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 2021-01/ 문화일보
01월 04일(월) 초가속 시대의 역주행
박현수 조사팀장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만 흥미롭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나름의 전망으로 올 한 해 계획도 세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이 최근 발표한 ‘2021년 글로벌 전망’이 눈길을 끈다. 블랙록은 이미 진행 중이던 구조적 변화에 코로나19가 기름을 부었고, 이 흐름은 올해 ‘터보 엔진을 단 듯’ 가속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대표적인 변화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도 증가, 자산·소득·의료 불평등 확대, 전자상거래의 지배력 강화 등을 꼽았다. 억눌렸던 수요가 폭발하면서 경기회복이 다시 가속화할 것이라고 한다. 애플·아마존·구글 및 삼성전자 등 반도체 선두 주자들의 압도적인 시장점유율과 지속적인 주가 상승이 한동안 이어진다는 것이다.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단 긍정적인 전망에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전망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역사학자 주경철, 사회학자 장덕진, 중국 전문가 정종호, 거시금융학자 함준호, 전략경영전문가 김동재, 뇌과학자 김대식 등 스타 학자 5명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전망해 최근 출간한 ‘초가속’(동아시아 펴냄)에서다. 새로운 시대가 대한민국에 던지는 질문들이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의 핵심은 ‘가속화’다.
지금 인류가 맞고 있는 변화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존 역사의 흐름에 내재돼 있던 변화이며, 코로나19는 그 흐름을 폭발적으로 가속하는 가속기(accelerator)이자 촉매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초가속(hyper-acceleration)’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감시자본주의, 4차 산업혁명, 극심한 불평등 등 이미 존재하는 경향이 가속화하는 ‘초가속 시대’가 열렸다고 진단했다. 우리 국민의 ‘빨리빨리 문화’는 초가속 시대에 잘 적응하는 요인일 수도 있다.
올해는 문재인 정부의 사실상 임기 마지막 해이고, 오늘은 새해 업무 첫 시작일이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1000명 안팎을 맴돌고 있고, 집값 폭등, 인구절벽 등 우울한 소식도 여전하다. 지난해 민심을 역주행한 문 정부의 독선과 아집으로는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없다. 대통령 지지율도 집권 후 최저로 떨어졌다. 초가속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약을 위해 올해는 편 가르기, 갈라치기가 아닌 포용적 리더십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01월 05일 이강인의 애국가
김종호 논설고문
‘나는 천사를 믿어요/ 적당한 시기가 오면/ 개울을 건널 거예요/ 내겐 꿈이 있어요/ 내겐 꿈이, 환상이 있어요/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I believe in angels/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a fantasy/ To help me through reality)’. 스웨덴의 전설적인 4인조 혼성 그룹 아바(ABBA)가 1979년 발표한, 세계 전역의 영원한 명곡 ‘내겐 꿈이 있어요’ 일부다. 미국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1963년 명연설 표현과 같은 제목의 노래로, 새해 벽두마다 더 각별하게 들린다.
한국 축구계는 이강인(20) 선수의 꿈도 떠올릴 만하다. 그의 올해 가장 큰 꿈은 코로나19 사태로 1년 연기돼 7월 23일 개막할 ‘2020 일본 도쿄올림픽’ 결승까지 올라 애국가를 더 크게 부르는 것이다. 폴란드에서 열린 2019년 ‘국제축구연맹(FIFA) U-20(20세 이하) 월드컵’ 경기 때마다, 그는 애국가를 누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불렀다. ‘기 싸움에서부터 상대를 압도해야 한다. 태극기를 바라볼 때와 같이 애국가를 부르며 각오를 더 다진다. 힘도 더 솟는다’는 취지로 그 이유를 밝혔다. 주장 황태현 선수에게 “언론 인터뷰 때는 팬들께 애국가를 크게 불러주시면 좋겠다고 반드시 말해 달라”고 부탁도 했다. ‘16강 진출도 어렵다’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예측을 훌쩍 넘어, 한국 남자 축구 최초로 FIFA 공식 대회 준우승까지 한 쾌거의 핵심 요인 중에서 그런 이강인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U-20 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궂은일을 도맡으며 구심점 역할을 하는 그를 선수들은 ‘막내 형’으로 불렀다. 8강전 승부차기에서는 그가 골키퍼 이광연 선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눈을 맞추며 “하면 되잖아”하며 기운을 북돋워 주는 모습이 세계의 화제를 모았다. 눈부신 기량으로, 아르헨티나 출신 리오넬 메시에 비견돼 ‘제2의 메시’로도 불렸다. 최우수 선수 몫인 ‘골든볼’ 상도 받았다. 1977년 창설된 대회 역사상 메시에 이은 두 번째 최연소 수상자이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이 아니라 ‘한 팀’이 받은 상이다. 대표팀 전원과 응원한 국민이 처음부터 끝까지 ‘원 팀(One team)’이었다. 그래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그가 모든 꿈을 실현하길 기원한다.
01월 06일 최악의 사면(赦免)
이도운 논설위원
사면(赦免)은 범죄를 용서해 형벌을 면제해주는 법적 행위다. 고대에는 정신적 리더인 종교 지도자, 봉건 시대에는 형벌권을 가진 군주의 권한이었는데,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선출된 국가원수가 이어받았다. 삼권분립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법체계의 한계, 법관 오류 가능성, 국민 정서 등 달리 고려해야 할 요인들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 법치 국가에서 인정한다. 우리나라 사면 제도의 법적 근거는 헌법 제79조로, 대통령이 법에 따라 사면·감형·복권을 명할 수 있다.
사면에는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이 있다. 일반사면은 도로교통법 등 범죄를 대상으로, 특별사면은 형이 확정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흔히 특사로 지칭되는 특별사면은 법무부 사면심사위원회 건의를 받아 대통령이 결정하지만, 형식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자의적 사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특사는 1948년 9월 29일 실시됐다. 정부 수립 기념으로 일반 범죄자 6796명이 대량 사면됐다. 정치적으로 주목받은 특사는 1987년과 1997년 10년 단위로 나왔다.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에 이어진 7·9 사면으로 재야 정치인 김대중 씨가 사면돼 대선 출마가 가능해졌다. 예춘호·문익환·백기완·이부영·이해찬이 함께 사면됐다. 헌정사상 처음 여야 정권 교체가 이뤄진 1997년 12월 18일 이틀 뒤에는 내란죄 등으로 수감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면됐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새해 벽두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론을 제기하면서 정치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 통합을 내세웠지만, 정국 주도권 확보나 야권 분열 등 정략이 가미됐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어쨌든 토론의 여지는 있다.
선진국은 대체로 사면권을 남용하지 않는다. 독일은 최근 60여 년 동안 사면 조치가 네 차례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부정부패, 선거법 위반, 테러, 마약, 미성년 폭행 사범은 사면을 금지한다. 덴마크는 장관급 인사에 대한 사면이 금지돼 있다. 예상 밖으로 최악의 사면은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고 퇴임을 앞둔 ‘레임덕’ 기간에 사돈, 측근 등을 무차별적으로 사면(pardon)하고 있고, 본인과 가족까지 ‘셀프 사면’할지 모른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늘 도전받는다.
01월 07일 조세 저항
문희수 논설위원
근대 민주주의가 진전하면서 시민의식도 성숙해져 갔다. 일방적인 과세, 무리한 과세는 강한 저항을 받았다. 영국에선 대헌장·권리청원·권리장전 등을 거치며 국왕의 일방 징세는 귀족의 동의, 의회의 동의를 받도록 점차 제한됐다.
미국 독립운동의 계기가 됐던 ‘보스턴 차(茶) 사건(Tea Party)’은 유명하다. 영국은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으로 들어오는 차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밀무역을 금지했다. 이어 영국이 동인도회사에 차 독점 판매권을 주자,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주민들이 입항해 있던 동인도회사 화물선을 습격해 실려 있던 차를 바다에 내버리며 반발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며 영국에 저항했다. 이 소식이 퍼져 1775년 미국 독립운동이 시작됐고 급기야 1783년 영국은 13개 주(州)의 독립을 승인했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인 2009년 오바마케어 등에 따른 재정적자 확대와 증세에 반발해 ‘보스턴 차 사건’ 이름을 본떠 ‘티파티’라는 민간 감시단체가 생겼다. ‘작은 정부, 낮은 세율’을 표방했다. 초창기엔 여론의 호응이 컸지만 2013년 연방정부 ‘셧다운’ 이후엔 지지도가 떨어졌다. 그래도 중도 성향 유권자와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선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고 한다.
정부가 증세하면 피세, 절세, 탈세 등 합법적·불합법적 대응도 늘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세율을 마냥 올린다고 세수가 비례적으로 늘지 않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 아서 래퍼의 ‘래퍼 커브’는 세율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오히려 세수가 감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플, 휴렛팩커드, 오라클 같은 글로벌 업체들이 세금이 많은 캘리포니아주를 떠나 세금이 적은 텍사스주로 본사를 이전하거나 새 사옥을 짓는 게 충분히 이해된다. 그래서 세정은 ‘낮은 세율, 넓은 과세’가 기본원칙이다.
지난해 12월 국내에선 정부가 자의적으로 종부세를 올린다며 위헌 소송이 또 제기됐다. 집값 급등으로 종부세와 재산세 등 보유세가 급증해서다. 1가구 1주택자들까지 세금이 늘게 되니 불만이 크다. 대법원에서 일단 막았지만, 서울 서초구가 공시가 9억 원 이하 주택에 대해 임의로 재산세 감면을 추진하는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무리한 과세는 저항을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01월 08일 사악한 퇴장
이미숙 논설위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퇴역 때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6·25전쟁 와중이던 1951년 4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연합군사령관 해임 통보를 받은 뒤 미 의회에서 한 퇴임 연설에서 군인의 삶을 마무리하는 소회를 밝힌 것인데, 당시 군에서 유행하던 노래 가사라고 한다. 그런데 맥아더의 명언은 이제 “노병은 결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로 바뀌어야 할 듯하다. 지난해 대선에서 ‘해고’당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 거부 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6일 각주 선거인단 투표를 확정하는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부통령이 결과를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 사태를 부추겼다. 조지아주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재검표를 통해 1만1780표를 더 찾아내라고 요구했다는 사실도 공개됐다. 지난 11월 대선 때 조지아주의 조 바이든 승리를 뒤엎기 위한 명시적 압박이라는 점에서 탄핵감이다. 그는 대선 패배 후 재검표 소송을 내고 선거자금을 모으며 대규모 유세도 잇달아 개최했다. 미 정가에서는 트럼프의 이 같은 행동을 ‘과장된 퇴장 의식’이나 2024년 대선 재출마를 위한 쇼 정도로 여겼지만, 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이 계엄령을 주문하자 기류가 달라졌다. “파시스트 트럼프가 체제 전복 쿠데타를 벌이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제기됐다. 이에 척 헤이글 등 전 국방장관 10명은 “이젠 대선 결과에 승복하라”는 경고 성명을 냈다. 군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고 사라져 달라는 주문이다.
2016년 대선 승리 후 백악관에 입성한 트럼프는 매일 리얼리티 쇼를 벌였지만 이제 그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돌출 행동과 자극적인 발언으로 시선을 끈 덕분에 그를 다룬 책은 늘 베스트셀러가 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트럼프 관련 책은 지난 4년간 1000여 종이 출간됐다. 버락 오바마 등 전직 대통령의 경우 평균 500종 정도다. 트럼프 관련 책이 전직의 2배가량 발간됐다는 것은 트럼프 현상의 격렬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트럼프는 19일 백악관에선 떠나겠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듯하다. 설혹 물리적으로 그가 사라진다 해도 트럼피즘은 미국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치명적 암으로 남을 것이라는 게 비극이다.
01월 11일(월) 與 의원엔 英 여왕도 마루타?
이현종 논설위원
“길 가다가 지갑 주웠다.” 지난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당시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했는데 그중에 초선만 108명에 달하자 고(故) 노회찬 의원이 한 말이다. 국회의원 준비가 안 된 이들이 대거 여당 의원이 되다 보니 당은 이런 초선들의 중구난방 때문에 골치를 앓았고 ‘108번뇌’ 얘기가 나왔다. 4년 사이 당 대표만 9명이 교체됐다. 당 워크숍에서 한 재선의원이 “초선 의원들 군기를 잡겠다”고 하자 한 초선 의원은 “군기 잡겠다는 사람의 귀를 물어뜯겠다”고 대들었다. 결국 그런 ‘활약’ 덕분에 18대 총선에선 81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제21대 국회 초선 의원은 151명. 전체 의석의 절반을 넘는다. 17대 187명의 초선 의원이 배지를 달았던 이후 가장 많은 숫자다. 더불어민주당은 전체 의원의 46%인 82명이 초선 의원인데 당내에서는 이들이 17대의 ‘108번뇌’에 버금갈 ‘초선 번뇌’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됐다.
당 청년위원장 출신의 초선인 장경태 의원은 지난 9일 SNS에 조속한 코로나 백신 도입 요구에 대해 “현재의 백신은 완성품 아닌 백신 추정 주사일 뿐”이라며 “사실상 국민을 ‘코로나 마루타’로 삼자는 거냐”고 했다. “의료 목적이라 주장했던 일본 731부대의 망령이 현재의 대한민국에 부활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적었다. 장 의원은 앞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 퇴진 요구를 “독립운동 시끄럽다고 친일하자는 꼴”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 정세균 총리 등이 오는 2월부터 백신 접종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며 연일 확보전에 나서고 있는데 장 의원은 ‘백신 추정 주사’ ‘마루타’ 운운했다. 백신은 과학적 검증을 통과해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접종되고 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94) 여왕도, 조 바이든(79) 미 대통령 당선인도, 다른 각국 정상들도 앞장서 맞고 있는데, 이들도 모두 마루타인가.
윤석열 검찰총장 탄핵론에 앞장서고 있는 김남국, 김용민 등 친(親)조국 의원들과 판사 출신인 이수진, 이탄희 의원 등의 돌출행동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또 경찰 출신 황운하 의원과 횡령으로 기소 된 윤미향 의원 등도 ‘초선 번뇌’의 일원이다. 그런데 초선보다 더한 중진도 있으니 이들만 탓할 수는 없다.
01월 12일 南과 北의 인지부조화
이신우 논설고문
어느 사이비 종교 신자들이 지구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교주의 말을 믿고 재산을 모두 처분한 후 휴거의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예언된 날 지구는 멀쩡했다. 교주는 어리둥절해 하는 신도들에게 “여러분의 신앙을 시험해본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시험을 통과했으니 며칠 후 진짜 구원의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교주는 말했다. “당신들의 변함없는 믿음이 마침내 지구 전체를 구원했다.” 그후 신도들은 더욱더 교주를 중심으로 뭉쳤다. 왜 그랬을까. 모든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고, 결국 자신들의 처지를 적당히 합리화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심리학 용어로 설명하자면 일종의 ‘인지부조화’인 셈이다.
지난 한 해 지구촌을 괴롭혔던 코로나 사태가 올 들어서는 조금씩 수그러들 조짐이다. 많은 나라가 백신 접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남의 집 이야기다. 초기 방역 성공 신화에 취한 채 백신 조기 구입에 실패하는 바람에 잘해야 하반기에나 집단 면역이 이뤄질 수 있다는 소식 때문이다. 이것이 되레 국민의 화를 돋운다. 자연히 문재인 정부의 무능에 비판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K-방역 신화에 젖어 있던 대통령으로서는 정신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상한 말이 들려온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 국무회의 자리에서 “치료제가 상용화된다면 대한민국은 ‘방역·백신·치료제’ 세 박자를 모두 갖춘 코로나 극복 모범 국가가 될 수 있다”면서 “이제 ‘코리아 디스카운트’ 시대가 끝나고 ‘코리아 프리미엄’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인지부조화의 끝판왕은 북한이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6년만 해도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찾아가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라는 종합공연을 관람하며 함박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정은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점차 현실감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김정은은 지난 6일 노동당 당대회 개회사를 통해 지난 5년을 되돌아보면서 “일찍이 있어 본 적 없는 최악 중의 최악으로 계속된 난국”이었다면서 “(경제발전에서도)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됐다”며 솔직히 실패를 인정했다. 이쯤 되면 김정은은 치유 중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01월 13일 윤여정의 ‘미나리’
김종호 논설고문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고 아픈 것 같지만, 거의 모두 그럴 거다. 나는 이 나이에도 인생을 잘 모른다. 내가 이 나이를 살아보는 건 처음이니까”. 흔히 ‘한국 드라마·영화 연기의 살아 있는 전설’ ‘국민 여배우’ 등으로 불리는 윤여정(74)의 말이다. 한국 최초의 대중음악 감상실로 대학생들의 공연 무대를 겸하면서, 1970년대 청년문화를 대변하던 가수 송창식·윤형주·이장희·김세환 등을 배출한, ‘아주 멋지다’는 뜻의 프랑스어 이름인 쎄시봉의 DJ로도 그는 활동했다.
한양대 국문과 재학 중에 등록금 마련을 위해 방송 진행자 도우미로 일하다가 담당 PD의 권유로 1966년 동양방송(TBC) 탤런트 공채 3기에 응시, 합격해 데뷔한 뒤였다. 당시 그는 재치 있는 언변에 청순 발랄하며 지성미(知性美)까지 겸비해, 선망하는 사람이 많은 ‘쎄시봉 뮤즈(muse)’였다. 1971년 ‘화녀’를 통해 영화배우 활동도 시작한 뒤로, 그는 배역의 나이가 적든 많든, 직업이 무엇이든, 지위가 높든 낮든 캐릭터마다 특유의 무심한 듯 따뜻한 연기로 돋보였다. 다른 누구도 해내지 못할 ‘대체 불가 연기’라는 평가도 따랐다. 국내외 영화상을 잇달아 수상해온 이유다. “진짜 멋진 연기는 저런 거구나” 하며 닮고 싶어 하는 후배가 많은 그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목숨 걸고 연기했다. 지금도 변함없이 그런다. 배우가 편하면 보는 사람이 기분 나쁜 연기가 된다.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떨림이 없는 연기는 죽어 있는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삭 정(한국명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에서 미국으로 이민(移民)한 딸의 친정어머니 연기를 한 그가 오는 4월 25일 제93회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수상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수상 후보는 3월 25일 발표된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영화다. 미국 최고 권위의 독립·예술영화상인, 오는 21일 열릴 제30회 고섬 어워즈(Gotham Awards)의 최고여배우상 후보로도 선정됐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보스턴·로스앤젤레스 등지의 비평가협회 여우조연상도 받았다. 미국 연예매체 인디와이어는 그를 ‘2020 최고 여배우 13인’에 지목한 바도 있다. 세계 영화 역사를 윤여정이 새로 쓰는 중인 셈이다.
01월 14일 ‘사만다’와 ‘이루다’
박현수 조사팀장
인간이 인공지능(AI)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2014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그녀(her)’가 실마리를 제공한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연애편지 대필 작가다. 아내와 별거 후 외롭게 살아가다 인공지능 ‘사만다’를 구매한다.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이해해주는 그녀로 인해 조금씩 상처를 회복하고 행복을 되찾기 시작한 그는 점점 AI와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심지어 성적 교감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을 나누며 동시에 수만 명과 사귄다고 말한다. 그는 충격을 받고, 그녀가 업그레이드를 위해 떠나자 결국 인공지능임을 깨닫는다.
‘당신의 첫 인공지능 친구’ 콘셉트로 등장한 20세 여대생 AI 챗봇(채팅 로봇)‘이루다’를 둘러싸고 성희롱과 개인정보 유출 논란이 뜨겁다. 특히 10∼20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어 청소년들의 그릇된 성 윤리 문제가 부각됐다. 한 스타트업이 지난해 12월 23일 출시해 보름여 만에 이용자가 70만 명을 돌파했는데, 85%가 10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논란이 계속되자 개발사 스캐터랩은 서비스를 중단하고 13일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사과문 발표까지 했다.
AI 챗봇이 논란이 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2016년 3월 ‘테이’를 선보였지만, 16시간 만에 서비스를 접었다. 일부 이용자가 차별적인 발언을 반복 학습시킨 결과, 테이는 인종과 성차별적 발언 등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의 모바일 서비스 제공사가 출시한 ‘토비’의 경우 긍정적인 사례도 있다. 처음에는 온라인 웹 채팅 서비스를 통해 고객의 질문에 응답하도록 설계됐으나, 이후 계정 정보 등에 대한 조언도 제공하도록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이번 이루다 사태를 두고 일각에서는 인공지능 윤리문제를 탓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 윤리의식 부재에서 비롯된 측면이 더 크다. 이로 인해 새로운 규제로 AI 산업 전체의 성장을 가로막는 우를 범하진 않을까 우려스럽다. 소통과 공감 부재 사회에서 AI 챗봇 등장은 인간과 기계의 새로운 관계를 예고한다. 갈수록 개인화되고, AI 기술이 발달하면서 ‘나만의 반려 AI’가 등장할 날도 머지않았다. 특히 코로나19를 계기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01월 15일 ‘특등머저리들’
황성규 논설위원
일상에서, 멋진·좋은·즐거운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 영어 나이스(nice)는 본래 그런 뜻으로 쓰인 말이 아니었다. 라틴어 시절에는 네스키우스(nescius)로 ‘무지한’ ‘할 줄 모르는’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프랑스어로 니스(nice)가 된 이후 ‘어리석은’이라는 뜻을 가진 채로 13세기 영어권에 흘러들어 갔다. 이후 ‘사내답지 못한→유약한→꼼꼼한’을 거쳐 오늘날에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다. ‘무지한’에서 출발해 ‘멋진’으로 전의(轉義)된 과정을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머저리’가 ‘멋쟁이’로 거듭난 셈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평범한 사람을 가리키던 ‘장본인’이란 말이, 오늘날 우리말에서는 사건의 주모자 등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는 형태와 정반대의 케이스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서 한때 ‘빠가’라는 비속어가 유행했다. 바보·머저리라는 뜻으로, 바카야로(馬鹿野郞)라는 일본어의 줄임말이다. 이 말의 여러 어원설 중에는, 윗사람을 농락해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이르는 지록위마(指鹿爲馬) 유래설도 있다. 일본어 바카(ばか)는 어리석은 사람 또는 머저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말과 사슴도 분간 못 하는 바보라는 의미에서 마록(馬鹿)이란 한자로 표기한다는 주장이다. 몇 가지나 되는 어원설 모두 머저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머저리는 말이나 행동이 다부지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멍텅구리와 같다. 어원 구조는, 멈추다는 뜻의 ‘멎’에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 ‘어리’가 합쳐진 형태로 추정된다. 머저리라는 말은 인격 비하 용어여서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 며칠 새 ‘머저리’라는 말이 버젓이 언론에 등장했다. 그것도 ‘특등-’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채로. 북한 당중앙위 부부장으로 강등된 김여정이 지난 13일 담화에서 우리 군의 합동참모본부를 향해 “특등머저리들”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는 기사에 나온다. 우리 군 지휘부를 1등보다 더 높은 ‘특등머저리’라고 한 것이다. 그는 그러고도 성에 안 차는지 엄포도 빼놓지 않았다. “언제인가도 내가 말했지만, 이런 것들도 꼭 후에는 계산이 돼야 할 것이다.” 안하무인 말본때로 보면 마치 국군 통수권자라도 된 듯하다. 그 말 듣고도 반박 한마디 못 하는 ‘특등머저리들’이 측은하다.
01월 18일(월) 與 열두 이무기
이도운 논설위원
새해 들어 여권의 대통령 후보군이 넓어지고 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지율이 점차 하락해 이재명 경기도지사와의 양강 구도가 무너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우선 정세균 국무총리·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 대표를 대체할 제3 후보로 거명된다. 물밑에서는 더 활발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이 대표는 물론 아직 지지율이 미약한 정 총리·임 전 실장도 안심이 안 되고, 이 지사에게는 절대 권력을 못 넘겨주겠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친문 강경 세력은 김경수 경남지사의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1·2심 판사의 판결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에게 ‘막연한’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대법관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친문의 기대를 저버리는 경우에 대비해 김두관 의원도 몸을 풀고 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같은 맥락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고 한다.
여권 내에서는 아예 대선 후보군을 전국적으로 더 넓혀 보자는 아이디어도 나오는 것 같다. 충남의 양승조 지사, 충북의 이시종 지사, 강원도의 이광재 의원 등까지 가담해 경선 붐을 일으켜 보자는 것이다. 특히 충남·북 지사의 출마는 논산에 뿌리가 있다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지역에서 견제할 수도 있는 카드라는 명분도 있다. 양 지사는 벌써 주변에 출마 의사를 밝히고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미 출마를 선언한 신예 박용진 의원도 명분과 정책을 가다듬고 있다. ‘검찰 개혁’을 위해 희생했다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라고 꿈이 없겠는가. 이렇게만 따져도 12명이다. 여의주를 얻어 등용문(登龍門)을 넘으려는 이무기들의 치열한 경쟁이 임박했다.
무더기 출마는 청와대의 정국 장악 전략이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이인제·이한동·이수성·이홍구·김덕룡·박찬종·최병렬·최형우 등 이른바 9룡(龍)의 대결을 유도해 레임덕을 늦추려 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은 이인제·한화갑·김근태·정동영·김중권·유종일·노무현 등 7명 후보 경선을 통해 정권을 재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민주당에서 제3 후보를 넘어 실제로 몇 명의 후보가 나올지, 이들이 어떻게 합종연횡할지, 청와대와는 어떤 관계를 유지할지 지켜볼 만하다.
01월 19일 ‘긱 워커’와 비정규직
문희수 논설위원
새해 벽두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첫 노조가 설립됐다는 소식이 화제를 모았다. 아마존, 우버, 리프트 같은 업체들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20일 취임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친노조 성향이 배경이라는 평가다.
고연봉인 실리콘밸리의 노조 설립으로 이른바 ‘긱 워커(gig worker)’의 정규직 논란이 함께 부각되고 있다. ‘긱’이란 1920년대 미국 재즈공연에서 단기 채용했던 임시 연주자를 말한다. 그런 연유로 ‘긱 워커’는 임시직 성격이 강하다. 이들은 특히 코로나 사태 이후 비(非)대면 비즈니스 확대, 원격근무·재택근무 활성화 등 시대 변화를 타고 급증하면서 정규직화가 이슈가 됐다.
문제는 ‘긱 워커’마다 업무의 성격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예컨대 프리랜서 디자이너나 개발자는 한 회사에서만 파트타임 또는 풀타임으로 일하는가 하면, 독립적 개인사업자로서 여러 회사와 계약을 맺고 주당 근로시간을 꽉 채워 일하기도 한다. 같은 우버택시 기사라도 반드시 풀타임이 아니라, 여분의 몇 시간만 일하거나 아예 여러 직업을 갖기 원하는 등 제각각이다. 이러니 임시직이든 정규직이든 하나의 그룹으로 묶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실리콘밸리가 속한 캘리포니아주(州)에선 이미 쟁점이다. 지난해 11월 이들을 정규직으로 대우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민발의법이 58%의 찬성으로 통과되면서 앞서 7월에 정규직화를 규정했던 주의회 법의 효력이 정지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정규직 대우에 찬성 입장이라고 한다. 어떤 해법이 도출될지 관심이다.
앞으로 ‘긱 경제’가 성장할 전망인 만큼 ‘긱 워커’ 증가세도 이어질 것이다. 지난 2002년 독일이 시간제 비정규직인 ‘미니잡’을 도입해 실업사태를 극복했던 것처럼 장차 ‘긱 워커’가 취업난을 넘는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는 2016년에 이미 미국과 유럽에선 광의의 ‘긱 워커’가 경제활동인구의 20∼30%나 됐다고 추정했었다.
한국은 비정규직이라면 정규직화만으로 직진한다. 그러나 ‘긱 워커’엔 획일적 경로가 맞지도 않고, 더욱이 당사자가 스스로 기피할 수도 있다. 미국의 대응은 주목할 선례가 되겠지만, 종전 같은 일률적인 잣대는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새 시대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01월 20일 바이든 키운 ‘어머니의 힘’
이미숙 논설위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풍운의 정치인으로 불린다. 평생 불운을 안고 살았지만, 그때마다 신은 바이든 편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늘 털고 일어나 한 걸음 전진했다. 바이든이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캐서린 진 바이든(1917∼2010)이 심어준 긍정의 DNA 덕분이라고 미 언론들은 평한다. 바이든 여사는 아들 조가 어린 시절 말더듬증으로 인해 “모스 부호처럼 말하는 아이”라고 놀림을 당할 때, “머리가 뛰어나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말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심어줬다. 29세 때 상원의원에 당선된 후 자동차 사고로 부인과 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엔 “주님은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시련을 주시진 않는다”면서 다독였다. 바이든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도 알코올의존자가 많은 집안 내력을 걱정한 어머니의 당부 덕분이다.
1988년 대선 출마를 준비하던 무렵 유세 후 쓰러졌던 바이든은 뇌혈관 부종 수술 끝에 겨우 살아났다. 가톨릭 신부가 임종 미사 준비까지 하던 위급 상황이었다고 에번 오스노스는 최근 펴낸 ‘조 바이든’ 전기에 기록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언어 장애가 우려됐지만, 말더듬이 시절 어머니의 격려를 떠올리며 이겨냈다. 바이든은 2008년 민주당 전당대회 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 때 “어머니는 정치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다. “누구도 너보다 뛰어나지 않고, 어떤 사람도 너보다 못하지 않다”는 어머니 말씀이 도덕적 나침반이자 정치의 좌표가 됐다는 것이다. 바이든은 델라웨어 자택 주차장을 별채로 개조해 말년의 어머니를 모셨다. 2010년 어머니 별세 때 애도 성명에선 “헌신은 최고의 가치이며 신념은 어려운 시대를 견디게 한다는 어머니 말씀 덕분에 세상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바이든은 2015년 뇌종양을 앓던 장남 보를 가슴에 묻으며 더 큰 절망에 빠졌다. 그때 주변에선 “시련이 바이든을 더 결단력 있고 더 겸손한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그리고 5년 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꺾고 미국을 치유할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됐다. 어머니와 아들을 잃은 뒤 더욱 겸허해진 덕분에 백악관에 입성하게 됐다는 주변의 얘기가 헛말은 아닌 것 같다.
01월 21일 문재인 ‘쇼통’
이현종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신년 회견에서 “기자회견만이 국민 소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대통령보다 현장 방문을 많이 했다”고도 했다. 취임 5년 차인 올해까지 문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은 회견은 2017년 8월 17일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 이후 2018, 2019, 2020년에 이어 이번 신년회견이 5번째로 소통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자 현장 방문을 강조한 것이다. 회견 직후 탁현민 의전비서관은 “문 대통령의 현장 방문은 박제화된 현장을 둘러보는 것이 다는 아니었다”면서 “현장 방문 전후로 사람들의 의견을 들었다”고 항변했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불통’이미지로 비난받자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의 이름도 국민소통수석비서관으로 바꾸고 취임사에서도 “국민과 수시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며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선포했다. 이런 약속에도 문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극도로 꺼리는 것은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 공식·비공식적으로 150차례나 기자들과 만났으나 설화(舌禍)에 시달리는 것을 옆에서 본 문 대통령은 잦은 회견이 분란만 일으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도 회견 때마다 말실수를 하다 보니 자신감도 떨어져 있다. 이번 회견에서도 ‘정인이 사건’을 언급하며 “입양 취소, 아이 바꾸기가 필요하다”고 실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현장 방문을 소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불통의 방증이다. 이 기준이라면 지난해 85회 현지 지도를 하는 등 매년 100차례 이상 현지를 방문하는 북한 김정은이 ‘소통 왕’이다. 김정은에게 기자회견은 없다. 문 대통령의 현장 방문도 소통보다는 ‘쇼통’에 가깝다. 지난 연말 4억5000만 원을 들여 장식된 임대주택을 방문한 것을 소통이라고 우길 순 없다. 지난해 2월 아산의 시장을 방문한 문 대통령에게 한 상인이 “경기가 거지 같다”고 했다가 친문들에게 ‘문자 테러’를 당한 것을 보면 대통령에게 쓴소리하기가 쉽지 않다. 노영민 전 비서실장은 “문 대통령이 기사와 댓글도 모두 챙겨본다”고 했다. 그 ‘모두’가 친정부 기사와 댓글 모두가 아닌지 의문이다. 어차피 다 볼 수도,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01월 22일 탈원전의 비밀 수혜자
이신우 논설고문
문재인 정부가 감사원의 ‘탈원전’ 감사를 막기 위해 총동원 상태다. 심지어 삼중수소라는 괴물까지 들먹이며 국민의 공포감 조성에 안간힘을 쓴다. 이런 발버둥을 보면 볼수록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문 대통령은 왜 그토록 탈원전 정책에 집착하는 것일까. 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재난영화인 ‘판도라’를 관람한 뒤 사고 시 국가적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며 “원전 추가 건설을 막고 앞으로 탈핵·탈원전 국가로 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안전성 제1의 한국형 원자로는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종류의 사고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구조다.
탈원전은 세계 각국이 강력히 추진하는 ‘2050 탄소 중립’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 정책이다. 정부는 원전 축소를 LNG 발전으로 대체하겠다지만 LNG는 원자력발전의 50배나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게다가 선진 각국이 탄소 중립의 조기 실현을 위해 원전으로 정책 전환을 하는 만큼 첨단 원전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수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문 정부의 탈원전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범죄 현장에서 흔히 회자되는 경구가 있다. ‘이익을 보는 자가 범인’이라는 것이다. 그럼 대한민국의 탈원전에서 이익을 보는 당사자는 누구일까. 대통령의 이념적 동지인 태양광 사업가(?) 허인회를 제외한다면 아무리 주판을 튕겨 봐도 중국과 북한만 남는다.
중국 입장에선 원전 수출의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진다. 이제 세계 원전 시장에서 중국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한국에서 원전 기술이 쇠퇴하고 월성 원전이 폐기되면 원자폭탄의 핵심인 플루토늄 생산 기반을 잃게 된다. 핵무기 생산 가능성이 원천 차단되는 것이다. 중국과 북한이 박수 칠 일이다. 또 폭증하는 LNG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러시아에서의 직수입이 필요해지고, 러시아와 북한을 관통하는 가스관 설치가 뒤따를 것이다. 가스관이 북한을 통과할 경우 북한은 막대한 통과 수수료를 얻는 한편, 가스관 통제권을 통해 한국에 대한 협박 수단을 확보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쌓아 올린 엄청난 이익을 중국과 북한에 넘겨주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
01월 25일(월) AI와 환생
박현수 조사팀장
지난해 12월 Mnet에서 특별한 무대가 펼쳐졌다. 고인이 된 가수 김현식과 혼성그룹 거북이 리더였던 터틀맨을 소환한 인공지능(AI) 음악 프로젝트 ‘다시 한 번’ 공연이다. AI와 가상현실(VR)·음성인식기술을 총동원해 목소리뿐만 아니라 실제 모습과 똑같은 형상과 표정, 몸동작까지 복원해 환생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고인을 AI 챗봇(채팅 로봇) 등으로 환생시킨 지 이미 오래다. 이런 기술의 상용화를 예견한 드라마도 있다. ‘블랙미러’시즌 2 ‘돌아올게(Be Right Back·2013)’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남편을 평소 그가 남겼던 SNS 속 디지털 데이터를 입력한 AI 로봇으로 환생시켜 생전과 같이 일상을 함께 보내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새해 들어 국내 방송에서도 관련 프로그램 경쟁이 뜨겁다. MBC가 선보인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가 대표적이다. 혈액암으로 딸을 떠나보낸 엄마가 VR 기술로 딸과 재회해 시청자를 울렸던 나연이 편에 이어 오는 28일 방송하는 ‘너를 만났다 시즌2’로망스 2화에서는 남편이 사별한 아내와 재회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29일 방송되는 SBS 신년특집 ‘세기의 대결 AI vs 인간’에서도 주목거리는 1996년 사망한 고 김광석이 2002년 발표된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부르는 대목이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지난 4일 ‘마이크로소프트(MS)가 사망한 사람을 챗봇으로 다시 살려낸다’는 기사를 실었다. 포브스에 따르면, MS는 지난해 말 특정인을 챗봇으로 복원시키는 AI 시스템을 특허출원했다. 가족이나 친구 등 특정인이 SNS에 남긴 대화나 사진·동영상·음성 등이 그 바탕이 된다. 여러 사람의 무작위 대화나 글을 학습하는 기존 챗봇과는 차원이 달라 흥미롭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고인을 실제처럼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세상이 성큼 다가왔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같은 역사 속 위인들을 생존 당시 모습으로 만나 육성 연설을 들을 수도 있다. 고인을 환생시키는 시스템이 상용화돼 부모나 배우자, 가슴에 묻어 둔 그리운 누군가를 단 한 번 만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상업성에 치우쳐 우후죽순 고인을 소환하는 것을 우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01월 26일 이남이 ‘웃으며 살자’
김종호 논설고문
‘왜 가야만 하니/ 왜 가야만 하니/ 왜 가니/ 수많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 잊었니/ 떠나보면 알 거야/ 아마 알 거야’. 걸출한 베이스기타 연주자이면서 가수였던 이남이(1948∼2010)가 작사·작곡해 부른 솔(soul)풍의 노래 ‘울고 싶어라’ 한 대목이다. ‘천재 기타리스트’ 최이철과 함께 당대 최고의 뮤지션을 규합해 1977년 결성한 그룹사운드 사랑과 평화에서 활동하다가 멤버 간의 불화 등으로 탈퇴한 그가 경기도 용인에서 농사를 지으며 만든 노래다. 김세화 노래로 1981년 처음 발표했으나, 그가 1988년 사랑과 평화에 복귀해 처연하게 절규하듯 다시 불러 1988년 사랑과 평화 제3집 앨범에 담은 뒤로 불후의 명곡 반열에 올랐다.
최이철 작사·작곡인 ‘노래는 숲에 흐르고’가 타이틀 곡이던 그 앨범의 이른바 ‘건전 가요’를 제외한 10곡 중에서 그가 보컬을 맡은 유일한 노래로, 콧수염을 기르고 벙거지를 쓴 독특한 모습으로 절창하는 장면이 TV를 통해 방영되면서 그를 비로소 ‘가수’로 전국에 각인시키기도 했다. 본명이 이창남인 그는 1967년 주한 미(美) 8군 무대에서 베이시스트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록 밴드인 차밍 가이스(Charming Guys)도 결성했고, 김대환(드럼)·조용필(보컬·기타)과 의기투합한 그룹 김트리오 일원이기도 했다. 그룹 신중현과 엽전들에 1974년 합류했고, 그런 뒤엔 사랑과 평화 전신(前身) 격인 밴드 서울나그네도 신중현과 함께 만든 바 있다.
솔로 가수로 독립해 음반 ‘그대가 떠난다면’ ‘내 집이 그립네’ 등을 내놓던 그는 1992년 돌연 설악산에 들어가, 화가이면서 ‘걸레 스님’으로 불리던 중광(重光)과 함께 8년간 지냈다. “더 닦을 도(道)가 없다”는 말을 듣고 내려와 2000년 강원 춘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곳에서 딸 단비, 이웃인 짜장면 배달원과 세차장 직원 등으로 그룹 철가방프로젝트를 결성해 음악을 ‘배달’하다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11주년 기일(忌日)이 오는 29일이다. 그가 작사·작곡해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웃으며 살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구름은 흘러서 하늘로 가고/ 우리네 인생도 하늘로 가고/ 언젠가 이곳에 오리야마는/ 그래도 웃으며 살아가야지/ 기우는 달 떠오는 해/ 울지는 말자’ 하는.
01월 27일 백악관의 코메리칸
이도운 논설위원
지난 20일 임기를 시작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참모 가운데 한국계 2명이 국내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데이비드 조와 지나 리. 국토안보부 산하 비밀경호국(SS) 소속인 조는 백악관 경호를 총괄한다. SS에서만 20년 근무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는 2018년 싱가포르·2019년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경호 작전을 수행한 뒤 백악관 경호팀 2인자로 승진했다. 바이든 선거 캠프 출신인 리는 영부인 질 바이든의 일정을 담당한다. 청와대 제2부속실장과 비슷한 자리다. 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시 백악관 법무실과 인사실에서도 일했다.
한국계 미국인의 백악관 진출이 낯선 일은 아니다.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오바마 시절에는 리 말고도 10여 명의 한국계 미국인이 백악관에서 일했다. 입법 보좌관으로 백악관에 들어갔던 크리스토퍼 강 변호사는 선임법률특보까지 올랐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시에는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가 국가안보회의(NSC)의 아시아 담당 국장으로 일하면서 북한 핵 문제 등 한반도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백악관에서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존 유 버클리대 법대 교수는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세력에 대한 선제공격’ 등을 법리적으로 뒷받침해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백악관에 눈에 띄는 한국계가 없었지만, 고홍주 예일대 법대 교수가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담당 차관보로 발탁됐다. 그의 형인 고경주 하버드대 공중보건대학원 부학장은 오바마 행정부의 보건부 차관보로 일했다.
한국계 미국인들이 백악관에서는 제법 활약을 했지만, 아직 미 행정부 장관이 되지는 못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동맹인 일본과 우방국인 대만 출신 미국인 가운데는 각료급 인사들까지 배출됐다. 미국 최초의 아시아계 장관인 일본계 노먼 미네타는 클린턴 시절부터 부시 시절까지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부시 시절 노동부 장관·트럼프 시절 교통부 장관을 지낸 일레인 차오와 바이든 행정부 초대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선임된 캐서린 타이는 대만계다. 오바마 시절 게리 로크 상무장관은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미 행정부에서 한국계 장관이 배출되는 날도 기대해 본다.
01월 28일 ‘집콕’과 엥겔지수
문희수 논설위원
코로나19로 가정생활이 많이 달라졌다. 당장 외출 자제로 집에서 지내는 ‘집콕’이 일상화했다.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집밥족 증가로 음식과 식자재 배달 역시 크게 늘었다. 아파트 단지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배송 차량들이 드나든다. 새벽에도 배달하는 마켓컬리 같은 업체는 배송 박스에 ‘오늘 놓친 한 끼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어 소비자를 유혹한다.
외식업중앙회 등으로 구성된 음식서비스 인적자원개발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통계가 흥미롭다. 300개 외식업체의 지난해 월평균 매출은 전년보다 16.5% 줄었지만, 배달 비중이 높은 업체는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는 내용이다. 100% 배달만 하는 업체는 11.0%, 배달 비중이 90∼99%인 곳은 5.0%, 50∼89%인 곳은 2.8% 각각 증가했다. 방문 판매는 줄어도 배달 판매는 증가한다는 새로운 트렌드가 드러난다.
가계의 소비 지출에서 식료품비와 비주류 음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인 엥겔지수가 지난해에 2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3분기 엥겔지수는 12.8%로 2000년 이후 가장 높았다. 재택근무 증가 등 세태를 반영한다. 식탁 물가 급등도 요인으로 꼽힌다. 통상 소득이 늘면 엥겔지수는 낮아진다. 문화·오락 등 서비스 지출이 늘기 때문이다. 이 지수는 1970년대 30%대에서 대체로 하락 추세였는데 지난해 역전됐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증가하면 평균소비성향은 감소한다. 한계소비성향도 그렇다. 늘어난 소득을 다 쓰지 않기 때문에 소비와 함께 저축도 증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득계층별로 소비 변화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저소득층의 평균소비성향은 고소득층보다 높지만, 소비 절대액이나 지출 여력은 고소득층일수록 크다. 정부가 소비를 늘리려면 계층별로 접근 방식을 강구해야 한다. 고소득층에겐 개별소비세 인하·폐지 같은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1인 가구와 함께 집밥·배달이 느는 트렌드 변화도 고려해야 한다.
집콕으로 과체중·비만 어린이가 증가했다고 한다. 어른도 다를 게 없다. 일단 집 밖 활동이 자유로워져야 소비든 건강이든 풀릴 수 있다. 정부는 2월부터 코로나 백신을 접종해 올 11월 집단면역을 달성하겠다고 한다. 늦었지만 그렇게라도 일상이 정상화할지 지켜보자.
01월 29일 文·트럼프의 위험한 세뇌
이미숙 논설위원
미국 작가 리처드 콘던의 ‘맨추리안 캔디데이트’는 냉전이 한창이던 1959년 발표된 소설이다. 직역하면 ‘만주의 입후보자’인데, 6·25전쟁 때 대원들과 함께 만주로 끌려간 미군 레이먼드가 소련·중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세뇌된 후 귀국, 누군가에게 조종되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인을 저지르는 얘기를 다룬 정치 스릴러다. 1962년 존 프랭컨하이머 감독이 프랭크 시내트라 주연으로 영화화해 인기를 끌었다. 2004년 조너선 드미 감독은 배경을 6·25에서 걸프전으로 바꾸고 리메이크했다.
소설과 영화로 유명해진 데 힘입어 맨추리안 캔디데이트는 영어 사전에도 등재됐다. 만주라는 지역적 의미와 상관없이 ‘적에게 세뇌당해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정치인’이란 뜻으로 통용된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지난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맨추리안 캔디데이트로 규정해 화제가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예측으로 유명해진 루비니 교수는 한 칼럼에서 “트럼프는 미·중 전략 경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단기적으로는 중국에 골칫거리지만 재임에 성공할 경우 오히려 중국을 이롭게 할 것”이라며 “트럼프는 현실의 맨추리안 캔디데이트”라고 했다. 트럼프가 결과적으로 미국의 경쟁국인 중국의 부상을 돕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낙관한 데 대해 미국에서 비판이 쏟아진다.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미국의 소리방송(VOA)인터뷰에서 “김정은의 8차 당대회 발언엔 비핵화 의지로 읽힐 만한 신호가 전혀 없다”면서 “문 대통령의 인식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했다.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카운슬 선임연구원도 “김정은의 핵무기 생산 확대 발언을 어떻게 비핵화 의지로 해석하나”라고 반문했다.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여당 의원은 김여정의 특등 머저리 발언에 대해 “좀 더 과감하게 대화하자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과 그 측근의 인식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북한 발언 해석용 난수표라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방북 때 누군가에게 세뇌됐기 때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보다 더 위험한 현대판 맨추리안 캔디데이트로 불리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