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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水地理8/ 김성수의 한국의 명당-한화 창업주 일가의 선영 - 〈1〉 명당에 자리 잡지 못한 대통령과 조선의 왕/ ‘조용헌의 靈發事典’ - (1)-① 바닷물에 발을 디디니 돌들이 올라와 징검다리..

상림은내고향 2021. 3. 21. 14:38

風水地理8/ 김성수의 한국의 명당(名堂)  조선pub

영목풍수지리연구소 소장

 81. 건국대 경제과 졸업.
⊙ 전매청, 건설부 근무. 한국풍수지리학회 회장. 저서로 《명당》 《운명 디자인》
《명당에서 인물 난다》 등이 있음.

2015-09-10  한화 창업주 일가의 선영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의 증조부 묘.

 

지난 7월 하순 어느 날, 장마 끝 무렵의 궂은 날씨 중에 문득 갠 날이 있어 서둘러 서남쪽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도중에 천안을 지나다가 「청수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알리는 큰 입간판과 울타리를 둘러친 광대한 공사현장을 지나게 되었다.
 
 
낯익은 곳이었다. 10여 년 전 방문했던 기억이 살아났다. 한화그룹 창업주 金씨 일가의 선영(先塋)이 개발지구의 한가운데 있었다. 개발 예정지구는 이미 절반쯤 산을 깎아 싯누런 황토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아 있는 숲속에 金씨 일가의 선영이 있었는데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자동차를 세워 놓고, 불도저가 뒤집어 놓아 길이 끊어진 질퍽한 땅을 지나, 가랑이를 휘감는 잡초를 헤치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한화그룹을 낳은 현암(玄岩) 김종희(金鍾喜·1922~1981)의 고향은 옛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 바로 지금의 천안시의 중심 부분이다. 지금 개발의 삽날 앞에 놓인 선영에는 현암의 증조부 묘소를 비롯하여 현암 일가의 묘소 10여 基()가 모여 있었다. 10여 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중 현암의 증조부(現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고조부) 묘소에 강한 생기가 있어 한화그룹의 오늘을 낳은 발복의 근원임을 확인한 일이 있었다
.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 일가의 선영이 있던 자리.

 

한화그룹은 그 무렵 공주지역에 다른 가족 묘원을 만들어 별도의 선영을 축조하고 있었는데, 새로 만든 공주의 선영에는 생기 넘치는 진혈(眞穴)의 명당이 한 곳도 없었다. 즉 한화그룹의 명당 기운은 바로 이곳에 있는 현암의 증조부 묘소가 유일했다.
 
 
질퍽거리는 황토지대가 끝나고 아직 솔숲이 남아 있는 야산으로 들어갔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한화그룹 선영이 나타났다. 묘소들은 모두 파서 이장(移葬)해 버리고 광()이 있었던 자리마다 구덩이만 을씨년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현암의 증조부 묘소가 있던 구덩이를 살펴보니 10여 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강한 생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묘소는 가고 기()만 살아남아 있었다.
 
 
한화 집안 묘소 중 유일한 명당이었는데 아까웠다. 윗대들도 대부분 이 부근에 있었는데 모두 이장(移葬)했다. 지방 장묘 전문업체에 확인해 보니 오래된 유해는 현장에서 화장(火葬)하고, 증조부까지는 공주에 있는 선영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


 
임광수 임광토건 창업주의 증조부모 묘

/임광수 임광토건 창업주의 증조부모 묘.

 

증조부 묘소가 있던 아래쪽에 현암의 형인 김종철의 묘소가 있었는데, 이 묘소는 현재의 개발사업과 관계없이 오래 전에 공주 선영으로 이장했다. 그 자리 역시 좋은 자리는 아니라는 것이 풍수계의 일반적인 평이었다. 무덤들이 사라진 빈 터에는 지난날 산신제를 지내던 제석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한화그룹은 청수지구 택지개발사업 중 한 지역을 맡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 선영을 없애고 그 위에 새 도시를 건설하는 공사의 일익을 맡은 셈이다.
 
 
천안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충남 조치원읍 외곽의 번암리 안동네 뒷산, 건설회사 임광토건의 창업주 대표인 임광수(林光洙)씨의 증조부모 묘소를 찾았다. 묘소는 번암리 안동네와 바로 이어진 야트막한 뒷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과 머리를 맞닿을 정도의 거리인데 마을 사람들이 돌보아 주는 듯 잘 가꾸어져 있었다.
 
 
「學部主事扶安林氏圭喆之墓, 配淑夫人金海金氏(학부주사부안임씨규철지묘, 배숙부인김해김씨)
 
 
임광수의 증조부모 묘소였다. 야트막한 산의 능선 위에 자리 잡은 건좌(乾坐)의 명당이었다. 생기가 있었고, 무덤에서 바라보면 특히 안산이 수려했다.
 
 
풍수계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명당집 자손」이라는 말이 있다. 조상 선영 중에서 명당 하나를 가진 집안의 자손들이 어딘가 모르게 혈색이 좋고 자신감과 창의력 넘치는 일을 벌여 성공하는 일이 많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임광수씨가 「명당집 자손」의 특징을 지녔다면 그 근원은 바로 이 작은 음택이었다.
 
 
증조부모 묘소의 우측 산록에는 조부 임헌록(林憲祿)의 묘소가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증조부보다 가까운 조부 묘소를 더 소중하게 여겨 치장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林씨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증조부모 묘소에 비해 조부 묘소가 봉분이 거창하고 치장이 돋보였으나 안타깝게도 수맥(水脈)이었다. , 발복의 근원인 명당은 허술한 모습 그대로였으나 수맥 위의 무덤은 상대적으로 장엄하게 가꾸고 있었다. 명당은 묘소의 겉모습 가꾸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허기진 스님께 공양하고 얻은 명당 터

  서울에서 새벽에 떠났으나 도중에 천안과 조치원을 들렀기 때문에 오후 늦게야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전남 나주시 공산면 송죽리 큰산골에 닿았다.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朴仁天·1901~ 1984)의 증조부모(합장) 묘소가 있는 곳이다.
 
 
묘소는 산 아래 포장도로에서 한눈에 확인될 정도로 잘 보였고, 산 아래 마을 뒤편에는 제각이 있었다. 산중턱까지 가파른 길이었다. 오르는 길은 목조 계단으로 잘 다듬어 놓았으나 한여름의 염천 아래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쉽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산으로 오르는 길의 절반 정도는 길 옆을 신우대(海藏竹·해장죽) 숲을 만들어 놓아 여름 폭양과 겨울의 찬바람을 조금이나마 가려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묘소에 오르니 멀리 좌측으로 영산강 허리가 잠깐 보였다. 물이 내 앞으로 들어와 산을 감싸고 가니 부자될 형국이다. 앞의 안산이 개발로 조금 손괴되었으나 큰 지장은 없고, 백호가 잘 돌아 명국을 빚어 놓았다. 석산으로 토질이 척박한 땅이라 봉분의 잔디가 따가운 여름 햇살을 힘겹게 견디고 있었다.
 
 
먼 옛날의 일이 아닌데도 이 묘소가 여기 있게 된 인연설화가 전해 온다. 원래 영산강 건너편에서 작은 농토를 일구며 살던 가난한 농사꾼 박씨 총각은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다가 허기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스님을 보고 자신이 먹으려고 가지고 간 밥을 내주었다.
 
 
스님은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에도 떠날 기세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으로 모시고 와서 공양했다. 한동안 머물던 스님이 떠나면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면서 무덤 자리를 점지해 주었다.
 
 
총각(박인천의 조부)은 이곳에 부친 무덤을 썼는데 바로 이 명당 자리였다. 뒤에 모친이 별세하자 합장했다. 『적선(積善)해야 명당을 얻는다』는 말 그대로였다.
 
 
청룡의 허리가 끊긴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무덤 주인의 자손 중 非命(비명)에 간 사람이 있었으니 끊긴 청룡의 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묘소는 「學生密陽朴公之墓 配 儒人 平海吳氏(학생밀양박공지묘 배 유인 평해오씨)」의 합장묘소였다. 합장을 해도 두 사람의 壙이 차지한 자리는 엄연히 다른데, 이 묘소는 부인 쪽이 眞穴이었다
.


 
水脈 위에 모신 박인천의 묘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의 조부모 묘()와 박인천의 묘(아래).

 

지맥(地脈)이 꿈틀거리며 내려와 하나의 국세(局勢)를 만들 때는 그 속에 생기 넘치는 진혈(眞穴)을 하나만 빚기 아쉬운지 주변에 다른 진혈이 있게 마련이다.
 
 
朴씨 묘소 주변에서도 어김없이 그런 현상이 발견됐다. 금호 박인천의 증조부모 묘소의 지척에 증조부모가 누워 있는 현재의 자리보다 더 강한 생기가 나오는 진혈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광주시 북구 광주중앙女高 뒤편에 있는 박인천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긴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정작 적선하여 부친 묘소를 명당에 모셨던 당사자, 즉 박인천의 조부는 그의 선친 묘소에서 약간 떨어진 나주시 왕곡면 박포리 마을 어귀에 있었다. 여기서도 영산강은 지척에 흐르고 있었는데, 높이 쌓은 제방이 아니었으면 강물이 보일 만한 위치였다.
 
 
이 묘소 역시 氣가 살아 있는 명당이었다. 그러나 내 앞을 지나가는 영산강을 백호가 걷어 주고 氣가 살아 있는 자리라는 것 말고는 뒤가 없는 속발지로서 장구한 호흡의 발음지는 아니었다. 어쨌든 금호그룹은 명당 두 개를 가진 집안으로 확인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광주시 북구에 있는 광주 중앙女高 경내에 있는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의 묘소를 둘러보았다. 기업을 일으켜 돈을 번 후 그 돈의 일부를 인재(人材) 양성에 투입하여 미래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이는 것이 朴회장의 무덤이었다. 공원처럼, 산 교육장으로 다듬어지고 꾸며진 묘역 앞에는 朴회장의 등신대 동상이 살아 있는 듯 생동하는 모습으로 서 있었고, 그 뒤편으로 잘 가꾸어진 잔디 동산 한가운데에 朴회장 내외가 잠들어 있었다.
 
 
「錦湖密城朴公仁天之墓 配 全州李氏 雙兆(금호밀성박공인천지묘 배 전주이씨 쌍조)
 
 
안산이 없어 묘역 전체에 명당이라 할만한 자리가 없었고, 특히 박인천 묘소는 수맥(水脈)이었다.
 
 
후세들에게 삶의 지표를 생생하게 전하려는 교육적 의지와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꼭 학교 부지에 신후지(身後地)를 잡아야만 했는지 아쉬움이 남았다.
 
 
흔히 명당(明堂)이라고 하면 「背山臨水(배산임수)에 左靑龍 右白虎(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고 안산이 수려한 땅」을 꼽는다. 그러나 아무리 형국이 좋아도 생기가 없으면 명당이 아니라 허화가국(虛華假局)이다. 「형국을 갖추었으면서도 생기가 솟아나는 진혈이 있는 곳(음택과 양택 모두 해당된다)」이 진정한 명당이다. 필자는 이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명당과 구분하기 위해 「名堂(명당)」으로 표현해 왔다
.


 
롯데그룹 신격호(辛格浩) 일가를 낳은 5대조 묘소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5대조 묘(앞)

 

  방향을 돌려 국토의 동남쪽 끝자락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로 향했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辛格浩호·1922~ )와 농심그룹 창업주 신춘호(辛春浩·1930~ ) 등 다섯 형제의 기업인을 낳은 영산(靈山) 신씨(辛氏)의 근원을 찾아나섰다.
 
 
먼저 이들의 생가(生家)가 보존돼 있는 삼동면 둔기리에 닿았다. 멀리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내려온 용맥의 끝부분이 저수지(대암호)를 만나 멈추었는데 저수지 가까운 지점에 산을 등지고 정남향의 초가삼간이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지붕은 억새로 이었고, 사립문(동남향)을 잘 엮어서 만들어 놓았다. 좌측에는 작은 헛간이 있었다.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산이 끝나는 지점으로 도로가 통과하는데 도로 저쪽에는 대암호가 펼쳐져 있고 辛씨 소유의 별장이 우람하게 서 있어 이 가문의 어제와 오늘이 한눈에 펼쳐졌다.
 
 
대암호는 1969년에 만들어졌다. 둔기천이 태화강으로 유입되는 지점에 댐을 만들었는데, 辛씨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란 옛 둔기리 마을은 이때 만들어진 저수지의 수면 아래로 영원히 묻혀 버렸다. 辛씨 형제들은 수몰지(水沒地)의 옛집을 고스란히 산 밑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바로 새로 옮겨 놓은 그 집이 드물게 보는 명당이었다.
 
 
삼간짜리 초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한가운데를 가르며 氣가 있었다. 드물게 보는 경우였다. 대개 명당집이라도 안방이나 대청 또는 건넌방 등 어느 한 부분으로 생기가 솟아나는 경우가 많은데 복원해 놓은 辛씨 옛집은 氣가 집 전체를 횡으로 꿰뚫고 있으니 집안의 어느 곳에서도 氣가 넘치는 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용하지 않고 그저 기념물로만 존재하니 이 집이 천하명당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생가에서 제법 거리를 두고 삼동면 작동리에 신격호의 5代祖 묘소가 있었다. 辛씨 일가의 묘소들을 면밀하게 관찰해 본 결과 그중 명당은 5대조 묘소였다.
 
 
가까운 조상일수록 장엄하게 치장하는 것이 모든 자손들의 공통심리인데 辛씨 일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복의 근원인 5대조 묘소는 봉분이 낮았을 뿐 아니라 주변을 화려하게 단장하지 않았다. 다만 비석 하나만은 확실하게 서 있었다
.


 
안산 때문에 집안 화목에 문제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생가.

 

  정남향의 묘소에는 정중앙으로 강한 생기가 있어 영산辛氏 후손들의 역동적인 창조력의 원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징은 주작()이 길고 두텁다는(長厚) 것이었다. 길게 내려온 용맥(龍脈)의 끝 부분에 진혈이 맺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별한 경우 중간에 아주 큰 진혈이 맺히는 辛씨 5대조 묘소가 바로 이 경우였다. 穴의 기운이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 청룡 쪽(동쪽)에서 주산을 이루고 뻗어 와서 혈을 맺었는데 大穴(대혈)이었다.
 
 
청룡은 내 본체보다 낮지만 혈 앞에서 水口까지 100m 이상을 감싸고 돌았다. 백호는 청룡보다 높고 아름다운 형상으로 잘 걷었다. 보은천, 둔기천을 비롯해 크고 작은 네댓 줄기의 물이 내 앞으로 들어와 뒤로 빠지니 풍수 용어 중 「청파수가 내 앞으로 들어와 뒤로 빠지는」 형상이니 대부(大富)가 나올 형국으로 매우 드문 대지다.
 
 
내 앞을 돌아 뒤로 빠진 물이 대암호에 모인다. 물은 여자를 상징하니 시초에는 여자의 노력에 힘을 얻는다.
 
 
「地無十全(지무십전)」이라는 말 그대로 국내에 몇 개 없는 큰 穴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아쉬운 것은 안산이었다. 안산은 크고 대범하게 보이나 봉우리 5개가 서로 외면하고 제각기 노는 형상이니 자손들의 화목이 이 가문의 큰 과제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辛씨의 발복 근원을 두고 말하기를 신격호 형제의 조부(辛奭坤·신석곤·1872~1944) 묘소를 꼽는다(碧峯處士 辛公之墓·벽봉처사 신공지묘). 임금 王() 字로 앞산이 들어오니 대지명당이라 하나 필자가 보기에 생기가 없어 자리가 아니었으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냥 「무덤」일 뿐이었다. 증조부(辛·1826~1877) 묘소는 대암호 건너편에 있었는데 이 역시 명당이라 할 수 없는 「무덤」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친(辛鎭洙·신진수·1902~1973) 묘소. 장례 후 흉도가 시신의 목을 잘라 가서 돈을 요구한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 묘소다. 이 묘역 또한 청파수가 내 앞으로 들어오고 5대조 묘소 못지않은 진혈이 묘역 내에 있었으나 아깝게도 선친 묘소는 실혈한 채 수맥(水脈)에 있었다.
 
 
그 때문에 하늘의 조화로 시신발동(屍身發動)의 해괴한 일이 벌어졌으나 문중에서는 이 소동이 암시하는 바(하늘의 뜻)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되찾은 시신의 머리를 원래 그 자리에 묻어 원상회복시켜 놓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1〉 명당에 자리 잡지 못한 대통령과 조선의 왕

풍수(風水)는 경험의 과학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연과학처럼 정교한 가설(假說)과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 관찰을 통해 세워진 과학은 아니다. 우주의 구조와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도출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를 하나의 축으로 삼고, 대자연의 현상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와 관찰을 또 하나의 축으로 삼고, 마지막으로 대지와 공간에 가득한 기()의 존재와 기능에 대한 인식과 감응을 세 번째 축으로 삼아 역사와 운명 그리고 문화 현상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풍수는 탁상에서 펼치는 이론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며, 발품으로 확인하고 축적한 경험의 산물이다.
  
 
흔히 국운(國運)이라는 말을 쓴다. 한 가정의 운수(運數)를 가운(家運)이라고 한다면, 국운은 나라의 운수를 말한다. 가운이 가장(家長)의 운명에 달려 있듯이 국운은 왕정시대라면 왕에게 달려 있을 터이고, 민주정부 시대라면 최고 지도자, 즉 대통령(大統領)이나 수상(首相)의 운명과 국운은 직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 김영삼(金泳三) () 대통령이 서거(逝去)하여 국가장을 치렀다. 풍수를 업으로 하고 있기에, 그의 묘소가 동작동의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마련되어 장례가 치러지는 모습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전직 대통령의 신후지(身後地)’가 곧 국운과 직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국운이 융성하면 덩달아 국민 개개인의 삶도 풍족해지고 여유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들어서면 아무리 풍수의 문외한이라도, ‘참 좋은 자리를 잡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좌청룡 우백호가 깃을 마음껏 벌리고 감싸 안으면서 한강물이 내 앞으로 들어오며 청룡과 백호가 길게 띠를 둘러 서로 안산이 되니 이보다 좋은 형국을 찾기가 어렵다. 좋은 국세가 진혈(眞穴)을 빚게 되어 있으니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의 명국(名局) 속에 진혈 명당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곳이다.


  
서거 후 재평가 이뤄져

  국립현충원에 새로 입주한 고()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부터 1998년까지 1990년대 대한민국호의 조타수(操舵手)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가끔 냉·온탕을 오가는 대북정책과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나들어 일부에서 ‘진보의 숙주(宿主)’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느 대통령이 그렇듯이 그 또한 공과(功過)가 뒤섞인 인물이다. 특히 군 내부의 최대 파벌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는 등의 개혁 조치는 두고두고 역사의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배의 아픈 기억을 지녔다는 이유로 ‘역사적 유물’인 중앙청 건물을 철거하는 등 논란을 빚을 만한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그보다도 ‘소통령’으로 불린 차남에게 임기 내내 휘둘린 부정(父情) IMF를 불러온 경제정책 실패로 인하여 부정적인 면모가 강하다. 역사적 평가가 아직 완성된 단계는 아니나 최근 국민들 평가에서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렇게 ‘잊힌 대통령’이 될 뻔했으나 서거 후 장례 도중에 긍정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재평가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역사가 된 인물에 대한 재평가와 풍수지리학적인 견해는 엄격하게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YS가 영면(永眠)한 자리(신후지)를 두고 천하의 명당이라거나 광(壙·구덩이)을 파다가 돌멩이 몇 개가 나오자 그걸 두고 ‘용의 알’이라고 법석을 떠는 것은 우리 언론의 속성인 ‘외길 몰아가기’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쓴 미소를 지우기 어렵다. 몇몇 언론이 재평가로 가닥을 잡아 나가자 전체적인 분위기가 호()평가로 흐른 것은 아닌가 싶어 또 다른 우려를 낳고 있다.

  
  
YS 묘소 명당 주장에 반대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편 형상에 자리 잡고 있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오른쪽)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소(왼쪽).

 

필자는 YS의 묘소가 명당이라는 주장에 대해, 생각을 달리한다. 국가장 며칠 뒤 일부 풍수가들이 천하명당이라고 주장하는 그곳을 필자가 방문했을 때 묘역은 아직 정비되지 않아 질퍽거렸고, ‘용의 알’들은 흉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필자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용맥(龍脈)의 중앙은 수맥’이라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일부 풍수지리 전문가들은 일반적인 훈습(잠재의식)에 따라 용맥의 중앙을 명당으로 지목하고 일반인들도 그런 줄로 아는 이상한 현상이 고착되어 왔는데 이번 YS의 국가장에서도 어김없이 그런 사태가 되풀이된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어서 안타깝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YS는 천하명당에 누운 것이 아니라 수맥파 위에 누워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일반인들이 보기에, 하나의 YS 묘소를 놓고 천하의 명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필자처럼 풍수에서 흉한 자리로 꼽히는 수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자체로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렇듯 의견 일치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며, 일부는 풍수지리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목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언뜻 풍수가 전문가 각각의 주관적인 생각에 좌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풍수지리학이 얼른 보아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보이지만, 이 학문의 기본이 주관적이어서가 아니라 학설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인 것이다.

  
  
후손의 번창과 풍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풍수가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은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묘지의 음택(陰宅)이 주는 영향의 첫째는 후손의 번창이다.
  
 
예를 들어 조선 초기 3대 왕인 이방원(태종)의 걸출했던 아들 3형제를 살펴보자. 첫째 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묘역은 상도동에 있다. 양녕대군은 안타깝게도 지척에 3개의 진혈을 두고도 평범한 자리에 들어 후손이 크게 번창하지는 못했다. 반면 둘째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역은 방배동에 있는데 그는 진혈에 들었기 때문에 후손이 전주 이씨 가문에서 가장 번창하는 종파로 알려져 있다.
  
 
효령대군은 묘역에 진혈이 하나뿐이지만 운 좋게도 진혈에 들었고 양녕은 진혈 3개소를 두고도 그렇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예는 또 있다.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은 천하의 명군(名君)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이다. 여주에 있는 세종의 능인 영릉은 풍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천하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 자리 또한 실기의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그로 인해(묘소를 잘못 택하여) 세종의 후손인 세조가 조카를 살해하고 그 자리를 침탈하였고, 그 후로도 영광보다는 치욕과 고난으로 점철된 왕위 물림이 이어졌다.
  
 
조선조 왕가의 영욕은 그저 한 가문의 영욕에 그치지 아니하고, 백성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풍수가로서, YS의 국가장을 보며 좀 더 좋은 곳을 택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갖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현충원에 다른 명당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흥선대원군의 사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

 

비슷한 사례는 역사 속에 얼마든지 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석문봉 자락의 남연군(南延君) 묘소가 대표적이다. 많은 전설과 설화를 통하여 알려진 그대로 대원군 이하응은 왕권이 외척인 안동김씨의 수중에 넘어가 국정이 문란해진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절치부심, 파락호(破落戶·난봉꾼) 생활을 하던 중 당대의 풍수지리 대가 정만인(鄭萬人)이 “예산 가야산에 만대영화를 누릴 자리와 2대 천자를 낳을 자리가 있는데 무엇을 택하겠습니까”라고 하자 2대 천자 자리를 택해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이구의 유해를 이장하였다.
  
 
이장 이전에 그 자리에는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이하응과 정만인은 절을 불태우고 이장을 완료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52년에 하응의 둘째 아들이 태어나고, 다시 1863년에 철종이 승하하자 대를 이을 자손이 없던 터라 하응의 둘째 아들(고종)이 등극하고 하응은 대원군이 되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조선 진출이 어렵다고 판단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이에 조선인 일꾼들을 고용, 남연군의 능묘를 파헤치려다 실패하고 철수한다. 이 사건 이후 대원군의 양이(洋夷) 배척 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한 사람의 묘소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 사연이다.


  
전직 대통령 사례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인 1995년 김대중(金大中) 당시 야당 총재가 부친과 전처 차씨의 묘소를 용인으로 이장했다.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으로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장을 주관했던 풍수가는 “이장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을 풀고 다녔으나 필자가 보기에 용인으로 이장한 선친과 전처의 묘소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배경은 좀 더 먼 윗대의 선산에서 찾아야 할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묘소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어쨌거나 대권 등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그의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풍수지리학이나 주역, 사주 등 명리학(命理學)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들은 주변에 많은 자칭타칭의 대가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의 쟁론이 일치하지 않아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묘소 역시 논쟁거리다. 일부 풍수가들은 박 대통령 묘소 밑으로 수맥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필자의 생각도 같다. 이러한 이유에서 혹자는 “박정희, 육영수의 무덤이 수맥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게 터무니없는 거짓말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안다. 어느 누군가 대통령에 당선된 사실만 두고 조상의 음택 기운을 논하기에는 이르다고. 수맥에 묘소를 썼다면, 좀 더 지켜보면 알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탁월한 예지(叡智)로 대한민국에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여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발판을 만든 주역이지만 그의 무덤 둘레를 싸고 있는 포석에 금이 갈 정도로 수맥 특유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가문은 절손의 위기를 맞고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인과응보의 원리는 불변의 진리다. 팥 뿌려놓고 콩 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다.
  
 
일부 풍수를 가리켜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오늘날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물의 진실들 중 많은 것이 백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미신이나 종교적 신념, 또는 공상의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과학의 발달이 눈부신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알지 못하는 초자연적 영역이 무수하게 남아 있다. ‘초자연적’이라는 말 자체도 사실은 알지 못하는 자연의 영역을 말할 뿐 엄밀한 의미에서 초자연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저 미지의 자연현상이 있을 뿐이다. 풍수지리학의 일부 명제들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자연적 현상이다. 무덤의 앉은 자리와 방향에 따라, 그리고 망자의 사주와 장례식의 택일이 어떻게 상관하는지에 대한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토대로 정리된 것이 풍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풍수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방방곡곡에 숨어 있는 명당을 찾아내어 후대 인재를 낳을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또 이미 훌륭한 인물을 낳은 생기가 있는 터를 계속 활용해야 한다. 새로운 인재 생산의 보금자리로 활용하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 國運 융성을 위한 風水의 이용

/경복궁과 청와대 전경. 사진=조선일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뜻이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지만, 한파(寒波)는 쉽게 멈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봄이 무조건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봄이 오면 중국 대륙의 황사(黃砂)가 찾아온다. 불청객 황사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봄은 건너뛰고 싶은 계절이 됐다.
  
 
찾아오는 계절을 막을 수는 없다. 봄은 온다. 오고 있다. 특히 수도(首都)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의 봄이다. 풍수지리(風水地理)로 보면, 서울의 생기(生氣)는 평양을 비롯한 역대 어느 왕조의 수도에 비해서도 강하고, 그 발전 가능성 또한 무한(無限)에 가깝다. 땅의 기()가 이리 좋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한마디로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1984, 본격적인 여성 우위 기운 시작

  땅의 기운은 일정한 흐름을 가진다. 역학(易學)에서 1984년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84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건도(乾道·하늘의 기운)의 시대였다면, 그 이후부터는 곤도(坤道·땅의 기운)의 기운이 강해졌다. 건도의 기운이 강한 시기는 양성(陽性)이 힘을 얻지만, 곤도의 시대에는 음성(陰性)이 강하다. 양성이 남성이라면, 음성은 여성이다. 이러한 이유로 여성 우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두드러지게 여성의 약진(躍進)이 생긴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 대통령이 등장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크게 늘어나는 이유 역시 이러한 기운에서 찾을 수 있다.
  
 
기운의 변화는 땅의 운에도 영향을 미친다. 과거 서출동류(西出東流)의 물가에 위치한 수도를 가진 국가가 번영했다. 그러나 음성의 기가 강해지는 새로운 시기에는 동출서류(東出西流), 그중에서도 서북간(西北間)으로 흐르는 물가에 자리 잡은 도시가 흥하게 되어, 새로운 시대의 리더로서 사회문화를 이끌어 가게 된다는 것이 풍수학계의 정설(定說)이다.
  
 
한반도의 대부분 하천이 서출동류하고 있으나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은 동출서류하는 하천이다. 서남향이 아닌 서북간으로 흐르는 강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강이다. 북한강 남한강 임진강 등이 합쳐져 인천으로 빠진다. 기운이 이토록 좋으니, 라인강을 낀 독일처럼 우리도 통일의 기적을 이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국만이 아니다. 세계적인 흐름도 비슷하다. 강의 흐름이 서북간 방향인 대표적인 경우는 유럽의 한가운데를 흘러 지나가는 라인강을 들 수 있다. 라인강이 지나는 나라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독일이다. 독일은 통일의 후유증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이 휘청거리는 유럽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여 비스마르크, 히틀러 시대를 능가하는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제국의 충돌》이라는 책이 있다. ‘독일의 부상(浮上), 중국의 도전 그리고 미국의 대응’이라는 부제(副題)를 달고 있는 이 책의 저자 장 미셀 카트르푸앵은 프랑스 언론인 출신으로 공산주의 실험의 실패 이후 미국의 일극(一極) 체제에서 중국과 미국이 경쟁하는 양극(兩極) 체제로 변동했고, 여기에 유럽을 대표하여 독일이 떠올라 삼국(三國)이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국제정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세 국가의 부상에는 중상주의(重商主義)가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 중상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알려진 애덤 스미스 경제학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정책의 핵심원리로서 상업자본과 금융자본이 국력의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중상주의는 원료 생산기지와 시장의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로 발전해, 과거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반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대전 이후에도 경제를 최우선으로 하는 중상주의는 세계를 움직이는 철학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이래 한국이 추구해 온 경제정책도 중상주의 기조(基調) 위에 서 있다. 산업화 시대의 국가철학은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고 기업인의 창의력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본다는 점이다. 필자는 여기서 경제학 이론이나 정책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우리 사회가 솔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가 사회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일부 정치인과 정당이 이를 포퓰리즘(대중영합 주의)으로 이용하고 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반기업(反企業) 정서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신과 가족이 기업에 기대어 먹고살면서도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기업에 대하여 냉소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기업과 기업인이 우대 받고, 기업인을 격려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기업을 고의적으로 죽이는 행위는 나라를 죽이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과거 세계경영을 모토로 내걸고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다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뒤통수를 맞고 좌초(坐礁)했다는 뒷말을 남긴 대우그룹과 요즈음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있는 롯데그룹의 사례를 풍수로 풀어서 설명해 보려 한다.


  
과거 대우 본사 건물과 풍수

/구 대우그룹 본사. 그룹 해체 후 풍수 관련 뒷말을 남겼다.

 

대우그룹의 창업주 김우중(金宇中) 전 회장의 선영(先塋)은 제주도에 있고 그의 모친(母親) 묘소는 충남 서산에 있다. 제주도의 선영은 평범한 묘지처럼 보이지만, 명당 자리는 맞다. 다만 서산의 모친 묘소는 지척에 진혈(眞穴)을 두고도 명당을 사용하지 않고 비껴져 아쉬움이 크다.
  
 
대우그룹을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서울역 앞에 서 있는 그 웅장한 구 대우 본사 모습 때문이다. 사옥을 지을 때부터 필자는 직간접적인 경로를 통하여 우려를 전달하였으나 필자의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대우빌딩 사옥을 건축하는 모습을 보고 필자가 대우 측에 이야기한 풍수지리학적인 의견은 간단하다.
  
 
어찌 보면 상식이다. 건물의 출입구를 서향(西向)으로 내면 흉가(凶家)라는 것은 풍수를 조금이라도 공부하면 상식으로 아는 사항이다. 아마 대우 측도 나름대로 자문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남산을 역()으로 향하며 건물을 짓는 등 풍수의 기본을 무시한 것은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거대한 기업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쓰렸다. 결국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대우그룹은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져 갔다. 그룹은 해체되었으나 계열사별로 경쟁력 있는 기업은 살아남아 대우 신화를 이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 대우그룹의 깃발 아래 뭉쳐서 국위선양을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롯데그룹, 명당 반도호텔 인수

  롯데그룹 이야기가 요즘 언론을 통해 많이 회자된다.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으로 좋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 비록 형제간의 싸움이 보기 좋지는 않으나, 근대화를 위해 나름 애쓴 지금까지의 노력까지 폄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롯데의 창업주 신격호(辛格浩) 총괄회장은 경남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삼남면 둔기리에서 태어나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던 1942년 부산에서 단돈 83원을 들고 관부연락선에 오른다. 그의 나이 19. 한국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칠 수 없게 되자 선택한 밀항(密航)이었다. 그 이후 신격호의 성공 신화는 널리 알려진 그대로이다. 그의 성실성을 보고 하게미스라는 일본인이 거금을 투자하여 사업을 해 보라고 권유하자 그 돈으로 세운 공장이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1945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남아 껌 제조에 성공하여 단숨에 풍선껌의 1인자가 됐다. 껌을 판 돈으로 일본 내에서 정상에 올라 1948년 주식회사 롯데를 창업한 것을 기점으로 1959년 롯데상사, 1961년 롯데부동산을 각각 창업하여 사업을 제과, 유통, 부동산으로 확대했다. 1968년 롯데물산 설립으로 일본 재계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 경영자로 떠오른 이가 신격호 명예회장이다

  
  
재복 넘치는 소공동 롯데

/소공동 롯데타운. 재복이 넘치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까지는 식민지 청년의 성공 신화의 한 장면으로 처리될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가 눈여겨보기를 권하는 것은 그 후 신격호 회장의 고국 투자 행적이다. 대부분 해외에서 돈을 번 사람들이 고국에 투자하는 행태를 살펴보면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한다.
  
 
신 회장의 경우,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고향 사람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 해마다 5월에 마을 잔치를 열었다. 신 회장의 고향인 둔기리가 울산 국가산업단지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대안댐의 준공으로 수몰됐고, 이 때문에 고향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신 회장이 만든 것은 둔기리를 본뜬 ‘둔기회’였다. 일본 가서 돈 벌어 성공한 사람의 금의환향을 알리는 행사와 다름 없었다.
  
  1973
년 롯데는 반도호텔을 인수해 건물을 전부 헐고 그 자리에 롯데호텔을 세웠다. 반도호텔은 1938년 서울 중구 소공동에 일본 신흥재벌 노구치 준(野口遵)이 건설했다. 호텔 설립 일화가 재미있는데, 노구치가 당시 경성 최고 호텔이었던 조선호텔에 투숙하려 하자 허름한 옷차림에 풍채도 볼품없었던 그를 보고 호텔 직원이 퇴짜를 놓자 경성 최고의 호텔을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해는 상당히 높다. 반도호텔은 3개의 생기가 지나는 재복이 넘치는 곳이다. 이러한 좋은 터에 롯데호텔을 세우고, 최고경영자가 머무는 그룹의 본사 역할을 했으니 사업이 번창한 것은 당연하다.
  
 
신 회장의 사업보국 이념이 확인된 것은 한국 경제가 고속 성장 시절을 끝내고 처음으로 맞이한 시련인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사태 시기이다. 대부분 이윤 추구를 위해 고국에 투자했던 교포 자본이 빠져나가고 외국 투자자들도 보따리를 쌀 때 롯데 신격호 회장의 고국 투자는 오히려 늘어났다. 한국 경제가 IMF의 길고 숨 막히는 터널을 빠져나온 원인은 여러 가지로 복합적이지만 그중에는 재일교포 기업인 롯데 신격호의 공로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흔히 신격호의 경영 스타일을 두고 ‘대한해협 경영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홀수 달에는 한국에, 짝수 달에는 일본에 머물면서 경영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국 투자를 두고 국내의 일부 젊은이나 학자들은 한국에서 돈을 벌어 일본으로 가져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기업인 신격호의 사업보국을 위한 집념을 인정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롯데 123층 건물, ‘연통’처럼 기운 모이는 형상

/신축 중인 롯데월드타워

 

신 회장은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 광고형식으로 천명한 회장의 경영이념에서 ‘품질본위, 박리다매, 노사협조,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을 들었다.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신 회장의 경영목표는 여기서 밝힌 이념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최근 신 회장 두 아들 사이에 불화가 격화되면서, 롯데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커지고 있다. 서울 잠실의 신천동 구() 롯데월드 맞은편에는 123 555m의 롯데타워 건물이 올해 말 완공 목표로 하늘을 찌를 기세로 올라가고 있다.
  
 
북한은 평양에 짓고 있는 102층 높이의 류경호텔을 착공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완공하지 못하고 있다. 롯데타워는 북한과 우리나라의 국력 차이가 이토록 엄청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알려주는 중요한 예가 될 것이다.
  
 
신 회장은 평소 “언제까지 외국 관광객들에게 고궁만 보여줄 것이냐. 세계 최고의 무엇이 있어야 사람들이 즐기러 올 것 아니냐”는 말로, 초고층 건물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필자 역시 신 회장의 이러한 주장에 크게 공감한다.
  
 
풍수적으로 볼 때, 새롭게 짓고 있는 롯데타워는 마치 연통(煙筒)처럼 기운이 모이는 형상으로, 재운을 담고 있는 한강이 감싸는 형국이다. 이런 좋은 터에 자리 잡으니, 향후 관광객들이 많이 모일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은 기회의 땅

  거대도시 서울에는 많은 기업이 몰려 있다. 서울은 ‘새 천년 기회의 땅’이다. 그러나 서울이 안고 있는 풍수지리학적 문제는 산처럼 쌓여 있다.
  
 
기업은 민간의 경쟁력과 창의력으로 성장한다. 정치는 기업의 경쟁력을 떠받치는 다른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 우리가 흔히 박정희 전 대통령을 5000년 가난에서 해방시킨 지도자로 평가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하겠다. 지도자가 아무리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어도 첨병인 기업의 능력이 없으면 지도자의 꿈은 헛꿈에 불과하다. 기업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총수의 음택과 양택이 두루 좋아야 하고 본사 건물이나 주요 산업 현장에도 생기가 넘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업 활동에서 터의 중요성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도 역시 터가 중요하다. 우리가 흔히 정치를 4류라고 비웃지만 정치의 온상인 국회의사당과 청와대가 생기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일이 매우 시급한 과제이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풍수지리학은 공익을 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국가 행정부의 위치를 어디에 놓느냐는 국운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조선의 이씨 왕조는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선대 임금들을 명당 진혈에 모시는 데 실패한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국왕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약체 정권이 많았다.
  
 
임금의 묘뿐만이 아니다. 정권의 향배를 명확하게 판가름하는 궁궐의 배치에도 고스란히 이러한 사정이 드러난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의 건립 터를 놓고서는 승려인 무학(無學)과 성리학자인 정도전(鄭道傳)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무학은 인왕산 아래를 주장했다. 정도전은 그러나 무학에 반대하여 삼각산 아래를 주장했다. 궁궐은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정해졌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웠으면 다시 채우면 된다. 하지만 궁궐을 다시 짓는 것은 국력을 소진하는 작업인지라 함부로 결정할 일이 못된다. 구한 말 쇠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경복궁을 중수하다가 경제적 난관에 빠지게 되었다. 당백전으로 중수 비용을 조달하다가 결국 나라 살림을 거덜 낸 일이 아득한 옛 얘기가 아니다. 조선 개국 당시 무학 대사는 풍수 등의 이유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국가적 재앙을 이미 예언했다. 풍수에 대한 무학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대가는 너무 컸다.

  
  
청와대 자리

/철거전 창경원 입구. 일제는 궁궐을 유원지로 바꾸어 터의 맥을 손상시켰다.

 

서울의 진산(鎭山)은 삼각산이라고도 부르는 북한산이다. 북한산이 두 팔을 벌리듯 청룡과 백호로 선명하게 갈라지니 청룡맥의 중심에 창경궁 생기처가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의 풍수적인 요소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소름이 돋는다. 창경궁을 전체적으로 유원지화하여 동물원으로 만든 것도 그러한 음모의 일환이었고 창경궁 안의 생기처에다 짐승 박제 전시장을 설치한 것도 저들의 음모 중 하나였다. 해방된 지 한 세기가 가까운 지금에도 저들의 음모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처럼 우리 겨레를 침탈한 외부 세력, 즉 일제는 풍수지리학에도 밝아 전국 곳곳의 명산마다 맥을 짚어 혈맥에 쇠말뚝을 박는 짓을 감행했으나 정작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산야의 혈맥을 보존하고 이용하는 데도 게을러 명당 진혈을 인재 양성의 터전으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이웃 나라에 무려 36년간이나 복속되는 치욕을 당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최고의 권부인 청와대는 경복궁의 후원에 지어진 무과(武科) 시험장으로 알려져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경복궁에서 경자를 따고 신무문에서 무자를 따서 경무대(景武臺)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이 이름이 독재의 상징으로 회자되자 4·19 이후 집권한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바꾸어 버렸다. 이름은 바뀌었으나 건물 자체는 경무대 시설 그대로였다.
  
 
옛 경무대 건물에 생기가 있었으나 김영삼 대통령 이후 신축한 청와대 건물에서는 그런 생기를 찾을 수가 없다. 필자는 청와대 경내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생기처인 창경궁 후원으로 청와대를 옮겨 백악관처럼 대통령과 비서실 직원들의 시각을 시민 수준으로 낮추면 지금같이 불통으로 인한 불만을 야기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하문 방향으로 불어오는 골바람 때문에 임진, 병자의 양란과 6·25 참사 등 국가적 변란을 불러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여러 번에 걸쳐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하였으나 그 반향은 아주 미미한 편이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구 청와대 건물을 복원하거나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의 창경궁 후원으로 청와대를 이전할 것을 시민의 이름으로 청원한다.
  
 
그리하면 모쪼록 찾아온 국운을 타고 세계 일류국가로 밀어올리는 동력을 갖게 될 것이다. 기업들이 앞에 서고 우리는 기업의 일부가 되어 함께 온 세상을 내 것으로 향유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고 당당하게 세계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의도 국회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소모적인 정쟁으로 세월을 다 보낸다고 시민들은 분노를 표출하지만 그들을 국회로 보낸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시민들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그 까닭이 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터에서는 생기를 발견할 수가 없다. 의사당이 그 자리에 서 있는 한 이 땅에 민의가 통치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국회의사당을 명당 진혈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 의원들이 청와대를 바라보고 해바라기처럼 움직이는 대신 민심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이런 시대가 와야 비로소 민주정치가 정착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서울의 진정한 봄은 그때 가서야 오게 될 것이다.

金聖洙 영목풍수지리연구소 소장    
정리李政炫 月刊朝鮮 기자

 

■‘조용헌의 靈發事典’ 연재를 시작하며

동양학자  조선일보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으면 ‘삼국유사(三國遺事)’도 있다. 눈에 보이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삼국사기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神異)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 삼국유사이다. 이야기꾼의 입장에서 보면 ‘사기’ 보다는 ‘유사’가 훨씬 재미있다. 아티스트 백남준도 ‘유사’야말로 자신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요즘처럼 판타지가 영화와 드라마의 대세로 떠 오른 마당에는 유사체(遺事體)의 神異한 이야기가 훨씬 소중하게 여겨진다.

영발사전은 21세기에 쓰는 유사체의 신이한 이야기들에 해당한다. ‘신이’가 ‘영발’이다. 영발사전은 눈에 안 보이는 정신세계의 작용에 관한 이야기들을 항목(keyword)별로 정리한 내용들이다. 그 항목이 수십개가 될지, 수백개가 될지는 연재를 해봐야 안다. 여기에 연재되는 내용의 70%는 필자가 지난 30년간 천하를 주유하며 직접 보고 들으며 취재한 사실적인 내용들이고, 30%는 필자의 추론과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겠다.

 

(1)-①  바닷물에 발을 디디니 돌들이 올라와 징검다리가 되고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전생(前生)

전생이 정말 있는 것인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인생관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관의 핵심은 사생관(死生觀)이 아닐까 싶다. 태어남과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게 아니라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면 현생의 죽음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 아닌가. 전생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전생이 있다고 받아들이려면 전생에 대한 생생한, 또는 자세한 기억을 가진 비상한 인물을 만나 보아야 한다. 그래야 실감이 날 것 아닌가.

지금부터 12년 전인 2003년 가을쯤으로 기억된다. 그때 나는 꿈을 하나 꾸었다. 꿈은 깨자마자 잊어버리는 꿈이 있고,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이 있다. 잊어버리는 꿈은 개꿈에 가깝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이 문제가 된다. 미래를 예측하게 해주는 꿈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예측도 단기적인 사건 하나를 꼭 집어서 미리 암시하는 꿈도 있고, 장기적으로 전개되는 대하드라마의 단초와 결론을 예시하는 꿈도 있다. 단편 예시인가 대하소설 예시인가는 시간이 지나봐야 결판이 난다.

 

/MBC에서 방영한 '불가사의의 세계-영혼의 비밀'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영국인 제니 코켈씨와 그녀의 전생 메리 써튼씨의 생전 모습. /조선일보 DB

 

시간이 결정한다. 그래서 꿈 보다 해몽이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 가을에 꾼 선명한 꿈은 내가 바다로 걸어가는 꿈이었다. 바닷물이 철렁거리는데 내가 한 발 디디면 바다 밑에서 커다란 바윗돌이 올라오는게 아닌가! 또 한걸음 내디디면 또 바닷물 밑에서 바위돌이 올라왔다. 그 바윗돌들이 징검다리가 되었다. 바다 밑에서 올라온 징검 다리를 계속 디디면서 어디인가로 가니까 커다란 섬이 나타났다. 그 섬에 도착하자 내 뒤로 많은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면서, 그 징검다리를 짚고 섬으로 오는 장면이 보였다. 그 꿈을 꾸고 나서 몇일 있다가 ‘제주도에 요가(yoga)의 고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학계에서 손꼽히는 도교 내단학(內丹學) 전문가이자 도교의 팔만대장경이라 할 수 있는 ‘정통도장(正統道藏)’을 거의 섭렵한 원광대 김낙필(金洛必.1948-) 교수로부터 요가고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필자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하였다. 불교와 유교에 비해 일반인에게 생소한 분야인 도교의 경전과 여러 수행법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필자가 섭취하게 된 경로는 김낙필 교수를 통해서였다.

고수가 있다는게 만사를 제치고 가 봐야지. 다음날 바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 요가 고수는 구 제주시내에 수련생들을 가르치는 도장(道場)이 있었다. 제주여상 앞이었는데, 간판도 없고 시설도 허름한 건물의 2층이었다. 실내는 30평이나 될까. 30-40명의 남녀노소 수련생들이 요가를 하고 있었다.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의상은 편하게 입는 검정색 등산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내가 처음 보는 요기(yogi)의 모습이었다.

머리를 깎고 있는 불교의 스님들과도 다른 아우라였고, 머리를 기른 도관(道觀)의 도사들과도 달랐다. 유불선(儒佛仙)에서 보지 못한 분위기와 파워가 풍겼다고나 할까. 옷도 편하게 입고, 머리를 기르고 독신으로 사는 프로페셔널 요가 수행자인 ‘요기’를 처음 접해본 것이다. 자유로우면서도 조용한 평화스러움이 느껴지고, 그러면서도 주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독존적(獨存的)인 에너지를 내품고 있었던 한주훈(1959-) 선생이었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2003
년부터 2015년까지 12년간 1년에 4-5차례씩, 한번 가면 평균 1주일 정도 머물면서 제주도에 건너가 인터뷰를 하였다. 12년간 계속된 인터뷰를 통해서 수많은 정신세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국내외의 여러 도사들을 탐방하면서 20년 가까이 ‘도에 관한’ 많은 도담(道談)을 나누어 보아서 어지간한 이야기에는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석명(石明, 한주훈이 전생에 사용하던 號) 선생은 내가 그동안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놀라게 해 주었다.

7000
년의 역사를 지닌 인도 요가의 정신세계는 넓고 깊었다. 불교의 뿌리도 요가가 아니었던가! 고타마 싯다르타도 원래 요가 수행자였던 것이다. 동양 정신세계의 종가집이 요가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12년간 제주도를 출입하면서 석명 선생과 나눈 이야기와 체험을 요약하면 이렇다. 석명은 요가에서 말하는 7개의 차크라를 뚫은 요기였었다. 도교적으로 표현하면 환정보뇌(還精補腦:정액을 되돌려 뇌로 보낸다)의 경지에 이르렀고,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뚫렸다.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누진통(漏盡通:정액이 새지 않는 능력)을 완성하여서 성욕을 극복한 성취자이다. 황진이와 지족선사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수행자들이 공부를 잘 하다가 막판에 무너지는 이유가 바로 섹스 문제 때문이다. 성욕 이거 정말 어렵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카톨릭 성자인 성프란체스코가 성욕을 극복하려고 장미 가시 덤불에서 몸을 뒹굴었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처절한 이야기인가. 석명은 하타(Hata) 요가의 여러 아사나(동작)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다고 알려진 간다베룬다 아사나(메뚜기 자세), 라자 카포타 아사나(왕비둘기 자세)가 우리 나이 57세인 현재에도 가능하다.

 

/요가 강사의 시범 장면. /유튜브 영상 캡처

 

요가 아사나는 토론이 필요 없다. 눈 앞에서 바로 동작이 나타난다. 그 아사나가 되는가 않되는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고기도 먹고 막걸리도 먹는 탁한 생활을 하면서도, 전국에서 찾아오는 요가 수련자들을 피하지 않고 만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50대 후반인 현재까지도 이러한 고난이도 요가 자세를 취할수 있는 인물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고난이도 요가 아사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사량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해야 하고, 채식 위주에다가,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육식을 하면 몸이 굳는다. 또한 체중이 불어나기 쉽다. 생각이 복잡한 일반인들을 많이 만나는 일도 에너지가 소진되는 과정이다. 몸이 예민한 사람 만나는 일을 되도록이면 피해야 한다. 석명처럼 거의 막행막식(莫行莫食) 수준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도 아사나를 유지하는 것은 희유한 일이다. 석명은 제주도 토박이다. 8세부터 혼자 스스로 아사나 동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누가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그런 동작을 하고 싶었다.

13
세때는 사바 아사나(동작을 끝내고 누워서 쉬는 자세)를 하던 도중에 황홀경을 체험하였다. 몸 안에 강력한 전기가 발생하여 몸을 돌아다니는 체험을 한 것이다. 16세 때는 더 깊은 삼매 체험을 하였다. 일주일에 평균 1-2회씩 엑스타시를 체험하다보니 학교를 갈 수 없었다. 하필 아침 등교 시간 무렵에 이러한 엑스타시 현상이 발생하는 것. 그 체험이 너무 황홀해서 밥 먹고, 가방 챙기고, 학교 가는 일을 병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한달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학교 때려 치웠다고 주먹이 센 형에게 두들겨 맞기도 하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한 일은 닭을 키우는 일이었다. 돈을 벌어야만 하는 집안 형편이었다. 집에다가 양계장을 만들어 놓고 수천마리의 닭을 키우면서 10대 후반 시절을 보냈다. 닭똥 냄새가 진동하는 양계장에서 닭 모이 주다가 시간 나면 혼자서 요가 아사나를 연습하면서 말이다. 석명으로부터 무려 12년간 들었던 수많은 주제의 도담(道談) 중에서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주제는 자신의 전생담(前生談)이었다. 전생이 확실히 있다면 현생의 삶은 지나가는 어느 간이역 중에 하나가 된다. 훨씬 여유가 생긴다. 생사는 하나의 변화일 뿐이다. 또 태어나니까. 죽음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가장 큰 문제가 죽음이다. 생사대사(生死大事) 아닌가. 석명의 전생담 요점을 정리하면 대강 이렇다.

석명은 제주시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구제주이다. 탑동 바닷가 쪽에서 이마트를 지나 동문로타리 쪽으로 가다보면 산지천(山地川)이 나온다. 청계천 정화사업 모델이 이 산지천이었다고도 한다. 한라산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물이 바다로 내려가면서 형성된 개천이다. 이 산지천에는 나무로 만든 배가 한 척 전시되어 있다. 길이는 대강 20미터나 될까. 중국에서 표류한 선박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전생에 석명이 타고 온 배가 이러한 유형의 선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석명은 배를 타고 서해안을 표류하다가 제주 산지천에 1954년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 근방에서 5년을 살다가 1958년에 사망하였다.<③편 계속>

 

<②편에서 계속>
사망 당시에 석명은 105세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1959년에 태어났다. 태어난 동네도 이 근방이다. 왜 석명은 서해안을 표류하였는가. 그는 전생에 중국의 요녕성(遼寧省)에서 살았다. 요녕성에서의 직업은 차()를 사고 파는 차 상인이었다. 중국의 차를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석명은 현생에서도 차를 좋아한다. 거의 중독 수준에 가깝다. 필자가 차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계기도 석명을 2003년에 처음 만나면서부터였다. 같이 만나면 하는 일이 요가 동작과 ‘차 마시고 밥 먹는’ 다반사(茶飯事)였던 것이다. 관찰해 보니까 그는 하루에 차를 평균 5리터 정도 마신다. 큰 생수병으로 거의 3병 분량을 마신다. 보통 사람이 이렇게 차를 마시면 몸에 무리가 온다. 하지만 그는 끄떡 없다. 차를 마시면 활기가 생긴다고 한다.

()자도 찻 물(
)이 혀()에 들어가면 활력이 샘솟는다고 해석할 정도이다. 그는 보이차를 특히 좋아한다. 돈이 생기면 보이차를 사 놓는다. 금생의 유일한 취미가 요가 하고 나서 차 마시는 일이다. 차에 대한 이런 집착은 그가 전생에 차 장사(茶商)을 한 데서 유래한다는 설명이다. 전생에 요녕성의 어느 도시에서 차를 사고 팔았는데, 처음에는 가게가 없이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금이 모이자 조그만 가게를 구입하였다.

 /조선일보 DB

 

마당도 있는 가게였다. 손님이 올때는 차를 팔다가 손님이 가고 한가해지면 마당에 나가서 요가 아사나를 연습하곤 하였다. 요기는 머리도 기르고 일반인들이 입는 복장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외견상으로는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석명은 중국에서도 요기였지만 생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였으므로 차 장사를 한 것이다. 시주를 받는 승려와는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돈을 스스로 벌면서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 요기이다. 요기는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고 사는 자이다. 더 나아가 신과 결합된 상태로 사는 자이다. 세상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돈 문제도 원만하게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돈을 벌줄 알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돈이 없어도 애로사항이 많고, 돈에 집착해도 번뇌가 몰려 온다. 돈이 너무 없어도 시달리고, 돈이 너무 많아도 시달린다. 아뭏튼 세상 그리고 돈과 조화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노선임에 틀림없다. 요녕성의 어느 도시에 살면서 차를 도매로 구입하기 위해서는 북경도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하였다고 술회한다.

“중국의 요녕성 일대에서 차 장사를 한 세월은 대략 얼마나 되는 겁니까?
“한 30년 됩니다. 그 전에는 티벳의 카일라스(Kailash) 산에서 살았어요. 카일라스 근처에는 마나사로바(Manasarovar)라고 하는 호수가 있어요. 이 호수 근처에는 동굴들이 많아서 요기들이 많이 살았죠. 저도 그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주로 과일만 많이 먹고 살았어요. 과일주의자라고 불리웠어요. 마나사로바에서 요가를 가르치다가 중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전생에도 제가 중국의 차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중국차의 그 향기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실크로드의 천산북로(天山北路)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왔고, 중국의 요녕성에 정착하면서 차를 매매하면서 30년 정도 살았습니다.

석명의 이야기에 따르면 1921년에 요녕성에 들어왔고, 1951년까지 여기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장개석의 국민당이 몰락하고 모택동 정권이 수립되던 시기이다. 모택동 정권은 1949년에 성립된다. 엄청난 사회 혼란기였다. 혼란기가 되면 부자들이 문제가 된다. 돈 있는 사람들은 공산당 정권을 피해서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석명의 차를 구입하던 고객들은 부자들이 많았다. 중국에서 돈 없는 사람은 차를 마시기가 힘들다. 좋은 차는 쌀값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요녕성의 부자들이 모택동 정권의 압박을 피해서 배를 타고 서해로 탈출하였다. 보트피플이다. 2척의 배가 서해로 나왔다. 아마도 배 한 척에 수십명씩은 탔던 것 같다. 석명도 이 배에 탔다. 배가 출발한 연도는 1951년이었다고 한다. 출발 항구는 위해(威海)나 천진(天津) 쯤 되었을까. 아니면 다른 항구였을까. 피난민을 태운 배 두 척은 서해상의 여러 섬을 돌아다녔다. 1951년은 6·25 전쟁 기간이기도 하였다. 피난민을 가득 태운 배 두척은 서해상의 이 섬, 저 섬에 정박하며 물과 식량을 보충하고 다니다가 배 한척은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고 침몰하여 버렸다. 살아 남은 배 한 척이 3년을 돌아다니다가 1954년에 제주도 산지천에 상륙하게 된 것이다. 석명의 전생 나이로 계산하면 100세이다. 그는 1854년 생이니까 만 나이로 100세에 산지천에 도착하여 낯설고 물설은 제주에서 살다가 1958 104세로 사망하였다.

“석명(石明)은 중국 요녕성에 살 때 쓰던 호라고 하였는데, 혹시 전생의 요기 이름은 생각납니까?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라마 모한이었습니다.<④편에 계속>

 

<③편에서 계속>
나는 석명 선생으로부터 ‘라마 모한’이라는 이름을 듣고 구글 검색에서 찾아 보았다. 흥미롭게도 ‘라마 모한 브라마차리(Ramamohana Brahmachari)'라는 이름이 실제로 존재하였다. ‘브라마차리’는 대요기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대종사(大宗師)’와 비슷한 의미이다. 구글 검색에서 보면 라마 모한 브라마차리는 부인과 자녀 3명과 함께 카일라스 근처의 동굴에서 살았던 것으로 나온다. 가지수가 무려 3천 종류나 되는 아사나(요가 동작), 그리고 맥박(pulse)을 정지시킬수 있는 비법을 가르쳤다고 나온다.

 

/한 미군이 요가를 하는 모습. /조선닷컴

 

20세기 초엽의 세계적인 요가 마스터인 크리슈나 마차리아(Krishna macharya)도 가르쳤다고 되어 있다. 동굴에 살고 있던 라마 모한으로부터 7년 동안 시봉을 하면서 크리슈나 마차리아가 요가를 배웠던 것이다. 크리슈나 마차리아의 유명한 양대 제자가 파타비 조이스(Pattabhi Jois,1915-2009), 아헹가(BKS Iyengar,1918-2014)이다. 파타비 조이스는 서양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역동적 요가. 즉 아쉬탕가 요가의 장문인이다. 아헹가는 고전요가인 하타 요가의 고수이다.

하타 요가를 수행한 석명은 28세 때인 80년대 후반에 인도에 가서 하타 요가의 고수인 아헹가의 요가 아쉬람(도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쉬람에 비치되어 있는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고 감개 무량함을 느꼈다고 한다. 눈에 익숙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석명의 전생이 정말로 라마 모한이었다고 한다면 아헹가는 손자 제자에 해당한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찾아간 셈이다. 그런데 금생에는 몸을 바꿔서 다시 태어났으니까, 손자뻘에 해당하는 그 아헹가가 이제는 스승의 위치가 된 셈이다.

 

/요가 에어리얼 빈야사(aerial vinyasa)를 하고 있는 파라 마즈 옴팩토리 창업주. /조선닷컴

 

“자신의 전생을 본다는 것은 어떤 원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머리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21개의 봉인(封印)이 있습니다. 영적인 에너지가 흐르는 21개의 나디(통로)인 셈이죠. 이 나디가 태어나서 백일이 되기 이전까지는 열려 있습니다. 갓 태어난 갓난아이는 머리가 물렁물렁 하죠. 백일이 지나면 이 21개의 나디가 닫힙니다. 요가 수행을 해서 닫혀 있는 이 21개의 나디를 열면 자신의 전생이 보입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자기 전생의 기록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21개의 봉인을 열면 자기 전생이 비디오 테이프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아사나를 해야 합니까?
“거꾸로 물구나무 서는 자세, 코브라(브장가) 자세, 쟁기자세 등입니다. 이런 자세들을 반복하면 닫혀 있던 봉인이 풀립니다.

석명의 전생담 가운데 또 하나가 있다. 석명은 인도에서 6년간 머무르다가 고향인 제주로 돌아왔다. 북인도 쪽의 히말라야 산맥의 동굴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마침 그 지역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가지 못하고 고향 제주로 왔다. 그때 나이가 34세였다. 제주에 와서 요가 도장을 열었다. 어느날 요가를 배우겠다고 어느 처녀가 도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처녀를 보니까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였다. 석명의 어머니는 석명이 8세때 일찍 죽었다. 죽은 어머니가 다시 아가씨의 몸을 받아 찾아 온 것이다. 이때 처녀의 나이는 26세 였다고 한다. 이 아가씨는 요가도장에서 석명을 처음 보자 마자 맹목적으로 좋아하였다. 매일 석명 옆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였다. 독신을 지켜야 하는 요기는 이럴 때 난감하다. 이 처녀가 볼때는 석명이 전생의 자기 아들이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특별한 끌림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석명에게는 이 아가씨가 아가씨로 보이는게 아니고 어머니로 보였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이 처녀를 잘 타일러서 다독거렸다. 안 떨어지려고 해서 애를 먹었다. 지금은 제주도 어느 지역에서 결혼을 하여 아이들 낳고 잘 산다고 한다. 석명에 의하면 ‘전생을 아는 것도 때로는 매우 곤란한 상황이 많다’고 한다. 전생을 모르고 사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선사들은 말한다. ‘전생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현재의 너 모습을 봐라. 그것이 전생 모습이다. 내생의 너를 알고 싶은가? 현재 네가 사는 모습을 봐라. 그것이 내생으로 이어진다’고 설파한다. 현재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구체적인 전생 모습을 알고 싶었다.

 

(2) 대한민국 산 가운데 도사들의 아지트는?

한국에서는 명산이 많다. 명산이라 함은 바위와 물, 그리고 동식물이 서식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산이 너무 높으면 사람이 살기 힘들다. 3천미터가 넘어가면 살기에 힘든 산이지만, 한국의 산들은 1천미터 내외라서 도사들이 거주하기에 좋다. 약초가 널려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화강암 바위가 많다는 것도 장점이다. 화강암은 정신세계의 영발(靈發)을 공급해주는 단백질원이니까 말이다. 화강암과 계곡물은 영발의 원천이다. 한반도의 대부분 산들은 이러한 영발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가 명당이라고 나는 본다.

한국의 산 가운데 도사들의 이야기가 많이 축적된 곳을 꼽는다면 금강산, 계룡산, 지리산이 생각난다. 물론 수없이 많은 산에 이야기가 있지만 우선 당장 예를 들기에 이 산들이 적당하다는 말이다. 금강산은 차력(借力), 축지(縮地), 둔갑(遁甲)과 같은 도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계룡산은 주역(周易),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나라의 미래 예측에 관한 콘텐츠가 풍부하다. 계룡산은 한반도 중심부에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정보를 취합하는데 유리하다.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지리산은 어떤가. 가장 웅장한 산이다. 둘레가 무려 오백리이다. 거기에다가 육산(肉山)이다. 산에 들어가 살기에 가장 적당한 산이 지리산이다.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온갖 약초와 동식물이 서식했던 산이었다. ‘인삼 빼고는 다 있다’는 산이 지리산이다. 크고 깊어서 은둔생활 하기에도 적당하다. 지리산에 가서 굶어 죽는 사람 없고, 자살하는 사람 없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어떤 수가 생긴다. 참 후덕한 산이다. 생명을 살리는 산이다. 가진것 없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고갈되었어도 지리산에 들어가면 비전이 생긴다. 없는 사람을 품어주는 산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에는 신선들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청산에 숨어 살면서 근심걱정 없이 살기를 희망하는 불노장생(不老長生) ()가 가장 선호했던 산이 지리산이었다. 선가(仙家)의 아지트였던 산이었다.

내가 30년 전에 지리산을 돌아다닐 때 지리산에서 평생을 살았던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었다. ‘南飛靑鶴雙溪寺 北來白鶴實相寺’라는 것이다. 지리산의 남쪽은 청학이 북쪽에는 백학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다. 남쪽으로 날아간 청학은 쌍계사(雙溪寺)가 되었고, 북쪽으로 날아온 백학은 실상사(實相寺)가 되었다는 설화이다. 선가(仙家)에서 불가(佛家), 학이 사찰이라는 데로 상징이 넘어가는 장면이다.

지리산 남쪽에서 보통 사람들이 가장 살기에 좋은 곳은 악양(岳陽)이다. 묏부리 악()이다. 지리산 남쪽의 양기가 뭉쳐 있는 지점이다. 악양 평사리는 원래 신선들이 살만한 동천(洞天)이었다. 들판이 넓어서 곡식이 풍부하다. 수천명이 살 수 있는 식량을 산출하는 들판이다. 그 넓은 들판 앞으로는 은빛 반짝이는 섬진강이 흐른다. 섬진강에는 은어와 재첩, 그리고 각종 물고기들이 풍부하다.

한국에서 배산임수의 교과서적인 입지조건을 갖춘 곳 가운데, 평사리만한 곳도 드물다. 평사리 뒤쪽으로는 1천 미터가 넘는 지리산 영봉(靈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 있다. 거기에다가 온갖 약초는 다 있다. 이 약초만 뜯어 먹어도 산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 이 평사리 일대에는 근래 10년 넘게 수백명의 방외지사(方外之士)들이 전국에서 숨어 들어와 살고 있다. 스님, 도사, 작가, 예술가, 건달, 낙오자 등등이 이 동네의 시골집을 하나씩 구해서 내부시설만 간단하게 고쳐 살고 있다. 보통 토굴이라 부른다.

악양은 독특한 분위기다. 체제를 벗어난 해방적 분위기가 있으면서도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이질적인 분위기가 있다. 다분히 탄트라적인 분위기이다. 이 방외지사들이 토굴 하나씩 장만해서 쏙닥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동네. 삶의 방식도 가지가지이다. 현재 직장 명예퇴직하고 귀촌(歸村)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도 바로 악양 평사리가 아닌가 싶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와 모악산에서 살다가 지리산으로 캠프를 이동한 박남준 시인을 만난 곳도 악양이 아니었던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산은 사회적 압박과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해방구였다.

방외지사의 천국을 보통 악양 알프스라고 부른다. 영남 알프스도 있지만, 악양 알프스도 있다. 평사리 주변을 둘러싼 봉우리들. 형제봉, 구재봉, 칠성봉, 깃대봉을 비롯한 7-8개의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빙 둘러싸고 있다. 이 코스를 한 바퀴 도는 것도 훌륭한 등산 코스이다. 뒷산을 도는 것이다. 뒷산이 있는것 하고 없는 것은 차이가 있다. 방에도 병풍이 하나 쳐져 있으면 분위기가 산다. 웬지 뒷심이 느껴지는 것이다.

 

/형제봉 정상부 주능선상의 바위협곡. /조선일보 DB

 

형제봉(兄弟峰). 1,150미터 높이다. 봉우리 2개가 형제처럼 있다고 해서 형제봉이다. 이 뒷산 봉우리 가운데 제일 높다. 형제봉 자락을 한참 타고 동네로 내려오다 보면 주막집이 하나 보인다. 제목은 ‘형제봉주막’이다. 시골 동네 구판장으로 쓰던 건물을 약간 개조하여 주막집으로 만들었다. 구판장이라 하면 구멍가게 비슷한 곳이다. 20평 남짓한 크기. 탁자를 4-5개 놓고 막걸리를 판다. 벽 주위에는 다녀간 사람들의 온갖 낙서가 어지럽게 붙어 있지만, 여기에 들어오면 웬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②편에 계속>

 

<①편에서 계속>
낭만적이다. 지리산 형제봉 밑에 있는 주막집이라! 산속 주막집인 셈이다. 주인장인 송영복(1957년생). 삶의 압박에 시달리던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2009년도에 지리산 악양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 주막집을 열었다. 이 주막집 주인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욕심이 별로 없다. 욕심이 없어야 편하다.

크게 돈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도시 생활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 속에 들어와 주막집이나 하면서 사람들 만나 이야기 하고 노는 생활을 즐기는 한량과(閑良科)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귀를 가지고 있다. 들어주는 것도 공덕 아니던가! () 기운이 많다. 막걸리 한잔 하다가 흥이 나면 기타를 친다. 어둠이 내려 앉고 달만 떠 있는 지리산 산속 동네의 21세기 주막집에서 기타 소리를 듣는 느낌. 그거 참 묘하다.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고, 기도를 올렸던 이 형제봉 자락에서 기타 소리를 들으면서 막걸리 한잔을 하는 삶. ‘낫 배드’(not bad)이다. 지리산의 정기(精氣)가 나와 함께 있는데 무엇이 외롭단 말인가? 산에 들어오면 낮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 밤에는 다가온다. 불빛이 안 보이는 어둠. 이것이 음이다. 도시에서 느낄수 없는 어둠이다. 음이 부족해서 병이 생기는것 아닌가. 어둠이 되면 ‘寂然不動 感而遂通’(적연부동 감이수통:조용하게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어떤 느낌이 생기면서 사물의 이치와 통하게 된다)의 느낌이 다가온다.

형제봉 주막에는 지리산 동네의 이야기들이 모여든다. 그 중에서도 형제봉 산신이 도와줘서 목숨을 건진 이야기가 아주 솔깃하였다. 50대 초반의 토목 기술자가 있었다. 도로를 내고, 터널을 뚫고, 다리를 건설하는 기술자였다. 서울의 회사에서 죽어라고 일만 하던 이 중년 남자는 전원생활이 그리웠다. 산 밑에다가 토담집 하나 짓고 텃밭이나 가꾸며 살아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서울의 직장을 그만두기 전에는 불가능이다. 주말에라도 잠깐 내려갈 수 있는 시골집이 하나 없을까? 산 밑에 집 하나 장만하려고 여기 저기를 알아보려 다녔다. 그러던 중에 지리산 형제봉 자락에 전원주택이 하나 나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문제는 거리였다. 서울에서 지리산 형제봉 자락까지 오려면 5시간은 너끈히 걸리는 거리였다. 부인이 반대하였다.

 

/개나리와 벚꽃이 활짝 핀 가운데 지리산 노고단 정상에 눈이 쌓여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지리산까지 어떻게 갈려고? 거기에다가 집을 사 놓고 얼마나 이용하려고? 헛 돈 쓰지 마라고!’ 여자는 백화점을 좋아하고 남자는 산 밑의 토담집을 좋아한다. 여자는 문명을 좋아하고 남자는 자연을 좋아한다. 와이프는 대개 토담집 반대한다. 그 부인은 평소 알고 있던 도사님을 만나서 이 문제를 상의하였다. 심천(深泉) 선생이었다. 심천은 80년대 초반 서강대학 재학시절에 학교 앞에서 데모하다가 경찰 곤봉으로 정수리를 심하게 얻어 맞았다. 머리뼈에 금이 갈 정도의 중상이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요양하기 위해서 통도사의 산내의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암자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어느 정도 몸이 좋아지면서 불교 좌선의 맛을 알게 되었다. 앉아 있으면 저절로 2-3시간 동안 참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父母未生前’(부모미생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라는 화두가 자연스럽게 떠 올랐다. 나는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부모님 뱃속에 있기 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좌선을 하려고 방석에 앉아 있으면 이 화두가 떠올랐다. 그러던 어느날 그 의문이 사라지게 되었다. 의문이 사라지면서 몸의 기혈이 자동적으로 열리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전생과 미래가 눈에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게 혹시 잘못된 공부가 아닌가 싶어서 전국의 사찰을 돌면서 점검을 받으려 다녔다.

도가 높다는 제방의 선지식들을 친견하러 다녔다. 공부의 객관화 작업이었다. 내 공부가 과연 맞나? 엉뚱한 길로 가지는 않았는가? 그러다가 지리산 자락의 어느 수행자로부터 ‘금강경’의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에 대한 도담(道談)을 나누다가 가슴과 머리가 시원해지는 체험을 하였다. 키는 170센티 정도. 체격은 보통 체격이다. 이야기도 톤이 높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별로 화를 내는 경우가 없다. 항상 알듯 말듯한 웃음기를 띠고 있는 스타일이다.

심천 선생이 남편이 형제봉에 집을 사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부인으로부터 듣고 나서 어드바이스를 하였다.


“남편이 그동안 가족 벌어먹여 살린다고 직장에서 20년 넘게 고생하지 않았느냐. 그 보답으로 남편 벤츠 한 대 사준다고 생각하고 그 집을 사줘라. 남편이 전생에 형제봉 산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형제봉 밑에 집을 얻어 살게 되면 수명이 연장된다. 그러니 남편 의견에 반대하지 말고 집을 구하는데 동의해라!

형제봉에 집을 구하는 일과 남편 수명이 어떻게 상관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 인연의 쓰리쿠션은 참으로 복잡 미묘하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심천 선생에 대해 평소의 신뢰가 있었다. ‘무슨 까닭이 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셨겠지’하고 형제봉 밑에 매물로 나온 전원주택을 구입하였다. 은행 대출을 받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남편은 이 집을 사 놓고 기뻐서 잠이 안올 지경이었다. 금요일 오후에 회사 일이 끝나기만 하면 부리나케 5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형제봉 집으로 달려오곤 하였다. <③편에 계속>

 

③ 삼성의 운세가 나날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명당 덕택?

<②편에서 계속>
회사일이 힘들고 짜증날 때마다 지리산에 갈 생각하면 하면 그 짜증이 없어졌다. 서울에서 차를 몰고 악양 입구에 들어서면 마음의 고향에 들어선다는 설레임이 다가오곤 하였다. 이 남편은 시간 날때마다 집을 고치기 시작하였다. 토목 기술자였다. 전 주인이 쌓아 놓은 축대도 해체한 다음에 새로 쌓기로 하였다. 마당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포크레인도 부르고 작업 인부도 2-3명 불러서 공사를 시작하려고 할 즈음이었다. 그때 회사에서 마침 일이 생겼다. 남미(南美)에 출장갈 일이 생긴 것이다.

남미 어느 나라로부터 댐 공사를 수주 받았는데,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전문가들과 함께 현장을 사전 답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남미에 열흘정도 기간으로 출장가는 일은 드물게 발생하는 일이었다. 회사에서 출장비 1천만원 가량을 지원해주는 출장이었다. 본인도 남미에 여행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형제봉 집 고친다고 이미 인부도 오기로 했고, 공사 장비까지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도저히 출장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회사에는 ‘집 공사 때문에 출장을 못 가겠다’고 양해를 구하였다. 남미행 비행기를 아쉽지만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 뒤로 몇일 있다가 비극적인 뉴스를 들어야만 하였다.

 

/남미 헬기 추락사고 현장. /조선닷컴

 

남미에 출장 갔던 일행들이 현지에서 헬기가 추락하는 사고로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댐 공사 현장을 둘러보기 위하여 헬기를 타고 가다가 일행들이 죽는 사고였다. 그 뉴스를 접하면서 부인은 머리칼이 쭈빗 솟았다. ‘이럴수가 있는가! 어찌 이런 일이!’ 심천 선생이 말한 ‘남편이 수생(數生) 전부터 형제봉 산신과 인연이 있어서, 형제봉에 밑에서 살면 목숨을 연장한다는 말이 이 일이었단 말인가!’하는 상념이 번개처럼 스쳤다. 지리산 남쪽으로 내려온 끝자락인 악양에 차를 타고 들어설 때마다 2개의 봉우리가 서 있는 형제봉을 바라본다. 형제봉 산신이 정말로 있단 말인가? 악양의 봉우리 봉우리 마다 신령스런 기운이 감싸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전설은 과거완료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보통 사람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부동산과 開運

심천(深泉) 선생과 부동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부동산을 구입하면 이처럼 운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까?


“바뀔 수 있습니다.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운이 좋은 명당 터를 구입하면 그 터의 에너지를 그 구입한 사람이 받는 것 같습니다. 서울 신세계 백화점 터, 남산 밑에 있던 장충동 저택, 태평로 본관, 한남동의 승지원 터, 수원의 삼성전자 공장 터 들을 보면 대개 명당입니다. 이런 터를 구입할 때마다 삼성의 운이 한 단계씩 점프 하면서 올라갔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생 시절 살던 터가 있고, 중학생 때에 맞는 터가 있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 수준에 맞는 터로 이사갔다고나 할까요. 운이 바뀔때마다 좋은 명당 터를 소유할 수 있기도 하고, 반대로 좋은 명당 터를 손에 얻음으로써 운이 바뀌는 수도 있습니다.


“형제봉 집 같은 경우도 그런 경우입니까?


“크게 보면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이 경우는 그 남편이 전생부터 형제봉과 인연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다른 사람이 형제봉에 산다고 해서 모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특수한 경우죠. 특별한 묘용(妙用)이 발생하는 터는 숙생(宿生)의 인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터와 그 사람이 전생부터 인연이 있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쉽게 이야기 하기가 힘든 부분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 될 수가 있지, 이건 어떤가, 저건 어떤가 하는 식으로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영발(靈發)의 세계는 붕어빵 찍듯이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발의 세계는 의도가 없고, 순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되어야 효험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이익을 위해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면 헛방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맞다가도 어떤 때는 전혀 맞지 않기도 한다.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어야 영발이 발생한다.

도덕경에 보면 ‘인법지’(人法地)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은 땅을 본 받는다’는 의미이다. ‘땅을 본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땅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영향을 어떻게 받지? 그 기운으로 받는다. 여기에서 기운, 즉 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본 받는다는 의미를 이해할수 없다. 대지(大地)에서는 기()가 방출되고 있다. 이 땅의 기운은 인간의 뇌세포와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야 이해가 된다. 이 전제에 동의하지 못하면 ‘인법지’의 깊은 의미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대지에는 기운이 작용한다고 믿었던 것이 인류의 수천년동안 전통이다. 그래서 대지를 지모신(地母神)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가이아’도 결국 지모신이라는 이야기이다.

명당은 지모신의 젖꼭지에 해당하는 지점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젖꼭지도 수천 종류이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젖이 진한 곳도 있고, 약한 곳도 있다. 어머니 젖을 먹고 힘을 내기 마련이다. 대학교에 들어가 활동량이 많아지면 젖의 양이 많이 나오는 곳에 터를 잡는 것이 좋다. 어떤 젖을 먹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총체적으로 풀이한다면 인연(因緣)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