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2021-02/
02-01(월) 회색 코뿔소와 검은 백조
누구나 위험 요소라는 것은 알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무심코 지나쳤다가 훗날 위기를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비유해서 ‘회색 코뿔소’라고 표현한다. 거구이지만 몸놀림이 날렵하고 날카로운 뿔까지 가진 회색 코뿔소가 위험한 동물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지만 이를 무시하고 다가갔다가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취지다. 예상하기 어려운 위기를 빗댄 ‘블랙 스완(검은 백조)’과 대비해서 쓰이기도 한다.
▷회색 코뿔소는 2013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미셸 부커가 처음 사용한 이후 중국 국가·기업 부채 등 문제의 심각성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중국 정부도 회색 코뿔소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28일 “각종 블랙 스완과 회색 코뿔소 사건에 잘 대비해야 한다”고 당에 주문했다. 미중 갈등, 확대된 유동성에 대한 대응 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2년 전에도 경제성장률 저하 등을 경계하며 블랙 스완과 회색 코뿔소를 언급했다.
▷코로나19 사태는 블랙 스완이었을까, 회색 코뿔소였을까. 코로나19라는 특정 바이러스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언젠가는 강력한 팬데믹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은 예측돼 왔기 때문에 회색 코뿔소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그런데도 충분히 대비하지 않았고, 코로나19 확산 이후에도 여러 국가가 미온적으로 대응하다 피해를 키웠다. “코로나19 사태의 교훈은 발생 가능성과 파급력이 큰 위험 요소를 무시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보여준 것”(영국 이코노미스트)이라는 지적은 따끔하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앞서 신종플루와 메르스 당시 겪었던 감염병 대응 인력·시설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방역체계 개편방안’까지 마련했지만 코로나19가 퍼지자 같은 문제가 재연됐다. 교정시설은 코로나19 확산의 최적 조건을 가리키는 3밀(밀집·밀접·밀폐)의 대표적 장소로 꼽히지만, 서울 동부구치소에서는 수용자들에게 마스크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고 결국 12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했다. 종교시설에서 확산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데도 신천지교회, 사랑제일교회, IM선교회 등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감염병은 작은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댐처럼 약한 고리가 남아 있으면 언제든 확산될 수 있다. 코로나19 초기 방역모범국이다가 외국인 노동자 숙소에서의 감염을 막지 못해 순식간에 코로나가 창궐됐던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코로나19에서 벗어날 시간을 앞당기려면 우리 주변에 또 다른 회색 코뿔소는 없는지부터 살펴봐야겠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2-02 환생
100kg이 넘는 소아용 인공심장 기계에 의지해 살아가던 다섯 살 현우(가명)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이제는 하늘나라로 떠난 고홍준 군(사망 당시 아홉 살)으로부터 진짜 심장을 이식받았다. 병실 침대에서만 살아야 했던 현우에게 새 삶이 생겼다. 홍준이는 현우에게만 장기를 준 게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세상을 뜨면서 심장, 간, 폐, 신장 두 개, 각막 두 개 등 일곱 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했다.
▷동아일보가 지난해 창간 100주년을 맞아 출범시킨 히어로콘텐츠팀 2기의 기획연재보도 ‘환생: 삶을 나눈 사람들’은 국내 장기기증의 현황을 다룬다. 국내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은 장기 기증자와 이식 수혜자를 서로 알 수 없게 하지만 동아일보는 공익적 목적일 경우 정보공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관련법을 활용해 취재했다. 서로에 대해 알고 싶어도 알아선 안 되지만 삶을 나눈 홍준이와 현우…. 현우 가족은 “기사를 통해서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심장을 받은 현우와 가족의 큰 기쁨이야 충분히 상상이 된다. 다만 어린 아들의 일부를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고 하늘로 보낸 부모의 마음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들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뜬 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그들은 큰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취재진이 홍준이 것이었던 현우의 건강한 심장 박동 동영상과 심전도 그래프를 보여주자 홍준이 아버지는 오열했다고 한다. “현우를 ‘마음으로 낳은 아이’라 해도 될까요. 세월이 흐르면 이제 몇 학년이 되는구나, 이 계절엔 소풍도 가겠구나 떠올릴게요.”
▷국내 장기이식법이 제정된 지 20년. 여전히 장기기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아 지난해 뇌사 장기기증자는 478명에 그쳤다. 뇌사자가 장기기증을 했다고 하면 마치 깨어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연명의료를 중단한 것처럼 잘못 인식돼 괜한 오해를 받기 일쑤다. 장기기증 유가족에게 정부가 장제비를 지급하는 걸 두고 ‘장기를 팔았다’란 비난도 한다. 윤리적 평가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장기기증자 기념공원을 건립해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고 떠난 이들과 가족에게 사회적 존경을 담자고 제안한다. 장기기증은 명예로운 일이라는 걸 미래 세대가 알게 하자는 것이다.
▷이해인 수녀의 시 ‘삶’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내 몸 속에 길을 낸 혈관 속에 사랑은 살아서 콸콸 흐르고 있다.’ 장기이식에 무관심한 사람이 많지만 보석 같은 눈과 심장을 사랑의 선물로 주고 떠나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 있다. 그들의 사랑이 새 육신들에 심어져 생명의 샘처럼 솟아 흐른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2-03 공매도 대전
‘투더문(to the moon).’ 요즘 미국 온라인 주식토론방에서 유행하는 구호다. 게임스톱이라는 회사 주가가 계속 치솟아 달에 닿을 것이란 뜻이다. 지난해 봄 2.8달러이던 이 회사 주가는 최근 469달러까지 올랐다. 이는 1월 중순부터 벌어진 공매도 전쟁 때문이다. 헤지펀드는 ‘내린다’에 걸었고 개인은 ‘오른다’에 ‘올인’했다. 주가가 오르면 헤지펀드가 죽고, 떨어지면 개인이 치명적 내상을 입는다. 참전한 개인이 살 길은 똘똘 뭉쳐 주가를 올리는 방법밖에 없다.
▷지난 주말 미국 뉴욕 맨해튼 주코티파크에는 헤지펀드 공매도에 분노한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구호는 ‘Reoccupy Wall Street(월가를 다시 점령하라)’였다. 주코티파크는 2011년 벌어진 월가 점령 시위 장소다. 당시 구호는 ‘We are 99%(우리가 99%)’. 소수의 탐욕스러운 거대 자본에 늘 당했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이 10년 전에는 노숙 농성에 그쳤다면, 이번엔 조직적으로 뭉쳐 공매도 전쟁까지 벌이고 있다.
▷일부 한국 개인투자자도 전의(戰意)를 불태우고 있다.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한투연)는 “(3월 만료인) 공매도 금지를 연장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개선하지 않으면 단체 주주행동에 나서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기관투자자가 공매도를 시도하면 해당 종목의 주가를 끌어올려 ‘한국판 게임스톱’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미국 헤지펀드들은 1월 한 달 동안 개인과 벌인 공매도 공방에서 약 22조 원의 손실을 봤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에서 공매도를 둘러싼 홍보전도 뜨겁다. 한투연은 2월 1일부터 “나는 공매도가 싫어요”라는 문구를 단 버스를 운행 중이다. 미국 개인투자자들은 뉴욕과 오클라호마시티 등에서 헤지펀드에 대항해 게임스톱 주식을 계속 사들이자는 내용의 전광판 광고를 했다. 두 나라 정치인들은 대체로 개인투자자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반면 백악관은 ‘예의 주시’라는 중립 입장이고, 미국 검찰과 증권거래소는 겉으론 중립이지만 개인투자자의 주가 조작도 의심하고 있다.
▷한국 금융당국은 공매도 금지 연장 쪽으로 기운 듯하다. 금지 만료 시한인 3월 15일에서 3개월 더 연장하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한다. 연장하더라도 3개월 시간을 벌었을 뿐 공매도 공방은 또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업 가치와 무관하게 주가가 급등락을 반복하면 증시는 제 기능을 잃고 선의의 피해자만 양산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제도가 완벽할 수는 없다. 개인의 공매도 참여를 확대하든 공매도 종목을 제한하든, 끊임없이 제도를 개선해 시장 참여자가 분노할 여지를 줄이는 길밖에 없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2-04 日 제국호텔의 변신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에 리히터 규모 7.9의 간토대지진이 일어났다. 하코네산에서 도쿄 도심에 이르기까지 화염이 몰아쳤다. 그런데 살아남은 건물이 있었다. 메이지 시대인 1890년 설립됐다가 바로 이날 새 건물로 문을 연 제국호텔이다. 대지진을 견뎌내고 이재민 구제 장소로 활용되면서 이 호텔과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일본 문화를 흠모했던 라이트는 서구식 건물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당시의 도쿄에 일본 전통가옥 형태로 이 호텔을 지어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줬다. 각국의 주요 정·재계 인사들이 이 호텔을 찾았다. 배우 메릴린 먼로도 신혼여행을 왔다. 1970년엔 지금의 17층 고층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고쿄(皇居·일왕의 거처)가 내려다보이는 객실, 일왕 가족이 사용하는 펜트하우스, 로비의 대형 이케바나(生花·꽃꽂이), 아리타(有田) 도자기와 기모노를 파는 지하 아케이드까지 모든 게 ‘일본식 럭셔리’다.
▷간토대지진에도 끄떡없던 제국호텔이 코로나에 무릎을 꿇었다. 제국호텔은 이달 1일부터 서비스 아파트먼트 사업을 시작했다. 코로나로 호텔 가동률이 10%대로 급락해 ‘호텔만이 가능한’ 신사업을 하겠다고 한다. 전체 객실의 10%인 99개 객실을 아파트처럼 개조해 임대료를 받는 형태다. 30박 기준으로 30m²(약 9평) 객실은 36만 엔(약 380만 원), 50m²(15평)는 60만 엔(640만 원)이다. 룸서비스 식사와 세탁 서비스도 각각 월 6만 엔(63만 원)과 3만 엔(31만 원)에 받을 수 있다. 게다가 피트니스센터와 수영장은 무료다.
▷도쿄 부도심의 주거지는 평당 월세가 1만 엔(약 11만 원) 정도다. 그런데 도심 한복판의 제국호텔이 돈만 내면 호텔을 집처럼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월세 임대시장에 호텔이 도전장을 던진 셈이다. 서비스 경쟁력도 쟁쟁하다. 일본 뷔페식당의 원조가 제국호텔의 ‘임피리얼 바이킹’(1958년)이다. 배우 키아누 리브스도 영화 ‘코드명 J’에서 “셔츠를 세탁하고 싶다. 가능하면 도쿄 제국호텔에서”라고 했을 정도다.
▷국내 호텔업계도 코로나 직격탄을 맞았다. 외국인 관광객이 줄어 2019년 67%대이던 호텔 객실 이용률이 20%대로 떨어졌다. 서울 강남의 첫 특급호텔이던 40년 역사의 5성급 쉐라톤서울팔래스강남도 곧 헐린다. 3, 4성급의 경영난은 말할 것도 없다. 해외여행 못 하고, 5명 이상 밤 9시 이후 못 모이고,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뭘까. 이 질문에서부터 ‘호텔만이 가능한’ 신사업이 나올 것이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2-05 미나리와 halmoni
녹음이 우거진 시냇가. 어린 손자 데이빗이 할머니와 걷는다. 할머니가 한국에서 가져와 뿌린 미나리 씨가 알아서 잘 자라 밭을 이루었다. “데이빗아, 미나리는 잡초처럼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뽑아 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미나리를 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김치에도 넣어 먹고 찌개에도 넣어 먹고 아플 땐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이란다. 아이고, 바람 분다. 미나리가 고맙습니다, 땡큐 베리 머치 절하네.”
▷제78회 미국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 아칸소주로 이주해 농장을 일구는 한국인 이민자 가족 이야기다. 배우 윤여정(74)이 연기한 할머니는 깡촌에 정착한 딸과 사위를 도우러 한국에서 왔다. 상아색 원피스를 입고 와서는 고춧가루와 멸치를 풀어낸다. 감격한 딸이 울자 말한다. “야, 또 울어? 멸치 때문에 울어?” 한사코 안 받겠다는 딸에게 돈 봉투도 쥐여 준다.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작 정 감독(43)은 자전적 내용을 영화로 만들었다. 손자는 한국에 가 본 적도 없으면서 처음 만난 할머니에게서 한국 냄새가 난다고 한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노랫말이 TV에서 흘러나오자 할머니가 손자에게 말한다. “네 엄마 아빠 한국에서 누가 노래만 시키면 서로 두 눈에서 꿀물을 뚝뚝 흘리면서 저 노래만 불렀다.” 그랬나, 하는 딸에게 말한다. “여기 오더니 다 까먹었구나.” 지난해 영화 ‘기생충’으로 이 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은 “미나리는 결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뉘앙스로 가득한 영화”라고 한다.
▷할머니는 쿠키는 못 만들어도 화투는 가르친다. 손자가 물가의 뱀을 쫓으려 하자 삶의 지혜도 알려준다. “보이는 게 나아. 숨어 있는 게 더 위험한 거란다.” 딱 윤여정이다. 인생의 굴곡을 이겨내고 두려움 없이 도전해 온, 주인공만 고집하지 않으니 자유로운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최근 리얼리티 프로그램 ‘윤스테이’에서 보여주는 그의 글로벌 감각과 공감능력은 젊은층으로부터 존경받는다. ‘윤여정표 쿨함’의 비결은 부단한 자기 단련이다.
▷골든글로브 측은 영어대사 비중이 적다며 미나리를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올리고 윤여정은 여우조연상 후보로 지명하지 않았다. 미나리는 이민 세대인 부모가 집에서 모국어로 대화하는 미국의 속살을 다룬 ‘미국인 감독과 미국 자본에 의해 미국에서 촬영한’ 영화다. 영화를 본 미국인들은 ‘halmoni’(할머니)란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미나리는 뿌리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큰 울림을 준다. “미나리, 할머니, 땡큐 베리 머치!”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2-06 네이버 실검 폐지
‘진용진레전드로가겠습니다.’ 외계어 같은 이 문장이 지난해 2월 뜬금없이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실검) 1위에 올랐다. 알고 보니 당시 구독자가 140만 명이던 유튜버 진용진 씨가 “몇 명이 검색해야 1위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지금 당장 띄어쓰기 없이 ‘진용진…’을 검색해 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현상이었다. 실검 순위가 소수의 동원력에 따라 좌우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네이버가 16년간 운영해온 실검 서비스를 25일 폐지하기로 했다. “실검이 대중의 관심사를 대변한다고 보기 어려워졌다”는 이유에서다. 그동안 여론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자 지난해 4·15총선을 앞두고 중단한 적이 있는데 4월 7일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아예 없애기로 한 것이다. 카카오가 운영하는 다음은 지난해 총선 무렵 실검 서비스를 먼저 접었다. “실검이 사회 현상의 반영이 아닌, 현상의 시작점이 돼버렸다”는 반성과 함께였다.
▷포털 뉴스 이용자 10명 중 7명은 실검 순위를 확인한 후 뉴스를 본다. 그만큼 실검이 영향력을 발휘하자 순위에 오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먼저 아이돌 팬들이 ‘오후 3시 ○○그룹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키워드로 ‘실검 총공’에 나서면서 세를 과시했다. 정치 팬덤도 뒤따랐다. ‘조국구속’이 1위에 오르면 ‘조국수호’가 치고 올라오고, ‘문재인탄핵’이 1위를 하면 ‘문재인지지’가 역전하는 현상이 반복됐다.
▷기업들도 할인 이벤트를 미끼로 상품명을 실검에 띄우는 경쟁에 뛰어들었다. 1000만 원을 내면 실검 순위에 한 시간 떠 있게 해주는 업체가 있다는 뒷말도 있다. 2018년엔 네이버 실검 순위를 조작하다 포털 업무방해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도 나왔다. 기업은 실검 조작으로 홍보 효과를 보고, 네이버는 검색어를 클릭하면 뜨는 검색 광고 수수료로 떼돈을 버는 사이 소비자들만 왜곡된 정보로 피해를 봤다.
▷이제 실검이 순수한 여론의 반영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포털 이용자 76%가 실검 조작을 의심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특히 네이버가 지난해 10월 검색 알고리즘 조작으로 자사 쇼핑 상품이나 동영상을 경쟁사보다 우선 노출해 과징금 267억 원을 부과받으면서 실검에 대한 불신도 깊어졌다. ‘실검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다. 이용자 개개인의 관심사가 모여 의제를 설정한다는, 실검의 순기능을 기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현실은 소수의 ‘실검 사유화’로 인한 여론 왜곡이다. 연 매출 6조 원인 인터넷 기업이 실검 장사로 배를 불리며 건전한 여론 형성을 방해하는 서비스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08(월) 악어 입 그래프
악어 사육사들은 악어를 제압할 때 테이프로 입을 묶는다. 입을 벌리는 힘이 약해 테이프로도 안전하기 때문이다. 작은 악어들은 고무줄로 묶어도 입을 벌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악어가 입을 벌리면 무시무시한 흉기로 변한다. 악어의 벌린 입 모양에 빗댄 국가 재정 ‘악어 입 그래프’도 나라에 큰 위협이다. 줄어드는 세입을 아래턱, 늘어나는 세출을 위턱으로 보면 이 그래프는 지속적인 재정 악화를 나타낸다. 최근 안일환 기획재정부 2차관이 이런 그래프를 경고하고 나섰다.
▷악어 입 그래프는 일본이 한국에 소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재무장관회의 때 마나고 야스시 일본 재무성 주계국장(한국의 예산실장 격)이 한국 관료들 앞에서 꺼내 든 일본 정부의 세입과 세출 그래프였다. 1990년대 거품경제 붕괴로 빚을 내 복지예산을 늘리면서, 세출은 계속 위를 향하고 세입은 아래로 향하게 됐다. 그 결과 일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1990년 64%에서 지난해 266%까지 치솟았다.
▷안 차관은 “재정 지출의 불가역성을 경고한 일본의 악어 입 그래프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쓸 돈과 빚은 느는데 들어올 돈은 기대에 못 미친다는 뜻이다. 과거 연간 20조 원대였던 적자 국채 발행액이 지난해 102조 원으로 증가했고, 국가 채무는 1000조 원이 코앞이다. 반면 올해 국세 수입은 전년 대비 9조 원 이상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올해 50%를 돌파하고 2025년에는 65%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악어 입 그래프가 무서운 건 한번 벌어지면 다물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빚이 늘다 보면 다시 빚을 내 이자를 갚아야 한다. 올해 국채 이자로 지불해야 할 돈이 사상 처음으로 20조 원을 넘어서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사상 처음 인구가 줄었고, 일자리는 고용 재난 수준이다. 집안 살림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돈을 벌 식구는 줄고, 그나마 가장마저 실업 위기에 내몰린 상태로 봐야 한다.
▷한국과 달리 일본 세수는 2012년부터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준(準)기축통화인 엔화를 무제한 찍어낸 데다 일자리가 늘어난 덕분이다. 일본은 현재 구직자 100명당 106개의 일자리가 있다. 한국과는 처지가 완전히 다른 셈이다. 이런데도 한국 정치권은 코로나 재난지원을 명목으로 ‘빚내서 돈 풀기’ 경쟁을 하고 있다. 국민 빚을 국가 빚으로 바꾸자는 황당한 주장이 쏟아진다. 이대로라면 악어 입 앞에 놓인 먹잇감 같은 처지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2-09 한국적 장르 ‘웹툰’
2092년 우주 청소부 얘기를 다룬 ‘승리호’. 한국 최초의 우주 SF물인 이 영화가 코로나19로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5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하루 만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가 됐다. 영어 제목은 ‘Space sweepers(우주 청소부들)’인데 프랑스를 포함한 28개국에서 1위 자리를 쓸어 담았다. 원작인 홍작가의 웹툰 ‘승리호’의 힘이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대중문화계의 비주류이던 웹툰이 드라마와 영화의 흥행을 보장하는 킬러 콘텐츠로 떠올랐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웹툰 원작의 드라마 ‘스위트홈’은 56개국에서 인기 순위 10위 안에 진입했다. ‘경이로운 소문’도 넷플릭스 아시아 시장에서 인기순위 1위다. 2010년 ‘매리는 외박중’을 시작으로 웹툰 기반의 드라마는 80편이 넘게 제작됐다. 영화도 2008년 ‘바보’부터 ‘이끼’ ‘강철비’ ‘신과함께’ 등 약 30편이 개봉하면서 웹툰 영화 시대를 열었다.
▷웹툰의 경쟁력은 세계적이다. 종이 만화 시장에선 미국과 일본이 대세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세로 스크롤 방식의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웹툰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웹툰의 연간 글로벌 결제액은 1조3000억 원이 넘는다. 인터넷 만화는 영어로 ‘웹코믹’이라 하지만 한국 웹코믹은 ‘웹툰’이라는 고유 장르로 분류된다. 굳이 ‘K웹툰’이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 1회 업데이트를 통한 속도감 있는 전개와 독자 댓글 반응의 적극적 수용이 웹툰의 강점.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원작인 웹툰을 찾아보는 사람들도 많다. 웹툰 ‘승리호’도 어제 북미 프랑스 일본 인도네시아 플랫폼을 통해 연재를 시작했다.
▷웹툰의 힘은 무한한 상상력에서 나온다. 유명 작가와 문하생 중심의 폐쇄적인 도제식 생산 방식을 버리고 누구나 인터넷에 작품을 올려 이용자들의 평가를 받는 개방형 시스템을 선택한 결과다. 웹툰 작가 10명 중 7명이 만화 교육을 받지 않은 아웃사이더들인데 이들은 기존 문법에서 벗어나 로맨스 판타지, 일상 개그툰, 학원 일진물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다. 소재 빈곤에 허덕이던 드라마와 영화 시장이 웹툰의 검증된 이야기보따리에서 부활의 기회를 잡고 있다.
▷종이 만화 시장은 정체 상태이지만 디지털 만화는 두 자릿수 증가세로 올해는 시장 규모가 58억6200만 달러(약 6조5000억 원)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마블 코믹스는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엑스맨 시리즈로 미국 영화 시장을 먹여 살리고 있다. 민주적 생산 방식의 웹툰이 세계 이야기 시장에서 한류 콘텐츠의 영토를 얼마나 넓혀 나갈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10 중-러 백신의 반전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그제 러시아제 ‘스푸트니크V’ 백신과 관련해 “다양한 백신에 대해 문을 열어놓고 가능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뒤 러시아, 중국 백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미국, 영국 백신의 공급 차질로 백신 쟁탈전이 심화하면서 세계 각국 정부로선 ‘꿩 대신 닭’이라도 필요한 상황인데 꿩 못잖은 닭이란 평가까지 나오면서 반전이 시작됐다.
▷작년 8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가말레야 연구소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을 세계 최초로 승인했다. 이름도 냉전시대 로켓기술 경쟁에서 미국 기선을 제압한 첫 인공위성에서 따온 ‘스푸트니크V’로 지었다. 하지만 임상시험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서구 전문가들은 “이 백신을 맞는 건 러시안 룰렛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최근 국제의학지에 공개된 임상시험 결과 스푸트니크V의 예방 효과는 91.6%로 미국 백신들 못지않고 2∼6도의 상온 보관도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값도 20달러(약 2만2300원)로 화이자, 모더나의 절반 밑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스푸트니크V 자료가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푸틴과도 대화했다”고 말해 신뢰도가 더 높아졌다.
▷백신 접종 속도에서 이스라엘을 제치고 최근 1위에 오른 아랍에미리트(UAE)의 비결은 중국 백신 시노팜이었다. 작년 6월부터 시노팜 임상시험을 자국 내에서 진행한 UAE는 80% 정도의 예방 효과가 확인되자 12월 접종을 시작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국 협조를 받아 지난해 11월 접종한 것으로 알려진 백신도 시노팜일 가능성이 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나오긴 해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백신 지원을 무기로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백신 개발은 제약 바이오 화학 등 기초과학 역량의 종합 시험대다.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지난해 발표한 자연과학 연구 성과 지표에서 중국은 미국에 이은 2위로 9위인 한국을 크게 앞섰다. 러시아는 18위지만 구(舊)소련 시절 쌓은 기초과학 수준은 여전히 톱클래스로 평가된다. 게다가 백신 개발은 환자 수가 많을수록 유리하고, 마지막 단계엔 실험 중인 백신을 접종한 뒤 감염 위험을 감수할 인원까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지난해 한국 정부가 ‘K방역’ 성과를 자랑하면서 국산 백신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을 키울 때 전문가들 사이에서 “헛된 기대로 끝나기 쉽다”는 평가가 나왔다. 백신의 효능과 안전성이 확실하게 입증되고, 멈춰선 경제와 일상의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굳이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를 가릴 필요는 없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2-11 클럽하우스 민주주의
‘이런 신세계가 있나.’ 지난 주말 무렵부터 체험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국내에 본격 상륙한 음성 전용 소셜미디어 ‘클럽하우스(Clubhouse)’ 얘기다. 한 지인은 클럽하우스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떠올린다. ‘예전 아마추어 무선통신이 이런 분위기 아니었을까. 아직은 누가 인사를 하면 화들짝 놀라서 나가기 버튼을 누르게 된다.’
▷클럽하우스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인 폴 데이비슨과 구글 출신 로한 세스가 지난해 3월 개발한 음성 앱이다. 그런데 1일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게임스톱 주가와 관련해 이 앱에 참여해 토론하면서 인기가 치솟았다. 아직은 아이폰 운영체계에서만 가능하다 보니 중고 아이폰 거래가 늘어났을 정도다. 이 앱에서 금기 이슈 토론이 활발해지자 중국 당국은 이 앱의 접속을 막기까지 했다.
▷클럽하우스에 들어가려면 일단 기존 가입자로부터 받은 모바일 초대장 또는 지인의 수락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엔 직접 방을 만들어 청취자 중 일부를 발표자로 선정해 대화를 이끌거나 또는 다른 방에 청취자로 참여해 손 모양 버튼을 눌러 발언권을 받을 수 있다. 해외 유명 인사들이 만든 방에도 영어 등 외국어로 참여할 수 있다. 스타트업 분야 종사자가 초기에 몰려 관련 내용의 대화방이 많다가 최근엔 취미, 성대모사 방도 생겼다. 카카오톡 대화방의 음성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방 저 방에서 음성 대화가 진행되니 마치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광장) 같다. 클럽하우스의 세계에는 말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자유, 듣다가 조용히 떠날 수 있는 자유가 다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비싼 콘퍼런스에 가서 듣던 고급 정보를 침대에 누워 공짜로 편하게 듣고 격의 없이 질문할 수 있다. 클럽하우스 앱 대표 이미지는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용자 얼굴 사진으로 주기적으로 바뀐다. 요즘 세대가 원하는 참여, 연결, 평등, 성장, 레트로 감성이 다 들어 있다.
▷그중 최고는 코로나로 인해 대화에 목말랐던 세계인들을 목소리로 연결시킨 점이다. 사용자들은 “사람의 목소리 질감이 이토록 매력적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클럽하우스에서는 지식과 경험을 말로 잘 풀어내는 실력자가 힘을 갖는다. 고유한 콘텐츠가 있고 영어까지 잘하면 글로벌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양날의 검이다. 고수를 가려내지만 선동가의 육성에 여론몰이 장으로 변할 위험이 있다. 트위터는 ‘조리돌림’(다수에게 공개해 수치심을 주는 처벌), 텔레그램은 N번방 사건의 불명예를 낳았다. ‘클럽하우스 민주주의’의 향배는 사용자가 얼마나 스스로 정보 감별 능력을 키우는지에 달렸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2-15(월) 뉴욕 가는 쿠팡
“그건 미친 짓이야(That‘s insane).” 지난해 쿠팡에 합류한 전준희 부사장이 미국 동료들에게 들었던 얘기다. 여기서 미친 짓은 하루 만에 배송하는 한국 전자상거래 시스템이다. 요즘은 당일 배송까지 된다. ‘한국적’ 속도를 앞세운 쿠팡이 미국 뉴욕증시 상장을 추진 중이다. 쿠팡은 쿠폰이 팡팡 쏟아진다는 뜻이다. 이름부터 사업 모델까지 한국 느낌인 쿠팡이 뉴욕으로 가는 것은 자금 조달을 위해서다. 하지만 한국에서 금지된 차등의결권 획득도 뉴욕행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벤처업계는 보고 있다.
▷쿠팡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신고한 내용을 보면 쿠팡은 두 종류의 주식이 있다. 1주당 1표의 의결권을 가진 클래스A 주식과 1주당 29표의 의결권을 가진 클래스B 주식이다. 클래스B 주식은 창업자인 김범석 이사회 의장만 소유한다. 차등의결권을 가진 김 의장은 2%의 지분만 가져도 58%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제도는 미국과 유럽에서 도입하고 있는데 아시아에서도 확산되는 추세다. 한국은 1주당 1표의 의결권만 갖도록 규정하고 있다.
▷차등의결권을 주는 이유는 경영권 안정을 위해서다. 특히 벤처기업은 대규모 투자 유치가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경영진의 지분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걱정 하지 말고 경영과 혁신에 전념하라고 주는 게 차등의결권이다. 구글 페이스북 등 급성장한 혁신기업들이 창업자나 최고경영자에게 차등의결권을 주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나스닥에서 차등의결권을 가진 곳이 일반기업에 비해 매출은 2.9배, 영업이익은 4.5배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복수의결권이라는 이름으로 차등의결권 도입이 추진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통해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1주당 최대 10표의 복수의결권을 허용할 방침이다. 정부는 벤처기업의 성장 사다리로서 복수의결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일부 시민단체들은 복수의결권을 도입하면 경영진이 무능해도 제어할 수 없다며 반대하고 있다.
▷쿠팡의 미국행은 조금 아쉽다. 한국이 키운 거대 기업이 해외증시를 선택하는 데 규제 성격의 제도도 한몫했다는 분석 때문이다. 자본시장에는 국경이 없다. 좋은 시장에는 유망 기업들이 몰려들어 자본 유치와 투자가 이뤄진다. 홍콩과 싱가포르가 2018년 차등의결권을 허용한 것은 증시에 우량기업을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증시가 제2의 쿠팡을 유치하려면 차등의결권뿐만 아니라 기업 관련 제도 전반을 열린 자세로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2-16 서울시 연정(聯政)
“서울시 공동 운영에 합의하는 방식으로 야권 단일화를 해야 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판세가 갈수록 혼미해지자 국민의힘 경선 후보들이 ‘연립 지방정부’ ‘공동 지방정부’ 구상을 언급하고 나섰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등 제3지대 후보와의 단일화가 지지층을 결속시키는 ‘윈윈 효과’를 내려면 승자독식이 아니라 승자와 패자가 서울시 지방권력을 분담하는 데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선 국면에선 후보 단일화를 전제로 한 공동정부 구상이 종종 있긴 했다. 1997년 김대중-김종필의 ‘DJP연합’은 정권 창출을 이뤄냈다는 점에서는 성공 사례다. 물론 양측이 정치적 담판을 벌인 것일 뿐 법적으로 담보된 공동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중도에 깨지긴 했지만…. 2002년 대선 때는 공동정부를 염두에 두고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성사됐다가 선거일을 하루 앞두고 파국을 맞기도 했다. “공동정부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정몽준)는 것이다.
▷광역시도 차원에선 2014년 당시 남경필 경기지사가 연정 실험에 나선 전례가 있다. 부지사 같은 자리만 준 게 아니라 인사 정책 예산 등의 권한을 민주당 측과 상당 부분 공유했다. 남 지사로선 당시 경기도의회 다수당이었던 민주당의 협조 없이 도정을 운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과 더불어 ‘연정 실험’을 자신의 정치 브랜드로 만들어보겠다는 계산도 작용했다는 평가다. 3년가량 이어진 경기도 연정 실험은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막을 내렸다.
▷‘범야권 연립 지방정부’를 처음 언급한 건 지난해 12월 안 후보였다. 국민의힘에 입당하진 않겠지만 ‘같이 간다’는 시그널을 명확히 하고, 자신을 범야권을 대표하는 후보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였다. 당선을 전제로, 3석의 소수 정당만으로는 민주당이 시의회와 구청을 장악한 서울시 운영은커녕 정무직 자리도 채우기 힘들다는 현실적 한계까지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누가 단일후보를 시켜 줬느냐”고 일갈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약 2개월이 흘러 국민의힘 오세훈 나경원 후보가 공동정부 구상에 긍정 반응을 보이고 나선 데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현 정권에 비판적인 중도 보수층의 ‘무조건 단일화’ 압박 여론을 감안할 때 공동정부 메시지를 명확히 발신하는 게 다음 달 4일 당내 경선은 물론 제3지대 후보와의 범야권 후보 단일화 경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으로 보인다. 분명한 건 이번에 나온 공동정부 구상이 보선 이후 내년 3월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범야권 통합 플랫폼과 연결이 돼 있다는 점이다. 범야권의 연정 논의가 정치적 의미를 갖는 정치실험으로 이어질지, 각 후보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다 그대로 소멸할지 지켜볼 일이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02-17 ‘팔색조’ WTO 수장
아프리카 공주, 트러블메이커, 불굴의 전사…. 15일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최초의 여성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으로 추대된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67)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그런 요란한 수식어답게 그는 국제무대에서 한마디로 평하기 어려운, 팔색조처럼 복잡 미묘한 인물로 통한다. 지난해 WTO 선거전 도중 그의 미국 시민권 획득 사실이 밝혀져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고 일부 국가의 표심마저 헷갈리게 만든 게 대표적인 사례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대 말 비아프라 내전으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삶이 나아졌을 때 내가 가진 것을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자는 생각을 갖게 됐죠.” 2010년 세계은행 집행이사였던 오콘조이웨알라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개발경제 전문가가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나이지리아의 작은 마을 통치자인 오비(왕)의 딸로 태어난 그는 독립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 하루 한 끼도 먹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미국 유학은 화려한 이력의 시작이었다. 하버드대 우등 졸업, 매사추세츠공대(MIT) 석·박사를 거쳐 세계은행에서 20여 년간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넘버 2’ 자리인 집행이사까지 올랐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부름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재무장관을 지냈고 잠시 외교장관을 맡기도 했다. 당시 그는 부정부패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사 기질을 보여줬고, 그때 얻은 별명이 ‘오콘조-와할라’였다. 와할라는 현지어로 골칫거리(trouble)를 뜻한다.
▷그는 공교롭게도 한국인과 두 차례나 경쟁했다. 2012년 세계은행 총재 자리를 두고 한국계 미국인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지만 고배를 마셨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과 최종 결선까지 간 이번 WTO 선거에선 지난해 10월 회원국 다수의 지지를 받아 일찌감치 총장 자리를 예약했지만 3개월 넘게 기다려야 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공개 반대하면서 컨센서스(전체 합의) 방식의 추대 절차가 멈춰 섰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의 친중(親中) 성향을 문제 삼았다고 하지만, 그가 민주당 측과 가깝다는 정치적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아프리카 소년병 이야기를 다룬 소설(‘Beasts of No Nation’) 저자인 그의 큰아들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교통장관이 된 피트 부티지지의 하버드대 룸메이트이기도 했다. 한국은 미국의 정권교체가 마무리될 때까지 침묵하다 이달 초 후보 사퇴를 발표했다. 미국에 불가분의 동맹 관계를 보여줬는지는 모르지만 그간 쏟아진 국제사회의 눈총이 한국 외교에 많은 의문표를 던졌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02-18 구글의 두 얼굴
프랑스의 글로벌 스타트업 행사 ‘비바 테크놀로지’를 2018년 파리에서 참관했다. 구글 등 정보기술(IT) 업계 수장들이 대거 파리로 몰려온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란 건 따로 있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이었다. “사회적 책임을 지는 착한 기술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과는 다른 유럽만의 규제 모델을 만들겠습니다.” 이후 구글은 프랑스에 온라인 교육센터들을 지었다.
▷‘구글과의 전쟁’의 전초전이었다. 프랑스는 2019년 3월 구글이 돈 한 푼 안 내고 기사를 노출시킨다며 뉴스 사용료를 요구했다. 그해 7월엔 유럽연합(EU) 중 처음으로 디지털세(稅) 법안도 통과시켰다. 국경을 초월해 돈을 버는 미국 기업 구글이 프랑스에서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구글은 항복했다. 최근 프랑스 신문협회 격인 APIG에 뉴스 사용료로 3년간 7600만 달러(약 838억 원)를 내기로 했다. 뉴스 사용료 지불 법안을 만들겠다는 호주에서도 돈을 내기로 했다.
▷지난해 9월 구글은 모든 콘텐츠에 ‘인앱 결제’(자사 마켓에 입점한 앱 개발사에 적용하는 결제)를 의무화하며 수수료를 30% 떼겠다고 발표했다. 인도는 이 수수료를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의 소금세에 빗대며 반발했다. 인도의 150여 개 스타트업이 이에 대항하는 앱 장터를 만들겠다고 나서자 구글은 무릎을 꿇었다. 수수료 인상 시기를 인도에서는 2022년 4월까지로 미뤘다.
▷한국은 미국과 인도에 이어 구글의 전 세계 매출을 이끄는 세 번째 나라다. 지난해 국내 모바일 앱 매출액 중 66.5%가 구글 앱 매출액(5조47억 원)으로 구글에 지급하는 연간 수수료가 무려 1조529억 원이다. 그런데도 구글은 지난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등 VIP 고객 국가를 홀대하더니 인도에서는 미룬 인앱 결제 의무화를 한국에서는 올해 말부터 적용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구글은 한국에서 최대 1568억 원을 더 벌게 된다.
▷구글은 1998년 창립 때부터 ‘전 세계 정보를 체계화해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강력한 검색엔진, 메일 포토 드라이브 등 무제한에 가까운 정보 저장 서비스로 시장을 평정했다. 기업의 이윤 활동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구글이 비싼 플랫폼 통행료(수수료)를 받아야겠다면 우는 아이 떡 주듯 하지 말고 정보의 정당한 비용(뉴스 사용료)부터 각국에 지불하는 게 맞다. 구글은 코로나19 시대 인류의 생필품이지만 개인정보 수집과 감시의 논란도 낳는다. 구글이 사회적 책임을 지려면 ‘사악해지지 말자’던 초심부터 되새겨야 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2-19 잠자는 ‘신사임당’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의 마크 카니 총재는 2016년 6월 기자회견장에 물을 채운 유리컵을 가져다 놓았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5파운드 지폐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물감이 든 컵에 담갔다가 뺐다. 돈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영상도 소개했다. 그래도 지폐는 멀쩡했다. 이렇게 내구성 좋은 지폐를 만드는 것은 각국 발권 당국의 목표 중 하나다. 한국도 해외 40개국에 수출할 정도로 돈을 잘 만든다. 하지만 오래가게 만들면 뭐하나. 돈은 시중에 돌지 않으면 제 역할을 못 한다.
▷지난해 한국 지폐 환수율이 관련 통계를 만들기 시작한 1992년 이래 최저인 40%로 떨어졌다. 지폐 10장을 찍어내면 4장만 환수되고, 나머지 6장은 장롱이든 금고든 어딘가 꽁꽁 숨어버리는 것이다. 직전인 2019년 환수율이 71.3%였으니 거의 반 토막이 됐다. 지폐 중에는 5만 원권의 환수율이 24.2%로 가장 낮았다. 지난해 추석 무렵엔 5만 원권 품귀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중에 돌아야 할 돈이 사라지면 비용을 들여 또 화폐를 찍어야 한다.
▷한국은행은 환수율 하락 이유로 코로나 사태와 저금리를 지목했다. 코로나 사태로 현금 거래가 많은 대면 소비가 크게 줄었다. 지폐가 환수되는 주요 경로가 ‘대면 서비스업→시중은행→한국은행’인데 이 고리가 시작점부터 위축된 것이다.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예비용 현금을 쌓아두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저금리 탓에 은행에 맡겨봐야 이자가 거의 없는 것도 현금 보유를 증가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코로나 사태와 저금리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그런데도 유독 한국만 지폐 환수율이 크게 떨어졌다. 최고액 지폐 환수율을 보면 미국이 70%대 후반이고, 유럽은 90%를 웃돈다. 이 때문에 탈세 등 불법거래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추측이 많다. 실제 상속세를 피하려고 지폐를 모으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최고 세율 50%인 상속세를 피해 현금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정용 금고 판매가 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전자 결제가 일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현금을 쓰는 일이 줄고 있다. 게다가 디지털 화폐도 선보이고 있다. 디지털 화폐는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와 달리 중앙은행이 발행하는데 중국은 이미 디지털 위안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전담조직을 꾸리고 선행 연구에 나섰다. 디지털 화폐는 코로나 등 전염병의 매개체가 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로 탈세나 돈세탁을 억제할 수도 있다고 한다. 첨단 기술 덕분에 ‘잠자는 신사임당’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2-20 ‘더 기빙 플레지’
지난 1년여 동안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45)만큼 ‘롤러코스터’를 탄 기업가도 드물 것이다. 2010년 창업해 국내 1위 배달 앱으로 키운 ‘배달의민족’(배민)을 2019년 말 40억 달러(약 4조4300억 원)에 독일 딜리버리히어로(DH)에 매각해 벤처 성공 신화를 이뤘지만 ‘알고 보니 게르만 민족’ 등 뒤따르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작년 4월 총선을 앞두고도 배민은 자영업자들이 내는 수수료 체계 개편을 시도했다가 “영세 상인을 착취하는 독점기업”(이재명 경기도지사) 등의 공격을 받고 포기해야 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11월 기업결합 승인 조건으로 DH의 자회사인 ‘요기요’ 매각을 요구하면서 인수합병(M&A) 무산 위기까지 맞았지만 결국 DH가 요기요를 팔기로 결정해 위기를 넘겼다.
▷김 의장이 한국인 중 첫 ‘더 기빙 플레지’ 회원이 됐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부부와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시작한 이 모임은 재산 10억 달러(약 1조1060억 원) 이상이고, 절반 이상 기부(give)를 서약(pledge)해야 가입할 수 있다. 재산이 1조 원 넘는 김 의장은 “자식들에게 주는 어떤 것들보다 최고의 유산이 될 것”이라고 서약문에 썼다.
▷서울예술대를 졸업하고 네이버 등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던 김 의장은 ‘치킨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쪄요’ 등 감각적 광고카피, ‘치믈리에 자격시험’ 같은 튀는 이벤트로 배민을 키웠다. 인구 100여 명인 전남 완도군 구도에서 태어나 부모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생활했던 그가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등에 이어 219번째 세계적 기부자가 됐다. 이 모임 회원 4명 중 3명은 김 의장 같은 자수성가형 기업가다.
▷이달 초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한국사회 문제 해결에 재산 절반(약 5조 원) 이상을 쓰겠다고 밝혔다. 단칸방에 살던 2남 3녀 중 맏아들로 “흙수저도 아니고 그냥 흙이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그는 “기업이 선한 의지를 가지면 사회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친지들에게 1450억 원어치 주식을 나눠준 것도 기부 덕에 미담이 됐다.
▷두 김 의장은 코로나19가 앞당긴 ‘언택트(비대면) 시대’ 최적의 기업을 창업했다는 게 공통점이다. 기부는 아니어도 밑바닥에서 출발해 세계적 게임기업을 키운 ‘3N’(넥슨 넷마블 엔씨소프트) 창업자들은 경쟁적으로 직원 처우를 개선해 다른 직장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막대한 기부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성공한 기업인을 보는 국민들의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꾼 게 이 ‘개천용’들이 한국 사회에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2-22(월) 소셜 버블
전에는 몰랐던 말들을 코로나19로 자주 쓰게 된다. 격리는 ‘쿼런틴(Quarantine)’, 격리 조치를 무시하는 10대는 ‘쿼런틴(Quaranteen)’이다. 재택근무는 WFH(Working From Home), 코로나 와중에 태어난 세대는 코로니얼(Coronnial)이라 한다. 정부가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를 개편하면서 도입을 검토 중인 방역 정책은 소셜 버블(Social Bubble)이다.
▷소셜 버블이란 가족이나 직장 동료처럼 일상을 공유하는 10명 내외의 사람들만 비눗방울로 싸듯 집단화해 버블 간 감염 확산을 막는 전략. 비눗방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자유롭게 접촉하되 버블 밖에선 철저히 마스크 쓰기와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 지난해 3월 방역 선진국인 뉴질랜드의 저신다 아던 총리가 봉쇄 조치를 발표하면서 “함께 사는 이들과 작은 버블 속에 있다고 생각하라. 바이러스가 버블 안에 없고, 우리가 버블 속에 있다면 우린 안전하다”라고 쉽게 설명한 것이 용어의 유래다.
▷소셜 버블은 감염의 위험을 통제하면서 거리 두기로 인한 고립감과 스트레스를 덜어 보자는 취지다. 뉴질랜드에 이어 캐나다 독일 영국에서도 시행 중인데 정부의 지침에 따라 감염이 확산되면 버블을 가족으로 제한했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간병인, 친척, 이웃 등으로 버블을 키운다. 어린 자녀의 사회성을 길러주기 위해 두세 가족이 하나의 버블을 만들 수도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은 지난해 6월 소셜 버블 정책을 시행했더니 일률적인 거리 두기를 적용했을 때보다 감염자 수가 3분의 1로 줄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소셜 버블은 터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작을수록 안전하고 1인당 하나의 버블에만 들어갈 수 있다. 두 가족 이상이 하나의 버블을 만들 경우 신체적 접촉의 수위나 가정 방문, 화장실 공유 문제, 버블 밖 행동반경 등에 대해 규칙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버블 밖에서 감염의 위험에 노출된 경우 즉시 버블 내 구성원에게 알려야 하며 조금이라도 찜찜하면 버블을 깨야 한다. 버블 형성 전 2주간의 자가 격리를 조언하는 전문가도 있다.
▷코로나의 장기화로 지속 가능한 방역 전략인 소셜 버블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가 일률적인 ‘5인 이상 모임 금지’ 대신 소셜 버블을 도입한다면 코로나 확산세에 따라 크고 작은 버블 속에서나마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셜 버블이 나와 비슷한 취향의 정보만 편식하는 ‘생각의 감옥’이 될까 봐 걱정이다. 몸은 소셜 버블에 갇혀 있더라도 마음은 다양한 이웃들의 사정과 생각을 향해 열어 두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2-23 코로나 블루
러시아 국민시인 고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요즘 그게 참 쉽지 않다. 코로나19가 인류에게 실존적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코로나 우울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에 이어 분노로 격화된 ‘코로나 레드’와 ‘코로나 블랙’이란 신조어도 등장했다.
▷지난해 코로나로 인해 기존의 ‘노멀 라이프’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졌다. 집에 갇혀 지내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사회와 공동체가 맡아야 할 돌봄의 역할이 대개의 가정에서 여성에게로 몰렸다. 엄마 또는 손자를 돌보는 조모나 외조모에게로. 82세 할머니까지 ‘82년생 김지영’이 되었다.
▷코로나는 일자리도 앗아갔다. 용도 폐기됐다는 고립감과 경제적 위협은 생명의 위협과 다를 바 없다. 원망과 불안이 마음에 쌓이면 몸에 고장을 일으킨다. 집 밖으로 아예 나오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병원체로 여기는 것도 문제다. 사회취약계층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동과 소통 등 인간의 기본 욕구가 막혀 ‘전 국민 우울경보’라도 내려야 할 판이다.
▷스코틀랜드의 자선단체 ‘모두를 위한 길(Path for all)’은 코로나 우울에 빠진 국민을 구제하기 위해 ‘자연과 함께 걷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바람과 숲을 느끼며 걷는 시간이 심신의 건강과 행복감을 가져온다는 믿음에서다. 최근 음성기반 소셜미디어인 클럽하우스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도, 타인의 취향을 조용하게 들려주는 팟캐스트나 명상 음원이 인기인 것도 코로나 우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일 수 있다.
▷색을 통해 심리적 치유를 얻는 컬러 세러피도 있다. 지난주 디지털로 열린 뉴욕패션위크는 암울한 지금보다는 밝아질 미래를 희망하며 달콤한 색들을 펼쳤다. 지난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 시를 낭송한 어맨다 고먼도 노란색 프라다 코트를 입었다. 글로벌 색채회사 팬톤이 올해의 색으로 노란색과 회색을 함께 선정한 것은 이 지긋지긋한 우울을 떨쳐내자는 다짐이다.
▷한 지인은 주말 새벽 수산시장에서 장을 봐 시집간 딸의 집으로 ‘아빠표 밀키트’를 보내주며 가족애를 다진다. 전문가들은 전화 통화, 식물 키우기, 산책 등이 마음 챙김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19세기 역병을 그 자신이 겪었던 푸시킨의 시는 이렇게 연결된다.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집단방역에 성공해도 끝이 아니다. 국가가 국민들의 심리적 정서적 후유증 관리에 적극 힘써야 한다. 한국형 코로나 블루에는 집값 폭등으로 인한 절망과 상실, 자영업자들의 눈물이 섞여 있다는 걸 새겨야 한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02-24 허위 거래로 집값 띄우기
돈, 세력, 공시. 주가 올리기에 동원되는 3요소다. 자금력을 갖춘 세력이 주식을 높은 값에 서로 사주는 한편, 해당 기업에서 호재를 공시하는 식이다. 그런데 돈도 세력도 없이 가격을 띄울 수 있는 시장이 있다. 요즘 일부 지역 주택시장이 그렇다고 한다. 시세보다 높은 값에 계약서 하나 쓰고 신고하면 끝이다. 정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은 높은 값을 그대로 ‘공시’해준다. 공개한 가격으로 시세가 굳어지면 계약을 바로 취소한다. 편법 집값 띄우기다.
▷지난해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등록했다가 취소한 주택 거래 3건 중 1건은 당시 기준으로 사상 최고가였다고 한다. 일부에서 허위 거래를 신고한 뒤 취소하는 방법으로 시세를 최고가로 끌어올렸다는 의혹이 커졌다. 자기들끼리 거래했다는 뜻에서 ‘부동산 자전거래’라고도 한다. 취소 거래 중 사상 최고가로 신고한 비율은 구매 대기 수요가 많은 서울과 울산에서 50%를 넘었다.
▷시장에서는 허위 거래의 배경으로 일부 주민의 담합을 지목한다. ‘얼마 이상은 받아야지’라는 공감대다. 부녀회에서 면적별 매매가를 지정해주는 곳이 있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중개업자와 주민들은 공생 관계다. 중개업자는 집값 띄우기에 적극 나서고, 주민들은 해당 중개업자에게 거래 일감을 몰아줄 수 있다. 서울 일부에선 재건축 조합장이 허위 계약서를 유포해 시세를 높였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시행업체도 종종 집값 띄우기에 나선다. 입주 초기, 분양가보다 높은 가격에 시세를 형성하기 위해서다. 이때 높은 값에 사들이는 쪽은 해당 업체와 특수 관계이거나 자회사인 경우가 많다. 시행사가 신축 단지의 초기 매매가를 정해주는 셈이다.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이 많은 곳에서는 높은 값에 허위 거래를 신고한 후 미분양 해소에 나서는 사례가 적지 않다.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을 허위 공시 창구로 활용하도록 정부가 방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고인은 취소하면 그만이고, 다른 포털에는 허위 가격이 그대로 남는다. 정부는 포털 관리와 함께 실거래가 신고를 공인중개사 입회하에 계약 당일 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다.
▷정부가 집값 급등 책임을 시세 조작 탓으로 돌린다는 비판이 많다. 실제 지난해 전국적으로 집값이 급등하면서 최고가가 쏟아졌던 만큼, 취소 거래 중에도 최고가 비율이 높은 게 당연한 측면이 있다. 취소된 거래 다수는 중복 등록 등 단순 실수로 알려졌다. 문제는 시세 조작이 먹힐 만한 환경이다. 인기 지역의 민간 주택 공급을 규제로 막아놓으니 조작됐다는 최고가에도 집이 팔리는 것이다. 투기꾼은 늘 실패한 정책을 활용한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02-25 ‘성폭행’ 드파르디외
“나의 사랑 팽조,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떠오릅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27세 연하 연인인 안 팽조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1962년 처음 만나 죽기 전까지 보낸 1218통의 러브레터 중 하나였다. 그는 부인 다니엘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상태였다. 팽조는 미테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함께 미테랑의 장례식에 참석하며 첫 공개 석상에 나왔다. 34년간의 밀회가 끝난 뒤였다.
▷프랑스 대통령의 스캔들은 낯설지 않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일본 여성과의 혼외 정사설이 나왔고,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전 대통령은 밀회 상대의 집에서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부인과 결혼을 유지하며 모델 카를라 브루니와 동거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은 한밤중 여배우인 연인 집에 가려고 스쿠터를 몰고 파리 거리를 달렸다. 성에 개방적인 프랑스여서 가능한 일이다.
▷17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73)가 2018년 8월 파리 자택에서 20대 여자 배우를 두 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고 주장했지만 검찰은 재조사를 통해 지난해 12월 기소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프랑스 대배우가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가해자가 되자 비난 여론도 뜨겁다.
▷드파르디외는 2014년 영화 ‘웰컴 투 뉴욕’에서 성범죄 가해자 역할을 맡았다.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유력 경제인이 미국 뉴욕에서 수많은 여성들과 환락을 즐기고, 호텔방을 청소하러 온 흑인 객실 청소 직원에게 성폭행을 시도해 몰락하는 얘기다. 이 영화는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실화를 각색한 것이다. 스트로스칸 전 총재의 국제적 망신 이후 프랑스 내 각성의 목소리가 높았고 관련 영화까지 나온 것이다. 그런데 드파르디외의 인생이 그 영화를 닮아가는 상황이다.
▷프랑스에서는 관대했던 성 인식이 권력과 연결되면 왜곡되고, 심지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미투 열풍’과 맞물려 커지고 있다. 베스트셀러 장편소설인 ‘동의(Le consentement)’를 통해 프랑스 문단 내 남성 원로 작가의 성폭력을 고발한 바네사 스프링고라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학대를 증언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난해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가 성폭행 의혹을 받거나 ‘미투’를 폄훼한 장관 2명을 임명하자 거센 비난이 이는 등 프랑스의 성 인식은 엄격해지고 있다. 정치적 계산에 따라 성폭력 가해자까지 감싸고도는 우리 정치권의 행태도 뿌리 뽑을 때가 됐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2-26 뉴스 사용료 부과법
페이스북은 최근 호주 정부가 언론사에 뉴스 사용료를 내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추진하자, 뉴스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호주 국민 중 40%가 평소 페이스북을 통해 뉴스를 봤기 때문에 불편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컸다. 일개 기업이 정보통제권을 휘두른다는 비판 또한 커졌다. 마크 맥가원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총리는 “페이스북이 북한 독재자처럼 군다”고 일갈했다.
▷호주 의회가 25일 구글, 페이스북 등 거대 플랫폼 기업에 뉴스 사용료를 부과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그동안 구글 등은 개별적으로 일부 언론사와 뉴스 사용 계약을 맺어 왔는데 법으로 사용료 지급을 명시한 것은 세계 최초다. 구글은 검색, 페이스북은 뉴스 서비스 중단을 꺼내며 법안 추진에 반대해 왔지만, 법안 통과 직전에 최근 호주 정부와 협상을 통해 합의점을 찾았다. 정부가 뉴스 사용료를 강제적으로 조정하기 전에 플랫폼과 언론사 간 자율적인 협상을 장려하는 쪽으로 법안이 수정됐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사용료 협상에 합의하면 법 적용에서 예외가 되기 때문에 구글 등은 호주 언론사와의 뉴스 사용료 협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호주가 관련법을 마련한 것은 플랫폼 기업들이 뉴스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면서도 언론사에 적절한 사용료를 지급하지 않아, 시장 왜곡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시장규제기구인 호주경쟁소비자위원회(ACCC)의 2018년 조사에 따르면 디지털 광고에 100달러가 투입된다면 이 가운데 구글이 53달러를, 페이스북이 28달러를 가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뉴스 사용료는 제대로 내지 않아 호주 언론사들의 경영 상황이 악화되고 있으며, 개별 언론사가 거대 플랫폼 기업을 상대로 문제를 바로잡기에도 한계가 있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 영국, 캐나다 등도 호주와 비슷한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EU는 ‘디지털 서비스법’ 등에 플랫폼 기업의 뉴스 사용료 지불을 명문화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캐나다도 수개월 안에 뉴스 사용료 부과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플랫폼 기업이 정당한 뉴스 사용료를 내도록 하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글로벌 기준에 맞게 거대 플랫폼과 국내 언론사 간 제대로 된 뉴스 사용료 부과 모델을 마련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구글, 페이스북 등은 국내에서 뉴스 서비스를 하면서도 ‘아웃링크’(플랫폼에서 클릭하면 언론사 홈페이지로 연결되는 것) 방식이라며 사용료를 내지 않아 왔다. 한국 정치권과 정부도 구글 등이 해외에서는 뉴스 사용료를 내면서도 한국에서는 갖은 이유를 대가며 어물쩍 넘어가는 상황을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
황인찬 논설위원 hic@donga.com
02-27 푸에블로호 배상 판결
1968년 1월 23일 동해에서 북한에 나포된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는 평양 대동강변에 전시돼 있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1866년 조선군과의 충돌 끝에 불타 침몰한 그 장소다. 북한은 그 격침을 주도한 영웅이 바로 김일성의 증조부였다고 선전한다. 원산에 있던 큰 함정이 어떻게 옮겨졌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은밀하게 남·서해를 거쳐 해상으로 운송했거나 분해해서 육로로 수송했을 테지만 둘 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태 이틀 뒤 발생한 푸에블로호 사건은 냉전시대 미국에 최악의 굴욕 사건이었다. 억류 승조원 83명(사망 유해 1구 포함) 석방을 위한 11개월의 밀고 당기는 비밀협상 끝에 미 육군 소장이 서명한 사과문은 이랬다. “영해에 침입해 엄중한 정탐행위를 한 데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고 엄숙히 사죄하며 앞으로 다시는….” 미국은 서명 전부터 ‘오로지 승조원 구출을 위해서였다’며 그 내용을 전면 부인하는 성명을 냈지만, 사과문은 북한의 선전 자료로 충분했다.
▷승조원들은 온갖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곳곳에 저항의 흔적을 남겼다. 단체사진에는 가운뎃손가락만 편 채 등장해 은근히 반항과 모욕의 뜻을 표시했고, 자백서에는 나이·군번을 허위로 적고 ‘김일성을 찬양한다’며 ‘pee on(오줌 누기)’처럼 들리는 ‘paean(찬가)’이란 단어를 썼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잠깐의 환영 이후 당국 조사와 의회 청문회, 그리고 고문 후유증이었다. 이들에게 전쟁포로 훈장이 수여된 것도 20여 년이 지난 1990년이었다.
▷푸에블로호는 미 해군 함정 리스트에 남아 있는 현역함이다. ‘아무도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No one left behind)’는 미군 원칙에 따라 언젠가는 되찾아 공식 퇴역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때문인지 푸에블로호는 북-미 관계의 부침에 따라 외교적 거래 또는 반환 촉구의 대상으로 떠오르곤 했다. 2000년대 초 북한의 반환 제의를 놓고 논의가 오갔지만 2차 북핵 위기로 무산됐고, 미 의회에선 때마다 반환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나오고 있다.
▷워싱턴 연방법원이 최근 북한에 푸에블로호 승조원과 가족, 유족 등 171명에게 23억 달러(약 2조5800억 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역대 미 법원이 명령한 북한 배상액 중 가장 큰 액수다. 이미 5억 달러 배상 판결을 받아낸 오토 웜비어 사망 사건처럼 앞으로 미국과 해외의 북한 자산을 압류해 배상액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가뜩이나 돌파구가 안 보이는 북-미 간 장기 교착 상태에는 악재가 또 하나 늘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