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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패망/ 일제 敗戰 후 한국에 살던 일본인 철수기 - 참회를 모르는 인종들

상림은내고향 2021. 4. 6. 20:43

■일제의 패망

2015-08-19 일제 敗戰 후 한국에 살던 일본인 철수기

▲1945 8월 말,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단출한 짐을 들고 귀국길에 올랐다.
출처=《광복 1775일》.

  

1945년 광복(光復) 당시 한국의 사정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있다. 사진도 있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한국에 살던 일본인은 패전(敗戰)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귀국길은 순탄했을까? 궁금한 일이다. 우리로서는 35년간 식민통치를 한 가해자(加害者)로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8·15를 맞았는지, 패전 후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알 필요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끊임없이 과거사 문제를 일으키는 일본인들의 심리 저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총독부 재무국장(현 장관에 해당-편집자 주)을 지낸 미즈타 나오마사(水田直昌·1897~1985), 총독부 식산(殖産)국장과 경성전기() 사장을 지낸 호쓰미 신로쿠로(穗積眞六郞·1889~1970)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글과 전남 진도금융조합 이사였던 시모카와 사도시(下川 智)의 수기이다.


 
총독부 재무국장의 회고

총독부 재무국장을 지낸 미즈타 나오마사는 자서전에 그가 미군에게 요청한 일, 서울의 혼란, 귀국의 행적 등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다.
 
 
미즈타는 아이치(愛知)현 출신으로 1921년 도쿄(東京)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해 후쿠오카와 오사카 남세무서장 등을 지낸 후 한국으로 건너와서 총독부 재무국(지금의 기획재정부에 해당)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대 법대), 경성고등상업학교(현 서울대 상대)에서 재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1928년에는 사계(司計)과장 서리(署理)가 되었는데, 당시의 총독부 과장은 지금으로 하면 차관보~국장급에 해당한다. 이때 총독부에서는 당시 31세이던 그에게 “너는 젊으니까 우선 서리로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1937년 재무국장이 되었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하야시 한조 후임으로 국장을 맡으라고 할 때 그는 “사세(司稅)과장 때 수집한 자료로 조선의 금융재정을 쓰고 싶으니 이참에 사직하고 싶다”고 간청했으나, 미나미가 “네 마음대로는 안 된다”며 거부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후일 수집한 수많은 재정관계 사료를 두고 귀국한 것을 누누이 후회하였다. 이로 보아 그는 관리보다도 학문연구, 재정학 집필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재무국장의 바쁜 업무 중에도 《이조시대의 재정》 《통감부 시대의 재정》 《총독부 시대의 재정》이라는 세 권의 책을 썼다. 광복 70년이 되어도 이 저서만 한 연구가 없다고 한다.
 
 
미즈타는 사무관·사계과장 13, 재무국장 8, 합계 21년을 재무국에서만 근무하였다. 그동안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비롯하여 8명의 총독을 보좌하였다. 역대 총독들은 재무관계만은 전적으로 그의 의견대로 집행하고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총독은 재무 이외 사항도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부임하는 총독마다 그를 애지중지했다.


 
귀국 후 한국 내 일본재산 찾기 운동 벌이기도

1945 8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을 들으며 눈물짓는 일본인들.

 

총독부 사세과장이나 재무국장은 조선의 예산을 세우고 결산을 했다. 각국(各局)에서 요청한 예산을 편성하여 일본 대장성에 가서 세밀한 분석, 사정을 받은 후 의회에 나가 설명을 하였다. 그래서 조선에 반년, 일본에서 반년 근무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미즈타는 재무국장 때 조선지적(地籍)협회를 창립(1938)하여 회장과 지적기술강습회 소장을 겸무(兼務)하였고 재무협회를 만들어 회장도 겸무하였다.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감리관도 겸임했다.
 
 
미즈타는 패전 후 미군정(美軍政) 조언자로 있다가, 1945 11 24일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는 철수 일본인 지원 활동을 했다. 가쿠슈인(學習院)대학 상무이사로 일했고, 일본대학 법과부 여자단기대학, 도카이대학에서 재정학을 강의하였다. 일본이 조선에 남겨두고 간 재산 되찾기 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했으며, 우방협회 이사장에 취임하면서는 “일본이 조선 통치를 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 보존, 조사하여 그 치적을 후세에 바르게 전승하는 일”에 전념했다.
 
 
미즈타는 재직 때 맥주, 수건 정도는 받고, 그 이상 되는 물품은 받을 수 없는 사연을 자세히 적은 편지와 함께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패전 후 이승만(李承晩) 정부 때는 “감옥행이 될까 겁나 한국에 못 간다”고 하였으나 그 후 두 번 와서 재정에 관한 자료를 구하여 갔다. 이때 일본 국적기(JAL)가 아닌 한국 국적기인 KAL을 이용했다. 그의 사위 말을 빌리면 생전에 한국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일본의 《조선신사록》(1931), 《조선공로자명감》(1935), 《일본근현대인물이력사전》(2006)에 그의 이력이 간단히 실려 있다. 한국에는 필자가 광복 43년 만에 《어느 측량사의 수기》(1988), 《한국지적백년사 - 인물, 용어편》(2005), 《식민지조선의 일본인 인명사전》(2011)에 자세히 소개한 일이 있다. 미즈타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8 14일 終戰 알아

  나는 재무국장이란 자리에 있었다. 총독부의 간부이다. 총독 밑에 정무총감(政務摠監·지금의 국무총리 격-편집자 주)이 있고 그 밑에 국장이 9명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인 내가 무조건 항복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대사건을 안 것은 8 14일이었다. 정말 조선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혹은 알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몰랐다.
 
  8
12일 재무국 직원들은 경성(京城·서울-편집자 주)이 언제 폭격을 받을지 몰라 가족을 피신시키기로 했다. 경성에서 200리쯤 떨어진 청주라는 곳, 원산이라든지, 소금을 만드는 염전에 집이 있으니까 각자 생각나는 곳으로 피란을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태평양전쟁에 일로매진하고 있었다.
 
  15
일 정오에 총독부에서 라디오로 (천황의) 종전(終戰)의 말씀을 듣고 망연자실하였다. “전 국민은 참기 어려워도 참아 경거망동을 하는 일이 없도록 엄히 삼가라”는 말씀이 강하게 머리에 스며든 기억이 있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은 “우리는 천황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조칙(詔勅)의 취지에 부응하여 우리는 종전 후의 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주군이 오기까지 조선총독부는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모두 침착하게 총독부로서의 임무를 수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8 15일에는 이미 소련군이 함흥 근처, 경성에서 기차로 하루 반이나 이틀 정도 걸리는 곳에 와 있었다.
 
  8
9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해 가장 먼저 영정(影幀·천황의 사진-편집자 주)과 교육칙어(敎育勅語) 8 15일 후 속속 경성으로 보내져 왔다. 그때는 경성에 소련군이 오는가, 미군이 오는가 몰랐다. 38도선 이남은 미국, 이북은 소련이 온다는 것을 안 것은 21일경이다.


 
影幀을 불태우고…

  8 15일 종전의 말씀을 듣고 총독과 총감의 지시대로 각 부서에서 뒤처리에 들어갔다. 15일 저물 무렵 총독부에서 보관하고 받들었던 영정, 교육칙어, 조서, 38도선 이북에서 운반하여 온 것을 일괄하여 후에 능욕당하지 않도록 모두 소각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제일 고참 국장이어서 경무국장(경찰청장-편집자 주)의 호위를 받으며 총독의 대리로 총독부 뒤뜰 깨끗한 곳에서 소각하였다. 그때의 기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비통감…. 옛 경복궁 상공을 저 멀리 꼬리를 끌고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 그 연기의 행방을 올려다보았다. 경성의 조선신궁(神宮)의 영대(靈代) 16일에 비행기로 일본에 무사히 옮겼으나 평양신사(神社)는 불에 타는 능욕을 당하였다.
 
 
경성에는 서대문 형무소와 경성 형무소 둘이 있었다. 그곳에는 독립사상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둘 다 겸한 자들이 수용되어 이천수백 명 되는 자들이 15일 야밤에 일제히 폭동을 일으켜 모두 형무소에서 뛰쳐나왔다. 그에 따라 강도범, 살인범들도 나왔다. 그래서 16일에는 그들이 중심이 되어 총기, 탄약을 갖고 경성 안은 물론 부근에 경찰서도 일거에 전부 점거하여 치안을 장악하였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1945년 초부터 일본인으로 적어도 총포를 다룰 수 있는 자는 거의 군()에 징집되었다. 그래서 소수(少數)의 일본인만 있었고 나머지는 거의 조선인 경찰관이었다. 그때는 조선군 사령관이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실력 행사를 하여 경찰을 일거에 괴멸 탄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진주군(進駐軍-미군)이 왔을 때 일본인이 어떠한 보복을 받을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대책으로서는 군에 부탁하여 전차(戰車) 등을 시내에 행진시켜 일종의 데모를 하는 정도로 총포를 쏘아 진압하는 것인데…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16
일 이후 시내의 인심은 불안하고 소란하였다. 나는 16일 총독부에서 10여 정() 떨어진 본정(本町-충무로)에 자동차를 타고 갔는데 “저것은 총독부 차다”라고 말하며 군중이 몰려왔다. 위험을 느낀 나는 뛰어내려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갔다. 운전수는 박군이라는 충실한 조선인이었는데 용케 빠져나왔다. 그런 정도로 일본인을 살상하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조선인 원한의 가장 큰 원인은 사상압박

▲1945 8 15일자 《아사히신문》. ‘항복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인의 원한은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있다. 원인은 공산주의자, 독립사상자를 압박한 것이다. 특히 도쿄에 와 있던 조선 학생들을 경시청에서 가택 수색을 하였고 중국 청년에게도 그랬다. 그들은 당시 일본 경찰에 대하여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방침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조선어를 쓰면 안 된다’ ‘국어(일어)를 써라’ ‘메이지(明治)신궁, 이세(伊勢)신궁에 요배(遙拜)를 하라’ ‘흰옷을 입지 마라’ 등 이것들은 선의(善意)지만, 그들로서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는 것은 이씨나 최씨를 다나카(田中), 미즈타(水田)로 바꾸라는 것인데, 이는 그들에게 상당한 압박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민중 특히 지식계급에 쌓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식량 공출(供出)은 근인이다. 전쟁이 점점 불리하게 되었고 1940년부터 쌀이 부족하게 되었다. 1937년 지나사변(支那事變·중일전쟁)이 시작될 무렵 식량만은 넉넉하다고 의회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적을 때는 1000만 석, 많을 때는 1500만 석이 조선과 대만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4년 조선에 큰 가뭄이 있어 평년작 2400만 석이 1000만 석 전후로 감수(減收)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거의 생각만치 쌀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전쟁에 돌입하자 도쿄의 중앙정부는 아무래도 조선에서 식량을 보내지 않으면 전쟁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년 흉작(凶作)이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몇백만 석의 쌀을 보내라고 계속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총독부의 간부는 이것은 조선인에게 나무 열매나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목숨을 이어가는 비상사태가 계속되는 큰 문제라며 거절하였다. 식량이 부족하면 전쟁에 진다. 총독부는 마지못해 어느 정도 힘써서 식량 공출을 독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물질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큰 부담이고 한()이었다.


 
쇠 供出, 사람 供出

  쇠 냄비나 놋그릇도 공출했다. 조선은 예부터 식기는 모두 놋그릇을 사용했는데 놋그릇은 군수품(軍需品)이 되었다. 형식은 자발적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는 강제로 공출한 것이다. 먹는 쌀을 앗아가고 식기도 앗아갔다. 이에 대체할 사기 그릇이 연료 부족으로 일본에서 약속한 때까지 안 되었다. 조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됐다. 이를 상상해 보라, 한스럽지 않겠는가.
 
 
징병(徵兵)제도는 끝판에 시행되었다. 대개 지원병(志願兵)제도로 이는 크게 원한받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노무(勞務)가 매우 부족하였다. 노동력이 있는 남자는 모두 군대에 징집되었으니까 그 노무의 부족을 조선인으로 보충하는 것이 중앙정부의 정책이었다. 금년에는 몇만 명을 보내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오면 군 기밀상 이유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통신을 할 수 없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남양(南洋)에서 비행기 기지라든지 군항(軍港)을 조성하는 데 조선인을 일부 징용했는데, 가는 도중 잠수함에 당하여 죽은 자도 꽤 있다. 그 외 대부분은 석탄을 캐는 데 사역(使役)하였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전쟁 중에 석탄이 많이 필요했는데 그 노무자의 6할은 조선인이었다.
 
 
군항을 구축한다든지 석탄을 캐는 것이 예정대로 안 되었다. 그러면 필히 전쟁에 진다. 전쟁에 지면 안 된다는 지상명령에 총독부는 마지못해 트럭을 몰고 가서 정해진 인원만큼 마을에서 데려온다.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인명과 식량 공출을 했다. 민족 1억 옥쇄(玉碎)라고 하지만 조선 민족이 전쟁을 저주하는 기분은 상당히 치열하였다.
 
 
우리만 안 것이지만 개전(開戰) 당초 이승만이라는 독립주의자가 워싱턴에서 한국 독립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편집자 주)를 세우고 미국에서 초단파(超短波)로 조선에 정보를 보내 일본의 패전에 조력(助力)을 했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지는 것을 일찌감치 믿고 있었다. 표면은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었으나 무슨 기회가 있으면 불타올랐다. 그럴 때는 할 수 없으니까 실력으로 탄압했다. 군대와 경찰의 힘으로 탄압하는 이외는 길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軍政 당국에 4가지 요청

1945 9 9일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가운데)은 한국에 진주한 미군에 항복했다

 

9 7일 미군이 진주하며 군정(軍政)을 선포했다. 진주군 사령관은 9 12일 총독과 총감을 파면하고 14일에는 각 국장을 면직(免職)하였다. 다만 “조언자(Advisor)로서 남아 있고 경성을 떠나서는 안 된다. 총독부에 나와라”라고 했다. 연금(軟禁) 상태로서 물론 도망갈 수는 없었다.
 
 
나의 후임 재무국장은 찰스 고든(Gordon) 육군 중령으로 9 15일 서대문 관사(官舍)를 그에게 넘겨주고 나는 조선 경찰 당국에 구인(拘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회현동 어느 집 2층 한 칸을 빌려 늑막염을 앓고 있는 장녀 마쓰기 마사코와 같이 들어갔다.


 
나는 군정 재무 당국에 4가지를 제의하였다.

  ① 조선인은 지폐에 대하여 이해력이 부족하니 일본은행권의 유통을 중지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조선은행권의 유통은 중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군표(軍票) 발행도 좋지 않다.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군표 발행을 여간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 사정은 잘 모르지만 여기서는 절대로 안 된다. 조선에는 미발행 은행권이 축적되어 있다. 그러니까 군표를 발행하지 않아도 지장이 없다”고 강하게 요망했다.
 
 
② 나는 지불정지(Moratorium)는 하지 않는다고 조선인에게 약속했으니까 지불정지를 안 했으면 한다.
 
 
③ 기존의 은행 문을 닫지 말라. 모든 금융기관은 종전과 같이 명칭도 변경하지 말고 지점도 당분간 현상 유지해야 한다. 다만 수뇌부의 경질은 부득이하다. 그러나 조선인을 갑자기 수뇌부로 하면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생길 수 있다. 조선인은 수뇌부가 될 훈련이 아직 충분치 않다. 제군(諸君)이 잘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
 
 
④ 일본인이 조선에 있는 물건을 갖고 갈 수 있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하여 달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보호해 줬으면 한다.
 
 
앞의 3조항은 들어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④조항은 승낙하지 않았다. 9 15, 16일이라고 기억하는데 내게 아무런 언질 없이 1945 8 9일 이후 일본인 관계 모든 처리, 매매, 수출입 관계는 모두 무효(無效)라고 포고했다.


 
금덩어리 처리

  조선은행에 금덩어리가 2개 있었다. 한 개는 당시 400만 엔, 들려고 해도 들을 수 없을 만한 무게였다. 이것을 미군이 오기 전에 일본은행에 보낼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결국 조선은행 호시노(星野) 부총재와 둘이서 결정한 것은 “지금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은행에 보내도 맥아더에게 압수될 것이다. 일본이 자유로 쓸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미군이 왔을 때 일본에 보내 횡령의 의사로 비치면 바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있는 것 모두 깨끗이 목록을 만들어 넘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였다.
 
 
재무국장 이하 전매국 간부들이 아편 밀매 혐의를 받아 밤중 서대문 관사를 급습한 경찰에 15~16명 모두 유치장에 연행되었다. 나는 일찌감치 몸을 숨겨 연행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구출에 땀을 흘리며 한나절 가까이 고생하였다. 미군 주둔 후 나는 재계 교란죄, 관금(官金) 횡령, 아편 밀매, 미군정탐 등의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고든 중령의 “아무것도 없다”는 조치로 11월 귀국하게 된 것이다.
 
 
나의 가족은 아내와 자녀 7(5세부터 21세까지), 가정부까지 9명이었다. 재무국 소재지로 할당된 청주 교외 가주거에 다른 가족과 함께 가 있었다. 신경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공무가 다망(多忙)하여 무엇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어 방치하여 두었다. 그런데 모 과장이 그 가족과 함께 귀국한 것을 그 후에 들었다. 늑막염으로 누워 있던 장녀 하나만 남기고 8월 하순 철수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일본이 식량 부족으로 큰일이라는 소문이 있어 쌀과 된장, 소금, 우메보시(매실로 만든 반찬) 등 먹을 것으로 배낭을 가득 채웠다. 부산에 아는 사람 호의로 며칠 머물다가 겨우 60톤급 일본 배로 3가족이 현해탄을 26시간이 걸려 무사히 횡단, 야마구치(山口)현 북쪽 해안에 상륙하였다. 이 또한 후에 들었다.
 
 
경성을 떠날 때 가족은 옷가지 등 화물 몇 개를 꾸려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의 호의로 일본에 탁송(託送)을 맡겼으나 도중 모두 약탈되어 한 개도 도착하지 못했다.


 
세 번의 눈물

  귀국하기 전 눈물이 복받쳐 흐르는 일이 세 번 있었다.
 
 
첫째, 전술(前述)한 것과 같이 8월 하순 총독 대리로 니시히로 경무국장 입회하에 폐하의 영정을 총독부 뒤뜰에서 불태웠을 때.
 
 
둘째, 9 8일 총독부 현관의 일장기(日章旗)를 내리고 미국의 성조기(星條旗)가 드높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볼 때.
 
 
셋째, 10월 중순 이승만이 미국에서 돌아와 총독부 청사에 들어올 때 정문 앞에서 도열 환영했을 때.


 
지금도 어제 일같이 생생하다.

  경성에서는 실로 언짢은 기분으로 매일을 보냈다. 일이 끝나면 하루라도 빨리 일본에 가고 싶다는 것이 거짓 없는 심정이었다. 오쿠무라는 서너 번 도둑을 맞아 11월에 여름 양복을 입고 있었다. 도둑맞은 양복이 다음날 아침 헌 옷 가게에 걸려 있었다. 순사에게 가서 “저것이 도난당한 것이다”라고 하면 “돈을 갖고 가서 사면 좋겠소” 하였다.
 
 
나는 구실을 붙여 재무국장 고든 중령에게 “대장성과의 여러 가지 교섭이나 재산문제의 교섭이 어렵다. 나는 책임자로서 일단 일본에 가서 대장대신과 문제를 절충할 필요가 있으니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고든 중령은 “GHQ가 있으니까 당신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다시 미 군정 당국자에게 “실은 도쿄의 집은 4 13일 공습당하여 살 집이 없다. 아내는 몸이 약하고, 아이들은 배가 아프다. 가족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걱정이다”라고 했다. 미 군정은 “그건 안 됐다. 그렇다면 곧 가라”고 했다. 미국인과 일본인의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2개월 휴가를 얻어 11 24일 귀국길에 올랐다. 이 무렵에는 미군도 일본인의 통치가 그들이 미국에서 들은 것 같이 압박 착취를 한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예컨대 토지 총면적의 8할은 일본인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7~8% 정도였다. 도처에서 일본인이 당하는 현실을 보고, 미군은 오히려 일본인들을 보호하여 철수하도록 태도가 변하였다.


 
조선에서 갖고 온 통장, 지불 못 하겠다니…

  나는 사람들에게 “일본인은 예금을 인출하고 귀국할 수 있다. 현찰 준비는 충분하다. 그러나 앞을 다투어 모두 인출하면 조선인의 불안감에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면 철수에 장애가 될 수 있다. 또한 큰돈을 갖고 있으면 강도를 당할 염려가 있다. 현재 부산행 귀국 열차가 도중 야밤에 수십 명의 무장 강도가 정차(停車)시켜 승객의 돈을 모두 강탈하는 예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지참금은 당장 쓸 정도로 하고 나머지는 통장에 넣어 갖고 가는 편이 안전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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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경 맥아더는 “외지(外地)에 가 있던 일본인은 외지 침략의 선봉에 섰다. 그쪽에서 일본에 통장을 갖고 와도 일본의 지폐로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인플레의 우려가 있으니 곧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조건 항복의 ‘달콤한 맛’이 이런 것이다. 대장성에서도 어찌할 수 없다. 일반 민중은 “그런 것은 우리는 모른다. 재무국장이 대장대신과 약속했다고 하니까 통장만 갖고 온 것이다. 그런 걸 알았으면 우리는 모두 현금으로 갖고 왔다. 모두 미즈타라는 사나이가 현찰을 갖고 귀국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원망했다.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지만 ‘나 한 사람이 죽어 많은 원한이 사라진다면…’이라고 자책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46 1월 이후 조선에서 철수한 사람의 우편저금만은 지불한다는 GHQ의 명령이 완화되어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기관사들, 열차 강도와 共謀

  귀국 열차에는 헌병 3인이 감시원으로 동승하였다. 조선인 기관사는 처음에는 강도에게 묶여 있다가 약탈이 끝나면 강도가 풀어주어 기차가 움직였으니 피해자였다. 그러다가 점점 교활하게 되어 일당과 공모하여 그들이 숨어 있는 인적과 떨어진 산간에 열차를 세우고 약탈이 끝났다는 신호를 기다려 출발 후에 일당으로부터 한몫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귀국 열차에 타자 곧 헌병에게 신분증명서를 보였다. 거기에는 나의 전력(前歷)과 미군정에 협력한 자라는 것, 이 말을 믿고 보호를 하라는 것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 약간의 팁을 주고 부탁했다. “도중 역이 아닌 곳에 기차가 급히 정차하면 곧 기관사에게 달려가기 바란다. 틀림없이 기관사는 묶여 있을 것이니 풀어주고 권총을 들이대고 곧 발차(發車)를 명하시오. 강도의 약탈을 막기 위해서요”라고 말했다. 헌병은 곧 OK하였다. 도중에 두 번 급정차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덕분에 일동이 다 난을 피했다.
 
 
부산에 도착하여 세관 창고 안의 짚 위에서 하룻밤을 잤다. 귀국 후 온 가족이 고향에서 살았다. 나는 12월 도쿄에 나가 친구 집에서 동거하면서 조선총독부 잔무(殘務)정리사무소에 출근하여 철수 사업에 종사하였다. 피로 때문인지 1946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간 고향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다. 일어나자 다시 상경(上京)했다. 마침 철수문제에 관심을 갖고 양원(兩院) 의원 20명으로 동포구원의원연맹이 결성될 기운이 있었다. 정부에 근무할 때에 낯익은 것을 이용하여 연맹 결성에 참여, 그 사무국장이 되었다. 비서 역이었던 후지하라에게 권유해 조선을 비롯한 외지 전반의 철수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는 데 미력(微力)을 바쳤다.


 
前 총독부 식산국장의 회고

총독부 식산국장을 지낸 호쓰미 신로쿠로의 《내 생애를 조선에》.

 

다음은 호쓰미 신로쿠로의 기록이다. 그는 총독부 때 식산국장을 지냈다. 일본 명문가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미즈타 나오마사의 선배이다. 미나미 총독 및 군부(軍部)와의 불화로 1941년 사임했다. 이후 경성전기() 사장을 지냈다. 패전을 맞아 경성도움회 회장을 하면서 일본인 철수에 진력하였고, 1946 4월 귀국하였다. 그 후 우방협회 이사장으로 일제 때 자료를 수집, 연구하였고, 나중에 이를 미즈타에게 인계하였다. 그는 자서전 《내 생애를 조선에》를 남겼는데 여기에 극히 일부분을 인용하는 것이다.


 
탈출자에 10, 20원씩 빌려줘

  특히 부산은 귀환의 입구라고 할 요소(要所)였으니 매우 바빴던 것 같다. 귀환 도움회 중에 가장 활동이 원활했던 곳은 인천이었다. 회장인 고타니(小谷)의 인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민이 시종 단결하여 미군과 연락도 잘되고 철수할 때도 단체로 ‘이별의 노래’를 합창하며 정든 인천을 떠나갔다. 경성에서는 11 6(1945), 8 9일 이후에 받았다는 이유로 도움회의 자금을 모두 미군에게 몰수당하여 고난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후루이치는 젊은이를 인천에 보내 인천 도움회의 잔금을 모두 받아왔다. 두 젊은이는 될 수 있는 한도의 지폐를 몸에 둘러 갖고 왔는데 기차 안에서 움직이면 바삭바삭 겨드랑이 밑에서 소리가 나서 신경이 곤두서 숙사에 돌아왔을 때는 손을 맞잡고 울었다. 1000만원 이상 몰수되기도 하고 해가 지나 1946년이 되자 북한으로부터의 탈출자가 증가하여 돈이 없어 어려웠다.
 
 
후루이치의 제안으로 밤에 무전(無電)을 도용(盜用)하여 일본 정부에 “이곳에서 돈을 빌렸으니 갚아달라”고 요청을 했다. 무전은 낮에는 미군이 감시하지만 한밤중에는 일본 기술자뿐이니까 잘 되었다. 대답은 “도움회장의 차용증(借用證)만 있으면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차금(借金)을 시작하였다. 경성에는 일본인도 적어졌고 마지못해 탈출자에게 10, 20원을 빌려주었다. 그것이 1억원이 되었다.


 
김계조 사건

  이 무렵부터 도움회 일 외에 시끄러운 사건에 얽히기 시작했다. 전쟁 중 내가 500만원을 모아 조선 젊은이의 지도에 쓰라고 정무총감에게 준 돈이 경무국장에게 갔다. 종전이 된 후 도움회는 그중에서 100만원을 받았다. 어느 날 경무국장을 만나니 “김계조(창씨명 中村一夫)라는 사람이 미군이 진주해 오면 시내 부녀자들이 잘못되면 안 되니까 미쓰코시(三越)의 지하실에 카바레를 열어 미군을 그곳에 흡수하여 난폭을 방지하는 안()을 내놓아 경무국에서도 지원하고 싶은데 돈이 부족하니 100만원 중 60만원을 나카무라에게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해도 미군은 곧 중지할 것이니 소용없다”고 항의했다. 하지만 워낙 경무국장이 강력히 부탁하고, 원래 경무국에서 받은 돈이어서 그중 60만원을 나카무라에게 건넸다. 이 카바레는 미군이 오자 곧 폐쇄되었다.
 
 
어느 날인가 조선인 한 사람이 “김계조가 카바레를 통하여 미군을 농락하고 해방 후의 임시정부를 파괴하는 음모를 하였다. 그 계획의 근원은 경무국장인 니시히로(西廣), 도움회장 호쓰미다”라는 선전문을 도움회에 갖고 와서 “10만원에 이것을 사라”고 했다. 총무부장인 스기야마(杉山), 다카시마(高島)가 그 문장을 보았다. 원래 근성이 있던 나는 이런 협박을 받으면 참을 수가 없었다. “돈을 내지 않으면 거리에 붙인다”하기에 “마음대로 해라”하고 만나지도 않고 쫓아버렸다. 만일 돈을 주면 약점이 있으니까 협박에 졌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런 선전문이 거리에 붙지는 않았지만 진주군이 소송을 걸어왔다. 하루건너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담당자는 중국인 2 CIC(방첩대) 중위였는데 여러 가지 심문을 해도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 3개월쯤 해서 그만두었다. 바쁜 도움회 일에 방해가 되었다. 그동안에도 일본인이 억류되면 석방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군정청에서는 무슨 사유를 붙여 불러내어 전혀 틈이 없었다.
 
  1945
11월에 재판권이 미군으로부터 조선의 임시정부로 이관되었다(호쓰미는 ‘조선의 임시정부’라고 표현하였으나,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판권을 이양한 적이 없으며,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된 것은 1947 6월이었다. 호쓰미가 말하는 ‘조선의 임시정부’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다.-편집자 주). 그와 동시에 ‘김계조 사건’을 다시 취조(取調)하게 되어 나는 몇 번인가 재판소에 불려갔다. 검사는 총독부 때부터 아는 자로 처음부터 이 재판은 바보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습으로 취조에 열의가 없었다.
 

1945 10월 부산에서 철수하는 일본인들. 미군이 일본인들의 짐을 검색하고 있다.
 

10일간 수감 생활

  나는 김계조에게 돈을 건넨 사정을 대강 말했다.
 
 
“조선인이 협박하러 왔을 때 만나지 않았다. 다만 협박에 굴하는 것은 싫으니까 협박장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런데 고소인은 내가 ‘새파랗게 질렸다’고 하는데 내가 당사자를 만났는지 아닌지는 스기야마나 동석한 다카시마 군을 소환하여 물으면 알 일이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니 검사가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조선인이 지금 일본인을 미워하는 기분은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면, 장차 두 나라를 위하여 유익한가 어떤가를 숙고해 보면 어떤가. 그리고 당신은 지금까지 조선에서의 자신의 과거도 잘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검사는 난처해 하면서 “내가 당신을 취조하는 것인지, 당신에게 취조를 받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군”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3월 상순에 “아무것도 조사할 것이 없으니 이 사건은 이것으로 종료한다”며 방면하였다. 안도하여 느긋한 기분이 되었는데 이번 일로 은밀히 걱정한 후루이치 군이 “이 어른을 억지로 일본에 귀국시키지 않으면 어떠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겠다”며 나의 귀환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2주 정도 무사히 지났는가 싶었는데, 3 18일 재판소로부터 “좀 나와라”는 통보가 왔다.
 
 
가보니 검사는 미안한 얼굴로 이상한 요구를 했다.
 
 
“당신이 아무 죄가 없는 것은 알지만, 누군가 돋보이는 인물을 감옥에 넣지 않으면 민족감정이 가라앉지 않을 거요. 길지는 않으니까 10일간만 감옥살이를 해주시오. 재판은 되도록 일찍 끝낼 테니까.
 
 
도움회 업무 인계상 필요하니 후루이치를 불러달라 하자 만나게 해주었다. “도움회는 자네가 있으면 충분하니 내가 수감되는 것쯤으로 동요가 없도록 뒤를 부탁한다. 건강에 주의하여 한층 열심히 노력하라”고 격려하고 헤어졌다. 후루이치는 후에 도움회 사람에게 “위로하러 갔다가 위로받고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인들의 위로

  1945년이 저물자 경성에는 남은 일본인이 얼마 없었다. 조선인의 태도도 점점 변했다. 1946년이 되었을 때 내가 길을 걸어가면 도로상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경전(京電경성전기) 인부가 정다운 소리로 “사장님, 아직 계셨군요. 몸조심하십시오”라고 위로하였다. 군정청에서 나를 부르면 경전에서는 도움회로 자동차를 보내주었다. 경전 사원이 차중(車中)에서 “무엇 때문에 부릅니까. 이번에도 어려운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걱정해 주었다. 내 방에 있던 소녀는 내가 회사에서 나온 후 나를 쫓아와 “정말 몸 잘 건사하십시오”라며 울었다. 경전 사장 때 사원 특히 조선인의 대우를 개선한 것이 어지간히 그들의 마음을 울린 것 같다.
 
 
이와 같이 신변의 위험도 점점 적게 되면서 다툼도 줄어 맑은 기분이었다. 한편으로 북쪽 탈출자는 점점 늘었다. 추운 날 한밤중에 탈출 도중 갓난아이가 죽어 묻으려 해도 땅이 얼어 있어 땅을 파지도 못하고 울면서 시신을 소나무 뿌리 근처에 눕혀 놓고 온 어머니, 해로(海路) 탈출 도중 돈을 잃어 가족 전원이 바다에 던져져 사망하고 혼자서 살아남아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던 젊은이, 이 추위에 속옷만 입고 가까스로 도착한 어느 부윤(府尹
시장). 어느 절 뜰에 피곤하여 늘어져 있던 노인은 “난 북선(北鮮북한-편집자 주)에서 손자를 등에 업고 50여 일을 걸어서 왔소. 나쁜 나라에 태어난 것이죠”라며 엉엉 울었다. 위로할 말도 없었다.  


 
지방 금융조합 이사의 조난기

우방협회에서 미즈타 나오마사가 감수 발행한 《조선금융조합 회고록》.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글은 우방협회에서 미즈타 나오마사가 감수 발행한 《조선금융조합 회고록—조선금융조합과 농촌과의 관계》에 시모카와 사도시가 기고한 〈장흥에서 철수한 조난 보고—현해탄의 12시간〉이라는 수기(手記). 그는 미즈타 같은 총독부 고관이 아니라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지방 금융조합 이사였다. 미즈타 나오마사나 호쓰미 신로쿠로 등은 일본 배로 무사히 귀국하였으나, 시모카와는 밀항선을 타고 가다가 난파, 800여 명 중 260명이 바다에 빠져 죽는 참사를 겪었다.
 
 
시모카와의 기고문을 보면, 그의 직함은 전라남도 진도금융조합 이사라고 했는데, 제목을 보면 장흥에서 철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 이상 그의 이력을 알 수 없다.

 
 
형과 어머니, 바다에 빠져

  장흥 철수자는 약 800명에서 900명이었는데 이들은 5척의 야미배(밀항선)로 나누어 타고 출발했다. 그중 3척은 무사히 귀국하였으나, 우리가 타고 있던 1척은 난파하는 바람에 생존자가 겨우 19명에 불과했다. 다른 한 척은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이와 같이 장흥 출신자의 약 3분의 1이 죽는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트럭 화물 위에 타고 장흥을 출발, 수문포 근방 작은 항구에서 야미배로 출발했다. 우리 178명을 태운 야미배는 1945 11 1일 밤중에 대마도에 도착했다. 곧 출발할 것인가, 혹은 하룻밤을 새우고 다음날 아침 출발할 것인가 배 안에서 의논이 있었다. 그 결과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 곧 출발하기로 했다. 해뢰(海雷·기뢰)가 여기저기 떠 있는 현해탄을 밤중에 통과한다는 것은 위험하기보다는 무모한 일이었다.
 
  12
2일 오전 2시경 돌연 선미(船尾)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걱정했던 해뢰에 접촉이 된 것이다. 선미 근방에 있던 자는 즉사(卽死)했다. 해뢰에 맞은 경우 철선(鐵船)이라면 곧 가라앉는다. 목선(木船)이기 때문에 침몰하지 않았는데 배 안에 순식간에 바닷물이 들어왔다. 젊은이들이 교대로 펌프로 물을 퍼냈는데 그때 나는 갑판 위에서 당번을 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좁은 승강구를 통해 차차 사람들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승강구는 앞과 뒤에 하나씩 있었는데 뒤쪽은 해뢰에 맞아 사용할 수 없고 앞쪽만 성했다. 많은 사람이 밤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승강 계단을 올라오는 것은 큰일이었다. 그중에 나의 어머니와 형의 모습이 보여 소리를 질렀으나 혼잡하여 잃어버렸다. 몇 시간 후에 아마 어머니는 바다에 떨어졌고 이를 구하려고 효자인 형이 함께 뛰어들었다고 생각한다. 갑판에 올라오지 못한 약 3분의 1(60) 정도는 배 안에서 익사한 것 같다. 겨우 갑판에 올라온 이들도 밤중의 격랑에 차차 휩쓸려간 것 같다.
 
 
새벽이 올 무렵 그곳은 사나운 파도의 한가운데 문자 그대로 난파선의 모습이었다. 수면상에 겨우 남은 곳에는 몇 시간 전까지 조국에 돌아간다는 기쁨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 세상에 생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미쳐서 양팔에 아이를 안고 서서 계속 웃어대는 남자는 우편국 우쓰 기(宇津木) , 발이 재목인가 무엇인가에 끼여 머리만 해면상에 내놓고 신음하면서 바닷물을 계속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미나카와(皆川) 씨의 아버지,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로프를 잡고 있는 사람은 나카가와 판사와 그의 부인, 이것을 보면서 곁으로 가지 못하고 큰소리로 격려를 계속하는 이는 당시 19세의 그들의 아들….


 
누이동생도 물속으로…

한국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있다. 출처=《광복 1775일》.

 

나의 여동생 도키코(時子) 등 몇 명이 가까이 모여 있었다. 난파선은 정기 항로로부터 멀리 떨어졌는지 배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날이 새어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강하게 앗아가는 큰 파도, 힘이 빠져 배에서 떨어지는 사람들….
 
 
그런 와중에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는 상당한 거리였으나 수영을 해서 갈 만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혹은 반미치광이가 되었는지 젊은이 몇이 그 섬을 목표로 헤엄쳐 나갔다. 그러나 모두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이렇게 되면 영구히 구출의 길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누군가 결심하고 닻을 내렸다. 바닥이 없는 깊은 바다에 닻을 내렸으니 배는 전복(顚覆)되기 시작했다. 배의 갑판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배의 둥근 바닥이 해면에 나타났다. 그 바람에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50~60명의 사람은 한순간에 바다에 던져졌다. 1시경의 일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다가 나는 또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 둥근 배 바닥에서 올라가려다 미끄러지는 자, 손을 휘저어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바다 가운데서 한 사람이 겨우 배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 발을 다른 사람이 잡았다. 다시 그 발을 잡은 사람의 줄이 이어졌다. 그중에 나의 여동생 사치코(幸子)가 있었다. 여동생의 발은 이마이(今井) 씨의 아버지가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차차 몇 명인가 죽어가고 있었다. 겨우 이십몇 명이 배 바닥 위로 올라왔다. 그중에 나의 누이동생 도키코가 있었다. 당시 20세였던 그녀는 “다 죽어버렸네요”라고 했다. 너덜너덜한 옷, 허벅지를 감추려는 몸놀림이 애처롭게 보였다. 도키코가 “앗”하는 사이 파도가 그녀를 휩쓸었다. 의자에 걸터앉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곳을 보는 그대로 대단한 기세로 멀어졌다. 손을 올릴 수도, 한마디 할 새도 없이 얼마 안 있어 그녀는 가라앉았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도다(戶田) 씨도 무릎 위에 아이를 꼭 안은 채 파도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떨어져 나갔다. 무로() 씨도 멀리 떠내려갔다. 고바야시(小林和歌子) 이야기는 태양여관의 대장(주인)이었던 아저씨가 배에서 손을 놓치고 갈 때 “와가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라고 외친 후 경전을 외우며 가라앉았다 한다.
 
 
많은 화물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지 한 척의 조선 배가 가까이 온 것은 약 1시간 후의 일이다. 구조선이 배 바닥에 닿았을 때 순간에 나는 뛰어 그 배로 건너갔다. 구조선에선 사람들과 접촉이 어려워 한 사람씩 로프로 구조하여 올렸다. 이때 구조된 자는 178명 중 겨우 20명뿐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명 오사카 군은 구조되어 안심했는지, 긴장했던 힘이 빠졌는지, 머리가 부딪혔는지, 우리가 꽤 격려했지만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기 전에 배 안에서 죽었다.
 
 
구조 완료 때 본 나의 시계는 오후 2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2시간의 사투였다. 그 구조선이 적어도 1시간 일찍 도착했으면 60명 정도의 목숨은 구했을 것이다. 아쉬운 일이다.
 
 
일가 전멸의 가족도 많다. 나도 매우 소중한 사랑하는 육친 8명을 잃고 나 하나만 살아남았다

| 이진호 지적박물관장

 

2016.08.11 일본 야마모토 이소로쿠 탑승 G4M 폭격기를 요격시킨 P-38 라이트닝 전투기

U.S P-38 Lightning Strikes Japan Navy Yamamoto Isoroku G4M Bomber

 

 

 

 

 

 태평양전쟁 당시 파푸아 뉴기니 부겐빌 섬 상공에서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한 1 G4M 11형 폭격기를 요격하는 미 공군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상상화 - 1943 4 18

 

 

▲뉴기니 제도 부겐빌섬의 정글속에 추락하여 폭발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했던

일본 해군 1 G4M 모델 11형 폭격기의 파괴된 기체 뒷부분 잔해 - 1943 4 18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39-yZ_2aao0

1943 4 18일 부겐빌 섬 상공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한 일본 해군의 G4M 폭격기가 미군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요격되는 장면 동영상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 1984-4.4~1943-4.18)의 초상화

  

미드웨이 해전과 산호해 해전 이후 태평양 전쟁의 형세가 일본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자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남태평양 군도 여러곳에 점령한 그들의 기지에서 분전하는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직접 항공기에 탑승하여 현지 시찰을 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수명을 재촉하는 짓으로 끝났다. 1943 4 18일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파푸아 뉴기니의 부겐빌 섬으로 전선 시찰에 나선다. 당시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거의 실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해독하고 있었다. 것은 대전중 영국이 독일의 이니그마 암호를 해독할수 있었던 상황처럼 미국측에게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극비 사항이었다.

 

미군에게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부겐빌섬 일본군 기지 시찰 며칠 전에 그의 비행일정이 입수되었다.

그의 일정이 입수되자 마자 미군은 일본의 거물급 전쟁범죄자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Operation Vengeance(복수 작전)이라고 명명하고 즉시 추진하게 된다.

 

진주만 기습 침략의 주범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내에서의 범국민적인 위상과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만 미국에 있어서는 자국 영토를 기습 폭격하여 수많은 자국 병사들을 대량 학살시키고 천문학적인 재산적 피해를 끼친 범국가적 원흉이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제거시키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향후 암호해독을 통한 정보입수 루트가 차단되는 막대한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그러한 형태로 인해 단순한 군사작전이 아니라 대단히 비중히 큰 형태의 이 작전은 미국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물론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택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일본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도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들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비행경로를 미군 전투기들의 작전반경 밖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신형 쌍발 전투기였던 P-38 라이트닝 전투기가 특수 보조연료탱크에까지 연료를 가득 채우고 작전에 투입될 경우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방문 목적지인 당시 미군의 최전선 비행장이었던 부겐빌 섬 부인(Buin) 비행장 상공이 헨더슨 비행장(과달카날)으로부터 비행 반경내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마지막 이동 경로

 

미군은 즉시 최정예 조종사들(캑터스 항공대)와 보유한 모든 P-38 전투기들 중에서 최상의 기체들을 엄선하여 며칠 간 극도의 보안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일행의 수행단이

1 G4M 폭격기 2 + 호위 전투기 제로센 6대의 편대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리고 미군은, 18기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를 출격시켜 이 중 14대가 호위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사이에 나머지 4대의 P-38 전투기 2대가 한 조를 이루어 일본 G4M 폭격기 1대씩을 최대한 신속히 격추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의 핵심은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체공시간이었다.

 

부겐빌 상공은 미군기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먼 지점이었는데 거기에다 육상()과 해상(초계정)으로부터의 탐색을 기만하기 위해 웨이포인트를 갈 지() 자로 꺾어가며 2시간 넘게 아슬아슬하게 초저공 비행을 해야 했던 탓에 비행장 상공에서 P-38 전투기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5분 남짓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수행단이 조금만 일찍도착하거나 늦게 도착한다면 그대로 작전은 실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철저한 시간관념을 알고 있던 미군은 비행 스케줄에 맞춰 수행단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대로 작전을 강행하였다.그리고 야마모토는 자신의 그 철저한 성격 탓에 목숨을 잃었다.

 

드디어 4 18일 오전 7 20, 헨더슨 비행장에서 18대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가 이륙하였다.

그러나 2대가 이륙 중 기체 이상으로 탈락했다. 오전 9 34, 2시간의 초저공 비행 끝에 부인(Buin) 비행장 인근에서 1만 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한 16대의 P-38 전투기는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이동 중인 수행단 일행을 1분 만에 발견했다.

 

그 즉시 연료탱크를 버리고 급가속하며 달려 들었지만, 이 때 1대의 P-38 전투기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아 그의 윙맨과 함께 이탈하여, 교전한 P-38전투기는 14(호위공격기 상대 10 + 1번 폭격기 공격 2 + 2번 폭격기 공격 2)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적으로도 여전히 우위였을 뿐더러 일본 폭격기의 호위 제로센 조종사들이 접근해 오는 P-38 전투기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상대적 거리가 1마일 이내였을 정도로 철저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9 35분 조용하던 하늘에서 순식간에 교전이 펼쳐졌다.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했던 일본군의 1 G4M (미국명 Betty) 323번 폭격기의 측면도

 

 2대의 일본 G4M 폭격기는 부리나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강하하며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지만, 속력이 느린 저속의 1 G4M 폭격기로서는 1대 당 2기씩 요격하기 위해 따라 붙는 미 공군 신형 P-38고속전투기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다.

 

먼저 323 G4M 폭격기 1대가 토마스 랜피어의 집중사격으로 순식간에 오른쪽 엔진과 날개가 박살나며 정글속으로 추락하였다. 곧이어 나머지 1대의 324 G4M폭격기도 다른 P-38 전투기 2대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 불시착한 직후 가라앉았다.

 

일본군 G4M 폭격기 2대를 모두 격추한 사실을 확인한 모든 미군 P-38 전투기 조종사들은 그 즉시 고속으로 상승하며 퇴각하였다. 바로 코 앞의 부인 비행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실색한 일본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비상출격하였지만, 고속상승이 주특기인 P-38 전투기를 따라 잡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미군기들의 기동은 신속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손실은 (2번째 G4M폭격기에 접근한 2기의 P-38 전투기중) 1기가 격추된 것이 전부였다(조종사도 전사).일본군 측 손실은 1 323번과 324 G4M 폭격기 2대가 전부였다.

 

그 폭격기 2대 속에 탑승해 있었던 사람들이 누구였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조종사들이 귀환한 헨더슨 비행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2대의 G4M 폭격기를 모두 격추시켰으므로 그 중 어느 것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는지 여부는 미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다. 미군은 이 작전의 성공이 '대전투의 승리'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으며,실제로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기 저하를 가져왔음이 종전 후 확인되었다.

 

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진상이 드러났다. 야마모토는 2대의 323번과 324 G4M 폭격기중 먼저 격추되어 정글에 추락하여 폭발한 323 G4M 폭격기에 탑승해 있었다. 일본군은 그 즉시 추락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워낙 빽빽한 정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난 후에야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괴된 323 G4M 폭격기 옆에 튕겨져 나와 군도를 꼭 쥔 채 숨져있던 그의 시신에서 2개의 관통상(가슴, 얼굴)이 발견되었다. 그것으로 보아 추락 되기 전에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미 공군 P-38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이미 사망했던 것이다. 바다에 떨어진 나머지 1대에는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 일행이 탑승하고 있었다. 우가키는 중상을 입었지만 즉각 출동한 보트에 구조가 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암살 작전을 성공시키고 생존 귀환한 미 공군 대원들의 단체 사진 - 1943 4 19

 

Roger Ames, Lawrence Graebner, Capt. Tom Lanphier, Delton Goerke,

Julius Jacobsen, Eldon Stratton, Albert Long,

Everett Anglin. Bill Smith, Doug Canning, Besby Holmes, Rex Barber,

Maj. John Mitchell, Maj. Lou Kittel, Gordon Whittaker

 

 

 

 

 

 

▲2011 12 23일에 개봉된 일본의 국수주의적 전쟁 영화였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태평양 전쟁 70년째의 진실]에서 주인공 야마모토 이소로쿠역을 맡았던 일본의 중견배우 야쿠쇼 코지(役所)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iNNEj5-6aOk

 

 

 

 

 

▲미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추락 이후 뉴기니 제도 부겐빌섬 정글속에 파괴되어 버려진채

지구촌 청정지대의 자연 환경을 지속적으로 훼손시키고 있는 태평양 전쟁 70년이 넘는 진실 -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323 G4M 폭격기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4Q_Io28IO3w

 

photo from : www.defensemedianetwork.com  www.donhollway.com

 

▲태평양전쟁 당시 파푸아 뉴기니 부겐빌 섬 상공에서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한 1 G4M 폭격기를 요격하는 미 공군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상상화 - 1943 4 18.jpg

 

2017.08.10  BEMIL사진자료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발후 일본인 남녀의 시내 걷기

Japanese military Soldier and girl walking down the street destroyed Hiroshima

 

 

 

/원폭후 살아남은 히로시마의 생존자들 - 1945 8 

 

/원자폭탄 폭발후 황폐하게 변해 버린 히로시마 시내를 걷는 일본군- 1945 8 

 

/원자 폭탄 폭발 한달후 내리는 히로시마 시내를 둘이서 다정히 걷고 있는 일본인 남녀 - 1945 9 8 

 

세계인들은 원자폭탄의 폭발이 지나간  폐허로 변해버린 일본 히로시마 시내를 걷고 있는 일본인 남녀의 

사진을 바라 보면 과연 어떠한 생각을 할까라는 의문을 가질수 있다.

 

물론 일본인들의 견지에서 사진속의 장면과 남녀의 모습울 바라 본다면 매우 측은한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의 세계인들은 일본인들의 그릇된 야욕에 의한 세계 인류를 파탄으로 몰아 넣은 2 세계대전 당시의 침략전쟁의 인종범죄를 알고 있기에 그러한 느낌을 가질수는 없다.

 

위의 사진을 바라보면 미국이 투하시킨 원자폭탄의 폭발로 히로시마 시가지는 초토화가 되어버렸지만

일본의 군국주의에 따라 여성들을 마치 사회의 부속물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았던 일본인들의 그릇된 인본주의 관념이 여전한 것을 찾아 볼수가 있다. 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당연히 남자가 우산을 펴서 여자를 씌워줘야 할것인데 그와는 반대로 여자가 우산을 펴서 남자를 씌워 주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히로시마 시내의 남녀 사진을 보자면 2 세계대전 당시 침략 전쟁을 일으켜 가까운 한국과 중국및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미국등에 침략의 폭격으로 엄청난 인명의 대량 살륙과 소중한 문화재들및 국가 재산들을 송두리채 약탈해가고 파괴를 시킨 천인공노할 전쟁범죄와 사람들을 강제로 붙잡아 가두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생체 실험을 했던 희대적 인종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서 평화적 상태에서 세계 평화에 이바지를 하는 나라로서의 일본인 남녀가 온전한 상태의 도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히로시마 시내를 남자가 우선적으로 우산을 펴서 여자를 보호하며 다정하게 우산을 받혀서 걷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느끼게 한다.

 

https://youtu.be/CCge5o1cetk

photo from : www.hindustantimes.com www.theatlantic.com

작성자: 슈트름게슈쯔

 

■참회를 모르는 인종들

2015-08-17 베아트릭스 여왕의 일본 방문에 국민들이 극구 반대한 것은...

▲매달 둘째주 화요일 네덜란드 헤이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반일 집회 현장.

 

20년 동안 한결같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집회에 동참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진정한 사과 없이 지나온 역사가 다음 세대로 이어져선 안 됩니다. 어린 나이에 내 아버지 세대의 전쟁 고통을 눈으로 봤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당시 전쟁을 일으켰던 세대의 진정한 사과만이 지금 젊은 세대에게 죄의식을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게 합니다. 사과가 있을 때까지 걸을 수 있는 한 이곳에 나와 외칠 것입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집회 현장에서 만난 데릭 맥헐스씨가 한 말이다. 그는 올해 78세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면서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온갖 수모를 겪었다.

 

전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곳에 모인 네덜란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본이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 가운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었고, 현재까지 일본이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는 것에 민감한 국가다.

 

매달 둘째주 화요일 낮 12시가 되면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에선 흰머리가 가득한 70세 이상의 노인들과 그들을 모시고 온 자녀들이 과거 일본의 만행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집회를 연다. 그 가운데는 걸음이 불편해 부축을 받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노인도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일본대사관의 유리창은 커튼이 쳐져있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어린 나이였지만 그 당시 전쟁의 참상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Foundation of Japanese Honorary Debts)’의 회장을 맡고 있는 판 바흐덴돈크(78)씨가 말했다. “전쟁 당시 인도네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네덜란드 10인 정도가 주축이 돼 이 모임을 결성하게 됐어요. 전쟁 당시 인도네시아에 거주했던 75000명 정도의 명부를 가지고 재단을 시작했습니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약 35%에 해당합니다. 우리 재단의 목적은 2차 대전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거주하며 전쟁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 사람의 권익을 찾는 것입니다.

 

()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이 보관하고 있는 전쟁 당시 인도네시아 거주민의 자료.
(
) 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던 네덜란드인이 입은 피해를 알리기 위해 만든 일본 범죄증언집

 

1. 2차대전 피해자 데릭 맥헐스씨는 20년 동안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며 “일본이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2.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입구.
3.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의 판 바흐덴돈크 회장과 임원진이 일본대사관에 들어가고 있다.
4.
일본의 범죄증언집에 실린 네덜란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과 함께 수록된 한국 작가의 그림.

 

과거 반성이 있어야 새로운 역사 쓸 수 있어

판 바흐덴돈크 회장과 함께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사무실을 찾았다. 한 쪽에 당시 인도네시아에 거주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거주증명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판 바흐덴돈크 회장은 최근 전쟁 피해자 증언 자료를 토대로 만든 책을 펼쳐 보이며 당시 인도네시아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 책 표지에 실린 굶주린 아이가 사진을 찍은 후 세상을 떠났다”며 “나 자신도 어린 나이였고 당시 전쟁을 이겨내는 게 쉽지 않았다. 아직도 그 고난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0
년에 설립된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은 전쟁 당시 일본군의 인권 유린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더불어 일본에 제대로 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전쟁 캠프에서 기아로 죽어갔던 아이들의 참혹한 실상, 네덜란드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인권을 유린당했던 생생한 증언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는 과거의 반성과 사죄가 있어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너무 파렴치합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정부조차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외교적으로 손익을 따지는 것에 앞서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살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일본이 사죄할 때까지 시위에 계속 참여할 것입니다.” 네덜란드 헤이그 일본대사관 앞 집회에서 만난 티니크 할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2015년 현재,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다. 과거 반성 없이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는 그의 말이 허공의 메아리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외교를 하며 동서양의 교류라는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양의 신비로운 문화가 서양에 알려진 것이다. 2009 8월에는 네덜란드와 일본의 외교 400주년을 맞아 거대한 행사가 양국에서 열리기도 했다. 이를 기념하는 주화도 만들었다. 또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 기차역은 일본 도쿄역의 모델이 됐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반 고흐는 프랑스 화단을 통해 본 일본 그림에 영향을 받아 제2의 화풍을 만들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일본은 독특한 동양의 문화를 지닌 단아한 나라로 알려져 있고, 일본 문화 관련 제품은 값비싼 가격에 팔린다. 17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큰 부()를 누렸던 암스테르담에서는 그 때의 명성을 아직도 느낄 수 있다. 세계 각국의 문화를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점도 넘쳐난다. 그 가운데 일본 음식은 독특한 모습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스시(생선초밥)를 기본 메뉴로 하는 일식집은 이곳 암스테르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식당이다

이처럼 네덜란드와 일본은 오랜 시간 문화 교류를 이어왔다. 그러나 1971년 쇼와 일왕이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네덜란드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가 없는 상황에서 일왕의 방문은 네덜란드 국민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1986
년에는 현 네덜란드 국왕의 어머니인 베아트릭스 여왕이 왕위 승계를 끝내고 일본을 방문하고자 하는 계획을 네덜란드 국민이 용인하지 않았다. 이후 1991년 베아트릭스 여왕은 일본을 방문, 일본의 네덜란드 포로에 대한 진상을 언급하며 배상을 요구했다. 네덜란드 내에서 반일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국왕은 일본의 초청으로 만찬에 참석해 일왕에게 과거 전쟁의 아픈 역사를 못 잊고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TV를 통해 이 연설을 지켜 본 네덜란드 국민은 국왕의 연설을 지지했다.

 

1~2. 일본 작품을 모사해 그린 반 고흐의 그림들.(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 소장)
3.
네덜란드-일본의 수교 400주년 기념주화

 

[Mini  interview 판 바흐덴돈크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회장]

 

“일본은 한국·중국과 대화하길 바란다”

 

언제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이 만들어졌나요?


1990 10명의 네덜란드인이 인도네시아에 거주했던 전쟁(2차 세계대전) 피해자 가운데 3분의 1 75000명의 명부를 가지고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권익을 찾는 게 우리의 임무입니다.

 

재단이 생기기 전 전쟁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인에 대한 네덜란드정부의 태도는 어땠나요?
2000 12월까지도 네덜란드정부는 우리가 겪은 수모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네덜란드정부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당시 1인당 3000길더( 1239달러)가량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당시 수용소 행은 네덜란드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됐습니다. 네덜란드 피가 섞였는지를 본 것이죠.

 

당시 여성과 아이도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여성은 원래 강제수용 대상이 아니었지만 네덜란드 사람이었기 때문에 수용시설에 감금됐습니다. 우리는 한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 일본군 피해 여성단체와 접촉하고 있습니다. 중국과는 아직 교류가 없는데, 중국이 우리 단체를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여성 가운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수는 얼마나 되나요?
“우리 회원 가운데 위안부 피해 여성은 350~ 500명으로 추정됩니다. 피해자 중 적은 수일 수 있지만 이 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제 인권운동 단체인 앰네스티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진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습니다.

 

매달 두번째 화요일 네덜란드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25년간 일본정부에 진정한 반성과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선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사과와 행동은 지속적인 미래 연대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청원서도 242번이나 일본대사관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일본 총리에게 전달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청원을 일본 총리가 이해하고, 최대 피해자로 거론되는 한국, 중국과 함께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장혜경 웨이포인트-홀랜드 뉴스 미디어&저널리즘 대표

출처 | 이코노미조선 8월호

 

2015.08.19  3만엔 봉투에 담긴 하토야마 前총리의 진심

서대문형무소 무릎 사죄
행사 비용에 보태달라며 이부영 前의원에게 맡겨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가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추모비에 헌화한 뒤 무릎을 꿇고 있다. /오종찬 기자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가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한 뒤 서대문구에 3만엔( 29만원)을 전달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하토야마 총리는 그날 저녁 "화환 등 나를 맞이하는 데 쓴 비용 일부를 내가 부담하겠다"며 봉투에 1만엔권 지폐 3장과 자신의 명함을 넣어 동행했던 이부영 전 의원을 통해 서대문구에 전달했다고 한다.

서대문구 측은 이 돈을 뜻깊게 쓴다는 차원에서 유관순기념사업회에 전달했다. 서대문구 관계자는 "큰돈은 아니지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 사과 메시지를 전달한 하토야마 전 총리의 행동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돈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유관순 열사를 기념하는 사업에 사용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당시 순국선열 추모비 앞에서 서대문구가 준비한 검은색 천을 깔고 무릎을 꿇었고, 두 손 모아 10초간 묵념하고 큰절을 올렸다.

현장을 찾은 국내 취재진을 위해 10분 정도 인터뷰 시간을 내줬고, 광복절을 앞두고 사과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한국인 선조들이 독립을 위해 힘쓰다 (일제의) 고문 등 가혹한 처사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에 깊이 사죄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여기 서 있다"고 말했다. 2001 10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도 이곳을 방문하긴 했지만, 언론 인터뷰 등은 하지 않았다.

작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는 607000여명이 방문했는데 그중 6.8% 정도인 41000여명이 일본인이었다.

서대문구 관계자는 "사과의 마음을 담아 이곳을 찾는 의식 있는 일본인이 많다" "특히 하토야마 전 총리 방문 이후로는 일본인 방문이 더 늘어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홍준기 기자

 

전직 일본 총리  하토야마 “유관순 가혹한 고문 사죄”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오후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서울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 앞에서 사죄의 묵념을 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히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추모비에 헌화한 뒤 무릎을 꿇고 있다 15.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