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동포 10만명을 구한 흥남철수 작전 다시보기
2014-12-21 월간조선
■55년 만의 報恩
2005년 5월27일, 경남 거제도 신현읍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 고현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이곳이 노인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에서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1950년 12월 혹한의 흥남부두를 빽빽하게 메우고 서 있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사지에서 구해 준 은인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거제도에 세웠다. 거제도는 흥남부두를 떠난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楊承浩(양승호·84)씨도 그중 한 명이다.
『1950년 12월24일, 1000명의 피란민과 함께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탄 배가 피란민을 실은 첫 배 같았습니다. 장승포 경찰서에서는 피란민들을 어디에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습니다. 경찰은 일단 우리를 인근 국민학교 교실에 배치했어요. 이북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경찰이 경비를 서더군요. 그런데 다음날부터 피란민을 실은 배가 막 쏟아져 들어오자, 경찰들이 경비고 뭐고 「알아서 다른 곳에 가서 살아라」고 합디다』
장승포에 살고 있는 尹末順(윤말순ㆍ82) 할머니는 부두에 내리는 북한 피란민들에게 주먹밥을 나눠 줬다. 배에서 내린 피란민들은 3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상태였다.
『피란민들이 탄 배가 도착하면 주먹밥을 해서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부두로 나갔지. 피란민들은 한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우리가 주는 주먹밥을 먹으면서 부두를 죽 빠져나오두먼』
▲1950년 12월24일
마지막 수송선이 떠난 후 폭파되는 흥남부두.
▲2005년 5월27일 경남 거제시 신현읍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열린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준공식.
인구 10만의 巨濟에 피란민 15만 수용
▲2005년 5월27일, 경남 거제시 신현읍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에 건립된「흥남철수작전 기념비」의 모습.
거제도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주민들의 신세를 져야 했다.
그때 일을 기억하는 거제도 노인들은 『골방이나 창고에까지 피란민들이 들어찼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을 어귀 공터나 산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당시 거제의 인구는 10만 명, 피란민이 15만 명 이상이었다. 흥남철수작전으로 온 10만여 명의 피란민 외에 부산에 머물던 피란민 상당수가 거제도로 옮겨졌다.
장승포 주민 鄭元株(정원주·83)씨는 당시 피란민들의 생활을 생생히 기억했다.
『우리 뒤주 방에도 피란민들이 몇 명 있었어. 양식은 배급이 되었지만, 그 사람들 참 불쌍했지 뭐. 고향에서 금붙이라도 가져온 피란민들은 이를 밑천으로 장사를 했지만, 대부분 돈이 없으니까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거나, 막노동을 했어. 그런 일거리도 거의 없었어』
포로를 상대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피란민도 있었다. 포로수용소 철조망 너머로 먹을 것을 넘겨주면, 포로들은 옷가지나 모포를 던져 주었다. 피란민들은 포로를 표시하는 「PW」라는 글씨를 지우고, 국방색을 탈색한 후 시장에 내다 팔았다.
피란민들이 많이 머문 장승포항·옥포항·고현항의 부두는 좌판을 벌인 피란민들로 가득했다. 당시 거제도에서는 장승포항이 가장 번화했다.
피란민들은 부두에 나와 쌀·고무신·광목 장사를 하거나, 솥을 걸어 놓고 국밥·국수 등을 팔았다. 윤말금 할머니는 장승포 부두에서 국밥을 팔던 함경도 아줌마의 사투리를 잊지 않고 있다.
『「빨리 옵세, 오가리 마이 있소」 하고 소리치데. 나는 「오가리」가 뭔가 싶어 솥을 들여다봤지. 팥죽 같은 데 밀가루를 뜯어 넣은 것을 오가리라고 하데. 그 사람들 참 생활력이 강했어요』
함흥에서 거제도로 피란 온 崔元植(최원식·82) 前 잡지협회 회장은 『성포리 구장집에 아홉 명이 머물렀다』며 『아홉 명이 그 집에서 석 달 동안 쌀이고 김장김치고 다 먹었는데도 구장은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고 말했다.
『구장은 밤마다 우리에게 고생한다며 이불 속에 손을 넣어 보고, 먹을 것도 주었어요. 그렇게 인심이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 구장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이제는 고맙다는 말을 전할 사람도 없습니다』
피란민들은 거제도에 짧게는 3개월, 보통 1~3년 정도 머물렀다. 거제도를 빠져 나간 이들은 부산에 나가 막노동을 하거나, 전국에 흩어져서 구두닦이·식당일·공사판 노동일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포위된 美 제1 해병사단
▲흥남으로 철수하는 美 해병 1사단 병사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12일 시작됐다. 동원된 수송선은 모두 193척, 병력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기 위해 함포 사격과 공중 폭격이 밤낮없이 이루어졌다.
6·25 때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丁一權(정일권) 장군은 手記에서 『나는 美 10군단장인 알몬드 소장의 철수계획을 들으면서 미국의 거대한 군사력을 실감했다. 그러면서도 그 막강한 해군력·공군력·지상군을 왜 전진공격할 때는 전면 가동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흥남철수는 함경남도 長津湖 일대에서 中共軍에게 포위된 美 해병1사단 1만2000명의 병력을 구출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美 해병 1사단이 괴멸될 경우 동부전선에 투입된 美 10군단 병력 10만5000명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崔秉具(최병구·75·現 서일大 영어강사)씨는 美 해병 1사단 5연대 E중대 민간인 통역관으로 長津湖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 전에 美 육군 군사고문단에서 일했던 崔씨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美軍에 합류했다.
崔秉具씨는 1950년 10월26일 美 해병대원들과 함께 원산에 상륙해 長津湖 쪽으로 북진했다. 崔씨가 속한 美 해병1사단 5연대는 7연대와 함께 長津湖 서쪽에 있는 유담리까지 들어갔다.
맥아더 사령부는 11월24일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였다. 서부전선을 맡은 美 8군은 곧바로 中共軍의 반격에 부닥쳤다. 서부전선 곳곳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戰勢가 급변하자 동부전선의 美 해병 1사단은 「長津湖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지점에 있는 무평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부전선에서 美 8군을 압박하는 中共軍의 뒤통수를 친 후, 8군과 함께 협공을 펼치려는 작전이었다.
무평리 공격의 선봉에 선 부대가 崔秉具씨가 속한 해병 1사단 5연대였다. 美 해병대는 11월27일, 서쪽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美 해병대는 유담리에서 채 5km 도 전진하지 못해 中共軍의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崔秉具씨의 설명이다.
山을 이룬 中共軍의 시신
▲철수하는 美 해병 1사단. 피곤에 지친 병사들이 눈위에 쓰러져 쉬고 있다
『유담리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밤새도록 총알을 있는 대로 쏘았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포위되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고 몰려오는 敵을 쏘기에 바빴습니다. 中共軍의 군복은 뒤집어 입으면 하얀색인데 밤에는 사람인지 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中共軍은 괴성을 지르며 나팔을 불면서 몰려왔습니다. 총도 없이 손에 수류탄 하나씩 들고 무조건 달려오다가 총을 맞아 죽습니다. 하루 저녁 전투를 마치고 중대장하고 中共軍 시체를 세는데 너무 많아서 도저히 셀 수 없었습니다』
11월28일 아침이 밝자 美 해병대는 中共軍에 포위당한 것을 알았다. 長津湖 서쪽 유담리에 있던 美 해병 1사단 주력부대인 5연대와 7연대, 長津湖 동쪽에 주둔했던 육군 2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대대 약 1만2000명의 병력이 고립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11월29일 해병 1사단에 「흥남으로 집결해서 교두보를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포위된 美 해병대는 왔던 길을 되돌아 유담리→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흥남까지 240km 이르는 거리를 철수해야 했다.
이 루트는 「한국의 지붕」으로 불리는 개마고원 지대로, 해발 1000~2000m의 고산지대였다. 고토리에서 진흥리 사이에는 험난한 황초령 고갯길이 있었다. 中共軍이 이곳만 점령하고 있어도 사단 병력 전체가 꼼짝 못했다.
美 해병대는 中共軍뿐 아니라 추운 날씨와도 싸워야 했다. 기온은 낮에는 영하 20℃, 밤에는 영하 30℃ 이하로 떨어졌다. 동상과 설사 등으로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추위를 敵들도 겪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中共軍, 추위와 굶주림으로 戰意 상실
< 소총의 기름이 혹한으로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 없었다. 자동소총도 불발이나 단발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관총은 어는 것을 막기 위해 2시간마다 사격을 해야 했고, 박격포 포판이 반동으로 얼어붙은 땅에 부딪혀서 금이 가기 일쑤였다. 트럭과 전차는 두 시간마다 15분쯤 가동시켜 놓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땅 표면이 35cm 정도 얼어 야전 축성은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고무를 많이 사용한 군화는 땀이 많이 차 가만히 있으면 곧 동상에 걸렸다. 시레이션은 겉은 녹일 수 있어도 속은 얼음덩어리가 남아 있어 복통이나 설사를 일으켰다. 부상자는 곧바로 동사하기 때문에 후송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마저 곤란했다〉 (한국전쟁: 日本육전사 연구보급회)
< 모든 것이 얼어 붙었다. 혈액이 얼어 병이 깨지고, 혈액이 용해되지 않고 튜브가 막혀 버렸기 때문에 수혈할 수 없었다. 붕대를 갈 수도 없었는데 그것은 장갑을 끼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처를 보기 위해 옷을 벗길 수도 없었다. 때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었다〉 (美 해병대 戰史)
1km 전진에 3시간 30분 걸리기도
▲李鍾淵 변호사. 美 해병 1사단 연락장교(당시 중위).
中共軍은 주로 밤이나 새벽을 틈타 공격을 해 왔다. 이들의 공격은 부족한 탄약과 형편없는 무기, 물자의 부족으로 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中共軍은 박격포나 기관총 없이 주로 수류탄에 의존한 공격을 펼쳤다. 美 해병대원이 총을 쏘는 참호 1m 앞까지 기어와 수류탄을 던지려고 하다가 죽은 中共軍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中共軍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戰意를 잃은 상태였다. 미군이 접근해도 참호에서 도망가지 않고 스스로 포로가 되거나, 피란민에 섞여서 내려오는 자도 있었다.
12월1일, 美 해병대 5연대, 7연대는 유담리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崔秉具씨의 설명이다.
『고지를 하나 점령한 후 부대를 통과시키고, 또 다른 중대가 고지를 점령하고 다시 부대를 통과시키는 식으로 후퇴했습니다. 황초령 부근에서 中共軍 30명이 포로가 되겠다고 따라오는데 아무리 가라고 해도 가지를 않습니다. 자기들은 공산당이 아니라 장개석 부대라며 막무가내로 따라오는 겁니다』
12월4일, 美 해병대는 유담리에서 22km 떨어진 하갈우리에 무사히 도착했다. 간혹 1km를 전진하는 데 평균 3시간 30분이 걸릴 정도로 힘든 철수였다. 하갈우리에는 美 해병대 지휘소와 보급기지가 있었다. 철수작전 4일 동안 발생한 해병대 부상자가 4400명, 사망자가 137명이었다.
하갈우리에서 집결한 병력은 1만여 명, 차량은 1000대였다. 하갈우리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美 해병대는 12월6일 하갈우리 집결지를 출발, 다음 철수지점인 고토리로 이동했다.
12월7일 아침 선두부대가 고토리 진지에 도착했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까지 오는 과정의 전투에서 美 해병대는 사망 86명, 부상 506명 등 600여 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해병대의 철수에서 항공기 엄호는 절대적이었다. 항공기 때문에 中共軍은 주간에 부대 자체를 집결할 수 없었다.
中共軍은 항공기와 보병, 포병을 유기적으로 사용하는 미군의 전투기술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 步·戰·砲·항공기 간의 협조는 놀라울 정도로 긴밀하였다. 從深 깊이 중화기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자동경화기, 로켓, 무반동포 등을 잘 조정하여 배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화기들은 엄폐되어 있었다. 我軍이 70~100m까지 접근했을 때 갑자기 사격하여, 我軍의 전개를 곤란하게 해 많은 피해를 주었다> (中共軍 26군 노획문서)
수적으로 미군보다 많게는 10배나 우세했던 中共軍은 추위와 보급 부족으로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 수송인원이 없어 보급추진이 안 되었고, 병사들은 찬 음식을 먹었다. 그나마 2일 동안에 감자 몇 개밖에 먹지 못한 병사도 있었다. 부상자는 제때 후송이 되지 않아 부상은 곧 사망이었고, 화포를 이용하려 해도 탄약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불발탄이었다. 병사들이 눈 쌓인 지면에서 야영을 해서 손과 발이 얼어 수류탄의 안전핀도 뽑을 수 없었다. 박격포의 포신도 얼어 수축되었으며 포탄의 70%가 불발이었다> (美 해병대 공간사 및 노획한 中共軍 문서)
12월10일, 美 해병대가 마지막 관문인 황초령을 넘을 때 中共軍은 미군의 주력부대를 분산시키는 공세를 펼쳤으나 미군의 화력에 큰 힘을 쓸 수 없었다.
12월11일, 고토리를 출발한 美 해병대는 진흥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별다른 저항 없이 트럭이나 기차 등으로 흥남으로 철수했다. 고토리-진흥리 간 전투에서 美 해병은 전사 51명, 부상 300여 명 등 도합 35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美 해병대의 後尾를 쫓는 피란민들
피란민들은 철수하는 美 해병대의 後尾(후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美 해병대가 고토리를 지날 무렵 피란민 수는 35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철수 후속부대인 공병대가 가끔 피란민들에게 뒤쳐지거나, 이들과 섞여서 행군했다.
가끔씩 피란민 속에 섞여서 있다가 튀어나와 미군을 공격하는 中共軍 때문에 後尾를 맡은 미군들은 공포를 쏘면서 따라붙는 피란민들을 멀찍이 떼어놓으려 했다.
< 제1연대 2대대 B중대는 피란민들이 진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 노인과 아녀자들이 불도 없이 눈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남루한 모습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해병대 병사들에게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피란민들을 진지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싶었지만, 中共軍이 피란민들 틈에 끼어서 진지 내로 들어와서 공격을 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미군은 이들을 진지 밖에 둘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해군 위생병의 도움으로 아기 두 명이 출산했다> (한국전쟁: 日本육전사 연구보급회)
▲1950년 12월 중순경 흥남부두의 모습. 군인과 피란민들이 뒤섞여 있다.
死地에 내몰린 기독교인들
당시 고려大 1학년에 재학 중이던 李鍾淵(이종연·77) 변호사는 전쟁이 나자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그 후 그는 美 해병대 1사단 연락장교로 파견되어 통역을 담당했다. 그는 長津湖 전투 때 사단지휘소가 있던 하갈우리에 머물고 있었다.
『내 임무는 하갈우리 중년 남자들을 동원해 지휘소 설치를 돕고, 공수 투하된 보급품을 회수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동원된 마을 사람들 중 세 명이 敵의 사격으로 죽었습니다. 하루는 어느 집을 방문하니 20명의 주민이 예배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5년간 공산 치하에서 박해받은 그들은 또다시 공산군에 점령되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갈우리에 남아 있던 300명 주민이 같이 피란을 나왔습니다. 그들은 눈 쌓인 맨땅에서 잤습니다. 흥남부두에 도착하니 온 부두가 피란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정말 비참한 광경이었어요』
함경북도 길주와 청진 방향으로 진격했던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은 비교적 손쉬운 철수 작전을 펼쳤다.
韓永燮(한영섭·77)씨는 KBS 종군기자로 수도사단을 따라 청진까지 진격했다가 후퇴했다.
『저를 비롯한 수도사단 일부 군인들은 군함을 타고 먼저 청진항을 출발했습니다. 당시 청진·성진 등 다른 항구에서도 목선으로 피란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軍은 수복지역에서 치안유지를 했던 청년과 反共단체 사람들을 트럭을 동원해 육로로 먼저 피신을 시켰습니다.
성진과 흥남 중간인 이원에서 하룻밤 머무르는데 마을 노인들 20여 명이 몰려와서 애원을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은 늙어서 못 가지만 애들이라도 좀 데리고 가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에 여유가 없다」면서 「걸어서 흥남으로 가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철수를 앞둔 흥남부두는 피란민과 군인이 뒤섞여 아수라장이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12월11일 원래 함흥과 흥남에서 강력한 교두보를 구축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이북에서 전면철수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美 10군단은 10일 안에 10만 명의 병력과 수십만t의 물자 수송을 끝낸다는 철수계획을 세웠다.
長津湖에서 철수한 해병대들이 흥남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93척의 함정이 사람과 물자를 싣기에 여념이 없었다. 12월12일 長津湖 전투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美 해병 1사단부터 배에 올랐다.
흥남 앞바다에서는 미주리호를 비롯한 13척의 美 항공모함이 中共軍 진지와 집결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했다. 함재기들은 하늘에서 中共軍에게 폭격을 퍼부었으며, 흥남 시가지에 늘어선 곡사포는 북쪽과 서쪽을 향해 쉴새없이 불을 뿜었다.
미군, 피란민 철수를 고려 안 해
▲玄鳳學 박사. 6·25 전쟁 당시 美10군단 민사담당 고문관.
美 해병 1사단의 승선에 이어, 美 10군단 본부, 국군 1군단 순으로 군인들의 승선이 완료됐다. 흥남 외곽의 방어선은 점차 축소되었고, 中共軍과 북한군은 산발적인 돌파를 계속했다. 미군 철수가 마무리될 무렵 美 함선들은 지원 포격을 한층 강화했다.
미군의 철수작전에는 당초 피란민 수송계획이 없었다. 흥남으로 몰려든 10만 명의 피란민들은 미군 수송선을 탈 수 있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부두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함남 갑산군 동림면에서 걸어서 흥남부두까지 온 趙來佶(조래길·80)씨는 『피란민들이 배에 가까이 가면 UN軍이 막았다. 해가 지면 인근 주택에 들어가거나 부두에서 잠을 잤다. 부두 상황을 계속 파악해야 했다』고 말했다. 민가에 들어가지 못한 많은 피란민들은 부두나 인근 백사장에서 밤을 샜다. 살을 에는 눈보라가 쉼없이 몰아쳤다.
美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보좌관 헤이그(훗날 美 국무부 장관) 대위는 『흥남철수의 가장 아픈 기억은 누군가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면서 무시무시한 추위 속에서 심지어 허리까지 오는 바닷물 속에 서 있던 피란민들을 바라보던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알몬드 장군의 美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흥남부두에 와 있던 玄鳳學(현봉학·83) 박사는 피란민을 구하기 위해 뛰었다. 그의 고향은 함흥이었고, 함흥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공산당이 점령을 하면 이들의 목숨이 제일 위험했다.
玄鳳學 박사는 알몬드 장군의 부참모장인 포니 대령을 만나 함흥의 민간인들을 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포니 대령은 『같이 노력해 보자』고 말했다. 11월30일 포니 대령과 玄鳳學 박사는 알몬드 장군을 만났다.
玄박사는 『장군님! 이들은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는 자들입니다. 지난 5년 동안 그들은 공산주의자와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UN軍을 도와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호소했다.
포니 대령도 거들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우리를 도왔습니다』
玄鳳學의 애끓는 설득
▲金白一 1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당신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현재로서는 군대조차 제대로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르겠기 때문에 확신을 할 수가 없다』며 『맥아더 사령부에 건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흥남에서 13km 떨어진 함흥의 철수 시한이 12월16일 오전 6시로 잡혔다. 中共軍은 함흥 앞까지 와 있었다. 玄鳳學 박사는 여러 차례 알몬드 장군에게 건의를 했다.
알몬드 장군은 12월15일 玄鳳學 박사를 불러 『4000~5000명의 피란민을 함흥에서 흥남으로 구출하기로 했다. 우선 기독교인들과 유엔군을 위해 일한 사람을 철수시키라』고 말했다.
玄鳳學 박사는 그 길로 지프를 몰고 함흥으로 달려갔다. 교회를 돌며 서둘러 철수하라고 연락했다. 그날 함흥 기차역에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소식을 들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차는 12월16일 새벽 5시에 흥남으로 출발했다. 기차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걸어서 흥남으로 왔다. 헌병들은 군용차량을 위해 피란민을 제지했다. 많은 사람들은 산길을 타고 걸어서 흥남으로 갔다.
▲지난 5월2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족공원에 건립된 흥남철수 기념비 앞에 선 로버트 러니氏와 현봉학 박사. 로버트 러니는 흥남철수 때 1만4000명을 피란시킨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이었다.
한국軍, 『우리는 걸어서 탈출하겠다』
미군과 달리 한국군 지휘부는 피란민을 데리고 가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국군의 후퇴가 결정된 직후 丁一權 육군참모총장은 1군단 사령부가 있는 성진에서 金白一 군단장을 만났다. 丁一權 장군의 手記다.
< 金白一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야 군인이니까 민간인 배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겠지. 여기 북한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나. 모두들 아우성이야. 울면서 제발 이남으로 데려가 달라는 거야. 북괴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알몬드는 군대 수송이 먼저라고 하겠지.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배에 태우겠네.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거든 잘 수습이나 해주게』
흥남으로 철수한 金白一 장군은 1군단사령부에서 피란민 수송대책을 열었다. 12월19일이었다.
수도사단장 宋堯讚(송요찬) 준장과 군단 민사처장 柳原植(유원식) 중령 등 참모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金白一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끝까지 미군과 교섭을 벌여야 한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정 못 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정 안 되면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편이 났다. 어차피 북괴놈들에게 당할 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피란민들을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다』>
한국군 1군단장 金白一 장군의 민사참모였던 柳原植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민간인 철수는 흥남철수의 막바지에 결정되었다.
< 12월18일 철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알몬드 장군이 불러서 갔습니다. 장군은 함남지사와 어느 목사 등 3명의 민간인만 데리고 가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아연실색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적어도 10만 명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로 알몬드 장군과 옥신각신했습니다. 나는 나와서 곧바로 金白一 장군에게 보고했습니다. 金白一 장군은 『미국이 영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국군 1군단이 피란민을 엄호하면서 육로로 후퇴하자』고 말했습니다. 참모들이 모두 동의했습니다. 19일 다시 알몬드 장군 측을 만났더니 『3000명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로 가겠다고 하자 『노, 노』 하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민족의 증언: 중앙일보)
흥남철수작전의 책임자 알몬드 장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부두에 모여든 피란민 자신들이었다.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알몬드 장군은 L-19기를 타고 흥남부두 위를 비행하였다. 헤이그 대위도 다른 L-19기로 비행을 하고 있었다. 헤이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 보잘것없는 살림살이를 든 많은 피란민들이 우리 군인들과 뒤섞여 있었다. 육군과 해병대는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공산 정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해졌다. 항구에 정박 중인 미국 배를 향해 수만 명의 피란민들이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면서 걸어갔다>
맥아더 사령부, 피란민 전면 철수 결정
▲마리너스 레너드 라루 선장. 6·25 전쟁 후 성베네딕토회 修士가 되었다
하늘에서 이 모습을 본 알몬드 장군은 무선으로 헤이그 대위에게 명령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놔두고 갈 수 없다. 모두 구출해야 해』
피란민의 전면 철수가 결정되자 남한과 일본에서 수송선과 상륙정이 징발되어 올라왔다. 12월19일부터 민간인들의 승선이 시작되었다. 1000명이 타도록 설계된 상륙정들은 5000명까지 승선을 시켰다. 피란민이 너무 많이 타서 갯벌에 처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륙정도 있었다.
12월19일 부산에서 올라온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항으로 들어갔다. 건조된지 5년이 된 7600t 급 미국 국적의 화물선이었다. 12월20일 흥남부두에 도착해 쌍안경으로 흥남부두를 살피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깜짝 놀랐다.
<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려는 中共軍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닻을 내리자 美 10군단 존 차일즈 대령이 승선했다.
『우리가 당신에게 피란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소, 당신이 자원하여 얼마라도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선원과 의논해 결정을 내려 줄 것을 부탁하오』
이 말을 들은 라루 선장은 누구와 상의하지도 않고 배를 부두에 댈 것을 명령했다.
12월22일 밤 9시부터 피란민 승선이 시작되었다. 라루 선장은 일등항해사에게 『피란민을 승선시키시오, 1만 명이 되면 나에게 보고하시오』하고 지시했다. 승선은 다음날 오전 11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최종 승선을 마쳤을 때 1만4000명이 타고 있었다.
3일간의 항해 끝에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거제도에 도착하여 피란민을 풀어놓았다. 라루 선장은 전쟁 후 본국으로 돌아가 베네딕토회 修士(수사)가 되어 생을 마쳤다.
自由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
▲白南權 장군. 수도사단 부사단장(당시 대령).
왜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북한을 탈출했을까. 피란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白南權(백남권·84·소장 전역) 장군은 흥남철수 당시 국군 1군단 수도사단 부사단장이었다. 그는 『골수 좌익분자들은 다 도망가고 북한지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전부 국군을 환영하는 사람들이었다』며 『다시 공산정권이 들어섰을 때의 보복이 두려워 모두 따라 내려왔다』고 말했다.
『곳곳마다 주민들이 국군 환영대회를 했습니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했고, 「애국청년단」 같은 反共단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북한에 어떻게 남아 있겠습니까. 우리 수도사단이 북진을 할 때 나는 가는 곳마다 초상집을 목격했습니다. 후퇴하는 인민군들이 反共인사를 학살한 것입니다. 공산군의 만행을 잘 아는 주민들은 다시 공산군이 내려온다니까 필사적으로 탈출한 겁니다』
흥남시 운중리에 살고 있던 玄彩麟(현채린·79)씨 집에는 UN軍 포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다음날 이 포부대가 돌연히 사라졌다.
玄씨는 포부대가 후퇴하는 것을 보고 아들·딸·아내를 데리고 내호부두로 갔다. 내호부두는 비료공장·화학공장·기계공장 등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바다 쪽에서는 함포사격이 요란했다.
『내가 배를 탄 것이 12월23일입니다. 우리는 배를 못 타면 몰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두에는 내가 탄 화물선 외에 화물선 한 척이 더 있었습니다. 우리 화물선은 미국 상선이었는데 3개 층으로 되어 있었어요. 배에서 애를 낳는 것도 보았어요.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봐야 하니 냄새가 말도 못했습니다. 강릉쯤을 지나는데 크리스마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玄彩麟. 북한에서 소비조합 근무.
玄씨는 일제시대 상업학교를 나왔다. 1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다고 한다. 북한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는 소비조합에서 일을 했다. 소비조합은 배급을 관리하고 조달하는 기관이다.
『나는 노동당원도 아니었고, 北의 사상도 맞지 않았습니다. 北에 있다가는 앞으로 신상에 어떤 변화가 올지 알 수 없었어요. 거제도에 4년간 머물면서 노동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1954년 서울에 올라왔는데 취직할 데가 없었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조성공사에서 막노동을 2년 했습니다. 그 후 공군 군속도 하고, 회사도 다니고 문구점도 했습니다』
현재 거제도 장승포에 살고 있는 李모(75)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신의주에 살았다. 李할머니는 후퇴하는 인민군이 아버지와 오빠를 처형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신의주 제일교회 목사였습니다. 오빠는 3대 독자였고요.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사상이 나쁘다면서 아버지와 오빠를 내가 보는 앞에서 처형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깨어나니 옛날 기억이 아무것도 나지 않는 완전히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 후 南에 함께 나온 우리 교회 장로님이 성경을 꺼내놓고 글도 가르쳐 주고, 여러 가지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지만 지금도 19세 이전의 일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오빠의 처형 장면도 생각나지 않아요. 장로님이 가르쳐 줘서 알 뿐이죠』
李할머니는 그 후 「여자 학도병」에 지원하여 국군을 따라 흥남으로 오게 됐다.
▲崔元植 前 잡지협회 회장. 북한에서 공무원.
崔元植(최원식·82) 前 잡지협회 회장은 함남 갑산에서 걸어서 후퇴를 했다. 일제 때 혜산군청 산업과에서 공무원을 했던 그는 이북 정권에서 쫓겨난 후 취직이 되지 않았다.
『소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 郡守로 발령 받아 왔습니다. 일제 때 공무원도 거의 다 쫓겨났습니다. 北에 있어 봐야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혜산진에서 풍산까지 80리, 거기서 북청이 150리, 거리서 흥남이 150리입니다. 후퇴하는 국군 뒤를 따라 나왔습니다. 당시 北에 있던 여자들은 늙은 시부모들 때문에 거의 못 나왔습니다』
崔씨는 흥남까지 오는 데 22일 정도 걸렸다고 했다. 잠은 동네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자고, 밥은 얻어먹거나 사먹었다. 피란민들에 대한 인심이 좋아 동네마다 잘 재워 주었다고 했다.
흥남부두에 머물 때는 밤에는 인근 마을 집에 들어가 자고, 낮에는 부두로 나오기를 반복했다. 흥남 주민들도 떠날 준비를 하느라 모두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타고 나온 LST(상륙정)에는 2000명 가량이 탔다. 항해 도중 기관이 고장 나서 바다에 정박한 채 수리를 하고 오는 바람에 거제도에 도착하는 데 14일이 걸렸다.
UN軍 협조자
흥남시 송동리에 살던 楊承浩(양승호·84)씨는 광복 후 원산 군자교 인민학교 교사로 있었다. UN軍이 흥남 지역을 점령하고 나서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공산군이 들어오면 나는 UN軍 협력자로 꼼짝없이 죽을 입장이었습니다. 12월12일 교원자질 향상 강습이 있어서 새벽에 만세교를 넘어 시내에 있는 학교로 갔는데 오후부터 다리가 통제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만세교 서쪽 서흥남 지역에 있던 우리 가족들이 못 넘어온 것 같습니다』
당시 그의 집에는 할머니, 부모, 동생이 남아 있었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楊씨는 『사람들이 내호부두에 집결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갔다. 그는 흥남시 교사들과 따로 모여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시 마운트 매킨리호에 승선한 맥아더 사령관. 그의 뒤편 오른쪽이 알몬드 소장이다(왼쪽 사진). 알몬드 장군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포니 대령.
흥남철수 後 軍입대한 사람들 많아
▲1만4000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미국 시애틀 항구로 돌아오자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전스에 관련기사가 실렸다(1951년 1월
『부두에서 며칠을 기다렸는데 12월20일경인가 앞뒤에 해치가 두 개 있는 배가 한 척 왔습니다. 그 배 사람들이 교사들이 모여 있는 우리 쪽을 향해 「선생! 여기 일할 사람 50명이 필요하니 올려 보내시오」 하는 겁니다. 사람들을 피란시키려는데 그냥 태우기가 뭣하니 일할 사람 뽑는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태운 겁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 50명이 탔습니다. 배에는 쌀 가마니가 실려 있었습니다. 내가 번호를 500번을 받았는데 배 안에는 이미 청진에서 타고 온 수백 명이 있었어요. 합해서 1000명 정도 될 겁니다』
楊씨는 크리스마스 전날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했다. 그는 뒷배가 들어올 때마다 혹시 가족이 탔는가 하고 나가 보았으나 그의 가족은 없었다. 楊씨는 거제도에 3개월 정도 머물다 방위군에 입대해 부산으로 갔다. 그때 방위군 간부들의 부정사건으로 방위군이 해체되자, 건설현장에서 막노동 등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楊承浩씨처럼 방위군이나 軍에 입대를 한 피란민들이 많았다. 현재 기업체 사장을 하고 있는 朴씨(75)는 『공산당을 무찔러 하루빨리 가족을 만나려고 軍에 지원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 조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朴씨는 4형제였으나 혼자만 탈출했다.
『흥남에서 떠나온 사람들을 전부 한 일주일만 피했다 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곧 UN軍이 반격한다고 했으니까요. 그때 내가 20세였는데 인민군에 징집 안 당하려고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습니다. 부두에 도착해 보니 벌써 LST 같은 상륙정은 다 떠나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발동어선 하나가 들어왔어요. 이 어선에는 동력이 없는 바지선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탔습니다. 하룻밤 항해 끝에 강원도 묵호항에 도착했습니다. 오다가 파도가 심해 바지선의 물을 퍼내느라 난리를 쳤습니다』
묵호에 내린 朴씨는 방위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한 달간 훈련받은 후 다시 육군 종합학교에 입교했다. 여기서 15명이 차출되어 종합학교 후보생 자격으로 美 8군에 배속이 되었다.
『美 8군 공수부대에서 북한 침투교육을 위한 밀봉교육을 받고 곧바로 낙하산으로 북한에 투입됐습니다. 소위로 임관할 시간도 없었어요. 강원도 통천에 23명이 낙하했는데 3명이 걸어서 살아나오고 다 죽었습니다. 敵 보급로 폭파가 임무였는데 작전 중에 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부대가 있었다는 것은 확인이 되어 전우회가 결성되어 있지만, 그때 전사한 사람은 군번이 없어서 그런지 명단 확인이 안 되어 전공처리가 안 됩니다. 동작동에 추모비만 하나 세웠어요』
▲楊承浩. 북한에서 교장.
10·26과 12·12 당시 보안사 기획처장을 지냈던 崔禮燮(최예섭·76·준장전역) 장군은 흥남에서 돛단배를 타고 빠져나왔다. 도착한 곳은 경북 포항이었다.
『12월 초 흥남 우리 집에 수도사단 사령부 헌병 대위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국군이 후퇴하니 젊은이들은 우선 피하라」고 했습니다. 6남매 중에 징집 나이가 된 나와 동생 두 명이 부두에 가니 누런 돛을 단 범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10명 정도가 타고 탈출했습니다. 우리는 정보를 빨리 알고 빠져나온 겁니다』
崔장군은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교사로 취직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마침 방위군 사관학교에 생도 모집이 있어서 그는 동생과 함께 지원했다.
『군인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지원했습니다. 방위군이 해체된 후에 장교만 남아 보병학교에 들어가서 再교육을 받고 임관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남은 가족들이 흥남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가족과 재회한 후 동생은 고등학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학교로 돌려 보내고, 나는 군인으로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우리 갑종 출신 1만1000명이 참전했는데, 참 많이 죽었습니다』
▲劉在萬 함남도민회 회장. 흥남 철수작전 기념사업회 공동위원
흥남부두에서 현지 입대한 경우도 있다. 劉在萬(유재만·74·소장 전역) 함경남도 도민회장이 그런 경우다.
『부두에서 군인들이 「입대할 사람 손 들라」고 해서 지원했습니다. 그러면 배를 빨리 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입대하겠다는 청년 500명만 군용선으로 미리 싣고 묵호에 나온 것입니다. 묵호에서 입대자를 再분류해 곧바로 제식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누구도 입대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저 군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단순한 생각만 했습니다. 일주일간 훈련받고 이등병으로 고성의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다가, 나중에 장교로 지원했습니다』
그는 종합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 후 수도사단 1연대 12중대 소대장으로 향로봉 전투와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됐다.
劉在萬 회장은 『당시 임관하여 수도사단에 배치된 갑종 8기 동기생 12명이 전쟁 중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혼자만 남았다』고 한다.
흥남부두의 이별
▲沈敬模 파라다이스 부회장. 부모와 함께 21명 全가족이 월남
가족과 헤어져서 부두에 온 이들이 많았고, 흥남부두에 도착한 이후 안타까운 이별은 계속됐다.
沈敬模(심경모·66) 파라다이스 부회장 가족은 국군이 후퇴한다고 하자 고향인 갑산을 떠났다. 21명이나 되는 대가족이었다. 沈회장은 『당시 형님과 숙부가 反共단체 활동을 해서 온 가족이 탈출했다』고 말했다.
온 가족이 무사히 흥남부두에 도착했으나 沈회장의 셋째 형은 배를 타지 못했다. 배를 기다리던 그의 셋째 형은 날이 추워서 잠시 민가에 불을 쬐러 들어갔다. 그 사이 부두에 있던 가족들의 승선이 시작됐다. 沈부장의 형은 당시 여학교 교사였다고 한다.
丁一權 육군 참모총장은 12월24일 흥남부두에서 마지막 수송선이 떠날 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받았다고 기록했다.
< 그때 수송선(LST)의 앞 쇠문이 닫혀지고 있던 순간이었다. 피란민들은 필사적으로 닫히는 쇠문에도 매달렸다. 쇠문에 끼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쇠문을 잡으려고 팔을 뻗쳤다가 바닷물에 곤두박질하는 피란민도 있었다. 그러한 참상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다. 착잡한 심정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李承晩 대통령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사퇴의사를 밝혔다. 한참 후에 李承晩 대통령이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어찌 丁총장만의 죄인가. 정말 죄인은 나야. 이토록 가슴 아픈 일은 또 없을 것이오. 자식과 헤어져 나온 부모들은 자식 생각에 울 것이고, 부모와 갈라진 자식들은 부모 생각에 울 것 아니겠는가. 전쟁은 이제부터이니 더욱 분발해야 하는 것이오』〉(丁一權 회고록)
목숨을 건 흥남부두에서의 탈출
黃鎬采(황호채·80)씨는 당시 LST 온양호 실습 항해사였다. 온양호는 미국에서 기증받은 배로 대한해운공사 소속이었는데 전쟁이 나자 징발되었다. 黃씨는 철수 마지막 날 항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2700t 온양호에 수천 명을 태우고 나왔습니다. 사람이 포개서 앉을 정도였습니다. 부두에는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아우성이었습니다. 선두 쪽의 문을 닫을 때는 미처 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피란민이 문 사이에 끼여 허덕이다가 바다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배에 탄 미군들이 배를 빨리 떼라고 허공에 총을 막 쏘았어요. 우리 배가 출항하자마자 흥남 시내가 불바다가 됐는데 철수선을 타지 못하고 부둣가에서 아우성 치던 그 많던 피란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1950년 12월10일을 전후하여 원산, 성진 등에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12월7일 원산항에 운집한 피란민들을 싣고 나온 것은 미국 상선인 레인 빅토리호였다. 레인 빅토리호는 원산에서 7600명의 피란민을 싣고 나와 부산에 내려놓았다.
李根用(이근용·74)씨는 『아버지가 원산시 자치위원회 과장이었는데 새벽 2시에 市에서 사람이 와서 원산부두로 피하라는 연락을 했다』며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부두로 나갔다』고 했다.
『배에 빈 자리가 없다며 꼭 데려나올 사람만 데리고 원산부두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인원 제한 때문에 일단 인민군 징집 나이인 나와 동생을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배를 타서 가족이 모두 만났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李씨 가족은 거제도에 가야 피란민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정부관리들의 말에 따라 거제도로 이동했다고 한다.
남한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느라 그동안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朱惠子(주혜자·74·여)씨는 『나이가 드니 그때 두고 온 늙은 부모와 동생들 생각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흥남철수 당시 함흥사범학교 졸업반이었다.
영웅들
『나는 집이 흥남에 있었는데 방학을 해서 잠시 흥남에 있는 고모 집에 가 있었습니다. 그때 고모가 피란한다기에 나는 「잠시 남한 구경이나 하고 오자」 해서 나왔습니다. 한 일주일 안에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다 그렇게 알고 있었죠. 「나는 왜 부모님에게 밥 한 끼 대접 못 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동생들 얼굴도 못 보고 살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비관스럽습니다』
수도사단 부사단장이었던 白南權 장군은 『그때 흥남에서 우리가 북한 동포를 버리고 왔다면 지금쯤 얼마나 큰 죄책감에 살고 있겠는가』 하고 말했다.
『전쟁 동안 내가 데리고 있던 부하 500명이 죽고, 150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지금도 그들을 死地로 보낼 때 따뜻한 고깃국이라도 한 그릇 먹여서 보냈더라면 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지난 5월27일 열린 거제도 흥남철수 기념비 준공식장에는 美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61), 알몬드 장군의 副참모장 포니 대령의 손자 존 포니(37·의사), 메러디스 빅토리호 상급선원 로버트 러니(77·변호사), 玄鳳學 박사 등이 참석했다.
CNN, CBS, 로이터 통신 등 외국 취재진의 열기가 뜨거웠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앞에 선 러니氏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사람들이 흥남부두에 모여 있었고,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서 구조한 것입니다. 피란민들은 질서정연하게 탔고, 서로 밀치지도 않았어요. 배에는 화장실도 없고, 물도 없고, 음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추운 갑판 위에서 잘 참아 주었어요. 정말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피란민들의 탈출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때 헤어진 많은 이산가족을 생각하면 아직도 슬픕니다』
영웅들의 후손들
▲포니 대령의 손자 존 포니(왼쪽)와 알몬드 장군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오른쪽)
이날 행사에 참여한 포니 대령의 손자는 『정말 믿을 수 없는 행사』라며 『할아버지가 살아서 이 모습을 보았다면 무척 기뻐했을 것』이라며 감격해했다. 그의 할아버지 포니 대령은 1965년 작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때 사람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 흥남철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가, 후에 玄鳳學 박사로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존 포니氏는 『최근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反美감정이 있다는 것을 안다』며 입을 열었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매우 슬펐어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노력이 한국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처럼 한국을 도운 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오늘날 한국에 민주주의가 왔습니다.
과거를 모르는 일부 젊은이들은 지금 이러한 민주주의 덕분에 자기의 주장을 펼칠 수 있습니다. 민주국가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슨 발언을 하든 그것은 자유이니까요』●
■2014.12.23 '흥남 철수' 주역은 실존인물 현봉학
美장군 설득해 10만명 피란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떠나버리면 저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중공군의 공격에 몰살당하고 말 것입니다. 장군님 제발… 불쌍한 우리 국민들을 살려주세요."
영화 '국제시장' 흥남 철수 장면에서 한국인 청년이 미군 장군에게 피란민들을 미군 배에 태워달라고 영어로 간절히 호소하는 모습은 관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청년은 '한국판 쉰들러'로 불리는 현봉학(1922~2007·사진)이다.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현봉학은 미국 버지니아 리치먼드 의대에 유학하고 1950년 3월 귀국한 직후 6·25전쟁을 맞았다. 한국 해병대 문관으로 참전해 미군 통역을 맡았다.
미군은 1950년 11월 27일부터 보름간 장진호 전투를 벌이고 흥남항을 통해 병력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은 4개 사단 12만명 병력으로 미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미군 병력 10만5000명을 철수시키는 것도 험난한 일이었다.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려는 피란민 10만여명이 부두에 몰려들었다.
현봉학은 철수작전 담당 참모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과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아먼드 소장에게 피란민을 배에 태워달라고 설득했다. 그의 간절한 설득에 아먼드는 결국 민간인 승선을 결정했다. 12월 12일부터 24일까지 9만8000여명이 배 193척에 나눠 타고 남으로 왔다. 24일 부두를 떠난 마지막 수송선 메리디스 빅토리호는 정원이 2000명이었지만 1만4000명을 태웠다. 대신 200t이 넘는 탄약과 500여개의 포탄, 유류 200드럼을 버리고 항구를 폭파했다. 이 배는 25일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했다. 미군들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했다.
현봉학과 아먼드의 기묘한 인연도 있었다. 아먼드 소장이 물었다. "그 유창한 영어는 어디서 배웠소?" "버지니아 리치먼드 의대에서 배웠습니다." "뭐요? 거기는 내 고향인데. 당신 고향은 어디요?" "군단장께서 주둔하고 있는 함흥입니다." 아먼드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이 사람은 어쩌면 9만8000명 사람을 구하라는 특명을 받고 이 세상에 왔는지도 몰라."
현봉학은 전쟁 직후 미국에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의대 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 11월 25일 미국 뉴저지에서 별세했다. 이화여대 문리대학장을 지낸 현영학(1921~2004)이 형, 재미 언론인 피터 현(한국명 현웅)이 동생이다.
조선일보 이한수 문화부 기자
2015-02-14 흥남철수의 산증인 송봉림 씨 인터뷰
▲흥남철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부두에 모여 있다.
나는 함경남도 흥남시 용성리에서 1930년 11월 26일에 태어났다. 5남매 중 장남이다. 막내는 1950년 흥남철수 때 돌을 지난 갓난아기였다. 나는 흥남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큰 외삼촌, 작은 외삼촌, 고모, 고모부 등과 함께 살았다. 집사람도 북이 고향인데, 원래는 장진호 근처에서 살았었다.
1948년, 북한에서는 군 간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일성은 일선 학교를 통해 유망한 학생들이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이런 간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했다. 이를 토대로 북한해군사관학교 1기생부터, 38선 경비간부사관학교며, 이름은 다르지만 유사한 군 간부 육성학교들이 생겨났다.
나는 흥남에서 제2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중학교는 제1중학교부터 제5중학교까지 있었고, 남학생과 여학생이 구분되어 있었다. 나는 여러 차례 이런 간부학교에 학교장의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장남이었고, 아버지 연세가 많다 보니 군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내일 차가 오면 타고 가라”고 지시하면 “알겠다”고 대답만 할 뿐 실제 나가지는 않았다. 어떤 때는 설사병을 핑계 댔다. 당시 나와 함께 북한해군사관학교에 추천받았던 두 명 중 한 명은 떨어지고, 한 명은 붙었다고 들었다.
광복 직후, 북에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인재가 부족했다. 지식층이라는 사람들과 부유한 기업인들은 자유경제를 억압하는 공산주의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이남으로 내려갔다. 그 바람에 나는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언변이 뛰어나고 이해력이 좋다고 하여 1949년 9월 1일부터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수 있었다.
북한 민청의 선전부장이 되다
▲자신이 겪은 흥남철수 이야기를 들려준 송봉림씨.
북한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면서도 노동조합은 없고 직맹이라는 직업동맹이 있었다. 그리고 민청이라 부르는 민주주의청년동맹이 있었다. 지금은 사로청이라고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는 직맹과 민청에 소속되어 있었다.
흥남시 교육청에서 선생을 대상으로 사전 집체교육을 약 한 달 동안 진행했다. 나는 독보회(讀報會)를 도맡아 발표할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이게 발단이 되어 흥남시 교육청은 나를 민청에 추천했다. 나는 공산당원의 자격인 만 20세에 조금 못 미친 만 19세였다. 엄밀히 말해 1930년생인 나는 1950년 11월 26일을 지나야 만 20세였다. 그런데도 내가 공산주의를 열심히 위한다는 것을 인정해 선전부장을 시킨 것이다. 나는 그때 스탈린 전집 등을 밤새워 읽을 정도로 공산주의에 빠져 있었다.
선전부장의 업무는 일주일에 한 번씩 민청위원장의 강의를 듣고 학교로 돌아가 그 내용을 교직원에 전파하는 것이었다. 민청위원장실은 시청에 있었다. 내가 일하는 흥남 제5 인민학교에서 도보로 1시간 걸리는 거리다. 당시 민청위원장이 진행했던 강의의 제목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위대한 조국전쟁’이다.
내용은 소련의 전쟁사이다. 당시 소련에는 위성국들이 많았다. 그 위성국들이 독일에 점령을 당하고 소련은 레닌그라드까지 포위당했다. 그런 위성국들은 독일에 협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배고픔에 가죽신발을 삶아서 먹을 정도로 어려웠음에도 끝까지 투쟁했다. 그것이 바로 빨치산 전투역사이다. 그 강의에서 말하길, 독일군에 협조한 빨치산들은 다른 빨치산들이 데려가 인민재판을 통해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 내용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그 강의 내용을 모두 적었다.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집까지 걸어오면 밤 10시가 되었다. 배가 고파 해바라기씨를 5원 주고 사서 그걸 오는 길에 먹었다.
학교에서는 교감 주재로 매일 종회(終會)를 했다. 그때 내가 민청에서 배운 내용을 20분 동안 교직원들에게 강의했다. 이 ‘위대한 조국전쟁’의 정신과 빨치산 정신을 깊이 새긴 것이다. 교직원들은 다시 학생들에게 이 내용을 전파했다.
돌이켜보면 왜 북한이 그렇게 열렬히 위대한 조국전쟁을 가르쳤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김일성이 한국전을 일으키고 만약에 전쟁에서 북한이 후퇴할 때를 염두에 둔 것이다. 마지막까지 북한 사람들이 빨치산 정신으로 투쟁하라는 지시였던 셈이다. 김일성이 상당히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는 것의 방증이다.
排共靑年團 적발
▲광복 후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지원 아래 공산화가 착착 진행됐다. 사진은 세계노동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일성(가운데)과 소련군 수뇌부.
흥남에는 배공청년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공산당을 청산하기 위해 모인 조직이다. 당수는 흥남공장 건설과 과장이었다. 사무장은 나의 큰 외삼촌이었다.
한국전에 임박해서 배공청년단은 위기에 처했다. 배공청년단의 젊은이 3명이 명주에 적은 배공청년단 명단을 자신들의 배에 묶어 이남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남한의 김창용 특무대장에게 그 명단을 보내려다 1950년 5월, 공산당에 적발되었다.
공산당은 명단에 오른 인물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나의 큰 외삼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작은 외삼촌이 형의 시체를 찾겠다고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이에 앞서 배공청년단은 1949년 8월, 한 사건을 모의했다. 소련 접경지역인 북쪽 지역에서 흥남을 거쳐 전방(남한과의 접경지역)으로 내려가는 선로가 있었는데 이 선로를 따라 화물열차가 쉴 새 없이 내려갔다. 군수물자들이었다.
그 화물열차들이 역에 서지도 않고 남쪽으로 끊임없이 내려갔다. 배공청년단의 젊은이들이 이 화물열차를 전복시키려고 모의를 한 것이다.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궁리한 끝에 대팻날을 모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대팻날은 다른 금속보다 강해, 기차 선로 틈에 꽂아두면 열차를 전복시킬 정도가 된다고 한다. 야간에 배공청년단의 젊은이들이 선로 사이 틈을 찾아 헤맸지만 날씨가 여름이다 보니 선로가 늘어나 대팻날을 꽂을 곳이 없었다. 기온이 올라가면 선로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그 작전은 결국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어쨌든 이런 사실로만 보아도 김일성은 전쟁 전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받은 여러 무기와 군수품을 미리 전방으로 옮겨두었던 것이다.
훗날 전쟁이 끝나고 1956~57년 무렵 남한에 배공청년단의 업적이 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 유가족을 위해 서울 상도동에 집을 100세대가량 지어주었다. 이곳이 바로 모자원이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의 송호성 부대가 북침?
한국전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나는 학교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다. 새벽 6시쯤 되니 한 선생님이 “큰일 났다!”며 자고 있던 나를 깨웠다. 라디오를 듣고서야 나는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라디오에서는 인민군의 군가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남한의 송호성 부대가 38선을 침범했고, 여기에 우리 인민군은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끝까지 밀고 올라왔다. 따라서 우리 인민군은 미명을 기해, 하는 수 없이 출동했다”라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남한의 북침이라는 이야기였다.
아침 8시쯤 되었을까. 라디오 방송에서 인민군이 개성을 해방시켰다고 했다. 북한은 어느 도시를 빼앗으면 점령이라고 하지 않고, 해방이라고 했다. 어려움에 처해 있던 사람들을 구해줬다는 의미이다. 학교에서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다가 학교에 걸려 있는 조선반도 지도 인민군이 해방한 도시들에 깃발을 꽂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게 전라도 이리였다. 인민군이 전라도 이리를 해방시켰다면서 이리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라는 말이 라디오에서 나왔다. 내가 북한에 살면서 전라도 이리라는 지명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은 익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해 7월 중순 무렵, 내가 교사로 일하던 제5인민학교 교감이 서울 모 초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교감 밑에는 교양주임(당 지도원)이라는 직책의 사람이 3명 있었는데, 이들은 선생님들의 수업태도를 순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 교 양주임들도 각각 남한의 교장으로 임명이 되어 남으로 내려갔다.
전화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그 시절에 전쟁 시작 후, 불과 몇 주 만에 그렇게 빨리 인사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만약에 정말 북침을 당했다면, 그렇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어찌 초등학교 교장 인사발령까지 낼 수 있었을까. 이런 인사명령은 흥남시 전역에서 있었다. 나랑 친하던 파출소장이며, 교직원들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발령이 났다.
남한에서 치고 올라오자, 전라도로 발령받았던 교양주임은 돌아오지 못했고, 우리 학교감은 서울에서 흥남으로 돌아왔다. 그를 다시 만나 내가 남쪽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는 “반동분자(남한 사람)들이 밤마다 여기서 꽝! 저기서 꽝! 하는 통에 무서워서 혼났다”고 말해주었다.
당시 김일성은 이승엽을 서울시장으로 임명하는 등 모든 분야의 사람들을 임명하여 남으로 보냈다. 이런 준비는 한두 달 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자원입대를 유도한 김일성
▲6·25 당시 북한은 의용군이라는 이름 아래 청년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김일성의 지시 아래, 김일성대학에서 학생총회를 열었다. 골자는 이렇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위대한 조국전쟁(6·25 한국전쟁)이 발생했으니 펜 대신에 총을 들고 나가 싸우자!”라고 외치는 일종의 궐기대회(蹶起大會)였다. 말미에 그냥 가서 싸우는 것보다는 김일성대학 연대를 만들어 나가 싸우자고 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을 하겠다는 학생들이 군복을 입고 나왔다. 김일성은 연대장과 같은 주요 보직을 맡을 사람들을 이미 학생으로 위장시켜 두었던 것이다.
이 내용은 내가 교직에 있다 보니 잘 알고, 실제 그 김일성대학 연대에 있었던 이기삼으로부터도 들었다. 이기삼은 당시 형무소에 잡혀갔다가도 경찰간부의 도장을 위조해, 다시 나올 정도로 북한에서 유명한 위조범이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말하길, 김일성대학 연대식에서 연대장을 하겠다고 나온 학생은 정말로 다른 학생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같이 학교에서 생활했으면서도 이들이 미리 준비된 군인이었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 김일성대학 연대라는 것은 하나의 대학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호소문’이라는 것을 북한의 모든 대학에 보냈다. 당시 북한에는 15개의 대학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대학도 동참했다. 동참 대학에서는 ‘호응대회’라는 것을 열었다. 그러면 전교생이 함께 군에 입대해 조국을 위해 싸우자고 외쳐댔다.
뿐만 아니다. 1950년 9월 15일은 김일성이 ‘국민총동원령’을 내린 날이다. 물론 그전부터 일반 회사나 관공서에 있는 남자들은 군대에서 오라고 하면 가야 했다. 교사를 하고 있는 남자들은 9월 15일까지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9월 15일에는 선생들 중에도 걸을 수 있는 남자는 다 군에 가야 했다. 교직원 중 나를 포함한 17명의 남자 교사들이 신체검사를 통해 군에 가야 할 형국이었다. 말이 신체검사지 흥남시 의사들이 청진기만 대보고 합격시켜 모두 군으로 보낸 것이다.
그 의사 무리 가운데 제일 높은 직책의 의사가 마침 우리 학교에 있던 교의(校醫)였다. 그 의사는 평소 나랑 친하다 보니, 나에게 “어디 아픈 데는 없소?”라고 물었다. 나는 내 고환 중 한쪽이 축 늘어지는 걸 말했다. 그렇게 퇴산(疝)고환을 진단받고 보행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군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12월 24일 흥남철수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출했던 미 해병대는 혹한 속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흥남에서 살던 집은 당시 김일성 공대(흥남공대)에서 1k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이 공대는 전쟁 중 시체보관소 및 병원의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장진호 전투에서 죽은 시체와 부상자들의 헬리콥터가 이 김일성 공대로 쉴 새 없이 들락날락거렸다. 내 집에서 이런 헬리콥터 행렬을 매일 볼 수 있었다. 그때가 1950년으로 내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집사람은 장진호 근처에 있다가 내 생사를 확인하려고 흥남으로 날 찾아왔다. 처갓집 가족들은 장진호 전투 때문에 다 죽었다.
흥남철수에 앞서 나의 가족은 회의를 했다. 전쟁 통에 모두 남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남을 사람을 정하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나이가 많은 할머니와 부모님은 남겠다고 했고 나와 동생들, 고모네 가족 등은 내려가기로 했다. 12월 23일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제일 큰 남동생은 열두 살이었고, 가장 어린 놈은 돌 지난 갓난아기였다. 나는 막둥이를 업고 흥남부두에서 가까운 고모네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4일 아침, 흥남부두로 고모네 가족과 함께 미군 배를 타려고 나섰다.
길 건너편에 보니 할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다. 부모님은 집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소가 있었는데, 소도 끌고 나오셨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미군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리듯이 흥남부두로 나왔다는 것이다. 미군들은 카투사 군인들을 통해 마을 곳곳에 통보했다. “당장 집에서 나와 흥남부두로 가라! 지금 당장 집에서 나오지 않으면 불을 지를 것이다!” 결국 미군들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가 흥남철수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미군들은 피란민들이 가지고 나온 짐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배에 실었다. 겨울이다 보니 이불은 기본이었고, 기타 세간이 이것저것 많았다. 심지어 아버지가 가지고 나온 소도 배에 실었다. 소를 산 채로 싣기 어렵다 보니 부두에서 바로 잡아 각을 내서 가지고 탔다. 당시 피란민의 수가 9만8000명에 달했는데 그 사람들이 가지고 나온 짐도 모두 싣게 허용했으니, 그 무게와 양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혹자는 미군들이 피란민의 짐을 버리게 한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힘이 더 있었으면, 우리 집 살림살이를 더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짐도 다 실었을 정도이기 때문에 흥남부두에 누구든지 코빼기를 보인 사람은 모두 데리고 나온 셈이다. 그 정도로 미군은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배에 오를 때도 편했다. 영화처럼 피란민들이 밧줄이나 사다리 같은 걸 붙잡고 배에 올라탄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서두르는 사람 없이 걸어서 차분하게 올라탔다.
화물선을 개조해 몇 개 층으로 나눠
▲흥남철수 당시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미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구원한 배’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LST라는 화물선(Landing Ship Tank의 약자로 상륙용 화물선) 안에는 갑판면 외에는 천장이 없다. 배 안은 그냥 뻥 뚫린 운동장 같다. 그래야 높이가 높은 탱크나 군용물자를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갑판에서 보면 아래 바닥까지 몇십 미터는 족히 될 것이다.
이런 배에 사람을 태운다고 했을 때 아무리 많이 태워봐야 얼마나 될 것인가. 미군들은 이 점을 알고 배를 개조했다. 배에 원래는 없던 층을 만든 것이다. 층층이 사람들을 차곡차곡 태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다. 이걸 준비하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보인다. 층을 나누기 위해 거대한 철판을 용접해 붙였다고 생각해 보라. 그게 어디 하루 이틀 만에 할 수 있겠나. 전쟁 통에 인민군은 쳐내려 오지, 피란민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지, 그렇게 어려운 순간 그 배 안에 사람들을 태우겠다고 층을 나누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미군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없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군들은 사람들에게 먹일 물도 준비했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흥남에서 거제도까지 내려오는 데 하루밖에 걸리지 않으니 끼니는 괜찮지만, 물은 있어야 한다. 미군은 이 물도 준비한 것이다. LST라는 화물선은 원래 취사 시설을 별도로 갖고 있지 않다. 피란민들 때문에 갑판 위에 대형 물탱크를 설치한 것이다.
화물선 안은 아까 말한 대로 몇 개의 층으로 나뉘어 사이사이 사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젊은 나는 호기심이 생겨 갑판 위가 궁금했다. 물도 받아 올 겸해서 갑판 위로 올라갔다. 흥남에서 해 질 녘이던 12월 24일 떠나, 다음날인 25일 아침 6시가 되니 거제도에 도착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군함들의 요란한 함포 소리였다. 내가 흥남부두에 올 때부터 함포 소리는 끝이 없었다. 피란민을 태우는 화물선과 여객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함들이었는데, 이런 군함들이 피란민을 옮기는 배 주변에서 적진을 향해 쉴 새 없이 함포를 발사했다. 언제부터 쏘아댔는지, 언제까지 쏘아댈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포격을 퍼부었다. 그때는 이유를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군들이 피란민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기 위해 인민군을 향해 엄호사격을 한 것이다.
301 철도 연대 보선반 생활
거제도에 도착한 며칠 뒤인 12월 29일,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에 철도원 모집 공고가 났다. 말이 좋아 철도원이지 철도 노무자였다. 피란민들은 먹고살 형편을 궁리해야 했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지원했다. 다들 육지로 가고 싶어 했다. 피란민 수용소에서 30리나 가야 하는 거제군청까지 걸어갔다. 나와 삼촌 그리고 사촌도 함께 갔다.
도착하고 보니, 지원자가 너무 많았다. 군청 관계자는 사람들에게 달리기를 시켰다. 20등까지 들어오면 합격. 나는 젊은 축에 들고 덩치도 큰 편이었다. 나는 1등이었는데 삼촌은 탈락했다. 1등이라고 소대장도 맡았다. 소대장 맡은 김에 나는 소대장 권한으로 삼촌과 사촌을 철도원으로 만들었다.
합격자들은 모두 부산으로 갔다. 거기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철도원이 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군인이었다. 군인이라고 하면 지원자가 적을까 싶어 철도원이라고 말한 것 같았다.
북한 민청의 선전부장이 몇 달 만에 남한 군인이 된 것이다. 근무처는 301철도연대. 3700명으로 구성됐다.
그 즈음엔 낙동강 전선이 뚫리는 등 어려운 시기였다. 모든 군수물자는 트럭과 철도가 도맡았다. 전선이 뚫리니 철도 선로가 부서지고, 철교가 부서지는 일도 허다했다. 나처럼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보선반이 되었다.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기관사, 통신반 등에 합류했다.
나중에 열차를 타고 나흘이 걸려 충북 제천으로 보선반 임무를 하러 올라갔다. 화물칸 하나에 한 소대가 탔다. 가운데 난로가 있고 모포 하나씩을 덮고 잤다. 군대 상황은 정말 열악했다. 군복은 후줄근한 국방색 천 쪼가리였고, 군화라고 해봐야 미군들이 신다 버린 것을 대충 신었다. 총도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쓰던 장총이었다. 그런 총마저 모자라 80명 소대에 20정만 지급했다. 나중에서야 M1 소총을 모두에게 주었다.
밥도 주먹밥 세 덩어리로 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 밥을 아꼈다가 점심, 저녁까지 먹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침에 3개를 다 먹고 점심, 저녁은 굶었다. 소금물로 간을 했고, 별도의 반찬은 없었다.
보선반은 쉴 새 없이 바빴다. 인민군들이 수송로를 차단하려고 선로에 불을 지르고 철교를 부수기 일쑤였다. 그러면 보선반이 나가서 다시 선로를 깔아야 했다. 그때 선로는 대부분 나무로 만들다 보니 불에 타기 쉬웠다. 더군다나 선로에 까는 나무들은 기름을 먹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더 잘 탔다. 그렇게 나는 1950년 12월 31일 입대해서 1951년 9월 5일에 명예 제대했다. 그때는 몇 주간 복무하다 제대하는 경우도 있었고, 요즘처럼 정해진 복무기간이 없었다.
김영삼씨와의 인연
▲미군은 철수작전이 끝날 무렵 흥남항을 포격, 피란민을 구하기 위해 흥남항에 버려둔 군수물자들을 파괴했다
내가 한때는 공산당원이었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나중에 남한에 와서야 깨달았다. 계기는 1952년 거제도 수용소에서 있은 3·1절 기념행사였다. 상이군인회 총무이자 사회자로서 연단에 올라 기념연설 중 일부를 했다. 그 자리에서 3·1운동은 매우 나쁜 운동임을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북한에서 교사로 일했던 나는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3·1절을 기념하지 않는다. 실패한 운동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권 때문이다. 이것은 각 나라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한 내용이다. 이것이 일제로부터 억압받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기폭제가 되어 3·1운동으로 번졌다 하나 김일성의 주장은 이들과 달랐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실제로 한국에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 괜히 자결권 운운해서 우리나라 사람들만 죽었다라는 논리를 펼쳤다. 이 때문에 1946년 광복 이후 첫해는 북한도 3·1운동을 기념했지만, 그 뒤로는 기념하지 않았다. 이런 북한의 주장을 믿고 있던 내가 남한 거제도 3·1운동 기념식에서 이 말을 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냥 보아 넘겼는데, 행사를 보러온 특무대장이 행사가 끝난 뒤 나를 불렀다. “당신이 오늘 기념식에서 뭐라고 말한 줄 아시오?”라며 고압적으로 추궁했다. 나는 당당하게 “내가 뭐 틀린 말 했소?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라고 응수했다. 그는 “이보시오, 선생. 당신 말대로 3·1운동이 그렇게 나쁜 날이면 여기 남한에서 왜 기념식을 하겠소?”라고 되물었다. 그 뒤로 나는 그제야 공산주의 교육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거제도에 돌아와서 4년간 살았다. 돌아와서는 상이군인회 총무를 맡았다. 그 덕분에 어린 나이였지만 동네 유지들과 친분을 쌓았다. 거제도 경찰서장도 알고 지냈다. 그와 술도 먹고 친구처럼 지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유당 공천을 받고 3대 국회의원으로 나왔다. 피란민에게도 투표권이 있었다. 거제도에 10만이 모여 있으니, 국회의원 후보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곳이다. 김영삼 후보가 거제 경찰서장을 만나 도와달라고 왔다. 그 자리에서 거제서장은 나를 김영삼씨에게 소개했다. 평소 언변이 좋아 추천한 것이다. 그 인연으로 나는 자유당 연설회에서 사회를 봤고, 그 후 자유당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피란민들이 김영삼씨를 당선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김영삼씨가 나를 취직시켜 주려고 한국전력 같은 곳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이북에서 제2중학교를 나온 게 학력의 전부이다 보니, 항상 학벌이 문제였다. 그래서 좋은 곳에 취직하지 못하고, 그냥 자유당 선전부장으로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 열풍이다. 〈국제시장〉은 한국전쟁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근현대사를 덕수(황정민 분)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있다. 특히 흥남철수,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 월남전쟁까지 주요 사건들을 그려냈다. 그 덕분에 가난과 배고픔을 모르고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유용한 교육 자료이자, 가난 속에 고통받았던 이 시대의 기성세대들은 어려웠던 과거를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 〈국제시장〉 속, 흥남철수의 산증인 송봉림씨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소재의 한 요양원을 찾았다. 그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둘 다 미국과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어 몇 년 전부터 요양원에서 머문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안경을 끼지 않고 신문을 읽을 정도다. 눈동자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인터뷰에 앞서 송씨는 이번 인터뷰를 결심하게 된 두 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가 아직까지 세간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죽기 전에 반드시 후세를 위해서라도 알려야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그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과거 북에서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밝힌다고 했다. 국내에 자신과 같은 공산당 출신의 사람들이 있을 것임에도 이런 이야기가 아직까지 전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마도 용기 내어 고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월간조선》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수기 형식으로 실었다.
송봉림(宋鳳林)
⊙ 85세. 함경남도 흥남시 용성리 출생.
⊙ 흥남 제2중학교 졸업. 제5인민학교 교사.
⊙ 북한 민주주의청년동맹(민청) 선전부장, 1950년 12월 24일 흥남철수에 합류, 한국 육군 301 철도연대 보선반, 상이군인회 총무 역임.
글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흥남 철수 당시 피란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
■2015-03-05 6·25 ‘전쟁고아의 아버지’ 美 딘 헤스 예비역 대령
▲6·25전쟁 당시 1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구한 딘 헤스 미 공군 예비역 대령이 고 황온순 여사(왼쪽)와 제주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던 당시 한 아이를 안은 모습(위 사진).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아래 사진 왼쪽)으로부터 공적을 치하받고 은성무공훈장과 한국 공군조종사 휘장을 받았다. 공군 제공
▲6·25전쟁 당시 미국 공군 조종사로 참전해 한국 공군의 산파 역할을 했고 1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구한 딘 헤스 예비역 대령(사진)이 3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8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했던 헤스 대령은 1950년 6월 미 제6146기지 부대의 부대장으로 임명됐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 공군의 F-51 전투기 10대를 한국 공군에 인도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였다. 당시 한국 공군에는 훈련기만 있었다. 헤스 대령은 한국군 조종사 10명과 함께 일본 미 공군기지로 건너가 F-51 전투기를 대구 공군기지로 가져왔다. ‘바우트 원’이라고 불리는 이 작전은 한국 공군 건설 작전이었다.
6·25전쟁에서 250여 회 출격한 헤스 대령은 초기 항공작전을 주도했다. 공군 관계자는 “당시 미 공군 조종사는 100회 출격하면 비전투지역인 일본이나 미국으로 전출됐음을 감안하면 그의 희생정신과 사명감이 얼마나 투철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F-51 전투기 조종 교육까지 맡은 그는 한국 공군의 초석을 세웠다.
그의 전용기인 F-51D 무스탕 18번기에는 ‘信念의 鳥人(신념의 조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좌우명인 ‘신념으로 비행한다(By Faith, I Fly)’를 옮긴 것. 헤스 대령은 정비사였던 최원문 일등상사에게 자신의 좌우명을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글귀는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의 기상을 상징하는 표현이 됐다. 1982년엔 ‘신념의 조인’이라는 군가도 나왔다. 1975년 작곡된 ‘필승 공군’이라는 군가에서도 ‘하늘 높이 솟구쳐라 신념의 조인’이라는 가사가 있다.
헤스 대령은 1951년 1·4후퇴 직전 중공군이 내려올 때 미 공군 군목이던 러셀 블레이즈델 대령과 함께 1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김포에서 제주로 피란시켰다. 버려진 고아들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미 공군 지휘부를 설득한 것이다. 그는 ‘한국의 테레사 수녀’로 불렸던 고 황온순 여사, 공군 군의관이었던 고 계원철 장군과 함께 제주에서 10개월간 보육원을 운영했다. 1956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고아 소녀 한 명을 입양했고, 20여 년간 전쟁고아들을 지원했다.
1975년 6·25 발발 25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헤스 대령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수로 독일 보육원을 폭격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수많은 고아들을 숨지게 한 죄책감을 한국 고아들을 구하면서 다소 씻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헤스 대령의 전쟁고아 수송 작전은 미 국립공군박물관에서 소개되고 있다. 그는 1956년 6·25 경험을 담은 책 ‘전송가(Battle hymn)’를 펴냈다.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 록 허드슨이 주연을 맡은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전송가는 2000년 국내에 번역 출간된 뒤 절판됐다가 2010년 6·25전쟁 60년을 맞아 ‘신념의 조인’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됐다. 이 책에서 그는 “마지막 차례의 어린이가 수송기 안으로 걸어와 문이 닫히는 순간 내가 느꼈던 그 지극한 감사와 안도감은 내 평생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무공훈장과 소파상을 수여했다. 헤스 대령은 “한국이 통일되는 것을 볼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의 공적은 대한민국 공군사에 영원히 남게 됐다.
정성택 neone@donga.com
□1000명 피신시키고 20년 후원한 조종사
▲‘6·25전쟁 고아들의 아버지’헤스 대령(당시 중령)이 고아가 된 한 소녀를 안아 올린 모습. /공군 제공
1950년 12월. 물밀듯 내려오는 중공군의 기세를 막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철수'를 결정한다. 서울에 남은 전쟁고아 1000여명이 중공군 손에 넘겨질 운명이었다. 이때 한 미군 조종사와 군목(軍牧)이 나섰다. C-47 수송기 15대를 동원해 아이들을 제주도로 피신시키는 계획이 세워졌고, 고아들은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했다.
군목이던 고(故) 러셀 블레이스델 중령과 함께 작전을 이끌었던 딘 헤스 미 공군 예비역 대령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맨 마지막 차례 어린이가 C-47 수송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문이 닫히는 순간 내가 느꼈던 그 지극한 감사와 안도감은 내 평생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 공군은 '전쟁고아의 아버지' 헤스 대령이 3일(현지 시각) 미국 오하이오주(州)에서 98세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1956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아들 3명을 두었으나 한국 고아 소녀 한 명을 입양했고, 이후 20여년 동안 6·25 전쟁고아들을 지원했다. 1950년 7월부터 1년 동안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을 훈련하는 역할도 맡았다. 자신도 250여 차례나 출격해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 공군은 존경의 표시로 헤스 대령의 전투기인 F-51D 무스탕에 좌우명 'By Faith, I Fly'를 번역한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한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무공훈장과 소파상 등을 수여했다.
1956년 '전송가(Battle Hymn)'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헤스 대령의 6·25 수기는 전후 60주년을 맞은 2010년 '신념의 조인'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그의 책은 유명 영화배우인 록 허드슨 주연의 동명(同名)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는 평소 "조국을 위해 미군이 감히 나서지 못하던 작전도 수행하려는 한국 공군의 불굴의 용기에 감명했다"고 6·25 참전 소회를 밝혀 왔다. 하지만 "한국이 통일되는 것을 볼 때까지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루지는 못했다. 공군은 "당시 참전 미군 조종사는 100회 출격하면 비전투 지역으로 전출되는 것이 관례였다"며 "그의 헌신은 '신념의 조인'으로 대한민국 공군사에 길이 남게 됐다"고 했다.◎
양승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