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이다5
[백두산]
2015-02-07 옛지도로 본 백두산의 역사
한국의 산은 수많은 고지도로 그려져 있다.
고지도에 표현된 산은 실제의 산이기도 하지만 역사 이야기가 담긴 산이고 선조들의 심상에 투영된 산이다. 산을 보는 다양한 시선과 의미가 담겨서 그림으로 재현된 지도인 것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명산기를 읽는 것으로 산행을 대신하기도 했고, 명산도를 걸어놓고 산행을 꿈꾸기도 했다. 고지도를 통해 산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선조들의 산에 대한 인식과 이해, 그리고 변천의 궤적을 더듬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산행이 될 것이다. 연재하는 동안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대해 본다. <편집자>

▲ 지도의 ‘함경도’
고지도는 옛 사람들이 공간을 축소해 문자와 부호, 색채로 평면도 상에 재현한 그림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공간적 지리정보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지리 인식과 세계관,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 등도 반영되어 있다.
국토의 형상을 인체에 비유하는 것도 그러한 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18세기) 하단에는 백두산이 인체의 머리요, 백두대간이 척추요, 호남의 제주도와 영남의 대마도를 두 다리에 비유한 글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에 국토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었으며, 조선시대의 실학자들은 한반도를 사람에 비유해 설명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 옛 지도는 세계지도, 전국지도, 도별지도, 군현지도, 관방도, 특수지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표현 형식으로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나뉘며, 필사본은 다시 회화식과 방안식으로 구분한다.

▲ (왼쪽) 중국도인<광여도>. 한반도 조선국의 가장 대표적인 산으로서 백두산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 18세기에 제작된 <여지도>는 백두산을 천산(天山)으로 인식하는 사고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서울대규장각 소장
옛 지도에서 산에 대한 그림은 매우 다채롭다. 산줄기 전체를 그린 지도가 있는가 하면, 방안의 스케일을 넣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지도도 있고, 회화식으로 묘사해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지도도 있다. 풍수 산도(山圖)와 같이 산줄기와 산의 형세를 그린 모습도 특징적이다.
우리 옛 지도 속에 표현된 산의 모습을 독해하는 일은 당시의 산 위치, 지형지세 등과 같은 객관적인 자연 형태뿐만 아니라 산에 표현된 지명, 관방시설 등의 역사적 지리정보도 파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일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해당 시기의 산악 경관에 대한 생각과 시선을 알 수 있는 가시적인 자료라는 점이다.
산을 재현한 옛 지도에는 당시의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사회경제적인 비중이 시대적으로 달리 반영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는 산이나 산줄기의 지도표현은 소략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산과 산지가 지니는 지리적인 중요성과 경제적인 비중이 커지면서, 산과 산줄기에 대한 표현은 정밀해지고 정확해지는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산지의 국토공간적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진 데 연유한 것이다.

▲ (위)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국토의 조종산으로서의 이미지가 뚜렷하다.
1402년 지도엔 백두산 표시 없어
옛 지도에서 백두산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자. 명칭을 보면, 백두, 백산, 태백산, 백두산, 장백산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중에서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다. 태백산이란 이름은 지도 중 중국도에 나온다. 단군이 내려온 산으로 인식된 것이 배경이 되었다. 지도의 함경도 도엽에는 신단수로 이해되는 ‘천년단목(千年檀木)’이 그려지고 있어 주목된다(지도1). 장백산이라는 이름은 중국 지도에서 나타나는 명칭이다. 광여도, 중국도에는 장백산과 함께 한반도를 대표하는 백두산이 함께 표기됐다(지도2).
백두산 천지도 대택(大澤), 대지(大池), 지(池), 천상근(天上近)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지(池)라는 명칭은 이른 시기의 지도에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천상근(天上近)’이라는 표현이다. 하늘 가까이 있다는 뜻으로, <관북지도> ‘갑산부’와 <전세보> ‘조선만주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여지도>에서는 ‘대택’이라고 표기했고, 백두산이 마치 천상에 떠 있는 산처럼 묘사되고 있어, 천산(天山)으로 백두산을 생각하는 당시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지도3).
백두산은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되었다. 지도에 따라 여러 색깔의 백두산이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은 역시 흰색이다. 흰머리산의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다.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에는 우뚝 솟은 백두산의 흰색 모습이 신성하게 느껴진다(지도4). 형태를 봐도 지도작성자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국토 조종산(祖宗山)으로서 상징이미지가 뚜렷하다. 대지(大池: 천지)와 함께 나라 산줄기의 으뜸 되는 위상이 중첩·집약되는 산줄기 형태로 강조되어 잘 표현되었다(지도5).
조선 후기에 와서야 백두산은 국토의 종산(宗山)이자 국가의 최고 명산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는다. 이때부터 백두산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1402년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백두산이 표현되지 않았다. 16세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에 와서야 백두산을 국토의 조종산으로 표시하고 백두대간이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2015.06.08 백두산 대폭발의 과학적 근거-①②③
천지 중심 내년 3㎜씩 솟아올라
장백폭포 온천수 83도까지 상승
헬륨 농도 일반 대기의 7배 상승
마그마 점성 높아 엄청난 가스 응축
/그래픽 = 김현지 조선일보 기자
천년을 참아온 백두산이 폭발한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이 뜨겁다. 지난 수년간 백두산 근처에서 일어나는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것. 윤성효 부산대 지구과학교육과 교수팀의 ‘국민안전처 용역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09년부터 침강하던 백두산 천지 외륜산의 해발이 지난해 7월부터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이 일대는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도 10㎝가량 상승했었다. 지난해부터의 상승 높이는 비록 1㎝도 채 안 되지만, 다시 융기를 시작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는 게 윤 교수의 설명이다. 만일 백두산이 정말로 폭발한다면 언제쯤 화산활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을까. 또 화산 폭발과 함께 입게 될 한국의 피해 규모는 얼마나 될까.
백두산 보도만 나오면 등장하는 윤성효(52) 교수. 그는 백두산 화산 분출 우려를 국내에 최초로 알린 화산학자다. 백두산 연구만 25년째이다. 화산 전공학자가 몇 안 되는 국내 학계에서 백두산을 연구한 사람은 그 말고는 찾기조차 힘들다. 그는 시간만 나면 백두산에 간다. 1996년에는 중국에 교환 연구원으로 가서 백두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가 연구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어떤 모습일까.
백두산 화산 폭발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는 사안이다. 윤 교수팀뿐만 아니라 다른 화산 전문가들 또한 미국의 옐로스톤, 일본의 후지산과 함께 백두산을 세계적으로 가장 위험한 화산으로 꼽고 있다. 땅속에 뜨거운 마그마를 잔뜩 품고서도 가만히 있는 화산이 활화산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백두산처럼 활성화 조짐이 뚜렷한 화산은 언제든 큰 폭발을 준비하고 있다. 그 시기를 정확히 모를 뿐이다. 시기적으로 백두산이 분화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2012년 일본의 화산 전문가 다니구치에 따르면 2019년까지 68%, 2032년까지는 99%다. 그는 2011년 발생한 일본의 대규모 동일본지진의 판 운동 영향과 역사상 백두산 분화의 시기적 연관성을 근거로 이 같이 주장했다. 윤 교수는 보통 ‘화산이 가까운 시일 내에 폭발할 수 있다’고 할 때, 그 시일은 ‘100년 이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윤 교수를 비롯한 한국의 화산 전문가들은 백두산 폭발 시기를 섣불리 예견하는 것을 우려한다. 백두산 화산의 폭발 시기를 단정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적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는 시추 연구로 화산이나 지진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고 있지만, 백두산은 그런 과학적 시추를 한 적이 없다. 땅속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기에 어느 누구든 백두산 폭발의 정확한 예측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이번처럼 화산 지표를 꾸준히 관측하다 보면 극히 단주기적인 예측 확률을 높일 수는 있다.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에는 화산 지진이 빈발하고, 화구가 급격히 부풀어 오르는 등의 전조현상이 나타난다. 백두산도 십여 년 전 이러한 징조를 보였다. 2002년부터 무려 5년간 화산 지진이 빗발쳤다. 심한 경우 한 달에 250회 정도나 일어났다. 이것은 백두산 폭발의 전조현상으로 의심되었고, 북한과 중국 당국을 긴장시켰다. 북한 당국은 2007년 남한 정부에 백두산 화산 남북 공동연구를 추진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백두산은 서기 1000년경 대폭발이 발생한 이후 네 차례(1413년, 1597년, 1668년, 1702년)에 걸쳐 소규모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 서기 1000년경의 대폭발은 ‘1만년 이내 지구상에서 폭발한 가장 큰 화산 중 하나’로 명시될 정도의 규모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큰 화산 폭발인 1815년 인도네시아의 탬보라 화산(87㎦) 폭발에 버금간다.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거론될 정도이며, 당시 흐른 용암의 양은 50∼172㎦로 추정된다. <②편에서 계속>
<①편에계속>
백두산의 높이는 2000년대 들어 10㎝나 높아졌다. 윤 교수팀이 중국 정부의 인공위성 사진을 입수한 결과, 산 정상을 중심으로 백두산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산 전체가 부풀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하의 마그마가 성장함에 따라 백두산 정상부가 솟아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지구자원탐사위성(JERS1)이 1992년 9월부터 1998년 10월까지 측정한 사진과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백두산은 천지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이 해마다 약 3㎜씩 솟아오른다.
2004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에릭 헤틀란드 연구원이 1998년부터 2년간 백두산 지하에서 발생하는 지진파를 분석한 결과, 지표면 아래 5∼10㎞, 15∼25㎞ 두 군데에서 마그마방으로 추정되는 고온의 영역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런데 5~10㎞ 지점에서 관측됐던 마그마방이 당시 2~3㎞ 지점까지 올라왔다는 것이다. 이는 진앙지가 천지 아래쪽 불과 2㎞ 지점이라는 의미이다. 마그마방은 마그마가 거대한 덩어리 형태로 뭉쳐져 있는 것을 말하는데, 수직으로 성장하여 상승하면 곧 분출로 이어지게 된다.
백두산 천지의 수면 높이는 2189m. 이것을 감안할 때 2~3㎞ 아래 지점의 마그마방은 해수면 기준으로 0m 지점까지 올라와 있는 셈이다. 마그마는 맨틀층(지하 30∼2900㎞) 부위에 있다가 힘이 강해지면 그 위의 지각층(지표∼지하 30㎞)을 뚫고 올라온다. 문제는 일본 동쪽 해안을 따라 이어진 태평양 지각판이 유라시아판 밑으로 들어가면서 천지 아래의 마그마방에 자극을 주고 있어 화산 분출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백두산 천지의 온천수 온도도 올라갔다. 1990년대에 섭씨 69도이던 장백폭포 아래의 온천수가 최근에는 최고 83도까지 뜨거워졌다. 헬륨 농도도 일반 대기의 7배나 증가했다. 지각 아래 맨틀에서 올라오는 헬륨가스의 증가로 백두산의 나무들이 질식해 말라 죽고 있는 상황. 해발이나 온천수 온도, 헬륨 농도의 상승은 화산 폭발 전의 징조다. 지하에서 뜨거운 마그마 활동이 계속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중국과학원 지질물리연구소 활화산연구센터와 윤 교수팀이 공동으로 측정한 결과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징조로 보면 백두산 화산은 내일이라도 터질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바로 폭발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마그마의 점성이 높다는 데 있다. 마그마의 점성이 높으면 지표면 위로 올라오는 속도가 느리고, 그 과정에서 굳어 암석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백두산 화산이 폭발한다면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은 뭘까. 바로 ‘화산 쇄설류(화쇄류)’다. 화산 구름기둥(분연주)이 1~5㎞ 올라가다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산비탈을 타고 주변으로 흩어지는 현상으로, 용암과 기존 암석이 크고 작은 파편으로 부서진 채 화산 가스와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시속 130~180㎞로 빠르게 주변을 덮치기 때문에 피하기가 어려워 화산 폭발에서 가장 무서운 현상으로 꼽힌다.
온도도 500~700도에 달해 이들이 닿는 곳에는 화재가 발생하고, 생물들은 심각한 화상을 입는다. 특히 뜨거운 재가 코로 들어가면 호흡기 점막이 손상돼 숨을 쉴 수 없다. 이 때문에 화쇄류는 화산 폭발로 인한 사망 원인의 70%를 차지한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시신들이 모두 웅크린 채 발견되는 것도 화쇄류의 뜨거운 열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다른 화산과 비교해 볼 때 작은 규모가 아니다. 특히 다량의 화산재를 만들어내는 유문암질과 조면암질의 점성 높은 마그마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분출 가스를 붙잡아 둘 수 있다. 점성이 낮은 마그마는 가스를 붙잡아 두는 힘이 약해 소규모 폭발이 일어나는 반면, 점성이 높은 마그마는 최후의 순간까지 화산 가스를 억제하고 있기 때문에 폭발을 하게 되면 대규모로 이어진다.
윤성효 교수를 비롯해 일부 화산 전문가들은 백두산 천지에 고인 20억t에 달하는 물과 함께 화산재가 분출될 경우 세계적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천지의 물이 고열과 만나면 수증기로 부피가 팽창해 폭발의 기폭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분화구에서 25㎞ 이상 공중으로 올라간 화산재가 성층권에 잔존하게 돼 태양 복사를 차단함으로써 기후 한랭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20억t에 이르는 천지 물이 흘러내리면서 북한 양강도와 중국 지린성 일대에 대규모 홍수가 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화산 분출물들이 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화산성 홍수인 ‘라하르’는 경사면을 따라 시속 100㎞로 흐르기 때문에 주변을 휩쓸어 버린다. 특히 기존 분화구에 고여 있는 물이 많을수록 위협은 더 커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③편에서 계속>
<②편에계속>
화산 분출물로 인한 피해는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실제로 한반도 남쪽의 한국에 직접적으로 미칠 수 있는 현상은 화산재로 국한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사할린 등 러시아 원동 쪽에 고기압이 발달해 백두산 화산재가 북동류를 타고 남한으로 확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는 최근 5년 동안의 기상 상황 등을 ‘유해물질 확산 대기모형’에 따라 모의실험한 결과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게 윤 교수팀의 설명이다.
윤 교수팀의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백두산 화산이 폭발지수 8단계 가운데 5단계 이상의 대폭발을 할 경우 화산재는 8시간 만에 울릉도와 독도에 이른다. 또 48시간 뒤에는 호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에 화산재가 쌓인다. 화산재가 북풍 계열의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강원도에 최대 10.3㎝의 화산재가 쌓이고, 호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에 적게는 수㎜에서 많게는 수십㎜의 화산재가 쌓인다.
화산재가 한반도에 퍼지게 되면 한국은 극심한 피해를 입는다. 농작물 피해가 4조5189억원, 제주공항을 제외한 모든 공항이 최장 39시간 이상 폐쇄되면서 그 피해액이 611억원일 것으로 예측된다. 화산 폭발로 인한 지진 때문에 서울과 부산 등 한국 주요 대도시에 있는 10층 이상 건물 유리창과 외벽 등이 파괴되면서 입는 피해 등 직간접적 피해를 합하면 11조1895억원의 피해액이 예상된다고 윤 교수팀은 밝혔다. 반면 폭발지수가 4단계 이하일 경우, 북한 지역은 쑥대밭이 되지만 남한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을 것으로 나타났다.
백두산 아래에 수상한 거동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화산 활동의 징조가 있다고 해도 짧은 시간 동안 증거를 찾아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처럼 엄청난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지표면과 가스, 지열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천년의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꿈틀대고 있는 백두산 화산의 몸부림을 어느 때보다 눈여겨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윤 교수는 말한다. 현재 정부는 윤 교수의 연구를 토대로, 화산 분출량과 풍속 등의 정보를 알면 화산재의 경로와 도달 시간을 3차원으로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두산 땅속 깊은 곳의 마그마 활동은 한민족의 뜨거운 심장처럼 쉬지 않고 끓고 있다. 한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백두산은 남과 북이 함께 연구하고 관리하고 감시해야 한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과학원은 1999년부터 백두산 곳곳에 지진파 탐지기를 설치해 꾸준히 지표면 탐사를 해왔다. 하지만 화산 활동을 예측하려면 마그마의 움직임이 있는 땅속의 지각구조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특히 백두산의 경우 더욱 그렇다. 20억t의 천지 담수와 마그마의 물리화학적 연동이 복잡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지질자원연구원과 중국과학원 지질물리연구소가 뭉쳤다. 2018년 공동으로 백두산 땅속을 파고들기로 한 것. 지하 7㎞ 깊이까지 시추공을 뚫고 마그마의 흐름을 꿰뚫어 볼 예정이다. 마그마는 지하 10㎞ 부근에 있지만, 7㎞가량 뚫고 들어가면 그 주변부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탐사팀의 설명이다. 그곳에서 1300도가 넘는 액체 상태의 마그마를 직접 꺼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렇게 마그마가 있는 지하 수㎞ 깊이까지 뚫는 작업은 세계의 휴화산 가운데 백두산이 처음이다.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라는 얘기다. 앞으로 두 나라 연구진의 백두산 연구가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 먼저 2017년까지 비파괴 검사를 통해 시추 지점을 결정한다. 마그마에 접근하기 위한 ‘안전한 길찾기’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백두산 땅속 최대 12㎞ 부근(1만㎦ 이상의 지역)까지 3차원 입체 지도를 그릴 수 있다.
물론 이 프로젝트에 일본이 참여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백두산은 일본 열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각판이 부딪쳐 탄생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따라서 세 나라가 공동으로 백두산을 탐사한다면 정확한 분화 예측은 물론이고 아시아 지역 안보에도 도움이 될 듯하다. 한·중·일의 연구가 반드시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백화점》
■조선 최대 백화점 ‘화신’ 총수 박흥식①②③
막강한 상권을 손에 쥔 박흥식은 조선 팔도에 화신의 깃발을 펄럭일 꿈을 꾼다. 1934년 화신이 내세웠던 연쇄점 운영이었다. 연쇄점은 박흥식이 처음 창안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서 연쇄점 상술로 맨 처음 성공한 사람은 박흥식이 아니라 경쟁자였던 최남이었다. 박흥식은 늘 새로운 상업 경향을 귀 기울여 듣는 포용력이 강했다. 최남에게서 연쇄점 아이디어를 물려받은 박흥식은 곧 그것을 실현하리라 결심한다. 그 무렵 화신에 새로 입사한 주요한(뒷날 상공부 장관)의 정세 타진 덕분이기도 했다. 그때 주요한은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을 졸업하고 돌아와서 시 ‘불놀이’를 발표, 이름을 얻고 있던 재기발랄한 지식청년이며 경제통이었다. 그 주요한이 영자신문을 읽고 나더니 연쇄점 운영을 건의하고 나선 것이다. “연쇄점을 하게 되면 값이 싸집니다. 수십, 수백 개 상점이 함께 경영되니까 상품을 대량 구입, 대량 소비시킬 수 있지요. 게다가 중간도매상들을 여러 번 거치느라 값이 치솟는 것도 막을 수 있습니다.”
연쇄점을 운영하려면 무엇보다 엄청난 자금이 문제였다. 점포를 수백, 수천 개씩 연쇄 경영하려면 운용자금도 수백, 수천 배로 늘어날 것은 뻔했다. 박흥식은 어떻게 자금을 조달할지 몇 달을 고심했다. 그런 가운데 연쇄점 과장으로 임명한 주요한을 불러 연쇄점 1000점 운용 계획안을 몇 번씩 고치며 그 의의를 강조하다가 박흥식은 껄껄 웃고 말았다.
“왜 웃으십니까, 사장님?”
“우습지 않은가? 연쇄점은 말하자면 올가미 코가 수백 개 달린 그물이 아닌가. 그런데 그물을 엮을 자본이 없단 말이지.”
“그렇습니다만….”
“연쇄점을 하려면 500만원은 있어야 하는데 지금 화신의 총자본은 100만원뿐이네. 나머지 400만원은 어디서 구해야 할까?”
박흥식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후우 소리가 나게 내뱉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어. 너무 곧게만 생각했단 말일세. 난 장사꾼이니 남의 실로 그물을 엮어 보려 하네.

/박흥식
롯데·신세계·미도파 … 건설·부동산업계도 가세
미츠코시는 해방 직후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 뒤를 이어 1954년에는 미도파, 55년에는 신신백화점 등이 문을 열어 한동안 3파전이 이어졌다. 미츠코시는 62년 동방생명으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63년 동방생명을 삼성이 인수하면서 신세계로 상호를 바꿨다. 롯데는 79년 서울 소공동에 롯데쇼핑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백화점 영업에 뛰어든다. 롯데는 개점 당시 ‘롯데쇼핑센터’라는 이름을 썼는데 이는 서울 도심에서는 백화점을 신설할 수 없다는 당시 규제 때문이었다.
80년대 경제발전으로 소득이 늘면서 소비 패턴도 다양화됐다. 소비자들의 상품 선호 기준도 변화하면서 백화점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다. 80~85년에는 롯데 ·신세계·미도파 백화점이 마켓셰어를 형성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을 이뤘다. 84~87년에는 부도심 지역에 현대백화점·그랜드백화점·뉴코아신관·여의도백화점 등이 잇따라 개점했다. 특히 건설·부동산 업계의 백화점 진출이 두드러졌다. 당시 건설업계의 호황세를 보여준다.
80년대 후반에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백화점들이 과다경쟁으로 도산하는 일이 빈번했다. 아케이드형 백화점이나 지하상가 같은 유사업종이 생겨나고 각종 규제가 늘어나면서 매출이 둔화되자 여의도백화점·유니버스백화점·파레스백화점·크리스탈백화점 등이 개점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1990년대 초반
백화점 호황기 … 명동 벗어나 대형화·다점포화 열기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경제는 유가·금리·달러가치 하락과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힘입어 성장가도를 달렸다. 92년 12월 문민정부가 탄생하면서 유통 관련 법규를 포함한 경제정책 전반에 변화가 일었다. 국가의 시장 개입을 줄이고 민간 경제주체들의 경제 활동을 장려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타고 백화점들도 대형화·다점포화·다각화하기 시작했다.복합시설을 갖추고 면적도 1만~1만5000㎡ 규모에서 2만5000~3만5000㎡ 규모에 이르는 대형 매장을 앞다퉈 열었다. 롯데쇼핑은 88년 면적 3만6390㎡의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백화점(본점)을 완성하고 비슷한 규모의 잠실점을 추가로 개점했다. 신세계도 미아점을 개점하고 현대백화점도 무역센터점을 여는 등 롯데·신세계·현대·미도파·뉴코아 같은 브랜드의 다점포 체제가 본격화됐다.또 기존의 명동 중심에서 강남·잠실·영등포·부산 같은 부도심과 지방으로 상권이 확대됐다. 백화점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
대형할인점·편의점에도 손 뻗어 … 문화센터 붐
90년대 중반 백화점들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백화점 업체들이 앞다퉈 타 업종인 외식사업 ·편의점·해외브랜드 사업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 롯데쇼핑은 세븐일레븐·로손 같은 편의점의 체인화를 시작했다. 신세계는 수퍼마켓을 발전시킨 할인점인 이마트를 시작하며 새로운 유통판로를 만들었다. 창고형 소매업인 프라이스클럽·킴스클럽과 인터넷쇼핑몰도 속속 등장했다. 이 같은 거대 유통업체의 공격적 시장 진출로 영세 수퍼마켓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백화점들은 타 매장과의 차별화를 위해 해외 유명 예술단체를 초청해 공연을 열거나 미술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백화점 인근 주민을 대상으로 한 문화센터도 잇따라 생겼다. 주부와 아이들을 위한 컴퓨터·창업·재테크·부동산 같은 다양한 강좌를 개설했다. 문화센터는 고정고객을 확보하며 홍보·판촉 기능을 대신해 더 많은 회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문화센터의 인기가 꾸준히 높아지자 현대백화점은 아예 고객들만을 대상으로 한 자체 대형콘서트를 기획해 백화점 외부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2000년대
20~30대 겨냥한 영패션관, VIP 위한 명품관 만들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 거주 30~40대가 주고객이던 백화점에도 변화의 바람이 시작됐다. 중국·일본 관광객이 늘고 상대적으로 구매력이 낮았던 20~30대 초반 고객들도 백화점을 자주 찾기 시작했다. 이에 백화점들도 제품 나열식 판매에서 탈피해 특정 고객층을 위한 전문관을 만들거나 복합쇼핑몰로의 변신을 꾀했다. 롯데백화점(2003)·현대백화점(2009)이 각각 영플라자·유플렉스라는 20대 전문관을 만들고 10~20대를 겨냥한 제품을 들여놓았다. 운영방식도 기존 백화점과 차별점을 뒀다. 정장을 입고 고객을 응대하던 기존 판매사원들과 달리 청바지와 티셔츠에 염색까지 가능하게 해 자유롭고 젊은 이미지를 표출했다. 신세계는 부산 지역에 외국인 관광객이 크게 늘자 ‘동북아 랜드마크’를 표방하며 신세계 샌텀시티점을 2009년 오픈했다. 오락·이벤트·쇼핑을 한군데서 즐길 수 있게 기획했다. 영화관은 물론 스파랜드·아이스링크까지 갖췄다.
최고급고객(VIP)을 위한 명품관들도 잇따라 생겼다. 90년 9월 ‘명품관’의 이름을 달고 재개장한 갤러리아 백화점이 국내 최초다. 갤러리아 명품관은 2000년 와인숍을 오픈하는가 하면 발레파킹 서비스도 제공했다. 샤넬·루이비통·까르띠에·구찌 같은 브랜드들도 갤러리아 명품관을 통해 처음 국내 시장에 진출했다. 롯데는 서울 소공동 본점 옆의 옛 한일은행 건물을 새 단장해 아예 명품전문 백화점 애비뉴엘을 열었다. 1만7190㎡의 면적에 96개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유치했다.
유통 그날, 1969년 4월 1일 - 신세계백화점의 역사
해방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국내 백화점은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백화점 업계는 경영 경험 부족과 자본 부담 등으로 백화점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임대상가의 수준에 머무는 단계였다.
1960년대 초까지 전근대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한국의 백화점은 1963년 삼성이 동화백화점을 인수해 만든 신세계백화점이 출범하면서 달라졌다. 백화점 직영화를 위해 매장의 직영화율을 해마다 높여가면서 주목할만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신세계는 1969년 4월 국내 최초로 직영백화점 체제를 선언해 백화점의 새로운 변혁을 가져왔고, 국내 백화점의 현대화 시대를 열었다. 또 은행계 카드보다 11년이나 앞서 1969년 국내 최초로 크레디트 카드제도를 도입해 신용사회 구축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처럼 1969년은 한국 유통의 현대화를 이루는 전기를 마련한 해이다. 이제 1969년에 신세계백화점에서 일어났던 ‘유통의 그날’로 떠나보자.
3월 말
해방 이후 백화점이라기 보다는 임대상가로 운영돼오던 동화백화점을 인수한 신세계는 백화점의 근간인 백화점 직영화를 위해 직영 매장의 비율을 해마다 높여 갔다. 백화점이라면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통일된 경영 의지 아래 부문별 경영을 하는 대형 소매점 형태를 말하며, 이는 직영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63년 12%에 불과한 직영율은 64년 23%, 65년 38%, 66년 50.3%로 증가했다. 1967년에 들어서면서 직영화율이 50%를 넘어서자 어느 정도 백화점다운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1968년에는 65%의 직영 매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69년 3월 말에는 약 85% 수준으로 직영율을 높였다. 이와 같이 신세계는 직영 백화점 체제 완비와 함께 보다 새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게 됐고, 소비자 보호는 물론 실질적인 유통 근대화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게 됐다. 이와 함께 정찰제 전면 실시, 검품 제도 개선, 메이커 직거래 확대 등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4월 1일
신세계는 1969년 4월 1일 ‘최고의 전통 직영 백화점’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걸고 국내 최초로 직영 백화점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직영백화점 출범은 지금과 같은 백화점이 정착하게 된 시발점으로, 한국 유통사의 시대 구분점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신세계가 직영체제를 완비하고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함에 따라 소비자들의 신뢰가 더욱 높아졌고, 이렇듯 사세를 확장해 나가자 이에 자극 받은 다른 임대 백화점들도 서서히 직영화에 동참하게 됐다. 신세계의 직영 백화점 출범은 우리 나라 유통 근대화에 전기를 마련한 계기가 됐으며, 이때부터 현재와 같은 백화점 형태가 국내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7월 초
1969년 7월에 신세계 통신판매 카다로그가 발간됐다. 카다로그를 펼쳐보면 통신판매에 대한 설명과 상품 및 불입금 등의 정보가 수록돼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관]
■조선 최초의 사진관 ‘천연당(天然當)’
찰칵! 꽃잎이 분분히 날리는 봄날, 누구나 디지털카메라를 들이댄다. 스마트폰으로도 한 컷. 사진이란 찍는 게 아닌 들이대기의 미학이다. 앨프리드 스티글리츠가 새로운 사진의 기치를 내걸었던 사진 분리파 운동(1902년)은 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초상사진과 기록사진을 찍는 촬영국(撮影局)이 1883년 서울 대안동(大安洞·안국동 일원)에 처음 생겼다. 사업가 황철이 청나라 상하이에서 촬영 기술을 배우고 사진기를 구입해와 자신의 사랑채를 개조해 조선 최초의 사진관을 열었던 것.
천연당(天然堂)사진관 광고(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6일)에서는 ‘특별염가 불변색(不變色)’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부인(婦人)은 내당(內堂·부녀자들이 거처하는 방)에서 부인(婦人)이 촬(撮)하고 출입(出入)이 심편(甚便·매우 편하게)함”이라는 보디카피를 쓰고 있다. 천연당사진관은 1907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당시의 신문에 여러 차례 시리즈로 광고를 냈다. 남녀가 함께 사진 찍기를 꺼리던 당시의 보수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여성의 사진 촬영은 고용된 여자 사진사가 맡는다고 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 밖에도 사진관 입구에서 남자를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출입이 편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른바 소비자 혜택의 강조. ‘불변색’이라는 카피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같은 총천연색은 아니어도 색을 입히는 기술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사진이 보급되어도 서민에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었고, 사진관은 기존의 초상화 시장을 점차 잠식해나갔다. 초상사진과 풍경사진 같은 기록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사진이 등장하자 전통 회화에 익숙하던 조선인의 시각체계 역시 서서히 바뀐다. 그러나 사진에 찍히면 혼령이 달아난다고 믿었던 사람도 많아, 사진이 대중화되기까지는 20여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그려 유명해진 채용신(1850∼1941)이 근대 초상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데는 사진과 똑같은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선전했던 비즈니스 감각도 한몫했을 터. 하지만 어쩌나, 사진은 이미 위력적으로 들이대는 신문명이었으니.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한국인 최초의 사진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上
아홉 살 나이에 미국 유학, 체력과 정신력으로 버틴 소년 유일한
유학 시절부터 상인 자질 발휘 보따리·숙주나물 장사로 성공-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