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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3/ 대중음악1/ 용어 설명 - 장르별 - 가요의 역사(복혜숙 - 고복수)

상림은내고향 2021. 2. 14. 12:28

음악 이야기3/ 대중음악

용어 설명 - 장르별 

· 디스코 [disco] 

    70년대 초 미국에선 라이브 연주 대신 레코딩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디스코텍이 유행했다. 이런 디스코텍에서 틀어주는 음악을 디스코라고 했다. 흑인음악 펑크(funk)에 뿌리둔 상업적 댄스곡 디스코는 70년대 중반 「도나 서머」 같은 스타가 탄생하고 수퍼그룹 「비지스」가 가세하면서 단숨에 팝계를 평정했다. 특히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는 전세계에 디스코 열병을 퍼뜨린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미국에서 디스코는 80년대 들어 자취를 감췄다. 명맥은 유럽에서 「유로 디스코」로 이어졌다. 80년대 중반 「모던 토킹」같은 밴드들이 선풍을 일으켰다. 지금도 「유로 댄스」에 리듬이 살아있다.   

 

·  [rap]

   속어로 ‘지껄이다’는 뜻. 70년대말 뉴욕 디스코 dj들이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다. 80년대 신보수주의로 흑인 상황이 악화하자 급진 정치적 거리문화로 확산됐다. 뉴욕을 중심한 ‘이스트코스트(동부 연안) 랩’, la를 중심한 ‘웨스트코스트(서부연안) 랩’으로 나뉜다. ‘동부 랩’은 사설을 툭툭 뱉는 반면, ‘서부 랩’은 이죽거리듯 늘어놓는다. 백인사회에 대한 저항과 살인, 마약, 폭력을 거침없이 담는다. 랩하는 사람은 래퍼(rapper)라 부른다. 90년대 일부 래퍼는 팝과 손잡아 대중 기반을 넓혔다.

 

·  레게 [reggae]

    50년대 서인도제도 자메이카 DJ들은 자기네 민속음악 ‘멘토’와 미국 ‘리듬앤블루스’를 섞은 흥겨운 리듬을 만들었다. ‘쿵짝쿵짝’하는 4박자 중 뒷 박자에 액센트를 주는 ‘스카’였다. 이 리듬은 60년대 들어 템포가 느려진 대신 묵직한 베이스 라인과 뒷 박자를 더욱 강조한 ‘레게’로 발전했다. ‘레게’는 자메이카 ‘저항 뮤지션’ 밥 말리가 영국 데뷔에 성공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레게’와 ‘스카’가 영국을 중심으로 뿌리내린 데는 당시 영국에 서인도제도 이민이 많이 유입됐던 사회-경제적 배경이 있다.

 

·  로큰롤 [rock & roll]

    로큰롤’이란 용어는 40년대 미국 흑인들 사이에 유행한 육감적 춤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다. 말 뜻 자체가 성행위를 암시한다. 55년 빌 헤일리가 ‘리듬 앤 블루스(R&B)’와 ‘컨트리 앤 웨스턴’을 섞어 만든 ‘록 어라운드 더 클록’이 인기를 얻으며 ‘로큰롤’이란 용어가 확산됐다는 게 정설. 하지만 초기엔 R&B와 동의어처럼 쓰였다고 한다. 백인 청중을 확보했던 R&B 계열 흑인 뮤지션 리틀 리처드와 척 베리가 ‘로큰롤 선구자’로 꼽히는 것도 그래서다. 비틀스, 롤링 스톤스 같은 60년대 백인 록밴드 대부분이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척 베리는 짧고 강렬한 기타 리프를 이용한 자극적 연주로 록사운드 전형을 보여줬다.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반항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음악과 이미지로 로큰롤을 대중화시킨 주인공. ‘로큰롤’은 영국 등 유럽으로 건너가 청년 하위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리듬앤블루스 [rhythm and blues]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블루스가 스윙같은 댄스풍 재즈와 섞여 태어난 흑인음악이다. 블루스보다 댄스비트가 강하고 리듬-멜로디도 대중적이다. 가사도 고단한 삶을 노래하던 블루스와 달리 쾌락적으로 흘렀다. r&b는 다시 백인음악 컨트리 앤 웨스턴(c&w)과 만나 현대 팝음악 주류 로큰롤(rock`n roll)을 낳는다. 그래서 초기 r&b 뮤지션 루이스 조던, 패츠 도미노, 보 디들리 등은 리틀 리처드-척 베리로 맥이 이어지는 「로큰롤의 흑인 선조들」로 불린다. 비틀즈, 롤링 스톤즈를 비롯한 60년대 백인 록밴드는 대부분 이들 영향을 크게 받는다.

 

·  모던록 [morden rock]

    70년대 말 디스코 열풍에 이어 80년대 여피들의 여가용 음악 「뉴 로맨틱스」가 음악시장을 점령하면서 「청년 반문화-저항음악」 록은 사망 선고를 받는다. 모던록은 전통적 록 시대가 이렇게 막을 내린 뒤 등장한 80년대 이래 록음악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60년대∼70년대와 달리 이 시기 록은 팝, 포크를 비롯한 다른 장르들과 활발한 경계 넘나들기를 해왔다. 때문에 음악적으로 모던록 개념은 아주 포괄적이다. 빌보드 모던록 차트만 봐도 전통적 의미의 록이라기보다 팝이나 포크, 테크노, 댄스에 가까운 음악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  모던재즈 [modern jazz ]

    194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현대적 재즈를 일컫는 말이다. 1900년 전후 태동한 초기 재즈는 빅밴드 춤곡이 풍미한 1930년대 ‘스윙’ 시대를 맞아 대중적 열광을 받았다. 그러나 젊은 실력파 연주자들은 꽉 짜인 빅밴드 편곡에 한정된 춤곡만 연주하는데 불만을 품었다. ‘모던 재즈 아버지’ 찰리 파커(알토 색소폰)를 비롯, 실로니어스 몽크(피아노), 디지 길레스피(트럼펫)가 변혁의 선봉에 섰다. 1940년대 들어 이들은 순간적 느낌을 살려 멜로디-리듬-화음을 자유롭게 바꾸는 즉흥연주, 복잡하고 분방한 멜로디와 사운드 변화가 특징인 ‘비밥(Bebop)’을 탄생시켰다. 재즈는 춤추기 위한 음악에서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탈바꿈했다. 현대적 의미의 재즈 토대가 놓인 1940년대 이후 ‘모던 재즈’ 계보는 ‘하드밥’ ‘프리 재즈’ ‘퓨전 재즈’ 등으로 이어졌다.

 

·  발라드 [ballard]

    원래는 중세 유럽의 이야기 형식 민요를 일컫는 말로 출발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조금씩 성격이 바뀌면서 19세기엔 영국 상류사회에서 유행하던 센티멘탈 가곡을 발라드라 부르기도 했다. 요즘 우리가 듣는 현대 대중음악에서는 분위기가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사랑노래(러브송)들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대개 템포는 느리다. 어떤 장르와 리듬을 골격으로 삼느냐에 따라 「팝발라드」 「록발라드」 「힙합발라드」 「r&b발라드」 「메틀발라드」 식으로 세분화 하기도 한다. 재즈에선 발라드 원곡의 멜로디를 살리며 즉흥연주하는 것을 따로 「발라드 연주」라고 한다.

 

·  브릿팝 [britpop]

    90년대 영국에선 기타 중심 록 사운드와 60년대 영국 팝을 접목한 음악이 고개를 들었다. 복고 느낌과 친근하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공통적인 이런 음악은 브릿팝으로 불렸다. 팝음악이 80년대 이후 힙합 테크노처럼 복잡하고 감각적인 리듬을 받아들인 것과 달리, 브릿팝은 대부분 단순하고 안정된 4분의4박자를 고집하는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모던록 개념이 너무 광범위해 모호하듯, 브릿팝도 어떤 한 범주로 묶기 힘들만큼 스타일이 다양하다. 같은 브릿팝 밴드라도, 60년대 로큰롤 스타일을 재현한 오아시스, 보다 정돈된 팝 사운드에 비틀즈 화성을 계승한 블러, 그런지 사운드에 팝 멜로디를 얹어낸 라디오헤드처럼 여러 색깔이다.

 

·  블루스 [blues]

    말 그대로 「슬픈(blue)」 음악인 블루스는 19세기 중엽 미국 흑인들이 슬픔과 절망을 노래한 민중가요로 태어났다. 초기엔 농촌을 떠도는 방랑시인같은 가수들이 불렀지만, 1920년대 「블루스 여왕」 베시 스미스같은 전문가수가 나왔다. 끈적하고 우울한 레#과 미, 시와 시# 사이의 묘한 불협화음 음계(블루 노트ㆍblue note)를 쓰고, 12마디를 반복하는 게 특징이다. 오늘날 듣는 비 비 킹, 앨버트 킹, 존 리 후커 등의 스타일은 1940년대에 정립된 「도시 블루스」다. 재즈 발생 토양이 됐고, 「로큰롤의 어머니」라 불릴만큼 20세기 대중음악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  비주얼 록 [visual rock]

    ‘비주얼 록’은 70년대 ‘글리터 록’과 ‘글램 록’에 뿌리를 대고 있다. glitter(광채)’ ‘glamorous(매혹적인)’라는 어원에서 보듯, 화려한 화장과 몸치장, 가식적 냄새가 강한 음악이 특징이다. ‘글리터’는 71년 짙게 화장하고 TV쇼에 나선 마크 볼란이 효시다. 글리터 밴드들은 주로 TV로 음악을 듣는 10대 소녀용 ‘쇼’를 추구, ‘타락한 록’이란 경멸을 받았다. ‘글램’은 데이비드 보위가 선구자다. 외견적 특징은 같지만, 록의 이념성을 거부하는 자의식을 지닌 점에서 ‘글리터’와 구분된다. ‘글램’은 70년대 중반 엘튼 존과 로드 스튜어트도 편승할만큼 유행했다. 그룹 ‘퀸’도 데뷔초 화려한 외모와 무대 매너 때문에 ‘마지막 글램 록 밴드’란 평을 들었다.

 

·  사이키델릭 [psychedelic music]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부터 요즘의 ‘테크노’까지, 많은 장르가 크게 영향받은 록 장르다. 마약에 취한 황홀경을 뜻하듯, 60년대 합성마약 LSD와 히피의 반문명사상이 맞물려 태어났다. 1943년 발명된 LSD는 미국과 영국에서 1966년 법적으로 금지됐다. 히피문화가 물결치던 대학가와 문화계에 널리 퍼진 뒤였다. 록계에선 환각 상태의 ‘자유 체험’을 색채감 풍부한 비선형적 사운드로 그리려는 욕구가 움텄다. 전통적 작법을 무시한 동양적 음계와 악기, 기타 이펙트와 기계적으로 변조된 사운드 등으로 몽환적 의식 상태를 표현했다. 미국 ‘버즈’와 영국 ‘야드버즈’의 실험에 이어, 비틀스가 새로운 음악 방법론으로 발전시켰다고 평가된다. 반면, 포크록-블루스록 틀을 유지한채, 자연회귀-반문명 사상을 노래한 그룹들도 ‘사이키델릭’ 계열로 분류한다.

 

·  샘플링 [sampling]

    전자기술은 80년대 중반 샘플러(sampler)를 탄생시켰다. 악기와 목소리는 물론 자연음까지 손쉽게 음원(source)으로 만들고 재생하는 기계였다. 샘플러 탄생은 미리 심어놓은 음원만 재생하는 신디사이저의 한계를 깨는 「소리 혁명」이었다. 곧이어 기타 드럼 베이스 같은 악기 연주를 새로 녹음하지 않고, 기존 팝-클래식 음반의 연주 음원을 그대로 따서 쓰는 샘플링(sampling) 기법이 등장했다. 미국 래퍼 퍼프 대디는 히트 팝송을 샘플링한 노래들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샘플링은 표절에 대한 전통적 기준 자체를 뒤흔들만큼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스윙 [swing]

    대공황으로 고통받던 미국인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효과를 거둔 1935년 쯤부터 실업과 생활고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라디오에선 희망이 움트는 시대 분위기에 맞게 경쾌하고 신나는 음악이 유행했다. 「검둥이 음악」 재즈를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 퍼뜨린 「스윙 재즈」였다. 스윙은 1920년대 빅밴드 재즈 댄스를 백인 취향으로 바꾼 음악이다. 재즈에 매력을 느끼던 일부 백인 뮤지션들이 백인 입맛을 가미해 대중화시키려고 노력한 결실이었다. 그래서 당시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던 스윙 스타들도 베니 굿맨, 글렌 밀러, 지미 도시 등 백인 일색이었다. 하지만 씨앗은 흑인들이 뿌렸다. 그중에도 30년대 초 뉴욕에서 활동하던 「재즈의 전설」 듀크 엘링턴은 몇년 뒤의 스윙 붐에 불씨를 지핀 「스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  스타시스템 [Star System]

    대중매체 시대와 더불어 등장한 ‘대중 스타’는 20세기를 특징짓는 문화현상이다. 현대인들은 거의 매일 tv-신문-광고 같은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스타’라는 ‘문화 상품’을 소비하며 산다. ‘스타시스템’은 이런 스타가 탄생하고 관리-활용되는 과정을 일컫는다.

 

·  싱어송라이터 [singer-songwriter ]

    영어 그대로, 가수(singer)이자 직접 작사-작곡도 하는 사람(song writer)이다.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60년대 포크(folk)시대부터다. 50년대 말 불붙은 포크 열기는 60년대 초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흑인민권운동 같은 정치운동과 맞물리며 폭발했다. 이런 포크, 그리고 포크와 록을 결합한 60년대 중반 포크록 계열에선 자작곡을 부르는 가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포크 뮤지션은 작곡 도구로 적합한 악기인 통기타에 능했다. 통기타 한 대로 자기가 만든 노래를 연주하며 부를 수 있는 포크는 이들의 작곡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개인적 세계관을 담은 메시지나 시적 가사를 주로 노래하던 음악 경향도 한 몫했다. 밥 딜런, 폴 사이먼, 닐 영 등은 그 시절 대표적 싱어송라이터들이다
대중음악에선 제작자가 신인을 발굴, 대중의 입맛에 맞게 음악과 이미지를 포장해 상품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있다. 그러나 점점 정교해지는 상업적 포장술과 대중매체의 ‘몰아주기’로 뮤지션들의 창조적 역할이 위축되면서 ‘스타시스템’이란 말은 흔히 부정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  어쿠스틱 [acoustic]

    음악 기사에선 ‘어쿠스틱 악기’ ‘어쿠스틱 연주’ 같은 표현을 종종 접하게 된다. 사전적으로 ‘어쿠스틱’ 은 ‘음향의’ 란 형용사, 복수 ‘어쿠스틱스’는 ‘음향학’ 이다. 그러나 음악에서 얘기할 때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자연적 악기 소리를 가리킨다. ‘일렉(트릭) 기타’ 와 대비되는 통기타를 비롯, 전기적으로 소리를 증폭시키지 않은 드럼 피아노 베이스 관악기 현악기 등이 ‘어쿠스틱 악기’ 다. 반면, ‘일렉 베이스’ 나 ‘일렉 바이올린’ 처럼 전기 증폭 장치를 달면 어쿠스틱이 아니다. 그래서 ‘어쿠스틱 연주’ 는 ‘전기 플러그를 뺀다’ 는 의미인 ‘언플러그드(Unplugged)’ 와 동의어로 쓰인다. 일렉 기타-베이스 등을 사용한 라이브 연주로 녹음한 음반을 컴퓨터 샘플링과 구별하려고 ‘어쿠스틱’ 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표현이다.

 

·  얼터너티브 [alternative]

80년대 초 여피들의 여가용 음악 「뉴 로맨틱스」가 시장을 점령하면서 전통 록은 사망선고를 받았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u2」 등 몇몇 뮤지션이 분투했지만, 탐욕스런 음악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인디 록」이 움텄다. 펑크(punk)가 주도한 이 흐름은 80년대 중반부터 헤비메틀 등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수용했다. 주류 음악시장 규칙과 관습적 사운드를 거부하는 이런 록은 「대안(대안)」이란 뜻인 「얼터너티브」로 불렸다. 「장르」가 아니라 「음악하는 태도」를 일컫는 용어였다. 그러나 90년대 「너바나」 같은 밴드들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며 「얼터너티브」는 자기모순에 빠졌다. 거부 대상인 주류 시장에 편입됨으로써 존재 의미를 잃은 것이다.

 

·  LA메틀 [L.A. metal]

    70년대 태동한 ‘헤비 메탈’은 “록음악이 아니다. 중금속 (heavy metal)을 내리치는 소리같다”는 초기 혹평에도 불구하고 몇년만에 록음악 주류로 떠올랐다. 이후 황금기를 누리던 헤비 메탈 진영은 70년대 말 일부 밴드가 우중충한 가죽재킷과 굉음 대신 화려한 의상에 소녀 취향 록발라드를 선보이며 내분에 빠졌다. 격한 사운드로 블루 컬러 백인 10대의 저항을 대변하던 ‘메탈 정신’에 대한 반란이었다. ‘본조비’ ‘포이즌’ ‘스키드 로’ ‘데프 레퍼드’ 같은 이런 밴드들의 음악은 ‘헤비 메탈’과 대비해 ‘라이트 메탈’이라고 불렀다. 그중 LA 지역에서 활동한 ‘머틀리 크루’ ‘래트’ 같은 밴드들은 따로 ‘LA 메탈’이란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라이트 메탈’계열 음악을 뭉뚱그려 ‘LA 메탈’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  인더스트리얼 [industrial music]

    70년대 중-후반 잉글랜드 북부 공업지대에서는 상업화-보수화되던 대중음악 경향을 거부하는 급진적 실험이 움텄다. 전자음향을 음악에 이용해 현대 산업사회의 인간 상실을 고발하려는 흐름이었다. 이들은 전통적 록음악 리듬과 코드를 무시하고, 전자적으로 왜곡시킨 온갖 소리와 잡음을 도입했다. 무대에선 충격적 퍼포먼스도 벌였다. ‘인더스트리얼’ 음악은 80년대 중반 미국에 건너가 헤비메털과 만나며 새롭게 꽃을 피웠다. 밴드 ‘미니스트리’를 이끌던 알 주르겐슨은 ‘인더스트리얼’의 전자음향 기법을 헤비메털 기타와 코드에 연결시켰다. 뒤이어 90년대 트렌트 레즈너는 원맨 밴드 ‘나인 인치 네일스’를 통해 돌풍을 일으키며 ‘인더스트리얼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 계보는 마릴린 맨슨으로 이어지고 있다.

 

·  인디게임 [indie game]  

    개인 개발자나 10명 내외의 소규모 개발팀이 적은 비용을 들여 만든 게임을 의미한다. 대규모 자본과 시스템에 좌우되지 않고, 게임 개발자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마음껏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참신한 콘텐츠를 찾는 비디오게임 업계가 인디게임을 적극 수용하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저예산 독립게임’이라고도 부른다

 

·  인디레이블 [Independent lable]

    줄여서 ‘인디’라고 한다. ‘메이저’로 불리는 대형 음반사 축에 끼지 못하는 소규모 음반사를 말한다. 우리말로는 ‘독립 음반사’인 이런 소규모 음반사는 흔히 ‘음악산업 혈맥’이라 일컬어진다. 몸집이 커서 유연성이 부족한 메이저들과 달리 새로운 음악 장르와 스타일을 시도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인디’라고 하면 흔히 ‘실험’과 ‘저항’을 떠올리는 이유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음악산업이 발달된 나라일수록 ‘인디’들의 역할이 크다. ‘인디 밴드’는 그런 인디 레이블을 거점으로 음반을 내고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 밴드를 뜻한다.

 

·  재즈 [jazz]

    재즈는 1900년 전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뉴올리언스는 16세기 이후 스페인, 프랑스, 영국 지배를 거친 도시다. 거기에 노예로 끌려온 흑인 문화가 가미됐다. 그처럼 복잡한 문화 배경을 지닌 뉴올리언스 흑인들은 아프리카 리듬에 대한 기억, 노동가와 블루스, 백인 민요와 클래식이 뒤섞인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초기 재즈는 「스트로빌」이란 홍등가에서 번성했다. 당시 공창은 2층부터만 영업이 허용됐다. 1층은 매춘부와 손님이 만나는 장소였다. 여기가 초기 재즈맨들의 주된 일터였다. 피아노 솔로나 현악트리오로 무드음악을 연주했다. 유곽 주변 싸구려 캬바레, 선술집, 클럽도 중요한 일터였다. 그러나 뉴올리언스 홍등가는 1917년 미국의 1차 대전 참전과 함께 폐쇄됐다. 실업자가 된 재즈맨들은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재즈는 미국 전역에 퍼졌다.

 

·  크로스오버 [crossover]

    다른 장르가 교차한다는 뜻의 음악용어 크로스오버가 본격적으로 쓰인 건 80년대 들어서다. 그러나 시기나 정의에 대해선 견해가 다양하다. 미국 캐서린 찰튼 교수는 80년대초 컨트리 가수들이 대거 팝차트에 진출하며 크로스오버란 말이 음악적 의미로 보편화됐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70년대 재즈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와 록을 결합해 대중화시킨 퓨전재즈도 오늘날엔 크로스오버로 일컫는다. 재즈를 포함한 대중음악 연주자-가수가 클래식을 변주(변주)하거나, 반대로 클래식 연주자-오케스트라가 팝을 연주해도 크로스오버라 한다. 80년대 로열필하모닉이 팝넘버로 선풍을 일으켰던 「훅트 온 클래식스」가 그런 예다 같은 대중음악 장르간 교차도 크로스오버라 부르고 있다. 반면, 빌보드 「팝-클래시컬 크로스오버」 차트는 런던필하모닉이 연주한 레드 제플린 히트곡처럼 대중음악과 클래식이 교류한 음악에 한정해 다룬다.

 

·  테크노 [techno]

    요즘은 전자음을 이용하는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을 뭉뚱그려 「테크노」라고 부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테크노」는 70년대 독일 전자음악 영향을 받아 80년대 초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탄생한 장르를 따로 일컫는다. 빠른 속도로 「붐---붐」 하며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리듬이 「테크노」 특징이다. 같은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이라도 「하우스(house)」는 디스코--펑크(funk) 같은 흑인 댄스음악을 믹스하는 과정에서 나와 태생과 리듬이 다르다. 테크노와 하우스는 80년대 중반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를 파생시켰고, 「애시드 하우스」는 유럽으로 건너가 백인 청년들의 댄스파티 레이브문화를 낳았다. 전자사운드를 힙합 비트와 섞어 몽롱한 분위기가 나는 「트립합(triphop)」은 영국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  트랜스 [Trance]

    테크노’에서 파생한 ‘일렉트로니카(전자음악)’ 장르다. ‘테크노’가 댄스음악을 주도하고 있는 유럽이 주된 무대다. ‘황홀경’ ‘무아경’이란 사전적 뜻처럼, 90년대 초반 일부 종류 마약이 합법화된 네델란드 클럽가에서 생겨났다는 게 정설이다. 차갑고 기계적인 정통 ‘테크노’에 비해 따뜻하고 서정적인 느낌이 강해 ‘부드러운 테크노’라고도 불린다. 멜로디가 두드러지고, 한 곡 안에 격한 감정과 서정성이 뒤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템포도 갑자기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식이다. ‘트랜스’의 급격한 감정 기복은 마약으로 몽롱한 환각 상태를 반영한다는 주장도 있다.

 

·  펑크(punk) [punk]

    너덜너덜 찢어진 옷차림, 형형색색 기괴한 머리, 쇠사슬처럼 음울한 장신구… 펑크 룩(punk look) 스타일에서도 보듯, 펑크는 음악 차원을 넘어 70년대 구미 청년세대의 문화현상이었다. 음악적으로 펑크 발생지가 미국인지 영국인지는 논란거리다. 하지만 76년 영국서 불붙었다는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섹스 피스톨스」는 우악스럽고 원시적인 사운드로 뒷골목 노동계급 청년들을 불러모았다. 모든 기존 질서에 시비와 조롱을 퍼부은 펑크는 당시 영국 사회의 암울한 상황을 자해적으로 표출한 「부정의 음악」이었다. 하지만 그런 야생성은 현실과 부대끼며 퇴조했고, 80년대 들어 사실상 소멸됐다. 런던 펑크는 70년대 말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록의 축이 됐다

 

·  퓨전재즈 [fusion jazz]

    전설적 재즈 뮤지션 마일즈 데이비스는 60년대 말 재즈에 전자사운드와 록 비트를 접목한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줄여서 흔히 「퓨전」이라고 말하는 「퓨전 재즈」의 탄생이었다. 60년대 후반 재즈는 상업적으로 무척 우울한 상황이었다. 많은 뮤지션들이 실험적이고 난해한 「프리 재즈」에 몰입해 대중들과 유리되고 있었다. 바로 이 때 마일즈 데이비스는 젊은이들을 사로잡던 록 사운드와 재즈에서 금기로 여기던 전자악기를 과감히 도입한 획기적 앨범 「비치즈 브루(bitches brew)」를 발표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재즈의 타락」이라고 혹평했지만, 대중들은 환호했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씨를 뿌린 재즈-록 퓨전은 70년대 들어 만개했다. 록과의 만남으로 장르 벽을 허문 재즈는 이후 다양한 음악들과 융화하며 지평을 넓혔고, 거꾸로 록뮤지션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  프로그레시브록 [Progressvie Rock]

   ‘프로그레시브’의 사전적 뜻은 ‘진보적’ 60년대 후반 상업적 조잡함을 탈피한 음악을 가리켜 나온 용어다. 그중 ‘프로그레시브 록’은 ‘예술음악’을 접목한 록음악 장르로, ‘아트 록’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 전통이 강한 영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60년대 후반 ‘비틀스’ ‘무디 블루스’ 등이 처음 시도했고, 70년대 들어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록밴드들이 대거 등장하고, 전자음향이 록음악에 본격 도입되면서 만개했다. ‘예스’ ‘제니시스’ ‘킹 크림슨’ 같은 밴드는 앞의 경우고, ‘사이키델릭 록’의 전자음향 실험을 발전시킨 ‘핑크 플로이드’는 뒤의 경우다.

 

·  헤비메탈 [heavy metal]

    헤비메탈’은 시끄럽고 공격적인 ‘하드 록(hard rock)’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드 록’이란 용어는 70년대 들어 ‘헤비메탈’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강력한 기타, 광포한 드럼, 고음으로 내지르는 샤우팅 보컬이 특징이다.
영국에선 ‘레드 제플린’ ‘주다스 프리스트’ ‘블랙 사바스’, 미국에선 ‘에어로스미스’ ‘키스’ ‘앨리스 쿠퍼’ 같은 밴드가 여기 속했다.


“그것은 록이 아니었다 중금속(heavy metal)을 내리치는 소리 같았다”는 평론가의 경멸적 표현에서 탄생했다는 어원에서 보듯, 원래는 정통 록 범주를 벗어난 음악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백인 노동계급 청년들과 10대의 하위문화로 각광받으면서 70년대 중반 이후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록음악의 주류로 떠올랐다.

 

■가요의 역사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 - 식민지백성의 서러움을 전한 고복수의 타향살이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가요해설가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시집 <물의 노래> <발견의 기쁨> <묵호> 14권 발간.
가요에세이 <번지없는 주막-한국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아서> 등 각종 저서 50여권 발간.
신동엽창작상,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경북문화상, 금복문화상 등을 받음.
대구MBC 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 프로의 MC로 활동.
현재 미국 워싱턴DC 소재 자유아시아방송(RFA) 라디오에서 <남북이 같이 듣는 노래> 프로를 매주 전화녹음으로 방송 중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 전국회장
현재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전도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 나온 개척기 한국 영화계의 선구

 한국의 대중문화사에서 초창기에 활동했던 분들은 대개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적어도 두 세 개 이상의 장르에 참가했던 경력들이 보입니다. 그 까닭은 당시 대중예술에 참가했던 인원이 적었던 탓도 있겠지만 장르간 분할과 독립이 확고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일손이 필요해서 부르면 즉시 달려가야 했을 것입니다.

 

연극배우가 영화에 자연스럽게 출연했었고, 또 가수로서 음반취입에 활용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강홍식, 전옥, 신카나리아, 최승희, 강석연, 김선초, 이경설, 이애리수, 왕평 등이 바로 그러한 표본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분야가 뚜렷하게 있지만 가수로서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고, 또 영화에 출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가요이야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복혜숙(卜惠淑, 19041982)에 관한 내용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복혜숙은 영화배우가 중심이었지요. 그리고 개척기 한국영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았던 대중문화계의 선구자였습니다.

 

 

복혜숙이 배우가 된 과정은 가히 운명적이라 할 만합니다. 1904년 충남 보령에서 기독교 전도사를 하던 복기업의 딸로 출생한 복혜숙은 어머니가 전도사업 때문에 오해를 받고 체포되어 옥중에서 고생을 할 때 어머니의 뱃속에서 함께 고생을 겪던 끝에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름도 성서에 나오는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복마리(卜馬利)였습니다.

 

나중에 목사가 되었던 아버지는 논산으로 이사를 했고, 병약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계모가 차지하게 된 가정이 점점 싫어졌습니다. 혼자 서울로 올라가서 이화학당을 다녔는데 재학 중에는 학교공부보다도 뜨개질을 비롯한 수예가 너무 좋아서 수예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학원에서 주선을 해주었던 요코하마수예학원으로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지요. 일본에서는 새로 익힌 수예작품을 팔아서 그 용돈으로 줄곧 영화관을 다녔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연극공연에서부터 뮤지컬공연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연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관람했는데 이것이 복혜숙을 배우의 길로 이끌도록 했던 가장 커다란 힘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한번은 무용공연을 보고 너무 심취해서 무용연구소에 나가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데 고국에서 딸을 찾아온 아버지가 그 현황을 보고 격노해서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버지는 강원도 김화교회의 목사가 되어서 임지로 떠나게 되었고, 복혜숙도 아버지를 따라 가 교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단조롭고 무료한 생활이 너무도 싫었던 복혜숙은 어느 날 아버지 몰래 짐을 챙겨서 서울로 무작정 올라와버렸습니다. 서울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단성사를 찾아가서 인기변사 김덕경을 만나 배우가 되고 싶은 자신의 포부를 밝혔습니다.

 

김덕경은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 18911921)에게 연결시켜 주었고, 거기서 여러 편의 신파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활이 점점 곤궁해진 복혜숙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겠다는 뜻을 밝히고 살아갔지만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무대 활동의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또 새로운 목적지를 찾은 곳이 중국의 대련항이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연락해둔 아버지의 신고로 말미암아 경찰에게 붙들려 압송되고 말았습니다.

 

1921년 복혜숙은 현철(玄哲, 18911965)이 조선배우학교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 입학했습니다. 이때 배우학교의 동기생들이 왕평, 이경설 등입니다. 한번은 극작가 이서구가 찾아와서 토월회의 여배우 자리가 갑자기 비게 되었는데 보충할만한 배우 하나를 급히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복혜숙은 여기에 지원해들어가서 열심히 무대 활동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연극배우로서의 생활입니다.

 

 

이어서 복혜숙이 영화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은 1926년입니다. 이규설(李圭卨) 감독이 제작하고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한 영화 <농중조(籠中鳥)>에 첫 출연을 했습니다. <농중조>는 일본말로 ‘가고노도리’, 즉 ‘새장 속에 갇힌 새’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의 제작자는 충무로에서 모자장수를 하던 요도라는 일본인이었습니다. 1927년에는 이구영(李龜永, 19011973) 감독의 <낙화유수>, 1928년에는 <세 동무>, <지나가(支那街)의 비밀> 등에 연이어 출연함으로써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굳건하게 다졌습니다.

 

복혜숙의 생애를 돌이켜보노라면 만약 그녀가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를 받아들여서 고분고분 순종하고 평범한 현모양처나 학교교사로서만 살아갔다면 결코 이후에 펼쳐간 배우로서의 삶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집을 나간 딸이 두어 차례 이상 아버지의 강압적인 뜻으로 끌려 되돌아오게 되지만 복혜숙은 기어이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부친의 뜻에 거역하고 일탈을 감행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선각자 복혜숙의 위대했던 판단과 선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배우 복혜숙이 첫 음반을 낸 것은 1929년이었는데, 이 음반은 가요가 아니라 영화극이란 장르를 달고 있는 <장한몽>(14)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파적 성격의 영화대본을 대중적 명성이 높은 배우로 하여금 직접 연기로 녹음하도록 해서 음반을 대중들에게 보급하려는 의도를 가진 전달체계였었지요. 이 음반에 이어서 <쌍옥루>(14)를 취입했고, <부활>, <낙화유수>(상하), <숙영낭자전>(14) 등을 발표했습니다. 영화극 음반으로는 이후에도 <불여귀>, <심청전>(상하) <하느님 잃은 동리>, 그리고 <춘희>(14) 등을 줄기차게 내놓았습니다.

 

배우로서의 대중적 명성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하던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는 복혜숙의 가요음반 <그대 그립다> <종로행진곡>을 발매했습니다. 이어서 <목장의 노래>, <()의 광()> 등을 발표하게 됩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이 음반들을 발매할 때 ‘시대요구의 째즈’란 이채로운 문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째즈’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식 재즈라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특성의 가요를 뜻하는 말로 보입니다. 복혜숙 노래의 반주를 맡았던 악단도 콜럼비아째즈밴드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이 음반의 종류로는 ‘째즈쏭’이란 꼬리표가 붙은 것이 이채로웠습니다. 말하자면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재즈가수였던 셈이지요.

 

 새벽녘이 되어 오면 이내 번민 끝이 없네
산란해진 마음속에 비취는 것 뉘 그림자
그대 그립다 입술은 타는구나
눈물은 흘러서 오늘밤도 새어가네

 

 노래 소리 지나가고 발자취 들리지만

어디에서 찾아볼까 마음속의 그림자를
그대 그립다 이 내 생각 산란하야
괴로운 며칠 밤을 누굴 위해 참으리
 

-<그대 그립다> 전문

 

이 노래를 음반으로 들어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나는 곡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바로 일본가수 후랑크 나가이가 불렀던 <(기미고이시)>입니다. 이 노래는 1929년 일본에서 크게 히트했던 노래입니다. 이것을 번안해서 복혜숙이 불렀는데, 사실 원래는 콜럼비아사에서 윤심덕(尹心悳, 18971926)에게 부탁을 했었는데 거절당하고 이어서 복혜숙에게 취입제의를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복혜숙이 부른 노래를 들어보면 미숙한 아마추어 가수의 느낌이 풍겨납니다. 음정도 불안하고 박자도 갈팡질팡합니다. 복혜숙이 생존했을 때 가요평론가 황문평에게 했던 말에 의하면 이화학당 시절에 합창단에서 알토파트를 맡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가창의 수준은 매우 엉성하고 불안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는 어찌하여 이런 복혜숙에게 재즈음반 취입을 제의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녀가 이름난 배우로서 대중적 명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코드회사는 복혜숙이 비록 가창능력은 부족하지만 배우로서의 대중적 명성이 있었으므로 거기에 의존해서 일본레코드자본의 식민지조선 연착륙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같은 음반의 다른 면에 수록된 <종로행진곡>도 앞의 곡과 마찬가지로 일본번안곡입니다.

 

붉은 등불 파란 등불 사월 파일 밤에
거리거리 흩어진 사랑의 붉은 등
등불 타는 등불 좀이나 좋으냐

마음대로 주정해라 고운 이 만나면

음전한 맵시 보소 선술집 각시
종로 네거리를 어떻다 이르료

안타깝다 우리 님이 거의 오실 이 때
흐늘거려 놀잔다 노래도 부르고
서울 밤 그리운 밤 종로의 네거리

-<종로행진곡> 전문

 

이 노래의 원래제목은 <도톤보리 행진곡(道頓堀行進曲)>입니다. 일본 오사카의 중심가에 있는 명소 도톤보리와 그 일대를 예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노래는 이후 도쿄의 번화가 아사쿠사(淺草)를 예찬하는 <아사쿠사행진곡>으로 개사되어 불렸는데, 식민지조선에서 음반을 낼 때 <종로행진곡>으로 바뀐 것입니다.

  

악곡의 전개방식도 전형적인 일본음계 미야코부시(都節)였습니다. 가요평론가 황문평도 이 음반에 대해서 1930년대 초기레코드를 통한 왜색가요 침투의 첫 번째 희생양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음반을 발매한 뒤에 복혜숙은 경성방송국의 조선어방송이 본격화되었을 때 방송드라마에 연속 출연해서 여주인공 역할을 담당합니다.

 

또 다른 가요음반 <목장의 노래>는 전형적 세 박자 왈츠풍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도 틀림없이 일본가요의 번안곡으로 추정이 됩니다. 자연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태환경 묘사가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보리나무 숲 그림 그늘 푸르고
찔레꽃 봉오리에 이슬 맺힐 때에
아가씨의 노니는 사랑을 따라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뽀풀나무 숲 그늘 끝없는 저쪽
불그레한 저녁놀 넘어갈 때에
아가씨의 즐기는 바다 푸르니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목장의 노래> 전문

 

복혜숙의 활동과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928년 그녀가 서울의 종로 인사동 입구에 ‘비너스’라는 다방을 열어서 8년 동안이나 운영했다는 사실입니다. 드나드는 손님들은 대부분 영화인들 중심이었는데, 연극인, 언론인, 문단 인사들까지도 단골로 출입했다고 합니다. 다방운영으로 얻은 수입은 모조리 영화인들을 위한 일에 썼다고 하니 복혜숙의 포부 또한 대단한 바가 있습니다.

  

복혜숙의 비너스다방을 자주 찾아오던 경성의과대학 출신의 김성진이 복혜숙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라 두 사람의 사랑은 불륜으로 무려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결국 비밀스러운 신접살림을 차렸고, 마침내 세월이 흘러서 안방마나님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962년 영화계의 원로가 된 복혜숙은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 위원장직에 선출되어 10년 동안 한국영화발전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일평생 300여 편이 훨씬 넘는 영화에 출연했던 한국영화사의 개척자 복혜숙! 그녀가 배우로서 출연했던 마지막 작품은 1973 <서울의 연가>란 제목의 영화입니다.

 

복혜숙의 나이 고희가 되던 그해에 방송인, 영화인들은 정성을 모아서 조촐한 칠순잔치를 차려주었습니다. 복혜숙은 말년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면서 후배들이 차려준 이날의 잔치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시절, 복혜숙의 노년기 삶에서 가장 즐겁고 흐뭇한 일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던 낙선재(樂善齋)로 가서 칠보장식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두 할머니는 각자 살아온 세월을 흐뭇하게 회고하며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1982년 배우 복혜숙은 서울에서 78세를 일기로 이승에서의 장엄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 국내 최초의 ‘눈물의 여왕’ 이었던 이 가수

당대 최고 인기 스타 이경설, 22세에 결핵으로 숨져

 한국영화사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줄줄 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가장 대표적인 비극배우는 누구였을까요?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함경도 함흥 출신의 배우 전옥(全玉, 본명 전덕례)이라 대답할 것입니다.

 

전옥도 <항구의 일야(一夜)>, <눈 나리는 밤> 등 비롯한 여러 악극과 영화에서 최루성 연기를 펼쳐 ‘눈물의 여왕’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옥 이전에 이미 원조 눈물의 여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경설(李景雪, 19121934)입니다. 그러니까 전옥은 이경설 사후에 그녀의 역할을 대신해서 ‘눈물의 여왕’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지요.

 

▲이경설의 사망을 알리는 당시의 신문기사

 

이경설은 불과 열다섯의 나이에 은막에 데뷔해서 각종 영화와 악극에 출연하며 대중들의 최고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활동하다가 갑자기 얻게 된 몹쓸 병으로 방년 22세의 한창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지요. 이경설의 이런 안타까운 생애를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슬픔으로 꽉 메어져옵니다.  

 

이경설은 일찍이 1912년 강원도에서 출생한 뒤 곧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청진으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배우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 살았습니다. 나중에 병이 들어 1934년 서울에서 낙향해 세상을 떠난 곳도 청진의 신암동이었으니 청진은 이경설의 진정한 고향이라 하겠습니다. 부친은 그곳 청년회 회장을 맡아했고, 어려서 아버지의 인도로 아동들의 무대에 출연했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녀시절, 이경설의 이웃에는 아주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일찍 시집을 갔다가 한 해만에 친정으로 쫓겨 와 고독하게 살다가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이경설은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큰 충격을 느꼈고, 여성에게 극히 불리한 혼인제도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영향을 주었던지 배우가 되고난 뒤에도 이경설의 표정과 연기는 슬픔으로 가득한 얼굴에다 가녀린 인상, 거기다 처연한 액션까지 보여주어서 부녀자 관객들은 이경설의 연기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걸핏하면 소외된 처지에서 마구 희생당하는 조선여성의 삶에 대하여 이경설은 그 누구보다도 연민과 애정을 갖고 그것을 연기에 쏟아 부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경설의 연기를 떠올리면 오로지 ‘눈물과 한탄’ 두 가지입니다.

 

이경설은 청진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예술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문을 닫았고, 고려영화제작소에 입사했지만 그 회사마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현철이 문을 열었던 조선배우학교란 곳을 들어가서 대중문화전문가 왕평(王平 이응호)과 동기생이 되었고, 이후 막역한 친구가 되었지요. 이경설은 여러 악극단에 단원으로 들어가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이 무렵에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아파도 돌보는 이 없이 무대에 올라야만 했던 슬픈 시절이 있었지요. 1924년 이경설이 참가했던 동반예술단도 흩어진 악극단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악극단 공연은 신파극을 중심으로 무술, 기계체조를 곁들여서 공연을 했는데 이경설은 여기서 가수이자 배우였던 신일선(申一仙)과 함께 노래와 연기를 계속하며 대중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갔습니다.

  

이경설의 나이 16세 되던 1928년 그 예술단도 해체되어버렸고, 이후 정착하게 된 곳은 김소랑(金小浪)이 이끌던 극단 취성좌(聚星座)입니다. 여기서 이애리수(李愛利秀), 신은봉(申銀鳳)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여배우 트리오로 연기와 가창 두 분야에서 눈부신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9년 이경설은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신무대 등으로 활동의 터전을 옮겨 다녔습니다. 이경설이 세상을 하직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신무대 소속의 단원이었지요. 1920년대 후반 공연장 무대에는 연극의 막과 막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메워주던 막간가수가 있었습니다. 무대장치를 변경시키기 위해 일단 막을 내리고 나면 그 빈 시간을 메우기 위해 커튼 앞에 나와서 노래를 들려주던 가수가 바로 막간가수입니다. 그 막간가수는 가창력이 뛰어난 배우를 골라서 관객 앞에 내보냈던 것입니다. 이애리수, 이경설, 강석연, 신은봉, 김선초 등은 모두 막간가수 출신들입니다.

 

▲'눈물의  여왕' 이경설

 

1928년 무렵, 언론은 이경설을 이미 주목받는 배우로 지면에 널리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화차생활(火車生活)>, <무언의 회오(悔悟)>, <가거라 아버지에게로>, <신 칼멘>, <카추샤>, <청춘의 반생>, <짠발짠>, <눈 오는 밤> 등의 연극에서 이경설의 명성은 드높아만 갔습니다. 이경설의 연기가 지닌 특징은 매우 똑똑한 세리프와 박력이 느껴지는 연기였다고 합니다.

 

함경도 출신의 억양이 느껴지는 독특한 화법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극시장 시절, 이경설은 그녀 한 몸에게만 집중되는 극단에서의 과도한 출연요청을 단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무대에 오르느라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고, 이 누적된 피로 때문에 결국 폐결핵에 걸린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배우 이경설이 정식으로 가수가 되어서 음반을 발표한 것은 1931년 봄입니다. 그녀의 생애를 통틀어 도합 44종의 음반을 내었는데, 돔보레코드에서 10, 시에론레코드에서 6, 포리도루레코드에서 28편을 발표했습니다. 종류로는 유행소곡, 유행가, 유행소패, 서정소곡, 민요 등의 이름을 달고 있는 가요작품이 33편으로 가장 많으며, 기타 넌센스, 스켓취, 극 등이 11편입니다.

 

돔보와 시에론에서는 가요만 발표했고, 포리도루레코드사 전속이 되어서는 가요와 극을 함께 발표했습니다. 돔보에서 발표한 음반은 <그리운 그대여(강남제비)>, <아 요것이 사랑이란다>, <아리랑>, <온양온천 노래>, <울지를 마서요>, <콘도라>, <피식은 젊은이(방랑가)>, <허영의 꿈>, <무정한 세상>, <양춘가> 등입니다. 시에론에서 발표한 음반은 <봄의 혼>, <강남제비>, <방랑가>, <온양온천 노래>, <인생은 초로같다>, <하리우드 행진곡> 등입니다.

 

포리도루에서 발표한 음반은 <국경의 애곡(哀曲)>, <방아타령>, <세기말의 노래>, <그대여 그리워>, <얼간망둥이>, <조선행진곡>, <경성은 좋은 곳>, <천리원정>,<서울가두풍경>, <이역정조곡>, <사막의 옛 자취>, <오로라의 처녀>, <월야>, <고성의 밤>, <옛 고향터>, <도회의 밤거리>, <패수비가>, <폐허에서>, <옛터를 찾아서>, <아리랑 한숨고개>, <울고 웃는 인생>, <청춘일기>, <멍텅구리 학창생활>, <춘희>, <고도에 지는 꽃>, <망향비곡>, <피식은 젊은이> 등입니다.

  

이 가운데 출연진들의 연기로 엮어가는 극 음반이나 스켓취, 넌센스 등은 주로 동료였던 왕평, 김용환, 신은봉, 심영 등이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요의 경우는 왕평, 박영호, 추야월, 김광 등의 노랫말에 김탄포(김용환), 강구야시(江口夜詩) 등이 곡을 붙인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경설이 배우로서 한창 인기가 드높던 시절에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 그녀에게 문예부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이때 이경설은 친구 왕평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기꺼이 맡겠노라고 했고 이에 대하여 포리도루 측에서는 내부적 논의를 거쳐 결국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대중문화계의 걸출한 두 젊은 스타가 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 업무를 공동으로 맡아보는 초유의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경설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면서 모든 업무는 주로 왕평 혼자서 보게 되었지요.

 

배우 이경설이 가수로서 발표한 최고의 히트작은 단연 <세기말의 노래>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1932 10월에 발표된 이 가요작품은 박영호 작사, 김탄포(김용환) 작곡으로 만들었는데 식민통치에 시달리는 국토와 민족의 아픔과 불안감을 매우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는 과감한 표현들이 오늘의 우리들로 하여금 깜짝깜짝 생경한 놀라움마저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정황은 일제가 축음기음반에 대한 본격적 감시와 단속에 들어가기 직전이라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미줄로 한허리를 얽고 거문고에 오르니
일만 설움 푸른 궁창아래 궂은비만 나려라
시들퍼라 거문고야 내 사랑 거문고
까다로운 이 거리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가랑잎이 동남풍을 실어 술렁술렁 떠나면
달 떨어진 만경창파위에 가마귀만 우짖어
괴로워라 이 바다야 내 사랑 바다야
뒤숭숭한 이 바다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청산벽계 저문 날을 찾아 목탁을 울리면서
돌아가신 어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비오니
답답해라 이 마을아 내 사랑 마을아
어두워진 이 마을이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세기말의 노래> 전문

 

▲이경설의 대표곡 '세기말의 노래' 가사지

 

각 소절의 마무리 부분에서 표현하고 있는 ‘까다로운 이 거리’, ‘뒤숭숭한 이 바다’, ‘어두워진 이 마을’ 등은 모두 일제의 식민통치 때문에 빚어진 우리 국토의 고통스런 현실을 빗대어 말하는 표현들입니다. 작가는 이 가요시를 통해서 진심에 찬 어조로 고통과 불안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을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라는 대목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유행가 <경성은 좋은 곳>을 발표합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서울의 명칭을 먼저 경성으로 고쳤습니다. 도시계획을 모두 일제의 기획에 의도 하에 정리했습니다. 거리이름도 명치정, 장곡천정, 죽첨정, 고시정, 대도정 등 그들의 침략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의 이름을 딴 일본식 지명과 번지로 바꾸고, 서울을 일본의 변방도시로 정비하려는 뜻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경설의 노래 <경성은 좋은 곳> 가사에는 식민지시대 서울시내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오던 일본군경들의 불안한 사이렌 경보음이 실감나게 들려옵니다. 어둡고 우울한 시대였지만 청년기 세대들은 제한된 공간속에서나마 청춘의 밝은 감성을 구가하려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들에게 노래와 웃음이 마음껏 펼쳐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심의 분위기는 쓸쓸한 비애와 삶의 긴장이 감돌았을 테지요.

 

 서울의 새벽 요란히 들리는 저 사이렌
힘 있는 젊은이 씩씩한 걸음 굳세인 팔
서울은 좋아요 힘으로 밝히며
해 지면 한양은 청춘의 밤

종로네거리 밤이면 피는 꽃 처녀의 얼굴
청춘아 서로서로 손을 잡고 뛰어라
불러라 마음대로 씩씩하게
노래와 웃음의 서울거리로

고요한 밤 멀리서 들리는 바람도 잠든
한강물 위에 들리는 소리 구슬픈 뱃노래
서울은 좋은 곳 언제든지요
밤이나 낮이나 노래의 서울

 -<경성은 좋은 곳> 전문

 

이듬해에는 안색이 표시가 나도록 창백해지고 기침과 각혈도 횟수가 심해지기만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애리수가 불러서 히트를 했던 <황성의 적>을 가사와 제목만 바꾸어서 <고성(古城)의 밤>이란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이경설의 처연한 목소리로 들어보는 이 노래는 특히 가을비가 처마 끝에 또드락또드락 소리를 내는 깊은 밤 자정 무렵에 들을 때 삶의 황혼녘에 다다른 이경설의 슬픔을 머금은 목소리는 명치끝을 따갑게 도려내는 듯 사뭇 가슴을 저밉니다. 극작가 이서구 선생은 1930년대 중반, 이경설이 평양에서 잠시 결혼생활을 했었다고 증언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3년 이경설은 지병이었던 결핵이 점점 악화되어 일본 오사카, 북간도 용정 등지로 요양을 다녀왔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1934 828일 청진의 신암동 자택으로 돌아가서 불과 22년의 짧았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그녀가 사망한 다음 달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는 이응호 극본 <춘희>를 ‘일대 여배우 이경설양 추모발매’ 유작음반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음반에는 동료 왕평, 신은봉 등과 함께 또랑또랑한 발음으로 연기하는 이경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감동적인 연기를 펼치며 배우와 가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당대 최고의 스타 이경설!

 

 말 그대로 ‘눈물의 여왕’ 원조였던 이경설의 애처로운 영혼은 지금도 전체 한국인들의 가슴속으로 가을비처럼 스며들어 슬픈 목소리로 여전히 우리를 적시고 있을 것입니다

 

# 식민지의 한과 슬픔을 걸러준 가수 전옥

1950년대 대구에는 제법 이름 있는 극장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10대 미만의 소년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극장 구경을 더러 다녔습니다. 참으로 오래된 극장인 만경관(萬頃館)도 갔었고, 대구극장에도 갔었습니다. 아버지가 즐겨 찾던 극장의 프로그램은 주로 비극을 테마로 하는 영화였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 제작 기법이나 기술이 발전된 시기가 아니어서 대개 권선징악이나 벽사진경과 관련된 판에 박힌 줄거리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이 워낙 힘겹고 고단하던 시절이라 비극을 보는 경험은 자신의 가슴 속에 쌓인 한과 슬픔을 털어내는 여과와 조절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극영화를 상연하는 극장 앞은 인산인해로 넘쳐났습니다. <목포의 눈물>, <눈 나리는 밤>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들로 기억됩니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비극 테마 영화의 대부분에서 단골 배역을 도맡았던 한 배우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전옥(全玉)입니다.

 

▲ 배우와 가수를 겸했던 전옥

 

영화배우 전옥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전덕례(全德禮)이지요. 함흥 영생중학교 2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집에서 그녀를 시집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배우가 되고 싶어 극단을 기웃거렸던 그는 부모를 설득해 오빠 전두옥(全斗玉)과 함께 서울로 내려갔습니다. 전옥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스타로 있던 토월회 문을 두드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습니다.


당시 16세의 전옥은 사슴 같은 눈에 콧날이 오뚝하여 이목구비가 뚜렷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토월회(土月會) 무대에 섰고 <낙원을 찾는 무리들>(황운 연출·1927)에서 주연을 맡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잘 있거라>에 출연한 그는 돈에 팔려 부호에 시집가는 황순녀 역을 능숙하게 잘 해냈습니다. 예명을 전옥으로 쓰게 된 것은 오빠의 이름 전두옥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전옥은 곧 신일선을 대신해 나운규 프로덕션의 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연이어 <옥녀> (1928), <사랑을 찾아서>(1928)에서 주연을 맡으며 스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성공의 기회가 꼭 한번은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전옥에게도 드디어 그러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25년 토월회 창립 2주년 기념공연으로 작품 <여직공 정옥>이 광무대에서 상연되던 어느 날 그 연극에서 주인공으로 연기하던 석금성이 관객이 던진 사과에 배를 맞았습니다. 임신 중이던 석금성은 졸도했고 그녀를 대신하여 전옥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전옥은 토월회 무대에서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극단이 해산하게 되면서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빠를 따라 무대를 떠나 영화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맨 처음에는 나운규와의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28 17세의 전옥은 오빠의 전문학교 시절 친구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강홍식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 강홍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에서 노래를 생방송했고 방송극에도 출연했습니다. 1929년에는 다시 문을 연 토월회의 무대에 섰으나 이내 토월회가 문을 닫자 지두환이 세운 조선연극사의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드는 독백으로 유명했으며 비극의 여인 역을 잘 해 '비극의 여왕', '눈물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1930
년대 전옥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발매된 그녀의 음반은 남편 강홍식과 함께 발표한 여러 노래들과 <항구의 일야(一夜)>로 대표되는,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을 레코드에 담은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중 1934년 남편 강홍식이 발표한 <처녀총각> 10만장이라는 엄청난 양이 팔렸습니다. 큰돈을 번 강홍식은 한 일본여자와 바람이 나서 가정을 떠났고 해방 후 월북했습니다.

 

그녀는 라미라가극단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다시 각색한 <아리랑>(1943)을 비롯해 많은 가극을 공연했습니다. 가극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다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 일제가 철저히 통제했던 영화계는 친일적인 시국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지만리>(1941), <망루의 결사대>(1943), <병정님>(1944)이 당시 그녀가 출연했던 군국영화입니다.

 

해방 후 전옥은 전국순회공연을 하던 남해위문대를 백조가극단(白鳥歌劇團)으로 개칭하여 악극을 공연했습니다. 당시 백조가극단의 공연은 1부에 전옥이 나오는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가 공연됐고, 2부에는 버라이어티쇼로 고복수, 황금심 같은 유명 가수들의 무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수많은 악극단이 명멸했던 그 당시, 전옥의 백조가극단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며 공연은 전쟁 중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즈음 전옥은 극단의 살림을 맡던 일본 유학출신 최일(崔一)과 재혼했습니다. 50년대 중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전옥은 다시 영화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자신이 출연한 인정비극 <항구의 일야>(1957), <눈 나리는 밤>(1958), <목포의 눈물>(1958) 등을 영화로 만듭니다. 60년대 이후 전옥은 무대와 다른 모습으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소년시절 제가 대구극장에서 보았던 것이 바로 <눈 나리는 밤>이었지요.

 

1969 10월 전옥은 고혈압과 뇌혈전 폐쇄증이 일어나 5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남과 북의 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영화배우 최민수의 모친인 배우 강효실과 북한의 대표적인 배우 강효선이 그의 딸입니다.

 

가수로서의 전옥은 영화의 선전효과를 높이기 위해 주제가나 관련되는 곡들을 직접 부른 경우가 많습니다. <실연의 노래>(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천지방웅 편곡, 1934) 1930년대 초반 당시 유행하던 풍조 중의 하나인 자유연애 사상을 한껏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말 못할 이 사정을 뉘게 말하며
안타까운 이 가슴 뉘게 보이나
넘어가는 저 달도 원망스러워
몸부림 이 한밤을 눈물로 새네

풀 언덕 마주앉아 부르던 노래
어스름한 달 아래 속살거린다
잊어야 할 눈물의 기억이던가
한 때의 한나절에 낮꿈이런가

상처진 옛 기억을 잊으려 하나
잠 못 자는 밤만이 깊어가누나
귀뚜라미 울음이 문틈에 드니
창포밭 옛 노래가 다시 그립다
-<실연의 노래> 전문

 

전옥이 부른 노래의 창법은 가슴 속에 깊이 가라앉은 슬픔을 다시 불러일으켜서 그것을 과장하지 않고, 스스로 조절하고 정리하여 심정적 안정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점은 전옥이 출연했던 영화에서 시도된 방법과도 일치됩니다. 위에 인용한 실연의 노래만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상적 삶에서의 로맨스를 중심 테마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실연이라는 테마를 좌절과 비탄으로 빠지지 않게 하고, 저급한 센티멘탈리즘으로 떨어지는 것도 거부합니다.

 

역시 전옥이 부른 노래 <피지 못한 꿈>도 청년기 특유의 애잔한 심정을 잘 담아낸 노래입니다. 특히 2절 가사는 ‘네온사인 불 밑이라 피지 못한 꿈 피지 못한 꿈’이란 대목을 통해 식민지적 근대와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청년기의 내적 고뇌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범오(凡吾) 유도순(劉道順)이 작사하고 외국곡에 의탁하여 취입했던 노래 가을에 보는 달은 한숨, 서러움, 쌀쌀함 따위의 내면 풍경을 전옥 특유의 낭랑하고도 슬픔의 페이소스로 충만된 음색과 창법을 통해 1930년대 초반 젊은이들의 심정을 울렸던 것입니다.

 

원조 ‘눈물의 여왕’ 이경설이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받아서 제2대 ‘눈물의 여왕’이라는 전옥의 별명답게 전옥이 불렀던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슬픔, 괴로움, 고달픔, 실연, 그리움, 상처 따위와 관련된 주제들이 많습니다. <울음의 벗>(이하윤 작사, 전기현 작곡)이란 가요작품이 지닌 총체성은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만으로도 전옥이 대중문화 쪽에서 지향하는 방향성을 고스란히 암시하게 해줍니다.

 

'울음의 벗'노래 가사지

 

아, 나는 서러운 몸 폐허 위에서
떠오르는 옛 생각에 아 오늘도 우네

아, 나는 꿈을 따라 헤매이는 몸
상한 가삼 부여안고 아 이 밤을 새네

아 나는 외로운 몸 치밀어 오는
향수일내 한숨 지며 아 오늘도 우네

아 나는 울음의 벗 젊은 가삼에
눈물의 비 받으면서 아 이 밤을 새네
-<울음의 벗> 전문

 
전옥이 남기고 있는 상당수의 가요 작품들은 시인 유도순이 노랫말을 만든 곡들입니다. 작곡가로는 김준영(金駿永)과 호흡을 잘 맞추었습니다. 작사가, 작곡가 두 사람은 전옥의 감성과 표현능력을 잘 이해하여 그 효과에 잘 부합되는 작품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리따운 처녀의 고운 자태를 묘사한 <첫사랑>(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수양버들>(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 1936)의 가사에서 마치 혜원 신윤복이 그린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한 전통적 감각과 색조가 느껴지는 어휘구사도 돋보입니다. 이를 전옥의 창법이 잘 소화시켜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전옥의 가수로서의 특징을 가장 잘 살려낸 최고의 걸작은 역시 악극 대본으로 구성한 <항구의 일야>가 아닌가 합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으로는 사랑에 깊은 배신을 겪고 삶의 좌절로 이어지는 고통에 빠진 ‘탄심(彈心)’이란 인물입니다. 이 배역을 전옥이 맡아서 크나큰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세상이 덧없으니 믿을 곳 없어
마음속 감춘 정을 그 누가 아랴 그 누가 아랴
-<항구의 일야> 삽입곡

 

 탄심의 연인이었던 상대역으로는 이철이란 인물이 설정되었고, 탄심의 친구로 영숙과 의형제를 맺었던 박민이란 인물이 좌절 속에 빠진 탄심을 위기에서 구출해줍니다. 이 악극의 삽입곡을 원래 남일연이 취입했었는데, 해방 후 이미자에 의해 재취입되어 LP음반으로 발매된 적이 있습니다. 이 음반을 통해서 듣는 전옥의 대사는 온갖 산전수전과 세상의 풍파를 다 겪은 노배우의 관록과 역량을 물씬 느끼게 하는 효과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전옥 이외의 배역으로는 성우인 남성우, 천선녀, 김영준 등이 맡았습니다.

  

# 누가 1930년대 최고의 동요가수였나?

이정숙과 서금영   

동요(童謠)는 어린이의 생각과 표현을 담아서 만든 가사와 노래의 혼합입니다.

 

어린이의 생각에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장 깨끗하고 순진무구한 영혼이 그 속에 깃들어 있지요.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침탈로 온갖 시련과 고통에 허덕일 때에 당시 아동문학가들은 많은 동요를 만들어서 힘든 시간을 견디어가던 겨레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이름도 고결한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831) 선생을 비롯하여, 홍난파, 윤극영, 정순철, 윤복진, 박태준, 윤석중 등 당대최고의 아동문학가 및 작곡가들이 1923년 봄,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보급과 확장에 노력했던 일들은 이제 아득한 신화처럼 여겨집니다. 봉건시대에는 어린이란 말조차 없었지요. 그저 개똥이, 돼지, 강아지 따위의 동물명으로 부르고 최소한의 인권조차 부여되지 않았던 아동들에게 처음으로 ‘어린이’란 이름을 만들어 부르고, 그들의 존재를 하늘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선각자들의 거룩했던 꿈과 포부를 생각해봅니다.

 

 이런 동요는 1920년대 중반부터 대중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1926 9월에 발표된 홍재유의 동요음반 <할미꼿> <춤추세>가 첫 음반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로부터 1939 5월까지 약 13년 동안 약 230여종이 넘는 동요음반이 10개의 음반회사에서 제작 발매되었습니다.

 

 동요라는 장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왕성하게 음반을 제작 발매했던 회사는 단연 리갈레코드사였습니다. 여기서 활동했던 동요가수들은 이정숙, 서금영, 이경숙, 최선숙, 원치승, 강한일, 녹성(綠星)동요합창단 등입니다. 김복진은 동화구연(童話口演) 음반을 주로 발표했지요. 리갈 소속 작사 작곡가로는 윤석중, 선우만년, 송무익, 이정구, 신고송, 윤복진, 홍난파, 원유각, 유기흥, 김성도, 박종선, 강석흥, 박소농, 고호봉, 임원호, 이인숙, 민영성, 손정봉, 원치승, 송찬일, 지상하, 현증순, 정윤희, 한만금, 송완순, 김정임, 지상하, 박천룡, 유기흥, 남궁인, 김여수 등입니다.

 

 두 번째로 동요음반을 많이 제작발매한 곳은 빅타레코드사입니다. 빅타에서 활동했던 가수들은 김연실, 김순임, 윤현향, 강석연, 김정임, 전명희, 송보선, 정경남, 진정희, 계혜련, 신흥동인회 등입니다. 윤백남은 동화구연 음반제작에 참가했습니다. 빅타 소속 작사 작곡가로는 이정구, 모령, 정인섭, 정순철, 최순애, 박태준, 엄흥섭, 안기영, 윤석중, 홍난파와 일본인 중산진평입니다.

 

 세 번째로는 콜럼비아레코드사였고 여기서 활동한 가수로는 이정숙, 채동원, 서금영, 최명숙, 이경숙, 이삼홍 등입니다. 작사 작곡가로는 윤석중, 홍난파, 박태현, 이원수, 방정환, 정순철, 유지영, 윤극영, 한정동, 윤백남 등입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도 아동물음반을 발매했었는데 동요가수로는 김숙이, 정경남, 고천명, 조현운, 김소희, 전병희, 송보선 등이며, 작사 작곡가로는 박세영, 염석정, 김태오, 원유각, 목일신, 김성칠, 조현운 등이 활동했습니다.

 

 닙본노홍과 같은 일본음반사에서는 홍재유(홍재후), 임건순, 이정숙, 서금영, 이경숙, 최명숙 등이 음반을 발표했고, 작사 작곡가로는 홍난파와 박태준이 전담했습니다. 이글레코드사에서는 서금영, 이경숙, 최명숙이 음반을 내었고, 그들을 위해 김태오, 김신명, 박노춘, 김수경(윤복진), 박수순, 홍난파 등이 작사와 작곡을 맡았습니다. 시에론레코드사에서는 강금자, 신카나리아, 임수금의 음반이 보이고, 닛토레코드에서는 이종옥과 이정숙의 음반이 확인이 됩니다. 디어레코드에서는 강금자와 신카나리아의 동요음반도 보입니다. 태평레코드사는 동요음반 제작발매에 가장 소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체목록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길귀송의 동요음반 하나만 확인이 됩니다. 여러 음반사마다 발간했던 동요 곡들의 제작에 참여한 가수와 작사작곡자 명단을 살펴보면 이름이 겹치는 경우가 자주 발견이 되지요. 그것은 그들의 활동이 나타내는 인기의 척도나 적극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이정숙

 

취입동요음반들을 가수별로 집계를 해보면 누가 가장 최고의 동요가수였었던가를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다취입가수는 단연 50여곡 이상을 음반에 취입한 이정숙(李貞淑)입니다. 그녀는 피아노연주 2곡과 작사 1편까지 포함해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한국근대 최고 동요가수였습니다. 이정숙이 활동했던 음반사로는 주된 터전이었던 콜럼비아, 리갈사를 비롯하여 닙본노홍, 이글, 리갈레코드사 등 여러 곳이었습니다. 그만큼 이정숙은 어린 소녀의 몸으로 한국동요사에서 동요음악을 유성기음반으로 취입하여 전국적인 동요보급 확산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입니다.

 

▲ 리갈사에서 발매된 '오빠생각 '가사지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정숙의 대표곡 <오빠생각> 전문

 

이정숙에 이어서 그 다음 위치를 차지하는 동요가수로는 서금영이 16곡으로 두 번째에 해당되고, 김숙이가 15, 그리고 녹성동요합창단이 12, 최선숙이 11, 진정희와 이경숙이 9, 김순임와 계혜련이 8, 강금자가 6, 신카나리아와 최명숙이 각각 5, 전명희, 이삼흥, 송보선, 신흥동인회가 각각 4곡씩 발표하고 있습니다. 김정임, 고천명, 임수금, 홍재유(홍재후) 3곡씩, 강석연, 양재익, 이정옥, 길귀송, 정경남, 윤현향이 2곡씩의 동요를 발표했습니다.

 

한국근대 최고의 동요가수 이정숙(李貞淑)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중앙보육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1910년에 태어난 서금영과는 거의 동년배로 보입니다. 금강키네마와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했던 유명영화감독 이구영(李龜永, 19011973)의 누이동생이었지요. 무성영화 <낙화유수(落花流水)>를 김영환과 함께 제작했습니다.

 

이때 삽입곡주제가(<강남 달>)를 유경에게 부르도록 했는데 이게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자 1929 7, 이미 동요가수로 장안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이정숙에게 이 노래를 정식으로 취입시키고 무대 위에서 직접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물론 오빠의 배려도 있었겠지만 이정숙은 1927 5월 닙폰노홍 음반사에서 <이 동리 저 동리>란 동요 곡을 발표했던 이미 어엿한 동요가수였습니다. 윤극영이 조직한 최초의 어린이합창단 ‘다알리아회’가 일본의 닛토레코드 초청으로 우리 동요 17곡을 취입할 때 가장 많은 곡을 취입했던 인기 높은 동요가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리갈과 콜럼비아레코드사의 대표적인 동요가수였고, 그밖에 닙본노홍과 이글, 리갈레코드사에서도 동요곡을 발표했습니다.

 

이정숙은 서금영과 함께 유명작곡가 홍난파(洪蘭坡, 18981941)로부터 동요창법에 대한 특별지도를 받았습니다. 1926 715, 경성라디오방송국이 체신국 방송소를 이용해서 전파를 송출할 때 여기에 최승일과 함께 출연해서 유행가 <곤돌라>, <푸른 별>, <뱃노래> 등을 불렀습니다. 배우 신일선(申一仙, 19121990)은 나운규(羅雲奎, 19021937)의 영화 <아리랑> 주제곡도 이정숙이 처음 부른 것으로 증언합니다. 1927 9월에는 장충단에서 열린 시민위안 추석놀이 음악영화대회에 단성사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기도 합니다.

 

취입음반은 1934 6, 리갈에서 내었던 동요 <참새 춤>까지 확인이 됩니다. 1937년 여름, 중앙무대에서 막을 올린 연극 <예수나 안 믿엇더면>(채만식 작) 공연에 아역배우로 출연했던 이름이 보이고, 1956년 서울방송국 어린이프로에 세 차례 출연해서 동요를 부르거나 피아노연주를 했다는 기사만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혼한 뒤 가정생활에 충실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 서금영

 

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동요가수로는 서금영(徐錦榮, 19101934)입니다. 그녀는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전당포(典當鋪)를 운영하던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옮겨와서 살았습니다. 1925년 동아일보 신년호에는 서울의 보통학교 재학생 중 장래가 촉망되는 아동 140명을 선발해서 특집을 꾸몄는데, ‘장래의 문학가’에는 교동보통학교의 윤석중(尹石重, 19112003)과 설정식(薛貞植, 19121953)이 여기에 뽑혔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자라서 예측대로 명망 높은 시인이 되었습니다. ‘장래의 음악가’에는 동덕여자보통학교의 재학생 서금영이 선발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수재아동의 가정을 소개할 때 ‘창가 잘 하는 아가씨’로 그녀에 대한 취재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습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이정숙이 다녔던 중앙보육학교로 진학했는데 재학시절 이미 이름난 동요가수로 여러 무대에 올랐습니다. 1931년 중앙보육학교 졸업생 명단에 서금영의 이름이 확인됩니다. 같은 해 이화여전 졸업생 명단에 시인 모윤숙(毛允淑)의 이름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와 동년배쯤 될 것입니다. 서금영도 이정숙과 마찬가지로 홍난파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창법지도를 받았던 제자였습니다. 1931 1 <바닷가에서>, <무명초> 등이 취입된 첫 음반을 콜럼비아에서 발표한 뒤 1934 6 <해바래기>, <봉사꼿>까지 내리닫이로 10여곡 이상을 취입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콜럼비아를 주된 무대로 하면서 리갈, 이글, 닙본노홍 등 여러 레코드사에서 초빙을 받아 다양한 음반들을 발표했지만 그해 여름 장티푸스로 돌연히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당시 서금영의 나이 불과 23세였습니다.

 

홍난파는 서금영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1931년 홍난파의 질녀 홍옥임이 동성애에 빠져서 파트너와 함께 열차에 투신자살한 쇼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끼던 제자 서금영의 사망소식을 접했으니, 홍난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되는 절창 <봉선화>가 빚어졌다고 하는군요. 노래 속의 봉선화는 질녀이기도 했고, 요절한 제자 서금영의 표상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비단물결 남실남실 어깨춤 추고
머리감은 수양버들 거문고 타면
달밤에 소금장이 맴을 돈단다

아가야 나오너라 냇가로 가자
달밤에 딸각딸각 나막신 신고
도랑물 쫄랑쫄랑 달마중 가자
-서금영의 대표곡 <달마중> 전문

 

 우리들의 어린 시절,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정숙과 서금영을 비롯한 옛 동요가수들의 노래는 한 세기의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두 사람의 음색과 창법을 비교해보면 이정숙은 서금영에 비해 한층 낭랑하고 또랑또랑한 울림으로 펼쳐집니다. 가련함과 애처로움이 듬뿍 느껴지는 애수의 정서가 서금영에 비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이에 대조적으로 서금영의 음색과 창법은 나직하고 은은함이 느껴지는 편안한 분위기가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다른 동요가수들의 경우도 두 소녀의 창법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대체로 유사한 경우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의 억양과 발음법이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엄청나게 그 변화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초창기동요를 들을 때 마치 북한가요를 듣는 느낌과 비슷하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북한가요에 남아있는 1930년대 창법의 흔적도 있는 것일 테지요. 여러분은 혹시 어떤 소감을 갖는지요?

 

대표적인 동요전문작사가로는 윤석중, 김수경(윤복진), 유기흥, 원유각, 윤극영, 김성도, 박세영, 이정구, 유지영, 송완순, 엄흥섭, 한정동, 김태오, 방정환, 최순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동요전문작곡가로는 홍난파를 위시하여 윤극영, 박태준, 박태현, 정순철, 김영환, 김신명, 안기영, 원치승, 조현운, 염석정 등과 일본인 중산진평을 손꼽힙니다.

 

식민지시대에서 동요음반은 이처럼 가슴속에 쌓인 상처와 울분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민족의 삶에 마치 어머니의 손길과도 같은 부드럽고 아늑한 사랑과 평화의 분위기로 마음을 한결 안정시켜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 속에 이정숙과 서금영, 그리고 이름이 아주 묻혀버린 소녀 동요가수들의 애달픈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 식민지백성의 서러움을 전한 고복수의 타향살이

때로 한 편의 시작품보다 유행가 가사가 더욱 절실한 느낌으로 가슴속에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좀 더 나은 삶을 향해 오늘도 안간힘을 쓰며 땀 흘리는 인간의 삶은 온갖 힘겨운 부담과 피로가 덧쌓여서 한날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지난 시절은 험난했습니다. 봉건왕조의 우울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시점에서 우리 겨레는 제국주의 침탈이라는 새로운 질곡에 신음해야만 했습니다. 그 제국주의는 고무신과 안경, 혹은 석유와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명종(自鳴鐘)의 얼굴로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유혹이자 바닥 모를 늪이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슬금슬금 불안의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삶의 중심과 갈피를 모조리 잃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기도 전에 가혹한 수탈과 모진 유린이 시작되었지요. 자고 나면 밝은 아침이 와야 마땅한데 광명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고, 눈앞엔 여전히 고달픈 암흑천지였습니다.

 

() 고복수의 대표가요 '타향(타향살이)'
(
) 고복수의 대표가요 '사막의한

 

바로 이 무렵에 고복수(高福壽, 19111972)가 처연한 성음으로 불렀던 <타향살이> <사막의 한>은 바로 이러한 세월의 암담함을 상징적으로 빗대어 표현했던 노래였습니다. 두 곡 모두 뛰어난 작사가 김능인(金陵人, 19111937) 선생과 작곡가 손목인(孫牧人, 19131999) 선생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지요. 세상에서는 이 대단한 가요작품을 만들어 식민지백성의 서러움을 달래주었던 훌륭한 작사가, 작곡가, 가수 셋을 일컬어 ‘손금고(孫金高) 트리오’라고 불렀습니다.


가수 고복수는 1912년 경남 울산 하상면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기계국수집을 운영하는 영세한 상인이었습니다. 유달리 음악을 좋아했던 고복수는 교회합창단에 들어가 각종 악기를 익혔고, 뒷동산에 올라가 저물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선교사들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을 배웠지요. 이 솜씨를 인정받아서 울산실업중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복수의 나이 18세 때에 경남 울산에서 전국가요콩쿨 예선에 출전하여 뽑혔고, 부산공회당에서 열린 콩쿨대회에서 1등을 하긴 했지만 서울로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가수로서 출세를 꿈꾸던 청년 고복수에겐 이것저것 물불을 가릴 틈이 없었지요. 마침내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장롱에서 60원을 몰래 꺼내어 달아났고, 1933년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서울 본선에서 기어이 2등으로 뽑혔습니다. 이때 고복수의 나이 22세였습니다.

 

검정두루마기에 하얀 장갑을 끼었던 시골뜨기 청년 고복수의 삶은 이로부터 활짝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콜럼비아사는 웬일인지 고복수에 커다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때 작곡가 손목인이 고복수를 오케레코드사 전속으로 재빨리 인도해서 계약을 맺었는데 쌀 한 가마니에 5원하던 시절에 고복수는 계약금 1.000, 월급 80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겠습니까?

 

 그리하여 1934년 오케레코드사로 옮겨간 고복수는 자신의 최고출세작이자 우리 민족의 고전적 가요라 할 수 있는 <타향>으로 엄청난 히트를 했고, 잇따라 <사막의 한>이 또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사막의 한>은 경쾌한 템포의 노래이지만 <타향>처럼 망국의 설움을 사막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에 실어서 표현했습니다. 나중에 <타향살이>로 바뀐 노래 <타향> 음반의 또 다른 면에 수록된 노래는 <이원애곡(梨園哀曲)>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슬프게 노래한 내용이었지요. 이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은 발매 1개월 만에 무려 5만장이나 팔렸고 단번에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 전문

 

▲고복수 걸작집 LP음반 표지

 

나날이 인기가 쇄도하자 레코드사에서는 제목을 <타향살이>로 바꾸고 위치도 B면에서 A면으로 옮겨 다시 찍었습니다. 쓸쓸한 애조를 머금은 소박한 목소리, 기교를 섞지 않는 창법이 고복수 성음의 특징이었습니다. <타향살이>는 한국가요의 본격적 황금기를 개막시킨 첫 번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만주 하얼빈(哈爾賓) 공연이나 북간도 용정(龍井) 공연에서는 가수와 청중이 함께 이 노래를 부르다 기어이 통곡의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공연 전에 이 노래에 대한 소식을 결코 알려준 적이 없었지만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조용히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고복수는 청중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의해 4절이나 되는 이 노래를 몇 차례나 반복해서 불렀다고 하니 그날 극장의 뜨거웠던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용정공연이 끝난 뒤에 무대 뒤로 고복수를 찾아온 30대중반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부산이 고향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고향집 주소를 적어주면서 혹시라도 부산 쪽 공연을 갈 일이 있을 때 부모님께 자신의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고복수에게 타향살이의 애끓는 신세한탄을 하던 그 여인은 격해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비통한 소식을 들은 고복수는 자신이 마치 그 여인을 죽음터로 몰아넣은 듯한 죄책감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작곡가 손목인 선생이 옆에서 고복수의 어깨를 안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그녀를 위해서 가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성심성의껏 <타향살이>를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날의 공연은 가수와 관객들이 하나가 되어서 혼연일체(渾然一體)의 눈물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케레코드사의 이철(李哲, 19031944) 사장은 무려 2.000원이란 거금을 전속축하 격려금으로 지급했습니다. 당시 소학교 교사의 월급이 42원이었으니, 이 규모는 참 대단한 액수라 하겠습니다. 고복수는 이 돈을 들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무릎 앞에 엎드려 울면서 너그러운 용서를 빌었습니다. 돈을 훔쳐 달아난 아들에게 괘씸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지만 고복수의 부친은 가수로 크게 성공해 돌아온 아들이 내심 너무나 흐뭇했습니다. 광대의 길을 선택하겠다면 아예 부자간 인연을 끊어버리자고 노여움을 표시했던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특별히 송아지를 잡아서 아들을 격려하고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날의 광경을 상상해보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흥겨웠던 모꼬지였을까요?

 

 고복수의 대표곡들로는 <휘파람>, <그리운 옛날>, <불망곡>, <꿈길천리>, <짝사랑>, <풍년송>, <고향은 눈물이냐> 등입니다.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고토와 민족의 근원을 다룬 내용들입니다.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도 원래는 <갈매기 항구>란 노래로 고복수 취입예정이었는데, 흔쾌히 이난영(李蘭暎, 19161965)에게 양보를 해서 만들어진 가요곡입니다. 만약 <목포의 눈물>을 고복수가 불렀다면 어떤 효과가 나왔을까요? 이난영 만큼의 폭발력은 기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한자말 물각유주(物各有主)의 깊은 뜻처럼 노래도 물건도 제각기 임자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짝사랑>에 등장하는 노랫말 ‘으악새’는 억새라는 식물인지 왁새라는 이름의 조류인지 한때 세간에서 흥미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고복수의 대표가요 '짝사랑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 뜸북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아 단풍이 휘날리오니 가을인가요
무너진 젊은 날이 나를 울립니다
궁창(穹蒼)을 헤매이는 서리 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 후유 한숨집니다

-<짝사랑> 전문

 

▲고복수 황금심 부부

 

고복수는 빅타가극단의 인기가수 황금심(黃琴心, 19122001)과 사랑의 불이 붙어 마침내 부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복수의 나이는 31, 황금심은 불과 19세였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았던 부부는 항상 다정하고 애틋한 부부애를 과시하며 살았지만 삶의 불운과 고통은 자꾸만 겹쳐졌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온갖 고생을 이겨낸 고복수 황금심 부부는 여러 험한 일들을 헤치며 혹독한 시련과 고달픔을 이겨내었습니다.

 

 가수 고복수의 삶은 어쩐 일인지 액운과 불행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에 납치되어 끌려가다가 평남 순천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던 일, 악극단경영과 운수회사의 잇따른 실패는 늙은 가수의 몸과 마음을 극도로 지치도록 했습니다. 기어이 싸구려 해적판 전집물(全集物)을 들고 도서외판원이 되어서 서울시내 다방을 전전하며 “저 왕년에 <타향살이>를 불렀던 가수 고복수입니다”라면서 그 특유의 눈물 섞인 목소리를 내었던 슬픈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늙은 가수는 1955 88일 서울 명동의 시공관(市公館)에서 열린 고복수 은퇴공연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수생활 26년 만에 얻은 것은 눈물이요, 받은 것은 설움이외다” 당시 우리의 척박했던 문화적 토양과 환경은 이처럼 훌륭했던 민족가수 한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켜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택시회사도 운영했고, 영화제작에도 손을 대었으며, 음악학원도 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업이 순조롭게 펴나지 못했습니다. 고복수가 운영했던 동화음악학원(同和音樂學院) 시절, <동백아가씨>의 가수 이미자(李美子) <대전부르스>의 가수 안정애(安貞愛)를 배출시킨 것은 하나의 커다란 업적이자 성과라 하겠습니다.

 

 <타향살이>로 민족의 대표가수가 된 고복수는 작곡가 손목인에게 평생 ‘선생님’으로 호칭하며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고복수는 병상으로 문병 온 손목인에게 “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하고 흐느끼며 껴안고 울었습니다. 가수 고복수는 1972, 그의 나이 회갑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고복수 은퇴공연 신문광고

() 고복수 은퇴공연을 마치고 가요계 선후배들과 함께

 

 

() 고복수의 근영

() 고복수 노래비(울산시소재)

 

1991, 고복수의 고향 울산에서 제4회 고복수가요제가 열리던 날, 울산의 북정동 동헌(東軒) 앞에서 ‘고복수노래비’가 제막되었습니다. 노래비에는 대표곡 <타향살이>의 전문이 새겨져 있었고, 고복수 특유의 그 슬픔을 머금은 애잔한 목소리가 한 마리 나비나래처럼 파들파들 떨면서 가수의 고향하늘로 울려 퍼졌습니다.

 

 오늘은 고복수의 이처럼 고단했던 생애를 생각하며 한국가요사에서 이젠 불후의 고전적 명곡이 된 <타향살이>의 애잔한 곡조를 여러분과 함께 흥얼거려 봅니다. 1927년까지 만주로 쫓겨 간 이 땅의 농민들은 무려 백만 명이 넘었습니다. 관서관북(關西關北) 지역의 험준한 산악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1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한국근대사의 처참했던 역사적 사연과 배경, 그리고 상처와 고통들을 생각하면서 <타향살이>를 잔잔히 불러보면 어떨까 합니다. 다정한 친구와 더불어 한 잔 술이 앞에 놓여있다면 더 좋겠지요? 옛 노래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읊조리듯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식민지 시대의 아이돌(idol) 강석연을 아십니까

피가 뜨거워야 할 젊은이의 몸에서 피는 식었습니다.

 그리고 두 눈에는 흥건한 눈물이 괴어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젊은이의 마음은 낙망과 설움으로 가득 차 있고, 온몸에는 병도 깊었군요. 이런 몸으로 과연 어디를 어떻게 여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가수 강석연(姜石燕, 본명 姜福亨, 19142001)이 불렀던 노래 <방랑가>의 한 대목은 차디찬 북국 눈보라 퍼붓는 광막한 벌판을 혼자 떠나갑니다. 이 노래 가사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야말로 비극적 세계관의 절정입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실제로 1920년대 초반 당시 우리 민족의 마음속 풍경은 이 <방랑가>의 극단적 측면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좌절과 낙담 속에서 우리는 기어이 1919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펼쳤고, 죽음을 무릅쓴 채 불렀던 만세소리는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우리의 주권회복 운동은 잔인무도한 일본군경의 총칼에 진압이 되고 말았지요. 그 후의 처절 참담한 심경은 말로 형언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1920년대의 시작품도 몽롱함, 까닭모를 슬픔, 허무와 퇴폐성 따위의 국적을 알 수 없는 부정적 기류가 들어와 대부분의 식민지 지식인들은 그 독한 마약과도 같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1931년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아낸 노래 한 편이 발표되어 식민지 청년들의 울분과 애환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랑가>였습니다. 이 노래는 이규송(李圭松)이 노랫말을 만들고 강윤석(姜潤石)이 편곡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잔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부르면 그나마 답답하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듯했습니다. 줄곧 명치끝을 조여오던 해묵은 체증 같은 것이 다소나마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된'방랑가'의 가사지

 

피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음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뉘가 알거나


돋는 달 지는 해 바라보면서

산 곱고 물 맑은 고향 그리며

외로운 나그네 홀로 눈물 지울 새

방랑의 하루해도 저물어가네


춘풍추우 덧없이 가는 세월

그동안 나의 마음 늙어 가고요

가약 굳은 내 사랑도 시들었으니

몸도 늙어 맘도 늙어 절로 시드네

-<방랑가> 전문

 

▲1930년대 초반의 강석연

 

 

▲() 일본에서 취입후에 한복을 입고 찍은 강석연. () 일본 옷을 입고 찍은 강석연(맨 오른쪽)과 김복희(가운데), 이애리수(맨왼쪽)의 모습. 이들은 모두 빅타레코드 전속가수였다

 

강석연은 1914년 제주도 제주면 삼도리(三徒里)에서 출생했지만, 일찍부터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자랐습니다. 언니 강석제는 토월회에서 활동하는 배우였고, 이 언니의 영향을 받아서 무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예능방면으로 천부적 재능이 있어서 연극, 라디오 드라마 출연, 노래 등으로 이름이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제주도 출신가수로는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난 백난아보다 강석연이 훨씬 먼저였고, 또 최초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 진출해 있던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사 서울지점에서 노래 잘 부르는 강석연을 뽑아서 전속으로 편입했습니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가수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기생, 영화배우, 연극배우 등이 가장 만만한 가수발탁의 대상이었습니다. 소설가이자 유명작사가였던 박노홍(朴魯洪, 19141982)의 증언에 의하면 강석연의 외모는 ‘다소 통통하게 생겼으며 모든 행동에 야무진 구석이 많았고, 노래 부르는 모습과 창법도 야무졌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1931 2월 강석연은 <방랑가> <오동나무> 등 두 곡을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강석연의 위상을 가수로 심어주는 일에 크나큰 기여를 했지요.

 

흔히들 <방랑가>를 평가하면서 이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많이도 발표되었던 유성기음반 중 이른바 ‘방랑물(放浪物)’ 가요의 기점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대중들의 반응이 워낙 드높아서 여러 레코드회사에서는 여타 인기곡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노래를 이애리수를 비롯한 다른 가수의 버전으로 취입하여 발매하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광복 후에는 고운봉, 명국환 등이 재취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독 강석연이 부른 노래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우뚝한 창법으로 시대적 분위기와 색깔을 잘 담아서 들려줍니다. 강석연의 <방랑가>를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넋을 놓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득한 눈보라 벌판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가파른 세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반성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대책 없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경고와 메시지를 작품의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지요.

  

유투브(http://www.youtube.com)에서 <방랑가>를 검색해보면 뜻밖에도 일본과 타이완에서 이 노래가 지금도 여전히 활발하게 연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放浪の唄>란 제목으로 1932년 고가마사오(古賀政男) 작곡, 사토우보노스케(佐藤之助) 작사 표시가 된 음반이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가 되었습니다. 고가마사오 작곡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가 조선에서 전래해오던 옛 가락을 다시 다듬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가사는 원곡의 분위기와 전혀 다릅니다. 노래는 1932년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가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하세가와가 누구냐 하면 바로 일본에서도 데뷔했던 가수 채규엽(蔡奎燁)으로 그가 일본에서 가수생활을 할 때 쓰던 이름입니다. 1962년 일본에서는 가수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旭)가 다시 이 노래를 편곡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船は港に 日は西に いつも日暮れにゃ 帰るのに 

枯れた我が身は 野に山に 何が恋しうて 寢るのやら


捨てた故鄉は 惜しまねど 風にさらされ 雨にぬれ 

泣けどかえらぬ 青春の 熱い淚を 何としよう


路もあるけば 南北 いつも太陽は あるけれど

春は束の間 秋がくる 若い命の 悲しさよ  

-<방랑가>의 일본버전 <放浪の唄> 전문

 

한편 타이완에서는 <유랑지가(流浪之歌)>란 제목으로 진분란(陳芬蘭)이란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대만에서 <우야화(雨夜花)>란 제목의 본토민요로 아예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유랑가>의 일본버전이나 대만버전이 모두 뱃노래를 방불케 하는 쓸쓸한 울림의 내용입니다.

 

船也要回反來 日落黃昏時

去處也無定時 阮要叨位去

拖磨的阮身命 有時在山野

爲何來流目屎 爲何會悲傷  

-<방랑가>의 대만버전 <流浪之歌>의 1절

 

 식민지조선에서 시작된 노래 <방랑가>는 이렇게 일본과 중국에서 여전히 청년세대들에 의해 즐겨 불려왔고 기타 연주곡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동북아시아 일대의 음악적 영향관계는 이처럼 결코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긴밀한 상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노래는 가사의 표면에 나타난 내용을 문맥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 주변에 서려있는 울림과 내적인 반향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제대로 된 맛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방랑가>와 같은 음반의 앞뒷면에 수록된 신민요 <오동나무>는 또 어떠합니까?

 

당시에도 검열(檢閱)의 매서운 눈초리는 삼엄했을 터이지만 이 노래의 효과는 전반적으로 눈물, 이별, 설움, 원한 따위에 대하여 그 원인을 따져서 묻고 비통한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노래가사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특히 마지막 5절 가사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금수강산은 다 어데 가고요/ 황막한 황야가 웬일인가’란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의 억장은 당시 일제가 저질렀던 온갖 수탈과 유린에 대해 새삼스레 끓어오르는 분노와 서러움으로 무너지는 듯합니다.

 

그 아름답고 평화롭던 금수강산의 현실이 이제는 황막한 황야로 변모해버린 정황에 대하여 개탄을 표시합니다. 1절에서 4절까지는 평범한 내용으로 전개되다가 꼭 하고 싶은 가슴속의 말을 5절 가사에 감추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노래가사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치는 웅변적 효과와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담긴 대목을 가수 강석연은 처연하게도 불러냅니다. 후렴구에서의 여운은 이런 비통한 심정을 한층 고조시킵니다.

 

 오동나무 열두 대 속에

신선선녀가 하강을 하네

에라 이것이 이별 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산신령 까마귀는 까욱까욱 하는데

정든 님 병환은 점점 깊어가네

에라 이것이 눈물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홍도 백도 우거진 곳에

처녀총각이 넘나드네

에라 이것이 사랑이란다

에라 이것이 서러움이라오


아가 가자 우지를 마라

백두산 허리에 해 저물어 가네

에라 이것이 이별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금수강산은 다 어데 가고요

황막한 황야가 웬일인가

에라 이것이 원한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신민요 <오동나무> 전문

  

강석연의 대표곡은 위의 두 곡을 비롯해서 <황금광조선(黃金狂朝鮮)>, <에로와 구로>, <젊은이의 노래>, <패수(浿水)의 애상곡>, <인생은 초로(草露)같다>, <서울행진곡>, <남대문타령> 등 다수가 있습니다.

  

강석연이 생전에 남긴 대중문화작품만 하더라도 무려 160여종이 넘습니다. 거기엔 유행가를 비롯해서 영화설명, 영화노래, 스켓취, 동요, 신민요, 코미디, 속요, 넌센스, 만요, 만극 등 실로 다양한 장르의 활동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강석연의 활동영역이 광범했고, 또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입니다. 하지만 가수 강석연과 관련된 자료들은 SP음반이나 가사지 이외에는 별로 이렇다 할 게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강석연 노래에 대한 글을 어느 지면에 발표한 뒤 이를 보게 된 유족과 극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당시의 귀한 사진자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사진 가운데는 빅타레코드사 전속가수 강석연이 같은 소속 이애리수, 김선초, 김복희 등과 함께 일본 빅타레코드사로 초청을 받아서 스튜디오에서 취입을 하는 광경, 도쿄의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광경, 새해를 맞아 빅타레코드사 옥상에서 조선의 여가수들과 함께 각각 ‘근하신년’이란 글자판을 각각 들고 찍은 사진, 이애리수와 단둘이 다정하게 찍은 귀한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강석연은 요즘 말로 하자면 식민지 초반의 아이돌(idol) 가수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

 

▲가수 강석연(1932)

 

강석연의 가수활동은 1939년까지 이어지다가 이후 결혼과 더불어 가요계를 아주 떠나게 됩니다. 당시 언론계와 금융 쪽에서 활동하던 방태영(方台榮, 1885?)과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리고 오로지 가정생활에만 충실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편은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고, 강석연은 홀로 아들 넷을 키우며 고생스럽게 살아갔습니다. 미용기술을 배워서 미장원을 운영하며 꿋꿋하게 가정을 꾸려갔습니다

 

▲() 강석연-오빠 강석우와 함께

() 강석연-토월회 시절 언니와 함께

 

강석연은 가수가 되기 전 언니 강석제(姜石齊)의 권유로 토월회에 가입하여 언니와 함께 무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많은 연극작품과 영화작품에 출연했습니다. 오빠 강석우(姜石雨)도 두 누이동생을 보살피면서 함께 무대 활동에도 참가했지요. 대중예술의 피와 재능이 갖추어져 있었던 형제자매들이라 하겠습니다. 가수 강석연은 분단 이후 그 어떤 대중매체에도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아들 방열의 회고에 의하면 중학교 재학시절, 다락방에서 붉은 비단보자기로 싼 보퉁이를 발견하고 이를 끌러보았는데 거기에는 뜻밖에도 무대의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어머니사진이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어머니는 몹시 노기 띤 표정으로 거기엔 관심을 두지 말라며 황급히 보따리를 어딘가로 깊이 감추어버렸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아들의 학업에 혼란을 줄까봐 자신의 무대경력을 철저히 감추었던 것이지요. 강석연은 2001 8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중들 앞에 전혀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연락처 010-4538-8700)에서는 강석연의 귀한 음원을 수집정리하고 이를 ‘강석연대표곡집’이란 타이틀의 CD 두 장으로 발간해서 세간의 화제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강석연 관련 자료들을 모두 수합해서 잘 간추린 평전(評傳)을 발간하는 것도 해볼 만한 일입니다. 한 가수의 전기적 삶을 정리함으로써 그 시대의 역사성과 의미를 함께 정리해내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한국대중음악사의 귀한 자료들이 하나둘씩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 일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음반, 사진, 가사지, 포스터, 편지, 메모, 유품, 의상 등등 여러 가지가 이에 해당될 터인즉 아직도 많은 보물들이 무관심속에 버려져 있거나 아예 방치된 사례가 많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특히 유성기음반자료는 식민지시대 주민들의 구체적 삶과 내면풍경을 고스란히 알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많은 음반자료들이 여전히 먼지를 덮어쓴 채 우리 앞에 그 전체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동안 험한 세월의 파도가 휘몰아쳐가는 과정에서 많은 음반들이 파괴되어 사라졌을 터이지요. 하지만 남아있는 음반이라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수집하며 갈무리하는 자세가 갖추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 민족의 연인이었던 막간가수-이애리수

자신의 몸속에 갈무리된 이른바 ‘끼’라는 것은 아무리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제압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지요. 줄곧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배우나 가수들이야말로 이 타고난 끼를 마음껏 발산하고 그 재주를 뽐내어야 비로소 대중적 스타로서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는 타고난 끼에 자신의 모든 운명이 휘둘려서 생의 한 구간을 살아갔던 인물입니다

 

 

이름도 특이한 이애리수는 1930 <황성(荒城)의 적()>(<황성 옛터>의 원래 이름) 한 곡으로 우리 문화사에서 그 살뜰한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고운 사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한 경과를 보면 한 사람의 가수로서 많은 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민족의 심금을 울려주는 단 한 편의 절창을 남길 수 있는가의 문제는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애리수는 1910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습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렸을 때의 이름이 음전(音全)으로 예능의 끼가 펄펄 넘치는 아이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완고한 집안 어른들에게 그리 달가운 모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순회연극사 소속의 이애리수는 여러 단원들과 함께 관서지방 일대를 돌며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 악극단이 마침내 경기도 개성 공연을 마치던 날, 극단의 중요 멤버인 왕평과 전수린 두 사람은 멸망한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의 만월대를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휘영청 보름달이 뜬 가을밤이었는데, 더부룩한 잡초더미와 폐허가 된 궁궐의 잔해는 망국의 비애와 떠돌이 악극단원으로서의 서글픔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비감한 심정에 젖은 두 사람은 눈물에 젖어 돌아와 그날 떠오른 악상을 곧바로 오선지에 옮겼고,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그해 늦가을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의 막을 올릴 때 이 노래를 배우 신일선에게 연습시켜 막간에 부르도록 했습니다. 신일선은 나운규가 만든 무성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 영희 역을 맡았던 어여쁜 배우였습니다. 이 곡을 듣는 관객들의 볼에는 저절로 눈물이 주르르 타고 내렸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깊은 한숨까지 들렸습니다. 모든 청중들의 가슴에는 망국의 서러움과 가슴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비분강개한 심정이 끓어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무대에서는 주로 이애리수가 이 곡을 불렀고, 1932년 봄 마침내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음반을 취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 가사지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 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덧없난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난 이 심사를 가삼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넷터야 잘 있거라

-<황성옛터(황성의 적)> 전문

 

 전국의 가요팬들은 이 <황성의 적>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축음기 판매량도 늘어났습니다. 주로 악극단 공연이나 무대를 통해서만 보급되던 유행창가나 영화주제가들이 드디어 음반을 통해 정식으로 보급되는 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 음반이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사이에 5만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워낙 인기가 높아가자 일본 경찰 당국에서는 바짝 긴장의 털을 곤두세웠습니다. 혹시라도 이 노래의 가사 속에 민족주의 사상이나 불온한 내용이 없는지 뒤지고 두리번거렸지요.

  

극장에서도 반드시 임석 순사가 입회하여 흥분한 관중들 앞에서 가수가 이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금지했고, 나중에는 기어이 트집을 잡아서 발매금지를 시키고 말았지요. 이 노래를 만든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경찰서에 불려갔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이애리수의 인기는 193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왕수복과 선우일선을 비롯한 기생가수의 출현, 이난영, 전옥 등 새로운 창법과 감각을 지닌 후배가수들에게 가요팬들의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지요. 창가풍의 단조로운 음색에 익숙한 이애리수의 노래는 인기 반열에서 차츰 퇴조하게 됩니다.

 

묵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구축하는 변화의 거친 물결은 그 자체가 너무나 비정하고 막을 수 없는 것일 테지요. 한 잡지사가 조사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선에서도 이애리수의 노래는 앞 순위에 오르지 못하고 점점 그녀의 이름은 관심권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이러한 때 이애리수는 그녀의 노래를 몹시 사랑하던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연희전문 졸업반 학생이던 배동필! 하지만 이미 배동필에게는 부모가 맺어준 처자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애리수에게도 지난날 그녀의 노래를 사랑하던 이광재란 자산가청년과 진작 정분을 맺어 세 살 바기 아기가 하나 있었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젊은 유부남 유부녀가 불륜으로 만나 사랑을 키워간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과 가수라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행한 난관이 수렁처럼 자꾸만 앞을 가로막습니다.

 

만날 기회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이승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밤 몰래 만나 칼모친이라는 독약을 함께 삼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목을 면도칼로 그어서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정사를 시도합니다. 이런 아슬아슬한 정황이 집주인에게 발견되어 긴급히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입원을 하게 되지요.

 

몇 차례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두 사람은 당시 언론과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기어이 동거생활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갑니다. 배동필은 두 아내를 처첩으로 거느린 야릇한 광경으로 주위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처첩간의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이애리수는 이후에도 또 다시 자살을 시도해서 신문기사의 화제로 오르는데 두 번째의 자살시도에 대해서는 언론과 사회에서 매우 싸늘한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아낸 듯한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이고범 작사, 전수린 작곡)를 마지막 곡으로 취입하게 됩니다. 그 애처로운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을 서러움으로 빠뜨렸고, 눈물까지 뚝뚝 흘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애리수 음독기사

 

하늘에 구름지면 꽃잎도 움츠리고

님께서 눈물지면 내 맘도 섧습니다.

우실 때 같이 우는 마음이 약한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요


가물어 물 마르면 꽃잎도 시들시들

님께서 성내시면 내 맘도 조입니다

성낼 때 떨고 있는 마음이 약한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요


광풍이 불어오면 꽃잎도 나불나불

님께서 뿌리치면 내 맘도 아득해요

가시는 옷깃 잡는 마음이 약한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요

-<버리지 말아주세요> 전문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의 부모는 이 노래를 듣고서 결국 두 사람의 부부로서의 사랑을 승낙하게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27녀의 자녀가 태어났고, 이애리수는 무대를 아주 떠나서 현모양처로 살아갔습니다.

 

▲2008 10월 생존 확인이 보도될 당시 이애리수

 

그런데 지난 2008, 뜻밖의 기사 하나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것은 왕년의 가수 이애리수가 경기도의 한 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이 보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대를 떠나 종적을 감춘 지 무려 80여년 세월이 흘러서 가수는 호호백발 할머니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20대 시절의 사진과 현재의 얼굴모습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은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 그 선과 윤곽이 또렷하게 닮아있었습니다. 언론에서는 특집을 준비하고 인터뷰 프로그램을 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009 331 99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해마다 가을밤만 되면 처량한 귀뚜라미 소리를 효과음으로 해서 이따금 라디오나 TV를 통해 듣게 되는 귀에 익은 슬프고 애잔한 가락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애리수의 <황성옛터(황성의 적)>입니다. 줄곧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노래 한 곡이 지닌 위력은 그토록 완강하던 식민지의 어둠을 조금씩 깨어 부수는 힘으로 움직였고, 전체 한국인들이 험한 세월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저력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 줄곧 민족혼을 노래했던 가수- 왕수복

왕수복(王壽福)이란 가수의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가수 왕수복

 

일찍이 1930년대 서울에는 평양기생 출신의 가수 하나가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통통하고 해맑은 얼굴에 다소 커다란 눈망울을 지녔던 그녀의 대표곡은 <고도(孤島)의 정한(情恨)> <인생의 봄> 두 곡이었답니다.

 

 가수 왕수복은 1917년 평남 강동에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성실이었지요. 그런데 할머니가 수명장수하고 다복하라는 뜻에서 수복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의 유년시절이 불우하듯 왕수복의 집안도 무척이나 가난하고 불우했습니다. 수복이는 11살에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으로 들어갔습니다.

 

기성(箕城)은 평양의 옛 이름이지요.

이제부터 왕수복의 재주는 날개를 달고 둥실 떠오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가곡과 가사, 시조 등의 소리지도를 받았고, 거문고를 비롯한 각종 악기를 두루 배웠습니다. 드디어 왕수복이가 열일곱 살 되던 해, 1933년은 서울로 가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하는 벅찬 해였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갈고 닦은 서도소리 가락의 느낌이 살아나는 바탕에 유행가 가락을 얹어서 엮어가는 왕수복만의 독창적 창법을 구사했던 것입니다.

 

 1933년 여름 왕수복은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울지 말아요> <한탄> 2곡이 수록된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습니다. 이 음반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가락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식민지백성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었고, 이런 왕수복에게는 ‘최초의 민요조 가수’, ‘최초의 기생가수’ 등의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왕수복의 명성이 본격적으로 전 조선에 울려 퍼지게 된 것은 1933년 가을, 포리도루레코드사로 옮긴 뒤 유행소곡이란 이름의 노래 <고도(孤島)의 정한(情恨)>(청해 작사, 전기현 작곡, 포리도루 19086) <인생의 봄>(주대명 작사, 박용수 작곡, 포리도루 19086)을 발표한 뒤였습니다.

 

▲왕수복의 노래 '고도의 정한' 레이블

 

▲왕수복의  '고도의 정한' 가사지

 

 

칠석날 떠나던 배 소식 없더니

바닷가 저쪽에선 돌아오는 배

뱃사공 노래 소리 가까웁건만

한번 간 그 옛님은 소식없구나


어린 맘 머리 풀어 맹세하더니

시악씨 가슴 속에 맺히었건만

잔잔한 파도소리 님의 노랜가

잠들은 바다의 밤 쓸쓸도 하다

-<고도의 정한> 전문

 

유성기 음반 앞뒷면에 실린 이 노래는 당대 최고의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당시 포리도루레코드회사에서 왕수복이 취입한 음반을 선전하는 광고 문구를 함께 읽어보실까요?

  

평양의 명화, 왕수복 입사 제1, 신유행가의 호화, 금수강산 평양이 나흔 포리도루 전속 예술미성의 가희 왕수복 양의 독창 레코드 <고도의 정한> <인생의 봄>은 과연 정적한 가을에 우리를 얼마나 위로하여 줄까! 드르라 이 호평의 소리반을! 왕수복 취입집 반도 제1인기 화형(花形)가수!

  

때 ‘화형가수’란 말은 가장 훌륭한 최고의 가수란 뜻입니다. 왕수복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대표적인 여성가수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곡들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여기에 옮겨 적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곡들 가운데서 왕수복의 목소리로 들어볼 수 있는 <그리운 강남>이란 노래는 우리의 귀에 아직도 여전히 익은 작품이지요.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

하늘이 푸르면 나가 일하고

별 아래 모이면 노래 부르니

이 나라 이름이 강남이라네

그리운 저 강남 두고 못 가는

삼천리 물길이 어려움인가

이 발목 상한지 오래이라네

그리운 저 강남 건너가려면

제비떼 뭉치듯 서로 뭉치세

상해도 발이니 가면 간다네

-<그리운 강남> 전문

  

당시 왕수복의 음반은 한 장에 1 50전이었다고 합니다. 1935, 당시 최고의 인기잡지였던 <삼천리>에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었는데, 총 여덟 차례나 실시했던 이 투표에서 왕수복은 1903표를 얻어서 단연 1위를 기록했습니다. 왕수복이 무대에 오르면 대중들의 함성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만인 절찬’ ‘유행가의 여왕’이란 칭호와 함께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가수 왕수복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은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기생출신’이란 꼬리표가 항상 짙은 그늘로 드리워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왕수복은 그동안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추진해오던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폴리돌레코드사 전속가수 시절의 왕수복 명함.

 

그것은 첫째로 기생 신분의 소속을 평양권번에 반납하는 일이었고, 둘째로는 서양음악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유학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왕수복의 나이 23, 그때까지도 서울의 레코드 회사들은 여전히 왕수복에게 끈질긴 취입 제의를 해왔지요. 그러나 왕수복은 모든 제의와 권유를 거절하고, 서구의 성악을 공부하여 조선의 전통과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무용 음악의 밤’ 공연이 열렸을 때 왕수복은 우리 겨레의 민요 <아리랑>을 서양식 창법으로 노래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요를 성악발성으로 부른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1939년 왕수복은 한 일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최승희씨가 조선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많이 노래하고 싶습니다.

 

우리 민요의 세계화를 위해 왕수복은 자신이 누리던 모든 인기와 보장된 길을 과감하게 버리고 고독한 경로를 선택한 것이지요.

 

이런 왕수복의 삶에 그녀의 포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한 연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李孝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 짧고 덧없는 봄눈이었습니다. 왕수복의 단호하고도 엄정한 삶은 일제말 암흑기에서 특히 밤하늘의 별처럼 빛을 반짝이고 있습니다. 조선민요도 일본어로 부르라고 강요받던 그 시절, 왕수복은 친일음악인이 되지 않으려고 단호하게 음악예술계를 은퇴합니다. 이런 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방 되던 해에 왕수복의 나이는 스물아홉, 그녀의 앞길에 다시 새로운 연인이 나타났습니다. 경제학도 김광진(金光鎭). 그러나 그녀의 연인은 사회주의자였고, 두 사람은 함께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결혼에 골인합니다. 분단 이후 왕수복은 북한음악계에서 중요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평양음악대학에서 민요의 현대화와 보급에 애쓰던 왕수복이 회갑을 맞이하게 되자 왕수복의 노래를 좋아하던 김일성이 직접 회갑연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칠순이 되었을 때 김정일이 다시 잔치와 특별공연을 열어주었습니다. 팔순 때에도 제자들과 함께 무대와 올라 노래를 불렀다고 북한의 보도는 전하고 있습니다.

 

가요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살리고 전통적 정서를 꽃피우려 애를 썼던 가수 왕수복의 삶은 분단시대 북한에서도 여전히 그 빛이 퇴색하지 아니합니다.

 

2003 6, 왕수복은 8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가수-선우일선

기생을 다른 말로 해어화(解語花)라 부르는 것을 아십니까?

 말귀를 잘 알아듣는 꽃이란 뜻입니다. 이 해어화들은 조선의 전통 궁중가무 개척자들이요, 선구자였습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전역에는 권번이 개설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평양권번의 명성은 드높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다시 떠올려 보고자 하려는 기생출신 가수 선우일선(鮮于一扇)도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 출신입니다. 최창선이란 본명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1919년 평남 대동군 룡성면에서 태어난 선우일선은 온화한 성격에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윤기가 자르르 느껴지는 목소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마치 옥을 굴리는 듯 고운 선우일선의 어여쁜 성음에 반한 남정네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우일선 데뷔 직후

 

지금은 누렇게 변색된 당시 가사지(歌詞紙)와 유성기음반의 상표를 통해 선우일선의 생김새를 짚어봅니다. 얼굴은 동그스름한 계란형에 머리는 쪽을 쪄서 한쪽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군요. 눈썹은 제법 숱이 많고 검습니다. 그 밑으로 가장자리가 아래로 드리운 눈매는 선량한 성격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눈은 방긋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마치 봄비에 젖은 복사꽃잎처럼 말입니다.


아담하게 얼굴의 중간에 자리 잡은 코는 얼굴 전체의 윤곽에서 안정과 중심을 유지하면서 분위기를 살려줍니다. 인중은 다소 짧아 보이는데, 그 입술의 선은 얼마나 어여쁜지 모릅니다. 아래위 입술은 부드럽게 다물려 있습니다만 그것이 결연한 함구(緘口)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전반적으로 은은한 느낌을 주는 선우일선의 용모는 보면 볼수록 가슴 설레고 서늘해집니다. 하얀 깃 동정을 곱게 달아 여민 목선이 아름답고, 저고리는 부드러운 흑공단으로 지은 듯합니다.

 

, 이만하면 1930년대의 기생가수 선우일선의 용모가 충실하게 전달이 된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직접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은 미련처럼 가슴에 오래 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선우일선의 그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듯한 노랫소리를 한번 들어보아야겠습니다.

 

독일 계열의 레코드사였던 포리도루는 1931년 서울에 영업소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1932 9월부터 조선의 음반을 만들게 됩니다. 당연히 한국인 가수가 필요했지요. <황성옛터>의 노랫말을 지은 왕평(王平, 19081941)과 여배우 이경설(李景雪)이 문예부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포리도루에서는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며 가수를 모집했습니다. 평양기생 출신의 선우일선도 이 무렵 발탁이 된 것입니다. 선우일선은 1934년 포리도루레코드사를 통해 가수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이때 데뷔곡은 시인 김안서(金岸曙, 1896?) 선생의 시작품에 작곡가 이면상(李冕相, 19081989)이 곡을 붙인 <꽃을 잡고>였습니다. 국악기 반주에 맞추어 높은 톤으로 엮어가는 선우일선의 이 노래는 이제 신민요의 고전으로 기록될 만한 작품이란 평판을 받습니다.

 

하늘하늘 봄바람이 꽃이 피면
다시 못 잊을 지낸 그 옛날

지낸 세월 구름이라 잊자건만
잊을 길 없는 설운 이 내 맘

꽃을 따며 놀던 것이 어제련만
그 님은 가고 나만 외로이

-<꽃을 잡고> 전문

 

▲선우일선 전성기 시절

 

작사가이자 뮤지컬 작가였던 이부풍(李扶風, 19141982)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선우일선의 목소리는 “마치 하늘나라에서 옥퉁소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녀의 아름답고 청아한 음색은 신민요라는 경지를 한층 더 밝혀주었다.”고 했습니다. 북한에서 발간된 자료 『계몽기 가요선곡집』(2001)에 의하면 왕수복의 부드럽고도 독특한 가창력을 “설레이는 바다”에 견줄 수 있다면 선우일선의 가창력을 “노을 비낀 호수”로 비견하고 있습니다. 은은한 울림이나 아련함이 설레는 음색을 이렇게 표현한 듯합니다. 노래의 형상이 은근하면서도 운치가 있고, 마치 비단결처럼 부드러우며 아름답다고 해서 생겨난 비유적 표현이지요.

 

▲선우일선 조선팔경가 음반

 

선우일선은 줄곧 서도민요의 구성지고도 애수에 젖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신민요 창법으로 불렀는데, 이 때문에 포리도루레코드사는 왕수복(王壽福)을 포함하여 세간에서 ‘민요의 왕국’이란 평을 들었습니다. 당시 취입한 대표적인 신민요곡으로는 <숲 사이 물방아>, <원포귀범>, <영춘부>, <원앙가>, <느리게 타령>, <청춘도 저요>, <지경 다지는 노래>, <가을의 황혼>, <별한>, <압록강 뱃노래>, <남포의 추억>, <무정세월>, <그리운 아리랑>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우일선의 노래를 단연 대표하는 노래로는 그녀의 출세작이기도 했던 <조선팔경가(朝鮮八景歌)>(1936.1)일 것입니다.

 

▲'조선팔경가' 가사지

 

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에 석굴암 아침 경은 못 보면 한이 되고
해운대 저녁달은 볼수록 유정해라

에 캠프의 부전고원 여름의 낙원이요
평양은 금수강산 청춘의 왕국이라

에 백두산 천지 가엔 선녀의 꿈이 짙고
압록강 여울에는 뗏목이 경이로다


(후렴)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조선팔경가> 전문

 

<조선팔경가>(편월 작시, 형석기 작곡) 2박자의 밝고 씩씩한 곡으로 신민요의 고전에 해당되는 명작입니다. 이 작품의 창작 모티브는 석굴암의 아침 경관이 보여주는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작사가 편월(片月)은 왕평 이응호의 또 다른 예명입니다.

 

<조선팔경가>를 창작한 작곡가 형석기(邢奭基, 19111994) 1911년에 태어나 20대초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해방 후에는 민요편곡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 노래는 1939 <조선팔경가>란 제목으로 바꾸어서 재발매했는데, 첫 발표 후 3년이 지난 세월에도 여전히 대중들의 크나큰 반향을 얻었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잃었던 식민지시대에 내 나라 내 땅의 아름다움과 그 민족적 긍지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노래를 만들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찡했겠습니까. 당시 식민지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이는 기회가 있을 적마다 이 <조선팔경가>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목이 메도록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선우일선 북한시절

 

해방 후 북한에서도 이 노래는 계속 불러졌는데, 이 사실은 참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팔경가>란 원래의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되 여덟 군데의 명소를 모조리 북한지역으로만 개사해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 남한의 것과 다릅니다. 한편 이 노래는 남한에서도 본래의 제목 <조선팔경가> <대한팔경가>로 바뀐 모습으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조선’이란 북한의 국명이 불편했던 것이지요. 남북한이 다 같이 함께 부르는 곡조지만 분단의 독소는 이렇게 노래에까지 스며들어 제목과 가사를 남북한 버전으로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신민요풍의 가수 선우일선의 노래는 하나같이 중심과 터전을 잃어버린 당시 식민지민중의 서러움과 슬픔, 청춘의 탄식, 고달픔, 삶의 애환 따위를 너무도 애처롭고도 유장한 가락으로 실실이 풀어갑니다. 선우일선의 음색에는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제 풀에 말라버린 눈물자국이 느껴집니다.

 

선우일선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때 고향인 평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에겐 특별히 사상이나 이념이 따로 있을 리 없었고, 다만 고향의 가족과 친척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선우일선은 해방 후에도 많은 노래를 불렀으며, 평양음악무용대학 전신인 평양음악대학 성악과에서 교편을 잡고 민족성악 전공으로 연구와 후진양성에 노력하면서 민요에 관심을 가진 후학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은퇴 후에도 민요발전을 위한 노력에 힘을 쏟던 선우일선은 1990년 곡절도 많았던 이승을 조용히 하직했습니다

  

# 최고의 신민요 가수-김복희 

인기(popularity)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에 쏠리는 대중의 높은 관심이나 좋아하는 기운입니다. 인기에만 의존해서 오로지 인기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가수와 배우들입니다. 아무리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스타라 하더라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덧없는 실바람이나 물거품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줄곧 다루고 있는 한국근대의 대표적인 가수들이 살아갔던 삶의 경과를 살펴보노라면 이러한 인기의 본체를 실감하게 됩니다.

  

인기의 상승은 독이요, 인기의 하강은 조바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가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지고 난 뒤 그 허탈감을 참지 못해서 삶을 비관하거나 절망에 빠져서 마약, 혹은 자살의 방법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인기란 품에 비수를 감추고 있는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인기가 높았건 낮았건 간에 비정한 세월은 모든 내용을 허무의 세계로 완전히 매몰시켜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1930년대 빅타레코드사가 간판 격으로 자랑하던 가수 김복희(金福姬, 1917?)의 경우도 바로 이 허무의 기슭에 매몰된 대중음악인으로 여겨집니다.

 

김복희의 생애는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구체적 자료를 확인할 수 없으나 다만 가수 자신의 인터뷰와 구술을 토대로 재구성해보면 1917년 평남 안주 입석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12세에 부친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가정형편이 몹시 곤궁해지자 김복희의 어머니는 가족들과 평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복희는 동생의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평양의 그 유명한 기성권번으로 들어가 기생수업을 받고 기생노릇을 하며 살아갑니다.

 

▲평양 기생학교 시절의 김복희

 

연광정을 지나 채관리(釵貫里)라는 곳에 세워져 있던 평양의 기생학교에는 화초병풍을 두른 방안에서 약 200여명의 어린 기생아씨들이 승무와 검무, 국악기 연주, 가창을 연습하는 소리가 담 밖으로 낭랑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김복희가 다니던 평양기생학교에는 선우일선(鮮于一扇)이 동갑나기 친구로 둘이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선배 왕수복(王壽福)이 이미 가요계로 데뷔해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친구 선우일선도 폴리돌레코드사로 불려가 인기가수가 되었던 시절이라 김복희의 경우도 은근히 그런 기대를 가슴속에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지요. 김복희의 나이 17세가 되던 1934, 서울의 빅타레코드사 문예부장 이기세(李基世, 18891945)의 집에 가 있던 평양기생 곽향란(郭香蘭)이 이기세에게 김복희의 뛰어난 가창능력을 추천했고, 이기세는 직원을 보내어 곧장 서울로 불러왔습니다.

 

이기세가 시험해본 김복희의 가창능력은 그 솜씨가 과연 부족함이 없었을 뿐더러 파르르 떠는 발성의 울림에서 기묘하게도 슬픈 여운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이기세는 시인 이하윤과 작곡가 전수린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어린 기생 김복희의 첫 음반이 반드시 성공리듬을 탈 수 있도록 신신당부했습니다.

 

 이런 전후사정이 1935년 잡지 <삼천리>지에 실린 글 ‘거리의 꾀꼬리인 십대가수를 내보낸 작사 작곡가의 고심기’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전수린이 김복희의 첫 작품 <애상곡(哀傷曲)>에 대한 작곡을 먼저 했고, 가사는 작곡을 완료한 뒤에 시인 이하윤에게 의뢰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작곡가 전수린의 회고를 들어보시지요.

 

 ‘김복희의 <애상곡>은 실로 나의 고심을 짜낸 것입니다. 처음에 김복희가 노래를 우리 회사에 와서 부르는 데 그 노래를 들음에 그 몸집같이 휘청휘청 마치 능라도 수양버들 같아서 그만 그 목청조차 몸 스타일에 따른 듯 하겠지요. 그래서 그 성대를 들음에 간드러지고 늘어지고 흔들리는 것이 애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서 이 멜로디에 맞는 곡조를 지어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김복희의 노래와 맞춰보니 아주 적당하다고 보아서 내가 처음 뜻을 발표해 보았으나 되지 않고 해서 마침 이하윤 씨에게 작사를 청한 것입니다. 그 늘어진 곡은 조선의 정조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애상곡>에 있어 그 처분처분 넘어가는 것을 대중이 퍽 좋아한 모양입니다마는 나로서는 나의 힘이 부족했더라도 장차 김복희가 불러낼 노래에는 더욱 그 묘한 점을 완전히 발표할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김복희의 첫 작품인 <애상곡> 가사를 맡았던 시인 이하윤은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순서인즉 작사도 먼저 되고 그 다음 작곡이 되고 그 후에 노래를 불러 주어야 옳을 터인데 이 <애상곡>은 아주 거꾸로 되었지요. 김복희의 목청을 듣고 거기에 맞을 곡을 지어주면서 이러이러한 의미에서 했으면 좋을듯하다고 하기에 내 생각해보아야 아무래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첫째 김복희가 입사해서 세상에 처음 알리는 것인 만큼 독특한 것을 내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구슬프게 가장 애상적인 그 목소리를 배합해서 짓노라고 매우 힘이 든 것이외다.

 

 그 목소리는 보통의 목청이 아니고 갈피갈피의 눈물과 한숨이 섞인 듯 연약한 여자가 달빛아래 홀로 서서 검푸른 못을 들여다보는 그 미묘 신비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몇 날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작사한 것이나, 이것을 김복희의 목에 맞춰 몇 번이나 수정했던지 사실 나로서 힘든 작사의 하나이외다.

 

 그래서 연습을 마치고 취입해서 테스트 판을 듣고 좋다고 해서 거리거리 악기점에서 구슬프게 빼는 <애상곡>은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김복희는 자기의 묘성(妙聲)을 완전히 아직은 발해보지 못한 줄로 압니다. 그 목소리에 알지 못할 깊은 점은 언제나 풀릴 런지 앞으로 나올 것을 주목치 않을 수 없습니다.

 

평양기생출신 가수 김복희의 첫 데뷔 작품 <애상곡>의 노래는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김복희의 음색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내지르는 가운뎃소리를 중심으로, 그 소리를 다시 한 맺힌 슬픔으로 비비며 껴안는 또 다른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나부기는 버들가지 같기도 하고, 가을날 적막한 숲에서 혼자 지저귀는 꾀꼬리의 하염없는 흐느낌 같기도 합니다.

 

어린 기생의 가창(歌唱)에서 어찌 이렇듯 한과 슬픔과 삶의 고뇌가 함께 어우러진 깊은 배합의 울림이 빚어져 나오는 것일까요? 당시 언론에서는 김복희 가창의 특색을 ‘북국적인 침착과 풍부한 성량’으로 손꼽았습니다. 빅타레코드사에서는 인기가 높고 음반판매량이 많은 김복희를 ‘금간판’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처럼 김복희의 노래는 출반되자마자 장안의 큰 화제와 인기를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지식인 계층에서 김복희의 노래에 깊이 몰입된 가요팬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김해송과 혼성듀엣으로 불렀던 노래 <명랑한 양주> 노래는 장안의 화제를 모았습니다.

 

 얼굴이 고와서 계집입디까

조밥에 된장을 먹으면 어때

아들 딸 잘 낳고 바느질 잘 하는

그러한 여자가 실상 좋더군

덩치만 크다고 사내랍디까

땅딸보 몸집에 곰보면 어때

소리나 잘 하고 마음도 구수한

그러한 사나이가 한결 좋더군

입성을 잘 입어 마누랍디까

속세배 치마를 입으면 어때

봉자질 잘 하고 마전질 잘 하는

그러한 여인네가 마냥 좋더군  

-<명랑한 양주> 전문

  

배우와 가수를 겸했던 복혜숙의 평에 의하면 김복희는 미인형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는 김복희는 재색을 겸비하고 성음이 뛰어난 기생출신 가수로 보이며 마침내 인기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1934년에 빅타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되어서 이후 5년 가까운 세월동안 무려 87편의 가요곡을 발표합니다. 그러다가 김복희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인 1939 4월에 포리도루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기었고, 포리도루에서는 5개월 동안 11편의 가요곡을 발표하다가 이후 가요계를 완전히 떠나면서 잊어진 가수가 되었습니다. 가수로서 마지막 발표곡은 포리도루에서 1939 10월에 발표한 <엇저면 그럿탐>으로 확인이 됩니다. 가요계에서 가수로 활동했던 시간은 도합 5년가량입니다.

 

김복희 노래의 특색은 <하로밤 매진 정>, <날 다려가오>, <탄식하는 술잔>, <연지의 그늘>, <농속에 든 새> 따위에서도 느껴지는 바와 같이 삶의 고통 속에서 헤매는 기생의 하소연과 탄식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음정이 환하고 성량이 크게 느껴지지만 한편 부드러운 맛이 있어서 그에게는 무슨 곡조를 주더라도 실패가 적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김복희 노래를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신민요(민요) 21, 속요 1, 주제가 1, 째즈쏭 1, 기타 모두는 유행가 장르에 속합니다.

 

 기생학교 시절에 갈고 닦은 성음인지라 역시 신민요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다음 노래는 김복희가 발표한 신민요 <함경도 아가씨>입니다,

 

명사십리 단두바위에 석굴 따는 아가씨야
신고산이 우루 우루루 멋들어진 콧노래에
갈매기도 흥에 겨워 닐리리야 춤추누나
해당화는 시들지라도 아가씨는 늙지 마오

길주명천 두메산골에 베를 짜는 아가씨야
치마 춤에 멀구 다래는 누굴 주려 감췄느냐
싱글싱글 웃음 주는 떠꺼머리총각에게
물그릇은 줄 지라도요 손목을랑 조심하오

삼수갑산 주막거리에 그네 뛰는 아가씨야
치렁치렁 드린 머리채 갑사댕기 풀어질라
민며느리 삼년 석 달 울고 오던 큰 애기도
아리아리 살금 내 주리 스리스리 바람났소
 

-<함경도 아가씨> 전문

 

박화산 작시, 이기영 작곡으로 1939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북관지역(北關地域)의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바닷가에서 굴 따는 처녀, 산촌에서 길쌈하는 처녀, 농촌마을에서 그네 뛰는 아가씨를 표상으로 하여 한국인의 전통적 삶과 아름다운 생활풍속을 정겨움과 사랑스러움이 듬뿍 느껴지는 필치의 분위기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너무도 생기로운 북방정서(北方情緖)를 이 노래에서 경험해볼 수 있지요. 이보다 4년 앞서 발표되었던 신민요 <제주아가씨> <함경도 아가씨>와 유사한 내용입니다. 제주도를 테마로 한 노래로서는 매우 희귀한 초창기 작품으로 기록이 됩니다.

 

▲김복희의 노래 '내 고향 칠백리' 가사지

 

김복희 노래에 가사를 보내준 작사자는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명단을 보면 이하윤, 김벽호, 이고범, 조영출, 전수린, 김동운, 유도순, 이현경, 이하윤, 강남월, 오관자, 고파영, 김팔련(김동환), 고마부, 홍희명, 박화산, 유춘수, 김포몽, 이부풍, 조벽운, 김송파, 강해인 등입니다. 이 가운데서 고마부의 노랫말이 9, 박화산, 고파영이 각 4편입니다. 함께 활동했던 작곡가로는 전수린, 김교성, 김준영, 나소운(홍난파), 탁성록, 김저석, 김면균, 형석기, 문호월, 이기영, 최상근, 고창근 등과 일본인 세전의승, 좌좌목준일 등이 확인이 됩니다.

 

이 가운데서 전수린이 15편으로 가장 많고, 나소운, 즉 홍난파의 작품이 7, 일본인 작곡가 좌좌목준일이 5편입니다. 듀엣으로 함께 노래를 불렀던 가수로는 이규남, 김교성, 손금홍, 이복본, 김해송, 이훈식 등으로 도합 11곡의 듀엣곡 중 이규남과 4, 이복본과 2편을 불렀습니다. 특이한 것은 작곡가 김교성과 듀엣곡을 취입한 음반도 보입니다.

 

▲전성기 시절의 김복희

 

김복희가 가수로 활동하던 전성기에 세간의 평은 대체로 양호합니다. 1936 75일자 매일신보에도 김복희 특집 인터뷰 기사가 발표되었고, 대중잡지 <삼천리>에는 김복희 관련 기사가 여러 차례 발표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복희가 가수활동을 하면서 평양의 기성권번 소속 기생을 겸했다는 사실입니다. <삼천리> 취재기사에 의하면 김복희는 평양 경재리 18번지에 하얀 사기로 제작한 ‘김복희’ 문패까지 붙어있는 별채에 살면서 단골고객들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김복희의 특별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여러 대중적 무대에 단골로 초청을 받았던 경과를 볼 수 있습니다. 1935 35일 평양 금천대좌(金千代座)에서 열린 평양축구단후원회주최 “각레코드사 연합 유행가 실연의 밤”에 30명 가수가 한 무대에 출연할 때 김복희는 빅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가수로 유일하게 참가했습니다.

 

 김복희가 출연하는 한 무대의 안내문에는 ‘레코드로만 듣고 그 미성에 취하든 김복희 팬들에게는 이번이야말로 스테지 우에서 부르는 그 득의의 <애상곡>을 들을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사뭇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김복희의 가장 대표곡으로 평가되는 노래 <애상곡>의 선율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날 저무는 바닷가에 희미한 저 별
괴로운 꿈 모두 잊고 따라서 가리
노래 불러 밤을 새던 정든 포구여
사랑하는 님을 두고 홀로 떠나네
별을 따라 나는 가네 내 사랑아
잘 있거라 나는 가네 님을 두고 가네

가는 나를 잡지 마라 다시 올 것을
젖은 소매 뿌리치는 가슴만 쓰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묻지를 마라
몸은 가도 사랑만은 두고 떠나네
별을 따라 나는 가네 내 사랑아
잘 있거라 나는 가네 님을 두고 가네

-<애상곡> 전문

 

경성방송국(JODK) 라디오 프로에도 자주 출연해서 자신의 대표곡들을 불렀던 신문기사가 획인이 됩니다. 이처럼 평양에서 서울로 자주 왕래할 때에는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1935 <삼천리>지가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에서 김복희는 왕수복, 선우일선, 이난영, 전옥에 이어서 5위의 자리에 오릅니다. 레코드의 양은 늘고 질은 떨어진다는 언론의 비판이 쏟아질 때에도 김복희의 노래가 지닌 품격만큼은 예외로 칭찬을 들었습니다.

 

▲중년 이후의 김복희

 

“순정을 노래하는 북국의 가인(歌人), 비행기 원정(遠征)의 김복희” 이처럼 성대한 소개문구로 존재를 과시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가수 김복희는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 불과 5개월 동안만 활동 한 뒤 젊은 후배가수들에게 존재가 가려져 빛을 못 보게 되자 주저 없이 가요계를 떠났습니다. 은퇴한 뒤에는 조용한 노후를 보낸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1960년대에는 동아방송에 잠시 출연했던 기록이 보이고, 1990년대 초반에는 서울에서 가톨릭교회 신자로 여생을 보낸다는 증언을 듣기도 했으나 이제는 1930년대 빅타레코드사 대표가수였던 김복희의 이름마저 제대로 기억하는 이조차 없습니다. 바람찬 망각의 언덕에 쓸쓸히 묻혀 있는 왕년의 화려했던 한 가인을 생각해봅니다.  

 

# 식민지백성의 서러움을 전한 고복수의 타향살이

때로 한 편의 시작품보다 유행가 가사가 더욱 절실한 느낌으로 가슴속에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좀 더 나은 삶을 향해 오늘도 안간힘을 쓰며 땀 흘리는 인간의 삶은 온갖 힘겨운 부담과 피로가 덧쌓여서 한날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의 지난 시절은 험난했습니다. 봉건왕조의 우울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시점에서 우리 겨레는 제국주의 침탈이라는 새로운 질곡에 신음해야만 했습니다. 그 제국주의는 고무신과 안경, 혹은 석유와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명종(自鳴鐘)의 얼굴로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유혹이자 바닥 모를 늪이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슬금슬금 불안의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삶의 중심과 갈피를 모조리 잃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기도 전에 가혹한 수탈과 모진 유린이 시작되었지요. 자고 나면 밝은 아침이 와야 마땅한데 광명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고, 눈앞엔 여전히 고달픈 암흑천지였습니다.

 

▲() 고복수의 대표가요 '타향(타향살이)'
(
) 고복수의 대표가요 '사막의 한

 

바로 이 무렵에 고복수(高福壽, 19111972)가 처연한 성음으로 불렀던 <타향살이> <사막의 한>은 바로 이러한 세월의 암담함을 상징적으로 빗대어 표현했던 노래였습니다. 두 곡 모두 뛰어난 작사가 김능인(金陵人, 19111937) 선생과 작곡가 손목인(孫牧人, 19131999) 선생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지요. 세상에서는 이 대단한 가요작품을 만들어 식민지백성의 서러움을 달래주었던 훌륭한 작사가, 작곡가, 가수 셋을 일컬어 ‘손금고(孫金高) 트리오’라고 불렀습니다.

 

가수 고복수는 1912년 경남 울산 하상면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기계국수집을 운영하는 영세한 상인이었습니다. 유달리 음악을 좋아했던 고복수는 교회합창단에 들어가 각종 악기를 익혔고, 뒷동산에 올라가 저물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선교사들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을 배웠지요. 이 솜씨를 인정받아서 울산실업중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복수의 나이 18세 때에 경남 울산에서 전국가요콩쿨 예선에 출전하여 뽑혔고, 부산공회당에서 열린 콩쿨대회에서 1등을 하긴 했지만 서울로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가수로서 출세를 꿈꾸던 청년 고복수에겐 이것저것 물불을 가릴 틈이 없었지요. 마침내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장롱에서 60원을 몰래 꺼내어 달아났고, 1933년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서울 본선에서 기어이 2등으로 뽑혔습니다. 이때 고복수의 나이 22세였습니다.

 

 검정두루마기에 하얀 장갑을 끼었던 시골뜨기 청년 고복수의 삶은 이로부터 활짝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콜럼비아사는 웬일인지 고복수에 커다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때 작곡가 손목인이 고복수를 오케레코드사 전속으로 재빨리 인도해서 계약을 맺었는데 쌀 한 가마니에 5원하던 시절에 고복수는 계약금 1.000, 월급 80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겠습니까?

 

그리하여 1934년 오케레코드사로 옮겨간 고복수는 자신의 최고출세작이자 우리 민족의 고전적 가요라 할 수 있는 <타향>으로 엄청난 히트를 했고, 잇따라 <사막의 한>이 또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사막의 한>은 경쾌한 템포의 노래이지만 <타향>처럼 망국의 설움을 사막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에 실어서 표현했습니다. 나중에 <타향살이>로 바뀐 노래 <타향> 음반의 또 다른 면에 수록된 노래는 <이원애곡(梨園哀曲)>이었습니다. 떠돌이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슬프게 노래한 내용이었지요. 이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은 발매 1개월 만에 무려 5만장이나 팔렸고 단번에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고복수의 '타향(살이)' 가사지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 전문

 

▲고복수 걸작집 LP음반 표지

 

나날이 인기가 쇄도하자 레코드사에서는 제목을 <타향살이>로 바꾸고 위치도 B면에서 A면으로 옮겨 다시 찍었습니다. 쓸쓸한 애조를 머금은 소박한 목소리, 기교를 섞지 않는 창법이 고복수 성음의 특징이었습니다. <타향살이>는 한국가요의 본격적 황금기를 개막시킨 첫 번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만주 하얼빈(哈爾賓) 공연이나 북간도 용정(龍井) 공연에서는 가수와 청중이 함께 이 노래를 부르다 기어이 통곡의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공연 전에 이 노래에 대한 소식을 결코 알려준 적이 없었지만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조용히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고복수는 청중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의해 4절이나 되는 이 노래를 몇 차례나 반복해서 불렀다고 하니 그날 극장의 뜨거웠던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용정공연이 끝난 뒤에 무대 뒤로 고복수를 찾아온 30대중반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부산이 고향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고향집 주소를 적어주면서 혹시라도 부산 쪽 공연을 갈 일이 있을 때 부모님께 자신의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고복수에게 타향살이의 애끓는 신세한탄을 하던 그 여인은 격해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비통한 소식을 들은 고복수는 자신이 마치 그 여인을 죽음터로 몰아넣은 듯한 죄책감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작곡가 손목인 선생이 옆에서 고복수의 어깨를 안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그녀를 위해서 가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성심성의껏 <타향살이>를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날의 공연은 가수와 관객들이 하나가 되어서 혼연일체(渾然一體)의 눈물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케레코드사의 이철(李哲, 19031944) 사장은 무려 2.000원이란 거금을 전속축하 격려금으로 지급했습니다. 당시 소학교 교사의 월급이 42원이었으니, 이 규모는 참 대단한 액수라 하겠습니다. 고복수는 이 돈을 들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무릎 앞에 엎드려 울면서 너그러운 용서를 빌었습니다. 돈을 훔쳐 달아난 아들에게 괘씸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지만 고복수의 부친은 가수로 크게 성공해 돌아온 아들이 내심 너무나 흐뭇했습니다. 광대의 길을 선택하겠다면 아예 부자간 인연을 끊어버리자고 노여움을 표시했던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특별히 송아지를 잡아서 아들을 격려하고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날의 광경을 상상해보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흥겨웠던 모꼬지였을까요?

 

고복수의 대표곡들로는 <휘파람>, <그리운 옛날>, <불망곡>, <꿈길천리>, <짝사랑>, <풍년송>, <고향은 눈물이냐> 등입니다. 거의 대부분 잃어버린 고토와 민족의 근원을 다룬 내용들입니다.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도 원래는 <갈매기 항구>란 노래로 고복수 취입예정이었는데, 흔쾌히 이난영(李蘭暎, 19161965)에게 양보를 해서 만들어진 가요곡입니다. 만약 <목포의 눈물>을 고복수가 불렀다면 어떤 효과가 나왔을까요? 이난영 만큼의 폭발력은 기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한자말 물각유주(物各有主)의 깊은 뜻처럼 노래도 물건도 제각기 임자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짝사랑>에 등장하는 노랫말 ‘으악새’는 억새라는 식물인지 왁새라는 이름의 조류인지 한때 세간에서 흥미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고복수의 대표가요 '짝사랑'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 뜸북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아 단풍이 휘날리오니 가을인가요
무너진 젊은 날이 나를 울립니다
궁창(穹蒼)을 헤매이는 서리 맞은 짝사랑
안개도 후유 후유 한숨집니다

-<짝사랑> 전문

 

▲고복수 황금심 부부

 

고복수는 빅타가극단의 인기가수 황금심(黃琴心, 19122001)과 사랑의 불이 붙어 마침내 부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복수의 나이는 31, 황금심은 불과 19세였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았던 부부는 항상 다정하고 애틋한 부부애를 과시하며 살았지만 삶의 불운과 고통은 자꾸만 겹쳐졌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온갖 고생을 이겨낸 고복수 황금심 부부는 여러 험한 일들을 헤치며 혹독한 시련과 고달픔을 이겨내었습니다.

 

가수 고복수의 삶은 어쩐 일인지 액운과 불행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에 납치되어 끌려가다가 평남 순천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던 일, 악극단경영과 운수회사의 잇따른 실패는 늙은 가수의 몸과 마음을 극도로 지치도록 했습니다. 기어이 싸구려 해적판 전집물(全集物)을 들고 도서외판원이 되어서 서울시내 다방을 전전하며 “저 왕년에 <타향살이>를 불렀던 가수 고복수입니다”라면서 그 특유의 눈물 섞인 목소리를 내었던 슬픈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늙은 가수는 1955 88일 서울 명동의 시공관(市公館)에서 열린 고복수 은퇴공연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수생활 26년 만에 얻은 것은 눈물이요, 받은 것은 설움이외다” 당시 우리의 척박했던 문화적 토양과 환경은 이처럼 훌륭했던 민족가수 한 사람을 제대로 관리하고 지켜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택시회사도 운영했고, 영화제작에도 손을 대었으며, 음악학원도 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업이 순조롭게 펴나지 못했습니다. 고복수가 운영했던 동화음악학원(同和音樂學院) 시절, <동백아가씨>의 가수 이미자(李美子) <대전부르스>의 가수 안정애(安貞愛)를 배출시킨 것은 하나의 커다란 업적이자 성과라 하겠습니다.

 

<타향살이>로 민족의 대표가수가 된 고복수는 작곡가 손목인에게 평생 ‘선생님’으로 호칭하며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고복수는 병상으로 문병 온 손목인에게 “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하고 흐느끼며 껴안고 울었습니다. 가수 고복수는 1972, 그의 나이 회갑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좌) 고복수 은퇴공연 신문광고

() 고복수 은퇴공연을 마치고 가요계 선후배들과 함께

 

 

▲() 고복수의 근영

() 고복수 노래비(울산시 소재)

 

1991, 고복수의 고향 울산에서 제4회 고복수가요제가 열리던 날, 울산의 북정동 동헌(東軒) 앞에서 ‘고복수노래비’가 제막되었습니다. 노래비에는 대표곡 <타향살이>의 전문이 새겨져 있었고, 고복수 특유의 그 슬픔을 머금은 애잔한 목소리가 한 마리 나비나래처럼 파들파들 떨면서 가수의 고향하늘로 울려 퍼졌습니다.

 

오늘은 고복수의 이처럼 고단했던 생애를 생각하며 한국가요사에서 이젠 불후의 고전적 명곡이 된 <타향살이>의 애잔한 곡조를 여러분과 함께 흥얼거려 봅니다. 1927년까지 만주로 쫓겨 간 이 땅의 농민들은 무려 백만 명이 넘었습니다. 관서관북(關西關北) 지역의 험준한 산악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1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한국근대사의 처참했던 역사적 사연과 배경, 그리고 상처와 고통들을 생각하면서 <타향살이>를 잔잔히 불러보면 어떨까 합니다. 다정한 친구와 더불어 한 잔 술이 앞에 놓여있다면 더 좋겠지요? 옛 노래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읊조리듯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920~90년대 한국 대중가요 앨범 6000장 분석해보니...

⊙ 대중가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음식은 술, 담배, 커피, 밥 순

⊙ 유행가에 등장하는 직업, ‘마도로스’ 언급 최다
⊙ 노랫말에 나오는 ‘작품 속 인물’과 ‘역사 속 인물’ 1위는 춘향과 황진이

 

▲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최규성 대표

 

포털 네이버가 한국 대중가요 앨범 6000여 장을 빅데이터로 분석했다. 이 작업은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최규성 대표 등이 참여, 2년 전부터 1920~90년대 발매된 대중가요 앨범을 분석한 것이다. 최규성 대표는 “한류(韓流) 뿌리를 DB화해 K-pop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 대표의 자료제공을 토대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주요 장면을 소개한다.
  

  한국 대중가요사상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음식은?

 

바로 ‘술’이다. 유행가의 효시로 꼽히는 채규엽의 ‘술은 눈물인가’(1932년 발표)부터 백설희의 ‘술의 탱고’(1960), 유성진의 ‘술 취한 마도로스’(1966), 김용만의 ‘술이 원수다’(1971), 이남이의 ‘술’(1988), 한경애의 ‘추억은 한 잔의 술이 되어’(1989) 등 술과 관련한 노래들이 많다.

  김용만의 ‘술이 원수다’ 가사는 이렇다.

  ‘헤어지기 섭섭해 한잔만 하세. 기분이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차 삼차 월급봉투 다 털어먹고, 얌체에 다음날 회사에 결근. 술 술 술이 원수다. 맞다. 술 술 술이 원수다. 맞어. 술 술 술전쟁.

  노랫말이 온통 ‘술 술 술’이다.  

‘술’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은 ‘담배’다. 술과 담배는 장르를 초월한 모든 작품의 주된 소재일지 모른다. 진송남의 ‘담배연기’(1966), 선우영의 ‘담배 연기 부르스’(1968), 김애리의 ‘담배’(1985),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1986), 임병수의 ‘담배연기처럼’(1986), 김성태의 ‘담배 끊고 당신도 잊고’(1989) 등이 있다.
  

‘담배’ 다음으로 커피, 사과(능금), , 보리, 나물, 고기, 수박, 김치 순이다. ‘커피’ 하면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잔’을 빼놓을 수 없다. 펄시스터즈는 1968년 걸그룹 사상 최초로 가수왕이 됐다. 한국 록의 대부인 신중현이 작사·작곡한 ‘커피 한잔’은 이후 키브러더스(1971), 김희갑(1971), 윤항기(1975), 김추자(1975), 박일남(1981), 이종숙(1986) 등이 리바이벌했는데, 펄시스터즈가 선수를 친 ‘초두(初頭)효과’ 때문인지 크게 히트하진 못했다.
  

  한국 대중가요사상 가장 긴 곡은?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신중현이 1973년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가수 윤용현과 함께 낸 〈내 곁에 있어주오〉에 실린 ‘거짓말이야’가 가장 길다. 신중현이 만든 ‘거짓말이야’는 1971년 김추자가 처음 불렀다.
  

‘거짓말이야’의 러닝타임은 2237. 1970년대 당시 히트곡 요건은 ‘3분’이었다. 3분을 넘기면 방송 선곡에서 제외되기 일쑤였다. 22분짜리 이 장대한 노래에 대해 최 대표는 이런 평을 내렸다. 7분쯤 이국적인 음악여정으로 접어들고 10분이 임박하면 느리고 묵직한 기타 사운드의 향연과 함께 환상의 나라로 행로가 변경된다. 이후 지루할 만큼 반복적 리듬은 15분쯤 환각세계로 인도한다.

 

▲신중현이 1973년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가수 윤용현과 함께 낸 〈내 곁에 있어주오〉. 이 앨범 사이드B 2237초짜리 노래 ‘거짓말이야’가 담겨 있다.

 

■국내 최초로 발매된 밴드앨범은 무얼까.   

최초의 록 음반은 신중현이 결성한 록밴드 ‘에드 포’가 1964 12월에 발매한 〈비 속의 여인(THE ADD 4FIRST ALBUM)〉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5개월 앞서 발매된 ‘키보이스’의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신중현이 결성한 록밴드 ‘에드 포’의 첫 앨범 〈비 속의 여인〉.

 

최규성 대표는 “결성 시기가 가장 빠른 록밴드는 미8군 장교클럽 하우스밴드로 활동했던 ‘코끼리브라더스’다.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밴드로 ‘김치스’와 ‘바보스’도 있지만 이들은 정규앨범이 없다. 발매시기로 보자면 ‘에드 포’보다 ‘키보이스’ 앨범을 최초의 록밴드 앨범으로 인증하는 게 옳다”고 했다.
  

  그러나 〈비 속의 여인〉 수록곡은 모두 신중현이 만들었다. 반면 〈그녀 입술은 달콤해〉는 히트 팝송을 번안하거나 트로트 작곡가로 알려진 김영광의 곡으로 구성돼 있다. 최 대표는 “음악계는 ‘에드 포’의 첫 앨범을 한국 최초의 록밴드 음반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가요에 등장하는 작품 속 등장인물 1위는?

▲국내 첫 유럽 진출 여가수 릴리화가 낸 앨범 〈밤에 속삭이는 바람〉.

 

가요 노랫말에 나오는 ‘작품 속 인물’과 ‘역사 속 인물’ 1위는 누굴까.

작품 속 인물로는 ‘춘향’이 노랫말에 가장 자주 등장했다. 황금심의 ‘춘향이 맘보’(1962), 원방현의 ‘춘향의 절개’(1963), 김세레나의 ‘춘향의 편지’(1968), 주연진의 ‘일편단심 춘향이’(1970)가 대표곡이다.
  

  ‘춘향’ 다음으론 뜻밖에도 ‘모나리자’다. 흔히 가왕(歌王) 조용필이 부른 ‘모나리자’(1988)를 떠올리지만 원로가수 현인이 ‘모나리자의 얼골’(1956)과 ‘모나리자 눈동자’(1970)를 먼저 불렀다. 이 밖에 안다성의 ‘모나리자’(1958)와 송골매의 ‘모나리자’(1986)가 있다. 곡명은 같지만 다른 노래다.
  

모나리자 다음으로 ‘견우’와 ‘심청’이 많다. 국보자매의 ‘견우직녀의 사랑가’(1986), 김용만의 ‘효녀 심청’(1957)이 많이 알려진 곡이다.

 

그렇다면 역사 속 인물 최다 빈출어는?

  1위부터 5위까지 열거하면 황진이, 논개, 이태백, 칭기즈칸, 호동 순이다. 이미자의 ‘잘 있거라 황진이’(1965) , 이동기의 ‘논개’(1988), 김부자의 ‘달타령’(1972), 김상희의 ‘징기스칸’(1979), 박재홍의 ‘왕자호동’(1970) 등이 인기를 끌었다.

 

▲최초의 어린이 독집은 〈하춘화 가요앨범〉(1962)이다.

 

최초의 어린이 독집은?

  1962년 하춘화가 나이 6세 때 부른 데뷔앨범 〈하춘화 가요앨범〉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동요집이 아닌 ‘효녀심청 되오리다’ ‘대구역 떠난 완행열차’ ‘찾어온 어머니 무덤’ ‘비 개인 서울거리’ ‘부산항 부루-스’ 등 8곡 모두가 성인곡으로 채워졌다.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한국 걸그룹은 김시스터즈다. 김시스터즈는 작곡가 김해송과 가수 이난영 사이에 난 두 딸 김숙자·애자,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딸 김()민자 등이 결성한 걸그룹이다. 김시스터즈는 미8군 무대를 통해 1953년 데뷔했으며, 미국에 진출해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섰던 〈에드 설리번 쇼〉에 22번이나 출연했다고 한다.  


 
김시스터즈가 미국 진출 1호 걸그룹이라면, 릴리화(한국 이름 최정환)는 국내 최초 유럽 진출 가수다. 또 서울음대 출신 1호 가수로도 알려져 있다. 릴리화는 대학 3학년 때인 1959년 당시 주한 서독대사의 양녀가 되어 독일로 떠났다. 그해 연말 독일 하이델베르크시가 주최한 국제 유학생경연대회에 참가, 한국 고전무용과 민요를 선보여 160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고상을 수상했다.  


 
최 대표는 “릴리화는 1964년 세계적 레이블 필립스레코드의 전속이 됐고 폭넓은 가창력으로 ‘동양의 별’이란 찬사를 받았다. 한국민요, 서구의 팝, 클래식을 넘나들며 한국 대중음악을 유럽에 최초로 알린 선구자”로 평가했다.


  
노랫말 속 최고 직업은?

▲커피 한잔’으로 가수왕에 오른 펄시스터즈

 

가사에 등장하는 직업 중 가장 많이 언급된 직업은 ‘마도로스’다. 마도로스는 외항선을 타는 선원을 일컫는 말로, 과거 해외여행이 쉽지 않던 시절 가장 각광받던 직업이다. 대개 1960년대 발표된 노래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쟈니 브라더스는 유독 마도로스 관련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마도로스 수기’(1969), ‘마도로스 림보락’(1969), ‘마도로스 상선 뽀이’(1969), ‘마도로스 도돔바’(1969) 등이 있다.
  

  노랫말 중 ‘강’과 관련한 국내 장소 1위는 어딜까.

  한강, 낙동강, 영산강, 백마강, 대동강 순이다. 한강과 관련된 노래 중 가장 오래된 곡은 김선대가 노래한 ‘추억의 한강다리’(호심 작사, 김성근 작곡)이다. 1960년대 나온 옴니버스 앨범 〈애수의 비가 옵니다〉(미도리 레코드)에 실렸다.
  

교통과 관련해서는 항구, , 부두, 열차, 기차 순이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 양희은의 ‘작은 배’(1973), 김트리오의 ‘연안부두’(1979), 남인수의 ‘무정열차’(1957), 다섯손가락의 ‘새벽기차’(1985) 등이 알려진 곡들이다.

 [월간조선 2017 2월호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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