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딴따라 이야기4/ 한국 여배우 열전 - 옛날 영화배우들의 옛 모습 - 우리 기억 속 '국민 엄마'

상림은내고향 2019. 12. 20. 17:34

2012-05-22  신동아  한국 여배우 열전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06월 호

최초의 팜파탈 김지미

남자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치명적인 매력의 여걸

  •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의 자리는 오랫동안 변방이었다. 남자 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제작 환경에서 여배우는 주인공의 상대역만 거듭하다 대중의 눈요깃거리, 가십의 대상으로 소모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1950~60년대부터 달라졌다. 미모와 재능, 개성을 겸비한 여성들이 스크린에서 영역을 확대했다. 동시에 한국 사회 전반의 여성에 대한 인식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영화 ‘킬리만자로’를 연출하고,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각본을 쓴 오승욱 감독이 한국 여성의 패러다임을 바꾼 여배우들을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 첫 순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배우였으며 동시에 떠들썩한 스캔들 메이커였던 여걸 김지미다. 연기·제작·영화 행정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그녀를 추억한다. <편집자 주>

 

최초의 팜파탈 김지미

눈부신 미모와 연기력, 당당한 매력으로 시대를 풍미한 배우 김지미.

 

1961년 새해 벽두. 알리와 포먼의 권투 대결만큼 세기의 대결은 아니지만, 구경꾼의 흥미가 동하는 사건이 생겼다. 두 편의 춘향전이 동시에 개봉한 것. 광복, 6·25전쟁, 4·19혁명이라는 격랑을 헤치며 지친 민중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가벼운 오락거리였다. ‘홍 코너’는 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이 조를 이룬 ‘성춘향’. 최은희는 ‘마음의 고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동양적인 미모와 섬세한 연기력으로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정취와 신여성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남성 관객에게 영원한 모성을 느끼게 해 준 광복 후 최초의 톱스타였다. 그녀의 남편이자 감독인 신상옥은 데뷔하자마자 세련된 연출력으로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 지적인 영화를 만들어내 평론가들의 상찬을 받았고, 자신의 프로덕션까지 갖춘 한국 영화계의 신성이었다. 이에 맞서는 ‘청 코너’는 김지미·홍성기 감독 조의 ‘춘향전’. 1958년, 데뷔 1년 만에 극장 안을 눈물바다로 만든,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과 장기 개봉 기록을 세운,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 멜로 ‘별아 내 가슴에’의 주연 배우 김지미와 ‘별아 내 가슴에’로 한국 최고의 흥행 감독이 된 홍성기 부부의 작품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한 해 전인 1960년 3월 춘향전의 영화화를 기획한 신상옥 감독은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시네마스코프의 장대한 화면과 총천연색 영화를 시도하기 위해 컬러 필름으로 테스트 촬영을 마치고 시나리오를 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흥행 감독 홍성기가 뒤늦게 춘향전을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할 것을 기획하고 신상옥보다 먼저 영화제작자협회에 촬영신고를 내버린 것이다.


 


세기의 대결 

지금도 그렇지만 같은 아이템과 같은 내용의 영화가 경쟁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서로 피한다. 도의상 문제도 있지만, 대결에서 실패하는 쪽은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심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춘향’과 ‘춘향전’양측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먼저 기획을 했다는 신상옥은 억울함을 호소했고, 홍성기 측은 “무슨 말이냐 내가 먼저 시작했다”며 버텼다. 제작자협회장은 홍성기 편이었고, 회원들은 “홍성기 감독과 회장이 밀실에서 협약을 맺은 것 아니냐”며 회장을 규탄했다. 협회가 둘로 나뉘어 싸움을 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양쪽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촬영을 진행했고 남은 것은 관객의 심판뿐이었다.

먼저 승리한 듯 보인 것은 홍성기의 ‘춘향전’ 쪽이었다. 앞서 개봉한 것이다. 3일 뒤 신상옥 감독의 춘향전은 같은 제목으로 상영불가하다는 판정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성춘향’이란 제목을 달아 개봉했다. 

먼저 김지미·홍성기 조의 ‘춘향전’을 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4대 3 화면비의 영화에 익숙하던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운동장처럼 넓은 화면의 시네마스코프에 울긋불긋한 총천연색 화면이 펼쳐진다. 단옷날 활쏘기에서 우승한 이 도령이 남원 광한루에 올라 방자와 사령에게 술을 따라주고 자신도 술을 먹으려다 술잔을 멈춘다. 저 멀리 누군가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 도령이 홀린 듯 바라보는 그네 타는 처녀는 누구인가?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 술잔을 마다하고 넋을 잃는가? 화면이 이 도령 시점으로 바뀌면, 아뿔싸. 저 멀리. 너무 멀어 점으로밖에 안 보이는데다 그림자가 져서 시커멓기까지 한 물체, 그 누군가가 그네를 타고 있다. 이 도령이 반했다고 영화 속에서 감탄을 하는데 관객에게 보이는 건 시커먼 점 하나다. 이 도령과 관객 모두가 반해야 할 춘향이 그네 타는 장면에서부터 홍성기·김지미 조는 관객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관객은 그래도 기다렸다. 홍성기·김지미 조가 춘향이 옥중 장면에서 극장 안을 홍수로 만들어줄 것을 굳게 믿으며.






 

최초의 팜파탈 김지미

1975년 영화 ‘육체의 약속’으로 제14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김지미.

 

똑같은 이야기의 또 다른 영화 ‘성춘향’으로 가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방자 역의 허장강이 특유의 능글거리는 몸짓과 말투로 오작교를 걷는 향단이와 춘향이를 불러 세우고 농을 지껄인다. 방자의 농지거리를 향단이가 척척 받아낸다. 향단이는 천하의 도금봉이다. 어라, 허장강·도금봉의 능청이 눈길을 잡기 시작한다. 이 도령과 춘향이가 만나기도 전부터 영화가 재미있다. 게다가 춘향이는 영화에 등장하자마자 시장 통의 점쟁이 앞에 앉아 “내가 누군지 맞혀보라”며 연애운을 본다. 이 한 장면에서 최은희는 자기 의지가 확고하고 세상풍파에 때 묻지 않은 발랄하고 자신감 있는 처녀라 선언하는데 여간 매력적이지 않다. 드디어 광한루. 홍성기의 ‘춘향전’과 똑같이 ‘성춘향’의 이 도령 김진규 역시 저 멀리 누군가를 홀린 듯이 바라본다. 광한루 난간에 기대어 넋을 잃어 혹시 난간에서 떨어질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그녀는 누구인가? 저 멀리 다홍치마를 입고 그네를 타는 아름다운 여자가 보인다. 신상옥은 이 도령의 시점에 망원경을 달아 관객에게 보여준다. 자태도 고운 최은희를 보고 이 도령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반하게 만든다. 방자 허장강이 춘향이의 신발을 빼앗아 오고 이 도령은 짐짓 점잖은 척 신발을 돌려준다는 구실로 춘향이에게 접근한다. 이 도령의 뻔한 수작을 다 아는 최은희.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무 뒤로 숨어 이 도령을 속 타게 만든다. 최은희는 생기발랄하고, 게다가 귀여운 교태까지 부린다. 하하, 이쯤이면 관객들은 신상옥·최은희 조의 ‘성춘향’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한다.

 


홍성기의 몰락 

자, 다시 고개를 돌려 홍성기의 ‘춘향전’으로 가자. 춘향이 김지미가 그네를 타는 현장으로 달려온 방자. 이 도령의 미팅 신청을 향단이에게 전하며 수작을 부리는데, 그들 뒤 배경으로 김지미가 너무나 힘들게 그네를 탄다. 다홍치마를 공중에 훨훨 날리며 새파란 하늘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시원한 맛이 있어야 그네타기 아닌가? 김지미는 고작 3~4m를 힘들게 왔다갔다 할뿐이다. 그네 줄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고, 그네 끝에 매달아놓은 붉은 비단은 물에 젖은 것처럼 축 늘어져 영화를 보는 나는 방자와 향단이의 능청스러운 수작에 집중을 못하고 김지미가 그네에서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춘향이 옥중 장탄식 장면도 역시 최은희의 완승. 김지미·홍성기 조는 ‘별아 내 가슴에’에서 선보여 당시 최고의 흥행카드가 되고,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어머니와 이모, 누나, 여동생들까지도 막장 드라마라 욕을 하면서도 끝끝내 TV 앞에서 본방사수를 하게 만드는 “내가 네 아비다” “아버지, 우리는 오누이 사이인가요? 그렇다면 우리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나요?” 신공을 안타깝게도 춘향이에게는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사용한다면 그것은 춘향전이 아니니, 오호통재라. 그들의 춘향전은 흥행에 참패하고, 대한민국 영화계를 뒤흔든 세기의 대결은 최은희·신상옥 조의 압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1년 후 홍성기 감독과 김지미의 결혼은 파경을 맞는다. 영화 ‘춘향전’의 실패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된 제작자 겸 감독 홍성기는 다음 영화를 만들었지만 재기에 성공하지 못했고, 게다가 바람까지 피우다 걸린 것이다. 춘향전의 실패는 홍성기와 김지미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작을 만들어낸 감독과 여배우는 결혼까지 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감독 홍성기는 관객을 눈물 흘리게 만들면 흥행에 성공한다는 생각에 젖어 비슷비슷한 내용의 신파 멜로를 만들다 몰락의 길을 걸었다.  

1957년 데뷔작 한 편을 찍은 김지미는 이듬해 흥행작 ‘별아 내 가슴에’의 성공 이후 1959년까지 2년 동안 23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이쯤 되면 20대 초반의 신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소모돼버리고 사라져야 할 텐데 이상한 일이다. 춘향전에서 완패했지만 김지미는 살아났다. 남편 홍성기가 진 빚 갚으랴, 영화에 출연하랴, 애 키우랴, 제대로 된 역을 소화해낼 겨를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지미가 마구잡이로 출연한 50여 편의 영화에서 그가 당당한 여배우로 인정받을 만한 연기를 펼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김지미는 사라지지 않고 버텨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 등장해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문정숙, 도금봉, 주증녀 등을 제치고 선배이자 라이벌인 최은희의 아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개성의 여배우로 자리 잡는다. 

김지미는 고등학생 때 김기영 감독의 눈에 들어 배우가 됐다. 김기영 감독의 첫 작품 ‘황혼열차’에 출연한 그녀는 이듬해 신성으로 떠오른다. 내 기억 속 첫 영화관 풍경은 하얀 손수건과 눈물이다. 10대 후반의 이모와 사촌누나들은 대여섯 살 난 나를 사내랍시고 극장에 갈 때면 꼭 데리고 갔다.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이모와 사촌누나들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하얀 손수건으로 찍어내던 풍경만은 선명하다. 왜 우는지 이해도 안 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안달하던 게 기억난다. ‘별아 내 가슴에’에서 갓 스무 살 나이에 양아버지의 아들을 사랑하게 된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해 스타가 된 김지미는 흥행 감독의 아내가 됐고 남편의 회사인 선민영화사 작품에 출연해 주연 자리를 어렵지 않게 독차지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때부터 김지미는 여배우로서 최은희와 항상 비교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녀의 라이벌이라고 호사가들이 떠들어댔던 최은희와 비교할 때,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의 김지미는 주연급 배우가 아니다. 그때까지 최은희는 자신의 캐릭터를 당당하게 구축한 진짜 배우였다. 1955년에 만들어진 신상옥 감독의 ‘꿈’을 보자. 평생 수도에 정진할 것을 맹세한 중을 상사병에 이르게 하는 최은희는 너무나도 정숙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희생자 최은희는 충분히 동정을 받는다. 남자 배우만 주역이고, 여배우는 남자 주연의 상대역 정도가 고작이던 초창기 한국 영화계에서 최은희는 한국 영화 최초의 진정한 여자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정숙한 캐릭터가 관객에게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신상옥 감독의 1958년 작 ‘지옥화’에서 최은희가 양공주로 출연하자 남성 관객들은 분노했다. ‘지옥화’에서 최은희는 미군부대 PX 물품을 도둑질하는 사나운 밀수꾼들을 농락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남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악녀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나른한 손놀림을 하며 담배를 피우던 최은희의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그녀에게서 전후(戰後)의 황폐한 시절 정신적인 구원자인 누나 또는 어머니의 모습을 찾던 남성 관객들은 그런 변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톱스타 최은희가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수절하는 과부, 참고 인내하는 여성, 불행에 빠져도 여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끝까지 놓지 않는 기품 있고 강인한 여성이었다. 고단하고 불안한 전후 대한민국 남성들의 안식처가 될 성모 마리아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김지미는 아직 자신의 캐릭터가 없었다. 그런데 춘향전 대결과 홍성기 감독과의 이혼에 이은 최무룡과의 재혼으로 영화 외적인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연기력과 비교된 것이 아니라, 이혼 스캔들과 관계된 별명이었다.





 


두 번째 이혼 

최무룡과 간통 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른 뒤 결혼한 김지미는 그와 단짝으로 수많은 영화에 주·조역으로 출연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캐릭터가 드러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는 남자를 좌지우지하는, 매력적이지만 어둡고 퇴폐적인 여자 캐릭터다. 1963년 김수용 감독의 ‘혈맥’에서 최무룡과 단짝으로 출연한 김지미는 양공주다. 일본 도쿄로 유학을 다녀왔지만 일을 못 찾고 방황하는 가난한 남자. 그 남자를 사모하며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돕고자 하는 가련하지만 녹록지 않은 여자. 빚더미에 앉아 방황하는 지적인 남자 홍성기의 아내였던 현실 세계에서의 김지미와 겹치는 영화 속 김지미. 이 캐릭터는 점차 발전해 1965년 작 ‘불나비’에 이르러서는 확고한 자기만의 세계가 된다. 김상국이 부른 영화 주제가 ‘불나비’가 더 유명한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여자 김지미를 향해 정염에 불타올라 불나방처럼 돌진하다 하얗게 재가 돼버린다. ‘불나비’ 속 김지미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 봐도 남자를 불행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다. 김지미는 남자를 유혹하는 요염한 이혼녀, 깡패의 아내로 핍박을 참아내는 정숙한 가정주부, 불처럼 타오르는 정욕을 주체 못해 밤마다 거리로 뛰쳐나가는 요부 같은 부잣집 딸로 매 시간 변신하는 수많은 이름과 얼굴을 가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다.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녀 주변의 남자는 모두 죽거나 미친다는 것. 영화에서 김지미가 등장하자마자 한 남자가 목을 칼에 찔려 죽는다. 왜 그녀가 가는 곳에는 이런 일이 생길까? 모든 사건이 해결된 라스트에서도 김지미는 자신을 죽도록 사랑한다는 신영균을 뿌리치고 혼자만의 삶을 지키겠다며 홀연히 떠나버린다. 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누가 연기할 것인가? 도금봉인가? 주증녀인가? 아니면 문정숙인가? 최지희가 비슷하지만 그녀는 깡패 남편의 핍박을 참아내는 정숙한 가정주부로 순식간에 페이스 오프 하기에는 뭔가 어색하다. 오로지 김지미만이 해낼 수 있었다. 이후 김지미는 ‘육체의 길’(조긍하 감독, 1967)에서 건실한 은행원 김승호를 파멸에 빠뜨리는 여인 역도 멋지게 해냈다. 남자들이 파멸에 빠질 것을 각오하고 기꺼이 몸을 던지게 하는 여인이 김지미의 캐릭터가 된다.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김지미의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계에서는 전후의 새로운 여성상을 표현하는 작품이 만들어진다. 이른바 ‘또순이’다. 북에서 내려온 여자들은 전쟁 통에 헤어진 남편 또는 월남 이후 모든 것을 상실해 폐인이 된 남편을 대신해 억척같이 일하며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1963년 도금봉이 함경도 출신 여성 또순이 역을 맡은 영화 ‘또순이’는 화제를 일으켰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김지미를 주연으로 비슷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김지미가 황해도 출신의 억척내기 해주댁을 연기한 영화의 제목은 ‘선술집 처녀’(박상호 감독, 1963). 황해도에서 월남한 홀몸의 처녀 김지미는 선술집을 운영한다. 동네 홀아비와 남정네들이 그녀를 사모해 난리가 난다. 김지미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남정네들의 애간장을 태우고는 돌아서서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에게 치근대며 구애하는 남정네는 사랑에 빠진 순간 김지미 손바닥 위에 올라간 약자가 된다. 김지미는 그들을 요령 좋게 요리하며 악착같이 돈을 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가짜 기자인 최무룡이 다가가자 그 요령 좋고 똑똑하던 김지미는 여지없이 무너져버린다.




 

 

능력 있고 독립적인 여성 

또 다른 영화 하나. ‘동대문 시장 훈이엄마’(서정민 감독, 1966)에서도 김지미는 홀몸으로 시장에서 장사하며 어린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가는 과부 훈이 엄마였다. 김지미의 육체를 노리고 선심과 협박으로 접근하는 시장 통의 늑대 같은 남자 무리 속에서 김지미는 힘들어하지만 강인하게 버티며 자수성가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남자 없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여자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남자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웬만한 남자들과 같이 사느니 혼자 사는 게 더 낫기 때문에 혼자 사는 여자다.  

최무룡은 홍성기처럼 자신의 영화사를 만들고 감독이 되는 길을 택한다. 김지미는 또 여러 영화에서 자신을 소모해가며 실패를 거듭해 빚더미에 올라앉은 최무룡에게 헌신한다. 최무룡의 영화 ‘나운규 일생’(1966)은 최무룡 본인의 이야기를 나운규에 이입해 만든 작품이다. 극 속에서 나운규는 자신의 괴팍한 예술관에 의거, 절대 본처 조미령에게 가지 않고 기생 김지미의 품에서 괴로워한다. 기생 김지미는 나운규, 즉 최무룡의 수발을 들지만 아내가 되지는 못한다. 영화 속 주인공과 현실의 김지미는 이렇게 이상하게 겹친다. 1960년대 그녀가 출연한 영화에서 김지미는 남편이 없는 여인이다. 반쪽 가정을 가진 여인이다. 최은희의 ‘사랑방 손님’과 비교되는 것은, 최은희는 지적이고 단아한 풍모로 본의 아니게 남자들을 끌어들인 뒤 갈등하지만 마지막에는 정숙을 강요하는 윤리관을 택하는 여성이라는 점. 반면 김지미는 교태로 남자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파멸시킨다. 새로운 여성상이다. 현실에서 최은희는 남편과 함께 북한의 영화인이 되는 선택까지 인내하지만, 김지미는 1960년대 말 파산한 최무룡을 떠난다. 이 시기에 그녀는 수많은 남자에게 구애를 받는다. 오죽했으면 아시아 영화제에서 김지미에게 반한 홍콩 스타 왕우가 자신의 영어 이름을 김지미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담아 ‘지미 왕’으로 지었을까?  

1957년 여고생 신분으로 영화계에 들어와 온갖 풍파를 견딘 김지미는 1960년대 말, 어느새 여장부가 돼버렸다. 최무룡과 이혼한 후 더 이상 사고치는 남자 뒷바라지를 할 필요가 없어지자 그녀는 영화 출연 횟수를 점점 줄인다. 물론 1960년대 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여성 스타 문희·남정임·윤정희, 이른바 트로이카의 시대가 밀려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지미 본인의 선택도 있었다. 자신을 데뷔하게 해준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 의리로 출연하는 등 우정에 기반을 둔 출연만 하는 정도였다. 김지미와 남다른 우정을 맺었던 배우 박노식은 그녀를 가리켜 “웬만한 남자와는 비교가 안 되는 여장부”라며, 자신의 첫 주연·감독 영화(인간 사표를 써라, 1971)에 출연한 것은 물론이고, 영화 촬영을 위해 자기 집 안방까지 빌려줬다고 고마워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 알다시피 가수 나훈아와 결혼하고 또 헤어지고, 네 번째 결혼을 하고 헤어진다. 그리하여 동네 양아치들이 화투판에서 패를 싹쓸이할 때 ‘김지미’를 외치는 별로 아름답지 못한 풍경까지 낳게 된다.  






 


“다 안다, 네 서러움” 

그리고 1985년. 김지미는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길소뜸’의 민화영 역으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풋사랑을 나눈 남편과 그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6·25전쟁 통에 잃어버리고 남한으로 내려와 자수성가한 여인을 연기한 이 영화에서 김지미는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연기라는 평가를 받는, 그녀가 살아온 내력을 잊게 만드는 명연기를 펼친다. 특히 개장수가 돼 하루벌이를 하며 천하고 상스럽게 살아가는 아들 앞에 서는 장면에서 그는 대사 하나 없이 눈썹의 떨림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기적의 연기를 선보인다. 이 세상 모든 여배우가 연기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지는 못한다. 영화계는 남성 중심의 투박하고 삭막한 곳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녀들은 유치한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자 하는 데 이용당하고, 대중에게 창녀 취급을 받기도 한다. 연기 외적인 문제로 침몰하거나 떠오른다. 그러나 김지미는 ‘길소뜸’을 통해 그동안의 모든 오명을 날리고, 그녀가 걸어온 힘든 세월을 떠올리며 숙연케 할 만한 연기를 이룬 것이다. 그녀는 암사마귀도 아니고, 독거미도 아니고, 팜파탈도 아니었다. 남성들의 세상에서 그녀만의 방식으로 생존한 끝에, 그간의 포한(抱恨)을 숭고한 경지까지 밀고 올라간 것이다.  

몇 년 후, ‘지미필름’을 만들어 외국영화 수입과 영화제작 등을 하던 그녀는 일생의 역작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당시로서는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된 ‘명자 아끼꼬 쏘냐’(1992)의 제작·주연에 온 힘을 기울인다. 당대 최고의 감독 이장호와 송길한 작가가 투입됐지만, 결과는 관객의 외면이었다. 그녀가 전 남편들과 달랐던 건 더 이상 영화 제작에 연연하지 않고 바로 손을 뗐다는 점이다. 이후 영화 행정에 전념한다. 그 결과 젊은 영화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됐고, 항상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됐다. 지금도 그 갈등은 여전하다. 참 파란만장한 일생이다. 




 

5~6년 전, 선배 시나리오 작가에게서 김지미에 얽힌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몇 해 전 춘사영화제 때 얘기다. 그해 영화제는 깊은 산속에서 열렸다. 어느 비 내리는 밤. 주최 측의 안이한 발상으로 인해 행사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먼 길을 달려온 참가자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이때 가뜩이나 어수선한 행사장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었다. 남루한 행색의 늙은 사내였다. 그는 술에 엉망으로 취해 주정을 부렸는데, 잘 들어보니 영화인으로 살면서 괄시받고 무시당한 한의 표출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알코올중독자가 된, 이름 없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흥행만을 목표로 질주한 척박한 우리 영화 시장에서 소모당한 불행한 작가의 표상 같은 인물이었다. 누구 하나 알은 체하지 않고 슬금슬금 피했다. 그를 아는 원로 영화인들조차 “또 주정이군. 창피하게” 하면서 난처한 얼굴로 외면했다. 그때 김지미가 나섰다. 김지미는 비에 흠뻑 젖은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코트를 벗어 입혀주고 다독였다. “다 안다. 네 서러움을 나는 안다.” 순간, 고함을 지르던 사내는 입을 다물었고 김지미의 품에 안겨 숙소로 돌아갔다. 원한에 가득 찬 술 취한 사내도 한국 영화계 속에서 원념에 가득 찬 세월을 견딘 김지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나 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온갖 풍파에 맞섰던 여걸 김지미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07월 호

위대한 악녀 도금봉

욕망 앞에 당당한 새로운 여성의 시작

  • 도금봉은 드셌다. 스크린에서 커다란 두 눈을 치뜨고 대거리를 할 때면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했다. 남자를 앞장서 이끌고, 심지어 지배하며, ‘사육’해 자신의 육욕을 채우는 도구로까지 사용하는 새로운 여성상. 1960년대 도금봉의 필모그래피는 관객을 놀라게 했고, 세상은 그를 두려워했다. 욕망에 충실한 여성은 ‘악녀’가 되던 시대, 도금봉은 그 한계를 배짱과 연기력으로 돌파하려 한 유일한 여배우다. 견고하고 비열한 남자들의 세계에서 끝내 좌절했지만, 대체 불가능한 역사로 남은 배우 도금봉을 추억한다.

 

위대한 악녀 도금봉

자기주장 강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연기한 배우 도금봉.

 

세상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사악한 두 명의 남자가 전당포에 들어선다. 두 남자는 밤업소를 전전하며 쥐꼬리 같은 일당을 받아 연명하는 가난뱅이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색소폰을 팔아 범죄 자금을 마련하려 한다. 그런데 전당포 쇠창살 건너편에서 전당포 여주인이 두 남자를 돌아보는 순간, 사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두 남자가 질려버린다. 소설 ‘죄와 벌’의 전당포 노파가 환생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당뇨병에 걸렸는지 아니면 신장이 안 좋은지 진한 화장을 했지만 온통 들떠서 기괴해 보이는 퉁퉁 부은 얼굴. 퍼석퍼석한 흰 머리카락. 그녀의 치켜뜬 커다란 눈에는 두 악당의 내공을 다섯 갑자는 뛰어넘는 악의가 번뜩인다. 대체 이 배우는 누구이기에 두 악당을 첫눈에 기가 질리게 만드는가?  

그녀는 바로 도금봉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3인조’(1997)에 전당포 여주인 역으로 특별출연한 도금봉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10여 년간 세상과 소식을 끊고 지내다 2009년 6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서울 구의동의 노인요양원에서 생을 접은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조용히 저세상 사람이 됐다. 얼마 후 도금봉의 죽음이 알려지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한민국 영화계는 호들갑을 떨었다.  

평소 건강했던 그녀가 감기 때문에 병원을 찾은 것은 그해 5월 하순. 갑작스러운 병세의 악화로 임종을 준비하던 때, 그녀를 간호하던 수녀들이 지인에게 알려 영화인 장을 치를 것을 권하자 도금봉은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 것을 부탁했다.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낸 두 아들과 며느리가 뒤늦게 찾아왔고, 30여 년간 언니 동생 하던 유일한 친구 최은희가 찾아왔을 때 도금봉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발인할 때 유족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영정을 한지로 가리고 나갔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성격배우이면서 기가 센 여자 도금봉은 죽음조차 그녀다웠다.




 


끝없는 사건 사고  

영화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은막 위에 명멸한 여배우는 많다. 하지만 손가락질 받는 수많은 스캔들을 배짱과 연기력으로 뒤엎고 당당하게 세상을 헤쳐나간 여배우는 거의 없다. 오로지 한 명, 도금봉뿐이다. 믿거나 말거나, 또는 그랬다카더라류의 소문이 아닌, 당시 일간지에 기사화된 사건·사고만 봐도 도금봉의 1960년대는 평탄치 않았다. 한국 프로복싱 챔피언이던 강세철과의 염문은 미국 배우 매릴린 먼로와 프로야구 선수 조 다마지오의 결합에 비견되는 커다란 사건으로 많은 관심을 샀지만, 강세철이 김기수에게 프로권투 왕좌를 빼앗기자 둘 사이는 끝이 났다. 곧이어 1962년, 그동안 동거해오던 신필름의 신인 미남스타 남궁원과의 결별이 세간의 눈길을 끈다. 장래가 유망한 후배 미남배우와 아이가 둘 딸린 선배 여배우 사이의 관계라는 것 못지않게, 동거라는 형태가 당시 사회에서는 입방아에 오를 만한 일이었다. 결별 이유는 도금봉이 두 아이의 장래 문제를 걱정했기 때문. 두 사람이 헤어진 뒤 한 달이 채 안 돼 그녀가 주연한 영화 ‘새댁’(이봉래 감독, 1962)이 공개된다. 영화는 도금봉의 스캔들과는 상관없이 흥행에 성공한다. 한 해 뒤에는 아시아영화제에서 ‘또순이’(박상호 감독)로 여우주연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도금봉은 와병으로 두문불출해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했는데, 후일 실은 눈 성형수술을 해서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라는 웃지 못할 ‘비밀’이 밝혀져 또 한 번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그리고 2년 후, 이번에는 어느 사이에 예비역 장성과 결혼한 그녀가 남부끄러운 절도 사건의 피해자로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남편의 열네 살 난 아들이 계모 도금봉의 밍크코트, 목걸이, 금팔찌, 현금 등 당시 시가 26만 원 상당의 금품을 훔쳐 가출한 것이다. 망신도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하지만 몇 달 후 그녀는 다시 ‘살인마’(이용민 감독)라는 공포 괴기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귀신 연기로 세상의 비웃음을 날려버린다.

그뿐인가? 기가 센 후배 여배우들을 모아 도박을 하다가 경찰에 걸리기도 하고, 영화 촬영 중 부상을 당한 후 영화사를 상대로 위자료 지급 소송을 벌여 배우들의 안전을 무시하는 당시 관행에 정면 도전하기도 하는 등 그녀는 끝없이 스캔들을 몰고 다녔다.

고향에 고급 호텔을 짓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도금봉은 인천에서 태어나 악극단 ‘창공’에서 연기 생활을 시작하고, 영화 ‘황진이’(조긍하 감독, 1957)의 주연으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그 후 도금봉은 ‘신필름’에 소속돼 신상옥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배역 대부분은 ‘신필름’ 간판스타 최은희를 받쳐주는 조역이었다. ‘로맨스 빠빠’(1960)에서는 장녀 최은희의 여동생, ‘성춘향’(1961)에서는 향단이, ‘사랑방손님과 어머니’(1961)에서는 과부 최은희 집의 식모…. 에너지 넘치는 젊은 도금봉을 가둬놓기에 ‘신필름’은 작은 그릇이었다. ‘신필름’은 최은희의 그늘에 가려졌던 그녀를 달래기 위해서 도금봉을 주연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특수촬영까지 한 ‘대심청전’(이형표 감독, 1962)을 만들었지만 흥행에 실패한다. 도금봉은 ‘신필름’과의 전속계약이 끝나자마자 재계약을 않고 자유계약을 선언한다. 이후 날개를 단 도금봉의 첫 번째 히트작이 ‘새댁’이었다.






 

 

당찬 촌색시 


위대한 악녀 도금봉

도금봉은 당찬 며느리, 독립심 강한 딸 등의 배역을 거쳐 한국 영화사에 유례 없던 악녀 캐릭터를 완성한다.

 

매일 아침 와장창. 큰아들과 큰며느리가 싸우는 소리로 시작되는 최남현의 집. 막내아들 이대엽을 장가보내려는 어머니 황정순은 큰며느리와 둘째 며느리를 얻은 것이 일생의 최대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부자인 큰며느리 집안의 돈을 빌려 사업을 하느라 큰소리 못 치고 사는 장남만 봐도 속이 터지는데, 대학물 먹은 둘째 며느리는 초등학교도 못 나온 시어머니를 무시하기 일쑤다. 황정순은 막내며느리만은 다른 며느리들과 달랐으면 하는 마음에 체육과를 나온 시원시원한 판사댁 따님을 후보로 두고 막내아들 이대엽을 설득한다. 하지만 아들의 마음은 저 충청도 시골에서 같이 어린 시절을 보낸, 배운 것도 없고 재산도 없는 순박하고 성실한 처녀 도금봉에게 가 있다. 어머니 황정순 몰래 집안 식구를 총동원해 도금봉과 약혼식을 올리는 이대엽. 도금봉은 사투리를 쓰는 수줍고 조신한 촌색시다. 시댁 식구들 앞에서 얌전하던 그녀가 약혼자인 이대엽이 얼마 전 선을 보았던 체육과 아가씨와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습격을 당하자 고무신을 벗어 들고 싸워 제압한다. 얌전하지만 약혼자가 위기에 처하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여자. 영화를 보던 노총각들은 도금봉의 모습을 보고 ‘나도 저런 아내를 얻었으면’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처음 본 도금봉의 영화는 ‘콩쥐팥쥐’(조긍하 감독, 1967)였다. 콩쥐 문희를 괴롭히는 간악하고 심술궂은 계모 팥쥐 엄마로 나온 도금봉은 나에게 계모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심어줬다. 그런데 ‘새댁’에서의 도금봉은 전혀 다른 여자가 아닌가? 순박하고 소박한 보석 같은 눈망울의 여자가 몇 해 후 다른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토록 성깔 사납고 부리부리한 눈알의 계모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1962년, 도금봉이 주연한 또 한 편의 영화가 극장에 걸린다. 제목은 ‘또순이’. 당시 인기 라디오 연속극이던 ‘행복의 반생’을 영화화한 것이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돼버린 서울 금호동의 산동네 판자촌 버스 종점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금호동에서 종로까지 운행하는 마이크로버스의 차주 최남현의 막내딸 도금봉은 하루치 버스 수익금을 아버지에게 전하며 오늘 일을 했으니 일당을 달라고 한다. 최남현이 “가족끼리 무슨 일당” 하며 무시하자 도금봉은 “자식은 자식이고 일은 일,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라”고 따진다. 아버지가 일당 줄 기색이 안 보이자 “언젠가는 내 노동의 대가를 꼭 되돌려 받겠다”며 밖으로 나가 잘 곳이 없어 서성이는 이대엽에게 담배를 사준 뒤 그에게 잠자리를 알려주고는 “나중에 돈 벌면 꼭 갚으라”고 한다. 도금봉은 차주의 딸이지만 시집갈 생각은 전혀 없고, 곤궁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도움을 주며 나중에 사정이 나아지면 꼭 갚으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기가 세고 독립심이 강한 딸은 언젠가 아버지와 부딪쳐 파국을 만들어내고야 마는 법. 줏대도 없고 나약하며 싹수가 노랗다고 생각한 이대엽을 딸이 도와준 것에 노발대발한 최남현은 도금봉을 앉혀놓고 일장 사설을 읊는다. “네 엄마와 함경도에서 무일푼으로 서울로 내려와 내가 머슴살이를 하고 엄마는 식모살이로 출발해, 나는 버스 스페어 운전수, 엄마는 차장으로 고생을 하며 너희들을 먹여 살렸다”고 하자, 도금봉은 “엄마 아빠가 돈 벌러 나갔을 때, 내가 살림 다 하고 언니 학교 보냈다. 일곱 살 때부터 일했으니 그동안 식모살이 월급을 달라”고 한다. 최남현이 질쏘냐. “이런 고얀 놈” 하며 “지금까지 키워준 돈 내놓으라”고 한다. 또순이는 지지 않고 “그건 부모의 의무다. 낳았으면 키워야 한다”고 반박한다. 아버지와 딸의 언성이 높아지고 화가 난 또순이는 독립을 선언한다. 아버지 어머니의 도움을 안 받고 이제부터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총명하고 독립적인 신여성 

그때까지 이런 종류의 여자 캐릭터는 한국 영화에 없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아버지에게 지지 않고 덤비는 딸이라니. 또순이 이전의 여자 주인공들은, 사랑하는 남자가 의붓아버지의 친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눈물 줄줄 흘리며 ‘우리는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할 운명인가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거나, 다른 여자를 얻은 남편에게 큰소리 한 번 못 치고, 폐병을 앓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도박을 하고 새벽에 들어온 남편을 위해 피를 토하며 밥상을 차렸다. 하얀 손수건을 들고 극장으로 몰려간 우리 엄마, 이모, 고모들은 그 시절, 남자의 잘잘못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여주인공의 삶을 보며 한 맺힌 설움을 함께 나누고 꺼이꺼이 손수건을 적셨다.


 

위대한 악녀 도금봉

생전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 도금봉.

 

그러나 또순이 도금봉은 달랐다.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무능력한 이대엽이 세차를 하러 한강가로 차를 몰고 가며 “이 추운 겨울에 세차를 어떻게 하나” 투덜대자, 또순이는 자신이 세차할 테니 돈을 달라며 한겨울 한강에 바지를 걷어 올리고 들어가 마이크로버스를 닦는다. 한심한 이대엽은 처음에는 이 추운 겨울에 물을 안 묻히게 돼 다행이라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도금봉이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고 아주 약간 숙연해진다. 물론 도금봉을 돕는 식의 사내답지 못한 행동은 절대 안 한다. 일확천금에 눈이 먼 이대엽이 사기를 당하자 도금봉은 기지를 발휘해 사기꾼을 속여 넘기고, 사기꾼에게 “여간내기가 아니다. 졌다”는 항복 선언을 얻어내고야 만다. 그뿐 아니다. 무능력하고 포기가 빠른 이대엽을 부추겨 일을 하도록 만들고 급기야 새나라 택시를 모는 당시 최고의 직업을 가진 남자로 만든다. 남성을 성공의 길로 인도하고 격려하는 여자 또순이는 성실하고. 총명하며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 속의 여성상을 한번에 바꿔놓았다. 최은희가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시대에서 번민하고 갈등하지만 윤리적 결단에 의해 욕망을 억누르는 여자였다면, 김지미는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남자들과 원하지 않은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괴로워하다 결국 남자로부터 벗어나 혼자 살아가려는 여성을 연기했다. 그러나 도금봉은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고, 심지어 변변치 않은 남성을 수족처럼 부려 자수성가하는 독립적이고 기가 센 여자를 연기해낸다. 당시 아시아영화제에 출품된 이 영화는 근대화의 출발선에 선 아시아 여성의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찬사와 함께 도금봉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이때 도금봉은 모두가 사랑할만한 현명하고 성실한 조국 근대화의 일꾼으로서의 여성상이었다. 그녀의 새 출발은 이렇듯 대단했다. 

1965년 여름, 평론가들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말이 좀 안 되는 한국 최초의 본격 공포영화를 보러 극장에 몰려들었다. 영화 제목은 ‘살인마’(이용민 감독). 주연은 도금봉. 귀신이 된 도금봉의 무시무시한 복수극이었다. 이듬해 여름. 또다시 도금봉을 주연으로 한 공포영화가 등장한다. 평론가들은 여전히 질 떨어지는 이 공포영화에 관객들이 몰려드는 것에 탄식하지만,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영화의 제목은 ‘목 없는 미녀’(이용민 감독). 전편에 이어 여전히 말이 안 되는 이 영화에서 도금봉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원한에 사무쳐 자신을 억울하게 살해한 자들에게 복수를 한다. 두 편의 공포영화에서 도금봉은 사랑받지 못한 여자였다. 돈에 눈먼 남자들에게, 비겁하고 치사한 남자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여자였다. ‘또순이’에서 강인하고 성실한 활력으로 남자와 여자에게 두루 사랑받고 존경받는 캐릭터였던 여자가 공포영화에서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원한에 찬 여자 캐릭터로 변한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1967년, 도금봉이 출연한 세 편의 영화가 공개된다.‘치맛바람’(이규웅 감독)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 감독) ‘산불(김수용 감독)’이 그것이다. ‘치맛바람’은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영화지만 재미도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허장강이 안방에 앉아 구부정하게 몸을 기울이고 구멍 난 양말을 깁고 있다. 항상 악역만 하던 그가 박봉의 월급쟁이로 출연한 것. 목소리에 힘이 없고, 피곤에 지쳐 있는 허장강에게 대학까지 보내놓았지만 룸펜이 된 동생 김순철이 용돈을 달라며 철없는 억지를 부린다. 이때 방문이 열리며 아버지 김희갑이 슬그머니 들어와 허장강에게 용돈 타령을 한다. 한숨만 나오는 허장강. 설상가상, 허장강의 중학생 아들과 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월사금, 용돈, 참고서 값을 줄줄이 외며 그의 주름을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아이들의 목소리와 아버지, 동생의 목소리가 높아져 방 밖으로 나가려 하자, 왈칵 문이 열리며 아내 김지미가 핏대를 세우고 들어와 허장강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당신이 벌어오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도저히 못 버틴다. 파산이다! 내가 나가서 돈을 벌어오겠다.” 찍소리 못하는 남자들을 기세등등하게 노려보고 김지미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치장한 뒤 집을 나선다. 사람들이 “김지미의 저렇게 무서운 모습은 처음이야” 하며 감탄할 때 그녀는 선배 언니를 찾아간다. 바로 바로 도금봉. 계주이며 결혼에 실패한 여자.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돈을 융통해 이자놀이를 하고 계를 꾸리며 나름 성공해 이 바닥에서는 소문이 짜르르한 기 센 여자다. 천하의 김지미도 도금봉 앞에서는 언제 허장강 앞에서 큰소리 쳤나 싶게 고양이 앞에 쥐요. 사자 굴 안의 여우다. 계원 중 하나가 조카가 승진에 실패했다고 하자, 그 회사가 어디냐, 당장 쳐들어가자며 벌떡 일어나 치맛자락을 바짝 당겨 잡고 문을 열어젖히는 도금봉과 그녀의 계원들. 도금봉이 찾아간 곳은 살살이 서영춘이 전무로 근무하는 회사. 다짜고짜 조카가 승진을 못할 경우 서영춘이 빌려간 돈을 갚을 여유를 주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모르는 서영춘의 비밀을 까발리겠다며 사무실에 드러눕는 도금봉. “얘들아 눕자!” 한마디에 계원들은 일치단결 사무실 바닥에 누워 서영춘을 곤란하게 한다. 김지미가 계원이 돼 돈 좀 벌어보겠다고 하자 도금봉은 가족 교육이 먼저라며 김지미의 집으로 계원들을 이끌고 쳐들어간다.

 

위대한 악녀 도금봉

도금봉이 욕망에 사로잡힌 과부를 연기한 영화 ‘산불’의 한 장면.

 

계주 도금봉의 캐릭터와 겹치는 것은 ‘또순이’다. 또순이는 비록 힘든 사람에게 돈을 빌려줘 숨통을 틔워주기는 하지만, 사실 그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빌려주고 이자를 쳐서 되돌려 받는 것이었다. 또 누군가 생산한 제품을 싼값에 사서 부가가치를 올려 되파는 것이었다. 그 방식이 소박하고 순진해서 그녀가 현명하고 성실해 보였지만, 더 나이가 들어 돈 벌기에 집중하며 세파를 헤쳐나가다 보면 ‘치맛바람’의 도금봉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영화에서 남자들은 모두 도금봉을 무서워하고, 김지미 역시 영화의 끝에 가서는 그녀를 두려워하고 후회하며 현모양처의 길로 돌아선다. ‘치맛바람’에서 도금봉은 돈에 눈이 멀어 가정을 파탄 내는 나쁜 사람으로 그려진다. 또순이가 바로 계주 도금봉인데, 남성 사회는 이런 종류의 여자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그녀를 단죄하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도금봉은 큰소리치며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다니기는 하지만 남자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같은 해 개봉된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도금봉은 천하의 악녀로 악명을 떨친다. 김지미를 팜파탈이라고 한다면 팜파탈은 남자에게 광적인 사랑을 받는 여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월하의 공동묘지’에서의 도금봉은 남녀 모두가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다. 성공한 사업가 박노식의 집안에 침모로 들어온 도금봉은 싹싹하고 예의 바르고 게다가 정도 많다. 산후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은 주인마님인 기생 출신 월향이를 끔찍이 위하며 걱정한다. 그녀가 몇 해 전에 연기한 ‘새댁’에서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사악한 생각이 있다. 기생 주제에 마나님이 된 월향을 질투하고 매일 조금씩 그녀의 음식에 독을 타서 그녀를 죽이고 이 집의 안방마님이 되고자 하는 것.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녀는 본성을 숨겨야만 한다. 마침내 월향이 죽고 도금봉은 자신의 아름답고 풍만한 육체를 이용해 박노식의 아내가 된다. 이때부터 본색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두려움을 주는 무시무시한 여자가 된다. 자신만큼이나 사악하지만 마음은 약한 어머니를 수족처럼 부리며 박노식과 월향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 하는 도금봉. 그녀는 아기를 죽이기 위해 목을 조르는가 하면 칼을 들이댄다. 그녀의 무시무시한 욕망 앞에 관객들은 기가 질리고 귀신으로 나타나 자신의 아기를 지키려는 월향이를 응원한다.  

같은 해에 만들어져 도금봉에게 정욕의 화신이란 또 다른 별명을 추가한 영화는 ‘산불’이다. 대나무 숲이 우거진 산골 마을. 이 마을에는 남자가 한 명도 없다. 아니 한 명 있기는 하다. 노망난 노인네 단 한 명. 그를 제외한 마을 사람은 모두 과부다. 마을의 여자 이장이 아낙들에게서 곡식을 거두고 있다. 공비에게 상납할 것을 거두는 것이다. 남들은 모두 보리쌀이라도 내놓았는데, 도금봉의 바구니에는 콩밖에 안 들어 있다. 게다가 남들의 반에 반도 안 되는 양이다. 기가 차서 도금봉을 올려다보자, 도금봉은 자기 어미를 본다. 불쑥 나서는 여자. 마른침을 퉤 뱉고는 “우리 집은 인민군으로 나가서 죽었으니 이 정도 하는 것도 많이 한 거다”며 눈을 부라린다. 황정순이다. 마을 사람들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리고 이장은 황정순의 독사 같은 기세에 대거리를 해보지만 그녀는 황정순, 도금봉 모녀의 상대가 아니다. 그렇다. 이들은 이 마을에서도 소문난 ‘독살스러운 계집’들이다. 그녀들은 왜 그렇게 독살스러운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식과 남편이 국방군에 나가 죽은 마을 사람들 속에서 도금봉 모녀는 외로운 섬이다. 그녀들의 아들이자, 남편은 의용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들은 가난하다. 남들은 산골짜기의 밭고랑이기는 하지만 남자들이 물려준 땅덩이가 있다. 그녀들이 생존하려는 몸짓은 너무 과해서 무섭다. 주증녀가 산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남자. 빨치산 도망병 신영균. 주증녀와 신영균은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고, 주증녀는 신영균을 위해 밥과 옷가지를 가져다주며 가까운 사이가 된다. 살쾡이처럼 민감한 코를 가진 도금봉이 그것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주증녀에게 다가가 위협한다. “너 혼자만 재미 보는 거냐?” 할 말을 잃는 주증녀. “네게 소중한 남자라면 나에게도 소중한 남자가 아니겠어? 오늘 밤엔 내가 가겠다.” 도금봉은 저항하는 신영균을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하며 껴안는다. “아무렴 어때? 살고 볼 일이지”라 속삭이며 자신의 욕욕을 채우는 도금봉. 신영균은 도금봉과 주증녀에게 돼지처럼 사육당하는 것이다.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 

이 영화에서 육덕진 몸매를 드러내고 콧소리를 내며 신영균의 몸을 쓰다듬는 도금봉의 연기는 당시 관객들을 경악게 했다. 육욕의 정념으로 가득 찬 여자. 이 영화에서도 도금봉은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온갖 불운을 겪는 여자다. 그렇게 많은 밤을 같이 보내고도 주증녀는 무사했는데, 도금봉은 첫날밤에 덜컥 임신을 한다. 헛구역질을 하며 도금봉은 중얼거린다. “난 자식이 싫다. 왜 나 같은 여자에게 자식이 들러붙는단 말인가?” 결국 그녀는 독약을 마시고 입에서 피를 쏟으며 자살하고 만다. 어머니 황정순에게조차 불쌍하다는 말을 못 듣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여자 도금봉의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다.


 

10년이 지난 1977년, 김수용 감독은 ‘산불’을 리메이크 하며 도금봉을 다시 출연시킨다. 이번에는 과거 황정순이 맡았던 역을 도금봉이 하고 선우용녀가 과거 도금봉의 역을 연기한다. 왜 리메이크를 했는지 알 수 없는 이 영화에 출연하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금봉의 연기는 에너지가 사라져버렸다. 남자들의 세상에서 남자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연기를 했던 도금봉은 한국 영화 역사상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간형을 연기해낸 최고의 배우였지만 배우로서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기가 드센 그녀였지만 견고하고 비열한 남자들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08월 호

③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문희·남정임·윤정희, 여배우 트로이카

  • 1966년과 1967년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시기다. 재능 있는 배우와 의욕 넘치는 감독,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는 관객이 삼위일체가 돼 그때껏 볼 수 없던 걸작을 쏟아냈다. 그 중심에 갓 데뷔한 여배우 3인방, 문희·남정임·윤정희가 있었다. 1968년 ‘미워도 다시 한 번’의 흥행으로 시작된 ‘신파 반동’ 탓에 채 꽃피기도 전에 스러지고 말았지만, 눈부시게 화려했던 트로이카의 전성시대를 추억한다.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1 발랄하고 거침없는 매력으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 남정임. 2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으로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배우 문희. 3 이지적인 현대 여성부터 비운의 여주인공까지 다양한 배역을 소화한 배우 윤정희.

 

1964년개봉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청춘이란 단어를 불러들였다. 고무신 부대의 눈물을 짜내는 것이 목표였던 신파 멜로 영화판에 새로운 기운을 가져온 것이다. 젊고 혈기 넘치지만 뒷골목 조무래기 깡패에 불과한 신성일의 우울하고 반항적인 연기와 싱싱하고 발랄한 여대생이라는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엄앵란의 연기. 이 커플의 사랑은 현실로까지 이어졌고, 영화는 큰 인기를 끌었다. 신성일이 입은 터틀넥 스웨터와 트위스트김의 청재킷·청바지가 유행했고, 엄앵란의 톡톡 쏘는 여대생 연기는 이후 한국 영화 속 여대생의 전형이 되어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 1975)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비슷비슷한 날림 영화가 우후죽순 만들어지는 법. ‘맨발의 청춘’ 아류작이 쏟아졌다. 그리고 1965년 10월, 이만희 감독의 ‘흑맥’이 개봉됐다. 남자 주인공은 신성일, 상대역은 문희라는 이름의 신인이었다. 서울역 주변을 무대로 소매치기를 하며 연명하는 일당의 두목 신성일이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문희를 만나 사랑하고, 범죄에서 벗어나려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또 ‘맨발의 청춘’ 아류작인가? 엄앵란이 시집가고 없으니 신인 여배우를 하나 급히 만들었나보다 했다. 그런데 서울 뒷골목과 그곳에서 기생하는 어두운 청춘의 이야기를 ‘맨발의 청춘’보다 더 뛰어나게 담아낸 게 아닌가. 그 중심에 신인 배우 문희가 있었다. 이 여배우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스산한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쏘냐’를 떠올렸고, 함께 연기한 배우 신성일은 옷이 흘러내려 속살이 드러나는 것도 모른 채 연기할 만큼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녀에게 감탄한다. 이만희 감독은 이 배우에게 최고 여배우 문정숙의 ‘문’과 자신의 이름 끝 자인 ‘희’를 따서 ‘문희’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1세대 트로이카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1968년 제7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녀 주연상을 받은 신성일과 문희. 

 

1960년대 중반. 1950년대를 주름잡던 스타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195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희갑은 겹치기 출연으로 매번 지각을 하는 민폐를 끼쳐 스태프들의 원성을 사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깡패 출신 제작자 임화수에게 폭행까지 당했던 스타다. 그가 이제는 신인 코미디 스타 서영춘이 겹치기 출연으로 촬영장에 늦게 나타나는 데 분개해 호통을 치는 시대가 됐다. 영원한 청춘 김진규가 맡았던 배역은 새로운 스타 신성일과 신영균에게 돌아갔다. 과거의 신인이 중견이 되고, 새로운 신인이 나타난 것이다.

여배우의 세계도 그랬다. 오랫동안 한국 영화에서 여배우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그런데 최고의 스타 최은희가 영화감독으로 나서며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 편수를 과감히 줄여나갔고, 김지미는 최무룡과의 스캔들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어 흥행작을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떠오르던 샛별 엄앵란은 신성일과 결혼해 아기를 출산한 뒤 영화 출연을 사실상 접어버렸다. 새로운 얼굴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였다. 이때 문희가 나타났다. 스타는 좋은 작품과 좋은 감독을 만나야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흥행이 돼야 스타가 나온다. 문희의 매력적인 분위기는 감독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가 떠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흑맥’ 개봉과 비슷한 시기인 1965년 11월, 이번엔 김수용 감독이 만든 ‘갯마을’에서 매력적인 얼굴을 지니고 연기력도 제법인 신인이 탄생했다. 영화의 도입부, 마을 여자들이 모두 나와 땀을 뻘뻘 흘리며 배를 끄는 장면에서 소녀 과부 고은아는 땀에 젖어 엉겨붙은 귀밑머리와 고개 숙인 옆모습 하나로 관객의 머리에 ‘에로틱’이 무엇인지 각인시켰다. 문희와 고은아 두 신인 여배우 모두 대학 재학 중 감독에게 발탁됐다. 이른바 여대생 출신 여배우의 탄생이었다. 이들 전의 여배우는 악극단 출신이 대부분이라 학력을 내세우며 선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 말하자면 미모와 지성을 갖춘 여배우가 등장한 것이다.

그 무렵 또 한 명의 스타도 조용히 태어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단역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신인 여배우 한 명이 김수용 감독의 영화 ‘유정’의 신인 여배우 오디션에 참가한 것. 이 신인 공모에는 유례없이 상금 50만 원이라는 큰돈이 걸려 있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이민자라는 이름의 신인 여배우는, 이후 소설 여주인공의 이름 ‘남정임’을 예명으로 얻었다. 자신의 얼굴은 오른쪽이 아름다우니 그쪽으로 찍어달라고 촬영 기사에게 당돌하게 요구할 만큼 거리낌 없던 여배우 남정임은 이렇게 탄생했다.

1966년 영화 ‘유정’이 개봉됐고, 순애보적인 사랑을 설득력 있게 연기한 남정임은 적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당대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작 ‘성춘향’(신상옥 감독, 1961)의 관객 수 36만 명에 필적하는 35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고은아·문희·남정임, 이 세 명의 신인 여배우는 여왕 자리를 넘보는 후보로 극장가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배우는 고은아였다. 당시 최고의 흥행 감독이던 김수용은 고은아를 “동양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를 지녔고,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배우 문예봉과 6·25전쟁 후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 두 사람의 인상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한국 여배우의 적통을 이은 배우로 평가한 것이다.









 

 

한국 영화의 황금기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영화 ‘자유부인’에서 최무룡과 연기하는 윤정희.

 

고은아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 ‘물레방아’(1966)에서 이제껏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도발적인 여인을 연기한다. 한여름 숲 속 풀밭에 누워 있는 한 여자. 청순하고, 정숙해 보이는 얼굴의 여자가 풀을 베다 잠깐 눈을 붙인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잠시 감았던 눈을 불만스럽게 치켜뜬다.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성욕 때문에 몸을 배배 꼰다. 얼굴은 정숙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불만과 욕정이 가득 차 있다. 그녀 앞에 나타나는 남자 신영균은 힘도 좋고 잘생겼으며 무엇보다도 고은아를 사랑한다. 마을 지주 허장강이 평생 호강시켜주겠다고 그녀를 유혹하지만 고은아는 신영균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웃음이 헤프다. 그것도 모르는 신영균은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지는 무리수를 두며 고은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첫날밤. 고은아는 어서 잠자리에 들자며 간절한 눈빛을 신영균에게 보내지만 바보 같은 그는 곰방대만 뻑뻑 빤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참 달도 밝다”고 하는 등 못나게 군다. 답답한 고은아, 벌떡 일어나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우물가로 가서 찬물을 쫙쫙 끼얹는다. 동네에서 바람기라면 최고를 자부하는 신영균의 상전이 고은아의 벌거벗은 뒤태를 보고 침을 흘린다. 그는 신영균과 고은아가 결혼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준 인물. 언젠가 고은아를 자신의 품에 들이겠다는 속셈 때문이었다. 신영균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까지 알았으니, 얼씨구. 이젠 뜸만 들이면 되는 것이다. 고은아는 신영균이 드르렁드르렁 코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다. 화가 난다. 이게 뭔가? 남자란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인가? 이 영화에서 고은아는 항상 성욕에 굶주려 있으며 현명하지도 못하다. 말하자면 백치 같은 여자다. 대사가 거의 없어, 꼭 필요한 말 몇 마디만으로 모호한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 아름답지만 지능이 낮고 정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며 성욕만 따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여자. 갓 스무 살 된 신인 여배우는 이 배역을 성심성의껏 연기했다. 고은아의 연기력이 좀 더 무르익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런 배역을 기성의 스타급 여배우에게 주문했다면 고분고분 잘했을까? ‘물레방아’는 의욕 넘치는 신인 여배우와 여자의 어두운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야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1966년 늦봄에는 정진우 감독의 영화 ‘초우’가 개봉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상류층의 최고급 저택이 화면 가득 등장한다. 산들바람이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고, 지나치게 따갑지 않은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다. 드넓은 마당 위, 잘 관리된 잔디밭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탐스러운 털이 난 애완견과 함께 누워 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외국 영화잡지들이 있고, 가슴에는 로버트 레드퍼드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다. 그 화면 위에서 생기발랄한, 톡톡 튀는, 싱그러운 젊음이 넘치는, 구김살 한 점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저택의 식모 문희다. 이 집 주인은 프랑스 대사로 프랑스에 가 있고, 안주인은 밤낮없이 자수만 놓는다. 그들에겐 병 걸린 딸이 있는데,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다. 대사가 아름다운 프랑스제 비옷을 선물해도 입고 나갈 수가 없다. “버리느니 차라리 식모에게”라며 건네준 덕에 아름다운 비옷은 문희 차지가 된다. 쨍하고 햇살 따가운 한여름,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문희. 드디어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옷을 입고 마당으로 달려 나가 ‘비!’ ‘비!’ 를 외치는 문희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1966년 데뷔한 정진우 감독은 대사에 의존하기보다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감각적인 영상을 선보였다. 통통 튀는 발랄함과 그 뒤에 감춰진 그늘을 동시에 가진 주인공은 문희에게 적역이었다. 감독은 그녀의 연기에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떠올렸다. 문희는 비옷을 입고 나가 차량 정비공이지만 손님의 고급 외제차를 끌고 나와 자신을 대기업 직원이라 속이는 신성일을 만난다. 식모이지만 프랑스 외교관의 딸이라고 속이는 문희와 상승욕이 가득한 신성일은 비극으로 치닫는 청춘의 드라마를 완성한다.


 


하이힐 부대의 등장 

후발 주자 남정임이라고 가만있었겠는가? 그는 데뷔 첫해에 ‘유정’‘학사와 기생’(김수용 감독, 1966), 단 두 편의 영화로 서울 관객 40만 명을 동원하며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됐다. 이 한 해에만 무려 15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시아영화제에서 신인 연기상을 타는 행운까지 누린다. 정진우 감독은 그녀를 주연으로 ‘초연’(1966)을 만든다. 남정임은 첫사랑 신성일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버리자 또 다른 남자 이순재와 사귄다. 신성일이 돌아와 남정임을 놓고 이순재와 한 치 양보도 없는 사랑의 결투를 벌인다. 두 남자가 병원에 입원하자 남정임은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하다 둘 다 놓치고 만다. 이 영화에서 남정임은 당돌하다. ‘초연’ 이전의 여주인공은 두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되면 괴로워했지만 남정임은 그렇지 않다. 아름답고 큰 눈을 또르르 굴리며 ‘어느 놈이 더 나을까?’ 저울질한다. ‘어쩌지? 둘 다 괜찮은데. 두 남자 모두 마음에 드는데, 일처이부(一妻二夫)는 안 되나? 하하하.’ 남정임의 개성이 한껏 드러난 영화였다.  

1966년과 1967년은 한국 영화계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 쏟아져 나온 엄청난 시대였다. 이만희 감독의 걸작 ‘만추’(1966)가 개봉되자, 그동안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 여겼던 교양인들이 쌍수를 들고 항복했다. 흥행감독 김수용은 잇달아 문학작품을 영화화해 내놓았고, 젊은 감독 정진우는 감각적인 영상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최고 스타 대우를 받으며 나날이 몸값이 높아지고, 건방진 여배우들을 캐스팅해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영화들이 나왔다. 새로운 여배우의 등장과 신성일·신영균 등 남자 배우의 듬직한 지원, 그리고 감독의 왕성한 창작력. 이 모든 것이 합쳐져 한국 영화 최고의 시기가 열린 것이다.

고은아·문희·남정임의 출현 전까지 우리 영화 중 여배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최은희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 세 배우의 등장으로 여배우 주연 영화가 대거 등장한다. 정진우의 ‘초우’와 ‘초연’ 그리고. 이만희의 ‘만추’가 바로 그런 영화들이다. 더욱 특별한 것은 관객을 억지로 울리려는 신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 영화 관객은 고무신 부대에서 하이힐 부대로 바뀌었다.

제작사들은 경쟁적으로 신인 여배우 공모를 벌인다. 신인 공모에 당선되면 주연 여배우로 캐스팅할 뿐 아니라 덤으로 50만 원의 상금까지 줬다. 이제 스타는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별이 아니었다. 누구나 응모해 행운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또 하나의 신인이 윤정희다. 영화 ‘청춘극장’(강대진 감독, 1967) 주연 여배우 공모에서 윤정희가 당선됐다는 신문 기사 옆에는, 고은아의 약혼 소식이 나란히 실렸다. 운명처럼 새로운 별이 뜨고 다른 별 하나가 지는 순간이었다. 고은아의 인기는 약혼 발표와 함께 주춤해진다.








 

 

서늘한 문희, 괄괄한 남정임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1972년 제9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남녀 주연상을 받은 박노식과 윤정희.

 

신인 윤정희가 영화 ‘청춘극장’으로 시험대에 오른 그 순간, 정진우 감독의 영화 ‘밀월’(1967)에서 문희는 더 이상 인형 같은 연기를 하는 신인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무더운 여름 컴컴한 방 안에 속옷 차림으로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는 한 여자가 보인다. 그녀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뭔가 권태로운 것 같고, 욕구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문희는 암흑가 두목 박암의 아내. 교도소에서 출소한 박암은 과장된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문희의 얼굴은 서늘하기만 하다. 데뷔작 ‘흑맥’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그 차갑고 서늘한 눈매와 표정이 부활한 것. 문희보다 서른 살 넘게 많은 박암은 섹스에서도, 대화에서도, 젊고 아름다운 문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문희는 박암의 품에 안겨 딴 생각을 하는 여자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문희의 고독과 절망은 그만큼 깊고 어둡다. 박암은 문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늙고 병든 몸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때 박암이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신성일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다. 영화가 시작된 뒤 신성일과 첫 대화를 나누기까지 30분 동안 문희는 대사가 없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은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 초반의 무언극이 눈부셨다는 평가를 받으며 문희는 신인 여배우가 흔히 듣게 마련인 연기력 부족이라는 비판에서 단숨에 벗어난다. 그는 이제 날개를 달았다.  

1967년 개봉한 이만희 감독의 영화 ‘기적’에는 남정임이 출연한다. 이만희의 걸작 중 하나로 격찬을 받은 이 영화에서 남정임은 열차 안에서 사과를 파는 소녀로, 쫓기는 남자 최무룡을 돕는다. 영화는 배경 음악 없이, 오로지 기차에서 나는 실제 음향만을 배경으로 촬영됐고, 대사도 극도로 억제돼 박진감을 자아낸다. 문희와 남정임은 이제 당당하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남정임은 진정한 배우라면 자기 목소리로 녹음을 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라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녹음을 고집한다. 물론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1967년 상반기 결산 결과 데뷔 2년차 문희가 출연한 영화는 13편이었다. 열 편 이상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 중이던 남정임 역시 그에 못지않은 성과를 거뒀다. 문희는 출연작마다 새롭다는 칭찬을 받았고, 남정임은 괄괄하고 당돌한 말괄량이 여성으로 자신의 개성을 만들어갔다. 그 사이 고은아는 영화제작자 곽정환과 결혼하면서 연기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동시에 재미있는 일이 터진다. 곽정환에 의해 신인 배우로 발탁된 윤정희가 그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 공모 상금 50만 원 중 15만 원만 주고 나머지는 10개월이 지나도록 주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자신이 다른 영화사의 작품에 출연하고 받은 개런티 중 30%를 곽정환이 챙기며 폭리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신파여, 다시 한 번! 

이 와중에 윤정희의 진가가 드러난 영화 ‘안개’(김수용 감독, 1967)가 개봉했다.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윤정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것도 없는 권태로운 시골 무진에 은거 중인 음악선생 역을 맡아 이질적인 환경에 놓인 현대 여성의 무기력과 절망을 표현했다. 이후 그녀는 이지적인 여성의 표상이 된다. 이만희 감독의 스릴러 영화 ‘여섯 개의 그림자’(1969)에서는 남궁원에게 학대당하고 신성일의 거짓 사랑에 속아 목숨을 위협당하는 절망적인 배역을 맡았다. 윤정희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 다 죽이기로 결심한다. 남궁원을 죽이러 가기 전 말없이 화장을 하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는 장면은 놀랍다. 그때까지 아무 매력도 없던 그녀가 갑자기 놀라운 매력을 뿜어내는 것이다.

윤정희는 도회적인 이미지로 첩보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가 하면 검객 영화에서 여검객 역을 맡기도 하고, 구시대의 비극적인 여인상을 연기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멀티 플레이어였다. 윤정희가 문희와 남정임에 이어 세 번째 여성 스타로 등극하면서 1960년대 말 사람들은 이 세 여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지 않고는 한국 영화를 봤다고 말하지 못할 상황에 놓였다. 이른바 트로이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968년, 문희 주연의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이 개봉된다. 이 영화는 단숨에 한국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사상 최고의 흥행 영화로 등극한다. 영화 내용은 오래전 이모와 고모, 어머니들이 고무신 신고 하얀 손수건을 든 채 보던 바로 그 신파영화였다. 아역 배우 김정훈의 “엄마. 왜 나는 엄마와 같이 살 수 없는 거예요?” 한 마디가 첨가됐을 뿐. 공전의 히트를 한 이 영화로 인해 한국 영화계는 다시 과거로, 손수건 적시는 신파 멜로 영화의 세계로 돌아가버린다. 너무나 단숨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사이 재능 있는 감독과 배우들이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쌓아 올렸던 새로운 시대가 한방에 무너지고 극장가는 다시 고무신 부대의 영화들로 채워지게 된다. 영화적인 실험도 사라졌다. 이와 때를 같이해 깡패 영화가 수없이 만들어지면서 재능 있는 세 명의 여배우는 깡패 영화에서 남자 배우의 들러리를 서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게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남정임은 자신의 장점이 부각되는 작품에 출연하지 못한 채 수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면서 서서히 재능을 갉아먹는다. 게다가 본래 갖고 있던 발랄하고 거침없는 말괄량이 기질로 크고 작은 스캔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제작부장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1971년, 남정임은 수억 원대 자산가라는 재일교포와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버린다. 문희도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수없이 많은 속편에 출연하고,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아들로 나온 아역 배우 김정훈의 아내가 되는 수모를 겪으며 ‘꼬마신랑’ 시리즈에 출연하는 등 빛나는 연기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가다 1971년, 남정임의 뒤를 이어 결혼한 후 은퇴해 영화계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2년 뒤, 트로이카의 마지막 여왕 윤정희도 공부를 하겠다며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몇 해 뒤 결혼해 영화계에서 사라진다. 이리하여 한국 영화계에서 최초로 여배우가 영화의 중심에 서던 시대는 저물고 만다.  








 

몇 해 뒤, 남정임이 돌아왔다. 결혼 직후부터 ‘선데이 서울’ 등의 주간지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됐던 불행한 결혼에 대한 소문의 종지부는 이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남정임은 그녀를 발굴해 데뷔작을 찍었던 김수용 감독의 영화 ‘웃음소리’(1978)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재기를 꿈꾼다. 당시 유행하던 호스티스 영화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작품이었다. 남정임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그녀의 가슴에 묻어둔 사랑의 기억들이 너무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졸작이었다. 게다가 이미 30대 초반에 접어든 남정임의 상대역이 파릇파릇한 청년 이영하였으니, 둘이 마주칠 때마다 남정임의 나이가 떠오를 수밖에 없던 건 또 다른 의미로 비극이었다. 진부한 졸작으로 재기를 노린 남정임은 몇 년 후 암에 걸리고, 1992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죽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생애를 시나리오로 만들어 영화화할 것을 꿈꿨다고 한다.

 

 

10월 호

④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애틋한 ‘겨울 여자’ 장미희

  •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장미희가 출연한 영화를 다시 보는 건 힘든 일이다. 영화와 여주인공에 매혹되기에 앞서, 영화를 만드는 자들과 영화를 보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거칠고 잔혹한 남자들의 시대에 영화계에 들어와 ‘예술’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과 확인 안 된 수많은 소문에 시달렸던 여인. 때로는 천사 같은 순수함으로, 때로는 살쾡이 같은 야성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배우 장미희를 추억한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1970~80년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큰 인기를 끌었던 배우 장미희. 

 

1970년대‘안방극장’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다. 새하얀 고무신을 신고 치맛자락을 당겨 잡고 극장으로 몰려가 하얀 손수건을 눈물로 적시던 고무신 부대가 거실에 놓인 TV로 눈을 돌렸다. 장욱제·태현실 주연의 TV 연속극 ‘여로’(1972)는 고무신 부대가 안방에서 손수건을 눈물로 적시게 했으며, 그녀들의 아들들은 모두 동네 공터로 몰려가 바보 영구 흉내를 내게 만들었다. 박치기 왕 김일의 프로 레슬링 경기가 방송되는 날이면 집에 TV가 있는 아이들은 그 동네의 왕이 되었다. 달도 차면 기울고 활짝 핀 꽃도 시간이 지나면 지고 마는 것. 1960년대 말 서울 극장가에 가면 출연작이 꼭 한 편 이상은 걸려 있었던 문희·남정임·윤정희 트로이카의 시대는 그들이 결혼하면서 저물었다. 한때 최고의 여배우였던 최은희도, 김지미도, 간간이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그녀들의 시대는 아니었다.  

구경 좋아하는 사람들을 TV에 빼앗기고, 최고의 흥행 여배우도 사라져버린 한국 영화계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례없는 수난이 찾아온다. 1973년 유신정권의 영화법 개정이다. ‘저질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모든 영화는 시나리오 단계부터 검열을 받아야 했다. 영화사 설립도 정부 허가를 받아야 했다. 결국 권력자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흥행이 보장된 외국 영화의 수입권은 한국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사에만 주어졌고, 외국 영화를 수입하려면 일정 편수 이상 만들어야 했다. 영악한 제작자들은 외국 영화를 수입하기 위해 위장 합작 영화를 만들거나, 배우와 스태프에게는 한 편만 찍는다고 말해놓고 극장에는 두 편, 세 편으로 둔갑시켜 개봉하는 ‘신공’을 부렸다. 결국 제 살 깎아 먹기가 돼 관객들은 한국 영화에서 발길을 돌렸다. 한국 영화는 곧 저질 영화의 대명사. 한국 영화를 백주 대낮에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결국 영화의 제작편수가 급격하게 줄어 1960년대 평균의 절반이 될 정도였다.  


 


새로 뜨는 별들 

그러나 아무리 무시무시한 검열이 버티고 있고, 상황이 열악해도 영화는 만들어지고 새로운 스타는 태어나는 것. 한 시대를 주름잡던 여배우들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여왕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나타난다. 유현목 감독의 ‘수학여행’(1969)에서 깜찍한 외모로 눈길을 끌었던 아역배우 서미경이 어느새 성숙한 여인이 돼 미스 롯데에 등극하며 주가를 올렸다. 곧이어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이 개봉되고, ‘선데이 서울’ 표지에 매혹적인 반라의 모습으로 등장해 뭇 사내들과 아직 머리가 여물지도 않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미경이 출연한 영화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당시 최고 권력자의 아들과 관계된 괴소문이 흉흉하게 나돌더니, 그녀는 사라졌다. 양정화라는 신인 여배우가 주목을 받는가 싶더니 정가의 떠들썩한 스캔들에 연루돼 사라져버렸다. 1970년대 트로이카의 여왕 중 하나로 등극할 유지인은 1974년 영화에 데뷔했지만 아직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신인 중 하나였고, 또 다른 트로이카 중 하나인 정윤희도 인형처럼 예쁘지만 연기는 못하는, 아이스크림 CF나 하는 그런 정도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 그 어떤 여배우도 문희·남정임·윤정희처럼 극장가를 자신의 얼굴로 뒤덮지는 못했다. 영화 제작 편수도 얼마 안 되고 신인 감독의 놀라운 약진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미국 UCLA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온 하길종이라는 감독이 데뷔한다. 전에 없던 유학파 감독이자 서울대 문리대 출신의 4·19 세대였던 그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1972년의 데뷔작은 표절 논란으로 얼룩진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975년 하길종 감독의 새 영화 ‘바보들의 행진’이 개봉됐다. 원작과 시나리오는 고등학생 때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돼 화제를 낳으며 문단의 신세대로 등장한 최인호가 썼다. 음악은 강근식과 송창식. 1970년대 청년문화의 주역이 다 모였고, 배우는 모두 당시 대학에 다니던 신인이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혹독한 검열의 칼날이 휘둘러졌지만, 1970년대 청년의 고뇌와 분노를 담은 이 영화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청년문화의 탄생 

바로 전해인 1974년엔 이장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별들의 고향’이 만들어졌다. 이 영화의 원작자와 시나리오 작가 역시 최인호. 음악도 강근식과 이장희. 주연은 아역 배우 출신 안인숙과 중년에 접어든 신성일이었다. 영화를 보고난 사람들의 입에 영화 속 대사가 오르내렸다. 물론 1960년대에도 영화 속 대사가 유행어가 되기는 했다. “나가 전라도에서 올라온 용팔이란 말이시” 뭐 이런 정도였다. 하지만 ‘별들의 고향’이 상영된 후엔 달랐다. 여주인공 경아의 대사 “추워요. 꼭 껴안아주세요” 라든지, “내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와 신성일의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같은 대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영화 전편에 흐르는 이장희와 강근식의 음악은 또 어떤가. ‘한잔의 추억’‘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최고의 히트곡이 됐고, 한국 영화의 진정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라 할 앨범이 처음으로 발매됐다. 영화는 개봉되자마자 청춘남녀를 극장으로 불러 들였고,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 1968)의 흥행 기록을 깨는 최고의 성과를 이뤄낸다. 

새로운 감각과 생각을 지닌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었다. 이 새로운 시대의 영화가 이전 시기의 영화와 다른 점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음악감독 모두 학생 시절 서로의 재능을 간파하고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끈끈한 유대감을 다져왔다는 점이다. 이장호의 경우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최인호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별들의 고향’을 눈여겨보다 의기투합했고, 이장희 역시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로의 재능을 눈여겨보던 사이였다. 그들은 서로의 유대감과 공감대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낸 첫 세대였고 그것을 ‘청년문화’라 불렀다. 하지만 곧이어 수없이 발동된 긴급조치와 대마초 파동이 청년문화를 초토화시켰다. 새로운 영화의 주역 대부분이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고, 영화에 사용돼 히트한 노래는 금지곡이 돼 들을 수 없게 됐다. 특히 ‘바보들의 행진’의 경우가 심했는데, 신촌 로터리 육교 위에서 주인공들이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려 도망치는 장면에서 사용된 ‘왜 불러’와 주인공 중 하나가 자살하는 장면에 사용된 ‘고래사냥’은 편협한 권력자들의 옹졸한 처사로 금지곡이 됐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1975년 베트남 패망은 대한민국에서 반공 히스테리와 북한의 남침 공포가 극에 달하도록 만들었다.  

1978년 초.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중에 일어난 일이다. 소집일에 학교에 간 나는 몇몇 아이의 방학 중 무용담을 들어야 했다. 오로지 장미희의 가슴을 보기 위해 단성사에 ‘쌔벼들어갔다’는 이야기였다. ‘쌔벼들어간다’는 건 극장에 돈을 안내고 몰래 들어간다는 뜻으로,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던 ‘겨울 여자’(김호선 감독)를 돈도 안 내고 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무용담의 주인공들은 영화에 장미희의 가슴 노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놓고 옥신각신했다. 당시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했다. 내 관심은 오로지 무협 액션 영화였고,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남자가 할 짓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도 사춘기의 남자였으니 장미희의 가슴이 노출된다는 말에 약간 솔깃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은 전혀 안 했다는 뜻이다.  

그해 겨울 장미희 주연의 ‘겨울 여자’는 대단했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삼촌들이 연인들과 ‘겨울 여자’를 보고 와서 주부였던 이모를 부럽게 만든 일이 기억난다. 대학생 삼촌들과 반 아이들의 입에서 장미희의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당시 내가 좋아하던 여배우는 임예진이었다. 몇몇 용감한 아이가 ‘겨울 여자’가 상영되던 단성사에 모험을 하러 간 그 시간에 나는 동네 극장에서 임예진 주연의 영화를 보거나 한·홍 합작 무협 액션 영화를 보고 있었다.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 ‘결혼행진곡’(1976)을 보고 당시 유행어가 된 한진희의 “죽갔네” 라는 대사를 깔깔 웃으며 따라 하기도 했지만, 여주인공이던 장미희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 오히려 당시 해태 브라보콘 CF에 출연하던 정윤희가 나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장미희는 당시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나의 여성 외모에 대한 심미안, 즉 눈 크고 예쁜 여자만 좋아하는 수준에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면이 있었다.  








 


입술 끝에 살짝 패는 미소 


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장미희는 학력 위조 파문 이후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브라운관에서 부활했다.

 

내가 처음 본 장미희 주연 영화는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감독, 1978)이다. 1978년 어느 날 밤,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 ‘김세원의 영화 음악’에서 김세원 씨가 약간 흥분된 어조로 자신이 얼마 전에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래 바람이 부는 황량한 사막에 빨간 우산이 굴러갑니다.” 라디오를 듣던 나는 그 강렬한 이미지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곧 이어 김세원이 들려준 영화의 메인 테마와 영화에 사용된 노래 중 하나인 양희은의 ‘알캉달캉’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 영화의 제목이 바로 ‘속 별들의 고향’이었다.  

동네 동시상영관에 영화가 들어왔다. 보러 갔다. 황량한 사막에 바람이 불고 빨간 우산이 떼굴떼굴 굴러간다. 그 위로 음악이 흐른다. 사실 사막이 아니라 한강 백사장이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병원에서 젊은 여자가 퇴원 수속을 밟는다. 병이 나아서 퇴원한다고는 하지만, 이 젊은 여자는 아직 불안한 것 같다. 병원 한쪽에서 환자들이 배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공이 없다. 환자들은 안 보이는 공으로, 공 없이 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환자들이 전부 동작을 멈추고 지나가던 젊은 여자를 바라본다. 안 보이는 공이 젊은 여자 쪽으로 굴러온 것이다. 여자는 미소를 짓고 자기 발 앞에 굴러온 안 보이는 공을 집어 들고 멋지게 서브를 해 환자들 쪽으로 던진다. 안 보이는 공은 환자들 쪽으로 날아가고 환자들은 다시 배구를 시작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망치로 가슴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 이런 것이 영화구나.”

그 장면에서 커트 머리를 한 젊은 여자 장미희의 입술 양 끝이 살짝 패는 미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 미소 속에 여러 감정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환자들에게 장난치듯 거짓으로 응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녀 역시 그들과 똑같이 공을 보고 있는지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선의인 것만은 확실했다.




 

영화의 라스트. 신성일이 죽고 장미희는 혼자 남는다. 어딘가를 바라본다. 고향이 없는 그녀. 만약 고향이 있다면 별처럼 먼 곳일, 그곳을 바라보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녀의 시선 어딘가로 화면이 바뀌면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한 황량한 모래밭에 바람이 불고 빨간 우산이 떼굴떼굴 굴러가다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화면은 정지되고 ‘끝’ 자가 떠오른다. 두 번째 망치. 고백하자면 나는 영화가 주는 강렬함을 ‘속 별들의 고향’으로 처음 경험했다. 경험은 알랭 들롱 주연의 ‘암흑가의 세 사람’의 라스트, 또는 왕우 주연의 ‘심야의 결투’ 라스트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남자 주인공의 비장하고 처절한 죽음에서 느껴지는 격한 감정이 아니라 추상적인 이미지와 주인공의 감정이 결합된 또 다른 종류의 격한 감정이었다. 먼 훗날 빨간 우산 장면은 데이비드 린 감독의 ‘라이언의 처녀’를 표절한 것이고, 배구 장면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블로우 업’ 중 테니스장 장면을 표절한 것임을 알았고, 어찌 보면 무척이나 감성적인 장면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나의 감동은 훼손되지 않았다.  

‘속 별들의 고향’에서 장미희는 심한 조울증 또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증상의 병을 앓는 여자인 것 같다. 그녀는 고아이고, 소매치기다. 밤마다 자신의 차가운 몸을 데워 주고, 지갑을 빼앗겨줄 남자를 찾아다니는 불량소녀다. 그녀는 추워서 덜덜 떠는 어리고 연약한 동물 같기도 하고, 젊고 아름다운 몸을 이용해 생존하는 것에 아무런 윤리적 갈등이 없는 강한 짐승 같기도 하다. 임신을 한 그녀는 만만한 신성일을 찾아가 그의 아기를 임신했다고 한다. 사실 거짓말이다. 누구의 아이인지 그녀도 모른다. 다만 아이를 낳고 키우려면 안정된 보금자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성일은 너무 쉽게 넘어간다. 신성일이 아기를 제 자식처럼 사랑하면 할수록 그녀의 ADHD 증상은 심해진다.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사막같이 되어버린 장미희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들어왔고, 그것 때문에 그녀는 난폭해진다. 이런 어려운 역을 20대 초반의 신인 장미희가 설득력 있게 소화해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전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감정 기복이 심한 여주인공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장미희는 ‘겨울 여자’와 ‘속 별들의 고향’의 성공으로 1970년대 말 최고의 인기 여배우가 된다. 이듬해인 1979년 그는 ‘하녀’(1960) ‘이어도’(1977) 같은 괴작을 만든 감독 김기영과 만난다. 영화 제목은 ‘느미’. 벙어리이지만 매우 아름다운 여자 장미희는 서울 변두리 벽돌 공장 공장장의 아내다. 예순이 다 된 늙은이와 살며 그의 아이를 낳고 그에게 학대받으며 낮에는 벽돌을 나르고 밤에는 그의 손발을 씻겨주고 섹스 상대가 되는 여자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주변에서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트럭 운전사 백일섭은 늙은 남편 앞에서 장미희에게 노골적으로 집적거린다. 늙은 남편은 힘으로는 백일섭과 상대가 안 되니 장미희에게 손찌검을 한다. 그 사이에 끼어든, 대기업에 취직할 예정인 인텔리 하명중. 백일섭은 정욕에 미쳐 장미희의 남편을 트럭으로 깔아뭉개 죽여버리고 장미희에게 결혼하자며 울부짖다 교도소로 간다. 대기업에 취직한 하명중은 장미희를 차지하기 위해 물량 공세를 편다.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남자들은 모두 불행한 죽음을 당하는 이 이상한 영화에서 장미희는 특별했다. 화장 안 한 맨 얼굴에 연약한 어깨와 빈약한 가슴을 드러내고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자들을 물어뜯는다. 심지어 자신을 돌보아주다 회사에서 강제 퇴직당한 하명중과 함께 자살을 하려고 연탄불을 방 안에 피워놓고 드러누웠다가 하명중이 가스 냄새를 맡고 일어나려 하자 베개로 그의 얼굴을 덮어 죽이려 한다. 하명중과 헤어질 때, 그가 사 모은 살림살이를 마을 사람들에게 경매로 헐값에 팔아버린 뒤 돈 절반을 뚝 떼어 하명중에게 주는 모습.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는 하명중을 냉혹하게 뿌리치고 떠나는 장면 등에서 그녀의 냉혹함은 설득력이 있다. 장미희는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행복해지면 신의 질투가 심해지고 결국 신이 행복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여자 역을 맡아, 마음속에 포악한 살쾡이 같은 일면과 천사와 같은 순수함이 불화를 이루는 모습을 연기했다.

1983년, 20대 장미희의 아름다운 매력이 최고로 꽃을 피운 영화가 만들어진다. 장미희와 배창호의 만남이었다. 제목은 ‘적도의 꽃’. 영화가 시작되면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어느 집 어두운 구석에서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쓰고 있다. 사내는 부잣집 아들인 것 같고 취직을 다섯 번이나 했지만 모두 그만두고 말았으며, 부유한 아버지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무위도식하는 청년이다. 그가 자기 집 맞은편에 이사 온 한 여자를 카메라 뷰 파인더로 보고는 반해버렸다. 이것은 장미희의 첫 흥행작 ‘겨울 여자’의 한 장면과 비슷하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겨울 여자’와 ‘적도의 꽃’ 두 영화에서 여주인공 장미희는 자신의 존재를 감춘 불쾌한 남자들, 즉 스토커의 폭력적인 시선에 갇힌 불행한 여자다.







여배우 학대하는 영화 

‘겨울 여자’의 주인공 이화는 꿈속에서 스토커로부터 도망쳐 교회로 들어간다. 그곳은 그녀가 안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녀가 믿는 신과 목사인 아버지가 지켜줄 수 있는 곳. 그녀는 안도의 기쁨에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춘다. 그런데 스토커는 보란 듯이 성역을 침범해, 이화 앞에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잠에서 깨어난 이화에게 온 편지. 스토커가 보낸 것이다. 스토커는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교회 안에서 가면을 쓰고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 이 불쾌한 남자와의 만남과, 그의 강간을 거부한 뒤 남자의 자살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는 이화를 변하게 만든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낸 여배우의 눈물

장미희가 미국에서 돌아와 출연한 배창호 감독의 영화 ‘깊고 푸른 밤’ 포스터.

 

‘적도의 꽃’의 여주인공 선영은 돈 많고 나이 많은 중년 신사가 숨겨놓고 즐기는 여자다. 중년 신사는 그녀에게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사주고, 생활비를 주고, 가끔 찾아와 섹스를 한다. 젊고 아름다운 선영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 앞에 스토커 ‘미스터 M’이 나타나 그들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며 자신의 선영에 대한 사랑만이 진실하고 깨끗한 것이라고 말한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가 장미희에 대해 약간 부드러운 면이 있지만, 이 두 영화는 모두 여배우에 대해 잔혹하다.  

‘겨울 여자’의 경우, 영화가 관객 동원에 성공한 이유가 신세대 여성의 성 모럴을 참신한 시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칭찬을 받는데,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 영화가 여배우를 보여주는 태도가 거칠고 야비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참혹한 삶을 보여주고 그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폭력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과, 관객의 흥미를 끌기 위해 주인공의 삶을 폭력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겨울 여자’부터 ‘적도의 꽃’까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장미희가 출연한 영화를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은, 영화와 여주인공에 대한 매혹이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자들과 영화를 보는 자들-물론 남성들이다-의 비열하고 야비한 시선이다.

영화 속에서 장미희는 시도 때도 없이 벗는다. 왜 벗어야 하는지 이유도 없다. 여주인공을 학대한다는 생각이 든다. 10대 후반에 영화계에 들어와 20대 중반까지 이런 야비한 시선들 앞에 자신을 노출하며 일해야 했을 어린 여배우의 고통이 상상된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는 거칠고 잔혹한 남자의 전성시대였다. 확인 안 된 수많은 야비한 소문들. 그 소문들 속에서 하나같이 권력을 쥔 남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포획물로 여배우를 이용하고 있다.  

1985년, 대학생이 된 나는 친구들과 장안의 화제작 ‘깊고 푸른 밤’(배창호 감독)을 보러 명보극장에 갔다. 영화가 시작되고 장미희가 등장했다. 아!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달라졌다. 물론 성형수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미국으로 떠났다가 2년 만에 영화에 나온 장미희의 얼굴은 20대의 파릇하고 청순하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볼 살이 사라졌고, 눈 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영화에서 그녀의 배역 역시 어두운 과거가 있는 그런 여자였다. 지난 2년간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아무도 모른다.










 


서러운 눈물의 이유는 

장미희는 배창호 감독과 호흡을 맞춰 1986년 ‘황진이’에도 출연한다. 온갖 시시한 남자들에게 유린당하고 마지막으로 시시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몸까지 팔고 바닷가에서 모로 쓰러져 서서히 죽어가는 황진이의 장대한 라스트는 영화의 주인공 황진이뿐 아니라 배우 장미희까지 생각하게 한다. ‘겨울 여자’에서 이화를 통해 이야기됐어야 할 것이 결국 ‘황진이’에 와서 표현된 것이다.  



그 후 배우 장미희는 어떤 때는 자아도취에 빠진 어리석은 여자로 보였고, 또 어떤 때에는 표독스러운 여자로 보였다. 그녀가 공개석상에서 취하는 위선적인 행동은 개그의 소재가 돼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다 학력 위조 사건이 터진다. 사건이 터지기 몇 달 전, 장미희는 영화잡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연기하고 싶은 배역은 엄격함과 단호함을 지닌 여자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녀가 보여준 건 엄격하거나 단호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제 장미희는 끝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김수현에 의해 부활한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2010)에서 그녀는 놀랍게도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캐릭터를 조롱과 연민이 느껴지게 연기한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 김근태의 장례식 날 그녀는 서럽게 울었다. 왜 울었을까? 울음으로 그녀가 살아온 그 질곡의 세월이 설명되지는 않지만, 그녀의 눈물은 우리가 절대로 알지 못할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11월 호

⑤ 영원한 여고생 임예진

 

한국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하이틴 스타  

  • 1970년대 중반 여고생 임예진은 한국 영화의 중심이었다. 거친 남성들의 액션 영화와 호스티스 멜로 영화가 극장가를 양분하던 시절,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깨끗하고 순진한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1980년대, ‘애마부인’을 비롯한 수많은 ‘부인’이 성적인 매력을 앞세워 스크린을 장악하면서 조용히 사라지고 만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복숭아 같은 뺨, 하얀 목덜미로 한 시대 소년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영원한 여고생, 임예진을 추억한다.
영원한 여고생 임예진

깜찍하고 풋풋한 외모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 임예진.

 

1977년 늦가을.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기말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도서관이 갑자기 술렁이고, 누군가 “데모한다!”라고 소리치자 학생들이 일어나 창가로 몰려들었다. 나도 몸집 큰 학생들 틈을 비집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고등학생 100여 명이 함성을 지르며 성난 파도처럼 우르르 교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4·19혁명 때 같았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어른들이 교문 앞에 있다가 고등학생들에게 쫓겨 허둥지둥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언제나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재빠르게 정보를 획득한 자가 있었다. 한 학생이 진상을 밝혀줬다. 우리 학교에 하이틴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촬영팀과 배우들이 왔는데, 학교 측이 촬영허가를 내주었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이 학교에서 하이틴 영화 따위를 찍는 것에 분노한 고등학생들이 데모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배우들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달려갔겠지만, 그 당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내가 다니던 학교의 고등학생들은 영화 촬영을 반대하고 배우들을 몰아내기 위해 노도처럼 달려갔던 것이다.  

이해가 안 갔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에서 하이틴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 뭐 그렇게 화가 날 일인지. 학교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느끼지 못하던 나는 하이틴 여배우 강주희가 왔다는 말을 듣고 혹시 그녀를 볼까 싶어 도서관을 나가 데모 학생들 주변을 서성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피신한 후였다.  




 


까까머리의 해방구 

1976년. 내가 막 중학생이 됐을 때 영화 한 편이 까까머리 소년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당시 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그 영화를 유치한 것이라 여기고, 오로지 무술 영화만을 보는 나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개봉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흥행을 이어가는 그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국 영화를 주로 개봉하던 을지로의 국도극장을 찾고야 말았다. 영화 제목은 ‘고교 얄개’. 극장 안에 들어서자 이상한 감동이 휘몰아쳤다. 검은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남학생들과 하얀 칼라의 단발머리 여학생들만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어른이 없는 검은 교복들만의 세계. 물론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하는 영화를 보러 가도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강요에 의한 동원이었다. 그러나 ‘고교 얄개’를 보러 들어간 극장 안은 순전히 자발적인 의지의 검은 교복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중학생이 된 뒤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때면 항상 불안에 시달리곤 했다. 극장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지도부 선생들에 대한 공포. 그들에게 걸리면 최소한 유기정학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보고 싶은 영화를 마음대로 보러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자마자 극장에 가는 것은 학칙을 위반하는 ‘범죄 행위’라는 것을 알고 나는 절망에 빠졌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물론이고 청소년 입장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조차 교칙 위반 행위라는 것이었다. 아니 왜? 학생지도부 선생들은 교칙을 위반한 학생을 잡아내려고 일제 고등계 형사들처럼 눈에 불을 켜고 극장 안을 순찰한다고 했다.

게다가 초등학생 때는 몰랐던, 극장 화장실에 기생하는 깡패의 존재도 알게 됐다. 그들에게 걸리면 팬티만 남기고 모조리 빼앗기고 재수 없으면 죽도록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반 아이 중 몇몇이 시계를 빼앗기기도 했다. 반 아이 중 하나는 여자친구와 극장엘 갔다가 학생지도부 선생에게 걸려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왕우 주연의 무술 영화가 들어오면 나는 내 신상정보가 만천하에 유출되는 이름표와 교표가 있는 교복 윗도리를 벗어 가방에 집어넣고, 학생모 역시 집어넣고는 까까머리를 숨기려 털모자를 쓰고, 고개를 숙이고 ‘미션 임파서블’ 작전만큼의 긴장을 하며 극장 안에 숨어들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그런 불안이 없었다. 잡아가려면 잡아가라! 우리 모두를.







 


고교생 스타의 탄생 

영화가 시작됐고, 나와 친구들은 마음껏 웃고 즐겼다. 그 옛날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 1968)과 ‘꼬마 신랑’(이규웅 감독, 1970)에서 이모와 고모들의 하얀 손수건을 적셨던 꼬마 스타 김정훈이 어느새 나이를 먹어 고등학생이 돼 있었다.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 1975)에서 구두닦이 소년으로 나와 각박한 세상에서 정직함을 잃지 않은 행동을 보여 감동을 줬던 이승현 역시 고등학생이 돼 있었다. 신기했다. 저들도 나이를 먹고 성장하는구나. 이웃집 형·누나 같은 고등학생 연기자들의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고교 얄개’지?

초등학생 때, 길고 긴 겨울방학 동안 나는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조흔파 원작의 ‘얄개전’. 표지에 만화가 신동우의 그림이 있던 책으로 기억한다. 개구쟁이에 낙제생인 중학생 ‘나두수’의 천방지축 모험담이었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의 낙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중학생이 되면 낙제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기도 하고 무서운 일이기도 했다. 중학생이 돼 내가 본 영화 ‘고교 얄개’의 주인공은 고등학생이었는데, 하는 짓은 소설 속 중학생과 똑같았다. 아니 고등학생이 되면 중학생과는 다른 무엇이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영화에는 소설 속에서 내게 두려움을 준 낙제에 대한 위협이 없었다. 그냥 까불기만 하는 것이었다.  

약간 화가 치밀었던 부분도 있다. 이전에 보았던 한국 깡패 영화들은 주인공이 천방지축 날뛰거나, 못된 짓을 일삼아도 라스트에 가면 그동안 저지른 나쁜 짓이 사실은 형사인 그가 정체를 숨기고 간첩 또는 악당들을 잡기 위해 꾸민 것으로 밝혀지거나, 깡패 주인공이 지난 잘못을 모두 뉘우치고 선행을 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고교 얄개’는 주인공이 갑자기 천방지축 까불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의젓한 모습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뭐야 이거!

1976년 청소년 영화 ‘고교 얄개’는 성인들이 보는 영화들을 제치고 흥행에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이승현·김정훈 주연의 고등학생 영화가 봇물 터지듯 개봉됐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시대에 검은 교복을 위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청소년이 된 베이비붐 세대가 불러일으킨 기적인가?








 

 

소년의 순정 


영원한 여고생 임예진

1970년대 중반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임예진, 전영록.

 

그 무렵. 중학생 교실에서는 신종 도박이 유행했는데 일명 ‘찌라시’라 불리는 영화 홍보 카드를 들고 와 가위 바위 보를 해 따먹는 것이었다. 중구와 종로구에 집이 있던 아이들은 극장가를 배회하며 수많은 영화 홍보용 카드를 모아 왔고, 교실 안은 온갖 영화 홍보물로 넘쳐 났다. 공부는 안 하고 도박에 온 정신을 쏟았던 나는 한 장의 카드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성난 능금’이라는 영화 홍보 카드. 그 속의 소녀, 임예진 때문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니! 사실 누나였지만. 

내가 냄새나는 사내들이 싸움질하는 영화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에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이미 서너 편이나 개봉된 상태였다. 하지만 곧장 극장으로 달려가지는 못했다. 그때는 좋아하는 여자 배우가 있어도 그녀의 얼굴이 담긴 브로마이드 혹은 사진을 갖고 다니거나 방에 붙여 놓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친구들에게 걸리면 “사내새끼가 여자 사진이나 보고, 쪽 팔리게” 하며 비웃음을 샀기 때문이다.  

그랬다. 사내가 어떻게 여고생이 나오는 영화를 본단 말인가? 그것은 말도 안 됐다. 그러나 나는 임예진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역 뒤편의 봉래극장이었다. 집과 학교에서 먼 곳이었기에 아는 사람의 눈에 걸릴 위험이 없어 선택한 장소였다. 그러나 문제가 좀 있었다. 봉래극장은 극장 안 깡패들이 무섭기로 소문난 곳이었고, 근처에 고등학교가 많아 지도부 선생들이 심심찮게 출몰하는 요주의 장소이기도 했다.

극장 매표구 앞에 섰다. 여직원이 표를 주는데 그 눈이 “사내새끼가 여고생이 나오는 영화나 보고, 너도 참 한심한 놈이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표를 받는 아저씨 역시 “한심하군. 넌 사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 남자가 거의 없었다. 여중생·여고생뿐이었다. “아! 제기랄.”  

영화가 시작됐다. 임예진 주연의 ‘정말 꿈이 있다구’(문여송 감독, 1976)라는 영화였다. 임예진이 소매치기로 나와 마지막에는 착한 소녀가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사실 스크린으로 임예진을 처음 본 감동 같은 것은 전혀 기억에 없다. 오로지 여학생 영화를 보러 왔다는 부끄러움밖에는 없었다.  

그 뒤로 제법 뻔뻔해져 임예진 주연의 영화를 보러 다녔고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최고의 문제아이며 ‘짱’이었던 학생이 다가와 쭈뼛거리며 임예진을 좋아한다고,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결국 같이 ‘푸른 교실’(김응천 감독, 1976)이란 영화를 보러 갔는데 녀석은 중학교 1학년밖에 안 된 주제에 영화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려 해 그것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더랬다.  










 


또래 여배우 

1970년대에 나와 또래들이 사모하던 여배우는 많았다. ‘로미오와 줄리엣’ ‘썸머타임 킬러’ 두 편의 영화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올리비아 허시. ‘정무문’과 ‘맹룡과강’의 노라 마오, ‘사랑의 스잔나’의 진추하. 그녀들은 아름다웠지만, 나와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저 먼 나라의 여자들이었다. 판타지 세계 속의 여성이었다. 물론 한국 여배우들도 아름다웠지만 보통 이모나 고모뻘이었다. 그런 우리 앞에 같은 학생복을 입은 또래의 여자 배우가 등장한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 영화에서 청소년 연기자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청소년 대상 영화는 거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고교 얄개’의 원작 ‘얄개전’을 각색해 중학생 안성기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있었지만, 청소년 영화 붐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1970년대 중반. 극장가를 휩쓸던 문희·남정임이 결혼과 함께 사라졌다. 대신 투박하고 사나운 남성들이 등장하는 깡패 영화가 주류를 차지했다. 홍콩에서 날아온 이소룡 영화도 돌풍을 일으켰다. 사나운 남성들의 찡그린 얼굴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즐비할 때. 소리 소문 없이 개봉한 영화가 있었다. 제목은 ‘여고 졸업반’(김응천 감독, 1975). 여고생 임예진이 남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소설 ‘불타는 신록’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본격적인 여고생 영화는 아니었다.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이른바 문예영화였다. 이 영화로 주연 임예진은 대종상 특별상을 받았고, 영화 주제곡으로 사용된 김인순의 노래 ‘여고 졸업반’은 중년 여성들에게까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사랑받는 히트곡이 됐다.

물론 여고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강대선 감독이 만든 세 편의 여고생 영화, ‘여고생의 첫사랑’(1971)과 ‘여고시절’(1972), ‘지나간 여고시절’(1973)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청소년 영화라기보다는 여고생이 등장하는 멜로 영화 쪽에 가까웠다.

그 시기 일본 대중문화에 밝았던 문여송 감독이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본 청소년의 사랑과 애환이 담긴 영화를 기억해내고 임예진을 주연으로 기용해 청소년들의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이른바 하이틴 영화 ‘진짜 진짜 잊지 마’(1976)였다. 주연은 임예진과 이덕화. 영화가 시작되면 고등학생으로 가득 찬 통학 열차에 학생모를 단정하게 쓴 모범생 이덕화가 등장한다. 이덕화는 언제나 같은 칸 같은 자리에 혼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친구들이 놀리고 비웃어도 그의 눈엔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창가의 소녀, 임예진이다.  










진짜 진짜 잊지 마 

그때 그들 사이에 운명적이고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떠나는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려온 임예진이 공교롭게도 이덕화가 매달린 출입구 쪽으로 달려와 이덕화에게 손을 내민다. 임예진의 손을 마주 잡는 이덕화. 이덕화는 임예진을 기차로 끌어올린다. 기차는 속력을 내서 달리고 이덕화와 임예진은 학생들로 가득한 출입구에 서로의 몸이 밀착된 채 매달린 꼴이 된다. 임예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하얀 목덜미와 복숭아 같은 뺨이 드러난다. 그녀의 냄새에 취한 이덕화는 임예진의 포로가 됐고, 임예진 역시 이덕화의 포로가 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놀라운 기적이 이뤄진 것이다.


 

영원한 여고생 임예진

전영록 임예진 이덕화(왼쪽부터)가 출연한 영화 ‘푸른 교실’의 한 장면. 

 

기적은 황홀하지만 그들은 1970년대 목포에 사는 아직 미숙한 고등학생일 뿐이다. 그들의 사랑은 임예진을 찍었다며 자기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또래의 고등학생 깡패에게 위협당하고, 고아인 이덕화는 그제까지 키워준 형 신구의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놈이 연애질이냐”는 폭언에 상처를 받는다. 그뿐 아니다. 사랑을 하는 그들은 ‘학칙을 위반하고 학생의 본분을 벗어나는 행위를 한 자’로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사람들, 정확하게 말하면 어른들과 또래 학생들의 눈을 피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다며 한숨을 내쉰다. 그들의 사랑은 숨어서 해야 하는 애틋한 사랑이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은 아니지만 그들은 결혼을 꿈꾼다. 하지만 현재는 미성년이고, 경제적인 능력도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들이 마음 놓고 사랑을 나눌 공간이 없다. 그러니 그들은 검은 교복을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영화의 라스트에 이르러 눈물을 강요하는 신파조의 억지스러운 결말과 그들의 사랑을 자꾸만 우정이라고 포장하는 감독의 검열과 세상에 대한 눈치가 몹시 거슬리기는 하지만, 임예진의 놀라운 연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그들의 욕망과 불안을 생생히 전달한다. ‘진짜 진짜 잊지 마’는 한국 청소년들의 욕망과 불안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며 그해 흥행 성적 2위에 올랐다.  

그리고 ‘임예진·이덕화·문여송’의 두 번째 영화가 만들어진다. ‘진짜 진짜 미안해’(1976). 고아이며 학교도 다니지 않고 야생마처럼 날뛰는 불량소년 이덕화와 그를 선도하려는 임예진의 노력이 줄거리인 이 영화는 일본에서 유행한 이른바 ‘학복물’의 영향을 받은 느낌이 강하다. 학생복을 입은 깡패 소년들의 액션 만화 ‘사나이 골목 대장(男一匹ガキ大將)’이나 ‘남조(男組)’‘청춘산맥(靑春山脈)’ 등의 흔적이 보인다.  





어른이 된 소녀 


영원한 여고생 임예진

1980년대 스크린에서 사라진 임예진은 이후 TV 드라마에서 생활 연기를 펼쳤다. 채널A 드라마 ‘불후의 명작’의 한 장면. 

 

임예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3년간 극장에선 온통 임예진 주연의 청소년 영화가 상영됐다. 당시 극장가 풍경을 보면 한쪽에서는 발차기를 하는 사나운 표정의 남성이 등장하는 권격 액션영화가 걸려 있고, 다른 쪽에는 침울하고 슬픈 표정의 호스티스들이 등장하는 여성 멜로 영화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세상 근심과 두려움과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를 사는 발랄하고 깨끗한 표정의 임예진이 등장하는 하이틴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활짝 핀 꽃도 시간이 지나면 지고 만다. 여고를 졸업한 최고의 인기 배우 임예진은 1979년, 10여 년 전 신성일 엄앵란 조가 눈부신 활약을 했던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1964)의 리메이크에 도전한다. 대학생이 된 임예진과 이덕화가 주연한 ‘맨발의 청춘’(김수형 감독, 1979)이다. 여고생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임예진 덕에 이 영화도 성공할 듯 보였지만,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이상 여고생이 아닌 임예진을 그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영화는 실패한다. 얄개 패거리 이승현과 김정훈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얄개’(김응천 감독, 1982)가 된 것에 대한 반응 역시 시들했다. 휴교조치와 최루탄이 난무하던 그때 ‘대학 얄개’라니 시대착오였다. 그들의 시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같은 해 임예진은 다시 성인 영화에 도전한다. 이원세 감독의 ‘땅콩 껍질 속의 연가’(1979)였다. 하숙방을 전전하던 30대 노총각 신성일은 집을 보러 갔다가 집주인이 이민을 떠나고 갈 곳이 없어진 가정부 임예진을 보고 어찌 보면 무례하고 바보 같은 제안을 하나 한다. 갈 곳이 없으면 자신의 가정부가 돼달라고. 그런데 문제가 있다. 신성일이 얻은 방은 달랑 한 칸이다. 결혼도 안 한 성인 남녀가 같은 방에서 살 수 있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당찬 임예진은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방 한가운데 커튼을 쳐놓고 밤 8시 이후에는 서로 커튼을 넘어가지 않기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기면 서로의 관계는 끝내기로 한다.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닌, 숙녀가 된 임예진은 1963년 영화 ‘또순이’ 속 도금봉처럼 악착같이, 굳은 일 안 가리고 일을 해 자기 생활을 한다. 신성일과의 관계도 유지한다. 그 사이 임예진을 사랑하게 된 신성일. 그러나 임예진은 “나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일식집 주방장 김영호와 결혼하겠다”며 기분 좋게 거절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간다. 영화는 무척 유쾌했고 임예진의 연기도 좋았다. 하지만 극 중 임예진이 누드모델을 하면서 그녀의 반라가 사진 속에 등장하고, 제작사가 그것을 홍보해 흥행의 미끼로 삼으려 하자 임예진의 남성 팬들이 분노한다. 그들 마음속의 여동생 또는 연인이었던 소녀의 변모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대의 종말 

이듬해 임예진은 좋은 영화에 적역으로 출연한다. 이장호 감독이 절치부심해서 만든 걸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한창 개발 중인 강남의 어느 곳에서 중국집 배달부, 목욕탕 때밀이, 이발사 보조로 일하는 세 청년의 이야기인데, 임예진은 이발사 보조인 이영호의 여동생으로 나와 중국집 배달부 안성기를 좋아하는 가난하지만 당차고 똑똑한 또순이를 연기한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안성기와 우연히 마주치자 그에게 곱게 포장한 양말을 선물하면서 은근히 데이트 신청을 하려는 장면. 그때 가난한 청년 안성기를 희롱하는 정체가 아리송한 부잣집 처녀 유지인이 차를 몰고 나타나 그들의 사이를 방해한다. 안성기는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자 유지인에게 홀렸다. 공장 노동자인 임예진이 끼어들 틈은 없다. 안성기는 유지인에게 홀려 그녀와의 데이트 약속이 불러올 비극적인 결말은 생각지도 않고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임예진은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본다.  


 

1980년대 초. 여배우들이 온통 성적 자극만으로 승부를 걸던 시대. ‘애마부인’을 비롯한 수많은 매혹적인 ‘부인’이 남성의 눈을 희롱할 때 임예진이 설자리는 없었다. 임예진은 이 영화를 끝으로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린다. 한국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깨끗하고 순진했던 여고생 스타가 조용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12월 호

⑥ 목마른 소녀 정윤희

 

눈부신 외모로 스크린 장악한 1970년대‘트로이카’의 전설 

  • 그녀는 너무도 예뻤다. 작고 까무잡잡한 인형 같았다. 어느 영화에 나오든 오직 그 미모만이 깊은 인상을 남겨, 내용도 배역도 잊히기 일쑤였다. 1970년대 ‘욕망을 좇는 여성’을 연기하면서도 연민을 자아내는 여배우가 그녀 외에 또 있었던가. 아름다웠기에 배우가 됐고, 1970년대 ‘트로이카’의 한 축으로 날아올랐던 정윤희.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결국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짧은 전성기 후 은퇴를 선택한, 미처 세상을 태우는 불꽃이 되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린 여배우 정윤희를 추억한다.
목마른 소녀 정윤희

인형 같은 외모로 1970년대 큰 인기를 모은 배우 정윤희. 

 

서울 무교동 골목에 촌스러운 차림의 앳된 여자가 들어선다. 오후 늦은 시간인데도 골목은 잠들어 있다. 골목은 간밤의 흥청망청했던 자취를 숨기고 다시 밤이 찾아올 때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지만 지난밤 향락이 남기고 간 쓰레기가 바람에 날린다. 네온 불빛이 꺼진 앙상한 간판을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그중 한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홀’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유흥업소다. 쾨쾨한 맥주 썩은 냄새와 담배 냄새가 불쾌하고, 테이블 위에 뒤집어 올려놓은 의자의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마치 도깨비들의 잔치가 끝난 후의 도깨비 소굴 같은 괴괴한 곳이다. 여자는 향락의 시간이 끝나고 난 뒤의 술집의 모습에서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물러선다. 그때 들어서는 남자. 여자는 취직하기 위해 아는 언니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자 남자는 시큰둥해하며 요새 취직을 하려 해도 호스티스가 남아돈다며 손사래를 친다. 여자가 도망치듯 문가로 나오자 남자는 반색을 한다. 어두운 홀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녀의 아름다움이 밝은 햇살에 드러난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돌아보라는 둥, 고개를 들어보라는 둥 이것저것 주문한다. 여자는 인형처럼 아름답다. 남자는 선심 쓰듯 여자에게 오늘부터 일을 하라고 한다. 도깨비 장난 같은 면접 심사를 한 셈이다.

밤이 오고 호스티스 대기실 한구석에 눈치를 보며 앉아 있는 여자. 일수 찍는 아줌마가 들어와 빌린 돈을 갚으라고 닦달을 하고 돈이 궁한 호스티스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나가자, 이번에는 김밥과 떡을 한가득 이고 할머니가 들어와 아가씨들에게 외상으로 김밥과 떡을 판다. 남자가 오늘 처음 이곳으로 일하러 온 사람이라고 여자를 소개하자 호스티스들이 한마디씩 한다. “웃으며 들어왔다 울며 떠나가는 무교동 바닥”이라고 겁을 주고, 화장품과 옷을 빌려주며 “도깨비 장난 같은 호스티스를 하러 도깨비굴에 총도 없이 뛰어들어?” 신세 한탄 또는 자기비하조의 농을 던진다. 남자는 여자에게 오늘부터 아가씨를 77번이라 부르겠다고 하고 나간다. 여자는 정신이 없다. 커다란 눈망울, 소녀 같은 작은 얼굴의 작은 체구를 지닌 77번 아가씨 정윤희의 무교동 입성 첫날이다. - ‘나는 77번 아가씨’(박호태 감독, 1978)


 


호스티스의 탄생 

1970년대 중반. 지금은 양재역 사거리라고 불리는 서울 말죽거리는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나무 널빤지를 깔아놓지 않으면 도저히 다닐 수 없었고, 과수원과 비닐하우스밖에 없는 허허벌판에 들어선 압구정동의 현대아파트에 이사 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신사동 사거리까지 나와 버스를 타고 제3한강교를 건너 시내로 들어와야 했던 그 무렵. 서울 제일의 환락가는 단연코 무교동이었다. 대우, 삼성, 현대라는 대기업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그곳에 취직을 하면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그런 회사들에서 일하는 남성들을 샐러리맨이라 불렀고 그들은 회사일이 끝나면 접대다 회식이다 하며 불나방처럼 환락가 무교동을 향해 몰려들었다. 방석집이라 불리며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흘러간 옛 노래나 부르며 막걸리를 팔던 술집은 도시 변두리로 물러나고 그 대신 맥주를 팔고, 근사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접대를 하는 홀이라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유흥업소가 생겨났다. 그곳에서 일하는 접대부 아가씨들을 호스티스라 불렀다. 홀에서 일하는 호스티스 아가씨들은 33번 77번 같은 번호가 이름이었고, 저녁에 출근해 아침에 퇴근하는 새로운 형태의 직업을 가진 여자들이었다.  

1970년대 한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사회였다. 자원도 기술력도 없는 개발도상국 한국의 경쟁력은 노동인력이었다. 그중 값싸고 고분고분한, 농촌에서 올라온 어린 여성들이 청계시장과 구로공단의 공장 노동자로, 중산층의 가정부로, 버스 안내양으로 서울에서 이를 악물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  

일하는 여성이 늘어나던 그 시절에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영화가 있었다. 1973년 발표된 조선작 단편소설 ‘영자의 전성시대’를 원작으로 소설가 출신의 당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김승옥이 시나리오를 쓰고 신인 배우 염복순을 주연으로 해신인 감독 김호선이 만든 ‘영자의 전성시대’(1975)였다. 영화 포스터는 유례가 없을 만큼 도발적이었다. 고딕체의 영화제목이 포스터의 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속옷 차림의 여주인공이 의자를 거꾸로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신인 여배우 염복순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는데, 영화에서 왜 노출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염복순은 자신의 가슴이 작다고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당돌한 대답을 해 다시 한 번 장안의 화제가 된다.

정작 영화의 내용보다 여배우의 노출에 관심이 쏟아졌지만, 김호선의 데뷔작 ‘영자의 전성시대’는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온 어린 여성들의 비극적인 몰락이 비교적 잘 표현된 영화였다.








 

 

영자의 전성시대 

신인 배우 염복순이 연기한 농촌 출신 영자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집의 가정부로 일한다. 공장의 젊은 노동자 창수의 구애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자는 연애보다는 돈을 벌어 시골집의 살림에 보태는 것이 더 중요한, 어리지만 나름의 꿈과 계획이 있는 똘똘한 아가씨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주인집 방탕한 아들의 강간으로 깨지고, 영자는 쫓겨난다. 서울에 먼저 올라와 자리 잡은 고향 언니가 사는 중랑천변의 무허가 판잣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 영자. 호스티스 일을 하는 언니가 남자를 데리고 오면 영자는 찬바람이 부는 거리로 쫓겨나와 여인숙에서도 가장 값싼, 여러 사람이 합숙을 하는 방의 차가운 윗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버틴다. 기술이 없는 그녀는 가내수공업을 하는 봉제 공장에서 실을 감는 일을 한다. 드디어 월급날. 그녀가 받은 월급에서 가게 외상값, 여기저기서 빌린 빚을 갚고 나자 동전 몇 개만 손바닥에 남는다. 그녀의 언니와 영자는 손바닥 위의 동전 몇 닢을 보고 히스테릭하게 웃는다. 언니가 ‘빠’에서 버는 돈에 비하면 너무나도 허무하고 웃기는 돈이다. 영자는 ‘빠’에서 일하기로 결심하고 언니를 따라 나서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무렵 영자에게 꿈이 생긴다. 여자 택시 운전사가 되는 것이다. 일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자고 버스 안내양이 되는데, 만원 버스에 매달린 영자가 손님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 넣으려 애를 쓰는 순간. 뒤에서 오던 차에 그녀의 손이 부딪히고 잘려진 그녀의 팔은 빌딩 숲 사이로 날아가버린다. 외팔이가 된 영자는 팔 한쪽 값으로 30만 원을 받고 그 돈을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있는 시골로 전부 보내버리고 자살을 결심한다. 사는 것도 어렵지만 죽는 것도 어려운 일. 그녀는 팔이 없는 빈 소매를 등 뒤로 감추고 창녀로 전락하고 만다. 전형적인 신파 멜로드라마지만, 주인공들이 전전하는 목욕탕 때밀이, 철공소 직공, 식모, 버스 안내양, 봉제 공장 노동자, 호스티스 같은 직업과 그들이 일하는 곳의 풍경을 리얼하게 묘사하려 노력한 점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신인 염복순은 백치미를 지닌 여배우라는 평을 들으며 이후 1980년대 한국 여배우들의 관능미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백치미란 단어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고 여배우가 주인공인 호스티스 영화의 기틀을 다진다.



 

목마른 소녀 정윤희

정윤희가 주연한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의 한 장면.

 

70년대 트로이카 

영화 ‘나는 77번 아가씨’의 정윤희도 처음에는 야쿠르트 배달부터 안 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빚을 갚아준다고 속인 날건달 같은 사내 김희라에게 딸을 빼앗기고, 딸을 되찾기 위해 무교동 바닥에 들어선 것이다. 그녀들의 말대로 무교동 바닥에 들어선 여자치고 사연 없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아름다운 정윤희는 단시일에 최고의 인기 호스티스가 되고, 그녀의 등골을 빼먹으려는 김희라와 그녀의 몸뚱이만을 노리는 온갖 종류의 남성들 사이에서 딸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1978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이후 호스티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극장가를 점령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극장가는 남자가 주인공인 무협영화와 여자가 주인공인 호스티스 영화로 양분됐다.

1970년대 중반. 1960년대 극장가를 수놓았던 여배우 트로이카가 사라진 빈자리를 대신하려 수많은 여배우가 등장했다. 아역 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해 성인 영화 ‘별들의 고향’과 ‘어제 내린 비’에 출연한 안인숙, 깜찍하고 발랄한 연기로 떠오른 ‘바보들의 행진’과 ‘병태와 영자’의 이영옥, 미스 롯데였던 서미경, ‘성숙’으로 신인 연기대상을 받은 유망주 양정화, ‘영자의 전성시대’의 염복순 등등. 수많은 여배우의 등장과 퇴장 속에서 ‘나는 77번 아가씨’의 여주인공 정윤희는 최고의 흥행 여자 배우로 등극했고 비슷한 시기 주가를 올리던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새로운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사람으로, 제작자들이 찾는 1순위 여배우가 됐다.

사실 데뷔 초기 정윤희에 대한 충무로 제작자와 감독들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예뻐서 인기는 많은데 연기를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등장한 장미희 역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1960년대 트로이카 문희나 남정임, 윤정희에 비하면 그녀들의 연기는 초보 수준이었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자연스러운 액션과 대사표현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당시 모든 신인 여배우의 대사는 성우가 대신 했으니 그녀들에게서 대사 표현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얼굴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으로만 연기력을 보자면 1970년대 장미희의 표정은 다채롭지 못하고 뭔가 억지스럽다. 장미희가 표현하는 표정이 10여 가지라면 정윤희는 고작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빈약했다. 그렇지만 예뻐서 인기는 있으니 난감했다.  






 


다방 레지, 꽃순이 

정윤희는 1975년 정소녀 주연의 영화 ‘욕망’(이경태 감독)으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같은 해 출연한 영화 ‘청춘극장’(변장호 감독)에서는 비교적 비중이 높은 조연을 맡았는데, 여주인공 김창숙과 신영일을 놓고 삼각관계에 놓인 부잣집 막내딸이었다. 이 영화에서 정윤희는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인형같이 예쁜 얼굴을 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한 여자를 연기하는데 아름다운 얼굴만 아니라면 관심 밖으로 사라져버릴, 특별할 것 없는 배우였다. 이후, 그녀는 하이틴 영화 ‘고교 얄개’와 ‘고교 우량아’에서 얄개 이승현의 예쁘고 철부지인 여대생 누나로 나와 귀여운 얼굴을 내비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해태제과 CF에 출연하면서 아름다운 얼굴을 만천하에 알렸지만, 영화에서는 아직이었다.


 

1976년 정윤희는 ‘고교 얄개’에서 연인 사이로 연기한 하명중과 함께 ‘목마와 숙녀’(이원세 감독)에 출연한다. 악성빈혈에 시달리는 발랄한 여대생 정윤희는 운동밖에 모르는 순진하고 무뚝뚝한 대학 야구선수 하명중과 만나 사랑을 하고, 죽음으로 이별을 한다. 미국 영화 ‘러브 스토리’와 비슷한 내용의 멜로드라마였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한다. 이듬해 출연한 사극 ‘임진왜란과 계월향’에서 정윤희는 임권택 감독과 만난다. 배우는 좋은 감독을 만났을 때,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으악새’ 영화(액션 폭력 영화에 대해 무시하는 표현으로 배우들이 ‘으악’ 하며 쓰러지는 장면만을 찍는다고 붙여진 이름)를 닥치는 대로 찍었던 그 옛날의 임권택 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으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하던 변화기의 임권택 감독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는 이 영화와 배우에 대해 흥미가 없었다. 친구였던 제작자 정진우 감독의 부탁으로 TV에서 인기가 있던 정윤희를 써 TV 방송국에 작품을 팔 의도로 영화를 만든 것이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참”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정윤희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77번 아가씨’가 만들어졌다. 얼굴은 예쁘지만 연기는 안 되는 배우. 그러나 대중은 그녀가 나오는 영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출연해 남성 관객의 욕망을 충족해주는 영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정윤희는 남성 관객의 욕망과 그것을 정확하게 노린 영화 제작자들에게 몇 년간 소모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김국환이 부른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꽃순이를 아시나요?’ 로 더 유명한 영화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협 감독, 1978)에서 정윤희는 시골에서 서울로 와 다방 레지가 됐다가 사진작가, 레슬링 선수 등등의 남자를 거치면서 결국 ‘꽃순이’란 이름으로 환락가를 전전하는 몸이 되는 역을 맡는다. 이후 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배역은 거의 모두 비슷하다. 발랄하고 청순한 여대생 아니면 순진한 시골처녀로 서울에 올라와 불행에 빠지는 비운의 여주인공이었다. 남성 관객들은 그녀가 무엇을 연기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만을 보러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1979년. 정윤희가 영화배우로 기억된다면 그래도 이 작품이라 할 만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 ‘여자들만 사는 거리’(1976) ‘겨울여자’(1977)로 1970년대 후반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떠오른 김호선 감독의 영화 ‘죽음보다 깊은 밤’(1979)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여자가 망연한 얼굴로 누워 있다. 죽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잠에 빠진 것인가?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둠. 그녀는 어둠 속에 누워 있다. 이어 유행가 소리. 여자들의 악다구니 소리. 술주정뱅이들이 길 구석에서 구토를 하거나 오줌을 누는, 말 그대로 지옥과도 같은 뒷골목 술집 거리에 젊은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정윤희. 여대생이다. 의처증에 걸려 걸핏하면 술손님들에게 패악질을 하는 아버지, 모진 수모를 참아내며 족발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정윤희는 자신의 집인 족발집 앞에 섰다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행패 부리는 모습을 보고는 발길을 돌려 달아난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남자친구가 일을 하는 밤업소. 음대생인 남자친구는 밤업소의 밴드에서 건반연주와 노래를 하며 학비와 생계비를 벌고 있다. 정윤희는 남자친구가 부르는 노래를 나지막이 따라 부른다. “나는 불꽃처럼 세상을 태워 한 움큼 재가 되어 세상에 흩어진다네” 여대생인 정윤희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여자다. 그녀는 어머니처럼은 안 살겠다고 집을 뛰쳐나온 여자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불태우는 찬란한 불꽃이 되고자 하는 여자다.




 


죽음보다 깊은 밤 


목마른 소녀 정윤희

정윤희는 1984년 사업가 조규영 씨와 결혼하며 스크린을 떠났다. 

 

1978년 상업적인 성격이 농후한 한국 영화에서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이 노골적으로 나온 예는 흔치 않다. 정윤희는 지긋지긋하게 가난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는 1970~80년대 한국 여성의 콤플렉스를 표현하는 여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키가 160cm 밖에는 안 되는 작은 여자’라 말하며, ‘남자에게 귀여워 보이고 싶은 것이 자신의 본질’이라는, 현실에서의 정윤희와 배우 정윤희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듯한 대사를 한다. 이제 정윤희는 한 사람의 여배우가 돼가는 것이다.

정윤희는 가난한 남자친구의 등에 올라타 부잣집 담장을 넘겨다보며 커다란 정원과 아름다운 조경수를 사달라고, 소꿉장난을 하듯 자신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처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언젠가 그녀가 날아오르거나 불꽃으로 타버릴 유일한 장점이자 약점이다. 잘생긴 재벌 2세의 눈에 들어 모델 제의를 받고 와인과 양식을 대접받고 가난한 남자친구의 자취방으로 들어온 정윤희는 가난한 남자친구가 정성껏 준비한 김치찌개를 발로 차서 뒤엎어버리고 “이게 뭐야. 이렇게 살 바엔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라며 히스테리를 부린다. 끝내 남자친구를 별 볼일 없는 딴따라라고 부정하며 재벌 2세에게 가버린다. 그녀는 세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다. 오직 자신만을 사랑한다. 1970년대 말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여성의 욕망. 남자에 의해 잘잘못이 가려지고 남자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인생을 살고 싶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여성을 정윤희는 연기한다.

 

이 시기에 그녀는 가수로도 데뷔한다. 데뷔곡은 ‘목마른 소녀’. 음정이 미묘하게 뒤틀린 그녀의 노래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욕망을 좇는 여주인공은 대개 부정적으로 보이기 일쑤인데, 정윤희는 전혀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고 연민을 자아낸다. 이른바 굿 캐스팅이었던 셈. 정윤희는 악녀도 아니고 팜 파탈도 아닌, 작은 체구로 남자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기 인생의 성공을 꿈꾸는 목마른 소녀였다.

 


짧은 전성기, 빠른 은퇴 

영화배우로 5년 차에 접어들 무렵. 그녀는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에 출연한다. 1970년대 초 ‘으악새 영화’나 찍는다며 무시를 당하던 이두용 감독이 작심하고 만든 걸작이다. 제작사는 감독의 재능을 믿고 전폭적인 지원을 했으며, 감독도 쫓기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이 영화에서 정윤희는 빨치산 대장의 딸로 기구한 인생을 사는 여인으로 나와 그럴듯한 연기를 해낸다. 요란한 술집 작부 화장을 한 정윤희가 방석집의 벽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는 대목은 기구한 운명을 산 여성의 절망이 설득력 있게 표현된 장면이다. 이쯤 되면 “어라 정윤희도 연기를 하네”라며 놀랄 수밖에 없다. 정윤희도 자신이 남성 관객의 눈요깃감으로 소모되는 그런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즐긴 모양이다. 오대산 정상에서 촬영할 때의 일이다. 자신의 촬영분을 모두 마친 정윤희가 산 아래에서부터 갖고 올라온 꽁치통조림을 까서 불을 피워 꽁치를 굽고 술 한잔을 준비한 뒤 촬영에 지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어여쁘고 귀여운 목소리로 “자 와서 꽁치 한 점과 술 한잔 하세요”라고 청해 모두를 기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때는 1980년. 이두용 감독의 야심작이며 한국 영화사상 최고 걸작 중 하나인 ‘최후의 증인’은 갈가리 찢겨져 2시간 30분짜리 영화가 1시간 30분으로 잘리고 도려내졌다. 극장에서도 일주일을 못 채운 채 내려져 관객과의 만남을 원천 봉쇄당하고 만다.  

이듬해 정윤희는 다시 임권택 감독과 만난다. 이번엔 ‘만다라’를 만들고 물이 잔뜩 오른 임권택 감독이었다. 영화 제목은 ‘안개마을’ 시골 학교의 여선생으로 출연한 정윤희는 마을의 바보이며, 이상한 남자 안성기에게 강간을 당한다. 안성기는 바보지만, 여성이 섹스에 목말라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는 여성의 욕구를 해소해주는 이상한 남자다. 그의 존재에 대해 마을 남성들도 여성들도 모두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정윤희가 약혼자와의 약속이 어그러지면서 히스테리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 안성기가 따라와 그녀를 강간한다. 정윤희는 처음엔 반항하지만, 그와의 섹스로 뭔가가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임권택 감독은 마을을 떠나게 된 정윤희를 클로즈업해 여러 가지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어 했다. 정윤희는 몇 해 전 ‘임진왜란과 계월향’을 찍을 때 인기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찍었던 그런 배우가 아니었다. 아직 성에 차지는 않지만 임권택 감독이 주문하는 복잡한 감정을 미묘한 표정의 변화로 전달하는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뿔사! 그녀가 슬슬 연기자가 되어 가려던 그때. 그녀에게 들어온 영화는 ‘벌레 먹은 장미’였고, 몇 해 뒤 간통 사건이 터지고 그녀는 결혼을 하며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만다.





 


아름다웠던 여인 

나는 정윤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를 극장에서 동시대에 관람한 기억이 없다. 그녀가 조연으로 출연한 ‘고교 얄개’와 ‘고교 우량아’가 그녀를 극장에서 본 작품의 전부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거나 중학생이던 내 나이 또래의 남자 중 정윤희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애간장을 졸인 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 이야기에 낄 자리가 없다. 정윤희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정진우 감독, 1980)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정진우 감독, 1981)를 본 그들의 경험담을 듣다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를 보이면 그들은 대개 나를 깔보곤 했다. 


 

고교 2학년 아니면 3학년 때, 버스를 타고 이태원 앞을 지난 적이 있다. 신호에 걸린 버스가 잠시 멈춰 섰을 때, 나는 인도에 사람들이 모여서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내 눈길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 한 여자가 담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작고 까무잡잡하지만 아름다운 인형 같은 여자. 영화 촬영 중인 정윤희였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창가로 몰려들어 그녀를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신호가 바뀌고 차는 떠났다.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몇 해 전 DVD로 나온 정윤희 주연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를 보고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정윤희의 얼굴이 예쁘다는 기억만 남은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여배우 정윤희는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지만, 미처 세상을 태우는 불꽃이 되지는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2013.01월 호

⑦ ‘애마부인’ 안소영의 눈물

 

큰 가슴에 갇혀 꺾여버린 배우의 꿈 

  • 1980년대를 회상할 때면 늘 매캐한 최루가스와 함께 ‘애마부인’이 떠오른다. 쓸쓸하고 황량하던 그 시절, 나는 술을 마시면 친구들과 심야상영관으로 몰려가 에로영화를 보며 청춘을 흘려보냈다. 하얀 속옷만 입은 채 빗속을 질주하던 안소영은 그 무렵 우리에게 ‘가슴 큰 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실은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배우였다는 걸, 대사 한 마디 없는 장면에서나 제 모습이 까마득히 멀어져 점처럼 보이는 순간에조차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려 한 연기자였음을 그때 알았다면, 안소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배우로서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사회성 짙은 영화에서조차 옷을 벗어야 했던, 정사(情事) 신을 촬영한 뒤 세트장 한편에서 홀로 통곡하던 안소영의 눈물을 추억한다.

 

‘애마부인’ 안소영의 눈물

배우 안소영이 하얀 속옷 차림으로 빗속을 질주하던 영화 ‘애마부인’의 한 장면.

 

1982년 2월. 고등학교 졸업식 하루 전날, 졸업식 예행연습을 위해 학교에 간 나는 대학학력고사 보기 한 달 전부터 고이고이 기른 머리카락을 잘릴까봐 가위를 들고 다니는 선생의 눈을 요리조리 피해 도망 다니는 힘든 하루를 보냈다. 교문을 나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오늘이 고등학교 생활의 마지막 날임을 깨달은 나는 친구들과 뭘 하면 오늘을 뜻 깊게 보낼 것인지를 의논했다. 종로통으로 진출해 보란 듯이 술을 먹자는 쪽으로 의견이 좁혀졌을 때, 한 친구가 다른 의견을 냈다. ‘미성년자 관람 절대 불가’ 영화인 장안의 화제작 ‘애마부인’(정인엽 감독)을 보고 술을 먹어야 오늘을 뜻 깊게 보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영사기에 16mm 프린트를 걸어 그 유명한 ‘엠마뉴엘 부인’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가 가진 엄청난 부와 그의 선심에 고마움을 느꼈던 우리는 그의 주장을 따르기로 했다. 여배우의 가슴이 어마어마하다느니, 원래 제목은 ‘愛馬부인’이었는데, 검열 때문에 ‘愛麻부인’으로 바뀌었다느니 하는 소문을 신문에서 보았고, ‘완전 성인영화! 관능, 에로티시즘’ 같은 선전 문구를 떠올리며 ‘이제 에로티시즘이란 것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타 종로 3가 서울극장 앞에 도착했다. 평일 오후 2시쯤이었는데도 극장 앞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남자였다. 그들 모두 애마부인을 만나러 온 것이다. 세상에! 백주 대낮에 이렇게 할 일 없는 남자가 많다니. 하하하. 나는 그렇게 애마부인 안소영을 처음 극장에서 대면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만큼이나 수많은 애마 시리즈가 극장에 걸렸다. 2대 애마 오수비는 말만 탄 것이 아니라 해변에서 사타구니를 벌리고 파도에 흠뻑 젖은 관능의 워터 쇼를 보여줬고, 3대 애마 염혜리(나중에 김부선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백치미라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줬다. 점입가경. 4대째에 가서는 ‘파리애마’가 등장해 88올림픽과 함께 글로벌 애마의 시대, 이제 우리는 세계를 생각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점을 마련해줬다.  

내가 20대를 보낸 1980년대는 애마부인의 시대였으며, 아직도 생각만 하면 코끝이 매캐해지는 최루가스의 시대였다. 술을 마시고 나서 우리는 신림역 주변의 동시상영관으로 우르르 몰려가 심야상영으로 애마부인들을 섭렵했고,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도 ‘애마부인’과 ‘산딸기’ 시리즈, ‘뼈와 살이 타는 밤’ 같은 에로영화를 보는 것으로 소중한 시간을 죽였다. 어찌 보면 참 쓸쓸하고 황량한 20대였다.  






 


예술과 음란 사이 

‘애마부인’ 안소영의 눈물

1980년대 에로영화 전성시대를 연 안소영 주연 영화 ‘애마부인’ 포스터.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이 1980년대 대한민국 극장가에서 벌어진 것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여배우와 남자배우가 정사 신을 찍었다는 것만으로 감독이 교도소에 수감되고 출연배우가 검찰 조사를 받았었으니 말이다. 1969년 7월 3일, 검찰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저속한 외설을 뿌리 뽑겠다며 특별단속반을 편성해 일제 단속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단속의 칼날은 먼저 도서 출판 쪽을 겨냥했다. 당시 대중잡지였던 ‘아리랑’과 ‘인기’가 음란소설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음란죄 철퇴를 맞았다.
 
칼날은 곧이어 영화 쪽으로 향했다. ‘벽 속의 여자’(박종호 감독, 1969) ‘당신’(이성구 감독, 1969) ‘내시’(신상옥 감독, 1968) ‘이조여인 잔혹사’(신상옥 감독, 1969)가 수사 대상이 됐다. 신상옥 감독과 박종호 감독이 음화 제조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김지미와 문희, 신성일과 윤정희가 검찰 조사를 받았다. 시나리오 검열 때 남녀의 정사 장면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는데도 촬영을 강행했고, 영화를 개봉하고 나서 검열에 다시 걸리고 나서야 정사 장면을 삭제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검열과 표현의 자유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유현목 감독의 목소리가 컸다. 유현목 감독을 괘씸하게 본 검찰은 그가 몇 해 전 만든 영화를 갖고 꼬투리를 잡았다. 1965년 상영됐던 유현목 감독의 영화 ‘춘몽’을 음란물유포죄로 기소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영화가 이미 검열을 통과해 극장에서 상영됐고, 문제가 된 남녀 배우의 정사신은 삭제 후 개봉했다는 점. 별문제 없는 것인데, 검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삭제해 일반에 공개했더라도 정사 신을 촬영한 것 자체가 음란죄라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었다. 검찰은 삭제해 보관 중이던 필름을 조사했고, 법정에서 유현목 감독은 음화제조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표현의 자유와 여배우의 옷을 벗겨 돈벌이하는 것의 차이는 어찌 보면 애매하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기 십상이다. 당시만 해도 여배우의 노출이, 그래봤자 약간 농도가 짙은 키스 신이나 여배우의 어깨 또는 허벅지가 드러나는 정도였지만, 화제가 됐고, 그것은 당장 흥행 성공으로 연결되는 시대였다. 그래서 제작자와 감독은 검열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노출 수위를 높였다. 검열의 가위가 약간 느슨해지면 노출 수위가 높아지고, 검열이 강화되면 움츠러드는 숨바꼭질이 무한 반복됐다.  

1970년대 중반, 조금씩 현실을 비판하는 영화가 나오기 시작하자, 검열의 가위는 노출 수위 쪽에 느슨해지고 정권에 비판적인 영화 쪽에 바짝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1974년. 당시 뉴 페이스로 남성 팬의 관심을 끌었던 양정화 주연의 영화 ‘성숙’(정소영 감독)에서는 비록 1, 2초에 지나지 않고 대역 여배우의 가슴을 노출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배우의 가슴이 노출된다.

주인공 양정화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한다. 아이의 아버지인 애인은 적반하장. 자신과 섹스해 임신한 양정화를 정조 관념이 희박하다고 탓하며 결별을 선언한다. 애인에게 배신당한 그의 배가 불러온다. 이상한 점을 눈치 챈 아버지는 양정화를 불러다놓고 폭력적으로 상의를 벗긴다. 이때 여배우의 가슴이 드러나는데, 사실 영화 속 주인공의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관객의 눈요기만을 위한 아주 뻔뻔한 노출 장면이었다.









 

폭우 속의 질주 


‘애마부인’ 안소영의 눈물

육감적인 몸매보다는 연기력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배우 안소영. 

 

1975년 개봉한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감독)에서도 비록 뒷모습이기는 하지만 여주인공 염복순의 상반신 누드가 검열에 걸리지 않은 채 관객을 만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 영화는 엄청난 흥행 기록을 세웠고, 창녀가 주인공인 영화도 검열에 통과한다는 전례를 만들어냈다. 이후 만들어진 여배우가 주인공인 영화들에서는 어떻게 하면 배우를 벗길 것인지에만 골몰하는 불쾌한 기운이 느껴진다. 장미희가 주연한 ‘겨울 여자’(김호선 감독, 1977)는 상반신 노출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내용과는 별 상관도 없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다른 영화들도 검열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여배우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신인 여배우들이 주연으로 발탁돼 옷을 벗었다.

세상이 변하면서 직업을 가진 여성이 늘어났고, 영화는 그들에게서 소재를 찾았다. 호스티스나 창녀, 여대생, 현지처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고, 때마침 흥행이 보장되는 여배우 세 명이 등장했다.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이 그들이다. 이 세 명의 여배우와 그들의 자리를 노리는 신인 여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아직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검열의 가위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영화 속 여배우들은 속이 비치는 얇은 옷에 노브라 차림으로 연기했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언제나 하얀 속옷 차림이거나, 하얀 잠옷 차림, 또는 얇은 하얀 옷차림이었다. 남성 관객들은 비에 흠뻑 젖어 사시나무처럼 떠는 그녀들의 영화 속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은 옷이 딱 달라붙어 훤히 비치는 가슴만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야금야금, 찔끔찔끔거리다 마침내 1982년 ‘애마부인’의 개봉으로 서슴없이 여배우의 가슴 노출을 선전하고, 여배우의 가슴 크기로 영화를 광고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애마부인’은 1970년대 중반 에로티시즘을 표방하며 프랑스에서 개봉한 쥐스트 자캥 감독, 실비아 크리스탈 주연의 에로티시즘 영화 ‘엠마누엘 부인’(1974)을 비롯해 ‘O양의 이야기’(쥐스트 자캥 감독, 1975), ‘채털리 부인의 사랑’(쥐스트 자캥 감독, 1981) ‘빌리티스’(데이비드 해밀튼 감독, 1977) 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여배우의 옷을 벗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애쓴다는 나름의 예술관을 표방한다. 그것이 바로 영상미이며 에로티시즘의 미학이다. 하지만 영화적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치졸한 수준의 포그 필터, 과도하게 관능적인 음악 등을 사용한 게 전부였다.




 


육체파 배우의 등장 


‘애마부인’ 안소영의 눈물


‘애마부인’의 흥행 성공은 댐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이제까지 한국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극장가를 점령하고 나선 것이다. ‘애마부인’의 감독 정인엽은 얼굴이 예쁜 여배우보다 섹시한 매력의 여성들을 캐스팅하는 데 주력했다. 관능미, 백치미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새로운 유형, 즉 얼굴이 예쁘기보다는 섹시한 육체파 여배우를 선호했고, 신인을 주연으로 기용했다. 그러면서 한국 영화 여주인공의 얼굴과 체형이 바뀌는 시대가 왔다. 

1960~70년대에도 관능적인 매력을 지닌 여배우들이 있긴 했다. 최지희, 오수미, 문숙 같은 이들인데, 당시엔 그들의 매력을 표현할 방법이 별로 없었던지 ‘이국적인 마스크’라고 선전되곤 했다. 그들은 동양적으로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을 선호하는 당시 남성 관객의 취향 때문에 주연보다는 도발적인 성격의 조연에 머물렀고, 비슷한 얼굴이던 염복순의 경우 영화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단명하고 말았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전형적인 동양 미인의 얼굴이 아닌 안소영, 오수비, 염혜리 같은 배우가 육체로 승부를 걸었고, 영화제작자들은 그들의 육체로 관객을 설득한 것이다.  

‘애마부인’의 여주인공은 언제나 정숙한 유부녀다. 남편의 외도와 무관심 속에 ‘내가 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며 침묵하고 인내하는 여성이다. 그런데 주변 사회가 바뀐다. 여성이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남편이 자신의 성욕을 해결해주기만 기다릴 수는 없고, 수동적인 자세로 성욕을 억제하며 살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남자들이 자신의 성욕을 밖에서 발산하고 다니는 동안, 참고 참았던 부인의 성욕이 폭발한다. 폭발의 도화선은 언제나 남편의 외도가 들키는 시점이다. “네가 한다면 나도 한다.”  




애마부인 안소영은 가슴 큰 여배우로 성공을 했다. 그리고 그가 출연한 모든 영화는 가슴으로 홍보됐다. 두 번째 영화 ‘탄야’(노세한 감독, 1982) 역시 포스터와 내용 모두 ‘애마부인’과 비슷했다. ‘애마부인’이 성공한 그해 안소영은 ‘불바람’(김수형 감독, 1982) ‘암사슴’(김수형 감독, 1982) 같은 ‘애마부인’의 아류작에도 출연했다. 그리고 ‘산딸기’(김수형 감독, 1982)에서는 현대 여성이 아닌 시골 처녀로 등장해 향토 에로물 시리즈의 시대를 연다.

당시 현대 여성의 애욕을 다룬 영화의 다른 편에는 일제강점기 또는 조선시대 농촌 또는 산골을 배경으로 여성의 애욕을 그리는 시대물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그런 영화들이 붐을 이루기 시작한다. 문여송 감독의 ‘처녀의 성’(1977)은 당시 신인이던 김영란을 주연으로 내세웠고, 정진우 감독은 정윤희 주연의 향토 에로물을 만들었다. 이두용 감독의 ‘뽕’(1985)은 최고의 흥행작이 됐고, 현대 에로물에는 담을 수 없는 고금소총류의 해학이 담긴 이런 영화들은 ‘변강쇠’(엄종선 감독, 1986)에 가서 정점을 찍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현대 에로물과 함께 비디오 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에로 비디오의 시대를 열게 된다.


 

배우라는 자존심 


‘애마부인’ 안소영의 눈물

배우 안소영은 ‘애마부인’에서 욕망에 충실한 유부녀를 연기했다.. 

 

안소영의 초기 출연작은 임권택 감독의 ‘내일 또 내일’(1979)이다. 당시 신인 여배우가 첫 등장할 때 주로 맡는 배역 중 하나는 스타급 여배우와 스타급 남자배우 사이에 끼어들어 삼각관계를 이루는 축 역할이었다. 정윤희가 처음 맡은 인물도 신영일과 김창숙 사이에 끼어든 발랄하고 아름다운 부잣집 딸이다. ‘내일 또 내일’의 안소영도 그랬다. 이덕화와 정희 사이에 끼어들어 삼각관계를 만드는 발랄하고 자유분방한 여대생이다.

안소영은 이 작품을 들어, 자신이 가슴 때문에 배우가 된 것이 결코 아님을 항상 강조하곤 했다. 자신은 극단 출신으로 연극에서 연기의 기초를 배웠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일 또 내일’에서 신인 연기자 안소영의 연기는 합격점이다. 이후 조연배우 생활을 하던 그녀에게 주어진 ‘애마부인’ 역이 그를 스타로 만들었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배우의 길에서 멀어지도록 할 줄을 그는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안소영은 자신이 연기자라는 자존심을 가진 여자였다. 그래서 더 이상 가슴 노출을 하는 배역이 아닌 연기로 승부를 걸려 한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의식이 강한 이 여배우가 스타가 된 후 처음으로 가슴을 선전하지 않는 영화에 출연한 것은 ‘티켓’(1986)이다. 자신을 배우로 만들어준 감독 임권택의 영화였다.  

강원도 속초. 서쪽에는 태백산맥이 버티고 있고, 동쪽에는 검푸른 동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바다를 상대하는 사나운 남자들과 이북에 고향을 둔 삼팔따라지 인생들이 모여 사는 남자들의 도시다. 남자 상대하는 직업을 전전하다 이곳까지 흘러온 여자들은 속초의 직업소개소에 모여 자신을 데려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다방 사장 김지미가 직업소개소로 들어온다. 그녀는 냉혹한 얼굴로 자신의 다방에서 일을 할 레지들을 고른다. 첫 번째로 고른 여자는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묶고, 디스코 바지를 입은, 딴에는 유행의 첨단을 걷는 빠꿈이 같은 여자 안소영이다. 안소영은 술에 취하거나 싸울 때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또박또박 서울말을 쓰며 남의 일에는 신경 안 쓰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동료 다방 레지의 단골손님도 빼앗아버리는 야무진 또순이다. 그가 장거리 커피 배달을 나선다. 다방에서 오토바이를 모는 남자가 뒷자리에 그녀를 태우며 한마디한다. “꽉 잡아. 떨어져서 죽어도 난 모른다.” 그렇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남자가 속력을 내자 안소영은 보라색 실크 목도리를 휘날리며 탄성을 지른다. 남자가 소리친다. “스피드 좋아해?” 안소영은 목소리를 높여 대답한다 “죽어!” “미쳐.” “오빠 달려!” 좀 놀아본 여자를 저렇게 단숨에 표현할 수가.







욕망과 현실 

야무진 다방 레지 안소영은 속초의 바닷가로 촬영온 영화 촬영 팀을 보고 나이 많은 조연급 배우 장혁에게 다가간다. 팬이라는 것. 그는 영화배우의 꿈을 갖고 있고, 언젠가 만났던, 아마도 서울의 어느 다방에서 손님으로 와 아무 생각 없이 농을 걸었을 영화감독의 헛소리를 금과옥조로 믿고 있다. 그 감독에 의하면 자신은 영화배우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 장혁은 그녀를 자신의 호텔 방으로 부른다. 감독에게 소개해주기 전 연기 테스트를 하겠다는 것. 장혁은 안소영을 앉혀 놓는다. 왼쪽에 라이트, 그리고 앞에는 카메라. 남자는 이제 카메라가 서서히 안소영의 얼굴로 다가간다며 그녀를 마음껏 농락한다. 안소영은 다방에서 레지 일을 할 때는 빠꿈이일지 몰라도 늙고 추한 배우라는 남자 앞에서는 바보다. 그는 자신이 영화에 캐스팅됐다고 믿고 촬영 팀 숙소인 호텔로 다시 찾아간다. 가진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꽃다발까지 준비한 채. 호텔 현관 앞.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스태프들에게 안소영은 장혁을 만나러 왔다고 한다. 스태프들은 그가 이미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 빠꿈이는 그제야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카메라는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그녀의 행동을 관찰한다.  

안소영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연기력을 보여줄 가장 중요한 순간이 바로 지금임을 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호텔 현관은 그늘져 있고 그녀의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그늘 속에서 꼼짝 않고 서 있는 것만으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다. 안소영과 임권택이 빚어낸 최고의 장면이다. 자신이 커다란 가슴만으로 스타가 된 배우가 아니라 연기자라는 것을, 안소영은 이 단 한 장면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그녀는 ‘티켓’ 이후 연기자로 인정받고 더 좋은 영화에서 자신의 연기력을 표현할 기회를 잡지 못한다. 1988년 또 한 편의 사극 에로 영화 ‘합궁’(남기남 감독)에 출연한 후 그녀는 사라진다. 그리고 무수한 소문이 돌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의 후처로 들어갔다느니, 결혼을 했다느니…. 그리고 잊혔다.

1992년 안소영은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진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인정받던 박광수 감독의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 출연을 결정한다. 임권택의 ‘티켓’ 이후 또 한 번 ‘애마부인’이 아닌 연기자로서 변신할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영화의 스태프였다. 안소영이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맡은 배역은 ‘벌떡녀’. 여자 혼자의 몸으로 해녀 일로 먹고 사는데 남자를 좋아해 ‘벌떡거린다’고 동네 여자들이 붙인 별명이다.

서러운 눈물 

안소영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자신의 연기력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옷 벗는 연기는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벌떡녀’는 남자를 밝히는 여자였고, 동네로 흘러들어온 땜장이와 눈이 맞아 정사를 하는 장면이 시나리오에 있었다. 안소영에게 가장 부담되는 것이 바로 그 장면이었다. 세트에서 정사 신을 찍던 날, 그녀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정사 신을 다 찍은 후 세트장 구석에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게 옷 벗는 연기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또 하게 된 것이다. 스태프들은 여배우의 서러운 눈물을 보며 할 말이 없었고, 숙연한 기분이었다.  

내가 영화 일을 하기 위해 연출부의 막내가 됐을 때, 처음 본 스타급 여배우가 안소영이다. 영화사 사무실에 처음 찾아온 안소영은 제과점에서만 팔던 고급 아이스크림을 한보따리 사왔더랬다. 그는 자신이 애마부인 이미지를 벗기 위해 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우리에게 자신이 가슴 크기로만 스타가 된 배우가 아님을 다시 강조하며 연기로 승부를 걸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에는 여배우가 네 명이나 출연했고, 연출부들은 각자 한 명의 여배우를 전담하기로 했다. 나는 안소영 담당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감동한 것은 추석이 지난 9월 말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해녀 연기를 할 때였다. 카메라 바로 앞에서는 떠오르는 스타 심혜진이 물에 빠지는 연기를 하고 있었고, 안소영은 저 멀리에서 바닷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해야 했다. 심혜진이 물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야 하는데 바닷물이어서 그런지 몸에 추를 주렁주렁 달아도 완전히 잠수가 되지 않고 그녀의 모습이 바닷물 위로 어른거려 연거푸 재촬영을 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이 끝난 뒤 나는 담요를 들고 안소영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나에게 “점으로 보인 내 연기 어땠어요?” 하고 물었다. 연출부 막내에게 화를 내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던진 농담이지만, 설움의 감정을 다 숨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후배 배우가 연기하는 뒤, 저 멀리 배경에서 점으로밖에 안 보여도 맡은 역은 해내는 연기자였다.














 

 

02월 호

⑧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섹시한 커리어 우먼 이미지로 영화판 ‘올킬’ 

  • 1980년대 여배우들은 고만고만했다. 1970년대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었다. 당시 한국 영화의 화두는 ‘노출 수위’였다. 여배우를 얼마나 벗기느냐가 지상과제였다. 여배우들은 그저 소모품으로 여겨졌다. 그럴 때, 전혀 다른 유형의 한 여배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몸에 착 붙는 청색 투피스를 입은 커리어 우먼. 미모와 지성, 게다가 섹시하기까지 한 이 신세대 여성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바로 심혜진이었다.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도대체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이란 어떤 밤일까. 1980년대 중반, ‘뼈와 살이 타는 밤’(1985, 조명화 감독)이란 영화가 상영되는 삼류 동시 상영관 앞에서 얼큰하게 술에 취한 나는 친구들과 극장 간판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심야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들과 나는 한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뭐 별거 없네.”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을 치른 서울의 1980년대. 해외여행이 자율화됐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그런 세상이 됐는데, 서울의 극장가에는 말과 개를 비롯한 동물들을 사랑하는 온갖 부인네가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내는 영화들이 판을 쳤다. 조선시대 여인네가 이상한 막대기를 손에 들고 깜짝 놀라는 얼굴로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고?’ 하는 영화들, 성매매를 하는 비운의 여성들의 벗은 몸이 화면에 가득한 세상이었다.

한국 영화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말에 생긴 동네 극장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동네의 유서 깊은 제2개봉관들이 UIP(다국적 영화배급사) 직배 영화관이 되어 개봉관으로 승격됐다. 그 대신 상가 건물의 지하에는 작은 동시상영관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객석이 100여 석 남짓한 이 극장들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버스 정거장 하나에 하나씩 생겨났다. 극장에 들어가면 요구르트를 하나씩 나눠주기도 했다.  

“이야! 영화도 보고, 요구르트도 먹고.” 이태원과 압구정동에는 해외여행 자율화로 잠깐 미국 물을 먹은 아이들이 오렌지족이라 불리며 청춘을 불태울 때, 낑깡족임을 자처한 돈 없고 한심한 나 같은 청춘들은 동네 동시상영관에서 주말 밤에 ‘뼈와 살이 타는 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요구르트를 쪽쪽 빨았다.  

입에 꽃 한 송이를 문 사내 하나가 산마루에 서서 바지춤을 내리고 힘을 쓰자 지축이 흔들린다. 사내가 쏟아내는 오줌발은 소방 호스 물줄기처럼 콸콸 쏟아져 폭포수가 되고 금세 계곡이 되고 강이 되어 버린다. 사내의 반대편 북쪽에선 한 여인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소변을 본다. 그러자 단단한 바윗덩이에 구멍이 파이고, 커다란 동굴이 되어버린다. 두 사람의 가공할 만한 정력은 보통 사람들이 당해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남에서 북으로, 여자는 북에서 남으로 짝을 찾아 길을 떠난다. 남남북녀가 드디어 만나 합궁을 하자 사슴들이 놀라 도망가고 새들이 땅에 떨어진다. 땅과 하늘이 들썩이고 지구가 요동을 치고 은하계가 부르르 떤다.  

변강쇠와 옹녀의 가공할 정력을 다룬 영화 ‘변강쇠’다. 이를 비롯해 조선시대의 야담인 고금소총, 어우야담에서 소재를 가져온 영화들이 쏟아져나왔고, 당시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여성 인신매매 소재 영화 ‘매춘’ 시리즈, 동물을 사랑하는 유부녀 시리즈들이 1980년대의 극장가를 점령했다. 이런 영화들을 우리는 에로영화라 불렀다. 주말에 여가를 즐길 마땅한 놀이가 없었던 젊은 남자들은 에로영화가 상영되는 동네 극장을 찾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다가, 낄낄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1970년대 ‘트로이카’라 불리던 여배우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여배우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들은 불운했다. 1970년대 중반~1980년대 말 한국 영화는 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맞았다. 이런 암흑기에 등장한 여배우는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갖췄어도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좋은 시나리오와 감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미경, 이보희, 나영희 같은 이들이 그런 경우다.  

이보희의 등장은 신선했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암담했던 시기에 절치부심한 이장호 감독은 ‘바보선언’(1983)으로 사회적 울분을 토해냈고 관객은 공감했다. ‘바보선언’에서 이보희는 가짜 여대생으로 출연해 그녀의 신선한 외모를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보희 주연의 ‘무릎과 무릎사이’(1985, 이장호 감독)와 ‘어우동’(1985, 이장호 감독)이 개봉됐다. ‘애마부인’ 이야기에 약간의 지적인 해석으로 여성의 트라우마를 넣은 ‘무릎과 무릎사이’는 흥행에 성공했다. 이장호 감독은 그 여세를 몰아 조선시대 야담에서 이야기를 가져온 ‘어우동’을 만든다. 조선시대 여성 수난사의 틀에 에로티시즘을 덧입힌 이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한다. 연기력으로 그녀의 존재감이 발휘되기 이전, 이보희는 에로틱한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흥행을 이끈 여배우로 각인되고 만다.  

1979년에 데뷔한 원미경은 아름다운 외모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하고 ‘김두한형 시라소니형’(1981, 김효천 감독) ‘종로 부루스’(1982, 김효천 감독) 같은 깡패 액션 영화의 조연을 맡거나 고만고만한 멜로 영화에 주연으로 등장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없었다. 오히려 애욕에 가득한 여인으로 등장한 ‘반노’에서의 노출 때문에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해묵은 논쟁을 부른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이두용 감독)를 통해 비로소 연기 잘하는 여배우로 인정받기 전까지 그녀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노출 여배우들의 시련 

나영희는 ‘어둠의 자식들’(1981, 이장호 감독)로 영화계에 데뷔해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2, 정진우 감독)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녀를 화제의 중심으로 만들어준 영화는 역시 ‘매춘’(1988, 유진선 감독)이었다. 그녀는 데뷔작인 ‘어둠의 자식들’에서 ‘카수 영애’로 등장, 가수를 꿈꾸었으나 창녀로 전락한 한 많은 여자를 연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영화 ‘매춘’에서 매춘녀 역을 맡으며 최고의 흥행을 거둔 것이다. 영화가 개봉되자 아무도 그녀의 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가슴 노출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1980년대 후반엔 대놓고 에로배우라는 칭호를 받는 여배우들도 등장했다. 1984년 ‘산딸기2’(김수형 감독)로 등장한 선우일란, ‘애마부인’ 출신의 오수비, ‘어울렁 더울렁’(1986, 차성호 감독), ‘요화 어울우동’(1986, 김기현 감독)의 김문희 같은 이들이다.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심혜진, 최민수가 주연한 영화 ‘결혼이야기’.

 

1970년대 말부터 한국 경제는 발전을 거듭해 1980년대에는 호황기로 접어들었다. 돈을 주고 여성을 사는 성매매 문화는 ‘빠’에서 ‘룸싸롱’으로 옮겨갔고, 무교동 유흥가는 강남 유흥가에 자리를 내줬다. 1980년대 중반 ‘꽃피는 남서울 영동’이란 가사의 노래가 나올 정도로 강남은 유흥문화의 중심이 됐다. 성매매 여성이 부족해지자 인신매매라는 극악한 수법으로 여성을 매춘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범죄가 사회 전반에 퍼진다. ‘매춘’이란 영화는 인신매매에 걸려든 불행한 여성들을 다룬 영화였지만, 그녀들의 고통을 표현하기보다는 그녀들을 벗겨서 눈요깃감으로 만드는 데 급급했다.  

에로영화가 넘쳐나던 이 시기에 임권택 감독은 인간의 고통과 한국 사회의 갈등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의 노력에 대한 작은 보답이 베니스 영화제 수상이었다. 조선시대 여인 수난사를 다룬 이야기인 ‘씨받이’(1986)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 주인공은 강수연. 아역 배우 출신인 강수연은 이 영화로 월드 스타라는 칭호를 받았고, 일약 충무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여배우로 등극했다.

하지만 1980년대 한국 영화의 화두는 역시 노출의 수위였다. 검열에 걸리지 않고 여배우를 얼마나 벗기는가, 이것이 ‘애마부인’ 이후 한국 영화의 목표였고, 남성 관객들은 여배우의 가슴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이 시기의 여배우들은 오로지 남성 관객과 공모한 남성 영화 제작자들의 볼거리로 소모되고 말았다.  

1980년대에 등장한 여배우들은 모두 고만고만했다. 1970년대의 여배우들과 비교하면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었다. 영화도 다 그렇고 그렇다. 그 시기 한국 영화를 본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다. 교양과 품위를 지닌 사람들은 한국 영화를 보지 않았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배용균 감독) 같은 영화가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하면 입에 올리는 정도였다.  






 


신세대 여왕벌의 등장 

한국 영화가 관객에게 철저히 외면받던 1980년대, TV 광고 속의 한 여성이 젊은 남성들뿐 아니라 젊은 여성들의 눈길까지 사로잡았다. 하늘색 블라우스에 몸에 착 달라붙는 짙은 청색 투피스를 입은 회사원 여성이었다. 그녀는 키가 또래의 남자들보다 조금 더 크거나 대등했고, 팔꿈치로 옆자리의 남자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그녀는 남자의 한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아, 알았어!’라는 뜻을 전하곤 다시 일에 몰두한다. 미모와 지성, 섹시함을 두루 갖췄을 뿐 아니라 자기 힘으로 돈을 번다. 바로 커리어 우먼의 등장이었다.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던 여성이 코카콜라 광고에 등장한 것이다.

1980년대 말 이 광고를 본 수많은 여성은 광고 속의 여성과 닮으려고 노력했고, 당시 나이 어린 여자들은 커서 이 여자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적이고 세련됐으며 섹시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들 앞에서 당당하고 존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 옆의 남성들도 모두 한가락 하는 멋쟁이이지만, 이 여자 앞에서는 뭔가 모자라 보였다. 매혹적인 신세대 여왕벌, 그녀는 심혜진이었다. 

대중의 인기를 얻은 여자 연예인을 놓치지 않는 것이 영화계다. 그녀는 바로 영화에 진출했다. 첫 출연작은 ‘물의 나라’(1989, 유영진 감독). 이 영화에서 심혜진은 사장의 내연의 처 역을 맡았다. 그 후 ‘그들도 우리처럼’(1990, 박광수 감독)에서 다방 레지로 출연했고, ‘하얀 전쟁’(1992, 정지영 감독)에서는 스트립걸로 나왔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코카콜라 광고에서 보여준 것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했다. 자칫 한때 반짝하고 지나가는 그런 여배우 중 하나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던 중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1992)가 개봉됐다. 스태프와 영화 제작자 모두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으로 힘을 뭉쳐 만든 영화였다. 심혜진은 이 영화에서 몇 해 전 코카콜라에서 보여주었던 그 당당한 여성, 새로운 여성의 등장을 완결짓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공동묘지의 묘비가 보인다. 묘비명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 앗! 이게 뭐지? 공포영화인가?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여 묘지 앞 커다란 나무로 다가간다.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남녀가 옷을 벗어 집어 던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결혼을 앞둔 최민수에게 이미 결혼한 직장 동료와 선배들이 한마디씩 한다. “결혼은 뜨거운 감자, 차라리 감옥이 낫다. 마누라가 없는 곳, 그곳이 천국이다.” “좀 더 신선하고 스릴 있는 자살 방법을 생각해라. 결혼은 초라하고 냄새나는 진부한 자살 방법이다.” 최민수는 그들이 하는 말이 실감이 안 난다. 그냥 질투하는 것 같다.  












남자 엉덩이를 토닥이는 여자 

장면이 바뀌면 심혜진이 여자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중 한 여자는 화를 내며 심혜진에게 “네가 결혼하면 당장 절교다”라는 폭탄선언을 한다. 그러나 동료와 선배들의 협박과 위협에도 최민수와 심혜진은 결혼에 돌입한다. 같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최민수는 PD이고, 심혜진은 단역 성우다. 두 사람이 복도에서 마주친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이 서고, 서로의 엉덩이로 손이 간다. 최민수가 심혜진의 엉덩이를 톡톡 치자, 심혜진도 지지 않고 최민수의 엉덩이를 토닥여준다. 그러고는 춤을 추듯 서로의 엉덩이를 부딪치며 애정공세를 펼친다. 남녀의 대등한 애정 표현이 이만큼 발랄하고 상쾌했던 한국 영화가 있었을까.

영화는 단숨에 관객의 호응을 얻어냈고 새로운 세대, 새로운 영화의 탄생을 알렸다. 최민수는 1960년대 한국 남성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런 남성이다. 다만 그때의 남성들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착하고, 여유롭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은 어머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사랑으로 부부관계의 험난함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심혜진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어머니나 여성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신세대 여성이다. 최민수는 치약을 끝에서부터 눌러 짜라고 하고, 심혜진은 그냥 아무렇게나 눌러 짜면 안 되느냐고 맞선다. 최민수는 심혜진이 목욕을 하고 난 뒤 세면대에 붙은 머리카락에 진저리를 치고, 심혜진은 최민수가 소변을 보고 난 뒤 좌변기에 떨어져 있는 ‘물방울’에 진저리를 친다. 그녀는 남편과의 섹스에서는 전혀 얻어내지 못했던 흥분과 희열을 대타로 얻은 배역에서 멋지게 성공한 후 얻는다. 자기 일의 성취감에서 느낀 흥분은 섹스 따위보다 더 강렬한 것이었다.  

최민수는 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에 대해 깜짝 놀라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심혜진이 자기의 진짜 세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자기의 진짜 세계와 결혼의 세계 사이에서 그들은 갈등한다. ‘나의 진짜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침대처럼 가구의 일종인가?’ ‘여성은 남편에게 섹스를 대주는 빨래판인가?’ 결국 심혜진은 선언한다. “당신과의 결혼생활은 나에겐 악몽이었다”고. ‘결혼이야기’의 성공 이후 남자들 앞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신세대 여성의 캐릭터를 획득한 심혜진은 단숨에 1990년대 새로운 영화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1994년작 ‘세상 밖으로’(여균동 감독)에서 그녀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싱싱하게 뛰어논다. 그녀의 배역은 젊은 부자의 세컨드 또는 호스티스다. 그런 그녀가 두 탈옥수 문성근과 이경영을 만나 날뛰기 시작한다.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그녀가 파출소에 끌려간 부분인데, 경찰관이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라고 하자 “내가 나인데 왜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냐”며 대든다. 내가 나를 증명하는 데 왜 증명서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친 문성근과 이경영을 욕하면서 그녀는, 남자들에게 동등한 위치와 똑같은 의리를 요구한다. 그녀는 자신을 ‘썅년’이라 욕하는 이경영을 제압하는 기를 지녔다. 쫓기는 자들이기에 그녀는 항상 뛰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그녀는 뛰는 것이 싫다고 외친다.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 병수발을 들면서 설거지를 마치고 지각하지 않기 위해 학교로 달려가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 또 뛰어야 했던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심혜진은 달랐다 


80년대 신여성 아이콘 심혜진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에 출연할 당시의 심혜진(오른쪽)과 진희경. 

 

1995년 심혜진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오병철 감독)에 출연한다. 강수연, 이미연과 함께 출연한 그녀는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중산층 여성을 연기한다. 대학 때부터 현실감각이 뛰어났던 그녀는 돈 많은 산부인과 의사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남편은 아내인 심혜진과 섹스를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며 세컨드 여자와 거리낌 없이 외도를 한다. 그러나 심혜진은 남편에 맞서기 위해 똑같이 맞바람을 피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심혜진은 서울 강남에 사는 부유한 여성의 욕망과 고통을 설득력 있게 연기해냈다.

심혜진은 자세히 뜯어보면 결코 예쁜 얼굴을 가진 배우는 아니다. 돌출된 입과 말처럼 긴 얼굴, 약간 사이가 먼 눈. 이것만 놓고 보자면 전형적인 여배우의 얼굴은 아니다. 1960년대였다면 주연 자리는커녕, 배우 근처에 발도 못 붙일 얼굴과 키였다. 하지만 1990년대는 그녀를 원했다. 1980년대의 격변기를 치러내고, 욕망이 발산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그 시기에 그녀는 가장 1990년대다운 여배우였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잘 모르는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할 때 가장 힘들었다”고 1990년대를 떠올렸다.

아쉽게도 나는 그녀가 ‘이게 뭐람?’이라 생각했을 법한 영화에서 같이 일했다. 연출부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박광수 감독)’에서 같이 일을 했고, ‘초록 물고기’(1997, 이창동 감독)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심혜진은 시골 마을마다 꼭 한 명씩은 있었던 약간 모자란 처녀 바보 옥님이 역을 맡았다. 도회적 이미지의 그녀가 1950년대 전라도 시골 마을의 바보 처녀 역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중요한 역이었다.  

심혜진은 자신의 촬영분이 있기 며칠 전부터 바보 옥님이의 의상을 입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첫 촬영분이 있기 전날에도 그녀는 진도의 시골길을 옥님이 옷을 입고 돌아다녔는데, 우리가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 그녀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진도의 들판에 홀로 서서 논밭 너머 멀리 해가 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진짜 바보 옥님이가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녀가 코카콜라 광고로 뜬 그렇고 그런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초록 물고기’에서 심혜진은 깡패 두목 문성근의 애인이며, 문성근의 부하인 한석규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 역을 맡았다. 극중에서 심혜진은 등에 칼자국이 무수히 나 있는, 과거를 알 수 없는 여자였고 이유도 없이 기차를 타고 혼자 어디로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여자였다. 깡패들이 나오는 영화이니, 그들이 활개를 치는 밤 시간에 주로 촬영이 이뤄졌다. 깡패의 애인이니, 그녀 역시 밤에만 주로 활동했다. 그녀가 낮에 촬영한 신은 영화의 첫 장면인 기차 신과 마지막 장면인 버드나무집 신뿐이었다. 그녀의 촬영 시간은 늘 새벽 2시부터 6시까지였다.  

가장 아름답게 보여야 할 여배우가 매일 밤잠을 설치면서 촬영장에 대기하는 건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배우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조감독인 나는 그녀 때문에 항상 스릴을 맛보곤 했다. 그녀가 촬영장에 제 시간에 도착한 날은 앞의 촬영분이 끝나지 않아 마냥 기다리게 해서 그녀의 살벌한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고, 그녀가 좀 늦는 날은 공교롭게도 앞 신의 촬영분이 너무 일찍 끝나는 바람에 모두가 그녀를 찾아 나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톱스타의 정중한 사과 

강행군으로 밤 촬영이 진행되어 모두가 피곤이 극에 달한 어느 날, 그녀가 일을 냈다. 좀 늦게 오기는 해도 조감독인 나만 알고 감독과 스태프는 모르게 촬영 시간을 잘 맞춰왔던 심혜진이 그날은 아주 늦어버린 것이다. 새벽 2시에는 와야 할 그녀가 한 시간 반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스태프가 짜증을 내고 그들의 원망을 한눈에 받던 나는 눈길을 피해 촬영장인 나이트클럽의 문 밖 계단에서 스릴을 만끽하며 서 있었다.  

늦어도 꽤 늦은 시간. 드디어 그녀와 매니저가 나타났다. 욕을 덜 얻어먹을 방법은 먼저 화를 내는 거라고, 매니저가 내게 화를 내며 불평을 늘어놓으려 입을 떼자 심혜진은 매니저의 말을 막으며 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녀에 대한 원망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톱스타 여배우의 정중한 사과를 받아본 것은 그때 심혜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심혜진은 대단히 쾌활하고 천방지축이며 어찌 보면 맹한 구석도 있는 명랑한 배우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웬만한 남자보다 멋진 여자였다.




 


03월 호

연기로 확인된 존재감 전도연

한국 여성의 욕망과 불안 뿜어내는 ‘칸의 여인’

  • 관객을 설득하기 위해선 무엇이든 하는 배우. 전도연의 연기는 사람들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다. 심은하·고소영 같은 화려함은 없었지만 연기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했다. ‘해피엔드’는 여배우의 노출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단박에 깨뜨렸다. ‘밀양’에선 고통을 피처럼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려 관객을 사로잡았다. 전도연은 21세기 한국 여성의 욕망과 불안을 처음으로 설득력 있게 연기해냈다. 이다지도 처절하게 옷을 벗은 여인이 또 있을까.

 

연기로 확인된 존재감  전도연

2007년 5월 칸 국제영화제에서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

 

1990년대 초, 나는 비디오 플레이어를 사서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TV ‘토요명화’를 통해서만 영화를 보는 시대는 이제 굿바이였다. 나는 당장 이소룡 영화와 왕우 영화 등 온갖 무협영화 비디오테이프를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사 모았다.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한번 상영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나는 왕우의 저 멋진 혈투 장면을 ‘갖고’ 싶었다. 방법은 단 하나, 내 머릿속에 기억으로 저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극장 안에서 한 영화를 일곱 번이나 보고 또 보았다.  

1980년대만 해도 부자 친구 집에 가야만 구경할 수 있던 베타 방식의 비디오 플레이어는 VHS 방식으로 전환된 1990년대 들어 각 가정에 보급돼 비디오 시대를 열었다. 1980년대 극장가를 휩쓴 에로영화들은 점차 극장에서 사라졌고, 대신 동네 비디오 가게의 최고 흥행물로 변신했다. 여전히 동물을 사랑하는 부인들의 인기는 사라지지 않아 ‘젖소 부인’ 시리즈가 ‘애마 부인’ 시리즈의 후계자로 등장했다.  

비디오 시장은 극장 손님을 빼앗아 갔지만, 한국 영화 제작자들에게는 비디오 판권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줬고, 한국 영화계가 ‘꼭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영화의 질은 점차 좋아졌다. 더는 한국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가는 게 창피하지 않게 됐다. 20대 젊은 관객들이 한국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가는 아름다운 광경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1970년대 한국 영화 제작비의 거의 모든 부분을 좌지우지했던 지방 흥행업자들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대신 삼성, 대우, 현대 같은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투자대비 이익을 내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은 대부분의 대기업은 투자한 지 4~5년 만에 철수했다. 하지만 모두 떠난 건 아니었다. 일신창투 같은 투자회사가 한국 영화 제작에 새롭게 뛰어들었고, 1990년대 말에는 롯데, CJ 같은 대기업이 영화전문 투자회사를 설립했다.








 
뭔가 부족했던 고소영, 심은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 제작사, 지방 흥행업자가 영화 제작비의 전부를 부담했기에 당연히 그들이 기획하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는 영화기획사라는 것이 생겨나 문화가 바뀌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새로운 인재들이 영화계에 뛰어들었고, 이들이 개발해 만든 영화가 늘어났다. 신문광고에만 의존하던 영화 광고는 영화사의 전문 홍보실, 영화 홍보 전문 회사들을 통한 홍보로 점점 바뀌어나갔다. 특히 영화계에 새롭게 등장한 여성들의 파워가 대단했다.  

한국 영화는 1990년대 들어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새로운 세대의 여배우들이 나타났다. 고소영이 대표적인 경우다. 1970년대에 태어난 젊은 남자 관객들은 고소영의 미모에 빠져들었다. 고작 CF 한두 편에 출연했을 뿐인 그녀에게 영화계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러던 중 ‘결혼 이야기’(김의석 감독, 1992)등 관객들의 기호와 감성에 맞는 영화를 만들던 1950~60년대생들을 주축으로 한 영화 제작사 ‘기획시대’가 고소영을 주연으로 야심 찬 기획을 시도한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컴퓨터그래픽(CG)을 이용한 영화 ‘구미호’(박헌수 감독, 1994)였다. 미남 신인 배우 정우성과 미녀 신인 배우 고소영의 조합은 영화 촬영 초부터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수준 낮은 CG , 엉성한 스토리, 특히 고소영의 어설픈 연기에 관객은 실망했다.  

고소영은 1997년 ‘비트’(김성수 감독)에 정우성의 여자친구 로미 역으로 출연했다. ‘비트’가 상영된 후 젊은 남자들 사이에선 한쪽 눈을 뒤덮는 머리카락과 지포 라이터가 열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10여 년 전 홍콩 영화 ‘영웅본색’이 몰고 온 이쑤시개 씹기, 라이터 불 입으로 빨아들이기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트’의 고소영은 정우성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1994년, TV 연속극 ‘마지막 승부’의 여주인공이 시선을 모았다. 심은하였다. 같은 해 그녀는 TV 연속극 ‘M’과 ‘숙희’에 출연해 아름다운 외모와 연기력을 지닌 여배우로 기대를 모았고 다음 해 바로 영화에 진출했다. 제목은 ‘아찌 아빠’(신승수 감독, 1994). 그러나 영화를 본 관객들은 충격을 받았다. TV에서와는 달리 그리 예쁘지도 않았고 연기도 별로였기 때문이다. 1996년 정우성과 심은하가 나온 ‘본투킬’(장현수 감독, 1996)도 별 재미를 못 봤다.

두 편의 영화에서 실패한 심은하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였다.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고소영과 심은하가 여배우 후보로 거론됐다.

심은하의 발탁 소식에 많은 이가 반신반의했다. 전작에서 보여준 형편없는 연기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신인 감독이 주연 배우들을 자기 마음대로 캐스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8월의 크리스마스’ 시나리오는 멜로드라마가 너무 심심하다는 이유로 충무로의 누군가는 “이런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가 장사가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망설이던 한석규가 출연하기로 결심하자 심은하가 영화 출연을 승낙했다.












 

심은하의 촬영 첫날, 시나리오 작가였던 나는 현장에 있었는데 나이 드신 스태프 한 분이 심은하 옆으로 다가가 예의를 갖추면서 “전작처럼 연기를 하면 안 된다.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 스태프 모두가 심은하의 연기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랬던 심은하는 자신의 촬영분 3회 만에 “아, 다림이는 저런 여자였구나!”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며 현장을 설득하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여배우로 거듭났다.


전도연의 재발견 ‘해피엔드’ 

1990년대 중반 이후 심은하가 한국 영화계 최고 여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 그늘에 가려 있던 여배우가 있었다. 1990년 존슨앤존슨 화장품 CF에서 청순한 소녀 이미지로 눈길을 끌고 뒤이어 TV 드라마 몇 편에 출연한 전도연이었다. 넓고 시원한 이마와 밝은 웃음이 매력적인 배우였지만, 너무 아기 같은 얼굴이었고 작아 보였다. 심은하, 고소영, 김희선 같은 미모의 여배우들이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고 있을 때 전도연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전도연의 첫 영화 출연작은 ‘접속’(장윤형 감독, 1997). 당시 전도연은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배우였다. 아무도 그녀의 연기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놀랍게도 전도연은 한 남자를 짝사랑하는 역을 설득력 있게 해냈다. 그러나 ‘접속’은 분명 전도연보다는 한석규에게 더 관심이 쏟아진 영화였다.  

전도연의 두 번째 출연작은 ‘내 마음의 풍금’(이영재 감독, 1998)이었다. 전도연은 선생을 짝사랑하는 소녀 역을 맡았다. 전도연은 외모에서 풍기는 소녀 같은 이미지 때문에 두 편의 영화에서 성공했지만, 연기 폭은 너무나 좁게 느껴졌다. 그녀에게는 미성숙의 느낌이 강했다. 그것은 독특한 개성이면서 동시에 한계로 비쳤다. ‘약속’(채희주 감독, 1998)에서도 전도연은 조폭 두목과 사랑에 빠진 여의사 역을 맡아 미성숙의 이미지를 버리려 애를 썼지만, 모두들 박신양의 영화로만 생각했을 뿐 전도연에게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때까지 그녀의 연기에서 기억나는 것은 그저 활짝 웃거나, 수줍은 듯 웃거나, 큰 눈에서 수정 같은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이듬해, 전도연은 모험을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저 멀리 아파트 복도 끝에서 한 여자가 카메라를 향해 걸어온다. 활동적인 전문직 여성들이 즐겨 입는 고급 양장 바지 차림이다. 당당하게 걷는 그녀는 전도연이다. 그때 화면의 왼쪽에서 한 여성이 들어온다. 뒷모습이지만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는 투피스 차림이다. 성숙한 여성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녀가 전도연을 지나쳐 간다. 전도연과 그녀가 비교된다. 성숙해 보이려 눈 화장도 짙게 하고 옷도 차려입고 심지어 키도 비슷했지만, 전도연에게선 뭔가 미성숙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전도연이 들어간 곳은 내연의 남자 주진모의 집이다. 장면이 바뀌면 뒤엉켜 서로의 혀를 탐닉하는 두 남녀가 화면에 가득 찬다.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관객들의 눈앞에 섹스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미성숙하고 청순할 것만 같은 전도연을 떠올리던 관객들의 허를 찌르며 영화가 시작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신인 감독 데뷔작의 첫 장면에서 여배우의 가슴을 보여주고, 돈벌이를 위한 섹스신이 아니라 남녀 사랑의 밀도를 표현하기 위한 농밀한 섹스신을 성공적으로 담아낸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여배우 전도연의 연기였다. 소녀 같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연기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과감하게 도전한 그녀의 배우 정신 때문이었다. ‘해피엔드’(정지우 감독, 1999)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














어둠과 빛을 연기한 여배우 

영화 속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의 스토리를 관객에게 설득하기 위해 여배우는 섹스신을 연기해야 한다.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섹스신이 필요하다면 감독은 연출하고 여배우는 연기해야 하는 것이다. 1970~80년대에 여배우들을 이용해 불필요한 섹스신을 찍어댔던 한국 영화계의 트라우마가 영화 일을 하는 우리들의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신인 정지우와 전도연은 그것을 과감하게 걷어내버렸다.

영화 속 전도연은 더 이상 나무 뒤에 숨어 짝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을 훔쳐보곤 수줍게 미소 지으며 달콤한 사랑을 꿈꾸는 소녀가 아니었다. ‘해피엔드’에서 전도연은 두 남자, 남편 최민식과 내연의 남자 주진모를 자기 앞에 세워놓고 둘이 서로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오랜 세월 거세돼온 여성의 권력의지를 각성하고 미소 짓는 여자를 연기했다. 다가올 2000년대 한국 여성들의 욕망과 결핍을 표현하는 여배우로 거듭난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의 변화와 자각이 두드러졌다. 서비스산업이 발전하면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잘하는 일이 생겨났고, 여성들은 그 분야에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남성보다 저임금을 받으면서도 똑같은 일을 해내는 여성 노동자를 자본도 선호했다. 출근길 전철에 탄 남성과 여성의 수가 대등해졌다. 여성 전용칸만으로는 여성을 수용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오랫동안 남성들의 세계였던 이곳에서 돈을 번 여성들이 자기계발서를 사 읽고, 나는 무엇이고 뭘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요가를 하고 헬스를 하고, 성형수술을 하고, 멋진 남자들과 섹스를 한다.

하지만 뭔가가 채워지지 않는다. 그녀들의 욕망과 불안은 뭘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해피엔드’에서 전도연은 이러한 2000년대 한국 여성의 욕망과 불안을 처음으로 설득력 있게 연기해냈다.








 

‘해피엔드’는 벗는 연기를 하는 여배우는 제대로 된 여배우가 아니라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콤플렉스를 단번에 깨뜨렸다. 전도연은 영화 속 주인공의 감정을 관객에게 설득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여배우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해피엔드’ 이후 전도연은 박흥식 감독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에서 일과 연애에 지친 보습학원 선생 역을 해냈고, 유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에선 전직 권투선수인 조폭 애인에게 눈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매를 맞지만 끝내 속내를 감추고 남자들 엿 먹일 궁리를 하는 전직 라운드걸이자 가수 지망생, 겉으로는 맹하고 푼수 같은 범죄자 역을 해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감독, 2003)에서는 정절을 지키는 여자에서 사랑에 눈을 뜨고 비극적인 최후를 향해 가는 조선시대 여인 역을 해냈고, 박흥식 감독과 다시 만난 ‘인어공주’(2004)에선 어머니와 딸 역을 동시에 해내며 어머니의 풋사랑을 이야기했다. 전도연은 빛과 어둠 두 가지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하는 2000년대 대표 여배우로 떠올랐다.

2000년대 이후 전도연은 심은하, 고소영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결혼과 함께 스스로 여배우의 길을 버린 심은하, 연기자로서의 삶보다는 CF에 간간이 출연하며 존재감만 확인해주는 존재가 된 고소영과 달리 모두가 인정하는 배우로 살아남았다. 여배우는 미모로 시작하지만 결국엔 연기로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을 전도연은 제대로 증명해 보였다.





“보고 있냐?” 

2007년 전도연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 출연한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이창동 감독이 영화로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남편과 아들을 잃고 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마저 실패한, 증오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여주인공을 연기할 여배우는 누구일지 궁금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맑은 하늘이 화면에 가득 찬다. 아마도 신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그곳.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의 주인공은 관객이기도 하고 여주인공 전도연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 하늘 아래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죽은 남편의 고향에서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꾸리려 했던 전도연은 새로운 고장의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여자 취급을 받는다. 죽은 남편의 고향을 찾아온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죽은 남편과의 금실도 썩 좋지만은 않아서, 남편은 바람을 피웠던 것 같지만 그녀는 애써 부인한다.

전도연은 왜 이곳으로 찾아온 것일까. 그녀는 과부의 몸으로 낯선 고장에서 살아가기 위해 돈이 좀 있는 척도 하고, 상가 여주인들과 술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가고, 지역 시의원의 집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기도 한다. 서울에서 상심한 그녀가 이곳 밀양에서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삶은 아들이 유괴당하고 살해되면서 박살난다. 결국 그녀는 기독교로 도피하면서 새 삶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새 삶을 살고 있다는 확고한 증거가 필요했던, 아직 뭔가 불안하고 결핍돼 있던 그녀는 아들을 살해한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불안과 결핍이 사라지고 충만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살해범은 그녀가 용서하기도 전에 신에게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녀는 “어떻게 당사자인 내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네가 용서를 받을 수 있냐”며 절규한다. 신이 뭔데, 나를 따돌리고 저희들끼리 용서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도연은 야외 부흥회장에서 목사가 설교를 하던 중에 가수 김추자의 히트곡‘거짓말이야’를 틀어 예배를 방해하고 부흥회장을 빠져나오며 하늘을 힐끗 쳐다보며 묻는다. “보고 있냐?”

그녀는 자신에게 집요하게 전도한 집사의 남편인 장로를 유혹해 갈대밭에서 섹스를 시도한다. 남자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속삭인다. “보고 있냐?”












고통의 대가 ‘칸 여우주연상’ 

전도연은 신과 대결하는 여자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교인들의 집에 돌을 던지고, 자신을 짝사랑하는 송강호에게 위악을 떨고 끝까지 간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보고 있냐!”라고 속삭이며 목과 이마에 핏대를 세운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고통의 클라이맥스다. 이쯤 되면 이 영화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두려워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신에게 도전하고 끊임없이 싸움을 거는 여주인공과 그것을 연기하는 전도연을 보면서 관객인 나는 고통받는다. 전도연은 여주인공의 고통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같이 고통스러워한다. 한국 영화에서 이처럼 처절하게 고통을 피처럼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리는 여주인공을 본 적이 있던가.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연기를 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뭔가를 표현하기 위해 억지로 꾸며내지 말라는 얘기다. 배우들은 이창동의 주문에 막막해하며 그와 일한다. 전도연 역시 그런 주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영화의 중반에 이르면 연기를 포기하고 여주인공의 심연 속에 들어가 고통 받는 것처럼 느낀다. 그 고통의 대가로 그녀는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다.  

저런 힘든 역을 했으니 좀 쉬겠지, 했는데 다음 해 전도연은 ‘멋진 하루’( 김희수 감독, 2008)에 출연한다. 소품이었지만, 뜬금없이 헤어진 애인 하정우에게 몇 년 전에 꿔준 돈을 받으려는, 상심한 2000년대 여성을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이어 ‘밀양’만큼이나 여주인공의 감정 진폭이 크고, 노출 수위도 높은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에 보란 듯이 출연해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고급 샹들리에에 목을 매고 분신하는 2000년대 한국 여성의 기괴한 지옥도를 표현해낸다.  

어찌 보면 전도연은 무섭다. 저러다가는 하얗게 타버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모텔 종업원으로 출연해 그녀가 나오는 신에 잠깐 얼굴을 내민 적이 있다. 전도연 일행을 방으로 안내하다가 그녀가 하는 말을 엿듣고 경찰에 신고하는 역이었는데, 만약 지금의 전도연이 등장하는 신에 출연하라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저히 못할 것 같다.






 

 
 04월 호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

엄앵란-이영옥-강수연 이은 청춘영화 막내 헤로인

  • ‘맨발의 청춘’의 엄앵란, ‘바보들의 행진’의 이영옥,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의 강수연. 한 시대를 풍미한 청춘영화 여주인공들이다. 2001년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 그 뒤를 이었다. 아니, 완벽하게 뛰어넘었다. 미모, ‘너 죽을래?’같은 전지현식 협박, 남자를 주도하는 독립적인 캐릭터에 관객은 매료됐다. ‘엽기적인 그녀’를 추월할 만한 청춘영화는 10년 넘게 안 나오고 있다.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

 

2001년 여름. 영화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감독)가 개봉됐을 때, 나는 솔직히 짜증이 났다. ‘또 엽기냐?’는 생각이 앞섰다. 1990년대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엽기’는 이미 끝물을 타고 있었다. 2000년에 등장한 ‘엽기토끼’가 자동차 뒷유리창이며 침대와 소파까지 점령한 뒤였다. 인터넷 자유게시판을 도배한 주제도 온통 ‘엽기’였다. 그럴 때 나온 영화라 그런지, 일단 제목부터 식상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엽기적인 그녀’는 바로 몇 해 전 프린터 광고에 나와 섹시한 테크노댄스를 추던 신인 배우 전지현이었다.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등장인물이 입었던, 우주복 비슷한 옷을 입고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질끈 동여맨 그녀를 보면서 나는 10여 년 전 심혜진이 등장했던 코카콜라 광고를 떠올렸다.  

광고 속에서 그녀들은 당당했다. 세상에 대해 당당했고, 무엇보다 남성에 대해 당당했다. 아니, 당당함을 넘어 비교우위에 선 느낌도 들었다. 그녀들은 남자에게 의존하는 여자들이 아니었고, 무엇이든 혼자서 할 수 있는 독립된 존재로 보였다. 전지현은 지적이고 섹시한 직업여성 이미지의 심혜진에 비해 3배쯤 업그레이드 된, 밀레니엄 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SF 영화의 주인공 같았으며, 섹시함과 지적인 느낌은 강인한 여전사와 비슷했다.

코카콜라 CF와 영화 ‘결혼 이야기’로 심혜진이 1990년대 여성의 롤모델이 된 것처럼,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2000년대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외모, 터프한 행동, 남성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연기 못하는 배우, 10년 휴업 감독 

CF로 얼굴을 알린 전지현은 심혜진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 진출했다. ‘화이트 발렌타인’과 ‘시월애’ 였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시월애’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전지현의 연기력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세 번째 영화였던 ‘엽기적인 그녀’는 달랐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비 오는 날의 수채화’(1989)를 만든 곽재용 감독이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흥행에도 성공하고 주제가도 히트했지만, 영화의 만듦새가 너무 허술해 비평적으로는 상당히 무시당했다. 전편의 흥행 성공에 힘입어 만든 ‘비 오는 날의 수채화 2’(1993)는 너무나 엉성해 관객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후 10년 넘게 곽재용 감독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연기가 안 되는 여배우, 흥행에 실패하고 10여 년간 휴업한 감독의 만남에 사람들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대단했다. 전지현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싱싱했고, 10년간 절치부심한 곽재용 감독의 연출력은 합격점을 받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연분홍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 주인공 차태현이 술을 마시고 있다. 1960~7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선술집에서 친구들과 군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은 ‘전방에서 근무한 공익’이라며 허세를 떨던 차태현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술집 창밖으로 지나가는 한 여자를 봤기 때문이다. 긴 생머리에 늘씬한 키, 투피스 정장 차림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차태현은 이렇게 말한다.  

“제 이상형입니다. 이상형이 지나가면 저는 못 참습니다. 말을 붙여봐야죠.”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넣은 차태현이 사냥감을 노리는 사자같이 술집 밖으로 달려 나간다. 그런데 이때 휴대전화가 울린다. 엄마다. 일곱 살 때까지 차태현을 여자 목욕탕에 데려갔던 무서운 엄마의 전화. 야수와 같던 차태현의 눈빛은 분홍색 털을 가진 애완견의 눈빛으로 변한다. 엄마는 외아들 차태현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군주로 나온다.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차태현은 전철 플랫폼의 맨 끝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술에 떡이 된 그녀, 바로 전지현이다. 순간 차태현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저 여자 위험한데’가 아니라 ‘앗! 나의 이상형’이다. 그러곤 ‘아무리 이상형이라도 술에 떡이 되어 비틀거리는 여자는 싫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 먹는다.

복학생 차태현의 모든 촉수는 오로지 하나에 꽂혀 있다. 긴 생머리에 늘씬한 키, 여배우 같은 얼굴의 ‘이상형’을 사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형 외모를 지녔다고 해도 조건이 하나 있다. 한국적인 현모양처형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이야긴가.

전철 플랫폼 끝에서 차태현이 안쪽으로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술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추한 모습에 게슴츠레 술에 취한 눈으로 차태현을 바라보던 ‘긴 생머리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자는 전철이 오자 휘청거리며 올라탄다. 여자는 전철 손잡이 기둥에 매달린 채 인사불성이다. 쇠기둥에 퉁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부딪히기를 반복하다 잠깐씩 정신을 차리는데, 그때마다 술주정을 부린다.

일단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자기 또래의 청년에게 시비를 건다. 분홍 형광색 티셔츠를 입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청년 앞에는 할아버지가 서 있다. 잠깐 정신이 든 사이 두 사람을 번갈아본 여자는 대뜸 반말로 “노인네가 서 있는데 안 일어나!”라고 소리친다. 청년이 무시하자 여자는 청년의 뒤통수를 퍽! 소리가 나도록 때린다. 이 여자, 정말 겁도 없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청년이 항의하려 하자 여자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는다. 다행히도 청년은 불쾌한 얼굴을 하고는 술 취한 여자를 피해 다른 칸으로 가버리는데, 이 여자가 갑자기 청년의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한다. “야, 분홍색 옷 입지마.”






 


“너 죽을래?” 

헛구역질을 하던 여자는 식도를 타고 역류한 음식물이 밖으로 분출되는 것을 간신히 억눌러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미처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음식물은 소 되새김질 하듯 씹어 삼킨다. 그러나 곧 다시 역류한 음식물이 자리를 양보 받은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 쏟아진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할아버지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전지현은 차태현 쪽으로 돌아서며 “자기야!” 하고는 쓰러진다.  

고스란히 뒷감당을 하게 된 차태현, 그는 이제 전지현의 포로가 돼버렸다. 전지현은 할아버지가 토사물이 묻은 가발을 벗자마자 드러난 민머리 위에 확인사살을 하듯 또다시 토사물을 쏟아내고, 졸지에 전지현의 애인으로 오인받은 차태현은 자신의 분홍색 스웨터를 벗어 토사물을 닦아낸다. 이것도 끝이 아니다. 차태현은 뻗어버린 전지현을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밤거리를 걸어 여관을 찾아내 데리고 들어갔다가 치한으로 오인받아 파출소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음 날, 어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찾아온 전지현의 태도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앙다물고는 “너 죽을래?” 하면서 차태현을 질질 끌고 다닌다. 차태현, 아니 남성 수난사의 막이 오른다.  

20대 초반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수많은 한국 영화 중 이렇게 황당한 만남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없었다. 10여 년 전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이규형 감독, 1987)에서 자기네 학교 농구팀이 경기를 잘 못하자 소주 한 병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농구팀 선수들에게 달려가 따귀를 올려붙인 강수연, 이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 박중훈이 강수연을 따라 버스에 타서는 잡상인 흉내를 내며 구애하던 첫 만남은 ‘엽기적인 그녀’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다.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1964)에서 건달 신성일이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하는 여대생 엄앵란을 구해주다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면도 이 영화에 댈 게 아니다.









 


청춘영화의 당돌한 첫 만남 

‘엽기적인 그녀’에 대적할 만큼은 아니지만, 1970년대 청춘영화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 1975)에서 남녀 주인공의 만남도 신선한 장면으로 꼽힌다.

주인공 병태는 여대 불어과 학생들과 미팅을 하는 자리에 나간다. 당시 불어과 여대생은 신부 후보감 일순위로 인기를 끈 ‘퀸카’였다. 양복을 빌려 입고 미팅 장소로 가던 병태가 장발 단속에 걸린다. 경찰에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육교 난간에 매달리는 아찔한 상황까지 연출하며 도망친 병태는 가까스로 미팅 장소에 도착한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파트너가 오지 않는다. “오늘 일진이 아주 안 좋군” 하고 중얼거리며 일어나는데 안내하는 아가씨가 “파트너가 밖에서 기다리니 가보라”고 말한다.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

 

밖으로 나가니 빨간 우산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보인다. 토끼 같은 눈망울, 아담한 키, 빨간 머플러에 나팔바지를 입은 여주인공 영자, 바로 이영옥이다. 그녀는 늦은 것을 사과하면서 “급한 일이 있는데 기다리고 있을 파트너가 불쌍해서 잠깐 와본 거다. 친구가 병에 걸렸는데,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할 일이 없었던 병태는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이영옥이 찾아간 곳은 친구가 아닌 교수의 집이었다. 그녀는 교수를 찾아가 학점을 고쳐달라고 떼를 쓴다. 어떻게 해서든 F학점을 면하려던 그녀는 급기야 교수의 집 거실에서 대성통곡을 한다. 난감해하던 교수는 “내일까지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리포트를 써오면 F학점은 면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훌쩍이며 교수의 배웅을 받고 나온 이영옥. 하지만 교수의 집 대문이 닫히자마자 훌쩍이던 얼굴은 금세 생글생글거리고, 기다리던 병태에게 “철학과 학생이니 책을 많이 읽었겠네”라고 말한다. 병태가 그렇다고 하자 이영옥은 토끼 같은 눈을 반짝이며 ‘이방인’을 읽었느냐고 묻고, 병태는 자신 있게 읽었다고 답한다. 그러자 이제는 숙제를 대신 해달라고 조른다. 병태는 뭐 아무려면 어떠냐는 얼굴로 해주겠다고 한다. 이영옥과 헤어진 후 병태가 발에서 불이 나게 서점으로 달려가 “카뮈 이방인 주세요”라고 말하며 병태와 이영옥의 첫 만남 시퀀스가 끝난다.  

1970년대의 이영옥과 1980년대의 강수연을 보면 한국 청춘영화 남녀 주인공의 첫 만남 장면에서 여주인공들은 거의 다 당돌하고 생기발랄하게 그려진다. 1960년대 영화 ‘맨발의 청춘’의 엄앵란 역시 수줍은 듯 조신하지만, 그 시대 여성들에 비하면 여간 당돌하지 않다. 엄앵란은 특유의 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건들거리는 신성일을 보고는 귀엽다는 듯 미소 짓는다. 아마 당시 여성들도 엄앵란을 보고 ‘저 여자처럼 쿨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2001년의 전지현은 당돌함과 생기발랄함을 넘어 자신의 확고한 주관이 남자 때문에 변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차태현에게 끊임없이 이벤트를 요구한다. 차태현이 난감해하면 바로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라리며 “너 죽을래?”하며 협박한다. 차태현의 학교로 약속 없이 들이닥치는 전지현, 화사한 봄 날씨에 어울리게 원피스 정장 차림에 하이힐을 신었다. 전지현은 “하이힐을 신으니 다리가 아프다”며 차태현에게 신발을 바꿔 신자고 한다. 난감한 차태현이 그냥 맨발로 가면 안 되냐고 하자 전지현은 바로 “너 죽을래?” 하며 주먹을 들이댄다. 차태현의 운동화를 신고 “나 잡아봐라”하며 앞서 달리는 전지현. 차태현은 자신을 보고 킥킥거리는 주변의 시선보다 하이힐을 신은 고통으로 죽을 맛이다. 자기를 잡으러 뛰어오지 않자 전지현은 다시 주먹을 든다. 어쩔 수 없이 전지현을 쫓아가는 차태현. 발을 죄어오는 하이힐의 고통이 이만저만하지 않다.

1970년대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이영옥도 약속 없이 병태의 학교를 찾아간다. 남녀공학인 병태의 학교는 여대생 이영옥에게는 신기한 공간이다. 여대와는 달리 그 무렵 남자들의 대학에는 시대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마침내 병태를 찾아내는 이영옥. 병태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공을 몰고 상대 골대를 향해 돌진하는 병태. 골문을 향해 슛을 날리는데 공이 아니라 병태의 운동화가 골대를 향해 날아간다.







 

병태와 이영옥은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잔디밭에 앉아 미래에 우리는 무엇이 될까를 이야기한다. 병태는 이영옥에게 기습 키스를 하려다 걷어차이고는 운동장으로 달려가 옷을 벗어던지고 “한국적 스트리킹이다”라고 외치며 미친 듯이 달린다. ‘바보들의 행진’의 학교 방문이 당시 군사독재 치하 한국 청춘들의 고통과 상심이 담긴 우울한 장면이었다면, ‘엽기적인 그녀’의 학교 방문 장면은 ‘하이힐 신고 달리기’를 통해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고역을 유쾌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바보들의 행진’이 1970년대 남성들의 억압과 우울을 담았다면 ‘엽기적인 그녀’는 2000년대 여성들의 억압과 욕망을 그려낸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여성의 억압과 욕망이 극명하게 드러난 때는 전지현이 쓴 영화 시나리오를 차태현이 억지로 읽게 하는 장면이다. 전지현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결말이 마음에 안든다며 스토리를 이렇게 고치겠다고 말한다.
‘어리바리한 시골 소년으로 분장한 차태현은 예쁜 세일러복을 입은 전지현과 함께 놀다가 소나기를 만난다. 그리고 며칠 후, 잠을 자려 돌아누운 차태현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는데, 그 소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소녀는 죽으면서 소원을 말했는데, 소년을 자기 무덤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장면이 바뀌면 차태현이 어른들에게 붙잡혀 소녀의 무덤 속으로 던져진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무덤에서 기어 나오려고 기를 쓰는데, 무표정한 어른들은 차태현을 삽으로 내려치고는 흙으로 덮어버린다.’



 


2000년대 인터넷 문화의 힘 

영화의 클라이맥스. 만난 지 100일 기념으로 전지현이 생각한 이벤트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술집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춤추러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이다. 두 사람이 나이트클럽 문 앞에서 당당하게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이며 걸어 들어가는 고속촬영 장면은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그들의 불안과 억압을 단순명쾌하게 표현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잘 만든 청춘영화는 그 시대 청춘들의 욕망과 불안을 극명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청년들의 문화가 농익어 탄생한다. ‘바보들의 행진’이 1970년대 청년문화의 주역들인 최인호, 송창식, 하길종과 아마추어 대학생 연기자들에 의해 탄생했듯 ‘엽기적인 그녀’도 2000년대 초 활발해진 청년들의 PC통신 문화를 기반으로 태어났다. PC통신 게시판에 견우라는 닉네임의 남자가 자신의 여자친구와 있었던 일들을 글로 써서 올린 것이 인기를 얻고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베스트셀러 소설도 아니고, PC통신 게시판에 올린 개인적인 소소한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2000년대 인터넷 문화의 힘이었다.  

‘엽기적인 그녀’가 만들어진 지 10여 년이 흘렀다. 당시 20대 초반이던 전지현은 30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CF에서만 얼굴을 볼 수 있는 모델로 전락했다가 영화 ‘도둑들’과 ‘베를린’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2013년. 세상은 바뀌었고, 남성들의 생각이 바뀌었듯 여성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그리고 영화도 바뀌고 있다. 영화가 처음 태어났을 때, 영화 제작자들의 고민은 ‘어떤 방식으로 관객과 영화가 만나야 돈을 벌 수 있을까’였다. 영화의 발명가로 알려진 뤼미에르는 다수의 관객을 한 장소에 모이게 해서 필름을 영사하는 방식을 생각했다. 연극을 보는 관람 행위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에디슨은 다른 생각을 했다. 그는 한 사람의 관객 앞에 그림 상자가 있어서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생각했다. 도서관과 비슷한 관람 방식이었다. 결국 뤼미에르가 승리했고, 에디슨은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TV가 탄생하고, 비디오에 이어 DVD 시대가 오고, 이제는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혼자서 영화를 보는 영화 관람 방식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람 방식과 거의 비슷한 비율이 됐다. 

한국 영화의 가장 중요한 관객층을 형성해온 20대들이 요즘 극장에 잘 오지 않는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쁘고, 웬만하면 자기 방의 모니터 앞에서 파일을 다운로드해 영화를 본다. 그래서인지 ‘엽기적인 그녀’ 이후로 감탄할 만한 청춘영화는 나오지 않고 있다. 내 생각에 가장 아름답고 싱싱한 영화는 20대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영화다. 시대마다 청춘영화가 있었고, 그 시대 젊은 여성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여배우들이 있었다. 1960년대엔 ‘맨발의 청춘’ 엄앵란이 있었고, 1970년대엔 ‘바보들의 행진’ 이영옥이 있었다. 그 암울했던 1980년대에도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강수연이 있었고, 2000년대에는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 있었다. 2010년대에는 과연 어떤 청춘영화가 나와 관객을 기쁘게 할까. 이 시대를 대표할 여배우는 과연 누구일까. 아니면 이제는 멋진 청춘영화가 더는 나오지 않을 것인가.












 

 

05월 호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절제된 감정의 끝 보여준 ‘만추’의 여인

  • 호객하지 않는 창녀. 윤리와 정욕 사이에서 고뇌하는 중년 여인. 천천히 길을 걷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삶의 고통과 절망이 배어난다. 닭똥 같은 눈물도 없는데 관객은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음습함에 전율한다. 문정숙의 연기에는 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다. ‘만추’ ‘검은 머리’ ‘귀로’가 명작으로 꼽히는 건 오로지 그녀의 연기 덕분이다. 얼굴과 몸매가 아닌, 배역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토록 관객을 사로잡은 여배우가 또 있을까.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연기력을 도외시하고 얼굴과 몸매로만 판단하는 것은 여배우를 모독하는 것이다.”  

1967년 8월 ‘서울신문’이 여배우의 얼굴과 몸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놓고 문화계 인사들에게 질문을 던지자 시인 김수영이 한 말이다. 여배우를 중심으로 한 영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작가 손소희는 “여배우의 이미지는 얼굴에 집약된다”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김지미, 문희를 예로 들었다.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있어 여배우의 얼굴 하나만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무용가 임성남과 화가 천경자는 “한국의 여배우들은 얼굴만 매만질 줄 알지 몸매를 위한 노력은 등한시한다”며 이제는 몸매의 밸런스를 유지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게 된다고 혀를 찼다. 극작가 이용찬의 대답은 의미심장했다. 그는 “뒷모습에서 여배우의 진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배우가 자기 역할을 잘 소화해서 표현하면 뒷모습에서조차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극작가다운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는 누구였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는 누구였을까.  

나는 이 질문에 단 한 명의 여배우를 떠올린다. 그녀는 첫눈에 관객의 눈을 확 잡아당길 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다. 그저 곱게 생긴 정도다. 그렇다고 몸매가 아름다운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뒷모습을 노출했을 때, 입이 험한 사람들은 “저런 몸매로 옷을 벗는 것은…”이라며 비웃었다.  

배우가 역을 잘 소화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영화 속에서 걷는 모습을 보면 된다. 주인공의 감정을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보여주지 않아도, 그저 뒷모습만으로 그 이상의 감정을 표현하는 배우가 있다. 그녀는 당대의 어떤 여배우도 보여 주지 못한 감정의 깊이를 걸어가는 뒷모습만으로 보여줬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배역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표현한 여배우”라는 극찬이 따라 다니는 사람. 바로 문정숙(1927~2000)이다.

1958년 초여름. 제1한강교를 건너 영등포를 지나 먼지를 날리며 신작로를 달리는 승용차가 있다. 새로 개장한, ‘한국 최초의 현대식 영화촬영소’라고 자랑하던 안양촬영소에서 찍는 영화 ‘생명’(이강천 감독)을 취재하러 가는 기자들이 타고 있었다. 촬영소 세트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소방차 2대와 촬영소 주변 마을 사람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뒷모습만으로 보여준 감정 

드디어 촬영 개시. 건물에 불이 활활 타오르자 촬영 현장에서 10여 m 떨어진 안전한 곳에 있는데도 기자들의 얼굴은 확확 달아올랐다. 그때, 불이 활활 타는 건물에서 한 여인이 뛰쳐나온다. 그녀는 불이 몸을 휘감고 치맛자락에 옮겨 붙으려는 찰나까지 버티다가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녀의 연기를 본 순간, 기자들은 감탄한다. 컷 사인이 떨어지자 기자들은 그녀를 인터뷰하기 위해 달려간다. 불길 속에서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셔 불 때문에 목이 쉰 여배우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촬영장에만 오면 일할 맛이 난다”며 방긋 웃는다. 문정숙은 그런 배우였다.  

1959년 김소동 감독의 신작 ‘오 내 고향이여!’는 아시아 영화제 출품작으로 선정됐지만, 문교부의 개입으로 최종 탈락한다. 그 자리를 ‘종각’(양주남 감독, 1958)이 대신한다. 문교부는 ‘종각’이 동양적 사상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영화라서 추천한다고 둘러댔다. 사실 ‘종각’은 인간의 고통과 회한을 진지하게 다루려는 제작자와 감독이 의기투합해 만든 꽤 괜찮은 영화였으나 문교부의 횡포 때문에 이미지를 구겼다.  

심사위원들과 제작자협회는 문교부의 선정을 못 받아들이겠다면서 ‘종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문교부 측 자문위원이던 문학평론가 백철은 ‘종각’의 장점을 조목조목 제시한 글을 ‘경향신문’에 발표해 문교부를 옹호하고 나섰다. 이 글에 대한 반박도 이어졌다. 갑론을박 끝에 결국 두 작품 모두 아시아 영화제 출품 후보작에서 제외됐다. 문교부와 제작자협회가 벌인 싸움 때문에 괜찮은 영화 두 편이 다 피해를 본 것이다.

영화 ‘종각’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는 주연 여배우 문정숙이 있었다. 문정숙은 이 영화에서 1인 3역을 하며 열연을 펼쳤다. 그런데 이 영화를 아시아 영화제 출품작으로 추천한 쪽도, 낙선을 주장한 쪽도 자기들 주장의 근거로 문정숙의 연기를 내세웠다.

종을 만드는 종쟁이 허장강이 일생 동안 만난 세 여인이 있다. 늙은 허장강과 한 지붕 밑에서 사는 젊은 처녀, 젊은 시절 허장강이 종쟁이가 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든 첫사랑, 허장강이 종쟁이가 되어 전국을 떠돌다가 우연히 만나 같이 살게 된 여인. 문정숙은 이 세 여인을 모두 연기했다.  

‘종각’을 비판한 영화인들은 문정숙이 연기한 세 여인의 캐릭터가 비슷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문정숙이 머리를 빗어 넘긴 모양새가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각’ 옹호파는 영화의 내용상 너무나 닮은 여자 세 명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연출 면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라고 주장했다.












 

 

놀라운 1인 3역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영화 ‘검은 머리’의 한 장면.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 등장한 젊은 여인이 문정숙인지 몰랐다. 두 번째 여인이 등장했을 때에야 뺨 아래에 난 작은 점을 보고 문정숙임을 알아봤다. 내가 아는 문정숙은 모두 30대 후반의 역할이어서 20대의 문정숙을 몰라본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외모가 머릿속에 각인될 만큼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조용하고 다감한 연기에 빠져들었다. 내가 보기에, ‘종각’ 반대파들이 왜 이 영화를 낙선시켰는지 수긍할 만한 부분은 그녀의 연기가 아니라 시나리오와 연출상의 문제였다. 가령 허장강이 결혼을 약속한 첫 번째 여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너무나 억지스러웠다. ‘종각’은 한 인간의 집념을 진지하게 그리기 위해 공을 들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게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정숙의 연기력 때문에 이 영화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와 연출은 미숙했지만, 허장강과 문정숙의 연기는 조금도 과장되지 않고 차분해서 당대의 어느 영화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봤다. 문정숙의 연기에선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기품이 느껴졌다. 이 영화를 옹호한 평론가 백철은 이후 문정숙의 팬이 됐는데, “문정숙은 지성적이며 연기의 신축성이 넓어 여러 가지 배역을 맡아도 능히 감당한다”고 극찬한 바 있다.  

문정숙은 배우였던 언니 문정복의 공연을 보면서 연기자의 꿈을 품었다. 17세에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극단에 들어가 연기자가 됐고, 1952년 신상옥 감독의 ‘악야’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1956년 연극 연습을 하던 그녀를 주목한 사람은 당시 인기 절정의 신인 남자배우 최무룡이었다. 그는 유현목 감독과 함께 자신이 제작, 주연을 맡은 영화 ‘유전의 애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문정숙을 보고는 이 영화가 원하는 슬픈 느낌의 얼굴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유 감독에게 소개했다. 단역 신세였던 문정숙은 일약 주연으로 발탁됐다. 영화는 성공했고 사람들은 “이탈리아 여배우가 나왔다”며 문정숙의 연기를 칭찬했다. 1950년대를 풍미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속 여주인공의, 감정이 절제된 사실적인 연기를 문정숙에게서 본 게 아니었을까. 그후 문정숙은 최은희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주연과 조연으로 영화에 꾸준히 출연해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이만희 감독을 만나다
 

그리고 그녀는 운명적으로 감독 이만희를 만난다. 이만희 감독은 군복무 시절 문정숙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보고 ‘제대한 뒤 꼭 문정숙을 여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만희는 제대 후 연출부 생활을 거쳐 능력을 인정받아 감독으로 데뷔한 후 세 번째 영화 ‘다이얼 112를 돌려라’(1962)를 만들며 문정숙을 주연으로 내세웠다.

당시 인기와 연기력에서 최고의 여배우는 단연 최은희였다. 그렇다면 이만희 감독은 왜 최은희가 아니라 문정숙을 선택했을까. 최은희가 신상옥 감독의 프로덕션 소속이라 다른 영화사 작품에 출연하는 게 쉽지 않았겠지만, 문정숙에게는 최은희가 갖지 못한 어두움과 우수의 이미지가 있었다. 최은희는 낮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에서도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의 고통을 표현한 양공주였을 뿐, 음습하고 우수에 찬 어둠의 고통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문정숙은 완벽한 밤의 여자였다. 그녀가 표현하는 고통에는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이만희 감독은 그것을 간파해 그녀를 악랄하고 더러운 세 남자의 흉계 속에서 고통받는 여주인공으로 선택했다. ‘다이얼 112를 돌려라’는 흥행에 성공했고, 김진규·최은희 콤비, 최무룡·김지미 콤비에 이어 장동휘·문정숙 콤비라는 말이 그때부터 나왔다.

영화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2)에서 문정숙이 연기한,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남편과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깡패 시동생, 양공주가 되는 시누이 사이에 낀 지옥과도 같은 가난 속에서 끝내 비극적 최후를 맞는 김진규의 아내 역도 인상 깊지만, 문정숙이 명실 공히 당대 최고의 연기자임을 증명한 영화는 역시 ‘검은 머리’(이만희 감독, 1964)였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문정숙

 

창녀들이 비닐우산을 들고 서성이는, 비 내리는 어두운 뒷골목. 술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들이 욕정의 대상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지나간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자신을 사줄 남자를 찾는 여자들의 맨 뒤, 어두운 골목에 한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다른 창녀들처럼 호객행위도 하지 않고 조용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저래서 장사가 되겠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무리 술 취한 남자라 해도 어둠 속에 숨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할 리 없다.
 
어둠 속의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남자들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여자들을 뿌리치고 굳이 어둠 속의 여자에게 다가간다. 남자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순간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여자의 얼굴엔 남자를 끌어들였다는 승리감에서 나온 야릇한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미소는 사라지고 공포로 가득한 얼굴이 된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자신이 선택됐다는 뿌듯함 뒤에 나타난 공포의 정체는 뭘까.


 


어둠 속의 매력 

여자는 과거 암흑가의 두목이던 장동휘의 아내였다. 그녀는 잠깐의 실수로 아편쟁이의 마수에 걸려 몸을 빼앗기고 그의 협박에 못 이겨 마약 살 돈과 몸을 바꾸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의 이중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장동휘의 부하들에게 발각된 뒤 그녀는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그들은 깨진 술병으로 그녀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내고 쫓아낸다.

이후 그녀는 거리의 여자로 살아간다. 그녀는 항상 끔찍한 흉터를 가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다. 그것이 어둠 속에서는 묘한 매력이 된다. 그러나 그녀를 사려고 다가온 남자들은 얼굴의 흉터를 발견한 뒤에는 발길을 돌리거나 속았다며 환불을 요구한다. 그녀를 때리는 남자도 있다. 남자를 끌어들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얼굴의 흉터를 본 남성들의 반응 때문에 그녀는 늘 두려움에 떤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문정숙이 최고의 연기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감독과 제작자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 이례적으로 문정숙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렸다. 남자주인공 장동휘의 이름은 그 밑에 있다. 지금도 영화 크레딧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리는 것에 주연 배우들은 여간 예민한 게 아니다. 하물며 50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대배우 장동휘마저 문정숙의 존재감을 인정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 문정숙

영화 ‘만추’의 한 장면.

 

다음 해인 1965년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승승장구하던 이만희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문정숙에게도 그 여파가 미쳤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칠인의 여포로’가 반공법 위반혐의로 법정에 선 것이다. 감독은 실형을 살고, 영화는 압수되어 네거필름이 사라졌다. 난도질된 영화는 제목까지 ‘돌아온 여군’으로 바뀌었다. 이 영화는 국도극장에서 일주일간 상영된 뒤 소리 없이 자취를 감췄다. 암흑 시대였다.  

얼마 후 출감한 이 감독은 수감되느라 촬영이 중단됐던 ‘흑룡강’(1965)을 마무리하고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문정숙 주연의 영화 한 편을 만드는데 그것이 ‘시장’(1965)이다. 그는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던 고통을 영화로 표현하는데, 그건 문정숙만이 할 수 있는 연기였다. 시장바닥을 떠도는 미친 여자 문정숙을 통해 이만희는 정상이 아닌 미친 여자가 오히려 정상적이고, 정상적이라 생각되는 시장 상인들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음모와 추잡스러운 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현실을 고발한다. 

이 영화를 촬영하다가 이만희는 우연히 감방 동료를 만나게 된다. 이만희는 탈옥을 했나 싶어 깜짝 놀랐지만, 그는 모범수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휴가를 받아 나온 것이라며 이만희를 안심시킨다. 그때 이만희의 머리에 반짝하고 떠오른 게 있었다. 오랜 수감생활 도중 휴가를 나오는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그리고 문정숙을 쳐다봤다. 휴가를 나온 죄수는 여자다!




 


‘만추’, 전설이 되다  

그리하여 문정숙과 이만희의 최고작이며, 영원히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는 전설의 영화 ‘만추’(1966)가 탄생하게 된다. 이제는 영화의 줄거리와 트렌치코트를 입고 쓸쓸하게 낙엽이 뒹구는 창경원에 선 문정숙의 스틸 사진 몇 장으로만 남아 있는 영화 ‘만추’가 개봉하자 평론가와 관객 모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30대 후반의 원숙한 여인을 그려낸 문정숙의 연기는 당대 누구도 받아본 적이 없는 호평을 받았다. ‘만추’는 여러 나라에 수출됐는데, 충무로의 제작사는 프린트를 뜰 돈이 없어 별생각 없이 영화의 원본인 네거필름을 수출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렇게 해서 영화 ‘만추’의 프린트와 네거필름 모두 사라져버렸다. 원통한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문정숙의 농익은 연기가 이만희 감독이 그 이듬해 만든 ‘귀로’(1967)에서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문정숙이 주연한 영화 중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 영화를 꼽으라면 영화인 대부분은 ‘귀로’와 ‘검은 머리’를 꼽는다.




 

서울역사 지붕이 올려다보이는 서울역 지하로를 향해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인이 걸어온다. 흑백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놀랍게도 그녀의 우수에 찬 분위기에 감염돼버린다. 그녀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서울역 지하도를 나와 서소문의 건널목에 서서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여전히 뒷모습인 그녀는 기차가 지나가자 서소문의 신작로를 따라 걸어서 시청이 내려다보이는 덕수궁 앞의 육교를 건너고 신문사로 들어간다.

남편 김진규는 소설가다. 그녀는 날마다 남편의 신문 연재소설 원고를 전하기 위해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시청 앞의 신문사를 다녀간다. 그녀는 지나간 자국마다 독특한 페로몬을 남긴다. 우울의 페로몬. 신문사의 젊은 신입기자가 그녀에게 반해버린다. 중년 여성의 원숙함에 우울한 어둠이 더해졌으니 세상의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반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우울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 남편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사랑과 신념을 과신했다. 사랑으로 남편의 불행을 극복할 수 있다고, 내가 선택한 이 남자를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며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14년을 버텨냈다.  




하지만 그녀와 남편 사이에는 서서히 균열이 오고 있다. 미친 듯 군가를 부르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남편.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며 쫓아다니는 젊고 잘생긴 청년. 자신이 선택한 신념, 그리고 육체가 원하는 정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문정숙의 감정은 쓸쓸하게 오가는 서울역 지하도와 서소문 건널목, 그리고 시청 앞 육교를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묵직하게 전해온다. 그녀는 영화 속 캐릭터가 가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적당한 고통의 무게만큼을 짊어지고 걷는다. 그리고 인상적인 명장면들이 등장한다.  

젊은 기자와 문정숙이 껴안고 서로의 살 냄새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키스를 하고 싶은 욕망과 선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신념.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적막 속에서 문정숙의 입술이 움찔거리지만 남자의 입술에 다가가지 못하는 극도의 긴장감.



 


‘영화’ 같은 사랑과 이별 

그리고 라스트. 안개가 낀 인천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문정숙의 뒷모습. 그녀는 젊은 남자와 하룻밤 정사(情事)를 벌인 후 남편을 떠나기로 하고 짐을 챙기러 온다. 집 안에는 그녀를 죽일 듯이 바라보는 시누이와 술에 취해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죽은 듯 자고 있는 남편이 있다. 자기 방으로 들어온 문정숙은 화장대에 앉아 천천히 립스틱을 다시 칠하고 눈썹에 마스카라를 바른다. 마스카라의 솔에 눈썹이 걸려 살짝 당겨진다. 아프다. 기차표를 사서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향한 마음과, 자신이 세운 윤리가 허물어진 절망감을 그녀는 마스카라를 칠하는 손길과 눈썹으로 표현한다. 이 멋진 장면은 1980년 ‘애마부인’에서 표절되지만, 문정숙이 표현했던 갈등의 긴장감을 따라갈 순 없었다. 

현실에서도 그 시기 문정숙은 이만희 감독과의 사랑과 어머니로서의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했고, 그녀는 결국 남편과 이혼한 후 이만희 감독과의 결혼도 포기하고 아들을 택한다. 그 후 이만희 감독이 새로 발굴한 젊은 여배우 문숙과 동거할 때 문숙은 우연히 국립극장 여배우 분장실에서 문정숙과 마주친다. 문숙이 문정숙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문정숙은 소리 내어 흐느꼈다. 문정숙과 이만희 콤비는 이렇게 끝이 났다.

이만희 감독이 간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후인 1978년. 문정숙은 영화 속 콤비 장동휘의 아내로 영화 ‘경찰관’(이두용 감독, 1978)에 출연한다. 파출소장 장동휘가 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안방에서 문정숙이 나와 맞이하고 밥상을 차려낸다. 된장찌개를 떠먹는 장동휘를 말없이 바라보는 문정숙. 범죄자들에게 호랑이로 불리는 우락부락한 장동휘는 편안하고 곱게 나이 든 아내의 품에서 양처럼 순하게 변한다.  

나는 이 식사 장면이 너무나 좋았다.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온 남녀 배우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배려하며 관객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연기한다. 이런 게 최고의 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정숙은 2000년 세상을 떠난다. 떠나기 4년 전인 1996년까지 매해 한두 편의 영화에 크고 작은 역으로 출연했다.  

어떤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지는 한마디 말로 정리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문정숙은 얼굴과 몸이 아니라 극중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연기한 배우라는 것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편안한 연기를 했던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것을.










 

 

06월 호

쌍장검 미녀검객 홍세미 성룡 구한 태권소녀 김정란

액션영화 속 여배우들

  • 영화 ‘수라설희(修羅雪姬)’에서 가지 메이코는 장검을 들고 눈밭에서 마지막 혈투를 벌인다. 40년 후 미국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장면을 ‘킬빌’에 그대로 재현한다. 칼에 베인 남자들이 뿌린 피로 기모노가 물든다. 우리 영화사에도 여성 검객들이 등장한다. 춘향으로 데뷔한 홍세미는 두 자루의 장검을 휘두르는 정통 액션을 선보였다. 한중 합작영화 ‘사학비권’의 액션배우 김정란은 성룡을 구하려다 죽는 비운의 인물을 연기했다.

 

쌍장검 미녀검객 홍세미 성룡 구한 태권소녀  김정란


1967년 3월 홍콩 무협 영화 ‘방랑의 결투’(호금전 감독, 1966)가 서울에서 개봉됐다. 영화평론가들은 무시했다. 신문도 ‘요란하기만 하지 보잘것없다’는 악평을 쏟아냈다. 그러나 정작 개봉관에는 관객이 몰려들었다.  

 
당시 우리 관객들에게 ‘방랑의 결투’는 그야말로 새로운 체험이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나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판타지, 무협의 세계가 이 영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중국인이 내세운 의협(義俠)이 한국인의 정서를 자극했다. 그 후에 나온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장철 감독, 1967), ‘심야의 결투’(장철 감독, 1968), ‘용문의 결투’(호금전 감독, 1966)도 성공을 거뒀다.  

당시 쏟아져 나온 홍콩무협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여성 검객의 등장이었다. ‘방랑의 결투’의 주인공은 정패패라는 이름을 가진 똘똘하게 생긴 여검객이었다. 그때까지 나왔던 액션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주먹을 휘두르거나 총질하고 칼질하는 남성이었다.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저 남자 주인공의 상대역이거나 남자들에게 싸움의 원인을 제공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칼과 주먹을 휘두르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정패패는 남자들과 똑같이 싸우는 여성이었다. 게다가 얼굴도 예쁘고 남성 못지않은 의협까지 지닌 협객이었다. 무용을 전공한 정패패는 제비처럼 날렵한 몸짓으로 단검 두 자루를 가지고 악당 남자들을 베고 찔렀다. 그녀는 영화 내내 중심에 서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액션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부터 인기를 끌며 제작되던 야쿠자 영화의 인기가 시들해질 무렵, 여자 도박사가 주인공인 ‘붉은 모란’ 시리즈가 나오면서 죽어가던 야쿠자 영화를 되살렸다. 야비한 도박 중독자들이 돈을 잃은 뒤 시비를 걸자 여자 도박사는 기모노의 옷깃을 잡아 어깨와 가슴 위까지 드러나게 옷을 벗는다. 등과 어깨에 새겨진 붉은 모란. 그녀는 단검을 들어 다다미에 꽉! 꽂고는 남자들을 노려본다.  

그녀의 이름은 후지 준코, 중성적인 미모를 지닌 매력적인 여배우였다. 기모노를 입고 짧은 보폭으로 움직이다가 넓은 소매 속에 감춰둔 단도로 남자 야쿠자들의 숨통을 끊어놓는가 하면, 모두가 등을 돌린 몰락한 야쿠자를 지키기 위해 신흥 세력과 대결한다. 1960년대 후반 홍콩의 정패패와 일본의 후지 준코는 미소년 같은 얼굴에 남성들이 보여줄 수 없는 우아하고 날렵한 몸동작으로 남성 관객을 사로잡았다.  

후지 준코 이후 일본의 여성 협객은 더욱 진화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가지 메이코였다. 가지 메이코는 미소년 같은 중성적인 미모로 승부수를 띄운 정패패나 후지 준코와는 외모부터 달랐다. 긴 생머리와 우수에 찬 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가지 메이코와 ‘킬빌’ 

메이코의 연기는 세계적인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타란티노가 만든 영화 ‘킬빌’의 마지막 대결 장면, 우마 서먼과 일본인 킬러(루시 리우)의 눈 속 대결은 메이코가 연기했던 ‘수라설희’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수라설희’ 시리즈에서 메이코는 단검을 양손에 들고 후지 준코보다 더 잔혹하게 남성들과 싸웠고, ‘긴자 은나비’ 시리즈에서는 단도를 던져버리고 장검을 들었다. 눈처럼 하얀 기모노를 입고 그녀가 적진으로 들어가면 검은 양복을 입은 20~30명의 남성 야쿠자가 장검을 휘두르며 덤벼든다. 그녀의 칼에 베인 남성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하얀 기모노는 금세 새빨간 피로 물든다.

정패패나 후지 준코가 싸울 때만 해도 그녀들의 곁에는 언제나 멋진 검객이나 야쿠자가 있었고, 마지막 순간 이 남자들이 그녀들을 지켜줬다. 그러나 가지 메이코는 달랐다. 그녀의 주변에도 남자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메이코를 존경하는 부하일 뿐이었다. 오히려 남자들이 메이코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마지막 대결도 언제나 메이코의 몫이었다. 이전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진화였다.  

홍콩에서는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지닌 남자배우 왕우와 이소룡이 등장하면서 여성을 앞세운 액션 영화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액션 영화는 ‘예스마담’ 양자경이 등장할 때까지 10년 넘게 긴 휴식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땠을까. 관객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던 1960년대, 충무로도 무협 영화로 들썩였다. 홍콩 무협 영화가 성공을 거두자 부랴부랴 무협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웨스턴 스타일의 주먹 싸움만 하던 한국 영화계에도 검객이 등장했다.





 

쌍장검 미녀검객 홍세미 성룡 구한 태권소녀  김정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만든 영화 ‘킬빌’의 한 장면.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우리나라엔 무협 영화의 판타지를 그럴듯하게 설득할 검객의 역사가 없었던 것이다. 홍콩에는 수호지, 삼국지, 사기열전 등에 등장하는 수많은 검객 이야기가 있었고 진융(金庸) 같은 걸출한 신세대 무협 작가가 있었다. 일본에도 에도시대의 야쿠자 무용담과 잔혹한 사무라이 소설들이 액션 영화의 좋은 재료가 됐다. 반면 철저히 유교적이었던 우리나라에는 검객과 관련된 전설과 신화가 없었다.  

게다가 홍콩의 무협 영화와 일본 야쿠자 영화에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신세계인 ‘의협’이 있었다. ‘협(俠)’은 강한 기득권에 대항하는 약자들끼리의 약속이면서 목숨을 담보로 하는 투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협을 지키는 남성들의 세계는 무협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판타지로 작용했다. 그런데 한국의 액션 영화에서 그려지는 ‘의리’는 이에 비하면 너무 약하고 허술했다.  

1960년대 말 한국에서 만들어진 검객 영화에는 긴장감을 높이는 장철의 액션 기술도 없었고, ‘대자객’에서 광기로 가득한 왕우가 보여준, 자신의 얼굴을 칼로 도려내고 배를 가르는 지독함도 없었다. 온몸에 쇠말뚝이 박혀 죽었다가 원념 때문에 벌떡 일어나 다시 싸우기 시작하는 영화 ‘심야의 결투’에서 왕우가 보여준 짐승 같은 연기를 맛본 관객들에게 당시 우리 검객 영화는 그야말로 하품 나오는 것이었다.  




 


춘향이 홍세미의 대변신

 
그럼에도 우리 영화계는 검객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냈다. 여검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도 여러 편 나왔다. 상당한 당수 실력을 갖고 있던 영화배우 이대엽과 1960년대 여성 트로이카의 한 축이었던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무협 영화 ‘삼인의 여검객’(최인현 감독, 1969)은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홍콩의 정패패보다 미모가 뛰어난 윤정희가 검객으로 나온다니, 그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었을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제목만 보면 여성 검객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윤정희는 검객이라고 하기에는 헛웃음이 날 만큼 동작이 둔하고 카리스마도 없어 관객을 전혀 설득하지 못했다. 더욱이 당시 한국 감독들은 일지매나 흑두건 같은 복면 도둑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는지, 아니면 주연배우의 형편없는 무술 실력을 숨기고 대역을 쉽게 쓰려고 그랬는지, 윤정희의 아름다운 얼굴에 복면을 씌우는 우를 범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장면이다.  

여검객 윤정희가 사실상 실패한 뒤 나온 여배우는 홍세미였다. 홍세미는 1968년 김수용 감독의 ‘춘향’에 캐스팅되며 데뷔했다. 당시 춘향은 최고의 여배우에게만 주어지는 역이었고, 흥행 보증 수표였다. 더구나 홍세미의 상대역(이 도령)을 맡은 사람은 당대 최고배우 신성일이었다. 이렇게 화려하게 데뷔한 홍세미는 아름다운 미모와 균형 잡힌 몸매로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아성에 도전하는 촉망받는 배우로 평가받았다. 그녀는 TBC 연속극 ‘조선총독부’ 촬영 도중 키스신을 거부해 출연정지를 당하기도 했지만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후 홍세미는 권영순 감독의 검객 영화 ‘무정검’(1969)에 여성 검객으로 출연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배우는 액션 영화 출연을 노출 장면 연기만큼이나 꺼린다.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신인 여배우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대부분의 여배우는 멜로 영화 속 우아한 여주인공을 꿈꾼다. 게다가 액션 영화를 촬영할 때는 부상도 각오해야 한다. ‘무정검’의 감독 권영순은 홍콩과 합작으로 당시 최고의 무협소설 작가였던 김광주의 작품 ‘비호’를 영화화하면서 홍콩 무협 영화의 노하우를 공부하고, 박노식과 홍세미를 주연으로 캐스팅해 야심차게 검객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인지 불분명한 장소에서 시작된다. 첫 비무(比武·서로 겨뤄보며 실력을 가늠하는 것) 장면에서 박노식은 탄성이 나올 만큼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홍콩 무협 영화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액션이었다. 물론 저속촬영을 한 티가 좀 나는 게 흠이었지만,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했다.  

그다음 장면에 드디어 홍세미가 등장한다. 홍세미는 이미 권영순 감독이 연출하고 박노식이 주연한 검객 영화 ‘백면검귀’에 출연한 바 있었다. 그녀는 남성 검객들 사이에 낀 비운의 여인 역을 맡았고, 비슷한 시기에 출연한 ‘암행어사와 흑두건’(김기풍 감독, 1969)에서는 정체불명의 검객 흑두건 장동휘의 애첩으로 나와 가야금을 타는 여인을 연기했다.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곁다리 여주인공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검객의 충격 액션
 

그러나 ‘무정검’의 홍세미는 달랐다. ‘방랑의 결투’ 정패패가 연상되는 의상에 단검 두 자루를 손에 쥐고 등장한 그녀는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액션 장면을 연기했다. 1961년 한형모 감독이 만든 코미디 영화 ‘언니는 말괄량이’에서 문정숙이 선보인 유도, 만주 독립군 항일영화에서 여배우들이 총을 들고 싸우며 선보인 액션과는 차원이 달랐다. 춘향 출신 여배우 홍세미가 선보인 액션은 정패패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한강 모래사장에서 단검 두 자루를 쥐고 검객 박노식과 대결하는 라스트 신도 합격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1970년 권영순 감독은 홍세미를 여주인공으로 내세워 또 한 편의 검객 영화를 만든다. 제목은 ‘유정검화’. 영화가 시작되면 똘망똘망한 얼굴의 홍세미가 장검을 메고 등장한다. 마치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요짐보’에서 험상궂은 얼굴로 카리스마를 뿜어낸 미후네 도시로의 등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이제껏 홍콩과 일본의 무협 영화에 등장한 여주인공들이 단검만을 사용한 것과도 비교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제까지 한국 액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여배우 중심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쌍장검 미녀검객 홍세미 성룡 구한 태권소녀  김정란

홍세미.

 

영화 속 홍세미는 사생아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 첫날밤 신방에 난입한 악당에 의해 농락을 당하고 성주인 남편에게 버림받는 불운한 여자다. 홍세미는 이제껏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살아왔다. 무술을 연마한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오해를 풀고 이 모든 불행의 원흉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산길을 홀로 걸어가는 홍세미 앞에 산적들이 나타나 그녀를 겁탈하려 할 때 멋진 사나이 남궁원이 나타난다. 홍세미는 연약한 척 뒤로 물러나고, 남궁원은 아름다운 홍세미를 구하기 위해 산적들과 20대 1의 싸움을 시작한다. 남궁원의 무술 실력은 뛰어나지만, 승부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심심해하던 홍세미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리더니 풀잎을 따서 산적들에게 표창처럼 내공의 힘으로 날린다. 산적들의 등에 비수처럼 꽂히는 풀잎. 남궁원은 자신의 칼이 닿지도 않았는데 쓰러지는 적들을 보고 ‘이게 무슨 일이래?’ 하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해하지만 그것이 설마 홍세미의 솜씨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실제 영화를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연출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홍세미가 보여주는 수준급의 연기는 모든 것을 용서하게 만든다. 멋지긴 하지만 어리바리한 남궁원이 홍세미 앞에서 생색을 내자 홍세미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더니 놀라운 경공(輕功·몸을 날리는 무공)을 발휘해 순식간에 산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공교롭게도 남궁원은 그녀가 찾는 원수의 아들이었다.  

당돌한 홍세미는 곧장 성으로 달려가 성문 앞에서 성주가 자기 아버지라며 만나게 해달라고 큰소리친다. 흥미가 동한 성주는 그녀를 들이고, 홍세미는 자신을 당돌하고 영리하지만 때때로 멍청한 캐릭터로 설정한 듯 성주가 있는 접견실을 지나쳐 가다가 아차! 하는 깨알 같은 연기도 보여준다.  

이어 홍세미의 첫 대결 장면이 나온다. 악당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등에 멘 장검을 빼어 든다. 양손을 검의 손잡이에 가져가자 검은 마술처럼 두 자루의 장검으로 변한다. 한 자루의 검이 두 자루로 나눠지는 비검이었다. 그녀는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장검을, 그것도 양손에 한 자루씩 들고 적들과 싸운다. 그녀의 검술 연기는 이전 출연작과는 차원이 달랐다. 홍콩과 일본 액션 여배우의 연기와 비교해도 꿀릴 게 없는 아름답고 우아한 몸놀림과 검술 솜씨였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태권소녀의 등장 

홍콩의 무협 영화는 왕우의 ‘용호의 결투’ 이후 권격 영화로 진화해 한국 관객들의 혼을 빼앗고, 그다음엔 이소룡이 등장해 쿵푸 영화로 천하를 통일한다. 홍세미는 이후 어떤 액션 영화에도 출연하지 않았다. 아니 그 후로 여배우가 주인공인 액션 영화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여성이 등장하는 액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1970년 ‘팔도 사나이’의 인기에 편승해 용팔이 박노식의 애인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팔도 사나이의 여성편 ‘팔도 가시나이’(편거영 감독, 1970) 정도다. 주연 여배우는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최지희였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업용 택시를 운전하는 최지희에게 택시 강도 두 명이 위협을 가한다. 최지희는 순식간에 두 택시강도를 제압하고는 옷을 벗겨 경찰서로 데려간다. 그러면서 “직업전선에 뛰어든 여자가 이 정도 실력도 없을 줄 알았냐?”고 쏘아붙인다. 그러나 최지희의 연기를 본격 액션신이라고는 하긴 힘들다. 게다가 너무나 조잡하다.

영화는 최지희와 팔도 가시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용팔이 박노식이 등장하면서 급하게 마무리된다. 다방 레지, 여자 택시 운전사, 바걸 등 여성 8명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재미있을 법도 했지만 급조된 티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최지희도 몇 장면 출연하지 않아 주연이라 하기도 어렵다. 결국 1960년대에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액션을 제대로 소화해낸 영화는 홍세미가 주연한 ‘무정검’과 ‘유정검화’뿐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태권도 영화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단골 여배우는 여수진이었다.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그녀는 주로 짐승 같은 남성들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버림 받는 역을 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태권도 유단자 여배우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임은주와 김정란이다. 이두용 감독의 태권도 영화에서 늘 악역으로 등장하던 험상궂은 얼굴의 사나이 권영문이 주연한 ‘흑룡’(김선경 감독, 1975)에서 조연으로 데뷔한 임은주는 이후 태권도 영화에 단골로 출연해 야무진 발차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무술 실력을 더욱 멋지게 드러낼 연출력이 부재한 가운데 그녀는 흐지부지 사라져갔다.  

임은주보다 조금 늦게 등장한 태권도 여배우가 김정란이다. 성형수술한 티가 너무 나는 얼굴과 작은 키가 흠이었지만, 홍콩 합작영화 ‘사학비권’(로웨이 감독 1978)에도 출연해 존재감 있는 캐릭터와 발차기를 보여줘 눈길을 끌었다.  
















성룡을 구한 김정란
 

영화는 의문의 사나이 성룡이 주점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비전의 무술비급인 사학비권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품속에 있는 비급을 훔치기 위해 악당들이 그의 행동을 주시하는 가운데,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을 한 거지 소년이 등장한다. 안하무인의 이 소년은 성룡의 탁자에 뻔뻔하게 동석해 사흘 굶은 거지처럼 온갖 음식을 시켜 볼이 미어져라 먹는다. 성룡 앞에서 어수룩한 척하지만 그는 사실 남장 여자였으며 성룡의 품속에 있는 사학팔보를 노리는 자들 중 하나였다. 김정란은 라스트 신에서 성룡을 구하려다 죽는 비운의 인물로 자신의 캐릭터를 완성한다. 태권도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 중 그나마 괜찮은 작품에서 인상 깊은 캐릭터를 연기한 예는 김정란이 거의 유일했다.  

액션 영화 제작은 험한 일이다. 때리는 연기를 하면 진짜로 때리는 것처럼 몸을 움직여야 하고, 상대방이 다치지 않도록 약속된 동작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하지만 사고는 언제나 일어난다. 사람 목숨까지 걸린 일이 되다보니 촬영 현장은 항상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스태프와 배우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거칠어진다. 영화 속에서 매를 맞는 장면이 있으면 배우들은 진짜로 맞는 것과 똑같은 육체적 부담을 갖는다. 이런 험악한 상황에서 남성들과 대등하게 몸을 부딪치며 연기하는 여배우들에게 경배를 보낸다. 



 


 

옛날 영화배우들의 옛 모습

 

나문희


                             

문정숙



 이민자


 

 정혜선



조미령



        주증녀



최무룡 김지마



  최은희



 



 홍세미



   황정순



   황해 백설희 전영록



    황해 가족



   마파도 할매들 김형자 여운게 김을동


    


2017.04.17 우리 기억 속 '국민 엄마'

"나는 19세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다. 내가 연기를 안 했으면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한테는 대본에 몰입하는 일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 단순한 직업 이상이다"

고인이 된 배우 김영애가 생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연기자로 불꽃처럼 살았고, '국민 엄마'로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 한 배우의 죽음이 우리의 마음에 이토록 와 닿는 건, 그 연기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김영애를 추모하며 그동안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브라운관 속 엄마들을 함께 추억해봤다.


(왼쪽부터) SBB드라마 '닥터스' 속 故 김영애,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속 故 김자옥, 영화 '해운대' 속 故 김지영, MBC드라마 '대장금'에 '정상궁'역을 맡았던 故 여운계 /SBS드라마 캡처, MBC 캡처, 영화 스틸컷, 조선DB


故 김영애 (1951.4.21~ 2017.4.9)

(왼쪽부터)故 김영애, MBC드라마 '로열패밀리'의 故 김영애, 영화 '애자'의 故 김영애, SBS드라마 '닥터스'의 故 김영애, 유작이 된 KBS드라마 '월계수 양복점'의 故 김영애 모습 /인터넷 캡처, 조선DB, 조선닷컴

1971년 MBC 공채 탤런트 3기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MBC 단막극 <민비>에서 민비 역을 맡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왕성하게 활동하며 46년 연기 인생에 1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고인은 2012년 MBC <해를 품은 달> 출연 당시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제작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병을 숨긴 채 두 달 동안 병원을 오가며 촬영에 임했다. 2014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몸이 아파 소리 지르는 연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허리에 끈을 칭칭 조여 매고 촬영했다. '해품달' 종영 후 9시간의 대수술을 받았고, 죽다 살아났다. 수술 한 뒤 몸무게가 40kg으로 줄었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수술 후 암과 싸우며 드라마 <내 사랑 나비부인> <메디컬 탑팀> <미녀의 탄생> <킬미 힐미> <마녀 보검> <닥터스>와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 <변호인> <우리는 형제입니다> <현기증> <카트> <허삼관>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인천상륙작전> <판도라> 등 다수의 작품을 찍었다.




故 김영애는 지난 2월 종영한 KBS2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을 유작으로 남겼다. 수척해진 모습에서는 병세가 완연했지만, 양복점 안주인으로서의 강단과 어머니로서의 애틋한 모성애를 잘 연기하며 우리 가슴 속 영원한 엄마로 남았다.

https://youtu.be/PHZZNQMJhGc유작이 된 <월계수 양복점> 속 배우 김영애의 모습./ 출처=유투브


故 김자옥 (1951.10.11~2014.11.16)

(왼쪽부터)1996년 최고의 유행어가 된 '공주병' 신드롬의 정점에서 인기를 누린 탤런트 故김자옥의 모습, SBS연기대상의 故김자옥, 악극 '봄날은 간다' 포스터 속 故김자옥, MBC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故김자옥, tvN '꽃보다 누나'의 故김자옥(가운데) /조선닷컴, SBS연기대상 캡처, 인터넷 캡처, 연합뉴스, 조선DB

1970년 MBC 공채 2기 탤런트 출신이다. 1970~1980년대 대표작으로는 드라마 <심청전> <수선화> <은빛 여울> 등과 영화 <보통여자> <목마 위의 여자> 등이 있다. 그는 1975년 김수현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수선화>에서 사연 많은 간호사 지선을 연기하며 청순가련한 이미지와 함께 '눈물의 여왕' 타이틀을 달았다. 

1990년대에 40대가 되면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MBC 코미디 <세상의 모든 딸들>에서 코믹 연기에 도전해 유쾌한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2000년대에는 <내 이름은 김삼순> <커피프린스 1호점><지붕 뚫고 하이킥> <오작교 형제들> 등에서 할머니, 엄마 역할을 연기했다. 

故 김자옥은 2008년 대장암 수술을 받았지만, 폐로 전이되며 지난 2014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애잔하고 절절함을 연기하는 엄마보다는 약간은 푼수 아줌마 같으면서도 소녀적이고 친근한 엄마였다. 다른 중년 배우들과의 차이를 두며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엄마로 살았다.



https://youtu.be/76KUsszzBQ0
2009년 MBC 일일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연기 중 NG를 내고 웃는 김자옥의 모습. /출처=유투브

 

 故 김지영 (1938.9.25~2017.2.19)
(왼쪽부터)배우 故김지영, KBS 드라마 '화려한 시절'의 故김지영, KBS특집극 '고맙다, 아들아'의 故김지영, 영화 '해운대'의 故김지영 /조선닷컴, 조선DB,
 영화 '해운대'스틸컷

 

1960년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상속자>로 데뷔했다. <야인시대> <산너머 남촌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식샤를 합시다 2> <판타스틱> 등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감칠맛 나는 연기를 선보였다. 또 <파이란> <그녀를 믿지 마세요> <나의 결혼 원정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도가니> 등 100편이 넘는 영화에서 주·조연으로 맹활약했다. 

故 김지영은 우리에겐 '사투리 잘하는 배우'로 인상 깊다. 서울 출신임에도 여러 지방의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는 "사투리 연기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시골 오일장을 돌아다니면서 사투리 연습을 아주 많이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지난 2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57년 동안 배우로 살았다. 79세에 세상에 안녕을 고하며 친근한 엄마로, 사투리 쓰던 할머니로, 정 많은 이모·고모로 영원히 남았다.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207063&plink=LINK&cooper=SBSNEWSVIEWER
2007년 1월. 원로배우 김지영 씨가 인터뷰를 하는 모습./ 출처=SBS 윤영미의 연예뉴스
 

故 여운계 (1940.2.25~2009.5.22)

(왼쪽부터)SBS TV 'LA아리랑'의 故여운계(왼쪽), 故여운계, 영화 '마파도' 촬영 당시 故여운계의 모습, MBC드라마 '대장금'의 故여운계 /조선닷컴, 조선DB

배우 여운계는 1958년 고려대 국어국문과 진학 후 대학극회 단원으로 활동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1950~1960년대엔 박근형 씨와 함께 '대학극의 2인'으로 불렸다. 졸업 후 1962년 KBS 공채 탤런트로 뽑혔다가, 1964년 TBS 공채 탤런트에 다시 합격해 한국 최초의 일일 연속극 <눈이 나리는데>의 시골 다방 마담 역으로 TV드라마에 데뷔했다.

20대때부터 노역 연기를 했던 그는 <아씨> <토지> <몽실언니> <사랑이 뭐길래> <LA아리랑> <청춘의 덫> <대장금> <내이름은 김삼순> <며느리 전성시대> 등의 수많은 작품에서 할머니, 어머니 등의 역할로 48년 간 활동했다. 그는 병중에 더욱 연기 혼을 불살랐다. 2007년 신장암으로 수술을 받고 2009년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약 10여편의 작품에서 감초 역할을 했다. 

故 여운계는 후배 연기자들에게 존경받는 선배였다. 후배들은 탁월한 연기력과 인품을 겸비한 그를 실제 어머니처럼 모셨다. 8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시청자의 엄마로 또 배우들의 엄마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https://youtu.be/0SpJFtPLUfE?list=PLv3yaLsJx2NvgHg417n0rKndTAWSnUpyP
1970년 TBC-TV 일일연속극 <아씨>에서 노역을 맡아 연기 중인 故 여운계의 모습./ 출처=유투브
 조선일보 큐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