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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雄 朴正熙11/ 2024.04 다시 듣는 1963년 대선 당시 朴正熙의 光州 유세 녹음 테이프 - 2025.03.03 박정희·카터는 '미군 철수' 놓고 150분 설전

상림은내고향 2025. 6. 19. 16:57

英雄 朴正熙11/

월간조선 2024. 04월 호

●다시 듣는 1963년 대선 당시 朴正熙의 光州 유세 녹음 테이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박정희 최고 연설 

‘무장한 예언가’ 박정희의 61년 전 선거 연설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였나?

 ⊙ 선거를 ‘신진세력 vs 舊정치인’ 대결로 규정… ‘세대교체’ 넘어 ‘시대의 교체’ 제시
⊙ 유권자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후손을 위해 당대는 희생해야 한다’고 호소
⊙ “민족주의 바탕을 둔 진짜 민주주의와 사대주의 바탕을 둔 가짜 민주주의의 대결”
⊙ “일본 부인을 또 하나 가지고 있다면 혹 있을 수 있는 모략…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제 아내를 일본 사람이라 하면 대단히 억울한 소리”
⊙ “일본 사람만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침략을 당했는지 반성해볼 시기가 왔다”
⊙ “가난 퇴치 없이는 나라의 독립도 개인의 자유도 없다”
⊙ “‘나를 대통령을 시켜주면 내일부터 당장 부자를 만들어주겠다’는 건 거짓말”
⊙ “장시간 지루한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신 데 감사합니다”

▲1963년 10월 14일 투표 전날 밤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

 

▲《조선일보》1963년 10월 4일 자 1면에 실린 전날의 박정희 후보 광주 유세 사진이다. 2만여 명의 청중이 현장을 찾았다. 당시 광주 유세가 박 후보의 지방 첫 유세였다.

 

대선(大選)이나 총선(總選) 때 후보들이 연설한 내용을 녹음해두었다가 선거가 끝난 뒤 상당한 세월이 흘러 그 진실성을 검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부분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61년 전 박정희(朴正熙) 공화당 후보(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가 선거 때 한 연설을 채점해보고 싶었다. 그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어 냈을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최근 입수한 광주(光州) 유세 녹음 테이프(40여 분)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 이전의 박정희 연설은 제대로 녹음, 녹화된 경우가 많지 않고 상태도 나쁘다. 15만6000표 차이로 한국의 진로(進路)를 결정했던 1963년 대통령 선거 기간 박정희 후보 비판에 가장 앞장섰던 《동아일보》는 그해 10월 3일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공화당 후보의 유세를 이렇게 보도했다.


요즘 언론보다 균형 잡힌 보도

▲1963년 10월 3일 광주서중 교정에서 열린 박정희 후보의 연설 영상을 캡처했다.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 박정희씨는 3일 광주에서 첫 지방 유세 강연을 벌였다. “역사는 역행시킬 수 없다”는 연제로 정견을 밝힌 박 후보는 야당 후보들이 집중 공세를 벌이고 있는 이른바 사상 논쟁을 “낡은 ‘매카시즘’의 찌꺼기”라고 힐난하면서 새 국정은 그와 같은 폭로나 비난보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지도체계 아래 정국(政局)이 우선 안정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국 안정을 위해서는 강력하고 양심적인 ‘리더십’이 확립돼야 하며 자립경제체제도 굳건히 세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 후보는 “이번 선거가 한국 역사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제, “우리의 당면 과제는 국민들의 단결·협동·근면·내핍 등으로 피땀을 흘려 우리 힘으로 스스로의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번 선거가 구악(舊惡) 집단과 민중 세력의 대결이다”라고 단정했다.

박 후보는 또한 “과거의 선거는 여당이 야당을 구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무책임하게 폭로 전술과 허위 사실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만 잡아 가두면 선거 방해라고 하려는 심사(心思)를 알기 때문에 선거 기간 동안은 처벌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범법자는 반드시 법에 의해 엄단할 방침이다”고 말했다.〉

이 기사문 자체가 요사이 언론 보도문보다 정확하고 균형 잡혀 있다. 광주서중(西中) 교정(校庭)에서 열린 이날 박 후보의 정견 발표장에는 사복 차림으로는 처음인 박씨를 보기 위해 약 2만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고 했다. 오전 11시10분부터 열린 이 유세에는 때마침 공휴일이어서 공무원과 회사원 차림의 청중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고 연설 도중 박수는 별로 없었으나 도중에 자리를 뜨는 이도 많지 않았다고 전했다.

당시 46세의 박정희 후보 연설은 온몸에서 우러나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매우 공격적인 내용이다. 여당 후보는 수세적이기 마련인데 그는 그 어떤 콤플렉스나 주저함도 없이 스무 살이 많은 민정당 윤보선(尹潽善) 후보를 수구(守舊) 세력으로 몰아붙인다. 박정희의 연설엔 ‘만들다’를 ‘맹글다’로 표현하는 대목이 많다. 국가 건설을 기치로 내건 군사정부의 투박한 말투이다. 박정희 연설은 언어 구사가 직설적이고 쉽다. 살이 없는 뼈대만 보이는 건축물이라고 할까.


“이 자리는 모략중상하는 장소 아니다”

〈친애하는 광주 시민 그리고 전라남도 도민 여러분, 어제는 8월 한가위 우리나라에 있어서 1년 중에 가장 즐거운 명절이었습니다. 작년 가을과 금년 봄 금년 여름에는 하늘이 우리에게 고된 시련을 많이 주었습니다만 다행히도 금년 가을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써 우리 모든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로써 오곡백과가 풍년을 구가(謳歌)하는 흐뭇한 가을이 왔고 여러분들 어제 추석도 이러한 흐뭇한 기분에서 명절을 맞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여러 정당의 유세 기관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여러 가지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얘기하고 갔으리라고 전 알고 있습니다. 달콤한 소리, 남을 헐뜯는 소리, 남을 욕하는 소리, 모략중상 별의별 소리를 다 하고 지나간 것을 본인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시민 여러분들이 여전히 어느 정당이 와서 이런 소리를 했으니까 오늘 박정희 의장이 오면 거기 대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하는 상당히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고 나왔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이 자리는 우리가 남을 서로 헐뜯고, 욕을 하고 모략중상을 하는 그런 장소는 절대 아닙니다.

 

오늘 이 시점에 있어서 우리 모든 국민들은 다 같이 옷깃을 가다듬고 진실로 정직하게 민족적인 양심에 되돌아가서 어떻게 하면 앞으로 이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재건할 수 있는가 하는 이런 문제를 우리 온 국민들이 다 같이 진지한 마음과 태도로써 모색을 하고 토론을 해야 될 그런 장소입니다.

이번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그야말로 우리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행사가 되겠습니다. 이번 선거야말로 우리 민족과 국가의 흥망 진퇴를 판가름하는 역사적인 고비가 될 것이고, 우리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고,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1963년 3월 28일 정국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야당 지도자들. 좌로부터 김병로·윤보선·이인·이범석·김도연·박순천·김법린·정일형·전진한. 박정희는 이들을 ‘구정치인’으로 규정지었다. 사진=조선DB

 

이 선거가 한국의 흥망과 진퇴를 판가름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란 예언은 적중했다. 만약 구(舊)정치인 대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었더라면 적어도 수출입국 전략에 기반한 고도 경제 성장 정책은 추진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역사는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 연설에서 윤보선이란 이름을 한 번도 쓰지 않는다. 윤보선으로 대표되는 ‘가식적(假飾的) 민주주의자들’을 ‘구정치인’이라 묶어 공격함으로써 선거의 의미를, ‘세대교체’를 넘어 ‘시대의 교체’로 삼으려 한다.

이날 박정희 연설의 주제는 가난 극복이다. 그는 당시 한국인의 굴욕적 삶의 근원을 가난으로 본다.

〈우리는 지난날 너무나 가난하게 살아왔습니다. 빈곤과 굴욕과 후진이란 것은 먼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대대로 우리에게 물려준 악(惡)의 유산입니다. 그 빈곤이라는 굴레를 우리는 오늘 현재도 벗지 못하고 신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과거에 남과 같이 떳떳하게 자립형 국민으로서 잘살지 못했는가? 먼 옛날은 그만두고라도 지난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초입에 들었을 때 온 세계 선진 국가들이 과거의 그 나라가 지니고 있는 봉건성을 탈피를 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우리 한국 국민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 당시의 위정자들이 무엇을 했는가.

20세기 초입에 들어서 불행히도 일제(日帝) 식민지화는 우리의 근대화를 가로막았습니다. 이 역시 우리가 우리를 침략한 일본 사람만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왜 우리 국민들이 일제에 침략을 당하고 정복을 당하고 식민지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 다 같이 가슴에 손을 대고 과거 우리 민족이 걸어온 지난 행적을 우리가 반성해볼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해방 이후 지난 18년 동안 2차 대전 후에 모든 후진국가들이 새로운 건설을 위해서 그들의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피땀을 흘리고 일을 하고 노력할 때 우리 대한민국은 무엇을 해왔는가? 허송세월을 해왔습니다.〉


이승만도 ‘무능한 구정치 세력’으로 인식

박정희는 상당히 비판적 역사관을 피력한 셈이다. 이승만(李承晩)의 건국, 호국, 한미동맹, 농지개혁, 교육개혁 등의 건설적 기여도 무시하고 지난 100년의 역사가 다 건설에 실패했다고 본다.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분노하면서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4·19를 맞았다. 이승만의 위대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뒤의 일이고 1963년 현재로선 윤보선이나 이승만이나 다 같이 무능한 구정치 세력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 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 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한국과 같은 해에 유엔과 미국의 도움으로 건국했던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이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 또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아프리카 짐바브웨(당시에는 로디지아)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살았다.

〈오늘날 세계는 달 로켓이 발사되고 달 세계의 개척에 대한 문제가 논의가 되고 우주를 개척해야겠다는 우주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지금도 저 시골에 들어가면 지금부터 수천 년 전 태고(太古) 원시 시절의 그 생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새까만 어두운 밤에 호롱불, 등불 하나로 아직까지 원시적인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과거에 못살았는가. 왜 우리는 현실에서도 이렇게 못사는가. 여기에는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5·16 직후 비서실에서 일하던 노태우(盧泰愚) 대위로부터 가난 실태를 보고받은 적이 있다. 강원도 경북 산간 지방의 화전민(火田民)들 중에는 겨울에 동물처럼 겨울잠을 자는 풍습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고 계속 잠만 자면서 체력 소모를 방지하던 사실상의 신석기(新石器) 시대의 삶이었다.


국민을 공개 비판한 후보

박정희는 이날도 국민들의 수준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표를 달라는 연설이 아니라 국민 훈계이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과거에 걸어온 생활의 태도와 우리가 국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가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을 확실히 저는 이 자리에서 지적을 합니다. 남을 서로 헐뜯고 모략을 하고 중상(中傷)을 하고 권모술수를 능사로 알고 파벌과 분쟁을 일삼는 그러한 생활 태도, 그러한 국민의 자세 이것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빈곤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었고 우리에게 굴욕이라는 유산을 물려준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새로운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의 기본 방향은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파벌이나 분규나 서로 헐뜯고 모략하는 그러한 과거의 태도가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좀 더 굳게 단결하고 협동을 하고 근면하고 내핍(耐乏)을 하고 피땀을 흘려서 우리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건설할 수 있는 길이요, 이것만이 우리가 잘살 수 있는 길이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이승만은 농담으로도 ‘한국인은 안 돼’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한국인, 특히 양반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엄청난 잠재력을 발견하고 긍정한 사람이다. 이들에게 자유만 주면 활력을 갖게 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돌진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독립정신》).

언론인 출신 이승만이 힘을 북돋우는 교사였다면 진짜 교사 출신인 박정희는 따뜻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되 국민을 질책하고 단련시키는 사람이었다. 위악적(僞惡的)이라고 할까. 두 사람의 교육 방법은 달랐지만 지향점은 같았다.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두 개의 기록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민주주의는 신(神)이 아니다’면서 민주 우상 숭배를 거부한 점, 다른 하나는 국민들에 대한 공개 비판이다.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新進 세력이다’

1963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가 당당하고 공세적인 이유는 그의 역사관에서 나온다. 윤보선 세력을 민주주의로 포장된 역사적 퇴보(退步) 세력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역사의 진보 편에 선 신진(新進) 세력으로 확신한 것이다.

더구나 당시 권력을 잡은 장교 집단은 남미형 정치 장교들이 아니고 20세기의 3대 전쟁 중 하나인 한국전에서 공산군과 싸워 살아남은 전투 집단이었다. 오늘의 이스라엘 지도부와 같은 패기와 자부심이 있었기에 ‘먹물 집단’에 눌릴 이유가 없었다. 당시 국군장교단의 약 10%는 미국 유학 경험자였다. 외교관들보다 더 많았다. 능력 면에서도 최강의 무장 집단이었다. 그런 조직을 대표하는 박정희의 자신감이 이날 연설을 관통한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에는 여러 개의 정당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당을 우리들이 대별(大別)해서 볼 때에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5·16 혁명을 근본적으로 부정을 하고 모든 사태를 5·16 전의 무질서로 다시 환원(還元)을 하기 원하는 소위 구악에 젖은 구정치인들의 복고주의적인 정당, 또 하나는 5·16 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 이 과업을 계속 강력히 추진해서 이 혁명을 국민혁명으로 발전시켜서 이 나라를 하루속히 재건하고 건설하겠다는 의욕적인 정당, 이 두 가지 정당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번 선거는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구악에 젖은 집단과 이 나라의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겠다는 개척정신에 불타는 신진 세력, 이 두 세력의 대결이라고 저는 규정합니다.

역사는 언제든지 앞으로 전진하는 법이지, 역사가 뒤로 역행(逆行)하는 법은 없습니다. 구정치인 집단은 전진하는 역사를 역행시키려고 발버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진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낡고 케케묵은 구질서가 허물어지고 구세대가 물러간 후에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려고 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사회적인 진통이 있는 법입니다.〉


‘4·19와 5·16은 형식상 다 불법’

박정희는 구정치인들을 반(反)역사적 수구 세력으로 규정하는데 그 논리의 근거는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가짜라는 확신이었다. 일부 학자들이 박정희는 자신의 쿠데타가 가진 반민주성을 인식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경제 발전에 몰입했다는 상상력을 논문에 반영하기도 한다. 이 연설은 그런 해석이 사실과 동떨어짐을 알려준다. 박정희는 5·16과 4·19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

〈구정치인들의 집단, 소위 말하는 복고주의적인 정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지금에 와서 5·16 혁명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부정을 하고 불법이라고 규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5·16 직후에는 이것은 구국(救國)혁명이요, 구국 반공(反共)혁명이요, 이 혁명이야말로 공산화 직전에 조국을 구한 유일한 구국혁명이라고 극구 예찬하던 그들이 지금에 와서는 5·16 혁명은 불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4·19 혁명은 의거라 하고 불법이라 하지 않습니다.

4·19 혁명 역시 그들이 주장하는 형식만을 따를 것 같으면, 그때 자유당 정부 역시 대한민국의 당시 합헌적(合憲的)인 정부였습니다. 이것을 학생들이 뒤집어엎었습니다. 5·16 혁명 이전 민주당 정부 역시 국민들이 선출한 합헌적인 정부였지만 대한민국 국군들이 이것을 뒤집어엎었습니다.

그렇게 볼 때는 그들이 5·16 혁명이나 4·19 혁명이나 다 같이 불법이라고 규정해야 할 텐데 왜 하필 5·16 혁명은 불법이고 4·19 혁명은 합법이냐 말입니다. 4·19 혁명은 순수한 학생들이 부정과 불의에 항거해서 자유당 정권을 뒤집어엎고 난 다음에 그 정권을 구정치인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그 이후 학생들의 피로써 쟁취한 그 정권을 민주당 정부가 과연 어떻게 관리를 하고 어떻게 다스려왔는지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5·16 혁명은 군인들이 혁명을 한 다음에 구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4·19 혁명 때 학생들이 구정치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주니까 그 꼴을 만들어놓은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정권을 넘겨주면 또다시 옛날과 같은 혼란과 구악이 재발돼서 이 나라에 혁명이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2년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우리 군인들이 이 나라의 기초적인 개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정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는 5·16 혁명을 불법이라고 떠드는 그 친구들은 (군인들이) 정권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할 뿐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혁명가의 헌법관’

▲박정희는 1963년 10월 3일 광주 연설에서 민주당의 무능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5·16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사진=조선DB

 

5·16의 불법성과 혁명성을 다 인정하는 박정희는 혁명가의 헌법관을 보여준다. 법리로 보면 5·16이나 4·19는 다 불법이지만 헌법 제정 권력자인 국민과 국군의 역사적 결단이므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1963년에 박정희가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엔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는 대목이 있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5·16을,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는 것을 거부하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는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 장면(張勉) 정부하의 혼란상을 폭로한다.

〈그들은 말합니다. 혁명정부가 민주당 정권을 탈권(奪權)했다고, 정권을 뺏어갔다고… 5월 16일 새벽에 민주당 정부가 정신없이 자고 있다가 정권을 빼앗긴 건 사실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정성 어린 표 한 표 한 표를 모아서 그들을 선출해서 이 나라의 모든 운명까지 맡겨서 대권을 맡긴 그 정권을 왜 민주당 정부는 그 따위로 똑똑하게 못 했기 때문에 하룻밤새 정권을 빼앗겼습니까.

아마 오늘 이 자리에도 민주당 출신, 현재에도 민주당에 적(籍)을 가진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불만을 갖고 계실지 모르지만 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 그 당시에 우리나라 사회상이 어땠습니까? 용공 세력이 활개치고 사회의 각계각층에 용공 세력이 뿌리를 박고 들어가고 깡패가 거리에서 제 세상처럼 날뛰고 있었고 데모는 밤낮없이 일어났습니다. 4·19 혁명이 일어난 뒤 민주당 정부가 넘어질 때까지 우리나라에 데모가 얼마나 일어났는지 여러분들 아십니까? 제가 알고 있는 통계로는 자그마치 1800여 회의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그 절반은 민주당 정부 때 일어났습니다.

아까도 박준규(朴浚圭)씨가 말씀하셨지만 신성한 국회의사당이 점령을 당하고 언론기관이 점령을 당하고 그것뿐이겠습니까?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이래선 안 되겠다 잘못하다가는 공산당에게 그대로 먹히겠다 해서 재산을 슬금슬금 해외에 도피시켰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국 선박과 계약을 해서 여차 하면 우리는 도망갈 것이다, 미리 돈을 낼 터이니 우리가 요구할 때 배를 어느 장소에 대기시켜달라는 계약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거짓말입니까? 여러분들이 거짓말이라고 하면 저는 증거를 대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5월 16일 평화스러운 서울 거리에 왜 군인들이 들어와 혁명을 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느냐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배부르게 떳떳하게 먹고 편하게 지낸 그 사람들은 평화로운 서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뜻있는 온 국민들은 이 국가가 공산화 직전에 있었던, 위기일발에 있었다는 위기의식을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탈권을 행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이었기 때문에 천만다행이었지, 만약 그 사람들 정신없이 잠자다가 이북 김일성이가 내려와 탈권을 했다면 오늘날 우리 신세가 어떻게 됐겠습니까?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됐겠어요?〉

정권의 무능(無能)을 동정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고(故) 김성한(金聲翰) 선생이 소설 《7년 전쟁》 첫 장에 써놓았던 말이다. “무능한 통치자는 만참(萬斬)으로도 부족한 역사의 범죄자다.”

박정희의 상대 윤보선은 당시 대통령으로서 미국 측의 한국군을 동원한 쿠데타 진압 제안을 거부, 쿠데타 성공을 도왔던 이였다.


‘나를 빨갱이라고 합니다’

1963년 선거는 ‘박정희는 빨갱이인가’라는 이른바 사상논쟁으로 시끄러웠다. 5·16 혁명 공약의 첫 문장이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고’로 시작되고, 자신의 사상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수천 명의 좌경(左傾) 인사들을 잡아넣었으며, 집행을 미뤄왔던 소위 사상범들을 처형하도록 한 박정희였다. 《국제신보》 주필로서 그와 술친구였던 작가 이병주(李炳注)도 5·16 뒤 감옥에 갇혀 좌익 사형수들이 형장(刑場)으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신세가 되었고 이때의 감정이 그의 말년 소설에 반영되었다.

〈못할 소리가 없습니다. 요즘 와서는 박 의장이 뺄갱이라고 합니다. 공산주의자라고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는 야당 당원들이 전국 방방곡곡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실정을 잘 모르는 무지한 농민들에게 ‘박 의장이 빨갱이래’ ‘그 사람 옛날 공산당이래’ 이런 식으로 유포를 하고 돌아다닙니다.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니까 목포 어디는 지금 붙어 있는 대통령 후보 포스터의 박 의장 얼굴에 빨간 잉크를 전부 칠했습니다. 뺄갱이라 이겁니다.

이것이 소위 민주주의는 자기들만이 알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자기들밖에 모른다고 주장하는 언필칭(言必稱) 민주주의의 신봉자라는 그자들이 하는 신사다운 행동입니까? 이거야말로 우리나라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놓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달려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 건져주니 지금 와서는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으로 우리를 빨갱이다…

그들은 구태의연(舊態依然)합니다. 그들이 하는 방법을 지난 2년 동안 더군다나 금년 정월 정치 활동이 허용되고 난 뒤에 본인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구정치인들의 모든 행동을 감시했습니다. 감시했다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을지 모르지만 바라보고 왔습니다.

그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 생리에 있어서 하는 수법에 있어서 조금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구태의연합니다. 본인을 대단히 위험한 사상을 가진 불순분자라고 몰아가면서 규정을 합니다. 제가 알기에는 그분들이 정말 위험천만한 사람들입니다.

왜? 여러분들, 박정희란 사람이 아무리 못나고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 형식에 있어서 대한민국 혁명정부의 최고 책임자로 있고 내가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나를 갖다가 아무 근거도 없이 터무니없이 저 사람이 빨갱이라고 생사람을 잡는 이런 수법을 쓰는 사람들이 만약에 이 다음에 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힘이 없고 말 못하는 백성들이 자기 비위에 거슬리고 미울 때는 전부 빨갱이라고 두드려 몰 것 아닙니까?〉


‘박정희 동정론’

박정희 의장은 오히려 자신이 근거 없는 용공 조작의 희생자라고 주장한다.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에 포섭되었다가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 전개된 숙군(肅軍) 수사에 걸려 구속되었고, 수사에 협조한 덕분에 수사 책임자 백선엽(白善燁) 정보국장의 배려로 사형 구형, 무기징역 선고 후 형 집행정지를 받고 군복을 벗은 것은 사실인데 박정희는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역공(逆攻)했다.

그럼에도 당시 민심은 박정희 편이었다. 그때 고교 2년생이던 기자는 농민과 서민층에 빨갱이로 몰려 고생한 이들이 너무 많아 윤보선 측의 이념 공세가 먹혀들지 않고 박정희 동정론으로 기우는 공기를 실감했다. 박정희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 윤보선 측이 이 문제를 공론화(公論化)하고 언론이 크게 보도하는 것이 불리하지 않다는 판단을 했다. 유세 때마다 박정희는 이 쟁점을 거론, 용공 조작으로 몰아갔다. 이른바 사상 논쟁은 그가 15만6000표 차로 이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특히 경상도에 빨갱이가 많다’는 민정당 한 당원의 투표일 직전 발언이었다.

박정희는 윤보선 세력을 용공 조작 세력으로 몬 뒤 본격적으로 민주주의 논쟁을 시작한다. 그의 무기는 놀랍게도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였다.


“‘박 의장 부인이 일본 여자’라는 얘기도…”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 출범 경축 파티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 대선 기간 중 야당은 ‘박정희의 부인은 일본 여자’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사진=조선DB

 

〈또 그분들은 말하기를 대한민국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우리만 알고 우리만이 민주주의를 충실히 신봉해왔고, 이행해왔고 지금 혁명정부나 군사정부는 전부 군사 독재고 파쇼고 무엇이고 박 의장은 군복을 벗고 나와도 그는 군인이고, 박 의장이 군복을 벗고 나와 집권을 하면 그것은 군정(軍政) 연장이다. 이렇게 궤변을 쓰고 돌아갑니다.

여러분, 본인이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본인이 배운 범위에 있어서, 민주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생각이 다르고 견해가 다른 그런 사이에 있어서도 이것은 어디까지든지 이해를 시키고 설득을 시키고 서로 타협을 할 줄 알고 서로 참을 줄 알고 남을 관용할 줄 아는 이런 아량을 가진 것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국민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태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전부 빨갱이고, 공산당이고 저놈 일본 사람에게 돈을 얼마 받아먹고… 심지어 무슨 소리가 나옵니까? 박 의장 부인이 일본 여자다 이런 얘기도….

이것도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 계획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유포하는 것을 경기도 어디 경찰이 잡아넣은 것을 검찰총장을 불러서 그따위 가둘 필요 없으니 석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박 의장이 일본에 어떤 일본 부인을 또 하나 가지고 있다, 이렇게 모략을 쓴다면 이건 혹 있을 수 있는 모략이 되겠는데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제 아내를 일본 사람이라 하면 대단히 억울한 소리입니다.

그래 이런 모략, 저런 모략, 서로 같이 정당 동지 간에 당을 만들다가 수틀리면 주먹이 날아가고 폭력이 날아가고 예전에 국민의당인가 무슨 당인가 할 때 서울에서 백주대로상에서 서부 활극을 연출하는 그런 방식이 그것이 그 사람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입니까? 민주주의가 주먹과 폭력을 가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혁명정부는 지금까지의 모든 실력을 가지고 하루아침에 민주주의를 다 만들어놓을 수도 있겠습니다.〉

박정희의 연설은 이어진다.

〈그분들은 또한 이번 선거는 이건 부정선거다, 선거법이 잘못됐다, 이건 뭐 말도 못 하도록 입을 막는 벙어리 선거다. 이렇게 지금 선전하고 돌아다닙니다.

여러분, 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이요 최고회의 의장이란 사람을, 멀쩡한 사람을 갖다가 뺄갱이다, 공산당이다, 그 사람 부인이 어느 나라 사람이다, 어디서 돈을 받아먹었다. 별의별 소리 다 들어도 우리 혁명정부에서 그 사람 한 사람을 구속을 했습니까? 이러한 못 할 소리 다 하고도 여기 자유가 없고 입도 못 벌린 벙어리 선거다 그럽니다. 그 사람들은 그럼 입을 벌리라 하면 무슨 소릴 할 작정입니까?〉


민족적 민주주의 vs 가식적 민주주의

이어지는 박정희 연설은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에 대하여 거대한 화두(話頭)를 던진다.

〈최근에 신문에 여러 가지 논쟁이 된 문제 중에 그분들이 본인을 지칭을 해서 대단히 위험한 민족주의자요, 또 이질적인 민주주의자라고 이렇게 지금 욕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물론 민주주의의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본인 자신도 느끼고 있습니다.

본인이 말하는 민족주의라는 것은 17~18세기에 유행되던 소위 계파적이요, 고립적이요, 심지어 극단적으로 나아가서 국수주의 사상과 직결되는 이러한 위험한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조(李朝) 500년 동안 뿌리 깊게 내려오던 사대주의 근성이 아직도 얼마든지 남아 있어요. 일제 40년 동안 뿌리 깊게 내려온 식민지주의 근성이 우리 생활 주변에는 아직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근대적, 봉건적인 잔재(殘滓)를 완전히 일소를 하고 우리도 독립국가의 자주민으로서 떳떳이 자주의식과 민족의 주체의식을 똑바로 가지자 하는 것이 본인이 주장하는 민족주의입니다.(박수)

본인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와 같은 확고한 민족적 이념에 바탕한 그걸 갖다 놓고 민주주의를 키워 나가자 하는 것이고 구정치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대주의 근성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허수아비 껍데기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이것을 총칭해서 가식적인 민주주의라고 얘기했습니다. 왜 가식적이고 껍데기냐, 외국에서 수입한 민주주의라는 간판만, 껍데기만 앞에 갖다 놓고 그 뒷전에 앉아서 협잡하고 부정하고 권모술수 쓰고 모략중상하는 그것이 껍데기 가짜 민주주의 아니고 뭡니까?(박수)〉


‘가짜 민주주의’에 맞선 고독한 투사

이는 박정희 연설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고 1963년 선거의 역사적 의미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말이다. 자신의 민주주의를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 규정하고 윤보선식 민주주의를 사대주의에 뿌리를 둔 가짜라고 몰아간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따를 것이냐, 한국적 현실에 맞게 주체적으로 수정할 것이냐를 두고 격론을 벌였는데 박정희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함으로써 이 논쟁은 박정희 통치 기간 내내 이어졌고 그 여진(餘震)은 지금도 한국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박정희는 조선조, 식민지, 자유당, 민주당 정권을 다 사대주의로 묶고(이승만 또한 포함되었다.) 여기에 뿌리내린 민주주의를 가짜라고 하면서, 5·16 세력이야말로 공산주의뿐 아니라 미국과도 맞서가면서 민족적 관점에서 모든 굴욕의 근원인 가난을 물리치는 역사적 사명에 골몰하는 진짜 민주주의 세력이라고 해석했다.

이 순간 박정희는 지나간 500년 동안 쌓여온 명분론적 사대주의에 도전하는 영웅적, 그래서 고독한 투사의 모습이다. 500년의 사대주의적 적폐를 2년간의 주체적 역량으로 어떻게 청산한단 말인가?


‘밀감도 탱자 된다’

〈예전에 어떤 식물학자를 만났는데 그분이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몇십 년 전에 일본에서 밀감나무를 가져와서 한국에 이식(移植)을 했다. 몇 년 후에 밀감이 열렸는데 이것이 밀감인가 하고 보니 밀감이 아니고 탱자가 열렸더라. 같은 종자를 일본이란 땅에서 한국 땅에 갖다가 이식할 것 같으면 여기는 기후적인 조건이 다르고 토질이 다르고 여러 가지 환경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밀감이 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탱자가 될 수 있다, 이겁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집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모든 주의나 사상이나 정치제도도 마찬가지라고 난 생각합니다.

덮어놓고 외국에서 온 것은 다 좋은 것이고 우리 것은 다 나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버리자 이겁니다. 외국의 좋은 제도는 우리에게 가져와서 우리의 역사적인 배경과 민족적 전통과 우리의 문화와 이러한 근본을 버리지 않는, 그러한 어떤 바탕 위에다 세워서 점차로 이것을 개선해나가 우리의 체질에 알맞게 해서 소화가 잘 되도록 하고, 그것이 나가서는 우리의 살이 되고 뼈가 되도록 하는 것이 본인이 주장하는 민주주의입니다. (박수)

만약 그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을 모략중상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권모술수를 능사로 알고 수틀리면 주먹이 나가고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 민주주의가 진짜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 또는 그들이 말하는 서구식 민주주의라면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라는 것은 다시 한 번 재고(再考)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진짜 서구식 민주주의라면 우리는 그러한 민주주의를 우리나라에 수입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서구라파에 수출하자 이겁니다(박수). 아마 우리나라 것이 훨씬 품질이 좋을 거예요.〉

이처럼 당당한 확신으로, 서구식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그것을 사대주의적으로 추종할 때 생기는 부작용을 비판한 사람은 박정희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이게 그의 위대성이고 이게 그의 절대고독인 셈이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는 부하들에게 박정희 시해 작전을 지시하고 만찬장으로 돌아가면서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렸다. 그가 말한 민주주의는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이끈 ‘한국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박정희가 비판한 ‘사대적 민주주의’였다. 박정희는 그의 최측근을 설득하는 데도 실패한 것이다. 박정희의 마지막 날 그는 미국, 한국 내의 민주화 세력, 그리고 북한 정권에 의하여 3면이 포위된 상태였다.

 

다시 박정희의 연설로 돌아가 보자.

〈결론적으로 말씀해서 이러한 민주주의니 뭐니 뭐니 하는 것을, 실속 있게, 알맹이가 있는, 우리에게 알맞은 것을 우리가 선택을 해서 우리가 잘 키워나가자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따라서 본인은 구정치인들 그자들이 떠드는 소위 억지 궤변에 대해서는 무슨 소리를 하든지 저는 전적으로 불신을 합니다. 구정치인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난 믿지 않으려 합니다.

왜, 그자들이 지금까지 해온 모든 그 행동, 지금까지 걸어온 그 행적, 오늘 현재 하고 있는 그 행보. 앞으로 새로이 수립되는 제3공화국에 있어서 이러한 구악에 젖은 구악(舊惡)의 보균자(保菌者)들이 또다시 정권을 잡았을 때 이 나라가 과연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근대적인 그런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하는 것은, 여기에 대한 선택의 자유는 국가의 주인공이신 국민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지만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번만은 절대 여러분들이 과거와 같이 구정치인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이것입니다.(박수)〉


“경제 재건 없는 자유민주주의는 공염불”

문제는 ‘구악의 보균자들’을 쓸어버릴 수 없는 헌법적 제약 속에서 국가 건설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앞으로 제3공화국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첫째는 정국의 안정을 이룩해야겠습니다. 둘째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확립해야 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자립경제를 기필코 달성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창한 민족적인 과업을 제3공화국에 있어서 우리가 시행하기 위해서는 여기에는 꼭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적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을 국민 여러분들이 뽑아주셔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제3공화국에 있어서 경제 재건이라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문제요, 동시에 우리 국가 목표 중에 있어서도 가장 제1위적인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총력을 여기다 경주(傾注)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제1차 5개년 계획은 이다음에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든 이것은 기필코 완성을 해야 되겠고 또한 1차 5개년 계획이 완료하면 제2차, 제3차 5개년 계획을 계속 추진을 해서 이 나라의 자립경제 바탕을 기필코 우리 모든 민족의 집결된 역량으로 꼭 달성해야 되겠다는 것을 저는 제3공화국에 있어서 부탁을 하는 바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경제 재건 없이는 우리가 항시 부르짖는 민족의 자주요, 자립이요, 국가의 독립이요, 개인의 자유요, 자유민주주의요 하는 것은 전부 다 공염불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에 있어서 모든 비극이라든지 불행이라는 것은 그 대부분이 전부 우리가 못살고 가난한 여기에서 전부 기인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허리띠 졸라매야”

그는 만악(萬惡)의 근원을 가난으로 파악한 다음에 자립경제를 건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나라의 독립과 개인의 자유도 경제적 자립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은 위대한 각성이다. 이런 원리가 힘없는 지식인이 아니라 ‘무장한 예언가’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동양적 실용정치의 원조 관중(管仲)이 2600년 전 중국 전국(戰國)시대에 한 말 ‘창고가 차면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족하면 영욕(榮辱)을 안다’는 뜻과 통한다. 그는 사실과 현실을 딛고 꿈을 이루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죽을 때까지 ‘4자(自)전략’을 밀고 나갔다. 자조(自助)정신-자립(自立)경제-자주(自主)국방-자유(自由)통일. 박정희의 대전략은 간결했고 일관성이 있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와가지고 혁명정부 경제 정책이 잘못돼서 무슨 집단 자살이 있고 무엇이 있고 그런 소리를 했다고 그러는데 이게 다 가난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가난을 빨리 우리의 노력으로써 이것을 극복을 하자, 그러나 이 조상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처음에도 제가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국민들이 앞으로 몇 년 후에 우리의 경제를 자립을 시키고 보다 잘살 수 있는 번영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은 우리가 먹을 것도 덜 먹고 입을 것도 덜 입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가 좀 더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하고 근면해야 내일의 행복이 올 수 있고 우리의 자립경제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겁니다.

요즘에 일부 정당의 후보자들이 지방에 돌아다니면서 ‘여러분들 나를 대통령을 시켜주면 내일부터 당장 여러분들을 배부르고 부자를 만들어주겠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주어진 여건이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그런 재주가 없는 한 하루 이틀에 당장 우리를 잘 먹이고 부자를 만들 그런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진짜 그런 분이 있다면 본인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장 대통령 후보라는 것을 사퇴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밥을 싸 들고 따라다니면서 지지를 하겠습니다.(박수)〉


“‘당선만 되면 된다’는 생각은 국가 위신 망각한 것”

요사이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처럼 후손들을 위하여 당대(當代)는 희생하자고 했더라면 정치적 자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61년 전 한국인들은 이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김재규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등에서 피가 샘물처럼 콸콸 터져 나오고 있을 때 곁에 있던 두 여인에게 한 마지막 말 ‘난 괜찮아’는 박정희 세대의 입버릇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한마디 부탁을 하고 내려갈까 합니다. 지금도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이번 우리의 선거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 자유 우방국가 국민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번에 대한민국 선거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가 하는 것을 모두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국내에도 현재 외국의 언론, 언론인, 신문기자, 외교관, 여러 사람들이 와서 이 선거를 전부 주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국민의 정치적인 수준, 교양의 정도, 과연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그런 민도(民度)에 도달한 국민인가 하는 것을 외국 사람들은 전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나는 당선만 되면 된다, 정권만 잡으면 된다 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건 국가의 위신이라든지 체면이라는 것은 전혀 망각한 그러한 행동이라고 규정짓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선거가 지금 종반전에 들어서 열을 띠고 흥분의 도가니에 싸여 있다 하더라도 이 나라의 주인공이신 국민 여러분들만은 절대 흥분에 휩쓸려 들어가서는 안 될 것이고 냉정을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제 추석이라 오늘은 모두 여러분들 성묘나 고향이나 모두 가야 될 시간인데 우리 당의 강연을 들어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많이 모여서 장시간 동안 지루한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신 데 대해서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박수)〉


“정치와 경제를 한국화하겠다”

▲피터 현

 

5대 대통령 선거를 취재하러 한국에 온 재미(在美)동포 언론인 피터 현은 그때 《뉴욕 헤럴드 트리뷴》 특파원이었다. 그는 윤보선 후보를 먼저 인터뷰했다. 피터 현의 집안과 윤보선 집안은 아는 사이였다. 피터 현은 장면 정부 시절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의 문정관(文政官)으로 일하다가 5·16 쿠데타가 터지자 ‘장면 정부 임명자’로 찍혀 면직되었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왔다.

피터 현은 윤보선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대단히 실망했다. 국가 운영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란 질문에 윤보선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모든 게 잘될 것이다” “그런 것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생각해볼 문제이다”는 식으로 대답하여 기사로 쓸 내용이 별로 없었다. 그가 1963년 10월 6일 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쓴 선거 관련 기사에도 윤보선의 말은 한마디만 소개되어 있다.

“나는 군사정부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한 사람이고, 박정희 일파가 몰고 온 해악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므로 출마했다.”

피터 현은 박정희 후보가 대구에서 유세할 때 따라 내려가서 그와 인터뷰했다. 박 의장의 집권으로 피해를 보았던 피터 현은 국가 건설에 대하여 설명하는 진지성과 열정에 감복하여 선입견이 바뀌었다. 피터 현은 인터뷰를 정리하여 박정희의 기고문 형식으로 10월 13일 자 신문에 실었다. 이 기고문에서 박정희는 윤보선 후보 측이 매카시적 수법으로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정희는 ‘내가 당선되면 국가적인 양심과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면서 평생 그가 추구했던 핵심적인 주제를 언급한다.

“나는 우리의 정치, 경제구조를 한국화(Koreanize)하겠다.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는 국민들의 요구와 필요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가 필요한 소비재는 우리가 만들어낼 것이다.”

박정희는 이어서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 정책과 막대한 원조를 탕진한 전 정권을 비판했다. 그는 이 대선의 의미를 구정치인과 공화당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피(New Blood)’의 대결이라고 했다.

피터 현은 인터뷰를 하던 박정희가 종합제철소, 고속도로, 정유공장 등 중공업 건설에 대한 포부를 밝힐 때는 속으로 비웃었다고 한다. 아직 전란(戰亂)의 상처도 치유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황당한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터 현은 그 11년 뒤 한국에 와서 다시 박정희를 인터뷰하게 되는데 이때 산업 시찰을 하면서 그 황당해 보이던 박정희의 꿈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을 확인한다.


CIA, “박정희, 反美 선동”

투표일을 나흘 앞둔 10월 11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남한 선거의 배경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작성해 워싱턴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보고서의 도입부는 아마도 한국 상황에 정통한 전문가가 쓴 듯 아주 적확(的確)하게 본질을 요약했다.

〈오늘날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외세에 의한 지배에 대해 한국인들이 벌여온 끈질긴 저항과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오랜 집착에서 연유한 것이다. 유교적 가치관은 개인적·가족적 유대(紐帶)관계를 너무나 중시함으로써 국가 이익에 손상을 끼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런 전통에 기인한 격렬한 민족적 자존심과 파당성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불리게끔 만들었다.

1948년 이후 대부분의 정치적 쟁점은 본질적으로 권력을 잡은 세력과 권력을 갖지 못한 세력의 싸움이었고 정치적인 충성은 정당과 정책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 개인에게 바쳐졌다.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와 11월 26일의 총선거도 이런 한국 정치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CIA 보고서는 대통령 후보들을 분석했다. 보고서는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이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반미(反美)감정을 충동질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립(中立)노선을 함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미국 CIA가 그를 위험인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CIA가 박정희의 이념성향을 표현할 때 동원한 ‘민족주의자’ ‘반미감정’ ‘중립노선’이란 단어는 당시 월남(남베트남) 대통령 고딘디엠에게도 똑같이 갖다 붙인 낙인(烙印)이기도 했다.


월남과 한국의 엇갈린 운명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을 알린 《조선일보》 1963년 10월 18일 자 1면이다. 사진=조선DB

 

바로 이 무렵 미국 정부는 사이공에서 CIA를 동원하여 월남 군부(軍部) 내의 반(反)고딘디엠 장군들과 내통, 쿠데타 계획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가 작성된 20일 뒤(11월 1일) 월남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민족주의자 고딘디엠과 그의 동생 고딘누는 살해된다. 고딘누는 정보기관장이었다. 쿠데타 이후 월남은 쿠데타의 악순환(惡循環)에 빠져들고 미국은 월남의 정치적 구심점을 상실하여 월남전을 대신 떠맡게 된다.

고딘디엠 정권의 파수꾼이었던 고딘누는 월남 군부 안에 인맥을 구축하지 못하고 주류 세력과 충돌해 쿠데타를 당하고 말았지만, 김종필(金鍾泌)은 육사 8기 중심으로 군부를 통제하고 최고회의를 장악하여 박정희 권력을 수호·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미국은 김종필을 박정희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면 박정희의 권력 기반이 약화·순화되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김종필이 조기에 귀국하여 박정희의 대선(大選) 캠프에 합류하는 것을 기를 쓰고 막았다.

그해 10월 17일 자 《조선일보》의 선거 결과 분석 기사 제목들은 이 선거의 의미를 잘 요약했다.

〈‘앞으론 “강력정치” 어려울 듯’ ‘여야의 번지수를 완전히 뒤집은 셈’ ‘남과 북의 숨 막히던 표차’ ‘자랑해도 좋은 민주역량(民主力量)’ ‘다소 잡음 있었지만 처음 맛본 공명(公明)’〉


‘무장한 예언가’의 따뜻한 배려심

운명적인 1963년 가을,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을 배제하고, 15만6000표 차이라도 이겨 ‘조국 근대화’의 기수(旗手)로서 언론과 야당의 견제 속에서 새 역사를 열었고, 월남 정권은 미국이 기획한 쿠데타로 무너져 그 12년 뒤 패망(敗亡)하는 길을 걷게 된다. 고딘디엠 형제의 피살 소식에 화를 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20일 뒤 댈러스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동갑인 박정희는 16년을 더 살다가 한미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부하 손에 죽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61년 전 박정희의 육성을 들으니 셰익스피어 연극에 자주 등장하는 운명과 마주한 인간의 격정과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박정희는 연설을 마치면서 청중에게 ‘장시간 동안 지루한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신 데 대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이런 따뜻한 배려심이 18년 동안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정치적 암살이 없었다는 뜻) 천지개벽의 변화를 이룬 지도력의 핵심일 것이다. 그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조건에서 최단기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긴 지도자일 터인데 그의 몸과 마음과 정책과 비전에 깃든 아름다운 균형의 미학(美學)에 감탄한다. 이 모든 것을 담은 61년 전 연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역사 드라마이고 무장한 예언가의 독백이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07.08 "유신 개발 독재? K2 전차·원전 수출은 박정희 '중화학 선언'의 열매" 

박정희의 '마지막 비서관' 김광모

▲박정희 중화학공업 정책의 산증인인 김광모 전 청와대 비서관이 6월 17일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 관련 자료와 문서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대부분 대통령기록관과 서울대 한국사회과학자료원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박상훈 기자

 

망백(望百)의 노인은 매일 아침 휠체어를 타고 집 근처 커피숍으로 간다. 글을 쓰기 위해서다. 그의 구십 생애 중 “가장 바빴으나 찬란했던” 1970년대를 기록하는 중이다.

 

1971년부터 8년 동안 그는 청와대 중화학 담당 비서관으로 일했다. 오원철과 함께 박정희의 손발이 되어 방위산업, 중화학공업, 원자핵 개발을 기획하고 실행한 인물이다. “나는 ‘했다고 한다’가 아니라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는 “K2전차와 원전 수출, 반도체 산업의 번창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위에서 탄생한 것인데도 MZ세대는 박정희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아 서글프다”고 했다.

 

핵무장론과 ‘대왕고래’ 탐사로 소란한 요즘, 박정희 핵 개발과 원유 시추 사업의 전말을 알고 있는 ‘마지막 비서관’ 김광모를 만났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알리고 죽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했다.

 

◇ 박정희의 손과 발로 뛴 8년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관련서를 이미 여러 권 출간하셨다. 왜 또 글을 쓰시나.

“써도 써도 모자란다는 생각에…. 책을 내도 사람들이 읽지 않으니 요즘은 매주 한 편씩 글을 써서 카톡으로 배달한다. 카톡이란 놈이 참 신통하다. 원고지, 볼펜이 따로 없어도 되니 나 같은 늙은이에겐 아주 제격이다(웃음).”

 

-첫 책은 자비로 출간했더라.

“1988년 낸 ‘한국의 산업 발전과 중화학공업화 정책’이다. 박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중화학 정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 한 게 안타까워 그간의 자료와 문서, 현장 경험을 토대로 기술한 것이다. 그런데 출판해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탓일까?

“신군부는 박정희 죽이기에 몰두했고, 주류 경제학자들은 유신 개발 독재의 산물이라며 저평가했다.”

 

-박정희의 중화학 선언은 왜 중요한가?

“박정희 최고의 업적은 새마을운동도, 고속도로도 아니다. 중화학공업화로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기초를 만든 것이다. 중화학이 뭔가. 철강, 기계, 조선, 석유화학, 전자 등 모든 산업의 기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지만 반도체도, AI 산업도 중화학의 토대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 시작은 방위산업이었더라.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 계획을 성공시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청와대 습격 사건, 울진삼척 지구 침투 사건 등 북한이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닉슨 독트린’과 함께 미국이 주한 미군 사단 하나를 철수하겠다는 통보를 해오자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오원철 수석이 이때 등장하는 건가?

“방위산업 추진 지시에 경제기획원은 주물선·특수강·중기계·조선소 등 4대 핵 공장 건설 계획을 세웠는데, 1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자 대통령이 크게 실망했다. 그때 서울대 공대 출신인 오원철 당시 상공부 광공전 차관보가 기막힌 대안을 마련해 왔다. 어떤 병기(兵器)도 분해하면 부품이 되는 것이니,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4대 핵 공장을 짓는 대신 부품 공장과 조립 공장을 설립하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병기를 양산할 수 있다고 보고한 것이다. 바로 다음 날 오원철은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 나는 중화학 및 방위산업 기획관으로 발령이 났다.”

 

-’공업 구조 개편’도 이때부터 시작되나?

“1971년 말부터 병기를 시제(試製)하는 단계에 들어갔는데 철강, 특수강, 화공약품 같은 원자재가 없으니 한계에 부닥쳤다. 오죽하면 청계천 고물 상가에 버려진 병기를 주워다 만들었겠나. 병기를 생산하려면 원자재를 만드는 중화학 공장과 정밀 가공 기술 인력이 필수라는 걸 절감하고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개편하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손발이 되어 중화학공업 정책의 실무를 맡았던 김광모 전 비서관이 창원기계단지 설립 계획안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모습. /김윤덕 기자

 

◇ 대통령 단상으로 날아간 파편

-미국은 박정희의 방위산업, 중화학 선언에 반대했다던데.

“방위산업을 하려는 박정희의 의도와 역량을 의심해서 무기 제조 기술은커녕 설계 도면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국방과학연구소는 최종 제품을 분해한 뒤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개발했다. 마침내 창원 기계단지에서 기본 병기를 양산하고 유도 무기와 핵 개발까지 논의하게 되자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창원 단지를 시찰했고, 한국의 방위산업이 공산권 수중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판단에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이 중단된다.”

 

-병기 시사(試射) 때의 일화가 흥미롭더라.

“모든 시사에 참석할 만큼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어린애 돌보듯 키웠다. 한번은 대전차 지뢰를 선보이는 날이었는데, 탱크 밑에 지뢰를 넣고 폭파했더니 그 파편이 대통령 단상으로 날아가 난리가 났다. 아찔한 상황인데도 대통령은 ‘지뢰 유력이 대단하구나. 계속해!’ 하며 칭찬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지뢰가 터지지 않을까 봐 두 개를 설치했다가 너무 세게 폭발한 거였다(웃음).”

 

-박정희의 중화학공업이 유신 개발 독재의 산물이란 비판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유신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유신으로 인해 안정된 정권이 보장됐기 때문에 최소 10년이 걸리는 중화학공업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은 개인 치부가 아니라 그가 즐겨 쓰던 휘호대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나는 믿는다.”

 

-대기업 특혜라는 비판도 따른다.

“중화학공업은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당시 대기업들이 참여하지 않으려고 해서 박통이 일일이 달래고 설득했다. 설득도 안 되면 행정명령으로 지시해 맡겼을 정도다. 조선소만 해도 건설업으로 성공한 현대를 지명했는데 정주영 회장이 못 한다고 버티자 대통령이 호통을 치셨다. 부품 생산과 가공 공장은 중소기업체들에 맡겨, 이 시기 중소기업 육성이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전경. /현대중공업 제공

 

◇ 신군부의 박정희 죽이기

-박정희의 핵 개발은 거의 완성 단계에서 포기했다던데.

“1972년 9월 박통이 오원철 수석에게 핵 개발 계획을 지시했다. 오 수석은 원자력연구소 윤용구 소장, 핵 개발을 전공한 현경호 부소장과 회의한 뒤 극비리에 플루토늄탄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프랑스에서 핵연료 재처리 기술과 도면을 획득했는데, 이를 안 미국이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 고리 원전 2호기 차관을 중지하겠다고 통보해 중단됐다. (핵 개발이) 완성 단계도 아니었다. 정치인들이 잘 알지 못하면서 회고록에 그렇게 쓰더라.”

 

-그래도 박정희가 비밀리에 핵 개발을 지속했다고 하더라.

“공식적으로는 포기했다고 선언했지만, 핵연료공단은 기술 개발을 이어갔다. 그러나 박정희 서거 후 신군부가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고 핵 개발 관련 기관들을 모두 없애고 연구 인력도 퇴출시켰다. 국방과학연구소 인력을 반으로 줄이고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로 축소시키면서 기술이 크게 퇴보했다.”

 

-김진명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핵 물리학자로 등장하는 이휘소 박사가 서울대 화공과 동기라던데?

“뛰어난 학생이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세계적인 과학자였지만 박정희 지시로 핵을 개발하다 CIA에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는 핵 개발과는 상관없는 소립자 물리학자였다. 박 대통령이 이휘소에게 친서를 보낸 적도 없다. 김진명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요즘 나오는 핵무장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대안도 없으면서 정치인들이 한마디씩 하는 것이다. 당장 누가 핵 개발을 주도할 것이며, 핵실험은 또 어디에서 할 건가.”

 

-6개월 내 핵을 가질 수 있다고도 한다.

“허무맹랑한 말들이다. 핵을 개발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윤석열 정부가 동해 석유 탐사 계획을 발표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원유 시추 실패담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1960년대 유공의 합작 회사였던 걸프 오일이 서해안 지역에 석유가 매장돼 있다는 미국 해양연구소의 에머리 보고서를 보여주면서 상공부에 대륙붕 개발 신청을 했다. 정부는 걸프오일, 텍사코, 셸 등 세 회사에 조광권을 주고 여섯 광구에서 원유 시추를 했다. 비용은 전액 시추자 부담이고 원유가 나오면 반씩 나누기로 한 조건이라 재정적 부담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 ‘드라이(징후 없음)’로 판정 났다. 일본과 분쟁지역인 7광구에서도 원유는 나오지 않았다.”

 

-상공부 석유화학과장을 지냈고, 대한석유공사에서도 근무하셨더라. 윤 정부의 동해 석유 탐사 가능성은 어떻게 보시나.

“석유 240억배럴이 있을 가능성이 20%라면 당연히 시추해야 한다. 부존 가능성 판단을 누가 어떻게 했는지가 관건인데, 나는 액트지오가 어떤 회사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것이 걱정된다. 박정희 때와 달리 국가 재정 부담이 큰 사업인데, 원유가 나오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져야 할 부담이 너무 크다.”

 

-박정희 대통령도 1976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우리도 석유국가가 됐다’고 발표했는데,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그해 박 대통령이 진해로 휴가를 가면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어느 기자가 석유 탐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돌발 질문을 하자, 당황한 대통령이 ‘원유는 있는데 경제성이 없어 포기했다’고 얼버무리셨다(웃음). 기대를 엄청 했는데 원유가 없다는 최종 결과에 대통령이 가장 크게 실망하셨다.”

 

 ▲지난 6월 3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 텔레비전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경제 현안 관련 국정 브리핑을 보고 있는 사람들. 이날 동해 심해 석유 탐사 계획이 발표됐다. 2024.6.3/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 尹 주위에 검사보다 과학자 많아야

-가까이서 본 박정희는 어떤 사람이었나?

“보고서에 깨알같이 메모하며 공부를 많이 하는 대통령이었다. 외강(外剛)이 몸에 배었으나 실은 내유(內柔)의 인사였다. 독일 함보른 광산에서 파독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울던 장면, 방산 현장에서 순직한 이석표 비서관을 꼭 살려내라며 울던 모습이 생생하다.”

 

-8년간 청와대에 있으면서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다던데.

“김정렴 실장의 ‘청와대 공무원 수칙’이었다. 명함도 못 만들게 하고, 대통령과 사진도 못 찍게 했으며,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게 했다(웃음). 모범공무훈장인 청조근정훈장 받은 것을 최고 영예로 느끼며 살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하나?

“강직하지만 포용이 없는 정치 스타일로 일관하다 무너진 게 안타깝다. 나는 그가 전자공학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올해는 중화학 선언 51년, 산업단지 60년이다.

“제조업 없이, 중화학 없이 첨단 산업도 없다. 자동차 부품 업체 없이 차세대 전기차를 만들 수 없고, 원전 방산 업체 없이 K원전·K방산 제품을 만들 수 없다. 반도체의 실리콘은 누가 만들 것인가. IMF 외환위기도 중화학 제품의 수출로 이겨냈다.”

 

-윤 대통령에게 조언한다면?

“방위산업, 항공산업, 원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과학자와 기술자가 대우받고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한 경제학자는 한국 중화학공업의 일등 공신은 박정희의 기술 인력 양성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 주위에 검사보다 과학자가 많아야 한다.”

 

-왜 그렇게 박정희에게 ‘진심’인가?

“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그만한 지도자, 애국자가 없었다.”

☞김광모

1933년 경남 김해 출생. 부산고,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상공부 화학과에 들어가 호남비료, 대한석유공사를 거쳐 상공부 석유화학과장으로 일했다. 1971년 청와대 경제2수석실에서 방위산업과 중화학, 핵개발 관련 실무를 맡았다. 삼성엔지니어링 대표, 삼성그룹 고문을 지냈다. ‘중화학 공업에 박정희의 혼이 살아 있다’ 등의 저서를 펴냈다.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08.07 쓴소리 반겼던 육영수 여사…정치 얘기엔 “대통령 하실 일”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 - 별세 50주년 ‘영부인 육영수’ 회고

“사모님!” “컥!” “사모님!” “컥컥!”

 

 50년 전인 1974년 8월 15일 한낮 서울대병원 응급실.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실려 온 육영수 여사를 살리려고 양 발목을 부여잡고 절규하다 사실상의 임종(臨終)을 지켜본 34세 청년이 있었다. 1971년 9월~74년 8월 대통령 제2부속실 행정관으로 육 여사를 수행했던 김두영(84) 전 청와대 비서관은 운명의 그 날을 마치 어제처럼 기억했다. 혹자는 그의 회고를 여사에 대한 ‘선택적 기억’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엔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일관성이 있다. 품격있는 영부인상이 유달리 목마른 시점에 그를 만났다.

 

약자 챙기기가 일상, 국정 개입 전무

옷 손수 지어입고 딸 예복으로 써

시중 대통령 비판 귀 열고 다 들어

특활비 전용·선물 논란? 상상 못해

 

영면하시던 날, 대통령과 껴안고 통곡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에서 만난 김두영 전 비서관은 저서 『가까이에서 본 인간 박정희, 인간 육영수』를 통해 두 사람의 인간적 면모를 생생히 전했다. 그는 “내가 세상 뜨고 나서 혼백이 있다면 두 분을 가장 먼저 뵙고 싶다”고 했다.

 

▶여사 별세 50주년입니다. 그날을 회고해주시죠.

“그날은 비번이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 중계를 집에서 TV로 보는데 갑자기 화면이 꺼져요. ‘무슨 일이 났나’ 하는데 청와대에서 ‘서울대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전화가 왔어요. 바로 달려갔더니 간호사가 침대에 누운 육 여사 가슴을 누르는 모습이 보여요. 간호사가 날 보더니 ‘환자 다리 들어 올리세요’ 하는 거예요. 피가 쏟아지니 지혈하려 그런 거죠. 급히 버선 신은 두 발목을 붙잡고 치켜든 채 안고 서서 ‘사모님, 사모님’ 외쳤는데 눈을 감은 채 가래 끓듯 ‘컥컥’ 소리만 내세요. 그때는 다들 ‘사모님’이라 불렀죠. 2~3분 그러고 있는데 의사들이 달려와 수술실로 여사를 모시고 갔어요. 그때 간호사가 여사의 총탄 맞은 이마에서 튀어나온 손톱만 한 뼛조각과 반지를 건네주더군요. 주머니에 넣고 복도에 서 있는데 대통령이 들어 오셨어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원래 검은 얼굴이 핏기가 싹 가시고, 온통 샛노란 거예요. 저녁 7시쯤 여사가 운명해 유해를 청와대에 운구했는데 대통령과 자녀들이 벌써 상복을 입고 서 계시더군요. 눈물을 못 참고 울고 있는데 누가 내 목을 와락 안고 대성통곡을 해요. 돌아보니 대통령이야. 둘이 껴안고 마구 울었어요. 김정렴 비서실장이 옆구리를 치면서 ‘각하 모시고 이러면 어떡해’ 해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통령을 집무실로 모셨어요. 그때 여사 모신 관이 실은 여사 모친 이경영 여사를 위해 준비해둔 관이었죠. 관에 뼛조각을 넣고, 반지는 유족에 돌려드렸어요. 오팔로 기억하는데 비싼 반지는 전혀 아니었죠.”

 

▶힘없고 어려운 국민에 유난히 따스했던 영부인으로 기억되는데요.

“그때 세간에 ‘어려운 일 있으면 대통령보다 영부인한테 편지하라’는 소문이 났어요. 대통령에 보낸 편지는 민정수석실에서 스크린하지만, 여사는 직접 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니까요. 박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1961~63년)일 때부터 여사에 편지가 왔을 겁니다. 많을 땐 하루 40통씩 오는데 저와 비서 2명이 편지를 전부 뜯어보고 내용을 발췌한 뒤 원본을 붙여 여사께 보고합니다. ‘무슨 자리에 취직시켜달라’ ‘융자해 달라’는 건 빼고요. 여사가 저녁때 그걸 다 보세요. 아침에 출근하면 ‘○○○ 할머니께 쌀 한 가마 보내주세요’ 같은 지시가 내려와 있어요. 특별한 사안은 직접 인터폰으로 지시하고요. 편지가 적게 오는 때도 있는데 그럼 ‘왜 없지?’ 하세요. 그게 민심을 보여주는 거죠. 세상이 시끄러우면 편지가 늘고요. 서울 서부경찰서 말단 순경의 사연이 기억납니다. 형편이 어려워 단칸방에서 순경과 부인, 시아버지가 함께 자요. 남편이 당직 서는 밤이면 며느리가 잘 곳이 없어 부뚜막에서 쪼그리고 자는 거예요. 영부인이 그 편지 보고 마음이 아팠던 것 같아요. ‘방 하나 더 얻게 30만원 보내주세요’라고 하셔서 내가 직접 돈을 전달했죠. 그 때로선 큰돈입니다.”

 

여배우 염문설’도 보고 가능했던 청와대

▲그가 육영수 여사 지시 집행내역을 쓴 경리 장부. 김현동 기자

 

▶생전의 육 여사는 ‘청와대 야당’으로 불렸다는데요.

“대통령 내외가 저녁밥 먹자고 자주 부르셨어요. 찬이라곤 멸치나 말린 꽁치 같은 간소한 식단이에요. 그때 민심을 전하죠. 한번은 ‘(반체제 시인) 김지하씨 두고 말이 많은데, 얘기 들어보면 불온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고 했어요. 대통령이 ‘그래?’라며 고개를 끄덕해요. 나랑 함께 여사를 모신 라은실 비서는 대통령에게 ‘모 여배우와 연애하신다는 소문이 났습니다’라고도 했어요. 대통령은 ‘아시아 영화제 참가자들 초청 행사 때 그 배우와 악수한 기억밖에 없는데’ 하셨을 뿐 전혀 화를 내지 않았죠. 또 한 번은 고려대에서 반정부 활동하는 조모 군이 ‘농활 가니 지원해달라’고 편지를 했길래 내가 직접 돈을 주면서 ‘왜 공부 안 하고 데모만 하나. 성과도 없고 시민들만 불편하지 않나. 차라리 농활 가서 농민들에게 박정희 정권 안 되겠으니 심판하라고 하라’고 했어요. 그 친구가 놀라면서 ‘그래도 괜찮습니까?’ 하길래 ‘해라. 청와대 비서관이 그리 말하라고 했다고 하라’고 한 일도 있어요.”

 

▶박정희 청와대 비서관이 그런 말들도 할 수 있었습니까.

“박 대통령 내외는 도량 넓으신 분들이고, 바른 소리 하는 사람을 고마워하세요. 그러니 얼마든지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지. 특히 육 여사는 당신을 추켜올리는 말을 하면 바로 ‘마음이 없는 얘기하지 마’라고 하세요. 듣기 싫은 얘기를 듣기 싫어하지 않는 분이었어요.”

 

▶전 영부인은 비싼 의상으로 특활비 전용 논란에 휘말렸는데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예요. 1973년 1월에 하와이 이민 70주년 행사가 열려 큰 영애(박근혜)가 대통령 특사로 갔는데, 내가 수행했어요. 한복을 5~6벌 갖고 갔는데 전부 육 여사 입던 옷들이라 놀랐어요. 여사가 손수 재봉틀을 돌려 기장을 맞춰놓고 ‘행사 별로 무슨 무슨 옷 입으라’고까지 적어줬어요. 여사 옷은 전부 저렴한 국산 옷감을 손수 디자인해서 가까운 양장점에 맡겨 만든 것들이에요. 양장점이 알려지면 손님들 몰릴까 봐 이름도 안 밝혀요. 백도 전부 국산만 들고 다녀요. 큰돈 들어갈 일 없으니 특활비 논란이 날 수가 있겠어요.”

 

▶전 영부인은 해외 출국 행사에서 남편보다 앞서 걸어 구설에 올랐는데요.

“육 여사는 대통령과 함께 한 행사에는 손도 안 들었어요. 동선도 늘 대통령 두세 발짝 뒤죠. 유튜브 동영상 보면 다 나와요. 본인만의 일정엔 경호도 일체 못하게 하고 나만 대동해요. 한번은 북한이 빤히 보이는 강화도에 가시는데, 걱정돼 경호실에 부탁해서 권총을 받아 가려 했어요. 여사에게 보고하자 ‘평소대로 하라’고 해 결국 못 가져갔죠.”

 

▶현 영부인은 ‘명품백 선물’ 논란으로 검찰 조사까지 받았는데요.

“육 여사는 늘 청와대에서 손님들을 접견하는데, 선물 가져온 이를 본 적이 없어요. 아예 안된다는 걸 다들 알고, 또 만나는 분들이 수준 있는 분들이니 불상사 날 일이 없죠. 양주동·박목월·봉두완씨 등 교수·작가·언론인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 자주 들으셨어요. 그분들이 책 들고 오신 건 봤죠.”

 

▶영부인들의 인사 개입 논란도 끊이질 않는데요.

“육 여사 추천으로 누군가 장관, 의원이 됐다면 다 알려졌을 텐데, 그런 일 기억나는 게 전혀 없어요. 여사한테 오는 전화는 나나 여비서가 다 받는데 주로 양지회 멤버들과 통화하시고, 친한 여성 성악가 한 분이나 전화가 오지, 장관·의원이나 그들 부인과 통화하는 경우는 없었어요.”

 

육 여사, 대통령 비서실에 전화 딱 2번

 ▶요즘은 영부인이 여당 대표에게 문자도 보내는데요.

“육 여사는 약자들 민원을 들어주고 ‘이런 민심이 있다’고 전할 뿐, 정치는 ‘대통령 하실 일’이라며 한치도 개입 안 했어요. 내가 여사를 수행한 3년 동안 그분이 대통령 비서실에 전화하는 거 딱 두 번 봤습니다. 한번은 ‘정종택 비서관(새마을 담당) 연결해 주세요’였는데 새마을 양잠 행사 참석 관련해 질문이 있어서였고요. 또 한 번은 ‘김성진 공보비서 대주세요’ 였어요. 그날 조간에 ‘박 대통령이 ○○ 지역을 시찰했다. 김정렴 비서실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이 수행했다’는 1단 기사를 보시고 그런 거여요. 여사가 김 비서관에게 ‘대통령 동정 기사 보면 밤낮 김 실장과 박 실장이 수행했다고만 나오는데, 국민들 지겨우시지 않겠나. 앞으로는 수행한 다른 분들 이름도 넣으면 좋겠다’고 해요. 맞는 얘기잖아요. 그 뒤로는 두 실장 대신 ‘○○ 장관이 수행했다’는 식으로 기사가 바뀌더군요.”

 

▶전 영부인은 대통령 전용기로 타지마할을 찾았다는 논란이 있습니다.

“당시는 여사는커녕 박 대통령도 전용기가 없어 일반 승객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갔어요. 73년 큰 영애가 하와이 갈 때도 KAL기를 일반인들과 타고 갔죠. 내가 수행했는데 기장이 ‘지금 이 비행기에 대한민국 대통령의 딸 박근혜 양이 타고 있다’는 방송을 한 게 기억나요. 영부인의 처신은 간단합니다. 육 여사처럼 상식에 맞고, 국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혜롭게 하면 돼요. 또 여사는 사람을 쓸 때 오랜 기간 됨됨이를 지켜본 뒤 썼기에 측근 논란도 전무했어요. 영부인에게 이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제2부속실 10개 만들어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중앙일보 강찬호 논설위원

 
 

10.20 60년전 박정희 '눈물의 연설'...서독 공회당엔 안내판 하나 없었다

▲1964년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을 격려한 독일 뒤스부르크의 한 공회당. photo 이동훈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1964년 12월 10일, 대한민국 국가원수 최초로 서독(현 독일)을 찾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은 파독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눈물을 애써 참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오전, 고국에서 대통령이 찾아온다는 소식에 이날만큼은 양복과 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파독광부과 간호사 250여명은 뒤스부르크 교외의 한 공회당(타운홀)을 가득 메웠다. 박 대통령이 태극기가 내걸린 단상에 오르고 애국가 반주가 울려퍼지자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란 마지막 대목에서 몇몇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 옆의 육영수 여사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한복을 입은 아시아 최빈국의 영부인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당시 서독 신문에까지 게재될 정도였다. 박정희의 당시 서독 방문은 역대 대통령의 수많은 국빈방문 중 가장 모범사례로도 얘기된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 뒤스부르크의 공회당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을 환영하는 파독광부들. photo 국가기록원

 

1964년 뒤스부르크 찾아간 박정희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자”는 박정희의 다짐처럼 당시만 해도 아시아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60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어엿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1964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3달러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3만3745달러를 기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피식민국가 중 6·25전쟁이란 동족상잔의 참화를 겪고도 이 정도 눈부신 발전을 거둔 나라는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 유일하다.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겠는가”(벤가릴 메논 유엔 한국재건단(UNKRA) 단장)란 말은 쓰레기통에 들어간 지 오래다.

 

하지만 60년 전 대한민국 국가원수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서독 뒤스부르크의 한 공회당에서 했던 이른바 ‘눈물의 연설’과 관련해서는 지금은 기억할 만한 공간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지난 10월 12일(현지시간) 찾아간 독일 뒤스부르크 교외의 한 공회당. 라인강과 루르강이 합류하는 곳에 자리한 유럽 최대 일관제철소 티센크루프제철소 아래 허름한 주택가에 자리한 이 공회당은 60년 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파독광부들과 간호사들을 격려한 역사적 현장이다. 한 해 전 파독광부 1진이 파견된 함보른탄광회사가 운영한 뒤스부르크 함보른의 프리드리히 티센탄광과도 차로 불과 15분 거리다.

 

빛바랜 하늘색 페인트로 덮인 공회당의 모습은 기자가 독일 방문에 앞서 국가기록원을 통해 입수한 빛바랜 흑백사진 속 공회당의 모습과 일치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곳 공회당에서 연설을 하고, 파독광부 1진 대표 유재천씨의 안내를 받아 공회당 인근에 있던 파독광부 숙소를 직접 둘러봤다. 하지만 공회당에서는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을 알려주는 그 흔한 기념비나 안내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전직 파독광부들을 수소문해 기자가 찾아간 날에도 공회당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공회당 뒤편의 테니스코트에는 지난해 걸어둔 현수막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공회당 앞에서 만난 한 집배원은 “평소에도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이튿날 다시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동네주민은 “마을회관으로 쓰는데 문닫은 지 오래”라며 한국에서 왜 찾아왔는지 되레 궁금해했다. “60년 전 한국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다”는 기자의 말에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기자와 함께 공회당을 찾아간 ‘재독한인 글뤽아우프회’의 양승욱 사무총장은 “재독 한인사회 내에서도 1964년 박 대통령이 연설했던 곳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며 “당시 영상을 보니 이곳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뤽아우프회’는 파독광부들의 모임으로, ‘글뤽아우프’는 ‘행운(글뤽)을 갖고 위(아우프)로 올라오라’란 독일 광부들의 인사다.

 

1967년 ‘동백림사건’의 트라우마

글뤽아우프회의 또 다른 관계자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경 일부 파독광부들 주도로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했던 뒤스부르크 공회당을 매입해 파독광부기념관으로 조성하자는 논의가 무성했다. 이곳은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서독 방문 35주년을 맞이해 1999년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 부총재 신분으로 독일을 찾았을 때 동포간담회를 연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뒤스부르크 인근 에센에 이미 파독광부기념회관을 조성한 마당에 별도 기념관을 조성할 필요가 있느냐는 부정적 목소리가 나오면서 결국 불발됐다. 공회당에 안내판이라도 세워서 당시 연설을 기념하자는 얘기도 나왔으나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교민사회 내부에서마저 공회당과 관련한 의견이 엇갈리면서 추진동력이 떨어지자, 공회당을 관리하는 뒤스부르크시 당국 역시 적극적으로 나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글뤽아우프회의 한 관계자는 “인근 주민들도 체육관으로 쓰는 공회당을 매입하면 체육관이 사라진다고 반대한 것으로 안다”며 “뒤스부르크시 역시 현지 주민들 입장을 고려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관계자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연설한 공회당 매입과 안내판 부착이 불발된 가장 큰 이유는 일부 교민들이 박정희에 대한 반감을 보이면서다. 이는 과거 동·서독 냉전(冷戰)의 최전선이자 북한의 핵심 대남 공작거점에서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사건’ 등이 터지면서 생긴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1964년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 옆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육영수 여사(오른쪽). photo 국가기록원

 

‘反朴’으로 돌아선 재독 한인사회

북한은 과거 동독을 거점으로 서독에 나와 있는 유학생, 파독광부와 간호사 등을 포섭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그 와중에 일부 한인들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과 무단접촉하는 이른바 ‘동백림사건’이 터졌다. 당시 김형욱 부장이 이끌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서독 한인회장을 지낸 작곡가 윤이상을 한국으로 납치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했다. 이에 서독 정부까지 개입했고 결국 서독 정부의 차관 취소 협박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윤이상을 대통령 특사로 석방하기에 이른다.

 

결국 박 대통령의 1964년 서독 연설 이후 3년 만에 터진 ‘동백림사건’으로 서독 한인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당시 서독에 거주했던 한인들 가운데는 박정희 정권의 민정이양 번복(1963년),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등에 비판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했다. 파독광부들 역시 대학교를 나온 고학력자가 많았다. 당시 서독을 비롯 유럽을 휩쓸었던 ‘68혁명’의 분위기 역시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유신(維新)’을 단행한 이후에는 서독 수도 본에서 ‘재독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가 결성되는 등 ‘반박(反朴)’ 바람이 강타했다. 그 결과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연설 이후 지난 60년간 적어도 재독 한인사회에서 ‘박정희’란 말은 일종의 금기어였다. 에센의 파독광부기념회관 한편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연설 사진과 그 옆에 자리한 ‘유신독재 타도하고 민주사회 건설하자’ ‘박(정희)독재 타도하고 민족통일 이룩하자’는 민건회 소속 재독한인들의 시위 사진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재독 한인사회의 한 관계자는 “박정희 정권 때 영남은 급속한 공업화가 진행되며 일자리가 넘쳐났던 반면, 호남은 먹고살 것이 없어 파독광부들 가운데도 호남 출신들이 상당히 많았다”며 “지역적 요인들이 뒤섞이면서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화됐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출신지역별로 크게 엇갈리는 것처럼, 재독 한인사회 역시 출신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평가가 첨예하게 엇갈린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한탄이다.

 

교과서에도 없는 박정희 서독 방문

박정희 대통령의 1964년 12월 서독 방문과 관련한 사실은 학교 교과서에서도 종종 생략된다. 최근 ‘우파교과서’로 논란이 된 한국학력평가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산업화’와 관련한 단원에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견하여 외화를 벌어들였다” 정도의 간략한 서술에 그친다.

 

박 대통령이 당시 서독 수도 본에서 쾰른을 거쳐 뒤스부르크까지 이어지는 아우토반을 직접 달리면서 경부고속도로 건설구상이 나왔고, 뒤스부르크의 데마크(Demag)제철을 방문한 직후 포항제철 건설 구상이 나왔다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교과서는 단 한 권도 없다. 뮌헨의 교민간담회에서 데마크제철 출신 김재관 박사(전 상공부 중공업차관보)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안을 받아든 사실을 언급하는 곳도 없다. 데마크제철은 당시 서독 철강산업을 주도하던 핵심 기업이다.

 

하지만 지난해 작고한 백영훈 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전 국회의원)의 회고에 따르면, ‘한강의 기적’은 1964년 박정희의 서독 방문에서 시작됐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백영훈 전 원장은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때 통역으로 수행하며 뤼브케 당시 서독 대통령, 에르하르트 총리와의 회담에 배석했다. 서독까지 타고 갈 비행기가 없어서 뤼브케 대통령과 직접 만나 “비행기 좀 빌려달라”고 읍소한 사람도 백영훈 전 원장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사실상 고립무원 상태였다. 당시 미국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정통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고, 각종 지원을 끊었다. 당초 박 대통령은 미국 노스웨스트항공(현 델타항공) 비행기를 임차해 서독으로 가려 했지만, 노스웨스트항공은 출발 10일 전 비행기 임대불가를 통보했다. 일본과는 당시 미수교 상태였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종잣돈을 구하기 위해 손을 벌릴 곳은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로, 2차대전의 폐허를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서독밖에 없었다.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의 씨앗

결국 1964년 12월 6일 서독 정부가 제공한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이륙한 박 대통령은 홍콩(당시 영국령), 방콕(태국), 뉴델리(인도), 카라치(파키스탄), 카이로(이집트), 로마(이탈리아), 프랑크푸르트(독일)를 거쳐 28시간 만에 쾰른·본공항에 당도했다. 본 라인강변의 쾨니히스호프호텔(현 아메론호텔)에 여장을 푼 박 대통령은 12월 9일에는 에르하르트 총리와 정상회담도 가졌다. 2차대전 패전 후 15년간 서독 경제장관을 지내고,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의 후임이 된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설계한 주역이다.

 

이 자리에서 에르하르트 총리는 경제장관 시절 두 차례 방한한 기억을 떠올리며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려우니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위를 달릴 자동차를 만들어야 하고, 자동차를 만들려면 제철소가 필요하다”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진다. ‘앙숙’이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모델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박정희에게 권한 것도 에르하르트 총리로 알려진다.

 

결국 1964년 12월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결과 파독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1억5900만마르크(약 4000만달러)의 차관을 얻어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조언대로 한·일 국교정상화도 서독 방문 이듬해인 1965년 전격 단행됐다. 이를 통해 얻어낸 대일 청구권자금을 활용해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착공해 1970년 완공했고, 포항제철은 1968년 착공해 1973년 완공한 뒤 쇳물을 쏟아냈다.

 

한국 전자산업 역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서베를린의 지멘스, AEG 공장 방문에서 단초가 마련됐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2014년 3월 독일 베를린을 찾아 50년 전 아버지가 찾았던 지멘스의 가스터빈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의 싹이 1964년 12월 박정희의 서독 방문에서 움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한편 이 같은 사정을 전해들은 경상북도는 올해 박정희 서독 연설 60주년을 맞아 뒤스부르크 공회당에 이를 기념하는 안내판이라도 붙이기 위해 뒤스부르크시 당국과 물밑접촉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북 구미는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결과 뒤스부르크시 측과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경북도 측이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했던 곳임을 알리는 동판을 제작해 뒤스부르크시 측에 기증하고, 뒤스부르크시가 이를 공회당에 세우는 식이다.

 

경북도, 기념판 설립 위해 물밑접촉 중

경북도의 이 같은 움직임이 알려지면서 글뤽아우프회 관계자들 역시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10년 전과 달리 국내 지자체에서 직접 뒤스부르크시와 교섭에 나선 터라,박정희에 대한 감정이 엇갈리는 재독 한인사회 내부의 논란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글뤽아우프회의 한 관계자는 “박정희 동상을 세우자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한 동판만 세우자는데 큰 반대가 있겠느냐”라고 했다.

 

다만 뒤스부르크시 측은 10년 전에도 막판에 소극적으로 돌아선 전례가 있어 끝까지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뤽아우프회 양승욱 사무총장은 “당시 뒤스부르크시 측과 거의 얘기가 됐는데, 뒤스부르크시의 한 동성애자 행사에서 일어난 사망사고로 시장이 교체되면서 흐지부지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독일 오버하우젠의 야코비탄광에서 일했던 백진건 전 에센 한인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했던 뒤스부르크의 공회당 건물을 매입하려고 타진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며 “작은 안내판이라도 하나 내거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주간조선 이동훈 기자

 

10.27 군인 박정희를 세계적 지도자로 만든 세 가지 '깊은 생각' 

박정희 대통령 서거 45주년 특집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1945년 이후 독립한 150여 신생국 중 유일하게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지도자다. 그의 재임 기간(18년 5개월 10일)을 포함한 1961년부터 80년까지 20년동안 한국이 이룩한 연평균 9%대 성장률은 인류사에서 찾기 힘든 기록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3년 연설하고 있다./조선일보DB

 

그는 집권 직후부터 8.5%(1962~66년), 9.7%(1967~71년)의 고속성장을 시작해 1971~78년에는 연평균 11% 속도로 한국 경제를 키웠다. 각국과 비교해 독창적이면서 빠른 성공을 일궈낸 박정희의 국가경영술(state-craft)은 세계적 연구대상이 됐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송의달

 

2024년도 노벨경제학상 공동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서울(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기념관을 방문해 가며 그의 발자취를 훑고 있다”며 “한국의 도약은 박정희가 ‘폭발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덕분”이라고 극찬했다.

 

1961년 5월 군인(육군 소장)이던 박정희는 어떻게 세계적 지도자가 됐을까? 비결을 찾기 위해 그가 1961년과 62년, 63년에 쓴 <지도자도(指導者道)>, <우리 민족의 나갈 길>(약칭 ‘우리 민족’), <국가와 혁명과 나>(약칭 ‘국가와 혁명’)를 살펴봤다. 이 세 권에 그의 후반 생애를 관통하며 행동의 원형(原型)이 된 ‘깊은 생각’ 세 가지가 담겨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 6월과 1963년 9월에 각각 발간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왼쪽)과 <국가와 혁명과 나>. 2017년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을 맞아 기파랑 출판사가 영인본으로 새로 냈다./기파랑

 

◇①민족과 역사에 대한 통찰

첫 번째는 민족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박정희(1917~79년)는 5000년에 걸친 민족사를 혹독하리만큼 냉정하게 평가했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속사. 고식·안일·무사주의(無事主義)로 표현되는 소아병적인 봉건사회의 한 축도판.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당파 상쟁(相爭)의 역사”(‘국가와 혁명’ 245~247쪽)

 

그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사대(事大)주의, 게으름, 불로소득 관념, 개척 정신의 결여 같은 나쁜 유산들로 인해 민족성이 악화되고 관존민비(官尊民卑)와 공인(工人)에 대한 천시가 굳어졌다고 했다.(‘우리 민족’ 84~96쪽).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 버려야 옳다”(‘국가와 혁명’ 250쪽)까지 했다.

만족사에 대한 처절하고 전면적인 부정(否定) 위에서 그는 ‘5·16 혁명’의 의의(意義)를 도출해 냈다.

 

“이것은 멀리는 고, 중세대, 가까이는 이조(李朝) 오백년간의 침체와 왜제(倭帝·일본의 통치) 36년간의 피맺힌 학정, 해방 이후 고질을 총결산하여 다시는 가난하지 아니하고, 약하지 아니하고, 못나지 아니한 예지와 용기와 자신을 가진 신생민족의 우렁찬 신등정(新登頂)이다.”(‘국가와 혁명’, 26쪽)

 

▲5.16 혁명 이틀 후인 1961년 5월 18일, 박정희 소장(맨 왼쪽)을 비롯한 5.16 혁명군 수뇌부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지지 시위에 경례로 인사하고 있다./조선일보DB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민족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큰 변곡점이라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우리나라에는 실업자는 250만명, 정기적으로 점심을 굶는 아동은 900만명이 넘었다. 하루 세끼 밥을 다 먹는 사람은 국민의 10%에 불과했다. 1960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80달러)이 필리핀·방글라데시 보다 더 낮은 아시아 최빈국이었다.

 

▲1960년대 중반 우리나라 지방 농촌의 한 민가 모습. 인구는 급증했지만 산업과 먹거리가 부족해 국민들은 매년 봄 보릿고개를 겪으며 식량 걱정을 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조선일보DB

 

박정희는 “1961년 정부 예산과 국방비에서 미국 원조가 차지하는 비율은 52%, 72.4%”라며 “이러고도 독립된 자유, 민주주의의 주권국가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했다. 그에게서 “5·16 혁명은 민족 중흥창업(中興創業)의 마지막 기회”(‘국가와 혁명’ 259쪽)였다.

 

“핵심은 민족의 산업혁명화에 있다. 먹여놓고, 살려놓고서야 정치가 있고 사회가 보일 것이며 문화에 대한 여유가 있을 것이다. (…) ‘굶주리는 사람 없는 나라’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민족경제의 타개와 부흥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해야 한다.”(‘국가와 혁명’ 248~259)

 

<박정희가 옳았다>의 저자인 이강호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은 “동아시아 3개국 중 가장 극심한 성리학 원리주의의 나라로 상공업 발전이 가장 미약했던 한국 국민들을 상대로 박정희는 대각성과 새로운 출발을 촉구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교육부가 2022년도 11학년(고교3년) 대상 세계사 교과서에 실은 한국의 경제 발전을 다룬 '한강의 기적' 관련 사진.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배경으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소개했다. 왼쪽부터 박정희 대통령,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박태준 포스코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 회장, 최종현 SK그룹 회장/한국학중앙연구원

 

◇‘할 수 있다’ 정신과 ‘한강변의 기적’

박정희는 ‘총력 속도전’으로 경제발전의 깃발을 들었다. 5·16 두 달 만인 1961년 7월 22일 경제기획원을 세우기 무섭게 62년 1월부터 경제개발 1차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건설부·농촌진흥청(62년), 노동청(63년), 국세청·수산청·산림청(66년)을 만들고 청와대 경제비서실을 경제1, 경제2, 경제3 수석비서관실로 확대개편(67년)했다

 

국민들에게는 “일어서자! ‘고생하자’”를 외치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 넣었다. 그는 “부지런하고, 싸움하지 말고, 노력하는 국민으로 행동하자. 그 길 만이 사는 길이다. (…) 한국은 20대 청년이다”(‘국가와 혁명’ 220,267쪽)고 말했다.

 

1961년 4000만 달러이던 수출이 70년 10억 달러로 10년동안 연평균 40%씩 치솟자, 박정희는 1973년 1월 ‘1981년 100억 달러 수출·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골자로 한 중화학공업 선언으로 또 한번 점프를 꾀했다. 조선·철강·자동차·석유화학 같은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과 현대·삼성·대우 같은 대기업을 키웠다.

 

1977년에는 아시아에서 일본(1967년)에 이은 두 번째로 100억 달러 수출을 목표보다 4년 앞당겨 달성했다.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놓는 것이 승공(勝共)의 길이다”(‘우리 민족’ 2쪽)는 초심(初心)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수출 100억 달러 돌파를 보도한 1977년 12월 23일자 조선일보 1면/조선일보 DB

◇②후세에 길이 남는 리더십

두 번째는 리더십에 대한 깊은 고뇌와 노력이다. 박정희는 1940년 2월부터 46년 12월까지 청년기 6년여(23세~29세)를 만주군관학교→일본 육사→조선경비사관학교 순서로 보냈다. 군문(軍門)에서 단련된 그는 리더십의 중요성를 절감했다. 박정희의 말이다.

 

“나라의 안태(安泰)와 민족의 번영은 지도자도(指導者道)의 확립 여하에 달려 있다. (...) 현존하는 위기를 극복하고 국태민안의 확고한 기틀을 세워야 하며 영세만대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가져본 바 없는 진정한 ‘지도자도’를 계승해 주어야 한다.”(’지도자도’ 34~35쪽)

 

▲1961년 6월 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발행된 <지도자도(指導者道)>. 5.16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자신의 사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쓴 35쪽 분량의 소책자이다./송의달

 

그는 “우리 사회가 불타오르겠다는 기름[油] 바다라면, 이 바다에 점화 역할을 해주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라면서, “안일주의, 이기주의, 방관주의 및 숙명론자로부터 탈각(脫却·벗어 버림)하여 국민이 부르짖는 것을 성취하도록 이끌어가야 한다”(같은 책 10쪽)고 했다.

 

박정희가 실제로 구상한 리더십은 포용적이고 대담했다. 5·16 혁명을 신랄하게 비판한 최두선 전 동아일보 사장을 1963년 12월 3공화국 초대 내각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정치적 인연이 전무(全無)한 남덕우 서강대 교수를 1969년 재무장관으로 기용한 게 이를 보여준다. 박정희의 저서 4권에 대한 평설(評說)을 쓴 남정욱 작가는 “그(박정희)는 관록 보다 의욕과 능력, 경력 보다 창의와 실천력을 가진 인재를 등용했고 검증된 인물은 오래 썼다”고 말했다.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7년 6개월), 남덕우 재무장관(이후 경제 부총리)·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각각 9년 3개월) 등이 대표적이다. 중화학공업 책임자인 오원철 경제 제2수석 비서관은 1971년부터 79년까지 청와대에서 일했다. 1965년부터 육사 제자인 박태준을 포항제철 사장으로 줄곧 맡겼다.

 

▲사진 왼쪽부터 최형섭(1920~2004년) 장관, 남덕우(1924~2013년) 장관, 김정렴(1924~2020년) 비서실장.

◇포용하며 예비하는 지도자

박정희는 빈농(貧農) 출신 엘리트들로 ‘활기차고 행동하는 정부’를 꾸린 뒤 차관급 이하 인사(人事)를 장관들에게 일임해 힘을 실어줬다. 1962년 5월 제1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신호탄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66년), 과학기술처(67년), 과학기술진흥법 제정(67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71년) 설립 등으로 ‘과학기술 강국(强國)’ 이라는 획기적인 국정(國政) 방향을 제시했다.

 

덕분에 1965년 28명이던 한국의 이공계 박사 숫자는 1980년 936명, 1990년엔 6070명으로 불었다. 한국의 경제활동인구 1000명당 연구원 수와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비 비중은 현재 세계 1위, 2위이다. 이는 한국 경제 부상(浮上)의 견인차가 됐다.

 

“지도자는 장래의 일을 예견하고 적절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야 한다”(‘지도자도’ 21쪽)는 말을 120% 이행한 것이다. 1960~70년대는 한국의 엘리트들이 가장 제대로 역할한 시대로 첫손 꼽힌다.

 

▲1976년 10월 3일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박정희 대통령이 쓴 친필 휘호/조선일보DB

 

그는 생애 마지막날(1979년 10월 26일)까지 충남 당진 삽교호 준공식 현장을 찾았고 각종 회의와 순시에선 긴말을 삼가고 실무자들 의견까지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의 육성(肉聲)이다.

 

“문제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판단할 줄 아는 총명(聰明)이 지도자에게 필요하다. 정열과 충분한 신축성이 있어야 한다. (…) 지도자는 그들(전문가)의 조언을 경청하고 포용하는 넒은 아량(雅量)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지도자도’ 20~21쪽)

 

“격랑 속의 독주(獨舟·외로운 배)를 저어가는 사공”이라 자신을 이름 붙인 박정희는 “파도의 물결이 모질수록 더욱 더 강해져 가고 있고 불퇴전(不退轉·물러서거나 흔들리지 않음)의 결의에 불타고”(‘국가와 혁명’ 12쪽)라고 심경을 밝혔다.

 

◇③서민과 동고동락...솔선수범의 자세

마지막 세 번째는 국민, 특히 서민(庶民)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恩人)이다.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은인과 관련있는 일에서 떠날 수가 없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創建)’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국가와 혁명’ 292쪽)

 

이는 ‘서민들이 잘 사는 나라’가 그의 최고 통치 목표였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관직을 둘러싼 당쟁과 파당주의, ‘특수 특권의식’ 그리고 이에 물든 정치인들에게는 환멸과 염증을 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생전에 농촌과 산간 벽지, 섬 등을 찾아 서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그들과 동고동락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소재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전시된 사진들이다./송의달

 

“또다시 전(前)근대적인 파당의식의 포로가 되어 정쟁(政爭)을 일삼는(…) 돈과 감투 분배에 눈이 어두운(…) 사리사욕(私利私慾)으로 뭉친 도당(…) ‘입으로 정치’하는 습성”(’우리 민족’ 24, 201~213쪽)

 

그는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 사회를 증오하는 소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부패 특권사회를 보고 참을 수 없어서 거사한 5·16 혁명(‘국가와 혁명’ 292쪽)”이라며 구(舊)정치 세력과의 단절·차별화를 분명히 했다.

 

“지도자는 대중과 운명을 같이 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동지로서의 의식을 가진 자라야 한다. 친절하고 겸손하며 모든 어려운 일에 당하여 솔선수범하여 난관을 돌파하며 사(私)를 버리고 오직 국민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숭고한 정신을 그는 가져야 한다.”(‘지도자도’, 18쪽)

 

박정희는 이 공언(公言)도 지켰다. 재임 중은 물론 사후(死後)에도 본인과 가족, 친·인척과 관련된 비리가 없이 깨끗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다”(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 “박정희의 청렴(淸廉)을 반박할 만한 근거는 나타나지 않았다”(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평가가 해외에서 먼저 나오고 있다.

 

▲1978년 12월 포항제철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오른쪽) 포항제철 사장과 최각규(왼쪽) 상공부 장관이 수행하고 있다./포스코

◇‘특수 특권의식’ 없이 청렴한 일생

양복, 외투, 내의, 구두 등을 모두 국산품으로 쓴 그의 청와대에서 점심은 특별한 행사가 아닌 한 멸치나 고기 국물에 만 기계국수나 우동, 비빔밥이었다. “굶는 국민들이 있는데 나만 잘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1970년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통치 자금에 보태 쓰시라”고 리베이트로 받은 6000만원을 건네자, 박정희는 펴보지도 않고 다시 밀며 “임자 마음대로 쓰게”라며 돌려주었다. “민족 전체를 생각하고 민족의 공동 운명을 의식한다면 어떻게 사리(私利)와 자파(自派)의 이익에만 혈안이 될 수 있겠는가”(‘우리 민족’ 44쪽)라는 자계(自戒·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지킨 것이다.

 

그는 1965년 2월부터 79년 9월까지 15년 동안 한 달도 빠지지 않고 수출진흥 확대회의와 월간경제동향회의에 총 299차례 참석했다. 여기에다 헬기와 기차 등으로 전국을 누비며 현장을 세밀하게 챙긴 국가 지도자는 많지 않다.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강원도 소양강 댐 담수식 참석 후 주변을 시찰하고 있다. 소양강댐은 이듬해인 1973년 10월 15일 준공됐다./국가기록원

 

10·26 사태 다음 날 새벽 국군통합병원에서 박정희의 시신을 확인한 군의관은 “낡은 허리띠, 도금 벗겨진 넥타이핀, 평범한 세이코 시계 등 대통령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5년 전속 이발사는 “박 대통령께선 해진 러닝셔츠를 입고 계신 적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박정희는 1977년 각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민의료보험을 저소득자·생활무능력자·생활보호대상자부터 우선 도입했다. “서민들이 잘 사는 복지민주국가”(’우리 민족’ 1쪽)를 만들겠다는 절박감에서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남 거제 저도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사진 왼쪽).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그린 그림들(오른쪽)

◇난세에 재조명되는 박정희

지금부터 45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40분쯤, 박정희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 서민의 인정(人情)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는 소망 대로였다.

 

그가 소박·검소하게 사는 동안, 국민들은 조금씩 배불리 먹어갔다. 언론을 억압하는 독재자라는 비난속에서도 박정희는 1968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두(年頭)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입 기자들은 물론 언론사 사주(社主), 간부들과 격의 없이 만나 민심을 들으면서 설득도 했다. 그것은 “지도자는 자기가 확신하는 방향과 가장 가능한 방법에 대하여 납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협력을 자극하고 이끌고 나갈 용기를 가진 자”(‘지도자도’ 13쪽)라는 신념의 발로(發露·겉으로 드러남)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 1월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2시간 넘게 연두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은 문화공보부가 다음날인 1월 16일 내놓은 당일 기자회견 책자. 총 85쪽 분량이다./SNS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를 좌우명으로 삼은 박정희는 1961~63년에 쓴 책들에 국민을 향한 약속과 자신에 대한 다짐·결의(決意)를 새겼다. 그리고 이 세상 마지막날까지 ‘국궁진력(鞠躬盡力·국민을 위해 몸을 구부려 온 힘을 다함)’의 자세로 실행에 최선을 다했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는 비전도 없이 한 달만 지나면 무의미해질 정쟁으로 매일을 허송하고 있다. 역사에 무지(無知)한 아마추어 리더십과 감성적 포퓰리즘이 난무한다. 국민들이 정치 지도자들을 더 걱정하는 이 난세(亂世)에 박정희가 품었던 ‘깊은 생각’은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도자는 솔선수범, 희생의 정신, 양심을 가져야 한다.(...) 언행이 일치하고 국가와 국민에 대하여 누구보다 충실하여야 한다. (…) 이와 같이 할 때 피지도자는 마음 속에서부터 지도자를 따를 것이다.”(‘지도자도’ 33~34쪽)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1979년 11월 3일 오전 서울 중앙청 앞마당에서 열렸다. 서울시청, 남대문, 서울역을 거쳐 한강교를 넘어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에 이르는 12km 거리 연도엔 200만 인파가

※참고한 책

박정희, 지도자도(1961년 6월 16일)·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년 2월)·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9월)

경제개발의 길목에서(남덕우 회고록, 2009),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조갑제, 2012), 박정희가 옳았다(이강호, 2019), 박정희 바로보기(송복 외, 2017), 박정희 새로보기(남정욱·이영훈 외, 2017), 아, 박정희(김정렴 회고록, 1997), Daron Acemoglu & James Robinson, Why Nations Fail?(2012) <가나다 순>

조선일보 송의달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11.04 아직도 박정희 무덤에 침을 뱉는 자들에게

한 유튜버가 국립서울현충원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가 침을 뱉는 치기 어린 행태를 담은 영상을 최근 우연히 보게 됐다. 그는 “박정희는 친일파”라며 ‘응징’을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러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대로 그렇게 해 주겠노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을 남겼다. 왜 그랬을까. 얼마 전 필자가 인터뷰했던 좌승희 박사의 설명을 들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새마을운동 당시 박 대통령은 성과를 낸 마을만 지원하는 인센티브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장관·정치인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그러잖아도 독재정권이라는 비판을 받는 박정희 정권이 이러다가는 무너질 수 있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정권이 넘어가도 좋다’며 소신대로 정책을 밀어붙였다.

 

필자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주변에서는 ‘참 사람 좋은 분이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식들은 밖에서는 싫은 소리 한 번 듣지 않고 ‘호인’으로 불리던 그분이 가정에서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였을 뿐이었다고 토로했다. 친구는 돌아가신 후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보다는 살아생전 자식과 가난한 집안 살림을 위해 때로는 체면 불구하고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아버지를 둔 가정이 부럽기만 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박정희가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을 일으키기 위해 새마을운동·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경제정책을 구상하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주변에서 보기엔 무리하게 추진한 점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과연 가난한 나라를 경제 대국으로 탈바꿈시킨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을까. 남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국민을 잘살게 만들겠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필리핀에 비교된다. 1960년 이후 두 나라를 주요 경제지표를 통해 비교하면 경제성장의 경로와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국내총생산(GDP)만 하더라도 1960년대 초반 한국이 약 27억 달러일 때 필리핀은 약 60억 달러로 2배가 넘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소위 ‘개발 독재’를 거친 후 한국은 1980년대 중반에 1000억 달러를 돌파하는 급격한 발전을 보였고, 2020년에는 1조6000억 달러로 승승장구했다. 반면 필리핀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위기로 성장이 더뎠다. 2020년 필리핀의 GDP는 약 3700억 달러에 머물러 한국에 비해 현격히 뒤떨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경제지표의 변화가 아니다. 어떤 국가는 성공했으나 어떤 국가는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박정희와 필리핀의 마르코스, 두 지도자는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통치했고 둘 다 독재자라는 오명을 썼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박정희가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던 한국의 경제발전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을 과감히 제거해 나갔다면, 마르코스는 국가의 경제발전보다는 자신의 권력 유지와 부정부패에 집중했고 결국 그의 독재는 필리핀을 경제적 침체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박정희가 독재자였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독재는 경제성장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오늘날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을 남긴 것은 자신이 추진한 정책에 대해 역사의 비판이 쏟아질 것을 예견한 것이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의는 자신의 명예나 영광보다는 가난한 이 나라를 잘살게 만들겠다는 그의 신념을 설명해 준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박정희의 독재를 부정적·억압적인 것으로만 평가해 왔다. 이는 좌파가 씌운 ‘친일·독재’ 프레임에 국민 대다수가 오도돼 온 탓이 크다. 최근 영화 ‘하보우만(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의 약속’을 준비하고 있는 이장호 영화감독은 “나는 여태껏 속고 살았다”면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오해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으로 대한민국에 사죄하려 한다”고 고백했다.

 

어디 이 감독뿐이랴.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들을 친일파라는 프레임에 가둬 버린 좌파의 기획에 의해 국민 대다수가 우롱당했다. 이제는 우리가 저들이 박정희 무덤을 향해 내뱉은 더러운 침을 닦아 내야 할 때가 아닌가.

 

박선옥 논설실장sobahk@skyedaily.com

 

11.14 5000년 보릿고개 끝낸 박정희와 통일벼의 기적

박정희, 오랜 굶주림 벗어나 농업 자립 이루고자 결단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와 협력 고수확 품종 개량 나서
야당·지식인층 반대 무릅쓰고 새마을운동과 함께 강행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은 극심한 식량 부족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민 대다수가 농사를 지었지만 주식인 쌀조차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워 많은 가정이 미국 원조 밀가루와 옥수수에 의존해야 했다. 특히 해마다 봄철이면 쌀과 보리가 거의 떨어져 고통스러운 보릿고개’로 온 국민이 한계 상황에 부딪히는 고비를 맞곤 했다. 배고픔과 가난이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한국은 자립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이 바로 박정희(1917~1979) 대통령이다. 그는 단순히 식량을 충당하는 차원을 넘어 한국이 굶주림을 벗어나 농업 자립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린다. 농업이 안정되지 않으면 국민의 삶도 국가의 자립도 이룰 수 없다는 신념에서였다. 이에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와 협력하여 고수확 벼 품종 개량을 추진하게 된다. 이 연구의 결과가 바로 통일벼다. 한국의 환경과 기후에 맞춰 개량된 고수확 품종인 통일벼는 배고픔에 시달리던 한국에 희망을 심어 주었다.

 

마침 14일이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7주년이다. 그의 탄생일을 맞아 한민족의 5000년 가난을 물리친 통일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기려 본다.

 

1960년대 한국은 경제적 불안정 속에 농업 생산성도 낮아 식량 수급이 불안정했다. 국민이 기본적인 식량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미국의 원조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며, 특히 농촌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당시 한국의 농업은 자급자족이 어려워 매년 봄이면 보릿고개가 반복되었다. 이 기간에는 쌀이 부족해 보리로 연명해야 했으며, 그나마 보리마저 모자라는 경우가 많았다. 배고픔에 고통받는 국민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농촌 경제도 가라앉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식량 자급을 통한 농업 혁신을 국가 과제로 삼았다. 단순히 수입 의존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국민 모두가 배불리 먹고 자립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는 식량 문제 해결과 더불어 농업의 현대화를 통해 농촌 경제를 일으키고자 했고, 그 해답이 고수확 품종의 개발과 보급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농업 혁신과 식량 자립의 의지 아래, 한국의 환경에 맞는 고수확 벼 품종을 개발하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을 이끈 농촌진흥청의 이승우 박사(당시 연구소 소장)와 김준호 박사(연구원)는 통일벼가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서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윤성필 박사는 새로운 품종이 전국의 농촌에 보급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재배법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한만복 박사와 이경영 박사는 연구진 간 협력을 이끌며 품종 개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식량 자립을 국가적 목표로 삼아 연구진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부었다.

 

이들의 헌신과 박 대통령의 결단이 모여 통일벼라는 기적의 품종이 탄생하게 되었고, 한국은 마침내 배고픔 없는 내일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1971년 마침내 통일벼 품종 개량에 성공하고, 이듬해부터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통일벼는 그동안 배고픔에 고통받던 농민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통일벼 덕분에 쌀 수확량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한국은 이제 자립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으며, 마침내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굶주림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벼 품종 개량(통일벼)과 함께 추진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생활 환경과 경제를 개선하려는 국가적 노력이었지만, 통일벼 개발과 보급에 대한 야당과 지식인층의 반대는 끊이지 않았다. 야당 의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중앙집권적 정책 방식을 비판하며, 농민의 자율적 선택권이 배제된 채 강제로 추진되는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통일벼 재배가 농민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새마을운동이 강압적으로 진행되는 구조를 문제 삼았다.

 

또한 일부에서는 농업 외 다른 산업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도시와 농촌 간의 발전 불균형 문제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이 있었다. 농민이 자율성을 상실하고 정책에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 국민에게 과도한 압박이 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반대와 논란 속에서도 통일벼는 전국으로 빠르게 보급되었고, 점차 높은 생산성을 입증하며 그 실효성을 인정받게 된다.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며, 한국 농민은 이제 안정적인 수확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통일벼는 기존의 벼 품종보다 두 배가량 많은 수확량을 자랑하며, 강풍이나 병해충에도 강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농민은 안정적으로 쌀을 생산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국은 식량 자급률을 크게 높이고, 식량을 스스로 충족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

 

통일벼는 단순히 고수확 품종을 넘어 한국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 준 희망의 씨앗이었다. 그동안 식량난에 허덕이던 농민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었고, 국민에게도 굶주림 없는 내일을 선물해 준 혁명적인 변화였다. 배고픔을 몰아내고 자립의 길을 열어 준 통일벼 덕분에 농민은 생계에 대한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국가경제도 보다 튼튼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통일벼는 노먼 볼로그 박사가 개발한 난쟁이 밀과 함께 농업 혁명의 대표적인 성과로 평가된다. 난쟁이 밀은 인도·파키스탄 등지에서 기아 문제를 해결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이로 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난쟁이 밀과 마찬가지로 통일벼도 굶주림에 시달리던 국민에게 희망과 생존의 기회를 제공한 기적이었다. 비록 통일벼는 국제적인 상을 받진 않았지만, 필자는 통일벼가 노벨상 감이라고 생각한다. 통일벼는 한국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자립과 성장의 기반이 된 기념비적인 업적이기 때문이다.

 

통일벼는 단순한 쌀 품종이 아닌 한국의 식량 문제와 빈곤을 종식시키고 자립을 이룩한 기적의 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국민에게 자립의 힘을 주었고, 농민에게는 생계와 안정된 수확을 약속하는 기초가 되었다. 통일벼가 이룬 성과는 단지 식량을 자급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자립하고 경제적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오늘날 통일벼는 한국 농업의 역사와 자립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우리나라가 굶주림의 고통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풍요로움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통일벼 덕분에 한국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자립의 역사를 쓰게 되었고, 이제는 배고픔과 빈곤의 기억을 극복한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다.

 

통일벼의 성공은 단순히 농업 혁신을 넘어 한국 국민의 생존과 자존을 지킨 역사적 성과이며, 이로써 오늘날 한국은 식량 자립과 함께 아시아의 농업 성공모델이 되었다.

▲ 이재이 작가·민족중흥회 홍보대사스카이데일리


2025

03.03 박정희·카터는 '미군 철수' 놓고 150분 설전

[트럼프·젤렌스키 회담]

▲1979년 6월 방한한 지미 카터(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박정희 당시 대통령./조선일보DB

 

1979년 6월 서울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양국 정상회담사에서 보기 드물게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당시 두 대통령은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두고 얼굴을 붉히며 거친 설전을 주고받았다. 카터 대통령이 훗날 “동맹국 지도자와 가진 토론 가운데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국내외 언론들도 “최악의 회담”이었다고 보도했다.

 

기밀 해제된 미 외교문서를 보면, 1979년 6월 29일 카터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한국 땅을 밟았다. 1977년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선포한 지 2년 만이었다. 하지만 입국 하루 만인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상회담은 양 정상의 모두 발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긴장감 있게 진행됐다고 한다.

 

포문은 박 대통령이 먼저 열었다.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 정책으로 북한의 군사력이 더 증강됐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것이다. 이에 카터 대통령은 “검토 중인 주한 미군 감축 규모는 전체 한국군의 0.5% 수준에 불과하다”고 맞받았다. 카터는 그러면서 “북한은 국민총생산(GNP)의 20%가량을 군사비에 쓴다. 한국이 군사비를 더 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일인독재 병영국가인) 북한은 우리와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면서 “우리가 GNP의 20%를 군사비에 쓰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반박했다.

 

카터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에서 한국 인권 문제까지 거론하며 유신(維新) 체제를 이어가던 박 대통령을 압박했다. 카터는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재소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석방하는 걸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무기한 유지할 의도는 없다. 충고를 새겨듣고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하면서 주한 미군 주둔 필요성을 주장했다.

 

당시 회담에 배석했던 박동진 전 외무장관은 자서전에서 “카터 대통령이 급해서 계속 (미군) 철수 압박을 넣었다”면서 “하지만 박 대통령은 주한 미군을 영원히 두자는 게 아니다.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면서 반대 논리를 폈다”고 말했다. 당시 한미 정상 간 설전은 2시간 30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파행에 가까운 분위기로 회담이 끝나면서 주한 미군 철수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후 북한의 군사력 증강 위험성을 강조하며 미 국방부·국무부 측을 설득했고, 미 고위 당국자들도 카터 대통령에게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여주며 주한 미군 철수는 북한의 오판을 야기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이에 카터 행정부의 주한 미군 철수 추진은 주춤거렸고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면서 흐지부지됐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

 

■박정희 대통령 이미지

 

 

 

 

 

 

 

 

 

 

 

 

 

 

 

 

 

 

 

 

 

 

 

 

 

 

 

 

 

 

 

 

 

 

 

■동영상 - 유튜브


▽박정희의 다짐

 

 

▽경부고속도로 역사적 개통

 

 

▽ 미 뉴욕 시민들의 박정희 환영

 

 

▽빅정희 작사 작곡 "나의 조국"

 

 

▽국민 성금으로 박정희 대통령 동상이 구미에 우뚝 서다

 

- 영웅 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