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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다큐4/ 1.기무사 수사 비화 - 2.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수기( 12 ·12 사태와 5 ·18 이야기) - [1] 1963년 7·6 쿠데타 음모와 하나회 - [11] 5·18 발포명령 진실 ‘병사 사망사건’ 증언이 ..

상림은내고향 2021. 4. 17. 21:00

비하인드 다큐4/ 12 ·12 사태와 5 ·18 이야기

■2016.08.30 기무사 수사 비화 - 간첩작전·방산비리 수사관들의 증언

⊙ 북한 난수 방송으로 조직재건 노리는 듯
10년 이상 투자해야 결실을 보는 간첩사건
⊙ 군 장교의 불확실한 미래가 기밀누출의 배경
⊙ 꼬리가 길면 반드시 잡히는 간첩
⊙ 사진과 발굴 비화로 보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기무사’

459페이지 35번 …”

북한 평양방송은 7 29 0 45(한국시각 오전 1 15)부터 12분간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수학 복습 과제를 알려 드리겠다”며 ‘459페이지 35번’, 913페이지 55번’ 등 5자리 숫자를 방송했다. 처음이 아니다. 남파 공작원 지령용 난수(亂數) 방송은 보름 전인 7 15일에도 방송됐다.


평양방송의 난수방송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중단된 뒤 16년 만에 시작됐다. 난수방송은 남파간첩에게 대남지령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다. 갑작스런 난수방송의 배경을 놓고 의문이 계속되고 있다. 7월 말 만난 전직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 수사관 A씨는 최근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평생 대간첩 업무를 수행하다가 전역한 A씨는 “20년 가까이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동지들! 건투를 빕니다’라고 한마디 연락해도, 상당히 고무적이다”며 “조직을 재건하는 동시에, 우리측을 협박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간첩이 외부의 적이라면, 양파껍질처럼 끝없이 계속되는 방산비리는 내부의 적이다. 20년 넘게 방산과 관련한 수사에 집중했던 기무사 B수사관은 “사관학교 출신 엘리트 장교들이 얼마 되지 않은 향응을 받거나, 선배를 잘못 만나 추락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나 안타까웠다”며 수사 기간의 소회를 밝혔다.


기자는 올해 초부터 기무사에서 대간첩작전, 방산비리 등을 파헤쳤던 핵심 수사관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취재 과정에서 기무사 수사관들은 언론에 ‘간첩, 방산비리 수사기법’이 노출될 경우에 생길 부작용을 걱정했다. 이들을 설득해 ▲무분별한 수사기법 공개는 삼가고 ▲기무사 본연의 역할을 설명하며 ▲향후 바람직한 군 수사기관의 역할을 제시한다는 취지에 공감한 복수의 전직 수사관들이 취재에 협조했다. 이렇게 보도를 준비하던 중에 어이없는 보안사고가 발생했다.

 

국군기무사령부

 

기무사는() 내 유일의 정보수사기관으로서 1948 5월 해방 직후 군내 대공(對共) 전담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조선경비대 정보처 특별조사과로 출발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육군 특무부대(1950.10.21.), 해군 방첩대(1953.1.15.), 공군특별수사대(1955.3.15.)로 각각 창설되어 각 군을 지원해 오다가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로 통합하였고 1991년 지금의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었다.

기무사는군사보안 및 방첩군 및 군 관련 첩보수집, 처리형법상 내란·외환의 죄, 국가보안법 등 특정범죄 수사방위사업 관련 군사보안업무 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군내 신원조사전군 보안기강 확립방산업체 보안지원군사기밀 유출자 색출군내 대테러 예방 등을 중점 업무로 추진하고 있다.

최근에는본부 인원 40% 감축, 현장활동 인력 확충외부인사를 참여시킨 특별직무감찰팀 편성비리연루·자질부족 부대원 퇴출개방형 직위 확대 및 민간 전문인력 특채 등을 도입해 조직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정치권의 무분별한 폭로에 보도 결정

7 1일 국회가 고정간첩들에게 “당신들은 수사 중”이라고 알려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일 국회 정보위원회는 국군기무사령부·국가정보원·국방정보본부 등으로부터 20대 국회 첫 업무보고를 받았다. 보고 직후 여당 간사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의 폭탄발언이 나왔다.


이 의원은 “군 장병 포섭을 기도하는 간첩 용의자 4명을 수사 중으로 기무사발()이다”며 “(수사 대상은) 다 민간인”이라고 말했다. 발언 즉시 ‘기무사, 간첩 용의자 4명 수사 중’이라는 속보가 쏟아졌다. 국회가 간첩에게 숨으라고 수사사실을 알리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렇듯 수사 비밀이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정치권의 세태에 경종(警鐘)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보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간의 취재내용을 공개하게 됐다.


간첩작전은 시간과의 싸움

10년은 긴 것도 아니에요.

전직 기무사 수사관 A씨는 간첩수사는 ‘시간’과의 싸움임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이러했다.

 

— 수사기간이 10년이 넘는 경우도 있나요.
“북에서 넘어온 경우 자수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어요. 우리에게 협조하겠다는 것이죠. 그럼 북한과의 통신연락 체계를 유지하라고 해요. 북한과 우리측의 머리싸움이 시작되는 것이죠. 요즈음 법원은 엄격한 증거를 원해요. 증거확보가 어렵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입니다.


— 그냥 감시만 하나요.
“직파 간첩의 경우 언젠가는 북에서 데리러 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배를 태워 국내에 침투시키면 다시 배를 보내야 하는 것이죠. (우리측이 미리 정보를 알기 때문에) 그러다가 보낸 배가 우리 해군에 격침되는 것이죠. 북한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자신들이 보낸 간첩이 변절했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럴 경우 북에서 지켜보겠죠. 우리 역시 마찬가지예요. 지켜보는 것이죠. 20년 이상 지켜본 경우도 있어요.


10여 년 감시를 받는데, 눈치채지 못하나요.
“미행, 감시, 잠복은 수사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에요. 이를 사찰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죠. 수년 동안 공들이면서 하는 거예요. 그만큼 어렵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기무사

전직 기무사 수사관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여러 일화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관련 사진을 보관하고 있는 전직 부대원으로부터 사진을 넘겨받았다. 최초 공개되는 역사적 사실은 이러하다.

 

▲1973 1월 대통령 부대 표창을 17대 강창성 사령관이 수상했다

 

▲박정희 대통령 표창장

 

“‘선글라스벗으세요

1961 8월 당시 기무사의 전신인 방첩부대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각종 행사나 민정시찰 시 항상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다녀 권위주의적이며 위협적인 인상으로 비칠 뿐만 아니라 군사문화적인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어 국민들에게는 물론 외국인들에게까지도 거부감을 유발시킨다는 내용을 최고회의에 보고했다.

 

박 의장은 처음에는 화를 내며 묵살했으나 당시 비서실장(이동원)에게 지시해 외교 채널 등을 통해 조사한 결과 보고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방첩부대 작성자를 격려하고 이후부터는 가급적 선글라스를 착용하지 않았다

 

▲1977 8월 군수산업 보안업무를 전담하는 군수산업 보안부대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사육신 묘역 정화사업

1972 4월 당시 역시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부대는 충절의 표상으로 널리 인식되는 동작구 노량진의 사육신 묘소가 관리자 없이 방치된 채 가축 분뇨나 쓰레기로 덮여 있어 시민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을 알고,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청와대는 서울시에 지시해 1972 5월 사육신 묘역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다

 

▲1972 11월 소격아파트 준공

 

김재규와 박정희 대통령

1979 10 26일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박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정부장과 관련한 내용도 있다. 1972 11월 당시 김재규 사령관은 열악한 부대원들의 거주 환경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 직후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서울 종로구 소격동 소재 영내에 2개동 50세대 소격아파트(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자리)를 건립했다. 기무사가 2008 11월 과천시로 이전하면서 아파트는 헐렸다.


정보 유출자 색출은 기무사의 임무

A수사관은 1993 7월 당시 후지TV 서울지국장이었던 일본 외신기자 시노하라 마사토 군사기밀 유출사건을 예로 들었다. 당시 시노하라는 현역 K 해군 소령에게 접근해 ‘독도 출격 대비태세 현황’ 등 국가기밀을 빼내 주한 일본무관에게 건넸다. 사건 수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A수사관은 기무사 수사과정을 설명했다.


— 첩보는 어떻게 수집하게 되었나요.
“해외첩보를 통해 시작됐죠. 일본 군사평론지에 상당한 군사기밀이 실려 있었어요. 기고자는 시노하라였어요. 기밀 내용이 상당히 센 것이어서 광범위하게 내사를 하게 됐죠.


—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기본적으로 통신수사를 하죠. 당시는 통신비밀보호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어요. 내사기간이 2년이 넘었어요. 상대방이 외신기자여서 충분한 증거수집이 필수였죠. 미행도 하면서 누구를 만나는지를 확인해야죠. 시노하라를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군내 유출자를 찾는 것이 기무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죠.

 

— 유출자로 국방부 K소령을 지목하게 된 배경은요?
“시노하라가 국방부 정보본부에 들르곤 했어요. (K소령이) 사단배치 현황 등의 문건을 그려 줬죠. 처음에 시노하라 수사는 불구속으로 진행했어요. 그러다 일본 국방무관에게 자료를 건넨 것이 확인되어 구속했습니다. 기자윤리에도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K소령이 건넸다는 문건과 시노하라가 받았다는 문건이 일치했어요. 양쪽의 진술이 일치하면 처벌이 가능하죠.


— 일본 무관은 처벌받지 않았나요.
“사실 그 부분이 명확하지 않아요. 사건이 터지자 해당 무관을 본국에서 소환했어요. 제가 생각해도 시노하라가 자발적으로 정보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K소령 역시 일본 무관이 정보를 요구했을 것으로 추측했어요. 혐의를 입증하려면 해당 무관을 조사해야 하는데 일본으로 가 버렸으니 조사를 못한 것이죠. 처벌할 수 없으니, 수사의 실익도 없어 그 부분은 규명되지 않았죠.


— 순순히 자백하나요.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했어요. 증거가 분명했기 때문에 부인하지 못했어요. 꾸준히 설득하자 혐의를 인정했어요. 부대가 70년 넘게 수사를 해 오면서 노하우가 많이 쌓였어요.


군 장교의 불확실한 미래

▲기무사 상징 조형물.

A 수사관의 증언을 듣는 과정에서 군사기밀이 유출되는 배경에는 군 장교들의 불확실한 장래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K소령이 외신기자에게 군사정보를 제공한 이유는 시노하라가 K소령이 진급할 수 있도록 윗선에 이야기하는 등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장교는 계급정년으로 인해, 50대 이른 나이에 군에서 나와야 하는 경우가 많다. 평생 군에서 생활하다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가 군사기밀 유출의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4 6월 방위력 개선사업 군사비밀 유출사건을 수사했던 B수사관도 비슷한 진단을 내놓았다.


2014
6월 방위력 개선사업 비밀 31건이 통째로 방산업체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기무사와 검찰은 ‘전대미문의 대규모 군사기밀 누설’이라며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파방해를 무력화시키는 ‘항재밍(Anti-jamming)’ 시스템이나 유도탄 성능기준 등 방위력 개선 관련 2·3급 비밀 31건이 무더기로 유출된 사건이었다.


수사관 B씨는 “군인은 일반 공무원에 비해 퇴직이 빠르다”며 “국내 방산업체에 취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배가 정보를 요청하면 거절하기가 힘들다”며 수사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B씨는 “유출된 문건 가운데는 적의 ○○을 감시하는 ○○ 문건도 포함되어 있었다”면서 “북한이 내용을 알면 ○○을 피해 다닐 텐데 민감한 정보가 많이 유출됐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 군 정보를 유출시킨 김○○의 범행동기는 무엇인가요.
“단기사병 출신이었죠. 언변이 정말 뛰어났어요. 영어학원을 운영했었죠. 통번역을 하다가 해외 방산업체 컨설턴트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방산업체가 알고 싶어하는 내용만 간단히 정리해서 보내도 됐는데 김○○은 비밀을 통째로 번역해 보냈어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거예요. 김○○의 이메일은 007로 끝나요. 보고서 메일을 카페에서 보내는 등 자신이 제임스 본드라고 착각하는 듯했어요.

 

— 박○○ 중령이 군사비밀을 넘겨준 이유는 무엇인가요.
“언론에 방산비리가 많이 보도되는데, (장교들의 경우) 계급정년으로 힘들지 않습니까. 현역들이 많은 돈을 받은 것도 아니에요. 군인들은 연금의 반이 날아가는 등 이중처벌을 받게 돼요. 사관학교 나오고 능력도 있는데 미래가 불확실하니까 취업보장 등의 미끼에 걸려드는 경우가 많아요. 해당 사건의 경우는 여직원과 등산을 함께 하게 하는 등 향응이 크게 작용했어요.


— 성접대는 없었어요?
“‘꽃을 보냈다’는 문자가 오고갔어요. 꽃을 보낼 정도면 성접대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집중적으로 수사했어요. 나중에 확인해 보니, 휴대폰 이모티콘 꽃이었어요. 군인을 상대로 한 성접대는 없었다고 결론 났습니다. 다만 술자리에 방산업체 여직원이 야한 옷차림으로 동석했고 이러한 분위기에 순진한 현역군인들이 넘어간 것은 사실입니다.


방산업체의 이중적 태도

 — 컨설턴트는 어떤 일을 하나요.
“방산업체 입장에서는 한국군이 어떤 스펙의 무기를 원하는지를 빨리 알아야 해요. 자신들의 무기가 대상이 아니라면 로비를 해서 바꿔야 하니까요. 군 관련 정보를 계약 맺은 해외업체에 보고서 형식으로 넘기는 일을 하는 이들이 컨설턴트입니다. 컨설턴트 계약을 맺을 때 ‘군 비밀 정보를 넘기면 계약을 취소한다’는 문구가 있어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죠. 하지만 그럴 거면 왜 고용하겠어요? 컨설턴트는 여러 인맥을 동원해 군의 정보를 넘기죠.

 

— 첩보는 어떻게 입수하게 되었나요.
“처음 소문에서 시작했어요. 일란성 쌍둥이 형제가 신분증을 바꿔 가며 활동한다는 이야기였죠. 처음에는 그럴 수 있겠냐고 의심했죠. 2011년 이러한 첩보를 입수해 2년가량 내사를 진행했어요.

 
— 수사결과 발표 당시에는 2013년부터 내사를 시작했다고 되어 있는데요.
“처음 첩보를 입수한 것이 2011 8월입니다. 해외업체와 컨설팅 계약을 맺은 김○○이 형의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면서 활동했어요. 해외에 나갈 때도 형 여권을 사용했어요. 미국은 ○○을 사용해서 어려우니까, 일단 다른 나라를 거쳐서 들어갔어요. 첩보를 바탕으로 통신기록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죠.


— 쌍둥이 형제가 서로 신분을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은 세금을 피하려 했어요. 형 김○○은 ○○대사관에서 운전기사로 일했는데,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되었어요. 이러한 이유에서 서로의 신분을 바꾼 것이죠.


군사기밀 유출은 국가안보에 치명적이다. 과거 군사기밀 수사에서 기무사는 ‘군사기밀 유출’만을 수사할 수 있었고 유출과정에서의 ‘금품수수’ 혐의는 수사할 수 없었다. 2014 3월 군사기밀보호법이 개정돼, 기무사는 군사기밀 유출자뿐만 아니라 군사기밀 불법거래 및 공여자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가능해졌다.


인터넷 시대에 간첩은 없다?

기무사 전경. 인터넷 홈페이지 캡처 

 

인터넷을 통해 온갖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요즈음 같은 시대에 과연 ‘북한이 간첩을 보낼까’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30년 가까이 대간첩작전 현장에 있었던 수사관 C씨는 “정보수사기관은 1%의 의심만 있어도 대비해야 하는 것이 옳다”며 “예방을 하는 것이 기무사의 임무다”라고 말했다.


— 기무사는 군 관련 수사만 하는데, 그렇다면 군과 관련이 없는 간첩은 수사를 못하나요.
“간첩은 100% 군사기밀 탐지수집의 지령을 받아요. 기본임무죠. 정치·문화·사회 곳곳에 퍼져 있지만 유사시를 대비해 군사기밀을 모으는 것이죠. 순수 민간 간첩은 별로 없어요.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국정원, 검찰, 경찰과 공조도 많이 해요.

 

 —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나요.
1995 7월 출판사에서 일하던 김○○이 일본을 왕래하다가 재일 조총련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입당한 사건이 있었죠.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국내에 밀반입해 ‘참된 봄을 부르며’라는 이름으로 복제한 이후에 전국 서점에 뿌렸어요. 군부 침투 지령도 있었는데 현역 공군소령에게 접근했어요.
 


— 수사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당시 군내 내무반에서 김일성 회고록이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간첩사건이 드러난 것이죠.


공개되는 간첩사건은 ‘빙산의 일각’

— ‘요즈음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냐’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간첩의 임무라는 것이 상당히 포괄적이죠. 유사시 혁명적 상황을 대비해 잠복하는 경우도 있어요. 제도권에서 그냥 있는 것이죠. 물론 옛날처럼 무전기, 난수표, 권총을 가지고 잠입하는 간첩은 없죠. 그것이 증거가 되니까요.

 
— 공개된 간첩사건의 경우 북에 보냈다는 자료가 신문 등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 경우도 간첩죄가 되나요.
“북의 지령을 받고 움직인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죠. 수사관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면 별거 아닌 정보라도 북한에서 모자이크 맞추듯 조합하면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죠.

 
— 간첩을 잡으면 모두 언론 등에 공개하나요.
“언론에 공개되는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죠. 사실 보도하지 않는 것이 옳죠. 간첩을 잡으면 이를 비밀로 해야 상부선에 접근하는 다른 간첩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검거하고 20년 넘게 지켜본 경우도 있어요.


— 간첩을 잡으면 승진하거나 보상이 있나요.
“군인정신으로 하는 거예요. 경찰은 사건을 해결하면 특진하잖아요. 저희는 그런 게 없어요.


— 남북한 정보기관 이야기를 다룬 영화 〈베를린〉을 보신 적이 있나요.
(웃으며) 그런 거 안 봐요.”⊙

[ 월간조선 2016 9월호 /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수기 - 신동아

음모와 암투’

[1] 1963 7·6 쿠데타 음모와 하나회“내가 너희를 살렸는데 너희가 나를 배신해? 

● ‘정치군인 숙정’ 내걸고 8기 겨냥 거사 계획

● 손영길(박정희 전속부관)이 쿠데타 세력 救命

● 하나회, 별 달린 단검 주며 “배신자는 이 칼로 자결”

● 惡貨가 良貨 구축한 윤필용 사건…전두환 浮上 계기

● 김재춘 조언 흘려들은 정승화의 기구한 운명

 

1. 박정희, 윤필용, 손영길의 인연

6·25전쟁 중 부산에서 개교한 육군사관학교는 생도들에게 4년간 정규 대학과정 교육을 시킨 뒤 학사학위를 수여하고, 1955년 생도들을 육군 소위로 임관시켰다. 6개월간 단기 교육을 받고 임관한 육사 1~10기 출신과 구별하는 차원에서 ‘정규 육사 1기’라고 했다. 1973년 윤필용 장군 사건 이후 ‘육사 11기’라고 불렀다.

 

육사 11기는 1966년 ‘하나회’라는 친목단체를 조직했다.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이 쿠데타 음모 모함을 받고 구속되자 ‘하나회’는 군내 정치 조직으로 변질됐다. 이후 대한민국 군을 주무르면서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군에서 퇴출당했고, 1996년에는 법의 심판을 받으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육사 11기로 임관한 손영길, 정호용, 노정기 소위는 전방(강원 인제·화천) 지역 7사단에 배치됐다. 당시 7사단장은 김익렬 장군이었다. 1957, 6군단 부군단장이던 박정희 장군이 7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박정희는 예전 5사단에서 같이 근무한 윤필용 중령을 군수참모, 차규헌 중령을 인사참모, 조천성 중령을 정보참모로 포진시켰다. 셋 다 육사 8기다.


박정희 사단장이 부임할 때 손영길 중위는 7사단 3연대 9중대장으로 근무했다. 당시에는 한 해 동안 1개 중대가 탈영 내지는 월북해 탈영병 문제로 전 부대가 골치를 앓았는데, 손영길의 9중대에선 탈영병이 한 명도 없어 박정희 사단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961
년 박정희 장군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윤필용 장군은 비서실장, 손영길 대위는 전속부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그러나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은 윤필용, 손영길 장군을 쿠데타 혐의로 구속한다. 지금까지 이 사건은 군부 내에서 있을 수 없는 항명 사건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 ‘쿠데타 음모 사건’은 사건 발생 두 달도 못 돼 ‘모함’에 의한 것으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이 사건을 조사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조사·보고 부실로 보직 해임을 당했다. 42년이 지난 2015년 두 장군의 쿠데타 음모 혐의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필자는 1973 4월 진종채 신임 수경사령관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윤필용 사건은 ‘모함에 의한 사건’임을 보고한 사실이 있다. 나는 이렇듯 지금까지 세상에 ‘잘못 알려진 사건’에 대한 진실을 말하려 한다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모함 사건’은 대한민국 50년 정치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건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 충신이 역적으로 몰린 사건이다. 30여 명의 우수한 장교가 퇴출되면서 1979 10·26사건을 일으킨 김재규가 재등장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1979 12·12사건과 1980 5·18민주화운동의 원인(遠因)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여파로 전두환, 노태우 장군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2. 전두환의 전화

7사단장을 마친 박정희 장군은 1군 참모장, 관구사령관을 거쳐 1960년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손영길 대위는 7사단을 떠나 논산 신병훈련소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1960년 손 대위는 고향 울산으로 가던 길에 박정희 사령관을 찾아가 인사했는데 그 직후 군수사령부로 전입해 경비중대장을 지냈다.

 

그다음 해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정변 다음 날인 5 17, 손영길 대위는 서울에서 학군단 교관으로 근무하던 육사 동기생이자 절친한 친구 전두환 대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5·16 주체세력이 육군사관학교에 5·16 지지 시가행진을 요청했는데, 육사 교관들이 거절하는 바람에 모두 반혁명분자로 몰려 구속됐다. 그러니 손 대위가 서울에 와서 박정희 장군께 말씀드려 오해를 풀어주고, 교관들이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


손 대위는 밤 열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5 18일 아침 서울역에서 전두환 대위를 만났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상황이 바뀌었다. 육사 생도들이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했고, 구속된 교관들도 모두 풀려났다는 것이다. 손 대위는 서울에 온 김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부의장(당시 의장은 장도영 장군)을 만나 인사하고는 서울에 온 경위를 보고했다. 대화를 마친 뒤 그가 “부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박정희 장군은 “가긴 어딜 가. 여기서 근무해”라며 주저앉혔다. 손 대위는 그때부터 박정희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3. “배신자는 자결” 하나회의 탄생

손영길 대위는 박정희 부의장에게 육사 11기 동기생과 후배들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 방첩부대 등 핵심 권력기관에 근무할 수 있도록 추천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 윤필용 대령에게 추천해 전두환 대위는 민원비서, 최성택 대위는 총무비서, 노정기 대위는 경호실에 근무하게 했다. 후배(13)인 신재기 대위는 박정희에 이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 된 이주일 장군 전속부관으로 추천해 함께 근무한다.


육사 11기 중 손영길·전두환·김복동 대위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박 대통령 전속부관 손 대위가 막강한 파워를 갖고 친목 모임을 선도했다. 1964 11월 손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해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는 30대대장에 보직된 데 이어 1966년 중령으로 진급하면서 자타공인 정규 육사 출신의 상징이 됐다


손 중령은 부대대장을 선발하면서 우수한 후배를 선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11기 동기생을 중심으로 후배 기수마다 10명 정도를 포함시킨 ‘우수 장교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66
년 초 30대대장 손 중령이 전두환·김복동·노태우·정호용·권익현·박갑용·노정기·최성택·박병하(이상 11), 박희도(12), 배명국·이종구(14), 김상구(15), 김진영·허화평·허삼수(이상 17) 등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들은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하자.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정의로운 군인이 되자. 그리고 박 대통령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받들고 충성을 다하자”는 결의를 하고, 모임 명칭을 ‘하나회’로 정했다. 전두환 중령을 회장으로, 이종구 대위를 총무로 선출했다.


‘회원 간에는 의리를 지키고, 배반하는 자는 자결해야 한다. 조직은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한다’는 행동강령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이를 철저히 지키기로 다짐했다. 기수별 모범 장교 10명 정도를 선발해 가입시켰고, 선후배 간 친목과 유대를 강화하자는 결의를 한 뒤 ‘형님’ ‘동생’으로 부르기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전두환, 손영길 소령(오른쪽 끝). 손 소령은 청와대 외곽경비를 책임지는 30대대장 후임에 전두환을 추천했다(1967 8 17). 사진제공·김충립

 

하나회는 처음엔 친목 모임이었을 뿐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다. 1967년 손 중령은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공수부대에 근무하던 전두환 중령을 30대대장 후임으로 추천했다. 30대대장에 부임한 하나회 회장 전 중령은 이때부터 하나회를 비밀 사조직으로 키웠다.

 

하나회는 1972년 육사 24기까지 150명 정도가 가입한 거대 조직으로 발전했다. 1973년에는 육사 11기 장성 진급자 4명이 모두 하나회 출신이어서 최대 경사를 맞았다. 하지만 핵심 회원인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 회원 간 선의의 경쟁과 대결이 시작되면서 과연 끝까지 의리를 지킬 수 있을지 이심전심으로 걱정하게 된다.


이 점을 염려한 후배 회원들은 1973 1월 초 26사단 76연대장이던 권익현 대령의 숙소에서 손영길,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 회원의 장군 진급 축하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후배 회원들은 손잡이 끝에 별을 부착한 단검을 축하 선물로 만들어 주면서 ‘하나회 회원 간 의리를 지키지 못할 경우 이 단검으로 자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이렇게 끈끈하던 의리는 정치적 욕망에 불타는 한 사람으로 인해 축하파티 후 두 달도 안돼 물거품이 된다.
하나회가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군내 비밀 사조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처음 보고된 것은 1973 3월이다. 보고자는 윤필용·손영길 장군 쿠데타 음모 사건을 조사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다.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철저히 조사해 뿌리를 뽑고 엄벌하라”고 지시했다. 곧 영관급 장교 30여 명이 조사를 받은 후 강제전역 당했다. 보안사는 전두환 장군과 노태우, 정호용 대령도 조사하려 했으나 박종규 경호실장의 압력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4. 박정희와 하나회

▲1973 1월 하나회 후배들이 육사 11기 장성 진급을 축하하며 선물한 단검. 사진제공·김충립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이 구속되자 이들과 가깝던 장교 30여 명이 군을 떠났고, 전두환·노태우 장군과 가까운 하나회 회원만 살아남았다. 이렇게 되자 모두 전두환 장군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하나회와 박 대통령은 밀접한 관계’라는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하나회를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막강한 조직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누군가 흘린 얘기였다.  


“하나회는 박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필요해 만들었다. 1963년 조직 당시 윤필용 방첩대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인받았다.   


“박 대통령이 육사 출신 중 경상도 출신 위주로 조직하라고 했다. 


“박 대통령이 하나회 출신 장성들에게 ‘일심(一心)’이라고 새겨진 장검(長劍)을 하사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전 장군의 권위를 세우고 박 대통령의 절대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의도였으나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의 권위와 명예를 훼손했다. 더 나아가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은 한통속’이라는 인식을 갖게 함으로써 현 박근혜 정부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동서화합과 국민대화합을 저해한다.
 


하나회 결성 시기가 1963년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모임에 참석했다는 육사 17기 김진영, 허화평, 허삼수 등은 당시 임관한 지 2년밖에 안 된 소위였다. 1963 7·6쿠데타 음모 사건이 드러났을 때도 하나회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방첩부대장 윤필용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는 얘기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윤 장군은 1965년에 방첩부대장이 됐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전속부관이던 손영길 장군은 “대통령에게 보고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한다.  


박 대통령이 경상도 출신을 중심으로 조직하라고 지시했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하나회를 조직할 당시 육사 11기 노정기, 15기 고명승, 16기 장세동 등 호남 출신이 회원으로 가입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하나회 출신 장성들에게 ‘一心’을 각인한 장식용 장검을 하사한 일도 없다

 

5. 1963년 쿠데타 음모 사건

1963년은 5·16혁명 주체세력이 대혼란을 겪는 시기였다. 1963 2월 민주공화당이 창당되고 민정 이양을 준비하면서 군부로 되돌아갈 것인지, 민정에 참여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혁명 주체세력 내 함경도 출신(정일권, 임동하, 박임항 등)과 평안도 출신(장도영), 경상도 출신(박정희)의 갈등이 표출된 해였다. 1963 7 3일 평안도 출신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 음모 혐의로 구속되고, 11월에는 함경도 출신 김동하, 박창암이 역시 쿠데타 혐의로 구속되면서 경상도 출신 박정희 장군이 대세를 잡았다.


1963
년 초 육사 5기 김재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이 되면서 김종필을 위시한 육사 8기와 극심하게 대립할 때 육사 11기들이 김재춘 장군과 한 편이 돼 육사 8기들을 제거하려 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노태우 대위는 김재춘 중정부장의 전속부관으로, 전두환 소령은 인사과장으로 근무했다. 김재춘 부장은 부임하자마자 중정에 근무하던 육사 8기생들을 몰아내고, 육사 11기 출신을 영입하는 등 분위기를 일신하면서 조직을 강화했다.


1963
3월경, 노태우 대위가 주동이 돼 전두환 소령과 육사 11기 출신 7~8명이 최성택 소령 집에 모였다. 이들은 당시 공화당 창당을 위해 ‘4대 의혹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지목된 김종필 등 육사 8기생 40여 명을 제거하려는 쿠데타를 모의했다. 4대 의혹사건이란 1961 9 13일 서울 광장동 부지 18만 평을 확보한 후 1962 12 26일 워커힐호텔을 건축하면서 건축비를 횡령해 창당자금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 1961 11월 일본 닛산자동차를 들여와 고가로 판 새나라자동차 사건, 1962 5월 증권파동 사건, 1962년 회전당구대 100대를 일본에서 수입해 33곳에 설치 운용하면서 거액을 만든 사건을 말한다.


11
기들의 쿠데타 명분은 ‘정치군인 숙정’이었다. 김종필 등 육사 8기들이 중정을 창설하고 군으로 복귀하지 않은 채 장기 집권을 위해 부당한 방법으로 정치자금을 만들었으니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 이들은 전방에 근무하던 후배 장교들에게도 가담을 종용했다.


이들은 1963 7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쿠데타를 모의하던 중 방첩부대 요원에게 음모가 발각됐다. 이들은 방첩부대장 정승화 준장의 지시로 체포돼 구속 조사를 받았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은 박종규 경호실장의 보고로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제주도 출장을 마치고 여의도공항에서 청와대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대통령 옆자리에 앉은 박 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청와대에 안 계시는 동안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육사 11기 출신 일부 영관, 위관 장교들이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 방첩부대에 적발돼 방첩부대장이 구속해 조사했습니다. 청와대에 도착하시면 보고하려고 방첩부대장이 대기 중입니다.


박 대통령이 “어떤 장교들이야?” 하고 묻자 박 실장은 “정규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인데 전두환 소령, 정호용 대위 등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앞자리에 있던 대통령 전속부관 손영길 소령이 “각하, 이 사건은 음모입니다. 정규 육사 출신 11기들이 이제 겨우 대위, 소령입니다. 무슨 힘이 있다고 쿠데타를 모의했겠습니까. 전두환 소령은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에 근무한 장교입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손 소령이 이렇게 말하자 박 실장도 더 이상 보고하지 않았다. 손 소령은 나아가 “잘해보려다 오해를 받고 조사를 받게 됐으니 각하께서 이들을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간청했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도착하니 정승화 방첩부대장이 국방부 장관, 참모총장 배석 하에 쿠데타 음모 사건을 보고하려고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보고를 받기도 전에 “정규 육사 출신으로, 계급도 낮은 장교들이 무슨 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겠나. 이들을 잘 교육시키고 타일러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훈방하라”고 지시했다.


사건은 종결됐다. 그때 군 생활을 마감하고 처벌받았어야 할 전두환 소령, 노태우 대위 등은 동기생인 손영길 소령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쿠데타로 조사받은 기록은 기무사 존안기록에 분명 존재한다.   

 

6. 전두환, 노태우를 살려준 후환

이 이야기는 53년 전인 1963년에 ‘쿠데타 음모’라는 범죄행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숨은 이야기다. 이 사건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소령이 30대대장, 1공수여단장, 1사단장을 거친 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한 후 1980년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됐고, 다른 한 사람인 노태우 대위는 1988년 제6공화국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처음 이 사건이 거론된 것은 1973년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975년에 출감한 손영길 전 장군이 자신의 집을 위로차 방문한 전두환, 노태우 장군에게 언급하면서다. 이 자리에서 손 전 장군이 “내가 쿠데타 음모를 한 사실이 있냐. 너희들은 1963년에 실제로 쿠데타 음모를 하지 않았냐. 너희들이 방첩대에 구속돼 조사받을 때 내가 대통령에게 간청해 살려내지 않았냐. 그러니 너희들도 내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지 않았다고 얘기해줬어야 하지 않냐”고 다그치자 두 사람은 아무 말 못하고 듣기만 했다. 손 전 장군은 “의리를 배반할 경우 자결하기로 맹세한 사이가 아니냐. 너희는 나에 대한 의리를 지켰어야 했다”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이 사건의 일부가 두 번째로 거론된 것은 2014년이다. 중정부장을 지낸 김재춘 장군이 2014년 세상을 떠나자 이 사건을 아는 육사 11기 중 한 명이 블로그에 추모글과 몇 장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내용은 이렇다.


1979 10·26이 발생한 후 김재춘 장군은 친구인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만나 1963 7·6 쿠데타 음모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여러 번 만남을 시도했으나 정 장군이 바쁘다며 시간을 내주지 않아 12·12 직전에야 만나게 됐다고 한다. 이때 김 장군은 정 참모총장에게 ‘7·6 쿠데타 사건을 조사한 후 이 사건을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를 처리하지 못하고 살려준 것은 잘못한 일이다. 지금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으니 조심하라’고 조언했으나, 정 총장은 ‘이번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걱정말라’고 자신 있게 답했다고 한다.


정승화 장군은 결국 신군부에 의해 체포당했다. 결론적으로 1963 7·6 쿠데타 음모 사건은 전두환 소령과 노태우 대위 등의 정치적 욕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71 7대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대화하는 김종필, 박종규, 박정희(왼쪽부터). 동아일보

 

7. 하나회, 윤필용 사건 후 전두환 사조직으로

1973 3월 윤필용, 손영길이 구속되고, 이 사건을 조사하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쿠데타 음모 배경에 하나회라는 조직이 있다는 것을 거론하려 했다. 이때가 하나회라는 조직을 인정하고 처음 공개한 시점이다. 강 사령관은 하나회 회장인 전두환 장군을 조사하려 했다. 그러나 박종규 경호실장과 전두환 장군의 반발로 중단된다.


하나회는 손영길 장군이 구속된 1973년 이후 정치 지향 군인들에 의해 사조직으로 변질됐다. 1979년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이 되고 난 뒤 더욱 세()를 확장해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의 핵심 세력이 됐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91 9월과 10, 나는 신동아에 ‘하나회 파워게임’을 연재하면서 하나회라는 조직이 군내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수도경비사령관 노태우 장군의 비위 사실을 적발한 적도 있다. 노 사령관이 9공수 여단에서 같이 근무한 특전사 영관급 장교 조모 중령 등에게 현금봉투를 돌리는 것을 적발하고 보안사령부에 보고해 돈 봉투를 즉각 회수하도록 조치한 사건이다. 이때부터 하나회 조직은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냈고, 일반 장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하나회 회원이 아니면 우수한 장교라 할지라도 진급·보직에서 제외됐다. 하나회는 불평불만과 갈등의 요인이 돼 군의 단결과 사기를 떨어뜨렸다


신동아 연재 이후 하나회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악화됐고 YS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이 조직을 와해시켰다. 당시 나는 육군참모총장 김진영 대장을 위시해 하나회 회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쉬운 기무사령관·수도경비사령관·특전사령관 등 중요한 3개 대전복부대장을 장악한 사실에 경악했다. YS가 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처리한 게 아닌가 했다. 이들이 반기를 들지 않았기 망정이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YS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하나회를 제거함으로써 군부가 다시는 정권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  김재규의 ‘윤필용 감청작전’

● 金 “선배 대접하라” vs 尹 “경력도 하찮은 게…”

● 통신보안 위장해 통화 녹음…참모에 발각

● 보안부대 20여 명 수경사 진격 준비…일촉즉발

● 金, 쫓겨난 뒤 원한 쌓여…10·26으로 폭발

▲1976년 김재규 당시 건설부 장관(왼쪽)이 건설공사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있다. 동아일보

 

창군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육군 내부에는 출신 지역에 따른 파벌이 있었다. 이북 출신이 다수를 점했다. 정일권 장군이 주도하는 함경도 출신과 장도영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 출신이 군을 양분했고,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출신과 그 밖에 호남 출신 등은 약세였다. 그러나 1963년부터 이북 출신 세력이 줄어들면서 힘의 공백 상태가 생긴다.


1961
5·16군사정변엔 군내 3대 파벌이 다 같이 동참했으나 경상도 출신과 평안도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1963년 들어 윤필용 장군 등 일부 현역은 군으로 복귀했지만, 많은 현역이 군복을 벗고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런데 제3공화국 정권 창출 과정에서 파벌 간 갈등이 표출되고,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 혁명 주체세력들의 새로운 쿠데타 음모가 적발되면서 이북 출신 고급 장교들이 대거 축출됐다. 1963 3 11일 김동하, 박임항 등 함경도 출신들이 주도한 쿠데타와 같은 해 7 3일 장도영 등 평안도 출신이 주축이 된 쿠데타 모의가 적발된 것이다.


이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는 경상도 출신과 호남 출신 인사들이 주도권을 장악해 군내 파벌이 종식되고 정국이 안정됐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정국이 다소 불안정했으나,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된 후 수년간 정국은 안정됐다. 박정희는 호남 출신 장군을 많이 등용했고, 호남지역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1. 요동치는 권력구조

1965년 한일수교 이후 1968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은 견고했고, 청와대 주변 권력자들 중 그로부터 가장 확고한 신임을 받은 사람은 방첩부대장 윤필용(1927~2010) 장군이었다. 육사 8기로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이던 그는 1963년 민정이양 때 군으로 복귀해 서울지구 506보안부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1965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동시에 방첩부대장으로 보직돼 1968년까지 막강한 파워를 행사했다.


그런데 1968 1 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간첩 일당이 청와대 습격을 기도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박 대통령의 지지 기반에 변동이 생기기 시작한다. 1·21사태 이후 윤필용 장군이 김신조 일당을 데리고 TV 방송에 출연한 것을 본 박 대통령은 윤 방첩대장을 해임하고 후임에 김재규(1926~1980) 6군단장을 앉혔다. 결국 1·21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윤필용, 가장 큰 수혜자는 김재규였다


1963
년 윤필용 비서실장이 군으로 복귀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이던 이후락(1924~2009) 1969년까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경호실장은 박종규(1930~1985)가 맡았다. 중앙정보부장에는 1963년 김재춘 장군이 물러나고 혁명 동지인 육사 8기 출신 김형욱 부장이 1969년까지 근무했고, 1970년 이후락, 1976년엔 김재규가 보직돼 박 대통령을 보필했다(표 참조). 


이들 중 윤필용과 이후락은 최고회의 당시 비서실장 전·후임자이면서도 서로 불편한 관계였다. 최고회의 전·후임 공보실장인 이후락과 신범식의 관계가 나빴던 것과 비슷하다. 박종규와 이후락도 평소 경쟁관계였는데, 박 실장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원했기에 두 사람은 좋은 사이가 될 수 없었다

 

‘보안사령부’ 격상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윤필용과 사이가 안 좋던 이후락 비서실장을 일본 대사로 좌천시키고, 그 후임에 김정렴 씨를 임명해 1978년까지 장기 근속시켰다. 박종규 경호실장, 김형욱 중정부장,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을 보필하며 3선 개헌을 했다. 1971년 ‘윤필용 장군 감청사건’ 이후 김재규 보안사령관 후임으로 강창성 장군이 보직됐고, 1973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사건’으로 진종채 장군이 수도경비사령관이 됐다가 1975년 보안사령관에 보직됐다. 1979년에는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이 됐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 제거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로 물러나고 차지철이 후임 경호실장이 됐다. 1973년 윤 장군 사건에 연루된 이후락 부장은 그해 말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물러나고, 신직수 부장에 이어 1976년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재규는 1979 10·26 사태로 이듬해 형장의 이슬이 됐다. 1980년에는 전두환이 중정부장을 겸하게 된다.


1968
년 윤필용의 후임으로 방첩부대장에 부임한 김재규는 부대 명칭을 ‘육군보안사령부’로 고치고, 부대장을 군단급 중장이 지휘하는 부대로 격상시켜 취임 3년 후인 1971년에는 윤필용보다 더 막강한 파워를 갖게 된다. 김재규는 경북 선산 출신으로 박 대통령과 동향이고, 1946년에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박 대통령과 동기이지만, 나이는 아홉 살 어렸다. 자존심과 명예욕, 정치적 욕망이 강했는데, 군내 최고 권력기관인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자 안하무인이 되어 강력한 파워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방첩부대장직을 떠난 윤필용 장군은 20사단장과 주월 맹호사단장을 마치고 1970년 귀국해 수경사령관에 보직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측근으로 돌아왔다. 1971년에는 1963년부터 중정부장을 한 김형욱이 해임되고 후임에 주일대사 이후락이 임명된다. 따라서 1971년엔 김정렴 비서실장, 박종규 경호실장, 이후락 중정부장, 김재규 보안사령관,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하는 시대가 열렸다

 

2. ‘필동사령관’을 견제하라

김재규 보안사령관은 경북대 농대 중등교원 양성과정을 수료한 경력을 과대 포장했다. 그는 경북대 사범대 전신인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박정희 대통령의 ‘학교 후배’라고 하면서 의욕을 보였다. 김재규는 윤필용 장군이 귀국하자 잔뜩 경계하면서 그가 어떤 보직을 받게 될 것인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게 된 연유는 어떻게 보면 단순했다. 김재규가 윤필용보다 한 살 많지만 둘은 친구 사이였다. 육사 기수로 따지면 김재규는 2, 윤필용은 8기라 김재규는 “군대 선배이고 계급도 중장으로 한 계급 높으니 나를 따르라”는 식이었고, 윤필용은 “그간 쌓은 경력과 품격이 김재규와는 비교가 안 된다”는 자부심으로 김재규를 무시하는 편이었다. ‘선배 대접’을 제대로 안 한 것이다. 두 장군 사이가 나빠지자 김재규와 윤필용을 따르는 장교들 간에도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당시 김재규 보안사령관과 함께 근무한 장교들의 면면은 이렇다. 육사 11기 김복동 대령이 비서실장으로 근무했고, 최성택 대령이 감사실장, 하나회 회원이던 육사 18기 김재창 대위와 박흥주 대위가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보안사령부 장교들 사이에는 “윤필용이 월남에서 3선 개헌을 반대해 조기 귀국했고 이로 인해 박 대통령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곧 군복을 벗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반면 윤필용 측근 장교들은 “윤 장군은 박 대통령이 7사단 근무 당시 군수 참모와 최고회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군으로 복귀한 후 방첩부대장과 주월 맹호사단장을 성공적으로 마쳤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신임은 변함없다”고 주장했다. 3선 개헌을 반대한 사실이 없으므로 차후 요직으로 갈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런데 윤필용이 대통령을 경호하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수경사령관에 보직되자 청와대 김시진 민정수석을 포함한 비서들의 수경사 방문이 이어졌다. 지방에 근무하는 장성들도 서울에 오면 윤 사령관에게 인사를 하러 갔고, 윤필용보다 상위직에 있는 육군 주요 인사들도 서울 필동 소재 수경사를 찾았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청와대 방문 전후에 윤필용에게 간다는 보고를 받은 김재규가 이를 예의주시하는 것은 당연했다.


군인뿐만 아니라 일부 민간인들도 수경사를 방문하자 ‘지원금을 주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졌고, 김재규는 윤필용에 대한 24시간 시간별 동향보고를 하도록 지시했다. 여기까지는 보안사령관 고유 권한에 속했다. 문제가 발견되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였다. 따라서 필자를 포함한 보안반에서는 자연스럽게 시간별 동향보고를 하고 있었다.   

 

파워게임 시작되다

흥미로운 점은 윤필용이 수경사령관에 부임한 후, 전국에 흩어져 근무하던 윤필용 계열의 우수 장교들이 대거 수경사로 전입된 사실이다. 당시 육군본부는 대통령 경호업무를 맡은 수경사에 일종의 특혜를 주고 있었는데, 수경사로 장교 전입 요청을 하면 우선적으로 차출해 발령을 내줬다. 따라서 수경사로 전입한 우수 장병들은 목숨을 걸고 대통령을 경비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됐고 윤필용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 부대 사기가 충천했다.

수경사 일부 장교들은 “수경사가 대통령 신변을 지키는 부대이고 충성심도 더 강한데, 보안부대가 감시를 하고 동향보고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보안사에 대해 비협조적이고 배타적으로 나왔다. 특히 서울 경복궁 소재 수경사 30대대의 경우 ‘경호임무 수행 중’이라는 이유로 보안반의 부대 출입을 막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안사에서는 수경사가 보안부대원 출입을 못마땅해할수록 예의관찰하며 강력히 대응하라고 지시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1971 6월 김재규-윤필용 간 본격적인 파워게임이 시작된다.  

 

3. 감청사건과 김재규 좌천

▲1973년 ‘윤필용 사건’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수사를 맡긴 데서도 비정한 권력의 속성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수경사령관과 보안사령관에 기용되기 전 사단장 시절 육사 8기 장성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차규헌 육본장교보직처장, 강창성 5사단장, 윤필용 20사단장, 이범준 15사단장. 동아일보

 

원래 수도권 대전복 부대(쿠데타를 일으킬 우려가 있는 부대) 지휘관은 일일 동향보고를 하게 돼 있지만, 24시간 시간별 동향보고는 특별하게 동향을 감시할 필요가 있을 때 실시했다. 통신 감청은 특정인에 대해 범죄혐의가 적발됐을 경우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김재규 보안사령관은 대통령을 경호하는 윤필용 수경사령관에 대해 시간별 동향보고를 지시했다. 며칠 뒤 515통신보안부대 감청요원 2명을 투입해 윤필용의 전화를 감청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런 지시는 윤필용을 군에서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절대 보안이 유지돼야 하고, 실패할 경우 많은 문제가 뒤따르기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필자가 가장 걱정한 것은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았는지 여부였다. 대통령을 경호하는 수경사령관에 대한 감청을 할 경우 사전에 대통령의 허락을 받는 게 당연하다. 수경사의 경우 비밀리에 감청할 수 없는 여건이라 탄로날 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될 것이기 때문에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필자는 사령부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에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정봉화 소령과 참모장 강성탑 준장(육사 8, 손영길 대령 전임), 그리고 통신참모에게 “보안사에서 전군을 대상으로 통신보안 점검을 실시하게 돼 수경사령부에서도 당분간 보안점검을 실시하게 될 것”이라며 “이는 보안부대에서 통상적으로 하는 보안업무”라고 통보했다. 이에 대해 모두들 ‘불쾌하다’며 반대 의견을 표하면서도 “알았다”고 했다.


필자는 통신보안부대 감청요원에게 사령부 건물 교환대 뒷벽에 붙어 있는 단자판에서 통신보안 점검활동을 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지하 맨홀에 들어가 윤필용 장군의 전화선을 찾았다. 통화를 하면 자동으로 녹음되게 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 감청요원으로부터 “최선을 다했지만 맨홀에 설치된 수백 개의 전화선 뭉치에서 윤 장군의 전화선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필자는 감청요원에게 “종전처럼 통신실 단자판에서 윤 장군 전화를 감청하되, 수경사 요원들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한 뒤 수경사 통신참모에게는 “일반적인 통신보안 점검이니 모른 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날부터 열흘 정도 윤 장군 전화에 녹음기를 연결하고, 통화 내용을 24시간 녹음한 후 녹취록을 보안사령부에 보고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반 부대에서는 이렇게 감청하지만, 윤 장군을 감청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라서 당장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러던 중 한 감청요원이 수경사 통신참모가 단자판실에 자주 들어와 본다고 전했다. 결국 통신참모가 윤 장군에게 “보안사령부에서 사령관의 전화를 감청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나회 장교 다수를 직계 부하로 거느린 '군부 강자' 윤필용 수경사령관(왼쪽)에게 처음 견제를 시도한 장성이 김재규 보안사령관이다. 동아일보

 

여관으로 사무실 옮겨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니 통신감청요원 2명이 수경사 제5헌병대대 구치소에 구속됐고, 녹음장비와 그간 윤 장군의 전화를 감청한 테이프가 증거물로 압수당했다. 필자가 제5헌병대대장 지성환 중령을 찾아가 “근무 중인 보안부대원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불법이니 구속한 병사와 장비를 즉각 돌려달라. 보안사령부의 기본 업무를 방해하면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 두 명의 병사와 장비를 돌려주면 감청업무를 중단하겠다”고 했더니 그는 “현행범을 구속한 것이니 법적으로 하자가 없고 이는 윤필용 사령관의 지시”라고 했다. 그는 필자에게 “당신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완강하게 나왔다.    


잠시 후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정봉화 소령이 “사령관 지시로 수경사령부에 파견된 보안반 사무실을 폐쇄하니 보안부대원 전원은 수경사령부에서 철수해달라”고 요청했다. 필자는 직속상관인 중구팀장 김형노 소령에게 이를 보고했다. 김 소령으로부터 “사태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정봉화 소령은 “절충안을 찾아보자. 이런 사태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는 말자”며 대안을 내놓았다.


보안반을 잠시 수경사령부 앞 ‘경화장 여관’으로 옮기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궁여지책이긴 하지만, 수경사령부에서 볼 때는 보안부대가 수경사령부에서 철수한 것이고, 보안사령부에서 볼 때는 부대원이 수경사령부에 계속 출입은 하니 철수한 것은 아닌 상황을 만든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전 반원이 이 조치를 따랐다.


다음 날 우리는 보안반 사무실을 경화장으로 옮기고, 전과 같이 부대 출입을 하면서 근무했다. 하지만 보안반을 여관으로 옮긴 것을 본부에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는데도 김재규와 윤필용의 관계는 더 악화되고, 청와대 분위기는 윤 장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정봉화 비서실장이 수경사령관에게 보안반 원대복귀를 건의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5헌병대대에 구속된 두 병사를 석방시키려는 노력은 허사였다. 짧은 기일 안에 수경사령관이 다시 보안반을 영내로 들어오게 할 리 없다는 판단이 서자 김형노 소령은 “우리는 파국을 막고 사태가 호전될 것을 예상하고 경화장 여관으로 잠시 옮겨왔으나 상황이 오래갈 것 같으니 본부에 보고하고 철수하자”고 했다  

 

고래 싸움의 끝

경화장에서 철수하고 서울 소공동 소재 506보안부대 본부로 들어갔다. 부대장 조현수 대령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우리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해줬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지하 감방에 감금됐고, 보안사령부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보안사령부 징계위원회는 김형노 소령에 대해 지휘책임을 물어 파면을 결정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김 소령은 억울하게 처벌을 받았다


필자에게는 ‘불문’ 결정을 내리고,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보안반 전원을 데리고 다시 수경사 영내로 쳐들어가라는 것, 그리고 육군본부 검찰부에 가서 윤필용 수경사령관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하라는 것이었다.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필자는 506보안부대 소속 병사 20여 명에게 전투복에 총기를 지급하고 군용 트럭에 탑승시킨 후 소공동 조선호텔 앞에서 필동 소재 수경사령부로 진격 출동 준비를 했다. 명령에 따라 무작정 수경사로 돌진하겠다는 각오였다.


우리가 쳐들어간다고 수경사에서 우리를 받아줄 리 없는데 이렇게 하면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어 난감했다. 그때 조현수 부대장이 “부대원 모두를 하차시키고 보안사에 가서 보안처장 김학호 대령의 지시를 받으라”고 했다.  


보안사 보안처장 김학호 대령은 필자에게 “육본 검찰부에 가서 윤필용 장군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고, 고소인 조서까지 작성하고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필자는 바로 삼각지 소재 육군본부 검찰부에 가서 윤 장군을 고소하고 고소인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육군 중위가 육군 소장을 고소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고소인 진술서를 작성하는 데 3시간 정도가 흘렀다. 그때 육군본부 검찰관들이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3군단장으로 발령났으니 조사를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령부 보안처장의 지시를 받아 고소를 취하한 후 506보안부대로 돌아왔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에서 물러나자 윤필용은 폐쇄한 수경사 보안반 사무실을 원위치시키라고 지시했고, 필자와 보안부대원들은 다시 수경사에 들어가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팀장 김형노 소령은 보안사령부 징계위원회에서 파면 처분을 받고 군을 떠났다. 두 장군의 고래 싸움에 훌륭한 영관 장교 한 명이 희생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행히 후일에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소 위로가 됐다.


결론적으로 윤필용 감청사건은 윤필용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 핵심 간 시기·질투와 세력 다툼일 뿐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무모한 사건이었다. 사건은 김재규 보안사령관의 3군단장 좌천으로 종결됐지만 김재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내부 관계자들은 김재규가 ‘윤필용 장군과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원한을 품고 떠났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누구도 이를 챙기고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하긴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후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에 앉힐 줄을. 그리고 그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박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할 줄을.  


김재규 보안사령관 후임으로는 육사 8기 중 선두주자로 명석하다고 소문난 강창성 장군이 부임했다. 강 장군은 경기도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에 오래 근무했고, 우수한 장군으로 인정받던 실력자였다. 그가 청와대 주변 권력기관장으로 부각되자, 표면적으로는 보안사령부와 수경사령부 관계가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윤필용에게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난 셈이었다. 또 다른 파워게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불거진 것이다.

 

▲1969 7월 윤필용 장군이 주월 맹호사단장으로 있을 때 3대대장이던 노태우 중령(가운데)과 박희도 중령(오른쪽). 동아일보

 

4. 강창성의 등장과 10월 유신

▲10·26사건 현장검증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동아일보

 

중앙정보부 출신 육사 8기 강창성 소장이 보안사령관에 보직되자 보안사 내 김재규 장군 계열 장교들은 축출됐다. 대신 이북 출신의 일반 장교들을 대거 영입해 주요 보직에 앉혔다. 1961 5·16 당시 군은 물론 혁명 주체세력의 대부분이 이북 출신이었지만, 1963년 두 번의 쿠데타 음모 사건으로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이 제거되자 영남과 호남 출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때 이북 출신의 대부는 황해도 출신 육사 8기 김형욱 중정부장이었지만 경기도 출신 강창성 장군도 세가 만만치 않았다.


이후 보안사에는 강창성 장군 계열의 이북 출신 장교들이 대거 영입돼 주류를 이뤘다. 그중 주요 인사는 참모장인 이북 출신의 육사 9기 김귀수 장군과 보안처장 김종진 대령이었다. 수경사 보안반장에는 참모장과 가까운 갑종 출신 안수덕 소령이 보직된다.


강창성 사령관은 1972 3월부터 10월유신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막강한 영향력과 세력을 구축했다. 당시 필자는 수경사 보안반에서 차출돼 506서울지역 보안부대 정보계장이면서 계엄사령부 일을 함께 맡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10월 유신을 주도하는 강창성 보안사령관과 서울지구계엄사령관이 된 윤필용 장군 사이에 또 다른 파워게임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일 업무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누구에게 먼저 보고하느냐’ 하는 문제로 민감해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특별 정치인들에 대한 정보 보고 우선순위를 놓고 민감했기에 우리는 신경을 써서 동시에 보고했다. 과연 윤필용과 강창성 중 누가 더 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느냐가 관심거리였는데, 당시 보안사령부에는 강창성 사령관이 윤필용 장군보다 대통령의 신임을 더 받고 있다고 보는 장교가 더 많았다. 1972년의 청와대 주변 권력구조는 김정렴 비서실장-박종규 경호실장-이후락 중정부장-강창성 보안사령관-윤필용 수경사령관으로 재편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키는 과업을 완수한 뒤 물러나는 것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에 적합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서구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면 경제발전은 어렵게 되고 사회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은 다소간 제약할 수밖에 없다’는 통치철학도 확고했다.


이러한 목적과 취지에 따라 10월 유신은 1972 4월부터 본격화했다. 정치적으로는 김홍일 당시 신민당 총재와 김상현 의원 등 40여 명의 야당 정치인 동향을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검거와 가택 연금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10월 유신이 실행되자 50여 명의 대원으로 하여금 정치인과 야당 국회의원을 연금한 후 김상현 의원이 10월 유신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고 회유하는 공작을 맡았지만 실패했다. 특히 김상현 의원에 대해서는 강창성 사령관이 10월 유신에 참여할 것을 직접 종용했으나 김 의원은 이를 거절했고, 결국 서빙고(보안사 분실)에 구속됐다.  

 

‘필동 육군본부’

10월 유신이 성공리에 끝나자 필자는 다시 수경사 보안반으로 발령이 났다. 보안반에 돌아와 보니 상황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안수덕 소령이 김귀수 보안사 참모장에게 수시로 구두보고를 했다. 윤필용 장군에게 무언가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가 감청사건 때와 흡사했다.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파워는 10월 유신 후 훨씬 강해졌다. 10월 유신 때 서울지역 계엄사령관직을 성공리에 마쳤고 박 대통령의 전속부관이던 손영길 대령이 수경사 참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대통령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 보였다.


당시 수경사령부는 일명 ‘필동 육군본부’로 불렸다. ‘필동에 육군 참모총장 못지않은 파워를 가진 윤필용 장군이 있다’는 뜻을 내포한 좋지 못한 별명이었는데, 이게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군 장성들이 윤 장군에게 문안 인사를 오기도 했고, 윤 장군은 일반인과도 빈번하게 접촉했다. 이들 중에는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 김연준 한양대 총장 등도 있었다.


강창성 사령관은 임무상 윤필용 장군의 이러한 동향을 예의주시한 뒤 경호실장과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것이고, 보고를 받은 박종규 경호실장과 박 대통령은 분명히 심기가 불편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자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10월 유신 2개월 후인 1973 1 1일 육사 11기 선두주자들의 장성 진급이 있었고, 다시 2개월이 지난 1973 3 8일에 결국 윤필용 장군 사건이 터졌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윤필용 장군을 구속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따지고 보면, 1971년 김재규가 윤필용을 제거하려고 시도한 감청사건은 1973 3월 윤필용 장군 구속 사건과 원인이 같다. 따라서 감청사건은 윤필용 사건의 전초전이고, 더 나아가 1979 10·26사태에 원인(遠因)을 제공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5. 10·26 사태의 발단

▲1968 4 2군사령부를 초도순시한 김재규 보안사령관(왼쪽)이 문형태 사령관(오른쪽)과 함께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 동아일보

보안사령관직에서 물러난 김재규는 강원도 최전방 3군단장으로 좌천돼 엄청난 모욕감과 분노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군 선배인 육군 중장이 소장을 못 이기고 물러났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에게도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내가 당신과 동향이고, 군 동기로서 당신의 국가 통치권에 도움을 주기 위해 버릇없는 윤필용을 혼내주려고 한 일 때문에 나를 이렇게 강원도 산골로 귀양살이를 보낼 수 있느냐’는 불평과 불만을 가질 만했다. 3군단장을 끝으로 군을 떠난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배려로 호남비료 사장, 유정회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을 역임한 후 1976 12월 대통령의 최측근 권력인 중앙정보부장으로 돌아왔으나, 이 사건으로 인한 원한은 뼛속 깊이 남아 있었던 듯하다.


김재규에 대한 장교들의 여론은 ‘자존심이 강하고 섬세하지 못해 정보업무를 다루기에 부족하며 즉흥적,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차분하지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박 대통령도 당연히 이러한 여론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 인재가 없었다. 1973년 윤필용 장군과 손영길 장군의 ‘쿠데타 모의 음모 사건’ 때문에 이후락 중정부장을 포함한 3명의 ‘충신’을 잃었고,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도 떠났다. 그리고 이 사건 당시 군내 우수 장교 30여 명과 중앙정보부에서 30여 명의 우수 인재를 정리했기 때문에 중정부장으로 등용할 사람도 마땅찮았다. 따라서 당시 핵심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부득이 김재규 건설부 장관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한 것으로 봤다.

 

惡貨의 良貨 구축

10·26사태는 대한민국 현대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불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권력기관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법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김재규는 자존심이 강하고 명예욕과 정치적 욕망, 질투심이 강해 권력 주변에 두기에는 위험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정치적 욕망이 강한 인물은 경쟁자나 정적(政敵)이 될 가능성이 높은 대상에 대해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제거하려 한다.


둘째, 한번 일을 저지른 경험이 있는 자는 같은 일을 또 저지른다는 교훈이다. 초범이 재범, 3범이 되는 것과 같다. 1963년 거사를 음모하다 구속돼 조사를 받은 과거가 있는 인물들이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 사건을 일으켰고, 1979 12·12사태, 1980 5·18사건을 일으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셋째, 정치적 욕망이 강한 자는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의리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은인을 밟고 일어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의리는 이득이 되는 유리한 경우에만 지키고, 불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자신의 처신을 합리화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1인자를 무너뜨리는 도전자는 2인자였고, 정치적 욕망이 강한 자는 상대를 제거하기 위해 권모술수, 음모, 암투를 벌인다. 1973년 윤필용·손영길 사건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많은 인재를 제거했다. 이 때문에 중용할 마땅한 인물이 없게 되자 김재규를 재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1973년 쿠데타 음모 사건은 재조명돼야 한다

 

[3]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사건 - 10월 유신 후폭풍 권력암투가 낳은 자해극

● 박종규·신범식·전두환 vs 이후락·윤필용·손영길

●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워라”에 전두환 불끈

● 誣告 보고하자 박 대통령 “내가 조사 지시했는데…”

● 육사 11기 ‘와이프 內戰’…김옥숙 ‘하급자 대우’한 이순자

▲1973 4 28일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맨 오른쪽) 등 ‘윤필용 사건’ 관련자들이 선고를 받았다. 이들은 업무상 횡령 등 여러 혐의로 최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재심을 통해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동아일보

42년 세월이 지난 오늘 이른바 1973년 수도경비사령부 윤필용·손영길 장군 쿠데타 음모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진실을 밝혀 역사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그동안 전두환 장군 측근들이 집권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감추고 유리한 이야기는 미화했기 때문에 ‘코리아게이트’ ‘제5공화국’ 같은 드라마를 통해 국민에게 잘못 알려졌거나 감추어진 사실이 많다.


또한 당시 사건으로 희생당한 수십 명의 현역 군인과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형을 받은 분들은 대부분 법정투쟁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보상도 받았으나, 강제 예편을 당한 분들은 40년 넘게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왔다. 군부 내 사조직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혹여 정치적 욕망으로 음모를 꾸미고 권모술수를 부리면서 집권을 꿈꾸는 인물들이 아직도 있다면 이 사건이 그들에게 경종이 될 것이다

 

1. 10월 유신 후 권력이동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주변 권력자는 비서실장 이후락,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방첩부대장 윤필용 등이었다. 1968 1·21 사건(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의 청와대 기습 사건) 이후 정국은 비교적 안정됐지만, 박 대통령의 야망이 문제였다. 당시 헌법으로는 대통령직 3선 연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박 대통령은 1971 4월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따라서 3선 대통령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이 필요했다.


결국 박 대통령의 뜻대로 1969 10 3선 개헌안은 77.1% 투표율에 65.1% 지지를 받아 통과됐고, 그는 3선 개헌 헌법에 따라 1971 4월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 대통령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과의 세력 균형을 위해 지속적인 국가 재건이 필요하고,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서구식 민주주의 정치제도’보다는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필요하다며 새로운 대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72
년 초 박 대통령은 ‘평화적 남북통일 과업과 국가 재건사업을 완수하는 시기까지 집권한 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마음먹고 ‘유신혁명’을 하기로 결단했다. 1972 3월부터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한편, 1972 7 4일에는 북한을 다녀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남북 7·4공동성명’을 남북이 동시에 발표하게 했다.


1972
10 17일 계엄을 선포한 박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야당 국회의원을 연금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뽑되 임기는 6년으로 하고, 국회의원 임기는 6년과 3 2가지로 했으며, 국회 개회일은 150일 이내로 하는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이러한 조치는 자유를 제약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는 이유로 국민적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1968 1·21 사건 이후 1972년까지 간첩 침투가 빈번해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따라서 국가경제 재건과 안보를 위해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수정해 일정 부분 정치적 자유를 제약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도 없진 않았다.


유신혁명이 마무리된 1972 10월 박 대통령 주변의 권력 실세는 비서실장 김정렴, 경호실장 박종규, 중정부장 이후락, 보안사령관 강창성, 수경사령관 윤필용, 수경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등이었다. 이른바 10월 유신 공로자들이다


그런데 앞서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이던 윤필용 대령이 1963년 군으로 복귀한 뒤 이후락 중정부장이 후임 비서실장으로 장기간 근무했다. 준장 진급 후 윤필용은 박 대통령에게 이후락의 비리를 보고했는데, 이것이 알려져 두 사람은 불편한 사이가 됐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을 주일대사로 좌천시켰다가 1970년 신직수의 후임으로 중정부장에 임명한다.


그러나 북한을 다녀온 후 1972 7·4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던 이후락은 10월 유신 이후 서울지구계엄사령관이던 윤필용과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같이하는 등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런데 이들을 화해시킨 인물은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사이인 손영길 대령으로 알려졌다. 이후락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박종규 경호실장과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은 이 때문에 손영길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갖게 된다


특히 박종규는 수경사령부가 경호실에 작전 배속돼 대통령을 경호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윤필용이 자신의 부하는 아니지만 각별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윤필용이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중정부장과 밀착되는 것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고, 특히 박 대통령 전속부관 출신으로 자기 밑에서 4년간 30대대장을 한 손영길이 윤필용과 같이 이후락과 가까워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969 9월 ‘윤필용 사건’ 발설자로 알려진 신범식 문공부 장관(후에 서울신문 사장, 왼쪽 두 번째)과 박종규 청와대경호실장(왼쪽 세 번째)이 서울 태평로의 김유신 장군 동상제막식에 참석해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과 함께 제막하고 있다. 박 대통령 왼쪽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오른쪽은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동아일보

 

세력 균형은 깨지고

그리고 박종규와 가깝지만 이후락과는 사이가 나쁜 신범식 사장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신범식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이후락 홍보실장의 후임 홍보실장이었고, 이후 문화공보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을 역임할 정도로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신범식은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이후락, 윤필용과의 술자리를 마련했고, 이 자리에서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한 언동을 경호실장과 대통령에게 보고해 윤필용·손영길이 쿠데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되게 했다.


1971
년 ‘수경사 감청사건’(‘신동아’ 2월호 140~155쪽 기사 참조)으로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좌천되고, 그 후임에 강창성이 부임한 후 10월 유신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그러나 유신 이후 안정돼 있던 세력 균형이 박 대통령 주변 권력자들의 이합집산으로 균열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중심으로 신범식 사장, 전두환 장군, 노태우 대령 등이고, ‘피해자’는 윤필용, 손영길, 이후락 등이었다. 가해자 측은 박 대통령에게 쿠데타 음모를 알렸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 박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철저히 조사해 엄벌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군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자이고 육사 8기생 중 선두주자이던 윤필용은 이 사건으로 인해 1973 3 8일 구속된다. 1961년 전속부관으로 박 대통령을 보필한 손영길은 제15사단 부사단장으로 전보됐다. 윤필용이 구속됐을 때만 해도 손영길은 이 사건에서 비껴나는 듯했지만 ‘통일정사 사건’(윤필용이 이후락이 대통령이 되기를 기원하기 위해 청와대에 기도처를 지었다고 모함한 사건)으로 1주일 후인 3 15일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구속됐다.


윤필용이 누구던가. 그는 박 대통령이 1956 7사단장 시절 이후 군수사령관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할 때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민정이양 이후에는 방첩부대장과 맹호부대장, 수경사령관을 맡으며 박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도운 심복이다. 대통령은 그런 그를 구속하고 제거한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전속부관 출신으로 가장 아끼던 손영길도 구속한 뒤 관계를 단절한다.  


필자는 신동아 2월호에서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1979 10·26 사건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1979년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키는 원인(遠因)을 제공한 사건이고,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권모술수가 우리나라 정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강창성의 직무유기

▲1972 12 27일 열린 제8대 대통령 취임식. 동아일보

이 사건에서 핵심은 윤필용·손영길이 과연 ‘역적’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강창성 사령관이 서빙고에서 조사한 결과 쿠데타를 모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역적이 아닌 것으로 일찌감치 판명됐다. 그렇다면 강창성은 누가 충신을 역적으로 모함했는지를 조사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어야 한다. 윤필용, 손영길, 이후락이 건재했다면 10·26, 5·18 같은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창성은 ‘하나회’를 조사하다가 전두환이 회장인 걸 알고 쿠데타와 관련 없는 윤필용 측근 30여 명의 군복을 벗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단 한 번도 이 사건과 관련해 누가, , 어떻게 음모를 꾸몄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드문 데다, 있다 해도 관련자들의 힘이 무서워 공개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1970년 말부터 1973년까지 4년여 동안 수경사 보안반에 근무하면서 1972년 감청사건과 10월 유신, 그리고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 사건 조사에 직접 참여한 만큼 그 내막을 비교적 자세하게 안다.


당시 나는 윤필용·손영길 사건이 모함에 의한 것임을 윤 장군의 후임인 진종채 장군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진 장군은 그 자리에서 강창성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 시간 이후, 수경사 요원을 서빙고로 연행해 조사해서는 안 된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또한 그는 곧바로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전화해 “보안사의 ‘유류 부정사건’을 철저히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보안사 유류 부정사건은 보안사 끗발로 배정받은 월 300여 드럼의 잉여 휘발유를 밖에 내다 팔다가 수경사 헌병에게 들킨 사건이다. 이것은 일종의 반격이었다. 진 장군은 이후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각하에게 보고드릴 사항이 있으니 시간을 잡아달라”며 면담을 요청했다.   


다음 날 진 장군은 필자의 보고를 박 대통령에게 전했다.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화를 냈지만 ‘사실은 나도 그런 보고를 받은 바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조사를 지시해서 구속했는데 내가 어떻게 풀어줄 수 있겠느냐”면서 후속 인사 조치를 하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시켰다.  

 

▲1955 10월 노태우(왼쪽 끝), 손영길 소위(왼쪽 세 번째)가 임관 직후 1관구사령부참모장 김재춘 대령(맨앞)과 기념촬영을 했다. 동아일보

 

박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대전지역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시키고, 2군단장이던 김종환 장군을 후임 보안사령관에 내정했다. 윤필용·손영길 장군 후속처리는 진종채 장군에게 일임하고, 출감 문제는 김 대위(필자)에게 시키라고 지시했다. 후속 조치는 박 대통령의 지시대로 종결됐다.


한편 이후락 부장은 이 사건의 여파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대통령의 신임을 만회하고자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나 1973 12월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후임 중정부장에는 검찰 출신 신직수 씨가 임명된다. 윤필용 사건을 주도한 박종규는 1974 8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으로 물러나고, 차지철이 후임 경호실장이 됐다. 결과적으로 사건 발생 2년 만에 가해자 박종규, 피해자 윤필용·손영길·이후락 등 박 대통령 측근 모두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청와대 주변을 떠나 야인이 됐다. 한마디로 모두가 불행해진 모함 사건이었다.

 

2. 질투의 화신들

1972 12월 말 손영길 대령이 1973 1 1일부로 준장 진급이 확실시되자 이후락 중정부장이 손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박 대통령의 허락을 받고 중앙정보부 2국장으로 오라고 요청했다. 손영길은 이를 윤필용 수경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윤필용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참모장을 중정에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락을 받기로 했다.


윤필용이 박 대통령에게 의중을 타진하자 “장차 참모총장을 해야 할 인물이니 정도를 걸어가도록 윤 장군이 잘 지도하라. 정보기관에 가서는 안 되니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잘 키워주라”고 지시했다. 이에 손영길은 수경사에서 윤필용의 참모장으로 계속 근무하게 된다.


손영길의 보직 문제가 박 대통령과 이후락, 그리고 윤필용 사이에서 논의되자 청와대 주변 권력자들 사이에 파장이 일었다. 손영길이 수경사 참모장에 보직된 후, 그전까지 사이가 나쁘던 이후락과 윤필용의 관계가 좋아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종규의 ‘파워’가 약해지고 이후락 쪽으로 힘이 쏠리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박종규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신범식이 윤필용 장군의 ‘불경한 언동’을 보고한 것을 덮어뒀는데, 손영길의 보직 문제로 박 대통령과 윤필용이 은밀히 대화를 나눈 것을 알고는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여긴 것이다. 2인자’를 자부하던 박종규는 윤필용·손영길이 이후락 쪽으로 기울면서 권력 중심이 이동한다는 말까지 나오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필용과 전두환 간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만한 대화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어졌다. 윤필용이 사석에서 전두환에게 “전두환 장군, 앞으로 더 잘해야겠어! 박 대통령이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우라는 당부가 있었으니 너는 더 분발해야겠어”라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육사 11기 중에서 자신이 가장 먼저 참모총장이 되겠다는 포부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윤필용이 전한 이야기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손영길과 전두환은 ‘혈투’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그 무렵 박종규는 윤필용·이후락·손영길이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이후락의 승승장구에 불만을 품은 신범식, 손영길의 파워에 밀리는 공수1여단장 전두환 장군, 연대장을 마치고 서울에 와 대기 중이던 노태우 대령 등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권력의 이합집산을 예의주시했다


이들은 1972 11월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박 대통령 후임 문제를 거론한 사건을 알고 있었다. 신범식은 차제에 이후락을 제거한 뒤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원하던 박종규가 중정부장으로 옮기면 자신이 중책을 맡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전두환도 자신의 앞날을 위해 윤필용과 손영길을 군에서 축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의문의 훈장 수여식

그러던 1973 1월 초, 손영길과 전두환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윤필용은 10월 유신 공로자 2명에게 훈장을 주겠으니 대상자를 추천하라는 정부의 연락을 받았다. 윤필용은 손영길과 전두환을 추천했고,

 

이들은 1973 1월 민방위의 날에 중앙청에서 박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게 됐다. 그런데 총무처 장관이 “1명만 2등 훈장을 주고, 다른 1명은 3등 훈장을 주게 됐다. 누구에게 2등 훈장을 주겠냐”고 문의하자 윤필용은 “2등 훈장은 손영길에게 주라”고 했다. 전두환이 섭섭하게 여긴 것은 불문가지.


하지만 손영길이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행사가 갑자기 취소됐고, 박종규가 수경사를 방문해 손영길에게 개인적으로 훈장을 전달했다. 어떤 연유 때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장교들 사이에는 전두환이 시기·질투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전두환이 박종규에게 불평하자 박종규도 손영길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손영길을 훈장 수여 행사장에 참석하지 못하게 조치하고, 훈장을 개인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사건’이 3 8일 일어난 윤필용·손영길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고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3. 손영길 vs 전두환

1972년 중순 육군본부에서는 장군 인사를 하면서 손영길·전두환 두 명의 대령을 장군 자리에 보직시키고, 1973 1 1일 장군 진급을 예고하는 인사를 했다. 즉 박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필해 온 수경사 30대대장 출신 손영길 대령은 수경사령부 참모장에, 전두환은 김포 공수 제1 여단장에 보직시켰다


육군본부는 1972년 장군 진급 심사에서 처음에는 육사 11기 중 2명만 장군으로 진급시킬 예정이었으나, 손영길이 대령으로 진급할 때 4명이 함께 특진했으니 김복동, 최성택 대령도 장군으로 진급시켜 달라는 건의가 있었다. 그 결과 1973 1 1, 육사 11기 선두주자 4(손영길·전두환·김복동·최성택)이 모두 장군으로 진급한다.


4
명 중 막강한 파워를 가진 1인자는 박 대통령 전속부관 출신 손영길이었고, 2인자는 전두환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7사단장을 할 때 손영길 중위는 최우수 중대장으로 인정받았고, 1961년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 소장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하다가 소령으로 진급해 청와대 외곽 경계를 경호하는 30대대장을 4년이나 맡은 바 있다.


전두환은 육사 시절엔 축구 잘하는 생도 정도로 여겨졌는데, 임관 후에는 동기들 중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동아 2월호에도 밝혔지만, 전두환은 손영길 덕분에 최고회의 비서실 민정비서로 근무할 수 있었고, 1963년 쿠데타 음모 사건 때는 손영길 소령의 도움으로 훈방된 적도 있다. 1967년 손영길 중령이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전두환 중령을 30대대장 후임자로 추천하며 박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형제와 같은 우정으로 서로를 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1973 1 1일 함께 준장으로 진급한 순간부터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박 대통령이 1973 1월 초 두 사람을 청와대로 초청해 진급 축하를 해줬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의 의리 있는 친구처럼 보였지만 속마음은 정반대였다


전두환·노태우 심야 회동

전두환은 2개월 전 신범식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불경(不敬) 사건’과 ‘통일정사 사건’이 곧 불거질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고, 박 대통령이 손영길을 참모총장 감으로 키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경쟁심을 갖게 됐다. 자신이 쿠데타 음모에 휘말릴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손 장군은 전 장군에게 “박 대통령을 잘 모시자. 형제같이 우정 변치 말고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지키는 간성이 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 윤필용이 구속된 3 8일 손영길은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건지 만나서 이야기나 해보자”고 했지만 전 장군은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부대 일이 많아 만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제야 손 장군은 전 장군이 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으며 자신을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 날 밤 전두환은 노태우 대령 집에 갔다. 중정 감사실 수사과장이던 송석근 소령이 노태우의 집에 갔다가 거기서 전두환을 봤다고 손영길에게 알려줬다(248쪽 상자기사 참조).


윤필용 구속 다음 날 손영길은 최전방 1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돼 쿠데타 음모 사건에서 비켜서는 듯했으나 1주일 후 전격 해임되고 보안부대원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돼 서빙고에 구속된다. 서빙고에서 보안사 참모장 김귀수 장군이 “자진해서 전역지원서를 쓰면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전역서를 쓰라”고 강요하자 손영길은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전역서를 쓰느냐. 절대 쓸 수 없다”고 맞섰다


윤필용의 경우는 대통령에 대한 불경(不敬)에 해당하는 말을 했다는 모함이라도 있었지만, 손영길은 조사를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결국 몇몇 사람의 모함에 밀려 억울하게 전역을 당하고 말았다. 문제가 된 ‘통일정사 사건’은 다음 회에 거론하겠지만, 손영길은 40여 년이 흐른 2015 7월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확정을 받고 보상도 받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988 2 25일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 김옥숙·이순자 여사가 청와대 접견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

 

4. 육사 11기 파워게임

▲제1 공수여단장 시절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행사에 참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 동아일보

 

육사 11기들 간의 파워게임은 가족들 간에 더 심했다. 군인 사회에선 동기생 간에도 군번이 빠른 군인이 상급자 대우를 받는데, 이는 군인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군번이나 계급, 파워에 따라 아내들 사이에 남자 세계보다 더 엄격하고 민감한 서열이 형성되고, 때로는 심한 시기와 질투가 불거지기도 했다.


특히 전두환·노태우·김복동의 가족 간 경쟁이 심했다. 남편의 계급이 올라가면서 가족 간 경쟁이 더 치열해져 남편들 간에 불화를 유발하기도 했다. 어떤 가족은 자존심이 유별나게 강해 남편을 곤란하게 하는가 하면, 경쟁에 밀리는 남편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아내도 있었다. 보안사령부 존안실에는 이러한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을 것이다.


육사 11기 동기생 가족들은 서울 한남동 손영길 대령 집(당시 최성택 대령 집과 붙어 있었다)에 모여 일본어 공부를 같이 하는 등 거의 매일 만났다. 당시 필자는 중위로 서울지구 506보안부대에 근무할 때였다. 필자가 대대장으로 모신 육사 13기 신재기 중령 부인의 소개로 손영길 대령 집을 자주 방문하면서 전두환, 김복동, 노태우, 최성택 대령 가족들과 알게 됐다. 특히 손영길, 최성택 대령 부인들과 가까이 지냈는데, 그들의 요청으로 손 대령 집에서 필자의 약혼녀를 인사시킨 일도 있고, 몇몇 부인은 1971년 말 종로예식장에서 치른 필자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부인들 사이에 불편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남편 간 서열이 바뀌면 군인 가족 서열도 뒤바뀌기 때문에 가족 간에 시기, 질투, 갈등이 생기기 쉽고 때로는 시비가 빚어지기도 했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와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 사이가 그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보다 1963년 소령 진급 때부터 1988년 대통령이 될 때까지 늘 한 해씩 진급이 늦었고, 전 전 대통령의 후임 보직을 여러 번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순자 여사는 김옥숙 여사를 ‘하급자 가족’처럼 대했고, 김옥숙 여사는 수십 년 동안 수모를 당하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다 1988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상황은 바뀌어 김옥숙 여사가 그동안 당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순자 여사에게 “나는 당신과 다르다. 당신은 체육관 출신 대통령 부인이고 나는 전 국민이 뽑은 직선 대통령 부인이야! 옛날에는 많이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쏘아붙인 이야기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수년 전 비자금 사건으로 두 전직 대통령의 거액 치부에 국민이 분노할 때, 필자는 당시 대통령의 부인들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4] 현대판 궁궐 암투, 통일정사 사건

“전두환·노태우가 손영길 책임 물어야 한다길래…” (박종규 前 청와대 경호실장)

● “이후락 위해 청와대 기도처 건축” 모함

● 진실 알았던 地官 손석우, 6개월 강제 구금

● “전두환이 모른 체하라 했다”…증인들 함구

● 박종규, 10년 뒤 손영길에 사과

/동아일보 DB

필자는 ‘신동아’ 3월호를 통해 ‘윤필용·손영길 장군 쿠데타 음모 사건’은 사실이 아니고, 이 사건 가해자는 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과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이라고 밝혔다. 또 사건을 조사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공명정대하게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며, 여기에 전두환 장군과 노태우 대령이 동조한 것도 상세히 소개했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손영길 장군 등 30여 명의 우수한 장교들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및 중정 직원 30여 명이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최대 피해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알려진 것처럼 윤필용 제거에는 ‘이후락 차기 대통령’ 발언이라는 모략이 작용했지만, 손영길 장군이 제거된 것은 청와대의 ‘통일정사’ 사건이 계기가 됐다.

 

바꿔 찬 금시계

청와대 주변 권력자들의 음모와 암투는 ‘현대판 궁궐 암투’나 다름없었는데, 그 원인을 제공하고 제거된 인물이 윤필용 장군이다. 윤 장군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을 거친 후 방첩대장(1965), 주월 맹호사단장(1969), 수도경비사령관(1971)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으로 근무했다.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 탓에 ‘필동 육군본부 참모총장’이라는 시기를 받았는데, 1972년 유신 이후 청와대 주변 권력자들과 접촉하면서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고 군복을 벗어야 했다


그러나 손영길은 윤필용과 달리 쿠데타 음모 오해를 받을 만한 언행을 한 적이 없다. 윤필용 사건 핵심 가해자인 박종규와도 각별하게 가까운 사이였고, 결정적인 범법행위도 없었다. 그래서 1973 3 8일 윤필용을 구속할 때 손영길은 제15사단 부사단장으로 전속돼 윤필용 사건에서 비켜난 듯했다. 그런데 1주일 후 추가로 구속된다. 누가 어떤 음모를 꾸며서 그렇게 됐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는 윤필용 사건 10년 후인 1983년 박종규가 손영길에게 한 사과의 내용과 1973 3월 청와대 경내에 세워진 ‘통일정사’에 얽힌 사실을 토대로 그 내막을 밝히고자 한다


1961
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비서실장 윤필용 대령(1927년생), 박종규 경호대장(1930년생), 전속부관 손영길 대위(1932년생), 이후락 공보실장(1924년생). 이들 4명은 서로 호형호제하며 지내오던 13년간의 인간관계를 1973 3 8일 하루아침에 끝냈다. 권력 2인자이던 박종규가 박 대통령에게 윤필용, 이후락, 손영길 등이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모함해 윤필용, 손영길을 구속시킨 것이다. 


이들 중 박종규와 손영길은 특히 각별한 사이였다. 1963년 민정 이양 당시 손영길은 최고회의 의장 전속부관을 사임하고 육군본부에서 근무했는데, 당시 육사 동기인 전두환 소령으로부터 “박 대통령이 박종규가 취중에 자신에 대해 불경한 언동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해 경호실장 자격을 정지시켰고, 박종규는 3일째 출근을 못하고 자택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영길은 박종규가 취중에라도 그런 방자한 언행을 할 사람이 아닌 만큼 모함을 받은 것으로 확신하고 박종규를 구하려 청와대로 향했다

 

김유신 삼국통일, 박정희 남북통일

▲1968 10월 최전방 부대에서 장비를 점검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군부 실력자들. 동아일보

 

그는 이낙선 민정수석과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모함이다. 박종규가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각하에게 보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낙선, 이후락이 난색을 보이자 손영길은 직접 박 대통령을 찾아가 20여 분간 대화하며 오해를 풀었다. 손영길의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그렇다면 박종규에게 가서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전하라”고 했다. 손영길은 박종규의 집으로 찾아가 지시를 전달했다. 이때 박종규는 “죽었다 살아났다”면서 자신이 손목에 차고 있던 금 도금 시계를 풀러 손영길이 차고 있던 시계와 바꿔 찼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상자기사 참조). 


1973
3 8일 윤필용이 구속되던 날, 손영길은 제15사단 부사단장 전출 명령을 받고 출발하기 전 박종규를 만난다. 이때 박종규는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잠깐 기다리면 내가 곧 돌아올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건 후 10년의 세월이 흘러 둘 다 야인이 돼 만난 1983. 손영길이 미국에서 돌아온 해였다. 그때 박종규는 손영길에게 사과하면서 용서를 빌고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했다고 한다. 


“사건이 불거진 건 10월 유신 직후였다. 처음에는 윤필용만 구속해 혼내주고 군부에 경종을 울릴 계획이었는데, 1주일 후 전두환과 노태우가 나를 찾아와 ‘윤필용이 이후락과 가까워지고, 윤필용이 각하에게 불경 언동을 하게 된 것은 두 사람을 절친하게 만든 손영길에게 책임이 있다. 따라서 윤필용보다 더 나쁜 사람이 손영길이니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너를 구속하게 됐다. 


당시 박종규도 손영길이 이후락과 윤필용을 가깝게 만들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손영길은 1972 12월 이후락이 자신을 중앙정보부 2국장(국내 담당)으로 전입 요청한 일로 인해 박종규, 전두환, 노태우 등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10월 유신 공로훈장 해프닝으로 전두환과도 불편한 관계였다(신동아 3월호 243~244쪽 참조).


통일정사는 1972 10월 유신 과정에 신범식, 박종규, 지관(地官) 손석우 등이 박 대통령을 위해 청와대 경내에 세운 작은 기도처(精舍). 그런데 1973 3월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사건이 터지자 박 대통령에게 “손영길이 자신과 동향인 이후락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세웠고, 스님을 불러 은밀히 불공을 드리는 곳”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박 대통령은 총애하던 손영길이 자신을 배반한 것에 대해 격노해 그를 구속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통일정사도 즉시 철거됐다


통일정사를 지은 신범식은 이후락의 후임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근무했고, 1963년부터 민주공화당에 참여한 후 청와대 공보실장을 거쳐 문화공보부 장관을 역임해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신범식은 1972 6월 “지관 손석우를 데리고 남한 전체를 돌아봤는데, 최고의 명당 자리가 청와대 경내에 있다. 이곳에 통일정사를 짓고 기도를 올리면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듯 박 대통령 임기 내에 통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통일정사 건축허가를 받으려고 1972 6월 서울시장을 찾아갔으나 서울시는 그곳에 지으려면 수도경비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1972 10월 수경사령관에게 건축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수경사는 그곳이 청와대 경내라 경호실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통보했다. 


2
주 뒤 손석우는 수경사령부에 “신범식 사장이 경호실장의 허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를 확인해달라”며 수차례 전화로 확인 요청을 했다. 참모장 손영길이 윤필용 사령관에게 이를 보고했다. 윤필용으로부터 “경호실장을 만나 확인해보고 알려달라”는 지시를 받은 손영길은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는 30대대장 이종구 중령과 함께 청와대 경호실을 방문해 박종규로부터 “통일정사 건축을 허가했으니 인부 출입을 허가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묘안’ 짜낸 강창성

▲1972 4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오른쪽 악수하는 사람)이 보안사를 방문해 강창성 사령관(오른쪽 끝)으로부터 보안 사 간부들을 소개받고 있다. 동아일보

 

신범식과 손석우는 1973 1 15일경 통일정사를 완공했다. 신범식은 “VIP(대통령)를 모시고 건축 기념행사를 한다”며 윤필용을 초청했는데, 윤필용은 다른 일정이 있다며 참모장 손영길에게 대신 행사에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손영길이 행사장에 가자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고, 조그만 정사를 지어놓고 스님 몇 사람이 불공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곳은 두 달 후인 3 15일 박 대통령이 손영길 구속 지시를 내리는 음모의 발신지로 둔갑했다. 그가 15사단 부사단장으로 1주일쯤 근무할 무렵이었다. 지시를 받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손영길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해 조사했다. 보안사령부 참모장 김귀수 장군이 손영길에게 “자진해서 전역지원서를 쓰면 처벌하지 않고 조용히 전역시켜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손영길은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며 거부했다. 이후 손영길은 윤필용과 함께 쿠데타 음모가 아닌 일반 범죄 관련 조사를 받은 후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그러나 서빙고 분실에서는 통일정사 음모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조사하면 손영길이 반발할 것이고, 손석우 지관을 조사하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 허위로 밝혀질 우려가 있었기에 일절 언급하지 않기로 박종규, 신범식, 강창성 간에 합의가 있었던 듯하다


강창성은 진실을 알고 있는 지관 손석우, 수경사 정보참모 윤태균 대령, 30대대장 이종구에 대한 보안 유지책을 강구했다. 만약 손석우가 언론에 “통일정사는 손영길이 건축한 게 아니라 나와 신범식이 박종규의 허가를 받고 지은 건물”이라고 밝힐 경우 모함을 한 것이 탄로날 판이었다. 또한 손영길을 지지하는 수경사 헌병들이 손석우를 체포해 조사하기라도 하면 문제는 더 커질 일이었다


이때 강창성이 묘안을 떠올렸다. 그는 3군단 보안부대장 우국일 대령에게 손석우를 부대 안에 연금시키고, 외부 인사와 일절 접촉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손석우의 집에는 월 50만 원의 생활비를 지급했다. 손석우는 1973 3월부터 강창성 장군이 보안사령관을 그만둔 8월까지 6개월간 보안부대에 감금돼 있다가 풀려났다. 이 같은 사연은 특전사령관 차규헌 장군에 의해 윤필용, 손영길에게 알려졌다


윤태균과 이종구에게는 통일정사 사건과 고철 판매대금 횡령사건에 관해 손영길에게 유리한 발언이나 증언을 절대 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 역할은 전두환이 맡았다. 실제로 이들은 고철값 횡령사건과 관련한 검찰 증인으로 나와 손영길에게 불리하도록 거짓 증언을 했다

 

보안부대장의 고백

손영길은 자신이 통일정사 사건으로 박 대통령의 분노를 사 억울하게 처벌 받게 됐다는 것을 1심 재판 때인 6월에야 알게 됐다. 1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육사 동기 권익현 대령이 손영길에게 “알아보니 각하께서 통일정사 사건으로 분노해 사건 해결이 어려운데, 이 사건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쓴 편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손영길은 권익현에게 “통일정사는 박종규가 허가하고 신범식과 손석우가 지은 건물이라 나와 무관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권익현에게 편지를 보낸 지 두 달이 지나 2심 재판이 끝난 8월 중순, 특전사령관 차규헌이 육군교도소에서 안양교도소로 이감하는 윤필용, 손영길을 면회하면서 “강창성이 가해자들과 공모해 사건 조사를 편파적으로 한 결과 보안사령관에서 해임됐다”며 통일정사와 관련된 비화를 들려줬다. 강창성 밑에서 3군단 보안부대장으로 근무하던 우국일이 차규헌을 찾아와 감금 중인 지관 손석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손영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손영길은 박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건이 음모라는 것을 몰랐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사건이 모함이었음을 지금껏 밝히지 못한 점, 그리고 박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배신감을 품고 세상을 떠난 점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필자에게 털어놓았다


통일정사가 처음부터 ‘음모용’으로 건축된 것은 아니다. 공사 시점이 신범식이 모함을 한 시기와 겹치지만, 건축을 시작한 시점은 1972 10월 유신 4개월 전이기 때문이다. 후일 손석우는 절에서 만난 지인에게 손영길에게 피해를 준 것은 미안하지만 자신은 통일정사가 그렇게 둔갑할지 몰랐다고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이 함구 지시”

손영길이 30대대장 이종구와 청와대 경호실을 방문해 통일정사 건축허가를 받을 때 박종규는 손영길에게 “청와대 경내 헬기장에 고철이 쌓여 있어 지저분하니 청소를 하고 깨끗하게 정리해달라”고 지시했다. 헬기장 근처에 널린 고철을 팔아서 용돈으로 쓰라는 얘기였다. 손영길은 동행한 이종구에게 고철을 30대대 영내로 옮겨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손영길은 결국 이 때문에 공금횡령으로 처벌을 받았다


경호실장을 만나고 돌아온 손영길은 윤필용에게 통일정사 건축허가가 났으며 고철 처리 지시를 받았다고 보고했고, 군수참모 노정기 대령에게 고철을 처분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노정기는 30대대 연병장으로 옮겨놨던 고철을 팔아 받은 340만 원을 참모장에게 가져왔다. 이 가운데 40만 원을 노정기에게 주면서 수고한 장병 회식비로 쓰라고 줬고, 남은 돈은 사령관 윤필용이 부대 운영에 보태 쓰라고 준 돈과 함께 보관했다


그런데 이 돈에서 사령관 숙소 수리비로 100만 원을 지급한 것이 문제가 됐다. 정상적인 부대 운영비 지급 과정을 지키지 않고 임의로 자금을 쓴 것은 공금횡령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손영길은 박종규가 용돈으로 쓰라며 준 고철 판매대금이라 부대 공금을 횡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박종규를 증인으로 조사해달라고 검찰에 요청했다. 하지만 박종규는 증인으로 출두하지 않았고 박종규를 대신해 정보참모 윤태균 대령과 30대대장 이종구가 법정 증인으로 나왔다


두 증인은 통일정사 건축과 고철판매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사실 그대로 증언하면 혐의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검찰관이 “청와대 헬기장 고철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고 묻자 둘은 “아는 바 없다”고 진술을 했다. 이 때문에 손영길은 공금을 횡령한 것으로 확정돼 실형을 살게 된다. 손영길은 검찰 증언을 하고 나오는 윤태균, 이종구에게 “어떻게 고철 사건을 모른다고 진술할 수 있냐”고 따지자 ”검찰에 나오기 전 전두환을 만났는데, 그가 이 일에 대해서는 일절 모른다고 진술하라고 지시해 진술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답했다

 

최대 피해자는 朴 대통령

이 사건을 조사한 강창성은 육사 8기생 중 선두주자였다. 두뇌가 명석한 인물로 알려졌고, 1972 10월 유신 후 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사건 조사를 공명정대하게 하지 못해 비난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인 윤필용을 제거하기 위해 장성들을 간첩 조사하듯 가혹하게 수사했고, 자신과 가깝지 않은 우수 장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는 의혹을 샀다.  


이 과정을 지켜본 필자는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군과 국가 발전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판단하고 강창성의 문제점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필자의 나이가 27세였고, 군 생활 5년째인 일개 대위였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판단이었다.  


필자는 진종채 수경사령관에게 “이 사건은 모함에 의한 것이고, 수사 지시를 받은 강창성이 수사를 잘못하고 있으니 대통령에게 강창성의 문제점을 보고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필자의 요청을 받아들인 진 장군은 필자의 보고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강창성 장군을 보안사령관에서 보직 해임했음을 밝혀둔다. 이로써 윤필용 사건도 종결됐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 손영길, 강창성, 이후락 등 박 대통령의 최측근은 사라졌고, 그 여파로 경호업무가 허술해진 탓에 1974 8 15일 육영수 여사를 잃었다. 육 여사의 서거로 박종규도 경호실장을 사임했고, 후임 경호실장 차지철은 2인자로 힘을 행세하는 과정에서 1976년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재규와 사사건건 불화가 잦았다.  


1979
3월 박 대통령은 제20사단 대대장 월북 사건으로 진종채 장군이 보안사령관에서 물러나자 1사단장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다. 그 후 정국은 김영삼 의원의 의원직 제명 사건에 이어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 김재규와 차지철 간 불화가 격화한 끝에 1979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통일정사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박 대통령 자신이었다 

[5] 오만한 ‘경호실 권력’과 정치군인들 -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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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 경호실장(오른쪽 끝)전두환 작전차장보(오른쪽 두 번째) 등 경호팀과 기념촬영을 했다. [동아일보]

윤필용 장군 쿠데타 음모사건’ (1973 3)의 최대 수혜자는 전두환 장군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윤필용 사건 이후 청와대 권력지형에 변화가 왔고, 그것이 전두환에게 이어졌다. 전두환은 1976 3월 제1공수여단장을 마치고 바로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발탁돼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된 후, 1977년 소장으로 진급하고

 

1978 1월 제1사단장에 부임한다. 그리고 1 2개월 만인 1979 3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어 10·26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중심으로 한 ‘음모와 암투’의 중심에 선다

 

윤필용 사건 당시 청와대 핵심 권력자들은 대통령비서실장 김정렴,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보안사령관 강창성 장군 등이었다. 사건 이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후임에는 진종채 장군, 강창성 보안사령관 후임에는 김종환 장군이 보직됐다. 그해 12월에는 김대중(DJ) 납치 사건으로 이후락 중정부장이 해임되고, 검사 출신 신직수 부장이 임명됐다. 다음 해인 1974 8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피격돼 서거하면서 박종규는 물러나고 5·16 혁명에 가담한 공수부대 출신 차지철 의원이 경호실장에 보직된다. 1975년은 윤필용·손영길 장군 등이 안양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는 등 조용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1976년 신직수 중정부장이 해임되고, 후임에 김재규 부장이 보직되자 청와대 주변 정보·보안 분야 권력자들 중 대통령을 수시로 면담하고 보고할 수 있는 ‘문고리 권력’ 서열이 바뀌게 된다.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문고리 권력은 1위 비서실장, 2위 중앙정보부장, 3위 경호실장, 4위 보안사령관 순이었다. 그런데 1974년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면서 이런 구도가 바뀌고, 서열 3위 경호실장이 1위로 올라섰다.

 

一人之下 萬人之

이런 변화는 청와대 공식 행사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1위 김정렴은 대통령의 오른쪽 상위 자리를 차지철에게 내주고, 자신은 2위 자리인 대통령 왼쪽 자리에 앉게 된다. 차량으로 수행할 경우 대통령 차량 바로 뒤를 경호실장 차량이 수행했다. 이런 ‘서열 변화’는 김정렴이 차지철에게 양보하는 가운데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이뤄졌고, 김재규가 부임하기 전 서열 2위였던 신직수도 비교적 너그러운 마음으로 마찰 없이 무난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재규는 달랐다. 1976년 신직수 후임으로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재규는 박 대통령과 자신이 육사 2기 동기생이자 동향(경북 선산)이라는 각별한 관계를 내세워 차지철과 충성경쟁을 시작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이 서열 1위를 지켜야 하고, 자신은 공식 서열 2위라고 주장하면서 차지철이 서열을 무시하고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제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지철은 조선시대의 영의정을 자처했다. 청와대 내에서 대통령 다음 ‘2인자’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루려 했다. 김재규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을 꿈꿨다. 차지철 못지않은 권력욕과 명예욕으로 들끓었다. 둘의 마찰음은 세월이 흐를수록 격화한다.  


김재규의 ‘2인자 욕망’은 그가 1971년 윤필용 장군 제거를 위한 감청사건(신동아 2월호 140~153쪽 참조)을 일으켰을 때부터 드러났다. 그는 자신보다 앞서가는 윤필용 장군을 제거하려다 발각돼 보안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3군단장으로 좌천된 후 권력에서 밀려나는 쓰라림을 맛봤다. 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와 반감을 가슴에 품었다. 그러나 중정부장이 되고 나서는 박 대통령이 명실 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2인자 자리에 자신을 재기용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여덟 살 어린 차지철에게 밀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지속되던 중, 1978년 비서실장에 중정부장 출신 김계원이 들어서자 김재규의 입지는 차지철에 비해 더 좁아지게 된다. 비서실장으로서 김계원의 권위는 김정렴 때보다 더 약해졌다. 4()의 국회의원과 3개 상임위원장 경력을 가진 차지철의 정치 분야 정보보고는 김재규의 정보보다 더 정확한 고급 정보였다. 가장 중요한 정치 정보보고 업무를 차지철에게 빼앗길 형편이었다.  


필자는 1976년 건설부 장관이던 김재규가 중정부장에 임명되는 것을 보고, 만약 1973년 윤필용 장군 모함 사건이 없었더라면 윤필용·손영길 장군과 권익현·정동철 대령 등 인재들이 제거되지 않았을 것이고, 윤필용 제거 음모를 시도한 김재규도 중정부장 자리에 기용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하고 치욕적인 10·26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충격과 슬픔 속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죽음의 지옥훈련

▲1976년 김재규 당시 건설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오른쪽)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듣고 있다. [동아일보]

            

전두환과 차지철의 인연은 1951년 육사 입학시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은 초등학교를 거쳐 5년제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 9월 육사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1차 합격자 명단에는 없었지만 예비후보로 합격하고 1955년에 육사 11기로 임관했다. 차지철은 서울 용산고를 졸업하고 육사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하자 간부 후보생 과정을 거쳐 1953년 장교로 임관한다. 따라서 차지철은 전두환보다 2년 앞서 장교로 임관돼 군에서는 선배이고 나이는 세 살 어렸다.  


육사에 입학한 전두환 생도는 숙소에서 소등 후 등잔불을 밝히고 공부해도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우수 생도가 하는 소대장 생도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고, 군번이 낮아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엔 학업 우수 생도에게 빠른 군번을 줬다. 임관 후에는 선두 주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지녔던 전두환은 1958년 육사 동기들, 그리고 13기 최세창과 함께 새로 창설하는 공수단에 지원한다. 이때 차지철 대위와 만나 인연을 맺게 된다.

 

전두환, 차지철 대위가 더 깊은 인연으로 연결된 것은 1960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특수전 교육에 차출되면서다. 당시 정규 육사 출신으로는 전두환(11), 장기오(12), 최세창(13) 3명이 차출됐고, 일반 장교 출신으로는 태권도(5), 합기도(5), 검도(3)가 도합 13단인 차지철 대위가 차출돼 미국 특수전 교육(레인저 코스)에 함께 참가한다. ‘죽음의 지옥훈련’으로 알려진 이 교육을 같이 받은 전우는 생사고락 속에서 강한 결속력을 갖게 되는데, 전두환과 차지철은 이때 깊은 인간관계를 맺은 것이다.  


공수단에서 끈끈한 인연을 쌓은 두 사람은 1961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다. 차지철은 5·16혁명 한 달 전 친분이 깊던 박종규와 함께 명동의 한 다방에서 박정희 소장을 만난 후 5·16군사혁명에 가담해 최고회의 의장 경호단장이던 박종규 소령과 같이 근무했다. 당시 전두환은 최고회의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둘은 다시 인연을 맺는다. 민정 이양 당시 전두환 대위는 군으로 복귀한 후 1973 1 1일 준장으로 진급해 제1공수여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차지철 대위는 정치인이 돼 4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74년 경호실장이 됐다.  


1974
년 경호실장에 임명된 차지철은 경호업무는 대통령의 신변 보호뿐만 아니라 ‘정권 유지’ 책임도 져야 한다며 경호실을 확대 개편했다. 특히 경호업무는 군 출신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군 출신을 대거 영입해 군단 규모로 경호실을 보강했는데, 경호차장에 육군 소장, 작전차장보에 준장급 장성을 앉혔다. 차지철은 군부 내에 자신의 지지세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육사 11기들을 작전차장보에 보직하기로 하고, 전두환 공수여단장을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앉힌 후 그 후임으로 노태우·김복동 장군을 연이어 보직했다. 이로써 차지철과 전두환은 세 번째로 직속상관과 부하 관계가 된다.

 

차지철의 대권 욕망

당시 주요 정보파트 인사들은 차지철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5·16군사혁명에 참여한 경험에 비춰 자신도 군부의 지원만 받으면 혁명이 가능하다는 대권 욕망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었다. 경호실 차장으로 정병주·문홍구·전성각·이재전 소장 등 우수한 장성들을 기용해 육군 중장으로 승진시킨 후 요직에 앉혔고, 작전차장보로 이광로·전두환·노태우·김복동 준장 등 육사 출신 장군을 기용해 승진시켜 요직에 진출케 한 것은 군부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차지철은 든든한 군부 인맥을 갖추고 김재규 중정부장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위에 언급한 8명의 장성은 차지철 스스로 ‘부통령’ 또는 ‘부각하’가 된 것 같은 영웅심을 갖게 했다. 특히 차지철이 군부에서 가장 신뢰한 인물은 육사 11기 전두환과 노태우 두 장군이었다.  


이들이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면서 차지철에게 맹종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육사의 명예와 권위를 실추시킨 행위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차지철의 그릇된 영웅심리를 키워 자만심에 빠지게 했고, 결국 차지철이 김재규를 넘어서려다가 10·26사건을 유발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말의 역사적 책임이 있다(상자기사 참조).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던 전두환은 1978 1 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필자는 같은 6군단 내 사단인 30사단 보안부대 운영과장을 맡아 30사단장과 인접 보안부대 동료들의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당시 30사단장은 군단장 회의에 다녀오면 필자를 불러 차를 한잔 하자고 했다. 그리고 군단장 황영시 장군과 1사단장 전두환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필자는 그의 말이 보안사령관에게 보고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주된 내용은 “황영시는 군단장 자격이 없고, 전두환은 군단장보다 상위 장군으로 행세하니 군기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 한 예로 군단장이 회식을 준비했는데, 전두환을 제외한 군단 내 모든 장군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이 도착할 때까지 1시간가량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모임 장소에 도착하자 군단장이 입구로 달려가 ‘모시고’ 들어왔다. 회식도 그때서야 시작됐다. 이로 인해 다른 사단장 모두가 군단장을 존경하지 않게 됐고, 군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필자는 이 정보를 사령부에 보고했다.

 

대대장 월북사건

▲1976 12 4일 국회 답변 도중 중앙정보부장 ‘영전’ 이 발표되자 여야 의원들이 김재규 건설부 장관을 축하하고 있다.

 

사단장 보직은 통상 2년이 기본 연한이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사단장 보직 1 2개월 만인 1979년 보통 군단장급인 육군 중장이 보직을 맡는 보안사령관에 전격 등용됐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등용에는 큰 사건이 배경이 됐다.  


1977
10월 중부전선 ○○지역 보병 제20사단에서 GOP 철책선 방어업무를 맡은 ○○연대 2대대장 유모 중령이 사단 내 대대급 전술 평가에서 최하위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제20사단 보안부대는 유 중령이 담당하던 방책선에 구멍이 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1주일 정도 내사했으나 사실 규명이 어려웠다. 보안부대장은 사단장에게 “유 중령 근무 지역 방책선에 구멍이 난 사건이 일어났으니 대대장을 즉시 교체하고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사단장은 대대장에 대한 인사조치 없이 즉시 사단 참모 2명에게 “현장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사단 조사관들이 야간에 62연대에 도착해 “현장 조사를 하자”고 하자 62연대장은 “날이 밝으면 조사를 하자”며 조사관을 사단으로 돌려보내고 유 대대장에게도 날이 밝으면 현장 조사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유 대대장은 20사단 보안부대의 내사에 압박을 받아오던 중, 사단에서 현장 조사가 나온다는 통보를 받자 처벌이 두려워 월북을 결심했다. 날이 밝자 대대장 지프에 통신병을 태우고 북방 한계선 가까이 가서는 운전병과 통신병에게 같이 월북할 것을 강요했고, 운전병이 이를 거절하자 다리에 총을 쏴 운전을 못하도록 하고는 통신병과 함께 월북했다.  
 


즉각 상황을 보고받은 보안사령관 진종채는 1차로 청와대에 “전방 20사단에서 대대장 유○○ 중령과 통신병이 행방불명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북괴에 납치된 것 같다”고 상황보고를 했다. 그가 ‘허위보고’를 한 것은 북한에 대한 대응책과 우리 군의 사기를 고려해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관계기관과 협의한 후 사건 전말을 보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6 12 4일 국회 답변 도중 중앙정보부장 ‘영전’ 이 발표되자 여야 의원들이 김재규

건설부 장관을 축하하고 있다. [동아일보]

 

, 군 관련 報告 독점

그런데 중정과 육군본부에서는 “납치된 것이 아니라 보안부대원의 책임 추궁 압력에 못 이겨 자진 월북한 사건”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보안사의 보고와 두 기관 보고 내용을 검토한 차지철은 격분했다. 그는 “내일 아침 대통령께 보고한 후 보안사령관을 허위보고 죄목으로 구속해야 한다”고 했다.  


복기(復棋)해보면, 철책선에 구멍이 뚫린 것을 발생 즉시 보고하지 않은 채 내사를 한다며 1주일 정도 시간을 허비한 점, 철책선이 뚫린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점, 보안부대장의 지휘 조언처럼 대대장의 보직을 변경한 후 조사를 하지 않은 점이 대대장 월북 사건을 만든 것이다.  


진종채는 차지철의 견제와 독선으로 대통령에게 직접 정보보고를 하는 데 많은 제약을 받던 중 이 사건이 발생하자 그마나 간간이 하던 대통령 독대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보안사령부의 군 관련 각종 보고서는 차지철에게 보고되고,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종합 보고하는 시스템이 굳어졌다.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은 군 관련 보고를 보안사령관이 직접 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었다.  


김재규는 이 사건을 기화로 1978년부터 보안사 기능을 축소하고 중정이 보안사를 직접 통제 관리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보안사 기존 편제인 ‘정보처’를 ‘방산처’로 바꾸고 모든 민간인 정보업무를 금지했으며 민간인은 국방부 관련 방산업체만 출입토록 했다. 그 동안 보안사 요원이 군부대 내에서 사복 근무를 하도록 한 것을 바꿔 군복을 입게 하는 등 보안사의 업무와 위상을 위축시켰다. 진종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79
3월 초, 차지철이 진종채를 경질할 작정을 하고 1977 10월 진종채가 대통령에게 ‘허위보고’한 내용을 들춰내 이를 보고하려는 준비를 했다. 박 대통령이 이 사실을 보고받으면 진종채가 처벌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긴박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런 상황을 감지한 필자의 친구가 “급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밤 12시가 지난 후 청와대 근처 효자동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를 만나 한 시간가량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보니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보고해 진종채 장군을 구속하라는 지시를 받아낼 수도 있어 진 장군이 매우 걱정됐다.  


필자는 대화를 마치고 육사 근처 묵동에 있는 사령관 숙소로 향했다. 새벽 2시가 좀 넘은 시간에 진종채 장군을 깨워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아침 일찍 청와대에 들어가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전 각하께 먼저 보고드릴 수 있도록 수행비서관과 협조해놓았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보안사령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도 했다. 진 장군은 “내일 아침 사건에 대해 자세한 보고를 드리고, 보안부대원이 관련된 사건인 만큼 보안사령관인 내가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軍 장악 술수

그날 퇴근 후 필자는 다시 진종채 사령관을 찾았다. 진 장군으로부터 내용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1975년부터 4년이나 보안사령관을 맡아 수고했으니 자리를 옮길 때가 됐다”며 2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했고, 후임에는 제1사단장인 전두환 장군을 전임시키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윤필용 장군 사건으로 우수한 장군들이 제거되어 적절한 인물이 없기 때문에 전두환 장군이 수혜자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청와대에 2인자로 자리를 굳힌 차지철은 군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자신과 가까운 인물을 보안사령관 자리에 앉히려는 계획을 실현한 꼴이 됐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 것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실추된 보안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차지철과 관계가 좋은 전두환을 추천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차지철이었다.  

 

필자는 1970~80년대 보안부대에서 정보 보안 업무를 담당하면서 군 장교들과 장성들의 군인정신, 국가관, 애국관을 평가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할 정신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는 군인으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으로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다. 그리고 장성이나 대전복(對顚覆) 중요 부대장의 개인적 가치관과 애국심은 더욱 중요하게 평가했다. 가치관과 애국심에 대한 평가 기준은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개인적이고 이기주의자인가, 아니면 이타적이고 공익과 민족과 국가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욕망이 어느 정도인가다.  


필자가 보안사에서 ‘옐로 카드’(인사기록카드)를 작성하면서 군인들을 평가한 경험에 의하면, 정상적인 군인은 오직 군과 국가를 위해 성실하고 충실하게 복무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어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으며 대통령이 될 기회가 와도 이를 거절한다. 다른 부류의 군인은 개인의 이득 추구는 물론 이를 이용해 정치적 욕망을 달성하려고 세력을 형성하고, 무리를 짓고, 여건만 되면 쿠데타를 해서라도 대권을 잡으려는 욕망을 가졌다.
 

김재규 목 죈 차지철

▲10·26 사건 현장검증에서 김재규가 전속 부관 박흥주의 권총을 뺏어 드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동아일보]

 

전자에 속한 장성으로는 윤필용, 진종채, 정승화, 장태완, 손영길, 정호용 등을 꼽을 수 있다. 후자에는 김재규, 김형욱, 강창성, 차지철, 전두환, 노태우 등이 있다. 후자는 군인이 된 후 지속적으로 정치적 욕망을 키우며 대권욕을 불태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기회 있을 때마다 정적을 제거하려고 권모술수, 음모, 암투를 마다하지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  


비록 공인의 범주에 드는 이들이긴 해도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여러 사람의 종합적인 평가여야 하며, 이를 공개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 수도 있다. 필자는 대권욕을 가졌느냐를 기준에 두고 주관적으로 평가한 것임을 밝힌다. 필자와 다른 평가를 하는 분들의 이해를 구한다. 필자가 경험한 인물 가운데 존경할 만한 인물은 진종채, 정치적 욕망이 없고 순수한 군인이기를 바랐던 인물은 정호용이다.  


1974
년 경호실장으로 임명된 차지철은 박종규 전임 실장과는 달랐다. 경호실장은 대통령의 신변뿐만 아니라 정권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며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모든 문건은 사전에 경호실장에게 제출하라고 강요했다. 문건에 독극물이 있는지를 조사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1978년 들어 차지철은 중정부장의 대통령 직접 보고도 방해하기 시작했다. 차지철이 정치 관련 보고를 독점해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 했기 때문이다. 4선 의원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정부장보다 더 정확한 정치 보고를 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그는 경호실장 밑에 두고 활용한 ‘이규광 정보팀’(육사 3기 이규광 전 헌병감이 지휘해 붙은 이름)을 통해 백두진 제10대 국회의장 선출 정보와 김영삼(YS) 의원 제명 관련 정보를 수집해 보고했는데, 여기엔 김재규의 보고보다 더 정확한 내용이 담겨 김재규의 입지를 위축시켰다


1979
10 20, 김재규는 부마(釜馬)사태와 관련된 보고 또한 잘못됐다는 문책을 받았고, 차지철은 ‘신민당이든 학생이든 탱크로 밀어붙이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김재규는 중정의 고유 업무를 차지철에게 빼앗긴 데다 차지철이 부마사태 처리까지 언급하자 그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고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10 26일 거사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10·26 일주일 전 새벽

▲1979 10월 부마항쟁 당시 부산 중구 중앙동 부산시청 앞에 계엄군이 출동해 있다. [사진제공·민주공원]

 

10·26 사건 발생 일주일 전 새벽 1시경, 성남 공군비행장에서 총리 전용기 편으로 김재규 중정부장이 부산으로 출동하는 범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현장에 나와 있었고, 필자도 보안 업무를 위해 현장에 나가 있다가 비행장에 도착한 김재규와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을 봤다. 김재규는 술에 취한 것 같았고, 무척 격앙된 표정이었다. 공항에 영접 나온 누구에게도 인사를 하거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박흥주는 필자와 506보안부대에서 영등포팀장과 마포팀장으로 함께 근무해 친한 사이였지만, 그와도 눈인사만 건넸을 뿐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분위기였다. 비행기가 준비될 순간까지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김재규 일행은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 정병주 사령관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박 대통령과 김재규, 차지철이 회식 중에 부마사태 해결 방안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더군. 차지철이 ‘강력하게 대처해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데 중정부장이 미온적으로 대처해 문제가 더 커지고 있다’며 김 부장을 몰아붙였다는 거야. 그러자 박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안일하게 대응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고 당장 현장에 달려가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한 거지. 그래서 김재규는 술자리가 끝나자마자 곧장 총리 전용기를 타고 부산으로 출동한 거라네. 


김재규가 부산으로 떠난 다음 날 아침 “특전사령부와 서울지역 예하 3개 여단은 기차편으로 부산으로 출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필자도 특전사령부 지휘부와 함께 부산으로 출동했다. 지휘부는 한성여대(현 경성대)에 자리 잡았고, 예하 여단은 부산대와 동아대 등에 주둔해 시위를 진압했다
 

민주화 위해 거사한 영웅?

1주일쯤 지나자 부산지역 시위는 진압됐다. 이어 10 27일에 1개 여단을 마산지역으로 출동시키기 위해 사전 준비를 하던 중 10·26 사건이 발생했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필자는 정병주와 함께 군 헬기편으로 급거 상경했다. 정병주는 차지철의 부하로 경호실 차장을 하다가 중장 진급과 함게 특전사령관으로 영전했고, 김재규와는 동향(김은 경북 선산, 정은 경북 영주) 선후배로 아주 친밀한 사이여서 큰 충격을 받았다.  


1979
년 늦가을은 그렇듯 긴박하게 흘러갔다. 10·26 이후 정부의 공식 발표와 김재규 변호사들의 주장은 엇갈렸다. 먼저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 대통령을 살해한 행위가 ‘계획된 거사’인지 우발적인 사건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진실은 뭘까. 필자는 김재규가 오래 전부터 마음의 준비는 해왔지만, 당일 행위는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본다.  


김재규가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에게 당일 현장에서 거사에 관해 알린 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일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박흥주에게 미리 알렸더라면 그날 밤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박흥주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어떻게든 사건을 막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사 후 삼일고가도로를 달리던 승용차에서 김재규가 박흥주에게 ‘중정과 육군본부 중 어디로 갈까?’ 하고 물었다는 대목도 이 사건이 계획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만약 육군본부로 가지 않고 남산 중정으로 가서 군 지휘관을 호출했다면 상황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김재규가 민주화를 위해 거사를 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런 얘기가 나온 것은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들이 김재규에게 그렇게 주장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재규가 사건 후 육군교도소로 이감됐을 때 투입된 보안부대 소속 비밀 감시원들은 김재규가 자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만큼 그는 삶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고 몇몇 반정부 성향 변호사들과 면접한 뒤부터 김재규의 언행은 180도 달라졌다. 구치소에서 자신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독재자를 살해한 영웅’이라고 큰소리를 치며 삶에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필자는 김재규 변호인 중 한 사람으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강신옥 변호사를 서교동 호텔에서 만났다. 필자는 그에게 김재규가 재판 말기에 ‘민주화를 위해 독재자를 사살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개입됐다’고 발설한 것은 김재규의 변호사들 중 일부가 김재규에게 ‘교육’을 시킨 내용이지 사실이 아니라고 조언했다. 강 변호사도 김재규를 살리기 위해 변호사들이 노력해보는 것일 뿐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기억한다


10
·26사건 이후 차기 대권의 향방을 놓고 여러 가능성이 대두됐다. 여권에서는 야당에 정치활동을 허락하면 정국은 극도로 소용돌이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과도 정부의 대통령은 최규하 총리가 대행하고 다음 대권은 김종필 공화당 총재에게 돌아가는 것이 순리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12·12사태가 발생하고 1980년에 접어들자 다음 대권이 김종필에게로 가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된다. 권력의 추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6]회는 결번

[7] 12·12쿠데타 전말 - 전두환〈보안사령관〉, ‘보안사령관 교체’ 정보에 정승화〈계엄사령관〉 전격 체포

● 보안사 명예회복 나선 전두환, “정병주 감시 잘해”

● ‘김재규 비호’ 정승화, 全과 일촉즉발

● 정승화 “조기 수사종결” vs 이학봉 “정승화 연행”

● 특전사령관실 수백 발 총격전, 김오랑만 허망하게…

 

1979 3월 제1사단장 전두환 소장이 보안사령관으로 전격 등용되자 군은 물론, 청와대와 정치권에도 충격적인 인사로 비쳤다.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정규 육사 출신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긴 하지만, 사단장 경력 1 3개월 만에 중장이 지휘하는 군단장급 직위에 보직된 데다 보안사령관의 실질적 권력 서열이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이어 4위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부의 위상과 파워는 최악이었다. 전임 진종채 사령관은 ‘선비형 장군’으로 1975년부터 4년간 조용히 군 보안업무에 주력했고, 보안사령부의 파워나 권위, 명예를 높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두환의 5인방

▲1974 12 1일 정병주 특전사령관(오른쪽)이 부대장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뒤편 왼쪽에 전두환 1공수단장, 노태우 9공수단장이 서 있다. 5년 뒤 정 사령관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체포된다.

 

권력기관의 장이 대통령과 자주 만나 특별한 임무를 받곤 하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차지철은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하던 정보 보고를 자신에게 하도록 했다. 보안사령관에게 대통령 대면 기회를 주지 않으니 보안사 파워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77 10 20사단의 대대장이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에게 일반 정보업무를 직접 맡지 못하게 압력을 넣으면서 중정의 통제를 받게 했다. 이 때문에 보안사령관은 경호실장과 중정부장 양쪽으로부터 견제를 받는 처지가 됐다. 결국 보안사는 일반 정보업무를 취급하던 정보처를 폐지하고 방산처로 이름을 바꿔 민간인 대상 정보 수집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민간인은 방위산업 관련 인사만 접촉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악조건에서 등용된 전두환은 우선 보안부대에 우수 인재를 보강하면서 하나회 소속 육사 16~18기 중심으로 참모진을 꾸렸다. 보안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허화평 대령(17)을 비서실장에, 같은 기수 허삼수 대령을 인사처장에, 대공 수사업무에 정통한 이학봉 대령(18)을 대공처장에 기용해 ‘3인방’을 형성하고, 여기에 오랜 심복인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장세동 대령(16) 33대대장 김진영 대령(17)을 합해 ‘5인방’을 핵심으로 자기 세력을 확고히 구축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부의 권위와 파워 형성에 신경을 쓰면서 참모들에게는 계엄 선포 시 보안사가 어떻게 정국을 바로잡고 수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시국 수습방안 연구’를 시켰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박 대통령을 대면할 준비를 하면서 대통령에게 김재규와 차지철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건의를 하려고 마음먹었다.  


1979
4월 필자는 전두환을 직접 만나 지시를 받았다. 허삼수가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부임 후 인사명령이 있었는데, 이때 필자는 ‘30사단 보안부대 운영과장을 마치고 503 대구 보안부대로 부임하라’는 인사명령지를 받았다. 기왕이면 고향과 가까운 경북 안동 36예비사단 보안부대장으로 가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사령부를 막 나오려는데 전 사령관이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사명령 보고를 했더니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김 소령, 이번에 대구로 가지 말고 특전사령부 보안반장으로 가면 좋겠어. 중령 진급 예정자 중 여러 명을 검토해봤는데 김 소령이 제일 적합한 것 같아 그러는 거야. 특전사 반장은 매우 중요한 자리야. 내가 그 부대 출신이니 내 체면을 봐서라도 특전사 반장 임무를 잘 해줘야 해. 그리고 중요한 임무가 있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잘 지켜봐야 해. 특전사령관은 요직이야. 그런데 매일 테니스나 치고, 부하들과 술이나 먹고, 훈시는 5분도 못할 만큼 소신도 철학도 없는 지휘관은 잘 살펴봐야 해.  


전두환은 참모들에게 검토시킨 ‘계엄 시 보안사의 역할에 관한 연구’ 결과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1979 10 18일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부마항쟁)가 발생하자 부산 보안부대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었고, 이어 10·26사건 직후에도 합수부를 설치했으며, 1980 5 27일 광주 도청 탈환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출범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전두환이 박 대통령을 면담해 차지철, 김재규에 대해 건의하려던 날짜는 10·26 직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확인되진 않은 사실이지만, 필자는 전두환이 충분히 그런 건의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본다.

육군참모총장 vs 보안사령관

1979 10 26일 오후 7시경 총격 현장에 있던 비서실장 김계원은 사건 발생 즉시 청와대 경호실에 비상을 걸고 경호실 병력을 현장에 출동시켜 대통령과 차지철의 신병을 확보해야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긴 뒤 비서실에 도착한 김계원은 8 40분 경호실 차장 이재전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 내가 관련돼 있으니 더 알려고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는 범인 김재규 체포를 방해한 죄목으로 사건 발생 3일 후인 10 29일 구속됐다. 12 20일 계엄 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 7명과 함께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 종사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며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2년 형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사건 당일 김재규의 요청으로 현장에 와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사건 직후 김재규와 함께 육군본부 B-2 벙커로 향했다. 그는 김재규가 요청한 대로 계엄사령관직을 수행하면서 8 5분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 출동을 금지시키는 ‘불법 명령’을 내렸다. 8 10분에는 수경사령관 전성각 소장에게 전화해 “앞으로는 참모총장의 명령만 받아라. 지금 즉시 출동 준비를 하라. 사령관은 즉시 B-2 벙커로 오라”고 했다. 또한 노재현 국방장관의 지시로 김재규를 체포한 전두환에겐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지시했다.  


정 총장은 전두환이 김재규를 체포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구속할 무렵 최규하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계엄사령관에 임명됐고, 동시에 전두환은 정승화에 의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전두환은 정승화를 체포해야 한다고 직감했지만, 정승화가 직속상관이 되면서 이를 실행하기 어렵게 됐다. 갈등의 씨앗은 그렇게 싹을 틔웠다.  


합수부가 김계원을 구속한 10 28일 정승화는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수사관을 총장실로 보내라”고 지시했고, 10 29일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총장실에서 이학봉 합수부 수사국장 등으로부터 조사를받았다. 이후 10 31일과 11 1일 등 모두 3차례 조사 받았다. 그는 조사를 받던 중 수시로 군 수뇌부 인사를 서울로 호출한 뒤 자신이 10·26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강조했고, 전두환에게 “수사를 빨리 종결하라”며 채근했다
 

죽느냐, 죽이느냐

▲1979 11 19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등 3군 총장을 동석시킨 가운데 국방부 현황 보고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그러나 이학봉은 11 2일 전두환에게 정승화 연행 조사를 건의했고, 전두환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이를 건의했으나 노 장관은 “시국이 불안해진다”는 이유로 수락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정승화가 노재현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행보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필자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11월 초 정승화는 최규하 총리를 과도정부 대통령으로 모시자고 노재현과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화당에서 김종필 총재를 과도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공화당 사무총장 길전식과 정책의장 장경순에게 압력을 넣어 김종필의 대통령 출마를 막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결국 최규하는 12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12 21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따라서 전두환이 최 총리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과도정부 수립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 정승화는 그 기세를 몰아 김재규의 사형판결을 면하게 하려고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신임 수경사령관과 자주 접촉하는 정황이 포착됐다. 김재춘 전 중정부장이 육사 5기 동기생인 정승화를 만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1963년 쿠데타를 주도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들을 조심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합동수사본부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눈치챈 정승화가 12 9일 노재현과 골프를 치면서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서 다른 보직으로 전출시키기로 합의했다는 정보가 보안사령부에 포착됐다.  


죽느냐, 죽이느냐. 결전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전두환은 이학봉에게 12 12일에 정승화를 연행하라고 명령했고, 정승화 체포 시각에 맞춰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승낙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국방장관(노재현)의 결재가 있어야 승낙하겠다며 버텼다. 한참 후 노재현이 나타난 뒤에야 장관과 대통령의 결재를 받았다. 정승화를 연행한지 8시간이 지나 대통령 사후 결재를 받은 것이다.  


12
12일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서울 신촌 모처에 만찬 초대를 받았다. 필자는 정 사령관이 수경사령부 제5헌병 대대장 조홍 대령의 장군 진급 축하 만찬에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함께 초대받아 참석한다는 것을 보고하고 퇴근했다.  


그런데 8시경 비상령이 발동됐다. 특전사 보안반으로 달려가니 정승화 체포와 정병주의 반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8 30분경 하달된 지시는, 신촌에서 식사 중이던 정병주가 특전사로 갈 예정이니 도착하면 보안사로 모셔 오라는 것이었다.  


9
시경 특전사에 도착한 정병주는 약간의 취기가 있었고 매우 흥분돼 있었다. 도착 일성은 제1여단장 박희도 장군과 제3여단장 최세창 장군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두 여단장은 30대대장실에 가 있었기에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자 정병주는 부사령관 이순길 장군과 인사처장 강리건 대령, 헌병대장 등 3명에게 “1여단으로 가서 출동을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1여단의 무장을 해제하고 출동을 저지할 것, 1여단에 배속된 병력 수송용 차량을 경기 부천의 9여단으로 보내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9여단장 윤흥기 장군에게는 즉시 출동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1여단의 임무를 9여단에 맡기고 1여단의 발을 묶어놓으라는 얘기였다.

 

“정병주를 체포하라”

▲신군부 쿠데타가 벌어진 1979 12 12일 밤 서울 한강대교 교통이 차단돼 강남으로 가려던 차들이 발이 묶였다. [동아일보]

필자는 특전사 상황을 보안사 상황실에 보고하는 한편, 작전참모 신우식 대령과 함께 정병주에게 “보안사령관과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정병주는 화를 내면서 “당신들, 나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거지?”라며 몰아붙였다. 필자는 “아무 일도 하는 것 없습니다. 단지 보안사령관으로부터 모셔 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무렵 109 보안부대장 김정룡 대령이 정병주와 독대하고 보안사령관에게 가자는 제의를 했으나 정병주는 거절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정병주는 1여단 부여단장 김기룡 대령에게 5, 6차례 전화를 걸어 1여단 차량을 9여단으로 보내라고 했다. 김 대령은 정병주에게 “1여단은 수경사에 작전 배속된 부대라 특전사령관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 더 이상 부당한 지시를 하지 말라”며 맞섰고, 정병주는 부하의 합법적인 항변에 아무 말 못하고 전화기를 던져버렸다.  


이 일화는 군에서 작전 배속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회 5공 청문회 때 많은 국회의원이 작전 배속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고, 특히 5·18 당시 작전 배속에 따른 군 지휘체제를 이해하지 못해 여러 오해를 일으킨 바 있다.  


한편 윤흥기 9여단장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라는 정병주의 명령에 병력을 이끌고 부평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 상황을 사령부에 보고하는 한편 9여단 보안반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프로 막든지 길에 드러눕든지 출동을 막아야 한다”는 통보를 전했다. 1여단과 9여단이 충돌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던 중 9여단 보안반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출동한 부대의 선두로 달려가 9여단장과 보안사령관의 통화를 연결했고, 이어 9여단이 원대 복귀했다고 전했다.  


오후 11시가 되자 1여단과 3여단은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정병주를 따르는 예하 여단장은 없었다. 정병주는 자신과 자주 통화하던 참모총장(정승화)과 수경사령관(장태완)이 체포됐다는 소식에 사기가 떨어진 듯 보였다. 특전사령부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잠시 후 30대대에서 1여단으로 복귀한 박희도 여단장은 병력을 이끌고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기 위해 출동했고, 3여단장 최세창은 오전 0 5분경 특전사령관실에 도착했다. 최세창은 “정병주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은 터였다. 최세창은 지금이라도 보안사령관을 만나러 가자며 마지막으로 권고했으나 정병주는 거절했다. 최세창이 사령관을 면담하고 나올 때 필자가 사령부 건물 현관에서 “설득이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저으며 무거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령관실 총격전

/1979 12 13일 동아일보 1.

 

/1979 12 24일 박진수 국방부 대변인이 12·12사건 전모를 발표하고 있다. [동아일보 ]

 

0 5분 정병주는 보안사에서 자신을 체포하러 온다며 사령부 5분 대기조 출동을 명했다. 0 10분 필자가 특전사령관 비서실에 들어가니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권총 탄창에 실탄 7발을 장전하고 있었다. 내가 “김 소령, 오늘 같은 날엔 권총을 차고 있으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어요. 나 봐요, 오늘은 총을 안 찼잖아요. 그리고 실탄 7발로 어떻게 한다는 거요? 실탄 장전은 안 하는 게 좋겠소”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김 소령은 “상황이 아주 급박합니다. 5분 대기 소대 출동 지시를 했고 보안사에서 곧 밀어닥칠 겁니다” 하고는 황급히 사령관 집무실로 들어간 뒤 안쪽에서 문을 잠갔다. 그것이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필자가 비서실을 나오는 순간, 3공수여단 박종규 중령이 10여 명의 장병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비서실엔 아무도 없었다. 박 중령이 사령관실 문을 열려고 했으나 안에서 잠겨 있었다. 박 중령이 “출입문 손잡이에 사격하라”고 지시하자 3명의 장병이 M16 소총으로 출입문을 향해 수십 발을 발사했다.  


그때 앞쪽에 있던 3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김오랑 소령이 문 안에서 권총을 쏜 것이다. 필자는 뒤로 약간 물러나 있었는데, 필자의 무릎 근처를 스쳐간 탄알 한 발이 벽에 맞으면서 시멘트가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간,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특전사 5분 대기 소대가 현장에 도착하면 보안부대원인 필자와 부대원들이 오해를 받아 불상사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4명의 부대원을 데리고 2층 사무실을 빠져나왔고, 그들을 지프 주차장에 피신토록 했다. 필자는 2층을 훤히 볼 수 있는 나무에 올라 정병주의 연행 장면과 김오랑 및 부상을 당한 3여단 장병들이 현장을 벗어나는 상황을 지켜봤다.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1980 3 5일 재판부의 신문을 받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동아일보]

그 후 2층 현장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보안반 전화기는 불이 났다. 나무에서 내려와 박기정 상사를 앞세우고 특전사 옆문에 다다르자 5분 대기조 소속 병사가 우리 일행에게 “손들어!”를 외쳤다. 다급해진 박 상사가 “나, 보안반 박 상사야!” 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필자가 “작전참모 신우식 대령에게 보안반원들을 건물 안에 들여보내도 되는지 확인해보고 문을 열어달라”고 했더니 잠시 후 한 병사가 문을 열어줘 보안반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혈압이 높았던 박 상사는 자신의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 코피를 냈다. 상황은 그만큼 긴박했다. 보안사는 “사령관실 현장을 수습하고 특전사 병력 출입을 통제하라”고 지시했다


현장(사령관 집무실)을 확인해보니 정병주도 2발을 발사했다. 자신도 왼팔에 2발의 총탄을 맞았다. 사령관 내실 입구에 쓰러져 피를 쏟는 김오랑을 부둥켜안고 있다가 총에 맞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현장에 들어서니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수백 발의 탄흔으로 사무실은 벌집이 돼 있었고, 총알 자국이 있는 M16 3정이 사무실 집기와 뒤엉켜 있었다.  


의무실에 전화해 정병주와 김오랑의 생사를 확인했다. 정병주는 생명에 지장은 없고 응급치료 후 국군병원으로 실려 갔다. 김오랑은 6발을 맞고 피를 많이 흘려 사망했다고 했다. 사령부에 이를 보고한 후 2발이 발사된 정병주의 권총과 7발이 모두 발사된 김오랑의 권총, 특전사 병사들이 사용한 M16 3정을 수거해 보안반에 보관하고 현장을 수습했다


1979
12 13일 아침 6시 뉴스는 “특전사에서 정병주 사령관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진압군을 향해 먼저 발포하면서 저항해 진압군이 정당방위 끝에 희생됐고, 이 과정에서 3명의 장병이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김오랑은 최세창의 부하인 박종규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인 사격으로 피살됐고, 이 과정에서 정병주도 왼팔에 총격을 받았다. 계엄군 측에선 장교 1명과 2명의 병사가 부상을 당했다.  


12
13일 오전 7, 신임 특전사령관으로 50사단장 정호용 장군이 부임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필자는 보안사령부 3층 수사과에 가서 정병주 사령관의 피 묻은 상의에서 지휘관 흉장과 견장을 떼어내 특전사로 가져왔다. 8시경 새로 부임한 정호용 사령관에게 이를 전달하면서 어젯밤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리고 ‘피살된 김오랑의 시신을 조용히 가족에게 인계하되, 부대장()을 치르거나 국립묘지에 안장해선 안 된다’는 보안사의 지시 내용을 보고했다.  


이 보고를 받은 정호용은 “부대 내에서 부하가 상관을 체포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인 것은 잘못된 일이고, 김오랑은 목숨을 바쳐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훌륭한 군인이며 부당하게 피살당했기에 부대장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보안사의 지시를 보고받고도 소신 있게 말하는 정호용을 보고 훌륭한 군인정신을 지닌 인물임을 알게 됐고, 동시에 보안사 지시도 거스를 만한 파워를 가진 인물임을 알게 됐다.  


보안사에서 요구한 김오랑의 부대 내 장례 및 국립묘지 안장 불가 지시는 결국 정호용의 확고한 의지로 묵살됐다. 당시 김오랑은 반란군의 부하로 인식됐다. 따라서 보안사 지침을 무시한 이 같은 조치는 여느 지휘관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정호용의 소신과 의지가 워낙 확고한 터라 보안사에서도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김오랑은 매사에 모범이 되는 장교였다. 최후의 순간에 보여준 것처럼 군인정신이 투철했을 뿐 아니라 아내 사랑도 지극했고, 부모에 대한 공경심 또한 남달랐다. 그는 필자와 거의 매일 점심식사를 같이했는데, 한번은 필자에게 아내에 대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했고 눈도 잘 안 보이지만 부모가 정해준 배필이기에 극진히 사랑합니다. 이렇게 하는 게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995 12 2일 시민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국민 성명을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동아일보]

 

, 김오랑…

 

장례식장에서 김오랑의 부인과 흙 묻은 농부 옷차림 그대로 참석한 형들이 오열하는 광경을 보고는 문상 온 장병들 모두 흐느껴 울었다. 김오랑과 정이 많이 든 필자는 그와 마지막으로 대화할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실탄 장전을 말리지 않아 목숨을 잃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2011
12 12일 ‘김오랑 중령 기념사업회’의 연락을 받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김오랑 중령 31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씨의 끈질긴 민원 제기 끝에 그는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됐다). 그 자리에서 그의 육사 25기 동기생들과 특전사 출신들이 뜻을 모아 특전사나 육사에 김오랑의 비석을 세우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 후 필자가 바라던 곳은 아니지만 그의 고향 마을에 흉상이 세워졌고, 2014 1월 정부가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해 뒤늦게나마 명예가 회복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필자는 12·12사건 당시 특전사 현장에 있다가 겪은 일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무엇보다 12·12 다음 날인 12 13일 부임한 정호용에게 전날 밤 상황을 사실 그대로 보고한 것이 문제가 됐다. 보안사에서 공식 발표한 것과 다른 ‘진실’을 보고했기 때문이다.

 

▲김오랑 중령의 장조카가 2001 12 10 12·12 22주기를 앞두고 국립묘지를 찾아 김 중령의 묘석을 닦고 있다. [동아일보 ]

 

정호용은 부임 후 처음 주재한 여단장 회의에서 최세창 3여단장에게 “보안사로부터 정병주 사령관을 모셔 오라는 지시를 받았으면 조용히 모셔 가야지, 부대 안에서 총격 사건을 일으키고 김오랑을 희생시킨 건 잘못된 조치”라고 주의를 줬다. 이 때문에 필자는 보안사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보안사에서 언론에 발표한 대로 보고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보고해 최세창이 정호용으로부터 주의를 받게 되는 분란을 일으킨 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허삼수는 “(12·12사건에)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앞으로 예의 주시하겠다”고 경고했다. 또한 김오랑을 국립묘지에 안장해선 안 된다는 지시가 이행되지 않아 또 한 번 그의 미움을 샀다. 이후에도 하나회 핵심 인사들과 충돌이 잦았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필자는 1980 10월 강제 전역지원서를 쓰고 군을 떠나야 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필자는 오랜 세월이 흐른 1993 9 16일 한 주간지에 김오랑 소령 피살 사건을 ‘특전사 군인들이 먼저 발포했다’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어떻게든 김오랑의 명예를 살려주고 싶었다 

[8] 신군부 ‘집권플랜’ 1980년 벽두부터 가동 - “다들 내가 대통령 해야 한다는데…”(전두환)

● 보안사 여론조사→창당 자금→중정부장서리→5·17

JP가 야당 편들자 군부, “새 대통령 후보 찾아라”

● 보안사 비밀 여론조사…‘전두환 대통령’ 압도적

● ‘창당 자금 180억’ 메모지 허화평에 전달

● 풍운아 허문도, 일본 기자들에게 ‘언론 공작’

▲1981 1 15일 열린 민주정의당 창당 및 전두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동아일보]

 

부마항쟁과 10·26, 12·12사건이 수습되고 1980년 새해가 밝았다. 


군부는 1월부터 최규하 대통령 이후의 정권 향방에 관심을 보였다. 긴급조치 9호 위반자와 시국사범에 대한 복권이 이뤄지자 재야 세력은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며 유신헌법에 의해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복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 가두시위가 잇따랐다. 김대중(DJ) 씨가 이끄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 5 22일을 시한으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등 극한 대립구도가 형성됐다.  


결국 군부가 개입해 5·17 계엄확대조치를 실시하면서 DJ 등 재야 세력을 체포했다. 유신정권의 부정축재자들도 구속했다. 다음 날 광주시민과 학생들이 DJ 석방과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5·18이 발생했고, 3개월 후 전두환 장군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을 열었다. 필자도 이 드라마틱한 과정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비운의 특전사 보안반장

1979 12·12사건으로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보안사령부에 연행된 다음 날인 12 13일 대구 50사단장을 하던 정호용 장군이 특전사령관에 보직됐다. 그때까지 그의 참모 대부분은 정병주 장군 사람들이었다. 특히 보안사, 계엄사, 중앙정보부 등 여러 정보기관에서 매일 사령관에게 전달되는 비밀 문건 등을 관리할 정보참모가 마땅치 않자 정 사령관은 필자에게 정보 업무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필자는 정 사령관에게 정보보좌관 겸직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아야 가능하니 보안사령관에게 건의해 허가를 받아달라고 했다. 특전사를 방문한 전 보안사령관은 필자에게 정보보좌관 업무를 겸직하라고 지시했다. 필자는 “정보보좌관 겸직이 혹여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보안처장과 109보안부대장에게도 지시해달라”고 요청했다.  


필자의 기본 임무 중 하나는 정호용 사령관의 동향을 매일 보안사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고 내용 대부분이 보안사령관(전두환)과 관련된 동향이어서, 이런 고급 정보가 장병들에게 노출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런 의견을 전했더니 전 보안사령관은 “정 사령관에 관한 일일 보고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전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필자는 신임 노태우 보안사령관으로부터 곤혹스러운 일을 당한다. 정 사령관에 대한 일일 정보보고를 안 했다는 이유로 ‘업무 태만’이라는 지적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6개월간 하지 않던 동향보고를 3일 만에 180건을 작성해 보고했는데, 이로 인해 노태우 사령관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리고 특전사령관의 정보보좌관 임무를 수행한 것은 1980년 말 강제전역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허삼수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은 1980년 말 필자가 중령으로 진급하자 노 보안사령관에게 사실과 다르게 필자가 ‘(인민군)부역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강제 예편시키라고 했다. 허 비서관은 필자가 전역한 지 2주 만에 자신이 관장하는 특수수사대로 필자를 연행해 구금하려다 불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하자 풀어줬다. 이 일을 겪은 후 필자는 미국으로 피신하는 신세가 됐다.  


김재규를 살려내려는 군내 김재규 계열 장군들이 12·12를 통해 제거된 후 새해를 맞았다. 모든 사람의 관심은 최규하 대통령이 이끄는 과도 정부가 끝난 후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될지에 쏠렸다. 김종필(JP) 공화당 총재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되는 가운데 DJ가 재야 인사들과 함께 정치를 재개하면서 김영삼(YS) 씨와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었다


최 대통령이 취임한 후 JP는 유신헌법 개정을 주장하던 DJ에 동조하면서 자신은 더 이상 여당이 아니고 야당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 그러자 군부 내에서 JP가 차기 대통령감이 못 된다는 비판이 대두됐다. JP를 비롯한 이후락, 박종규 등 유신정권의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도 일었다. JP 대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전두환 집권 위한 여론조사

▲1980 5 9일 신민당사 4층 강당에서 열린 김영삼 총재 기자회견.

 

군부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0·26을 수습했으니 자신의 말대로 군으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현실 정치에 뛰어들 것이냐’에 관심이 집중됐다. 보안사 전체 장교들을 대상으로 이와 관련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때 필자는 ‘전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돼선 안 되고, 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조사 결과 ‘전 사령관이 군에 복귀하지 말고 차기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보안사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와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은 필자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필자는 사령관실로 불려갔다. 이런 대화가 오갔다.  


전두환 전 보안 부대원들이 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데, 김 소령만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네. 그 이유가 뭐요?  


필자 사령관님께서 복귀하지 않고 최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다면 사람들은 최 대통령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JP, YS, DJ 등 대통령이 되려고 오랜 세월 준비해온 사람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순리대로 풀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후일 어려움이 따를 겁니다. 이번 기회는 포기하고 군으로 돌아가셔서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도 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다음 정권이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면 국민이 ‘전두환 장군이 나와야 한다’며 나설 겁니다. 10·26사건 조사를 통해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분이라는 것은 국민도 알게 됐으니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이 되는 게 합당하다고 봅니다


전두환 정호용 장군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소?  


필자 이것은 보안부대 내부 여론조사라 제 개인 생각을 보고한 겁니다. 정호용 장군은 이번 여론조사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전두환 그래, 잘 알겠소. 근무 잘하시오.  


전 사령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그의 대권욕이 확고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정치적 혼란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통령이 등장해 혼란을 수습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떻게 집권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봤다.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후환이 따른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12·12를 일으킨 허씨들(허삼수, 허화평)과 합동수사본부 요원들, 그리고 ‘하나회’ 회원들 간에는 전 사령관을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묵시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필자는 정국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보안사령관과 주변 추종자들의 움직임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DJ와 재야 정치권의 투쟁

▲1980 2 29일 복권 소식을 들은 김대중 씨가 자택에 몰려든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동아일보]

 

재야 반체제 인사들 중에는 김재규를 옹호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김재규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라고 공공연하게 평가했고, DJ와 그 추종세력은 유신헌법 폐기와 차기 대통령선거를 위한 정치 일정을 공개하라며 적극적인 공개 투쟁을 전개했다.  


1979
11 10일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헌법에 따라 3개월 안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 헌법 개정 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재야에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를 반대, 유신헌법 즉각 폐지, 거국내각 구성, 조기 총선 실시를 요구했다. 11 13일 신민당 총재인 YS가 이를 지지하고, 여당인 공화당 총재 JP도 이에 가담하자 군부에서는 JP의 ‘배신 행위’를 규탄했다.  


1979
12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은 12 8일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위반자 68명의 형 집행을 면제했다.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1978 12월부터 가택연금 중이던 DJ가 이 조치에 따라 풀려났다. 아울러 재야 정치인들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했고, 최 대통령이 1980 2 29 DJ 등 시국사범 687명을 복권 조치하자 정국은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헌법 개정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국회는 1979 11 26일 개헌특위를 설치하고 국회 주도의 헌법 개정을 추진했고, 공화·신민 양당은 1980 2 9일 직선 대통령중심제, 4년 임기의 1차 중임제 헌법 시안을 확정하고 이를 국회 개헌특위에 제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무분별한 정치 과열 현상을 용납할 수 없다”고 정치권에 경고했다. 신민당은 1980 3 15일 민주화촉진대회를 열어 정부의 헌법 개정 심의기구를 해체하라고 촉구하고 그러지 않으면 중대 결단을 하겠다며 계엄사령부를 압박했다. 재야 세력을 대표하는 DJ는 민주화투쟁을 선포하는 한편 “정부가 유신 세력을 주축으로 신당을 구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 대통령은 대통령 담화문을 통해 “애국적 견지에서 자제와 화합으로 대동단결해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자”고 당부했다. 그리고 10·26사건 이후 중지된 중앙정보부 기능을 정상화하기 위해 전두환 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해 국내 정치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확보해줬다.  


DJ
는 이런 기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학 순회 연설에 나섰다. 4 29일에는 DJ가 주도하는 ‘국민연합’이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포한 뒤 반정부 장외투쟁을 본격화했다. 5월 중순 그 세력이 전국적으로 10만 명을 넘어서자, 5 22일을 기해 정국을 뒤엎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그러자 기회를 엿보던 군부는 1980 5 17 0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발표하고 DJ를 포함한 재야 인사들과 여권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을 구속하기에 이른다. 다음 날 광주에서 DJ 석방과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면서 5·18이 터지게 된다. 

 

창당 후원금 180

▲1980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중정 간부들. 오른쪽부터 허문도 비서실장, 이종찬 총무국장, 김만기 감찰실장, 김성진 기획조정실장, 김영선 2차장, 서정화 1차장. [사진제공·이종찬]

 

12·12사건이 일어날 때만 해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대통령이 되려는 의도는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1980년에 들어서면서 JP DJ 편을 들며 유신헌법을 부정하자 군부 내에서는 새로운 기류가 형성됐다. 신당을 만들어 JP의 대안을 찾자는 것이었다.  


1980
2월 초 정호용 사령관이 “전 보안사령관이 정당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자금이 필요한 것 같더라. 자금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필자가 “전 사령관이 정치를 하려면 중앙정보부장직을 겸하는 것이 좋고, 창당 자금도 중앙정보부 자금을 활용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했더니 “그래요? 그 문제는 얘기해보겠다”고 했다. 필자는 “자금을 알아보긴 하겠지만, 내가 이야기한 후 자금을 대겠다는 분들이 정 사령관과 직접 대화를 해야 성사될 것 같으니 자리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사실 이 대화를 하기 전, 훗날 국회의원이 된 H씨와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출신의 P씨를 정 사령관에게 소개해 함께 식사하면서 창당과 관련한 얘기를 나눈 터였다. 중견기업인인 J 회장과 P 대표와도 저녁식사를 하면서 비슷한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은 후원금을 낼 의사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며칠 후 P씨는 필자를 만난 자리에서 “100억 원을 후원하겠다”고 했고, J 회장은 50억 원, 친구인 P 대표는 30억 원의 후원금을 내겠다고 했다. 필자는 이 내용을 정 사령관에게 보고했고, 다음 날 아침 그가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러 갈 때 후원자들의 인적 사항과 연락처, 그리고 후원 금액을 정리한 메모지를 건네면서 신신당부했다.  


“이 메모지는 전 사령관에게 직접 전달해야 합니다. 자금이 안 쓰이게 될 경우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니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특히 전 사령관에게 보고하기 전 허화평 비서실장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전 사령관이 중정부장을 겸하게 될 경우 외부 자금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박모 씨가 서울 여의도에 있는 빌딩을 팔아 80억 원 상당의 정치자금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유의하시고…. 


그런데 정 사령관은 보안사령부에 가서 여러 일을 보다가 필자의 당부를 잊고 180억 헌금 메모지를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에게 주면서 “자금이 필요하면 이분들에게 연락해 활용하라”고 말한 뒤 특전사로 귀대했다. 필자는 그 얘기를 듣고 ‘큰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을 했다. 허 비서실장 등 ‘허씨’들은 정 장군이 전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거나 그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필자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돕겠다는 사람을 범죄자로…”

 

3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P씨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허 비서실장이 내게 ‘내일 아침 10시 이전에 한국을 떠나라, 그 시간 이후에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체포하겠다’고 한다. 지금 특전사로 갈 테니 정 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 


필자는 즉각 이를 정호용 장군에게 보고하면서 “우리가 도움을 요청했고, 그래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분을 범죄자로 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책임을 지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정 사령관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이상의 잡음을 막으려면 허 비서실장의 말대로 출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는 허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P
씨는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있냐”고 화를 내면서 다음 날 아침 7시 서울 한남동 소재 국일관에서 정 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보고 과정에 문제가 생겼고, 심각한 오해가 생겨 난처하게 된 것 같다”며 그를 설득했지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 보안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허 비서실장이 정 사령관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이 일화는 5공 세력이 1980 2월 창당하려고 준비한 것이 분명함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전 보안사령관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정치공작’이 시작됐다는 증거다. 이 사건 이후 창당 자금 후원 얘기는 잠잠해졌지만, 5공 군부 세력의 집권 공작과 창당 작업은 계속됐다. 1981년 초 5공 군부에 의한 민주정의당(민정당) 창당과 그 2중대인 민주한국당(민한당) 창당은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에 의해 주도된 부끄러운 역사다.  


10
·26사건으로 위축된 중앙정보부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북한의 도발이 우려되고 재야 세력의 반정부 활동이 격렬해지면서 정국이 불안해지자 중정 기능을 살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최 대통령은 1980 4 14일 전 보안사령관에게 중정부장서리를 겸직하게 했다. 확인된 건 아니지만, 1980 2월 필자가 정 사령관에게 전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을 겸하는 게 좋다고 말한 것이 전달됐고, 3월 한 달 동안 노력한 결과 겸임하게 된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전 사령관은 북한 관련 정보는 물론 국내외 정치·경제·사회 문제 전반의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됐고, 이를 조정하고 수사까지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혜성처럼 등장한 허문도

▲1988 11월 국회 언론청문회에서 대질 신문에 답변하는 필자 김충립 씨(왼쪽)와 허문도 씨. [동아일보]

 

전 사령관이 중정부장서리를 겸직할 때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있으니 바로 허문도 중정부장서리 비서실장이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일본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1979년 일본영사관 공보관으로 근무했다. 보안사 인사처장인 허삼수 대령, 수경사 33대대장 김진영 대령과 부산고 동기생으로, 이들의 추천으로 중정부장 비서실장에 발탁된 후 ‘스리 허’의 한 사람으로 허화평과 허삼수에 버금가는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필자가 처음 그를 대면한 것은 1980 4월 중순경이다. 정호용 사령관에게 보직 인사를 왔을 때였는데, 그는 자신이 썼다는 ‘창조적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논문을 정 장군에게 건넸다. 언론인 출신이지만 전두환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은 군 출신 인사들보다 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의 첫인상은 매우 당돌해 보였고 큰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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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뒤 정 장군을 다시 방문한 자리에서 그는 “언론 통폐합안을 브리핑하고 조언을 구하려 한다”고 말했다. 정 장군은 “김충립 소령이 보안사에서 정보를 오래 맡은 사람이니 같이 듣고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필자도 언론 통폐합안 브리핑을 함께 듣게 됐다.  


그는 자신의 중요 업무 중 하나는 대한민국 언론을 개혁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등의 외신기자를 초대해 전두환 사령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인데, 앞으로 외신기자들을 특전사에 데려올 계획이니 잘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한 시간 남짓한 브리핑을 듣고 난 정 사령관은 매우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 필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언론 개혁이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언론기관이 너무 많고 기자들의 횡포가 심해 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언론 개혁은 민주주의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안은 민주주의 정치 발전을 저해한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특히 한 도()에 하나의 신문만 허용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최소 둘은 돼야 서로 견제하며 보도할 수 있다. 이것 말고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 XX가 헛소리하고 있어”

 

정 사령관은 “언론 통폐합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문제이니 시간을 갖고 보완하는 것이 좋겠소. 김 소령(필자)은 정보장교 경험도 많으니 같이 의논해 새로운 안을 만들어보는 것이 좋겠소”라고 제안했다. 이에 허 비서실장은 “지금 바로 의논하자“고 해 차를 함께 타고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로 갔다.  


호텔에 도착하자 허 실장이 “커피숍에서 좀 기다리면 방을 준비하고 연락하겠다”며 사무실로 올라갔다.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당신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기에 “프라자호텔에 있습니다. 정 장군 지시로 허 비서실장과 언론 통폐합안을 의논하려고 왔습니다”라고 답했더니 “이 XX가 헛소리하고 있네. 너는 누구 부하야? 그리고 정 사령관은 언론법에 관여할 자격이 없어. 당장 부대로 돌아가! 그러지 않으면 근무지 이탈로 체포하겠어” 하고 호통을 쳤다.  


필자는 그제야 허삼수와 허문도가 이 호텔에서 함께 언론 통폐합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언론 통폐합을 5공 핵심 인사들이 주도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특전사에 복귀해 정 장군에게 “언론 통폐합에 관해서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다. 또한 허씨들이 정 장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보고했다. 정 장군이 12·12사건에 직접 가담한 사람이 아니고, 전두환 사령관과 밀접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의 견제를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허씨들이 진행하려던 언론 통폐합 건은 정 장군의 반대로 6개월간 끌다가 1980 11월 실행됐다. 내용 대부분에 허 비서실장의 원안을 반영했고, 이로써 민주주의 정치 발전이 20년쯤 후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자 1000여 명이 강제 해직됐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88 11월 국회 문화공보위원회 언론 통폐합 관련 청문회가 시작됐다. 언론 통폐합을 누가 주도했는지를 놓고 1주일 정도 갑론을박을 하고 있을 때,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필자는 민주당 김동영 의원에게 “귀국해서 청문회에 나가 누가 언론 통폐합안을 만들었는지 증언하겠다”고 제의하고는 청문회 증인으로 나갔다. 청문회 마지막 날 저녁 정대철 위원장의 요청으로 필자는 참고인으로 출석했고. 허화평·허삼수·허문도·이학봉 등 증인들 앞에서 “언론 통폐합은 허문도 씨가 주도했고, 정 사령관은 이에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全 대통령 만들기’ 해외공작

언론 통폐합 외에 허문도 비서실장언의 또 다른 과제는 자신이 일본특파원으로 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일본 언론인들을 초청해 신군부의 동정을 알리고, 전두환 사령관을 해외에 알리는 것이었다. 일본 기자들을 특전사로 초청해 한국군의 막강한 군사력을 홍보할 때 필자도 동석했다. 허 비서실장은 전 사령관이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분이라 군부는 물론 일반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 일본 언론에 전 사령관에 대한 기사가 실리더니, 곧 “대한민국 다음 대통령은 전 사령관이 될 것”이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내 신문은 “일본 언론은 전 사령관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며 인용 보도했다


차기 대통령 관련 보도는 허 비서실장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문화공보위원을 거쳐 문화공보부 차관, 청와대 정무비서관, 국토통일부 장관을 지낸다. 오랜 기간 전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허화평·허삼수 대령은 1980년 청와대에 입성해 각각 정무수석, 사정수석비서관으로 일하다 1982년 말 청와대에서 밀려났지만, 허문도 비서실장은 5공화국 7년 내내 중책을 맡은 핵심 인사로 전두환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는 언론 통폐합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수많은 언론인을 강제 해직당하게 한 과오를 저지르고도 사과하지 않았다

 

[9] ‘노태우 의리 테스트’ 술상 뒤엎은 김복동

5·17 계엄확대는 계획된 거사…전두환 政敵 제거

● ‘부정축재자’에 박정희 끼워 넣은 사연

● 정호용이 사양한 보안사령관 자리, 노태우에게

● 사령관 축하연에서 盧에 상석 권한 정호용

● 고건 靑 수석 “건설부 장관 하고 싶다”

▲1991 6 29일 방미 중인 노태우 대통령이 미국 스탠퍼드대 연설에 앞서 정호용 전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동아일보]

 

최규하 국무총리는 1979 10·26사건 40일 후인 12 6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셈이었다. 이틀 뒤 긴급조치 위반자 68명에 대한 형 집행을 면제하고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다. 그리고 1980 2 29일 김대중(DJ) 등 시국사범 687명을 복권하고 학생 373명의 일괄 복학을 허가했다


복권된 DJ가 주도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과 재야세력은 복학생들과 연계해 3개월간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1980 4 29일에는 민주화촉진운동 전개를 선포하고 장외투쟁을 본격화하는 등 최규하 정부와 정면 대결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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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서울대 복학생대회를 시작으로 6일까지 대학생 수만 명이 모여 시위와 철야농성을 하며 계엄 해제를 요구했고, 7일에는 30여 명의 내외신 기자를 모아놓고 민주화촉진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튿날 전국 총학생위원장단이 반정부 시위를 결정하자 전국 39개 대학에서 일제히 이를 결행했고, 정부와 군부는 긴급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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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에는 전국 80개 대학에서 10만여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서울시내는 치안 공백 상황에 이르렀다. DJ의 국민연합은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고 19일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할 것을 요구하면서 22일 정오를 기해 대정부투쟁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사실상 대정부 최후통첩이었고, 곧 새 정부가 들어설 것 같은 분위기였다

 

폭풍전야, 1980 5

▲1980 5 20일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5·17조치를 격렬히 비난하자 신군부는 그를 가택 연금했다. [동아일보]

정부와 군부는 이 같은 상황을 방치할 경우 무법천지의 무정부 상태로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특단의 대책을 궁리했다. 정치권도 혼돈스러웠다. 여당인 공화당은 집권당이 아니라 야당이 됐고, 김종필(JP) 총재의 대망론도 수그러들었다. 


이에 앞서 4 14일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하면서 정치권은 전두환 사령관에게 장악돼갔고, 군 내부에선 DJ가 정권을 잡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확고해졌다


시국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자 최 대통령은 4 27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학원 소요사태에 강력 대응해 국가기강을 바로잡으라고 지시했다. 장외투쟁이 격화되자 군부대가 서울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이 계엄사령관은 인천 부평에 있던 특전사 9여단을 서울 지역 수도군단에 배속했다. 5 7일에는 전방 특전사 13여단을 서울 거여동으로 이동시켜 대학가 소요 진압을 준비했다. 강원도에 있던 특전사 11여단은 경기 김포로 이동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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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김종환 내무장관은 경찰 능력으로는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으니 군 병력을 투입해줄 것과 국가 주요시설 경계를 군부대가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학원소요 근절 대책 수립을 지시했고, 권정달 정보처장에게는 시국 수습 방안을 수립해 보고하라고 했다. 4월 말에 특전사 예하 여단들이 폭동 진압을 위해 서울 근교로 출동한 것 말고도 5·17 계엄확대조치가 사전에 이미 준비됐음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있다.

 

계획된 5·17 비상계엄확대

가령 이런 것이다. 특전사 소속의 한 중위가 DJ의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전화를 해 “특전사 군인들의 광주지역 출동이 임박했다. 군인들이 광주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는 전화를 한 것이 보안사령부 감청에서 드러났다. 보안사는 필자에게 “동교동에 전화를 건 장교를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예하 여단의 광주 출신 장교가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특전사 부대 내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모두 폐쇄했다.  


필자는 1980 5 17일에 DJ를 검거한다는 사실도 미리 알았다. 5월 초 토요일 필자는 충남 홍성지원 박상선 판사의 초청으로 친구 8명과 부부 동반으로 1 2일 충남 온양의 도고호텔로 여행을 갔다. 아내를 동반하지 않은 필자와 친구 P회장이 같은 방을 썼다.


그런데 1972년 대선 때 DJ의 홍보 비서를 맡은 바 있는 P회장이 “다음 대통령에 DJ가 당선될 것을 확신한다. 내일 찾아가 인사하고 500만 원을 드려야겠다”고 했다. 5 17 DJ가 구속될 것을 알고 있는 필자는 P회장을 말렸으나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우리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친구들이 우리 방으로 몰려왔다. 필자는 “P회장이 500만 원을 들고 DJ를 찾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건 죽느냐, 사느냐 생사가 걸린 문제다. 너희들이 좀 설득해봐라”고 한 뒤 호텔 방을 나왔다. 친구들의 간곡한 설득에 P회장은 뜻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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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계엄확대조치 1주일 전 특전사 작전참모 장세동 대령과 박중환 작전과장, 병사 등 5명이 광주에 출동했다. 필자의 방에 들른 장 대령에게 지갑에 있던 용돈 5만 원과 보관 중이던 비상식량을 챙겨줬다. 군부 핵심 인사들이 5·17 계엄확대조치에 대비해 광주지역 폭동진압 작전계획을 세우기 위해 작전팀을 출동시킨 것이다. 이는 특전사령부 작전 실무팀들이 전투교육사령부 광주지역 계엄사령부로 작전 배속이 됐다는 의미이고,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은 광주 사건에 작전지휘권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3가지 사례는 5·17 계엄확대조치가 사태 수습을 위해 당일 군 지휘관회의 결의에 따라 이뤄졌다는 군부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조치가 100% 집권 욕망에 의한 ‘의도적 시나리오’라고 매도해선 안 된다. 국가 보위를 위해 언제쯤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인지를 사전에 예상하고 필요한 대책을 세우는 것은 정부와 군이 해야 할 당연한 임무다. 따라서 5·18에 대한 평가는 모두가 한발씩 양보하면서 총체적인 화해와 용서에 나서야 한다.

 

박종규 “나를 제물 삼아라”

5 13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이학봉 수사국장은 학원 시위 근절을 위해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국민연합 및 복학생 조직 민주청년협의회, 전국총학생회장단 핵심 간부에 대한 사법처리를 단행한다. 5 15일에는 권정달 정보처장과 협조해 학생 소요 배후인물인 ‘국기문란자’와 3공화국 정부 ‘부정축재자’ 명단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고, 다음 날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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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일 시위 주도 학생들에게 군이 출동할 것이라는 정보가 전해지자 학생들은 시위를 자제했다. 군부는 5 17일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소집해놓고 있었다. 학생 소요가 잠잠해지자 계엄을 확대할 명분이 사라졌지만, 학생들의 동향을 예의 관찰하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역 앞에서 학생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경찰 2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5 17일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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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10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청와대로 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국비상계엄 확대, 국기문란자와 부정축재자 검거,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등을 건의했다. 최 대통령은 국기문란자와 부정축재자에 대한 조사는 재가하고, 국회 해산 안건은 부결했으며, 국보위 설치 안은 보류했다. 이에 따라 DJ는 오후 11시경 자택에서 체포됐고, 김상현 전 의원은 다음 날 오전 4시 제주도의 친지 집에서 체포됐다. 김영삼(YS) 신민당 총재는 5 20일 가택 연금을 당했다.  


보안사는 JP와 이후락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10여 명을 연행했고, 중앙정보부는 국기문란자로 DJ,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인명진, 이영희 등 26명을 연행 조사한 후 이들 중 24명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관련자’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전두환 정권 수립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여야 인사들을 5·17 계엄확대조치로 정치권에서 제거해버린 것이다. 이후 5·18의 진행 과정은 잘 알려진 대로다.  

 

‘부정축재자 박정희’

▲1980 5 17일 열린 전군지휘관회의. 신군부는 계엄확대, 국회해산, 국보위 설치 등을 역설했다. [동아일보]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국기문란자와 함께 검거한 것은 반정부 시위자들의 요구를 들어준 측면도 있지만, 유신 정권 권력자들을 심판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차기 정권 수립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컸다. 당시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전 보안사령관 측에 유신정권 인사인 자신을 제물로 삼아 JP와 이후락을 사법처리한 뒤 전두환이 정권을 잡도록 조언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로 확인됐다. 1981 1, 북한에서 석탄을 싣고 인천항으로 들어온 재일교포 나카야마 야스지(한국명 박영수)가 박종규 전 경호실장과 접촉하는 과정에서다. 박영수는 북한에서 산 석탄을 중국을 경유해 인천항으로 들여와야 했으나, 박 전 실장의 힘을 믿고 곧장 인천항으로 입항했다.  


이 문제를 예의주시하던 필자는 박 전 실장과 수차례 만났고, 그 과정에서 그로부터 앞에 기술한 얘기를 듣게 됐다. 박영수는 이후 한국프로사이클연맹 회장으로 있으면서 한국에 경륜사업을 도입하려고 하다가 무산되자 1994년 한국 정·관계에 50억 엔 로비를 했다고 폭로한 인물이다.  


당시 정치권에선 5·17 계엄확대조치가 일종의 ‘무혈 쿠데타’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전 보안사령관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계엄사는 3공 시절 권력형 부정축재 조사 대상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을 포함시켰다. 박 대통령을 부정축재자로 조사한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필자가 “새로운 지도자를 부각하려는 의도로 이미 서거한 전직 대통령을 조사한다는 것은 인륜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실제로 조사할 경우 (큰딸인) 박근혜 양을 조사하겠다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즉각 시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다음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을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1년 어느 날, 필자는 이학봉 당시 수사국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거론한 경위를 물었다. 그는 “언론에서 의도적으로 박 대통령을 추가한 것이지 우리가 발표한 것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발표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유가족에게 큰 충격을 줬고, 이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측근들에게 배신감을 갖게 된 것은 확실해 보였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6 18일 “5 17일 검거한 부정축재자 처리 결과, 이들은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정치 활동을 일절 하지 않을 것이며, 국회의원직을 자진 사퇴한다는 조건으로 형사처벌은 유예하고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헌납한 금액은 JP 216억 원, 이후락 194억 원 등 총 853억 원이다. 이들은 공직 및 국회의원직 사퇴서가 수리된 후인 7 2, 구속된 지 46일 만에 석방됐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최규하 대통령은 7월 중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사의를 표한 뒤 8 16일 하야했다. 정치권에서는 전 사령관의 압박으로 최 대통령이 물러났다는 여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광주 시민과 학생들은 DJ 등 재야인사를 구속하고 YS를 가택 연금시킨 데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정부와 군부의 예상대로 이들이 5·17 계엄조치에 항거해 DJ를 석방하라며 거리에 나서자 특전사 병력이 투입됐다. 진압 과정에서 퇴로를 열어주지 않고 모조리 검거하려는 특전사 병력의 과잉 진압에 광주 시민들은 예비군 무기를 들고 맞섰고, 전남도청은 학생과 시민군에 의해 점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광주 연락 임무라도…”

▲1980 5 20일 신군부는 임시국회 개원일에 맞춰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의원들의 출입을 막았다. 신민당 황낙주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은 이에 항의하다 계엄군에 의해 의사당 정문 밖으로 밀려났다. [동아일보]

 

한편 서울 거여동 특전사령부에는 정적이 흘렀다. 예하 여단이 광주 등 예하 부대로 작전 배속된 후 사령부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보안반장(필자) 등 일부 지원부서가 남아 있었다. 상황실에는 예하 여단의 일일 상황보고만 있을 뿐 작전 상황은 결과만 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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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침 상황실에 “어젯밤 행방불명된 병사의 시체가 인근 하수도에서 발견됐는데,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러한 인사 사고는 작전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정호용 사령관이 대처해야 했다. 필자는 “이 사건은 광주사태 수습과 부대 사기를 위해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급부대 지휘관(중대장, 대대장)이 상급부대(여단장, 사단장, 지역관할 계엄사령관) 지휘관의 승낙을 받아 병사 개개인의 생명보호 차원에서 실탄을 지급했고, 군인들은 실탄 지급을 발포 명령으로 인식해 5·18의 희생이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앞서 5 10일 특전사 작전참모 장세동 대령과 작전과장 박중환 중령 등 작전팀이 광주로 떠나고, 5 16일 예하 모든 여단이 타 부대로 작전 배속되자 정호용 사령관은 아무 임무 없이 특전사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병사 실종 사건’ 발생 3~4일이 지난 시점에 ‘북한의 광주 사건에 관한 방송을 보고 유무선이 감청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겼다.  


필자는 정호용 사령관에게 육군의 유무선 통신을 억제하고, 광주에 연락 임무를 띠고 헬기로 현장을 다녀와서 계엄사령관과 보안사령관에게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권을 잡는 것이 사실상 확정된 데다, 정 사령관은 1979 12·12 때도 이렇다 할 역할이 없었으며, 광주 사건과 관련해서도 아무런 역할 없이 사무실을 지켰다가는 후일 곤란을 겪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마침 북한군의 보안 감청이 우려됐기에 정 사령관이 군의 유무선 통신을 중단시키고 광주 현장과 계엄사·보안사 간에 연락 임무라도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정 사령관은 육군항공대에서 헬기 2대를 지원받아 광주를 다니면서 연락 업무를 하게 됐다.  


그런데 사건 발생 8년 후 노태우 대통령 집권 시기에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가 열리자 5·18의 책임자로 정호용 장군이 지목됐다. 이후 그는 ‘발포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하지만 그는 5·18 당시 작전 지휘를 할 자격과 권한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광주 현장에 머물지 않고 헬기로 광주 현장에 다녀오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정호용 사령관은 당시 31사단장이던 정웅 소장의 증언에 의해 광주 사건의 원흉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대권 물려받을 수도 있는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매우 밀접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군인 시절 노태우 장군은 전두환 장군의 책사(策士) 노릇을 했고, 1978년 노 장군이 전 장군의 뒤를 이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물려받았으며, 12·12 때 협력했고, 1980 8월 후임 보안사령관, 1988년엔 후임 대통령이 돼 정권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들은 내면적으론 불편한 관계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두 사람은 특히 노태우 장군이 대통령이 된 뒤부터 적대적 관계로 변했다. ‘신동아’ 6월호에 실린 전두환·이순자 인터뷰에 따르면 이순자 여사는 “대통령직을 마친 후 백담사로 들어갈 때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생명의 위험을 느꼈다”고 한다. -노의 사이가 실제로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두환은 단순하면서 외향적이고 선이 굵은 보스 기질로 신의를 중시하는 반면, 노태우 장군은 두뇌가 비상한 조조 같은 인물이었다. 이기적이고 내성적인 성품으로 명예욕과 시기, 질투심이 강해 손위처남인 육사 동기 김복동 장군에게도 경쟁의식을 가졌다. 이에 대해서는 전두환뿐 아니라 동기생 손영길, 정호용 장군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김복동 장군 가족 역시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최근에 확인할 수 있었다.  


1980
6월 중순 전두환 장군은 후임 보안사령관 자리를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제안을 받은 정 사령관은 “노태우가 있지 않으냐”며 사양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대권을 이어받을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호용 사령관은 이 제안을 받은 후 고심하면서 필자와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다. 정 사령관은 노태우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군인의 길이 아닌 옆길(정보부대)로 나가지 않겠다는 소신이 있었다. 필자는 “의리보다는 국가 장래를 생각해 더 중요한 보직을 맡아 헌신하는 게 바람직하고, 보안사령관이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자리가 아니다”고 설득했다. 한 번은 작심하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이댔다.  


“정 사령관이 이 자리를 거절하면 보안사령관이 된 노태우는 앞으로 당신의 앞길을 막으면서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거다. 계속 당신을 견제할 것이다. 이건 생사가 달린 결정이고 이 자리가 다음 대권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하시라.

 

, 보안사령관직 사양

3주쯤 지난 1980 7월 초, 정 사령관은 마지막 제안을 또 거절했다. 다음 날 아침 정 사령관은 필자에게 “어제 전두환 장군과 보안사령관직에 대한 결말을 냈는데, 보안사령관 후임을 노태우에게 양보했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토록 여러 번 간청했는데 정말 섭섭하다. 이젠 나도 죽고 사령관도 다 끝났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필자의 언행에 놀란 그가 옷깃을 붙잡았다. 정 사령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전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저와 이야기했던 것 어떻게 조치가 되었습니까. 


“당신이 안 하겠다고 해서 노태우에게 통보했는데 왜 그러지요? 
 


“….  


“아, 왜 그러냐니까….  


“알겠습니다. 그냥 여쭤본 겁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필자는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정 사령관이 “노태우 장군이 내게 그렇게 나쁘게 할 사람이 아니야. 당신이 잘못 생각했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필자는 그에게 “그럼 노태우를 ‘의리 테스트’로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테스트’에는 김복동, 노태우, 정호용 장군과 김윤환 전 의원 등 경북고 동기생들이 참여했다. 이 모임의 최상급자는 1973년 준장으로 진급한 김복동 장군이었다. 그의 여동생 김옥숙 씨는 노태우 장군의 부인. 따라서 손위처남이자 최상급자인 김복동 장군이 상석에 앉는 게 당연했다. 필자는 정 사령관에게 노태우 장군의 우정과 의리를 테스트하기 위해 이렇게 해보라고 조언했다.  


“정호용 사령관이 노태우 보안사령관 취임 축하를 위해 4명의 동창생을 음식점으로 초대하고, ‘오늘은 노태우 보안사령관 영전을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으니 노 사령관이 김복동 장군보다 상석에 앉는 것이 좋겠소’라고 제안하라. 이때 노 사령관이 김 장군에게 상석을 양보하면 필자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고, 만약 김복동 장군을 무시하고 상석에 앉는다면 필자의 말이 맞는 것이다.

 

술상 뒤엎은 김복동

▲1981 5월 업무보고에 앞서 고건 농수산부 장관과 악수하는 전두환 대통령. [동아일보]

 

정 사령관은 “노태우가 보안사령관이 됐다고 김복동 장군을 제치고 상석에 앉을 리가 없어”라고 했다. 주말 저녁 서울 한남동 ‘향교’에 정호용, 김복동, 노태우, 김윤환 4명이 앉았다. 정 사령관이 노 사령관에게 상석을 권하자 그는 두말없이 상석에 앉았다. 상관인 김복동 장군이 하석에 앉게 된 것을 확인하고 나는 음식점을 떠났다.  


김복동 장군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전두환 사령관보다 군번이 빨라 정규 육사 출신 중 제일 상관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전 사령관에게 한 번도 ‘형님’이라고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몇 시간 후 밤 늦은 시간에 음식점 마담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김복동 장군이 상을 뒤엎는 바람에 술자리가 난장판이 돼버렸어요. 실장님(김충립)이 오셔서 정리를 좀 해주세요….  


다음 날 아침 정호용 사령관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는 보안사령관직을 노태우 장군에게 양보한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기미도 역력했다. 이 술자리가 있은 지 3주 뒤 노태우 사령관은 10·26사건의 책임을 물어 김복동 장군(10·26 당시 경호실 작전차장보)을 전역시키려 했지만, 정호용 사령관이 나서 김 장군을 육사 교장으로 승진 발령나도록 도왔다. 2012년 봄 정호용 장군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당시 노태우를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것을 후회한다. 그때 당신(필자) 권유대로 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비슷한 시기, 기억에 남는 인물이 고건 전 국무총리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내각을 구성하고 있을 때 필자는 정 사령관에게 “국민통합과 5·18사건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내각을 짤 때 호남 인사 3, 4명을 장관으로 임명하도록 건의하라”고 조언했다.  


며칠 후 정 사령관은 “좋은 분이 있으면 찾아보라”고 했고, 필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어 고건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을 추천받았다. 그의 경기고 동창인 조내벽 라이프그룹 회장이 자리를 주선해 정 사령관, 김윤환 전 의원과 함께 음식점에서 상견례를 했고, 고 수석은 입각에 동의하면서 건설부 장관을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정 사령관은 전 보안사령관과 의논한 결과 그를 교통부 장관에 임명할 것이라고 했고, 필자는 이를 고 수석에게 전달했다. 이외에 필자는 목포 출신 박성철 씨 등의 추천을 받아 최영철, 이도선 씨 등을 추천했는데, 최영철 전 의원은 5공화국 시절 국회의장을 지냈다

 

 10호 결번

[11] 5·18 발포명령 진실 ‘병사 사망사건’ 증언이 열쇠

● 北, 5·18 작전 실시간 보도…軍 무선 통제

● 구타 사망 특전사 병사 부대원 증언 나와야

2017 5·18 기념식에서 광주-5共 화해 기대

▲1988 12 7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호용 당시 의원.

 

‘신동아’ 9월호에서 언급했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희생자 단체와 광주시민들은 5공 세력에 대해 발포명령자를 밝힐 것과 진정한 사과를 요구한다. 그들 대부분은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발포명령자요, 총 책임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인식한다. 반면 전두환, 정호용 두 사람은 “우리는 발포명령자가 아니며, 5·18이 일어났을 때 군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진영의 주장은 36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맞부딪친다. 5·18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이던 필자는 그날의 진실에 비교적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필자가 알고, 보고, 행했던 역사적 사실만 ‘신동아’ 연재 수기를 통해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훗날 역사학자들이 필자의 기록을 보고 그날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필자가 정호용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1979 12 13일이다. 전날 특전사령관이던 정병주 장군이 연행되고, 50사단장이던 정호용 장군이 특전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다. 필자는 이후 1년 넘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보고하고, 때로는 그를 보좌하는 자리에 있었다

 

5공 핵심과 불편한 사이

정 사령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는 개인적으로는 친구 사이였지만, 5공 핵심 인사들과는 불편한 사이였다. 19804월에는 언론 통폐합을 반대한 일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으로부터 노골적인 비난을 받았고, 그런 와중에 5공 세력의 좌장이요 핵심인 장세동 대령이 특전사 작전참모로 부임하자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1980 5월 초 정국이 소용돌이치고 사회가 혼란해지자 5·17 계엄확대 조치에 따른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특전사 예하 여단은 서울 경기 인근 부대로, 7여단은 광주지역 교육사령부로 작전 배속됐다. 따라서 특전사령관은 예하부대를 타 부대에 작전 배속시킨 후 특전사에 홀로 남았고 아무 임무도 맡지 않았다


물론 특전사령관이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1979 10월 부마사태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직접 3개 여단을 이끌고 부산 한성여대(현 경성대)에 지휘부를 설치했고, 예하 여단은 부산대, 동아대 교정에 주둔시켰다. 필자도 특전사령부와 함께 이동해 한성여대에 출동한 바 있다. 


그런데 5·17 계엄확대 조치 때는 예하 여단을 전국적으로 분산 배속시켰기 때문에 정호용 사령관에겐 특정 임무가 없었다. 이 때문에 5·18 광주 작전 때는 처음엔 7여단이 31사단에 작전 배속됐고, 사태가 확대되자 3여단이 추가로 배속됐다


정 사령관이 구체적 임무를 받지 못한 것은 △12·12 주역이 아닌 사람이 특전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보직됐고 △보직 후 4개월 동안 5공 핵심 인물들이 추진하는 일에 비판적이거나 반대했고 △평소 “군인은 군인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인 듯하다. 5공 핵심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그에게 임무를 주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일종의 ‘왕따’였다.


당시 나는 계엄사와 보안사,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등 각종 정보기관에서 배포하는 1일 정보보고와 북한 동향, 예하 여단에서 사령부 상황실로 보고한 내용을 취합해 보고했다. 광주에서 진압작전이 시작된 후 정 사령관은 “시위대가 도주할 길을 열어줘야지, 가둬놓고 모두 체포하려 하면 안 된다. 국군이 적군 대신 국민을 향해 발포하는 사태가 일어나 안타깝다”며 눈물을 보인 적도 있다. 


내가 올리는 여러 정보보고 중 정 사령관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북한 관련 보고였다. 북한이 광주 상황을 오판하고 도발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5·18 초기 북한 방송은 허위 선전 일색이었지만, 1주일쯤 지나자 국군의 작전 상황까지 포함된 내용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광주-서울 연락업무 건의

▲1980 5 21일 광주 투입 공수부대의 발포 직전. [동아일보]

 

이와 관련해 필자는 두 가지 경우의 수에 대해 정호용 사령관에게 설명했다.  


“우리나라에 침투해 모르스 부호를 이용해 보고하는 고정간첩 30여 명 중 많은 숫자가 광주지역으로 이동해 활동하거나, 북한이 국군의 유무선 통신을 감청해 정보를 입수한 뒤 방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국군의 유무선 보고를 줄이고 광주와 서울 간 헬기를 통한 연락체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건의했다.


5·17 계엄확대로 김영삼(YS), 김대중(DJ) 등 재야 정치권 인사들과 김종필(JP) 총재를 포함한 3공화국 인사 대부분이 검거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집권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정 사령관님은 12·12에 참여하지 않아 실세들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광주 상황 수습과정에서 아무런 임무도 맡지 않고 사무실만 지키고 있어선 안 됩니다.  


마침 정보기관에서 북한의 국군 유무선 감청에 대응해 광주와 서울 간 연락업무 체계를 연구하는 중이니, 육군 항공대 헬기를 지원받아 광주를 오가면서 연락업무를 맡는 게 좋겠습니다.  


정 사령관이 흔쾌히 동의하자 필자는 보안사령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광주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 단시일 안에 매듭지어질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최근 북한 방송 내용이 우리 군이 상부에 보고하는 것보다 더 자세하고 빠르니 광주지역에서 암약하는 고정간첩 검거에 노력해야 한다. 국군의 유무선 통신이 북한에 감청될 우려가 있으니 통신보안에 더 유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북한이 광주 상황을 오판하고 도발할 가능성이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 군 작전상 보안 유지를 위해 육군 항공대 헬기를 활용해 장군급 인사가 광주와 서울 간 연락업무를 맡으면 좋겠다. 마침 정호용 사령관이 특별하게 하는 일이 없으니 이 임무를 주는 게 좋겠다.  


필자의 건의는 군 수뇌부에 즉각 전달됐고, 다음 날 육군 항공대는 2명의 조종사(소령)와 헬기 2대를 특전사 연병장에 대기시켰다. 정 사령관이 이 헬기를 타고 처음 광주에 다녀온 것은 5 20일이다. 이후 21일과 26일 모두 3회에 걸쳐 광주를 다녀왔다. 그런데 후일 정 사령관은 5·18 책임자라는 ‘누명’을 쓴다. 

 

전두환·정호용과 광주

▲지난 5 18일 열린 5·18 광주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식. [동아일보]

 

광주지역 계엄사령부가 전남도청 탈환작전을 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5 23일이다.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이 정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를 해 “전남도청 탈환작전 계획을 원래 예정된 5 27일에서 이틀쯤 앞당기려는데 사령관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정 사령관은 “현지 지휘관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현지 사정을 잘 모르면서 서울에서 작전 일자를 조정하는 것은 부당하니 현지 계엄사령관의 계획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핵심 참모들이 ‘광주 사건’을 조용하고 신속하게 수습하려 했다는 것, 정 사령관이 작전지휘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 사령관은 전남도청 탈환작전(상무충정작전) 전날인 5 26일 오후 5시께 광주로 가기 위해 헬기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육군항공대 헬기 조종사들은 “비바람이 강하게 불어 헬기 운행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오후 8시에 헬기에 올랐으나 기상 악화로 도중에 전주에서 내려야 했다. 광주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해 밤 12시가 다 돼 도착했다. 도청 탈환작전은 새벽 1시경 시작돼 2시경 끝났다 


5·17 계엄확대는 전 보안사령관으로 하여금 수개월 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확정짓는 조치였다. 따라서 하루빨리 희생자 발생 없이 사건을 종결지으라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압력을 넣고 있을 때였다. 5공 핵심 세력은 5·18 수습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준비, 권력형 부정축재자 처리와 이들의 정계 은퇴 유도, DJ 등 재야인사들의 군법회의 회부 등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전 사령관이 대통령이 되려고 광주에서 잔인한 행위를 했다거나 발포를 해서라도 사건을 조기 수습하라고 지시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뒤의 일이지만, 3당 합당에 힘입어 1992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YS는 군내에 존재하던 하나회를 전격 퇴출시키고 ‘군사정권 청산 및 5·18사건 처리’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그리고 정호용 장군 등에게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

 

노태우의 ‘희생 요청’

1996 12·12 5·18 관련 재판이 시작되자 당시 미국에 체류하던 필자는 5·18광주청문회(1988)에서 ‘발포책임자’로 몰린 정호용 전 사령관의 생사를 걱정해야 할 중대한 상황이었다. 필자는 청문회에 출석해 사실을 밝히겠다며 내용증명까지 보내 증인 채택을 요구했지만 정 전 사령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1996년 재판에서만큼은 반드시 증인으로 나가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필자가 정 사령관으로 하여금 광주에 다녀오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개인적인 부담도 있었지만, 5·18의 진실을 규명한다는 차원에서도 증인으로 나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수소문 끝에 정 전 사령관이 구속되기 하루 전 국제전화로 40분간 대화를 나누며 필자를 증인으로 요청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정 전 사령관은 “(당신이 증인으로 나와 증언하면) 나는 누명을 벗을 수 있겠지만 다른 한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보다는 다 같이 벌을 나눠 받는 것이 옳다. 나 혼자 살겠다는 생각은 없다”고 했다. 훗날 필자가 그를 만나 “왜 증인 신청을 하지 않았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노 대통령이 ‘친구를 위해 한 번만 양보해서 희생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그의 처지를 고려해 다툴 형편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사실 1988 13대 국회의 5공비리 특별위원회가 마련한 청문회는 노태우 대통령이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려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동시에 자신을 도운 정호용 전 사령관을 밀어낸 자리였다. 당시 노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YS에게 ‘군사정권 청산 전권을 주겠다’며 보수 대연합을 하자는 비밀 제안을 하는 한편, DJ가 이끄는 평화민주당 김원기 사무총장에게는 ‘군사정권 청산을 위한 5·18사건 해결 전권을 주겠으니 연합을 하자’는 비밀 제안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처분을 YS DJ에게 맡기니 두 분 의사대로 하라’는 뜻이었고, 5·18 책임자인 정호용 의원 처리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제안이었다. 전두환과 정호용으로선 배신감을 느낄 만한 행위였다 


이 이야기는 1988년 민주당 핵심인사이던 김동영 의원이 필자에게 들려준 것이다. 당시 김 의원은 필자에게 “곧 3당 합당이 되니 민주당에 참여하면 좋겠다”며 입당을 제안했다. 이후 DJ가 합당을 반대하면서 JP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이 합세해 1990 3당 합당이 이뤄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필자가 1980 10월 군을 떠나고 8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미국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우연히 5공 청문회 방송을 보게 됐다. 5·18 당시 31사단장 정웅 씨는 평화민주당 의원이 돼 있었다. 정호용 전 사령관도 국회의원 신분이었다 


정웅 의원은 “5·18 당시 내가 사단장이었는데, 당신(정호용을 지칭)이 현지에 와서 작전지휘를 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내가 그 현장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한 야당 의원이 “특전사 병력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특전사령관이었던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정호용 의원을 몰아붙이자 정 의원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당시 광주지역에 간 7여단과 3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31사단장에게 있고, 최종적으로는 계엄사령관-국방장관-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필자는 청문회를 보면서 이건 5·18의 진실을 규명하자는 게 아니라 전두환과 정호용을 5·18의 원흉으로 몰고 가는 정치재판이자 노 대통령이 두 사람을 궁지로 밀어넣는 청문회라고 생각했다. 당시 야당 의원이던 김영진 전 의원은 1988년 청문회를 회고하며 “그때 여당 의원들이 나서 정 의원을 몰아붙이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후 정 전 사령관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했고 ‘광주 발포책임자’ ‘살인자’라는 누명을 지금까지 벗지 못하고 있다 


청문회와 재판을 거치면서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는 2014년 어느 날 광주 5·18기념재단을 방문해 관련 단체장들과 만나 6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이후 여러 차례 다시 만나 “5·18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실권자였는데, 5·17 계엄확대로 5·18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으며, 5·18을 수습하고 정국을 장악한 뒤 대통령에 취임했기에 5·18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과 광주시민에게 사죄하고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도 밝혔다. 마침내 전 전 대통령이 지난 4 27일 신동아 인터뷰 자리에서 사과 용의를 밝힌 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진실을 밝히는 길

5공 세력과 5·18 희생자들의 파열음은 발포명령에서 비롯된다. 5공 세력은 발포명령을 하지 않았다 하고, 희생자 유족회 등은 그들을 발포명령자로 인식한다. 실탄 보급과 발포 명령은 과연 누가 했을까 


필자가 신동아 9월호에 이 연재 지면에서 언급했듯 1980 5 17일 저녁 특전사 예하부대 한 병사의 실종 보고가 있었고, 이튿날 그 병사의 시신이 인근 하수구에서 발견됐다. 구타에 의한 사망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 사고로 인해 특전사 병력의 생명 보호를 위해 실탄이 지급됐을 것이다 


군부대에서 실탄은 평소 중대 단위로 보관하며, 돌발사건이 발발하면 통합보관 중이던 실탄을 병사들에게 지급한다. 실탄 지급 권한은 지휘자 또는 지휘관에게 있고, 실탄을 지급받은 장병은 정당방위나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경우 발포해도 좋다는 권한을 동시에 부여받는다. 이는 경찰이 실탄을 지급받아 근무하던 중 위험에 처할 경우 정당방위로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과 같다.  


그러나 특전사 병사의 타살사건이 ‘없었던 일’로 묻혀버렸기 때문에, 당시 시위 진압 병사들에게 실탄이 지급된 근거도 없어졌고, 결국 발포는 있었지만 발포명령을 한 근거도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병사 구타 사망사고 물증은 찾을 수 없다 해도 사건이 발생한 부대의 동료·분대장·소대장·중대장·대대장 중 용기를 내 이 사건을 증언하는 사람이 나와주기를 기대한다. 그러지 않으면 실탄 지급 경위와 발포 경위는 영원히 미궁에 빠질 것이다 
 


이 이야기를 5·18 관련 단체장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꺼내자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거론된 바 없는데 무슨 이야기냐, 믿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필자는 “기록에도 없고 그 누구도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밝혀질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을 말한 것”이라며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져야 실탄 지급과 발포명령에 대한 의혹도 풀린다”고 거듭 설명했다 


이쯤 되면 필자가 정 전 사령관이나 5공 세력과 함께 일한 전력이 있어 특정 세력 편을 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분명히 밝혔지만, 필자는 5공 핵심 세력에 의해 강제 전역을 당했고, 이후 1991년 신동아 9월호에 최초로 하나회의 존재를 밝히는 수기를 실었다가 가족 살해 협박을 받고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도 있다. 필자는 그 누구보다 5공 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이고 정의는 정의다.

 

화합과 통합

부디 지금이라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동서 화합과 국민 대통합을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 찾아봤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람이다. 그 길에서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희망으로 지난 1월부터 신동아 연재를 시작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신동아 인터뷰에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하겠다는 인식의 변화를 드러냈고,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하고 망월동 국립묘지를 방문할 의지도 밝혔다. 광주시민들도 그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받아들일 뜻이 있다고 밝혔다. 내년 5·18 37주년 기념식은 광주시민들과 5공 세력이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국민 대통합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훗날 역사가 평가해줄 것으로 믿는다. 끝

 

■2016.10.11 김재규와 보안사와 10·26

김재규와 보안사와 10·26...보안사령관 8년 뒤 서빙고 피의자 신세로

⊙ 김재규 보안사령관, 3선 개헌 당시 정구영 설득하러 갔다가 차지철과 다퉈
⊙ 전두환, 보안사령관 취임 후 합동수사본부 규정 등 마련
⊙ “김재규를 정중히 모시라는 얘기만 들었지, 그가 시해사건의 범인이니 수사하라는 지시는 받지 못했다” (허화평)
⊙ 보안사,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민간정보수집권 박탈당했다가 10·26 후 중정 감독하는 위치로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10·26사태 현장검증을 하는 김재규. 보안사령관을 지낸 그는 대통령 시해범으로 보안사에서 수사를 받았다

 

1961 5·16 후 중앙정보부(후에 국가안전기획부 → 국가정보원)가 설립됐다. 이후 중앙정보부와 방첩부대(이후 육군보안사령부 → 국군보안사령부 → 국군기무사령부)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양대 정보기구, 아니 권력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국민들에게는 ‘남산’으로 지칭되던 중앙정보부가 무섭게 각인되었지만 대통령에게는 보안사령부도 중앙정보부 못지않게 중요한 기관이었다. 보안사 출신들은 그러한 힘의 원천을 김창룡 특무부대장 이후 형성된 ‘대통령에 대한 절대 충성’의 전통에서 찾는다.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허화평(許和平) 전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중앙정보부는 정치·사회 등 모든 분야를 다 다루다 보니, 정보 장사를 한다고 할까, 일종의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경찰도 비슷하다. 군복을 입은 보안사는 통수권자만 쳐다본다. 심플하다. 이런 전통을 만든 사람이 김창룡 특무부대장이다.

 

보안사와 중앙정보부라는 양대 정보기관장을 다 지낸 사람이 있다. 김재규(金載圭). 김재규는 1968~1971년 제16대 육군보안사령관을, 1976~1979년 제8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전두환은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있다가 1980 4~7월 중앙정보부장 서리(署理)를 겸직했다. 법적으로 현역 군인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편법을 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다 지낸 사람은 김재규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보안사령관 김재규

김재규는 1968 2월 육군방첩부대장으로 취임했다. 육사 2기인 그는 고향이 경북 선산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보다 9살 어린 동향 출신의 김재규를 아꼈다. 김재규가 부대장으로 취임한 지 7개월 후인 그해 9, 육군방첩부대는 육군보안사령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공군의 방첩부대도 보안부대로 이름을 변경했다.

 

김재규는 부임한 후 전용 식당을 따로 만들고 사령관실로 통하는 별도의 통로도 만들었다. 김창룡 특무대장 시절, 부대장이 부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전통을 기억했던 고참들은 김재규 사령관의 처사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고 후일 10·26사태가 그때 일을 떠올렸다고 한다.

 

김재규 사령관은 단순한 보안사령관이 아니었다. 3선 개헌 등 정치적 고비에서는 박 대통령의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초대 공화당 총재를 지낸 정구영(鄭求瑛) 3선 개헌에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1969 8 6, 박정희 대통령은 충북 옥천 고향집에 머무르고 있던 정구영에게 특사를 보냈다. 차지철(車智澈) 의원이었다. 5·16 주체 중의 하나였던 그는 당시 34세의 나이로 국회 외무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차제에 개헌에 대해 확실한 찬반의 태도를 취해 달라. 개헌에 찬성할 수 없다면 당의 결속과 통솔을 위해 탈당 권고가 불가피하다’는 내용의 박정희 대통령 친서를 정구영에게 전달한 차지철은 그에 대한 답변을 달라고 졸랐다. 밤새 차지철에게 시달린 정구영은 차지철에게 끌려오다시피 서울 북아현동 집으로 올라왔다. 다음 날 오후에도 차지철은 아현동 집을 찾아가 정구영에게 “찬반 태도를 밝혀 달라”고 졸랐다. 개헌 반대파인 예춘호(芮春浩) 의원은 사랑방 문을 열어 놓고 두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김재규와 차지철의 다툼

 차지철이 1시간쯤 그러고 있을 때 김재규 방첩부대장이 찾아왔다. 김재규가 왔다는 말에도 차지철은 “방첩부대장은 다른 방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했다. 그러고 차지철은 한참을 더 정구영에게 답변을 요구하다가 나갔다.

 

김재규는 정구영과 인연이 깊었다. 정구영의 4남 정만영이 육사 2기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정만영은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군복을 벗었지만, 이후에도 김재규는 정구영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예춘호 전 의원은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재야(在野)의 거목이던 정구영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추천한 사람이 김재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김재규가 정구영을 찾아온 것도 3선 개헌에 찬성해 달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김재규는 그해 6월에도 정구영을 찾아와 5시간 가까이 개헌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정구영은 “장기 집권을 금하는 헌법정신, 부패 청산, 이것 때문에 3선 개헌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재규는 “개헌이 안 되면 어떤 비상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면서 정구영에게 개헌에 찬성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얼마 후 김재규가 방에서 나왔다. 예춘호가 김재규를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김재규가 그때까지 가지 않고 있던 차지철에게 뭐라고 야단을 치고 있었다. 아마 차지철이 정구영에게 이틀 동안 계속해서 무례(無禮)를 범한 데 대해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10·26사태가 발생했을 때, 예춘호는 불현듯 10년 전 일이 떠오르면서 ‘김재규와 차지철의 불행한 관계는 그때 싹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후 김재규는 3군단장을 끝으로 육군중장으로 예편, 유정회 국회의원을 하다가 1973년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신직수였다.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을 지낸 자기가 군 법무관 출신인 신직수 아래서 차장을 하는 것을 자존심 상해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1974년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보안사, 민간정보수집 금지당해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무렵 육군보안사령관은 진종채(재임 1975~1979) 중장이었다. 1978년 봄 보안사는 군() 관련 정보를 제외한 민간정보 수집활동을 중단당했다. 이는 김기춘(金琪春·법무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국장의 작품이라고 한다. 보안사에 근무하던 이대인씨는 “1978년 봄 어느날 출근했더니, ‘오늘 아침 9시부터 일반정보(행정부·공공기관 및 민간 관련 정보) 활동을 일체 중단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정보의 질()에서 중앙정보부가 번번이 보안사에 밀리자 중앙정보부가 대통령에게 보안사는 군 정보기관이라는 이유로 그런 건의를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한창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허화평 전 의원은 “진종채 사령관이 조용히 일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실장 사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979 3월 제1사단장을 지낸 전두환 소장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를 천거한 것은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그가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드는 차지철 경호실장을 견제해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전임자들이 중장이었던 것에 비하면 계급이 낮았지만,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장군이었다. 이대인씨는 “전 장군이 사령관으로 오게 되자 모두 ‘실세(實勢)가 온다’면서 잃어버린 일반정보 업무가 곧 부활될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통령 시절, “진종채 전임 사령관이 나가면서 나보고 보고서를 내지 말라고 하더라. 보고서를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라고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서가 올라오면 그걸 보고서에서 거론된 사람에게 건네 주곤 했다. 일종의 ‘분할통치’였다. 대통령에게 독대(獨對)해서 보고를 해야 할 보안사령관이 보고서를 내면 죽는다고 몸을 사려야 할 정도로 당시 보안사령부는 위축돼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 정비

서울 소격동에 있던 옛 보안사령부 건물. 대통령이 이용하는 국군서울지구병원도 같은 건물에 있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부대 정비에 나섰다. 비서실장으로는 전방부대에 있던 허화평 대령을 데려왔다. 그는 강창성 사령관 시절 서울지구보안부대 대공(對共)과장을 하다가 윤필용 사건 이후 부산 피복창으로 좌천되기도 했었다.

 

허화평 전 의원은 “전두환 사령관은 부임 직후 제대할 날만 기다리면서 일을 하지 않던 대령·중령급 장교들을 내보내고 전방에서 중대장을 마친 육사 출신의 빳빳한 인력들을 보안사로 데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 사령관과 김재규 정보부장 사이는 원만했다고 기억했다. 전두환 사령관이 선배들에게 붙임성 있게 구는 성격이었고 김재규도 전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장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딪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보안사의 일반정보활동도 부활했다. 허화평 전 의원은 “전두환 사령관이 박 대통령에게 ‘일반정보활동을 해야겠습니다’라고 했고 박 대통령도 바로 오케이 했다”고 했다. 하지만 일선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했던 준위급 실무자들은 “10·26 이후 합동수사본부가 만들어지면서 일반정보활동이 완전히 회복됐다”고 말했다.

 

전두환 사령관 부임 후 시국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5월에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됐고, 8월에는 YH사태가 발생했다. 10월 들어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부마사태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그 와중에 시국대처 방안을 놓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권부(權府) 내의 갈등 상황에 대해 보고하기로 결심했다. 1987 4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측근들과의 자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도 얘기했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友軍)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했어. 망하려니 그런가 봐. 그래서 내가 10 27일쯤 박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연습도 하고 보고 준비를 다 했었는데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보고서는 허화평 실장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말을 아끼면서도 “차지철과 김재규 문제 등 당시 권부의 문제들에 대해 지적하는 내용들이었다”고 말했다.

 

1979 10 26. 궁정동에서의 총격사건이 발생한 후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이 부상당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소격동 국군서울지구병원에 들이닥친 것은 저녁 7 55분경이었다. 군의관들이 달려왔다. 김 실장은 “이 사람 꼭 살려야 돼!”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박정희 대통령은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숨을 거둔 뒤였다. 김계원 실장은 “보안을 유지하라. 출입을 금지시켜라”라고 한 후 택시를 잡아타고 청와대로 갔다. 대통령의 시신 곁에는 궁정동 안가 경비원으로 총격사건에 가담했던 유성옥서영준이 남았다.

 

와이셔츠 바람에 신발도 짝짝이로 신은 김계원 실장은 청와대로 들어서자 마자 본관 경호책임자인 함수용 경호과장에게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빨리 찾아 들어오라고 하라”고 지시했다. 자기 방으로 올라온 김 실장은 따라온 경호원들에게 “총리, 국방부 장관,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육군참모총장을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하라”고 했다. 이때 건장한 체구의 경호원이 김 실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전두환 장군의 동생입니다. 전경환입니다.

“코드 원인가?

 

자리에서 물러나온 전경환은 보안사로 전화를 걸었다. 저녁 8시 경 전두환 사령관은 차량으로 이동 중에 무전으로 “사령부로 전화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부관이 인근 가게에 가서 사령부로 전화를 걸었더니 “청와대 전경환씨가 사령관님을 찾아서 급히 전화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했다. 전경환에게 전화를 했지만 얼른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사령관 비서실에서도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빨리 육군본부로 나오라고 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전 사령관은 부관을 시켜 경호실장, 경호실 상황실장 정동호 준장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지금 바쁘다”는 상황실 관계자로부터 “안의 일이다”라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전 사령관은 9시쯤 육군본부 벙커에 나타났다.

 

보안사는 국군서울지구병원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무엇인가 변고가 발생했고 서울지구병원에 김계원 실장이 VIP로 보이는 인사의 시신을 모셨다는 소식을 접한 보안사에서는 우국일 참모장, 당직사령, 그리고 전두환 사령관이 잇달아 서울지구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병수 병원장은 침대 위에 뉘여 있는 시신을 보기는 했지만 그게 박 대통령의 시신이라는 것은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 사령관이 물었다.

 

“누구냐? 각하야?
“아닙니다.

“실장인가?
“아닙니다. 아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병수 원장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김 실장은 “정중히 모시라”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김 원장이 시신을 국군수도통합병원 영안실로 모시자고 했으나 김 실장은 “청와대 의무실로 모시라”고 했다. 대통령이 쓰는 청와대 의무실로 시신을 옮기라는 말에 김 원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VIP’가 모셔져 있는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는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경비원 유성옥·서영준이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권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시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했다. 김 원장은 “흉부의 상처 처리 상황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했다. 중정 경비원들은 와이셔츠를 걷어 시신의 얼굴을 가렸다. 와이셔츠를 걷어 올리자 아랫배에 희끗희끗한 반점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김 원장은 그 시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몇 해 전 박정희 대통령은 저도 별장에서 그 반점을 보여주면서, “김 박사, 이것 좀 치료 안 해 줄래?”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었다.

 

김 원장은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유성옥이 따라붙었다. 김 원장이 담배를 꺼내 무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었다. 우 준장이 말했다.

 

“여러 가지 어렵고 위협적인 상황에 있는 것 같은데, 답은 길게 하지 말고 듣기만 하되, ‘예스’나 ‘노’로만 답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운명하셨나?
“예.

“실장이야?
“아닙니다.

“그럼 코드 원(Code 1)인가?
“예.


김재규 체포

 그날 밤 11시 반 경, 김계원 비서실장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고 실토하면서 “권총을 갖고 있으니 조심해서 체포하라”고 말했다. 정 총장은 김진기 육군헌병감을 불러 “김재규를 체포해서 보안사령관에게 인계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그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 “김재규의 신병(身柄)을 인수해 수사하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허화평 당시 보안사 비서실장의 증언은 다르다. 그는 “우리 보안사는 정 총장으로부터 김재규를 ‘정중히 모시라’는 지시만 받았지, 시해사건 범인으로 수사하라는 지시는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김진기 헌병감은 보안사 소속 오일랑 중령과 국방부 헌병중대장 이기덕 대위를 데리고 체포작전에 나섰다. 김진기 헌병감은 김재규를 국방부 후정(後庭)으로 유인한 후 무장을 해제하고 체포했다. 차는 보안사 정동분실(지금의 조선일보 본사 자리)로 향했다. 차 안에서 김재규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세상이 달라졌어. 각하는 돌아가셨어. 지금 수도통합병원에 계셔”라고 말했다.

 

보안사 정동분실 위치를 몰랐던 운전병은 분실을 지나쳐 그 옆 중앙정보부 분실(현 사랑의열매 자리) 앞에 차를 댔다. 중정 분실에서 경비원이 나오는 걸 본 김재규는 반색을 하며 “아, 여긴 우리 분실인데…”라고 했다.

 

기겁을 한 오 중령은 서둘러 보안사 분실로 차를 돌리게 했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이 김재규의 신병을 넘겨받았다. “정중히 모시라”는 말을 전해 들은 허 대령은 김재규를 2층으로 모셨다. 신동기 수사관이 김재규를 맡았다. 허 대령은 1층에 남았다.


서빙고 분실

10·26사태 후 김재규를 조사한 보안사 서빙고분실

 

그런데 잠시 후 신 수사관이 1층으로 내려왔다. “실장님, 김재규가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각하가 돌아가셨다, 세상이 달라졌다, 이런 소리를 합니다. 아무래도 김재규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허화평 실장은 바로 전두환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김재규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이건 정동분실이 아니라 서빙고분실에서 다루어야 할 일입니다.

서빙고분실에 온 후 김재규는 낡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그는 여전히 큰소리를 쳤다.

“내가 각하를 살해했다. 이제 세상은 다 끝났다. 수사관, 자네들도 살 궁리를 해야 해.” “현장에는 정승화 총장도 함께 있었고, 같이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갔었다.

 

이런 소리에 수사관들도 위축이 됐다. 이학봉 수사과장은 “우리의 손에 지금 국가의 흥망이 달렸다. 목숨을 걸고 수사를 철저히 하여 김재규의 공모자들을 색출해야 한다”며 수사관들을 독려했다. 김재규를 정동분실에서 데려온 신동기 수사관이 수사를 맡았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신 수사관은 안면몰수하고 거칠게 나갔다.

 

“어이, 김재규! 솔직히 이야기하자. 어느 군부대를 몰고 올 거야? 우리도 알아야 손 들고 항복할 것 아닌가? 어느 군단과 결탁했어?

 

김재규는 “없습니다. 단독으로 시해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재규가 대답할 때마다 주먹이 날아갔다. 김재규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쓰러지면 바로 일어나 의자에 다시 앉았다. 30여 분간 그런 후에 이학봉 중령은 김재규와 결탁한 부대는 없다고 판단했다.

 

국방부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그동안 들어온 보고를 적은 메모를 보여주면서 “김재규가 압송차 안에서 횡설수설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틀림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합동수사본부 탄생

1979 11 6 10·26사태 전모에 대해 발표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계엄법 시행규칙에 따른 ‘충무계획 1200’에는 합동수사본부를 둘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이 규정을 정비하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이에 따라 국군보안사령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됐다. 합동수사본부는 군은 물론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등 모든 정보수사기관을 조정·감독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 사령관이 제일 먼저 지시한 것은 “정보부 기능을 중지시키라”는 것이었다. 국·실장급 간부들이 줄줄이 합동수사본부로 잡혀와 김재규와 범행을 모의하지나 않았는지 조사를 받았다.

 

1979 10 28일 오후 4,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국방부에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관 직속 기구였다. 하지만 합동수사본부에서는 김계원 비서실장은 물론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까지도 김재규와 공범으로 보고 있었다. 허화평 당시 비서실장은 “10·26사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쿠데타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건 현장에 김재규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러다 놓고 왔다 갔다 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배 기자 같으면, 사장이 불러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는데, 그 옆에 친구를 불러다 놓고 왔다 갔다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얘기인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김계원이 청와대, 정승화가 군부를 장악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쿠데타를 한 것이다.

 

12·12사태의 씨앗은 이렇게 자라고 있었다.

[월간조선 2016 10월호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