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3/ 2018 동아일보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71>뚝섬 정수장… 수돗물과 물장수
▲우리나라 최초의 수돗물 시설인 서울 뚝섬 정수장의 완속여과지(1908년 건축).
물장수가 있었다. 19세기 서울에서 각 가정에 물을 배달해주던 사람들. 특히 함경도 북청 사람이 많아 북청 물장수라는 말까지 성행했다. 북청 사람들은 물을 팔아 번 돈으로 자식의 유학비를 댄 것으로 유명하다. 모두 상수도 수돗물이 보급되기 전 얘기다.
1908년 서울 뚝섬에 경성수도양수공장이 생겼다. 침전지, 여과지, 정수지, 송수실 등을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었다. 건물과 시설은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이 지었다. 뚝섬은 한강 유역에서 수질오염이 가장 적고 유량이 풍부했다. 수돗물 공급용 증기터빈을 돌리는 데 필요한 땔나무와 숯도 많은 곳이었다.
그해 9월, 드디어 서울에 수돗물이 등장했다. 4대문 안과 용산 일대 시민 12만5000명에게 수돗물을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의 수돗물 공급은 1990년까지 이어졌다.
뚝섬의 옛 정수장과 양수공장은 현재 수도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야외에는 190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사용했던 각종 펌프, 수도관 등을 전시하고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송수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물은 아치 모양의 화강석 입구가 두드러진다. 입구 좌우로 ‘경성수도양수공장’ ‘광무 11년 건축’이라는 표석이 지금도 선명하다.
완속 여과지(濾過池)도 인상적이다. 모래와 자갈 등을 깔고 이곳으로 물이 느린 속도로 흘러가도록 해 물속 불순물을 걸러내는 곳이다. 이 여과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콘크리트 건물 가운데 하나다. 특히 출입구와 내부의 조형미가 독특하다. 내부는 마치 하나의 설치미술처럼 수십 개의 기둥이 아치형 천장으로 연결돼 있다. 그 아래 바닥에 모래와 자갈 등이 깔려 있다. 천장으로 뒤덮인 여과지의 내부는 어두컴컴하다. 실제로 물이 흐른다면 수많은 기둥이 물에 비쳐 흔들릴 것이고 그 모습은 장관을 연출했을 것 같다. 송수실과 여과지는 지금 기능이 중단되었지만 1908년 당시로서는 서울 한강변의 신기한 볼거리였다.
서울에 수돗물이 등장하면서 물장수는 사라졌다. 1914년경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해 6·25전쟁 직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근대 상수도의 발상지인 뚝섬 정수장. 이곳 수도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서면 북청 물장수의 “물 사시오” 외침이 먼저 들려온다. 물장수를 밀어낸 근대 양수장에서 물장수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니, 색다른 경험이 아닐 수 없다.
<72>경교장의 유리창 총탄 구멍과 그 너머
▲경교장의 김구 집무실 유리창 총탄 구멍. 1949년 암살직후 찍은 사진(왼쪽)과 현재 재현해놓은 모습.
백범 김구의 죽음 하면 떠오르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경교장 2층 김구의 집무실 유리창 너머, 고개를 떨군 채 통곡하는 군중의 모습. 사진 속 유리창에는 총탄 구멍 두 개가 선명하다. 안두희가 쏜 총탄이 유리창을 관통한 흔적이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암살 직후 미국의 사진기자 칼 마이댄스가 찍어 ‘라이프’에 게재했던 것이다. 당시 사진 제목은 ‘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였다.
서울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내 경교장. 이 건물은 1938년 지어졌다. 김구는 1945년 11월 중국에서 환국해 1949년 서거할 때까지 경교장을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했다. 여기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김구 암살 후엔 미군 사무실, 주한 대만대사관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매입해 병원 건물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내부 구조가 많이 바뀌었고 1990년대 들어 복원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복원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5년 2층의 옛 김구 집무실을 먼저 복원했다. 그 무렵 이곳은 의사들의 휴게실이었다. 이후 경교장 전체를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2010년 강북삼성병원은 복원을 위해 건물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전면 복원은 2013년 마무리되었다.
건물 안팎 곳곳이 매력적인 경교장. 여기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들르는 지점이 있다. 2층 집무실 유리창의 총탄 구멍이다. 1949년 사진에 나오는 두 개의 총탄 구멍. 이것은 김구 집무실을 복원하면서 함께 되살렸다. 복원 당시, 총탄 구멍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지를 놓고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유리창에 직접 구멍을 낼 수는 없었다. 구멍으로 바람이 불어오거나 빗물이 들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5mm 두께의 투명 아크릴판에 총탄 구멍을 재현해 유리창에 덧붙이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복원이든 재현이든, 총탄 구멍은 매우 각별하다.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흔적, 경교장에서 가장 극적인 흔적이기 때문이다. 총탄 구멍 앞에 서면 1949년 사진 속 유리창 너머 군중의 모습이 떠오른다. 통곡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착잡함에 한동안 발길을 옮길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오면 유리창 너머 그 자리, 지금은 그냥 분주한 주차장이다.
<73>수원 나혜석 생가터와 우울한 자화상
▲경기 수원시 화성행궁 근처의 나혜석 생가터.
1948년 12월 10일, 서울 용산구 시립병원 자제원(慈濟院)의 무연고 병실에서 한 여성이 숨을 거뒀다. 인근 원효로 노상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뒤 행려병자로 처리되어 이곳으로 옮겨진 여성이었다. 52세. 행색은 초라했고 얼굴은 피폐했다.
나혜석(1896∼1948).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가부장적 관습에 맞서며 한 시대를 풍미한 선구적 여성이었지만 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허망하고 처연했다.
경기 수원시 화성(華城) 행궁 주변의 행궁마을. 이곳엔 사방으로 골목들이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다. 벽화 골목도 있고, 미술 조형물도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언제부턴가 그 골목길을 나혜석 옛길이라 부른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느 야쿠르트 대리점 옆으로 ‘정월 나혜석 생가터’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 집은 사라졌고 터만 남아 있다. 주변 골목길 담장 곳곳엔 나혜석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나혜석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글과 그림도 있다. ‘남녀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맞섰던 예술가. 꽃보다 더 붉은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는 안내판 문구도 보인다. 그 모습들이 때론 정겹고 때론 쓸쓸하다.
2015년 11월 흥미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나혜석 자화상’의 기증 소식이었다. 기증자는 나혜석의 막내며느리 이광일 씨. 막내아들은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였다. 2015년 4월 세상을 떠난 김 전 총재의 유지에 따라 부인 이 씨가 나혜석의 작품들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 내놓은 것이다. 막내아들인 김 전 총재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나혜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주변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수원시립미술관은 화성 행궁 바로 앞에 있다. 나혜석 생가터에서는 걸어서 5분 거리. 젊은 시절, 나혜석은 이곳을 열심히 지나다녔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결국 갈 곳을 잃고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나혜석은 죽고 나서 그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자화상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자화상은 지금 수원시립미술관의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자화상 속 나혜석의 눈빛은 여전히 우울하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면 늘 마음이 무거워진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행려병자 나혜석의 간극…. 며칠 뒤면 12월 10일이다.
<74>대구 제일모직 기숙사와 女工의 꿈
▲대구 북구 침산동에 있는 옛 제일모직 대구공장 기숙사.
“그때는 제일모직이 최고였지요. 공장엔 기숙사까지 있었습니다. 기숙사 시설이 엄청 좋아 사람들이 제일대학이라고 불렀다니까요.” 제일모직 기숙사 가는 길, 택시 운전사는 그곳을 지금도 대학이라 불렀다.
1954년 대구 북구 침산동에 들어선 제일모직 대구공장. 국내 최초로 국산 양복지를 생산하던 곳이다. 대구공장은 1995년 경북 구미로 이전했다. 이후 24만7000여 m²(약 7만5000평)가 빈터로 남아있다 오랜 논의를 거쳐 올봄 복합창조경제단지 겸 문화생활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공식 이름은 대구삼성창조캠퍼스.
이곳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옛 제일모직 대구공장 여자 기숙사 건물 6채다. 기숙사가 생긴 것은 1956년으로, 국내 최초의 여자 직원 기숙사였다. 이병철 회장이 대구공장을 세우면서 가장 역점을 둔 공간이 여자 기숙사였다.
처음엔 3채에 진심(眞心) 선심(善心) 숙심(淑心)이라 이름 붙이고 최고급 자재를 사용해 건물을 지었다. 미용실, 욕실, 세탁실, 다리미실, 도서실, 휴게실 등 시설도 최고였다. 스팀 난방시설과 온수기도 있었다. 정원은 잔디밭으로 단장했고 나무들이 무성했다. 정원과 연못에선 공작과 꿩들이 노닐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1960년대 이 기숙사를 둘러본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이 정도면 딸을 맡길 수 있겠군”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렇다 보니 외부인들은 이곳을 제일호텔, 제일공원, 제일대학이라 불렀다. 제일모직 대구공장 여직원들은 뭇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여자 기숙사는 1980년대 초까지 6채로 늘어났다. 1, 2층짜리 건물의 외벽은 온통 담쟁이넝쿨이다. 겨울인 지금도 담쟁이넝쿨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사이로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 오래된 나무들이 멋을 더한다. 옛 기숙사는 외관을 원래 모습으로 유지한 채 내부를 리모델링해 공예품을 제작 전시 판매하는 공방과 전시장, 음악창작실, 카페 등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기숙사 내부를 되살린 공간도 마련했다. 기숙사 옆에는 삼성의 모체인 삼성상회(1938년 설립)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한국 근대화의 주역이었던 섬유산업. 그 역군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 고향집에 보내고 밤에는 야학 등을 통해 공부를 했다. 제일모직 기숙사엔 그들의 꿈과 애환, 한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75>을지로 옛 서산부인과와 김중업의 상상력
▲서울 중구 을지로7가 옛 서산부인과(김중업 설계, 1967년 건축)의 발코니를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
이 건물은 안팎으로 구석구석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 옆으로 고개를 기울여 보기도 하고, 쪼그려 앉아 위로 올려다볼 필요도 있다. 적당히 수고를 들이면 숨겨진 매력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근처 광희문과 한양공고 사이.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와 만나는 곳. 거기 독특한 모습의 5층짜리 뽀얀 건물이 있다. 건축주인 산부인과 서병준 의사의 의뢰에 따라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의 설계로 1967년에 개인 병원으로 지은 건물이다.
프랑스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였던 김중업은 직선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곡선의 자유로움을 구현한 건축가로 평가받는다. 김중업의 곡선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물이 바로 이것이다. 김중업은 산부인과 병원이라는 점에 착안해 내부 공간을 자궁과 같이 디자인했다.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는 엄마의 몸속과 같은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구현하기 위해 곡선과 원의 모티브를 과감하게 적용했다. 건물 여기저기 곡선과 원들이 물결치듯 출렁거린다. 건물 벽면과 바닥 이음매 부분도 둥글게 마감했다.
층층이 곡면으로 처리한 발코니가 특히 인상적이다. 밑에서 바라보면 하늘에 떠 있는 듯하다. 곡면 발코니는 돌아가면서 이어져 올라간다. 그 모습이 마치 탯줄을 연상시킨다.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곡선으로 표현되면서 절묘하게 생명의 탄생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건물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스하다. 당시 한국 건축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이었다. 건축가 김중업의 자유롭고 과감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건물은 1995년까지 서산부인과의 병원으로 쓰였다. 하지만 1995년부터 산부인과 기능이 사라졌고 현재는 디자인회사 아리움의 사옥으로 쓰이고 있다. 아쉽게도 건물 주변엔 내력에 관한 표석이 하나도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옛 서산부인과 건물 길 건너엔 한양도성의 광희문이 있다. 조선시대 이 문은 시신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통로였다. 그런데 그 맞은편에 서산부인과 건물이 들어섰다니, 죽음의 통로 바로 앞에 마주한 생명의 공간. 이건 우연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광희문과 옛 서산부인과. 두 공간이 서로 마주 보면서 오래오래 함께했으면 좋겠다.
<76>상암동 월드컵공원과 난지도 쓰레기장의 흔적
▲서울 월드컵공원 전시관의 난지도 쓰레기들. 구두닦이통, ‘코리아나’의 서울 올림픽 주제가 앨범 등이 눈에 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붉은악마의 함성이 들리는 곳,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공원(노을공원 하늘공원 등). 3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대규모 쓰레기장이었다. 1000만 서울시민이 먹고 쓰고 버린 것이 총집결했던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
난지도는 원래 아름다운 꽃이 피고 새가 노니는 곳이었다. 예부터 난초와 영지가 자란다고 해서 난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꽃이 많아 꽃섬, 오리가 물에 떠있는 모습이어서 오리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60, 70년대 난지도는 억새가 우거져 데이트와 영화 촬영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그런 난지도가 쓰레기 매립지로 변한 것은 1978년. 이후 1993년까지 서울시민의 쓰레기는 모두 난지도로 모였다. 15년 동안 약 270만 m²(82만3000여 평)에 9200만 t의 쓰레기가 쌓였고 그 높이가 98m에 달했다. 8.5t 트럭 1300만 대 분량. 거대한 쓰레기산이 생긴 것이다. 파리 먼지 악취가 많아 삼다도로 불렸고, 15년 동안 무려 1390차례나 화재가 발생했다. 불모의 땅이었다.
1993년 경기 김포에 새로운 쓰레기 매립지가 조성되면서 난지도를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쓰레기산을 흙으로 덮고, 흘러내리지 않게 경사면을 안정화하고,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침출수를 정화하고, 매립 가스를 포집해 난방 에너지로 돌리고…. 2002년 난지도는 그렇게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월드컵공원 동편 가장자리에 가면 난지도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다. 쓰레기산을 절개한 단면 모형과 난지도 쓰레기 일부를 전시해놓았다. 10여 년 전엔 뉴 뽀빠이, 김성동 소설 ‘만다라’, 조용필 1집, 비사표 성냥, 삼양라면 등이 보였는데 며칠 전 가보니 연탄재, 구두닦이 통, 그룹 ‘코리아나’의 서울 올림픽 주제가 앨범, 브라운관 TV, 자전거 튜브 등이 눈에 들어왔다.
난지도 쓰레기는 개발시대 서울의 일상과 소비와 욕망의 흔적이다. 그리고 난지도의 수난사이기도 하다. 그 흔적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난지도 쓰레기장의 핵심 공간이었던 노을공원 하늘공원에서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사람들이 발 디디는 지표면 아래엔 지금도 엄연히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있기 때문이다.
2050년쯤, 노을공원이나 하늘공원 일부를 절개해 발굴해보면 어떨까. 1970, 80년대 서울의 삶을 만나는 흥미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77>해운대 송정역과 동해남부선의 추억
▲부산 해운대구 옛 송정역의 역사 건물(1941년·왼쪽 사진)과 노천 대합실 기둥의 철제장식(1967년).
부산 해운대 달맞이길 넘어 기장역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뽀얀 백사장과 함께 자그마한 역 하나가 나온다. 동해남부선의 간이역, 옛 송정역.
바닷가 간이역은 단출하고 경쾌하다. 송정역도 그렇다. 간이역 건물은 대개 삼각 모양의 박공지붕을 하고 그 아래 중앙에 출입문을 배치한다. 그런데 송정역 건물(1941년 건축)은 출입문을 박공의 중심선에 맞추지 않고 왼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했다. 박공과 출입문 캐노피 사이에 세 쪽의 작은 창이 있는데 이 또한 왼쪽으로 치우치게 했다. 일탈이고 파격이다. 이를 두고 어느 건축가는 “사람으로 치면 입 한쪽을 씩 올리며 반갑게 웃는 형상이다. 숫제 윙크를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참 기분 좋은 비유다. 바닷가를 찾는 이들은 무언가 채우고 싶은 빈틈을 하나씩 갖고 있다. 그 마음 상태에 어울리는 바닷가 간이역의 디자인이다.
철길 옆에 있는 노천대합실(1967년 건축)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천장의 삼각 트러스와 기둥 윗부분의 장식이 특히 매력적이다. 아르누보 스타일 철제 장식으로 고품격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부산진∼울산∼경주 구간의 동해남부선은 1918,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개통되었다. 송정역은 1934년 역무원이 없는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동해남부선은 원래 일제강점기 경남 경북 사이의 해산물 자원 이동을 위해 건설했다. 이후 1960년대부터 해운대, 경북 경주 등을 찾는 낭만적인 철길로 각광을 받았다. 1965년 송정해수욕장이 생기고 동해남부선은 더욱 인기였다. 해운대와 송정 바다를 즐긴 뒤 동해남부선을 타고 경주 불국사역에 내려 완행버스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송정역은 2013년 열차 운행을 중단했다. 동해남부선 복선 전철화로 근처에 새로운 송정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은 역 자체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역은 비교적 잘 살아남았다. 사람들의 발길도 꾸준하고, 역 건물은 갤러리 겸 카페,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에 힘입어 최근엔 옛 송정역 일대를 역사문화공간으로 복원 활용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송정역. 그 흔적을 제대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거기 우리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송정역에 다시 가고 싶다.
<78>옛 조선내화 목포공장과 붉은 벽돌의 꿈
▲전남 목포시 유달산 아래에 있는 옛 조선내화 목포공장.
유달산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굴뚝 세 개. 그중 하나는 1930년대 붉은 벽돌로 차곡차곡 30m를 쌓아 올린 것이다. 벽돌 몇 개는 떨어지고 부서졌어도 촘촘히 쌓인 붉은색 견고함이 목포 앞바다와도 잘 어울린다. 나머지 두 개는 1950, 60년대에 지은 철근콘크리트 굴뚝이다.
전남 목포시 온금동 옛 조선내화 목포공장. 이곳은 불과 열에 견디는 벽돌 등 내화물을 생산하던 곳이었다. 1997년 이후 21년째 가동이 중단되었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흔적들을 둘러보면 과거의 영화가 그대로 전해온다. 1938년부터 1970년대에 걸쳐 지은 여러 채의 공장 건물, 벽돌 야적장, 사무실, 공장장 사택과 테니스장…. 일부 공장 건물은 천장이 무너져 내렸지만 대체로 천장의 철골 트러스 구조가 웅장한 모습을 그대로 뽐내고 있다. 공장 건물 내부엔 벽돌을 구워내던 1960년대식 독일제 일본제 터널가마(길이 70m)가 여전히 웅장하다. 옛 사무실 공간으로 들어가 보면 1960, 70년대 분위기다. 사장실, 사무실, 전화교환실이 있고 “기술 좋다 자랑 말고 품질제일 자랑하자”라는 구호가 눈에 쏙 들어온다.
조선내화는 애초 1930년대 후반 일제가 세운 회사였다. 무기용 철이 필요했던 일제가 이를 위해 제철용 내화벽돌을 이곳 목포공장에서 생산했다. 광복 이후 1953년 목포 기업인 이훈동이 회사를 인수했고 1970년대 이후 포항제철 광양제철 등에 내화벽돌을 집중 공급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1997년 공장을 광양, 포항으로 옮기면서 목포공장은 가동이 중단되었다.
조선내화는 보해양조, 행남사와 함께 목포의 3대 기업으로 꼽힌다. 그렇기에 조선내화 목포공장에 대한 목포 사람들의 기억은 더욱 각별하다. 20년 동안 방치하는 바람에 공장 건물이 일부 무너지고 황폐한 느낌을 주지만 이곳을 보수, 복원한다면 멋진 산업유산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최근 목포공장이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공장 건물을 옛 모습대로 되살려 조선내화의 역사를 보여주고 동시에 전시공연장 서점 카페 식당 등 문화생활공간으로 활용한다면 이곳은 몇 년 뒤 목포에서 가장 ‘핫’한 곳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대규모의 양조공장을 방치해오다 문화공간으로 복원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캐나다 토론토의 ‘디스틸러리 디스트릭트’(옛 구더햄 앤드 워츠 양조장)처럼 말이다.
<79>남대문로 2층 한옥상가, 그 100년의 흔적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2층 한옥상가(1910년대 건축). 최근 보수 복원해 한옥카페로 활용하고 있다.
늘 분주한 곳, 서울 남대문시장 앞. 숭례문에서 한국은행 쪽으로 가다 보면 최근 들어선 고층 호텔이 나오고 그 앞에 작고 독특한 2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다. 붉은 벽돌로 지었는데 지붕에 기와를 올렸다. 주변 분위기로 치면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거기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서울 남대문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10년대 2층 벽돌 한옥상가 건물.’
1910년대 전후 숭례문 주변(현재 남대문시장 일대)엔 근대 상권이 형성되었다. 사람들이 몰렸고 점포 건물들이 새로 들어섰다. 당시 점포 건물은 2층짜리 벽돌 한옥이 인기였다. 그 이전까지 한옥은 대개 단층이었지만 서양 건축이 들어오면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벽돌을 사용했고 상업 수요를 맞추기 위해 2층으로 높여 넓은 공간을 확보했다. 지붕에 기와를 올렸지만 지붕틀은 전통에서 벗어나 서양식 목조 트러스를 도입했다. 이른바 한양(韓洋) 절충식 한옥상가였다. 2층을 주거 공간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2층짜리 한옥상가 건물은 광복 이후 대부분 철거되고 2000년대 초 겨우 3채만 남았다. 이 3채는 남대문시장 맞은편 도로변에 서로 연달아 붙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주변의 낡은 건물들에 섞여 있다 보니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호텔을 짓는 과정에서 두 채가 사라졌다. 나머지 한 채마저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급기야 이마저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일었다. 논의 끝에 2016년 이 한옥상가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보존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어 소유주인 흥국생명의 결단을 이끌어냈고, 2017년 변형된 부분들을 찾아내 최대한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보수, 복원했다. 이 한옥상가의 소유주는 줄곧 한국인이었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상권을 차지하려는 일본인 상인들 틈바구니에서 소유권을 끝까지 지켜낸 건물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이 건물은 현재 한옥카페로 활용 중이다. 내부의 빛바랜 벽돌, 출입구와 창호에 남아 있는 부서진 돌들, 천장의 목조 트러스, 운치 있는 오르내리창…. 건물 안팎 곳곳엔 100년의 흔적이 여전하다. 내부엔 옛날 사진과 도면도 전시해 놓았다. 한옥상가 카페에 들어와 앉으면 오래된 창문 너머로 남대문시장의 모습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그 분주한 풍경이 언제나 매력적이다.
<80>성신여대 옆 권진규 아틀리에와 예술가의 죽음
▲서울 성북구 동선동의 권진규 아틀리에 입구. 권진규의 실루엣 사진과 부조작품이 인상적이다.
2006년 일본의 미술 명문 무사시노미술대는 개교 80주년(2009년)을 앞두고 졸업생 가운데 최고 작가를 선정하기로 했다. 공모 심사 결과, 한국의 얼굴 조각가 권진규(1922∼1973)가 뽑혔다. 2009년 가을엔 도쿄국립근대미술관과 무사시노미술대에서 권진규의 전작을 선보이는 특별전이 열렸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한국 근대조각의 틀을 마련한 권진규. 1959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서울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창작에 매진하며 ‘자소상(自塑像)’ ‘지원의 얼굴’ 등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다.
서울 성북구 동선동 성신여대 옆 작은 골목을 따라 계단을 몇 번 꺾어 올라가면 막다른 길이 나온다. 거기 권진규의 아틀리에가 있다. 이 작업실은 권진규가 직접 지었다. 내부로 들어서면 높게 탁 트인 천장 아래로 진열대, 받침대, 다락방, 나무 계단과 선반이 눈에 들어온다. 벽돌 가마, 우물, 흙 저장 공간도 있다. 테라코타 조각가의 작업실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하지만 지금 진열대와 다락방 선반에 작품은 없고 포스터와 패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곳곳에 자소상과 부조 작품의 복제품이 있지만 주인 없는 아틀리에는 생동감보다는 쓸쓸함이 더 진하다. 천장에는 옛날식 형광등이 걸려 있고, 줄에 매달려 길게 늘어뜨린 스위치에선 세월이 진하게 묻어난다. 아틀리에는 권진규의 생전에 늘 어두웠다고 한다. 세상이 그의 미술을 알아보지 못해서였을까. 1973년 5월 어느 날, 권진규는 ‘인생은 무(無)’라는 글을 남긴 채 여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느 평론가는 “권진규의 작품은 좀 어두운 곳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권진규가 세상을 떠난 뒤 아틀리에는 그의 여동생이 관리해왔다. 그러다 2006년 여동생이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하면서 공공의 공간이 되었다. 내셔널트러스트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사전 신청을 받아 매달 하루 이곳을 개방한다.
아틀리에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업 공간 옆 살림채에 권진규의 큼지막한 실루엣 사진이 걸려 있다. 그는 사진 속에서 먼 데를 응시한다. 아틀리에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권진규가 테라코타 되었다’고 노래한 황동규의 시도 걸려 있다. 얼굴을 통해 삶을 성찰했던 권진규. 그는 이곳에서 영원한 예술이 되었다.
<81>표준전과를 삼켜버린 소금창고
▲인천 중구 싸리재 고갯길에 있는 예술공간 ‘잇다스페이스’의 출입문.
인천 개항장 거리에서 배다리 마을로 넘어가는 싸리재 고갯길. 그 한 모퉁이 낡은 벽돌 건물의 출입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동양서림’ ‘새전과·표준학력고사·중학전과·새산수완성’. 출입문의 널빤지 틈새는 벌어졌고 하얀색 페인트 글씨는 탁하게 바랬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래된 창고 분위기다. 벽돌들은 여기저기 금이 갔고, 천장엔 먼지 낀 옛날식 애자가 붙어 있다. 한쪽 벽엔 누런 태극기가 걸려 있고 1980년대 신문지를 붙였던 흔적도 보인다. 이곳에 들어오는 미술작가들은 “아, 여기서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탄성을 지르기 일쑤다. 예술공간 ‘잇다스페이스’의 풍경이다.
배다리 마을은 인천지역 근대의 길목이었다. 130여 년 전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근대 문물은 배다리를 거쳐 인천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개항장 일대에서 일본인, 중국인에게 밀려난 한국인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고 성냥공장 양조장 미곡상회 등이 생겨났다. 1950, 60년대엔 헌책방들이 가세하면서 헌책방 골목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잇다스페이스 건물은 원래 1920년대 소금창고로 지어진 건물이다. 소래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이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인천에 들어오면 그중 일부를 여기에 보관했을 것이다. 소금창고 건물은 1940년대 여성 사우나로 변신했다. 1950년대 문조사라는 서점으로 바뀐 뒤 헌책방 동양서림으로 이어졌다. 동양서림의 주요 품목은 초중고 참고서였다. 1970, 80년대는 표준전과, 동아전과를 비롯해 성문기본·종합영어, 수학의정석 등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헌책의 수요가 줄면서 1992년 동양서림은 문을 닫았다. 그 후 건물은 빈 채로 방치되었고, 언제부턴가 동네 쓰레기 창고로 바뀌어 버렸다. 그러던 중 2015년 눈 밝은 목공예 작가 부부가 이 건물을 찾아내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들은 건물에 남아있는 시간의 흔적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되살렸다.
내부 벽에 붙어 있는 오동나무 줄기도 인상적이다. 그 줄기를 따라가면 놀랍게도 건물 밖 오동나무로 이어진다. 시멘트 바닥 밑으로 뻗어 들어온 오동나무 뿌리가 내부 틈새로 빠져나와 벽을 타고 올라간 것이다. 그 생명력이 마치 이 건물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하다. 소금창고에서 사우나, 헌책방으로 이어진 100년의 흔적. 이곳에서 언젠가 표준전과의 추억을 담아 특별한 전시를 열었으면 좋겠다.
<82>진해 흑백다방의 알록달록 문화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흑백다방. 1955년 음악다방으로 시작해 지금은 문화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군항제가 열리는 곳,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원로터리. 방사형 로터리를 둘러보면 옛 건물이 적잖이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풍의 진해우체국(1912년), 중국풍의 육각 뾰족집 수양회관(1930년대),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화요릿집 원해루 그리고 길게 줄지어 선 적산가옥들. 그 옆으로 ‘흑백’이라는 큼지막한 간판이 보인다. 커피숍 같기도 하고 연주회장 같기도 한 2층짜리 건물, ‘문화공간 흑백’이다. 입구 기둥엔 ‘창원시 근대건조물 4호’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이 건물은 1912년에 건축되었다. 1952년 여기에 ‘칼멘’이란 이름의 고전음악 다방이 문을 열었다. 1955년 서양화가 유택렬(1924∼1999)이 칼멘다방을 인수해 흑백다방으로 이름을 바꿨다. 유택렬은 1층 다방에서 고전음악 감상회를 열고, 2층에서는 창작 활동을 했다. 1960, 70년대 변변한 문화공간이 없던 시절, 흑백다방은 진해 지역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인근 통영에서 활동하던 화가 전혁림 이중섭, 시인 김춘수도 이곳에 드나들었다. 2008년 이후엔 유택렬의 딸이 연주회 전시 중심의 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출입문을 여는 순간, 오래된 건물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온다. 벽이든 가구든 온통 빛바랜 색깔이다. 정면 중앙에 피아노가 있고 주변으로 오래된 음반과 악보들이 꽂혀 있다. 단정한 느낌의 풍금, 줄이 풀어진 바이올린, 말라붙은 물감 튜브, 손잡이가 너덜너덜해진 물감 박스, 살짝 먼지가 내려 앉은 뽀얀 석고상, 그을음이 남아 있는 등잔…. 창가의 오래된 소파에 앉으면 중원로터리 맞은편으로 진해우체국의 이국적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영화 ‘화차’를 촬영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매달 두 차례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면,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외국에서 오는 사람도 있고, 해군사관학교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우연히 들르는 사람도 있다. 연주회가 끝나면 그들은 방명록에 ‘진해 문화의 등대’ ‘살아 있는 흑백’과 같은 소감을 남기기도 한다.
유택렬은 까치의 이미지를 차용해 흑백이란 이름을 지었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의 이미지를 흑과 백으로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흑백다방은 군항제와 함께 진해의 자존심으로 자리 잡았다. 진해 사람들은 이곳을 흑백다방이 아니라 그냥 “흑백”이라 부른다. 흑백 63년의 역사는 진해의 문화예술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83>청운동 수도 가압장과 윤동주의 우물
▲서울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문학관에 전시 중인 목제 우물틀. 중국 룽징의 윤동주 생가에서 옮겨온 것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절,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과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을 했다. 그 무렵 ‘자화상’이라는 시를 썼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에는 우물이 등장한다. 윤동주에게 우물은 세상과 소통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매개물이었다.
종로구 누상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청운동엔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건물은 원래 청운동 수도 가압장이었다. 수도 가압장은 수돗물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수압을 높이는 시설이다. 상수도 여건이 좋지 않았던 1970년대에 주로 고지대 초입에 많이 생겼다. 청운동 가압장은 1974년 지어졌다. 이후 이 일대의 상수도 여건은 계속 나아져 2008년 운영을 중단했다. 한동안 방치됐던 이곳은 2012년 윤동주문학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문학관 전시실엔 중국 룽징(龍井)의 윤동주 생가에서 옮겨온 우물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사각형 목제 우물틀이다. 여기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우물 옆에 서면 동북쪽 언덕으로 윤동주가 다닌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합니다. 이 우물에 대한 기억은 오래오래 남아 그의 대표작 ‘자화상’을 낳습니다.” 윤동주는 이 우물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거기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하늘과 별이 비치고, 식민지 현실이 떠올랐을 것이다.
옛 수도 가압장 건물엔 물탱크가 두 개 있었다. 문학관으로 꾸미면서 하나는 천장을 텄다. 그 물탱크의 벽에는 수위(水位)의 흔적이 여러 줄로 남아 있다. 마치 우물 속에 들어온 듯하다. 또 다른 물탱크는 밀폐된 공간으로 남겨 두었다. 윤동주가 최후를 맞았던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분위기를 살린 것이다. 천장에 연결된 인부들의 출입 통로는 창으로 활용했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온통 칠흑처럼 캄캄하다. 하지만 천장 구석의 작은 창에서 한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윤동주가 갈망했던 자유의 빛이다.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후쿠오카의 감방에서 생을 마쳤다. 28년의 짧은 청춘이었다. 기일을 앞두고 옛 수도 가압장에서 만나는 윤동주의 우물. 오래된 탓에 목제 우물틀의 표면은 비늘처럼 겹겹이 들뜨고 모서리는 여기저기 떨어져 나갔다. 청년 윤동주의 삶인 듯, 보는 이를 시리게 한다.
<84>그때는 사이렌이 울렸다
▲충남 보령시 대천동에 있는 보령경찰서 망루(1950년 건축). 보통의 망루와 달리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한다.
시계가 흔치 않던 1950∼70년대, 낮 12시가 되면 정오 사이렌이 울리곤 했다. 밤 12시엔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이보다 30분 앞서 오후 11시 반에 통금 예비 사이렌이 울리는 곳도 있었다. 어느 지역은 소방서에서, 어느 지역은 경찰서나 면사무소에서 사이렌을 울렸다.
대천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목인 장항선의 대천역 인근. 충남 보령시 대천동 보령경찰서 옆엔 독특한 모양의 망루가 있다. 누군가는 “첨성대 같다”고 하고 누군가는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같다”고 한다. 안내판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대천경찰서가 남으로 후퇴하였다가 9·28 서울 수복 후 돌아왔으나 지방의 불순분자와 북한군의 잔당들이 성주산 일대에 은거하면서 대천의 치안질서를 위협하였다. 1950년 10월 초 당시 경찰서장 김선호가 지역주민의 협조를 받아 성주산 일대의 자연석을 운반해 축조한 치안유지용 망루이다.’
망루 높이는 10m. 자연석과 시멘트 콘크리트로 몸체를 만들고 윗부분은 8각 기와지붕을 얹었다. 망루 내부는 4층의 나무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망루 꼭대기에 오르면 대천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내부 곳곳에서 밖으로 사격할 수 있도록 총안(銃眼)을 22개 설치했다. 총안 주변엔 총탄 자국도 남아 있다.
그런데 경찰서나 형무소 망루치고는 모양이 지극히 이색적이다. 전체적으로 몸통이 부드러운 유선형이다 보니 망루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혀 위압적이지 않다. 그 망루 표면을 담쟁이넝쿨이 휘감고 있다. 지금은 겨울이라서 메말라 있지만 초록이 무성한 계절이 되면 푸르름이 장관을 이룬다.
6·25전쟁이 끝나고 1980년대까지 이 망루의 주요 기능은 사이렌을 울리는 것이었다. 화재가 발생했거나 민방공훈련이 있을 때 망루에선 어김없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오와 자정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사이렌은 멈췄다.
보령경찰서 망루는 평화롭다. 그러나 지난 시절을 기억하기엔 지나치게 정적이다. 망루의 입구를 막아놓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이제, 망루의 기억을 다시 불러낼 수 있어야 한다. 내부도 개방하고, 사이렌도 울리고,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생각을 바꾸면, 보령경찰서 망루의 사이렌이 대천의 독특한 문화상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85>가장 뜨겁고 가장 포항답게
▲경북 포항시 포스코역사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옛 삼화제철 고로(1943년 제작).
1991년 강원 삼척시 삼화제철 터에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 그곳엔 선철(銑鐵) 생산을 위해 1943년 설치한 고로(용광로)가 8기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북한 제외)에 남아 있는 고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파트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고로 7기를 철거해 버렸다. 역사의 흔적보다 개발이 더 중요한 시대였다. 막상 없애고 나니 반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 남은 고로라도 잘 보존해야 하는데….” 1992년엔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포스코(옛 포항제철)가 고로를 눈여겨보았고, 1993년 고로를 매입해 보존하기로 했다.
일제는 군비 확장과 대륙 침략이 한창이던 1930년대부터 한반도에 제철소를 짓기 시작했다. 1943년 일본 고레가와 제철은 삼척에 소형 고로 8개를 갖춘 공장을 세웠다. 광복 후 고레가와 제철은 삼화제철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전력, 원료, 기술자가 모두 부족해 고로를 제대로 가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949년 제철소 규모를 확장하면서 고로를 보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수공사는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 1952년 국고보조금을 투입해 고로를 다시 보수했다. 이어 1954년 시험생산에 들어갔으나 전력과 자금 부족으로 곧바로 휴업을 해야 했다. 이후 추가 보수가 수차례 되풀이되었고 드디어 1961년부터 선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것이 1950, 60년대 한국 제철산업의 현실이었다. 1960년대 제철소가 10여 곳 있었지만 제대로 된 선철을 생산하는 곳은 삼화제철이 유일했다. 삼화제철은 1971년까지 철을 생산하고 문을 닫았다. 동국제강이 고로를 인수한 뒤 그 가운데 7기를 개조해 생석회를 생산하기도 했다. 용광로의 용도가 폐기된 7기의 고로는 끝내 아파트 건설 과정에서 철거되고 말았다.
1993년 포스코는 하나 남은 삼화제철 고로를 해체해 포항으로 옮겨왔다. 보수 복원을 거쳐 지금은 포스코역사관 야외전시장에 전시해 놓았다. 수차례 보수와 가동 중단을 반복했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뜨겁게 견뎌온 삼화제철 고로. 거기엔 우리 제철산업의 역사와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형 고로라고 하지만 그래도 높이 25m, 무게 30t의 위용을 자랑한다. 멀리서 보면 멋진 예술조형물 같다. 제철도시 포항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
2018-03-08
<86>고종이 와플을 좋아했다고?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 와플팬. 20세기 초에 수입돼 덕수궁 만찬용 와플을 만드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진은 창덕궁 곳곳에 남아 있던 근대기 대한제국의 생활유물을 조사해 정리했다. 서양식 가구, 욕실용품, 식기류, 조리용구가 꽤 많았다. 대부분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에서 수입한 것들이었다. 가구 가운데에는 당시 세계적인 가구업체인 영국 메이플사의 제품이 두드러졌다.
이 생활용품들은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에 창덕궁과 덕수궁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창덕궁에서 순종이 사용했던 물건도 있고, 덕수궁에서 고종이 사용하다 언젠가 창덕궁으로 옮겨놓은 물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사용 시기를 하나하나 확정할 수는 없다.
조사 도중 독특한 물건 하나가 연구진의 관심을 끌었다. 둥글고 넓적한 철제 팬이었다. 두 개의 철판이 붙어 있고, 겉은 매끈했지만 안쪽은 울퉁불퉁 사각형의 요철이 가득했다. 그 특이한 모습에 연구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고 보니 와플팬이었다. 와플을 만들 때 쓰는 요즘 도구와 흡사했다. 와플팬에는 ‘DAWN’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지만 아직 그 의미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와플틀과 함께 제과 형틀도 140여 점이나 발견되었다. 제과 형틀은 표면에 ‘베넘 앤드 프라우드(Benham&Froud)’라는 영국 회사의 십자가 모양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이 로고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만 사용했던 것이다. 이 제과 형틀과 마찬가지로 와플팬도 20세기 초 수입품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고종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 외교관들을 덕수궁에서 자주 접견했다. 그때 주로 서양식 음식을 제공했다. 와플은 빵과 함께 서양식 만찬의 주요 디저트였다. 현재 남아 있는 와플팬이 제과 형틀보다 수량이 훨씬 적다는 점에서 와플이 빵보다는 더 귀하게 취급된 것 같다.
와플팬은 현재 경복궁 경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대한제국 시기 고종과 덕수궁의 만찬 상황이 머리에 떠오른다. 외국 외교관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디저트 와플을 즐기던 고종의 모습. 고종과 와플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조사 연구해야겠지만, 정황상 이 같은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와플과 커피는 잘 어울린다. 커피를 좋아했던 고종이었기에 와플을 좋아했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맛도 맛이지만 벌집 같은 독특한 모양새에 요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와플. 그 와플 인기가 100년 전 덕수궁에서 시작된 건 아닐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