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뿌리를 찾아 중앙일보
2010.08.24
(1) 메이지 일본의 ‘한국병탄 프로젝트’
100년 전 일본은 두 개의 흐름으로 조선을 공략해 왔다. 하나는 공식 라인, 다른 하나는 비공식 라인이다. 공식 라인은 눈에 보인다. 정한론(征韓論)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 쇼인의 두 제자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동지이자 라이벌인 두 사람은 공식 라인을 대변한다. 이토는 초대 총리를 포함해 총리를 네 번이나 지냈고, 일본군을 근대화한 야마가타는 이토에 이어 두 번의 총리를 지내며 조선 침략의 발판을 다졌다. 이들의 출신지는 일본 서부 야마구치현이다. 비공식 라인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본 특유의 대륙낭인들이다. 그들은 정한론이 대두된 1873년부터 조선을 병합한 1910년까지 공식 라인에 앞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구로부터 일본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역사 속 현장을 찾아갔다.
▲정한론을 둘러싼 메이지 정부의 논쟁 현장을 그린 일본 그림. 한국을 침략할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전개됐다. 정한론이 등장한1873년부터 1910년 한국병합조약 체결까지 일본은 한국 병합의 밑그림을 하나하나 구체화했다.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한상일 지음)에서
#1. 후쿠오카 ‘겐요샤’
▲일본의 우익 정치 결사 겐요샤 회원들의 묘지
16일 오후 일본 후쿠오카시 ‘겐요샤(玄洋社) 묘지’. 8월 중순의 뙤약볕이 강렬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옷소매 사이로 땀이 줄줄 흘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묘지 앞에 향을 태우며 절을 하고 있었다.
“묘 주인이 꽤 높은 사무라이 가문인가 봅니다. 후손들이 아직도 참배를 하는 것을 보니….”
30년째 겐요샤를 연구해온 이시타키 도요미(60·후쿠오카인권문제연구소 이사)의 말이다. 겐요샤는 일본 학계에서 인기가 없다. 속칭 밥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다. 후쿠오카 인근 기타큐슈대학에서 외교사를 가르치는 김봉진 교수는 “겐요샤는 일본인도 잊고 싶어 하는, 과거 강력했던 우익의 상징물”이라고 했다.
겐요샤는 일본 근대 우익의 거두 도야마 미쓰루가 1881년 창설한 정치단체다. 묘지 복판에는 가장 큰 크기의 도야마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도야마는 제2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많은 일본인이 존경하던 인물이었는데 오늘날엔 거의 잊혀진 존재지요.” 이시타키의 설명이다.
도야마는 평생 어떤 공식 직함도 갖지 않았다. 주요 정치활동의 막후에서 활약했다. 우치다 료헤이도 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개인 참모로 함께 온 민간인이다. 그 역시 아무런 직함이 없다. 그런 민간인이 어떻게 당대 최고의 실세 이토와 동행할 수 있을까. 우치다는 도야마의 후계자였다. 우치다는 일진회(대표적 친일단체)가 한·일 병합을 순종에게 건의하게 하는 막후 조정 역할을 했다. 흥미로운 게 있다. 도야마가 조선 개화파의 리더 김옥균, 중국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 등 아시아의 개혁세력과 두루 인연을 맺었고, 또 그들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김옥균-도야마 사이에는 일종의 공감대가 있었다. 둘 다 서구식 개혁을 지향했다. 동시에 서양에 맞서 아시아를 지킨다는 범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엔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우리는 왕실에 대한 관념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근대적 국가관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인은 1870년대에 이미 입만 열면 동양 평화를 들먹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상황에서 일본의 살길을 찾는 가운데 나온 방책이었다. 조선을 침략하는 정한론도 동양 평화를 명분으로 삼았다. 특히 겐요샤는 조선 병합 프로젝트를 물밑 지원한 대표적 민간단체였다. 지금도 후쿠오카 도심엔 겐요샤 건물터 표지석이 남아 있다. 겐요샤 출신 인물의 동상도 곳곳에 서 있다. 100년 전 일본의 한국 병탄이 제국주의 정권과 군부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관·군·민이 합심한 총체적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들의 성공과 결실이 우리에겐 망국이고 설움이다.
겐요샤는 조선 병합의 비공식 라인이었다. 흔히 ‘대륙 낭인’이라고 불린다. 대륙 낭인을 연구해온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는 “낭인이란 떠돌이 사무라이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다. 나쁘게 보면 폭력집단일 수 있지만, 일본 입장에서 보면 국가를 위해 혼신을 다 바친 민간외교의 첨병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한국 병합은 치밀했다. 외국의 시선을 의식,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병합을 요청하는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도야마와 우치다 같은 대륙 낭인이 그런 임무를 맡았다. 그들의 암행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 병탄의 강제성·불법성을 은폐하는 요소로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후쿠오카=글·사진 배영대 기자
#2. 야마구치 하기
한·일 병합의 뿌리는 19세기 중반 일본 메이지 유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유신의 발원지는 야마구치현의 하기. 시모노세키로부터 100㎞ 정도 거리다. 하지만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기차나 국도를 이용해야 한다. 한적한 국도를 자동차로 달렸는데 3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우리는 동해, 일본은 일본해로 부르는 바다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도착해 보니 고즈넉한 시골이다. 메이지 일본의 중심 권력이 태동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기는 제국 일본의 힘을 탄생시킨 모태다. 메이지 정권의 최고 설계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성장했다. 일본의 군사제도를 만든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향도 여기다. 야마가타로부터 가쓰라 다로와 데라우치 마사다케로 이어지는 근대 초기 육군의 실세가 모두 동향이다. 이토, 야마가타, 가쓰라, 데라우치는 차례로 총리를 지냈다. 한국인에게는 병탄의 원흉들. 하지만 일본에서는 메이지 국가 건설의 공신들이다.
이토와 야마가타의 관계가 각별하다. 그들은 한국 병합의 공식라인을 대표한다. 경쟁적으로 일본 근대화와 조선 침략을 이끌었다. 요시다 쇼인이라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리더가 그들을 키웠다. 그가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둘은 함께 공부했다. 동지이자 라이벌이다. 요시다 쇼인의 생가와 쇼카손주쿠 입구에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라는 커다란 입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입장 마감(오후 5시)이 다가오는데도 쇼카손주쿠를 찾는 발길이 이어졌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쇼카손주쿠에서 5분 정도 걸으니 이토가 살던 집과 나중에 도쿄에 지었던 것을 옮겨온 이토의 별장이 나타났다. 관리인이 정원의 석등을 가리키며 “메이지 천황이 이토 총리에게 하사한 선물”이라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이토는 문관으로서 메이지 헌법과 관료제의 기초를 세웠다. 야마가타는 징병제를 비롯해 근대적 군대를 육성했다. 이토가 문관을 대표한다면, 야마가타는 무관을 대표한다. 둘 다 유럽에 유학했고, 그 경험을 일본 근대화에 활용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정권을 다투는 경쟁관계이기도 했지만 대외 팽창적 국익 앞에선 콤비를 이뤘다. 이토는 45세이던 1885년 초대 총리에 오르며 내각책임제를 확립한다. 이토에 이어 1890년 총리에 취임한 야마가타는 외교정략론을 발표하면서 “이익선(국가 이익)의 초점은 조선”임을 분명히 했다. 그 후 일본의 이익선은 한국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시베리아에서 중국 대륙으로, 그리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확대됐다.
1894∼95년은 한·중·일 3국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야마가타의 논리에 의하면, 일본이 이익선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내부적으로 다져온 힘을 외부로 돌린 첫 시도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을 주도한 인물은 이토였다. 야마가타가 전쟁을 일으키고 이토가 수습하며 일본의 국익을 챙기는 호흡이 절묘하다. 청나라의 리훙장을 야마구치현으로 불러들여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의 현장은 요즘 관광지로 인기다.
이토는 조선을 중국에서 분리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표현을 썼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복잡하게 얽혔던 시절, 조선의 독립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1837년 정한론 대두로부터 시작된 조선 침략 프로젝트의 1단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1885~95년 총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조선 침탈의 밑그림을 완성해갔다. 그 10년간, 조선은 일본과 정반대로 개화와 개혁의 동력을 상실했다. 당시 조선의 리더들도 전통적 유학 지식에 새로 습득한 서양 지식을 접목해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몇몇 주도자가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변화를 주도할 힘을 전반적으로 상실했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개화를 지지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처 꽃도 펴보지 못하고 사라진 것”(김봉진 교수)이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파가 몰락한 때부터 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은 중국의 위안스카이에게 주요한 국가의 결정권을 빼앗긴 ‘잃어버린 10년’”(김현철 박사·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이기도 했다.
부국강병과 총화단결, 그리고 대외침략. 메이지 유신과 한국 병합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위세는 지난 100년간 우리에게 이중적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 증오와 저항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선망의 모델이었다. 그 밑엔 망국의 한이 서려 있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오늘 우리는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가. 김봉진 교수는 “건국 이후 60여 년간 대한민국은 제국주의를 거치지 않고도 근대화에 성공한 첫 케이스를 세계에 알렸다”며 “그런 자랑스러운 근대화를 배경 삼아 상생과 협력의 국제질서를 제시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망국의 한’은 벗어던지고 말이다.
▲하기=글·사진 배영대 기자<BALANCE@JOONGANG.CO.KR>
정한론 메이지 유신 완성 위한 잔혹한 ‘생존술’
☞◆정한론=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최대 과제는 국민적 통합과 민족적 독립이었다. 정한론은 두 과제를 모두 이뤄내기 위한 일종의 묘수였다. 1873년 본격 정책과제로 부상했다. 일본이 살기 위해 무력으로 한반도를 침공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의 시대정신은 ‘정한’의 방법론으로 모아졌다.
정한론이 등장한 1873년부터 1910년 한국병합조약이 강제 조인될 때까지 37년간은 정한론의 실현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치밀했다. 궁극 목표는 만주 대륙 진출이었고, 1차 관문이 한국 정복이었다. 관·군·민이 머리와 손발을 합쳤다. 때론 민간을 앞세워 은밀히, 때론 군부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진행됐고, 정치권과 외무성은 그 작업을 컨트롤하며 ‘적절한 시기’를 재고 또 쟀다. 청일전쟁-시모노세키조약-영일동맹-러일전쟁-가쓰라·태프트밀약-포츠머스조약-을사늑약 등을 거치며 한국병합이 구체화됐다. 일본 학계에선 그 시기 문제를 놓고 ‘정한론’ ‘반정한론’ 논쟁이 진행 중이지만 한국침략이란 대명제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가고시마현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한론의 주창자로 보기도 한다. 정한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그가 총대를 멨기 때문이다. 하지만 1877년 메이지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내전에서 반군 편에 섰고, 결국 반군이 패하면서 역사의 큰 흐름에서 사라졌다. 그는 당시 인물 가운데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최후의 사무라이’로 통한다.
(2) 망국으로 이끈 3대 조약
39일간 일본의 3개 협약
#1. 태프트 - 가쓰라 밀약 1905년 7월 29일
#2. 제2차 영·일동맹 8월 12일
#3. 러·일 포츠머스 강화조약 9월 5일
1905년 여름은 치욕적이다. 조선의 운명은 암울해졌다. 러일전쟁의 승자는 일본이었다. 그 무렵 진행된 3개 협상이 조선을 압박했다. 태프트-가쓰라 미·일 밀약(1905년 7월 29일)→제2차 영·일 동맹(8월 12일)→ 러·일 포츠머스 강화조약(9월 5일)-. 일본이 러시아·영국·미국과 맺은 협약이다. 강대국들은 조선을 형편없이 업신여겼다. 일본은 조선의 종주권(Suzerainty)을 확보했다. 한반도의 외교적 포위망을 완비했다. 그것은 그해 11월 17일 을사늑약(勒約, 강제 보호조약)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겼다. 경술국치(1910년)는 그 굴욕의 연장이다. 망국은 5년 전 여름에 결판났다. 39일간 3개의 협상-. 조선을 견디기 어렵게 만든 열강의 외교 게임. 그 흥정과 거래 현장들은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곳을 다년간 추적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낀 대한제국의 운명을 풍자한 삽화.1905년 미국 시사 잡지 ‘하퍼스 위클리’ 에 실렸다
글·사진=박보균 기자(편집인)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R)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친일파다. 그러나 1905년 5월 일본 해군의 압승은 전율과 같은 충격이었다. “식민지 필리핀을 일본이 공략에 나선다면….” 태평양함대는 일본 연합함대를 제어하기 힘들었다. 그는 2중의 대비에 나섰다. 러·일 양측에 종전을 설득했다. 그리고 핵심 참모를 일본에 파견했다.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 그는 TR의 지시로 7월 일본과 필리핀으로 떠났다. ‘제국의 항해’(Imperial Cruise)로 불렸다. 일본은 대환영했다. 태프트 일행은 도쿄의 영빈관 시바리큐(芝離宮)에 묵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은 친선의 화기애애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밀약과 술수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7월 29일 아침 시바리큐. 태프트는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를 만났다. 가쓰라는 조슈(長州)군벌의 간판이다. 조슈는 한국 침략의 원흉들을 배출했다.
가쓰라는 미국의 걱정을 먼저 덜어주었다.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침략 의도를 품지 않으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각서1항) 마지막에 조선 문제(3항)를 논의했다. 가쓰라의 말은 위압적이었다.
▶가쓰라=“조선은 러시아와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다. 그대로 두면 조선은 다른 강대국과 어떤 합의, 조약을 체결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간다. 결정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태프트=“조선이 일본 동의 없이 조약을 체결하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일본 병력에 의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수립하는 게 전쟁의 논리적 결과다.”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은 휴지조각이 됐다. 그 조약은 선린, 중재의 거중조정(good office) 내용을 담고 있다. 밀약의 장소는 없어졌다. 시바리큐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탔다. 지금은 공원이다. 나는 그것으로 역사의 갈증을 끝낼 수 없다. 태프트를 찾아나섰다. 태프트는 TR 다음 대통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그곳 태프트의 집은 박물관 겸 역사유적지다. 필리핀 총독→육군장관→대통령→대법원장을 지낸 그의 화려한 경력을 얹은 유품과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조선과 필리핀을 맞교환한 밀약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태프트-가쓰라 비망록에서 미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제감리(control)를 인정했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공세적인 계획(aggressive design)을 부인했다.”
착잡했다. 사진과 설명문이 고작이었다. 무성의하다는 느낌이었다. 역사의 비애가 더욱 깊어진다. 그 시대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 협약은 불신의 상징이다. 우리 사회 반미 정서의 근원이다. 함께 갔던 조지타운대 객원연구원(마이클 자오)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중국인 2세다. “청나라는 국제적 배신을 무수히 당했다. 배신을 기억해 역사의 경계로 삼는다. 하지만 배신 문제에 몰입하지 않는다. 역사 패배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협약은 비밀에 부쳤다. 그 문건은 19년 뒤(1924년) 발견됐다.
◆제2차 영·일동맹=1905년 1,3월 일본군은 만주의 뤄순(旅順) 과 봉천(현재 瀋陽)에서 점령한다. 세계 최강 러시아 육군은 패퇴했다. 영국은 러일 전쟁의 흐름에 민감했다.“러시아는 이제 극동에서 봉쇄된다. 러시아 남진의 다음 출구는 인도 쪽이 유력하다.” 당시 영국 외무성의 판단이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다.일본은 영국의 동맹국이다.
3월말 영국의 헨리 랜스다운(Lansdowne) 외상은 런던 주재 일본 공사 하야시 다다스(林董)와 만났다.두 사람은 영일동맹 (Anglo-Japan Alliance,1902년1월)조약의 주역이었다. 랜스다운은 동맹의 개정 필요성을 언급했다. 동맹의 범위를 인도까지 넓히자는 의사를 표시했다.일본도 러시아의 복수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때 영일동맹의 진가는 발휘되고 있었다.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해군과 외교망은 발틱 함대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그 정보를 일본에 전달했다. 발틱함대는 5월27일 스시마 해협에 들어섰다. 8개월 동안 지구의 반을 돌아 피곤에 찌들었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의 연합함대는 숨죽이며 기다렸다. 발틱 함대를 단숨에 몰락시켰다.
일본 요코스카(橫須賀)항 미카사(三笠)공원에 가면 러일 전쟁의 기억이 있다. 미카사는 도고의 연합함대 기함이다. 그 배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도고의 붓 글씨도 전시돼 있다. “황국의 흥패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원 분투하고 노력하라”(皇國興廢 在此一戰 各員 一層奮勵努力) 쓰시마 해전때 훈시다.
영국은 이미 영광스런 고립 정책을 포기했다. 신흥 독일과 러시아 견제를 위해서다. 그게 1차 영일동맹의 배경이다. 랜스다운과 하야시는 개정 협상을 계속했다. 랜스다운 하우스(지금 프라이빗 클럽)에서 머리를 맞댔다. 영국은 조선을 자립능력이 없는 나라로 파악했다. 강대국들의 생각은 같았다. 동맹 전문은 “청과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indepedence and territorial integrity)을 유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6월말 개정 협상 초기에 ‘대한제국’은 삭제됐다.영국은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 한 달 전이다.
두 사람은 협상수정안을 여러 차례 교환했다. 동맹 내용을 격상시켰다. 방어동맹에서 공수(攻守,defensive & offensive)동맹으로 바꿨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도(Guidance)ㆍ감리(監理,Control)ㆍ보호(Protection)조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다.” (조약 3조)는 내용을 넣었다. 지도ㆍ감리ㆍ보호는 약속국에겐 저주와 악몽의 언어였다.
포츠머스(Portsmouth)는 미국 동북부 뉴햄프셔의 군항이다. 그곳에 거대한 해군기지가 있다. 보스턴에서 50마일 떨어져 있다. 내부의 군 공창(工廠·naval shipyard) 건물에서 러시아·일본의 협상이 벌어졌다. 그 건물이 존재한다. ‘빌딩 86’-.
붉은 벽돌의 평범한 3층 직사각형이다. 사적지의 맛은 나지 않는다. 거기서 역사의 대서사시가 써졌다. 빌딩 앞쪽 벽에 대형 동판(2.4X1.6m)이 붙어 있다.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빌딩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초청에 의해 러시아와 일본 외교사절 간 평화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오후 3시47분 두 제국 사이의 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 조약(Treaty)이 체결됐다.” 가장자리에 일본 왕실과 러시아 차르(황제)의 문양을 번갈아 새겼다. 동판은 역사의 블랙박스다. 포츠머스조약은 조선엔 결정타였다.
▲포츠머스 평화빌딩에 붙어 있는 조약 기념 동판
1905년 여름 러일전쟁(개전 1904년 2월)의 당사국들은 한계에 직면했다. 일본은 인적·물적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공산주의 봉기는 러시아의 전쟁 의지를 더욱 떨어뜨렸다.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TR·26대)는 종전 협상을 중재했다. 그는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DR)의 먼 친척이다. 그는 일본을 러시아의 방패막이로 후원했다. 사석에서 “일본이 우리를 위한 전쟁을 하고 있다. 일본 승리가 기쁘다”고 할 정도였다.
전세가 일본으로 기울었다. TR의 태도는 달라졌다. 동북아의 세력균형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는 회담 장소를 물색했다. 워싱턴의 더위를 피해 휴양지 포츠머스로 잡았다. 1905년 8월 8일 러시아·일본 대표단이 도착했다. 러시아의 전권대표는 세르게이 비테(Sergei Vitte·56) 전 재상, 일본은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이 대표를 맡았다. 포츠머스 역사연구회의 피테 맥렌은 “외교무대의 스타가 총출동한 세기의 협상이었다. 비테는 러시아의 만주 진출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미국 제국주의 시대를 개막한 TR(47), 고무라(50)는 일본 제국 외교의 전략 틀을 짰다”고 말했다.
건물 2층은 전시실이다. 협상테이블이 진열됐다. 모조품이다. 고무라가 앉았던 가죽 의자도 있다. 『언덕 위의 구름』의 작가 시바 료타로 를 상념에 젖게 한 의자다. 8월 10일 첫 회의가 있었다. 고무라는 12개 항의 강화 조건을 내걸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 러시아군의 만주 철수, 뤼순·다롄항의 일본 조차, 러시아 배상금 지불 등이었다. 10년 전 3국간섭의 수모를 씻으려는 의도가 확연했다.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간섭의 주역은 비테였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의 대가인 랴오둥(遼東)반도를 반환했다.
▲회담을 중재한 루스벨트 대통령(가운데)과 일 대표 고무라(오른쪽 둘째), 러 대표 비테(왼쪽).
러시아 측은 대체로 수긍했다. 그러나 배상금 지불과 사할린섬 할양은 거부했다. 국가 존립과 차르(니콜라이 2세)의 위엄을 해친다는 이유였다. 비테는 “일본이 돈 때문에 전쟁을 계속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언론은 러시아 쪽으로 기울었다. 협상은 배상금 없이 사할린을 나누는 것으로 결말지었다. 러시아는 외교전에선 이겼다.
그러나 일본은 숙원을 이뤘다. 만주 진출의 발판을 확보했다. 조선 병합에 장애물 없이 나설 수 있었다. 메이지(明治)유신의 진정한 성취로 자부했다. 조약 2조는 이렇게 보장했다.
“러시아 정부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 군사경제상 우월한 권익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고, 일본 정부가 조선에서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지도·보호·감리 조치를 취하는 데 방해하거나 간섭에 나서지 않는다.” 지도·보호·감리의 굴욕적 용어가 예외 없이 들어 있다.
전시실의 컨셉트는 평화다. 빌딩의 애칭도 ‘평화빌딩’이다. 신문 제목도 ‘평화’다. 시어도어는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중재의 공로다. 그러나 그 평화는 대한제국엔 잔혹했다. 조선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을사늑약은 두 달 뒤다. 맥렌 연구원과 나의 시각은 비슷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정글의 법칙이 난무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족은 평화를 맛볼 자격이 없었다. 그 평화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구걸하는 평화는 위선의 독소로 썩는다. 경제력·군사력이 없으면 평화는 얻을 수 없다.”
(3) ‘강제병합조약’ 어떻게 체결됐나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 제3대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1858~1926)이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했다. 공식 발표는 29일 이뤄졌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1873년 정한론(征韓論) 이후 37년 동안 진행된 일본의 조선 침탈이 완성됐다. 데라우치가 통감에 부임한 것은 1910년 7월 23일. 그는 8월 16일,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병합의 뜻을 통보한다. 그의 통감 부임부터 조약 체결까지는 불과 한 달. 하지만 그 한 달 새 모든 게 이뤄진 건 아니다. 데라우치가 서울에 왔을 때 조선 병합의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의 책임자는 가쓰라 다로(桂太郞·1848~1913) 총리였고, 한국 병합을 주도한 실무 총책임자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1855~1911) 외무대신이었다.
가쓰라는 야마구치현 하기(萩) 출신, 고무라는 미야자키현 오비(飫肥) 출신이다. 야마구치현 하기는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다. 가쓰라의 후견인은 죠슈(長州)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 원수. 야마가타의 군부 인맥을 잇는 핵심 실세가 가쓰라다. 가쓰라는 총리로 재임하며 고무라 외무대신과 데라우치 육군대신을 양대 축으로 하여 병합을 완수해 나갔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가 닦아놓은 대한제국 침탈의 도로를 질주하며 피날레를 장식한 인물이 가쓰로-고무라 콤비다. 이들은 1905년 러일전쟁-포츠머스 조약-을사늑약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모든 단계의 전면에 나섰다. 야마가타-가쓰라-데라우치로 이어지는 군부 실세의 힘이 바탕이 됐다. 여기에 고무라 외무대신의 외교 지략이 합쳐져 한국병합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대륙 침략의 첫 관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결실이지만 우리에겐 치욕이고 망국이다.
가쓰라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호흡이 잘 맞았다. 한국 병합 관련 결정적인 외교문서에는 그들이 빠지지 않는다. 1905년 체결된 ‘망국을 이끈 3대 조약’(가쓰라·태프트 밀약-제2차 영·일동맹-포츠머스 조약)의 뒤에는 가쓰라-고무라가 있었다. 1902년 제1차 영·일동맹도 마찬가지다. 가쓰라는 총리에 부임하자마자 고무라를 외무대신에 앉혔다. 1908년 가쓰라가 두 번째로 총리에 부임할 때 역시 외무대신은 고무라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선병탄의 알파와 오메가를 기획했다. 일본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것은 미국·영국·러시아 등 강대국의 간섭. 이를 경술국치 이전에 마무리한 주역이 가쓰라-고무라 콤비였다.
하기에는 가쓰라의 생가와 동상이 보존돼 있다. 오비에는 역시 고무라의 생가·동상과 함께 기념관까지 설치돼 있다. 고무라의 활약상을 더 생생히 느껴볼 수 있게 했다. 고무라 기념관의 나가토모 데이지(52) 학예연구사는 “일본 외교를 이야기할 때 ‘고무라 시대’ ‘고무라 외교’라는 표현이 보통명사처럼 쓰인다”고 했다. 일본 외교에 미친 고무라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강대국과 맺었던 각종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며 관세 자주권을 회복한 일과 러일전쟁을 적절한 시점에 끝내면서 일본에 유리하게 협상을 이끈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쓰라-고무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손을 잡아왔다. 1894~1895년 청일전쟁 무렵 두 사람은 청나라 공사관에서 함께 근무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때부터 가쓰라는 고무라의 능력을 눈여겨보았다. 1901년 총리에 오르자 고무라를 외무대신으로 발탁했다. 고무라는 영어에 능했고 국제법에 밝았다. 그가 외무성에 특채된 배경이다.
1m56㎝의 단신 고무라. 그는 16세 때 외국 문물 창구였던 나가사키에 가서 외국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오늘날 도쿄대학의 전신인 ‘대학남교(大學南校)’에선 영어와 법률을 공부했다. 문부성 주최 제1회 해외 유학생에 선발돼 미국 하버드대 법대에 유학했다. 야마구치현과 가고시마현 출신들이 주요 관직을 거의 독식하는 상황에서 메이지 정부 탄생에 기여도가 비교적 적은 미야자키현의 작은 시골 출신인 그가 중용될 수 있던 배경이다.
고무라는 학맥과 실력을 적재적소에 써먹었다. 포츠머스 조약 체결 당시, 러시아와 협약을 중재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하버드대 동문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주요 강대국의 외교 업무를 섭렵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외교적 뒤처리를 한 것도 그였다.
1909년 4월 10일, 가쓰라와 고무라는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한다. 한국 병합을 위한 ‘제1호 방침서 및 시설 대강서’를 추인받기 위해서였다. 요점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 병합을 실행할 것”이다. 이는 고무라가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스키치에게 지시해 작성했으며, 3월 30일 가쓰라 총리에게 제출했던 것이다. 이후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일본 정부의 공식 방침으로 결정됐다. 경술국치 1년도 더 전의 일이다. ‘시설 대강’은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의 정책 목표였다. ▶질서유지를 위한 군대의 주둔, 헌병·경찰관의 증파 ▶외국 교섭 사무 장악 ▶한국 철도를 제국 철도원으로 이관하고 남만주철도와의 연락화 ▶일본인의 한국 이주와 한·일 경제의 긴밀화 등 구체적 정책 과제가 이미 준비돼 있었던 것이다.
고무라는 용의주도했다. 경술국치 조약 체결이 끝난 후, 그는 신문사 대표들을 외무대신 관저로 초청해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며 언론의 협조를 당부했다. 일본이 1905년 동양 화란(禍亂)의 뿌리를 단절하기 위해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를 시작했다는 것, 그러나 보호통치만으로는 화란의 근원을 단절하는 책임을 다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됐고, 그래서 1909년 7월 조선 병합의 방침을 확정하고 필요한 시기에 이를 결행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정을 설명했다.
당시 조선에서 고무라에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은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1856~1914) 정도를 꼽을 수 있다. 26세 때인 188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 유학, 1883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 유학해 서양의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885년 귀국해서 1892년까지 무려 7년을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서 연금상태로 지내야 했다. 개화당과 관련 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현철(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외교사) 박사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수많은 개화파 인재들이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몰락해간 점이 100년 전을 회고할 때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하기·미야자키=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경술국치 ‘치욕의 장소’ - 남산 통감 관저
을사늑약→정미 7조약에 이은 1910년의 강제병합조약은 최후의 절차였다. 이날을 우리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른다.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부끄러움.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곳은 남산 기슭의 통감 관저(사진)다. 식민 통치의 모든 정책 결정이 이뤄진 이곳은 지금은 잊혀진 현장이다. 표지석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그 자리가 어디였으며, 언제 사라졌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 퇴계로 중부세무서 옆에서 남산 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서울시 소방방재본부’가 나오는데, 소방방재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로 이어지는 진입로 주변의 제법 너른 공터가 통감 관저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가 방한했을 때 머문 숙소도 이곳이었다.
당초 일본 공사관으로 쓰이던 2층 건물이었다. 을사늑약에 따라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 2월부터는 통감 관저로 바뀌었다. 1910년 강제병합조약이 발표되면서 다시 총독 관저로 이름이 바뀐다.
한·일 강제병합조약 어떤 내용 담았나
▲1910년 강제병합조약의 대한제국 측 원문.
대한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해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합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인 자작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각각 그 전권위원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해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907년 10월 경회루 … 볼모로 잡힌 황태자, 강압 … 매국의 한 장면
▲사진은 침탈의 위세를 담고 있다. 매국의 굴욕이 넘쳐난다. 망국으로 가던 길의 씁쓸한 현장이다. 사진의 사연은 이렇다.
1907년 여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야욕은 험악하게 표출된다. 7월 19일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들었다. 23일 대한제국의 내치 장악(정미 7조약)→31일 군대 해산의 강압적 조치가 이어졌다. 이토의 다음 음모는 황태자 이은(李垠)의 일본 유학이었다. 실제는 볼모로 잡는 것이었다. 한국 황실의 일본화도 겨냥했다. 그는 노회(老獪)했다.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먼저 추진했다. 조선의 반발을 막기 위해서였다.
메이지(明治) 일왕은 난색을 표시했다. 조선의 의병활동과 정세 불안 때문이었다. 이토가 설득했다. 왕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有栖川宮 威仁) 친왕의 수행을 조건으로 4박5일의 서울 방문을 허락했다. 러·일 해전의 승자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 을사늑약 때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도 함께 왔다. 그 일행은 10월 16일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그리고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회를 가졌다. 조선의 대신들과 기념사진(왼쪽 사진)도 찍었다. 친일매국의 정미칠적(丁未七賊)들이다. 이토의 표정에는 조선을 호령하는 으스댐이 드러난다.
두 달 뒤 12월 5일 조선 황태자는 이토에 이끌려 일본으로 갔다. 열 살 때였다. 영친왕(英親王)의 비운의 삶이 시작됐다. 이토는 태자태사(太子太師)의 직책을 받았다.
박보균 기자
(4) 식민 통치에 반대한 일본인들
▲일본 도쿄 스기나미구에 있는 사찰 다이엔지에 세워진 요코야마 야스타케의 묘비.
일본에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조선을 강제병합 하자 많은 일본인은 환호했다. 그러나 극소수이기는 해도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이 조선은 물론 일본의 장래에도 맹독이 될 것이란 점을 예측 했다 . 한·일 강제병합 100 년을 맞아 이들의 언행은 새삼 일본을 위해 무엇이 옳은 길이었던가를 말해 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조선을 정벌하자는 목소리가 국민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 일본이 융성하고 강한 국력을 갖고 있다면 뭐 때문에 조선을 상대로 무례한 일을 벌여야 하는가. …우리는 조선뿐만 아니라 이미 아이누인(일본 홋카이도 등에 있는 소수민족)에게 원망을 사고 있지 않느냐.”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직후 정한론(征韓論)이 거세게 불 때 이에 반대하는 건의문과 신정부 개혁안을 메이지 정부에 내고 할복 자살한 일본인이 있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쓰마번(薩摩藩·지금의 가고시마현) 출신 무사이자 지식인이었던 요코야마 야스타케(橫山安武)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에서 초대 문부상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의 친형이다. 어릴 때 요코야마 집안의 양자가 돼 이름을 바꿨다.
그의 흔적을 쫓아 20일 도쿄 스기나미(杉竝)구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사찰 다이엔지(大圓寺)를 찾았다. 사찰 안에는 매미 울음소리만 그악스럽게 들려올 뿐 고즈넉했다. 이 절의 주지 오쓰지 도쿠겐(大辻德彦)의 안내로 절 뒤편으로 돌아가니 묘비가 즐비했다. 오쓰지는 높이 3m 정도의 묘비 앞으로 다가섰다. 묘비에는 ‘요코야마 쇼타로 후지와라 야스타케(橫山正太郞 藤原安武)’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 절은 17세 중반부터 도쿄에서 숨진 사쓰마번 출신 인사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오쓰지는 “요코야마는 일찍 숨져 그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부패한 신정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정한론 등 외교 정책에도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묘와 유적지 등이 지금도 화려하게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그의 무덤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메이지 정부가 부국강병과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침략적인 제국주의로 나아갈 때 반대했던 극소수 인사들의 실상이 피부로 느껴졌다.
당시 개혁을 선도하던 정치인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도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조선은 일본의 선생님이었다. 조선이 망국병에 걸렸다 해도 소생할 때가 올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부국강병과 침략’이란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일본은 1905년 러시아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과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외교권을 강탈하는 등 조선 식민지화를 구체화했다. 일본 사회는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지만 일부 사회주의자는 제국주의 반대 이념을 근거로 조선 침략에 반대했다.
언론인·변호사로 활동했던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1869~1937)는 을사늑약 체결 직전 신문에 “조선은 결국 독립국이 되지 못한 채 오직 지리책에서만 존재하게 됐다”는 글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다. 사회주의자였던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1871~1911)도 1907년 신문에 “조선인민의 자유독립을 인정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와 같은 기독교 인사들 사이에서도 조선 침략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우치무라는 1910년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전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해도 영혼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썼다.
강제병합 후 일본 정부의 탄압과 일본인들의 조선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사회주의 성향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는 1910년대 “한국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말을 했다가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일제시대에 조선인들의 인권과 독립운동가들을 변론했던 대표적인 변호사였다. 2004년 일본인으로는 처음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올해 일본에서 제작돼 도쿄 등에서 상영 중이다. 일왕 메이지가 죽은 뒤 다이쇼(大正·재위 1912~26)의 시대가 열리면서 일본 사회에 민본주의 바람이 불자 도쿄대 교수였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1878~1933)와 같이 일본의 가혹한 조선 동화주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던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1884~1973)은 정치적 관점에서 ‘대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다른 국가와 협력해 발전하는 ‘소일본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1921년 동양경제신보사에 “ 조선과 대만에 자유를 줘라. 동양과 세계의 약소국 전체를 우리의 지지자로 만든다면 얼마나 큰 이익인가”라고 썼다.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1930년대 들어 군국주의 세력이 집권하면서 대체로 위축됐지만 이들은 일본 사회의 양심적인 보루였다. 특히 기노시타가 강제병합 직후 일본이 제국주의라는 대홍수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듯이 일제시대의 예언자이기도 했다. 이들의 정신은 지금도 시민운동 등을 통해 소소히 이어져 오고 있다.
오대영 선임기자·박소영 도쿄 특파원 DAYYOUNG@JOONGANG.CO.KR
◆“지도 위 조선에 먹을 칠하며” … ‘일본의 윤동주’ 이시카와 ‘저항 시’
‘地圖の上 朝鮮半島に 黑黑と 墨を塗りつつ 秋風を聽く’
(지도 위 조선국에 새카만 먹을 칠하며 가을바람 소리를 듣는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사진)가 1911년 발표한 ‘9월 밤의 불평’(1911)이란 제목의 와카(和歌·일본의 고유 시) 34수에 들어 있는 시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이시카와는 ‘일본의 윤동주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며 “조선이 식민지가 돼 없어진 것을 ‘먹을 칠하는 것’으로 표현해 강제병합에 항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시카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우리는 조선인을 미워해야 할 까닭을 모른다”며 연민을 표시했다. 또 “누가 나에게 권총이라도 쏘아 보렴. 이토처럼 나도 죽어 보이리라”라는 시도 썼다.
2016.10.21
■매국(賣國)의 선봉이 된 개화(開化) 관료- 이완용(李完用)
⊙ 대원군의 측근이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 출세 코스 밟아
⊙ 육영공원 나온 후 주미 서리공사, 참찬관 등 역임하며 서구 문물에 눈떠… 독립협회 위원장 지내
⊙ 이완용, “천도(天道), 인사(人事)가 때에 따라 변역(變易)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라고 변명
장철균
1950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라오스 대사·주스위스 대사 / 현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출간
▲을사늑약과 한일합병에 찬성해 ‘매국노’가 된 이완용.
이완용(李完用·1858~1926)은 영특하고 재주가 비상했다. 입신출세를 위해 정치적으로는 수구(보수)와 개혁(진보)을 오가고 대외적으로는 친미, 친러, 친일로 변신하면서 총리대신에 올라서는 한일병탄을 주도해 망국의 주역이 됐다. 그 뒤 일제의 주구가 돼 민족혼과 뿌리마저 말살하려는 일제의 동화정책에 앞장서면서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매국노’로 비판받고 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완용에 대한 변론도 없지 않다. 이미 몰락한 조선의 망국 책임을 그에게만 물을 수 있는가? 이완용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이완용의 역할을 했지 않았을까? 독립협회 회장 역임 등 그의 ‘애국적’ 행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인색하다는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대대로 양자를 입양한 집안에 양자로 입양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에서 잔반(殘班)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0세 때인 1867년에 일가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李鎬俊)에게 입양됐다. 이호준은 이조참의,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정계의 거물로 이조판서를 지낸 민 왕후의 친척 민응현의 사위였으며 흥선대원군과는 정치적 동지였다. 이완용이 이런 명문 가문에 양자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서자(庶子)와 딸만 있었던 이호준은 서자인 이윤용(李允用)을 대원군의 서녀(庶女)와 결혼시켜 왕실과 이중삼중의 연을 맺어 핵심 권력층에 자리 잡게 된다. 이호준의 가계(家系)는 350년 전부터 후사(後嗣) 문제로 입양을 시작한 이후 여덟 번이나 양자를 들였다. 이완용을 입양한 이호준 자신도 어렸을 때 입양 온 양자였다.
이완용은 입양된 후 정익호에게 사사(師事)하였고, 이용희에게 서예를 익혀 후일 당대 명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양부 이호준의 후원으로 과거를 준비하던 이완용은 25세가 되는 1882년 왕실에서 특별히 실시한 증광시(增廣試) 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 증광시는 임오군란으로 피란 갔던 민 왕후가 청군(淸軍)의 도움으로 환궁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치러진 것이었다.
이완용은 갑과(甲科)나 을과(乙科)가 아니라 병과로 합격한 데 불과했지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8, 9품을 거치지 않고, 정7품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됐다. 이 자리는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이는 양부 이호준이 청국에 끌려간 대원군과 손을 끊고 발 빠르게 민씨 정권으로 말을 갈아탔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속출세
▲대한제국의 주미 공사관 건물. 1889년 박정양 초대 주미 공사가 임차해 16년간 사용됐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민씨 일족이 내몰리게 되자 민씨 정권에 줄을 섰던 이호준은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정변 세력의 표적이 됐다. 그러나 정변이 민비가 요청한 청국(淸國)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이호준은 권력 핵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던 이호준은 이완용을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료교육기관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시켜 영어와 신문물을 배우도록 했다. 그 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정3품)에 보임돼 왕세자 순종(純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그가 정3품 당상관에 오르기까지는 불과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밀려나간 급진개혁 세력의 자리를 이호준의 후광으로 이완용이 차지한 셈이다.
30세가 되는 1887년, 이완용은 주미전권공사로 부임하는 박정양(朴定陽)을 따라 참찬관(參贊官)으로 미국에 부임했다가 병이 나서 7개월여 만에 귀국하고 만다. 귀국 후에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조참의, 외무참의 등 요직을 지냈다.
미국에 부임한 박정양 전권공사는 청에 약속한 영약삼단(另約三端)을 지키지 않고 독자외교를 펼치다 청국의 압력으로 귀국하게 된다. 이완용은 1888년 다시 주미 참찬관으로 부임해 2년여 서리(署理) 공사로서 공관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오늘날로 치면 워싱턴에서 주미 대사대리를 한 셈이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대사성과 형조참판, 공조참판, 우부승지(右副承旨), 내무참의(內務參議) 등 차관급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 성균관 대사성 재임 시에는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제도화하고, 근대적 교사 양성사업 계획을 지휘했으며 성균관에 서양 학문 이수 과목을 신설했다.
이완용의 행보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대원군이 하야하고 친정(親政)을 시작한 고종은 쇄국을 버리고 개방정책으로 선회했다.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을 이용해 균세(均勢)외교를 추진하자 이완용은 이호준의 후견을 업어 서재필(徐載弼) 등이 주도하는 ‘정동파(貞洞派)’에 접근하면서 친미(親美) 행보를 걷게 된다.
친미 행보로 이완용은 1894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외무협판이 되었다. 이때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 급진개혁 세력이 일본의 비호 아래 조선으로 돌아왔다. 친청(親淸) 수구파 정권은 붕괴했다. 이완용 부자는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호준은 친일정권에 부응하는 한편 고종과 민비 측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양다리를 걸쳤다. 이완용은 1895년 박영효가 주도하는 친일내각에 학부대신(學部大臣) 겸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입각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유하자 만주에 이해가 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해 개입했다. ‘삼국간섭(三國干涉)’이다. 아직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했다. 러시아의 힘을 목격한 민비는 러시아를 일본의 새로운 경쟁상대로 등장시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전략을 추진했다.
위기를 느낀 박영효는 고종과 민비를 러시아와 차단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키려다 왕후시해 음모라는 누명을 쓰고 다시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민씨 정권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Veber.K.I)와 손을 잡고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완용은 이 내각에도 입각했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민비를 시해했다. 이완용 부자도 목숨이 위험했지만 미국 공사관 서기관 알렌(H.N.Allen·安連)의 도움으로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 주도
▲이완용이 학부대신 시절 문을 연 법어(프랑스어)학교. 맨 왼쪽이 프랑스인 교사 마르텔이다.
을미사변 후 고종은 궁궐에 머무는 것도 불안해했다. 고종의 뜻에 따라 이호준은 이범진(李範晉) 등과 모의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이완용을 러시아에 접근시켰다. 첫 번째 파천 시도는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 실패했다. 이게 ‘춘생문(春生門) 사건’이다. 다시 모의를 거듭한 끝에 1896년 친위대가 지방 소요를 진압하러 떠난 사이 마침내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파천이 성공하자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파천에 공을 세운 이완용은 박정양 내각의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으로 중용되었다. 1년 뒤 1897년, 조선반도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러시아는 각종 이권 획득에 만족지 않고 사사건건 내정에도 개입했다. 러시아의 간섭이 도를 넘자 고종은 외부대신 이완용의 의견에 따라 이번에는 미국 쪽에 줄을 대고 각종 이권을 미국에 넘겨주었다.
이완용은 서재필, 윤치호(尹致昊) 등이 주도하는 친미 성향의 독립협회를 지원해 초대 협회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에서 그는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고 주장했다.(《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독립협회는 미국식 참정권을 주장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해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해고하라고 요구했다. 분노한 러시아의 견제를 받은 이완용은 1897년 외직인 평양관찰사로 좌천됐다. 1898년 11월 17일자 《황성신문》에 의하면, 그는 이 시절 “유람하러 나서면서 기생 4명에 나졸을 합해 100여 명이 움직였으며 돈 4000냥을 경비로 사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아 원성이 높았다.
이 사례는 그가 개인적으로 영특했지만 매우 부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 주미 공사관에 있을 때부터 수십 년간 그를 지켜봐 왔던 윤치호는 그의 일기(1896년 1월 21일자)에 “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함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는 평을 남겼다. 그는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공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행적도 일기에 남겼다.
을사늑약
▲을사늑약을 강요하러 방한한 이토 히로부미.
이 와중에 1901년 2월 의정부 참정(參政·정1품)이던 이호준이 노환으로 쓰러졌다. 고종은 이호준의 후계인 이완용을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으로 불러올렸다. 이호준은 얼마 안 가 8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이완용은 곧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보호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수구파의 좌장 자리에 올랐다.
이완용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전 그의 정치적 행보가 전적으로 양부 이호준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국권 침탈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04년 9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자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이완용이 스스로 내린 정치적 결단은 친일이었다. 1905년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방한해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했다. 이완용은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이완용의 조카이자 이완용의 비서직으로 있던 김명수(金明秀)는 1927년 펴낸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이 말을 들은 이토는 하세가와를 대동해 궁궐로 들어가 마구잡이로 보호조약을 통과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어전회의에 참석한 여덟 대신 중에 다섯 명은 찬성, 세 명은 반대했다. 처음부터 찬성을 외친 대신은 이완용과 이지용(李址鎔) 둘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을사늑약 후 친일 행보
을사늑약 이후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됐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1907년에는 대한제국 총리대신직에 올랐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등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을사늑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해 보려 했으나 좌절됐다. 이완용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이토를 도와 고종을 퇴위시키고 내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는 정미(丁未)7조약을 체결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이완용은 황제를 향해 칼을 빼들고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고함까지 질렀다고 한다. 반일 단체인 동우회(同友會) 회원들은 이완용의 자택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전국 각지에서 이완용 화형식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이완용은 군대 해산에 앞장서는 등 친일 행보를 계속했다. 그 공로로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을 받았다.
그는 자식이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고종의 막내아들 영친왕을 내세웠다. 막후에서 실질적 권력을 쥐려 했던 고종의 노욕을 이용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나면서 사법권을 넘기는 작업을 계획하고 이 일을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맡겼다. 내각 내에서도 반대가 빗발쳤지만 그는 일본과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에 서명해 버렸다.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을 받았다. 조선인으로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조선 왕족 3명을 제외하면 이완용이 유일하다.
통감부,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했다. 이완용은 추도회에 참석해 “이토 공은 나의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가 제창한 극동평화론(極東平和論)의 뜻을 지지하고 존경한다”고 말하고 안중근 의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해 12월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 의사가 이완용을 습격했다. 이완용은 칼에 세 군데를 찔렸지만 목숨을 건졌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합방(合邦)을 앞당기기 위해 이완용과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宋秉畯)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완용은 핵심 측근 이인직(李人稙)을 통해 “현 내각이 와해되어도 이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일본에 합병을 먼저 제의했다. 송병준과 친일 경쟁을 하던 그가 선수를 친 것이다.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합병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제는 국호는 조선으로 변경했지만 순종에게 ‘이왕(李王)’, 고종에게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칭호를 주고 한국 황실을 일본 황족에 준해 예우하기로 약속했다.
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통감부 관사로 찾아가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조약문에 서명했다. 조약체결 후 이완용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伯爵)의 작위와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恩賜)공채금 15만 원을 받았다.
3·1운동 당시 ‘경고문’ 발표
1912년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랐다. 일제하에서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이완용은 ‘일선융화(日鮮融化)’를 내세우며,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권장하는 동화정책에도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가 그를 찾아가 독립선언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 오히려 당시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편지를 보내 탄압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완용은 1919년 3월 28일에 쓴 친필 편지에서 “수습방책은 내선인동화(內鮮人同化)에 있습니다. … 먼저 조선인들에게 국어(일본어)를 보급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더 나아가 이완용은 조선 민중을 상대로 “조선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몰각한 망동으로서 이를 자각하지 못하면 강압책을 쓸 수밖에 없다. 한일합방은 조선 민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이다.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로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경고문까지 발표했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려주었다. 1923년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이 되었다.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李恒九)도 남작(男爵)이 돼 보기 드문 부자귀족(父子貴族)이 되었다. 이완용은 일제에 협력한 공으로 막대한 부(富)도 누렸다.
이완용은 1926년 폐병으로 69세에 삶을 마감했다. 장례식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 50명의 장례위원이 엄수했고 장례 행렬의 규모는 고종 황제 장례 행렬을 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했다. 그는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에 항거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난을 당하여 분사(憤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상계의 자극은 될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일 뿐이다”라면서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고 변호했다. 근래에 나온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이라는 부제(副題)가 달린 《이완용평전》은 “지금까지 우리는 탐욕스럽고 패륜적이며 배은망덕한 인간 말종이라는 ‘그럴듯한 매국노 이완용 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삿대질을 하면서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겨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명수의 《일당기사》에는 이완용의 인생관이 기록되어 있다. “나(이완용)는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 갑오경장 후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에는 … 일파(日派)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망국의 책임을 이완용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고종의 정치력 부족, 민비와 대원군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척사 세력과 개혁 세력의 투쟁과 분화, 조선사회의 경직성과 부실한 근대화 개혁 등등 구한말 조선에 망국의 총체적 책임이 있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으로서 ‘자진해서’ 일제에 협조하여 망국에 마침표를 찍는 선봉장의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완용은 ‘매국노’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자신이 고백한 ‘천도와 변역’ 그리고 이러한 인생관에 따른 기회주의적 행적은 정치적 변신을 거듭했던 양아버지 이호준으로부터의 학습효과와 자기최면의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 글=장철균 서희외교포럼대표·전 스위스 대사]
□시세에 따라 변신을 거듭하다
글 이의화
흔히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을 친일파, 매국노라고 말한다. 일제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그런 지탄이야 어김없는 사실에 따른 매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매도쯤으로는 지금도 그는 지하에서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다. 1907년 2월 2일, 충복이요 비서였던 생질 김명수에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처음 스물다섯 무렵에 종래 조선 사람들이 목적으로 삼던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류가 점점 요긴했기 때문에, 그런 때에 신설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공부하고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뒤 을미년에 이르러 아관파천 사건으로 인해서 친러파라 일컬어졌다. 그 뒤 러일전쟁이 끝남을 알릴 즈음에 친러파에서 전환하여 현재의 친일파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무릇 천도에는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것을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에도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을 또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에 때를 따라 변역이 없다면 이것은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될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는 서양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목하 시세가 또 돌변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이런 기회를 타서 인사의 적의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언행잡록〉, 《일당기사(一堂紀事)》
그는 말을 마치고 “이는 숙질간의 이야기이니 남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때는 을사조약이 끝난 뒤 러 · 프동맹으로 국제정세가 변하고 있었고,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으로 지목하여 그를 죽이려는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힘의 논리에 따라 처음에는 수구파, 다음에는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하다가 그 ‘변역’을 보아 다시 변신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니 친일파, 매국노라는 지목은 결과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또 평상시에 조선 사람들이 흰 옷과 푸른 옷을 즐겨 입는 것을 보고 이런 습속을 고치기 위해 무슨 색깔이 좋을지를 궁리했다. 그런 끝에 회색이 좋다고 하여 사시사철 회색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는 기질적으로 회색분자이면서 자신의 권세와 이권을 챙기기 위해 변신을 거듭했다. 이로 따져보면 그가 영원한 스승으로 받들던 죽은 이토 히로부미도 그에게 고마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자기의 이권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는 어떤 출신 배경을 가지고 이렇듯 시대의 패륜아와 탕아로 전락했던가?
일가붙이 부호의 양자로 가다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의 가난한 선비 이호석(李鎬奭)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들 이씨는 본관이 우봉(牛峯)으로 대대로 노론계열에 속했다. 이호석의 5대조 이재(李縡)는 숙부 이만성(李晩成)이 신임사화 때 노론계열로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용인에 은거하며 성리학에 몰두했다. 그 뒤 이들 자손은 영락하여 겨우 선비 체면만 세우며 살았다.
이완용은 여느 경우처럼 아버지에게서 《천자문》, 《동몽선습》 따위를 배우다가 열 살 때에 이호준(李鎬俊)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이호석과 이호준과는 6대조에서 갈려나갔으니 먼 일가붙이였으나(32촌) 이호준의 집안은 거의 대대로 양자로 가계를 이어왔기에 당내친(堂內親, 8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에서는 양자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이호준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살고 있었는데, 처가 덕분으로 벼슬을 얻어 했으니 이호석의 집과는 사뭇 가세가 달랐다. 이호준의 장인은 민용현으로 비록 민씨의 중심세력은 아니었으나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호준은 민씨의 힘을 입어 벼슬길에 나와서 1870년에는 전라감사가 되기도 했다.
촌아이 이완용이 안국동의 양갓집으로 들어온 날 양어머니 민씨는 정성껏 밥상을 차렸다. 양어머니는 그가 고기 씹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민씨 : 고기가 질겨 씹기 어려우면 뱉어내라.
완용 : 한번 입에 넣은 것을 질기다고 어떻게 뱉어냅니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흐뭇해 박수를 치며 웃었다고 한다. 또 마흔일곱의 중늙은이 이호준도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이런 그였으니 양자 이완용의 혼사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이완용이 열세 살 때에 명문가인 양주조씨 조병익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다. 이호준에게는 평양기생의 몸에서 난 아들 이윤용(李允用)이 있었으나 서자이기에 가통을 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흥선대원군의 외동딸(서녀)과 짝을 지어 사위가 되었다. 이렇게 이호준은 혼인관계에 있어 명문이나 세도가와 줄이 닿아 있었다.
이호준의 양자가 된 이완용은 독선생을 들여앉혀 글을 배웠고 명필을 초빙해 글씨도 익혔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주역》 등 유가경전을 거의 배우고 나서 스물다섯 살 때 증광별시(增廣別試)에 합격했다. 이 과거는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에 이를 경축하여 보인 시험으로 극도의 부정으로 얼룩졌다고 황현은 《매천야록》에 쓰고 있다.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그 뒤 그는 승지 · 규장각대교 등의 벼슬을 하면서 임금을 모시고 민비의 총애도 입었다. 그런데 그는 성장하면서 말수가 아주 적었고 목소리도 나직했으며 말을 할 적에는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했다고 한다. 또 농담이나 잡담도 거의 하지 않았다. 몸가짐을 신중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성격은 돌과 같이 침착하고 얼음과 같이 냉철하여 소심주도(小心周到)하고 사려 과단한 변종의 인물이었다”(《한국근대사론저집》)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그는 남달리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입었다.
그는 1885년 4월 홍문관 수찬으로 6품직에 올랐는데, 이때에 그는 홍문관에 있는 동료 민종식, 이준용 등과 함께 여섯 차례에 걸쳐 신기선(申箕善) 등 갑신정변의 연루자를 국문하여 뿌리 뽑으라고 강경하게 요구했다. 그는 이때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민씨 추종세력임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또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
이해 8월 조정에서 육영공원을 세워 귀족의 자제를 뽑아 산수, 언어, 정치, 물리 등의 과목을 가르칠 적에 그도 여기에 들어갔다. 또한 1887년 4월에 왕과 영의정 심순택이 보는 앞에서 갑신정변의 혐의자인 신기선, 지운영, 지석영 등을 국문할 때에는 문사낭청(問事郎廳, 심문관)의 자격으로 여규형 등과 함께 참여하여 신임과 명성을 얻었다.
1887년 7월, 박정양이 미국전권대신으로 갈 때 이완용이 참찬관으로 따라갔다. 그가 육영공원에서 배운 영어와 서양 지식을 써볼 기회를 잡은 것이다. 당시 미국공사관원은 10여 명이었다. 그는 미국생활 5개월이 채 못 되는 때 풍토병에 걸려 이를 핑계대고 돌아왔다.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는 처지를 염려해 급하게 돌아온 것이라 볼 수도 있고 향수병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부승지 따위의 벼슬을 받아 다시 임금 곁에 있었고 이어 외무참의로 승진했다.
1888년 10월에 그는 다시 미국의 대리공사로 부임했다. 당시 박정양이 미국에서, 조선 속국(종주권)을 내건 청국의 외교정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원세개의 압력을 받아 10개월 만에 소환의 명을 받고 귀국하게 되자, 그 대리의 일을 이완용이 맡은 것이다. 박정양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등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현지법을 어기고 담배를 시장에 내다 파는 밀수행위를 하여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그는 상투를 틀고 모자를 그 위에 쓰고 너덜너덜한 관복을 입고 다녀 어린애들에게 돌팔매질을 받기도 했다. 청국의 간섭과 견제로 허수아비나 다름없어서 미국인 알렌이 외교 임무를 도맡아 했다.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받으며 이권에 개입한 인물로 고종의 지시에 따라 미국공사관원의 일원이 되었다.
이와 달리 대리공사로 간 이완용은 영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조선에는 엄청난 금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한편으로는 “서울에는 서양인들이 조선의 어린애를 잡아가서 눈을 도려내 사진기의 렌즈로 쓰거나 끓여서 약을 먹는다는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실제 서울에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그리하여 자본가들이 서울 진출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완용의 처지는 박정양보다는 나았지만 별다른 외교활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미국대리공사로 2년쯤 봉직하고 돌아왔을 때에는 미국의 여러 정치제도와 문화 · 경제 등 미국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대미외교의 1인자가 되었고 또 친미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조선인으로 서재필, 윤치호, 유길준과 함께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꼽혔다. 내무참의를 지내고 나서 외교 · 통상과 관련이 깊은 기관인 교환서, 전환국, 육영공원의 책임을 맡아보았다. 30대 후반의 나이로 3년간 관료로 봉직한 이 시기야말로 조야의 명망을 얻고 임금의 신임을 두텁게 한 득의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젊고 패기에 찬 관료로 한국 근대화에 공헌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894년은 격동의 해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벌어졌으며 그런 소용돌이 가운데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성립되고 갑오개혁이 이루어졌으며 민씨정권이 타도되었다.
이 시절 이완용은 어떻게 처신했던가? 그는 이때 생모의 초상을 치르느라 일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있었다. 당시 그는 분명히 보았다. 민중의 저항이 요원의 불길과 같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현실을 겪었고, 개방을 단행한 일본이 거대한 청나라를 압도하고 있음도 보았다. 그러나 일본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세력이 있음도 뚜렷이 보았다. 곧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요동과 대만을 할양받았으나 러시아와 프랑스 · 독일의 간섭으로 요동을 반환하는 일본의 초라한 몰골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이런 국제정세를 읽고 친러파로의 변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 8월, 그에게 일본 보빙사 박정양과 함께 일본 전권공사로 나가라는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청국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낸 판국에 일본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사절이었다. 그는 마침 생모의 복상을 입고 있었는데, 고종은 그에게 제복행공(除服行公, 복상 입는 일을 중지하고 공무에 나오는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 간곡하게 이를 사양했다. 하지만 외부협판이라는 중책이 다시 주어졌다. 당시 외무대신은 김윤식이었고 내무대신은 박영효였으니, 그는 실권을 잡지 못한 처지였다. 아무튼 친미파 이완용의 새로운 변신을 기대해볼 만할 것이다.
영악한 민비는 이때 대외정책을 배일친러로 전환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 · 영국 · 독일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민비는 러시아공사관에 사람을 보내 접촉을 시도했다. 또 외교관료들이 중심이 된 정동파들이 민활하게 움직였다. 정동파는 미국 · 러시아와 유럽의 강대국과 연결하려는 정치집단이었다. 정동파는 러시아공사관과 민비를 이어주는 일을 맡아 나섰다. 망명해 있던 서광범과 서재필도 귀국해 정동파에 들었다. 이완용은 어느새 정동파의 리더가 되었다.
고종은 친일 김홍집 내각을 물러가게 하고 박정양 내각을 출범시켰다. 여기에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미국인 알렌이 고종에게 박정양과 이완용을 추천했던 것이다. 중립적 태도를 보인 박정양은 개성이 없는 인물로 소문이 났지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학부대신으로 입각한 이완용은 달랐다. 이들은 차츰 친러파로 변신을 했다. 이완용은 4개월 동안 학부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성균관을 개편해 역사와 지리와 산술 등을 가르치게 했고 소학교령을 공포해 초등교육을 강화하는 조치를 단행했으며 한성사범학교를 설립하게도 했다.
1895년 8월 20일, 마침내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서울 주재 일본공사 마우라 고로의 공작으로 흥선대원군이 가담하고 외교관이 낀 일본의 낭인들과 조선의 훈련대 군사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민비를 죽이고 시신을 불태웠다. 그리고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떠받들고 제3차 김홍집 내각을 등장시켰다. 이때 내각에서는 단발령을 발동해 상투 자르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에 전국에서는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 친일내각의 타도에 나섰다.
이때 이완용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는 그의 형 이윤용과 함께 미국공사관의 서기관 알렌의 주선에 따라 미국공사관에 피신했다. 당시 그는 친미파여서 미국의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는 미국공사관에 있을 때 중추원의관으로 임명되었다. 중추원은 내각의 자문기구였으나 실권이 없는 자리였다.
아관파천을 주도하다
그는 새로운 음모를 꾸었다. 그는 이범진, 안경수(安駉壽) 등과 어울려 고종을 친일내각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게 하려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돌리려 했다. 그러나 안경수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완용은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서울에 숨어 지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알렌 등의 협력과, 다시 잠입한 이범진과 모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고종과 태자를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돌리는 일을 성공시켰다. 1896년 2월 11일의 일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아관파천이라 한다.
아관파천에 성공한 이들은 곧 친러의 박정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때 이완용은 외부대신을 차지했고 이어 농상공부대신의 서리 등 요직에 앉았다. 그의 형 이윤용은 군부대신에 경무사(警務使)까지 겸임했다. 이때 그들 형제는 외교 · 군사 · 경찰권을 모두 거머쥐었다. 친러내각은 곧 친일파 김홍집 등의 포살령을 내렸는데,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은 민중들에게 맞아 죽었고, 유길준, 장박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베베르와 알렌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에 가두어놓고 이권을 하나씩 챙기고 있었다. 러시아는 채 익지도 않은 고기를 황급히 먹고 있었던 셈이다. 이완용은 관련 부서의 대신으로 있으면서 이들 이권의 허가에 서명을 해주었다. 이때 그는 많은 뇌물과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이해 7월에 들어 명망가와 유지들은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과 중국사신이 머물던 모화관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고자 했다. 이때 영은문은 청일전쟁 때 불타 없어졌고 모화관은 시민들에 의해 이미 헐려 있었다. 종래 두 건물을 헐어버리고 독립문을 세우려 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는 온건 개화파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외교관료 중심의 정동구락부 회원들이 가담했다. 이 독립협회에 이완용은 정동구락부의 회원으로 끼어들었다. 그 주요 회원을 보면 서재필, 안경수, 김가진, 이상재, 오세창 등이었다. 이완용은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사람들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을 몰라보았으나 그 자신이 일생 벌인 행적 중에서 이것만은 차마 욕을 퍼붓지 못할 대목일 것이다.
그는 위원장으로 독립문 정초식을 주도했고 왕실과 민중을 묶어 이 운동에 참여시키는 데에 일정한 공헌을 했다. 시민 · 학생 등 4천여 명이 모인 정초식에서 그는 ‘조선의 전정이 어떠할꼬’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와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하기에 달려 있다.
- 《일당기사》, 〈독립신문〉
물론 하나도 어긋남 없는 바른 말이었다. 그는 독립문 윗자리에 있는 제자(題字)인 한글과 한문 글씨도 썼다고 전한다. 명필의 글씨인 한글과 한문의 독립문 여섯 자는 지금도 독립문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뒤 그는 고종의 환궁을 추진하여 베베르의 미움을 받았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뒤에 덕수궁)으로 옮기고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완용은 비서원경으로 발탁되었고 다음해 2월에는 독립협회의 2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종로에서 열고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해고하라고 요구하는 등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로 하여 이완용은 러시아와 황실의 견제를 받았다.
이어 독립협회 회원들이, 차츰 보수 경향으로 흘러가고 개혁을 외면하는 정부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정부에서는 서재필의 해고와 〈독립신문〉의 폐간을 꾀했다. 이어 독립협회가 민중 주도의 체제로 정비되고 외국의 이권개입을 규탄하고 나서자, 이권을 넘겨준 일에 앞장섰던 이완용의 입지도 난처하게 되었다. 1년 6개월 정도에 걸친 이완용의 독립협회 참여는 민족운동에 가담한 최초요 최후의 기록이다.
이제 친러파는 점점 빛을 잃고 있었고 친일파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때에 그는 다시 독립협회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의 요직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몇 년 동안 전라북도관찰사(전국의 행정구역 개편하여 전라도를 남북으로 가르고 관찰사를 각기 두었다)로 내려가 있었다. 이때 이완용은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었다는 지탄을 받고 독립협회 회장자리에서 밀려났다. 그에게 닥친 위기였으나 그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이완용은 어느 때에 정읍, 순창, 장성, 남원, 부안을 유람하러 나섰는데 기생 4명에 나졸을 합해 1백여 명이 움직였으며 돈 4천 냥을 경비로 사용했다(〈황성신문〉 1898년 11월 17일자). 나졸들의 행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게다가 가렴주구를 일삼아 원성이 높았다. 그런 탓인지 2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하지만 5개월 뒤에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발탁되었으나 거절하고 양부가 죽자 상복을 입고 정계에 등장하지 않았다.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그러다 다시 기회가 왔다. 러시아는 남진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일본과 맞섰다. 일본은 국제정세의 추이를 보다가 영일동맹을 맺고 나서 러시아의 조차지인 여순을 기습함으로써 러일전쟁을 도발했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도발한 뒤 대한제국에게서 한러조약의 파기를 강요하고 이어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하여 고문정치를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러시아에 일대 승리를 거두었다. 이해 11월 2일에 그는 오랜 잠복기를 끝내고 궁내부특진관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왔다. 이제 눈부신 친일주구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주둔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일선에 내세워 친일파를 곳곳에 박아두고 있었다. 재야 쪽으로는 일진회를 만들어 이용구, 송병준, 윤시병을 내세워 일제정책에 협력하거나 사주받는 단체로 써먹으려 했고, 조정안에는 이지용, 이완용, 박제순 등을 박아두어 그네들의 수족으로 부려먹으려 했다.
이런 구도에 따라 이완용은 1905년 9월 학부대신이 되었다. 햇수로 따져 9년 만에 다시 대신의 자리를 얻은 것이다. 이 무렵 이토 히로부미는 특명전권대사로 들어와 손택호텔에 자리 잡고 새로운 중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먼저 일본 군부가 러일전쟁 때 써먹고 버린 일진회를 다시 회유하여 끌어들이는 한편, 이완용 등을 철저한 주구로 만드는 일을 벌였다.
그리하여 일진회에서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것이 동양평화를 위해 어길 수 없는 일이라고 조정에 요구하기도 하고 대중들에게 떠벌였다. 이런 이야기는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이토는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해 공식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는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모으고 위협 · 공갈을 일삼으며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고 한국을 보호한다”는 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이때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모두 ‘절대 반대’하기로 내약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완용이 불쑥 “오늘의 동아 형세를 살펴볼 때 일본의 제안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지난날의 모든 조약이 일방적인 강요에 못 이겨 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늘 그 조약의 글자수정을 못한 것에 후회하였습니다. 그러하니 이번 새로운 조약은 서로 변동할 수 있도록 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 《일당기사》
이 말을 들은 한규설은 펄펄 뛰었으나 이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들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토는 군대를 서울시내와 궁궐 안에 풀어놓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때 이완용은 또 말했다.
군신 사이에 문답하면서 오직 ‘불가’ 두 자로만 말하니 이를 사체로 따져서는 말할지 모르나 형식상의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이 미리 강구해둔 바가 있습니다. 이 조약 중에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서 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조약 3조의 통감 밑엔 ‘외교’ 두 자를 명연하지 않음으로써 이는 뒷날 끝없이 번거로운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또 외교권은 우리나라의 실력이 충실할 때를 기다린 뒤 반환될 것이므로 지금 경솔하게 연한을 정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렇다고 이를 모호하게 보아 넘길 수도 없습니다.
- 《일당기사》
이것을 두고 괴변이라고 하는가? 어쨌든 이 말을 들은 이토는 하세가와를 대동해 궁궐로 들어가 마구잡이로 보호조약을 통과시켰다. 이때에 이완용은 다시 이와 같은 수정을 말하고 또 ‘황실의 안녕’ 조항을 삽입하자는 요구 아닌 요구를 했다.
이때 회의에 참여한 대신 중에 다섯 명은 ‘가’, 세 명은 ‘불가’라고 했는데, 그 ‘가’의 다섯 대신을 5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런데 5적 중에서도 처음 ‘불가’를 말한 대신도 있었으나 이완용과 이지용만은 처음부터 ‘불가’를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내각총리대신
보호조약을 체결할 때 ‘가’를 외친 다섯 명의 매국노를 우리는 오적이라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불가’를 외치다 바꾼 이도 있지만 이완용은 처음부터 ‘불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약을 맺고 나온 뒤 이지용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날 최명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국가의 일을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조청전쟁(병자호란) 때의 주화파인 최명길을 끌어대어 나랏일을 했다고 떠벌린 것이다. 이완용은 또 “내가 황실을 보호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고 뽐냈다고 한다. 나라 잃은 황실의 존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05년, 양력으로는 11월 17일이요 음력으로는 10월 21일 새벽, 이씨의 조선 왕조는 사실상 무너졌다. 이 나라는 껍데기만 남고 일제의 지배로 들어갔다. 전국 곳곳에서 새로이 의병이 일어났고 5적을 향해서는 암살 · 테러를 가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때의 정황으로 보면 5적들이 제명에 살 것 같지 않았으나 목숨은 모진 것이라는 말이 진실인 것도 같다.
조약을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이 귀양살이를 떠나고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해온 뒤 그는 내각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보호정치 아래의 총리대신은 일제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토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이토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그의 내각에 또 한 사람의 씻을 수 없는 친일파 송병준이 농상공부대신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그 둘의 주구경쟁이 볼 만할 것이다.
고종을 퇴위시키다
그가 통감 이토의 위촉을 받아 내각을 조직할 때에 각원(閣員) 중 두 사람을 이토 스스로 추천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통감부의 촉탁인 조중응을 법무대신, 일진회 고문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들여앉혔다. 두 사람의 자격은 따질 것도 없거니와 참으로 의외의 요구였으나 그는 꼭두각시이고 보니 그대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토가 두 사람을 이완용의 경쟁자로 내세워 다음의 계책을 추진하려는 음모였다.
50세의 이완용은 참정대신(뒤에 총리대신으로 고침)이 되었는데 이토의 지시를 받는 것 이외에는 걸릴 것이 없었다. 이런 때에 또 하나의 사단이 벌어졌다. 1907년 6월 고종이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이준 등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사실이 들통 난 것이다.
이때 이토는 이완용에게 세 가지 일을 지시했다. 첫째, 황제의 상징인 옥새를 빼앗을 것, 둘째, 사람을 뽑아 섭정하게 할 것, 셋째, 고종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천황에게 사죄하게 할 것 따위였다. 이것을 고종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이에 이완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종에게 “태자에게 황제의 위를 넘겨주라”고 요구했으나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폐하, 지금이 어느 세상입니까?
고종은 이런 이완용을 흘겨보다가 “그렇다면 태자에게 위를 넘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다음 날 태자에게 황제대리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즈음 이완용, 송병준 등은 늘 칼을 차고 임금 앞에 나타났다. 예전에는 임금의 시종 이외에는 결코 임금 앞에서 무기를 지닐 수가 없었는데, 이들은 이런 왕실의 규정을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자의 대리는 양위로 바뀌어버렸다. 이완용의 작란으로 일본 천황으로부터 엉뚱하게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전보가 왔고, 이완용은 그 전보내용대로 고종의 퇴위를 계속 강요하여 성사시켰다. 이어 이완용과 이토는 내정마저 일본통감부에 넘겨주는 이른바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당시 내각의 대신으로 서명했던 일곱 대신은 역사에서 7적(七賊)이 되었고 5적에서 빠졌던 송병준도 당당히 여기에는 끼었다. 전국에서 의병이 다시 벌떼처럼 일어났고 서울의 시민들은 이완용 등 7적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때 이완용의 집은 남대문 밖 약고개(지금의 중림동)에 있었는데, 조상인 이만성(李晩成) 등 모든 신주가 불에 타버렸다.(《매천야록》) 손자 잘못 둔 탓에 애꿎은 조상만 욕을 당한 것이다.
이완용의 가족은 몸을 피해 진고개 왜성구락부로 기어들었다. 일본군은 일본인 거주지역인 진고개(지근의 충무로 일대) 주변에 철저한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이곳에서 두 달쯤 머물렀다. 그는 이런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의병과 폭도를 다스리기 위해 일본 군대보다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필요하다고 하여 수많은 헌병보조원 제도를 만들어냈다. 이들 헌병보조원은 뒷날 식민 치하에서 일제 헌병이나 경찰보다 더욱 날뛰었다.
이 무렵 이완용의 주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소문이 떠돌았다. 이완용의 큰아들 이명구가 일본에 수년간 유학 가 있었는데, 이때 이완용이 그의 며느리를 간통했다는 것이다. 이명구가 돌아와 어느 날 안방에 들어 가보니 아버지가 자기 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명구가 문을 닫고 나와 “집안과 나라가 함께 망했으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고 탄식하고 자살했다 한다. 그 뒤 이완용은 며느리를 독차지해 첩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 일본 유학 간 것과 돌아온 시기, 그리고 죽은 사실이 모두 부합되니 이 이야기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까? 아니면 민중들이 그를 헐뜯으려 만들어낸 이야기일까? 이완용의 평전을 쓴 윤덕한은 이는 허구날조라고 말한다. 아무튼 이완용은 일본 한국통감부가 시키는 대로 잘도 따랐다. 이런 너절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다 늘어놓을 수가 없다.
이즈음 그의 심사는 말이 아니었다. 일진회는 송병준과 이용구의 사주로 연일 ‘합방론’을 부르짖으며 성명서를 내기도 하고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더욱이 내부대신으로 있던 송병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합방선언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고 있었다.
이완용으로서는 이를 덮어둘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지 이해 12월 4일 그의 충실한 비서인 이인직(李人稙)과 민씨의 잔당 민영규(閔泳奎)를 시켜 국민대연설회를 개최하게 했다. 원각사에서 열린 연설회에는 시민 4천여 명이 모여들었고 연사로 나선 민영규, 이인직 등은 합방을 주장하는 이용구, 송병준을 규탄하면서 일진회와는 결단코 같은 국민이 될 수 없다고 떠벌렸다.
여기에 참석한 민중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완용은 이런 일을 벌이며 한편으로는 일진회의 합방안 따위를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퇴짜를 놓고 있었다.(황현 《매천야록》,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이렇게 몇 자락을 깔며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을 적에 그가 칼을 맞았으니 여간 통분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이때 죽었더라면 오명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는 일진회로부터 국정을 농단했다는 공격을 연달아 받았다. 이토와 긴밀히 상의한 끝에 그 배후 조종자인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을 수석 대신인 내무대신으로 기용했다. 이로 해서 일진회는 이완용에 대한 공격을 한동안 멈추었다.
1909년 1월 이완용은 순종과 이토와 함께 기차를 타고 북도 순행 길에 나섰다. 기차가 중화역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었는데 손에는 일장기를 들고 있었다. 분노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토에게 이완용이 영어로 말을 건넸다.
이완용 : 통감 저기를 보십시오. 저 노인이 들고 있는 국기가 어느 나라 국기입니까?
이토 : 일본 국기지.
이완용 : 그러면 저 노인은 어느 나라 백성입니까?
이토 : 조선인이오.
이완용 : 조선인이 일본 국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도 조선인들은 아직까지 국기에 대한 관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세계적 대정치가인 통감각하께서 이 정도의 사소한 일을 가지고 격노하십니까?
- 윤덕한 《매국과 애국의 두 얼굴 이완용 평전》 〈이토 암살의 넋을 잃고〉
이 대화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아직 완전히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1909년 12월 그는 명동성당에서 있은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여했다. 그가 막 성당 문을 나와 인력거를 타고 출발하려 할 때에 한 청년이 뛰어나와 인력거꾼을 먼저 찌르고 이어 이완용의 어깨부터 심장 부위를 찔렀다. 이완용은 대한의원에서 53일 동안 치료를 받고 용케도 살았으나 칼끝이 왼쪽 폐를 찔러 결국 후유증으로 뒷날 죽게 되었다.
1909년 10월 이토는 조선에 이어 다음 차례로 만주를 침략하려는 공작을 꾸미기 위해 하얼빈역에 내렸다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그야말로 웅지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완용은 실성한 사람처럼 얼이 빠져 있었다 한다. 서울에는 사흘간 이토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가무음주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또 정부대표의 조문사로 한성부민 대표인 유길준과 함께 다롄에 갔고, 이어 이토의 국장을 도쿄에서 거행할 때에는 서울 장충단에서 추도제를 주도해 거행했다.
그가 쓴 제문에 “아아 애통하도다. 동쪽 바다의 원기와 후지산의 정기가 한 위인을 내서 영웅으로 우뚝 살았도다. 정치의 경략으로 개명(開明)을 먼저 만들어내고 아시아 모든 지역에 평화를 유지하게 하니······”(《일당기사》) 따위의 말을 늘어놓았다.
1910년 5월에 들어 일본은 합방을 실현하기 위해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를 새 통감으로 삼아 내보냈다. 이완용은 온양에서 요양하다가 데라우치의 부임소식을 듣고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뛰어올라왔다.
한일병합에 앞장서다
데라우치는 그에게 한일병합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론의 여지가 없음을 말하고 다만 “농사짓는 자는 농사짓고 장사하는 자는 장사하고 공업하는 자는 공업에 종사하면 예전처럼 살 수 있으나 양반들은 선악을 따질 것 없이 국가의 존망과 같이 하므로 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인도천리로 보아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조선귀족령이 생겼다.
어쨌든 병합조약(정식으로 따지면 ‘합방’이 아님)은 을사조약 때에 비해 식은 죽 먹기였다. 그의 하수인이요 시종원의 책임자인 윤덕영은 순종이 통곡하다가 잠들자 조약 내용을 적은 종이딱지에 스스로 옥새를 찍어 이완용에게 건네주었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5시. 이제 조선 왕국, 아니 우리 겨레가 이 땅에 터전을 잡고 산 지 5천 년 만에 처음으로 껍데기 왕조마저 날려 보내고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나라가 완전히 넘어간 뒤 그 이름도 그럴듯한 조선의 귀족 65명은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이완용은 일본 귀족으로 따져 넷째 자리인 백작에 은사금 1천 5백여 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조선총독부정무총감이 의장인 중추원의 부의장(처음에는 고문)이 되었다.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일본과 조선 사람의 혼혈을 주장하면서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관료 출신으로는 민영휘와 함께 가장 많은 재산을 모은 자산가로 꼽혔다.
▲이완용은 자신의 권세와 이권을 챙기기 위해 힘의 논리에 따라 수구파에서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을 거듭했다. (왼쪽이 이완용)
이렇게 호의호식하며 나날을 지낼 적에 또 한 번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곧 3·1운동이었다. 그가 왕세자 이은과 일본의 황족녀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도쿄에 막 도착했을 때 “고종이 승하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더욱이 이 결혼을 그가 중매쟁이가 되어 추진시켰다. 그는 급거 귀국하여 서울에서 장례절차에 간여하기도 하고 고종의 덕행을 적은 시책문을 쓰기도 했다. 정말로 아이러니였다.
이때 손병희가 그를 찾아가 민족대표와 독립선언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는데 이를 고자질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3·1운동이 진행되는 시기인 4월 5일 경고문을 〈매일신보〉에 내고 이어 두 차례에 걸쳐 포고문을 냈다. 청년 · 학생들이 학업에 열중하지 않고 가산을 탕진하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조선독립은 실력양성이 있은 뒤에 이루어진다고 떠벌렸다. 이른바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실력양성론’을 들고 나오기 전에 그가 먼저 조선총독부의 눈치를 살펴 이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천재적 변신술이요 출세수단이었다. 이런 공로 탓인지, 이듬해 그는 백작에서 후작으로 뛰어올랐다.
3·1운동 뒤 일제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사이토 마코토를 맞이하러 부산까지 내려갔다. 그들 일행이 서울에 내리자 강우규 의사가 던진 폭탄이 사이토 마코토가 탈 마차에 터졌다. 두 사람 모두 이때도 화를 면했다. 질긴 운명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1920년 3·1운동에 따른 공로로 그에게 후작이 주어졌다. 1924년에는 아들 이항구도 남작을 받았다.
철저한 친일부역배로 생을 마감하다
1926년 양력 2월 11일, 여염에서는 한창 음력설 준비를 서두를 때 그는 서울 옥인동 자기 집에서 죽었다. 그는 겨울철만 되면 해수병이 도졌는데, 이때에도 천식으로 자리에 누웠다. 이재명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이었다.
그의 명정에는 ‘조선총독부중추원부의장정이품대훈위후작이공지구(朝鮮總督府中樞院副議長正二品大勳位侯爵李公之柩)’라 썼다. 도대체 학부대신이나 내각총리대신 같은 높은 벼슬을 쓰지 않고 겨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아래에 두었던 중추원부의장의 직함만 썼으니 죽어서까지 철저한 친일부역배가 된 것이다. 그의 영결식이 용산에서 있었는데 기마대들이 호위를 맡아 돌고 무수한 조화와 만시를 쓴 깃발이 펄럭였으며 자동차와 인력거가 뒤를 따랐다. 천여 명의 조문객과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10여 리에 뻗혔다.
그의 시체는 특급열차에 실려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선인봉 아래 명당 터에 묻혔다. 이 명당은 그가 전라북도관찰사로 있을 당시 유명한 풍수쟁이를 시켜 잡은 것이다.
그러나 명당이 무슨 소용인가? 8·15광복 후 넓은 그의 묘지가 곧잘 국민학생들의 소풍장소가 되었다. 아이들이 묫등에 올라 “요놈 매국노 뒈져라”라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미국에 숨어 있던 손자들이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화장하고 무덤을 없애버렸다 한다. 그리고 그의 손자와 증손자들은 지금도 미국과 서울에서 출신을 숨기며 살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구파, 다음에는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하여 시세를 잘도 타서 얻은 그 많은 권세와 재산과 명당이 이렇게 끝나버렸으니 천도와 인사가 무심하지 않은 것인가?
곧잘 시대가 영웅을 만들기도 하나 때로는 시대가 한 인물을 삼키기도 한다. 그는 분명히 글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예술도 이해하고 머리도 좋아서 훌륭한 교양인으로 남을 수도 있었으나 마음 하나 잘못 먹은 탓으로 영원한 매국노가 된 것이다. 그를 객관적으로 다루려는 의도에서 평전을 쓴 윤덕한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탐욕스럽고 패륜적이며 배은망덕한 인간 말종이라는 ‘그럴듯한 매국노 이완용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삿대질을 하면서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겨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망국의 치욕감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 위안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 아닌 것에서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는 없다. 이제 문제는 ‘엉뚱한 이완용 상’에 욕설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한때 대단히 애국적이었던 인물이 어떻게 해서 만고의 매국노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비극적 과정과 변신의 논리를 밝히는 데 있다.
- 《매국과 애국의 두 얼굴, 이완용 평전》
과연 이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의 전반기의 모습은 한 가닥 인정해줄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는 영어는 할 줄 알아도 일본어로는 거의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다고 하고, 평소에 양복과 조선옷을 입었으나 일본옷은 입지 않았다고 하며, 기독교나 일본 신도를 믿지 않고 불교를 받들었다 한다. 이런 일상생활의 모습은 또 무엇을 시사할까? 이제까지 장황하고 지루한 이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할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의화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2018.02.23 ‘한일합방’ 앞장선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 일본과의 ‘합방(合邦)’ 통한 문명화 추구했던 친일매국노
▲ 한일합병에 앞장선 일진회장 이용구
‘친일파(親日派)’의 대명사 이완용(李完用)보다 일본이 ‘진짜 친일파’로 여기는 사람이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1868~1912)이다. 우리의 이완용에 대한 ‘친일파’라는 표현은 ‘매국노(賣國奴)’라는 의미다. 하나 일본의 이용구에 대한 ‘친일파’라는 인식은 ‘지사(志士)’라는 뜻이다. 우리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얘기지만 말이다.
이용구는 186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고려 벽진상군 이총언의 32대손이지만 이용구가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몰락한 상태였다. 13세 때 아버지마저 죽었다. 한때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노모와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했다. 그럴 때 사람은 세상을 뒤집고 싶어 한다. 1890년 이용구가 동학(東學)에 입교(入敎)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는 손병희(孫秉熙) 등과 함께 동학의 2대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에게 배웠다.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났다. 이용구는 전봉준(全琫準)의 호서군(湖西軍)에서 활동했다. 공주전투에서는 일본군과 싸우다 총상을 입었다. 동학란이 실패한 후 이용구는 투옥됐으나 용케 사형(死刑)을 면하고 풀려났다.
최시형이 처형된 후 손병희는 동학조직을 재건하려 했다. 하지만 ‘동학도=역도(逆徒)’로 치부되던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병희는 동학 재건을 위해 세계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1년 3월 손병희는 동생 손병흠, 이용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손병희는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을 쓰며 조선의 갑부로 행세했다.
당시 손병희는 박영효·오세창·권동진 등 개화파 망명객들은 물론 일본 각계 인사들과 교유(交遊)하면서 문명개화에 눈을 떴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손병희는 교토부(京都府)를 통해 1만 엔의 군사비를 헌납했다. 일본이 승리하고 한국의 내정을 개혁하면 동학 재건의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진보회
▲진보회장 이용구와 일진회장 송병준(왼쪽)은 일진회를 만들어 친일행각을 벌였다.
손병희는 그해 3~4월경 이용구를 국내로 보내 평안도에서부터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게 했다. 그해 9월 대동회는 진보회(進步會)로 개칭했다. 대동회나 진보회 모두 문명개화를 할 것을 주장하는 친일적 색채가 강했다. 진보회는 옛 동학 조직을 기반으로 지방조직을 구축해 나갔다. 1904년 12월 진보회의 회원 수는 11만7000여 명에 달했다.
진보회가 세력을 확장하자 송병준이 만든 일진회(一進會)가 손을 내밀었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유신회(維新會)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가 곧 일진회로 이름을 바꿨다. 일진회는 창립취지서에서 “일진은 일심진보(一心進步)할 주의(主義)”라고 밝혔다.
일진회는 겉으로는 과거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윤시병·유홍주·염중모 등이 주도했지만 그 뒤에는 일본군 통역관 송병준이 있었다. 송병준은 제12사단 병참감 오타니 소장을 비롯한 일본 군부가 뒷배를 봐주고 있었다. 일본 정계 요로에 폭넓은 인맥을 가진 극우단체 흑룡회(黑龍會)도 송병준을 후원했다.
이런 배경에도 일진회는 한계가 있었다. 한성에만 3600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었을 뿐, 지방조직이 전무(全無)했다. 이게 송병준이 탄탄한 지방조직을 갖춘 진보회에 눈을 돌린 이유다. 진보회와 일진회 모두 강령이 흡사했다. 두 단체 모두 황실존중, 정부개혁, 인민의 생명·재산보호, 군정(軍政)·재정정리를 내걸었던 것이다
일진회의 탄생
진보회와 일진회는 1904년 12월 2일 일진회라는 이름으로 통합했다. 이용구는 통합 전에 일진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동양의 일각에서는 단지 일본만이 먼저 문명의 길을 열어 기예를 발달시키고 활기를 배양하여 세계열강과 함께 서 있다. 금일 우리 한국 정부는 혼미의 와중에 있어 아직 개명의 진정한 길을 열지 못하고 구습(舊習)에 젖어 전제 위압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독(毒)을 삼천리에 흘리고, 쇄국(鎖國)하여 2000만의 생령(生靈)에 압정을 가하고 있기에, 외국을 모욕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화(禍)가 미치고, 내정은 날로 이루어지지 못하며, 국세의 쇠퇴가 목전에 닥치고 있다. … 팔역(八域)에 격문을 날리자 한 번 외침에 백이 답하고 결사의 각오로 모여 여기저기서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은 일심(一心)의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 주지는 1일(日) 1보(步), 2일에 2보이니 일세(一世)의 백성을 1보의 지경에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강창일,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송병준도 “500년의 포학한 정령(政令)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생명재산의 안고(安固)를 도모하고, 다른 나라의 군사적 행동 또는 압박에 의한 병탄을 면하여 2000만 민중이 영원히 노예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 2000만 민중이 문명의 세례를 받아 자자손손(子子孫孫) 영원무궁한 복지를 향수(享受)하도록” 운운하며 이에 화답했다.
통합 초기 일진회는 중앙본회와 지방본회라는 이원(二元)조직으로 운영됐다. 중앙본회 회장은 윤시병, 지방본회 회장은 이용구가 맡았다. 송병준은 평의원장을 맡았다. 1905년 9월 일진회는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일원화하는 조직 개편을 했다. 윤시병이 본부 회장, 이용구가 지방총장, 송병준이 평의원장을 맡았다.
일진회, 자기 돈 써 가면서 일본군 지원
일진회의 양대 모토는 ‘친일’과 ‘반(反)정부’였다. 일진회는 친일단체였지만 일종의 야당을 자임했던 것이다. 당연히 대한제국 정부는 일진회를 탄압하려 했다. 하지만 러일전쟁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이 일진회를 노골적으로 비호했다. 일진회는 이런 일본군을 위해 몸 바쳐 충성했다.
일진회는 경의선 철도 공사와 일본군의 병참 지원에 회원들을 동원했다. 1904년 10월부터 1년 동안 경의선 공사에 동원된 일진회 회원 수는 14만9114명에 달했다. 흥미로운 것은 총 경비 14만9114엔 가운데 일본군이 이들에게 지급한 액수는 2만6410엔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차액 12만2704엔은 일진회원들이 부담했다.
이용구와 송병준은 일진회 통합 이전인 1905년 6~10월 북진수송대라는 것을 조직, 일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지원했다. 11만4500명이 동원됐다. 이들 중 49명이 죽거나 다쳤다. 북진수송대 역시 일본군이 부담한 비용보다 스스로 부담한 비용이 더 많았다. 총 경비 19만7750엔 가운데 일본군이 지불한 액수는 6만3530엔에 불과했다.
일진회는 1904년 9월 18일 이용구와 송병준의 약속에 따라 ‘문명화 및 일한일체화(日韓一體化)에 대한 서약의 표시’로 일제히 단발을 단행했다. 103명의 일진회원이 시작한 단발운동은 곧 전국으로 번져 20여만명이 단발했다. 이 사건은 《대한매일신보》(1904년 9월 19일 자)에 보도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일본의 보호국 되기를 자처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진회는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1905년 11월 5일 일진회는 이용구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한일 양국의 관계를 옛날로 회복하고자 함은 마치 사자(死者)를 회생시키려는 것이니 그 성패는 자명하다. 만약 외국의 간섭을 거부하고 독립의 명실(名實)을 완전히 하고자 한다면 분연히 궐기하여 그 이유를 만국에 선언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방의 지도에 순응하여 문명을 진척시키고 독립을 유지함이 가하다. …
한일 양국의 관계에 장래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알 수 없더라도 가령 외교의 권한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여 재외공사의 송환, 주한공사의 철퇴(撤退)가 있더라도 생길 문제는 무엇이겠는가. 이것을 논하는 자는 말하길 독립의 대권(大權)이 침해당하고 국가의 체면이 손상되며, 혹은 황망분주하며 망국의 탄식을 발하는 자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니, 앞서 정한 한일의정서 중에 이미 외교의 일은 대소 없이 일본 정부가 추천한 고문관의 자문을 구한다고 명기하고 있으니, 만일 외교의 일을 전부 일본 정부에 위임하는 것과 그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실체는 하나일 뿐 단지 형식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해외공사와 같은 것은 이름만 있는 허식이니, 차라리 우방 정부에 위임하여 그 힘에 의지하여 국권을 보유하는 것도 또한 폐하 대권의 선양이 아닐까. 내치의 일도 마찬가지로 선진 고문을 택하여 폐정(弊政)을 제거하고 민덕(民德)을 진취해야 한다. … 독립보호・강토유지는 대일본황제 조칙을 세계에 공포하신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일심동기와 신의로써 우방과 교류하고 성의로써 동맹을 대하며, 그 지도 보호에 의지하여 국가의 독립과 안녕, 행복을 영원무궁하게 유지하고자 이에 감히 선언한다.〉(강창일,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이날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메이지(明治) 천황의 친서를 갖고 도쿄를 출발하던 날이다. 그해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됐다. 12월 22일 이용구는 일진회 회장으로 승진(?)했다.
동학에서 축출되다
▲동학 3대 교주 손병희.
이용구의 친일 행각에 손병희는 크게 놀랐다. 손병희도 한때 일본의 힘을 빌려 국정을 개혁하고 동학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이용구처럼 국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이용구를 불러 야단을 쳤다.
“도대체 어쩌자고 보호선언이란 망동(妄動)을 하였느냐?”
“현하(現下)의 대한은 보호독립이 시의(時宜)에 적합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보호를 받으면 독립이 아니요, 독립을 하면 보호가 불필요한 것인데, 어떻게 보호독립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선생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토에게 ‘안네기’를 걸었습니다. 이제 적당한 시기에 제가 닥치기만 하면 이토는 나가 자빠질 것입니다.”
“이토가 어떤 사람인데 ‘안네기’에 걸리겠나? 바로 그대가 걸리면 걸렸지.”
그해 12월 1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했다. 이어 이용구 등 친일파 62명을 출교(黜敎) 처분했다. 이용구는 송병준 등과 함께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었다.
을사조약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統監)으로 부임해 왔다. 을사조약에 따르면 통감은 대한제국의 외교관계 사무만 관장하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정 전반을 감독하는 사실상의 총독이었다. 통감 정치 아래서 일진회의 입지는 묘했다. 일진회의 후원자인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통감부 조사촉탁으로 부임했다.
일진회도 우치다를 고문으로 영입했다. 당연히 일진회와 통감부 사이는 밀접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이토는 일진회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대한제국 정부와 함께 일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정부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일진회가 부담스러웠다.
통감부 이전 주한일본공사관이나 일본 외무성도 같은 이유에서 일진회를 마뜩잖게 여겼었다. 일진회가 태생부터 조선주차군(駐箚軍)사령부를 비롯한 일본 군부와 가까웠던 것도 이토가 일진회를 안 좋게 본 이유였다. 통감부-대한제국 정부와 조선주차군사령부-일진회 간에 보이지 않는 대립구도가 형성됐다. 이는 일본 내에서부터 이어진, 이토 히로부미를 우두머리로 하는 문치파(文治派・문민그룹)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우두머리로 하는 무단파(武斷派・군부) 간의 대립이었다.
하여튼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일진회에 의탁해서 한자리하려는 무리가 나타났다. 덕분에 일진회는 ‘100만 회원’을 호언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일진회는 이런 힘을 배경으로 박제순(朴齊純) 내각에 ‘개혁’을 요구했다. 1907년 5월 일진회는 박제순 내각 탄핵문을 발표하고 내각 총사직을 권고했다. 총리대신 자리를 노리던 학부(學部)대신 이완용도 박제순을 흔들어댔다. 이완용은 일진회에 제휴의 손길을 내밀었다.
1907년 6월 이완용 내각이 출범했다. 일진회의 송병준이 농상공부 대신으로 입각(入閣)했다. 이완용과 일진회의 송병준이 손을 잡았다고 해서 이완용-송병준 연립내각이라고 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이완용을 ‘통감세력 및 송병준 내지 일진회 휘하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일진회의 응견(鷹犬)’이라고 평했다.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는 “송병준이 없는 이완용 내각은 허세(虛勢)에 불과하다”고 했다. 송병준의 내각 진출과 함께 일진회원이 지방 관찰사(도지사), 군수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보은이라도 하듯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송병준은 일진회원 300여 명을 동원해 고종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완용과 일진회의 갈등
▲송병준과 매국 경쟁을 벌인 이완용.
이완용과 송병준의 밀월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완용은 형 이윤용을 궁내부 대신, 사돈 임선준을 내부(內部)대신, 처남 조민희를 평리원 재판장(대법원장)으로 앉히는 등 친위(親衛) 세력을 구축했다. 이완용과 가깝거나 먼 친척으로 요직에 나간 자가 20여 명, 벼슬살이를 하는 자가 60여 명이 넘는다는 소리가 나왔다.
일진회는 “이완용이 정치 개선에 힘쓰지 않고 ‘가족정부(家族政府)’ 형성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완용도 반격했다.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 조중응은 보부상 단체를 동원, 일진회 해산운동을 벌였다. 이완용은 일진회에 프락치를 심어 조직 붕괴를 꾀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이완용은 1908년 6월 개각(改閣)에서 송병준을 내부대신으로 영전(榮轉)시켜 화해 제스처를 보였다. 여기에 지방관 추천권까지 주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일진회 출신 관찰사는 4명에서 1명으로 줄어들었다. 화해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는 개각 직후 특별평의원회를 열고 ‘총리대신 이완용 사직권고’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듬해 2월 순종(純宗)의 순행(巡幸) 때에 송병준이 불경(不敬)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대신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일진회 세력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관리에 임용된 일진회원은 군수 이하 지방직 2명에 불과했다.
이용구는 1908년 9월 도일(渡日), 도쿄에 머물고 있던 통감 이토를 만났다. 이용구는 이토에게 이완용 내각 경질과 일진회에 대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토는 “한국 내각은 어떤 사람을 내세워도 그 치적에서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이완용 경질을 거절했다. 이용구는 흑룡회를 통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추밀원(천황의 자문기구) 의장,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육군대신 등 군부 강경파들과 접촉, 이토 경질운동을 벌였다.
이용구는 이완용 내각을 붕괴시키기 위해 송병준에게 내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송병준이 거절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는 한때 불편해졌다. 이용구는 이완용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일 애국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서북학회와 함께 ‘3파 제휴운동’도 벌였다.
이완용과 일진회의 갈등은 다분히 그들의 출신 계급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완용은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이호준의 양자로 개화기 최고의 엘리트 관료였다. 이용구는 몰락 양반의 후예였고, 송병준은 함경북도의 말단 관리와 기녀(妓女)의 아들이었다. 나라가 사실상 망한 상황에서도 이용구와 송병준은 양반 기득권을 공격해 댔고, 이완용은 기득권을 지켜보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일진회의 합방안
▲일진회원과 일본인들로 구성된 자위단. 앞줄이 무장한 일진회원들이다.
이완용 내각과 갈등을 벌이는 동안에도 일진회의 친일행각은 계속됐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투쟁이 치열해지자 일진회는 일본군의 진압작전을 돕기 위해 1907년 11월 ‘자위단’을 결성했다. 1907년 5월에는 이용구가 의병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1907년 7월~1908년 5월 피살된 일진회원의 수가 92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도를 넘는 친일행각에 일진회원들조차 환멸을 느껴 조직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이탈하는 회원이 늘어나자 이용구는 “합방 이후 정부 각 대신과 13도 관찰사 및 군수직은 모두 일진회원이 맡을 것”이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이 무렵 일본 정부는 한국 병합(倂合) 방침을 결정하고, 그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1909년 7월 6일 일본 내각은 〈대한(對韓)정책확정의 건(件)〉을 결정하고 천황의 재가를 얻었다. 이에 앞선 1909년 6월에는 통감 이토가 일본의 추밀원 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진회는 이러한 움직임에 편승해서 재기를 도모했다. 이용구는 송병준과 20회 이상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연방안(聯邦案)의 세목(細目)〉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한국을 한국으로 칭할 것.
- 황제를 왕으로 칭할 것.
- 왕실은 현금(現今)대로 한국에 존립게 할 것.
- 국민권은 일본 국민과 동등하게 할 것.
- 일본 관리는 모두 고빙(雇聘)하여 현금보다 그 수를 감소케 할 것.
- 인민의 교육, 군대를 진기(振起)시킬 것.
- 본문제는 한국 정부로부터 직접 일본 정부에 교섭게 할 것.
1909년 12월 3일 일진회 간부총회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의 내용을 일본 정부에 제의하기로 했다.
- 한국 황실을 영구히 안전케 할 것.
- 한국 정부는 이를 폐지하고 일본 정부가 정령(政令)을 행할 것.
- 통감부를 폐지할 것.
- 일진회만 남기고 다른 단체는 일절 해산할 것.
이용구의 ‘정합방론(政合邦論)
이용구가 모델로 삼은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국왕을 겸하되, 헝가리는 자체의 정부와 의회를 갖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공동으로 대외(對外)정책을 결정하고 있었다. 한국의 정치체제를 일본과 통합시켜서 일본 천황을 한일 양국의 원수(元首)로 하되, 한국에는 ‘황제’에서 호칭이 격하된 왕과 정부를 두자는 것이 이용구의 당초 구상이었다.
이용구는 1909년 11월 26일 대한협회 총무 윤효정과 만나 “30% 정도의 국권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70%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황제를 왕으로 격하시켜 일본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용구는 자신의 주장을 ‘정치체제의 통합’이라는 의미에서 ‘정합방론(政合邦論)’이라고 불렀다.
이런 생각은 이용구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일본인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가 1880년대부터 주장했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이 원조다. ‘대동합방론’은 “백인종의 침략에 대항하여 황인종이 단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형태로 합방하여 ‘대동국’이라는 연합국을 세우고, 청나라와는 긴밀하게 제휴(합종・合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용구 스스로도 자신의 생각이 다루이에게서 온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다루이의 주장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일본 도쿄의 중앙정부가 한국의 외교・군사・입법권을 주관하고 한국은 그에 종속된 지방정부가 되어 완전한 지방자치를 실시케 하자는 것으로 대등한 주권행사가 아니다(한명근, 〈일진회의 대일인식과 ‘정합방론(政合邦論)’〉).
송병준은 이용구와는 달리 ‘일본으로의 완전한 병합’을 추구했고, 그런 방향으로 이용구를 설득했다. 일진회 간부총회가 결의한 합방안이 ‘한국 정부의 폐지’ 등을 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한합방청원
1909년 12월 4일, 이용구는 ‘100만 일진회원’의 이름으로 〈일한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순종 황제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일한합방’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는 ‘청원서’를 보냈다. 〈일한합방성명서〉를 보면 이용구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
〈(前略) 갑오년(1894)에 일본(日本)은 일청전쟁(日淸戰爭)을 일으켜 거액의 전비를 소모하고 수만 명의 군사를 희생시켜 가면서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 한국의 독립을 확고히 해주었다. 그런데도 정사를 어지럽히고 호의를 배격하여 이 만대(萬代)의 기초를 능히 지키지 못한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 스스로가 초래케 한 것이다. 마침내 일로전쟁(日露戰爭)의 인과를 초래하여 일본의 손해는 갑오년의 10배나 되었으나 우리를 러시아 사람들의 범 아가리에 한 덩어리의 고기로 먹히게 되는 것을 면하게 하고 온 동양 판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이 선린주의(善隣主義)에 즐거이 따르지 않고 도리어 이 나라에 붙었다 저 나라에 붙었다 하는 폐단을 만들어내어 마침내는 외교권을 남에게 넘겨주고 보호조약을 체결함에 이른 것도 또한 우리 한국 사람들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中略)
종래에 우리 한국은 전제 정치로 인민들의 권리를 속박하여 자유롭지 못하였던 민족인 까닭에 스스로가 채택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하여도 될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고 앞날을 생각하면 안위존망(安危存亡)을 결코 민족의 책임으로 돌린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날의 교훈이 오래지 않은 만큼 그 전철을 밟지 말고 500년을 지내온 종사(宗社)가 폐허로 되고 2000만의 백성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비참한 지경에 빠질 것이다.
오늘날이 어떠한 때인가? 외교권 한 가지를 이미 넘겨준 결과로 재정이 우리에게 있는가, 군기(軍機)가 우리에게 있는가? 통신이 우리에게 있는가, 법률이 우리에게 있는가? 이른바 조약이라는 것은 하나의 무용지물이 되고 나라의 기백과 백성의 목숨은 빠르게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가고 있다. 오늘에 지난날이 다시 오지 않고 내일에 오늘이 다시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 오늘을 알지 못하는 만큼 오늘에 내일을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 우리 2000만 국민의 머릿속에 충만된 조국 정신을 떨쳐내어 큰소리로 외쳐서 지금 일본의 여론이 주창하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하여 그 파란을 안정시키면서 우리 황제 폐하와 일본 천황 폐하가 하늘까지 통할 하나로 뭉친 정성으로 애달프게 호소하여 우리 황실을 만대에 높일 수 있는 기초를 공고히 하고 우리 백성들에게 일등 대우의 복리를 누리게 하며 정부와 사회가 더욱더 발전하게 할 것을 주창하여 일대 정치적 기관(機關)을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곧 우리 한국을 보호하는 것이다.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우리 2000만 국민은 노예의 멸시에서 벗어나고 희생의 고통을 면하여 동등한 대열에 서서 완전히 새롭게 소생하여 앞을 향하여 전진해 보고 실력을 양성한다면 앞날의 쾌락을 누리고 뒷날의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은 확연 명료하다. (後略)〉(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 순종 2년 12월 4일)
해산비 15만원 받고 일진회 해산
이용구의 주장은 대한제국의 대내외 정책의 실패를 비난하면서, 한국민이 보호국 체제 아래서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는 열등한 국민으로 남아 있느니, 차라리 대등한 자격으로 일본제국의 정치체제 아래 편입되어 들어가 문명개화의 길로 나가고 국민들로 하여금 ‘세계 1등국민’인 일본제국 국민의 지위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순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이용구는 “우리나라는 일본과 본래 같은 종족에서 나와서 아직까지 탱자와 귤만큼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 아니고 지금 서로 다투는 것도 심하지 않은 만큼 그 국경을 없애고 두 이웃 사이의 울타리를 아주 없애버려서 두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한 정치와 교화 밑에서 자유로이 노닐면서 다 같이 함께 살고 함께 다스려지는 복리를 누리게 한다면 누가 형이고 아우고를 가릴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올린 상소문에서는 “우리 대한국의 전도에 절실하고 우리나라 사직과 백성을 영원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실로 일본과 한국이 합방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어쩌면 이용구는 조국의 자주독립보다는 민족의 문명개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폴란드・인도・베트남처럼 열강의 지배 아래 있던 주변부 국가 지식인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었다.
이상의 문건들에서 이용구는 ‘병합(倂合)’이 아니라 ‘합방(合邦)’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약소국인 대한제국이 강대국인 일본에 흡수 통합되는 ‘병합’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통합되는 ‘합방’이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그것은 궤변이었다. 국호가 ‘대한국’에서 ‘한국’으로 바뀌고, ‘황제’가 ‘왕’으로 격하되는 데서부터 ‘대등’한 통합일 수가 없다.
당연히 여론은 분노했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조차 “중외(中外)의 인심이 격분하여 술렁댔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일본제국은 이용구가 요구한 대등한 통합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체결된 ‘합병(合倂)조약’은 이용구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일제는 ‘병합’이라는 말을 ‘합병’이라는 새로 만든 말로 포장했지만 본질은 한국의 식민지화였다.
이용구와 일진회는 ‘합병’ 직후인 1910년 9월 12일 해산됐다. 일제는 ‘해산비’ 명목으로 15만원을 주었다. 1907년부터 이용구는 흑룡회 관계자들과 함께 한일합방 후에는 100만명의 일진회원을 만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 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었다.
이용구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1910년 ‘합병’ 직후 이용구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한국인들에게도 참정권을 달라”고 호소했다. 물론 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이▲용구와 조선낭인 다케다 한시, 우치다 료헤이(오른쪽부터).
일진회가 해산된 직후 이용구는 피를 쏟고 쓰러졌다. 폐병이었다. 그는 일본 효고현의 해안에서 요양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는 죽기 석 달 전 흑룡회의 대륙낭인(大陸浪人)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평생 제가 추구한 것은 일신상의 사리(私利)가 아니라 국가의 대리(大利)와 인민구제의 소망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잘도 속임을 당하고 잘도 농락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2000만 인민을 일본의 최하등민(最下等民)으로 빠뜨린 죄도 소생에게 있습니다. 문을 나서면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욕 먹고, … 당국의 조치를 보면 우리를 대하는 것이 원수 대하듯, 거지 대하듯, 사냥 뒤의 개 대하듯 합니다. 소생을 보고 매국노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도, 어찌 입이 있어 변명을 하겠습니까? 지하에 선인(先人)의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 간들 무슨 낯으로 그들을 대하겠습니까? 스기야마, 우치다, 다케다(흑룡회의 대륙낭인들-기자 주)가 속임을 당했는지, 송병준과 이용구가 사기를 당했는지, 태어날 때부터 바보인 소생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1910년 4월 2일 대륙낭인 우치다 료헤이가 문병을 왔다. 우치다의 손을 잡고 이용구는 탄식했다.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걸까요?”
우치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뒷날 반드시 현달(顯達)할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賢者)가 될 것입니다.”
이용구는 1912년 5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를 버려두었던 일제는 그에게 훈일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을 수여했다. 그의 관(棺)이 경성역(서울역)에 도착하자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를 비롯한 2000여 명이 출영을 나왔다. 장례식에는 5000여 명이 참석했다.
아들, “이용구는 나름대로 우국을 한 사람”
이용구의 아들은 해방 후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귀화했다. 다루이 도키치가 제창하고 이용구가 공감한 ‘대동국’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1980년대에 그는 칠십 노구를 이끌고 ‘이용구 재조명’ 작업에 매달렸다. 소설가 이병주를 만나 “이용구는 일본 정부가 작위를 주려 했지만 ‘만일 영작(榮爵)을 받는다면 그 영작을 바라고 나라를 판 놈이라고 해도 나는 변명할 수가 없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지가 참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는데 나만 영작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거절했다”면서 “이용구는 나름대로 우국(憂國)을 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용구는 동학당의 두령에서 일본의 문명개화를 추종하는 개화론자로 변신하고, 당대 최대 규모의 대중조직의 지도자로 부상했다가 결국 ‘일한합방’까지 변신을 거듭했다. 일제에 버림받고 쓸쓸히 죽는 데서는 ‘비극성’마저 느껴진다. 일부 일본인들이 이용구를 ‘지사’로 추앙하려 드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용구를 ‘현자’로도, ‘나름대로 우국을 한 사람’으로도, ‘지사’로도 보지 않는다.⊙
월간조선 2018년 3월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한일합방 영상
■일제에 작위 받은 ‘조선 친일 귀족’ 이완용 등 총 150여명
유길준·한규설 등은 거부… 민영린은 아편 흡입죄로 박탈
한일병합조약 제5조 따라 신설… 후·백·자·남작 등 華族制 준용
강제병합 공로자·왕족 등 포함… 식민통치 선전하는 전위대 역할
홍영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최근 자신의 조부가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작위를 받았다고 사죄를 하면서 ‘일제의 작위’, 이른바 ‘조선 귀족’이 또다시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조선 귀족은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중국 고대 하왕조와 주왕조의 선례를 참고해 만든 공·후·백·자·남작 다섯 등급의 화족(華族) 제도를 준용해 만든 특수 계급이다. 조선 귀족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 직후 작위를 받은 수작자 76명을 포함해 선대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습작자까지 포함해 140∼150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작위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고 독립 운동으로 작위가 강제 박탈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나락으로 추락하던 그때, 일본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해방 후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처벌 대상이 된 조선 귀족,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친일 반민족행위로 규정된 수작·습작을 한 조선 귀족은 누구이고, 또 그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리했다.
◇조선귀족은 누구 = 조선 귀족은 1910년 8월 29일 공표된 한일병합조약 제5조와 일본 황실령 ‘조선 귀족령’에 따라 신설됐다가 1947년 5월 2일 일본 황실령 제12호 ‘황실령과 부속법령 폐지의 건’으로 폐지됐다. 그 당시에도 선정 이유나 경력이 비밀에 부쳐졌기에 각각의 선정 기준이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전모도 완벽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일제가 조선 귀족을 선정할 때 가장 염두에 둔 조건은 강제병합 과정에서의 공로였고, 여기에 대한제국 황실을 배려해 이왕의 혈족과 준왕족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제가 조선 귀족령을 제정하고 귀족 집단을 만든 것은 개항 이래 한국 침략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식민 통치를 앞장서 선전하고 정당화할 전위대로서 피지배민의 최상층인 조선 귀족을 만들어 적극 이용했다”고 풀이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1910년 9월 초 자격이 될 만한 이들에 대한 심의에 착수했다. 통감부가 대상자를 1차로 검토해 일본 정부에 보냈고, 각의 논의와 궁내성 최종 심의를 거쳐 일왕이 재가하는 절차가 이뤄졌다. 결국 그해 9월 30일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76명 명단이 확정됐다. 원래 공작 작위도 수여할 계획이었으나 가능한 주요 대상인 대한제국 황족의 방계가 별도로 ‘공족’으로 칭해지면서 수여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작 작위는 왕족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고종의 인척 이해승, 순종의 장인 윤택영, 개화파 박영효가 받았다. 을사오적 이완용, 순종의 첫 부인 순명효황후와 남매 관계인 민영린, 내부대신이었던 왕족 이지용은 백작, 창씨개명 1호 송병준, 정미칠적 조중응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나중에 이완용은 백작에서 후작으로, 송병준과 고희경은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했다. 그 후 추가로 작위를 받은 경우는 1924년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가 남작 작위를 받은 것이 유일하다. 여기에 작위를 계승한 습작자를 포함해 조선귀족은 140∼150여 명에 이른다. 규모와 관련해 민족문제연구소는 140여 명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는 150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작위를 거부한 사람들 = 1910년 습작자 76명 중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8명이다. 강제병합이 이뤄지자 음독 자결한 관리 김석진, 역시 자결을 시도해 작위를 반납한 조정구 그리고 작위를 거절한 유길준, 민영달,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홍순형이다. 유길준은 그해 10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글을 보내 남작 작위를 반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제는 유길준에게 남작 중 최고 액수의 은사 공채를 수여하며 회유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이와 함께 자작 김윤식·이용직, 남작 김가진·김사준은 ‘독립운동’과 관련해 ‘실작’했다. 이용창 연구원은 “일제의 일방적 강요 때문에 작위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작위 거절, 거부 및 반납은 본인이 얼마든지 능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정치적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작위가 박탈·반납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백작 민영린은 아편 흡입죄로 작위를 잃었고, 남작 조희연은 빚에 쪼들리다가 품위 손상으로 작위를 반납했다.
◇권리와 행태들 = 이들은 ‘조선 귀족령’에 근거해 일본 화족과 같은 예우를 향유할 권리, 작위 세습의 권리 등을 보장받았다. 이들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가쿠슈인(學習院)에 입학할 수 있고, 결원이 발생할 경우 무시험으로 도쿄(東京)제국대, 교토(京都)제국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은사공채 증권도 교부받았고,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 및 삼림 매각 과정에서 무상 대부 및 증여도 받았다. 그 대신 조선귀족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쓸모 있는 최상위 협력층으로 각종 통치기구나 사회단체, 수탈기구에 참여해 활동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문화 통치로 전환한 식민정책과 더불어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 집단이 성장하면서 이들의 역할도 정체됐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춘원은 親日과 抗日, 두 가지 전략 구사했다?
이광수 삶·문학 재조명 활발
자료집 '이광수 초기 문장집' - 청년기의 민족개조론 집대성
평전 '자유꽃이 피리라' - 춘원의 친일, 위장 친일로 규정
춘원 이광수(1892~1950?)를 재조명하는 연구 활동이 최근 활발해졌다.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 일본 니가타현립대 명예교수와 최주한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가 '이광수 초기 문장집'(전 2권·소나무)을 엮어서 냈고, 김원모 단국대 역사학과 명예교수가 이광수 평전 '자유꽃이 피리라'(전 2권·철학과 현실사)를 출간했다. 김 교수의 평전은 춘원의 친일을 '위장(僞裝) 친일'로 규정해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다.
'이광수 초기 문장집'은 춘원이 1908~1919년 청년 시절에 쓴 글을 한자리에 모은 자료집이다. 발표 당시의 원문 표기를 그대로 살렸기에 일반 독자보다는 연구자들을 겨냥한 책이다. 하타노 세츠코 교수가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찾아낸 잡지 '신한자유종(新韓自由鐘)'을 비롯해 지난 10년 사이 뒤늦게 발굴된 춘원의 자료도 이미 알려진 자료에 덧붙여서 기존 연구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신한자유종'은 춘원이 도쿄 유학 시절 유학생들과 함께 낸 등사판 잡지였고, '비분강개한 애국적인 글'을 실었다가 일본 경찰에 압수돼 지금껏 극비 문서로 보존된 것이다. 이번 자료집은 춘원이 논설과 수필뿐 아니라 시와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민족 독립을 추구한 기록을 보여준다.
▲1937년 ‘문장독본’을 냈을 때의 이광수. 오른쪽은 이광수가 1910년 도쿄 유학 중 편집한 잡지 ‘신한자유종’의 표지. 일본 경찰이 독립 정신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압수한 뒤 찍은 ‘극비(極秘)’ 도장이 오른쪽 위에 선명하다. /철학과 현실사 제공
'이광수 초기 문장집'을 엮은 하타노 교수는 한국 근대문학을 전공한 일본인 학자로 연구서 '무정(無情)을 읽는다'를 낸 바 있다. 그는 최근 일본에서 평전 '이광수-한국근대문학의 아버지와 친일의 낙인'(중앙공론사)도 냈다. 일본 주요 언론이 잇달아 서평을 실은 가운데 마이니치신문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정한 역사관에 의한 역사의 소유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고뇌를 응시하는 겸허한 시선일 것"이라며 "전후 70년에 어울리는 책"이라고 평했다.
청년 이광수의 글 중에 새로 주목받는 것은 '먹적골 가난뱅이로 한세상을 들먹들먹한 허생원'(1914년)이다. 박지원의 한문 소설 '허생전'을 근대적 한글로 풀어쓴 것. 춘원은 허생의 입을 빌려 조선의 상공업 멸시 풍토를 질타했다. "죠션의 배가 남의 나라에 다니지 아니하고 수레가 내 나라 안에 다니지 아니함으로 모든 물건이 제 곳에서 나서 제 곳에서 없어지고…"라며 청년들에게 창업과 무역 정신을 불어넣으려 했다. 춘원은 연해주를 떠돌면서 현지 동포들에게 "나라를 찾을 이가 우리밖에 없나이다"라고 역설하며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고 했다. "술을 잡수시다가도 내가 독립군이니 몸이 약하게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 하시고, 돈을 쓰시다가도 내가 본국까지 나갈 차비와 총 한 자루 값은 평생 몸에 지녀야 할 것을 생각하옵소서. 여러분의 돈은 피땀 흘려 벌은 것이니 독립 전쟁에 쓰기 마땅한 것이로소이다."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평전 '자유꽃이 피리라'(1852쪽)를 통해 "춘원이 친일과 항일 투트랙 전략을 구사했다"고 강조했다. 춘원은 민족운동단체 '동우(同友)회' 결성에 관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937년 안창호를 비롯해 180여 명이 검거된 '동우회 사건'이었다. 김원모 교수는 춘원이 고문에 시달리는 동지들의 무죄 석방을 위해 재판부에 친일을 위한 사상전향서를 제출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청년들의 우상이었던 춘원이 민족 지도자로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위장 친일'을 선택했다는 것. 동우회는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탄압 때문에 해산됐다. 춘원은 그 이후 조선인의 학병 지원을 권하는 행사에도 나섰다. 평전 '자유꽃이 피리라'는 '조선인의 학병 입대를 장차 독립군의 기간 장교를 육성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고 풀이했다. 또한 춘원은 일제 말기에 조선어 소설 11편을 발표했다. 김원모 교수는 "조선어 사용 전폐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조선어로 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민족운동"이라고 평가했다.◎
박해현 문화부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