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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231] 남한산성 비석 숲에 숨은 복잡다기한 역사 - [240]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상림은내고향 2020. 12. 16. 18:03

박종인의 땅의 歷史  조선일보

 

2020.10.07

[231] 남한산성 비석 숲에 숨은 복잡다기한 역사

“선정비들을 강물에 집어던져야 합니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남문 입구에 비석 숲이 있다. 산성 안팎에 서 있던 각종 선정비(善政碑)를 모아놓은 곳이다. 디귿 자로 도열해 있는 비석은 모두 30기다. 조용하다. 방문객 동선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 선정비는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에게 백성이 주는 선물이다. 그럴까. 이제 알아보자.

 

▲남한산성 남문 입구에 있는 비석 숲. 남한산성과 인연이 있는 고관대작들의 공덕비다. 시대를 풍미한 흥선대원군 선정비가 2기, 다른 의미로 시대를 풍미한 민씨 척족 권력자 민영소의 공덕비도 있다. /박종인

 

공무원 체크리스트 수령칠사(守令七事)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문명계로 진입하면 사회를 다스리는 규율이 생기고 규율을 집행하는 국가 조직이 운영된다. 집행하는 자는 공무원이다.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국가가 필요한 세금을 거두려면 그 공무원이 기강이 서 있고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문명국가라면 응당 공무원계를 감찰하는 제도 또한 운영했고 운영한다. 예컨대 이런 것.

 

‘매년 말 관찰사는 수령칠사(守令七事)의 실적을 왕에게 보고한다. 칠사는 논밭과 뽕밭을 성하게 하고(農桑盛·농상성), 인구를 늘리고(戶口增·호구증), 학교를 일으키고(學校興·학교흥), 군정을 바르게 하고(軍政修·군정수), 부역을 고르게 하고(賦役均·부역균), 송사를 간명하게 하고(詞訟簡·사송간), 간사하고 교활한 풍속을 그치게 하는 것(奸猾息·간활식)이다.(’대전통편' 이전(吏典) ‘고과·考課’)'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수령이 해야 할 일곱 가지 업무 고과 체크리스트다. 이 고과에 합격한 수령은 더 기름진 마을로 영전하거나 포상을 받았다. 주민은 선정비를 세워 그들을 기렸다. 선정비 이름은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떠나도 생각하겠다는 ‘거사비(去思碑)’, 자기네를 아끼고 사랑해줬다는 ‘애휼비(愛恤碑)’ 등이다. 매우 큰 업을 쌓아 이별하기 싫어 곡을 한다는 ‘타루비(墮淚碑)’도 있다. 전남 여수 진남관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타루비가 그 예다. 그런데-.

 

분기탱천한 영조

박문수가 아뢰었다. “평양에서 보니 앞뒤로 살아 있는 감사 사당과 선정비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오로지 습관처럼 아첨하고 기쁘게 하려고 백성에게 건립 비용을 거둬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마땅히 대동강에 비석을 던져버려야 합니다(必沈其碑於大同江·필침기비어대동강).” 영조가 말했다. “상원군수 이화 생사당은 내가 일찌감치 없애라 했거늘! 위가 탁하니 아래도 맑지가 않구나(上濁下不淨 상탁하부정). 저 따위 감사가 어찌 아랫것에게 선정비를 금하랴. 현직 감사를 엄히 감찰하라.”(1735년 영조 11년 1월 3일 ‘승정원일기’)

 

이후 영조는 온갖 분야에 추상같은 규율을 잡아나갔다.(영조가 벌인 상상을 초월한 규율 잡기는 ‘땅의 역사 223. 무법천하 막장정치 영조-노론 연합정권’편 참조) 결국 영조 42년에 선정비를 세운 사또는 물론 숨어있던 선정비를 발견한 사또까지 왕명 위반으로 규정해 중형을 내리도록 규정했다.(1766년 6월 5일 ‘영조실록’)

 

난세 때마다 급증한 선정비

안 그런 선정비도 물론 많지만, 선정비는 학정의 상징이다. 2007년 충북대 교수 임용한이 경기도 안성, 죽산 역대 수령 305명 가운데 현존하는 선정비 주인공 57명을 분석해보니 8%만이 ‘수령칠사’에 의해 우수 수령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임용한, ‘조선 후기 수령 선정비의 분석’, 한국사학보 26집, 고려사학회, 2007) 조선 정부 조정에서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처음 선정비 문제가 공론화된 때는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였다. 인조 9년 “요즘 조금도 공이 없는 지방관들이 나무로 돌로 비석을 세우고 있어 문제”라는 보고가 올라왔다.(1631년 12월 12일 ‘인조실록’) 그전까지는 드문드문 세웠던 선정비가 곳곳에 서고 있다는 보고였다. 인조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현종 때인 1663년 처음으로 왕명으로 선정비 건립 금지령이 떨어졌다. 1664년에도 또 금지령을 내렸다. 그래서인지 현종 대 선정비는 이전에 비해 그 수가 급감했다. 경기도 과천, 안성, 죽산 세 고을은 현종 재위 기간에 세운 선정비는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 누가 자기 치적 과시를 솔선수범해서 멈추겠는가. 숙종 10년인 1684년 또 선정비가 즐비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숙종은 “금한 일이 이어지니 해괴하다”며 1663년 이후 세운 선정비들을 모조리 없애라고 명했다.(1684년 8월 3일 ‘숙종실록’) 막강 권력자 숙종이 칼을 갈자 또 선정비는 자취를 감췄다. 영조가 아예 왕명 위반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그 숫자는 더 줄어들었다.

 

민란(民亂)의 시대, 19세기가 왔다. 조선왕국 기저질환인 삼정문란이 극에 달하던 시대였다. 헌종 때 늘어나기 시작한 선정비는 1863년 고종 즉위와 함께 급증했다. 심지어 한 사람이 여러 개 선정비를 세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재위 기간이 비슷한 숙종 때의 7배, 영조 때의 8배다.(임용한, 앞 논문) 폭력적으로 정권을 교체한 인조 때, 그리고 혼탁한 국정이 극에 달했던 고종 때 이 선정비들이 팔도에 출몰한 것이다. 갑자기 선량한 목민관이 출현했을 리 만무하니, ‘수령칠사’가 수령 본인 혹은 주변에 달라붙은 모리배에 의해 농단당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그 시대 땅에 꽂힌 비석들이다.

 

각양각색 선정비

대표적인 증거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아비 조규순 영세불망비다. 멀쩡하게 있던 비석을 없애고 값비싼 오석(烏石)으로 새 비석을 만든 뒤 비각(碑閣) 건립 명목으로 군민에게 1000냥을 뜯어낸 비석이다. 이는 이듬해 동학혁명의 불씨가 됐다.

 

▲전북 정읍에 있는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영세불망비. 동학혁명의 불씨가 된 역사적 비석이다. /박종인

 

문경새재에는 문경현감 이인면(李寅冕) 애휼비(1889년)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보기 드문 마애비(磨崖碑)다. 이인면은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고 벌금을 적게 부과해 칭송받은’ 수령이었다.(1886년 4월 29일 ‘고종실록’)

 

▲문경새재에 있는 문경현감 이인면 마애 애휼비. 1889년에 세웠다./박종인

 

충북 보은에 있는 선영홍(宣永鴻) 선정비(1922년)는 대한제국 비서경이었던 선영홍이 고향 고흥 소작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세금을 스스로 부담한 덕으로 소작민들이 세운 공덕비다. 철로 만들었다. 그 옆에는 그 아들 선정훈이 자기 집에 학교를 짓고 흥학(興學)을 한 공덕비가 서 있다. 관선정(觀善亭)이라는 이 학교에서 한학 대가 임창순이 공부를 했다. 이렇게 선정비는 쇠, 바위, 비석 등등 모양도 재질도 다양하고 새겨 넣은 진의(眞意)도 다양하다.

▲충북 보은에 있는 선영홍 시혜비. 대한제국 때 비서원경이었던 선영홍은 소작농가에 소작세를 면제해주고 땅을 나눠줬다. 이 시혜비 옆에는 그 아들 선정훈의 흥학 공덕비도 있다. 관선정이라는 서당을 만들어 후학을 가르쳤다. 이 서당에서 한학자 임창순이 공부했다. /박종인

 

다시 남한산성 비석 숲에서

남한산성 비석 숲에는 무슨 사연이 숨어 있다는 말인가.

 

입구 왼쪽 맨 처음 서 있는 비석은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다. 세운 날짜는 청나라 연호로 동치 3년, 1864년이다. 고종이 등극한 이듬해다. 세도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할 때인지라 ‘대원군’이 아니라 극존칭 ‘대원위 대감’이라 새겨져 있다. 매천 황현은 대원군 시대를 일러 ‘위세가 우레와 불 같아서 모든 관리와 백성이 두려움에 휩싸여 항시 법을 두려워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실각하고 왕비 민씨 세력이 권력을 잡은 뒤로는 ‘백성이 민씨들 착취를 견디다 못해 한탄하며 대원군 정치를 그리워했다’고 했다.(황현, ‘매천야록’ 대원군의 위세)

 

그 민씨 성을 가진 광주유수 겸 수어청 수어사 민영소(閔泳韶) 영세불망비가 대원군 선정비 대각선 방향 끝자락에 서 있다. 민태호·민영목·민영익·민응식과 함께 ‘단군 이래 최악의 부패 정권’이라 낙인찍힌 민씨 정권 실력자였다. 임오군란(1882년) 때 왕십리 군인들이 그 집을 불태웠을 정도다. 또 1894년 홍종우를 사주해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을 암살한 사람이기도 했다. 경술국치 직후 총독부에서 조선 귀족 작위를 받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장인 민치구 선정비도 보인다. 고종을 차기 왕으로 적극 밀었던 영의정 조두순도 보인다. 그 역사를 저 비석이 품고 있다. 나라가 격동하던 그 시대 사람들이 몇 걸음 거리 숲 속에 모여 있다.

 

세월은 가고, 공화국이 되었다. ‘수령칠사’는 완수되고 있는가. 비석들에게 입이 있다고 치고, 가서 물어보자.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 고종 즉위 후인 1864년에 건립돼 대원군이 아니라 '대원위대감'으로 새겨져 있다.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박종인

 

▲1891년 세운 광주유수 민영소 영세불망비. 민영소는 민태호·민영목·민영익·민응식과 함께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던 민씨척족 실력자다. 망국 후에는 총독부로부터 조선 귀족 작위를 받았다./박종인

 

[232]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조선을 구원할 미국 공주님께 옥과 비단으로 예우를 베푸시라”

 

1905년 5월 러일전쟁이 일본 승리로 끝났다. 일본이 ‘조선을 위한 성전(聖戰)’이라는 명분으로 노골적으로 조선 정복욕을 드러낸 전쟁이었다. 1905년 11월 마침내 조선은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에게 넘어갔다. 그때 대한제국 권력자들은 어떤 노력을 했을까. 최고 권력자 고종을 포함해 당시 국운(國運)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의 행적을 들여다본다. 특히 고종이 풍전등화 같은 대한제국을 살리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살펴본다. 돋보기를 대고 뜯어보면, 세간에 알려진 바와 조금 다르다.

 

▲대한제국 첫 황제 고종.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엽서에 사용된 사진이다./국립고궁박물관

 

6월 25일 신임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

윌러드 스트레이트(W. Straight)는 러일전쟁 취재차 일본에 와 있던 AP통신 기자였다. 그러다 덜컥 대한제국 주재 미국공사관 부영사에 임명됐다. 1905년 6월 25일 신임 부영사가 황제를 알현했다. 알현 장소는 중명전(重明殿)이었다. 중명전은 경운궁에 딸린 왕실도서관이다. 아관파천(1896년) 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주로 중명전 2층에 거주해왔다.

 

알현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데, 고종이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 지금 미 대사관저인 미국공사관은 중명전과 맞붙어 있었다.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는 일찌감치 이렇게 일기를 썼다. ‘황제가 굴 같은 중명전에서 지내기 위해 이렇게 아름다운 궁궐(창덕궁)을 방치해야 했다니 정말 슬픈 일이다. 황제의 실정이 이 나라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붕괴시킨 것은 더 슬픈 일이다.(‘윤치호일기' 1904년 5월 6일: 이 일기를 쓴 때는 1904년 러일전쟁 첫 육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창덕궁 후원에서 전승 파티를 연 때였다. 이에 대해서는 ‘땅의 역사 [190] 1904년 창덕궁에서 열린 러일전쟁 축하파티’ 참조) 중명전은 서양 공관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신임 부영사는 5개월 뒤 미 공사관 담 너머로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장면도 모두 목격했다.

 

대한제국으로 출발하기 전 스트레이트는 도쿄 항에서 러시아 군함 오룔 호를 목격했다. 3주 전 대마도해전에서 무참하게 포격당한 배였다. 크고 작은 포탄 67발을 맞은 오룔 호는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접수한 뒤 자기네 군함으로 재활용하기 위해 수리 중이었다. 갑판에서는 여자들이 웃으며 핏자국과 머리카락 범벅을 닦아내고 있었다.(‘윌러드 스트레이트 문서’ reel 1 segment 2, 1905년 7월 21일 ‘바크에게 보내는 편지’)

 

그 상반된 풍경. 한 제국은 세계 최강 러시아제국 군함을 차지했고 바다 건너 또 다른 제국에서는 서양 공관들 한가운데 도서관을 짓고 황제가 살고 있는 풍경. 기자였던 스트레이트 눈에 이미 두 제국 운명은 결정돼 있었다.

 

9월 19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가 부임하고 석 달 뒤 또 다른 귀빈이 대한제국을 찾았다. 1905년 9월 17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이 귀빈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그녀는 세계 최고국 귀한 공주다. 예사로움을 뛰어넘는 의지와 기개, 소탈하고 명랑한 자질과 깊고 고요한 학문은 일일이 논할 필요도 없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향기로운 수레가 머무는 곳과 공주가 청초하게 바라보는 곳에는 산천이 빛을 더하고 초목이 영광을 더함은 말해 무엇 하랴.’ 기사는 황제에 대한 조언으로 끝났다. ‘황제 폐하께서는 옥과 비단으로 예우를 베풀고 최고의 집에서 음식을 내고 음악을 베풀어 양국 우호를 달성하고 귀빈을 즐겁게 하여 예의가 굳건하게 된 연후에 너그러움을 베풀지니라.’(1905년 9월 17일 ‘대한매일신보’)

 

이 세계 최고 나라 공주님 이름은 앨리스 루스벨트(Alice Roosevelt), 제26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외동딸이다.

 

▲1905년 9월 대한제국을 찾은 앨리스 루즈벨트 일행. 앨리스는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딸이다. 왼쪽부터 고든 패덕 주한미국 대리공사, 앨리스 루즈벨트, 약혼자 닉 롱워스. 촬영장소는 미국공사관(현 미 대사관저)이다. 황제를 포함해 조선인은 앨리스를 '세계 최고국이 공주'라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다. 고종은 미국을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을 구원해줄 '큰형'으로 여겼다. 하지만 앨리스는 사람들을 경악시키는 행동과 파티로 일관하며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다. /코넬대학교 희귀문서 컬렉션

 

1882년 한미조약 ‘거중조정’ 조항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수교조약을 맺었다. 영국과 독일(1883), 러시아·이탈리아(1884), 프랑스(1886)와도 수교했다. 청 제국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천하(天下)’에서 마침내 정글 같은 ‘세계(世界)’로 진입한 것이다. 1882년 음력 4월 6일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1조는 이렇게 규정했다.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게 되면 상조(相助)하여 잘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 국제 분쟁을 일으킨 당사국 사이에 제3국이 끼어들어 분쟁을 해결한다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이다.

 

1882년 당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이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려고 삽입한 이 조항을, 고종과 측근은 철석같이 믿었다. 러일전쟁 직전, 고종 최측근 이용익이 이 조항을 언급하며 말했다. “미국과 유럽이 조선 독립을 보장한다.” 러일전쟁 영국인 종군기자 매켄지가 답했다. “국력 없는 조약은 쓸모없다. 당신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데 남이 보호해줄 턱이 있는가.” 이용익이 답했다. “미국이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은 친구가 될 것이다.”(F 매켄지, ‘Korea’s fight for freedom’, 1920, p78)

 

철석같이 미국을 믿은 고종

나라가 완전히 거덜 난 상태에서 그 미국 대통령 딸이 대한제국을 찾았다. 수교 후 자그마치 23년 뒤, 세상이 완전히 바뀐 1905년에 대한제국 황제 고종 정권은 바로 이 조항을 생각해내고 미국 공주 앨리스를 극진히 접대한 것이다. 고종과 측근은 마지막 동아줄로 생각했다. 미 아시아함대 전함 오하이오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앨리스 일행은 이런 대접을 받았다.

 

‘어제 오후 7시에 미국 대통령의 영랑(令娘)이 왔는데, 관리가 인천까지 가서 영접해 특별열차를 타고 신문외(新門外) 정거장(서대문역)에 도착했다. 궁내부대신 이재극이 황명을 받들어 황색 가마로 영랑을 모시고 앞뒤로 경무관과 순사들이 옹도했다. 한성 내외 사녀(士女)들이 영랑의 용모와 명성을 애모하여 도로 좌우에 운집하였다.’(1905년 9월 20일자 ‘황성신문’) 황제는 첫 만찬에서 ‘앨리스를 팔짱을 끼고 테이블로 인도했다.’ 미국을 ‘큰형(Elder Brother·한미관계자료집3, 1905년 9월 13일 ‘호러스 알렌이 국무부에 보낸 편지’)’라고 불렀던 고종에게, 앨리스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왕비 민씨 왕릉인 홍릉에서 석물에 앉아 있는 앨리스. 당시 황실 접견 담당이었던 독일 여성 크뢰벨이 자서전(1909)에서 이를 비난하자 앨리스 측은 극구 부인했다. 훗날 코넬대학교에서 사진이 발견되면서 논쟁은 끝났다. /코넬대학 희귀문서 컬렉션

 

홍릉에 나타난 버펄로 빌

음은 스트레이트가 기록한 앨리스의 서울 체류 11박 12일 일정이다. ’19일 도착, 20일 황제 알현 및 연회, 21일 궁중 연회 및 공사관 연회, 22일 창덕궁 파티 및 미국 선교사 접견, 23일 전차 시승, 25일 승마 여행, 27일 전차 탑승해 왕비 민씨 왕릉 구경, 28일 환송 만찬, 30일 부산행 출발'. 축제와 만찬과 야외 파티와 여행이 전부였다. 한국인들은 이번 방문이 정치적으로 무슨 뜻이 있어서 미국 정부가 한국을 도와 위태로운 상황에서 꺼내 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사실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H. 헐버트, ‘The Korea Review’ vol.5(1905), 경인문화사, 1984, p332)'

 

가장 극적인 장면은 왕비 민씨가 잠든 옛 청량리 홍릉(洪陵)에서 연출됐다.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왕릉 축하연회였다. 당시 고종 의전 담당이던 독일 여자 엠마 크뢰벨은 이렇게 기록했다.

 

'먼지가 뿌옇게 나더니 말 탄 무리가 나타났다. 앨리스 공주와 약혼자, 수행원들이었다. 그녀는 붉은색 긴 승마복에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짝이 가죽장화를 신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말채찍을 들고 있고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한 석상에 올라탔다. 약혼자에게 눈짓하자 그는 재빨리 카메라를 꺼내들고 초점을 맞췄다. 얼마 뒤 그녀가 모두 말에 올라타라고 명령했다. 일행은 마치 서부 가죽업자 버펄로 빌처럼 떠났다.'(엠마 크뢰벨,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1909), 민속원, 2015)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루스벨트 일행은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정복했노라(The Roosevelt party came saw and conquered).'(’윌라드 스트레이트 문서' reel 1 segment 2, 1905년 10월 3일 ‘파머에게 보내는 편지’) 이게 미국 공주님이 했던 전부다. 고종은 ‘큰형의 딸’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왕비 민씨 왕릉인 홍릉에서 석물에 앉아 있는 앨리스 일행. /코넬대학 희귀문서 컬렉션

 

고종만 몰랐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던 조선은 루스벨트 일행을 구명 장치로 생각하고 있었다.(윌라드 스트레이트, 앞 편지). 하지만 이미 운명은 결정된 상태였다. 루스벨트는 일찌감치 1900년 부통령 시절 ‘조선인은 자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 대통령이었다.(김원모, ’19세기 말 미국의 대한정책(1894~1905)', 국사관논총 60집, 1994, 재인용) 또 9월 5일 러일전쟁 종전 협정인 포츠머스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한 지위가 인정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두 달 전 7월에는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사이에 ‘필리핀과 조선은 각각 미국과 일본이 먹는다’는 땅 따먹기 밀약이 맺어진 상태였다. ‘미국 사교계의 스타’였던 앨리스 루스벨트는 미일 수교 50주년 축하라는 명분으로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일행에 끼어 있었다. 7월 25일 도쿄에 도착한 이들은 이틀 뒤 밀약을 맺고 두 달 동안 필리핀, 싱가포르, 홍콩, 상해, 북경을 여행했다. 그리고 다시 도쿄를 들렀다가 조선을 찾은 것이다.

 

이 밀약은 1924년 8월 타일러 데넷이라는 학자가 미 의회도서관에서 문서를 발견함으로써 공개됐지만, 대략적인 실체는 이미 밀약 석 달 뒤 알려지기 시작했다. 10월 4일 도쿄 ‘고쿠민신분(國民新聞)’이 ‘일본과 미국이 동맹을 맺었다’고 보도했다. 이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미국 신문과 호주 신문들까지 이를 보도했다.(K 라슨 등, ‘태프트-가쓰라 밀약, 단순 대화인가 밀약인가’,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19 no 1, 듀크대 출판부, 2014) 무슨 말인가. 고종 빼고 다 알았다는 말이다.

 

1909년 엠마 크뢰벨이 베를린에서 펴낸 자서전에 홍릉 사건이 실렸다. 앨리스 측은 즉각 이를 부인했다. 아주 훗날 미국 코넬대학교 도서관 희귀본 컬렉션에서 앨리스 행적 사진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애시당초 불필요했던 논쟁은 종료됐다.

 

자서전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일본을 신뢰하고 있었고 그런 일본이 자국 정세를 간섭하거나 왕위를 찬탈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크뢰벨, 위 책 p238~239) 과연 그랬을까. 고종이 한 일들을 더 세밀하게 본다.<다음 주 ‘뇌물 받은 황제’로 계속>

 

[233]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② 뇌물 받은 황제

을사조약 직전 고종은 일본서 뇌물 2만원(25억원)을 받았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게 이토 히로부미 대사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을 주었다 -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을사조약 때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무엇을 했나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다.

앨리스 루스벨트 일행이 대한제국(이하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05년 9월이었다. 황제 고종은 앨리스를 공주처럼 접대하며 조선 독립을 호소했다. 이미 두 달 전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는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우선권을 맞교환한 이후였다. 그리고 두 달 뒤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강탈’했다. 조선이라는 민족공동체에는 강탈이라는 말이 옳다. 그렇다면 고종에게는? 이제 1905년 11월 17일 조약 체결 전후로 고종이 한 행동을 하나하나 뜯어보자.

 

▲대한제국 황제 고종. /국립고궁박물관

상소한 자들을 처벌하라

조약 후 첫 조치부터 이상했다. 고종은 조약을 반대했던 의정 참정대신 한규설을 “황제의 지척에서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며 조약 당일 파면했다.(1905년 11월 17일 ‘고종실록’) 그리고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영의정에 해당하는 의정대신 서리로 임명하고(11월 22일), 엿새 뒤 박제순을 참정대신에 임명했다.(11월 28일 ‘고종실록’)

 

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이 인사는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공사 하야시의 충고에 따라” 이뤄졌다. 이날 고종은 ‘인심을 도발하는 상소자들을 가둬두기 위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하시겠다는 결심을 보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1. 보호조약 1~3 (145) ‘이토 대사 작별 인사차 알현 및 시정 개선에 관한 정부 당국에의 훈유적 강화 건’) 일방적인 일본 측 기록임을 감안해도, 나라를 빼앗긴 국가 지도자가 보일 행동은 아니다.

 

고종 태도를 성토하는 상소가 말 그대로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실록을 본다.

 

“역적 두목을 의정대신 대리로 임용해 신으로 하여금 그 아래 반열에 나가도록 하니, 분한 피가 가슴에 가득 차고 뜨거운 눈물이 넘쳐흘러 당장 죽어 모든 것을 잊어버렸으면 한다.”(11월 24일 의정부 참찬 이상설)

 

“두렵고 꺼리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폐하 뜻이 견고하지 못함을 헤아릴 수 있으니 나라의 존망은 알 수가 없다.”(1905년 11월 26일 시강원 시독 박제황)

 

“나라를 주도해서 팔아먹은 박제순에게 총애를 베풀어 의정 서리로 삼고 다른 역적들도 편안하게 권위를 유지시켰다.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저들의 위엄과 권세를 두려워해서 그런가.”(11월 26일 정3품 윤병수)

 

이런 이해 못할 처분에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삼천리 강산을 한밤중에 도둑맞았다. 이제 그저 궁내부에서 헛된 자리에 앉아서 (재정 고문) 메가타(目賀田)가 주는 황실비(皇室費)를 가지고 풍족히 살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이 역시 한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데, 무엇을 꺼려 역적들을 섬멸하지 않고 도리어 총애와 영예를 안겨주는가.”(11월 28일 전 내부주사 노봉수)

 

노봉수 상소에는 본질적인 질문이 들어 있었다.

 

“선왕의 판도(版圖)를 일본으로 넘겨주고 조종(祖宗)이 남겨준 백성을 일본 포로로 모두 넘기려는가. 국토와 백성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비바람 맞으며 힘들게 마련한 것이지 폐하의 개인 소유가 아니다.”

 

이런 상소에 고종 답은 한결같았다.

 

“이처럼 크게 벌일 일이 아니고 또 요량해서 처분을 내릴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1905년 11월 27일 ‘고종실록’)

 

원로대신 조병세 무리가 궁중에 들어와 농성하며 상소를 하자 고종은 “반복하여 타이른 것이 서너 번만이 아닌데 왜 말을 받지 않는가”라며 이들을 궐 밖으로 쫓아버렸다.(같은 날 고종실록) 조병세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자 다음 날 무관장 민영환이 뒤를 이었다. 고종은 “번거로우니 속히 물러가라”고 답했다. 그래도 민영환이 물러나지 않자 고종은 이들을 체포해 징계를 내리라 명했다.(11월 28일)

 

이틀 뒤 민영환이 자결했다. 그 다음 날 조병세가 자결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왜 조약을 주도한 박제순을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했는가. 황제는 왜 이들을 처단하라는 상소에 번거롭다는 반응으로 일관했는가.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힌트가 몇 군데 있다.

 

▲1905년 12월 11일자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을사조약 체결을 위해 황제 고종을 포함한 대한제국 고위층에 거액의 뇌물을 뿌렸다는 기록이다. /국사편찬위

 

황제가 받은 접대비 2만원

내탕금(황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용해 심상훈을 통하여 황제 수중으로 2만원을 납입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1주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일본 외무성 기밀 제119호에 의거해 기밀비 10만원을 집행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22. 보호조약 1~3 (195)'임시 기밀비 지불 잔액 반납의 건', 1905년 12월 11일) 다음은 이에 대한 일본공사관 기록 전문이다. 이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공개돼 있다.

 

‘지난달 4일 자 기밀 제119호로 보호권 확립에 관한 조약체결 등을 위하여 무엇인가 비용을 필요로 하겠기에 기밀비 10만원을 송부하여 위의 목적에 지출하라는 훈시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신협약 체결 전에 있어서는 당장 이토 대사 내한에 즈음해 궁중 내탕금이 궁핍 상태라는 것을 탐지했기 때문에 대사 접대용 비용에 충당하는 명의 아래 금 2만원을 심상훈(沈相薰)을 거쳐서 황제 수중에 납입하고 금 3000원은 폐하 좌우에 있는 시종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구완희(具完喜)에게, 금 3000원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에게 급여한 외에 나머지 2만원은 모두 조인 후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등으로 하여금 선후책으로서 그 부하를 위무시킬 필요상 지급할 것을 조치했습니다. 또한 참정 박제순 기타 한두 대신에게 같은 목적으로 지급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었기에 그 견적 1만5000원을 공제하고 잔액금 3만9000원은 반납 조치하였사오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문서에는 지출된 금액을 계산한 메모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기밀119호에 의해 기밀비 10만원'

 

▲'2만원을 황제의 수중에 납입'

 

▲'무기명예금증서로 심상훈을 통하여 궁중으로'

 

▲구완희 3000원 이하영 3000원 이지용 5000원 이근택 5000원 이완용 1만원 박제순 외 두 대신 1만5000원 계 6만1000원 차액 3만9000원

 

한마디로, 조약 체결 1주일 전에 황제 고종이 일본 공사로부터 2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명분은 이토 히로부미 접대비이고, 이유는 ‘내탕금 궁핍 상태’였다. 조약 상대방의 궁박함을 이용한 증뢰(贈賂)요, 태조고황제가 비바람 맞으며 힘들게 마련한 나라를 판, 명백한 수뢰(受賂)다.

 

통계에 따르면 5년 뒤인 1910년 서울 숙련 목수 일당이 1엔이었다. 목수 연봉을 200엔으로 가정했을 때(김낙년 등 4명, ‘한국의 장기통계’ 1, 해남, 2018, p191) 2만원은 이 인부의 100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2010년 현재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연봉은 2500만원이니, 그 100배는 25억 원이다.

 

하야시 보고서에는 황실 재산 담당관인 경리원경 심상훈을 통해 무기명 예금증서로 2만원을 궁중에 보내고 러일전쟁 참전 일본군 응접관을 지낸 구완희와 법부대신 이하영에게 3000원을 줬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조약 체결 후인 11월 22일 내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이근택에게 5000원,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1만원을 줄 예정이며 외부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다른 세 대신에게 1만5000원을 지급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다. 이지용과 이근택, 이완용은 조약 완료 조건부로 뇌물을 준 것이다. 액수로는 고종-이완용-이지용과 이근택 순이다. 조약에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 조항이 삽입됐다.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 많은 뇌물이 오갔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알려져 왔다. 당대 지식인 황현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등박문은 300만원을 정부에 고루 뇌물로 주어 조약이 성립되기를 꾀하였다. 탐욕한 사람들은 많은 전답을 마련한 후 편안한 생활을 하였다. 권중현(權重顯) 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하며 이근택, 박제순 등도 졸부가 되었다.’(황현, ‘매천야록’ 4권 1905년⑤ 8. ‘이등박문의 뇌물 공세’) 꼼꼼한 관찰자이자 기록자였던 황현이지만 황제가 직접 뇌물을 받은 사실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뇌물 30만엔과 경부선 지분

을사조약 전해인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며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조선 전역을 군사용지로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협정이다. 4개월 전인 1903년 10월 14일 일본공사 하야시는 본국에 이렇게 보고했다. ‘한국 황제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매사에 우리가 경험한 바 있음. 따라서 오로지 한국 정부로 하여금 눈앞의 이익을 얻게 하고 또 상당한 위력을 가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음.’(‘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권 11. 일한밀약 부 한국중립 (2)'일·한 간 비밀조약 체결에 관한 건', 1903년 10월 14일) 하야시는 고종이 받을 이익으로 1. 망명자에 관해 황제가 만족할 견제 2. 거액의 차관 3. 상당한 운동비를 한국 조정 실력자에게 제공을 꼽았다.

 

고종은 이미 협정 체결 전인 2월 17일 일본 요청에 의해 창덕궁 후원을 일본군 12사단 병영으로 내줬다. 그리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3월 20일 일본국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알현했다. 실록에는 ‘황제가 이등박문을 접견했다’고 딱 한 줄 적혀 있다.

 

접견식에 배석했던 영접위원장 민영환은 3월 31일 영국공사관을 방문해 공사 조던에게 이토 방문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은 조던이 영국 외무부에 보낸 당일 면담 기록이다.

 

‘이토는 메이지 천황 국서를 조선 외교부에 사본을 남기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민영환이 그날 면담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대사는 황제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엔을 줬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을 보장하고, 향후 경의선 지분 또한 보장한다고 확약했다. 이토 후작은 같은 방식으로 50만엔을 궁중 참석자에게 나눠주고, 이번 방문 관계자들에게도 귀중품을 선물했다.’(영국 외무부 자료, 1904년 3월 31일 조던 공사가 랜스다운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1904년 3월 31일 주한영국공사 조던이 영국 외무장관 랜스다운에게 보낸 편지. ‘한일의정서 체결 후 고종이 일본 천황으로부터 30만엔을 받았다’는 민영환 면담 기록이다. /영국 외무성 문서보존소

30만엔과 경부선 지분. 경부선은 건설 당시 일본 로비스트 다케우치가 경부철도회사 주식 1000주와 5만원을 황실에 헌납하고 진행한 공사였다.(김윤희, 이욱, 홍준화, ‘조선의 최후’, 다른세상, 2004, p233) 그 지분을 이토로부터 보장받은 것이다.

 

의정서 조인 전인 2월 8일 고종은 이지용을 통해 ‘궁성과 정부는 범접 금지 보증’을 요구했고(‘주한일본공사관기록’ 23권 2.電本省往 1~3 (104) ‘심상훈을 통해 황제 위안 노력에 관한 건’), 의정서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전과 안녕을 성실 보장’ 조항이 삽입됐다.

 

3월 20일 고종은 하야시 공사부터 통역관 마에마 교사쿠까지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 ‘전원(全員)’에게 훈1등부터 5등까지 훈장을 내렸다. 나흘 뒤 고종은 특파대사 이토에게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장을 주고 일행 전원에게 훈장을 내렸다. 그 다음 날 이토가 탑승했던 일본 함장 해군 대위 두 명에게 또 훈장을 내렸다. 사흘 뒤 고종은 의주군수 구완희를 러일전쟁 참전 일본군을 접대하는 관리로 임명했다.(3월 20일, 24일, 25일, 28일 ‘고종실록’)

 

“나가 죽으시라”

2007년 소장 역사학자 4명은 을사조약에 임한 고종을 두고 이렇게 의문을 던졌다.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황실은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김윤희, 이욱, 홍준화, ‘조선의 최후’, 다른세상, 2004, p331)

 

이미 100년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또한 노골적으로 황제에게 분노의 붓을 던졌다. “이 조약은 맺어도 망하고 거부해도 망한다. 망하는 것은 똑같은데 어찌 황제는 사직을 위하여 죽으려 들지 않는가(准亦亡不准亦亡也 如等亡焉則 無寧決志殉社·준역망부준역망야 여등망언즉 무녕결지순사).”(1905년 11월 23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그 이상설이다.

<다음 주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연설’에서 계속>

 

[234]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③/끝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연설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친 우리 조선인은…”

▲1907년 7월 5일자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만국평화회의가 열흘째 열리고 있던 1907년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고종이 보낸 밀사 3명이 나타났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한성재판소 검사 이준, 그리고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장남 이위종이다. 이위종은 7개 국어에 능했고 다른 두 사람은 못했다. 그래서 만 스무 살인 이위종이 실질적인 대표로 활약했다. 회담 관계자들은 이위종을 왕자(Prince)라고 불렀다. 그 왕자가 취재기자들 앞에서 연설했다. 제목은 ‘조선을 위한 호소(Plea for Korea)’다. 국사교과서에도 실린 명문이다.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부당함, 일본의 잔학함과 폭력성을 낱낱이 폭로한 글이다. 그 연설문 이야기다.

 

메가타가 던진 떡밥 150만엔

1905년 8월 27일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가 고종을 알현했다. 일본공사 하야시와 동행한 메가타는 고종에게 궁중 재정 개선책을 건의했다. 고종은 이에 “일본인 고문에게 재정을 위임하는 건은 아직 이견이 많다”며 거부했다. 그런데 메가타가 “궁중의 용돈 증가를 도모하기 위하여 150만엔을 무이자로 일본 정부로부터 차입하는 방법에 관하여” 건의하자 황제는 깊이 후의를 감사하며 계획을 받아들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6권 1.본성왕전1~4 (216)'한국 총세무사 브라운 사임과 황실비 대출에 관한 상주 건')

 

을사조약 체결 석 달 전에 이미 일본은 고종을 돈으로 매수할 계획을 세웠고, 고종은 ‘용돈 150만엔’을 깊이 감사하며 승낙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약 1주일 전 고종은 하야시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현 시가 25억원)을 받았다.(2020년 10월 21일 자 ‘땅의 역사’ 233.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② 뇌물받은 황제' 참조)

 

그런데 150만엔은 떡밥에 불과했다.

 조약 체결 한 달 뒤인 1905년 12월 15일 하야시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황실비 대여 150만엔’은 진행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재정고문 메가타는 그때까지 황실이 직접 세금을 거두던 제도를 없애고 모든 조세는 황실이 아닌 대한제국 정부 수납기관에서 징수하겠다고 선언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6권 11.잡찬(雜纂) (1)황실비에 관한 건) 이미 그 전해 일본 천황으로부터 30만엔을 선물받은 고종에게 황실비 150만엔 무이자 대출은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거꾸로 돈줄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미국 인디펜던트지 1907년 7월 25일자. 사진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파견된 밀사 이위종이다. 이 잡지에는 이위종이 기자회견장에서 한 연설문 전문이 실려 있다.

 

러시아의 변심과 밀사 파견

고종은 이후 경운궁(덕수궁)에 유폐된 채 ‘메가타가 주는 공식 황실비’로 살았다. 을사조약 체결 한 달 전인 1905년 10월 9일 러시아 정부는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에게 헤이그 평화회의 초청 각서를 전달했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지만, 고종은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해주리라고 믿었다. 러시아 또한 회의를 통해 조선에 대해 외교적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딱 1년 뒤인 1906년 10월 9일 일본 주재 러시아공사 바흐메치예프는 외상(外相)으로 영전한 전 주한 공사 하야시에게 “대한제국은 참가 불가”라고 통보했다. 이미 그해 러시아와 일본은 ‘몽골과 한반도에 대한 상호 이익을 인정한다’는 러일협약을 진행 중인 상태였다.

 

그 급변한 국제 정세를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밀사가 파견된 것이다. 밀사들은 회의장 입장은 물론 각국 대표 개별 면담조차 거부됐다.

 

▲미국 인디펜던트지 1907년 7월 25일자. 붉은 색 부분에 '우리 조선인은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쳐 있다'고 적혀 있다.

 

기획 헐버트, 자금 콜브란의 15만엔

구중궁궐에 유폐돼 있으니, 고종이 국제 정세를 알 도리는 없었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런데 돈은 어디서 났을까. 그때 이상설은 간도에서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운영 중이었고 이준은 서울에서,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활동 중이었다. 고종은 ‘내탕금이 궁핍해’ 일본 특사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을 받고, 용돈 150만엔 제안을 깊은 후의로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은 밀사 파견 자금이 고종이 외국 은행에 예치해둔 비자금에서 나왔다고 추정한다. 또 황실비인 내탕금을 밀사 외교를 위해 사용했으리라는 추정도 있다. 사실일까. 당시 통감부 외사국장인 고마쓰 미도리는 밀사 자금 수사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해놓았다.

 

‘밀사 파견 사실이 공개되면서 통감부는 난리가 터졌다. 통감 이토는 대신들을 불러 전모를 밝히라고 닦달했다. 그 사이 “유폐 중인 황제에게는 자금이 있을 리 없다”고 판단한 고마쓰는 한성전기회사 사장인 미국인 콜브란을 만났다. 고마쓰가 물었다. “요즘도 황제에게 용돈을 주시는가.” 콜브란이 대답했다. “15만엔을 달라고 해서 영수증을 받고 황제 조카뻘인 조남승에게 돈을 줬다.”’

 

‘그러고 보니 조남승이 수입이 없을 텐데 요즘 갑자기 씀씀이가 헤퍼졌다. 조남승을 불러 따졌더니 15만엔은 미국인 헐버트와 이준, 이상설과 본인이 나눠 가졌다고 자백했다. 또 고종이 헐버트가 마련한 친서 초안과 위임장을 밀사들에게 줬다고 자백했다. 자백에 따라 한 프랑스 교회를 수색하니 각종 비밀 서류와 함께 위임장과 친서 초안이 나왔다.’(고마쓰 미도리, ‘명치외교비화(明治外交秘話)’, 原書房, 1976, p244~246)

 

또 다른 일본 측 기록인 ‘일한합방비사’에는 금액이 20만엔으로 적혀 있다. 어찌 됐건 밀사는 당시 반일 운동을 하던 미국인 헐버트가 기획하고 미국인 기업가 콜브란이 자금을 댔다는 게 통감부 조사 결과였다.

 

▲미국 인디펜던트지 1907년 7월 25일자.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보낸 친서가 실려 있다.

 

교민들의 의연금 1만8000원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그해 5월 중국 용정에 있던 이상설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다(이위종은 6월에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했다). 한국교민회장 김학만과 정순만 등이 한교(韓僑)에게서 모금하여 이들에게 1만8000원을 전달하였다.(이병석, ‘이상설전: 헤이그특사 이상설의 독립운동론’, 일조각, 1998, p64)

 

고종에게 15만엔(혹은 20만엔)을 받은 밀사들이 왜 동포들에게서 또 의연금을 받았을까. 콜브란이 준 15만엔에 배달 사고가 난 건 아닐까. 고종이 이준에게 자금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닐까. 혹은 헐버트가 주지 않은 건 아닐까. 어느 쪽이 됐든, 불쾌하기 짝이 없다.

 

▲미국 인디펜던트지 1907년 7월 25일자. 이위종이 헤이그 기자회견장에서 한 연설이 실려 있다.

 

우리가 몰랐던 이위종의 연설

풍찬노숙 끝에 헤이그에 도착한 밀사들은 회의장 입장을 거부당했다. 그리하여 7월 8일 밀사들은 취재기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프랑스어가 유창한 이위종이 대표를 맡았다. 시작은 이러했다. ‘러일전쟁 때 일본은 조선의 독립이 목적이라고 공언했다. 일본 정치인들은 거듭해서 모든 문명을 위해 싸운다고 했다.’ 그리고 이위종은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강압에 의한 조약임을 기자들에게 웅변했다.

 

그런데 연설 앞쪽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우리 조선인들은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쳐 있던 터라, 일본인들을 기대를 가지고 맞이했다(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 received the Japanese with sympathy and hope)’. 황제의 위임장과 친서를 소지한 황제의 밀사 입에서, 그 황제가 경영한 정권이 부패하고 탐학하며 잔인하다는 고백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위종은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백성에게 정의를 구현해주리라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그런 신뢰를 배반하고 조선을 불법 병탄한 일본을 탄핵한다는 게 이위종 연설의 요지다.

 

이 모든 것이 대중적으로 공개된 자료들이니, 관련 학자들은 틀림없이 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을사조약을 전후해 고종에게 거액의 뇌물이 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헤이그 밀사 연설에 부패 정권을 비판한 내용이 있음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반쪽짜리 역사다.

 

7월 14일 일요일 이위종이 잠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사이 일요일 이준이 호텔에서 죽었다. 이틀 뒤 이준은 현지 공동묘지에 가매장됐다. 임시 장례식에는 이상설과 호텔 사장이 참석했다.

 

고종은 강제 퇴위 당했다. 7월 20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거짓 밀사들을 사법처리하라”고 명했다. 8월 8일 법부대신 조중응이 평리원 선고문을 순종에게 보고했다. 정사 이상설은 교수형, 부사 이위종과 이준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형은 이들을 체포한 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1907년 8월 8일 ‘순종실록’) 3년 뒤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필리핀과 조선을 나눠먹기로 밀약한 미국에 기대려 한 황제와, 망국 조약 후 ‘매국노들’ 처단을 끝내 거부한 황제와, 그 황제가 보낸 밀사 입에서 나온 ‘부패하고 탐학한 정권’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1907년 7월 5일자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사진은 왼쪽부터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다.

 

[235] 이하응의 파란만장한 삶과 천자(天子)의 나라

“예전엔 귀했으나 천하게 됐으니 어찌하겠는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살았고, 유폐됐고, 죽은 서울 운현궁. /박종인

 

어느 날 흥선군 이하응은 “가야산 가야사 석탑 자리에 선친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1845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선친 남연군을 충청도 예산에 이장하니, 과연 둘째 아들 명복과 손자 척(坧)은 황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들과 아비는 하늘을 함께 짊어지지 못할 원수로 지냈고, 아비는 쓸쓸히 죽었다. 나라도 쓸쓸히 사라졌다. 그 거인(巨人) 석파 이하응이 살아간 파란만장한 삶과 그 아들 손자 대에 끝난 나라를 일별해본다.

 

▲1882년 8월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로 끌려간 흥선대원군. 사진은 그 해 8월 청나라 천진에서 이홍장을 비롯한 청나라 관리들 심문을 받고 '사형을 감하여 유폐에 처함' 처분을 받기 전후 촬영된 천진성 영무처 공식 사진이다. 타국에 납치된 정치인 눈빛이 심상치 않다. 사진 오른쪽에는 '고려국 대원군'이라고 적혀 있다. 왼쪽에 적혀 있는 '양시태 조상관'은 천진에서 황실 사진을 전문으로 찍은 선구적 사진관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모순된 지도자, 이하응(1820~1898)

‘구리 기둥과 쇠 절벽 같은 굳은 습관에 손을 대 부순 대혁명가였으나 쇄국을 행하여 스스로 소경이 되었다. 아픈 역사[痛史·통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박은식, ‘한국통사’ 대원군 편)

 

대원군 시대(1863~1873)는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과감한 개혁과 시대를 거스르는 쇄국 정책으로 일관됐다. 노론 일색이던 정치권에는 소론과 남인은 물론 멸종됐던 북인까지 되살아났다. 사대와 당파색의 소굴이던 만동묘(萬東廟)와 서원을 없애 버렸다. 전통적 면세 집단인 양반계급에게 세금을 거두고 문란하기 짝이 없던 삼정을 갈아엎었다. 문관이 장악했던 군 지휘권을 무관에게 돌려준 것도 조선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었다. 세도정권에 눌렸던 왕권 회복을 위한 경복궁 중건 공사는 큰 실수였다. 제일 큰 실수는 쇄국이었다.

 

천주교와 러시아와 권력

처음부터 쇄국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부인 민씨는 아들이 왕이 되자 감사 미사를 올린 천주교도였다. 고종 유모 박씨는 마르타라는 세례명도 있었다.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를 이용해 두만강을 넘나들던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1864년 양력 8월 18일 프랑스 외방전도회 신부 베르뇌가 북경 조선교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신도인 전(前) 승지 남종삼에게 “러시아인을 몰아내면 종교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했다.(강상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정치학적 고찰’, 정신문화연구 30권, 2007)

 

그런데 1866년 1월 베르뇌가 의금부에 체포됐다. 의금부는 “남종삼이 반란 음모를 꾸몄다”고 보고했다. 노론 대신들은 남종삼을 추국해 진상을 밝히자고 나섰다.(1866년 고종 3년 1월 11일 ‘고종실록’) 가뜩이나 만동묘 철폐(1865년)로 노론에 견제받고 있던 대원군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그 돌파구가 이후 2년 동안 벌어진 병인박해였고 그 복수극이 9월 11일 프랑스군의 침략, 병인양요다.

 

그리고 1868년 ‘아들을 천자로 만들어준’ 선친 남연군묘가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게 봉분이 파헤쳐졌다. 쇄국은 감정으로 변했다. 쇄국만이 정권과 윤리를 지킬 수 있다고, 대원군은 믿게 되었다.

 

쇄국의 후속 조치, 강병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871)를 겪으며 대원군은 기존 강병책을 더욱 강화했다. ‘조선의 인후(咽喉)’라 불리는 강화도에 진무영(鎭撫營) 병력을 확대하고, 포병대를 설치했다. 1874년까지 예비군(속오군)이 지키던 진무영에 3500명이 넘는 병력이 확보됐다. 진무영 훈련대장 신헌은 대원군 지시로 수중시한폭탄 격인 수뢰포, 포신 방향과 각도를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는 마반포거를 비롯해 10가지가 넘는 신무기를 개발했다.(연갑수, ‘고종대 정치변동 연구’, 일지사, 2008, p210) 대원군 자신도 운현궁에 무기창을 설치하고 역시 포신 각도 조절이 가능한 소중대형 대포를 개발했다. 육군박물관에는 ‘운현궁별주(雲峴宮別鑄)’라고 새겨진 당시 화포가 남아 있다. 이 포에는 대원군이 쫓겨난 다음해인 동치 13년(1874년)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다. 운현궁별주 화포 이후 조선은 물론 대한제국에서도 무기 수입만 있을 뿐 신무기를 개발한 기록이 없다.

 

1875년 고종 친정 선언 2년 뒤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를 공격했다. 궁궐 수비대를 강화하려는 고종 명에 의해 강화도 진무영은 대폭 축소된 상황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초지진 첨사 이민덕은 즉시 도주하고 35명이 전사하며’ 참패로 끝났다. 더 이상 병인·신미양요에서 사생결단으로 싸우던 조선군이 아니었다.

 

▲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1869년 50세 기념으로 제작한 대원군 초상화. 서양세력이 몰려오던 그때, 대원군은 조선 군사력 강화에 공을 들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임오군란, 납치된 대원군

1882년 6월, 열석 달 동안 월급이 밀린 하급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타도 대상은 왕비 민씨였고, 그 척족들이었다. 이들은 대원군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궁궐로 난입했다. 이들을 진압하러 온 군사는 청나라 군사들이었다. 7월 13일 청나라 사령관 오장경이 자기네 병영으로 대원군을 유인한 후 필담을 나눴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대원군이 이리 말했다. “장군은 지금 구름 속에서 꿈을 꾸며 노닐 참인가!”(원세개 제자 심조헌, ‘용암제자기·容庵弟子記’, 1910) 대원군은 청나라 천진으로 납치됐다. 7월 30일 천진에서 대원군을 세 살 연하 이홍장이 다그쳤다. “각하가 난의 괴수다.” 대원군이 말했다. “기름 가마솥이 앞에 있어도 나는 결백하다.”(흥선대원군 사료휘편 4권 ‘대원군 체진 비망록’, 현암사, 2005)

 

8월 12일 대원군은 ‘감사안치(減死安置·사형을 대신한 유폐형)’를 선고받았다. 사흘 뒤 대원군은 천진 옆 보정부성 치안지서에 연금됐다. 출발 전 대원군은 황실 전문 사진관인 ‘양시태 조상관’에서 천진성 관무처 공식 사진을 촬영했다. 11월 2일 그는 보정부성에서 관리 오여륜과 필담을 가졌다. 대원군은 예순셋이고 오여륜은 마흔넷이었다.

 

필담에는 상남자 냄새가 난다.

“잘못을 사죄하라.”(오)

“불량 소년을 만나 곤욕을 치르는구나.”(대)

 

“무슨 책을 읽는가.”(오)

“강목 9권을 보았다.”(대)

 

“그런 책은 좋은 데 쓰지 않으면 사람 죽이는 책이다. 덮어라.”(오)

“글을 써내려가는 형세가 또 욕설이구나.”(대)

 

“악한 짓을 하고도 남의 욕설을 막으려 하는가.”(오)

“내가 이미 악에 처했는데 당신 입도 악하고 날씨까지 악하니 세가지 악이 한 데 모였구나.”(대)

 

대원군이 말했다. “양왜 배척이 오늘날 정세에는 옳지 않다. 천하의 대세이니, 좋은 것은 인정해야 한다.”(대)

 

“천하라니, 당신은 그저 일국(一國) 얘기나 하라.”(오)

 

한참 기싸움 끝에 대원군이 말했다.

“욕설을 들었지만, 날마다 대화를 하면 고향을 잊겠구나.”(이상 대원군, ‘보정부담초·保定府談草’)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동판화. 대원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척화론을 내세우고 강병책에 돌입했다.

 

대원군의 귀국과 유폐

그 사이 조선에서는 대원군을 겁박해 끌고 갔던 젊은 원세개가 섭정을 했다. 고종과 왕비 민씨와 그 처족들은 청나라 보호 속에 무사안일하게 살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터졌다. 정변 주도자들은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대원군 귀국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46시간 만에 정변은 청나라 군사에게 진압됐다.

 

1885년 고종 정권이 러시아에 기대려는 한러 밀약이 두 차례 폭로됐다. 청 정부는 고종 정권 견제를 위해 대원군을 귀국시켰다. 납치된 지 만 2년이 지난 1885년 8월 27일 대원군이 남대문을 통해 서울로 돌아왔다. 아들 고종은 남대문까지 나가서 아비를 맞이했다.(1885년 고종 22년 8월 27일 ‘고종실록’) 그날 고종이 대신들에게 말했다.

 

“기쁜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잡류(雜類)들이 까닭 없이 거짓말과 비방으로 대원군에게 누가 되게 하였다. 각별한 분이니 예조에서 의정부와 상의하여 예절 절차를 마련하라.”

 

9월 10일 예조가 발표한 대원군 예우 규정은 이러했다. 첫째, 대문 밖에 하마비(下馬碑·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표지)를 설치할 것. 둘째, 대문에 차단봉[橫杠木·횡강목]을 설치할 것. 셋째, 대문은 습독관이 윤번으로 입직할 것. 넷째, 조정 신하들은 사적으로 감히 대원군을 만나지 말 것.(1885년 고종 22년 9월 10일 ‘고종실록’)

 

대문 개폐 차단은 물론 출입은 24시간 감시당하고 면회는 통제됐다. 아들에 의하여 아비는 다시 유폐당한 것이다. 고종에게 흥선대원군은 정적(政敵)이었지 아버지가 아니었다.

 

황은(皇恩)에 감격한 아들

또 한 해가 지난 1886년,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책으로 고종 옆에서 조선국을 통치하던 원세개가 고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런저런 충고와 청나라를 따돌리고 러시아 같은 다른 나라와는 손잡을 생각 말라는 반협박 반조언 문서였다. 고종이 답했다.

 

“글자마다 약석(藥石)이 되어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나이다. 천조(天朝)를 섬겨온 지 200여 년이 되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은(皇恩)을 입지 않는 것이 없었나이다. 근래 외교 관계가 더욱 넓어져가나, 이 나라는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면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홀로 지냈나이다. 이런 때에 천조에서 이끌어주고 일깨워주며 친목을 도모하고 협약을 토의 체결하여 서로 의지하게 했으니, 여기에서 천지가 만물을 덮어주듯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마음을 알 수 있었나이다.”(1886년 고종 23년 7월 29일 ‘고종실록’)

 

실질적인 청나라 속국 상태는 1894년까지 8년을 더 갔다. 동학혁명이 터지자 고종은 민씨들과 함께 청군을 불러들였고, 청군과 동시에 들어온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벌였다.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갑오정부를 세웠다. 한 달 뒤 정권이 안정된 갑오정부와 일본은 대원군을 하야시켰다. 거인의 발걸음은 거기서 멈췄다.

 

“주상이 아직 오지 않았느냐”

3년 뒤 1897년 10월 12일 아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세웠다. 황제가 되었다. 넉 달 뒤인 1898년 2월 22일 대원군이 죽었다. 죽기 전 대원군은 고종의 형인 장남 재면에게 “주상을 알현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세 번을 물었다. 대원군은 “아직 주상 가마가 오지 않느냐”고 묻고는 긴 탄식을 하고 죽었다.(황현, ‘매천야록’ 2권 1898년① 2. 흥선대원군 사망) 고종은 임종도, 5월 15일 치른 장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19일 아들 광무제가 강제 퇴위되고 손자 이척이 융희제에 등극했다. 대원군이 남연군 묘를 이장한 목적이 완수됐다. ‘2대천자지지’ 발복은 거기까지였다.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제작한 '운현궁별주명대포'. 몸체에 '동치 13년'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1874년이다. 병인양요 이후 군사력 강화에 나선 대원군정권이 제작한 신형 대포다. 이후 조선은 신무기 개발보다는 수입에 열중했다. /국립중앙박물관

 

1918년 한자리에 모인 아들, 손자, 증손자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총성 한 번 없었다. 조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병사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담판 개시일부터 조약 조인까지 딱 일주일 걸렸다.’(고마쓰 미도리, ‘明治外交祕話·명치외교비화’, 原書房, 1976, p295)

 

8년 뒤 1918년 정초 일본으로 떠났던 대원군 증손자 영친왕 이은(李垠)이 귀국했다. 1918년 1월 13일 고종이 사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대원군 아들과 손자와 증손자들이 총독부 관리들과 귀국 기념 오찬을 했다.(‘순종실록 부록’)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맨 앞줄 한가운데에 왕공족(王公族)들이, 양옆으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가 앉았다. 그때 고종은 태황제가 아니었고 순종은 황제가 아니었다. 영친왕도 황태자가 아니었고 순종 동생 의친왕 이강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천황가의 조선 왕족과 공족이었다.

 

1873년 아들은 친정을 선언하며 아비가 강화도에 구축했던 진무영(鎭撫營)을 축소하고 궁궐 수비대로 전환시켰다. 그때 아비 대원군은 “그 군영이 국가에 무슨 해를 끼쳐서 장성(長城)을 파괴하는가?”라며 울었다.(황현, ‘매천야록’ 1권 1894년 이전④ 12. 강화도 무위영의 철폐) 이후 벌어진 역사를 우리는 모두 안다. 총성 한 번 울리지 않고 나라가 사라진, 이유가 뿌리 깊다.

 

▲1918년 1월 일본에서 영친왕 이은이 귀국했다. 그달 13일 경복궁 석조전에서 왕족과 총독부 관리, 조선귀족들이 오찬을 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가운데에 고종이, 고종 오른쪽으로 영친왕 이은과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고종 왼쪽으로 순종, 의친왕 이강,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앉아 있다. '한말궁중관계사진첩'에는 '1월 23일 석조전 오찬 기념사진'으로 적혀 있지만, '순종실록부록'에는 오찬 날짜가 1월 13일로 기록돼 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236] 경복궁 석물의 비밀① 근정전 품계석과 간의대“여러분은 세종시대 천문기구 간의대의 종말을 보고 계십니다”

1395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완공한 경복궁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녔다. 임진왜란 개전 직후인 1592년 4월 선조 일행이 북쪽으로 도주하자 분노한 한성 주민들이 난입해 불태웠다.(1592년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이후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건 공사를 시작할 때까지 경복궁은 공궐위(空闕衛·빈 궁궐 경비대)가 지킬 뿐 왕국 법궁(法宮) 기능은 상실했다. 몰라도 상관없으나 알면 다시 보게 되는, 그 경복궁에 얽힌 비밀 이야기다.

 

▲경복궁 경회루.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흠경각 뒤에 있던 해시계 '일영대'를 뜯어서 경회루 석축에 충당했다. /박종인

 

천재 일벌레 세종의 치적들

조선 4대 국왕 세종은 천재였고 일벌레였다. 천재도 부담스러운데 일벌레이기까지 했으니 그 아래 관료들은 죽을 맛이었다. 예컨대 영의정 황희는 나이 예순넷에 부모상을 당해 3년 휴직계를 냈다가 100일 만에 복직당했다. 예순아홉에 사표를 냈으나 또 거절당했고 일흔여섯에 낸 사표도 거부됐다. 1449년 여든여섯에 또 한 차례 사표 파동을 거친 후에야 세종은 황희를 은퇴시켰는데 이듬해 세종이 죽고 2년 뒤 황희도 죽었다. 그런 관료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 일벌레 천재 군주가 완성한 시스템 또한 한둘이 아니었다. “옛 무기가 우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고 자부할 정도로 최신 무기를 개발했고(1445년 3월 30일 ‘세종실록’), 자랑스러운 훈민정음을 창안했다. 그리고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천재 과학기술자들과 함께 천문 관측 시스템을 만들어갔으니, 그 가운데 가장 거대한 기구가 간의대다. 1433년 경회루 북쪽 담 안에 설치한 천문대 간의대는 높이가 31척(9.3m)에 길이는 47척(14.1m)에 너비는 32척(9.6m·1척 30㎝ 기준)이었다.(1437년 4월 15일 ‘세종실록’) 간의대 위에는 청동을 부어 만든 간의를 설치해 천체 현상을 관측했다. 그 옆에는 청석(靑石)을 정교하게 깎아 절기를 측정하는 규표(圭表)를 두었다.

 

▲경복궁 품계석.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궁 북서쪽에 있던 간의대 옥석을 헐어서 만들었다./박종인

 

괄시받은 간의대

간의대 역사는 수난(受難)의 역사였다. 1442년 12월 26일 세종은 느닷없이 경회루 간의대 자리에 별궁을 짓겠다며 간의대를 북쪽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그러다 일주일 뒤인 1443년 1월 3일 “자손만대에 전하려던 간의대를 헐어버리려니 마음이 괴롭다”며 명을 취소했다. 하지만 세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내가 머물 궁이 필요하다”며 별궁 자리를 고르라고 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2월 4일 또 마음이 바뀐 세종이 간의대를 옮길 자리를 고르라고 명했다.

 

세종은 합리적 사고방식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러니 며칠 사이 변심을 거듭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별궁 자리를 고르라는 명이 떨어지고 11일이 지난 1월 14일, 사간원 좌헌납(간언을 담당하는 관리) 윤사윤이 왜 간의대를 헐고 궁을 짓느냐고 왕에게 물었다. 세종 입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답이 튀어나왔다.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중국 사신이 보게 될까 해서다.”(1443년 1월 14일 ‘세종실록’)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국호(國號) ‘조선(朝鮮)’을 하사받은 사대의 나라였다. 그리고 천문을 관측하고 이에 따라 절기와 시각을 측정하는 일은 황제국의 권리며 제후국에는 금기(禁忌)였다. 세종은 그 사대 본국 명 사절에게 금기가 탄로날까 두려워 거대한 간의대를 이전하려고 한 것이다.

 

2월 15일 사헌부에서 또 이전 불가 상소가 올라왔지만 세종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간의대는 경복궁 북문인 숙정문 앞 담장 안으로 이전됐다. 1462년 세조 8년에는 이 간의대를 부수고 세자궁을 지으려는 시도가 있었고(1462년 2월 23일 ‘세조실록’), 1539년 중종 34년에는 간의대 담장을 높이는 공사가 벌어졌다. 이유는 ‘간의대 자리가 높아서 천사(天使·중국 사신)가 보면 왕이 대답하기 곤란해서’였다.(1539년 3월 27일 ‘중종실록’) 당대 세계 으뜸이었던 과학 기술이 사대(事大)에 의해 조락해버린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막대한 돈과 인력을 투입하고, 기존 건축자재를 재활용했다. 그 와중에 세종이 만든 천문관측기구 간의대는 옥석을 뜯어서 품계석 24개를 만들었고, 해시계인 일영대는 석재를 다듬어서 경회루 석축에 사용했다. 지금 우리는 품계석들은 세종 과학시대의 끝을 보고 있다./박종인

 

호랑이 출몰한 경복궁

임진왜란이 터졌다. 선조가 도주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한성 백성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왕실 금고 내탕고를 털어갔다. 그리고 노비 문서가 보관된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실록과 고려 사초도 남김없이 타버렸고 경복궁은 물론 창덕궁과 창경궁도 불탔다. 재물 탐하기로 소문난 왕자 임해군 집도 불탔다.

 

이후 경복궁은 273년 동안 폐허였다. 경복궁에는 전각이 ‘단 하나도 없었다’.(1704년 11월 12일 ‘숙종실록’) 가끔 노인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기도 하고(1706년 9월 16일 ‘숙종실록’), 뽕나무를 심어 왕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는 시범농업소 역할도 했다.(1767년 3월 10일 ‘영조실록’) 가끔 과거시험장으로도 사용됐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경복궁은 공터였다.

 

왕실에서는 공궐위를 설치해 빈 궁궐을 지켰지만 호랑이가 빈 궁궐에 들어오기도 하고(1751년 6월 9일, 1752년 1월 2일) 민간인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영조 때는 빈 궁궐에 아이 하나가 들어와 땔감을 줍다가 적발됐다. 아이는 금 술잔과 동으로 만든 사자상을 땔감 대신 주웠고, 이를 임금에게 바쳐 벌 대신 상을 받았다.(1764년 2월 13일 ‘영조실록’)

 

실학자 유득공의 궁궐 나들이

역시 영조 때인 1770년, 나비와 새가 나타나는 삼월 삼짇날 실학자 유득공이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와 함께 한성 나들이를 했다. 그리고 ‘봄날 한성 나들이(春城遊記·춘성유기)’라는 귀한 기행문을 남긴다.(유득공, ‘영재집’ 15) 삼청동에서 시작한 봄나들이는 남산을 거쳐 나흘째 경복궁으로 이어졌다. 남문 다리를 건너 근정전 옛터를 북쪽으로 도니 해시계인 일영대(日影臺)가 있었다. 경회루 옛터로 연결된 부서진 다리를 덜덜 떨며 건너가 구경했고 다시 다리를 건너 주춧돌 쌓인 공터를 지나 북으로 가니 간의대가 나왔다.

 

유득공이 이렇게 기록했다. ‘담장 안에 간의대가 있다. 대 위에 네모난 돌이 하나 있다. 서쪽에는 검은 돌 여섯 개가 있다. 돌은 길이가 대여섯 자쯤 되고 너비가 세 자쯤 되는데 물길을 뚫어 놓았다. 간의대는 드높고 시원스럽게 트여서 북쪽 동네의 꽃과 나무를 조망할 수 있다.’

 

대여섯 자쯤 되는 검은 돌은 규표(圭表)다. 처음 만들었을 때 검은 돌 위에 설치됐던 동표(銅表)는 사라지고 없었다.

 

간의대 위치는 경복궁 서북쪽 모서리였다. 신무문(神武門) 바로 옆이다. 세종 본인이 창안한 과학기구가 과학자 본인에 의해 궁궐 깊숙한 곳으로 쫓겨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폐기돼 사용하지 않으니 중국에서 배운 것인지 세종대왕이 창조한 건지도 모를 바요 용법도 모르니 매우 애석한’ 기계로 전락해 있었다.(1713년 윤5월 15일 ‘숙종실록’)

 

‘경복궁영건일기’와 사라진 간의대

1863년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실질적인 권력자는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진 세도정치를 끝내려던 대원군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을 통해 왕권 과시를 시도했다. 중건 공사는 국고(國庫) 소진과 인플레이션이라는 회복 불가능한 부작용을 낳고, 다른 공(功)들이 빛이 바랜 대원군은 1873년 권좌에서 쫓겨났다.

 

중건 공사를 주도한 영건도감 낭청 원세철은 중건 결정일인 1865년 4월 1일부터 큰 공사가 완료된 1868년 7월 4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기록했다. 이 일기에 간의대가 아주 순간적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린다.

 

‘근정전 상하 월대에 박석을 깔았다. 그리고 앞뜰에 박석을 깔고 두 줄로 품계석 24개를 세웠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2 1867년 10월 9일 맑음, 서울역사편찬원, 2019, p334)

 

품계석은 문무백관 벼슬 높낮이에 따라 정전인 근정전 앞마당에 정렬한 돌이다. 품계는 문, 무반 각각 정1품부터 정9품, 종1품부터 종9품까지 모두 36개지만 종4품 이하는 품계석을 생략해 총합은 24개다. 그 품계석을 1867년 10월 9일 박석 공사와 함께 앞뜰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문장에 누대에 걸쳐 소박 받던 간의대가 등장한다.

 

‘문무품 각 12개는 헐어버린 간의대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文武品各十二塊 以簡儀臺所毁玉石爲·문무품각십이괴 이간의대소훼옥석위).’

 

조선 최첨단 과학기술의 말로

궁궐 북서쪽에 서 있던 거대한 간의대를 헐어서, 그 석재 가운데 귀한 옥석(玉石)을 다듬어 품계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흠경각 옛터에 있는 일영대를 철거하고 그 석재를 모두 다듬어 경회루 연못 석축에 옮겨 사용하였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1865년 7월 6일 맑음, p177) 유득공 일행이 경회루 북쪽으로 돌아서 본 그 일영대다.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 두 가지 가운데 간의대는 벼슬아치들 아침 조회 자리잡이용 돌맹이로, 한 가지는 연못 석축으로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말이다.

 

찬란한 세종대왕 과학시대가 이렇게 초라한 종말을 맞이하였다. 역병이 한창이지만 고궁 나들이는 풀려 있으니, 경복궁에 가시거들랑 얼핏얼핏 옥색 석맥(石脈)을 비치며 서 있는 품계석에서 말로만 듣던 간의대를 상상해보시라.

 

▲경복궁 북쪽, 청와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태원전. 왕실에서 상을 당했을 때 관을 모신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세종시대 간의대는 철거돼 그 석재는 근정전 앞 품계석으로 재활용됐다. /박종인

 

▲서울 계동 서운감에 설치한 소관천대 흔적. 경복궁 관천대에 비해 소규모였다. 세종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지만 증거는 없다./박종인

 

[237] 경복궁에 숨은 역사② 구멍 뚫린 천록(天祿)과 굶어 죽은 녹산 사슴

“상처 난 돌짐승 하나가 주인 없는 궁에 와 있소이다”

▲경복궁 영제교 천록 석물. 오른쪽 천록은 등에 구멍이 뚫려 있다. /박종인

어느 동종의 기구한 운명

흥선대원군이 시작한 경복궁 중건 공사가 한창이던 1866년 겨울이었다. 그해 2월 8일 인부들이 광화문 서쪽에 방치돼 있던 종 하나를 경복궁 안으로 끌고 와 부쉈다. 세조 때 만든 이 종은 길이가 9자 2치(2m76)에 지름은 6자 5치(1m95) 두께는 9치 7푼(29cm)짜리 대종이었다. 종에는 신숙주가 쓴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녹여 근정전 사방을 지키는 향로와 처마 끝 기와를 보호하는 토수(吐首)를 만들고 나머지는 당백전을 만들었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1866년 2월 8일, 서울역사편찬원, 2019·이하 ‘영건일기’) 이보다 5개월 전 운종가 포목전 사람 600명이 동대문에서 종 하나를 옮겨 광화문으로 가져왔는데 이 또한 높이 8자 6치(2m58)에 너비는 5자 5치(1m60)요 두께는 9치 5푼(28.5cm)짜리 큰 종이었다. 세조 때 만든 흥천사 종이다.(‘영건일기’ 1865년 9월 2일) 광화문 문루에 걸었던 이 종은 지금 덕수궁 안에 걸려 있다.

 

한 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 종은 그나마 살아남았다. 동대문에 있던 종은 1555년 ‘종을 녹여 조총(鳥銃)을 만들자’는 각 관청 요구를 “옛것은 신령한 힘이 있다”며 명종이 결재를 거부한 바람에 살아남았다.(1555년 6월 17일 등 ‘명종실록’) 37년 뒤 그 조총을 앞세운 일본에 국토와 국민이 유린됐지만, 어찌 됐든 종은 살아남아 있다. 명분과 실질과 현실이 맞부딪친 구한말 경복궁 중건 현장으로 다시 가본다.

 

▲경복궁 근정전 오른쪽 구석에 있는 해태상. 암컷이 새끼를 안고 있다. /박종인

 

대원군의 트라우마, 화재(火災)

왕실 위엄도 위엄이지만, 대원군에게 경복궁 공사 최고 주안점은 화재 예방이었다. 곳곳에 수로를 파고 물을 담은 ‘드므’를 배치했다. 주술적인 방법도 동원했다. 불을 피하기 위해 많은 현판을 금색으로 썼고(‘영건일기’ 1867년 4월 21일), 화산(火山)인 관악산 기를 누르려고 관악산 꼭대기에서 숯을 만들어 근정전과 경회루 주변에 묻었다. 관악산 정상에 우물도 팠다.(1866년 1월 6일) 서쪽으로 냈던 경회루 수로 입구는 관악산 화기를 막기 위해 남쪽으로 바꿨다.(1866년 7월 1일) 청동으로 불을 제압하는 용을 만들어 경회루 연못에 집어넣고 근정전 상량식에는 용 용(龍) 자 1000자로 물 수(水) 자를 그린 종이를 상량문과 함께 삽입했다.(1867년 2월 9일) 목재로 만든 건물에 온돌로 난방을 하는 시스템이니, 바야흐로 위엄을 회복하려는 왕실에 화재는 무엇보다 무서운 적이었다.

 

▲경복궁 영제교에는 상서로운 동물인 서수 조각상이 네 개 있다. 하늘에서 온 사슴, 천록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하나(사진 오른쪽)는 등에 구멍을 때운 흔적이 보인다. 중국 사신이 묵는 숙소, 남별궁에서 가져온 석물이다. 왜 구멍이 뚫려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춘성유기’와 구멍 뚫린 천록(天祿)

경복궁 석물(石物)은 복을 빌고 악을 피하려는 상징들이다. 특히 근정전을 둘러싼 월대에는 많은 석물이 조각돼 있다. 대원군은 근정전 건물에서 월대까지 너비를 5척 확충하고, 석수(石手)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하며 공사를 독려했다.

 

돌기둥 36개 위에 있는 서수상 가운데 1층 월대 모서리에 있는 암수 동물상은 특이하고 예쁘다. 1770년 경복궁을 구경한 실학자 유득공은 이렇게 기록했다. ‘암컷은 새끼를 한 마리 안고 있다. 무학대사가 남쪽 오랑캐가 침략하면 짖도록 만들었고 어미개가 늙으면 새끼가 뒤를 이어 짖도록 했다고 전해 온다.’(유득공, ‘영재집’15 춘성유기(春城游記)) 유득공이 ‘개’라고 한 이 짐승은 해태(혹은 해치)다. 선과 악을 구별하고 화재와 재앙을 물리치는 동물이다.

 

그리고 유득공 눈길을 끌었던 석물이 하나 더 있으니,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 영제교 양쪽에 앉아 있는 천록들이다. ‘남문 안에 다리가 있는데 동쪽에는 돌을 깎아 만든 천록(天祿 혹은 天鹿)이 두 마리 있고, 다리 서쪽에는 한 마리가 있다. 천록의 비늘과 갈기가 잘 새겨져 있어 생생하였다.’ 한쪽에는 두 마리가 다른 쪽에는 한 마리가 있다는 목격담이다. 천록은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제거하는 전설 속 동물이다.

 

2020년 현재 영제교 옆에 있는 천록은 모두 네 마리다. 250년 전 존재하지 않았던 한 마리가 멀쩡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쪽 한 마리는 등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덮개가 씌어 있다. 유득공의 목격담은 이렇게 이어진다. ‘남별궁(南別宮) 뒤뜰에 등에 구멍이 뚫려 있는 천록이 한 마리 있는데 이것과 아주 비슷하다. 필시 다리 서쪽에 있었던 나머지 하나임이 분명하다.’(‘춘성유기’)

 

▲경복궁 영제교 동쪽에 있는 천록. 등에 난 구멍을 메꾼 흔적이 보인다. 고종 때 중국 사신 숙소인 남별궁에서 가져와 설치한 석물이다. /박종인

 

임진왜란, 남별궁 그리고 소공로

남별궁은 임진왜란 이후 중국 사신이 머물던 숙소다. 서울 소공동에 있다. 원래는 태종 둘째딸 경정공주가 살던 집이었다. 지금 지명인 ‘소공동(小公洞)’은 ‘소공주(小公主)’가 살던 집에서 유래됐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이 집에 진영을 차렸다. 원래 우키타는 종묘에 주둔했었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서로 칼로 치다가 죽은 자가 속출하자’(1592년 5월 3일 ‘선조실록’) 이 집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1593년 한성이 수복된 이후에는 불타버린 옛 명나라 사신 숙소 태평관 대신 명과 청나라 사신 숙소로 사용됐다.

 

명대인지 청대인지는 알 수 없는 어느 때, 경복궁에 있던 천록 한 마리가 남별궁으로 옮겨졌다. 실학자 이덕무는 “바로 경복궁에서 옮겨온 것(盖自景福宮移置也·개자경복궁이치야)”이라고 확신했다.(이덕무, ‘청장관전서’51 이목구심서4) 1868년 3월 2일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영제교 패하석의 등쪽 팬 곳을 돌로 보완했다’고 기록돼 있으니 그 무렵 남별궁에서 천록은 경복궁으로 환궁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흠경각 뒤편 화원에 있는 정체불명의 석물. 유득공의 '춘성유기'에 따르면 이는 근정전에 있던 사관들 돌벼루다.

 

굶어 죽은 녹산 사슴

대원군이 그렇게 화재 예방 상징을 새겨 넣었지만, 경복궁은 화재가 여러 번 났다. 1867년 2월 9일 근정전 상량문을 올리던 그날 영추문과 건춘문 쪽 목재 창고와 인부 숙소에 불이 나버렸다. 한 달 뒤인 3월 5일 심야 화재로 공사 중이던 전각 수백 칸이 사라졌고 목재도 불탔다. 1876년에는 완공된 경복궁에 또다시 큰 화재가 일어났다. 전각 830여 칸이 재로 변했고 역대 왕들 글씨와 유품도 몽땅 사라졌다.(1876년 11월 4일 ‘고종실록’) 고종은 ‘민간 토목공사 금지령’을 거듭 내리며 재중건 공사를 강행했다.(1893년 8월 25일 등 ‘승정원일기')

 

고종이 백단향을 피우며 국태민안을 빌었던(‘영건일기’ 1867년 11월 16일) 근정전 향로는 뚜껑을 잃어버리고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남별궁은 1897년 황제가 천제를 지내는 원구단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896년 2월 아관으로 파천한 이후 고종은 두 번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08년 2월 12일 고종과 왕비 민씨가 완상하던 궁내 녹산 사슴 7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죽었다. 고종 내탕금이 내려오지 않아 사료를 사지 못해 굶어 죽었다.(1908년 2월 12일 ‘대한매일신보’) 창덕궁으로 옮긴 6마리 가운데 4마리도 2주 뒤 죽었다.

 

그해 3월 1일 대한제국 궁내부는 텅 빈 경복궁을 민간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했다.(1908년 3월 1일 ‘대한매일신보’) 3월 8일 입장권이 발매됐고, 4월 26일 일요일 경복궁 관람객은 2118명이었다.(1908년 4월 28일 ‘황성신문’) 이듬해 궁내부는 경복궁 건물 4000여 칸을 경매에 부쳤다. 낙찰자 10여 명이 칸 당 15환부터 27환까지 가격으로 응찰했다. 한성부윤 장헌식 또한 석재와 목재를 사서 자기 집을 짓다가 욕을 먹었다.(1909년 5월 15일, 7월 5일 ‘대한매일신보’) 신문 기사 제목은 ‘기막히여’였다.

 

1911년 2월 20일 천록이 있던 옛 남별궁, 원구단 건물과 땅이 총독부에 인계됐다. 석 달 뒤인 5월 17일 궁내부는 경복궁 전체를 총독부에 넘겼다.(1911년 5월 17일 ‘순종실록부록’) 아무리 정교하게 깎고 정성을 들인들, 돌들은 나라를 지켜주지 못했다. 대원군이 심혈을 기울인 근정전 해태 가족상도, 국운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천록도 경회루 못 가운데 숨죽이던 청동 용도 소용없었다.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향로. 세조 때 만든 큰 종을 녹여 만들었다. 종을 녹여 나온 동은 당백전 재료로도 사용됐다. /박종인\

 

조선고적도보 10권(1930년)에 나온 근정전 향로. 뚜껑이 있다.

 

[238] 경복궁에 숨은 역사 ③끝 효자로 플라타너스 숲의 정체

경복궁 돌담길 가로수마다 사연이 숨었다

▲좋든싫든 역사를 품은, 경복궁 서쪽 담장 너머 플라타너스 숲. /박종인

 

경복궁 약전(略傳)

‘1865년 3월 의정부에서 평석이 발견됐는데,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으면 자손이 끊기니 다시 지어서 보좌를 옮기면 대를 이어 국운이 연장되고 인민이 부유하고 번성하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대원위 합하에게 바치자 궁을 중건하라는 명이 내려왔다.’(‘경복궁영건일기’ 서, 한성부 주부 원세철, 1868년)

 

그리하여 시작된 경복궁 중건 역사는 1868년 7월 4일 고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문무백관 하례를 받으며 공식 완료됐다. 비가 내리던 그날 판부사 이유원이 고종에게 청했다. “이 법궁을 억만년토록 기명(基命·일의 시작)과 정명(定命·일의 끝)의 근본으로 삼으소서.” 고종이 말했다. “마땅히 가슴속에 새겨두겠다.” 임진왜란 이후 276년 만에 부활한 조선왕조 법궁을 수호하고 국태민안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 주변에 있는 플라타너스 거목. 일제강점기에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 /박종인

 

이후 궁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1895년 왕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피살됐다. 이듬해 왕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1915년 총독부는 많은 전각을 허물고 경복궁을 조선물산공진회 전시회장으로 전용했다. 11년 뒤인 1926년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에 섰다. 이듬해 광화문이 동쪽으로 이건됐다. 1929년에는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열렸다. 더 많은 전각이 사라졌다.

 

광복 후 총독부 청사는 대한민국 정부청사였다가 국립박물관이었다가 1995년 해체됐다. 지금은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을 복원 작업 중이다. 고종이 깨뜨린 법궁 수호와 국태민안의 의지가 공화국시대에 실행되는 중이다.

 

▲경복궁 서쪽 담장 너머 보이는 플라타너스 숲. 일제강점기에 심은 가로수로 추정된다. 새로운 자재로 복원되는 옛 건물과 달리 시간에 따라 성장하는 노거수(老巨樹)는 주변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플라타너스는 빨리 자라는 장점이 있지만 꽃가루를 날리고 노변 가게 간판을 가리는 탓에 퇴출 기로에 선 가로수다. 가로수 수종을 교체하면, 아쉽지만 나무에 얽힌 역사는 망각된다. /박종인

 

잊힌 궁궐, 경복궁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황궁을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긴 뒤 경복궁은 버림받았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왕은 다시 경복궁을 찾지 않았다. 실록에 따르면 이후 고종이 경복궁을 찾은 날은 1906년 9월 13일 고종 54회 생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음력 7월 25일) 잔칫날밖에 없었다. 그사이 1901년 7월 1일 지방에서 놀러온 민간인들이 병정들을 따라 무너진 경복궁 담장을 통해 구경하다가 걸리기도 했다.(‘사법품보·司法稟報’ 30 1901년 7월 1일)

 

결국 경복궁은 식민지 지배 기관인 총독부 청사 터로 변했다. 이후 도시는 대폭 바뀌었다. 1914년 12월 2일 서소문이 경매로 매각됐다. 이듬해 3월 6일 서대문도 매각됐다. 목재는 205원에 경성 사람 염덕기에게 낙찰됐고 석재는 도로 확장용 자재로 들어갔다.(1915년 3월 15일 등 ‘매일신보’)

 

경성 거리에 나타난 가로수

500년 동안 유지됐던 도시 구조가 변화하면서 또 다른 생명체가 역사에 등장했다. 가로수다.

 

1917년 총독부 ‘도로요람’은 주요 도로에 가로수를 7.27m 간격으로 심되 연 2회 손질을 하며 교통에 지장이 없도록 아랫부분은 가지를 잘라내도록 규정했다.(조선총독부, ‘도로요람’, 1917: 김해경, ‘일제강점기 경성 내 가로수에 대한 일고찰’, 서울과역사 98호, 서울역사편찬원, 2018 재인용) 도심에는 병충해에 강하고 열매 없는 낙엽수를 심도록 규정했다. 세종 때 30리마다 이정표 나무 후수(堠樹)를 세우라는 기록이 있고 정조 때 수원 융릉 가는 길에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본격적인 도심 가로수는 이때 탄생했다.(김해경, 앞 논문) 경복궁 주변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가로수를 처음 본 사람들 반응은 두 가지였다. 가로수는 ‘황금정 1정목 자동차상가 앞 나무 한 개를 뿌리째 빼가는 악희(惡戲)’의 대상이기도 했고(1917년 4월 17일 ‘매일신보’), 가로수의 잎사귀들은 ‘양양(陽陽)한 광채의 물결 위에서 파닥이면서 가벼운 파문을 일으키는’ 낭만의 대상이기도 했다.(김안서, ‘수확의 가을과 시상’, 삼천리 12권 9호 1940년 10월) 유럽 여행을 떠났던 독립운동가 박승철은 파리에서 ‘노방수(路傍樹)가 열을 지여 잇나이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파리와 베를린’, 개벽 24호, 1922년 6월)

 

동네마다 달랐던 가로수들

1934년 가로수 식수 6개년 계획이 결정됐다. 이에 따르면 플라타너스와 모니후에스(?·양버들나무 추정)를 연건동 대학병원 부근(플라타너스)과 안국동~돈화문(양버들)에 심고 광화문거리에는 중앙에 녹지대를 만들어 가로수를 심도록 돼 있다. 그리고 1936년 심었던 가로수들 가운데 고사(枯死)한 1400그루를 같은 종류로 갈아 심고 1300그루를 새로 심었다.(1936년 3월 5일 ‘조선중앙일보’) 경상남도에서 가로수 600만 그루 심기 대회를 열고 부산-창원-진주에서는 가로수 품평회를 열 정도로(1931년 1월 23일, 1932년 3월 8일 등 ‘부산일보’) 가로수는 ‘총독부가 선사한 근대의 상징’으로 장려됐다.

 

소위 녹화사업은 꾸준히 계속됐는데, 포플러와 향나무와 아카시아가 말라죽자 이를 플라타너스로 대체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김해경(건국대 녹지환경계획학과)에 따르면 이 나무들은 해방 후까지 유지돼 1957년에도 태평로 일대에 플라타너스, 광화문 광장에는 은행나무, 한강로에는 양버들, 청량리~동구릉 연도에는 수양버들이 그대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니까 각 지역마다 종류가 다른 가로수들이 군집을 이루며 자라나고 있었다는 말이다.

 

▲1929년 촬영된 경복궁 동쪽 궁장. 왼쪽으로 중학천이 보이고 멀리 동십자각이 보인다. 사진은 1927년 총독부가 이전한 광화문 문루에서 찍었다. 궁장 가운데 보이는 문은 건춘문이다. 건춘문에서 동십자각에 이르는 궁장이 아직 철거되기 전 사진이다. 가로수는 보이지 않는다. /총독부 유리건판

 

플라타너스, 추억 그리고 역사

기억이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된다. 쓰린 추억도 추억이고 아픈 역사도 역사다. 전국 팔도에 살고 있는 노거수(老巨樹)는 그 자체가 역사다. 2009년 광화문광장이 조성되면서 총독부가 심었던 세종로 중앙분리대 은행나무들이 뽑혀나갔다. 29그루였다. 이들은 원래 경기도로 이사하려 했으나, ‘뿌리까지 뽑아놓고 보니 나무를 실은 트럭이 터널을 통과하지 못해’ 부랴부랴 도로 양편 정부청사와 시민열린마당으로 옮겨 심었다. 이미 주요 가지들은 잘라낸 탓에 나무들이 겪은 식민지와 전쟁의 역사는 찾아볼 수 없다.

 

경복궁 주변은 어떨까. 현 광화문 앞길에 심었던 은행나무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경복궁 서쪽 효자로 주변에는 거대한 플라타너스들이 은행나무들 사이에서 자라고 있다. 성장 속도가 빠른 장점이 있지만 꽃가루가 날리는 데다 성장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라 간판을 가리는 단점으로 퇴출 대상이 된 나무들이다.

 

그런데 그 장단점 뚜렷한 나무들이 지금 경복궁 서쪽 길 양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서울시는 물론 관할 종로구에도 이 나무들이 언제 식재됐는지 기록이 전무하다. 이 플라타너스들은 1951년 촬영된 미군 항공사진에도 등장하니, 총독부가 심은 나무일 확률이 크다. 일제강점기 그 복잡하고 서글프고 강요된 역사를 견디며 자라나 어느덧 역사와 함께 늙어버린 나무들이라는 말이다. 왜 이들을 ‘일제의 잔재’라며 폐기 처분하지 않았는지 이유는 알 길 없으나, 그 덕에 우리는 저 키 큰 나무들이 품고 있는 역사를 호흡하며 도심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929년 7월 4일자 '조선일보'. 조선박람회를 위해 동십자각 주변 경복궁 담장을 철거한다는 기사다. 기사에는 '박람회가 끝나면 다시 원상을 회복한다더라'라고 적혀 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에 실린 경복궁 동십자각. 박람회 출입구로 사용하기 위해 경복궁 담장을 철거하고 철책을 설치했다. 동십자각은 외벽을 덧대 크게 변형시켰다. /서울역사박물관

 

▲1929년 조선박람회 출입구로 변형된 동십자각. 경복궁과 연결된 궁장은 철거되고 외벽은 심하게 변형됐다. /국사편찬위

 

▲건춘문 옆으로 이건된 뒤 1929년 9월 조선박람회 입구로 사용된 광화문. 가설 외벽을 덧대서 3층으로 변형시켰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자리다. 사진 아래쪽 난간은 중학천에 설치된 난간이다. /국사편찬위


동십자각과 수수께끼의 포플러

1929년 9월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가 열렸다. ‘총독부 시정 20주년’을 기념하는 초대규모 엑스포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경복궁 전각들이 박람회를 위해 빗자루로 쓸어내듯 쓸려나갔다. 1929년 7월 경복궁의 동쪽 궐(闕·궁을 지키는 망루)인 동십자각 주변 담장이 전격 철거됐다. 동십자각 양옆을 박람회 출입구로 사용하기 위한 조치였다. 동십자각은 도로 속 섬이 됐다. 2년 전인 1927년 광화문이 경복궁 동쪽 건춘문 옆으로 이건당했다. 이건된 광화문은 박람회 메인게이트로 전락했다.

 

1929년 총독부 유리건판 사진을 보면 현 경복궁 주차장 앞에는 가로수가 한 그루도 없다. 1947년 미국 ‘라이프지’가 찍은 사진에도 가로수는 보이지 않는다. 2020년 겨울, 삼청로 노변에는 어린 은행나무가 줄지어 있는데 동십자각 뒤편 주차장 입구에 거대한 포플러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뜬금없는 이 나무,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왔는가. 기록도 없고 아는 이도 없다.

 

복원된 건물과 달리 노거수는 시간 속에서 변화한다. 역사와 함께 키가 자라고 덩치가 불어나고 꽃이 피고 잎이 떨어진다. 서울 가로수 역사는 120년이 넘지만 역사를 알려주는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김해경, 앞 논문) 현실 속에 숨쉬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상 간의대 토막 품계석 사건과 척추 부러진 천록에서 가로수까지, 경복궁에 얽힌 몇몇 이야기였다

 

▲동십자각 북쪽 경복궁 동쪽 주차장 입구에 서 있는 수수께끼의 양버들나무(포플러 종류). 삼청로 가로수는 모두 은행나무고 이 나무만 유일하게 다른 수종이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촬영한 사진에도 이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박종인

 

[239] 전주 이씨 시조 묘 조경단

여기가 조선왕조의 시작이며 끝이었다

▲조선 왕조의 시작, 전주 조경단.

 

전북 전주 덕진동 전북대학교와 덕진체련공원 사이에 제사 때를 빼고는 늘 닫혀 있는 문이 있다. 문 너머 공간 이름은 조경단(肇慶壇)이다.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또 있다. 옛 전주부성 남문 이름은 풍남문(豐南門)이고 서문 이름은 패서문(沛西門)이다. 풍(豐)과 패(沛)는 한나라 유방이 군사를 일으킨 강소성 패군 풍현을 가리킨다. 즉 제왕의 땅이라는 말이다.

 

이쯤이면 조경단이 무엇이고 풍남문과 패서문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리라. 조선 왕실에 전주는 풍패지향(豊沛之鄕), 새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이라는 말이다.

 

조경단은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李翰)을 기리는 제단이다. 그리고 강원도 삼척에는 이성계의 4대조 이양무 무덤, 준경묘(濬慶墓)가 있다. 518년 이어진 조선 왕실은 건국 507년 뒤인 1899년에야 이들을 찾아내 단과 묘를 만들었다. 전주에서 시작해 두만강 건너 알동(斡東)까지 이어진 전주 이씨 왕실 흥망사 이야기다.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 위치를 찾지 못해 대신 만든 제단, '조경단'.


전주를 떠난 전주 이씨들

성품이 호방하여 천하를 경략할 뜻을 가진 전주 호족 이안사는 때마침 전주에 파견된 산성별감과 관기(官妓)를 두고 다투었다. 이에 이안사는 화를 피해 수하 식솔 170여 호와 함께 강릉도 삼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그 산성별감이 하필이면 강릉도 안렴사로 부임하자 다시 화를 피해 바다를 건너 북쪽 덕원, 곧 함흥 땅으로 옮겼다. 함흥은 그때 몽골 땅이었다.(‘태조실록’ 총서)삼척을 떠나기 전 이안사 부친 이양무가 죽었다. 삼척 지역 설화에 따르면 묏자리를 찾는 이안사에게 한 승려가 “소 백 마리를 잡아서 개토제를 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면 5대 뒤 임금이 난다”고 했다. 가난한 이안사는 일백 백[百] 대신 흰 백[白]을 써서 흰 소를 제물로 삼고 황금 대신 누런 귀릿짚으로 관을 삼아 장사를 치렀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선원계보 17세 양무) ‘백우금관(百牛金棺)’ 신화다. 예언대로 이안사 5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금의환향한 다루가치들이성계(5대)와 이방원(6대)까지 이들을 세종은 ‘용비어천가’에서 해동육룡(海東六龍)이라 불렀다.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과 이자춘(환조)과 이성계(태조)와 이방원(태종)이다. 1254년 이안사는 두만강 건너 지금 러시아 땅인 알동(斡東)으로 옮겨 원나라 지역 관리가 되었다. 그 손자 이춘은 몽골명이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였고 그 아들 이자춘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다. 이들은 몽골 지역 수장인 다루가치로 넓은 영역을 통치했다.(‘태조실록’ 총서)그러다 이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흑룡과 싸우던 백룡을 도와주니 백룡이 ‘큰 경사가 자손에게 있으리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아들 이자춘이 고려에 귀순해 공민왕 휘하에서 몽골을 격퇴하고, 영흥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가 이성계다.이성계 또한 왜구 격퇴에 무공을 세우고 드디어 새 나라를 세웠다. 백우금관 설화가 실현된 것이며 고조 이안사 때 쫓기듯 떠난 고향으로 찬란하게 복귀한 것이다. 그러니 삼척과 고향 전주가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대한제국 시대인 1899년 고종 명에 의해 세운 조경단 비석. '대한 조경단'이라고 적혀 있다. 대한의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제왕의 땅, 풍패지향전주는 전주 이씨 왕실의 고향이었다. 태종 때 조선왕조는 전주에 어용전(御容殿)을 건립했다. 세종 때 경기전(慶基殿)으로 개칭된 어용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전까지 제왕의 땅, 풍패지향은 함흥과 함길도(함경도) 일대였다. 함길도 관찰사 정갑손은 “본도(本道)는 우리 조정의 풍패”라 했고(1443년 4월 7일 ‘세종실록’) 선조 때에도 “(함길도는) 풍패의 땅이므로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1605년 5월 29일 ‘선조실록’)삼척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왕실에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제후 조상묘는 4대까지 제사를 지내는 유교 예법에 따라 이성계 5대조인 이양무는 예법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이욱, ‘조선시대 왕실 원조의 무덤 찾기’, 종교연구 60집, 한국종교학회, 2010) 1580년 강원도 감사 정철이 “천하 명당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고 보고하며 정비를 요청했지만 묵살됐다.왜란과 호란 두 전란이 끝나고 양반 사회가 안정되던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족보 제작과 시조묘 찾기 열풍이 불었다. 고조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사대봉사(四代奉祀)’ 한계를 뛰어넘어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묘제(墓祭)를 통해 가문을 결속하려 한 것이다.(이욱, 앞 논문)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려면 묘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시조 묘가 있는 전주가 풍패지향으로 부각됐고, 백우금관 건국설화를 품은 삼척이 성지(聖地)로 부각됐다

 

▲강원도 삼척에 있는 준경묘.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무덤이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졌다.

 

현상수배 준경묘

삼척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1640년 인조 때는 풍기 사람 박지영이 “묘를 꿈에서 찾았다”며 몽서(夢書)를 올렸고, 이듬해 최명길은 “가끔 꿈이 들어맞기도 한다”며 조사를 요구했다.(1640년 7월 15일, 1641년 5월 3일 ‘인조실록’) 인조는 사람을 보내 지형을 조사하고 땅을 파봤으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인조는 관련자들에게 상을 줘 제보를 권장했다.(1649년 3월 24일 ‘인조실록’)

 

‘찾는 사람에게 백금(百金)과 판윤 벼슬을 준다’는 말에 제보가 봇물처럼 터졌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자 허망(虛妄)한 말을 한 혐의로 벌을 받곤 했다.(1704년 1월 12일 ‘숙종실록’) 대신 이양무와 그 아내 이씨 묘로 추정되는 분묘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하는 선에서 세월이 갔다.

 

진정한 제왕의 땅, 전주

1767년 영조 43년 전주성이 대화재로 불탔다. 그러자 전라관찰사 홍낙인은 남문과 서문을 재건하고 이름을 각각 풍남문과 패서문이라 이름 붙였다. 진정한 제왕의 성이 된 것이다.

 

1771년 영조 47년 전주 경기전 북쪽에 조경묘(肇慶廟)가 건립됐다. 그해 10월 7일 영조는 시조 이한 사당 건립을 전격 지시했다. “내가 여든이 되어 거의 13세 할아버지 얼굴을 뵙게 될 판인데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1771년 10월 7일 ‘영조실록’) 그달 21일 터 닦이 공사가 완료되고 11월 24일 사당이 완공됐다.

 

왕족인 전주 이씨들 상소가 이어진 데다 영조 본인 또한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시조 이한의 묘역을 전혀 찾을 수 없는 탓에 사당만 지었다. 완공 사흘 뒤 특별 과거를 실시했는데, 급제자 가운데 전주 이씨와 (시조모인) 경주 김씨가 없었다. 그러자 다음 날 두 성씨만 대상으로 또 시험을 치러 4명을 급제시켰다. 전주는 조선 창업자 태조의 본향에서 조선 창업의 땅으로 격상됐다.(이동희 ‘조선왕실의 시조사당 조경묘 창건과 그 역사적 의미’, 국가 문화재 승격을 위한 조경단·조경묘 학술대회 자료, 전주역사박물관, 2020)

 

고종이 해결한 준경묘와 조경단

한참 세월이 흐른 1898년 10월 24일 의정부 찬정 이종건이 시조묘를 모시지 못해 원통하다고 상소를 했다. 고종이 답했다. “일반 백성도 조상을 모시는데 하물며 황제 집안인데 못하겠는가.”(1898년 양력 10월 24일 ‘고종실록’) 1899년 1월 25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전주 건지산에 제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고 명했다. 동시에 삼척에 있는 이양무 부부묘를 준경묘와 영경묘로 이름하고 이를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물증이 없어서 500년을 미루던 대역사가 한번에 해결된 것이다.

 

▲조선 왕실은 건국 이래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묘와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영조 때 시조 이한을 기리는 사당 조경묘를 전주에 짓고 고종 때 시조 묘역에 제단을 지어 조경단이라 명명했다.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묘는 찾는 데 실패해 의묘를 세웠다. 가운데 네모난 공간이 조경단, 오른쪽은 비각, 언덕 위에 시조 이한의 의묘가 보인다. 그리고 삼척에서 이성계 5대조 이양무 묘를 찾아 '준경묘'라 명명했다. /박종인

 

어울리지 않았던 ‘경사의 시작’

‘매천야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고종이 시조 묘를 알리기 위해 거창한 역사를 시작했는데, 너무 거창하여 원성이 행인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함경도에서 온 지관 주씨가 몰래 참서를 묻어놓았다가 발굴하였다. 참서에는 “황제를 칭한 뒤 300년 동안 국조가 이어진다”고 돼 있었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였다. 서울에서 감독관이 내려왔고 전북에서는 관찰사 이완용이 주관했다.’(황현, ‘매천야록’ 3권 1899년① 3.’조경단 신축', 국사편찬위)

 

고종은 자기 금고인 내탕고에서 5000원을 공사비로 하사했다.(1899년 양력 1월 25일 ‘고종실록’) 턱없이 부족했다. 탁지부에서는 1만원을 예비비로 추가 요청했다.(각사등록 근대편 각부청의서존안11, ‘영건청 소관 조경단 건축비 지출 청의’ 1899년 6월 20일, 국사편찬위) 이래저래 조경단 공식 공사비는 3만8058원57전이었다.(각부청의서존안14, ‘조경단 건축비 증액 지출 건’ 1900년 4월 28일) 대한제국 정부는 모자라는 공사비 보충을 위해 ‘김창석, 정귀조 등을 감독으로 임명해 비용을 지불하게 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전주의 거부(巨富)였다.’(황현, 위 책)

 

참 허망한 것이, 그러고 6년 뒤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또 5년 뒤 나라가 사라졌다. 뿌리는 찾았는데 그 뿌리에서 움터 창대하였던 그 나라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주에 가면, 웅지(雄志)로 세운 나라가 어떤 경로로 어떤 흥망을 겪었는지 한번 볼 일이다

 

 

2020.12.16

[240]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 ① “흙으로 만든 국과 종이로 만든 떡을 누가 먹으랴!”

/전주성 풍남문 /박종인

 

내 인생은 낭비” 관찰사 서유구

올해 복원된 전라감영 동헌 앞에는 낯선 돌이 두 개 서 있다. 하나는 가석(嘉石)이고 하나는 폐석(肺石)이다. 가석은 경범죄를 저지른 자를 그 위에 앉혀서 죄를 뉘우치게 하는 돌이다. 폐석은 억울한 백성이 그 옆에 서 있으면 관리들이 자초지종을 물어 사연을 풀어주는 돌이다. 행정과 사법을 동시에 담당했던 조선시대 지방관 통치 율법을 상징한다.

 

19세기 초 이 전라감영에서 만 19개월 근무했던 행정가가 있다. 1833년 4월 부임했을 때 나이는 만 69세, 고희(古稀)였다. 이 늙은 관찰사는 임기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이름하여 ‘완영일록(完營日錄)’이다. 그가 결재한 모든 공문서가 첨부돼 있고, 사건과 사고, 민간 풍습과 가뭄 때 고구마를 들여와 시범 재배를 한 사실까지 다 기록돼 있다. 이 사내는 또 한자로 250만 자가 넘는 백과사전을 혼자 지었다. 그 속에는 화훼와 음악, 회화와 건축, 기상과 천문과 의학과 문화예술과 가정경제까지 다 들어 있다. 책 이름은 ‘임원경제지’다.

 

이만하면 웬만한 업은 다 성취했을 법한데, 그가 스스로 남긴 묘지명에는 이리 적혀 있다. ‘내 인생은 낭비투성이였다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더 남겼다. ‘흙으로 만든 국과 종이로 만든 떡은 만들지 않겠다네.’

 

자, 이 사내 이름은 서유구(徐有榘)다. ‘榘(구)’는 모날 구자다. 직선과 네모를 뜻한다. 친구들끼리 부르는 이름 자(字)는 ‘준평(準平)’, 목수들이 쓰는 수평계 이름이다.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 선비 치고는 작법이 범상치 않다. 민란(民亂)이 급증하던 19세기 초 흙국과 종이떡을 거부하고 낭비투성이 삶을 살았다는 서유구 이야기.

 

▲전라감영이 있는 전북 전주 풍남문. 1833년 고희(古稀) 나이에 전라관찰사로 부임한 서유구는 19개월 임기 동안 꼬박 ‘완영일록’이라는 업무일지를 남겼다. 그는 ‘비실용적인 학문은 못 먹는 흙국과 종이떡과 같다’고 했다. 대신 자신은 세상을 위해 실용적인 학문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박종인

 

과거 부정과 왕세손 이정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그 아들 정(琔)을 왕세손으로 삼았다. 정은 아비 사도세자 대신 그 맏형인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했다. 자그마치 24년 뒤인 1775년 11월 30일 영조는 왕세손을 왕좌에 앉히고 본인은 대리청정하는 위치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조정 대신들은 물론 왕세손까지 극구 반대했으나 영조는 ‘결재 거부’ ‘단식투쟁’을 내걸고 관철했다. 대리청정을 못하게 하면 아예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우기기도 했다.(1751년 5월 13일, 1775년 11월 30일, 12월 7일, 12월 8일 ‘영조실록’)

 

사흘 뒤 대리청정 축하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합격자를 고르고 나니 최수원, 조영의, 조우규 세 응시자 답안지가 똑같았다. 과거 문제지는 물론 모범 답안지까지 유출된 것이다. 왕좌에 앉은 왕세손은 이들 합격을 취소시켰다. 훗날 왕위에 오르며 왕세손은 이름을 산(祘)으로 개명했다. 그가 조선 22대 국왕 정조다. 왕이 됐어도 과거장 꼬락서니는 변함없었다. 청탁과 남의 글을 베끼는 차술(借述)과, 책을 들고 들어가는 협책(挾冊) 행위가 곳곳에서 적발됐다. 처음에 “일단은 참겠다”며 넘어갔던 정조는 나중에는 “‘부정행위 처벌' 명령을 궐문에 걸라”고 분기탱천하기도 했다.(1782년 1월 10일, 1794년 1월 6일 ‘정조실록’)

 

▲서유구(1764~1845).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용주의자다

 

친위대 초계문신과 서유구

과거가 난장판이니 또 다른 인재 충원 루트가 필요했다. 그게 초계문신(抄啓文臣: 인재를 골라서 왕에게 아뢰어 등용한 문신)이다. 즉위 후 6개월 뒤 정조는 창덕궁에 왕립도서관 규장각을 세웠다. 규장각 간부인 각신(閣臣) 6명은 공무 중 면책특권을 비롯한 많은 특권을 누렸다. 한성 안팎으로 말을 타고 다니는 ‘어마어마한’ 특권도 있었다.(1776년 9월 25일 ‘정조실록’) 그리고 5년 뒤 37세 이하 과거 합격생 가운데 초계문신을 뽑았다. 정조는 이들을 규장각에 근무시키고 직접 가르쳤다. 왕이 관료를 직접 양성한 것이다. 1781년 16명을 비롯해 정조가 죽은 1800년까지 초계문신은 모두 139명이 선발됐다. 1789년 15명에는 정약용이, 1790년 19명에는 문제적 인물 서유구가 들어 있었다.

 

교육은 혹독해서 초계문신들은 ‘동몽(童蒙·어린아이)같이 맞으며 생도(生徒·학생)같이 단속 당했다.’(정약용, 경세유포 권1 춘관예조 3) 활쏘기 또한 교양 필수였는데, 정약용도 못 쏘았고 서유구도 못 쏘았다. 서유구는 특히나 젬병이었다. 1791년 10월 2일 초계문신들이 활쏘기 훈련을 받았는데 대부분 활을 쏘지 못했다. 실망한 정조는 시험을 중단시키고 병영에서 훈련을 명했다. 많은 이가 재시험을 통과했으나 서유구는 ‘구제불능 최하급이라(下愚不移·하우불이) 깎아내지 못할 썩은 나무 같았다(朽木不可雕也·후목불가조야).’ 고문관 서유구는 또 숙직을 하며 훈련을 해야 했다.(1791년 10월 27일 ‘승정원일기')

 

그런데 공부는 뛰어났다. 1789년과 1790년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한 시경 강의 후 정조가 출제한 시험 문제 590개 가운데 후배 서유구는 181개, 선배 정약용 답안은 117개가 채택됐다.(정명현 등 ‘임원경제지,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12, p149 이하)

 

똑같이 전도유망한 초계문신 선후배 정약용과 서유구는 이후 인생도 많이 닮았다. 활쏘기를 잘 못한 것도 닮았고(정약용은 아예 자기 문집 ‘다산시문집’에 ‘북영벌사기(北營罰射記: 벌 받은 활쏘기 훈련기)’를 남길 정도였다), 학문에 뛰어난 것도 닮았다. 그런데 우리는 실학, 하면 다산을 떠올리고 서유구는 잘 모른다. 이 사연은 뒤에 하기로 하자.

 

▲복원된 전라감영. 동헌 앞마당 통로 좌우에는 사법행정과 관련된 돌 두 개가 서 있다. /박종인

 

5020권짜리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겨울 청나라로 떠난 연행사 일행이 만 석 달 만에 돌아왔다. 1777년 2월 24일 창덕궁에 입궐한 일행은 이렇게 보고했다.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020권이 지금 막 실려 오고 있나이다.”(1777년 2월 24일 ‘정조실록’) 고금도서집성은 청나라 최대이자 지금도 최대인 중국 백과사전이다. 가격은 은화 2150냥이었다.

 

선대인 영조 시대는 학문의 암흑기였다. 전주 이씨 왕실 계보를 왜곡한 청나라 책이 수입되자 영조는 일체의 중국 서적 수입을 금지하고 책 판매상인 책쾌(冊儈)도 한동안 금지했다.(2019년 7월 10일 자 본지 ‘땅의 역사 172: 서점 없는 나라 조선과 책쾌들의 대학살’ 참조) 정조가 즉위하고, 학문을 통해 왕권 강화를 꿈꿨던 정조는 청나라 학술 서적을 직접 명했다.

 

도서집성 상자를 열어보니 종이가 저급한지라 죄다 뜯어내고 제본을 다시 했더니 두 권 늘어난 5022권이 되었다. 그 책마다 제목 ‘도서집성’ 네 자를 모두 지사(知事) 조윤형이 썼다. 함께 근무하던 이덕무가 “최소한 도서집성 네 자는 왕희지보다 낫다”고 놀릴 정도였다.(노대환, ’18세기 동아시아의 백과전서 고금도서집성', 2015)

 

정조가 원했던 책은 새로운 백과사전인 ‘사고전서(四庫全書)’였는데 아직 미완성 상태였다. 그래서 연행사 부사 서호수가 청 학계를 잘 아는 유금을 통해 고금도서집성을 대신 구입했다.(김윤조, ’18세기 후반 한중 문인 교유와 이조원', 한국학논집 51집, 계명대한국학연구원, 2013)

 

▲전라감영에 복원된 ‘가석(嘉石)’. 경범죄를 저지른 백성을 앉혀놓고 죄를 반성하게 하는 기능을 했다. 지방 감영과 한성 형조에 설치돼 있었다. /박종인

 

핏줄에 흐르는 실용주의

그 서호수의 아들이 서유구다. 서호수는 규장각 각신이었고 동생이자 서유구 삼촌 서형수는 초계문신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서명응은 1776년 규장각이 설립되고 첫 제학(提學)이었다. 서명응은 농서 ‘본사(本史)’를 손자와 함께 지었는데, 그는 손자에게 이리 말했다. “자고로 어렵고 난삽한 말을 써서 읽는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린 듯이 한다면 후세에 글 못 읽는 사람들이 이 책을 장독 뚜껑으로 쓰게 될까 두렵다.” 서유구는 기쁘게 깨닫고 책을 완성했다.(서유구, ‘풍석고협집’ 6 잡저 ‘발본사·跋本史’)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독자로 하여금 두 번 세 번 읽게 해야 명문(名文) 취급 받던 시대에, 이 서씨 3대는 그렇게도 실용적이었다. 서유구는 중국 고대 실용지식을 담은 ‘주례 고공기’를 삼촌으로부터 배우다가 “대장부 문장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책상을 치며 소리지르는 아이였다.(서유구, 앞 책 ‘서형수 서문’)

 

모날 구 자를 아들 이름에 넣은 사람이 서호수였고, 그 두 사람에게 실용주의적 시각을 내려준 사람은 고증학의 대가인 할아버지 서명응이었다. 피는 쉽게 속이지 못한다.

 

민란, 흙국과 종이떡

자, 세월은 바야흐로 민란의 시대로 흐르고 있었다. 국왕을 보필하며 학문과 정치를 찬란하게 빛낼 임무를 띤 초계문신 출신들은 그 민란의 시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대표적인 초계문신 김조순은 정조 본인이 순조의 장인으로 낙점했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했던 김상헌의 후손 김조순은 이후 60년 넘도록 이어진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국가를 자기 재산 내지는 금고로 생각했던 세도가들은 금고를 털어내듯 가렴주구와 학정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 나라는 빈털터리였다. 예정대로 민란(民亂)이 폭발했다.

 

1800년 정조가 죽었다. 기둥이 쓰러진 초계문신 출신 관료들은 방황했다. 1801년 천주교를 믿는다는 빌미로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당했다. 서유구는 삼촌 서형수가 동기 김달순의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정계에서 축출당하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806년이었다. 그가 물러나 초야에 묻혀 산 세월이 또한 18년이었다.

 

정약용도, 서유구도 그 민란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다. 정약용은 곧 조정에 복귀해 세상을 바꾸겠노라며 1표2서(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지었다. 서유구는 달랐다. 민란에 대한 답은 굶주림에 있었다. 막강 세도정치를 허물어뜨리고 세상을 바꾸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그 18년 세월을 농사짓고 땔감을 주워 등을 덥히며 백성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한때 경서를 공부했으나 옛 사람들이 이미 모두 말해버렸으니, 내가 거기다 두 번 말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또 경세학을 공부했으나 처사들이 이리저리 한 말은 못 먹는 흙국이고 종이떡(土羹紙餠·토갱지병)’이었다. 그런 노력이 또한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서유구, ‘행포지서·杏蒲志序’, 1825)

 

좋은 말과 아름다운 이론이 난무하지만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기는 먹을 수 있는 국과 떡, 실용적 학문으로 백성을 배부르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그 떡과 국 맛을 보기로 하자.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