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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상해 임시정부가 대한제국 황제의 권한을 박탈하고 민주공화제를 선포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 해방당시 희귀영상 - 광복절 유래와 ‘독립기념일’ 필요성- 애국가 '작사 미상'의..

상림은내고향 2021. 4. 8. 17:28

■광복

2016.08.16 상해 임시정부가 대한제국 황제의 권한을 박탈하고 민주공화제를 선포한 근거는?

▲1910 8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영구히 가진다는 내용의 강제 병합조약이 발표된다(경술 국치일). 주권을 빼앗긴 후 경복궁 근정전에 내걸린 일장기.

 

100년전 역사를 법으로 풀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1910년에 체결된 (일본 명칭) ‘일한병합조약’에 대한 한국의 기본 입장은 체결 과정상의 불법성에 기인한 무효 주장이다. 강박에 의해 체결된, 위임에 흠결이 있는, 체결권자의 의사가 적법하게 반영되지 않은 원천 무효의 조약이라는 것이다.

 

자주성과 주권이 침탈된 역사이므로 한국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법적 맥락의 추궁이라 할지라도 상징적이고 선언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지 그것을 실체법적 구제의 추구로 이해하게 되면 추궁의 실익은 물론, 법논리로서도 많은 무리가 있다.

 

일한병합조약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동 조약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함.

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함.

 

조문에서 알 수 있듯이 ‘병합’의 의미는 한국의 황제가 일본의 황제에게 ‘통치권을 양여’하는 것이고, 그 통치권 양여의 결과로 양국이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문 구성으로 병합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대한제국의 정체가 전제군주제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국제는,

 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는 오백년을 전래하시고 이후로는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실 전제정치이다.

 

3조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시니 공법(公法)에서 일컫는 자립 정체이다.

 

9조 대한국 대황제께서는 조약을 맺은 각 국가에 사신을 파송 주찰(駐紮)케 하시고 선전(宣戰)·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하시니 공법에서 일컫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절대왕정, 전제정이었기에 대한제국은 국민의 뜻과 관계없이 통치권자 한 사람만 동의하면 국가의 주권 포기마저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한국측의 주장대로 동 조약이 무효라면, 그 이전 상태, 즉 황제의 통치권이 보지(保持)되는 전제왕정으로 복귀한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1919년 상해임정의 임시헌장과의 관계이다.

 

 임시헌장은 전문(前文)에서 “...평화적 독립을 삼백여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자손려민에 세전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고 규정하고 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법적 논리로만 본다면 법률행위의 선후 관계가 중요할 터이다. 만약 1910년 조약이 원천 무효라면, 황제는 복위(復位)되고 통치권은 황제에게 환원되어야 한다. 1919 임시헌장은 그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였고 황제의 통치권의 부재 또는 국민주권 이념은 주어진 것 또는 기정사실로 간주된다.

 

 그러나, 법논리를 엄밀히 적용하면 임시정부의 헌장이 법적 효력에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어떠한 의미에서건 황제의 통치권을 일방적으로 박탈하는 권한의 존부 또는 위임에 대한 근거를 생각해야 한다.

 

 (혁명이 발발하여 왕정을 폐지시킨 것이 아니라, 왕정이 스스로 왕권을 국민에게 이양한 것이 아니라) 1910년 조약의 결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황제가 존재하지 않는 권력 공백의 ‘현실’을 맞이하여, 임시정부는 권한의 근거와 구체제와의 권력투쟁에 대한 고민 없이 창설적 효력을 갖는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공화국’을 정체(政體)로 하는 신국가의 설립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1919년 임시헌장은 1910년 조약의 불법성이라는 관념적/의제적 상황과 관계없이 1910년 조약이 야기한 실재적 ‘현실’을 기초로 성립한 것인바, 1919년 임시헌장을 대한민국 성립의 기초로 삼고자 한다면, 1910년 조약의 불법성을 따지는게 법적 정합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에 언급한대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해 그 부당성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차원에서 선언적, 상징적 의미로 1910년 조약의 불법성을 짚고 넘어가는 것까지는 좋으나, 그러한 추궁이 지나치게 법이론적인 측면에 함몰되어 현실감각을 잃고, 뭔가 현실적인 구제나 효과를 추구하게 되면 한국 스스로 독립과 건국에 이르는 법체계에 있어서도 정통성, 정당성, 법적 정합성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고안한 “이미 무효” 조항은 기실 법적 독해를 요하는 조항이 아니라, 역사적 독해를 요하는 조항이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덧붙임)

 

 한 명이라도 왕위 계승권에 근접한 왕족이 임정에 합류하여 통치권의 국민 이양에 대한 정통성이 제공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나,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아픔이다. (하긴 그랬다면 민주공화국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조선일보 글 | 신상목 전 외교관/일식당 운영 

 

독립운동가들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 세 번의 비극

1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비극 가운데 하나, 1946년 대구사건

/대구사건 당시의 희생자 시신.

 

사회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할 말을 못하고 안 할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 이유는 학문이 이데올로기의 외풍(外風)을 만나기 때문이다. 일찍이 헝가리의 사회학자 만하임(Karl Mannheim)은 이와 같은 현실을 ‘존재구속성(Seinsgebundenheit)’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한국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이념의 굴레를 쓰고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이면에는 ‘반공’이라는 불퇴전의 보루가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공부하던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막스 베버(Max Weber)의 책이 공항 검색대에서 압수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이름에 막스(?)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고전으로 꼽히는 무어(B. Moore)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표지가 빨갛다는 이유로 금서였으며, 라흐마니노프(Sergei Rakhmaninov)가 소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창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볼륨을 낮춰 그의 음악을 들어야 했다. 외국에서 좌파 서적이라도 가지고 들어오려면 표지를 찢어버리거나 매직펜으로 제목을 지워 세관원의 압수를 모면했다.

그와 같은 엄혹한 시대는 의외로 길었다. 국어 시간이면 반공 웅변대회, 반공 글짓기대회, 반공 표어짓기대회를 치렀고, 미술 시간에는 반공 포스터 그리기의 학습을 거쳐야 했고, 음악 시간에는 반공 노래자랑을 했고, 체육 시간에는 반공 마라톤대회에 나가 뛰어야 했다. 교과서 뒷장에는 ‘(1)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3)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는 ‘우리의 맹세’가 인쇄되어 있었고 ‘통일의 노래’를 실은 적도 있었다.

반공·북진 통일이 아니라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정치인은 처형되었고, 용공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제재 대상이 되었다. 향토예비군교육장에서는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 과업”이란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학력이 낮은 친구들은 그것을 외우지 못하여 그저 “때·무·쳐·이”라는 첫 글자만 외웠다. 반공은 일상화되었고 거기에 익숙해 갔다. 그렇다면 반공은 악()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논란이 되지만,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던 시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세 번의 사건, 1946년의 대구사건, 1948년의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당장 사건의 명칭부터 어찌해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는다. ‘대구10월항쟁’(심지연)인지, ‘대구인민항쟁’(박헌영·정해구)인지, 우익들의 호칭처럼 ‘대구공산폭동’인지, ‘대구사건’(대구MBC)인지 아직 학계의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이름 짓기도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대구사건’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었던 데 대해서도 독자들의 양해를 얻고자 한다. 공자(孔子)께서 역사를 기술하면서 “있는 대로 설명할 뿐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말라”(‘述而不作’·논어 述而篇술이편)고 하신 말씀을 거듭 유념하면서 이 글을 쓴다.


1946
, 대구의 분위기

1946년의 상황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조속한 독립에 대한 열망은 점차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5월에 미·소공위가 정회에 들어감으로써 그에 대한 일말의 희망과 기대감마저 무너졌다. 이러한 정치적 혼미에 대하여 우익이나 미 군정이 초조를 느낄 이유는 없었다. 그 상황에서 정작 초조와 불안을 느낀 것은 좌익, 특히 박헌영(朴憲永) 일파였다. 7월부터 시작된 좌우합작은 좌파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국의 운영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게 만들었으며, 11 14일로 확정된 남한의 과도 입법기구의 창설은 좌익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남한의 상황은 마치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화약고와 같았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박헌영으로서는 이와 같은 정적(靜寂)을 견딜 수 없었다.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사건(1946 5 15)으로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내부의 도전을 받고 있던 그에게는 일거에 형세를 만회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후난(湖南) 추수 폭동(1927)을 연상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의 수뇌부는 강성(强性)을 과시하면서 당내 반대파의 도전에 반격을 가하고자 9 9일의 총파업을 지시했다. 전위(前衛·vanguard) 이론에 심취했던 박헌영으로서는 파업이 상황을 만회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파업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철도 노조를 겨냥했다. 철도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그 자체로서 매혹적인 것이었다.

7000
여명의 부산철도 노동자들은 9 15일 군정청에 제시한 임금 인상과 일급제 반대 등 6개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부분 태업으로 맞서 오다가 9 23일 파업에 돌입했다. 이때 부산철도 노조의 중심에는 백남억(白南檍)이 있었다. 대구사건을 취재했던 대구매일신문 기자 정영진(丁英鎭)의 증언에 따르면, 백남억은 규슈대학(九州大學)을 졸업하고 부산철도국 운수과장으로 재직 중인 지식인이었다(‘폭풍의 10월’ 297~298). 부산철도 노조를 시발로 하여 대구와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4만여명의 철도 종업원의 파업이 일어나자, 전평(全評) 산하 각 분야의 공장과 직장으로 파업은 신속하게 파급되었다.

미 군정이 보기에 당시 대구의 공산주의자들은 아마도 ‘대구의 분위기를 서울까지 가져간다(bring Taegu to Seoul)’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당시 대구의 상황을 살펴보면 대체로 좌익적 분위기가 강했다. 한민당 요인으로서 도당의 재정을 맡고 있는 박노익(朴魯益·동아자동차주식회사 회장) 등 기업인들의 정치 참여가 있었으나 좌익적 분위기 속에서 입지를 강력하게 내세울 형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상북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더욱 적극적이었다. 당시의 유력 잡지였던 ‘무궁화’ 1945 12월호, 80쪽에 수록된 대구인민위원회 광고에 따르면, 위원장 이상훈(李相薰), 부위원장 겸 내정부장 최문식(崔文植), 산업부장 이선장(李善長), 보안부장 이재복(李在福), 재정부장 김성곤(金成坤)·채충식(蔡忠植), 노농부장 정시명(鄭時鳴), 선전부장 황태성(黃泰成)으로 구성된 대구인민위원회는 능력이나 이념에 대한 경도, 그리고 지적(知的) 수준에서 우익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서울에서 파업을 지휘하고 있던 전평위원장 허성택(許成澤)은 함북 성진(城津) 출신으로 적색 노조로부터 시작하여 모스크바동방노력자대학을 수료한 파업전문가였다.(그는 대구사건 이후 월북하여 노동상(勞動相)과 노동당중앙위원을 역임한 후에 종파주의 혐의로 해임되었다.)

어느 일이나 다 그렇듯이 역사에서의 어떤 사건도 느닷없이 문득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까지에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이미 깔려 있었는데, 대구사건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가 있다.<③편에 계속>


<②편에서 계속>
첫째로는 식량부족과 이에 따른 기아(飢餓)문제였다. 당초 군정은 식량부족이란 신생국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대구의 상황만 보더라도 식량 사정은 그리 열악하지 않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판으로 말미암아 군정은 미곡수집령(米穀收集令)에 따라 2월부터 강제 미곡 수집에 들어갔다. 농가가 식량으로 보유할 수 있는 쌀은 1인당 45되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 차례 기아 시위가 일어났다. 대구 초등학생의 평균 50% 이상이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고, 전 학생의 80%가 점심을 굶는 학교도 있었다. 굶주린 시민들은 열차를 타고 전북 지방에 가서 쌀을 사 가지고 오다가 신태인역에서 그곳 소방대와 청년대의 제지를 받았다. 시위대는 8 19일 오전 11시 도청 앞에 몰려들었다. 시위가 격화된 것은 콜레라의 발생으로 영남·호남·충북 일부 지역에서 열차 운행이 중지됨으로써 양곡 수송 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대구 사태의 두 번째 요인은 경찰의 억압이었다. 당시 군정이 판단한 바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근무했던 한국인 경찰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민중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경찰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이 존재했다. 더욱이 경찰은 우익 청년단체의 협조를 얻어, 범죄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없음에도 좌익 지도자를 체포하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권력을 남용하여 피의자를 구타하고 고문했으며, 양곡 수집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이 부당하고 거칠었다. 나는 그 시절에 괴산(槐山)경찰서 옆에 살았는데 밤이면 고문으로 인한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아 잠을 잘 수 없는 때가 많았다.

정영진의 증언에 따르면, 경북 경찰의 총수인 권영석(權寧錫)은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낸 친일 관료로서 관구경찰청장에 오른 인물이었고, 대구경찰서장 이성옥(李成玉)은 창씨명이 마쓰오카 히사요시(松岡久允)로서 일제강점기에 안동(安東)경찰서에서 형사주임으로 근무할 때 이미 종칠위훈팔등(從七位勳八等)의 서훈을 받았으며, 광복 당시에는 경시(警視) 계급을 끝으로 경찰직을 떠났다가 군정청에 의해 대구경찰서장에 기용된 인물이었다. 그 당시에 ‘순사’는 두려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리가 울면 엄마는 “순사 온다”고 말해 울음을 그치게 했다.

셋째로는 당시에 만연했던 콜레라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대구에서 8월경에는 1만여명이 감염되어 있었다. 위생에 대한 경비·통제·격리는 국방경비대의 임무였기 때문에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던 경찰이 통행 검문소를 관리했는데 이때 동원된 경찰의 거친 처사로 말미암아 의료진과 화목하지 않았다. 8 1일 대구의전(大邱醫專) 교수 이상요(李相堯)는 콜레라가 발생한 관내에 7 30일부터 교통을 차단하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방역 순찰에 동행했던 국방경비대원도 이상요의 추궁에 가세하자 소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 후 학교로 돌아온 이상요는 경찰서에 연행되어 공무집행방해죄로 구금되었다. 대구 사태의 진원지가 대구의전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대구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된 1946 10 2일 대구경찰서 앞의 시위대.

사건의 전개

9
30일에 대구에서는 여러 곳에서 운동회를 끝마친 학생들이 시위 행렬을 벌이다가 경찰의 제지를 당하여 사소한 충돌이 있던 터라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태였다. 아직 추석(9 10) 분위기도 사라지지 않았다. 집회를 끝마친 후 노동자들이 학생 및 시민들과 합류하여 1000여명이 시위 행렬을 개시하자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중은 불어나 3000~4000명이 되었는데, 연령은 12~17세로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군중들은 질서를 지키고 있었고 대부분은 호기심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적 색깔이 두드러지지도 않았다. 이 정도의 대치 상황은 당시로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시위대를 다루면서 매우 거칠어 시민들 사이에 증오감이 일어났다.

대구 역전에 모인 노동자·지식인·학생·사무원·일반 시민들은 “쌀을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 시위의 배후에는 경상북도 인민위원장 이상훈과 인민보안대장 나윤출(羅允出)이 있었다. 나윤출은 본디 씨름장사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그는 그 뒤 대구를 탈출, 월북하여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에 선임되어 체육계에서 활약했으며, 1966년 런던월드컵축구대회의 임원으로 참가했다가 숙청되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청년행동대원 100~200명씩이 1개 분단을 이루어 대구 역전 광장을 비롯하여 주요 거리에 배치되어 암약하고 있었다. <④편에 계속>

 

<③편에서 계속>
10
2 12시에 경북지사 헤론(Gordon J. Heron) 대령이 주둔군에 탱크를 요청하자 프레지아(John C. Presia) 소령이 이끄는 탱크부대가 거리를 순찰하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당시에 배치된 병력은 219명이며, 부산 제5연대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에게 실탄이 지급되었다. 이날 오후 5시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오후 7시부터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당시의 소요에 대하여 탱크를 동원할 상황은 아니었으나, 군정은 이곳의 좌익적 성향에 지레 겁을 먹어 과잉반응한 측면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군중들이 해산함에 따라 사람의 숫자가 적어졌는데도 경찰이 발포했다. 이날로부터 대구 일대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왜관(倭館)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장석한(張錫翰)과 경관의 눈알을 빼고 혀를 자른 다음 살해했다. 경찰의 성기를 잘라버린 경우도 있었다.(‘재팬 다이어리(Japan Diary)’·마크 게인(Mark Gayn)·420) 이때 민간인 22명과 경찰 31명이 죽었다.

10
2일 아침이 되자 수십 명의 시위대가 경찰에 의한 피살자라며 사체를 들것에 싣고 경찰서 앞에 나타났다. 이를 목격한 군중심리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격분해 있었다.(조선일보 1946 10 8일자) 사망자의 신원에 대하여는 좌익과 우익의 견해가 다르다. 당시 남로당원으로서 전평 경상북도평의회 간사였던 이일재(李一宰)는 나와의 인터뷰(대구 그랜드호텔, 2003 10 1)에서 당시 사망자는 대팔(大八)연탄공장의 공원이었던 황팔용으로서 경찰의 발포에 의해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대구 MBC가 제작하여 1996 10 10일에 방영한 ‘대구 10·1사건 50주년 특집 방송’에 출연했던 당시 대구의전 교수와 경찰 관계자들은 좌익들이 대구의전 영안실에서 그 시체를 탈취했다고 증언했다. 그 시체의 이름이 황팔용이었다는 이일재의 증언이 맞을 수는 있지만 시체의 신원에 대해서 나는 대구의전 교수들의 증언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민중들은 경찰서를 포위하여 한동안 점거했으며 인근 지방의 경찰서와 지서의 무기를 강탈하는 동시에 청사를 점령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대구의 군정 당국은 충남과 충북에서 경찰을 지원받아 대응했다. 경찰에 대한 보복살해는 더욱 늘어났다. 살해 방법은 몽둥이나 쇠꼬챙이를 사용했으며, 시체의 머리를 자르고 얼굴의 껍질을 벗기고 팔다리를 잘랐다.(조선일보 1946 10 29일자) 이날 대구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죄수 100여명이 탈출했으며 시위대는 도청 관리와 경찰의 가택을 습격하여 가구를 파손하고 가족들을 납치했다. 소요는 얼마 동안 더 진행되다가 10 21일 밤에 계엄령은 해제되었으며, 연말에 이르러서야 소요는 가라앉았다. 군정은 특별군법회의를 설치했는데 심지연 교수(경남대학교)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보통군법회의가 5년형 이상을 선고할 수 없기 때문에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구 사태는 “대구에서만 있었던 사건”은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70~80여개 군 및 시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그 한 예로 선산인민위원회의 내정부장이었던 박상희(朴相熙) 10 3일에 선산군 민청 간부 김정수(金鼎洙)와 더불어 봉기에 참여했다. 그들이 이끄는 2000여명의 군중들은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구미경찰서를 습격하여 백철상(白喆相) 경찰서장에게 경찰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경찰서와 군청을 접수했으나 이튿날 경찰의 반격을 받아 박상희는 군농조위원장인 김광암(金光岩) 및 민청 간부인 장달천(張達千)과 함께 사살되었다.(‘대구 리포트(Taegue Report)’·이그지비트 에프(Exhibit F)·20, ‘폭풍의 10월’·정영진·389~390) 백남억은 한민당 간부 박노익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는 박노익의 사위였다. 박노익은 공화당 정부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박준규(朴浚圭)의 아버지이다. <⑤편에 계속>

 

<④편에서 계속>

유산

훗날 한국전쟁 당시에 낙동강(洛東江) 전선이 위험하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형무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끌어내어 기결수나 미결수를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 이것이 이른바 죽음의 예비 검속이었다. 특히 대구와 왜관에서 헌병들은 200~300명씩 줄을 세우고 사살했으며, 그중에는 12~13세의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총이 부실하여 단발에 사살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시 확인 사살을 했고, 그러고도 살아남은 자의 비명이 그치지 않았다.(‘프랭크 피어스 리포트(Frank Pearce Report) 1950 8 11(11 August 1950))

그렇다면 대구사건 당시의 희생자는 얼마나 될까? 이것은 어쩌면 우문(愚問)일 수 있다.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보복살해와 우익의 즉결처분과 암매장은 증거조차도 남아 있지 않으나 그 숫자는 매우 높으리라고 추정되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전쟁 당시에 옥중에서 학살된 인명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법천지에서 자행된 사형(私刑)과 불법행위는 더 참혹했다. 그것은 우익이 좌익에 비해 더 잔혹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좌우익을 가릴 것 없이 똑같이 자행되었다. 이 당시에 대구형무소에서 군에 이첩되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자는 모두 1402명이었다.(대구매일신문 1960 6 7일자, 경상북도의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 371~390쪽·2000) 그 잔혹상은 경북 일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박헌영의 기록(‘투쟁일지’ 119)에 따르면, 10 16일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은 대구 소요 사건의 주모자가 서울에 잠입했으리라는 확신 아래 3000여명의 경관을 동원하여 시내 각 여관과 유곽(遊廓)을 검색하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 33명을 검거하여 경관을 해친 자라고 발표했다.

대구 사태를 설명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점은 과연 이 사태의 배후에 박헌영 또는 남로당이 얼마나 깊이 연루되었으며 그들의 의도는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사건이 일어나자 미 군정 측에서는 이 사건이 박헌영의 작품이라고 확신했고, 일부 조선공산당 계열에서도 그렇게 믿고 이에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며, 우익에서도 이를 비난했다. 공산당에서는 이를 극좌 모험이라고 비난했고, 안재홍(安在鴻)은 실패한 이립삼(李立三) 노선(공산화 과정에서 먼저 거점도시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주변 농촌으로 혁명을 확산한다는 이론)을 방불케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당사자인 박헌영은 이번 사건이 “조선공산당 중앙에서 선동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려는 것은 이승만 일파와 동일한 견해”라고 응수하면서, 이번 사태야말로 동학란(東學亂·동학농민운동) 3·1운동과 더불어 남조선의 3대 인민 항쟁이라고 자평했다.(10월인민항쟁’·박헌영·53, 67) <⑥편에 계속>

 

<⑤편에서 계속>

나이가 많은 독자들은 위의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의 실명(實名)을 보면서 내가 대구사건을 쓰면서 왜 부담스러워하며 사설(辭說)이 길었는지를 눈치챘을 것이다. 박상희(1906년생)는 박정희 전 대통령(1917년생)의 형이었고, 백남억(1914년생)과 김성곤(1913년생)은 훗날 민주공화당의 중요 당직자였다. 황태성(1906년생)은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의 무역성 부상(차관)이 되어 남한의 군사정부가 친공산주의 정권이라고 오판한 김일성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1926년생)을 만나러 밀파되었다가 처형된 인물이다.(‘김종필 증언록’ 중앙일보 2015 4 20일자)

5
·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그런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은 박정희의 운신과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尹潽善) 후보도 이 문제를 거론했다. 당시 유세반원이었던 김사만(金思萬)은 영주(榮州)에서의 연설에서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으며, 김일성이 내려오면 만세를 부를 사람이 많다”(조선일보 1963 10 13일자)고 말했다가 거센 역풍을 만났다. 그때 박정희와 윤보선의 당락의 표차가 156000표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김사만의 설화(舌禍)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역사적 평가를 하자면, 대구 사태는 전근대적 형태의 민란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흉작, 수입감소, 전염병이라는 민란의 전형적인 3대 요소에 의해 일어난 민중 봉기였다. 여기에 틈새를 노리고 있던 좌익이 이를 호기로 이용했을 뿐이다. 대구 사태 당시에 적기(赤旗)가 나부끼고, 적기가를 부르고, 노동 해방의 구호를 외쳤다고 해서 그것이 공산혁명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박헌영의 평가는 대구 사태를 공산혁명으로 지나치게 미화했고 우익은 거기에 이념을 덧씌웠다. 그것은 굶주림과 압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남로당의 전술이 종속 변수로 개입되었을 뿐이다.

한국의 현대사 연구는 이념의 문제를 너무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념의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몇몇 전문가들에 국한된 것이었고, 민중의 생각은 그토록 정제되거나 체계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대구사건은 박헌영의 주장처럼 현대사의 3대 혁명도 아니고 우익의 주장처럼 빨갱이들의 폭동도 아니다. 그것은 신생국 창설 과정에서 벌어진 갈등의 표출이었다. 거기에 해묵은 원한과 전통적인 모순에 대한 격정과 질주가 중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대구 사태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었던 민중적 소망을 담은 현대적 민란이었고 그로 인한 잔혹사였을 뿐이다.

주간조선 신복룡 전 건대 석좌교수 

 

2 박헌영(朴憲永):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

박헌영은 서자였다... 호적에 '어머니는 주막업, ()'

박헌영(오른쪽)과 부인 주세죽. 이들은 딸을 낳았다.

 

2000 7,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나는 집필 중이던 ‘한국분단사연구:1943~1953’의 마지막 보완 작업을 하다가 문득 충남 예산군(禮山郡) 신양면(新陽面)으로 답사를 떠났다. 그곳은 박헌영(朴憲永)의 고향이다. 뭔가 부족한 듯한 원고의 마지막 작업에 대한 영감을 얻고 싶어서 갔다. 머리에는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Toynbee)의 충고가 맴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의 역사학은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이 책을 통해 얻은 것보다 더 많다. 그리스 역사의 기술은 더욱 그러했다. 역사학자는 현장을 가보아야 한다. 그곳에서 그는 책에서 알지 못한 영감을 얻을 것이다.” 이 충고는 나의 역사 연구의 중요한 등대였다. 그래서 나는 ‘전봉준 평전’을 쓰면서도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을 ‘모두’ 밟아 보았다. 그리고 그 답사는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폭염 속의 신양면 옛 장터는 고즈넉했다. 동네 이름처럼 햇살이 맑았다. 나는 먼저 신양면사무소에 들러 박헌영의 제적등본을 신청했다. 개인 정보 보호가 없던 시절이라 면서기는 쉽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박헌영의 제적등본을 받아들고 망연자실했다. 어머니 이학규(李學圭)의 직업은 ‘주막업(酒幕業)’이라고 적혀 있고, 그와 호주인 남편 박현주(朴鉉柱)와의 관계는 ‘첩()’으로 되어 있고, 박헌영과 아버지인 호주와의 관계는 ‘서자(庶子)’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가혹한 호적등본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1922년에 조선호적령이 실시되었으니까, 박헌영이 22살 때부터는 이 등본을 들고 다녔을 터인데 그때 그 감수성 많은 청년 수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이념의 여부를 떠나 나는 연민과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면사무소를 나와 후손을 찾으니 삼종손 박대희(朴大熙)씨를 소개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77세인 그는 처연한 심정으로 박헌영의 소년 시절을 들려주면서 첫 아내 주세죽(朱世竹)과의 행복했던 시절 사진을 보여 주었다.
   
   
박헌영은 1900년에 충남 예산군 광시면(光時面) 서초정리(瑞草井里)에서 아버지 영해(寧海) 박씨 현주(1867~1934)와 어머니 신평(新平) 이씨 학규(1867~?) 사이에 출생했다. 제적등본에 따르면, 박현주에게는 이미 맏아들 지영(芝永·1891년생)이 있었고 박헌영 뒤로 두 딸(1905년생·1912년생)이 있었다. 이미 맏아들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자식을 얻기 위해 소실을 맞이한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는 쌀가게를 경영하면서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던 것으로 보아 궁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헌영은 훗날 자신이 “봉건 양반 가정에서 출생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는 아마 열등감의 표현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신의주(新義州) 지방법원 검사국이 작성한 ‘박헌영의 피의자 신문 조서’(1925 12 12)에는 “나에게는 부모님, 형님 내외분, 그리고 나와 아내, 이렇게 여섯 가족이 있고, 재산은 나에게 없으나 아버님께 약 1만원의 재산(동산·부동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난한 수재의 응어리진 삶

▲ 박헌영의 제적등본. 어머니 이학규의 직업은 ‘주막업’이라 적혀 있고, 이씨와 이씨의 남편 박현주와의 관계는 ‘첩’으로, 아들 박헌영은 ‘서자’로 적혀 있다.


   
박헌영은 소년 시절에 비만하고 키가 작았다. 그는 1910년에 서당을 다녔고 1912년에 예산군 대흥면의 대흥(大興)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5년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합격했다. 재학 중에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책을 읽는 것이 취미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기 전이었으니 학비는 아버지가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1974년에 다시 편책한 박헌영의 호적등본에 따르면 무슨 연유였던지 1932년에 어머니 이학규는 박현주와 이혼했으며, 1934년에 박헌영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호주를 상속했다. 1932년이면 박헌영이 이미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공산주의자로 활약하던 시기였다는 점으로 본다면 아마도 첩실(妾室)의 서출(庶出)로 기록되기보다는 일가 창립을 하는 것이 더 떳떳하다는 판단에 의해서 이혼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가 이혼하기 전에 작성된 호적에 직업이 주막업으로 된 것을 보면 이미 이혼 전에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주막을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우한 소년은 신양장터에서 주막집을 경영하면서 주정뱅이 사내들에게 시달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술심부름을 하는 동안 가진 자에 대한 분노와 적의(敵意)를 많이 느꼈을 것이다. 뒷날 박헌영이 인민 전선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그가 누구보다도 계급적 적의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리 민족의 해방이나 통일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지주를 용서할 수 없었는데 그 이면에는 강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토지 모순에서 해방 정국에 대한 해법(解法)의 교훈을 얻으려 했다.
   
   1919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참가했으며, 휴교로 인해 개별적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YMCA 영어반과 승동교회 성경반에서 영어 공부를 하며 미국 유학을 준비했으나 학자금을 마련해주겠다던 윤돈구(尹暾求)가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유학의 꿈도 사라졌다. 그것도 운명이었다. 역사에서의 가정이란 덧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윤돈구가 죽지 않고 박헌영이 미국 유학을 가 이승만(李承晩)에 못지않은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했더라면 그의 운명과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교육 환경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박헌영은 수재로서 일찍부터 정규적인 영재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 열정의 배후에는 학업을 통한 신분 상승의 욕구가 강렬했다.
   
   
실의에 빠진 박헌영은 1920년 가을, 일본으로 밀항하여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그는 상과대학에 입학할 준비로 지나(支那)기독청년회 영어과에 들어가 약 6개월간 공부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공산주의에 입문했다. 그는 1921 4월 상하이상과대학에 들어가 1922 6월까지 다녔다. 박헌영은 영어·일어·러시아어·에스페란토어 등 4개 언어에 능통했다. 그는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평민 계급의 반역자로서 귀족의 노예이며… 제후와 영토를 옹호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변호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현앨리스와의 사랑과 헤어짐

▲ 박헌영을 연모했던 현앨리스.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간첩죄로 처형됐다.


   
박헌영은 1920 11~1922 4월 상하이에 머물렀다. 그 기간에 운명적으로 한 여인을 만났다. 노동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이었던 강상호(姜尙昊)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청년동맹(共靑)을 조직하여 책임비서로 있을 당시 그곳에 망명해 있던 평남 출신 현순(玄楯) 목사 집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었다.

 

 현순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계열이었다. 현 목사에게는 훗날 미국대사관 일등서기관(CIA의 한국 책임자) 노블(Harold J. Noble)의 부하인 현()피터(대위)라는 아들과 현앨리스(Alice)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박헌영을 연모(戀慕)했다.

 

그는 박헌영보다 세 살 아래였으니까 17~18세 전후였을 것이다. 현앨리스의 평전을 쓴 정병준 교수(이화여대)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정도”였다고 하며, 전 남로당원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여 박헌영의 전기를 쓴 박갑동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증언했다. 현앨리스는 1922년 상하이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곧 이혼하고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화여대를 잠시 다녔다고 한다. 그들이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꿈 많은 청소년기의 감정은 그들의 생애에 깊은 추억으로 남았으리라는 것은 그들의 그 후 행적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무렵은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여 정착하는 단계였다. 레닌(V. I. Lenin)은 러시아혁명의 축제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기에 ‘극동피압박민족대회’(1922 1 21~2 2)라는 이름으로 극동의 공산주의자를 모스크바에 초치했다. 일행인 조선공산당 대표 가운데에는 현순 목사도 들어 있었다. 이때 박헌영도 좌익 지도자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레닌을 만났다. 다른 지도자들이 다 그랬듯이 그도 러시아혁명의 열기와 레닌의 지도력에 깊은 감화를 받은 듯하다. 귀국 후에는 주로 화요회(火曜會·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지은 이름)에 가입하여 활약했다.
   
   
모스크바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박헌영은 러시아 정부의 후원 밑에 조직된 고려공산당 당원인 김만겸(金萬謙)으로부터 100원의 여비를 받아 조선에 공산주의를 선전할 사명을 띠고 귀국길에 올랐다. 상하이에서 안동(安東)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으로 잠입을 기도하던 중에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대정(大正) 8(1919)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6월의 형을 받았다. 그는 1924 1 18일에 출옥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박헌영은 1925 4 18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여 이끌어가던 중에 1925 11월 신의주에서 술김에 친일 변호사 박유정(朴有楨)과 그 일행인 경관을 폭행한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가택수색으로 조직이 폭로되어 체포되었으나 광인(狂人)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미친 사람 행세가 어찌나 천연스러웠던지 수사관들도 속았다.
   
   
이때 박헌영은 운명의 두 번째 여인인 주세죽(朱世竹)을 만났다. 박헌영보다 두 살 연상인 그는 함흥(咸興) 출신으로서, 관북 제일의 명문인 함흥 영생고보(永生高普)를 마치고, 상하이 안정씨(晏鼎氏)여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이들은 허정숙(許貞淑)의 소개로 알게 된 사이였는데, 1925 2 19일자 동아일보 1면 하단에 광고로 게재된 화요회 주최의 전조선민중지도자대회 준비 회의 명단에 박헌영·허정숙·주세죽이 함께 경성 대표로 등재되어 있고, 1926년 제2차 공산당 체포 기록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그들은 이미 이념의 동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세죽은 3·1운동 당시 함흥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1개월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바 있다.
   
   
이후 주세죽은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 등을 주도하며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일제는 그를 “여성 사회주의자 가운데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인물(要視察人物)로 감시했다. 그는 1924 5월 서울에서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1월 경성(京城)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했으며 4월에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박헌영이 일경에 붙잡힌 뒤 그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박헌영과 주세죽은 결국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비비안나)도 낳았다. 결혼 연도는 1921년이라고 했다가 1924년이라고 했다가 법정에서 한 말이 다르다. 호적등본에는 1926년에 신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26 6월 주세죽은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일경에 다시 붙잡혔으나 2개월 만에 풀려났다. 1927 5월 근우회(槿友會)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던 주세죽은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망명과 도피, 그리고 투옥 생활을 거치면서 그들은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박헌영이 아내를 만났을 때 그의 배가 불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아이가 아니었다. 박헌영은 김단야(金丹冶)를 의심했고 주세죽도 그가 아기의 아버지라고 시인했다. 이것을 불륜이니 치정이니 따질 일은 아니다. 궁핍한 혁명가의 삶을 살면서 비좁고 불편한 주거 환경 속에서 벌어진 ‘접촉 사고’였을 뿐이다. 어쨌든 둘은 이 일로 헤어졌다


   
두 번째 여인 주세죽의 파란만장한 생애

주세죽은 소련으로 건너가 ‘한베라’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거기서 그는 1934년 김단야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소련에서도 주세죽은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았다. 주세죽은 1938년 일본의 밀정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주거가 제한되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1946년 형기를 마친 뒤에도 그곳에서 살다가 1950년대 중엽에 죽었다. 한국의 좌파정권 시절인 2007년에 주세죽은 독립유공자 애족장(7등급 가운데 5등급)을 받았다. 좌익이라고 해서 서훈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공적으로 볼 때 그가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우익들은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그가 박헌영의 아내였다는 후광(?)이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1924 4월에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그해 7월까지 있다가 8월 조선일보에 기자로 들어가 11월 중순에 퇴사했다. 동아일보를 퇴사한 것은 그가 동맹파업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이었고, 조선일보를 퇴사한 것은 그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조선 독립을 쟁취하자”는 글을 쓴 후 사회주의자를 내쫓으라는 일제의 강압 때문이었다. 1929년에 박헌영은 간도(間島),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는 그곳에서 동방노동자공산대학(모스크바공산대학)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수학한 다음 1932년에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는 1933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 6년형을 받고 1939년에 출감했다. 그는 다시 광인 행세를 하면서 경성 콤그룹(Com Group)의 대표자로서 조직의 운영을 위해 암약했다. 박헌영은 이 무렵에 이득균이 경영하는 광주시(光州市) 월산동의 벽돌 공장에서 ‘김성삼’ 또는 ‘김추삼’이란 가명으로 직공 행세를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이 되자 박헌영은 휘황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서울 종로에는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는 전단이 나붙었다. 9 8일이 되어 서울 계동에서 개최된 공산당열성자대회에 나타난 박헌영은 “조선 인민공화국 만드느라고 동무들 만나기가 늦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에 착수했다. 이때 잊을 만하던 운명의 여인이 다시 찾아왔다. 현앨리스가 군정 요원으로 자원하여 서울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박헌영과 자주 접촉했다. 군정청은 영어와 한국어가 자유로운 그를 쓰면서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끝내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박헌영의 활약은 뜻과 같지 않았다. 그는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위조지폐사건(1946 5 15)으로 체포령이 내리자 남한을 탈출하여 북한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미군의 수색을 피해 관 속에 숨은 채로 9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하다가 평양에 도착했지만 일제나 미 군정보다도 더 가혹한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조선정판사 사건은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공산주의자 탄압을 위해 사건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쓴 임성옥의 박사학위 논문(한국외국어대학·2015)이 최근에 통과되었다.

 

 내가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글을 처음 발표했을 때 몇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그 주모자인 박락종(朴洛鍾)이 정치인 박지원(朴智源)의 할아버지인 것을 알고 썼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박락종이 박지원 의원의 할아버지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느냐”고 물었더니 “향토예비군 교육장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박지원 의원도 싫지만 그런 식의 우익도 싫다. 박헌영은 북한에서 재기할 꿈을 꾸며 1947 12월 초에 그의 정치적 보루로서 혁명의 전위 계급을 양성하기 위해 강동(江東)정치학원을 창설하여 1948 1 1일자로 개원했다.

 

 이 학원이 적어도 남한에서 그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남쪽 출신 360명 가운데 강동 정치학원생이 200명이 넘었다. 남한 출신 학생들은 사석에서 박헌영을 ‘조선의 레닌’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추종했다.
   
   
박헌영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소련의 군부가 북한의 지도자로 박헌영과 김일성을 택일하는 문제를 결정한 무렵인 1946 7월 말, 박헌영이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 스탈린이 두 사람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이 박헌영을 지명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이론적으로 준비된 인텔리였으나 1928년 해체된 조선공산당원으로 종파 활동을 한 경험이 있으며, 일제하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며 10여년 동안 세 차례 투옥 생활을 하면서도 살아남은 것으로 보아 그 과정에서 일본에 전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북한 대중에게는 박헌영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박헌영은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박헌영 관련 보도를 본 현앨리스는 우선 아들이 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갔다가 거기에서 헝가리~러시아~울란바토르~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여정이 20일 정도 걸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했을 것이다. 앨리스가 평양에 들어간 것은 11월 말경에서 12월 초 사이였다.(정병준 교수의 기록) 동토를 통과하기가 몹시 추웠을 것이다. 그는 박헌영이 장관으로 있는 외무성의 타자수 겸 통역으로 채용되었다는 설(박갑동)과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는 설(박헌영 기소장), 그리고 박헌영의 비서였다는 설(피터현)이 있다. 그 어느 쪽이든 박헌영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왜 그 먼 길을 찾아갔을까?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아닌 바에야 이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19532~3월경에 체포되어 1956 8월 무렵에 처형되었으리라는 것이 정병준 교수의 추정이다.
   
   
경향신문(2002 11 9)은 상자기사로 현앨리스의 사진과 함께 그를 “한국의 마타하리”라고 소개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가 과연 이중간첩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박헌영에게 씌워진 간첩죄와 그를 통한 공화국 전복 음모의 빌미가 된 것은 사실이다.

 

 북한최고재판소의 ‘박헌영 기소장’에 따르면, 그는 “서울에서 활약할 당시 접선한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자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보 기관의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元漢慶)에게 고용된 간첩”으로서, “인민군대의 진격으로 단절된 노블(H. J. Noble)과의 간첩 연락선을 다시 회복할 목적으로 미군이 밀파한 최익환(崔益煥)·박진목(朴進穆) 등과 접선하였고” “1948 6월 하지(John R. Hodge)의 지령을 받은 미국 간첩 현앨리스를 중앙통신사 및 외무성에 배치시켜 간첩 활동을 지원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1956 7월에 처형되었다.     


   
인생에서의 야망과 운명

   이념의 선악을 떠나 박헌영의 생애는 불우한 시대의 한 지식인의 비극적 생애를 소설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서울로 돌아와 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은 전략적으로 실수했다. 그는 남한의 우익과의 투쟁에 몰두하는 동안에 이미 탈진해 있었으며, 신진 공산주의자인 해외파, 특히 코민테른과의 연계·배려를 소홀히 한 것이 실수였다. 고전적 공산주의자인 그는 이 점에서 순진했으며, 김일성을 너무 낮고 어리게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박헌영은 전술적으로 실수했다.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이 한국 정치의 중심지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서울에 집결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생존하지 못하고 월북했을 때, 그것은 이미 늦었다. 현지 기반이 없는 그들은 국외자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꿈이나 야심은 중요하다. 더욱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야심은 허물이 아니다. 당대에 일가를 이룬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나 야망이 전략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재앙의 단초가 된다.

 

 현실정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N. Machiavelli)가 인간의 성공 조건으로 세 가지를 뽑으면서 첫째는 운명이고, 둘째는 덕을 베풂이고, 셋째는 역사가 부를 때 너는 거기에서 준비하고 있었느냐고 물은 것은 그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한 결론이었다. 박헌영의 생애를 보노라면 그의 말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출처 | 주간조선 2365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1945년 9월 하늘에서 본 서울…일제강점기·해방당시 희귀영상

/1945년 서울역 앞

일제강점기 조선의 모습과 해방 당시의 역사적 순간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희귀영상 자료들이 공개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8일 시사회를 열고 지난 한 해 해외에서 수집한 한국 관련 초기 영상 89편 중 자료적 가치가 높은 세 편의 일제강점기 기록 영상을 공개했다.

 

/1945년 전차 이용하는 서울 시민

 

/1945년 보신각 앞

 

/1945년 연합군 포로수용소 앞에 모인 호주군

 

/1935년 울산 읍내장 부근 태화루

 

 

/1935년 울산 읍내장

 

 

/1935년 시인 공초 오상순과 도예가 버나드 리치

 

 

/30년대 일제강점기, 전북수리조합 군산출장소

 

 

/30년대 일제강점기, 군산 부잔교

 

 

/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신탁주식회사 사무실

입력 : 2017.03.28 14:01
[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광복절 기념 사진

/1948 대한님국 정부수립 경축 퍼레이드

 

/1948

 

/1952년 제2대 대통령 취임식 및 광복절 기념식 시가행렬

 

/1953년 판문점 북서쪽 공산지역 마을

 

/1955년 이승만 대통령 광복 10주년 기념 해방어린이 초총

 

/1955년 제10주년 광복절 행사 시가행진

 

/1956-1 제3대 대통령 취임식 및 광복절 기념식

 

/1956-2

 

/1957년 광복 12주년 디젤기관차 운행

 

/1957년 광복선열추도식에 참석한 유가족 분향

 

/1958년 서울 용암지역 움막집

 

/1959년 광복 제14주년 기념 아치 서울역 야경

 

/1960-1 제15회 광복절 기념식

 

/1960-2

 

/1960년 서울 주택가

 

/1961년 제16주년 광복절 경축가념 꽃전차

 

/1961년

 

/1962년 구로동

 

/1962년 국내 최초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

 

/1962년 제주도 전통가옥

 

/1962년 홍인동 일대

 

/1968년 영동 제1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된 반포지역

 

/1975년 국립묘지 무후선열재단 준공식

 

/1987년 제42주년 광복절 및 독립 기념관 개관식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경축식

 

/1995년 광복 50주년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2015.8.13 통일의 빛 - 광화문 국가보훈처와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최

 

/2015.8.14 광복절 전야제 - 서울광장에서 시민 2만 여명이 불빛을 모아 태극무늬를 만들었다

 

■광복절 유래와 ‘독립기념일’ 필요성  2015년 08월 12일 

이영훈 / 서울대 교수·경제학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됐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해방과 광복, 건국, 독립의 개념을 둘러싸고 적잖은 혼선이 있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제대로 알고 기념해야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통성, 정체성을 반듯이 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1948
8 15, 대한민국은 세계를 향해 독립을 선포했다. 그해 12월 유엔은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승인했고, 그에 기초해 미국 등 우방이 대한민국을 승인했다. 1949 8 15일 정부는 ‘제1회 독립기념일’을 성대하게 경축했다. 더불어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에 회부했다. 4대 국경일은 3·1, 헌법공포기념일, 독립기념일, 개천절이었다. 그런데 그해 9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바뀌었다.

광복절의 ‘광복’은 무엇을 영광스럽게 회복한다는 뜻이다. 1910년대부터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광복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광복’ 두 글자만으로도 독립을 영광스럽게 회복하는 투쟁이라는 뜻이 충분했다. 국회가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바꾼 것은 독립이나 광복이나 그 뜻이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1950년을 제2, 1951년을 제3회 광복절로 경축했다.

그런데 1951년부터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문들은 제3회 광복절을 제6회 광복절로 부르기 시작했다. 1954년부터 정부도 슬그머니 그렇게 바꿔 기념했다. 지난 60년 간 ‘광복’ 두 글자도 암흑을 뚫고 빛이 돌아왔다는 식의 엉뚱한 이미지로 바뀌었다. 이 같은 혼란이 발생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역사의 우연이다. 만약 총선거가 1948 5월이 아니라 3월에 실시됐더라면 독립은 그해 6월 중에 선포됐을 것이다. 그러면 독립기념일 또는 광복절이 8 15일과 겹칠 이유가 없었다. 총선거가 5월에 실시됐기 때문에 국회 소집, 헌법 제정, 대통령 선출, 행정부와 사법부 구성이 8 4일까지 완료됐다. 그래서 독립선포일이 8 15일로 잡혔는데, 3년 전의 해방도 함께 경축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자 독립은 사라지고 해방만 경축하게 됐다.

둘째는 한국인의 반일 민족주의이다. 1948년 당시만 해도 개인·자유·독립과 같은 근대문명의 기본 가치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는 낮은 수준이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인이 공유한 정신세계는 반일 민족주의였다. 정부도 국민 통합을 위해 민족주의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교육되지 않고 반일 민족의 일원으로 양성됐다. 그 결과 해마다 광복절을 맞아서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맞은 기억이 자유인의 국가가 독립을 했다는 기억을 압도해 버렸다.

셋째는 학문하는 자세의 결여다. 해마다 광복절이면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축전이 날아온다. 2010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제62회 ‘코리안 인디펜던스 데이’(Korean Independence Day)를 축하했다. 지난 60년간 정부는 한국과 3년이 어긋나는 축전을 받고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어느 쪽이 잘못인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공화국 창건을 기념하지 않는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다. 우선 광복절의 주년(週年)을 바로잡을 일이다. 그런 다음에 혼란의 근원이 된 광복절이란 애매한 명칭을 원안대로 독립기념일로 돌리기 위한 국민적 토론에 착수할 일이다. 올해는 광복 67주년이 되는 해다.

문화일보

 

■2015.08.14 목숨 걸고 한국 지켜낸 '파란눈 태극戰士'

[광복 70주년, 숨은 영웅 70]
[
당신들이 있어 대한민국이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 6
·25전쟁 도운 외국인들
전쟁고아 1000명 살린 블라이스델
유일한 6·25 종군女기자 히긴스, 美 전역 "한국 돕자" 캠페인 벌여
戰功 세운 터키, '형제의 나라'

 

올해 광복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고마운 은인이 너무나 많다. 광복과 건국 그리고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주요 고비마다 헌신적인 도움의 손길을 건넸던 외국인들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을 선정하고, 지면을 통해 뒤늦은 감사 편지를 보낸다. 때로는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고 정확한 생몰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묵묵히 한국을 도왔던 이들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숨은 영웅들(Hidden Heros·히든 히어로즈)’이다. 본지는 이들과 유족에게 감사패와 기념 선물(갤럭시탭S)을 전달할 예정이다.

 

"그들은 마치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

1950 8 23일 미국 뉴욕헤럴드트리뷴지()에 실린 6·25전쟁의 전황 보도 중 한 줄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주일 전 북한군 2개 연대가 경남 통영 시내를 기습 공격하자 한국 해병대가 단독으로 반격에 나선 '통영상륙작전'을 다룬 기사였다. 이때 해병대의 활약에 강한 인상을 받은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사진)가 기사에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국내 신문이 이를 번역해 보도하는 과정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생겨났고, 지금까지 우리 해병대를 대표하는 수식어로 쓰이고 있다.

마거릿 히긴스는 6·25전쟁을 취재한 300여명의 종군기자 중 유일한 여기자였다. 전쟁 발발 이틀 만에 한국 땅을 밟은 뒤 6개월간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전했다. 인천상륙작전 때 여자를 함정에 태우지 않는다는 미군의 방침에 맞서 "갑판 위에서 자겠다"며 버텨 승선을 허락받은 일화도 유명하다.

 

▲광주광역시의 충현원에는 6·25전쟁 당시 고아 1000여명을 구출한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의 동상이 있다. 블라이스델 대령은 2007년 이 고아원을 돕기 위해 자신의 회고록 판권을 넘기는 등 계속 한국의 고아들을 도왔다. /김영근 기자

 

미국에 돌아온 뒤인 1951년 그간 취재를 바탕으로 '한국전쟁(War in Korea)'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을 들고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의 캠페인은 미국 젊은이들로 하여금 한국을 위해 참전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히긴스는 이 책으로 여기자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역시 6·25전쟁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AP통신 사진기자 맥스 데스포도 히긴스와 함께 전쟁의 실상을 알린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히긴스와 데스포가 전장을 누빌 때, 미 공군의 군종장교로 참전한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은 온 서울을 뒤지며 수송기와 트럭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군대가 후퇴하자 블라이스델 대령도 자신의 책임 아래 돌보던 전쟁고아들을 탈출시켜야 했다. 그는 제5군 사령부에서 기적적으로 만난 부사령관을 설득해 일본에 있던 C-54 수송기 16대를 김포공항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미 공군 러셀 블라이스델 대령의 전쟁고아 탈출 작전 모습. 1069명의 생명을 구했다. /충현원 제공

 

난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항까지 아이들을 태울 차량도 없었다. 블라이스델 대령은 시내에서 수송 임무 중이던 해병대 트럭을 발견하고 "상부 명령"이라고 속여가며 아이들을 태웠다. 극적으로 공항에 도착한 블라이스델 대령과 고아들은 제주도까지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살아난 고아와 보육교사는 총 1069. 이 작전은 공식 미군 전사(戰史) '유모차 공수작전(Kiddy Car Airlift)'이란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을 위해 묵묵히 싸운 전사(戰士)들의 공도 컸다. 1951 2월 중공군의 공세를 꺾은 지평리 전투에서 필사의 총검 돌격을 감행한 프랑스군을 지휘한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령, 미 해군 정보장교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큰 공을 세우고 서울탈환작전 중 녹번동 일대에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그런 용사 중에서도 빛나는 이들이다.

6
·25전쟁 때 터키군 1개 여단을 이끌고 참전한 타흐신 야즈즈 준장도 부산·수원 등에서 북한군을 격퇴했고,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UN군의 후위에서 퇴각을 엄호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와 터키군의 분전 덕분에 오늘날 한국과 터키 사람들은 서로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며 가깝게 여기고 있다.
공동기획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권승준 기자

 

■2015.08.14 이승만 외교·臨政 도운 '광복의 은인들'

[광복 70주년, 숨은 영웅 70]
[
당신들이 있어 대한민국이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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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도운 외국인들
상하이서 독립운동가와 교류한 美 피치 목사, 백범의 탈출 도와
英 베델, 양기탁과 일제침략 고발… 中 쑨커, 해외에 한국 독립 거론

올해 광복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고마운 은인이 너무나 많다. 광복과 건국 그리고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주요 고비마다 헌신적인 도움의 손길을 건넸던 외국인들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을 선정하고, 지면을 통해 뒤늦은 감사 편지를 보낸다. 때로는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고 정확한 생몰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묵묵히 한국을 도왔던 이들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숨은 영웅들(Hidden Heros·히든 히어로즈)’이다. 본지는 이들과 유족에게 감사패와 기념 선물(갤럭시탭S)을 전달할 예정이다.

 

"날마다 왜놈들이 우리 동포들을 잡으려고 미친개처럼 돌아다녔다. 임시정부와 민단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녀 단체인 애국부인회까지도 아예 집회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1932
년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일제는 백범 김구를 체포하려고 현상금 20만원을 내걸고 대대적 검거에 나섰다. 일제는 임정이 있던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 수색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하이 주둔군 사령부 합작으로 다시 현상금 60만원을 걸었다. 절체절명의 체포 위기에 내몰린 백범을 숨겨주고 탈출을 도와준 은인이 미국인 목사 조지 피치(1883~1979)였다.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난 피치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온정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반일(反日) 정신이 강했다.

 

▲1947년 경교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첫줄 오른쪽에서 둘째)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첫줄 왼쪽에서 둘째), 김구 임시정부 주석(첫줄 왼쪽에서 넷째), 조지 피치(둘째 줄 왼쪽에서 첫째)와 부인(첫줄 오른쪽에서 첫째)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구는 손녀 효자를 안고 있다. /백범김구기념관 제공

 

피치는 1909년 뉴욕 신학대 졸업 이후 상하이에서 YMCA 간사로 활동하며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윤봉길 의거 직후에도 피치는 보름이 넘게 2층 전체를 백범 일행에게 내줬다. 피치의 부인은 윤봉길 의거의 진상을 밝히고 일제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영문으로 작성했다.

일제 끄나풀이 피치의 집 주변을 끊임없이 들락거리며 정탐하자, 백범 일행은 결국 상하이 탈출을 결심했다. 피치 목사는 차량 운전사로 변장했고, 김구와 피치의 부인은 나란히 부부처럼 뒷자리에 앉아 마당에서 차를 몰고 나왔다. 프랑스 조계를 지나 중국 지역과 연결되는 다리에 이르러서야 피치의 자동차는 멈췄다. 차에서 내린 백범 일행은 미처 인사할 겨를도 없이 짐 꾸러미를 들고 다리를 건넜다.

훗날 김구의 '변장 탈출'로 알려진 사건이었다. 1937년 일제의 난징(南京) 대학살 당시에도 피치는 참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코트 속에 감추고 탈출을 감행했다. 이듬해 그는 미국 전역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했다. 피치 부부는 광복 이후 한국에서 김구 선생과 행복하게 해후(邂逅)했다. 그는 한국과 대만 YMCA에서 활동하다가 1961년 은퇴했다.

한국의 광복을 염원했던 모든 외국인이 피치처럼 행복한 결말을 보았던 건 아니다. 구한말 당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은 양기탁 선생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일제의 침략을 고발했다. 하지만 일제의 부당한 압력으로 1907년부터 두 차례나 법정에 선 끝에 1909년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베델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혀 있다. 구한말 고종 황제를 보필했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도움을 줬던 호머 헐버트도 이 묘원에 나란히 묻혀 있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의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미국의 아시아 외교 전략 수정을 미국 정부에 건의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광복 후에도 미군정과 국무부에 한국 입장을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1919
3·1운동의 열기 속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광복까지 26년간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이 기간 임정을 따뜻하게 맞아준 건 중국의 반일 운동가들이었다. 중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의 아들 쑨커(孫科) 1942년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과 중한(中韓)문화협회를 조직했고, 국제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거론했다.

공동기획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015-08-14 우리의 광복, 나의 광복

/데이비드 조나단 린튼 변호사

 

올해는 우리가 일제강점기 치하로부터 대한민국의 주권을 회복한 지 7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이는 또한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소하는 데 실패한 지 70주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의 사명감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은 오늘날의 세계를 이끄는 한 축이 아닌 역사책 모퉁이에 글로만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서양인의 외모, 하얀 피부 색깔, 밝은 머리색, 깊은 눈매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나의 선조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고 그 덕분에 나는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유진 벨 선교사는 1895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벨 선교사는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교육활동에도 헌신하며 문맹 퇴치에 앞장서셨다. 그의 사위이자 나의 증조부인 윌리엄 린튼은 3·1운동에 앞장서셨고 미국에서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데에도 기여하셨다. 결국 증조부는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사 터를 뒷간으로 만든 죄목으로 일제로부터 추방을 당하시기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증조부처럼 대한민국 독립에 대한 염원의 끈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신 분들 덕택에 70년 전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내가 광복절의 의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요즈음, 우리가 오늘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 준 우리 선조들의 희생과 노고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 각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얀 피부의 한국인으로부터 이러한 당연한 말을 듣는 것이 어쩌면 새롭게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개종을 한 사람들은 그 종교에 대해 가장 열정적인 지지자가 된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귀화한 한국인으로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을 위하는 가장 열정적인 지지자가 되고자 마음먹었다.

나는 두 가지 길을 통해 대한민국의 열렬한 지지자로 거듭나고자 한다. 이번 광복절처럼 중요한 국경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그 첫 번째 길이다. 나는 지난 반 년 동안 서울시 광복 70주년 시민위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뜻 깊은 행사의 의미를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이는 나 자신에게도 많은 배움과 교훈을 주었다.

두 번째 길은 대한민국 미래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짧은 시간 내에 시장 선도자로 발돋움하며 전 세계를 여러 차례 놀라게 한 바 있다. 하지만 내 소견으로는 대한민국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과 스타트업들 또한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창업가 정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성공적으로 스타트업을 운영한 경력이 있는 국제 인수합병(M&A) 전문 미국 변호사로서, 나는 한국의 선도기업들의 해외 진출과 국제거래를 돕고 초기 기업들이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대한민국 경제와 미래에 가장 큰 이바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귀화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각종 규제 개선을 위한 토론에도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

나는 광복이라는 말이 퍽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 명예, 문화 등 다양한 뜻이 있는 ‘빛()’을 되찾는 것, 광복의 한자 의미이다.

 

올해 8월은 나에게 개인적인 ‘광복절’이기도 하다. 선조들이 독립에 일조한 덕택에 국적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이 된 지 1년이 되기 때문이다. 제 선조께서 몸 바쳐서 되찾고 지키려 했던 그 아름다운 나라의 명예와 문화가 5대를 거쳐 내게 다시 돌아온 것이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이만한 영예가 또 어디 있을까? 이렇게 감사한 국적법 덕분에 나의 여동생도 이번에 대한민국 국적을 얻게 된다.

이 자리를 빌려 독립유공자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후손들이 빛을 찾아 대한민국으로 오게 해 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와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되찾은 빛을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데이비드 조나단 린튼 변호사

 

2015.08.15 세계와 함께 기념하는 8·15

1945 8 15 600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2차 세계대전의 광기(狂氣)가 봉인되었다. 1차 세계대전과 묶어서 '20세기 30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긴 전쟁의 종점이었다. 17세기 서유럽의 30년 전쟁이 개신교와 가톨릭의 종교 전쟁이었듯이 20세기 30년 전쟁도 관념의 충돌에 의해 추동되었다. 20세기 초 좌익 전체주의와 우익 전체주의는 황실(皇室) 숭배가 강했던 나라들에서 대량 학살의 괴물들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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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레닌과 스탈린,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대중적 광기를 결집했다면 일왕(日王)은 이미 1868년부터 서양 중세의 황제나 교황에 버금가는 동양의 신()적인 존재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폐위된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처럼 군국주의를 추동한 일왕도 1945년 폐위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1억 옥쇄(玉碎)'를 부르짖던 일본 군부 강경파를 누르기 위해서는 '만들어진 신'의 마지막 역할이 필요했다.

일왕 히로히토는 8 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신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였다. 나치 독일의 패망을 기준으로 독일은 5 8, 러시아는 5 9일을 2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9 3일을 전승절(戰勝節)로 기념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서울과 평양이 함께 기념하는 날은 8 15일이다. 8·15는 영어권 국가들에서도 'V-J Day(Victory over Japan Day)'로 경축되어 왔다.

1945
8 15일 연합국 진영은 물론 도쿄·경성(서울)·평양·타이베이·사이공·자카르타 등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에서 전쟁의 공포가 사라졌다. 더 이상 남녀노소가 전시 노동에 동원되지 않아도 되었다. 교사들이 더 이상 거짓을 진실처럼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다.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적 양심을 굽히고 일왕을 경배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본군 종군 위안소도 폐쇄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날은 기쁘면서도 아쉬운 날이었다. 김구는 탄식했다.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었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가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연합국들은 한국의 독립 의지를 인정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영친왕으로 격하되어 일본 황군(皇軍) 사단장으로 복무하던 시절에 그들마저 없었다면 연합국은 우리를 전범국(戰犯國) 일본 제국 아래 있던 '조선 왕국'으로 오인할 수도 있었다. 그들의 독립 정신은 17세기 30년 전쟁 이후 독립국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던 세계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1945
8 15일을 기념하면서 3년 후인 1948 8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이 독립했다. 이 민주공화국은 1897년 독립을 선포했지만 일본에 강점당했던 대한제국보다 더 많은 나라로부터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세계인들과 함께 '세계평화의 날'로 기념해야 할 8·15를 한국인들이 더욱 소중하게 기려야 하는 까닭이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15.09.05 김구 선생 숨겨주고, 윤봉길 의사 폭탄 만들어주고…

臨政 도운 중국인과 후예들

4일 열린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청사 재개관식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중국인 추푸청(輔成·1873~1948) 선생의 손자인 추정위안(政元·83)씨도 참석했다. 추씨는 임정 청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김구 선생과 한국 독립열사들의 의거(義擧)는 중국의 항일(抗日)운동에도 큰 도움이 됐다" "(김구 선생 등을 도운) 조부(祖父)의 결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중국인임에도 대한민국의 독립에 큰 이바지를 한 데 대해 감사드린다" "중국인 독립 유공자의 후손으로서 한·중 관계의 가교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신해혁명 원로 추푸청, 공상총장 출신 천치메이.

 

신해혁명 원로였던 추푸청은 김구 선생과 임정 요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1996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32년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를 빌미로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붙잡고자 했다. 당시 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이었던 그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상하이에서 저장성 자싱(嘉興)으로 긴급히 피신시켰다. 자신이 소유한 공장을 피난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김구가 자싱에 은신했던 당시 추정위안씨는 갓난아이였다. 추씨는 "김구 선생이 머문 곳은 우리 집 인근 친척집이었다" "피난처였던 곳은 뒷문이 호수와 맞닿아 있어 일제에 발각됐다 하더라도 급히 대피할 수 있도록 조부가 고른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씨는 이후 아버지의 피신처인 자싱을 직접 방문해 "추푸청 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일가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과 선생이 베푼 온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감사를 전했다.

이 밖에도 많은 중국인이 임정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중국 공상총장(工商總長) 출신인 천치메이(陳其美·1878~1916)는 베이징에서 한·중 공동 전선을 펼치며 항일 투쟁을 벌였다. 그는 1968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윤봉길 의사가 의거에 사용한 폭탄을 만들어 준 이도 당시 병공창 소속 기술자인 중국인 왕보시우(王伯修)였다.

유마디 미래기획부 기자 

 

2015-08-28  70년 전 기억을 더듬어 작성한 나의 8.15 이야기

 

저는 1930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나 우리 민족의 격동기이며 수난기인 일제 강점 시대와 6.25전쟁을 겪은 세대로, 아직 생존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오늘은1945 8 15일을 전후로 제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7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1945 8 15일 해방 당시 저는 만 열다섯 살,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꼭 7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 때의 감격, 그 때의 기쁨이 제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감격, 가장 큰 기쁨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1945 6 1일부터 7 31일까지 두달 동안 소위 근로동원에 나가 평택 비행장 활주로 공사에 동원되었다가 1주일 간의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8 8일부터 학교에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당시 부모님께서 ‘학교에 돌아가면 또 근로동원에 나갈텐데, 너는 몸도 약하니 집에서 쉬라’는 말씀에 따라 집에 머물다가 8 15일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먼저 학생 근로동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일제 말기엔 대부분의 청년들이 전장으로 나가고 많은 장년들이 징용으로 끌려나가 노동력이 부족했습니다.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일제는 학생을 동원하여 일을 시켰는데 이것을 소위 근로동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근로동원에 나가 잠실에 있던 일본 사람들의 농장에 가서 일하기도 했으며,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일본 신사를 짓기 위해 터를 닦는 공사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한강에는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인도교가 단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참고로 지금은 서른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엔 용산에서 잠실에 가려면 서빙고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당시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때부터 일본 군대를 위해 쓰일 소위 송탄유를 만드는 원료인 송진(resin)이 박힌 소나무 뿌리 또는 가지를 모으는 일, 일본 군의 군마에게 먹일 마초를 베어서 바치는 일들을 했습니다.

 

1945 8 15일 아침, 저는 큰 형님과 함께 집 터밭에서 가을 채소를 심기 위해 풀을 매고 있었습니다. 12시경 되어서 집 앞에 사는 친척 아저씨(7촌숙)가 단파 라디오로 12시 중대 뉴스를 듣고 나오며 “오늘 일본이 항복하였군. 일본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민초(백성들)를 위하여 무조건 항복했다”는 겁니다. 그 순간엔 실감이 나지 않았지요.

 

그리고 나서 점심을 먹고 큰 형님과 집에서 약 30(7.5 마일) 떨어져 있는 미둔리라는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 길은 부래산이라는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미둔리에는 저의 작은아버지가 사셨는데 그 날은 그 동네에서 기형제를 지내는 날이어서 돼지를 잡기에 다같이 식사를 위해 떠난 것이었고, 우리 형제는 저녁 무렵에 미둔리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1년에 한번씩 기형제라는 것을 지냈는데, 소를 잡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제 말기에는 대개 돼지를 잡아놓고, 축문(기도문)을 읽고, 동네 수호신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고기(육류)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기형제 지내는 날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지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아마 그 당시 우리나라 한 사람당 1년 평균 육류 소비량은 1( 2 파운드)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집집마다 형편에 따라 달랐겠지만 대체적으로 설날, 추석날, 어른들 생일, 잔치날, 그리고 기형제 정도가 아니었겠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간혹 겨울에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돼지를 잡아 몫을 지어 나누어 가져가 김치찌개에 넣어 먹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물론 부잣집의 경우에는 달랐겠지요. 그리고 당시 보통 사람들은 불고기, 갈비구이와 같은 음식은 생각지도 못했었습니다. 대개 적은 양의 고기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먹기 위해 국을 만들어 먹었지요.

 

그래서 그 날 저녁에는 우리 형제뿐만 아니라 다른 사촌 형제, 친척들이 모여서 오랫만에 돼지 국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 꽃이 피기 시작하였고, 어디에서부터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국호를 “동진 공화국”으로 한다느니, “고려공화국”으로 한다느니, 총리대신(국무총리의 일본식 직명)은 김구가 되고, 육군대신은 김일성, 농림대신은 강기덕이 된다느니 하면서 그전에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름들도 거론되었습니다.

 

물론 김일성이란 이름은 그 때 당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요. 그는 축지법을 써서 하루 밤에 몇 백 리를 갈 수 있는 독립군으로 신화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편, 저희 사촌 형 중에 말이 조금 빠른 분이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조선사람들 별 수 있겠니. 며칠만 있으면 또 서로 싸울텐데…”라고 하자 저는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나던지 그가 몹시 미웠어요.

 

그렇게 8 15일이 지나가고 다음날인 16일 형님과 전 기차를 타고 고원읍으로 갔습니다. 기차로 두 정거장 거리인데 일제 말기에는 군수 물자 수송 때문에 민간인들에게는 기차 얻어타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미둔리 갈 때는 기차를 타지 못해 걸어서 갔는데 운이 좋게 오는 길에는 일본이 항복하여 군용물자 수송이 필어없어져 기차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고원역에 내려 읍내에 들어가니 읍내 전체가 온통 만세 판이었지요. 모두들 미친듯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껑충 껑충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저도 집에 와서 종일 “조선독립 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춤을 추었어요. 펌프 우물에서 펌프질을 하면서도 내내 “조선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아버지와 같이 먹을 갈아서 일본 국기 일장기에 태극기를 그려넣던 일은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저희 아버지가 어떻게 태극기를 그릴 줄 아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물론 몰랐지요. ! 일본의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려 넣던 감격은 참으로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8 16일부터 2~3일 동안은 국민들이 너무도 기뻐서 온통 미치다 싶이 했을 겁니다. 그 때는 “대한독립 만세”라는 말을 “조선독립 만세”라고 했어요. 그리고 일본 사람이 물러나면 우리나라가 바로 독립하는 줄로 알고 있었지요.

 

그 때 들리는 소문엔 서울에서 중학생 이상 학생들로 치안대를 조직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즉시 학교로 돌아가야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2~3일 후에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갔어요. 그전 같으면 급행 열차로 6시간, 완행으로 8시간 걸리던 거리를 하루 이상 걸려서 서울에 도착했던 것 같습니다.

 

일제 시대에 기차 기관사들이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물러갔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기차 타는데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객차, 화물차 꼭대기, 기관차 위, 승강 계단 등 아무데나 매달려서 탔지요. 기차 안에서는 선반 위에도 타고, 바닥에도 앉고, 아무데나 걸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그야말로 무질서 그 자체였어요.

 

서울역에서 내려서 저는 가회동에 있는 제 하숙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알아보니 일본이 항복하던 날에 학생들이 치안대 역할을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계속 치안을 유지한다고 하더군요. 학교는 당분간 휴교 상태여서 2주일 가까이 그저 하숙집에 머물러 있었지요.

 

서울에 와보니 휘문중학교 교문에는 “한국민주당”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고, 안국동에 있는 지금의 풍문여고 교문에는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더군요. “한국민주당”은 송진우, 김성수 씨가 주동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 안재홍 씨가 주동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 때부터 제 사촌 형이 예언한 대로 당파 싸움이 시작되더군요.

 

저는 그 후 38선을 넘어 집으로 왔습니다. 그 때까지는 38선을 넘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만주 쪽에서 귀국하는 엄청난 사람들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었어요. 길 옆에서 소고기 장국밥을 파는 곳이 그렇게도 많더군요. 해방이 되었으니 소도 마구 잡아먹었지요.

 

그 때 소련군이 들어와서 일본 여자들을 강간한다는 소문이 돌아 일본 여자들은 머리를 깎기도 하고 한국 사람 집에서 식모로 일하겠다고 한다는 말이 들리기도 했어요. 우리 동네 가까이에 신작로(국도)가 있었는데 소련 군인들이 트럭(미국 GMC)을 타고 지나가는데 얼굴이 먼지로 덮여 뽀얗고 코는 크고 빨겋게 보여 모두 똑같아 보였어요.

 

한번은 신작로에 나갔더니 보따리를 지거나 멘 사람들의 긴 행렬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원산 쪽에서 일본 관리들이 줄을 지어 북쪽으로 가는 행렬이었어요. 소련 군인들이 따발총을 메고 앞, , 중간에서 그들을 몰고 가면서 가끔씩 따발총을 공중에 대고 쏘아 대더군요. 후에 들으니 그것이 소위 “죽음의 행진”으로, 그렇게 소련까지 몰고 갔는데 도중에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패전 국민의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군인(로스키)들은 동네의 쌀, 감자, 술 등을 마구 강탈해 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막기 위해 로스키가 나타나면 동네 높은 곳에서 종을 치고, 종 소리가 나면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로스키 뒤를 따라 다녔습니다. 로스키들이 마차를 타고 와서 말을 나무에 매어놓고 무 밭에서 무를 뽑아 안주로 삼아 소주를 마시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로스키들은 시계가 귀했는지 시계를 팔에 몇 개씩 차고 다니곤 했고, 어떤 군인들은 때가 쩔어붙은 가죽 군복을 입은 것도 보았습니다. 그들이 세수하는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아마 추운 지방 야전에서 겨울에 세수하기 곤란하니까 그렇게 한 모양이예요. 입에 물을 한 모금 물고 그 물을 뱉으면서 손으로 받아 세수를 하곤 했어요.

 

저는 가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학교에 다니다가 겨울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데, 38선에서 경계를 서 있는 미국 군인들이 38선을 넘으려는 우리를 발견하고 “가쪼, 가쪼”라고 하더군요. 38 북쪽에서는 소련 군인들이 “까라, 까라”하면서 38선을 못 넘도록 하더군요. 어린 소년 가슴 속에 ‘왜 우리 땅에서 우리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마음대로 못 다니게 하는가’ 하는 울분이 일어나더군요.

 

‘언제쯤 우리 마음대로 이곳을 넘어 다닐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7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중에 내 나이 또래의 길손을 만나 같이 38선을 넘어 눈이 덮인 철원 평야를 달 밝은 밤에 서벅 서벅 새 눈을 밟으면서 걸어가던 생각이 납니다.

 

우리 세대는 참으로 격변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보통학교”라고 부르다가, 그 후 “심상소학교”라고 부르더니, 졸업할 무렵에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지요.

 

제가 태어난 다음해 소위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이 만주를 점령했고, 보통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중일전쟁이 일어났으며, 졸업할 무렵에는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고, 1945 8 6일과 9일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지요.

 

그 때까지 소련과 일본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는데,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곧 항복할 것 같으니까 스탈린은 부랴부랴 대일전쟁에 참여하여 소련 비행기가 집 상공을 지나 원산을 폭격했고, 소련의 육군은 한소 국경 도시 웅기를 점령했으며, 8 12일에는 나진, 청진에 상륙했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교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소련군은 해방군이고 미군은 점령군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대한민국 안 다섯 나라 국기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일장기, 해방 직후 북한에 있을 때는 붉은 소련기, 남한 미 군정 하에서는 미국 성조기,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태극기, 6.25 때는 인공기 아래 살았지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기 저의 계산으로는 화폐 가치가 대략 천만분지 일로 절하되었어요. 다시말해 물가가 제 생애 동안에 천만배 이상 올랐다는 것이지요.

 

국민학교 때는 우리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사용했었어요. 소위 창씨개명을 하였었지요. 일제 시대엔 학교에서 일본말만 사용하고 조선말은 쓰지 못하게 했었어요. 지금 용인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집, 흙을 이겨서 만든 벽으로 된 집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중학교 다닐 때 우리는 지금의 중학생들이 먹는 양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항상 배고픔으로 살았어요. 일제 시대 도시에서의 하루 1인당 곡류 배급량은 23( 184g, 6.5온스)였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조금 더 지급되었는데, 아마 하루에 1인당 200g(7온스)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일본군에게는 하루에 1인당 6(480g)을 지급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한창 먹을 때인 학생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6.25 때는 죽기 전에 흰밥 실컷 배불리 먹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1년에 고기 한 근을 못 먹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해방 전에는 서울에 사범학교, 상업학교, 공업학교, 실업학교, 농업학교, 중학교를 포함하여 중등 학교가 30개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학교 합격자 명단이 일간 신문에 발표되기도 했답니다.

 

해방 후 미 군정청에서 남한의 교육 정도를 조사했더니 중등학교(4, 5년제) 이상 교육을 받은 사람이 남한 전체에 약 5만 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방 전에는 우리 나라에 종합대학이 “경성제국대학”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것도 일본 사람을 위한 대학이었기에 조선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전문학교(초급대학)가 아마 십 여개 되었을 것입니다. 연희전문(연세대학 전신), 보성전문(고려대학 전신), 혜화전문(동국대학 전신), 숭실전문, 세브란스 의전, 경선의전, 평양의전 그리고 법학전문학교, 약학 전문학교, 치과 전문학교, 고등상업학교 등이 있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에 4년제 대학교가 205, 전문 대학이 137개가 있으며, 천안시에만 대학교가 9, 전문대학이 2개가 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인구대비 대학생 수가 가장 많은 나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통계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마 해방 전 우리나라 1인당 GNP는 지금돈으로 $50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수년 전에 우리나라는 인구 5,000만명 이상, 국민소득 $20,000 이상 되는 7개국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주택의 대부분은 초가집이었지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시골에 가도 초가집은 거의 볼 수 없지요. 일제 시대에는 도시를 제외하고는 포장 도로가 거의 없었습니다. 신작로라고 하여 국도가 자갈로 덮여 있었어요. 국도 제1호 경부 국도도 비포장 도로였습니다. 지금은 시골에 가도 대부분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요.

 

1948년 세계2차대전 후 처음으로 영국 런던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을 때 우리나라는 동메달 2개를 따서 종합 순위 32위였는데, 2012년 런던올립픽에서는 금메달 13개로 미국, 중국, 영국, 러시아에 이어 금메달 순 종합순위 5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제 제가 직접 경험한 일제 시대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나는대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조선어 시간이 1주일에 한번 있었는데, 그것도 저희 때까지만 있었고 그 후엔 조선어가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아예 없어졌습니다. 제가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수신(도덕)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저희 반에 들어왔어요. 그 때 우리 학교에는 교장 선생만 일본 사람이었는데 그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너희들은 어느 나라 국민이냐”고. 그 때 우리 반에서 좀 활발한 아이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이”하고 손을 들더니 “조선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은 “그래, 본슈(일본)에서 난 사람은 본슈인, 규슈에서 난 사람은 규슈인이라고 하고, 조선에서 난 사람은 조선이라고 하지만 모두 대일본제국의 신민(신민이라는 것은 천왕의 신하라는 뜻)이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때 속으로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몰라요. 우리가 조선사람인데 왜 일본사람이라고 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교 2학년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저희 고향에는 중학교가 없어, 제 작은 아버지께서 사는 서울에 올라가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저희가 중학교 다닐 때는 까만 교모가 아닌 국방색 전투모를 쓰고, 국방색 국민복을 입고, 허리에는 군대식 요대를 띠고, 다리에는 각반(게도루; gaiter)를 감고, 돼지 가죽 구두를 신고 등교했습니다.

 

 교복 깃에는 학교 뱃지와 학년 숫자 –1학년이면 1, 2학년이면 2– 를 붙이고 다녔지요. 그리고 하급생은 상급생을 보면 먼저 거수 경례를 해야합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하급생이 상급생에게 경례를 하지 않으면 얼차려를 주거나 때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상급생이 하급생을 불러다가 보자기 같은 것을 씌워놓고 집단적으로 때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일본말로 “후꾸로 다다끼”(보자기 때리기 - 뭇매질)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저희 학교(중앙중학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1학년에 입학하니 5학년 선배가 저에게 경어를 쓰더군요. 같은 하숙방을 쓰던 2년 선배도 저에게 경어를 썼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3학년 학생들이 2학년 학생을 불러다가 뭇매질을 하다가 정학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다른 학교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저희 학교에서는 처벌을 하더군요.

 

그당시 학교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한 매일 아침 운동장에서 조회를 서고, 조회 시에는 일본 천황이 사는 동쪽을 향하여 소위 “궁성 요배”를 하고, “황국신민 서사”를 해야했습니다. 저도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을 매일 아침 해야 했습니다. 이어서 교장선생님의 훈시, 훈육주임의 주의 사항 등이 있었고, 그후에 도수 체조(라디오 체조라고 불렀음)를 했습니다.

 

겨울에도 조회 시간에는 외투를 입지 못했고, 장갑도 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한 달에 한 번은 단체로 신사참배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에 가서 한달에 한번씩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이를 거절하다가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은 순교를 하셨지요.

 

지난 좌파 정권 때 소위 “친일 인명 사전”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 안에는 민족에게 해를 기친 나쁜 친일파들도 있었지만, 백낙준, 김활란, 김성수, 현상윤 선생 같은 민족의 지도자급 인사도 포함되었어요.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세운 나라로서 정통성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제 시대 당시엔 해외에 나가 있지 않고 국내에 있으면서 공직에 있던 사람으로 이들의 기준에 의한 친일 행위를 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라고 기억이 됩니다만, 하루는 연희전문학교 교수 두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제 사촌 형의 행방을 아느냐고 묻더군요. 제 사촌 형이 그 당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병에 나가지 않기 위해 숨어 있었어요. 이 연희 전문학교 교수들이 제 사촌형의 행방을 말하리라고 기대하고 왔겠어요?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했거니와 알아도 제가 그것을 말하겠어요? 이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은 엄밀히 말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지요. 그 당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도 생각됩니다.

 

하물며 학교의 교장이나 책임자로서 그 정도의 “친일 행위”를 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안하면 학교 문을 닫아야했을 테니까요.

 

3학년 때 근로동원 나갔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평택에 가서 평택비행장을 건설하는 현장에 두 달 동안 동원되었어요. 비행장 활주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갈이 필요한데 평택 지역은 평야 지대여서 자갈이 없어요.

 

그래서 다른데서 기차로 자갈을 운반하여 평택역에 뿌리면 우리가 소위 “도록고”(소형 궤도 위에서 물건을 운반하는데 쓰이는 수레 – rail cart)에 자갈을 실고 그것을 밀어서 평택역에서 평택비행장 활주로 만들 자리에 갖다 붓는 것이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 때 서울의 2개 학교가 그 곳에서 작업을 했는데, 아침 5시에 나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연병장에 모여 조회를 마치고, 내무반에 돌아와 조반을 먹고 행군하여 '도록고'가 있는 곳에 가서 도록고를 밀고 평택역에 가 자갈을 싣고 그것을 밀어 평택비행장에 갖다 붓고 도록고를 제자리에 갖다놓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녁을 먹고 풀밭에 누워 쉬다가 내무반으로 이동하여 점호를 취하고 취침하는 일과였습니다. 그래도 저의 중·고등학교 생활을 통털어서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같이 풀밭에 누워 구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쉬던 것이 유일하게 즐거운 추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두 달 동안 모자를 쓰고, 윗통을 벗고, 팬티만 입고 맨발로 철로에서 “도록고”를 밀면서 지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학생 근로동원을 위해 큰 막사를 몇 채 짓고, 학교 별로 한 막사씩 들어가 있게 했어요. 막사는 칸막이가 없는 큰 마루방이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근로동원 기간 중 식사는 주로 조밥 또는 강냉이 밥, 대두박(콩에서 기름을 빼고난 찌꺼기) 밥이었지요. 쌀은 조금 밖에 섞여 있지 않고 대부분이 잡곡이었습니다. 반찬은 그 근처 농민들이 야산에서 뜯은 넙적넙적한 풀에 된장 조금 넣은 소금국이었지요. 그나마 조금 밖에 주지 않아 항상 배가 고픈 상태였지요.

 

 “도록고”로 자갈을 운반하다가 점심 시간이 되면 식사 당번이 가지고 온 것을 먹고는 풀밭에 누워 잠시 쉬곤했었습니다. 그 때 잠깐 눈을 붙이고 잠을 잤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데, 정말 꿀맛이었어요.

 

그리고 기상 나팔을 불면 일어나야 했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든지… 학생들이 점심 먹는 곳 주변에는 동네 사람들이 찐 감자나 찐 찹쌀, 떡 같은 것을 들고 나와 팔려고 해서 그걸 막으려는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기도 했지요.

 
근로동원 기간 중 비가 오는 날은 쉬는 날이었어요. 그럴 때는 모여서 노래자랑이라든지 우스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마루에 누워 뒹굴기도 했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대나무로 포크를 만들기도 하고, 영어사전을 가지고 어떤 단어를 빨리 찾는지 내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취침 시간이 가까워지는데 취사반에서 일하는 친한 친구가 저와 다른친구를 보자고 부르더니 어두컴컴한 중에 무언가를 쥐어주었습니다. 물렁물렁했습니다. 쌀밥을 뭉친 것이었어요. 잡곡밥만 먹다가 쌀밥 뭉치를 입에 넣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 전에 그렇게 맛있는 쌀밥을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막사는 바닥이 마루였고, 그 위에서 쭉 줄을 지어 자는데 벼룩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은 너무 가려워서 덮고 자던 홋이불을 움켜 안고 불 밑으로 갔더니 벼룩이 몇 마리가 그 속에서 이리저리 튀고 있는 게 보였어요.

 

평택 비행장에 자갈을 나르면서 저는 이 비행장이 언젠가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비행장이 되리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낮 12시 정오가 되면 약 1분간 싸이렌이 울렸는데, 그러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전몰 장병과 일본군을 위한 묵념을 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저는 그당시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는 때었기 때문에 기도할 줄은 모르고 막연히 우리 아버지 오래 살게 해 달라고 빌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중학교에는 교련 선생이 있었는데, 우리학교에는 예비역 군조(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복을 입었고, 교련 시간은 1주일에 1~2번 있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에서 제식훈련을 비롯한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 외에 배속 장교라는 사람이 있어서 1주일에 한두번씩 와서 상급반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그는 현역 장교로 군복을 입고 칼을 찬 채 말을 타고 다녔어요. 한번은 그가 말을 운동장 옆에 있는 나무에 매어놓았는데 3학년 학생이 그것을 풀어 타고 운동장을 돌았어요.

 

교련 선생한테 들켜서 얼마나 두둘겨 맞고 발로 채였는지 몰라요. “군마는 무기인데 네가 그 무기를 그렇게 함부로 다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저 학생이 일본인이라면 저렇게 때리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제 말기에는 중학교에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는 없었고 유일하게 총검술이 스포츠를 대신했었어요. 그래서 대게 대항 총검술 시합이 있었어요. 유도나 검도는 학과의 일부로 필수적으로 가르쳤지요. 유도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고, 검도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었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유도를 가르쳤어요.

 

해방 후에는 이것을 일본 것이라고 해서 가르치지 않았어요. 해방 후엔 상당 기간 일본말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였고, 부끄럽게 생각했어요. 1960년에 저는 미국 병기학교에서 병기 장교 교육을 받았는데, 제 옆에 일본 장교가 앉아 있었어요. 그는 영어가 서툴렀고 저는 그때만해도 일본말을 할 수 있었지만, 일본말로 거의 대화하지 않고 영어로만 얘기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때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루는 배속장교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장시간에 걸쳐 소년병으로 지원하라는 열변을 토하더군요. 항공소년병(진주만 공격한 소년병과 같은), 소년 전차병, 소년 잠수함병 등에 지원하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는 그렇게 장시간 열변을 토하고도 지원자가 없자 일본도를 쾅쾅 구르면서 나라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고 하며 몹시 화를 내더군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에겐 대개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끼리 이야기할 때는 주로 선생님의 별명을 불렀지요. 우리들에게 1학년 영어를 가르친 분은 유경화 선생님이었는데 그의 별명은 “무턱”이었어요. 목과 턱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붙어 있는 것 같이 보였거든요.

 

그는 영어를 가르치는데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기로 유명했어요. 회상을 하자면, 1학년 첫 시간에 교실에 들어올 때 굵은 막대기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영어 알파벳을 쓰는 4선지를 한 권씩 주고 알파벳을 써오라는 숙제를 줍니다. 대문자, 소문자, 인쇄체 대문자, 인쇄체 소문자를 써오는 숙제를 내어 주면 그것을 다음 시간에 써 가야 하는데 만약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그 굵은 막대기로 종아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선생님의 영어 숙제는 안하고는 못 배깁니다. 만약 숙제를 했는데 집에다 놓고 왔다고 하면 집에 가서 가지고 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선생님은 영어 문법책을 본인이 만들어 가르쳤는데, 동사의 12시형을 포함한 영어 기초문법을 철저히 가르쳤답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무척 사랑하셨지요 그러한 무턱이 선생님을 졸업생들은 제일 존경했고, 제일 먼저 찾아갔다고 합니다.

 

해방되던 해, 저는 겨울 방학을 고향 집에서 보내고 이듬해인 1946 2월 하순 부모님께 학생 모자를 벗고 간단히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어버렸어요.

 

사촌 형과 같이 걸어서 서울을 향해 떠났습니다. 우리 집에서 백리 떨어져 있는 원산역에 도달했을 때 원산역에 몇개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약소민족의 해방자 위대한 스탈린 원수 만세”, “세계 노동자 농민의 조국 위대한 소비에트 연방 만세”, “모든 영광은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에게”라고 쓴 현수막이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훗날인 1953 3월 제가 논산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받을 때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통쾌했던지요.

 

제가 마지막으로 38선을 넘어 서울에 올 때 당시 돈 800원이 있었는데, 한달 하숙비가 600원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한 달을 살다보니 돈은 다 떨어지고 38선은 점점 굳어져서 부모님과의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살 길이 막막했는데 그 무렵 우리 학교에서는 이북 학생을 위해 유도장을 비워 기숙사를 제공했었지요.

 

 해방 전에는 우리 학교를 포함한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는 팔도 강산에서 모여든 지방 학생들로 상당했었습니다. 그 당시 군 단위에는 중학교가 거의 없고 간혹 농업학교만 있었습니다. 지금의 북한 땅에서 온 학생들도 많았는데 해방된 후에 학교에 돌아오지 못하고 지방으로 간 학생들도 있었고, 서울에 남아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도 있었어요. 저는 학교 유도장 기숙사에 들어가 있으면서 도매로 책을 사서 서울시 내 주택가를 누비며 팔아 몇 안되는 돈을 벌어가며 생활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6월에 우리학교에서 동맹 휴학이 일어났습니다. 이유는 학교에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은데 별로 인기가 없었던 심형필이라는 선생님이 교장이 되었으니 훌륭한 선생들이 모두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일제 시대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 사람이 취직할 수 있는 자리가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학교 선생이 되었었지요. 우리 학교에만 보아도 교장 선생은 후에 고려대학교 총장(현상윤 선생)이 되었고, 영어 선생은 외무장관(변영태 선생)이 되었어요.

 

 후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이 된 김상기 선생도 우리 학교에 계셨는데, 그들은 대부분 해방 후 대부분 대학 교수나 다른 학교 교장으로 가셨답니다. 후에 알고보니 우리 학교 교주가 김성수 씨였는데, 그가 임명한 교장을 쫓아내기 위해 좌익 세력들이 배후에서 동맹 휴학을 모의했다는 것입니다.

 

동맹 휴학을 하던날, 우리는 비가 철철 오는데 교내 야외 스탠드에 앉아 교장 선생님이 나갈 것을 결정한 후, 스크랩을 짜고 학교 운동장을 돌다가 한 사람씩 교장실로 들어가서 “선생님 나가주십시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요구가 받아드려지지 않으니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렇게 약 1주일이 지나니 학교에서는 조기에 여름방학을 시작한다고 발표했고, 자연스럽게 지방 학생들은 집으로 내려가고 이북 학생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이북으로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우리 선배 졸업생 한 사람과 저만 학교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중학교는 졸업하고 싶었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학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일제시대에 조선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 제가 경험하거나 들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내선일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고 말하면서 조선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우리 언어를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강제로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를 하게하고 한달에 한번씩은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하고, 학교에서 조선말을 일체 못 쓰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얼핏 하면 “조선인 주제에”라는 말을 사용했고, 그래서 조선인이란 말에는 멸시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근 40년 간이나 조선에 살면서도 조선 사람들이 먹는 김치와 마늘은 냄새 난다고 깔보며 거의 안 먹었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얼마나 김치나 마늘을 좋아합니까?

 

일본 순사(순경)들은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울면 저기 순사 온다고 하면 무서워서 그칠 정도로 순사를 무서워했습니다. 그러한 일본 순사가 시골 주재소까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조선 사람들의 생활을 샅샅이 꿰뚫고 있었지요.

 

일제 시대 말기에는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쳤는데, 이것을 '공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공출을 어기고 몰래 남겨두었다가 본인들이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쌀 조사'가 가끔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관리들이 가정 집에 나와서 쌀독은 물론 여기 저기 쌀을 숨길만한 곳을 찾아 소위 '쌀 조사'를 했답니다.

 

기차를 탈 때는 쌀을 마음대로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군용으로 쓰기 위하여 일반 가정에서 쓰는 놋 그릇(유기)를 전부 바치게 했습니다. 1938년부터는 조선인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고, 1942년 이훙ㄴ 징병 제도가 실시되어 조선 청년들이 일본 군대에 끌려 갔습니다.

 

 군대에 갈 나이가 넘은 조선사람은 100만명 이상이 징용으로 끌려갔는데, 이들을 “보국대”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탄광과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게 했으며, 요새 말썽이 되고 있는 정신대(위안부)로 수 많은 처녀들을 끌려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일찍 결혼한 분들을 주위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직장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보수(월급)에 있어서도 차별을 두었고, 채용에 있어서도 차별을 하였지요. 제가 기아자동차에 있을 때 우리나라 공업계의 원로 한 분이 강연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일본 고등공업학교(초급 공과대학 - 그당시에는 상당히 높은 학력)을 졸업하고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그렇게 큰 회사에 정사원의 조선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전부 임시직 공원이었으며, 고등공업학교를 나온 본인도 공원으로 근무하였다고 증언하더군요.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일제시대에 15세까지 살면서 겪은 저의 지극히 제한된 경험을 나누어 적어본 것입니다. 저는 일제시대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선조들이 서로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겨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가’ 하고 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까지도 남북 관계는 물론, 남한 내에서도 서로 싸우는 것을 볼 때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해방 후의 혼란은 참으로 심각했습니다. 서울에서 삼일절이나 광복절 때면 우익 사람들은 서울 운동장에 모이고, 좌익 사람들은 남산에 모였다가 서로 시내에서 만나 싸우고 때려 부수고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50, 북한 인민군이 스탈린의 지시를 받아 남침을 감행하여 수 백만명의 사람이 죽고 수 많은 이산가족, 고아, 상이군인을 남기게 됐지요. 우리 국군 약 14만명이 전사, 40여 만명은 부상, 유엔군은 약 4만명이 전사, 15만명이 부상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 16개국의 청년들을 불러 공산군과 싸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인을 사랑하시어 이승만 박사와 같은 훌륭한 크리스찬 지도자를 내어서 대한민국을 세우도록 하시고 6.25의 공산침략을 물리치고 오늘의 대한민국과 한국 교회가 있게 하신 줄 믿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제헌국회에서 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는 국회의원 중의 한 사람인 이윤영 목사로 하여금 기도를 하게하여 국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비기독교인 의원들도 모두 머리를 숙이고 기도에 참여하였으며 거기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취임식에서 헌법 위에 성경을 놓고 그 위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을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켜주시고 공산침략에서 지켜주셨으며, 한국 교회를 세우시고 세계 선교의 일익을 담당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우리들의 사명이 막중함을 새삼 느낍니다.

 

- 김사묵 (金思默) 약력 -
1930  
함경남도 고원 출생
1949   중앙중학교 (6) 졸업
1964  
동아대학교 (화학과) 졸업
1977  
육군 중령 예편
1977  
기아 산업 (아시아 자동차) 입사
1993  
기아 자동차 퇴사
2008  
미국으로 이민
| 차윤 CPR 회장

 

■2016.03.01 "광복 후 3·1절 熱氣 편승하려던 좌파, 우파에 완패"

[1946년 첫 역사전쟁 조명 논문

반탁·찬탁 격돌하던 左右, 3·1절 기념행사 각각 개최
주도층·참석자 수 크게 차이나… 좌파 '3·1운동 계승' 주장 포기

 

 "3·1운동에서 임시정부가 탄생되고, 임시정부가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 형태로 출현했다는 것은 망각할 수 없는 것이다."(엄항섭 임정 선전부장)

"
일본의 문화정책에 흡수된 우파들은 3·1 정신의 계승자가 될 수 없고, 계급투쟁을 전개한 좌파들이 진정한 3·1운동의 계승자이다."(김오성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

광복 후 처음 맞는 3·1절인 1946 3 1일을 앞두고 좌·우파가 계승 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1945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신탁통치안에 대한 반대(우파)와 찬성(좌파)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던 양쪽은 3·1절 기념행사를 통해 새로 세워지는 나라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판 대결을 벌였다.

 

1946 3 1일자 조선일보 1. 광복 후 처음 3·1절을 맞아 대대적인 특집을 마련했다. 3·1운동의 결실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경축사와 엄항섭 선전부장의 3·1운동론 등이 실렸다.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한국기독교사) 3월 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20회 영익기념강좌에서 발표할 '1946 3·1: 해방 후 첫 번째 역사전쟁' 논문을 통해 좌·우파의 1946 3·1절 기념행사 준비 과정과 역사 논쟁, 기념행사 개최 결과, 역사적 의미 등을 추적한다.

해방 정국의 주도권과 관련,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를 놓고 상반된 입장을 보이던 좌·우파는 각각 3·1절 기념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우파는 1946 1 29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종교계와 정당, 청년·부녀 단체들이 참여하여 '기미독립선언전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승만·김구를 명예회장, 신익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어 2 14일 미 군정의 자문 기구로 출범한 민주의원은 3·1절 기념행사의 전국적 개최를 건의했고, 미 군정은 이에 호응하여 3·1절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그때까지 3·1운동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보이던 좌파는 우파의 적극적 움직임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주도로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좌파가 우세한 언론·문화예술계를 동원하며 3·1절 기념행사의 좌·우 공동 주최를 요구했다. 하지만 명분과 세력에서 우위를 보였던 우파는 좌파의 물타기 전술에 말려들지 않았고, 결국 좌·우파가 따로 기념행사를 갖게 됐다.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민주의원 주최 '27회 독립선언 기념식'에는 이승만·김구·김규식 등 우파 정치 지도자와 미 군정 최고 책임자, 3·1운동 민족 대표 오세창·권동진 등이 참석했다. 이어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우파의 3·1절 기념 시민대회에는 10~20만명이 참가해서 동대문에서 광화문을 거쳐 남대문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한편 탑골공원에서 열린 민전 주최 3·1절 기념행사에는 좌파 정치 지도자인 여운형·박헌영은 불참하고 이강국·허헌·이여성 등이 주도했다. 이어 남산공원에서 개최된 좌파의 시민대회는 약 15000명이 참석했다. 당초 예상보다 행사 규모가 크게 줄어들자 이들은 예정했던 가두행진을 포기했다.


박명수 교수는 "3·1운동과 임시정부의 계승을 주장한 우파와 달리 좌파는 일제하의 공산주의 운동에 정통성을 두었는데 3·1절에 대한 대중의 열기가 높자 이에 편승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946 3·1절 역사 전쟁에서 패배한 좌파는 더 이상 3·1운동 계승을 주장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2015-09-15 “아펜젤러 문헌 통해 ‘애국가 1897년 윤치호 작사’ 최초로 규명”

 1955년 국사편찬委, 애국가 작사자 확정 표결 11 2를 받았으나 ‘미확정’ 결론

⊙ “1897 8월 배재학당 학생들, 尹致昊 작사한 ‘무궁화 노래’ 불러”(아펜젤러 傳記)
1908년 출판한 尹致昊 《찬미가》 14장에 오늘날의 애국가 등장
⊙ 서지학자 安春根, 1903년 출간한 ‘애국가 자료 3종’ 발표… 위작 판명
⊙ “자녀들에게 애국가 작사자 未詳으로 가르치는 일 끝내야”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시작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未詳)으로 가르치는 부끄러운 일은 올해로 끝내야 합니다.
 
 
서울 세종로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김연갑(金煉甲·61) 이사는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논쟁을 끝내지 못하고 방치하던 것을 60년 만에 사료 발굴을 통해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면서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尹致昊·1865~1945) 선생을 향한 모든 의문점을 해결했고, 올해 서거 70주년에서는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공로를 제대로 기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연갑 이사는 30여 년 이상 아리랑과 애국가 연구에만 종사해 온 한국의 대표적 서지학자다. 김 이사는 “윤치호 선생은 애국가를 국가(國歌) 개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계몽과 단결을 위해 애국적 찬송가로 지었다”며 “당시 그의 노래가 배재학당을 비롯한 기독교학교로 확산되고, 3·1운동 기간 민중이 선택하고, 임시정부가 수용하여 광복 후 대한민국이 채택했던 것”이라고 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作詞者 조사

/좌옹 윤치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자연스레 국가로 자리 잡은 애국가는 작곡가 안익태(安益泰·1906~1965) 1935 11월 작곡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안익태 선생은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이 가사가 외국 민요에 실려 불리는 것을 가슴 아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만들게 된 계기는 바로 가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애국가 악보를 살펴보면, 작곡가는 ‘안익태’지만, 작사자 자리는 ‘여백’으로 남아 있다. 작사가가 누구인지 아직도 여러 설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사의 작사자는 광복 70주년이 되도록 논란만 분분한 채 표류해 왔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5,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가가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당시에도 6명이 거론돼 꽤 논란이 많았던 듯하다. 당시 조사위원 중 한 명인 황의돈(黃義敦)은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歌詞紙)에 침을 묻혀 문질러 보고 “이는 10년 내외에 쓰인 것으로, 1907년 작()이 아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신문들은 윤치호의 애국가 가사지를 위작(僞作)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작고 직전 가족에게 남긴 가사지 존재도 김연갑 이사가 발굴했다.
 
 
그러나 이것을 제출할 때 미국 거주 가족들은 작품 뒷면에 1945 10월 가족의 요청으로 윤치호가 쓴 것이라고 ‘단서’를 달았고, 윤치호의 사위인 정광현(鄭光鉉) 당시 서울법대 교수가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의견서’에서 밝힘으로써 해결됐다. 그 결과 최종 한 명으로 압축됐다. 바로 좌옹 윤치호였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확정하는 문제를 표결에 부쳤고, 11 2라는 압도적 결과가 나왔음에도 국사편찬위원회는 ‘미확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바로 이 결정이 기나긴 논란의 발단이 됐던 것이다.
 
 
―왜 국사편찬위원회가 미확정으로 결론을 내렸을까요.
 
1955년 미확정은 윤치호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걸 확정하여 발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작사자 규명이 정체된 상태로 논란만 거듭해 온 데는 ‘애국가 가사를 친일파가 썼다’는 정서적 불편함이 담겨 있다는 얘기였거든요. 당시 신문은 ‘이것은 당시 조사위원의 상황한계를 벗어난 지나친 불평이며, 또한 윤치호씨는 친일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를 범한 일이라 하겠다’고 국사편찬위원회의 직무유기를 질타했습니다.  


 
충청도 사투리로 作詞

/도산 안창호.

 

그 이후 안창호설, 공동작사설 등이 제기됐지만 현재 전문가들은 윤치호설을 거의 확정적으로 보고 있다. 객관적인 자료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갑 이사는 “윤치호 선생은 1907년 애국가 가사와 후렴이 같아 원형으로 보는 ‘애국적 찬미가(무궁화가)’를 1897 8 13일 조선 개국 505주년 기념식 때 기념가로 작사했다(서재필의 ‘편집자 노트’)”고 했다.
 
 
“특히 이날 독립협회 주최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고 하는 내용이 2013년 발간된 아펜젤러의 전기(《아펜젤러와 한국: The Appenzellers: Who They Preached)에 등장합니다. 《독립신문》 사장 서재필(徐載弼)은 그의 취재노트(Editorial Note)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1897 8 13일 독립협회 주최 조선 개국 505회 기원절 행사는 오후 3시 배재학당 학생들의 찬양(Praise)으로 시작돼 독립협회 안경수(安駉壽)가 인사말을 하고, 외국인 참석자들이 소개되었다. 와병 중인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대신하여 한성판윤 이채연(李采淵)이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 가사는 한국의 계관시인(Poet Laureate)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Scranton) 여사(이화학당 설립자)가 오르간으로 반주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춰 불렀다.’”
 
 
윤치호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는 1908년 재판을 발행한 노래집 《찬미가(讚美歌)》다. 윤치호가 펴낸 이 책에는 앞의 ‘무궁화 노래’와 ‘애국가’의 가사가 수록돼 있다. 김 이사의 말이다.
 
 
“《찬미가》 14(일명 무궁화가)에는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와 같은 후렴이 등장합니다. ‘승자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시작하는데, 충남 아산 사람이었던 윤치호는 성자신손(聖者神孫)을 ‘승자신손’이라고 충청도 사투리로 기록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윤치호는 성경을 ‘승경’이라고 했다고 해요.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증거지요.
 

/1955 7 30일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최종 3차 회의가 끝난 후 윤치호가 유력하다로 결론났다고 보도하는 언론 기사.

 

윤치호가 1908년 펴낸 노래집 《찬미가》 제14(현재의 애국가)에는 애국가 가사가 온전하게 수록돼 있다. 가사는 이렇다.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2절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3절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이 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미국 에모리대학교에는 윤치호가 1945 10월 딸 윤문희(尹文姬)에게 직접 써주었다는 애국가 가사지가 소장돼 있다. 여기엔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쓰여 있다. 윤치호의 유족은 고인이 석사 학위를 받은 에모리대학에 이 가사지를 보존처리 후 위탁·보관시켰다. 김 이사는 “윤치호는 1907년에도 ‘아래아(·) 사용의 불편함 때문에 큰아()를 쓰고 아래아자를 사용하지 말자’고 할 정도로 국문에도 선각자적 면모를 보였다”고 했다. 김 이사는 “윤치호가 임종하기 직전인 1945 10, 개성에서 딸이 《찬미가》의 일부 가사를 새로 고쳐 써달라고 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라고 했다.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은 1911년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 “지금까지 우리가 불렀던 애국가를 폐하고 윤치호가 새롭게 작사한 애국가를 부르자”고 결의한 내용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록이 5건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치호가 작사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의 친일 행적과 깊은 관련이 있다. 1890년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선발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던 윤치호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반대해 고종에게 상소하며 관직을 떠났고, 이후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돼 3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뒤로는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으나, 일본 귀족원 의원 자리에 오르는 바람에 친일파로 몰리고 말았다.  


 
具益均 증언 계기로 ‘안창호 작사설’ 본격 주장

 

▲윤치호가 작고 직전인 1945 10월 그의 딸 윤문희의 청에 의해 고쳐 써준 애국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황의돈 조사위원은 ‘1907년 윤치호 작을 보고먹이 10년밖에 되지 않았다며 위작이라고 했으나, 가족들이 1945 10월에 쓴 것이라고 해명함으로써 의문이 풀렸다

 

도산의 유족과 지인들은 생전의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가 애국가 가사를 지었다는 증언만을 들어 《흥사단 100년사》와 언론 등에서 작사를 주장하고 있다. 1907 3 20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만리현 의무균명학교(義務均明學校) 학생들에게 조회 때마다 국기를 내걸고 애국가를 부르자”라고 했다는 기사가 게재되기도 할 만큼 안창호가 국기와 애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김 이사는 “‘안창호 작사설’은 1945년 이전 단 한 건의 문헌 기록도 없이, 그것도 간접 증언과 정황으로만 주장할 뿐”이라고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도해 만든 흥사단은 《월간조선》(2008 6월호)의 구익균(具益均·1908~2013) 선생 인터뷰를 근거로 작사자규명위원회를 본격 가동해 안창호 작사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구익균은 1928년 신의주 고등보통학교를 나왔고, 1929 3월 신의주학생의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피신해 그곳에서 한국독립당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여쭤보니 빙긋이 웃으시며 아무 대답을 안 하셨어요. 민영환, 김병연, 김인식, 윤치호 등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내가 여쭤볼 당시 느낌으로는 도산이 작사했다는 게 거의 확실해요. 도산은 거국가를 짓는 등 노랫말 짓기를 좋아했어요.”〉
 
 
김연갑 이사는 “1947년 춘원 이광수가 도산 안창호 전기에서 ‘웃고 답하지 않았다(笑而不答), 그리고 부인하지도 않았다’라고 한 것에 이어, 구익균 선생이 ‘내가 직접 여쭤보니 빙긋이 웃으시며…’라는 새로운 말이 추가됐다”며 “구익균 선생은 1994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새 역사의 여명에 서서》에서 애국가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전형적인 학습에 의한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구익균 선생은 《기러기》 1980 6월호 ‘도산 선생의 대공주의 사상’, 8월호 ‘상해에서 해방을 맞으며’, 11월호 ‘상해에서의 도산’ 등의 글에서도 애국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윤치호가 1908년 발행한 노래집 《찬미가》. 윤치호의 애국가가 실려 있는 문헌이다

 

김 이사는 “광복 후 친일문제로 고민하던 이광수는 《백범일지》 집필을 시작했고, 이어 흥사단의 요청으로 《도산 안창호》라는 책도 1947년 펴낸다”면서 “그러나 안창호 평전에 등장하는 애국가 작사자 물음에 ‘웃고 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광수와 안창호의 관계로 미뤄볼 때 구체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서지학적으로도 이광수 저작 원전에 누군가 가필(加筆)한 것이다”고 했다.
 
 
더군다나 안창호는 1908년 대성학교를 설립하면서 개성의 미션스쿨인 한영서원(韓英書院) 설립으로 당시 명망이 높았던 윤치호를 교장으로 영입한 일이 있어, 당시 1908년 《찬미가》 재판이 나와서 불리고 있던 상황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몰랐을리가 없다는 것이다.
 
 
김 이사는 “임정 시절, 백범에게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듣고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애국가 작사자를 물으면, ‘우리가 3·1운동을 독립선언서, 태극기, 애국가로 했는데, 그런 것을 왜 묻느냐’고 반문하셨다”며 “그만큼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한때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나 친일로 간 윤치호를 애석해하며 애국가에 대한 작사자를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흥사단은 일간지에 ‘안창호 비서실장의 애국가 증언’을 퍼뜨리더니, 급기야 2012 8월 ‘애국가 작사자 규명발표회’를 열어 오동춘(吳東春)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장을 내세워 애국가 가사를 쓴 사람이 안창호 선생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근거로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 여러 인물의 증언을 담은 구술과 신문기사, 잡지, 단행본 기록 등을 내세웠다. 결국 흥사단은 2013년 발간한 《흥사단 100년사》(731)에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기록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토론회

《찬미가》에는 총 15편의 노래가 실렸고, 이 중 1, 10, 14장을 윤치호가 작사했다. 특히 10(무궁화가)은 후렴이 오늘날과 같고, 14장은 오늘날의 애국가와 동일하다. 10장 무궁화가의 시작 부분에서승자신손은 충남 아산 사람인 윤치호가성자신손을 충청도 사투리로 표기한 것이며, 1897 8 13일 서재필은 〈편집자 노트〉에계관시인 윤치호 작시(作詩)’라고 기록했다.

 

지난 3 31일 흥사단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애국가 작사자 연구발표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는 순흥 안씨인 안용환 명지대 연구교수를 비롯해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준혁 한신대 교수, 윤정경 애국가 연구가가 주제발표를 했다.
 
 
그러나 팽팽한 토론이 예상됐던 발표회는 예상과는 달리 윤치호 작사설의 한판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놓고 볼 때 구체적 사료와 물증이 뒷받침된 윤치호 작사설이 유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윤치호가 직접 쓴 가사는 물론,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는 기록들을 꽤 많이 확보했기 때문이다.
 
 
김연갑 이사는 “순흥 안씨인 새정치연합 안민석 의원 등은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결정적이고도 새로운 기록이 없으므로 간담회를 통해 ‘안창호-윤치호 합작설’로 몰아가려 했다”면서 “그러나 구체적 물증부터 유족들의 증언까지 윤치호 작사라는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다”고 했다.
 
 
―흥사단 측은 행사에서 어떤 근거를 댔습니까.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인 필립 안 커디(Philip Ahn Cuudy)가 어머니(안수산)의 책에 도산이 애국가 가사를 썼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도산의 부인 이혜련(李惠鍊)도 남편이 애국가를 지었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거든요. 아무튼 안수산 저서의 참고문헌에 이광수의 도산 전기가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딸조차 애국가 인식이 몇 년밖에 안 됐다는 의미지요. 또 구익균 선생에게서 도산이 애국가를 썼다고 들었다고도 했고요.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만리현 의무균명학교 학생들에게 조회 때마다 애국가를 부르자(《대한매일신보》 1907 3 20일자) 했다는 기사를 마치 안창호가 지은 애국가를 부르자고 했다는 식으로 왜곡해 주장했습니다.
 

▲한국독립당원으로 활동하며 안창호와 교유한 고 구익균 선생.

 

―흥사단 측은 윤치호 작사설에 대해 어떤 논리로 반박했나요.
 
“안민석 의원은 미 에모리대 소장 윤치호 친필의 ‘애국가 가사지’가 과연 윤치호의 친필인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독립기념관 이명화(李明花) 학술연구팀장은 1910년 미국 발간 《신한민보》에 ‘윤티()호작’으로 명기한 애국가 가사 4절이 수록된 것을 ‘안창호가 보급을 위해 이름을 바꿔 발표했다’는 해괴한 논리를 폈고, 중앙대 노동은(魯棟銀) 명예교수는 무궁화 노래를 ‘배재학당이 불렀다’는 《독립신문》 기사를 ‘배재학당이 지어 불렀다’로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1908 6 25일 발행한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 대해 ‘역술(譯述)’은 영어로 ‘translation’으로, ‘번역해 기술한다’ ‘번역한다’는 뜻이므로 《찬미가》의 애국가는 윤치호가 번역·감수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김 이사께서는 어떻게 답변했나요.
 
“노동은 교수가 1903~1905년 기록된 애국가 필사자료가 있고 윤치호가 지은 현 애국가(찬미가 14)와 동일한 후렴을 가진 무궁화가(찬미가 10)는 ‘배재학당 작사’라고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겁니다. 내가 1998년 쓴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 그것에 대한 답변이 있다고 하자, 노 교수는 ‘그 책 버려라’고 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저를 보고 깔깔 웃었어요. ‘생각해 보니 안창호가 작사했다고 들었다고 했다’(김경래 저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도 순흥 안씨이고, 애국가 작사설의 안창호 선생도, 공동작설을 내세운 안민석 의원도, 위작 자료 세 건을 1981년 공개한 서지학자 안춘근씨도, 최근 ‘안창호와 김일성 관계’를 끌어들인 의외의 안용환 교수도 모두 순흥 안씨여서 ‘순흥 안씨 종친연구회’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튿날 ‘뉴시스’에 ‘노동은의 조작’이라는 글을 실었는데, 흥사단 측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이었죠.
 
 
―노동은 교수의 ‘역술’은 ‘번역’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 문헌에 나오는 역술의 유권해석은 ‘대부분 번역, 일부 창작(7할 번역, 3할 저술)’이라고 합니다. 유길준(兪吉濬)도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쓰면서 판권에 ‘집술(輯述)’이란 말을 썼습니다. 책 뒷부분에 자신의 감상을 덧붙였거든요. 윤치호도 《찬미가》 15장 가운데 1, 10, 14장을 지었으니, 역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安春根의 ‘애국가 자료 3종’은 가짜”

1950년 미국 적십자사가 발간한 《세계의 국가》.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미국 거주 후손들이 증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해 7 12일 방영된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946)〉는 ‘애국가 작사자는 누가-친일파냐, 애국자냐’며 진영논리로 몰고 갔다. 1903년 제작된 필사본 《기설(幾說)》에 수록된 ‘애국충성가’와 1904년 제작된 김수원(金壽垣)의 서예작품 ‘갑진(甲辰) 한시 애국가’가 현재의 애국가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자료는 1981년 서지학자 안춘근(安春根·1926~1993)에 의해 일간지를 통해 발표된 것으로, 기존 윤치호의 ‘1907년 작’을 전면 뒤집는 내용들이다. 안춘근은 1981 4 2일 《조선일보》에 1903년 《기설》의 ‘애국충성가’를, 1981 8 11일 《동아일보》에 1904년 ‘갑진 한문 애국가’를, 같은 날 《중앙일보》에 《기설》의 ‘애국충성가’와 ‘갑진 한문 애국가’, 간기(刊記·씌어진 연도)가 없는 독립운동가 송암 김완규(金完圭)의 ‘송암 김완규 애국가’ 등 ‘애국가 자료 3종’을 연속으로 발표했다.
 
 
이어 안춘근은 1981 12월 《월간조선》에 ‘국가 없는 한국’이란 글을 발표했고, 1986년 그의 저서 《한국고서평석(韓國古書評釋)》에서 이를 재수록해 의미를 부여했다. 안춘근은 “특정인을 작사자로 단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으로, 결국 윤치호 《찬미가》 14장의 현 ‘애국가’는 자신이 공개한 두 자료를 윤색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1907년 윤치호 작사설’은 기각되며, 애국가 작사가를 가리는 문제는 혼돈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애국가가 특정인의 작사가 아닌, 1890년대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집단 창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냈다. 안민석 의원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1897 8 13일 독립협회 주최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고 기록한 《독립신문》 사장 서재필의 취재노트(Editorial Note). 2013년 발간된 아펜젤러의 전기에 등장한다.

 

고서연구가인 박대헌(朴大憲·62) 완주책박물관 관장은 〈그것이 알고 싶다〉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박 관장은 최근 근대서지학회(회장 전경수)가 펴내는 반연간지 《근대서지》에 발표한 논문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의 논쟁에 대한 고찰”에서 “안춘근의 ‘애국가 자료 3종’이 모두 후대에 위조된 것”이라고 선언했다.
 
 
박 관장은 지난해 7 28일 안춘근으로부터 자료를 입수한 소장자 윤형두(尹炯斗) 범우사 대표를 찾아 《기설》의 ‘애국충성가’를 직접 확인한 뒤, ‘애국충성가’의 글씨체, 먹의 농담(濃淡), 글씨의 격이 책에 실린 다른 가사와 확연히 다르다고 판단했다.
 
 
《기설》 필사본은 4×6배판 120페이지의 한장본(漢裝本)으로 본문은 교화를 위한 고문(古文), 율시(律詩), 공성시(孔聖詩)가 적혀 있고, 책 뒷부분에 4페이지 분량으로 ‘운동가’ ‘애국충성가’ ‘시흥학교교가’ 등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책 권말에 보이는 ‘계묘(癸卯)’는 1903년이므로 안춘근의 주장에 큰 문제가 없었으나, 이 책의 다른 세 곳에서 ‘명치 44년’, 1911년 표기가 발견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애국충성가가 1903년에 필사된 것이라는 단정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다. 즉 뒤 4페이지 부분에서, ‘운동가’와 ‘시흥학교 교가’는 같은 필체였던 데 반해, ‘애국충성가’는 필체가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박 관장은 ‘운동가’와 ‘시흥학교 교가’는 《기설》이 처음 완성된 1903년에 기록한 것이고, 명치 44(1911) 12 25일 ‘토지매매 문서양식’은 1911년에 기록한 내용, ‘애국충성가’는 1981 4 2일 안춘근이 이를 신문에 공개하기 전에 누군가가 위작한 글이라고 보았다.
 
 
‘갑진 한문 애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글씨의 크기, 구도,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과의 관계 등으로 추정해 볼 때 최근 위작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박 관장은 안춘근이 발표한 다른 애국가 자료인 ‘송암 김완규 애국가’ 역시 ‘가짜 글씨’라고 판정했다.    


 
충분한 자료 검토 이뤄지지 않아

▲1908년 재판 찬미가 판권. ‘역술자윤치호로 돼 있다. 광학서포는 윤치호가 인수해 한영서원 교재 등을 발행했다.

 

―위조 여부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가짜 글씨는 모본(母本)을 모사(模寫)하거나 모본 없이 글씨를 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모본을 유리판 사이에 놓고 유리판 밑에서 형광등 불빛을 비춰 그대로 복사하듯 모사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진품에나 나타나는 비벽(鄙僻·필자의 글씨 습관)이나 갈필(渴筆·붓에 먹물을 많이 묻히지 않고 쓰는 것으로 達筆이나 速筆에 나타나는 현상)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글씨 꼴을 흉내 내는 데 급급하다 보면 속도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둘째로 모본 없이 글씨를 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는데, 난고문학관에 진열된 김병연(김삿갓)의 경우처럼 친필이 존재하지 않을 때 많이 쓰는 수법입니다. 가짜 글씨를 쓰기 위한 옛날 종이나 비단은 책 뒤편에 빈 여백도 이용할 수 있고, 병풍 뒷장의 배접지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박대헌 관장은 “안춘근 선생이 입수한 애국가 자료 3종이 진짜라면 우리의 애국가 역사가 새로 씌어야 할 대사건”이라면서 “이러한 자료가 언론에 공개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자료에 대한 진위 검증 문제”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국가 자료 3종’은 언론에 공개하기 전 자료의 진위 여부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안춘근 선생은 탁월한 서지학자이고, 발표 당사자는 확신을 갖고 있었겠지만, 서지학 입장에서는 누구의 작품인가, 누구의 친필인가, 언제 쓴 것인가, 내용은 무엇인가 등은 기본적으로 검토해야만 합니다.
 

1908년 발행한 한영서원 한문 교재 《유학자취》. 내용 중에대한제국 대한민국이 들어 있다. 윤치호의 애국계몽운동기 의식을 볼 수 있다.

 

김연갑 이사는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안춘근은 원본 공개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제시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 이사는 박대헌 관장이 안춘근의 자료를 확인한 경위를 설명했다.
 
 
“《기설》의 속표지에는 ‘1981. 3. 27. 南涯(남애) () 20’이라는 볼펜으로 쓴 기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1981 3 27일 남애가 연에게 2만원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제게 최초로 5만원을 제시했으나, 당시 여유가 없어 구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남애는 안춘근의 호이고, 연은 김연창(金然昌)의 가운데 이름자입니다. 김연창은 1980~1990년대 장안평과 청계천에서 내로라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연창은 1978년 고서와 고서화 등을 대량으로 위조, 판매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동아일보》(1978 10 5일자)를 보면, 그는 가짜 낙관 800여 개를 갖고, 《조야회통(朝野會通)》이라는 이름 없는 책을 구입해 추사(秋史) 이름을 넣고 대원군과 육당 최남선의 가짜 낙관을 찍어 추사가 쓰고 대원군과 육당이 소장하고 있던 책으로 속여 팔기도 했다.
 
 
김 이사는 “1980년대 중반, 김연창은 《의금돈신록(義金敦信錄)》 구한말 필사본의 여백에 ‘대한국가(大韓國歌)’를 여러 페이지에 써넣은 위작을 만들어 내게 판 적도 있다”면서 “그때 박대헌 관장에게 진위를 물었더니 가짜라고 해서 연구에서 제외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 이사는 “(안춘근이 3종의 애국가 자료를 공개한) 1980~1990년대는 이중섭(李仲燮) 등 근대 유명 화가와 민화 등의 가짜 그림이 대량 유통되는 시기였다”며 “위조범들의 수법도 지능화돼 안춘근의 ‘애국가 3종’처럼 연구자의 전공과 성향을 파악하고 위작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김 이사는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국민에게 존경을 받는 도산 선생이 애국가의 작사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정서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한 바람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제목, ‘친일파냐, 애국자냐’처럼 나왔다는 것이다.  


 
安昌浩의 애국가 전파도 평가해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 출연해 윤치호 선생의 판권에 등장하는역술의 의미를 설명하는 김연갑 이사.

 

김연갑 이사는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는 아니지만 기여한 부분도 있으니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김 이사는 “윤치호가 1908년 《찬미가》 10장과 14장을 작사했고, 이를 ‘애국가’로 부른 것은 배재학당을 비롯한 기독교계 학교와 3·1운동 현장의 민중이었다”며 “이를 국가의 대용(代用)으로 1910년 미주 지역 국민회의에서 ‘국민가’로 부르면서 의례음악으로 정착시켰다”고 했다. 특히 안창호는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에서 국가 대용으로 애국가를 부르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서지학자 안춘근이 김연창으로부터 입수한 3편의 애국가 자료를 활용하여 저술한 책. SBS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책을 이용해 윤치호 작사설을 공격했다.

 

이후 애국가는 1940년 백범 김구(金九)가 임정에서 미주국민회 요청에 의해 애국가 곡을 기존의 올드 랭 사인에서 안익태의 신곡보(新曲譜)를 사용하도록 했고, 광복군 성립식에서 공식으로 연주했다. 1948 8월 애국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 때 국가로 준용됐고, 현재 국가 대우를 받는 애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애국가 작사자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연갑 이사는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면 애국가는 역사의 노래”라면서 “윤치호여서 안 된다면 국민의 뜻을 모아 애국가를 새로 제정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역사적 팩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김 이사는 “‘윤치호 작사’ 사실을 들어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며 “그러나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2·8 독립선언’,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3·1 독립선언서’도 그들이 친일을 했다고 버릴 수 없듯, 윤치호 선생의 친일과 오늘날의 애국가 위상(位相)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는 “미국 에모리대학에 소장된 윤치호 일기의 경우, 전면적인 번역과 조사를 해야 할 것”이라며 “국가를 대표하는 노래인 애국가 작사자의 규명은 재야학자들의 손에서 정부로 넘어갔다”고 했다.

출처 | 월간조선 9월호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2018.03.12 애국가 '작사 미상'의 진실

"한 애국지사 手筆로 50년 전 이 애국가가 창작됐지만, 佚名해버렸다" (-1945년 김구 주석의 기록)

[애국가 '작사 미상'의 진실…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윤치호 확정 발표 對 유보… 조사위원 투표 결과 11:2
정부는 '윤치호 미확정' 발표, 그뒤 '작사 미상'으로 남아

"
윤치호씨는 親日한 사람, 작사자 돼서는 안 된다는 뜻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

 

'애국가와 관련해 할 얘기가 있다'는 김연갑(64)씨의 메일을 받았을 때만 해도 심각한 역사(歷史)의 고민과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애국가는 '작곡 안익태, 작사 미상(未詳)'으로 되어 있습니다. 친일파 이력이 있는 인물이라 '윤치호' 이름을 지워왔던 겁니다. 이런 논리라면 태극기를 만든 박영효나 '기미독립선언서'의 최남선도 지워야 합니까. 우리 근대사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는 “후대 사람들은 피상적인 잣대로만 ‘친일’을 본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지금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겁니까?
"내년 '임정(臨政) 100주년'을 맞아 정부가 국호·태극기·애국가 등 국가 상징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애국가' 문제도 공개적으로 다뤄야 합니다. 계속 덮어두는 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차라리 '윤치호는 친일파이니 애국가를 바꿔야 하는가'라고 묻는 게 정직합니다."

그는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다. 지금까지 7400여 수의 아리랑을 수집했고 저서도 열 권 남짓 냈다.

"애국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0년 전쯤입니다. 몇몇 학자들이 이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에서 부인됐던 '안창호 작사설'을 다시 꺼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민족지도자(안창호)가 지었으면 좋겠지만,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애국가 작사자를 둘러싼 첫 논쟁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국무부가 백과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애국가의 연혁(沿革)을 알려달라고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 문교부에서 '작곡 안익태·작사 안창호로 통보할 것'이라고 알려지자, 여러 신문에서 반론이 쏟아졌다. 이에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서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신문에서는 '애국가 작사자를 모르는 것은 우리 문화의 수치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수치'라고 하는 등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작사자로 거론된 인물들에 대한 증거 자료와 증언 등을 수집했습니다. 1차 위원회에서 '안창호 작사는 아닌 게 명백하다'고 결론 났습니다. 2차 위원회부터 '윤치호'로 좁혀 갔습니다. 석 달간 조사를 마무리 짓는 3차 위원회에서 '윤치호 확정 발표' 문제를 놓고 최종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조사위원 투표에서 '윤치호 확정 발표' () '유보' 11:2로 나왔습니다. 문교부는 이를 '윤치호 작사 미확정으로 결론 났다'고 발표했습니다. '애국가 가사를 친일파가 썼다'는 부담이 작용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추측합니까?
"당시 한 신문은 '윤치호씨는 친일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라고 질타했습니다. 그 발표로 인해 60년 이상 흐른 지금까지 애국가는 작사 미상으로 남게 된 겁니다."

―그 공식 조사가 있은 뒤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게 있습니까?
"1908년 윤치호가 발행한 가사집 '찬미가(讚美歌)'에는 외국 번역 노래 12편과 국내 노래 3편이 들어 있습니다. 국내 노래 중 한 편은 후렴이 애국가와 같고, 다른 한 편은 애국가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하지만 가사집에는 '윤치호 역술(譯述)'로 돼 있어 그가 직접 지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역술'이라면 윤치호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울 것 같군요.
"당시 역술의 용례를 보면 번역과 일부 창작을 의미합니다. 윤치호가 지었다는 증거를 다른 자료에서 제가 찾아냈습니다."

―그 증거란?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이 쓴 '편집자 노트'에서 찾아냈습니다. '1897 8 13일 조선 개국 505주년'을 맞아 독립협회 주최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 이 노래 가사는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이화학당 설립자)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에 맞춰 불렀다'고 나옵니다. 그 무궁화 노래 1절이 소개돼 있는데, 바로 '찬미가' 가사집의 10장에 실려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무궁화 노래는 '승자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로 시작되고 후렴부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되어 있다.

―이 가사는 '애국가'와 다르지 않습니까?
"후렴과 곡조가 동일합니다. 가사집의 애국가도 윤치호가 지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이지요. 1910년 신한민보에 '국민가' 이름으로 애국가 가사가 실려 있고, '윤티()' 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 공문서에는 기록이 있습니까?
"1910 8 14일 동경유학생회가 한국개국기원축하회를 열면서 '윤치호가 새로 작사한 국가를 부르자'고 했다는 총독부 기록이 있습니다. 1915년 개성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이 압수됐을 때 '윤치호 작 애국가 등 불온창가'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1935년 경기경찰부의 조사 기록에도 '재미 조선인들이 부른 조선애국가'라며 윤치호를 언급했습니다."

―망국의 시대적 상황에서 '애국가'라는 이름의 노래들이 많이 지어졌습니다. 이 중 현재의 애국가가 어떻게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됐을까요?
"당시 40여 종의 '애국가'가 조사됐습니다. 윤치호의 가사가 수준이 높았습니다. 국민 계몽과 단결을 위해 찬송가 양식으로 지은 그의 애국가는 배재학당을 비롯한 기독교 학교로 확산됐고, 3·1운동 기간 민중이 선택했으며, 임시정부가 수용해 나라의 상징이 된 겁니다."


―상해 임정(臨政)에서 애국가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의 기록이 나옵니까?
"1919 4 10일 첫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가 상징으로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 '태극기'가 정해졌지만, '국가(國歌)' 결정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 뒤 임시정부 행사에서 첫 순서로 일동이 기립해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는 기록이 임정 기관지인 '우리통역'에 나옵니다."

―임정에서 애국가를 '국가'로 승인했다는 뜻입니까?
"국가 대용(代用)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20년 의정원 회의에서 '애국가에 대한 수정안'이 상정됐으나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니 수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이 나옵니다. 하지만 애국가는 임정에서 계속 사용돼 왔습니다. 1941년 임정은 '올드 랭 사인 곡을 안익태 곡으로 바꿔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허가해 달라'는 북미대한인국민회의의 안건을 의결해 지금과 같은 애국가 곡조(曲調)가 된 겁니다."

―임정에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고 있었을까요?
"김구 주석의 명의로 광복 직후 출간된 '한중영문중국판 한국애국가(韓中英文中國版 韓國愛國歌)'라는 가사집이 있습니다. 표제 뒷면에 '이 애국가는 50년 전에 한 한국 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일명(佚名)해버렸다(중략)'라는 김구의 글이 나옵니다."

'일명(佚名)'이라면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뜻인데.
"윤치호는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사건)'으로 수감됐다가 1915년 일제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풀려났습니다. 그 뒤로 친일 행적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애국가는 3·1운동에도 불리면서 항일 독립 의지의 표상으로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습니다. 김구가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고민이 있었던 겁니다."

―해방되면서 애국가 작사자로서 '윤치호'의 이름이 지워졌습니까?
"국내에서는 지우고 싶었을지 모르나, 1949년 대한민국 공보처가 발간한 영문판 '한국 소개(Introduction to Korea)'에는 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로 나옵니다. 1954년 영문 악보집 '코리아 랜드 오브 송(Korea Land of Song)'에도 '윤치호'로 명기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애국가'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습니까?
"광복 후 좌파 진영에서는 애국가의 후렴을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로 바꾸자고 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월북한 작사가 박세영이 지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라는 애국가를 채택했습니다. 이는 1992년 북한 국가로 승격됐습니다."

―윤치호는 60년간 일기를 써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기에는 애국가를 자신이 지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윤치호는 '실용영어문법' 7권의 책을 썼지만 일기에는 적지 않았습니다. 죽기 두 달 전인 1945 10월 윤치호는 딸에게 자필로 애국가 가사를 써주며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표시했습니다(현재 미국 에모리대 소장)."

―당초 '안창호 작사설'은 어떻게 해서 나온 겁니까?
"광복 전까지는 단 한 건도 관련 문헌 기록이 없습니다. 1947년 춘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 전기에, '애국가를 선생님이 지었느냐는 질문에 웃고 답하지 않았다(笑而不答)'는 구절이 나옵니다. 안창호 작사설은 이를 근거로 시작됐습니다. 안창호가 1908년에 '애국생(愛國生)'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애국가'가 있지만 지금의 애국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안창호의 '소이부답'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가 '윤치호'라고 답변할 수 없었던 것은 애국가의 운명에 대한 배려였다고 봅니다."

 

―친일파 윤치호를 배려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후대 사람들은 피상적인 잣대로만 '친일'을 봅니다. 바깥으로 드러난 행적만이 전부가 아닐 겁니다. 신간회 사건으로 안창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윤치호가 보석금과 병원비를 댔습니다. 안창호가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하여 일하려 하는 윤치호의 지()와 성()을 굳게 믿노라'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최보식 선임기자

 

■03 31일 “애국가는 절대 도산 안창호의 작품일 수 없다”

【서울=뉴시스】 안창호(왼쪽)와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학술원 통신’ 제297(2018 41일 발행)에 ‘애국가 작사는 누구의 작품인가’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신용하 교수의 민족이야기’ 블로그에서도 읽을 수 있다. “애국가의 본 가사는 1절부터 4절까지 모두 도산 안창호의 작품이다. 단 후렴만은 독립협회 시기의 ‘무궁화 노래’에서 빌려 온 것이다”는 요지다 

이와 관련,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가 이론을 제기했다. “애국가는 좌옹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국가(國家)가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인정하느냐에 주목할뿐 작사자 논쟁에는 가담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기존의 ‘흥사단’이나 ‘순흥안씨’라는 진영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고, 독립협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근대사학자의 글이라는 점에서이다

역시 기대했던대로 진영논리는 배제되었다. 이에 크게 안도했다. ‘친일파’가 작사하였으니 폐기하자는 주장을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협회, 독립운동사, 독도, 고대사 연구자라는 기대에 의한 학문적 융합력은 확인되지 않아 크게 실망을 했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 검토도 없고, 기본적인 사료의 교차 검증조차 하지 못했고, 학술원 회원이라는 권위를 휘두르는 흔적까지 읽혔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EBS와의 인터뷰에서 “학자에겐 학자적 양심이 있다”고 하며 연구, 교육, 봉사로 살고 있다고 강조했는데, 이 글에서는 학자적 양심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큰 실망감에 약속을 깨고 비판을 하게 되었다


◇선행연구 검토 없는 허약한 글 

학자의 글은 선행연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스스로 표현했 듯이 ‘뜨거운 논쟁’이 있어 온 문제인 데도 글의 내용에서나 참고문헌에서 2015년 이후의 연구 결과와 자료 발굴 기사 등을 도외시했다. 2015년 발간된 단행본 ‘애국가 작사자의 비밀’(신동립) 2015년 흥사단 주최 학술회의 논문 ‘윤치호 애국가 작사 연구’(김연갑), 2016년 서울신학대 주최 학술회의 논문 ‘윤치호 작사 증거 10가지’(김연갑), 2017년 명지대 국제한국연구소 주최 학술회의 논문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 연구’(김연갑)를 간과했다 

이를 의도적 회피로 본다면 심사도 없는 회원지에 심심풀이로 쓴 글이거나 연구자적 자세를 잃어버린 글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의 본체 격인 “애국가 가사의 내용분석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추적해 보기로 한다”의 결과는 사상누각이다. 왜냐하면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방법은 주로 자료수집과 ‘증언’ 청취에 의존했다가 실패했으므로”라는 전제가 틀렸기 때문에 이로부터 얻어진 결과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다음의 주장들이 그렇다. 

1.
외국 출판사의 문의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통보한다는 1955 42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대해 타 신문들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작사자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듬해 1956 831일자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렸다. 16개월 간의 조사결과이다. , 3차 회의(1955.7.28)에서 조사위원 19인 중 13인이 출석한 자리에서 작사자를 윤치호로 확정 발표하자는 것에 대해 표결을 했다. 결과는 윤치호 확정 11 () 미확정 2로 나왔다. 확정을 반대한 이유는 “내가 작사자다”라고 주장한 김인식이 생존해 있고, 만의 하나 “거부(拒否)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타 작사자가 출현하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가정(假定)”해서였다 

분명한 것은 ‘윤치호 11 대 안창호 2’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 교수님은 이를 “11(윤치호) 2(안창호)로 만장일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하여 “정부는 결국 애국가 ‘작사자’를 또 다시 ‘未詳(미상)’으로 결론지어 발표하였다”고 근거 없는 주장을 한 것이다. 기존에 이런 주장이 있었으나 최근에 바로 잡혔다. 신 교수님은 오류를 답습한 것이다 

2.
이후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 자필 애국가 가사지(1907년 작)의 진위에 대한 감정을 받기도 하고, ‘찬미가’를 공개적으로 찾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최종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윤치호씨로 결론, 애국가 작사자에 종지부, 국사편찬위원회 불원 문교부 장관에게 보고하리라 한다.(국도신문, 1956.8.31)  

3.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는 자료집이지 결과보고서가 아니다. 이 자료집이 발간된 것은 1955 513일이다. 신 교수님은 “국사편찬위원회는 1955 511일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편성하고”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2일 만에 조사결과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국사편찬위원회는 경과보고서를 제출하고” 또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수용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조사자료’를 ‘조사결과 보고서’라고 주장한 것인데, 이는 신 교수님 글의 전제가 틀린 것으로 이에 근거한 모든 주장은 허망한 것이 되는 것이다 

4.
신 교수님은 현 애국가와 동일한 후렴의 ‘무궁화가’에 대해 “현재까지는 ‘무궁화가’의 작사자도 불명이다”라고 했다. 당연히 아리랑의 예에서와 같이 후렴이 같으면 같은 노래로 보는 음악 일반론은 알고 있으니 같은 후렴을 쓰는 ‘무궁화가’가 윤치호 작이어서는 안 된다고 보아 이런 주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도 틀렸다. 1897 713일 정부와 독립협회가 서대문 독립관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제505회 조선 개국 기원절 경축행사에 대해 당시 독립협회 회장이며 독립신문 사장인 서재필이 영문판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의 편집자주(Editorial Notes)에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다.

“오후 3시 배재학당 학생들의 찬양으로 시작되어, 독립협회 안경수가 인사말을 하고, 외국인 참석자들이 소개되었다. 와병 중인 학부대신 이완용을 대신하여 한성판윤 이채연이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가’를 불렀다.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시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연주한 ‘올드 랭 사인’ 곡에 맞춰 불렀다. (The Paichai boys sang a song National Flower which was composed by the poet lauriate of Korea, Mr. T. H. Yun, for the occasion. They sang it to the tune of Auld Lang Syne accompanied by Mrs. M.F. Scranton on the organ) 

‘무궁화가’를 ‘National Flower’로 표기했고, 이를 계관시인(桂冠詩人·poet lauriate of Korea) 윤치호(Mr. T. H. Yun)가 행사를 위해 작사했다고 밝혔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단행본과 논문에서는 조선개국 기원절 행사에서의 윤치호 역할에 대해서는 물론, 이 기사의 전후 맥락을 자세히 서술했다. 그러므로 신 교수님은 선행연구를 검토하지 않은 것은 물론, 독립협회 연구자가 그 기관지인 독립신문 영문판도 텍스트로 수용하지 못한 것이니 허망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
신 교수님은 대성학교 개교 시기보다 현 애국가가 수록된 ‘찬미가’가 발행된 시점이 앞선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찬미가’ 재판은 1908 625일 발행되었다. 그런데 신 교수님은 “1908 926일 대성학교를 개교하자 윤치호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안창호 자신은 대리교장으로 실제 실무를 담당하면서 창작해 놓은 애국가를 윤치호 교장에게 보이어 동의를 받고 애국가를 공개하여 보급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라고 하였다. 이미 3개월 전에 윤치호 역술 찬미가에 수록된 애국가를 안창호가 지어 보였다고 하였으니 어불성설이다.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물론 이의 오류도 선행연구에서 이미 바로 잡힌 것이다. 

7. 1945
1018일 임시정부 주석 명으로 중국 충칭의 음악월간사가 펴낸 ‘한중영문중국판 한국애국가(韓中英文中國版 韓國愛國歌)’에서 김구가 애국가의 고사(故事)을 간략하게 밝혔다. “이 애국가는 50년 전에 창작되었는데 한 한국애국지사의 수필에서 나왔으나 단 이미 그 이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신 교수님은 이 대목을 인용까지 하고는 아무런 해석 없이 넘어갔다. 그런데 1945년으로부터 50년 전이라고 했으니 1896년이 된다. 이 시기는 ‘무궁화가’를 작사한 1897년에 근접한 시점이고, 안창호의 나이로는 가당치가 않다. 결정적으로는 안창호가 작사했다면 김구가 작사자의 이름을 모른다고 할 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윤치호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제 역시 선행연구에서 밝혀 놓았음은 물론이다 

8.
역술(譯述)의 문제이다. 애국가, 무궁화가, 그리고 또 한편의 애국찬미가가 수록된 ‘찬미가’의 판권에는 융희(隆熙) 2(二年) 620일 재판 인쇄, 25일 발행, 역술자 윤치호(譯述者 尹致昊)로 되어있다. 여기서 ‘역술’은 번역의 유사 개념인 번안과 다르게 당시 지식 수용과 주체화 과정에서 일부는 번역하고 일부는 자기 지식을 반영한 ‘번역과 일부 지음’의 합성어이다. 굳이 ‘번역(飜譯)’이란 용어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니, 분명히 전체 번역에 일부 창작(저술)이 포함된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일본에서 유입된 용어로 1895년 ‘제국문학’ 8월호 ‘번역의 진상(眞相)’이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역술을 설명하였다 

“번역이 곤란하여 때로 오류가 불가피한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역술로 되는 것이고 이것 역시 가능하더라. 무릇 역술이라 함은 7할의 번역과 3할의 창작을 가미한 것이라더라. 

역술의 실례는 현채(玄采·1856~1925)의 역술 ‘동국사략(東國史略)’이 있다. 일본인 임태보(林泰輔)의 ‘조선사’를 번역하고, 원저에 없는 단군사나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 등을 끼워 넣었다. 또한 원저의 결론과는 반대로 임진왜란을 우리가 승리했다고 서술했다. 이렇게 일부를 지어 넣은 경우이다. 윤치호가 찬미가를 ‘역술’로 한 것은 서양 찬송가 12편을 ‘역()’하고, 3편을 창작 한 것을 ‘술()’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번역’이나 ‘편집’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이다. 무궁화가가 명확한 술이니 애국가 외 한 편도 술인 것이다. 윤치호는 일본, 중국, 미국에서 많은 책을 읽었으니 이런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울=뉴시스】 윤치호(왼쪽)와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

 

9. 위의 선행연구에서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밝힌 다수의 자료들을 적시했다. 일반적인 연구자라면 먼저 이런 자료들의 가치나 성격을 극복하고 나서 안창호설을 주장하는 것이 도리이며 옳은 연구 자세이다

1910
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티호’ 작사 표기 
1914
년 미국 ‘태평양잡지’ 윤치호 작사로 기술 
1931
년 한석원 편저 ‘세계명작가곡집’ 윤치호 표기 
1909
년 이기재 소장 창가집, 윤치호 작사로 표기 
1920
년대 김종만 소장 필사 가사집, ‘윤선생 치호’로 표기 
1910
년 일본유학생회 ‘윤치호 작 새 애국가’ 기록 
1911
년 ‘105인 사건’ 관련 경기도 경무보고서에서 ‘윤치호 구작(舊作)
1914
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보고 제143호에 ‘윤치호 작’  

신문잡지, 필사본, 일제 조사자료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표기한 것들 중 일부이다. 이들은 최근 신문과 통신을 통해 기사화된 것들로 검색 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한 자료들이다. 바로 이런 자료의 증거력을 극복하기 전에는 안창호설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신 교수님이 이에 상응하는 안창호 작사 표기 자료를 한 건도 발굴하지 않고 안창호가 작사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물론 작사하지 않았으므로 기록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료의 교차 검증 없는 글 

1. 신 교수님은 교차 검증이 필요한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했다. “도산은 귀국 도중에 일본 동경에서 체류 중인 유길준(吉濬)을 예방하여 애국가 작사를 요청한 사실에서 보거나 균명학교 등의 강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애국가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모두 고사하므로 스스로 작사할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의지가 있었던’ 것과 실제 작사한 것은 엄연한 별개 문제이다. 그리고 ‘유길준을 예방하여 애국가 작사를 요청’했다는 기록도 근거가 없다. 이런 기록은 유길준 측의 자료와 교차 검증을 하고 사용해야 한다. 이는 연구자로서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2.
일본 외무성 자료를 인용했다. 외사경찰이 보고한 자료에 애국창가 9곡을 적시하며 애국가, 국기가, 국민가는 “평양 대성학당 생도 중에서 불라디보스토크에 작년에 온 조선인의 작()이라고 하고 애국가의 내용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애국가와 대성학교와의 관련 증언은 신뢰성이 매우 높다”라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의 “애국가와 대성학교와의 관련 증언은 신뢰성이 매우 높다”라는 부분은 대성학교 개교 이전부터 찬미가 소재 애국가가 윤치호가 설립한 한영서원으로부터 기독교계 학교에 널리 퍼져 불려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같은 해석은 1915년 문제가 된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윤치호가 설립한 개성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이 압수되어 교사 이상춘 등과 이웃 학교인 호수돈여학교 교사까지 피체된 사건이다. 처음 40부를 찍고, 이어 99부를 찍어 보급하다 1917 9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불경죄 등의 죄목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사건 기록에는 “한영서원 불온문서 발각 윤치호 작 애국가 등 불온 창가집 인쇄 1 40전”이 확인된다. 이는 앞의 ‘관련 증언은 신뢰성이 매우 높다’ 정도와 비교가 되지 않는 직접적인 기록이다. 교차 검증을 했다면 강조할 자료가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학자적 양심’ 없이 권위로 누르는 글 

신 교수님은 자신이 해제를 쓴 국가보훈처 수집 1914년 길림성 소영자 소재 광성중학교 교재 ‘최신창가집’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 “최신창가집(最新唱歌集)에는 152곡의 애국창가를 수집 수록하면서 도산 안창호의 가사 ‘애국가’를 첫 머리에 그대로 ‘국가(國歌)’로 제목을 바꾸어 수록하였다”라고 했다. 현 애국가를 ‘국가’로 표기한 자료를 ‘도산 안창호의 가사’라고 했다. 1996년 해제에서 언급하지 않은 애국가 작사자를 20여년이 지난 2018년에 와서는 ‘도산 안창호의 가사’라고 억지를 폈다. 사실에 의거한 주장이 아니라 내가 해제를 쓴 책이라고 자의적 표현을 한 권위적 주장이다

이런 태도는 결론 부분에서 “오랫동안 뜨겁게 논쟁해 온 주제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기 때문에, 이 견해에 대한 학술적 검토 이외에 다른 시비는 사양한다”라고 했다. 그동안 논쟁은 ‘학술적 검토’가 아니었으니 자신의 주장만 들으라는 말인지, 뜨겁게 논쟁해 온 주제이니 자신의 주장으로 끝을 내라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그야말로 ‘학자적 양심’은 읽히지 않고 권위적 주장으로만 읽힌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족을 달고자 한다. 신 교수님의 ‘애국가 가사 내용의 비교’는 잘못된 전제로 설한 것이므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비판을 한다. 1절 ‘하나님이 보우하사’의 ‘하나님’을 안창호 기록에서 찾기 바란다. 어떤 원로의 말처럼 “안창호는 기독교인이지만 신앙고백이 없다”고 한다. 이 ‘하나님’이란 용어를 누가 무겁게 썼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소중하다. 또 다른 ‘신 교수님’이 없기를 바라면서 이 기록을 남긴다
<
뉴시스>  

 

04-13 현존 最古 추정 ‘애국가 영문악보’ 공개

안익태 선생, 1944년 美서 제작… 뉴욕한인회 이민사박물관 보유

가장 오래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애국가 영문악보’(사진)가 공개됐다.

 

미국 뉴욕한인회 이민사박물관은 1944년 미국에서 제작된 안익태 선생(19061965)의 애국가 영문악보 인쇄본을 전시한다고 11(현지 시간) 밝혔다. 현존하는 애국가 영문악보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가장 오래된 애국가 영문악보는 1956년 제작됐다.

이번에 공개된 애국가 영문악보는 뉴욕 롱아일랜드에 거주하는 김근영 목사 가족이 보관해 오다 이민사박물관에 기증했다고 뉴욕한인회는 설명했다

악보 표지에는 ‘KOREAN NATIONAL ANTHEM(한국 국가)’이라는 굵은 글씨체의 영문 제목과 작곡가 안익태 선생 및 발행인 존 스타 김의 영문 이름이 적혀 있다. 존 스타 김은 한인교회 소속이라고 표기돼 있다. 당시 뉴욕 한인교회 김준성 목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악보에는 영어로 의역된 애국가 가사가 2절까지 소개됐다. 

애국가는 1935년 해외에서 활동하던 안익태 선생이 작곡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 곡을 애국가로 사용했지만 해외에만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지금의 애국가가 정부 공식행사에 사용됐다. 이때 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며 전국적으로 애창됐다. 애국가 악보의 한글판은 앞서 미 샌프란시스코 등에서도 발견됐다. 1945년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도 한국어 중국어 영어 병기 악보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발굴 -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

■수필가 한흑구의 ‘안익태 교우록’

“이것이 코리아 환타지의 프롤로그(서곡)!

⊙ 안익태, 커티스 음악원 낙방하자 템플대 기악과 외국인 장학생이 돼
⊙ ‘러시아 환상곡’에 영향받아 ‘한국환상곡’을 쓰기로 결심
⊙ ‘러시아 환상곡’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으로 추정

 

▲1962 2월 스페인에서 일시 귀국한 안익태 선생이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교향악단 지휘를 하고 있다.

     

  수필가이자 번역문학가인 한흑구(韓黑鷗·1909~1979) 선생은 수필집 《인생산문》(1974)에서 안익태와의 인연을 자세히 소개했다. 이 책은 음악학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음악칼럼니스트인 김승열씨가 발견해 《월간조선》에 소개했다.
 
  한흑구는 책에 실린 ‘예술가 안익태-젊은 시절의 교우록’에서 고학(苦學)을 하던 미국 유학 시절의 만남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이 교우록은 픽션적 소설이 아니고 나의 죽마고우인 안익태 군과 미국에서 같이 고학하던 젊은 시절을 사실대로 기록해 두려는 것이다. 이 시절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음악학도로서의 가장 중요한 20대의 청춘기였던 것이다. 나의 기억에서 상실된 것은 아쉽게도 잃어버린 사실이 있을지언정, 픽션적인 이야기는 한 오라기도 첨가하지 않고, 다만 옛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는 이야기체로 기억해 두려는 것이다. …〉(p172, 《인생산문》)
 
  ‘안익태 교우록’에는 한국환상곡(코리아 환타지)의 작곡 동기가 등장한다. 1933년 어느 봄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본 뒤 안익태는 “나도 지휘자가 되어 볼 결심이야. 또한 한국광상곡(韓國狂想曲·‘한국환상곡’과 같은 의미로 추정된다)도 하나 작곡하고”라고 한흑구에게 말한다.
 
  일부 음악학자들은 이부쿠베 아키라(伊福部昭) 1935년 작품 ‘일본광시곡’이 ‘한국환상곡’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으나 한흑구의 《인생산문》을 통해 볼 때 ‘친일 추론’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또 안익태는 ‘한국환상곡’ 작곡을 위해 피아노로 도라지타령, 아리랑, 수심가 등을 치고 한흑구에게 양산도를 부르게 하는 대목도 나온다. 실제로 ‘한국환상곡’ 1부에 한국 민속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이 플루트와 금관악기를 통해 연주된다.

 
  《월간조선》은 ‘안익태 교우록’에 실린 ‘노부부의 온정’ 편을 소개한다. 일부 표기를 현대어로 고쳤음을 밝혀 둔다.

 

▲한흑구 선생이 쓴 수필집 《인생산문》(1974)에 실린안익태 교우록지면이다

 

(안익태)은 커티스 음악학교에서 장학생 시험을 보았으나 아깝게도 떨어지고 말았다.
 
  일곱 명을 뽑는데 아홉째가 되었고, 응시한 사람은 서른 명이나 되었다.
 
  첫째로 뽑힌 사람은 첼로를 하는 17세의 소녀였다. 참으로 놀랄 만한 천재 소녀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열째로 떨어진 사람도 캐나다에서 온 서른이 넘은 청년으로 캐나다에서 삼십 회 이상의 연주회를 가졌고, 일류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그의 스크랩북을 보여 주었다.
 
  “이것들을 보시오! 이렇게 연주를 많이 했는데도 나를 떨어뜨렸으니.
 
  그의 스크랩북에는 그가 연주했던 곡과 각 신문에 실렸던 기사들과 음악 평론가들의 평문들이 조각조각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안은 울지는 않았다. 안도 동경에서 음악학교를 나왔고, 개인 연주회도 여러 번 가졌으며 또 고국에서도 여러 차례의 연주회를 가졌었다.
 
  서울 장곡천공회당(長谷川公會堂·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의 이름을 붙인 오늘의 소공동. 공회당은 상공회의소 자리에 있었다-편집자)에서 연주회를 가진 것은, 한국사람으로서는 처음인 첼리스트의 연주회였다.
 
  또한 고향인 평양의 모교 숭실대학 강당에서 열렸던 연주회에는 평양의 전 시민이 모여서 열광적으로 환영을 하였다.
 
  백여 명의 미국 선교사들도 참여했었지만, 안을 처음부터 지도해 오시던 모의리(牟義理·미국 출신의 선교사 E. M. Mowry. 항일 독립운동가. 숭실학교 교장으로 민족주의 사상, 항일의식을 고취했다-편집자) 교수도 감격한 나머지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나의 눈으로도 목격했던 것이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안은 아깝게도 일곱 명을 뽑는데 아홉째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한흑구) ! 자네 학교 음악과에 잘 말해서 나를 장학생으로 좀 넣어 주게나. 자넨 총장을 잘 알지 않나.
 
  안은 침착한 태도로 말하였다.
 
  안의 말대로 나는 찰스 베리(Charles Buery) 총장을 만나 안을 소개해서 내가 다니고 있던 템플대학교(Temple University) 음악대학 기악과에 외국인 장학생으로 무난히 넣을 수 있었다.
 
  안은 입학한 후 며칠 되지 않아 나에게 다시 이런 제안을 하였다.
 
  “여보게, 커티스 음악학교에 가서 짐발리스트 씨를 찾아보고, 일주일에 단 한 시간이라도 개인지도해 달라고 애원을 해 보세나. 아무래도 그런 대가(大家)에게 가서 배우지 않으면 내가 이곳까지 온 목적이 서지 않는 것이야.
 
  “글세,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겠나!
 
  나는 주저했다.
 
  커티스 음악학교는 필리(필라델피아-편집자)에서 제일 오래된 신문인 퍼블릭 레저(Public Ledger)의 사장이 자기의 이름을 따서 음악학교를 세우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명한 음악가들을 채용해서 음악 학도들을 학비 없이 교육시키는 유명한 학교였다.
 
  “한! 내 스크랩북을 보았나? 내가 동경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 마침 짐발리스트 씨가 동경에서 연주회를 갖기 위해서 내방하셨는데, 그때 그가 내 연주회에 왔었어. 그때 그가 내 연주를 신문기사를 통해서 호평한 것이 아사히신문에 났었는데, 그걸 갖고 한번 찾아가서 부탁해 보세나!
 
  안은 스크랩북을 꺼내서 신문 기사를 오려 붙인 것을 펼쳐놓았다.
 
  “그렇군! 그럼, 한번 가 보세나. 되든 안 되든 해 봐야지, 미리 전화로 약속을 하고 가야 해.
 
  그의 스크랩을 보고는 나도 이렇게 말하고 그의 제안을 승낙하였다.
 
  약속한 날, 안과 나는 커티스 음악학교로 가게 되었다. 캠퍼스에 들어서자 바이올린의 고운 멜로디가 이층에서 흘러나왔다. ‘미뉴에트’ 곡이었다.
 
  “한! 아마 저건 짐발리스트가 켜나 봐. 참 고운데!
 
  안은 이렇게 감탄하면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서 있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자 여비서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바이올린을 켜고 계시는 이가 짐발리스트 씨입니까?
 
  “아니요, 우리 학생입니다.
 
  비서의 대답을 듣고 우리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린 한국에서 온 학생들인데 짐발리스트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미리 약속을 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비서는 이렇게 말하고 전화로 연락을 하였다.
 
  “자, 이리로 들어가세요.
 
  친절한 여비서는 옆방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자 반가이 맞아주는 짐발리스트의 손을 잡고 인사를 드렸다.
 
  그는 우리들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서 자기도 소파에 앉으며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국에서 언제 오셨소?
 
  이렇게 묻고 있는 그의 입도 컸지만 코도 컸으며 넓은 이마는 앞이 다 벗어졌다.
 
  그는 성자(聖者)와 같은 표정을 하고 친절한 눈으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저는 약 4년 전에 왔고, 미스터 안은 일 년 전에 왔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안은 일본에서 음악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음악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한 주일 전에 이리로 왔습니다.
 
  “아, 그런가요? 무엇을 전공하시지요?
 
  “전공은 첼로입니다. 일전에 이 학교에서 장학생 시험을 보았는데 아깝게도 아홉째가 되어서 떨어졌습니다.
 
  “아하, 그랬군요! 참 서운한 일이군요. 시험관들은 우리보다도 더 정확합니다.
 
  그는 잠깐 동안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엇인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부탁은 다름 아니오라, 선생님께 미스터 안이 한 주일에 단 한 시간이라도 개인 교수를 받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본래 우린 둘이 다 고학생이지만 배움에 주려서 이곳 미국에까지 온 것입니다.
 
  나는 말에 힘을 줄 수 있는 대로 주어서 분명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난색을 하고 한참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였다.
 
  “먼저 내 생활을 이야기하지요. 나는 이 학교 외에 세 학교에 나가는데 그 학교들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보스턴과 뉴욕과 워싱턴에 있기 때문에 비행기로 왕래하게 됩니다. 그래서 늘 바쁘고, 늘 피곤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 이번 학기만이라도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 혼자서도 충분히 자습을 해 나갈 수 있겠습니다. 지금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그가 거절하기 전에 이렇게 덧붙여서 애걸하였다. 그는 한 손가락을 볼 위에 대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 이것을 좀 보십시오.
 
  안은 가지고 온 스크랩북을 펴 놓았다.
 
  “이것은 선생님이 일본에 오셨을 때, 그리고 미스터 안의 연주회에 오셨을 때의 아사히신문 기사입니다. 일본글이 되어서 모르시겠지만, 그때 선생님이 이런 평을 하신 것을 기억하시겠습니까?
 
  〈… 安君의 첼로의 音色은 東洋的인 특색을 가진 哀愁的인 멜로디다.
 
  앞으로 세계적인 대가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기대된다. …〉
 
  “선생님께서 이렇게 극구 칭찬하신 것을 잊으셨나요?
 
  나는 신이 나서 이렇게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한참 동안 신문 기사와 함께 실려 있는 자기의 사진과 안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그렇군, 그렇지! 내가 그때 안군의 연주회에 갔던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나의 기억력이 감퇴되었으니….
 
  그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안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미안하오. 잘 알아보지 못해서. 그럼, 내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한 시에 오셔서 한 시간만 배우도록 합시다.
 
  그는 안의 손을 그대로 쥐고 흔들면서 이렇게 쾌히 승낙하였다.
 
  “댕큐 서어! 댕큐 베리머치 서어!
 
  안은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이렇게 인사를 드렸다.
 
  나도 일어서면서 악수를 청하고, 몇 번이나 고맙다고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그는 우리와 함께 현관까지 나왔다.
 
  “나라도 없는 한국 학생이기 때문에 나는 안군을 잘 지도해 주려는 것이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안의 어깨를 여러 번 두들겨 주었다.
 
  안과 나는 한없이 감격하여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여러 번 절을 하였다.
 
  우리 둘은 그의 마지막 말을 여러 번 되새기며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안익태 선생의 유품들. 연미복과 초상화, 훈장 등이다

 

안은 템플대학에도 잘 다녔고, 짐발리스트 씨의 지도도 잘 받았다.
 
  특히 짐발리스트에게서는 연주할 때 숨을 쉬는 방법과 음색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곡을 따라서 무겁게 혹은 가볍게 또는 고상하게, 작곡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연주가의 생명이라는 것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나에게도 여러 번 설명하였다.
 
  안은 이렇게 해서 가장 좋은 스승들로부터 마음껏 배울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돈을 벌 기회도 없었고, 벌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를 동생과 같이 믿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김블 형제백화점(Gimble Brothers Department Store)의 동양물품부의 점원이었으나, 학교 때문에 반나절의 시간일(part time work)을 했기 때문에 안의 생활비까지 대기에는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사 먹던 식사를 집에서 자취하며 해 먹기로 하였다.
 
  빨래도 우리 손으로 하고 다림질도 우리 손으로 하기로 하였다.
 
  우리 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거의 다 내 손으로 한 셈이었다.
 
  그는 밤낮으로 첼로에 열중했기 때문에 잔심부름을 할 정신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루는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 반하우스 박사(Dr. Barnhouse)를 찾아갔다.
 
  미국에서 3대 교회당의 하나라는 그의 제십장로회당(第十長老敎會堂·The 10th Presbytarian Church)에 다니게 된 것은 그 교회에서 우리나라 경북 안동에 선교사를 보냈고 교회를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한국과 한국사람들을 생각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하나였다.
 
  그것이 고마워서 나는 그의 교회의 교인이 된 것이다. 그는 내가 갈 때마다 아버님같이 나를 대해 주었다.
 
  그날도 그는 혼자서 서실(書室) 안에 앉아서 연구를 하다가 내가 온 것을 알고 나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쿡에게 나의 저녁을 청해 주었다.
 
  자기는 식사를 했다고 커피만 들면서 나에겐 고기와 맛있는 음식을 자꾸 권했다. 나는 많이 먹기도 하였다.
 
  “그래, 한군은 여전히 공부도 잘하고, 또 잘 지내나?
 
  목사는 웃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이 염려해 주시는 덕택으로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고기 한 덩어리를 더 집으면서 웃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고국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들도 다 무고하겠지?
 
  “네, 일 주일에 한 번씩 서신 왕래를 합니다.
 
  “그래야지. 한국이 빨리 독립을 해야 모든 것이 해결될 텐데!
 
  그는 늘 한국의 독립을 마음으로 성원하였다. 다른 미국의 지성인들도 그렇지만, 이 목사님은 더욱 진실하게 성원하였다.
 
  그는 선교 사업을 통해서 일본 통치하의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사님, 좀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나는 식사를 끝내고 이렇게 말을 꺼내면서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무엇인가? 어서 말해 보게!
 
  “안익태라는 나의 고향 친구인 죽마지우가 얼마 전에 저의 집에 와 있습니다.
 
  “그래? 얼마나 반갑겠나? 나도 만나게 해 주게.
 
  “물론이지요. 요새 학교 관계도 있고 해서 너무 분주해서 못 데리고 왔습니다. 그도 평양에서 미션스쿨을 나왔으니까 앞으로 우리 교회에 같이 나오겠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의 안과 내가 지내 온 모든 처지를 이야기하였다.
 
  내가 혼자서 벌어서 두 사람의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서 자취도 하고 빨래까지 우리의 손으로 해서 지낸다는 이야기까지 모두 말했다.
 
  “그렇게 힘들게 지내서야 어디 오래 참아 가겠나! 우선 안이 직업을 가지도록 내가 좀 주선해 보지.
 
  목사님은 엄지손가락을 턱에 대었다.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주일마다 연보를 받을 때 성가 독창을 시키시는데 늘 독창만 시키지 마시고 첼로를 시키시면 어떻겠습니까?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나는 안이 첼로를 잘하고, 짐발리스트 씨에게 사숙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중략) 수요일 저녁 우리 교회 주일학교 애들이 예배를 볼 때 음악예배를 보기로 했으면 좋겠네. 학생들에게 한국 청년도 이렇게 서양음악을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어 한국을 한번 자랑해 보세나! 미국에선 무보수라는 것은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얼마씩 생활비에 보태어 나가면 좋은 아이디어가 또 생기지 않겠나.
 
  이렇게 말하는 목사의 얼굴은 무척 명랑해 보였다.
 
 
한 손을 다른 손 위에 올려놓고 그가 웃는 얼굴을 하는 것은 틀림없이 될 만한 일이라는 것과, 앞으로 우리 둘을 위해서 성의껏 도와주겠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이 보였다. (중략)
 
  ‘내일을 위하여 결코 걱정하지 말라! 오늘에 성심껏 일한 것으로서 충분하다!
 
  이 명언(名言)은 이곳 필리 출신인 외교관이요 발명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었다.
 
  안군과 나는 약속한 수요일 저녁 교회에 가서 오백여 명의 미국 어린애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음악예배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머리털이 검고 눈동자가 검은 동양사람이 어떻게 서양음악을 그렇게 잘하나 하고 그들은 커다란 눈들을 더욱 크게 굴리면서 열광적인 박수로 환호하면서 음악예배를 끝마쳤던 것이다.
 
  반하우스 목사님도 매우 만족해하셨으며 우리 두 사람의 한 주일 생활비에 해당하는 보수를 내주셨다.
 
  프랭클린의 말과 같이 우리는 내일을 위하여 조금도 비관하지 않고 그날그날 성실히 일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뿐인가, 그다음 주일엔 목사님께서 윌리(Willey)라는 늙은 부부에게 안군을 소개해 주었다.
 
  윌리 부부는 어떤 회사에서 삼십 년이나 중역으로 일을 하다가 은퇴하고 넉넉한 재산과 보너스로 한가하게 지내는 부부였다.
 
  슬하의 자식들도 다 분가해 살고 있었고, 두 늙은이만이 한적한 곳에 좋은 집을 가지고 여생을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더구나 윌리 부인은 스미드 대학(Smith College) 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그래서 이 늙은 부부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 대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는 안군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었다.
 
  “목사님 덕분으로 넌 이제부턴 걱정 없게 되었어. , 빨리 가 보게!
 
  이렇게 전송하는 나에게 그는 쓸쓸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마음에 없는 곳에 시집을 가는 처녀의 심정과 같네.
 
  안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 사람이, 뭐 먼 데로 가는 건가? 무슨 말을 하나? 내일이라도 만날 게 아닌가? 이젠 마음 놓고 공부나 열심히 하게. 나도 이젠 기쁘게 공부를 하겠네.
 
  이렇게 나는 안을 위로해 주었다.
 
  사실 나도 그와 헤어지는 것이 한없이 쓸쓸했으나 우리 형편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그후 안과 나는 학교에서 만나기도 하고 주말에는 안이 있는 집으로 놀러가서 밤을 새우면서 놀기도 하였다. (중략)
 

▲1955 4월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 축제를 위한 특별초청으로 귀국한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이 대통령은 그에게 한국 최초의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씨가 퍽 부드럽고 맑았다. 라일락꽃이 피어 나는 5월이었던 것이다.
 
  안을 찾아 경치 좋은 교외로 버스를 타고 윌리 부부의 집을 찾은 것은 점심 시각이 지나서였다. 윌리 부부와 안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점심을 먹고 왔다고 해도 맛있는 케이크와 과일, 커피를 잔뜩 갖다 놓고, 안과 둘이서 이야기하며 실컷 놀라고 하였다.
 
  “이 사람, ! 나는 어제 저녁 스토코브스키의 심포니에 가 보았네. 참으로 귀신같애! 작품은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되는 러시아계의 청년이 작곡하였다는 것인데, 곡명이 러시아 광상곡(狂想曲)이야! 처음엔 러시아 제정시대(帝政時代)의 한가로운 시대를 그렸는데, 느릿한 템포로 시작하고,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노래 같은 것도 나오고, 구루마 바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나오고, 이러다가 제정이 부패해 가는 음탕한 음조로 차차 변해 가. 그러고는 러시아의 혁명가인 듯, 트럼펫 소리, 슬라이 트럼퍼가 마치 만세라도 외치는 듯이 굉장히 우렁찬 소리로 변해 가네.
 
  이때 지휘자 스토코브스키의 팔이 얼마나 빨리 휘도는지 열두어 개나 되는 것같이 쉴 새 없이 막 휘돌아가는 거야! 나도 지휘자가 되어 볼 결심이야. 또한 한국광상곡(韓國狂想曲·‘한국환상곡’과 같은 의미로 추정된다. 한흑구는 아래에 ‘코리아 환타지’ 옆에 ‘한국광상곡’이라 적었다-편집자)도 하나 작곡하고.
 
  안은 쉴 새 없이 이렇게 열심히 이야기를 해 갔다.
 
  상대자인 내가 어떻게 생각하거나 알 바 없다는 듯이 마치 중학생처럼 감상적이고 열정적인 이야기를 그냥 계속하였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나를 끌고 피아노 앞으로 갔다.
 
  “이 바통(지휘봉)도 어제 저녁에 사 왔어.
 
  그는 때 하나 묻지 않은 바통을 피아노 위에서 들어서 내게 보이고는 다시 피아노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러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를 꽝꽝 치기 시작하였다.
 
  한참 치다가 피아노에서 두 손을 떼어 올리면서,
 
  “이것이 ‘코리아환타지(Korea Phantasy, 韓國狂想曲)’의 프롤로그(서곡)!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참 좋네. 훌륭하이. 꼭 하나 작곡해 보게.
 
  음악을 모르는 나이지만 어쨌든 그의 앰비션과 재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춘향전에 나오는 것 같은 노래와 도라지타령, 천안삼거리, 노들강변, 아리랑, 또는 수심가 같은 멜로디가 섞인 곡을 피아노가 깨어져라 치고 있었다.
 
  “대체로 아우트라인이 잡히기는 했는데, 한국 민요를 몰라서 큰 야단이야. 이건 모두 내가 들은 한국 민요를 내 멋대로 편곡한 것인데 꼭 그대로 할 필요는 없어도 그 줄거리는 잘 알아야 해! 한군! , 아무 곡이나 하나 해 봐, ? 도라지타령을 한번 불러봐.
 
  그는 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청을 한다기보다도 강요하는 표정을 했다.
 
  “나는 몰라. 노랠 내가 해 봤어야지.
 
  나는 어느 주석(酒席)에서 노래 차례에 걸린 사람 같이 서먹서먹했다.
 
  “어서! 아무 곡이나 좋아!
 
  “그럼 양산도를 한번 해 보지.
 
  잘할 줄 모르는 노래지만 그의 작곡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양산도를 숨이 차게 불렀다.


  그는 머리를 끄떡끄떡하면서, 한 손으로는 피아노의 키를 짚어 가면서 멜로디의 피치를 암송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약 한 시간 동안, 술 한 잔도 없는 피아노 앞에서 잘 부르거나 말거나 아는 노래는 모두 핏대를 올려서 불러댔다.

월간조선 2019.01월 호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월간조선 01월 호 - : 김승열  음악칼럼니스트

■안익태에 관해 우리가 몰랐던 ‘한국환상곡’의 진실들

‘한국환상곡’의 작곡·초연 연도는 ‘1937~38년’ 아닌 ‘1934년’

⊙ ‘한국환상곡’은 ‘일본광시곡’ 아닌 ‘러시아 부활제 서곡’에 영감 받아
⊙ 한흑구의 ‘안익태 교우록’ 발견… ‘한국환상곡(코리아 환타지)’ 작곡 동기 드러나
⊙ 안익태의 교향시 ‘降天聲樂’도 일본 궁중음악(에텐라쿠)이 아닌 통일신라 옥보고의 ‘降天聲曲’ 영향


金勝烈
1976년 출생. 서울대 대학원 석사, 파리8대학 석사(공연예술학), 파리7대학 박사과정(동양학) 수학 / 유럽 50여개 도시와 일본, 중국 등지에서 세계적인 클래식·오페라 거장들의 무대 900여회 관람 / 저서 《거장들의 유럽 클래식 무대》(2013, 투티)

 

▲2011 5 14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기원 국민대합창’ 행사 모습이다. ‘한국환상곡’중 애국가 부분과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서울광장의 합창단 2018, 평창 알펜시아의 합창단 2018, 뉴욕의 교포 합창단 50여명, 시민 등 12000여명이 함께 노래했다.

 

  2018 12 20일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안익태(安益泰·1906~1965)의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결정한 지 78주년 되는 날이다. 1940 12 20일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안익태의 애국가는 일제치하 한국의 공식 국가로 승인받았다. 그로부터 석 달 전인 9 27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베를린에서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는 3국동맹을 맺었다. 당시 독일의 수중에 있던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거점으로 지휘활동을 하던 안익태는 이런 삼엄한 시대조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3국동맹 체결 직전까지 안익태는 그의 주요작품들인 ‘한국환상곡(코리아 환타지)’과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유럽무대에서 수시로 지휘했다.
 
  그러나 3국동맹 직후부터 안익태의 지휘목록에 ‘한국환상곡’이 사라지고 ‘교쿠토(極東)’와 ‘만주국’, ‘도아(東亞)’가 등장한다. 또 ‘야상곡과 에텐라쿠’는 ‘에텐라쿠’로 대신한다. 에텐라쿠(越天樂)는 일본의 궁중음악을 뜻한다. 이로 인해 안익태를 둘러싼 친일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 일부 음악학자들은 ‘한국환상곡’이 이부쿠베 아키라(伊福部昭)의 ‘일본광시곡’에 자극받아 작곡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한국환상곡’은 림스키 코르사코프(1844~1908)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에 영향 받아 작곡되었다. 그 직접 증거를 최근 발굴했다.
 
  이와 함께 안익태가 1959년 작곡한 교향시 강천성악’(降天聲樂)이 일본의 전통 가가쿠(雅樂)의 음악 선율과 모티브로 작곡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송병욱과 이경분은 지난 2006년과 2007년에 안익태의 대표작 ‘강천성악’이 ‘에텐라쿠’라고 처음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강천성악’은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명인(名人) 옥보고(서기 742년에서 765년 사이 경덕왕 때의 음악가)가 작곡했다는 거문고곡인 ‘강천성곡(降天聲曲)’을 모르고서는 붙일 수 없는 제목으로 ‘에텐라쿠’를 포괄하는 상위개념으로 작곡했다.

 

한흑구의 ‘안익태 교우록’이 담고 있는 놀라운 사실들

/수필가 한흑구의 산문집 《인생산문》(1974).

 

필자는 최근 한흑구(韓黑鷗· 1909~ 1979)의 수필집 《인생산문》(1974)을 입수했다. 1933 2 3일 미국 신시내티에서 필라델피아로 온 고학생 안익태를 받아 준 인물은 한흑구였다. 안익태와 동향(평양)인 한흑구는 당시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 신문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안익태는 두 달여를 그에게 얹혀살았다. 한흑구의 《인생산문》 부록에 실린 ‘안익태 교우록’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안익태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1933 2 9일 안익태는 7명을 선발하는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 첼로장학생 선발시험에서 9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낙방한 안익태를 한흑구는 템플대 찰스 베리(Charles Buery) 총장에게 얘기해서 템플대 음악대학 기악과에 외국인 장학생으로 넣었다는 이야기도 ‘안익태 교우록’에 등장한다. ‘안()은 나보다 세 살이 더 많고’라는 언급 또한 그간 논란이 된 안익태의 정확한 생년도가 1906년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사실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바로 ‘한국환상곡’의 작곡 동기다.
 
  후원자로 나선 윌리 부부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안익태를 한흑구는 라일락 피는 5월의 어느 토요일에 방문했다고 적고 있다. 그날 안익태는 전날 본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필자는 1933년 이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 목록을 조사해 보았다. 1933 4 7()에 필라델피아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 있었던 스토코프스키 지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이날 안익태가 언급한 음악회로 추정된다. 한흑구는 ‘4월’을 ‘5월’로 혼돈한 것으로 보인다. 라일락은 4월에도 핀다.
 
  이날 콘서트에서는 3곡이 연주되었는데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등이었다.
 
  교우록에는 안익태가 이 연주회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커티스 음악원 첼로장학생 시험에는 낙방했지만, 낙방 직후 안익태는 한흑구와 함께 커티스 음악원 바이올린과 교수였던 에프렘 짐발리스트(1889~1985)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온 안익태를 동정한 짐발리스트는 일주일에 1시간씩 무료 레슨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매주 한 시간씩 레슨을 해 주던 고마운 스승 짐발리스트가 협연하는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무대를 보기 위해 안익태는 이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찾은 것이었다.
 
  특히 안익태는 이날 연주회에 25세의 러시아계 작곡가가 작곡했다는 ‘러시아 환상곡’에 영감 받아 ‘한국환상곡’을 쓰기로 결심했다는 대목이 실려 있다.
 
  여기서 ‘25세 러시아계 작곡가’가 스트라빈스키의 투영이다. 또 ‘러시아 환상곡’은 ‘러시아 부활제 서곡’의 투영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한흑구가 설명하는 ‘러시아 환상곡’의 해설이 바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과 흐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 이날 연주된 ‘봄의 제전’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한흑구의 기억 속에 ‘러시아 부활제 서곡’의 작곡가로 둔갑한 것이다.
 
  심지어 1957 11 10일 자 미국 《찰스턴 가제트》 지와의 인터뷰에서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이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환상곡’의 작곡 동기는 명확해진다. 이날 연주회에서 들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제 서곡’에 직접 영향 받아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것이다.
 
  그리고 안익태는 덧붙인다. “스토코프스키의 강렬한 지휘에 자극받아 이제부터는 지휘자가 되어 볼 결심”이라고. 이것이 ‘첼리스트’ 안익태에서 ‘작곡가·지휘자’ 안익태로 전향하게 되는 기념비적인 터닝포인트다.


  ‘한국환상곡’의 작곡·初演 연도와 안익태의 첫 유럽행은 수정돼야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 선생과 그의 유품. 그가 이끌었던 스페인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연주회 안내장이다.

 

이 책을 쓴 한흑구는 모친의 위독 전보를 받고 1934 3 19 5년 만에 미국을 떠난다. 이는 당시 Korea National Association이 발행한 《The New Korea 1934 3 22일 자 기사가 전한다. ‘안익태 교우록’에 의하면 1933년 겨울방학이 되자 안익태는 전미음악콩쿠르의 첼로 부문에 응시하기 위해 한흑구와 뉴욕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뉴욕 유니온 정거장에서 두 사람은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이후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한흑구에게 안익태는 총 4번의 편지를 보낸다. 3번은 뉴욕에서, 한 번은 런던에서다. 그중 첫 번째 편지는 전미음악콩쿠르의 첼로 부문에 2등으로 입상한 안익태가 뉴욕 제2심포니의 제1첼리스트로 채용됐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뉴욕 제2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내셔널 오케스트라로 불린 NBC 하우스 오케스트라일 공산이 크다. 이 악단은 1937 11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영입으로 탄생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신이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에서 안익태는,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안익태에게 그가 얼마 전 완성한 ‘한국환상곡’을 직접 지휘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지휘자는 당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던 프랭크 J. 블랙(1894~1968) 아니면, 에르노 래피(1891~1945) 중 한 명일 것이다. 이로부터 얼마 후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안익태는 카네기홀에서 “어제 저녁 자신의 지휘로 직접 ‘한국환상곡’을 초연했다”고 전한다. 뉴욕의 여러 신문들의 평도 좋았다고 덧붙인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한 달이 지나도록 안익태로부터의 소식이 끊겼다고 한흑구는 적고 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런던에서 안익태로부터 편지와 소포가 도착했다. “어떤 음악비평가의 소개로 런던 제1심포니의 제1첼리스트로 1년 간 계약을 하고 3주 전 런던으로 왔다”는 내용이었다. “소포에는 런던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하던 사진과 프로그램, 신문비평문들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런던에서 성공하면 빈에 꼭 가 볼 생각이라고 안익태가 적었다”고 했다.


▲1963년 제2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안익태가 광주 카리타스 수녀원 합창단을 지휘한 성가 네 곡이 담긴 LP 초판.

 

이 기록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1937년에 작곡되어 1938 2월에 더블린에서 ‘한국환상곡’이 초연되었다는 그간의 통설보다 3~4년 앞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흑구는 1934 3월까지만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 의하면 안익태의 첫 유럽행이 그간 알려진 1936년보다 2년 앞서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함께 일본 도시바공업주식회사에서 발매된, 안익태의 알려지지 않은 음반과 유일한 저서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전기》 초판(235쪽 분량)을 입수했다. 1963년 제2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안익태가 광주 카리타스 수녀원 합창단을 지휘한 성가 네 곡과 1960~70년대 일본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이토 교코(1927~)가 부른 안익태의 가곡 ‘흰 백합화’를 수록한 작은 사이즈의 LP음반은 그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귀물이다.


  안익태의 교향시 ‘강천성악’ 논란

안익태의쾌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34 2 15일자 지면. 사진은 뉴욕서 열린 안의 첼로 연주회 포스터와 연주 모습이다.

 

이제, 친일논란을 일으킨 안익태의 교향시 ‘강천성악’으로 돌아가 보자. 몇몇 학자들은 ‘강천성악’이 일본의 전통음악(에텐라쿠)에 영향받아 작곡했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필자는 ‘강천성악’이 ‘에텐라쿠’가 아니라, ‘야상곡과 에텐라쿠’라고 반박한다.
 
  그 근거를 제시하면 이렇다. 이 작품이 초연된 1940 4 30일 안익태 지휘 로마 방송 교향악단의 연주회를 보도하는 그해 4 24일 자 《조선일보》에 ‘야악(아악에 의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3국동맹 체결 전의 마지막 지휘무대인 1940 9 4일 부다페스트 교향악단과의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이 작품을 정확히 ‘야상곡과 에텐라쿠’라고 표기하고 있다. 즉 안익태는 처음부터 ‘에텐라쿠’를 작곡한 것이 아니라,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작곡한 것이다. 3국동맹 체결 직후의 연주회부터 ‘야상곡’이 사라진 ‘에텐라쿠’만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일제 압박으로 일본 편향 연주회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훗날 ‘강천성악’으로 곡명이 바뀌었다.
 
  유일한 ‘강천성악’ CD KBS 교향악단(김만복 지휘)의 음반을 들어 보면, 처음부터 ‘에텐라쿠’ 선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플루트로 연주되는 ‘야상곡’의 선율이 3분 이상 연주된 후에 ‘에텐라쿠’의 선율이 등장한다. 이 야상곡은 ‘강천성악’의 도입부와 피날레를 책임지고 있다. , 안익태는 ‘야상곡과 에텐라쿠’=’강천성악’이라는 ‘에텐라쿠’를 포괄하는 ‘에텐라쿠’의 상위개념으로서 ‘강천성악’을 작곡했던 것이다.
 
  또한 ‘강천성악’은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명인(名人) 옥보고(서기 742년에서 765년 사이 경덕왕 때의 음악가)가 작곡했다는 거문고곡인 ‘강천성곡(降天聲曲)’을 모르고서는 붙일 수 없는 제목이다. ‘강천성곡’과 ‘강천성악’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이다.
 
  그러나 ‘에텐라쿠’의 한자음 표기인 ‘월천악’은 ‘하늘을 넘어온(혹은 초월한) 음악’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이 아니다. 그럼에도 ‘에텐라쿠’의 뜻풀이가 ‘강천성곡’ 혹은 ’강천성악’과 똑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Music coming from heaven)’으로 통용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 서기 794년 출범한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유행했다고 하는 ‘에텐라쿠’가 옥보고의 ‘강천성곡’이 일본에 전달되어 음은 바뀌었으되, 뜻은 유지됐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헤이안 시대를 연 일본 50대 간무천황(서기 781~806년 재위)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었다. , 그의 모친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가 무령왕의 직계 10대손이다.
 
  안익태는 전해지지 않는 ‘강천성곡’이 일본에 건너가 지금껏 전해지는 ‘에텐라쿠’로 탈바꿈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1936 6월 힌데미트와의 베를린 면담에서 ‘강천성악’을 두고 조선 아악을 주제로 작곡한 관현악곡 운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옥보고의 ‘강천성곡’과 ‘에텐라쿠’ 모두 거문고 곡임을 잊지 말자. 핵심은 안익태가 염두에 둔 ‘강천성악’은 ‘야상곡과 에텐라쿠’로서 ‘에텐라쿠’를 포괄하는 ‘에텐라쿠’의 상위개념이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