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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1> 기막힌 운명… 죽기 위해 나는 살아야 했다 - <10> ‘평범한’ 삶이 얼마나 그립고 행복한 것인지

상림은내고향 2025. 2. 19. 18:08

 [평양에서 왔습니다]/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스카이데일리 2025

프로필

1962년 백령도에서 건너다보이는 북한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18세 때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 공작원으로 선발돼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1990년 1차 남파돼 거물 간첩 이선실 대동 복귀, 1995년 2차 남파돼 간첩망 구축과 고정간첩 접선 등 공작원 활동을 하다 충남 부여에서 검거됐다.

 

전향해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과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을 지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대북전략컨설팅 대표로 있으면서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 S파일’을 운영하고 있다.

 

박사 논문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대한 연구’와 저서로는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북한 대남 전략의 실체’가 있다.

 

02.04

<1> 기막힌 운명… 죽기 위해 나는 살아야 했다

북한 공작원 김동식 회고록-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
1995년 남파 공작 나섰다 충남 부여에서 붙잡혀
안 죽고 잡힌 죄… 가족은 정치범수용소 끌려가

들어가며

오늘부터 실릴 필자의 글은 2013년에 출간된 필자의 자서전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에 실렸던 내용에 그 기반을 둔다. 사실 당시에는 내가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근무하고 있었던 관계로 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릴 소지가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사전에 의도적으로 뺀다거나 익명 처리 등을 해야 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내용의 정확성과 진실성을 약화시켰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처음 책을 냈던 때로부터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이미 자연인으로 살고 있는 필자로서는 민족 분단의 아픈 역사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당사자로서 더 늦기 전에 시대에 맞게 글을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필자가 1995년 충남 부여에서 검거된 후 대한민국에서 생활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넘어가고 있다. 내 의지와 관계 없이 대남공작원에 발탁되어 북한에서 활동했던 인간 병기’ ‘인간 방패로서의 15년은 한순간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남공작원으로서 나의 운명은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살아온 사자(死者)의 삶이었고, 칠성판(七星板)을 등에 지고 살아온 산송장과 같은 죽음의 세월이었다.

 

내가 대남공작원으로 북한에서 살았던 15년 세월은 북한 독재체제하에서 한 인간의 자유와 삶이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힐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자서전을 발간하게 된 계기도, 또 스카이데일리에 원고를 기고하기로 한 결심도 결국 독자들에게 죽기 위해 살아야 했던 나의 기막힌 운명을 통해 자유와 인권에 바탕을 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혼란스럽고 어려운 때일수록 삶의 터전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왜 반드시 지켜 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려 드려야 한다는 책무감 때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다.

 

앞서 말했듯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온 30년 세월은 나에게 자유와 인권이 무엇이고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반면 내가 북한에서 살았던 30여 년은, 그곳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김일성·김정일, 그리고 지금은 김정은과 그의 가족뿐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충성을 다하면 북한 주민 모두가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만이 전부인 세월이었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김정은에 대해 사소한 비판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김정은 앞에서 잠깐 졸았다고 고사총으로 처형하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 여행과 거주 이전은 물론 북한 스스로 헌법에 규정해 놓은 신앙·언론·출판·집회·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포함하여 우리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이다.

 

단언컨대 한국에서 군사독재가 아무리 심했던 시절이라도 지금의 북한 김정은 정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한국에서 군사독재 정권이라고 일컫는 시절에 단지 대통령을 욕했다고 처형되거나 더욱이 대통령 앞에서 졸았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고사총으로 처형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억압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자유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며, 필자처럼 혁명적 자폭정신을 세뇌받으며 생명을 위협받을 만큼의 독재를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충분히 느끼기 힘들 것이다. 나의 한국에서 30여 년 삶은 그래서 북한에서는 결코 느껴 보거나 알 수도 없었을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소중함을 피부로 체험한 귀한 시간인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곡절 많은 나의 삶을 통해 내 아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소중한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에 그 가치를 둔 평범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 본다.

 

아울러, 이념 양극화가 극에 달한 현 시점에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남북 간첩 전쟁의 역사적 진실과 필자 개인의 삶에 대해 미화나 편견없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실에 바탕을 둔 기록을 연재라는 형식을 빌어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스카이데일리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운명의 1024

1024일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다. 이날은 5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나의 인생을 두 번 바꿔 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1024일은 북한이 나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해 영광을 안겨 준 날이기도 하고 남조선혁명가(대남공작원)로서의 나의 인생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날이기도 하다.

, 그리고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

꼼짝 말고 손 들어!”

 

순간 아차,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동시에 내가 죽더라도 조국과의 약속, 본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조국과의 약속, 본부와의 약속이란 접선 과정에 불의의 상황으로 체포되거나 죽어야 할 상황(혁명적 자폭)이 발생하면 총성을 울리는 것이었다. 그 총성은 곧 우리가 접선하려는 대상의 배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북한을 떠나올 때 담당부부장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조장 선생, 만약 공작조가 봉화 1를 접선하다가 불의의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꼭 총소리를 울려 주시오. 그 모든 상황을 남한 언론을 통해 여기서 낱낱이 확인할 수 있고 그래야 우리가 봉화 1의 그동안 행적이나 배신 여부, 그리고 선생들의 활동을 제대로 파악하고 여기서 대책을 세울 수 있지 않겠소?”

 

봉화1호가 이미 전향해서 우리가 남한 수사기관에 잡히거나 죽게 되면 총소리를 울려 북한에 신호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총소리를 울리면 남한 언론매체에서 보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에서는 봉화1호가 전향했다는 것과 우리가 남한에서 잡히거나 아니면 죽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부부장의 짧은 당부 속에 담겨진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약속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더라도 반드시 총소리는 내고 죽을 테니까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담당부부장의 얼굴과 함께 그와 했던 약속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죽더라도 부부장과의 약속, 조국과의 약속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조국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이대로 잡히거나 죽는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피값이라도 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드는 척하면서 순간적으로 오른손을 콤비 안주머니에 넣어 권총을 꺼내 겨누었다. 그러자 상대방이 당황해서 먼저 총을 발사했다.

 

~~.”

 

다급해진 나는 얼떨결에 총소리가 나는 방향에 권총을 대충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는데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권총에 탄창을 끼우기만 하고 장탄은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빨리 권총 덮개 부분을 뒤로 잡아당겨 장탄을 한 다음 한 발을 발사했다.

 

.”

 

내가 쏜 총소리는 회초리로 문짝 두드리는 정도의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내가 소지하고 있던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의 크기가 손바닥보다도 작은 데다 소음기까지 부착했기 때문이었다. 총소리 같지 않은 소리였지만 나는 목숨을 걸고 총소리를 울려 담당부부장과의 약속, 조국과의 약속을 지켰다. 당시에는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오직 조국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총을 쐈던 것이다. 물론 목숨을 걸면서까지 조국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했던 것은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했던 단 한 사람, 이원국 부부장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목숨을 걸고 총에 맞으면서 조국과의 약속을 지킨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바로 나의 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진 것이었다. 오직 내가 죽지 않고 잡혔다는 결과 하나 때문에.

 

이처럼 북한은 철저히 결과만을 따지는 체제이다. 아마도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계속>

아들이 묻고 아빠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주고받았던 문자들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앞으로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을 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해 보려 한다.

 

아들: 멀리 저 너머로 북한 군인들이 싸우는 게 보이면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고 귀순자가 올 가능성이 있어서 경계상황이 올라간대요.

 

아버지: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때리는 걸 거야.

 

아들: 우리 카메라 장비로 북한군 농구하는 것도 볼 수 있다네요. 심지어 물도 지게로 나른다 하고, 최전방에서도 감자 심고 농사 짓는대요. 많이 힘들어 보여 씁쓸하네요. 저희 나이거나 저희보다 어릴 텐데 서로 무슨 고생인지.

 

아버지: 60년대까지는 남과 북이 반대 상황이었지만, 그 후로 저쪽은 먹을 게 없어. 많이 형편 없고 힘들어. 김정일·김정은 정권 거치면서. 이젠 남북 간 경쟁은 끝난 거지.

 

아들: 여기 오니까 통일이 더 가까운 듯 멀어 보여요. 남과 북 둘 다 통일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안 하는 것 같아요. 서로 총만 겨누고.

 

아버지: 가까운 듯 먼 통일.

 

아들: 맞습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 같아요. 간절한 사람만이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 같아요.

아버지: 그렇지.

 

아들: 그 첫 스텝을 GOP(General Out Post·전방 지역의 소규모 전초기지)에서 밟게 되어 행복합니다.

 

아버지: GOP에서 근무하는 게 왜 행복한데?

 

아들: 아버지 고향을 멀리서라도 바라볼 수 있어서요.

 

아버지: 그래!? 난 네 깊은 마음을 몰랐네. 우리 아들 이젠 다 컸네. 항상 긴장하고,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고, 네가 얼마나 행복한지도 항상 생각하고.

 

아들: 명심하겠습니다.

 

<2> 승복 입은 청년 車 세우더니… “꼼짝 말고 손 들어”

스님 위장 ‘봉화 1호’ 대동 복귀 위해 부여 정각사 몰래 찾아
절에서 만난 50대 “왜 왔냐” 묻는데 꺼림칙… 알고 보니 경찰

 1995년 10월24일

 

그날은 하루 전에 내린 가을비로 땅은 촉촉이 젖어 있었고 겨울을 재촉하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약간은 음산한 전형적인 늦가을 날씨였다. 보통 그런 날에는 사람들이 밖에 나다니는 것을 싫어한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럴 수가 없는 처지였다.

 

며칠 전에 나는 무전을 통해 본부에 보고를 하고 방송을 통해 지시를 받았다.

 

북한에서 침투하기 전에 받은 임무,  1980 4월에 남파되어 스님으로 위장해서 활동하고 있는 봉화 1라는 공작대호를 가진 공작원을 접선하여 대동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공작대호는 공작조나 공작원들의 신상이 모두 보안사항이기 때문에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지어놓은 일종의 닉네임, 즉 별명이다.

 

본부에서 받은 위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려면 봉화 1호가 있는 충남 부여의 사찰 정각사에 가서 그를 만나야 하는데 왠지 그곳에 가기가 싫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임무수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토록 정각사에 가기 싫었던 것은 음산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진짜 이유는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가지고 다니지 않던 권총에 실탄을 장전해 챙겼다.

 

나는 함께 남파되었던 조원 박광남과 대전에서 부여행 버스를 타고 논산을 거쳐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에서 내려 산 중턱에 있는 정각사까지 걸어서 갔다. 당시 나는 양복 바지에 티셔츠와 콤비 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었고, 광남이는 청바지에 티셔츠·점퍼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광남이와 함께 정각리에서 정각사로 가는 고개를 넘어가면서 그때까지 분리해서 휴대하고 있던 권총과 실탄이 들어 있는 탄창을 조립해 콤비 안주머니에 넣었다. 만일의 경우 신속하게 권총을 꺼내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광남이는 점퍼 안주머니에 권총을 넣고 지퍼를 반쯤 올렸다.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광남이를 정각사 밑에 있는 폐가 앞을 지나 도로 옆 골짜기에 은폐시켰다. 그러면서 광남이에게 만약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나는 죽어도 좋으니 혼자 돌아가 공작 결과를 보고하라. 내가 책임지고 대응할 테니라는 지시를 하고 혼자 정각사로 올라갔다. 돌발 상황이란 내가 불의에 체포되거나 나와 수사기관 또는 군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광남이를 은폐시키고 정각사에 거의 도착했는데, 문을 급히 여닫는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이 주고받는 작은 말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상한 생각을 하며 주변을 예리하게 주시하면서 귀를 곤두세우고 천천히 정각사 앞에 도착했다. 당시 정각사 앞에는 프라이드 승용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곧이어 정각사 앞마당에 들어서자 허름한 청바지 차림의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허리가 약간 굽은 50대 중후반 정도의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나에게 어떻게 오셨냐고 점잖게 물어보았다.

 

나는 웃는 표정을 지으며 정각사도 구경할 겸 여기에 계시는 집안 어른을 찾아뵈러 왔는데, 혹시 여기에 계시는 분입니까?”라고 답하면서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안 좋아서 얼마 전부터 여기가 공기도 좋고 조용하고 해서 치료차 와 있거든요. 혹시 어떤 분을 찾으려고 오셨는지요?”

 

나는 담배 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답했다.

 

자운 스님이 저희 집안 어른이신데, 여기에 계시다고 해서 왔어요. 연세도 많으시고 몸도 편찮으시진 않을까 싶어 뵙고 가려고 왔는데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 그러시군요. 그렇지 않아도 자운 스님이 며칠 전에 오셨는데, 지금은 절에 계시지 않고 저 밑에 있는 밭에서 약초를 가꾸고 있어요. 만나 보시려면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그렇습니까? 괜찮습니다. 자운 스님 건강은 괜찮으신가 보죠?”

 

, 스님은 아주 정정하십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때 나와 대화를 나눈 사람은 경찰관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가 경찰관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경찰관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금 전 올라오면서 들었던 소리가 자꾸 생각나 불안감이 더해 갔다. 그러다가 불현듯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고, 가능한 한 빨리 그곳을 이탈하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얘기했다.

 

, 그렇군요. 그럼 제가 자운 스님이 계시다는 약초밭에 내려가서 뵙겠습니다. 약초밭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실래요? 그럼 올라오신 길로 내려가다가 저 밑에 있는 폐가 앞을 지나면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오솔길이 있어요. 그 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다 보면 밭이 보일 겁니다. 거기에 스님이 계세요.”

 

,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병 치료 잘 받으세요.”

 

그러고는 돌아서자마자 걸음을 재촉해 은폐시켰던 광남이를 찾았다. 광남이에게 간단 명료하게 사태를 설명했다.

 

, 아무래도 이상해. 우리 빨리 여기서 이탈하자. 무슨 얘기인지 알지? 구체적인 것은 가면서 얘기하자.”

 

알았어요.”

 

광남이와 함께 폐가 앞에 도착할 즈음 뒤에서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정각사에 갔을 때 봤던 프라이드였다. 차를 피하려고 도로 옆에 비켜서 있는데 승용차가 바로 우리 옆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승용차 운전석에 앉은 승복을 입은 덩치 큰 청년이 말을 걸어 왔다.

 

혹시 선생님들 시내로 나가시는 것 아닙니까?”

왜 그러시는데요?”

제가 볼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가는 길인데, 시내로 가시는 길이면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빠르게 살펴보니 근육질에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어 예사로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또한 경찰관이었고 무술 유단자였다.

 

, 그러세요? 저희들은 저 아래 내려가서 만날 분이 있거든요.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고맙기는 하지만 먼저 가 보세요.”

 

,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다녀가세요.”

 

그러고는 다시 승용차에 올라타고 15m가량 가더니 다시 멈춰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그는 타이어를 발로 툭툭 차는 시늉을 하더니 갑자기 권총을 꺼내 겨누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꼼짝 말고 손들어!”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날이 좋으면 멀리 인공기도 보인다는데. 조교가 훨씬 편하지 않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여기서 맨날 북한을 보니까 겁나기보다는 그냥 기분이 싱숭생숭 아련하다 해야할까. 한 민족이었는데 적이라니, 걔네도 우리랑 비슷한 나이일 텐데 서로 총 겨누고 있고. 엄마, 여기선 크리스마스고지도 보이고 밤이 되면 철책이 길게 빛이 나, 촛불처럼.

엄마: 엄마는 네가 조교로 남아 있길 바랐던 맘이 너무 커서인지 아직도 마음이 좀 그래. 근데 아들 다 컸네.

 

아들: 아침엔 해가 뜨는데 노을 같고, 해랑 구름이 우리랑 같은 선에 있는 것 같아. 독수리도 우리보다 낮게 날아.

 

엄마: 머리랑 몸이 맑아지겠구나. 비울 거 다 털어 내고 좋은 것만 담아 와.

 

아들: 우리가 지금 여기를 지키고 있어서 우리 부모형제가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거래. 그래서 부모님 세대가 지켜 온 나라를 이번에는 우리가 군대에 와서 지킬 차례라고. 이 말을 신교대에서 듣는데 가슴이 웅장해지더라고.

 

엄마: 당연하지. 아빠는 아빠 식으로 나라를 위하셨던 거고,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는 거야.

 

아들: 그치. 그런데 엄마 말이 왠지 참 슬프다. 조교도 좋았겠지만 여기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 슬프긴. 네가 거기 있음이, 피하지 않고 입대를 한 네가 우린 더 자랑스러워.

 

아들: 고맙고, 이런 생각이면 남은 군 생활은 끄떡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바라던 북녘 땅을 가진 못하지만 이렇게 매일 볼 수 있으니까.

 

엄마: 힘든 일도 생길 수 있겠지만 항상 마음 단단히 먹고 파이팅 해.

 

<3> 접선 대신 총격전, 총탄 맞고도 살아난 기적 같은 운명

1995년 남파 공작 나섰다 충남 부여에서 붙잡혀
안 죽고 잡힌 죄… 가족은 정치범 수용소 끌려가

운전기사로 변장하고 처음 총을 발사한 경찰관 말고도 사복을 입은 여러 명이 권총을 쏘며 쫓아오고 있었다. 정각사에 매복했던 경찰과 국가안전기획부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광남이와 나는 권총으로 대응사격을 하면서 단독가옥(폐가) 뒤편에 있는 산으로 도주해 시간을 벌며 만약 우리가 죽을 경우를 대비해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모두 없애기로 하고 2개씩 가지고 있던 위조 주민등록증 가운데 1개만 남기고 기존에 사용했던 위조 주민등록증 1개와 운전면허증·수첩 등을 모두 땅에 묻었다. 수첩의 메모 부분은 찢어서 매몰했다.

 

정각사 뒷산을 넘어 논산~부여를 연결하는 국도가 보이는 산기슭에 도착한 우리는 국도를 횡단해 맞은편 산을 타고 부여로 가기로 결정하고, 만약 둘 가운데 한 명이 죽거나 잡히면 나머지 한 명이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광남이에게는 내가 나이도 너보다 많고 조장이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너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라. 돌아가서 우리가 했던 일을 구체적으로 보고해. 알았지!”라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봉화 1호에 대한 배신감은 극에 달했고 나도 모르게 험한 욕이 튀어나왔다.

 

개새끼, 잡히면 저 혼자 잡혀서 죽든가 살든가 할 것이지 왜 우리까지 끌어들여?”

 

우리와 도로 사이에 있던 작은 저수지 둑 밑에 일단 몸을 숨겼다. 도로 옆 도랑까지 접근한 다음 둘이 동시에 도로를 횡단하기로 하고, 광남이에게 엄호를 부탁하며 내가 먼저 저수지 수로로 뛰어내렸다.

 

그런데 2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여러 발의 총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다시 한번 매복에 걸린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광남이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대로 앞을 향해 달려가 수로를 뛰어넘는 동시에 권총으로 경찰관들에게 대응사격을 하면서 광남이가 수로로 건너올 수 있도록 엄호했다. 합세한 우리는 총소리가 빗발치는 가운데 도로를 향해 뛰었고 국도변에 서 있는 봉고 트럭을 발견하고 지체없이 접근했다.

광남아, 저 트럭 타고 가자. 네가 시동 걸어. 내가 엄호할께

 

트럭에 접근해 문을 열고 운전기사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트럭에서 내리라고 소리쳤다. 권총과 고함소리에 혼이 나간 운전기사는 한동안 꼼짝도 못 하다가 다시 큰 소리를 치며 화를 내자 트럭에서 내려 도망을 갔고, 나는 곧바로 적재함에 뛰어올라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광남이에게 빨리 시동을 걸라고 외쳤다. 광남이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려고 시도했지만 걸리지 않았고, 광남이와 위치를 바꾼 내가 시동을 다시 걸어 보려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 안 되겠다. 그냥 가자.”

 

우리는 곧바로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로를 횡단한 다음 산 정상을 향해 뛰었다. 나는 광남이를 앞세우고 뒤에서 경찰관들을 향해 총을 쏘며 광남이가 가는 산 정상 방향으로 돌아서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여러 사람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고, 두 손은 뒤로 한 채 수갑이 채워져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종아리가 너무 아파서 보니 피가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그때까지도 총에 맞은 줄은 몰랐다.

 

사복을 입은 안기부 직원 2명이 나를 부축해 승용차에 태우려고 하는데, 총에 맞은 왼발이 아예 없는 것처럼 힘을 전혀 쓸 수가 없어 그냥 앞으로 넘어졌다. 그러자 직원 두 명이 나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차에 태웠다. 차에 타고 가는데 왼쪽 종아리를 타고 뜨거운 것이 계속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를 태운 차가 부여경찰서에 도착하고 유치장까지 질질 끌려 들어가 앉았다. 외부에서 온 의사가 내 상처를 보더니 총에 맞은 것 같다며 핀셋에 거즈를 감아 총알이 관통한 자리를 쑤셔댔다. 죽을 것처럼 고통이 몰려왔다. 소리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이 내가 지르는 소리가 너무 큰 데다 혀를 깨물 것 같아 손수건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고 한다.

 

결국 총격전 도중 경찰관이 쏜 한 발의 총알이 왼쪽 장딴지를 관통했고, 나는 조국을 위해 맹세했던 혁명적 자폭을 할 겨를조차 없이 빗발치는 총격전 속에 생포된 것이었다.

 

총탄에 맞고도 살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기적이고 행운이라고 한다. 나 역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나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당시 나는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이 정말 불행이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북한에 있는 내 가족이 나로 인해 앞으로 겪을 고통 때문에.

 

그런 복잡한 생각이 꼬리를 무는 중에도 내 머릿속에는 조원인 광남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서 보내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나를 잡히게 한 봉화 1호에 대한 괘씸함은 그다음 문제였다.

 

나는 이번 기회를 빌어 나와 조원 박광남 때문에 당시 현장에서 희생된 경찰관 두 명과 그 가족에게 심심한 애도와 유감을 표하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경찰·국정원 직원들과 충남 부여에 세워진 충혼탑과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경찰관 묘소를 찾아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용서를 구한 바 있다. 2024년 여름에는 중앙일보 팀과도 다녀왔다.

 

▲ 김동식이 자신과 조원 박광남 때문에 당시 현장에서 희생된 경찰관 두 명과 그 가족에게 심심한 애도와 유감을 표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그는 이미 여러 번 경찰·국정원 직원들과 충남 부여에 세워진 충혼탑과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경찰관 묘소를 찾아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용서를 구한 바 있다. 필자 제공

전향한 봉화 1 그리고 실패한 수색 접선

 

우리가 남한에 침투하기 전에 파악한 바에 따르면 정각사에서 만나기로 한 봉화 1’(암호명)는 원래 남한 출신이었다. 내가 북한 공작부서에서 가져다준 봉화 1호의 인적사항을 보고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는 1926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전두식이다. 그는 6·25전쟁 때 월북하여 결혼해 아들딸 7남매를 낳고 살다가 대남 공작원으로 차출되었다. 마지막 침투 시점인 1980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남한에 침투해 공작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는 베테랑 공작원이었다.

 

그는 1980년 봄에 침투했기 때문에 비록 북한에 있지는 않았지만, 남자 공작원으로서는 유일하게 북한 권력 서열 22위였던 이선실처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고,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장관급)으로 선출되었으며 아들딸들이 모두 좋은 대학을 나와 각 분야에서 중간급 간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 봄 남파된 후, 같은 해 겨울에 그를 접선하려고 은밀히 침투하던 공작선이 영문도 모른 채 남한 해군의 기습공격에 의해 격침되며 승선한 전투원들이 모두 희생되는 사고가 발생하자 대남 공작부서에서는 그의 피검 및 전향 여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피검 및 전향 가능성을 강력하게 제기한 사람들은 공작선 및 안내조를 파견한 중앙당 조사부(그 후 작전부로 개칭)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공작원을 데리러 갔던 전투원들도 똑같은 해상침투 루트를 따라 침투했다가 안전하게 귀환했는데, 그 공작원(봉화 1)을 데리러 갔던 전투원들만 남한 해군이 어떻게 알고 기습적으로 공격을 했겠느냐? 공작원이 이미 전향했기 때문이다며 항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피검 및 전향 가능성을 가장 강력하게 부인하고 나선 것은 당시 연락부장이었던 정경희와 부부장(차관) 등 일부 책임간부들이었다. 그러던 중 봉화 1(실제로는 경찰) 침투 선박이 격침된 것은 은밀성을 기하지 못하고 노출된 상태에서 항해했기 때문이라며 자기가 수집한 정보를 북한에 무전으로 보고했다.

 

정경희 등 책임간부들은 그가 보내온 무전보고만을 근거로 내세우며 작전부의 주장을 반박했다. 담당 공작원이 검거되어 전향했다는 것을 인정할 경우 작전부 소속 전투원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그들이 져야 할 상황이었기에 더욱 강력하게 그의 전향 가능성을 부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로도 15년간 그의 전향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북한 대남공작부서와 무전과 방송 등 약정된 절차에 따라 지속적으로 연계 연락을 취하며 부여된 임무도 수행했다고 보고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대한민국 경찰에서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995년 들어 대외연락부에서 그를 복귀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노동당 창건 50주년이 되는 1995 1010일을 앞두고 김정일에게 선물할 공작 성과에 목말라 하던 중앙당 사회문화부(현 문화교류국)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그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김정일에게 보고해 결재까지 받아 놓았다. 이제는 그의 전향 여부가 전향에 따른 책임 소재를 판단하기 위한 공방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를 접선하러 가는 사람들의 생사와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상황은 굉장히 심각해졌다. 결국 남파공작원이 침투하고 복귀할 때 안내를 전담하는 중앙당 작전부 측에서 그의 과거 행적을 거론하며 자기 사람들을 안 내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작원이 직접 그를 접선하러 가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직접 나서야 하는 이유가 되어 버렸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훈련소 입소 첫날부터 느껴 온 것이, 아무리 의무라지만 솔직히 전역하는 날을 세다 보면 앞도 끝도 안보이는데, 하물며 모든 일상적인 생활에서 완전 고립된, 흔히 말하는 인간병기 육성을 위해 보내야 했던 북한에서의 군생활을 아버지는 어떻게 버틸 수 있었어요? 정말 상상이 안 됩니다.

 

아버지: 내가 한 생활은 일반적인 군생활하고는 달라. 북한에서도 현역군인은 7년이든, 10년이든 군사복무 기간이 정해져 있어. 근데, 나는 현역군인이 아니었고 남조선 혁명가’, 다시 말하면 남파공작원이었잖아. 대남 공작 파트에 대해서는 현역군인들처럼 근무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전역(해임)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전역하는 날을 센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도 없는 거지.

 

물론 몸이 너무 아파서 남한에 침투할 상황이 아니거나 사생활에서 무단 외출·남녀 관계 같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공작부서에서 그때그때 전역시키는데, 그런 결정적인 하자가 없으면 10년은 기본이고 15년까지 훈련만 하다가 전역하는 공작원들도 있어.

 

나도 사실은 공작원으로 선발된 지 8년 차 되는 해인 1988년이 제일 고비였어. 매일 반복되는 강도 높은 훈련과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한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는 게 정말 싫었고, 거기에다 너무너무 지루하더라고.

 

그래서 1년만 더 참아 보고 자진해서 전역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989년 설 명절 때 담당부부장(차관)이 찾아와 남파 공작 임무를 부여하겠다고 해서 결국 1차로 남한에 침투하게 된 거지.

 

<4> 봉화1호 이미 전향… ‘독 안에 든 쥐’ 된 접선 공작

다양한 방법으로 확인했지만 정각사엔 ‘자운스님’ 아예 없어
北에 ‘이상’ 보고에도 “무조건 절에 가서 접선” 일방적 지령
기본적 수색접선 원칙 무시한 공작 지도부가 死地 몰아넣은 격

당시 부부장을 비롯한 일부 인원은 봉화 1호가 전향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반면, 오랫동안 공작원 생활을 했고 직접 남한에 침투해 공작 임무 수행의 경험이 풍부한 윤택림 과장과 그를 직접 담당했던 지도원 등 일부에서는 그가 전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반대 의견을 제기했다.

 

부부장을 주축으로 하는 비전향파와 과장을 주축으로 하는 전향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향파가 비전향파를 납득시킬 만한 구체적이고 확실한 물증이나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었을 뿐 아니라 직급에서도 비전향파에 밀려 결국 비전향파의 의견에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양쪽이 절충점을 찾아 결론을 내린 것이, 그가 전향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혹시 전향했을지도 모르니 만일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해 그와의 접선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론에 따라 사회문화부에서는 그를 접선하기 위한 특단의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절차대로 접선을 하려 하다가는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 변칙적인 접선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공작 용어로 수색 접선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공작에서의 접선은 쌍방이 미리 정한 날짜와 시간에 이미 약속한 장소에서 약속된 절차에 따라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접선의 경우에는 접선하려는 쌍방 모두에게 접선 장소와 날짜 및 시간·절차 등을 똑같이 알려 주고 접선을 위한 행동을 동시에 하도록 한다.

 

반면 수색 접선은 변칙적인 것으로 접선 쌍방 가운데 한쪽, 즉 주로 적지에서 활동하는 공작원이나 현지인을 믿을 수 없을 경우에 활용하는 접선 방법이다. 쉽게 설명하면 먼저 접선하려는 쌍방에 똑같이 접선 장소와 시간 등을 알려 주지 않고 A(공작부서에서 직접 파견하는 믿음이 확실한 쪽)에게만 접선 지시를 하고 B(현지에서 활동하는 대상으로서 신뢰가 가지 않는 쪽)에게는 접선과 관련한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A에게는 B의 인상착의와 소재 등 B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구체적으로 알려줌으로써 A가 주동적으로 행동하도록 한다. 접선 지시를 받은 A는 먼저 B의 소재를 찾아 B의 정확성 여부를 확인한 다음 가장 중요한 신변 위협 유무부터 파악한다. 신변 안전에 지장이 없고 행동에 편리한 시간과 장소를 A가 주동적으로 선택해 B에게 접근한 다음, B에게 본부와 기존에 약정한 접선 신호와 암호 등을 일방적으로 확인시키는 방법으로 접선한다.

 

이것이 바로 수색 접선으로, 전향이나 배신 등의 우려가 있어 한쪽을 믿을 수 없을 때 실시하며 변절자로 확인되면 제거한다. 이처럼 전술적인 장점이 있는 수색 접선이었음에도 북한 공작지도부의 안일한 판단과 일처리로 인해 무리하게 추진된 우리의 수색 접선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접선 대신 총격전, 그리고 종지부

수갑이 채워진 채 부여경찰서로 호송되는 차 안에서, 그리고 부여경찰서 유치장에서 수사관들의 집중 심문을 받으며 머릿속 한켠에서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봉화 1호는 오래전에 이미 전향했음에 틀림없으며 북한의 지령은 그가 배신한 후 하달된 것이었기에 남한 수사기관의 역공작이 당연히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수색 접선의 방법으로 접선해야 할 대상은 전향 가능성 때문에 논쟁의 대상이 된 봉화 1호였다. 봉화 1호가 자운이라는 법명의 스님으로 위장하고 거처하고 있는 곳은 앞에서 말한 충남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에 있는 정각사였다. 아니, 북한 공작지도부에서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그가 정각사에 체류하고 있어야 했다.

 

북한 공작지도부는 정각사에 체류하고 있다는 보고를 봉화 1(사실은 경찰)로부터 직접 받은 후 이를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확인하고자 남한 현지에서 활동하던 고정 간첩을 제3국으로 불러냈다. 그러고는 고정 간첩에게 봉화 1호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진에 있는 인물(봉화 1)이 실제로 정각사에 있는지 현장에 가서 확인한 후 그 결과를 북한 공작지도부에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봉화 1호의 정각사 체류 여부를 확인해 보고하라는 북한 공작지도부의 임무를 받고 다시 남한에 돌아온 고정 간첩은 정각사에 가서 확인해 보니 사진에서 본 스님(봉화 1)이 거기에 있다고 북한 공작지도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거될 당시에는 물론 지금에 와서 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고정 간첩이 실제로 정각사에 가 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된다.

▲ 1995년 11월29일 경찰청은 경찰특공대 훈련장에서 10월24일 검거된 충남 부여 무장간첩 김동식(33‧본명 이승철) 등 2명으로부터 노획한 장비 전시회를 가졌다. 연합뉴스

 

그렇지만 당시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던 나와 조원 박광남은 남한에 침투한 후 부여와 논산 일대의 사찰을 직접 탐문하며 자운이라는 법명으로 위장해 활동 중인 봉화 1호의 실체를 확인하려 했지만 금시초문이라는 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즉 봉화 1호는 우리가 확인해서 본부에 보고한 것과 같이 실제로 정각사에 체류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부에 실체를 확인할 수 없으니 특단의 대책을 세워 달라는 보고도 했지만, 본부에서는 봉화 1호에게 정각사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주었으니 정각사에 가서 그와 접선하라는 등 수색 접선의 기본원칙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수색 접선의 생명과도 같은 전제 조건은, 접선을 주동적으로 하려는 대상(A)만 접선 관련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고 현지에 있는 대상, 즉 믿을 수 없는 대상(B)은 접선 여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야 한다는 은밀성이다. 그런데 봉화 1호에게 정각사에 가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하달함으로써 누군가 너를 찾아갈 것이라는 암시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바꾸어 말하면 대한민국 방첩수사기관에 우리(북한) 사람을 정각사에 보낼 테니 가서 대기하다 붙잡으라는 정보를 미리 준 셈이다.

 

수색 접선의 생명인 은밀성이 깨어지면서 나는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꼈고, 당시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정각사에 가기 싫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여러 경로와 방법을 통해 확인했음에도 접선 대상인 봉화 1호의 실체가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북한 공작지도부의 접선 지시를 따라야 했던 우리는 결국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만 휴대하는 권총을 가져갈 결심을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와 광남이는 1024일 각각 무기를 휴대한 채 정각사에 가게 되었고, 마침내 내가 우려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쌍방이 관련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절대적으로 한쪽만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색 접선이 실패한 중요한 원인은 우선 침투 준비 기간이 절대적으로 짧아 사전에 본부와 현지 공작조 간 접선 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막상 일이 벌어졌을 때 본부와 현지 공작조 간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현지 공작조의 보고는 무시한 채 수색 접선의 초보적인 원칙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북한 공작지도부의 무리한 접선 추진이 결국 나와 광남이를 사고에 빠뜨려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1995 1024일은 내 운명과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극적으로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정확히 5년 전 1990년 바로 이날 북한 대남공작원으로서 북한의 최고 명예칭호인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던 내가 5년 후 이날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날이 되었으니 말이다.

1990 1024

그러나 그로부터 5년 전인 1990 1024일은 북한 사람인 나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이날은 당시 북한 노동당 사회문화부(현재 대외연락부) 소속 대남공작원이었던 나에게 공화국영웅 칭호 수여가 결정된 날이다. 말하자면 북한 사람으로서의 나에게 최상의 영광을 안겨 준 결정적인 날이다. 공화국영웅 칭호는 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영광과 존경의 상징이며 누구나 마음대로 받을 수도 없는 선망과 소망의 상징이다.

 

내가 공화국영웅 칭호를 실제로 수여받은 것은 그로부터 10일 정도가 지난 11월 초였다. 당시 노동당 대남부서의 하나인 사회문화부 부장이었던 이창선이 간부들을 대동하고 초대소를 방문해 나와 조장이었던 권중현에게 공화국영웅 메달과 증서,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했다.

 

당시 받은 공화국영웅 증서를 보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나와 권중현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로 결정하고 김일성의 결재를 받은 날이 바로 1024일이었던 것이다.

 

그해 5월 말 제주도를 통해 남한에 침투해 북한으로 복귀한 10월 중순까지 남한에서 잠복해 활동하면서 맡겨진 공작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받은 칭호였다.

 

그때 내가 수행한 공작 임무는 간단히 말해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오래전에 남한에 침투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에 해당) 이선실을 서울에서 접선하여 안전하게 대동하고 복귀한 것이였다.

 

이선실은 제주도 출신으로 당시 75세였는데 1980년에 일본을 거쳐 남한으로 침투해 10년째 활동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복귀한 나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로 하고 김일성이 서명한 날이 바로 1990 1024일인 것이다.

 

자랑할 건 못 되지만 아마도 나만큼 극과 극을 오가는 인생,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생을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그리고 늦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은 나의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아들이 묻고 아빠가 답하다

아들: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북한이며 그렇다고 탈북을 한 것은 아니잖아요. 가족은 모두 북한에 남아 계시고 아버지는 이곳 한국에서 다시 삶을 살아가고 계신데, 아버지는 아버지의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 글쎄! 나는 한마디로 남과 북 사이에 있는 경계인인 것 같아. 이도 저도 아닌. 나는 당연히 너희들과 한국에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인데,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아는 남한 사람들은 나를 한국인으로 대하지 않거든. 남한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금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북한 사람도 아니잖아?! 내가 30년간 살면서 느낀 한국 사회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 그가 어떤 사람이든 너무 벽이 높고 차별이 심한 것 같아. 앞에서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 같은 민족이고 먼저 온 통일이라고 말은 하는데, 그건 말뿐이고.

 

내가 실제 조직 사회에 들어가 생활해 보니까 실력을 인정해 주지도 않고, 차별이 심해서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밥그릇이 걸려 있어서 그런지 정말 냉정하더라고. 아마 그래서 많은 탈북인들이 한국에 왔다가 살지 못하고 탈북자라고 해서 특별히 차별을 하지 않는 해외로 나가서 사는 것 같아.

 

<5> 오직 당과 수령 위한 삶… “내겐 선택권조차 없었다”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고등중 4학년 때 대남 공작원으로 뽑혀
수차례 면담·신체검사 … “자지 말고 감기도 걸리지 마라” 지침
당 결정 따라 격리된 채 조련… 4남2녀 장남 평범한 삶 깨져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인생을 선택의 연속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결정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타의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도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기본적으로 부모님이 자식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북한에서는 부모님보다 노동당에 의해 자식이나 개인의 인생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북한은 일체 선택의 자유가 없는 곳이니까.

 

내가 대남 공작원이 된 것은 처음부터 스스로 선택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될 당시 내 나이가 어렸던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최종적으로 내가 동의했기 때문에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기는 했지만, 북한의 상황을 감안하면 나를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한 노동당이 내가 인생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유도 목적도 모르는 채 노동당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선발되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수용시설(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대남 공작원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오로지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만을 다짐하며 부모님이 내게 주신 이름조차 지워진 채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 살아야 했던 나의 삶은 처음부터 내가 선택할 권리조차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북한의 독재체제하에서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첫발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 42녀의 맏아들로서의 평범했던 내 삶의 궤적은 연기처럼 사라져 재탄생될 것임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우연히 간부의 눈에 띈 소년, 북한식 길거리 캐스팅

고등중학교 4학년 때인 1980 3월 초 어느 날. 학교 정문으로 군당(郡黨)책임비서 전용 지프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섰다. 그리고 교사(校舍) 현관 앞에 멈추더니 군당책임비서와 다른 한 명의 간부가 차에서 내려 교장선생님 집무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군당책임비서는 내가 이미 군()사로청(현재의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에서 개최하는 회의에 참석했을 때 여러 번 봤던 적이 있었고, 또 그의 아들이 나와 같은 연배인 관계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군당책임비서 일행이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교장 선생님이 4학년 남자 아이들만 교사 뒷마당에 집결시켰다. 시골 학교라서 당시 모였던 남학생이라야 70여 명밖에 안 되었다. 부교장 선생님이 밖으로 나온 4학년 남자 아이들을 모두 키 순서대로 한 줄로 세우자 군당책임비서와 같이 차를 타고 온 젊은 간부가 인원을 절반으로 가르더니 키 작은 아이들은 교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러고는 키가 큰 아이들만 세워놓고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중 나를 포함해 5명을 손가락으로 지명해 불러낸 다음 우리를 데리고 교장선생님 사무실로 가는 것이었다.

 

당시 5명의 아이들을 선발해 데리고 갔던 간부는 나중에 알고 보니 군당 조직부 간부과 지도원이었다. 원래 군당 조직부 간부과는 노동당 간부만을 선발·임명·해임하는 등의 인사 업무 전담 부서이다. 행정·경제기관 간부들에 대한 인사 업무는 조직부 간부과에서 하지 않고 독립 부서로 존재하는 간부부에서 담당한다.

 

교장선생님 집무실에는 이미 군당책임비서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당책임비서와 지도원은 서로 번갈아 가며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이름·나이·건강 상태 그리고 부모의 이름과 직장 직위 등을 질문하면서 수첩에 열심히 메모했다. 그러더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냥 이젠 됐으니 수업에 참가해도 된다며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이유도 알 수 없는 간단한 면담을 마치고 돌아와 다음 수업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가 교실 문을 두드리더니 수업을 하고 있던 선생님에게 나를 다시 교장선생님 집무실로 호출한다는 연락을 전해 주었다. 집무실에 들어가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군당책임비서와 지도원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내 이름과 나이를 재확인하고 계속해서 건강 상태·취미·학과 성적 그리고 가족관계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그 후 나를 돌려보내면서 학교에 이야기해 놓을 테니 3일 후에 군당 조직부 간부과로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공부와 생활을 잘하고 건강에도 특별히 유의하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 북한 인민학교 어린이들이 총기사용법을 배우고 있다. 북한에서는 부모님보다 노동당에 의해 자식이나 개인의 인생이 결정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연합뉴스

군당(郡黨)에 의한 1차 선발

그로부터 3일 후, 나는 군당 간부들의 지시대로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의 승인을 받고 군당청사가 있는 읍까지 걸어갔다.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아 북한 주민들은 80(32) 거리는 하루에 걸어서 이동한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군당 청사가 있는 읍까지 10(4), 걸어서 1시간 정도였으니 나도 아침 일찍 집을 떠나 걸어서 군당 청사로 향했다.

 

군당 청사 정문 접수창구 간부에게 조직부 간부과에서 불러서 왔다고 이야기하니 들어가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이어 군당 조직부 간부과 간판이 걸려 있는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다른 학교에서 선발되어 온 20여 명의 내 또래 남자 아이들이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며칠 전 학교에 찾아왔던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나에게 오느라고 수고했다면서 다른 친구들을 가리키며 앞으로 같이 다니게 될 친구들이니 서로 잘 도와주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군당으로 호출한 인원이 모두 도착하자 우리를 데리고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군()인민병원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게 했다.

 

신체검사가 끝나자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며칠 후에 다시 부르면 그때 군당 간부과로 찾아오라고 당부했다.

 

며칠 지난 후 연락이 와서 또다시 군당 간부과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신체검사에서 통과된 아이들 10명 정도가 있었다.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거기에 있던 모든 아이들에게 간부문건(서류)을 나누어 주면서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준 다음 집에 가서 해당 내용을 기재해 가지고 3일 후에 다시 군당 간부과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북한에는 간부로 임용되기 전에 본인이 작성해야 하는 간부문건(서류) 3가지가 있다. 이력서·자서전(일종의 자기소개서가계표 등이다. 가계표는 가정의 입출금 관계를 기록하는 가계부(家計簿)가 아니라 가족 및 친척관계 즉 가계(家系)를 기록하는 서류를 말한다.

 

나는 군당 조직부 간부과에서 나누어 준 간부문건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해당 내용을 모두 기재했다. 그리고 3일 후 다시 군당으로 가서 그것을 간부과 지도원에게 제출했다. 그 전에 보았던 다른 친구들도 모두 왔었는데 간부과 지도원은 우리에게 넘겨받은 문건 내용을 검토하면서 필요한 내용을 그 자리에서 물어보고 보충하는 등 대체적인 파악이 끝난 다음 우리를 돌려보냈다.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아이들에게 학교에 돌아가 예전보다 공부도 더 잘 하고 조직생활도 잘하며 특히 사고를 내지 말고 건강에 신경을 써서 감기에도 걸리지 말라고 특별히 강조했다. 또한 앞으로 군당과 도당(道黨)에서 여러 차례 호출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간부들과의 담화(면접 또는 면담)도 해야 하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물론 노동당의 정책·노선과 관련된 내용을 집중적으로 공부해 두라고도 당부했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3월 말경, 또다시 군당 간부과에서 불러서 가 보니 지난번에 나와 같이 신체검사를 받은 친구들 일부와 처음 보는 친구들을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까지 6명인 셈이었다.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다시 친구들을 서로 인사시킨 다음 한 명씩 개별적으로 불러 당시 노동당의 정책과 관련된 내용을 몇 가지 물어본 다음 또 다시 군()인민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기존에 받았던 신체검사를 다시 받도록 했는데,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좀 더 세밀했다. 계속해서 이와 같은 신체검사와 면접을 4월에 들어와서도 2회 정도 반복하게 했다.

 

4월 말경, 군당 간부과에서는 또다시 나와 다른 아이들을 불러 신체검사를 실시하도록 한 다음 지난번과 같은 내용의 당부를 하고 앞으로 2~3주 후에 도당(道黨)에 올라갈 예정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그 전까지 집중적으로 당의 유일사상 체계와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그리고 김일성주의와 최근 노동당의 노선과 정책 관련 내용을 공부해 두라고 이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의 유일사상체계라는 것은 한마디로 김일성의 사상 및 지도 체제와 관련된 내용을 말하고,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라는 것은 김정일의 영도체제와 관련된 내용을 일컫는다. 그리고 김일성주의라는 것은 말 그대로 김일성주체사상과 이론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며, 노동당 정책이라는 것은 당시 북한 노동당이 제시한 각종 정책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제가 중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부모들 사이에서 옮겨지기 시작한 아버지 이야기가 결국 친구들에게까지 퍼지면서 그 당시 엄마를 비롯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던 적이 있어요.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사실 관련 기관이 아니고서야 아버지 신상에 대해 그리 상세히 알아내는 게 어찌 가능했을까,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신상까지 굳이 가십거리로 만들어야 했을까? 가끔 그때 일이 떠오르곤 해요. 그 후에도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정말 전향을 했는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면 아들인 나도 이성적으로 참아 내기가 어려웠는데, 당사자인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항상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전향을 한 것에 대한 의심을 했을 경우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나요?

 

아버지: 너의 말처럼 내가 진짜 전향했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처음에는 상당히 많았고, 심지어는 지금도 내가 전향했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나는, 내가 진짜 전향했는지 의심하는 그런 사람의 생각이나 말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 왜냐하면 내가 전향한 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한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니까.

 

전향이란 말 그대로 방향을 바꾼다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내가 처음에 가졌던 신념이나 사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버린다는 거야. 사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반일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을 전향시켜 보려고 고문까지 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지. 그래서 일본인의 강요에 못이겨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친일 인사’ ‘친일파로 전향한 사람이 적지 않아.

 

그때는 전향이라고 하면 곧 친일파 매국 역적을 의미하는 단어였지. 그리고 그때부터 전향이라는 용어가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어. 그래서 전향이라고 하면 지금도 상당히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그러나 지금은 일제시대와 달라. 나는 자신이 예전에 갖고 있던 신념이나 사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바꾸거나 버리는 것, 즉 전향하는 것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나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내가 태어나 어려서부터 배워서 알고 있던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이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거든. 거기에다 나 때문에 죄 없는 가족까지 숙청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갖고 있던 이념과 사상을 버렸어.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인권이 진정으로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념이 옳다고 인정하고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항상 떳떳하게 살고 있어.

 

내가 너희들에게도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정말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항상 얘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기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방의 의무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고.

 

<6> 수차례 정밀 신체검사에 녹초… 드디어 중앙당 면접

도당(道黨)에서의 2차 선발

그로부터 2주 정도 지난 5월 초 어느 날. 군당 조직부 간부과에서 4일가량의 출장 준비를 해서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군당청사로 들어오라는 지시가 교장선생님을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나는 여유 있게 5일간 체류하는 데 필요한 돈과 양표, 세면도구와 증명서 등을 넣은 자그마한 가방을 들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떠나 8시 전에 군당 청사에 도착했다.

 

북한에만 있는 양표는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때 지불하는 일종의 식권과 같은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식량배급제를 전면 시행했던 북한에서는 배급량과 연계해 양표를 발행했다.

 

양표 1장이 한 끼 식사분인데 정량은 200그램(g)이다. 따라서 5일분이라면 양표 15장이고, 식량으로 환산하면 3kg과 맞먹는다. 1980년대 초까지는 양표가 없을 경우 양표 대신에 돈을 조금 더 내면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수 있었으나, 그 이후부터 양표가 없으면 식당에서 아예 밥을 사 먹을 수 없었다.

 

군당에 도착하니 지난 4월 신체검사 할 때 동행했던 친구 5명이 이미 와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우리에게 앞으로 도() 소재지인 해주시로 간다며 자신의 지시에 따라 행동할 것을 다시 강조한 다음 우리를 자동차사업소로 데리고 가서 해주행 버스를 같이 탔다.

 

버스를 타고 해주에 도착해 어느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다음 도당청사에 찾아가 도당 간부과 지도원에게 도착 보고(신고)를 하고 그가 지정해 준 여관으로 갔다. 그 여관에는 벌써 황해남도의 다른 시·군에서 온 내 또래의 아이들이 굉장히 많이 와 있었다.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오전 10시경에 군당 간부과 지도원을 따라 다시 도당 청사로 갔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우리가 숙박한 여관뿐 아니라 다른 여관에서 잠을 자고 온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똑같은 아이들이 200~300명가량 되었다.

 

우리는 도당 조직부 간부과 지도원들의 지시에 따라 40~50명씩 조를 편성한 다음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해주의학대학병원으로 이동해 정밀 신체검사를 받았다. 외과·내과·안과·이비인후과·비뇨기과 등에서 각종 검사를 받고 혈액검사와 소변검사·X레이검사 등 예전에 군에서 실시했던 신체검사 때보다 상당히 더 구체적인 검사들을 이어서 받았다.

 

그날은 신체검사를 받는 것으로 일과를 끝내고 다음 날부터 도당 간부과에서 본격적인 면접심사를 실시했다. 나를 비롯한 우리 일행은 3일째 되는 날에 가서야 도당 간부과에서 진행하는 면접 심사를 받았다. 면접 심사는 도당 청사의 3층에 있는 간부과 사무실에서 했는데 서너 명의 간부들이 이름과 나이·취미와 건강상태 등 인적사항과 가족·친척 관계를 기본으로 물어보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쉬운 것들을 짤막하게 질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에서 시키는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나는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씩씩하게 대답하고 앞으로의 각오를 묻는 질문에는 당에서 바라는 일이라면 그 어떤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다 자신감 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향에 돌아가서 공부와 조직 생활을 잘하고 사고를 내지 말라고 당부한 다음 돌려보냈다.

 

나는 그다음 날 군당 간부과 지도원의 인솔하에 같이 갔던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읍까지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군당 청사에 들러 앞으로도 공부를 잘하고 계속 건강에 유의하라는 군당 간부과 부부장의 당부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때까지도 군당이나 도당에선 어떤 목적으로, 무엇 때문에 거듭되는 신체검사와 면접 같은 것을 하고 있는지 일체 알려 주지 않았다. 따라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진로 등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고, 그렇다고 어디에 물어볼 곳도 없어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 간부의 눈에 띄어 선발된 후 군당과 도당을 오르내리며 이유와 분야를 알 수 없는 신체검사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불과 몇 개월 사이 팔에서 엄청 많은 피를 뽑았다는 기억밖에 없을 정도다. 스카이데일리

관찰력 테스트

처음 도당에서 진행하는 신체검사와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지 3주일가량 지난 어느 날, 나는 또다시 군당 조직부 간부과로부터 도당에 올라가야 하니 1주일간의 출장 준비를 해서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군당청사에 도착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종전대로 돈과 양표·증명서·세면도구 등과 면접 심사에 대비해 여러 가지 내용을 메모한 노트를 가방에 넣어서 아침 일찍 군당 청사로 갔다. 군당 청사 정문을 통과해 간부과 사무실에 들어서니 다른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지도원 혼자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번에 도당에 올라갈 때는 다른 친구들은 안 가고 너 혼자만 가게 되었다. 나도 동행하지 않을 거야. 지난번에 한번 가 보았으니 그때처럼 행동하면 돼.

 

해주에 도착하면 바로 도당 정문으로 가서 네 이름을 얘기하고 도당 조직부 간부1과에서 불러서 왔다고 해라. 그러면 도당 조직부 간부과 지도원을 만나게 해 줄 거야. 그다음에는 도당 간부과 지도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면 돼. 알았지?”

, 알겠습니다.”

 

군당 간부과 지도원은 계속해서 이번에는 혼자 가는 만큼 사고 내지 말고 면접할 때에도 지난번처럼 대답을 잘하라고 특별히 당부한 다음, 자동차사업소에 함께 가서 해주시로 향하는 버스에 태워 배웅해 주었다.

 

버스를 타고 해주에 도착한 나는 군당 지도원의 지시대로 도당청사로 찾아가 정문에서 접수를 하고 도당 조직부 간부1과 지도원을 만났다.

 

도당 간부과 지도원은 오느라고 수고했다면서 오늘은 여관에 가서 휴식하고 내일 다시 만나자며 내가 숙박할 여관을 지정해 주었다. 여관 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 여관으로 갔다. 거기에는 지난번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내 또래의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여관에서 밥을 먹고 9시경 도당 청사 정문으로 가니 도당 조직부 간부과 지도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정해 준 여관과 친척집 등에서 자고 이튿날 도당 청사로 집결하는 내 또래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나를 포함해 모두 12명이었다.

 

도당 지도원은 친구들의 거주지와 이름 등을 불러 가며 인원 점검을 한 뒤 서로 알고 지내라며 한 명씩 소개해 주는 시간을 짧게 가진 후 지난번에 갔던 해주의학대학병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 또다시 신체검사를 받도록 했다.

 

지난번 신체검사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세밀했다. 이 시기에 군당과 도당을 오르내리며 이유와 분야를 알 수 없는 신체검사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불과 몇 개월 사이 팔에서 엄청 많은 피를 뽑았다는 기억밖에 없을 정도다. 의과대학병원에서 정밀 신체검사가 끝난 후에는 다른 일정이 없어 시내 관광을 하며 여유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에는 일부 인원만 도당에 가서 면담을 하고 나머지는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가 있어 나도 여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3일째 되는 날에야 비로소 다른 일부 학생들과 함께 나도 불려갔는데, 그때도 역시 도당청사 3층에 있는 휴게실에서 대기하며 한 명씩 조직부 간부과 사무실로 들어가 면접을 했다.

 

내 순서가 되어 사무실에 들어서니 지난번과는 달리 직급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 서너 명의 간부들이 앉아 있었고, 지난번에 면담했던 도당 과장급은 한쪽 옆에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중앙당 지도원과 도당 간부과 부부장 등 고위 간부들이었다. 그날 면접은 개인 신상과 가족관계 등을 확인하고 노동당의 정책과 관련된 비교적 간단한 문제를 물어보는 정도에서 그치는 등 오히려 그전보다 다소 대답하기 쉬운 질문들이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군대에는 생각보다 보급되는 물품이 다양하고 많아요. 내복 상하의는 물론이고 안면마스크나 목도리·패딩·전투용 가죽장갑 등도 지급되어 한국에 계시지 않은 엄마가 GOP에서 겨울을 지내고 있는 저한테 무엇을 보내 줘야 하나 걱정 안 하셔도 될 정도입니다. 식사로 밥뿐만 아니라 치킨이나 핫도그·시리얼도 나오고 간식(부식)으로는 아이스크림·치킨햄버거·고로케나 각종 빵도 나오고 있어 만족합니다. 그래도 어제는 엄마가 해 주시던 음식들이 생각이 나면서 갑자기 아버지가 가장 그리워하는 북한 음식은 무엇일까 많이 궁금해졌습니다.

 

아버지: 나도 북한에서 훈련할 때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는데, 내가 훈련받을 때 겨울용으로 보급받았던 품목은 방한복과 솜장갑·내복 정도였거든. 그리고 북한에서 주식은 밥이니까 보통 흰쌀밥과 국(한국의 밥공기보다 큰 식기에 담아 제공), 그리고 돼지고기와 야채·달걀·김치 등으로 구성된 반찬 한 접시가 전부야. 물론 우리는 북한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밥과 반찬 등을 더 가져다 먹어도 그걸 가지고 통제하지는 않았어. 간식으로는 사탕·과자 등이 보급되었고.

 

그럼에도 네가 복무하는 지금의 대한민국 군대와는 보급품이나 식사 등이 비교도 안 되지.

 

내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가장 그리운 음식은 짼지두부’(황해도에서는 김치를 짼지 또는 짠지라고 함), 다시 말하면 김치두부야. 짼지두부는 황해도 사람들이 겨울에 주로 해 먹는 음식인데, 일반적으로 순두부를 만들 때 넣는 서슬이나 바닷물 대신 김장김치 국물과 김치를 썰어 넣고 끓인 다음, 거기에 다진 마늘과 파·고춧가루·들기름 등이 들어간 양념간장을 얹어 먹는 음식이야.

 

내가 평양에 오래 살았는데, 평양 사람들도 짼지두부가 뭔지 모르더라고.

 

난 아직도 내가 고향에 살 때 할머니와 어머니가 해 주시던 짼지두부가 제일 먹고 싶어. 

 

<7> 돌연 학교로 찾아온 黨간부… 난센스 퀴즈 던져 당혹

당시의 면담 내용 가운데 중앙당 지도원의 질문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무! 조금 전에 도당 청사로 들어와 3층까지 올 때 계단을 통해 올라 왔지요?”

.”

그렇다면 매 층마다 계단이 몇 개씩인지 말해 보시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관찰력과 기억력, 순간적인 판단력과 상황 대처 능력 등을 체크할 목적으로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무엇 때문에 군당과 도당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면담과 신체검사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길이 없었으므로 군당 간부과 지도원이 공부하라고 한 내용 외에는 별로 신경 써서 보지도 않았고, 특히 계단 수를 관찰하는 것과 같은 일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질문이 주어진 만큼 대답을 해야 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 내가 계단으로 올라올 때 한번에 계단을 두 개씩 딛고 다섯번 정도 옮겨 반층을 올라왔던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냈고, 그와 동시에 당시 내가 앉아 있는 사무실의 높이와도 대비해 대략적인 계산을 끝냈다. 정확하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매 층의 계단은 20개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중앙당 지도원은 내 대답의 정확성 유무를 확인해 주지는 않고, 기분좋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 있던 간부들도 모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맞힌 것 같았다.

 

계속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와 종전과 같이 당에서 바라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하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중앙당 지도원은 면접이 끝난 다음 집에 돌아가서도 학습과 조직생활을 잘하고, 특히 사고 치지 말고 몸 건강에 유의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다음 날 우리 일행은 도당 조직부 간부과 지도원으로부터 또다시 집에 돌아가서 건강하게 지내라는 말과 함께 군당청사에 들러 그동안의 결과를 보고한 다음 군당 조직부 간부과 지시에 따라 움직이라는 강조 사항을 듣고 각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버스를 타고 돌아온 나는 군당 조직부 간부과 지도원에게 도당에서 실시한 면접 결과를 간단히 보고했다.

 

내 말을 들은 군당 조직부 간부과 지도원 역시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나도 도당으로부터 전화를 받아 알고 있다. 앞으로는 언제 어떤 곳에서 호출할지 모르니 내 승인이 없이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사고를 내거나 몸에 자그마한 흠집도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몸 건강에도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집에 돌아온 나는 평소처럼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생활했고, 그 이후에도 두 차례나 더 도당 조직부 간부과의 호출을 받고 해주에 가서 신체검사와 면접심사 등을 되풀이했다. 그러는 사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든 1980 9월 나는 고등중학교 5학년에 진학했다.

시골 학교까지 찾아온 중앙당 간부

그러던 1980 12월 초 어느 날. 당시 나는 북한에 새로 도입된 국가판정시험인 동시에 고등중학교 졸업시험 기간이어서 시험 날짜가 되면 시험을 보고 나머지 시간에는 교실에서 친구들과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급하게 나를 부르더니 교장선생님 집무실로 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높은 간부들이 찾아온 것 같다고 알려 주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집에 가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올 사이도 없이 그냥 평소 등교할 때 입고 다니던 교복을 입은 상태로 교장선생님 집무실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만난 적이 있는 도당 조직부 간부과 부부장과 지도원, 그리고 처음 보는 나이 지긋한 분이 앉아 있었다.

 

들어서면서 머리 숙여 인사하자 도당 간부과 부부장이 옆에 앉아 있는 간부를 가리키면서 중앙당에서 내려오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중앙당 지도원이 악수를 청해 그와 악수를 나누고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아픈 데는 없소?”

, 없습니다.”

 

공부하기 힘들지 않소?”

특별히 힘든 것은 없습니다.”

 

중앙당 지도원은 계속해서 내 신상과 가족관계, 노동당의 노선과 정책 등에 대해 질문을 한 다음 말미에 문제를 제시할 테니 한번 풀어 보라고 했다. 내가 알았다고 하자 그는 그러면 잘 듣고 풀어 보라며 문제를 제시했고 나는 그 문제를 푸느라 한참 동안 진땀을 흘려야 했다.

▲ 2013년 3월14일 북한의 대학·전문학교·중학교에서 '청소년 학생들이 인민군대 입대와 복대를 탄원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조선중앙통신이 15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난센스 퀴즈에 진땀 빼다

당시 중앙당 지도원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세 명의 친구가 길을 가고 있었소. 길을 가던 중 갑돌이라는 친구가 담배가 피우고 싶어 담배를 사려고 상점에 갔는데, 자기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는 담배 한 갑을 살 수가 없었소. 담배 한 갑에 25전이었는데 주머니에는 10전밖에 없었기 때문이요.

 

그래서 옆에 있는 친구 두 명으로부터 각각 10전씩 빌렸소. 거기에다 자기 주머니에 있던 10전을 합쳐 30전으로 25전짜리 담배 한 갑을 샀소. 그리고 잔돈 5전은 1전짜리 5개로 받았소.

 

그 다음 잔돈으로 받은 5(1전짜리 5) 3명이 똑같이 1전씩 나누어 가졌소. 그러니 남은 돈은 2전이겠죠? , 이렇게 되면 처음에 세 명의 친구가 각각 10전씩 냈지만, 1전씩 되돌려 받았기 때문에 3명이 각각 9전씩 낸 것과 마찬가지겠죠?

 

그렇다면, 3명이 각각 9전씩 냈으니 3×9=27전이죠.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담배를 사고 남은 잔돈 5전 가운데 각각 1전씩 나누어 가졌으니까 최종적으로 남은 돈은 2전인데, 27전과 2전을 합치면 29전이죠?

 

문제는 처음에 3명이 각각 10전씩 내서 모았던 돈이 분명 30전이었는데, 나중에 계산해 보니 29전이라는 거요. 그러면 나머지 1전은 어디로 갔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문제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 질문 역시 순발력과 응용력, 사고(思考)의 폭 등을 체크해 보기 위해서 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북한에는 난센스 문제 자체가 거의 없다. 그러니 나 역시 이런 난센스 문제는 접해 본 적이 없었고 또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문제를 이해하느라 한참 동안 애를 먹었다. 빨리 대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질문이 맞는다는 전제 하에 점원이 가졌다. 담배를 사러 갔던 갑돌이가 가졌다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잠깐 시간을 달라고 요구한 다음 여러 각도에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 문제 자체에 함정이 있는 난센스 퀴즈일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던 끝에 문제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런 시각에서 꼼꼼하게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로 문제 자체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중앙당 지도원에게 먼저 그 문제는 문제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을 한 다음 계속해서 이렇게 답했다.

 

처음에 3명이 각각 10전씩 내 모두 30전으로 25전짜리 담배를 산 다음 잔돈 5전을 받아 그것을 1전씩 나누어 가졌으니 결국은 9전씩 낸 것이 되었고, 그것을 합치면 27전이고 남은 돈이 2전이라는 것까지는 맞습니다.

 

그런데 역으로 계산하는 방법이 틀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3명이 9전씩 낸 것을 합산하면 27전인데 여기에 1전씩 나누어 갖고 남은 돈 2전을 합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은 돈 2전은 이미 담배를 산 27전 속에 포함되어 있는 돈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계산하려면 세 명이 각각 9전씩 내서 합친 돈 27전과 담배를 산 후 각각 1전씩 되돌려 받은 3전을 합쳐야 합니다. 문제 자체에 혼란을 주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중앙당 지도원이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 그런 거요? 그것은 그쯤 해 두고.”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제가 2년여 정도 다녔던 대안학교에서는 친구들과의 학교생활에서 갈등이 생기면 마음나누기 형태로 지속적인 토론을 했어요. 아버지가 다녔던 북한 학교에서는 저희처럼 이런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했나요? 사실 북한 영화나 이야기들을 보면 항상 등장하는 자아비판이라는 낯선 말이 있던데.

 

아버지: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갈등이 생기면 처음에는 말다툼을 하고 그것이 격해지면 주먹다짐을 하는 등 몸싸움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북한 학교에서는 남한보다 아이들 사이에서 갈등·몸싸움 등이 비일비재하게 많이 일어나.

 

그런데 북한에는 학교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상담이나 토론 같은 전문적인 프로그램이 전혀 없어.

 

물론 아이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 있기는 하지. 바로 생활총화야. 네가 얘기한 자아비판이라는 표현도 생활총화에서 하는 건데, 정확히 말하면 남한에서 북한을 잘 모르고 쓰는 표현이야.

 

생활총화는 무조건 일주일에 한 번 진행하게 되어 있는데, 대체로 토요일에 진행해. 북한은 주 5일제가 아니어서 토요일에도 출근·등교를 해야 하거든. 이런 생활총화는 20~30명으로 구성된 반(학급) 아이들이 모두 참가해 진행하는데, 모든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 일주일간 자기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잘못을 고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먼저 토론하는데 이걸 보통 남한에서는 자아비판이라고 해.

 

자아비판을 한 다음에는 호상비판이라는 걸 하는데, 호상비판은 다른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면서 원인을 나름대로 규명해 주고 앞으로 고치라고 충고하는 방식으로 해.

 

이와 같은 호상비판이 보통 어렸을 때는 고자질 형태로 변질되어 나타나고, 학년이 올라가고 머리가 커지면 서로 눈감아 주면서 안 하게 돼. 그래도 선생님이 자꾸 호상비판하라고 하면 친구들끼리 서로 짜고 없는 잘못을 만들어 지적해 주는 방식으로 변질된 거지.

 

그런데, 이런 생활총화는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 생긴 갈등을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특히 호상비판을 하는 과정에 의도치 않게 친구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거나 오히려 갈등이 증폭되는 경우도 종종 생기곤 해.

 

<8> “중앙당에서 올라오라고 한다”… 드디어 평양행

입은 두었다 어디에 쓰겠습니까

 

중앙당 지도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이면서 계속해서 나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평양에 와 본 적 있소?”

 

, 있습니다. 금년 여름에 배움의 천리길 답사 갔을 때 3 4일가량 평양시내 견학을 한 적이 있고 그 외에는 가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배움의 천리길이란 중국에 살고 있던 김일성이 12살 때 조선을 배우기 위해 걸어서 평양까지 왔다고 하면서 그 거리가 1000리가 된다며, 김정일이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다. 보통 고등중학교 아이들이 배움의 천리길 답사를 가는데, 중국·북한 국경에 있는 양강도 후창에서 출발해 매일 30~40 거리를 걸어 평안남도 안주까지 이동한 다음 거기에서 열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해 3일간 평양시내 관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정도면 평양에 갔다 놔도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네. 평양 구경 한번 시켜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그의 말은 내가 시골 촌놈이라 무시하는 것처럼 들려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래서 반항하는 투로 대꾸했다.

 

평양을 한 번밖에 못 가 봤고 잘 모르니까 더 구경시켜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번 구경시켜 주십시오.”

평양 구경을 시켜 달라고. 구경도 구경이지만 평양을 잘 모르는 친구한테 내가 특정 장소를 지정해 주고 거기까지 찾아오라고 하면 정확히 찾아올 수 있겠소?”

 

찾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평양에 한 번밖에 와 본 적이 없고 그것도 버스를 타고 시내 몇 번 돌고 온 친구가 어떻게 찾아온단 말이오?”

 

입은 두었다 어디에 쓰겠습니까? 모르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찾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중앙당 지도원은 너무도 거침없이 대답하는 나를 보며 웃더니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평양 구경을 한번 시켜 줘야겠군. 좋소. 내가 구경시켜 줄 테니 평양에 한번 와 보시오.”

 

중앙당 지도원은 진담과 농담이 절반씩 섞인 투로 이야기하면서 국가판정시험을 잘 보라고 격려해 준 다음, 웃으면서 건강한 몸으로 평양에서 다시 만나자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고 나를 돌려보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선생님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는 멀리 가 본 적이 있지만 혼자서는 30(12m) 이상은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틀림없는 시골 촌놈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민학교(현재는 소학교) 2학년 때까지는 줄곧 최우등을 했다. 2학년에 올라와서는 14세 미만의 어린 학생들로 조직된 소년단이라는 정치조직에 입단하는 동시에 분단위원장(우리의 반 대표에 해당)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분단위원장이란 1개 반에 조직된 소년단의 기층 조직인 분단의 책임자로 주로 반에서 진행하는 각종 회의나 모임을 준비하고 집행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회의 보고서나 토론문 같은 것을 많이 써야 한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줄 분공(과제)안을 만들어 과제를 주고 그것이 집행되도록 통제하는 한편, 그 결과는 물론 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져야 하므로 선생님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욕도 많이 먹게 된다.

 

이 같은 단점에도 반장은 대열 인솔이나 인원 관리 등 행정적인 임무만 수행하면 되는 반면, 분단위원장이었던 나는 글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작문 수준도 높아지고 책임감과 통솔력 같은 것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중학교 3학년에 진학해서는 사로청(현재의 청년동맹)에 가입할 때까지 학교 전체 소년단원을 대표하는 소년단위원장도 역임하였다.

 

북한의 청년동맹은 15~30세의 남녀 청년들 가운데서 노동당원을 제외한 모든 청년이 가입해야 하는 청년 조직이다. 중학교 3학년 후반기가 되면 사로청에 가입시키는데 소년단 조직처럼 반에는 초급단체, 학교에는 초급사로청위원회가 조직되어 각각 위원장을 선출한다. 그래서 반의 책임자는 초급단체위원장, 학교의 책임자는 초급사로청위원장 또는 학교사로청위원장이라고 부른다. 나는 초급단체위원장도 해 봤고 중앙당 지도원과 면접할 때는 학교 사로청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조직을 책임지는 직책을 맡아 수행하면서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겨 그랬던 것 같다.

 

중앙당 지도원의 빈정대는 듯한 말투에 무시당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자존심도 좀 상했고 그래서 찾아갈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쳐 놓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잠깐 걱정은 했지만 찾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와 같은 걱정이나 혼자 가지 못할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평양에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의욕과 함께 비록 경험은 없지만 혼자서도 능히 찾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평양에서의 최종 테스트

중앙당 지도원이 다녀가고 또 겨울방학을 재미있게 보내고 난 후 2월 초부터 등교를 했다. 등교한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은 2월 초 어느 날, 또다시 군당으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군당 간부과로 들어와 지시를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 날 나는 연락받은 대로 아침 일찍 군당에 도착해 간부과 지도원을 만났다.

 

중앙당에서 올라오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2일 후에 출발해야 겠다. 시간이 없다. 내가 이미 전화를 해 놓았으니까 행정위원회 2부에 가서 평양에 가는 통행증을 발급받아 와야겠다.”

 

북한에서는 여행을 할 때 자기가 사는 군내에서는 그냥 다닐 수 있지만 다른 군 또는 다른 도에 가려면 통행증을 발급받아 소지해야 한다. 당시엔 거주하는 시·군 단위 지역을 벗어날 때는 해당 거주지 리()·()사무소에 여행 사유를 밝힌 뒤 그곳에서 통행증을 발급받고, 자신이 사는 도 단위 지역을 벗어날 때는 통행증 발급 업무만 전담하는 해당 지역의 시·군 행정위원회 2부에 가서 사유를 이야기하고 발급받았다.

 

특히 평양시나 전방(민통선지역)지역, 국경지역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하려면 자기가 사는 시·군 행정위원회에서는 일방적으로 통행증을 발급해줄 권한이 없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치안을 담당한 인민보안성(당시 사회안전부)에서 와도 좋다는 승인과 함께 승인번호를 보내 주어야 시·군 행정위원회 2부에서도 통행증을 발급해 줄 수 있으며 승인번호가 있는 통행증만이 효력이 있다. 결국 내가 평양에 가는 통행증을 발급받은 것은 중앙당에서 승인번호를 보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군당 지도원이 지시한 대로 나는 행정위원회 2부에 가서 통행증을 발급받아 왔다.

 

내일 시간이 있으니 집에 가서 목욕을 깨끗이 해라. 입고 갈 옷도 어머니에게 깔끔하게 손질해 달라고 하고. 그리고 1주일 동안 식사하는 데 필요한 양표와 쓸 돈·세면도구·증명서와 통행증을 잊지 말고 준비해서 모레 아침 8시까지 군당 간부과에 도착해야 한다.”

 

군당 간부과 지도원이 지정해 준 날짜에 군당 청사에 도착하니 간부과 지도원은 내가 준비해 가져간 소지품을 확인한 다음 이렇게 강조했다.

 

이번에 평양에 가서도 전에 했던 것처럼 간부들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고 특히 무단행동은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번에도 너 혼자 가게 되었으니 도당(道黨) 간부과에 가서 지시를 받고 그대로 행동해라. 해주에 갈 때는 군 인민위원장이 회의 참석하러 해주에 가는데 그 차를 함께 타고 갈 수 있도록 부탁해 두었으니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러고는 나를 데리고 나가 군 인민위원장 승용차에 태워 주었다. 당시 군 인민위원장은 군을 행정적으로 책임진 사람으로서 우리의 군수나 시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군 인민위원장의 전용 승용차는 북한에서 생산하다가 지금은 중단된 백두산’이란 명칭의 승용차였다. 나는 군 인민위원장과 해주까지 가는 승용차 안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나를 도당 청사까지 태워다 주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아버지는 청소년기에 어떤 일을 가장 해 보고 싶으셨어요?

 

아버지: 글쎄, 불행하게도 나는 청소년기에 어떤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못 하고 살았어. 내가 살았던 곳이 정말 시골 깡촌이었고, 그래서 청소년기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기보다 농사일에 내몰리는 경우가 너무 많아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

 

내가 10살 때 군청 소재지가 있는 읍내(나름 도시)에 살다가 아버지가 1개 리()를 책임진 당비서로 임명되시면서 시골로 이사갔는데, 그때가 인민학교(우리의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 당연히 나도 3학년 1학기부터 시골 학교로 전학 가게 되었는데, 처음 들어간 교실이 초가집이었고, 교실 바닥은 콘크리트 포장도 못 해 흙바닥 그대로였어. 심지어 여름에 비가 올 때는 교실 바닥에서 물이 나왔어.

 

그런데서 공부하고 남은 시간에는 무조건 농사일에 내몰려야 하고 집에 가면 토끼풀 뜯어다 주어야 하고, 가을에는 도토리 따 와야 하고, 겨울에는 소똥·개똥을 주어다 바쳐야 하고, 겨울에 교실 난방용으로 땔 나무를 해야 하고. 정말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었어.

 

무엇이든 본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어야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마음도 생기는 법인데, 시골에서 보고 배우는 건 농사일과 잡일밖에 없었잖아. 거기에다 생각할 여유도 없고.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거야. 말하자면 선택의 자유가 없는, 인간의 자유가 철저히 말살된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공부 잘하고 능력이 있어도 마음대로 실력을 펼칠 수가 없어.

 

아마 내가 너희들처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살았다면 정말 해 보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 같아. 전투기조종사나 카레이서도 해 보고 싶었을 것 같고 수학자 아니면 목공, 정말 다양한데.

 

나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사는 너희들이 제일 부러워!

 

<9> 스파이 접선하듯… ‘모란봉 여관’ 찾아가라

말이 씨가 되다

도당 청사 정문에서 접수를 하고 기다리니 간부과 지도원이 나왔다. 그가 나를 안내해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들어서면서 보니 또래 친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나 혼자였다. 그래서 도당 지도원에게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 황해남도에서 너 혼자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중앙당 지도원이 너희 학교에 갔을 때 이야기한대로 그 누구도 따라가는 사람 없이 너 혼자서 평양에 가야 해. 그때 큰소리쳤으니까 갈 수 있겠지? 이번에 정말 너 혼자서 가는 거야.”

 

물론 나중에 다른 분야로 선발된 친구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 도당에 올라갔을 때 청사에 모였던 200~300명 가운데 최종적으로 10여 명만 남아 있었고, 또 내가 평양에 올라갈 당시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도당 지도원은 평양에서 절대로 자유주의(무단행동) 하지 말고 간부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면서 앞으로 지켜야 할 행동 방향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네가 평양에 도착해서 찾아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모란봉여관이야. 내가 그곳까지 가는 방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들었다가 그대로 하도록 해. 네가 열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해서 하차할 역은 대동강역이야. 대동강역에 도착해서 개찰구를 빠져나간 다음 우측으로 300m가량 가는 거야. 그러면 거기에 대동강역과 모란봉경기장(지금의 김일성경기장) 사이를 왕복하는 무궤도전차가 있어. 그것을 타고 마지막 정류소까지 가서 내리면 거기가 모란봉경기장이야.

 

모란봉경기장에서 좌회전해서 300~400m가량 가면 좌측에 교예극장(서커스극장)이 보이고 우측, 그러니까 교예극장 맞은편에 높은 아파트가 있는데 그 아파트가 바로 네가 찾아가야 할 모란봉여관이야.

 

모란봉여관에 도착해 중앙당에서 불러서 왔다는 것과, 황해남도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네 이름을 이야기하면 거기에서 방을 배정해 주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행동 방향을 알려줄 거야. 그다음부터 그곳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르면 돼. 그럼 내가 이야기한 내용을 다시 네가 말해봐.”

 

마치 어렸을 때 본 탐정영화에서처럼 접선 장소를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들은 내용을 내가 천천히 이야기하자 그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또다시 물었다.

 

너 정말 찾아갈 수 있겠지? 하여튼 이번에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 주었는데도 찾아가지 못하면 안 돼.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정확히 찾아가야 돼. 알았지?”

알겠습니다.”

 

사실 평양은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다른 대도시와 비교해 보면 복잡하다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도시이다. 그러나 북한에는 큰 도시가 평양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평양이 가장 복잡한 도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위에 언급한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나 역시 그때까지만 해도 별 수 없는 시골 촌놈이었다.

 

도당 간부과 지도원은 다시 한번 평양 모란봉여관까지 찾아가는 방법과 도착해서 지켜야 사항을 강조한 다음 함께 해주역으로 이동해 점심 때 쯤 해주·평양·남포행 열차를 태워 주었다.

 

열차를 타고 그날 오후 늦게 평양 대동강역에 도착한 나는 도당 지도원이 가르쳐준 대로 버스정류소에 가서 모랑봉경기장행 무궤도전차를 탔다.

 

그런데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버스가 한참동안 달리다가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옥류교를 앞에 두고 동평양 쪽에 멈춰선 것이다. 옥류교는 그 유명한 평양냉면집 옥류관에서 내다보이는, 대동강을 건너다니는 다리이다.

 

내가 운전기사에게 이유를 물으니 대동강 건너편, 그러니까 서평양 쪽에 있는 중구역 종로4거리에 지하보도를 건설하기 때문에 당분간 차가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를 가든 내 위치와 목적지, 그리고 목적지까지의 방향을 알아야 가는 방법을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데 평양 시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보니 내가 옥류교의 동쪽에 있다는 것, 옥류교를 건너야 모란봉여관에 갈 수 있다는 것 외에 모란봉여관의 위치가 어디인지 또 그곳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은 버스에 탔던 승객들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물어보면서 모란봉여관까지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평양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했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촌놈이다보니 4가량 되는 거리를 그냥 걸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많이 걸어 다닌 덕에 별로 힘든 줄은 모르고 1시간가량 걸어서 목적지인 모란봉여관에 도착했던 것 같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입은 두었다 어디에 쓰겠냐며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라도 찾아가겠다고 한 나의 말이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 후부터 나는 말을 할 때 더욱 조심하는 편이다.

▲ 김정일(오른쪽) 북한 국방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선거일인 2009년 3월8일 평양의 김일성정치대학을 시찰했다. 김 위원장은 제342호 선거구 제22호 분구인 이 대학 투표소에서 대의원 후보자인 전일 인민군 군관에게 투표했다. 연합뉴스

천재 미술가 명수

모란봉여관에 도착해 도당 간부과 지도원이 가르쳐준 대로 접수 창구 아주머니에게 내 이름과 주소를 얘기하고 중앙당에서 불러서 왔다고 하자 이미 연락을 받아서 알고 있다는 듯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호실 번호를 가르쳐주면서 중앙당 지도원으로부터 앞으로 여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전해 주었다.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식사를 한 다음 방에 있는데 오전 10시쯤 50대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가 찾아왔다. 자신의 신분을 중앙당 지도원이라고 밝힌 그는 내 신상을 간단히 확인한 다음 이렇게 얘기했다.

 

평양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소. 지난번에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다더니 잘 찾아왔소. 앞으로 나와 같이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내가 수시로 찾아올 테니까 절대로 밖으로 나가 다니지 말고 호실에만 있어야겠소.”

 

중앙당 지도원이 돌아간 다음 방에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나서 문을 여니 내 또래 친구가 서 있었다. 그는 나에게 혹시 중앙당에서 불러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는 자기도 중앙당에서 불러서 왔다면서 서로 알고 지내자며 자기 소개를 했다.

 

그가 바로 나중에 나와 함께 대남공작원으로 소환되어 금성정치군사대학(현재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같이 입학해 대학 시절 같은 소대에서 4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생활했고, 졸업 후에도 역시 함께 대남공작부서인 연락부(현재 문화교류국) 일본공작과 공작원으로 임명받은 친구 한명수다.

 

한명수의 고향은 황해북도 신계군이다. 그는 기억력과 관찰력이 뛰어나고 특히 그림을 잘 그렸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거의 없던 나에게 미술에 대한 상식을 가르쳐주었던 명수의 미술 실력은 천재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훌륭한 미술가는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직관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재학 당시 그의 미술 수준은 대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중앙당에 소환되는 바람에 평양미술대학에 합격하고도 못 갔을 정도로 정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고 성격도 참 좋았다.

 

명수는 대학 졸업 후 나와 함께 연락부 공작원에 임명되었는데, 일본 지역 공작을 전담하던 연락부 3과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1988년 관절염 때문에 제대(전역 또는 해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후의 소식은 들은 바가 없어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가 미술가로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차라리 애초부터 공작원으로 소환되지 않고 미술가의 길을 갔더라면 더 훌륭한 미술가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며 악수를 나눈 다음 명수는 원래 우리는 서로 만나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중앙당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호실도 따로따로 정해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중앙당 지도원이 자기에게도 서로 만나지 말 것을 지시했다면서 앞으로 중앙당 지도원이 물어보면 서로 만난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고 했다. 그 후 나와 명수는 신체검사와 면접 때마다 늘 같은 승용차를 타고 함께 다녔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친가 쪽 가족·친척이 전혀 없는 저로서는 사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키워오시며 해 주신 모든 것들이 궁금하기만 해요. 특히나 장남인 아버지가 어디로 가는지, 언제 다시 보게 될는지조차도 묻지 못하고 보내야만 하셨을 때의 심정은 감히 제가 상상조차 못 하겠어요. 엄마는 군 입대날 함께하지 못하셔서 많이 우셨다던데, 할머니와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물어보면 아버지 마음이 많이 힘드실까요? 얼마전 제 꿈에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안아 주시는 꿈을 꾸었어요.

 

아버지: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너의 할아버지는 노동당 간부였고 할머니는 평범한 농민이었어. 원래 할아버지 정도의 당간부라면 할머니는 집에서 놀아도 되는데, 할아버지가 워낙 고지식한 분이어서 항상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하시며 할머니에게 농사일을 하라고 하셨지. 내가 고향을 떠날 때까지 할아버지가 매일 새벽에 들어오셨다가 새벽에 출근하셨기 때문에 언제 집에 들어왔다 나가시는지 모를 정도로 열심히 일하셨어. 할머니 역시 집안일은 증조할머니에게 모두 맡겨 놓고 당신은 늘 새벽에 밭에 나가 밤늦게까지 농사일을 하셨어. 그래서 나와 우리 형제들은 모두 증조할머니가 키우신 셈이지.

 

특히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할아버지는 노동당 간부였기 때문에 내가 어디로 가는지 분명 알고 계셨을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도 내가 어디에 갈 것이라는 말씀은 안 하셨어. 그만큼 노동당에 충실한 당간부였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말씀 안 하시니까 당연히 내가 어디 가는지 전혀 모르셨을 것이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추운 날씨에도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오시면서 눈물로 나를 배웅해 주셨어.

 

당시 할아버지는 해주에 있는 도()공산대학(노동당 간부 양성기관)에서 소집교육을 받고 계셨기 때문에 내가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해주역에서 만났어.

 

원래 할아버지는 과묵한 분이셔서 다른 사람들은 물론 아들인 나와도 긴 대화를 거의 안 하셨는데, 그날은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때 할아버지가 평양으로 떠나는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어디에 가든지 자기의 근본을 잊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항상 말을 조심하고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그리고 어떤 일에 부닥치든지 신중하게 결심하고 언제나 바르게 살아라고 조용히 말씀하셨어. 그러면서도 내가 어디에 가는지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말씀 안 하셨어.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한참동안 먼 산을 바라보시더라고. 눈물을 흘리신 것 같아. 난 그때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처음으로 봤는데, 나도 그래서 눈물을 좀 흘렸던 것 같아.

 

<10> ‘평범한’ 삶이 얼마나 그립고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전국에서 그러모은 중학생 6명

그 후 모란봉여관 1층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다른 도()에서 온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북한 전역에서 당시 나와 같이 중앙당에서 불러 평양에 온 중학생들이 나를 포함해 모두 6명이었다.

 

당시 평양에 모였던 6명의 인적 구성을 보면 황해남도에서는 내가, 황해북도에서는 명수, 평안남도·강원도에서도 각각 1명씩 오고 평안북도에서만 2명이 왔다.

 

나중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해 보니 위에서 얘기한 6명 가운데 황해남도에 살던 나를 포함해 강원도의 박문일과 황해북도 한명수 등 3명만 공작원으로 최종 선발되었고,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에서 왔던 나머지 3명은 탈락했다. 결국 평양까지 왔던 인원 가운데 50퍼센트만 합격한 셈이다.

 

당시 평안남도에서 왔던 친구는 신체검사가 끝난 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간에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것 때문에 탈락한 것 같다. 평안북도에서 온 2명은 참으로 운이 없는 친구들이었다. 이들 2명이 숙소인 모란봉여관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사이에 도둑이 방에 들어와 1명의 옷을 모두 훔쳐간 것이다. 그래서 중앙당 지도원이 상점에 가서 옷을 사 입혔는데, 아마도 그때 옷을 도둑맞은 것이 약점으로 평가되어 결국 탈락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밤에만 찾아오는 중앙당 간부

당시 평양에 올라와 신체검사와 면담을 하면서 느꼈던 특징적인 부분은 모든 일을 낮이 아닌 밤에만 진행했다는 것이다. 매번 저녁 9~10시경에 승용차가 와서 나와 명수를 태우고 평양 시내를 한참동안 빙글빙글 돌다가 면접 장소로 가거나 신체검사 장소로 이동했다. 아마 6명 가운데 탈락하는 친구가 발생하더라도 그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 모르게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 같다.

 

나중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과 공작원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신체검사는 평양의학대학병원과 공작원 전용병원인 915병원에서 각각 실시했고, 면담은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연락부 초대소에서 진행했다. 그리고 모란봉여관은 물론 평양시 당위원회 청사에서도 여러 명의 간부를 만나 면담을 했다.

 

신체검사는 도에서 했던 정도로 했고 면담 내용 역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다만 라틴아메리카를 왜 라틴아메리카라고 하는지 아느냐?’라는 질문과 희랍(그리스의 북한식 표현)이 어느 대륙에 있느냐?’ 등의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물론 2가지 질문에 대해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더니 나중에 질문했던 간부가 라틴아메리카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중남미 국가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이며 희랍은 구라파(유럽)에 있는 나라라고 가르쳐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중에 생각해 본 가정(假定)이기는 하지만 그때 간부들이 물어본 문제들에 답을 완벽하게 했다면 그 후에 해외공작 전담과에 배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 지리 상식에 대해 질문했던 간부가 연락부 이완기 부부장이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1개월 내에 안 부르면 마음대로 해라

5일간에 걸쳐 신체검사와 간부들과의 면접을 마친 나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 건강하게 공부 잘하라는 중앙당 지도원의 당부를 뒤로하고 다시 해주로 향했다. 그때 누가 최종적으로 선발되고 또 누가 탈락할지 몰라 명수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과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하지 못한 채 헤어져야 했다.

 
 

해주에 도착한 나는 도당 간부과 지도원을 찾아가 신체검사와 면접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도당 간부과 지도원은 이렇게 당부했다.

 

고향에 가면 몸 건강에 특별히 유의하고 또 자그마한 사고도 내지 말고 생활을 잘 해라. 그리고 앞으로의 최종 소환 여부는 네가 이번에 평양에 가서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있는데, 신체검사와 면접심사 결과가 만족스럽다면 소환할 것이고, 반대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소환하지 않을 거니까 기다려 보면 알 것이다. 네 말을 들어 보니 신체검사도 그렇고 면접심사도 괜찮게 한 것 같기는 한데,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니까 두고 봐야 알겠지.

 

만약 1개월 이내로 부르지 않으면 불합격인줄 알고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도 돼. 다만, 그 전에는 그 어디로도 움직이지 말고 네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가는 길에 군당 간부과에 가서 보고하고 거기에서 지시하는 대로 하면 돼. 갔다 오느라고 고생했는데 집에 내려가서 푹 쉬어라.”

 

당시 북한에서는 고등중학교 졸업 시기가 8월이었다. 그리고 대학으로부터 인민학교(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각급 교육기관의 새 학년도가 9월에 시작되기 때문에 내가 평양에 가서 신체검사와 면접심사를 받고 내려온 2월 하순은 고등중학교 졸업을 불과 5개월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보통 3월부터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와 면접심사, 대학 입학을 위한 면접 및 추천 등 여러 가지 조치들이 실제적으로 취해진다.

 

▲ 북한 정권 창건 55주년인 2003년 9월9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북한 군인들이 개인화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따라서 도당 간부과 지도원이 ‘1개월 내에 중앙당에서 소환하지 않으면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도 된다라고 말한 것은 최종적으로 중앙당 소환 여부가 1개월 내에 결정되기 때문에 1개월 내에 중앙당에서 소환장이 내려오지 않으면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군에 입대하거가 일반 대학에 가도 좋다는 의미였다.

 

나는 해주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와 군당 간부과 지도원에게 그동안 해주와 평양에서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보고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내가 그동안에 겪었던 일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당에서 나를 데려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시키려고 하는지 무척 궁금해 하셨다.

 

나는 내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최선을 다했으니 앞으로의 일은 일단 운명에 맡겨 놓기로 했다. 그동안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들뜬 기분을 자제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도 하고 산과 강에도 놀러가는 등 예전처럼 평범한 생활을 이어 갔다.

 

전투기 조종사에 선발되다

집에 돌아와 예전과 같이 생활하면서 군당 간부과 지도원이 지적해 준 내용들을 공부하면서 생활한 지 며칠이 지난 2월 하순 어느날, 군사동원부에서 나를 포함해 졸업반 남학생 20여 명에게 군 입대와 관련한 신체검사를 실시하려고 하니 읍 소재지에 있는 군사동원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군사동원부는 북한의 모든 도··군에 설치되어 있는데 군 입대와 제대, 입대 대상자들의 이동 문제 등 병무행정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으로, 한국의 병무청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근무 인원들은 모두 현역 군관(장교)들로 군복을 입고 근무한다.

 

군사동원부에서는 해마다 고등중학교 졸업을 앞둔 학생들과 군 입대를 희망하는 직장인들을 상대로 신체검사를 실시하고 합격된 대상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각 군종 및 병종별로 필요로 하는 인원만큼 필요한 시기에 입대시키고 또한 제대 군인들을 등록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고등중학교 졸업을 앞둔 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신체검사(징병검사)를 나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반 친구들과 함께 군사동원부에 가서 신체검사표를 받아 군()인민병원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또다시 군사동원부에서 불러서 가 보니 군사동원부 부부장이 군당 간부과에서 요구했던 것과 같은 간부 문건(서류) 용지를 주면서 집에 가서 작성해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요구대로 집으로 돌아와 서류를 작성한 다음 그것을 가져다주며 어디 좋은 곳에 나를 보내 주는 것이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앞으로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어린 마음에 호기심이 생겨 조종사든 뭐든 시켜 주면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군사동원부 부부장은 나를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대학에 추천할 생각이라면서 집으로 돌아가 공부도 잘 하고 건강하게 생활하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평양에 올라가 중앙당 간부들의 최종 심사를 받고 내려와 1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군사동원부에 몇 번씩 불려 다니며 간부문건 작성은 물론 신체검사와 면접심사를 여러번 하면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들떠 언제 또 나를 부를까 하고 은근히 기대까지 했었던 그때의 기억들이 아직도 내게는 생생하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아들: 김정일군사정치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수 차례의 면접과 신체검사가 있었다고 하셨는데,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은 없으세요? 저나 동생에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에 대해 자주 말씀해 주시는데, 그럴 때마다 사실 평범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삶이 왠지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버지: 내가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의 신체검사와 면접심사를 했지만 그때까지는 내가 어디에 가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전혀 몰랐어.

 

그리고 그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또 평범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 건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었지. 오히려 어렸을 때는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보다는 특별하게 사는 것, 튀어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많잖아?

 

북한 사람들은 물론 나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중앙당에 소환되어 평양으로 가는 것은 곧 출세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어. 난 최종 소환되어 갈 때까지도 김일성·김정일을 경호하는 요원으로 차출되는 줄 알았거든.

 

물론 내가 중앙당에 소환되어 가면 평범한 삶을 살게 될지, 아니면 특별하고 힘겨운 삶을 살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어.

 

그런데 내가 남파공작원으로 생활하면서 그것이 특별한 삶이라는 것과 함께 그러한 삶이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삶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때에야 비로소 평범한 삶이 얼마나 그립고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이지.

 

그래서 너희들에게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항상 얘기해 준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군복무를 하는 것이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며 군 입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한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너희들이 아버지의 얘기를 경청하고 군복무를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에 대해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