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 동아일보 2020
01-01 힘없으면 옳은 것도 관철 못 한다
지난해 정권의 옳지 못한 시도 광화문광장에서는 막아냈으나
여의도 국회에서는 막지 못해
정치는 옳은 것을 관철하는 힘… 올해 총선이 그 계기 돼야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전세 사는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집값 잡는다고 한 조치가 이제는 전셋값을 끌어올리고 있다. 집값은 못 잡아도 좋으니 제발 전셋값이라도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죽어나는 건 집 없는 사람이고 자영업자이고 아르바이트생이고 중소기업이고 신생 혁신기업이다. 살판 난 것은 서울 등 수도권 요지에 집을 가진 사람들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주52시간 노동제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는 대기업과 공공기업에 다니는 근로자들이다.
혁신은 없다. 다른 나라는 다 근미래(近未來)의 전기차로 가는데 우리만 올지 말지 알 수 없는 원미래(遠未來)의 수소차로 가고 있다. 정부가 바이오산업의 육성을 외친 올해 바이오산업의 주가는 오히려 추락했다. 공산당이 만사를 통제하는 중국마저 화끈한 규제개혁을 하는데 우리만 기득권 조합이나 노조에 발목 잡혀 지지부진이다. 적폐청산 과정에서 정책 결정에 대한 시비로 감옥에 가거나 좌천한 선임자를 본 공무원들은 재량을 발휘할 생각을 않는다.
일본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시비이고 중국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굴욕적 처신이다. 중국은 사드 보복에 무릎 꿇고 미세먼지조차 자기 탓하는 걸 보면서 한국은 무시해 버려도 되는 나라로 판단한 듯하다. 그러니 ‘홍콩과 신장위구르 사태는 중국 내정 문제’라는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중국 관영 언론이 써대는 것 아니겠는가. 중국 외교부가 고쳐줄지 지켜보겠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센카쿠열도 갈등을 극복하고 급속히 호전되고 있다. 일본 쪽에서는 일본인이 한국보다 중국을 더 좋아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중국도 일본도 동북아시아를 한중일 삼국지(三國志)가 아니라 중일 양국지(兩國志)로 이끌고 싶어 한다. 하수(下手)에게는 한일 관계와 한중 관계의 소국(小局)만 보이고 중일 관계의 대국(大局)은 보이지 않나 보다.
새로운 규칙은 그 규칙을 만든 자에게 먼저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오랜 법언(法諺)이 있다. 적폐청산이라며 사화(士禍) 수준의 수사를 하면서 피의자를 공개소환하고 피의사실을 밥 먹듯이 유포하고 수갑까지 채워 수치를 주던 정권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해 새로운 검찰사무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피의자 조국과 그 가족에게 제일 먼저 적용했다. 그러고도 파렴치하게 공정을 외치고 있다. 이런 정부에 무슨 공정한 검찰 개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공수처에서는 조국, 유재수, 송철호, 그 윗선에 대한 수사가 가능할 것인가. 공수처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그런 수사가 가능하지 않다는 데는 별 의견 차이가 없다. 지지하는 자들은 그런 수사를 왜 하냐고 뻔뻔하게 물을 것이고 지지하지 않는 자들은 그런 수사 하지 말라고 만든 게 공수처가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이유야 뭐라고 보든 그런 수사는 하지 않는 게 바로 공수처다. 그래서 정권의 보위부인 것이다.
건국 100주년이 제야 속으로 사라졌다. 가야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고 법률가가 되지 않았으면 역사가가 됐을 것이라는 아마추어 역사가는 일제 식민지배의 한가운데인 1919년을 건국이라고 불렀다. 잃은 것을 잃었다 하고 얻은 것을 얻었다고 하는 사회는 걱정할 게 없다. 나라를 잃은 것을 나라를 얻었다고 하니 그 역사의식이 송두리째 걱정스러울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김정은의 말만 믿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이 비핵화의 진의가 있다고 전달한 것이 베트남 하노이 북-미 회담을 좌초시킨 근본적 원인이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말이 아니라 피와 철에 의해 결정됨에도 일방적으로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경계태세를 허물었다. 어리석은 송양공(宋襄公)이 따로 없다. 그 어리석음의 대가는 전멸이다.
경제성장률은 1%대로 추락시키고 부동산 값 하나 잡지 못하는 무능한 정권이 제 분수도 모르고 나라를 정초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땀과 피와 철로 세운 것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부수는 건 한순간이다.
힘이 없으면 옳은 것도 관철하지 못한다. 정치는 옳은 것을 관철하는 힘이다. 좀 더 겸손하게 말하자면 옳지 못한 것을 막는 힘이다. 광장에서는 옳지 못한 것을 막아냈으나 국회에서는 막아내지 못했다. 올해는 총선이 있다.
01-15 영원회귀하는 ‘동물국회’
패스트트랙으로 돌아온 동물국회
선진화법에 농락당한 보수 정당… 과반의 냉엄한 현실 깨닫고
분노를 국회 몸싸움이 아니라 선거에서의 각오로 표출해야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완패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법안을 국회선진화법이 정한 절차대로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걸 물리적으로 막은 것부터가 잘못됐다. 패스트트랙 법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할 때도 이를 물리적으로 막겠다고 지금 여당이 과거 야당일 때 했던 추태를 재연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다. 민주주의의 숫자는 5분의 3이 아니고 2분의 1이다. 국회선진화법은 5분의 3의 합의를 표결의 원칙으로 하는 세계에서 드문 법이다. 5분의 3쪽만 보면 더 많은 다수의 합의를 요구하는 좋은 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5분의 2쪽을 보면 2분의 1도 안 되는 소수가 2분의 1 이상 다수의 의사 관철을 막는 나쁜 법이다. 다만 국회선진화법은 패스트트랙이란 절차가 있어서 최종적으로는 2분의 1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위헌 시비를 벗어났다.
패스트트랙은 그 말의 일상적 의미와는 달리 신속처리와는 거리가 멀다. 어느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건 길게는 1년까지 그 법안을 심사숙고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심사숙고는커녕 양대 정당이 싸우기만 하다가 막판에 여당이 군소정당과 야합해 표 대결로 끝냈다. 날치기 공세가 반복되고 날치기를 막는다는 명분의 몸싸움도 반복됐다. 국회선진화법이 국회를 식물국회로 만든다는 점은 입증이 끝난 것이지만 이번에는 패스트트랙이 가동되면 국회는 다시 동물국회로 돌아간다는 점도 입증됐다.
국회선진화법의 5분의 3은 세계에서 드물게 가중(加重) 다수제를 채택한 미국 상원의 3분의 2를 어설프게 흉내 낸 것이다. 미국 상원에서조차 3분의 2의 합의를 요구하는 경우는 예외적인데 대통령 탄핵 의결 때와 합법적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킬 때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2분의 1의 합의로 회기를 종결시키는 꼼수를 써서 필리버스터조차 있으나 마나 한 제도로 만들었다. 정작 5분의 3의 합의가 꼭 필요할 때는 5분의 3을 회피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인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된 것은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대선 주자였을 때다.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연합이 야당이었을 때 던진 합의정치의 미끼를 덥석 문 것은 새누리당 대표인 황우여와 쇄신파들이었고 이를 침묵으로 승인한 것은 박근혜였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내놓은 경제활성화 법안 등은 모두 국회선진화법의 5분의 3 규정에 묶여 번번이 통과되지 못했다. 남 탓 할 수 없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이었다.
그때 왜 박근혜 정권은 여당이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물국회 타령만 하면서 패스트트랙을 가동할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패스트트랙이 어떻게 작동할지 그려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패스트트랙에 올릴 경우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참지 못할 정도로 조바심을 냈다고 볼 수도 있다. 개혁은 지식과 끈기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인데 둘 다 부족했다.
민주당이 정의당 등 범여권의 군소정당들에 유리한 선거법 개정을 해주는 대가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 등의 통과를 보장받았다. 민주당이 공수처법에 매달린 것은 형사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들어서라도 후환을 막으려는 것이다. 언젠가는 더러운 야합의 결과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야합일지라도 표결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아니 물리적으로 막아지지 않는다. 그런 뻔한 계산도 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한국당을 이끌었던 지도부는 아마추어였던 것이다.
패스트트랙에서 한국당과 범여권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범여권에서는 또 최루탄을 터뜨리고 해머로 문을 부수는 의원들까지 나왔을지 모른다. 한국당이 그 정도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흉내를 냈다. 정치의 품격은 의회주의를 존중하고 일관성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 앞으로 한국당이 다수의 표를 모아 패스트트랙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때 물리적으로 막는 반대편을 향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운동권 의원들의 행패를 흉내 내지 않는다고 해서 웰빙 체질인 것이 아니다. 한 번은 국회선진화법이 내세운 5분의 3이라는 합의정치의 환상에 속고 또 한 번은 패스트트랙을 통해 관철되는 2분의 1의 냉엄한 현실에 당하고도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못하면 그것이 웰빙 체질이다. 요란한 분노보다 조용한 분노가 더 무섭다는 걸 선거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01-29 죄 지어도 처벌 못 하는 계급 태어난다
파렴치한 검찰 물갈이 인사 이어
최강욱 기소에 감찰로 압박하고 향후 공수처 수사로 보복 협박
親文 실세들 처벌 점점 어려워져… 사악한 ‘2020 체제’ 시작된 듯
윤석열 검찰총장의 지시로 이뤄진 최강욱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 기소에 대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감찰 운운하면서 정권이 최강욱 기소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인 모양새가 됐다. 조국 아들에게 허위 인턴활동확인서나 써준 ‘천하의 잡범’(진중권 표현) 최강욱이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새로 짜인 추 장관-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라인이 윤 총장을 중간에 두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실전처럼 막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이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유재수 비리 의혹과 울산시장 선거공작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을 거쳐 임종석 전 비서실장과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는 상황이다. 윤건영 전 국정기획상황실장, 김경수 경남지사, 송철호 울산시장도 걸려 있다. 시험 가동의 결과는 100% 만족스러운 게 아니어서 감찰 운운하는 협박이 나왔겠지만 윤 총장 쪽도 이 지검장이 최강욱 기소안 결재를 깔아뭉개는 사보타주를 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최강욱을 기소했을 정도니 앞으로 수사가 첩첩산중이다.
백원우의 이름이 검찰 수사에서 자주 거론되자 임종석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잽싸게 사라졌다. 그러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보지 못한 파렴치한 검찰 물갈이 인사가 끝날 때쯤 다시 더불어민주당에 얼굴을 드러냈다. 손발이 잘린 윤 총장이 수사를 더 지휘해 봐야 자신에게까지는 칼날이 미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 듯하다. 임종석의 웃음에서 바야흐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하지 못하는 계급이 태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강욱은 기소된 직후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겼다. 향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하면 자신을 기소한 윤 총장을 공수처가 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에 불리한 사이비 연동형 비례대표제까지 해주면서 군소정당을 끌어들여 공수처법을 통과시킨 이 정권의 사람들이 공수처를 어떻게 활용하고 싶어 하는지 그 내심을 보여주는 말이다.
공수처는 고위공직자에 대해 누구를 수사하고, 누구를 수사하지 말지를 결정할 뿐 아니라 고위공직자 중 검사와 판사에 대해서는 수사할 권한을 넘어 기소할 권한까지 갖고 있다. 공수처가 그 존재를 각인시키는 길은 우선적으로 검·판사를 수사해 기소까지 하는 것이다. 정권의 뜻을 거스른 수사를 한 검사들이 공수처의 제1호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최강욱의 말은 검찰 물갈이로도 모자라 검사들을 향해 조심하라는 협박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공수처의 제2호 수사 대상은 판사들이 될 수 있다. 김경수 항소심 재판부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2차례나 선고를 연기했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유재수 감찰 무마 혐의가 죄질이 나쁨에도 부인 정경심 씨가 구속돼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는데 정경심 재판부는 정 씨의 보석 석방을 고려하고 있다. 판사들도 굳이 정권에 밉보이면서까지 정의를 관철하려 하지 않는다. 김경수 재판이야 허익범 특검이 상대하고 있지만 조국 정경심 최강욱 재판에서 물갈이된 검찰이 공소 유지나 제대로 할지 의문이다.
조국과 그 가족의 비리가 터져 나올 때 그들을 신성(神性) 가족처럼 취급하는 지지자들의 해괴한 정신 상태를 경험한 바 있다. 그런 정신 상태로부터 귀태 같은 공수처가 태어났다. 고위공직자 수사를 독점하게 된 공수처는 정권의 반대자들은 가혹하게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 당성(黨性)만 좋으면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노멘클라투라를 만드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검경수사권 조정은 경찰권의 충분한 분산이 이뤄지면 대체로 법치의 모범국가들을 따라가는 개혁이다. 김학의 불기소 같은 일은 이번 조정으로 방지할 수 있고 오히려 경찰판 김학의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반면 공수처는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남들이 다 하는 제도에서나 잘할 생각을 해야 한다. 형사사법제도같이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에서는 더욱 그렇다. 모자란 것들이 꼭 검증되지 않은 새것으로 하면 잘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공수처는 보수 정권이 장악해도 진보 정권이 장악해도 악이다. 그것이 악인 것은 처음 장악하는 쪽이 20년, 혹은 그 이상 집권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수처를 막지 못하면 올해는 후대에 2020년 체제라고 불릴 사악한 체제가 출범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02-12 은유로서의 질병 ‘우한 폐렴’
‘우한 폐렴’에서 黃禍로의 비약… 과학적 사고 아닌 은유적 사고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우리도 낙인의 대상 돼
우리가 중국인 사투 도와야
질병은 과학의 대상이다. 과학적으로 진단하고 과학적으로 치료할 대상이다. 그러나 인류는 흔히 질병을 종교나 문학의 용어로 표현해 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질병을 신의 진노로 여겼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 때 유럽의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여겼다. 20세기의 암에 비견될 수 있는 19세기 결핵은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사랑의 질병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문학 속 비련의 주인공은 종종 결핵환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19세기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역병이 있었으니 콜레라다. 콜레라는 1800년 이전까지는 인도 벵골 지방의 풍토병에 불과했으나 인도를 식민지배한 영국이 중국 광둥에 그 병원균을 실어왔고 결국 조선에까지 전파됐다. 1821년 조선에 처음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죽은 사람이 도성에서만 20만 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고 시골은 그 수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 왕조는 사악한 기운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한다고 여겨 콜레라가 발병하면 죄수를 석방하는 등의 방법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풀려고 했다. 천주교와 동학 같은 종교가 민중 사이에 파고드는 데는 그 앞에서 인간이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 콜레라에 대한 공포도 큰 역할을 했다.
콜레라의 원인이 세균으로 밝혀진 것은 1880년대다. 이때부터 인류를 괴롭힌 병원균이 하나씩 과학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구한말 지석영이 일본에서 배운 종두법으로 천연두를 치료하기 시작한 것도 1880년대다. 그럼에도 질병을 은유적으로 다루는 오랜 습관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980년대 에이즈가 확산되자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은 ‘성의 쾌락을 도착적으로 추구하다 신의 진노를 산 것’으로 여겼다. 에이즈가 동성애를 통해 많이 확산됐기 때문에 그런 은유가 가능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에이즈 치료의 길을 연 것은 도덕적 방종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과학적 진단에 의한 에이즈 치료제의 개발이다. 에이즈가 소멸하는 질병이 되고 있는 지금 그들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돌아선 것은 1978년이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굴기(굴起)는 중국발 전염병의 굴기이기도 하다. 사스는 2002년 대유행을 했고 지금 우한 폐렴이 그 이상의 대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스는 닭을 사육하는 더러운 환경에서 인간에게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한 폐렴은 가축이 아닌 야생동물을 함부로 먹는 식습관에서 비롯됐다는 추정이 있다.
우한 폐렴 사태를 두고 프랑스의 어느 신문은 ‘Alerte jaune(황색 경보)’이라고 칭했다. 서양에서 황화(黃禍)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죄와 벌’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전 세계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번지는 어떤 무시무시한 역병의 희생물이 될 운명에 놓이는 꿈을 꾼다. 도스토옙스키가 염두에 둔 것은 콜레라였다. 에이즈 때는 아프리카 기원을 문제 삼으며 흑화(黑禍)론이 일었다. 황화론이나 흑화론은 서양인의 나쁜 버릇 같은 것이다.
서양인의 눈에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이 모두 비슷하게 보인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묘한 입장에 빠져 있다. 그들은 중국인들처럼 바이러스 숙주 취급을 당하는 데 기분 나빠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또 중국인들을 바이러스 숙주 취급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중국인이 세계 시민이 될 만한 위생관념을 갖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조차도 19세기에 시궁창이 만연한 도시 환경이 콜레라의 온상이 됐다. 나라가 발전하면서 위생관념도 발전한다. 어느 나라나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화한다. 콜레라를 세계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영국 자신이다. 중국발 전염병도 중국이 세계의 물가를 낮춰준 긍정적 앞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부정적 뒷면이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통해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진핑은 중국을 마오의 1인 독재 시대로 되돌리려 한다. 우한 폐렴은 그 과정에서 공안통치의 강화로 확산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봉쇄된 도시에서 사투를 벌이는 중국 인민의 치열한 노력에 인류애적 차원의 성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질병은 질병일 뿐이다. 중국인을 도와서 하루라도 빨리 전염병을 극복하는 것이 모두가 황화의 잘못된 은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02-26 나라 거지꼴 만들고 웃음이 나왔나
역병 중 웃음소리 들린 청와대… 우한코로나 방역 최악 실패국
신천지에서 멈춘 역학 조사… 중국 감염원 밝혀질까 두렵나
추경 앞서 대통령 사과해야
역병이 돌 때는 조선시대 임금들도 함부로 웃지 않았다는데 우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던 날 청와대에서는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영화 ‘기생충’ 팀과 짜파구리를 끓여 먹으며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우한 코로나가 돌기 시작하자 김정숙 여사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라졌다는 말이 들렸다. 다들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타면 주변에서 말려도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나타나 예상했던 이상을 보여줬다. 고작 짜파구리 만드는 데 이연복이라는 유명 셰프를 대동하고 재래시장에 들러 장까지 봤다.
경제만 거지꼴이 아니고 나라가 거지꼴이다. 우한 코로나 확진자가 중국 다음으로 많다. 크루즈선 확진자 약 700명을 포함한 일본보다 많다. 크루즈선 확진자를 빼면 크루즈선 확진자 수 이상 차이 나는 압도적인 2위다. 한국이 또 하나의 우한(another Wuhan) 취급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민 시위에 관광 온 한국인들을 자기들 돈으로 전세기를 마련해 돌려보냈고, 모리셔스에서는 신혼여행을 간 부부들이 느닷없이 격리돼 허름한 숙소에 갇혔다. 중국 산둥성은 한국인 입국자를 강제 격리했다. 미국 등은 한국 여행경보를 최고로 올렸다.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서 두세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화를 불렀다. 기생충 파티는 미뤄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관심이 식기 전에 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모양이다. 우한 코로나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종식’을 거론하며 “이제 경제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결국 방역도 경제도 망치게 했다.
방역은 첫째도 감염원 차단이고, 마지막도 감염원 차단이다. 미국은 이 단순한 원칙에 따라 중국인 입국을 금지했고 크루즈선 확진자를 뺀 자국민 확진자를 30명대에 잡아두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지 않아 2, 3위 확진국이 됐다. 일본이야 도쿄 여름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중국의 협조를 구한다는 국민적 대의(大義)가 있다. 한국으로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찾아주면 좋지만 왜 조만간 꼭 와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미국은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면서도 빌 게이츠 같은 민간 기업인이 중국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우리는 위정자들이 궁지에 처한 중국을 돕는 것과 방역을 위해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 결과 우한 꼴이 나고 결국 중국에 마스크 보내는 도움조차 어려워졌다.
신천지 대구교회의 감염 실태가 드러나고 있으나 역학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신천지 교주 형의 장례식이 청도대남병원에서 치러진 사실을 고리로 양쪽을 관련짓는가 싶더니 흐지부지다. 질병관리본부는 감염자가 많아 검사와 치료에 주력하겠다고 한다. 추적해서 찾아봐야 감염원이 중국인이나 중국인으로부터의 2, 3차 감염자로 나온다면 정부만 곤란해지는 상황이다. 신천지에서 더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국으로부터의 입국 절차를 강화한 후에도 입국자가 10만 명을 넘었다. 60∼70%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잠재적 감염원으로는 천문학적일 정도로 많은 숫자다. 정부는 중국 입국자 중 20%가량이 한국인이고 이런 한국인이 오히려 더 ‘밝혀지지 않은 감염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한국인은 추적이 가능하다. 중국인은 추적이 어렵다. 방역을 아예 포기하면 모르되 방역을 한다면 이제라도 중국인 입국을 막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뒤늦게 전문가 간담회라는 걸 열었다. 중국인 입국 금지 불가를 인정받기 위한 자리였다. 중국인 입국 금지를 수차례 건의한 대한의사협회는 간담회에 초청받지 못했다. 정부 눈치를 보는 전문가들은 우한 코로나가 너무 많이 퍼져버려서 중국인 입국을 막아도 소용없다고 주장했다. 왜 그렇게 많이 퍼져버렸는지,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추경은 해야 한다. 하지만 추경을 요구하는 자세가 고약하다. 중국 다음 가는 최악의 방역 실패에 사과 한마디가 없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 최고회의에서 우한 코로나 사태 악화에 대해 송구하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대통령 대신 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 회의석상에 앉아서 무성의하게 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추경에 필요한 돈은 국민 주머니에서 나온다. 문 대통령이 정중히 사죄하고 추경을 당부해야 한다.
03-11 우리만 모른 방역의 기본
작은 섬나라 모리셔스도 알고 뒤통수친 중국이 보여준 방역의 기본 우리만 몰라
이웃 나라 돕기와 방역 구별 못해… 정부가 엎지른 물 국민이 수습 중
방역은 지금 와서 보니 과학이라기보다는 정책적 결단인 듯하다. 대한의사협회도 대한감염학회도 중국인 입국 금지가 방역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정책 결정자에게 권고할 뿐이다. 그 권고를 받아들이느냐 마냐는 정책 결정자에게 달렸다.
한국에서 확진자가 급증하기 시작할 때 모리셔스가 한국인 신혼부부들을 예고도 없이 허름한 숙소에 격리시키고 돌려보냈다. 처음에는 괘씸한 나라라고 여겼으나 이어지는 각국의 유사한 조치를 보면서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도 알고 있는 방역의 기본을 우리만 몰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약 110개국이 한국의 입국을 금지하거나 제한했다. 가장 뼈아픈 것은 중국이 친 뒤통수다. 우리 외교부가 항의하자 중국 관영 환추시보는 “외교보다 중요한 것은 방역”이라고 응수했다. 일본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일(訪日) 연기를 확정하자 즉각 중국인 입국을 제한했다. 그동안 중국인 입국은 막지 않으면서 한국인 입국만 막는 것은 일관성이 없어 하지 않았던 한국인 입국도 함께 제한했다. 방역은 매정한 것이다. 우리만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방역 능력이 없는 국가들이 한국인 입국 금지라는 투박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한 다음 날 호주가 한국인 입국을 금지했다. ‘2019 세계 보건안보지수’에서 호주는 한국보다 5계단 높은 세계 4위다. 세계 1위는 미국이다. 미국이 방역 능력이 다른 나라보다 모자라 중국인 입국을 금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외교는 세련돼야 하지만 방역은 투박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방역은 국방과 비슷하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고 골든타임을 놓치면 국민이 생명을 잃는다. 실제 그랬다. 한국은 평균 수준의 방역을 했을 경우에 비해 현재까지 최소한 수십 명은 잃지 않을 수도 있었던 목숨을 잃었다.
일본이 뒤늦게나마 중국인 입국을 강력히 제한하자 중국은 별 말 없이 양해했다. 그것은 중국보다 바이러스에 덜 오염된 일본이 가진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이 오염이 심해져 이런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 확진자의 절대 수로 보면 중국보다 훨씬 더 낫지만 인구 비례로 보면 중국만도 못하다. 우리로서는 덜 오염된 일본의 조치에 맞대응하려면 그 전에 더 오염된 중국의 조치에 먼저 맞대응을 했어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 방역은 외교처럼 하고 외교는 방역처럼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제 “한국이 방역의 세계 모범이 될 수 있다”며 뭐가 그리 급한지 미리 앞서서 자화자찬했다. 나중에 방역이 잘 끝났어도 방역을 책임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인데, 확진자가 신천지 관련을 빼도 세계 3, 4위권인 나라가 방역의 세계 모범 운운하니 중국의 시진핑 영웅 만들기 시도를 남 일처럼 볼 것도 아니다.
드라이브 스루 검사는 인천의료원 의사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약국을 통한 마스크 판매는 경북 문경의 한 약사의 청원에서 시작됐다. 코로나19 신속 검사키트를 개발한 것은 민간기업들이다. 한국판 ‘칼레의 시민들’은 정부가 엎지른 물을 최대한 잘 수습하고 있다. 정부만 궁지에 처한 이웃 나라를 돕는 것과 자국민을 위해 꼭 필요한 방역을 하는 것을 구별해 결정적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평균 이상이었을 것이다.
박 장관은 감염원의 정확한 목록도 내놓지 않은 채 “감염의 가장 큰 원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가 언젠가는 감염원의 정확한 목록을 내놓기 바란다. 신천지 감염원도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꼭 밝혀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의 판단처럼 설혹 감염의 가장 큰 원인이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방역 책임자는 중국인 입국 금지와 함께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을 격리하는 더 일관성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반성했어야 한다.
중국인이든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든 중국발 모기(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것은 과학자에게 물어볼 것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창문을 아무리 틀어막아도 비집고 들어오는 모기가 있어 팬데믹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으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창문을 최대한 막는 것이 사람이 할 바를 다하는 방역의 진인사(盡人事)다.
03-25 여론조사 회사도 못 믿을 선거 여론조사
2017년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여론조사, 선거 결과와 너무 달라 조사 회사의 편향 방치도 의심돼
이번 4월 총선에서도 격차 크면 이대로 더 이상 놔둬선 안돼
여론조사 회사는 자신이 한 조사를 믿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2018년 6·13지방선거에서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별 득표는 자유한국당이 27.76%였다. 그러나 선거 직전인 11, 12일의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한국당의 경우 18.7%로 개표 결과와 무려 9%포인트의 차이가 났다.
리얼미터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갤럽은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을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정당지지도 조사를 매주 했다. 지방선거 1주일 전의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한국당 지지도는 11%였다. 이 수치와 한국당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 27.76%는 무려 16.76%포인트 차이가 난다. 정당지지도와 광역의회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다른 것이지만 이 정도 격차가 나면 정당지지도 조사는 의미 없다.
지상파 방송 3사가 칸타퍼블릭 코리아리서치센터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광역단체장 여론조사를 보면 실제 투표 결과와의 차이가 더 크다. 여론조사는 당시 지방선거를 1주일여 앞둔 6월 2일부터 5일까지 실시됐다. 서울에서는 박원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49.3%, 김문수 한국당 후보가 13.6%, 안철수 바른미래당 후보가 10.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김 후보가 약 10%포인트 오른 23.34%, 안 후보가 약 9%포인트 오른 19.55%를 얻었다. 박 후보는 3.5%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지방에서는 차이가 더 컸다. 대구에서 권영진 한국당 후보는 25.4%포인트를, 부산에서 서병수 한국당 후보는 16.8%포인트를 더 얻었다. 대부분의 한국당 후보가 여론조사보다 훨씬 큰 지지를 받았다. 의미가 없는 여론조사의 수준을 넘어 의미를 왜곡하는 여론조사였다고 할 수 있다.
2018년 6·13지방선거 전에는 2017년 대선이 있었다. 대선이 끝난 이후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의 용역으로 2016년 4월 12일부터 2017년 5월 3일까지 심의위에 등록된 801개 대선 여론조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가 나왔다. 그에 따르면 전화면접에 비해 ARS 방식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율이 예외 없이 더 높게 나왔다. 또 무선 ARS 방식만 사용한 경우가 유무선 혼용 ARS 방식보다 문 후보 지지율이 대체로 더 높게 나왔다.
지난달 21일 리얼미터가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 이낙연 민주당 후보와 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후보가 50.3%, 황 후보가 39.2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 조사의 다른 설문에서 응답자의 무려 70.2%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대선 당시 득표율은 41.08%, 종로구에서는 41.15%를 얻었다. 종로구의 투표율이 77%였기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 지지자들은 32% 정도가 포함되는 것이 적절하다. 무려 2배가 넘었다.
리얼미터가 의도적으로 이런 편향을 방치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이 후보가 황 후보보다 높게 나온다. 다만 여론조사의 실태에 비춰 보면 샘플링(sampling)의 체계적 왜곡으로 실제보다 더 높게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응답을 선호하고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응답을 선호하지 않을 경우 한쪽으로 치우친 샘플이 나오기 쉽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런 경향이 현저히 강화됐다.
여론조사의 정확성이 전 세계적으로 떨어졌지만 우리나라처럼 심각한 경우도 드물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현재의 조사비용이나 조사기법으로는 대표성 있는 샘플을 얻기가 어렵게 되자 아예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뻔히 알 수 있는 설문 조항의 편향이나 샘플링의 편향조차도 방치하면서 투매하듯 결과를 던져버리는 것일 수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4월 창원 성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선거 1주일 전 여론조사로는 여영국 정의당 후보가 강기윤 한국당 후보를 24.1%포인트 차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 결과는 강 후보가 0.54%포인트 앞섰다. 최악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실제 득표율과 여론조사 결과 사이에 큰 차이가 난다면 있어서 없는 것만 못한 여론조사를 어찌할지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
04-08 다 못하는데 방역만 잘하는 정부는 없다
아무도 못 간 未踏의 길 간다는 주제넘은 발상 하다 결국 포기
실패할 뻔한 방역, 성공 만든 功… 마땅히 국민과 의료체계에 돌려야
숟가락만 얹고선 가로채선 안 돼
유럽발 입국자에 대한 전수조사가 처음 시행된 지난달 22일에만 19명의 확진자가 쏟아졌다. 이후 매일 입국자 중에서 적지 않은 확진자가 나왔고 날에 따라서는 신규 확진자의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할 때 중국발 입국자를 전수조사했다면 어땠을지 가늠할 수 있다. 최소한 수백 명의 중국발 감염자가 들어와 휘젓고 다녔다는 말이 된다. 당시 중국인 입국을 금지하고 중국발 한국인을 자가 격리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안 듣더니 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하자 모든 입국자에 대한 자가 격리 조치에 들어갔다. 선진국도 가지 못한 미답(未踏)의 길을 걷는다는 주제 넘는 발상을 하다가 비로소 이제야 다른 나라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창문 열어 놓고 모기 잡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모기 없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중국인보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이 더 큰 감염원”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중국인만 감염시키고 중국에 있는 한국인은 감염시키지 않을 리가 없다. 중국인 입국자를 차단하라고 하면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인 입국자에 대해서도 자가 격리 등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장관이 말꼬리나 잡으면서 책임 회피만 하더니 나중에는 자국민을 입국 금지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라는데 엉뚱하게 자국민 입국 금지 타령을 하니 듣는 쪽은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코로나 지옥을 겪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도 더 일찍 더 철저하게 중국 쪽 입국 관리를 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 31일 중국발 입국을 제한하며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고 떠벌렸지만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미 늦은 대응이었던 데다 입국 제한 후에도 미국 시민 등 4만 명이 중국에서 들어와 철저하지 못했다”. 유럽의 감염원이 된 이탈리아도 1월 31일 중국인 관광객 2명이 확진자로 드러나자 즉각 중국발 직항노선의 운항을 중단시켰으나 다른 국가를 경유한 항공편과 인근 국가에서 육로와 해로로 들어오는 중국인 관광객을 막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처음에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 지도자들만큼도 신중하지 못했다. 중국 쪽 창문을 열어놓고 영화 ‘기생충’ 제작진과 파안대소(破顔大笑) 파티를 여는 여유를 부리면서 방역도 외교도, 방역도 경제도 잡겠다고 하다가 된통 당했다. 다행히 현명한 국민들이 열심히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씻고 종교의 자유 등 기본권 침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한 데다 의사 약사 등 현업의 전문인들이 드라이브스루 검사와 약국 마스크 판매 같은 획기적 아이디어를 내 성공적 방역으로의 대반전을 이뤄냈다.
대대적이고 신속하고 투명한 검사는 정부가 주도한 것이지만 의도가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정부가 초기 방역 실패의 책임을 신천지에 뒤집어씌우려고 마녀사냥하듯 방역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측면이 있다. 그마저도 정부의 의지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민간 기업들이 메르스 사태 이후 조성된 새로운 기반 위에서 개발해 공급한 신속검사키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의료 공백 사태를 막아 치사율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역대 정부가 가꿔온 효율적인 건강보험 제도 덕분이다.
한국의 성공적 방역 이후 문 대통령과 외국 정상이 통화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국민과 나라를 대표해 통화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말 잘한 게 있는 정부는 공을 국민에게 돌린다. 대개 숟가락만 얹은 정부가 국민의 공을 가로채려 하고, 적폐몰이를 일삼는 정부가 과거 정부의 공까지 제 것으로 만든다.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우며 매년 슈퍼 적자예산을 편성해 국가를 빚더미에 앉히고도 성장률을 사실상 1%대로 떨어뜨렸다. 이벤트뿐인 비핵화 협상 뒤에서 북한 김정은은 핵무기 개발과 단거리미사일 시험을 계속해 한반도를 더 위험에 빠뜨렸다. 조국 씨의 장관 임명 강행으로 국민을 우롱하더니 임명을 철회한 후에도 ‘마음의 빚’ 운운하며 다시 우롱하고 있다. 공수처법 관철을 위해 해괴한 선거법을 통과시켜 아이들 앞에 설명하기도 창피한 선거를 치르게 한다. 경제도 안보도 정치도 제대로 못하면서 방역만 잘하는 그런 정부는 없다.
04-22 보수, 자학 아닌 반성을 해야
41% 득표 정당 해체 주장은 무리… ‘숨은 보수표 없다’ 주장도 거짓
섣부른 자학은 냉정한 반성 아냐
통합당, 계파 공존에서 길 찾아야 중도로의 확장과 대선 전망 있다
반성도 불필요하게 자학하는 것이 되면 생산적인 반성이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의 득표율이 20%나 30%에 그쳤다면 주류 정당으로서는 생명이 끝난 것이니 해체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구 의석수에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득표율은 41.4%에 이르렀다. 비례정당 투표에서도 더불어민주당 계열 두 비례정당의 득표를 합산한 것과 5%포인트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물론 41.4%의 득표는 아깝게 지기에 딱 좋은 수치다. 그래서 지역구에서 대패했다. 그러나 아깝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지는 게 뻔한데도 ‘정신 승리’만 외친 것은 아니다. 총선 전 전망은 코로나19 위기가 문재인 정부의 온갖 실정을 뒤덮으면서 잘하면 통합당이 민주당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정도였다. 다만 한선교의 어처구니없는 비례대표 공천부터 왜 했는지 알 수 없는 세월호 막말과 그 대처까지 최악의 선거 관리가 이어지면서 접전 지역이 대부분 민주당 쪽으로 넘어간 것이 대패의 원인일 것이다.
숨은 보수표가 없었다는 것도 자학적인 분석이다. 이번 총선은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이 매주 실시하는 정당 지지도 조사가 실제와 얼마나 불일치하는지 보여주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했다. 여론조사에서 지난 3년간 통합당의 지지도는 20% 전후에 머물렀지만 이번 투표에서 40%를 넘겼다. 숨은 보수표가 있었지만 이기지 못한 것일 뿐 여론조사에 반영되지 않은 숨은 보수표는 상당히 컸다.
한 번 하고 마는 선거라면 20%로 지든 30%로 지든 40%로 지든 마찬가지다. 졌다는 사실을 통렬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거는 한 번 하고 마는 게 아니다. 5 대 4로 진 경기를 5 대 1로 진 것처럼 자학해서는 다음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실효적 분석을 하지 못한다. 불필요한 정도로 자학해서 오버슈팅(overshooting)하면 또 지게 된다.
통합당은 황교안과 김종인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으로 총선을 치렀다. 서로 욕할 것 없다. 김종인을 불러들인 황교안이나 황교안이 부른다고 온 김종인이나 똑같다. 황교안은 사퇴의 변으로 ‘화학적 결합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 황교안이 유승민과도 화학적 결합을 못 했는데, 김종인과 화학적 결합을 할 리가 없다. 한배를 탔던 이상 황교안 유승민 김종인 모두 누가 더 책임이 있냐고 따지는 것이야말로 품위 없는 짓이다.
한쪽에서는 통합당이 꼰대당 체질을 벗지 못해 졌다고 비판하고, 한쪽에서는 통합당이 정체성을 훼손하다가 졌다고 비판한다. 진실은 꼰대당 체질을 벗으려 노력했으나 어설픈 중도 흉내로 끝났다는 데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김종인의 중도 성향이 탐난다 할지라도 일단은 김무성·유승민계와의 화합적 결합이 중요하고, 그런 결합이 이뤄진 상황에서 더 큰 확장을 모색해야 한다.
보수정당의 약점이 계파정치를 할 만한 도량이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서 친이계가 친박계를 박해하는 바람에 친박계가 탈당해 친박연대를 만들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친박계가 김무성·유승민계를 박해하는 바람에 김무성·유승민계가 탈당했다가 김무성계가 먼저 돌아오고 유승민계가 총선을 앞두고서야 뒤늦게 돌아왔다. 이 정도 경험이 쌓이며 불행을 겪었으면 서로 공존하는 정치를 모색할 때도 됐다.
이번 총선에서는 충청 지역의 정진석과 김태흠의 저력이 돋보였다. 인천의 윤상현은 또다시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구에서 김부겸을 이긴 주호영, 부산에서 김영춘을 이긴 서병수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험지에 차출돼 아깝게 패배한 사람 중에서 오세훈 같은 이는 당선자와 마찬가지로 대우해야 한다. 유승민 홍준표는 출마나 당락 여부와 관련 없이 늘 보수정당의 인재다. 5060세대가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주장도 3040세대 정치인이 해야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들이 중심이 돼 계파와 세대를 뛰어넘는 정치를 해 보인다면 통합당의 미래가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황교안이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나간 것은 패배 뒷면의 수확이다. 선거 결과가 어정쩡해서 남아 있었다면 정말 골치 아플 뻔했다. 아직도 남긴 했지만 비호감 의원들이 대거 공천과 선거에서 탈락한 것도 생각해 보면 나쁠 게 없다. 통합당이 살아나려면 빨리 대선의 깃발을 들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겸손하게 찾아보면 그런 인물이 없지도 않다.
05-06 정치의 실패, 정치학의 실패
총선 民心의 부정확한 분석… 또 다른 정치 실패 낳을 우려
민주당 너무 의기양양하게 해도, 통합당 너무 의기소침하게 해도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 안돼
최근 4·15총선 결과를 분석하는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어느 분의 질문이 날카로웠다. 세미나 발표자들은 정치학자들이었는데 그는 “정치학자들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위성비례정당이 만들어질 줄 몰랐는가”라고 물었다.
경고는 있었다. 지난해 8월 한국정당학회 토론회에서 영남대 정준표 교수가 알바니아 사례를 거론하면서 위성비례정당 등장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보다 앞서 2018년 11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선거제도 개혁 관련 공청회’에서 경북대 강우진 교수가 비슷한 경고를 보냈다. 다만 대학총장까지 지낸 그 질문자조차도 정치학계가 미리 경고하지 못했다고 느낄 정도로 경고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정치적 의제를 공론화할 적합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신문에 칼럼을 쓰는 정치학자들일 터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위성비례정당을 경고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이미 물 건너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계속 거론하며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폐쇄적 양당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것이라는 찬사로 일관했다. 어떤 이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비판했지만 많은 비판 내용 중에 단 하나 위성비례정당에 대한 경고만 없었다. 어떤 이는 아예 이 주제를 무시했다.
위성비례정당의 등장은 굳이 알바니아 사례를 알아야 경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당의 생리를 안다면 전문가든 아니든 웬만하면 다 생각할 수 있다. 필명을 날리는 정치학자들이 새 제도의 허점을 지적하기는커녕 문제가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했다니 한마디로 학문의 실패다. 총선에서 봤듯이 정치의 실패로 이어진 학문의 실패다.
한 정치학자는 총선 직후에 쓴 칼럼에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난 3년간 보수정파에 대한 지지율은 20% 전후에 머물러 있었지만 있지도 않은 숨은 보수를 만들어내며 촛불 집회 이후의 변화된 현실을 부정했던 결과가 오늘날 이런 선거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자답지 못한 안이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다.
총선 직전의 리얼미터와 한국갤럽의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미래통합당의 지지율은 각각 29.5%와 23%였다. 총선 직후의 조사에서는 각각 27.7%와 22%였다. 실제 투표에서 통합당은 41.4%를 득표했다. 여론조사 회사 측은 정당지지도 조사는 전 유권자를 모집단으로 하고, 득표율은 투표한 유권자만 모집단으로 하기 때문에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통합당은 41.4%를 득표했지만 투표율은 66.2%에 그치므로 곱하면 얼추 27%의 지지도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더불어민주당은 49.9%를 득표했으므로 33%의 지지도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총선 전후 그 지지도는 50%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나온다. 문제는 민주당의 지지도는 실제 득표와 비슷한데 통합당만 15∼20%포인트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여론조사 회사들은 지금도 정당지지도 조사를 계속 발표한다. 가짜 뉴스는 가짜 뉴스로 끝나지만 가짜 여론조사는 그것을 인용한 수많은 가짜 분석을 생산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정치 분석의 중요한 기초 자료다. 정치학자라면 가짜 여론조사를 인용해 가짜 분석이나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일본의 정치 여론조사는 어떻게 무려 40∼60%의 높은 응답률을 끌어내는지 알아내서 고작 5∼10% 수준인 한국 정치 여론조사의 낮은 응답률을 제고하는 데 기여할 생각부터 해야 한다.
4·15총선은 코로나19라는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변수로 인해 문재인 정권 3년에 대한 중간평가가 되지 못했다. 민주당을 필요 이상으로 의기양양하게 하는 것도, 통합당을 필요 이상으로 의기소침하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당이 총선 압승을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긍정 평가로 여겨 유턴하지 않고 직진하면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저하다 초기 방역에 실패한 것처럼 경제와 안보의 파탄을 피할 수 없다. 통합당이 총선 참패를 정권 견제에 대한 부정 평가로만 여겨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 반대와 찬성을 오간 ‘샤워실의 바보’ 같은 짓을 계속하면 정권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
민주당의 오버슈팅도 통합당의 오버슈팅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니 정치학자들의 오버슈팅이야말로 바람직하지 않다. 정확한 자료에 의해 민심의 분량을 정확히 계산해주는 것이 향후 또 다른 정치의 실패를 막기 위한 정치학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05-20 금기의 뒷면에서 군림한 윤미향
감시 체제 느슨한 금기의 뒷면… 배임 횡령 유혹 작동하기 쉬워
위안부 할머니 향한 협박은 자신이 피해자 결정한다는 무도함
대리인이 주인 행세 말아야
독일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책 ‘토템과 터부’에는 터부(taboo)의 뜻을 설명하는 친절한 부분이 나온다. 터부는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뜻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성한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섬뜩하고 불결한 것을 의미한다. 터부는 본래 태평양 폴리네시아인의 말이다. 폴리네시아어에서 터부의 반대말은 평범한 것을 뜻하는 노아(noa)라고 한다. 터부는 신성한 쪽으로든, 섬뜩하고 불결한 쪽으로든 특별한 것이다.
터부가 가진 두 가지 상반된 방향의 뜻은 실은 내적으로는 긴밀히 연결돼 있다. 죽음이나 정조의 상실은 섬뜩하고 불결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우리나 우리의 가족을 대신해서 섬뜩해지고 더럽혀졌다면 그 존재는 신성하다. 우리가 그 존재의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나 우리의 가족이 죽거나 정조를 상실했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우리 시대의 터부다.
터부는 금지와 연결돼 있다. 그래서 금기(禁忌)라고 한다. 행동으로든 말로든 터부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금지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루는 어려움은 여기서 비롯된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학문적인 실증정신으로만 혹은 엄격한 법률 개념으로만 다루려는 시도가 반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가 일종의 제의(祭儀)적 차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윤미향 사태는 금기의 뒷면에서 금기를 다루는 자들의 충격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위안부 피해자를 돕기 위한 정부의 보조금, 기업의 후원금, 시민들의 기부금이 쏟아지지만 금기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금기의 그늘에서 감시 체제가 느슨해지고 배임과 횡령의 유혹이 작동하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윤미향이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에게 한 협박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는 “약 30년 전 이용수 할머니가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로 떨면서 ‘저는 피해자가 아니고요. 제 친구가요…’라고 하던 그때의 상황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라는 글을 최근 페이스북에 올렸다. 위안부 피해자가 있고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고 위안부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자신이야말로 누가 위안부 피해자이고 누가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이용수 할머니에게 상기시킨 것이다.
윤미향의 협박은 한 할머니에 대한 협박 이상이다. 누가 위안부 피해자이고 누가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지 그 경계선이 확정돼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암시를 던진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가진 일관성에 간혹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그 후신인 정의기억연대가 그 문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오래전 기억이 정확할 수도 없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면이 있다. 그런 점을 이용해 그들은 할머니들 위에 군림하는 힘을 갖게 됐을 수 있다.
이용수 할머니 이전에 심미자 할머니가 있었다. 심 할머니는 16년 전 정대협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정대협이 정해 ‘기억의 터’ 조형물에 새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47명의 명단에 들지 못했다. 심 할머니는 가해자인 일본의 최고재판소로부터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임을 인정받은 피해자인데도 그랬다. 신이 있어서 신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전이 있어서 신이 있다는 말이 있다. 정대협과 정의연은 말하자면 신전을 운영하는 사제들이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윤미향 비판은 정의연이 더 이상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편해졌다는 뜻이다. 할머니들을 이용해 먹지만 말고 실질적 도움을 달라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기부금이 자신들을 돕기보다 교육과 홍보에 더 많이 쓰이는 것도 불만이지만 기부받은 돈으로 맨날 교육하고 홍보한다고 하는데 정말 빼돌리지 않고 교육이나 홍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금기의 자리에 앉혀 놓고 이용하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 할머니들을 일상의 자리로 내려오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생존하신 분들도 연세가 많다. 살아서 금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일본으로부터 보상을 받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심리다. 일본의 보상 문제에 정의연이 대리인 주제에 주인 행세 하며 더 이상 끼어들어선 안 된다.
06-03 김종인이라는 포퓰리스트
박사학위 주제는 분배와 재분배, 경제수석 때도 성장에는 무관심
평생 나랏돈 쓰는 것만 궁리… 퍼주기 경쟁 무책임할수록 유리
김종인식 처방 이미 효과 떨어져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한국외국어대 독일어학과를 나와 서독 뮌스터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재정학 분야의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지도교수는 소련 경제 전문가였고 그의 권고로 중국 경제에 대해 써보려고 준비하다가 뜻하지 않게 바꾼 주제가 ‘개발도상국가에 있어서의 분배와 재분배’다. 철학이나 신학이면 몰라도 1960년대에 경제학을 공부한다면 미국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그는 유학에서 돌아와 서강대에서 가르쳤다. 교수 시절인 1980년에 그가 낸 유일한 학술적 저서인 ‘재정학’을 읽어보면 유학까지 가서 공부해 쓸 내용인가 싶을 정도로 평이하다. 가인(街人) 김병로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뛰어난 학재(學才)는 보이지 않으니 당시 집안에서 기획 유학을 보내 교수로 만든 케이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최근 낸 회고록에서 처삼촌이 되는 박정희 시절 비서실장 김정렴 씨를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지만 국내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지도 않아 선배도 없고 경제학도 생소한 곳에서 배운 그를 청와대의 처삼촌이 아니면 누가 찾아줬을까. 그는 유신 시절 정부 프로젝트에 여러 차례 초청받아 참여하고, 전두환 집권 과정에서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재무분과위원으로 활동한 끝에 두 차례나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돼 1987년 민주화를 맞는다.
그는 유학을 떠나기 전 24세의 나이에 정치인 가인의 비서를 맡으면서 정치에 일찍 눈을 뜰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전두환 시절 민정당 전국구 의원 2차례, 노태우 시절 경제수석을 거쳐 다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지내면서 경제 분야의 정치기획가로서 경험을 쌓게 됐다. 공부보다는 정치가 적성에 맞은 듯하다.
군사정권 시절의 여당 정치인인 데다 1994년 민자당 전국구 의원 당시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사라지는가 했던 그가 존재감을 지니고 다시 불려나온 것은 정계가 2011년 무상급식을 시발로 퍼주기 경쟁에 돌입한 이후다. 그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박근혜 쪽으로, 2016년 총선에서는 문재인 쪽으로 불려 다녔다.
1987년 헌법에 그가 넣었다는 경제민주화의 개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서양에서 경제민주주의라고 하면 노동자자주관리나 노사공동결정을 의미한다. 그런 건 아니란다. 알쏭달쏭한 경제민주화 덕분에 그가 이쪽저쪽 불려 다녔지만 실제 한 일은 박근혜 쪽에서는 노인들에게 월 20만 원을 지급하는 공약을 만들고, 나중에 문재인 쪽으로 가서는 한술 더 떠 노인들에게 월 30만 원을 지급하는 공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개발이 중요한 노태우 시대에 경제수석을 지낸 사람인데도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다. 재정학자가 대체로 성장에는 문외한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재정학자라면 최소한 세입과 세출의 균형에는 관심을 가진다. 그는 세입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돈을 쓰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가 다시 보수 정당 쪽으로 불려왔다. 그의 전략은 늘 그렇듯이 상대편보다 더 많이 지르는 것이다. 4·15총선을 앞두고 긴급재난지원금의 지급 범위를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조차 70%로 정한 것을 100%로 바꿔버린 것이 그다. 그러나 통합당은 표를 얻지 못하고 그 제안을 잽싸게 낚아챈 민주당이 공을 독차지했다. 김종인식 처방에 내성이 생겨 그 약효가 다해 가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퍼주기 경쟁은 더 무책임한 쪽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보수정당은 이 게임에서 질 수밖에 없다. 그는 앞으로 청년 기본소득을 도입할 뜻을 밝혔다. 보수정당이 얼마를 주든 민주당은 그 이상을 줄 준비가 돼 있다. 기본소득 등 온갖 공상적 아이디어가 민주당 쪽에 판친다. 보수정당이 그중 하나를 받으면 민주당은 죄의식마저 털고 더 얹어서 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20년 집권 혹은 100년 집권의 묘책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묘책이다.
보수정당은 ‘누가 더 많이 퍼주나’의 게임을 ‘누가 더 많은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나’의 게임으로 바꿀 때만 승리의 기회가 온다. 그러나 평생 나랏돈 버는 궁리는 없이 나랏돈 쓰는 궁리만 해온 80대 노인은 자기편이 이길 수 있는 게임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편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겠다고 덤비고 있다. 보수정당마저 상대편보다 더 많이 퍼줘 선거에서 이기려다 망한 나라들이 더 이상 남 일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