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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 離脫住民(脫北民) 이야기 2025-1/ 01.30 수잔 숄티 "DJ와 盧가 김정일을, 文이 김정은을 살렸다" - 03.25 北 인권 지원, 美가 안 한다면 한국이 하자

상림은내고향 2025. 3. 28. 16:12

北韓 離脫住民(脫北民) 이야기 2025-1/

01.30 수잔 숄티 "DJ와 盧가 김정일을, 文이 김정은을 살렸다"

[월간조선] 북한인권운동 30년을 맞은 수잔 숄티 디펜스포럼재단 대

▲북한인권운동 30년을 맞은 수잔 숄티 디펜스포럼재단 대표

 

‘탈북자의 대모(代母)’, ‘인권 천사’로 불리는 수잔 숄티(Suzanne Scholte) 미국 디펜스포럼재단(Defense Forum Foundation) 대표가 북한인권운동에 투신한 지 올해로 30년째를 맞았다. 숄티 대표는 1996년에 탈북자들이 전하는 북한의 참상을 듣고 북한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뒤 1999년 4월에 미국 상원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청문회가 개최되는 데 힘을 썼다. 2003년에는 황장엽(黃長燁) 전(前) 북한 노동당 비서의 미국 의회 증언을 성사시켜 김정일 정권의 실상을 전(全) 세계에 알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는 2004년에 미국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채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숄티 대표는 이때부터 북한 인권의 실상을 알리는 ‘북한 자유의 날’ 행사를 매년 하고 있다.

 

“북한을 상대하는 것은 지옥의 문을 여는 일이었습니다. 북한은 악마적 정권이고, 그 악(惡)은 정말 순수한 사악함, 그 자체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북한인권운동을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은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저지른 일을 사람들이 믿지 않았듯이 말이죠. 나치로부터 유린당한 사람들이 나치의 잔혹 행위를 증언하고 증거를 제시했듯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세계 사회에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생하게 알리면서 미국 내(內)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2014년에 있었던 UN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발표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미국인으로서 북한인권운동을 하는 것이 녹록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북한 내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상황을 믿지 않으려는 불신(不信)과 싸우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또 한국에서 북한인권운동 활동을 막는 친북(親北)성향 단체들이 있는 것도 힘들었고요. 수많은 탈북자가 증언하고, 책을 쓰고, 그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기에 많은 미국인은 북한을 이제 이해합니다. 기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미국인이 북한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미국인에게 한국은 ‘K 팝’이고 북한은 ‘요덕수용소’입니다.”

 

- 30년 동안 북한인권운동에 투신했음에도 북한 체제는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아쉽지 않습니까.

“솔직히 한국에서 권력을 잡았던 일부 사람들이 북한 정권을 몇 번 구제하지 않았다면 북한의 김씨 일가는 끝났을 겁니다. 황장엽 선생이 1997년에 망명했을 때 그는 ‘북한에서 수백 만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고 증언했습니다. 황장엽 선생이 누굽니까. 북한 정권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김일성의 오른팔이었고 김정일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DJ 킴(김대중 전 대통령 지칭)은 햇볕정책을 선택했고 김정일 정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DJ 킴은 황장엽 선생과 수많은 탈북자의 증언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햇볕정책은 독재 정권에서 김정일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줬습니다. DJ 킴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무시했고, 북한 주민의 기아(飢餓)를 외면했습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보시는군요.

“충분히 김정일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DJ 킴은 한국 시민이 힘들게 번 납세자의 돈을 이용해서 북한 정권을 살리고, 노벨평화상을 사들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으로 북한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세계가 인도적 차원에서 지급한 식량을 큰 트럭들이 마을에 배달하고 나면 표식 없는 북한의 군용트럭들이 다시 지원 물품을 되가져 갔습니다. 일반 국민에게 돌아가야 할 쌀을 바로 뺏어서 가져간 겁니다. 예전에 독일의 유명한 의사인 노르베르트 발라센은 ‘고아원에 가서 쿠키를 나눠주면 아이들이 쿠키를 먹지 않고 그냥 들고 앉아있었다’고 얘기한 적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누군가가 다시 들어와서 자기 손에 있는 쿠키를 도로 뺏어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북한에서도 일어난 겁니다. DJ 킴에 이어 정권을 물려받은 노무현 정부도 북한에 우호적이었습니다.”

“미국도 속았다”

▲수잔 숄티 대표가 미국 워싱턴의 중국 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북송 문제를 항의하고 있다.

 

-한국이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였던 때에 미국 내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탈북자인 김성민 자유북한대표를 만난 미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고, 북한 내에서 일어나는 인권 유린 행위에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후반 들어 미국 정부도 북한과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휩쓸렸습니다. 미국 정부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없애는 것에 초점을 맞췄고 북한 인권 문제를 뒷전으로 미뤘습니다. 미북(美北) 대화를 맡게 된 주한미국 대사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미북 직접 대화를 시도했지만 끝내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미국도 북한에 속았다는 얘기입니까.

“미국 정부의 선의(善意), 우리가 그들(북한)과 대화를 하면 긍정적인 발전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을 북한은 이용했습니다. 미국이 완전 함정에 빠진 거죠. 4자 회담, 6자 회담을 가졌지만, 북한 정권의 완전 조작에 놀아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황장엽 선생이 한 말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탈북자, 그중에서도 북한 권력 상층부에 있던 사람들은 ‘김정일은 결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북한 김씨 일가에 대한 판단 착오가 모두에게 있었군요.

“북한 김씨 일가의 관심은 권력 유지뿐입니다. 한국에서 DJ 킴과 노무현이 김정일을 살렸고, 문재인이 김정은을 살렸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인권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접근했지만, 문재인은 그간에 진척되어온 북한 인권에 대한 진전을 없앴습니다. 사실 북한에 대해 가장 걱정하고, 북한 주민의 인권을 지키는데 최전방에 서야 할 사람들은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이 더욱 북한 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군요.

“당연합니다. UN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2월에 북한이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반(反)인륜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이런 인권 침해가 국가 정책의 하나로 자행되고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UN 인권위원회는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강하게 규탄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을 지난해까지 20년 연속 채택했습니다. 전 세계 55개국이 공동제안국으로 인권결의안을 채택할 때 문재인 정권은 무엇을 했습니까? 한국은 문재인 정부가 집권했던 2019년부터 2022년까지 UN의 북한인권결의안의 공동제안국에 참여하지 않았고,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했습니다. 문재인은 탈북어민을 강제 북송(北送)했습니다.”

“문재인은 인권보다 김정은 독재 유지에 더 관심이 있었던 듯”

-문재인 정부가 탈북어민을 북송했을 때 공개적으로 비판하셨지요?

“문재인 정부가 한국 헌법과 국제 조약상 의무들을 위반해 북한 난민들을 송환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재인은 김정은 독재 정치 유치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저는 신이 나중에 문재인 대통령을 심판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 정권이 DJ 킴이 아니었다면 1990년대 후반에 붕괴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문재인 정부가 아니었다면 그간에 들어간 많은 정보로 인해 북한 사회가 많이 흔들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 주민들은 김씨 정권이 수립된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바깥의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북한 주민들이 더는 정보를 얻지 못하고 다시 고립되도록 도왔습니다. 당신들 모두는 한국인입니다. 누구는 DMZ 남쪽에서 태어났기에 자유롭게 사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북쪽에서 태어났기에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겁니다. 어디에서 태어났든 대한민국 사람의 인권을 보장해야 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대통령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북한 인권 문제 해결의 선봉에 서야 하고, 세계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공개적인 서한을 통해 ‘제발 CVID를 잊고 CVIF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수잰 숄티 회장은 2024년 12월5일 자 《워싱턴타임즈》에 칼럼을 썼다.

 

〈트럼프 당선인이 백악관을 들어가고 난 뒤에 북한에 대한 드라마틱한 접근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현재의 대북 정책은 평양 핵 프로그램의 ‘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mantlement, 완전하고 검증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 주민을 위한 ’CVIF(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Freedom,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윤석열 한국 대통령의 현재 목표를 반영하고, 수 십년 간 미북 협상이 실패했다는 혹독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비무장지대 남쪽이 아닌 북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언할 수 없는 잔혹함을 겪는 국민을 해방해 한반도에 지속적인 평화를 이뤄야 한다〉

“북한은 核 강국이자 대량살상무기 확산국”

▲수잔숄티 대표(가운데)와 황장엽 선생(수잔숄티의 오른쪽),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미국 의회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인용하며 ‘자유’라는 단어를 36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링컨 시대의 미국은 국민의 반은 자유로웠고, 반은 노예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이 비극적인 전쟁과 분열을 극복했지만 결국 노예제도라는 재앙을 없애며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의 절반은 자유롭고, 절반은 노예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은을 제외한 모두가 노예입니다. 북한의 고위 당원이든, 군인이든, 주부든 상관없이 그들에게는 ‘노예가 될 것이냐, 죽을 것이냐’의 선택뿐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북한 주민이 자유를 받아들여 독재 정권을 종식하고, 한반도를 한국 헌법에 따라 통일하고 온전한 국가로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트럼프 당선인에게 북한과의 일대일 회담은 꿈도 꾸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4자 회담, 합의된 틀, 포용정책, 6자 회담 등 북한과의 회담이 수 년 동안 있을 동안 수 백만명의 북한 주민들이 사망했습니다. 황장엽 선생은 북한이 결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습니다. 북한을 무너뜨리는 것은 인권의 문제이며, 그것이 바로 아킬레스건입니다.”

 

-북한은 지난해에 오물 풍선을 지속적으로 한국으로 보내며 자극했습니다.

“저는 김정은의 절박함이 커지고 있다는 신호로 봤습니다. 문재인은 김정은에게 대화가 통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줄 의향이 있는 대통령이었습니다. 김정은은 새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와는 커넥션이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무려 36번이나 썼다는 것만으로도 김정은은 위협으로 느꼈을 겁니다. 왜냐하면 북한 주민은 누구나 자유로울 권리가 있고, 김정은의 노예가 아니라는 암시니까요. 김정은으로서는 북한 주민에 의해 전복되지 않으려면 정보의 흐름을 더욱 적극적으로 차단해야 합니다. 북한 탈북자와 자유를 사랑하는 민간단체들이 북한에 정보와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협력 사업을 중단시켜야 합니다. 그를 위해 휴전선을 가로질러 남북을 연결한 철도와 도로를 폭파하고, 남북 관련 기구를 없애고, 공중에서는 쓰레기 풍선을 지속적으로 날리는 겁니다.”

 

숄티 대표에 의하면 최근의 ‘북한자유주간’ 행사에서 북한 탈북자 대표단은 북한 주민, 특히 젊은 세대가 변화에 목말라하며 김정은이 자신들이 굶주리는 동안에도 핵과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북한 내부에서 변화가 감지된다는 소리다.

 

“젊은 세대는 변화를 원합니다. 그들은 기근이 이어지는 동안에 자신들의 어머니가 시장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김씨 일가는 2009년까지 시장 시스템을 통제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죠. 한국은 국제 규약에 따라 국경을 넘나드는 정보를 전달할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는 갖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를 우리 스스로 지켜낼 수 있도록 모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김정은의 말을 정말로 믿는 한국인이 있는 것은 아니죠? ‘북한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를 만든 것이다’, ‘우리는 한국을 점령한 미국인으로부터 한국은 보호할 것이다’라는 말 같은 것을요. 저는 북한 정권의 얘기를 들을 때 여전히 많이 놀랍니다.”

 

-30년이나 북한인권운동을 했는데 여전히 놀랄 일이 있습니까.

“북한 정권의 선동, 선전, 거짓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최근에 북한자유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문했던 탈북자가 북한에서 ‘미국인들은 늑대 얼굴을 한 인간(페이스 오프 울브스)이며, 살인자’이며 ‘미국 국기에 그려진 별은 미국이 침략한 사람들과 집단을 뜻한다’고 배웠다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침략해서 점령하는 국가가 늘어갈수록 우리 국기의 별들이 늘어나는 건가요?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해낼 수 있습니까? 정말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해내는 선동은 창의적입니다. 몹시 나쁜 방향으로 천재들이죠.”

“증언대에 세운 탈북자 숫자 세지 않았다”

-몇 명의 탈북자들을 여태 초청했습니까?

“아주 많이, 수 백명일 겁니다. 하지만 숫자는 세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다 소중합니다.”

 

-1996년을 시작으로 줄이어 탈북자 증언이 미국에서 이어졌지요?

“1998년에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었던 이순옥, 요덕수용소에서 10년간 살다 나온 강철환씨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고, 1999년 4월에 미국 상원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민주당 상원의원 존 케리(John Kerry), 공화당 상원의원 크레이그 토마스(Craig Thomas)가 청문회를 주최했습니다.

하지만 제 노력과 미국 내 정치 상황이 달라서 화나기도 했습니다.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첫 번째 심리가 열릴 때인데, 제가 늘 품고 다니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네요. 당시에 Associated Press라는 곳에 조지 게타라는 기자가 저를 찾아와서 ‘20년 이상을 기자로 활동했지만,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것만큼 끔찍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기사화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지금 보여 드리는 것이 그가 작성한 청문회 기사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사는 실리지 못했습니다. 4자 회담을 앞두고 있던 미국 국무부가 막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기사가 작성한 기사, 그리고 국무부가 보도제재 팩스 서한을 갖고 다닙니다. 북한 주민을 구출하는 것은 세계인이 모두 나서야 하는 일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면 좋겠고, 한국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북한 문제에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고, 남한에 사는 탈북자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진실을 전달하기를 바랍니다. 북한이 붕괴되는 날은 머지 않았으니까요.”

조선일보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01.30 ‘6개월 시한부’ 선고받은 김성민 대표의 ‘나의 삶, 나의 자유북한방송’(上)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북한 동포 위한 방송한 것이 자긍심”

⊙ 북한군 장교 출신이 억울한 누명 쓰고 脫北… 1차 북송됐지만 재탈북해 입국
⊙ 대북 방송 시작 후 김정일, “당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이런 못된 방송까지 하는 데 용납할 수 없다”
⊙ 정부 돈 안 받고 후원금만으로 방송 운영
⊙ 식칼·죽은 쥐·칼 꽂은 인형도 그의 ‘자유 전파’ 의지 막지 못해
⊙ 북한군 대위 시절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 들으며 북한 체제에 회의
⊙ “8년간 아버지처럼 모신 황장엽 선생은 너무나 고독했다”

金聖珉
1962년 자강도 희천 출생. 평양 경상유치원, 대동문인민학교, 련광중학교, 김형직사범대 졸업 / 태탄군 주둔 28사 경보병 대대, 보병대대 박격포부대, 4군단 선전대,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 대위 출신으로 1995년 탈북. 現 자유북한방송 대표이사 / 국경 없는 기자회 ‘자유언론 상’, 아시아 민주 인권상,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1995년 9월 30일 북한 양강도 혜산시

북한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 대위 김진은 멍하니 앉아 눈앞에 펼쳐진 압록강을 바라봤다. 부대를 탈출한 지 꼭 8일째 되던 날이었다. 압록강변을 순찰하던 군인 세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군복을 입고 있던 그가 소속과 성명을 밝히자, 조장인 듯한 군인이 이름을 안다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보초교대를 마치고 금방 돌아오겠으니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들이 떠나자 김진은 압록강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몸이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갈 즈음에야 인근에서 빨래하던 여인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2004년 4월 20일 서울시 양천구 목동

김성민(金聖珉)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방송 부스에 앉았다. 두 달 전인 2월 16일과 4월 15일에 시험방송을 마쳤고, 오늘부터 본방송을 시작기로 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남북(南北) 장성급 군사회담 결과에 따라 2004년 6월부터 대북(對北) 방송을 중단키로 합의했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탈북인들이 북한 동포를 위한 민간 방송을 하기로 결정했다. 김성민 대표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보내는 자유북한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민간 對北 방송 시작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2024년 3월에 라디오 방송을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삶이란 예측할 수 없어서 오히려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신(神)은 그에게 너무 가혹했다.

북한 체제에 그다지 불만이 없던 북한군 대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더는 그곳에서 살기 어렵다고 판단해 탈북(脫北)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 지린성 옌지, 랴오닝성 다롄을 거쳐 남(南)으로 오던 그는 중국 톈진에서 공안에게 붙잡혀 북한 보위부에 넘겨졌다. 한반도 최북단인 온성에서 1차 조사를 받고 2차 조사를 위해 평양으로 이동하던 중 80km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린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결혼하여 딸을 낳고, 중국인 신분으로 살던 그는 남한의 친척을 만나려다 서울 김포공항에서 체포되었다.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온 것을 두고 흔히 ‘1만 킬로미터의 여정’이라고 하는데, 그에게 있어 이러한 표현은 사치스럽기만 하다. 대한민국 국민이 되자 그는 북한인권운동에 투신했고 북한 주민들에게 자본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자유북한방송을 만 20년째 하고 있다. 북한군 대위 김진이라는 이름은 그사이에 김성민으로 바뀌었다. 2024년 11월 30일과 12월 7일에 인천시 강화군에서 요양 중인 김성민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2017년에 폐암 4기, 뇌종양으로 수술, 항암 치료를 받고 호전됐다가 최근 병세가 심해졌다. 이번에는 암이 간으로 전이됐고 의사로부터 ‘6개월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그는 요즘도 ‘할 일은 한다’며 탈북민 행사, 일본 출장길에 오른다.

― 우리나라에 와서 북한인권운동을 했는데, 그래도 많은 이가 기억하는 것은 자유북한방송의 김성민이겠죠?
“아무래도 그럴 겁니다. 대북 방송을 의도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인들과 식사 중이었는데 TV에서 정상회담 소식이 나오고 남북이 상호비방 금지 차원에서 대북, 대남(對南) 방송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함께 있던 선배들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뜻을 모았습니다. 당시 저는 KTV의 〈서울말 평양말〉, KBS의 〈남북의 창〉, 라디오 〈출발 동서남북〉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소위 방송인이다 보니 나더러 하라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 출연과 운영은 엄연히 다를 텐데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연합뉴스’의 조계창 기자가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돈 있고, 전파만 임차하면 된다’고 용기를 북돋워줬습니다. 처음에는 인터넷 방송www.freenk.net)으로 시작했는데 목표는 단파 방송 송출이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친북 단체들, 방송국 앞에서 시위

― 방송 시작하고 북한에서 반응이 있었는지요.
“두 달쯤 지나니까 북한에서 반응을 하더군요. 김정일이 ‘당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나가서 반북(反北) 방송까지 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못된 방송까지 하는 데 용납할 수 없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세계일보》의 한 기자가 관련 문건을 입수해 전해줬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한데 친북(親北) 단체들이 거의 매일 방송국 앞에 와서 ‘방송을 중단하라’며 시위하고, 전대협 통일선봉대라는 사람들 200여 명이 와서 집회를 했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때여서 아무래도 정부가 북한에 우호적이었죠.
“정부를 대신해서 방송을 하는 건데 신변 보호를 한다던 경찰관들은 오히려 저의 활동을 제한했습니다. 친북 단체는 연일 방송국 앞에서 반대 기자회견을 하는데 정작 저는 사무실 안에서 꼼짝달싹을 못하다 보니 화가 나고 ‘이건 아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방송에 임해야겠다고 결정한 이유는 그의 앞으로 쏟아져 오는 각종 협박 때문이었다. 황장엽(黃長燁) 선생의 얼굴에 붉은 페인트칠을 하고 과도를 넣은 소포, 죽은 쥐, 칼을 꽂은 인형 등이 수시로 배달됐다. 친북 단체 혹은 북한 추종 세력이 보냈음이 자명한데, 이 때문에 한동안 그는 어떠한 소포도 맘대로 열지 못했다. 그럴수록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이렇게 북한을 찬양하는 자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을 보니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구나!”

김성민 대표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국 정부에 손 내민 적 한 번도 없어”

자유북한방송 홈페이지에 게재된 설립 목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소식과 진실을 전한다.
2.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전파한다.
3. 김정은 독재 정권 추종 세력을 비판·경고한다.
4. 북한의 인권 참상을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에 알린다.
5. 한반도의 통일과 세계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한다.
6. 탈북인들의 교류와 소통, 입장 표명 기회를 제공한다.〉

― 그렇게 지낸 세월이 벌써 20년이네요.
“제가 자부하는 것은 자유북한방송은 대북 방송을 시작한 이후로 매일 2시간씩, 365일, 20년 동안 단 한 번 중단하지 않고 방송을 했다는 겁니다. 정권이 바뀌거나 국제사회가 요동치거나, 코로나19 여파가 있었을 때도요. 단 하루도 방송을 내보내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끌고 온 것에 긍지감을 갖고 있습니다.”

―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람을 탈 수 있었을 텐데요.
“방송에 대한 책임감이 컸고 수전 숄티(Suzanne Scholte) 여사가 컨트롤해 준 덕이 컸습니다. 저는 좌파 정권은 물론이고 우파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도 한국 정부에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수전도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정부에 손 내밀었다가 낭패 보는 일이 너무 많을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방송은 전파가 기본이고, 전파는 모두 돈입니다. 이것을 정부 지원으로 했다가 끊기면 안 되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자생적으로 운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초기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니 놀랍네요.
“주위에서 많이들 도와줬어요. 어떻게든 방송을 시작해야 한다며 탈북 선배 20여 명이 100만원씩 모아주고, 삼촌이 초창기 운영자금 2억8000만원 정도를 대줬습니다. 제가 정착금,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쏟아부었고요. 고(故) 안응모 전(前) 내무부 장관, 이북오도청 황해도·평북도·평남도 도민회 등에서 도왔습니다. ‘이대목동병원 정문에서 만나자’는 분이 있어서 나가보니 점잖아 보이는 분들이 봉투를 주고 가는데, 성우회(한국의 예비역 및 퇴역 장성 단체)분들이더군요. 알게 모르게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고 우리 나름대로 3년 치 예산을 확보하고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 그래도 세월이 20년인데 힘든 일이 부지기수였겠지요.
“라디오 방송 스튜디오를 여러 번 옮기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방송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 때문에 장안동의 북한 연구소에서 양천구 신정동으로, 대령연합회가 있던 강남과 다시 양천구 목동으로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스튜디오를 다시 꾸리고 예산을 다시 편성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 ‘얼만큼 버틸 수 있을까’ 하던 사람들 보란 듯이 매일 두 시간씩 방송을 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우리 방송은 미국의 자유북한방송 후원회를 비롯해 10달러, 100달러, 1만원짜리 100% 후원만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자유북한방송은 본방송을 개시한 지 1년 반이 지난 2005년 12월 8일부터 단파 방송을 시작했다. 주파수는 7530kHz(오전 4~6시), 12155kHz(오후 8~9시), 7600kHz(오후 10시~자정)를 사용한다. 단파 방송은 말 그대로 단파(短波)를 이용한 방송으로 특성상 먼 곳까지 도달하며 장거리 방송용으로 활용된다. 단파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를 통상 단파라디오라고 부른다. FM 방송은 주파수 변조를 이용하는 방송인데 단파 방송보다 적은 지역을 커버하지만 기상과 환경의 영향을 적게 받아 고(高)음질 청취가 가능하다. 김성민 대표의 자유북한방송 청취 리포트를 보면 저 멀리 유럽의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방송을 들었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허공에 뿌리는 메아리’

― 단파 방송의 위력을 알고 있었습니까.
“외국인들이 청취 보고서를 보내주고 있지만, 저희 방송은 허공에 뿌리는 메아리입니다. 북한 동포들이 이 방송을 들었는지를 실시간으로 알 수도 없고 피드백도 빨리 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끝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제가 북한에서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 탈북하기 전에 대북 방송 청취자였군요.
“북한군에 있을 때 ‘적지물자(敵地物資)’라고 해서 양말, 트레이닝복, 불티나 라이터, 담배, 라디오 등이 하늘에서 종종 떨어졌습니다. 사병 때는 엄두를 못 냈고 장교가 된 다음에 라디오를 하나 구해 선전대 창작실에서 들었습니다. 창작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거든요. 저희 자유북한방송의 제1 목적이 ‘북한 주민에게 외부 소식과 진실을 전파한다’ 아닙니까. 북한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와의 정보 차단입니다. 자체적으로 뉴스를 생산해 《로동신문》을 비롯한 중앙기관지를 통해 뿌리고 교과서를 만들고, 우상화 교육을 하고 역사를 왜곡합니다. 저도 이런 식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는데 막상 라디오를 들어보니까 전혀 다른 얘기를 하더군요.”

― 구체적으로 라디오에서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데요.
“강인덕 선생(전 통일부 장관, 그는 1980년 1월부터 1988년 2월까지 KBS에서 심리전 프로그램 〈북한 노동당 간부들에게〉를 진행했다) 방송을 들었는데 신기한 얘기가 많았습니다. 북에서는 김정일의 고향이 백두산이라고 했는데 방송을 들어보니 러시아 하바롭스크라는 겁니다. 구체적인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계속 듣다 보니 ‘내가 아는 장군님이 아닌가? 교과서가 잘못된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당시 북에서 황순희라는 여성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는데 방송을 들어보니 그 사람이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친구이자 실질적으로 김정일을 키운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 왜 황순희가 북에서 잘나가고 있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 조금 의심이 들거나 흩어져 있던 정보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 같은 거였을까요?
“처음에는 ‘희한하네’ 정도였고 자꾸 듣다 보니 의심도 들었죠. 하지만 저는 북한 체제에 워낙 충실한 대위였기 때문에 남조선에서 괜한 얘기를 지어내는 것이라고 애써 외면했습니다.”

“북한 주민 누구나 바깥세상 궁금해해”

▲김성민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가 2003년 미국 하원의원 청문회에서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모습. 가운데가 황장엽 선생이다.

 

― 북한은 통제 국가인데 그래도 바깥세상을 궁금해하기는 하나 보죠?
“그럼요. 라디오가 없어서 듣지 못할 뿐입니다. 당시엔 한국어를 통해 외부 소식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가 대북 방송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방송을 ‘남산 안기부에서 북한 사회를 흔들기 위해 만드는 모략 방송’이라고 선전(宣傳)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호기심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원천 봉쇄하는 것이 될 리가 없죠.”

― 이런 경험 때문에 자유북한방송이 허공에 뿌리는 메아리지만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군요.
“듣는 사람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간혹 자유북한방송이 북한 체제 비판을 너무 세게 할 때는 북한 인접 지역에서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습니다. 일상적인 라디오 방송처럼 실시간으로 피드백이 오지 않지만, 북한 동포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실제로 제 방송을 들었다며 찾아오는 탈북자들을 만날 때 마음이 뭉클합니다. 처음부터 남한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탈북자가 알음알음으로 돈 모아서 매일 방송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요? 어쩌면 운영 자금 모으느라 고민해서 암(癌)이 생겼을지도 몰라요(웃음). 그래도 방송을 20년이나 지속했으니… 뿌듯합니다.”

▲그의 정신적 동지인 수전 숄티 여사가 지난 2008년 라디오 방송국을 방문했을 때 모습이다.

 

 ― 아까 수전 숄티 여사의 컨트롤 덕분이라고 감사의 표시를 했는데 두 분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된 겁니까.
“2003년에 미국 하원의원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수전은 1990년대 초부터 탈북자 지원과 북한 인권 운동을 했는데 당시 탈북난민구출 운동을 하던 김상철 변호사에게 ‘미국 청문회에서 탈북자 3명의 증언이 필요한데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김상철 변호사가 저를 소개해서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던 이용국, 수용소에 있던 이신옥과 함께 워싱턴에 가게 됐습니다. 이듬해에 수전이 서울에 왔는데 저를 못 알아보더라고요. 동양인들이 비슷하게 생겨서 그랬나 봐요. 왜 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따져 물으며 친해져서 이후에 서로에게 각인됐습니다. 수전이 자유북한방송 운영 자금을 미국에서 모금해 주고, 북한자유주간 행사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 정신적 동지네요.
“네, 맞습니다.”

남한에 온 뒤 소령으로 입대 준비

김성민 대표가 남한에 정착한 것은 1999년 12월이었다. 그의 전직(前職)이 북한군 대위였기에 남한에서는 당연히 그가 군(軍) 생활을 이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에서 장교 출신이 탈북하면 한 계급 진급시켜 현역으로 입대시켜 주는 제도가 있었다. 김성민 대표는 신체검사, 국방부 장관 면담 등을 모두 마치고,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촌이 ‘북에서 군대 생활만 한 사람이 또 하느냐.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니까 회사 생활을 해보라’고 해서 삼촌 회사로 출근을 시작했다. 이 같은 결정을 하고 국방부 장관에게 ‘회사원으로 지내겠다’고 했더니 뜻밖에 ‘알았다’는 답변이 왔다. 하지만 회사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그는 주변의 탈북민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2001년에 자생적 탈북 단체인 ‘백두한라회’가 만들어졌다.

“초창기 생활 정착금을 다른 탈북자들보다 3배 정도 많이 받았습니다. 탈북자들 만나면 제가 술 사고, 밥 사고, 그렇게 어울려 지냈죠. ‘우리도 계 모임 같은 것을 만들자’고 해서 월 10만원씩 내는 28명이 생겼습니다. 대통령실 행정관을 했던 조 아무개도 있었고, 북한학을 전공한 최대석(崔大錫) 이화여대 교수가 저희를 가르쳤는데 ‘술만 먹는 모임은 안 된다. 이왕이면 의미 있는 모임을 하자’고 해서 친목 봉사를 했습니다. 봉천동 달동네 쪽방촌에 연탄 나르고 도배하고, 그러다 보니 우리 활동이 몇 번 뉴스에 나왔습니다. 최초의 자생적인 탈북자 단체라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그때 황장엽 선생이 뉴스를 본 모양입니다. 그때 탈북자동지회는 황장엽 선생과 황 선생과 함께 탈북한 김덕홍(金德弘)씨로 지지가 갈리던 시절이거든요.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이 공석(空席)이 됐는데 황장엽 선생이 제 이름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자네 아버지와 내가 김일성대 동료 교수였네’

▲황장엽 선생은 생전에 김성민 대표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

 

 황장엽 선생은 김 대표에게 한 번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거절했다. 딱히 만나야 할 이유가 없었단다. 황 선생의 두 번째 만남 요청, 그러나 또 거절, 세 번째 요청 때는 편지를 보냈다. ‘자네 아버지와 내가 김일성종합대학 동료 교수였네’라는 문구를 담은 편지였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황장엽 선생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 선생은 대학 총장을 지냈고, 제 선친(先親)은 평교수였으니 하늘과 땅 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편지에서 ‘동료 교수’라고 쓴 것을 보고, 제가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뵀고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맡게 됐습니다.”

― 외부에서는 김 대표를 ‘황장엽의 양아들’이라고 했죠.
“황 선생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어요. 강연 다니면서 제 소개를 할 때 ‘내 아들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아버지처럼 모셨거든요. 제 눈에 비친 황 선생은 너무 고독했습니다. 국정원에서 꼭꼭 숨겨놓은, 외출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는 사람, 일반 탈북자들에게는 하늘처럼 높은 사람, 그런데 만날수록 아버지 같은 냄새가 너무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황 선생은 국가정보원 경호팀의 철통 보안 속에 토요일에 미리 허락된 곳만 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황 선생을 8년 정도 모셨는데 그렇게 마음이 짠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적적하실까 싶어 딸아이를 데려갔는데 ‘손녀 생각이 난다’고 해서 이후에는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과일이든, 과자든, 눈에 보이는 건 전부 아이 가져다주라며 통째로 주셨습니다.”

― 세상이 황 선생에 대해 너무 야박하게 평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상모략이 너무 많습니다. 황장엽 선생이 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을 할 때 월급이 700만원 정도였습니다. 월급날 황 선생은 200만원, 100만원을 봉투에 넣어 다 나눠줬습니다. 황 선생이 정한 사람에게 직접 가져다주는 것은 제 임무였고요. 황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에 ‘구두쇠였다’ ‘돈 벌어서 여자한테 다 줬다’는 헛소문을 내는데 황 선생은 수중에 100만원도 없었습니다. 황 선생에게 돈을 받았던 이들이 침묵하는 것을 보면 열이 나요. 제가 돈을 전달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압니다.”

‘카드라는 거,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김성민 대표(왼쪽)와 황장엽 선생(오른쪽).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황장엽 선생이 ‘성민아, 카드라는 거 그거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고 말을 했다. 김 대표가 부인에게 말해 직불카드를 만들고, 100만원을 입금했다. 황 선생은 천을 오리고 손바느질을 해 카드 주머니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열 달이 넘도록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김 대표의 부인 휴대전화로 ‘40만원’을 쓴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김 대표가 경호팀에 전화해 보니 황장엽 선생이 황씨 모임에서 식사 후에 긁으셨다고 했다.

“밤에 문자가 오니까 너무 궁금하잖아요. ‘아이고, 이 할부지가 어디에 쓰셨을까’ 해서 물어보니 황씨 모임에서 아주 폼나게 긁으셨대요. 얼마나 신이 나셨을까요. 황 선생의 휴대전화도, 하나뿐인 직불카드도 모두 저나 제 부인 명의였습니다.”

― 황 선생은 무엇을 꿈꿨습니까.
“인간 중심 철학이죠. 북에서 인간 중심 철학이 주체사상으로 변모되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황 선생의 철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황 선생의 철학을 공부하는 A, B, C 팀이 있었는데, 저는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았습니다. 황 선생한테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저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다들 어려워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황 선생의 철학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같고, 할아버지 같아서 그냥 선생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 황 선생 돌아가시고 1년 만에 추모 모임을 만드셨죠.
“‘황장엽을 사랑하는 모임’은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탈북자동지회 홈페이지를 만드는 친구가 있는데 샤프하고 똘똘한 친구예요. 그 친구가 제안하고 제가 빨리 만들자고 해서 만든 겁니다. 지금도 황장엽 철학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아버지 같고, 철학자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해마다 부인과 함께 대전 현충원에 두 번씩 갑니다. ‘할부지, 나 왔어요’라고 하고 한참 얘기합니다.”

중국 곳곳을 떠돌며 남한行 꿈꾸다 좌절

김성민이라고 개명(改名)한 것은 북에서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남한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삼촌이 ‘너의 사촌들은 돌림자로 성인 성(聖) 자를 쓴다’고 해서 바꿨다. 기자가 만난 김성민 대표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뒀다고 해서 그의 행적을 과장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 명줄이 길다’는 말이 있다. 사선(死線)을 숱하게 넘은 그는 이대로라면 100세까지는 거뜬히 살아내야 할는지 모른다.

압록강을 건너니 중국 쪽은 45도의 가파른 제방이었다. 한 조선족 청년이 나무 막대기를 구해와 그를 끌어올려 줬다. 북한군 대위의 탈북 소식에 양강도 보위부에서는 다음 날 체포조를 창바이로 보냈다. 그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중국 창바이의 한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의 여집사는 “북한군이 어제부터 당신을 찾고 있다. 이곳은 위험하다”며 그를 데리고 12시간을 달려 중국 옌지로 갔다.

1995년, 당시 중국 도로에는 검문이 없었다. 그가 탈북한 시점을 1996년으로 소개한 기사들이 많다. 정확하게는 1995년 9월이다. 그는 한동안 신분이 들통날 것을 우려해 1996년이라고 살짝 포장했다. 그는 옌지에서 조선족인 태중원 목사를 만났다. 목사는 그에게 교회에서 먹고 자도 좋다고 했고, 그는 6개월 동안, 정확히는 1996년 2월까지 중국 옌지에서 지냈다. 이즈음 김성민 대표는 ‘인민폐 500만원이 있으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백두산 견학을 가는 목사 일행이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조선족 현지 선교사에게 부탁해 500만원을 구해다 줬다. 돈이 생기자 그는 중국 다롄으로 떠났다. 당시 그의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남조선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롄에서 만난 김○○ 목사는 그에게 500만원을 건네받더니, 한쪽 구석에 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저 조선족 청년을 따라가면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민 대표는 그 청년과 함께 다롄항으로 갔다.

“어느 배를 타야 남조선으로 가느냐고 청년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더군요. 자기의 임무는 다롄항까지만 저를 데려다주는 것이었대요. 다롄항은 중국 보초병들이 즐비했고, 항구라서 그런지 새벽 2시가 되어도 사방이 환했습니다. 때마침 2월이어서 날씨는 얼음장처럼 추웠습니다. 그 청년에게 ‘내가 남조선 배를 찾아볼 테니, 혹시 못 찾을 경우를 대비해 기다려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중국 공안에 붙잡히다

― 어렵게 다롄항까지 갔는데, 이번에는 알아서 남한 배를 찾아야 한다니요.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항구 쪽으로 보초병의 눈을 피해 다가가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바닷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는데 아뿔싸, 저는 남조선 배에는 한글이 적혀 있을 줄 알았어요. 아니었습니다. 온통 영어로 적혀 있는 거예요.”

― 저런, 그 청년은 기다려주던가요?
“제가 불쌍했던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말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그 청년이 아니었다면 또 어찌 됐을지 알 수 없죠.”

그 청년은 김성민 대표에게 ‘아무래도 500만원을 건넨 목사에게 속은 것 같다’며 자신과 함께 톈진으로 가자고 했다. 톈진에 함께 가는 친구들을 통해 남조선 배를 찾아주겠다며 말이다. 그렇게 김성민 대표는 다시 톈진으로 향했다. 청년은 친구들에게 들었다며 ‘톈진항에 남조선 광석 운반선이 있다고 하니 그 배에 몰래 타라’고 했다.

김성민 대표는 밤에 항구에 몰래 들어가 선박에 접근했다. 배에 거의 다가갔을 때 공안 셋이 뛰어나왔다. 그는 “배 선원인데 잠시 외출을 나갔다 오는 길”이라고 둘러댔다. 중국 공안은 배 선장을 불렀다. 그는 중국 공안이 한국어를 못 하는 것을 감안해 선장에게 웃으며 사정 설명을 했다. 하지만 선장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노스 코리아 아미!”

중국 공안은 그를 체포했다. 그는 톈진 감옥에 수감돼 40여 일이나 있어야만 했다. 2월은 중국의 최대 명절인 춘절이 있는 때라서, 감옥에서의 업무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나중에야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여자 통역사가 나타났지만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김성민 대표는 “중국으로 정치 망명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통역사는 이를 외면했고, 그는 1차 조사를 받고 투먼 변방수용소로 이송됐다. 투먼은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도시다. 중국 영토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매우 많다.

조선족 공안인 줄 알았던 사람이 北 보위부원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공안이 그에게 “너는 북으로 가면 죽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북으로 보내지 않고 중국에 있는 로개농장(로동개조농장)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북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말에 그는 “김정일 체제가 싫어서 나왔다”고 했다.

며칠 뒤, 처음 보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 조사관은 김성민 대표에게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쁘냐”고 물었다. 어쩌면 북송(北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갖다 붙이며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럿이 수용소에 오더니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봉고차에 밀어 넣었다. 함경북도 남양의 국경 다리를 건너자, 중국 공안은 그를 북한 보위부로 넘겼다.

 

중국 쪽에서 남양을 바라보면 국경다리 앞에 ‘영생탑’이 있다. 보위부원은 탑 주변을 돌라고 지시했다. 그 주위에 돌멩이가 있을 리가 없는데, 어느새 장사하던 아주머니들이 돌을 들고 와 그를 향해 던지며 ‘조국의 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북한군 대위가 겪기에는 너무나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보위부원들은 그를 온성 보위부로 끌고 갔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사용되던 때도 아니요, 신분증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그는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김성민 대표는 본인이 원산악기농장 노동자라고 말했다.

“걸친 옷이 전부니까, 제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잖습니까. 처음에는 저기 먼 지역의 노동자인 것처럼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보위부가 확인해 보고, 사실이 아니자 때리더군요. 그러고 나서 또 제가 신분을 지어내 말을 했어요. 확인해 보고 사실이 아니자 또 때렸고요. 고문을 당한 것은 아니고, 그렇게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로 시간이 지났습니다.”

― 그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군요.
“온성 보위부에서 조사받은 지 며칠 지났을 때 그 희망이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제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투먼 변방수용소에서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털어놔 봐라’고 했던 이였습니다. 조선족 공안인 줄 알았던 사람이 실은 북한 보위부 직원이었던 거죠.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지다

다음 날, 그가 복무했던 부대와 인민무력부 소속 보위사령부 군관들이 왔다. 그들은 “평양 가서 조사를 받고, 다시 부대에 가서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호송원들의 손에 이끌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일반 객실이 아닌, 호송원과 승무원들이 타는 특별 객실이었다. 기차는 느릿느릿하게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한군 대위 출신이 탈북하고, 북한 체제에 대한 온갖 비판을 했으니 그는 평양에 도착하는 순간 더 이상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

김성민 대표의 머릿속에는 이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톈진 감옥에서 40일, 투먼 변방수용소에서 열흘 남짓 있었던 탓에 그의 수갑을 찬 팔목은 온통 짓이겨져 있었다. 벼룩과 이, 빈대에 뜯겨서 난 상처 때문이었다. 북한 보위부원들은 그의 처지가 도저히 수갑을 찰 수 없다고 생각해 솜옷 위에 수갑을 채운 터였다. 손을 살살 움직여보니, 한쪽 손을 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100m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열차 전봇대였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린다, 군에서 훈련한 대로 착지한다, 그런데 전봇대는 어찌 피할 것인가?’

그는 평양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수없이 탈출 방안을 고민했다. 열차가 평양 인근에 인접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시속 80km로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김성민 대표의 말이다.

“며칠 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연습했는데 그게 다 통하지 않더만요. 몸을 던지는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

― 그래도 좀 멋지게 표현해 보시지요,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을 하신 건데요.
“아니에요. 정말 그냥 본능적으로 열차에서 뛰어내린 겁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요. 정신 차려보니까 선로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열차가 그냥 계속 운행할 줄 알았는데 저 멀리서 수십 개의 손전등이 반짝이더군요. 저를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뛰었습니다.”

“이 나라는 망했구나”

 ― 반대 방향에는 뭐가 있었나요.
“산자락이었는데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감옥, 수용소에 너무 오래 있어서 몸을 움직일 겨를이 없었고, 영양 상태도 좋지 못했고요. 어떻게든 숨어야 한다는 생각에 없는 힘을 쥐어짜 기어서 필사적으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산자락에 붙어 얼마 가지 않았을 때, 호송원들이 정신없이 앞으로만 달려 그의 주위를 지나쳐갔다. 손전등 불빛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보면서, 김성민 대표는 다시 산을 기어올라갔다.

산에서 하루를 은신한 뒤 주변 기차역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의 수배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는 다시 북으로 올라가는 화물열차 위에 올라타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1996년 3월, 밖은 여전히 쌀쌀했다. 열차를 숨어 타다 내리고, 산에 은신했다가 다시 열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산나물을 캐러 올라오는 남루한 차림의 북한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김성민 대표를 보더라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먹을 것을 캐느라 정신이 없었다. 군대에서 복무했기에 이 같은 광경을 목격할 일이 없었던 김성민 대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나라는 망했구나. 내가 여태 이런 나라를 위해 찬양하는 글을 썼단 말인가.”

기차를 타고 몇 날이나 이동했을까. 오전 9시쯤 기차 옆으로 두만강이 보였다.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두만강을 향해 냅다 달렸다. 두만강의 3분의 1은 얼어 있었다. 여기가 북한 땅인지 중국 땅인지 알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할 때, 모퉁이 깃대에 적힌 중국 글씨를 보고서야 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는 벌러덩 땅에 누워 이내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자유를 찾았다, 살았다 뭐 그런 느낌은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리 때문인지 중국 땅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냥 온힘을 다해 잠을 자고 싶었습니다.”

― 탈북한 지 6개월 만에 재탈북한 것 아닙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반년 전에 머물었던 중국 옌지교회로 다시 찾아갔습니다. 태중원 목사는 이미 제가 남조선으로 간 줄 알고 계시더군요.”

― 남조선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했나요.
“아니요. 사실 예전에 중국에 머물 때 베이징 한국대사관으로 찾아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다리라는 답만 들었거든요. 거기다 애써 톈진에서 한국 배를 찾았지만 선장이 이실직고하는 바람에 공안에게 잡혔죠. 사실 당시에는 한국으로 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들어오다

‘재탈북’한 김성민 대표는 1999년 2월까지 중국 옌지에서 머물렀다. 옌볜병원 의사였던 태중원 목사의 처제와 결혼했고, 딸도 얻었다. 그의 신분은 중국인, 마침 연락이 닿은 한국에 사는 삼촌이 그를 만나기 위해 옌지로 날아왔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삼촌은 그를 보자 이내 눈물을 쏟았고, ‘한국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삼촌이 건네준 몇만 달러로 김성민 대표는 한국식 당구장, 노래방을 차렸다.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탈북 청년들 수십 명을 이곳에서 숨겨주고 재워줬다. 삼촌과 왕래를 이어간 덕분에, 중국 여권으로 두 번 서울을 찾았다가 1999년 2월에 김포공항에서 체포됐다. 수사기관은 그의 행동이 수상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김성민 대표는 체포 후 순순히 ‘북한 장교 출신’이라고 털어놓고 조사기관으로 이송돼 10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러고 1999년 12월,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월간조선 01월 호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02.01 ‘6개월 시한부’ 선고받은 김성민 작가 ‘나의 삶, 나의 자유북한방송’ (下)

“자유는 고향으로 안고 갈 우리의 맹세”

⊙ “김정은이 임종석 얘기 들었다면 ‘내 동지 하나가 제대로 하고 있구먼’ 할 듯”
⊙ “대북 전단 살포는 옳은 일… 심리전 방송 계속해야”
⊙ “김정은, ‘우리는 미국하고 놀 만큼 다 놀았다’… 트럼프가 끌려가게 될 것”
⊙ “윤석열 정부가 강제 북송 책임자 처벌하지 않은 것 아쉬워”


 한 달 사이에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의 직함은 자유북한방송 작가로 바뀌었다. 김 작가는 지난해 12월 말에 이시영 국장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물려줬다. 김 작가는 “건강상의 문제도 있지만, 이제는 후배들이 자유북한방송의 새 시대를 열어갈 시점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자유북한방송 대표 때도 작가의 꿈을 놓지 못했던 그는 〈감초영감〉 〈수용소의 노래〉 〈여자이고 싶었다〉, 성극 〈예수님 탄생〉 등 다수의 라디오 방송극을 집필한 적이 있다.

“이곳 강화도는 북한과 가까워요. 10분만 달리면 북한이 보입니다. 이따금 고향을 보곤 합니다. 2018년도에 뇌종양 수술을 받고 집에 있다가 병원에서 다시 오래서 갔더니 폐암에서 전이된 뇌종양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도 여태 잘 살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주치의가 ‘정리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이 새까맣게 변하더군요. 너무 막연해서 나흘 동안 물도 못 넘겼어요. 지금은 마음의 정리가 됐고, 준비할 시간이 6개월 남았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라고 생각해요.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 자신이 있거든요. 또 남은 시간이 제가 보낸 60 평생과 바꾸지 못할 소중한 시간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지금껏 하던 일을 차분히 마무리하는 것이 남은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조사관이 ‘너 왜 왔니’라고 물었어요. 제게 남아 있는 시간에 좋은 책을 한 권 써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노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고요.”

기자가 만난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작가는 사시사철 푸릇한 소나무 같은 사람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도, 지독한 항암 치료를 받고 온 다음 날도, 지인들이 끊임없이 방문한 날도 지친 기색 없이 담담하고 평온했다.

인생에 ‘만약에’라는 말은 없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인생은 자신의 선택이며, 우리는 그에 따른 결과를 묵묵히 감내할 따름이다. 이럼에도 그에게 ‘만약에 북(北)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았다면, 만약에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를 물었다. 그는 “시인, 또는 작가가 됐을 것 같다”고 했다.

김정일이 인정한 작가

▲2024년 12월 연세세브란스병원 입원 때 이시영 자유북한방송 국장(김 작가의 오른쪽)과 김기성 자유북한방송 기자와 함께.

 

작가 김성민에게는 글쟁이의 피가 흐른다. 그의 선친(先親)인 김순석(1921~1974년)씨는 북한의 유명 시인이다. 종군기자로 6·25 전쟁을 겪고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창작 지도교수로 일하면서 북한의 대표적 시인인 조빈, 서진명씨 등을 가르쳤다. 선친은 ‘북측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김 작가가 한국으로 오기 직전까지 했던 일은 620 훈련소 예술선전대에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북한군 장교로 있으면서 다른 부대의 군인들이 이름을 들으면 알 정도로 여러 편의 시와 수필을 잡지에 냈고, 각종 선전대 축전 때 발표한 작품이 김정일의 호평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작가였다.

“한국은 국방부에 문선대(과거 국군에서 위문 공연 등을 담당한 홍보 부대)가 하나 있지만 북한은 군단마다 선전대가 있고, 그 군단마다 작가가 있습니다. 작가는 군단 예술선전대를 위한 공연 대본을 써야 합니다. 제가 메인 작가였고, 7명의 서브 작가가 있었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면 군인들의 충성심이 높아지기 때문에 선전대 작가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 가령 어떤 것들을 썼나요.
“북에서는 ‘재담’이라고 하는데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만담 같은 겁니다.”

〈가: 집에 갔다. 휴가 다녀왔는데 내 동생이 쌀값을 몰라.
나: 왜 몰라, 쌀값을.

가: 쌀값만 모르나. 병원의 치료비도 몰라, 옷값도 몰라. 하지만 우리의 충성심은 알지.
나: 그럼 그럼,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만 알면 되지.〉

“안 내려왔으면 유명 작가 되지 않았을까?”

“저는 온종일 글만 썼습니다. 설날 공연, 2월 16일 김정일 생일, 4월 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대 기념일, 4월 15일 김일성 생일, 4월 25일 군대명절 공연, 5월 농촌지원, 6월 전쟁기념, 7월 전쟁 승리한 날, 8월은 8·15 해방, 9월 9일 국가 창건일, 10월 10일 당 창건일, 12월 27일 헌법절.”

― 아직도 줄줄 외우고 계시네요.
“잊히지가 않네요. 일 년에 15번 공연을 하거든요. 작가 혼자서 그걸 다 준비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부족하겠습니까. 작가가 글을 쓰고 나면 작곡가, 연출가에게 전달되고, 정치위원 심의를 통과해야 하고 1년 내내 바빴습니다. 군복 한 번 제대로 입은 적이 없습니다. 여름에는 속옷 바람에 글 쓰고, 겨울에는 뭐든 뒤집어쓴 채 글 쓰고, 탈북하기 전까지 온종일 글만 썼습니다.”

 

― 북한 체제에 대해 의심해 볼 겨를도 없었겠네요.
“기계였죠, 글 쓰는 기계. 북한 체제에 대해 의심할 틈이 어디 있습니까. 안 내려왔으면 유명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 글을 쓸 때 먹을 것은 풍족했나요.
“잊고 있었는데 한동안 강연 다닐 때마다 했던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국정원 조사를 받을 때 보니까 음료수를 계속 바꿔서 주더라고요. 제가 ‘남조선에 음료수가 몇 개냐’고 물었더니 ‘그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해서 놀랐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음료수가 몇 개인지 다 알아요. 첫째 우물, 둘째 샘물, 셋째 수돗물, 넷째 70년대 말에 사라져 버린 사이다. 1989년에 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과 함께 나타난 콜라가 노동자 한 달 월급의 절반 값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식량난 시작

― 탈북할 때인 1995년이 ‘고난의 행군’ 때여서 여쭸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건데 북한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식량난에 시달렸습니다.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을 할 때였죠. 김정일은 1985년 무렵부터 ‘나라 사정이 어려우니 군대에서도 자체 농사를 지으라’며 국가에서는 쌀과 된장, 간장만 준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부식품은 자체 생산해야 했습니다. 1986년 즈음부터 우리 부대에서는 축구를 했던 운동장을 갈아엎고 배추, 무, 옥수수, 고추, 가지 같은 것들을 심었습니다. 그걸 잘하는 지휘관은 군인들에게 철철이 먹을거리를 제대로 줄 수 있었고, 그걸 못하는 지휘관은 소금국에 밥밖에 주지 못했습니다. 군에서 먼저 영양실조 환자들이 생기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 고난의 행군보다 훨씬 이전이네요.
“그나마 김일성, 김정일 생일에 돼지고기를 줬는데 그걸 가마솥에 넣어 끓여서 먹었습니다. 한데 사병들이 돼지고기 국물 한 사발을 소화를 못 시켜요. 흡수가 되지 않아서요. 그래서 설사증이 시작됐고, 이로 인해 죽는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링거 한 대만 맞아도 설사증이 멎는데. 군대에서 죽는 사병들이 생기니까 연대 사단에 ‘영양중대’가 생기고, 허약한 병사들을 모아놓고 따로 관리를 했습니다. 영양식이랄 것도 없고 밥에 기름 한 숟가락 얹어주는….”

― 한국에서는 ‘86아시안게임’을 하고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할 때였는데요.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어느 날이 생각납니다. 점심 먹고 사병 90여 명이 등을 까고 앉아 있었습니다. 영양소가 부족해 등껍질이 벗겨져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껍질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런 군인들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옷을 입고 장군님 노래를 부르면서 병실(막사)로 가는 겁니다.”

“최고의 제철소 고로 9개 중 8개가 스톱”

▲2024년 5월 23일 줄리 터너 방한 때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 북한의 토양이 너무 척박한 탓에 농사가 되지 않았던 걸까요.
“아닙니다. 농사지을 땅 자체는 척박하지 않았습니다. 거름, 비료가 없으니까 땅이 산성화돼서 첫해에는 그럭저럭 농사가 되다가 2년 차부터 되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 부대 앞에 기차 역전이 있었는데, 열차가 서면 빵통(화물칸)에 실려 있는 비료를 훔쳐오라고 지휘관들이 사병들을 내몰곤 했죠. 그 비료를 땅에 뿌리면 그해 농사가 잘되는 걸 직접 봤습니다.”

― 그 얘기는 북한 땅에 농기구가 있고, 퇴비만 있으면 농사가 잘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럼요, 그거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비료를 만들 전기가 없으니 비료 공장이 안 돌아가고, 비료가 없으니 땅이 척박해지고, 그냥 다 안 되는 겁니다.”

― 그건 자본주의가 좀 들어가면 가능한 건데요.
“평양-향산 고속도로 건설을 할 때 우리 군단이 맡은 지역이 평안남도 안주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만들려면 굴간(갱도)도 파고 다리도 놓아야 하고, 그러자면 철근과 시멘트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맡은 구간에 다리 3개가 있었습니다. 저는 군사선동을 위해 선전대 작가로 건설에 관여하게 됐습니다. 다리를 놓으려면 철근 20만t이 있어야 한다더군요. 부대에서 ‘철근을 구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최고사령관 명령서에 ‘620부대에 철근 20만t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그나마 현대화된 제철소가 황해제철소인데, 가서 보니 9개의 용광로가 있었습니다. 철근을 받으러 갔는데 9개 중 8개의 용광로가 그냥 멈춰 서 있었습니다.”

― 한 개만 돌아가고 있었군요.
“그건 장군님 비준 없이는 아무도 손댈 수 없다는, 이른바 ‘비준 용광로’였습니다. 미사일이든 핵 부품이든 거기에 필요한 철을 뽑아낸다는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들고 간 ‘명령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황당해하는 제게 제철소 관계자가 ‘철근을 뽑으려면 최소 20명에게 줄 3일분의 쌀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직장장(공장장)이 말하기에 군단 사령관에게 말해 옥수수 1.5t을 실어왔습니다. 다음 날부터 공장 직원들이 씩씩하게 나와서 용광로를 살릴 준비를 하더군요. 세상에, 멈춰 섰던 용광로를 이틀 만에 살리는 것도 처음 보았고, 코크스 대신 폐 타이어를 태우는 것도 처음 봤습니다. 파철을 녹이는 데 알루미늄이 필요하다기에 장마당에서 가마를 사 그걸 녹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니까 시뻘건 철근이 나오는데, 노동자들은 노동자들 대로 벌겋게 달아오른 철근에 물을 부어 철근을 식혀서는 장마당으로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황해제철소의 대표적 시장인 송림 장마당에 나가보니 전국에서 철근이 필요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각지의 특산물 등으로 철근을 매입해 가더군요. 평양술, 개성인삼, 골동품….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북미 관계에서 유리한 쪽은 북한”

▲보수단체 집회에 참석해 연설을 하는 김성민 당시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성민 작가의 컴퓨터에는 최신 북한 동향 정보들이 가득했다. 그가 파일을 클릭할 때마다 북한 내부 문서로 짐작되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북한에서 살다 30년 전에 대한민국으로 왔지만 김성민의 레이더는 온통 북한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안에 대해 물었다.

― 트럼프 시대가 또 도래했습니다.
“김씨 일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겁니다. UN 제재가 있었을 때 김정일은 ‘우리가 언제는 제재를 받지 않은 적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김씨 일가를 자극하지 못하고, 이럴수록 더욱 ‘자력갱생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더구나 김정은은 미국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트럼프를 다룰 줄도 압니다. 얼마 전 대대장 대회 때 김정은은 ‘우리는 미국하고 놀 만큼 다 놀았다’고 했습니다. 이건 트럼프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결국 트럼프가 끌려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북미(北美) 관계에서 유리한 쪽은 북한입니다.”

― 김정은이 젊은 나이에 집권했는데 그렇게 스마트한 인물인가요.
“이건 김정은이 집권 초창기에 나온 북한군 총정치국 자료입니다. 여기에 김정은의 이른바 말씀이 나오는데 4월 15일(김일성 생일) 평양 방어사령부의 박격포 대대가 축포를 쏘기 위해 평양시 중심부로 들어갔는데 김정은에게 보고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로한 김정은이 ‘나는 군대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김일성, 김정일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북한에서의 평양시 통제는 무엇보다 최고 지도부의 보위, 안전에 있는 것이고 특히 무장 반입은 금물인데 김정은에게 보고되지 않은 박격포 대대가 평양으로 들어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당시 군부가 어린 김정은을 얼마나 얕잡아 봤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놈이 뭐를 알겠어’라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고, 장성택에게 많은 정보가 쏠렸을 겁니다. 그러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숙청한 이후 기류가 완전히 바뀌었고, 제가 파악한 바로는 김정은은 김정일보다 더 도전적입니다.”

“백두 혈통은 그냥 지정하면 그걸로 끝”

― 그렇다면 김정은이 한 수 위일 수 있다는 거네요.
“나름 유학을 해서 외국물을 먹은 것이 효과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집권 초기에 장성택을 치지 않았다면 여전히 김정은을 얕잡아 보는 시각이 있었을 것이고, 장성택 쪽으로 군부가 몰렸을 텐데 완전히 상황이 역전된 겁니다.”

― 장성택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체포 때 사진을 보니까 완전 놀라더군요. 전혀 몰랐다는 얘기입니다. 김경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최근 몇 년 들어 김주애를 등장시키는데 4세대로의 이양 아닙니까. 레짐 체인지가 될 수 없는 겁니까.
“우리의 생각보다 북한의 내부 교육 시스템이 상당히 강합니다. 황장엽(黃長燁) 선생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김정일의 후계자를 두고 김정은, 김정남, 김정철이 거론될 때 저는 김정은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근거는 내부 자료를 보니 ‘평양의 어머니’라며 김정은의 조모인 김정숙에 대해 군인들을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국무부 부장관인 커트 캠벨이 ‘아무리 그래도 20대 초반의 어린 친구에게 북한을 물려주겠느냐’고 하기에 ‘안 될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김정은이 세 살 난 어린아이를 지명하고 ‘이제부터 백두 혈통이 북한을 이끈다’라고 말을 하면 거기에 맞추는 것이 북한의 시스템입니다.”

― ‘김씨 왕조’라는 얘기가 정확히 맞네요.
“김주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정남이 피살된 것을 우리나 알지, 북한 주민들은 알지 못합니다. 외교관이나 특별한 직업의 사람들만 알죠. 김정은의 배다른 형이라는 것도 모를 겁니다. 북한 사람들이 말하는 백두 혈통은 그냥 지정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만약에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됐다고 해도 ‘이 사람이다’라고 하면 이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의식적으로 심리전 해야”

▲2018년 방미 당시 김성민 작가가 하원의원 출마를 준비하던 영킴 의원의 선거캠프 방문 모습. 왼쪽은 수잔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다.

 

― 요즘은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고 노래를 듣는다고 하는데요.
“그건 다른 얘기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남한 드라마 100개를 본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건 전부 세트장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남조선에서 의도적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 결국 바뀌지 않는다는 소리인가요.
“바뀌기는 하겠지만 속도가 굉장히, 많이 늦을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더딥니다. 이 자료를 한 번 보세요. 북한의 내부 강연 자료인데 ‘어느 지방 도시에서 9000명의 고급 중학교 학생들이 안전기관을 찾아가 불순 특화물(남한 드라마 등을 지칭)을 봤다는 사실을 자수했으며, 3000명의 학생이 스스로 불순 녹화물이 있는 USB 기기를 반납했다’고 돼 있습니다.”

― 북한 사람들이 남한 문물을 많이 접하고 있으니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할 때가 아니네요.
“남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심리전(心理戰)을 의식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요즘은 북한 내부에서도 ‘인권 유린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며 인권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고, 죽이는 일을 하면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겁니다.”

― 의식적으로 심리전을 계속해야 한다는 말은 대북 전단 살포 등을 지속해야 한다는 건가요.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이게 왜 부정한 일이고, 나쁜 일입니까. 대북 전단, 심리전 방송을 계속해야 합니다. UN을 비롯해 국제사회의 제재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입증됐습니다. 북한 백성들이 마음을 움직여 그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그걸 위해 들고일어서야 합니다. 이게 통일의 기본 원칙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대북(對北) 심리전을 계속해야 합니다. 과장하거나 없는 사실을 얘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 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우물 밖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거죠. ‘지금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고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임종석은 김정은 복사본”

― 문재인 정부 때 김정은의 서울 방문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서울 한복판에 내걸렸을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진연) 같은 애들은 정말 이상한 애들이에요. 한데 그들이 스스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 뒤에 또 다른 세력이 있고, 또 따라가면 간첩이 있죠. 대진연 같은 조직을 움직이게끔 하는 사람들이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 통진당 이석기 동부연합의 후예들이 아닐까요.
“이석기는 간첩이죠. 저는 이번에 임종석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정은 복사본이잖아요. 임종석이 ‘김정은 정권 붕괴하면 영구 분단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지낸 남한 사람이 어떻게 김정은 얘기를 그대로 따라 합니까?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인터뷰 내내 차분했던 김 작가는 최근 임종석의 발언이 거론대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것이 남한 사회의 진짜 문제점”이라고 했다.

“지능화된, 소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한 사람이…(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석(私席)에서도 아니고 언론을 상대로 그런 얘기를 하다니, 이건 너무나도 끔찍한 일입니다. 김정은이 봤을 때 ‘아이고, 내 동지 하나가 남조선에서 제대로 일을 하고 있구먼’이라고 할 일입니다.”

― 북한 체제를 겪은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끔찍할 것 같네요.
“제가 정의로운 대한민국 군인이라거나, 국정원 사람이라면, 하, 정말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무시하고, 통일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탈북자의 날’

▲2024년 강화도 모처에서 맞은 생일에 지인들과 함께.

 

― 문재인 전(前) 대통령은 탈북 어부를 북송(北送)했는데요.
“임종석이 비서실장을 할 때는 저도 분위기를 많이 주시해야 했습니다. 탈북자를 북송하더라도 누구 하나 신경이나 썼을까요? 이어 최근 발언까지, 물론 대한민국 사회가 그만큼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참담했습니다. 저는 윤석열 정부가 적어도 탈북자를 강제 북송시킨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의 책임은 묻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못 하더군요. 지금 탈북자들이 배를 타고 못 오는 이유 중 하나가 ‘남으로 가면 도로 잡아서 돌려보낸다’는 소문도 한몫을 할 겁니다. 북한은 그런 얘기는 정말 빠르게 선전하거든요. 윤석열 정부는 탈북자들이 처음으로 선거 캠프를 꾸려서 지지했던 정부입니다. 태영호 전(前) 의원이 본부장을 하고, 탈북민들이 전국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다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정권인데 너무나 아쉽습니다.”

― ‘탈북자의 날’이 제정되고,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으셨지요.
“훈장은 혼자 받은 것이 아니라 탈북자 모두가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래 바지사장을 많이 했거든요(웃음). 탈북자동지회, 남북통일당, 제대군인 모임, 북한인권단체 등에서 바지사장을 하다 보니 눈에 띄었겠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보다 ‘탈북자의 날’이 제정됐을 때처럼 우리의 마음이 후련했던 적이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하나하나가 정말 시원했습니다. 탈북자들에게 명절이 생겼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입니다. 이제 탈북민들이 훨씬 대한민국을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탈북자들, ‘나는 스타’라고 생각”

김성민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지인은 “여전히 탈북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탈북자 3만4000명 시대. 누군가는 대한민국에서 잘 적응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여전히 탈북자에 대해 이중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탈북자들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탈북자들은 나름 ‘나는 스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면 (국경 지역 출신의 탈북민을 제외하곤) 누구나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나 혼자 온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북에서는 남한에서 넘어온 사람을 굉장히 특별 대접 해주기 때문에 탈북자들도 으레껏 자신들이 남한으로 오면 그런 대접을 받는 줄 알더라고요. 20년 정도 지나야 ‘내가 특별하지 않구나’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 탈북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탈북민들은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북한에 전파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끼리 연대(連帶)하고, 협조하는 것이야말로 통일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봅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북한 인권 활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발만 물러서면 훨씬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이해해라’는 것을 꼭 부탁하고 싶습니다.”

― 북한이 그리운 적은 없었나요.
“모란봉 기슭 대동강변에는 동평양과 서평양을 잇는 옥류교가 놓여 있습니다. 열두 개 교각 밑으로 맑은 물이 흐릅니다. 집에서 학교로 매일 지나던 그 다리 위로 버스며 승용차가 달리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 갈 때에는 어머니가, 집에 갈 땐 담임선생님이 늘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던 다리입니다. 다리 머릿돌 한구석에 장난 삼아 제 이름을 적어놓기도 했었는데, 그곳이 유독 생각납니다.”

“말은 통해도 뇌 구조는 완전히 달라”

▲2024년 12월 21일 자유북한방송 송년회 때 전체 사진.

 

― 자유북한방송 운영의 어려움은 여전하시지요.
“진정한 애국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조갑제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북한 인권 활동도 비슷합니다. 탈북자 단체 중 예산이 없어서 문을 닫은 곳이 꽤 됩니다. 황장엽 선생도 탈북자들에게 ‘남한에서 돈을 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니까 적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탈북민 사업가들이 북한 인권 단체를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하고 유럽과 미국처럼 국내 기업들, 사업가들이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위해 탈북민 단체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북한방송의 새로운 미래도 이 같은 협조와 나눔을 자양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성민 작가의 방 한편에는 선친 김순석 시인의 사진이 놓여 있는데 상당한 미남이었다. 선친은 그가 12세 때 차량 전복 사고로, 어머니 역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한 살 위였는데 두 분의 사이가 지극했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해방 전 평북도 미인대회에서 1등을 했을 정도로 미인이었다. 두 분은 슬하에 1남 5녀를 뒀다. 고향을 떠날 때 그는 “내가 떠나고 나면 부모님 산소는 누가 돌보나”를 걱정했다.

“누나가 다섯인데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남조선으로 간다고 고발할까 봐요.”

― 가족조차 믿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이네요.
“인간성이 말살됐지요. 북한은 겉으로 보면 멀쩡합니다. 평양 지하철 내부에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제외하면 외국인의 눈에는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보일 겁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말까지 통하는 동포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세뇌당해 온 터라 뇌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 최근에는 탈북자들을 찾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국경은 아예 막혔습니다. DMZ보다 더 막혔죠. 그나마 빨리 탈북해 남한에 잘 정착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우리의 맹세’

사실 김성민 작가의 명함에 적힌 공식 직함은 ‘자유북한방송 이사장’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간곡하게,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직함을 ‘김성민 작가’라고 해달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한평생 마음에만 품고 있는 로망은 있지 않은가, 그에게 ‘작가’라는 타이틀은 그런 모양이다.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는 자유북한방송 출범 20주년 행사가 열렸다. 저마다의 말 못 할 사연을 가진 탈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시영 자유북한방송 신임 대표는 말 맺음으로 김성민 작가가 지은 시(詩)를 읽었다.

〈우리의 맹세(盟誓)
다름 아닌 내 것임에도
날 때부터 우리에게 없었던 그것
시장통의 물건이 아니면서도
우리의 부모들이 빼앗긴 그것
그것 없이는 살아도 죽은 목숨인
숨결이며 가치인 자유는
고향으로 안고 갈 우리의 맹세(盟誓)〉

월간조선 02월 호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02-19 “술 마신 얼굴에 숨 쉴 때마다 ‘색색’” 탈북 외교관의 김정은 묘사

 

 "TV에서는 굉장히 크고 비대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좀 작다"

탈북한 리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정치 담당 참사가 방송에 나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처음 대면한 순간의 인상에 대해 묘사했다. 특히 리 전 참사는 "‘술 마신 사람처럼, 왜 저렇게까지 빨갛지?’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옆에 있으면 덩달아 같이 숨 찬다. 색색하는 소리가 다 들린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방영된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리 전 참사는 2018년 11월 쿠바의 국가 수반급 정상인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방북했을 당시 김 위원장과 첫 대면했다고 밝혔다. 당시 행사를 총괄이 리 전 참사였기 때문이다.

리 전 참사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김정은을) 준비 없이 만났다. VIP 라운지에서 대기했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김여정(김정은 여동생이자 노동당 부부장)이 갑자기 활주로 점검을 요청했다. 동선을 살피고 복귀하니까 그 사이 김정은이 (라운지에) 들어와 있더라"고 말했다. 리 전 참사는 "김정은이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을 갖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현장에서 김 위원장이 먼저 "야, 비행기 몇 시에 온다고?"라며 리 전 참사에게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리 전 참사는 김정은 실물을 상세히 묘사하기도 했다. 리 전 참사는 "TV에서보다는 작은 느낌"이라며 "TV에서는 굉장히 크고 비대해 보이는데, 실제로는 좀 작다"면서 "얼굴이 굉장히 빨갛다. 이게 굉장히 특징적"이라고 말했다. 리 전 참사는 "손은 굉장히 통통하다. 손에 살이 많아서 손가락을 쭉 펴면 휘어진 듯 보인다"고 덧붙였다.

리 전 참사는 김 위원장의 건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리 전 참사는 "옆에 있으면 덩달아 같이 숨이 찬다"며 "분명하게 ‘건강한 사람은 아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리 전 참사는 2023년 11월 탈북한 이후 북한에 대한 여러 폭로를 이어오고 있다. 앞선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해서 "북한에 철저히 속아 별 수모를 다 받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문화일보 임정환 기자

 

03.04 북과 남에 존재하는 어리석은 바보들

이 글을 읽고 “이것도 글이라고 썼냐?”고 비난할 줄 알면서도 쓴다. 북한이라는 이상한 나라에서 살아 보지 못한 사람은 이런 한심한 글을 절대로 쓸 수가 없다. 나는 북한은 세금 없는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는 전교조의 교육을 받고 자란 한국의 40·50대 남한 사람들이 북한이 왜 지구상에서 제일 부끄러운 바보들의 나라인지를 알기 바라며 이 글을 쓴다.

 

며칠 전부터 우리 집 출입문의 자동키가 건전지를 교체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동네 마트에 가 보니 어디에 쓰는 것인지도 모를 별의별 건전지들이 참 많다. 그 건전지들을 보는 순간 건전지가 없어서 불편했던 북한 시절이 떠오르며 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가 고향을 떠나던 2000년대 초에도 북한에는 건전지를 파는 곳이 없어서 리모컨과 벽시계 사용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나는 외국 출장을 갔다 올 때마다 건전지를 꼭 사오곤 했다.

 

물론 평양에도 최신식 일본산 기계를 들여놓은 건전지 생산 공장이 있다. 1980년대 초 김정일이 조총련을 통해서 건전지 생산 설비를 들여왔다. 처음 한두 달은 건전지 생산이 잘되었다.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장군님 배려로 고급 건전지를 마음껏 쓰게 됐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몇 달도 못 가서 일본에서 들여온 기계들이 멈췄다. 그러자 북한은 일본 측에 항의를 했고, 일본 기술자들이 날아왔다. 건전지 생산 공장에 간 일본 기술자들은 기계에 물려 있는 철판부터 측정해 보더니 이 철판이 어느 나라 것이냐고 물었다.

 

북한 측은 우리가 자체로 생산한 철판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일본 기술자들은 이 기계는 철판의 정확한 두께와 강도를 보장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멈춘다. 기계의 고장이 아니라 당신들이 철판의 기술적 요구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는 떠났다.

 

사실이 그랬다. 처음에 생산이 잘되었던 것은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올 때 함께 건네받은 시험생산용 철판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북한은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일본의 철판과 같은 것을 생산할 수 있다고 장담했으나 계속 실패했다. 북한의 기술로는 철판의 정확한 두께와 강도를 맞출 수가 없었다.

 

그나마 먼저 생산했던 고급 건전지들은 휴지장 같은 북한 돈을 받고 몽땅 팔아 버렸다. 그러니 외화가 없어서 일본에서 철판을 사올 수도 없다. 그렇게 많은 외화를 주고 사왔던 건전지 생산 공장은 돌아가지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건전지를 구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이것이 한국인들은 하찮게 여기는 건전지 하나에 비쳐지는 내 고향의 모습이다. 또 내가 50년 동안을 살아왔던 공산국가 북한의 현실이기도 하다.

 

나도 내 형제들이 사는 내 고향의 부끄러운 허물을 들추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인민들은 식량이 없어 배고프고 건전지 따위도 없어서 어둡고 불편한 한생을 살아가야 하는 저 북한 공산국가의 현실을 한국 국민도 알아야 자기들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도 생길 것이다.

 

물론 종북 분자들은 그까짓 건전지 따위를 가지고 호들갑을 떤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21세기인 지금에 그따위 건전지 하나도 못 만드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바보인지는 당신들도 알아야 한다.

 

북한에 흔한 것은 오직 김씨 가문의 우상화 작품들과 선전선동, 즉 말뿐이다. 신발도 밥사발도 숟가락도 심지어 소소한 생활 용품인 칫솔·치약마저도 부족하다. 온 가족이 수건 한 장을 걸어 놓고 몇 년씩 써야 하고 공장에서 나온 화장지를 쓰는 사람은 부르주아다.

 

김일성 가문은 북한을 거지·바보들의 나라로 만들었다. 나는 그것이 싫어서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건전지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드는 김일성 가문의 바보들을 피해서 한국으로 왔는데 한국에 와 보고 정말 실망했다.

 

북한의 300만 노동당원들보다 훨씬 더 김일성 가문에 충성하는 종북 바보들이 이 땅에 차고 넘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몇몇 전직 대통령도 당 대표도 그런 바보들이었다. 속담에 팔자 도망은 못 한다더니 내 팔자는 공산주의 바보들 밑에서 살 팔자인가 보다.

 

오늘도 북한에 충성하는 바보들이 한국의 정치판과 법조계를 깔고 앉아서 대통령과 총리와 국방부 장관·경찰청장 모두를 감옥에 잡아넣고 나라를 북한과 중국에 갖다 바치려 한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국민은 문재인·이재명 같은 북·중의 간첩과 역적을 지지한다. 배에 기름이 꽉 찬 한국의 바보들은 공산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독약인지도 모르고 그냥 좋다고 불나방 같이 덤빈다. 그런 바보들 때문에 남·북한 전체가 위험하다,

 

21세기에 건전지도 하나도 못 만드는 북한 공산주의 바보들과 세상 최고의 반도체를 만들면서도 북한에 충성하는 한국의 바보들 중에서 누가 더 멍청한 바보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그리고 제발 정신들 차리고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라!

스카이데일리 ▲ 김태산 트루스코리아 상임대표·前체코주재북한무역 대표

03.06 이시영 자유북한방송 신임 대표

“북한 정권의 붕괴, 딱 하나만 보고 성큼 걸어가겠다”

⊙ 김일성종합대 출신으로 ‘당 간부’ 꿈꾸다 돌연 ‘반역자의 딸’로 낙인찍혀 서른에 탈북
⊙ “언어가 통하는 것 외에 모든 것을 대한민국에서 새로 배워”
⊙ “북에서는 자유북한방송을 ‘민족 반역자 중에서 가장 악질 반역자가 하는 방송’이라고 해”
⊙ “국정원 조사 받으면서도 ‘장군님의 딸로 죽겠다’던 나의 달라진 모습, 북한 주민에게 전하고 싶다”

이시영
1982년 양강도 해산 출생. 특목고 외국어학원, 김일성종합대 컴퓨터 단과대학 졸업 / 2012년 탈북, 자유북한방송 기자, 국장 역임, 現 자유북한방송 대표

 

조막만 한 얼굴에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체구의 야리야리한 손녀를 두고 친할머니, 외할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저 여성 당 간부라 함은 살집이 있어서 남자들을 휘어잡아야 하는데, 자가 그럴 수 있같어? 걱정이다 걱정.

 

할머니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북한의 엘리트로 자라 ‘당 간부’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손녀딸이 ‘반역자의 딸’로 낙인찍혀 목숨을 걸고 탈북하고, 대한민국에서 북한 주민에게 실상을 알리는 대북(對北) 방송의 대표가 될 줄 말이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이사장이 20여 년간 이끌어오던 대표이사 자리를 이시영 국장에게 물려줬다. 지난 2월 4일에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이 있는 강서구 마곡동에서 이시영 대표를 만났다.

‘북한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북한의 특목고에 해당하는 외국어학원, 김일성종합대 컴퓨터 단과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큰 규모의 식당을 두 개나 운영했던 그는 서른이 다 되어서야 탈북해 2013년도에 한국 땅을 밟았다. 북한의 초(超) 엘리트에서 ‘반역자의 딸’로 신분이 수직 낙하한 기구한 사연이 있는데다, 아직 북에 가족이 남아 있기에 그는 조용히 살려고 했단다. 하지만 북한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이를 알리기 위해 TV 조선에서 방송한 〈모란봉 클럽〉에 출연하며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북한도 살 만한 곳이 아니냐’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서 ‘북한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낱낱이 얘기하고 싶어서 방송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막상 방송국에서 다른 탈북자 패널들을 만나보니 저와는 비교도 안 되게 사람 취급을 못 받으면서 살다가 넘어온 사람들이 많더군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 북한 사람들끼리도 서로 처지를 알지 못한다는 소리네요.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가르치고, 가진 자나 배운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북한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철저한 계급 사회이고 나와 출신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너와 나는 다른 종자(種子)’라며 외면합니다. 북한의 상위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저와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 평등, 분배를 얘기하면서 세상 어디보다 계급 사회라니 아이러니하죠.
“왕과 신하, 노비가 있는 거죠.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다시 태어났다 싶을 정도로 새로 배우는 것들이 많아요. 대한민국은 제가 북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몇천 배 대단한 세상이에요. 탈북 전에 라디오를 들으면서 막연하게 ‘남한은 이런 곳이겠구나’ 상상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세상입니다. 30년간 누구보다 북한을 찬양했던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에서 느낀 것을 북한 주민에게 전달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라디오 방송을 기다리는 북한 주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꽃제비가 재벌 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2024년 12월 18일에 열린 ‘자유북한방송 20주년’ 송년회에서 김성민 이사장과 함께한 이시영 대표.

 

〈모란봉 클럽〉에 출연하며 한국 생활에 적응해 가던 이시영 대표는 고향에서부터 삼촌이라고 부른 최정훈 당시 자유북한방송 국장을 따라 자유북한방송 멤버들과 1박 2일 야유회에 함께했다. 몇 달 뒤에 그는 김성민 이사장을 찾아가 일자리가 있는지를 물었다. 한국 회사에 다니면서 TV 출연을 하는 것이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김성민 이사장이 그러시더군요.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누구는 수준이 있네, 없네’ ‘공부를 많이 했네, 무식하네’라며 헐뜯는데 아무 쓸모없는 얘기라고요. 탈북민들은 고향을 떠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인데 서로 흠집 내는 것은 자신의 허물을 들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당신도 북한에서 엘리트였으니 그리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북한 주민에게 진실을 전하는 일을 하면 된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았지만, 대한민국에서 재벌이 되어 통일 시대에 북한에 빌딩을 지을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콕 와닿았습니다.”

― 태어날 때 조건은 나쁘지만, 본인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죠.
“당연한 말인데 그게 그렇게 놀라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 하나라는 것, 그것에 동참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김 이사장은 ‘탈북민들이 자유북한방송을 디딤돌로 삼아서 대한민국에 제대로 적응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덧붙였어요. 북에서 배웠던 지식만으로 대한민국 사회에 잘 적응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럴 때 자유북한방송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있으면 조금 낫지 않겠느냐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 보통은 네게 기회를 줄 테니, 여기 뼈를 묻으라고 할 텐데요.
“그러게요(웃음). 오히려 여기서 이력을 충분히 쌓으라고 하시더군요.”

“김성민 이사장을 만난 것은 천운”

이시영 대표가 첫 업무로 주문받은 것은 ‘북한 주민용 기사 작성’이었다. 글이라고는 써본 적이 없던 이 대표는 ‘조선중앙통신’에서 ‘위대한 수령 동지께서’라고 쓰는 방식처럼 대한민국 찬양 기사 같은 것을 썼다. 김성민 이사장이 이 대표의 글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북한에서 기자는 별 볼 일 없는 직업이에요. 당에서 지시하는 대로 ‘위대한 수령 동지의 영도하에 올해 어느 농장에서 애초 계획의 300%를 초과 달성했다’라고 쓰는 사람이 기자입니다. 일반인이 장사해서 돈을 버는 것은 불법(不法)이기 때문에 돈과 관련된 취재거리도 없고, 체제 비판을 할 수도 없고, 사실 위대한 수령 동지가 다 하는 거니까 쓸 기사가 없습니다. 제가 쓴 기사를 보고 김성민 이사장이 북한식이라면서 ‘대한민국의 기자는 사실만 전달하는 사람이야. 그에 대한 의미 부여와 분석은 독자가 하는 것이지’라고 했습니다. 그때 또 놀랐죠. 당의 지침대로가 아니라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한다는 것이 낯설어서요.”

― 온통 신기한 일투성이였군요.
“언어가 통한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교육받고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느꼈습니다. 실제 탈북자들도 처음은 대한민국의 자유를 느끼면서 행복해하다가 나중에 변질되고, 같은 탈북자끼리 사기치고 싸우고, 뒤에서 헐뜯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 그거야 탈북자뿐 아니라 어느 사회에나 있는 일이지요.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완전히 새로 태어났습니다. 김성민 이사장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죠. 초창기 헤매던 제게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서 좋다’며 호방하게 웃었고, 실수를 할 때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며 칭찬해 줬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변함없는 분은 처음 뵀어요.”

“삶은 계란을 마음껏 먹는 세상”

 ▲제19회 자유북한주간 행사에 참여한 이시영 대표.(왼쪽에서 네 번째)

 

이시영 대표는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묻는 말에 필요한 말만 정확히 골라서 답했고, 자기 의사 표현이 똑 부러졌다. 앳된 외모 탓에 혹여 그가 외부의 바람에 휩쓸릴까 걱정된다면 그건 기우(杞憂)에 불과할 것 같았다. 학습 능력이 빨랐던지라, 이 대표가 자유북한방송에 합류해 석 달 정도 지나니 업무가 어느 정도 손에 익었다. 김 이사장은 그에게 기사에 국한되지 말고 프로그램도 기획해 보라고 했다. 이시영 대표가 북에 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나와 비슷하게 살다가 탈북해 남한으로 간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였다.

“방송에서 미국, 한국 정치권 뉴스, 북녘 동포를 위한 소식 등 여러 가지를 전해주는데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탈북하려면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하나, 탈북한 사람들은 정말 남한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까였습니다.”

― 그게 제일 궁금할 것 같긴 합니다. 남한에서 어떤 당국에 잡혀간 것은 아닐까 궁금할 테고요.
“맞아요. 제가 여기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면 북한 동포들이 ‘나도 탈북하면 저렇게 살 수 있을 거야’라는 마음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자유북한방송이 유튜브를 했는데, 저는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음식 얘기를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수백, 수천 가지 음식이 있고 진짜 맛있고 신기하다고요. 동영상으로 찍어 먹는 거를 보여줬습니다.”

― 뭐가 가장 신기하던가요. 음식의 가짓수, 아니면 퀄리티, 뭐가요?
“삶은 계란, 그게 가장 신기했습니다. 북한에서 남한 드라마를 보는데 찜질방에서 삶은 계란 먹는 장면이 자주 나와요. 북한에서 삶은 계란은 생일, 명절, 수학여행, 등산 가는 날에만 먹을 수 있거든요. 엄마가 다른 형제들 모르게 도시락 사발 밑에 한 알씩 넣어줍니다. 그런데 남한은 찜질방에서 매번 삶은 계란을 먹는 거예요. 게다가 나쁜 사람에게 날계란을 던집니다. 너무 이상했어요. 돌을 던져야지, 저 아까운 계란을 왜 던지나 싶어서요. 북한에서는 고기를 배급받아도 물에 빠뜨려서 멀건 국으로 먹는 것이 다인데 여기는 삼겹살을 불판에다 구워 먹어요. 더구나 여자들은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안 먹습니다. 저는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영상으로 찍었습니다.”

“도와달라고 하면 다들 흔쾌히 도와줘”

― 2012년에 탈북했는데 삶은 계란을 마음껏 먹는 것이 그토록 신기했다니요.
“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북한에서 식당 가는 사람은 돈 많은 부자예요. 여기는 삼시 세 끼를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꿈도 못 꾸죠. 그래서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았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일하면 삼시 세 끼 식당에서 밥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북한에서 여자가 감히 어떻게 운전을 하나요? 자동차도 없을뿐더러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참 희한한 것이 탈북자들이 펜션으로 1박 2일 야유회를 가면 주차장 사이즈부터 확인해야 해요. 같은 동네 사는 사람들은 카풀해서 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요. 탈북자들에게는 약간의 보상심리랄까, 남한에 와서 자동차도 돈 주고 사고 운전도 마음껏 한다는 것, 그런 마음이 남아서 꼭 혼자 차를 몰고 옵니다(웃음).”

― 북에서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에서 프로그램 기획자가 되어보니 어땠나요.
“누군가가 듣는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정말 신기하고 설레서 프로그램을 수없이 만들었습니다. ‘탈북하려면 누구를 통해서 어디로 도망쳐라’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이건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을 북한 주민뿐만 아니라 보위부도 듣고 있으니까요. 북한 주민들의 인식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북한 사람들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탈북자들은 남한에 오면 자기가 모르는 것이 탄로 날까 봐 몰라도 아는 척을 하곤 해요. 제가 경험한 남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 탈북자라서 뭐를 몰라요. 도와주실래요?’라고 물으면 열 명이면 열 명이 다들 흔쾌히 도와줬습니다. 그게 대한민국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물어가면서 하나하나 배웠습니다.

하루는 김성민 이사장이 ‘예산안 짜는 것이 어려운데 해보겠니’라고 하기에 프린트한 종이를 잔뜩 들고 갔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누구한테 물어서라도, 필요하면 통일부 앞마당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배우겠다고 말하면서요(웃음). ‘이사장님이 외부 활동을 하신다면 저는 방송 안살림을 책임질게요’라고 당돌하게 말했는데 그런 것을 좋게 봐주셨습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자유북한방송이라는 게 진짜 있어요?’

― 자유북한방송에서 일하면서 보람을 느꼈을 때는요.
“탈북자들이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때 ‘여기 정말 자유북한방송이 있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국정원 조사를 마치자마자 찾아옵니다. 북에서는 탈북민이 주축이 된 자유북한방송을 ‘민족 반역자 중에서 가장 악질 반역자가 하는 방송’이라 말합니다. 우리 방송을 들었다 하면 처벌이 더욱 세집니다. 탈북자들이 방송국을 찾아와서 ‘정말 이 방송국이 있네’라고 말할 때 뿌듯했습니다.”

― 반면 상처를 받는 일도 있었겠죠.
“금전적으로 넉넉지 못하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우리를 다르게 보는 것은 각오했어요. 그런데 방송국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나가서 우리를 헐뜯을 때는 많이 속상했습니다. 김성민 이사장이 ‘우리를 딛고 일어서서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만큼 뿌듯한 것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우리를 깎아내리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라고 할 때 정말 이 사람은 그릇이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친북(親北) 세력이 우리를 공격할 때는 오히려 신이 났습니다. ‘와, 우리가 얼마나 잘하기에’ 싶어서 늘 파이팅 하고 싶던데요(웃음).”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으리라’가 신념

 ▲2019년도에 북한을 방문한 해외 동포가 촬영한 평양시의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음. 사진=뉴시스

 

이시영 대표는 양강도 해산에서 태어났다. 고등중학교 6년을 양강도에 있는 특목고 외국어학원을 다녔고 김일성종합대학 컴퓨터 단과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김정일은 1999년도에 러시아를 다녀오고 그곳의 컴퓨터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김일성종합대학의 자동화학부에 있던 컴퓨터 학부를 단과대학으로 승격시켜서 3년 6개월 만에 졸업시키는 속성반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통상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이라고 해도 농촌 동원, 건설 현장 지원 등에 나가느라 졸업 때까지 6~7년이 걸리기 마련이다. 1기 출신인 이시영 대표는 4학년 언니들보다 빨리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부친은 북한 정권의 해외 노동자 파견으로 러시아에서 5년간 보위원으로 일하다 세관에 배치를 받아 달러를 다뤘다. 어머니는 당 간부 출신인데 아버지 덕에 ‘돈 걱정 없는 당 간부’로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해산 시장을 지냈다. 어머니는 다섯 자매였는데 큰이모는 우리로 치면 판사로 일했고, 두 명의 이모는 의과대학, 교대를 졸업했다. 친할아버지댁은 김일성이 다녀간 유적지로 지정돼 집 앞 화단을 당에서 관리해 줬다.

“대학 입학 때까지 제 신념은 ‘나는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친가, 외가 모두 장군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집안이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희한했던 것은 권력가로 진출하지 않은 이모가 둘 있었는데 북한 국영 식당 지배인인 이모의 허세가 장난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일개 식당 지배인인 이모 앞에서 조직비서, 책임비서, 도당비서들이 다들 굽실거렸습니다. 이모가 싸주는 도시락과 담배, 맥주를 받아가려고요.

판사였던 이모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사람들이 이모한테 ‘오늘 집으로 기름 넣었습네다, 쌀 좀 보냈습네다’라고 하면 큰이모는 그걸 그렇게 고마워했습니다. 가끔은 집으로 돌아와서 ‘그 사람은 잘못이 없는데…’라며 자신이 판결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 사회에서 권력을 잡더라도 돈을 다루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김대(그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이렇게 지칭했다)에 들어가기 위해서 평양에 왔는데 또 다른 세상이더군요. 여태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제일 못사는 축에 속했습니다.”

― 평양은 평양이군요.
“출신 성분을 얘기하는데 저와 차원이 달랐고, 수업에 들어오면서 남한 수집물이 들어 있는 USB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니더군요.”

― 남한물을 보기만 해도 교화형, 때로는 숙청 아닙니까.
“나를 건드릴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처럼 당당하게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도 돌연 변해서 장군님 찬양을 하는 거예요. 제가 분명히 남한물 소지한 것을 봤는데 ‘장군님, 장군님’을 외치면서 목이 쉴 때까지 부르는 겁니다. 그때 사람은 앞과 뒤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양에서 식당 차려

북한에서는 지방에서 상경해 평양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여자들의 경우 결혼하지 않으면 평양에 배치를 받지 못한다. 이시영 대표는 대학 졸업 후에 다시 양강도 도청으로 배치받았다. 그는 조직 문서원으로서 아침마다 출근해 당비서 방을 청소하고, 산처럼 쌓인 담배꽁초를 치우는 허드렛일을 맡았다. 도청 공무원임에도 월급도 없고, 배급도 없었다. 컴퓨터가 없어 온종일 먹지에 대고 회의록을 베끼고 나면 손이 새까매졌다. 의대를 졸업한 이후에 의사의 길을 걷지 않고 평양에서 개인 식당을 했던 이모가 ‘평양은 아무나 올라올 수 없다. 식당을 운영해 임시 거주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식당을 하려면 미화 5000달러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아버지께 ‘저 시집갈 때 주시려고 모아놓은 돈 있으면 미리 주세요. 평양 가서 식당을 운영하려고요’라며 사정을 했습니다. 평양의 좋은 집안 자제를 만나 결혼하기를 원했던 아버지는 많이 망설였지만, 제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 아버지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겁니다.
“그럼요. 아버지는 늘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식인데 아버지는 러시아에 5년간 있다 오신 다음에 제 남동생을 앉혀두고 ‘내가 큰 나라에 가보니 여자들을 최우선으로 대접하더라. 누나를 극진히 대해라’고 할 정도로 늘 저를 위해주셨습니다.”

이시영 대표는 아버지가 준 달러를 들고 평양에서 식당을 열었다. 평양냉면 위주로 양꼬치, 국수 등을 팔았다. 스무 살짜리 식당 접객원을 뽑고, 김일성종합대 동창들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그렇게 반년 만에 식당이 자리 잡혔다. 2006년 당시로서는 식당 주인이 20대인 것도, 종업원들이 20대 초반인 것도 드문 일이었다. 식당이 번창하자 공영 식당의 위층에 있던 2층 맥줏집을 개인에게 넘긴다고 하기에 그것도 이어받았다. 1층 국영식당은 6시 반까지 운영하고, 2층 맥줏집은 7시부터 운영하는 형태였다.

공짜 술, 공짜 밥이 일상인 북한 간부들

― 평양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것은 불법 아닙니까.
“불법이죠. 하지만 장마당처럼 눈감아 주는 겁니다. 경찰들이 숱하게 왔는데, 그들은 신분증이 곧 돈이에요. ‘우리 이 구역 안전부 감찰이야’ 하고 들이닥치면 그냥 테이블 내주고 공짜 술을 줍니다. 돌아갈 때면 담배도 한 갑씩 찔러 줍니다.”

―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나요.
“매일 최소한 열 테이블은 공짜 테이블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오면 식당 주인은 만날 숨을 수밖에 없었어요.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면 무한정 공짜를 요구하니까요.”

― 진짜 돈 내는 손님은요?
“어떤 날은 공짜가 열 테이블, 돈 내는 손님은 세 테이블인 때도 있었어요. 안전부 감찰이래도 월급, 배급이 일절 없으니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낮에는 공짜 밥을 먹고, 저녁에는 공짜 술을 먹는 겁니다. 너무 심하다 싶어 ‘너보다 높은 계급에 얘기할 거야’라고 윽박지르면 매일 오다가 3일에 한 번꼴로 오고….”

― 날강도가 따로 없네요.
“제가 남한에 와서 제일 신기한 것 중의 하나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반드시 계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간부 사모님들께 인사를 드릴 때 가끔 ‘어머, 그 반지 예쁘다’고 하면 그건 빼서 달라는 얘기였어요. 두 번 얘기했는데도 눈치 없이 주지 않으면 다음부터 슬슬 제재가 들어옵니다.”

‘지배인 만세’

 ▲이시영 대표(맨 오른쪽)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한 모습.

 

그렇게 살던 2006년 4월에 탈이 났다. 4년 아래 남동생은 키가 178cm로 훤칠했는데 어려서부터 백혈구 감소증에 시달려 병으로 인해 집에서 가까운 경무부(헌병대)에서 군사경찰로 근무했다. 북한군에서는 ‘풀과 고기를 바꾸자’라는 김정일의 방침을 관철한다고 군부대마다 염소와 토끼를 키운다. 군인들이 교대제로 염소방목을 하는데 몸이 아픈 동생이 염소 방목을 나갔다가 산에서 잠이 들어 부대로 돌아 올 때쯤 염소 두 마리를 잃어버렸다. 그러잖아도 동생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분대장이 이를 빌미로 남동생을 구타했고, 남동생은 병원에 실려가서 한 달 만에 사망했다. 심장이 약했던 아버지는 이 충격으로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연이어 아들과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직장에 출근해야 함에도 충격으로 인해 몸져누웠다.

식음을 전폐하는 어머니를 보고 이모들은 평양에 사는 딸 곁으로 가라고 했다. 평양에는 혼자 사는 과부들을 위한 당 간부 일거리가 있었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슬픔을 잊으려는 듯 일에 매진했다.

“애초 어머니 자리에 가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엄마가 직원에게 월급 준다, 배급 준다’며 투서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중앙당에서는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니 잘못을 따지지 마라’고 덮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굉장히 끈질겼어요. 장성택 라인으로 투서를 지속적으로 넣었고, 엄마는 엄마대로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일할 뿐’이라며 편지를 넣었습니다. ‘월급 준다’는 말에도 별 반응이 없던 중앙당은 의외의 곳에서 어머니를 몰아세웠습니다.”

― 어떤 대목에서요?
“직원들이 지배인(어머니)이 잘해주니까 정말 고맙다면서, 가끔 회식을 할 때 ‘지배인 만세’를 한 겁니다. 일종의 건배사였던 거죠. 이 얘기가 전해지자 난리가 났습니다. 어머니가 반(反)정부의 기조단체를 결성했다면서 한순간에 반역자가 된 거예요. 당 간부들은 어머니에게 얼른 지방으로 내려가 숨어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일순간에 이시영 대표의 어머니는 수배지가 주요 기차역에 붙는 반역자가 됐다. 군경들이 할머니, 이모, 이시영 대표 등 온 가족을 따라다니며 감시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나자 다들 지쳤다. 이모들은 이 대표의 어머니에게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며 “네가 죽어야 우리가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이시영 대표를 불렀다. 이미 최후를 결심한 사람 같았다. 이 대표는 울며불며 엄마에게 매달렸다.

탈북

인터뷰 내내 강단 있고, 똑 부러진 모습을 보였던 이 대표는 이 대목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이날의 기억이 선명해 보였다.

“‘나는 엄마가 반동이든 정치범으로 끌려가든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며 펑펑 울었습니다. 엄마가 ‘그건 사는 게 아니야. 나는 언제 햇빛 한 번 보며 걷니’라고 하시더군요. 그제야 우리 엄마가 지난 2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가 실감이 났습니다. 울며불며 매달리자 엄마가 ‘그럼, 우리 북을 떠날까?’라고 했습니다. 엄마가 숨어 지내면서 라디오 방송을 매일 들었거든요.”


― 그래서 남한으로의 탈북을 결심한 건가요.
“아니요. 엄마가 말하기에 ‘그건 안 돼. 꽃제비는 북에서 탄압받았으니까 남한에서 불쌍하다고 받아준 거지만, 우리는 여기서 혜택을 다 보고 충성했는데 왜 받아주겠어.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죽일 거야’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별다른 방법이 없더군요. 결국 엄마를 남한으로 보내고, 엄마가 ‘장군님 말씀에 따른 것밖에 없는데 억울하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오해가 풀리면 다시 북으로 돌아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탈북 루트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시영 대표는 당시에도 평양에서 잘나가고 있었고, 어머니는 수배자인지라 마땅한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1년 넘게 다양한 방법을 알아본 끝에 마약을 하고, 밀수하는 고향 친구들과 수시로 어울리며 밀수꾼으로 위장해 탈북하기로 했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시영 대표에게 친척들은 사촌 동생을 스파이로 붙였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2012년 11월의 어느 날, 이시영 대표는 어머니와 사촌 동생을 데리고 탈북했다. 강을 건널 때 온몸이 얼어붙어 어머니는 저체온증에 시달려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여성 셋은 손발톱이 모두 빠져 한족이 사는 집에서 의사소통도 되지 않았지만 두 달간 머물며 치료해야 했다. 두 사람은 먼저 서울로 떠났고, 이시영 대표는 2013년 4월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때는 바야흐로 메르스 시국, 국정원 직원은 이 대표에게 마스크를 건넸다.

‘비록 이곳이 남한이라도 나는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겠다’

“아, 남한에서는 나를 바이러스 취급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데려가서 피검사한다기에 ‘이놈들이 탈북자를 피 뽑아 죽인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이구나’ 싶었습니다. 의사가 엄마 이름을 대면서 잘 지낸다고 했지만, 엄마 얼굴을 보지 못하니 의심은 계속 쌓여갔습니다. 국정원에 조사를 받으러 갔더니 CCTV가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여기나 저기나 감시는 똑같구나’ 싶어서 계속 북한 찬양 노래를 불렀습니다. ‘비록 이곳이 남한이라도 나는 장군님의 딸로 살다 죽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끝없이 의심했군요.
“네. 창밖을 보니 사람들이 걸어오지 않고 차를 타고 오기에 그건 좀 신기했습니다. 조사를 받을 때 중국에 오래 거주하다가 넘어온 두 명과 같이 생활했어요. 그 언니들한테 ‘죽이려면 빨리 죽이지 왜 이렇게 잘해주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침마다 바나나, 우유를 주고, 북에서 비싼 ‘미샤’ 화장품이며 생리대를 풍족하게 줬거든요. 두 명이 저를 보고서 ‘이래서 직행들은 안 돼. 아무것도 몰라’라고 할 때도 저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습니다.”

― 다시 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랬겠지요.
“저도 북에서 라디오를 들어서 상상은 했지만, 엄마의 안전이 보장된 후에 저는 다시 돌아가면 그뿐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국정원 직원이 삼성 컴퓨터를 제 앞에 놓고 ‘시작합시다’라고 하더군요. 뭘 시작하느냐고 했더니 ‘다 알고 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또 쳐다봤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들은 제가 김일성대 컴퓨터학부를 졸업한 해커로 생각하고 있더군요. 저는 졸업 후에는 컴퓨터를 다룬 적이 없는데…. 하다못해 남한으로 내려온 경위라도 컴퓨터로 적으라고 했는데, 자판이 북한과 달라서 독수리 타법으로 치니까 국정원에서 황당해하더군요(웃음).”

“북한 정권 무너지는 날까지 걷겠다”

국정원 조사를 끝마치고 꿈에 그리던 엄마를 만났다. 그의 어머니는 진찰 과정에서 병이 발견되어,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다. 모녀는 국정원이 제공한 11평짜리 아파트에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3년은 많이 힘들었단다. 북한에서 잘살았던 때 생각이 나고, 남한의 모든 것이 새로워서 받아들이기가 꽤 어려웠다.

“솔직히 북에서 살 때는 잘난 척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출신 성분 따지고 그랬습니다. 사람들끼리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따뜻한 마음, 나눔, 희생하는 마음은 모두 대한민국에서 배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탈북민이 끊겼지만, 이 땅에 있는 3만5000여 명의 탈북자가 북한 정권의 피해자이자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 방송국을 어떻게 꾸려갈 생각입니까.
“꿈꿔본 적도 없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그냥 김성민 이사장의 말씀을 잘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정말 행복하니까, 아직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욱 불쌍합니다. ‘나 정말 잘 살거든. 너희 때문에 너무나 가슴이 아파’라는 말을 방송을 통해 꼭 전하고 싶습니다. 방송이 번창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초심(初心)은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북한 정권의 붕괴, 딱 하나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가지겠지만, 불법 유턴하지 않고, 꼼수 부리지 않고 묵묵히 걷겠습니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그들이 온전한 자유를 찾는 날까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월간조선 03월 호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03.20 北 주민 강제북송 논란 재점화… "유엔사 군정위도 속였다"

귀순 의사 밝혔으나 강제북송… 절차적 위법 논란
정치적 고려 있었나… “北과의 관계 개선 목적”
영장 없는 경찰특공대 개입도 조사해야

▲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을 통해 강제 북송되는 귀순 어민이 군사분계선(MDL) 선상에서 북한군에 두 팔이 잡히자 엉덩이를 최대한 뒤로 빼며 몸부림치고 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감춘 채 “귀순 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통일부는 12일 귀순 어민 강제 북송 장면을 촬영한 사진 10장을 공개했다. 통일부

문재인 정부가 2019년 귀순 의사를 밝힌 북한 주민 2명을 강제북송한 것은 헌법과 국제법을 위반한 행위라는 논란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귀순 의사를 밝힌 탈북민을 적법 절차 없이 북한으로 송환한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 보호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강제송환 당시 이들이 극렬히 저항하며 무릎으로 기어가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파장이 컸지만 국내 언론들은 상대적으로 소극적 보도를 했다.지난 2월 중순 관련자들에 대한 1심 재판 결과가 '선고유예'로 나오자, 결과에 댜ㅐ한 논란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귀순 의사 밝혔으나 강제북송 절차적 위법 논란

2019 10월 말, 북한 김책항에서 출항한 어선에 탑승한 북한 주민 19명 중 3명이 선장에 대한 불만으로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증거 인멸을 위해 16명을 추가로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이후 3명 중 1명이 북한 보위부에 체포되었고, 나머지 2명은 도주 과정에서 NLL 인근 해역까지 남하했다.

 

이들은 112일 우리 해군에 발견되었으며, 해군 1함대사에 승선한 뒤 귀순의향서를 작성했다. 이후 서울 대방동 소재 합동조사팀(군합신소)으로 이송되었고, 신문 과정에서 다시 귀순의향서를 제출했다. 조사 과정에서 복수의 신문관은 이들의 귀순 의사가 명백함을 확인했으며, 기존의 귀순 절차에 따라 심층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국정원 대북전략국은 이들의 범죄 혐의를 문제 삼아 강제송환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14, 이들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백이 보고되자 청와대는 즉시 북송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115일 북한과 접촉해 추방 결정을 통보했다.

 

통상적으로 해상에서 귀순한 탈북자는 군경 합동신문 조사를 거쳐 귀순의향서를 작성한 경우에만 신문을 계속 진행하고, 만약 본인이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경우, 신원 조사 후 본인이 원하면 송환하는 절차를 따른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합동신문조 조사관들이 강제송환의 위법성을 수차례 보고했음에도, 청와대와 국정원은 실무진의 의견을 무시하고 신문을 중단한 채 북송을 강행했다.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 강제 북송은 헌법 위반

헌법 제3조에 따르면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귀순 의사를 밝힌 북한 주민을 강제로 송환한 것은 헌법상 국민 보호 의무를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또한, 국제법상 강제송환 금지 원칙(Non-refoulement)’에 따르면, 본국에서 고문이나 처형 등의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송환하는 것은 금지된다. 북한은 탈북자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고문 및 공개 처형 등의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곳으로, 이에 따라 국제엠네스티와 유엔 인권보고관 등도 당시 한국 정부의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는 북한 주민 2명이 16명을 살해한 흉악범이므로 난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법조계에서는 살인 혐의가 있다면 국내에서 정식 수사와 재판을 거쳐 처벌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사법 절차 없이 강제 송환한 것은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또한, 북한이탈주민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어디에도 북한이탈주민을 추방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다. 살인범일 경우에도 정착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뿐이며, 형사 처벌은 국내 법체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북송 과정서 절차 무시 유엔사도 속여

문재인 정부는 북한 주민 2명을 강제 북송하면서 기존의 절차를 무시했다. 일반적으로 귀순자를 북한으로 송환할 경우, 유엔사 군정위를 통해 휴전협정 위반 여부를 검토하고, 본인의 귀순 의사를 다시 한번 확인받는 것이 70년간 유지된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이러한 절차 없이 117일 국정원이 유엔사 군정위를 속이고 북송을 강행했다.

 

당시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종합정책질의 도중 뉴스1 기자가 촬영한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의 휴대폰 화면에는 JSA 근무 장교가 보낸 지난 2일 삼척으로 내려왔던 북한 주민 2명을 오늘 15시 판문점을 통해 송환하는데, 국정원과 통일부가 의견 정리를 못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는 정부 내부에서도 강제 북송 결정이 논란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고려 있었나 과의 관계 개선 목적

이번 강제 북송 결정이 정치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11 5일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 모친상에 대한 조의를 표명했고, 같은 달 25~26일에는 부산에서 한·아세안(ASEAN) 특별정상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당시 정부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참석을 추진하고 있었던 만큼,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귀순 어민을 인신 공양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법원, 정부 관계자들 선고유예 철저한 재수사 필요

219,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재판장 허경무)는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 서훈 전 국정원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등에 대해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이들의 행위가 헌법과 법률에 위반된다고 인정하면서도, 제도적 개선 없이 개인을 처벌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정치권과 법조계에서는 국가 공무원이 국민의 생명권을 자의적으로 박탈한 사건이라며 철저한 재수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경찰특공대가 법원의 영장 없이 강제력을 행사해 귀순 의사가 있는 북한 주민을 송환한 것은 헌법 제12조 신체의 자유 조항을 명백히 위반한 것으로, 관련 공무원들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북한 주민 2명의 강제송환은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제법을 위반한 사건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정부의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여진 편집위원 기자jebo@skyedaily.com

 

03.25 北 인권 지원, 美가 안 한다면 한국이 하자

▲"국제 원조 줄여선 안된다" - 지난달 5일 미국 워싱턴 DC 의회의사당 앞에서 미 국제개발처(USAID) 폐지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USAID 원조를 받는 사람들의 사진과 관련 피켓을 들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구조조정 여파는 북한 인권 단체와 지한파 싱크탱크 등에도 미치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트럼프 미 대통령이 보조금을 삭감하면서 국내외 북한 인권 운동 단체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 북한 인권 단체에 연간 1000만달러를 지원해온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국(DRL), 민주주의진흥재단(NED) 예산이 삭감됐다. NED의 경우 작년 대북 방송 등 25개 사업에 500만달러를 지원했다. 1982년 만들어진 NED는 북한 인권 운동 지원과 차세대 탈북민 지도자 양성도 도왔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대북 인권 단체 지원을 통제할 때 NED 지원금이 숨통 역할을 했다. 전 세계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북한 주민에게 민주주의를 전파하던 미국의소리(VOA)와 자유아시아방송(RFA)도 최근 신규 프로그램 송출을 중단했다. 두 매체의 한국어 방송에도 연간 1000만달러의 미국 보조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민들은 “두 매체의 방송은 독재와 고립 속에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다”고 했다. 북한 주민에게 외부 소식을 알리고 북한 주민의 인권을 개선하는 일은 원래 미국이 아닌 한국 정부가 앞장서야 했다. 그러나 한국 좌파 정권에 북한 인권은 금기 사항이었다. 북한 김씨 왕조가 싫어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나아졌다고 하지만 올해 대북 인권 단체 지원 예산은 29억6000만원에 그쳤다. 북한 인권 활동 제도화와는 거리가 멀다. 이를 위해 2016년 북한인권재단을 설치하는 북한인권법이 발의 11년 만에 시행됐다. 그러나 민주당이 재단 이사를 추천하지 않는 방식으로 9년째 출범을 방해하고 있다.

 

다음 달 유엔에서 채택될 북한인권결의안 초안에는 북한의 파병을 규탄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초안 제출 국가는 폴란드와 호주다. 민주당과 진보파들은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은 물론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호소한 한국 송환에도 관심이 없다. 북한 인권을 우리는 외면하고 국제사회가 지원하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야 한다. 미국이 북한 인권 운동 지원을 중단한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그 역할을 하면 된다. 여야가 있을 수 없다.◎

조선일보 사설 

 

北韓 離脫住民(脫北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