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이다2
[한국 담배의 변천사]

해방 후 1945~1950년대
▲'승리'는 한국인 기술로 만들어진 광복기념 최초의 담배다. '화랑'은 국군창설 기념으로 나온 담배로 최장수(32년)브랜드다.(1940년대), '파랑새'는 전쟁후 희망과 의욕을 불어넣기 위한 담배다. '아리랑'은 최초의 필터담배다. (1950년대)

▲'금관'은 최초의 박하담배다. '신탄진'은 제1차 경제개발계획 및 동양 최대 신탄진 담배공장 준공 기념으로 나왔다. '새마을'은 새마을운동 독려 하여 나온 담배다. '청자'는 노래는 추자, 담배는 청자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당시 최고 인기담배였다.

1970년대
▲'은하수'는 최초의 탄소필터 장착 담배다. '거북선'은 충무공의 창의력과 애국심을 기르는 담배로 나왔다. '태양'은 당시 가장 순한 담배였다.

1970년대

2000년대
▲'에쎄'는 최초 슬림형 담배로 나왔다. '레종'은 대학가에서 많이 팔리는 인기담배였다. '시즌'은 국내 최초 저타르 담배다. '보헴'은 최초 시가엽 브랜드 담배다.

▲1997년 서울시 한의사협회 소속 한의사가 서울시청에서 시 공무원들에게 금연침을 시술하고 있다.

▲1997년 이화여대 보건교육과 학생들이 여대생 흡연자들에게 담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금연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1996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4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흡연권 보장 및 흡연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애연가대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공중이용시설과 대형 건물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도록 규정한 국민건강증진법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담배를 한 대씩 피우고 있다.

▲1988년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훈련병들이 휴식시간에 앉은 자세로 흡연을 하며 쉬고 있다.

▲1998년 지하 창작집단 파적주최로 열린 "담배당당히 피우기"행사에 참가한 여성들이 신촌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걷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는 '내고장 담배보내기 운동' 등 금연 캠페인이 일어남에 따라 금연빌딩이 등장해 건물 내 흡연이 금지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1996년 금연빌딩 밖에서 흡연하는 사람들의 모습.

▲2000년 서울 종묘공원에서 한국담배소비자연맹 소속 애연가들이 종이를 담배처럼 말아 입에 문 채 세계보건기구의 `흡연규제 기본협약` 조문이 담긴 모형상자를 태우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DB · KT&G제공
[등대의 역사]
세계7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파로스등대가 기원입니다.
파로스등대(Pharos lighthouse)
이집트의 프롤레마이오스2세때 건축가 소스트라소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화강석으로 쌓은탑의 높이가 120m이며 나무를 태워서 내는 불빛이 55km까지 나갔다.
예로부터 바다에서 선박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하여 횃불 등을 이용하여 항해의 지표로 삼았으며, 4000년전부터 문명이 발달한 중국에서는 강이나 바다의 물길을 이용한 여행이 일반화되어 강가나 해안가에 표적을 설치하고 항해의 지표로 이용하여 왔다.
등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경 지중해를 항해하는 선박을 위한 길잡이로서 밤에 횃불이 타오르는 탑에 대한 것이 있다. 리비아와 이집트 주변 아프리카 북부 해안의 바다는 겨울이면 아주 거센 파도가 휘몰아쳐서 선박운항이 어렵게 되자 리비아인들과 쿠시인들이 최초로 항해에 도움이 되는 장치를 만들고 이를“불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기원전 280년전에 지중해 이집트의 알랙산드리아항구 입구 근처에 있는 파로스라는 작은 섬에 탑을 세워 밤이나 낮에 항해자의 눈에 잘 띄게 하였는데, 이 “파로스” 등대가 세계 최초의 등대이다. 1600년 동안 선원들의 길잡이가 되었던 파로스등대는 두 차례의 지진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AD 2세기경 스페인에 라 코루나(LA CORUNA)등대가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도 지중해 연안에 많은 등대가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본격적인 근대식 등대는 1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등대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또는 알렉산드리의 파로스 등대(그리스어: o Φάρος της Αλεξάνδρειας)라고 합니다.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을 말하며 모든 등대의 원형으로 여겨집니다.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지만 지금은 파괴되어 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1903년에 팔미도에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세워진 지 100년이 가까운 등대들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국토해양부가 등대 생활 체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시행 중인 등대체험 프로그램은 누구나 신청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여수 거문도 등대와 부산 가덕도 등대, 제주 산지 등대 등 3곳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등대에 펜션과 유사한 숙박 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위키백과 사전 참조)
o 예로부터
지중해 사람들은 선원들을 인도할 수 있는 거대한 기념물을 항구에 세웠다. 주로 엄청난 규모의 거상이나 먼곳에서도 보이는 신전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러한 건물이나 거상이 항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배들이 낮에만 도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밤에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선박들의 선원이 항구를 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2백80년경에 파로스섬에 고대 역사상 가장 높은 등대를 건설하게 된 요인이다.
대부분이 대리석 돌로 된 등대의 높이가 120m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령으로 소스트라투스가 만들었다. 오늘날의 등대처럼 가늘고 둥근 모습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빌딩처럼 지어졌다. 등대는 3개의 층계로 만들어져서 맨 아래층이 4각형,가운데층이 8각형, 꼭대기 층은 원통형이었다. 그 둥근 모형 안에 거대한 화로가 장치되어 밤에는 내내 불을 피웠다. 땔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램프 뒤에는 거대한 반사용 거울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한다. 파로스 등대는 단순한 항해의 표시였던 것은 아니었고, 등대 내부에는 300개 이상의 방이 있어서 많은 수의 군인들이 묵었고 따라서 성곽의 역할까지 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등대는 높이가 상당했는데도 꼭대기까지 연결하는 계단이 없었으며 나선형으로 비스듬하게 길을 만들어 말들이 다닐 정도였고 등대 꼭대기 옥탑 위에는 거대한 동상(이시스 여신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아랍인들이 7세기에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이 등대는 빛이 너무 밝아 반사경의 불빛이 55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으며, 맑게 개인 날에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거리 모습이 거울에 비칠 정도였다. 이집트가 아랍인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도 상당 기간 동안 이 등대는 잘 보존이 되었다. 그러나 850년 경 신성로마 제국과 이슬람교도간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파로스 등대는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화로스 등대는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아주 유리했으나 로마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즉 로마군의 상황이 이 등대의 거울에 의해 낱낱이 관찰당한 것이었다. 로마 황제는 싸움이 이처럼 불리하자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칼리프(회교도의 왕)에게 첩자를 보내, 등대 밑에 엄청남 금은 보화가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칼리프는 즉시 등대 밑을 팠다. 그러나 적의 계략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반사경이 깨진 상태였고 다시 원상태로 회복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파로스 등대는 이때부터 등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신 화로스 등대는 이슬람교의 사원으로 전락을 해버렸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는 카이로가 번창함에 따라 점점 쇠퇴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고 등대는 폐허가 되어 버렸다. 1375년 삼각주를 휩쓴 엄청난 대지진으로 화로스 등대는 그나마의 모습마져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지진은 후유증이 커서 지진 지역을 정리하는데만도 약 100년이 걸렸다고 한다.등대의 흔적이 없어지자 자연히 사람들의 입에서도 파로스 등대 이야기는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묻혀 지내던 파로스 등대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겨우 등대가 있던 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 크지 않던 섬에 그렇게 웅장한 등대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으로 그렇게 밝은 빛을 낼 수 있었으며 또 렌즈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등대의 건물에 방이 수백 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혹시 작은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기한 일이 아닐 수없다.
[대한민국 미인 변천사]
한국 美人 변천사… 풍만(三國)→우아(고려)→요염(조선)
삼국시대 풍만한 미인에서 고려시대 우아한 미인으로,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요염한 미인으로 바뀌어왔다. 이는 홍선표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2003년 발표한 '한국 미인화의 신체 이미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고대에는 여성에게 풍요나 다산, 생식력이 강조돼 퉁퉁한 여성이 미인이다. 하지만 고려시대로 넘어와 궁중문화가 발달하면서 궁녀 등 품위 있어 보이는 것으로 미의 기준이 옮겨간다. 조선시대부터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미인이 나타난다. 기생들이 중심이 되면서 정감적이고 살 냄새 풍기는, 남성 정욕의 대상이 되는 여성을 미인으로 여긴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 유흥·향락의 주체가 사대부에서 중인으로 넘어오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노골화된다.
조선을 들었다 놨다 한 미인은?

▲(왼쪽부터) 화가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와 '전모 쓴 여인', 논개와 함께 ‘임진왜란 2대 의기(義妓)’로 꼽히는 계월향 초상화 /간송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DB
조선시대 미인상은 화가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에 잘 집약돼 있다. 눈·코·입이 작고, 전체적으로 다소곳한 분위기를 풍긴다. 세부적으로 보면 눈썹은 초승달, 코는 마늘쪽, 입술은 앵두 같고, 이마는 반듯하며 이마와 머리의 경계선은 각이 진형이다. 각진 모양을 만들기 위해 조선시대 여인들은 이마 양 끝에 황새의 똥을 탈모제로 바르고 명주실로 잔털을 뽑았다고 한다. 눈두덩을 넓게 보이게 하려고 눈썹 밑을 정돈하는 것은 기본이다. 몸매를 보면 허리는 길고 팔다리는 짧다.
韓 눈코입 작고 다소곳한 분위기

▲왕족의 얼굴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어느 귀부인의 초상화'. 눈썹이 흐리고 눈동자가 작고 코가 긴 북방형얼굴이다. 16~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작자 미상 /조선일보DB
진짜 공주엔 공주병이 없다
엄앵란부터 수지까지 ‘미인 60년史’

▲초창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조선일보DB
1957년 5월 서울 명동 시립극장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전쟁 후 먹고 살기에 여념이 없던 국민이 미인이라는 볼거리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이후 각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미인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미인이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대 최고의 미인들을 꼽아 보고, 시대별로 선호하는 미인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본다.
'성숙'에서 '동안'으로…시대별 미인 변천사
20~30대 여성, V라인 얼굴형 원해…세월 따라 바뀌는 O-U-V 얼굴형

▲(왼쪽부터) 윤정희·엄앵란·김지미·남정임·문희 /조선일보DB
1950~1960년대
오동통한 얼굴형에 동글동글한 눈
당시에는 '복스럽게 생겼다'는 말이 여성들에게 최고의 찬사였다. ‘달덩이처럼 뺨이 둥근 며느리가 집안을 평화롭게 만든다’는 말도 있었다. 따라서 새하얀 볼살이 붙은 O자형 얼굴형에 눈·코·입이 고르게 발달해 시원시원해 보이는 얼굴이 미인이었다. 엄앵란·김지미·윤정희·남정임·문희 등이 최고의 미인으로 꼽힌다.

▲여배우 트로이카' (왼쪽부터) 유지인·장미희·정윤희 /조선일보DB
1970년대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미인
동그란 얼굴형에 쌍커플이 진 큰 눈 등 1970년대 미인들도 이전 시대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듯하지만, 하얀 피부만을 고집하지 않았고 코가 좀더 길어졌다.
이때는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장미희·정윤희·유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가진 정윤희와 콧소리로 오묘한 매력을 뽐낸 장미희,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이 쏙 들어간 유지인 등 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남성들의 마음을 훔쳤다.

▲(왼쪽부터) 이미숙·이응경·황신혜·하희라·김혜수·채시라 /조선일보DB
1980년대
일·사랑 둘 다 쟁취할 것 같은 그녀
1980년대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단아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선호했다. 당시 미인들은 이전 시대와 비교해 얼굴형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아래턱을 포함한 얼굴의 가로 폭이 전체적으로 좁아지면서 갸름해진 U자형 얼굴형을 가졌다. 구체적으로 보면 콧방울이 둥글면서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얼굴이 대중의 마음을 끌었다. '컴퓨터 미인' 황신혜를 필두로 날렵한 선을 가진 이미숙, 청순 미인의 계보를 이은 이응경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남녀평등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당찬 이미지를 미인으로 꼽기도 했는데, 채시라·하희라·김혜수 등이 이에 속한다.
[한국미인을 찾아서] 평범함속 친근감이 중요

▲(왼쪽부터) 김성령·오현경·고현정 /조선일보DB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도 '스타 등용문'으로 불리면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미모뿐 아니라 키 170cm 안팎의 길쭉길쭉한 체형을 가진 오현경·고현정·김성령 등이 주목을 받았다.
미스코리아 출신들이 뽑은 “한국 최고미인은 고현정"

▲(왼쪽부터) 고소영·김희선·심은하·이영애 /조선일보DB
1990년대
서구형 미인 vs. 청순가련형 미인
1990년대부터는 '서구형 얼굴'이 두드러졌다. 크고 쌍꺼풀이 진 눈과 곧고 높은 콧날에 갸름하고 조그마한 계란형 얼굴이 미인의 조건이 됐다. 그러면서 김희선·고소영과 같은 ‘고양이상’이 주목받았다. 특히 김희선의 인기가 돋보였다. TV 드라마가 오로지 김희선에 맞춰 제작되기도 했고, 후배 연기자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인기투표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서구형 얼굴과 별개로 심은하·이영애 또한 청순 미인으로 꼽혀 큰 사랑을 받았다.
한국-서양미인 얼굴형 같다
입술-치아돌출정도-턱각도등
한편 서양미인의 표준에 가까운 얼굴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아지면서 부위별 성형수술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미스코리아로 가는 다섯 관문에 성형수술이 포함될 정도였다.
턱-광대뼈깍아 새얼굴 만들기

▲(왼쪽부터) 김태희·전지현·송혜교·손예진·한가인·한예슬 /조선일보DB·스포츠조선
2000년대
대세는 V라인과 S라인
2000년대부터 현재까지 'V라인 얼굴형' 또는 'S라인 체형'이 미인의 기준으로 꼽힌다. 세부적으로 보면, 요즘 미인들은 짧은 하관에 갸름하고 매끄러운 턱선과 볼록한 이마, 웃을 때 눈꼬리가 살짝 내려오는 반달형 눈매에 눈 밑 애교살이 도드라진다. 게다가 얼굴 크기가 현저히 작아져 눈·코·입은 상대적으로 커 보인다. 짧은 옷에 대한 거부감이 줄면서 글래머 몸매도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게 됐다.

▲(왼쪽부터) 김사랑·금나나·김주희·이하늬 /조선일보DB
이러한 경향은 미스코리아 심사 기준에서도 반영돼 김사랑이 2000년대 첫 미스코리아 진(眞)으로 선발됐다. 여기에다 고학력의 참가자가 늘어나 미국 하버드 대학 박사 출신 금나나, SBS 아나운서로 입사한 김주희, 서울대 국악과 출신 이하늬가 미스코리아 진을 거머쥐었다.

▲(왼쪽부터) 이연희·박신혜·수지·설현 /조선일보DB·조선일보JNS·스포츠조선
또한 성형수술 열풍이 불면서 자연스러운 얼굴을 더욱 선호하게 됐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이연희·박신혜·수지·설현 등이 인기가 있다.
‘외모지상주의' 에 반기를 들다
미인에게 찬사를 보내면서도 한쪽에선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 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하자 최근에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자’는 목소리가 더욱 힘을 받고 있다. 여성들 사이에서도 ‘예쁘다’는 표현보다 ‘매력적이다’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살빼기 집착하는 한국 여자아이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역시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긴다는 비판에 직면해 추락했다. 한때 지상파 방송에서 생중계할 정도로 국민적인 행사였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여성의 성을 상품화한다'는 오명을 늘 달고 있었고,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은 폐지를 촉구했다. 결국 2002년부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케이블TV에서 생중계를 맡게 됐고 점차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 Copyright ⓒ 조선일보
남북 여성의 100년 스타일 변천사 담아낸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5SWHjWtykns
[물가]
2015.07.07 70년 전엔 담뱃값이 쌀값의 8배
광복후 物價 어떻게 변했나

1945년 광복을 기념해 출시된 국내 최초의 담배 '승리'의 가격은 3원으로 당시 쌀 40kg 가격 35전(0.35원)보다 8배가량 비쌌다. 70년이 지난 지금 쌀 가격은 담배 가격을 훨씬 뛰어넘었다. 2015년 현재 담뱃값은 4500원으로 급상승했지만, 쌀값은 더 많이 올라 담뱃값의 17배에 달하는 7만6000원이 됐다.
서울연구원은 6일 쌀·담배·버스요금 등 서울의 주요 생필품 및 생활요금 가격 변화를 담은 '광복 70년, 서울은 어떻게 변했을까ㅡ생활물가 편' 인포그래픽스를 발표했다. 자료에 따르면 광복 직후 쌀 40kg의 가격은 담배뿐만 아니라 영화 1편(1.7원), 시내버스 기본요금(0.5원)보다도 쌌다. 화폐개혁 이후인 1963년 1505원이었던 쌀값은 이후 50년간 50배가량 올라 오늘날 값비싼 생필품에 속하게 됐다.
국내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은 1963년 9월 1봉지당 10원으로 출시됐다. 현재는 76배로 올라 760원에 판매된다. 대표적 외식 메뉴인 자장면 가격은 같은 기간 25원에서 4600원 수준으로 184배 뛰었다.1963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TV 유료방송이 시작됐을 때 한 달 수신료(100원)는 영화 1편을 보는 비용(65원)보다 비쌌다. 1970년대에는 500원, 1980년대에는 2500원 수준으로 TV와 영화가 비슷한 가격대를 유지했고, 1990년대 들어와서는 영화 관람료가 TV수신료를 역전했다. 2015년 현재 영화 1편 관람료는 9000원으로 TV 한 달 수신료의 3배가 넘는다.
교통 관련 물가도 꾸준히 상승했다. 1965년 8원이었던 시내버스 기본구간 요금은 올해 163배 오른 1300원이 됐다. 휘발유 1L당 가격은 1946년 2전(0.02원)에 불과했지만 1차 석유파동 후인 1974년 150원, 2차 석유파동 후인 1980년 538원으로 크게 올랐다. 2012년 2000원대까지 상승했던 휘발유 가격은 올해 1670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