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2/ ⑪ 주사파는 어떻게 학생운동을 장악했나? - (26)운동권 '한대련'과 비운동권 '전총모'의 공존 - 에필로그 ②
[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2/ 자유일보 김성회 논설위원

2022.09.06
⑪ 주사파는 어떻게 학생운동을 장악했나?
대중노선 표방 NL계열, 전대협 등 연대조직 장악 주류 급부상
NL 진영 내부엔 수령론 수용 ‘주사NL’·거부하는 ‘비주사NL’ 존재
대선 후 자민통·조통·반제청년동맹·관악 자주파 등 4개 그룹 나눠져
계급 문제를 근본적인 해결 과제로 삼는 PD그룹 소수 정파로 전락

▲1989년 5월 충남대 종합운동장에서 전국 100여개 대학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3기 전대협 발대식이 열렸다.
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의 분열은 학생운동에게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분열은 더 심각해졌다. 하나는 통일운동을 전개하자는 ‘NL진영’과 다른 하나는 보수 야당을 비판하면서 독자적 민중당을 구성하자는 ‘PD진영’으로 갈라졌다. 85년부터 진행된 ‘CNP논쟁’이 양대진영으로 나뉜 것이다.
겉으로는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주의) 양대진영이었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좀 더 복잡했다. NL 진영에는 민족해방노선과 수령론을 모두 받아들이는 ‘주사 NL(주체사상파)’과 민족해방 노선은 받아들이되 수령론은 거부하는 ‘비주사 NL그룹’이 존재했고, PD 진영 안에는 인민노련(인천부천노동자연맹) 등 비주사 NL그룹과 서노련 계통의 삼민주의와 ‘제파PD(반제반파쇼)그룹’ 등 다양한 그룹이 존재했다.
이러한 진영은 시간이 지나면서 삼민주의를 표방한 서노련과 CA진영의 사노맹이 공안당국의 수사와 검거로 와해되고, ‘비주사 NL’ 진영이 주체사상 그룹(주사NL)과 PD 진영으로 갈라짐에 따라 크게 NL과 PD 진영으로 고착되었다. 특히 학생운동에서는 대중노선을 표방한 NL 계열이 전대협 등 연대조직체를 장악함에 따라 학생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PD계열은 소수 정파가 되었다.
학생운동에서 노선 투쟁은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후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전에도 좌익 계열의 노선 투쟁은 존재했다. 남로당 계열의 1차 인혁당, 2차 인혁당과 북한과 직접 연계된 성시백 그룹, 그리고 통혁당(통일혁명당) 계열이 있었다. 이들을 통합하려고 한 것이 79년에 검거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이었다.
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벌어진 서울역 회군과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남민전 등 전 좌익 계열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79년 10.26 이전에 조직이 검거되고 와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울역 회군과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남민전 등 좌익 계열의 사람들은 조직적인 지침에 따라 참여했다기보다는 개인적 차원에서 참여한 경우로 보아야 할 것이다.
80년 서울역 회군과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강세를 보인 ‘선도투론(학생운동의 전망)’은 이태복 등의 ‘전민노련’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70년대 주류를 차지했던 ‘언더 써클’의 주류노선이 아니었다. 그들은 ‘준비론(야학비판)’의 주류노선을 비판하면서 80년 초반 학생운동의 중심을 차지했다.
◇삼민투 이후 전개된 ‘혁명론쟁’
이러한 ‘선도투론’이 85년 2.12 총선 이후, 신민당의 등장 등 강력한 야당과 재야단체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노선 투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85년 삼민투 결성과정에서 구체적인 혁명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막연한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학습 수준을 벗어나 ‘민중민주주의’라는 구체적인 혁명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개헌 문제가 제기되면서 미국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야당이 제기한 ‘개헌’ 이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격화되었다. 처음 색다른 문제를 제기한 것은 자민투계열이었다. 즉 ‘해방서시’에 등장한 ‘반미직투론(AI론, 반미직접투쟁론)’이다.
자민투계열에서 제기된 ‘반미직투론’은 본격적인 한국사회 구조에 대한 논쟁(사회구성체론쟁)을 불러왔다. 그 후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식민지 반봉건사회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를 놓고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에 맞는 혁명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보고, 어떤 혁명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쟁이 수없이 벌어졌다. 운동권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5~6명만 모이면 골방에 틀어박혀 사회구성체 논의를 정리하고, 혁명론을 만들어 낸다"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혁명론’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운동권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다"는 소리도 생겼다.

▲1989년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밀입북한 외대 학생 임수경을 환영하는 학생과 시민단체.
NDR(민족민주혁명론),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 AINPR(반제 민족민중혁명론), PDR(민중민주주의혁명론) 등, 실로 수많은 혁명론을 담은 팜플릿이 돌아다녔다. 혁명론 백가쟁명 분위기로 온갖 논란이 퍼지고 있을 때 충격적인 팜플릿 하나가 나왔다.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편지형식의 시리즈로 된 팜플릿이었다.
후에 ‘강철서신’으로 이름 붙여진 팜플릿은 구로지역 노동현장에 있던 김영환(공법 4)이 구학련(구국학생연맹) 성원들을 교육하기 위해 작성한 문건이었다. 주로 조직 활동에 필요한 자질(품성)에 대한 글이었지만, ‘혁명론’ 하나쯤은 갖고 잘난체하는 운동권 분위기에 충격을 주었다.
‘강철서신’의 품성론은 ‘잘난체하는 운동권 활동가’에게 일대 경종을 울리긴 했지만, NLPDR 이론이 운동권 주류를 장악하는 계기는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투쟁이론을 담은 팜플릿이 나왔다. 하지만, 이재호 김세진의 분신 같은 과격 투쟁과 5.3 인천시위 사태 이후 전개된 분열과 갈등, 그리고 탄압이 전개되면서 ‘선도투쟁론’에 대한 회의가 표출되었다.
◇학생운동 중심을 장악한 품성론과 대중노선
운동권에서 본격적인 ‘대중노선’이 제기된 것이다. "야당인 신민당과 연합, 국민이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운동과 투쟁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른바 5.30 팜플릿 등을 통해 대중노선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한국의 사회구성체에 대한 견해도 ‘식민지 반봉건사회’보다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했다.
이러한 이론은 70년대 말 남민전 활동으로 구속되었다가 노동현장에 투신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후배들인 학생운동권으로 퍼져갔다. 이와 함께 주체사상도 함께 퍼졌다. 때문에 공안당국에서는 학생운동의 구학련 등 자민투계열뿐 아니라, 노동운동에 침투해 있는 남민전 계열 등의 조직들과 북한이 연계되고 있다는 증거를 잡으려 노력했다.
구학련의 자민투와 함께 반제동맹당, 중부지역당, 5.1위원회, 그리고 남민전 계열 조직들이 활동하였다. ‘NL그룹’의 혁명이론인 NLPDR과 함께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함께 퍼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NLPDR은 수용하나, 김일성 수령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비주사 NL그룹’이 형성되었다.
남노련(남부노동자연합), 경수노련(경기남부지역) 등 비주사 NL그룹은 삼민주의를 표방한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등이 와해된 후 인민노련(인천부천민주노동자연맹)을 중심으로 결속되었다가 87년 대선 때는 독자 후보 전술을 통한 양김 후보단일화 운동을 벌였다. 87년 대선 이후 NL의 김대중 비판적 지지노선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민중당 건설 노선을 견지하며 PD그룹의 중심을 이룬다.
PD 그룹은 NLPDR을 수용하는 비주사 NL그룹 외에 전통적인 마르크스 레닌주의 입장에서 NL의 민족주의 노선을 비판하는 비 NL그룹(서노련, 인민노련 등)이 중심을 차지했다. 학생운동권에서는 민민투 CA계열에서 분리된 제파PD(반제반파쇼), 제독PD(반제반독점), 등이 있고, 관악 자주파 등 비주사 NL등과 결합된 ‘21세기 진보학생연합’ 등이 있다.
앞의 NL 그룹이 민족 문제(미국의 식민지)를 당면 과제로 삼는 ‘민족 자주적 입장(자주파)’인 반면, PD 그룹은 민족 문제에 대해선 부분적으로 긍정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계급문제를 근본적 해결과제로 삼는 ‘계급해방 입장(평등파)’을 가졌다. PD계열은 NL노선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지만, 초기 노동운동 진영인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등에서 중심을 차지했다.
◇자주와 평등의 양대 정파(NL, PD)가 형성되다

▲1991년 사노맹 중앙위원을 활동하다 구속된 박노해.
반면, 민민투계열은 개헌 투쟁에서 ‘헌법제정 민중의회’를 주장했다가,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하는 CA그룹으로 진행되고, 최민을 중심으로 중앙CT(중앙전위조직)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후 백태웅과 박노해 등을 중심으로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구성하고, 이것마저 와해된 후 ‘노해동(노동해방동맹)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즉, 80년 이후 학생운동 주류를 장악했던 ‘선도투론(학생운동 전망, 민추위)’ 그룹은 86~87년 개헌국면을 거치며, 반미운동과 대중운동노선을 제기한 ‘준비론(야학비판)’ 그룹인 NL진영에게 주류자리를 내주었고, 비주류 자리마저 비주사 NL이 주축인 PD진영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 뒤, ‘사노맹’이라는 비주류의 소수정파로 굳어지게 되었다.
86년 초 대중노선이 제기되며 학생운동 주류를 장악하기 시작한 NL그룹은 반미청년회와 애학투련 결성, 건국대 사태로 홍역을 치른다. 이론은 대중노선이었지만, 행동으로는 과격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건국대 사태를 일으킨 애학투련과 전대협을 지도하던 반미청년회(회장 조혁)는 88년에 ‘반미구국결사대’를 구성해 ‘서울 미 문화원 점거사건’을 또다시 벌인다.
87년 대선 이후 전대협(의장 이인영) 결성으로 학생운동의 주류를 장악한 NL진영은 한양대와 외대, 경희대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자민통(자주민주통일) 그룹’, 서울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통(조국통일촉진) 그룹’, 그리고 ‘반제청년동맹 그룹’, ‘관악 자주파 그룹’ 등 4개 그룹으로 나뉜다.
임수경 방북사건을 주도한 3기 전대협(의장 임종석) 이후 전대협과 한총련을 주도한 것은 ‘자민통 그룹’이었고, 서울 서부지역(연세대 등)에서 조직활동을 주도한 ‘조통 그룹’은 ‘새벽’ 지를 발행하는 장명국 씨와의 연계성이 강해 ‘새벽그룹’이라고 불렸다. 그 외 서울대와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관악 자주파 그룹은 수령론 수용을 거부하는 비주사 NL의 성향을 띠었다.
⑫ NL노선과 주사파의 생성 발전
86년 학생운동, 몸통 ‘전대협’ 투쟁노선 ‘NL’ 유전자는 ‘주체사상’
주사파 등장, 자생적 조직과 북한의 대남연락부 통해 동시에 진행
저항적 민족의식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반미의식으로 표출
北서 강조한 ‘민족자주의식’과 접목되면서 학생운동으로 자리잡아

▲전대협 1기 의장 이인영의 연설 모습.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에서 가장 강력하게 등장한 노선은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과 김일성주의를 표방하는 ‘주체사상파’였다. 이들은 87년 6월 항쟁 이후 8월에 충남대에서 발족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 의장 이인영)’를 비롯해 재야와 학생운동에서 가장 중심적인 세력이 되었다.
NL노선과 주사파가 강력한 중심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두 가지 이론 때문이었다. 첫째는 ‘품성론’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과 사회구성체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잘난체’를 하며 분파주의와 종파주의를 일삼는 운동권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그것이 김영환의 강철서신이었다.
다른 하나는 ‘대중노선’이었다. 제1야당인 신민당과 연합전선을 복원하고, 국민이 받아들이기 쉬운 ‘직선제 개헌’을 중심적인 투쟁 노선으로 채택한 것이다. 조직에서도 분파주의, 종파주의의 온상이었던 ‘언더 써클’을 해체하고 총학생회-단과대 학생회-과 학생회로 이어지는 대중조직 중심으로 조직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개의 노선이 학생운동권에서 주사파를 중심세력으로 만든 것이다. 그에 따라 PD나 CA진영과 달리 NL진영(주체사상파)에서는 이론학습 중심의 ‘써클’이 아니라, 실무적인 조직을 중심에 두었다. 즉, 지하 지도부의 핵심성원이 아니면 고도의 이론학습보다는 현장 실무에 집중함으로써 조직의 분업 효율성을 높인 것이다.
오픈 조직으로 전대협이 존재했다면, 지하 지도부로는 ‘반미청년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활동했다. 지하 지도부에서도 마르크스나 레닌, 마오 등의 정통 공산주의, 루카치나 그람시 같은 네오맑시즘, 종속이론의 원전학습보다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내보내는 ‘한민전 구국의 소리’ 방송 청취팀을 가동했다.
그러다 보니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 구국의 소리방송’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와 함께 대중적으로도 북한에 대한 거부감(레드 콤플렉스)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도 전개되었다. ‘북한 바로알기운동’이다. 통일운동과 함께 ‘북한 바로알기’라는 이념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거부감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을 진행했다.
대학생의 사회진출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학생운동=>노동운동, 농민운동, 도시 빈민운동이라는 기층 민중으로의 ‘혁명적 사회진출’보다는 교수 등 지식인, 화이트칼라를 비롯해 환경운동이나 문화운동, 청년운동 등 분야별 전문가 운동으로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를 혁명적 사회진출에 대비하여 ‘애국적 사회진출’이라고 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노동, 농민, 빈민운동 외에 환경운동, 여성운동, 문화운동, 청년운동 민변 등, 분야별, 전문직 사회운동이 활발해졌다. 즉, ‘PD진영’은 노동운동과 민중당 건설에 집중했지만, ‘NL진영’에서는 전문직 등 분야별 운동으로 진출이 늘어났고, 이들이 연합하는 ‘연합전선운동’이 활성화된 것이다.
◇주체사상파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NL과 주체사상파의 형성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선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고 있진 않다.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이 제시된 것은 ‘통혁당(통일혁명당)’에서였다. 대한민국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폭력혁명을 통해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민족해방과 군사독재와 재벌을 해체하는 민중(인민)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주사파 대부로 '강철서신' 저자인 김영환이 전향 후 북한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며 2014년 강연을 하고 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에서 피압박 식민지 투쟁으로 제시한 투쟁전략이었다. 그리고 베트남 통일전쟁에서 제시된 통일전선 전략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79년 검거된 이재문 등의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전선)도 베트남에서 진행된 ‘베트민(일명 베트콩,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본딴 것이다.
이러한 6~70년대 북한과 연계된 좌익 계열의 혁명노선이 85년 말 이후 재야 학생운동에 접목되는 과정은 두 개의 경로를 통해서였다. 하나는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확고한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혁명노선을 재정립했던 것이다.
◇ 북한에서의 주체사상 정립
북한에서는 82년에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이 발표된다. 72년경, 노동당의 선전부장으로 자리 잡은 김정일이 김일성 후계 구도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으로 주체사상을 정립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80년 초에 완성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의해 주체사상이 정립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북한 주체사상 형성과정 전체를 알지 못하는 주장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북한의 통치 철학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체사상’이라는 철학은 김정일이 노동당에 들어오며 구체화 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즉, "(주체사상이) 김일성의 항일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김일성의 후계 구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김정일이 만들어낸 철학 이론이라는 것이 정확한 관점이다. 황장엽 이론에서는 ‘수령론’이 보이지 않지만, 개인-당-수령이라는 ‘사회생명체론’이 정립된 것은 김정일 이후이고, 이것이 김정일 후계 구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실제, 6~70년대 북한의 문건에서 반제반봉건 민족해방혁명론과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전략에 입각한 이론은 보이지만, 주체사상에 입각한 자연철학과 ‘사회적 생명체론(수령론)’이라는 사회역사이론은 보이지 않는다. 주체사상의 핵심인 ‘사회적 생명체론’은 80년대 초반에 완성되었고, 그것이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에 게재된 것이다.
그 후 주체사상과 접목된 ‘NLPDR론’이 정립된 뒤, 85년에 통혁당을 ‘한민전’으로 개편하고 ‘구국의 소리방송’을 내보낸 것이다. 이는 한국의 사회구성체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보았던 80년대 이전과 달리, ‘식민지 반(半)자본주의사회’로 본 85년 전후의 이론적 변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 국내 주체사상파의 발생 과정
북한과 달리 한국 내에서 NLPDR과 주체사상이 생성되고 발전한 과정은 다른 경로를 밟았다. 구체적 과정은 김영환이 전향을 하면서 구국학생연맹과 반제청년동맹, 그리고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의 결성과정을 밝히면서 드러났다. 김영환은 자신이 주체사상 습득 경로로 "통일부에서 발간한 북한 총람 등의 서적을 통해서" 였다고 했다.

▲안기부가 1992년 발표한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 지역당 조직도.
하지만, 국내 NL과 주체사상의 생성은 단선적인 경로가 아니라, 다양한 경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구학련과 반제청년동맹 외에도 ‘남민전 잔존세력’, ‘반제동맹당’, 안재구의 ‘구국전위’, 황인오의 ‘중부지역당’, 최호경의 ‘1995위원회(후에 중부지역당으로 결합)’, 김낙중(민중당) 등, 다양한 경로에서 NL노선과 주체사상이 등장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배포되었던 주사파 관련 팜플릿 종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강철서신’과 함께 발표된 ‘선진노동자의 임무(심진구 저)’ 외에 ‘5.30 팜플릿’, ‘백산’ or ‘백두산’ 이름으로 된 팜플릿, 등 다양한 팜플릿이 86년 전/후에 배포되었다.
민혁당의 김영환은 "노동당 사회문화부(후에 대남연락부)의 과장이었던 윤택림(가명 김철수)으로부터 민혁당 건설을 주문받았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그는 89년경 한겨레사회연구소 출신의 김철수라는 사람을 만났더니, "북한에서 왔다"며 "민혁당 건설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이에 "‘반제청년동맹’을 해산하고 민혁당을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또 ‘부여간첩사건’의 김동식의 증언에 의하면, "윤택림은 5개 라인을 관리하고 있었다"며, 대남연락부에서는 "전설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김영환이 "민혁당 조직에 다른 지하조직이 접촉해 온다"고 하자, 윤택림이 "(민혁당 조직활동을) 경인, 전북, 영남 등 5개 지역으로 국한시켰다"고 한다. 같은 시기 활동했던 황인오의 ‘중부지역당’ 등과 겹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외에도 최호경의 ‘1995년 위원회’에서 나타나듯이 자생적인 주사파 조직들도 많다. 최호경의 ‘1995년 위원회’는 자생적인 주사파 조직으로 북한과 연계하기 위해 변의숙을 북한으로 파견했지만, 후에 황인오의 ‘중부지역당’과 연계되어 흡수된다. 그 후 최호경은 ‘중부지역당’의 강원도당 지도책 역할을 한다.
이처럼 주사파의 등장은 자생적인 조직과 북한의 대남연락부를 통해 동시에 진행되었다. 80년대 초반 김정일 후계 구도와 관련하여 주체사상을 수립한 뒤 남쪽으로 전파하려 했고, 국내에서는 85년경, 혁명론 정립 과정에서 자생적인 지하조직과 학생운동 조직에서 NL이론과 주체사상이 자리 잡은 것이다.
◇몸통은 전대협(한총련), 흐르는 피는 NL노선, DNA는 주체사상
따라서 주사파의 생성과 발전은 86년 이후 한국의 재야 학생운동에서 분리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즉, 몸통은 전대협이나 전노협(전노협과 민노총 초기에서만 PD진영이 잠시 우세했다), 전농이지만, 밑바닥에 흐르는 피(투쟁 노선)는 NL이고, DNA(유전자, 사상)는 주체사상인 것이다.
이처럼 NL과 주사파가 재야와 학생운동, 사회운동에 넓고 깊게 뿌리박게 된 것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특이점 중의 하나이다. ‘품성론’과 ‘대중노선’처럼 직접적인 영향도 있지만,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뿌리 깊은 저항적 민족의식(피해의식)과 외세+군사독재+재벌이라는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식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저항적 민족의식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반미의식으로 표출되었고, 북한에서 강조하는 ‘민족 자주 의식’과 접목되면서, NL노선과 주사파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⑬ 대선 패배, 통일운동으로 활로 개척
2기 전대협 5공 청산·통일 운동, 대중적 지지 얻으며 '탄력'
전경환 구속으로 5공 청산투쟁 시작...전두환 국회 증언까지 2년간 계속
6·10 남북학생회담 위해 2만명 판문점으로 행진...盧정권 ‘원천봉쇄’
89년 문익환 목사·임수경 방북 사건이 대대적인 '공안통치' 명분 제공

▲1989년 7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한국외대 재학생 임수경이 몰려든 북한 군중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1987년 8월 19일, 전국 95개 대학에서 모인 3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남대학교에서 제1기 전대협 발대식이 열렸다. 전대협 건설은 87년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 단위의 연대 조직 결성을 논의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85년 전학련과 삼민투 이후, 투쟁 노선에 따라 자민투, 민민투로 분열된 학생운동이 통일적인 연대 조직을 모색한 것이다. 먼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결성한 뒤 6월 민주항쟁 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장 이인영)를 결성한 것이다.
전대협은 발족 선언문에서 △외세 배격과 독재 종식을 통한 자주적 민간 정부의 수립,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에 기여,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향한 연대, △학문·사상의 자유 쟁취, △전국학생총연합(전총련) 건설의 토대 마련 등 다섯 가지를 활동 목표로 내걸었다.
이렇게 결성된 전대협은 1987년 대선 기간에는 공정선거감시단 활동과 13대 대선 투쟁을 진행했으나,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양 김 분열과 대선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써야 했다. 이를 두고 "대선 승리를 위해 후보 단일화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음에도 한쪽 진영(김대중 진영)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분열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대선 패배의 악몽을 딛고, 2기 전대협은 5공 청산 투쟁과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6월 민주항쟁 1주년이 되는 1988년 6월 10일 8.15 남북학생회담을 시도하는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2기 전대협의 5공 청산 투쟁과 통일운동은 국내외 정세와 맞물려 큰 호응을 얻었다.
5공 청산 투쟁 전개
2월에 취임한 노태우 정권의 입장에서는 전두환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고, 또 88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야당과 재야 학생운동이 벌이는 5공 청산 투쟁과 통일운동이 활성화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즉, 노태우 정권은 정권대로 5공 청산과 북방정책에 관심이 높았고,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분열된 야당은 야당대로 선명 경쟁을 위해 5공 청문회와 청산에 관심이 높았던 것이다. 그에 따라 재야 학생운동이 전개하는 5공 청산 투쟁과 통일운동도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5공 청산 투쟁은 1988년 3월 31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비리와 관련해 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이 구속되면서 시작되었다. 5공 비리와 5.18 광주에 대한 청문회가 생중계되면서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잇따랐다. 5공 청산 투쟁은 88년 6월 13일 전두환 일가 비리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면서 5공특위 가동 및 1차 청문회 등으로 이어져 89년 12월 31일 전두환 국회 증언까지 2년간 계속되었다.
이를 통해 일해재단 설립과정, 5.18 광주민주화운동, 언론인 숙정과 통폐합 등에 관한 적나라한 내용이 국민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을 비롯해 친형 전기환, 처남 이창석 등이 잇따라 구속되었고, 이후 장세동, 차규헌, 김종호 등 47명이 구속되었다.
이와 함께 88올림픽 공동 개최와 북방정책 관련 이슈가 제기되었다. 88년 남북 올림픽 공동 개최에 불을 지핀 것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였다. 그는 1984년 11월 29일,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서신을 보내 서울올림픽이 남북통일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남북 양 지역의 공동 개최 결정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1989년 12월 31일 국회 5공-광주특위 연석회의에 증인으로 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 야당 의원들이 단상으로 몰려가 불성실한 답변을 중단하라고 고함 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여러 사회주의 국가가 나서서 남북 올림픽 공동 개최를 주장하며 IOC를 압박했다. 국제사회 여론에 사마란치 위원장은 남북체육회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남북 NOC 대표들을 스위스 로잔으로 불러들였다. 남북에서도 박철언이 대북 비밀특사로 파견돼 북한의 한시해와 만났다.
하지만, 실제 속내는 달랐다. 한국은 사회주의권의 올림픽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북한을 붙잡아 두고, 필요하다면 몇 개 행사를 북한에 떼어주는 분산개최 전략을 갖고 있었고, 북한은 서울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거나, 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성공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어쨌든 이러한 국내외 정세로 재야와 학생운동의 주요 투쟁도 5공 청산과 통일운동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2기 전대협과 학생운동은 3월 새 학기에 들어오면서 ‘전이 구속투쟁과 체포결사대’ 활동에 집중했다. 전두환의 집이 있는 연희동은 매일같이 학생들의 시위와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판문점 ‘남북청년학생회담’ 개최 시도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을 처음 제기한 것은 서울대였다. 1988년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김중기 후보는 ‘김일성대학 청년 학생들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통해 "‘남북한 국토종단순례 대행진’과 민족단결을 위한 ‘남북한 청년학생체육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위원회에서 제안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고(4월 4일), 4월 15일에는 서울대 총학생회 산하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특별위원회(조통특위)’에서 남북한 국토종단순례대행진과 청년학생체육대회를 위한 실무회담을 6월 10일에 판문점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6·10 남북학생판문점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6월 10일 연세대에서 전국 2만여 명의 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 출정식을 갖고 판문점으로 행진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학생들의 판문점행을 원천봉쇄했다.
전대협의 남북학생회담 추진 투쟁은 4·19 혁명 이후 남북한 민간 교류를 최초로 시도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전대협은 ‘88올림픽 남북한 공동개최’와 89년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학생들의 통일운동은 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양 방북 사건으로 이어져 노태우 정부의 대대적인 공안통치의 명분을 제공했다.
88년 노태우 정부와 재야 학생운동 사이에서 치열한 대결이 펼쳐지긴 했지만, 이것이 본격적인 대결투쟁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노태우 정부로서는 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해야 했고, 재야와 학생운동 진영은 직선제로 등장한 노태우 정부의 퇴진을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따라서 노태우 정권과 재야 학생운동의 본격적인 대결은 89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87년 대통령 선거와 88년 13대 총선을 치르며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던 재야 세력에는 88년의 ‘5공 청산 투쟁’과 ‘통일운동’에 힘입어 하나의 연대체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들은 89년 1월 서울 등 전국의 12개 지역단체와 노동자, 농민 등 8개 부문 단체를 망라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이부영)’을 결성했다.
자주 민주 통일을 내세운 ‘전민련’은 결성선언문에서 "애국적 민족민주운동역량의 총집결체로, 민중 해방과 자유 평등 사회를 위해 자주화 운동, 반독재민주화운동, 조국통일운동에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5공 청산운동, 광주학살책임자처단투쟁, 반민주악법개폐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 등을 전개하기로 했다.
전민련 결성과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이렇게 재야운동에서 전국적인 단일대오를 결성하고 있는 시점에 갑작스러운 ‘문익환 목사 무단 방북 사건’이 터졌다. 전민련의 상임고문이었던 문익환 목사는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초청을 받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것이다. 문익환 목사와 동행한 인물은 통일민주당의 유원호, 재일교포였던 정경모 씨였다.

▲1989년 3월 북한을 무단으로 방북한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우리말 갈래사전'을 선물하면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문익환 목사는 북한의 김일성과 2차례의 만남을 갖고 남북의 통일문제를 논의했으며, 조평통 위원장인 허담과 회담한 뒤, 4월 2일 평양의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 항’이란 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합의 성명의 주요 내용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한 통일문제 해결, △정치 군사회담 진전을 통해 남북의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동시에 다방면의 교류 접촉 실현, △연방제 방식의 통일, △팀스피릿 훈련 반대 등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귀환 즉시 ‘정부와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한 것’과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하여 전민련 주요 간부를 연행하고 시인 고은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인 이재오를 구속하였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동의대 사태가 불러온 공안통치
여기에 동의대 사태(5월 3일)와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6월 27일)’이 연이어 터지면서 공안정국으로 치달았다. 동의대 사태는 5월 초 동의대 학생들에게 감금된 사복경찰 5명을 구출하면서 벌어졌다. 5월 3일 새벽 경찰은 5개 중대를 동원, 전격적인 진압 작전을 펼쳤다.
이에 맞서 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서관 7층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경찰 20여 명이 불길에 휩싸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동의대생 94명이 연행되고 76명이 구속되었다(동의대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논란이 있다).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동의대 사태,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을 계기로 ‘화염병 처벌법’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노태우 정권에 의해 대대적인 공안정국이 펼쳐졌다. 바야흐로 노태우 정부와 재야 학생운동 간에 본격적인 대결 정국이 펼쳐진 것이다.
⑭ 1988~1989년 방북 사건의 여파
노태우 정권, 수많은 재야인사·학생들 구속 '대대적 공안통치'
김대중·이길재, 안기부 조사 받고 '서경원 방북' 불고지죄로 기소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 후 남북화해 분위기 삽시간에 얼어붙어
정부 '평양학생축전' 참가 불허...임수경, 전대협 대표로 입북 강행
89년 3월 소설가 황석영 씨와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사건이 채 가시기도 전인 5월에 들어서자 동의대 사태가, 이어 전대협 대표인 임수경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는 방북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 여기에 88년에 방북했던 서경원 의원의 방북 사건이 1년이 지난 뒤 알려졌다.
연이은 방북 사건의 여파로 수많은 재야인사와 학생들이 구속되고, 김대중, 이길재 의원이 안기부의 조사를 받고 불고지죄로 기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르면서 북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노태우 정권에서는 이를 계기로 재야와 학생운동의 통일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공안통치에 몰입하게 되었다.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1989년 6월 북한에 밀입국해 이적행위를 한 혐의로 당시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서울 중부경찰서에 수감되고 있다.
평민당 국회의원이자 농민운동가였던 서경원 의원은 88년 8월에 방북하였다. 그가 방북한 사실은 방북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다가 1년 정도 지난 89년에 같은 당의 동료인 이길재 의원에게 털어놓으면서 그 전모가 밝혀졌다. 이로 인해 서경원 의원은 구속되었으며,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와 이길재 의원이 불고지죄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서경원 의원은 함평에서 4H 활동을 하고, 가톨릭농민회(가농)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가톨릭농민회(가농)에서 청년회장과 전국 부회장을 맡았으며 1984년 전국 회장에 선출됐다.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가입해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야농민운동단체 대표로 평화민주당에 영입되어 함평군-영광군 선거구에서 당선된다. 그는 가농 회장으로 있던 1985년에 서독의 성낙영 목사를 통해 북한 당국에 방북 의사를 밝혔는데, 1988년 8월 북한으로부터 방문 허가를 받아 북한 여권으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프라하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타고 8월 19일 평양에 도착했다.
서경원의 방북은 김수환, 장익, 함세웅 등 가톨릭 서울대교구 관계자를 비롯해 소수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경원이 함께 농민운동을 했던 같은 당 이길재 의원에게 자신의 방북 사실을 알리면서 방북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길재는 원내총무 김원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김원기는 다시 총재 김대중과 안기부장 박세직에게 보고했다. 뒤늦게 방북 사실을 인지한 안기부는 서경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김대중 총재와 이길재 의원을 불고지죄로 불구속 기소하였다.
황석영 방북 사건
소설가 황석영은 1989년 3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서 초청을 받아 전국민족예술인총연합(약칭 민예총) 대변인 자격으로 일본과 중국을 경유하여 방북하였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소련 및 동구권,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가 본격화되자, 황석영을 포함한 민족문학작가회의도 남북 작가 회담을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황석영의 방북이 이뤄진 것이다.
황석영은 방북 전에 안기부와 집권 민정당 사무총장 이종찬 의원에게 북한 방문 계획을 통보했다. 이에 대해 이종찬 의원은 단순히 방북계획을 통보받았을 뿐이며 정부와 협의해서 결정하라고 했다고 해명했다. 이 때문에 이종찬 사무총장이 안기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둘의 만남을 주선한 김상현 평민당 원내총무도 안기부 조사를 받았다.
정부에선 북의 대남선전 공세에 말려들 수 있다면서 방북을 반대했는데 황석영 작가가 일방적으로 방북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권 쪽에서 사전에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이 터지면서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이는 황석영 씨가 88년부터 공공연히 ‘평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다닌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황석영은 북쪽과의 문화교류와 남북협력 사업에 합의하였지만, 남쪽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우자 귀국하지 않고 일본과 독일 등을 떠돌아다녔다. 그동안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대변인 자격으로 4차례 추가 방북하였으며 범민족대회 등의 행사에 관여하였다.
그 후 자신의 방북 당시 경험을 다룬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창작과비평’에 연재했으나, 이시영 주간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후 창비에서는 황석영의 방문기를 요약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귀국해서 구속되었다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1989년 방북한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과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민통련의 후신으로 89년 1월 결성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상임고문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사건이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민주당 당원이었던 유원호, 재일교포 정경모와 함께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두 차례 만나 통일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또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인 허담과 회담을 하고, 4월 2일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에서는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 항’이란 제목의 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합의 성명의 주요 내용은 ①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한 통일문제 해결, ②정치, 군사회담 진전을 통해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동시에 다방면의 교류와 접촉 실현, ③연방제 방식의 통일, ④팀스피릿 훈련 반대 등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북경을 통해 돌아왔는데,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으며 평양 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 정부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잠입죄’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공안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전민련의 주요 간부를 연행해 조사하고, 시인 고은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재오를 구속했다.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들은 조사를 받았다. 문익환 목사는 지령 수수와 잠입, 탈출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3년 3월 6일 사면되었다.
임수경 방북사건
▲1989년 8월 15일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이 판문점 북쪽지역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오고 있다.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재학중이던 임수경이 1989년 6월 30일부터 8월 15일까지 한 달 보름간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사건이다. 임수경 양의 방북 사건은 국내는 물론, 북한 내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북한은 88서울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해 89년 7월 1일부터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에 북한은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대협 앞으로 초청장을 보냈다. 초청장은 조선학생위원회에서 북한적십자사를 거쳐 대한적십자사에 전달되었고, 다시 통일부를 거쳐 전대협에 전달되었다.
북한의 초청장이 전대협에 전달된 것은 88서울올림픽 공동개최와 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로 인해 남북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 의원의 무단 방북이 사건화되기 전이었기에 가능했다. 정부는 7.7선언을 통해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제안했고, 한국일보는 <대학생들 평양축전 보낸다>란 우호적 기사(2월 12일)를 내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벌어지면서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후 공안정국이 조성되면서 정부가 학생들의 평양축전 참가 투쟁을 억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문교부는 ‘평양축전’이 북한의 반미와 반한 선전장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대협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공식적으로 불허했다(6월 6일).
이에 전대협은 임수경을 대표로 선발하고 밀입북 루트를 탐색했다. 일단 문익환 목사가 경유했던 서울-홍콩-북경-평양은 불가능했기에, 일본-서독-동독(베를린)-소비에트 연방을 통한 우회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1일, 집에서 출발한 임수경은 일본에서 7일간 머무른 뒤 서베를린-동베를린-모스크바를 거쳐 9일만인 30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임수경은 ‘전대협은 마침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라는 도착 성명서를 발표했다. 임수경이 북한에 발을 들이기 전날 한양대에서는 5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임종석 의장과 전문환 ‘평축준비위원장’이 임수경을 평양에 파견했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경찰은 전의경 병력을 한양대로 투입하여 2천여 명의 대학생을 강제 연행하였다.
임수경은 7월 3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전대협이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했으며, 7월 7일, 북한 조선학생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녀는 북한에 온 동기를 "조국 통일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고 했으며, "남과 북은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서 통일되어야 하며 미국은 한국 내 문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수경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수많은 밀입북 사건에 이어 대학생마저 북한에 들어간 것이 충격이었고, 북한은 임수경 특유의 ‘나대는 성격’과 ‘발랄함’으로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이다. 생기발랄한 임수경의 모습에 북한 주민들도 평소와 다르게 자발적으로 몰려들어, 북한 당국이 진땀을 흘려야 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임수경은 북한에서 인기 정상의 아이돌과 같았다고 한다. 임수경의 패션(티셔츠와 청바지)도 신선했을 뿐 아니라,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은 북한의 청년들에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임수경이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전대협 진군가’는 북한에서 유행하기까지 했다.
45일간의 방북을 마친 임수경은 8월 15일 귀환을 위해 동행하겠다고 방북한 문규현 바오로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했다. 원래 계획은 7월 27일에 도착하는 것이었는데, 판문점 귀환이 군사정전위 협정 위반으로 불허되어 6일간 단식 투쟁을 통해 허락을 얻어냈다. 귀환 후에는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⑮ 공안정국에 이은 3당 합당
盧정권, 공안 광풍 몰아치면서 전격 '3당 통합' 여소야대 무력화
89년 치안본부·안기부·검찰 참여 '합수부' 만들면서 공안 광풍 불어
고문 등 가혹행위 잇단 폭로...이철규·이내창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
盧정권, 안정적 집권 위해 정계 개편 214석 거대 '민자당' 탄생시켜

▲1990년 1월 22일 오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청와대에서 3당 합당을 공동 발표하고 있다.
서경원, 황석영, 문익환, 임수경의 무단 방북 사건은 정국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중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새로 결성한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위원장 이재오) 관계자들이 공안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고, 서경원 의원의 방북은 평민당의 이길재 의원과 김대중 총재가 불구속기소 되었다.
또, 임수경의 방북은 전대협(3기 의장 임종석)에 대한 대대적 탄압으로 나타났다. 전대협 조직에서 조국통일위원회를 비롯해, 정책국, 문화국, 투쟁국 등의 실무조직이 있었다. 하지만, 이와 별도의 전업 활동가 조직인 ‘정책위원회’가 전반적인 투쟁노선을 지도하는 구조였다. 당국이 방북을 배후에서 주도한 ‘전대협 정책위원회’에 대한 검거에 주력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고 5월 3일 터진 동의대 사건과 10월 15일 연세대에서 터진 설인종 군 고문치사 사건은 노태우 정권의 재야와 학생운동 탄압에 기름을 끼얹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89년 5월 9일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지난 1년여 동안 체제전복 세력의 선동으로 안정이 흔들려도 인내와 자제로 대처했지만, 이젠 두고 볼 수가 없다"라고 선언했다.
안기부도 6월 27일 <국내 좌경실상 자료집>을 발표하며 전체 좌경조직이 전국 12개, 지역 114개로 핵심세력이 총 10,500명이라고 발표하였다.
‘합수부’ 구성과 공안정국
이후 치안본부-안기부-검찰이 3자 합동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합수부)’를 조직하고 국가보안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해서 재야 학생운동 단체들을 ‘용공’ 혐의로 수사했다. 이에 따라 교정시설은 시국사범(양심수)으로 넘쳐났다. 89년 한 해 동안 수감자는 1,515명으로 늘어났고, 이적단체 및 반국가단체 구성죄 적용도 빈번해졌다.
안기부 등 수사 기관들은 ‘국가보안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하고 조직사건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검거된 재야인사와 학생들의 수사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가 가해졌으며, 수사기관에서 고문을 당했다는 증언도 끊이지 않았다.
문익환 목사와 같이 방북했다가 구속된 유원호 씨는 "죽더라도 안기부엔 가지 말라"며 안기부의 고문과 폭력을 증언했고, ‘민족해방운동사 사건’ 관련자 홍성담과 차일환 화백도 안기부에서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 외에 서경원 의원과 방양균 보좌관, ‘한미문제연구소 사건’ 관련자 문부식이 고문 사실을 증언했으며, 보안사에 의한 ‘국민대생 김정환 생매장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대 교지편집위원장이었던 이철규와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철규, 이내창의 의문사
89년 5월 10일 광주시 북구 청풍동 제4 수원지 상류에서 이철규 군이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는 85년 11월 ‘반외세반독재투쟁위원회’ 활동으로 구속되었다가 87년 7월에 가석방된 사람이었다. 5월 3일 밤 10시쯤 후배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택시를 타고 무등산장 쪽으로 가던 중 제4 수원지에서 경찰의 심문을 받았는데, 일주일 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교지인 ‘민주조선’에 <미제 침략사 100년사>를 게재해 광주 전남지역 공안합수부에 의해 현상금 300만 원에 1계급 특진이 걸려 있는 수배자였다. 경찰은 택시강도 혐의자를 위해 일상적인 검문을 했을 뿐이며, 이철규인지는 몰랐고, 검문 도중 도망가는 바람에 놓쳤다고 발표했다.
이철규 사체는 물 위에 떠 있었는데, 얼굴이 심하게 상해 있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왼쪽 눈알은 돌출되었고 얼굴은 검은색으로 변색 되고, 오른쪽 어깨가 부어올라 있어 단순한 익사체로 보기 어려웠다. 5월 11일 검찰 주도하에 부검이 진행되었는데, 부검의들은 자살에 의한 익사나 실족사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검찰은 국과수에 재부검을 요청했고 국과수는 5월 14일 몸의 각 장기에 플랑크톤이 발견됐다며 익사라 발표했다. 하지만 가족들과 학생들은 이 발표를 믿지 못해 계속 시위를 벌였고 5월 27일 국회 차원에서 이철규 변사 조사특위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검찰은 30일 실족후 익사라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1989년 5월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된 조선대생 이철규의 운구행렬.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재조사가 이뤄지고, 안기부가 개입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광주지역 안기부 요원으로부터 "이철규가 작성한 문건의 내용이 용공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수사과로 넘겼다"는 진술을 받아낸 것이다. 또 일본 법의학자인 ‘카미야마 자타로 교수’는 ‘외부의 힘’에 의해 큰 상처를 받은 뒤 물에 던져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진술을 했다.
이철규 의문사 사건에 이어 89년 8월 15일에는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 군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여수 거문도 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내창은 중앙대 조소과에 입학 후,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에 당선되고 경인지역 학생운동과 통일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거문도 해변에서 변사체로 떠오르기 전날인 14일, 보안사 생매장 사건의 국민대 김정환 군이 총학생회실로 찾아와 만났다.
그는 담배를 사러 간다고 나간 뒤, 사라졌다가 이튿날 여수 거문도 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떠올랐다. 경찰에서는 단순 익사 사고로 발표했지만, 인천지역 안기부 요원이 여수에서 거문도로 가는 여객선에 함께 승선했던 것이 밝혀지고, ‘고문에 의한 타살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2004년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했지만, 동행했던 안기부원 도씨와 남자친구 백씨는 "이내창 군과 우연히 함께 승선했을 뿐"이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다방 종업원에 의해 도씨가 이내창이 함께 있었던 것과 도망치던 이내창을 보았다는 주민의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노동운동에 불어닥친 공안광풍
이렇듯 89년은 합수부에 의한 공안사건이 잇달았다. 노동운동에서는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사건과 ‘인천부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사건이 대표적이다. ‘인노회’ 사건은 최근 경찰국장으로 임명된 김순호 국장과 관련된 것으로 유명해진 사건이다.
‘인노회(안재환 등)’는 88년 3월 인천 부천지역의 통합 노동자조직인 ‘인민노련(인천부천민주노동자연맹)’에서 NL진영이 이탈하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이후 NL진영의 노동조직으로 ‘안노회(안양지역노동자회)’, ‘수노회(수원직역 노동자회)’ 등이 생겨났다.
89년 2월 8일 치안본부(대공3부)는 ‘인노회’ 사무국 구성원 6명을 연행하여 이적단체 가입죄를 적용하려 했으나, 법원은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하지만 치안본부는 영장을 재신청하고, 수차례에 걸쳐 구속수사를 계속했다. 구속수사를 받던 최동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다가 다음 해 8월 7일 분신 자결하였다. ‘인노회’ 사건으로 모두 18명이 연루되어 15명이 구속되었다.
‘인천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 주대환 노회찬 등)’은 87년 이후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던 노동운동 조직이다. 87년 6월 26일, 부평역 앞 광장에서 노동자 5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민중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노회찬, 주대환, 정태윤, 황광우, 조승수, 송영길, 등이 참여했다. 초기 인민노련에는 NL계열도 참여했지만, 노선갈등으로 인해 NL계열은 ‘인노회’를 결성하며 분리되었다.
‘인민노련’은 ‘주체사상파(NL)’와 ‘제헌의회파(CA)’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비판했다. 인민노련은 87년 7월부터 시작된 대규모 노동자 대투쟁으로 급격하게 세가 커졌고, 전국적으로 영향력 있는 노동운동조직이 되었다. 이로써 ‘제헌의회파(CA)’를 밀어내고 NL과 대립되는 PD계열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89년 이후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구심점이 되는 노동자정당을 건설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NL계열이 야당과의 연합을 중심으로 대중조직의 연합전선운동에 역점을 두었다면, 이들은 독자적인 민중정당 건설에 역점을 둔 것이다. 특히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이카로 소련이 붕괴 한 후 ‘노동자정당 설립’이라는 ‘신노선’을 내세우고, 민중당 설립에 앞장섰다.
▲1989년 8월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서경원 밀입북 사건과 관련해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친뒤 귀가하고 있다.
89년 8월부터 ‘인민노련’은 기관지 ‘사회주의자’를 발간했다. 이로 인해 공안당국으로부터 위원장 오동렬을 포함한 15명의 지도부가 체포되었다(10월). 검거는 12월까지 계속되어 21명이 더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하지만 인민노련은 와해되지 않고 91년 한국노동당 창준위와 노정추로 이어지다가 ‘민중당’으로 흡수되었다.
공안정국은 3당 합당 정계개편의 ‘밑밥깔기’?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은 문익환, 임수경 등의 무단방북과 5.3 동의대 사태 등의 국내적 요인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는 87년부터 고르바쵸프가 등장한 뒤 소련에서는 개혁과 개방의 물결이 넘치고 있었다. 노태우의 북방정책도 냉전체제 해체라는 시대적 조류를 따라간 것이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엄중했다. 국내에서는 88년 치러진 총선에서 집권 민정당은 120여 석을 얻었을 뿐이고, 평화민주당(김대중)과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의 여소야대 신 4당 체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여소야대 4당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이라는 정계개편을 감행했다.
그런 의미에서 노태우 정권의 공안 정국은 재야 학생운동의 투쟁에 대한 대응하는 성격을 띠었지만, 밑바탕에는 냉전체제 해체와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하고 여소야대의 4당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공안정국을 통해, 재야 학생운동과 야당을 분리시키고, 정계개편을 통해 집권세력을 안정시키려 한 것이다.
공안 광풍이 휩쓸던 89년 말, 동서독을 나누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종주국인 소련도 해체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90년 1월, 민정당, 통민당, 공화당이 전격적인 통합선언을 단행하고, 214석에 달하는 거대 ‘민자당’이 탄생했다.
(16) 절망 뒤에 찾아온 분신정국
사회주의권 몰락, 재야·학생운동 진영엔 '상상 이상의 충격'
자신들이 꿈꿔온 미래 대안 사회를 상실하며 절망에 빠져
'3당 합당 분쇄 투쟁'도 흐지부지...새로운 전망 창출 못해
전경들 집단폭행에 강경대 군 사망하자 항의 분신 잇따라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 창당축하연에 참석한 김영삼·노태우·김종필.
89년과 90년 초에 벌어진 세계사적 변화와 국내 상황은 재야와 학생운동 진영을 몸서리치게 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동서 냉전의 해체, 그리고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동부 유럽의 몰락이 가져온 정신적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학생운동권이 대안으로 여기던 사회주의 권력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89년 자기 인민을 탱크로 밀어버린 중국의 천안문사태, 그리고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죽음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상을 목격하면서 재야, 학생운동 진영은 자신들이 꿈꾸어온 미래 대안 사회를 상실했다.
그런데, 재야 학생운동에게 또 하나의 절망적인 사건이 불어닥쳤다. 여소야대 4당 체제가 일거에 무너지는 3당 합당이 단행된 것이다. 여소야대로 인해 정국운영에 한계를 느끼고, 뚜렷한 차기 후보자가 없던 노태우 정권과 민정당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정계개편을 단행했다.
이로써 214석에 달하는 절대다수의 여당이 탄생했다. 통일민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하면서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국민은 88년 총선에서 평민당에 밀려 제2야당으로 밀려난 상황을 뒤집어보려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처음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호남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김대중의 평민당에 합당 제안했다. 그러나, 3당 합당에 대해 ‘내각제’ 개헌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자 김대중 총재가 머뭇거렸고,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쪽이 내각제 개헌을 받아들이며 3당 합당에 이르게 되었다.
산발적인 3당 합당 분쇄투쟁
이처럼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절대다수 여당이 만들어지는 3당 합당은 재야 학생운동 세력에겐 절망스런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2월 10일 서총련에서 중앙대에서 기습적으로 진행한 3당 야합을 규탄하는 ‘반민주야합, 일당독재 음모 분쇄결의대회’가 열었다.
그리고 2월 24일과 25일에는 국민연합이 주최하는 전국 15개 도시에서 동시에 개최한 ‘반민주 3당야합 분쇄 및 민중기본권 쟁취를 위한 국민대회’가 열렸다. 부울총협(부산울산지역 대학총학생회 협의회)에서는 4기 전대협 임시의장인 송갑석(전남대 4)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미문화원 방화투쟁 계승 및 친미야합 분쇄 결의대회’를 가졌다.
하지만, 산발적인 투쟁으로 3당 합당을 저지하거나 분쇄할 수는 없었다. 정치권에서는 노무현 등 일부 국회의원들이 합당을 거부하며 탈당하고, 김대중의 평민당이 3당 합당과 내각제 개헌 음모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고작이었다.
3월 들어오면서 대학에서는 등록금 투쟁에 매달리면서 3당 합당 저지 투쟁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대협은 4기 출범식과 처음 열리는 ‘8.15 범민족대회’에 집중함으로써 3당 합당과 내각제 기도를 분쇄하려는 정치권과 거리를 두었다. 87년 대선 실패와 89년 거듭된 방북으로 야권과 재야 학생운동의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국군보안사령부에 근무하면서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들을 사찰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의 기자회견.
윤석양 이병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폭로
하지만, 사이가 벌어졌던 재야 학생운동과 야당은 거대 여당의 일방통행이 증가하면서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 계기는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이었다. 90년 10월 4일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에서 복무하던 윤석양(이등병, 29세)이 정치계와 노동계, 종교계, 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 1303명을 상대로 정치사찰을 벌였다고 폭로한 것이다.
그는 군에 입대한 뒤, 외대 재학 때 관여한 ‘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 사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된 후, 서빙고분실에서 강제로 대공 및 학원사찰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다 90년 9월 21일 새벽, 위병소 근무자가 다음 근무자를 깨우기 위해 내무반으로 들어간 사이를 이용하여, 미리 빼낸 ‘사찰대상자 명부 철’을 가지고 탈출했다.
윤석양 이병이 가지고 나온 ‘청명계획’은 89년 3월 공안정국이 조성된 직후인 4월에 만들어졌다. 비상계엄이 발동될 경우, 방해될 민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보안사령부에서 체포 목록을 작성한 것이었다. 계엄령을 발동할 경우 체포만 남은 상황이었다. 자택의 가구 배치, 진입과 도주 가능 경로, 친인척 주거지 및 세세한 인적 사항이 ‘청명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청명계획’ 명단에는 김대중, 이기택, 노무현, 등의 정치인은 물론 김수환(신부), 한승헌(변호사), 김승훈(신부), 박형규, 문동환(목사), 송월주(불교), 이창복(재야), 이효재(여성계), 단병호(노동), 권종대(농민), 송건호(언론, 한겨레), 김지하(시인), 조혁(반미청년회), 백태웅(서울대)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심지어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인 김영삼까지 사찰 대상으로 적시되어 있었다.
10월 13일 보라매공원에서 야당과 재야 학생운동이 결합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규탄하는 국민대회’가 열렸고, 대회장에는 1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전대협 의장이 속한 대학이 전남대이고, 서총련 의장에는 PD계열인 윤진호(고대 총학생회장)가 들어서면서 여전히 야당과의 연합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도 야당과의 연합전선은 실현되지 못했다. 여전히 재야 학생운동 진영은 야당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야당인 평민당도 재야 학생운동과 결합함으로써 김대중에 대한 ‘색깔론’ 공격이 더 강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처럼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재야와 운동권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확장되었음에도, 소련과 사회주의권의 몰락, 3당 합당으로 인해 새로운 전망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처럼 재야를 비롯한 노동, 농민, 학생운동 세력에게 90년은 절망스럽고 우울한 해였다.
분신정국...절망에 몸무림치다
그렇게 재야와 운동권은 우울하고 절망스런 상황에서 91년을 맞았다. 그런데, 4월 26일 명지대학교 강경대가 시위 도중에 전경들의 집단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 이어, 전투경찰의 박석진 일경이 시위 진압을 거부하고 양심선언을 하며 시위대와 전경 사이에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또, 5월 6일에는 서울구치소 수감 중, 머리부상으로 안양병원에 이송되어 있던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이 병원 앞마당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병원 이송과정에서부터 전노협 탈퇴 종용 등 안기부의 개입이 확인되면서 또 다른 의문사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91년 명지대학교 1학년생이던 강경대 군의 영결식 행렬.
특히 강경대의 죽음은 이한열의 죽음과 연관되면서 재야 학생운동 진영을 크게 격앙시켰다. 시신이 안치된 세브란스 병원을 중심으로 신촌 일대는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재야와 학생운동은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이하 범대위)’를 결성해 대정부 투쟁에 돌입했다.
이에 놀란 노태우 정부는 안응모 내무부 장관을 경질시키고, 검찰은 강경대를 폭행 살해한 전경 5명을 잡아들였다. 29일에는 노재봉 총리가 치안장관회의에서 사과 의사를 밝혔다. 노태우 대통령도 5월 2일에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과의 정례회담에서 사과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하루 뒤 청년회의소 다과회에서 "강경대 사망은 과거 민주화 투쟁 중에 벌어진 희생과는 다르다"며, 다음날 국무회의에서 전경과 백골단 해체는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최루탄 발사 예고제’와 ‘백골단의 진압복 착용, 경찰의 교내진입 자제’ 등을 시사했다.
이에 분노한 재야, 학생운동에서 죽음으로 항거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91년 5월 한 달은 피로 얼룩졌다. 강경대가 죽은 지 사흘 뒤인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망을 규탄하는 집회현장에서 분신했다. 이어 5월 1일에는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에는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이 분신하였다.
또, 5월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서강대학교 옥상에서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거기에 5월 12일에는 서울직장민주화청년연합 회원 윤용하가, 5월 18일에는 주부 이정순, 전남 보성고등학교 학생 김철수, 광주의 운전기사 차태권, 5월 22일 정상순이 분신을 택했다.
전국적으로 무려 9명이 분신자살을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24일 노재봉 총리가 물러나고 정치적 성향이 옅은 정원식이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총리가 바뀐 뒤 벌어진 25일 종로에서 벌어진 3차 규탄 국민대회에서 경찰에 쫓기던 성균관대 김귀정 양이 최루탄 세례 속에 골목길로 쫓기다가 깔려 질식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죽음의 행진, 언론의 왜곡으로 무너져
절망 속에서 벌어진 죽음의 행진은 세 가지 사건에 의해 더 아픈 상처만 남기고 끝이 났다. 하나는 재야 운동권의 정신적 지주와 같던 김지하 시인이 ‘죽음의 굿판을 거둬라’는 조선일보 칼럼이고, 또 다른 하나는 김기설 분신을 조종했다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그리고 정원식 총리 후보에게 가해진 외대생들의 밀가루 테러 사건이다.
김기설 분신자살을 배후 조종하고 유서대필을 했다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한국판 드레퓌스사건(유대인 장교인 드레퓌스를 독일 간첩으로 몰아 종신형을 선고한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강기훈은 3년 형을 선고받아 만기출소한 뒤, 암 투병에 시달리면서도 재심을 청구하여 혐의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김지하 시인이 쓴 ‘죽음의 굿판을 거둬라’는 칼럼과 함께 분신자살을 조장하는 배후조직이 있는 것으로, 여론이 조성됨으로써 분신 정국은 급속이 냉각되었다. 그리고 외대에 강의하러 간 정원식 총리 후보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부은 학생들의 거친 행동이 집중 조명되면서 지방선거는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17) 전환점에 선 재야·학생운동
'전국연합' '진보정당 건설' '시민운동' 세 갈래의 길을 가다
전국연합, 노동자·농민 등 기층 대중운동 기반으로 연합전선 강화
진보정당 건설운동, 1990년 11월 민중당 창당했지만 급속 쇠락
시민운동, 환경운동연합을 시작으로 경실련·여연 등 활발한 활동

▲1998년 서울대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1989년과 1990년에 걸쳐 진행된 소련과 동유럽 등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재야와 학생운동에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더욱이 90년 벽두에 진행된 3당 합당은 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건으로 인해, 재야 학생운동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거기에 경찰에 의한 강경대 군의 폭행치사 사건은 가뜩이나 절망상태에 놓인 재야, 학생운동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가도록 부채질했다. 그것이 바로 91년 박승희 등 9명의 분신 사태를 불러왔다.
이에 김지하 시인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고 일갈하고,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언론의 가짜뉴스, 정원식 총리에 대한 밀가루 테러 사건은 재야, 학생운동의 대중적인 영향력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그것은 곧이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의 완승으로 나타났다.
재야 학생운동, 새로운 길을 찾다
89~90년 소련과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91년 재야, 학생운동의 몰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전환점에 선 재야 학생운동이 찾은 길은 3가지 길이었다. 하나는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연합전선 운동의 강화였다. 다른 하나는 합법적인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경실련,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 새로운 시민운동의 전개였다.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운동에 기반을 둔 연합전선 운동은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결성으로 나타났다. 89년 초에 결성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은 수많은 인적, 재정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동시다발집회’ 남발 등 잘못된 투쟁노선과 지도부의 분열(이부영, 김근태, 장기표, 이재오 등)로 급속히 쇠락했다.
또,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재야, 학생운동의 비전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하고, 분열을 재촉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버티고 있는 북한의 존재로 정신적 타격을 덜 받고 야권으로의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NL 진영은 새롭게 성장한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운동의 성장에 주목했다.
전국연합의 탄생
학생운동의 ‘전대협(전국대학총학생회협의회)’, 노동운동의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농민운동의 ‘전농(전국농민회총동맹)’, 교사운동의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협의회)’, 철거민과 노점상 등 도시빈민운동의 ‘전빈협(전국도시빈민협의회)’, 청년운동의 ‘전청협(전국청년단체협의회)’ 등 ‘6전 조직’이 모여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을 결성한 것이다.
그 외에도 재야 운동권의 13개 부문 단체와 12개 지역연합 등, 해방 이후 최대의 재야운동 단체들이 망라되어 결성된 것이 ‘전국연합’이었다. 이들은 1991년 12월 1일 연세대에서 결성식을 갖고, "자주적 민주 정부를 수립과 민족자주권 확립", "민중의 생존권이 보장되는 참된 민주사회를 구현", "번영된 범민족 통일국가 수립"을 내걸었다.
결성된 ‘전국연합’은 2006년 ‘한국진보연대’가 출범하며 해산되기까지 15년 동안 유지되었다. ‘전국연합’이 결성된 뒤, 93년 우루구아이 협정에 반대하는 ‘쌀과 농산물지키기 범국민운동’, ‘5.18 특별법 제정 운동’, ‘1~5차에 걸친 범민족대회’ 등 대중적인 운동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95~98년 초까지 통일운동과 정치세력화의 방향을 놓고 노선투쟁을 벌이면서 독자적 통일운동을 강조하는 온건 성향의 NL과 북한과 연대를 중시하는 종북적 성향의 NL로 분화되었다. 94년 북한 김일성의 사망과 대기근(일명, 고난의 행군) 사태를 전후로 하여 ‘독자적 통일대회’를 주장하는 측과 북한과 연계를 주장하는 ‘범민족대회’ 측이 크게 대립하였다.

▲1986년 5월 3일, 옛 인천시민회관 사거리에 몰려든 시위 인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야당 정치인과 사회민주화를 외쳤던 다양한 세력이 이날 시위에 참여했다. 이 시위는 ‘5.3사태’로 불리고 있다.
‘범민련(범민족통일운동연합)’과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등 북한과 연계를 강조하는 종북적 성향의 그룹은 96년 연세대 사태를 주도하고, 전국연합의 중앙 등 온건 통일운동 진영이 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승리21’ 등 민주노동당 건설에 뛰어들면서 둘의 대립은 극단적인 분열로 나타나 지도부 공백 상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97년 김대중 정부의 탄생으로 온건 통일운동 세력이 ‘전국연합’을 이탈하고, ‘새천년민주당’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전국연합’에는 북한과 연계를 주장하는 ‘범민련’, ‘한총련’, 등 종북성향 그룹만 남게 되었다. 이석기 등 ‘경기동부그룹’은 ‘전국연합’ 산하 ‘경기남부연합’에 소속된 그룹이었는데, 이들이 ‘범민련’, ‘한총련’과 함께 ‘전국연합’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진보정당 건설운동
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백기완 후보를 중심으로 독자적 민중후보 출마를 주장하였던 사람들이 89년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이 결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90년 11월 10일 민중당이 창당되었다. 이우재(농민운동), 김낙중, 김상기가 상임공동대표를 맡았고, 정책위원장에는 장기표, 사무총장은 이재오가 맡았다.
민중당의 뿌리는 노회찬 등이 이끌었던 ‘인민노련(인천부천민주노동자연맹)’으로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 이후 NL진영과 함께 운동권의 양대산맥인 PD 진영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89~90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는 세계적 격변기를 통해 ‘합법적 진보정당’을 결성하는 것이 운동의 진로라고 판단했다.
민중당은 91년 지방의원 선거에서 강원도의원에 당선자를 배출했다. 정선군 제2선거구에 출마했던 성희직으로 역사상 첫 진보정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였다. 이들이 다시 92년 2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와 통합했으나, 92년 총선에서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한 채,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정당 등록 취소 이후 지도부였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는 김영삼이 이끄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들 중 민주자유당을 이은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새누리당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은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는 물론, 김성식, 정태근, 신지호, 김용태, 차명진, 박형준, 임해규 등이 있다.
그 외 장기표는 여러 번의 정당 결성 등을 시도했지만 국회 진출에 실패했고,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창당을 주도했던 노회찬, 주대환, 조승수 등은 92년 초 민중당과 합당하였지만, 민중당이 해산되고 지도부가 신한국당에 입당한 후, 잔류하여 민주노동당과 결합한 후 국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 외 열린우리당을 통해 국회에 진출한 인물은 김부겸이 있다.
민중당이 해산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거물 간첩 ‘이선실’을 빼놓을 수 없다. 이선실은 1917년 제주에서 태어나 월북했다가, 본인이 자청하여 대남공작원이 된 여성으로 북한 서열 22위까지 올랐던 거물 간첩이었다. 그녀는 66년에도 부산에 내려와 공작을 벌인 경험이 있는 베테랑 공작원이었다.
그녀는 재일교포 신순녀를 만난 뒤, 신순녀로 위장을 했다. 신순녀의 모든 기억을 전달받은 그녀는 74년 일본으로 건너가 신순녀의 가족들을 만나고, 신순녀의 가족으로부터 보증을 받아 일본의 주민등록증까지 받아내기도 했다. 78년에는 한국에 들어와 전주에 기거하는 신순녀의 언니 신양근을 찾아가 ‘신순녀’로 위장을 하였다.
그리고 80년에는 재일교포 국민증을 토대로 한국 주민등록증까지 마련했다. 그 후 10년간 활동하면서 황인오, 손병선 등을 포섭하여 ‘중부지역당’을 결성하도록 배후조종하였으며, 민중당을 통해 정계 진출을 모색했다. 이름을 ‘이선화’로 개명하고, 북한의 공작금을 이우재, 김부겸 등 민중당 출마자들에게 제공한 것이 드러나 민중당 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의 핵심 인물인 남파간첩 이선실(1916년생). 북한 권력서열 22위까지 올랐던 거물로서, 약 30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공작활동을 펼쳤다. /MBC 자료화면
시민운동의 탄생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재야, 학생운동과는 달리 새롭게 나타난 것이 ‘환경운동연합’과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운동이었다. ‘전국연합’이 87년 이후 성장해온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운동에 기반을 둔 연합전선 운동이고, 민중당이 합법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운동이었다면, 시민운동은 권위주의 체제의 종식 후 언론의 ‘하위동맹’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중 제일 먼저 출발한 환경운동연합은 88년 학생운동의 반핵운동과 공해문제연구소가 결합하여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이 발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93년에는 전국의 8개 지역에서 활동하던 환경단체가 통합되어 ‘환경운동연합(대표 최열)’이 설립되었다.
환경운동연합은 댐 건설과 하천 정비사업 등 국토 개발에 대한 감시와 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멸종위기 동식물과 서식지 보전활동, 유전자 조작식품과 환경호르몬 발생에 대한 감시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그린피스 등 세계적 차원의 환경운동이 활성화되면서, ‘환경운동연합’의 영향력도 커졌다.
89년 7월에 발족한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서경석)’은 부동산투기 근절, 금융실명제 실시, 정경유착 척결과 세제개혁 운동, 등 경제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운동을 하기 위해 발족하였다. 금융실명제 실시, 토지공개념 도입 등의 제도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했지만, 김현철 사건과 연루되어 ‘권력유착’ 의혹에 휩싸이며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한명숙 등)’은 87년 2월에 여성운동을 하는 기독교여민회, 여성의전화, 등 여성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모여 창립하였다. ‘여연’은 여성민우회 등과 함께 대표적 여성단체로 ‘호주제 폐지’와 ‘성폭력 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 ‘성매매방지법’ 등을 제정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남녀 갈등을 유발하고 새로운 불평등을 초래하고, 여성가족부와 저출산 고령화 대책 예산의 집행 등 ‘국가 예산’과 ‘이권’을 독식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이렇듯 87년 이후 탄생한 시민운동은 정치적 편향과 진영논리, 그리고 이권 카르텔을 형성함으로써 시민단체의 역기능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18) 주사파 일색이 된 전대협과 한총련
범민족대회 등 통일운동 주력...北 혁명주의식 슬로건 걸고 경직화
범민련·범청학련 출범...연방제 통일·주한미군 철수 등 北 주장 동조
PD진영도 문민정부 이후 신세대 문화 외면 거대 담론·혁명론 일관
非주사 NL 관악자주파 새 흐름도...박원순 등과 참여연대 결성 역할

▲1991년 5월, 노태우 정부에서 국무총리서리에 임명된 정원식 전 문교부장관은 취임 전 마지막 강의를 위해 서울 외국어대학교에 나갔다가 운동권학생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제 정파 협의체에서 주사파 일색화로
91년 강경대 폭행 치사 사건에 이은 분신정국, 그리고 정원식 총리 밀가루 테러 사건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3당 합당으로 좌절감에 빠진 극단적인 재야, 학생운동의 ‘단발마’와 같은 비명이었다.
하지만, 그 비명에 대한 화답은 참혹했다. 김지하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고 일갈했고, 강기훈에 의한 ‘유서대필’이라는 가짜뉴스로 국민들은 냉담해졌고, 곧이어 치러진 지방선거는 야권의 참패로 끝이 났다. 극단적 투쟁이 극단적 패배를 부른 것이다.
그렇게 90년대 들어와 재야, 학생운동권은 좌절감에서 시작했다. 재야와 사회운동은 ‘부문운동’과 ‘연합전선운동’, 그리고 분야별 시민운동으로 분화되었다. 전노협과 사무직 노동조합 연합체인 업종회의가 결성되고,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빈협(전국도시빈민협의회),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청협(전국청년단체협의회) 등이 속속 결성되었다.
그리고 분야별로 시민운동이 태동 되었다. ‘환경련(환경운동연합)’이 결성되고,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여연(여성운동연합)’, ‘민교협(민주화운동교수협의회)’,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예총(민족예술인총연합)’, ‘민동(전국대학민주동문회)’, ‘민가협(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등이 속속 만들어졌다.
이들의 연합전선체로 91년 12월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 탄생했다. 전국연합은 민통련, 전민련에 이어 재야와 민주화운동 세력의 연합체로 만들어졌고, 학생운동은 연합전선체인 전국연합을 떠받치는 핵심역할을 했다. 즉, 전대협(한총련) - 전국연합이 중심축을 형성하며, 전체 운동을 이끌고 나간 것이다.
또, 학생운동이 주력한 것은 통일운동이었다. 88년부터 학생운동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남북학생 판문점회담을 추진했다. 89년에는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평축)에 전대협의 대표로 임수경을 파견했다. 그 이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과 범청학련(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그리고 8.15 범민족대회는 학생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범민련, 범청학련의 결성
남과 북, 해외가 함께 통일운동을 벌이자는 범민련 결성은 90년 8월 15일 1차 범민족대회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제1차 범민족대회 공동결의문을 통해 "남에 있는 북에 있든 관계없이 진정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동포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대단결을 실현할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어 베를린에서 진행된 남, 북, 해외 대표 간의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 통일기구 결성 3자 실무회담’에서 조직체계, 당면사업, 결성사업 계획 등을 확정하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하였다. 또 회담에서는 91년 1월 말까지 남, 북, 해외의 지역본부를 결성한 후 의장단 회의를 소집하여 강령과 규약을 확정하는 등 범민련 결성사업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1992년 범청학련 결성식.
90년 12월 16일에는 윤이상(재독 작곡가)을 의장으로 한 해외본부가, 91년 1월 23일에는 문익환 목사를 준비위원장으로 한 남측본부 준비위원회가, 91년 1월 25일에는 윤기복을 의장으로 하는 북측본부가 결성되었다. 해외본부는 미주, 일본, 중국, 독립국가연합(구 소련), 호주, 유럽, 캐나다 등에 지역본부를 두었고, 범민련 공동사무국(베를린, 이후 일본)을 운영했다.
범민련은 가장 핵심적인 활동으로 매년 8월에 추진되는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 화해 협력을 위하여 토론회, 집회 등을 열었다. 90년 1회 대회를 기점으로 매년 8월 15일에 ‘범민족대회’를 개최하였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이적단체가 된 ‘범민련’은 최고 의결기구인 ‘범민족회의’를 진행하지는 못했다.
범민련과 함께 전대협과 한총련 등 학생운동의 결집체가 ‘범청학련’이었다. ‘범청학련’은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청년조직이 연합해 1992년 8월 15일에 결성되었다. 쉽게 이야기해서 ‘범청학련’은 ‘범민련’의 청년학생 조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따라서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듯이 ‘범청학련’도 이적단체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조직은 중앙조직과 공동사무국, 지역조직으로 구성됐으며, 중앙조직으로는 총회와 중앙위원회, 공동의장단으로 구성되었다. 지역조직은 범청학련 남측본부와 북측본부, 해외본부 등 3개로 구성되었으며, 해외본부 산하에는 일본지부 중국지부 러시아지부 미국지부 유럽지부 등을 두었다.
공동사무국은 독일의 베를린에 설치해서 해외본부가 운영을 맡도록 했다. 공동의장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약칭 한총련) 의장, 북한 조선학생위원회 위원장, 해외동포 청년 학생대표 등 3명이 맡았다. 범민련과 범청학련에 대해 대법원은 97년 연방제 통일,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등 북한 정권에 동조하는 주장을 폈다는 것을 근거로 이적단체로 판결했다.
주사파로 일색화 되어간 전대협과 한총련
통일운동에 매진한 전대협은 점차 NL노선과 주체사상파로 일색화 되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운동은 NL계열, 특히 주사파 조직에서 관심이 클 수밖에 없고, 남과 북 해외의 3자 연대에 의한 범민련과 범청학련과 합의로 활동할 때, 북한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전대협 초창기만 하더라도, 심지어 4기 전대협만 하더라도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의장은 PD계열이 차지할 정로도 전대협은 NL과 PD의 동거체제였다. 비율은 NL진영이 우세하고, ‘언더 지도부’는 주사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지만, 겉으로는 NL과 PD 등 제정파가 연합하는 형태를 띠었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에 PD와 비운동권 총학생회도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정치투쟁과 ‘범민족대회’ 등 통일운동에 집중하면서 비운동권 총학생회는 물론, 통일운동에 관심이 적은 PD진영도 전대협, 한총련과 거리를 두었다. 따라서 전대협 후반기에서 한총련으로 전환하는 92년~93년에 전대협과 한총련의 지도부는 물론, 직업적 운동가로 구성된 정책실 등 ‘언더 지도부’는 주체사상파로 일색화될 수밖에 없었다.
91년 극단적인 투쟁을 전개했던 재야 학생운동의 상황은 92년이 되어도 나아질 것이 없었다. 노동자, 농민 등 부문운동과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운동이 발전하고는 있었지만, 운동의 중심축인 재야와 학생운동은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결국, 92년 대선에서 야당인 김대중 후보는 압도적인 차이로 김영삼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93년 들어와서 학생운동은 제6기 전대협의 시대를 마감하고, 연합체로의 발전을 모색했다. 그것이 93년에 창립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다. 한총련의 창립 시에는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 한총련’이라는 슬로건이 내세웠듯이 어느 정도는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이었다. 이미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넘어오면서 PD계열이나 비운동권 총학생회의 참여는 배제되다시피 했다. 학생 대중과 함께한다는 대중노선도 구호에 그쳤다. 한총련의 언더 지도부는 대학을 졸업하거나 휴학한 채,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전업적 운동가들로 일색화 되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와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경제적 풍요를 누린, 서태지로 대변되는 신세대 문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지만, 한총련 등 학생운동은 ‘불패의 애국 대오 한총련’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며 북한식 혁명주의 노선으로 일관했다. NL과 주사파로 일색화된 학생운동이 어떻게 경직화되어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1993년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물론 한총련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PD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즉, 사회는 문민정부가 출범한 상태에서 현실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했고, 젊은 층은 풍요로운 성장환경에서 배낭여행 등 신세대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학생운동권은 거대 담론과 혁명론, 그리고 상명하달에 의한 동원식 거리투쟁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NL진영의 한총련과 PD진영 외에 새로운 학생운동이 흐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관악자주파로 거론된 비주사 NL진영이다. 이들은 평범한 대학생들의 일상에 주목하며 새로운 학생운동 방식을 시도했다. 이들이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었고, ‘관악자주파’ 계열은 박원순 등과 함께 ‘참여민주사회연대(참여연대)’를 만드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한총련은 전대협의 대중동원 능력을 넘어섰다. 전대협 출범식 때는 3~4만 정도의 인원이 모였지만, 한총련 출범식 때는 5만~8만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 학생운동이 서울 명문대 엘리트 중심에서, 지방대 등이 중심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논쟁과 이론투쟁보다는 선전과 선동을 담당하는 ‘대학신문’이나 ‘문화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한총련이 첫선을 보인 것은 93년 5월 29일 고려대였다. 이전에 전북대에서 대의원대회를 열어 제1기 의장으로 김재용(한양대 정외4)을 선출했으며, 조국통일위원장에는 김병삼(연대 공대4)를 선출하였다. 한총련 출범식이 열리는 고대 운동장에는 8만여 명이 운집하였고, 지역 총련별로 깃발과 유니폼까지 차려입어 장관을 연출했다.
고려대 학생회관에서는 북한 및 해외 학생대표들과 국제전화로 교신하였다. 한총련에서는 김재용을 비롯해 11명, 북한 조선학생위원회에서는 허창조 등 6명이 북경의 연경호텔에서, 김창오 등 해외본부 의장단 6명은 일본 동경에서 국제전화로 2시간 동안 회의를 열고, 공개적으로 통일방안과 ‘3차 청년학생축전’ 개최를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서 북한으로 귀환한 미전향장기수 리인모는 ‘범민련’ 해외본부 임민식 사무총장의 대독한 연대사를 통해 "나는 북한에서 잘 지내고 있다"며, "우리 모두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남과 북, 해외의 공동의장단은 ‘한반도 평화정착’, ‘8.15범민족회담 성사’, ‘남북청년학생 자매결연 예비회담 개최와 범청학련 연대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공동결의문을 채택했다.
(19) 문답으로 알아보는 주사파 특징
한총련 이후 주사파, 北 의존도 강화되고 맹목적 모습 보였다
이성적 학습·이론보다는 집단적 감성·선동에 의존하는 경향 짙어져
봉건 왕조로 변질된 北에 대한 비판의식 상실...'인권문제' 눈 감아
이론 논쟁 들어가면 실질적 대안 제시하는 각론에선 형편없는 모습
90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학생운동이 대안으로 삼던 ‘사회주의’는 더이상 대안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북한 김일성 체제는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넘어가면서 ‘민족해방민중(인민)민주주의혁명론(NLPDR)’과 주체사상으로 일색화 되었다.
따라서 92년 대선과 93년 한총련 출범 이후 학생운동은 주사파, 즉 김일성주의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주체사상’ 즉 김일성주의는 기존의 사회주의, 즉 맑스 레닌주의와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 연재에서는 주사파(김일성주의)에 대한 특징을 문답 형식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주체사상의 이론을 정립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주체사상은 기존 공산주의 노선에서 벗어난 북한의 독자적인 사상체계였다. 김정일은 이를 더욱 변형시켜 수령 유일 독재이론으로 변질시켰다.
1문: 주사파는 어떻게 재야 학생운동권에 정착했나?
답: 해방 후 대한민국 좌익운동 계열은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 계열과 북한 노동당에 의해 직접 지도된 북로당 계열(성시백 계열)로 나뉜다. 남로당 계열에 의해 1차 인혁당 사건(64년)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 74년)이 일어난다. 반면 북로당 계열은 6.25이후 궤멸되었다가 남파된 간첩과 연결되어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통일혁명당(총책 김종태)이다. 그들은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 서울대 문리대 중심으로 통일혁명당을 조직하고,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북한과 내왕하는 기지를 건설한다(임자도 간첩단 사건). 통혁당이 검거된 후에도 북한은 지하당 건설 공작을 벌였고, 이것이 4~5회에 걸쳐 통혁당 재건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적발되었다.
79년 10월 통혁당(북로당계열)과 인혁당(남로당계열) 세력의 통합을 시도한 남민전 사건이 일어났지만, 학생운동과의 연계는 밀접하지 않았다. 여전히 ‘반미’문제는 좌익 지하당과 학생운동 사이에 넘지 못할 벽이었다. 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며, ‘맑스 레닌주의’와 ‘반미의식’이 학생운동권에서 일반화되면서 그 차이가 좁혀졌다.
85년 미문화원 점거, 그리고 CNP(시민혁명, 민족혁명, 인민혁명) 논쟁과 사회구성체 논쟁에 따라 ‘맑스 레닌주의 사상’이 학생운동권에 일반화되고 ‘반미운동’을 전면에 내세운 ‘자민투’가 만들어지면서 ‘NLPDR 노선’과 주체사상이 재야, 학생운동권에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남민전 관련자가 감옥에서 출소하여 학생운동권과 만나고 ▲85년 ‘통혁당 소리방송’이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방송’으로 바뀌면서 이론과 혁명투쟁에 대한 북한의 지시가 강화되고 ▲남파 간첩들의 지하당 공작(윤택림, 이선실 등)이 진행되면서,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학생운동, 노동운동, 재야운동에 만들어졌다.
구국학생연맹(서울대), 애학투련, 반미청년회(고대), 구국학생동맹(연세대) 등 각 대학 ‘언더 써클’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혁명조직(RO)으로 재편되었다. 그중 반미청년회(조혁)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고, 전대협을 탄생시키는 배후가 되었다. 이후 학생운동권은 ‘자민통(서울동부)’, ‘조통(서울 서부)’, ‘관악자주파(서울대)’ 등 전대협을 배후 조종하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통일운동이 강화되면서 전대협에서 주체사상파의 지위가 확고해졌고, 범민련, 범청학련이 만들어지면서 북한과 직접적인 연계가 강화된다. 특히 ▲통일운동 중심의 투쟁전략 ▲남과 북 해외의 2자 연대조직인 범민련과 범청학련 ▲한민전 구국의 소리방송에 의존하는 전대협, 한총련의 직업적 ‘언더 지도부’가 주사파 일색화를 재촉했다.
2문: 맑스 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차이는?
답: 맑스주의는 철학적 관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사물에 내재된 대립물의 투쟁으로 사물의 변화발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사적 유물론에서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 투쟁으로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레닌주의는 맑스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해야 사회주의로 전환"된다는 단계적 발전론에서 저발전 국가인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한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레닌주의는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당 조직’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노력이 강조되었다.
주체사상은 ‘맑스 레닌주의의 유물론’을 계승하지만,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에 의해 역사발전이 이뤄진다"고 주장하여, 유물론적 ‘역사발전관’을 변형하였다. 맑스는 "‘관념철학’은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했는데, 주체사상이 사실상 ‘유교적 관념론’에 기울면서 북한의 봉건 지배 이데올로기로 바뀐 것이다.

▲1982년 3월 18일에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 (대청동2가)에 있는 당시 부산 미국 문화원(현 부산근대역사관)에 불을 질렀다. 1980년 5·18에 대한 미국의 방관적 자세가 반미정서를 자극해 일어난 사건이다.
3문: 주체사상의 특징은?
답: 북한의 주체사상, 즉 김일성주의는 ▲관념화, ▲민족주의화, ▲유교화 된 ‘맑스 레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에 의해 역사발전이 이뤄진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역사발전관이다. 이것을 주체사상은 ‘사람 중심의 철학’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 중심의 역사발전관에서 핵심은 ‘사회유기체론’이다. 즉,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관계를 맺고 조직을 만들게 되는데, 그렇게 구성된 공동체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유기체는 팔, 다리와 같은 말단 촉수의 역할이 있고, 심장의 역할이 있고, 뇌수의 역할이 있는데, 노동당과 수령이 심장과 뇌수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이 바로 ‘수령론’이다. 또, 수령의 영도를 옆에서 배우고 학습한 후계자가 계승하게 되는데, 이것이 ‘후계자론’이다.
‘사회유기체론’, ‘수령론’, ‘후계자론’이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이다. 주체사상이 왜, 맑스 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유교적 관념론’으로 수정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에서 ‘사람 중심의 철학’과 ‘사회유기체론’, ‘수령론’, ‘후계자론’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4문: 주체사상의 탄생 과정은?
답: 주체사상의 시작은 60년 말 중소 분쟁 과정에서 독자적 노선을 모색하면서 탄생했다. 즉, 중국과 소련의 분쟁 와중에 줄타기 외교를 했던 북한의 처지에서 독자적 사상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이 김정일의 노동당 선전부장 진입으로 본격화된 것이다.
이는 주체사상의 탄생 과정에서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정일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김일성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미화하는 작업과 함께, 북한 주민들에 대한 사상 교양과 김정일 후계 구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수령론’과 ‘후계자론’은 김정일 후계 구도가 완성되어가던 1982년 전후로 완성되었다. 더욱이 김정일의 대학 졸업논문인 ‘조선민족형성론’과 김일성 대학의 주체사상연구소(소장 박승덕)에서 집필된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 등이 나오면서 완성되었다.
5문: 대한민국 주사파의 특징(장점과 단점)은?
답: 초기 재야 학생운동권에서 주체사상이 자리 잡은 것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투쟁 과정에서 ‘반미주의’가 일반화되고,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방송’과 ‘직선제 개헌 투쟁’과 같은 대중노선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초기 주사파의 경우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식민지 반(半)자본주의론’ 등 한국 사회에 대한 사회구성체 논쟁이나 ‘NLPDR론(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등 이론적인 논쟁과 철학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 재판현장.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시간 만에 형이 집행돼 당시 박정희 정권은 '사법살인'을 자행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론 투쟁이 전개되는 ‘언더 서클’의 해체와 총학생회 중심의 운동체계로 선전 선동과 문화패 활동에 주력함으로써 이론적 깊이가 얕아지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저항적 ‘민족주의론’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더구나 전대협, 한총련의 ‘언더 지도부’가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방송’에 의존함으로써 이론적 능력이 한층 부족해졌다.
그러므로 주사파로 일색화 된 한총련 이후 학생운동은 ▲한민전 구국의 소리방송 의존도 심화(북한 의존도 심화) ▲저항적 민족주의 경향성 강화 ▲이성적 학습과 이론보다는 집단적 감성과 선동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총련 이후 대한민국 주사파는 ‘NLPDR론’과 ‘주체사상파’의 초기 모습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북한 의존도가 강화되고, 집단주의적 경향성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독자적 통일운동보다는 범민련 등 3자 연대에 의한 범민족대회를 고수하고 ▲북한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북한 동포돕기 운동’을 거부하고 ▲96년 연세대 사태 일으키는 등 맹목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모습을 보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한총련 이후 주사파들이 봉건 왕조체제로 변이된 북한에 대한 비판의식이 상실하고,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에 대해 눈을 감고 있는 것, 그리고 반미, 반일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일본이나 서양의 ‘극우파’적 경향성을 띠는 것이다.
따라서 주사파의 장점과 단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장점으로는 ‘집단주의적 선전과 선동능력’이 높다는 것이다. 각종 문화패 활동, 집단적 감성에 대한 호소, 그리고 음모론 등을 동원한 선전 선동과 조작 능력이 대단히 출중하다.
반면, 감성적이고 집단적인 선전 선동에 의존하다보니 이성적이고 이론적 능력과 판단이 매우 뒤진다. 선전과 선동을 위한 감성적 ‘레토릭’에는 대단히 강하지만, 이론적 논쟁에 들어가면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총론적인 비판능력은 높지만,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각론에서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다.
(20) 문민정부시대 신공안정국 도래
UR 반대투쟁·북핵 위기속 김일성 조문 파동...주사파 색출 나서
농산물시장 개방으로 전농·민주당·전국연합·한총련 등 연일 반대 시위
北 핵확산금지조약 탈퇴·서울 불바다 발언...전쟁 공포에 라면 사재기도
김영삼 대통령, 공산주의 학생 척결 지시...94년 6~8월에 432명 구속

▲서울 서대문 농협중앙회관에서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 대응 결의대회’를 하는 전국농민대표. /연합
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를 표방하여 취임 초기부터 본인을 포함한 공직자들의 재산을 공개해 부패 공직자들을 대거 숙정했다. 또, 군부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시행, 안기부 개혁 등, 속 시원한 개혁에 국민의 박수가 쏟아졌다.
취임 초기 김영삼의 지지율이 90%를 돌파하여 서태지와 아이들, 최진실을 제치고 인기스타 1위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반면,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 고문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사실상 김영삼 대통령과 민자당의 일극 체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도 잠시. 연속적인 대형 참사와 사건으로 정권에 대한 신뢰가 급속히 추락했다. 295명이 사망한 ‘서해페리호’ 침몰 사건(93년 10월), 성수대교 붕괴(94년 10월, 32명 사망)와 충주호 유람선 화재(94년 10월, 29명 사망),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94년 12월, 사망자 12명, 부상자 101명, 이재민 210세대 555명)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이러한 대형 참사는 95년에도 이어져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95년 4월, 사망 101명, 부상 202명, 차량 150대, 건물 80여 채 파손)와 삼풍백화점 붕괴(95년 6월, 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외에도 지존파와 박한상의 반인륜적 연쇄살인 사건(93년 4월~94년 9월)이 벌어졌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보호무역이 유지되었던 GATT 체제에서 새로운 무역협정인 우르과이라운드(UR, WTO체제) 협정이 체결되어 쌀과 기초농산물 수입개방이 불가피해졌고, 1차 북한 핵 위기로 인한 영변 핵시설 폭격이 논의되는 등, 김영삼 정권의 국가경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어 민심이 흉흉해졌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 반대 투쟁
1990년대 들어 농민들은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외국 언어들과 싸워야 했다. 우루과이라운드(UR)에 이어 GATT, UR, WTO, FTA 등, 농업 전반에 걸쳐 세계화의 물결에 밀어닥쳤다. 농사만 지으면 될 줄 알던 농민들에게 국제정세까지 알아야 하는 시련이 닥친 것이다.
당시 세계 무역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이라고 불리던 것으로 48년부터 지속된 GATT 체제였다. 이것이 서비스무역, 해외투자, 지적소유권의 국제적 이전 등, GATT 체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국제적 교류가 늘어나, 새로운 교섭이 필요하였다.
또, 미국의 절대적 우위에 기초한 국제경제 질서가 붕괴되고,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 미국, 일본, 유럽공동체 등으로 다극화되었다. 이로 인해 농업공황, 제조업 쇠퇴, 서비스산업 팽창이라는 산업구조의 변화와 경상수지 적자에 직면한 미국은 새로운 무역질서 구축을 시도하게 되었다.
즉 농업·서비스산업 및 첨단기술의 비교우위를 무기로 하여 세계 경제에 대한 패권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 같은 미국 대자본의 요구에 의한 새로운 무역질서 재편과정이 우루과이라운드였고, 이를 통해 ‘GATT 체제’를 ‘WTO 체제’로 이행하려 했다.
김영삼 정부는 농산물 개방을 막겠다고 했지만, 뜻대로 될 수는 없었다. G7 정상들이 합의한 것은 모든 수입제한품목의 자유화, 농업보조금 폐지, 이중곡가제 폐지, 영농자금 융자중단, 수출보조금 철폐 등 이었다. 이에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을 지키겠다던 정부의 약속도 물거품이 되었다.
UR 협상 타결 소식은 농민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농민이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었고, 사회 분위기도 농민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이에 농민조직인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과 농어민후계자연합회 등은 야당인 민주당과 연합하여 ‘UR 대책위’를 구성하고 쌀과 기초농산물 수입개방 저지 투쟁에 나섰다.
전국연합과 한총련 등 재야 학생운동도 187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UR 대책위’를 구성해 투쟁에 동참했다. 93년 2월 15일 동국대에서 약 2만여 명의 농민, 학생,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UR협상 거부 및 쌀 전량수매 쟁취를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1994년 2월 1일, 전농 등 9개 농민단체 회원과 학생, 시민 등 4만여 명은 대학로에서 ‘UR 재협상쟁취, 국회비준 거부와 농정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집회를 마친 농민들은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전경 버스와 경찰 순찰차를 불태우는 등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차 북핵 위기와 김일성 사망
1차 북핵 위기는 북한이 중단되었던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재개된 것에 반발하며, 93년 3월 12일에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하면서 일어났다.
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특별 사찰을 요구했다. 이에 6차례 걸쳐 사찰이 이루어졌으나, 92년 7월 시찰에서 보고서에 적힌 플루토늄의 양과 실제 플루토늄의 양이 다른 것이 드러나고, 미신고 시설에 대한 사찰을 북한이 거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팀스피리트’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재개되면서 북한은 93년 3월 12일에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게 된다. 이에 한미는 대화와 ‘포괄적 접근’을 통해 북측의 핵무기 개발 중단을 막고, 북한을 다시 NPT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 불바다 발언’을 계기로 갑작스레 입장을 바꿔, 3차 북미회담은 결렬되었다.
냉 온탕을 오가는 김영삼 정부의 정책으로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위기는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미국이 대북 강경 입장을 가질 때는 대북 온건 대화 전략을 폈고, 미국이 대북 온건 대화 전략을 펼 때는 강경책을 펼쳤다.
그 와중에 서울 불바다 발언과 미 항모의 영변 핵시설 폭격이 시도되었다. 그중 1차 긴장을 불러온 ‘서울 불바다 발언’은 94년 3월 19일에 판문점 남북 특사교환 실무회담장에서 벌어졌다. 실무회담 대표로 나온 북한 조평통의 박영수 부국장은 팀스피리스 훈련 재개에 불만을 토로하며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며,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성수대교가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 32명이 사망했다. /김석구 기자
이것을 정부가 공개하면서 서울은 삽시간에 전쟁 공포 분위기가 되었다. 강남지역의 각종 마트에서 ‘라면 사재기’가 대거 일어나고, 동원참치 매출이 급증했다. 또 백화점 비상용품 판매 코너에서 방독면 등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또, 사람들은 현금을 비축하기 위해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했다.
정부도 전쟁 분위기를 적극 조장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현충일에 놀러가는 분위기를 질타했고, 방송과 언론에서는 연일 북핵 위기를 거론했다. 이홍구 통일원 장관도 민주평통 서울지역회의에서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의 전쟁 기도를 응징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심지어 거리에는 확성기를 단 ‘멸공 차량’도 등장했다.
1994년 5월 18일에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에게 항공모함 5척을 동해로 보내, 작전계획 5027 하에 북한의 핵시설을 공습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김일성이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초청하고,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정세는 급속하게 변했다.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판문점을 넘어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과 회담을 하고, 김영삼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김일성의 남북 정상회담은 94년 7월 8일 갑작스런 김일성 사망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에 미국은 미국의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해군의 항공모함 2척과 함정 33척이 원산 인근 동해에 집결하여, 북한의 핵시설을 공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반도 전쟁을 우려한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 핵시설 폭격을 만류하고, 10월 21일에 제네바에서 북미합의가 체결되었다.
신 공안정국 도래
서울 불바다 발언과 김일성 사망 후, 조문 파동이 일어나면서 ‘신공안정국’이 조성되었다. 김일성 사망 후, 대학 총학생회가 김일성 빈소를 마련하고 조문하는 등, ‘조문 파동’이 진행되자, 김영삼 대통령은 전국 14개 대 총장들을 청와대에 불러 오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서강대 박홍 총장이 "주사파의 배후에는 김정일이 있다"며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박홍 총장은 "북한은 해외 6개 지역의 범민련본부에서 팩시밀리를 통해 남한의 주사파에게 지령을 보낸다"며, "북한은 학생들에게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미군기지 반납 운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정국은 발칵 뒤집혔고, ‘조문파동’에 이어 ‘주사파 파동’이 시작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수호를 위해 폭력과 낡아빠진 공산주의를 맹종하는 학생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주사파 학생을 강력하게 척결할 것을 지시했다. 박홍 총장은 일본 마이니치신문과 인터뷰에서 "북한에 초청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교수가 되었다"고 밝혀, 언론과 학계, 문화계까지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진행되었다.
검찰은 한총련과 범청학련 간의 팩스 교류 사례를 공개했고, 법무부는 주사파를 사면과 복권에서 제외시켰다. 8월에는 장상환 등 경상대 교수 아홉 명이 공동으로 쓴 ‘한국사회의 이해’를 이적표현물로 몰아 수사에 착수했고, 경찰은 ‘김일성주의청년동맹’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9일에는 범민족대회 추진본부의 이창복 의장 등 두 명을 구속했고, 제5차 범민족대회에 헬기와 병력을 투입해 최루액을 뿌리며 해산 작전을 펼쳤다.
9월에도 공안 사건이 계속되어 7일에는 고교생에게 의식화 학습을 시켰다는 혐의로 고교생 조직 ‘샘’을 검거하고 고등학생 잡지 ‘새날 열기’의 편집장 정동익을 이적표현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구속했다. 94년 9월까지 구속자 수가 744명이었는데, 신공안정국이 조성된 6~8월 구속자는 전체 구속자의 50%가 넘는 432명이었다.
(21) 조문파동과 통일운동의 분열
한총련 "김일성 분향소 설치하라" 지침...발각되자 "공안 조작극"
범민련 의장 北 조문 가다 체포...전남대 등 분향소 ‘종북 주사파’ 인식만 강화
문익환 목사 새 통일운동체제 필요성 제기에 ‘반미자주 진영’ 반발하며 분열
문민정부, 북미제네바 합의후 온건 통일운동지지-종북 성향 운동권엔 강경
보안수사대, 한총련 산하 지하조직 검거 집중 ‘구국전위’ 등 조직사건들 터져
93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면서 한반도 핵 위기가 찾아왔다. 북한의 핵 위기는 1년 넘게 진행되면서 한반도에는 영변 원자력시설에 대한 폭격과 ‘서울 불바다(94년 4월)’ 발언 등으로 일촉즉발의 긴장이 흘렀다. 그러는 가운데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약속되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94년 7월 9일 북한의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묘향산 별장에서 김정일과 함께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대처방안을 논의하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켜 숨졌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를 두고 김정일과의 언쟁으로 김일성이 사망하게 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김일성의 사망은 주사파 학생운동 내부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남총련 산하 전남대의 한 학생은 "7월 9일 갑자기 발표된 김일성 주석 서거 소식을 듣고 한동안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응답하라 한총련 91~97). 그만큼 한총련 내에서 김일성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김일성 사망으로 조문단 파견이 이슈로 떠올랐다. 남북정상회담의 한 주체인 김일성의 사망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이부영 의원은 국회의 대정부 질의를 통해 "조문단 파견 용의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6.25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조문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당시 대학가에 걸린 현수막.
김일성 조문파동
김일성 조문파동은 정부와 재야 학생운동 사이에 격렬한 갈등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문파동은 김일성에 대한 호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김일성을 ‘김일성 주석’으로 부를 것인지, 아니면 그냥 ‘김일성’으로 부를 것인지가 논란이었다. 정부에서는 정상회담에 대한 실무접촉에서는 ‘김일성 주석’이었지만, 사망 이후에는 ‘김일성’으로 호칭했다.
재야 학생운동의 주장에 따라 야당 의원들이 공식적으로 조문단 파견을 제안했다. 이에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남한 조문단을 환영한다는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였다(7월 14일). 하지만, 국내에서는 조문 반대 여론이 더욱 확대되었다. 정부도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전군과 경찰에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그리고 조문에 대한 어떠한 발언도 모두 김일성 추종세력으로 규정하고 "조의 표명과 조문 행위에 대해 ‘사법처리’할 것"임을 발표했다. "김일성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자, 분단 이후 계속된 무력도발로 한국 사회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일으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이후 북한은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한국 정부를 향해 "조문단 파견을 가로막고, 애도의 뜻조차 표하지 않는 것은 불손하고 무례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정부는 김영삼 대통령과 14개 대학 총장들의 오찬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서강대 박홍 총장은 "주사파의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는 ‘김정일 주사파 배후설’을 제기하였다.
7월 15일 새벽, 경찰은 병력을 전남대에 진입하여 학생회관에 설치된 김일성 분향소를 철거하였다. 아울러 다른 대학 총학생회에 설치된 비공개 분향소에 대해서도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한총련은 "분향소는 존재하지 않았고, 공안탄압을 위한 조작극"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런데, 범민련의 강희남 의장이 홀로 ‘조문하러 간다’는 손글씨를 쓰고 판문점을 향해 가다 체포되었다. 또, 전남대 등에서 비공개 김일성 사망 조문 분향소를 차려놓고 분향을 한 것이 발각되었다. 한총련에서 분향소를 마련하고 조문하라는 지침이 내린 것도 확인되었다. 이로써 한총련의 주장은 ‘발뺌’하는 것으로 보였고, ‘종북 주사파’라는 인식만 강화시켰다.
공안정국은 8.15 범민족대회를 전후로 급속히 강화되었다. 94년 범민족대회는 건국대학교에서 열기로 했으나, 경찰의 봉쇄로 8월 14일 오후에 서울대로 옮겨 진행되었다. 2호선 전철을 이용해 서울대에 진입한 한총련에게 경찰은 헬기를 띄워 최루액을 살포하며 진압하였다.
이러한 공안정국은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까지 지속되었다. 9월 미국은 동해에 항모 2척을 포함하여 대규모 전단을 띄우고 북한 핵 시설 폭격을 준비했다. 그야말로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이때 김영삼 대통령은 빌 클린턴 전화를 걸어 북폭을 만류했다고 한다(김영삼 회고록).
김영삼 대통령의 만류로 북한 핵시설에 대한 폭격이 중단되고, 북-미는 제네바 합의를 했다. 제네바 합의에서 북한은 핵 개발을 동결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며, 북한에 경수로 원전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경수로 공사 기간 중 매년 중유 50만 톤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통일운동의 분열
북미 관계의 변화에 따라, 김영삼 정부의 태도도 변화되었다. 통일운동 내에서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른바 ‘새통체(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 논쟁이었다. 즉, 남과 북 해외의 3자가 연대하는 조직인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북한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함으로써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북한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석방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의 문제의식은 범민련과 종북적 성향의 주사파 진영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 중심에 리인모와 함께 석방되었던 미전향 장기수, 범민련 남측본부, 그리고 전향을 거부했던 경기동부, 영남위원회, 등 민혁당 하부조직과 한총련 등이 포진되어 있었다.

▲1993년 3월 사면으로 출소하는 문익환 목사. /연합
갈등과 분열 상황에서 범민련 측의 비난과 공격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문익환 목사가 94년 초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7월에는 김일성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통일운동의 갈등과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재야의 본산인 전국연합을 중심으로 새로운 통일운동체인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를 출범시키긴 했지만, 그 분열은 여전했다.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에 따른 북미관계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김영삼 정부의 유화적 정책도 통일운동 진영의 분열을 재촉했다. 즉, 정세의 변화에 따라 독자적인 대중적 통일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측과 반미자주 투쟁과 3자 연대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었다.
그런 상황에서 2-300만이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북한발 ‘고난의 행군’ 참상이 전해졌다. 중국과의 국교로 만주지역 방문이 이뤄지고, 닫혔던 북한 소식이 조금씩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94년 말 새로 개국한 SBS에서 3부작에 걸쳐 ‘조, 중 국경을 가다’라는 다큐 프로그램이 방영되면서 그 실상이 알려졌다.
실상은 참혹했다. 숨어 사는 탈북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탈북자들의 비참한 삶이 전해지고, 심지어 어린아이를 삶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또, 탈북을 하다가 총격으로 쓰러져 얼어붙은 압록강에 버려진 시체가 화면을 채웠다. 국제 구호기관을 통해 전달되는 사진들은 더 심했다.
이에 전국연합과 민족회의 등 통일운동 진영에서 ‘북한 동포돕기 사업’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북한동포돕기’ 사업은 통일운동 진영의 분열과 갈등을 부채질했다. 전국연합과 민족회의는 ‘북한 동포돕기 사업’에 적극적이었지만, 반미자주와 3자 연대 강화를 주장하는 진영은 "‘북한 동포돕기 사업’이 북한의 위신을 추락시킨다"며 반대하였다.
‘북한동포돕기 사업’은 길거리 모금과 개인 후원금 등으로 35억이 걷혔다. 당시로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아이의 돌 반지나 결혼 패물은 물론 전세보증금까지 기부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95년 ‘민족공동행사’가 열리는 보라매 공원에서 종북 주사파 성향의 범민족대회 측이 ‘동포돕기’ 모금함을 부수는 사태까지 벌어져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신 공안정국과 보안수사대
김영삼 정부는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 온건 통일운동 진영에는 손을 내밀면서, 범민련, 한총련 등, 종북성향의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보안수사대였다.
94년 이전까지는 대규모 조직사건에만 안기부나 보안수사대가 개입했고, 일반적인 대학별 집회와 시위에는 관할 경찰서가 담당했다. 이들은 학생회 조직을 검거하기보다는 집회 및 시위를 막는 것에 주력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관할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후, 집시법이나 화염병처벌법,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구속되었다.
그런데, 94년 공안정국 이후 학생운동 관련 수사는 보안수사대가 전담했다. 보안수사대는 국가보안법 관련 공안 사건 또는 간첩 사건을 담당하는 특수부서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후신이었다. 보안수사대는 학생시위에 대응하기보다는 한총련 산하 지하조직을 검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러한 신공안정국에서 여러 조직사건이 발표되었다. 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난 안재구의 구국전위도 그중 하나였다. ‘구국전위’ 간첩단 사건은 북한의 조선로동당 산하 남조선 지하당을 구축했던 사건으로 관련자 23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11차례에 걸쳐 북한과 교신하며 정세보고 등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외에도 94년 범민족대회와 관련해 전국연합의 이창복 의장 등 2명이 구속되었으며, ‘한누리노동청년회’,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성남노동자회’, ‘김일성주의청년동맹’, ‘샘’ 사건 등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들 사건으로 발표된 조혁(구국전위), 최홍재(김일성주의청년동맹)‘ 연성수(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등은 단순 이적표현물 소지죄 등으로만 기소되거나 석방되어, 조직사건을 공안정국 조성하고, 통일운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94년 공안정국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3백87명이었다. 총구속자 7백74명의 50%에 해당한 것으로 89년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총구속자의 18%, 90년 32%, 91년 40%였던 것에 비해 훨씬 늘어난 것이다.
(22) 민노총의 탄생과 5.18 특별법 제정
95년 생산직 '전노협'·사무직 '업종회의' 통합, 민주노총 출범
87년 노동자 대투쟁때 생긴 노조들, 한국노총 가입 거부 새 연대조직 모색
한국통신파업 강경 대응 문민정부, 교계 반발·잇단 대형사고로 개혁 후퇴
민주노총, 출범 후 사회개혁 투쟁 주력...권영길 위원장 대통령 후보 내기도
재야·학생운동 5.18 쟁점화로 全·盧 구속...성공한 쿠데타 처벌 선례 남겨
94~95년 통일운동을 둘러싼 재야와 학생운동의 분열은 범민련이 아닌 새로운 통일운동체(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 설립 논쟁과 김일성 ‘조문파동’에 이어 ‘북한동포돕기운동’에서의 이견으로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새통체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남과 북 해외 3자 연대에 의한 범민련에 의해 통일운동이 진행되면 종북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고, 대중적인 통일운동은 불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반면 범민련과 한총련 등 종북 성향의 통일운동 진영은 독자적 통일운동 모색은 "3자 연대를 거부하는 반통일적 행동"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런데, 94년 범민족대회를 앞두고 북한 범민련이 "‘범’을 뺀 ‘민족대회’를 반대한다"는 문건을 팩스로 보내오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또, 종북 성향의 통일운동 진영이 ‘안기부 프락치’라고 문익환 목사를 비난하고, 그 스트레스로 심근경색을 일으켜 문익환 목사가 숨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북한의 대홍수로 식량난에 빠진 북한에서 2-300만 명이 굶어 죽고, 식량을 찾아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해졌다. 탈북자들에 의해 북한 내부의 참상이 드러나며 ‘북한동포돕기운동’이 급속히 번졌다. 재야의 총본산인 전국연합을 비롯해 경실련(우리민족서로돕기)과 기독교 월드비전 등이 ‘북한동포돕기운동’에 뛰어들었다.

▲1990년 전노협 창립대회에서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에 종북 성향의 범민련과 한총련은 ‘북한동포돕기운동’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북한동포돕기운동’으로 북한의 참상이 보도되며 북한의 체면이 손상되고 있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갈등은 범민련과 한총련이 8.15 대회에서 ‘민족공동행사’가 열리는 보라매공원에서 이탈하여 서울대 범민족대회장으로 이동하면서 표출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범민족대회가 열리는 서울대에 헬기까지 띄우고 최루액을 뿌려댐으로써 통일운동의 분열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즉, 종북세력에 대해선 강경하게 탄압하고 온건세력은 끌어들이려는 이중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96년 연세대 사태까지 이어지게 된다.
민주노총의 탄생
하지만, 통일운동에서의 극심한 분열과 달리 민생과 반정부 투쟁에서 재야, 학생운동은 단일대오를 유지했다. 95년에 생산직 중심의 전노협(위원장 단병호)과 사무직 중심의 업종회의(의장 권열길)가 통합되어 민주노총이 만들어졌다.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조합들이 만들어지고, 한국통신 파업을 계기로 민주노총이 결성된 것이다.
87년 6월 민주화운동에 이어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수출주도형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저임금을 받던 노동자들이 친정부적 한국노총체제에 반기를 들고 민주화와 민주노조 건설을 목표로 파업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87년 한해 만 노조 수가 2,675개에서 4,103개로 늘어났고, 조직률도 12.3%에서 13.8%로 증가하였다.
이때 탄생한 노동조합들은 한국노총 가입을 거부하고 새로운 노동조합의 연대조직 건설을 모색하였다. 90년 1월 제조업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14개 지역협의체와 2개 업종별 조직, 600여 개 노동조합의 20여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 위원장 단병호)’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사무 전문직 업종의 14개 연맹, 586개 노동조합, 200,197명 조합원을 거느린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약칭 업종회의, 의장 권영길)’가 결성되었다. 이 두 조직은 1991년 10월 국제노동기구(ILO) 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ILO 공대위)를 구성하여 공동 활동을 전개하였다.
93년 6월에는 전노협, 업종회의,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가 주축이 되어 1,048개 노동조합, 420,409명 조합원으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약칭, 전노대)’를 결성하였고, 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 창립대의원대회를 열어 민주노총(총 862개 노조, 42만 조합원)을 출범시키고, 권영길과 권용목을 위원장과 사무총장으로 선출하였다.
95년 민주노총이 탄생하는데 기여한 것은 한국통신파업이었다. 한국통신은 94년 5월부터 공기업 임금 가이드라인 철폐와 함께 통신시장 개방 반대, 대기업 위주의 통신산업 민영화 중지 등을 내걸어 정부와의 갈등했다. 이에 사측이 유덕상 노조위원장 등 간부 64명을 고소 고발하며 중징계 방침을 결정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5월 19일, IPI 한국위원회 위원장과 이사진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한국통신 노조가 불법행위를 계속하며 정보통신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국가전복의 저의가 있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단순한 노사분규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로 규정했다.
이에 사측은 64명의 노조 간부를 중징계하였으며, 경찰은 핵심간부 20명을 검거하고 일부를 구속하였다. 노조는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농성에 들어가고, 조합원들은 준법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조계사와 명동성당에 경찰을 투입하여 노조 간부를 연행하고 구속하였다.
하지만,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이 진입한 것을 두고 천주교와 불교계가 크게 반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정부의 개혁은 크게 후퇴하였고,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등 각종 사고로 지지도가 폭락하였다. 결국, 6월에 치러진 제1차 지방선거에서 신한국당은 대패하고 말았다.
민주노총은 출범 이후 전국적인 임금, 단체협약 갱신 투쟁과 함께 정경유착 근절과 노동조합 경영참가, 사회복지제도 개선, 세제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개혁 투쟁에 주력하였다. 96년에는 국제노동기구 기준의 자주적 단결권, 쟁의권 확보와 공무원, 교사의 노동3권 확보, 복수노조금지 조항, 정치활동 금지조항 삭제, 변형근로제, 근로자파견제 저지, 주 40시간 노동제를 위한 노동법개정 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국회에서 개악된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되었다. 이에 민주노총은 3,422개 노조, 연인원 380만여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투쟁을 벌였다. 이에 미국 등 22개국 노동자의 연대와 지지를 끌어냈다. 97년에는 북한동포돕기 조합원 모금,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참가하고,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1993년5월18일 연세대학교에서 전두환-노태우 체포 결사대 출정식에 참석한 결사대가 깃발을 흔들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0년 이후 민주노총은 경직된 고임금 고용구조를 유지하고, 고용세습을 시도하는 등 개혁세력이기보다는 기득권 집단의 길을 걷고 있다. 민주노동당 결성 이후 지나친 정치 개입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고, 주사파에 의해 조직이 장악됨으로써 다수 조합원의 외면과 종북 집단의 주도권 행사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5.18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
95년은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게 된 WTO가 출범한 해다. 그리고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4월, 101명 사망),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6월, 502명 사망, 6명 실종), 북한 대홍수, 여수 앞바다에서 유조선인 씨프린스호 침몰(12월) 등, 여러 가지 재안이 일어난 해다.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 원년’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했지만, 대형 재난사고와 해양생태계 오염으로 국민적 신뢰도가 추락했다. 김종필은 김영삼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고, 김대중도 영국에서 돌아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시점에서 5.18에 대한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재야 학생운동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들은 ‘5.18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섰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15주기를 맞아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하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6월 지방선거가 끝난 뒤 5.18 문제는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김영삼 정부의 초기 입장은 "5.18에 대해 진상규명이 진행되었기에 평가는 역사에 맡기자"는 입장이었다. 7월 19일 검찰에서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요지로 ‘공소권 없음’이 발표되었다.
전국연합을 비롯한 재야와 한총련은 전두환, 노태우의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8월 16일에 장충공원에서 2만 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대회를 진행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경찰을 대회장에 진입시키고 강경진압을 시도했다. 9월에 들어서도 한총련은 신한국당사를 점거하는 등 동맹휴업과 총궐기 투쟁을 전개했다.
10월 들어 박계동 의원에 의해 4천억에 달하는 노태우 비자금 내역을 폭로했다. 이에 언론매체가 노태우 비자금 이야기를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11월 3일 재야와 학생운동은 총궐기 투쟁을 전개되었다. 총궐기 투쟁은 신림사거리, 신촌, 안암로터리 등의 대학가에서 집회가 열리는 종묘공원을 향해 인도로 걸어오며 거리에서 선전전을 펼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인도를 통해 걸어오며 선전전을 펼치는 학생들에게 시민들도 호응했다. 4천억에 달하는 노태우의 비자금에 대한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반면, 시위를 막는 경찰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한 시위대열도 아니고, 인도에서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학생대열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전국연합과 학생운동의 집회와 시위에서 여론을 살피던 김영삼 정부는 "‘5.18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4천억 비자금 사건으로 떠들썩한 노태우를 구속하였다. 이에 한총련에서는 구속되지 않은 전두환을 체포하겠다며 연세대에 집결하고 철야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가 계속되자, 12월 2일 전두환은 집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갔다. 이에 검찰은 전두환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구속하였다. 곧이어 국회에서는 ‘5.18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성공한 쿠테타’도 처벌되는 선례를 남겼다.
(23) 없음
(24) 반성없는 한총련, 막장으로 치닫다
경찰 프락치로 오인, 두 명 납치해 고문치사...명동성당서도 쫓겨나
전남대서 이종권씨·한양대서 이석씨, 학생들에 의한 고문치사...야당도 "해체해야"
총학생회서 새벽까지 구타...한총련 조통위원장 "전시에 인륜 생각하냐" 고문 독려
이종권씨 고문치사 사건 주모자 강위원·정의찬, 이재명 대표 측근으로 활동하기도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과 자민련의 김종필은 DJP연대를 가동했다.
민간통일운동의 통제에서 벗어나 범민련 남측본부와 범청학련, 경기동부그룹 중심의 종북 주사파 지시를 받았던 한총련은 연세대 사태를 경험하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세대에서의 철수를 주장했던 온건파를 적과 내통한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과격하고 폐쇄적인 조직노선을 추구했다.
이러한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한총련의 종북, 과격주의는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사건을 초래하고 말았다. 바로 97년에 벌어진 이종권 씨와 이석 씨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이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 한총련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급기야 정권교체가 된 98년 7월 대법원으로부터 ‘이적단체’라는 불명예를 얻고야 말았다.
계속되는 대형 사건 사고, IMF구제금융사태
97년 대한민국은 대형 사건 사고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새해 벽두 여당인 신한국당은 안기부법, 노동법을 개악하는 날치기를 감행했다. 곧이어 한보, 기아 등 대기업이 연쇄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이어 ‘한보비리’ 사건에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 씨가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북한에서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일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북경의 한국 대사관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일성 사후 3년 만에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가시화되며, 이에 대한 반발로 한국행을 선택한 것이다. 황장엽 비서의 탈북은 일부에서 북한의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붕괴 조짐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한보, 기아, 해태, 진로, 한라 등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와 김현철의 구속은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더구나 김영삼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최형우 의원이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후계 구도가 크게 흔들렸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에게 맞서다 총리를 사퇴한 이회창을 신한국당 대표로 세워야만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 약화는 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를 수습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삼성 등에서 기아 자동차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에 노조는 연일 파업과 시위로 맞섰다. 야당에서도 전혀 협조하지 않아 기아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 사이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과 자민련의 김종필은 DJP연대를 가동했다.
끊임없이 터진 대형 사건 사고는 97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육지(삼풍백화점 붕괴)와 바다(서해 페리호 침몰, 씨프린스 유조선 침몰)에서 벌어지던 참사는 결국 공중에서도 일어나고 말았다. 국내 여행객을 싣고 괌으로 가던 대한항공이 추락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254명 중 25명이 부상하고 229명이 숨졌다.
이처럼 김영삼 정부의 통치 불능 사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제통화기금(IMF)에게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사태로 치달았다.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며, 150만 명 이상이 직장을 잃었다. 급기야 연말 김영삼 정부의 인기는 10% 이하로 떨어졌고, DJP연대와 이인제 후보의 등장으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DJP연대’ 등 보수화에 반발한 전국연합, 민주노총
97년을 놓고 일부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짐으로써 ‘민주화운동의 승리’라는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재야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97년 전국연합 등 재야 운동은 물론 한총련 등 학생운동도 길을 잃고 표류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즉, 97년 연초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에 대해 전국연합과 민주노총, 한총련은 연대투쟁을 통해 저지에 나섰고, 국민의 여론도 우호적이었다. 이에 김영삼 정권은 날치기한 노동법, 안기부법을 재개정하겠다는 약속하며 물러서야만 했다. ‘국민속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건 민주노총의 승리였다.
이에 고무된 전국연합 상층부과 민주노총은 ‘국민정당 건설’과 ‘독자 대선후보 전략’으로 치달았다.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는 대선 시기에 독자후보를 내고, 이를 통해 진보적 국민정당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새정치국민회의가 DJP연대를 가동하면서 보수화 경향을 보이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 약화는 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를 수습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전국연합 상층과 민주노총의 ‘독자후보’ ‘국민정당 건설’ 노선은 한총련 등 학생운동과 분리되었다. 한총련의 주류를 장악하고 있는 종북 주사파 진영은 ‘수평적 정권교체’를 지지하며, 야당과의 연합전술을 중심에 두고, 전국연합 상층과 민주노총의 독자후보, 국민정당 건설 노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94년 조문파동, 95년 새통체(새로운 통일운동체, 민족회의) 건설과 범민족대회, 96년 한총련의 연세대 사태로 분열되었던 상황이 더욱 심해졌다. 또 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한총련의 폭주로 학생운동 내부의 분열양상도 심각해졌다. 96년 말에 치러진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한총련 주류는 48%를 점유했을 뿐이다.
통일운동에서 전국연합 등 재야 지도부와 분리되고, 노동법 날치기 파동에 맞선 투쟁에서 민주노총과 분리된 한총련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그것은 한양대에서 벌어진 한총련 출범식에서 이석 씨 폭행 치사사건 후 명동성당을 찾은 한총련이 퇴짜를 맞고,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 등 정치권에서 ‘한총련 해체’ 촉구성명이 나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총련은 범민련 남측본부와 해외 범청학련과의 연계만 강화하며 자기들만의 길을 갔다. 이석기 등 경기동부그룹과 범민련, 등 종북 주사파 진영과만 연대하였다. 이러한 한총련의 종북 과격주의는 급기야 이종권,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으로 이어졌다.
막장 한총련이 벌인 이종권,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
4월 4일 한총련 대의원대회에서 5기 의장으로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강위원이 당선되었다. 남총련에서 4기 정명기 의장에 이어 5기 의장을 배출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남총련 의장은 조선대 총학생회장인 정의찬이 맡았다.
그런데, 5월 27일 전남대에서 이종권 씨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전남대를 동경하던 송원전문대 졸업생 이종권이 기계공학과 1년으로 속이고 ‘용봉문학회’에 가입한 것이다. 이에 구영민 동아리 회장은 이종권이 선배들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로 경찰이 보낸 프락치로 오인했다.
구영민에 의해 총동아리연합회로 호출된 이종권은 다시 남총련 정책위원인 이승철에게 인계되었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에 의해 동아리 내부 별실로 끌려갔다. 곧이어 도착한 남총련 간부들은 이종권을 다짜고짜 고문하고 폭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종권에게 경찰 프락치라는 것을 실토하라며, 27일 새벽 3시까지 7시간 동안 가혹행위를 계속했다.
이종권에게 폭행을 가한 남총련 간부들은 의장인 정의찬을 비롯해, 이승철, 장형욱(정책위원), 전병모(전 순천대총학생회장, 남총련 기획국장), 최석주(전남대 총학생회 오월대장), 전연진(투쟁국장), 등 6명이었다. 이들은 주먹과 쇠파이프로 이종권을 폭행했고, 구토하는 이종권에게 소화제를 강제로 삼키게 했다. 결국 강제로 삼킨 소화제가 기도에 걸려 질식 사망하였다.
이종권이 사망하자 당황한 남총련 간부들은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조동호(전남대 연대사업국장), 이진실(선전부장), 구광식(섭외부장), 김형완(남총련 투쟁국장), 송선주(남총련 95년 투쟁국장), 강재학(고문) 등이 모여 회의를 한 후 사건을 은폐하기로 하고 "우연히 이씨를 발견하고 응급조치했으나 사망했다"라고 말을 맞추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는 것이 맞냐"며 이종권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 것이 확인되었고, 경찰의 기지국 조사에 의해 전남대 총동연 사무실에서 전화가 온 것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정의찬 남총련 의장이 구속되어 징역 5년에 자격정지 3년, 벌금 2000만 원을 선고받는 등 관련자 18명이 구속되거나 법적인 심판을 받았다.

▲이석 씨 고문치사 현장검증.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은 97년 6월 3일 한총련 출범식이 열리는 한양대에서 벌어졌다. 한총련 출범식이 열리는 한양대 근방을 지나가던 선반공 이석 씨를 경찰 프락치로 오인하고 납치하여 총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간 것이다. 이석을 총학생회 사무실로 끌고 간 한총련 간부들은 다음날 9시까지 이석 씨를 고문했다.
그들은 이석을 침낭으로 감싼 후, 물을 뿌려가며 경찰 진압봉으로 마구 폭행했다. 한양대 투쟁국장이었던 배주환은 의식을 잃어가는 피해자의 코에 최루가스 분말을 집어넣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 또 한총련 조통위원장인 이준구는 "전쟁 상황인데 인륜을 생각할 때냐"며 고문을 독려했다. 이석 씨는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석 씨가 사망하자, 또다시 이를 은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프락치를 심었기 때문에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는 식으로 강변했다. 책임을 김영삼 정권의 학생운동 탄압에 돌린 것이다. 또 "진술서를 쓰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이 씨가 달려들어 목을 조르는 바람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며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길소연(한양대 교육학과 졸), 권순욱(건국대 2년), 이호준(건국대 3년), 김호(서총련 투쟁국장), 배주환(한양대 투쟁국장), 이준구(한총련 조통위원장) 등 한총련 간부 22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이종권, 이석 씨 폭행치사 사건은 한총련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연세대 사태 이후 이적단체로 몰리며 재판을 받고 있던 한총련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오죽하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 ‘한총련 해체’를 공식으로 거론했고, 구명을 위해 찾아간 명동성당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한총련의 폭주는 11월 전국 대학에서 치러진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비운동권 후보가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오죽하면 전남대에서조차 비 한총련 계열이 당선되었고, 이들은 한총련 탈퇴 찬반투표를 진행했다. 과반이 참여하지 않아 결과가 반영되진 않았지만, 44% 참여(7,691명)했고, 이 중 86%(6,565명)가 찬성표를 던졌다.
(25) 한총련의 몰락과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결성
한총련, 2008년 16기 의장 선출 실패하며 몰락의 길로 들어서
2000년 들어 한총련 가입 대학은 200여 개서 40여 개로 급감
한대련, 2002년 준비조직 구성...2005년 전국조직 구축 시작
한총련보다 확실히 온건해졌고 생활과 밀접한 투쟁에 머물러

▲2011년 6월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소속 대학생들이 반값 등록금 실현 촉구 촛불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들고 청계광장 인근을 행진하고 있다.
96년 연세대 사태에 이어 97년 남총련과 한총련에서 벌어진 이종권, 이석 씨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은 한총련에게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을 안겨줬다.
그러나 한총련은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연세대 사태는 김영삼 정권의 탄압 때문이라며 철수를 주장했던 온건파를 적과 내통한 자들로 몰아세웠고, 이종권, 이석 씨를 고문하여 사망케 한 것은 경찰의 프락치 공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한총련의 태도는 86년 건국대에서 벌어진 ‘애학투’ 사건과 비교된다. 즉, 86년 건국대 사태 이후 ‘애학투’는 철저한 반성을 통해 과격 투쟁을 조장하는 ‘서클주의’를 해체하고, 학생회 중심의 대중노선을 선택했다. 그 결과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야당과 연합하게 되었고,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반면, 96년과 97년의 한총련은 반성하고 혁신하기보다는 더욱 극렬해졌으며, 경찰의 프락치 공작에 대한 경계심과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보안 당국의 ‘프락치 공작’에 예민해진 상태로 대처하다 보니 선량한 젊은이였던 이종권, 이석 씨를 프락치로 몰아 고문하고 사망케 하는 일을 벌인 것이다.
결국, 한총련은 이종권,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으로 이적단체 혐의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김대중 후보에 의해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성사되었음에도,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로 야권연합 전술을 선택했음에도 한총련에게 대선 승리의 기쁨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선에서 승리하고, 50년 만에 정권교체가 성사되었음에도 한총련에게 대선 승리는 남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는 한총련이 따르던 범민련 남측본부, 경기동부연합 등의 종북 주사파들도 마찬가지였다. 97년 대선 승리는 DJP연대에 의한 승리일 뿐, 한총련이나 재야 민주화운동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적단체가 된 한총련, 몰락의 길을 걷다
따라서 김대중 정권이 수립된 후에도 한총련에 대한 탄압은 여전했다. 그런 가운데 98년 7월 대법원에서 한총련에 대한 이적단체 판결이 이뤄졌다. 예전에는 전대협 ‘조통위’나 정책실 등 특정조직을 이적단체로 판결했지만, 이번엔 한총련 전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한 것이다.
한총련 전체가 이적단체가 된 것에 대해 법을 잘 모르는 한총련의 직업적 운동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즉, 한총련에 가입한 대학의 총학생회장은 물론 단과대 간부만 되더라도 곧바로 이적단체 성원이 되어 수배상태가 되었다.
학생회 간부들은 총학생회, 단과대 학생회 장에 당선되자마자 사법처리가 두려워 한총련 탈퇴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전엔 비운동권 총학생회조차 한총련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한총련을 탈퇴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비운동권은 고사하고 PD나 NL비주사 계열의 총학생회장이 선출되면 곧바로 한총련을 탈퇴하였다.
물론 98년 7월 대법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뒤에도 한총련의 활동은 2008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실제적인 활동과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2003년 동아대에서‘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이 시작되어 2005년~2008년에 한대련이 발족한 후 2008년 제16기 의장 선출에 실패하면서 한총련은 거의 막을 내리게 됐다.
당시, 16기 한총련 의장을 선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언론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한총련은 올해 초 내부 합의를 거쳐 조선대 총학생회장 최모 씨를 단독후보로 내정한 바 있다. 한총련이 정한 16기 의장 선거의 후보자 등록 마감 시한은 2월 15일. 예정대로라면 최씨의 단독 입후보로 2월 중 의장 선출이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최씨가 한총련 의장 선거 출마 의사를 번복하면서 한총련은 혼란에 빠졌다.
이와 관련, 한총련의 한 관계자는 "최씨는 중앙위원회에서도 과반의 지지를 받아 의장 후보로 내정돼 사실상 의장 선출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최씨 가족이 완강하게 만류해 결국 출마를 포기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병을 앓고 있는 최씨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가 결정적 이유가 됐다는 것이다.
다급해진 한총련 지도부는 후보 등록 시한을 한 달간 연장하고 서울의 한 사립대 총학생회장과 영남지역 한 대학의 총학생회장에게 출마 의사를 타진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이에 또 다른 총학생회장들에게 설득을 시도했지만 하나같이 "등록금 투쟁 등 학내 현안이 많다"거나, "소속 대학 활동에 소홀해진다"며 출마를 거부했다.
결국, 후보 등록 시한 연장에도 출마자가 없자 한총련은 3월 29일 김현웅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16기 한총련 투쟁본부장’으로 추대하고 16기 집행부를 비상대책위(이하 비대위) 체제 형태로 가동하였다. 이러한 것은 한총련 의장으로서의 정치적 프리미엄도 사라지고, 이적단체 규정으로 사법처리 부담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일보 인용)
이런 모습은 한총련만이 아니었다. IMF구제금융 사태를 지나며 대학생들은 취업 걱정 때문에 학업을 중시하는 현실적인 생각에 골몰했다. 그에 따라 운동권에 대한 여론이 점점 나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한총련 의장이 될 경우, 쏟아질 학내 비판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실제 2008년 3월 29일 열린 한총련 대의원대회 장소를 제공한 한양대 총학생회의 경우 ‘한총련에 장소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회가 끝난 뒤 학생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대의원대회 이후 학생들은 학교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한총련에 장소를 제공한 것이 말이 되느냐"며, "총학생회가 학생들과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2000년에 들어와 대학가의 탈이념, 탈 한총련, 탈 운동권의 바람으로 인해 한총련 가입 대학 수는 200여 개에서 40여 개로 줄어들었다. 대부분이 호남 등 지방대로 서울 소재 대학은 손을 꼽는 정도다. 그나마 서울의 운동권이 총학생회를 차지한 경우는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쪽으로 기울었다.
한총련을 대신한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은 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한총련이 분열되어 몰락하면서 새롭게 구성된 전국 운동권 대학생 연대조직이다. 2002년 동아대 총학생회에서 ‘새 학생운동 연대체’ 구성을 위한 준비조직이 생겼다가, 2005년에 전국적인 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2007년 1월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진보연대 출범식 및 2007년 투쟁선포식'에서 오종열 총회의장(맨 왼쪽) 등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대련’에 대해 당시 학생운동가들은 ‘21세기’라는 약칭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는 한대련은 한총련을 계승하였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근래 민주당의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강훈식(건국대), 박주민(서울대), 강병원(서울대) 의원 등이 한대련 출신이다. 한대련의 활동은 재야와 연대 활동에서 한총련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총련의 몰락은 한대련 때문이기도 하다. 즉, 법원에 의해 이적단체가 된 한총련의 간부가 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이 한대련 쪽으로 움직인 것이다. 따라서 한대련은 한총련과 같이 종북 주사파로 일색화되지는 않고 범 NL과 PD진영의 학생운동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이 발족하기까지 학생운동은 한총련과 한대련의 양축으로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한대련 활동이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기에 2008~2018년은 한총련과 한대련, 또는 ‘비 한총련’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정치성향으로 보면 한대련은 NL진영이 주축을 이뤘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등에선 한대련을 경기동부그룹이나 다름없다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한대련의 또 다른 특징은 한총련과 달리 덕성여대, 숙명여대 등 여대가 주류로 등장했다. 95년 이후 한총련에는 여대생의 참여가 두드러지는 현상이 보였는데, 이것이 한대련 활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한대련의 활동은 한총련보다 확실히 온건해졌고, 정치투쟁보다는 등록금 투쟁 등 대학생 생활과 밀접한 투쟁에 머물렀다. 뉴라이트 운동 등 새롭게 형성되던 우파 대학생 운동과 종북 과격주의로 치달아 몰락하게 된 한총련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대련은 특정 이념적 성향이 지배적인 대학생 조직은 아니었다.
굳이 한대련의 이념적 성향을 분류하면 처음부터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던 한총련 혁신계열(사람사랑)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던 한총련 계열, 그리고 PD진영으로 나뉜다. 전국에서 대략 80여 개의 대학이 한대련과 연대하고 있으며 2008년 광우병 파동과 2011년 대학생 등록금 반값 요구 촛불집회를 전개한 바 있다.
이들은 전국연합의 후신인 한국진보연대(진보연대)와 관련이 깊은데, 전국연합-한총련의 자리를 진보연대-한대련이 물려받은 것으로 보면 된다. 또, 오프라인 중심의 한총련과 달리 온라인 활동과 연합동아리 활동이 두드러졌다. 초기 ‘디씨 겔’을 물론 후마니타스 연대, 청춘의 지성, 역사동아리, 쏘셜메이커(진보사회토론동아리) 등의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했다.
하지만, 한총련과 같은 영향력이나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다. 그만큼 2000년 이후 대학가에서 조직적 행동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또 한총련처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거나 기소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만큼 이념적 활동에 대한 대학생들의 거부감이 심했다.
다만, 2002년 말,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2008년 광우병 파동, 2016년 ‘탄핵촛불집회’처럼 국가적 이슈와 대중들의 참여가 집중될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2000년 이후 학생운동은 전대협과 한총련과 달리 ‘민중운동 진영’ 내에서 주력부대의 지위를 잃었다. 그 지위를 대신한 것이 민주노총이었다.
(26)운동권 '한대련'과 비운동권 '전총모'의 공존과 대진연 결성
한대련,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 대체...대중적 운동 표방
소셜네트워크 영향력 커지면서 시민단체·유명인·정치인들에 종속
정치화 비판에 직면...'비운동권 열풍' 속 대안 세력 '전총모' 등장
박근혜 탄핵 거치면서 종북 주사파 계열 '대진연'이 학생운동 주도

▲2002년 12월 14일 저녁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순·미선양을 추모하는 집회와 '주권회복의 날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에 촛불을 든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한대련은 2002년 하반기와 연말에 진행된 미선이 효순이 촛불집회가 끝난 뒤 등장했다. 이적단체로 몰린 한총련 대신에 새로운 대학생연합조직 건설을 논의하면서 구체화 되었다. 2002년 12월 22일 연세대 학생회관에서 동아대 총학생회장 문옥주를 비롯해 고려대, 연세대, 경희대, 단국대 등 17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참석했다.
그 외 60여 개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이 참관했다. 이 회의에는 한총련 소속 총학생회장뿐만 아니라, 한총련의 좌파 민족주의적 성향(자주파, NL)에 비판적이었던 평등파(PD) 학생들과 반자본주의 성향의 학생들도 참여했다. 회의에서는 주로 ‘학생운동의 총단결’과 ‘새로운 단일 학생 조직 건설’을 논의했다.
이러한 논의가 진행된 배경에는 2002년 말부터 수 개 월간 계속된 ‘미선 효순 추모 촛불시위’가 있었다. 한대련 결성 논의에 참석한 대학생들의 입장은 당시 발표된 ‘호소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회의가 끝난 후 ‘전국 300만 대학생 여러분께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선도해 온 대학생의 역할이 여전하다는 것은 최근 일어난 새로운 반미운동을 통해서도 명백히 알 수 있다"며, "이 역동적인 에너지는 인터넷 공간에서 네티즌 여론으로 나타났고, 광화문에서 촛불의 바다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또, 그들은 "공통성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서로의 차이는 존중하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전체 학생운동의 힘을 길러야 할 때"라고 밝혔다. 그들이 제시한 ‘단결’의 사례로 2003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를 자주파 계열 학생들과 평등파 계열 학생들이 공동으로 운영한 예를 들고 있다.
당시 김민수 한대련 추진위 집행위원장은 "한대련은 한총련과 다른 독자적인 조직이고, 독자적인 건설 과정을 밟고 있으며, 한총련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2003년만 해도 한총련이 학생운동의 주류였고, 투쟁으로 ‘이적단체’ 문제를 돌파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한총련 소속으로 총학생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에 당선만 되어도 곧바로 이적단체 성원이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총련에 애정이 없는 비운동권, 비NL계열 총학생회는 당선되자마자 한총련 탈퇴를 추진했다.
그렇게 한총련을 탈퇴하거나 활동을 하지 않는 총학생회가 모여 2005년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 후 광우병 파동 촛불시위와 오세훈 시장 사퇴와 박원순 시장 선거운동으로 활성화된 한대련은 2011년에는 고려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 전국 20여 개 총학생회와 80여 개 대학의 단과대 학생회가 참여하며 가장 큰 대학생조직이 되었다.
한총련은 2008년부터 의장을 선출하지 못한 채 투쟁본부 체제로 운영되었다. 또 2010년이 넘어오면서는 일부 대학에서 활동하는 사람 몇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2009년부터 재야연합체인 ‘한국진보연대’의 대학생단체 상임위원 자리도 한총련에서 한대련으로 넘어갔다. 한총련은 ‘6·15실천연대의 학생위원회’ 등으로 활동했다.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을 대체한 한대련
대학생 운동조직의 통합을 표방한 한대련이었지만, 주된 세력은 한총련을 구성하고 있던 ‘NL주사파’가 주축을 이뤘다. 창립선언문에서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밝힌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대련은 반값 등록금 촛불시위처럼 대중적 운동을 중심에 두었던 점에서 한총련과 차이를 보였다. 조직 강령에서도 ‘교육의 공공성 강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존권 보장’ 등을 ‘우리 민족끼리 평화통일’보다 먼저 제시하고 있다. 이는 반미주의를 맨 앞에 내건 한총련과 비교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대련이 중점을 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반값 아파트’에 착안한 ‘반값 등록금’ 투쟁이었다. 2012년 대선이 가까워지던 2011년 ‘반값 등록금’ 투쟁이 본격화됐다. 3~4월 경희대, 고려대, 이화여대, 인하대, KAIST 등 전국의 대학생들이 비상 학생총회를 열어 학교 당국에 등록금 동결, 비민주적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5월 30일에는 서울대 법인화에 반대하는 서울대 학생들의 비상총회가 본관 점거로 이어졌다. 이 비상총회에는 2000여 명이 참석해 재학생의 10%(1650명)라는 정족수가 채워졌다. 6년 만에 열린 비상총회에서 서울대 학생들은 ‘법인설립준비위원회 해체를 위한 행동 개시’, ‘행정관 점거’라는 안건에 80%가 넘는 지지를 보냈다.
광화문에서도 대학생들의 촛불시위가 이어졌다. 한대련은 5월 29일부터 조건 없는 반값 등록금 이행을 외치며 기습 촛불시위를 벌였다. 시위 닷새째인 6월 2일부터는 시민들이 촛불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이명박 정부의 반값 등록금 공약 철회다.

▲전총모 3기 출범식이 2013년 7월 2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리고 있다.
2011년에 대학생들의 투쟁이 예전보다 격화됐는가에 대해선 2010년 오세훈 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시장에서 사퇴하면서 무상급식 등 복지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생운동 단체보다 유명인들을 내세운 시민단체들의 소셜네트워크 영향력이 컸다는 점에서 광우병 촛불시위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이렇듯 한대련에 들어오면서 일반 학생운동은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유명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심해지고, 한총련 등 조직적인 NL 주사파의 영향력은 현격히 약화됐다. 즉, 소셜네트워크의 영향력으로 시민단체, 유명인, 정치인들에게 종속적인 존재가 되었다.
한대련은 학생 대중투쟁에 집중한 한총련과 달리 정치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대부분은 민주노동당에 가입했지만,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민주당에도 가입하였다. 그래서 한대련 총회에 이정희 민노당 대표가 참석하여 축사했다. 그러다 보니, 민주노동당 평등파에서는 한대련을 한총련의 후신, 이석기의 ‘경기동부그룹’ 계열로 여겨졌다.
한대련은 이름만 바꾼 한총련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점차 비운동권과 비NL계열의 총학생회가 탈퇴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더구나 2000년대 들어 대학생들 사이에 운동권에 대한 거부 정서가 퍼졌기에 노골적인 ‘반 운동권 선본’을 표방하고 총학생회 선거에 나서는 팀들이 많았다.
학생들, 학생운동 정치화 비판으로 비운동권 총학생회장 선호
2012년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가 ‘한대련(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탈퇴’를 결의했다. 고대 총학은 2009년 한대련에 가입한 뒤, 한대련 서울지부인 서울대련 소속으로 활동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해 말 ‘한대련 탈퇴’를 제1 공약으로 내세웠던 학생들이 2012년 총학생회에 당선됐다. 고대 총학은 10일부터 사흘간 고대생들을 대상으로 정책투표를 열어 한대련 탈퇴를 결정했다.
비운동권 학생들이 총학생회에 당선된 것은 고대만이 아니었다. 한국외대 서울캠퍼스도 2012년에 한대련을 탈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총련, 한대련 탈퇴는 개별 대학 차원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고대 총학의 한대련 탈퇴는 9월 중으로 예정된 비운동권 총학생회 연합조직인 ‘전국총학생회모임(전총모)’의 출범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전총모’ 소속인 박종찬 고려대 총학생회장(31)은 "35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모여 전총모의 방향에 대해 논의했고, 총 50개 대학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한대련만이 대학생을 대표하는 유일한 연대조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 한총련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면서 ‘비운동권 열풍’이 불었다. 일부 비운동권 학생들은 뉴라이트 전국연합 등 보수단체의 지원을 받은 사례도 나타났고, 2002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손창일은 2004년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 신청을 하기도 했다.
전총모는 공식적으로 ‘한대련을 대체할 대안 연대체’를 내걸었다. 일부 운동권 학생들은 "전총모의 뒤에 보수세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전총모를 ‘보수주의 학생운동 조직’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이론적 지식이나 조직적 능력에서 ‘전총모’는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전총모의 행적은 ‘반값 등록금’을 주장하는 한대련과 다르지 않았다. 8월 전총모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만나 "등록금 부담을 반으로 낮추겠다"는 답변을 들었고,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도 반값 등록금 공청회를 열겠다고 했다. 그만큼 현안 중심이었지, 이론적이고 조직적인 뒷받침은 없었다.
이에 전총모의 박 회장은 "전총모는 기성정치 세력이나 이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은 학생들이 모인 연석회의"라며, "대학생들이 사회적 목소리를 내야 할 사안이 있다면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거리 집회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대련이 ‘반값 등록금’ 이슈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긴 했지만, 그 활동이 총학생회장 당선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왜냐하면, 한대련이 대중적인 이슈에 투쟁의 초점을 맞춘 것은 사실이지만, 시민단체와 유명인을 내세워 관심을 끄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대련도 학생운동을 정치화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한 비판이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의 당선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전총모’의 결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한대련의 시기에 학생운동은 운동권(한대련)과 비운동권(전총모)의 대결, 그리고 NL 주사파의 한총련이 공존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시위를 거치며 NL주사파의 언더그룹인 한총련과 오픈그룹인 한대련이 통합된 종북 주사파 계열인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문재인 정권의 수립으로 ‘언더’와 ‘오픈’을 분리해서 운영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① 경찰 프락치로 오인 일반인 고문치사·폭행 사건
'한양대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으로 '한총련=이적단체' 규정
선반공을 경찰 프락치로 몰아 구타·고문했지만 반성조차 안해
서울대·연세대·전남대서도 비슷한 사건 터져 사회에 큰 충격
관련자들 정치적으로 출세...운동권 문제점 적나라하게 드러나
지난 연재로 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를 마무리하며, 이번 주부터는 에필로그로 1) 경찰 프락치로 오인 일반인 고문치사, 폭행 사건, 2) 학생운동과 종북세력의 정치참여 과정, 3) 종북세력의 숙주가 된 일본군 위안부와 반일주의를 다루려 한다.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사건
1984년 9월, 서울대 학생들이 관악 캠퍼스를 다니던 방통대 학생 등, 다른 학교 학생을 포함한 민간인 4명을 경찰 프락치로 몰아 납치 감금하고 물고문과 각목으로 폭행을 가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1984년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으로 구속된 유시민.
이 사건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학생운동이 독재정권에서 행하던 고문을 똑같이 답습했던 것으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사건 관련자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정치적으로 출세를 함으로써 운동권 진영논리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피해자 4명은 각각 2일에서 6일간 감금되어 각목으로 구타당하고 물고문을 당했다. 고문 피해자 중 한 명인 손현구는 모진 고문 끝에 자신을 프락치라고 말했으나, 나머지 3명은 끝까지 자신은 프락치가 아니라며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사건을 조사한 경찰과 법원은 피해자 4명이 모두 경찰 프락치가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납치, 감금, 고문 피해자들은 공대 학생회장 조현수, 호국단 총학생회장이었던 백태웅, 총학생회장 이정우, 윤호중이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폭행 사실을 부인하였다.
이 사건으로 유시민은 구속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유시민을 비롯한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2006년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되었을 때 피해자 정용범 씨의 모친이 기자회견에서 "사과 한마디도 없다"며 "장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피해자 전기동 씨도 2019년 언론 인터뷰에서 "판사가 합의를 권유하면서 유 이사장에게 사과하라고 하더라.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 이사장이 제게 사과했다. 형량을 적게 받으려고 한 것일 뿐, 진심 어린 사과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그 이후로도 소송 때문에 유 이사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사과는커녕 아는 체도 안 하더라"고 말했다.
월간조선은 2006년 2월호는 "이 사건으로 피해자들의 인생이 망가져 버렸다"고 전했다.
1989년,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
1989년 10월 15일, 연세대 만화동아리 ‘만화사랑’에 가입한 동양공업전문대학(현 동양미래대학교) 학생 설인종이 프락치로 몰려 고려대와 연세대 운동권 학생들에게 잔혹하게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이다. 연대생들이 저지른 사건으로 오인되고 있지만, 실제 주범은 고려대생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연세대 만화사랑 동아리는 1987년 6월 최루탄으로 숨진 이한열이 소속된 동아리였다.
설인종은 동양공전 화공과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만화에 관심이 많았고, 집에서 먼 동양공전까지 통학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인근에 있는 연세대 운동권 조직인 만화동아리에 들어가 만화를 탐독했다. 하지만, 설인종은 운동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만화동아리에서도 학생운동에 대해 많이 비판했다.
이에 운동권에 개입되어 있던 학생들이 그의 뒤를 캐기 시작했고, 학적과에 조회해보니 설인종이라는 학생이 없었다. 그러자 운동권 학생들은 그를 프락치로 단정하고, 연고전이 벌어지던 날, 설인종을 연세대 학생회관 3층 적십자 서클룸에 감금한 후 의자에 묶어 놓고 각목으로 마구 폭행하며 고문하였다.
운동권들은 설인종을 각목으로 장시간 마구 구타하였으며, 구둣발로 밟고 정신을 잃을 때마다 물을 끼얹어 깨운 뒤 다시 폭행하였다. 마침 연고전이라 놀러 온 고대생들이 취조에 가담하여 여덟 명 정도가 그를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팼다. 결국, 설인종은 폭행으로 인해 쇼크사(死)하였다.

▲설인종 구타 사망과 관련, 동양공전 학생들에게 공개 사과하는 연세대 총학생회.
설인종이 사망한 후 학생들은 폭행 고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설인종의 옷을 갈아입혔고, 설인종이 원래 입고 있었던 옷을 감췄다. 하지만 학생회관을 청소하던 청소원에 의해 설인종이 원래 입었던 옷이 발견되었고, 설인종에게 물을 끼얹고 고문한 사실이 드러났다.
시신을 수습하러 온 설인종의 가족들은 매우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설인종의 프락치 주장에 대해서 부모는 "인종이는 지적 수준이 낮아 프락치 같은 것은 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양영준(20 연세대 법학 3, 적십자회 전회장), 김중표(22 고려대 신방 3), 이선욱(21 연세대 경제 3, 교지편집부원), 장량(26 고려대 체교 4)이 징역 4년을, 김현철(24 연세대 정외 4), 오성훈(21 연세대 경제 3, 컴퓨터서클 회원), 이주학(23 고려대 사학 4), 이주식(21 연세대 응용통계 3, 만화사랑서클회장) 등 4명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전남대, 이종권 고문치사 사건
1997년 정의찬을 비롯한 남총련 간부들이 ‘박철민’이란 가명으로 전남대생 행세를 하고 다니던 이종권(25세)을 경찰 프락치로 의심하고 집단 폭행, 고문한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연세대 사태로 인해서 이미지가 나빠지던 학생운동에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이석 치사 사건과 더불어 한총련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다.
폭행을 주도한 학생들은 남총련의 투쟁국원, 기획국장, 정책위원 등 다섯 명의 간부들이었다. 소주 12병을 나눠마시고 만취한 상태로 피해자를 남총련 사무실 방으로 끌고 가 경찰 프락치란 것을 자백하라며 주먹은 물론 쇠파이프와 물병을 이용해서 구타하였다.
직접적인 사인은 구타 도중 강제로 먹인 소화제가 기도에 걸려 질식사한 것으로 판명됐다. 후일 경찰 조사 결과 이 폭행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간부가 무려 18명이나 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최종적으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가해자들은 ‘술 취한 주정뱅이가 캠퍼스에 쓰러진 것을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조치를 했다’는 증언을 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경찰 수사로 거짓임이 밝혀졌다.
이종권은 송원대학교 졸업생으로서 ‘박철민’이라는 가명으로 전남대 문학동아리 ‘용봉문학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97년 5월 27일 동아리 측 회장이 ‘아무래도 학생이 아닌 것 같다’며 선배들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이에 남총련 간부들은 이종권을 프락치로 간주하고 고문하였다.
가담했던 간부 중 한 명인 구광식은 출소 후에도 3개월간 20여 차례에 걸쳐 강도강간과 강간살인까지 저지르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또 가해자 중 한 명인 정의찬은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의해 경기도 산하 기관인 ‘수원 월드컵경기장 관리재단’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문제가 되어 사퇴했다.
한총련 출범식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
1997년 6월 4일, 한총련 출범식을 앞두고 한양대에서 일어난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5월 31일 예정되었던 5기 한총련 출범식이 무산된 한양대에서 한총련 간부들이 캠퍼스 주변을 배회하던 선반기능공 이석(23세) 씨를 경찰의 프락치로 의심해서 집단으로 구타하여 사망케 한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6월 3일, 한양대 학생회관을 배회하던 피해자 이석이 "남총련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이석이 대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이석을 붙잡아 학생회관 5층 교지 자료실로 데려갔다. 이후 18시께부터 4일 09시까지 이석을 경찰 프락치로 몰아 폭행, 고문을 하였다.
그중 한양대 투쟁국장 배주환은 의식을 잃어가는 피해자의 코에 최루탄 분말을 뿌리는 등 잔혹한 고문을 했으며, 폭행 중엔 침낭으로 감싸 물을 뿌리며 경찰 진압봉으로 마구 때려 폭행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사수대원이 지나치다고 말렸지만,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 이준구는 "전쟁상황에 인륜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며 고문을 독려했다.

▲선반기능공 이석 씨는 경찰 프락치로 오인한 학생들의 폭행으로 사망했다.
결국, 피해자가 의식을 잃자 한양대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내상과 과다출혈로 사망한 뒤였다. 하지만, 한총련 측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심각한 폭행은 없었고 피해자와 함께 잠을 자다 피해자가 숨을 멈춘 것 같아, 한양대병원으로 옮긴 것"이라는 거짓 해명을 내놓으며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를 통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여론의 거센 비난이 일었다. 여야 정당은 비판 논평을 내고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제1야당 당수가 조문하는 등 전남대에서 일어난 이종권 고문치사 사건과 달리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주요 관련자는 길소연(22, 한양대 졸), 권순욱(24, 건국대 2년), 이호준(24, 건국대 3년), 정용욱(20, 건국대 1년), 정욱열(19, 건국대 1년), 이창희(27, 단국대 3년), 김호(25, 명지대 3년, 서총련 투쟁국장), 배주환(21, 한양대 4년, 투쟁국장), 이준구(26, 건국대 4년, 한총련 조통위장), 강위원(27, 전남대 4, 한총련 의장), 그외 한총련 정책위원, 조직위원, 정책국장 등 15명과 건국대 2년 이모 ‘황소대원’이 있다.
하지만, 관련자들은 반성하지 않았다. 이준구(조통위장)는 출소하면서 정권의 탄압으로 투옥된 양심수로 표현했으며, 서총련 투쟁국장이던 김호는 이태원에서 미군에게 당한 묻지마 흉기습격을 자신의 SNS에 자랑스럽게 올려놓기도 했다. 또, 한총련 의장 강위원은 이재명 캠프에서 후보 수행부실장이라는 중요직책을 맡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간부들은 자동 수배가 되었고 많은 대학의 총학생회는 한총련을 탈퇴했다.
2023.01.10
에필로그 ② 학생운동과 종북세력의 정치참여 과정
종북 주사파, 김대중 정권 들어선 뒤 집단회의서 정치참여 결의
2001년 9월 '군자산의 약속' 채택하며 합법적 제도권 정당 진입 모색
경기동부그룹 등 민노당 당권 장악 과정서 광범위한 부정행위 저질러
한총련 등 주사파, 박근혜 탄핵 후 친문-친명으로 나뉘어 민주당 포진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1월20일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학생운동의 정치참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해방 후 우익 학생운동을 했던 이철승이 정치권에 진출했다. 그 외 4.19 학생운동과 ‘6.3사태’ 관련 학생운동 세력도 정치권에 많이 진출했다. 이기택, 남재희, 이명박, 이재오 등이 있다. 80년대 들어와서 신민당 돌풍이 일었던 85년 2.12 총선거에서 이철 등이 신민당에 영입되어 선거에 출마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 개별적인 영입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정치권 진출이 이뤄졌다. 6월 민주항쟁 이후, 단일 야당을 분당하고 나갔다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세력 확충전략에 따라 조직적인 영입이 진행되었다.
그 첫 번째가 ‘평민연’의 평화민주당 집단 입당이다. 1988년 2월 문동환, 임채정, 이해찬, 김학민, 신계륜 등 98명은 ‘평화민주통일연구회(약칭 평민연)’을 결성한 후, 지분 50%를 보장받고 평화민주당에 집단 입당하였다. 평민당은 88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호남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황색 돌풍을 일으키며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누르고 두 번째 정당이 되었다.
양 김, 주도권 확보 위해 재야 학생운동가 집단 영입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은 정치권 인재영입의 풀장과 같은 구실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만이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도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야 학생운동 세력을 영입하여 전두환, 노태우의 민정계를 밀어내고 친정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것이 ‘신한국당’이다.
1995년 12월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반란자들을 전격 구속하고 민정계를 몰아낸 김영삼 대통령은 민중당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하였다. 이때 영입된 인사들이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등이다. 이전에도 이성헌, 김영춘 등 86 운동권 출신들이 있었다.
하지만, 신한국당은 민정계와 공화계(김종필)가 등을 돌리면서 96년 15대 총선에서 대구와 경북, 충청지역에서 대거 의석을 빼앗기며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였다. 선거 후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와 겨우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97년 외환 위기로 단명하며 한나라당으로 간판을 바꿨다.
98년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99년 1월 청와대 출입 기자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젊은 피 수혈론’을 언급했다. 청와대와 집권당인 국민회의에서는 ‘원론적인 차원의 발언’이라고 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세계교체를 통한 정계개편’의 수를 둔 것으로 여기며 크게 술렁였다.
김대중은 호남에 편중된 ‘국민회의’의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는 ‘전국정당’을 추구하는 한편,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이탈한 이인제의 국민신당과 재야 학생운동세력의 젊은 피를 수혈함으로써 세대교체와 정국 주도권을 동시에 거머쥐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신설 합당 형식의 ‘새천년민주당’이었다.
이때 기존에 영입된 학생운동 출신들 외에 전대협과 민주노총, 전농 등 재야 민주화운동이 대거 영입되고 결합하였다. 이때 영입된 인물들이 송영길,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오영식 등으로 지금 586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586 정치세력은 김대중의 젊은 피 수혈 때 영입된 인사와 노무현 탄핵 역풍을 딛고 입성한 ‘탄돌이’들이 핵심이다.
종북 주사파, 본격적인 정치진출 모색
96년 연세대 사태, 97년 한총련 이종권, 이석 고문치사 사건 등 한총련의 몰락과 98년 김대중 정권의 탄생은 재야, 학생운동의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즉, 재야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에 머물러 있던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본격적인 정치권 진출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 계기는 97년 대선이었다. 95년 지방선거가 끝나고 민주당을 분당하면서까지 정치재개를 한 김대중 총재로는 정권교체를 이룰 수 없다는 절망감이 전국연합을 비롯한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들에서 제기되고, 본격적인 독자 정치세력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97년 재야 민주화운동을 총괄하고 있던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이 공동으로 국민승리21이라는 정당을 결성하고,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선출했다.
하지만, 상황은 간단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승리가 점쳐지던 대선이 외환 위기와 한나라당 후보 분열, 그리고 DJP 정치연합으로 구도가 급변했다. 한나라당의 일방적인 우세는 사라지고, 예측 불가능한 혼전 양상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독자적 정치세력화보다는 정권교체를 우선하는 전국연합의 지역조직들이 독자 정치세력화 대오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30만 표를 얻었고, 김대중 후보는 DJP연합과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에 힘입어 1.2%의 격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1년 후‘젊은 피 수혈’을 통한 정치권의 세대교체와 정계개편에 돌입하고,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한다.

▲2013년 9월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 공안탄압 규탄대회'에 참석한 이석기 의원.
97년 대선까지 전국연합 본부와 달리 ‘야권으로의 정권교체’라는 노선을 걸었던 경기동부그룹과 인천연합, 광주전남연합 등 종북 주사파 성향의 지역연합 세력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뒤, 집단적 회의를 통해 정치참여를 결의하였다. 그것이 바로 ‘군자산의 약속’이다.
"오늘 우리가 ‘3년 안에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과 민족민주정당을 건설하여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 정부 수립과 연방 통일 조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대업을 이루자’는 것을 내외에 선포하는 것은 우리 민족민주운동을 이제 승리를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구체적인 전략 전술과 계획을 갖고 수행하는 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결의하는 것이자 외세의 침략과 분단의 고통으로 얼룩진 치욕의 역사를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고 7천만 민족이 하나 되어 번영을 구가하는 자주적 통일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결심이다."
위와 같은 선언문이 채택된 ‘군자산의 약속’은 괴산군 군자산의 ‘보람원’에서 2001년 9월 22~23일 개최된 ‘2001 민족민주전선 일꾼 전진대회’에 참석한 전국연합 산하 인천연합, 광주전남연합 등 종북 주사파 계열 활동가들에 의해 채택된 정치참여 선언이다.
문건의 명칭은 ‘조국 통일의 대 사변 기를 맞는 전국연합의 정치 조직방침에 대한 해설서’이며, 보통 ‘군자산의 약속’이라고 지칭한다. 이들은 문건을 통해 6.15 남북 공동 선언으로 인해 몇 년 내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이 실현되고, 10년 전후로 자주적 민주 정부와 완전한 연방제 남북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 전망에 따라 3년 안에 민족민주전선과 민족민주정당을 건설해,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목표 달성을 위해 1) 지역 토대를 강고히 하며 부문(계층) 조직을 포괄하고, 2) 정당을 포괄하여 정치 전선으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고, 3) 전국연합으로 결집하여 모든 지역에 조직을 갖추는 것을 계획하였다.
이것은 대중투쟁에 몰두하던 종북 주사파들이 합법 제도권 정당으로 침투할 것을 결심한 선언이다. 전국연합 상층부가 빠져나간 민주노동당에 대거 가입하며 민주노동당 당권을 장악하기 위한 활동에 돌입하였다. 그 결과 17대 총선에서 이석기 등 종북 주사파 계열을 중심으로 당권을 장악하였고, 주도권을 잃은 PD 계열은 2008년에 민주노동당을 탈당하였다.
한총련 출신, 통진당 해산으로 민주당에 침투
이석기 등 경기동부그룹과 함께 한 종북 주사파 세력의 민주노동당 당권장악 과정에서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수없이 자행되었다. 예를 들어 성남 지역의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국의 조직원들에게 ‘성남으로의 주소 이전’을 지시한 후, 성남의 지구당을 장악했다.
성남을 장악한 후에는 다른 지역으로 주소를 옮겨 지역의 당권을 장악하는 식이었다. 지역 당권을 장악한 뒤, 민주노동당 전체의 당권을 장악했다. 당의 비례대표 순번을 정하는 선거에서도, ‘유령당원’, ‘위장전입’과 같은 부정행위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민주노동당은 97년에 국민승리 21을 창당한 후, 2004년까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는 비례대표 선거와 지역 선거가 분리되는 1인 2표제에 힘입어 49명의 후보를 내어 22명을 당선시키며,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으로 올라섰다. 2002년 대선에서는 97만 표를 얻었고, 2004년 총선에서는 10석(비례 8석, 지역 2석)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조직적인 당권 장악에 돌입한 종북 주사파 세력에 의해 ‘유령당원’, ‘위장전입’ 문제가 불거지며, 내부는 극심한 분열에 휩싸였다. 여기에 중앙 당직자가 연루된 ‘일심회’ 간첩단 사건으로 ‘종북 주사파’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결국, 2008년에 PD 계열이 탈당하여 정의당을 만듦으로써 분열되고 말았다.
2011년 12월에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들을 주축으로 통합 진보정당을 구성하기로 합의한 뒤 우여곡절 끝에 통합진보당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계파별 대립과 갈등은 치유되지 않았고, 결국, 노회찬 심상정 등이 이탈했다. 경기동부그룹이 주축이 된 통진당은 끝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정당이라는 선고를 받고 해체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민중연합당이라는 형태로 재건을 기도하고 있으며, 박근혜 탄핵 이후 한총련 출신 등 대다수 종북 주사파는 친문과 친명 진영으로 나뉘어 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친 이재명계에는 김재용, 강위원 등 한총련 전 의장을 비롯한 다수의 한총련 간부, 한대련 간부 출신들이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