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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설수설 2021-03/ 03-01(월) 래플 소비학 - 03-31(수) 미얀마의 R2P 호소

상림은내고향 2021. 4. 1. 17:20

황설수설 2021-03 동아일보

03-01(월)  래플 소비학

 

국내 대기업이 최근 스웨덴의 신제품 향수를 수입해 들여오며 온라인을 통해 래플 판매를 공지했다. 래플(raffle)은 추첨 복권이라는 뜻으로, 한정 수량의 제품을 살 수 있는 자격을 무작위 추첨으로 주는 방식을 일컫는다. 나이키와 협업해 운동화를 내놓았던 미국의 유명 힙합 가수가 ‘우주의 향기를 만들어냈다’는 업체의 마케팅에 래플의 경쟁률은 500 대 1에 달했다. 100mL에 30만 원이 넘는 향수였다.

 

▷래플은 MZ세대(1980년 이후 출생)와 코로나19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소비 행태다. 2015년 무렵부터 럭셔리 브랜드와 스트리트 브랜드가 한정판을 내놓기 시작할 때엔 선착순 판매 방식이었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H&M이 프랑스 발맹과 협업했을 때에는 서울 명동에서 엿새간 노숙 구매 행렬이 이어졌다. 미국 슈프림이 한정판을 낼 때마다 뉴욕과 파리에서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외출이 어려워지자 MZ세대는 쇼핑의 공간을 비대면 채널로 옮겨왔다. 업계는 ‘공정’을 목숨만큼 중시하는 이들을 위해 래플을 제시했다.


▷래플은 리셀(resell)로 불리는 되팔기와 한 짝이다. 한정판 제품은 공급은 적은데 수요가 많기 때문에 중고여도 시간이 지나도 가격이 오른다. 특히 MZ세대가 매달리는 건 한정판 운동화다. 부동산과 예술품에 비하면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데다 신고 즐기다가 현금화할 수 있어 대체자산의 성격을 띤다. 이 때문에 경매회사들까지 뛰어들며 달아오른 글로벌 운동화 재판매 시장은 2025년엔 60억 달러(약 6조8000억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주말 서울 여의도에 개점한 한 백화점에는 유명 중고거래 플랫폼의 첫 오프라인 매장이 선보였다. 럭셔리 브랜드 또는 유명 연예인과 협업한 운동화들을 판다. 한정판이라 구하기 어려웠던 수백만 원짜리 제품들도 있다. 럭셔리 제품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MZ세대와 그들의 부모 세대인 과거 X세대가 두루 방문한다. 이 중에는 운동화 가격 추이를 주식 차트처럼 분석하는 스니커테크(스니커즈+재테크) 고객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운동화 재판매도 주식처럼 투자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국내 래플 시장의 성장에는 국산 온라인 패션 플랫폼이 큰 역할을 했다. 펭수 한정판 상의도, 코로나 방역 마스크도 래플을 했다. 언택트 소비자들에게 제품 스펙에 대해 상세하게 알리고, 소비를 게임하듯 즐기는 재미를 일깨우고, 공정한 소비의 규칙을 제시했더니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폭풍 신장 중이다. 결국은 공정과 신뢰의 문제다. MZ세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싶다면 래플을 연구하면 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3-02  말편자에 박는 못

 

“못(nail)이 없어서 편자(horseshoe)가 사라졌고, 편자가 없다 보니 말(馬)까지 잃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결국엔 ‘왕국’이 파괴된다. 21세기엔 반도체가 편자의 못이다.” 지난달 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자동차용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등 4개 품목 글로벌 공급망 검토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한 발언이 세계 경제계에 충격을 던졌다.


▷오랜 기간 미국인에게 말은 농사에 필요한 기초 생산력이자 철도 등장 전까지 유일한 장거리 이동수단이었다. 말발굽을 보호하는 편자와 편자를 고정하는 못은 자동차 타이어만큼이나 핵심 부품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편자를 말발굽에 박을 때 쓰는 못’이란 쉬운 표현으로 국가 경제력에 영향을 미칠 첨단 분야 소재·부품의 자국 내 생산 필요성, 경쟁국이 이 제품 생산을 독점할 때의 위험성을 강조한 것이다.


▷작년 코로나19 발생 초기 트럼프 행정부는 인공호흡기 등 기본적 의료기기조차 확보하지 못해 6·25전쟁 직후 제정된 ‘국방물자생산법’을 동원해 기업에 생산을 강제해야 했다. 수많은 세계적 기업이 있어도 정작 물건을 생산할 공장은 중국 동남아시아 등 해외에 있기 때문이었다. 유턴 기업에 대한 혜택을 대폭 늘렸지만 떠났던 공장이 돌아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번 조치는 중국을 겨냥했다. 한국(34.7%)이 바짝 뒤쫓고 있지만 중국의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은 37.5%로 세계 1위다. 희토류는 세계 수요의 58%를 중국이 공급한다. 중국의 반도체 점유율은 15%로 대만(22%) 한국(21%)에 밀리지만 12%인 미국을 추월해 일본(15%)과 3, 4위를 다투고 있다. 미국은 인텔 퀄컴 엔비디아 등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들을 보유하고도 반도체의 생산은 대만 TSMC와 삼성전자 등에 맡기고 있다.

 

▷최근엔 자동차용 반도체 공급 차질로 GM, 포드와 테슬라 전기차 생산라인까지 멈춰 미국 정부의 마음이 급해졌다. 코로나19 이후 세계적 ‘집콕 트렌드’로 인한 가전제품 수요 급증, 텍사스주 한파와 정전 사태가 겹쳐 ‘못이 없어 말이 사라지는’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F-35 스텔스 전투기 등 미국 첨단무기 제작에 필요한 희토류 수출을 통제하려는 중국의 움직임은 경제 문제를 넘어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으로선 단기적으로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 반도체 배터리 두 분야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 미국 시장을 확대할 좋은 기회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 중국산 희토류 수입을 줄이도록 압박하면서 양자택일을 요구해 올 경우 문제가 복잡해진다. 두 강대국 모두에 ‘못과 편자’를 팔아야 지탱하는 한국 경제의 숙명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3-03  백신에 대한 오해

 

“곧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겠죠.” “친구들과 마음 놓고 만나고 싶어요.” 국내 코로나19 환자 발생 400여 일 만에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희망에 들떠 있다. 한 의사는 “짱돌 들고 싸우다 방탄복에 총까지 든 기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다니려면 아직 멀었다.


▷백신을 맞아 항체가 생기면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염려가 없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런데 코로나 백신으로 생기는 면역은 감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살균 면역(sterilizing immunity)이 아니다. 백신 접종을 하면 증상이 발현되지 않을 뿐 체내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내 몸속 바이러스는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다. 다른 백신들도 마찬가지다. 2009년 미국 일부 지역에서 갑자기 볼거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역학조사 결과 11세 소년이 영국에서 볼거리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귀국해 전파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이 소년은 홍역·볼거리·풍진(MMR) 예방접종을 모두 마친 상태였지만 감염과 전파를 피하진 못했다.


▷백신은 몸속에 들어오는 바이러스 양을 줄여 확산을 막는 효과는 있다. 현재 백신별 전파 억지 효과에 관한 연구가 진행 중인데,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경우 1회 접종 후 감염자 수가 67% 줄었다는 연구가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미국 화이자 백신의 효과가 확인됐다. 백신을 맞지 않은 집단의 감염률은 4%인데 백신을 2회 모두 맞은 집단의 감염률은 0.02%로 뚝 떨어졌다.

 

▷그렇다고 전 세계 코로나 환자 증가세가 주춤한 것이 100% 백신 덕분만은 아니다. 마스크 쓰기와 거리 두기의 습관화, 부분적 봉쇄, 자연 면역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절대적인 발생 규모는 여전히 위험한 수준이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설 조짐마저 보인다. 올여름 코로나 종식을 기대했던 미국에선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이 백신 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한국은 하루 확진자가 좀처럼 300명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 방심했다가는 3차 유행 속에서 4차 유행을 맞을 수 있다.

 

▷정부는 올 9월까지 국민 70% 이상의 접종을 완료해 11월 집단 면역을 달성할 계획이다. 하지만 백신 접종 나흘째인 1일까지 접종률은 0.04%에 불과하다. 집단 면역에 필요한 접종률 60∼72%는 백신이 바이러스 전파를 완벽히 차단할 경우의 수치이며 실제로는 80∼90%가 맞아야 안심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어제 “코로나가 올해 끝난다는 건 비현실적인 생각”이라며 거리 두기 강화를 권고했다. 백신 접종 개시는 코로나 끝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4  여초사회

 

작년 한국에서 여자아이 100명이 태어날 때 남자아이가 태어나는 비율, 즉 ‘출생성비’가 104.9명으로 관련 데이터가 남아 있는 1990년 이후 가장 낮았다고 통계청이 밝혔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출생성비가 103∼107명이란 점을 고려하면 정확히 중간 수준이다.


▷30년 전만 해도 상황이 많이 달랐다. 1980년경 시작된 출생성비 불균형이 정점에 달했던 1990년 한국의 출생성비는 116.5명으로 자연 상태를 심하게 벗어났다. 유교문화가 남긴 남아 선호 사상의 병폐(病弊)란 비판을 받으면서도 태아 성(性)감별과 낙태를 통해 남자아이만 골라 낳은 가정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1993년 ‘셋째 아이 이상’ 출생성비는 209.7명이란 극단적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 숫자도 지난해엔 106.7명으로 정상이 됐다. 중국 인도 베트남 등 남아 선호가 강한 나라에선 여전히 출생성비가 110명이 넘는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길고, 사건·사고 사망자도 남성이 많기 때문에 의도적 남초(男超) 출산이 없는 사회는 여성 인구가 남성보다 많아지는 게 정상이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남자 80.3년, 여자 86.3년으로 6년 차이가 난다. 외국인을 뺀 주민등록 인구로는 한국도 2015년 6월에 이미 여성 인구가 남성을 앞질렀다. 남성 외국인의 취업이민이 많아진 영향으로 통계청 추계인구로는 2029년에 진짜 여초(女超)사회에 진입할 전망인데 출생성비 하락은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

 

▷전체 인구는 남자가 많지만 사회 곳곳에선 이미 ‘여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교사, 공무원 등의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올해 임용될 서울지역 국공립 중등학교 교사 10명 중 8명(80.9%)은 여성이다. 이번 학년도 공립초등학교 교사 합격자 가운데 96.8%도 여성이었다. 국가공무원 중 여성 비율은 2017년 말에 50.2%로 남성을 넘어섰다. 과도한 쏠림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인위적으로 해결할 순 없는 문제다. 일자리를 둘러싼 한국 청년 남녀 간의 신경전도 넓게 보면 인구구조 변화의 한 단면일 수 있다.

 

▷출생성비를 왜곡하던 남아 선호가 자취를 감춘 데엔 고령화에 따른 의식변화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고령층이 많이 돌려보는 ‘어느 요양원 의사의 글’의 내용은 이렇다. “요양원 면회 온 가족의 위치를 보면 촌수(寸數)가 나온다. 침대 옆에 바싹 붙어서 챙기는 여성은 딸, 그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건 사위, 문간쯤에 서서 밖을 보는 남자는 아들이다.” 과장된 우스개지만 자녀와의 ‘정서적 교감’이 노후 생활에 중요하다는 깨달음이 인구구조를 바꿔 놓고 있을 수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3-05  “다 잘될 거야”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에 맞서다 숨진 19세 소녀가 민주화 시위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쿠데타 발생 후 최악의 유혈사태가 벌어진 3일 미얀마의 2대 도시 만달레이 시위 현장에서 군경의 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에인절(또는 찰 신)이다. 그의 티셔츠에 적혀 있던 문구는 시위의 슬로건이 됐다. “다 잘될 거야(Everything will be OK).”


▷에인절은 댄서이자 태권도 사범이었다. 함께 시위 현장에 있었던 친구들은 그가 용감하게 시위를 주도했다고 기억한다. 경찰이 최루가스통을 던지면 그걸 주워 경찰을 향해 되던지고, 시위대가 매운 눈을 씻을 수 있도록 송수관을 찾아 열었다는 것이다. 에인절은 지난해 11월 총선 때 “내 생애 첫 투표”라는 글과 함께 투표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11월 총선은 군부가 부정선거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계기다.


▷이번 시위의 주역은 에인절처럼 1995년 이후 출생한 Z세대다. 1988년 민주화운동 세대의 자녀들이다. 군사 정권하에서 나고 자란 부모 세대와 달리 이들은 민정 이양기에 유년기를 보냈고, 이후엔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의 집권하에 살아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와는 상극이다. Z세대의 카니발 축제 같은 시위를 보면 민주화운동의 세대교체를 실감하게 된다. 만화 캐릭터 분장에 ‘전 남자친구도 나쁘지만 군대는 더 나빠’ 같은 구호를 외치며 청년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한다. SNS에는 국영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참혹한 시위 현장 사진을 올린다.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숨진 에인절의 모습도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졌다.

 

▷이번 시위는 1962년 미얀마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세 번째 대규모 민주화 항쟁이다. 1988년 항쟁과 2007년 선황색(샤프란) 승복 차림의 승려들이 주도했던 ‘샤프란 혁명’은 군부의 잔인한 진압으로 끝났다. 이번에도 50명 넘게 숨지는 유혈사태로 번지면서 “미얀마에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제사회가 미얀마 군정을 규탄하는 가운데 미국은 군정을 겨냥한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에인절은 다 잘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페이스북에 혈액형과 비상연락처, 시신을 기증해 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작별 인사를 남겼다. “이게 마지막 말일지 몰라. 많이 사랑해. 잊지 마.” 미얀마 유혈사태는 신생 민주주의 국가의 허약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수많은 ‘에인절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1987년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던 이한열의 죽음이 수많은 ‘이한열들’을 일으켜 세워 6월 항쟁을 이끌었듯 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6  해적판에 우는 ‘미나리’

 

영화 ‘기생충’은 홍콩에서 ‘상류기생족’으로 개봉했지만 중국 본토 극장에 걸린 적은 없다. 작은 영화제 폐막작으로 결정됐다가 하루 전 취소됐는데 ‘계급 갈등을 다뤘기 때문’이라는 뒷말이 나왔다. 그런데 중국 소셜미디어에는 관람평이 쏟아졌다. 불법 사이트를 통해 해적판을 본 것이다.


▷‘기생충’에 이어 한국어 영화로는 두 번째로 미국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미나리’도 속을 끓이고 있다. 개봉 첫날인 3일 흥행순위 1위에 올랐지만 ‘미나리’의 수입과 배급을 맡은 판씨네마는 “다수의 불법 복제를 확인했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주인공인 한인 이민 가족의 미나리 같은 생명력이 찬사를 받을수록 해적판도 빠르게 확산하고 있어 ‘미나리’가 녹초가 돼 파김치가 될 지경이다.


▷영화는 이용료가 비싸기 때문에 해적판 이용률이 높은 장르다. 한국저작권보호원에 따르면 국내 영화 소비량의 42.8%는 불법 복제물이다. 방송은 31.4%, 음악은 18.6%다(2019년 기준). 2016∼2018년 3년간 영화 불법 복제로 인한 피해액이 2조6499억 원으로 한 해 시장 규모의 83%나 된다. 지난해부터는 영화관이 폐쇄되면서 불법 사이트가 코로나 특수까지 누린다. 불법 사이트들의 월간 다운로드 건수를 합치면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의 회원 수와 맞먹는다는 통계도 있다. 영화 ‘승리호’도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4일 만에 600여 개의 불법 유통 사이트가 적발됐다.

 

▷새로운 한류 콘텐츠로 각광받는 웹툰은 불법 복제물로 작가들이 생계에 위협을 느낄 정도다. 웹툰 작가 A는 불법 사이트에서 자신의 작품이 80만 회나 조회된 사실을 알아냈다. 연재료 1억600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조회수였지만 그가 받은 금액은 1만7000원이었다. 2017∼2018년 8월 웹툰업계의 해적판 피해액은 1조8000억 원이 넘는다. 방송은 포맷 표절도 심각하다. 중국에서 ‘프로듀스 101’을 ‘우상연습생’으로 표절하는 등 최근 5년간 한국 예능 프로그램 18편이 20차례 표절 또는 도용당했다.

 

▷해적물 단속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음악은 발매 후 1주일, 방송은 본방송 종료 후 1일, 영화는 개봉 후 3개월 이내에 이뤄지는 불법 복제를 막지 않으면 경제적 피해가 막심해진다. 하지만 대부분 해외에 서버가 있는 불법 사이트를 개별 업자들이 일일이 찾아내기는 어렵고, 적발해도 콘텐츠 삭제를 요구하는 선에서 그친다. 한류는 한 해 10조 원이 넘는 시장이자 한국 소프트파워의 원천이다. ‘한류 콘텐츠는 공짜’라는 인식이 굳어지기 전에 정부 차원에서 대응에 나서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08(월) 하얀 석유

 

위성에서 본 남미 안데스 산맥에는 흰 점들이 찍혀 있다. 주로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가 맞닿은 곳이다. 만년설이 아니다. 빙하기를 거치며 안데스의 눈 녹은 물들이 증발을 거듭해 소금만 남은 소금 평원(salt pan)이다. 해발 4000m, 홍학과 야마(llama)의 땅. 이곳에 ‘하얀 석유’가 있다. 소금 속 리튬이다. 배터리 소재인 리튬은 전기차 시대를 맞아 하얀 석유로 불린다. 값이 폭등하면서 포스코가 확보한 아르헨티나 ‘옴브레 무에르토’ 염호(鹽湖)의 총 외형가치는 35조 원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포스코 측은 매장된 리튬으로 2차전지용 탄산리튬을 생산한다고 가정하고, 현 국제 시세를 적용하면 약 35조 원의 누적 매출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막대한 생산 비용을 감안하면 실제 염호의 가치는 훨씬 낮을 것이다. 그래도 2018년 염호 채굴권을 약 3000억 원에 인수했으니 큰 이익을 기대할 만하다. 염호 확보 프로젝트명은 ‘살 데 오로(Sal de Oro)’. 스페인어로 황금 소금이란 뜻이다. 인수 때 예상한 매장량은 220만 t이었는데 지난해 최신 기법으로 측정한 결과 6배로 늘어났다.


▷하얀 석유로 각광받는 리튬은 배터리 소재 외에도 쓰임새가 많다. 산업용으로는 도자기나 유리를 만들 때 촉매로 사용한다. 수소폭탄을 만들 때도 리튬이 필요하다. 리튬은 조울증 치료제로 사용하며, 치매 치료약의 원료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리튬 농도가 높은 호수나 지하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자살률이 낮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리튬은 독성이 있어서 의사의 처방 없이 리튬 계열 약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포스코는 2009년부터 리튬 등 에너지 소재 분야에 주목했다. 리튬을 추출하는 기술은 곧 개발됐지만 염호 확보는 쉽지 않았다. 칠레 등 3개국이 국경을 맞댄 ‘리튬 트라이앵글’을 헤집고 다녔지만 실패를 반복했다. 세계 리튬 매장량의 70%가 몰린 이곳에서 여러 나라가 자원 전쟁을 벌였다. 중국 기업들은 정부를 등에 업고 거액의 베팅을 했고, 칠레 등은 핵심 자원 지키기에 나섰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포스코는 실패한 해외 자원 개발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리튬 생산은 2023년부터 약 50년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 아직 공장을 짓는 단계라 성과를 예측하긴 어렵다. 다만 미래 산업의 핵심 자원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 중단으로 일본을 압박했듯이 자원은 국가의 힘이다. 자원이 부족한 한국으로선 아직 갈 길이 멀다. 긴 안목에서 인내심을 갖고 해외에서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길 기대한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3-09  용버들

 

한국에는 버들 양(楊)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경기 양주와 양평, 강원 양구가 대표적이다. 이런 지명이 많은 것은 버드나무가 산과 계곡이 많은 한국 지형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알곡을 선별하는 ‘키’도 버드나무로 만들었던 걸 보면 이 나무는 오랫동안 한국인과 함께했다. 양치질의 어원이 양지(楊枝·버드나무 가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나무가 뜬금없이 LH 투기 사건에 등장했다. LH 직원이 토지 보상비를 더 받으려고 용버들을 잔뜩 심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버드나무 중 하나인 용버들은 생존력이 강하고 성장력도 좋아서 보상을 받을 때 유리하다고 한다.


▷투기 의혹을 받는 LH 직원 A 씨 등은 광명·시흥 신도시로 발표된 경기 시흥시 무지내동에서 2017년부터 땅을 사들였다. 이후 그곳에 용버들을 심었다. 3.3m²당 1그루를 심는 게 적당한데 수십 그루를 심었다. 토지 수용 때 나무 보상비는 주로 그루당 이식 비용에 전체 그루 수를 곱해 결정한다. 많이 심을수록 보상비가 늘어나는 구조다. 나무 값을 감정할 수도 있는데 빨리 자랄수록 감정 가격이 높아진다. 용버들은 어릴 때 빠르게 자라는 속성수로 꼽힌다. 나무 선택부터 심는 방법까지 보상의 달인이라고 할 만하다.


▷과거 사례를 보면 보상비를 더 받으려고 가축과 꿀벌을 동원하기도 한다. 토지 수용 때 축산업 손실 보상 기준은 돼지 20마리, 토끼 150마리, 꿀벌 20군 등 일정 규모 이상으로 정해져 있다. 이 숫자를 채워도 무단으로 가축을 길렀다면 보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위례신도시 보상 때는 불법 벌통 8000개가 적발됐고, 미사지구 등에서는 가축 수천 마리가 적발되기도 했다.

 

▷현지 주민들은 의혹이 불거진 LH 직원들을 ‘사장님’이나 ‘부동산 업자’로 알았다고 했다. 거액에 땅을 사들이고, 나무까지 심는 모습이 부유한 사장님과 투기꾼의 중간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들의 거침없는 행동에는 자신감도 묻어난다. 가축 무단 반입을 걸러내듯, 나무를 너무 촘촘히 심으면 보상비를 줄이는 규정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논에 모심듯 나무를 심었다는 건 보상받을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LH 투기 의혹은 전직과 현직, 직원 직급, 논밭 등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퇴직자가 개입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불법과 적법의 경계에서 상당한 투기가 있었다고 의심해 볼 대목이다. 과거 수도권에서 단독주택 용지를 공급받은 직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절차를 따랐어도 그리 떳떳해 보이진 않는다. 국민은 처벌에 앞서 언제부터 얼마나 많은 투기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고 싶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3-10  성폭력 정당방위

 

중국 형법에는 “진행 중인 흉포한 행위, 살인, 강도, 성폭행, 유괴” 등에 대한 방어 조치로 상대가 사망하더라도 형사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미국 텍사스주 형법은 “납치, 살인, 성폭력, 절도” 등을 막기 위해서는 치명적 힘을 사용해도 면책하도록 규정한다. 성범죄를 살인 수준의 중범죄로 보고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한 것이다. 한국도 형법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하지만 성범죄에 대한 별도의 규정은 없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고시원 주방에서 몸을 만지며 추행하는 남성에게 사기그릇을 휘둘러 상처를 입힌 여성 A 씨에 대해 검찰이 기소유예 처분한 것을 취소하라고 최근 결정했다. 기소유예란 혐의는 인정되나 재판에 넘기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헌재는 A 씨의 경우 정당방위이므로 무죄라고 판단했다. 또 검찰은 지난해 7월 강제로 키스하려는 남성의 혀를 3cm가량 절단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여성을 불기소 처분했다. “여성 입장에선 즉각적으로 유효하게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1964년 성폭행에 저항하다 가해 남성의 혀를 절단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 씨는 재심을 청구했지만 지난달 기각됐다. 재판부는 “오늘날과 같이 성별 간 평등이 우리 사회가 지향할 주요한 가치로 실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면 최 씨를 감옥에 보내지도,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57년이 지난 뒤에도 최 씨의 낙인을 지워주지는 못했다. 2008년 성추행하는 남성을 둔기로 때리고 목 졸라 살해한 여성이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해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다.

 

▷현대 법치주의에서는 사력(私力)에 의한 구제를 금지하되 정당방위, 긴급피난 등 예외적으로만 인정한다. 각 나라의 환경과 문화에 따라 인정 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성폭행에 저항하다 남성을 여성이 살해한 것을 정당방위로 보지 않고 사형을 집행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미국 흑인사회에선 인종에 따라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기준에 차별이 있다는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국 형법은 정당방위를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로 규정한다. 대법원 판결문과 헌재의 결정문을 보면 가해 행위의 종류, 정도, 방법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이에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방어를 했는지 등을 기준으로 정당방위를 판단한다. 이런 법리를 균형감 있게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법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것은 법치주의의 대의다. 정당방위를 판단할 때도 법은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11  ‘사공1가’

 

혼인 중’인 사람에게만 자녀를 입양할 권리를 주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와 자녀가 있는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혼자 사는 사람도 입양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관련 법규가 개정된 2007년부터다. 1인 가구의 증가 등 사회의 변화가 영향을 미친 결과다. 이제 1인 가구는 더욱 늘어서 ‘대세’가 됐다. 그럼에도 법과 제도는 여전히 전통적 개념의 가구와 가족을 기반으로 한 것이 많아 법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2000년 우리나라에서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는 15.5%에 불과했지만 2019년에는 30.2%로 늘어 가구 형태 중 가장 비중이 높다. 표준으로 여겨졌던 4인 가구의 비중은 같은 기간 31.1%에서 16%로 뚝 떨어졌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추산에 따르면 2030년 한국에서 1인 가구 비중은 43%로, 미국(35%)이나 스위스(34%) 등 서방국보다 높다.


▷1인 가구의 수는 70대 이상이 가장 많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배우자와의 사별, 자녀의 분가 등으로 홀몸노인이 늘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어르신들은 이른바 ‘불효자 방지법’으로 불리는 민법 개정안을 눈여겨보고 있다. 재산만 물려받고는 부모를 ‘나 몰라라’ 하는 자녀에게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반대로 자녀가 클 때는 방치했던 부모가 나중에 자녀의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도록 하는 이른바 ‘구하라법’도 1인 가구 시대에 주목받는 법안이다.

 

▷20대와 30대에서도 싱글족이 빠르게 늘고 있다. 결혼을 늦게 하거나 아예 결혼을 안 하는 경우가 많아져서다. 이들은 주거 관련 제도, 특히 주택청약제도에 불만이 많다. 청약 가점을 적용하는 일반공급에서 84점 만점에 부양가족 수에 걸린 점수가 35점이나 된다. 더욱이 20, 30대는 청약통장 가입 기간, 무주택 기간도 짧아 ‘청포자(청약포기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이들은 보다 쉽고 안정적으로 주거 공유(셰어하우스)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도 관심을 보인다.

 

▷법무부가 ‘사공일가’(사회적 공존, 1인 가구) TF를 구성한 것은 달라진 시대에 맞는 법과 제도를 고민하기 위해서다. 친족, 상속, 주거, 보호, 유대 등 5개 분야를 먼저 살펴볼 계획이다. 1인 가구에 대한 법제를 개선하면 전통적 가족의 해체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엄연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법제는 안정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 속도보다 느리게 바뀐다. 법과 현실의 괴리를 줄이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은 국회와 정부의 능력에 달려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12  ‘아재백신’ 미스터리

 

코로나19 백신을 먼저 맞고 있는 의료진이 소셜미디어에 생생한 접종 후기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영국 아스트라제네카(AZ)의 경우 젊을수록 독감에 된통 걸린 듯한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다. 반면 고령층의 부작용은 상대적으로 적어 AZ백신은 ‘아재백신’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이 같은 현상을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몇몇 전문가는 백신 개발 방식에서 원인을 찾는다. AZ는 침팬지에게 감기를 유발하는 아데노바이러스에 코로나바이러스의 단백질 유전자를 집어넣어 만든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아데노바이러스에 노출된 경험도 많아 백신의 효과는 떨어지는 대신에 부작용은 덜하다는 주장이다. 미국 얀센과 러시아 스푸트니크V가 아데노바이러스 백신이고, 미국 화이자와 모더나는 RNA 백신이다.


▷예방접종 후 나타나는 부작용은 몸 안에 항체를 만들기 위한 통과의례로 그만큼 백신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신호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면역 작용이 활발한 젊은층일수록 면역 반응도 세기 때문에 발열이나 근육통 같은 이상반응을 강하게 겪는 것”이라고 했다. 면역력이 너무 강해서 탈이 날 때도 있다. ‘사이토카인 폭풍’이 대표적이다. 면역 물질인 사이토카인이 과다 분비돼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숙주까지 공격하는 현상이다.

 

▷해외에서는 젊은층이 AZ를 맞는 사례가 드물어 ‘아재백신’ 현상이 보고된 바는 없다. 모든 백신의 부작용은 나이보다는 성별에 따라 차이가 난다. 미국의 경우 코로나 예방접종자 1370만 명을 분석한 결과 61%가 여성인데 부작용을 호소한 이들 중 여성 비율은 79%나 됐다. 중증 알레르기 반응인 아나필락시스 반응을 보인 66명 중 63명이 여성이었다. 연구진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더 많은 항체를 생산하도록 돕고 △면역 유전자가 대부분 X염색체에 있으며 △여성이 적은 백신으로도 예방 효과를 낼 수 있는데 접종 용량은 남녀가 같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1일까지 국내 코로나 예방접종자는 50만 명이고, 이상반응 신고율은 AZ가 1.4%, 화이자 0.4%다. AZ는 2차 접종 때 부작용이 덜하고, 화이자는 2차 때 더 아프다고 한다. 의료진 접종만으로도 일부 병원에서는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들로 응급실이 북적였다. 의료진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할 일반인 접종이 시작되기 전에 부작용 사례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부작용 단계별 대처요령을 자세히 안내해야 한다. 그래야 응급실 마비와 접종 기피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 극심한 통증을 호소한 접종 후기들의 결론은 “그래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13  ‘100조 쿠팡’

 

로켓 배송을 내세운 쿠팡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한 첫날인 11일(현지 시간) 시가총액 100조 회사가 됐다. 국내 기업 가운데 삼성전자에 이은 2위이고, 현대차의 2배를 웃돈다. 흑자 한 번 낸 적이 없고 누적 적자가 4조5000억 원인 회사가 시가총액 100조라니, 주식시장에 밝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외국 투자자들은 어느 대목에서 쿠팡에 이처럼 높은 가치를 매겼을까.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현지에서 “한국 5000만 명이 실제 주거하는 면적은 로드아일랜드 정도”라고 했다. 로드아일랜드는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로 인구는 100만 명이다. 한국은 좁은 곳에 몰려 사니까 당일 배송을 할 수 있었고, 배달 문제가 해결되면서 e커머스 시장이 150조 원까지 커졌다는 뜻이다. ‘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면 대박 아닐까’ 하는 기대가 시가총액 100조 원을 만들었다. 우리에게 일상인 밀집 거주가 외국인에게는 대단한 성장 잠재력으로 보였던 것 같다.


▷‘승자 독식’ 추세도 상장 성공의 배경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혁신기업 상당수가 시장을 독식하고 있다. 유통에선 아마존이 그 예다. 천문학적인 자금을 끝없이 투입하며 마침내 시장을 지배하게 된 승자가 시장을 독식하는 것이다. 쿠팡에 투자한 ‘큰손’들은 본인들의 막대한 자금으로 이 회사가 시장을 지배하길 기대한다. 요즘 미국에서 승자는 자본이 ‘점지’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외부 자본 투입이 혁신기업의 성공 요소로 부각되면서 기업 오너의 개념도 달라지고 있다. 쿠팡 최대 주주는 33.1%를 가진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다. 김 의장의 지분은 10.2%다. 하지만 일반 주식 29배의 의결권을 부여한 차등의결권 덕분에 김 의장의 경영권은 탄탄하다. 창업자는 혁신적 경영을 하고, 소유권은 여러 투자자로 분산되는 구조다. 소유에 대한 집착도 덜하다. 벤처 창업자들은 투자자가 물러나라면 언제든 떠나겠다는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김 의장은 현지 인터뷰에서 한국인의 창의성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했다. 제2, 제3의 쿠팡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국내 환경은 여의치 않다. 쿠팡만 해도 설립 초기 택배차량의 불법 시비가 있었다. 노란색 영업용 번호판이 없다는 이유였다. 합법화가 되긴 했지만, 이런 제한들은 혁신의 걸림돌이다. 본사를 해외로 옮기는 제2 쿠팡 후보들도 적지 않다. 팀블라인드 멤버쉽컴퍼니 등은 설립 초기 미국과 중국으로 본사를 옮겼다. 한국인의 창의성이 꽃피도록 각종 제한을 풀고, 성장한 기업들이 제대로 평가받도록 상장 여건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3-15(월)  둠스데이 항공기

 

옛 소련과의 냉전이 치열했던 1961년 미국 정부는 핵 공격을 받아 지상의 지휘소들이 파괴될 경우를 대비해 ‘루킹 글라스(Looking Glass·거울) 작전’을 시작한다. 이름 그대로 지상의 지휘소와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항공기를 공중에 띄워 어떤 상황에서도 지휘 기능을 유지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 작전에 쓰인 항공기 EC-135의 기능을 한층 향상시킨 게 핵공중지휘통제기 E-4B다. ‘둠스데이(Doomsday·심판의 날) 항공기’ 또는 ‘나이트워치’로 불리는 E-4B가 한국에 온다.


▷미군이 갖고 있는 E-4B는 모두 4대다. 이 가운데 1대는 미 대통령 근처에서 대기하며, 유사시 즉각 대통령이 탑승할 수 있도록 항시 엔진을 가동하고 있다. 미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할 때에도 E-4B가 멀지 않은 곳에 배치된다. 최대 112명이 탑승할 수 있는 E-4B는 대형 재난 발생 시 연방재난관리청(FEMA) 요원들을 현장까지 수송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다만 2017년에는 E-4B 2대가 토네이도에 고장 나는 바람에 어떤 상황에서도 임무를 수행한다는 명성에 금이 가기도 했다.


▷E-4B는 하늘을 나는 전시상황실이다. 핵 공격은 물론이고 전자기펄스(EMP)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아날로그 장비까지 갖추고 있다. 공중 급유를 받으면서 72시간 이상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다. 길이 70.5m, 날개 폭 59.7m에 최고 속도는 시속 969km다.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 미군을 지휘할 수 있고, 잠수함과도 직접 통신이 가능하다. 1980년 1월부터 미 공군에서 운용하고 있다. 대당 가격은 2억2320만 달러(약 2530억 원)에 달한다.

 

▷E-4B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미 국방장관이 해외에 나갈 때 종종 E-4B를 이용하는데 2010년 로버트 게이츠 장관, 2017년 제임스 매티스 장관이 E-4B를 타고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해 6월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데 이어 ‘서울 불바다’ 발언을 내놓아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졌을 때에는 미 전략사령부가 E-4B의 훈련 장면을 전격 공개하기도 했다.

 

▷17일 한국을 방문하는 미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E-4B를 이용할 예정이다. 미국이 전략자산을 아무 의미 없이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다. 최근 북한 영변 핵시설 재가동 여부 등을 놓고 북-미 간에 신경전이 치열한 상황에서 E-4B의 등장은 대북 경고의 메시지로 읽힌다. 북한이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북-미 대화의 물꼬를 트는 길이고, 한반도 평화의 첫걸음일 것이다. 바늘구멍만큼 작은 가능성일지라도.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16  백신 휴가

 

다음 달 일반인 대상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앞두고 정부가 백신 휴가제를 검토하고 있다. 백신을 먼저 맞은 일부 의료인들이 부작용으로 “난생처음 경험하는 통증”을 호소하면서 백신 접종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접종 후 하루 이틀은 쉬면서 증상을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백신 부작용은 4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 별문제를 느끼지 않는 정도, 2단계는 조금 불편한 정도의 이상반응이다. 3단계는 고열로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 4단계는 호흡곤란 등으로 입원해야 하는 수준이다. 일반적인 백신의 부작용은 1, 2단계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휴가의 필요성이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런데 코로나 백신의 경우 일부 의료인들이 예상 밖의 부작용을 호소하면서 불안감이 번지고 있다.


▷특히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은 젊은 의료진을 중심으로 “오한 발열 근육통이 독감의 10배는 된다” “이가 달달 떨릴 정도로 오한이 심하고 타이레놀 먹어도 열이 39도 밑으로 안 내려갔다” “2차 접종이 두렵다”는 경험담이 나온다. 어떤 병원에선 20대 직원이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고열과 통증으로 일을 못 할 정도였지만 대체 인력이 없어 계속 일하다 울면서 퇴근했다고 한다. “수액실이 병원 직원들로 가득 찼다”는 병원도 있다.

 

▷정부와 의료계는 백신 접종을 중단할 정도의 부작용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일반인 접종이 시작될 경우 과거 예방접종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부작용에 놀란 사람들이 응급실로 몰려들거나 백신 접종을 꺼리는 사태를 우려한다. 질병관리청은 “고열과 통증 같은 부작용은 응급실에서도 관찰 외에는 치료할 부분이 크지 않다. 집에서 타이레놀을 먹으며 상황을 지켜보는 쪽이 낫다”고 밝혔다. 정부는 백신 휴가의 유·무급 여부와 유급일 경우 비용을 정부나 사업주 어느 쪽에서 부담할지를 논의 중이다. 일본도 백신 휴가제를 검토 중이며, 대부분의 선진국은 상병 수당과 유급 병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2분기(4∼6월) 접종 인원은 1150만여 명으로 1분기의 10배가 넘는다. 지금까지 백신 이상반응 신고율이 1.4%인 점을 감안하면 2분기엔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이 16만 명이 넘을 것이다. 현재 질병관리청의 이상반응 집계는 사망이나 입원이 필요한 4단계(1.2%) 외에는 98% 이상이 모두 ‘일반’으로 분류된다. 발열과 통증의 편차가 ‘일반’으로 묶기에는 매우 크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백신 휴가 도입과 함께 부작용의 종류와 강도, 대처 요령을 미리 자세히 안내해 차례가 오면 모두 안심하고 백신을 맞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17  ‘찐멘토’ 윤여정

 

본인이 말하길 “특별히 전성기나 대표작이 없었던 것 같다”는 나이 일흔넷의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제93회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아시아계로는 5번째다. 이미 거머쥔 다른 여우조연상만 33개.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우리 사회에서 ‘조연’이 이토록 주목받은 적이 있던가.


▷남다른 멘토로서 그의 모습은 영화 ‘여배우들’(2009년)에서 이미 돋보였다. 이미숙 고현정 등 쟁쟁한 후배 여배우들과 함께 출연했던 이 영화는 배우들의 실제 삶이 반영된 즉흥 대사가 많았다. 윤여정은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인간의 본성이 나만 주목받고 싶은 것이지만 그건 욕심”이라고. “살아보니 박수를 받으면 돌멩이질도 그만큼 받더라. 세상엔 공짜가 없으니 분할 것도 억울해할 것도 없다.”


▷윤여정은 1966년 TBC 탤런트 공채 3기로 데뷔해 연기생활 55년째다. 한양대 국문과 재학 시절 신종 직업으로 뜨던 탤런트에 도전했다. 남편을 여의고 홀로 딸들을 키우는 양호교사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것 같아서. 드라마 ‘장희빈’과 영화 ‘화녀’로 유명해진 뒤 가수 조영남과 결혼해 미국 가서 13년을 살았지만 헤어졌다. 고생하며 아이들을 키운 건 그였다. 그의 어머니도, 그 자신도 ‘생명력 강한 미나리’였다.

 

▷‘미나리 리더십’의 핵심은 겸손과 섬김이다. 겸손은 자신의 객관화에서 출발한다. “미모도 재능도 없기 때문에 노력한다”는 그는 박카스 아줌마(영화 ‘죽여주는 여자’)로도 치매 걸린 할머니(영화 ‘계춘할망’)로도 변신한다. 조연이라고 뒤로 빠지지도 않는다. 주연이 빛나도록 배려하면서 필요할 때 나선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가 삶은 밤을 씹어 손자에게 주는 장면, “미나리는 원더풀이란다”라는 핵심 대사는 그가 제안한 것이다. 제작비 200만 달러(약 22억 원)의 초저예산 영화를 찍으며 후배들을 살뜰히 챙긴 것도 그였다.

 

▷윤여정은 욕심의 힘을 뺀 궁극의 나이스 스윙을 떠올리게 한다. 나이 들었다고 무게 잡지 않고, 밥값을 내고, 남 탓 안 하며, 유머가 있다. 아카데미 후보로 오르자 “여러분의 응원이 감사하면서도 부담스러워 올림픽 선수들의 심적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창창한 나이일 때는 빨리 깨질수록 좋다.” “나는 나같이 살면 된다.” “인생이 별거 아니다. 재밌게 사는 게 제일이다.” 윤여정은 요즘 말로 ‘찐멘토’(진정한 멘토)다. 기성세대도 미래세대도 한국인도 미국인도 그에게서 세상을 살아갈 힘과 위로를 얻는다.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마저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3-18  ‘중국발 황사’ 특보

 

‘인터스텔라’나 ‘블레이드 러너’ 같은 미래 영화에선 잿빛 하늘에 산성비가 내린다.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로 미세먼지 농도가 올라가니 온 세상이 뿌옇게 되고, 미세먼지는 강산성 오염물질이어서 산성비가 내리는 것이다. 중국발 최악의 황사가 덮친 요즘 한국은 미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황사는 중국 사막지대에서 발생한 흙먼지이고, 미세먼지는 공장이나 자동차 배출가스처럼 사람의 활동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이다. 하지만 황사도 아주 작은 입자라는 점에서는 미세먼지다. 기상청이 ‘황사특보’를 내리는 기준도 미세먼지 농도다. 16일부터 계속되고 있는 황사특보는 ‘황사경보’에는 못 미치는 ‘미세먼지 주의보’다.


▷‘중국산’ 미세먼지는 강철보다 단단하다. 중국 시안자오퉁(西安交通)대 연구팀에 따르면 중국 미세먼지의 70%는 산업용 기계에 마모를 일으킬 정도의 강도다. 미세먼지 농도가 올라가면 반도체 같은 정밀기계의 불량률이 높아지는 이유다. 그런 미세먼지를 들이마시면 폐포가 남아나질 않는다. 세계보건기구는 미세먼지로 인해 매년 700만 명이 조기 사망한다며 미세먼지를 1급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초미세먼지 농도가 m³당 10μg 증가할 때마다 암 발생 확률이 12%, 기형아 낳을 확률은 16% 높아진다고 한다. 최근에는 미세먼지가 폐 세포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결합하는 단백질을 더 많이 만들게 해 코로나 감염률을 높인다는 연구도 나왔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초미세먼지 농도가 가장 높다(그린피스, 2019년). 국내 연구팀은 2018년 중국 설 연휴에 한반도를 뒤덮은 ‘나쁨’ 수준의 초미세먼지를 분석한 결과 중국에서 터뜨린 설맞이 폭죽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반도 미세먼지의 주범이 중국임을 처음으로 입증한 것이다. 발뺌하던 중국은 2019년 한국 초미세먼지 중 32%는 중국산임을 인정했다. 최근 기상청이 황사특보를 내리며 “중국발 황사”라고 발표한 데 대해선 “몽골발 황사”라며 발끈했다.

 

▷중국의 미세먼지 저감 노력에도 한국의 상황은 악화될 전망이다. 중국은 베이징 공기를 맑게 한다는 명분으로 베이징 공장을 동쪽으로 옮기고 있다. 중국은 석탄화력발전소가 가장 많은 나라인데, 발전소의 절반은 동부 지역에 있다. 바람은 동쪽으로 부니 우리만 피해를 보는 셈이다. 황사의 발원지가 몽골이든 중국이든 중국 내 대기오염 시설을 거쳐 불어오면 우리로선 해롭기는 마찬가지다. 경유차 타지 않고 미세먼지 저감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국발 미세먼지 대책 없이는 국회가 ‘사회 재난’으로 규정한 미세먼지를 피해 살아갈 방법은 없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19  사상 최저 혼인 건수

 

국내 혼인 건수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혼인 건수는 21만4000건으로 1970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가장 적었다. 반세기 만의 최저치다. 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도 사상 최저인 4.2건으로 감소했다. 가장 많았던 1980년의 10.6건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코로나19로 결혼이 연기되거나 취소된 경우가 많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결혼 적령기 남녀의 연애, 구체적으로는 마스크 쓴 남녀의 대면접촉 연애가 어려워진 건 아닌지 우려된다. 연애의 사전적 의미는 ‘성적(性的)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며 사귐’이다. 전염병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에로스를 약화시킬 수 있다. 더욱이 확진자 동선이 낱낱이 드러나는 한국사회에서는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나는 사유하는 존재 이전에 행위하는 존재, 즉 몸(body)적 존재”라고 했건만.


▷미국에서는 코로나 이후 데이트 앱 시장이 호황이다. 보통 남성들이 애용하던 데이트 앱에 여성들의 참여가 늘어 일대일 화상 채팅도 활발하다. 최근에는 자기소개 프로필에 “나는 백신을 맞았다”고 올려 데이트 상대를 안심시키는 이용자도 많아졌다. 뉴욕타임스는 ‘세상의 끝을 위한 연인 찾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코로나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클수록 혼자인 게 두렵기 때문에 동반자 관계에 대한 갈망을 키운다”고 분석했다.

 

▷아쉬운 대로 비대면 사랑이라도 키워 나가면 결혼이 늘어날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전망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국내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33.2세, 여성 30.8세로 20년 전인 2000년에 비해 각각 3.9세, 4.3세 높아졌다. 주목할 점은 여성의 초혼 연령이다. 역대 최고치일 뿐 아니라 출생연도를 따지면 1990년대생의 결혼시장 진입이 코앞이다. 이 청년세대에게 결혼은 결코 필수가 아니다. 아무리 ‘노오력’(노력의 풍자어)을 한들 일자리도 집도 얻기 어려운데 어떻게 가정을 이뤄 아이를 낳고 키우는가. 사실상 미혼을 강요받는 셈이다.

 

▷혼인 건수는 출산율의 선행지표다. 결혼을 포기하는 ‘결포족’이 늘면 인구수축사회가 더 빨리 찾아온다. 경제활동을 해서 세금을 내는 국민이 줄기 때문에 국가 재정도 타격을 받게 된다. ‘90년생’은 왜 기성세대가 만든 불평등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느냐고 항변한다. 100년 전 소설가 현진건이 쓴 ‘술 권하는 사회’에서 술 마시는 남편의 아내는 말했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90년생들도 말할지 모르겠다. “이 몹쓸 사회가 왜 결혼을 권하는고.”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3-20 외국인 차별 코로나 검사

 

“본국에 안식년 가 있는 외국인 동료 교수가 연락을 해 왔어요. 서울의 모든 외국인 근로자가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게 사실이냐고요. 그렇다고 했더니 서울에서 교수를 계속 해야 하는지 환멸을 느낀다고 했어요. 많이들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이제라도 서울시가 행정명령을 거둬들여 다행입니다. 외국인 교수들이 소식을 듣더니 서울 시민과 외국인과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자진해서 검사를 받겠다고 하네요.”(구민교 서울대 학생처장)


▷말 많던 서울시의 ‘외국인 근로자 코로나 진단검사 의무화 행정명령’이 이틀 만에 철회됐다. 서울시는 17일 발동했던 이 명령을 고위험 사업장에 대한 검사 권고로 변경한다고 어제 밝혔다. 밀접, 밀집, 밀폐 즉 ‘3밀(密)’ 근무 환경의 노동자만 검사받도록 권한다는 것이다. 사흘 동안 적잖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가 “불공정한 명령”이라고 물꼬를 튼 후 주한 외국대사들이 인종 차별이라며 외교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주한 외국상공회의소와 서울대도 철회를 요구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조사에 착수했다.


▷당초 서울시가 모든 외국인 근로자에게 검사를 의무화한 근거는 외국인 감염률 추이였다. 지난해 말 2%대이던 외국인 감염률이 올 들어 6%대로 올랐다는 이유였다. 밀집생활을 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많아 집단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도 했다. 도를 넘은 행정편의주의였다. 서울의 외국인 근로자 7만 명 중에는 밀집생활과는 무관한 외국계 기업의 임직원과 외신기자도 있다. 글로벌 인재의 유입을 막고 국가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는 우려를 낳았던 이유다. 서울시는 정부의 공식 철회 요구에 어제 오후 늦게 입장을 바꿨다.

 

▷이번 명령과 철회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는 차별이라는 의제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1978년 채택된 유네스코의 ‘인종과 인종적 편견에 관한 선언’의 제1조 1항은 ‘모든 인간은 존엄과 권리에서 평등하며 그들 모두는 인류에 없어서는 안 될 일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인권위도 어제 “이주민을 배제하거나 분리하는 정책은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차별을 낳고 인종 혐오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인종 차별 철폐의 날이다. 1960년 3월 21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렸던 통행법 반대 평화집회를 기리는 날이다. 이동할 때마다 백인에게 통행권을 제시해야 했던 유색 인종의 설움을 역사에서 되풀이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날이다.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 차별을 과거에도 지금도 겪는 우리가, 행정편의주의에 매몰돼 외국인을 차별하는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3-22(월) 無관중 도쿄 올림픽

 

일본 도쿄만큼 올림픽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도시는 없다. 1940년 여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도 중일전쟁으로 개최권을 반납했다. 1964년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여름 올림픽을 개최하는 영광을 누렸으나 2020년 여름 올림픽은 코로나19 탓으로 1년 연기 끝에 사상 처음으로 해외 관중 없이 치르게 됐다.


▷“도쿄 올림픽은 저주받은 올림픽이다.” 일본은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의 ‘망언’이 실현될까 전전긍긍이다. 올림픽 특수로 국내총생산(GDP)이 2조 엔(약 20조 원)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1년 연기된 것만으로 총 개최 비용의 40%인 2940억 엔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 여기에 해외 관중 없이 치르면 2000억 엔에 가까운 손실이 추가된다. 아예 취소될 경우 손실 추산액이 4조 엔이니 개최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동안 일본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 개최의 불씨를 살리려 애를 썼다. IOC는 중국과 협력해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 중국 백신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안전한 관중 규모를 가늠하기 위해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관중 숫자를 달리해 가며 응원에 따른 비말 전파도를 실험했다. 지난해 12월부터는 변이 바이러스의 유입을 막기 위해 해외 입국도 금지했다. 그러면서 올림픽 선수와 관계자들만 예외적으로 입국을 허용해 해외 유학생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일본 국민의 80%는 올림픽 취소나 연기를 원한다.

 

▷관중 없이 경기를 할 경우 선수들의 경기력이 어떤 변화를 보일지도 관심거리다. 영국에서는 축구 선수들이 홈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면 ‘관중 효과’로 승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관중의 열렬한 응원이 선수들의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최대 70%까지 올려주는 덕분이다. 반면 지난해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무관중 경기의 참가자 스코어는 평균 70.44타로 전년도(70.8타)와 비슷했다. 매 시즌 평균 타수가 줄어드는 추세임을 감안하면 관중의 영향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도쿄 올림픽 개최 일정이 차질을 빚으면서 ‘올림픽은 40년마다 문제가 생긴다’는 40년 주기설이 나온다. 1940년 올림픽이 취소된 데 이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서방이 불참하면서 반쪽 올림픽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전쟁과 테러의 위협 속에서도 페어플레이로 인류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올림픽 정신은 그대로였다. 유례없는 팬데믹 와중에 치러지는 이번 올림픽에서도 선수들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량으로 세계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를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23  코로나 쓰레기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는 말이 요즘 자주 쓰인다. 그리스어로 인류를 뜻하는 anthropos와 지질시대 단위인 세(世)를 나타내는 접미사 cene의 결합이다. 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이 2000년 사용해 담론을 확산시킨 말로, 인류로 인해 빚어진 시대란 뜻이다. 46억 년을 버텨온 지구 환경을 인간이 70년 만에 훼손했으므로 1만7000년 전에 시작된 지금의 홀로세(Holocene·그리스어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라는 뜻)와는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코로나19 시대는 인류세의 비극에 코로나 쓰레기를 추가하고 있다. 이 쓰레기는 코로나가 낳은 소비 변화의 결과물이다. 온라인 쇼핑으로 물건을 시키면 상점에 가서 살 때보다 포장이 비대해질 수밖에 없다. 카페에서 음료를 마실 때에도 일회용 컵이 안심이 된다. 특히 한국은 빠른 속도와 배달의 효율을 자랑하는 나라답게 코로나 쓰레기가 급증하고 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가운데 배달음식 주문이 많아진 게 주된 이유다. 지난해 플라스틱 폐기물은 전년 대비 18.9%, 스티로폼 등 발포 수지는 14.4% 늘었다. 비대면 쇼핑의 확산으로 택배 상자와 같은 종이 폐기물도 24.8% 늘었다. 코로나 쓰레기는 쏟아져 나오는데 소각 비용을 내지 않으려는 폐기물 업체의 무단 투기까지 늘어 걱정이다. 2019년 미국 CNN 보도로 국제적 망신이 됐던 경북 의성군 폐기물 처리장의 20만 t 규모 ‘쓰레기 산’은 지난달에야 사라졌다.

 

▷코로나 쓰레기를 이루는 플라스틱은 1907년 발명돼 주요 산업 자재로 사용되며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잘게 부서져 미세 플라스틱이 되면 생태계를 교란하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한다. 불행 중 다행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자는 제로 웨이스트 운동이 지금의 인류세에서 확산되는 점이다.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가 뉴노멀(새로운 기준)로 자리 잡고 있는 만큼 앞으로 동참하지 않는 기업은 좋은 평판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플라스틱 빨대와 같은 소재로 필터를 만드는 마스크도 대표적인 코로나 쓰레기다. 그런데 한국화학연구원이 한 달 안에 퇴비화 조건에서 100% 자연 분해가 되는 마스크 필터를 개발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K마스크가 신음하는 지구에 회복과 위로를 주기 바란다. 환경오염이 초래하는 기후변화는 최근 봄꽃이 피어나는 시기를 열흘 이상 앞당기고 꽃 피는 순서도 헝클어놓았다. 폴란드 망명정부 지폐 같은 쓸쓸한 낙엽을 봄날에 보는 재앙을 맞지 않으려면 코로나 쓰레기를 줄이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해야겠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3-24  K컬처 저작권 흑자

 

지난해 K팝 등의 수출 실적이 반영된 문화예술저작권 무역수지가 사상 첫 흑자를 냈다. 흑자 규모도 1억6000만 달러에 이른다. 특히 음악과 영상 분야 저작권이 지난해 적자에서 올해 2억 달러에 가까운 대규모 흑자로 돌아섰다. 한국의 대중문화(K컬처)가 세계인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이 수치로도 확인된 것이다.


▷영화의 본고장인 미국 할리우드는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소재 고갈에 부닥쳤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것을 찾아 눈을 돌린 게 아시아다. 2018년 미국을 강타한 할리우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원작자도 출연진도 모두 아시아인이었다. 그런데 찾다 보니 아시아에서도 유독 스토리텔링이 독보적인 나라가 한국이었다. 웹툰 기반의 상상력과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에 세계가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국 영화는 100주년을 맞던 2019년 영화 ‘기생충’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국내 흥행작이었던 한국 영화 ‘완벽한 타인’의 원작은 본래 이탈리아 영화인 ‘퍼펙트 스트레인저’다. 이 원작은 프랑스 등 12개국에서 리메이크됐다. 그런데 베트남의 한 제작사는 완벽한 타인의 제작진을 찾아와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 리메이크가 가장 좋으니 공감 포인트를 어떻게 잡을지 가르쳐 달라”고. 한국 정서를 담자 베트남 리메이크도 대박이 났다. 부산국제영화제도 최근엔 영상으로 제작될 가능성이 높은 원작 콘텐츠(만화와 소설 등)의 지식재산권을 거래하는 마켓을 공들여 운영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은 한국 음반시장을 구해낸 공신이다. 20년 전 음악 공유 서비스로 공짜 음악이 나돌게 된 후부터 국내 음반 판매는 추락했다. 하지만 2017년 BTS의 음반이 100만 장 넘게 팔리더니 지난해엔 ‘2020 글로벌 앨범 판매 차트’에서 1, 2위를 휩쓸었다. K팝은 영상미와 스토리가 만난 뮤직비디오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변방이었던 K컬처의 확산에는 SNS의 힘도 크다. MZ세대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어도 팬심으로 음반을 사고, 자신의 취향을 SNS에 적극 공유한다.

 

▷지난해 문화예술저작권 무역수지는 흑자였지만 전체 지식재산권 무역수지는 18억7000만 달러 적자였다. 특히 한국의 게임은 2019년 10억8000만 달러 흑자에서 지난해 3억 달러 적자가 됐다. 게임회사들의 수출이 늘었는데도 플랫폼인 구글에 내는 수수료(인앱 결제)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란다. 영상도 넷플릭스 결제가 매년 늘고 있지만 지난해엔 수출이 압도해 흑자를 낼 수 있었다. 콘텐츠가 중요하지만 플랫폼도 중요하다. 무역수지 숫자가 ‘K컬처가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3-25  교토국제고의 쾌거

 

“배우들은 천장이 낡아 떨어진 강당에서 학생들의 환영식에 참가했다. 올갠(오르간) 하나 없는 강당에서 다 같이 부른 애국가 합창이 끝났을 때 (배우들의) 울음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1965년 5월 한국 배우들이 일본 교토의 한국중고등학교를 방문한 장면을 전한 본보 기사 내용이다. 광복 이후에도 가난과 차별을 견뎌야 했던 재일동포들의 서러움이 배어 있다. 이 학교를 이은 교토국제고가 어제 일본 고교 스포츠의 꽃인 선발고교야구대회(봄 고시엔)에서 값진 첫 승리를 거뒀다.


▷교토국제고의 역사에는 재일동포들의 아픔이 묻어 있다. 1947년 교토시 기타시라카와의 낡은 목조건물에 조선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뒤 더 나은 환경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새 부지를 물색했다. 1961년 긴카쿠지 인근에, 1968년 11월에는 가타기하라에 땅을 사들였지만 주민들이 한국계 학교 건설에 강력 반대해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히가시야마구에 세 번째로 부지를 매입한 뒤에도 주민들과 갈등이 빚어졌고 1984년 8월에야 학교 건물이 완공됐다. 이런 고난을 이겨낸 힘이 야구부에도 이어졌으리라.


▷일본 고교 야구선수들에게 니시노미야의 한신고시엔구장은 ‘꿈의 구장’으로 불린다. 3940개의 고교 야구팀 가운데 0.8%인 단 32개 팀만 이 구장에서 열리는 봄 고시엔 무대에 선다. 1924년 창설된 봄 고시엔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코로나 사태를 맞은 지난해를 제외하고 93번째 열리는 동안 외국계 고교가 출전한 것 자체가 처음이다. 더욱이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역전승했다. 학생 정원 131명의 작은 학교가 야구부 창설 22년 만에 이뤄낸 쾌거다.

 

▷이날 고시엔구장에선 ‘동해 바다 건너서…’로 시작되는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두 번 울려 퍼졌다. 1회가 끝난 뒤에는 두 학교의 교가가 각각 흘러나왔고, 경기가 끝난 뒤 승리한 학교의 교가만 한 번 더 방송됐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NHK를 통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됐다. 다만 자막에는 ‘동해(東海)’ 대신 ‘동쪽의 바다(東の海)’라고 표기했다. 동해 명칭을 둘러싼 한일 간의 신경전을 감안한 번역일 것이다.

 

▷박경수 교토국제고 교장은 고시엔 출전의 의미에 대해 “조선통신사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이후 얼어붙은 한일관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박 교장의 바람대로 고시엔에서 한국계 학교의 선전이 한국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한일관계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까. 교토국제고가 27일 경기에서도 이겨서 다시 고시엔구장에 한국어 교가가 두 번 울리기를 기대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3-26  ‘인기 작가’ 국세청

 

인터넷 교보문고 3월 2주 차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2위, 종합순위 10위에 오른 책은 ‘주택과 세금’이었다. 초판 1만 부가 매진돼 2만5000부를 더 찍었고 이마저 부족해 1만5000부를 더 찍고 있다. 작가는 다름 아닌 국세청. 정부가 부동산 세제를 너무 자주, 많이 뜯어고치는 바람에 국세청의 세금 해설서가 일반인이 줄 쳐 가며 읽는 필독서가 됐다.


▷책의 최대 고객은 한국세무사회다. ‘양포세(양도소득세 상담을 포기한 세무사)’가 늘어나자 1만 권을 구입해 회원들에게 배포하기로 했다. 현행 양도세는 집 채수, 공시가격, 주택 소재지의 규제 지역 여부, 취득 시점, 보유 기간, 실제 거주 기간에 따라 수많은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하나라도 실수해 틀린 세액을 고객에게 알려줬다간 항의를 받는 건 물론이고 신고불성실 가산세 등 피해까지 물어줘야 해 세무사들이 양도세 상담을 꺼릴 수밖에 없다.


▷“집을 팔려고 하는데 양도세 계산법이 어려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국세청에 서면질의와 인터넷 상담을 하고 세무서 2곳을 직접 방문해 물어보고, 126 국세상담센터와 개인 세무사 대면 상담도 해봤지만 모두 다른 해석을 한다.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오를 정도로 양도세는 난해한 세금이 됐다. 주택 수와 소재지, 보유 기간 등에 따라 세율이 바뀌는 종합부동산세도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공동주택 공시가격 열람이 16일 시작된 이후 국세청 종합부동산세 계산 사이트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경쟁력 있는 조세’의 조건으로 공평성, 탈세 방지, 예측 가능성, 경제적인 납세협력비용 및 행정비용을 제시하고 있다. 수시로 바뀌어 납세자가 세금 부담을 예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부동산 세제는 ‘예측 가능성’이 하락하고 있다. 세금 내는 데 드는 납세자의 시간과 노력, 비용을 뜻하는 납세협력비용도 증가하고 있다. 연말정산 때를 빼면 세금 문제로 머리 쓸 일이 별로 없던 월급쟁이들까지 집 문제로 세제를 들여다보는 바람에 국세청이 ‘인기 작가’가 된 것이다.

 

▷부동산 세제가 ‘난수표’가 된 주된 원인 중 하나는 현 정부가 세금을 부동산대책의 수단으로 남용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덧댄 데를 또 덧대는 식으로 고치다 보니 세제가 복잡해졌다. 영국의 19세기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는 “사랑을 하면서 현명해질 수 없는 것처럼 세금을 거두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내는 것 자체가 결코 즐겁지 않은 세금을 국민들이 ‘열공’하게 만드는 제도는 정상이라고 하기 어렵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3-27  샤오펀훙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올라와 퍼지고 있는 15초짜리 영상에서는 미국 나이키 운동화들이 불타고 있다.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가 소셜미디어에 나이키 등을 ‘블랙리스트’로 선정해 올린 게 불씨였다. 여기서 블랙리스트는 중국 신장의 강제노동에 반대해 신장산(産) 면화를 쓰지 않는 외국 기업이다. 그러자 중국의 샤오펀훙(小粉紅)이 봉기했다. 이들이 주도한 불매 운동은 다른 글로벌 브랜드들을 대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샤오펀훙은 맹목적 애국주의를 분출하는 공격적 성향의 중국 청년 인터넷 부대다. ‘작은 분홍색’이란 뜻으로, 2003년 극단적 애국주의에 심취한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가 분홍색이었던 것에서 명칭이 유래했다. 20, 30대 고학력 남성이 주축으로, 아이돌을 숭배하듯 국가를 사랑해 ‘팬덤 민족주의자’로도 불린다.


▷머릿속에 물을 붓듯 세뇌시키는 관수법(灌水法)이라는 게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원리로 중국 관수이론의 창시자는 마오쩌둥(毛澤東) 초대 국가주석이다. 중화민족이 세계 중심에 선다는 중국몽(夢)을 가진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이 관수법을 계승해 샤오펀훙을 교육시켰다. 문자, 언어, 이미지 관수가 다 사용됐다(김인희 ‘중국 애국주의 홍위병, 분노청년’). ‘21세기 시진핑 키즈’인 샤오펀훙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 “너희를 믿는다”며 독려하는 중국 정부다.

 

▷샤오펀훙의 주된 전술은 해외 웹사이트 공격이다. 출정을 위한 의식과 규율, 해외 방화벽 뚫는 법 등을 갖추고 조직적으로 활동한다. 애국주의라는 사상적 무기와 이모티콘이라는 공격 무기를 겸비하고 인터넷 게시판을 의미 없는 내용으로 도배해 마비시키는 방식이다. 그런데 최대 공격 대상이 한국이다. 첫 해외 출정이었던 동방신기 홈페이지 공격을 시작으로 최근엔 방탄소년단 등 한류 스타들에 대해서 비난을 퍼붓는다.

 

▷어제 SBS는 노골적으로 중국풍 소품을 사용해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월화 드라마 ‘조선구마사’를 방영 2회 만에 폐지했다. 폐지 전, 샤오펀훙은 “당시 한국의 전형적 모습”이라며 물 만난 고기처럼 장면들을 인터넷에 퍼 날랐다. 중국은 20년 전부터 한국 고대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고 최근엔 한복도, 김치도 자기네 문화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시 주석은 요즘 부쩍 공산당 역사학습을 강조한다. 내부 결속의 의도겠지만 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샤오펀훙의 타국 증오를 중국 당국은 방관하고 있다. 샤오펀훙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할 ‘미래의 홍위병’이 연상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3-29(월) 수에즈 운하

 

배 한 척이 모래톱에 박히자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배는 미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높이보다 길다. 좌초한 장소는 하필 수에즈 운하다. 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ever given)’호가 떡하니 운하를 가로막은 지 5일째. 국제 유가는 오르고, 물류 수송이 차질을 빚고, 운하에 갇힌 배에서 운송 중인 동물들은 굶어 죽을 처지다. 인류의 위대한 업적인 수에즈 운하가 배 한 척 때문에 재앙으로 돌변했다.


▷수에즈 운하 길이는 192km.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아 아시아로 향하는 9000km를 항해해야 한다. 이 꿈의 항로에 처음 도전한 사람은 기원전 19세기 이집트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라고 한다. 당시에는 나일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방식이었는데 나중에 페르시아 정복왕 다리우스 1세가 성공했다. 지금의 운하는 1869년 프랑스 주도로 완성했다. 이집트의 알짜 수입원으로 한 해 통행료는 약 55억 달러(약 6조2200억 원). 하지만 배 한 척이 좌초되자 시간당 4억 달러(약 4500억 원)어치의 물류 운송이 지체되고 있다.


▷에버기븐호 좌초로 국제 유가는 연일 급등하고 있다.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10%가 수에즈 운하를 지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등 수출 기업들은 물류 대란이 길어질까 우려하고 있다. 반사이익을 보는 곳도 있다. 사고 이후 한국 조선업체 주가는 가파른 오름세다. 일본이 건조한 에버기븐호가 좌초되자 경쟁 관계인 한국 조선의 품질이 부각된 효과다. 해상 운임이 오를 것이란 기대로 HMM(옛 현대상선) 주가도 연일 상승하고 있다.

 

▷수에즈 운하 사고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HMM은 선박 4척을 아프리카 남부 희망봉 노선으로 우회하기로 했다. 운하를 통과하는 것보다 10일 가까이 더 걸린다. 이번 사고로 북극 항로가 부각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대신 캄차카반도를 지나 북극으로 유럽에 닿는 항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대안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배로 간 뒤 열차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유럽에 가는 방식이다.

 

▷이집트 당국은 배를 띄우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뱃머리가 박힌 운하 제방에서 2만 m³ 정도 모래와 흙을 퍼냈다. 배 무게를 줄이려고 배의 균형을 잡는 평형수도 빼냈다. 만조가 되면 배가 뜰 것이란 기대도 한다. 머지않아 배가 뜨겠지만 이런 사고는 또 생길 수 있다. 지구 반대편 수로에 주목하는 것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숙명이다. 무역할 곳을 다양하게 넓히고, 실어 나를 여러 방법도 미리 준비해 두는 수밖에 없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3-30  여자 공대생

 

“올해는 SES야, 핑클이야?”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대학에 신입생이 들어오면 공대생들은 이런 궁금증을 공유했다. 100명 넘는 정원에 여학생이 달랑 3, 4명이어서 걸그룹 멤버 숫자와 비교한 것이다. 하지만 요즘 공대는 다르다. 지난해 공대 재학생 중 여성 비율은 사상 최고인 20.1%로 집계됐다.


▷여성 공대생이 증가한 주요 계기는 1996년 이화여대가 여대로는 처음으로 공대를 신설한 것이다. 1980년 1.2%에 불과했던 공대 여학생 비율은 1997년 10%를 넘어섰다. 2015년에는 숙명여대에도 공대가 생겼다. 전공별로는 섬유공학(37.4%) 조경학(36.3%) 화학공학(36.2%)의 여학생 비율이 높고, 자동차(5.2%) 기계(8.3%) 전기(9.9%) 공학은 아직도 남학생 비율이 압도적이다.

▷공학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여성과 궁합이 맞는 학문이다.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는 학문이어서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자료를 보면 15세 학생들의 수학(남자 492점, 여자 487점)과 과학(488, 490점) 점수는 남녀 간 별 차이가 없다. 반면 읽기 영역은 여학생(502점)이 남학생(472점)을 압도한다. 특히 학문 간 융·복합이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여성들의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알고리즘을 발견한 에이다 러브레이스도 영국 시인 바이런의 딸로 어려서부터 수학 과학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은 여성이다.

 

▷하지만 전체 여대생 비중(42.6%)을 감안하면 여성의 공대 기피 현상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남성 중심적 교육 과정과 취업 시장에서의 성차별이 원인으로 꼽힌다. 공대 교수들 중 여성은 5%가 조금 넘는다. ‘82년생 공대 여성’을 추적 조사한 결과 이들의 2006년 취업률은 63.2%로 남성(70.6%)보다 낮았다. 대학 입학 때는 전체 정원의 20%에 가까웠지만 취업 후 팀장급이 되면 그 비중은 3.8%로 쪼그라들었다(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공학 분야에서 남성 편중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자동차 설계다. 교통사고가 나면 여성이 중상을 입을 확률이 남성보다 훨씬 높다. 자동차 안전 설계가 남성을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의 혜택을 남녀 모두 누리려면 해당 분야에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다. 여성의 공학적 재능이 사장된다면 공학 발전에도 손해다. ‘여자 공대생’이 주목받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여성 친화적인 교육 환경 조성과 취업 불이익 해소에 힘써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3-31(수) 미얀마의 R2P 호소

 

미얀마의 한 시민이 트위터에 올린 사진에 ‘미얀마를 구하라’ ‘여성과 어린이를 그만 죽여라’와 함께 ‘우리는 R2P가 필요하다’는 문구의 팻말이 있다. 요즘 미얀마의 트위터에는 해시태그 ‘#R2P’가 달린 게시물이 넘쳐난다. 유엔의 ‘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을 일컫는 R2P를 통해 국제사회에 도움을 촉구하려는 것이다.


▷R2P는 국가가 집단학살, 전쟁범죄, 인종청소, 반인류 범죄 등 4대 범죄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뜻한다. 이에 실패하는 국가가 있다면 국제사회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개입할 수 있다는 국제정치 개념이다. 2005년 유엔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이래 2007년 케냐 인종학살, 2011년 리비아 내전 등에 유엔이 나선 전례가 있다. 그래서 지난달 1일 쿠데타를 시작해 지금까지 510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미얀마 군부의 반인류 범죄에 R2P를 적용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이 미얀마와 교역협정을 중단하기로 했지만 미얀마 군부를 한목소리로 압박하는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는 아직 없다. 각국의 계산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홀로 더 밀어붙이면 미얀마가 중국 편이 될까 걱정이다. 중국도 신(新)실크로드 전략구상인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미얀마 군부와 척지고 싶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는 27일 미얀마 군(軍)의 날 열병식에 축하 사절도 보냈다. 미얀마가 가입해 있는 아세안은 다른 회원국들조차 정치 상황이 혼란해 미얀마를 도울 처지가 못 된다.

 

▷미얀마 군부의 폭력성은 극에 달하고 있다. 주택가에 총탄을 쏘아 유아를 숨지게 하고 머리를 쏘는 헤드 샷과 참수(斬首)도 서슴지 않는다. 시민 114명이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숨지던 순간 군 장성들은 흰 제복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유유자적 파티를 했다. 결국 기댈 곳은 오늘(31일) 열리는 긴급 유엔 안보리다. R2P를 적용해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 또는 회복’하기 위한 무력행사를 허용하는 유엔 헌장 제7장의 발동을 논의할지 주목된다.

 

▷미얀마 군의 날, 국제미인대회에 참가한 미얀마 여대생은 흐느끼며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다. “미얀마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려고 거리에 나설 때, 저는 이 무대에서 민주주의를 외칩니다.” 그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 ‘힐 더 월드(Heal The World)’도 불렀다. 지금 어디에선가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어린이까지 참혹하게 살해하는 미얀마 군부를 더는 방치할 시간이 없다. 국제사회가 인류애로 힘을 합칠 때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