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04/ <31회> '간도협정은 무효→행정 착오→법리적 무효 - <39회>'윤석열 인터뷰' 9개 면에 펼친 요미우리 실세 와타나베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04 조선일보 외교담당 에디터

조선일보 한나라당 취재반장, 외교안보팀장과 워싱턴·도쿄 특파원, 국제부장,논설위원을 역임했습니다. TV조선에서 정치부장 겸 '뉴스 9 (메인뉴스)' '이하원의 시사Q', 앵커로 활동했습니다. 저서 <레이와 시대 일본탐험><사무라이와 양키의 퀀텀점프> <시진핑과 오바마> <세계를 알려면 워싱턴을 읽어라> <조용한 열정, 반기문(공저)> <남북한과 미국, 변화하는 3각관계>
2024.10.27
<31회> '간도협정은 무효→행정 착오→법리적 무효' 9일 새 두 차례 바뀐 정부 입장
'간도협정은 무효' 명기된 국감자료집 수거후
외교부, 정례 브리핑서 "행정 착오였다" 사과
1주일 뒤 국감서 다시 '법리적으로는 무효'
중국 눈치보며 오락가락 대응해 논란 키워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 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의미있는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지난주 막전막후 <30회> [ ‘간도협약은 무효’ 국감 자료집 회수한 외교부]에서 계속됩니다. (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4/10/20/7KHHMB3PHJEIRKPPJ5KR235FWY/)
2004년 10월 초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밝힌 국정감사 자료집을 국회에 배포했다가 회수한 파문이 퍼져가는 가운데, 같은 달 14일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정례 브리핑을 가졌습니다. 반 장관은 이 자리에서 “자료 제출과정에서 실무자들 간에 행정적 착오가 있었다. 양해를 구한다”고 말했습니다.
반 장관은 “간도협약은 법리적으로, 또 국제정치적으로 보는 것이 있고 복잡한 고려 요소가 있다”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또 “간도협약은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로 좀 더 정확한 역사적 고증과 신중한 입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이전에) 발표했었다”고도 했습니다.
간도협약은 을사조약으로 우리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1909년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준 협약을 말하는데, 이에 대해 무효라고 하지 않고 “신중한 입장이 필요하다”로 후퇴한 겁니다.

▲1909년 9월 간도 협약 100주년을 맞아 발족한 ‘간도 영유권 회복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가 국민 청원 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외교부의 이 같은 입장은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같은 날 청와대도 외교부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도 이날 불교방송에 출연, “조약 문구라든지 법리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간도 문제가 중국과 우리 사이의 영토와 국경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조약이 유효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크게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외교부는 조선일보가 이 사안을 보도한 후, 브리핑을 갖기로 했다가 이를 하루 연기하면서까지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 결과 미래의 영토보다는 현재의 한·중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기로 결정을 내렸던 겁니다.
◇조약국과 아태국 논쟁
2004년 간도협약 사례는 여러 면에서 복기할 필요가 있습니다.정부 내부의 검토와 토론을 거쳐 작성된 후 국회의원들에게 배포된 자료를 단순한 행정적 착오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외교부는 국감자료집 7권 186쪽에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인 만큼 이 연장선상에서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밝힌 데 이어 188쪽에는 “1941년 이전의 중국과 일본 간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 중·일 평화조약과 별개로 간도협약은 원천무효”라는 표현을 명기했습니다.
당시 조약국은 간도 문제를 제기하면 중국과의 외교 마찰이 불가피하나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통일된 후 이 문제를 제기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중국을 향해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밝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더 늦기 전에 이를 제기해서 나중에 외교적 카드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중국을 직접 담당하는 아시아·태평양국에서는 이 문제를 제기할 경우 득실을 많이 따졌습니다. 당시 외교부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해결하는데 외교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기에 양국간 갈등 확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또, 간도에 대한구체적인 지리적 정의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를 제기했다가 오히려 중국에 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특히 조약국에서 이 문제를 담당했던 외교관 K 과장의 법리적 입장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외교부를 취재하면 들은 얘기 중에서 가장 솔직한 것은 이런 겁니다. “우리의 영토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외교력을 발휘하라는 요구가 있지만, 솔직히 우리는 그런 힘이 없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고구려사 왜곡시정 문제가 시급한 상황에서 간도협약 문제를 이슈화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한신지지부지도(大韓新地志附地圖)' 철판본(1907)에 실린 대한전도. 북간도가 함경북도 내에 포함돼 있다. /연합뉴스
◇ 간도협약 인정한 북한
외교부는 간도협약을 인정한 북중 국경 조약도 고려했습니다. 1962년 평양에서 김일성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서명한 북한과 중국 간의 ‘조·중 변계(邊界)조약’은 압록강·두만강을 국경으로 정해 1909년의 간도협약을 사실상 추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은 간도 영유권 문제를 일절 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통일이 된다면 국제법에 따라 북한이 맺은 조약을 승계할 수 밖에 없지않느냐는 판단도 있었다고 합니다.
외교부의 이런 입장과는 달리 상당수 민간 전문가들은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간도는 영영 중국 영토로 굳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당시 신형식 백산학회 회장(상명대 초빙교수·한국고대사)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며 “간도문제를 공식적으로 논의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 회장은 “일제가 제작한 지도에도 드러나듯 간도는 명백한 우리 영토였고, 1909년의 청·일 간 간도협약은 국제법상으로도 무효”라며 “만일 정부가 제기하지 못한다면 국회와 학계에서라도 이 문제를 이슈화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영돈 인천대 교수(국제법)는 “중국이 국가 주도로 자신의 국익에 유리한 이론화 작업을 추진하는 데 비해 우리 정부는 ‘외교적 마찰’ 운운하며 이런 논의를 스스로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중국 정부와의 ‘조용한 조율’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삼음으로써 중국에 대한 ‘카드’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습니다.
성재호 성균관대 교수(국제법)는 “영토 분쟁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해결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양쪽 정부 차원에서 공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며 “간도문제는 언론과 학계 등 민간에서만 제기된 문제여서 공식적인 ‘분쟁지역’조차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등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9일만에 다시 바뀐 정부 입장
그런데 이렇게 ‘행정 착오’로 봉합될 것 같았던 간도협약 문제는 외교부가 다시 입장을 바꿔 주목받았습니다. 조선일보의 간도협약 보도 후 9일 만인 2004년 10월 22일 다시 열린 외교부에 대한 국정감사는 간도협약 청문회처럼 진행됐습니다. 한나라당의 정문헌, 최병국 의원 등에 이어 같은 당의 이성권 의원(현 국민의힘 의원)이 간도 문제를 조목조목 짚었습니다.
○이성권 위원
처음에 이 자료(국정감사 자료집)가 제출되는 과정과 바뀌게 되는 과정에 어떤 논의와 어떤 형태의 얘기들이 오고 갔는지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외교통상부장관 반기문
그래서 조약국에서는 법리적인 측면을 검토를 했고요, 그다음에 아태국에서는 여러 가지 현재의 한중관계라든지를 감안해서 했습니다.
○이성권 위원
좋습니다. 방금 법리적 측면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법리적 측면이라는 것은 국제법상의 측면을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외교통상부장관 반기문
예.
○이성권 위원
그렇게 얘기를 하시면 결국은 외교통상부도 국제법상으로는 인정을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외교통상부장관 반기문
그래서 아까 아침에 노영돈 교수의 여러 가지 참고인 진술 또 여러 위원님들 말씀이 많이 계셨기 때문에 그 역사적인 측면은 제가 반복은 하지 않겠습니다. 간도협약에 관해서는 법리적으로는 무효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성권 위원
법리적으로는 무효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렇지요?
이 의원은 국감 전에 간도협약에 대해 질의했을 때 외교부로부터 ‘무효’라는답변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반 장관을 상대로 “법리적으로는무효”라는 답변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는 다음날 신문에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간도협약은 법리적인 측면에서 무효라고 할 수 있으나 영유권문제는 (법적 문제와) 분리해서 접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보도됐습니다. ”간도협약이 무효라고 해서 간도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입장이 한중 관계에 새로운 사안을 발생시킨다고 보지는 않는다”,"간도문제는 통일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접근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도 전했습니다.
▲‘순종실록’에 적힌 ‘간도협약’ 내용. 1909년 9월 4일 일본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해 간도 지역에 대한 청의 영유권을 인정했는데,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국사편찬위원회
반 장관이 이날 국회 답변을 이용해 밝힌 ‘법리적 무효’는 9일 전의 ‘행정적 착오’와는 다른 입장으로 ‘간도 협약이 법적으로는 무효이나 간도 영유권문제는 법적인 측면과 분리해서 접근한다’는 쪽으로 정부 입장이 다시 정리됐음을 뜻합니다. 국회에서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당장 중국에 제기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표명한 절충안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이렇게 입장이 재정리된 배경에는 우리의 영토와 관련된 문제인데 나중에 우리나라에 불리하지 않게 해석될 여지를 남겨 놓아야 한다는, 정권 차원의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86 운동권 세대가 장악한 노무현 청와대에서 간도협약을 인정했다는 비판을 듣기 싫어 ‘법리적으로는 무효’라는 부분이 강조되기를 강하게 바랬다는 겁니다.
한편,당시 청와대 내부에서 중국에 “간도협약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고 반대급부로 북핵 문제 등에서 더 큰 협조를 얻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주장도 나왔다고 합니다. 중국과 그런 방향으로 협의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외교관도 있는데, 진실은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규명될 듯합니다.
◇ 2009년 간도협약 100주년 맞아 간도되찾기 운동
2004년 외교부 국정감사 당시 간도협약 관련 국감 자료집이 회수된 사태로 중요한 역사적, 외교적 사안에 대해 우리 정부가 제대로 된 입장을 갖고 있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대해 전직 외교부의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정부의 모든 공식입장은 어떤 비판도 소화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야 한다. 첫 자료집에서 무효라는 입장이 발표된 이상 그에 맞는 논리로 대응하면 좋았는데, 이를 회수해서 중국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인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다른 전직 외교관은"간도협약을 비롯해 중국과의 여러 사안에 대해 일본 관련 문제에서 취하는 엄격함의 단 몇 분의 1이라도 가져야 한다”며 “지금이라도 정부와 민간이 1.5 트랙에서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언제든 중국에 사용할 수 있는 외교적 카드로 만들어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간도협약은 2009년 간도협약 체결 100주년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간도 되찾기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간도 영유권 회복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져 국민청원운동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이명수 자유선진당 의원(대표발의) 등 국회의원 50명은 이 협약이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선언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학계에서도 중국의 입장을 반박하는 회의가 다수 열리기도 했습니다.하지만 이후 간도협약은 다시 주목받는 큰 계기를갖지 못한 채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P.S.
1. 2004년 10월 22일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는 간도협약과 관련해 노영돈 인천대 교수가 참고인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노 교수는 “(간도협약에 대한 정부의) 신중론 자체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말로 우리 정부의 ‘신중한’ 대응을 비판했는데, 되새겨 볼만하다고 생각해 소개합니다.
"(간도협약) 당시 대한제국은 제3국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조약법상 제3국에 대한 효력, 상대적 효력이라고도 하는데요. 과거부터 국제 관습법으로 확립되어 온 것이 조약은 제3국에 아무런 이익도 해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3국인 대한제국에는 그 조약 자체는 아무런 효력이 미치지 않고요, 따라서 기존의 외교적으로 진행되었던 간도분쟁은 해결된 바가 없다, 적어도 우리 측에서는 그 조약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도 협약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이)통상 신중하게 접근해야 된다는 신중론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더 더욱이나 동북공정이라는 것을 추진하고 있는 마당에서 보면 간도문제는 우리가 당연히 제기해야 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렇지 못한 측면에서 또 정책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연구가 부족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해야 될 일이 많은 것이지 신중하다고 해서 덮어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신중론 자체도 신중하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32회> 北 러시아 파병할 때 韓中 관계 복원해야
평통, 2013년 중국과 '정전체제 60주년' 포럼 개최
중국 공산당 당교의 시진핑 주석 '개인교사'가
"평화협정은 北을 핵 보유국 인정한다"며 비판
EAI 회의 中 학자 "한국, 北 도발에 철저한 보복 준비를 "
북이 러와 밀착하면 한국은 과거처럼 中과 거리 좁혀야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속히 악화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7일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여당이 참패해 과반수 의석에 미달했고,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주한미군에 부정적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유럽과 중동에서의 ‘두 개의 전쟁’ 동시 발발을 가장 경계해왔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2년 넘게 진행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6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24년만의 방북으로 군사동맹을 복원한 북한이 최근 대규모 특수부대를 우크라이나 전선에 파병했습니다.
러시아와 북한이 동맹국으로 긴장 지수를 대폭 끌어올리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대응책에 부심하고 있습니다. 방어용 무기뿐만 아니라 공격용 무기도 우크라이나에 지원한다는 계획을 공개, 러시아와 북한을 압박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방중 직후 이례적인 회의 열려
\한미동맹 중심의 전략을 중심축으로 삼으면서도 북한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국을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옵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파병한 북한과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럴 때 2016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관계가 멀어진 중국과의 관계를 완전 복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2013년 6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방문 이틀째인 이날 베이징 조어대(영빈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오찬을 마친 뒤 서로 준비한 선물을 소개하고 있다. 왼쪽은 시 주석이 준비한 법랑 항아리, 오른쪽은 박 대통령이 준비한 찻잔 세트와 주칠함이다. 시 주석 왼쪽은 시 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조선일보 DB
이런 상황에서 참고할 만한 일들이 11년 전에 있었습니다.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이어 7월 24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평화통일 포럼’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사에 기록될만한 행사였습니다. 6·25 전쟁 정전(停戰) 60주년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문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중국 인민대학교와 공동으로 국제회의를 개최했기 때문입니다.
정전체제가 60년 동안 계속된 상황에서 한·중 양국이 6·25 전쟁의 여파와 한반도의 평화 전망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어서 조선일보는 이를 후원했습니다. 이 행사엔 우리측에서 현경대 평통 수석부의장, 박병석 국회 부의장, 안홍준 외통위원장, 권영세 대사, 이태환 세종연구소 중국연구센터장, 김흥규 성신여대(현 아주대) 교수 등이 참석했습니다.
중국 측에서 천위루(陳雨露) 인민대 총장, 장롄구이(張璉瑰) 공산당 중앙당교 교수, 추수롱 (楚树龙) 칭화대 교수 등이 나왔습니다. 양국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이번 포럼은 △2013년에 돌아본 6·25 전쟁과 그 함의△중북관계와 정전체제 종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동북아 정세와 한중관계의 미래 분야로 나눠 진행됐습니다. 60여년 전 중국의 참전으로 총부리를 겨눴던 양국이 정전체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는 점에서 지금 돌이켜봐도 특별한 회의였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에서 중국의 책임 있는 역할 정립 방안이 집중적으로 논의됐습니다.
◇장롄구이, “평화협정은 북핵 폐기와 동시에 돼야”
이날 회의에서 단연 시선을 끈 인물은 장롄구이 중국 공산당 중앙 당교(党校) 교수였습니다. 당교는 중국 공산당의 연수원으로 약 1억 명의 중 공산당원을 이념 교육시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현 시진핑 주석이 중앙 당교 교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에서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13년 7월 24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평화통일 포럼’. 6·25 전쟁 정전(停戰) 60주년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문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중국 인민대학교와 공동으로 국제회의를 개최했다./민주평통
이날 회의에 등장한 장 교수는 “현 상태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은 미국에게 ‘북한은 핵 보유국’이라고 인정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또, “미북간에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북한이 무엇을 하든지간에 막을 수 없게 된다”며 “북한의 평화협정 주장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한반도 평화협정과 관련한 중국의 원칙은 두 가지라며 “평화협정은 반드시 한반도 관련국가가 함께 서명해야 하며 북한의 핵 폐기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포럼 현장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들어가며 기사를 쓰던 저는 북한을 비판한 장 교수의 발언을 듣자마자 “큰 기사가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1943년생으로 북한 김일성대에 유학했던 장 교수는 한반도를 전공한 원로 전문가입니다. 시진핑 주석의 당교 교장 시절부터 그에게 남북한 문제에 대해 조언, ‘시진핑의 개인 교사’ 로 평가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 헌법 기관과의 공개 포럼에서 북한을 비판한 것은 뉴스 가치가 컸습니다.
기사를 완전히 새로 고쳐서 장 교수의 발언을 기사의 맨 앞으로 올려서 서울로 송고했습니다. 본사 편집국에 전화해 “북한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발언이 중국측으로부터 나왔으니 크게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날 저녁 편집국장 대행으로 야간 근무중이던 박정훈 부국장(현 논설실장)은 베이징으로 전화를 걸어서 최종판 부장 회의에서 이를 1면 톱기사로 결정했다고 알려줬습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다음날 아침 조선일보 독자들은 [中 공산당 원로학자도 미북 평화협정 반대 “평화협정 체결, 북핵 인정하는 것”] 이라는 제목의 1면 톱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일보는 평통과 인민대가 공동 주최한 정전체제 60주년 기념 포럼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 당교 소속으로 시진핑 주석의 한반도 문제 개인교사 역할을 해 온 장롄구이 교수가 북한을 비판한 기사를 2013년 7월25일자 1면 톱 기사로 게재했다.
조선일보는 평통과 인민대가 공동 주최한 정전체제 60주년 기념 포럼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 당교 소속으로 시진핑 주석의 한반도 문제 개인교사 역할을 해 온 장롄구이 교수가 북한을 비판한 기사를 2013년 7월25일자 1면 톱 기사로 게재했다.
현경대 평통 수석 부의장은 개회사에서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문제는 남북뿐 아니라 동북아, 세계 평화와 직결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진창룽 인민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도 개회사에서 “중·한 관계가 역사상 가장 좋다”며 “정전 60주년을 맞아 과거를 뒤돌아보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박병석 국회 부의장은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이 ‘중국의 꿈’과 함께 갈 수 있다”며 “북핵 불용에 대한 중·미 합의는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시사한다”고 밝혔습니다. 권영세 주중 대사는 “중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날 청중석에서는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남북통일’이라는 데 동의하느냐”, “북한 핵 문제가 결국 한·중 간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중국이 반성해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날카로운 질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민주평통 베이징협의회 관계자는 이날 “한·중 관계가 좋아졌다고 해도 정전 60주년과 통일이라는 민감한 주제로 베이징에서 대규모 한·중 회의를 개최하기는 쉽지 않았다”며 “중국 정부에서도 이번 회의 개최에 대해 민감하게 검토한 것으로 안다”고 귀뜸해줬습니다.
초당파 외교안보 싱크탱크 ‘플라자 프로젝트’를 만들어 활동하는 김흥규 교수는 당시 포럼에서 “지난 달(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을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이 중국의 한반도 ‘제4원칙’의 지위로 부상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종전까지 중국의 한반도 정책 원칙은 비핵화, 혼란 방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등 세 가지였는데 평화통일이 추가됐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시진핑 주석이 박 대통령과 정상회담 때 “중국 국민의 한반도에 대한 양대 희망은 비핵화와 평화통일”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한국에 의한 자주적 평화통일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북한에 대해선 대단히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청샤오허 교수는 “과거 중국은 한반도 원칙에서 ‘혼란 방지’를 가장 먼저 언급했지만 3차 핵실험 이후에는 ‘비핵화’를 우선순위에 올려놨다”고 밝혔습니다.
▲자칭궈 베이징대 교수가 2019년 12월 23일 서울 최종현학술원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그는 이 회의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요청에 따라 화웨이 사용을 금지한다면 중국도 한국 기술과 장비 사용을 끊을 것”이라며 “한국은 중국 시장과 협력 가능성을 잃는 손해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DB
◇ 자칭궈 “북한에 보복할 것이라는 의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라”
평통과 인민대와의 포럼 석 달전에 나온 중국 베이징대 국제관계 대학원 자칭궈(賈慶國) 교수도 당시 중국이 한국과 밀착하던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1988년 미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베이징대에서 활동해 온 그는 한국에도 지인이 많은데, 당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상무위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2013년 4월 29일 그가 외교부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이 개최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21세기 전략적 사고와 신정부 외교비전’이라는 주제하에 열린 이 회의에서 “한국은 북한이 도발을 감행할 경우, 북한에 보복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해 청중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한국과 북한은 현재 신뢰구축의 4 단계중 최하위인 ‘부정적·최소 신뢰’단계에 있다며 “현 단계에서 한국의 결정과 의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자 위원은 2013년 현 단계에서 한국이 군사력을 확충하고, 전투 준비를 완비하며, 북한이 도발할 경우 한국이 보복 조치를 취할 것임을 북한에 명확히 전달하고, 충돌이 일어날 경우 미국이나 중국 등 관련 국가들로부터 국제적 지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으로부터도 국제적 지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빅터 차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보좌관도 참석했는데, 자 위원의 발언은 중국 공산당과 조율돼 있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는 평통, EAI 주최 회의 뿐만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도 이같은 얘기가 양국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고 갈 정도로 한중 관계는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중국의 전문가들로부터 “김정은 북한 정권은 우리에게도 골칫거리”라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같은 분위기가 계속되면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2015년 천안문에서 열린 중국의 ‘항일(抗日)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박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은 이후 여러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사드 사태, 미중 갈등 격화, 시진핑 주석의 연임 및 3연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중국이 6차 핵실험까지 한 북한을 용인하고 한국과는 거리를 두는 상태가 계속돼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에서는 곧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합니다. 북한의 대규모 특수부대 러시아 파병으로 양국이 밀착하고, 그 결과 동북아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중국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2013년 박근혜 대통령 방중에 이어 6·25 정전체제까지 논할 정도로 긴밀했던 관계의 복원을 양국이 모색한다면 이는 북한에 적지 않은 압박이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로서는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면서도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디자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결국 우리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 안보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3회> 尹 대통령에게 필요한 트럼프와 아베의 '브로맨스'
아베, 2016년 트럼프 당선 9일만에 뉴욕 찾아가 만나
혼마 골프채 선물하고 취임 한 달만에 함께 라운딩
하루 27홀 골프, 세 끼 식사 함께 하며 친분 쌓아
日 골퍼 "두 정상, 카트에서 진지하게 대화에 몰입"
일본에서 가장 구독자가 많은 종합월간지는 문예춘추입니다. 이 매체의 10월호에 일본의 유명 프로 골퍼 아오키 이사오(青木功)가 2019년 5월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골프를 친 소감문이 실렸습니다.
아오키는 일본인 최초로 1980년대 미국 PGA 대회에서 우승한 인물입니다. 트럼프가 2017년 첫 방일 때 과거 아오키와 잭 니클라우스의 경기를 시청했다며 그의 퍼팅 실력을 칭찬한 것이 계기가 돼 두 사람의 골프 회동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2019년 5월 26일 레이와 시대의 첫 국빈으로 방문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첫 행사는 아베 총리와의 골프 회동이었다. 아베 총리가 골프 중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는데, 두 사람의 '브로맨스'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꼽힌다.
아오키는 문예춘추 기고문에서 이런 목격담을 전합니다. “(내가) 나이스샷이라고 말을 걸 새도 없이 두 사람은 공을 치면 쑥 카트로 돌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에 몰입했다.” 스코어는 기록하지 않았다. 골프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진짜 목적은 둘이서만 본심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누구의 눈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도청당할 염려도 없는 골프장은 안성맞춤이 아니었을까. 뉴스를 통해 영상을 본 사람들은 두 사람이 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지 모르나 가까이서 봤던 내 인상은 다르다. 카트 안에서 진지하게 정치 이야기를 했다. 말 그대로 ‘골프외교’였다.”
골프는 친목을 쌓는 수단이었을 뿐, 트럼프와 아베는 카트를 타고 이동하면서 서로 국익을 놓고 진지한 대화를 했다는 겁니다.
◇골프로 브로맨스 쌓은 트럼프와 아베
아오키의 문예춘추 기고는 2019년 도쿄 특파원으로 당시 트럼프와 아베의 골프 회동을 취재하던 당시를 떠 올리게 했습니다. 트럼프와 아베, 아오키가 라운딩을 한 날은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 일대의 기온이 32도까지 솟구쳐 오른 5월 26일이었습니다.
▲문예춘추 2024년 10월호에 실린 일본 프로 골퍼 아오키 이사오(青木功)의 기고문. '트럼프상에게 증정한 드라이버'라는 제목의 글에서 아오키는 2019년 5월 트럼프와 아베가 골프 회동을 했을 때 자신이 '나이스 샷'이라고 말을 말을 걸 새도 없이 볼을 친 후 곧장 카트로 돌아가 대화에 몰입하는 골프 외교를 했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 9시 나루히토 일왕의 첫 국빈(國賓)자격으로 25일 일본을 찾은 트럼프의 전용 헬기 ‘마린 원’이 도쿄만(灣) 동쪽 지바(千葉)현의 한 골프장 페어웨이에 착륙했습니다. 미리 도착해 있던 아베는 헬기 바로 앞까지 걸어가 환한 얼굴로 그를 영접했습니다.
무더운 날씨였고 전날 지바현 일대엔 진도 5.1의 지진이 발생했지만 두 정상의 ‘브로맨스’ (brother+romance·남자 간의 우정을 의미) 골프를 막지 못했습니다. 두 정상 간 회담은 당시가 11번째이고, 골프 회동은 5번째였습니다. 이들은 골프 시작에 앞서 ‘미 · 일 동맹을 더 강하게’라고 쓰인 패널에 사인한 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라운딩 도중 아베 총리는 직접 카트를 운전했습니다. 두 정상은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날씨에 헬기 발착용으로 폐쇄된 2개 홀을 제외한 16홀을 3시간에 걸쳐 다 돌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골프 회동에 만족한 듯 운동이 끝나자마자 트위터에 아베 총리를 배려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일본과의 무역 협상에서 큰 진전이 이뤄지는 중이다. 많은 부분은 일본의 7월 선거 이후까지 기다리겠다.”
미 · 일 무역 협상이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아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에 선거 이후에 다루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아베도 트위터에 “새로운 레이와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미일동맹을 만들고 싶다”며 트럼프와 함께 활짝 웃는 표정으로 찍은 셀카 사진을 올렸습니다.
▲2019년 5월 26일 아베 일본 총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옆에 앉히고 직접 카트를 운전하며 골프를 했다. 뒷좌석에 경호원과 통역이 보인다. 교도/연합뉴스
◇취임 전부터 골프광 트럼프 마음을 사로잡은 아베
아베와 골프 회동으로 일본 국빈 방문 일정을 시작할 정도로 트럼프는 골프광입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그가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재임하면서 4년간 총 261차례 라운딩을 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바쁜 대통령’ 이면서도 매주 1회 이상 골프를 친 겁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스털링의 트럼프 내셔널클럽을 비롯, 전 세계에 15개의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베는 트럼프가 당선되는 순간부터 그가 골프광이라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아베는 2016년 11월 8일 트럼프 승리가 확정된 직후 통화를 하고, 9일만인 11월 17일 뉴욕의 트럼프 타워로 찾아갔습니다. 혼마의 금장(金裝) 골프채를 선물로 들고서 말입니다. 일본의 수상이 미 대통령 당선자를 찾아가는 매우 이례적인 행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스기야마 신스케 당시 외무성 차관은 오바마 행정부로부터 ‘보복’을 당했다고 회고하는 글을 올해 문예춘추에 쓰기도 했습니다. ) 골프채 가격은 약 1000만원에 이른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고가품이었습니다.
트럼프는 이런 아베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미 대통령선거가 끝난지 불과 9일만에 일본의 현직 총리가 찾아와 자신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선물을 내놓으며 함께 골프를 치고 싶다고 했으니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아베, 트럼프 취임 한달만에 27홀 라운딩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2017년 2월 플로리다주의 골프장에서부터 본격화했습니다. 트럼프와 아베가 이곳에서 골프를 치기 시작한 것은 오전 9시 25분이었습니다. 아침 8시 11분부터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함께한 직후였습니다. 18홀 골프를 끝낸 시각이 오후 1시 50분. 점심을 함께 한 두 사람이 다시 골프장에 나왔습니다. 9홀을 더 돈 후 4시 35분에 트럼프의 별장 마라라고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6시부터 시작된 만찬엔 워싱턴 DC에서 내려온 그의 딸과 사위도 참석했습니다.
친한 사람도 하루에 27홀 골프, 세 끼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겨우 두 번째 만남에서 말입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의기투합했습니다. 트럼프는 전날 워싱턴 DC에서 정상회담 한 아베를 ‘에어포스 원’에동승시켜 자신의 별장으로 데려왔습니다. 노회한 비즈니스맨 트럼프와 총리직을 두 번째 수행 중인 아베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의전상 이런 파격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전 세계에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말입니다.
당장 레이건-나카소네 관계가 다시 시작됐다는 관측이 나왔습니다. 트럼프가 아베 환대를 통해 국내외에 주는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아베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다. 앞으로 아시아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는 아베와 먼저 상의할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미국의 국무부 국방부 상무부는 물론 연방 의회 관계자들에게 빠르게 확산했습니다. 아베의 생각이 고스란히 트럼프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관측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트럼프와 아베는 만찬 도중 북한의 ‘북극성 2호’ 미사일 도발 보고를 받자마자 저녁 10시 35분 기자들 앞에 함께 섰습니다. 아베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용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트럼프는 “우리의 중요 동맹인 일본을 100% 지지한다”고 했습니다. 북한이 도발하자 이를 미 · 일 동맹을 더 견고히 하는 계기로 활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장면에서 한국은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두 정상 중 누구에게서도 한 · 미 · 일 3각 협력체제를 구축, 한국과 북한 문제에 대해 밀접한 협의를 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긴급 기자회견에서 확인된 두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한국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보여줬습니다. 트럼프 1기 때 지속된 ‘한국 따돌리기’의 시작이었던 겁니다.
◇미일, 2019년 3개월 연속 정상회담 신기록
아베와 트럼프가 2019년 4월부터 6월까지 매달 미·일 양국에서 만나 3개월 연속 정상회담을 하는 신기록을 세운 것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아베 일본 총리는 2019년 4월 26일 트럼프 미 대통령 부인의 49번째 생일 축하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했다. 다음날인 27일 버지니아주 스털링에 있는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트럼프와 골프를 친 후 귀국했다./AP 연합뉴스
아베는 2019년 4월 26일 미국을 다시 방문, 첫날 백악관에서 약 2시간 동안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이어서 아베는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의 49번째 생일 축하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27일에는 버지니아주 스털링에 있는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골프를 함께 했습니다. 사실상 이 정상회담은 트럼프 부인 생일 기념 만찬에 참석하고 함께 골프를 치기 위한 것으로 방미 시간은 40시간에 불과했습니다.
이어서 다음달인 5월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즉위하자 같은 달 26일부터 3일간 트럼프가 새 일왕의 첫 국빈으로 도쿄를 방문,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트럼프는 이어서 6월 28일부터 오사카(大阪)에서 열리는 G20회의에도 참석, 회동했습니다. 아사히 신문은 4,5,6월에 걸쳐서 3개월 연속으로 미·일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당시 도쿄의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빈번하게 만나는 것은 미·일 동맹이 더 굳건해지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더군요. 미·일의 군사적 협력관계도 더욱 긴밀해지고 있었습니다. 양국이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할 경우, 이를 요격하는 실험을 실시하기로 합의한 것도 2019년입니다.
이런 긴밀한 관계는 2016년 아베가 체면 차리지 않고 트럼프가 처음 당선된 지 9일만에 찾아간 것이 발판이 됐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트럼프의 두 번째 당선 확정 직후인 7일 그와 통화하면서 이른 시일내에 만나기로 했다고 밝혔는데, 8년 전 아베의 움직임을 잘 분석해 보길 바랍니다.
<아베와 트럼프의 브로맨스 관련 ‘막전막후’는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34회>"보석같은 미일 동맹"....트럼프, 국빈 초청받은 일 왕궁서 최고의 찬사
아베, 레이와 시대 개막을 동맹강화에 활용
나루히토 즉위 직후 트럼프를 첫 국빈 초청
미국산 소고기 특제 햄버거 등 세밀한 준비
트럼프, 스모 경기장서 우승 트로피 직접 시상

▲2019년 5월 26일 일본을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도쿄 스모 경기장에서 우승자인 아사노야마에게 미국에서 만들어 온 '대통령 배(트로피)'를 수여하고 있다. 외국 정상이 일본 스모 선수에게 트로피를 수여한 것은 처음이다./AP 연합뉴스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징용배상 판결과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일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도쿄를 방문한 트럼프는 미일 관계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줬습니다. 공개적으로 일본을 ‘동북아 안보의 반석’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베의 손을 번쩍 들어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도쿄에서 파악한 아베의 미일 동맹강화계획은 전방위적이었습니다. 아베는 2019년 아키히토가 퇴임하고 나루히토가 30년 만에 즉위하는 것을 적극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미 2018년 11월에 나루히토 왕세자의 즉위와 2019년 6월 오사카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트럼프가 두 번 방일하는 방안이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도쿄의 외교소식통은 당시 “트럼프를 새로운 시대의 첫 국빈으로 초청하고, 오사카 G20회의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이 아베 총리의 구상”이라고 제게 귀뜸해줬습니다.
◇ 스모 전통 무시하고 특별석에 트럼프 의자 설치
트럼프가 2019년 5월 26일 국빈으로 방일, 아베와 골프를 친 데 이어 이날 오후 5시쯤 레이와((令和) 시대 개막 후 처음 열린 스모 경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트럼프가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나쓰바쇼(夏場所· 5 월 대회) 최종일 경기가 열린 도쿄 료고쿠(兩國)의 국기관에 들어서자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관객들이 3분간 선 채로 스마트폰 사진을 찍는 바람에 주최 측에서 “경기 진행을 위해 앉아달라”는 방송을 해야 했습니다. 두 정상 부부는 도효(土俵· 스모 경기판) 주변의 특별석 마스세키(升席)에 고급 의자를 놓고 관람했습니다. 원래 방석에 앉아 관람하는 것이 스모 전통이지만, 일본은 트럼프를 위해 전통까지 포기한 겁니다.
일본 사회에서 스모와 관련한 의식은 지극히 보수적입니다.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스세키 표를 모두 독점하고, 스모의 전 통을 무시해가며 대우하는 것에 대해 비판도 나왔습니다. 일부 스모 팬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아베 내각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트럼프가 도효에 올라 우승자인 아사노야마 히데키(朝乃山英樹) 이름을 부르자 다시 환호성이 나왔습니다. 트럼프는 그를 ‘스모 그랜드 챔피언’이라고 부르며 미국에서 특별히 제작해 온 ‘미일 우호를 위한 트럼프배(杯)’를 시상했습니다. 높이 137㎝,무게 30㎏의 대형 은색 트로피 맨 위에는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장식물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도효를 신성시하는 일본 스모 전통에 따라 구두 대신 검은색 슬리퍼로 갈아 신고 시상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가 2019년 5월 26일 도쿄 롯폰기의 일식당에서 아베 신조(오른쪽 두 번째) 일본 총리 부부와 만찬을 함께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스모 관람에 이어서 두 정상이 향한 곳은 손님들 바로 앞에서 요리사가 직접 음식을 구워주는 로바다야키 방식의 유명 식당 이나카야(田舎家) 롯폰기 동점(東店)이었습니다. 이나카야는 우리말로 시골집을 의미합니다.
트럼프는 식당에서 기자들에게 “오늘 무역, 군사 문제에 대해서 아베 총리와 얘기했다”고 밝혀 북한 및 미일 군사동맹 문제가 주요 대화 소재였음을 시사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두 정상의 저녁 식사 장소 주변 차로를 전면 차단하고 식당 바로 앞에 길이 30m, 높이 3m의 대형 천막을 설치했습니다. 저녁 식사는 오후 8시쯤 끝났습니다. 두 정상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11시간을 함께 하며 세 끼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 트럼프 입맛에 맞춘 특제 햄버거
일본 정부의 트럼프를 감동시키기 위한 준비는 섬세했습니다. 트럼프 방일을 한 달 앞둔 4월 중순 도쿄의 유명 햄버거 전문점 ‘더 버거숍’ 기오이초(紀尾井町)점에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외무성이 트럼프가 햄버거를 좋아하는 것에 착안, 골프장에서 특제 햄버거를 제공키로 한 겁니다.
일본 외무성은 시제품으로 더블 치즈 버거 20개를 주문했습니다. 조건은 3가지. ‘미국 쇠고기를 사용하고, 바싹 익히며, 패티와 빵은 크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트럼프의 식사 성향을 의식한 것이었습니다.
일 외무성은 햄버거에 들어가는 체다 치즈에 대해서도 “미국산이냐”고 확인했습니다. 음료수도 그가 좋아하는 콜라로 준비했습니다. 이 음식점의 패티는 통상 1장당 120g이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를 위해 160g의 특제 패티를 만든 후, 두 장을 넣어 총 320g이 되도록 했습니다. 햄버거 빵도 일반 햄버거보다 1.2배 큰 12㎝의 특대 사이즈로 준비했습니다.
이 음식점의 요리사 4명은 26일 미일 정상이 회동한 골프장에 아침 일찍 도착해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골프장 식당에 철판이 없어서 프라이팬에 패티를 익혀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두 정상의 골프에 동석했던 일본의 프로 골프 선수 아오키 이사오가 일본 방송에 밝힌 바에 따르면, 트럼프는 햄버거의 빵은 먹지 않은 채 평소 습관처럼 패티 위에 케첩을 잔뜩 뿌려서 먹었습니다.
트럼프는 15분 만에 빵은 빼고 햄버거를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고 합니다. 일본 언론에 이 사실이 보도된 후, 더 버거 숍은 그가 먹었던 것과 똑같은 햄버거에 ‘더 스테이크 하우스 버거(The Steak House Burger)’라는 이름을 붙여 하루에 10개 한정으로 판매했습니다.

▲일본을 국빈방문 중이던 도널드 트럼프(왼쪽에서 2번째) 미국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왼쪽에서 3번째) 여사가 2019년 5월 27일 도쿄 왕궁에서 나루히토(맨 왼쪽) 일왕, 마사코 왕비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부부는 5월 1일 즉위한 나루히토 일왕의 첫 국빈이었다./AP 연합뉴스
◇ 아베, 트럼프를 ‘도널드’라고 부르며 친밀감 과시
2019년 5월 27일, 트럼프와 아베는 아카사카의 영빈관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나타났습니다. 두 정상은 한층 강화된 관계를 기자회견에서도 과시하는 것이 TV중계로 목격됐습니다. 트럼프는 기자들 앞에서 여러 차례 아베와 눈을 맞췄습니다. 아베는 두 차례에 걸쳐 트럼프를 ‘도널드’로 부르며 친밀감을 과시했습니다.
트럼프는 미일 동맹을 동북아 번영의 ‘반석’이라고 규정하며 일본과의 안보 분야 협력을 계속 강화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북한에 의한) 납치 문제는 내 머릿속에 있다. 꼭 해결하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당시 한일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본과의 협력에 더욱 비중을 두겠다는 입장을 내비친 겁니다.
이날 저녁 나루히토가 주최한 만찬에서는 양국 관계를 한층 더 격상시켜 표현, 주목받았습니다. 트럼프는 “미일 관계는 보물 같은 동맹”이라고 했습니다. 아베도 북한 문제에서 한국을 건너뛰고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직접 접촉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는 “납치 문제의 빠른 해결을 위해 다음은 나 자신이 김 위원장과 직접 만나겠다는 결의가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이 결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여러 가지 지원을 하겠다는 강한 지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아베는 “미일의 입장은 완전히 일치한 상태”라고도 했습니다.
당시 두 정상 만남을 보도한 일본 신문을 살펴봤더니, 골프 회동 당시 남북한 문제도 대화 소재가 됐습니다. 이때 “한국과 북한 간에 전혀 대화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를 나누며 한국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또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받은 사실도 아베에게 밝혔다고 전했습니다.
트럼프는 싱가포르에서 2018년 6월, 하노이에서 2019년 2월 김정은 위원장과 두 차례 회담할 때까지만 해도 문재인 정부의 중재 외교를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차례 회담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후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약속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인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 트럼프의 귀를 잡은 아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019년 5월 28일 가나가와(神奈川)현의 요코스카(橫須賀) 해상자위대 기지를 찾아 이즈모급 호위함 '가가'(かが)에 승선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아베는 트럼프의 국빈 방문을 활용, 트럼프의 대북 정책에서 자신이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원래 일본은 북한에 접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정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 남북 정상회담이 세 차례 열릴 때 북일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8년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이 나온 후 일본 정부가 방향을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6개월 이상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자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의 지원과 중국, 러시아의 양해하에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추진한다’는 새 방향이 설정됐습니다.
트럼프가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지하고, 일본은 미일 동맹을 활용해 외교 무대를 확대하는 모습은 워싱턴 특파원에 이어 2018년부터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던 필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한일갈등이 심각하고 한미동맹이 이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미일 관계가 이렇게 비상하는 것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까. 미일 양국이 한국을 배제하고 중국,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정세를 논의하면 한국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앞으로 한·미 동맹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고민은 제가 2021년 4월 도쿄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끊이지 않았습니다.⊙
<35회>"트럼프, 위기에 처한 아베 구했다"...도쿄 올림픽 개최 연기 도와줘
코로나 사태로 2020 올림픽 무산 직전에 트럼프가 전화
"1000% 도와주겠다" 며 아베에게 1년 연기 제안
일본은 미국의 어깨에 올라타 실리 챙기며 배후 조종
아베 " 주한미군은 동북아 안정 위해 중요"...철수 반대
“미국에 얹혀사는 처지, 기다리는(reactive) 자세에서 벗어나 일본은 우리 스스로 지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그 능력을 종합적으로 향상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플레이어(proactive player)로 일본은 완전히 탈바꿈했다.”
지난 22일 트럼프 2기의 대외전략을 주제로 열린 세종국가포럼에서 아사바 유키(淺羽祐樹) 일본 도시샤대 교수는 이런 요지의 발표를 했습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기 때 8년간 재임하면서 ‘세계 평화에 선제적으로 기여하는 적극적 평화주의 의지를 표명’하면서 ‘능력’을 제고해 왔다는 겁니다.
아사바 교수의 발언이 파격적인 자화자찬으로 느껴질지 수 있습니다. 저도 ‘적극적 평화주의’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베가 두 번째로 총리가 돼 8년간 재임한 시기에 일본이 외교안보 면에서 완전히 변했다는 것에는 이의(異議)가 없습니다. 이 시기는 생존 전략으로서 미일동맹의 진화를 위해 진력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8년부터 도쿄 특파원으로 3년 동안 근무하면서 일본이 미일동맹의 배후에서 미국을 조종, 끌고 나가는 측면도 있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2020년 트럼프-아베 시대에 펴낸 미·일 동맹 발전 보고서 표지.
미일 동맹은 8년간 총리로 집권했던 아베가 제안하고, 트럼프 1기 때 브랜드화한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과거 미일 동맹이 일방적인 미국 주도였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입니다.
2021년 트럼프를 대선에서 꺾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 후에도 미일 동맹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앞에 내세워 활동 범위를 서쪽으로 지속해서 확장해 갔습니다. 일본은 트럼프 정부에 이어 바이든 정부에서도 아베가 고안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OIP)’ 슬로건을 계속 사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일본, 인도,호주 4국의 안보 협력체 ‘쿼드’의 사실상 사무국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요인 중의 하나는 트럼프와 아베의 브로맨스였는데, 이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 사업가적 감각으로 도쿄 올림픽 연기 제안
2020년 초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트럼프와 아베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습니다. 아베는 2020년 5월 “코로나바이러스는 중국에서 세계로 확산된 것이 사실”이라며 “기본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으로서 미국과 협력하면서 다양한 국제적 과제에 대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코로나 긴급사태를 해제하는 기자회견에서 격화되는 미중 갈등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이같이 말했습니다.
그는 “국제사회 요구는 일본과 중국이 각각 지역의 평화와 안정, 번영에 책임 있는 대응을 취하는 것”이라며 “중국이 그런 대응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고도 했습니다. 미중이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서로를 더욱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아베가 비교적 명확하게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중국을 견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2020년 도쿄 올림픽이 무산될 뻔 했으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베 일본 총리에게 1년 연기를 제안, 2021년에 열렸다./EPA연합뉴스
2020년 3월엔 트럼프가 아베를 설득, 도쿄 올림픽이 1년 연기되도록 해 “트럼프가 올림픽 문제로 위기에 처한 아베를 구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도쿄 특파원으로 저는 당시 매일 아침 도쿄에서 발행되는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 닛케이, 산케이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는데, 닛케이가 3월 24일 자 1면 톱 기사에서 도쿄 올림픽 연기 배경을 자세히 전했습니다. 이 신문은 ‘밀월(蜜月)’관계인 트럼프 조언이 아베의 연기 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에 따르면 트럼프는 50분간의 전화 회담에서 “올림픽을 1년간 연기해야 한다. 관객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것보다는 1년 연기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그는 특유의 ‘1000% 지지’ 표현을 써가며 ‘2021년 도쿄 올림픽’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어서 3월 16일 화상 통화로 이뤄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아베는 “도쿄 올림픽은 완전한 형태로 개최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도쿄 올림픽을 연기해서 개최하겠다는 견해를 처음으로 밝힌 것입니다. 이 회의에서 영국의 존슨 총리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찬성 견해를 밝혔습니다.다른 정상들도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아베는 올림픽 1년 연기가 결정되자마자 3월 25일 트럼프에게 전화해 감사 표시를 했습니다. 미일 정상 간에 12일 만에 다시 이뤄진 40분간의 통화에서 트럼프는 “매우 현명하고 훌륭한 결정을 했다”고 칭찬했습니다.
트럼프가 제안해서 성사된 ‘도쿄 올림픽 1년 연기’는 아베에게 나쁘지 않은 정치적 차선책(次善策)이었습니다. 도쿄 올림픽이 만약 전면 취소됐다면 그에게는 대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아리기 어려운 경제적 피해는 물론이고 국민의 실망감과 불만이 아베 정권을 향할 것은 자명했습니다. 아베가 불명예 퇴진하는 시나리오가 부각될 수도 있었습니다. 트럼프는 대회 취소를 고려하는 IOC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했습니다. 사업가적인 감각으로 일본과 아베를 위해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8년 4월 17일(현지시간) 미 플로리다주에 위치한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식사를 앞두고 찍은 기념사진./ 출처=로이터연합뉴스
◇ 트럼프, 아베와 친분있는 인사를 주일대사에 지명
트럼프는 2020년 3월 16일 주일 미국 대사에 아베와 친분이 두터운 케네스 와인스틴 미 허드슨 연구소 소장을 지명하기도 했습니다. 와인스틴 지명자는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아베와 여러 차례 만난 인물로 “역대 주일 미 대사 중 현직 일본 총리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 지명됐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교도통신도 트럼프가 아베와 와인스틴의 관계를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하버드대 정치학 박사 출신인 와인스타인은 1991년 보수 성향의 허드슨 연구소에 들어간 후, 2011년 소장이 됐습니다. 이어서 2013년 허드슨 연구소가 국가 안보에 공헌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허먼 칸(허드슨 연구소 창설자) 상’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아베에게 수여했습니다. 아베는 허드슨 연구소가 허버트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신설된 ‘일본 체어(석좌)’로 영입할 때 정부 예산으로 5억 6,000만 엔을 지원하도록 함으로써 와인스틴에게 보답했습니다. 와인스틴은 미 의회에서 인준 절차가 지연되면서 일본에 부임하지는 못했으나 이는 트럼프와 아베의 브로맨스를 상징하는 또 다른 징표가 됐습니다.
◇주한미군 철수 반대한 아베
트럼프와 아베의 긴밀한 관계는 한국 관련 사안에 대해 아베가 트럼프를 대변(代辯)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2018년 10월 7일 아베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직전에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가진 아베는 FT 인터뷰에서 북한 비핵화 협상의 하나로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방안에 자신도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미군의 한국 주둔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믿는다”고 도 했습니다. 아베의 이 발언은 미일 두 정상이 대화할 때 북한 비핵화에 따른 주한미군 문제가 중요하게 논의됐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 및 국민의 입장과는 관계없이 주한미군 문제가 처리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트럼프는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북한 김정일을 만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세 차례에 걸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P.S.
1. 아베-트럼프 때 더욱 견고해진 미일동맹은 바이든 행정부에도 계속됩니다. 일본 관점에서 미일 동맹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수는 중국과 영토 분쟁 중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입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2020년 11월 당선 직후 스가 요시히데 당시 일본 총리와의 첫 전화 통화에서 센카쿠 보호를 언급, 일본 열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일본 외무성 고위 관리가 크게 만족하며 “100점 만점”이라고 언급한 사실이 요미우리 신문 3면에 대서특필됐습니다.
바이든 정부는 ‘(누구도) 깰 수 없는(unbreakable) 미 ·일 동맹’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만이 위협받으면 양국이 공동작전을 펼치는 작전 계획도 만들어졌습니다. 2021년 창설된 미국 · 영국 ·호주의 3국 동맹 오커스(AUKUS)에 일본이 들어가 조커스(JAUKUS)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36회>"조선학교 학생들은 그 배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라"
재일교포 북송 65주년 ①
고3때 북송된 가와사키씨 43년만에 탈북
일본에 정착 후 '귀국선' 탄 니카타항서 회한 토로
" 일본 음식은 모두 바다에 버려라"가 첫 명령
먼저 북한 간 선배 청진항서 "내리지마" 소리쳐
이번 달 14일은 재일교포 북송 사업이 시작된 지 6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59년 14일, 재일교포 975명이 일본 니가타(新潟)항에서 출발한 귀국선을 타고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1984년까지 25년 동안 약 9만3000 명의 재일교포가 북송됐습니다. 귀국선은 약 200차례에 걸쳐 운항되었습니다.
1962년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생모 고용희가 10살 때 부모 손에 이끌려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을 탔습니다. 1959년부터 25년에 걸쳐 재일교포들이 북송된 사건은 북한 정부가 끌고 일본 정부가 등 떠민 합작 사업으로 희대의 인권 유린 사건입니다.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가는 첫 '귀국선'에 재일 동포들이 승선한 가운데 환송행사가 열리고 있다. 선박 옆면에는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마이니치신문
2018년 6월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할 때 꼭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던 취재 아이템들이 몇 개 있었는데, 재일교포 북송 사업은 취재 리스트의 상단에 있었습니다.
◇ 김정은 정권에 손해배상 청구한 가와사키씨
도쿄에 부임한 후 얼마 안돼 재일교포 북송 문제를 취재할 계기가 생겼습니다. 2018년 8월 말, 조총련계 조선학교 고3 때 북송 사업에 속아서 북한에 건너갔다가 2003년 43년 만에 탈북한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씨 사연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당시 비슷한 처지의 탈북자들을 모아 김정은 정권 앞으로 총 5억 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냈는데, 관련 기사가 조선일보 제휴사인 마이니치 신문에 실렸습니다. 아침 일찍 사무실에서 이 기사를 읽자마자 마이니치 신문사 편집국 4층의 사회부로 올라갔습니다. (조선일보 도쿄 지국은 마이니치 신문사 건물 3층에 있습니다.) 마이니치 신문 데스크를 통해 그의 연락처를 확보하고 이같은 내용의 기사를 써서 서울로 보냈습니다.
“북한 허위 선전에 속았다” 日 거주 탈북자 5명, 북한 상대로 첫 소송 제기
재일 교포 북송 사업 당시 북한에 가서 생활하다가 탈북해 일본에 거주하는 남녀 5명이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8월 21일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76)씨 등 57~77세의 탈북자들은 “북한이 ‘지상 낙원’이라고 재일 한국인을 속여서 ‘귀환 사업’을 하는 데 참가해 인권을 억압당했다”며 총 5억엔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냈다.
재일 교포 탈북자가 일본 내에서 친북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지만,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소송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사카 지방법원은 2009년 세 살 때 부모와 함께 북송 사업으로 입북했다가 2003년 일본으로 돌아온 탈북자가 조총련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기각한 바 있다.
이번에 소송을 제기한 가와사키씨 등은 1960~1970년대 북한에 갔다가 2000년대 탈북했다. 이들은 북한에서 충분한 식량을 배급받지 못한 채 저항하다가 탄압받았으며 출국을 금지당했다고 주장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이 중 한 명이 “가혹한 생활로 부모는 원통하게 일생을 마쳤다. 인생을 돌려달라고 부르짖고 싶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가와사키씨를 비롯한 탈북자들은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에 북한의 인권 침해를 규명해 달라고 요청한 데 이어 일본의 변호사 단체에 북한에 의한 인권 침해를 다뤄달라고 한 바 있다.
이 소송은 일본의 재판권이 외국 정부에 미치는지와 시효가 성립되는지 등이 쟁점이 될 전망이다. 변호인단은 소송 진행상 문제점이 일부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실질적 심리에 빨리 들어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탈북자 원고 측 변호사는 “법원이 북한에 의한 인권 침해의 위법성을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된 북송 사업으로 일본인 아내를 포함해 9만3000여 명이 니가타(新潟)현에서 만경봉호 등을 타고 북으로 건너갔다. 일본에는 이들 외에도 북한에서 생활하다가 돌아온 탈북자들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유사한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1959년 12월 14일, 니가타항을 출항하는 제1호 북송선 쿠릴리온호와 토보리스크호/나무위키
기사를 쓴 데 이어서 9월 3일 도쿄 도심에서 가까운 키바(木場)에서 가와사키씨를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가와사키씨의 삶은 파란만장(波瀾萬丈)이라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그는 북송사업이 시작된 다음 해인 1960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북송선을 타고 청진으로 갔습니다. 원래는 자신이 태어난 일본을 떠나 북한에 가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나 한국에서 4·19가 발생하자 생각을 바꿨습니다. 조총련이 “한국은 이승만 체제가 곧 붕괴되고 사회주의 통일이 될 텐데 미리 북한에 가서 이를 준비하자”고 선동하자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북한행을 말렸지만, 결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조센징’에 대한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별도 북한을 택하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와사키씨는 1987년 북한에서 결혼해 1남 4녀를 낳았습니다. 남편이 사망하고 1990년대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하는 것을 보고 탈북을 결심해 2003년 초반 딸 하나를 데리고 사선(死線)을 건넜습니다.
2004년 일본에 정착한 그는 2007년 ‘일본인’이 됐습니다. 일본 국적을 선택한 것은 북송 사업 피해자를 돕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일본 국적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북한의 위협을 받거나 위해를 당하게 되면 일본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환 사업에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가 이 문제 해결에 열심히 나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북송 59년 만에 다시 니가타항 찾은 가와사키씨
가와사키씨는 20세기 조선이 일본제국에 병탄(倂呑)되고, 한반도가 분단되고,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만든 비극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일교포 북송 사업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 가와사키씨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도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2019년 12월은 북송사업 6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가와사키씨에게 송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방문해 회상하는 기획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픈 기억에도 불구, 니가타항에서 북송사업의 실상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2019년 11월 29일 가와사키씨와 함께 그가 59년 전에 북송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찾아갔습니다. 도쿄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니가타로 가는 동안 그는 회한에 젖은 듯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니가타항의 날씨는 맑았습니다.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았습니다. 그는 12월 14일 ‘재일교포 귀환 사업’ 시작 60년을 앞두고 악몽처럼 남아 있는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조선학교 고3때 북한에 속아서 일본을 떠났다가 43년만에 탈북한 재일교포 가와사키 에이코씨가 2019년 11월 북송사업 60주년을 앞두고 자신이 귀국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찾아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이하원 기자
“1960년 북송선이 떠날 때는 굉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조총련 계열 조선학교 취주악단이 나와서 계속 쿵작거렸습니다. 지상 낙원에 간다는 들뜬 분위기였지요. 재일교포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나와서 열성적으로 환송했습니다.”
가와사키씨 등을 태운 북송선은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의 인도를 받아서 출항했습니다. 배가 일본 영해를 벗어날 때 일본 함정에서 “이제 공해로 들어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인사를 했다고 기억했습니다.
2박3일간 운항했던 북송선에서 북한 관리들로부터 처음 받은 지시는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모두 바다에 버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일본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가와사키씨는 그때 불안감이 엄습했다고 했습니다. “왜 먹는 음식을 일본 식품이라고 버리라고 하는 걸까. 그러면 ‘메이드 인 재팬’인 재일교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아닐까.”
가와사키씨는 배가 청진항에 접근할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청진항 일대가 온통 잿빛이었고 높은 빌딩이라곤 보이지 않았습니다. 환영 인파 속 사람들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거나 양말을 신은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지상 천국’이라던 선전과는 딴판이었습니다.
가와사키씨는 북송선이 청진항 부두에 접안할 무렵 선착장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조선학교 선배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보다 먼저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도착했던 그 선배는 배에 타고 있던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북한 군인들이 못 알아듣도록 일본어로 “내리지 말라”고 외쳤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내리지 마라. 다시 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라.”
◇도착 첫날부터 먹을 것 없어 “속았다”고 느껴
배에서 내린 재일교포들이 “속은 것 아니냐”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집단 합숙소에 들어간 가와사키씨와 재일교포들은 첫날 저녁부터 먹을 것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생지옥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북한으로부터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청진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일본의 가족들이 북한으로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생활은 나 혼자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소학교 4학년인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뒤에 만나자는 내용만 계속 써서 보냈습니다. 절대 북한에 오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의 부모는 딸이 ‘지옥에서 보낸 편지’의 의미를 깨닫고 북한행을 단념했습니다.⊙
< 재일교포 북송 65주년 ➁는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37회>"적십자사가 제대로 북송 심사 안 한 것이 한스럽다"
재일교포 북송 65주년②
1960년 스위스 여성 요원이 1분간 형식적인 심사
9만명에게 시간 돌려 물으면 모두 안 간다고 할 것
귀국협회 일본인 "북송선 타는 순간 지옥이 시작돼"
"재일교포들을 지옥에 보내는데 일조했다고 후회"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재일교포 북송 사업 피해자로 43년 만에 탈북한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씨가 2019년 다시 찾은 니가타(新潟) 항. 그곳은 1960년 그가 귀국선을 탔을 때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300 m 길이의 항구에 정박 중이던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은 북송선을 연상시켰습니다. 당시 니가타시는 북송사업을 기념하기 위해 니가타항 주변 도로 양측에 버드나무를 500 그루 가량 심기도 했습니다. 북송사업은 지금도 ‘버드나무 도리(길)’이라는 명칭이 쓰일 정도로 25년간 활발하게 진행됐습니다.

▲북한에서 43년 만에 탈출한 가와사키 에이코씨가 2019년 11월 니가타(新潟)를 다시 찾아 아직도 남아 있는 북송사업 기념비를 가리키고 있다. 니가타현 조총련 본부와 조선인귀국협력회가 니가타항 근처에 북송사업을 기념하는 버드나무를 심어 '버드나무도리'로 불린다. /이하원 기자
가와사키씨가 니가타에 와서 미군이 남기고 간 합숙소에서 며칠을 보낸 후 탄 북송선은 만경봉호가 아니라 소련 국적의 배였습니다. 그는 북송 초기에는 북한의 김일성이 이승만 정권을 의식해 소련 배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북송 사업에 강하게 반대, 공해상에서 북송선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얘기가 돌았어요. 그래서 그런 문제를 차단하기 위해 소련 배를 투입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련 배는 (한국 군함이 막아서는) 만약의 사태를 위해서 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참 동안 동해를 바라보던 그는 자신이 북한에 있었던 세월이 원망스러운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여기 니가타 항에서 북송선을 탔던 재일교포 9만명에게 시간을 돌려서 다시 물어본다면 단 한명도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할 겁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던 것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북송선을 타기 전날 국제적십자사의 곱게 생긴 스위스 출신 여성이 나를 심사했습니다. ‘본인 의사로 가느냐’는 형식적인 질문이 전부였습니다. 1분도 채 안 걸렸습니다. 그때 제대로 심사가 이뤄졌다면 많은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을 겁니다.”
◇ “재일교포들을 지옥에 보내는데 일조했다”
니가타항을 나와서 가와사키씨의 안내로 한 일본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1959년부터 니가타항에서 재일교포 북송선이 떠날 때마다 현장을 취재해 ‘니가타협력회 뉴스’를 만들어 배포했던 일본인 고지마 하루노리(小島晴則·당시 88세)씨였습니다.
그는 한국의 기자가 북송사업 60주년을 취재하러 온 것에 대해 놀라며 회한(悔恨) 섞인 얘기를 했습니다. “북송선을 타는 순간 재일교포들에게는 지옥이 시작된 겁니다. 당시는 모든 일본 신문과 TV가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해서 그것을 몰랐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 일조했다는 ‘구야미(뉘우침, 후회라는 의미의 일본어)’가 있습니다.”

▲1959년부터 니가타항에서 재일교포 북송선이 떠날 때마다 현장을 취재해 ‘니가타협력회 뉴스’를 만들어 배포했던 일본인 고지마 하루노리씨가 2019년 11월 인터뷰에서 "내가 재일교포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 일조했다고 후회한다”고 말하고 있다./이하원 기자
그는 이런 마음을 담아 2016년 북송 사업이 진행되던 현장을 알린 ‘귀국자 9만3000여명 최후의 이별’이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출간했습니다. 공산당원이던 그는 젊었을 때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의 니가타 지부에서 사무국장을 맡아 ‘니가타협력회 뉴스’의 실질적인 편집장으로 활동했습니다. “한 달에 세 차례가량 귀환 사업 관련 신문을 발간했습니다. 니가타항에서 떠나는 이들을 사진 찍고, 기사 쓰고 약 5000부를 찍어서 각계에 보냈습니다.”
고지마씨가 변한 것은 1960년대 3주간 북한을 방문한 뒤부터입니다. “북한 체제는 잘산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사람의 얼굴은 거짓말을 안 합니다. 가서 만나보니 모두 영양실조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귀국협력회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공산당에서도 탈당했습니다. 1997년부터는 북한에 의해 납치된 여중생 메구미 구출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이 일본 사회에서 이대로 잊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편집했던 신문과 사진을 모아서 자료집을 냈습니다.
고지마씨는 “귀환 사업은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일본인 처와 자녀 6000여명도 관련된 일”이라며 “일본인 납치 문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9만명이 지옥에 있는 것을 모른 척하면 아베 총리는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아베 신조 총리가 북송 사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납북자 문제에만 매달린 것을 비판한 겁니다.
◇국가적 사기극 북송사업 25년간 계속돼
가와사키씨와 고지마씨의 증언대로 올해로 시작된 지 65주년을 맞는 ‘북송 사업’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국제 사기극이었습니다. 1959년부터 25년간 북송된 9만3340명은 최소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차별대우에 시달렸습니다. 이중엔 일본 국적자도 6000여명 있었습니다.
북송 사업이 시작될 당시 김일성 북한 정권은 재일교포의 노동력과 재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재일교포를 흡수해 한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앞서겠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로선 대부분 일본 강점기에 끌려와 불만을 가진 한국인을 내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말 일본 체제는 “식민지배에 원한을 가진 한국인을 한 명이라도 더 일본 땅에서 내보내는 것이 좋다”는 판단하에 북한의 ‘귀환사업’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일본의 공산당부터 자민당까지, 일본의 언론 매체와 사회단체까지 나서서 재일교포를 북한에 보내는 데 열성적이었습니다. 일본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입니다. 북한의 지원을 받은 조총련이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선전하며 사업에 앞장섰습니다. 한국 정부는 당시 외교력을 총동원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1959년 12월 귀국선이 처음 니가타현의 니가타항을 출발할 당시에는 소련 선박 두 척이 동원됐고 5만여 명이 모여 북송 사업을 축하했습니다. 이후 만경봉호가 니가타항과 청진항을 오가며 재일교포를 실어 날랐습니다. 북송된 재일교포들의 참담한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비판이 제기됐으나 이 문제가 일본 정부 차원에서 표면화된 적은 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북송 사업의 파장 확대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일본 법원, 2심에서 관할권 인정
일본 정부뿐 아니라 법원도 이들의 피해 구제에 소극적이었는데, 2018년 8월 가와사키씨 등 5명이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5억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도쿄특파원이었던 저는 북송사업 피해자들을 돕는 일본인 변호사들로부터 일본 법원 내부의 기류에 대해 상세하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통상 다른 나라 정부를 상대로 하는 소송은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2009년 제정된 ‘대(對)외국 민사(民事)재판권법’에 의해 북한은 미승인 국가로 ‘국가면제’를 받을 수 있는 외국에 해당하지 않아 재판이 가능하다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또 북한이 사기행위로 재일교포를 데려간 후 출국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납치이기에 민법상 불법행위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북한에서 억류됐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 부모가 2018년 미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인정된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 법원은 김정은 정권의 책임을 물어서 5억달러의 손해배상을 명령했습니다.
◇역사적인 첫 재판 2021년 열려

▲2014년 10월 14일 '재일동포 북송사업'에 대해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가와사키 에이코(중앙) 등 원고와 지지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재판정으로 가고 있다./최은경 특파원
이런 분위기속에 2021년 10월 도쿄 지요다구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가와사키씨 등 북송사업 피해자 5명이 김정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약 3년 만에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북한이 국제법상 주권 면제 조항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정식 재판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역사적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최은경 조선일보 특파원에 따르면 가와사키씨는 북에 남겨둔 가족 이야기를 할 때 고개를 떨군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가 탈출한 후, 북한에 남았던 손자는 살해당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북송 사업으로 건너간 9만여 명 대다수는 정신적인 충격, 빈곤, 정치범 수용소 생활 등으로 사망했지만 그 자녀와 손주 수십만 명이 살아있다”며 “이들이 목숨을 건 탈북을 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같은 호소에도 2022년 3월 1심에서는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서 발생한 억류와 관련한 재판 관할권이 일본에 없다며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하지만 같은해 10월 30일 도쿄고등재판소는 항소심에서 관할권이 없다는 원심판결을 깨고 1심 법원인 도쿄지방재판소에 재판을 다시 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북한의 행위는 전체를 하나의 계속된 불법행위로 봐야 하기 때문에 관할권은 일본 재판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올해 9월 한국 법원 처럼 일본 법원도 북한의 인권 침해 사실을 인정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9월 북송재일교포협회 이태경 대표 등 탈북민 5명이 북한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북한의 인권 침해를 인정, 손해 배상을 명령한 바 있습니다. 부디 일본 법원에서도 같은 판결이 나와 가와사키씨 등 북송 사업 피해자들이 작은 위로를 받고,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를 바랍니다.
[ P.S. ]
1. 2018년 8월 가와사키씨를 처음 만나 인터뷰할 때는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과 6월에 판문점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각각 만나 회담한 직후였습니다. 남북, 미북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황에서 가와사키씨와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지금(2018년 8월) 남한과 북한은 화해 분위기인데.
“(쓴 웃음을 지으며) 나는 북한을 믿지 않는다. 김정은이 지금 대화에 나온 것은 북한 백성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유엔의 제재가 자신들의 사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외국 제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어려워지니까 그러는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북한이 어려울 때 문재인 대통령이 계속 러브콜을 보내자, 당 간부들이 ‘남조선을 이용하자’고 해서 시작된 게 이번 국면의 본질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독재 체제가 어울릴 수 있나.”
가와사키씨는 당시 북한이 유화적으로 나오는 상황의 핵심을 짚어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에게 ‘사기’ 당하던 사태의 본질을 북한 체제에서 40년 넘게 살았던 사람으로서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겁니다. 북한은 언젠가 또 다시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우며 표변할 수도 있는데, 가와사키씨를 비롯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8회>'윤석열 노벨 평화상' 추천한 캠벨, 계엄선포에 배신감
한일관계 정상화 높이 평가하며
올 초 '尹과 기시다' 공동 수상 주장
2009년 "김정일 수명 3년 남았다" 며
정확한 예측 한국에 알려주기도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으로 인한 비상사태를 가장 주시하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은 이번 사태를 시시각각 분석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비상 사태 정보 수집을 위해 미국의 정보 기관원들이 일부 충원됐다고 합니다. S씨, K씨를 비롯한 미국측 외교안보 전문가들도 속속 서울을 찾고 있습니다.
미국의 반응은 여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로 요약됩니다. 윤 대통령의 계엄을 위법으로 규정하며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호를 내고 있습니다. 12월 3일 계엄 사태 발생 초기부터 이런 흐름을 이끄는 이는 미 국무부의 커트 캠벨 부장관입니다. 캠벨 부장관은 계엄 사태 직후인 4일 워싱턴 DC의 아스펜 안보포럼(ASF)에 참석,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대해 “매우 문제 있고 위법한 행동으로, 예측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심하게 오판(badly misjudged)한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또 “한국이 이런 조치를 관리하고, 명확하고 단호하게 반대하는 회복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한국의 민주주의 강도와 깊이에 대해 매우 안심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이 2024년 7월 워싱턴 DC를 방문한 김영호 통일부 장관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1987년 한국이 민주화된 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가 통치 문제로 미국의 부장관으로부터 공개적인 비판을 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평시같으면 문제가 돼도 크게 됐을 사안입니다만, 우리나라의 어느 외교관도 미국에 항의하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시각에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대한민국 비상사태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그 발언의 강도는 캠벨의 비판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흔히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것과 유사했습니다. 미리 통보를 받지 못해 화가 났다는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트럼프의 방위비 재협상 시도 우회 비판
캠벨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아시아를 중시하는 ‘아시아 회귀 정책(Pivot to Asia)’을 추진했고,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백악관 인도·태평양 조정관에 이어 현직을 맡고 있습니다.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국가를 총괄하는 ‘아시아 차르’로 불리는 실세입니다.
그는 1990년대 중반 국방부 동아태 부차관보를 맡으면서 30년 가까이 한국 문제를 다뤄와 한국에 지인들이 많습니다. 지한파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계엄 사태 직전인 지난 달,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한 회의에 나와 차기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우호적인 한미관계가 계속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한국은 매우 관대하고 너그러운 방위비 협정을 체결했다”며 “차기 행정부에서도 이런 지혜가 충분히 발휘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차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최대 9배까지 올리겠다고 하자 이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한국을 변호하고 나선 겁니다. (한국은 지난 10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2026년에 전년 대비 8.3% 오른 1조 5192억원으로 정하고 2030년까지 매년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을 반영해 올리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에 앞서 그는 지난 4월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바 있습니다. 이는 윤 대통령의 실책으로 여당인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대패한 직후여서 거의 기사화되지 않았습니다.
캠벨은 당시 허드슨 연구소 대담에서 지난해 8월 처음으로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이 열린 것을 상기시키며 “한일 두 정상이 매우 어려운 역사적 문제를 극복하려는 결단은 놀라웠다”고 했습니다. 그는 “만약 진정으로 누가 국제 무대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와 노벨 평화상 수상 자격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두 정상의 공동 수상이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바이든 행정부를 대표해서 ‘윤석열-기시다 공동수상’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위법’ ‘오판’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윤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것은 바이든 행정부 차원의 ‘경고’이자, 깊은 배신감을 토로한 것으로 보입니다. 윤 대통령이 어처구니없는 계엄 선포로 어렵게 쌓아 올린 한미일 3국 협력체제를 붕괴시키는데 대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023년 10월 커트 캠벨 당시 백악관 NSC 인도태평양 조정관이 한미동맹 70주년 기념식에 참석, 기념사를 하고 있다./주미한국대사관
◇ 오바마 행정부 동아태 차관보로 활동
제가 캠벨에 주목한 것은 2007년 5월 워싱턴 DC에 부임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캠벨은 2008년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미국안보센터(CNAS)를 만들면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CNAS는 대선 때 오바마의 싱크탱크로 활동하면서 여러 외교안보 정책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피닉스 이니셔티브(Phoenix Initiative)’ 보고서에서 러시아와 협상, 미국의 핵무기를 1000개 수준으로 대폭 감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2008년 11월 13일 백악관 바로 옆의 윌라드 호텔에서 열린 CNAS 행사는 그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이날 CNAS의 ‘간판’인 캠벨과 제임스 스타인버그 전 NSC 부보좌관(나중에 국무부 부장관) 이 ‘쉽지 않은 정권 인수인계(Difficult Transition)’ 출간 기념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때 약 500여 명이 몰려 책에 서명을 받기 위해 긴 줄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CNAS 공동 창설자인 미셸 플루노이(나중에 국방부 차관) 는 오바마 정부 인수위원회의 국방부 인수팀장으로 선발됐습니다. 당시 하마평대로 캠벨은 2009년 1월 출범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 임명됐습니다.
그의 부인 레이얼 브레이너드는 클린턴 백악관의 국가경제 부보좌관에 이어 오바마 행정부의 재무부 국제 담당 차관으로 임명돼 ‘파워 엘리트 부부’로 주목받았습니다. 브레이너드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연방준비제도(연준) 부의장을 거쳐 2023년 2월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에 임명됐습니다. 캠벨과 브레이너드는 각각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 부교수, 매사추세츠공대(MIT) 응용경제학과 부교수 시절 보스턴에서 만나 결혼, 3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조선일보 독자들과 interact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오바마 정부에서 한반도 정책을 이끈 캠벨은 주미한국대사관과 한국 특파원들의 매일같이 주시해야 할 인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단독 인터뷰를 요청한 끝에 2010년 10월 국무부 6층 캠벨의 방에서 그와 마주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방 한 쪽이 가족 사진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상 위에도 딸 3명 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캠벨은 저와 악수하며 “한국언론과 별도의 인터뷰 하기는 처음이다. 조선일보 독자들과 interact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가 ‘교감하다, 소통하다’는 의미를 가진 interact 라는 표현을 쓴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북한과의 대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대단히(extraordinarily) 명확하고, 대단히 일관돼 있다”며 “한반도 긴장 완화 초기의 중요한 과정은 남북한이 더욱 개선된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캠벨과의 인터뷰에서 기억나는 질문은 크게 두 개입니다.
―(오바마 행정부는) 한국이 운전석에 앉아 모든 한반도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미국은 이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으려는 것 같다.
“그 말에 많은 부분을 동의하면서 몇 단어만 바꾸고 싶다. 때때로 미국과 북한 간의 외교가 한국의 입장보다 앞에 있었던 그런 시대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미국은 한국의 파트너로서 전략적 이해를 갖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해야 할 중요한 리더십 역할이 있다. 한·미 양국이 상호 이해를 극대화하는 것은 최대한 긴밀한 협력으로 북한에 대응하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중국과 어떤 관계를 갖길 바라는가.
“(2010년 3월) 천안함 사태가 발생한 후 중국측에 여러 차례 ‘지난 15년간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바로 한·중관계의 발전’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중국이 북한을 편들어서 한국의 중국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그동안 발전하여 온 한·중관계가 더 진전되기를 바라고, 신뢰가 다시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를 대립시켜 보는 시각이 강합니다. 우파는 우파대로, 좌파는 좌파대로 한미-한중 관계에 대해 편견이 있는데, 캠벨이 미국의 입장을 솔직하게 피력했다고 생각합니다.
캠벨이 지한파라고 해서 미국의 국가 이익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국방부 부차관보 시절 주한미군 방위비가 제대로 인상되지 않으면 미군을 감축시킬 수도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기억하는 한국 외교관도 있습니다. 당시 우리측은 이를 일종의 협박으로 인식했습니다.
한국 외교부의 특정 인사를 거명하며 “내 처를 제외하고는 내가 가장 많이 싸운 사람”이라는 조크를 한미 양국 인사들이 모인 식사 모임에서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미 양국이 문을 걸어 닫고 진행하는 협상에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 클린턴 방북 토대로 김정일 남은 수명 정확히 예측
캠벨은 2010년 3월 방한 당시 우리 정부 관계자 등에게 “김정일의 수명이 3년 남았다”고 전해줘 화제가 됐습니다.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김정일의 건강 문제에 대한 미국의 분석을 알려준 겁니다.
조선일보는 이를 토대로 2010년 3월 17일자에 [“김정일 수명이 3년 정도 남았다”면…]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김정일은 캠벨의 발언 후 1년 9개월 뒤인 2011년 12월에 사망했습니다.

▲2009년 8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맨 오른쪽)의 방북 당시 김정일을 주시하고 있는 클린턴의 주치의 로저 밴드 교수(오른쪽에서 세번째)/연합뉴스
당시 캠벨이 김정일 수명을 예측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09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이 있습니다. 클린턴은 2009년 8월 그해 3월 북·중 접경지역에 취재갔다가 북한에 억류된 미국 여기자 두 명을 데려오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이때 클린턴의 주치의 역할을 하는 로저 밴드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가 동행했습니다.
응급의학 전문의인 밴드 교수는 방북하기 전에 정보기관으로부터 김정일을 만나게 될 경우에 대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김정일의 걸음걸이를 비롯해 치아, 머리카락, 손발의 움직임, 발음 등을 정밀하게 관찰할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클린턴은 약 3시간 동안 김정일을 만나는 자리에 밴드 교수를 배석시켜 김정일을 바로 코앞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밴드 교수는 평양에서 돌아와 김정일의 건강상태를 보고했고, 미 정보기관은 이를 토대로 그의 수명을 예측했습니다. 캠벨은 이같은 예측을 당시 이명박 정부와 공유하며 유사시 한미 양국의 더욱 증강된 협력 태세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39회>'윤석열 인터뷰' 9개 면에 펼친 요미우리 실세 와타나베
60년대 한일국교 정상화 깊숙이 관여 후
일본 내에 한일관계 정상화 중요성 알려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 주장하기도
74년간 '평생 기자' 일관 후 98세로 타계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지난해 3월 윤석열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1면부터 총 9개 면에 걸쳐서 보도했습니다. 당시 윤 대통령이 3 · 1절 기념사를 통해 조건 없는 한일 관계 개선을 언급하고, 징용 문제를 한국이 먼저 책임지고 배상하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자 파격적인 편집과 보도로 호응한 겁니다. 이는 일본 사회의 여론을 바꾸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19일 타계한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 주필은 1960년대 당시 차기 총리로 거론되던 자민당의 거물 오노 반보쿠 부총재의 양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신임을 받았다. 와타나베는 그의 방한을 성사시켜 박정희 대통령과 만나게 했다. 사진은 와타나베(맨 오른쪽)가 1960년대 오노 부총재를 취재하고 있는 모습/요미우리 신문 2024년 12월 20일자
올해 5월 개최된 제주포럼에 박철희 당시 국립외교원장(현 주일대사)과 함께 발표자로 나온 모리 다케오(森健良) 전 외무성 차관이 “윤 대통령의 (한일 관계 정상화) 결단에 대해 존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가 됐습니다.
2018년 대법원의 일제 징용 배상 판결, 2019년 아베 내각의 경제 제재로 양국 관계자들이 악수조차 하지 않았던 시기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입니다. 요미우리의 ‘초대형 9개면 인터뷰’가 일본 사회의 변화를 견인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상화 된 한일관계가 윤 대통령의 어이없는 12·3 자폭계엄으로 다시 흔들릴 가능성이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요미우리 신문이 이처럼 대규모의 지면을 할애해 배경에는 ‘일본의 마지막 괴물’ ,’막후의 쇼군(최고 실력자)’으로 불려오다가 19일 별세한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98) 대표 겸 주필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요미우리를 움직였던 실세 와타나베 주필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와타나베는 1995년 아사히신문이 2002년 한 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주장하고 나서자 “공동 개최한다면 양국 모두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며 이를 지지하고 나서는 등 한일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기원해왔습니다.
◇ 자민당 실력자 방한 성사시키고, 김종필-오히라 메모 특종
와타나베는 기자이면서도 한일 국교 수교 정상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특이한 인물입니다. 와타나베는 1960년대 차기 총리로 거론되던 자민당의 거물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부총재의 양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노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와타나베는 2020년 자신의 일생을 다룬 NHK 다큐멘터리에서 “오노 부총재는 한국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어서 이전부터 한국을 싫어했었다”고 했습니다.
1962 년 한국 정부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던 와타나베가 그런 오노를 설득했습니다. 그는 “오노와 김종필(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게 해줬더니 얘기가 잘 통해서 서로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오노가 방한 결단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오노는 1962년 11월 방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한일 국교 정상화의 기틀을 놓았습니다.
와타나베가 한일 수교 조건을 기록한 역사적인 메모를 입수한 것은 1962년 서울 방문 때였습니다. “오히라-김종필 합의 문서는 김종필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무상 원조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1억달러라고 쓰인 문서를 그가 보여줬다. 3 · 2 · 1…. 배상 금액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요미우리는 와타나베가 김종필 부장으로부터 취재한 내용을 1962년 12월 1면 톱기사로 보도했습니다.
와타나베는 자민당 거물의 방한을 성사시키고 이를 1면 톱 특종 기사로 쓴 데 이어 ‘JP-오히라’ 메모를 다시 단독 보도해 한일 양국을 모두 흔들어 놓았습니다. 김종필에 대해선 “두뇌가 우수했다. 인격도 좋고…. 재팬(일본) 콤플렉스도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주필이 2020년 NHK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고 있다. 와타나베 주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대해 "서울 방문 당시 김종필로부터 정보를 얻었다"고 말했다. /NHK
그는 NHK 다큐멘터리에서 1960년대 자신의 역할이 기자로서 의 선을 넘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전례 없는 것이지만 양국 간 국교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국교 정상화가 양국 모두에 플러스가 된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기자 중에 니시야마 다키치(西山太吉) 전 마이니치신문 기자가 있습니다. 니시야마는 일본의 유명 소설가 야마자키 토요코의 작품 ‘운명의 사람’ 실제 모델입니다. (니시야마는 1971년 미일 오키나와 반환 협정에 원상복구 비용 약 4000만엔을 일본이 부담키로 한 밀약을 특종했으나, 외무성 여자 직원과의 불륜을 통해 이를 취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니시야마는 “와타나베가 오노 부총재의 방한을 기획하고 동행자의 명단까지 만든 것은 물론 섭외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 요미우리 6개면에 걸쳐서 와타나베 추도
요미우리는 와타나베가 타계하자 20일자 1면 사이드 톱에 이어서 정치, 경제,스포츠면 등 총 6개 면을 할애해서 그를 추도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와타나베는 지난달 말까지도 정기적으로 출근, 임원 회의에 참석했으나 이달 들어 갑자기 입원했습니다. 요미우리는 그가 “숨지기 며칠 전에도 (병상에서) 사설을 점검하면서 마지막까지 주필로 집무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부고에는 “평생 기자로 일관했다”는 제목이 달렸습니다.
와타나베는 NHK가 다큐멘터리에서 “와타나베의 주장과 행동이 헤이세이(平成·아키히토 천황 재임시기 1989~2019) 시대에 큰 영향을 줬다”고 평가할 정도로 막후에서 일본 사회를 움직이는 거물로 평가돼 왔습니다. 일본 정계에서 ‘나베쓰네’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그는 도쿄대 시절에는 공산당 지부 책임자였지만,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시하는 것에 반발해 전향했습니다. 1950년 요미우리에 입사 후 워싱턴지국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장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1991년 사장이 되자 일본 사회 우경화에 맞춰 보수적 색채가 강한 지면과 공격적 경영으로 신문 부수를 늘려왔습니다. 그의 사장 재임 중 요미우리는 1994년에 최초로 1000만부를 돌파했습니다. 2001년 1월에는 1031만 91부 발행 기록을 세웠습니다. 1996년부터 약 8년 동안 프로야구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로 활동하면서 스포츠 분야로도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 ‘검증 전쟁 책임’ 기획으로 일제 군국주의 비판
그는 일제 군국주의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요미우리는 2005년부터 1년간 ‘검증(檢證) 전쟁 책임’이라는 기획물을 연재했는데, “군국주의자들이 수백만 명을 죽여 일본을 폐허로 만들었다. 젊은이들에게 전쟁 책임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회고했습니다.
1945년 패전 이후에 군국주의자를 엄격하게 처벌했어야 일본 정치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친한 관계를 맺었던 요시다 시게루, 하토야마 이치로, 이케다 하야토 전 총리는 모두 전쟁에 반대했었다고도 했습니다. 또, 1983년 다나카 가쿠에이와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연합해 나카소네가 총리가 된 배경에도 전쟁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둘 다 젊은 시절 군국주의가 일으킨 전쟁을 겪으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 공감했기에 나카소네가 지원을 요청하고 100여 명의 의원을 거느리고 있던 다나카가 그를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요미우리 신문은 20일 와타나베 쓰네오 주필의 별세를 1면 사이드톱에 이어서 정치, 경제, 스포츠 면 등 총 6개면에 걸쳐서 다뤘다. 그만큼 그는 일본 사회를 막후에서 움직이는 실력자였다. /요미우리 2024년 12월 20일자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을 모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반대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에 대해선 “역사도 철학도 모르고, 공부도 하지 않으며 교양도 없다”고 맹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94년 자위력 유지와 환경권 신설, 헌법재판소 창설 등을 명기한 헌법 개정 시안을 만들어 개헌을 주장했습니다.
와타나베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정언(政言) 유착의 대표적 기자이나 그의 활약은 독보적입니다. 그는 일본 정계의 유력 정치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총리와 내각 인선 및 주요 정책에 개입해왔습니다. 이와 관련 요미우리는 19일 “(와타나베가) 나카소네 야스히로, 아베 신조, 기시다 후미오 등 역대 총리들과 친분이 두터워 정치권은 물론 각 방면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20일에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가 그에 대해 “정치가를 움직여서 정국을 움직여가는 신문기자”라고 평가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특히 존 F 케네디가 미 대통령이 된 과정을 연구하며 나카소네 총리 만들기에 앞장섰습니다. 그의 묘비에 새겨질 문구는 나카소네가 써 줄 정도로 평생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베 신조가 2012년부터 8년간 총리로 집권할 때는 ‘언제든 총리와 통화가 가능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화제가 된 NHK 다큐멘터리
1926년생인 와타나베가 2020년 NHK 다큐멘터리에서 전성기 못지않은 기억력과 논리력으로 쇼와(昭和), 헤이세이(平成) 시대 정치에 대해 회고하는 모습은 많은 일본인을 놀라게 했습니다. 와타나베는 당시 일본 정치의 이면(裏面)에 대해서도 비화를 털어놓았습니다. 요미우리 라이벌인 아사히는 1회가 방송된 후 “와타나베 주필의 마음 좋은 할아버지 같은 모습은 독재자 이미지와는 매우 다른 것”이라며 “다음 방송도 꼭 보고 싶다”는 평을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1950년에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당시 일본 정계에서 돈이 자주 오갔다고 회고했습니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총리가 될 때 전당대회장 복도에서 의원들이 돈을 주고받은 것을 목격한 그는 “마치 성관계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를 주도한 이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무상이었습니다. 그는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가 대장성(大藏省) 대신일 때 비서관을 지낼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라가 정치적으로 성장, 주목받기 시작하자 이케다가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오히라 외상이 내게 ‘이케다 총리가 나를 싫어한다. 넘버 원은 넘버 투를 싫어한다. 그것은 질투다.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라고 믿었는데… 정치는 미묘하다’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유능한 정치부 기자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거론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인이 불우할 때 정성을 들여서 각별한 관계를 맺고,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권력투쟁 일삼으며 종신 독재자 됐다”
일본 사회에는 그의 지나친 권력 지향성을 지적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요미우리 내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와타나베 왕국’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일본에서 요미우리는 디지털화에 뒤처진 신문으로 통하는 데 그 배경으로 ‘페이퍼 신문’에 집착하는 와타나베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전횡(專橫)의 카리스마 와타나베 쓰네오’라는 책을 출간한 저널리스트 오시타 에이지(大下英治)는 그가 사내 권력 투쟁을 일삼으며 대표 자리에 오른 후 ‘종신 독재자’가 됐다고 비판했습니다.
P.S.
1. 2020년 도쿄특파원 시절, NHK가 와타나베 다큐멘터리를 방연한 후 그를 인터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1060년대 한일 수교 과정에 대해 말하지 않은 부분이 더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정치와 언론의 관계는 영원한 숙제인데,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언론관에 대해서도 직접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요로를 통해서 와타나베 인터뷰를 타진했습니다. 당시 제게 돌아온 답신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해서 고령의 와타나베 주필이 외부 인사를 만날 수 없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쿄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2021년 4월 귀국 후에도 여러 차례 와타나베 인터뷰를 계속 타진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쉽습니다. 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