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왔습니다]/ <11> 전투기 조종사 되려던 꿈은 군당 제지로 물거품 - <20>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용광로
[평양에서 왔습니다]/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스카이데일리 2025
2025.02.20
<11> 전투기 조종사 되려던 꿈은 군당 제지로 물거품
김일성종합대학에도 추천받다
그렇게 들뜬 상태로 생활하던 1981년 3월 초 어느 날. 내 마음을 헤아려 주기나 하듯 이번에는 군(郡)행정위원회 대학모집과 지도원이 학교에 찾아와 대학 추천을 위한 면접을 했다. 북한에서는 본인이 가고 싶은 대학에 원서를 제출하고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군행정위원회 대학모집과에서 추천해 줘야 대학 입학시험을 볼 수 있고, 시험 결과에 따라 대학 입학 여부가 결정된다. 대학모집과에서는 학생의 성적을 우선으로 출신 성분과 성장 배경 및 품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학 추천 여부와 대학을 결정한다.
그날 학교에 찾아온 대학모집과 지도원은 다른 친구들을 만난 후 마지막으로 나를 부르더니 인적 사항과 가족관계, 학업성적 등을 확인한 다음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대학에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고등중학교 4학년 여름, 군에서 주관하는 수재 선발을 위한 예비시험에 응시한 적이 있다. 하필 그날은 학교에서 체육 수업시간에 광탄천으로 수영을 하러 가게 된 날이어서 친구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쑤어 먹기로 약속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서 학교에 갔다. 하지만 갑자기 교장 선생님이 나를 사무실로 불렀고, 수영 대신 수재 선발 시험에 응시하라며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시험을 잘 보라고 강조까지 했다.
그러지 않아도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던 나는 수재시험을 잘 봐서 선발되면 죽을 때까지 하기 싫은 공부를 계속해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 시험 때문에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지 못한다는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공부도 못 하는 내가 어떻게 수재시험을 보겠느냐며 교장 선생님에게 투정도 부려 보고 시험을 안 보면 안 되냐 억지도 부렸지만, 결국 야단을 맞고 시험을 건성으로 보았지만 점수가 괜찮게 나왔던지 그 후에 또다시 읍에 가서 수재시험을 봐야 했다. 당시도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시험을 잘 보았다가는 앞으로 평생 공부를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고등중학교 시절 시험 보는 것이 너무 싫어서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대학에 가기 싫었다. 그런 내 속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가 오히려 추궁을 당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어떤 대학에 가겠다고 정해 두지 않았습니다.”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희 세대에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대학을 안 나오면 간부고 뭐고 어떤 일도 할 수 없단 말이야.”
한참 뜸을 들이다가 나는 마지못해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공부를 싫어하다 보니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래서 어느 대학에 갈 것인지 솔직히 정해 놓은 곳도 없습니다. 지도원 선생님께서 좋은 대학을 추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김일성종합대학에 한번 가 봐.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잖아.”
솔직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가 싫어 대학 진학에 대해 아무 것도 정해 놓지 않은 나에게 김일성종합대학을 거론하니, 한편으로는 농담 같기도 했다. 선뜻 믿기지가 않아서 다시 물어보았다.
“저 같은 촌놈이 어떻게 최고의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을 갈 수 있습니까? 김일성종합대학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까? 그러니 농담하지 마십시오. 저 정도의 실력으로 어떻게 감히 그런 대학에 입학하겠습니까? 입학시험을 봐도 합격하지 못할 게 뻔한데…. 종합대학은 제외하고 다른 좋은 대학은 없습니까?”
“허참, 이때까지 몇 년 동안 많은 아이를 만나 보았는데 너 같은 친구는 처음이다. 다른 학생들은 종합대학 같은 데 추천받지 못해서 안달인데 너는 보내 주겠다고 해도 안 가겠다니 참 어이가 없다. 아니 네가 다른 학생들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냐? 학교사로청위원장도 했겠다, 거기에다 5년 동안 줄곧 최우등을 했는데 그만하면 됐지, 너 같은 사람이 종합대학에 못 가면 어떤 사람이 가겠느냐? 난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야. 내 생각에는 지금 너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고 보는데….”
아마도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려고 의도적으로 한 얘기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도 자신감이 생겨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한번 가서 입학시험을 보겠습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대학에 입학하든지 떨어지든지 일단 입학시험은 보겠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붙지 못하면 이 기회에 평양 구경이나 실컷 하고 오겠습니다. 그럼 지도원 선생님 말씀대로 김일성종합대학에 추천해 주십시오.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앞으로 입학시험 준비를 잘 하라고 당부하고 학교를 떠나갔다. 그날 저녁 교장선생님이 불러 ‘군(郡)에 김일성종합대학 추천 대상이 모두 8명 배당되었는데 그중 우리 학교에서는 너만 추천받았다’고 알려주었다. 다음 날 담임선생님은 학교 교사회의에서 나를 김일성종합대학에 추천하기로 정식 결정했다는 것을 알려 주면서 앞으로 입학시험 준비를 잘 하라고 일렀다.
▲ 평양시 대학생들이 2004년 3월30일 김일성종합대학 본청사 앞에서 ‘조선아 너를 빛내리’를 합창하고 있다. 북한의 고등중학교 졸업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군당 간부과를 통해 중앙당에 소환되는 것이다. 그다음이 대학 추천을 받는 것인데 김일성종합대학에 추천받는 것을 최상으로 여긴다.
양다리가 아니라 세 다리를 걸치다
사실 북한의 고등중학교 졸업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군당 간부과를 통해 중앙당에 소환되는 것이다. 그다음이 대학 추천을 받는 것인데 김일성종합대학에 추천받는 것을 최상으로 여긴다. 대학에도 못가는 경우 군(軍)에 입대하는데 기왕이면 조종사를 양성하는 공군대학에 추천받아 가는 것을 선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곳에 선발되거나 추천받으려면 무엇보다도 공부를 잘해야 하며 그에 못지않게 출신 성분이 좋아야 한다. 신체적으로도 키가 크고 건강하며 용모도 괜찮아야 가능하다. 이 중 어느 한 가지 조건만 부족해도 선발되거나 추천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운데 어느 한 곳에만 추천 또는 선발되어도 집안에서는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인물 잘생기고 키가 크면 출신 성분이 걸리고, 출신 성분이 좋으면 공부를 못하고, 또 공부를 잘하면 체력 조건이 안 되는 등 한 사람이 3박자를 모두 갖추기란 쉽지 않다.
물론 중앙당에 소환될 수 있는 조건이 되면 다른 두 곳에는 얼마든지 선발될 수도 있고 추천받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와 같이 한 사람이 세 곳에 동시에 선발되기란 운이 따른다고 해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그 당시 기쁨과 자긍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하루아침에 날아간 조종사의 꿈
이렇게 들뜬 기분으로 군당에서 공부하라고 한 내용과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군사동원부에서 연락이 왔다.
군사동원부에서는 교장선생님을 통해 공군대학 신체검사를 받으러 도청 소재지인 해주에 가야 하니 3일가량 체류할 준비를 해서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군사동원부로 들어오라고 전했다. 나는 5일간 묵을 수 있게 집에서 양표 20여 장과 돈·세면도구와 증명서를 넣은 작은 가방을 들고 아침 일찍 걸어서 군사동원부가 있는 읍으로 갔다.
그런데 읍에 들어서면서 생각해 보니 군당에서 이미 학습 과제도 주었고 얼마 안 있으면 소환될지도 모른다고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일단 군당 간부과에 이야기하고 움직이기로 결심하고 군당 청사로 향했다. 군당 정문에 들어가 군당 간부과 지도원과의 면회를 요청해 그동안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니 그 옆에 있던 간부과 부부장이 잘 찾아왔다며 펄쩍 뛰었다. 그러더니 바로 군사동원부에 전화를 걸어 신체검사를 위해 해주에 가는 명단에 내 이름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한 다음 곧바로 군사동원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점잖게 야단을 쳤다.
“군사동원부에서 무슨 일을 그렇게 합니까? 이 학생은 이미 당에서 쓰려고 신체검사도 하고 문건도 다 만들어 놓았는데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중앙당에 가서 담화(면접)까지 하고 왔습니다. 당에서 하는 일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다 선발해 놓은 사람을 빼 가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당장 이 학생을 명단에서 빼고 더 이상 호출하지 마시오. 이 학생은 집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좀 만납시다.”
간부과 부부장은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나에게 당부했다.
“너는 집에 돌아가 지난번에 제시한 학습 과제를 열심히 공부해라. 언제 중앙당에서 소환장이 내려올지 모르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군당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 너를 부르더라도 절대로 가서는 안 돼. 너는 이미 당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곳에서 부르지도 않겠지만, 만약 부른다면 그때에는 군당에 즉시 보고한 다음 우리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해.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럼 빨리 집에 가.”
결과적으로 공군대학에 가서 조종사가 되려던 나의 꿈은 군당의 요구에 의해 중간 단계에서 그만 접어야만 했다.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도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전부터 중앙당에 소환되면 주석궁(현재 김일성‧김정일 시신 안치)이나 중앙당 청사 내부에서 최고위급들에 대한 경호와 업무보좌 등을 하게 된다는 사례도 있고 소문도 있었기 때문에, 그냥 막연하게 좋은 곳이겠지 하는 정도의 기대감만 품고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어렸을 때 동네에 살던 친한 형이 중앙당에 소환되어 김일성 근접경호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나도 그런 곳에 갈지 모른다는 생각만 어렴풋이 하는 정도였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어릴 적 매미 박사로도 불렸던 저에게 곤충과 식물, 그리고 자연현상에 대해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주신 건 바로 아버지였어요. 매미의 우화를 보여주기 위해 이른 새벽 저와 함께 산에 갔던 아버지가 그래서 저는 너무 대단해 보였으니까요. 내가 아빠가 된다면, 그때의 아빠처럼 내 자식에게도 그리 해 줄 수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아버지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와는 어떤 것들을 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셨어요?
아버지: 사실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이 거의 없어. 단 한 번 추석 때 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고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성묘하고 돌아오던 중 아버지가 밤을 따 주셨던 적이 있는데, 그것이 유일하게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이야.
북한에는 아직도 유교적인 관념이 강해 부모(어른)가 자식(아이)들과 놀아 주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그래서 어른들이 시간이 있어도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거나 카드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
여기에다 북한에는 아버지가 자식들과 놀아 주거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어. 그것은 북한을 통치하는 김정은이나 노동당이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지.
봄에는 ‘모내기 전투’, 가을에는 ‘추수 전투’ 등 농사철에는 휴일도 따로 없이 농사일에 동원되어야 하고 연말이나 주요 명절을 앞두고 성과를 끌어올린다며 ‘70일 전투’ ‘100일 전투’ ‘200일 전투’를 하도록 하고 그 기간에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매일 출근해서 노동을 해야 하거든. 전투가 끝나고 쉬는 날이면 그동안 밀린 피로 때문에 잠을 자거나 쉬려고 하지 자식과 함께 놀아 줄 여유가 없어. 그러니 아무리 자식들과 함께 놀아 주고 싶어도 놀아 줄 수가 없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야.⊙
<12> 중앙당 면접 20일 지나자… “평양으로 오라”
칠순 넘기신 할머니 눈물로 배웅… 언제 만날지 모를 작별
“항상 대바르게 살라” 아버지 당부… 평생 좌우명으로 살아
열차 타고 가는 내내 고향 광탄의 온갖 추억이 주마등처럼
20일 만에 내려온 중앙당 소환장
평양에 가서 면접과 신체검사를 받고 내려온 지 20일쯤 지난 3월 초 어느 날, 군당 간부과로부터 다음 날 아침 일찍 군당 청사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다음 날 군당 청사에 도착하니 군당 간부과 부부장이 중앙당에서 소환장이 내려왔다며 내일이라도 당장 평양으로 오라고 할 수 있으니 오늘 중으로 소환 준비를 끝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미 해당 기관들에 연락을 해 놓았다며, 돌아다니면서 문건 수속을 하면 된다고 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어떤 일을 하는 곳에 간다는 말이 전혀 없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좋은 곳에 가는 거니까 물어보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자꾸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냥 중앙당에 소환되어 평양으로 간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미 각오한 일이어서 별로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환 사실을 받아들였다.
군당 간부과 지도원이 가르쳐 준 대로 여러 기관을 돌며 중앙당 소환에 필요한 서류들을 발급받았다. 먼저 군(郡)행정위원회 2부에 가서 평양까지 가는 ‘통행증’을 발급받은 후 군사동원부에 가서 ‘군사이동증’을 발급받았다. 이어 양정사업소에 가서 ‘식량정지증명서’를 발급받고 군(郡)사로청에 가서는 ‘사로청이동증’을 발급받은 후 마지막으로 안전부에 가서 주민등록이전 신고와 같은 퇴거 수속까지 차례로 마쳤다. 모든 수속을 끝마친 후 군당에 다시 들러 그 결과를 군당 간부과 지도원에게 보고했다.
“수고했다. 그런데 아까 도당 간부과에서 전화가 와서 받아 보니 내일 당장 평양에 가지 않아도 되겠다. 아직까지는 중앙당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날짜에 평양에 올라오라는 지시가 안 내려왔지만, 언제 오라고 할 지 모르니 집에 돌아가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항상 대기상태에 있어야 되겠다. 일단 집에 돌아가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 어디에도 가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네, 알았습니다.”
그날 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께서 성의껏 마련해 준 음식을 친구들과 함께 먹었다. 우리 집에서는 다음 날 내가 바로 평양에 가는 줄 알고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고 친구들을 그러모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는 그동안 내가 사용해 온 물건도 정리하고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에 부모님이 양복도 한 벌 맞춰 주셨다.
소환 준비를 끝내고 1주일 정도 지난 3월17일 군당 간부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앙당에서 3월18일까지 평양으로 올라오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니 준비한 것을 모두 챙겨 아침 일찍 군당 청사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기관에서 발급받은 문건 외에 다른 것은 일절 소지할 필요가 없으니 맨몸으로 오라고 했다.
그간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선발되어 수차례 봐 았던 면접에서 ‘당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던 10대의 나에게 중앙당 소환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자부심을 갖게 했다.
고향을 떠나
그 전날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3월18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당시 아버지는 집을 떠나 해주에 있는 도(道)공산대학에 재교육을 받으러 가 계셨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해주행 버스가 출발하는 태탄읍까지 걸어서 갔다.
할머니는 멀리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새로 산 시계를 손목에 채워 주시며 뜨거운 눈물로 나를 배웅하셨다. 태어나서 고향을 떠나는 그날까지 매일같이 가장 애지중지하며 키워 온 장손이 기약 없는 길을 떠나는데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 할머니의 연세는 이미 칠순을 넘겼고 그해 겨울에 동생이 집 앞마당에 닦아 놓은 얼음판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골절된 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다가 내가 어디에 가는지, 또 가면 언제 돌아올지조차 전혀 모르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나 역시 할머니 살아 생전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시계도 놔 두고 떠나려다가 할머니께 평생 한이 될 것 같기도 해서 차고 떠났다. 할머니는 그 후 5년이 지난 1986년 초에 다시 한번 뵐 수 있었는데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걸어서 군당에 도착한 나는 군당 책임비서와 조직비서 등 군당 고위 간부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해주행 버스가 출발하는 자동차사업소로 갔다. 거기에서 군당 간부과 지도원과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눈물어린 어머니의 모습을 뒤로한 채 해주로 향했다.
해주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아버지가 재교육을 받고 계시던 공산대학에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도당으로 가서 도당 간부과 부부장을 만나 그로부터 평양 대동강역에 도착하면 중앙당 지도원이 마중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당책임비서 등 고위간부들에게도 인사한 다음 그의 안내를 받아 해주역으로 갔다.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해주역에서 아버지와 함께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내게 “어디에 가든 근본을 잊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항상 말을 조심하고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떤 일에 부딪히든 신중하게 결심하고 언제나 대바르게 살라”고 조용히 이르셨다.

▲ 압록강 주변에 개나리가 만발한 2004년 4월25일 오전 룡천과 인접한 신의주 압록강변에 산책 나온 북한 어린이들이 강 너머로 깃발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때 아버지가 나에게 하셨던 말씀은 대학생활 과정은 물론 그 후로도 살아오는 동안 나의 좌우명이 되어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도당 간부과 지도원이 사 준 차표를 받아 들고 평양행 열차에 올랐다. 그리고 손 저어 배웅해 주시는 아버지의 뜨거운 전송을 받으며 해주역을 떠나 평양으로 향했다.
열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나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스쳐지나갔다.
어린 시절의 꿈은 아름답다
내고향 광탄
무릇 고향은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간직돼 있는 곳이라 언제나 그리운 법이다. 고향은 또한 따뜻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 같이 느껴져 항상 달려가 안기고 싶은 정다운 곳,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젖어드는 사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뻐꾹새가 노래하는 곳/ 사랑하는 내 고향일세/ 사람마다 자유롭고/ 사람마다 행복스런 곳. 아~언제나 좋은 곳일세/ 아~ 내 고향 어머니 품아~’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좋아했던 ‘내 고향’이라는 가곡의 1절 가사이다. 북한에도 김일성 유일 체제가 들어서기 전인 1960년대 중반까지는 그래도 순수하고 문학적인 감정이 담긴 노래와 예술작품이 창작되었는데, 가곡 ‘내 고향’이 대표적이다.
이원수의 ‘고향의 봄’이란 노래 가사에도 실려 있는 것처럼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은 봄이 오면 동산에 진달래꽃과 함께 복숭아·살구·사과·배를 비롯한 온갖 과일 꽃이 만발하고 하늘에는 종다리와 뻐꾹새가 노래하는 곳, 여름이면 시냇가에 나가 물놀이를 하고 가을이면 들판에 황금이삭 물결치고 주변 과수원에는 각종 과일이 탐스럽게 열리는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나는 1962년 9월28일 황해도 장연군 목감면 광탄리(오늘의 황해남도 태탄군 광탄리) 광탄천 기슭의 아담한 농가에서 당시 리(里)서기장으로 근무하던 아버지 곽용성과 협동농장(집단농장)에서 농사일을 하시던 어머니 허순옥 사이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할머니와 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다. 광탄(廣灘)리는 광탄천 중류에 자리 잡은 곳으로 산에 밤나무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내 고향 광탄리는 현풍 곽씨 집성촌이 있고 선조들을 모신 선산이 있을 정도로 곽씨 성을 가진 친척이 많이 살았다. 이렇게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선조의 뼈가 묻혀 있는 우리 가문의 삶의 터전이 바로 광탄이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적어도 지금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저나 동생에게 정말 많은 선물과 여행 추억을 주셨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도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었던 저를 친구들이 놀릴 정도였으니까…. 북한에는 크리스마스도 없을 테고, 출장 다녀오실 때마다 우리에게 사다 주신 레고나 건담 같은 장난감도 흔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저희에게 그렇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실 수 있었어요?
아버지: 내가 너희들에게 경제적 여유가 되는 한에서 선물도 사 주고 여행을 데리고 다니면서 추억을 만들어 준 것은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 북한에 살면서 그렇게 못 했기 때문에 너희들에게만은 꼭 해 주고 싶어서 그런 걸 거야. 일종의 대리만족이랄까…. 내가 어렸을 때 북한에서는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선물로 사 줄 만한 물건도 없었고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도 없었어. 특히 북한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김정일에 의해 그나마 일부 남아 있던 선물 문화가 강제로 사라졌어. 김일성·김정일이 하사하는 물건만 ‘선물’이라는 표현을 쓰게 했고, 김씨 부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선물로 주고받는 물건에 대해서는 ‘선물’이라는 표현조차 쓰지 못하게 하고 ‘기념품’이라는 용어를 쓰게 했어. 그러니까 선물 문화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
여행도 마찬가지야. 여행을 가려면 관광지나 친척집 등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고 여행 경비도 있어야 하는데, 북한에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없어. 일단 ‘관광’이라는 개념도 없고 ‘관광을 다녀오기 위해 휴가를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래서 ‘휴가’라고 하면 하루 이틀 정도 쉬는 것으로 생각해. 그 짧은 휴가조차도 받기 힘든 것이 현실이고…. 그러니 북한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여행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
더 중요한 것은 좀 더 먼 곳에 있는 광광지를 방문하려면 내가 살고 있는 시·군단위 지역은 기본이고 도단위 지역을 벗어나야 하잖아. 그런데 북한에서는 내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행정기관에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여행을 간다고 하면 통행증을 발급해 주지 않는다는 거야.
특히 지방에 사는 사람이 평양 관광을 위해 통행증을 신청하면 아예 발급해 주지 않기 때문에 평양 관광 자체가 불가능해. 그래서 지방 사람들은 평양을 평생 한 번도 못 가 보고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정말 여행의 자유·이동의 자유 등 인간의 초보적인 자유마저 누리지 못하는 생지옥이 북한이지.⊙
<13> 우리 집안 3대는 분단·동족상잔 최대 희생자
아버지 따라 태탄읍으로
광탄리에서 살던 나는 아버지가 해주공산대학(노동당 간부 양성기관)을 졸업하고 태탄군당 조직부 지도원으로 임용되면서 군당(群黨) 청사가 있는 태탄읍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광탄리에서 태탄읍까지의 거리는 30리(12㎞)가량 된다. 당시 우리 가족은 이삿짐을 싣고 갈 트럭이 없어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나이 어린 나 혼자만 달구지 위에 타고 어른들은 걸어서 갔다. 그때 내 앞에 실려 있던 닭장 속에 같이 넣었던 강아지와 닭이 서로 싸우는 것을 구경하면서 달구지를 타고 갔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태탄읍으로 이사 온 우리 가족은 속달산 자락의 단층 다세대 주택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노동당 간부였기 때문에 군당 청사로 출근하셨고 광탄리에 살 때 농사일을 하시던 어머니는 직업을 바꾸어 처음에는 식품전문매장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자리를 옮겨 국수집(냉면집) 주방책임자로 일하셨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따라 식품매점과 냉면집에 자주 갔다. 당시 매점에는 사탕·과자를 비롯한 간식과 고기·생선 등 먹을 것이 많았다. 하여튼 상점에는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먹을 것과 물건이 풍부했다. 냉면집 역시 돼지고기 육수에 국수를 말아 판매할 정도였다. 어머니는 여름이면 농촌 지원 차원에서 육수와 면·김치 등을 차에 싣고 농촌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동 판매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생활용품이나 먹을 것이 풍족했다. 그래서 나와 같이 1960~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북한 사람들은 잘살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서 깊은 태탄
태탄읍에서 유치원을 거쳐 인민학교(현재는 소학교) 2학년까지 다니던 나는 또다시 아버지가 태탄군 과산리 초급당비서(흔히 리당비서로 호칭)로 임용돼 여름방학 때인 1974년 8월 과산리로 이사 갔고, 내가 고향을 떠날 때까지 그곳 과산리에서 살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황해남도 태탄군은 1950년대 중반 북한이 행정구역 전체를 개편할 때 새로 만들어진 군(郡)이다. 당시 북한은 황해도를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구분하는 등 행정구역을 대폭 개편했다. 황해도 장연군 목감면과 속달면을 기본으로 하여 옹진군과 벽성군·신천군의 일부 지역을 추가로 포함시켜 태탄군을 만들었다. 내가 살았던 광탄리(목감면)와 태탄읍(속달면)은 모두 과거 황해도 장연군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태탄군은 서쪽으로 대동만을 포함하여 서해와 접해 있고 평야와 구릉지대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어 주민들 대부분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일부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다.
태탄군은 특별히 유명한 곳이 없지만, 산세가 비교적 완만하고 강·하천이 발달해 있으며 예로부터 아름다운 전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태탄읍의 북쪽에 지붕처럼 높이 솟은 속달산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던 슬기로운 선조들이 군량미가 떨어지자 벼껍질과 석회를 물에 풀어 쌀뜨물과 같이 허옇게 만든 다음 광탄천으로 흘려보내 군량미가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왜적들을 감쪽같이 속여 넘김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 하여 산의 이름을 ‘속달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태탄군의 서쪽에 위치한 용연군에는 예로부터 효녀로 이름난 심청이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졌다는 임당수가 있고 아름다움 절경과 백사장으로 유명한 몽금포와 장산곶이 있다.
불타산 줄기 산등성이에는 옛날에 다정한 오누이가 서로 경쟁하면서 쌓은 성이라고 하여 ‘오누이성’이라 불리는 고성(古城)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말기인 1909년에 태어나신 할머님 말씀에 의하면 성을 누가 빨리 쌓는지 오누이가 선의의 경쟁을 했는데 오빠는 누이동생이 잠들면 옆에서 같이 쉬면서 두 사람이 성 쌓는 시간을 동일하게 맞추려고 노력한 반면, 여동생은 오직 이기겠다는 생각만으로 오빠가 잠깐 잠든 사이에도 성을 쌓아 경쟁에서 이겼다고 한다. 말하자면 누이동생이 페어플레이 정신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여자는 참으로 간사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자신도 여성이면서 같은 여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한 분이셨다.
▲ 동해선 남북철도 연결구간 열차 시험운행이 열린 2007년5월 17일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역에서 출발한 남북열차가 남측통문을 통과해 북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대(代)부터 나까지 3대가 체제와 이념·동족상잔과 분단의 최대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나와 우리 가족만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슬픔이고 남북분단의 비극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태탄군 중심에는 저멀리 멸악산과 불타산 깊은 골짜기에서 시작되어 속달산을 감돌아 서해의 대동만으로 유유히 흘러드는 광탄천이 있다. 여기에는 천어·쏘가리·붕어·잉어·초어·모래무지·메기 등과 함께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은어와 자라 등 민물고기가 많다. 광탄천 하류에는 강물이 절벽 밑으로 감돌아 흐르면서 형성된 소(沼)가 있다. 그리고 거울처럼 잔잔해진 수면 위에 20m가량의 기암절벽이 그대로 반사되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명소 수경대(水鏡臺)가 있다.
이와 함께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는 금향산(계명산으로도 불림)과 피부병과 위장염에 특효가 있다고 소문나 멀리 외국에까지 수출된다는 삼봉약수, 부양리의 무진장한 도자기용 찰흙 등 자원도 풍부하고 사람들의 인심 또한 후덕하여 참으로 살기 좋은 고장이다. 누구나 다 그러하듯 나 역시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을 무척 사랑한다.
나는 고향이라고 하는 것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를 낳아 주고 키워 준 부모님과 형제, 함께 자란 친구 그리고 정든 산천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
나의 할아버지 곽기형은 1903년 내가 태어난 황해도 장연군 목감면 광탄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셨다. 8·15 광복 후에는 북한 당국이 실시한 토지개혁에 적극 참여하셨고, 그 공로로 노동당에도 입당하셨다. 그런 이유로 6·25 전쟁 시기 피살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할머니 송옥화는 1909년 4월22일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와 결혼한 후 2남2녀를 낳아 키우셨고 1986년 5월 77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낳은 2남2녀 가운데 아버지와 두 분의 고모 등 3남매만 생존해 계셨고, 삼촌은 6·25 전쟁 때 어린 나이로 사망했다.
할머니는 생존해 계시는 동안 6명의 손자·손녀들을 모두 업어 키워 주셨다. 품성이 참으로 대바르고 의지가 매우 강한 분이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수수께끼, 요즘으로 치면 퀴즈와 같은 문제를 제시해 손자들의 지능을 키워 주셨다. 지금도 당시 할머니가 “먹어도 배부르고 안 먹어도 배부른 것이 무엇이냐?” “아래로 먹고 위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위로 먹고 옆으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등 주변에 있는 생활 도구들의 모양이나 쓰임새를 비유해 제시했던 퀴즈 문제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 곽용성은 황해도 장연군 목감면 광탄리에서 태어나 북한군에 입대해서는 7년간 판문점에서 민경으로 군사 복무하고 제대해 노동당 간부를 양성하는 해주공산대학을 졸업한 다음 1960년대 중반부터 내가 남파될 때까지 30년 이상 당간부로 일을 해 오신 대바르고 정직하고 품성이 매우 고지식한 분이다.
어머니 허순옥은 황해도 장연군 목감면 삼봉리 태생이다. 평생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아버지 뒷바라지를 하시고 자식 6남매를 낳아 큰 소리 한번 치지 않고 훌륭하게 키우신 참으로 헌신적이고 인자한 분이다. 내가 한국으로 침투할 때 건강이 몹시 안 좋으셨는데, 지금도 마지막으로 뵀던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 눈물이 난다.
우리 형제는 모두 4남2녀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남동생까지 살아 있다면 5남2녀였을 것이다. 내가 1995년 남파될 당시 첫째 여동생은 군(郡)병원 치과 준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 아래 첫째 남동생과 둘째 여동생·둘째 남동생은 북한군에 복무하고 있었고 막내 남동생은 고등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검거된 후 모두 숙청되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대(代)부터 나까지 3대가 체제와 이념, 민족 상잔과 분단의 최대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나와 우리 가족만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슬픔이고 남북분단의 비극이기도 하다.
고향이나 부모형제는 그 누구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다. 자신을 낳아 주고 키워 주신 부모님과 나서 자란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혜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나 역시 나를 낳아 키워 주신 부모님과 내 형제,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을 무한히 사랑한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아버지께서는 시간이 될 때마다 북에 계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삼촌과 고모들에 대해 저와 동생에게 상세히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만큼은 아니겠지만 무척이나 뵙고 싶습니다. 어릴 때는 북에 계시는 가족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었구요.
이젠 아버지와 술 한 잔 나누며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자라기도 해서 여쭤 보는 건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꼭 해 드리고 싶었지만 못 해 드렸던 것이 많으실 것 같아요. 살아 계신다면,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해 드리고 싶으신가요?
아버지: 아마 너희 할아버지·할머니는 내가 북한을 떠나올 때 건강이 안 좋았고 연세도 많았기 때문에 모두 돌아가셨을 거야. 특히 할머니는 내가 남한에 침투하던 1995년 당시 만났을 때 건강이 너무 악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면 얼마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을 거야.
내가 검거된 후 부모형제 모두 숙청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숙청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지 못할 오지로 추방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보내 평생 강제노역을 시키는 것이거든. 물론 감옥에 보내거나 처형하는 것도 숙청의 다른 방법이야.
과거 북한의 행태와 사례를 볼 때 최소한 우리 가족은 ‘정치범수용소 수용’ 이상의 처벌을 받았을 거야. 북한은 이렇게 내가 아무리 노동당과 조국을 위해 충성했더라도 검거되면 과거 세웠던 공적을 모두 무시하고 아무런 죄도 없는 가족을 숙청하는 무지막지하고 비인간적인 곳이야.
그럼에도 만약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 계시고 만날 수 있다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곳을 보여드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서울대병원과 같은 좋은 병원에 모셔다 종합검진을 받게 해 드리고 싶어. 내가 침투할 당시에 두 분 건강이 너무 안 좋으셨거든. 그래서 먼저 좋은 병원에 모셔다 종합검진을 받게 한 다음 검진 결과에 따라 가지고 있는 모든 병을 고쳐 드리고 싶어.⊙
<14> 어릴 적 막연히 꿈꿨던 공작원… 진짜 될 줄이야
개구쟁이 어린 시절
나는 광탄리에서 살 때도 그랬지만 태탄읍에 이사 온 이후에도 역시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모두 직장에 나가 일을 하셨어도 탁아소(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할머니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유치원에 들어간 것은 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이다. 그때 유치원에 가면서부터 비로소 한글을 배웠다. 유치원은 집으로부터 약 1㎞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지금도 할머니가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올 때도 마중 나와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유치원에 가서는 낮잠 시간에 친구들과 몰래 도망쳐 개울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기상시간 직전에 다시 들어가 유치원에서 주는 간식을 받아 먹던 개구쟁이 시절의 기억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1972년 9월 태탄인민학교(현재의 소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까지 다녔다. 당시에는 태탄읍에 인민학교가 1개 있었는데, 한 학년에 10여 개의 반이 있었다. 당시에만 해도 인민학교는 남자반과 여자반이 따로 있는 남녀공학이었다.
태탄인민학교에서 2학년까지 공부하는 동안 나는 줄곧 최우등을 했다. 그리고 ‘소년단’이라는 정치 조직에 입단하면서 분단위원장(우리의 반대표에 해당)에 선출되기도 했다. 분단위원장이란 1개 반에 조직된 소년단의 기층 조직인 분단의 책임자로 주로 반에서 진행하는 각종 회의나 모임을 준비하고 집행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회의 보고서나 토론문 같은 것을 많이 써야 한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줄 분공(과제)안을 만들어 과제를 주고 그것이 집행되도록 통제하는 한편 그 결과에 대해서는 물론 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져야 하므로 선생님으로부터 욕도 많이 먹는다.
위와 같은 단점도 있지만 글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작문 수준도 높아지고 책임감과 통솔력 같은 것도 자연스럽게 커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장은 대열 인솔이나 인원 관리 등 행정적인 임무만 수행하면 된다.
나는 분단위원장이라는 책임을 맡고 있었지만 학교생활에서 항상 모범생은 아니었다. 우리반 교실은 3층짜리 학교 건물 2층 중앙에 있었는데, 수업이 끝난 후 과외공부를 하거나 교실 청소 같은 것을 할 때면 창문을 열고 가방을 아래로 던진 다음 계단으로 걸어내려가 가방을 들고 도망쳐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민속놀이로 시간을 보내다
어렸을 때 나는 봄이면 트랙터가 갈아엎은 흙 속에서 나팔꽃 뿌리를 주워 먹고, 감꽃이 필 때는 집 근처에 있는 감밭에 가서 감꽃을 주워 먹으며 놀았다. 나팔꽃 뿌리와 감꽃은 모두 달콤해서 맛이 있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익지 않은 파란 감을 따서 개울가 모래 속에 일주일가량 묻어 두었다가 파 먹으면 익지 않은 감 고유의 떫은 맛은 없어지고 제법 단맛이 나기 때문에 간식이 없는 상황에서 맛있는 간식이었다.
여름이면 나무에 올라 매미를 잡고 무더운 날이면 광탄천에 나가 물고기와 자라 새끼를 잡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매미는 아직 허물을 벗지 않고 땅속에서 잠 자는 유충을 잡아다 서랍에 넣어 두고 허물이 벗겨지는 과정을 관찰하기도 하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에 앉아 우는 매미를 잡기도 했다.
한번은 매미를 잡으려고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이모님에게 업혀 온 적도 있었고, 광탄천 수경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깊은 물 속에 빠져 물을 실컷 먹고 다 죽게 된 것을 동네 형이 건져 줘서 겨우 살아난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를 물속에서 건져 살려 준 그 형에게 덕분에 손자가 살았다고 하면서 우리 집에 데려다 밥도 해 먹이고 간식도 사 주면서 고마워했다.
또한 내가 자랄 때는 학교에 가서는 공부하는 흉내만 내고 집에 돌아오면 숙제나 복습을 할 생각은 안 하고 틈만 있으면 친구들과 놀았다.
그때 친구들과 함께 자치기·제기차기·꼬누·연날리기·비석치기·구슬치기·딱지치기·땅따먹기·숨바꼭질·말타기·별놀이·볼 때리기(소프트볼과 유사)·진돌이·장기 등 여러 가지 민속놀이를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 2004년 6월7일 평양의 당창건기념탑 앞에서 조선소년단 창립 58주년 기념 소년단 입단식이 열렸다. 북한 주민의 공식 조직생활은 소학교 2학년(7세) 소년단 입단으로부터 시작된다. 소년단 입단식은 김정일 생일(2월16일)·김일성 생일(4월 15일)·소년단 창건 기념일(6월 6일) 등 연 3회에 걸쳐 진행된다. 평양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대남요원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지금 생각해 봐도 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일어났었는데, 그 사연을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주방장으로 일하시던 냉면집에 근무하는 아주머니들 가운데 내게 특별히 잘해 주는 분이 있어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는 그 아주머니가 참 좋은 분이라며 그 남편은 대남 부문에서 일하다가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 영화가 많이 상영되고 있던 시기여서 대남 요원이라면 영화에서처럼 용맹스럽고 귀신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행동하는 초인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어린 생각에 자연히 용감성과 대담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군 정찰병이나 대남 특수요원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진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상황 때문이었는지 그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남 부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용감한 사람이 일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은근히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아버지가 덧니처럼 생긴 송곳니를 뽑고 금이빨을 하고 집에 들어오셨는데, 그것을 본 어머니가 내게 조용히 다가와 자기 치아가 가장 좋으니 너는 앞으로 성한 이빨을 뽑지 말라고 하셨다.
이때 나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순간적으로 ‘내가 만약 앞으로 커서 대남 요원이 되는 경우 금이빨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쉽게 기억될 수 있으므로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올라 어머니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특수요원이나 정보공작을 하는 사람들은 외모에 특징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떤 사람에게서 들었거나 영화를 보고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에 내가 실제로 대남 공작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내가 앞으로 대남 공작원이 된다는 그 어떤 조건이나 보장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인지, 또 어렸을 때 생각했던 대로 결과적으로는 공작원이 되었는데 어떻게 자신의 앞날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예상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이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기가 막히고 신기해서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다.
아버지 따라 과산리로
소꿉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생활하던 1974년 여름, 인민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칠 무렵 우리 가족은 과산리 초급당비서로 임용되신 아버지를 따라 태탄읍으로부터 10㎞가량 떨어진 과산리로 이사가게 되었다. 당시 내가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도 아쉬워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께 이사 가지 말자며 되지도 않을 억지를 부렸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과산리로 이사 온 우리 가족은 도로에서 약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지어진 단독주택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아버지에게 매일 수없이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보면 교통사고로 사망한 손자 생각이 자꾸 난다고 하시면서 차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면 좋겠다고 얘기해 자그마한 언덕 너머에 있는 동네로 옮기게 되었다.
동네를 옮겨 우리가 살게 된 집은 1960년대에 지은 단독주택으로 방 2개에 부엌·창고가 각각 1개씩 있었다. 당시 마을에는 우리집과 같은 주택이 30채가량 있었는데, 우리집은 마을 제일 안쪽에 있었다.
우리집은 3면이 야산을 개간해 만든 과수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봄이 오면 각종 과일 꽃과 함께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여기에 온갖 나비와 벌까지 날아들어 그야말로 꽃동산으로 변했다. 그리고 오뉴월부터 시작해서 딸기·앵두·살구·복숭아·배·사과·포도 등 각종 과일이 가을까지 끊이지 않았는데, 그래서 나는 고향을 떠날 때까지 여러 종류의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고 그 후에도 고향에 갈 때마다 과일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과산리는 서쪽으로는 태탄읍과 대진리, 동쪽으로는 벽성군 죽천리, 북쪽으로는 태탄군 류정리와 운산리 등을 접하고 있으며 과일이 풍부하고 논과 밭의 비율이 반반씩 되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과산리는 태탄읍에서 도로를 따라 가면 10㎞가량 되지만, 광탄천을 건너 그 옆으로 난 지름길을 따라 가면 5㎞ 정도밖에 안 된다.
나는 과산리로 이사간 후 인민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과산리에는 다른 리(里)와 마찬가지로 학교가 1개밖에 없다. 같은 학교 울타리 안에서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같이 생활하면서 교사(校舍)만 갈라져 있을 뿐 운동장도 같이 쓰고 교장선생님도 한 분이다. 그리고 학교 명칭도 ‘과산고등중학교’라고 부르며 거기에서 중학생은 중등반, 인민학생은 인민반 학생으로 부른다. 과산리는 다른 리에 비해 비교적 넓은 지역이어서 내가 학교에 다닐 당시 본교 학생이 1000명이 되었고, 100여 명이 다니는 분교까지 있을 정도였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아버지 어릴 적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동생에 비해 더 ‘호기심 천국’인 제가 아버지를 닮은 거구나 싶은 생각이 종종 들 때가 많았어요. 그런 아버지의 호기심이나 장난기 때문에 돌발 상황이 생겨 다치거나 혹은 소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훈육을 어떤 식으로 하셨어요? 엄마는 어릴 때 제게 정말 무서운 존재였거든요.
아버지: 글쎄, 어렸을 때의 기억이 많이 사라져 전부 생각나지는 않아.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워낙 개구쟁이여서 장난도 많이 하고 그 과정에 사고도 많이 친 건 사실이야. 매미 잡는다며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이모님에게 업혀서 집에 오기도 하고, 친구들과 물놀이 하러 갔다가 깊은 물속에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어. 손칼로 나무를 깎다가 손을 베는 것은 일상이고, 토끼장을 만드는 과정에 판자에 박아 놓았던 못에 발바닥이 찔리기도 하는 등 정말 사고를 많이 쳤어.
그런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업무를 보거나 일하는 시간이어서 안 계셨기 때문에 항상 할머니가 나의 사고 소식을 접하셨는데, 한 번도 내게 욕을 하거나 야단을 치신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못에 찔리거나 손칼에 베인 상처에 약을 발라 주고 다시는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시는 게 전부였어. 그리고 아버지·어머니에게는 걱정할까 봐 그랬는지 내가 다쳤다는 말씀도 안 하셨어.
그래서 나도 너희들이 정말 크게 다치거나 사고를 치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치지 않고
<15> 물에 빠지고 감전되고… 죽을 고비 넘긴 천운
창고 같은 교실, 무서운 담임선생님
내가 전학 가서 편입된 반은 과산고등중학교 인민반 3학년 1반이었다. 같은 학년에 2개의 반이 있었는데 남자반은 1반, 여자반은 2반이었으니 당연히 나는 1반이 된 것이다. 등교 첫날 담임선생님을 따라 내가 공부할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교실이 너무도 초라하고 어두워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리 교실은 학교 본관과 신관 사이 공터에 지은 작은 건물에 있었는데, 지붕은 볏짚을 엮어서 올린 초가지붕이었고 교실 바닥은 시멘트 포장도 하지 않은 흙바닥이어서 비가 오면 교실 바닥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교실 창문도 크기가 작은데다 유리가 없어 두꺼운 비닐박막으로 대충 가려 놓았기 때문에 흐린 날에는 선생님이 칠판에 쓴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었다.
당시 내가 공부했던 교실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창고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고, 아마 당시 북한 내에서도 그 정도로 낙후한 곳이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반은 새 교사 건설이 완공될 때까지 창고보다도 못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농민들이 회합 장소로 이용하는 회의실에 옮겨가 이동수업을 해야 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무섭기로 소문난 권주화 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을 무서워한 이유에 대해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반 아이들이 대체로 공부를 못 하고 싫어했는데, 이러한 아이들을 공부시키려고 욕도 하고 엄하게 통제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전학을 온 다음 나를 분단위원장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1년 만인 4학년 초에 결혼해 학교를 그만두셨다.
당시 내가 할머니에게 담임선생님의 결혼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스승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표시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분단위원장이었던 내가 생각 끝에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 드리기로 하고 아이들한테 조금씩 돈을 모아 만년필과 그릇 등 몇 가지 물건을 마련해 선생님에게 결혼 선물로 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고마움을 표시하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후에는 담임선생님을 다시 본 적이 없다.
고된 시골학교 생활
농촌 지역인 과산리로 이사와 보니 태탄읍이 자그마한 도시였음에도 거기에 살 때는 해 보지도 않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많이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가을에 접어들자 학교에서는 인민학교 3학년 이상 학생에게 산에 가서 도토리를 따오라고 지시했다. 산에서 따온 도토리를 그냥 학교에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은 다음 바짝 말려 절구에 찧어 도토리 쌀로 만들어 가져오라고 하였다. 할당량도 인민학교 3학년 학생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이 장마당에 가서 도토리를 사다 주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도 혼자서는 할당량을 채울 수 없어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도와주어서야 겨우 채울 수 있었다.
또한 인민학교 3학년 이상 학생들은 봄과 가을이 되면 오전에만 정상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전적으로 ‘농촌 지원’ 명목으로 협동농장(집단농장)의 모내기와 옥수수 심기, 김매기와 가을걷이 등 잡다한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겨울에는 다음 해 농사에 필요한 거름을 마련한다며 얼어붙은 소똥·개똥까지 모아 학교에 가져가야 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토끼 기르기와 학교 교사 건설 등에 동원되었다.
▲ 북한 노동자와 학생들이 2015년 2월8일 반미교양 시설인 황해남도 신천박물관을 관람하고 있다. 북한은 6·25전쟁 시기 신천 지역에 주둔한 미군이 “2개월도 안 되는 기간에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며 신천박물관에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반미교양의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신천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4학년 때는 각목과 널판지를 자른 다음 못을 박아 토끼장을 만들다가 판자에 박힌 못이 위로 솟아 있는 것을 모르고 밟아 못이 신발 바닥을 뚫고 발바닥에 그대로 박혀 고생했던 적도 있다. 이때 할머니가 민간요법이라며 신발에 오줌을 받은 다음 그대로 신고 있으면 괜찮다고 해서 그렇게 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스스로 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학기말이나 학년말 시험 기간을 제외하고는 과외 공부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한편, 당시에는 시골에 교통수단이 없어 어디를 가든 걸어 다녔다. 해마다 4월과 6월이면 군(郡) 내 학생들이 전부 읍내에 모여서 진행하는 사로청·소년단 연합단체 대회를 할 때도 5㎞가량 되는 읍까지 당일 아침에 1시간 동안 걸어가 행사에 참가하고 그날 저녁으로 또다시 걸어서 집에 돌아와 다음 날 아침에는 등교해 수업에 참가해야 했다.
인민학교 4학년 때는 과산리로부터 약 40㎞가량 떨어진 황해남도 신천군까지 걸어가 신천박물관을 참관하고 돌아온 적도 있다. 신천박물관은 6·25전쟁 때 신천군 인구의 30% 이상이 미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하면서 그 당시의 자료와 유물을 전시해 놓고 반미교양을 하고 있는 북한의 대표적인 반미교양 장소다.
낫에 찔리고 전기에 감전되다
이러한 가운데 인민학교 4년 과정을 마치고 고등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북한에서 자란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해마다 봄과 가을에는 학업을 전폐하고 1~2개월씩 식량을 가지고 농촌 지원에 동원되어야 했다.
여기에다 가을에는 농촌 지원 말고도 예전부터 하던 도토리 따기 과제는 물론 조금 컸다고 산에 가서 낫을 들고 겨울철 교실 난방용 나무까지 베어 와야 했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어렵고 힘든 노동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모든 일이 서툴렀고, 일하는 과정에 크고 작은 사고도 많이 발생했다.
중학교 1학년 가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학교에서 2㎞가량 떨어진 야산에 올라 낫으로 겨울철 교실난방용 나무를 베게 되었다. 우리가 베는 나무는 떡갈나무와 억새 같은 잡초였다. 잡초를 낫으로 벤 다음 새끼로 한 아름씩 묶어 놓았다가 겨울이 되면 그것을 실어다 한 단씩 때는 방식으로 교실 난방용 땔감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나의 낫질 솜씨가 숙련되지 않고 서툴러서 낫으로 나무를 쉽게 베겠다며 내리친 것이 나무 대신 내 무릎을 내리찍어 약 3cm가량 낫 끝이 무릎 아래에 박히고 말았다. 내가 아프다고 소리치며 넘어지자 정연복 담임선생님이 망설임 없이 손수건과 옷 안감을 뜯어내 그것으로 허벅지 부분을 묶어 지혈시킨 다음 나를 등에 업고 2㎞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진료소까지 달려가 치료를 받도록 해 주셨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봄에 동원되는 농촌 지원에 나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토끼사육장 건설 노동을 하다가 전기에 감전되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사실 그날은 비가 온 다음 날이어서 땅이 젖은 상태였는데,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전기가 진짜 통하는지 한번 시험해 보자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낮은 곳에 가설한 구리 전기선을 겁도 없이 건드렸다가 감전되고 말았다.
당시 내가 전기에 감전되어 거의 정신이 혼미해지던 상황이었는데 옆에서 톱질 하던 친구가 톱으로 전기선을 내리쳐 끊음으로써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내가 탈진 상태로 누워 있으니 같이 일하던 선생님이 나에게 죽는지 사는지 한번 시험해 보려고 그랬냐며, 하여튼 몸속에 있던 잡병은 모두 없어졌을 것이라고 웃으면서 얘기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농담 삼아 그런 얘기를 하셨겠지만 죽을 고비를 넘긴 나로서는 너무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여튼 나에게는 이때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하고 살아난 이후로 두 번째로 겪은 위험한 고비였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광탄천과 나의 소년시절
푸르른 산과 기름진 들판을 지나 서해의 넓은 바다로 흘러드는 광탄천, 나는 유년시절과 마찬가지로 소년시절도 광탄천과 더불어 보냈다. 내가 과산리로 이사와 사는 동안 힘겹고 위험한 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과산리에서의 소년시절은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도 많이 간직하게 해 준 낭만적인 시절이기도 하다.
복잡하고 힘겨운 가운데서도 봄이 오면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금향산(계명산으로도 불림)에 올라가 도라지·더덕·칡뿌리를 캐 먹고 주변 야산에 올라서는 싱아와 찔레도 꺾어 먹었다. 그리고 산골짜기 자갈밭에서 몸보신과 관절 치료에 좋다는 왕지네도 잡았고, 그러다가 왕지네에게 물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토끼풀을 하러 간다며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광탄천에 나가 하루 종일 물놀이도 하고 발목까지 빠지는 물속에서 은어와 불거지(피라미)·모래무지·메기 등 물고기를 나무막대기로 내리쳐서 잡은 다음 그것으로 어죽을 쑤어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강기슭 밭에 심은 참외와 수박·토마토·오이 그리고 사탕무를 서리해 먹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밭에 재배하던 사탕무는 일반 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쿠바에서 들여온 식용작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탕무는 너무 달콤해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가을철에 접어들면 산에 올라가 도토리를 따면서 다래와 머루·밤·개암·잣 등 각종 산 열매를 따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농장 밭에 들어가 콩과 옥수수를 서리해 먹기도 했다. 콩은 꼬투리가 달린 채로 꺾어 한 대씩 논바닥에 촘촘하게 꽂아 놓고 그 위에 볏짚을 덮은 다음 불을 지르면 콩대와 껍질·볏짚만 불에 타고 콩알은 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그대로 남는다. 그러면 그것을 한 줌씩 쥐고 입으로 바람을 세게 불어 재가 날아가도록 한 다음 콩알만 먹던지, 윗도리를 벗어 키질하듯 흔들어서 바람을 세게 일으켜 재를 날려 보내고 콩알을 먹으면 된다. 이런 것을 당시 고향에서는 ‘콩청대’라고 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어릴 때 저희를 위해 썰매를 직접 만들어 주실 때나 저희 방에 필요한 것들, 혹은 엄마가 필요해서 뭐든 말만 하면 직접 뚝딱대며 만들어 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저희는 그럴 때마다 아빠를 맥가이버라고 부르기도 했었구요. 아버지로서 혹은 남편으로서 말고, 아버지 본인만을 위해 꼭 한번 배워 보고 싶은 게 있다면 뭐예요?
아버지: 너희들이 어렸을 때 썰매와 팽이를 직접 만들어 준 것은 어렸을 때의 추억도 있고, 또 내가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야. 한국에는 아이들이 노는 데 필요한 장난감이나 스포츠용품을 모두 만들어서 팔고 있고, 그것들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도 풍부하지만 내가 어렸을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북한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어. 그래서 썰매든 뭐든 나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었어.
만약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 배워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목공 기술이야. 어렸을 때도 뚝딱거리며 무엇이든 만드는 걸 좋아했거든. 그래서 2년 전에 마음먹고 목공기술을 배우는 목공학원에 등록하고 몇 주간 기술을 배워 서랍장을 만들었는데, 정말 뿌듯했어.⊙
<16> 참고서는 없고 교과서만 있는 북한의 열악한 교육 환경
할머니가 다려 주시던 옥수수엿
겨울이 오면 얼음판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스케이트와 함께 스스로 만든 썰매를 타느라 손발이 시리고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놀았다.
그런가 하면 연을 만들어 날리고 연싸움을 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 연줄이 끊어지면 연을 잡으러 건너편 마을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팽이도 스스로 깎아 돌렸는데, 팽이는 굵고 단단한 나무로 깎아야 윙윙 우는 소리도 크게 나고 팽이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밤이 제법 많이 달리는 굵은 밤나무 가지를 잘라다 하루 종일 낫으로 팽이를 깎기도 했다. 팽이를 깎으려고 밤나무 가지를 자르다가 마을 어른들에게 야단맞던 게 엊그제 일 같다.
날씨가 몹시 추운 날에는 도끼와 함께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 ‘등걸’을 해 오기도 했다. 등걸은 떡갈나무 뿌리를 일컫는 황해도 방언이다. 황해도에서는 땔감이 부족해 떡갈나무가 뿌리에서 1년 정도 자라면 가을에 낫으로 베어 화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겨울이면 항상 나뭇가지는 없고 뿌리만 앙상하게 땅 위에 솟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등걸이다. 등걸은 겨울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얼어 버리기 때문에 도끼로 힘있게 내리치면 쉽게 부러진다. 산에 가서 등걸을 한 지게 해 오면 할머님이 그것으로 불을 지펴 달콤한 옥수수엿을 다려 주셨다.
등걸은 화력이 강하고 오랫동안 불이 붙기 때문에 옥수수엿을 다리는 데 제격이다. 아직도 내가 등걸을 한 지게 짊어지고 집에 들어설 때 못내 대견해 하면서 그것으로 옥수수엿을 다려 주며 행복해 하시던 할머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처럼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경험해 보았다. 물론 그 과정에 좀 다치기도 하고 위험한 적도 있었지만, 그 후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능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모두 어렸을 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문을 몹시 싫어했던 문제 학생
중학교 생활 기간에는 또한 여러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이 많았다. 나는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았고 인기도 그만하면 좋은 편이었지만, 선생님들에게는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공부하는 아이들을 충동질해서 수업에 빠지고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등 그리 환영받을 만한 학생이 못 되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문제 학생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당시 1학년부터 한문을 가르쳤는데, 한문을 가르치는 이유는 역사 연구와 통일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한자 자체가 낯설었고 쓰는 것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았다. 사실 한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에게 ‘한자는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린다’고 해야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한문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그 어려운 한자를 칠판에 가득 써 놓고 아이들에게 그것을 보고 그대로 쓰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런 한문 시간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한번은 연세 많은 한문 선생님에게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한문을 공부하기 싫은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선생님,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쓰지도 않는데 무엇 때문에 한자를 배워야 합니까? 그 시간에 차라리 앞으로 꼭 필요한 다른 지식을 배우는 편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너는 내가 처음 한문 수업을 시작할 때 왜 한문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를 벌써 다 잊었어? 우리나라 역사 연구와 통일을 위해서 한문을 배워야 한다고 했잖아?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썼기 때문에 모든 역사 자료가 한자로 되어 있고, 특히 지금도 남조선에서는 신문이나 교과서 같은 데 한문을 쓰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역사 연구를 위해서도 그렇고 통일을 한 다음 남조선 사람들과 어울려 살려면 그들이 쓰는 한문을 알아야 하는 거야. 넌 지금 한문을 왜 배워야 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쓰기 싫으니까 그런 거 아냐?”

▲ 2001년 6월22일 북한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김부자 혁명역사’ 과목 수업을 받고 있다. 북한은 2000년 10월 청소년들에 대한 사상교육 강화책의 일환으로 동 과목에 대한 학습 시간을 연간 60시간에서 120시간으로 확대했다. 연합뉴스
한마디로 나는 본전도 못 찾았다. 그런데 그토록 한문을 싫어했던 내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한자를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대남공작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공작원으로 소환된 후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갔을 때 중학교 시절 한문을 가르쳤던 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던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는 옛 성인들의 충고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재미있는 일화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음악에 대한 아쉬움
고등중학교 1학년 때는 당시 학교에 새로 생긴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과 클라리넷을 2개월가량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할머님께서 “왜 풍각쟁이가 되려고 하느냐”며 밴드부를 책임진 음악 선생님을 찾아가 “내 손자를 밴드부에서 빼 달라”며 한사코 못 하게 해 하는 수 없이 그만둔 적도 있다.
그 후에 하모니카와 대금 등 다른 악기를 좀 배우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때 악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 다른 건 몰라도 음악만큼은 좀 알아야 한다며 피아노학원에 보낸 적이 있다.
고등중학교 3학년 여름에는 군(郡)청년동맹에서 우리 학교가 토끼 기르기를 잘했다며 야영을 보내 주어 15일간 황해남도 도청소재지 해주시의 수양산 밑에 있는 도(道)야영소로 야영을 다녀오기도 했다. 야영이란 각 학교에서 모인 아이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교육과 함께 등산도 하고 해수욕도 하고 오락도 하면서 보내는 것을 말한다. 잼버리와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해주시로 야영을 갈 때도 과산리에서 해주까지 40km 되는 거리를 걸어서 왕복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야영을 다녀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예전과 같이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협동농장에 가을걷이 지원도 나가고, 한편으로는 산에 올라 도토리도 따고 겨울철 난방용 나무를 베기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선생님 놀려 주다 걸린 아이
이런 가운데 고등중학교 3학년 시절 나의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잊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해주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배치된 지 얼마 안 되는 처녀 선생님이 가르치는 지리 수업시간에 일이 발생한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 반 수업에 들어온 그는 숙제 검사부터 했는데, 숙제를 안 해 온 아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한 명씩 이름을 물어보고 기록했다. 그런데 숙제를 안 해 온 아이들 가운데 한 친구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지리 선생님은 누구에게 할 것 없이 그 친구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지리 선생님은 20대 초반으로 무용수들처럼 가슴을 앞으로 유난히 내밀고 다녀 아이들이 ‘오리가슴’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받지도 않고 무시해 버리는 건방진 행동까지 해서 인기가 없었다. 우리 교실에 들어와서도 첫 수업 시간부터 기선을 잡으려고 괜히 아이들을 야단치고 말과 행동도 거칠게 하고 숙제도 일부러 많이 내주어 아이들의 불평이 굉장했다.
그래서 나는 한번 골탕 먹어 보라는 심정으로 지리 선생님의 등 뒤에서 그 친구의 이름이 아닌 그의 별명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지리 선생님은 자신이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숙제 검사를 곧바로 중단하고 “방금 별명을 부른 학생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 순진한 때였으므로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별명을 큰 소리로 외친 나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를 눈치 챈 지리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네가 방금 별명을 불렀지?”
“네, 제가 그랬습니다.”
“일어나서 교실 앞으로 나와.”
그런데 당시 나에게는 옆에 앉았던 친구가 집에서 가져다준 고구마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고구마를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나가면 불쑥 튀어나와 망신스럽다는 생각에 그것을 꺼내 친구에게 맡겨 두고 교실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지리 선생님이 언제 보았는지 친구에게 다가가 고구마를 빼앗은 다음 교실 앞에 서 있는 내 주머니에 고구마를 넣어 주는 것이었다. 물론 고구마가 들어간 내 상의 주머니가 불룩해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주머니가 불룩한 모양으로 아이들 앞에 서 있자니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했고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참으로 그 당시에 느낀 모멸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도였다. 아마도 당시 내가 명색이 학교 소년단 조직의 총책임자인 소년단위원장(전교회장)이었기 때문에 더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나는 2학년 때까지 우리 반의 소년단 조직을 책임진 분단위원장이었고, 고등중학교 3학년은 소년단 가운데 가장 상급 학년이어서 3학년 학생 가운데 학교 소년단위원장을 선출하는데 내가 거기에 뽑힌 것이다.
그런데 수업시간이 절반가량 지나갔는데도 지리 선생님은 나를 그냥 그 자리에 세워 두었다. 그러다가는 틀림없이 수업이 끝난 다음 교사들이 모두 모이는 교무실로 끌고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학교의 모든 선생님에게 망신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기가 막혔다.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서 그랬겠지만 정말 더 이상의 치욕과 수치는 없을 것 같았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아버지와 엄마가 유일하게 저와 동생에게 시키셨던 사교육은 태권도도장과 피아노학원이었어요. 그 덕분에 좋았던 점은 가족여행을 정말 많이 다닐 수 있었고 집에서든 밖에서든 놀고 싶을 때마다 놀 수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아쉬웠던 점은 학원으로 다 가 버린 친구들 탓에 레고나 건담을 가지고 놀거나 아니면 동생이나 사촌누나들이 그나마 가장 오래동안 같이 놀아 줄 친구였다는 것….
그리고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 차 타고 학원에 다녀 보는 게 소원일 때도 있었어요. 그때 정말 궁금했던 것이, 아버지는 저와 동생에게 다른 거 말고 왜 태권도와 피아노 두 가지만 배우라 하셨을까 하는 거였어요.
아버지: 내가 한국에 살면서 보니까 여기는 자기가 공부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어. 내가 북한에서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밖에 없었거든. 참고서는 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북한에는 ‘학원’이나 ‘과외’라는 말조차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공부를 했잖아.
그래서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학원에 가야만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머리가 되면 굳이 학원에 다니지 않더라도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교재와 참고서만 가지고도 충분히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 엄마에게 국어나 수학·영어 등을 가르치는 학원에는 보내지 말자고 했던 거야.
다만, 너희들을 태권도 도장에 보낸 것은 남자가 최소한 자신은 물론 여자친구 정도는 보호해줄 수 있는 능력(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피아노학원의 경우에는 내가 살아오면서 보니까 음악을 알면 보다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음악을 배우라고 보냈던 거야.
물론 내가 어렸을 때 악기도 다루고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할머니 반대로 할 수 없었던 데다, 살아오면서 ‘음악을 좀 더 알았으면 삶이 더 풍족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피아노를 배우라고 한 것도 있었지.⊙
<17> 北에선 안 쓰는 말 ‘사춘기’… 고약한 반항 성장통
‘사춘기’라는 것도 모른 채 시작된 반항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망신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지리 선생님이 돌아서서 칠판에 글을 쓰는 사이에 몰래 주머니에 있던 고구마를 꺼내 교실의 제일 앞에 앉은 친구에게 무작정 넘겨주었다. 사춘기 반항의 시작이었다. 북한에는 ‘사춘기’라는 단어가 없다. 그만큼 청소년 교육에 관심도 없고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고등중학교 3학년 때 처녀 선생님을 놀리는 등 반항 아닌 반항을 했던 것이 ‘사춘기 반항’이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 와서 살면서 알게 되었다.
나에게 고구마를 넘겨받은 친구는 자기 뒤에 앉은 친구에게 넘겨주었고, 그것을 받은 친구는 세 번째 줄에 앉은 친구에게 또다시 건네주었다. 그런데 세 번째 줄에 앉은 친구가 후환이 두려웠던지 고구마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두 번째 줄에 앉은 친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자기 책상 다리와 교실 벽 사이의 공간에 고구마를 그냥 놓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모르고 수업을 이어 가던 지리 선생님은 한참 후에 비로소 내 주머니에서 고구마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나에게 고구마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답할 내가 아니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서 있자 화가 난 지리 선생님은 수업을 아예 중단하고 없어진 고구마를 찾기 시작했다. 제일 앞줄에 앉은 아이들부터 한 명씩 주머니와 책가방·책상 서랍을 뒤지고 검사가 끝난 순서대로 아이들을 모두 교실 앞에 세워 놓았다.
그러나 고구마가 책상 다리 옆에 놓여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세 번째 줄 아이들까지 검사하면서도 고구마를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 수업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휴식시간까지 아이들을 붙잡아 놓고 이미 고구마가 있는 곳을 지나쳐 찾지도 못할 고구마를 진땀까지 흘려 가며 찾고 또 찾았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고구마를 찾지 못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지리 선생님은 나를 망신시키려다 반대로 자기가 아이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2교시였던 지리 수업이 끝나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업간체조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이 지리 선생님 때문에 체조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었다.
2교시가 끝나면 평소처럼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오리라고 생각한 담임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우리반이 서야 할 위치에 서서 기다리다가 아이들이 나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한 명도 보이지 않자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문을 열고 보니 절반가량의 아이들이 교실 앞에 나와 서 있고 나머지는 앉아 있는데, 지리 선생님은 무엇을 찾는지 아이들의 몸과 책가방·책상 서랍을 뒤지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담임선생님은 화가 나 교실에 들어오지 않고 문을 쾅 닫았는데, 정신없이 가방을 뒤지던 지리 선생님은 ‘쾅’ 소리를 듣고서야 하던 행동을 멈추고 아이들을 그냥 세워둔 채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교실 문 밖에서 한참 동안 담임선생님과 대화를 했다. 아마도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얼마 후에 선생님 두 분이 교실로 들어오더니 지리 선생님은 교수안과 출석부 등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고 담임선생님만 남았다. 그때 이미 담임선생님의 얼굴색과 모습은 극도로 흥분되어 정상이 아니었다.
▲ 2005년 10월20일 조선중앙TV는 평양서성 제1중학교 교원 리현 씨가 ‘교류의 전력’ 45분 수업에 양심을 바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연합뉴스
사랑의 매
중학교 1학년에 진학한 후부터 담임이었던 정연복 선생님은 20대 중반의 총각이었고 경력도 지리 선생님에 비하면 한참 선배인데, 갓 대학을 졸업한 후배에게 자기가 담당한 아이들이 잘못해서 지적받았으니 충분히 화가 날 만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엄청나게 화가 난 것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담임선생님은 교실 앞에 서 있던 아이들에게 자리에 돌아가 앉으라고 하더니 교실 뒤편으로 걸어갔다. 교실 뒤편 구석에는 친구들이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대금을 만든다며 잘라서 가져다 세워 놓았던 직경 5~6㎝, 길이 2.5m가량 되는 오동나무가 있었다. 그는 오동나무를 발로 밟아 절반으로 부러뜨린 다음 1m가 좀 더 되는 한쪽 부분을 가지고 교실 앞으로 다시 돌아와 제일 먼저 내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바지를 걷어 올리라고 한 다음 오동나무로 내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이었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두 번째 만에 몽둥이가 부러져 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또다시 남은 몽둥이를 가지고 나와 내 종아리를 다시 내리쳤다. 처음 가격한 나무가 부러질 때까지만 해도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맞을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두 번째 굵은 몽둥이로 내리칠 때는 그만 참아내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사실 정연복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처음부터 우리 반을 담임했었는데, 1학년 가을에는 나무를 베다가 낫으로 무릎을 찍어 많은 피를 흘리고 걸을 수 없게 된 나를 업고 먼 길을 달려가 치료해 준 분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나를 많이 사랑해 주고 아껴 주던 분이었고, 그래서 내가 무척 존경하고 따르던 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당시 수학 과목을 가르쳤는데, 붓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등 다재다능한 분이었고 인정도 남달리 많은 분이었다. 그래서 매를 맞는 그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담임선생님에 대한 반감보다는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나를 매 맞게 만든 지리 선생님이 얄밉다는 생각이 더 컸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혼내는 것만으로는 쌓인 화를 풀기에 부족할 만큼 너무도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년단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있던 10여 명의 다른 아이들을 불러내 그들에게도 오동나무 세례를 안겼다. 그렇게 하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반에서 조금이라도 책임을 맡은 아이들을 모두 불러내 그들에게도 왜 아이들을 통제하지 못했느냐며 몽둥이 세례를 안겼다.
두 번째 몽둥이가 부러져 나갈 때까지 한참동안 화풀이를 하고 난 담임선생님은 나를 혼자 따로 불러내더니 학교로부터 조금 떨어진 조용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내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 멍든 종아리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그토록 믿어 왔는데 어쩌면 그렇게 내 믿음을 저버릴 수 있어?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해도 말렸어냐 할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담임선생님의 이 말씀에 나는 몽둥이로 맞은 것보다 더 큰 자책감을 느꼈다. 따라서 맞은 것이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담임선생님에게 너무도 죄송하다는 생각이 앞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선생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계속되는 사춘기 반항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나는 지리 과목 수업 시간만 되면 의도적으로 잠을 자거나 옆에 앉은 아이들과 떠들어 주위를 산만하게 해 수업에 지장을 주었다. 나중에는 아예 아이들을 끌고 나가 지리 수업에 불참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지리 선생님을 골탕먹이는 등 학생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까지 무지막지하게 했다.
사실 그래봐야 나만 손해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당시 나이 어린 내 머릿속에는 오직 지리 선생님에 대한 나쁜 감정과 반발심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를 골탕먹일까 하는 못된 생각만 하고 있었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당시를 생각해 보면 굳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당시 나이가 어려 사고의 폭이 좁았던 내 수준과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충동적인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지리 선생님은 나를 좋게 봐 줄 수 없었고, 나는 나대로 지리 과목 노트 정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학기말이나 학년말에 과목마다 해당 과목 담당 선생님이 기말 시험 성적과 평소 학습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주는 최종 점수를 높게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른 과목은 모두 10점 만점을 받았는데 지리 과목만 낙제 점수인 4점 이하를 받을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자 내가 받은 지리 과목 성적에 대해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고 신경을 쓰는 사람은 담임선생님이었다. 그는 내가 말썽을 피울 때는 나를 불러 자기의 체면을 봐서라도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결과적으로 내 지리 과목 성적이 엉망으로 나오자 나에게 다른 아이들의 노트를 보고 노트 정리라도 제대로 해서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요구를 거역할 수 없어 며칠 안에 지리 과목 노트 정리를 깔끔하게 해서 가져다 드렸는데, 그걸 가지고 지리 선생님에게 선처를 호소했는지 성적증에 기재되는 최종점수를 6점을 받아 낙제 점수를 겨우 면하게 되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어릴 적 나와 동생을 데리고 공원에 나가 운동을 할 때면, 아버지는 거의 모든 스포츠에 대해 잘 알고 저희에게 심지어 규칙에 대한 것들도 직접 가르쳐 주셨던 기억이 나요. 특히 동생이 어린이야구부에 들었을 땐 함께 미국 메이저리그를 봐 가며 선수들의 이름이나 특징들, 포지션까지도 자세히 설명해 주실 때가 많았는데, 북한에서는 이런 스포츠를 접할 기회가 없지 않았나요?
아버지: 사실 내가 어렸을 때 북한에서 접하거나 본 스포츠는 육상과 축구·농구·배구·송구(핸드볼) 등 구기 종목과 배드민턴·테니스·유도·레슬링 등이 전부였어. 특히 당시 북한에는 정말 재미있는 야구는 물론 당구나 골프도 없었어. 심지어는 그런 종목이 있는지조차도 몰랐어. 그만큼 스포츠 분야에서는 후진국이었지.
그런데 내가 남한에 침투하기 전에 적구화교육(북한 사람을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을 받을 때 86아시안게임 관련 자료를 많이 봤는데, 스포츠 종목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어. 처음 접한 것이 야구였는데 내가 어렸을 때 친구들과 했던 ‘볼치기’ 놀이와 비슷했는데, 경기룰을 하나도 모르니까 재미가 없더라고….
그런데 강사로부터 야구 룰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보니까 반대로 야구가 엄청 재미있는 거야. 그래서 당시 선동열·최동원·이만수·김성한 등 유명한 야구 선수들 이름까지 외우며 야구를 열심히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어. 또 한국에 정착해 살면서 박찬호가 나오는 미국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면서 야구를 더 즐기게 됐지.
결과적으로 야구나 당구·골프 등 북한에서 접하지 못했던 스포츠 종목의 경우 룰을 모르니까 보고 싶은 생각도, 재미도 없었는데 룰을 알고 보니까 그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너희들에게도 스포츠를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스포츠 종목과 그에 따르는 룰을 알려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너희들이 자라면 스포츠를 보거나 즐길 텐데, 기왕이면 즐겁게 보고 즐기라고 스포츠 종목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룰을 알려 준 거야.⊙
<18> 사려 깊고 대범하셨던 할머니… 내 삶의 ‘참 스승’
할머니는 나의 스승
그런데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몽둥이로 한 대씩만 때렸는데 그때 맞은 친구 한 명이 부모님께 그 사실을 이야기해서 그 부모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군(郡)안전부(경찰서)에 찾아가 “학생들을 몽둥이로 때리는 것은 일제통치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며 담임선생님을 강력하게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여러 학부모가 관련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담임선생님에 대한 비난이 더욱 고조되었다. 여기에다 담임선생님이 중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며 법적으로 문제를 삼겠다는 안전부의 압력으로 담임선생님은 어깨가 축 늘어져서 다니다가 결국 1년 만에 교사직을 자진사퇴하고 자기 형이 살고 있던 개성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담임선생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개성으로 가시기 전 어느 날, 할머니가 그 일을 어떻게 아셨는지 내가 집에 들어서자 아무 말씀도 없이 무작정 내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셨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몽둥이에 맞은 자리가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때에는 이미 몽둥이에 맞아 생겼던 멍이 없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여서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맞은 적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같은 동네에 사는 선생님으로부터 구체적으로 들어서 다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집에서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귀하게 키운 자식인데, 감히 누가 남의 귀한 자식에게 손찌검을 하느냐?”며 몹시 분해 하셨다. 그러면서 당장 법기관에 신고해서 문제삼겠다고 펄쩍 뛰셨다. 그때 마침 집에 들어와 계시던 아버지가 “저 녀석이 맞을 짓을 해서 선생님이 손을 댔지 아무려면 말 잘 듣는 아이에게 매를 들었겠느냐?”고 하시면서 말려서야 할머니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할머니는 담임선생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개성으로 이사간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식에게 매를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자식을 가르친 스승”이라고 하시며 북한에서는 귀한 손님들에게만 대접하는 떡을 손수 만드신 다음 담임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 정성껏 대접하셨다. 정말 사려 깊고 대범하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스승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승이란 결코 대학을 나오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며, 또한 결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할 뿐 나의 가까운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선생님 말씀 한마디가 중요한 까닭
담임선생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아예 다른 지역으로 가신 것은 나에겐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나 하나 때문에 그렇게 훌륭한 선생님께서 교단을 떠나게 됐으니 그보다 더 큰 죄악은 없을 것 같았다. 당시에도 죄책감을 느꼈지만 아마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죄책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담임선생님이 떠나신 이후 나의 행동이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나는 담임선생님께서 떠나신 이후 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른 과목 공부는 잘하면서도 지리 과목만큼은 마지못해 겨우 노트 정리나 해서 낙제 점수를 면하는 정도로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한반도 지리는 물론 세계 지리에 대해서도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결국은 나 혼자만 손해를 본 것이다.
그리고 학교 내에서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만날 때마다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도 유독 지리 선생님에게만은 마주쳐도 인사를 하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거나 머리를 빳빳이 들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몰상식한’ 행동을 했다. 계속해서 그렇게 행동했더니 나중에는 지리 선생님도 화가 나서 이렇게 얘기했다.
“너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 본다. 앞으로 네가 커서 얼마나 잘되는지 두고 보자.”

▲ 북한의 평양창덕학교에서 1일 입학식을 마친 신입생들이 첫 수업을 받고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나도 이에 질세라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지리 선생님이 저에게 잘되라고 해서 제가 특별히 잘될 것도 없고, 또 잘못되라고 빈다고 해서 제가 할 일을 못하거나 잘못될 것도 없으니 실컷 따라다니면서 보십시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으로서 대단히 건방진 태도였는데, 그때 내게 무슨 배짱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지금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뒤에 휴가차 고향에 간 기회에 동창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그때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친구들에게 지리 선생님의 근황을 물었더니 그는 내가 고향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고, 결혼 후에는 해주시에서 빵 장사를 하고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아마도 그때 지리 선생님이 나에게 앞으로 얼마나 잘되는지 보자고 한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는 더욱더 그가 보란 듯이 더 잘해야 되겠다는 오기가 발동되어 그 후에도 무슨 일에서든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지리 선생님과의 관계로 발생한 일은 그 후에 알게 모르게 나의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사춘기 시절 철 없는 행동에 대해 지금이라도 지리 선생님께 사과드리고 싶다.
그만큼 감수성이 풍부하고 신경이 예민한 청소년기, 사춘기에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학생들의 행동과 장래를 결정하는 데 참으로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삼봉약수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에 사로청(현재 청년동맹)에 가입한 나는 4학년에 올라가면서 대부분 5학년 학생들이 하는 학교사로청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사로청은 15~30세의 남녀 청년 가운데서 노동당원을 제외한 북한의 모든 청년이 가입하는 청년 조직이다.
중학교 3학년 후반기가 되면 사로청에 가입시키는데 소년단 조직처럼 반에는 초급단체, 학교에는 초급사로청위원회가 조직되어 각각 위원장을 선거한다. 그래서 반의 책임자는 초급단체위원장, 학교의 책임자는 학교사로청위원장(또는 초급사로청위원장)이라고 부른다.
그해 여름에 군(郡)사로청 주최로 관내 모든 학교 사로청·소년단 책임자들의 강습이 삼봉약수터에서 1주일간 진행되었다. 나도 우리 학교 10여 명의 사로청·소년단 간부들을 책임지고 여기에 참가했다. 강습은 약수가 나오는 산골짜기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면서 노래와 춤·운동경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캠핑 또는 교육 프로그램과 같은 것이다. 강습 기간이 비록 길지 않았지만 인상에 깊이 남는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가 여름이어서 땀띠가 생긴 아이들도 많았으나 3일가량 삼봉약수로 밥을 지어 먹고 아침저녁 약수물로 씻으니 거짓말처럼 땀띠가 없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리 설익은 밥을 먹어도, 잠을 잘 때 배를 내놓고 자도 배탈 나는 친구가 없었고 소화가 굉장히 잘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삼봉약수는 피부병과 위장염에 아주 특효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삼봉약수터에 위장병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요양원까지 생겨났다. 아울러 삼봉약수를 외국에까지 수출한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북한에도 행복과 자유 그리고 인권과 같은 말들의 정의나 아니면 인문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나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세계지리나 서양철학부터 사상·물리나 화학 심지어 한국 역사까지 저희가 질문하는 대부분을 동생과 제가 잘 이해하게 설명을 해 주셔서 북한 교육과정에서도 그런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가 보다 생각했었거든요. 그리고 특히나 한국 역사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요.
아버지: 사실 북한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김씨 가문의 역사와 그들이 말한 내용을 ‘교시’ ‘말씀’이라며 가르치는 거야. 김씨 가문의 역사는 유치원과 소학교(초등학교)에서 한 번, 고등중학교에서 한 번, 대학에서 한 번, 이렇게 세 번을 반복에서 가르쳐. 그러니까 북한의 모든 주민은 김씨 일가 역사에 대해서는 전부 외우고 있어.
북한의 대학에서도 철학 과목을 가르치기는 하는데 주체사상에 대한 내용을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행복과 자유·인권과 같은 보편적인 개념에 관한 이론은 거의 가르치지 않아.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인문학적으로 상당히 메마른 것이 사실이야.
남한이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 가르치는 학문 가운데 북한에서만 가르치지 않는 과목이 있는데, 바로 정치학과 사회학이야. 정치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북한에서 정치가는 김씨 일가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 주민은 정치학을 배울 필요도 없고 배우면 안 된다는 인식 때문이야. 사회학은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나 병폐를 해결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북한은 ‘인민이 주인인 살기 좋은 나라’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나 병폐가 아예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재미있는 것은 북한이 언론매체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부정적인 문제들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북한이 선전선동에서 내세우고 있는 소위 ‘긍정감화교양’(주민들에게 긍정적인 내용을 알려주어 그대로 따라 하도록 하는 것) 원칙 때문이야.
특히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말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북한은 한국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는 인민대중의 투쟁의 역사’라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과거 우리 선조들이 외세에 반대해 투쟁하거나 왕조 체제에 반대 또는 반발해 일으켰던 봉기나 폭동 위주로 역사를 가르치고 있어. 이와 함께 ‘미국과 일본은 100여 년 전부터 조선을 침략해 왔다’며 반미·반일 교육을 강화하고 있어.
또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 500년 역사’에 대해서도 ‘왕의 아들이면 무조건 왕이 되는 세습 체제’였다며 상당히 비판적으로 가르쳐. 그런데 ‘조선은 혈통에 의해 왕권이 계승되는 세습 체제’라며 그토록 강력하게 비판했던 북한이 그대로 과거 조선의 역사를 답습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
그리고 6·25 전쟁의 경우에도 북한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남한을 공격함으로써 발생한 남침 전쟁인데, 반대로 미국과 남한이 먼저 일으킨 북침 전쟁이라고 왜곡해서 가르치고 있어.⊙
<19> 특별하지 않은 평범함 때문에 공작원 되다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는 지도원 말에 눈앞 캄캄해져
4년간 금성정치군사대학서 공부한다는 말에 엄청난 충격
‘죽으려고 여기까지 왔나’…평범한 삶 대신 운명의 소용돌이로
천리길 답사
중학교 4학년 여름에는 우리 학교 아이들과 함께 ‘배움의 천리길’ 답사를 가게 되었다. 김일성이 12살 되던 1923년 겨울 중국 국경 지역인 임강에 살다가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배우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외가가 있던 평양 만경대 구역(당시는 평남 대동군) 칠골까지 왔었는데, 당시 걸어서 이동한 거리가 1000리(400㎞)가 된다고 하여 김정일이 ‘배움의 천리길’이라고 명명하고 1975년 처음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전체적인 노정과 매일 걷는 거리는 당시 김일성이 걸었던 거리로 했다고 하며, 교통 수단 역시 그대로 이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중국 임강의 맞은 편인 양강도 후창(지금의 김형직군)에서 출발해 10여 일가량 매일 평균 70~80리(28~32㎞)씩 걷고 어떤 날에는 100리(40㎞)도 걷는다. 자강도 화평과 강계·전천과 희천을 거쳐 묘향산이 있는 평안북도 향산과 구장을 지나 평안남도 개천에 도착한 다음 기차를 타고 안주를 거쳐 평양까지 간다. 그리고 평양에 도착해서는 3·4일간 시내 관광을 한 다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전체적인 답사 일정이 마무리된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5명의 선생님과 1~4학년 남녀 학생 70명으로 답사단을 구성해서 갔는데, 나는 이때에도 학교 사로청위원장으로서 전체 학생들을 책임지고 갔었다.
그때가 한여름 장마철이어서 그런지 비가 자주 많이 내려 거의 매일 비를 맞으며 걸었던 기억밖에 없다. 그리고 10살이 갓 지난 아이들로부터 17세에 이르기까지 나이도 다양하고, 또 남학생은 물론 여학생들까지 섞여 있어 걱정은 되었지만 모두 모범생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그때 전체 학생들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어 모든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지금도 그들과 함께 찍었던 흑색 기념사진이 우리 집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걸어 다니는 팔자를 타고났는지 어려서부터 하루에 100리쯤 걸어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고, 특히 그 후에도 인간의 생에서 결코 짧은 기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15년 동안 훈련의 절반 이상을 걸어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직업 남파공작원으로 활동했다.
배움의 천리길 답사를 다녀온 후 고등중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준군사조직인 ‘붉은청년근위대’에 입대해 군당 민방위부에서 주관하는 약 1주일간의 군사훈련과 함께 실탄사격을 했다. 당시 실탄사격은 AK소총을 가지고 100m 거리의 목표를 향해 3발을 쏘는 방식으로 했는데, 나는 30점 만점에 26점을 받았다.
평범함 때문에 공작원으로 선발되다
4학년 여름에는 군(郡)에서 주관하는 수재 선발을 위한 예비 시험에 응시하기도 했다. 그날은 우리 반이 체육 수업의 일환으로 광탄천으로 수영하러 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나는 전날 친구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쑤어 먹기로 약속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 가지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나를 사무실로 부르시더니 수영하러 가지 말고 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번 시험은 수재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에 영광으로 생각하고 시험을 잘 보라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수재 시험을 잘 봐서 정말 수재로 선발되면 죽을 때까지 하기 싫은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험을 보기 싫었다. 여기에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려고 만반의 준비까지 다 해 왔는데 못 가게 되었으니 시험을 보고 싶은 생각이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께 공부도 못 하는 내가 어떻게 수재 시험을 보겠느냐며 투정도 부리고 시험을 안 보면 안 되냐며 억지도 부리다가 야단을 맞고서야 할 수 없이 대여섯 명의 다른 아이들과 시험을 보았다. ‘비둘기 마음 콩밭에 가 있다’는 속담도 있듯이 내 마음은 이미 강가에 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공부가 싫은데 수재 시험을 잘 보면 앞으로 평생 공부만 해야 될 거라고 생각하니 도대체 시험을 잘 봐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욕이나 먹지 않을 정도로 건성으로 시험을 보았다.

▲ 2003년 3월16일 평양 만경대를 향해 량강도 포평을 출발한 전국학생소년들이 ‘배움의 천리길’ 답사행군대를 하고 있다. 배움의 천리길은 김일성이 1921년 중국 바다오거우(팔도구)에서 만경대 칠골로 걸어서 유학온 길이다.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이다. 평양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그렇게 시험을 봤는데도 점수가 괜찮게 나왔던지 그 후에 또다시 읍에 가서 군(郡)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 놓고 보는 수재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내 머릿속에는 시험을 잘 보았다가는 앞으로 평생 공부를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고, 그런 생각으로 시험을 봐서 그랬는지 다음부터는 다시 수재 시험을 보라는 얘기가 없었다.
고등중학교 5학년 1학기가 끝날 즈음에는 전국의 고등중학교 졸업생들을 상대로 실시되는 국가판정시험(일종의 수학능력시험)을 보았는데, 이 시험 성적에 따라 중학교 졸업 이후의 진로가 결정되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을 봤다. 그 결과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군(郡) 내에서 10위권 내에는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고등중학교 생활 전 기간 나는 지리 선생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훌륭하신 부모님과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디에서든 예의 바르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고,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최우등생이었다. 그리고 줄곧 내가 속한 반과 학교에 전체를 대표하는 소년단·사로청 조직의 책임자로도 활동했다. 내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동생들 역시 모두 학과 성적에서는 항상 최우등생이었고, 각급 조직의 책임자를 역임했다.
이처럼 나의 부모님은 유명한 사람도 아주 높은 간부도 아니었고, 나 역시 뛰어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 평범함 때문에 내가 공작원으로 선발되었는지 모른다.
최종 선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내 운명 ‘대남 공작원’
내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평양 대동강역에 도착한 시간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녁 6시경이었다. 기차에서 내린 후 개찰구를 빠져나와 마중 나오기로 한 중앙당 지도원을 기다리는데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황해북도 신계에서 온 명수가 서 있었다. 명수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면접 및 신체검사 때 우리를 안내했던 중앙당 지도원이 다가왔다. 오느라고 수고했다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낸 그는 안전원(경찰)들이 회수해 간 나와 명수의 신분증을 찾아가지고 나와 우리를 승용차에 태우더니 평양 시내 중심으로 향했다.
승용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양 시내 중심 인민문화궁전 맞은 편에 위치한 10층짜리 아파트 앞이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아파트의 맨 위층으로 안내되었다. 후에 알게된 것이지만 당시 우리가 들어갔던 아파트는 일반 아파트가 아니라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연락부에서 사용하던 공작원 전용 초대소였다. 미리 연락부 부과장이 나와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를 맞이했다.
연락부 부과장은 그곳에서 우리와 저녁식사를 함께 한 다음 나와 명수를 각각 한 명씩 면담실로 불렀다. 그는 내가 발급받아 가지고 간 식량정지증명서와 군사이동증을 비롯한 서류와 주머니에 있던 돈과 증명서·사진 등 소지품까지 꺼내 놓으라고 한 다음 종이봉투에 집어넣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소지품들은 앞으로 필요할 때 주겠소. 오늘부터 동무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4년 동안 대학 공부를 하게 되었소. 금성정치군사대학은 남조선 혁명가들을 양성하는 대학이오. 동무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높은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의해 남조선 혁명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소. 이야기가 끝나면 나하고 대학까지 같이 갑시다.”
부과장으로부터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내가 죽으려고 여기까지 왔나?!’
‘대남’과 ‘죽음’을 동일시하고 있던 평범한 나에게 ‘남조선 혁명가’라는 표현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데 과연 펄펄 날아 다닌다는 대남 공작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됐다. 여기에다 단 한 번도 입학시험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시험도 안 보고 들어가는 이런 이상한 대학도 있나, 공부가 하기 싫어서 대학을 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결국 대학에까지 가게 되었으니 충격은 더 컸다.
부과장은 내가 정신 차릴 여유도 주지 않고 이번에는 대남 공작원이 된다는 사실이 실감나도록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는 본명을 사용하지 말고 대신 가명을 사용해야겠소. 우리가 지은 이름인데 ‘박승국’ 이라는 가명을 쓰시오. 그리고 조금 전에 회수한 돈이나 사진 등 소지품은 우리가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대학을 졸업한 뒤 필요하면 그때 가서 그대로 돌려주겠소.”
당시 나와 명수에게서 회수했던 돈과 사진 등 소지품은 부과장이 얘기한 대로 그로부터 4년이 지나 대학을 졸업한 다음 다시 돌려주었다.
아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다녔던 대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사실 잘 와닿지 않았던 적이 많았어요. 여기선 상상조차 힘드니까….
제가 군대에 입대해 생활하면서는 꼭 아버지의 아들이어서라기보다 청춘 시절의 남자 대 남자로서 아버지를 생각해 볼 시간이 많았어요. 혹시 아버지가 저처럼 이런 젊은 시절에 해 보거나 누리지 못해서 후회스러운 것들이 있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버지: 글쎄, 나는 후회스럽다고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가급적이면 후회를 잘 안 하는 편이야. 대신 후회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지.
그런데 내가 평양에 소환된 다음 간부들로부터 남조선 혁명가, 즉 대남 공작원으로 임용되었고 공작원이 되기 위해서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해 공부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도중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여기까지 안 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 그리고 괜히 노동당에서 하라는 대로 해서 이렇게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잠깐 후회한 적도 있고….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후회한다고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아예 후회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
그리고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해 혹독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생활했던 4년간을 돌이켜볼 때 별로 후회되거나 아쉬운 것은 없어.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떠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일이고 나를 낳아 키워 주신 부모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훈련을 했으니까….
다만,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이 연애를 한창 할 나이인데 나는 ‘슬프게도’ 연애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연애를 못 했다는 아쉬움마저도 느낄 수 없었어.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나의 대학 시절은 ‘비참하고 슬픈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
03.11
<20>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용광로… ‘인간 병기’ 제조 공장
대남 공작원에 대한 두 가지 선입견
일반적으로 북한 사람들은 대남 공작원에 대해 두 가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남 공작원이라면 무술을 잘해 한 번에 수십 명씩 쓰러뜨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펄펄 날아다니는, 그야말로 귀신과 같은 존재라고 여긴다. 또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남’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나뿐만 아니라 북한 남자 대부분이 대남 공작원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싸움을 아주 잘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또 과거에 남편이 대남 분야에서 일하다가 사망해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는 여성을 주위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었으므로 ‘대남’과 ‘죽음’을 동일시한 것이다.
결국 내 머릿속을 강타한 것은 ‘내가 과연 몇 사람씩 때려눕힐 정도로 싸움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인 대남 공작원이 되었다는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대남 공작원’이라는 명칭과 ‘죽음’을 동일한 의미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충격과 함께 실망이 겹쳤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저는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대남 공작원을 못 하겠습니다”라거나 여타 다른 변명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전에도 그랬지만 바로 한 달 전 면접과 신체검사를 하러 평양에 왔을 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는 간부들에게 큰 목소리로 “저는 당에서 바라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고 대답했었으니까….
그동안 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집에서 태탄읍과 해주 그리고 황해도와 평양을 오가며 내 머릿속으로는 다른 지역 또래 아이들과 경쟁했던 지난 1년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부과장은 곧이어 명수와 면담했다. 면담이 끝난 후 우리는 초대소에 올 때 타고 왔던 승용차를 다시 타고 대학으로 향했다.
이렇게 1981년 3월18일은 철없는 소년이던 내가 대남 공작원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날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세 갈래 갈림길에서 일반인으로서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이나 조종사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군대학이 아니라 전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가장 위험하고 힘든 대남 공작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남공작원이 된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대남 공작원이 된 것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인생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후회스럽다고 해서 다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인간 병기’ 제조공장 김정일정치군사대학
1985년 6월 금성정치군사대학(현재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고 공작원으로 정식 임명되어 초대소에 처음 입소했을 때 초대소 요리사들은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용광로를 나오셨군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어떤 이유로 그렇게 얘기하냐고 물었더니 “일단 군복을 입은 선생님은 전투원 양성 과정을 마친 분들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선생님들은 누구보다 더 힘들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잖아요. 무쇠가 용광로에서 강철로 변하듯 혹독한 훈련을 받은 선생님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얘기한 거예요”라며 추켜세워 주었다.
그들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군복 입은 모습을 보고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당시는 금성정치군사대학) 전투원반 교육 과정을 졸업한 공작원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작원반 졸업생들은 모두 사복을 입고 초대소에 입소했다.
▲ 김정은(오른쪽 두 번째)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4년 4월10일 최고위급 군 지휘관을 양성하는 김정일군정대학을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다음날인 11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아우루스 차량을 타고 대학에 도착했다. 연합뉴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전투원 양성 과정은 그만큼 강도 높은 훈련으로 유명하다. 초대소 요리사들까지 어떤 쇠든지 모두 녹여서 강철로 만들어 내는 ‘용광로’에 비유할 정도로 북한에서도 힘들고 어렵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다. 그래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그들의 표현대로 ‘용광로’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강철 체력, 철저한 주체사상 신봉, 군사·기술적 지식, 포섭 능력까지도 완벽하게 갖춘 최고급 대남 공작원을 육성하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대학으로, 요리사들의 표현대로라면 ‘용광로’,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쉽게 표현하면 ‘인간 병기’ 제조 공장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북한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인 노동당에서 직접 관장하는 대학인 동시에 당시 북한에서 살아 있던 김정일의 이름을 명칭 앞에 처음으로 붙인 대학이기도 하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과 봉화정치학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북한 유일의 대남 공작요원 전문 양성기관으로 1957년 1월3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학교’(약칭 중앙당정치학교)라는 명칭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 분교 형식으로 설립되었다. 김일성고급당학교는 북한 최고의 노동당 고급간부 양성 기관이다.
아마도 대남 공작원들이 수행하는 임무가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고 지도하는 비합법적인 당 사업이기 때문에 당 간부와 동일한 양성기관처럼 취급해 김일성고급당학교의 분교로 설립한 것 같다. 당시에는 남한 출신 월북자들이 주로 중앙당정치학교 학생으로 차출되어 대남 공작 교육을 받았다.
중앙당정치학교는 1970년대 후반 평안남도 강서에 위치하고 있던 전투원(흔히 대남 침투요원) 훈련 및 교육기관인 686훈련소를 흡수 통합하면서 명칭을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했다. 이때부터 대남 공작원과 대남 침투전문 전투원 양성을 동시에 담당하게 되었고, 남한 출신뿐만 아니라 북한 출신도 선발해 전투원 또는 공작원으로 양성했다.
그리고 학제도 1~2년에서 3년제로 늘어났다. 대학 명칭 가운데 ‘금성’이라는 단어는 김일성의 청년 시절 별명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하며 ‘정치군사대학’은 말 그대로 정치와 군사를 동시에 배우는 대학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는 대학 명칭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 정치학교’라고 개칭하고 학제도 4년제로 늘려 일반 사회대학과 같이 대학 졸업장도 수여하는 등 대학 졸업 학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사실 3년제일 때까지는 일반 대학과 달리 ‘양성기관’이라는 용어를 써서 특별 취급했다.
그러던 중 인민무력부 총참모장이었던 오극렬이 중앙당 민방위부장을 거쳐 대남 공작부서인 작전부장으로 부임한 1990년대 초반 김정일의 허락을 얻어 대학 명칭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했다. 학제도 예비과정 6개월에 본 과정 5년제로 확대 개편해 명실상부 종합대학이 되었으며 격술연구소와 연구원(대학원) 과정도 신설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내부적으로 ‘130연락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대외적으로는 ‘695군부대’라는 군부대 명칭도 사용한다. ‘130연락소’는 대학 창립 일자(1월30일) 및 대학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때 김일성이 대학을 방문했다는 의미에서 대남공작부서 예하 기관에서 흔히 사용하는 ‘연락소’ 명칭 앞에 ‘130’을 붙여 부르는 명칭이다. ‘695군부대’는 대외적으로 군부대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위장 명칭이다.
한편, 1990년대 초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하면서 전투원 양성만 담당하게 되었고 공작원 양성은 따로 분리·독립된 교육기관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공작원들을 별도로 양성하기 위해 새롭게 설립한 교육기관이 ‘봉화정치학원’이다.
봉화정치학원은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력통일을 위해 남한 각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간부들을 양성하던 강동정치학원의 맥을 이어 ‘조국통일의 봉화를 지핀다’는 의미로 붙여진 명칭이기도 하다.
당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노동당 작전부 직속 교육기관이었지만, 봉화정치학원은 노동당 대외연락부 직속 기관이었다. 직접적으로는 대외연락부 교육담당과에서 담당하였으며 교육기간은 기본이 3년제이고 대상의 수준에 따라 1년제·2년제가 있다. 봉화정치학원을 ‘112연락소’라고도 하는데, 이는 봉화정치학원을 새로 창설할 때 김정일로부터 인준을 받은 날짜가 1월12일이기 때문에 그 날짜를 앞에 붙여 명칭을 정한 것이다.
공작원이 된 사람들
공작원으로 임명된 사람들의 경우 사회에 있을 때의 직업이나 직책·학력·경력 등은 모두 다르다. 나처럼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공작원으로 선발된 경우도 있고,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업종합대학·평양외국어대학·의과대학·사범대학 등 일반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혹은 졸업과 동시에 선발된 경우도 있다. 또한 대학을 졸업한 후 청년조직이나 노동당 간부를 역임하다가 소환되어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공작원으로 선발된 후에는 전직과 경력·나이에 관계없이 금성정치군사대학 공작원반(후에 봉화정치학원)에 입학해 공작원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기 위한 기초교육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교육기간이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0년대 초반까지 금성정치군사대학에는 전투원 양성과정과 공작원 양성과정의 2개 과정이 있었다. 전투원 양성과정을 일명 금성정치군사대학 ‘전투원반’이라 하고, 공작원 양성과정을 ‘공작원반’이라고 불렀는데, 공작원 대부분은 공작원반에 입학해 교육받는다.
공작원 양성 과정에는 1년제·2년제·3년제 등의 학제가 있었는데, 기본은 3년제로 해당 공작부서에서 선발된 공작원 대상의 학력이나 경력 등을 감안하여 적절한 학제를 선택한 후 기초교육을 받도록 한다.
1990년 5월 내가 처음으로 남파될 때 함께 침투했던 공작조장 권중현은 40대의 나이에 평양시 낙랑구역당 조직비서라는 고위급 당 간부를 역임하다가 공작원으로 소환되었는데, 1년제 공작원 양성과정을 졸업했다. 급히 파견해야 할 공작원의 경우 6개월간 통신 연락 등 기초적인 교육만 받는 단기속성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하기도 한다.
1985년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 같은 공작조장을 했던 박철만의 경우에는 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있는 지질대학 7년제 과정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공작원으로 소환돼 2년제 공작원 양성과정을 마쳤다. 1995년 2차로 침투하는 나와 함께 남파되었던 조원 박광남은 함흥의학대학 3학년에 재학하다가 공작원으로 소환된 후 3년제 공작원 양성과정을 밟았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통일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족 빼고는 주변 친구들과 해 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군에 입대해서는 달랐지만요….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때가 온다면 아버지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제외하고 어딜 가장 가 보고 싶으세요?
아버지: 글쎄,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때가 온다면 고향을 제외하고 특별히 가 보고 싶은 곳은 없어. 너도 전방에 근무하면서 휴전선 너머에 있는 북한 땅을 봤으면 알겠지만 북한의 산들이 대부분 민둥산이야. 왜냐하면 북한 주민들이 난방과 취사용 연료가 없어 산에 있는 나무를 모두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기 때문인데, 다니다 보면 민둥산만 계속 보일 것 같아서 솔직히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게 사실이야.
그나마 가 볼 수 있는 데가 명산이라고 알려진 백두산이나 금강산·묘향산 등인데, 내가 북한에 있을 때 금강산에는 두 번, 백두산도 세 번 가 봤기 때문에 그곳은 다시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사실 내가 북한에서 1995년 2차로 남한에 침투하지 않았다면 그해 가을에 묘향산 관광을 가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그때 가 보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해. 그래서 가능하다면 묘향산이나 한번 가 보고 싶고, 그다음에는 황해도의 명산 구월산에도 한번 가 보고 싶어.
그래서 통일이 되면 뭘 본다며 돌아다니기 전에 가스화를 먼저 실현해 북한 주민들의 취사 및 난방용 연료를 해결해 주고 나서 그다음에 나무를 심어 민둥산을 숲이 우거진 제대로 된 산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