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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說竪說(동아일보) 2025-01/ 01-01(수) 2024년 증시 ‘밸류업’ 외치다 - 01-31(금) 트럼프 ‘금요일 밤의 학살’… 현실 된 ‘스케줄 F’의 공포

상림은내고향 2025. 1. 18. 18:36

橫說竪說(동아일보) 2025-01/

01-01(수) 2024년 증시 ‘밸류업’ 외치다 ‘밸류다운’… 올해는 나아질까

 

2891.35’. 작년 7월 11일 코스피가 3,000 선 코앞까지 갔을 때만 해도 한국 증시는 순항할 것처럼 보였다. 이틀 후 미국 필라델피아 유세 중 간발의 차이로 총격을 피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주먹을 쥐고 “파이트!”를 외친 후 코스피는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당선 가능성이 높아진 그의 고관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공약이 한국 경제에 충격을 줄 거란 우려 때문이었다. 지난달 코스피는 글로벌 금융위기 후 16년 만에 6개월 연속 하락해 2399.49로 마감했다.

▷작년 1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의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방침을 밝혔고, 소액주주 이익 제고를 위한 상법 개정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은 이렇게 시동이 걸렸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자동차 수출의 호조와 대기업들의 잇단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상반기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7월의 트럼프 총격 사건, 일본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우려로 나타난 8월 5일 ‘블랙 먼데이’ 쇼크에 한국 증시는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국, 일본 등 다른 나라 주가가 조속히 복원된 것과 달리 한국의 주가 하락엔 브레이크가 없었다. 작년 한 해 증시 성적표는 코스피 ―9.6%, 코스닥 ―21.7%. 큰 폭 상승한 미국 나스닥(31.4%), 일본 닛케이(19.2%), 중국 상하이지수(15.3%)와 정반대의 극심한 ‘밸류 다운’으로 끝났다.

 

▷하반기 서학개미들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선두주자 미국 엔비디아, 트럼프 당선에 기여해 ‘퍼스트 버디(친구)’가 된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를 향한 ‘투자 이민’을 서둘렀다. ‘국장 탈출은 지능순’이란 말이 상식이 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대화 주제는 엔비디아, 테슬라 주가가 됐다. 작년 말 한국인의 해외 주식투자 중 미국 비중은 관련 통계 집계 후 처음 95%를 넘었다. 국내 투자자가 보유한 미국 주식 가치는 174조 원에 이른다.

▷12·3 비상계엄 선포는 국가 수장이 제 나라 증시를 향해 던진 폭탄이 됐다. 더 떨어질 게 남았나 싶었는데, 12월 한 달간 코스피는 2.3% 더 내렸다. 연초 대통령이 툭 던졌던 ‘상법 개정’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 악화시킬 것이란 기업들의 반발만 불렀다. 주가는 그 나라 정치·경제·사회적 실력의 총화란 명제가 작년처럼 뚜렷이 입증된 예도 드물다. 작년 증시를 망친 문제 중 뭐 하나 시원하게 풀린 것 없이 새해를 맞았다는 게 큰 고민거리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1-02 따뜻한 위로 건네는 봉사자들, 무안에 전해진 온정

 

2025년 새해가 밝았지만 제주항공 참사의 상처가 깊은 전남 무안공항의 시간은 멈춰 있다. 참사 사흘 만에 희생자 179명의 신원이 모두 확인됐지만, 아직도 희생자들을 품에 안지 못한 유가족에게 새해를 맞이하는 건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유족들에게 그나마 힘이 되는 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온정의 손길이다. “내 자식, 내 형제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서” 한걸음에 달려온 자원봉사자들이 지금까지 2000명이 넘는다.

▷무안군의 여성 농업인들은 사고 당일 맨 먼저 떡국 3000인분을 챙겨 공항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여기에 새마을부녀회 등 지역 봉사단체들이 힘을 보태 매일 아침 유가족과 사고 수습에 나선 소방대원, 경찰, 공항 직원들을 위한 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공항 주차장엔 전국 곳곳에서 보내온 밥차·간식차들이 빼곡히 들어섰고 공항 1층의 식당도 24시간 문을 열고 하루 700인분의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그 어떤 헤아림도 유족의 비통함을 대신할 수 없겠지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해주고 싶은 작은 정성들이다.

▷생업을 제쳐 두고 현장으로 달려온 자원봉사자들은 크고 작은 안내부터 쓰레기 정리, 화장실 청소, 교통 지원까지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손발을 보태고 있다. 유가족들 사연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며 같이 울어주고 슬픔을 어루만지는 것도 현장 봉사자들이다. 커피 한 잔을 건네다 함께 눈물을 글썽이고, 손난로와 담요를 전달하며 이별의 아픔을 다독인다. 공항 계단에는 “너무 무서웠을 그 시간이 비통하고 미안하다”, “좋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만나자”고 쓴 손편지가 가득하다.

 

▷현장을 직접 찾지 못한 시민들은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때도 등장했던 ‘선결제 나눔’으로 작은 위로를 보내고 있다. 공항 내 커피숍과 편의점, 식당에는 ‘커피 200잔 선결제’, ‘도시락 선결제’ 같은 안내문이 갈수록 늘고 있다. 유가족을 돕기 위한 생필품과 구호품도 속속 답지하고 있다. 지자체 등에는 “필요한 게 있으면 어떻게든 구해서 보내주겠다”는 전화가 쉴 틈 없이 쏟아진다고 한다.

▷새해 벽두부터 전국 각지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는 희생자를 애도하는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무안공항 분향소에는 조문 인파가 너무 몰려 통신 장애가 빚어지고 지자체가 ‘다른 분향소를 방문해 달라’는 안내 문자를 보낼 정도다. 슬픔을 함께할 수 있다면 한두 시간씩 기다리는 일쯤은 조금도 힘들지 않다는 마음들이다. 느닷없는 국가적 대참사로 어느 해보다 참담한 심정으로 새해를 맞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모으려는 봉사 행렬과 이웃의 고통을 나누려는 조문 행렬에서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본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03 美도 홀린 K뷰티… 프랑스 제치고 美 수입시장 첫 1위

 

올해 5월 미국의 유명 흑인 뷰티 크리에이터는 유튜브 영상에서 한국의 쿠션 파운데이션을 바르면서 “내 피부톤에 딱 맞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 유튜버가 한국 파운데이션 색상이 너무 밝아 아쉽다고 하자 한국 화장품 회사에서 어두운 톤을 개발해 선물한 것이다. 흑인 피부에 딱 맞는 파운데이션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화제가 됐다. 한국 제품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아마존 뷰티 카테고리에서 판매량 1위에 올랐다.

▷K뷰티의 강렬한 향기가 미국 시장도 홀리고 있다. 한국 화장품은 미국에서 지난해 1∼10월 2조 원어치 팔렸는데, 수입 화장품 시장 점유율 22%로 사상 처음 1위에 올랐다. 그동안 북미 수입 뷰티 시장을 양분하던 프랑스와 캐나다를 상당한 격차로 제쳤다. 미국 소비자들로부터 가성비가 좋다는 호평을 받으며 판매량이 급성장했다. 실제 최근 아마존에서 팔리는 뷰티 제품의 상위 목록에는 한국 제품이 대거 포진해 있다.

▷K뷰티는 2010년대 대기업을 중심으로 중국 시장에서 1차 전성기를 맞았다. 최근의 K뷰티 2차 전성기는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 다양한 국가에서 중소·인디 브랜드가 주도하는 게 특징이다. 수출 제품 10개 중 7개가 중소·인디 브랜드 제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온라인 채널이 확대되면서 중소기업이 해외를 직접 공략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됐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 K컬처 덕분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한몫했다.

 

▷자본력이 약한 인디 브랜드가 미국 등 세계 시장을 휘저을 수 있었던 데는 ‘한국의 TSMC’로 불리는 한국콜마와 코스맥스 등 제조자개발생산(ODM) 기업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자체 생산시설이 없어도 좋은 기획 아이디어만 있으면 ODM 업체를 통해 빠르게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반도체로 치면 인디 브랜드가 반도체 설계(팹리스), ODM 업체가 위탁생산(파운드리)을 맡은 셈이다. 이렇게 출시된 다양한 제품은 올리브영 등 플랫폼을 통해 팔려 나갔다. 기획, 생산, 유통의 한국식 ‘화장품 생태계’가 제대로 구축된 것이다.

▷고객의 취향과 수요에 즉각 대응하는 ‘빨리빨리’도 K뷰티만의 경쟁력이다. 한 국내 화장품 브랜드는 동양인 피부톤에 맞는 5가지 색상의 쿠션을 생산하다가 다양한 인종의 미국 시장을 노리고 색상을 30가지로 늘렸다. 한국 회사들은 에어쿠션, 마스크팩, 스틱 파운데이션, 뷰티 기기 등 새로운 제품도 끊임없이 선보였다. 다만 인디 브랜드가 급증하면서 단기 기획과 마케팅에만 치우치고 있다는 점은 걱정이다. 고품질 화장품을 위한 원천 기술 확보 등 꾸준한 연구개발도 함께 이뤄져야 장기 수출 효자품목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1-04(토) “국무위원들, 경제 고민 좀 하고 말하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신년사를 낭독하다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많은 비판이 있는 걸 안다”고 운을 뗐다. “(한국은행) 간부들이 공보관을 통해 (총재가 신년사를) 그냥 읽고 오시고, 절대 애드립(즉흥 발언)하지 말라고 했는데,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면서 시작한 말이다. 이틀 전 최 권한대행은 헌법재판소 재판관 3명 임명을 거부하다가 탄핵당한 한덕수 전 대행과 달리, 그중 2명을 임명했다. 중앙은행 총재가 신년사에서 이런 민감한 정치 문제를 꺼낸 것이다.

▷이 총재는 “최 대행을 비판하려면, 특히 국무위원은 해외 신용평가사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년사 직후 기자간담회 때는 한술 더 떠 “국무위원들은 경제 고민 좀 하고 얘기하라”고 했다. 헌재 재판관 임명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일정이 더는 늦춰지지 않도록 한 조치다. 지금 같은 환율 급등 국면에서 외국 투자자에게 한국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이 총재의 발언은 지난해 12월 31일 국무회의에서 벌어진 ‘소동’을 겨냥한 것이다. 최 대행은 그날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사전에 예고가 없었던 헌재 재판관 임명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몇몇 장관이 “왜 상의도 없이 중대 사안을 발표하느냐”고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정치인 출신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윤 대통령과 대학 동기인 유철환 국민권익위원장, 윤 대통령의 개인변호사였던 이완규 법제처장 등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 대행은 장관들과 동료인 경제부총리가 더 이상 아니다. 재판관 임명 여부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이지, 토론해 정할 성격은 아니다.

 

▷이 총재가 해외 신용평가사를 거론한 건 국가 신용등급 때문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때 무디스, S&P 등 이름도 생소하던 글로벌 신용등급회사가 한국의 국가등급을 낮추는 일이 환율 폭등 및 차입금리 급등과 맞물려 진행되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디스는 12·3 계엄 직후 Aa2라는 우리 신용등급은 유지하면서도 “정치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총재는 자신이 10년 전 IMF 국장을 지내며 40여 아태 국가에 대한 경제리스크 보고서를 작성했던 책임자였기 때문에 더 민감했을 수 있다.

▷한국은행 총재는 발언이 금융시장에 미치는 파급력 때문에 말과 행동의 절제를 요구받는다. 이 총재는 이런 상식을 깨고 한은의 업무 영역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대학입시 문제에까지 의견을 내 왔다. 그의 행보를 놓고 “오지랖이 넓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국무위원들은 경제 고민 좀 하고 얘기하라”는 말의 내용에는 뭐라 토를 달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경제는 ‘리스크의 지뢰밭’을 걷고 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1-06(월) 부자가 8.7년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

 

건강은 개인 하기 나름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미국은 인종에 따라 기대수명 차이가 크다. 아시아인이 84.5세, 백인 77.5세, 흑인 72.8세, 원주민 67.9세 순이다. 영국에선 부촌에서 태어난 아이가 가난한 동네 아이보다 12년 더 오래 산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부자가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윤석준 고려대 예방의학교실 연구팀이 2008∼2020년 건강보험 데이터를 이용해 소득 수준(5개 등급)에 따른 기대수명을 분석한 결과 2020년 최상위 소득계층이 87.4년으로 최저 소득층보다 7.9년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별 이상 없이 생활하는 기간을 뜻하는 ‘건강수명’ 격차는 더 컸다. 최상위 계층이 74.9년으로 최저소득 계층보다 8.7년 더 길었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 모두 소득 수준에 따른 격차가 해마다 더 벌어지는 추세를 보였다.

▷건강과 수명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경제력, 주거 환경, 식습관, 사회관계 등이 꼽히는데 특히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는 큰 병원과 실력 있는 의사들이 많다. ‘종합병원에 1시간 30분 이내 접근이 불가능한 인구 비율’은 의료 여건이 좋은 곳은 0%이지만 나쁜 곳은 42%나 된다. ‘지역응급의료센터에 30분 이내 접근이 불가능한 인구 비율’은 지역별로 0∼57%로 격차가 더 크다. 이 때문에 소득 수준별로 응급 상황이나 급성 심뇌혈관질환으로 인한 사망률 차이가 크게 난다. 제때 치료를 받았더라면 피할 수 있는 사망률(회피가능사망률)의 경우 최저소득 계층이 최고층보다 1.4배 더 높다.

 

▷부자들은 급성 질환뿐만 아니라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같은 만성 질환을 앓는 비율도 낮다. 많이 벌수록 술과 담배를 덜하고, 적당한 유산소 운동과 균형 잡힌 식단으로 건강과 비만을 관리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질병관리청 2023 국민건강영향조사). 건강은 대물림된다. 유전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생활 환경과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아 부모 세대 건강 격차가 자녀 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자산이 10억 원 이상인 부자들은 일반인보다 아침 식사를 하는 비율이 높고, 종이신문과 연간 10권의 책을 읽으며,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횟수도 많았다(‘2024 대한민국 웰스 리포트’). 아침을 먹으면 폭식을 예방하고, 하루 30분 이상 읽으면 사망할 확률이 줄어들며, 가족 간 유대는 심리적 안정에 필수 요소다. 평범해 보이는 이런 장수 생활 습관도 먹고살기 힘든 이들에겐 사치일 수 있다. 의료 불평등 못지않게 경제 양극화 완화에 힘써야 건강 불평등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07 ‘명태균 수사’가 진짜 불법계엄 방아쇠를 당겼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 망상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건 지난해 3, 4월경부터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신원식 국방부 장관과 김용현 경호처장 등에게 시국 걱정을 하며 “비상대권 외엔 방법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 후 5, 6, 8월에도 비상조치 운운하는 자리가 이어졌고, 9월 초 김 처장을 국방부 장관에 앉힌 것도 계엄을 염두에 둔 인사였다. 이때만 해도 계엄은 아직 구상 단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월은 안 그래도 휘청이던 윤 대통령에게 치명적 한 방이 더해진 달이다. 윤 대통령 부부가 명태균 씨를 통해 공천에 개입한 의혹이 처음 보도된 게 이때다. 혐의가 짙어질수록 윤 대통령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명 씨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진 다음 날 윤 대통령은 관저에서 비상대권을 모의했고, 윤 대통령의 김영선 공천 관련 통화 녹음이 공개된 지 열흘 만인 11월 9일에는 계엄 선포 시 동원 가능한 군 규모를 논의했다.

▷“내가 구속되면 정권이 한 달 안에 무너진다.” 명 씨는 지난해 11월 15일 검찰에 구속되면서 이런 으름장을 놨다. 윤 대통령 부부와 벌인 불법 행위를 낱낱이 폭로할 수 있다는 선언으로 해석됐다. 검찰의 김 전 장관 공소장을 보면 적어도 윤 대통령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다. 명 씨의 구속 9일 만에 구체적인 계엄 준비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11월 24일 김 전 장관에게 명태균 의혹 등을 언급하며 “이게 나라냐. 비상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고 김 전 장관은 그날부터 비상계엄 선포문, 포고령 초안 등을 준비했다. 명태균 의혹이 계엄 선포의 방아쇠가 됐다고 볼 만한 대목이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지난해 12월 3일 명 씨가 기소되고 불과 몇 시간 뒤 이뤄졌다. 전날 명 씨는 윤 대통령 부부와 2년 넘게 연락하며 써온 황금폰을 공개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판도라 상자가 열리는 게 시간 문제가 된 이상 윤 대통령으로선 특단의 대책을 더는 미루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명 씨가 검찰에 제출한 황금폰 3대에는 저장된 메시지만 15만 개가 넘고, 윤 대통령이 2022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공천관리위원장이던 윤상현 의원에게 김영선 공천을 독촉하는 통화 녹음 등이 담겨 있었다.

▷한 달 안에 정권이 무너진다던 명 씨의 말은 결과적으로 현실이 됐다. 그의 구속 딱 한 달 만에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명 씨는 계엄 사태로 궁지에 몰린 윤 대통령에게 “단단한 콘크리트는 질 좋은 시멘트(아첨꾼)만으론 안 되고 모난 자갈(쓴소리꾼)을 잘 섞어야 만들어진다. 그게 국정 운영”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정치 브로커마저 아는 이 자명한 이치를 끝까지 외면해 온 윤 대통령은 체포영장이 발부된 지금도 아첨꾼들을 방패 삼아 관저에 숨어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1-08 “51번째 주지사” 트럼프에 조롱당한 트뤼도 사임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2015년 집권 때부터 ‘캐나다의 오바마’로 불린 서구 진보 정치계 스타였다. 자유당 소속으로 보수당 10년 통치를 끝낸 그의 행보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과 극명하게 대비되며 지지율이 60%대까지 치솟았다. 트럼프가 이민을 막자 “박해를 피하려는 이들을 환영한다”고 했고, 캐나다산 철강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자 보복 관세로 맞섰다. 2019년 나토 정상회의 땐 기자회견을 길게 한 트럼프를 조롱하는 장면이 공개될 만큼 껄끄러운 사이였다.

▷그랬던 트뤼도가 트럼프 당선 한 달도 안 된 지난해 11월 말 트럼프 사저 마러라고 리조트로 급히 향했다. 2200km 거리를 날아간 그는 리조트 회원들 사이에 끼어 트럼프와 같이 저녁을 먹었다. 다음 날 소셜미디어에 “우리가 다시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올렸다. 캐나다가 불법 이민을 막지 않는다는 이유로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한 트럼프의 나흘 전 엄포 때문이었다. 고물가 등으로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한 상태에서 관세 폭탄까지 맞으면 직 유지가 어렵다는 두려움에 마러라고행을 택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반전 기회로 삼으려 했던 그 만찬 테이블에서 트럼프의 ‘51번째 주지사’ 얘기가 처음 나왔다. 트럼프는 “(대미 흑자) 1000억 달러를 미국으로부터 뜯어내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뜻이냐. 그럼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라”고 했다. 주권을 침해하는 치욕적 발언에도 트뤼도는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고 한다. 귀국 뒤 오락가락하던 그의 모습에 여론이 돌아섰고 재무장관이 저자세라고 비판하며 그만둔 것이 결정타가 됐다. 트뤼도는 6일 “이제 리셋할 시간”이라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모진 트럼프는 트뤼도의 사임 회견 뒤에도 ‘51번째 주’ 얘기로 또다시 조롱했다. 주요 7개국(G7) 멤버이자 미국의 2위 교역국 정상을 끝까지 놀림감 삼았다. 관세 폭탄을 앞세운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 칼날이 취임도 전에 동맹국 정상을 쓰러뜨린 셈이다. 세계 주요 정상들이 마러라고에 가 고개를 숙이고, ‘퍼스트 버디’(1호 친구)라 불리는 일론 머스크의 노골적 내정 간섭에도 영국 독일 정부가 비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트뤼도는 ‘이익 앞에 적과 친구 구분 없다’는 트럼프의 첫 희생자가 됐다. 먼 나라 일로 치부할 게 아니다. CNN은 트럼프가 관세 위협을 이용해 캐나다의 정치 혼란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이익을 취하려 한다며 모든 국가가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사례로 든 나라가 탄핵 정국의 한국이다. 한국의 대미 흑자 규모는 캐나다(6위)에 이어 8위다. 지난해 557억 달러로 역대 최대 대미 흑자를 기록한 한국이 ‘트럼프 스톰’의 다음 타깃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01-09 3년 지나서야… 숙대 “김건희 석사 논문 표절”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는 1999년 숙명여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논문은 ‘파울 클레의 회화의 특성에 관한 연구’다. 독일 청기사파 화가인 클레의 작품 세계를 분석했다. 숙명여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이 논문의 표절 의혹이 제기되고 검증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표절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작가 연보, 첨부된 그림, 참고 문헌을 제외하면 43쪽에 불과한 짧은 논문이다. 그런데도 이 논문 검증에 석사 논문을 하나 새로 쓰고도 남을 시간이 걸렸다.

▷김 여사 석사 논문 표절 의혹은 2021년 12월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주자일 당시 처음 제기됐다. 그 이후 숙명여대 민주동문회가 자체 검증한 바에 따르면, 해당 논문의 표절률은 48.1∼54.9%였다. ‘제노바에서는 난생처음으로 보는 바다와 항구에 감동했고…’ ‘이탈리아 여행은 클레에게 뮌헨에서의 3년간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했다’ 등처럼 다른 논문, 저서와 6개 단어가 연속으로 일치하거나 동일한 내용인데 단어만 살짝 바꿔치기한 경우들이다. 이런 내용이 과연 학술적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운데 이조차 남의 글을 베꼈다는 것이다.

▷숙명여대는 2022년 2월 예비조사를 거쳐 그해 12월 본조사에 착수했다. 규정상 석 달 안에 조사 결과가 나와야 하지만 두 해가 지나도록 감감이었다. 학생, 동문이 나서서 조사를 촉구했지만 정부가 대학의 돈줄을 꽉 틀어쥔 상황에서 시퍼런 권력자의 심기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지난해 9월 김 여사 논문 검증을 공약한 신임 총장이 취임하고서야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새로 구성됐고, 석 달 만에 표절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야….”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지만 숙명여대는 국민대에 비하면 그나마 체면을 덜 구겼다. 김 여사는 숙명여대 석사에 이어 2008년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과정 중에 발표한 논문 ‘온라인 운세 콘텐츠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관한 연구’는 ‘회원 유지’를 ‘member Yuji’로 엉터리 번역해 함량 미달 논란을 불렀다. 박사 학위 논문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는 점집 블로그 등을 출처 표기 없이 그대로 복사해 붙여 넣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국민대는 2022년 8월 관행이었다는 취지로 이들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봤다.

▷김 여사는 짜깁기 석·박사 학위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경력을 이어왔다. 하지만 실수였다고 강변했을 뿐, 학문적 양심에 반한 행위였다는 반성은 없었다. 정직성, 성실성은 최소한의 연구 윤리이다. 학위만 수집했을 뿐, 윤리적 책임감을 배우지 못한 것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을 것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1-10 그린란드, 파나마운하, 멕시코만… 트럼프의 다음 타깃은

 

북극해에 있는 그린란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온 곳이다. 섬의 80%가 얼음으로 덮여 있는데 기후변화로 녹아내리면 북극항로의 거점이 될 요충지다. 미국이 이곳을 갖게 되면 중국과 러시아 중심인 북극 패권 경쟁을 주도할 수 있다. 전기차 제조에 필요한 희토류 등 광물도 많이 매장돼 있어 중국이 장악한 희토류 공급망을 뒤흔들 수도 있다. 섬의 주인은 18세기부터 그린란드를 지배해 온 덴마크다. 섬을 팔라는 트럼프의 제안을 덴마크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물러설 트럼프가 아니다. 최근 기자회견에서 그린란드 문제와 관련해 군사력 사용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트럼프가 무력을 써서라도 손에 넣겠다고 공언한 곳엔 파나마 운하도 있다. 미국은 48년 전 파나마에 이 운하를 넘겼는데 이제 와 회수하겠다는 것이다. 중남미의 핵심 무역로인 파나마 운하는 원래 미국이 건설해 운영했지만 현지인들과 유혈 충돌이 계속되자 카터 대통령이 “강압보다 공정성이 우선”이라며 통제권을 넘겨줬다. 파나마는 운하를 반납하란 트럼프의 요구에 “1m²도 못 내준다”고 반발한다. 이에 트럼프는 “운하가 나쁜 자들에 넘어가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나쁜 자는 파나마 운하 덕에 남미 최대 교역국이 된 중국을 지칭한 것이다.

▷트럼프는 취임을 앞두고 주변국들을 부쩍 자극하고 있다.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라고 부르고, 미 남부와 멕시코 쿠바로 둘러싸인 바다인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바꾸겠다고도 했다. 캐나다와 멕시코가 대미 무역 흑자를 누리면서도 불법 이민자를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다며 관세를 확 올리겠다는 겁박과 함께 나온 말들이다.

 

▷지난해 대선 때 트럼프는 ‘세계의 경찰’을 그만두고 자국에 집중하는 고립주의를 표방했다. 그런데 지금은 주변국들 영토를 탐내며 군대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수지타산이 안 맞는 먼 지역 분쟁에선 발을 빼지만 돈 되는 안마당에선 공격적으로 확장한다는 것이다. 국제 질서엔 관심 없고 이익을 위해선 과거의 제국주의도 끌어다 쓰는 트럼프식 팽창주의로 볼 수 있다.

▷목표를 높게 잡은 뒤 그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트럼프 스타일을 고려하면 실제로 땅을 빼앗진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양보를 얻어낼 것이다. 국제 불량배 같은 행태지만 주변국들은 마땅히 대응을 못하고 있다. 캐나다는 국민 80%가 미국 접경지에 살 정도로 미 경제에 깊이 얽혀 있고, 멕시코 역시 ‘신은 멀고 미국은 가깝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의 그늘 아래 있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데 능한 트럼프는 미국에 대한 경제와 안보 의존도가 높은 한국도 좋은 먹잇감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 태평양 너머 저 멀리서 벌어지는 남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1-11(토) ‘백골단’ 악몽이 누구에겐 추억이었나

 

“백골단 10∼20명이 다가와 쓰러져 있는 우리를 U자형으로 에워싼 채 방패와 진압봉 구둣발로 구타했다. 전경의 욕설과 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뒤범벅됐다. 머리카락을 잡혀 꼼짝없이 끌려가는 학생도 있었다.” 1991년 5월 25일. 경찰은 노태우 정권 퇴진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을 향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했다. 서울의 한 좁은 골목에 학생들이 뒤엉켜 쓰러졌다. 숨 쉬기조차 어려운 그때 백골단의 무차별 구타가 이어졌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한 학생이 엎드려 쓰러진 채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누군가 “여학생이 죽었다”라고 외쳤다.

▷동아일보는 그해 스물다섯의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의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그 한 달 전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 구타에 목숨을 잃었다. 1996년 연세대 학생 노수석은 백골단의 ‘토끼몰이’ 진압 과정에서 숨을 거뒀다. 백골단은 하얀 헬멧에 청재킷 청바지를 입고 다리 보호대를 찼다. 몽둥이와 방패를 든 그들은 사과탄이라 부르는 최루탄을 던졌다. 방독면 뒤에 얼굴을 숨겼다. 1980∼1990년대 시위 진압을 위한 사복경찰 부대였던 그들은 군부 독재의 폭력적 공권력을 상징했다.

▷2000년대 들어 잊혔던 백골단 명칭이 그제 느닷없이 등장했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해온 40대 유튜버 김모 씨는 20∼30대 30여 명으로 구성된 백골단을 조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지키는 300명 민간 수비대의 핵심이자 훈련 조교라고 했다. 하얀 헬멧과 무릎보호대는 물론 ‘멸공봉’이라 부르는 붉은 경광봉을 갖췄고 방독면도 구비할 것이라고 했다. 왜 백골단이냐고 했더니 “국가비상사태에는 백골단처럼 강한 이미지도 나쁘지 않다”고 답했다고 한다. 자경단 역할을 한다고 했으니 여차하면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려 한 것이라 의심된다.

 

▷집권여당의 최고위원까지 지낸 김민전 의원은 ‘반공청년단’의 예하 부대로 활동한다는 이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들은 ‘백골(白骨)’을 연상시키는 하얀 헬멧을 쓴 채 회견장에 나타났다. 폭력적 공권력의 상징을 차용해 법을 무시하고 폭력을 써서라도 윤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일그러진 인식을 여당 국회의원이 나서서 부추긴 셈이다.

▷논란이 커지자 김 의원은 뒤늦게 “송구하다”며 기자회견을 주선한 사실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80년대 학번인 김 의원이 전두환 정권 시절 대학 캠퍼스에 수차례 진입한 백골단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철회 이유에 대해 백골단 명칭이 좌파에 공격 명분을 주는 표현이라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란 취지의 변명을 하기도 했다. 끔찍했던 백골단 악몽이 김 의원에겐 추억이었나.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그의 행태는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민주주의 퇴행의 쓰린 민낯이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01-13(월) 경호처 미스터리… ‘TOP 4’의 엇갈린 선택

 

박종준 전 대통령경호처장이 10일 전격적으로 경찰에 출석하고, 사직까지 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닷새 전만 해도 “대통령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신명을 바칠 것”이라며 호위무사를 자처했던 그다. 윤석열 대통령 변호인단도 박 전 처장 출석 직후 “처장 복귀 시까지 차장이 직무를 대행한다”고 공지했다. 그가 돌아올 것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 체포를 둘러싼 대치 와중에 경호처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세간에서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은 두 차례 출석을 거부했던 박 전 처장이 왜 갑자기 사표를 낸 뒤 경찰에 나왔을까 하는 점이다. 뭔가 계산된 행보라고 보는 이들은 박 전 처장을 먼저 체포한 뒤 윤 대통령 신병 확보에 나서려는 공수처와 경찰의 계획을 흔들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한다. 반면 세 번째 출석 요구에도 불응하면 경찰의 체포영장 신청이 유력한 상황에서 체포를 피하고 경호처장으로서의 심적 부담을 덜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는 11일에도 경찰에 출석한 뒤 “최대한 성실히 협조하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경호처 내의 ‘강경파’에 박 전 처장이 밀린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야당에선 “경호처에도 김건희 여사의 총애를 받는 한남동 십상시가 있다” “김용현·김성훈·이광우는 한 몸”이라며 김성훈 경호차장, 이광우 경호본부장을 ‘김건희·김용현 라인’으로 지목한다. 공채 출신인 두 사람은 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근접 보좌해 왔다. 반면 박 전 처장은 지난해 9월부터 4개월 정도 처장으로 재직해 왔을 뿐이다. 8일 윤 대통령이 관저를 둘러봤을 때도 두 사람이 박 전 처장보다 먼저 알고 경호관을 배치했다고 한다.

 

▷공채 출신으로 경호처의 또 다른 핵심으로 꼽히는 이진하 경비안전본부장도 11일 경찰에 출석했다. 그는 체포영장 집행을 막은 것은 “윗선의 지시를 전달한 것일 뿐”이라며 책임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TOP 4’로 불리는 수뇌부가 각자도생을 택한 마당에 경호처 직원들이 동요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경호처 직원들만 접속할 수 있는 내부망에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공무집행 방해에 해당할 수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가 삭제되는가 하면 경호처 직원이 보냈다는 “춥고 불안하다”는 등의 메시지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평소 경호 대상의 그림자처럼 임무를 수행하는 경호처는 “하나 된 충성 영원한 명예”를 처훈(處訓)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충성의 대상인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의 피의자가 된 데다 핵심 간부들이 누구 라인이네 하는 등의 잡음이 흘러나오면서 경호처 직원들은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경호처 직원들을 ‘사병’처럼 이용해 버티는 윤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불러온 것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1-14 무식하면 용감하다?… ‘더닝 크루거’ 한국 사회

 

 ‘더닝 크루거 효과’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로 요약하면 딱 들어맞는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의 성을 딴 심리학 용어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더닝과 크루거는 논문을 발표한 이듬해인 2000년 괴짜들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이그 노벨상을 받았다. 다소 익살스럽게 받아들여졌던 이들의 연구 결과는 알고리즘에 갇혀 정보 편식이 심각해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가 열리면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사회및성격심리학회는 올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 현상으로 더닝 크루거 효과를 꼽았다.

▷더닝과 크루거는 미국 코넬대 대학생을 대상으로 간단한 시험을 치르게 하고 절대적 점수와 상대적 석차를 측정했다. 그 결과, 가장 점수가 낮은 집단(하위 25%)이 실제 점수와 석차보다 자신을 가장 높게 평가하더라는 것이다. 이 집단은 평균 9.6개를 맞혔지만 14.2개를 맞혔다고 생각했다. 백분율로 환산하면 이들의 평균 석차는 88등이었지만 스스로를 32등으로 평가했다.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얘기다. 가장 점수가 높은 집단(상위 25%)은 평균 14등이었지만 32등으로 평가해 그 반대였다.

▷시험을 잘 봤다고 으쓱하며 돌아온 아이의 성적이 처참하거나, 주식 초보자가 몰빵 투자하는 이유다. 문제는 SNS 시대가 도래하며 더닝 크루거 효과가 개인의 실패를 넘어 사회의 실패를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필터링된 편향된 정보만 보는 ‘필터 버블’과 더닝 크루거 효과가 결합하면 허위 정보나 음모론에 쉽게 빠져든다. 음모론이 증폭될수록 사회는 극단으로 분열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자라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트럼프 정부가 한국 부정선거를 파헤친다” “선거 조작범으로 중국공산당 요원을 체포했다” 등의 거짓 주장을 펼치는 극우 유튜버가 극성을 부린다. 이들의 황당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보수 성향 고령층만이 아니다. 구독자 20만 명 이상 극우 유튜브 시청자를 분석해 보니 10∼30대가 50∼80대보다 많이 봤다. 학력이나 경력도 상관없다. 중국의 선거 개입을 믿는 일부 교수들이 중국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퇴직공무원이라는 사람들이 모여 부정선거 단죄를 주장한다.

▷더닝 크루거 효과는 무지하고 무능할수록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메타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를 피하려면 충분히 공부하고, 그 지식을 의심하며, 다른 의견에 열려 있어야 한다. “유튜브를 통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며 극우 유튜브의 열혈 애청자임을 자인한 윤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도 더닝 크루거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지도자의 지적 게으름이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1-15 트럼프 유죄 “법이 보호하는 건 사람 아닌 직책”

 

4건의 형사 기소를 안고 대선을 치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구한 건 지난해 7월 미 연방대법원 판결이다. 트럼프의 2020년 대선 패배 뒤집기 시도가 대통령 재임 중 이뤄진 광범위한 공적 행위로 볼 수 있다며 면책 특권을 인정해줬다. 그 덕에 트럼프의 다른 재판들이 줄줄이 중단됐다. 기밀 문건 유출이나 조지아주 대선 개입도 ‘공적 행위’로 면책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까지 트럼프의 골치를 썩인 사건이 있다. 성추문 입막음 대가로 성인영화 여배우에게 13만 달러(약 1억9000만 원)를 주면서 회계를 조작해 공금으로 처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 판결 두 달 전에 이미 배심원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이 났다. 미국은 배심원이 유무죄를 가리고 판사가 형량을 정한다. 배심원 평결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을 열흘 앞둔 10일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의 1심 선고가 나왔다. ‘유죄지만 무조건 석방’. 트럼프가 범죄자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징역형을 선고할 경우 대통령직 수행이 불가능한 사정을 고려한 판결이었다.

▷1심 판사는 트럼프를 향해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대통령 당선자라는 신분이 범죄의 심각성을 줄이거나 정당화하지 않으며, 법적 보호는 직책에 주어지는 것이지 직책을 맡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했다. 법원이 석방시킨 건 미국 대통령이지 피고인 트럼프가 아니란 얘기다. 이 판결로 트럼프는 ‘범죄자 대통령’이란 꼬리표를 단 채 취임하게 됐다.

 

▷트럼프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할지 여부는 미 사법부의 난제였다. 미국은 대통령에 대해선 관례상 기소하지 않는데, 트럼프처럼 대통령이 다수의 범죄 혐의를 받은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논란 끝에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은 대통령직의 안정성이 중요하다며 면책 특권을 폭넓게 인정했다. 대통령이 재임 중 행위로 처벌된다면 의사결정이 위축될 수 있고, 정치적 분열이 커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트럼프는 이 판결을 내세워 성추문 입막음 사건의 유죄 평결도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맨해튼 법원은 대통령의 직무 행위가 아닌 개인 범죄까지 용인하진 않는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어떻게든 처벌을 피해 보려 했던 트럼프지만 사법 절차를 아예 무시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가 법원에 출두하는 날이면 주변이 한바탕 들썩였다. 방탄 리무진을 타고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등장해 법정에서 무죄 주장을 폈으나 판사의 질문에는 예의를 갖춰 답변했다. 구치소로 옮겨졌을 땐 다른 수감자들과 똑같이 키와 몸무게 재고, 머그샷(범인 식별용 사진)을 찍은 뒤 보석금 내고 풀려났다. ‘통제 불능’에 ‘예측 불허’라는 트럼프도 검찰과 법원의 소환 요구에 불응한 적은 없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1-16 ‘54년 족쇄’ 벗는 기아 소하리 공장

 

경기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기아 오토랜드’는 광명 시민들에게 ‘소하리 공장’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이 공장에서 처음 생산된 세단 브리사는 현대차 포니와 함께 1970년대 국내 자동차 시장을 휩쓸었다. 이후 ‘봉고 신화’를 쓴 승합차 봉고, 국민 소형차로 불린 프라이드, 기아 대표 스테디셀러 카니발 등이 줄줄이 이 공장에서 탄생했다. 지난해부터 이곳 2공장에서 전기차 EV3도 생산하고 있다.

▷그런데 기아가 연매출 100조 원 돌파를 앞둔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동안 모태가 되는 이 공장은 54년째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여 있다. 공장은 1970년 설립 허가를 받아 착공했지만 이듬해 도시계획법이 개정되면서 느닷없이 그린벨트로 지정됐다고 한다. 그동안 주변 녹지는 그린벨트에서 풀려 아파트 단지들이 우후죽순 들어섰지만 공장 부지만큼은 한번 박힌 대못 규제가 뽑히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기아는 광명 공장을 증설하거나 개축할 때마다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를 거치는 건 물론이고 그린벨트 보전부담금을 물어야 했다. 지난해 노후화된 2공장을 재건축해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전환할 때도 예외가 없었다. 광명시 등 지자체까지 나서서 그린벨트 부담금을 낮춰 달라고 건의했지만 정부는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퇴짜를 놨다. 4000억 원을 투입해 현대차그룹의 첫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었지만, 세제 혜택은커녕 부담금 폭탄을 떠안은 것이다.

 

▷기아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전기차 생산라인 증설 계획을 20만 대에서 15만 대로 축소하고 기존 공장의 지붕과 뼈대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를 두고 경제계에서 “해묵은 규제가 미래차 투자를 가로막는다”는 반발이 쏟아졌고 국무조정실, 대한상공회의소, 지자체 등이 머리를 맞대고 개선 방안을 모색했다. 그렇게 절충점을 찾은 게 광명 공장의 지목을 ‘대지’에서 ‘공장 용지’로 변경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린벨트 보전부담금이 6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향후 증설 규모에 따라 최대 수천억 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그린벨트에서 완전히 해제된 건 아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이 대만 TSMC 반도체 공장 유치를 위해 50년 이상 묶였던 그린벨트를 풀고 수조 원대 보조금을 쏟아붓는 것과 대비된다. 더군다나 오토랜드 공장처럼 설립 허가를 받은 뒤 그린벨트로 묶인 공장이 수도권에 수두룩하다고 한다. 급변하는 산업 흐름에 맞춰 공장 시설을 교체하거나 업그레이드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첨단산업 패권을 쥐기 위한 글로벌 전쟁이 숨 가쁜데,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규제가 우리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1-17 “지옥 맛볼 것” 트럼프 경고 먹혔나… 이-하마스 6주 휴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불가능해 보이던 휴전협상이 타결됐다. 우선 6주간 전투를 중단하고, 이스라엘 포로 1인당 하마스 수감자 30명 비율로 맞바꾸는 포로 교환이 시작된다. 3단계 휴전 합의 중 1단계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 닷새 전에 타결됐다. 2023년 10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가자지구 경계선을 넘어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해 1200명가량 살해하고, 약 250명을 인질로 끌고 가면서 시작된 전쟁이 15개월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미국에선 조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인 중 어느 쪽 역할이 더 컸느냐를 두고 뜨겁게 논쟁 중이다. 타결 발표는 트럼프가 X(옛 트위터)를 통해 선수를 쳤다. 바이든이 몇 시간 뒤 기자회견에서 “힘겨운 협상을 마쳤다”며 성과를 내세웠지만, 기자들은 ‘어느 쪽 공로가 더 크냐’는 질문을 빼놓지 않았다. 바이든은 “지금 농담하는 거냐”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서명 당사자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먼저 전화한 건 바이든이 아니라 ‘미래 권력’ 트럼프였다. 이스라엘 보도자료는 온통 트럼프의 역할을 강조했고, 바이든을 거론한 건 딱 1문장이었다.

▷미국 전문가들은 두 대통령을 모두 평가했지만, “내가 당선됐기에 가능한 휴전 합의”라는 트럼프의 말은 무시하기 어렵다. 휴전 협상 내용은 바이든 정부가 지난해 5월 내놓은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8개월 동안 진척이 없다가 “내 취임식 날까지 미국인을 포함한 인질을 안 풀어주면 전면적인 지옥을 맛볼 것”이라는 트럼프의 엄포 후 속도가 났다. 트럼프는 친구인 뉴욕의 부동산 사업가 스티브 윗코프를 특사로 임명했다. 유대계이지만, 외교도 중동도 문외한이었다.

 

▷윗코프 특사는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데 능력을 발휘했다. 11일 이스라엘로 날아가면서 “무조건 일정을 잡자”고 했다. 토요일인 그날은 유대인들이 엄격하게 지키는 안식일이었지만, 이스라엘이 따랐다고 한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협상 타결은 네타냐후 총리의 결심으로 가능했다. 그는 전쟁 중이라 현직을 유지할 뿐이지, 전쟁이 끝나면 퇴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트럼프와 협력할 때라야 휴전 후에도 권력 연장이 가능하다고 여겼을 공산이 크다.

▷지금의 국제 질서는 미국의 힘이 빠지면서 더 불안정해졌다고 평가된다. 불필요한 해외 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재등장이 겹치면서 국제 분쟁은 더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늘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취임 직전에 어렵다던 이스라엘-하마스 휴전이 성사됐다. 트럼프는 알려진 대로 자신이 주인공인 ‘거래의 성사’에 관심이 크다. 군사력은 제한적으로 쓰겠다면서도 “지옥을 맛보게 될 거다”라는 식의 엄포 외교를 서슴지 않는다. 이번 협상 타결은 더 자신만만해진 트럼프식 외교의 서막일 수 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1-18 돈 걷어 ‘간부 모시는 날’, 공직사회 아직도 이런 폐습이…

 

지난해 9급 초임 공무원 월급은 각종 수당을 포함해 222만2000원이었다. 월 최저임금보다 불과 16만 원 많은 수준이다. 혼자 살기에도 빠듯한 돈인데 일부 지자체 공무원은 여기서 매달 5만∼10만 원을 팀비로 낸다. 이른바 ‘간부 모시는 날’을 위해서다.

▷간부 모시는 날은 하급 직원들이 사비를 털어 상급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공직사회 특유의 문화다. 팀마다 순번을 정해 주 1회 과장을 대접하고, 월 1회 국장을 대접하는 식이다. 국과장이 혼자 식사하지 않도록 챙기면서, 매번 돈을 내는 부담도 줄여주기 위해 생긴 관행이라고 한다. 국과장 입장에선 매일 돌아가며 공짜 밥을 대접받는 셈이다. 젊은 공무원 사이에선 “월 200만 원 받는 처지에 월 500만 원도 넘게 받는 국과장 밥을 사야 하나”, “식비가 부담이라 도시락 싸 다니는데 상급자 밥값을 내라니 어이가 없다” 등의 불만이 나온다.

▷최근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일부 지자체에는 매주 1, 2회 간부 모시는 날이 남아 있다. 이날이 되면 주로 막내인 팀 총무가 상급자에게 미리 선호 메뉴를 물어 식당을 예약한 후 함께 이동해 식사하고 원하면 커피까지 대접한다. 팀 총무는 상급자의 취향은 물론이고 전날 먹은 메뉴까지 파악하고 참석자를 체크하느라 오전 업무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 식비는 미리 걷은 팀비에서 내는 경우가 많은데, 하급자 입장에선 돈은 돈대로 쓰고 마음 편히 식사도 못 하니 억울할 만하다. 하지만 매달 순번표까지 만들어 내려오는 데다 공무원 사회에선 ‘점심시간도 업무의 연장’이란 인식이 여전해 다른 일정이 있다며 빠지기도 어렵다.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마련되는 자리지만 실제 성격은 다르다. 공직사회 특성상 명확한 성과 측정이 쉽지 않다 보니 한 번이라도 더 만나 식사를 하고 친분을 쌓아야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넓게 보면 청탁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어 국민권익위원회는 올해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공무원 행동강령 위반 여부를 점검할 방침이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이 관행은 2000년대 들어 공직사회 세대교체가 진행되며 ‘시보떡’(수습 기간이 끝나면 사비로 돌리는 떡)과 함께 대표적 공직사회 악습으로 꼽히게 됐다. 정부도 여러 차례 근절을 약속했다. 현재 중앙부처에선 거의 사라졌지만 지자체의 경우 지난해 조사에선 응답자의 44%, 올해 조사에선 24%가 여전히 ‘모시는 날 관행이 남아 있다’고 답했다. 최근 정부 조사에서 공무원의 91%는 ‘모시는 날 관행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했다. 공무원 스스로도 불필요한 관행임을 인정한 만큼 이번에야말로 시대착오적 악습을 뿌리 뽑아야 한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01-20(월) 트럼프 “내가 혼돈 그 자체라고? 한국을 보라”

 

시도 때도 없이 돌출 발언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선 한 달 넘게 침묵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될 가능성이 있고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의중을 드러내기보단 한국과 협상하기 유리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이란 해석이 많다. 4년 전 1·6 의사당 폭동을 선동한 혐의를 받아온 트럼프로선 섣불리 메시지를 냈다간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지도자란 이미지가 더 강해질 수 있어 거리를 두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랬던 트럼프가 은연중 자신의 생각을 내비친 사적 대화가 공개됐다. 마러라고 자택에서 장녀 이방카와 전화 통화를 하던 중 농담하듯 한국의 계엄 사태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다들 나더러 혼돈 그 자체(chaotic)라고 하지만 한국을 봐. 탄핵이 중단된다면 윤 대통령을 만나게 될 수도 있지.” 4년 전 대선 패배에 불복해 결과를 뒤집으려 했다는 혐의를 받는 트럼프는 민주당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적’이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런 그가 “내가 아무리 심해도 한국만큼은 아니지 않으냐”는 취지로 말한 건 한국 정치에 대한 조롱으로 들린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때 한국을 현금인출기란 뜻의 ‘머니 머신’이라고 불렀다. 이번 계엄 사태를 거치며 ‘나보다 더 심한 혼돈의 나라’라는 표현이 추가됐다. 한국에 대해 내정이 불안하고 민주주의가 취약한 나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취임하면 두툼한 청구서를 들이밀 참이었던 그에게 한국은 돈이 많은데 약점도 많아 다루기 쉬운 상대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시위대 사이에선 트럼프가 취임하면 윤 대통령을 도와줄 것이란 기대가 많다. 이들은 태극기와 성조기, ‘Stop The Steal(스톱 더 스틸·도둑질을 멈춰라)’이란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한다. ‘스톱 더 스틸’은 1·6 폭동 때 트럼프의 극렬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할 때 들었던 깃발 문구다. 양쪽 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헌법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공통점이 있는 만큼 트럼프가 윤 대통령에게 유대감을 느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철저히 이익을 보고 움직이는 트럼프가 탄핵 위기에 놓인 윤 대통령에게 손 내미는 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지 의문이다.

▷19일 윤 대통령의 구속에 변호인단은 “법치가 죽고 법 양심이 사라졌다”면서 시일야방성대곡이란 표현을 썼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을 강요한 일제를 규탄하며 ‘이날 목 놓아 크게 운다’는 뜻으로 쓴 말인데 이를 윤 대통령을 구속한 사법부를 규탄하는 데 동원한 것이다. 정작 목 놓아 울고 싶은 이들은 따로 있다. 트럼프 2기가 맹렬한 기세로 출범하는데 리더십이 실종된 정부를 바라만 봐야 하는 국민들일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1-21 ‘영끌’의 눈물… ‘이자 역습’에 줄줄이 경매

 

2018년 처음 등장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은 저금리와 집값 급등이 함께하던 시절 보편적인 투자기법이 됐다. ‘서울 집값은 오늘이 가장 싸다’고 했고, ‘대출은 빚이 아니라 투자’라 했다. 주택담보대출은 물론이고 신용대출, 회사 대출, 퇴직연금 등 노후자금까지 있는 대로 탈탈 털어 집 사는 데 쓸어 넣었다. 대출 상환 걱정은 없었다. 처음엔 이자만 내다가 집값 오르면 팔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고금리가 닥치면서 빚의 역습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법원에 따르면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린 채무자가 원금이나 이자를 3개월 이상 갚지 못해 임의경매로 넘어간 부동산(건물·토지·집합건물)이 지난해 13만9874건에 달했다. 2023년보다는 30%가량 늘었고, 2022년과 비교하면 배 이상이 됐다. 집값 하락으로 ‘하우스푸어’가 사회적 문제가 됐던 2013년 이후 11년 만에 가장 많다. 최근엔 압구정동, 대치동 등 서울 강남권에서도 빚을 갚지 못해 경매로 넘어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임의경매가 늘어난 것은 2020년 이후 뜨거웠던 ‘영끌’ 열풍의 후폭풍이다. 집을 산 후 한동안 저금리가 계속되고 집값이 올랐지만 2022년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제로금리의 시대가 끝나 전 세계가 기준금리를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국내 대출금리도 함께 올랐다. 고삐 풀린 듯 오르기만 하던 집값도 하락세로 돌아섰다. 대출금 부담이 커져 손절하려고 해도 거래가 위축되면서 팔기도 쉽지 않았고, 결국 경매로 넘어간 경우가 많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영끌족들 중에선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집값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조만간 미국에서 큰 폭의 금리인하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대출 규제, 경기 침체에 탄핵 정국까지 겹치며 주택 시장이 다시 얼어붙었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으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지며 금리가 내려가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 것도 악재다. 이런 상황에서 2020년부터 5년간 낮은 수준의 고정금리를 적용받다가 올해부터 고금리의 변동금리로 전환되는 사람들이 많아 이자 부담이 더 커지게 됐다.

▷영끌 대출의 문제는 빚에 허덕이는 매수자들의 한숨에 그치지 않는다. 대출금 상환 부담에 이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소비와 내수 침체가 더 깊어질 수 있고 금융권 부실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영끌족들은 파국에 이르기 전에 적극적으로 부채 조정에 나서야 한다. 내 집 마련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영끌족들의 눈물을 반면교사 삼아 무리한 대출을 삼가야 한다. 우리 사회가 빚의 무서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1-22 트럼프 파리기후협약 탈퇴, 지구적 재앙 되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일 취임식 연설에서 선거 구호였던 “시추하고, 시추할 것(We will drill, baby, drill.)”을 외치며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취임식을 마치고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지자 2만 명이 모인 워싱턴 경기장 ‘캐피털원아레나’로 이동해선 파리 기후변화협약(파리협약)에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탈퇴가 공식화되면 미국은 이란, 리비아, 예멘 등과 파리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4개 나라가 된다.

▷파리협약은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도 이내 상승으로 제한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각국은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제출하는데 미국은 2035년까지 2005년의 61∼66%를 감축하기로 했다. 2017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낙후된 공업도시인) 피츠버그 시민을 대표하기 위해 선출된 것”이라며 파리협약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협약 발효일부터 3년 이후 유엔에 탈퇴를 통보할 수 있기 때문에 임기 내내 협약 당사국으로 남아 있었고 2021년 2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직후 재가입을 선언했다. 미국이 실질적으로 파리협약을 탈퇴한 적은 없는 셈이다.

▷물론 파리협약 탈퇴 없이 NDC를 지키지 않더라도 제재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트럼프 1기에선 그의 탈퇴 선언이 석유와 석탄 기업이 포진한 텍사스와 웨스트버지니아주, 자동차 산업의 부활을 기대하는 러스트벨트 등 핵심 지지층을 향한 정치적 수사로 해석됐다. 이번엔 다르다. 탈퇴 통보 이후 1년이 지나면 효력이 발생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의 인공지능(AI) 기술 경쟁 등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파리협약을 준수하려면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고, 친환경 자동차를 보급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름값이 폭등했는데도 풍부하게 매장된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지 않아 미국인이 고통을 받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풍력발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풍력 터빈과 태양광 패널의 핵심 광물이 희토류다. 중국이 희토류 공급망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였다간 에너지 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중국산 전기차의 거센 공습도 막아야 한다. 더욱이 AI 패권을 지키려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의 두 배, 그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며 화석, 원자력 발전으로 회귀를 선언한 배경이다.

▷미국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14%를 차지한다. 미국이 파리협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고, 각국이 앞다퉈 당장의 이익만 좇으며 장기적인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국제 협력의 틀도 무너질 것이다. 세계 에너지 공급망이 재편되는 시기, ‘에너지 빈국’인 한국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1-23 트럼프 취임식의 한국 VIP들 어디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은 티켓 구하기 경쟁이 치열했다. 원래 미국 대통령 취임식은 국내 행사인데 트럼프가 개인적 친분을 중시하는 데다 전혀 다른 미국을 예고하면서 ‘눈도장 찍기’ 수요가 폭증했다. VIP석과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기부금이 쇄도해 역대 최고치인 2억5000만 달러(약 3627억 원)가 걷혔다. 한국 정·재계 참석자들도 현지에서 인증샷을 올리고 있는데 취임식을 ‘직관’한 이는 많지 않다.

▷이번 취임식 전 배포된 초청장은 VIP석 1600장을 포함해 22만 장. 그런데 북극 한파로 국회의사당 실내 행사로 바뀌면서 참석 인원이 2만1800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취임식 좌석은 3등급으로 나뉘는데 1등급은 취임식이 열린 의사당 중앙홀(로툰다)로 약 600명에게 돌아갔다. 상·하원 의원들과 대법관, 전직 대통령 부부, 빅테크 기업 수장들이 상석을 차지했다. 한국인 중엔 조현동 주미 대사가 유일하게 로툰다 홀에 초대됐다.

▷2등급은 의사당 내 노예해방홀(1200명), 3등급은 의사당 밖 체육관인 캐피털원아레나(2만 명)로 모두 취임식을 생중계 화면으로만 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계 미국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이 노예해방홀,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부부와 최준호 패션그룹형지 부회장 등이 캐피털원에 초대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식후 노예해방홀에서 즉석 연설을, 캐피털원에선 행정명령 서명쇼를 벌였으나 상당수는 트럼프의 얼굴도 못 봤다고 한다. 정 회장 부부는 트럼프 장남의 초대로 VIP만 입장 가능한 3개 무도회 중 한 곳에도 참석했다.

 

▷정계에서는 국민의힘 방미단과 일부 의원들이 캐피털원에서 취임식을 스크린으로 지켜봤다. 수용 규모가 2만 명이어서 미 정계 인사들과 의미 있는 교류를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소셜미디어에 “차기 대선 후보 자격으로 미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초청”을 받았다면서도 추위에 줄 설 엄두가 나지 않아 호텔에서 스크린으로 취임식을 봤다고 썼다. 취임식 일주일 전 급하게 초청받아 상원의원들과의 만남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럴 거면 세금 써서 왜 간 것이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초대했는데 대신 부주석이 참석했다. 그동안 주미 대사가 참석했던 관례를 깨고 부주석으로 급을 높인 것이다. 일본도 처음으로 외상이 취임식에 초대받았고, 식후에는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회담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행정명령 폭탄을 쏟아내는 터라 탄핵 사태로 인한 리더십 공백이 뼈아플 수밖에 없다. 의원 외교로 공백을 메워주면 좋으련만 다들 ‘찬밥’ 신세에다 일부는 대통령을 먼발치서 보려는 수고도 않았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1-24 텔레그램 첫 수사 협조… 숨을 곳은 없다

 

절대 잡히지 않는다.” 최근 경찰에 검거된 사이버 성폭력 범죄집단, 자칭 ‘자경단’의 총책은 평소 조직원들에게 이렇게 장담했다고 한다. 경찰을 상대로는 “수사하러 헛고생하지 말고 푹 쉬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2020년부터 5년 가까이 가스라이팅, 강간치상 등으로 234명의 피해자를 성착취해 온 대담한 범죄자들의 믿을 구석은 바로 온라인 메신저 텔레그램이었다. 국내 수사기관에 비협조적인 해외 메신저를 이용하면 수사망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경찰이 23일 공개한 ‘자경단 사건’은 텔레그램이 국내 수사기관에 관련 자료를 넘겨 수사가 이뤄진 첫 사례다. 2023년 12월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텔레그램 측을 지속적으로 설득한 끝에 지난해 9월 사건과 관련된 데이터를 제공받았고 10월부터 공식적인 수사 협조 체제를 구축했다. 그동안 텔레그램은 각국 정부의 범죄 수사 협조 요청에 대해 사생활 보호를 들어 외면해 왔지만,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8월 프랑스에서 체포된 이후 방침을 바꿨다. 정부는 앞으로 마약 유통망 적발을 위해서도 텔레그램 측과 공조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텔레그램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2014년부터다. 당시 카카오톡 압수수색 논란 등으로 사이버 검열 우려가 커지자 많은 사람들이 텔레그램으로 ‘메신저 망명’에 나섰다. 해외에서 서버를 운영하고 있고 보안성이 우수하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시작은 자유를 위한 탈출이었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텔레그램은 마약 성범죄 테러 사기 등 각종 범죄가 모의, 거래되는 어둠의 통로가 됐다. 텔레그램을 악용한 2020년 ‘n번방’ 사건은 사회적 공분을 자아냈다.

 

▷대화가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정치인들도 텔레그램을 즐겨 이용한다. 국회에서 의원들이 텔레그램 앱을 사용하는 모습이 종종 카메라에 잡힌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과 권성동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텔레그램 대화에서 포착된 ‘체리따봉’ 이모티콘이 유명하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직후에는 용산 대통령실 참모들의 ‘텔레그램 갈아엎기’가 러시를 이뤘다. 텔레그램을 탈퇴했다가 재가입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도 텔레그램 계정을 지웠다.

▷텔레그램 대화 내용을 지우고, 계정을 탈퇴한다고 해도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당초 텔레그램 측은 수사 협조 요청을 거부하며 ‘대화가 남아 있지 않고 철저히 암호화돼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이유를 댔지만, 정보 제공이 일부 가능하다고 입장을 바꿨다. 텔레그램의 보안정책이 언제 또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영원한 은신처란 결코 있을 수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1-25 “美 출생자에 시민권 안 주면 위헌”… 트럼프 벌써 역풍

 

20일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첫 4일 동안 54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석유 시추 확대, 가상화폐 촉진 등 대선 때부터 예고하던 것들이다. 불법 이민자 자녀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조치도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합법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니라면 불법 체류자 어머니가 낳은 아이에게 미국 국적을 더 이상은 안 준다는 내용이다. 어머니가 유학, 관광, 단기 근로를 위해 정식으로 입국했다가 출산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인구 3억4500만 명인 미국에서는 한 해 약 360만 명이 태어나는데, 이 행정명령대로라면 25만∼30만 명이 미국 국적을 못 얻게 된다.

▷무더기 행정명령에 제동을 건 것은 법원이었다. 워싱턴주 존 코큰아워 연방판사는 23일 “이만큼 명백한 위헌 사례는 못 봤다”며 우선 ‘2주간 효력정지’ 결정을 내렸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모두가 미국 시민”이라는 수정헌법 14조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이 판사는 “(2주 뒤인) 2월 5일 추가로 판단하겠다”고 예고했다. 결론이 뒤바뀔 가능성은 작다는 전망이 많아, 기세등등하던 트럼프로선 첫 역풍을 맞은 것이다.

▷수정헌법 14조는 남북전쟁으로 노예 해방이 선언된 직후인 1866년 흑인 노예와 그 자녀의 권리 보장을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식 속지(屬地)주의의 근간이 됐다. 과거에도 수정헌법 14조의 적법성을 연방대법원이 2차례 검토한 적이 있다. 1898년과 1982년인데, 헌법상 출생시민권(birthright)이 명확히 표현돼 있어서 다른 해석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에도 “불법 체류자 자녀에게 시민권을 준다니, 웃기지 않느냐. 지구상에 미국 한 곳만 이렇다”며 행정명령을 예고한 적이 있다. 속지주의는 미국 외에도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약 30개국이 채택하고 있지만, 사실관계에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창궐하자 계획을 미뤘다.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동해 최상위 법체계인 헌법 조항에 반하는 정책을 편다는 발상이 트럼프답다.

▷트럼프는 백인 유권자의 공(恐), 벽(壁), 노(怒)를 앞세워 재선에 성공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공포심, 그래서 쌓아올린 미-멕시코 국경의 긴 장벽을 활용해 백인 지지층을 상대로 분노 마케팅을 펼쳤다. 트럼프는 취임사에서 “나는 정책추진 동력(mandate)을 부여받았다”고 선언했다. 뭘 해도 정당성이 주어졌다는 믿음이다. 그렇다 보니 전문성과 경력보다는 충성심을 기준으로 장관을 발탁했고, 이벤트 같은 서명식을 통해 충분히 검토됐는지 모를 행정명령들을 쏟아냈다. 그러다가 법원에 가로막힌 것이다. 트럼프식 정치가 언제까지 지금처럼 좌충우돌할지 모를 일이다. 트럼프 2기 4년은 트럼프의 몰아치기 국정과 미국의 촘촘한 시스템 사이의 힘 겨루기로 기억될 수 있겠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1-27(월) 5번째 구속 ‘큰손’ 장영자

 

큰손’ 장영자 씨가 처음 사기죄로 구속된 건 1982년이다. 당시 나이 38세였다. 사채업을 하던 그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담보로 그 금액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은 뒤, 약속과 달리 어음을 현금화해 버렸다. 만기가 돼 어음을 막지 못한 기업이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사기 행각의 전모가 드러났다. 지금으로 보면 전형적인 폰지 사기인데 당시 장 씨는 “경제는 유통이에요. 난 경제 활동을 한 겁니다”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단군 이래 최대 사기극’이라 불린 장 씨의 어음 사기 피해액은 6400억 원이었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현재 가치로는 2조9000억 원가량이다. 기업들이 원금의 몇 배에 이르는 어음을 순순히 담보로 맡겼을 리 없으니 ‘권력형 비리’가 의심됐다. 장 씨의 남편은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으로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고 이철희 씨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인척 관계로 얽혀 있었다. 장 씨의 형부가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씨의 삼촌인 이규광 씨였다. 더욱이 하루 1000만 원씩 펑펑 써댄 장 씨의 호화생활이 알려지며 민심의 분노에 불이 붙었다. 결국 남편 이 씨와 함께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장 씨는 끝까지 “나는 권력투쟁의 희생양”이라고 강변했다.

▷장 씨가 최근 위조 수표를 쓰다가 5번째 구속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농산물 납품 계약을 체결하며 위조 수표를 건네고 3000만 원을 받아 가로챘다. 올해 81세인 장 씨는 4번의 사기죄로 이미 33년을 복역했다. 남편 이 씨의 삼성전자 주식 1만 주(액면분할 전)가 담보로 묶여 있어 돈이 필요하다거나, 비자금이었던 구권 화폐를 바꿔주면 웃돈을 주겠다는 등의 사기를 쳤다. 반복되는 사기로 장 씨가 처음 구속된 이래 감옥 밖에서 보낸 시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장 씨는 왜 사기를 멈추지 못할까. 과거 그를 수사했던 검사들의 증언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정신감정을 해야 할 만큼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누구든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고, 남을 속이는 데 쾌감을 느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허황된 측면이 있어 경제관념이 되레 부족해 보였다고도 했다. 서울 한 여대의 ‘메이 퀸’을 지낸 미모, 언변에다 돈과 권력까지 업었으니 이런 자기애적 망상이 부풀기만 했던 것 같다.

▷그가 궁극적으로 갇힌 곳은 철창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거짓 세상이다. 사기를 통해 일확천금을 노린 것인지,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그날을 잊지 못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조차 철저히 속이면서 헛된 욕망을 탐닉하는 데 일생을 허비하고 말았다. 돈, 권력, 가족….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탐욕의 덧없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만이 그를 기다릴 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1-31(금) 트럼프 ‘금요일 밤의 학살’… 현실 된 ‘스케줄 F’의 공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금요일 밤을 골라 국무부 재무부 등 연방정부의 감찰관을 무더기 해고했다. “금요일 밤의 학살”이란 미 언론의 평가가 나왔다. 개인에겐 해고 사유 통보도 없었다. 백악관 인사국장의 이메일 통보를 받은 감찰관은 17명인 것이 금주 들어서야 파악됐다. “법무부와 국토안보부 2곳을 뺀 모든 부처”라는 보도가 나왔다. 살아남은 법무부 감찰관은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임명했지만, 트럼프를 수사했던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고강도로 감찰한 전력이 있다. 트럼프는 기자들 질문에 “그 FBI 감찰보고서는 참 정확했다”고 답해 그가 살아남은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전체 250만 명에 이르는 연방정부 구성원이 동요하자, 트럼프는 다음 날 “몇몇 감찰관은 불공정했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하지만 감찰관 해고를 위해 30일 전에 구체적인 해고 사유를 문서로 상원에 보고하도록 된 규정은 지키지 않았다. 트럼프는 이 규정을 모르는 듯 “해고는 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가 전국적 인지도를 쌓은 것은 20년 전 방송 리얼리티쇼 사회자로 나서서 “넌 해고됐어(you are fired)”를 외치면서다. 여전히 ‘해고는 곧 인기’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첫 4년 임기 동안 트럼프는 연방정부 공직자들이 일부러 태업을 해 자신을 괴롭혔다고 여겼고, 이들을 비밀 결사체라는 식으로 “딥 스테이트(deep state)”로 종종 불렀다. 트럼프 사단은 이들을 손볼 방법을 찾다가 ‘스케줄 F’ 조항을 찾아냈다. 통상 연방정부 공직자는 고용이 보장된다(스케줄 G). 하지만 기밀을 다루거나 정책 결정 및 홍보에 참여하는 이들의 해고는 상대적으로 쉽다(스케줄 F). 트럼프는 첫 임기 마지막 해인 2020년 직무를 재조정해 4000명 선이었던 스케줄 F 대상을 5만 명 정도로 늘려놓았다.

 

▷트럼프가 말하는 연방정부 ‘개혁’에는 두 가지 목표가 뒤섞여 있다. 반대파를 골라낸 자리에 트럼프 충성파를 입성시킨다는 것이 하나고, 인건비 및 사업예산 절감을 통한 경영 효율화를 이루는 것이 다른 하나다. 일론 머스크 같은 혁신형 기업가에게 정부효율부(DOGE)라는 신생 조직을 맡긴 것은 둘째 목표를 위한 것이다. 스케줄 F 공직자들로선 언제, 어떻게 해고당할지 알 길이 없어 불안해한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이렇듯 트럼프의 정부 개혁에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정부 슬림화로 예산을 아낀다면 누가 반대할까. 하지만 역량보다 충성심을 더 중시하고, 이메일 해고라는 거친 방식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현실이 된 첫 무더기 해고 대상이 정치적 중립성이 강조되는 감찰관들이었다. 새 감찰관들이 공직 기강 확립이란 본업을 비판자 축출에 활용할 수도 있다. 아직은 단정하기 이르지만, 이런 식이면 연방정부가 정치 싸움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있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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