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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세계문명기행] [61] 아폴로 11호가 가져온 돌 아래, 윌슨의 理想이 잠들다 - [67] 독재자를 추앙한 죄

상림은내고향 2021. 4. 3. 08:31

[송동훈의 세계문명기행]

[61] 아폴로 11호가 가져온 돌 아래, 윌슨의 理想이 잠들다

워싱턴 국립 대성당과 윌슨의 묘

워싱턴 D.C.의 중심 도로 중 하나인 매사추세츠 애비뉴를 따라 북서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또 다른 대로인 위스콘신 애비뉴와 만나게 된다. 그 교차로의 북동쪽에 서 있는 웅장한 건물이 ‘워싱턴 국립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이다. 순간적으로 유럽의 어느 유서 깊은 도시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성당은 전형적인 중세 고딕 양식이다.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in America)’ 워싱턴 교구 성당인 이곳은 ‘국립 대성당’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교회이기도 하다.

 

▲워싱턴 국립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 중 스페이스 윈도는 우주로의 도전과 성과를 상징하고 있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 상단 중앙에는 달에서 우주인들이 직접 가져온 월석이 박혀 있다./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을 대표하는 국립 대성당

미국을 대표하는 교회답게 외관과 내부 모두 상징적인 장식과 조각들로 가득하다. 특히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사방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볼만하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신랑(身廊‧Nave)의 남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스페이스 윈도(Space Window)’다. 대우주와 소우주를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5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1974년). 붉은 태양의 한가운데 박힌 작은 돌은 우주인들이 달의 ‘고요의 바다(Sea of Tranquility)’에서 가져왔다. 우주라는 미지의 공간을 향한 거대한 전진을 상징하기 때문일까? 스페이스 윈도를 응시하고 있노라면 묘한 전율에 휩싸이게 된다. 남쪽 신랑에서 눈길을 끄는 또 다른 것은 단아한 석관이다. 미국을 상징하는 교회 안에 꽃과 문장으로 돋보이게 장식된 석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덮개에 오래된 문체로 이름이 조각돼 있다. ‘Woodrow Wilson’. 미국의 28대 대통령이다. 그는 하나의 이상(理想)을 상징한다.

 

▲워싱턴 국립 대성당의 웅장한 외관. 중세 고딕 양식을 본뜬 좌우대칭의 종탑과 중앙의 장미창이 인상적이다./게티이미지뱅크

 

교수, 총장, 주지사,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856년 버지니아주(州) 스탠턴(Staunton)에서 태어났다. 장로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를 떠돌며 자랐다. 탁월한 지성과 성실한 태도는 윌슨에게 최고의 교육을 선사했다. 프린스턴 대학, 버지니아 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공부한 윌슨은 떠오르는 정치학자가 됐다. 모교 프린스턴 대학에서 재직할 당시, 윌슨은 명강의로 이름 높은 인기 교수였다. 명성에 힘입어 프린스턴 대학 총장(재임 1902~1910년)이 된 윌슨은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조치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20세기 초 미국은 바야흐로 개혁과 진보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국력에 걸맞게 적극적으로 세계 문제에 개입했다. 대내적으로는 정부의 방임하에 무분별하게 커지던 소수의 트러스트(기업합동)를 규제하고, 열악한 노동조건을 완화시키기 시작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개입과 개혁은 시대의 흐름이었다. 민주당 지도부가 대학 총장 윌슨에게 주목한 이유다. 민주당은 윌슨을 뉴저지주 주지사 후보로 내세웠고, 윌슨은 공화당 텃밭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주지사 윌슨은 대학 총장 때와 마찬가지로 개혁에 전력을 다했으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중앙 정계에서 윌슨은 무명이나 다름없었지만 민주당의 막강한 원로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등의 후원에 힘입었다. 1912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윌슨은 선거인단 531명 중 435명의 표를 얻어 당선됐다. 공화당 후보가 루스벨트(T. Roosevelt‧26대 대통령)와 태프트(W. H. Taft‧27대 대통령)로 분열된 탓도 있지만, 윌슨의 선명한 개혁주의자 이미지도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재임 1913~1921년). /위키디피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윌슨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유능하고 강력한 내각을 구성했고,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관세 인하, 소득에 대한 누진세 도입, 기업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연방통상위원회 설립, 현재 모습의 연방준비은행 설립 등이 대표적이다. 1914년 8월 국내 문제 해결에 몰두하던 윌슨에게 유럽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암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앞다퉈 서로에게 선전포고했다. 전쟁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비화됐다. 평화주의자였던 윌슨은 확고하게 중립을 지켰다. 전쟁의 광풍은 갈수록 윌슨을 흔들어댔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으로 미국 상선이 연이어 격침되고 미국인 사상자가 늘어나자 더 이상의 인내는 불가능했다. 1917년 4월 2일 윌슨은 상하 양원에 전쟁 선포를 요구했다. 의회는 승인했고, 군대는 유럽을 향했다. 전쟁에 임하며 윌슨은 자신의 생각을 모두에게 밝혔다.

 

“우리는 이기적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정복도 지배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배상금을 얻을 생각도 없고, 우리가 기꺼이 바칠 희생에 대한 물질적 보상도 받을 생각이 없다. 단지 인류가 가진 권리를 옹호할 뿐이다.”

 

유럽 열강들 중심의 제국주의 체제가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 그 순간에 윌슨은 도덕적 보편성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그 위로는 자유, 자치, 민주주의와 평화의 이상이 찬란히 휘날렸다. 원대하지만 허황된, 순수하지만 교만한 이상! 초기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지도자 존 윈스럽이 제시했던, 세계가 우러를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를 건설해야 한다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이 드디어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 세계로 향했다.

 

▲워싱턴 국립 대성당 내부에 마련된 윌슨 대통령의 석관. 국제적으로 자유주의와 영구 평화의 이상을 설파했던 윌슨은 미국 수도에 묻혀 있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이다./위키피디아 Tim Evanson

 

사라지지 않을 이상을 남기다

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영국‧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졌다. 승자와 패자 사이에 협상이 시작됐다. 윌슨은 역사에서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직접 프랑스로 향했다. 협상에 앞서 윌슨은 전후 세계 질서를 위해 역사적인 ’14개조 원칙(Fourteen Points)'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민족자결, 항해의 자유, 공개 외교, 군비 축소, 자유무역의 원칙이 포함됐다. 이런 원칙을 강제하고 미래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창설하자는 제안도 들어있었다

 

 

협상 시작부터 윌슨의 이상주의는 승전국들의 이기적인 국익과 다퉈야 했다. 윌슨은 자신이 주창했던 원칙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국제연맹 창설만은 가까스로 지켜냈다. 그러나 윌슨에게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있었다. 베르사유 조약과 연맹 가입에 대한 미국 상원의 동의였다. 상원은 부정적이었다. 윌슨은 타협을 거부하고 대중에게 직접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났다. 1919년 9월 25일, 윌슨은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에서 연설한 후 심한 두통으로 쓰러졌다. 윌슨은 사경을 헤맸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으나 정상적인 업무 수행은 불가능했다. 그동안 베르사유 조약도, 국제연맹 가입도 상원에서 부결됐다. 미국의 불참으로 국제연맹은 절름발이가 됐다. 윌슨은 자신의 이상이 시대와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국민들로부터 외면받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윌슨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육신은 국립 대성당에 묻혔다(1924년 2월).

 

인류는 윌슨이 꿈꿨던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 만들기는커녕 상황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 그런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윌슨의 이상이 사라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황홀한 이상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윌슨의 이상은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계승되고 있을 것이다./워싱턴 D.C.=송동훈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열린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 부부. 왼쪽부터 트럼프, 오바마, 클린턴, 카터 대통령이다. /위키디피아

 

[워싱턴 국립 대성당]

워싱턴 D.C.의 국립 대성당은 미국을 대표하는 교회답게 국가적인 행사에 자주 이용된다. 전직 대통령의 국장(國葬)이 대표적으로 아버지 부시(41대 대통령‧2018년), 포드(38대‧2007년), 레이건(40대‧2004년), 아이젠하워(34대‧1969년)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치러졌다. 대통령에 대한 추모 행사와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 미국 사회에 크게 기여한 각계각층 인물들에 대한 추모 행사도 열린다. 세계적인 사회사업가이자 작가인 헬렌 켈러와 그의 스승인 교육가 앤 설리번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62] 美 대법원엔 사법부의 아버지와 사법부의 수치가 나란히 있다

미국 대법원과 대법원장들

▲코린트 양식의 열주들이 웅장한 대법원 현관. 들어가는 입구 왼쪽의 좌상은 정의를 상징하고 있다./게티이미지뱅크

워싱턴 D.C.의 중심부는 마치 고대 아테네나 로마를 옮겨다 놓은 듯하다. 주요 건물들의 외관은 그리스·로마 양식이고, 색깔도 온통 하얗다. 백악관, 국회의사당은 물론이고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도 예외가 아니다. 대법원(Supreme Court)도 마찬가지다. 미국 대법원은 국회의사당 바로 뒤편에 있다. 두 줄로 배열된 16개 코린트 양식의 화려한 열주가 웅장하게 정면을 장식하고 있다.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 양옆으로는 두 개의 좌상이 당당하다. 오른쪽의 검을 잡은 남자는 법의 권위를, 왼쪽의 법전을 든 여자는 정의를 상징한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법 앞에 동등한 정의(Equal Justice Under Law)’란 문구가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삼각형 페디먼트(Pediment·박공벽)에는 ‘자유(Liberty)’를 상징하는 여인이 ‘질서(Order)’와 ‘권위(Authority)’를 뜻하는 두 남자의 호위를 받으며 왕좌에 앉아 있다.

법은 자유를 위해 존재한다

 

미국 대법원은 이렇듯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구를 드나드는 모두에게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법은 동등한 정의를 부여한다는 문구에서 특권과 차별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민주국가의 상식을 얘기하고 있다. ‘자유’를 중심으로 한 페디먼트 조각은 법치 사회에서 법은 자유를 위해 존재한다는, 질서와 권위는 자유를 지키는 수단일 뿐 자유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선언한다. 그렇게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긴 홀을 따라 대법원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다.

 

외관이 화려한 코린트 양식이라면, 내부는 소박하지만 강건한 도리아 양식이다. 내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역대 대법원장들의 흉상이 전시된 공간과 역사적인 판결이 새겨진 벽면들이다. 그렇다. 이 건물이 아무리 크다 한들 건물에 불과하고, 장식이 화려한들 장식에 불과하다. 대법원을 대법원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판사다. 판사의 판결이다. 초대 대법원장 존 제이(John Jay·재임 1789~1795년)부터 16대 대법원장 윌리엄 렌퀴스트(William Rehnquist·재임 1986~2005년)에 이르기까지 16명의 판사. 판결을 통해 미국의 대법원을, 미국이란 나라를 만들어 온 판사들이다

 

▲미국 대법원의 4대 대법원장 존 마셜의 초상화./위키피디아

▲미국 대법원의 5대 대법원장 로저 태니의 초상화. 비록 같은 대법원장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마셜이 미국 사법부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반면, 태니는 권력과 시류에 편승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오늘날까지 사법부의 수치로 기억되고 있다./위키피디아

존 마셜, 사법부의 아버지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4대 대법원장 존 마셜(John Marshall·재임 1801~1835년)이다.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 의해 대법원장에 임명된 마셜은 무려 3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재임하면서 미국 대법원의 초석을 쌓았다. 마셜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과 동시대를 살았던 버지니아인이었다. 성격은 강직했고, 지성은 탁월했으며, 인품은 순박했다. 독립 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 밑에서 함께 싸웠다. 그때부터 워싱턴의 영향을 받은 마셜은 강력한 연방정부 구성을 통해 통일된 국가를 설립해야 한다는 연방주의자가 됐다. 마셜은 대법원장직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연방정부를 강화하고, 연방정부에 통일성과 권위를 부여했다. 무엇보다 대법원에 법률이 헌법에 맞는지 어긋나는지를 판단하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대법원의 권한을 무한대로 늘렸다. 그 결과 대법원은 대통령, 의회와 대등한 통치기관으로 성장했다. 작은 정부를 추구하고 주의 권리를 옹호했던 대통령 제퍼슨은 대법원장 마셜과 임기 내내 반목하고 충돌하고 화해하기를 되풀이했다. 두 사람의 오랜 정치적 경쟁과 긴장 관계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간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정치의 이상을 증진시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했다.

 

▲미국 국회의사당에 진열된 로저 태니 전직 대법원장의 흉상. 지난 7월 하원은 노예제를 지지했던 남부연합 지도자들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태니도 포함됐다. /AP연합뉴스

 

로저 태니, 사법부의 수치

제퍼슨의 후임 대통령들도 존 마셜과 반목했다. 특히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때 심했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잭슨은 임명된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견제하는 데 분노했다. 그러나 아무리 인기 있는 대통령이라도 법에 보장된 대법원장의 임기(종신제)에 손댈 수는 없었다. 잭슨은 그저 마셜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그때가 오자 자신의 최측근인 메릴랜드주(州) 출신의 로저 태니(Roger Taney·재임 1836~1864년)를 후임 대법원장에 임명했다. 태니 대법원의 책임은 막중했다. 노예제를 둘러싸고 미국 사회가 점차 남북으로 갈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책무는 헌법 정신의 테두리 안에서 올바른 법적 판단을 통해 분열을 막고 통합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니의 대법원은 거꾸로 갔다. 태니 대법원장은 노예주 출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1857년 3월 드레드 스콧이란 노예의 신분을 둘러싼 재판에서 대법원은 최종 판결을 통해 ‘헌법은 백인만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 흑인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으며 그들은 일종의 자산’이라고 선언했다. 더 나아가 연방의회에는 주가 되기 직전 상태에 놓인 준주(準州)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할 권한이 없다고도 했다. 충격적인 판결이었다. 남부의 노예제 지지자들은 환호했고, 북부의 노예제 반대자들은 분노했다. 태니의 대법원은 노예제를 옹호함으로써 역사적인 오점을 남겼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남북전쟁 발발에도 기여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 대법원

 

존 마셜은 위대한 업적을, 로저 태니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남겼다. 둘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흉상은 대법원장들이 전시된 공간에 나란히 놓여 있다. 영광도 치욕도 결국엔 후손들이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인 것이다. 마셜과 태니 외에도 수많은 대법원 판사가 있었다. 간혹 후대로부터 비판받는 판결을 내린 대법원 판사들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시대를 초월하는 공통의 신조가 있었다. 대통령과 국회가 미국 민주주의의 선봉이라면, 법원은 보루라는 신조. 그래서 미국 대법원은 미국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다. 9명의 대법관은 정의를 구현하고, 사회의 가치 기준을 설정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제다이들인 셈이다.

 

권력은 부패하고 타락한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언제나 권력자는 대법원을 입맛대로 구성해서 마음껏 주무르려 했다. 제퍼슨이나 잭슨같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 대통령도 그러하니, 보잘것없는 대통령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법원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강직했다. 많은 경우 권력 편에 서기보다는 사회의 공의(公義)와 시민의 자유 편에 서서 싸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결국 사람이다. 미국 대법관 상당수는 비굴하게 권력에 아부하고 보신하려 하지 않았다. 민주국가에서 법원이 무너지면 독재가 만개(滿開)하고,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매명(賣名)의 치욕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권력과 법원 간의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 개인의 권리를 둘러싼 최후의 전쟁이다. 양심적이고 윤리적이며 용기 있는 법관들이 없다면 법원은 권력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 법원이 패배한다면 우리와 후대의 운명은 어두울 것이다. 미국 대법원 건물 곳곳에 새겨진 위대한 법의 정신과 정의의 상징이 부디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기를 바란다면 부질없는 짓일까?

 

[대법원]

▲대법원에 전시된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의 흉상. /송동훈

 

미국 대법원이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주목받고 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연방 대법관 사망과 후임 인선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대법원의 보수화를 강화하기 위해 대선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아이콘인 긴즈버그의 후임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보수주의자인 에이미 코니 배럿(Amy Coney Barrett) 판사를 지명했다. 배럿이 청문회를 통과해 대법관에 임명된다면 그녀는 미국 대법원 역사상 다섯 번째 여성 대법관이 된다. 소토마요르(Sotomayor), 케이건(Kagan)과 더불어 세 번째 현직 여성 대법관이다.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 대법관은 샌드라 데이 오코너(Sandra Day O’Connor·1930년)이다. 오코너는 1981년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됐고, 2006년 은퇴했다. 그녀의 대법관 임명은 미국 사법사와 여성사에서 중요한 진보였다. 공화당 출신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오코너에게 민주당 출신 오바마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 메달을 수여한 이유다(2009년). 미국 대법원 곳곳에서 그녀의 동상과 흉상을 발견할 수 있다.

 

[63] 북군 총사령관의 위용, 그러나 그가 대통령 되자 모두 불행해졌다

국회의사당 앞 그랜트 대통령 동상

미국은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모국(母國)이다. 삼권분립은 국가의 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눈다는 민주국가의 기본 원리다. 오늘날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미국의 국부들이 삼권분립의 토대 위에 헌법을 창조한 18세기 말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원리고 체제다. 미국의 국부들은 왜 삼권분립을 만들어냈을까? 견제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 권력의 종착지는 결국 부패와 독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랜트의 당당한 기마상. 그는 대통령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 복장을 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연방을 지켜낸 군인의 자격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캐피톨의 수호자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는 국부들이 창조한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수도 중심에 있는 내셔널 몰 주변에 여러 권력 기관을 흩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 가장 거대한 건물은 ‘캐피톨(The Capitol)’이라 불리는 국회의사당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주변을 산책하며 민주주의의 성전이며 민권(民權)의 상징인 캐피톨의 웅장함에 압도당해보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캐피톨을 돌다 보면 서쪽 정면, 워싱턴 기념비와 마주 보는 위치에 세워진 거대한 기마상을 보게 된다. 캐피톨 주변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조형물이다. 그는 고독하게 홀로 높이 말 위에 앉아 있다. 사방을 네 마리 사자가 둘러싸고 있다. 기마상의 인물은 마치 캐피톨을 수호하는 듯하다. 장군 복장을 하고 있는 그는 누구일까?

 

서부의 아들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1822~1885년)는 미국의 18대 대통령이다. 그랜트는 대통령보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역사적인 업적도 대통령보다 장군으로서가 더 크다. 오하이오주(州) 포인트 플레전트(Point Pleasant)에서 태어났다. 켄터키·인디애나주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인디애나가 1816년에 주로 승격된 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극(極)서부에 해당했다. 변방에서 그랜트의 아버지는 무두장이로 생계를 꾸렸다. 아들에게 기대가 컸던 아버지는 정치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랜트를 육군사관학교에 진학시켰다(1839년). 웨스트포인트에서 그랜트는 평범했다. 졸업 성적은 39명 중 21등에 그쳤다.

 

졸업 후 그랜트는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이 멕시코와 벌인 전쟁에 참전했다(1846~1848년). 전쟁 후에는 캘리포니아로 발령이 났다. 가정적인 그랜트에게 가족과 떨어진 채 태평양 연안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건 천형(天刑)이나 다름없었다. 그랜트는 점차 술에 빠져들었다. 평판도 악화됐다. 결국 불명예스럽게 군을 떠났다(1854년).

 

▲‘The Peacemakers’란 제목의 그림은 1865년 3월 27일 증기선‘리버 퀸(River Queen)’에서 열린 북군 전쟁 지휘관들의 역사적인 종전 전략 회의를 묘사하고 있다. 링컨(오른쪽 둘째) 왼쪽이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다. 종전 직후 링컨의 암살로 승리의 후광은 그랜트에게로 옮겨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랜트는 미국의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위키피디아

 

고향의 가족 품으로 돌아왔지만 전직 군인 그랜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농사도 사업도 손대는 것마다 실패였다. 실의에 빠진 그랜트를 살린 건 전쟁이었다. 1861년 남부군이 섬터(Sumter) 요새를 공격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그랜트는 예비역으로 자원입대했고, 대령에 임명됐다. 북군에는 유능한 장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그랜트의 새 출발은 순조로웠다.

 

공화국의 구세주

모든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랜트에게는 사령관직이 그랬다. 사관생도나 하급 장교 시절에는 빛을 보지 못했던 그랜트였지만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권한을 갖게 되자 달라졌다. 탁월한 전략적 안목, 신속한 결단, 과감한 추진력으로 전장(戰場)을 지배했다. 인상적인 첫 전과(戰果)는 북군에게 켄터키주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준 도널슨(Donelson) 요새 점령이었다(1862년 2월). 이때 항복 조건을 문의해 온 남군 사령관에게 그랜트는 ‘무조건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요구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압도적인 국력의 우위에도 막상 전쟁터에서 남군에 밀리고 있던 북부 사람들은 그랜트에게 열광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무조건항복’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랜트의 승리는 1863년 7월 4일 미시시피강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천험의 요새 도시인 빅스버그(Vicksburg)를 점령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남북전쟁 기간에 게티즈버그 전투와 함께 가장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되는 빅스버그 점령을 통해 그랜트는 미시시피강 전체를 북군의 통제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아칸소 세 주가 남부연합에서 떨어져 나갔고, 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더욱 위축됐다. 1864년 3월, 링컨 대통령은 그랜트를 중장으로 진급시킴과 동시에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랜트는 특유의 거침없는 전진과 무자비한 전쟁 수행으로 링컨에게 보답했다. 그랜트가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점령하고, 남군 총사령관 리(Lee) 장군에게서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내전은 종결됐다(1865년 4월 9일).

 

무능력한 대통령

승리 직후에 찾아온 링컨의 예상치 못했던 죽음은 모두에게 큰 슬픔이었다. 특히 그랜트에게는 그랬다. 링컨은 자신을 술주정뱅이라고 험담하는 장군들에게서 지켜주고, 능력을 믿고 인정해준 은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링컨의 죽음은 그랜트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링컨을 감싸고 있던 전쟁 지도자의 후광이 그랜트에게로 옮아왔기 때문이다.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17대 대통령)의 온건한 남부 재건 정책에 만족하지 못했던 북부의 급진파는 전쟁 영웅 그랜트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본의 아니게 그랜트는 정치에 입문했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도 있게 마련이다. 그랜트에게는 대통령직이 그랬다. 남부의 재건과 국가의 통합이라는 시대의 과제를 군인 그랜트는 감당할 수 없었다. 전쟁에 지친 영웅에게는 더 이상 야망도 열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에게 권력은 지나간 승리에 대한 보상에 불과했다. 모두에게 불행이었다. 남북전쟁 이후의 혼란 속에서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있었다. 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백악관과 정부는 그러나, 무기력했다. 스스로가 부정부패의 온상이었으니 당연했다. 대통령의 매제 아벨 코빈(Abel Corbin)은 서민 경제의 기반을 뒤흔든 금값 조작 사건에 가담했다. 부통령 스카일러 콜팩스(Schuyler Colfax), 몇몇 의원과 정부 내 주요 인사들은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컸던 철도회사 크레디 모빌리에(Crédit Mobilier) 사기 계약 사건의 공범들이었다. 일부 재무부 관리는 위스키 업자들과 짜고 세금을 포탈했고, 육군부 장관 윌리엄 벨냅(William Belknap)과 그의 아내는 뇌물을 받고 막대한 이익이 보장되는 군납업자 자리를 팔았다. 대형 권력형 게이트들이 연이어 터졌으나 대통령은 오히려 관련자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영광과 오명 사이

실정(失政)의 결과는 선거에서 나타났다. 민심을 잃은 공화당은 1876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민주당 후보가 일반 투표에서 26만표 이상 더 얻었다. 그러나 몇몇 주의 선거 결과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는지가 모호해졌다. 양당은 특별선거위원회를 구성했다. 물밑 협상 끝에 특별선거위원회가 공화당 후보 러더퍼드 헤이스(Rutherford Hayes·19대 대통령)를 대통령에 지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통령직을 양보하는 대가로 민주당은 남부인의 각료 임명, 남부 내 연방 관리 임명권, 남부에 대한 광대한 개발, 남부에서 연방군의 철수 등 다양한 정치적 과실을 얻어냈다. 그 결과 남부는 다시 배타적인 소수 백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흑인들은 다시 노예나 다름없게 됐다.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린 끝에 승리했는데도 남부의 재건은 부패하고 무능한 그랜트 정권 때문에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링컨이 약속했던 자유와 권리가 흑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캐피톨 앞의 동상은 말이 없다. 그가 미국 사회에 남긴 상처와 오명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가 완벽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인정하는 것 또한 미국의 전통이다. 그랜트는 지금 캐피톨 앞에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북군 총사령관으로서, 부패하고 실패한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연방을 구한 영웅으로 서있는 것이다. 그는 대통령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은 전혀 없고 과만 넘치는 사람도 으스대며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나는 어떠한지’ 스스로 성찰할 일이다.

 

[뉴욕의 무덤에도 ‘대통령보다 장군’]

▲뉴욕의 그랜트 묘를 장식하고 있는 벽화 중 하나. 그랜트가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이다. /송동훈

 

그랜트 대통령의 무덤은 뉴욕 맨해튼(Manhattan) 북부 모닝사이드 하이츠(Morningside Heights)에 있다. 대부분의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에 묻힌 것을 고려하면 예외적이다. 대통령직에서 은퇴한 후 말년을 뉴욕에서 보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인 줄리아(Julia 1826~1902년)가 강력하게 뉴욕에 묻히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덤은 거대한 돔과 웅장한 도리아 스타일로 구성됐는데 미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크다. 내부는 남북전쟁 당시 그랜트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벽화로 장식돼 있다. 결국 무덤에서조차 그랜트는 무능한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군인으로서 기억되고 있는 셈이다. 찾는 이는 많지 않다.

 

[64] 중앙은행 설립한 美 초대 재무, 뉴욕의 마천루 200년간 지키다

뉴욕과 알렉산더 해밀턴

▲현대 도시 문명의 상징이자 세계 제국 미국의 경제 금융 중심지인 뉴욕의 마천루가 알렉산더 해밀턴 흉상 뒤로 펼쳐져 있다. 해밀턴은 미국의 미래를 내다보고 거기에 적합한 국가의 제도적 틀을 쌓은 선구자였다. 흉상이 놓인 뉴저지주 위호켄에서 해밀턴은 정적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사진=송주영

 

뉴욕(New York)은 상징이다. 바벨탑처럼 하늘을 향해 뻗은 수많은 고층 빌딩은 도시를 상징한다. 자유의여신상은 말 그대로 ‘자유(Liberty)’를 상징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들은 공존을 상징한다. 눈부신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브로드웨이의 밤은 화려하고 감각적인 문화를 상징한다. 부정적 상징도 있다. 한때 세계화를 상징했던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9‧11 메모리얼은 흔들리는 세계화와 격화되는 문명의 충돌을 상징한다. 더러운 뒷골목과 할렘은 가난과 범죄, 차별의 상징이다. 그렇게 뉴욕은 인류의 명암을 상징하는 현재의 축소판이다.

 

현대 문명의 상징 뉴욕

뉴욕을 감상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시 한가운데로 들어가 느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시에서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면 두 방법이 다 필요하다. 그중 뉴욕을 전체적으로 감상하기에 가장 의미 있는 곳은 뉴저지주 위호켄(Weehawken)의 해밀턴 공원이다.

 

▲뉴저지주 쪽에서 바라본 뉴욕 맨해튼섬의 장려한 마천루. 인간이 건설한 가장 장엄한 도시 뉴욕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게티이미지뱅크

 

위호켄의 해밀턴 공원은 맨해튼섬 맞은편에 있다. 허드슨강과 뉴욕이 바라보이는 높은 언덕에 있어 전망이 기막히다. 특히 맨해튼섬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천루의 위용이 압권이다. 뉴욕이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다. 시대 흐름을 잘 탔고, 수많은 사람이 피땀을 흘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뉴욕의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그는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오늘날의 미국을 상상한 몽상가이자, 오늘날의 미국을 설계한 전략가다.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1755?~1804년)은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연도는 불확실하다. 어려서 고아가 됐지만 총명하게 타고났다. 성공 의지도 강했다. 해밀턴은 결국 노력 끝에 뉴욕으로 터전을 옮겼고, 컬럼비아 대학교의 전신(前身) 킹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당시는 혁명 시대였다. 많은 미국인이 억압받는 식민지인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대영제국과 싸우기를 열망했다. 해밀턴 역시 아메리카인의 권리를 믿었고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독립 전쟁이 터지자 해밀턴은 입대했다. 그의 탁월한 재능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 부관으로 임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워싱턴과 해밀턴은 사선을 함께 넘으며 부자(父子)처럼 서로를 신뢰하게 됐다. 이때 형성된 두 사람 관계는 다가올 미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쟁은 식민지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풀어야 할 난제가 가득했다. 헌법 제정과 정부 구성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영국 정부를 대신해 독재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식민지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 필요성이 앞섰다. 1787년 5월 독립의 도시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제정 회의가 열렸다.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을 필두로 한 미국의 ‘대인물’ 55명이 모였다. 외교관으로 해외에 나가 있던 존 애덤스(영국 대사, 2대 대통령)와 토머스 제퍼슨(프랑스 대사, 3대 대통령)을 제외한 당대 최고 명사들이었다. 해밀턴은 뉴욕주(州)를 대표해서 회의에 참석했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다

 

해밀턴의 정치 철학은 그의 삶과 유리돼 있었다. 출생은 비천했으나, 해밀턴은 영국의 귀족정치와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민중의 상식, 대중의 분별, 여론의 선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밀턴은 미국에서 입헌군주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공화정부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해밀턴은 차선책으로 견제와 균형을 토대로 하되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했다.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의 국부(國父) 다수도 해밀턴의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미국 헌법이 탄생할 수 있었다. 모두의 지지와 환호 속에서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헌법은 문서에 불과하다. 문서에 새겨진 정신과 제도를 구현하는 것은 사람 몫이다. 워싱턴은 새로 출범한 정부의 가장 중요한 직책인 재무장관에 해밀턴을 임명했다. 또 다른 핵심 직책인 국무장관은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해밀턴과 제퍼슨은 미국 초대 내각의 양대 축이었다. 동시에 서로 상반된 정치 철학과 국가 전략의 대표 주자였다. 해밀턴은 ‘연방주의자’였다. 무질서를 혐오했고 효율과 질서를 중시했다. 새로 탄생한 미국의 미래가 상공업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융과 사적 거래에 신용을 제공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를 선호했다. 제퍼슨은 ‘반(反)연방주의자’였다. 독재를 미워하고 자유를 중시했던 제퍼슨은 연방보다 주의 권리를 우선시했다. 민중을 신뢰했고 여론을 중시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영농들이 이끄는 농업 국가를 미국의 미래로 봤다. 둘은 개인적 성향, 정치적 철학, 정책 방향, 국가의 이상향 등 모든 점에서 대척점에 서 있었다.

 

해밀턴은 재무장관 지위를 이용해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고, 상공업을 진흥할 금융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우선 헌법 제정 이전의 정부가 독립 전쟁 과정에서 진 채무 변제를 추진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계약을 존중해야만 단기간에 미국 정부에 신용이 생긴다고 본 것이다. 당시 채무 대부분은 독립 전쟁 동안 대륙회의가 군인들에게 발행해준 봉급 지불 증서였다. 대륙회의에 대한 불신과 생활고로 많은 군인은 봉급 지불 증서를 헐값에 시장에 내다 팔았고, 투기꾼들이 사들였다. 해밀턴의 계획대로 중앙정부가 채무를 이행하면 큰 이득을 보는 것은 투기꾼들이었다. 반대가 심했지만 해밀턴은 채무 이행을 강행했다. 사적(私的) 거래를 존중하고 정부의 신용을 쌓는다는 더 큰 목표를 위해서였다. 연방정부가 각 주의 부채를 인수하는 계획도 추진했다. 역시 반대가 심했다. 부채가 적은 주가 많은 주를 위해 세금을 더 내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밀턴은 제퍼슨 등과 미국의 수도를 버지니아에 설치하기로 타협함으로써 ‘부채 인수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적의 총에 최후를 맞다

해밀턴의 또 다른 업적은 중앙은행 설립이다. 그는 중앙은행의 후원을 받아야 상공업이 번창하고, 상공업이 번창해야 연방정부가 강력해질 것이라고 봤다. 문제는 헌법에 명기된 연방정부의 권한 중에 은행 설립 조항이 없다는 것이었다. 반(反)연방주의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해밀턴은 헌법을 유연하게 해석하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워싱턴 대통령은 해밀턴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미국에 중앙은행이 탄생하고 상공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이 갖춰지기 시작했다(1791년). 모두 해밀턴의 공적이다.

 

해밀턴의 영도와 워싱턴의 지지에 힘입어 연방주의자들은 새롭게 태어난 미국의 기초를 쌓고 정부의 틀을 짰다. 부유하고 계몽된 지배계급, 활력 있는 상업 경제, 다양한 제조업이 번영하는 국가 비전을 제시했다. 해밀턴은 위대한 선구자였지만 대중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대중을 신뢰하지 않았다. 대중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해밀턴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해밀턴에게는 정적(政敵)이 많았다. 뉴욕의 거물 정치인 에런 버(Aaron Burr·1756~1836)와 특히 심각한 관계였다. 재능과 그릇에 비해 터무니없는 큰 꿈을 품었던 버는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에게 패배했다. 해밀턴이 제퍼슨을 지지한 탓이다. 버는 이때부터 해밀턴을 증오했다. 그 후 버는 제퍼슨 정부에 반대해 연방 탈퇴를 획책하던 세력과 손잡고 뉴욕주지사에 도전했다. 해밀턴은 공개적으로 버의 행동을 비난했다. 선거에서 패한 버는 이 역시 해밀턴 탓이라며 결투를 신청했다. 겁쟁이란 소리를 듣는 것이 싫었던 해밀턴은 응했다. 두 사람은 결투가 불법이 아니었던 뉴저지의 한적한 숲에서 권총을 들고 만났다. 그 자리에서 해밀턴은 버의 총을 맞고 죽었다(1804년 7월 12일).

 

위호켄의 해밀턴 공원은 바로 버에게 해밀턴이 살해당한 곳이다. 뉴욕의 마천루가 보이는 곳에는 해밀턴 흉상이 놓여있고,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 합당하다. 해밀턴이 없었다면 오늘의 뉴욕도 미국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의 미국을 꿈꾸고 설계한 선구자다. 비록 대중과 시대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랑의 단물만 뽑아 먹고 헛되이 떠난 그 어떤 인물보다 심오한 유산을 남겼다. 위호켄의 해밀턴 공원은 그런 해밀턴의 비극적 최후를 추모하고, 그가 남긴 유산을 감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해밀턴 부인의 말은 200년 후 뮤지컬로 실현됐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명성과 업적을 되살려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의 한 장면. 독립 전쟁에서 결투로 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려냈다.

 

해밀턴만큼 업적에 비해 혐오를 많이 받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드물다. 정적(政敵) 제퍼슨이 강조했던 민주주의가 해밀턴이 중시했던 귀족주의보다 미국인의 기질에 더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밀턴은 미국 헌법에 내포된 이상을 제도로 현실화한 설계자였다. 미국의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 명확한 비전을 제시한 선구자였다. 그의 삶은 최근 론 처노(Ron Chernow)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린-마누엘 미란다(Lin-Manuel Miranda)의 뮤지컬 ‘해밀턴(Hamilton)’이 브로드웨이를 석권함에 따라 재조명받고 있다. 해밀턴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자녀들에게 ‘나의 해밀턴, 그를 기억하는 일에도 정의가 찾아오리라’라고 했던 예언은 200년이 흐른 뒤 문화의 힘으로 실현됐다.

 

[65] “북군 통솔해달라” 링컨 제안 뿌리치고… 그는 왜 敵將이 됐나

게티즈버그와 리 장군그리고 링컨 대통령

남북전쟁(1861~1865)은 미국 역사상 유일한 내전이었다. 가장 큰 인명 피해를 기록한 전쟁이기도 하다. 펜실베이니아주(州) 남부의 게티즈버그는 그런 남북전쟁의 전환점이 된 결정적 전투의 현장이다. 우리에게는 링컨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표현이 포함된 연설로 기억되고 있다. 오늘날의 게티즈버그는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작은 도심을 중심으로 펼쳐진 넓고 한가로운 평원에는 참전자와 희생자를 기리는 수많은 기념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남북전쟁 당시에 썼던 대포와 나무로 된 엄폐물들도 곳곳에 놓여 있다. 걷는 건 힘들다. 차로 돌아도 중요한 곳을 다 보려면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 기념비와 동상 중 가장 인상적인 건 펜실베이니아 기념비다. 거대한 개선문이다. 이에 필적하는 건 버지니아 기념비다. 규모는 작지만 인상적이다. 기념비의 상부를 장식하고 있는 건 한 장군의 기마상이다. 그는 조용히 북군의 진지가 있었던 곳을 응시하고 있다.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1807~1870). 게티즈버그 전투의 주역이었던 남부군 사령관이다.

 

▲게티즈버그 전투 현장에 세워진 버지니아 기념비는 남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의 기마상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당대 최고의 군인이었던 리 장군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남부는 사실상 남북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을 상실했다./게티이미지뱅크

 

워싱턴의 후예 리 장군

로버트 리는 버지니아 명문(名門)의 후손이다. 그의 가문은 리처드 리 1세(Richard Lee Ⅰ·1617~1664)가 1639년 버지니아로 이민 온 이후 대대로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리의 아버지 헨리는 독립전쟁의 영웅이었고, 버지니아주의 주지사까지 지냈다. 리는 남부 명문가의 전통에 따라 육사에 진학했고 차석으로 졸업했다(1829년). 졸업 후 리는 메리 랜돌프 커스티스(Mary A. Randolph Custis)와 결혼했다. 그녀는 국부 조지 워싱턴의 양자인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1781~1857)의 유일한 딸이었다. 결혼을 통해 리는 조지 워싱턴의 법통을 이어받게 된 셈이다. 리가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건 1846년에 터진 멕시코 전쟁이었다. 리는 이 전쟁에서 탁월한 능력과 용기를 선보였고 특진을 거듭해 대령에 이르렀다. 스스로의 능력, 가문의 명성, 처가의 후광으로 인해 리는 군부 내에서 단연 돋보였다.

 

리 장군, 남부를 선택하다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링컨이 북군 사령관으로 리를 생각했던 건 당연했다. 조지 워싱턴을 마치 신처럼 떠받치는 나라에서 그의 법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군대를 이끈다면 이보다 완벽하게 북부의 대의명분을 상징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리는 탁월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링컨의 기대와 달리 리는 남부를 선택했다. 노예 제도에 대한 반감보다 버지니아에 대한 애정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버지니아에 있었고, 버지니아는 남부의 대의에 충실했다. 리는 사실상 남군 총사령관으로 버지니아 전선을 진두지휘했다. 남부가 국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4년간 버틸 수 있었던 데는 리와 같은 탁월한 장군들의 역할이 컸다.

 

 

남부가 무너지기 시작한 건 서부 미시시피 전선에서였다. 그곳에는 리에게 필적할 만한 장군이 없었다. 오히려 북군에 그랜트(Grant)와 셔먼(Sherman) 같은 맹장들이 포진해 있었다. 1863년 봄, 그랜트는 미시시피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빅스버그(Vicksburg)로 향했다. 빅스버그를 잃으면 남부연합은 미시시피강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게 된다. 그러면 남부는 두 동강이 난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아칸소의 지원을 잃게 되면 이미 열세인 전력은 더욱 약해질 게 뻔했다. 남부연합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리는 새로운 작전을 제안했다. 북침이었다. 그동안 남군은 고향에서 싸웠다. 전쟁 목표가 북부 정복이 아니라 북부로부터의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북부는 전쟁 내내 평화를 누렸다. 리는 북부로 쳐들어가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위협함으로써 북부에 전쟁의 공포를 퍼트리고 반전(反戰) 여론을 조성하고자 했다. 두려워진 북부의 민심이 링컨을 압박하면 남부는 협상을 통해 연방에서 독립할 수 있을 터였다. 남부 수뇌부는 리의 새로운 작전을 승인했다. 7만명이 넘는 대군이 리 장군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1863년 6월).

 

게티즈버그에서 싸우다

북군 역시 남군을 추격해 북으로 갔다. 둘은 펜실베이니아 남쪽의 작은 마을 게티즈버그에서 충돌했다(1863년 7월 1~3일). 사흘간 남과 북은 치열하게 싸웠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남군의 사기는 드높았지만, 북군도 필사적으로 버텼다. 3일째 되는 날, 리는 세미터리 리지(Cemetery Ridge)에 주둔 중인 북군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돌격대를 이끌었던 장군의 이름을 따 ‘피킷의 돌격(Pickett’s Charge)’이라 불리는 진격은 그러나 북군의 집중포화에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 날 남군은 게티즈버그에서 철수했다. 리의 패배였다. 남부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링컨은 북군 사령관 미드(Meade) 장군에게 리의 군대를 추격하라 지시했다. 리를 잡으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드높은 리의 명성 앞에서 북군의 장군들은 망설였다. 리의 군대는 무사히 버지니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은 계속될 터였다.

 

▲게티즈버그 국립묘지 안에 마련된 링컨의 흉상. 역사에 남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이 묘지에서 행해졌음을 상징하고 있다. 링컨은 이 연설을 통해 남북전쟁이 민주주의 정부를 지켜내고 유지하기 위한 전쟁임을 명확히 했다./송동훈

 

링컨, 불멸의 명성을 부여하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막대한 사상자를 남겼다. 양측 합쳐서 5만명이 넘는 군인이 죽거나 다쳤다. 연방정부는 전투 현장에 묘지를 조성했다. 묘지 봉헌식은 1863년 11월 19일에 열렸다. 전날 게티즈버그에 도착한 링컨은 홀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다음 날 묘지는 청중 약 9000명으로 가득했다. 하버드대학 총장을 지낸 유명 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의 2시간에 걸친 열정적인 연설이 끝난 후 링컨은 연단에 올랐다. ‘80년 하고도 7년 전에’로 시작된 대통령의 연설은 짧았다. 연설이 끝났을 때, 이토록 짧은 연설을 예상치 못했던 청중은 침묵했다. 링컨이 몸을 돌려 자리로 향하자 마침내 박수 소리가 터졌다. 청중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들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게티즈버그 유적지의 국립묘지로 들어가면 입구 오른쪽에 링컨의 흉상이 놓여 있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연설 현장을 기념하는 흉상이다. 묘지는 너무나 고즈넉해 그날의 혈투를 상상하기 어렵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다. 무덤은 그 기념비를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낮게 배치돼 있다. 무명용사들을 제외한 모두가 고향 전우들과 나란히 묻혀 있다.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링컨은 ‘세계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말 대신 이곳에서 용사들이 한 일을 기억할 것’이라 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세계는 링컨이 한 말을 통해 군인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링컨은 그들의 용기와 희생에 불멸의 명성을 불어넣었다. 그의 말이 고결하고, 마음이 진실했던 탓이다. 지금도 게티즈버그에 갔던 봄과 여름을 생각하면 상쾌하고 담백한 풀 향기가 난다. 수준 낮은 정치인들의 비루한 말이 사방에 넘쳐 불쾌할 때면 나는 게티즈버그의 국립묘지를 생각한다. 위대한 정치가와 그가 추구했던 참민주주의의 이상에 위로받기 때문이다. 내게 게티즈버그는 이동하는 안식처다./펜실베이니아 게티즈버그=송동훈

 

▲게티즈버그 국립묘지의 기념비는 남북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이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연방을 지킨 모든 군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기념비를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배치된 많은 무덤 중 가장 인상적인 건 무명용사들의 묘다. 그들은 오직 묘비에 적힌 숫자로만 기억되고 있다./게티이미지뱅크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게티즈버그 연설은 고전(古典)과 같다. 누구나 들어봤지만 정확한 내용을 아는 이는 드물다. 드높은 민주주의의 이상이 담겨 있기에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지금이야말로 읽고 생각하기에 적기다.

 

“87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자유와 만인 평등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기 위해 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세워진 이 나라가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을지 판가름하는 큰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인 이 자리가 바로 그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 바친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그 땅의 일부를 봉헌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이 땅을 봉헌한다 해도 더 신성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이곳에서 싸운 용사들이 이미 이 땅을 신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는 더 이상 보탤 수도, 뺄 수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말을 전 세계가 주목하거나 오래 기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용사들이 한 일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숭고하게 이끌었으나 아직 끝내지 못한 과업을 위해 우리를 봉헌해야 합니다. 명예롭게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분들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이루고자 했던 대의에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하나님의 은총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를 낳을 것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66] ‘오하이오 갱’의 꼭두각시가 된 최악의 대통령… 초상화는 말이 없다

워싱턴 국립초상화박물관과 하딩 대통령

▲시인 월트 휘트먼의 극찬대로 그리스 고전주의 양식을 본뜬 국립 초상화박물관의 외관은 웅장하고 우아하다./게티이미지뱅크

 

▲박물관 내부의 중정은 독특한 천장으로 인해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영박물관 천장을 설계·시공한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 회사 작품인 탓에 대영박물관과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한다./위키피디아 APK

워싱턴의 국립초상화박물관은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외관부터가 웅장하고 아름답다. 특허청사로 썼던 이 건물은 백악관, 국회의사당(The Capitol)에 이은 워싱턴의 세 번째 공공 건물이다. 미국의 위대한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1819~1892)이 “워싱턴의 빌딩 중 가장 장려하다(noblest)”고 감탄할 만하다. 비록 오래된 건물이지만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다. 대대적으로 개축해 2006년에 다시 개관했기 때문이다.

 

건물 중 가장 멋진 곳은 중정이다. 그곳 천장은 빔과 유리로 된 덮개인데, 유려하게 흐르는 물결 같기도 하고 무한히 반복되는 마름모꼴 파도 같기도 하다. 빛에 따라 구름에 따라 바람에 따라 박물관 중정은 쉼 없이 변한다. 사람들 움직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추상적이고 아름답다. 소장품 중 하이라이트는 미국 대통령 초상화 컬렉션이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에서 44대 대통령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통령이 초상(肖像)을 남겼다. 관람객 대부분은 제퍼슨, 링컨, 윌슨, 루스벨트처럼 위대한 대통령 초상 앞에 머문다. 반면 나는 한 무명(無名) 대통령 앞에 오래 서서 상념에 잠긴다. 그의 이름은 하딩. 무명이라기보다는 오명(汚名)으로 기억되는 대통령이다.

 

▲워싱턴 D.C. 국립 초상화박물관에 걸려 있는 29대 대통령 하딩의 초상화. 오하이오의 평범한 정치인이었으나 ‘대통령답게 생겼다’는 유일한 장점에 전임자 윌슨의 이상과 개혁에 지친 민심이 더해지면서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근엄한 표정과 당당한 풍채 뒤에 숨겨진 온갖 단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보이지 않는다./워싱턴 D.C.=송주영

 

잘생긴 정치가

워런 하딩(Warren Harding·1865~1923년)은 미국의 29대 대통령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해인 1865년 11월에 오하이오주(州)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주도 콜럼버스(Columbus)시 북쪽의 매리언(Marion)에서 신문기자로 경력을 시작한 하딩은 30대 중반 지방 정계에 진출했다. 183㎝의 훤칠한 키, 당당한 풍채, 잘생긴 얼굴에 언제나 잘 차려입는 하딩은 누구에게나 리더처럼 보였다. 그는 순식간에 오하이오 정계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오하이오 공화당의 부패한 모리배 해리 도허티(Harry Dougherty)는 하딩의 가능성을 주목했다. 도허티는 특히 하딩이 자신만의 정견(政見)과 윤리적 기준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좋게 보았다. 자신의 꼭두각시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도허티는 열심히 ‘하딩 띄우기’에 나섰고 그를 오하이오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1914년). 상원의원 하딩은 평범했다. 비록 업적은 없었지만, 인물만큼은 워싱턴 D.C.에서도 돋보였다.

 

1920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도허티는 하딩을 공화당 후보로 출마시켰다. 전국적 지명도도, 정치적 업적도 없는 하딩에게는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도허티는 하딩이 ‘대통령처럼 생겼다’며 공화당 지도부를 설득했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는 데 외모만큼 중요한 게 있겠냐는 도허티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하딩의 평범함도 장점이 됐다. 공화당 지도부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재임 1901~1909년)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재임 1913~1921년) 같은 뛰어난 대통령에게 질려 있었다. 위대한 대통령 밑에서 당과 의회는 거수기에 불과했다. 이제 하딩 같은 인물을 내세워 당과 의회가 정치의 주도권을 찾아올 때가 된 것이다.

 

▲하딩의 첫 내각 멤버들. 미국 역사상 최악으로 평가받는 하딩의 첫 내각 구성원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하딩 대통령, 맬론 재무장관, 도허티 법무장관, 덴비 해군장관, 월레스 농무장관, 데이비스 노동장관, 쿨리지 부통령, 후버 상무장관, 폴 내무장관, 헤이스 우정청장, 위크스 전쟁장관, 휴즈 국무장관./미국의회도서관

부패한 정권

민심도 마찬가지였다. 윌슨의 이상은 고매했고 개혁은 필요했지만 그에 따른 피로감도 만만치 않았다. 윌슨의 가르치려는 태도와 완고한 자기 확신, 말년에 보여준 불통 모습은 위대한 인물과 민주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평범하고 조용했던 과거로 되돌아가길 원했다. 하딩의 선거 캠프는 민심 흐름을 제대로 읽었다. ‘Return to normalcy(정상으로 복귀)’라는 단순한 선거 구호만 달랑 내세웠을 뿐인데도 민심이 쏠렸다. 하딩은 일반 투표에서 1600만표 이상을 얻어 당선됐다. 민주당 후보와는 격차가 700만표 이상이었다. 모두 1920년까지 치러진 대선 기준으로 최다 득표, 최대 격차였다.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400표 이상으로 민주당 후보를 압도했다.

 

하딩의 행복한 백악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내각은 위대한 인물들과 위태로운 인물들이 묘한 조화를 이뤘다. 국무장관 휴스(Charles Hughes), 재무장관 멜런론(Andrew Mellon), 상무장관 후버(Herbert Hoover)가 전자에 속했다. 법무장관 도허티, 내무장관 폴(Albert Fall), 해군장관 덴비(Edwin Denby), 연방준비은행 이사회 의장 크리싱어(Daniel Crissinger), 보훈처장 포브스(Charles Forbes), 조폐국장 스코비(Frank Scobey) 등은 후자였다. 진짜 권력은 도허티를 필두로 한 후자에게 있었다. 일명 ‘오하이오 갱(Ohio Gang)’이라 한 대통령 측근들은 조직적으로 국가를 도적질하기 시작했다. ‘작은 초록색 집’이라고 부른 도허티의 워싱턴 집이 본부였다. 그곳에선 정부 재산과 정부 하도급 사업은 물론이고 공직, 사면, 가석방 등 인사와 사법(司法) 정의도 매매됐다. 부정부패가 일상이 됐고, 뇌물이 넘쳐났다. 국가와 국민이 본 피해는 고스란히 대통령 측근들에게 이익이 됐다. 허수아비 대통령은 아무것도 몰랐다.

 

대통령의 몰락

사법 정의를 지켜야 할 법무장관이 주범이었으니 다른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비리는 당연히 은폐됐다. 오하이오 갱은 도허티를 법무장관에 앉힐 때부터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숨기기에는 부패 규모가 너무 방대했고, 관련자가 너무 많았다. 1923년 봄, 보훈처장 포브스와 관련된 부패 사건 내막이 하딩의 귀에 들어갔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지만 대통령은 충격에 빠졌다. 두려움과 분노에 사로잡힌 하딩은 도허티의 측근 제스 스미스(Jess Smith)를 질책했다. 그 직후 스미스는 사망했다. 언론에 발표된 사인은 권총 자살이었다. 스미스가 갖고 있던 자료는 불태워졌다.

 

하딩의 심신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휴식하고자 대통령은 그해 6월 알래스카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8월 2일 저녁,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의 호텔에서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영부인이 부검을 거부했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하딩의 예상치 못했던 죽음은 전국적인 애도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거기까지였다. 사후(死後)에 각종 부패 스캔들이 밝혀지면서 하딩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1927년 7월 하딩의 숨겨진 애인인 서른한 살 연하의 낸 브리턴(Nan Britton)이 ‘대통령의 딸’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전직 대통령 하딩의 평판은 바닥을 쳤다(낸 브리턴의 딸은 2015년 DNA 검사로 하딩의 친자임이 밝혀졌다).

 

”유일한 죄는 완전히 바보였다는 점”

하딩의 초상화가 국립초상화박물관에 버젓이 위대한 대통령들과 함께 걸려 있다. 그의 본질이 그림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초상화 속 하딩은 멋지고 당당할 뿐이다. ‘대통령처럼 보인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행복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자신의 평판이 산산조각 나고, 친구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가는 것을 보지 않고 죽었으니까.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비정하다. 대통령을 평가하는 각종 조사에서 하딩은 확고부동하게 꼴등이다. 세계적 작가 빌 브라이슨은 “하딩의 유일한 죄는 완전히 바보였다는 점”이라고까지 혹평했다. 대통령에게 ‘완전히 바보였다’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일까? 판단은 각자 몫이겠지만 내 생각은 명확하다. 용서받을 수 없다. /워싱턴 D.C.=송동훈

 

▲국립초상화 박물관 내 서점에 진열된 백남준 전시회 기념 책자의 커버. 그의 영어 이름과 함께 세계적인 선구자란 표현이 선명하다./워싱턴 D.C.=송동훈


[‘세계적인 선구자, 백남준’ 2012년 특별전… 책 판매]

옛 특허청 건물은 규모 면에서 워싱턴D.C.에서 손꼽힌다. 국립초상화박물관과 미국예술박물관(American Art Museum)이 함께 들어가 있는 이유다. 그런 만큼 각종 책과 기념품을 파는 박물관 서점의 규모와 수준도 정상급이다. 그곳에서 한국인을 다룬 책을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NAM JUNE PAIK, GLOBAL VISIONARY(세계적인 선구자, 백남준)’ 2012년 12월부터 2013년 8월까지 이곳에서 열린 백남준 특별전을 기념한 책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이 정도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벅찬 일이다. 이를 계기로 이 박물관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졌다.

 

[67] 독재자를 추앙한 죄… 비행왕의 추락이 시작됐다

대서양 첫 단독비행한 찰스 린드버그, 그의 삶이 던지는 화두

▲1927년 5월 21일 린드버그가 몰고 간 ‘세인트루이스 정신’ 항공기가 파리 르부르제 비행장에 도착하자 수만 명 인파가 그를 환영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린드버그는 에펠탑 위를 선회한 후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린드버그는 뉴욕 귀국 환영 행사에서도 400만명 이상에게 환호를 받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뉴욕은 마천루의 도시다. 규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동시에 퍼레이드의 도시다. 운이 좋으면 마천루 사이를 가로지르는 퍼레이드를 보게 되는데, 장관(壯觀)이다.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인 퍼레이드는 3월마다 열리는 아일랜드의 성인 ‘성 패트릭(Saint Patrick)’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그날 뉴욕 거리와 펍은 온통 성 패트릭의 상징색인 초록으로 뒤덮였다. 성대했지만 내 기억 속 한 장면과 비교하면 초라했다. 기억 속의 퍼레이드는 흑백이다. 한 남자를 위한 환영 행사였는데, 건물에서 날린 무수한 색종이가 뉴욕의 마천루를 뒤덮었다. 이토록 거대하고 열렬한 퍼레이드는 본 적이 없다. 개선 행진 주인공은 20대 중반의 청년, 찰스 린드버그였다.

 

하늘을 동경한 소년

찰스 오거스터스 린드버그(Charles Augustus Lindbergh)는 1902년 미네소타주(州)에서 태어났다. 원래 성(姓)은 몬손(Månsson)이었다. 조부 올라 몬손(Ola Månsson)이 1859년 스웨덴을 떠나 미국에 이민 갔을 때 린드버그로 개명했다. 린드버그와 동명인 아버지 찰스는 변호사를 거쳐 공화당 연방 하원 의원으로 활약했다. 린드버그는 아버지를 따라 워싱턴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린드버그는 비행을 동경했다. 위스콘신대 2학년 때 결국 비행의 꿈을 좇아 자퇴했다. 당시 비행사는 기피 직업이었다. 월급은 적었고, 생활은 불안정했으며, 사고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린드버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대서양을 최초로 단독비행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 /게티이미지코리아

 

린드버그는 1922년 4월 9일 처음 하늘을 날았다. 네브래스카주(州) 링컨의 비행 학교였다. 비행에 더욱 매료된 린드버그는 위험천만한 곡예비행사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2년 동안 무려 700회 이상 창공을 날았다. 1924년에는 육군 항공 예비군 훈련 과정에 들어가 체계적 기술 훈련까지 받았다.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당시 미군은 비행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린드버그는 보직 없는 대위 계급장만 받았다. 비행을 계속하기 위해서 린드버그는 항공 우편 조종사로 취직했다. 현장은 난관투성이였고, 린드버그는 그런 어려움을 돌파하면서 최고 비행사로 성장했다. 1927년 봄이 됐을 때 린드버그는 스스로 준비됐음을 확신했다. 때가 된 것이다.

 

대서양 비행에 성공하다

당시 유럽과 미국의 이목은 대서양 횡단 비행에 쏠려 있었다. 당대 최고 조종사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무명 청년 린드버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린드버그는 샌디에이고 라이언 항공사의 도움을 받아 직접 비행기를 제작했다. 오직 한 사람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널 비행기 ‘세인트루이스 정신(Sprit of St Louis)’은 그렇게 탄생했다. 린드버그가 세인트루이스 정신을 타고 뉴욕 루스벨트 비행장을 떠난 건 1927년 5월 20일 오전 7시 52분이었다. 린드버그는 오직 혼자 힘으로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파리로 가는 항로를 정확하게 찾아 동쪽으로 날아갔다. 경이, 그 자체였다.

 

5월 21일 저녁 린드버그 눈앞에 거대한 빛무리가 펼쳐졌다. 파리의 불빛이었다. 린드버그는 에펠탑 위를 선회한 후 목표했던 파리 북동쪽 르부르제 비행장의 풀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저녁 10시 22분. 뉴욕을 떠난 지 33시간 30분이 갓 넘은 시간이었다. 수만 명이 기다리던 르부르제는 환희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사방에서 군중이 린드버그를 향해 소용돌이처럼 밀려갔다. 모두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역사적 사건의 목격자이며, 눈앞에서 역사를 새로 쓴 위대한 영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몰아치는 찬사의 광풍

그날 파리는 잠들지 못했다. 같은 시각, 미국 전역은 승리감으로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어제까지 무명이었던 한 청년 이름을 입에 올렸다. 신문은 린드버그에 대한 찬사로 도배됐다. ‘인류 역사상 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공적’ ‘부활 이후 최대 사건’ ‘창조주에게 보내는 최초의 전권대사 출현’ 등 온갖 미사여구가 총동원됐다. 린드버그를 위한 온갖 제안이 쏟아졌는데 거기에는 평생 세금을 면제해주자, 항공부를 신설해 린드버그를 종신 장관에 임명하자, 미네소타주명을 린드버지아로 개명하자 등이 포함됐다. 공원, 거리, 산, 강, 다리, 학교 등 온갖 것에 린드버그 이름이 붙었다. 린드버그 집으로 350만통이 넘는 편지가 갔고, 선물이 담긴 소포 1만5000점도 배달됐다.

 

광풍은 뉴욕 환영 행사에서 절정을 맞았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직접 보낸 군함을 타고 미국으로 돌아온 린드버그는 워싱턴에서 대대적 환영을 받고 뉴욕에 도착했다. 6월 13일 월요일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뉴욕 전체가 단 한 사람을 영접하기 위해 기다렸다. 맨해튼 남쪽에서 브로드웨이를 거쳐 센트럴파크에 이르는 모든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건물 옥상과 창문에도 빼곡하게 사람들로 가득 찼다. 린드버그는 뉴욕 시장과 함께 무개차(無蓋車)에 올라 뉴욕을 가로질렀다. 마천루에서 뿌린 색종이가 진눈깨비처럼 쏟아져 린드버그의 모습을 가릴 정도였다. 최소 400만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됐다. 린드버그에게 이날은 인생의 절정이었다.

 

추락하는 이카로스

린드버그의 모험은 계속됐다. 항공 산업의 선구자 노릇도 했다. 대중은 영웅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고 열광했다. 그러나 세상의 지나친 관심은 숫기 없는 린드버그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의 인생은 1932년 초 아들의 납치와 살해라는 가장 파괴적 방식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린드버그 부부는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여러 나라를 여행했는데 특히 독일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36년 나치는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린드버그를 초청했다. 영웅은 기꺼이 응했고, 대접은 융숭했다. 2년 뒤 나치 정권은 린드버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독일 공군 사령관이자 히틀러의 최측근 헤르만 괴링이 히틀러를 대신해 훈장을 달아줬다. 파멸의 서곡이었으나 당시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린드버그는 1938년의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히틀러라는 독재자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히틀러가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린드버그는 미국의 참전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수렁에 한 발 더 디뎠다.

 

▲린드버그 몰락의 시작이었던 독일 나치 인사들과 만나는 장면. /게티이미지코리아

1941년 9월 11일,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린드버그는 ‘영국, 유대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고의로 진실을 왜곡해 미국을 전쟁으로 끌고 가는 3대 전쟁 선동자로 규정하고 매도하는 연설을 했다. 유대인들이 “미국의 영화, 언론, 라디오, 정부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있어서 그들의 영향이 특히 악랄하다”는 발언도 했다. 나치의 시각으로 전쟁과 미국을 본 이날 연설로 20세기의 이카로스는 추락했다. 여론은 영웅에게서 등을 돌렸다. 3개월 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면서 린드버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뒤늦게 조국의 대의명분을 지지하고 나섰으나 너무 늦었다. 전쟁 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린드버그는 본토를 떠나 하와이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1974년 8월 26일). 시신은 사망 직후 자택 근처 조그만 공동묘지에 묻혔다.

 

독재자와 어울렸던 죄

업적에 비해 초라한 말년이고 최후였다. 포드 대통령이 헌사에서 밝혔듯 린드버그는 ‘세계를 변모시킨 항공 시대의 위대한 선구자’로 기억하는 것이 맞는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린드버그에 대한 찬사는 살아생전에 이미 사라졌다. 뉴욕의 마천루는 역사상 최고 퍼레이드가 열린 때보다 훨씬 웅장해졌지만 정작 그날의 주인공은 잊혔다.

 

히틀러를 좋게 봤고, 히틀러에게 훈장을 받았으며, 히틀러에게 도움이 되는 연설을 했기 때문이다. 린드버그는 지식인도 정치가도 아니었다. 비행에 미쳤던 용기 있는 도전자에 불과했다. 그런 린드버그에게 역사와 대중이 내린 판결은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웅에겐 그에 합당한 도덕적 기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마천루에 설 때마다 린드버그의 삶이 준 경고를 되새긴다. 독재자와 어울린 죄는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비정한 역사의 법정에서 유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세계 첫 초음속 조종사는 척 예거]

 

지난 7일(현지 시각) 척 예거(Chuck Yeager·1923~2020·사진)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류 최초로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한 사람이다(1947년 10월). 음속을 돌파함으로써 예거는 음속 이상으로 비행하면 충격파 때문에 폭파될 것이라는 두려움의 벽을 깼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매체들은 물론이고 가디언 같은 영국 매체들도 그의 삶에 대해 긴 부고를 썼다. 달 표면에 최초로 발자국을 남겨 ‘인류의 커다란 도약’을 이뤄낸 닐 암스트롱이 2012년에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찰스 린드버그의 긴 부고에도 공과가 차분한 어조로 함께 실렸다. 강대국과 비강대국의 차이는 이런 데 있다. 강대국은 정말 가치 있는 업적이 무엇인지, 정말 기억해야 할 영웅이 누구인지 안다. 약소국은 그러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