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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다큐14/ 정치6/ 고건 편3/ <71> 87년 6·10 민주항쟁 ① - <115·끝> 세연정 (洗然亭)

상림은내고향 2021. 4. 25. 14:47

비하인드 다큐14/ 정치6/ 고건 편3  중앙일보 

<71> 87년 6·10 민주항쟁 ①

1987 5 26일 잠을 자고 있는데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잠이 덜 깬 채로 수화기를 들었다. 청와대 부속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대통령께서 통화를 원하셔서 전화 드렸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 전두환 대통령과 전화가 연결됐다.
 “고 의원이 내무부 장관을 맡아줘야겠어요.

 내가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87 1월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 터졌다. 사건 은폐 의혹까지 번지면서 민심은 분노했고 정국은 요동을 쳤다. 치안을 담당하는 내무부는 수세에 몰렸다. 순간적으로 생각을 했다. 내무부는 내가 처음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고향 같은 부처다. 어려운 때라고 해서 내무부 장관직을 피할 순 없었다.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수락하고 전화를 끊었다. 15분쯤 지났을까. 청와대 부속실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저기…, 이한기 전 감사원장의 전화번호 아십니까.
 “아, 저도 모르는데요. 사무실에 가면 연락처가 있겠지만 지금은 집이라 없습니다. 연감 인명록에 나온 주소와 전화번호가 대개 맞습니다. 급하시면 거기 나온 번호로 연락해 보시죠.

 ‘무슨 일로 이 전 원장의 연락처를 나한테 묻나’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버지가 깰 때까지 2시간 정도 기다렸다. 그 사이 담배를 한 갑이나 피웠다. 새벽 6시반쯤 아버지가 일어나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2층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말을 꺼냈다.

 “새벽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무부 장관을 맡아 달라고 해서 수락했습니다.
 기뻐하는 내색은 없었다. 아버지는 대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왜 호구(虎口·호랑이 입)에 들어가려고 하느냐.
 “나라가 어려울 때 부름을 받았는데, 어떻게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오전 전 대통령이 개각을 발표했다. 총리·부총리에 장관 셋이 교체되는 비교적 큰 폭의 개각이었다. 새벽 청와대 부속실에서 왜 이한기 전 원장의 전화번호를 물어봤는지 알게 됐다. 나는 내무부 장관에, 이 전 원장은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됐다.

 시간이 갈수록 민심은 더욱 악화됐다. 6 10일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을 규탄하고 호헌(護憲·현행 헌법을 유지함)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6·10 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그날 늦은 저녁 조종석 시경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긴급한 내용이라며 보고했다.

 “시위대 1000여 명이 명동성당에 집결했습니다.
 “다른 시위대는 이미 해산한 거 아닙니까. 그대로 놔두세요. 괜히 해결한다고 경찰이 포위했다가는 문제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5분 후 다시 조 국장이 전화 했다.

 “이미 안전기획부에서 현장 조정을 했고 명동성당을 포위했습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전화기에 대고 버럭 소리를 쳤다. 안기부에 항의를 했지만 소용 없었다. 걱정했던 대로 포위된 명동성당은 태풍의 눈이 됐다.

 6 12일 청와대 본관에서 연락이 왔다. 저녁 7시 공안장관회의가 열리니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와 경찰이 사흘째 대치하고 있는 문제를 다룬다고 했다. 청와대 안가에서 회의가 열렸다. 내무부 장관인 나를 포함해 외무·법무 등 관계부처 장관들과 박영수 대통령 비서실장, 안현태 경호실장, 안무혁 안기부장,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 청와대 관련 수석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안현태 경호실장이 회의를 주재하다시피 했다. 24시간 내에 명동성당에서 시위대를 전부 내보내지 않으면 전투경찰이 진입해 해산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이렇게 통보하려고 합니다.

 전 대통령의 지침인 듯했다. 의견을 수렴하기보다는 방침을 일방적으로 시달하는 쪽으로 회의 분위기가 흘러갔다. 안무혁 안기부장이 참석자들에게 “돌아가며 쭉 의견을 얘기해 보라”고 했다. 내 차례가 왔다.

 “전 제일 나중에 말하겠습니다.
 다른 참석자들의 발언이 끝나자 나에게 질문이 떨어졌다.

 “경찰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계획을 얘기해 보세요.

 질문한 사람이 안현태 경호실장이었는지 다른 사람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전투경찰을 어떻게 투입할지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내 대답은 분명했다.

 “전 반대합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6·10 민주항쟁

1987 6월 전국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 학생은 물론 ‘넥타이 부대’로 불린 직장인과 상인 등도 시위에 동참했다. 이들은 전두환 정권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며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간선제였던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는 내용의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72> 87년 6·10 민주항쟁 ②

나는 발언을 이어갔다.

 “전투경찰 투입 계획을 얘기할 게 아니라 투입 여부부터 논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 반대합니다. 첫째, 전경을 명동성당에 투입하면 결국 계엄령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부·수녀들이 탱크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둘째, 벌써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내년 서울 올림픽을 못 열겠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전경을 성당에 투입하면 서울 올림픽은 못 열고 회수될 겁니다. 셋째로 성당에 전경이 강제 진입하면 바티칸에서 가만있겠습니까.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가톨릭에서 불매운동 한마디라도 하면 한국 경제는 망합니다.

 내 발언을 두고 토론이 이어졌다. 그런데 내 앞으로 쪽지 한 장이 전달됐다. 대통령이 통화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잠깐 사이 내가 반대한다는 내용의 직보가 청와대 본관으로 올라갔나 보다. 바로 옆 전실(前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고 장관, 해방구가 뭔지 알아요?

 전두환 대통령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앙돼 있었다. 당시 명동성당 안에서 시위 참석자가 해방구 선언을 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러시아 공산혁명 때 나온 말로 알고….
 “아니, 맨날 회의만 하면서 물이나 마시고 말이야.

 빨리 결론을 내고 이의를 달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사태를 잘 수습하기 위해 토론 중에 있습니다. 잘 수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대통령과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다. 다행히 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강우혁 청와대 정무 제2수석, 안무혁 안기부장과 민정당 이춘구 사무총장이었다. 하지만 4시간 넘게 진행한 회의에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회의 후 나와 안무혁 부장, 이춘구 총장 이렇게 셋이 따로 남아 머리를 맞댔다. 이상연 안기부 차장도 합석했다. “명동성당에 경찰 진입은 안 된다”고 전 대통령에게 내일 오전 다시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안무혁 부장이 1차로 대통령과 면담하고, 그래도 안 되면 2차로 주무장관인 내가 재건의하기로 전략을 짰다.

 6 13일 오전 9시 대통령 주재 시국관계회의가 소집됐다. 청와대 본관 회의실 입구에 나를 비롯해 참석자 모두 도열했다. 전 대통령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안 부장이 대통령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안 부장은 이미 대통령과 면담을 마친 상태였다.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짓으로 ‘어떻게 됐느냐’고 신호를 했다. 안 부장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조심스레 오른손을 들더니 ‘O’자를 그렸다. ‘됐다.’ 속으로 안도했다.

 전 대통령은 나에게 시국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다.

 “일부 시민이 동조·가담하거나 고무하고 있습니다. 경찰 역시 피로가 쌓여있는 데다 시민들의 야유로 사기가 많이 위축돼 있습니다.

 내 설명이 끝나자 전 대통령이 대응 지침을 밝혔다.
 “정부로서 명동성당 사태에 대해 인내를 보여주도록 합시다.
 명동성당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이제 명동성당에 모여 있는 시위대를 평화적으로 해산시키는 일이 남았다. 이상연 안기부 차장과 조종석 시경국장이 중간에서 수고를 많이 했다. 명동성당 안의 학생들은 투표를 했고 6 15일 해산하기로 결론을 냈다. 함세웅 신부로부터 “이들의 무사 귀가를 보장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경찰버스에 태워 각 대학 캠퍼스에 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안전하게 학생들을 수송하라”고 단단히 지시를 했다. 함 신부에게 한 약속은 지켜졌다.

 명동성당 사태는 그렇게 평화적으로 해결됐지만 6월 민주항쟁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전국에서 집회가 열렸다.

 6 18일 오후 530분 민정당 당사 대표실에서 노태우 대표를 만나 30분 정도 얘기를 나눴다. 나는 “경찰의 질서유지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고 치안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노 대표는 이미 정치적 결단을 숙고하고 있는 눈치였다.

 6 29일 오전 930분 노 대표는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했다.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88 2월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6월 민주항쟁의 결실인 6·29 선언이 공표되는 순간이었다.

 만일 그때 명동성당에 전경 병력을 투입했었다면 6·29 선언이 나올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날 공안장관회의 장면이 눈에 선하다.

 

<73> 소선거구제 도입

1987 7 10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독대를 청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말을 했다.

 “제 역할은 다한 것 같습니다. 연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여당 당적을 가진 사람이 선거 주무부처인 내무부 장관을 맡아서는 제대로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국회로 복귀시켜 주십시오.

 “음, 그래요. 당신 말이 맞네.

 전 대통령은 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사표를 쓰진 않았지만 네 번째 공직 사의였다. 다음 날 전국 시·도지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 역할이 끝나서 이제 물러난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인사를 했다.

 7 12일 일요일 대통령 주재 오찬이 잡혔다. 약속 장소인 청와대 녹지원에 도착했는데 깜짝 놀랐다. 나를 비롯해 장관 6명이 와 있었다. 전 대통령이 의원 겸직 장관 모두를 부른 것이었다. 내 이론을 전 대통령이 확대 적용해버렸다. 난감했다.

 밥을 먹기 전 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전 대통령은 “수고했다”고 말하며 봉투 하나씩을 6명에게 줬다. 전별금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한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러세요.

 “조기상 정무 제1장관은 입각한 지 두 달밖에 안 됐습니다. 그리고 정무장관은 원래 당적이 있는 사람이 맡도록 돼 있지 않습니까. 면제해주시죠?

 “예외 없어. 그냥 원칙대로 다 해야지. 저기 이세기 체육부 장관도 올림픽을 앞두고 있지만, 원칙대로 하는 게 좋겠어.

 그러더니 전 대통령은 나웅배 상공부 장관을 보며 말했다.
 “아 참, 나웅배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나웅배 장관은 전국구 의원으로 지역구 의원인 다른 장관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나 장관은 바로 답했다.
 “아, . 전 남겠습니다.

 장관을 계속 하는 대신 의원직을 포기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전 대통령 반응이 재미있었다.

 “그래, 그럼 남아. 그거 이리 줘.
 전별금 봉투를 돌려달라는 뜻이었다. 정말 그는 나 장관 몫의 봉투를 회수했다.

 7 13일 개각 발표가 났다. 두 달의 짧은 내무부 장관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난 세 개 부처 장관을 거쳤지만 재임 기간은 교통부 6개월, 농수산부 14개월, 내무부 2개월에 불과하다. 다 합쳐도 110개월이다.

 

“장관을 세 번 했다” “직업이 장관이다” 등의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했던 이유다.

 민주정의당 의원으로 돌아가자마자 새로운 임무가 맡겨졌다. 선거구제를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87년 개헌을 앞두고 선거제도연구 소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은 나와 구용상·유흥수·김중권 의원 등 다섯 명이었다. 소위가 마련한 선거구제 개정 방안은 두 가지였다. 1안은 1 1의원의 소선거구제, 2안은 인구 비례 지역대표제인 중·대선거구제였다. 소위의 협의를 거쳐 88 1월 초 노태우 대통령 당선인에게 보고를 했다. 이 자리에 이재형 국회의장, 채문식 민정당 대표가 참석했다.

 이 안을 가지고 원내 4당은 협상에 들어갔다. 민정당의 심명보 사무총장과 나, 통일민주당의 황낙주 의원, 평화민주당의 김봉호 의원, 공화당의 최재구 의원 등 각 당에서 대표들이 모여 협상한 결과 소선거구제로 결론이 났다.

 선거구 획정은 ‘투표의 등가성(等價性)’과 ‘지역 대표성’이 조화되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 선거구를 획정하는 데 합리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나는 한 선거구에서 뽑는 의원 정수와 유권자 수와의 비율인 선거구별 인구 편차의 허용 범위를 3.5 1로 한정했다. 이때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투표의 등가성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소선거구제는 동반 당선에 대한 비판을 일소하는 효과를 거뒀다. 88 3 8일 소선거구제를 바탕으로 하는 의원선거법 개정안은 4당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다.

 소선거구제는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정책엔 부작용이 있다. 선거 정책도 예외는 아니다. 소선거구제 때문에 영·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패권주의 정당이 출현했다. 우리 정치가 한 단계 성숙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소선거구제를 입안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지난 2010년 사회통합위원장으로 일하며 한국정당학회와 함께 석패율제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새 정치를 하려면 비례대표제 의원 수를 늘리고 독일이나 일본처럼 석패율제를 도입해야 한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지식] 석패율제(惜敗率制)

지역구에서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고도 애석하게 패배한 후보를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시키는 제도. 일부 지역구 후보가 비례대표 후보로 이중 등록하도록 허용한다.

 

<74> 악수와 민심

내 지역구였던 전북 군산-옥구는 소선거구제가 시행되면서 2개 지역구로 나뉘었다. 1988년 제13대 총선거에서 나는 여당인 민주정의당 후보로 군산에 출마했다. 선거운동을 하는데 예상치 못한 역풍이 불었다. 8년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이 곳곳에 뿌려졌고 노태우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전남·전북을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평민당의 상징 색깔인 황색을 빗대 ‘황색 바람’, ‘황사 바람’이라고 불렸다.

 나도 황색 바람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악수를 하면 민심이 보인다. 현장에 나갈 때마다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악수를 피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연고가 있는 옥구가 아닌 군산을 선택한 것도 패착이었다. 그래도 여론조사에서 50~60% 지지율이 나왔다. ‘나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반대해 사표를 던졌는데…. 나만은 황사 바람을 피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어느 날 경성고무란 회사에 선거운동을 하러 갔다. 종업원 2000여 명이 모두 유권자였다. 대부분의 직원이 여성이었다. 구내식당 입구에 서서 한 사람씩 공손히 악수한 후 식판을 받아 들고 함께 식사도 했다. 전남도청에서 회의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경성고무의 넓은 부지를 걸어 나가는데 개수대가 보였다. 회의 생각만 하고 무심코 손을 씻었다.

 그날 저녁 도청에서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당원 한 명이 큰일 났다며 나에게 보고를 했다. 내가 손을 씻는 모습을 경성고무 직원 몇몇이 봤다고 했다. ‘손을 씻으려면 뭐 하러 악수를 했느냐’며 비난이 쏟아졌다는 얘기였다. 2000여 명과 악수한 일이 물거품이 됐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군산 민심이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악재는 한꺼번에 몰아쳤다. 선거 사나흘 앞두고 김대중 전 평민당 총재가 군산에 지지 유세를 하러 왔다. 여당 후보인 나와 평민당 채영석·무소속 강근호 후보 세 명이 경합하고 있었다. 군산역 앞에 단상이 마련됐고 그 위에서 김 전 총재가 채 후보와 강 후보의 손을 맞잡았다. 그는 유세 인파의 함성 속에 야당 후보를 채 후보로 단일화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1 2의 경쟁이 1 1로 바뀌었다.

 그해 4 26 13대 총선에서 지역구 224, 전국구 75명 의원이 당선됐다. 소선거구제가 불러온 정치권의 변화는 폭발적이었다. 총선에 앞서 선거구제 개정안을 논의할 때 김영삼 총재가 이끄는 통일민주당은 1차 협상에서 중·대선거구제에 합의했다. 2차 협상 과정에서 당론을 소선거구제로 바꿨다. 그런데 소선거구제로 치러진 첫 총선에서 민주당은 제1야당에서 제2야당으로 밀렸다. 평민당은 호남 지역구를 싹쓸이하며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여당인 민정당은 원내 제1당 자리를 유지했지만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노태우 정부의 정국 운영은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소선거구제가 불러온 정계 개편은 3당 통합에 의한 민주자유당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만일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이 제1야당 지위를 유지했다면 굳이 민정당·공화당과 더불어 90 1 22 3당 합당에 참여했을까.

 선거구제 개편 실무를 맡았던 나도 13대 총선에서 역풍을 맞았다. 단일화한 채 후보가 승리했다. 나는 낙선했고 재선에 실패했다. 20대에 고등고시에 낙방한 이후 두 번째로 맛본 큰 실패였다.

 

<75>  88년 관선 서울시장

큰 의미에서 행정(行政)도 정치(政治). 의회에서 하면 정치, 정부에서 하면 행정이다. 다만 정치와 행정의 가장 큰 차이는 목적에 있다. 정치는 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 행정은 권력이 목적이 아니다. 국민을 위한 서비스를 목적으로 한다. 오로지 국민에게만 봉사하면 된다. 정치인이라면 정권에 충성해야 하지만 행정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일에 정성을 쏟다 보면 자연스레 정권에 좋은 영향을 끼칠 따름이다. 내가 몸으로 느낀 차이다.

 정치인 생활을 마무리한 나는 1988 12 5일 행정인으로 돌아갔다. 노태우 대통령은 나를 제22대 서울시장으로 임명했다. 지금과 달리 선거 없이 대통령이 시장을 임명하던 시절이다.

 서울시청으로 처음 출근한 12 6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임명권자의 눈치를 살피는 시장이 아니라 시민들이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행동으로 옮기는 참된 공복(公僕)이 되겠습니다. 서울시가 복마전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끗한 시정을 펴나갈 방침입니다. 시장 독단으로 결정하는 밀실행정은 없을 것입니다. 시장이 솔선수범해 공개행정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기자가 질문을 쏟아냈다. 한 여기자가 물었다.

 “인구 20~30만 명의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이 인구 1000만 명의 도시 행정을 잘 이끌 수 있을까요?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질문이다. 웃으며 답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계속 당선된 사람보다는 한 번 당선되고 한 번 떨어져본 사람이 민심을 더 잘 헤아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자의 물음처럼 서울은 큰 도시였다. 내무부 행정과 기획계장으로 일하며 도시계획을 연구하던 1960년대 후반, 이호철 작가의 『서울은 만원이다』란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그때 서울 인구가 300만 명이었다. 서울시장으로 임명된 88년 말 서울 인구는 1000만 명을 돌파해 1100만 명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지금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서울은 만원을 넘어 초만원이었다. 교통·주택·환경·상하수도에 쓰레기 문제까지. 도시화가 불러온 부작용으로 서울시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87 6·29 선언을 계기로 시민의 집단 민원도 분출하기 시작했다. 행정의 민주화가 필요했다. 공개행정에 그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고 취임할 때부터 강조했다. 권위주의 시대의 일방통행식 행정 관행을 버려야 했다. 일방적으로 정책을 만들고 무작정 따라오라고 홍보만 한다면 시민의 자발적인 협조를 얻어낼 수 없다. 특히 현장에서 시민을 만나면 자기와 관련 있는 특정 시책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주요 정책을 비밀로 하고 밀실에서 결정하면 부패의 온상이 된다. 불필요한 오해도 부를 수 있다. 국가안보나 부동산 투기 관련 대책 등 보안이 필요한 극히 일부 대책만 제외하고는 공개행정을 펼치기로 방침을 세웠다.

 20년 가까이 행정을 하면서 나름 전문가라고 생각해 왔는데 역시 서울시정은 만만치 않았다. 시정을 파악하는 데 6개월이 걸렸고 시정을 장악하는 데 1년이 걸렸다. 서울시 직원이 보기에 시장은 객()이다. 평생직장으로 서울시에서 일한 직원들은 스스로를 주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시장이 시정을 샅샅이 파악하지 않는다면 몇 년 머물다 떠날 과객이 돼버린다. 노력이 필요했다.

 서울시정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도시계획이다. 시장관저에 작은 서재가 있었다. 관저에 머물 때 대부분 시간을 거기서 보냈다. 서재 한쪽 벽에 서울 도시계획 전도를 붙여놓고 매일 들여다봤다. 역시 교통이 가장 큰 문제였다.

 

<76> 서울 2기 지하철 착공

서울시민에게 지하철을 타라고 권장해 놓고 시장이 승용차만 타고 다닐 순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지하철이나 버스로 출근했다. 서울 혜화동 시장공관에서 걸어 나오면 4호선 한성대입구역이 나온다. 4호선을 타다가 동대문운동장역(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시청역에서 내렸다.

 출근길은 험했다. 나를 알아보는 시민들과 인사하고 얘기를 나누는 여유는 지하철을 타기 전까지만이었다. 출근 시간 지하철 안은 전쟁터였다. 지하철이 역에 설 때마다 사람들이 밀려 들어오고 나가는데 시장이라고 피할 재간이 없었다. 나 역시 밀고 당기고 몸싸움에 시달렸다. 어느 날은 인파를 헤치고 시청역에 내렸더니 양복 윗옷 단추가 뜯겨나가고 없었다. 여중생이 지하철 안에서 질식해 기절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기도 했다.

 혼잡도 100%는 지하철 좌석이 다 차고 나머지 사람들이 손잡이 하나씩 잡고 서 있는, 전동차 정원에 딱 맞는 정도를 말한다. 현재 가장 복잡하다는 2호선 신도림역 근처 열차 안 혼잡도가 200%를 좀 넘는 수준이다. 1988년 지하철 혼잡도는 300%를 넘었다. 말 그대로 ‘지옥철’이었다. 해결책을 빨리 찾아야 했다.

 먼저 800량에도 못 미치는 서울시내 전동차 수를 약 2배인 1700량으로 늘리는 대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예산도 별로 없지만, 있는 예산마저도 제대로 집행을 못하고 있다”는 실무자의 대답을 들었다. 입찰 가격을 올리려고 현대정공과 대우중공업 두 회사가 담합해 13차례나 유찰됐다고 했다. 3의 회사인 대한조선공사를 입찰에 참여시켰다. 담합이 깨졌고 계획대로 전동차를 발주할 수 있었다.

해마다 단계적으로 전동차 수를 늘리기로 했지만 비상조치에 불과했다. 지하철 혼잡도는 줄긴 했지만 240~260% 수준이었다. 출·퇴근길 시민의 고통은 여전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해마다 자동차 대수는 20%씩 늘어나는데 도로만 깔아서는 교통대란을 해결할 수 없었다. 지하철은 정시성(定時性)·안전성이 장점이다. 대량 수송이 가능하고 공해도 유발하지 않는다.

 1·2·3·4호선 1기 지하철에 이어 2기 지하철을 서둘러 건설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89년 나는 겁도 없이 5·6·7·8호선 2기 지하철 건설 사업을 착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관건은 돈이었다. 지하철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확보해야 했다. 1기 지하철 국고 보조 비율은 2.7%로 미미했다. 그 정도 수준으로는 공사를 제대로 추진할 수 없었다. 90 2월 서울시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 대를 넘어선 그 주 국무회의에서 서울시 기간 교통망 지도 2장을 들고 “중앙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90 4 2일 노태우 대통령, 강영훈 국무총리, , 안상영 부산시장과 관계 부처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대도시 교통 종합대책’ 합동 보고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지하철 공사비의 30%를 중앙정부 예산으로 지원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노 대통령의 결단이 있어 가능했다.

 그러나 집행 단계에서 다른 도시와 달리 서울시는 30%를 지원해줄 수 없다고 경제기획원이 발뺌했다. 나는 경제기획원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며 설득을 했다. 결국 중앙정부가 2기 지하철 사업비의 25%를 지원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뤄졌다.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일본 공적개발원조(ODA) 기금에서 차관을 도입해 사업비에 보태기도 했다.

 2년 만에 지하철 4개 노선을 선정, 설계하고 예산을 확보해서 착공까지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하철 건설 전문 기술자들을 모으는 일이 중요했다. 우명규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장의 수고가 컸다.

 2기 지하철 사업 규모는 총 연장 160㎞로 1기 지하철의 규모를 뛰어넘었다. 76개월여 만인 98년 민선 서울시장으로 돌아왔다. 2000 6호선이 개통되며 8개 노선에 총 연장 287㎞의 서울 지하철이 완성됐다. 그해 12 15일 지하철 6호선 개통식에 참석했다. 큰 보람을 느꼈다.

 

<77> 서울 내·외부 순환도로

1980년대 후반 서울 도심을 재개발하면서 마들평야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지금의 노원구 상계동과 중계동 일대다. 수십만 인구가 입주했지만 교통 대책은 부실했다. 이 지역과 도심을 잇는 역할은 지하철 4호선이 맡았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교통 수요를 감당하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지하철 6·7호선 건설 계획이 확정됐지만 완공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서울 동부 지역을 잇는 간선도로를 서둘러 만들어야 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도로를 빨리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서울시는 중랑천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중랑천을 따라 길을 내면 하천변과 둑을 활용하기 때문에 민간인 토지를 수용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다. 동부간선도로라고 이름을 짓고 1년 안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사업을 추진했다.

 암초는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건설부가 하천 범람 위험이 있다며 허가를 안 내줬다. 건설부 요청에 따라 수리모형시험(현장을 축소한 모형을 만든 다음 물을 흘려보내는 시험)을 하는 데 1년 더 걸렸다. 내가 서울시장에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후 동부간선도로를 착공할 수 있었다.

 도로 교통난은 서울 동부 지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의 도로망은 도심에서 바깥으로 바퀴살처럼 뻗어나가는 방사형(放射形)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선진국 대도시와 달리 외곽과 외곽을 이어주는 고리형 순환도로(Ring road)가 없었다. 서울 외곽에서 다른 외곽 지역으로 가려는 차량의 절반 정도가 도심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야 했다. 시간도 많이 걸렸고 서울 중심가의 교통난을 더욱 부추기기도 했다.

 서울시에 2개의 순환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방안을 만들었다. 내부순환도로는 서울시가 건설하고 외곽순환도로는 수도권 광역교통망을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중앙정부가 만든다는 분담안이었다. 이 안을 건설부에 제의했고 국무회의를 통해 확정했다.

 내부순환도로의 노선을 정하려고 남산을 4번 넘게 올라갔다. 도심을 내려다보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당한 노선이 나오지 않았다. 도시 건조물 사이로 도로를 뚫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엄청난 보상비는 또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매일 고민을 거듭했다.

 어느 날 밤 관저로 돌아와 서재 의자에 앉았다. 저녁 자리에서 마신 술기운이 남아 있었다. 책상 앞 벽에 붙어 있는 서울 도시계획 전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순간 묘안이 떠올랐다.

‘강변을 이용하자’.

 중랑천을 활용해 동부간선도로를 설계한 선례가 있었다. 한강의 북측 강변과 홍제천·정릉천 등 하천과 산악지를 최대한 활용한 도심순환고속도로의 설계가 완성됐다. 89 9 20일 서울시는 총 연장 40.1㎞의 내부순환도로를 건설하는 ‘서울 교통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보통 도로를 만들면 사업비의 90%를 토지 보상비로 쓴다. 하지만 내부순환도로는 총 사업비 12131억원 가운데 10% 1226억원만 토지 보상비로 사용했다. 하천변과 산지를 이용한 설계로 예산을 절약할 수 있었다. 임명직 시장일 때 시작한 내부순환도로 공사는 민선 시장으로 돌아온 후인 99 2월 홍은동 사거리와 마장동을 잇는 13.7㎞ 구간 공사가 끝나면서 마무리됐다. 현재 서울에서 교통 분담률이 제일 많은 강변북로는 내부순환도로의 한 구간으로 탄생했다.

 중앙정부가 담당한 수도권 제1 외곽순환도로는 착공 17년 만인 2007 12월 완성됐다. 2개 순환도로가 완공되면서 서울의 도로망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다.

 

<78> 여성 주차단속원의 탄생

서울시장에 취임한 1988 12월 서울의 교통 문제는 심각했다. ‘교통삼난(交通三難)’이란 말이 시민들 입에 오르내렸다. 차는 많고 도로는 모자라 생긴 ‘소통난’, 버스와 지하철이 콩나물시루처럼 사람으로 빽빽하고 택시 잡기도 어렵다고 해서 ‘승차난’, 그리고 ‘주차난’이었다.

 서울시는 인구 1000, 차량 100만 시대를 맞았다. 매년 평균 20%씩 자동차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주차할 장소는 턱없이 부족했다. 점심시간 유명 호텔 앞 대로는 3~4열로 불법 주차한 차량으로 무법천지였다. 도로와 지하철 확충이 장기 과제라면 주차는 당장의 문제였다.

 우리나라처럼 땅은 좁지만 교통대책을 훌륭히 펼치고 있는 선진국의 사례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89 2월 모처럼 4일간의 설날 연휴를 맞았다. 휴일 동안 교통 선진 도시인 홍콩과 싱가포르의 교통 시스템을 둘러보고 현장에서 워크숍을 진행하기로 했다. 신부용 교통개발원장이 시찰 일정을 짰고 임성빈 명지대 교수, 이원종 교통국장이 함께 갔다.

 홍콩과 싱가포르 현지 안내를 맡을 교통 전문가는 호주계 사람들이었다. 동양의 명절인 춘절을 쇠지 않았던 그들은 출장 기간 내내 많은 도움을 줬다. 34일 동안 현장을 걸어서 확인하고 워크숍을 여는 강행군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출국 길에 청와대와 서울시 간 혼선이 있었다. 임명직 시장이었던 만큼 해외 출장을 가려면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서면으로 재가를 받고 구두로 보고도 하고 출국했는데 비행기가 떠난 직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나의 출장을 문제 삼았다. “중국의 춘절 공휴일에 시장이 홍콩과 싱가포르로 출장을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노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직접 김포공항까지 연락해 나의 출국을 막으려 했다고 한다. 내가 탄 항공기가 이미 이륙한 뒤여서 출장을 가 있는 동안은 이 사실을 몰랐다. 돌아와서 알게 됐다. 공휴일에 시장 일행이 관내에 와 있는 것을 공관에서 불편하게 여기는 바람에 생긴 일 같았다.

 역시 홍콩과 싱가포르는 교통 선진 도시였다. 출장을 통해 새로운 서울 교통정책의 얼개를 짤 수 있었다. ‘서울의 교통 이대로 좋은가’란 제목으로 공개 토론회를 열어 시민의 의견을 듣고 정책을 구체화했다.

 먼저 서울시 도로에 황색 실선을 그었다. 황색 실선이 그려진 구역에 주차를 해선 안 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싱가포르에 출장 가서 보고 배운 정책이었다.

 그다음 주차 단속 제도를 바꿨다. 경찰이 갖고 있던 주차 단속권을 지방자치단체도 가질 수 있도록 법을 고치기로 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도 법을 개정하는 데 1년이 더 걸렸다. 관련 부처에서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관철했다.

90
8월 법이 개정되자마자 서울시 여성 주차 단속원을 모집했다. 유명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제복도 만들었다. 디자인과 색상은 주차 단속원들이 직접 고르도록 했다. 난 감색 디자인이 맘에 들었는데 그들은 자주색을 선택했다.

 90 10 26일 서울 경희궁공원에서 주차 단속원 발대식이 열렸다. 365명의 주차 단속원에게 당부했다.

 “호텔 앞에 불법 주차한 큰 차부터 단속해 주십시오. 사장·회장·장관 등 높은 사람 차부터 단속해야 합니다.

 단속 첫째 날 부총리 차가 불법 주차로 걸렸다. 차를 잡아낸 주차 단속원을 크게 칭찬했다. 이 일은 신문에도 보도됐다.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주차 정책을 열심히 추진해 성과를 낸 김상돈(전 서울메트로 사장) 주차계장을 주차과장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처음으로 시청에 주차과를 만들었다.

 98 7월 민선 시장으로 서울시에 돌아왔다. 주차 단속 제도는 자리를 잡았지만 주택가 주차 문제는 여전히 심각했다. 시내 전역의 주택가 이면 도로를 전수 조사해 노면 주차가 가능한 공간을 파악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일부 구에서 시범 실시하던 거주자 우선 주차제도를 2001년 확대 시행하며 정책을 보완했다

 

<79> 교통방송과 교통카드

지하철과 도로 같은 하드웨어만큼 교통의 소프트웨어도 중요하다. 임명직 서울시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한참 전이다. 한 번 차에 올라타면 왜 길이 막히는지, 어디로 가야 길이 덜 막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라디오 방송으로 교통정보를 신속하게 알려 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교통방송(TBS) 창립을 서둘렀다. 난 교통은 알아도 방송은 모른다. 권위 있는 방송 전문가를 모아 교통방송 창설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김규 서강대 교수, 이환의 전 MBC 사장 등이 위원회에 참여해 도움을 줬다. 그리고 90 6 11일 교통방송이 문을 열었다. 교통방송이 시작되면서 운전자는 라디오로 교통정보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어 좋았고, 도로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개선할 점은 많이 남아 있었다. 출퇴근길 서울시내 차량 가운데 ‘나홀로 승용차’가 70%를 넘었다. 처음 서울시장으로 임명됐던 80년대 후반이나 선거를 거쳐 서울시장직을 다시 맡게 된 90년대 후반이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시민이 대중교통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야 했다. 지하철을 편리하고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시급했다.

 어느 날 “시장도 찜통 지하철을 한 번 타 보라”는 힐난 섞인 e메일을 받았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지하철 2·4호선으로 출근하는 나도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1~4호선의 노후 전동차를 2002년까지 순차적으로 냉방이 잘되는 새 전동차로 교체했다. 승객이 많은 지하철역부터 시작해 역사의 냉방시설을 개선해 나갔다.

 서울 지하철의 환승거리가 멀다는 점도 해결해야 했다.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수평 에스컬레이터 등을 확충했다. 취임 초기 36%였던 지하철 수송 분담률을 임기 말 50%대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시내버스나 마을버스로 쉽게 갈아탈 수 있는 환승체계도 구축했다. 윤준병(현 서울시 도시교통본부장) 서울시 대중교통과장이 실무를 맡았다. 2000년 교통카드 하나로 지하철과 시내버스,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 호환사업을 실시했다. 2001년엔 지하철과 버스로 갈아탈 때 요금을 할인해 주는 환승할인제도도 만들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윤준병 서울시 도시교통본부장
교통카드 호환 시스템 환승 할인제 도입 뿌듯

서울의 교통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윤준병 서울시 도시교통본부장(52·사진)을 지난달 29일 만났다. 고건 전 국무총리가 두 번째로 서울시장을 할 때인 서울시 대중교통과장으로 일했다. 윤 본부장은 교통카드 호환사용 제도와 대중교통 환승요금 할인제를 도입한 공로로 2002 1월 제1회 ‘서울 정책인 대상’ 본상을 받았다.


 - 지금의 교통카드는 어떻게 나왔나.

 “원래 교통카드는 시내버스 선불교통카드, 지하철 후불교통카드가 있었다. 두 개 방식의 교통카드를 통합하려고 했다. 보고했더니 고건 당시 서울시장이 ‘안 된다. 두 종류 모두 사용이 가능하도록 호환방식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회사 간 협의가 하도 안 돼서 궁리 끝에 ‘교통카드호환협의회’를 만들었다. 각 사를 회원으로 참여시키고 거부권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협의회를 통해 회원사끼리 결정하도록 하니 합의가 이뤄지더라. 1999년 말 고 시장에게 결재를 받으러 가서 ‘이제 됐다’고 보고를 했는데 ‘수고했다’는 한마디도 안 하시더라. 가장 적용하기 쉬운 버스부터 시작해 2000 6월 지하철에서도 선불·후불 카드를 함께 쓸 수 있도록 호환시스템을 완성했다.


 - 대중교통 환승요금 할인제는.

“환승할인제도를 2001년 시행하려고 2000 10월 방안을 올렸는데 예산 단계에서 막혔다. 50억원 정도 예산이 필요했는데 반영이 안 됐다. 어느 토요일 고 시장이 교통 관계부서 과장들을 모아 점심을 샀다. 약주 한잔을 하면서 ‘할 얘기 있으면 해보라’고 해서 환승할인 예산에 대해 말했다. 고 시장은 ‘대중교통이 중요하잖아’란 답만 했다. 된 건지 안 된 건지 모르고 있는데 다음 날 예산 부서에서 ‘빨리 예산서 가져오라’고 연락이 왔다. 예산을 따냈고 계획대로 시행할 수 있었다.


 - 대중교통과장 때 가장 힘들 던 일은.

“버스 구조조정이다. 재정 상태가 안 좋은 버스회사를 퇴출시키는 사업을 중점 시책으로 잡고 추진했다. 버스업체의 저항이 얼마나 많았는지…. 3년 이상 적자가 계속되는 버스업체는 퇴출시키는 내용의 대통령령을 만들었고 구조조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80>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서울시장이 된 지 9일 만인 1988 12 14.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의 한 마을을 찾아갔다. 골목 가장 후미진 곳까지 들어갔다. 집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골목은 너무도 좁았다. 어깨가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넓이였다.

 안내하던 통장이 말했다.
 “사람이 살아서는 나와도 죽어서는 못 나오는 동네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골목이 하도 좁아서 관이 누워서는 못나오거든요. 관도 옆으로 세워야 간신히 빠져 나온다고 해서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를 하죠.

 철거 이주민이 정착해 만든 달동네였다. 불도저식 도심지 개발이 불러온 부작용은 1970년대 초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으로 일하며 경기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일대) 현장에서 목격했다.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서울의 70여 개 지역에서 주택 재개발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산등성이만 보면 전부 시뻘갰다. 양천구 신정동 칼산마을 등 다른 달동네를 둘러봤다. 상황은 비슷했다. 갈 곳 없는 세입자들은 항거했고 철거용역회사는 물리력으로 그들을 밀어냈다. 갈등과 충돌만 있지 법도 정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살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실제 현장이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양적인 주택 공급에만 매달렸다. 현지 주민의 고통은 안중에 없었다.

 고민이 시작됐다. ‘무질서하게 오밀조밀 지은 판잣집이지만 단층이다. 달동네를 밀고 10층 아파트를 지으면서 왜 원주민들은 쫓겨나야 하는가.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원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아파트 공간은 넘쳤다. 문제의 본질은 아파트 재개발 이익의 배분에 있었다. 달동네가 있는 산비탈 지역은 대부분 국공유지였다. 도시계획상 공원·녹지 지역으로 건축이 불가능한 곳이다. 이 지역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해 10층 이상의 아파트 건설을 허용하는 특혜를 줬다. 천문학적인 재개발 이익이 생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익은 재개발 조합을 등에 업은 건설회사와 외지에서 온 부동산 투기꾼에게 넘어갔다. 원주민에게 이익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이 재개발 이익의 극히 적은 부분이라도 원주민에게 배분한다면 달동네 재개발 과정에서 생긴 갈등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김인식 서울시 건설관리국장을 불렀다.

 “원주민인 세입자에게 딱지 반 장을 주는 대신 재개발 아파트 입주권을 주는 방안을 검토해 보세요.
 김 국장은 얼마 후 1차 검토 결과를 나에게 보고했다.

 “건설부 규정상 안 되는 걸로 나옵니다.
 “건설부 규정은 무시하세요. 시 자체의 조례나 규정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며칠 뒤 김 국장은 다시 검토 결과를 가져왔다. 역시 ‘안 된다’였다.
 

“설사 세입자에게 아파트 입주권을 인정하더라도 아파트 구입 능력이 없어 현실성이 없습니다.

 옳은 얘기였다. 재개발 원주민들은 돈이 없어 입주권 딱지를 위장 전입자에게 팔고 떠나는 게 현실이었으니까.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내 구상에 대한 언론의 반응도 싸늘했다. “업무 파악을 못한 정치인 출신 시장의 황당한 공약”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이 일을 빗댄 신문 만평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내가 농악대 상모를 쓰고 신나게 머리를 돌리고 있는 만화였다.

 그래도 나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현실에 맞게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달동네 세입자가 내고 살 수 있는 임대아파트를 그 자리에 함께 짓기로 했다. 서울시 조례로 이 내용을 제도화했다.

 1989 3 9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서울시는 달동네 주택 재개발은 세입자를 위한 소형 영구임대아파트 건설을 전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SH공사가 하고 있는 재개발 임대아파트 사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이 일을 겪으면서 어려운 일일수록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곳에 해답이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81> 소통의 방법

1989년 초 어느 날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국무회의를 마치고 시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동차 안 자동경비전화가 울렸다. 시장 비서실에서 온 급한 연락이었다.

 “시장님, 지금 시청 정문 앞이 민원인들로 포위됐습니다. 2000~3000명은 됩니다. 뒷문으로 오셔야겠습니다.
 “아니, 왜 시장이 정문이 아니고 뒷문으로 갑니까. 시장을 만나러 온 사람들인데 왜 제가 몰래 그들을 피해야 합니까. 그냥 가겠습니다.

 시장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시내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번엔 현장의 문제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시위대 때문에 시청 근처 교통이 차단됐다.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 내려 시청까지 걸어갔다. 시청은 2000여 명의 시위대로 둘러싸여 있었다.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장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길을 내줬다. 시청 정문 돌계단에 올라선 다음 시위대를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 시장 만나러 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언제 안 만나준다고 그랬습니까.
 나서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노상에서 진지한 대화가 되겠습니까. 매주 토요일마다 시청 민원심사위원회가 열립니다. 대표 5명을 뽑아서 시장 면담을 신청하십시오. 신청만 하면 시장, 민원심사위원들과 만나 얘기할 수 있습니다.

 시위대에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그럼 이번 토요일에 만나주세요.
 나는 대답했다. “순서가 있어서 바로는 안 되겠지만 한 달 이상은 안 걸릴 겁니다.

 설득은 통했다. 시위대는 스스로 해산했다. 얼마 후 민원심사위원회에서 민원인 대표 5명을 만났다. 재개발과 관련한 민원이었고 민원심사위원회를 통해 해결책을 찾았다.

 나는 취임 직후인 88 12 26일 시민불편신고센터를 만들었다. 5일 근무제를 시행하기 전이었다. 토요일마다 시민의 민원을 직접 듣고 해결책을 찾는 민원심사위원회를 열었다. 98년 민선 서울시장으로 돌아와선 민원심사위원회의 명칭을 ‘시민과의 토요데이트’로 바꿨다. 도시계획 전문가, 판사 출신 변호사, 감정평가사, 여성시민단체 대표, 언론인 등 20명을 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들 가운데 6명씩 돌아가며 위원회에 참여했다. 회의는 내가 직접 주재했다.

 민원의 성격은 주택 분야 21%, 교통 분야 14% 등의 순이었다. 부동산과 관련한 민원이 제일 많았다. 토요데이트를 열면 배경동 당시 서울시 주택국장( SH공사 도시재생본부 본부장)이 단골로 참여했다. 10년 이상 묵은 고질적 민원을 비롯해 서울시가 갖고 있는 집단 민원을 거의 여기서 해결했다.

 서울시정은 1000만 시민의 살림을 꾸려가는 일이다. 집단 갈등 문제에서 한시라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99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토요데이트 100회째를 맞아 심포지엄을 열었다. 여기서 토요데이트를 집단 갈등 해결의 조정 방안으로 매우 참신하고 효과적인 모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
서민 주택 재개발 사업 시장논리로만은 안 돼"
배경동 전 서울시 주택국장

배경동(60) SH공사 도시재생본부장은 서울시 재개발과·주택개량과·도시관리과장을 거쳐 2001 1월부터 2년간 서울시 주택국장으로 일했다. 배 전 본부장은 지난 5일 인터뷰에서 “서민을 위한 주택 재개발 사업은 시장 논리에만 맡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 주택국장이었을 당시 서울시의 주택 재개발 사업은 어땠나.

“불량촌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재개발의 목적이다. 그런데 불량촌 주민보다는 나름대로 양호한 주택지를 갖고 있는 중산층이나 나대지를 가지고 있는 투자자들이 인근의 불량촌을 핑계로 재개발을 추동했다. 대부분의 재개발 수익은 이들에게 돌아갔고 불량촌에 살고 있던 저소득층은 축출됐다. 그런데도 토요데이트에 가면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해 달라’, ‘추진 속도를 빠르게 해달라’ 등 민원이 많았다. 재개발 사업은 더 이상 황금알을 낳는 오리가 아니라고 늘 설득해야 했다.


 - 최근 뉴타운 사업과 관련한 문제가 많다.

“뉴타운·도시재정비 사업의 본질과 한계가 드러났다. 용산 참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서민을 위한 주거환경 개선 사업은 시장(市場)에 맡겨선 안된다. 공공 주도 하에 주거·세입자 대책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장기간 사업이 시행되지 않는 구역은 일정 기간 예고를 거쳐 해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82> 용산 참사의 재구성

지난해 8 1일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다.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을 서울 신문로 인디스페이스에서 진철훈 전 한국시설안전기술공단 이사장, 양갑 전 서울시정개발연구원(현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과 같이 봤다. 극장을 빠져나오는데 발걸음은 무거웠다. 근처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때처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면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까요.


 내가 민선 서울시장일 때 진 전 이사장은 도시계획국장, 양 전 연구위원은 주택국장이었다. 우리 셋은 용산 참사를 재구성했다. 꽤 오랜 시간 토론이 이어졌고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라면 참사를 막을 세 번의 기회를 만들었을 겁니다.

 나는 서울시 달동네 불량주택 재개발을 추진하며 세입자를 위한 임대 아파트 제도를 만들었다. 문제가 된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은 달랐다.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이었고 상가 세입자에 대한 대책이 부족했다. 임대 아파트 정책처럼 그들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만들어야 했다.

 두 번째로 ‘시민과의 토요데이트’가 있다. 시장과 민원인이 직접 만나 대화로 해결할 기회를 활용했을 것이다. 시정 책임자가 직접 나서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했다면 서로 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두 단계에서 해결이 안 됐다 해도 세 번째 기회가 남아 있다. 경찰특공대원을 실은 컨테이너를 크레인으로 끌어올려 상가 옥상에 투입하는 일은 엄청난 수준의 공권력 행사다. 상가 건물 위에서 농성하고 있는 철거민을 진압하는 것이 그 정도로 위급하고 중대한 일이었을까. 아니다. 물리적 경찰 강제력 행사의 전제가 되는 ‘경찰 비례의 원칙(공공질서에 심각한 위해가 있을 때 가능한 한 최소의 경찰권을 투입)’에 어긋난다. 이처럼 중대한 경찰 강제력의 투입은 서울경찰청장이 당연히 시장에게 사전 보고를 해야 하는 사안이다. 나에게 보고가 들어왔다면 즉각 반대했을 것이다.

용산 참사를 복기하면 할수록 안타까움은 더 커졌다. 불통이 부른 참극이었다.

 행정의 9할은 대화와 소통이다. 소통에도 요령이 있다. 나는 나름대로 소통에는 세 단계가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터득했다. 첫째는 경청이다. 서울시장 시절 토요데이트에서 민원인들을 만나면 처음 30분간은 주의 깊게 들었다. 20분 만에 끝나면 “더 할 얘기가 없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라도 30분을 넘기진 않았다. 관료주의에 물든 공무원은 책임부터 피하고 보는 면책 우선주의에 빠진다. 국민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말 허리를 끊고는 안 되는 이유부터 역설하곤 한다. 민원인의 화를 돋우고 해결할 길은 멀어진다. 마음 놓고 얘기할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민원인의 마음은 절반쯤은 풀린다.

 그 다음은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공감이다.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마음을 듣는 것이다. 행정 실무자가 경직되게 법적 해석을 내리는 바람에 갈등이 생겼다면 책임은 시장이 지는 조건으로 문제를 풀었다. 시민에게 유리하도록 융통성을 가지고 접근했다. 물론 들어주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나 ‘떼 쓰기’ 성격의 민원도 있다. 그럼 나와 민원심사위원들이 설득에 나섰다.

 설득하고 또 설득당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책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대안을 구상하고 정책으로 만드는 일이 소통의 마지막 단계다.

 소통은 안 하고 일만 해선 안 된다. 소통비서관을 만든다고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은 정책 책임자 스스로 해야만 한다. 소통만 하고 행동을 안 하는 것은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시민과의 토요데이트를 통해 행정의 요체는 경청과 공감, 대안과 실천에 있다는 점을 터득하게 됐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 용산 참사

용산 재개발 보상대책에 반발하는 철거민이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자 2009 1 20일 경찰은 강제 진압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다쳤다.

 

<83> 북촌 한옥마을과 인사동

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 서강(西江)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6·25 전쟁에 전북으로 피란을 갔지만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 내 기억은 서울 곳곳과 얽혀 있다. 1988 12월 서울시장으로 임명됐을 때 감회가 남달랐던 이유다. 시장으로 일하며 서울 곳곳을 둘러봤다. 아쉬웠다. 내 기억 속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가 거의 없었다. 전쟁의 포화로 무너졌고 그나마 남은 지역도 재개발과 도로 건설로 원래 모습을 잃었다.

 경복궁·창덕궁 사이의 북촌과 인사동에 그나마 전통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북촌을 중심으로 안국동 윤보선가, 가회동 백인제가 등 문화적 가치가 높은 한옥이 모여 있었다. 인사동에도 개화파 정객 박영효의 생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고택 등 아름다운 옛 가옥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대로 뒀다가는 북촌과 인사동마저 개발 열풍에 휘말릴 수 있겠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콘크리트 빌딩 숲으로부터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에 각종 건축 규제 정책을 썼다.

 98 7월 민선 서울시장으로 돌아왔을 때 북촌과 인사동을 다시 찾았다. 좌절했다. 규제 일변도의 정책은 통하지 않았다. 인사동에 고층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할 순 있어도 스파게티 집이 들어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창덕궁 근처 골목엔 국적 불명의 4~5층 가옥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북촌 한옥마을은 겨우 유지됐지만 일방적인 행정 규제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컸다. 한옥 숫자도 800여 채로 크게 줄어 있었다.

 북촌 한옥마을 복원에 나섰다. 규제 일변도 정책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게 급선무였다. 주민과 대화를 통해 한옥 등록제를 시행했다. 강제적 조치는 아니었다. 등록하면 한옥을 개·보수하거나 신축할 때 자금을 지원하고 재산세도 면제해줬다. 공동 정화조와 주차장 등 주민생활편의시설을 확충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한옥을 보존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요한 경우 한옥을 서울시에서 사들였다. 처음으로 시에서 매입한 한옥는 북촌 관광안내소로 탈바꿈했다.

 인사동도 고민이었다. 시에서 손을 대고 투자를 하면 지가는 오르고 임대료도 따라 오른다. 임대료가 높아지면 필방, 표구점, 한복점 등 전통공방은 밀려나고 대형 체인점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보호하려고 시행한 정책이 도리어 파괴하는 정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실패한 규제 위주 정책을 다시 쓸 순 없었다. 부동산 시장의 흐름에 맡겨둬서도 안 됐다. 위험을 잘 알았지만 시 주도로 지원 정책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인사동의 노후한 인프라를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사동 밑으로는 삼청동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길이 있었다. 하수관로가 낡고 용량이 적어 비만 오면 침수됐다. 오래된 하수관로를 다 파내고 대용량의 콘크리트 하수관로를 깔았다. 도시가스망도 새로 만들었다. 돌가루로 구워 만든 흑색 전돌을 보도에 깔고, 불법 주차를 막기 위해 돌방석을 설치했다. ‘인사동 문화환경보전 기금’을 만들고 서울시가 5억원을 출연했다. 2000년 도시설계지구, 2002년 문화지구로 지정해 인사동 분위기에 맞지 않는 가게나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았다. 전통업소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방세를 감면해주고 운영비와 건물수리비를 낮은 금리로 융자해주기도 했다. 규제보다는 인센티브(장려책)에 초점을 맞췄다.

 인사동과 북촌 한옥마을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처음 임명직 시장 때는 규제 위주 정책으로 실패를 맛봤다. 두 번째 민선 시장을 하며 인센티브 시스템으로 바꿨고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 지금의 북촌은 살아 숨 쉬는 한옥마을이 됐다. 한옥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긴 했지만 말이다. 북촌의 분위기는 이제 서촌으로도 확산 중이다.

 

<84> 남산 제 모습 찾기

남산은 서울 사람뿐 아니라 한국인에게 고향의 앞산같이 소중한 곳이다. 그런 남산에 일제는 총독부와 신궁을 지었다. 남산의 수난은 해방 뒤에도 계속됐다. 난개발로 각종 콘크리트 구조물이 남산을 잠식했다.

 ‘남산을 시민에게 돌려줄 수 없을까’. 관선 서울시장으로 일하며 갖게 된 소망이었다.

  “남산에 다녀왔다”고 하면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고문받고 왔다”고 알던 시절이다. 남산이 그런 상징으로 남게 둘 순 없었다.

 1989년 말 서울 신라호텔의 한 방에서 나는 서동권 안기부장과 만났다. “안기부의 성격상 일반 시민들과는 좀 떨어져 있는 곳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리적으로 지금 남산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안기부 신청사를 지을 만한 서울 시내 근교 부지를 물색해뒀습니다. 안기부장 공관도 함께 이전하는 것이 어떨까요.

 서 부장은 내가 전남도지사로 일하던 시절 광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를 지냈다.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마침 안기부도 좁은 건물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 내곡동 등 몇 개 이전 후보지를 그에게 추천했다. 얘기는 상당히 잘 진행됐다.

 하지만 수도방위사령부, 대한주택공사, 외국공관 등 남산 복원을 위해 설득해야 할 기관은 더 있었다. 사업에 추진력을 얻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90
년 어느 날 이동(李棟)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에게 “시정연구관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주택공사 강홍빈 주택연구소장을 추천했다. 강 소장은 미 하버드대와 MIT에서 수학한 도시 전문가였다.

 “아, 미국 보스턴에서 내가 한 번 본 적이 있지. 근데 여기 월급이 얼마 안 되는데 오겠어?
 “주택공사보다는 훨씬 적을 겁니다. 그래도 올지 모릅니다.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얼마 후 그를 직접 만났다. “난 문화적 소양이 부족하다. 나와 같이 서울시에서 일하자”고 설득했다. 이동 본부장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일 욕심 하나로 서울시 시정연구관이 됐다.

90
6월 남산 복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강홍빈 연구관이 기획하고 추진했다. 그는 이 사업에 ‘남산 제 모습 찾기’란 이름을 붙였다. ‘남산 제 모습 찾기 100인 시민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90 10월 사업의 네 가지 큰 방향을 정했다. 첫째, 남산 잠식시설을 옮기거나 철거한 뒤 그 자리를 공원화하고 둘째, 남산의 생태환경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셋째, 역사적 가치가 있는 봉수대와 성곽을 복원하고 넷째, 남산 주변 난개발을 막고 산 안의 보행로를 가꾸기로 했다.

 여론의 반응은 뜨거웠고 환영받았다. 하지만 ‘과연 실현될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남산 사업이 막 무르익어갈 때 나는 수서택지 특혜 분양 압력을 거부하다 서울시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강홍빈 연구관은 남아 100인 시민위원회와 함께 계획을 진전시켰고 관련 부서들이 이어받아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94 11 20일 외인아파트는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

민선 서울시장으로 돌아와서 보니 외인아파트 자리가 공터로 남아 있어 야생화공원으로 만들었다. 안기부 건물은 서울의 안전을 책임지는 서울종합방재센터·소방재난본부·도시안전본부 등으로 탈바꿈했다. 안기부장 공관은 문학의 집으로 바뀌었다. 수방사 자리엔 한옥마을이 들어섰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남산 복원 실무 맡았던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

강홍빈(68)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서울시정개발연구원(현 서울연구원) 원장을 거쳐 서울시 행정1부시장을 지냈다. 강 관장은 “남산 제 모습 찾기란 거대한 그림은 1990년 시작됐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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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제 모습 찾기 100인 시민위원회는 어떻게 구성했나. 100명은 많은 인원인데 운영하기 어렵지 않았나.

“정확히는 103명이다. 시의회도 없고 시민단체 활동도 미약하던 시절이다. 하향식 지시 행정의 틀을 벗어난 시도였다. 김원용 박사가 위원장을 맡았다. 전문가는 물론 남산 자락에 사는 주민, 유치원 교사, 인근 학교 교장 등 다양한 사람이 참여했다. 100인이 다양한 의견을 냈고 역동적이고 멋있게 운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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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복원 사업을 할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남산 군인아파트를 허물고 새 아파트를 짓는데 15층 고층으로 지으려고 했다. 내가 반대하니 시행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칼을 들고 사무실로 쳐들어오더라.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출신인 김병린 사장이 시공사 대표였는데 “내가 접을게”라고 하셨다. 너무 고마웠다. 결국 남산 경관을 해치지 않는 저층 아파트가 지어졌다. 그렇게 지켜낸 남산인데 지금 주변에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85> 수해와의 전쟁

1990년 서울에 큰 물난리가 났다. 9 11일부터 사흘간 480㎜의 비가 내렸다. 서울의 연평균 강수량이 1370㎜였다. 1년치 강수량의 3분의 1이 단 3일 동안 서울에 쏟아졌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다음의 기록이라고 했다. 65년 만의 대홍수가 하필 내가 서울시장일 때 닥쳤다. 전남도지사 시절 지독한 가뭄으로 고생했는데…. 전남도지사 땐 지사실에서 밤을 새우며 기우제를 지냈다. 이젠 시청 시장실에서 기청제(비가 멈추길 비는 제사)를 지내야 할 판이었다. 내 운을 탓할 여유는 없었다. 한강 수위가 심상찮았다.

 급히 3개의 수방(水防) 기동대를 만들었다. 우명규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장 등에게 기동대장 역할을 맡겼다. 나 역시 며칠 밤낮을 시장실에서 보냈다.

 김학재 전 행정2부시장은 23년 전 긴박했던 현장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당시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 차장이었던 그는 기동대에서 활약했다. 김 전 부시장의 설명이다.

 “고건 시장으로부터 ‘영등포 시내로 물이 들어온다고 한다. 빨리 가보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바로 현장으로 향했는데 마포에 물이 넘쳐서 차가 더 못 가더라고요. 차에서 내려 걸어서 여의도 샛강에 가보니 엉망이었습니다. 쓰레기에 스티로폼에…. 어디서 물이 새어 나오는지 알 길이 없는 겁니다. 서울시 한강개발부장을 할 때 알고 지내던 잠수부들을 동원했습니다. 노련한 그들도 겁을 낼 정도로 물살이 강했습니다. 잠수부들이 허리에 줄을 묶고 들어갔지요. 몇 번을 그렇게 해서 뚜껑이 안 닫힌 맨홀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빗물 펌프장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장마철을 앞두고 공사를 잠시 중단하며 물이 새어 나올 통로를 철저히 막아둬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잠수부들이 철망, 모래 가마니 등을 열린 맨홀 위에 덮어 겨우 막았습니다. 홍수가 닥치기 전 현장 점검을 철저히 했어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무사안일이 문제였던 거죠.” 김 전 부시장의 지적이다.

 영등포 일대 주택 360여 채가 물에 잠기고 922가구 주민이 대피해야 했지만 김 전 부시장 등 수방 기동대의 활약 덕분에 더 큰 피해는 막았다. 그런데 곧 이어 중랑천 합류 지점의 한강 제방이 붕괴될 조짐이 있다는 심각한 위기경보를 받았다. 우명규 본부장이 현장으로 달려가 지하철 건설용 중장비를 비상 동원해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이때 수도권에 내린 폭우로 경기도 고양의 한강 제방이 붕괴됐다. 서울을 보호하기 위해 고양의 둑을 터뜨렸다는 유언비어가 돌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서울의 한강 제방이 터졌다면 고양의 제방은 안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서울도 최악의 상황만 피했을 뿐 저지대 아파트, 풍납동 서울중앙병원(지금의 서울아산병원) 등에서 적지 않은 침수 피해가 발생했다. 수해와의 첫 번째 전쟁이었다.

 바로 ‘수해 항구 대책 3개년 계획’을 세웠다. 풍납동에서 망원동에 이르기까지 배수 펌프장 28개소를 한강 본류에 더 설치하고 17개 제방을 쌓았다.

 민선시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8 8. 또 서울에 홍수가 닥쳤다. 이젠 70여 년 만의 최대 규모 폭우였다. 한강 본류에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관선시장 때 추진한 수해 대책 덕이었다. 그런데 한강 지천에서 사고가 터졌다. 중랑천·안양천 등이 범람했다. 두 번째 수해와의 전쟁이었다.

 혹독한 수업이었다. 99년 ‘수해 항구 대책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추진했다. 한강 지천 바닥을 준설했고 침수 피해가 심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펌프장을 신설했다. 117㎞의 하수관로를 새로 깔았고 용량도 확대했다. 펌프장 상태를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조정할 수 있도록 영상 감시, 원격 조종, 자동 기록 시스템을 확충했다.

 하지만 수재(水災)와 나의 악연은 너무나도 질겼다. 2001 7월 집중 폭우가 서울에 내렸다. 200년 만에 한 번 있을까 한 큰 비라고 했다. 수해 항구 대책 5개년 사업을 채 완료하기도 전이었다. 저지대 주택가 지하실 등이 침수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 안타깝고 서울시민에게 죄송스러웠다.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수해 항구 대책을 완료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나는 수해와의 세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후 과거와 같은 광범위한 수해는 없었지만 강남대로와 세종로 사거리 침수, 우면산 산사태 등 피해가 발생했다. 우수·하수관로의 용량을 키우고 산사태 피해를 예방해야 한다. 서울시의 수해와의 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86> 쓰레기 과장과 쓰레기 시장

 1980년대 후반 서울시민의 생활 수준도 높아졌고 덩달아 쓰레기 배출량도 빠르게 늘었다. 78년부터 서울시 전용 쓰레기 매립장으로 사용한 난지도 역시 포화 상태로 가고 있었다. 쓰레기 양을 줄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89 11월 서울시 시민불편신고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재종 담당관을 불렀다. 그는 일하는 열정이 남달랐다. 청소1과장직을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만났는데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시장님, ‘다른 자리도 많은데 하필 쓰레기 과장이냐’고 집사람까지 툴툴댑니다.
 “아니, 무슨 소립니까. 당신이 쓰레기 과장이면 나도 쓰레기 시장이요. 쓰레기를 없애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사실 나는 이때 ‘80년대 구시대 행정의 쓰레기를 치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난 쓰레기 양을 줄이는 해법을 찾는데 골몰했다. 그 분야에서 최고 권위가 있다는 학자들을 모셔서 시장실에서 여러 번 회의도 했지만 묘수가 나오질 않았다. 한창 고민을 하고 있는데 김재종 과장이 제안을 했다.

 “시장님, 저를 일본에 보내주십시오. 지금 서울시민의 하루 쓰레기 배출량이 2.8㎏인데 일본은 1.2㎏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일본 도쿄의 쓰레기 정책은 우리보다 30년 앞서 있다고 합니다. 현장에 가서 비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었고, 흔쾌히 허락했다.

 김 과장은 직원 두 명과 15일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도쿄 시내를 다니며 시민들은 쓰레기를 어떻게 버리고 청소부들은 어떻게 쓰레기를 치우는지 관찰했다. 적환장(매립장에 가기 전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 소각공장, 매립지로 이어지는 쓰레기 처리 시스템도 살펴봤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 과장은 “일본 도쿄 쓰레기 정책의 핵심은 분리 수거에 있다”고 보고했다.

 우리는 쓰레기 분리 수거의 초점을 재활용에 맞추기로 했다. 바로 쓰레기 정책 전문가, 시청 담당 공무원, 환경업체 대표와 시민단체 관계자를 모아 ‘쓰레기감량화대책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서 일반 쓰레기, 재활용품 두 가지로 나눠 수거하자는 안이 나왔다. 위원으로 참여한 김천주 대한주부클럽연합회장은 한발 더 나아가 “재활용품을 철제류·목제류·플라스틱류·병류 등으로 세분해 수거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분리 수거 시범 단지로 송파구 올림픽선수촌아파트를 선정했다. 처음엔 김장할 때 쓰는 빨간 고무통을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쭉 늘어놓고 분리 수거를 했다. 불편해하는 아파트 주민을 설득하는 일은 9개 여성단체에서 나서서 했다. 언론에서도 분리 수거 시범 사업을 앞다퉈 소개해줬다. 시범 사업이 실제 정책으로 정착하는데 여성단체와 언론의 도움이 정말 컸다.

 분리 수거 시책을 계기로 쓰레기 종량제 논의도 시작할 수 있었다. 90 10월 시민단체·환경미화원·학계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거쳐 쓰레기를 배출량에 따라 요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결정하고 발표했다. 그 전엔 가족의 인원에 따라 쓰레기 수거료를 징수했었다. 하지만 환경미화원 노조의 요청에 따라 유예 기간을 뒀다. 쓰레기 종량제는 93년 서울에서 시행됐고 95년 전국으로 확대됐다. 20년 전 시작된 쓰레기 처리 시스템은 시민과 시청, 시민단체와 환경미화원이 함께 참여하고 협력해서 이뤄낼 수 있었다. 요즘 회자되는 ‘거버넌스(協治)’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현장주의자’ 김재종 전 과장
환경미화원들 생고생 눈물
아파트 쓰레기 투입구 없애


김재종(71) 전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장을 17일 만났다. 청소1과장 , 행정관리국장 등을 역임했다. 고건 전 총리는 그를 ‘열정의 현장주의자’라고 칭한다. 그는 1급 공무원으로 정년 퇴임한 최초의 인물이다. “지금 서울시는 쓰레기 배출량에서나 분리 수거 등 처리 시스템에서나 일본 도쿄를 앞섰다. 뿌듯하다”고 그는 말했다.


 - 서울시에서 청소과장을 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더스트 슈트(dust shoot)’라고 각층 투입구를 통해 쓰레기를 던져 버리는 설비가 아파트마다 있었다. 악취가 심해졌고 민원도 많았다. 환경미화원들과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더스트 슈트 때문에 맨 아래층 적하장에서 쓰레기를 치우다가 머리 위로 음식 쓰레기를 맞는 일이 허다하다. 냄새가 독해서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가족과 한자리에 있기가 민망할 때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눈물이 나더라. 고 시장에게 건의해 복지회관과 목욕시설을 지어주기도 했다. 또 건설부에 신설 아파트에 쓰레기 투입구를 만들지 못하도록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 당시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의 폐쇄에 따른 후속 대책은 어떻게 진행했나.

“서울·경기·인천이 함께 사용할 수도권 매립장을 조성하기 위해 서울시 등은 1989 339억원을 들여 경기 검단지구 해안 매립지 약 2074만㎡를 동아건설로부터 매입했다. 이 매립지가 다시 포화 상태에 이르면 그 땅을 팔아 또 다른 매립지를 마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조현숙 기자

 

<87> 복마전 서울시

서울시장에 임명된 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1988 12월 중순. 권완 서울시 목동지구개발사업소장이 결재 서류를 들고 시장실로 왔다. 목동 신도시 개발 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던 시기다. 목동사업소는 그곳에서 이뤄지는 각종 공사를 지휘하는 부서였다. 권한이 막강했다. 그가 건넨 서류를 쭉 훑어봤다. 공구별 공사 발주 일람표였다. 10여 개 공사명과 규모, 예산이 쓰여 있었고 맨 오른쪽 칸은 비어 있었다. 아무리 서류를 들여다봐도 공란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권 소장이 말을 꺼냈다.

 “시장님, 이 공사들을 발주해야 하는데 어느 업체에 줘야 할지 거기다 써 주십시오. 아니면 직접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황당한 소리였다.


 “아니, 내가 공개행정 한다고 했잖아요. 공개해요.

 권 소장의 표정이 희한했다.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꼭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시장실을 나갔다. 일주일 후 권 소장이 다시 결재 서류를 가지고 시장실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시장님이 다 정해 주셨습니다. 큰 거 몇 건만이라도 정해 주십시오.

 내 지시가 먹히지 않았다. 내 얘기를 못 믿어서 그랬나, 아니면 ‘시장이 사업소장을 믿지 않는구나’란 자격지심에서 그랬나. 둘 중 하나였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이 사람이. 공개 경쟁하라는데 왜 딴 소립니까.

 권 소장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가 나가고 시장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했다. 사실 권 소장의 잘못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서울시가 굵직굵직한 공사를 그런 식으로 발주해 왔다는 의미였다. 당시 서울시청을 두고 사람들은 복마전(伏魔殿)이라고 했다. 업체와 공무원이 결탁해 온갖 비리를 저지른다는 비아냥이었다. 국정감사가 열릴 때마다 서울시는 국회와 언론으로부터 두드려 맞았다.

 시장으로 취임하며 “서울시가 복마전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내 생각보다 상황은 심각했다.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입찰 경쟁 없이 한 업체와 수의 계약을 맺거나 몇 군데 기업을 사전에 선정한 다음 경쟁을 거쳐 계약(지명 경쟁 계약)하는 방식을 실질적인 공개 경쟁 계약으로 바꿨다. 공사의 특성상 업체의 자격요건을 엄격히 제한해야 하는 경우에만 지명 경쟁 방식을 썼다. 물론 특정업체 한 곳을 사전에 찍어 놓은 다음 ‘나머지 몇 개 업체는 알아서 데리고 오라’는 식이었던 예전의 지명 경쟁 방식은 철저히 배제했다.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수의 계약과 지명 경쟁 계약만 주로 해왔던 시청 담당 공무원들이 우왕좌왕했다. 입찰 경쟁을 붙이려면 시에서 공사 설계서를 공개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고민했던 것이다. 인터넷이 없었던 때라 시청에 공사계약 시민열람실을 만들었다. 공사 설계서와 발주 절차 그리고 입찰 결과와 계약서까지 모든 과정을 공개했다. 건설업자는 물론 시민들도 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인사 심의와 정책 결정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 특히 이권과 관련된 방침을 결정할 때는 그 과정을 무조건 공개하도록 했다. 시장의 판공비도 공개했다. 시의회가 없을 때였다. 더욱 공개 행정, 참여 행정이 중요했다. 하나하나 고쳐 나가는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1989년 서울시는 커다란 권력형 비리의 중심에 말려 들어갔다. 바로 수서택지 특혜분양 사건이었다.

 

<88> 수서 사건 ①

1989 3 21일 건설부는 서울 강남구 수서지역을 공영개발 예정지구로 고시했다. 이를 미리 알았던 한보그룹은 88 4월부터 자연녹지였던 수서 일대의 땅을 사들였었다. 수서지역이 공영개발지구로 고시되자마자 한보는 그 땅의 명의를 연합주택조합에 넘기고 전방위 로비를 시작했다. 그곳에 주택조합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수의계약 방식으로 토지를 특별분양해 달라는 요구였다. 특정 주택조합에 택지를 특별분양하면 일반분양 가구수는 그만큼 감소한다. 청약저축에 가입한 50만여 명의 시민이 추첨을 통해 아파트를 분양받을 기회가 크게 줄어든다는 얘기다. 수서지구는 ‘서울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땅’으로 불렸다. 택지를 특별분양해 주면 막대한 이익이 조합과 건설사에 돌아갈 판이었다. 공영개발의 취지에 맞지 않고 관련 법규에도 어긋났다. 당연히 서울시는 불가(不可)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89년 말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시장실로 찾아왔다. 그가 용건을 얘기했다. “수서지구에서 특별공급 형태로 조합주택용 토지를 분양해 주십시오.

 난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그에게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취지는 이랬다. “주택조합이 당초 아파트를 지을 수 없는 자연녹지를 조합주택용지로 사들였습니다. 현행 법규상 공영개발택지를 주택조합에 특별공급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보는 물러서지 않았다. 90 2월 초 조합원 수천 명을 동원해 서울시에 택지 특별분양을 해달라고 집단 민원을 제기했다. 서울시도 굽히지 않았다. 분양 불가 방침을 조합에 통보했다.

 그러자 그동안 문건을 남기지 않고 전화나 구두로 압력을 행사했던 청와대는 2 16일 서울시에 협조 공문을 발송했다. ‘민원인들이 공공기관 등에 근무하는 무주택자들로서 적법한 가격으로 공공택지를 우선 공급하는 방안을 건설부와 협의해 검토·처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서울시에 대한 공식적인 압력이었다.

 나는 담당인 이모 청와대 행정수석에게 공영 개발의 취지와 법규정상 택지의 특별분양이 불가하다는 사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나와 고시 동기인 정모 청와대 민정수석이 합석하는 3인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서울 운니동 한식집 ‘송죽헌’에서 둘과 만났다. 난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두 수석 모두 내 얘기에 관심이 없었다. 혹만 하나 더 붙인 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시장 면담을 또 신청했다. 안 된다는 내 입장을 확실히 전하려 정 회장을 시장실로 불렀다. 서너 달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나는 강경한 어조로 특별분양을 허가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내 말이 끝나자 정 회장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두툼한 봉투를 꺼내더니 탁자 앞에 올려놨다. 화가 치밀었다. “어디서 무슨 수작입니까. 당장 나가요.

 나는 크게 소리쳤다. 손으로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그때 정 회장의 표정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무안했는지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눈과 입에서 능글맞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네가 버티면 얼마나 버티겠느냐’는 의미 같았다.

 그 비웃음의 의미는 곧 알 수 있었다. 검찰은 수서택지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시 김모 종합건설본부장과 김모 도시계획국장을 구속했다. 3~4년 전 그들이 받은 명절 떡값을 문제 삼았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서울시장으로서 고독하고 치열한 싸움이었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후임 도시계획국장으로 임명해야 했다. 김학재 서기관(4급 기술직)이 떠올랐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 그와 자주 마주쳤었다. 실생활이 청렴하고 소박하다는 의미였다. 물론 지금 청렴하더라도 요직에 가서 변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자신의 미래를 돈으로 바꾸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기술고시 출신에 나이도 젊었다. 미래 발전성이 충분하다 싶었다. 세 번째 조건은 의지력이었다. 종합건설본부장에 새로 임명할 예정이었던 이동 시정연구관에게 물었더니 “그는 암벽 등반이 취미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란 답이 돌아왔다.

 90 5 18일 김학재 서기관을 도시계획국장 직무대리로 임명했다. 4급 기술직을 2급 수석국장 자리에 발령 낸 것은 전에 없던 파격적인 인사였다. 강창구 도시개발과장도 같은 기준으로 발탁했다. 청와대와 서울시가 벌이는 전쟁터의 최전선에 두 사람을 내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안했다. 하지만 발령장을 주면서 “수서 문제에 있어 원칙과 소신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그들은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89> 수서 사건 ②

"김학재 국장 구속 땐 내가 신문 광고 통해 고발"

1990 5 10일 서울시는 건설부에 수서택지 특별분양 여부에 대한 의견을 달라고 요청했다. 건설부의 판단도 서울시와 같았다. ‘공영개발지구 내 토지 공급은 형평을 유지해야 한다. 국민주택청약 등 예금 가입자에게 불리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연합주택조합에 특별분양은 안 된다’는 간단한 내용의 회신을 서울시로 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 건설부 주택국장이 교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청와대의 압력과 한보의 로비가 건설부로까지 미쳤다. 건설부의 입장은 ‘특별분양이 가능하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서울시는 이제 홀로 맞서야 했다. 먼저 나는 김학재 도시계획국장을 통해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김 국장은 신임 건설부 주택국장과 팽팽한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 다음 수서지구를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이 ‘특별분양을 허가해 달라’고 올린 건의를 서울시 민원심사위원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했다. 위원회를 열어 주택조합 측의 의견을 들었다. 공개적으로 심사하는 과정을 거쳤고 ‘불가(不可)’ 결정이 내려졌다.

 정치권의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여당은 당정협의기구를 통해 압력을 가했다. 당시 야당인 평민당은 총재 명의의 협조 공문까지 서울시에 보냈다.

 얼마 후 이모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장 한 명을 보낼 테니 얘기를 한 번 잘 들어보세요.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오후 시장실로 신모 법무부 국장이 찾아왔다. 그는 나의 학교 후배였다. 심각한 얼굴로 그는 나에게 말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시장님.
 “뭐가 심각하다는 거요.

 “지금 김학재 도시계획국장을 그대로 놔두면 곧 구속이 됩니다. 그걸 예방하려면 국장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후임은 아무개 국장으로 해주십시오.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지만 일단 참았다.

 “내가 김학재를 도시계획국장으로 인선할 때는 그 사람이 청렴하고 생활이 검소하고 강직하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도시계획국장으로 와서 한 건 시장 지시에 의해서 한 거니까, 잘못이 있어 구속한다면 그건 내 잘못이오. 구속하려면 시장을 구속하시오.

 그렇게 신 국장을 돌려보냈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 이제 올 것이 왔구나.

 시장실로 이동 종합건설본부장, 김학재 도시계획국장 등 신임하는 몇몇 간부를 불렀다. 법무부 국장이 찾아와 한 얘기를 전했다.

 “내가 거부해서 보냈으니까 혹시 김학재 국장을 구속하는 사건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옥쇄를 각오하고 저항하고 고발할 겁니다.

 질문이 쏟아졌다.
 “어디다가 고발을 합니까. 검찰도 그렇게 나오는 마당에 말입니다.

 “일간지에 내 돈으로 전면광고를 할 겁니다. 수서 사건이 이러저러하다고 사회 고발을 하는 겁니다. 나도 문안을 생각해 볼 테니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1990 9월 초 경기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장·차관 연수가 있었다. 아침에 산책을 나갔는데 이모 법무부 장관이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김학재 국장에 대해 얘기했다.

 “김 국장은 내가 인선할 때부터 고심한 청렴한 국장입니다.

 어떤 압력이 있어도 서울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내 나름의 뜻을 그 말에 담았다. 우리 뒤에 안상영 부산시장이 마침 있었다. 안 시장은 서울시 기술직 공무원 출신으로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을 지냈다. 속사정을 알 리 없는 그였지만 내 말을 거들어줬다. “김학재요? , 내가 알죠. 그 사람 청렴한 거 내가 보증합니다.

 검찰에선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90 12 27일 청와대는 개각을 발표했다. 나는 서울시장직에서 경질됐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사건] 수서택지 특혜 분양

1991 1월 서울시가 한보그룹을 배후에 둔 주택조합에 수서지구 택지를 특혜 공급한 사건. 노태우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번졌다. 91년 특혜 분양 시비가 일자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을 비롯해 여야 의원, 청와대 비서진, 건설부 공무원 등이 구속됐다. 4년 후 비자금 수사가 진행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서 사건과 관련해 정 회장으로부터 수백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90> 수서 사건 ③

대통령이 임명한 공직자라면 임명권자의 지시나 청와대의 방침에 따르는 것이 상례다. 난 그 원칙을 따르려 노력했다. 하지만 세 번 청와대에 항거할 수밖에 없었다. 5·17, 명동성당 사태 그리고 수서 사건 때다.

 1990 12 27일 청와대는 박세직 전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장을 서울시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경질됐다. 최악의 경우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참담한 감정이 밀려왔다. ‘오후에 지하철 8호선 기공식에 참석하려고 했는데….

 시청 간부들에겐 내색을 안 했다. 한창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는데 김학재 도시계획국장이 찾아왔다. 그의 얼굴은 무척 어두웠다.

 “시장님, 혹시 수서 지구 때문에….
 나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 장관이 10명이나 바뀌고 개편 폭이 꽤 컸어요. 설마 나 한 사람 쫓아내려고 개각을 했을까.

 이어 이원종 내무국장이 찾아와 말했다.
 “무엇이든 심부름할 일을 말해주십시오.
 “한 가지 마지막 부탁이 있긴 해. 서울시정에 그동안 협조해주신 분들께 이임 인사장을 보내주세요.

 짧은 문안을 써서 이 국장에게 건넸다. 그중 한 문장이다. ‘오랫동안 서울시를 괴롭혀온 외부 압력이나 이권 청탁을 철저히 막아내겠다고 한 취임 때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공직에서 이미 물러난 나였다. 그냥 시장을 할 때 도움 받은 사람들에게 솔직한 생각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인사장에 있던 이 한 문장은 수서 비리 사건이 폭로되는 단초가 됐다.

 91 1월 서울시는 수서지구에서 조합주택용 택지를 특별분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담당인 김학재 국장과 강창구 도시개발과장은 결재서류에 사인하길 완강히 거부했다. 박세직 시장과 윤백영 부시장만이 결재서류에 사인했다.

 그리고 91 2 3일 세계일보는 수서택지 특혜분양 비리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사건의 전말이 세상에 알려졌고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사태 초기 나는 오해를 받았다. 국회 사무처에서 수서 관련 청원심사 결과 통지문을 보냈고 나는 퇴임 직전인 90 12 13일 문서 접수 공람 확인란에 사인을 했다. 말 그대로 서류가 시청에 도착했고 내가 그 사실을 확인했다는 의미일 뿐 결재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인을 두고 내가 시장일 때 수서 특혜분양 결정을 했다는 식으로 보도가 나갔다. ‘박세직 현 시장과 고건 전 시장이 책임 떠넘기기를 한다’는 비판이 언론에서 쏟아졌다. 진짜 책임자를 숨기고 잘못을 나에게 떠넘기려는 시청 내부자의 소행이 분명했다. 시청에서 제대로 근무했더라면 공람과 결재의 차이를 모를 리 없었다. 누군지 짐작이 갔지만 아는 체는 하지 않았다.

 수서 비리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뤄졌고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인물] 김학재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지난달 29일 김학재(69) 전 서울시 행정2부시장을 만났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지하철건설본부장을 거쳐 조순·고건 시장 때 부시장으로 일했다.


 - 1990년 당시 도시계획국장으로 발탁됐을 때 어땠나.

“나도 놀랐다. 그때 고 시장이 도라지 담배를 피웠다. 발령 받고 앞에 앉았는데 고 시장이 몇 분 동안 담배를 물고 말이 없다가 ‘남의 돈 먹지 마라. 수서 문제에 원칙과 소신을 지켜야 한다. 바람은 내가 막겠다’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서울시 한 직원이 다른 일로 뇌물을 받은 일이 신문에 났다. 고 시장이 ‘나는 복마전의 수괴가 될 생각 없다. 니들끼리 다 해라’라고 소리치고는 간부들 상대를 안 하시는 거다. 그래서 간부들이 자진해서 서약대회를 열고 ‘우리 이렇게 서약했으니 제발 봐달라’ 사정한 기억이 난다.

 - 수서 사건 때 기억나는 일은.

“특혜 분양은 안 된다고 완강히 반대하고 있는데 검찰에서 나를 잡으러 곧 온다고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고 시장이 나를 불러서 ‘당신 내 얘기 서운하게 듣지 마. 당신이 나한테 그림을 선물하고 국장이 됐다고 소문이 도나 봐’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림이 아니고 도자기라고 얘기가 돕니다. 제가 안 드렸으면 된 거죠’라고 답했다.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퍼뜨릴 만큼 그쪽 압력이 컸다. 솔직히 겁나고 괴로웠다. 그래도 버텼다.

 

<91> 공직 떠난 7년

1990 12 27일 나는 서울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치를 다시 할 생각은 없었고 돌아갈 곳도 없었다. 민주자유당 전북 군산지구당 위원장 자리는 대학 후배에게 물려준 지 오래였다.

 91 1월 서울시립대 원로 교수들이 “시장 출신이 총장을 맡아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정희채 현 총장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

 처음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교육에 열정을 쏟는 것도 보람이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 2 4일 시립대의 노춘희 도시행정학과 교수, 신홍 전 법정대학장과 나는 신임 총장 경선을 치렀다. 교수 131명이 비밀투표를 했다. 나는 68, 신홍 전 학장은 36, 노춘희 교수는 26표를 얻었다. 과반수 득표로 나는 최종 후보에 올랐다. 교육부 장관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형식적 절차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수서택지 특혜 분양 사건이 터졌다. 투표는 끝났는데 총장 임명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다. 교육부는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시간을 끌었다. 청와대는 나에게도 압력을 가했다. 어느 날 청와대 수석 비서관 2명이 나를 직접 찾아왔다.

 “수서 문제로 서울시가 시끄럽습니다. 현직 시장도 이번 일로 물러나게 됐고, 이런 상황에서 전직 시장을 시립대 총장으로 어떻게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퇴해 주셔야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청와대 압력에 굴복했다는 오명을 남기기 싫었다. 아버지도 “절대 물러나지 말라”고 단단히 나에게 일렀다. 하지만 고민을 거듭하면 할수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원로 교수들이 나를 총장 후보로 영입한 뜻은 시로부터 보조금도 더 받고, 의과대도 신설해주고…. 시립대 발전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청와대와 각을 세운 내가 총장이 되면 시립대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내가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일을 맡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물러났다. 시립대 총장을 하면 스스로 정한 진퇴의 원칙에 어긋난다. 사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청와대의 압력에 굴했다는 불명예는 감수해야 했다.

 2 27일 서울시립대 교수협의회에 총장 후보 사퇴서를 냈다. 53세 나이에 쓴 다섯 번째 사표였다. 내가 시립대 총장직에 당선되고도 자진 사퇴하자 외압설이 흘러나왔다. “외압에 의한 사퇴는 아니다”고 답했다. 사실 관계를 떠나 더 이상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공자는 50대를 하늘의 뜻을 아는(知天命·지천명) 나이라고 했다. 천명을 알고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그런데 나는 90년 서울시장에서 경질된 후 97년 김영삼정부 국무총리로 지명되기까지 7년을 공직과 떨어져 지냈다. 50대 황금기의 7년을 그렇게 보냈다. 50대는 자유롭고 외로웠다.

 대개 공직을 그만두면 정부 산하 기관장을 하거나 대기업 고문으로 갔다. 나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봉사활동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세계선린회,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에서 일했다. 김지길 목사,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서영훈 세계선린회 이사장, 신익호 목사 등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했다. 낚시도 다니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유도 즐겼다.

 

<92> 권노갑 최고위원의 전화

 1994 2월 대학 총장으로 갈 기회를 다시 얻었다. 3년 넘게 공직과 떨어져 생활하던 나에게 명지대 교수협의회 인사들이 찾아왔다.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영덕 전 총장의 후임으로 나를 영입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수서 사건과 청와대 외압으로 서울시립대 총장을 맡지 못한 일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공직에 있으면서도 대학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 했다. 아버지(고형곤)는 전북대 총장을 지냈다. 선친이 간 길을 따라 밟아본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명지대 재단이사회의 추천을 받아 총장 후보로 단독 출마했다. 3 15일 교수들은 찬반 투표를 했고 184명 중 165명이 찬성했다. 교수회와 학생회 사람들을 만나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겠다. 대학 행정을 쇄신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대학 현장에 가보니 교수와 학생이 만나 직접 대화하는 일이 없었다. 권위주의 시대에 시위에 나가려는 학생들과 이를 말리는 교수들 사이에 생겼던 벽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 벽을 허물어야 했다. ‘총장이 맥주를 살 테니 원하는 학생은 모이라’는 ‘총장과의 호프미팅’을 벽보로 알렸다. 날짜와 장소도 적어놨다. 벽보가 붙은 지 사흘쯤 지났는데 총장 비서실로 전화가 왔다. “누가 총장 이름을 내걸고 벽보로 장난을 쳤다”는 얘기였다. 총장 비서실에서 “사실이다”라고 확인해줬다.

 반응은 괜찮았다. 학교 앞 맥주집 ‘비어뱅크’에 학생 200여 명이 모였다. 학교가 어떻게 변했으면 하는지 학생들의 진솔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틈날 때마다 이런 자리를 마련했고 ‘호프미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공직으로 돌아가서도 호프미팅을 이어갔다. 이후 국무총리로, 서울시장으로 일하며 직원들과, 기자들과 자주 호프미팅을 가졌다. 총리였을 때 저녁 늦게 불 켜진 사무실이 있으면 직원들을 데리고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뒤편 건물 지하의 맥주집으로 향했다. 야근이 잦은 교육부·행정자치부(현 안전행정부) 직원들이 단골 상대였다. 좋아하는 맥주도 마시고 그들의 어려움도 들었다. 청사 안에서 듣지 못했던 솔직한 현장의 소리를 기자들과 호프미팅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총리로서, 시장으로서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기자들에게 말하고 설득하는 기회도 됐다. 그 누구와의 만찬보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명지대 총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94년 말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휴일이라 집에서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민주당 권노갑 최고위원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직접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갑작스러웠다. 그와는 만나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다. 첫 통화이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답을 했다.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전 지금 공중전화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다시 연락을 주시겠단 말씀이신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자기 개인 전화는 도청이 되니 안 된다. 직접 만나서 말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다’란 뜻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제가 아내를 통해 연락하겠습니다.

 권 위원 부인과 내 아내는 경기여고 동기(44) 동창이다. 권 위원에게 연락을 했다.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에 있는 내 개인 사무실에서 만나자. 정치인과 언론인이 출입하지 않는 곳이고 남의 눈에도 안 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약속한 시간에 그와 단 둘이 사무실에서 만났다. 권 위원이 말했다.

 “민선 서울시장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주셨으면 합니다.

 

<93> 두 번의 거절

 예상했던 대로였다. 권노갑 민주당 최고위원과 만나기 전 나는 서울시장 선거에 나갈 수 없는 이유 5가지를 미리 메모해뒀다. 준비한 내용을 말했다.

 “제안 정말 감사 드립니다.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어렵겠습니다. 첫째, 정치를 잠깐 했지만 공직을 오래 했고 그쪽 정당에 몸 담은 적도 없습니다. 민주당 후보로 나서기엔 명분이 안 섭니다. 둘째, 전 돈이 없는 사람입니다. 셋째….

 내 얘기를 다 듣고 권 위원이 답했다.
 “여기서 당장 결정하지 마시고 좀 더 생각해 보신 뒤 다시 얘기하시죠.

 일주일 후 같은 장소에서 권 위원을 다시 만났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상의하고 온 듯했다. 권 위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전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 답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서울시 모든 민주당 지구당위원장이 서명한 후보 영입 요청서를 받아올 테니 명분은 걱정 마십시오. 둘째, 선거자금은 전액 당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셋째로….

 일주일 전 그는 메모 한 글자 하지 않고 내 말을 들었다. 그런데 순서도 틀리지 않고 답을 했다. 명석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내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저를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장 임기가 4년인데 아직 1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교수·학생들과 한 약속도 있고, 선거에 나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현실 정치인에겐 설득력이 약했다. “집의 가친께서도 반대하신다”고 단호하게 끝맺음을 했다.

 얼마 후 민주당이 조순 전 경제부총리를 첫 민선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했다는 발표가 언론에 났다. 1995 6 27일 첫 전국 동시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조순 후보가 당선됐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정치적 제안을 받았다. 1996년 어느 날 고등고시 13회 동기들과 서울 종로구 한정식집 ‘장원’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때 아내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김 대통령이 통화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핑계를 대고 저녁 자리에서 빠져 나온 뒤 공중전화를 찾았다. 그런데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고 전화기 잡음도 심했다. 결국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저녁 9시가 다 됐다. 김 대통령이 TV 뉴스를 볼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기를 앞에 두고 기다렸다. 김 대통령이 어떤 얘기를 꺼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신한국당이 새 얼굴을 영입하려 뛰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전화로 거절하기는 어려운데….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다.

 저녁 930분 청와대 부속실로 전화를 했다. 김 대통령과 전화가 연결됐다.
 “고 총장, 오랜만이오. 춘부장은 잘 계시지.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버지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리고 용건을 말했다. “내일 나하고 차 한잔 합시다.

 다행이었다. 전화로 대통령에게 거절의 뜻을 전하는 난감한 일은 일단 피했다. 다음날 오후 5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그와 단둘이 앉았다. 김 대통령이 말했다.

 “과거에 여당은 중앙정보부에서 몇 사람, 당에서 몇 사람, 청와대에서 몇 사람 넣고…. 그렇게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들을 정했어요. 이제 그래선 안 돼. 여론조사에 의해 과학적으로 인선을 하고 있어요. 고 총장이 전국구 상위 순번으로 들어와서 나하고 정치를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준비한 답을 했다.

 “배려할 사람이 많으실 텐데 저까지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립대 총장도 공인이라면 공인입니다. 공인이 공언한 얘기는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생회와 교수, 학교 간부들에게 ‘약속한 일을 마치기 전에는 정계에 안 나간다’고 공언을 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판단이 빨랐다. 대답은 시원했다.
 “공인이 공언한 건 지켜야지.
 그러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취임 초에 기자회견도 아니고, 오찬 간담회 비슷한 걸 했는데 말입니다. 기자들이 나한테 ‘현철이가 정치를 한다고 하면 허용하시겠습니까’ 묻길래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은 안 시키겠다’고 공언을 했어요. 그런데 요즘 현철이가 정치를 하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공언한 걸 지켜야 하니까 제가 말렸습니다.

 김 대통령은 내 뜻을 받아줬다. 낯도 붉히지 않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 독대를 마쳤다. 얼마 후 이회창 전 총리, 박찬종 전 의원 등이 신한국당에 입당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났다.

 그렇게 DJ YS의 제안을 한 번씩 거절했다. 그때 제안을 받아들여 1990년대 중반 정치에 뛰어들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94> 97년 총리로 공직 복귀

 1997 2월 말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1년 전처럼 청와대 집무실에 마주 앉은 김 대통령이 말을 꺼냈다.

 “국무총리를 맡아 한보 사태 위기 정국을 수습해 주세요.

 임기 말에 접어든 김영삼정부는 한보 사태로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한보그룹과 나의 악연은 질겼다. 한보 때문에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났던 나는 7년이 지나 한보 때문에 총리 자리를 제안받았다. 나는 한보 사태를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제안을 사양하자 김 대통령은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두 번을 강조했다.

 명지대 총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때였다. 교수와 학생 앞에서 약속한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건부로 수락했다.

 “총리가 내각을 통할하려면 국무위원 해임 제청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거 뭐 어렵나.” 김 대통령은 즉석에서 내 의견을 받아들여줬다.

 “국회 회기를 감안하면 일주일 정도 시간이 더 있습니다. 더 좋은 사람을 물색해보시고 그래도 제가 필요하시다면 연락을 주십시오.

 3 5일 나는 총리로 취임했다. 7년 만에 돌아온 공직이었지만 기쁜 마음은 없었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했다. 한보철강 특혜 대출을 둘러싼 비리 의혹은 김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김 대통령에게 독대를 청했다.

 “이미 문종수 민정수석을 통해 보고드렸지만 언론이나 일반 국민들이 현재의 검찰 수뇌부에 신뢰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을 바꾸긴 했지만 검찰총장, 중수부장 모두 한보 정태수 회장과 같은 영남 사람이란 선입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검찰총장은 임기를 지켜주는 게 맞겠고, 대신 중수부장을 교체하는 방안을 가납해주시면 검찰 수사진의 신뢰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의 말에 김 대통령은 한동안 침묵했다. 대통령도 나도 중수부장 교체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아들을 구속 수사하겠다는 뜻이었다. 김 대통령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게 하세요.

 최상엽 법무부 장관을 총리 집무실로 불러 상의했다.

 “이렇게 가서는 한보 사태가 수습이 안 됩니다. 중수부장을 교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검찰 최고의 수사통이 누굽니까.
 “인천지검에 심재륜이라고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으로 바꾸세요. 책임은 제가 집니다. 국무회의 때 내가 직접 지시를 하는 형식을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3 18일 국무회의에서 나는 준비한 대로 최 장관에게 지시했다.

 “국민들은 한보 사태 등 일련의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가 미흡하며, 내각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의혹을 불식시킬 수 있도록 사람을 바꿔서라도 철저한 수사 노력을 기울여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김 대통령의 재가도 받았고 최 장관과도 미리 말을 맞춰둔 상태였다. 전말을 알 리 없는 언론은 ‘총리가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 재수사를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라며 대서특필했다.

 3 23일 법무부는 심재륜 인천지검장을 대검 중수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 칼날 같은 수사를 벌였다. 두 달 후인 5 17일 검찰은 김현철씨를 구속했다. 그렇게 한보 사태의 고비 하나를 넘겼다.

 그런데 아들이 구속되고 나서부터 김 대통령이 불면증을 앓았다. 총리로서 매우 곤혹스러웠다. 내 책임이 컸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서울 삼청동 총리관저에서 김 대통령을 비롯해 5부 수뇌가 참석하는 부부 동반 만찬을 열었다. 만찬이 열리기 전 오후 청와대 의전실에 물었다.

 “어떻게 하면 오늘 대통령께서 주무시겠나. 술은 뭘로 했으면 좋겠나.

 김 대통령은 원래 술을 즐기진 않았다. 와인 ‘마주앙’을 몇 잔 하는 정도였다. 그날만큼은 주무실 수 있도록 도수가 높은 술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미였다. 의전실 담당자는 내 말 뜻을 금방 알아챘다.

 “‘우량예(五粮液)’로 하면 어떨까요.

 그의 제안대로 도수가 높은 중국술 우량예를 만찬 석상에 올렸다. 만찬 분위기는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우량예 서너 잔을 마셨다.

 다음 날 청와대 부속실에 물었더니 “대통령께선 잘 주무셨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후 김 대통령은 아침에 조깅을 하지 않고 대신 오후에 수영을 하며 불면증을 고쳤다고 전해 들었다.

 

<95>규제개혁 '제1과제'

 1997 3 5일 오전 11시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대회의실. 총리 이·취임식이 처음으로 동시에 열렸다. 이수성 총리와 나는 서울대 56학번 동기다. 떠나는 이 총리는 신임인 나에게 웃으며 한마디 건넸다.

 “너무 힘들어서 축하는 못하고.
 “위로라도 해줘야지.

 나는 웃으며 답했지만 마음 속은 걱정으로 차 있었다. 한보 사태로 김영삼정부는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정경 유착이 경제를 좀먹게 했고 국민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해법이 필요했다. 나는 문제의 핵심을 규제라고 봤다.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 앞에 섰다.

 “행정의 투명성을 가로막는 허다한 정부 규제가 특혜와 정경 유착을 가져와 나라의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경제 활성화와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해 규제 혁파 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입니다.

 당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을 31위로 평가했다. 2년 전에 비해 7단계나 떨어졌다. 정부 규제와 행정의 불투명성이 점수를 갉아먹는 주요인이었다. 난 대통령 자문기구인 행정쇄신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행정 쇄신 정도가 아니라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고 밝혔다. 쇄신과 개혁을 넘어 틀을 부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규제 혁파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경제 활성화, 그리고 반()부패였다. 규제와 특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규제가 있기 때문에 특혜가 있다. 규제 없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경쟁하게 한다면 특혜와 부패는 사라진다.

 시간이 없었다. 김영삼정부의 임기가 채 1년도 남지 않았다. 주변 상황도 여러 모로 나빴다. 한보 사태와 경기 침체로 여론은 차갑기만 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관련 부처 공무원의 저항도 문제였다. 다음 정부만 바라보고 있는 관료들이 움직이지 않으리란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사람은 가도 시스템은 남는다’. 이 원칙을 되뇌며 밀고 나갔다. 먼저 김영삼 대통령에게 “규제 개혁을 중점 시책으로 삼겠다”고 보고했다. 김 대통령은 재가를 해줬다. 속도를 냈다.

 4 2일 가칭 ‘규제개혁추진회의’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벤처기업 활성화를 위한 창업 규제 완화, 규제 일몰제(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규제가 사라지도록 하는 제도) 단계적 도입, 규제영향 평가제도 시행 등 10가지 원칙도 함께 공개했다.

 없애야 할 규제와 강화해야 할 규제는 따로 있다. 환경·안전 규제는 강화해야 한다. 지금의 경제민주화 관련법처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는 경제 규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친 진입 규제 등 쓸모 없는 규제는 부패를 불러올 따름이다. 이런 규제를 없애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4 21일 규제개혁추진회의가 공식 출범했다. 각 부처에 흩어져 있었던 규제개혁기구를 하나로 통합했다. 나와 김상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공동 의장을 맡았다. 강경식 경제부총리,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 최종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박상희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장 등 22명을 위원으로 위촉했다. 그리고 7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 정책을 뒷받침하는 행정규제기본법안이 통과됐다. 지금의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는 이렇게 출발했다. 전윤철 공정위원장이 실무를 주도했고 수고를 많이 했다. 1997년 한 해만 100여 건의 규제개혁 과제를 정했고 추진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비판도 많았다. 굵직굵직한 규제개혁 방안은 관련 부처의 반발이나 이해관계가 얽힌 민간단체의 반대로 가로막히기 일쑤였다. 지엽적인 규제만 손질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시스템을 탄탄히 갖춰놓는다면 실효성 있는 규제개혁은 언제든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가졌다. 1998 8월 행정규제기본법이 발효되면서 규제개혁 작업이 본궤도에 올랐다.

 2003 2 27일 나는 다시 국무총리가 됐다. 출범 7년째를 맞이한 규제개혁위원회는 한층 성장해 있었다. 경제위기 속에 규제를 개선하는 틀로서 역할도 해냈다. 뿌듯했다. 두 번째로 총리를 맡았을 때 “양 위주에서 질 위주 규제개혁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규제개혁의 내실화에 중점을 뒀다.

 

<96>EBS 수능 방송

김영삼정부 시절인 1997 8 25 EBS의 ‘위성교육방송’이 실시됐다. 교육부가 마련한 ‘과열 과외 완화 및 과외비 경감 대책’의 하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전부터 EBS 수능 과외방송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날 설렁탕에 깍두기를 곁들인 청와대 주례오찬 중에 그가 말했다.

 “수능 과외방송, 그걸 꼭 했으면 좋겠어요. 잘 좀 해보세요.
 “네, 염려 마십시오.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위성방송 개국을 넉 달 앞둔 1997 4월 총리 공관에서 안병영 교육부 장관을 비롯해 관계자들을 불러 간담회를 했다. 수능시험을 관장하는 국립교육평가원(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간부들과 전년도 수능 출제위원, 고교 교사들도 있었다. 회의 도중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이 수능 과외방송이 실제로 효과를 보려면 방송 내용이 수능시험에 꼭 출제돼야 하는 거 아니오? 방송 내용 중에서 수능시험을 60% 이상 출제하는 게 어때요?

 마침 수능시험을 관장하는 김정길 국립교육평가원장도 참석 중이었다. 참석자들은 “수능시험의 60% EBS 수능 과외방송에서 출제한다”는 데 인식을 함께했다. EBS 수능 과외교재는 2년 동안 불티가 났다. EBS 위성교육방송이 개국한 1997 8 25일 김영삼 대통령은 축하메시지를 영상으로 띄웠다. 나는 서울 서초구 우면동 한국교육개발원에 가서 축사를 했다. 재원 마련을 위해 9 1일부터는 광고방송도 했다.

 위성방송 개시 전에 일종의 권한 다툼도 있었다. 위성방송 관계장관회의를 하면 위성방송이 교육부 소관이냐 정보통신부 소관이냐를 놓고 부처끼리 많이 싸웠다. 광고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도 갈등이 심했다. 4 25일 총리 주재 오찬 간담회에서 업무 조정을 했다.

 7년 뒤인 2004년 노무현정부도 부동산과 함께 사교육비 문제를 민생과 관련한 가장 시급한 정책 과제로 설정했다. 2004 2 17일 안병영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또다시 ‘사교육비 경감 대책’을 발표했다. 이번 대책의 핵심은 EBS 인터넷 수능 강의였다. 교육부의 수장은 7년 전과 똑같이 안병영 장관이었다. 서삼영 한국전산원(현 한국정보화진흥원), 박경재 교육부 국장과 EBS의 고석만 사장, 배종대 국장이 적극 참여했다.

 인터넷 수능 강의의 취지는 인터넷 접속이 되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수능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인터넷 강의에 인기 강사들을 출연시키기로 했다. 단기간에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쉽지 않았다. 3 11일 정통부·EBS·한국전산원·KT·두루넷 등 11개 유관기관 전문가로 구성된 대책반을 만들었다. 예상되는 문제들을 함께 점검해 나갔다.

 그런데 서버 다운을 막으려면 최소 10만 회선을 확보해야 했다.
 교육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진대제 정통부 장관의 손을 빌려야 했다.

 “진 장관, 당신이 책임지고 10만 회선을 확보하세요. 4 1일 강의 시작 전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시오.

 우격다짐으로 진 장관을 몰아세웠다. 진 장관이 미국에 급히 연락해 들여온 CDN(Contents Delivery Network) 서버가 인천공항을 통과한 것은 3 30일 새벽이었다. 덕분에 이틀 후 인터넷 강의가 시작됐을 때 접속 폭주했지만 서버에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사교육비 부담이 국민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었고 EBS 위성방송과 인터넷 강의는 ‘국가대표 수능과외’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해 7 9 EBS 회원 100만 명 시대가 열렸다.

 공교육을 책임지는 정부가 수능과외 공부에 앞장을 섰다. 수능과외는 정부가 성공시킨 유일한 사교육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97>  2004년 KTX 개통

 2004 3 30일 오전 서울역 광장. 고속철도(KTX) 개통식이 열렸다. 12년간 3만 명의 인원과 20조원의 자금을 투자한 대역사였다. 국무총리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나는 목포행 KTX 열차에 올랐다. ‘웅’ 낮은 소리를 내며 열차가 서울역을 출발했다.

 요란했던 개통 행사와 촬영, 기자회견이 끝났다. KTX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서울시장 때 타봤던 런던~파리 구간 유로스타의 승차감, 안락함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30분이 채 지나기 전 열차는 빠른 속도로 천안아산역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7년 전 일이 기억 났다.

 1997 4월 세계적 안전진단기업인 미국 WJE는 경부고속철도 1차 공구인 서울~천안, 천안~대전 구간의 철도·교량·터널 등 1012개 구조물의 70%가 부실 시공됐다는 발표를 했다.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이 정밀안전점검을 의뢰한 결과였다. 설계부터 시공, 감리까지 총체적 부실이었다. 2002년 개통한다는 목표에 차질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5조원으로 계획했던 공사비가 30조원으로 불어난다는 분석이 나왔다.

 연이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부실공사에 대한 국민의 공포감은 극에 달했던 시기다. 경기 침체 때문에 세금 낭비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고속철도 반대론이 비등했다.

 그런데 착공 후 지금까지 투자한 막대한 세금이 문제였다. 매몰 비용으로 처리하기엔 너무 큰 액수였다. 대통령 선거를 6개월여 앞두고 고속철도 공사를 포기하느냐 마느냐가 국가적 고민으로 부상했다. 공사 초기부터 갈렸던 고속철도 반대론과 찬성론이 다시 팽팽하게 맞섰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보 사태에 집중하고 있었다. 총리인 나에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제가 맡겨졌다. 교통부 장관을 할 때의 경험을 살렸다. 토목공학, 교통정책, 재정 등 전문가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토론 결과를 바탕으로 찬성론자, 반대론자 그리고 중립적 전문가가 참여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부실공사에 대한 조사 결과, 보완공사 가능성 판단, 공사 계속 여부 등을 가지고 총리 주재 위원회 회의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공사를 계속 추진하되 사업계획을 대폭 보완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9 9일 건설교통부·고속철도건설공단·교통개발연구원은 경부고속철도 서울~대구 구간은 2003 7월 개통하고 부산까지는 기존 경부선을 활용해 일단 사용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부산 간 완전 개통 시기는 2005 11월로 늦춰졌다. 89년 기준 58000억원이었던 사업비는 97 1월 기준 176300억원으로 늘어났다. 공사비가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데 대한 비판은 감수해야 했다.

 고속철도와 얽힌 사연은 또 있다. 2003년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구간이 문제가 돼 공사가 중단됐다. 두 번째 총리 시절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를 통해 문제를 돌파했다. 2003 9 19일 총리 주재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예정대로 천성산 구간 공사를 진행한다고 결론을 냈다.

 다음 해 KTX 경부선보다 호남선 구간이 먼저 완공됐다. 내가 교통부 장관이었던 시절 호남선 복선화 공사를 하면서 곡선이던 구간을 직선으로 만들었던 게 도움이 됐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이라던 고속철도 공사가 중단될 뻔한 위기를 극복한 것은 공론화 과정을 거친 사회적 합의가 있어서였다.

공론화 과정과 국민적 합의가 바로 소통이다. 고속철도 개통식에서 내 감회가 남달랐던 이유다. 하지만 우리 좁은 국토에서 KTX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북한을 거쳐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 대륙을 거쳐 유럽과 연결이 되는 ‘철의 실크로드’가 완성돼야 할 것이다.

 

<98> 97년 외환위기의 서막

 1997 4월 태국 바트화 가치가 폭락했다. 동남아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태국에서 시작한 위기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로 전염됐다. 불과 넉 달 후인 8월 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신세가 됐다. 국가부도 사태가 동남아에서 번지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때만 해도 총리는 경제정책 결정 라인에서 빠져 있었다. 총리 간섭 없이 경제부총리의 지휘 아래 경제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경제부처와 비()경제부처 간 의견이 다른 부분을 조정해주는 역할만 했다. 경제장관회의에 총리가 참석하는 일도 없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아보려면 청와대 담당 수석이나 경제부처 장관을 따로 불러 묻는 수밖에 없었다.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는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걱정이 많이 됩니다.
 “총리님,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걱정을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 경제는 펀더멘털(기초체력)이 튼튼합니다.

 그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펀더멘털 얘기만 했다. 안심이 안 됐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고민 끝에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전임 경제부총리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현 사태에 대해 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라’는 취지였다. 남덕우·신현확 전 총리, 이승윤 전 부총리와 만찬을 연이어 마련했다. 나도 합석했다.

 1997년 말로 갈수록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11월 들어 경제관료들 입에서 나온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얘기가 신문에 보도됐다.

 11 15일 만찬 행사 자리에서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를 만났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이 됩니다.
 “저도 걱정이 됩니다. 부총재를 보낼 테니 한번 설명을 들어봐 주십시오.
 “아, 그러면 내일이라도 들어야겠습니다.

 11 16일은 일요일이었지만 약속대로 한은 부총재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불러 만났다. 그가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외환보유액이 300억 달러가 넘긴 하지만 대부분이 묶여 있는 돈이고 가용액은 30억 달러 수준이라는 설명이었다.

 ‘큰일이 났다. 대통령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

 청와대에 급히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11 18일 화요일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었다. 내가 들은 얘기를 했다. 김 대통령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고 있어요. 보고를 받았습니다.

 누구에게 보고를 받았는지에 대해 김 대통령은 말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경제부총리를 경질하는 개각이 단행됐다. 그리고 11 21일 재정경제원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도 한국 경제에 상처로 남아 있는 IMF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참담했다. 그리고 총리로서 책임을 통감했다. 하지만 총리로서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550억 달러를 지원하는 대가로 IMF는 까다로운 이행 조건을 제시했다.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이행 조건 양해각서에 각 정당의 합의 서명을 받아오라는 요구까지 했다.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일은 내 몫이었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15대 대통령선거를 엄정하고 중립적으로 치르는 일도 중요했다. 그것 말고도 챙겨야 할 사안은 많았다.

 1997 12 15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정상회담이 개막됐다. 대선을 불과 사흘 앞둔 시기였다. 나는 김 대통령을 대신해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15일 오전 공식 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 회담장 전실(前室)에서 13개국 정상이 모여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외환위기가 아시아에 짙게 드리운 시기였다. 다들 표정이 심각했다.

 

<99> 금 모으기 운동

회담 주최국인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농담을 꺼내기 시작했다. 정상들은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도 농담을 이어갔다. “정말 덥네요. 여기선 건물 안에서만 에어컨을 틀고 있지만 베이징에선 실외에서도 에어컨을 열심히 틀고 있습니다.

 12월이었지만 말레이시아는 더웠다. 그는 한겨울인 베이징의 날씨를 에어컨에 빗대 농담을 한 것이었다.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싶었다. 고촉통(吳作棟) 싱가포르 총리를 보며 말을 꺼냈다. 그는 나보다 키가 한참 컸다. “내 성이 ‘높을 고()’자입니다. 발음으로만 따지자면 고촉통 총리와 성이 같습니다. 그래서 고촉통 총리께서 키가 크신가 봅니다.

 고촉통 총리를 비롯해 참석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거기까지였다.

 회담 시간이 되자 13개국 정상이 차례로 공식 회의장에 들어섰다. 분위기는 심각했다. 자리에 앉은 정상들은 하나같이 내 얼굴을 살폈다. 그들이 어떤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지는 뻔했다. ‘너희 나라가 거덜 나게 생겼는데 어떻게 돼가는 거냐’라는 표정이었다. 내 발언 차례가 돌아왔다. 준비한 연설문은 한·아세안(ASEAN) 협력 관계에 대한 내용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마디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여러분들이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해서 걱정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CNN 뉴스를 보셨습니까.

 다들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말을 이어갔다. “한국의 젊은 부부들이 결혼 기념 반지를 내놓는 등 전 국민이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려고 금을 모으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외환위기를 충분히 극복하고 남을 국민성을 갖고 있습니다. 반드시 위기를 극복할 것입니다.

 회담장 분위기가 일순간 숙연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장쩌민 주석이 그 일을 기억에 깊이 담아뒀던 것 같다. 1년 후인 1998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정상회담에서 장쩌민 주석이 금 모으기 운동에 감명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1997 12 18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어느 정도 할 일을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미뤄뒀던 일을 해야 했다. 사표를 썼다.

 고민이 깊었다. ‘국난이 닥쳤다. 정권 중반에 외환위기를 맞아도 극복하기가 어려운데 정권 교체기에 일이 발생했다. 물러나는 정부와 새로운 정부 간의 진심 어린 협력이 있어야 이 사태를 극복할 수 있다.

 12 19일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과 단둘이 다시 만났다. 먼저 정상회담 결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사표를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내가 쓴 여섯 번째 사표였다.

 “나라가 백척간두(百尺竿頭·긴 장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움)의 위기에 있습니다. 총리로서 이번 위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려고 합니다. 이 사표를 받아주시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으로부터 경제통을 내밀히 천거 받으셔서 신임 총리로 임명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건 안 돼요.

 김 대통령은 짧게 답했다. 말투는 단호했다. 그의 뜻을 거스를 순 없었다. 그래서 다시 얘기했다.

 “현 정권과 차기 정권 간의 긴밀한 협조체제가 중요합니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같은 협력기구를 차기 정부와 공동으로 구성해 운영하면 어떨까 합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 조해녕 당시 내무부 장관
새마을부녀회서 방향 잡아 애국 가락지 모으기 운동

조해녕(70·사진) 전 대구시장은 ‘금 모으기 운동’의 시작을 지켜본 인물이다. 총무처 장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회장을 역임했고 1997년 고건 총리 시절 내무부 장관으로 일했다.


 - 금 모으기 운동의 시초는 무엇인가.

“환율이 급등하고 외환보유액이 바닥나기 시작한 1997년 말의 일이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국무회의 후 국무위원 휴게실에서 고건 총리에게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새마을부녀회중앙연합회 등에서 추진한 ‘3조원 저축운동’의 성과를 보고했다. 그러자 고 총리가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에 필적할 사업이다. 외환위기 극복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어떻게 금 모으기 운동으로 번지게 됐나.

“그 자리에서 내가 정행길 새마을부녀회중앙연합회 회장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고 총리가 한 당부와 치하의 말을 전했다. 새마을부녀회는 장롱 속에 있던 돌반지 등 금붙이를 모으고 해외여행 후 쓰다 남은 외화 잔액으로 외화 통장을 만들어 모으자고 캠페인 방향을 설정했다. 그렇게 1997 12월 새마을부녀회 주도로 금 모으기 운동의 시초인

 

<100> 두 번째 서울시장 도전

1997 12 22 12명으로 구성된 비상경제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정부 측 대표는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당 측 대표는 김용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부총재가 맡았다. 위원회는 외환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사실상의 비상내각 역할을 했다.

 나는 물러나는 총리로서 마지막 업무를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국회 임명 동의를 아직 받지 못한 김종필 총리 후보를 대신해 98 3 3일 새 장관들을 임명 제청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비상시국이었다. 새 내각이 시작부터 혼란에 빠져선 안 된다는 생각에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이날 김대중(DJ) 정부 ‘일일 총리’ 역할을 끝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년 전인 97 3 3일 총리로 내정됐을 때 “이번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마지막 봉사 기회라는 각오로 온몸을 던져 일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총리에서 물러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98 3월 중순 박정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주미대사를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DJ 뜻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바로 대답을 했다.

 “아, 그건 아닌 듯합니다. 주미대사는 미국 유학파가 맡아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전 미국에서 1년 반 정도 있었고 짧게 유람한 정도에 그칩니다. 제대로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을 뽑아야 학맥도 인맥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절했다. 얼마 후 이종찬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같은 내용이었다. 내 대답도 변함없었다. “내가 국가의 일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때만 공직을 맡았습니다. 주미대사직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 진퇴의 원칙에 반합니다. 미국 유학파를 기용하십시오.

 거듭 거절했다.

 다음 달인 4월 새정치국민회의 조세형 총재 권한대행이 종로구 연지동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두 달 뒤 있을 민선 2기 서울시장 선거에 국민회의 후보로 나가 줬으면 한다”는 말을 했다. 94 DJ가 권노갑 전 의원을 통해 민선 1기 서울시장 출마를 권유했던 기억이 났다.

 4년 전과는 이제 상황이 달랐다. 난 자유로운 몸이었다. ‘서울시장이라면 한 번 해 본 경험이 있다. 관선 서울시장 때 시작했던 일을 마무리하는 것도 보람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쉽게 결정 내릴 일이 아니었다. 조 대행에게 말했다.

 “전 돈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거비용을 댈 능력이 없습니다.

 그의 답은 명쾌했다. 바뀐 선거법을 설명해 줬다. “일정 득표율 이상을 얻으면 국고에서 선거비용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정치자금법에 의거해 후보도 후원금을 받을 수 있고, 그 돈을 개인 활동비로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에서도 선거자금을 지원할 겁니다.

 “그럼, 수락하겠습니다.

 조 대행이 사무실을 떠났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임명직 서울시장으로 일하며 야심 차게 시작했던 5~8호선 2기 지하철과 내·외곽 순환도로 공사를 다시 내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수서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서울시장직에서 경질되면서 미처 하지 못한 일이 많았다. 많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검은색 표지의 작은 빈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 서울시정 핵심 과제를 적어 내려갔다. 불과 사나흘 만에 수첩 안은 빼곡한 글씨로 다 찼다. 그때 만든 수첩은 이후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4년 내내 들여다보며 시정 방향을 점검하는 나만의 ‘체크리스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01> 노무현과 한광옥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을 통해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겠다는 뜻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했다. 국민회의에서 나를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한다는 사실을 발표하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먼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에 “찾아 뵙겠다”고 전화를 했다. 김 전 대통령을 만났다.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서울시장 후보 제의를 받았습니다. 시장 재수를 하려고 합니다.
 김 전 대통령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 그래요.”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출마를 결심하게 된 나름의 이유와 명분을 설명했다. 얘기를 듣던 김 전 대통령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근데 며칠 전에 최병렬 한나라당 후보가 다녀갔습니다. 서울시장 선거에 나간다고 그래서 제가 잘 해보라고 격려를 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 입장에선 나에게도 ‘잘 해보라’고 말할 순 없었을 것이다. 그의 대답은 짧았다.

 “그렇게 알고 있겠어요.

 김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선거 내내 최병렬 후보와 나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줬다. 고마웠다.

 권노갑 전 의원도 만났다. 4년 전 서울시장 후보 제안을 끝내 고사했지만 이번엔 받았다”고 말하며 이유를 설명했다. 권 전 의원을 찾아가 양해를 구하는 게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했다.

 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국민회의의 노무현 부총재와 한광옥 부총재였다. 두 사람 모두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나 때문에 뜻을 접어야 했다.

 노 부총재는 먼저 “서울시장 후보로 나가지 않겠다. 경선을 하지 않고 지지를 하겠다”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고맙다. 식사를 하자”고 청했고 며칠 후 대학로 일식집 ‘석정’에서 그를 만났다.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처음 그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그때만 해도 당내에서 노 부총재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5년 후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와의 첫 만남은 인상적이었다. 그의 화법은 매우 담백했다.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드물게 사심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 부총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한 부총재는 일찌감치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려고 뛰었었다. 당내에서도 영향력이 컸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나를 서울시장 후보로 낙점했다. 여론조사 결과가 김 대통령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한 부총재와는 직접 연락이 되지 않았고 만날 수도 없었다. 그가 서울 근교 모처로 잠적했다는 소문만 들릴 뿐이었다.

 1998 5 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국민회의 서울시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대회 전에 서울지역 국민회의 지구당위원장 47명을 모두 만나 출마 이유를 설명하며 지지를 부탁했다. 이날 대회에서 국민회의는 나를 서울시장 후보로 공식 추대했다.

 행사가 끝난 후 만사 제쳐놓고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광옥 부총재 자택으로 찾아갔다. 한참을 벨을 눌러도 답이 없었다.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인터폰으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한 부총재의 부인이었다. 그제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 부총재 부인의 안내로 1층 응접실에 앉았다. 2층에서 한 부총재가 내려왔다. 그와 대면해 공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훗날 노 부총재는 서울 종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한 부총재는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5 8일 한 부총재를 만나고 돌아와서 바로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국민회의도, 한나라당도 서울시장 선거를 놓고 총력전에 들어갔다.

 

<102> 네거티브 선거, 그리고 승리

서울시장 선거를 한 달 앞둔 1998 5월 선거대책위원회 사무실이 김대중 대통령의 대선 캠프였던 여의도동 대하빌딩에 설치됐다. 당 사람들이 캠프로 몰려들었다. 2개 층을 사무실로 썼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그곳에서 일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임채정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나에게 세 사람을 보냈다. 김한길·정동영 의원과 신계륜 전 의원이었다. 김 의원과 정 의원은 기획과 홍보를 맡았다. 신 전 의원은 후보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이들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양복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치고 찍은 포스터 사진은 정 의원의 작품이었다. 내게 생소하기만 했던 TV 토론회를 무사히 치르는 데 김 의원과 정 의원의 조력이 컸다.

 여당인 국민회의도, 야당인 한나라당도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 총력전을 펼쳤다. 여소야대 상황이었고 대선을 치른 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다. 여당에겐 더 없이 중요한 선거였다. 대선에서 패한 한나라당으로서도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선거전은 점점 치열해졌고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네거티브 선거의 등장이었다. 한나라당 최병렬 서울시장 후보는 ‘고건의 7대 불가사의’를 들고 나왔다. 시장 후보에게 허용되는 신문 광고 횟수는 제한돼 있다. 그런데 최 후보 측은 정책이 아닌 ‘고건의 7대 불가사의’를 신문 광고에 집중적으로 실었다. 핵심은 내 병역 문제였다.

 나는 병역이나 입영을 기피한 적이 없다. 1960 3월 대학을 졸업하고 1961 12월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그 후 군에 입대하려고 입영 영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4·19 5·16으로 병역 기피자들이 한꺼번에 군에 입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군사정부에서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가운데 병역 기피자를 색출해서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입대하는 사람이 갑자기 늘면서 내 또래의 입영 대기자 35만 명 가운데 절반인 17만 명에게 입영 영장이 나오지 않았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내가 병역을 기피하려고 했거나 병역상의 하자가 있었다면 나는 공무원으로 임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영장은 계속 나오지 않았고 1962 10월 병역법 개정법률 1163호에 따라 나는 보충역으로 편입됐다.

 서울시장 선거를 앞둔 1998 5월 야당 의원들의 요구로 국회 국방위원회는 나의 병역 기록을 열람했고 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영장 미하령’ 상황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7가지 의혹이 사실이 아니란 점을 설명하고 시정 구상을 유권자에게 소개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하지만 네거티브 캠페인에 묻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선거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네거티브 선거는 심해졌다. 결국 나는 최 후보측을 검찰에 고발하는 강수를 쓸 수밖에 없었다. 선거 끝난 후 화해 차원에서 고소를 취하했다. 5년 후 총리 인준 때 이 내용이 다시 문제가 됐다. 네거티브 캠페인에 대해선 법률적인 결론을 분명히 내렸어야 했다. 후회가 됐다.

 네거티브 선거는 최근 더 심해졌다. 검증의 한 방법이라며 ‘네거티브 옹호론’도 나오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검증과 네거티브 선거는 엄연히 다르다.

 1998 6 4일 나는 53.5% 득표율로 제31대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44.0%를 득표한 최병렬 후보와 33만 표 차이었다. 네거티브 선거는 혹독했지만 극복해냈다. 나는 76개월여 만에 서울시로 돌아왔다.

 

<103> 서울시 구조조정

서울시장 취임식 시간과 장소는 1998 7 1일 오후 3시 세종문화회관으로 잡혔다. 일찌감치 혜화동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마침 자리가 있어 앉았다. 옆자리에 한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인사를 나눈 뒤 물었다.

 “어디 가는 길이세요?
 “…. 저 동화은행 직원입니다. 동화은행 퇴출 반대 시위를 하러 가는 길이에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IMF 외환위기는 엄혹했다. 뼈저린 과제를 민선 서울시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직면했다.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데 관() 주도 행정 시스템도 한몫했다. 관치(官治)가 통하는 시대는 이미 갔는데 비대하기만 한 관 주도 행정 시스템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울시도 구조조정의 찬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서울시장으로 다시 돌아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시정 시스템 혁신이었다.

 취임식 바로 다음날인 7 2일 ‘서울시정개혁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필곤 서울시 행정1부시장과 권태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17명 위원의 절반가량은 민간 전문가로 위촉했다.

 시정개혁위원회는 서울시 본청 공무원 정원 18100명 가운데 약 2000명을, 산하 기관 22800명 중 4900명을 줄이는 안을 발표했다. 10~20% 인원을 감축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 방안이었다. 결원을 보충하지 않고, 명예·정년퇴직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신규 채용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감축 인원의 절반가량을 충당했다. 민간에 맡겨도 되는 부분은 시청 조직에서 떼어냈다. 일종의 민영화 또는 민간 위탁이었다. 그래도 인력 퇴출이 불가피했다. 반발이 거셌다.

 시청 본청과 산하 기관 직원들을 설득하는 데 공을 들였다. 서울지하철공사에서 구조조정안에 반대하며 파업을 했을 때는 나 역시 “물러설 수 없다”고 선언하고 맞섰다. 설득하고 또 강행하는 과정 속에 접점을 찾아나갔다.

 사실 시장 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해서 시정이 바뀌지 않는다. 시청 공무원 모두가 일하는 방식과 체계를 바꿔야 했다. 공무원을 개혁의 대상으로만 삼아선 안 된다. 개혁의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서울시 직원들이 스스로 나서 개혁에 동참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구조조정에 대해 “시정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한 시스템 혁신의 과정”이라고 직원들에게 꾸준히 강조했다. 세계적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기업은 제품이 아니라 만족을 판다”고 했다. 서울시도 고객인 시민에게 만족을 주는 게 중요했다.

 시청의 수많은 공무원이 하는 일을 시장이 혼자 감독할 수 없다. 그래서 1000만 서울시민이 직접 감독하게 했다.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시정 서비스 만족도 조사를 실시했다. 1999년 시작한 시민평가제는 광역자치단체 등 정부 단위에서 처음 시도한 일이었다. 우선 지하철·시내버스, 청소, 수돗물, 보건·의료, 민원행정 등 6개 분야를 대상으로 했다. 한국갤럽 등 전문 조사기관 6곳에 의뢰해 분야별로 각각 1400~3000명의 시민을 면접 조사했다.

 보건소의 만족도가 가장 높고, 지하철이 가장 낮게 나왔다. 서비스의 특성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분야별 점수를 매기고 단순하게 줄을 세우는 방법은 버렸다. 1년 전과 비교해 얼마나 만족도가 나아졌나 비교하도록 했다. 부서별로 경쟁하게 됐고 조금씩이지만 해마다 만족도가 나아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가 시민평가단장을 맡아 최병대 한양대 교수 등과 함께 많은 일을 해냈다.

 이후 시민평가제는 다른 지자체와 정부부처로 확산됐다. 공무원의 행정 마인드를 관청 본위에서 시민 본위로 바꾸는 데 이 제도가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104>  '오픈 시스템' 탄생

 1999 1 19. 서울시청에서 구청장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한창 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비서실 직원이 시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검찰에서 행정관리국장을 체포해 갔습니다.


 임명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김모 행정관리국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시청 사무실에서 긴급체포됐다. 2년 전 부구청장이었을 때 토지형질을 변경해 주는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 때문이라고 했다.

 머리에 날벼락이 치는 듯했다. 나는 8년여 전 수서 사건으로 부패와의 전쟁을 치렀고 결국 서울시장 직에서 물러났다. 미처 다하지 못한 숙제를 마무리해야 했다. 1998년 서울시로 돌아오며 나는 “부패와의 2차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포했다. 그 전쟁에서 야전사령관 역할을 하는 자리가 바로 행정관리국장이었다. 예전 김학재 도시계획국장을 임명할 때처럼 신중을 기했는데…. 너무 충격이 컸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언론에서 “고건 시장이 ‘복마전을 청산하겠다’고 큰소리치더니 주무국장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밥맛이 사라졌다. 울화 때문에 잠을 설치던 새벽 3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이권 관련 민원을 인터넷으로 신청 받고, 진행상황 역시 인터넷으로 실시간 공개하면 어떨까.

 다음 날인 1 25일 간부회의를 소집해 내 구상을 밝혔다. 감사담당관실 김찬곤 감사담당관, 한문철 사무관과 정보화담당관실 이계헌 사무관 등이 컴퓨터 프로그램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그렇게 4 15일 ‘민원처리 온라인 공개 시스템’이 처음으로 선보였다. 교통·건설·환경·위생 등 이권이 얽혀 있어 비리가 발생하기 쉬운 26개 분야를 선정해 우선 실시했다.

 공무원이 민원을 접수하는 시점부터 처리가 끝날 때까지 결재 단계별로 진행상황을 인터넷에 올리는 프로그램이었다. 예를 들면 건축허가를 신청한 민원인이 자신의 민원서류가 계장, 과장 또는 국장 선에 가 있는지, 앞으로 언제쯤 결재가 날 것인지, 반려가 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온라인을 통해 어디서든 볼 수 있게 했다.

 이유 없이 민원서류를 쥐고 앉아 있는 공무원이 없도록 말이다. 시청의 인맥을 동원하거나 ‘급행료’ 명목의 뇌물을 요구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민원처리 온라인 공개 시스템은 ‘오픈(OPEN·Online Procedures Enhancement for Civil Applications) 시스템’이란 이름을 얻었다. 제프리 존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 등 몇몇 외국인에게 공모해 결정한 약칭이다. 서울시가 창안한 이 시스템은 각 조직의 특성에 맞게 조금씩 변형된 뒤 정부부처와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전파됐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 김찬곤 당시 서울시 감사담당관
‘햇빛은 최고 살균제’ 믿음
국제반부패회의서도 호평

서울 송파구 김찬곤(57·사진) 부구청장은 1999년 서울시 감사담당관으로 일하며 오픈 시스템의 실무를 맡았다. “‘햇빛은 최고의 살균제’라는 루이스 브랜다이스 미 대법관의 격언을 늘 되새긴다. 그의 말처럼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부패가 자리 잡을 곳은 없다”고 김 부구청장은 강조했다.


 - 이전에 없던 제도라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시청은 물론 구청마다 사용하는 행정 서류 양식과 절차가 달랐다. 심지어 과마다 다른 경우도 많았다. 공개하지 않고 업무를 처리하는 관행에 물들어 있던 시청·구청 직원들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감사담당관으로서 권한을 좀 활용했다. 특별한 사유 없이 오픈시스템에 등록하지 않는 구청이나 과 직원들에게 ‘공개 안 하면 특별감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 성과는 어땠나.

1999 10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제9차 국제반부패회의 총회에 참가해 오픈시스템을 우수 사례로 발표해 달라고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요청해왔다. TI의 초청을 받아 고 시장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고 호평을 받았다. 감사원에서 모범 사례로 선정하기도 했고, 그해 1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공공부문 경영혁신사례로 보고됐다. 2001년 미국 타임지에 보도되기도 했다. ‘복마전’이라고 불리던 서울시로선 큰 진전이었다. 정말 보람 있었다.

 

<105> 나는 청렴했는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하지만 윗물이 맑다고 해서 아랫물이 반드시 맑은 것은 아니다. 윗물이 맑은 것은 아랫물이 맑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공직자들에게 ‘청렴하라’고 사명감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율기’에서 ‘지자이렴(智者利廉)’을 찾아냈다. ‘지혜로운 자는 청렴함을 이롭게 여긴다’는 뜻이다.

 나는 오랜 공직생활 동안 지자이렴을 수칙으로 삼아왔다. 다산은 ‘재물보다 왜 청렴함이 이롭다고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다.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고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


 난 공직생활을 하며 청렴했다기보다 이렴(利廉)했다. 서울시 공직자에게도 지자이렴을 강조했다. 그리고 신상필벌(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줌)의 원칙에 따라 인사를 했다. 부패한 공직자는 백벌백계(百罰百戒)했다. 일벌백계(一罰百戒·1명을 벌줘서 100명이 경계로 삼도록 함)가 아니다.

 과거엔 일벌백계가 관행이었다. 처벌받은 사람은 ‘아, 나만 운이 나빠서 걸렸다’는 인식을 갖는다. 처벌을 해도 큰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 100명이면 100명 모두 처벌한다는 백벌백계의 원칙을 공직사회에 정착시키려 노력했다. 부정을 저지르면 시기가 이를 수도, 늦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적발된다.

나는 민선 서울시장 때 부패를 적발하는 방법의 하나로 ‘시장이 직접 받는 부조리 신고 엽서 제도’를 활용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무관용주의(Zero Tolerance)는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도 권고하고 있는 원칙이다. TI는 매년 세계 각국의 청렴도 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내가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때인 1999년부터 서울시 역시 기관·행정 분야별로 반부패지수를 조사해 발표하고 있다. 이권 관련 민원을 제기하고 처리 과정을 경험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반부패지수를 산출했다. 지수가 안 좋게 나온 몇몇 구청에서 반대했지만 밀고 나갔다. 자정 노력을 펼치도록 반강제적으로라도 경쟁을 붙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은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청렴도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인사도 부정부패를 막는 데 중요한 요소다. 물이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한 공무원이 오랜 기간 같은 지역에서 인허가 업무를 담당하다 보면 그 공무원은 그 지역의 민원인이나 업자들과 유착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이런 부조리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데 역점을 뒀다.

1998
년 말 나는 건축·위생·세무 등 5대 부조리 취약 분야에 근무하는 25개 구청 공무원 중 4142명을 대상으로 구청 간 교류 인사를 냈다. 구청 직원 80%의 보직이 바뀌는 시정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대 규모의 인사였다. 인사를 통해 부패 커넥션을 차단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엔 망국적인 부패가 만연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 중심엔 파워 엘리트들의 부패 커넥션이 자리 잡고 있다. 로펌과 장관직, 금융감독기관과 민간 금융사, 전관예우 등의 부패 커넥션부터 차단해야 한다. 단호한 의지와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106> 서울의 물

 1998년 ‘6·4 지방선거’를 열흘 앞둔 5 23. 새정치국민회의 서울시장 후보였던 나는 임창렬 경기도지사 후보, 최기선 인천시장 후보와 같이 경기도 팔당호를 찾았다. 구명조끼를 입고 두 후보와 나란히 작은 보트에 올라탔다. 잠수부들이 건져 올린 망을 살펴보니 쓰레기가 가득했다. 호수 주변에 음식점, 숙박업소가 즐비했다. 수도권 2000만 인구의 상수원인 팔당호의 수질은 걱정스러운 수준이었다. 2급수 기준을 간신히 충족했고 그대로 뒀다가는 3급수로 추락할 판이었다.

 그날 현장에서 두 후보와 함께 ‘수도권 상수도 수질 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한강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상·하류 지역에서 함께 감시하자. 수질을 개선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공동으로 부담하자’는 내용이었다.

 한강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시민의 생명선이었다. 나는 97년 국무총리로 일할 때 ‘한강 환경 감시대’를 상설 조직으로 만들어 운용할 만큼 한강의 수질에 관심이 많았다. 지역 유지들의 외압을 막아 가며 한강 상수원에 있는 가두리 양식장을 모두 걷어 올리는 조치를 강행하기도 했다.

 한강의 수질이 더 이상 나빠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는 ‘공약 중의 공약’으로 수질을 꼽았다. 한강의 수질 개선은 서울시의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 상류와 하류 지역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정부가 그동안 한강 수질 개선 대책을 여러 차례 발표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비용 부담 등 실행 방안을 두고 상류와 하류 지방자치단체의 의견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강 상류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면 음식점, 숙박업소, 축산시설, 공장 등이 들어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 강변 땅을 소유한 사람들의 재산권 행사가 제한되기 때문에 보상이 필요하다. 하수 처리 시설을 만드는 데도 돈이 들어간다. 상류가 깨끗해지면 하류에 있는 사람들도 혜택을 보는 만큼 비용을 공동 부담하는 게 옳았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물값을 더 받겠다는 인기 없는 정책을 내걸었다.

 지자체가 함께 협력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단추였다.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바쁜 유세 일정 속에서도 경기도·인천시의 두 후보를 불러모아 팔당호 현장에서 공약을 발표한 이유였다.

 그해 7 1일 서울시장으로 취임했다. 시민에게 공약한 일을 서둘러 실천했다. 경기도·인천시·강원도·충북도 등 한강 수계 시·도와 같이 머리를 맞댔다. 9 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수도권행정협의회가 열렸다. 나는 여기서 임창렬 경기지사, 최기선 인천시장, 김진선 강원지사, 이원종 충북지사와 함께 ‘한강수계관리위원회’ 출범을 공식 선언했다.

 우리는 위원회를 통해 물 관리 대책을 함께 마련하고 수질 개선에 필요한 비용을 공동 부담하겠다고 중앙정부에 제안했다. 한강이 지나가는 5개 시·도와 환경부, 한국수자원공사 등이 참여하는 한강수계관리위원회가 99년 정식 기구로 설치됐다.

 서울·인천시민과 경기도민이 내고 있는 물이용부담금은 여기서 출발했다. 물이용부담금을 재원으로 하는 수계관리기금은 99년부터 2012년까지 4조원 넘게 쌓였고 한강의 수질을 개선하는 데 투자됐다. 물이용부담금 제도는 2002년부터 낙동강 등 다른 수계 지역으로도 확대 시행됐다.

 팔당 하류에서 상수도 수원으로 제일 깨끗한 곳은 모래·자갈층이 발달한 덕소 부근이다. 서울시는 이곳에 1 200t 용량의 강북 정수장을 건설했고 그 대신 선유도 정수장은 퇴역시켰다. 이곳은 2002 4월 ‘선유도 물의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그 앞에는 세계 최고 높이의 한강 분수대가 설치됐다.

 한강의 수질은 수계관리 이전보다 나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깨끗한 한강을 만들려면 서울 상·하류 지자체와 주민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07>  서울의 공기

청와대 정무 제2수석비서관으로 일하던 때인 1970년대 후반. 지방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하느라 헬리콥터를 자주 타고 다녔다. 서울에 다다르면 헬리콥터 차창 밖으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곤 했다. 늘 서울은 짙은 회색의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두터운 스모그에 가려 시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70~80년대 서울은 지독한 대기오염에 시달렸다. 석유·연탄을 때서 난방을 하는 주택과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아황산가스가 많이 발생했고 스모그가 생겨났다. 스모그는 원인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연탄과 석유 난방으로 인한 스모그를 ‘런던형’, 자동차 배기가스가 주 원인인 스모그를 ‘LA(로스앤젤레스)형’이라 부른다.

 서울시장으로 처음 임명된 80년대 후반. 런던형 스모그 현상이 심각했다. 그래서 서울시장으로 일하며 석유·연탄에 비해 오염 물질이 훨씬 덜 나오는 도시가스를 보급하는 데 역점을 뒀다. 98년 서울시장으로 돌아와보니 도시가스가 많이 보급되면서 아황산가스 문제는 해결이 됐다. 서울의 공기 중 아황산가스 농도가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기준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민이 체감하기에 대기오염 문제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자동차 수가 급증하면서 배기가스에 들어 있는 질소산화물(NOX), 미세먼지 등이 서울의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었다. 런던형 스모그 대신 LA형 스모그가 서울의 공기를 메우기 시작했다. 대기 오염에 대한 서울시민의 불안은 컸다. 오존주의보 발령 일수는 매년 늘어만 갔다.

 임명직 시장 때는 교통, 주택, 수해방지 시설 등 서울의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민선 시장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서울의 소프트웨어 구축에 방점을 찍었다. 모두 1000만 서울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 민선 시장 때 3대 시정 목표로 인간적인 환경도시, 한국적인 문화도시, 국제적인 허브도시로 잡은 이유가 거기 있었다.

 환경이 최우선이었다. 맑은 물, 깨끗한 공기, 푸른 숲 이 세 가지를 되찾기 위한 대단위 사업을 펼쳤다. 우선 서울의 대기 기준부터 손질했다. 환경부 기준보다 훨씬 강화된 기준을 적용해 조례를 만들었다. 자동차 배기가스 검사 항목에 질소산화물을 포함시켰다. 모두 서울시에서 처음 한 시도였다.

 전체 공기 오염원의 80%가 자동차 배기가스였다. 특히 경유를 연료로 쓰는 시내버스 한 대는 승용차 50대분의 오염물질을 뿜어냈다. 시내버스를 오염물질이 적게 배출되는 압축천연가스(CNG) 버스로 교체했다. 어려운 작업이었다. 일반 버스보다 CNG 버스가 대당 3100만원가량 비쌌다. 서울시 등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급하며 CNG 버스로 교체를 서둘렀다.

 가스 충전소를 건립하는 것도 문제였다. 충전소 부지를 물색했지만 지역 주민들은 위험하다며 반대했고 민원을 제기했다. 어렵사리 주민들을 설득해서 은평·강동 등 공영버스 차고지 등 7곳에 가스 충전소를 만들 수 있었다.

 당시 2007년까지 모든 버스를 CNG 버스로 교체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내가 시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계획대로 안 됐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노력으로 지난해 서울시의 CNG 버스 전량 교체가 마무리됐다고 한다.

 자동차 정비업소나 주유소·세탁소 등에서 발생하는 휘발성유기화합물질(VOC)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VOC 흡입장치를 설치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시에서 지원했다. 먼지 발생을 줄이기 위해 물 청소차량을 135대로 늘렸다.

 서울의 행정이 환경이 아닌 개발 위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감시하는 장치로서 녹색서울시민위원회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내가 직접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공직에서 물러나 있던 시절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맡았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생명의 나무 1000만 그루 심기’ 운동을 펼쳤다. 서울시민 한 명이 한 그루씩 나무를 심어보자는 운동이었다. 주택가와 학교·공공시설 등 주변 자투리 땅에 나무를 심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기념식수를 하는 행사도 마련했다. 그렇게 1600만 그루 나무를 서울에 새로 심었다.

 서울의 공기를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앞으로는 황사가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사를 막으려면 중국의 사막화에 대처하는 동북아 국가 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권병현 전 주중대사가 중국 현지에서 펼치고 있는 사막화 방지를 위한 나무 심기 운동이 좋은 민간협력 모델이라고 본다.

 

<108> 노숙자와 화장실

/1998년 10월 지하도에 종이박스 등을 깔고 앉거나 누워 있는 노숙자들. [중앙포토]

 

1998년 외환위기의 삭풍은 매서웠다. 멀쩡한 직장인이, 사업가가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았다. 98 8월 서울시에서 조사한 노숙자 수는 2100명이었다. 추정치에 불과했다. 3000~4000명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었다. 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노숙자는 과거 부랑인과 달랐다. 근본적으로 다른 해법이 필요했다.

 서울시의 김재종 보건복지국장과 사회복지과의 백무경 사무관에게 실무를 맡겼다. 이들과 함께 현장을 다녔다. 서울 구세군회관에 가서 보니 20명 안팎의 노숙자를 모아 ‘그룹홈’(소규모 공동 자활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20~30명 규모의 노숙자 그룹홈을 만들고 쉼터와 일터를 제공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서울시는 노숙자대책협의회를 만들었다. 이재정 성공회대 총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구세군 그룹홈에서 만난 중소기업 사장 출신의 노숙자도 위원으로 참여했다. 98 9월부터 시에서 지원하는 사회복지관 등의 시설을 활용해 그룹홈 형태의 노숙자 쉼터인 ‘희망의 집’을 100여 곳 만들었다. 쉼터에 오는 노숙자에게 우선적으로 공공근로에 참여할 기회를 줬다. 2000명 가까운 노숙자들이 쉼터와 일터를 찾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쉼터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노숙자가 적지 않았다. 98 11월 노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술·담배 금지, 출입시간 제한 등 쉼터의 통제를 받기 싫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자유가 없어 싫다’는 의미였다. 추운 겨울이 오는데 노숙자들을 그대로 길에 둘 수 없었다. 세계가 한국의 외환위기에 주목하고 있었다. 노숙자가 길에서 집단 동사(凍死)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큰일이었다. 국가 신인도가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절제된 음주, 출입 자유 등을 허용하는 ‘자유의 집’을 만들었다. 비어 있는 방림방적 옛 기숙사 건물을 활용했다. 서울의 노숙자 대책에 대한 CNN 등 국내외 언론의 반응은 좋은 편이었다.

 ‘노숙자 다시 서기’ 프로그램은 본궤도에 올랐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서울시의 열악한 화장실 수준이 고민이 됐다. 노숙자 정책에 열과 성을 다한 백무경 사무관을 서울시 환경관리실 화장실문화수준향상반장으로 임명했다.

 먼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지역에 시범 공중화장실 25개소를 만들었다. 1만 개 넘는 음식점에 화장실 소모품 비용을 지원했다. 외국인이 많이 다니는 인사동, 이태원, 명동 등 도심지의 300여 개 빌딩 화장실을 개방하는 조치도 했다. 시민과 외국인 모두 쉽게 개방 화장실을 찾을 수 있도록 800여 개 안내 표지판도 설치했다. 모두 빌딩 주인들의 협조가 있어 가능했다.

 하지만 공무원이 주도하는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화장실은 문화다.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시민운동으로 추진하는 게 중요했다. 화장실문화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화장실 새마을운동’ 비슷한 캠페인이 시작됐고 시에선 행정·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단기간에 서울의 화장실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월하는 계기가 됐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 당시 실무 백무경 전 사무관
‘자유의 집’서 한달 함께 숙식
설 차례상 차리고 같이 울어

고건 전 총리는 백무경(64·사진) 전 서울시 강서수도사업소장을 “일에 대한 온도가 남다르게 뜨거운 현장 중심의 열정파”라고 설명했다. 백 전 소장은 1990년대 후반 서울시의 노숙자·화장실 문제를 현장에서 풀어냈다.


 - 당시 노숙자 대책은.

IMF 외환위기로 노숙자가 급증했고 문제가 심각했다. 그런데 위에서 ‘싹 쓸어버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경찰 기동대를 동원해 새벽에 싹 데려다가 알코올중독자, 정신병자 등으로 분류한 뒤 수용소에 넣으라는 얘기였다. 안 될 일이었다.


 - 기억에 남는 일은.

“노숙자를 위한 ‘자유의 집’을 그때 처음 만들었고 나도 한 달 동안 거기서 먹고 잤다. 그런데 음주를 허용하다 보니 밤마다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고민한 끝에 ‘어깨’ 출신의 노숙자에게 반장 역할을 맡겨 해결했다. 1998년 겨울은 정말 추웠다. 그런데도 시설에 들어가지 않는 노숙자들이 있어 아이디어를 냈다. 지방의 온천호텔 하나를 어렵게 빌려 노숙자들이 목욕도 실컷 하고, 맛있는 것도 먹는 크리스마스 행사를 열었고 노숙자들이 몰려왔다. 설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노숙자들을 위해 자유의 집에서 공동 차례상도 마련했다. 그때 차례를 지내며 우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같이 울었다.

 

<109> 서울종합방재센터와 GIS

1990년대 초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난 후의 일로 기억한다. 1991년 준공한 일본 도쿄도 신청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듣던 대로 잘 지은 고층 건물이었다. 도쿄도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도청 안을 둘러봤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8층이었다. 층 전체가 종합방재센터였고 최신식 설비로 가득 차 있었다. 도쿄는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다. 방재 시스템이 중요했고 그에 걸맞은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너무 부러웠다.

 당시 우리나라는 법 체계상 재난·재해의 유형에 따라 책임 부서가 다 달랐다. 정보를 공유하거나 구조·복구 활동을 같이 펼치기가 너무 어려웠다. 서울시 역시 재난·재해 대응 조직이 분산돼 생기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전에도 종합방재센터를 만들자는 계획은 있었지만 부서 간 의견이 달라 실행이 잘 되지 않았다.


 1998년 나는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종합방재센터에 대한 내 구상을 하나씩 실천할 수 있었다. 먼저 소방·민방위·방재기획 세 분야를 묶어 서울소방재난본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소방재난본부가 위기를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첨단 정보통신(IT) 시스템 설비를 갖춘 종합방재센터를 만들었다. 정부 내에서 처음 한 시도였다.

 서울시 중구 예장동에 서울종합방재센터가 개설됐다.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있던 자리다. 한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공간이 서울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2002 5월 메트로폴리스 총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세계 주요 대도시 시장들이 이곳을 시찰하기도 했다.

 방재센터가 설치되기 전 서울의 땅 밑 곳곳에는 서울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지뢰’가 깔려 있었다. 1994 12 7일 서울 아현동에서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지하에 묻혀 있던 도시가스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생긴 사고였다. 서울시민 생활의 생명선(lifeline)이라 할 수 있는 상·하수도, 전기·통신선, 도시가스관 등의 총 길이는 4만㎞가 넘었다. 하지만 어느 선이 어디에 깔려 있는지 잘 알지 못했고 관리도 어려웠다. 담당 기관이 제각각이라 정보 공유도 안 됐다. 도시가스 굴착 공사를 하다가 상수도 관이 터지는 일이 빈번했다. 하수도 공사를 하다가 도시가스관이라도 건드린다면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때처럼 대형 인명사고로 번질 위험이 컸다. 사고를 예방하려면 지하 매설물에 대한 정보를 통합한 전자지도 격인 지리정보시스템(GIS·Geographic Information System)이 필요했다.

 서울시는 1998 12 GIS를 만들기 시작했다. 상수도, 하수도, 전기, 통신, 도시가스, 난방 등 6대 지하 매설물 정보를 통합 관리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로 했다. 14개 기관에 흩어져 있던 정보를 한데 모았다.

 각 기관으로부터 모은 지도만으로는 부족했다. 현장을 확인해봐야 했다. 지도엔 있지만 이미 폐쇄됐거나, 새로 만들어 지도에 없는 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때 시작한 공공근로사업을 활용했다. 공공근로 인력에게 장비를 주고 지하 탐사 요령을 가르친 뒤 현장을 확인하도록 했다. 3년 만인 2002년 서울의 GIS 지도가 완성돼 첫선을 보였다. GIS 덕분에 도로나 지하철 공사를 하다가 수도관이 파열되거나 가스관이 폭발하는 사고가 크게 줄었다.

 서울 시내에서 재해·재난·화재 사고 등이 발생하면 GIS 지도를 바탕으로 방재센터에서 그 현장을 모니터로 보면서 소방 등 방재대책을 지휘할 수 있었다. 센터 내 수해상황실에선 한강의 수위를 관측하고 90여 개 펌프장의 작동을 감시하면서 수방대책을 지휘했다. 첨단 방재시스템의 모델이 됐다.

 방재센터는 서울시의 위기관리 기능이 한데 모인 곳이다. 24시간 잠들지 않으며 불의의 재난·재해로부터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안전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110>경인운하 반대, 왜

 서울시장으로서 한·일 월드컵 준비를 하느라 한창 바빴던 2002년 초의 일이다. 서울시청에서 나는 경인운하 건설 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경인운하 건설 계획에 들어가 있는 시설인 김포터미널 때문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김포시에 속했지만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포함돼 있었다.

 서울시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시작됐다. 경인운하 건설 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한 모 연구용역회사의 임원이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설명을 듣다 보니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수상 운송은 육로 운송에 비해 운임 단가는 싸지만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데 비용이 더 든다. 나는 질문을 던졌다.

 “보고서를 보면 경인운하의 수상 운송 거리가 18㎞에 불과합니다. 운송비보다 물류 상·하차료가 더 들 텐데 그에 대한 검토는 한 겁니까. 경제적 이점이 얼마나 있는 겁니까.
 “….” 대답이 없었다.

 나는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운하 물동량은 얼마로 예상하고 있습니까.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근거가 불분명한 추정치만 나열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을 했다.
 “도대체 뭘 실어 나르겠다는 겁니까. 운하를 이용할 선박 주종은 벌크입니까, 컨테이너입니까.
 “….”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운하를 이용할 화물의 종류는 물론 수송량에 대한 분석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내 불편한 기색을 읽었는지 용역보고 내용을 설명하던 그 임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김포터미널 부지 면적을 확보하는 데만 계속 열을 올렸다.

 ‘염불보다는 젯밥 생각만 하는구나’. 속으로 혀를 찼다. 월드컵 준비로 바쁜 때에 괜한 시간 낭비만 했구나 싶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서울시는 경인운하 건설 사업 추진을 반대한다’고 결론을 냈다.

 1년이 지난 2003년 굴포천 방수로 사업과 경인운하 사업에 대한 정부 방침을 다시 정립하는 절차가 국무총리실에서 진행됐다. 이번엔 국무총리로서 경인운하 사업 계획서를 살펴보니 1년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그해 9월 내가 주재하는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경인운하 사업을 재검토하라’는 결론을 냈고 사실상 무산시켰다. 대신 상습 침수지역인 굴포천에 방수로를 설치하는 사업은 국고를 지원해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2008 12월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경인운하 건설을 추진하기로 번복해 결정했다. 회의 이름은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서 국가정책조정회의로 바뀌고, 총리와 장관 등 참석자 면면이 달랐지만 회의체의 성격은 같았다. 하지만 5년 전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냈다.

 ‘아라뱃길’로 이름을 바꾼 경인운하는 2012 5월 개통됐다. 22000억원을 투자한 대규모 사업이었다. 하지만 내가 우려했던 대로 운하 사업이라기보다는 부동산 개발 사업으로 변질됐다. 170만㎡에 달하는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을 풀어주는 특혜도 줬지만 지금 아라뱃길의 모습은 어떤가. 내가 경인운하를 반대했던 이유를 곱씹어 볼수록 아쉬움이 커질 뿐이다.

서울시장으로서 한·일 월드컵 준비를 하느라 한창 바빴던 2002년 초의 일이다. 서울시청에서 나는 경인운하 건설 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경인운하 건설 계획에 들어가 있는 시설인 김포터미널 때문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김포시에 속했지만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포함돼 있었다.

 

<111> 쓰레기 산의 천지개벽

난지도(蘭芝島). 원래는 난초와 지초, 잔디가 가득한 아름다운 섬이었다. 1978년 난지도는 서울시민이 버린 쓰레기를 묻는 장소가 됐다. 그리고 93년 매립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15년이 흐르며 거대한 쓰레기 산 2개가 만들어졌다. 악취가 대단했다.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외국인들은 쓰레기 냄새를 맡으며 서울로 들어와야 했다. 서울시민은 쓰레기와 악취, 파리가 많다며 난지도를 ‘삼다도(三多島)’라 불렀다.

 97년 김영삼정부 마지막 국무총리 때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장 부지를 난지도가 있는 마포구 상암동으로 정했다. 월드컵 경기장과 공원 건설을 민선 서울시장으로서 내가 맡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다.

 서울시는 버려졌던 쓰레기 매립장을 안정화시키는 것을 넘어서 환경생태공원으로 재탄생시키기로 방침을 정했다.

 우선 썩은 쓰레기에서 나오는 침출수가 한강과 주변 토양을 더 이상 오염시키지 못하게 해야 했다. 난지도 산 둘레 6㎞를 따라 콘크리트와 철판으로 만든 차수벽을 둘러쳤다. 60만㎡가 넘는 쓰레기 산 위에는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폴리에틸렌 차단막을 깔았다. 침출수를 정화하는 처리장도 만들었다.

 냄새의 주범인 메탄가스를 뽑아내는 것도 큰 일이었다. 메탄가스를 태워 에너지로 바꾸는 열병합발전소를 건설했다. 월드컵 경기장과 상암 신도시에서 쓸 냉난방 에너지를 여기에서 공급했다. 가파른 쓰레기 산비탈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정시키는 일도 어려운 과제였다. 완만하게 경사를 다시 잡고 깨끗한 흙을 덮었다. 풀과 나무를 그 위에 심었다.

 쓰레기더미에서 고철·종이·합성수지를 골라내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들이 난지도 주변에 살았다. 이들을 이주시키고 그 주택을 철거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난지도 매립지 안정화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 일대에서 악취가 났다. 월드컵 개막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큰일이었다. 코 감각이 유달리 발달한 전문가를 동원했다. 악취의 원인은 경기도 고양시 대파밭에서 비료로 쓰고 있는 닭똥으로 드러났다.

냄새 때문에 매립지 안정화 공사가 잘못 됐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냄새가 안 나는 유기질 비료를 시에서 공급했다. 다행히 악취가 모두 사라졌다.

 2002 5 1일 불모의 땅이었던 난지도는 ‘월드컵 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시민에게 되돌아갔다. ‘평화의 공원’ ‘난지천 공원’ ‘하늘 공원’ ‘노을 공원’ ‘난지한강 공원’ 등 저마다 특징을 갖춘 다섯 개 공원으로 꾸며졌다. 맹꽁이, 촉새, 뻐꾸기와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도 공원을 찾기 시작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 김승규 당시 서울시 환경관리실장
2
년 만에 환경 생태공원
세계 석학들 극찬에 보람

김승규(66·사진) 전 서울시 SH공사 사장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시 환경관리실장으로 일했다. 난지도 매립지를 월드컵 공원으로 바꾸는 작업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 어떻게 월드컵 공원 조성 사업을 시작했나.

2000 2월 고건 서울시장이 나를 환경관리실장으로 발탁했다. 고 시장은 한·일 월드컵을 ‘환경 월드컵’으로 치러야 한다며 월드컵 공원 조성 사업을 맡겼다. 월드컵 개막 때까지는 완성해야 하는 대역사였다.


 - 어떤 것에 초점을 맞췄나.

 “친환경적인 생태공원을 만드는데 중점을 뒀다. 매립지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를 원래 불에 태워 공중에 날려 없애버리기로 했었다. 하지만 대기오염 문제가 있었 다. 메탄가스를 열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20㎾급 풍력발전기 5개도 시범 설치했다. 2002 5 7일 ‘환경재생 국제 라운드테이블’에 참석한 매립지 분야 세계적 석학 6명이 월드컵 공원을 방문했는데 극찬 했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싹 씻겼다.


 - 대학로에 낙산공원을 만드는 일도 맡았는데.

“난지도처럼 낙산 시민아파트도 서울의 압축 성장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2000년 시민아파트 30동을 철거하고 주민을 이주시켜 조성했다. 어렵게 심은 소나무가 말라 가길래 나무의 하단에 물주머니를 달아 물이 일정하게 스며들 수 있도록 했다. 서울시 직원들의 아이디어였다.

 

<112> 서울 월드컵 경기장

2002 5 31일 한·일 월드컵 대회가 서울에서 개막했다. 경기장을 관중석에서, TV에서 지켜본 5억의 세계인들은 두 가지에 놀랐을 것이다. 우승 후보로 꼽혔던 세계 최강 프랑스팀을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세네갈이 꺾은 사실과 그 무대가 된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아름다움에 말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우리의 건축 기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방패연 모양의 반투명 지붕이 황포 돛대처럼 솟았고 그 아래 팔각 소반을 본뜬 스탠드가 자리했다. 그날 밤 나는 6만 관중의 한 명으로 함성 속에 빛나는 경기장을 지켜봤다.


 월드컵경기장의 탄생에 대한 나의 소회는 남달랐다. 5년 전 내가 국무총리였던 1997. 정부는 어려운 경제 상황을 감안해 월드컵 개최지를 특별·광역시 7곳으로 한정했다. 대회 개막 도시인 서울에만 축구 전용 경기장을 짓기로 했다. 다른 도시는 기존 경기장 시설을 보완해 활용키로 방침을 정했다.

 강덕기 서울시장 직무대리를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총리 집무실에서 만나 이런 정부의 원칙을 전했다.

 강 직무대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서울시의 재정 형편상 경기장 신축이 힘들 것 같습니다. 정부 지원 없이는 어렵습니다.

 강 직무대리가 돌아간 뒤 이영탁 총리 행정조정실장을 불렀다.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열어 재정특별대책을 수립해줬으면 합니다.

 그렇게 중앙정부 600억원, 서울시 600억원, 국민체육진흥공단 300억원,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조직위원회(KOWOC) 200억원, 대한축구협회 250억원의 분담 안이 만들어졌다. 1997 10 10일 서울시 ‘월드컵 주경기장 부지 선정위원회’는 건립 장소를 서울 마포구 상암지구로 정했다. 1998 2월 김대중정부가 들어섰고 월드컵 개최 도시는 특별·광역 7개 시에 3개가 추가돼 10개로 확정됐다.

 1998 7 1일 나는 민선 시장으로 서울시에 돌아와 월드컵 경기장 건설을 지휘하게 됐다. 공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다. ‘예정된 공기(工期)에 맞출 수 있겠느냐, 부실 시공이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였다. 일본에 비해 착공 시기가 한참이나 늦었고 건설비도 낮게 책정됐다.

 당시 서울시 월드컵주경기장건설단장을 맡았던 진철훈 전 한국시설안전공단 이사장의 설명이다.

 “예상 공기도 짧았고 예산도 빠듯했습니다. 일정을 감안해 설계와 시공을 일괄 추진하는 턴키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눈에 띄는 대형 공사는 시공능력 1위부터 순서대로 대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하면 중소기업은 양보해야 하는 관행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업 규모를 따지기 보다는 내실을 중요시 했습니다. 설계 내용을 중심으로 심사를 했고 삼성엔지니어링 등 시공능력 20위 밖의 중견·중소기업 5개사가 모인 컨소시엄이 시공사로 선정됐지요. 그때 모 대기업 건설사 사장이 수주 실패를 책임지고 교체될 정도로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총 건설비는 1733억원으로 낙찰됐다. 당초 책정한 예산보다 237억원 낮은 금액이었다. 남은 돈으로 세계 최고 높이인 202m의 월드컵 분수대와 주차장을 건설했다.

 나는 공사 기간에 50번 넘게 현장을 찾았다. 현장 곳곳을 다니다 보니 걱정이 하나 생겼다. 입찰 때 지붕막 재질은 중·하급으로 정해졌다. 한강의 황포 돛단배와 방패연을 상징하는 지붕막은 경기장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월드컵 경기장의 생명은 지붕막입니다. 최고품으로 바꿔주십시오. 밑지더라도 작품을 만들어 주십시오.” 이 회장은 나의 부탁을 들어줬다.

 월드컵 이후 경기장의 활용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경기장을 관리하려면 많은 돈이 든다. 예산을 잡아먹는 시설로 두기보다는 마포구민을 위한 커뮤니티 시설과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케팅 회사에 용역연구를 맡겼다. 경기장 스탠드 아래 5만㎡의 빈 공간을 대형 쇼핑센터·전문 식당가·스포츠센터·복합상영관 등으로 활용하기로 방향을 정하고 공사를 했다.

 우리는 단 한 건의 안전사고도 없이 정밀 시공했다. 예정된 공사 기한보다 40여 일 앞당겨 준공할 수 있었다. 경기장 스탠드 아래 만든 시설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지난 2011년 경기장의 연간 유지관리 비용 85억원을 훨씬 넘는 170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한때 쓰레기로 뒤덮였던 상암동에 피어난 꽃과 같다. 경기장과 그 주변을 둘러싼 월드컵 공원, 디지털미디어시티(DMC)는 외환위기를 극복해낸 우리의 자랑스러운 자화상이다.

 

<113> 우민, 시민으로 돌아가다

 서울시장 임기 내내 나는 한 질문에 시달렸다. “시장 선거에 다시 출마할 겁니까.” 국정감사나 시정질의 자리에서 서른 번 넘게 같은 대답을 해야 했다. 한광옥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표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불출마의 공언을 거둬들일 수가 없습니다. 지난 3년 전 당의 부름을 받아들여 시장 선거에 나섰던 것은 10여 년 전 임명직 시장 시절 구상했다가 타의로 물러나면서 다하지 못했던 일들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물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2000년과 2001년 사이의 일이다. 권노갑 민주당 최고위원과 만났다. 남산이 내다보이는 신라호텔 일식집의 별실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또 시장 ‘삼수(三修)’에 대한 얘기인가 했다. “저는 약속한 대로 다음 시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권 위원이 의외의 말을 했다. “아니 그 얘기 말구요.
 그는 대선 출마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놀랐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호남 출신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국민은 대탕평 인사를 통해 지역 감정 대립을 해소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탕평 인사를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국정원의 차장급 세 사람을 전부 호남 출신으로 인선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부터 지역 감정이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호남 출신으로 알려진 내가 대선에 뜻을 두고 움직인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권 위원과의 만남은 그렇게 일단락 났다.

얼마 후 강원용 목사가 나에게 차 한잔 하자고 연락해 왔다. 그와는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등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자주 만났던 사이였다.

 강 목사의 종로구 재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 시장이 짐을 지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 뜻을 내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건의하려고 하는데 사전에 본인한테는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만나자고 했어요.

 “김 대통령에게 그 말씀을 드리지 마십시오.” 강 목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권 위원을 만난 일을 얘기했다. 그런데 강 목사는 이튿날 DJ를 만나 나를 대선 후보로 천거했다. 강 목사의 말에 DJ는 단 한마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고 시장은 호남 출신 아닙니까.
 그리고 1년여 지난 2001년 말쯤 강 목사가 다시 나에게 만나자고 청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김 대통령에게 또 얘기하려고 합니다.

 나는 또 만류했지만 그는 DJ를 만났다. 이번엔 그는 DJ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나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시장의 임기 마지막 날인 2002 6 30. 나는 요코하마에서 열린 한·일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했다. 시장으로서 마지막 일정을 일본에서 마쳤다. 7 1일 인천공항으로 돌아올 때 나는 이미 시장이 아닌 서울시민 중 한 사람이었다. 우민(又民·고 전 총리의 호, ‘다시 또 시민’이란 뜻)으로 돌아왔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나의 서울시 파트너들
이필곤·김정국·허신행 … 자랑스런 일꾼들 만나 행복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한국 역사의 전환기 14년의 앞 2년과 뒤 4, 모두 6년을 수도 서울의 시장 책임자로 일했다. 서울시 공무원과 많은 일을 함께 해냈다. 그들은 나의 자랑스러운 파트너들이다. 지하철 안에서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다가와서 인사를 한다.

 “시장님, 저 그때 노숙자대책반에서 일했습니다.
 “아, 그렇지. 그때 정말 애 많이 썼지.

 파트너들과 이런 우연한 만남은 공인으로서의 보람이고 ‘우민(又民)’으로서 즐거움이다.

 98 7월 민선 서울시장으로 취임하며 이필곤 삼성그룹 중국본사 대표를 서울시 행정1부시장으로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다. 이 부시장은 IMF 외환위기 속에 시정 개혁의 밑그림을 그렸고 실행했다. ‘시정업무 재설계(BPR)’와 ‘전자민원처리’ 등 전자정부의 기초도 닦았다. 99 8월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으로 임명한 김정국 현대중공업 해외영업담당 사장은 지하철공사 경영 합리화, 지하철 무()파업 선언을 이끌어냈다.

 허신행 전 농림수산부 장관은 서울시 농수산물공사 사장을 맡아 가락시장을 혁신했다. 우리 정부 최초의 ‘정보화전담관(CIO·chief information officer)’으로 선임된 배경율 상명대 교수는 지하철 8개 노선 터널을 활용해 서울시 전용 초고속 광통신망(e-seoul net)을 만들었고 전자결재시스템도 정착시켰다.

 

<114> 기성 정치의 벽기성 

 # 2005 2월 어느 날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 김 전 대통령과 단둘이 자택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다음달인 3 16일 나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 초청으로 강연을 할 예정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과거 이 대학에서 연설했다. 먼저 강연한 선배에게 조언을 구해보자는 생각에 찾아갔다.

 “어, 고 총리. 지금 나이가 어떻게 돼요?
 “1938년생에 만으로 67세가 됩니다.

 대답을 듣더니 그는 가만히 뭘 계산했다. 내 나이를 따져보는 것 같았다. 17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다면 2007년 내 나이는 만 69, 18대 대선에 나선다면 2012년 만 74세가 된다. DJ는 대통령에 당선된 1997년에 만 73세였다.

 ‘대선에 나가겠다’고 말 한 번 한 적 없는데 대권 후보로서 내 지지율이 치솟기 시작한 시기였다. 나를 지지하는 모임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정중동(靜中動). 언론은 내 행보를 그렇게 표현했다. 사실 ‘정중정(靜中靜)’이었다. 다산연구소 고문직에 국제투명성기구(TI) 자문위원직만 맡았을 뿐 사회활동은 거의 안 했다. 해외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와서 두세 건 응한 게 다였다. 국내에서 강연은 일절 하지 않았다.

 2004 5 25일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나며 “1년 동안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외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공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1년이 지났고 내 잠행은 어느새 1 6개월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국민들로부터 과분한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활동도 안 하고 출마 의사도 표시를 안 했는데 지지율 1위를 달렸다. 2005년 말, 2006년 초 내가 짊어져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다. 소명의식을 느꼈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새로운 정치를 해야겠다’. 난 대선 출마를 결심했다.

 # 2006 7 2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수해로 농가 앞마당에 들이닥친 진흙을 삽으로 퍼냈다. 그러자 요란하게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울렸다. 기자가 많았다. 웃으며 다시 한번 흙을 퍼올렸다. 나를 지지하는 모임인 ‘우민회’ 회원 200여 명과 함께 수해 복구 봉사활동을 하러 평창에 갔다. 숨이 가쁘고 어지러웠지만 참았다. 그날 찍은 사진을 보고 나 자신도 놀랐다. 병색이 완연했다. 늘 보던 내 낯빛이 아니었다. 나는 폐렴을 앓고 있었다. 의사도 원인균을 모르겠다고 했다. 약물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좀처럼 낫지 않았다.

 피로감이 커지고 있었다. 아픈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성 정치의 벽은 너무 높았다. 이념과 계층, 지역 간 갈등이 심각했다.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했다. 국민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국민대통합 신당을 추진했다. 중도·실용·개혁의 새 정치에 뜻을 같이하는 양심적인 사람들과 대안 정당을 만들려고 했다.

 2006년 말 나는 정치인들에게 원탁회의를 제시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정치를 위해 원탁회의에 나와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기성 정치인과 정당의 호응은 적었다. 국회의원 선거까지 2년여 시간이 남아 있었다. 미리 정치적 입지를 결정하는 위험 부담을 현역 의원들은 지지 않으려고 했다.

 2006 11 13일 열린우리당 문희상 전 의장과 대학로 일식집 ‘석정’에서 만났다. 내 구상을 설명했다.

 “당을 재건축해야 합니다.
 “리모델링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문 전 의장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김한길·김영환·이낙연·정동영·김근태·안영근·최인기·신중식 등 전·현직 의원을 접촉해 설득했다. 역시 반응은 비슷했다. 나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115·끝> 세연정 (洗然亭)

 2007년 새해를 맞았다.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한 내 입장을 밝혀야 했다. 나는 2주일 동안 칩거하며 장고에 들어갔다. 2006 10 9일 북한은 핵 실험을 했다. 내 지지율은 하강 곡선을 그렸다. 호남인으로서 영남에서의 25% 지지 없이는 수학적으로 당선이 어려웠다. ‘보수의 잃어버린 10년’ ‘영남의 잃어버린 10년’이란 정서가 강했다. 영남에서 내 지지율은 급락했다. 나는 정치적 구심력을 상실했고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대선 출마의 뜻을 접기로 했다.

 2007 1 16일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동숭동 집에서 나오는 골목부터 지지자들이 나를 막아 섰다.


 “대선 포기는 안 됩니다. 기자회견은 절대 안 됩니다.

 그들은 소리쳤다. 실랑이 끝에 간신히 차를 탔다. 내 사무실이 있는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회견장이 있는 14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지자들과 취재진이 얽혀 있었다. 수십 명이 나를 둘러쌌다. 지지자들이 “대선 포기는 무효”라고 외쳤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김덕봉 전 국무총리 공보수석에게 기자회견문을 대신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기성 정치권의 벽이 지나치게 높아 저로서는 역부족임을 실감하고 불출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른 지하층에 주차돼 있던 차에 몸을 실었다. 기사에게 말했다.

 “남해안으로 갑시다.

 차 안에서 50여 통 전화를 했다. 미처 상의하지 못한 후원자들에게 불출마 이유를 설명했다.

 6~7시간을 달렸을까. 나는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경상남도 통영시였다. 한산도에 가려고 했지만 배 시간이 맞지 않았다. 발길을 돌려 세병관(洗兵館)을 찾았다. ‘병기와 말을 씻어 두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는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세병관을 나와 강진 고려청자 도요지 전시관으로 향했다. 사람들 눈에 안 띄려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전시관 안에 들어갔다.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전남도지사 시절 청자 도요지를 복원하는 기공식에서 삽을 들고 있는 젊은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숨기가, 잠행하기가 참 어렵구나’ 생각했다.

 다음 여정은 보길도였다. 고산 윤선도가 지은 정자 하나와 마주쳤다. 세연정(洗然亭)이었다. ‘자연으로 마음을 씻으라(然洗)는 뜻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3일을 남해안에서 보내고 상경했다. 집 근처 마로니에 공원에서 지지자 500여 명이 “돌아오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1 20일 전화가 왔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었다. 그와 대학로 중국집 ‘진아춘’에서 만났다.
 “불출마 뜻을 번의해 주십시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뜻입니다.
 DJ는 그때 처음 나를 지지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같았다.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 대안 정당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기득권을 버리고 원탁회의를 제안했지만 기성 정치권의 호응이 없었습니다.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업 정치인이었다면 ‘고맙다’고 수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었다. 국민의 지지에 부응해야겠다는 소명의식에 정치를 시작했을 뿐이다. 열린우리당, 민주당에 들어가 공천 지분권이나 즐기면서 구태 정치에 몸을 담그기는 싫었다.

 사실 낙선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성 정당의 후보로 출마해 짐을 져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당을 혁신하고 새 정치를 위한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조건이 갖춰진다면 말이다. 그 추동력은 차차기 대선 후보여야 가질 수 있었다. 5년 후인 2012년 나는 만 74세가 된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도 만 73세였다. 차차기 대선은 나에게 노욕(老慾)이었다.

 언론은 ‘새 정치를 표방한 제3후보의 정치적 좌절’ ‘권력 의지가 약한 비정당 정치인의 중도하차’라고 했다.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1 21일 늦은 밤. 추위가 매서웠다. 집 앞에 10여 명 시위대가 농성을 하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밖에서 밤을 새우게 둘 수 없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다미’라는 집 근처 작은 국숫집으로 함께 갔다. 소주와 국수로 몸을 데웠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기성 정당에 들어가 출마해도 호남인으로서 수학적으론 당선이 불가능합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반문했다.
 “DJ는 당선되지 않았습니까.

 “…. DJ 때는 이인제 후보가 있어 가능했던 겁니다.

 그들을 돌려보냈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눈을 감았다. 공인으로 보낸 40여 년도 함께 머리를 스쳐갔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운명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115회 연재 마친 고건 전 총리

정치의 꿈을 품은 젊은 대학생 시절부터 대권 앞에서 스스로 뜻을 접을 때까지. 고건(高建·75) 전 국무총리는 공인으로서의 50년 삶을 5개월 넘게 115회의 글로 풀어냈다. 본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연재를 마무리한 고 전 총리를 29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 안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국정엔 열의, 권력의지는 강하지 못해

- 대선 출마를 포기하는 과정의 얘기는 왜 서둘러 마무리했나.
“공인으로서 제일 큰 실패였고 마지막 실패였다. 나름대로 대선 출마의 뜻을 접게 된 이유만은 분명히 얘기했다고 생각한다.

- 연재를 시작할 때 ‘대통령의 꿈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제 ‘꿈은 있었지만 대통령을 향한 권력 의지가 분명히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해석해도 될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나랏일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도 뜨거웠다. 그러나 권력 쟁취에 대한 의지는 그만큼 강하지 못했다. 제 본업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전문 행정가였다. 그렇게 체질화됐다. 권력 지향적이라기보다는 권력 중립적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직업적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권력투쟁 의지를 갖지 못했다.

- 대권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얘기를 하고 싶나.
“패장이 훈수를 해선 안 되지.

 정치 문제엔 여전히 말을 아꼈다. 고 전 총리는 “권력투쟁과 정당정치에 대해선 일정한 거리를 뒀다. 그게 내가 걸어온 길”이라고 설명했다.


현 정부, 국민과 소통 노력 시작 단계

- 왜 연재의 주제를 소통으로 선택했나.
“일반론적으로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사회 갈등이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한다. 이 많은 사회 갈등을 해소하려면 소통을 통해 노력해야 한다. 정부와 국민, 여와 야, 노사 간에 서로 소통하면서 협력해야만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다. 소통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일상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 현 정부는 소통을 잘하고 있나.
“평가하기엔 이르고…. 근래에 국민대통합위원회, 문화융성위원회 등을 통해 정부가 다양한 분야에서 국민과 소통하려고 노력을 시작하는 모습이 보인다.

- 소통만큼, 혹은 소통보다 중요한 키워드를 꼽는다면.
“나는 ‘국정은 소통’이라고 했는데 다르게 표현한다면 ‘국정은 혁신’이다. 나날이 변하고 있는 행정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선 일일신(日日新·나날이 새롭게)해야 하고 혁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정부에 몸담고 있을 때 국정 시스템 혁신에 많은 정성을 쏟았다. 정책을 수립할 때도 하나의 작품을 만들 듯이 해야 한다. 어느 작품이든 작가의 이름이 붙듯이 정책을 수립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 정책 실명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는 고 전 총리지만 여전히 “행정은 어렵다”고 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보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 연재를 마무리하는 소회는 어떤가.
“행정이라는 게 해놓고 보면 보람은 있지만 그 과정은 고민하고 치열하게 정성을 쏟고…. 원래부터가 행정은 재밌는 소재가 못 된다. 내가 체험한 사례를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노력은 했다. 좌우간 재미없는 얘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독자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열정과 배려, 그것이 공무원의 영혼

- 연재 내용 중 실패담이 적어 아쉽다는 반응이 있었는데.
“저도 그 점이 아쉽다. 우리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현존하는 행정 시스템이거나 사업의 결과이거나 또는 건설된 시설이거나…. 이런 행정의 결과에 중점을 두고 소개하다 보니까 자연히 성공담 위주로 흘러갔다. 실패에서 배우지 않는 성공은 없다. 전 그렇게 생각한다. 언제 실패담을 모아 풀어놓을 기회가 있을 거다.

‘다시 공직에 나갈 생각은 있느냐’고 묻자 고 전 총리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전혀. 젊은 후배들이 잘할 수 있도록 뒤에서 응원하고 박수 치고. 그런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그럼 후배 공직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얘기들을 한다. 그렇지 않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미칠 정도로 열정을 가진 현장주의자들을 아주 좋아했고 많이 만났다. 그런 파트너들과 함께 어려운 과제를 풀어나갔다. 지금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누군가 ‘노숙자대책팀에서 일한 아무개입니다’ ‘CNG버스 처음 시작할 때 일했습니다’라고 말을 걸어온다. 물러난 공인으로서 큰 보람이다.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 Passion’과 어려운 국민을 위한 배려, Compassion. 그것이 공무원의 영혼이다.”◎

=조현숙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