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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22/ 조선시대 그림 이야기4/ 정선 조영석 채용신

상림은내고향 2020. 4. 23. 10:12

조선시대 그림 이야기3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1759년)

그의 호는 겸재(謙齋)다. 예전에는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선 같으면 '겸재' 하고 호를 이름 대신 불렀다. '겸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금강산 그림이다. 그만큼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다. 왜 그렇게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는지 먼저 그 이유의 하나는 정선이 살던 당시에 금강산 여행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그전부터 무척 유명했는데 고려 시대에 이미 중국까지 소문이 났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난다면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구경해 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정선이 살던 18세기는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가 넉넉해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름나 있던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금강산에 다녀온 사람은 그것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금강산 그림을 찾곤 했다. 마치 우리가 해외 여행지에 가서 엽서를 사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이 특히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솜씨도 솜씨려니와 무엇보다도 정선이 금강산을 그리는 새로운 기법을 찾아냈다는 게 중요하다.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을 보면 마치 실제 산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기술직으로 41세에 첫 관직… 노년엔 안경 쓰고 정밀화 그려

겸재 정선의 일생

 정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독서여가도(讀書餘暇圖). 6566세 무렵의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간송미술관 소장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개창한 대가다. 몰락한 양반가 출신이었던 그는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선대는 경기 광주 일대에서 세거하다가 고조부 연() 때부터 한양의 서쪽, 인왕산 기슭에 터전을 잡았다. 정선은 1676년 아버지 시익(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 즉 현재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북악산 서남쪽 기슭 인근으로 추정된다

집안이 가난한데다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자 그는 열 살을 지날 무렵부터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일을 했고, 과거를 볼 만한 형편도 못됐다


하지만 청풍계에 위치한 외조부 박자진 가는 상당히 유복해 정선에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정선은 41세 때 관상감의 천문학 교수로서 첫 관직에 진출했다. 본래는 중인들이 나가던 자리이지만 외조부 박자진도 같은 업무를 담당했던 적이 있는 연유에서인지 기술직 관료로서 관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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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때 경상도 하양의 현감이 되어 5년간 근무했고, 한양에 돌아와 52세에는 인왕산 동쪽 기슭에 있던 인왕곡(현재 종로구 옥인동 20번지로 추정)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정선은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으며, 인곡정사도(仁谷精舍圖) 등과 같은 작품 속에 자신의 거처를 담아냈다. 54세 때 의금부도사가 되고, 58 6월에는 경상도 청하현감에 임명됐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에 속하는 금강전도(金剛全圖), 내연산삼용추(內延山三龍湫) 등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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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부터 70 1월까지 경기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정선은 한양을 떠나면 친구인 이병연과 시화를 서로 바꾸어 보자고 약속했고,이를 실행하며 서울 근교의 명승들과 한강변의 풍경을 그린 대표작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을 제작했다 

선비화가 심사정과 중인화가 마성린 등 그림 제자를 키웠고, 수많은 작품의 주문에 응대하기 위해 제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노년까지 안경을 쓰고 정밀한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76세에는 인왕제색도를 그리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화필을 꺾지 않았다. 79세에 나이가 많은 것으로 우대를 받아 종4품인 사도시첨정을 거쳐 81세에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을 만큼 관운도 좋았다.

 

가의 평생을 품어준 仁王… 265년이 지나도 변치않은 넉넉함

▲경복궁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선은 인왕산 일대에서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그만큼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인왕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낸 진경산수화를 많이 남겼다. 김호웅 기자diverkim@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의 배경… 서울 ‘인왕산’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국보 제216호다. 전통 회화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작품이 14점밖에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작품은 비교적 큰 화면에 인왕산을 가득 담고 있다. 정선이 직접 ‘인왕제색도’라는 제목을 붙였듯이 이 작품은 비온 뒤 개어 가고 있는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화면의 상반부에는 인왕산의 주봉인 매바위를 중심으로 육중한 암봉들이 꽉 차게 그려져 있고, 그 아래로는 비온 뒤 물을 잔뜩 머금은 산이 토한 안개 구름이 뿌옇게 피어오르고 있다. 구름 층 바로 아래에는 둥그런 언덕이 솟아 있고, 언덕 등성이에 축축하게 젖은 푸른 소나무 숲이 보이며,그 아래로 울창한 수풀에 감싸인 건물 몇 채가 나타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부분). 국보 제216, 지본수묵(紙本水墨). 79.2×138.2, 1751. 리움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인왕산의 비온 뒤 경관을 보이는 대로 재현한 것이다. 1751년 윤 5월 이 작품을 그렸던 당시 정선은 76세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강한 형세와 단단하고 힘찬 필치, 감흥을 담뿍 담아낸 풍성한 먹의 표현으로 보는 이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비온 뒤 인왕산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신비한 변화상을 만나 강렬한 흥취를 느꼈던 노대가의 기분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들도 정선이 경험했음직한 그 느낌을 인왕제색도를 보며 만나게 된다. 이러한 특징은 이 작품이 정선이 남긴 수백 점의 작품 가운데서도 백미로 손꼽히는 이유다

그런데 인왕제색도에는 다만 그러한 인상과 느낌만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인왕산의 전경을 담은 사진과 비교해 보면, 인왕산의 전체적인 형태와 위치가 사진에 거의 가깝도록 사실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정선은 어느 정도의 사실성에 근거하면서도 동시에 인왕산에 나타난 환상적인 비경의 한 순간을 포착한 후 자신의 감성을 가득 담아 ‘표현’해낸 것이다. 18세기 초엽 정선이 나타나 조선에 실재하는 경치를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놀랍도록 사실적인 정선의 그림에 환호했다

이전에도 산수화는 늘 인기가 있었지만, 정선처럼 현장에 실재하는 경관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내는 것은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진짜같이 보이는 산수화에 박수를 보냈다. 정선은 이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진지하게 관찰해 사실적으로 재현했으며 그 위에 자신의 느낌과 해석을 더하여 더욱 감동을 주는 진경산수화를 제시했다. 사실을 토대로 하되 주관적인 해석과 표현이 더해진 그림이 바로 정선의 진경산수화다 

진경산수화라는 장르를 새롭게 개척한 정선이 가장 자주 그린 곳은 인왕산과 금강산이었다. 금강산은 당시 사대부와 서민들 사이에 가장 인기 높은 여행지였다. 사람들은 마음먹고 평생에 한 번 정도 찾았던 금강산을 그림으로 담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당시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정선에게 금강산 그림을 자주 주문했다.따라서 정선은 평생토록 금강산 그림을 그렸고, 현재까지도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정선이 금강산만큼 자주 그린 곳이 바로 인왕산이다. 그것은 정선이 인왕산 주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인왕산 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그의 삶의 터전이었고, 그와 친구들이 늘 노닐던 곳이었으며 또한 높은 지위에 있던 경화세족들이 정선에게 그 모습을 그려달라고 주문했던 산이다. 즉 인왕산은 정선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가 살고 노닐었던 인왕산인 만큼 생생하게 그림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조선시대 내내 인왕산은 언제나 중요한 산으로 손꼽혔다. 수도 한양을 수호하는 사대 진산(鎭山)의 하나로 중시되던 인왕산은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높이338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으며, 특히 암반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순전히 돌로만 된 산 같다. 선바위, 범바위,매부리바위, 치마바위, 삿갓바위 등 우뚝 솟은 기암절벽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고, 그 강인하고도 호방한 인상으로 인해 대대로 명산으로 숭배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너무 높지도 험하지도 않아서 곳곳에 등산로가 있고, 약수터와 누정이 있으며 사철 경치가 아름다워 조선시대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인왕산은 조선 초기 한양의 도성을 세울 때 북악을 주산, 남산을 안산,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삼는 풍수적인 개념이 적용돼 한양을 수호하는 사대 진산의 하나가 됐다. 조선 개국 초에는 서산(西山)으로 불리다가 세종대부터 불법을 수호하는 수호신 중 하나인 인왕에서 유래된 명칭인 인왕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왕조를 수호하는 산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조선 중기 때 명나라 사신이 임금을 보필한다는 의미에서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러한 연유로 현재까지도 필운대(弼雲臺)와 필운동(弼雲洞)의 이름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왕()자를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인왕산(仁旺山)으로 표기되기도 했지만 1995년 본래의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됐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산인 인왕산은 또한 경치가 뛰어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거대한 암봉들 사이로는 수많은 계곡과 시내가 흘러서 한양의 중심에 가까우면서도 그곳에 들어가면 마치 깊은 심산유곡에 숨은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인왕산에는 예로부터 이름높은 사족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면서 한양 북촌에 버금가는 곳으로 손꼽혔다 

정선은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를 반복해서 그렸는데, 장동팔경은 인왕산과 북악산에 걸쳐 있는 장동 일대에 속한 여덟 곳의 명승지였다. 계절이 좋은 때 한양사람들은 이곳을 방문해 소풍을 즐겼고, 때로는 사대부들이 모여 시회를 열기도 했다. 장동팔경 중에는 청송당, 취미대, 청하동, 청풍계, 수성동, 세심대, 필운대, 백운동 등이 손꼽힌다. 한양의 장동은 인왕산 남쪽 기슭에서 북악산 계곡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곳에 창의문이 있었기에 창의동이라 하다가 후에 장의동으로 변하였고, 이어 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서울의 효자동·청운동 일대를 가리키는데, 한양 최고의 거주지로 꼽히며 권문세가들이 많이 살았다. 

장동팔경 가운데 정선은 특히 청풍계를 자주 그렸다. 청풍계는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계곡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 초부터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여 사람들이 즐겨 찾던 명승지이다. 17세기 중엽 안동김씨 중 선원 김상용(15611637)이 이곳에 별서를 짓고 살게 되면서 그 이후에는 줄곧 장동 김씨가 세거했다 

정선은 청풍계와 이런 저런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몰락한 양반가 출신의 정선이 평생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았던 외가댁이 바로 청풍계 근처에 있었기에 정선이 자주 드나들었다. 또한 장동에 세거하던 안동 김씨들인 장동 김씨가의 여러 사람들과 교류했는데 이 즈음 청풍계에 살던 장동 김씨가의 김시민과도 교유했다. 때로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정선의 평생 지기였던 이병연 등 친구들과 청풍계에서 모임을 가졌으니, 청풍계는 정선의 삶에서 꽤 의미있는 장소였음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정선은 인왕산의 청풍계와 청풍계에 있던 장동 김씨가의 제택을 반복해서 그렸고, 그 가운데는 정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도 있다. 

정선의 장동팔경도 가운데 주목되는 또 다른 작품은 ‘수성동도(水聲洞圖)’이다. 수성동은 19세기 지리지인 ‘동국여지비고’에 “인왕산록에 있으니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다. 곧 비해당(안평대군·14181453)의 옛집터로 시내와 바위의 빼어남이 있어 여름에 놀며 감상하기에 마땅하다.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라 한다”고 기록된 곳이다. 정선의 장동팔경도 중 ‘수성동도’는 인왕산의 기암절벽 사이로 난 계곡과 시내, 돌다리가 등장하고 있고 이곳에서 노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기록된 명승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준다 

이처럼 유명한 명승인 수성동 계곡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옥인동에 아파트 단지들이 난립하면서 원래의 경관이 손상된 채 옛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문화역사 경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2009년에서 2012년까지 3년에 걸쳐 서울시가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한 끝에 수성동의 옛 경관을 복원했다. 지금 옥인동의 수성동 계곡에 가면 조선시대에 칭송되었던 명승으로서의 위용을 다시 만날 수 있다. 만일 정선의 ‘수성동도’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왕산과 관련된 정선의 작품 가운데 조현명(16901752)과 이춘제(16921761) 등 인왕산 주변에 살던 소론계 세도가들과 관련된 작품들도 눈길을 끈다. 정선은 젊은 시절부터 소론계 인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는데, ‘옥동척강도(玉洞陟崗圖)’는 1739년 여름쯤 소론계 관료들의 모임을 기록한 진경산수화이다. 이때 인왕산 세심대와 옥류동 중간 즈음에 위치한 이춘제의 집에서 일곱 사람들이 모여 아회(雅會)를 가졌는데, 흥취가 높아지자 옥류동에서 출발하여 청풍계를 지나는 등산을 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춘제는 정선에게 그 장면을 그려줄 것을 주문했다. 64세의 노인이었던 정선은 이춘제의 주문에 충실히 응해 참석한 일곱 사람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그렸다.인왕산 등성이가 크게 부각되고 사람은 작게 보이는 방식으로 재현했는데 지팡이를 짚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즐거운 모습이어서 이들의 흥취가 잘 전달되고 있다

이처럼 인왕산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이었다. 그만큼 정선은 자주 인왕산의 여러 장소를 진경산수화로 그려내었다. 정선의 대표작이자 국보이기도 한 인왕제색도를 비롯하여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 인곡정사도(仁谷精舍圖)가 있고 청풍계도(淸風溪圖), 장동팔경도 등 인왕산의 다양한 경관은 현재까지도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과 흥취를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자 작품으로 무궁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박은순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2017.11.09 겸재 진경산수화의 걸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비 온 뒤 인왕산의 신비스러운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1751년 어느 날, 일주일째 내리던 비는 마침내 그쳤다. 그 순간 인왕산 골짜기에 신비하고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자욱한 운무가 산자락을 뒤덮은 것이다.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었으리라. 조선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이 이 풍경을 놓칠 리 없다. 즉시 먹물을 가득 묻힌 붓을 들었다. 그리곤 눈앞에 풍경이 보이는 대로 조선 최고의 화성畵聖의 손끝에 안긴 붓은 살아 꿈틀거리는 듯 한지에 고스란히 담겼다.

 

겸재는 생생한 현장감을 생동감 있는 필치로 그려나갔다. 비에 젖은 뒤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기 위해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과감하게 내리 그었다.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에 본 대로 한 편의 산수화를 완성했다.

 

▲겸재 정선이 75세 때인 1751년 비 온 뒤 운무가 자욱한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화면을 꽉 채운 화풍과 강렬한 필치로 진경산수화의 대표적 걸작으로 꼽힌다. 출처 겸재정선미술관.

 

▲겸재가 그린 ‘창의문(彰義門). 왼쪽 인왕산과 오른쪽 북악산 사이 창의문을 잘 표현했다. 창의문 위 인왕산 부암바위는 항상 빠트리지 않는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겸재가 그린 ‘백운동(白雲洞)’의 당시 풍경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겸재가 인왕산 자락 아래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인곡정사(仁谷精舍)’가 그림으로 남아 있다. 출처 겸재정선미술관.

 

▲겸재가 1739년 그린 ‘청풍계(淸風溪). 출처 간송미술관.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오는 수성동계곡을 당시 풍경으로 최대한 복원했다.

 

▲겸재의 그림 ‘수성동’에 나오는 수성동계곡을 당시 풍경으로 최대한 복원했다.

 

▲선 바위 가는 길에 인왕산의 신비한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인왕산은 선바위 등 신비한 바위들이 많다.

조선닷컴

 

■겸제 정선 첫 작품 300년

조선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겸재 정선(1676~1759)이 올해로 <신묘년풍악도첩>이란 첫 작품을 그린 지 꼭 300년이 되는 해다. 현존하는 <신묘년풍악도첩>은 겸제가1711년 금강산을 첫 기행해서 그림 그림이다. 그 때 나이 36. 조선 화단에 겸재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서곡이었다.

 

▲겸재 정선은 50대 후반인 1734 <금강전도>를 완성하면서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화풍을 선보여, 그의 전성기를 활짝 연다. 사진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 제공

 

<신묘년풍악도첩> 1712년 영조대의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친구 이병연이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삼연 김창흡과 겸재를 불러 금강산 여행을 한 게 계기가 됐다. 겸재는 말로만 듣던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보고, 채 감회가 가기 전에 12폭의 작품을 그려냈다. 그 그림이 신묘년에 그린 풍악도첩이라고 해서 <신묘년풍악도첩>으로 불린다. 이 작품은 겸재란 이름을 화단에 알리며 동시에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화풍을 본격 구사하는 계기가 된다

 

▲겸재는 평생 금강산을 세 번이나 기행하면서 직접 본 경치를 그림에 그대로 담는 기법을 사용했다. 사진은 50대의 대표작인 <금강전도>이다. 사진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 제공

 

사실 그 때까지 조선시대의 화풍은 성리학적인 관념론과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념산수화, 추상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관념론에서 벗어나 보다 보편적인 세계관과 구체적인 현실을 중시하게 된다. 즉 실제 본 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기풍으로 바뀌게 된다.

 

▲70대에 이르러 <인왕제색도>를 완성해 겸재는 화가로서 완숙의 경지에 이른다. 사진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 제공

 

겸재는 금강산을 다녀온 지 불과 1년 후인 이병연의 특별초청으로 아버지, 동생 등과 함께 또 다시 금강산을 기행한다. 2년 연속 금강산 구경을 한 겸재는 친구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내금강과 외금강의 진경 21폭을 그린 <해악전신첩>을 이병연에게 선물했다.

 

▲겸재 정선의 화첩에 있는 진경산수화.

 

이병연은 이를 소장하고 있으면서, 삼연 김창흡, 시인 조유수, 서화수장가 이하곤과 신정하 등 당대 명인들에게 돌려 보이며 시를 받아 넣었다. 겸재의 명성을 일시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겸재는 당장 호사가들 사이에 유명인사가 됐다.

 

▲겸재 화첩에 있는 진경산수화의 한 폭. 겸재 자신의 모습이라고 한다.

 

<해악전신첩>이란 이름은 이병연이 금강산과 주변의 명승들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린 것에 대한 경의와 감탄의 표현으로 붙인 것으로, ‘바다와 산의 본모습을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흔히 동양의 그림을 ‘전신’이라 부르고 여러 그림들을 모아 엮은 것들을 ‘전신첩(傳神帖)’이라 부른다. 아쉽지만 이 그림은 지금 전하지 않고 있다.

 

/금강전도.

 

이 때부터 겸재는 문인화가로서 개성적인 화풍을 구사했고,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한 순간에 조선의 명망 있는 화가로 이름을 올리자, 겸재의 집은 그림을 부탁하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2017.12.19 김병헌 동국대 연구위원,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진경산수 창시한 적 없어"

겸재=진경산수’라는 통설 비판··· "정선에 대한 신격화 중단해야"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우리는 조선후기 문화사에서 산수화의 대가인 겸재(謙齋정선(鄭敾: 16761759)에 대해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창시자’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교과서는 물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료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겸재 정선’을 검색하면 곧바로 ‘조선 후기 18∼19세기에 성행했던 진경산수의 대가’, ‘진경시대의 대표적 화가’, ‘진경산수의 대성자’ 등 정선이 곧 진경산수이며, 진경산수가 곧 정선이라는 글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 학설에 반론을 제기한 연구자가 있다.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김병헌 연구위원이 그 주인공. 그는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를 창시하지 않았다”며  “진경산수라는 산수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진경시대나 진경문화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김 연구위원은 이 같은 자신의 주장을 정리하여 《진경시대는 없다》는 제목으로 지난 9월 <조선pub>에 3회에 걸쳐 칼럼으로 연재하였다. 이 칼럼에서 김 연구위원은 ‘겸재=진경산수’라는 기존의 통설에 대해 그러한 등식이 성립된 배경과 그 허구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교과서와 백과사전을 다시 써야 할 정도의 내용이기에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상하리만큼 반응이 없었다. 김병헌 연구위원을 직접 만나서 이 문제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칼럼이 나간 후 어떤 반응이 좀 있었습니까?
“전혀요.”
 
-중요한 문제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왜 반응이 없을까요?

“유명(有名)과 무명(無名)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내용을 봐야 하는데 누가 말했는가를 보는 듯합니다. 그림을 구매하면서 작품성보다는 누가 그렸는가를 보고 사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언론도 조용합니다. 
“미술사 연구자들조차 ‘진경(眞景)’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학계의 무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언론조차 이에 대해 조용한 것은 좀 실망스럽습니다.” 


 ‘진경’인가 아닌가는 관람자의 주관적 판단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요?
“학술 용어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경(實景)과 진경(眞景)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 구분이 안 되고, 구분이 안 되니 그게 그것 같은 겁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 문제냐는 식이죠.”  
 
-실경과 진경이란 단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
“실경(實景)은 ‘실재하는 풍경’이라는 뜻으로 산수화의 소재(素材)를 말하는 반면 진경(眞景)은 ‘사진처럼 잘 그린 풍경’이라는 뜻의 비평 용어입니다. 북한산 인수봉을 그려놓고 ‘실경산수’라 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진경산수’라고 할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진경’인가 아닌가는 관람자의 주관적 판단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학술용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진경’이라는 용어가 학술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요? 

“진경이라는 용어가 1970년대를 전후해서 미미하게 사용되기는 했지만, ‘겸재=진경산수’라는 등식이 확고하게 성립된 데는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최완수 연구실장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정선이나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정리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술사 용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

“최 실장이 제기한 용어에는 대부분 ‘진(眞)’이라는 글자가 들어갑니다. 그림에 있어서 ‘진경산수’, 글씨에 있어서 ‘동국진체(東國眞體)’, 시(詩)에 있어서 ‘진경시(眞景詩)’가 다 그가 창안해 낸 용어입니다. 여기에 유홍준 교수는 논문이나 교과서라는 매체를 통해 공신력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용어임에도 이 두 사람이 워낙 인지도가 높다보니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내용은 따져보지도 않고 ‘누가’ 말했기 때문이죠.”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교과서나 백과사전 등에 "진경산수의 대표작"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특히 문제 되는 점을 든다면요?
“최 실장은 겸재를 가리켜 ‘진경산수화의 대성자’,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 ‘진경산수화법의 창안자’, ‘진경산수화풍의 시조’ 등 모든 미칭은 다 동원해서 찬양했습니다. 또, 유홍준 교수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겸재 정선을 ‘진경산수의 창시자, 개척자, 완성자’라는 글을 실어 아이들에게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에 객관성이라는 엄밀한 잣대가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김 연구위원은 “우선 ‘산수화’와 ‘산수화풍’‘산수화법’은 분명히 다른 개념인데도 전혀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다” 하고 또“산수화에 시조나 창시자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교과서에 실렸으니 아이들은 당연히 맞는 내용으로 믿고, 인터넷에서 정선을 검색해도 온통 진경산수나 동국진경이 쏟아지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 없죠. 그러니 저 같은 무명 학자가 한마디 한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이거죠.”  

"‘진경’이란 특정인의 그림에 국한된 용어 아냐"

-그렇다면 ‘실경산수’와 ‘진경산수’는 과연 무엇인지요?  
“우선 두 용어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진경산수라는 말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으니까요주지하는 바와 같이 산수화에는 상상 속의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觀念山水)가 있는가 하면실재(實在)하는 풍경을 보고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가 있습니다조선 전기까지는 주로 관념산수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 실경산수가 미미하나마 차츰 늘어나다가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산천을 직접 보고 그린 실경산수가 유행합니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 등을 필두로 하여 많은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은 겸재의 그림을 보고 ‘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는 찬사를 남겼는데, 여기의 ‘진경’이라는 두 글자를 채용하여 진경산수, 동국진경, 진경시대 등으로 사용하며 학술용어로 굳어졌습니다. 문제는 겸재와 진경산수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세황이 말한 동국진경은 어떤 의미인가요?
“‘조선의 풍경을 진짜처럼 잘 그린 그림’이라는 뜻으로 쓴 겁니다. 흔히 말하는 화찬(畵讚)입니다.” 
 
-그럼 보는 사람에 따라 평이 달라질 수도 있겠군요.

“당연합니다어떤 이는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를 보고 동국진경이라 할 수도 있고또 다른 화가의 그림을 두고 동국진경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실제로 강세황은 강희언(姜熙彦)의 인왕산도에 쓴 화찬에도 ‘동국진경’이라 했으니까요결국 ‘진경’이란 특정인의 그림에 국한된 용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극단적으로 유치원 아이가 동네 산을 그린 그림을 보고 ‘진경이다.’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강희언의 인왕산 그림.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보면 진경산수화를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의 전통을 토대로 발전된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진경산수화가 실경산수화 다음에 등장한 그림이라는 뜻 아닌가요?
“백과사전의 논리라면 관념산수에서 실경산수로, 실경산수에서 진경산수로 발전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최완수 실장이나 유홍준 교수 등이 말하는 진경산수에 대한 개념을 보면 이 서술이 모순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최완수 실장은 진경산수화를 ‘진(眞)짜 있는 경치(景致)를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되고, 실제 있는 경치를 그 정신까지 묘사해내는 사진 기법 즉 초상기법으로 사생해낸 그림이라는 의미도 된다’고 했어요. 이는 분명히 실경산수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쓴 다른 글에서는 ‘우리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새로운 그림 기법을 창안한 것’, ‘조선에만 있는 조선 고유화법의 창안’이라 하여 ‘기법’ 또는 ‘화법’이라 하였습니다. 
 
유홍준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겸재는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寫景) 산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남종화 기법을 수용하여 한 차원 높은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역시 기법의 변화죠. 최 실장이나 유 교수가 정선이 창안했다고 하는 산수화는 그림의 소재를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에서 다른 것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남종화 기법을 구사하여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관념산수(소재)→실경산수(소재)→진경산수(기법)으로 발전되었다고 했으니 모순이죠.”   


"겸재에 대한 신격화는 그를 욕보이는 것"

 -진경산수의 실체는 기법이라고 설명한 다른 자료도 있는지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진경산수화에 대해 ‘조선 후기(1700∼1850년)를 통하여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로 정의하고, ‘화풍은 종래의 실경 산수화 전통에 18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畫法)을 가미하여 형성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한 <테마로 보는 미술>에서는 ‘진경이란 용어 자체가 남종화의 개념이듯이 정선의 진경산수화도 남종화풍을 근간으로 삼았다’고 하여 진경을 남종화와 동일시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소재는 분명 실경인데 기법은 남종화법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기법의 채용이지 소재의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진경’이라는 용어는 ‘실경’이라는 뜻에 가까울 뿐 기법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죠. 그러니 실경산수 다음에 등장한 산수화라고 하면 명백한 오류입니다. 기법은 실경산수 내에 포함된 하위개념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십니까?
“간단합니다. 진경산수라는 용어를 기존에 쓰던 실경산수로, 진경산수화풍이나 진경수산화법은 겸재산수화풍과 겸재산수화법으로 바꾸면 간단히 정리 됩니다. 또,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에 유명한 화가로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독창적 기법을 구사하여 뛰어난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산수화 중에 어떤 작품은 표암 강세황으로부터 동국진경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식으로 서술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진경산수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니 진경문화도 모순입니다. 당연히 진경문화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정선에게 진경문화의 주도자요, 개척자, 창시자, 시조라는 허울을 씌워 그를 추앙하면 미술사가 심각한 왜곡의 늪에 빠져드는 겁니다. 특히 겸재를 화성(畵聖)이라는 칭호까지 써가며 신격화하는 것은 도를 넘는 것이죠. 이러한 신격화는 그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모욕이라 생각합니다. 더이상 이런 식으로 겸재를 욕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화가는 그가 남긴 작품으로 평가하면 그만입니다.”   
 
김 연구위원은 따라서 교과서의 진경산수화와 미술사 관련 서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산수화는 상상 속의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觀念山水)와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가 유행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작가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 등이 있다. 
 
겸재 정선은 중국의 남종화법을 토대로 독창적 기법을 구사하여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단원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산수화, 풍속화, 기록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긴 가운데,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의 실경산수를 많이 남겼다. 
 
표암 강세황은 원근법과 음영법 등 서양화 기법을 구사하여 영통골입구도와 같은 독창적인 실경산수를 남긴 작가로 알려져 있다. 모두 실경산수를 많이 그렸으나 각자 기법이나 화풍의 차이가 있다.>

 

/강세황의 영통골입구 그림.

 

우리 고유 글씨라는 '동국진체'도 실체가 없어

-김 연구위원께서 쓰신 <조선pub> 칼럼 중에는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서예용어에 대해서도 비판한 게 있는데요. 

“네. 그것도 황당하기 짝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최완수 실장은 1986년 한 잡지를 통해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서예용어를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시작이 짧은 한문의 오역(誤譯)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진경산수와는 또 다른 차원의 오류입니다.”
 
-정선이 창안한 진경산수가 없듯이 동국진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뜻인지요.
“동국진체의 문헌적 근거는 옥동(玉洞) 이서(李
)라는 사람의 행장초(行狀草)에서 시작합니다. 옥동의 후손 이시홍이 고조부의 평생을 정리한 행장초(行狀草)에 ‘동국진체(東國眞體) 실자옥동시(實自玉洞始)’라는 문구를 최완수 실장은 ‘옥동 이서가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 동국진체라 불렀다.’고 했습니다. 명백한 오역입니다. 지극히 초보적인 문장인데 정말 뜻을 몰랐는지, 아니면 뜻을 알고도 왜곡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부끄러운 일이기는 마찬가지죠.” 
 
김 연구위원은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서예사를 조금 알아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 중기의 서예는 고려 말에 도입된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와 조선 중기에 혜성같이 나타난 한호(韓濩)의 석봉체가 주름잡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서가(書家)들이 이들 글씨의 연미하고 진부함에 싫증을 느끼면서 왕희지로의 복고 현상이 나타납니다. 옥동 이서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 이하진이 중국에서 들여온 왕희지 글씨를 보고 왕희지에 전적으로 경도됩니다. 
 
이후 왕희지를 제외한 모든 서가들을 양주(楊朱)·묵적(墨翟)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서에게는 오로지 왕희지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러자 그와 인맥이 닿은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李匡師) 등도 그의 영향을 받아 왕희지서를 익히게 됩니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이시홍은 ‘조선의 진짜 글씨는 실로 옥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東國眞體, 實自玉洞始)’고 했는데, 이는 글씨 중에 진짜 글씨로 여겨지는 왕희지 글씨를 쓰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최 실장은 이러한 뜻과는 전혀 다르게 ‘옥동 이서가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 이를 동국진체라 불렀다’고 했으니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죠.” 

 

▲교과서에 실린 동국진체와 추사체.  동국진체에 대해 '우리 고유의 감정을 나타낸 글자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지학사 191쪽

 

그래도 인터넷에서 동국진체를 검색하면 많이 나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실체도 없는데 모두들 동국진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유홍준 교수는 ‘민족적 서체인 동국진체’라고 박사학위논문 서문에 써놓았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민족적 서체인 동국진체를 한 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건 최 실장은 ‘옥동 이서가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 이를 동국진체라 불렀다’고 했는데, 유홍준 교수의 학위논문에는 ‘조선 후기의 서예의 선구는 백하 윤순이었고 그것의 완성은 원교 이광사가 동국진체의 한 전형을 창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후기에는 백하와 원교의 동국진체가 등장했고...’, ‘원교 이광사에 의해 하나의 전형으로 제시되고 이를 동국진체라고 불렀다’, ‘원교 이광사는 이서에서 출발하여 윤순을 거쳐 창출된 동국진체를 완성시킨 조선 후기 서예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고 합니다. 이 정도 되면 중구난방(衆口難防) 수준이죠.”  

"우리 민족의 고유 서체를 개인이 어떻게 창시하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동국진체’에 대해 ‘18세기에 출현한 우리 고유의 서체(書體)’라고 했던데요.
“‘고유(固有)’는 ‘본디부터 있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백과사전에는 18세기에 ‘출현(出現)’했다고 썼어요. 그리고 한 줄 아래 개설부분에는 ‘이서가 정립(定立)한 서법’이라 해서 ‘출현’이 ‘정립’으로 ‘서체’가 ‘서법’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몇 줄 내려가면 ‘동국진체로 발현되었다’고 해서 이번엔 ‘발현(發現)’, 또다시 몇 줄 아래에는 ‘옥동 이서가 동국진체를 형성(形成)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더 내려가면 ‘전통적인 진체(晉體: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미법(米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며 창안된 옥동체(玉洞體)이며, 이를 동국진체라 칭하였다.’고 했습니다. ‘진체(晉體)’는 왕희지체를 일컫는 용어인데 왕희지체가 전통적인 것일까요? 그런데 집필자는 옥동 이서가 창안한 옥동체가 곧 동국진체라 했는데, 옥동 이서가 언제 옥동체를 창안하고 그걸 누가 동국진체라 불렀는지도 없습니다. 


또한 ‘옥동 이서가 <필결(筆訣)>을 저술하여 동국진체를 창시했다’고 하여 이번에는 또 ‘창시(創始)’입니다. 문제는 <필결(筆訣)>은 서법 이론인데 그걸로 어떻게 동국진체를 창시했다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옥동체가 곧 동국진체라 해놓고 이것을 이광사가 완성했다고 했습니다. 옥동의 글씨는 옥동체, 원교의 글씨는 그냥 원교체일 뿐입니다. 
 
백과사전 마지막 부분의 ‘의의와 평’ 항목에는 동국진체를 ‘18세기 우리 글씨의 총체적 명칭’이라 했다가 바로 ‘18세기에 가장 애용되던 우리의 고유 서체’라고 했습니다. 우리 고유의 서체인데 누가 창안하고 창시하고 완성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집필자 머릿속에 있는 동국진체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횡설수설입니다. 이게 우리나라 최고의 백과사전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수준입니다.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이광사(李匡師) 황노직시(黃魯直詩부분.

 

-왕희지체라는 서체가 있듯이 이서의 글씨가 독특하다면 동국진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지요.
“옥동 이서의 글씨는 그냥 옥동체일 뿐입니다. 만약 옥동 이서가 창안한 동국진체가 있다면 그것을 제시해야 하는데 아무도 제시한 경우가 없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이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 명칭도 아주 다양합니다. 최완수 실장은 옥동 이서가 창안한 ‘서체’라고 했으나 유홍준 교수는 원교 이광사가 제시한 ‘전형(典型)’, ‘진경산수와 같은 장르’라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서풍의 총칭’, 어떤 이는 ‘시대 서풍’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동국진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했는데 500쪽 정도 되는 단행본 중 동국진체에 관한 서술은 겨우 7쪽 밖에 안 되는데다 동국진체를 ‘서예의 범주’‘예술 현상’이라고 했습니다하나의 사안을 두고 이토록 개념이 다양한 경우는 대부분 실체가 없거나 속이고 있는 경우에 해당합니다사람마다 ‘도깨비’를 그리면 모두가 다른 것과 같은 경우라고 보면 됩니다동국진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글을 쓸 때 ‘동국진체’라는 실체를 앞에 놓고 글을 쓰셨으면 합니다.  

"역사 교과서는 하나로 통일해야"

 -이야기가 약간 벗어났지만 김정희가 창안했다는 추사체도 실체가 없다는 뜻인가요.  
“그건 추사체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현행 교과서에서 ‘김정희가 추사체를 창안하였다’는 서술이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서체를 창안한 것은 아니죠. 김정희가 남긴 많은 작품을 후대에 와서 그냥 그의 호를 붙여 부르는 것일 뿐입니다. 왕희지가 남긴 글씨는 왕희지체, 조맹부가 남긴 글씨는 송설체, 한호가 남긴 글씨는 석봉체라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림과 글씨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마지막으로 현행 교과서의 체제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
“현행 8종 검정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다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다면 굳이 여러 종의 교과서를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타의 과목이 대체로 문제 해결 방법을 가르친다면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재정리하여 학생에게 전달하는 과목입니다. 8종 교과서가 서로 다른 사건이나 인물을 제시하거나 같은 사건이나 인물이라도 서로 다른 내용을 가르친다면 배우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분명 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학자들 간에 주관적 판단에 따라 비중이 다를 수는 있지만 같은 또래의 학생들은 같은 내용을 배워야 공평합니다. 현 정부는 교과서 종류를 많이 나눠놓는 것을 다양성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나, 이는 학생들마다 서로 다른 내용을 배우는 것이지 다양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학생들은 8종 교과서를 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정해주는 한 권의 교과서로만 배우기 때문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다른 이론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교과서마다 다른 학설을 수록했다는 것은 연구자들조차 해당 학설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연구자들조차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일까요? 모든 교과서에는 과목 이름 앞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라는 명칭이 붙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한국사’라는 것은 고등학생 수준에 맞는 국사 교과서라는 뜻이죠. 
 
연구자들 사이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학설을 교과서마다 서로 다르게 수록한다면 이건 학술서지 고등학교 교과서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역사 교과서는 연구자들끼리 합의를 이룬 통설이나 정설 위주로 학생들 수준에 맞는 내용을 엄선하여 하나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과 반목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현행 교과서 오류 문제에 대해 <조선pub>에 글을 연재하고 있는 김 연구위원은 교과서 문제로 들어가니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 이상흔 조선pub 기자

 

이미지

 

/함흥본궁송도

 

 

 

 

 

 

 

/산수화

 

/인왕제색도

 

■조영석 趙榮祏 

종보, 관아재, 석계산인

출생 1686년

사망 1761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종보(宗甫), 호는 관아재(觀我齋) 또는 석계산인(石溪山人). 군수를 지낸 조해(趙楷)의 아들이며, 한성부 우윤을 지낸 조영복(趙榮福)의 아우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인이다. 17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등용되어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관아재 조영석 - 이 잡는 노승

 

〈사제첩〉 가운데 〈수공선거〉, 조영석이 종이 바탕에 담채로 그린 풍속화(조선 후기), 28×20.7cm, 조동제 소장

 

/ 쌍작

 

/병아리

 

/산수도

 

 /우도

 

/설중방우도

 

/江上釣魚圖

 

 

/편자박이

 

/옹기장사

 

 

/쟁기질

 

/장기

 

/작두질

 

/여물주기

 

/방당인필어선도

 

/바느질

 

/새참

 

 

■채용신 蔡龍臣

 

석지(石芝), 석강(石江), 정산(定山), 동근(東根)

출생 1850년(철종 1)

사망 1941년

  

초명은 동근(東根). 호는 석지(石芝)·석강(石江)·정산(定山). 초상화·화조화·인물화 등을 극세극채색(極細極彩色)으로 잘 그린 화가로 70여점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1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벼슬은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역임한 뒤 종2품관까지 지냈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하여 이하응(李昰應)·최익현(崔益鉉)·김영상(金永相)·전우(田愚)·황현(黃玹)·최치원(崔致遠) 등의 초상과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등을 그렸으며,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황장길부인상(黃長吉夫人像)」 등 여인상도 그렸다

 

/최치원상(崔致遠像)

 

/1911년 그린 황현 초상, 풍속화가 김춘근이 그린 19세기 말 머리 얹는 모양,

 

/운낭자 = 문화재

 

최연홍 초상, 1914

이 초상은 주로 "운낭자상"으로 불려왔습니다.

운낭은 최연홍의 초명으로 평안도 가산의 관청기생이었다고 합니다.

27세때인 순조 11년(18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희저 일당에 의해 군수 정시와 그의 아버지가 살해되고 아우는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때 최연홍이 위험을 무릅쓰고 군수 아우의 목숨을 살려내는 한편,

부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충절을 가상히 여겨 기적을 삭제하고 논밭을 주어 크게 표창하였다고 합니다.

연홍의 활약은 <순조실록> 12 1월 10일조에 수록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채용신이 1914년에 운낭자의 27세 때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추화로서

'최연홍'이라는 특정한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는 있지만,

후덕하고 젊은 미인이 건강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통하여

이상적인 귀감을 제시하려는 의식이 엿보입니다.

 

■삼국지연의도

 

 

 

 

 

/삼국지연의도

 

■'면암 최익현

 /고종 어진◎

 

조선시대 그림 이야기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