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스카이데일리) [61] 속사정 모르는 국민… - [70] 북핵과 바꾼 노벨상… 물 건너간 남북 평화
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 스카이데일리 김기삼 변호사 2025
△ 미 프린스턴 대학 졸업
△ 197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시카고 트리뷴지(Chicago Tribune)·프랑스 파리의 IHT(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를 비롯해 50년간 한반도 문제 전문 최고령 현역 기자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2025.01.02
[61] 속사정 모르는 국민… DJ 수상자 선정 소식에 환
발표 20분 전 통보받았다는 김한정 말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3년 지난 뒤 월간지와 인터뷰…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감격 회상
노무현정부의 황우석 지원… ‘황우석‧KI 스캔들’
김대중정부의 김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공작에 이어 이번엔 노무현정부가 황우석 박사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발벗고 나선 정황이 한겨레신문 등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특히 황교수 팀이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KI)에 비치할 공동 연구 장비를 구입한다는 명목으로 후원금 50만5000달러를 인출해 2005년 12월12일 KI 측에 송금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의혹이 더욱 증폭되었다.
KI는 스웨덴 명문 의과대학 겸 연구기관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은 KI 교수 50명으로 구성된 ‘KI노벨회의(Nobel Assembly at KI)’에서 선정, 수여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KI의 칼스테트-두케 처장은 “해당 자금은 한국과학재단의 공공 연구 자금이며 실무적 목적상 황 교수 팀의 국내 금융기관 계좌를 통해 전달된 것이라는 내용의 확인서를 한국 대사관에서 받았다”며 “황 교수 후원금이라는 얘기는 한국 측에서 듣지 못했고 확인서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KI 스캔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스웨덴‧노르웨이에서 모두 슬그머니 묻혀 버렸다. 스웨덴도 한국도 이를 둘러싼 소동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노벨상 수상이 한국의 국격을 높인다는 생각에서 상을 받는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 과정에는 관심이 많지 않았다.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환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 또 다른 노벨상 수상자가 과학 분야의 황우석이면 어떻고 문학 분야의 시인 고은이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DJ 수상 소식 발표
이제 다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2000년 10월13일, 노벨평화상 수상을 결정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김대중 대통령의 수상 소식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과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해 2000년도 노벨평화상을 그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김 대통령은 한국에서 수십 년간 독재 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오랜 기간 국외 생활을 해야 했음에도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지도적인 대변자로 점차 부상했다.
한국은 1997년 김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으로 세계 민주국가의 대열에 결정적으로 합류했다. 김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민주적인 정부를 강화하고 한국 내부의 화해를 촉진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김 대통령은 동아시아의 지도적인 보편적 인권의 수호자로서 강력한 도덕적 힘으로 아시아에서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에 맞서 왔다. 그는 또한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동티모르 탄압 반대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한 간의 50년 이상 지속된 전쟁과 적대감 극복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김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남북한 간 긴장 완화 과정의 촉진제가 됐다. 이제 한국에서도 냉전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났다. 김 대통령은 한국과 이웃 국가, 특히 일본과의 화해를 위해서 노력했다. 노르웨이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한반도 화해 진전과 재통일을 위한 북한과 다른 국가 지도자의 기여에 대해서도 감사의 뜻을 밝히고자 한다.”

▲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상이라며 온 나라는 감동의 도가니로 변했다. 2000년 10월14일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의 한 식당은 손님에게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김한정, 월간중앙과 첫 언론 인터뷰
2003년 여름, 청와대에서 나온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김한정은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가졌다. 지난 몇 년간 언론과 숨바꼭질하듯이 피해만 다녔던 그로서는 언론에 처음 데뷔한 셈이었다. 당시 그로서는 여러 가지로 해명해야 할 일이 많았다. 왜냐하면 지난해 가을, 최규선의 ‘블루카펫 프로젝트’ 보도로 한 차례 크게 홍역을 치른 데다, 지난겨울에는 국정원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직원 김기삼이 양심 증언을 통해 자신을 노벨상 공작의 주역으로 거론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기삼의 양심 증언으로 촉발된 대북 송금 특검이 아직 진행 중인 때였다. 어느 수준, 어떤 형태로든지 자기방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는 평소 그나마 덜 적대적인 매체라고 생각해 왔던 월간중앙을 그의 첫 공식 언론 무대로 선정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노벨상 수상 발표 소식을 들었을 때의 감격과 청와대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김한정… 노벨상 수상 통보받은 날의 감동 전해
“2000년 10월13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발표된 날이죠. 통상 노벨상은 발표 20분 전에 수상자에게 통보해 주는 것이 관례였죠. 그런데 연락이 안 왔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측에서 청와대로 국제전화를 시도했는데 교환 전화로 걸어 통화 연결이 안 되었다고 하더군요.
오후 6시 정각, 저는 청와대 관저에서 몹시 초조한 심정으로 CNN 뉴스를 보고 있었지요. 군나르 베르게 노벨상위원장이 노벨연구소 발표식장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는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과 동아시아의 인권 증진,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코멘트를 듣고 바로 관저 안방으로 들어갔어요.
두 분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 계시는데 꼭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 같더라고요. ‘대통령님,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죠. 저도 모르게 울먹였던지 목소리가 몹시 떨렸어요. ‘오, 그래….’ 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던 두 분의 모습을 앞으로도 잊을 수 없겠지요.”
발표 20분 전에 통보를 받았다는 그의 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20분이 아니라 아마도 이틀 전에는 언질을 받았을 것이다. 김한정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고 감격했다는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자신이 쏟아 넣었던 시간과 열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간지 등 국내 언론‧국민 모두 한마음으로 축하
어찌 김한정뿐이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응당 감격해야 마땅한 일 아니었던가.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 온 노벨상이란 말인가.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상 아니던가. 온 나라는 감동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때의 그 감격을 다시 느껴 보기 위해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 당시의 신문을 몇 가지 들추어 보자.
“지난 주말 세계 10개국 정상들과 30명 가까운 전직 대통령‧국제기구 지도자 등으로부터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청와대에 쇄도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이탈리아 대통령‧바츨라프 하벨 체코공화국 대통령‧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호르스트 쾰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이 전화·서한·팩스를 보내 축하했다.
이 밖에 수상이 발표된 13일 저녁에만 청와대로 수백 통의 축하 전화가 걸려 왔으며 축하 화분도 답지했고 세계 각지의 교포‧상사 주재원과 국내 거주 국민들도 청와대 홈페이지에 수천 통의 축하 이메일을 통해 ‘한국민으로서 한없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밝혔다. 13일 저녁 평소보다 20배나 많은 1만여 명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접속해 서버가 다운됐으며, 14일 아침에도 또 한 차례 다운됐다.”⊙
[62] 요란한 노벨상 축하 잔치… 온 나라가 ‘떠들썩’
DJ 수감되었던 청주교도소 감방 영구 보존하기로
상점들도 축하에 동참, 기업은 ‘노벨상 축하 마케팅’
DJ, ‘하의도 노벨평화공원’ 조성 계획 중단 지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온 나라는 감동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어서 당시의 감격을 담은 신문 기사들을 살펴보자.
“목포에서 뱃길로 40㎞ 떨어진 작은 섬 하의도가 2년여 만에 다시 환희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지난 97년 말 대통령 당선 때 기쁨에 휩싸였던 연꽃 모양의 섬 하의도는 13일 오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으로 다시 축제의 도가니가 됐다. 신안군은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직후인 13일‘오는 2002년까지 국비 50억 원과 지방비 50억 원 등 총 100억 원을 들여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탄생시킨 하의도 김 대통령 생가 주변에 노벨평화공원을 조성키로 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18일 전남 신안군의 ‘하의도 노벨평화공원’ 조성 계획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일본‧중국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일제히 청와대에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는13일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켜 남북 화해와 협력을 향한 새로운 조류를 만들었다’며 ‘이번 노벨상 수상은 이 같은 빛나는 업적과 한국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김 대통령의 신념 및 열의가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게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노벨상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한 김 대통령의 용기 있는 행동에 대한 존경’이라고 축하했다.”
DJ 수감되었던 청주교도소 감방 영구 보존하기로
“김 대통령이 지난 1981년 1월부터 82년 말까지 23개월 동안 수감되었던 청주교도소 병사7호 감방이 영구 보존된다. 청주교도소는 지난 14일 처음으로 감방을 공개한 데 이어 이 감방을 영구 보존할 방침이라고 16일 밝혔다. 당시 수감자가 대통령이 된 데다 노벨평화상을 받았기 때문에 역사적인 현장으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교도소 측은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에서 무기수로 감형된 뒤 23개월 동안 갇혀 있던 이곳 청주교도소 병사 7호실은 당시 그대로 복원돼 있다. 창고였던 곳을 독감방으로 개조한 이곳은 김 대통령의 수감 생활 이후 다른 수감자는 들이지 않았다.”
식당‧서점 등 축하 행렬에 동참, 기업은 ‘노벨상 축하 마케팅’
“종로구 종로3가 서울극장 옆 종로점과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백화점 무역점 건너편의 삼성점 등 닭익는 마을 체인점 2곳은 13일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기분좋은 날’이라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다. 14일부터 사흘간 닭불고기와 국밥 등 점심 식사를 ‘공짜’로 제공하기로 결정, 15일 하루 점심 시간에만 400명가량의 손님이 닭불고기를 먹으며 노벨상 수상을 축하했다고. 14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 식당이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이날 하루 음식값을 받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자 기업들은 다양한 ‘DJ 노벨상 축하 마케팅’을 펼치기로 했다. 가뜩이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터진 경사인 만큼 이번 수상을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로 승화시키면서 동시에 제품 판매로 연결한다는 전략이다.

▲ 2000년10월13일 교보문고 관계자가 역대 노벨상 수상자 초상화 전시물 앞에서 이날 노벨평화상 수상이 발표된 김대중 대통령의 초상화를 걸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시내 한 대형서점은 13일 오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특별코너를 설치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 저서 특수에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교보문고는 이날 오전부터 2개의 전시대를 마련해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아태평화재단), ‘김대중 옥중서신’(한울), ‘나의 삶 나의 길’(산하) 등 김 대통령의 저서는 물론 ‘내일을 위한 기도’(여성신문)와 ‘나의 사랑 나의 조국’(명림당) 등 이희호 여사의 저서, 강준만 교수의 ‘김대중 죽이기’(개마고원) 등 관련 서적 60여 종을 전시해 놓았다.”
국제 통화요금 인하‧아파트값 할인에 기념 담배까지
“통신업체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 스웨덴‧노르웨이와의 국제전화 요금을 50% 인하키로 해 화제다. 별정통신업체인 인퍼텔은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노벨의 출생지인 스웨덴과 노벨평화상 시상식 개최지인 노르웨이 등 2개국에 한해 앞으로 2개월간 국제전화 요금을 50% 할인해 주기로 했다고 16일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아파트 가격까지 낮췄다. 월드건설은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 서울 목동에 짓고 있는 월드메르디앙과 현재 입주 중인 김포 장기지구 월드메르디앙4‧5차 아파트의 일부 세대를 할인가로 공급한다고 밝혔다. 분양가격이 1억6169만 원인 목동 33평형 2세대는 1000만 원이 낮은 1억5000만 원선에 판매한다. 김포 장기 아파트는 49‧62평형 각 2세대를 분양가보다 15% 낮은 가격에 내놓았다.
한국담배인삼공사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의장도안 등을 넣은 담배를 발매한다고 24일 밝혔다. 25일부터 전국에서 판매되는 기념담배는 ‘디스’ ‘타임’ 등 5종으로 모두 2억5000만 갑이다.”
10월14일엔 청와대에서도 축하 행사
다음 날인 2000년 10월14일 아침, 청와대 안마당에서도 작은 축하 행사가 열렸다.
“아침 9시20분경 출근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태운 1호차가 관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직원들이 도열해 있는 녹지원 가까이에서 승용차가 멈춰 서자 김 대통령이 내려 섰다. 박수가 쏟아지며 눈길이 마주친 직원들의 목례가 이어졌고, 김 대통령은 밝은 미소로 화답하며 도열한 사람들 사이를 걸어서 집무실 쪽으로 향했다.
김 대통령이 그 길을 잠시라도 걷는 것은 좀체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한민족 최초의 노벨상을 현직 대통령이 받은 마당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에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에서 마련한 약식 잔치였다. 그야말로 조촐했지만 청와대 직원들로서는 참으로 감격적이고 뜻깊은 행사로 기억에 남을 만한 날이었다.”
아셈 회의에서도 각국 정상의 축하 인사 이어져
축하 열기는 그다음 주에 열린 아셈회의에까지 이어졌다.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아셈) 제3차 회의가 열린 20일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가장 바쁘고 화려한 하루였다. 이날 모든 아셈 일정의 중심에는 이번 회의의 의장인 김 대통령이 있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아침 8시45분부터 정상회의가 열린 한국종합무역센터(코엑스) 앞 현관에서 각국 정상들을 맞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9시20분까지 1‧2분 간격으로 도착한 25명의 손님들에게 김 대통령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정성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김 대통령은 개회 연설에서 ‘오늘 저는 특별한 감회 속에 여러분을 맞게 됐다’며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광은 오직 우리 국민과 여러분의 성원의 덕으로 생각하고 깊이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김 대통령의 뒤를 이어 연설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이보다 더 합당한 선택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국제사회의 치하를 받아 마땅한 분’이라고 추켜세웠다.
추안 리크파이 타이 총리는 ‘아시아의 우리 모두는 특별히 우리의 존경하는 친구이자 동료께서 저명한 상을 수상하게 되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신장시키고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불굴의 의지로 애써 오신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도 ‘그는 아시아의 진정한 지도자이며,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고 칭찬한 뒤 아예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진리와 정의를 위한 염원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세상이 결코 무너지는 일은 없다’는 김 대통령의 옥중서신 대목을 인용해 자신의 연설을 매듭지었다.”⊙
[63] YS “언론탄압 독재자가 웬 노벨상” 원색 비난
“DJ가 인권주의자라면 국군포로·납북자 조속 송환” 쓴소리
한나라당 김만제‧유흥수 의원 ‘노벨위 로비’ 의혹 본격 제기
DJ의 노벨상 수상을 맹비난한 YS
2000년 10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가 나자 온 나라가 기쁨의 열기에 휩싸여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천편일률로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칭송한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시비하거나 딴지를 거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축하 열기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13일 오후 6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야당 말살‧언론탄압‧부정선거 저지른 독재자가 노벨상을 받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노벨평화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특강을 위해 고려대에 들어가려다 학생들에게 제지당한 뒤 고려대 앞에 세워 둔 승용차 안에서 ‘강연 초청을 받고 왔으나 10시간 동안 차 안에 갇혀 못 들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자유며 인권이며 정의를 얘기하느냐’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YS는 며칠이 지나도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듯 16일 다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다음과 같이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맹비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상 수상을 위해 북한에 너무나 많은 것을 양보하고 경제적 지원을 했다. 1973년 말 미국의 키신저와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결정됐던 레둑토 월맹(현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수상을 거부하고 1년 만에 월남을 공산화했다. 한국도 그렇게 가고 있다. 북한이 고려연방제 통일을 포기했다는 김 대통령의 말은 완전한 거짓말이며, 북한이 주장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은 ‘높은 단계’로 가는 첫 단계이다. 김 대통령이 인권주의자라면 북한에서 핍박받는 많은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을 하루속히 송환받아야 할 것이다.”
YS는 고대 사태 당시 생리 현상을 어떻게 해결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차 안에서 우유통으로 했다”고도 말했다.
YS처럼 원색적인 비난을 하진 않았지만 은근히 딴지를 거는 목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방계 단체인 재단법인 자유기업원(당시 원장 민병균)은 ‘한국 대통령과 노벨평화상’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벨평화상은 북유럽 선진국의 고매한 세계관을 반영할 뿐이며, 평화주의 자체가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 도박이라는 것을 역사는 누누이 가르쳐 주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고 잘 지내라’고 칭찬하면서 멋있는 상을 주는 것이 사대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질 경우 어떤 영향이 내포되는지 등골에 서늘한 땀을 흐르게 한다”
“진정한 평화는 적대 세력에게 호감을 사려고 애쓰고 양보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피해야겠다’는 평화주의자의 매물이 아니다.”

▲ 김대중(오른쪽) 대통령이 2000년 6월19일 김영삼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해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10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야당 말살·언론 탄압·부정선거 저지른 독재자가 노벨상을 받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노벨평화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DJ 노벨상 수상에 대한 북한의 반응
그러면 당시 북한의 반응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다음은 이에 대한 기사다.
“북한 언론은 15일까지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아무런 보도를 내보내지 않고 있다.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정규 뉴스 시간인 오전 6시를 비롯해 7시와 8시 뉴스 시간에도 김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는다는 소식을 일절 전하지 않았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된 13일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조명록 차수의 귀국 소식을 속보로 내보냈다.”
한편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 소식에 간간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던 언론은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지적을 하기도 했다.
“이번에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인사가 누구인지는 아직 공식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국내에서 추천받지 않았고 외국 인사들에 의해서만 추천됐다고 청와대 측은 밝혔다. 김 대통령의 한 측근은 ‘김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외국 인사 중 특히 과거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인사들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들 중 일부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 자문역도 맡고 있다’고 밝혔다.”
DJ 노벨상 수상에 정치권의 미묘한 신경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정치권은 이에 대해 물밑에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10일 열린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전체회의에서 한나라당 유흥수 의원이 ‘노벨평화상 로비설’을 제기했다. 유 의원은 회의 도중 갑자기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지난 8월 본데빅 노르웨이 전 총리가 방문한 사실을 따져 물었다. 유의원은 ‘노르웨이 전 총리가 구주(유럽)에서는 휴가철인데 8월에 아·태재단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느냐’며 ‘특히 그가 비밀스럽게 이산가족상봉 현장에 별도의 방을 얻어 상봉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돌아갔다는 말이 맞느냐’고 추궁했다. 그는 본데빅 전 노르웨이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 면담설의 진상도 따졌다.
이에 대해 이 장관은 ‘나는 당시 뉴욕에 가서 국내에 없었고, 노르웨이 전 총리가 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고 비켜 갔다. 하지만 유 의원은 회의 직후 아·태민주지도자회의의 초청으로 본데빅 전 총리가 방한했다는 내용의 외교부 자료를 공개했고, 아·태 측은 “본데빅 전 총리가 서남아시아 국가를 방문하는 길에 한국에 잠시 들렀다’고 시인했다.”
“한나라당 김만제 정책위원회 부의장이 2일 난데없는 ‘노벨상 로비설’ 제기로 구설수에 올랐다. 김 부의장은 이날 열린 총재단 회의에 앞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0순위에 올랐는데, 이는 ‘한국식 로비’ 덕분이라는 말이 있다’고 주장했다. 보도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 부의장이 돌출발언을 하자 놀란 사람은 권철현 대변인. 권 대변인은 김 부의장을 따로 불러내 미묘한 시점에 왜 그런 말을 하느냐며 ‘질책’을 했다는 후문이다. 권 대변인은 나중에 다시 기자들에게 ‘김 부의장의 말은 당의 공식 입장이 아닌 만큼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국정원과 청와대, DJ 노벨상 수상 위해 전력 질주
노벨상 공작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은 당시 DJ에게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최선을 다해 경쟁자들과 싸웠다. 국정원은 노벨상 공작에 기관의 모든 것을 걸다시피 했다. 북한을 비롯한 대외 정보수집이 본연의 임무인 국정원 요원들은 만사를 제치고 다른 노벨상 경쟁자들에 관한 정보 수집에 몰두했다. 노벨상 공작이 북한 권력층이나 북한의 도발 위협 등과 관련된 다른 어떤 소문이나 일상적인 문제들보다 우선이었다.
1999년 10월 국정원 내부 보고서 ‘FDL 사업 관련 보고’를 보면 당시 군나르 스톨셋 주교는 DJ가 동티모르 및 미얀마 등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에 기여한 DJ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견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주교는 그것을 위해 DJ가 더 노력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현지 언론에서 수상과 관련해 김 대통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희망 섞인 분석을 하면서 현재로서는 불필요한 로비는 배제해야 한다고 썼다.
결과적으로 1999년 노벨평화상은 세계적인 인도주의 의료봉사 단체 ‘국경없는의사회’에 돌아갔다. 그러나 이 소식이 DJ의 노벨상 공작을 주춤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미 십여 차례나 최종 후보로 거론됐던 만큼 다음 해 수상을 위한 준비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향한 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질 게 뻔했다.⊙
[64] DJ 노벨상 최대 적수는 ‘소떼 방북’ 정주영
국정원 “鄭회장 평화상 노리고 수시로 해외 출장” 보고
IRA 분쟁 중재 클린턴·북핵 위기 해결 카터도 경쟁자로 부상
박노용, 노벨평화상 후보자 추천 건수 등 본부에 보고
2000년 2월 박노용 파견관은 본부로 보고 전문을 보냈다. 내용은 노르웨이의 아프텐포스텐 지가 보도한 노벨상위원회의 임원 개편과 후보자 추천 건수에 대한 것이었다.
2000년 2월23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군나르 베르게 석유사업청장을 신임 위원장으로, 군나르 스톨셋 오슬로 주교를 부위원장으로 각각 선출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룬데스타드 사무총장은 당해년도 최종 후보 추천 건수가 150건이라고 밝혔다. 이 중 114건이 개인, 36건이 단체인데 이날 회의에서 20∼40건으로 추리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전년도의 경우 후보자 수는 136명, 직전년도의 139명에 비해 조금 증가한 수치였다.
빌 클린턴‧지미 카터… DJ의 쟁쟁한 경쟁자들
2000년도 후보자 중에서는 북아일랜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중재에 공을 들이고 있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조지 미첼 전 상원의원도 들어 있었다. 발칸 사태를 중재한 공로로 마르티 아티사리 핀란드 대통령과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수상도 추천 명단에 들어갔다.
국정원 파견관 박노용은 클린턴 대통령의 후보자 선정 소식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은 김대중(DJ) 대통령의 수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했다. 이에 따라 국정원은 DJ가 올해에도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한국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김일성 만나 북한 핵 위기 해결한 지미 카터
DJ의 노벨상 경쟁에서 클린턴 못지않은 강적이 있었는데, 바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카터는 1994년 북한 핵 위기가 극에 달했을 당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대동강 보트 회담 등을 통해 위기를 해결한 장본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만큼 DJ에게는 누구보다 강력한 경쟁자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세계 곳곳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국제 봉사기구 해비타트 운동을 주도하며 수상 가능성을 높여 왔다. 카터는 DJ 수상 후 2년이 지나 상을 받았는데, 논란이 많았던 그의 수상은 당시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비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또 다른 주요 경쟁자는 미국의 전직 외교관 리처드 홀부르크였다. 그는 1995년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세르비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 3국 사이의 평화협상을 성공적으로 중재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1999년 1월 아프텐포스텐이 홀부르크가 직무상 윤리 의무 위반으로 미 법무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노벨상 후보로서 홀부르크의 위치는 급락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군소 경쟁자들도 후보에 올랐다. 클린턴 정부에서 에너지부 장관을 지낸 빌 리처드슨 전 유엔 대사는 북한과 이라크에 대한 활동 덕분에 DJ의 노벨상 경쟁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편, 엉뚱하게도 다음 해에 헤이그 유엔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혐의로 기소될 밀로세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 등도 후보군에 포함됐다.

▲ 1998년 6월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이 새로 개통된 통일대교를 넘어 판문점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개인뿐 아니라 단체‧기구도 DJ의 경쟁 상대
DJ의 노벨상 경쟁 상대는 개인뿐만이 아니었다. 1999년 노벨평화상의 강력한 후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였다. 노르웨이 신문 아프텐포스텐은 1999년 2월 신문에 전 나토 사무총장 레이프 클레테의 글을 실었다.
클레테는 ‘노벨상의 가치’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토가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동맹으로만 알려졌는데, 이는 조약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토가 각국의 자유를 지키고 그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정치적 동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사례에서 보듯이 나토의 평화 유지를 위한 역할은 동맹 역사의 새장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국내 언론인 신동아는 또 다른 후보로 세계적 반핵운동 단체 그린피스‧ 오랜 역사의 인도주의 단체 구세군‧뉴욕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유엔 사법재판소 등을 들었다.
또한 알바니아의 쿠케스 마을은 1999년부터 2000년까지 45만 명의 코소보 난민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다고 전했다.
가장 강력한 경쟁 후보는 국내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하지만 노벨상 프로젝트팀이 보기에 그해의 가장 강력한 DJ의 노벨상 경쟁자는 바로 대한민국 안에 있었다. 그는 바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1998년 현대아산을 통한 금강산 관광 사업을 추진하고, 이른바 1001마리 ‘소떼 방북’으로 전 세계를 향해 남북한 화해와 협력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주인공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정주영은 자신의 호를 아산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북한의 강원도 해안 지역 원산과 금강산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이다. 그의 대북 사업은 그 자체로 상당한 상징성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월간조선은 2000년 3월호에서 “주요 후보들 중에서 정주영 회장이 DJ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고 밝혔다.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한 이 기사에서는 “1999년부터 2000년 초까지 국정원은 청와대에 정 회장이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수시로 외국에 드나든다고 보고했다”면서 “정 회장이 사실상 남북관계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또한 월간조선은 1999년 말 노벨상 공작 책임자 김한정이 “정 회장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며, 그의 대북사업엔 사업 이상의 목적이 있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1001마리 ‘소떼 방북’… 남북 관계 진전의 첫발
정주영 회장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998년 6월16일 정 회장의 ‘소떼 방북’은 남북관계 진전의 ‘첫걸음’으로 보여졌다. 당시 도널드 커크 기자는 정 회장이 자신의 두 아들 정몽구‧정몽헌과 함께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향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다.
일행을 태운 리무진은 한 대에 열 마리씩의 소를 태운 트럭 50대를 선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북한에 주기로 약속했던 나머지 501마리의 소는 4개월 후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전해졌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도 경쟁자로 꼽혀
또 한 명의 국내 경쟁자로는 ‘옥수수 박사’로 알려진 김순권 경북대 교수가 있었다. 수십만 명이 굶어 죽을 정도로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그는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해 옥수수 신품종을 소개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김대중 정권 들어 햇볕정책 덕분에 김 박사의 이러한 북한 옥수수 지원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북한의 식량난 해결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DJ는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김 박사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대통령 당선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김 박사는 자신이 “DJ와 그 측근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다년간 연속으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던 사람”이라며 “DJ는 노벨상 수상자 선정을 앞두고 대북 지원사업에 앞장서는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DJ의 측근들은 DJ에게 노벨상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며 “DJ의 최측근들은 내게 북한에 가서 DJ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게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65] 노벨위, DJ 찬사 일색… 北인권 외면 언급 안 해
“왜 北인권 침묵하냐” 물으면 “원만한 남북관계 위한 것” 변명으로 일관
제왕적 리더십으로 권세 과시… 장관들 밉보이면 하룻밤 새 날라가
노벨평화상 후보 거론돼 곤욕 치른 ‘옥수수 박사’
‘옥수수 박사’ 김순권은 북한 식량 지원 등 햇볕정책을 도운 공로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까운 사이로 지내 온 김대중(DJ) 대통령은 노벨상 수상자 선정을 앞두고 김 박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김 박사는 “DJ의 측근들은 내게 민족의 화합을 위해 노벨상을 양보하라는 식으로 말했다”며 “더 중요한 것은 노벨상 수상자 선정을 앞두고 북한 김정일이 공동 수상자가 될 것처럼 말했다”고 강조했다. 이후 DJ가 노벨상을 받고 난 후에는 그동안 약속해 온 김 박사의 대북사업 지원을 도외시하면서 김 박사와 DJ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쟁쟁한 경쟁자들 물리치고 마침내 수상자로 선정된 DJ
노벨상과 관련해 노르웨이 국영 통신사 NTB는 “누가 상을 받든 이번 수상자에게 노벨상의 가치는 이전보다 더욱 높아질 것으로, 특히 상금 면에서도 그렇다”고 언급했다. 보도에서는 “노벨상 상금은 780만 스웨덴크로네에서 900만 스웨덴크로네로 거의 14%나 인상됐는데 이는 미화 130만 달러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NTB는 “노벨상 위원회는 어느 해보다 많은 144명의 후보들 중 마지막 선정 작업을 마쳐 가고 있다”면서“클린턴과 지미 카터가 유력한 가운데 특히 클린턴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평화 중재 노력의 성과로 수상이 유력하다”고 전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DJ의 경쟁자들이 이처럼 많지만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성공시키고, 한국에서의 정치적 핍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DJ를 당할 만한 후보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분명히 그해 당시 DJ는 여러 후보들 중 가장 앞서가고 있었다. 결국 2000년 10월13일 DJ와 노벨상 공작팀은 그토록 열망하던 바로 그 말을 듣게 된다.
“한국 및 동아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에 특별히 기여한 김대중을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DJ에 대한 찬사로 가득한 수상자 결정 발표문
위원회의 수상자 결정 발표문 내용은 마치 DJ 측에서 직접 작성한 것처럼 온갖 찬사로 가득했다.
“수십 년에 이르는 한국의 권위주의 시절 동안 여러 차례의 생명 위협과 사형선고에도 그는 조국의 민주주의 대변자로 올라섰다. 또한 대통령으로서 민주 정부를 공고히함과 동시에 국제사회의 화해를 촉진시켰다.”
발표문에서는 북한의 인권유린 행태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DJ의 잘못은 지적하지 않고 ‘인권 보장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아시아에서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수호하는 지도자’라고 추켜세웠다. 또한 북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DJ의 미얀마 민주화 및 압제에 항거하는 동티모르에 대한 노력을 높이 살 만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DJ는 북한의 극악한 독재와 북한 주민들의 참담한 인권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기는커녕 두 개의 한국이 연방제를 통해 공존하다가 통일을 이루자는 매우 불투명한 제안을 내놓았을 뿐이다.

▲ 스무 번째 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옥수수박사 김순권 경북대 교수가 2001년 8월24일 통일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북한의 옥수수재배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인권‧북한에 억류된 국민 철저히 외면한 DJ
김대중은 북한에 억류돼 있는 남한 주민에 관한 문제 역시 단 한 번도 제기하지 않았다. 통일부에 따르면 북한은 휴전협정 이후 북한에 붙잡힌 1만9000명의 남한 전쟁포로 중 343명을 아직 송환하지 않고 있다. 또한 분단 후 지금까지 수천 명의 한국인이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납북됐으며, 그중 수백 명이 아직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1969년 공중 납치된 대한항공 여객기의 조종사 및 승무원 등이 포함돼 있다.
가장 비극적인 사례로 아내와 두 딸을 북한에 남겨두고 탈출한 경제학자 오길남 박사가 있다. 오 박사 가족은 독일에서 북한의 실상을 알지 못한 채 꼬임에 넘어가 밀입북한 후 오 박사 혼자서만 북한을 탈출했다. 오 박사 가족이 북한에 가게 된 데는 음악가 윤이상과 그의 아내 이수자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부부는 오 박사 가족이 밀입북하도록 설득했고 오 박사 탈북 후 남은 가족은 강제수용소에서 생사도 확인되지 않는 채로 생이별을 겪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수자는 김일성이 윤이상에게 하사한 고급 저택에서 호강하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왜 북한 김정일에게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것일까.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당시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DJ는 이 문제에 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꺼내면 ‘존경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불편하실까 봐 그랬을까.
북한 억류 국민 모르쇠로 일관한 DJ의 변명
그동안 북한은 억류 한국인에 대한 송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현재 북한에 강제로 억류된 남조선 주민은 한 명도 없고 모두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들이 원해서 북한에 살고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되풀이해 왔다. 김대중 역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언급을 피하는 이유를 물을 때마다 원만한 남북관계를 위한 것이라는 식의 변명으로 일관했다.
노벨상 수상 경쟁을 하던 당시에도 여전히 김대중은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들의 안위에 대한 우려를 나타낼 수 없었을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가 북한에 억류된 남한 주민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이와 관련해 어떠한 비판이나 불만도 나타낼 수가 없었다.
설령 남북정상회담 석상에서 김대중이 이 문제를 꺼내 놓았다 하더라도 김정일은 그것을 의제로 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김대중은 남한 독재정권에 맹수처럼 맞서 싸우던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불리지만 북한 지도자 앞에서는 그저 순한 강아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공동선언문이었다. 노벨위원회는 수상자 발표문에서 “김대중은 50년 이상 적대관계와 전쟁 위협이 이어져 온 남북한 사이 화해를 시도했으며, 그의 방북은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원동력이 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또한 김대중의 노력 덕분에 한반도의 냉전이 종식될 것으로 기대하며 한국의 주변국들, 특히 일본과의 화해 역시 진전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위원회 발표문에서는 한반도에서의 화해와 통일 촉진에 북한 및 다른 국가들이 기여할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김정일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는 데에 그의 역할도 있었다는 점을 시사했다.
권력 잡자 독재자들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한 DJ
발표문에서의 표현들은 김대중의 길고 지난했던 인생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지만 정작 김대중 자신이 권력을 잡자 그 역시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통치 기술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거론되지 않았다.
DJ는 자신의 내각 구성원들이 서로 충성 경쟁을 벌이도록 유도했으며, 자신이 임명한 장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잘라 버렸다. 그의 제왕적 리더십은 유명했다. 장관들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서 어떤 문제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고 거의 김대중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 장관들은 열심히 받아 적는 분위기였다.
2003년 2월 DJ 퇴임 당시까지 20개가 채 되지 않는 내각 요직에 임명됐던 사람은 모두 150명에 달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임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전 통보도 없이 하루아침에 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다.⊙
[66] 학력 콤플렉스 DJ… 세계 유명 賞 받으려 안달
학자적 문제 인식‧기업가적 현실감각으로 자기 포장 안간힘
출생‧신분 열등감까지… 1960년 국회의원 되자 호적 위조도
DJ의 자기 포장… ‘학자적 문제 인식’과 ‘기업가적 현실감각’
DJ의 노벨상 공작은 어떤 면에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는 일생일대의 정치적 기회와 노벨상 수상이라는 목표 두 가지 모두를 이루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노벨위원회는 그의 인생 스토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 김대중은 자신이 망국적 지역감정을 이용해 대통령까지 된 포퓰리스트적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그는 정치 입문 초기부터 자신을 학자적인 문제 인식을 하고 기업가적 현실감각을 지닌 정치인으로 보이려고 했다.
노벨위원회 위원들은 수상자 선정을 위한 심사에 들어가던 당시 DJ의 자질과 배경에 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상태였다. 김대중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고, 온갖 상에 대한 욕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학력 콤플렉스를 세계적인 유명 상들을 닥치는 대로 받는 것으로 커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평생 공부에 대한 열망… 대단한 독서가‧저술가로 발전
덕분에 김대중은 노벨상에도 도움이 될 만한 대여섯 개 이상의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으로 1981년 브루노 크리스키상‧1999년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에 이어 노벨상 수상자 발표 직전에 수상한 2000년 라프토 인권상 등이 있다. 또한 나머지 언급하지 않은 상들도 사실 모두 노벨상 수상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로비에도 DJ는 UN 인권상은 수상하지 못했다. 그 대신 같은 국제인권연맹으로부터 인권상을 받고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성대한 시상 기념식을 열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DJ 자신이 정식으로 대학을 다녀 본 적도 없고, 이런 콤플렉스 때문에 평생 공부에 대한 열망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대단한 독서가이자 저술가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정치‧경제‧사회‧철학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관해 23권이나 되는 책을 직접 썼다고 한다. 김대중이 평생 저술한 책의 수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평생 읽은 책보다 많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DJ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정치인이 언제 그렇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직접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김대중 뒤에는 수많은 유령작가 및 자료수집 담당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썼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책은 김대중 사후 발간된 방대한 분량의 김대중 전기 단 한 권뿐이다.
‘고졸’ DJ의 학력 콤플렉스, 놀림의 대상 되기도
정식 학력이라고는 고등학교 졸업장뿐인 DJ의 학력 콤플렉스는 주변에 꽤 알려진 사실이었다. 특히 자신과 비교가 안 될 학력의 여자와 재혼하면서 그의 학력 콤플렉스는 더욱 심해졌고, 이 때문에 상을 받고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것만큼이나 명예학위를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취미를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전 세계 대학에서 12개 이상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에는 자신이 따르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고향 인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1992년에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1998년 조지타운 대학‧2008년 말라야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99년 7월5일 김대중(오른쪽 두 번째) 대통령이 미국 필라델피아협회의 자유의 메달을 수상한 뒤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노력에도 DJ의 짧은 가방끈은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수년 전 청남대에서 공개된 김대중의 동상은 그가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김대중이 들고 있는 책은 인문학 서적이 아니라 홍성대 씨가 쓴 수학 참고서 ‘수학의 정석’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고 하는 책이다. 한국의 고등학생치고 이 책으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더 우스운 것은 김대중이 그 책을 거꾸로 들고 읽고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의 최종 학력이 상업계 고등학교라는 사실을 은근히 조롱한 듯한 모습이다. 청남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미 없이 ‘수학의 정석’으로 책 모양을 뜬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지금은 책 표지의 ‘수학의 정석’이라는 글씨는 지워진 상태이다.
학력에 이어 출생‧신분에 대한 소문까지
김대중의 청년 시절 정치 및 사회활동은 사회적 신분‧학력 열등감에서 발전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가 차츰 야당 정치인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대선 후보에까지 오르는 거물이 되자 그의 출생에 관한 소문이 불거져 나왔다. 세간에는 그가 부친의 후처 또는 첩의 소생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또한 그의 출생지가 정확히 어디인가를 놓고도 논란이 이어졌다. 세간에는 그가 1960년 첫 번째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시기를 전후해 자신의 호적을 허위로 위조 또는 변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생년월일이 정확히 언제인지를 두고도 오래도록 논란이 일었다. 당초에는 1923년 1월생이라고 알려졌지만 이후 1925년 1월이라고 정정했다가 그의 사망 후 유족들은 김대중의 생일이 1924년 1월7일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1924년 1월이라면 음력으로 계산하면 돼지해 출생이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자신이 돼지띠라서 뱀띠인 박정희를 이긴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지난해는 바로 그 대한민국의 ‘암 덩어리’가 100년 전에 태어난 해였다.
커크 기자, 남북정상회담의 금전 거래 의혹 제기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의 도널드 커크 기자가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금전이 거래되었을 가능성을 처음 기사로 게재한 후 정확히 2년이 지난 2003년 1월31일, 김기삼은 이와 관련한 더욱 상세한 내용을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폭로했다.
그 전 해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김대중정부하의 현대 아산에 대한 수상한 대출금이 정치 쟁점이 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정상회담의 뒷돈 거래에 관한 사실은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권력 최고위층 외에는 정상회담의 대가로 천문학적인 돈이 오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상회담에서의 뒷돈 거래가 전 세계를 핵전쟁의 위험에 빠뜨리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거론한 사람은 이제까지 한 명도 없었다. 당시 북한에 건네진 현금으로 북한은 급속하게 핵 개발을 할 수 있었고 2006년과 2009년, 그리고 2013년에 핵실험을 성공하게 되었다.
2002년 10월까지 미국, 그리고 어쩌면 중국 등 국가의 정보기관 외에는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igh-enriched uranium‧HEU)에서 핵탄두를 만들어 내기 위해 완전히 분리된 프로그램을 가동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또한 이렇게 개발한 핵무기를 근거리 및 장거리까지 실어 날라 표적지를 타격하는 대량살상 무기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남북정상회담의 뒷돈 거래… 핵무기 개발과 노벨상으로
게다가 그 대가가 DJ의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역시 아무도 몰랐다. 이처럼 감춰져 있던 노벨상 수상을 위한 뒷거래 공작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단초가 된 것은 한 여기자의 특종기사였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뉴스위크 한국판의 임도경 편집장은 2002년 10월9일자 신문의 ‘M 프로젝트’ 및 ‘블루카펫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기사 두 건을 통해 로비스트 최규선의 사무실에서 2002년 8월 녹음된 통화 및 이메일 내용을 폭로했다.
당시 최규선은 DJ의 3남 김홍걸이 연루된 뇌물 스캔들로 구속돼 수감 중이었다. 최규선의 운전기사로부터 정보를 입수한 임도경은 그것을 바탕으로 DJ의 측근들이 노벨상 수상 공작을 벌인 정황에 체계적으로 접근해 갔다.⊙
[67] 현대그룹 통한 대북 송금… 결국 북핵 개발 ‘돈줄’
2002년 대선 앞두고 국회서 5억 달러 극비 송금 쟁점화
당시 박지원 靑실장 “1달러도 안 보냈다” 새빨간 거짓말
김한정 이전 공작팀 핵심 최규선의 활약상
최규선의 자료는 상당한 폭발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김한정이 등장하기 전 노벨상 공작팀의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최규선은 DJ의 대통령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른 1997년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딸을 한국에 데려와 만델라가 DJ를 지지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당시인 1998년 초 미국의 억만장자 투자자 조지 소로스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를 한국에 초청했다. 1998년 DJ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을 초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규선은 어느 날 공작의 핵심부에서 밀려나게 됐다. 노벨상 공작에서 자신의 역할을 지나치게 떠벌리고 다니는 것은 물론 돈 문제까지 일으켰기 때문이다.
DJ 유엔 평화상‧아난 총장의 서울 평화상 맞교환 시도
임도경의 기사에서는 최규선과 코피 아난 국제연합(UN‧유엔) 사무총장과의 커넥션도 드러났다. 이 기사는 최규선과 아난 총장의 측근 압둘라 타릭 알 만수르 사이의 거래 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DJ의 유엔 평화상 수상과 아난 총장의 서울 평화상 수상 맞교환 시도 가능성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DJ는 유엔이 주는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난 총장은 1999년 서울평화상 수상에 더해 경희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리고 불과 얼마 후 2000년에 DJ가, 바로 다음 해인 2001년에는 아난 총장이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2002년 대선 정국에 파장 일으킨 임도경의 기사
임도경의 기사는 2002년 대통령 선거 정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여당 후보 노무현은 DJ의 남북 화해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공약한 상태였던 만큼, DJ가 노벨상 수상을 위해 북한과 밀거래를 했다는 의혹은 선거 판도를 뒤흔들 만한 일이었다.
그러자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청와대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실을 그렇게 공개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노벨평화상의 권위를 흔들고, 나아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행위를 두고 보지 않겠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룬데스타드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의 해명
한국에서 이런 논란이 벌어지자 게이르 룬데스타드 당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은,노벨위원회의 수상자 선정 과정에 부정이 개입될 수 없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는 “로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DJ의 수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반대하는 내용의 편지 등이 위원회로 계속 발송된 것”이라고 말했다.
노벨상 의혹에 대한 그의 해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합리화로 가득했다. “나는 2000년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어떠한 부정한 방법이 개입됐다는 주장에 반대한다”면서 “노벨위원회가 어떤 대가를 받았다는 주장은 대단히 무례한 것이며, 그것은 노벨상 수상자 선정 과정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DJ의 노벨상 수상 공작 의혹을 본격 제기할 경우 예상되는 역풍을 우려해 이 문제를 이슈로 삼는 것을 피했다.

▲ 2002년12월23일 김대중(왼쪽)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청와대 현관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그룹 통한 대북 불법 송금 의혹 불거져
도널드 커크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지 기자는 2001년 1월31일자 기사에서 “미국 정부는 DJ가 남북한 화해를 위해 이제 할 일이 거의 없을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고 밝혔다. 이 말은 DJ가 아닌 임동원을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노벨상 공작 과정에서의 대북 불법 송금 문제는 2002년 대선 정국에서 이슈가 되지 못했다.
커크의 의혹 제기 후 1년여가 지난 2002년 3월 미 의회조사국(CRS)의 한반도 담당 래리 닉시 연구원은 한‧미 관계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가 현대그룹이 북한에 송금한 돈의 상당 부분을 보상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닉시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현대가 북한에 5억 달러에 이르는 비밀 지출을 했으며 그 돈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넘어갔고, 이에 대해 정부가 현대에 상당 부분을 변제해 주었다는 점을 현대와 김대중정부가 올 초 인정했다”고 밝혔다.
현대그룹 통해 넘어간 자금 북한 고농축우라늄 무기 개발에 쓰
또한 그는 “현대가 북한에 지급한 현금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무기 프로그램 가속화를 도운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닉시 연구원은 2005년 한‧미 관계 보고서에서 1999∼2003년 현대의 대북 송금 규모를 “금강산 관광과 다른 2개 사업의 대가로 공개 지불한 현금 6억 달러”와 “비밀 송금 5억 달러”라고 추산했다. 닉시 연구원은 “가장 심각한 것은 이 돈이 HEU 무기 개발 가속화를 도왔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나 “이는 미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기관의 판단이 아니라 현대그룹의 자금이 북한에 들어간 시기와 북한이 HEU 부품.자재를 대량 구입한 시기가 일치하는 등 매우 강력한 정황 증거에 기반한 나의 추론”이라며 “정황 증거이지만 매우 객관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에 공개된 닉시 연구원의 보고서를 보면 2003년까지는 현대 자금의 ‘군사 전용’을 주장했으나 2005년 1월판부터 HEU 프로그램 가속화 전용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2003년 말∼2004년 초 보고서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 보고서들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대그룹의 북송 자금 북한 노동당 39호실로 유입
보고서에서 닉시 연구원은 현대의 자금이 김정일이 직접 관장하는 북한 노동당 39호실로 유입됐다고 밝혔다. 39호실은 김정일의 하사품용 사치품 외에 대량살상무기의 부품과 자재를 구입하는 등의 역할을 맡은 부서이다. 닉시 연구원은 1999∼2000년 현대에서 넘어간 자금이 해당 년도 북한 외환 수입의 최소 30%를 차지하고, 북한이 1999∼2001년 해외에서 HEU 관련 자재와 부품을 ‘대량’ 구입했다는 등 미 정보기관 관계자 등의 말을 인용한 각종 언론보도를 추론의 근거로 제시했다.
2002년 대선 앞두고 문제가 된 대북송금 의혹
대북송금 의혹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국회에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엄호성 한나라당 의원은 대선을 두 달가량 앞두고 열린 국회에 산업은행 엄낙용 전 총재를 증인으로 불러 이 문제를 따졌다. 당연히 여당과 김대중정부는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청와대 박지원 실장은 가장 강하게 반발했는데 그는 “단 1달러도 북한에 보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강하게 부정하는 것은 실제로 한국에서 북한으로 돈이 흘러 들어간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돈이 얼마나, 어떤 방법으로 흘러갔는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논란으로 수명 다한 햇볕정책
그러나 DJ의 임기가 끝나 가며 그동안 북한이 속여 온 전모가 드러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미 정부 특사로 외교관 등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게 됐다. 켈리 특사는 10월4일 평양에서 북한 외무부 강석주 1차관을 만나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시설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강석주는 나중에 부인했지만 켈리와의 회담에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해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소식은 켈리 일행이 워싱턴으로 돌아온 후 알려지면서 제네바 합의는 파국을 맞았다. 미국은11월부터 북한에 대한 중유 선적을 중단했고, 이에 대해 북한은 5메가와트(MW)급 원자로 폐쇄 감시를 위해 북한에 체류 중이던 유엔원자력기구의 사찰단을 추방 조치했다. 이로써 사실상 햇볕정책은 그 수명을 다했다.⊙
[68] “DJ, 北에 15억 달러 뒷돈”… 김기삼 폭로 일파만파
정권 바뀌자 로비 폭로 봇물… 박지원 “北에 2억 달러 제공”물타기 꼼수
김한정 도움 컸지만 진짜 일등 공신은 남궁진… 14년간 온갖 자료 모아
DJ의 노벨상 로비 의혹 덮어 주려 한 노무현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승리의 또 다른 주요 원인은 두 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소위 미군 장갑차 사건이었다. 사고 후 서울 시민들은 몇 주 동안 야간에 미군 규탄 시위를 벌이며 사고 책임자인 두 명의 미군 병사를 한국 법정에 세울 것을 요구했다.
이회창 후보는 선거 직전 미군 장갑차 사건 규탄 집회에 직접 참석하는 등 노력했지만 여중생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계기로 이미 강하게 형성된 반미 정서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취임식 전 정권 인수 기간 중 대북 송금 및 노벨상 관련 의혹에 대해 언급을 피했다. 그의 핵심 측근은 이 문제가 이전 정권에서의 문제라고 일축했지만 결국 터져 나오고 말았다.
로비 의혹 불거지자 박지원이 물타기 꼼수
2003년 1월29일 오마이뉴스는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남북정상회담 전 북한에 2억 달러를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 정보를 흘린 고위관계자는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일 것으로 추정된다. 어차피 드러날 문제라면 차라리 금액을 크게 줄여 정권이 바뀌는 시기에 물타기 식으로 넘어가는 게 낫겠다는 꼼수를 부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보도가 나온 다음 날 전직 국정원 요원 김기삼은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이라는 제목에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대북 뒷거래 실상’이라는 부제를 달아 장문의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직 국정원 요원 김기삼의 폭로
“지난 김대중(DJ) 정권 5년간 국가 통치권자에 의한 반역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적을 이롭게 하고 우리의 안보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믿습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에 눈이 어두워 조국에 반역 행위를 했다고 믿습니다.
DJ는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무리하게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에게 비밀리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뇌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2002년 7월24일 국방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연합뉴스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15억 달러 합의
남북한이 정상회담의 대가로 15억 달러라는 금액에 합의했으며, 저는 이것이 민족에 대한 배신이고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DJ를 ‘악마적인 사기꾼’이라고 판단합니다.”
김기삼은 자신의 글에서 당시 DJ‧김정일‧현대그룹 사이에 있었던 3각 협력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99년,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한 DJ는 자신의 업적과 경륜을 해외에 적극 홍보하면서 노벨상 수상 분위기 조성에 진력했습니다. 그해 7월, DJ는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벨상 사냥에 나섰습니다. 역대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수상자 11명 가운데 6명이 노벨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DJ는 이제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돌파구만 마련할 수 있다면 노벨상을 목에 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DJ와 김정일 간의 은밀한 뇌물 뒷거래는 이러한 배경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1999년 말, 온 세상이 새천년의 기대에 한창 들떠 있을 즈음 DJ와 김정일은 극비리에 뇌물 뒷거래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DJ가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뒷돈의 규모는 미화(美貨)로 15억 달러입니다. 인류가 뇌물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이후 최고의 뇌물 액수이자 앞으로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일 것입니다.
실제 뇌물은 현대그룹에서 제공
현대그룹에서 이 뒷돈의 대부분을 제공했습니다. 지난번 엄호성 한나라당 의원이 제기한 현대상선의 4000억 원은 이 돈의 일부일 것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현대상선의 대출금 일부가 남북정상회담 선금으로 건너갔고, 잔금은 대부분 2000년 9∼12월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0년 3월과 6월에 벌어졌던 현대그룹 왕자의 난은 정주영 회장이 이 돈을 대기 위해 그룹 전체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시도였을 것입니다.
DJ가 남북정상회담에 걸었던 세 가지 목표
DJ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의도는 자명합니다. 단기적으로는 4.13 총선에서 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중기적으로는 노벨평화상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대북 관계 개선을 지렛대 삼아 호남당이라는 새천년민주당의 한계를 벗고 궁극적으로 남북을 아우르는 정계 개편을 획책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단기와 장기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노벨평화상을 받는 데 남북정상회담이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DJ는 국민의 혈세로 이루어진 공적 자금을 현대에 지원하면서 현대로부터 리베이트를 챙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의 상당 부분을 북한에 뇌물로 바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현대는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지원받아 일부를 북한에 전달하고, 그 대가로 금강산과 개성공단 독점사업권을 받았습니다. 북한은 현금을 챙기고 위장된 평화 생색을 내줌으로써 DJ가 노벨평화상을 받도록 도운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의 폭로와 함께 전면적인 조사를 요구하며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도, 일부의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했다.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DJ가 자랑스러워한 노벨상은 북한 동포의 피눈물과 절규, 우리 국민의 혈세가 한데 뭉친 결정체입니다. 지금 DJ는 전설처럼 남아 있는 권력을 동원해 과거의 추악한 범죄 흔적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노벨상 공작과 대북송금 문제 역시 세상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합니다.”
언론의 관심은 김기삼의 폭로에 모아졌다. 동아일보는 2003년 2월5일자에 김기삼이 노벨상 공작의 핵심인물 ‘청와대 김모 씨’로 지칭한 DJ의 측근 김한정에 관한 기사를 내보냈다.
김한정은 자신이 DJ의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자랑하고 다니며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 과정에서 부적절한 행위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르웨이 친구들로부터 일부 도움은 받았다”고 말했다.
노벨상 공작의 일등공신은 남궁진
사실 김한정 혼자 DJ를 노벨상 수상 후보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DJ의 오랜 측근이자 정치적 동지인 남궁진 전 문화부 장관의 역할은 그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무려 14년 동안 해마다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추천서를 받고 자료를 모으는 등 온갖 노력을 했다. 남궁진 역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DJ의 노벨상 공작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그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정상회담과 노벨상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다.
남궁 전 장관은 노벨상 수상은 국가적 자부심을 가져야 할 일이라고 지적했다. “노벨상은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로비를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DJ는 남북한의 평화 체제 구축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은 것이다”며 노벨상 공작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는 노벨상과 정상회담을 관련지어 생각해서는 안 되며, 노벨상은 노벨상이고 정상회담은 정상회담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면서 양자 간의 관계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국익에 해를 끼치는 일이라며, 이런 식이라면 나중에 어떻게 또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69] 노무현 정권 ‘대북 송금’ 날림특검… 면죄부만 줬다
처음부터 “남북 관계 손상 우려 있는 조사 않겠다” 노골적 감싸기
송두환 특검법, DJ는커녕 김한정조차 부르지 않아… 예고된 부실
남궁진의 변명… “직무에 충실한 관료였을 뿐”
노벨상 수상 과정에서의 역할에 대해 남궁진 전 문화부 장관은 자신은 보스를 위해 직무에 충실한 관료였을 뿐이라고 밝혔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상위원회에 수상 후보로 추천했다. 그리고 추천서가 제대로 노벨상위원회로 전달됐는지 체크했고, 문제가 있는 경우 다시 보냈다. (…) 대부분의 자료는 방송 테이프처럼 김 대통령의 평화 및 인권운동 관련 활동을 담은 홍보 자료, 관련 신문 및 잡지 기사 등이었다.”
남궁진의 발언은 나름 사실일 수 있다. 도널드 커크 기자는 여러 해 동안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DJ)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하며 남궁진과 관계를 이어 왔다. 커크는 자신이 DJ를 처음 취재한 것이 1972년 시카고 트리뷴 일본 특파원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교동 DJ 자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1973년 ‘김대중 납치음모사건’ 당시 인터뷰를 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도 DJ 취재를 위한 채널은 남궁진이었다.
남궁진, DJ가 가장 신임한 최측근
DJ가 민주헌법 쟁취를 주장하며 가택연금 상태에 있을 때,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 다음 대통령 선거인 1992년 평생의 라이벌 김영삼(YS)에게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한국을 떠날 때, 그리고 정계에 복귀한 DJ가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이 모든 중요한 시기에 남궁진은 DJ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으로 옆을 지켰다. 따라서 그는 인터뷰에서 밝힌 것과 달리 노벨상 공작을 주도한 김한정 다음으로 그 과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노벨상 공작 의혹을 폭로한 김기삼이 이미 미국으로 떠나 망명을 모색하던2003년 3월 월간조선은 ‘김대중 노벨평화상 국제로비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그 기사에서 월간조선은 “로비 의혹을 둘러싼 진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면서 DJ 정부의 관리들이 이 로비에 관여한 것이 분명하며 몇몇 정부 관리의 지원을 받아 그것을 주도한 인물은 김한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NP 프로젝트’라 불리는 이 공작엔 극소수의 인원만 참여했기 때문에 그 전모를 알아내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월간조선, 김한정을 노벨상 공작 책임자로 지목
월간조선 기사에서 노벨상 공작 책임자로 지목된 김한정은 예상대로 수년간 국정원 요원으로서 노벨상 공작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김기삼의 주장에 대해 “그런 부도덕한 사람의 주장은 반박할 가치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신의 입장을 묻는 월간조선의 질문에 김한정은 자신이 이 문제에 직접 대응하는 것보다 국정원 차원에서 책임을 물을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비윤리적인 사람의 발언에 대해 묻고 답할 필요가 없다”며 불쾌감을 나타냈다. 이어서 국정원과 이후 아시아태평양민주지도자회의(FDL-AP)에서 어떤 일을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김한정은 “당신 원하는 대로 쓰세요, 난 어떤 대답도 하지 않겠습니다”며 더 이상의 답변을 거부했다.

▲ 김대중(왼쪽) 대통령이 2001년 9월19일 청와대에서 남궁진 신임 문화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홍준, 김정남에게서 남북 간의 뒷돈 거래 사실 들어
김기삼은 자신의 저서에서 북한과의 돈거래가 이루어진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2002년 10월 그는 워싱턴에서 재미교포 사업가 윤홍준을 만나 그로부터 관련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제였는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2000년 초 날씨가 제법 쌀쌀했던 날 동경에서 김정남을 만났는데 그때 김정남과 그의 수행원인 황 대장이라는 친구로부터 남북 간의 뒷거래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김기삼이 그의 패스포드를 확인해 보았더니 2000년 2월과 4월 초에 일본에 다녀온 기록이 남아 있었다.
윤홍준의 설명에 의하면 “남과 북은 1999년 12월 말, 국정원의 파우치(외교행낭)를 이용하여 남측이 북측에 15억 달러 상당의 돈을 유로화로 송금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윤홍준은 김정남 일행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듣고 흘려 버렸는데 “지금에야 그것이 남북정상회담의 뒷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김기삼은 윤홍준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지만 결국 그가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윤홍준의 얘기를 들으니 김한정의 행적과 윤홍준이 말해 준 김정남의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김기삼의 노벨상 공작 폭로 후 임동원과 박지원의 해명
김기삼의 폭로 후 2주가 지나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임동원과 박지원이 직접 해명에 나섰다. 청와대는 5억 달러를 북한에 전달한 사실은 시인하면서도 그 돈은 정상회담의 대가가 아니라 현대아산과 북한 사이의 사업자금으로 이미 정해진 지불 일정에 따라 송금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 임동원은 자신은 국익을 위해서만 일을 했다며 면책특권에 따라 국익에 관련된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그는 “그 돈은 남북정상회담의 대가가 아니며 정상회담 개최 합의 당시 북한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고려해 정부가 지원을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고 3월로 접어들면서 대선에 패배해 주눅이 들어 있던 한나라당이 서서히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대북 송금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법(특검)을 발의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신임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을 승인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특검이란 승부수를 던져 DJ로부터 독립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 DJ 대북 송금 특검 승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는 당시 특검을 받아들이게 된 사연이 비교적 상세히 소개돼 있다. 그 책의 설명에 따르면 DJ가 송금 사실을 인정하면 통치 행위로 무마해 넘어갈 수 있었는데 끝내 송금 사실을 몰랐다고 우기는 바람에 통치 행위론을 주장할 근거가 없었다고 한다. 박지원이라도 총대를 멨더라면 특검 없이 갈 수가 있었는데 그것도 안 됐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특검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애초부터 특검을 하더라도 남북관계에 손상을 줄 염려가 있는 조사는 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은 했지만 당초에 송두환 특검팀에는 큰 기대를 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검에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아서도, 자세를 보아서도 초유의 반역 사건을 엄정하게 다루려는 의지가 묻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DJ는 물론이고 김한정도 조사하지 않았다. 특검의 단초를 제공한 김기삼에게도 아무런 수사 협조 요청을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특검의 결과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몇 달간의 조사를 통해 송두환 특검팀은 “북한으로 송금된 돈의 액수는 총 5억 달러이며 이 중 5000만 달러는 현물로 보내졌다”고 발표했다.
특검의 수사는 “5억 달러 중에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김대중정부가 북측에 건네기로 약속한 1억 달러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히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특검 이전에 이미 확인된 내용 이외에 특검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것은 전혀 없었다.⊙
01.15
[70] 북핵과 바꾼 노벨상… 물 건너간 남북 평화
2010년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으로 한반도 초긴장
DJ 햇볕정책 대북 굴종의 산물… 허황된 망상 드러나
용두사미가 된 대북 송금 특검
노무현정부의 특검 수사가 끝나면서 권노갑과 박지원의 비리가 불거져 나왔다. 이들이 김대중(DJ)의 죄를 일부나마 대신 뒤집어쓰는 형국이 된 것이다. 지루한 수사와 공방 끝에 박지원과 권노갑은 구속되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들도 결국 특사로 풀려났다.
대북 송금에 관여한 다른 인사들에게는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특검과 그 이후의 검찰 수사는 반역범들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고 그들에게 면죄부만 쥐여 준 꼴이 되고 말았다.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죽음
2003년 8월 초, 검찰의 후속 수사 과정에서 현대그룹의 정몽헌 회장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정황으로 보아 타살의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2006년 초 “정몽헌 회장이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충격적인 기사가 월간조선에 잇달아 보도되었다.
기사의 골자는 “정몽헌 회장의 유서는 사전에 조작된 것이었고, 그의 자살극도 사전 각본에 의해 연출된 것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자살극이 실제로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누군가의 천재적인 각본에 따라 정 회장이 자살을 가장하여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내부고발자 김기삼을 폄훼한 김한정과 국정원
김기삼은 2003년 1월 말, 노벨상 공작과 대북 비밀송금에 대한 글을 올리고 난 후 한국 정부로부터 국정원직원법상 직무상 취득한 비밀 누설금지 위반과 일부 직원으로부터 형법상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언론도 이런 고발 사실을 보도했다. 국정원은 김기삼을 ‘정보 업무에 적응하지 못한 정신이상자’로 낙인찍었다.
김한정은 한 인터뷰에서 “김기삼은 도덕적으로 비열한 사람이다”고 비난했다. 그 후에도 그들은 “김기삼은 그런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는 억지 주장을 폈다. 그들은 김기삼을 돈이나 바라고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사람으로 폄훼하려 들었다.
그럼에도 김기삼의 일부 동료들은 조심스럽게 그를 좋게 평가했다고 월간조선은 기사에서 밝혔다.
“김씨가 국정원을 그만둔다 했을 때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엘리트 요원’으로 출발부터 남달랐다. 국정원에 들어와 교육을 마친 김기삼의 국정원 내 첫 보직은 대공정책실장 부속실로 국정원 내에서도 소수의 사람들만 접근할 수 있는 고도의 기밀 정보를 다루는 곳이었다. 또한 김기삼은 동기회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신설된 대외협력보좌관실에 뽑혀 가서 근무했다.”

▲ 로버트 갈루치 美국무부 정치 군사담당차관보가 우리정부관계자들과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고위전략회의를 갖기 위해 1994년 3월10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연합뉴스
전 세계가 우려하기 시작한 핵무기 확산
2012년 3월 초, 서울은 제2차 세계 핵안보정상회의 준비로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행사는 세계 50여 개국의 지도자가 핵무기 등이 테러 조직에 들어가거나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을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2년 전 워싱턴에서 시작된 이 모임은 전 세계가 핵무기 확산을 우려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 전 해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핵에너지의 평화적인 사용도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터였다. 바야흐로 핵으로 인한 위험과 불안감이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는 추세였다.
이에 더해 북한은 미군과 국군이 해마다 진행하고 있는 독수리 훈련‧키리졸브 훈련‧을지훈련 등 연례 군사훈련을 맹비난하며 긴장의 수위를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두 차례 핵실험을 단행한 북한이 언제 또다시 3차 핵실험을 감행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DJ가 노벨상을 받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제공하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까지 개최했지만 그 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상황을 보면 평화가 오기는커녕 핵 참화의 암울한 그림자만 깊이 내려앉았음을 알 수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북한의 김정일은 정상회담 대가로 받은 현금을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쏟아부은 것이다. DJ가 시작한 대북 유화정책은 김정일 정권을 만족시킨 것 말고는 다른 아무 의미도 없었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
청와대에서 불과 수십km밖에 떨어지지 않은 248km 길이의 비무장지대에선 아직도 팽팽한 긴장감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남북한은 여전히 서로를 겨누며 엄중한 대치 상태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10년 3월 한반도의 서쪽 바다에서 북한이 벌인 천안함 폭침 사건은 한국과 미국은 물론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는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으로 한국의 해군 함정이 침몰한 사건으로, 46명의 해군 장병이 사망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북한 해안에서 8km 거리에 있는 연평도에 북한군이 포격을 가해 국군 해병대 2명과 민간인 근로자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이 사건들은 모두 약 10년 전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추진되고 시행된 이른바 햇볕정책이라는 대북 유화정책이 얼마나 허황된 환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DJ는 왜 김정일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을까. DJ는 왜 김정일에게 그와 같은 결정적인 카드를 쥐여 준 것일까. 북한과 제대로 된 협상이 이루어졌어도 DJ에게 노벨상이 돌아갔을까. 무엇보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일회성 이벤트가 DJ의 노벨상을 결정짓는 요인이 됐을까. 김기삼이 외로이 DJ의 노벨상을 추적하면서 던진 질문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는 사람은 청와대에도 국정원에도, 어디에도 없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북한, 1994년 제네바 협정으로 핵 개발 중단
DJ가 햇볕정책을 천명하던 당시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내부적으로는 극심한 식량난으로 체제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1994년 10월 북한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경수로와 중유를 지원받기로 하고 핵 개발을 중단했다.
북한으로선 당시가 미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미국은 북한의 화력발전소 가동을 위해 연간 50만톤(t)의 중유를 공급해 주기로 약속했다. 한국은 협정 당사자가 아니었지만 김영삼정부는 경수로 건설 비용으로40억 달러를 지불하기로 했다. 일본도 이에 동조해 10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었다.
당시 협상을 주도했던 로버트 갈루치는 자신의 협상 능력을 과신하며 미국이 칼자루를 쥐고 있고 북한이 얼마 못 가 붕괴될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미국 편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미국 측의 이러한 시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체제를 과소평가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DJ의 햇볕정책, 빈사 상태의 북한 정권에는 새로운 기회
북한은 1990년대 중반 국가의 존립 기반을 마비시킬 정도의 심각한 경제위기와 식량난 속에서도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당시 북한은 단지 그것을 핵무기 등의 개발에 필요한 현금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DJ의 햇볕정책은 빈사 상태에 빠졌던 북한 정권에 새로운 기회를 갖다준 것이었다. 김정일은 DJ의 햇볕정책을 한국으로부터 현금을 뜯어내는 구실로 역이용했다. 마치 연극하듯이 거짓 화해 제스처를 취해 주고는 막대한 현금을 챙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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