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음악 이야기1/ 클래식1/ 최영섭은 누구 - 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상림은내고향 2021. 2. 13. 16:28

음악 이야기1/ 클래식1 

최영섭은 누구 -  '그리운 금강산’

18세에 첫 작곡 발표회… 라디오 방송 ‘이 주일의 노래’로 가곡 대중화

 

최영섭은 1929년 경기 강화군 화도면(현 인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서 태어났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경기뱃노래 소리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한국적 가락을 접했고, 일찍부터 집 근처 병원에서 흘러나오는 ‘할렐루야’ 등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서양음악을 익혔다. 인천중학교 밴드부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며 여러 관악기의 연주법을 배웠고, 1945년 광복이 돼 서울로 온 후 경복중학교에 다니면서 피아노를 만났다. 밴드부 활동을 하며 관악기 연주법을 배운 것은 훗날 그가 오케스트라 편곡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경복중학교 시절 피아노를 배운 것은 새로운 길을 여는 전환점이 됐다. 피아노를 빠른 속도로 배워 재능을 보였지만 피아니스트를 꿈꾸기에는 손가락이 짧아 작곡을 해보라는 선생님의 권유로 당시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에게 화성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화성학 수업은 오래지 않아 결실을 보았다. 2년 동안 작곡이론을 사사하며 틈틈이 곡을 써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인 1949 6 4 18세의 나이로 인천 외국문화연구관에서 피아노 모음곡, 피아노 환상곡, 가곡, 바이올린곡으로 첫 작곡 발표회를 열었다.

이후 그는 1949년 서울대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해 김성태 교수의 제자로 공부하며 조지훈의 시에 곡을 붙여 ‘마을’ ‘도라지꽃’ 등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학생 작품 같지 않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그는 1953년 결혼 기념으로 가곡집 ‘소라’를 출판했다. 이 작곡집은 최영섭에게 미국의 줄리아드 음악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가곡집 ‘소라’를 본 줄리아드 음악대학 학장이자 작곡가인 윌리엄 슈만이 최영섭을 특별 장학생으로 초청한 것이다. 그러나 신혼이었던 그는 음악적 욕심보다는 가정에 대한 책임을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줄리아드 음악대학에 가지 않았다.  

1958년 최영섭은 KBS 라디오 프로그램 ‘이 주일의 노래’를 통해 다시 한 번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이 주일의 노래’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국민에게 신작 가곡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시인들의 시에 작곡가를 선정해 곡을 만들어 연주 녹음을 한 뒤 1주일 동안 하루에 6번 정도 방송했는데, 하루 종일 라디오만 듣던 그 시대에 ‘이 주일의 노래’를 통해 들려주는 노래들은 가곡 대중화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최영섭은 ‘이 주일의 노래’에 작곡가로 위촉돼 많은 곡을 만들어 국민에게 들려주었다. 그 당시 그는 최고의 인기 작곡가였다.

 

누구의 주재련가… 역사의 갈피마다 ‘그 이름’ 다시 불리다

▲  최영섭 작곡가가 1960년대 서울중앙방송국에 출연하던 가수·성우들의 사랑방 같았던 남산 산길다방이 있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서 가곡그리운 금강산이 잉태됐다.

 

최영섭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산실…남산·인천 

“한강 낙동강 압록강 백두산 등  
노래 다있는데 금강산만 없어”  
방송국 별실같았던 산길다방서  
1961년 작곡가 한용희가 제안  

인천서 한상억시인에 말하니  
책상 서랍서 대뜸 원고 내줘  
시 읽으며 20분만에 멜로디  
노래 첫소절 ‘~주제련가’로  
잘못 알고있는 사람도 많아  

72년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땐  
공연전 3군데 가사 수정 요구  
85년 남북예술단 교환공연땐  
北서 원래대로 불렀지만 박수 

 

 

누구의 주재련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못 가본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우리 예대로인가  
흰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 아래 산해만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슬픔 풀릴 때까지 


한국 가곡 가운데 ‘그리운 금강산’은 요즘 개최되는 음악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인기 순위 1위 곡이다. 한국인이 작곡한 작품 중에서도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해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스리 테너’(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 러시아 볼쇼이 합창단,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등이 연주했으며, 더 자랑스러운 것은 한국인 최초로 독일의 유명 클래식 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에 오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서양 노래가 시작된 것은 1876년 개항과 함께 0찬송가가 들어오면서부터다. 1896년쯤부터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인 ‘창가(唱歌)’가 등장했다.  

‘창가’란 서양의 악곡에다 계몽사상, 반일감정, 애국사상 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가사를 붙인 노래를 의미한다.  

이후 ‘창가’는 새로운 시에 곡을 붙여 발전하면서 그 시의 내용에 따라서 가곡, 동요, 유행가 등으로 나뉘었다. 이렇게 노래가 나누어지면서 1920년에 발표된 홍난파의 ‘봉숭아’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으로, 1924년에 발표된 윤극영의 ‘반달’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로 기록됐다. 이런 노래들은 1927년 홍난파가 작곡한 ‘고향의 봄’과 더불어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1980년대까지 60년이 지나도록 전 국민이 함께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30대 중반만 해도 이런 노래들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그래도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노래는 그렇지 않다. 1947년 안병원이 작곡한 ‘우리의 소원’이 그렇다. 아마 이 노래는 남북통일이 되면 역사 속의 노래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운 금강산’도 통일이 된다 해도 영원히 살아남을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고전이 변함없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서양음악 기법으로 작곡된 클래식 음악이 지금까지 연주되고 있듯이 ‘그리운 금강산’도 서양음악 기법으로 작곡된 예술가곡이기 때문이다. 또한 천년만년 변하지 않고 우뚝 솟아있을 금강산(위 작은 사진)을 한국인의 감성으로 노래한 것도 그렇다. 작곡가는 이렇게 특별한 내용이 있는 시를 만나게 되는 일이 있는데, 운이 좋게도 그런 시를 받아 작곡하게 된 사람이 바로 올해 90세가 된 최영섭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최영섭은 곡을 듣기에도 부르기에도 어렵지 않게 썼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그 노래가 큰 감동의 소리로 다가오는 것은 서양음악의 작곡기법에서 중요한 전조를 빠르게 사용하는 등 그는 타고난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곡 ‘그리운 금강산’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  인천문화예술회관 뜰에 있는그리운 금강산노래비.

 

1961년 남산에 있는 서울중앙방송국( KBS) 길 건너에는 산길다방이 있었다. 그 당시 산길다방은 서울중앙방송국의 별실처럼 방송국을 드나드는 가수, 성우, 연예인 등이 모이는 사랑방 같은 장소였다. 1961 8 22일 최영섭은 방송을 끝내고 변함없이 산길다방에 갔었다. 마침 그곳에 있었던 한용희(19312014·서울국제방송국 음악계장,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작곡가)가 최영섭을 보자 “최 선생, 마침 잘 만났습니다. 한강, 낙동강, 압록강, 백두산 고국의 산천 노래들이 다 있는데 금강산이 없어요. 최 선생이 한번 써 보시지요”라고 전했다. 

최영섭은 이 말을 듣자마자 인천으로 내려가 시인 한상억(19151992·문화총연맹 인천지부장)에게 서울에서 있었던 얘기를 했다. 그러자 한상억은 책상 서랍에서 원고를 꺼내 주며 “내가 금강산을 해방 전에 일곱 번 갔다 왔는데, 시인으로 금강산을 일곱 번 갔다 온 사람이 지금은 흔치 않을 겁니다” 라고 했다.

최영섭은 그 자리에서 ‘그리운 금강산’ 시를 읽어 내려가며 멜로디가 머릿속에 잡혀갔다. 버스를 타고 인천 남구 숭의동에 있는 집으로 가면서 흥분된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멜로디가 거의 구성됐고, 집에 도착해서는 피아노 반주까지 완전한 곡을 완성했다. 최영섭은 ‘그리운 금강산’의 멜로디를 20여 분 만에 썼는데, 그가 작곡한 700여 곡의 가곡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린 곡이라고 했다.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했던 인천 남구 숭의동 집은 지금 찾아볼 수가 없다. 모두 개발돼 반듯한 도시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 당시 최영섭의 집은 버스에서 내려 15분가량 밭길을 걸어갔다. 밭 한가운데 집이 서너 채 있는 곳에 있었던 그의 집은 한옥 풍으로 작은방 3개와 작은 마루가 있는 구조였다. 그 중 방 1개를 그의 작업실로 썼다는데 그것은 그만큼 그가 많은 곡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운 금강산’이 방송을 타고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듯 인기를 얻자 KBS 라디오 프로그램 ‘이 주일의 노래’에서는 계속 최영섭에게 작곡 청탁을 했다. 최영섭은 서울로 이사해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1972년 판문점에서는 6·25 전쟁 후 남북이 처음으로 만나는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그때 정부에서는 남북회담을 하는데 ‘그리운 금강산’의 노랫말을 조금 바꿨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영섭도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한상억에게 말했더니 흔쾌히 바꿔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 당시 ‘그리운 금강산’이 얼마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래인지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노랫말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짓밟힌 자리 → 예대로인가 

맺힌 원한 → 맺힌 슬픔 

더럽힌 지 몇몇 해 → 못 가본 지 몇몇 해 

 

1985년 남북의 예술단 교환 공연이 있었을 때 이야기도 있다. 평양 모란극장 음악회에서 소프라노 이귀도는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성악가는 본래의 노랫말로 불렀다. 노래의 음도 단3도 높여서 불렀다. 노래에서 단3도는 아주 많이 높여서 부르는 것인데 이렇게 높은 소리의 가사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원래 가사로 불렀는데도 연주가 끝나고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소프라노 이귀도는 말하기를 원래 가사로 불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그날 숙소인 고려호텔로 돌아와서는 문을 걸고, 누가 밖에서 노크만 해도 겁이 났고 그래서 북한 측에서 관광하러 가자는데도 못 갔다고 했다. 필자는 ‘그리운 금강산’은 노랫말이 바뀐 것으로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그리운 금강산’의 노랫말이 ‘누구의 주제련가’로 된 악보가 있는데 ‘주제’가 아니라 ‘주재’이다. 절대 소유권을 지닌 사람을 뜻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자로 얘기한 것으로 한상억 시인은 ‘누구의 주재련가’라고 썼다. 


전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으로 자리 잡은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노래는 70여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돈이 되는 대중가요가 아니라 돈이 안 되는 순수음악이라서 그는 아직도 반지하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직도 그가 했던 말이 생생하다. “한국에서 작곡가가 순수음악을 작곡하면 생활이 안 됩니다. 그러니 걸작이 나올 수가 없죠. 서양예술의 역사를 보면 뛰어난 예술가에게는 지원이나 후원을 많이 했기에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참 부러운 일이죠. 

글·사진 = 한지영 작곡가  

 

그리운 금강산 - 영상 음악

Soprano Veronika Dzhioeva [베로니카]그리운 금강산

 

http://www.youtube.com/watch?v=Kdsxa__8-3M&feature=player_detailpage - 조수미

 

http://www.youtube.com/watch?v=TWDkh061ruw&feature=player_embedded - 외국인 성악가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