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송평인 칼럼2020/ 01-01 힘없으면 옳은 것도 관철 못 한다 - 12-30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질 판인 K방역

상림은내고향 2020. 12. 30. 15:46

송평인 칼럼 동아일보 2020

01-01  힘없으면 옳은 것도 관철 못 한다

지난해 정권의 옳지 못한 시도 광화문광장에서는 막아냈으나
여의도 국회에서는 막지 못해  
정치는 옳은 것을 관철하는 힘… 올해 총선이 그 계기 돼야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전세 사는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집값 잡는다고 한 조치가 이제는 전셋값을 끌어올리고 있다. 집값은 못 잡아도 좋으니 제발 전셋값이라도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죽어나는 건 집 없는 사람이고 자영업자이고 아르바이트생이고 중소기업이고 신생 혁신기업이다. 살판 난 것은 서울 등 수도권 요지에 집을 가진 사람들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주52시간 노동제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는 대기업과 공공기업에 다니는 근로자들이다. 

혁신은 없다. 다른 나라는 다 근미래(近未來)의 전기차로 가는데 우리만 올지 말지 알 수 없는 원미래(遠未來)의 수소차로 가고 있다. 정부가 바이오산업의 육성을 외친 올해 바이오산업의 주가는 오히려 추락했다. 공산당이 만사를 통제하는 중국마저 화끈한 규제개혁을 하는데 우리만 기득권 조합이나 노조에 발목 잡혀 지지부진이다. 적폐청산 과정에서 정책 결정에 대한 시비로 감옥에 가거나 좌천한 선임자를 본 공무원들은 재량을 발휘할 생각을 않는다. 


일본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시비이고 중국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굴욕적 처신이다. 중국은 사드 보복에 무릎 꿇고 미세먼지조차 자기 탓하는 걸 보면서 한국은 무시해 버려도 되는 나라로 판단한 듯하다. 그러니 ‘홍콩과 신장위구르 사태는 중국 내정 문제’라는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중국 관영 언론이 써대는 것 아니겠는가. 중국 외교부가 고쳐줄지 지켜보겠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센카쿠열도 갈등을 극복하고 급속히 호전되고 있다. 일본 쪽에서는 일본인이 한국보다 중국을 더 좋아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중국도 일본도 동북아시아를 한중일 삼국지(三國志)가 아니라 중일 양국지(兩國志)로 이끌고 싶어 한다. 하수(下手)에게는 한일 관계와 한중 관계의 소국(小局)만 보이고 중일 관계의 대국(大局)은 보이지 않나 보다. 

 

새로운 규칙은 그 규칙을 만든 자에게 먼저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오랜 법언(法諺)이 있다. 적폐청산이라며 사화(士禍) 수준의 수사를 하면서 피의자를 공개소환하고 피의사실을 밥 먹듯이 유포하고 수갑까지 채워 수치를 주던 정권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해 새로운 검찰사무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피의자 조국과 그 가족에게 제일 먼저 적용했다. 그러고도 파렴치하게 공정을 외치고 있다. 이런 정부에 무슨 공정한 검찰 개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공수처에서는 조국, 유재수, 송철호, 그 윗선에 대한 수사가 가능할 것인가. 공수처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그런 수사가 가능하지 않다는 데는 별 의견 차이가 없다. 지지하는 자들은 그런 수사를 왜 하냐고 뻔뻔하게 물을 것이고 지지하지 않는 자들은 그런 수사 하지 말라고 만든 게 공수처가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이유야 뭐라고 보든 그런 수사는 하지 않는 게 바로 공수처다. 그래서 정권의 보위부인 것이다. 

건국 100주년이 제야 속으로 사라졌다. 가야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고 법률가가 되지 않았으면 역사가가 됐을 것이라는 아마추어 역사가는 일제 식민지배의 한가운데인 1919년을 건국이라고 불렀다. 잃은 것을 잃었다 하고 얻은 것을 얻었다고 하는 사회는 걱정할 게 없다. 나라를 잃은 것을 나라를 얻었다고 하니 그 역사의식이 송두리째 걱정스러울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김정은의 말만 믿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이 비핵화의 진의가 있다고 전달한 것이 베트남 하노이 북-미 회담을 좌초시킨 근본적 원인이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말이 아니라 피와 철에 의해 결정됨에도 일방적으로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경계태세를 허물었다. 어리석은 송양공(宋襄公)이 따로 없다. 그 어리석음의 대가는 전멸이다. 

 

경제성장률은 1%대로 추락시키고 부동산 값 하나 잡지 못하는 무능한 정권이 제 분수도 모르고 나라를 정초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땀과 피와 철로 세운 것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부수는 건 한순간이다.  

힘이 없으면 옳은 것도 관철하지 못한다. 정치는 옳은 것을 관철하는 힘이다. 좀 더 겸손하게 말하자면 옳지 못한 것을 막는 힘이다. 광장에서는 옳지 못한 것을 막아냈으나 국회에서는 막아내지 못했다. 올해는 총선이 있다.

 

01-15  영원회귀하는 ‘동물국회’ 

패스트트랙으로 돌아온 동물국회 
선진화법에 농락당한 보수 정당… 과반의 냉엄한 현실 깨닫고
분노를 국회 몸싸움이 아니라 선거에서의 각오로 표출해야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완패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법안을 국회선진화법이 정한 절차대로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걸 물리적으로 막은 것부터가 잘못됐다. 패스트트랙 법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할 때도 이를 물리적으로 막겠다고 지금 여당이 과거 야당일 때 했던 추태를 재연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다. 민주주의의 숫자는 5분의 3이 아니고 2분의 1이다. 국회선진화법은 5분의 3의 합의를 표결의 원칙으로 하는 세계에서 드문 법이다. 5분의 3쪽만 보면 더 많은 다수의 합의를 요구하는 좋은 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5분의 2쪽을 보면 2분의 1도 안 되는 소수가 2분의 1 이상 다수의 의사 관철을 막는 나쁜 법이다. 다만 국회선진화법은 패스트트랙이란 절차가 있어서 최종적으로는 2분의 1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위헌 시비를 벗어났다. 


패스트트랙은 그 말의 일상적 의미와는 달리 신속처리와는 거리가 멀다. 어느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건 길게는 1년까지 그 법안을 심사숙고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심사숙고는커녕 양대 정당이 싸우기만 하다가 막판에 여당이 군소정당과 야합해 표 대결로 끝냈다. 날치기 공세가 반복되고 날치기를 막는다는 명분의 몸싸움도 반복됐다. 국회선진화법이 국회를 식물국회로 만든다는 점은 입증이 끝난 것이지만 이번에는 패스트트랙이 가동되면 국회는 다시 동물국회로 돌아간다는 점도 입증됐다.


국회선진화법의 5분의 3은 세계에서 드물게 가중(加重) 다수제를 채택한 미국 상원의 3분의 2를 어설프게 흉내 낸 것이다. 미국 상원에서조차 3분의 2의 합의를 요구하는 경우는 예외적인데 대통령 탄핵 의결 때와 합법적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킬 때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2분의 1의 합의로 회기를 종결시키는 꼼수를 써서 필리버스터조차 있으나 마나 한 제도로 만들었다. 정작 5분의 3의 합의가 꼭 필요할 때는 5분의 3을 회피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인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된 것은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대선 주자였을 때다.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연합이 야당이었을 때 던진 합의정치의 미끼를 덥석 문 것은 새누리당 대표인 황우여와 쇄신파들이었고 이를 침묵으로 승인한 것은 박근혜였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내놓은 경제활성화 법안 등은 모두 국회선진화법의 5분의 3 규정에 묶여 번번이 통과되지 못했다. 남 탓 할 수 없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이었다. 

 

그때 왜 박근혜 정권은 여당이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물국회 타령만 하면서 패스트트랙을 가동할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패스트트랙이 어떻게 작동할지 그려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패스트트랙에 올릴 경우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조바심을 냈다고 볼 수도 있다. 개혁은 지식과 끈기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인데 둘 다 부족했다.
 

민주당이 정의당 등 범여권의 군소정당들에 유리한 선거법 개정을 해주는 대가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 등의 통과를 보장받았다. 민주당이 공수처법에 매달린 것은 형사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들어서라도 후환을 막으려는 것이다. 언젠가는 더러운 야합의 결과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야합일지라도 표결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아니 물리적으로 막아지지 않는다. 그런 뻔한 계산도 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한국당을 이끌었던 지도부는 아마추어였던 것이다. 


패스트트랙에서 한국당과 범여권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범여권에서는 또 최루탄을 터뜨리고 해머로 문을 부수는 의원들까지 나왔을지 모른다. 한국당이 그 정도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흉내를 냈다. 정치의 품격은 의회주의를 존중하고 일관성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 앞으로 한국당이 다수의 표를 모아 패스트트랙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때 물리적으로 막는 반대편을 향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운동권 의원들의 행패를 흉내 내지 않는다고 해서 웰빙 체질인 것이 아니다. 한 번은 국회선진화법이 내세운 5분의 3이라는 합의정치의 환상에 속고 또 한 번은 패스트트랙을 통해 관철되는 2분의 1의 냉엄한 현실에 당하고도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못하면 그것이 웰빙 체질이다. 요란한 분노보다 조용한 분노가 더 무섭다는 걸 선거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01-29  죄 지어도 처벌 못 하는 계급 태어난다 

파렴치한 검찰 물갈이 인사 이어 
최강욱 기소에 감찰로 압박하고 향후 공수처 수사로 보복 협박
親文 실세들 처벌 점점 어려워져… 사악한 ‘2020 체제’ 시작된 듯

 윤석열 검찰총장의 지시로 이뤄진 최강욱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 기소에 대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감찰 운운하면서 정권이 최강욱 기소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인 모양새가 됐다. 조국 아들에게 허위 인턴활동확인서나 써준 ‘천하의 잡범’(진중권 표현) 최강욱이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새로 짜인 추 장관-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라인이 윤 총장을 중간에 두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실전처럼 막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이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유재수 비리 의혹과 울산시장 선거공작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을 거쳐 임종석 전 비서실장과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는 상황이다. 윤건영 전 국정기획상황실장, 김경수 경남지사, 송철호 울산시장도 걸려 있다. 시험 가동의 결과는 100% 만족스러운 게 아니어서 감찰 운운하는 협박이 나왔겠지만 윤 총장 쪽도 이 지검장이 최강욱 기소안 결재를 깔아뭉개는 사보타주를 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최강욱을 기소했을 정도니 앞으로 수사가 첩첩산중이다.


백원우의 이름이 검찰 수사에서 자주 거론되자 임종석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잽싸게 사라졌다. 그러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보지 못한 파렴치한 검찰 물갈이 인사가 끝날 때쯤 다시 더불어민주당에 얼굴을 드러냈다. 손발이 잘린 윤 총장이 수사를 더 지휘해 봐야 자신에게까지는 칼날이 미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 듯하다. 임종석의 웃음에서 바야흐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하지 못하는 계급이 태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강욱은 기소된 직후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다. 향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하면 자신을 기소한 윤 총장을 공수처가 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에 불리한 사이비 연동형 비례대표제까지 해주면서 군소정당을 끌어들여 공수처법을 통과시킨 이 정권의 사람들이 공수처를 어떻게 활용하고 싶어 하는지 그 내심을 보여주는 말이다.  


공수처는 고위공직자에 대해 누구를 수사하고, 누구를 수사하지 말지를 결정할 뿐 아니라 고위공직자 중 검사와 판사에 대해서는 수사할 권한을 넘어 기소할 권한까지 갖고 있다. 공수처가 그 존재를 각인시키는 길은 우선적으로 검·판사를 수사해 기소까지 하는 것이다. 정권의 뜻을 거스른 수사를 한 검사들이 공수처의 제1호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최강욱의 말은 검찰 물갈이로도 모자라 검사들을 향해 조심하라는 협박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공수처의 제2호 수사 대상은 판사들이 될 수 있다. 김경수 항소심 재판부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2차례나 선고를 연기했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유재수 감찰 무마 혐의가 죄질이 나쁨에도 부인 정경심 씨가 구속돼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는데 정경심 재판부는 정 씨의 보석 석방을 고려하고 있다. 판사들도 굳이 정권에 밉보이면서까지 정의를 관철하려 하지 않는다. 김경수 재판이야 허익범 특검이 상대하고 있지만 조국 정경심 최강욱 재판에서 물갈이된 검찰이 공소 유지나 제대로 할지 의문이다. 
 

조국과 그 가족의 비리가 터져 나올 때 그들을 신성(神性) 가족처럼 취급하는 지지자들의 해괴한 정신 상태를 경험한 바 있다. 그런 정신 상태로부터 귀태 같은 공수처가 태어났다. 고위공직자 수사를 독점하게 된 공수처는 정권의 반대자들은 가혹하게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 당성(黨性)만 좋으면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노멘클라투라를 만드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검경수사권 조정은 경찰권의 충분한 분산이 이뤄지면 대체로 법치의 모범국가들을 따라가는 개혁이다. 김학의 불기소 같은 일은 이번 조정으로 방지할 수 있고 오히려 경찰판 김학의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반면 공수처는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남들이 다 하는 제도에서나 잘할 생각을 해야 한다. 형사사법제도같이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에서는 더욱 그렇다. 모자란 것들이 꼭 검증되지 않은 새것으로 하면 잘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공수처는 보수 정권이 장악해도 진보 정권이 장악해도 악이다. 그것이 악인 것은 처음 장악하는 쪽이 20년, 혹은 그 이상 집권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수처를 막지 못하면 올해는 후대에 2020년 체제라고 불릴 사악한 체제가 출범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02-12  은유로서의 질병 ‘우한 폐렴’ 

‘우한 폐렴’에서 黃禍로의 비약… 과학적 사고 아닌 은유적 사고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우리도 낙인의 대상 돼
우리가 중국인 사투 도와야

 질병은 과학의 대상이다. 과학적으로 진단하고 과학적으로 치료할 대상이다. 그러나 인류는 흔히 질병을 종교나 문학의 용어로 표현해 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질병을 신의 진노로 여겼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 때 유럽의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여겼다. 20세기의 암에 비견될 수 있는 19세기 결핵은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사랑의 질병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문학 속 비련의 주인공은 종종 결핵환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19세기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역병이 있었으니 콜레라다. 콜레라는 1800년 이전까지는 인도 벵골 지방의 풍토병에 불과했으나 인도를 식민지배한 영국이 중국 광둥에 그 병원균을 실어왔고 결국 조선에까지 전파됐다. 1821년 조선에 처음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죽은 사람이 도성에서만 20만 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고 시골은 그 수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 왕조는 사악한 기운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한다고 여겨 콜레라가 발병하면 죄수를 석방하는 등의 방법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풀려고 했다. 천주교와 동학 같은 종교가 민중 사이에 파고드는 데는 그 앞에서 인간이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 콜레라에 대한 공포도 큰 역할을 했다.


콜레라의 원인이 세균으로 밝혀진 것은 1880년대다. 이때부터 인류를 괴롭힌 병원균이 하나씩 과학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구한말 지석영이 일본에서 배운 종두법으로 천연두를 치료하기 시작한 것도 1880년대다. 그럼에도 질병을 은유적으로 다루는 오랜 습관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980년대 에이즈가 확산되자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은 ‘성의 쾌락을 도착적으로 추구하다 신의 진노를 산 것’으로 여겼다. 에이즈가 동성애를 통해 많이 확산됐기 때문에 그런 은유가 가능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에이즈 치료의 길을 연 것은 도덕적 방종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과학적 진단에 의한 에이즈 치료제의 개발이다. 에이즈가 소멸하는 질병이 되고 있는 지금 그들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돌아선 것은 1978년이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굴기(굴起)는 중국발 전염병의 굴기이기도 하다. 사스는 2002년 대유행을 했고 지금 우한 폐렴이 그 이상의 대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스는 닭을 사육하는 더러운 환경에서 인간에게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한 폐렴은 가축이 아닌 야생동물을 함부로 먹는 식습관에서 비롯됐다는 추정이 있다. 

 

우한 폐렴 사태를 두고 프랑스의 어느 신문은 ‘Alerte jaune(황색 경보)’이라고 칭했다. 서양에서 황화(黃禍)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죄와 벌’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전 세계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번지는 어떤 무시무시한 역병의 희생물이 될 운명에 놓이는 꿈을 꾼다. 도스토옙스키가 염두에 둔 것은 콜레라였다. 에이즈 때는 아프리카 기원을 문제 삼으며 흑화(黑禍)론이 일었다. 황화론이나 흑화론은 서양인의 나쁜 버릇 같은 것이다. 

 

서양인의 눈에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이 모두 비슷하게 보인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묘한 입장에 빠져 있다. 그들은 중국인들처럼 바이러스 숙주 취급을 당하는 데 기분 나빠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또 중국인들을 바이러스 숙주 취급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중국인이 세계 시민이 될 만한 위생관념을 갖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조차도 19세기에 시궁창이 만연한 도시 환경이 콜레라의 온상이 됐다. 나라가 발전하면서 위생관념도 발전한다. 어느 나라나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화한다. 콜레라를 세계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영국 자신이다. 중국발 전염병도 중국이 세계의 물가를 낮춰준 긍정적 앞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부정적 뒷면이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통해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진핑은 중국을 마오의 1인 독재 시대로 되돌리려 한다. 우한 폐렴은 그 과정에서 공안통치의 강화로 확산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봉쇄된 도시에서 사투를 벌이는 중국 인민의 치열한 노력에 인류애적 차원의 성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질병은 질병일 뿐이다. 중국인을 도와서 하루라도 빨리 전염병을 극복하는 것이 모두가 황화의 잘못된 은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02-26  나라 거지꼴 만들고 웃음이 나왔나 

역병 중 웃음소리 들린 청와대… 우한코로나 방역 최악 실패국
신천지에서 멈춘 역학 조사… 중국 감염원 밝혀질까 두렵나
추경 앞서 대통령 사과해야

 역병이 돌 때는 조선시대 임금들도 함부로 웃지 않았다는데 우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던 날 청와대에서는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영화 ‘기생충’ 팀과 짜파구리를 끓여 먹으며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우한 코로나가 돌기 시작하자 김정숙 여사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라졌다는 말이 들렸다. 다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타면 주변에서 말려도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나타나 예상했던 이상을 보여줬다. 고작 짜파구리 만드는 데 이연복이라는 유명 셰프를 대동하고 재래시장에 들러 장까지 봤다.


경제만 거지꼴이 아니고 나라가 거지꼴이다. 우한 코로나 확진자가 중국 다음으로 많다. 크루즈선 확진자 약 700명을 포함한 일본보다 많다. 크루즈선 확진자를 빼면 크루즈선 확진자 수 이상 차이 나는 압도적인 2위다. 한국이 또 하나의 우한(another Wuhan) 취급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민 시위에 관광 온 한국인들을 자기들 돈으로 전세기를 마련해 돌려보냈고, 모리셔스에서는 신혼여행을 간 부부들이 느닷없이 격리돼 허름한 숙소에 갇혔다. 중국 산둥성은 한국인 입국자를 강제 격리했다. 미국 등은 한국 여행경보를 최고로 올렸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서 두세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화를 불렀다. 기생충 파티는 미뤄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관심이 식기 전에 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모양이다. 우한 코로나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종식’을 거론하며 “이제 경제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결국 방역도 경제도 망치게 했다.  

방역은 첫째도 감염원 차단이고, 마지막도 감염원 차단이다. 미국은 이 단순한 원칙에 따라 중국인 입국을 금지했고 크루즈선 확진자를 뺀 자국민 확진자를 30명대에 잡아두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지 않아 2, 3위 확진국이 됐다. 일본이야 도쿄 여름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중국의 협조를 구한다는 국민적 대의(大義)가 있다. 한국으로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찾아주면 좋지만 왜 조만간 꼭 와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미국은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면서도 빌 게이츠 같은 민간 기업인이 중국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우리는 위정자들이 궁지에 처한 중국을 돕는 것과 방역을 위해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 결과 우한 꼴이 나고 결국 중국에 마스크 보내는 도움조차 어려워졌다.  


신천지 대구교회의 감염 실태가 드러나고 있으나 역학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신천지 교주 형의 장례식이 청도대남병원에서 치러진 사실을 고리로 양쪽을 관련짓는가 싶더니 흐지부지다. 질병관리본부는 감염자가 많아 검사와 치료에 주력하겠다고 한다. 추적해서 찾아봐야 감염원이 중국인이나 중국인으로부터의 2, 3차 감염자로 나온다면 정부만 곤란해지는 상황이다. 신천지에서 더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국으로부터의 입국 절차를 강화한 후에도 입국자가 10만 명을 넘었다. 60∼70%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잠재적 감염원으로는 천문학적일 정도로 많은 숫자다. 정부는 중국 입국자 중 20%가량이 한국인이고 이런 한국인이 오히려 더 ‘밝혀지지 않은 감염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한국인은 추적이 가능하다. 중국인은 추적이 어렵다. 방역을 아예 포기하면 모르되 방역을 한다면 이제라도 중국인 입국을 막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뒤늦게 전문가 간담회라는 걸 열었다. 중국인 입국 금지 불가를 인정받기 위한 자리였다. 중국인 입국 금지를 수차례 건의한 대한의사협회는 간담회에 초청받지 못했다. 정부 눈치를 보는 전문가들은 우한 코로나가 너무 많이 퍼져버려서 중국인 입국을 막아도 소용없다고 주장했다. 왜 그렇게 많이 퍼져버렸는지,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추경은 해야 한다. 하지만 추경을 요구하는 자세가 고약하다. 중국 다음 가는 최악의 방역 실패에 사과 한마디가 없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 최고회의에서 우한 코로나 사태 악화에 대해 송구하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대통령 대신 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 회의석상에 앉아서 무성의하게 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추경에 필요한 돈은 국민 주머니에서 나온다. 문 대통령이 정중히 사죄하고 추경을 당부해야 한다.

03-11  우리만 모른 방역의 기본

작은 섬나라 모리셔스도 알고 뒤통수친 중국이 보여준 방역의 기본 우리만 몰라
이웃 나라 돕기와 방역 구별 못해… 정부가 엎지른 물 국민이 수습 중

방역은 지금 와서 보니 과학이라기보다는 정책적 결단인 듯하다. 대한의사협회도 대한감염학회도 중국인 입국 금지가 방역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정책 결정자에게 권고할 뿐이다. 그 권고를 받아들이느냐 마냐는 정책 결정자에게 달렸다.


한국에서 확진자가 급증하기 시작할 때 모리셔스가 한국인 신혼부부들을 예고도 없이 허름한 숙소에 격리시키고 돌려보냈다. 처음에는 괘씸한 나라라고 여겼으나 이어지는 각국의 유사한 조치를 보면서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도 알고 있는 방역의 기본을 우리만 몰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약 110개국이 한국의 입국을 금지하거나 제한했다. 가장 뼈아픈 것은 중국이 친 뒤통수다. 우리 외교부가 항의하자 중국 관영 환추시보는 “외교보다 중요한 것은 방역”이라고 응수했다. 일본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일(訪日) 연기를 확정하자 즉각 중국인 입국을 제한했다. 그동안 중국인 입국은 막지 않으면서 한국인 입국만 막는 것은 일관성이 없어 하지 않았던 한국인 입국도 함께 제한했다. 방역은 매정한 것이다. 우리만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방역 능력이 없는 국가들이 한국인 입국 금지라는 투박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한 다음 날 호주가 한국인 입국을 금지했다. ‘2019 세계 보건안보지수’에서 호주는 한국보다 5계단 높은 세계 4위다. 세계 1위는 미국이다. 미국이 방역 능력이 다른 나라보다 모자라 중국인 입국을 금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외교는 세련돼야 하지만 방역은 투박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방역은 국방과 비슷하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고 골든타임을 놓치면 국민이 생명을 잃는다. 실제 그랬다. 한국은 평균 수준의 방역을 했을 경우에 비해 현재까지 최소한 수십 명은 잃지 않을 수도 있었던 목숨을 잃었다.
  

일본이 뒤늦게나마 중국인 입국을 강력히 제한하자 중국은 별 말 없이 양해했다. 그것은 중국보다 바이러스에 덜 오염된 일본이 가진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이 오염이 심해져 이런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 확진자의 절대 수로 보면 중국보다 훨씬 더 낫지만 인구 비례로 보면 중국만도 못하다. 우리로서는 덜 오염된 일본의 조치에 맞대응하려면 그 전에 더 오염된 중국의 조치에 먼저 맞대응을 했어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 방역은 외교처럼 하고 외교는 방역처럼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제 “한국이 방역의 세계 모범이 될 수 있다”며 뭐가 그리 급한지 미리 앞서서 자화자찬했다. 나중에 방역이 잘 끝났어도 방역을 책임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인데, 확진자가 신천지 관련을 빼도 세계 3, 4위권인 나라가 방역의 세계 모범 운운하니 중국의 시진핑 영웅 만들기 시도를 남 일처럼 볼 것도 아니다.


드라이브 스루 검사는 인천의료원 의사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약국을 통한 마스크 판매는 경북 문경의 한 약사의 청원에서 시작됐다. 코로나19 신속 검사키트를 개발한 것은 민간기업들이다. 한국판 ‘칼레의 시민들’은 정부가 엎지른 물을 최대한 잘 수습하고 있다. 정부만 궁지에 처한 이웃 나라를 돕는 것과 자국민을 위해 꼭 필요한 방역을 하는 것을 구별해 결정적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평균 이상이었을 것이다.


박 장관은 감염원의 정확한 목록도 내놓지 않은 채 “감염의 가장 큰 원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가 언젠가는 감염원의 정확한 목록을 내놓기 바란다. 신천지 감염원도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꼭 밝혀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의 판단처럼 설혹 감염의 가장 큰 원인이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방역 책임자는 중국인 입국 금지와 함께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을 격리하는 더 일관성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반성했어야 한다. 

 

중국인이든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든 중국발 모기(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것은 과학자에게 물어볼 것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창문을 아무리 틀어막아도 비집고 들어오는 모기가 있어 팬데믹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으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창문을 최대한 막는 것이 사람이 할 바를 다하는 방역의 진인사(盡人事)다.

 

03-25  여론조사 회사도 못 믿을 선거 여론조사 

2017년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여론조사, 선거 결과와 너무 달라 조사 회사의 편향 방치도 의심돼
이번 4월 총선에서도 격차 크면 이대로 더 이상 놔둬선 안돼

여론조사 회사는 자신이 한 조사를 믿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2018년 6·13지방선거에서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별 득표는 자유한국당이 27.76%였다. 그러나 선거 직전인 11, 12일의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한국당의 경우 18.7%로 개표 결과와 무려 9%포인트의 차이가 났다.

리얼미터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갤럽은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을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정당지지도 조사를 매주 했다. 지방선거 1주일 전의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한국당 지지도는 11%였다. 이 수치와 한국당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 27.76%는 무려 16.76%포인트 차이가 난다. 정당지지도와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다른 것이지만 이 정도 격차가 나면 정당지지도 조사는 의미 없다.

지상파 방송 3사가 칸타퍼블릭 코리아리서치센터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광역단체장 여론조사를 보면 실제 투표 결과와의 차이가 더 크다. 여론조사는 당시 지방선거를 1주일여 앞둔 6월 2일부터 5일까지 실시됐다. 서울에서는 박원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49.3%, 김문수 한국당 후보가 13.6%, 안철수 바른미래당 후보가 10.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김 후보가 약 10%포인트 오른 23.34%, 안 후보가 약 9%포인트 오른 19.55%를 얻었다. 박 후보는 3.5%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지방에서는 차이가 더 컸다. 대구에서 권영진 한국당 후보는 25.4%포인트를, 부산에서 서병수 한국당 후보는 16.8%포인트를 더 얻었다. 대부분의 한국당 후보가 여론조사보다 훨씬 큰 지지를 받았다. 의미가 없는 여론조사의 수준을 넘어 의미를 왜곡하는 여론조사였다고 할 수 있다.


2018년 6·13지방선거 전에는 2017년 대선이 있었다. 대선이 끝난 이후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의 용역으로 2016년 4월 12일부터 2017년 5월 3일까지 심의위에 등록된 801개 대선 여론조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가 나왔다. 그에 따르면 전화면접에 비해 ARS 방식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율이 예외 없이 더 높게 나왔다. 또 무선 ARS 방식만 사용한 경우가 유무선 혼용 ARS 방식보다 문 후보 지지율이 대체로 더 높게 나왔다.

 

지난달 21일 리얼미터가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 이낙연 민주당 후보와 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후보가 50.3%, 황 후보가 39.2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 조사의 다른 설문에서 응답자의 무려 70.2%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대선 당시 득표율은 41.08%, 종로구에서는 41.15%를 얻었다. 종로구의 투표율이 77%였기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 지지자들은 32% 정도가 포함되는 것이 적절하다. 무려 2배가 넘었다.

 

리얼미터가 의도적으로 이런 편향을 방치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이 후보가 황 후보보다 높게 나온다. 다만 여론조사의 실태에 비춰 보면 샘플링(sampling)의 체계적 왜곡으로 실제보다 더 높게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응답을 선호하고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응답을 선호하지 않을 경우 한쪽으로 치우친 샘플이 나오기 쉽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런 경향이 현저히 강화됐다.

여론조사의 정확성이 전 세계적으로 떨어졌지만 우리나라처럼 심각한 경우도 드물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현재의 조사비용이나 조사기법으로는 대표성 있는 샘플을 얻기가 어렵게 되자 아예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뻔히 알 수 있는 설문 조항의 편향이나 샘플링의 편향조차도 방치하면서 투매하듯 결과를 던져버리는 것일 수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4월 창원 성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선거 1주일 전 여론조사로는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강기윤 한국당 후보를 24.1%포인트 차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 결과는 강 후보가 0.54%포인트 앞섰다. 최악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실제 득표율과 여론조사 결과 사이에 큰 차이가 난다면 있어서 없는 것만 못한 여론조사를 어찌할지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04-08  다 못하는데 방역만 잘하는 정부는 없다 

아무도 못 간 未踏의 길 간다는 주제넘은 발상 하다 결국 포기
실패할 뻔한 방역, 성공 만든 功… 마땅히 국민과 의료체계에 돌려야
숟가락만 얹고선 가로채선 안 돼

유럽발 입국자에 대한 전수조사가 처음 시행된 지난달 22일에만 19명의 확진자가 쏟아졌다. 이후 매일 입국자 중에서 적지 않은 확진자가 나왔고 날에 따라서는 신규 확진자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할 때 중국발 입국자를 전수조사했다면 어땠을지 가늠할 수 있다. 최소한 수백 명의 중국발 감염자가 들어와 휘젓고 다녔다는 말이 된다. 당시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고 중국발 한국인을 자가 격리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안 듣더니 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하자 모든 입국자에 대한 자가 격리 조치에 들어갔다. 선진국도 가지 못한 미답(未踏)의 길을 걷는다는 주제 넘는 발상을 하다가 비로소 이제야 다른 나라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창문 열어 놓고 모기 잡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모기 없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중국인보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 더 큰 감염원”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중국인만 감염시키고 중국에 있는 한국인은 감염시키지 않을 리가 없다. 중국인 입국자를 차단하라고 하면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 입국자에 대해서도 자가 격리 등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장관이 말꼬리나 잡으면서 책임 회피만 하더니 나중에는 자국민을 입국 금지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라는데 엉뚱하게 자국민 입국 금지 타령을 하니 듣는 쪽은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코로나 지옥을 겪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도 더 일찍 더 철저하게 중국 쪽 입국 관리를 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 31일 중국발 입국을 제한하며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고 떠벌렸지만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미 늦은 대응이었던 데다 입국 제한 후에도 미국 시민 등 4만 명이 중국에서 들어와 철저하지 못했다”. 유럽의 감염원이 된 이탈리아도 1월 31일 중국인 관광객 2명이 확진자로 드러나자 즉각 중국발 직항노선의 운항을 중단시켰으나 다른 국가를 경유한 항공편과 인근 국가에서 육로와 해로로 들어오는 중국인 관광객을 막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처음에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 지도자들만큼도 신중하지 못했다. 중국 쪽 창문을 열어놓고 영화 ‘기생충’ 제작진과 파안대소(破顔大笑) 파티를 여는 여유를 부리면서 방역도 외교도, 방역도 경제도 잡겠다고 하다가 된통 당했다. 다행히 현명한 국민들이 열심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씻고 종교의 자유 등 기본권 침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한 데다 의사 약사 등 현업의 전문인들이 드라이브스루 검사와 약국 마스크 판매 같은 획기적 아이디어를 내 성공적 방역으로의 대반전을 이뤄냈다.


대대적이고 신속하고 투명한 검사는 정부가 주도한 것이지만 의도가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정부가 초기 방역 실패의 책임을 신천지에 뒤집어씌우려고 마녀사냥하듯 방역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측면이 있다. 그마저도 정부의 의지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민간 기업들이 메르스 사태 이후 조성된 새로운 기반 위에서 개발해 공급한 신속검사키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의료 공백 사태를 막아 치사율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역대 정부가 가꿔온 효율적인 건강보험 제도 덕분이다.

 

한국의 성공적 방역 이후 문 대통령과 외국 정상이 통화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국민과 나라를 대표해 통화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말 잘한 게 있는 정부는 공을 국민에게 돌린다. 대개 숟가락만 얹은 정부가 국민의 공을 가로채려 하고, 적폐몰이를 일삼는 정부가 과거 정부의 공까지 제 것으로 만든다.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우며 매년 슈퍼 적자예산을 편성해 국가를 빚더미에 앉히고도 성장률을 사실상 1%대로 떨어뜨렸다. 이벤트뿐인 비핵화 협상 뒤에서 북한 김정은은 핵무기 개발과 단거리미사일 시험을 계속해 한반도를 더 위험에 빠뜨렸다. 조국 씨의 장관 임명 강행으로 국민을 우롱하더니 임명을 철회한 후에도 ‘마음의 빚’ 운운하며 다시 우롱하고 있다. 공수처법 관철을 위해 해괴한 선거법을 통과시켜 아이들 앞에 설명하기도 창피한 선거를 치르게 한다. 경제도 안보도 정치도 제대로 못하면서 방역만 잘하는 그런 정부는 없다.

 

04-22  보수, 자학 아닌 반성을 해야 

41% 득표 정당 해체 주장은 무리… ‘숨은 보수표 없다’ 주장도 거짓
섣부른 자학은 냉정한 반성 아냐

 통합당, 계파 공존에서 길 찾아야 중도로의 확장과 대선 전망 있다

 

반성도 불필요하게 자학하는 것이 되면 생산적인 반성이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의 득표율이 20%나 30%에 그쳤다면 주류 정당으로서는 생명이 끝난 것이니 해체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구 의석수에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득표율은 41.4%에 이르렀다. 비례정당 투표에서도 더불어민주당 계열 두 비례정당의 득표를 합산한 것과 5%포인트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물론 41.4%의 득표는 아깝게 지기에 딱 좋은 수치다. 그래서 지역구에서 대패했다. 그러나 아깝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지는 게 뻔한데도 ‘정신 승리’만 외친 것은 아니다. 총선 전 전망은 코로나19 위기가 문재인 정부의 온갖 실정을 뒤덮으면서 잘하면 통합당이 민주당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였다. 다만 한선교의 어처구니없는 비례대표 공천부터 왜 했는지 알 수 없는 세월호 막말과 그 대처까지 최악의 선거 관리가 이어지면서 접전 지역이 대부분 민주당 쪽으로 넘어간 것이 대패의 원인일 것이다.


숨은 보수표가 없었다는 것도 자학적인 분석이다. 이번 총선은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이 매주 실시하는 정당 지지도 조사가 실제와 얼마나 불일치하는지 보여주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했다. 여론조사에서 지난 3년간 통합당의 지지도는 20% 전후에 머물렀지만 이번 투표에서 40%를 넘겼다. 숨은 보수표가 있었지만 이기지 못한 것일 뿐 여론조사에 반영되지 않은 숨은 보수표는 상당히 컸다.


한 번 하고 마는 선거라면 20%로 지든 30%로 지든 40%로 지든 마찬가지다. 졌다는 사실을 통렬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거는 한 번 하고 마는 게 아니다. 5 대 4로 진 경기를 5 대 1로 진 것처럼 자학해서는 다음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실효적 분석을 하지 못한다. 불필요한 정도로 자학해서 오버슈팅(overshooting)하면 또 지게 된다.


통합당은 황교안과 김종인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으로 총선을 치렀다. 서로 욕할 것 없다. 김종인을 불러들인 황교안이나 황교안이 부른다고 온 김종인이나 똑같다. 황교안은 사퇴의 변으로 ‘화학적 결합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 황교안이 유승민과도 화학적 결합을 못 했는데, 김종인과 화학적 결합을 할 리가 없다. 한배를 탔던 이상 황교안 유승민 김종인 모두 누가 더 책임이 있냐고 따지는 것이야말로 품위 없는 짓이다.

 

한쪽에서는 통합당이 꼰대당 체질을 벗지 못해 졌다고 비판하고, 한쪽에서는 통합당이 정체성을 훼손하다가 졌다고 비판한다. 진실은 꼰대당 체질을 벗으려 노력했으나 어설픈 중도 흉내로 끝났다는 데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김종인의 중도 성향이 탐난다 할지라도 일단은 김무성·유승민계와의 화합적 결합이 중요하고, 그런 결합이 이뤄진 상황에서 더 큰 확장을 모색해야 한다.

 

보수정당의 약점이 계파정치를 할 만한 도량이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친이계가 친박계를 박해하는 바람에 친박계가 탈당해 친박연대를 만들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친박계가 김무성·유승민계를 박해하는 바람에 김무성·유승민계가 탈당했다가 김무성계가 먼저 돌아오고 유승민계가 총선을 앞두고서야 뒤늦게 돌아왔다. 이 정도 경험이 쌓이며 불행을 겪었으면 서로 공존하는 정치를 모색할 때도 됐다.


이번 총선에서는 충청 지역의 정진석과 김태흠의 저력이 돋보였다. 인천의 윤상현은 또다시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구에서 김부겸을 이긴 주호영, 부산에서 김영춘을 이긴 서병수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험지에 차출돼 아깝게 패배한 사람 중에서 오세훈 같은 이는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대우해야 한다. 유승민 홍준표는 출마나 당락 여부와 관련 없이 늘 보수정당의 인재다. 5060세대가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주장도 3040세대 정치인이 해야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들이 중심이 돼 계파와 세대를 뛰어넘는 정치를 해 보인다면 통합당의 미래가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황교안이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나간 것은 패배 뒷면의 수확이다. 선거 결과가 어정쩡해서 남아 있었다면 정말 골치 아플 뻔했다. 아직도 남긴 했지만 비호감 의원들이 대거 공천과 선거에서 탈락한 것도 생각해 보면 나쁠 게 없다. 통합당이 살아나려면 빨리 대선의 깃발을 들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겸손하게 찾아보면 그런 인물이 없지도 않다.

 

05-06  정치의 실패, 정치학의 실패 

총선 民心의 부정확한 분석… 또 다른 정치 실패 낳을 우려
민주당 너무 의기양양하게 해도, 통합당 너무 의기소침하게 해도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 안돼

최근 4·15총선 결과를 분석하는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어느 분의 질문이 날카로웠다. 세미나 발표자들은 정치학자들이었는데 그는 “정치학자들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위성비례정당이 만들어질 줄 몰랐는가”라고 물었다.


경고는 있었다. 지난해 8월 한국정당학회 토론회에서 영남대 정준표 교수가 알바니아 사례를 거론하면서 위성비례정당 등장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보다 앞서 2018년 11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선거제도 개혁 관련 공청회’에서 경북대 강우진 교수가 비슷한 경고를 보냈다. 다만 대학총장까지 지낸 그 질문자조차도 정치학계가 미리 경고하지 못했다고 느낄 정도로 경고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정치적 의제를 공론화할 적합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정치학자들일 터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위성비례정당을 경고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미 물 건너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계속 거론하며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폐쇄적 양당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것이라는 찬사로 일관했다. 어떤 이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비판했지만 많은 비판 내용 중에 단 하나 위성비례정당에 대한 경고만 없었다. 어떤 이는 아예 이 주제를 무시했다.


위성비례정당의 등장은 굳이 알바니아 사례를 알아야 경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당의 생리를 안다면 전문가든 아니든 웬만하면 다 생각할 수 있다. 필명을 날리는 정치학자들이 새 제도의 허점을 지적하기는커녕 문제가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니 한마디로 학문의 실패다. 총선에서 봤듯이 정치의 실패로 이어진 학문의 실패다.


한 정치학자는 총선 직후에 쓴 칼럼에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난 3년간 보수정파에 대한 지지율은 20% 전후에 머물러 있었지만 있지도 않은 숨은 보수를 만들어내며 촛불 집회 이후의 변화된 현실을 부정했던 결과가 오늘날 이런 선거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자답지 못한 안이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총선 직전의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의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은 각각 29.5%와 23%였다. 총선 직후의 조사에서는 각각 27.7%와 22%였다. 실제 투표에서 통합당은 41.4%를 득표했다. 여론조사 회사 측은 정당지지도 조사는 전 유권자를 모집단으로 하고, 득표율은 투표한 유권자만 모집단으로 하기 때문에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통합당은 41.4%를 득표했지만 투표율은 66.2%에 그치므로 곱하면 얼추 27%의 지지도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더불어민주당은 49.9%를 득표했으므로 33%의 지지도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총선 전후 그 지지도는 50%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다. 문제는 민주당의 지지도는 실제 득표와 비슷한데 통합당만 15∼20%포인트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회사들은 지금도 정당지지도 조사를 계속 발표한다. 가짜 뉴스는 가짜 뉴스로 끝나지만 가짜 여론조사는 그것을 인용한 수많은 가짜 분석을 생산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정치 분석의 중요한 기초 자료다. 정치학자라면 가짜 여론조사를 인용해 가짜 분석이나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일본의 정치 여론조사는 어떻게 무려 40∼60%의 높은 응답률을 끌어내는지 알아내서 고작 5∼10% 수준인 한국 정치 여론조사의 낮은 응답률을 제고하는 데 기여할 생각부터 해야 한다.


4·15총선은 코로나19라는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변수로 인해 문재인 정권 3년에 대한 중간평가가 되지 못했다. 민주당을 필요 이상으로 의기양양하게 하는 것도, 통합당을 필요 이상으로 의기소침하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당이 총선 압승을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긍정 평가로 여겨 유턴하지 않고 직진하면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저하다 초기 방역에 실패한 것처럼 경제와 안보의 파탄을 피할 수 없다. 통합당이 총선 참패를 정권 견제에 대한 부정 평가로만 여겨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 반대와 찬성을 오간 ‘샤워실의 바보’ 같은 짓을 계속하면 정권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

 

민주당의 오버슈팅도 통합당의 오버슈팅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니 정치학자들의 오버슈팅이야말로 바람직하지 않다. 정확한 자료에 의해 민심의 분량을 정확히 계산해주는 것이 향후 또 다른 정치의 실패를 막기 위한 정치학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05-20  금기의 뒷면에서 군림한 윤미향 

감시 체제 느슨한 금기의 뒷면… 배임 횡령 유혹 작동하기 쉬워
위안부 할머니 향한 협박은 자신이 피해자 결정한다는 무도함
대리인이 주인 행세 말아야

독일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책 ‘토템과 터부’에는 터부(taboo)의 뜻을 설명하는 친절한 부분이 나온다. 터부는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뜻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성한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섬뜩하고 불결한 것을 의미한다. 터부는 본래 태평양 폴리네시아인의 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평범한 것을 뜻하는 노아(noa)라고 한다. 터부는 신성한 쪽으로든, 섬뜩하고 불결한 쪽으로든 특별한 것이다.


터부가 가진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뜻은 실은 내적으로는 긴밀히 연결돼 있다. 죽음이나 정조의 상실은 섬뜩하고 불결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우리나 우리의 가족을 대신해서 섬뜩해지고 더럽혀졌다면 그 존재는 신성하다. 우리가 그 존재의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나 우리의 가족이 죽거나 정조를 상실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우리 시대의 터부다.


터부는 금지와 연결돼 있다. 그래서 금기(禁忌)라고 한다. 행동으로든 말로든 터부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금지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루는 어려움은 여기서 비롯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학문적인 실증정신으로만 혹은 엄격한 법률 개념으로만 다루려는 시도가 반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가 일종의 제의(祭儀)적 차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윤미향 사태는 금기의 뒷면에서 금기를 다루는 자들의 충격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위안부 피해자를 돕기 위한 정부의 보조금, 기업의 후원금, 시민들의 기부금이 쏟아지지만 금기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금기의 그늘에서 감시 체제가 느슨해지고 배임과 횡령의 유혹이 작동하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윤미향이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에게 한 협박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는 “약 30년 전 이용수 할머니가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로 떨면서 ‘저는 피해자가 아니고요. 제 친구가요…’라고 하던 그때의 상황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라는 글을 최근 페이스북에 올렸다. 위안부 피해자가 있고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고 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자신이야말로 누가 위안부 피해자이고 누가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이용수 할머니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윤미향의 협박은 한 할머니에 대한 협박 이상이다. 누가 위안부 피해자이고 누가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지 그 경계선이 확정돼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암시를 던진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가진 일관성에 간혹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그 후신인 정의기억연대가 그 문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오래전 기억이 정확할 수도 없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면이 있다. 그런 점을 이용해 그들은 할머니들 위에 군림하는 힘을 갖게 됐을 수 있다.

 

이용수 할머니 이전에 심미자 할머니가 있었다. 심 할머니는 16년 전 정대협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대협이 정해 ‘기억의 터’ 조형물에 새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47명의 명단에 들지 못했다. 심 할머니는 가해자인 일본의 최고재판소로부터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임을 인정받은 피해자인데도 그랬다. 신이 있어서 신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전이 있어서 신이 있다는 말이 있다. 정대협과 정의연은 말하자면 신전을 운영하는 사제들이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윤미향 비판은 정의연이 더 이상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편해졌다는 뜻이다. 할머니들을 이용해 먹지만 말고 실질적 도움을 달라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기부금이 자신들을 돕기보다 교육과 홍보에 더 많이 쓰이는 것도 불만이지만 기부받은 돈으로 맨날 교육하고 홍보한다고 하는데 정말 빼돌리지 않고 교육이나 홍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금기의 자리에 앉혀 놓고 이용하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 할머니들을 일상의 자리로 내려오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생존하신 분들도 연세가 많다. 살아서 금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일본으로부터 보상을 받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심리다. 일본의 보상 문제에 정의연이 대리인 주제에 주인 행세 하며 더 이상 끼어들어선 안 된다. 
 

06-03  김종인이라는 포퓰리스트 

박사학위 주제는 분배와 재분배, 경제수석 때도 성장에는 무관심
평생 나랏돈 쓰는 것만 궁리… 퍼주기 경쟁 무책임할수록 유리
김종인식 처방 이미 효과 떨어져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한국외국어대 독일어학과를 나와 서독 뮌스터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재정학 분야의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지도교수는 소련 경제 전문가였고 그의 권고로 중국 경제에 대해 써보려고 준비하다가 뜻하지 않게 바꾼 주제가 ‘개발도상국가에 있어서의 분배와 재분배’다. 철학이나 신학이면 몰라도 1960년대에 경제학을 공부한다면 미국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그는 유학에서 돌아와 서강대에서 가르쳤다. 교수 시절인 1980년에 그가 낸 유일한 학술적 저서인 ‘재정학’을 읽어보면 유학까지 가서 공부해 쓸 내용인가 싶을 정도로 평이하다. 가인(街人) 김병로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뛰어난 학재(學才)는 보이지 않으니 당시 집안에서 기획 유학을 보내 교수로 만든 케이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최근 낸 회고록에서 처삼촌이 되는 박정희 시절 비서실장 김정렴 씨를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내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지도 않아 선배도 없고 경제학도 생소한 곳에서 배운 그를 청와대의 처삼촌이 아니면 누가 찾아줬을까. 그는 유신 시절 정부 프로젝트에 여러 차례 초청받아 참여하고, 전두환 집권 과정에서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재무분과위원으로 활동한 끝에 두 차례나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돼 1987년 민주화를 맞는다.


그는 유학을 떠나기 전 24세의 나이에 정치인 가인의 비서를 맡으면서 정치에 일찍 눈을 뜰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전두환 시절 민정당 전국구 의원 2차례, 노태우 시절 경제수석을 거쳐 다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지내면서 경제 분야의 정치기획가로서 경험을 쌓게 됐다. 공부보다는 정치가 적성에 맞은 듯하다.

 

군사정권 시절의 여당 정치인인 데다 1994년 민자당 전국구 의원 당시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사라지는가 했던 그가 존재감을 지니고 다시 불려나온 것은 정계가 2011년 무상급식을 시발로 퍼주기 경쟁에 돌입한 이후다. 그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박근혜 쪽으로, 2016년 총선에서는 문재인 쪽으로 불려 다녔다.


1987년 헌법에 그가 넣었다는 경제민주화의 개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서양에서 경제민주주의라고 하면 노동자자주관리나 노사공동결정을 의미한다. 그런 건 아니란다. 알쏭달쏭한 경제민주화 덕분에 그가 이쪽저쪽 불려 다녔지만 실제 한 일은 박근혜 쪽에서는 노인들에게 월 20만 원을 지급하는 공약을 만들고, 나중에 문재인 쪽으로 가서는 한술 더 떠 노인들에게 월 30만 원을 지급하는 공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개발이 중요한 노태우 시대에 경제수석을 지낸 사람인데도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재정학자가 대체로 성장에는 문외한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재정학자라면 최소한 세입과 세출의 균형에는 관심을 가진다. 그는 세입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돈을 쓰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가 다시 보수 정당 쪽으로 불려왔다. 그의 전략은 늘 그렇듯이 상대편보다 더 많이 지르는 것이다. 4·15총선을 앞두고 긴급재난지원금의 지급 범위를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조차 70%로 정한 것을 100%로 바꿔버린 것이 그다. 그러나 통합당은 표를 얻지 못하고 그 제안을 잽싸게 낚아챈 민주당이 공을 독차지했다. 김종인식 처방에 내성이 생겨 그 약효가 다해 가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퍼주기 경쟁은 더 무책임한 쪽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보수정당은 이 게임에서 질 수밖에 없다. 그는 앞으로 청년 기본소득을 도입할 뜻을 밝혔다. 보수정당이 얼마를 주든 민주당은 그 이상을 줄 준비가 돼 있다. 기본소득 등 온갖 공상적 아이디어가 민주당 쪽에 판친다. 보수정당이 그중 하나를 받으면 민주당은 죄의식마저 털고 더 얹어서 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20년 집권 혹은 100년 집권의 묘책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묘책이다.

보수정당은 ‘누가 더 많이 퍼주나’의 게임을 ‘누가 더 많은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나’의 게임으로 바꿀 때만 승리의 기회가 온다. 그러나 평생 나랏돈 버는 궁리는 없이 나랏돈 쓰는 궁리만 해온 80대 노인은 자기편이 이길 수 있는 게임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편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겠다고 덤비고 있다. 보수정당마저 상대편보다 더 많이 퍼줘 선거에서 이기려다 망한 나라들이 더 이상 남 일 같지 않다.  

 

06-17  민주당, 박영선 법사위원장 시절 몽니 기억하나

민주당 야당이던 18, 19대 국회… 법사위원장 몽니 가장 심해
박영선 위원장 때가 절정, 이제와 야당 몫 가져간 파렴치
新독재의 그림자 어른거린다

국회 역사상 가장 몽니를 많이 부린 법제사법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박영선 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아닐까 싶다.

2014년 새해 벽두에 이런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박 당시 위원장이 2013년 말 여야 지도부가 처리하기로 합의한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이 법만큼은 내 손으로 상정할 수 없다”면서 심야까지 버티는 바람에 새해 예산안이 연말까지도 처리되지 못하고 새해로 넘어왔다는 내용이다. 당시 같은 당의 정세균 전 대표, 김진표 박지원 전 원내대표, 김한길 당시 대표까지 나서 그를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듣지 못한 황당한 일이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통상 법사위원장은 법안의 체계·자구 심사권을 가지고 시비를 건다. 국회법은 ‘각 위원회에서 심사를 마친 모든 법률안은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에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모든 법안은 법사위를 거쳐야만 본회의로 올라갈 수 있다. 이 규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규정은 이미 2대 국회 때부터 있었다. 법률안의 위헌성과 다른 법률과의 충돌 여부 등을 심사함으로써 법률의 합헌성, 체계정당성, 조화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그 취지다.


박 당시 위원장의 몽니는 체계·자구 심사권과도 관련이 없었다. 사실 그는 비(非)법조인 출신이어서 체계·자구를 심사할 능력도 부족했다. 단지 자신의 소신에 맞지 않는다고 아예 상정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어느 자리인지도 모르고 떼쓰는 아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13대 국회 때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이 되면서 여당이 독식하던 상임위원장 자리를 야당이 나눠 갖고, 15대 국회 후반부터 법사위원장 자리가 야당 몫으로 넘어가면서 법사위의 월권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의 민주당 쪽이 야당이던 18대와 19대 국회에서부터다.

18대 국회에서 미래통합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154석을 차지했다. 당시는 국회선진화법이 만들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과반 의석을 가진 정당은 현 21대 국회에서 180석을 가진 정당과 똑같은 힘을 가졌다. 거기에 다른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를 합하면 의석이 184석에 이르러 세력이 지금의 범여권 못지않았다. 이때부터 법사위원장을 맡은 민주당의 몽니가 심해졌다. 19대 국회에서는 국회선진화법까지 이용하면서 월권의 강도가 정점으로 치달았다.

 

18대 국회 후반기 법사위원장은 우윤근 의원이 맡고 박영선 의원이 같은 당 간사를 했다. 2010년 소관 상임위인 외교통일위원회를 통과한 북한인권법안의 법사위 상정이 민주당 쪽 반대로 1년 넘게 저지되다가 여야 대표 합의로 간신히 상정돼 통과됐다.

19대 국회 전반기 박영선 위원장 때와 19대 국회 후반기 이상민 위원장 때는 ‘해외 파병에 대한 일반사항에 대한 법률’이 2012년 소관 상임위인 국방위원회를 통과했으나 법사위에서 4년 내내 단 한 번의 체계·자구 심사도 하지 않아 아예 폐기되는 일도 벌어졌다. 체계·자구 심사를 핑계로 법안을 일시적으로 지연 또는 보류시키는 정도를 넘어 그 기간을 국회 임기가 끝날 때까지 늘려 폐기시킨 것으로, 있어도 없는 것만 못한 법사위로 만들어버렸다.

과거 국회에서 법사위원장 자리를 이용해 몽니를 부릴 대로 부린 민주당이 21대 국회에서 법사위원장을 야당 몫으로 돌려온 관행을 깨고 결국 법사위원장 자리까지 가져갔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개인으로 보면 양심이 없는 짓이고 조직 간의 관계로 보면 신사협정을 깬 것이다.

법사위원장을 야당이 맡는 국회의 관행이 폐해가 있다 하더라도 여야의 합의로 만든 이상 그것을 바꿀 때도 여야의 합의로 바꿔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우후죽순 신(新)독재가 확산되는 가운데 새삼 강조되는 민주주의 정신이 권력의 절제된 사용이다. 18대와 19대 국회에서 통합당 쪽은 민주당 쪽으로부터 법사위원장 자리를 뺏을 수도 있었지만 뺏지 않았다. 소수파일 때는 관행의 혜택을 최대한으로까지 누리고 다수파가 돼서는 이런 관행을 싹 무시하고 소수파를 짓밟는 태도는 볼셰비키 등 레닌주의 정당에서 익히 보던 수법이다. 민주당의 김태년스러움이 몰고 올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

 

07-01  수사심의위 시민들이 검사보다 옳다 

문재인 정부서 도입된 수사심의위
기소 과정에 시민전문가 참여시켜 불필요한 시비 벗어나자는 것
삼성 합병 불기소 권고 존중이 향후 수사심의위 활성화의 관건

 법원은 2008년 국민참여재판이란 이름으로 형사사건에 재판배심을 도입했다. 우리나라의 형사배심결정은 영미권에서와는 달리 권고적 효력을 가질 뿐이지만 판사들은 그 권고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강제하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 없다는 미묘한 효력에 힘입어 재판배심은 대륙법계인 우리나라에서도 큰 무리 없이 정착되고 있다.

재판 이전에 기소 여부가 재판 이상으로 피의자의 이해를 좌우한다. 법원의 재판배심 도입에 맞춰 검찰도 기소배심을 도입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2018년에 와서야 수사심의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기소배심에 접근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검찰의 편의(便宜)적 불기소는 법원에 하는 재정신청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나 검찰의 편의적 기소를 통제하는 장치는 수사심의위에 의해 처음으로 마련됐다.

법원의 판결마저도 정치적 시비에 휘말리는 세상이다. 나는 이를 정치적 감수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보며 굳이 부정적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적 시비에서 벗어날 대안을 찾지 않으면 사법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그 대안이 형사배심제도를 확대해 시민을 재판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검찰의 기소나 불기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훨씬 오래전부터 숱한 시비가 일었다. 2년 전 수사심의위의 도입은 오히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느낌이다.


진정한 검찰개혁은 공수처 같은 제2의 검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사심의위 같은 제도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경찰이 검경수사권 조정에 앞서 경찰 수사개혁 방안으로 제시한 것 중에는 수사배심제가 들어 있다. 권은희 의원의 공수처법안은 백혜련 안에 밀려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공수처의 기소 여부를 심사하는 기소심의위를 두고 있다. 재판만이 아니라 기소에도 시민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최근 8번째 수사심의위가 소집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대한 검찰 수사의 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했다. 합병 과정이란 게 워낙 복잡해서 그 과정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친여적 시민단체가 문제를 제기하면 검찰이 수사를 하고 그 수사 내용을 친여적 매체가 피의사실 유포에 가까울 정도로 보도하는 방식으로 불법이 있는 듯한 예단을 조성한다는 인상은 받았다. 검찰과 삼성 측의 견해를 고루 듣고 내린 수사심의위의 결정은 그 예단이 틀렸다는 것이다.

 

여권에서 즉각 수사심의위 결정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왔다. 박주민 의원과 박용진 의원은 다짜고짜 “검찰이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리도 없다. 재벌이니까 불기소는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다. 노웅래 의원은 “수사심의위의 첫 번째 수혜자가 이재용 부회장이 돼선 안 된다”고 했다. 팩트도 틀렸다. 앞서 7번의 수사심의위에서 불기소 권고로 무혐의 처분 혜택을 받은 피의자들이 있다. 홍익표 의원은 수사심의위 명단이 공개되지 않는 걸 문제 삼았다. 트집이다. 수사심의위 명단이 공개되고 신상털이가 일어날 우려가 생기면 공정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으면 부실 수사의 책임을 지워 윤석열 검찰총장을 몰아내겠다는 이상한 방향으로까지 몰고 가고 있다.


수사심의위는 문재인 정부에서 도입된 것이다. 2018년 당시 박상기 법무장관이 문 대통령에게 검찰개혁의 한 방안으로 보고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시행했다. 여당도 입만 열면 검찰이 민주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지금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소하면 이쪽에서 매도당하고 불기소하면 저쪽에서 매도당할 바에야 차라리 시민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구를 만들어 판단을 맡겨 보자고 도입한 것이 수사심의위다. 여당의 반발에 굴복해 검찰이 기소한다면 그거야말로 수사심의위 도입의 취지를 정면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수사심의위 결정은 권고적 효력밖에 없다. 하지만 결정이 내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한다. 검찰이 수사심의위의 불기소 권고에도 불구하고 기소를 강행하려면 유죄를 받아낼 더 높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법원의 판단을 한번 받아보겠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무려 1년 7개월이나 수사했으니 면피성 기소라도 해야겠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이다. 1년 7개월 수사를 하고도 접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시민을 존중하는 태도다.

 

07-15  자살을 속죄로 보는 죽음의 문화 

자살은 속죄 아닌 범죄, 죽는 게 용기 아니라
죄 지었으면 수치당하고 죗값 치르는 것이 용기
죽음의 문화 부추겨선 안돼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은 인성(人性)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아홉 구비로 이뤄져 있다. 처음 다섯 구비는 애욕 탐욕 분노 등 무절제에서 비롯된 죄를 다룬다. 성추행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상층 지옥을 형성하는 이 다섯 구비를 돌아내려 가면 더 심각한 죄를 다루는 하층 지옥이 나온다. 7번째 구비는 폭력이다. 폭력에는 남에 대한 폭력과 자기에 대한 폭력이 있다. 단테는 남을 살해하는 죄와 자신을 살해하는 죄를 똑같이 7번째 지옥에 할당했다.

형법의 태도가 단테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 형법은 살인의 죄라는 항목에서 살인과 자살을 동시에 다룬다. 방조(幇助)는 돕는다는 뜻이다. 방조죄가 성립하려면 도움받는 행위가 범죄여야 한다. 즉 살인방조죄가 성립하려면 살인이 먼저 범죄여야 한다. 자살죄는 없다. 자살한 사람이 죽어버려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방조죄는 있다. 자살은 처벌할 수는 없지만 범죄라는 사고를 보여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까지 범죄 혐의를 받던 저명 정치인의 자살이 사회에 끼치는 가장 심각한 폐해는 자살을 속죄(贖罪)로 보는 인식을 조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살은 속죄가 아니라 범죄다. 다만 처벌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원천적인 ‘공소권 없음’의 범죄일 뿐이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누명을 벗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벗어날 길이 없자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대개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장문의 유서를 남긴다. 이런 자살도 옳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억울하면 자살까지 했겠는가 하는 동정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시장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자살이 오히려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부인 권양숙 씨가 100만 달러, 딸이 40만 달러, 아들과 조카사위가 500만 달러를 받은 경위에 대해 수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 박 전 시장은 전 비서가 성추행 혐의로 그를 고소해 경찰 수사가 이뤄진 바로 다음 날 자살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고 했다. 박 전 시장은 유서에서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던 노회찬 전 국회의원은 “어리석은 선택이었고 부끄러운 판단이었다”며 “죄송하다”고 유서에 적었다. 노 전 대통령과 박 전 시장은 둘 다 혐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부인도 시인도 아닌 회피다. 그렇다고 노 전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이나 박 전 시장보다 더 솔직했다느니 하는 식의 평가를 하고 싶지 않다. 자살 자체가 나쁜 것인데 더 솔직했느니 덜 솔직했느니 하는 것은 의미 없는 구별이다.
 

CCTV에 잡힌 박 전 시장의 마지막 모습은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죽으러 가는 사람이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저리 서둘러 걸어가는가 안타까웠다. 택시를 타고 와룡공원에서 내린 뒤 숙정문으로 올라가는 길이나 혹은 숙정문에서 삼청공원으로 내려오는 길 어디선가 어두운 숲속으로 내려설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내가 그 숲속에 들어서는 양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살은 용기 있는 태도도 아니고 인간적인 태도도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살아서 그 죄에 합당한 수치를 당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이 진짜 용기 있는 태도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큰 수치를 당했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고 수감돼 죗값을 치르고 있다. 죄를 인정할 수 없다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면서 법적 투쟁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부엉이바위 위에 선 노 전 대통령보다는 “우리가 받은 돈은 너희들의 10분의 1도 안 된다”고 항변하던 노 전 대통령이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자살을 속죄로 보는 것은 죽음의 문화다. 명확히 잘못했다고 말하지도 않고 자살해버린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감옥에 갇혀 죗값을 치르는 사람보다 더 추앙받는 분위기는 죽음의 문화에 속한다. 죽음의 문화를 부추긴 자가 생각하듯이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인 것이 아니다. 삶은 자연의 전부이고 삶의 부재(不在)가 죽음일 뿐이다.

 

07-29  책임윤리 심정윤리, 그리고 사악함

문재인 정권과 친여세력의 당파성, 심정윤리에 휘둘려온 한국 정치
책임윤리로 가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사악한 당파적 정치로 퇴행
정상국가가 서서히 파괴되고 있다

1919년 독일에서 대학자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유명한 뮌헨대 강연을 통해 심정윤리(Gesinnungsethik)와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를 구별했다. 심정윤리는 사람의 의도만을 따져 윤리적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책임윤리는 의도치 않은 결과의 발생까지 고려해서 의도한 결과를 이루려 할 때 윤리적이라고 판단한다.


베버는 카를 마르크스가 창시자 중 하나인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까운 지식인이었다. 베버의 강연은 2년 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SPD에서 갈라져 나와 독일공산당(KPD)을 조직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죽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는 로자가 심정윤리로는 윤리적이었지만 책임윤리로는 윤리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베버의 심정윤리와 책임윤리의 구별은 SPD의 급진화를 막고 책임정당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베버가 강연을 하던 해 한국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는 출범 때부터 신채호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심정윤리적 공격에 시달려 해체 위기까지 갔다. 임시정부 말기 좌우합작 시기에는 무정부주의적 의열단원으로 시작해 저우언라이 등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세력화한 김원봉의 권력 찬탈 시도를 견제해야 했다.


이들에 맞서 임시정부의 명맥을 이어간 책임윤리의 계보는 이승만-안창호-김구였다. 해방정국에서 김구는 1948년 초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하의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불가피하다고 여길 정도로 현실적인 사고를 견지했다. 그러다 돌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어쨌든 그는 죽더라도 38선을 베고 죽겠다고 나옴으로써 김일성에게 이용당하고 자신의 정치적 몰락을 재촉했다.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부르지 않는 건 자유다. 그러나 국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승만일 수밖에 없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유라시아를 덮은 붉은 물결 끝자락에 보일 듯 말 듯 남은 작고 푸른 점은 없었다. 이승만을 국부로 삼기 싫다면 그냥 국부는 없는 것이다. 이승만 대신 김구를 국부로 삼는다는 것은 정(正)이 될 수 없는 반(反)을, 정과의 통합을 통해 합(合)으로만 간직될 수 있는 반을 정이라고 부르는 빈약한 논리이고 역사인식이다.

 

우리가 심정윤리적 정치인들에게 갖는 감정은 안타까움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여전히 김구를 존경한다. 독일에서 로자의 인기는 높다. 그것은 역사에서 심정윤리적으로 행동하다가 불가피한 패배를 당한 사람을 향한 배려와 같은 것이다. 베버는 로자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려 했지만 그 전에 레닌 같은 음모적이고 당파적인 공산주의자로부터 로자를 구별했다. 김구에 대한 존경은 김구였다면 더 성공한 역사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분단이라는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진행에 대한 아쉬움을 그를 통해 표현하면서 미래를 향해 더 큰 분발을 다짐하고 촉구하는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으로 역사를 배운 ‘86 운동권’ 정치인들은 사실 김구를 국부로 여기지도 않는다. 심정윤리의 영웅을 내세우는 것은 음모적이고 당파적인 정치인들의 흔한 수법이다. 주사파는 김일성이라는 볼드모트의 이름을 댈 수 없으니 그 대용으로 김구를 둘러대는 것이고 주사파임을 부인하는 자는 여운형이든 박헌영이든 김구이든, 이승만만 아니면 누구든 상관없는 것이다.


심정윤리든 책임윤리든 둘 다 윤리적 동기가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반대편에 당파성이 자리 잡고 있다. 윤리는 공정에 바탕을 둔다. 당파성은 공정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적 보편성을 무시한다. 조국 박원순 사태가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울산시장 선거공작 수사에 이어 윤미향 정의연 수사도 흐지부지되고 있다. 내로남불은 가십의 용어가 아니라 이 정권의 본질을 표현하는 용어가 되고 있다. 정치가 심정윤리에서 책임윤리로 발전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사악한 당파성으로 퇴행하고 있다.

 

앞으로는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신계급이 탄생할 것이다. 반대로 정권의 반대자는 사소한 트집을 잡혀 이미 감옥에 가고 있다. 곧 출범할 공수처는 레닌의 체카(KGB의 전신)가 될 것이다. 추미애는 정상적인 형사사법 체계를 파괴하면서 그 길을 예비하고 있다. 이것이 검찰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전말이다.  

 

 08-12  조국과 서울대의 비양심

조국 박사논문 표절 여부, 7년 전 조사 거부했던 서울대
이번엔 연구부정행위로 결론… 단, 부정사례 카운트하지 않고
대충 경미한 위반으로 빠져나와, 박정훈 위원장 바꿔 재심해야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가 조국 로스쿨 교수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 ‘연구부정행위’가 있었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위반의 정도는 경미하다’고 했다.

이에 대한 논평을 잠시 망설인 이유는 조 씨가 언론 보도에 잇달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고 있어서가 아니라 혁명 수준으로 진행되는 형사사법 체계의 파괴, 수습 불가 상태로 가고 있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 같은 큰 현안을 놔두고 곁가지로 빠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럼에도 조 씨의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해온 사람 중 하나로서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위원회 결정은 2013년 결정보다는 진전된 것이다. 당시 이준구 경제학과 교수가 위원장으로 있을 때는 “제보 내용이 진실하지 않다”며 보지도 않고 기각해버렸다. 조 씨의 연구부정행위를 알아내기 위해 거창한 조사까지 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연구부정행위를 인정받기까지 7년이 걸렸다. 조국 사태가 없었다면 이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울대 연구윤리지침은 표절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연구부적절행위와 연구부정행위라는 말을 사용한다. 연구부적절행위는 ‘연구상 중대하지 않은 과실’을, 연구부정행위는 ‘고의나 연구상 중대한 과실’을 의미한다고 돼 있다. 조 씨의 표절은 연구부정행위인데도 경미하다는 것이다. 요령부득이다.


위원회는 조 씨의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은 127군데에서 인용표시 없는 인용이 있었다고 밝혔으나 박사학위 논문은 몇 군데서 그런 인용이 있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건성으로 조사했음이 드러난다. 조 씨 논문에는 마이클 잰더라는 학자의 글이 10군데나 인용표시 없이 인용돼 있는데 이런 사례들이 통째로 빠졌다. 부정행위가 인정된 7편의 논문에 대해서도 인용표시 없는 인용이 몇 군데씩 누락돼 있다.

위원회는 연구부정행위가 대부분 타인 저술이나 외국 판례의 요약정리와 관련돼 있으며 연구의 주요 결과에 미치는 정도가 미미하다고 봤다. 위원회는 인문·사회과학 논문에서 독자적인 요약정리의 중요성과 조 씨의 요약정리 차용이 지닌 비양심적 맥락에 눈을 감았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책은 영어로 쓰여 있지만 단어는 평이해도 그가 쓰는 특유한 의미가 있어 해독이 어려운 영어다. 그래서 벤담은 벤담 전공자가 아닌 한 벤담 전공자가 요약정리한 책으로 읽고 인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굳이 벤담을 직접 읽고 인용한 것처럼 쓴 것은 비영어권 박사과정 학생이 영어로의 요약정리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벤담에 대한 기초적인 감조차 잡지 못한 상태에서 거짓을 시도한 것이다.

조 씨는 논문에서 독일어 논문을 12편 인용하는데 9편이 페이지 수 표시 없이 통째로 인용돼 있다. 그는 영어 논문을 인용할 때는 빠짐없이 페이지 수를 써준다. 독일어 논문을 실제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자체가 인용표시 없는 인용을 넘어서는 심각한 부정행위다. 그의 논문 속에 어처구니없는 독일어 표기 실수가 너무나 많은 것은 독일어를 읽는 능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실력으로 독일어 판례는 당연히 읽지 못했을 것이며 그러니 다른 학자가 영어로 정리해놓은 요약을 자신이 직접 독일어 판례를 읽은 것처럼 갖다 쓴 것이다.

이런 논문이 어떻게 미국에서도 일류로 통하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의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 취재해봤더니 조 씨의 지도교수이자 박사학위 논문 심사위원장이 필립 존슨 교수였다.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는 그가 지적 디자인(Intellectual Design) 운동의 창시자 중 하나로 사이비과학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쓰여 있다. 로스쿨 교수가 관심이 딴 데 가 있는 정도를 넘어 학문적 사이비로 빠졌던 것이다.

조 씨는 지난해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끝내자마자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리라는 예상 속에서도 서울대에 복직 신청을 했다. 서울대 법학 교수는 장관 자리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만큼의 학자적 양심이 있는지 의문이다. 이번 연구진실성위원회 위원장은 박정훈 서울대 로스쿨 교수였다. 그는 현 정부에서 경찰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재심 청구가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에 위원장을 바꿔 재심할 것을 권한다.

 

08-26  민주적 방역과 독재적 방역

동아시아 국가 성공적 방역에 권위주의적 체제도 큰 영향
K방역에도 권위적 요소 많아… ‘공권력이 살아있음’ 운운하며
방역 독재 유혹에 빠져선 안돼

 방역만 떼어 놓고 보면 효율성에서 공산주의를 따라갈 체제가 없다. 소련은 1930년 아제르바이잔의 한 지역에서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군대를 투입해 주민들을 소개하고 지역 전체를 불태운 뒤 농약 클로로피크린을 뿌렸다. 클로로피크린의 독성이 워낙 높아 3년간 그 땅에서 채소 재배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련까지 거슬러 갈 것도 없다. 몇 개월 전 코로나19의 발상지인 우한에서 중국 공산당은 서방 국가는 꿈도 꿀 수 없는 감시와 통제로 인구 1000만 도시를 76일간이나 봉쇄한 끝에 최근 한 워터파크에서 수천 명이 빼곡히 모인 파티를 열어 성과를 과시했다. 방역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권리와 조화시키는 나라에서나 어려운 것이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권리보다 앞세우는 나라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대체로 성공적인 방역을 했다. 한국은 약 1만8000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310명이 사망했다. 인구가 한국의 두 배인 베트남은 확진자 약 1000명, 사망자 27명이다. 인구가 비슷한 태국은 확진자 약 3400명, 사망자 58명이다. 인구가 절반인 대만은 확진자 약 500명, 사망자 4명이다. 한국은 오히려 성적이 처지는 편이다. 다만 일본(확진자 약 6만3000명, 사망자 1181명)에 비하면 성공적이며, 일본 역시 서방 국가에 비하면 성공적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방에 비해 성공적 방역을 하는 요인이 수수께끼 같아서 ‘팩터(factor) X’로 불리기도 한다. 동아시아인이 마스크 착용에 거부감이 적고 뺨 키스 등의 습관이 적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하나 더 있으니 동아시아 국가들의 권위주의적 성격이다.


 K방역에는 신속한 대량 진단 능력만이 아니라 철저한 감염자 동선 추적이 포함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역학조사에 부여된 막강한 권한이다. 한국은 역학조사 시 그 조사를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 방해, 회피하는 행위 외에도 거짓말을 하거나 고의로 사실을 누락, 은폐하는 행위까지 처벌한다. 뒷부분은 2015년 감염병관리법 개정 때 도입됐다. 범죄자라도 스스로에 대해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는데 역학조사의 대상이 되는 국민은 그럴 권리도 없다.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처벌된다. 이것이 K방역의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일본만 해도 사전에 피해보상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영업정지 명령을 함부로 내리지 못한다. 우리나라도 피해 보상 규정이 있다. 하지만 걸핏하면 영업정지 명령이 내려지는 노래방 PC방 등에 현실적인 피해 보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감염병 환자의 경우 국가 비용으로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여권은 가능한 한 감염 책임을 국민에게 돌리며 구상권을 행사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 초기 언론은 신천지를 옹호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침묵하는 사이 이재명 경기지사 등 대선 주자를 꿈꾸는 여권 지자체장들이 가시적 성과를 내는 경쟁을 벌이면서 방역 행정은 점점 더 고압적이 됐다. 결국 밥 먹을 때와 차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실내외를 막론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우한에나 있을 법한 괴기한 행정명령까지 내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사랑제일교회와 광화문 집회를 겨냥해 현행범 체포 운운하면서 “공권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라”고 했다. 섬뜩한 표현인데 그마저도 공정하지 못하다. 이 표현은 수시로 관공서를 점거하는 등 공권력을 무시해온 민노총을 향해 먼저 사용했어야 하는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편향성과 반대자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서방 국가보다 방역을 잘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방역을 못했다고 의기소침할 것도 없다. 권위적일수록 방역의 효율이 높아지는 법칙이 통하고 있을 뿐이다. K방역에 대단한 비법이 있었던 양 착각해서 목표 확진자 수를 비현실적으로 낮게 잡고 그 목표에 매달리다가 방역 독재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

 

신천지는 코로나 위기 초기라 잘 몰라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사랑제일교회와 광화문 집회의 경솔함은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혼나야 한다. 다만 대통령 자신도 경솔해서 짜파구리 파티를 벌이며 파안대소하던 때를 잊지 말라. 그래야 권력의 절제된 사용이 가능하다.

 

09-09  진보적 판결 아니라 수준 미달 판결

잇따라 조롱받는 대법원 판결
主文 납득 못시키는 억지 논리에 헌법재판소 권한까지 침범해
특정 성향 보고 뽑은 대법관들 무능력으로 편향 더 두드러져

 판결이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는 일단 그 논리가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고 나서 따질 일이다. 김명수 대법원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처분 위법 판결은 진보적 판결이 아니라 그냥 수준 미달의 판결일 뿐이다.


노동조합법은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할 때 노조로 보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노동조합법 시행령은 이런 경우 ‘노조로 보지 않음’을 통보할 수 있도록 했다. 모법과 시행령의 연관관계는 너무 직접적이고 단순해서 그 뜻을 달리 새길 여지가 없어 보인다. 대법원은 자연스러운 법령 해석을 거부하고 ‘형성적 처분’ 운운하며 미리 정해 놓은 주문(主文)에 맞춘 듯한 기교(技巧)적 개념을 구사했는데 그마저도 솜씨가 서툴러 위법 판결에 찬성한 대법관들 사이에서조차 내분이 일었다.


대법원이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에 시비를 건다면 노동조합법 조항 자체가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침해한다고 시비를 걸어야 한다. 그러나 전교조가 이 조항에 대해 제기한 위헌법률심판 소송에서 헌법재판소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헌재와 달리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할 권한이 없다. 그러자 법률 아래 명령에 해당하는 시행령이 위헌이라고 시비를 거는 졸렬한 방식을 택했다.

 

현실적으로 보면 전교조 조합원이 6만 명이나 되는데 겨우 9명의 해직 교사가 있다고 해서 노조를 법외(法外)화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그러나 반대로 고작 9명의 해직 교사, 그것도 법원의 유죄 판결을 받아 해직된 교사를 지키느라 6만 명이나 되는 조합원의 권리를 포기하느냐는 비판도 가능하다.

 

해직자의 가입을 허용할지 말지는 노조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선진국의 추세라고 하더라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위헌은 아니라는 것이 헌재의 판단이다. 그렇다면 허용할지 말지는 국회의 입법에 맡길 일이다. 헌재의 결정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헌재의 헌법 해석을 넘어선 ‘그들만의 정의’에 기초해 법률의 명백한 규정에 반한 판결을 내리는 것은 월권이자 법치주의에 반한다. 정상적 국회라면 탄핵해야 할 사안이다.


김명수 대법원의 이재명 경기지사 무죄 판결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판결의 요지는 적극적인 허위 사실 공표가 아니면 선거법상의 허위 사실 공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논리대로 이 지사가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KBS 방송 선거토론회에서 ‘친형을 강제입원시킨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적이 없다’고 한 것은 적극적인 사실 표명이 아니어서 허위 사실 공표가 아니라고 치자. 이런 논리라면 이 지사가 이후 MBC 방송 선거토론회에 나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친형을 강제입원시킨 적 없다’고 한 것은 허위 사실 공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려야 한다. 대법원은 비겁하게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내세운 논리에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판결에서 가장 납득하기 힘든 대목은 ‘선거토론은 발언 순서, 발언 시간 등 형식이 엄격하게 규제돼 있어 제한된 시간에 공방이 이뤄지면 표현의 명확성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이 지사의 답변은 ‘그런 적이 없다’가 아니라 ‘그런 적이 있다. 그러나 직권을 남용해서 그런 적은 없다’가 됐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정도 답변에 발언 순서나 발언 시간은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대법원은 이 지사가 친형의 강제입원에 대한 사실을 공개할 법적 의무를 부담하고 있지 않다고 봤다. 그러나 친형의 강제입원 여부는 친형 쪽에서 반발을 해서 외부에 알려졌다. 반발은 불법이 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유권자는 이에 대해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 사생활로 보호받아야 할 여배우와의 스캔들과는 다른 사안이다.


대법원의 봐주기 판결 때문에 선거토론에서 최소한의 진실성 보장마저 불가능해졌다. 법관이라면 불법성이 입증되지도 않은 강제입원 사실을 부인했다는 사실만으로 지사를 파면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허위 사실 공표 금지와 조화시키려면 더 정치한 논리를 펼쳤어야 한다.

 

김명수 대법원에는 편향성과 무능력의 문제가 섞여 있다. 대법관 감도 못 되는 이들이 특정 성향만으로 발탁돼 임명권자의 뜻을 알아서 헤아린 판결문을 쓰다 보니 능력도 안 돼 억지 논리를 펼치면서 숫자로 밀어붙이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09-23  미션 임파서블 ‘서 일병 구하기’

휴가명령서는 사전 발급이 원칙, 서 씨 사전에 휴가 신청했다는데
사후 휴가명령서는 있을 수 없어… 엄마만 사태 파악 못한 듯
역겨운 정치드라마 되고 있어

 대학으로는 나와 같은 학번인 셈인 육사 43기 친구와 통화했다. 사병의 휴가 관리가 내가 군 복무하던 30여 년 전과 많이 달라졌나 궁금했는데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는 휴가 복귀 당일 미귀(未歸) 보고를 집에서 하는 휴가자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불가피하게 늦게 되면 귀대하면서 여기가 어디인데 여차여차한 이유로 늦는다고 보고를 한다. 게다가 요새 군대는 친절해져서 지휘관이 하루 이틀 전 전화를 걸어 복귀 여부를 확인한다. 예정에 없는 미복귀는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는 사후에 휴가명령서가 작성되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사병이 불가피하게 전화로 휴가 연장을 신청한다 해도 사전에 해야 하고 사전에 휴가명령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었는데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중요한 걸 한 가지 잊었다며 전화로 휴가를 연장할 경우 사유가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에 지휘관이 반드시 그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다고 했다.

 

혹시 카투사는 다른 걸까. 미국 국적으로 주한미군에서 장성급으로 일했던 지인과 통화했다. 그는 미군과 카투사의 관계를 미군이 카투사를 한국군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관계로 설명했다. 카투사 사병은 작전에서만 미군에 배속돼 미군의 지휘를 받을 뿐 인사 관리는 한국군의 지휘를 받는다는 말이다. 카투사에 복무해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어서 새삼 거론한다는 게 창피할 정도다.

 

마침 조카가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 서모 씨와 상당 기간 겹쳐서 같은 카투사 지역대(Area 1)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와도 통화했다. 서 씨는 2017년 6월 23일 금요일이 2차 병가로부터 복귀하도록 예정된 날이었으나 복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미귀 사실은 6월 25일 일요일 저녁 점호 때 가서야 당직사병에 의해 발견됐다. 일부에서는 카투사 사병들이 대부분 외박을 나가는 금·토요일의 점호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으나 조카의 말은 다르다.

 

카투사 사병들이 한 숙소(barrack)에 9명 정도가 묵는다면 6, 7명 정도는 금요일 근무가 끝난 후 패스(외박허가)를 얻어 외박을 나갔다가 일요일 저녁 점호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것은 맞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2, 3명은 주말에도 남아있고 이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인원 확인이 이뤄진다.


조카가 중요한 말을 하나 했다. 당직사병은 육군 인트라넷으로 전날 보고된 인원 상황을 확인하고 당일 점호 후의 인원 상황을 육군본부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처리된 휴가인데도 당직사병이 모르는 휴가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육본 컴퓨터의 기록을 뒤져보면 금·토요일에 이미 서 씨 휴가가 연장 처리됐는지 여부가 드러날 것이다. 정상적으로 처리되지 않았으니 일요일 당직사병이 미귀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카투사에서 지원반을 부사관이 맡을 때는 지원반장이라고 부르고 장교가 맡을 때는 지원대장이라고 부른다. 서 씨가 속한 지원반은 상사가 관리하지만 병가 중이어서 다른 지원반을 맡은 대위가 대신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월 25일 당직사병이 서 씨의 미귀를 발견했을 때 뒤늦게 나타나 휴가 처리를 지시한 사람은 지원반장도 지원대장도 아니고 지역대 본부와 육본을 연결하는 업무를 담당한 김모 대위였다.


서 씨 측은 6월 21일 2차 병가 관련 진단서를 이메일로 제출하면서 휴가 연장을 문의했다고 주장한다. 그때도 김 대위와 보좌관이 통화했다. 보좌관은 김 대위의 ‘개인 연가를 쓰라’는 말을 구두 승인으로 인식했다고 주장한다.

 

휴가 승인은 지원반장(혹은 지원대장)-지역대장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참모인 김 대위의 승인이 아니라 부대장의 승인이 있었는지는 휴가명령서를 통해 확인될 수 있다. 부대장의 승인이 있었다면 6월 21일에서 23일 사이 휴가명령서가 만들어질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휴가명령서는 당직사병이 서 씨의 미귀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부랴부랴 만들어졌다. 부대장이 승인하지 않고 미적댔다는 뜻이다.


조카가 복무할 때 이미 서 씨 엄마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서 씨 구하기는 국민을 개돼지로 보지 않는 한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 엄마만 아직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듯하다. 서 씨 구하기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멋진 액션 드라마가 아니라 역겨운 정치 드라마가 될 것이다.

 

10-07  조선 제일 뻔뻔녀

지난해 10월 3일 조국 퇴진 시위
올해 10월 3일도 집회 가능했다면 추미애 퇴진 시위 벌어졌을 
국민 우롱하는 대통령 처신에 국민은 돌아버릴 지경이다

 국민은 지난해 10월 3일 100여만 명이 모인 광화문 집회로 조국 당시 법무장관의 사퇴를 이끌어냈다. 사퇴 후의 상황은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조선 제일 위선남을 몰아냈더니 조선 제일 뻔뻔녀가 왔다. 여우나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라는 옛 표현은 이 판국에는 불필요하게 구수하다. 그냥 쓰레기차 치웠더니 똥차 온 격이다.

 

추미애 법무장관은 지난달 1일 국회에서 박형수 국민의힘 의원의 “보좌관이 전화해서 휴가 연장에 대해 물었다는 보도가 맞느냐”는 질문에 “그런 사실이 있지 않다”고 답했다. “그런 사실이 없다”가 아니라 “그런 사실이 있지 않다”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지금 돌아보니 도둑이 제 발 저리는 화법이었다.


추 장관은 박 의원이 다시 확인하듯 “당시 보좌관에게 (전화하라고) 지시했느냐”고 묻자 “뭣 하러 그런 사적인 일을 지시하겠느냐”고 답했다. 굳이 질문에도 없는 사적인 일이란 말을 꺼낸 것은 앞선 대답의 단호하지 못함을 깨닫고 보상하려는 심리였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박 의원이 “만약 추 장관이 보좌관에게 (전화하라고) 지시했다면 직권남용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자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그런 사실이 없다”며 쐐기를 박았다.

 

더불어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은 추 장관 아들과 보좌관이 형 아우 하는 친밀한 사이여서 부탁한다면 직접 부탁했을 것이라고 방어막을 쳤다. 검찰 수사 결과 추 장관이 보좌관에게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준 사실이 드러났다. 본인이 인정한 대로 직권남용죄가 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추 장관은 추석 연휴에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한마디 사과도 없이 오히려 의혹을 제기한 측에 책임을 묻겠다고 썼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표현으로는 격화소양(隔靴搔양)의 느낌이 없지 않다. ‘똥 싼 게 성내는’ 꼴이었다.

 

추 장관은 추석 연휴에 페이스북에 두 번째 글을 올렸다. 이번엔 드디어 ‘보좌관에게 지원장교 전화번호를 준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아들에게서 전달받은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전달한 것을 보좌관에 대한 ‘지시’라고 볼 근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세상에는 당연해서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는 자유심증(自由心證)의 사실이 있다. 과연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최초에 아들에게서 전달받았는지 의문이지만 누구에게서 전달받았든 그 번호를 보좌관에게 준 것은 전화를 하라고 지시하기 위함이다. 그 인과관계는 입증할 필요도 없는 것이며 당연시된 인과관계를 깨려면 깨려는 측이 반대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해명도 안 되는 해명을 늘어놓는 것은 궁지에 몰린 추 장관의 궁핍한 처지만 드러냈을 뿐이다.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어느 장관의 사퇴를 요구할 때는 그 요구가 합당하든 아니든 경질을 고려하는 것이 대통령의 도리다.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등 민주화 이후의 모든 대통령들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잠시 고집을 부렸겠지만 결국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 전 장관을 경질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조 전 장관이 마지못해 사퇴를 했을 때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후속 인사를 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국민을 조삼모사(朝三暮四)에 속는 원숭이 취급하는 후속 인사를 했다.


더 이상 쓰레기차나 똥차를 탓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하다. 쓰레기차를 배차하고 똥차를 배차하는 운영자의 문제다. 문 대통령은 조 전 장관 사퇴 이후 그를 향해 ‘마음의 빚’ 운운한 데 이어 추 장관에 대해서는 청와대에서 열린 권력기관 개혁 회의에 웃으며 나란히 입장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국민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검찰 수사로 추 장관의 거짓말이 드러난 후에도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거짓말을 했던가요”라며 의뭉스러운 딴소리를 했다. 여권에서 가장 합리적인 축에 속한다는 사람의 반응이 이렇다. 말로 하는 정치를 위해 여야가 공유해야 할 ‘최소한의 사실’마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언론의 비판도 통하지 않을 때 국민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지만 현명한 국민들은 방역을 망친다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분노를 삭이며 올 10월 3일 광화문 집회를 보류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의 머릿속에서는 1년 전과 같은 광화문 집회가 열려 사퇴와 하야 요구가 하늘을 찌르는 상상이 펼쳐졌다. 그러니까 경찰차벽으로 ‘재인산성’을 쌓은 것 아니겠는가.

 

10-21  독재 모습 드러낸 문재인 검찰개혁

현 정권 검찰개혁의 뻔뻔함은 문재인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
윤석열 등용할 때도 뻔뻔했고 윤석열 몰아내려 할 때도 뻔뻔해
공수처는 독재의 기구 될 것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겨우 닷새가 지난 2017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에 수상한 기사가 하나 보도됐다. 이영렬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안태근 당시 법무부 검찰국장과 밥을 먹고 각자 상대편 후배들에게 100만 원씩 돈 봉투를 줬다는 기사였다. 처음부터 죄가 되는지조차 의문이었지만 대통령이 직접 감찰을 지시하며 큰 잘못이 있는 양 떠들었다. 이영렬과 안태근은 즉각 자리에서 쫓겨났다. 청와대는 법무장관도 검찰총장도 없는 사이 누구와의 협의도 없이 윤석열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영렬과 안태근에 대한 면직 처분은 나중에 법원에서 취소됐다.

 

건(件)도 안 되는 걸 건인 양 취급해 공작하는 것은 운동권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방식이다. 윤석열을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앉힐 때도 그랬고 검찰총장에까지 승진시킨 윤석열을 쫓아내려는 지금도 그렇다.


올 3월 17일 MBC에서 채널A 기자가 수감 중인 이철이란 사람의 대리인 지모 씨에게 접근해 윤석열의 최측근 검사장이었던 한동훈과 통화한 내용을 들려주며 유시민의 비위를 털어놓으면 검찰의 선처 약속을 받아주겠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권력 주변의 비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기자의 임무다. 그러나 검사에게 말해 선처의 약속을 받아주거나 가중의 처벌을 가하게 할 기자는 없다. 그런 일은 사기꾼이 되기 힘든 평균 이하 지능인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회유나 압박이다.

 

기껏해야 사기꾼의 함정에 빠져 취재윤리를 어긴 사안에 여권은 검언(檢言)유착이라는 어마어마한 프레임을 덮어씌우고 추미애 법무장관은 수사지휘권까지 행사했다. 검언유착은 없었다. 법무장관이 수사지휘권까지 행사했는데도 성과 없이 수사가 끝났으면 장관이 스스로 물러나거나 대통령이 그 장관을 해임하는 것이 법치국가의 관례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추 장관을 해임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지했다. 이것으로 법무(法務)의 정상적 운용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추 장관의 사퇴와 문 대통령의 책임을 묻기 위한 집회와 시위를 방역 때문에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되자 새로운 공세가 시작됐다. 라임펀드 사기 사건의 주범 김봉현 전 대표가 옥중 입장문을 공개한 것이 계기가 됐다. 공개 전에 문 대통령은 강기정 전 정무수석에게 5000만 원을 줬다는 김 전 대표의 법정증언에도 불구하고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했는데 이전의 처신에 비해 전혀 뜻밖이었다. 김 전 대표는 문 대통령의 ‘성역 없는 수사’ 지시 이후 화살을 야당 정치인과 검사들로 돌렸다. 실은 ‘성역 없는 수사’ 지시가 김 전 대표의 옥중 입장문에 대해 미리 전해 듣고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사기꾼의 말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라고 해도 ‘성역 없는 수사’를 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성역 없는 수사를 하자면서도 특검에는 반대다. 그렇다면 검찰이 수사를 해야 하는데 추 장관은 다시 수사지휘권을 발동해 윤석열 총장을 라임 수사 지휘에서 배제했다. 성역은 야권과 팔다리 잘린 검찰총장이었던 것이다. 역대 어떤 대통령도 성역이란 말을 이렇게 맹랑하게 사용한 적이 없다. 이런 의미의 ‘성역 없는 수사’는 공수처가 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대법원을 거치고 나니 국민적 관심사에 대해 거짓말을 한 이재명 경기지사와 조직폭력배에게 차량과 운전기사를 빌린 은수미 성남시장이 살아남았다. 대법원은 이미 정권에 장악됐고 남은 건 검찰이다. 추 장관이 검찰총장과의 협의도 거치지 않은 2차례 인사를 통해 검찰의 요직 대부분을 정권의 총애를 받고자 하는 애완 검사들과 정권의 눈 밖에 날 것이 두려운 초식 검사들로 채웠다. 그러나 정점(頂點)의 윤석열 총장과 그를 따르는 좌천된 검사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들마저 제거해야 ‘죄 지어도 처벌받지 않은 계급’의 등장이 가능해진다. 조국 전 법무장관 때까지는 그 정도까지 진행되지 못했다. 추미애 법무장관의 아들은 탈영 혐의가 명백한데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죄 지어도 처벌받지 않은 계급’의 등장에 더 가까워졌다. 공수처가 출범해서 법원과 검찰에 남아 있는 삼별초 같은 저항세력을 수사하고 기소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들의 입장에서 형사사법체제의 장악이 완성되는 것이고 국민의 입장에서는 법치가 파괴되고 독재가 시작되는 것이다.

 

11-04  개혁 아니라 혁명, 그것도 사악한 혁명

민주주의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어… 트럼프 파시즘에 미국도 위협받아
한국에서 민주주의 위협하는 건 친문 세력의 軟性 레닌주의
공수처, 한국판 체카 될 수도

 도널드 트럼프가 4년 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미국인이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가 파시즘이었다. 3일(현지 시간)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할 위기에 처한 트럼프는 극우 무장 세력에게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대선 개표가 연장되는 경우 ‘물리적으로 위험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에서조차 이런 대통령이 나와 적지 않은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은 정치에서 사악한 권력 의지를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때에 민주화가 뜻하는 바로 그 정치적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혹자는 친문 세력의 행태를 연성 파시즘이라고 부르며 우려한다. 그러나 그 행태는 미국과 달리 우파 파시즘보다는 좌파 레닌주의(Leninism)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연성 레닌주의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옛 소련이 선전했듯 대중이 봉기한 ‘영광스러운 혁명’이 아니라 볼셰비키의 군사 쿠데타였다. 레닌은 쿠데타 전만 하더라도 검열을 비판하고 언론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가 쿠데타 이튿날 첫 번째로 내린 조치는 1위 신문인 ‘볼랴 나로다’ 폐쇄였다. 친구인 막심 고리키의 신문과 그가 쓰는 ‘반시대적 생각’이란 칼럼만은 한동안 허용됐지만 그마저도 이듬해 여름 없애버렸다.

 

언론장악만큼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독재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형사사법체제의 장악이었다. 12월 레닌은 비밀포고령으로 체카를 설립했다. KGB의 전신인 체카(Cheka)는 검찰과 경찰에서 벗어난 특별 수사·기소 기관이었다. 체카의 자의적 수사와 기소로 반혁명분자로 지목된 자들은 사소한 트집을 잡혀 감옥에 가고 볼셰비키들은 죄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특권계급으로 탄생했다.

 

우리나라의 공수처는 공산권 국가를 빼고는 유례를 찾기 힘든 수사·기소기관이다. 지금 공수처 추진과 함께 검찰의 기능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검찰총장과 그 측근들만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평검사들마저 반발하고 나왔다. 평검사 전체의 15%가량이 자기 이름을 걸고 반발할 정도이면 나머지 침묵하는 검사 대부분도 반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반발하는 검사의 수가 얼마가 되든 다 잘라버리면 그만이라는 집권세력의 발상은 검찰을 개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검찰을 혁명하겠다는 것이다.

 

친문 세력에게 이 혁명이란 용어가 특별히 거부감을 갖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꼭 해야 할 혁명으로 여길 수 있다. 정작 한심한 쪽은 공수처를 단지 비판의 여지가 있는 입법의 하나로 보는 흐리멍덩한 보수세력이다. 공수처 추진과 검찰에 대한 공격은 대한민국의 대체로 성공한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폄훼한 세력이 이제 역사를 넘어 구체적 제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공수처는 그 자체로 위험한 조직이지만 야당이 공수처장 추천에 비토권을 갖고 있는 지금은 아직 그 위험성이 현실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야가 공수처장 추천에 대한 합의에 실패하고 집권세력이 법을 바꿔 야당의 비토권을 없애버리고 일방적으로 임명을 강행하는 순간 그것은 한국판 체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대법원이 법치의 최후 보루 역할을 수행한다면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다. 그러나 김명수 대법원은 법치의 최후 보루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얼마 전 대법원의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판결은 취소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별게 아니다. 그러나 취소 판결에 이르는 논리가 헌법과 법률이 허용한 범위를 넘어섰다. 막연한 정의감이 헌법보다 상위에 있었다. 파슈카니스 등 소련 법학자들이 주장하던 ‘혁명적 정의’를 떠올리게 하는 위험한 판결이다

 

러시아 인민들에게 볼셰비키 혁명은 일으킨 게 아니라 당한 것이다. 그들이 당한 줄도 모르게 당한 혁명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우리도 지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혁명을 당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혁명인 줄도 모르는 것일 수 있다. 그건 개혁이 아니라 사악한 혁명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다. 미국도 한국도 방심하지 않고 깨어서 행동하는 국민만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11-18  측은지심마저 정치적인 대통령

北서 사살된 어업지도원 아들에게
손편지 대신 타이핑 편지 보낸 대통령
암투병 파업 기자 병문안과 큰 대비
5·18 유족, 천안함 유족 보는 태도 달라
人之常情마저 정파적이어선 안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보면 미술평론가 최열의 ‘옛 그림으로 보는 서울’이 눈에 잘 띄게 진열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페이스북에 ‘모처럼 좋은 책을 읽었다’며 이 책을 소개했다. 지금은 사라진 옛 서울의 모습을 조선시대 회화를 통해 찾아본 책이다. 문 대통령은 “그림과 해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해 보노라면 읽고 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부동산정책은 수습 불가 상태로 가고 있어 집 없는 자들의 분통을 자아내고 추미애의 목불인견(目不忍見) 추태는 끝날 기약 없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실종된 서해 어업지도원에 대한 북한군의 잔혹한 사살까지 겹쳐 나라가 뒤숭숭했는데 대통령만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한가한 책 추천이었다. 그 책은 최 씨가 8년 전 펴낸 ‘옛 그림 따라 걷는 서울길’을 확대·보완한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책이라 할 수 없다. 혼자만의 감상이면 모르되 추천으로서는 철 지나도 한참 지난 소리를 한 셈이다.

 

북한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에 대해 어업지도원의 아들이 문 대통령에게 진상 규명을 호소하는 편지가 공개된 것이 지난달 5일이다. 문 대통령은 열흘쯤 뒤인 14일 답장을 보냈다. 답장은 손글씨로 쓴 것이 아니라 타이핑한 글에 전자서명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미국 대통령도 위로의 편지는 손글씨로 쓴다. 비서진이 써준 걸 옮겨 적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예의다. 손편지 하나 쓸 여유가 없었던 대통령이 자신이 사는 청와대와 그 주변이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호기심이 컸던지 대통령이 스스로 표현한 대로 ‘읽고 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도’ 그렇게 한 모양이다.

 

실은 손편지를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손편지를 쓸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2월 문 대통령은 2012년 MBC 파업을 주도하다 해직된 뒤 암 투병 중인 MBC 이용마 기자를 직접 병문안했다. 2012년 MBC 파업을 의미 있게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의문이고 그 의미마저도 논란이 있다. 그런 일로 대통령이 한 개인을 공개적으로 병문안하는 일은 흔치 않다. 이 기자를 향한 대통령의 각별한 배려를 높이 평가할수록 어업지도원의 아들에게 손편지 한 장 쓰지 않은 몰인정함과의 차이는 더 극명해진다.

 

사람이 누군가를 딱하게 여기는 감정은 정치적 입장과는 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측은지심이 동(動)하는 데 있어서조차 정치적인 면이 크게 작용하는 유형인 듯하다.


그는 대선 후보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되자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아 세월호 방명록에 “미안하고 고맙다”는 글을 썼다. 어른들 말을 너무 잘 들어 구조를 기다리다 죽어간 착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자기 아이가 아니라도 가슴이 찢어진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고맙다는 말은 어딘지 이상하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할 따름이지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인지상정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취임한 해 5·18기념식에서 ‘유족의 편지’를 읽고 자리로 돌아가는 한 유족에게 불쑥 다가가 위로하듯 안아준 것으로 따뜻한 감동을 줬다. 그러나 예정에 없는 듯이 연출된 상황이 아니라 돌발 상황에서 인간의 본심이 드러나는 법이다. 올 3월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천안함 폭침 전사자의 어머니가 분향하려는 대통령에게 다가가 “천안함 폭침이 누구 소행인지 말씀 좀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어머니를 쏘아보던 눈빛은 차가웠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년에 맞춰 나온 ‘Lenin: The Man, The Dictator, the Master of Terror(레닌: 인간, 독재자, 테러의 대가)’란 책을 읽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서평까지 쓴 레닌 전기로 ‘인간 레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891년 레닌이 변호사이던 때 그의 고향인 볼가강 유역에 극심한 기근이 닥쳤다. 40만 명 이상이 죽어갔다. 톨스토이 체호프 같은 작가들이 국제 구호 캠페인에 나섰다. 그러나 레닌은 왜 차르 체제를 돕는 일을 하느냐며 일체의 구호활동을 거부했다. 그런 레닌에게 그의 누이들은 소름이 끼쳤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측은지심마저 정치적인 사람의 싹수가 어땠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12-02  문재인 정권 하는 짓, 레닌 때와 닮았다

검사의 상식과 적법절차 요구를 대통령은 ‘집단이익’으로 매도
정권 말 안 따르고 시비 가리는 공무원 다 사보타주로 모는 것
공수처의 예고편이나 다름없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유사한 드문 선례가 레닌의 체카다. 체카는 ‘전(全) 러시아 특별위원회’의 이니셜인 ‘ChK’를 러시아어로 읽은 것이다. 레닌이 기존의 형사사법체제에서 벗어나 만든 수사기관으로 기소와 재판까지 좌지우지했다. 이후 모든 공산권 국가가 모델로 삼았다.
체카에는 정확히 말하자면 ‘전 러시아 특별위원회’ 앞에 ‘반(反)혁명과 사보타주 분쇄를 위한’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다. 반혁명과 나란히 사보타주가 있다.

 

레닌이 정권을 장악하고 직면한 곤란한 상황 중 하나가 공무원의 반발이었다. 사보타주는 태업(怠業) 파괴 등의 작업 방해공작을 말한다. 철도노조가 파업을 하면서 일부러 느릿느릿 업무를 처리하거나 철로를 끊어 열차가 못 다니게 하는 것이 전형적인 사보타주다. 체카의 눈에는 레닌의 혁명적 공약을 공무원이 상식이나 적법성을 따지면서 회피하거나 시비를 거는 것도 사보타주였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대통령이 월성 원전 1호기 폐쇄를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담당 부처 공무원이 폐쇄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면 사보타주가 된다. 담당 부처 공무원이 장관의 “너 죽을래”라는 말에 엉터리 근거를 만들었는데 그 사실을 감사원이 밝혀내면 사보타주가 된다. 감사 결과를 토대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면 그것은 엄청난 사보타주가 된다.

 

‘반혁명과 사보타주 분쇄를 위한’이란 수식어는 다시 ‘반혁명과 사보타주와 투기 분쇄를 위한’이란 수식어로 바뀌었다. 투기란 말은 레닌이 반(反)시장적 정책을 펴다 곡물값이 오르자 쿨라크(Kulak·부농)가 곡물을 숨겨놓았다고 보고(실은 그렇지 않았다) 곡물을 뜯어내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됐다. 시대가 달라도 같은 생각에서는 같은 행동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자신들이 잘못해 부동산 대란이 일어나자 투기세력을 잡겠다며 ‘부동산거래분석원’을 추진 중이다.

 

러시아의 진정한 혁명은 1917년 2월 혁명이었다. 2월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레닌은 그해 10월 쿠데타로 임시정부를 전복한 후에도 임시정부가 예정한 11월 총선은 치르기로 했다. 레닌을 지지한 러시아 인민들은 볼셰비키만이 총선과 제헌의회를 보장할 세력이라는 기대를 걸었다. 레닌은 언론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4분의 1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자 이듬해 1월 제헌의회가 소집된 날 회의장을 청소해야 한다는 이유로 의장을 쫓아낸 후 의회의 문을 영원히 닫아버렸다. 그날 4만 명의 시민과 공무원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레닌 정권에 의한 첫 유혈진압이 이뤄졌다.

 

최근 영국의 양자물리학 천재 폴 디랙의 삶을 다룬 과학책을 보다가 이런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디랙과 가까운 이고리 탐이란 소련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대학을 가기 전부터 마르크스주의자로 과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볼셰비키를 위한 시간제 활동가로 일했다. 그러나 제헌의회가 폐쇄되고 그해 여름 다른 모든 정당이 불법화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끼고 과학에만 몰두했다.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이 혁명의 배반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배반을 당한 것이다.

 

한국의 민족해방(NL) 자주파 세력은 러시아 중국 북한의 혁명사를 깊이 연구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 현실에 맞는 자신들의 집권 도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공수처’다.


문 대통령은 그제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배제와 징계청구 철회를 요구하는 검사 대부분의 의견을 우회적으로 ‘집단이익’으로 매도했다. 최소한의 상식적인 법무행정과 수사와 감찰의 적법한 절차에 대한 요구를 사실상 사보타주라고 폄하한 것이다.

 

집권 초 특활비에서 나온 ‘100만 원 돈봉투’를 트집 잡아 서울중앙지검장을 몰아냈다. 지금은 대리인인 추미애 법무장관을 통해 ‘사찰 같지도 않은 것’을 사찰로 몰아 검찰총장을 쫓아내려 한다. 이유라도 이유 같으면 그나마 봐주겠으나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 체카가 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그런 사소한 트집 잡기로 공무원을 몰아내고 가두는 것이었다. 현 사태는 공수처가 설치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보여주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금태섭 전 의원은 “우리가 광장에서 외친 세상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라고 했다. 촛불혁명을 말하는 모양이다.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영원히 배반당하기 전에 막을 책임이 모두에게 있다.

 

12-16  공수처는 ‘2021년 체제’의 시작이다

文 배후 두 원로 백낙청 이해찬
백낙청이 반복해온 ‘○○○○년 체제론’
이해찬이 들고나온 20년 집권론
내년 출범 공수처로 20년 집권하면
대한민국의 성공한 역사는 끝

 잡지 ‘창작과 비평’의 평생 독자다. 대학에 다닐 때는 창비가 폐간당해 나오지 않을 때이지만 없는 돈에도 창간호부터의 영인본을 구입해 읽었다. 복간된 후에도 창비를 쭉 봤다. 창비가 선호하는 리얼리즘 문학작품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별로 읽지 못했지만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창비에서 평을 보고 사서 읽었다.

 

창비의 설립자인 백낙청 씨는 문학평론만이 아니라 사회변혁론도 펼쳐왔다. 백 씨의 변혁론에 전혀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의 변혁론이 진보 진영의 가장 정교한 변혁론이라고는 생각한다. 백 씨는 처음에는 계급모순론에 대항해 분단모순론을 펼쳤고 나중에 북한 세습체제가 문제가 되자 남한의 변혁 과정을 통해 북한의 변혁도 동시에 추구하는 이중과제론을 펼쳤다. 이중과제론은 북한의 변혁 추구 부분이 약하고 그래서 남로당이 북로당에 잡아먹혔듯이 남한의 변혁 세력이 북한을 변혁하기는커녕 북한에 변혁당할 우려가 크다는 게 나의 비판이다.


창비는 문학 중심의 잡지였으나 2002년 노무현 대통령 집권 이후 정치평론을 크게 늘렸다. 과거 창비는 선동적이라기보다는 비판적이었는데 사실 중시의 비판 정신마저도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많이 사라졌다. 창비에 광우병과 천안함에 대한 선동적인 글이 대거 실렸다. 그것은 창비의 편집책임이 백 씨 이후 세대로 넘어간 것과도 무관치 않다. 백 씨 자신은 나중에 천안함 선동 등에 대해 자성하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창비가 ‘○○○○년 체제론’을 들고나온 것은 2007년 무렵부터다. 백 씨의 제자 세대들이 1987년 체제를 넘어 남북연합을 목표로 한 체제를 만들자는 의미로 ‘○○○○년 체제론’을 펼쳤다. 백 씨 자신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2013년 체제론이란 책을 썼다. ‘내가 보수 신문사 사주라면 잠이 안 올 것’이라는 점잖지 못한 말까지 하고 다녔으나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으로 꿈은 깨졌다.

 

그러다 2016년 박 대통령 탄핵 정국이 도래했다. ‘2017년 체제론’이 또 나오겠구나 생각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도 ‘○○○○년 체제론’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를 정말로 칠 기회가 왔다고 여겼을 때는 말부터 하지 않는다. 몽둥이를 뒤에 숨긴 채 조용히 접근한다. 그들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잡았다고 여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문 대통령의 적폐청산은 단순히 이명박 박근혜 두 보수 대통령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두 대통령의 집권 기간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작업이다. 그리하여 김대중과 노무현에서 문재인으로 직접 이어지는 자신들의 역사 발전 궤도를 복원하고 이 궤도를 이승만 집권 이전 해방 전후사의 좌파나 중도 좌파와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배후에 원로 원탁회의라는 게 있었다. 원탁회의의 세 중심 원로가 백낙청 이해찬 함세웅이다. 함 신부는 정치적인 일에 종교인을 동원하는 것 외에 큰 의미는 없다. 백 씨와 이 전 의원이 핵심이다. 백 씨는 이론의 대부이고 이 전 의원은 정치의 대부다. 이 전 의원이 2018년 더불어민주당 대표 자리에 도전했을 때 그의 출마는 의원 선수(選數)나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진보 진영 전체가 체제 변혁을 위한 총력전에 돌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씨는 전당대회 때부터 20년 집권론을 펼쳤다. 그의 말에 따르면 1800년 정조 사후 220년간 지속된 수구 세력의 편향을 극복하려면, 내가 이해하기로는 남북연합이 가능한 체제를 만들려면 최소한 20년의 집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20년을 집권하는 데 꼭 필요한 기구가 공수처다. 이 정권이 왜 온갖 억지와 추태를 부리면서까지, 심지어 불법을 자행하면서까지 공수처 설립과 검찰 파괴에 집착했는지는 높은 역사의 고지에서 봐야 보인다.


공수처는 ‘2021년 체제’의 시작이다. 공수처는 국가의 틀인 형사사법체제의 중대한 변경으로서 헌법 개정을 통하지 않은, 헌법 개정 수준의 변경이다. 문재인 정권은 공수처를 최대한 활용해 2022년 재집권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며 재집권에 성공하면 대한민국의 성공한 역사를 만든 기반을 향후 20년간 하나씩 파괴해갈 것이다.

 

12-30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질 판인 K방역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버티면서
백신으로 공세 전환하는 작전
文 머릿속에 그런 구도 없었다
백신개발 강조하다 백신확보 늦어
코로나 終戰 지연은 경제 치명타

 미국과 서유럽 등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에서 인간은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대체로 패배했다. 반면 자유와 인권을 완벽히 억압한 중국은 최초의 코로나 창궐국이면서도 성공적으로 코로나를 저지했다.


국가가 억압적일수록 코로나에 잘 대응한다는 법칙에서 K방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감염병예방관리법’은 메르스 사태 이후인 2015년 개정 때 방역독재의 법으로 바뀌었다. 동선(動線)추적권이 도입됐다. 미국과 서유럽이 갖지 못한 무기를 가졌으니 우리가 더 잘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동선추적권만 놓고 방역독재라고 경솔히 말하는 건 아니다. 방역 조사 때 거짓말을 하면 처벌하는 조항도 함께 도입됐다. 범죄자도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는데 범죄자도 아닌 감염 환자나 감염 의심자가 거짓말을 했다고 처벌받게 됐다.

 

방역조사를 받다 보면 누구나 거짓말을 하기 마련이다. 한 학원 강사는 성소수자임이 드러나면 학원에서 쫓겨나 먹고살 수 없게 될 듯해 거짓말을 했는데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사람마다 숨겨야 할 수백, 수천 가지 다른 종류의 비밀이 있다. 그런 거짓말을 뚫고 나갈 책임은 방역당국에 있다. 동선추적권을 가진 것으로도 모자라 거짓말을 한다고 처벌하니 그야말로 안보불고지죄에 버금가는 방역불고지죄다.

 

행정명령으로 손쉽게 집회를 금지하는 조항도 2015년 신설됐는데 이로 인해 집회·시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같은 기본권도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대만은 방역 실적이 우리보다 훨씬 좋은 나라다. 그런 대만에서조차 지난달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에 반대해 5만 명이 모인 집회가 열렸다. 반면 문재인 정권은 재인산성을 쌓아 쥐 한 마리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학교 문을 닫지 않는 한 교회 문을 닫을 수 없다”고 했다. 반면 문재인 정권은 교회 문을 카페 문 닫듯이 닫았다.


마스크 착용 의무화는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교통수단을 이용하거나 영업점에 들어갈 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거부당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는 거리를 걸을 때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가 과태료를 물까 걱정해야 한다. 중국에서 식당에 들어갈 때 QR코드를 찍는다고 사생활 침해 운운하던 보도는 우리가 QR코드를 사용하자 싹 사라졌다.

 

사실 자세히 알면 자랑할 만한 비결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라도 확진자와 사망자를 줄여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 하루 확진자가 1000명대라고 아우성이지만 하루 사망자가 수백 명인 비슷한 인구의 나라도 있다. 다만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방식으로는 확진자가 증가하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겠지만 증가하는 추세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더 누르면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겠지만 중국처럼 계속 누를 수 없는 이상 다시 풀 수밖에 없고 그러면 전보다 더 튀어 오른다. 지금 돌아보면 확진자가 100명을 넘었다고 야단일 때가 낯설게 느껴진다. 확진자가 수천 명이 되면 1000명을 넘었다고 야단인 지금이 또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코로나와의 싸움은 아무리 잘 싸워도 인간이 조금씩 후퇴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외신은 코로나 백신 접종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했다. 미국과 서유럽은 후퇴를 거듭하다 드디어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무기를 개발해 코로나와의 싸움에 나섰다. 우리만 거리 두기나 마스크 착용 같은 육탄전으로 싸우면서 잘 싸웠다고 자아도취에 빠졌다가 낭패에 직면했다.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다’ ‘실무자는 잘했으나 지도자가 못했다’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문재인 대통령도 백신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았던 듯하다. 다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백신업계의 수준도 따져보지 않고 시간 고려 없이 백신 개발을 강조하며 백신 확보는 뒷전이었다. 그 결과 백신 개발도 못 한 채 백신 접종을 시작한 나라들을 닭 쫓던 개처럼 쳐다만 보는 꼴이 됐다. 백신 접종이 늦어지면 집단면역이 되는 시기도 늦어지면서 일찍 집단면역이 된 국가와 비교할 때 경제적으로 뒤처질 수 있다. 외교도 안보도 경제도 제 처지를 모르고 야랑자대(夜郞自大)하다 망쳤다. 방역도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송평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