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재상 열전 2/ 월간조선 2024.01월 호 13 이준경(李浚慶)전 - 24 〈마지막 회〉 숙종 때 10번 이상 재상에 오른 최석정(崔錫鼎)
조선 재상 열전/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월간조선 2024
01월 호
13 이준경(李浚慶)전
난세를 극복하고 세상을 안정시킨 사직지신
⊙ 명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선조 옹립
⊙ “권간(權奸)이 권세를 부리던 당시 지조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 “신진들의 논의가 과격하고 예리한 것을 보고는 항상 억제하여 조정하려 하였다”
⊙ “사사로운 붕당 깨뜨리지 않으면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은 조선 초 때 크게 번성했던 최고 명문가 광주(廣州) 이씨의 후손으로, 조선 중기 문신 성현(成俔·1439~1504년)은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 제2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문벌(門閥)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다음으로는 우리 성씨(成氏)만 한 집안도 없다. 광주 이씨는 둔촌(遁村) 이후로 점점 커졌으니 둔촌의 아들 지직(之直)은 참의(參議)였고, 참의는 아들이 셋인데 장손(長孫)은 사인(舍人)이었고, 인손(仁孫)은 우의정(右議政)이었고, 예손(禮孫)은 관찰사(觀察使)였으며, 사인의 아들인 극규(克圭)는 지금 판결사(判決事)로 있다. 우의정에게도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극배(克培)는 영의정(領議政)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극감(克堪)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광성군(廣城君), 극증(克增)은 광천군(廣川君), 극돈(克墩)은 이조판서(吏曹判書) 광원군, 극균(克均)은 지중추(知中樞)였으니, 모두 일품(一品)에 올랐는데, 이 네 아들은 공이 있어 군(君)으로 봉한 것이다. 광성군은 비록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세좌(世佐)는 지금 광양군(廣陽君)이며, 문자(文字)·문손(文孫)도 높은 반열에 서서 서로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
둔촌은 지금의 서울 강동구 둔촌동 일대로 이집(李集)의 호다. 이지직의 호는 탄천(炭川)이다. 세조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정 회의에 광주 이씨 집안 ‘극’자 돌림만 8명이 참석해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중 이준경의 증조할아버지 이극감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1445~1504년)도 중추부 판사를 역임했다. 아버지 이수정은 홍문관 부수찬을 지냈다. 아마도 연산군 시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광주 이씨의 흥성은 계속 이어졌을지 모른다.
갑자사화
이세좌는 형조판서를 지낸 이극감의 아들로 성종 8년(1477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초고속 승진을 계속했다. 연산군 때에도 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9년(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서 어의(御衣)에 술을 엎질러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은 생모 윤씨가 폐위(廢位)당할 때 이세좌가 극간(極諫)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씨에게 사약(賜藥)을 전달했다 하여 자살을 명했다. 이세좌는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세좌에게는 수원(守元)·수형(守亨)·수의(守義)·수정(守貞) 네 아들이 있었는데 연산군 10년(1504년) 5월 13일 같은 날 모두 아버지의 죄에 연좌(連坐)되어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斬刑)을 당했다. 당시 실록의 평이다.
“수원·수형·수의·수정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죄 아닌 일로 함께 참형을 당하니 통탄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형제의 이름에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주역》의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럼에도 때를 잘못 만나 모두 비명횡사한 것이다.
4형제 중 막내 이수정(1477~1504년)이 준경의 아버지이다.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형 윤경(李潤慶)은 7세, 준경은 6세로 한 살 터울이었다. 아버지는 참형을 당했고 어머니 신씨(申氏)는 종이 되었다. 한성부 내자시 노비가 된 신씨는 다시 장녹수 집 노비로 쫓겨났다.
신씨는 일찍부터 두 아들에게 직접 《소학》을 가르쳤다. 특히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은 늘 신씨에게 “이 아이들은 세상에 이름을 떨칠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니 조심해서 보호하라”고 당부하곤 했다.
어린 나이에 유배 생활
▲조광조
윤경과 준경은 이때부터 충청도 괴산에서 ‘유배살이’를 했다. 이때 일화 하나가 《동고유고(東皐遺稿)》 연보에 실려 있다. 동고(東皐)는 이준경의 호다.
준경이 7세 때 일이다. 하루는 집주인의 실화(失火)로 준경 형제의 낡은 솜옷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이웃사람들이 찾아와 위로의 말을 했고, 유모도 준경의 손을 잡고 울었다.
“이제 낡은 솜옷마저 불에 타 없어졌으니 도련님, 추워서 어떻게 밤을 나겠습니까?”
준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이 옷은 이와 벼룩이 득시글거려 항상 괴로웠는데 불에 다 타버렸으니 이제 밤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하는 모습이 태연하여 듣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준경은 8세 때인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남과 동시에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종 생활을 하던 어머니와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 신씨는 ‘과부가 키운 자식’이라는 삿대질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윤경·준경 형제를 대단히 엄하게 가르쳤고 바깥출입도 금지시켰다. 또 학문을 익힌 바 있던 어머니 신씨는 형제에게 직접 《효경(孝經)》과 《대학(大學)》을 가르쳤다. 윤경·준경 형제에게는 사촌형님인 이연경(李延慶·1484~1548년)이 있었다. 이연경도 같은 시기에 유배를 갔다가 이때 풀려났다.
이연경은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당시의 신진 사림(士林)들과 가깝게 지냈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해 사헌부와 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같은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이 이연경은 연산군 때 화(禍)를 입은 집안의 자손이라 하여 특별히 그의 이름을 삭제해준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이연경은 공주에서 은거하면서 성리학과 양명학 등을 두루 공부했고 그의 학문적 명망을 듣고 찾아온 노수신(盧守愼)과 강유선을 사위로 삼기도 했다. 이준경이 훗날 성리학이 기본임에도 다른 학문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연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33세에 뒤늦게 급제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준경은 스물두 살이었다. 이미 사화를 겪은 바 있는 집안인데다가 학문적 방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준경은 문과 급제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 대신 각 분야의 많은 사람과 교유를 하며 20대를 보냈다. 조식(曺植·1501~1572년)과의 깊은 교감도 이때 이루어졌다. 조식에게는 《심경(心經)》을 선물하기도 했다. 훗날 이준경은 술학(術學)에도 깊은 조예를 보이는데 이 또한 이 시기의 공부에 따른 것이다.
이에 반해 이황(李滉·1501~ 1570년)은 일찍부터 성리학으로 방향을 잡았다. 스무 살 무렵 하루는 집에 있는데 누가 와서 “이 서방!” 하고 불러서 자신을 찾는 줄 알고 나가보니 늙은 종을 부르는 소리였다. 이에 이황은 “내가 이뤄놓은 것이 없다 보니 이런 욕을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과거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낙방하는 등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준경은 33세 때인 중종 26년(1531년) 마침내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선다. 이때 이황은 진사시에만 합격해놓고 고향 주변 산사(山寺)를 돌며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33세 때인 중종 29년(1534년) 문과에 2등으로 합격했다. 두 사람 모두 문과 급제는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이준경과 이황이 관리의 길에 첫발을 디딘 이 무렵은 권간(權奸) 김안로(金安老·1481~1537년)의 세상이었다. 남곤(南袞·1471~1527년)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갔다가 1527년 조정으로 복귀한 김안로는 특히 이황이 문과에 급제한 그 무렵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전횡을 부리고 있었다. 이황이 처음으로 맡은 보직은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한데 김안로는 이황이 급제 후에 자신에게 인사를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내쫓아버렸다. 이황은 한직인 승문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김안로는 더 나아가 이황을 추천했던 예문관 관원들까지 모두 파직시켜버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문안 인사’는 패거리 형성에서 대단히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었는데 이황이 이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신사무옥
그런데 이황이 관리의 길에 설 무렵 이준경은 조정에 없었다. 1531년 문과 급제 후 이듬해 홍문관 정자를 거쳐 1533년 부수찬으로 승진한 이준경은 동료인 구수담(具壽聃·1500~1549년)과 함께 안처겸(安處謙·1486~1521년)을 비롯한 신사무옥(辛巳誣獄) 연루자들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다가 파직을 당했다.
신사무옥이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지지하다가 실각한 정승 안당(安瑭·1461~1521년)의 아들 안처겸이 이정숙(李正淑), 권전(權磌)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심정(沈貞·1471~1531년)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한 사건을 말한다. 이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안당의 집안사람 송사련(宋祀連·1496~1575년)은 처형뻘이 되는 정상(鄭鏛)과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하였다. 이로써 사건이 벌어져 안처겸·안당·안처근(安處謹)·권전·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이약수(李若水)·김필(金珌) 등 10여 명이 관련되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이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송사련의 아들이 바로 후일 서인(西人)의 모주(謀主)가 되는 송익필(宋翼弼·1534~1599년)이다.
이후 중종 32년 김안로를 비롯한 ‘3간(奸)’이 제거될 때까지 5년 동안 이준경은 세상을 떠돌며 책과 사람 만나기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황의 좌천과 이준경의 파직은 실은 연결되어 있었다. 김안로가 이황을 좌천시키면서 들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그의 장인 권질(權礩·1483~1545년)이 바로 안처겸 사건과 연루되어 경상도 예안(현 경북 안동)에 유배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권질의 동생 권전은 신사무옥 때 고문을 당해 죽었다. 이황은 인척 관계로 인해 좌천을 당했고 이준경은 이 사건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김안로에게 당한 것이었다.
이황과 함께 근무
김안로의 조정에서 이황의 앞길은 순탄치 못했다. 1535년(중종 31년) 이황은 6품 직인 선무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황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 근처의 수령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조정의 권력투쟁에도 염증이 났다. 그러나 김안로의 저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중종 32년 김안로 등이 실각하자마자 이준경은 호조좌랑으로 복직한 뒤 홍문관으로 자리를 옮겨 그해 말에는 응교(應敎)에까지 올랐다. 응교면 정4품 직이었다. 이후 이준경은 중종 36년 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으로 특진한다.
한편 이준경이 응교로 있던 중종 34년 말 이황은 홍문관 수찬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이때 두 사람은 같은 기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아마도 두 사람은 이전부터 친교를 맺었을 것이다. 또 이 무렵 두 사람은 홍문관과 사헌부 등을 함께 옮겨 다니며 돈독한 선후배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중종 35년 12월에는 김안로에게 당해 귀양 간 사람들을 풀어주는 문제로 이준경과 함께 잠시나마 파직되기도 했다. 이때는 두 사람 모두 사헌부에 있을 때였다.
이준경은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다. 이 무렵 시를 지어 정사룡(鄭士龍·1491~1570년)이라는 문인에게 보여주며 “옛사람의 시와 비교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정사룡이 “비록 옛사람 것만은 못하나 친구를 위하여 이별의 정을 나타내는 시문을 짓는 데는 넉넉하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이준경은 다시는 시를 읊지 않았다.
綱九目疎
이준경이 홍문관 직제학이던 중종 36년 4월 이황은 교리로 있었다. 직제학은 정3품 당하관, 교리는 정5품이었다. 이준경이 이황의 직장 상사였다. 이때 부제학이 바로 이언적(李彦迪·1491~1553년)이었다.
당시 홍문관 관리들은 의기투합해서 중종에게 학문과 정치, 민생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는 유명한 상소를 올린다. ‘일강구목소(一綱九目疎)’가 그것이다. 일강, 즉 가장 중요한 원칙은 ‘치중화(致中和)’로 올바른 화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침이 바로 구목이다.
첫째, 궁궐 내의 기강은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宮禁不可不嚴), 둘째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고(紀綱不可不正), 셋째 인재를 잘 가려서 쓰지 않으면 안 되고(人才不可不辨), 넷째 제사를 격식에 맞도록 제대로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되고(祭祀不可不謹), 다섯째 백성의 곤궁함을 구제해주지 않으면 안 되고(民隱不可不恤), 여섯째 백성을 일깨우는 일을 밝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敎化不可不明), 일곱째 형벌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刑獄不可不愼), 여덟째 사치는 금하지 않으면 안 되고(奢侈不可不禁), 아홉째 신하들이 간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諫諍不可不納).
이준경이나 이황은 이런 지도자와 정치를 바랐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황의 은퇴
▲이황
중종이 죽고 인종이 뒤를 이었으나 병약했던 인종은 즉위 8개월 만인 1545년(을사년) 7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인종은 세자 때부터 사림들로부터 큰 기대를 받은 임금이다. 인종의 죽음이 사림들에게 준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이런 가운데 12세 명종이 뒤를 이었고 문정왕후가 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에 나섰다.
당시 홍문관 응교로 있던 이황은 다른 동료 직원들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부당하다”고 말하자 “대비인 문정왕후 외에 누가 섭정을 할 수 있는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반박했다. 형식 논리로 보자면 이황의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특히 이황의 성품상 그가 문정왕후나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려고 이런 말을 했을 리 또한 만무했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 두 명이 이황을 불러 나무랐다. 그러나 이황은 “떳떳하다”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밝혔다. 이후 두 사람은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결국 윤원형에 의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사실 이황과 윤원형은 사마시 동년(同年), 즉 사마시 동기 합격자였다. 그러나 이황은 평소에 윤원형을 제대로 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황은 윤원형과의 인연을 떠나 사리(事理)를 말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황의 마음은 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홍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등을 맡고 있던 그는 여러 차례 사직서를 제출했고 경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애당초 대윤(大尹·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일족인 윤임, 윤여필 등)이나 소윤(小尹·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일족인 윤지임, 윤원형, 윤원로 등)과 멀리했던 그이기에 사화가 그에게 직접 닥쳐오지는 않았지만 9월 들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병도 심해지고 정치에 대한 환멸도 깊어만 갔다. 사직서를 제출하면 위에서는 반려하는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한 해가 지나갔다. 이듬해 어렵사리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기한을 넘겨 그해 5월 해직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황은 을사사화의 피바람을 비켜갈 수 있었다. 이후 이황은 고향마을에 암자를 짓고 본격적인 학문 수양과 제자 양성에 들어간다.
을묘왜변 진압
한편 이준경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중종이 승하하자 이를 명(明)나라에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 차출되어 북경을 다녀온다. 한양으로 돌아와서는 형조참판에 오른다.
이때 대윤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조정에서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윤원로(尹元老)를 죽여야 한다는 논의를 하고 있었다. 특히 조정 신하들은 먼저 윤원로를 제거한 후에 대비에게 보고하자고 의견을 모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성우윤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준경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대비가 위에 계신데 품의도 않고 지친(至親)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윤원로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이황과 마찬가지로 형식 논리로 봤을 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발언 하나가 이준경의 생사를 결정짓는다. 곧바로 대윤을 제거하려는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이준경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원형 세력의 핵심을 이루던 이기(李芑·1476~1552년)와 임백령 등은 이준경이 조정에 있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그는 좌천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명종 3년 평안도관찰사에서 병조판서로 특진되어 중앙조정으로 돌아온 이준경은 다시 이기의 모함으로 인해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를 가기도 하지만 얼마 후 복귀해 형조·이조·병조·공조 등의 판서를 두루 거쳤다. 1555년(명종 10년) 전라도 일대에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자 이준경은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성공적으로 변을 진압했다.
사직지신
그 공으로 이준경은 우찬성에 올라 병조판서를 겸하면서 실권을 장악했고 이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윤원형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지만 점점 자라가는 명종의 총애가 컸고 워낙 능력이 출중한데다 청렴했기 때문이었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세력의 제거를 주도하는 것도 좌의정 이준경의 몫이었다.
명종 시대 22년을 참여의 입장에서 보낸 이준경의 길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권간(權奸)이 권세를 부리던 당시 준경은 지조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자주 배격을 당하였으나, 그들이 끝내 감히 가해하지 못한 것은 절조와 행검에 하자가 없고 논의가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정한 논의에 대하여 그것을 바로잡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나, 그의 본심은 사림을 보호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청론(淸論·사림의 의논)이 믿고 의지하는 바가 있어 여망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윤원형이 무너진 뒤에 비로소 국사를 담당하고 금상(今上·명종)을 보좌하여 급한 상태를 안정 국면으로 돌아서게 하였는데, 주상도 국사를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준경은 성심과 공도로 문무 관원을 재목에 따라 써서 계책이 행해지고 공이 이루어졌으며 인심을 진정시키고 국맥을 배양하였으니, 참으로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할 만하다.〉
정승의 체모를 지키다
그렇다고 이준경이 사림에 대해 무조건 동조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경륜가였다. 그래서 그는 “사화(士禍)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신진들의 논의가 과격하고 예리한 것을 보면 항상 억제하여 조정하려 하였고, 또 혁신하여 일거리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사림이 흔히 그 점을 부족하게 여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에 이준경은 웃으면서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낫지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한다.
이준경은 비판자의 눈에는 ‘오만하다’는 평을 받을 만큼 당당했고 행동 하나하나에 위엄이 가득했다.
“이준경은 정승으로 있으면서 체모를 잘 지켜 비록 선인(善人)을 좋아하고 선비를 위하긴 하였으나, 자신을 낮추어 굽힌 적은 없었다.”
한번은 어릴 적부터 친구인 남명 조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들어왔다. 이에 이준경은 옛 친구의 입장에서 서신은 보냈으나 끝내 조식을 만나지는 않았다. 이에 서운함을 느낀 조식이 귀향하기 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공은 어찌 정승 자리를 가지고 스스로 높이려 하는가?”
정승이 되었다고 잘난 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에 이준경은 “조정의 체모를 내가 감히 폄하할 수 없어서이다”고 답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은 이런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중망(重望)을 얻을 수 있었고 그가 선택한 ‘하성군 이균(李鈞·훗날의 선조)’에 대해 더 이상의 왈가왈부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런 강직한 인물이 어떻게 윤원형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을까? 을사년(1545년) 인종이 사망한 직후 시점의 일화에 답이 있다. 이때 신하들은 문정왕후에게 알리지도 않고 윤원형의 형 윤원로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한성부 우윤이던 이준경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비가 위에 계시는데 어찌 품의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그 동기를 주살할 수 있는가?”라며 반대했다.
이 일이 아니었으면 그도 을사사화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일을 윤원형이 고맙게 생각해 평안감사로 좌천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고 이후 정승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물론 윤원형에게 아부를 하지도 않았다. 실록은 “준경은 조정에서 꼿꼿하게 집정(執政)하며 끝내 굽히는 일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윤원형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순회세자의 죽음
명종 18년(1563년) 10월 23일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 부를 정도로 중히 여겼기 때문에 순회세자의 죽음은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장래 또한 뒤흔들 수 있는 중대 사안이었다. 이때 순회세자의 나이 13세였다. 게다가 명종에게는 아들이 순회세자 하나뿐이었고 명종 자신의 건강도 좋지 못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명종 앞 인종에게도 자손이 없었다. 거슬러 올라가 중종이 3명의 왕후를 들이면서 낳은 아들 또한 인종과 명종이 전부였다. 첫 번째 왕비였던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순회세자의 죽음은 조선 왕실의 후계 문제를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로 몰아넣었다. 자칫 또다시 왕실 후계 문제로 피바람이 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종의 나이가 이제 서른이었기에 세자를 다시 생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암초는 그의 건강이었다. 그는 심열증을 앓고 있었다. 심열증의 전형적인 증상은 화를 잘 내고 행동이 산만한 것인데 실록을 보면 명종이 화를 내는 장면이 수시로 나온다.
명종 20년 4월 6일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가 사망하자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열흘 후인 4월 16일 약방제조를 맡고 있던 좌의정 심통원(沈通源·1499~?)에게 명종이 자신의 증세를 이야기한다.
“내가 약한 체질로 평소에 위는 열이 나고 아래는 냉한 증세가 있었다. 근년에 들어와서 심기(心氣)가 허약하여져 계해년(1563년) 가을에 놀라고 슬픈 일을 당한 이후로 작은 병이 자주 있어 간신히 보전하여 날을 보내고 있었더니 올봄에 기운이 조금 돌아오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망극한 변을 당하였다. 바야흐로 애통한 중에 있으면서 비위(脾胃)가 편치 못하고 기운도 혹 피곤하기도 하며 가슴과 명치가 막힌 듯하여 음식이 잘 내려가지 않아 지금 환약을 먹고 있다.”
윤원형의 실각
5월 19일에도 갑작스러운 복통과 설사로 약방제조 심통원이 찾아와 맥을 짚었다. 명종의 병환이 이렇다 할 차도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8월부터는 사간원(대사간 박순)과 사헌부(대사헌 이탁)가 나서 명종의 외삼촌이자 20년간 문정왕후 윤씨와 함께 권력을 휘둘러온 영의정 윤원형에 대한 탄핵 상소가 본격화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정왕후 사후(死後)부터 승려 보우(普雨)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연일 올라오고 있었다. 윤원형도 동조할 정도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사 청산 문제였다. 이후 홍문관과 성균관의 유생들까지 나서 연일 윤원형과 보우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렸다.
결국 8월 21일 신하들에게 밀린 명종은 윤원형을 파직했다. 다음 날 윤원형에 이어 영의정에 오른 이준경은 첫날부터 윤원형을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다. 마침내 8월 27일 윤원형은 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당시 식자들의 분위기에 관해 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수십 년간을 전제(專制)하였는데도 조정의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 그 죄를 대놓고 지적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며, 흉악한 짓을 제멋대로 하게 하여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권세가 제거된 뒤에서야 비로소 논하였으니 너무 늦었다. 이 또한 을사년 이후 사기가 꺾이고 인심에 휩쓸려서 화복(禍福)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윤원형이 쫓겨난 뒤에 지방의 한 백성 중 한쪽 팔만 들고서 노래하고 춤추는 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윤원형은 국가에 해를 끼친 놈인데 지금 쫓아내어 백성의 해를 제거했으니 그래서 기뻐서 춤추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어 한쪽 팔만 들고 추는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지금 윤원형은 쫓겨났으나 또 다른 윤원형이 남아 있으니, 만약 모두 제거된다면 양팔을 들고 춤을 출 것이다’고 하였으니, 바로 심통원을 가리킨 말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양팔 모두 들어 춤을 추었을 것이다. 중종 32년(1537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후 윤원형에게 밀착해 좌의정에까지 오른 심통원은 결국 윤원형이 쫓겨나면서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3사의 탄핵을 받아 곧바로 사직했다. 심통원은 선조가 즉위한 1567년에는 김안로에게 아부한 죄로 관직마저 삭탈당한다. 심통원은 명종 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할아버지인 심연원의 동생으로 말하자면 왕비의 작은할아버지였다.
9월 들어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고 윤원형의 첩 정난정이 독살한 그의 본처 김씨의 어머니가 고소를 하면서 윤원형은 점점 더 곤란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을축년의 하서
이런 가운데 명종의 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9월 15일 대궐 분위기는 거의 임종을 앞둔 듯했다. 이날 밤 명종은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영평부원군 윤개를 불렀다. 사실상의 유언을 남기는 자리였다. 여기서 이준경 등은 아주 조심스럽게 비어 있는 세자 자리를 정해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청했다. 명종은 안 좋은 내색을 하면서 거부했다. 그러자 이준경 등은 다시 송(宋)나라의 인종, 고려의 성종과 목종 등도 뛰어난 인품이 아니면서도 종묘사직을 생각해 30세 무렵에 ‘단안’을 내린 적이 있음을 들어 누군가를 지목해줄 것을 은근히 청했다. 이에 명종은 “내전(內殿)에서 생각하여 처리할 것”이라고 답한다. 명종 본인은 자신의 건강이 반드시 회복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실록의 사관은 “주상께서 하답(下答)하기 어려워 이렇게 답한 것이었고 실은 후사(後嗣)를 정할 뜻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명종의 건강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회복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틀 후 영평부원군 윤개,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심통원, 우의정 이명, 좌찬성 홍섬, 좌참찬 송기수, 우참찬 조언수, 병조판서 권철, 이조판서 오겸, 공조판서 채세영, 예조판서 박영준, 형조판서 박충원, 대사헌 이탁, 홍문관 부제학 김귀영, 대사간 박순 등이 언서로 중전에게 국본을 정해줄 것을 청했다. 완강하게 거부하던 중전, 즉 인순왕후 심씨는 언문 친필로 “국가의 일이 망극하니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이균을 입시시켜 시약(施藥)하게 하라”고 답한다. 소위 ‘을축년의 하서’였다.
번복된 하서
애매했다. 명종의 재가 또한 없었다. 신하들은 다시 중전을 압박했다. 자칫하면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중전이 명종을 뵙고 돌아와 답한다.
“방금 국본에 대한 일을 잠시 계품하였더니 성심(聖心)이 몹시 동요하셨다.”
명종은 여전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다음 날에도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이 중전을 찾아와 다시 한 번 재촉했지만 중전은 아무런 답을 줄 수 없었다. 9월 19일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은 중전에게 굳이 이균의 이름을 거명한 사실을 환기시키며 그 마음 변치 말 것을 당부한다. 뭔가 최고 권력을 둘러싼 정치가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17일 자 실록도 “부정 윤건이 중전과 수상(이준경)의 처소를 7~8차례나 왔다 갔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준경이 윤건을 통해 중전에게 은밀하게 아뢰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니 윤건은 바로 심강의 매부였기 때문이다”고 단서를 기록해두고 있다. 심강은 중전의 아버지다.
마침내 10월 4일 명종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일주일 정도 몸을 추스른 명종은 10월 10일 윤개와 이준경, 심통원, 이명 등을 불러 국본의 문제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당시 내 병세가 심해 인심이 불안해하자 대신들이 누차 내전에 계(啓)를 올려 결정을 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내전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써서 내렸었다. 이제 내가 소생했고 국본의 탄생을 진실로 기다리고 바라야 하니 앞으로 다시는 다른 의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대신들도 자신들이 황망 중에 한 일이라며 간곡하게 용서를 빌었다. 이로써 ‘을축년의 하서’는 원인 무효, 없었던 일이 되었다. 잠깐 이름이 언급되고 해프닝으로 끝난 하성군 이균의 그때 나이는 14세였다.
선조의 즉위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새벽 2시경 경복궁 내 작은 침소인 양심당(養心堂)에서 명종이 승하했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로 재위 22년째였다. 그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위세에 눌려 단 한순간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해보지 못한 불운한 군주였다. 묘호는 명종(明宗)이지만 실은 암군(暗君)이었다.
사태는 명종이 위독한 상태를 보이던 6월 27일 심야부터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밤 11시경 중전이 두 정승과 약방제조를 불렀다. 당시 우의정 권철(權轍·1503~1578년)은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영의정은 이준경, 좌의정은 이명(李蓂·1496~1572년)이었다. 이명은 이준경과 궤를 같이했고 호(號)도 같은 동고(東皐)였다. 그러나 영의정과 좌의정 두 사람은 궐내에 없었고 약방제조 심통원만이 머물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우선 심통원과 병조판서 원혼, 도승지 이양원 등만이 양심당에 들어 입시했다. 얼마 후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해 좌승지 박응남, 동부승지 박소립 등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나마 이준경은 의정부에서 유숙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종의 임종(臨終)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의 미묘함에 대해 사관은 아주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만일 이준경의 입시가 늦었다면 중전과 약방제조이자 작은할아버지인 심통원만이 유명(遺命)을 받게 되어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소인(小人·심통원)이 그사이에 미처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이준경이 들었을 때 아직 명종은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말은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준경은 중전에게 하교를 내려주기를 청했고 중전은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지난 을축년에 하서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경들 역시 알고 있다. 지금 그 일을 정하고자 한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을 후사로 삼겠다는 뜻을 넌지시 전한 것이다. 결국 영의정 이준경이 을축년의 하서를 근거로 중전의 승인을 받아 하성군 이균을 다음 국왕으로 결정했다. 명종은 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선조 정권을 안정시키다
▲조선 선조의 초상으로 알려진 그림.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생생하게 전한다.
“이준경은 평소 중망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모두 하는 말이 ‘이때에 이 사람이 있으니 나라가 반드시 그의 힘을 입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할 자가 정해지자마자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던 것은 다 이준경이 사람들을 진정시킨 덕분이다.”
우리가 이준경을 기억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명종이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왕위에 공백이 생길 뻔했으나 영의정으로서 공평무사하게 새 임금을 뽑아 등극시킨 점이다. 이런 경우 흔히 신하들은 자신들이 즉위 과정에서 세운 공로를 내세워 출세하려 하지만 이준경은 당연한 일처리라 여겨 조금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이리 하여 명종의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제의 선조(宣祖)다.
이후 선조의 집권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준경은 원상(院相)이 되어 미숙한 선조가 국왕으로서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선조 1년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의 관작(官爵)을 늦게나마 추증(追贈)하고 노수신, 유희춘 등 을사사화의 피해자들을 유배에서 풀어줌과 동시에 관작도 회복시켜주었다.
선조를 왕으로 추대한 것, 그리고 훈구(勳舊) 세력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사림 세력을 세운 것이 과연 조선 역사를 더 빛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 논란이 있겠지만 이것은 당시로서는 누구나 바라던 일이었고 이준경은 강한 의지와 노련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사림의 패거리 짓기 경고
이제 선조 정권을 안정시키는 임무는 전적으로 영의정 이준경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이준경은 가장 먼저 이황을 선조의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전수하려 하였다. 선조는 이황을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했다. 그러나 이황은 한사코 사양했다. 자신은 병약하고 현실정치에 대해 모른다는 이유였다. 계속되는 강청에 결국 이황은 한양으로 올라온다.
이때의 일화가 있다.
이황이 한양에 들어왔을 때 사대부가 아침저녁으로 그의 문전을 찾아가니, 이황은 한결같이 모두 예로 접대하였다. 최후에 이준경을 찾아가 인사하자 이준경이 말하기를 “도성에 들어오신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이제야 찾아오십니까?” 하니, 이황이 사대부들을 응접하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고 하자, 이준경이 언짢아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기묘년에도 선비의 풍조가 이러하였으나 그 가운데도 염소 몸에 호랑이 껍질을 뒤집어쓴 자가 있었으므로, 사화가 이로 인하여 일어났습니다. 조정암(趙靜庵·조광조) 이외에 그 누구도 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림의 패거리 짓기에 대한 경고의 말이었다. 그 의미를 이황이 모를 리 없었다.
선조 5년(1572년) 7월 영의정에서 물러나 있던 이준경도 눈을 감는다. 이때 “이 늙은이 흙 속으로 돌아가며 전하께 4건을 당부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이를 유차(遺箚)라고 하는데 약식 유언 상소를 말한다. 거기에는 자신이 국왕으로 만든 선조에 대한 이준경의 솔직한 인식과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선조에게 “잘난 체하지 말아야”
“땅으로 들어가는 신 준경은 삼가 네 가지 조목으로 죽은 뒤에도 들어줄 것을 청합니다.
첫째, 제왕에게 있어 가장 큰 일은 무엇보다도 학문하는 일입니다. 정자(程子)가 ‘함양 공부는 경(敬)으로 해야 하고 학문을 진취시키려면 치지(致知)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학문은 치지의 공력 면에서는 보통 이상의 수준이라고 하겠지만 함양의 힘은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것이 매우 준엄하시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 포용하고 공순한 기상이 적으시니, 전하께서는 이 점에 더 노력하소서.
둘째,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위의(威儀)가 있어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천자는 목목(穆穆·단정하고 엄숙한 모습)하고 제후는 황황(皇皇·활달하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하다’고 하였으니, 위의를 차리시는 일을 삼가서는 안 됩니다. 신하가 진언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너그러이 포용하여 예우해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뜻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때로 영기(英氣)를 드러내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은 있으실지언정, 사사건건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계속 지금처럼 하신다면 백관이 맥이 풀려 수없이 터지는 잘못을 이루 다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간하는 일입니다. 신이 듣건대 군자와 소인은 본디 정해진 명분이 있어 숨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당 문종(唐文宗)이나 송 인종(宋仁宗)은 애당초 군자와 소인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사당(私黨)에 이끌려 그들을 분간하여 쓰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시비에 어두워져 조정이 불안정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참으로 군자라면 아무리 소인이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뽑아 써 의심하지 마시고, 참으로 소인이라면 비록 사정(私情)이 있으시더라도 단호히 물리쳐 멀리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하북조정(河北朝廷·당파싸움이 심했던 중국의 북송)과 같은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넷째,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잘못된 행실이나 법에 어긋난 일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말 한마디가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며, 행검을 유의하지 않고 독서에 힘쓰지 않더라도 고담대언(高談大言)으로 붕당을 맺는 자에 대해서는 고상한 풍치로 여겨 마침내 허위 풍조를 빚어내고 말았습니다. 군자는 모두 조정에서 집정하게 하여 의심하지 말고 소인은 방치하여 자기들끼리 어울리게 해야 하니, 지금은 곧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두루 살펴 힘써 이 폐단을 없앨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임금을 아끼고 세상을 염려하다”
하나하나가 다 인간 선조를 꿰뚫어 본 조언(助言)이었다. 어쩌면 이미 선조가 5년여의 집권 기간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병폐였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이런 글을 올렸더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록 사관의 평이다.
“공은 임금을 아끼고 세상을 염려하여 죽는 날에도 이러한 유차를 남겼으니 참으로 옛날의 곧은 신하[直臣]와 같다. 당시에 심의겸(沈義謙) 당이 이 차자를 배척하여 건조무미한 말이라 하며 소를 올려 배척하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군자의 말은 소인이 싫어하는 것이다.”⊙
14 상진(尙震)전
세상을 비켜 사는 지혜로 난세의 명재상이 되다
⊙ “인품과 도량이 넓고 커서 일찍이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이수광)
⊙ 자유분방하면서 대립하는 의견을 능수능란하게 조화시켜가는 보기 드문 정치력 보여줘
⊙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현실권력과 타협했지만, 청렴해서 權奸 소리 듣지 않아

▲상진
상진(尙震·1493~1564년)은 찰방 상보(尙甫)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8세에 아버지까지 여의어 큰 매부 성몽정(成夢井·1471~1517년) 집에서 자랐다. 성몽정은 문과 장원 출신으로 중종 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지냈고 조광조와 가까웠으며 성품이 단아하고 맑았다고 한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따르면 그는 15세 때까지는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동료들에게 조롱을 당한 뒤에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상진은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에서 밝힌 대로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상보가 역참을 돌보는 종6품 찰방에 오른 것이 전부였다. 자기 집안의 한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상진은 글 읽기는 내팽개치고 말 타고 활 쏘는 데만 열중했다. 무인(武人)이 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20세 무렵 주변 친구들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을 알고 공부를 시작해 25세 무렵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이에 앞서 매부 성몽정이 상진의 의중을 기특하게 여긴 일화가 있는데, 한 번은 성몽정이 상진에게 벼슬살이를 해보라고 하자 상진은 “글을 읽는 것은 큰 공업을 세우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답했다. 이 무렵 그는 성수침(成守琛), 성수종(成守琮) 형제와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성수침은 성혼(成渾)의 아버지이다. 이이, 송익필과 함께 서인을 이끈 파주 삼현(三賢)의 그 성혼이다.
尙씨의 유래
여기서 상씨(尙氏)의 유래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과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민족의 손꼽히는 명장(名將)이다. 둘 다 무인인 것 말고도 왕건과 이성계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왕건의 옆에는 도선(道詵)대사가 있었고 이성계의 옆에는 무학(無學)대사가 있었다. 또 당시 전쟁에서는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심이 3대 핵심 요건이었다. 이 중에서 지리를 아는 데는 풍수(風水)만 한 것이 없었다. 당시 왕건이나 이성계에게 풍수는 다름 아닌 군사지리학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적이라도 감싸 안는 포용력이다. 아들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처참한 말로를 맞긴 했지만 이성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鄭夢周)를 끌어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왕건 또한 군사적 우위를 점했으면서도 후백제, 신라가 투항할 때까지 무던히도 기다렸다. 결국 후백제는 견훤의 귀순 등, 내분으로 붕괴되었고, 신라(경순왕) 또한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한데 이렇게 포용력이 큰 왕건조차 도저히 용서 못 할 사람들이 있었다. 후백제의 충청도 목천 사람들이었다. 조선 성종 때 양성지·노사신·강희맹·서거정 등이 편찬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목천 사람들이 끝까지 투항을 하지 않고 버티자 왕건은 이들에게 돈(豚), 상(象), 우(牛), 장(獐) 등과 같은 희귀한 성(姓)을 부여했다. 글자 그대로 돼지, 코끼리, 소, 사슴 등의 짐승 명칭을 성씨로 내린 것이다. 그만큼 왕건의 노여움이 컸다는 뜻이다. 이후에 豚은 頓(돈)으로, 象은 尙(상)으로, 牛는 于(우)로, 獐은 張(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들 네 성은 모두 목천을 본관으로 한다. 이 밖에 목천을 본관으로 하는 마(馬)씨도 있다. 아동문학가로 유명한 마해송이 바로 이 목천 마씨다. 그러나 마씨는 그전부터 있던 성이었다.
목천을 본관으로 하는 이 네 성은 멸문지화(滅門之禍)에 가까운 고초 탓인지 고려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시대에도 명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상진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인물을 찾기가 힘들다.
정광필, “게으른 정승이 나왔구나!”
그가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때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터지기 전이었다. 선비들이 유난히 티를 내며 몸가짐을 삼가는 척을 하자 상진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실록은 “상진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일부러 관(冠)을 쓰지 않고 다리도 뻗고 앉아서 동료들을 조롱하고 업신여기었다”고 적고 있다. 자유인 상진의 기질이 유감없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얼마 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 명재상 정광필(鄭光弼)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정광필은 주변 사람들에게 “게으른 정승이 나왔구나”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상진은 중종 14년(기묘년 1519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는데 사재(史才)가 있다 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제수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게 되었다.
간혹 좌천을 당하기는 했지만 상진의 벼슬살이는 무난한 편이었다. 중종 21년(1526년)에는 예조정랑으로 성절사 서장관에 보임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궁 관리인 필선(弼善)이 되어 세자를 보필했다. 이때부터 탄탄대로를 달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쳐 중종 28년(1533년) 마침내 대사간이 된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같은 해 10월 5일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올린 차자(箚子·약식 상소)는 당시 상진의 식견과 기개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총명한 사람은 은미한 것을 통해 드러날 것을 알아차리고 사리를 아는 사람은 그림자만 보고서도 그 형체를 살펴 아는 것입니다. 드러날 것을 알기 때문에 은미한 것을 통해 미리 방지하고, 형체를 살펴 알기 때문에 그림자를 보고도 끊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재변이 한꺼번에 나타나, 계추(季秋)에 천둥이 쳐서 안정하지 못하니, 하늘의 경고가 어찌 원인이 없겠습니까? 조정에 변고가 많아서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았었는데, 지금 약간 안정이 되어 있지만 인심이 어긋나서 재앙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화를 즐겨 간계를 부릴 기회를 엿보는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더욱이 공론이 확립되지 않아 사기(士氣)가 위축되어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의향이 다르므로 한자리에서도 말과 의견이 서로 모순되니, 재앙과 환란의 기틀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권간(權奸)이 조정에서 작란한 뒤로, 물론에 용납되지 못한 자는 청현직에 주의(注擬·천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조(提調·위원회 위원) 같은 겸직도 제수하지 않은 것은 국가를 위한 큰 계책으로 반드시 깊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조(銓曹·인사를 책임지는 이조와 병조)를 은혜 파는 자리로 여겨 천거와 의망이 잇따르고 있는데도 선비들의 공론은 연약한 태도만을 숭상하면서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권간을 아첨으로 섬긴 실정이 뚜렷이 드러나 공론에 죄를 얻어 유배되고 파직된 자는 결단코 다시 조정의 반열에 끼워 이미 정해진 국시를 혼란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식견 있는 사람들이 사사로운 은혜를 팔려고 ‘아무개는 방면하지 않을 수 없다’느니 ‘아무개는 서용하지 않을 수 없다’느니 하고 있으니, 이런 의논이 한번 나오면 저 여우와 쥐 같은 무리들이 갓을 털면서 세상에 나올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꾀는 성공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랏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물며 은명(恩命)은 임금의 큰 권병(權柄)이니 어찌 신하가 간여해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상진이 신권(臣權)을 중시하는 주자학보다는 임금의 강명(剛明·성질이 곧고 두뇌가 명석하다는 의미다)을 더 중시하는 입장에 서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상진은 현대적 맥락에서 재조명을 해야 하는 인물이다. 어떤 하나의 틀에 담아낼 수 없는 그의 자유분방함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대립하는 의견을 능수능란하게 조화시켜가는 보기 드문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의리(義理) 일변도의 성리학적 잣대로 보자면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 인물이다.
중종, “끝내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길 것”
이 무렵 중종은 상진에 대한 총애가 깊었다. 중종 30년(1535년) 동부승지, 좌부승지로 지근거리에서 중종을 모셨고 중종 32년(1537년)에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때 하급 관료 여럿이 권간의 뜻에 영합하고자 정광필을 사지에 내몰려 하자 상진은 분연히 소를 올려 정광필을 구제하였다. 이에 당시 사론(士論)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같은 해 겨울 형조참판에 올랐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중종 34년(1539년)에 마침내 형조판서에 오른다. 그런데 이 무렵 그가 새로운 관직을 맡을 때마다 대간에서는 반대했는데 겉으로는 너무 빠르다는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그의 출신을 부정적으로 본 때문이었다.
이 때문인지 중종 36년(1541년) 중종이 그를 한성판윤으로 삼으려 했으나, 시행되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듬해 중종은 다시 그를 한성판윤에 임명하고 병권(兵權)을 책임지는 도총관(都摠管)까지 겸직시켰다. 이후 여름에 공조판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특명으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중종이 그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엿볼 수 있다. 중종 39년(1544년) 2월 24일에는 마침내 정승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는데(의정부 우찬성 제수), 사간원이 또 반대했다.
역시 이유는 자헌대부(정2품)가 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반대에도 중종은 그를 그대로 우찬성에 제수했다. 그러나 3월이 되어서도 연일 상진의 일을 아뢰자 3월 3일 중종은 결국 우찬성 제수를 취소하고 두 달 후 형조판서에 제수했다. 당시 중종은 “끝내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길 것이다”라고 했지만 결국 자기 손으로 정승에 임명하지는 못했다.
현실권력과 타협해 사림 비판 받기도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짧았던 인종 재위 기간 상진은 유인숙(柳仁淑)의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마침 이 무렵 유인숙은 공조판서를 거쳐 상진이 제수됐던 우찬성에 올랐다. 유인숙은 대체로 조광조와 같은 노선을 걸은 사림(士林) 계열이다. 상진은 이때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사실상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인종이 9개월 만에 승하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명종 즉위와 함께 유인숙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던 중에 사사(賜死)되었다.
상진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중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특진을 했다. 이 바람에 견제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상진은 이재(吏才)가 뛰어났다. 오늘날로 보자면 행정 능력이 특출했다는 말이다. 더불어 시국을 한 걸음 물러서서 보는 여유를 갖고 있었다. 훈구(勳舊)보다는 사림과 가까우면서도 기묘사화나 을사사화를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중종 때 공조·형조·병조 등의 판서를 두루 거친 상진에게도 명종 즉위와 함께 시작된 문정왕후와 윤원형(尹元衡) 시대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상진은 결국 현실권력과 타협하는 길을 걸었다. 덕분에 명종 즉위와 함께 우참찬에 임명됐다. 참찬은 정2품, 찬성은 종1품이니 품계는 오르지 않았지만 역시 참찬이나 찬성은 판서를 마치고 정승 훈련을 받는 곳이라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명종 1년(1546년) 1월 17일 그가 우참찬에 제수된 날 사신(史臣)은 상진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상진은 천성이 탐욕스럽고 기절(氣節·기개와 절조)이 없어 일을 잘 회피하였으며,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걱정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봐 걱정하여 세상의 추세에 따라서 향배(向背)를 잘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유인숙이 전장(銓長·이조판서)으로 있으면서 상진을 내쫓아 경상감사로 삼으니 그는 항시 분노를 품고 인숙이 언급될 때면 반드시 노(奴)라고 꾸짖었는데, 이에 이르러서 이기(李芑·1476~1552년) 등이 극력 추천해서 이 직에 제배(除拜)된 것이다.〉
전형적인 사림의 시각이다. 이런 비판에는 비부(鄙夫)에 관한 공자 언급까지 동원되었다. 《논어》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말했다.
“비루한 사람과 함께 임금을 섬기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지위를) 얻기 전에는 그것을 얻어보려고 근심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그것을 잃을까 근심한다. 정말로 잃을 것을 걱정할 경우엔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못 하는 짓이 없다.”〉
《명종실록》은 선조 때 편찬되었다. 그렇다면 이 시절 세력을 이루었던 사림들이 주도했을 것이며 사림과 거리를 두려 했던 상진이었기에 이런 비판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명종 때 정승이 되다
명종 1년(1546년) 9월 3일 상진은 자리를 옮겨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2년 후인 명종 3년(1548년) 7월 25일 상진은 우찬성에 제배된다. 이에 상진은 거듭 사직을 청했으나 명종은[아니 사실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문정왕후의 뜻일 것이다] “경은 여러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는데 잘못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니 사직하지 마라”며 윤허하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명종 대에 들어 늘 그를 후원한 인물은 이기이다. 명종 4년 9월 18일 드디어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도 영의정 이기의 추천 덕이었다.
이기는 젊어서는 장인 김진이 저지른 뇌물죄에 연루되어 서경(署經·사헌부 승인)을 필요로 하는 요직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중종 말기 신임을 받아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형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오르고 마침내 좌의정까지 지냈지만 인종 때 대윤(大尹) 거두 윤임(尹任) 등이 탄핵하여 병조판서로 강등됐다. 이에 원한을 품고 있다가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과 손을 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상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상진이 우의정이 되던 날 역시 사신은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상진은 아첨이나 하고 비위나 맞추는 자로서 상부(相府·의정부)에 10여 년이나 있었으면서 건백(建白·건의)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시론이 비루하게 여겼다.”
상진이 정승이 되면서 한미하기 그지없던 그의 집안은 3대 추은(推恩)을 받아 아버지는 의정부 영의정, 할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 증조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증직(贈職)받았다.
상진이 우의정으로 있을 당시 곤경에 빠진 일이 있었다. 문정왕후가 비망기를 내려 선교양종(禪敎兩宗·불교 종파인 선종과 교종을 말한다)의 복립(復立)을 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 좌의정 심연원(沈連源)과 우의정 상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대 의사를 밝혔으나 문정왕후는 윤허하지 않았다. 이 충돌은 해를 넘겨가며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명종 6년(1551년) 8월 23일 상진은 좌의정에 오른다. 여전히 선교양종을 세우는 문제가 조정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었다. 《국조인물고》는 이 무렵 일화 한 가지를 전한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며 청단(聽斷)할 때 선교양종의 제도를 다시 시행하려고 공에게 이야기하기를 “승려들이 계통이 없다. 양종을 설치하여 통섭되도록 하고 싶다”고 하니, 공이 아뢰기를 “오래도록 폐지한 지금 다시 시행한다는 것은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의 생각은 은미하고 부드러운 말로 넌지시 고하여 임금의 뜻을 돌이키려고 기대하였는데, 공의 생각을 모른 사람은 주상의 뜻에 영합하였다고 의심하였다. 공은 그 말을 듣고 “유석(儒釋·유교와 불교)의 시비는 흑백처럼 분명한 것인데 내가 어찌 군주에게 영합하기까지 할 사람인가? 대체로 평소에 행동한 것이 남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저 스스로를 반성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상진에 대해서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에게 ‘아부했다’는 비판이 종종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려는 심모원려(深謀遠慮)임을 당대의 식자들은 다 알고 있었기에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종 때의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를 잇는 명상(名相)”이라는 찬사가 많았다.
상진의 인품과 도량
참고로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에서 ‘상진의 인품과 도량’이라는 별도의 항목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정승 상진은 인품과 도량이 넓고 커서 일찍이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당시 육조판서를 두루 지낸 오상(吳祥)은 이런 시를 지었다.
‘희황악속금여소 지재춘풍배주간(羲皇樂俗今如掃 只在春風杯酒間)’
그 뜻은 대략 ‘복희씨 시대의 음악과 풍속은 지금 쓸어낸 듯 없어져버렸고/ 다만 봄바람 부는 술자리에만 남아 있구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본 상진은 “어찌 말을 그렇게 야박하게 하는가”라며 첫 구의 마지막 두 자와 둘째 구의 앞부분 두 자를 고쳐 이렇게 읊었다.
‘희황악속금유재 간취춘풍배주간(羲皇樂俗今猶在 看取春風杯酒間)’
‘복희씨 시대의 음악과 풍속이 지금도 남아 있어/ 봄바람 부는 술자리에서 찾아볼 수 있네!’〉
세상을 보는 시각은 말할 것도 없고 스케일이 달랐던 것이다. 이수광이 상진의 ‘도량’을 보여주기 위해 이 일화를 고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상진은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현실권력과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권간’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청렴(淸廉)이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수없이 많다. 그중 하나다. 하루는 창고가 허물어지려 하자 종들이 수리를 하고자 했다. 상진은 그만두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고쳐 세운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우려 하는고?”
창고는 무너져버렸다.
그랬기 때문인지 상진은 세상의 굴곡(屈曲)을 수용하는 자신의 처신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갑내기 친구이자 중종 때 잘나갔던 사림 계열의 송순(宋純)이 윤원형 세력과 충돌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상진이 물었다.
“자네는 어찌 이리 침체되고 불우한가?”
이에 송순은 “내가 자네처럼 목을 움츠리고 바른말을 하지 않았으면 벌써 정승의 지위를 얻었을 것이네!”라고 반박했다. 이에 상진은 “자네가 바른말하지 않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불평스러운 말을 많이 하여 이리저리 귀양 다니는 것이 무슨 맛이 있는가?”라며 웃었다.
상진은 죽음을 맞을 당시 자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묘비는 세우지 말고 짤막한 갈(碣)을 세워 “공은 늦게 거문고를 배워 일찍이 ‘감군은(感君恩)’ 한 곡조를 연주하였다”라고만 쓰면 족하다.〉
그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며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오던 위선과 가식(假飾)의 식자들을 조롱하며 살다가 간 인물인지 모른다
명재상 정광필과 이준경을 이어주는 가교
▲박세채
명재상 정광필과 이준경(李浚慶)의 가교가 되었다는 점은 정승 상진이 했던 큰 역할 중 하나다.
명종 4년(1549년)에 상진은 이조판서, 이준경은 병조판서로 함께 조정에 있었다. 특히 상진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 이준경을 이조판서로 삼았고 또 이준경은 우찬성에 올랐다. 또 명종 13년(1558년) 5월 29일 상진이 영의정이 될 때 이준경은 우의정 바로 아래인 좌찬성에 제수된다. 물론 이준경이 윤원형과의 관계를 유연하게 이끌어간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진은 이준경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명종 14년(1559년)에는 영의정 상진, 우의정 이준경으로 함께 의정부를 끌고 간다. 이어 명종 15년(1560년)에는 영의정 상진, 좌의정 이준경으로 함께 조정을 이끈다.
숙종 20년(1694년) 6월 4일 좌의정 박세채(朴世采)가 차자(상소문)를 올렸는데 명종 말기를 언급하며 이렇게 평하고 있다.
〈명종께서 춘추(春秋)가 차지 못하셨기에 당국(當國)한 제신(諸臣)에게 크게 오도(誤導)되어 여러 차례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고 선량한 선비들이 죽게 되었는데, 중년(中年) 이후에는 점차로 깨달으시어 상진·이준경을 임용(任用)하심으로써 양복(陽復)의 기틀을 이루셨고, 만년에는 또한 이황(李滉)에게 예우(禮遇)를 다 하시매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고쳐지고 선류(善類)들이 무리로 진출(進出)하게 되었었습니다. 오늘날 역대의 조정 가운데서 다스려진 적을 말하자면 반드시 명종과 선조 때를 말하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전의 일에 구애되지 마시고 선왕(先王)들의 성헌(成憲)을 거울로 삼아 잘 계술(繼述)해가는 아름다움을 이루소서.〉
양복(陽復)이란 《주역》 복괘(復卦·)를 가리키는 말로 음(陰)이 득세하던 소인(小人)의 시대가 마침내 사라지려 할 때 아래에서 굳센 양, 즉 군자(君子)가 나온 것을 말한다. 상진·이준경과 크게 멀지 않은 시대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박세채의 평가라는 점에서 신뢰할 수 있다.⊙
15 류성룡(柳成龍)전
시대를 잘못 만난 현상(賢相)
⊙ “그 학문을 논하면 章句에 얽매이는 고루한 선비가 아니오, 그 재능을 말하면 족히 큰일을 감당할 만하다”(선조)
⊙ “내가 유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심복(心服)할 때가 많다”(선조)
⊙ 임진왜란 때 戰時 宰相으로 이순신 등용, 훈련도감 설치 등 업적
⊙ 일본과의 화의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실각… 《징비록》 저술

▲류성룡
류성룡(柳成龍·1542~1607년)은 중종 37년(1542년)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柳仲郢)의 아들로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맑고 순수하여 4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6세에 《대학(大學)》을 배웠으며 8세에 《맹자(孟子)》를 읽었다고 한다.
21세 때 류성룡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안동 도산(陶山)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있던 이황(李滉· 1502~1571년)을 찾아갔다. 이때 류성룡을 본 이황은 좌우 제자들에게 “이 사람은 하늘이 내었다”라며 극찬했다. 류성룡은 여러 달 동안 도산에 머물면서 이황으로부터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과 주희(朱熹)의 《근사록(近思錄)》 수업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이황을 평생 스승으로 섬겼다.
명나라 유생들을 감탄케 하다

▲이황
류성룡은 25세 때인 명종 21년(1566년) 문과에 급제해 일찍 벼슬길에 들어섰다. 승문원(承文院) 예문관(藝文館)을 거쳐 선조 2년(1569년)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성절사(聖節使) 서장관으로 뽑혀 명나라 경사(京師·북경)에 사행(使行)을 갔다. 당시 유명한 일화 두 가지가 정경세(鄭經世·1563~1633년)가 지은 류성룡 행장(行狀)에 적혀 있다.
첫째, 경사에서 대궐로 들어가는데 행렬 맨 앞에 불교 승려와 도교 도사[僧道]가 서고 그 뒤에 유생(儒生)들을 세운 것을 보고 류성룡이 명나라 유생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장보(章甫·유생)의 관을 쓰고도 오히려 저들 뒤에 선단 말인가?”
유생들이 답했다.
“저들은 관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행렬을 담당하던 서반(序班)을 불러 따지듯 말했다.
“우리는 유자(儒者)의 예복을 입고서 관직에 있으니 도석(道釋·도교와 불교) 뒤에 설 수 없다.”
서반이 외교를 담당하던 홍려시(鴻㱺寺)에게 말하니 승려와 도사를 뒤에 서게 했다. 이를 본 명나라 유생과 사람들은 모두 감동했다.
둘째, 류성룡이 명나라 유생들에게 물었다.
“중국에서는 누구를 도학(道學)의 으뜸으로 삼는가?”
한참을 서로 돌아보며 망설이던 유생들이 말했다.
“왕양명(王陽明)과 진백사(陳白沙)이다.”
류성룡이 말했다.
“진백사는 도(道)를 정밀하게 보지 못했고 왕양명의 학문은 오직 선학(禪學)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보건대 한결같이 정(正)에서 나온 설문청(薛文淸)만 못하다.”
사행에서 돌아온 류성룡이 이황에게 이런 내용을 편지로 보내니 이황은 “육선(陸禪·육상산과 불교)이 천하를 혼란에 빠트리려 하는데 공이 능히 수백 유생을 상대하여 그 혼미함을 지적하였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고 치하했다.
이를 통해 류성룡은 이미 양명학과 도학, 불교 등에도 깊은 조예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中의 경세가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류성룡은 정(正)만 고집하는 막힌 학자가 아니었고 늘 그 상황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 중(中)의 경세가였다. 이 점은 일찍부터 드러났다.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그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인 선조 2년(1569년) 한창 제왕학 수업에 열중이던 어린 선조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는 옛날의 군주 중에서 누구를 닮았는가?”
정이주(鄭以周)라는 신하가 “전하의 다스림은 요순(堯舜)과 같습니다”라고 답하자 이를 지켜보던 강직한 성품의 김성일(金誠一·1538~1593년)이 말했다.
“전하는 요순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
성군(聖君)도 될 수 있고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이나 은(殷)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처럼 폭군도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명민하긴 했으나 포용력이 부족했던 선조는 낯빛이 바뀌었다. 이때 류성룡이 나섰다.
“정이주가 요순과 같다고 한 것은 그런 임금을 만들겠다는 뜻이고 김성일이 그렇게 말한 것은 걸주와 같은 임금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니, 둘 다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확히 사안에 적중하는 중(中)의 대처법이었다.
류성룡은 선조 3년(1570년)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참여해 신왕(新王) 선조의 공부를 곁에서 도왔다. 당시 이런 류성룡의 모습을 정경세는 “매번 입시(入侍)하여 답변할 때마다 명백하고 적절하고 그 분석이 정미(精微)하니 당시 강관(講官) 가운데 제일이라는 명성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 무렵 실록을 읽어보아도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조 5년(1572년) 7월 7일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이 졸했다. 이준경은 선조에게 올린 유차(遺箚)에서 네 가지를 당부했는데 우선 붕당(朋黨)의 조짐을 경고했다. 실록은 “이때 심의겸(沈義謙)이 외척으로 뭇 소인(小人)들과 체결하여 조정을 어지럽힐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뭇 소인들 중에는 이이(李珥·1536~1584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준경을 옹호하다
이에 홍문관 응교 이이는 격정의 소(疏)를 올려 이준경을 비판했다.
“참으로 정신(廷臣)들이 사당(私黨)을 결성한 사실을 알았다면 어찌 정승으로 있으면서 입고(入告)할 때에 명백하게 진술해서 그 길을 끊어버리지 않고,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야 감히 말을 꺼낸단 말입니까. 또 어째서 누가 붕당을 맺었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고 얼버무림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모든 군신(群臣)을 다 의심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준경이 붕당으로 지목한 자들은 모두 한때의 청망(淸望)을 등에 업고서 공론을 주장하는 자들이니, 만약 이름을 분명히 말하면 사림에 죄를 얻어 결과적으로 자신이 소인이 될 뿐만 아니라, 아무리 전하라도 그가 현인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을 의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고 강직한 자가 과연 이와 같단 말입니까.”
많은 신하가 이이를 뒤이어 모두 같은 취지의 소를 올렸고 심지어 대간(臺諫) 중에는 이준경을 추죄(追罪)하자는 의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 수찬 류성룡이 나섰다.
“그 말은 옳지 않으나 그 잘못을 가려내면 그만이지 죄를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대신을 대우하는 체모에 손상이 될 듯하다.”
이로써 이준경에 대해 사림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신망을 쌓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3년 후인 선조 8년 이준경의 예상대로 조정에서는 당쟁(黨爭)이 본격화된다. 류성룡은 동인(東人), 이이는 서인(西人)에 속했다.
이이와 충돌

▲이이
류성룡은 선조 6년(1573년) 다시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해 사직하고 복제를 마치고 나서 선조 9년(1576년) 여름에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조정에 복귀했다. 류성룡은 대체로 홍문관과 대간을 오가며 관력을 쌓고 있었다. 그는 선조 11년 사간(司諫), 홍문관 응교를 지내고 이듬해 동부승지에 오른다. 선조 14년(1581년)에는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같은 해 말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한다.
류성룡에게 처음 시련이 찾아온 때는 선조 16년이다. 이른바 ‘10만 양병’을 둘러싼 논란이다. 당시 선조는 호조판서로 있던 이이에게 “지금 우리의 국방력이 전조(前朝·고려)만도 못하다”며 군대를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올리라 한다. 이에 이이는 서얼허통(庶孽許通·서얼이 관직에 차별이 없도록 하는 방안)과 ‘10만 양병’ 육성 방안을 보고한다.
이이는 “재주 있는 노비들의 속량(贖良)과 서얼허통 등을 통해 노력하면 10년쯤 지나 전조의 절반 정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의 절반이란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 왔을 때 이를 반격하기 위해 고려가 동원한 군사 20만 명 기록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류성룡에 의해 좌절된다. 류성룡은 “나라에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란(禍亂)의 단서를 만드는 것”이라는 논리로 반박했다. 또다시 류성룡이 이이를 이긴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선조는 이이와 류성룡 모두를 아끼고 있었다. 이이가 사망한 후이긴 하지만 선조 18년 5월 28일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등용한 현인은 이이와 성혼(成渾·1535~1598년)이기 때문에 무릇 이 두 사람을 공격하는 자는 반드시 간사한 자라고 하였다. 류성룡도 역시 군자이다. 대현(大賢)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 사람됨을 보고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다 보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심복할 때가 많다.”
어쩌면 선조는 류성룡에게서 중화(中和)의 정치인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물론 이이와 류성룡의 충돌 배후에는 당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선조 16년 4월 17일 경안부령 이요가 선조와 독대(獨對)하여 조정의 안정을 잃게 하는 당쟁의 폐해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하곤, 특히 “류성룡·이발·김효원·김응남 등은 동변(東邊·동인)의 괴수들로서 저희 멋대로 하는 일이 많으니 재억(裁抑)을 가하기 바란다”고 건의했다.
이요는 학식이 뛰어나 선조가 많이 의지했던 종친으로, 조식(曺植)에게서 양명학의 세계를 전해 듣고 오직 이쪽으로만 파고들어 남언경과 함께 선조 때 조선에 양명학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실제로 얼마 후 선조는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를 폐지해버렸다. 그러나 동인들은 “다 두려워하고 기가 죽었으며 류성룡 등도 불안하여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이건창은 적고 있다. 그들은 “경안부령 이요가 이이의 가르침을 받아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왕실 종친이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당장 사헌부·사간원 등에서 이요가 근거 없는 말을 했으니 파직시켜야 한다고 들고일어났다. 이에 선조는 이렇게 답했다.
“요가 아뢴 내용도 자못 일리가 있는 말들이었다. 내가 비록 매우 과매(寡昧·덕이 적고 우매하다는 겸손의 표현)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주 어리석은 임금은 아니다. 이번 일은 요에게 하등의 죄를 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말이 어찌하여 내 귀에 들어왔겠는가.”
선조도 당쟁의 실상을 상당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언급이다.
계미삼찬
선조 16년 6월 11일 병조판서 이이의 사소한 실수가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된다. 격무에 시달리던 이이가 이날 대궐에 들어왔다가 현기증이 생겨 선조를 알현하지 않고 병조에만 잠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갔는데, 반대파들에게 이는 임금을 업신여기는 행태로 보인 것이다.
동인 쪽의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직제학 허봉(許篈) 등이 삼사(三司)에 연계(聯啓)를 올려, 이이는 임금을 업신여기며 파당을 만들어 바른 사람을 배척하므로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간신이라고 하였다.
이때 서인 쪽의 영의정 박순(朴淳)과 호군 성혼은 언근(言根)을 밝혀 주동자를 처벌해야 한다면서, 송응개와 허봉을 외직으로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삼사에서는 언론으로 죄를 줄 수는 없다고 맞섰다.
이에 다시 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송응개가 이이는 이익을 탐해 지방관을 위협하고 사류를 미워하며 해쳤다고 공격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학생 및 전라도·황해도 유생들이 각각 연명으로 소를 올려 이이가 모함을 당했다고 변호하는 등 큰 파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죄를 밝혀 시비를 정하자는 서인 정철(鄭澈·1536~1594년)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사감(私感)을 가지고 공론을 가탁, 임금의 총명을 가렸다는 죄목의 친필교문을 내려, 박근원을 평안도 강계로, 송응개와 허봉을 각각 함경도 회령과 갑산으로 귀양 보냈다. 이를 역사에서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한다. 찬(竄)은 유배를 간다는 뜻이다. 이후 선조 17년(1584년) 이이는 세상을 떠난다.
“임금과 신하이지만, 붕우와 같다”
이이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선조 17년 9월 경상감사로 있던 류성룡이 부제학이 되었다가 마침내 예조판서로 승진, 임명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겸하게 되었다. 이에 류성룡이 글을 올려 힘껏 사임하니 선조는 수찰(手札)로 뜻을 전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옛 임금 가운데는 신하를 신하로 대하는 자도 있었고, 벗으로 대하는 자도 있었으며, 스승으로 대하는 자도 있었다. 이 뜻은 비록 후세에 전하진 않으나, 경이 10년 동안 경악(經幄·경연)에 나오면서 한결같은 덕으로 아무런 흠이 없었으니 의리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라 하나 정의로는 붕우(朋友)와 같다. 그 학문을 논하면 장구(章句)에 얽매이는 고루한 선비가 아니오, 그 재능을 말하면 족히 큰일을 감당할 만하다. 나만큼 경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이는 선조의 본심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 정철이 일방적으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류성룡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관직이 계속 내려왔지만, 류성룡은 대부분 사직하고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지극히 현명한 처신이었다.
그럼에도 류성룡에 대한 서인의 공격은 집요했다. 선조 18년(1585년) 의주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이 소를 올렸다.
“정여립(鄭汝立)이 이이에게 보낸 글에서 ‘3인은 유배시켰으나 거간(巨奸)은 아직도 있다’라고 하였는데 거간이란 류성룡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때도 선조는 어찰(御札)을 내려 류성룡을 옹호하며 말했다.
“류성룡은 군자이다. 당대의 대현(大賢)이라 해도 옳다. 그 사람됨을 보고 말하노라면 저도 모르게 심복(心服)된다. 어찌 학식과 기상이 이와 같은 사람이 거간이 될 리 있는가? 어떤 담대한 자가 감히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류성룡은 소를 올려 물러나야만 하는 다섯 가지 사유를 아뢰면서 이렇게 말했다.
“거취(去就)의 의리는 의식(衣食)처럼 당장 해야 하는 데 있는 것이지 미적거릴 일이 아닙니다. 나아감은 이(利)를 탐해서가 아니며, 물러남은 은혜를 저버려서가 아닙니다. 백세(百世)가 앞에 있고 천세(千世)가 뒤에 있습니다. 스스로 꾀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면 이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서인의 공격
선조 22년(1589년)에는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지만 조헌(趙憲)의 소로 인해 사직했다. 이때는 정여립의 난이 일으킨 후폭풍으로 인해 동인들이 일망타진당하던 시기였다. 류성룡도 큰 위기에 처했다. 같은 해 12월 14일 전라도 유생 등이 이산해(李山海·1539~1609년), 정언신(鄭彦信), 정인홍(鄭仁弘·1535~1623년) 등을 배척하는 소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류성룡을 비판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류성룡은 소위 사류(士類)로 일신(一身)에 큰 명망을 차지하고 시론(時論)을 주관하면서 남의 말을 교묘히 피합니다. 이전의 일은 추구(推究)할 필요가 없으나, 요즘 국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도 사당(邪黨)을 배치시킬 뿐, 충현(忠賢)을 끌어들여 지난번의 과오를 고치는 계책으로 삼겠다는 한마디의 말도 없으며, 도리어 우성전(禹性傳·1542~1593년)이 이산해·김응남(金應南) 등의 기세를 꺾으려 한다 하여 옛 친구를 배반하고 새 붕당에 구합(苟合)하며, 매번 역적을 위하여 부회(傅會)와 찬양으로 온갖 정태(情態)를 써서 그를 끌어들여 우익을 삼으려고 천의(天意·임금의 뜻)를 탐지하고 병관(兵官)에 주의하여 낙점까지 받았으나, 그때 마침 조헌의 소가 올라와 취임시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만약 병정(兵政)을 차지하여 흉모(凶謀)를 재촉하였다면 당당한 국가야 아무런 걱정이 없겠지만, 혈전(血戰)에 임한 군사들이야 어찌 조그마한 손해뿐이겠습니까. 류성룡은 진실로 역모에 가담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만약 반성해본다면 태양 아래서 어떻게 낯을 들고 살 수 있겠습니까.”
서인 입장에서도 류성룡을 옭아맬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평소 진중한 언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선조는 오히려 이틀 후에 특지(特旨)로 류성룡을 이조판서에 임명한다. 류성룡은 사직했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저의’ 문제로 정철 실각
이런 총애에 힘입어 49세 때인 1590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를 겸직했다. 그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영의정은 이산해, 좌의정은 정철이었다. 이산해는 동인이었고 실권은 서인인 정철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유명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건저의(建儲議), 즉 세자를 세우자고 했다가 한순간에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이 몰락하게 되는 일을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년) 2월 우의정 류성룡이 좌의정 정철을 찾아와 영의정 이산해와 더불어 삼정승이 임금을 찾아뵙고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산해와 류성룡은 동인(이어 남인), 정철은 서인이었다.
당시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자식을 못 낳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암암리에 ‘광해군 세자론’이 퍼져 있던 때였다. 정철은 류성룡의 제안이 있었고 이산해와 류성룡은 같은 당파이니 서로 의견을 나눴을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이 삼정승 중에서 가장 힘이 막강한 좌의정이니 임금을 만나는 경연에서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순서라고 판단했다.
경연에서 정철이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선조의 분노가 폭발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문제는 그 순간 이산해와 류성룡이 아무 말도 안 했다는 사실이다. 이산해의 술수에 걸려든 것이다. 결국 정철은 파직당해 마천령 넘어 함경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여기서 정철이 옳고 이산해가 틀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아니다. 당시는 정여립의 난 직후였기 때문에 서로 피 말리는 정쟁을 하던 중이었다. 문제는 이산해가 구사한 술수가 지극히 고전적인 수법이라는 사실이다.
진덕수의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따르면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급암(汲黯·?~B.C.112)은 공손홍(公孫弘)과 더불어 함께 황제에게 아뢰기로 했다가 정작 황제 앞에 이르자 급암은 자신의 품은 바를 남김없이 다 말했는데 공손홍은 오히려 면전에서 아첨을 일삼았다.
이처럼 함께 아뢰기로 했다가 면전에서 표변하는 수법은 당(唐)나라 현종(玄宗·재위 712~756년) 때도 등장한다.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오는 사례다. 당나라 현종은 삭방절도사 우선객(牛仙客)이 비용도 절감하고 무기 개량도 잘했다 하여 봉읍에서 실제로 받는 조세인 실봉(實封)을 높여주려 했다. 이에 충직한 성품의 장구령(張九齡)은 재상 이임보(李林甫)에게 말했다.
“실봉을 상으로 주는 것은 명신(名臣)과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인데 어찌 변방의 장수를 고위직에 올리면서 이리 급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공과 더불어 힘껏 간언을 올려봅시다.”
아첨에 능한 이임보는 그러자며 허락했다. 그러나 정작 황제에게 나아가 뵈었을 때 장구령은 할 말을 다 했지만 이임보는 침묵을 지켰다. 오히려 이임보는 물러 나와서 장구령의 말을 우선객에게 흘렸다. 다음날 우선객이 황제를 알현하여 울면서 호소하자 황제는 다시 우선객에게 상을 내리기로 하고 조정의 논의에 부쳤다. 여기서도 장구령은 원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며 한사코 반대했다. 그 순간 이임보가 “재능이 중요하지 사람됨을 말합니까? 천자가 사람을 쓰겠다는데 어찌하여 안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황제는 이임보는 꽉 막혀 있지 않아 좋다고 여겼다.
정철이 당시 고위 관리들의 필독서였던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제대로 보았다면 거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낡은 덫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로 서인은 몰락했다. 이 사례는 류성룡이 정치 술수에도 만만치 않은 능력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그러고 얼마 후 좌의정에 오르는데 이때 역시 이조판서를 겸했다. 그에 대한 선조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戰時 재상으로 국난 극복
그러나 좌의정에 오른 류성룡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조선 건국 200년 만에 찾아온 최대의 위기,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오히려 류성룡의 활약은 눈부시다는 말만으로는 다 할 수 없을 만큼 국난(國難) 극복에 온 힘을 쏟았다. 물론 그것은 고난의 연속이기도 했다. 전란의 와중에도 당쟁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격화됐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전쟁 발발 직후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軍務)를 총괄했다. 이어 영의정이 돼 왕을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따르는 일)했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됐다. 다시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다. 이 해에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다.
그해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한양으로 돌아와서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이순신(李舜臣)의 후원자 역할을 맡아 남해 바다를 지켜낸 공 또한 빠트릴 수 없다.
북인, 류성룡을 진회로 몰아세우다
선조 31년(1598년) 12월 6일 북인 이이첨(李爾瞻·1560~1623년)이 주도한 홍문관 관리들이 소를 올려 류성룡을 탄핵했다. 그 배후에는 정인홍이 있었다.
“전 풍원 부원군 류성룡은 성품이 강퍅하고 행실이 사악할뿐더러 권병(權柄·권세)을 잡았을 때에는 그의 세력이 불길처럼 치솟아 두렵기만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화의(和議)를 주창하여 호택(胡澤) 심유경(沈惟敬)의 말에 부회하면서 감히 최황(崔滉)의 정직한 변론을 꺾어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으니, 송(宋)나라 때 진회(秦檜·1090~1155년)가 증개(曾開)를 매섭게 꾸짖은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진회는 천하의 사람들이 자기를 논의할까 두려워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류성룡은 서신과 폐물(幣物)을 몰래 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는 또한 진회의 죄인입니다. 옛날에 호전(胡銓)이 글을 올려 진회를 참수할 것을 청했는데, 노추(虜酋)에게 그 말이 전해지자 군신이 놀라면서 송나라에도 사람이 있다고 감탄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양사(兩司)의 논의가 실제로 간사한 무리를 제거하고 화의를 주창한 자를 죄주자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면,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군신들도 그 말을 듣고 놀랄지 어찌 알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양사의 주청에 따르시어 신인(神人)의 분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소서.”
류성룡은 전란 내내 명나라 군대를 지원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등의 힘을 쏟았으나 전쟁이 끝나가던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류성룡은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 정경세는 말한다.
“애초에 정인홍은 평소 공을 원수로 여겨 음해하려 하였는데 대신으로서 공을 미워하는 자와 멀리에서 서로 결탁하였다. 이에 이르러 정인홍의 문객 문홍도(文弘道)가 정언(正言)이 되자 어깨에 힘을 주며 맡고 나서 온갖 말로 헐뜯으며 당(唐)과 남송(南宋) 때의 간신인 노기(盧杞)와 진회에 견주기까지 하였다.”
조선에서는 그 후에도 주화(主和)를 주장하는 대신을 진회라고 몰아세웠다. 병자호란 때 최명길(崔鳴吉)도 진회로 몰렸다.
《징비록(懲毖錄)》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 사진=조선DB
류성룡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다. 그가 은거하여 처음 한 일은 퇴계 이황 연보(年譜) 편찬이었다.
평생을 조선, 그것도 선조를 위해 봉사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지독한 불명예였다. 그로서는 참으로 억울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가 남긴 책 《징비록(懲毖錄)》을 읽어보면 그 원통함이 행간에 남아 있는 듯하다. 명재상이었으나 결코 행복했던 벼슬살이는 아니었다.
선조 40년(1607년) 류성룡은 졸했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평했다.
〈류성룡은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어린 나이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예(禮)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그릇으로 여겼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應接)하는 즈음에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의리(義理)를 논설하는 데는 뭇 서적에 밝아 수미(首尾)가 정밀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베이징)에 갔을 때 중국의 선비들이 모여들었으나 힐난(詰難)하지 못하고서는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고 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예와 지위가 함께 드러나고 총애가 융숭하였다.
‘국가의 안위가 그에게 의지’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국가의 안위(安危)가 그에 의지하였는데, 정인홍과 의논이 맞지 않아서, 인홍이 매번 공손홍(公孫弘)이라 배척하였고, 류성룡 역시 인홍의 속이 좁고 편벽됨을 미워하니, 사론(士論)이 두 갈래로 나뉘어 서로 공격하는 것이 물과 불같았다.
류성룡은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퇴계 문하에서 배웠다. 성일은 강의(剛毅), 독실하여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대절(大節)이 드높아 사람들의 이의(異義)가 없었는데 계사년(1593년) 나라 일에 진력하다가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조목은 종신토록 은거하면서 학문에 독실하고 자수(自修)하였으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게 되자 강개(慷慨·원통하고 슬픔)해 마지않았는데 지난해 죽었다. 조목은 일찍이 성일을 낫게 생각하고 성룡을 못하게 여겼는데, 만년에는 성룡이 하는 일에 매우 분개하여 절교(絶交)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하였다. 퇴계의 문하에서는 이 세 사람을 영수(領袖)로 삼는다.
류성룡은 조정에 선 지 30여 년 동안 재상으로 있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상(임금)의 권우(眷遇·임금이 신하를 후하게 대우함)가 조금도 쇠하지 않아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경악에서 선한 말을 올리고 임금의 잘못을 막을 적엔 겸손하고 뜻이 극진하니 이 때문에 상이 더욱 중히 여겨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류모(柳某)의 학식과 기상을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심복할 때가 많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규모(規模)가 조금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하여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신임을 얻은 것이 오래였었지만 직간(直諫)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고 정사를 비록 전단(專斷·혼자 결정하고 단행함)하였으나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하였다.
기축년(1589년)의 변에 권간(權奸)이 화(禍)를 요행으로 여겨 역옥(逆獄)으로 함정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을 얽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일망타진하여 산림(山林)의 착한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는데도 일찍이 한마디 말을 하거나 한 사람도 구제하지 않고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면서 구차하게 몸과 지위를 보전하기까지 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군신(君臣)이 들판에서 자고 백성들이 고생을 하였으며 두 능(陵)이 욕을 당하고 종사(宗社)가 불에 탔으니 하늘까지 닿는 원수는 영원토록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도 계획이 굳세지 못하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서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하며 통신(通信)하여 적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여서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한 죄가 천고(千古)에 한(恨)을 끼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사(義士)들이 분개해하고 언자(言者)들이 말을 하였다.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이 신구(伸救)하는 상소 가운데 ‘성룡은 역시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마는 재보(宰輔)의 기국(器局)이 부족하고 대신(大臣)의 풍력(風力)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확한 논의이다.
무술년(1598년) 겨울에 (명나라에) 변무(辨誣)하는 일을 어렵게 여겨 사피함으로써 파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 후에 직첩(職牒)을 돌려주었고 상이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의관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훈련도감, 오늘에 이르도록 그 덕을 보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졸기에는 그의 장점을 이렇게 기록했다.
〈임진난이 일어난 뒤 건의하여 처음으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는데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모방하여 포(砲)·사(射)·살(殺)의 삼수(三手)를 뽑아 군용을 갖추었고 외방의 산성(山城)을 수선(修繕)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손질하여 비어책(備禦策)으로 삼았다. 그러나 류성룡이 자리에서 떠나자 모두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았는데 유독 훈련도감만은 존속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 덕을 보고 있다.〉
그의 단점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譏弄·실없는 말로 놀림)하였다.”⊙
16 이원익(李元翼)전
3명의 군주를 바른 도리로 모신 명재상
⊙ 안주목사 시절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하여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는 평가 받아
⊙ 임진왜란 중 평안도와 영남에서 군병 관리, 군량 보급, 산성 수축 등에 업적
⊙ 선조에게 “많은 장수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라며 이순신 옹호
⊙ 광해군 시절 영의정으로 廢母에 반대하다 귀양… 인조반정 후 복귀

▲이원익
“강정(剛正), 청고(淸苦)했다.”
서인(西人)이 집필을 주도한 《인조실록》에서 남인(南人) 계통의 정승 이원익(李元翼·1547~1634년)이 졸(卒)했을 때 그의 사람됨과 생활 모습을 표현한 문장이다. 굳세고 바른 성품에 지나칠 정도로 깨끗함을 지켰다는 말이다.
이원익은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의 4세손이며,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기수(靑杞守) 이표(李彪)이다. 아버지는 함천정(咸川正) 이억재(李億載)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조상들 직함인데, 군(君), 수(守), 정(正)은 모두 왕실 사람들에게 내리는 작호(爵號)다. 그리고 정(正)을 끝으로 친진(親盡)이 된다. 친진이란 왕실과의 친척 관계가 다 끝났다는 뜻이다. 마침내 일반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547년(명종 2년)에 태어난 이원익은 23세 때인 1569년(선조 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한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년)은 일찍부터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훗날 같은 남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이원익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품은 청년이었다. 그의 비명(碑銘)은 청년 이원익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젊었을 때에 기품이 자못 호방하였다. 집이 낙산(駱山) 아래에 있었는데 번번이 거문고를 가지고 산에 올라 스스로 타고 노래하였으며 옛사람의 악부(樂府)까지도 소리를 길게 끌며 소리 높여 읊으면 다 곡조에 맞았다. 삼각산(三角山)의 백운대(白雲臺)와 개성(開城)의 성거산(聖居山), 영동(嶺東)의 풍악(楓岳-금강산),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 등 기승(奇勝)이며 유명한 곳에는 모두 얽매임 없이 홀로 가서 즐겼다.〉
吏才를 드러내다
승문원은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중국·일본·여진과 주고받는 문서를 담당하던 기관이다. 문과 급제자가 주로 배치되어 신진 관리로서의 기본을 익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원익은 2년 정도 승문원 부정자(종 9품), 정자(正字·정9품), 저작(著作·정8품)을 지내면서 중국어 과목에서 늘 우등을 차지했다.
이어 성균관으로 옮기는데 1573년(선조 6년)에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으로 임명받아 북경을 다녀온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명(明)나라를 보고 온 것이다. 이후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1574년 가을 황해도 도사(都事)로 부임한다. 도사는 종5품직으로 관찰사를 보좌하는 외직이다. 이때 권덕여가 관찰사로 있었는데 얼마 후 병으로 사직하고 후임으로 이이(李珥·1536~1584년)가 왔다.
이원익은 무엇보다 이재(吏才)가 뛰어났다. 그는 군적(軍籍)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이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선조수정실록》 9년(1576년) 1월 2일 자에는 이원익이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음을 알리고 파격적으로 이 배경을 상세하게 전한다.
〈황해도사(黃海都事) 이원익을 정언으로 삼았다. 원익은 젊어서 과거에 올랐는데, 조용히 자신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성균관 직강으로 있다가 황해도사가 되었는데, 감사 이이가 그의 재주와 국량이 비범함을 살피고서 감영(監營)의 사무를 맡기었다.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와 원익의 재기(才器)와 조행(操行)이 쓸 만하다고 말하고, 드디어 홍문선(弘文選)에 기록하였다. 이윽고 정언에 제수되니 대신들이 제목(除目)을 보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재주가 있는데도 하급 관료로 침체해 있었는데 이제야 현직(顯職)에 통하였으니 조정에 공론이 있다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때 군적을 처음 반포하였는데 제도(諸道)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어떤 이는 소략하게 하고 어떤 이는 각박하게 하여 백성들 원망이 많았다. 그런데 해서(海西·황해도)에서 만든 군적만은 최고로 일컬어지니 원익은 이 일로 이름이 드러났다.〉
그해 내직으로 돌아온 이원익은 사헌부 지평·헌납·장령, 홍문관 교리·응교 등 청요직을 거쳐 동부승지를 시작으로 선조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다.
이이 탄핵 사태

▲이이
선조 16년(1583년) 6월 11일 병조판서 이이의 사소한 실수가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된다. 격무에 시달리던 이이가 이날 대궐에 들어왔다가 현기증이 생겨 선조를 알현하지 않고 병조에만 잠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간 것이 반대파들에게 탄핵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이유였다.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이 있었고 홍문관까지 나섰다.
이에 대한 선조의 반박은 논리 정연했다. 6월 20일 선조는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내렸다. 우선 사소한 일을 확대해서 문제 삼는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비판하면서 정말 이이가 임금을 업신여긴 대죄를 지었다면 파직 정도의 처벌을 제시한 양사나 옥당도 잘못이라고 거꾸로 몰아세웠다. 그것은 결국 당파적 이유에서 이이를 내쫓으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다그침이었다. 그러고 이렇게 말한다.
“경들이 만약 이이를 일러 나라를 그르친 소인(小人)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죄를 분명히 밝혀 그를 물리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를 공격하는 자가 소인이다. 임금이 소인을 등용하고서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이치가 어디에 있는가. 오늘이야말로 숙특(淑慝)을 가려낼 수 있는 때가 아니겠는가. 경들로서는 확실히 가려내지 않고 어물어물해서는 안 된다. 조정이 각기 유파끼리 분당(分黨)되어 나랏일이 날로 글러가고 있는데도 대신들이 그것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나랏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이날 당장 홍문관 관리 전원이 자신들이 붕당으로 몰렸다며 사직을 청했으나 선조는 이를 반려했다. 정승들도 이이에게 문제가 없지만 병조판서 자리가 너무 중하니 일단 병조판서를 교체할 것을 청했다. 선조는 결국 이들의 청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때 정승들에게 병조판서 교체를 지시하면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이이가 고향으로 돌아가 흰구름 위에 높이 누워 있으면 누가 그를 옭아맬 수 있겠는가?”
병조판서 교체는 선조가 이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조처였던 것이다.
당쟁의 불똥이 튀다
그런데 여기서 보듯 당쟁에 대한 선조의 대응은 미온적이고 수세적이다. 대안(代案)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은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이의 사퇴는 조정에 보다 심각한 당파싸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고 선조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동인(東人) 계열 대사간 송응개를 정점으로 한 홍문관 전한(典翰) 허봉, 승지 박근원 등이 주도한 이이 탄핵은 일단 성공이었다. 늘 이이의 중재역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동인 세력이 승리를 거두는 듯했다.
일전에 이이가 후견인 역할을 하던 백인걸의 상소문을 대필해준 적이 있는데 그것을 문제 삼아 이이를 공격했던 송응형은 송응개의 형이다. 형제가 모두 이이와 악연(惡緣)이었다. 허봉의 경우도 부친이 병중에 있는데도 기생들과 놀았다는 이유로 직제학에 추천됐다가 이이의 반대로 좌절된 적이 있어 이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다음날 대사간 송응개가 선조를 찾아와 성혼, 이이, 심지어 영의정 박순까지 몰아세우는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모두 심의겸을 비롯한 서인(西人)의 한통속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선조의 마음은 정해졌다. 송응개의 발언이 끝나자 선조는 “네 말이 설사 전부 옳다고 하더라도 진작 이야기하지 않고 지금에야 말하는 것은 불충(不忠)이다. 대사간에서 물러나라”고 면박을 주었다. 본인에게 면전에서 파직을 명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선조는 동인들의 이이 탄핵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날 바로 송응개는 장흥부사로, 허봉은 창원부사로 좌천되었다. 도승지 박근원을 포함해 이들 세 사람이 유배 간 일을 역사에서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부른다. 그리고 당시 승지들을 모두 교체하는데 이원익도 동인인지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주목사로 이름 떨쳐

▲윤두수
《선조수정실록》 20년(1587년) 4월 1일 자에, 이원익이 안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도 이례적으로 그 배경과 안주목사로서 업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원익을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삼았다.
이원익이 파산(罷散)하여 있다가 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쳤으나 오히려 복관(復官)되지 못하였다. 이때 안주는 관방(關防)의 중요한 진영인데 재해를 여러 차례 겪고 기근이 들어 조폐(凋弊)되었다는 이유로 명망이 중한 문신을 정밀히 골라 그 지방을 다독거려 수습하게 하되 구임(久任)시켜 공을 세우도록 책임 지우기를 청하였다. 명관(名官)이 모두 꺼려 피하기를 도모하였으므로 상이 이조에 명하여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도록 책임 지웠는데 판서 권극례가 이로 인하여 면관된 사람을 기용하고자 하여 이원익을 주의(注擬)하니 상이 허락하여 이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원익이 단기(單騎)로 부임하여 먼저 조곡(糶穀) 1만 석을 감사(監司)에게 청해다가 종자를 주어 경작을 권하였더니 가을이 되자 큰 풍년이 들어 조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찼다. 드디어 군정(軍政)을 변통하고 잡역을 감면하여 몸소 변진(邊鎭)에 양세(粮稅)를 납입하게 하여 조등(刁蹬)의 폐단을 없앴다. 안주는 서로(西路)에서 누에치기를 힘쓰지 않았다. 이원익이 백성에게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니 사람들이 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불렀다.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하여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자주 포상을 받아 승질(陞秩)하여 환조(還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원익의 명망은 여기에서 기초되었다.〉
조등()이란 간사한 꾀를 써서 물가를 오르게 하는 일을 말한다.
안주목사로 2년 반을 일한 뒤인 선조 22년(1589년) 9월 이원익은 서인의 중심인물 윤두수(尹斗壽·1533~1601년)의 추천으로 형조참판에 임명된다.
〈이원익을 형조참판으로 삼았다. 원익은 정사가 최(最)를 맞아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는데 임기가 차자 이 임명이 있었다. 윤두수가 그때 감사가 되어 모든 군사와 백성에 관한 사무가 있으면 그때마다 차임(差任)하여 그와 의논하였는데 건혁(建革)한 바가 많았고 일이 완료되면 그의 공로를 계문(啓聞)하였다. 원익도 두수가 도량이 있고 임사(任使)를 잘한다 하여 그에게 쓰이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관서 지방의 민정(民政)에 정리된 바가 자못 많았다.〉
두 사람 모두 당파를 넘어서는 도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어 3년 후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까지 이원익은 대사헌·호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다.
임진왜란 중 정승에 오르다
일차적으로 그의 관리로서 뛰어난 면모가 발휘된 때는 임진왜란 시기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의 직무를 맡아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는 장차 상이 서행(西幸·몽진)할 것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원익은 일찍이 안주목사를 지내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했으므로 민심이 귀의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먼저 보내 어루만져 달램으로써 순행(巡幸)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평양 수비군은 겨우 3000여 명이었는데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으로서는 군 통솔이 잘 안 되고 군기(軍紀) 또한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해 군의 질서를 확립했다.
평양이 함락되자 이원익은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加資)됐다.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그는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했다. 1595년(선조 28년)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됐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했다.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 오르긴 했으나 모든 것이 어수선할 때였다. 《국조인물고》가 전하는 당시 이원익의 활약상이다.
〈을미년(乙未年·1595년·선조 28년)에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고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를 받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조정에 돌아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고 영남(嶺南)에 독부(督府)를 개설하였다. 이때 중국 군사가 변경(邊境)까지 가까이 갔는데, 공이 식량 공급을 잘 조정하여 군량이 모자라지 않게 하였다. 또 적을 제압하는 요령은 성을 지키는 것 말고는 딴 방책이 없다고 생각하여 곧 각처의 산성(山城)을 수선하였다. 이때 군율(軍律)이 해이하여 문란해지고 제도(諸道)의 장수가 법을 어기는 일이 많아 다 잡아다가 매를 때렸는데, 사납고 무지한 자일지라도 다 그 엄명한 데에 복종하고 원망하는 뜻이 없었다.〉
이순신을 옹호하다

▲이순신
무엇보다 이 기간 이순신을 옹호한 사람이 이원익이었다. 《선조실록》 29년(1596년) 10월 5일 한양으로 올라온 이원익에게 선조는 이순신에 관해 묻는다.
〈상이 말했다.
“통제사 이순신은 힘써 종사하고 있던가?”
이원익이 아뢰었다.
“그 사람은 미욱스럽지 않아 힘써 종사하고 있을뿐더러 한산도(閑山島)에는 군량이 많이 쌓였다고 합니다.”
상이 말했다.
“당초에는 왜적들을 부지런히 사로잡았다던데, 그 후에 들으니 태만한 마음이 없지 않다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어떠하던가?”
이원익이 아뢰었다.
“소신의 소견으로는 많은 장수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처음과는 달리 태만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상이 말했다.
“절제(節制)할 만한 재질이 있던가?”
이원익이 아뢰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경상도에 있는 많은 장수 가운데 순신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순신 또한 이원익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품고 있었다. 이 점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은 이원익을 상국(相國)이라고 존칭했다.
명나라 정응태와 맞서다
선조 31년(1598년) 이원익은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해 조정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자 당시 영의정 류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했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다.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마라”며 자원했다.
그는 이미 좌의정·영의정에 올라 당쟁이 극심하던 상황에서 정도(正道)를 고수하며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 했다. 이를 통해 그는 당파를 넘어 지지를 받는 거의 유일한 재상으로 자리 잡았다.
《국조인물고》에는 이때 명나라에 가던 도중 이원익이 정응태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장면이 생생하게 나온다.
〈이때에 공이 떠나서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뜻밖에 정응태 일행이 왕래하는 것을 만났다. 정응태가 공이 가면 반드시 경리(양호)를 칭찬하여 아뢰리라는 것을 알고 크게 섭섭히 여겨 어두워진 뒤에 두세 장관(將官)을 보내어 요동(遼東) 경계까지 공을 쫓아가서 매우 급하게 돌아가기를 재촉하였다. 공이 중국말을 알아듣고 또 말하기를 ‘우리는 국왕의 명을 받들고 중국 조정에 들어가는데, 이제 중도에서 멈추게 하면 임금의 명을 막는 것이다. 너희가 힘으로 일행을 묶어서 거꾸로 실어 갈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국왕에게 변명할 말이 있을 터인데, 어찌 너희가 그럴 수 있겠는가?’ 하니, 장관이 강제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돌아갔다.
정응태가 중국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곧바로 아뢰기를 ‘신이 조선에 가니 길가에 떨어진 작은 책 하나가 있었는데 다 조선이 왜를 섬기는 절목(節目)이었습니다. 이번 왜구(倭寇)는 수상(首相) 이원익과 그 국왕이 길을 빌려주어 인도한 것이니, 이원익을 하옥하고 엄히 캐어물으면 그 정상이 절로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갖가지로 기교(奇巧)하였다.
공이 드디어 부사(副使) 허잠(許箴)과 서장관(書狀官) 조정립(趙正立)과 함께 날마다 육부(六部)와 과도관도어사(科道官都御史)의 아문(衙門)에 말하여 해명하고 또 통정사(通政司)에 정문(呈文·글을 올림)하고는 머리로 바닥을 두들겨 피를 흘리고 각로(閣老·명나라 때 재상을 일컫는 말)가 나오는 것을 기다려 호소하니, 각로가 온화한 말로 이르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위에 전달하여 아뢸 것이오’라고 하였다.〉
대동법 실시
당시 이원익이 갖고 있던 중망(重望)은 광해군 즉위 후 북인(北人) 세력이 정권을 잡았음에도 그가 다시 영의정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북인은 원래 남인과 함께 동인이었으나,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기점으로 서인에 대한 온건한 태도를 갖는 쪽은 남인, 급진적 태도를 갖는 쪽은 북인으로 갈렸다. 당색(黨色)이 약하기는 했지만 이원익은 일관되게 류성룡을 따라 온건 남인이었다.
영의정으로서 그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정쟁이 아니라 민생(民生)이었다. 전후(戰後)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 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했다.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시간이 흘러 점점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女色)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諫爭)했다. 하루는 궐중에서 광해군의 잘못을 곧바로 지적하였는데 광해군이 진노하여 옷을 털고 들어가 비빈(妃嬪)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모욕당한 것이 지극하다. 너희는 삼가라. 그러지 않으면 그 손에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 이원익은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어 다시 이이첨(李爾瞻) 등이 모후(母后)를 폐하려 하자 이원익이 광해군에게 소장을 올려 자전(慈殿)께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니,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원익이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군부(君父)의 죄안(罪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고서 마침내 홍천(洪川)으로 귀양 보냈다. 그런데 실록에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체로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즉 광해군은 죽이고 싶어 했지만 그의 명망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결국 1623년 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은 권좌에서 내려왔다.
인조반정 후 영의정 복귀

▲인조가 청백리 이원익에게 하사한 관감당(觀感堂). 경기도 광명시에 있다. 사진=조선DB
《인조실록》 3월 16일 자는 거사가 성공한 직후 한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유명한 장면이다.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조 때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일국의 중망을 받았다. 혼조(昏朝·광해군) 시절 임해군의 옥사 때 맨 먼저 은혜를 온전히 하는 의리를 개진하였고, 폐모론(廢母論)이 한창일 때에도 상차(上箚)하여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극력 개진하여 흉도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에 유배되었다가 전리에 방귀(放歸)되었다. 이때에 와서 다시 수규(首揆·영의정)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
광해군 초기 북인 정권이었음에도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조 초기 서인 정권이었음에도 다시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선조·광해군·인조 세 조정에 걸쳐 정승을 지내는 특이한 이력을 갖게 된 것이다. 비명이 전하는 그의 처신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공은 금도(襟度)가 정명(精明)하고 표리(表裡)가 순일(純一)하며 평소에 사기(辭氣)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낯빛으로 웃으며 말하는 것이 사랑스러웠으나, 일에 임하면 독립하여 산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 일을 처리할 시 순전히 《시경(詩經)》 《서경(書經)》을 인용하고 고사(古事)를 참고해 절로 이치에 맞았는데, 어떤 재신(宰臣)이 말하기를, “누가 금세에는 성인(聖人)이 없다 하던가? 완평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다.
이때는 일이 많았는데 묘당에 큰 논의가 있으면 반드시 공이 한마디 말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였으므로, 오성(鰲城·이항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일마다 행수(行首)의 재처(裁處)를 따른다”라고 했고, 신흠(申欽)공도 그렇게 말하였으며 공도 오성을 언급하면서 반드시 말하기를 “위인(偉人)이다”라고 하였고 일찍이 말하기를, “정치는 반드시 만물에 미쳐야 하고 지론(持論)은 되도록 두터워야 한다”라고 했다.〉
‘正’을 한결같이 지킨 재상
그가 글을 지으면 조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지만 체재는 갖추어서 보기에는 간단하고 담박한 듯하나 의미가 심장했다고 한다. 그는 문장의 화려한 것을 자기 일로 삼은 적이 없으므로 지은 글을 짓는 대로 곧 버려서 집에 감춘 사고(私稿·문집)가 없었다. 이런 재상이 있었기에 혼란한 시기를 지나면서도 조선이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1634년(인조 12년) 정월 29일에 서거하니 향년 88세였다.
“한 마음으로는 여러 임금을 섬길 수 있지만 두 마음으로는 한 임금도 섬길 수 없다”고 했으니 곧 이원익을 두고 한 말이다.
이준경이 중정(中正)을 갖춘 정승이었고 류성룡이 중(中)에 치우쳤다면 이원익은 정(正)을 한결같이 지킨 정승이라 하겠다.⊙
17 이항복(李恒福)전
난세(亂世)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명재상
⊙ 임진왜란 당시 선조 호종… 전쟁 중 5번 병조판서 역임
⊙ 문장력과 실무 능력 겸비해 선조의 총애받아
⊙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비와 영창대군 살해에 반대하다 귀양 가서 사망
⊙ “조정이 겨우 모양만 남았어도 사대부들이 그런대로 염치를 알았던 것은 공이 전석(銓席)에 있었기 때문”(신흠)
⊙ “문자에 종사하는 선비인데 전곡(錢穀)을 다스리는 재간까지 있단 말인가?”(윤두수)

▲이항복
이항복(李恒福·1156~1618년)은 우리에게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인 한음 이덕형(李德馨·1561~1613년)과의 기지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정작 그의 경륜이나 정치적 역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 대단히 안타까운 대목이다. 그의 정치 역정만 추려내서 보아도 숨 가쁠 만큼 이항복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인물이다.
1556년(명종 11년)에 태어난 이항복은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8세 때 시를 지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거상(居喪)을 예(禮)에 따랐다.
소년 시절에는 재물을 풀어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했고 씩씩하여 남의 제재를 받지 않았으며 골목길에서 서로 용맹을 뽐낼 때는 다른 소년들이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때 무뢰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따끔한 가르침이 계기가 돼 학업에 열중했다.
“내가 미망인으로 곧 땅속에 들어갈 판인데 너는 오히려 무뢰한 자제들과 놀고 있으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이에 호방한 성격을 버렸다.
1571년(선조 4년)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특히 시가 호방하여 많은 선비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당시 재상 권철(權轍·1503~1578년)은 그 소문을 듣고 손녀사위로 삼았는데 첫눈에 재상감임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권철은 훗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대표적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권율(權慄·1537~1599년)의 아버지이니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이다.
이이를 통해 서인의 길을 걷다

▲이이
이항복은 정치 노선이 서인(西人)이다. 신흠(申欽·1566~1628년)이 지은 이항복 비명(碑銘)에 이항복이 서인의 길을 걷게 된 연유가 적혀 있다. 먼저 《선조수정실록》 15년(1582년) 6월 1일 기록부터 보자.
〈상이 경연에 나아가 대제학 이이(李珥)에게 말했다.
“내가 강목(綱目)을 읽고 싶으니 경은 재주 있는 신하를 미리 선발하여 그들에게 강독을 전담케 해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라.”
이이가 봉교(奉敎) 이항복, 정자(正字) 이덕형, 검열(檢閱) 오억령, 수찬(修撰) 이정립, 봉교 이영을 선발에 응하게 했다.〉
해당 연도는 1년 차이가 나지만 신흠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에 선묘(宣廟)가 장차 《주자강목(朱子綱目)》을 강독하려고 해 미리 재주 있는 신하를 가려 뽑았는데 다섯 사람 중에 공이 참여했으니 바로 율곡 이이 공이 추천한 것이었다. 율곡은 도학(道學)과 문장이 한 세상을 압도하였는데 공은 한 번 보고 당장에 뜻이 부합하였다.〉
대개 당색(黨色)은 가학(家學)이나 사승(師承)으로 인해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지던 당시 풍토와 달리 이항복은 뒤늦게 스스로 이이를 흠모해 서인의 길을 걷게 된 경우다. 그래서인지 뒤에서 보듯이 정통 서인들이 걷는 길과는 다른, 매우 독자적인 서인의 노선을 고수하게 된다.
그런데 선조 17년(1584년) 이이가 4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정권은 동인(東人) 쪽으로 넘어간다. 이 무렵 이항복은 예문관 봉교(奉敎)에서 사간원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과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특히 임금의 글을 짓는 지제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필력이 출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선조가 총애한 때문이기도 했다. 선조 18년(1585년) 9월 그가 정언에서 이조좌랑으로 옮겼을 때 실록 사관은 이런 평을 남겼다.
〈항복은 재기(材器)가 남보다 뛰어나 상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발(李潑) 등이 시기했으나 배척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한 일 처리 능력
이항복은 반대파인 동인의 수장(首長) 대사간 이발(李潑·1544~1589년)을 공박하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했으나 오히려 선조의 특명으로 옥당(홍문관)에 머문 적도 있었다. 1590년에 호조참의가 됐고 얼마 후에 조선을 뒤흔든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됐다. 비명에는 당시 일 처리하는 이항복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묘사가 담겨 있다.
〈기축년(1589년·선조 22년) 겨울에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정여립의 옥사(獄事)에 참국(參鞫)하였는데, 선묘(宣廟)가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논죄할 때 공은 응대(應對)하기를 빈틈이 없이 민첩하게 하고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 절도에 맞았으며,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고 입으로는 묻고 손으로는 글씨를 쓰기를 동시에 하는데, 상대방의 말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고 붓대는 잠시도 멈추지 않으면서 종횡무진으로 계속 움직이되 그 요점을 전부 파악하였으므로, 백관들은 팔짱만 끼고 서리들은 곁에서 보기만 하며 놀라서 귀신이라고 하였다. 선조는 누차 공이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고 매사를 반드시 공에게 맡겼는데, 공은 죄수가 많이 연루되어 옥사가 빨리 끝나지 않음으로써 남이 화를 당하는 것을 바라는 자의 마음을 열어놓는 상황을 민망히 여긴 나머지 죄상이 의심스러울 때는 다시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하기에 힘썼으며, 옥사를 심의할 때 자주 곁에서 의견을 제시하는가 하면 문서 중에 혹시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일을 담당한 자에게 꼼꼼히 따져보는 등, 붓대를 잡고 문서만 작성하지는 않았다.〉
실각한 정철 외면하지 않아
이에 선조는 이항복을 점차 글 짓는 분야에서 정치를 보좌하는 쪽으로 키우기 시작한다. 비명이다.
〈경인년(1590년·선조 23년) 여름에 응교에서 의정부의 검상(檢詳)·사인(舍人)으로 천전(遷轉)되고, 가을에 평난공(平難功)을 책록(策錄)할 때 공은 문사(問事)의 공로로써 3등 공신에 책록되고 전한(典翰)으로 옮겼다. 언젠가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 선조가 공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 하고서는 공이 옥사를 국문할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 뛰어난 재주라고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직질(職秩)을 올려 장려하고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시켰다가 특지(特旨)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여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하였는데 장차 공을 크게 등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선조 24년(1591년) 정여립 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던 좌의정 정철(鄭澈)이 건저의(建儲議) 문제로 갑자기 실각했다. 정철은 당시 동인파 거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1539~1609년)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됐다.
정철이 실각하여 논죄를 당하자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 아무도 정철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이항복은 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했다. 이 일로 이항복은 정철 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했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됐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됐다. 그만큼 선조의 신임이 컸다. 또 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1547~1634년)의 적극적인 비호로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다. 당시 동인이던 이원익은 “이항복을 탄핵하려면 나부터 탄핵하라”며 이항복을 아꼈다.
이항복은 문재(文才)뿐만 아니라 이재(吏才)에도 능했다. 재상 윤두수(尹斗壽·1533~1601년)의 비명에 나오는 일화다.
〈신묘년(1591년·선조 24년) 봄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겨우 한 달 만에 본조(本曹)의 사무가 어지러운 것이 없고 창고에 저장한 물자가 새어나가는 것이 없자 상국(相國·재상) 윤두수가 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크게 중시하여 말하기를 “문자에 종사하는 선비인데 전곡(錢穀)을 다스리는 재간까지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병조판서 5번 지내

▲서울 종로구 필운동 필운대(弼雲臺). ‘필운’은 이항복의 아호다. 필운대는 이항복의 집터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 그의 장인인 권율, 혹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터라고 한다. 사진=조선DB
이항복의 진가가 발휘된 때는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했다. 몽진하던 도중 선조는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러 대신(大臣)과 윤두수를 불러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는데 이항복이 가장 먼저 말했다.
“우리나라의 병력으로는 이 적(賊)을 당해낼 수 없고 오직 관서 쪽으로 가서 명(明)나라에 호소하여 원병을 요청하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 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승진됐다. 말 그대로 눈부신 승진이었다.
훗날 신흠은 항복의 비명에 이렇게 적었다.
〈공은 무릇 병조판서를 다섯 차례, 이조판서를 한 차례 지냈는데, 마음씀이 바르고 밝아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사람을 의망하고 발탁할 때 오직 그 재능의 유무만 보며 오로지 공론을 따랐고, 감히 다른 길로 진출시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관서에 질서가 있고 벼슬길이 맑았으니, 조정이 겨우 모양만 남았어도 사대부들이 그런대로 염치를 알았던 것은 공이 전석(銓席·인사권을 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흠이 같은 서인이긴 하지만 인사의 공정성과 관련된 이 대목은 훗날 이항복이 받게 되는 신망을 감안할 때 과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재상이 되었지만…
전란이 한창이던 1598년 이항복은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동료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1564~1635년)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2년 후인 1600년 영의정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 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됐다. 1602년 북인(北人)의 정인홍(鄭仁弘·1535~1623년), 문경호(文景虎·?~1620년) 등이 정여립 사건 당시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한 장본인이 성혼(成渾·1535~1598년)이라고 발설하자 삼사(三司)에서 성혼을 공격했다. 성혼은 서인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이었다.
이에 이항복은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했다. 이 점은 이항복의 독특한 면모이기도 하다. 정철 때도 그렇고 성혼 때도 그렇고 자신의 당파가 공격을 당할 때는 거침없이 최일선에 나섰다.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됐으나 이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북인에게 서인은 정적(政敵)이었으니 이항복으로서는 정치적 시련기에 들어선 것이다. 광해군 초기에 이항복은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임해군과 광해군
정권을 장악한 북인은 광해군을 설득 협박해 광해군 즉위년 2월 14일 광해군 친형 임해군 이진(李珒·1572~1609년)을 반역 혐의로 전격 잡아들인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봉작에 대한 서열 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 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일부 대신의 주청에 의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의 교동으로 이배되었고, 이듬해 죽임을 당했다. 임해군은 후일 1623년(인조 1년)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등극하자 복작신원(復爵伸寃·관작을 회복하여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이때 이항복은 영의정이었고 아직 선조가 살아 있을 때인 선조 39년(1606년)에 조정을 대표해 중국 사신에게 광해군이 세자임을 분명히 밝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준 바 있었다. 《선조실록》 선조 39년(1606년) 4월 16일 자이다.
〈소방(小邦)의 세자에 대해 천조(天朝)에서 책봉하는 명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으니, 간절히 바라건대 태자(台慈)께서는 온 나라 사람의 심정을 곡진히 살피시어 귀국하시는 대로 천자께 주달함으로써 속히 은전을 내리게 해주셨으면 하는 일로 정소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적장자(嫡長子)를 후사로 세우는 것이 상경(常經)이긴 하지만, 공로를 우선하고 현인을 택하는 것 역시 예법의 권도(權道)인 것입니다. 과군(寡君·자기 임금을 신하가 칭하는 호칭)이 임진년 병화(兵禍)를 당하던 날 국세(國勢)는 창황하고 인심은 안정될 곳이 없게 되자, 신민들이 모두 세자를 세워 위태로운 상황을 진정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과군의 여러 아들 중에 오직 임해군 이진과 지금의 세자가 가장 장성했는데, 과군께서는 세자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인효(仁孝)하고 공검(恭儉)하다는 것을 평소부터 아시고 주기(主器)를 맡겨야 하겠다고 일찍부터 마음을 정하셨으며, 사람들이 촉망하는 바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료에게 자문을 구하고 의논을 해서 후사로 세운 뒤, 위로 종묘사직의 신령들에게 고하고 아래로 온 나라의 백성에게 유시하였으니, 명분이 이미 정해지고 책임의 소재가 귀결된 것입니다.
그 당시 일의 형세가 하도 창황하여 미처 전주(轉奏)해서 품명(稟命)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때에도 요동(遼東)에 자보(咨報)하여 조정에 전주(轉奏)하였습니다. 이어 세자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위(神位)를 받들게 하고 약간의 신료를 수행시켜 험고한 지역에 의지해서 보전책을 도모케 하였으니, 대개 이렇게까지 되었고 보면 백성을 감호(監護)하고 무마하는 책임을 이미 전적으로 세자에게 맡겼다 하겠습니다. 세자가 이에 온갖 어려움과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평안도에서 나와 황해도를 거쳐 동으로 강원도에 이르러 진격을 도모하고, 동남쪽으로 가서 호남과 기전(畿田)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지나는 곳마다 성세(聲勢)를 떨쳐 격문(檄文)을 전하여 소모(召募)하며 대의(大義)로 유시하니, 달아나 숨었던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정인홍과 틀어지다
분명 이항복은 광해군 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한 그는 임해군에 대해서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10년(1618년) 5월 13일 자 그의 졸기(卒記) 일부이다.
〈무신년(1608년) 초정(初政·광해군 집권 초)에 민간에는 임해군이 변을 일으키고 조정이 먼저 움직여 이덕형 또한 처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그러나 이항복만이 진중하게 뇌동하지 않았다. 당시에 훈련도감 도제조였는데 혹자는 그에게 은밀히 군사 대비를 명령하라고 권하였다. 이에 이항복이 말하기를 “임해군이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내가 평소처럼 처리하더라도 충분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 후 일찍이 문하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젊은이들은 임해군이 신원되는 때를 볼 것이다”라고 했는데 과연 그의 말처럼 되었다.〉
신흠은 이항복이 실력자 정인홍과 틀어지게 되는 결정적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해년(1611년·광해군 3년)에 정인홍이 봉소(封疏)하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을 극구 비난하며 문묘(文廟)에 향사(享祀)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그 잘못을 해명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는데, 정인홍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들추어내 아뢰자 광해군이 그 논의를 주도한 자를 조사해 밝혀내어 금고(禁錮)시키라 하므로, 공은 크게 놀라 “이는 망국(亡國)의 처사”라 말하고 밤을 지새워가며 차자를 지어 아침 일찍 올렸다. 제생(諸生)들은 이와 같은 임금의 명을 듣고서 권당(捲堂·동맹휴학)하고 떠났으며, 공은 또 차자(箚刺·약식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진달하였다. 그 뒤 인대(引對)할 때 회재에 관한 일 네 조목을 기록하여 올렸는데, 정인홍은 이로 인해 크게 유감을 품어 해괴한 기틀이 점점 시작되었다.〉
곧이어 북인 세력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의 멸문, 선조의 적자(嫡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 흉계를 자행하자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해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년)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 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했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같은 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1617년(광해군 9년) 11월에 폐모론(廢母論)이 거의 결정되려 할 즈음 병중에 있던 이항복은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누가 전하를 위해 이러한 계획을 세웠습니까? 요순(堯舜)의 일이 아니면 임금께 진달하지 않는 것은 옛사람의 명백한 훈계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사나운 아버지와 미련한 어머니가 항상 순(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치게 하고서 입구를 막아버렸고, 창고의 지붕을 수리하라 하고서 밑에서 불을 지르는 등 위태롭기가 이를 데 없었는데도 하늘을 향해 통곡하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을 뿐, 부모가 옳지 않은 점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니, 이는 진정 아비가 아무리 자애롭지 않더라도 자식으로서는 불효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의리에 자식이 어미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이 장차 차츰 교화될 가망이 있는데, 이러한 말이 어찌하여 임금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의 도(道)는 순의 덕을 본받아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여움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정인홍의 인목대비 규탄
이항복이 언급한 《춘추》의 의리를 단서로 우리는 정인홍과 이항복의 마음가짐과 학문적 깊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광해군일기》 1613년(광해군 5년) 7월 9일 정인홍이 자신을 불러올리는 명을 사양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그중에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자모형제(子母兄弟)의 변을 당하신 것이 순(舜)임금과 정장공(鄭莊公)이 당한 것보다 더 심한 점이 있으니 전하의 심정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지금 이 역적이 그 흉악한 꾀를 펼친 것은 실로 간악함을 묘사하는 괴수로서 서로 연결하여 나라 안에 일이 있기를 바란 것이 아침저녁의 일이 아닙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결하여 인목대비의 세력을 의지하고 영창을 가담시켜 명분을 세웁니다.
아, 당요(唐堯·요임금)의 세상에도 사흉(四兇)의 죄는 오히려 귀양을 가고 주벌을 당함을 면하지 못했는데 지금이 어느 때이며 이것이 어떤 죄인데 도리어 이 사흉과 같은 죄를 아끼십니까. 《주역(周易)》 겸괘(謙卦) 육오(六五)에 ‘남을 침략하는 것이 이롭다[利用侵伐·이용침벌]라는 것은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제왕(帝王)은 한결같이 겸공(謙恭)만을 덕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겸겸(謙謙)의 극치는 반드시 복종하지 않은 자를 정벌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성인이 시의(時義)를 명시하여 이런 형상이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지 어찌 후세 사람을 속이려고 했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전하께서 심사숙고해 보셔야 할 부분입니다.〉
정인홍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정인홍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정인홍은 조식(曺植·1501~1572년)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 오건(吳健), 김우옹(金宇顒),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남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했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강경파인 북인에 가담해 영수(領首)가 됐다.
정인홍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의병 활동을 통해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했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류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남이공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이이첨(李爾瞻) 등과 대북을 영도했다. 1612년(광해군 4년)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과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 유폐 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정인홍은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했으며, 끝내 신원되지 못했다.
정인홍이 올린 위의 상소는 바로 계축옥사와 직결된 글 중의 하나다. 공자는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서 “곧기만 하고 사리를 알지 못하면 강퍅해진다”라고 했다. 정인홍이 딱 이런 사람이었다.
제자 최명길 등 인조반정의 주역 돼
결국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는 계축옥사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담긴 정확한 의미를 광해군이 경연에서 제대로 파악했다면 정인홍이 올린 소에 대해 “그대는 내가 순임금이 아니라 정나라 장공이 돼라 하는구나!”라고 꾸짖고 특히 《주역》을 끌어들여 “겸겸(謙謙)의 극치는 반드시 복종하지 않은 자를 정벌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어찌 영창이 주공의 형제인 관숙이나 채숙만큼 악한 행위를 했다는 말인가?”라고 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굳세고 눈 밝은[剛明] 임금의 언행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정인홍의 위협에 굴복해 유약하고 어두운[柔暗] 임금의 길을 걸었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쫓겨나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 했고 정인홍은 비명횡사(非命橫死)했다. 정인홍의 《주역》 인용은 상황에도 맞지 않았고 일의 이치에도 맞지 않았다.
반면에 이항복의 해석은 상황에도 맞고 일의 이치에도 맞았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이항복을 버리고 정인홍을 선택했다.
이항복이 죽은 지 정확히 5년 만에 그의 제자들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년) 등 서인 세력이 주도한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권좌에서 쫓겨났고 정인홍은 비명횡사했다.⊙
18 이덕형(李德馨)전
탁월한 吏才와 신중한 처신으로 38세에 정승에 오르다
⊙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당론을 좋아하지 않았다”(실록)
⊙ “明나라 조정에 있다 하더라도 예복 차림으로 위엄을 갖추어 묘당에 서서 백료들을 복종하게 할 인물”(명나라 장수 양호)
⊙ 선조가 요동 망명 서두르자 “우리나라에 한 고을도 남은 곳이 없게 된 뒤에 가야 될 것”
⊙ 임진왜란 중 홍문학 대제학·한성판윤으로 明軍 접대 등 對明 외교 담당
⊙ 광해군 즉위 시 對明 외교 맡아 기여했으나 폐모론 반대하다가 실각

▲이덕형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세 분의 정승(政丞)이 좌우에서 돕고 인도하여 오늘이 있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백성들 사이에서 떠돌았다는 말이다. 이원익(李元翼·1547~1634년),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 그리고 이덕형(李德馨·1561~1613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덕형은 조선 초 명문가 광주(廣州) 이씨(李氏)로 연산군 때 정승을 지낸 이극균(李克均)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지사를 지낸 이민성(李民聖)이다. 1561년(명종 16년)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났고 성품 또한 침착하고 굳세고 순후(醇厚)하면서도 조심성이 있었다고 한다. 한양의 북쪽에 살았다고 해서 호를 한음(漢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선조의 총애받아 고속 승진

▲이덕형의 장인 이산해.
스무 살(선조 13년·1580년)에 과거(科擧)에 급제해 괴원(槐院·승정원)을 거쳐 사원(史苑·예문관의 별칭)에 천거를 받았으나 당시 장인이던 이산해(李山海)가 궁중 소장의 서적을 주관할 때라 이덕형은 사사로운 친분을 이유로 사절했는데 선조(宣祖)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강(講)하려고 하면서 고문(顧問)에 대비할 재신(才臣) 다섯 사람을 선발케 하고 어부(御符·임금 전용 도서관)의 책을 내어주자 마침내 참여했다.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그를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사적(私的)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했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이덕형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선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은 이덕형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홍문관 정자(正字)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문풍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했다. 이 뒤에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됐다.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 사신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경(趙絅)이 지은 비명이다.
〈두 왜사(倭使)는 공의 의표(儀表)를 바라보고는 자신들도 모르게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며, 서울로 들어와서는 향연(享燕)을 베푼 자리에서 현소 등이 보빙(報聘)을 몹시 간청하므로 공은 얼굴에 엄정한 빛을 띠고 말하기를 ‘이웃 나라와의 수교(修交)는 신의(信義)를 버리고는 할 수가 없다. 지난날 네 나라의 봉강신(封疆臣)이 우리나라의 망로(亡虜) 사화동(沙火同)을 부추겨 끼고서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의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는데도 너의 나라에서는 금할 줄을 모르니, 신의라는 게 있는가?’라고 하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소와 평의지는 졸왜(卒倭)를 우리나라로 보내어 한 달이 못 되어 사화동과 사로잡혀 간 늙은이와 아이들 100여 명을 데리고 와서 바치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특별히 직제학(直提學)을 제수하고 은대(銀帶)를 하사(下賜)하였다.〉
31세에 文衡에 오르다
이 무렵 이덕형의 승진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했다. 이때 이덕형의 나이 31세였다. 대제학이란 국가 문장을 주관하는 자리라 하여 문형(文衡)이라 불렀다. 승지로서 기밀 업무를 다루는 데 능함이 입증되었는데 문재(文才) 또한 타의추종을 불허했던 것이다. 비명이다.
〈신묘년(辛卯年·선조 24년·1591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초배(超拜·특진)되어 대제학(大提學)을 겸하니 당시 나이 31세였다. 춘정[春亭·변계량(卞季良)] 이후 문형(文衡)을 맡았던 사람들은 모두 오래도록 덕망을 쌓고 품계가 높은 이들을 등용하였고 공과 같은 묘령(妙齡)에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 문학에도 능숙하고 덕망을 쌓은 훌륭한 이가 몇 사람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공이 문형을 맡은 우두머리가 되기에 이르자 모두가 이르기를 ‘이모(李某)보다 앞설 사람은 없다’라고 하였다.〉
이덕형은 문약(文弱)한 인재가 아니었다. 《선조실록》 17년(1584년) 3월 25일 자 기록이다.
〈임금이 서총대(瑞葱臺)에 친림(親臨)하여 무예를 시험할 때 공이 응제(應製)하여 장원(壯元)했는데 이로부터 무예를 겨룰 적마다 항시 수위(首位)를 차지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이덕형의 담대함은 두고두고 그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의 비명은 당시 그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진년(壬辰年·1592년)에 들어 왜구(倭寇)들이 대거 침입해 우리나라를 천식(荐食·점차로 먹어 들어감)하면서 이모(李某)를 만나 강화를 논의하겠노라 선언하므로 선조가 조신(朝臣)들에게 그 대책을 두루 하문(下問)했으나 모두가 겁에만 질려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 공이 나아가 이르기를 ‘급히 서두르는 것이 신하 된 자의 직분입니다’라고 자청하여 단기(單騎)로 급히 달려 구성[駒城·용인(龍仁)]에 이르러 보니 벌써 적(賊)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널리 퍼져 있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곧바로 되돌아 한강(漢江)을 건너와 보니 대가(大駕)는 이미 서행(西幸·몽진)한 뒤라 사잇길로 뒤쫓아 평양(平壤)에 도착했다.
그동안 적들은 패수[浿水·대동강(大同江)의 옛 이름]까지 핍박해 들어와서 공을 만나기를 청하므로 공은 또 가길 자청하여 단가(單舸)로 강중(江中)에까지 나아가 그들을 회견하였다. 뭇 신하들과 여러 장수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질려 얼굴빛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건만 공은 적을 만나 태연자약한 기세로 꾸짖기를 ‘너희들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군사를 일으켜 오랫동안의 우호(友好)를 깨뜨림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현소 등이 이르기를 ‘우리는 명(明)나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조선(朝鮮)에서 군도(軍途)를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지라, 공은 준엄한 표정을 지으며 잘라 이르기를 ‘너희들이 우리의 부모국(父母國)과 같은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니, 설사 우리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없다. 어찌 화의(和議)가 이루어지겠는가?’라고 했다. 이후에 현소 등은 떠들썩하게 공을 칭송하여 이르기를 ‘험악한 적진 속에서도 말하는 품이 지난날 연회의 주석(酒席)에서 하는 태도와 다름이 없으니 참으로 미치기 어려운 인물이다’라고 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다

▲윤두수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이덕형은 관직이 대사헌이었지만 원병을 청하는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요동을 방문하고 돌아온다.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태가 급박해지면 선조가 요동으로 피신해도 되는지를 타진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원병 파견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선조 25년(1592년) 7월 3일이다.
먼저 요동에 들어가기를 서두르는 선조의 촉구에 이덕형은 사실상 불가함을 이렇게 에둘러 말한다.
“우리나라에 한 고을도 남은 곳이 없게 된 뒤에 가야 될 것입니다. 만일 한 고을이라도 남아 있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공억(供億·물자 제공)을 어느 아문(衙門)에서 하겠습니까. 반드시 적병의 핍박(逼迫)으로 부득이하게 된 뒤에 가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 파견은 이런저런 이유로 지연되고 있었다. 8월 22일 대사헌 이덕형은 문형의 직임을 감당키 어렵다며 체직(遞職)을 청했다. 그러나 전쟁이 터져 명나라와 외교 교섭이 더욱 중요해진 상황에서 국왕의 문서 작성을 책임져야 하는 문형의 비중은 더 커졌다. 이에 선조는 여러 신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덕형은 동인(東人)-북인(北人)의 거두 이산해의 사위였다. 서인(西人)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말했다.
“문형(文衡)의 직임은 평소 양성한 명망이 가볍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중국 사신을 만날 경우에는 전적으로 나라를 빛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현재 호종(扈從·임금을 호위하는 일)한 재신(宰臣) 중 누구인들 골육과 친속이 오랑캐의 수중에 빠져 있지 않겠습니까. 대의(大義)가 중하기 때문에 힘써 종사하면서 구구한 사정(私情)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이덕형은 나이도 젊고 명망도 무겁고 문학도 넉넉하니, 대제학의 직임은 아마도 가볍게 바꾸지 않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이덕형이 조정 신하들로부터 어떤 신망을 받고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발언이다.
한성부판윤으로 明軍 접대 담당
선조 25년(1592년) 12월 18일 대사헌 이덕형은 한성부판윤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이덕형의 주된 업무는 접대사(接待使), 접반사(接伴使) 등으로서 명나라에서 온 장군들을 만나 그들의 속내를 파악하고 조선이 원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선조는 이덕형을 중추부 지사로 임명한다. 특히 평양성 탈환 이후 속히 일본군을 조선에서 내몰 수 있도록 명나라 군대에 진격을 촉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러나 남의 나라 군대를 우리 뜻대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 중신들은 이로 인해 명나라 장수들에게 곤욕을 당하곤 했는데 이덕형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선조 26년, 이덕형은 다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에 임명되지만, 본 업무는 ‘제독 접반사’였다. 명나라 수뇌부 이여송(李如松)과 협의하는 최고위 통로였다. 그만큼 선조의 신임이 깊었다. 이해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비명이 간략하다.
〈4월에 들어 공은 명군(明軍)을 인도하여 한양(漢陽)에 입성(入城)해서 묘사(廟社·종묘사직)의 회신(灰燼)을 말끔히 쓸고 크게 통곡하니 살아남은 고로(故老)들이 모두가 울면서 공을 보기를 부모와 같이 여겼다. 경성(京城)은 이제 막 병화(兵禍)에 결딴이 난 뒤라 굶주린 데다 돌림병마저 치열하게 번져 부자가 뼈를 바꾸어 씹을 지경에 이른 백성들이 고난(苦難) 속에 슬피 울부짖었고, 이미 굶어 죽은 시체가 길가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쉴 새 없이 굶주린 백성들을 거두어 먹인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고, 또 한편으론 흩어진 서적(書籍)들을 수집하여 강유[講帷·강연(講筵)]에 대비하게 하였다.〉
1594년 이덕형은 모친상을 당했다. 그러나 선조는 그를 기복(起復)하여 이조판서에 제수했다. 이에 이덕형은 아홉 차례나 사직을 청했다. 선조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국세가 위급할 때에는 인물을 전형하는 일에 국가의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단지 금혁(金革·무기)을 친히 맡은 것뿐이겠는가. 한갓 사정(私情)만을 고집하고 군부(君父)의 위급함은 돌아보지 않으니, 어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는가. 경은 전번의 전지에 따라 급히 올라오라.”
‘경리 접반사’
1595년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이듬해 이덕형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1596년에 호서(湖西)의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일으켜 두 고을을 함락하자 홍주목사(洪州牧使) 홍가신(洪可臣)이 그를 토멸해 주살했는데, 그 잔당(殘黨)이 체포당해 이덕형의 이름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덕형은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벌의 명을 기다렸으나 선조는 문제 삼지 않았고 병조판서의 자리에서만 물러나게 했다.
정유년(丁酉年·선조 30년·1597년)에 왜적(倭賊)이 재침(再侵)하자 명(明)나라 황제가 네 사람의 장수(將帥)를 보내면서 병사(兵士) 10만 명을 인솔하게 했고, 어사(御使) 양호(楊鎬)를 감군(監軍)으로 삼았다.
양호는 나이가 어리고 기세를 마구 부리며 세상의 명사(名士)들을 얕보는 버릇이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평판을 듣고 몹시 겁을 먹었는데 선조는 많은 신하 가운데 오직 이덕형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여 보냈다. 다시 정치에 복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경리(經理) 접반사’로서 양호를 만난 이덕형은 첫 대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리란 양호이다.
“지금 왜적(倭賊)의 기세가 몹시 험악하니 순식간에 한강(漢江)을 건너올 것이다. 까딱 한 번 천참[天塹·천연의 요새지 한강(漢江)]을 잃는다면 비록 명군(明軍) 같은 위세(威勢)일지라도 힘이 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양호는 이 말을 듣고 즉시 서울로 들어가 서둘러 책전(責戰)을 하고 유격장(遊擊將) 마귀(麻貴)가 거느린 용감한 기병들이 왜적을 직산(稷山·지금의 충남 천안)의 소사(素沙) 들판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래서 서울이 다시 안정을 찾게 됐다. 이후 양호는 이덕형의 일 처리에 감복해 이렇게 말했다.
“이모(李某)는 비록 명(明)나라 조정(朝廷)에 있다 하더라도 예복(禮服) 차림으로 위엄을 갖추어 묘당(廟堂·정승 사무실)에 서서 백료(百僚·모든 벼슬아치)들을 복종하게 할 인물이다. 참으로 훌륭하다!”
급제 18년 만에 정승에 올라
선조는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우상(右相)에 임명하니 나이 38세였는데, 얼마 안 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불과 18년 만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한 이덕형은 곧바로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했다. 당시 상황을 비명은 자세하게 전한다.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하할 때 선조(宣祖)가 전송(餞送)을 하니 유정이 간절한 말로 이르기를 ‘이 나라에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가장 훌륭한 자와 함께 동행하게 한다면 만족히 여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우상(右相) 이항복(李恒福)에게 ‘의중(意中)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하문(下問)하므로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모(李某)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공을 종행(從行)하게 명했다. 유정은 몹시 기뻐하면서 ‘나는 성공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순천(順天)에 당도하니 궁지에 몰린 적추(賊酋)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의 기세가 몹시 꺾여 섬멸(殲滅)의 날을 기필(期必)할 수 있었는데 유정은 교활한 성품에다 남에게 분공(分功)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몰래 소서행장에게 사람을 보내 피하여 달아날 것을 권유하였다.
공이 그 내용을 미리 탐지하고서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명나라 수군(水軍) 제독(提督) 진린(陳璘)과 약속을 하고 요항(要港)에 잠복했다가 퇴각하는 적을 대파(大破)하게 하니 소서행장은 겨우 죽음만을 면하고 도망하였다. 유정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분개하면서 ‘이모(李某)가 나의 30년의 훈명(勳名)을 떨어뜨린단 말인가?’라며 아쉬워하였다.〉
광해군 즉위에 정당성 부여
선조의 한결같은 총애를 받았던 이덕형은 광해군(光海君) 집권과 더불어 큰 시련기를 맞게 된다. 광해군 초기에 그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에 대한 고변(告變)이 있어 삼사(三司)에서 즉시 법대로 다스리길 청하자 광해군이 대신(大臣)들의 논의를 물었다. 이덕형과 좌상(左相) 이항복은 의(義)로써 처단하는 것보다는 은정(恩情)으로 감싸줄 것을 말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도 도헌(都憲·대사헌)으로서 소(疏)를 올려 전은(全恩·온전히 살려주는 은혜)을 주장했으며 상신(相臣) 이원익도 차자(箚刺·약식 상소)를 올려 역시 전은을 주장하자 시론(時論)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전은을 주장한 사람들을 지목하여 호역(護逆)이라 몰아세웠다. 이덕형은 남인(南人)이었고 당시 세상은 북인 천하였다. 결국 임해군의 처형을 막지 못했다.
이에 앞서 명나라 조정에서는 적장자(嫡長子)를 버려두고 서자(庶子)를 세웠다는 이유를 들어 광해군의 책봉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고부사(告訃使) 이호민(李好閔)이 연경(燕京)에 도착하자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 두 차관(差官)을 보내 임해군의 광포(狂暴)한 병 상황을 사문(査問)하려 하자 온 조정이 허둥지둥 놀라 입을 다물 뿐 감히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이에 이덕형이 이들 차관에게 달려가 이르기를 “아우의 일로 형을 사증(査證)하는 행위는 아무리 하국(下國)일지라도 명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니 차관들이 이 말을 듣고 다시는 사문(査問)하지 않았다. 광해군 즉위 정당성 확보에 공을 세운 것이다. 당시 명나라 만력(萬曆) 말엽에 천자(天子)의 뒤를 이을 후계자의 옹립이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아 아무리 번국(藩國)에서 자국(自國)의 세자 책봉 허락을 요청하여도 명조(明朝)에서는 그 허락을 자꾸만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이덕형에게 명하여 진주사(陳奏使)로 삼으니 이덕형은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27일 만에 연경에 도착하여 5개월 동안 머물면서 백방(百方)으로 주선하여 책봉의 허락을 받아 돌아왔다.
광해군이 몹시 기뻐하여 이덕형의 아버지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를 제수하고 아들에게는 6품(品) 벼슬을 내렸으며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내려 돈독히 대우하였다.
영창대군 처형과 폐모론에 맞서
1613년(광해군 5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使嗾)를 받은 삼사(三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이덕형을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하는 데 그쳤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같은 해 10월 9일이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53세였다. 짧았으나 참으로 많은 일을 한 생애였다.
《광해군 일기》 광해 5년(1613년) 10월 9일 자에 실린 이덕형 졸기다.
〈이때 죄를 주자는 논계(論啟)는 이미 중지되었는데 덕형은 양근(楊根·양평)에 있는 시골집에 돌아가 있다가 병으로 졸하였다. 덕형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그는 일찍부터 공보(公輔·재상)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는데 문학(文學)과 덕기(德器)는 이항복과 대등하였다. 31세에 대제학에 제수되었고 38세에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임진년 이래 공로가 많이 드러나 그의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들에게도 알려졌다.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 있었을 때에는 왜인들에게 크게 존경받았으나 임진왜란에 이르러 적의 기세가 날로 급박해지자 조정에서는 이덕형으로 하여금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세력을 늦추도록 보내려 하였다. 이덕형이 명을 듣자마자 즉시 출발하므로 선조가 이에 감읍하였다. 가마가 평양에 도달하자 적장 현소가 이덕형을 뵙기를 구하니 사람들이 이를 크게 위태롭게 여겼다. 이덕형은 한 척의 배로 찾아갔는데 조금의 두려워하는 낯빛이 없었다. 갑진록(甲辰錄) 호성공(扈聖功)에 이덕형의 충성과 노고가 기록되었음에도 봉작을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계축년 옥사가 일어나자 수상(首相)으로 흉배들에게 협박받았다. 비록 옥사(獄事)에 성실히 참여했지만 친구를 대하면서 말이 시사에 미치면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식음을 전폐하는 데 이르렀다. 차자로 영창대군의 원한을 논하면서 말이 조리가 없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겼고 오히려 이 때문에 죄를 받았다.
사람됨이 간솔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또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아 장인 이산해가 당파 가운데서도 지론(持論)이 가장 편벽되고 그 문하들이 모두 간악한 자들로 본받을 만하지 못하였는데 덕형은 한 사람도 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주 소인들에게 곤욕을 당하였다. 그가 졸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하였다.〉⊙
19 최명길(崔鳴吉)전
백성을 전란의 도탄에서 구해낸 ‘실사구시 재상’
⊙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실록》)
⊙ 병자호란 앞두고 강화 주장… 전쟁 끝난 후 속환된 여성들 보호
⊙ 광해군 시절 유배생활 하면서 양명학 공부
⊙ 거사 날짜 정하는 등 인조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
⊙ “강화의 문서를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 되고 찢어진 문서를 맞추는 사람 또한 있어야”

▲최명길
1623년 3월 13일 서인(西人) 세력이 주축이 된 일군의 무리가 훗날의 인조를 내세워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강화도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1560~1623년) 등을 처형했다.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대북파를 이끈 이이첨은 광해군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을 주도했다. 사실상 서인과 남인들이 거사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인조와 서인은 남인 이원익(李元翼·1547~1634년)을 모셔와 영의정으로 삼았지만 실권을 갖는 재상인 좌의정은 자기 사람으로 임명했다. 거사 당시 좌의정 박홍구(朴弘耈·1552~1624년)는 곧바로 윤방(尹昉·1563~1640년)으로 교체되었다. 박홍구는 이이첨·정인홍을 따르던 대북파로 반정 당시에는 목숨을 건졌지만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돼 사형당했다.
거사 후 열흘이 지난 3월 24일 정창연(鄭昌衍·1552~1636년)이 좌의정에 오른다. 좌의정 정유길(鄭惟吉·1515~1588년)의 아들로 이미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냈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직에서 사퇴하고 두문불출했다. 이때 이미 70세를 넘겨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광해군 비 유씨(柳氏)가 조카였음에도 폐모론에 참여치 않아 서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반정공신 김류
그러나 정창연은 4개월여 만에 물러나고 우의정 윤방이 좌의정에 오른다. 선조 때 서인 영수였던 영의정 윤두수(尹斗壽·1533~1601년)의 아들로 이이(李珥)의 제자였으니 정통 서인이었다. 그는 4년 정도 좌의정으로 있으며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의 졸기(卒記) 한 대목이다.
〈상이 반정하고 나서 그를 재상으로 발탁하였는데 국가 대사에 대해 특별히 의견을 진달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갑자년(1624년)에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맨 먼저 도성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책자 한 권을 바쳤는데 곧 역적 이괄에게 붙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것이었으므로 그는 자세히 보지도 않고 불태워 버렸다. 그래서 의논하는 사람들이 ‘이분의 큰 역량이 아니었으면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정묘호란이 있기 전에 조용히 은퇴했거나 병자호란 때 죽기로 결심했더라면 이름난 재상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다고 하겠다.〉
그는 병자호란 때 40여 신주를 모시고 봉림대군 등과 함께 강화로 피란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러 2개월 동안 유배에 처하기도 했다.
윤방의 뒤를 이어 잠시 신흠(申欽·1566~1628년)이 좌의정에 올랐지만 곧바로 오윤겸(吳允謙·1559~1636년)으로 교체된다. 인조 5년(1627년) 9월 4일이었다. 반정공신 김류(金瑬·1571~1648년)는 우의정이었다.
오윤겸은 성혼(成渾·1535~1598년)의 문인으로 서인이며 예학(禮學)에 밝았다고 한다. 그러나 재상으로 업적은 그다지 없었다. 그에 대한 졸기의 한 대목이다.
〈청백하고 근신함으로써 몸을 지켰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들을 예우하였으므로 현상(賢相)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능과 곧은 말을 하는 기풍이 없어 명성이 정승이 되기 전보다 떨어졌다.〉
1년 후 드디어 반정 1등 공신 김류가 좌의정이 되어 정국을 주도한다. 김류는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 추숭(追崇·왕위에 못 오르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과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고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졸기는 그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품이 자기의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선을 따르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병자년과 정축년의 난리 때에는 패자(敗子)에게 중임을 제수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통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아들에게 강화도 수비를 담당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가 실패한 일을 말한다. 이후 이정귀(李廷龜· 1564~1635년)도 잠깐 좌의정을 맡았다. 마침내 인조 15년(1637년) 7월 최명길이 좌의정에 오른다. 52세 때였다.
“오늘은 증자, 내일은 안자, 다음 날은 공자 되리라”
최명길은 1586년 8월 15일에 태어났다. 선조 19년이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이다. 아버지 최기남(崔起南·1559~1619년)은 우계(牛溪) 성혼에게 수학했고, 문과에 급제했으나 “당시의 소인배들에게 배척을 당해 관직으로 현달하지 못하고 영흥부사(永興府使)에 그쳤다”. 할아버지 최수준(崔秀俊)은 아예 벼슬을 멀리 했다.
아버지의 학통이 서인 중에서 훗날 소론(少論)으로 발전하게 되는 학파의 종주(宗主)인 성혼과 닿아 있다는 것은 어린 시절 최명길의 배움에도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된다. 아마도 아버지가 서인 중에서도 이이나 송익필(宋翼弼)의 학통이었다면 주희(朱熹)의 《소학(小學)》부터 읽으라고 했을 텐데 아버지 최기남은 달랐다. 행장(行狀)을 비롯한 각종 기록을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둘째 아들이었던 최명길은 키가 작고 몸도 좋지 않았다. 남들보다 늦은 8세에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최명길이 자주 입에 올린 말이 있다.
“오늘은 증자(曾子)가 되고 내일은 안자(顔子)가 되고 또 그다음 날에는 공자(孔子)가 되리라.”
증자와 안자[안회(顔回)]는 모두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덕행(德行)이 최고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최기남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논어(論語)》를 가르쳤다. 10세 때 문장을 짓기 시작했고 14세 때에는 집에서 주자(朱子)의 책들을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시골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가 성균관(成均館)을 드나들며 선비들과 교유했다.
사실 이때는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였다. 최명길의 나이 7세 되던 1592년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은 지금의 경기도 송탄으로 피란을 떠났다. 다행히 이듬해 한양이 수복됐고, 그제야 최명길의 가족들도 인천(仁川)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최명길의 공부가 늦어진 또 하나의 이유다.
다행히 최명길의 증손자이자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1646~ 1715년)의 아들인 최창대(崔昌大)가 남긴 글에 이 무렵 일에 대해 최명길 자신이 회고한 대목이 실려 있다. 자제들을 타이르며 한 말이다.
“난리 뒤에 인천 장사(莊舍)로 돌아가 살면서 부지런하게 과독(課讀·책읽기)하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간혹 닭이 울게 되면 매번 배 속이 주림을 깨달았지만 이제 막 상란(喪亂)을 겪은 터에 집 안 또한 텅 비고 곤궁하여 집 안을 빙 둘러보아도 실로 주림을 구제하고 먹을 만한 것이 없어 늘 주림을 참으며 글 읽기를 면하지 못하였느니라. 이제 너희는 날로 기름진 기장밥을 배부르게 먹어 항상 배불러 넉넉함이 있거늘 부지런히 글을 읽지 아니한다면 되겠느냐?”
신흠, “장래 세상 위해 큰일 할 인물”

▲이항복
최명길은 1605년(선조 38년) 2월 14일 문과에 급제했다. 20세 때였다. 훗날 그의 스승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되는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승정원에 재직 중이었는데 평소 눈여겨보던 최명길에 대해 이런 촌평을 남겼다.
“최 아무개는 체질은 비록 잔약하나 정신은 정련돼 있어 금이나 옥과 같은 사람이다. 장래에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할 인물이다.”
최명길은 과거 급제자들의 길을 따라서 승문원(承文院)에서 관리의 업무를 익히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승문원이란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는 관청으로 흔히 중국의 관례를 따라 괴원(槐院)이라고 불렸다. 이 무렵 최명길은 이시백(李時白·1581~1660년), 장유(張維·1587~1638년)와 함께 어울리며 당시 정승으로 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을 스승처럼 섬겼다. 이들은 넓은 의미의 서인(西人)이라 할 수 있다. 이시백은 이이를 스승으로 섬긴 이귀(李貴)의 아들이고 장유는 서인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김장생(金長生·1548~1631년)의 문인이다. 이항복은 대체로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본다.
최명길의 실제 관리로서의 길은 평탄치 못했다. 최명길은 병약했다. 24세 때인 1609년 광해 원년에 사초(史草)를 정리하던 사국(史局)에 천거됐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이듬해 사헌부 감찰과 예조좌랑에 천거됐을 때도 마찬가지 이유로 취임하지 못했다. 1611년 공조좌랑에 임명됐고 이듬해에는 병조좌랑에 제수됐다. 그런데 병조좌랑으로 있던 최명길은 1614년(광해군 6년) 1월 14일에 감옥에 수감된다. 그날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다.
“병조좌랑 최명길(崔鳴吉), 선전관 윤우(尹佑)가 잡혀와 하옥되었다.”
배경은 이러했다. 당시에 명나라 차관(差官)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왕이 명하여 병조 낭청과 선전관 각 한 사람으로 하여금 차관의 관소를 수직하게 하여 외부 사람과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막도록 했다. 마침 원일(元日·정월 초하루)이어서 차관의 가정(家丁) 몇 사람이 길을 나다녔는데 포도청 군사들이 그 뒤를 수행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했다. 그런데 서학(西學) 유생 이홍임(李弘任)이란 자가 술에 취하여 접근해 “당신네는 중국 사람인데 어디서 왔는가?”라고 했다. 이에 포도청 군사들이 즉시 체포, 이홍임이 중국인과 밀담을 주고받았다고 무고하여 상을 타고자 하였다.
양명학을 배우다
하지만 최명길이 사실을 조사하니 이런 실상이 없어 즉시 석방했다. 그런데 당시의 실력자 이이첨이 이 소식을 듣고는 사실을 알고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고 하여 이홍임과 더불어 함께 수감되게 된 것이다. 왕이 친국(親鞫)하여 공초를 받고, 이어 하옥하라고 명했다. 결국 최명길은 관작을 모두 빼앗기고 도성 밖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이러다 5년 후인 1619년(광해군 11년) 5월 14일, 최명길은 유배에서 풀려난다. 연보(年譜)에 따르면 이 무렵 아버지의 외가 쪽 친척인 남언경(南彦經·1528~1594년)의 아들 남격(南格)으로부터 장유와 함께 양명학(陽明學)을 배웠다. 남언경은 선조 때 사람으로 서경덕(徐敬德·1489~1546년)의 문인이며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다.
유배에서 풀려나고 한 달 만인 6월 16일 최명길은 부친상을 당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1619년부터 1621년까지는 시묘살이를 하느라 공부를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고 이후로부터 본다면 인조반정을 일으키던 1623년까지 대략 1~2년 정도 양명학을 공부한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시장(諡狀·위인이 살았을 때 한 일들을 적은 글발)에 따르면 이 무렵 최명길은 “복제(服制)가 끝났어도 성시(城市)로 가까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교외에 살면서 소요했다”고 한다.
이미 인목대비는 폐위돼 서궁(西宮)에 유폐돼 있었다. 시중에는 광해군이 유폐된 인목대비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이 무렵 신경진(申景禛·1575~1643년)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다. 당시 신립(申砬·1546~1592년)의 아들 신경진은 안주목사(安州牧使)에 제배되자 최명길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의 뜻은 서궁(인목대비)을 붙들어 보호하는 데 있소. 멀리 변방 요새로 부임하는 것을 원하지 않소.”
거사(擧事)의 암시였다. 신경진은 당시 이미 김류 등과 거사를 준비해오고 있었다.
반정 다음 날 이조좌랑 발탁
이시백과 가까웠던 최명길은 이시백의 아버지 이귀를 찾아갔다. 이귀도 동의했다. 당시 최명길의 역할과 관련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거사의 날을 최명길이 점을 쳐서 정했다는 것이다. 후손 최석정이 쓴 행장을 보자.
〈그때 같이 일할 여러 사람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어서 시간을 자꾸 오래 끌어 거의 무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큰 계획을 너무 질질 끄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해 바로 시골에서 서울로 옮겨 와서는 반정의 거사일을 스스로 점쳐 결정했다.〉
이는 최명길이 《주역(周易)》과 《춘추(春秋)》에 밝았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의 대체(大體)를 살필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그의 행장이나 신도비 등이 반드시 기록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한창 거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능양군(綾陽君·훗날의 인조)을 사저로 찾아봬라고 권했다. 그러나 공은 “훗날 신하가 돼 섬겨야 할 분이다. 의리로 볼 때 사사로이 뵙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다”라며 끝내 가지 않았다. 식자들이 옳은 일이라고 했다.〉
훗날 최명길이 보여주는 공(公)과 사(私)의 분별은 이미 이때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공로를 얻기 위해 거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도의가 땅에 떨어진 데 대한 공분(公憤)에서 참여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인조반정 거사 바로 다음 날 최명길은 조익(趙翼·1566~1628년)과 더불어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됐다. 이날의 《인조실록》이다.
〈명길은 영민하고 재주가 있으며 성품 또한 재치가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세상 일을 담당할 뜻을 두었다. 광해조 때 벼슬에서 쫓겨나 집에 있다가 드디어 신경진 등과 의거를 꾀했는데 기묘하고 은밀한 계책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아울러 정사원공(靖社元功)에 녹훈됐다.〉
이조좌랑은 높지는 않아도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요직이다. 그만큼 인조나 반정 세력 사이에서 최명길에 대한 신망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공정함에 대한 인정이 없었다면 인사를 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은 이후에 그가 맡은 직위를 통해 확인된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주선”

▲김류
3월 25일 새 임금은 김류·이귀·이괄을 불러 만나보고서 거사에서 주요 인사들의 활동상을 보고받았다. 차후에 있게 될 공신 책봉의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김류는 최명길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언급을 한다.
“무오년(1618년)부터 서로 약속한 자는 신경진·구인후(具仁垕)·이서(李曙)·박난영(朴蘭英)이었는데 이흥립과 이서는 박승종(朴承宗)과 절친한 사이지만 끝내 대의(大義)를 일으켰으니 더욱 충의를 분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최명길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주선하였으니 그 공로가 김자점(金自點·1588~1651년)에 밑돌지 않습니다.”
김류가 비교 대상으로 삼은 김자점은 어떤 사람인가? 최명길보다 두 살 아래인 김자점은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고 음보(蔭補)로 출사해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의 폐비 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 대북 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했다. 처음에 최명길·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년) 김류·신경진 등과 연결됐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 반정 직후에는 이귀의 입장을 지지하다가 김류와 이귀가 갈등을 빚자 김류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김류의 칭찬 덕분인지 같은 해 10월 18일 반정 공로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최명길은 1등공신에 녹훈돼 완성군(完城君)의 봉작을 받았다. 이미 이에 앞서 8월 11일 최명길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됐다. 그러고 11월 2일 다시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승진했다. 새 임금과 조정의 신망이 그만큼 두터웠다는 방증이다.
‘진회보다 못한 자’

▲진회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해결책을 내지 못할 때 그는 당당히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다. 병자호란이 임박한 인조 14년(1636년) 11월 8일 최명길은 일관되게 청나라의 침략을 당해낼 능력이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화친을 추진했는데 부교리 윤집(尹集)이 소를 올려 최명길을 성토했다.
“옛날 화의를 주장한 자들 중에 진회(秦檜·1090~1155년)보다 더한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언어와 사적(事迹)이 사관(史官)의 필주(筆誅·글로써 공격함)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로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명확합니다. 대체로 진회로서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차마 하였으니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진회만도 못한 자라는 뜻이다.
진회는 남송(南宋) 초 정치가로 송나라를 침략한 금나라와 송나라를 남북으로 나누기로 합의한 장본인이다. 유능한 관리였지만 정권 유지를 위해 ‘문자옥(文字獄)’을 일으켜 반대파를 억압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이상주의를 내세운 후세의 주자학파(朱子學派)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손에 옥사(獄死)한 악비(岳飛)가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데 반해 그에게는 간신(奸臣)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서인이 누구인가? 주자학파 중에서도 가장 골수들 아닌가?
최명길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전쟁 발발을 앞두고 최명길은 온몸을 던져 적진으로 들어가 전쟁을 막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청나라 장수는 전쟁과 강화(講和) 중 택일할 것을 통보했다. 최명길이 이를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에게 보고하자 조정 신하들은 격론을 벌였다. 최명길의 비명이 전하는 당시 상황이다.
〈공이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결과를 보고하니 주상이 공의 손을 붙잡고 울먹였고 공도 눈물을 흘리며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성 아래에 이르러 여전히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공격과 강화의 의논이 더욱더 거세졌기 때문에 조정에서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공이 분발하여 말했다.
“오늘날의 계책은 오직 강화냐 전쟁이냐 이 두 가지 일뿐인데 전쟁을 하려고 하면 힘이 미치지 않고 강화를 하려고 하면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상하가 어육(魚肉)이 되어버린다면 장차 종사(宗社)는 어느 곳에다 둔단 말입니까?”
오랑캐가 성을 더욱더 급하게 포위하여 여러 번 함락되려고 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상실되어 대부분 강화의 의논을 따랐다. 김상헌(金尙憲) 공이 강화의 문서를 찢으며 통곡하니, 공이 주어서 맞추면서 말했다.
“강화의 문서를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 되고 찢어진 문서를 맞추는 사람 또한 있어야 합니다.”
강도(江都·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자 드디어 남한산성 아래에서 강화의 맹약을 하였다.〉
이로써 종묘사직은 보존될 수 있었다.
1637년 4월 최명길은 우의정이 되었다가 석 달 만에 좌의정에 올랐다. 이 시기 그는 병자호란으로 망가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우고 청나라와 교섭해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과 척화신들을 송환하고, 청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절하느라 고생했다.
속환된 여성들을 보호
인조 16년(1638년) 3월 11일 자 《인조실록》에는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족(士族) 여성들에 대한 이혼 문제가 실려 있다. 이때 좌의정 최명길은 속환 여성들의 강제 이혼에 대해 반대론을 펼친다. 정(正)보다는 중(中), 낡은 관습보다는 변통(變通)을 중시했던 그의 면모가 한껏 드러나는 장면이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자 음식을 주지 않았고 결국 사하보(沙河堡)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이에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이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贖)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는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을 하였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가령 이 두 처녀가 다행히 기한 전에 속환되었더라면 반드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이 더럽혀졌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 모두 몸이 더럽혀졌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인조는 최명길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 하지만 《실록》은 덧붙여 “그러나 이 뒤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날 사관의 평은 더 가혹하다.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선조(宣祖)를 말함]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史冊)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 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본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진회보다 못한 자”에 이어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라는 비난이 사책에 더해진 것이다. 여기서 선조 때의 일이란 임진왜란 때 일어난 일로 최명길이 인용한 대목이다.
“신이 고로(故老)들에게 들으니, 선조 조에 임진년 왜변이 있은 뒤에 전교가 있었는데, 지난해 성상의 전교와 서로 부합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항(閭巷)에서 전하는 바로 말한다면, 그때 어떤 종실이 상소하여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어떤 문관이 이미 다시 장가를 들었다가 아내가 쇄환(刷還·외국에서 돌아옴)되자 선조께서 후취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셨으며, 그 처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정실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재상이나 조관(朝官)으로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 이 어찌 예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때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시중(時中)의 논리가 먹혀들 조선 사대부 사회가 아니었다.
최명길의 8대 공로

▲최석정
최명길은 1638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기득권 세력화한 반정공신들과의 갈등으로 물러난다. 1640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임경업(林慶業·1594~1646년)과 함께 명(明)나라와 내통하였다 하여 청나라로 압송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645년 귀국, 귀국 후에는 원로로 목소리를 내다가 1647년 세상을 떠난다.
최명길이 세상을 떠날 때 두 살이었던 손자 최석정은 숙종 때인 1699년 좌의정에 오르고 1701년 영의정으로 옮긴다. 할아버지와 같은 서인 내 소론의 입장으로 남인을 포용할 것을 주장했고 백성의 어려움을 정치의 첫머리에 두었으며 당쟁의 폐단을 최대한 줄이려 했던 재상이다. 당시 노론 세력이 대보단(大報壇)을 세우면서 조부 최명길을 맹공하자 그 원통함을 해명하는 소를 올렸다. 그 소 중에 이시백이 최명길의 삶을 평가한 대목이 나온다.
“신의 조부(祖父)가 별세한 뒤에 고(故) 상신(相臣) 이시백(李時白)이 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천(遲川·최명길의 호)의 사업(事業)이 매우 많은데도, 그중에 큰 것이 여덟 가지가 있다.
계해년 반정(反正)할 때에 광복(匡復)하는 사업을 협찬(協贊)한 것이 첫째이고,
병인년에 예(禮)를 의논할 때에 능히 부자(父子)의 윤리(倫理)를 밝힌 것이 둘째이며,
병자년의 호란(胡亂) 때 혼자 말을 타고 적진(敵陣)에 나아가 적(賊)의 기세(氣勢)를 늦추게 한 것이 셋째이고,
남한산성의 포위 때에 비방을 무릅쓰고 화친(和親)을 주장하여 종사(宗社)를 보존(保存)시킨 것이 넷째이며,
무인년의 징병(徵兵)할 때에 의리로써 거절하여 죽는 것을 자기 집에 돌아가듯이 여긴 것이 다섯째이고,
명나라에서 서신을 보내어 마침내 위기(危機)를 밟으면서 자신이 스스로 담당한 것이 여섯째이며,
마음을 가지고 일을 행하는 데 확실하게 자신(自信)하여 붕당(朋黨)에 물들지 않은 것이 일곱째이고,
골육(骨肉)을 잘 처리하여 촉오(觸忤)를 피하지 않고 남이 어렵게 여기는 바를 말한 것이 여덟째이다.’
‘지천’은 곧 신의 조부의 자호(自號)입니다.”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

▲이시백
이시백의 말에서 병인년에 부자의 윤리를 밝힌 것이란 인조의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할 때 찬성한 것을 말한다. 무인년의 징병이란 청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줄 것을 청한 것이고 최명길은 명분에 입각해 이를 거절했다. 촉오란 웃어른의 마음을 거슬러서 성을 벌컥 내게 함이니 왕실 문제도 원칙에 입각해 곧은 간언을 했음을 말한다.
《실록》의 최명길 졸기는 반대파에서 쓴 것임을 감안하면서 읽어야 한다.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이 졸하였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원훈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실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救時之相]이라 하겠다.〉
구시지상(救時之相), 이시백의 평과 정확히 합치되는 평이다.⊙
20 김육(金堉)전
백성의 삶을 정치하는 최우선으로 삼은 ‘대동법 재상’
⊙ 대동법 실시, 화폐 유통, 수레 도입 등 주장
⊙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나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 말을 다 했다”(실록 졸기)
⊙ “회포가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비록 엄중한 견책을 받아도 굽힌 바가 없었다”(이경석)
⊙ 죽기 직전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서 세자의 스승으로 정적인 송시열·송준길 추천

▲김육
‘대동법 재상’ 김육(金堉·1580~ 1658년)은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호는 잠곡(潛谷)으로 선조 13년(1580년) 한양 마포의 외조부 조신창(趙新昌)의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 김흥우(金興宇·1564~1594년)는 사마시에 급제했지만 벼슬이 참봉에 머물렀고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문하에 출입했다. 훗날 김육이 서인(西人)으로 분류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김비(金棐)가 임지인 평안도 강동현에 갈 때 7~8세 무렵의 김육이 따라갔다가 마침 그곳으로 유배온 퇴계 제자 조호익(曺好益·1545~1609년)을 만나 경전을 익혔다. 조호익은 특히 《주역》에 밝아 이에 관한 여러 책을 지었다. 훗날 김육이 서인의 주자학 일변도에 국한되지 않고 열린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데는 어릴 때 조호익으로부터 감화받은 바가 컸기 때문이다.
10년간 은거

▲김장생
김육은 25세 때인 1605년(선조 38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균관 시절 그는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를 올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5인을 문묘에 종사(宗祀)해달라 청했다. 당시 북인(北人) 정권의 실력자였던 정인홍(鄭仁弘·1536~1623년)은 이에 반대했다. 이 사건 때문에 문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는 금고(禁錮)를 당하자 김육은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으로 가 은거하였다. 그는 당시 심정을 ‘유감(有感)’이라는 시(詩)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의 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으니
슬픈 마음 그 어찌 말로 다 풀어내리
봄바람 불 때 두 줄기 눈물 흘리며
깊은 산속에 홀로 누워 지내노라.”
이곳에 머물며 회정당(晦靜堂)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학문을 닦았다. 이때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10여 년에 걸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은거 생활이 이어졌다. 형편조차 넉넉지 않았다. 남의 밭의 김을 매주고 숯을 구워 팔아 근근이 끼니를 이어나갔다. 이런 빈궁한 생활이 훗날 그가 정치인으로서 무엇보다 민생(民生)을 첫머리에 두는 계기가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623년, 그의 나이 43세 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서인 세상이 열렸다. 반정 직후 광해군 시절 직언하다가 죄를 입은 유생과 학행(學行)이 있는 유생을 발탁해 6품직을 제수했는데 이때 김육의 이름은 김장생(金長生·1548~1631년)의 아들 김집(金集·1574~1656년)과 함께 학행 유생에 포함돼 있었다. 이듬해인 1624년(인조 2년) 9월 29일에 김육은 증광 별시에서 문과에 급제했다.
문과 급제 후 김육의 벼슬 생활은 주로 사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인조 3년(1625년) 7월 3일에는 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 문학(文學)에 제수됐는데 당시 실록은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김육은 천성이 본디 단정하고 성실하며 지조가 있었다. 일찍이 혼조(昏朝·광해군 조정)에서는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리고 산골짜기에서 몸소 농사를 지어 사뭇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고 반정 뒤에 맨 먼저 학행으로 발탁되었다.〉
인조 7년(1629년), 순조로운 벼슬살이에 처음으로 위기가 찾아온다. 인사 문제를 조정하려다가 오히려 공격을 당해 하옥되었다가 축출되었다. 이때는 강관(講官)으로서의 공로로 하사 받은 호피(虎皮)로 전답을 사서 한적하게 지냈다. 이 당시 그의 학문은 공리공담(空理空談)보다는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잡학(雜學)에 관심을 쏟았다. 군사, 천문, 지리, 의학, 산학 등이었다. 3년 후인 인조 10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다.
명나라에서 맞은 병자호란
인조 14년(1626년) 병자년 3월 5일 김육은 동지사(冬至使)에 제배(除拜)됐다. 이때는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의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다. 김육 비명(碑銘)에 이경석(李景奭·1595~1671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꺼리었으나 공은 태연히 길을 나서 8월에 남신구(南汛口)에 정박하였다. 그때 청나라 군사가 이미 명나라 수도 연경(燕京)을 육박하는데도 도독(都督) 진홍범(陳洪範)은 군사를 거느리고 관문(關門) 밖에 있는지라 공이 서찰을 보내어 대의(大義)로 격동시키니, 진홍범이 부끄럽게 여기어 그 군졸이 11월에 연경에 도착하였다. 그때 천하가 전란에 빠졌는데, 공만 일찍 하례(賀禮)의 사절로 도착하였으므로 예부상서(禮部尙書) 강봉원(姜逢元)이 위로하고 절일(節日)에는 함께 참례(參禮)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대우였다. 정축년(丁丑年·1637년 인조 15년) 2월에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기 앞서 명나라에서 관례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주려고 하자 공은 국모[國母·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의 상중(喪中)이라고 하여 사양하고 또 은(銀) 값을 쳐서 주는 것을 사양하였다. 우리나라가 전란(戰亂)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 동쪽을 향해 통곡하니, 중국 사람 또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었다. 전후로 각부(閣部)에서 올린 공문 10여 건이 우리나라의 정황을 아뢴 것으로, 황제가 우리 조정의 성의를 가상히 여기고 힘이 부족한 것을 민망히 여겨 상을 후히 내림과 아울러 병부(兵部)에 명하여 3000의 병력으로 호송하여 바다로 나가게 하였다. 도중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임명되었는데 임무를 보고하고 나서 사양하여 면직되었다. 예조(禮曹)를 거쳐 승정원(承政院)으로 들어가 주상이 내린 하교에 불평(不平)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는 봉하여 다시 올리고 얼마 안 되어 사직하였다.〉
김육은 명나라에서 병자호란을 맞았던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로 대동법 시행
인조 16년(1638년) 6월 25일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된다. 그의 문집에 〈호서대동절목서(湖西大同節目序)〉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공직에 임하는 그의 자세가 생생하게 적혀 있다. 호서란 충청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군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려서는 학문에 힘쓰고 학문을 닦아서는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도덕을 닦고 관직을 받는 것이 어찌 이록(利祿)을 위하고 명예를 노려서이겠는가? 장차 그 뜻을 실천하여 백성들에게 펴고자 하는 것이다. 관직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진실로 그 뜻을 시행하는 데 뜻을 둔다면 성현의 말씀을 법으로 삼아야 한다. 한 고을에서 시행하면 한 고을이 편해지고 한 나라에서 시행하면 그 나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며 온 천하에 시행하면 온 천하의 백성들을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부임한 지 석 달 후인 9월 27일 실록이다.
〈충청감사 김육이 치계(馳啟)했다.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서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도내(道內) 결부(結負)의 수를 모두 계산해 보건대, 매결(每結) 각각 면포(綿布) 1필과 쌀 2말씩 내면 진상하는 공물(貢物)의 값과 본도의 잡역(雜役)인 전선(戰船), 쇄마(刷馬) 및 관청에 바치는 물건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도 오히려 남는 것이 수만입니다. 지난날 권반(權盼·1564~1631년)이 감사가 되었을 때에 도내의 수령들과 더불어 이 법을 시행하려다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시행하면 백성 한 사람도 괴롭히지 않고 번거롭게 호령도 하지 않으며 면포 1필과 쌀 2말 이외에 다시 징수하는 명목도 없을 것이니,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비국(備局·비변사)이 회계(回啓)했다.
“이 상정(詳定·그 지방 특성에 따라 알맞게 조정한 세금 규정)은 바로 고(故) 신 권반이 일찍이 상세하게 만든 것인데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이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깁니다. 만약 지금 시행한다면 공사(公私) 양편 모두가 이로울 것이고 서울과 지방이 모두 편리할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낱낱이 상고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청렴 근신하고 바르고 곧아”
인조 17년(1639년) 12월 11일 김육은 관찰사 임기를 마치고 동부승지로 중앙에 복귀한다. 2년 정도 승정원 승지 직을 순환하던 김육은 인조 19년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옮긴다. 인조 21년(1643년) 5월 21일 김육은 한성부 우윤(右尹·부시장)에 제수된다. 이때 사관의 평이다.
〈김육은 청렴 근신하며 바르고 곧아 승정원에 오래 있는 동안 상의 총애가 융숭하였는데 마침내 초탁(超擢)하였다.〉
당시 인조가 김육을 얼마나 총애했는지는 두 달 후인 7월 13일 김육을 도승지로 삼은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김육은 심양(瀋陽)에 원손(元孫) 보양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원손이란 소현세자의 아들이다. 또 김육은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그의 애책문(哀冊文)을 짓기도 했다.
이러다 인조 24년(1646년) 2월 인조는 세자빈 강씨가 음식에 독을 넣었다며 억지를 부리는데, 이때 약방제조 도제조 김류(金瑬· 1571~1648년)와 부제조 김육이 자기에게 그 음식을 들었는지 여부를 물어보지 않았다며 내친다. 당시 김육은 예조판서이기도 했는데 인조는 김육이 일찍이 강씨에게 후하게 했고 또 원손 보양관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비호(庇護)한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이듬해 송도유수(松都留守)가 되어 다시 관직으로 돌아온다. 비명은 송도유수 김육의 활약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부임하여 먼저 교도(敎導)의 정사를 펴고 선비들을 교육하고 학궁(學宮)의 양쪽 곁채를 새로 단장하고 대성전(大成殿)의 제전(祭奠)을 반드시 몸소 드리었다. 그리고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이 순절(殉節)한 곳에다 성인비(成仁碑)를 세우고 《논어(論語)》의 정문(正文)과 《효충전경(孝忠全經)》을 간행하여 배포하고 노인을 우대하고 선행을 표창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고 돌아올 때 수레를 붙잡고 사모하였다.〉
인조 27년(1649년), 김육은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간다. 나이가 이미 70세로 남들 같았으면 벼슬에서 물러나야 할 때였다. 그해 5월 인조가 승하하자 김육은 임시 예조판서로 불려와 장례를 흠결 없이 치러낸다.
우의정 되자마자 대동법 확대 실시 주장
효종(孝宗)은 즉위하자마자 8월 28일 김육을 대사헌으로 삼았다가 곧바로 9월 1일 우의정에 제수한다. 좌의정은 조익(趙翼·1579~1655년)이었다.
우의정 김육은 재상으로서 제일 먼저 대동법 확대를 실시했다. 또 그는 역법(曆法)에도 조예가 깊었다. 모두 잠곡 시절 공부해두었던 정책들이었다. 효종 즉위년(1649년) 12월 3일 실록이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익이 나아가 아뢰었다.
“왕정(王政) 가운데서 큰 것으로는 대동법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찌 한두 가지 일이 불편하다 하여 행하지 않겠습니까.”
우의정 김육이 아뢰었다.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條例)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김육이 또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관상감 제조를 지내어서 역법(曆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함을 압니다. 역법은 반드시 100년 혹은 50년에 한 번씩 바꾸어야 하는데 지금 쓰고 있는 역은 바로 허형(許衡) 등이 만든 법으로 이미 400년이 되었으니 어찌 변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서양(西洋)의 새 법에는 견해가 없지 않으니 그 법을 참고해서 고쳐야 합니다.”
상이 말했다.
“그 가운데서도 역시 옳지 않은 것이 있다. 우선 추산(推算)하여 고쳐 어떠한지 보아야 한다.”〉
당파보다 인물 중시

▲송시열
효종이 머뭇거린 이유는 이조판서 김집 때문이었다. 효종 1년(1650년) 1월 13일 자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이는 훗날 한당(漢黨)과 산당(山黨)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김육은 애초 인물의 능력이 중요하지 당파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우의정 김육이 선조의 묘를 성묘하기 위하여 양주(楊州)로 물러갔다. 이보다 앞서 김육이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조판서 김집에게 물으니 김집은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고, 또 건의하여 원로 대신에게 인재를 물어 차례에 구애받지 말고 등용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김육이 소를 올려 말했다.
“인재를 등용하는 권한은 인주(人主)의 대병(大柄)이므로 아래에서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화협하지 못했다. 그 뒤로 김육은 여러 번 소를 올려 치사(致仕·사퇴)를 청하면서 아뢰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진퇴가 분명하고 그 마음에 변함이 없어야 할 뿐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에 물러나는 것은 잘못이며, 물러가야 할 때 나아가는 것도 잘못입니다.
대체로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경우가 셋이며,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셋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국가의 안위가 걸려 있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자가 첫째요, 산림(山林)에서 와서 덕망이 세상을 덮는 자가 둘째요, 나이가 젊고 근력이 있어 국사를 담당할 만한 자가 셋째이니, 이상은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분명히 알 만큼 재덕(才德)이 부족한 경우가 첫째요, 나이가 이미 많고 노쇠하여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지닌 자가 둘째며, 남의 비웃음이나 당하며 쓰이기에는 부적합한 말을 하는 자가 셋째이니, 이는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입니다.
이제 신은 분에 넘치는 은총으로 치사할 나이가 넘었으니 물러가야 하겠습니까, 물러가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옛사람을 들어 말하건대 자신에게 국가의 존망이 걸린 한(漢)의 제갈량(諸葛亮)이나 백성들의 인망이 간절했던 진(晋)의 사안석(謝安石)이나 나이가 노쇠하지 않았던 송(宋)의 문천상(文天祥)의 경우와, 참람되지만 비교해 본다면, 하늘을 나는 붕새와 땅속 벌레의 차이 정도일 뿐만이 아니며, 시세의 어려움도 한(漢)이나 진(晋)·송(宋)의 경우와도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그대로 나아가야 할 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치사를 허락하여주소서.〉
김집이 “원로 대신에게 인재를 물어” 운운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특정 당파의 인재를 쓰자는 것이다. 김육은 이 점을 꿰뚫어 보았기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김집과의 충돌은 곧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송시열(宋時烈·1607~1689년) 등 청의파(淸議派)와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김육으로서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권(王權)에 손상을 입히고 인재를 능력에 맞게 쓴다는 원칙에 어긋났기에 김육으로서도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명분보다 실상을 중시했던 김육은 여기서 제갈량, 사안석, 문천상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흔히 사공(事功)을 중시했던 인물이며 그 뿌리는 관중(管仲)의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닿아 있었다.
김집은 대동법 시행에 반대해 김육이 소를 올린 얼마 후인 1월 21일 고향 연산(連山)으로 돌아간다. 다음 날, 김육도 김집의 사직에 맞서 사직의 뜻을 올린다.
〈이제 들으니 이조판서 김집이 상소를 남겨두고 떠났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도 일찍이 봄이 되면 왕래하도록 허락하셨는데, 혹시라도 그가 나가고 신이 들어가면 남들은 필시 신의 말로 인하여 그가 갔다고 할 것입니다. 어진 벗을 내쫓고 자신이 들어가는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위험한 기관(機關)을 범하였으니 참으로 스스로를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어진 이를 업신여기고 변법(變法)을 한 것으로 왕안석(王安石)에 견주어 공격한다면, 전하께서 아무리 신을 구원하고자 하여도 안 될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게을리하여 책임을 회피한 죄를 받을지언정 진퇴(進退)에 기준이 없는 사람이 되어 탄핵의 아래 욕을 당하는 그런 사람은 차마 될 수 없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효종과 사돈이 되다

▲김우명
효종은 김집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흘 후인 1월 25일 김육을 우의정에서 면직시키고 영중추부사로 삼았다. 실권(實權)이 없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러다 효종은 1년 후인 효종 2년 1월 11일 김육을 영의정으로 임명한다. 좌의정을 거치지 않은 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이다.
영의정으로서 김육이 새롭게 제기한 문제는 화폐 유통이었다. 이 또한 실은 대동법과도 연계된 것으로 백성들의 삶을 편안케 할 수 있는 핵심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는 훗날 숙종 때에 가서 빛을 보게 된다.
효종 2년 11월 21일 김육의 아들인 세마(洗馬) 김우명(金佑明·1619~1675년)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된다. 훗날 현종(顯宗)비이며 숙종(肅宗)의 어머니이다.
효종 2년 12월 7일 마침내 김육은 좌의정이 된다. 71세 때였다. 김육은 2년 반 정도 좌의정으로 있다가 다시 영의정을 맡았고 얼마 후에 돈녕부영사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돈녕부란 왕실 인척들을 관리하는 관아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김육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건의하는 데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효종 6년(1655년) 7월 9일 돈녕부영사 김육이 차자(箚子·약식 상소)를 올려 병조판서 원두표(元斗杓·1593~1664년), 호조판서 허적(許積·1610~1680년)과 화폐를 통행시키는 법을 함께 의논하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원두표는 대동법 시행 때도 보조를 같이했던 인물이다.
대개는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이렇다 할 건의를 올리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육은 이와 달리 어느 자리에 있건 백성을 편안케 할 방책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을 해 종종 임금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이경석의 말이다.
〈조정에 나간 뒤로 회포가 있을 때마다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혹은 항의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무릎 밑에 나아가 쌓인 바를 남김없이 털어놓되, 비록 엄중한 견책을 받아도 굽힌 바가 없었다. 예를 들면 안흥(安興)의 축성(築城)이나 속오군(束伍軍)의 급보(給保)나 어영군(御營軍)이 돌아가며 번서는 것이나 영장(營將)을 별도로 설치하는 것 등이 백성을 동요할까 염려하여 모두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흠경각(欽敬閣) 옛터에다 만수전(萬壽殿)을 지으려고 하자 불가(不可)한 이유를 극구 개진하였는데, 그 뜻이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임금이 그 굳은 충심을 가상히 여기었다.〉
또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돈의 유통과 수레의 사용은 모두 공이 건의한 것이었는데, 시행되지 않자 항상 개연(慨然)하게 여기었다. 옛날의 활 쏘는 법이 변할까 염려하여 등대(登對)할 때 극력 건의하고, 호남의 균역(均役)에 뜻을 두었다가 죽은 뒤에 비로소 시행되었다. 주상이 공의 충심을 추념하고 경연(經筵)에서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김 영돈녕(領敦寧)처럼 소신이 확고한 사람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유언 상소에서 政敵을 임금에게 추천
김육은 죽음을 앞두고 효종에게 다음과 같은 유차(遺箚·유언 상소)를 올렸다.
〈신의 병이 날로 더욱 깊어지기만 하니 실날같은 목숨이 얼마나 버티다가 끊어질는지요? 아마도 다시는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할까 생각되므로 궁궐을 바라보며 비 오듯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왕의 학문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마음을 간직하고 정신을 하나로 모아 밖으로 치달리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하께서는 종전부터 학문을 강마(講磨)하시면서 과연 이 도리를 잃지 않으셨는지요? 악정자 춘(樂正子春)은 한낱 필부였습니다만, 한 발자국을 뗄 때에도 부모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오늘날 다치신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악정자 춘에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송 효종(宋孝宗)에게 철장(鐵杖)과 목마(木馬)가 뜻을 가다듬어 원수를 갚는 데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주희(朱熹)와 같은 때에 살면서도 주희로 하여금 수십 일도 조정에 있게 하지 못하였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심학(心學)에 힘을 써야 하실 것은 다만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시[抑戒詩·시경에 나오는 시 억(抑)]를 완미하고 탐색하시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백성을 보호하면서 왕 노릇을 하면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편안하여 삶을 즐겁게 누리면 어찌 군사가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가려 하는데 승호(陞戶)하는 일이 또 이때에 생겨 대신들이 다투어 간했지만 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후회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열 번 명령을 바꾼다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을 기르는 일은 오늘의 급선무인데, 찬선(贊善·세자시강원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정3품 벼슬)을 맡길 사람은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1606~1672년)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공경스러운 예로 맞아 지성으로 대우하여 멀리하려는 마음이 없게 하소서.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1614~1671년)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 신이 아뢰고 싶은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병이 위급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대략 만분의 일만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황송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백성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이준경(李浚慶·1499~1572년)이 선조에게 올렸던 유차를 떠올리게 하는 충심의 글이다.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송시열과 송준길을 천거한 것 또한 그의 개방적 태도를 잘 보여주며 후임자 추천까지 빠트리지 않았다. 서필원은 전라도 관찰사 때 김육처럼 전남도 대동사목을 반포했고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로 있다가 죽었다. 민생을 구휼하고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사업을 많이 했으며 왕에게 직언을 잘해 그 시절 이상진(李尙眞·1614~1690년) 등과 함께 오직(五直)으로 불렸다.
김육 졸기의 일부다.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 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리나라가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과 의견이 맞지 않자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21 黨爭 시대의 無力한 재상들
중도 노선 지키며 대대로 정승 배출한 정광필의 후손들
⊙ 당쟁 이후 ‘나라의 재상’에서 ‘당파의 재상’으로
⊙ 중종 때 영의정 지낸 정광필의 손자 정유길, 선조 때 좌의정 지내
⊙ 정유길의 아들 정창연, 광해군 때 우의정, 인조 때 좌의정 역임
⊙ 정유길의 손자 정태화는 효종 때 좌의정, 동생 정치화는 우의정 지내
⊙ 정태화의 아들 정재숭은 숙종 때 우의정, 후손 정홍순은 정조 때 우의정 지내

▲정광필
일반적으로 선조 8년(1575년)에 조선의 당쟁이 본격화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실은 이미 그전부터 조짐이 있었고 이때에 이르러 심의겸과 김효원이 인사권 문제로 충돌하면서 물밑에서 갈등하던 당쟁(黨爭)이 수면으로 올라온 것일 뿐이다.
당쟁의 폐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재상 혹은 정승이 바로 이 당파의 일원이 됨으로써 나라 전체의 인재를 쓰지 못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조 이전의 재상과 선조 이후의 재상은 그 품격에서 이미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선조 8년 이후부터 좌의정을 맡았던 이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 무렵 좌의정은 박순(朴淳)인데 그는 노골적으로 이이(李珥)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서인(西人) 계열이다. 학문이 깊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쟁이 시작되던 시기에 그것을 제어하기보다는 어느 한쪽에 서서 좌의정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당시 우의정은 노수신(盧守愼)이었는데 그 또한 서인과 관련이 깊었고 뒤에 좌의정에 오르지만 실록은 “정승으로 있는 동안 이렇다 할 건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이때부터 나라의 재상은 드물게 되고 당파의 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정승을 국상(國相)이라고까지 했는데 이때부터는 당상(黨相)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런 한계를 감안하면서 선조 이후의 재상들을 짚어볼 때 그들의 현실 속의 모습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함부로 ‘명재상’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정광필 손자 정유길
이런 맥락에서 정유길(鄭惟吉· 1515~1588년)을 살펴보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누구보다 잘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어서다.
우선 그의 배경은 든든하다. 할아버지가 중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1462~1538년)이다. 또한 훗날 서인을 좌우하게 되는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의 외할아버지다. 즉 그 이전까지는 한미한 편이었던 안동 김씨는 바로 이 정유길의 외손자였다는 사실 하나로 조정에서 발언권을 높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창연(金昌衍)도 좌의정에 올랐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유길은 겨우 이를 갈 무렵에 할아버지 문익공(정광필)이 슬하에 놓고 가르치면서 항상 부인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뒤에 반드시 나의 지위에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무렵 어떤 재능을 보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으로 볼 수도 있고 사람을 보는 데 밝았던 정광필이 그에게서 뭔가 특이한 점을 살핀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문장에서 일찍부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조금 장성하자 문장의 구상이 넘쳐흘러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부해져 재능이 몇 사람을 아우를 수 있었으므로 동료 중에 앞선 사람이 없었다.”
간쟁 없이 탄탄대로
관리로서 그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1531년(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그 뒤 공조좌랑, 이조좌랑, 중추부도사, 세자시강원 문학 등을 역임했다.
뒤에도 그랬지만 정유길은 당파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쏠리는 성향은 아니었다.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외척들 사이에 틈이 생겨 조정이 분분했는데 정유길은 격동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으니 사론(士論)이 귀의했다고 한다. 1544년에는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했다.
굳이 말하자면 정유길은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관리형 인재였다고 할 것이다. 1552년(명종 7년) 부제학에서 도승지가 됐다. 1560년에는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 및 이황을 추천했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필가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흔히 폭정의 시대로 불리는 명종 때 이렇다 할 간쟁(諫爭)은 없이 벼슬에만 올랐다는 것은 그리 자랑이라 할 수는 없다. 결국 먼 훗날 우의정에 제수됐을 때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 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해야 했다. 그러나 결기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 뜻을 굽히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당시의 배경에 대해 외손자인 김상헌은 정유길의 묘비명을 통해 이렇게 변명했다.
〈다시 찬성(贊成)이 되었을 때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지적해 배척하니 임금의 하교에 “내가 정 아무개를 보건대 그 마음이 순실(純實)하여 정말로 경박한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들이 마음을 합쳐 나라를 도울 것은 생각지 않은 채 오직 자신들에게 빌붙지 않은 사람은 번번이 배척하고 있으니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선배와 후배가 서로 불신하여 당파로 나뉘는 조짐이 있었으므로 부군이 피차의 간격을 두지 않고 한결같이 화평하도록 조절하였는데, 소년(少年·신진인사)들이 일을 좋아하여 함부로 비평하며 공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굳이 요즘 식의 용어를 빌리자면 ‘어용(御用)’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실 정유길이 걸었던 길은 큰 시각에서 보면 임금을 섬기는 바른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동서(東西)로 갈라지면서 당색을 떠나 두루 정치를 하려 했던 인물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끝자리에 정유길이 있었던 것이다.
1568년(선조 1년)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 안정에 진력했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됐다. 우의정이 사헌부에 의해 좌절된 지 2년이 지난 1583년에 다시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이 하사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됐다. 이 무렵 정유길에 대한 김상헌의 기록이다.
‘고사를 행하기에 힘쓰고 개혁하는 것에 신중’
〈고사(故事)를 행하기에 힘쓰고 개혁하는 것에 신중을 기했다. 항상 명예와 세도를 멀리하고자 문호(門戶)를 세워 사사로이 후진과 결탁하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해 누차 분분한 탄핵을 초래하였다. 부군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오래된 가문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받았다고 여겨 차마 결연히 떠나지 못하였으나 의중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부군이 꿈속에 어느 정자에 이르러 마음에 매우 들었었는데 그 뒤에 사들인 정자가 한결같이 꿈속의 경관과 같았으므로 그냥 “몽뢰(夢賚)”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집은 “퇴우(退憂)”로 편액을 걸어 만년에 휴식하는 뜻을 의탁했다.〉
1588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북인 쪽에서 편찬한 《선조실록》은 그 일에 관해 “정유길이 죽었다”고만 기록했다. 그나마 서인에서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조금 길긴 하다.
〈재주와 풍도가 있어 일찍부터 훌륭한 명성을 드날려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러나 천성이 화유(和裕)하고 엄하지 아니하여 권간(權奸)이 용사(用事)할 때를 당하여 이견을 표시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사론이 이를 이유로 가볍게 여겼다. 만년에 다시 등용되어 자주 공격을 받았으나 상의 권고(眷顧)가 쇠하지 아니하여 공명을 누린 채 졸하였다.〉
이 또한 졸기(卒記)치고는 그다지 긍정적이라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정유길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다.
정유길 아들 정창연
정창연(鄭昌衍·1552~1636년)은 정유길의 아들로 1579년(선조 12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가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는 당쟁의 불길이 점점 크게 타오르던 때였다. 4년 후인 선조 16년(1583년) 오억령(吳億齡)과 함께 이조좌랑에 제수되면서 본격 관리 생활을 시작했고 5년 후인 선조 21년(1588년) 3월 9일 동부승지가 되어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게 된다. 당시 정창연은 종4품 조산대부(朝散大夫)임에도 정3품 당상관인 승지에 오른 것인데 실록은 “상이 특별히 임명토록 했다”라고 적고 있다.
얼마 후에 정여립(鄭汝立·1546~ 1589년)의 난이 일어나 정창연도 위기를 맞는다. 그를 김제 군수로 추천한 인물들을 추적하던 중에 선조 19년(1586년)에 이조에 있었던 인물이 모두 조사 대상이 되었는데 이조판서가 이산해(李山海)였고 정창연은 이조정랑이어서 조사를 받았다.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난 정창연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년) 4월에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석 달 후인 7월 6일 좌부승지로 본래 자리로 복귀한다. 선조에 대한 그의 총애를 엿볼 수 있다.
이후 그의 승진은 눈부실 정도다. 같은 해 7월 22일 이조참판으로 옮겼고 임진왜란 직후인 이듬해 5월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벼슬살이 시작한 지 10년 만에 판서에 오른 것이다. 이때 정창연은 세자 좌빈객도 겸하게 되는데 이는 그만큼 행실이 두터웠다는 뜻이다.
선조 26년(1593년) 1월 16일 대사헌에 제수된 정창연은 5월 6일에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된다. 이후 정창연은 다시 대사헌 좌참찬 예조판서를 순환하며 직무를 수행했는데 이렇다 할 문책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재(吏才)가 뛰어나고 글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98년(선조 31년) 12월 6일 처음으로 사헌부 지평 구의강(具義剛)과 사간원 정언 권진(權縉)이 “전 풍원부원군 류성룡의 삭탈관작을 명하소서”라고 하자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 이때 대사헌이 정창연이었다. 처음으로 당쟁과 관련된 문제에 그의 이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듬해 1월 14일 대사헌 정창연은 이원익(李元翼)이 류성룡 탄핵을 변론한 일은 부당하다며 자기는 사퇴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류성룡 탄핵은 당시 선조의 본심이었기 때문이다.
선조 32년 3월 27일 정창연은 이조판서가 되고 얼마 후에 형조판서로 옮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에도 정창연은 이조·형조판서 외에 중추부 동지사와 대사헌을 순환하고 있다.
살얼음을 걸어야 했던 광해군 시기
북인(北人), 그중에서도 대북(大北)이 중심이 된 광해군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서인 정창연은 광해군 초기부터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요직을 맡았다. 특히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인 광해 즉위년 3월 7일 어떤 진사가 이조판서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에 대해 실록 사관은 이렇게 비평하고 있다.
〈정창연이 세 번이나 가망(加望)된 끝에 이조판서에 제배되었는데 과장하기 좋아하고 이욕을 즐기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마구 달려나와 빌붙었으므로 정사를 혼란시키는 제일의 원두(源頭)가 되었다.〉
그 무리가 누구일까? 다행히 6월 3일 자 《광해군 일기》에는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조정은 정인홍의 당이고 이이첨의 심복이다.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사악하고 아첨을 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임금을 버려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버림받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창연이 맨 먼저 그를 전조(銓曹)에 끌어들였다.〉
즉 정창연은 대북 핵심인 정인홍과 이이첨 세력이 인사를 책임지는 전조에 진입할 수 있는 물꼬를 터주었던 것이다. 동래 정씨 특유의 화합 정신이랄까? 그러나 같은 서인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기에 이처럼 말이 거친 것이다. 참고로 《광해군 일기》는 서인 입장에서 편찬된 것이다.
광해군 6년(1614년) 1월 19일 마침내 정창연은 우의정이 되어 정승 반열에 오른다. 이때 영의정은 기자헌(奇自獻·1562~1624년), 좌의정은 정인홍(鄭仁弘)이었다. 이때 정창연은 건강을 이유로 열아홉 차례 사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해 11월 7일 마침내 출사하는데 《광해군 일기》는 그 이유를 정인홍이 아니라 기자헌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창연은 평소에 기자헌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자헌이 수상(首相)이 되자 대간이 번갈아 상소를 올려 탄핵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창연은 자헌과 함께 정승을 하기 싫어서 병을 핑계로 사직서를 18차례나 올렸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때에 이르러 출사하였다.〉
정창연은 2년 후인 광해군 8년(1616년)에도 스무 차례 사직소를 올려 마침내 우의정에서 물러나 돈녕부 영사가 된다. 돈녕부란 왕실 친인척을 관리하는 부서로 영사 지사는 왕실 친인척이 맡았다.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柳自新·1541~1612년)이 정창연 매부였다. 따라서 광해군은 정창연에게 조카사위였다.
광해군 9년에 인목대비 폐비(廢妃) 문제가 본격 제기되자 정창연은 두문불출했다. 이에 조정뿐만 아니라 재야에서도 정창연이 친척이면서도 폐비 문제를 관망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상소가 끝없이 올라왔다. 광해군 10년 2월에는 정사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38명의 명단을 정리했는데 여기에도 정창연은 이름이 올라 있다.
인조반정으로 위기에서 벗어나 좌의정에 오르다
광해군 15년(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이로써 정창연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을 진출시킨 잘못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말기 폐모 논의에 끝내 참여하지 않은 공이 높게 평가를 받았다.
인조 1년(1623년) 3월 24일 정창연은 마침내 좌의정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이날 실록은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적고 있다.
〈창연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조심스러웠다. 폐비의 가까운 인척으로 자못 자신을 단속하고 경계하여 폐모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시론이 훌륭히 여기었다.〉
2년 후에 좌의정에서 물러나 원로로 있으며 생을 마쳤다.
아들 정광성(鄭廣成·1576~1654년)은 선조 36년(1603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에서 요직을 거쳤고 인조 때는 승지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나 병자호란 이후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졸기다.
〈광성은 고 정승 정창연의 아들이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화려한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고 혼조(昏朝·광해군)에 있어서는 수립한 것이 적지만, 평소에 재능과 명망을 짊어지고서 몸가짐이 간소 검약하였다. 때문에 반정 이후에 위임하고 대우함에 쇠퇴한 적이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물러나 전리(田里)로 돌아가 벼슬에 대한 뜻을 끊어버렸다. 상이 그의 아들 정태화가 바야흐로 국정을 맡아 항상 귀근(歸覲·부모를 찾아뵘)을 청한다는 까닭으로 누차 그를 부르자 광성이 부득이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졸하니 나이가 79세였다.〉
정창연의 둘째 아들 정광경(鄭廣敬·1586~1644년)은 아버지 정창연 말기에 함께 조정에 있었다. 정광경은 아버지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폐비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반정 후에 조정에서는 그 사정을 알기에 죄를 묻지 않았다.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효종·현종 때 재상 정태화 형제
조선 중기에 이르러 동래 정씨만큼 성대한 집안도 드물 것이다. 정광성은 아들 셋을 두었다. 태화(太和), 치화(致和), 만화(萬和)가 그들이다. 이름에서 화(和)를 강조한 데서 집안 정신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다. 이 중 태화와 치화는 모두 정승에 이른다.
정태화(鄭太和·1602~1673년)는 인조 6년(1628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다녀왔다. 1637년 심양에서 돌아오자 요직을 거쳐 1649년 49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후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사 문제로 조정이 갈라져 격심한 충돌이 있었는데 이 와중에서 예조·형조판서, 대사헌 등을 맡으면서도 무탈할 수 있었던 것은 적대 세력을 두지 않은 때문이라고 한다. 사관은 이렇게 평한다.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이름을 떨치다는 의미)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
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었고 이후 20년 동안 5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했다. 그 시대는 북벌(北伐) 정책과 예송(禮訟) 논쟁 등으로 신하들 간에 반목이 심했는데도 당색(黨色)을 드러내기를 꺼려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 일은 적극 담당하지 않고 처신만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정태화의 졸기다.
〈재주와 지혜가 넉넉하고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일에 앞서 생각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법도가 있어 자제들에게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말고 붕당(朋黨)을 결성하지 말도록 신칙하였다. 의정부에 출입한 지 25년이나 되어도 세력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행동하고 국사를 제대로 담당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기롱도 있어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향년 72세로서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하나는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고, 하나는 명관(名官)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음사(蔭仕)를 하였으므로, 조복(朝服)이 집에 가득하였다. 동생 정치화와 더불어 번갈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복록(福祿)이 온 세상에 비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중도 노선 지킨 정치화
정치화(鄭致和·1609~1677년)는 정광성의 아들이자 정태화의 동생이다. 태화의 막내아들 재륜(載崙)을 입양했는데 그가 효종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혼인해 동평위(東平尉)가 되니 효종과는 사돈 관계였다.
1628년(인조 6년) 문과에 급제해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육조판서와 대사헌 등을 지내고 39세 때인 1667년(현종 8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그 또한 대체로 서인과 남인의 당쟁에서 나서지 않고 중도 노선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화 졸기다. 상당히 부정적이다. 아마도 서인 노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 소론에 의해 집필된 때문으로 보인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치화가 졸(卒)하였다. 나이는 69세였다. 정치화는 어려서부터 강직하고 명민하다는 칭송이 있었고 또 청렴하다는 명망이 널리 알려졌었다. 만년에 서자(庶子)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책망이 있었으므로 그 좋은 명예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정만화(鄭萬和·1614~1669년)는 예조참판을 지냈는데 역시 졸기가 각박하다.
〈본래 재주와 지혜도 없으면서 가혹하고 각박함을 일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바르지 못하다고 지목하였다.〉
반면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보면 매우 긍정적이다.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기민(饑民)을 구호하는 한편, 타도의 유민 수천 명까지 구호하는 치적을 쌓아 이원익과 함께 평양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그 뒤 병조참판·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에 뛰어나 김상헌·이정구(李廷龜) 등으로부터 찬탄을 받았다.”
당쟁의 폐해가 실록 편찬에 그대로 반영된 경우라 양단(兩端)을 통해 그의 면모를 떠올려보기를 바란다.
송시열 비호한 정지화
정지화(鄭知和·1613~1688년)는 아버지가 이조참판 정광경(鄭廣敬)이다. 아들을 두지 못해 형 정지화(鄭至和)의 셋째 아들 정재희(鄭載禧)를 양자로 들였는데 정재희는 훗날 예조판서에 오른다.
1637년(인조 15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해 홍문관 부수찬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허적(許積) 등과 함께 홍문록에 올랐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소현세자를 시중해 심양으로 갔다. 1640년 세자가 문안할 때 귀국해 청요직을 거쳤고 현종 5년(1664년)에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후 각조 판서와 대사헌을 거듭했고 1674년 좌의정에 오른다. 서인이면서도 남인과의 충돌을 조정하고 억제하는 등 중도적 길을 걸었다. 숙종 14년(1688년) 3월 23일 자 정지화(鄭知和)의 졸기는 정치화보다는 조금 낫다.
〈정지화는 문익공(文翼公) 정광필의 5대손인데 대가(大家)에서 태어났다. 관직(官職)에 있을 때 엄숙함을 자못 명령하면 시행되고 금지(禁止)하면 그쳐지는 효과가 있었다. 성품이 음악과 여색과 거문고와 퉁소를 좋아하여 분대(粉黛·곱게 화장한 미인)가 좌우(左右)를 떠나지 않았으며, 즐겨 노는 것이 습관이 되어 공무(公務)에 게을러 힘쓰지 않았으므로, 직위(職位)가 열경(列卿)에 이르렀으나, 정책(政策)을 수립하여 밝힌 것이 없었다.
가세(家世)로써 입상하였는데 간당(奸黨)이 정권을 잡은 시기를 만나자 곧 사임(辭任)하여 체직(遞職)되고 집에 있었다. 그러나 윤휴()와 허목(許穆)의 무리가 고묘론(告廟論)을 발의(發議)하여 송시열(宋時烈)을 죽이려고 할 때에 곧 차자(箚子)를 올려 그들의 잘못을 남김없이 말하였으니 사의(辭意)가 밝고 정대(正大)하여 흉론(凶論)이 조금 좌절된 것은 정지화의 힘이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한 가지 일이 자못 정광필의 후손 된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젊어서는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늙어서는 사알(私謁)을 자못 행하였다. 나이 76세에 졸(卒)하였다.〉
간당은 곧 3년상을 주창했던 남인 세력을 말한다.
숙종 때 재상 정재숭
정재숭(鄭載嵩·1632~1692년)은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이다. 현종 1년(1660년) 문과에 급제하고 숙종 2년(1676년)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숙종 11년(1685년) 우의정에 올랐다. 숙종 18년(1692년) 2월 19일 자 그의 졸기다.
〈영중추부사 정재숭이 졸(卒)했는데 나이는 67세였다. 정씨(鄭氏)들은 문익공 정광필 이후로 정승을 지낸 사람이 많았다.
정재숭은 정태화가 아비이고 정치화가 숙부이며 정지화가 종숙(從叔)이었으며 또한 재지(才智)가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오랫동안 탁지(度支·호조)의 판서(判書)로 있었고 또한 정승으로 들어갔었는데 특출한 풍절(風節)은 없었다.
윤이(倫彛·인륜)가 무너져 어두웠을 때를 당해 단지 명위(名位)만 가지고 있다 돌아갔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정재숭으로 끊어질 듯하던 재상 배출 전통은 정조 때에 이르러 정홍순(鄭弘淳·1720~1784년)이 이어갔다. 증조부가 정태화의 장남 정재대(鄭載岱)이다. 정재대는 정재숭의 형이다. 할아버지는 정혁선(鄭赫先)이고 아버지는 참판 정석삼(鄭錫三·1690~1729년)이다.
정석삼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해 호조·예조참판에 그쳤다.
정홍순은 영조 21년(1745년) 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이후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 문제에 재능을 발휘해 당대 최고의 재정관이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이재(吏才)가 출중했던 것이다.
이재에 밝았던 정홍순

▲정홍순
이후 예조판서를 겸하면서 1762년에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상례를 주관하면서 세자의 의복과 금침(衾枕)에서 미세한 것까지 한 조각씩 떼 내어 잘 보관했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하고 당시 예조판서였던 정홍순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장례에 관한 사항을 묻자 정홍순은 그동안 간직했던 것들을 정조에게 다 내보였다. 이에 정조는 1778년(정조 2년) 정홍순을 우의정에 임명했다. 근 100년 만에 동래 정씨 가문에서 다시 재상이 나온 것이다. 1년 만에 우의정에서 물러났고 이후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정조 8년(1784년) 1월 25일 졸했다. 그의 졸기다.
〈판중추부사 정홍순이 졸(卒)하였다. 정홍순의 자(字)는 의중(毅中)이며 영의정 정태화의 후손이다. 영종(英宗·영조) 을축년(영조 21년)에 급제하여 재주와 지모로 벼슬이 올라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여러 번 탁지와 혜국(惠局·선혜청)을 맡았는데 근세에서 이재(理財)를 잘하는 자로는 반드시 먼저 꼽는다. 금상(今上) 무술년(정조 2년)에 비로소 정승에 천거되었는데, 성질이 준엄하고 강직하며 매우 민첩하여 일을 헤아리는 데에 밝았으나 정승의 직무로 보자면 장점이 아니었다.〉
즉 정승으로 갖춰야 할 간이(簡易)함이 부족했고 너무 잘 알았다는 지적이다.⊙
22 안동 김씨가 낳은 재상들
당쟁의 와중에 영욕 엇갈리다 세도 정치 시대 열어
⊙ 병자호란 때 자결한 김상용은 우의정, 척화파 김상헌은 좌의정 지내
⊙ 노론의 선봉 김수흥·김수항, 영의정 지냈으나 당쟁 와중에 비극적 최후
⊙ “김수항은 처음부터 송시열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다”(실록)
⊙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안동 김씨 세도의 길 열려
⊙ 김좌근, 김홍근, 김흥근 등 정승 자리에 올라

▲김조순
자료를 보면 성씨별 정승 배출 순위에서 전주 이씨(22명), 동래 정씨(16명) 다음으로 안동 김씨(15명)가 바로 뒤를 잇는다. 이는 아마도 순조 때부터 안동 김씨 외척(外戚) 정치 시대가 열린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다음으로 청송 심씨(13명), 청주 한씨(12명), 파평 윤씨(11명), 여흥 민씨(11명)가 뒤를 잇는다. 전주 이씨와 동래 정씨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왕실 외척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 중에서 안동 김씨와 여흥 민씨는 당쟁(黨爭)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모두 서인(西人)-노론(老論)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김상용
조선 중후기 안동 김씨의 도약은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에서 비롯된다. 사실 그는 한양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그저 그런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고 아버지 김극효(金克孝·1542~1618년) 또한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한 진사였고 정승 정유길(鄭惟吉)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그의 사위가 되면서 돈령부(敦寧府) 동지사가 된 것이 전부다. 돈령부란 외척을 관리하는 부서이고 종친을 관리하는 종친부(宗親府)와 대비를 이룬다. 즉 김상헌 외할아버지가 정유길이었다.
김극효에게는 김상용(金尙容·1561~1637년)과 김상헌을 포함한 다섯 아들이 있었다. 김상용은 장남, 김상헌은 넷째였다. 김상용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고 좌의정 정철(鄭澈)의 종사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삼촌인 도원수 권율(權慄·1537~1599년)을 따라 영호남을 누볐다. 권율은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의 장인이었으니 김상용은 이항복과도 인척지간인 셈이었다.
전란이 한창이던 1594년 한 살 아래 부인 권씨가 33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김상용은 김장생(金長生)의 누이와 재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1598년 승지에 올랐다. 그의 졸기(卒記)는 이렇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선조를 섬겨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역임했으며 임금이 싫어해도 해야 할 일을 만나면 극언하였다. 광해군 때에 참여하지 않아 화가 임박했는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먼저 들어가 사태가 급박해지자 남문루에 올라 화약을 장치한 뒤 손자 한 명, 노비 한 명과 함께 불에 뛰어들어 분사(焚死)했다. 그래서 졸기는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다”고 평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광해군과도 인척 관계였다는 점이다. 정유길의 딸이 광해군 장인 유자신(柳自新)과 혼인하였으니 유자신은 김상용에게 이모부였고 광해군과는 이종사촌 간이었다.
광해군 때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廢母論)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강원도로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다시 부름을 받아 집권당 김장생의 매부이기도 했기에 여러 판서를 두루 거친 후에 1629년 우의정에 올랐다.
절의의 상징 김상헌
형 김상용이 벼슬길을 열었다면 동생 김상헌은 절의(節義)로 이름을 날렸다. 임란 중이던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요직을 거쳐 광해군 4년(1611년) 동부승지가 되어 왕의 지근거리에서 일을 하였다. 그런데 북인(北人) 정권을 이끌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배척하자 정인홍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1613년 조작 논란이 있는 칠서지옥(七庶之獄)이 터져 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사형을 당할 때 김상헌 아들 김광찬(金光燦)이 김제남 아들 김래의 사위라 하여 파직되었고 이에 경상도 안동으로 내려가서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이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하지만 공신들의 보합(保合) 정치에 반대하며 강경파로서 청서파(淸西派)를 이끌며 당파 영수로 떠올랐다. 이후 육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지만 1632년 인조 아버지 원종(元宗)을 추존하려는 인조의 뜻에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서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였으며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안동으로 물러나 지냈다. 1639년에 청(淸)나라가 명(明)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로 압송되어 6년 동안 억류 생활을 했고 이후 귀국하여 1645년에 좌의정에 제수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후 송시열(宋時烈·1607~1689년), 김집(金集)의 노론 강경파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김상용·김상헌 형제가 모두 정승에 오르기는 했으나 다분히 상징적이었다. 당쟁 시대에 접어들어 김수흥(金壽興·1626~1690년)·김수항(金壽恒·1629~1689년) 형제가 정승에 오른다. 두 사람의 아버지 김광찬(金光燦·1597~1668년)은 본래 김상관의 아들이었으나 김상헌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래의 딸과 결혼한 그 아들이다. 김광찬은 진사시에 그쳐 현달하지 못했고 군수와 목사 등을 지냈다.
송시열이 산림(山林)의 이론가였다면 김수흥·김수항은 조정의 행동가였다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은 김상헌을 사모하였기에 이들의 결합은 서인-노론의 법통(法統)이라 할 수 있다.
김수흥은 30세 때인 효종 6년(1655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효종 때는 김상헌-송시열의 영향력이 극에 이르던 때라 김수흥의 관리 생활도 탄탄대로였다. 현종 초기에도 대사간, 동부승지, 경기관찰사 등을 지냈고 현종 14년(1673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문과에 급제한 지 20년도 되지 않아 정승에 오른 것이다. 그는 이재(吏才)가 출중했다. 졸기의 일부다.
“문사(文詞)는 (동생인) 김수항보다 못하였으나 또한 아량이 있어 쓸 만하였다. 간사(幹事)하는 기량이 남보다 뛰어나서 과단(果斷)하고 민첩하게 처리하였으므로, 탁지(度支·호조)의 정사(政事)는 사람들이 근세에 드문 것으로 일컬었다.”
그는 현종 15년 4월 영의정에 오르지만 곧바로 험로(險路)를 만나게 된다. 예송(禮訟) 논쟁이다.
도신징의 상소
현종의 친모 인선대비가 세상을 떠나고 자의왕대비의 복제가 대공복(大功服·9개월 상복)으로 정해져 5개월이 흐른 현종 15년(1674년) 7월 6일 남인(南人) 계통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정국을 뒤흔드는 소를 올렸다. 이 소는 남인들의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실은 이 당시 서인들에 대한 현종 자신의 생각을 거의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왕대비께서 인선왕후를 위해 입는 복에 대해 처음에는 기년복(朞年服·1년 상복)으로 정하였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쳤는데 이는 어떤 전례를 따라 한 것입니까? 대체로 큰아들이나 큰며느리를 위해 입는 복은 모두 기년의 제도로 되어 있으니 이는 국조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해년 국상 때에 왕대비께서 입은 기년복의 제도에 대해서 이미 ‘국조 전례에 따라 거행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정한 대공복은 또 국조 전례에서 벗어났으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
만약 주공(周公)이 제정한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어준다’는 예에 따라 행하였다고 한다면, 《주례(周禮)》 가운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고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는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모두 후세에서 준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나라 위징(魏徵)이 건의하여 이 부분을 고쳤고, 송나라 주자도 고전을 모아 《가례(家禮)》를 편찬하면서 ‘큰며느리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어준다’고 하였고, 명나라 구준(丘濬)이 《가례의절(家禮儀節)》을 편찬할 적에도 변동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본조(조선)의 선정신(先正臣·옛 명신) 정구(鄭逑)가 만든 〈오복도(五服圖)〉 가운데 《주례》의 ‘큰며느리는 대공복을 입어준다’는 것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전하는 ‘춘추(春秋)’의 예를 지킨 것일 뿐이지 후세에서 따라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큰며느리에 대해 기년복을 입어주는 것은 역대 여러 선비들이 짐작해 정한 것으로서 성인이 나오더라도 개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처럼 명백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사로운 견해로 참작해 가까운 명나라가 제정한 제도를 버리고 저 멀리 삼대(三代)의 옛날 예를 취하였으니 전도(轉倒)된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일찍이 국가에서 제정한 예에 따라 기해년에는 큰아들에 대한 기년복을 입어주었는데, 반대로 지금에 와서는 국가에서 제정한 뭇 며느리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게 하면서 《예경(禮經)》에 지장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의리가 후일에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왕대비의 위치에서 볼 때 전하가 만일 뭇 며느리한테서 탄생한 것으로 친다면 전하는 서손(庶孫)이 되는데, 왕대비께서 춘추가 한이 있어 뒷날 돌아가셨을 경우 전하께서 왕대비를 위해 감히 중대한 대통을 전해받은 적장손(嫡長孫)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중대한 대통을 이어받아 종사의 주인이 되었는데도 적장자나 적장손이 되지 못한 경우가 과연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적장손으로 자처하신다면 양세(兩世)를 위해 복을 입어드리는 의리에 있어서 앞뒤가 다르게 되었으니 천리의 절문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치고 어느 누가 놀라고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안으로는 울분을 품고도 겉으로는 서로가 경계하고 주의시키면서 아직까지도 누구 하나 전하를 위해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라는 한 글자가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는 바가 되어 사람마다 제 몸을 아끼느라 감히 입을 열지 못하더니 더없이 중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러한 때를 당해서도 일절 침묵을 지키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어, 조정에 공론이 없어지고 재야의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참으로 선뜻 깨닫고 즉시 반성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자세히 전례를 상고토록 분명하게 지시해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올바른 제도로 회복시킨 다음, 후회한다는 전교를 널리 내려 안팎의 의혹을 말끔히 씻어준다면, 상례 치르는 예에 여한이 없을 것이고 적장손의 의리도 밝혀질 것입니다. 떳떳한 법을 바로잡아 도에 합치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이 일에 달려 있으며, 말 한마디로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오늘입니다. 이렇게 하였는데도 능히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국시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게 된다면, 망령된 말을 한 죄로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신은 실로 달게 여기겠습니다.
신이 대궐문 앞에서 이마를 조아린 지 반 달이 지났는데도 시종 기각을 당하기만 하였으니, 국가의 언로가 막혔으며 백성의 목숨이 장차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이 말하려 하는 것은 오늘날 복을 낮추어 입은 잘못에 대한 것일 뿐인데, 승정원이 금지령을 어기고 예를 논한다는 말로 억압하면서 받아주지 않고 물리쳤습니다. 아, 기해년의 기년복에 대해서는 경상도 선비들이 올린 소로 인해 이미 교서를 반포하고 금령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공복에 대해서는 금령을 만들지도 않았는데 지레 막아버리니 정원의 의도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과거에 기년복으로 정할 때 근거로 한 것은 국조 전례였는데 지금 대공복으로 정한 것은 상고해볼 데가 없으니, 맹자가 이른바 ‘예가 아닌 예’라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대공복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미천한 자들도 알 수 있는데 잘 알고 있을 정원으로서 이렇게까지 막아 가리고 있으니, 전하께서 너무 고립되어 있습니다. 재야의 아름다운 말이 어디에서 올 수 있겠습니까. 진(秦)나라는 시서(詩書)를 읽지 못하도록 금령을 만들었다가 결국 나라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성스러운 이 시대에 예경을 논하지 말라는 금령을 새로 만들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이 소를 올려 한번 깨닫게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안에서 저지하니 뜻을 못 펴고 되돌아가다 넘어져 죽을 뿐입니다만, 국가가 장차 어느 지경에 놓일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조여들고 말이 움츠러들어 뜻대로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대궐을 향해 절하고 하직하면서 통곡할 뿐입니다.〉
서인에게 고립된 현종
도신징 상소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송시열을 필두로 한 예론이 실은 효종을 서자로 취급하는 논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상소를 승정원에 포진된 서인 세력이 반달 동안이나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야 하는 승지들까지 자기편이 아니라는 데 현종은 경악했다. 도신징의 말대로 자신은 고립돼 있었다.
도신징의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대사간으로 임명된 전 예조참판 김익경이 현종을 찾아와 인피(引避)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익경은 김장생의 손자였다. 인피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이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 처벌을 기다리겠다는 뜻을 말한다.
“삼가 듣건대, 어떤 유생이 소를 올려 왕대비께서 입은 복제에 대해 예조에서 정한 것이 예에 맞지 않다고 논하였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가 하달되지 않아 어떻게 말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 데다가 또 옳고 그름과 잘잘못에 대해 지레 논해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신은 그 당시 예관의 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종의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도신징의 상소가 현종에게 전달되자마자 승정원에 포진된 서인 계통의 승지들이 김익경을 비롯한 서인의 핵심 인사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종이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인 진영은 불안과 공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전긍긍(戰戰兢兢). ‘과연 주상은 이 일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가?’
현종의 반격
김익경이 인피하자 사간원의 사간 이하진, 정언 안후태 등이 엄호사격에 나섰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 일로 인피할 것까지야 뭐가 있겠습니까. 김익경으로 하여금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그러나 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하진이나 안후태의 지원 논리는 무성의한 것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라고 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닷새 후인 7월 11일 사헌부 장령 이광적이 나서 “상복 제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데 유생이 올린 소는 망령되고 그릇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여 공론으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하진과 안후태는 좌천시키고 김익경은 출사하게 하소서”라고 소를 올렸다.
‘공론으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또 공론인가?’ 현종이 볼 때 서인들의 ‘노는 꼴’이 가관이었지만 일단은 이광적의 상소를 받아들여 이하진과 안후태를 체차(遞差)하였다. 체차란 현직에서 내쫓았다는 뜻이다.
이때 현종은 몸이 좋지 않은 데다가 치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틈틈이 공부하고 연마해온 예론 탐구를 바탕으로 도신징의 상소에 대한 치밀한 검토에 들어갔다. 검토 결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현종은 7월 13일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대신들을 부른다.
현종은 먼저 영의정 김수흥에게 질문을 던진다.
“왕대비께서 입을 상복 제도에 대해 예조가 처음엔 기년복으로 의논해 정하여 들였다가 뒤이어 대공복으로 고친 것은 무슨 곡절 때문에 그런 것인가?”
이 말을 듣는 순간 김수흥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송시열이 있었다.
송시열과 김상헌

▲송시열
송시열은 예론이라는 이론 면에서는 김장생·김집의 정신을 계승했다면 절의의 현실 정치에서는 김상헌을 이었다. 송시열에게 김장생·김집 부자가 마음이었다면 김상헌은 몸이었다. 송시열은 1645년(인조 23년) 경기도 모처에 은거하고 있던 김상헌을 직접 찾아뵈었고 자신의 아버지 송갑조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기도 했다. 당시 산림들 사이에 묘갈명을 부탁한다는 것은 그만큼 존경한다는 뜻이었다. 김상헌 또한 송시열을 ‘태평책을 품은 경세가’ ‘주자(朱子)를 이은 종유(宗儒)’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김상헌은 75세였고 송시열은 38세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 3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김수흥의 입장에서 보자면 효종을 서자로 보는 서인의 예론은 단순히 왕권(王權)에 대한 반대를 넘어 할아버지의 절개를 드높이 숭상하는 사안이기도 했다. 현종의 질문에 김수흥은 간단하게 답한다.
“기해년에 이미 기년복을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현종을 너무 얕잡아본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현종은 예론에 관한 이론 무장을 거의 끝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다 기억은 못 하지만 중국 고대(古代)의 예법이 아닌 국제(國制)에 따라 1년 복으로 정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이번 왕대비의 대공복도 국제에 따른 것인가?”
궁지에 몰린 김수흥
고례(古禮)란 주나라 예법인 주례(周禮)를 의미하고 국제란 《경국대전》에 명문화돼 있는 예법을 말한다. 주례에 따르면 장자(長子)의 상에는 참최복(斬衰服·3년 상복)을 입어야 하고 나머지 아들(衆子)의 상에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반면 국제에 따르면 장자와 중자는 구별 없이 그 상에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명확한 사실은 효종이 승하한 기해년 때 자의왕대비는 기년복을 입었다. 그런데 현종은 국제에 따랐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내심’ 고례를 따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문제는 다시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왕대비의 복제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서인들도 외형적으로는 국제를 따랐다고 이야기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자의왕대비의 복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제에 따라 기년복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서인들도 더 이상 내심을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써가며 기년복을 대공복으로 바꾼 것인데 도신징의 상소가 계기가 되어 자신들의 의도가 만천하에, 그것도 현종 앞에서 드러나게 돼버린 것이었다.
김수흥은 “고례에 따르면 대공복입니다”라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문제는 이럴 경우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점을 현종은 놓치지 않았다.
“기해년에는 국제를 사용하고 오늘날에는 옛날의 예를 쓰자는 말인데 왜 앞뒤가 다른가?”
김수흥이 “기해년에도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사용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한 것”이라고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하자 현종은 평소와 달리 단호함을 보였다.
“그렇지 않다. 그때는 분명 국제를 썼던 것이고 그 뒤 문제가 되어 고례대로 하자는 다툼이 있었을 뿐이다.”
김수흥이 수세에 몰리자 같은 서인 계열의 행(行)호조판서 민유중(閔維重·1630~1687년)이 거들고 나섰다.
“기해년에는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다시 김수흥에게 따져 물었다.
“자, 그러면 국제에 따를 경우 이번에는 어떤 복이 되는가?”
김수흥은 “국제에는 맏며느리의 복은 기년으로 되어 있습니다”고 답한다. 이에 현종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얼굴에도 노기(怒氣)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 왕대비께서 거행하고 있는 대공복은 국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건 놀라운 일이다. 기해년에 사용한 것은 국제였지 고례가 아니다. 만일 경들의 주장대로 기해년에 고례와 국제를 함께 참작해 사용했다고 한다면 오늘날 대공복은 국제를 참작한 것이 뭐가 있는가? 내 실로 이해가 안 간다.”
맏며느리라면, 즉 효종을 장자로 간주했다면 국제로 하더라도 대공복이 아닌가 하는 정면 반박이었다. ‘효종을 적장자로 삼을 수 없다’는 서인들의 묵계(默契)는 하나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현종이 다시 한 번 “기해년에 조정에서 결정한 것은 국제를 따른 것”이라고 못 박으려 하자 결국 김수흥은 본심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례를 따랐기 때문에 따지는 자가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너무 나갔다. 현종은 확실하게 논의의 주도권을 잡았다.
“고례에서 장자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
김수흥으로서는 “참최 3년 복입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모순의 덫에 단단히 걸려들었다. 자기 입으로 기해년에는 국제가 아닌 고례를 따랐다고 해놓고 장자의 복은 참최 3년 복이라고 말해버렸으니 당시 현종은 장자가 아닌 중자(衆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돼버린 것이다.
현종의 환국
상황은 끝났다. 그때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내보이며 읽어볼 것을 권한다. 김수흥과의 논쟁을 통해 현종은 자기 아버지가 서인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인조의 서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더불어 도신징의 상소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후 현종은 자의왕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바꾸고 영의정 김수흥을 춘천으로 귀양 보냈다. 또 예론의 주무부서인 예조의 판서·참판 등을 하옥한 다음 귀양을 보냈다. 그러고 충주에 물러나 있던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1610~1680년)을 불러올려 영의정으로 삼았다. 전광석화 같은 조치를 통해 정권 교체를 추진한 것이다. 훗날 숙종이 여러 차례 보여주게 되는 환국(換局)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송논쟁 불과 한 달여 만인 8월 10일 갑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던 현종이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허적이 명을 받고 한양으로 들어온 것은 8월 16일. 영의정 허적은 남인이었지만 좌의정 김수항, 우의정 정지화 등은 서인이었다. 김수항은 김수흥의 동생이었다.
송시열의 추종자 김수항

▲김수항
김수항은 김광찬의 셋째 아들이다. 노선은 김상헌·송시열·송준길 노선이었고 남인과는 분명한 대립을 보였다. 1651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서 효종 때 요직을 거쳐 현종 때 예조·이조참판을 거쳐 도승지와 대사헌을 거쳐 이조·예조·형조판서등을 두루 지냈고 현종 13년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올라 정승이 되었다.
이후 숙종 시대가 열리자 영욕이 교차하게 되는데 1차 경신환국 때는 남인들의 죄를 앞장서서 다스렸고 남인의 영수 윤휴(尹鑴·1617~1680년)와 허목(許穆·1595~1682년)을 처형하라는 여론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에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서인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러나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 정권이 세워지자 김수항도 전라도 진도로 위리안치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약(賜藥)을 받았다. 송시열도 같은 시기에 사약을 받았다. 졸기 그대로이다.
“김수항은 처음부터 송시열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으며, 오로지 이것을 가계(家計)로 삼아 거의 옳다는 것은 있어도 그르다는 것은 없었다.”
형 김수흥도 숙종기에 부침을 거듭하며 한때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으나 동생이 죽은 이듬해인 1690년 유배지 경상도 장기(포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전형적으로 임금의 재상이 아니라 당파의 재상이었던 두 사람의 비극적 결말이라 하겠다.
두 사람의 형 김수증(金壽增·1624 ~1701년)은 어려서부터 조부 김상헌을 모시며 송시열은 사우(師友)로 삼아 가까이 지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그는 이런저런 중간급 관직을 지내면서 노론계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강원도 화천 화악산 북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떠 자기 호를 붙여 곡운구곡(谷雲九曲)이라 이름 짓고 천수를 누렸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아버지에 이어 사사된 김창집

▲김창집
김수항에게는 창(昌)자 돌림 여섯 아들이 있어 흔히 육창(六昌)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버지가 사사되자 김창집(金昌集·1648~1722년)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학문이나 글씨 혹은 그림에 전념하며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김창집은 숙종 10년(16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에 나선다. 남들보다 많이 늦은 36세에 문과에 급제하게 된 데는 현종 말기 아버지가 유배를 갔기 때문이었다. 경신환국(1680년)이 일어나 남인들이 축출되고 서인들이 다시 득세하자 비로소 문과에 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9년 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유배지 진도에서 사사되자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관직을 멀리하고 향리에 머물렀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해 김창집도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했고 이후 동부승지·대사간 등도 받지 않았다. 그 후 철원부사로 민정을 잘 다스려 호조·이조·형조판서를 거쳐 1706년에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고 1717년 영의정이 되었다.
김창집은 숙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원상(院相)이 되어 정사를 주도했다. 이때 경종이 즉위하여 34세가 되었는데 후사가 없어 노론과 소론(少論)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김창집은 중추부 영사 이이명(), 판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함께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세우기로 하고 김 대비의 후원을 얻었다. 이들이 바로 노론 사대신(四大臣)이다.
그러나 경종비 어씨와 소론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여 결국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등이 주도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인 1722년 경상도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아버지 김수항에 이어 부자가 사사된 것이다.
김창협(金昌協·1651~1708년)은 형 창집보다 빠른 숙종 8년(168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쾌속 승진하여 동부승지, 대사성, 대사간 등을 지냈고 청풍부사로 있을 때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사직하고 형과 함께 지금의 경기도 포천인 영평(永平)으로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아버지가 신원되고 조정에서도 대제학과 예조판서 등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설을 절충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문장과 시에도 능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호는 농암(農巖)이다.
김창흡(金昌翕·1653~1722년)은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사사되자 형들을 따라 영평에 은거하면서 《장자(莊子)》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읽으며 시름을 달래고 세상을 멀리했으며 뒤에 성리학과 문장을 파고들어 일가를 이루었다.
김창업(金昌業·1658~1721년)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영평에 숨어 지냈다. 그림에 능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의 〈추강만박도(秋江晩泊圖)〉라는 그림이 전해진다.
김창즙(金昌緝·1662~1713년)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고 한다. 제자로 유척기(兪拓基·1691~1767년)가 있다. 유척기는 훗날 영의정에 이른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
안동 김씨, 흔히 장동(壯洞) 김씨의 번성은 김창집의 현손(玄孫) 김조순(金祖淳·1765~1832년)에 이르러 활짝 열리게 된다. 흔히 세도 정치라고 하는 안동 김씨의 외척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마치 중국 한(漢)나라 말기의 외척 왕(王)씨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영조 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김조순은 정조 9년(178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정조가 중시했던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다. 김조순은 1788년 규장각 대교(待敎)로 있으면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 투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김조순의 신중한 언행과 처신은 이미 어려서부터 탁월했다. 이후 김조순은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시파로 돌았고 정조의 노선을 도왔다.
이에 정조의 적극적 의지로 세자를 사위로 맞았다. 순조가 즉위하자 김조순에게 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이 제수되었으나 그는 진심으로 사양하며 순조를 뒤에서 도왔다. 그는 실권(實權)이 있는 자리는 맡지 않고 당연히 정승에도 오르지 않았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
김조순에게는 김유근(), 김원근(金元根), 김좌근(金左根)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김유근은 예조판서, 김원근은 이조참판에 올랐고 김좌근은 세도 정치의 중심에 서서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된다.
김좌근은 마흔 살이 넘은 1838년(헌종 4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당시 전권을 행사하던 대비의 동생이라는 배경으로 그는 일찌감치 이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냈다. 철종 1년(1850년)에는 총융사(摠戎使)를 맡아 병권(兵權)을 장악했고 당시 이반하던 민심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두루 판서를 지냈고 영의정만 세 번 보직되어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자 요직에서 물러났다.
고종 6년(1869년) 4월 25일 실록 졸기를 보면 그의 사람됨에 대해 “반듯한 마음가짐과 공평한 일 처리”를 칭찬하고 있다.
김창집의 아들 대에서 갈려 김조순의 사촌 김명순(金明淳)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그 두 아들 김홍근(金弘根·1788~1842년)과 김흥근(金興根·1796~1870년)은 모두 정승에 올랐다. 흥선대원군에게 훗날 석파정(石坡亭)이 된 별장을 빼앗긴 주인공이기도 하다.⊙
23 여흥 민씨가 낳은 재상들
숙종·고종 때 왕비 배출하면서 권력 휘둘러
⊙ 송시열의 제자 민정중, 숙종 때 우의정 지내며 노론 실세로 활약
⊙ 민정중의 동생 민유중, 숙종의 장인 되어 재정권·병권 장악
⊙ 민진후·민진원 형제 영조 때 좌의정 지내… “黨同伐異에 과감” “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 평 들어
⊙ 민유중의 6대손 명성황후 민씨가 고종의 왕비 되면서 여흥 민씨 척족 세도

▲경기도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민씨의 생가. 사진=조선DB
여흥 민씨는 고려 때 명문가로 조선 건국을 도왔고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래서 태종 장인 민제(閔霽·1339~1408년)는 좌정승을 지냈다. 그러나 민제의 네 아들, 즉 태종의 처남 4명이 모두 정치적으로 제거되면서 여흥 민씨 집안은 조선 중기까지 이렇다 할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 선조 때에 이르러 비로소 정승에 오르는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세에 뛰어났던 민기
민기(閔箕·1504~1568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해 명종 시대를 거치며 대사헌, 이조참판,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문재(文才)가 뛰어나 조정의 기대를 모았다. 《명종실록》 명종 4년(1549년) 3월 22일 자다. 좌의정 황헌(黃憲)이 아뢰었다.
“정사룡, 남응룡(南應龍), 김주(金澍), 민기는 다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입니다. 신이 그들 문장(文章)의 높낮음은 잘 알지 못하나 이런 사람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그가 이조판서에 임명된 명종 21년(1566년) 1월 18일에 사관은 민기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지략과 계려가 있어 사변을 잘 처리하였다. 소시에 학문이 있었으나 만년에의 소득(所得)은 알 수 없다. 기량이 평탄하고 식려(識慮)가 심원(深遠)하였다. 그러나 집에 있을 적에는 미세(微細)한 조행(操行)을 힘쓰지 않았다.”
민기는 선조 즉위년(1567년) 우의정에 올랐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1년(1568년) 2월 1일 자 졸기(卒記)다.
“민기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이이(李珥)가 낭관(郞官)이었는데 언제나 전선(銓選·인사 선발)을 공평히 함으로써 청탁의 길을 막으려 하면, 민기는 곧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일을 발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다. 이에 이이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민공(閔公)이 뛰어난 재상이기는 하나 다만 소인(小人)을 두려워할 뿐 군자(君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다. 이이가 대답하기를 ‘민공이 만약 군자에게 죄를 얻는다면 현반(顯班)에다 두지 않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나 소인은 성품이 각박하여 만약 서로 거슬렸을 경우 혹 멸족(滅族)의 화도 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민공은 소인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식자들은 민기를 일러 섭세(涉世)의 재주가 뛰어났다고 하였다.”
섭세(涉世)란 처신섭세(處身涉世)를 말하는 것으로 처세술을 말한다.
폐모에 앞장선 민몽룡
민몽룡(閔夢龍·1550~1618년)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요직을 거쳤고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맡아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축출에 앞장섰다. 선조 말 북인(北人)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자 정인홍(鄭仁弘)을 따라 대북이 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을 앞장서서 관철시켰다. 《광해군일기》 광해 10년(1618년) 1월 30일 자에 서궁(西宮·인목대비)을 깎아내리는 절목을 좌의정 한효순(韓孝純·1543~1621년)과 함께 앞장서서 올렸다.
〈존호(尊號)를 낮추고 전에 올린 본국의 존호를 삭제하며,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내오며, 대비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서궁이라 부르며, 국혼(國婚) 때의 납징(納徵)·납폐(納幣) 등 문서를 도로 내오며, 어보(御寶)를 내오고 휘지표신(徽旨標信)을 내오며, 여연(輿輦)·의장(儀仗)을 내오며, 조알(朝謁)·문안(問安)·숙배(肅拜)를 폐지하고, 분사(分司)를 없애며, 공헌(貢獻)을 없애며, 서궁의 진배(進排)는 후궁(後宮)의 예에 따르며, 공주의 늠료(廩料)와 혼인은 옹주(翁主)의 예에 따르며, 아비는 역적의 괴수이고 자신은 역모에 가담했고 아들은 역적의 무리들에 의해 추대된 이상 이미 종묘에서 끊어졌으니 죽은 뒤에는 온 나라 상하가 거애(擧哀)하지 않고 복(服)을 입지 않음은 물론 종묘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궁궐 담을 올려 쌓고 파수대를 설치한 다음 무사를 시켜 수직(守直)하게 한다.〉
이에 대한 사관의 비평이 신랄하다.
〈민몽룡이 신임 정승으로서 팔을 걷어붙이고 수염을 휘날리면서 흔연히 떠맡았는데, 폄손하는 절목 일체에 대하여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익히 지시를 받은 뒤 물음에 응하여 물 흐르듯 거침없이 외워 나갔으며, 한효순은 머리를 구부린 채 ‘예. 예’ 하고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 병으로 사망했으며,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 서인 입장에서 쓴 《광해군일기》 광해 10년(1618년) 5월 13일 자 졸기는 극도로 비판적이다.
〈몽룡은 용렬한 비부(鄙夫)로서 세상의 버림을 받고 오래도록 서위(西衛·무반)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정인홍이 한 번 보고는 남명(南冥)의 기절(氣節)이 있다고 하여 극력 천거하였다. 그러다가 대론(大論·폐모론)이 나오자 앞장서서 떠맡고 나서면서 이이첨과 합동으로 한마음이 된 결과 갑자기 전부(銓部·이조)로 들어가게 되었고 곧바로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폄손하는 절목(節目)을 의논할 적에 뻐기면서 의정부에 앉아 턱으로 지시하고 입으로 부르는 등 의기양양했었는데 그 모임이 파하기도 전에 갑자기 뻐개지는 듯한 두통을 느끼고 부축받아 나갔다. 그 길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사람들이 천벌을 받았다고들 하였다. 그 아내와 장자 민준철(閔濬哲)도 잇달아 죽었다.〉
민기와 민광훈
조선 중·후기 여흥 민씨 번성의 뿌리는 민기(閔機·1568~1641년)다. 민기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7년(선조 30년) 문과에 급제해 외직(外職)을 두루 역임했다. 《인조실록》 인조 3년(1625년) 12월 25일 자 기사다.
“민기를 병조 참지(參知)로 삼았다. 민기는 사람됨이 청백(淸白)하고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인조가 즉위하고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했으며 인조도 그를 아껴 지방직을 돌던 그를 불러올려 승지로 삼아 가까이에 두었다. 인조 4년(1626년) 9월 19일 자 기록이다. 인조의 말이다.
“민기의 청백함과 선치(善治)에 대해서 내가 전부터 듣고서 가상히 여겨왔다. 그 고을 선비가 올린 상소를 보니 전에 들은 바가 헛말이 아니었다. 뛰어난 수령 한 사람 얻기가 매우 어려운 때이니, 백성을 위해서 죄를 용서하고 그대로 유임시켜 나의 근심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고, 겸하여 그의 선치(善治)를 포상해서 다른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정원은 의논해서 아뢰라.”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민기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인조 19년(1641년) 사망하자 송준길(宋浚吉)이 묘표를 짓고 송시열(宋時烈)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이로써 우리는 민기가 서인(西人)이 존중하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민기의 아들 민광훈(閔光勳·1595~ 1659년)은 인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원손(元孫)을 모시고 인근 섬으로 피신하여 공신에 책록되었다. 관직은 호조참의와 강원도 관찰사에까지 올랐다. 당색은 서인 노론(老論)이었다.
민시중과 그의 아들 민진주
민광훈에게는 민시중(閔蓍重· 1625~1677년), 민정중(閔鼎重· 1628~1692년), 민유중(閔維重· 1630~1687년)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민시중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현종 5년(166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특히 경상도 관찰사로 큰 치적을 남겼다. 그는 대사헌에까지 이르렀는데 숙종 3년(1677년) 2월 3일 자 졸기를 보면 “민시중은 민정중의 형인데 재주와 방책은 두 아우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충후(忠厚)함은 앞서므로 당시에 선인(善人)으로 불리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숙종 초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다행히 정치적 격랑을 겪지는 않았다.
그의 둘째 아들 민진주(閔鎭周·1646~1700년)는 환국의 파고를 온몸으로 넘어야 했다. 1685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을 때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집권하면서 유배를 가야 했다. 1694년에 다시 서인이 집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으로 승진했고 도승지에 올랐으며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숙종 26년(1700년) 8월 24일 자 졸기다.
〈민진주는 민시중의 아들로 사람됨이 장자(長者·덕망 있는 사람)답고 후덕하였으며 말과 의논이 강직하였다. 조사석(趙師錫)이 오전(奧殿·중전)의 도움으로 정승에 배명(拜命)되었으나 온 조정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민진주 홀로 항소(抗疏)로 말하고 거듭 임금의 뜻을 어기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니 청의(淸議)가 옳게 여겼다. 일찍이 부개(副价·부사)로 연경(燕京)에 갔더니, 상사(上使) 서문중(徐文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민모(閔某)는 실로 다른 사람이 알기를 두려워하는 깨끗한 지조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조행(操行)을 가다듬고 구차스럽게 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향용(嚮用·한마음으로 임용함)이 바야흐로 한창이었는데 갑자기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민광훈의 둘째 아들 민정중은 인조 27년(1649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와 승정원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했고 남인에 대해서는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예송(禮訟)논쟁 때는 남인의 주장에 강경하게 반박하기도 했다.
민정중의 사람됨은 매우 강직했다. 《현종실록》 현종 3년(1662년) 6월 10일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현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민정중처럼 과감하고 강직한 자마저 입을 꾹 다문 채 체직(遞職)되려고만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오늘날의 나랏일이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현종이 점차 서인에 대해서 등을 돌릴 무렵인 현종 14년(1673년) 9월 14일 자에는 다음과 같은 하교가 나온다.
“민정중은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은 신하이므로 산림(山林)에서 은거하는 선비와 같지 않은데도, 이때를 당하여 감히 먼 외지에 물러앉아 누차 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더니 지금 또 교외(郊外)에 와 있으면서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고 있으니, 송 판부사(判府事·송시열)가 한 일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인가? 판부사는 정승의 직을 사면하고 물러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으나, 민정중은 누차 온당치 않다는 분부를 내린 연후에야 비로소 올라왔는데 이르는 곳마다 소를 올렸으니 교만하고 방자함이 심하다. 관작을 삭탈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바로 다음 날 민정중을 유배 보낸다.
“민정중의 행신(行身)과 처사(處事)는 조금도 볼 만한 것이 없다.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간 것도 명분이 없고 밖에 있으면서 소를 올린 것도 사군자(士君子)의 기풍과 절개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 정언 성호징이 감히 민정중을 찬양하기를 ‘나오기는 어려워하고 물러가기를 쉽게 하는 것은 사군자의 기풍이요 절개이다’라고 하고, ‘쓸쓸하고 적막한 곳에 스스로 들어 앉는 것은 필시 마음속에 스스로 지키는 바가 있고 시기가 의리상 갑자기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고 하며, ‘전하의 이 일은 정말 천고에 없었던 일이다’고도 하는 등 말을 이리저리 둘러대어 억양(抑揚)하면서 민정중에게 아부하고 임금을 멸시하였으니, 그 정상이 극히 가증스럽다. 엄히 징계하고 다스려 그 죄를 바루지 않을 수 없다.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라.”
현종은 송시열의 제자들이 자신을 농락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노론의 중심이 된 민정중

▲송시열
민정중은 숙종 초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얼마 후 남인이 득세하면서 쫓겨났고 1679년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당했다. 이러다 이듬해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송시열과 함께 유배에서 풀려나 같은 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그의 승진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숙종 6년 4월 19일 공조판서가 됐고 4월 29일에는 우의정에 제수됐다. 우의정이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5월 24일 민정중은 송시열의 방면(放免)을 청했다.
“송시열은 당초 ‘임금을 깎아내리고 종통(宗統)을 어지럽혔다’는 것이 그의 죄명인데,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원통한 것이고, 남에게 화(禍)를 전가한 자들이 억지로 꾸민 죄목입니다. 지난번에 성상께서 그의 본심을 특별히 살피시어 즉시 양이(量移)토록 명하시니, 보고 듣는 모든 사람이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소결은 이미 아무 허물도 없는 듯이 석방하시는 것인데, 송시열은 일찍이 대신의 반열에 있었고, 또 빈사(賓師)의 지위에 있었으니, 일의 체모로 보아 다른 죄인들과 차이가 있어야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신 등이 문서를 가지고 하나하나 이름을 아뢰기를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참작하여 처리하심이 일의 대체에 맞을 듯합니다.”
한마디로 서둘러 특명으로 송시열을 유배에서 풀어주라는 요청이었고 숙종은 그날 바로 재가했다. 우의정에 오른 지 5개월도 채 안 된 10월 12일 민정중은 좌의정에 오른다. 민정중은 숙종 10년 10월 21일 병을 이유로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경신환국 이후 4년 동안 서인 정권의 핵심 지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할 때 노론을 선택해 여흥 민씨가 줄곧 송시열 노선을 따른 것은 민정중으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송시열·송준길 등이 가장 중시”
이러다 숙종 15년(1689년) 다시 남인이 집권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하루아침에 신분이 ‘죄인’으로 바뀌었다.
11월 18일 남인 영수 이현일(李玄逸)이 숙종을 뵙고 말했다.
“민정중의 죄악은 하늘에까지 가득 찼는데 어찌 일찍이 대신이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끝내 안률(按律)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민정중은 숙종 18년(1692년) 6월 25일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끝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졸기다.
〈전(前) 좌의정 민정중이 (평안북도) 벽동(碧潼)의 적소(謫所·유배지)에서 졸(卒)했는데 65세였다.
민정중은 자(字)가 대수(大受)로 사람됨이 영특(英特)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으며 예법으로 자신을 신칙하였다. 일찍이 괴과(魁科·과거)에 올랐고 극력 청의(淸議)를 붙들었으며, 송시열·송준길 등 제현(諸賢)이 가장 중시하는 바가 되었다. 국자감(國子監·성균관)의 장관(長官)이 되어 선비들을 조성해내는 데에 매우 공효가 있게 되므로, 당시에 정엽(鄭曄) 이후의 제일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 뒤 다른 관직에 뽑혀서도 그대로 겸임, 체직되지 않았으며, 게을리하지 않고 교도(敎導)하므로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북(關北)을 안찰(按察)하게 되어서는, 북쪽의 풍속은 오로지 무예(武藝)만 숭상하고 문사(文事)에는 소홀하여 진실로 친상사장(親上死長·윗사람을 공경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일)하는 의리에 어두우므로, 비록 재질과 능력이 강건(强健)하여도 쓸 데가 없었다. 드디어 자신이 솔선시범(率先示範)하며 선비들의 교화(敎化)를 크게 천명(闡明)하므로, 얼마 되지 않아서 빈빈(彬彬·문무가 조화를 이룸)해져 볼 만하게 되었다.
그 뒤에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이 나라의 일을 맡아 보게 되면서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갔었는데, 비록 배척받는 가운데 있었지만 여망(輿望)은 더욱 높아져, 오늘날의 (송나라 명신) 진요옹(陳了翁)이나 (송나라 학자) 유원성(劉元城) 같은 사람이라고 하게 되었다.
경신년의 경화(更化) 때에는 제일 먼저 태부(台府·의정부)에 들어오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있는 몇 해 동안 한결같이 임금의 덕을 바로잡는 것과 선비들의 공론을 붙잡기에 주력하고, 여타의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만년(晩年)에는 윤증(尹拯)이 스승(송시열)을 배반하는 것을 보자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옳음과 그름을 구별하여 밝히므로 세상의 도의(道義)가 더욱 힘입는 바가 있게 되었다.
기사년의 변(變) 뒤에는 뭇 간신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돌아보며 두렵게 여기는 바가 있어 실행하지 못했다.〉
우의정에 임명되자마자 사망한 민진장
아버지에 이어 정승이 되는 민정중의 아들 민진장(閔鎭長·1649~ 1700년)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숙종 12년(1686년) 문과에 급제해 도승지와 형조·병조·호조판서 등을 두루 거쳐 숙종 26년(1700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명을 받고 숙배(肅拜·임금에게 작별을 아뢰던 일)도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우의정의 업무는 하루도 보지 못한 정승이라 하겠다.
숙종 26년(1700년) 3월 16일 자 졸기다. 매우 상세하다.
〈민진장은 가정의 행실이 매우 지극하여 아버지 민정중을 섬김에 뜻을 잘 받들어 어김이 없었고 그 어머니가 중병을 앓았는데 밤낮으로 간호(看護)하면서 수십 년을 하루같이 하여 효성이 천성(天性)에서 타고 나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조정에서 벼슬할 적에는 일을 공평히 처리하고 법을 지켜서 한결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임하고 오랫동안 군국(軍國)의 중요한 임무를 통괄하여 마음과 힘을 다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민정중은 강직(剛直)하고 민진장은 온화 중후하여 부자(父子)가 타고난 성품은 비록 같지 않았으나 성심으로 나라를 위하여 사림을 도와 권장하는 데는 다를 것이 없었다. 한때 사람들이 모두 민정중의 착한 아들이라고 칭송하였고 정승에 임명되자 여론이 만족해하며 앞으로 큰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숙배도 하기 전에 갑자기 죽으니 조야(朝野)에서 매우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숙종의 환국정치
숙종은 1674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대체로 이런 나이일 경우 수렴청정을 받는 것이 관례였으나 총명했던 그는 곧바로 친정(親政)을 시행했다. 이때 그의 왕비는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로 김장생(金長生)의 증손 김만기(金萬基·1633~1687년)의 딸이었는데, 숙종과의 사이에 딸 둘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본인도 천연두를 앓다가 숙종 6년(1680년) 10월 2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이듬해 숙종은 계비로 민유중의 딸을 맞아들인다. 환국으로 1689년 폐위되기도 하고 1694년 복위되기도 하는 비운의 왕비다. 또 왕비면서도 후궁 장희빈(張禧嬪)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경신환국은 1680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영의정 허적(許積·1610~ 1680년)의 경솔한 처신이 빌미가 되어 남인 정권이 궤멸한 사건을 말한다. 허적은 조부의 잔치를 위해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유악(油幄·기름칠한 천막)을 숙종 허락도 없이 가져다 써서 숙종의 분노를 샀다. 당시까지 숙종 정권은 남인 일색이었지만 서인 중에서 송시열과는 거리를 둔 김석주(金錫胄·1634~1684년)가 숙종의 외종숙(5촌)으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다가 이때 남인에 일대 타격을 가한 것이다.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은 배후에 있고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이 연합하여 전면에서 정국을 주도했다. 1683년에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尹拯·1629~1714년)의 소론(少論)으로 갈라졌다.
노론 정권은 숙종 15년(1689년) 남인들이 지지하던 후궁 장희빈이 낳은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다가 일거에 축출당하고 남인이 집권했다. 이를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숙종 20년(1694년) 남인이 소수파임에도 독선적임에 넌더리를 느껴 숙종은 마음을 바꿔 다시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과 손을 잡는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금위대장 민유중

▲윤증
민유중은 형제 정승이자 역시 부자 정승이기도 했다.
민유중은 송준길과 송시열 문인으로 1651년 문과에 급제해 1671년 형조판서·대사헌·호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다. 송시열·송준길의 산당(山黨)에 속해 김육(金堉)의 한당(漢黨)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 현종비 집안인 김좌명(金佐明)·김우명(金佑明)·김석주 등과 크게 불화했다. 숙종이 즉위해 남인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서 조용히 지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민유중은 형 민정중을 도와 남인을 축출하는 데 앞장서 실권을 장악했다. 3년 후에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형과 함께 노론이 되었다. 1681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둘째 딸이 송시열과 김석주의 추천으로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이에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가 되어 돈녕부 영사(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종친부는 친척, 돈녕부는 외척을 관리하는 기구였다.
민유중은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왕실 경호 부대) 창설을 주도해 금위대장을 맡았다. 국구로서 병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민유중은 전권을 휘둘렀다. 이를 옛날에는 천권(擅權·권력을 마음대로 부림)이라고 했다. 숙종 9년(1683년) 5월 5일 자 《숙종실록》이다. 소론의 윤증을 조정에서 불렀으나 윤증은 과천에 이르러 자기가 대궐에 이를 수 없는 사정을 담아 소(疏)를 올렸다. 그리고 과천까지 찾아온 박세채(朴世采·1631~1695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다. 남인의 원한[怨毒]을 화평하게 할 수 없는 것이 그 하나이고 삼척(三戚)의 위병(威柄·위세)을 제지(制止)할 수 없는 것이 하나이며, 우옹(尤翁·송시열)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하나이다.”
이징명의 경고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후 살았던 서울 안국동 안동별궁. 후에 풍문여고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서울공예박물관이 됐다. 사진=조선DB
이에 대한 실록의 풀이다.
“삼척(三戚)이란 두 김가(金家)와 민가(閔家)를 가리킨 것이다. 그때 윤증은 이미 송시열을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뒷날의 화복(禍福)을 깊이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박세채와 더불어 같이 자면서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모두 송시열을 헐뜯고 해치는 말이었으며 또 박세채에게 반드시 송시열과 각립(角立·서로 버팀)하여줄 것을 권하였다.”
두 김가란 김석주의 청풍 김씨와 김장생의 광산 김씨를 가리키는 것이다. 3년 후인 숙종 12년(1686년) 7월 6일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李徵明·1648~1699년)이 소를 올려 외척을 경계할 것을 건의했다. 노론이었던 이징명은 장희빈 주변을 비판함과 동시에 인현왕후 집안도 함께 겨냥했다.
“오늘날의 외척은 모두가 사류(士類)이므로, 아직은 염려할 만한 자취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처와 봉양에 습성이 바뀌니 인정이 변하기 쉽고, 대간(臺諫)의 탄핵에 충격을 받으면 행여 반성에 어둡기 마련인 만큼 일에 앞서서 경계하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하더라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옛사람의 명백한 교훈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 곤성(坤聖·왕비)을 면계(勉戒)하고 외척을 칙려(飭勵)하여 근신하시기를 마치 후한(後漢) 명덕황후(明德皇后)의 외가와 같이 하신다면, 국가의 행복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곤성의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덕이 또한 영원히 보전되어 휴손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징명의 준엄한 지적에 대해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했다.
“이징명이 학식은 모자란다 하더라도 원래 편협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남이 하기 어려운 말을 능히 하여, 그 가세(家世)의 경직(勁直)한 기풍을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그의 말은 기사환국에 이르러 더욱 증험이 되어 드디어 후세 사람의 귀감(龜鑑)이 되었는지라, 온 세상이 다 함께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한다.”
이징명은 송시열 문인으로 현종 말기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나 송시열을 죽이라는 탄핵이 빗발칠 때 몸소 유생들을 모아 이에 항의하는 소를 올렸다. 그만큼 서인 노론 노선을 강하게 고집한 인물이다. 1689년 노론이 축출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그도 남해로 유배되었다. 관직은 참판급에 머물렀다.
이후 숙종은 더 이상 민유중을 사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민유중은 모든 관직을 내어놓고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민유중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민진후(閔鎭厚·1659~1720년)와 민진원(閔鎭遠·1664~1736년)이 현달했다. 특히 민진원은 경종과 영조 때 노론의 영수로 활약했으며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민진후는 인현왕후의 친오빠이고 명성황후의 5대조이다. 어릴 때 송시열에게 수학했고 1686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숙종 20년에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중용되어 형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숙종실록 보궐정오》 숙종 46년(1720년) 5월 13일 자 졸기다.
〈민진후가 내행(內行)을 신칙(申飭)하고 국사(國事)에 근로(勤勞)한 것은 세상에 이론(異論)이 없었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편벽되고 가혹하여 당동벌이(黨同伐異)에 과감하였다. 재물을 관장하면서 남은 이익을 추구했고, 여항(閭巷)의 간교한 자들을 높이 써서 한 시대에 폐해를 끼친 것은 그의 단점이다. 그러나 그의 동궁(東宮·훗날의 경종)을 위한 적심(赤心)만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만일 민진후가 생존해 있었다면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의 무리들이 반드시 감히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이른바 ‘사직(社稷)의 보위(保衛)’라 할 것이다.〉
소론 입장에서 쓴 졸기라 하겠다.
‘노론의 공격수’ 민진원
민진원은 1691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2년 전에 일어난 기사환국과 누이동생 인현왕후의 폐비로 등용되지 못했다.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드디어 등용되어 요직을 두루 거치며 노론의 공격수로 활약하며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숙종 말기 형조·공조·예조·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특히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경종이 즉위하자 김창집·조태채·이이명·이건명 등 노론 4대신을 앞세워 숙빈 최씨 아들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왕세제로 삼을 것을 압박했다. 1721년 신임옥사(辛任獄事)로 노론이 실각하자 성주로 유배되었다.
신임옥사란 노론 4대신이 경종의 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장하자 경종이 이를 승인했는데 소론의 조태구(趙泰耉) 등이 그 부당성을 상소함으로써 대리청정이 취소되었고 소론이 역공하여 노론을 축출한 사건을 말한다.
1725년 우여곡절 끝에 영조가 즉위하자 민진원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고 영조가 소론 영수 이광좌(李光佐·1674~1740년)와의 화해를 주선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민진원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죽은 노론 4대신의 복권과 소론 5대신에 대한 탄핵·추탈·부관참시 등을 요구하였다. 1727년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는 정미환국(丁未換局) 때 파직되어 평안도 순안에 안치되었다.
탕평에 동조한 민응수
그런데 이듬해 소론 강경파가 남인과 손을 잡고 삼남(三南) 지역에서 대규모 난을 일으켰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그것이다. 이에 소론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영조는 노론 강경파의 영수 민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 민진원은 소론과 남인 세력에 대해 ‘이인좌의 잔당’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숙정을 감행했다. 1729년 중추부 영사가 됐고 1736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실록》 12년(1736년) 11월 28일 자 졸기에서 사관은 이렇게 짧게 평했다.
〈성품이 집요(執拗)한데다가 당(黨)에 대한 병통이 가장 고질이었다. 그러나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민진주의 아들 민응수(閔應洙·1684~1750년)는 집안 노선에 따라 노론을 견지했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을 지냈고 이조·예조·형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른다. 그런데 그는 민진원과 달리 유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26년(1750년) 7월 26일 졸기다.
〈민응수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졌고 등과 후에는 청요직을 거쳤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붕당을 타파하고 조정(調停)을 하고자 하였는데 민응수가 지론(持論)을 평이하게 하여 조현명(趙顯命)·송인명(宋寅明)과 서로 맞부딪힘이 없자 임금이 드디어 현저하게 탁용(擢用)하여 병조와 이조를 맡은 지 오래지 않아 의정에 올랐다. 마침 그때 삼사에서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의 추탈(追奪)을 논하자 임금이 진노하여 모두를 내치니 민응수가 전상(殿上)에 올라가 힘써 만류하다가 뜻을 거슬러 사면(辭免)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졸한 것이었다.〉
고종 때 민씨 천하를 이루다

▲명성황후 민씨의 아버지 민치록의 묘. 사진=조선DB
정조나 순조·헌종·철종 때 여흥 민씨는 침체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1864년 1월 16일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년)의 아들이 즉위하자 뜻하지 않게 다시 여흥 민씨의 세상이 열린다.
흥미롭게도 대원군의 어머니도 여흥 민씨였고 부인도 여흥 민씨였다. 부인은 인경왕후 민씨 아버지인 민유중의 5대손 민치구(閔致久·1795~1874년)의 딸이다. 민치구는 명성황후 친정아버지 민치록(閔致祿·1800~1858년)과는 10촌 동항렬이다. 민치구는 고종이 즉위해 훗날 공조판서에까지 올랐다.
민규호(閔奎鎬·1836~1878년)는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의 5대손이다. 철종 10년(1859년) 문과에 급제했고 고종 4년(1867년) 이조참의가 되어 승승장구했으며 흥선대원군에 맞서 서구 문물에 대한 개국론(開國論)을 주창했다. 훗날 우의정에 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 민씨 또한 여흥 민씨다.
여흥 민씨는 조선 개국을 함께한 집안임과 동시에 패망을 함께한 집안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 조선 말기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항거한 사람과 일본에 굴복한 사람들이 어느 집안보다 많다.⊙
12월 호
〈마지막 회〉 숙종 때 10번 이상 재상에 오른 최석정(崔錫鼎)
숙종에게 중용됐던 소론의 거두
⊙ 최명길 손자, 남구만과 박세채의 제자로 소론의 거두
⊙ 관료 생활 초기부터 숙종의 총애받아
⊙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으며, 명분과 의리를 함부로 전도시켰다”(노론)
⊙ “당론을 타파하고 인재를 수습”(소론)
⊙ 《구수략(九數略)》 짓는 등 수학에 통달했던 르네상스적 인간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최석정
최석정(崔錫鼎·1646~1715년)은 인조 때 정승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1586~1647년)의 손자다. 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가 묘사한 어린 시절 최석정의 모습이다.
〈성품이 청명(淸明)하고 기상(氣像)이 화락(和樂)하고 단아(端雅)했으며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남구만(南九萬)과 박세채(朴世采)를 따라 배웠는데, 이치를 분별하여 깨달아 12세에 이미 《주역(周易)》에 통달하여 손으로 그려서 도면을 만드니,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남구만(南九萬·1629~1711년)은 1684년 회니(懷尼) 논쟁 당시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질 때 송시열(宋時烈)의 노론에 맞서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소론은 남인(南人)에 대해 좀 더 유화적이고 근왕(勤王)의식이 노론보다 강했다. 이것은 이미 최명길이 보여주었던 모습과도 통한다. 젊은 시절 최명길도 《주역(周易)》에 통달했다.
박세채(朴世采·1631~1695년)도 회니 논쟁 때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지어 노론과 소론을 중재하려 했으나 끝내 소론의 편에 섰다. 이후 소론 윤증(尹拯·1629~1713년)을 옹호했다.
회니 논쟁은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도 하는데 송시열과 윤증 간의 불화를 말한다. ‘회니’는 송시열이 회덕(懷德)에 살았고 윤증이 이성(尼城)에 살았기에 붙은 명칭이다. 송시열과 윤증은 원래 사제지간이었으나 현종 14년(1673년)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문(墓碣文)을 송시열에게 청하면서 박세채가 지은 행장(行狀)과 윤선거가 생전에 송시열에게 충고하기 위해 써놓은 편지를 함께 보냈는데 송시열은 그 편지를 못마땅하게 여겨 윤선거의 묘갈문을 지으면서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다가 글자 몇 개만 살짝 수정하고 끝내 새로 짓지 않았다.
숙종 6년(1680년) 남인의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자 윤증이 이런 개인감정과 함께 송시열의 덕행과 학문을 비난하면서 사제 관계를 끊었다.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두고서 서인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자 윤증은 온건파인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강경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불꽃 튀는 싸움을 전개했다.
최석정은 이런 두 스승의 노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소론의 정치관을 갖게 됐다.
벼슬길에 들어서다

▲회니논쟁을 벌인 송시열(왼쪽)과 윤증.
최석정은 현종 12년(1671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 4년 후인 숙종 1년(1675년)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을 올렸다. 초급 관리로서 엘리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숙종 초는 허적(許積·1610~ 1680년)의 남인 정권 시절이었다. 당시 최석정은 서인이었지만 초급 관리였기에 그런대로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해 숙종 6년 4월 13일 홍문관 정4품 응교(應敎)에 임명되고 넉 달 후인 윤(閏) 8월 21일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숙종의 각별한 총애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후 숙종 10년까지 줄곧 승정원에서 일하던 최석정은 7월 16일 성균관 정3품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됐다가 두 달 후인 9월에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긴다. 이를 보면 이때까지 최석정은 이재(吏才)보다는 학재(學才)를 인정받아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11년(1685년) 2월 9일 홍문관 부제학 최석정은 스승 윤증을 옹호하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을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소론의 논객으로 노론의 수장을 직격한 것이다. 이에 최석정은 파직당했다.
6월 3일에는 좌의정 남구만과 이조판서 여성제(呂聖齊)가 연이어 최석정의 문학(文學)이 뛰어나니 다시 임용할 것을 청했으나 숙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특히 남구만은 숙종이 곧 《주역》을 강론해야 하니 최석정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해 10월 부제학으로 돌아오고 바로 다음 달 ‘특별 승진’해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숙종의 신임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숙종의 신임받아 출세 가도 달려
2년 후인 숙종 13년(1687년) 9월 24일 최석정은 도승지에 제배(除拜)된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돼 대사성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부제학을 맡는다. 그러고 그해 10월 20일 이조참판에 제배된다. 이러다 두 달 후인 숙종 15년 1월 9일 홍문관 종2품 제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숙종 22년(1696년)에는 이조참판을 겸임했고 같은 해 특승(特陞·특진)하여 판윤에 이르고 다시 엿새 후에는 대사헌에 임명된다. 통상적인 관례대로라면 이미 대사간이나 대사헌을 지냈어야 하는데 뒤늦게 대사헌에 제수된 셈이다.
숙종 22년 4월 28일 최석정은 이조판서에 제수된다. 이때 최석정은 대제학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교서(敎書)를 지었다. 문장가로서 그의 실력이 당대 최고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를 문형(文衡)이라고 한다.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최석정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관철시켰다. 이런 점을 높이 산 숙종은 재위 23년(1697년) 3월 12일 최석정을 우의정에 제수한다. 같은 날 윤증은 이조판서에 제수된다. 노론이 편찬한 《숙종실록》은 이 일에 대해 “최석정은 천박하여 정승의 그릇이 아니어서 중외(中外·조정 안팎)에서 실망하였다”고 적고 있다. 같은 날 최석정은 주청정사(奏請正使), 최규서(崔奎瑞)는 부사, 송상기(宋相琦)는 서장관에 임명되었다.
최규서는 같은 소론으로 한때 최석정이 파직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는 등 일관되게 최석정과 노선을 함께한 인물이다. 송상기는 노론으로 부수찬 시절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탄 채 대궐에 출입한 것을 두고 가마를 불태워야 한다고 청했다가 파직된 경력이 있을 만큼 강직한 인물이다.
이번 사신의 임무는 청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의 승인을 받아내는 중대한 것이었다. 당사자는 훗날의 경종(景宗·1688~1724년). 이때 나이 10세로 국내적으로는 세자로 사실상 책봉받았으나 청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아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국내 책봉 과정에서 서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송시열은 이 와중 사약까지 받았다. 즉 이들 모두의 정치적 미래가 이 사신단의 임무 성공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앞에 두고 최석정을 정사로 하는 세자 책봉 승인을 위한 주청사는 같은 해 윤 3월 29일 도성을 출발했다.
청나라는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근거로 삼아 세자 책봉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최석정은 같은 《대명회전》을 근거로 그것은 중국의 예식과 관계된 것으로 조선과 같은 외번(外藩)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지를 펼쳐 책봉을 실현했다.
9월 6일 주청사 최석정이 돌아와 숙종에게 복명(復命)했다. 숙종은 크게 기뻐했다.
좌의정이 되어 민생 관련 건의

▲소론을 이끌었던 남구만(왼쪽)과 박세채.
그러나 이것도 잠시일 뿐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과실이 발생, 숙종 24년(1698년) 5월 28일 최석정은 우의정에서 파직된다. 하지만 이러고 얼마 뒤 판중추에 오른다. 중추부 판사는 잠재적인 좌의정 후보군으로, 10월 29일 숙종은 특별히 유시(諭示)를 내려 이렇게 말한다.
“일전에 봉사(奉使·사신 받드는 일)는 비록 착오가 있었으나 본래 다른 뜻은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내가 어찌 가슴에 품고 있겠으며, 경(卿)은 어찌 깊이 스스로 허물을 인책(引責)해야 하겠는가? 가슴에 품고 있다면 이는 임금의 아량이 못 되며, 깊이 허물을 인책한다면 이는 마음을 알아주는 도리가 아니다. 이 두 가지에 따라 경의 거취(去就)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나라에 큰 예(禮)가 있고 바야흐로 도제조(都提調)의 임무를 띠고 있으니 더욱 물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최석정은 소를 올려 사양했으나 숙종은 재차 출사(出仕)할 것을 권했다. 이때 최석정은 봉릉도감 도제조(封陵都監 都提調)를 맡고 있었기에 숙종이 이런 말을 덧붙인 것이다.
숙종 25년(1699년) 3월 13일 숙종은 최석정을 좌의정에 제배했다. 관례에 따라 최석정은 다섯 차례 글을 올려 사양했으나 마침내 4월 4일 제배의 명을 따라 좌의정에 오른다. 좌의정으로서 처음 한 일은 과거 시관을 맡아야 할 대제학과 제학이 모두 자리를 비워 홍문관 제학 박세당(朴世堂·1629~1703년)으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 맡도록 청한 것이다. 과거 시관을 주문인(主文人)이라고 했다.
박세당은 관리보다는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고 대체로 박세채, 남구만, 최석정 등과 가까웠다. 최석정은 자리나 지키는 구신(具臣)이 아니었기에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한 달에 두세 건씩 다양한 건의를 올렸는데 대개 민생과 관련한 것이었다. 또 당색이 소론이다 보니 노론과 남인의 중간에 서서 당쟁을 조정하는 일에도 힘썼다.
좌의정으로서 대제학을 겸하며 《국조보감(國朝寶鑑)》 속편과 《여지승람》 증보를 건의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자리 또한 석 달도 넘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이봉징의 상소
숙종 27년(1701년) 6월 19일 최석정은 영의정에 제배된다. 그러나 좌의정 때와 마찬가지로 이 자리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숙종 27년 8월 14일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복상(服喪) 기간 중이던 8월 27일 남인인 행(行)부사직 이봉징이 대단히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는 상소를 올렸다. 장희빈의 경우 6년간 왕비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후궁과는 복제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름 일리가 있는 견해이기는 했다. 또한 남인들로서는 민씨의 죽음이 어쩌면 장희빈의 복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이봉징이 남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조참판을 거쳐 행부사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숙종이 제한적인 남인 포용 정책을 쓴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숙종 또한 이봉징의 상소를 그저 복제 문제에 관한 일리 있는 건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서인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9월 2일 영의정 최석정이 나서 문제를 제기했고 숙종도 “이봉징의 상소는 나도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고 답한다. 다음 날 숙종은 이봉징을 삭탈관작하고 극변으로 유배를 보낸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 20여 일이 지난 9월 23일 숙종은 죽은 왕비를 무고했다는 이유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1701년)를 처형하라는 비망기(備忘記)를 전격적으로 내린다. 사실 무고의 장본인은 장희재가 아니라 장희빈이었다. 장희빈은 틈만 나면 취선당 서쪽에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민씨가 죽기를 기도했었다.
밀고자는 다름 아닌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였다. 최씨는 갑술환국이 있던 1694년 9월 훗날의 영조가 되는 왕자를 출산했다. 최씨는 민씨의 사람이었다. 실록은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잊지 못하고 원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임금에게 몰래 고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그 이상의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를 잇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애초부터 출신이 너무 낮았다.
장희빈 사사 만류하다 귀양
실록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서인 쪽에서 남인의 재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손을 썼을 수도 있다. 20여 일이면 생각하고 일을 꾸미기에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신하들은 어느 정도의 일이면 숙종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고 이틀 후인 9월 25일 밤 숙종은 “희빈 장씨로 하여금 자진(自盡)토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놀란 승지 서종헌과 윤지인 등이 나서 만류했다. 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을 보존해야 세자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금일의 조치는 국가를 위한 것이고 세자를 위한 것이지 즐거워서 하는 일이 아니다. 처음에 잘 처리하지 아니하여 그 화가 마침내 자라게 된다면 반드시 끝없는 걱정이 생길 것이니, 다만 이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고 세자를 위한 것이다. 지금 비망기는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고 밤낮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한 나머지 부득이하여 낸 것이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던 숙종도 승지들의 간곡한 만류가 계속되자 일단 한 걸음 물러선다. 특히 윤지인은 강경하게 맞섰다. 심지어 국가의 중대사를 순간의 격분한 마음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가 숙종의 분노까지 사게 된다.
이후 여러 날 동안 숙종은 관련한 궁녀들에 대한 친국(親鞫)을 주관했다. 와중에 영의정 최석정은 10월 1일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청하다가 충청도 진천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중도부처(中途付處·유배지로 가는 중간지점의 한 곳에 머물게 하는 형벌)였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정승들을 비롯한 신하들의 반대 상소가 이어지는 가운데 10월 7일 숙종은 엉뚱하게도 빈이 후비의 자리를 이을 수 없도록 국법으로 정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고 다음 날 “장희빈이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고 했다”며 자진 명령을 내린다. 당시 세자는 조정 대신들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어느 신하도 숙종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결국 10월 10일 장희빈은 사약을 마셨다.
이듬해 1월 5일 숙종은 교서를 내렸다.
“중도부처한 죄인 최석정은 지은 죄가 비록 무거우나 귀양을 간 지가 한 해를 넘겼고 바야흐로 양춘(陽春·음력 정월)을 당했으니 관대한 은전(恩典)이 없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방송(放送)하라.”
숙종이 무한 신뢰한 賢相
숙종의 최석정에 대한 신뢰는 장희빈의 사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았다. 본인이 구상하는 정국(政局)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재상이 바로 최석정이었기 때문이다.
숙종 28년(1702년) 12월 2일 숙종은 최석정을 서용(敍用)할 것을 명하고서 다시 판중추에 제배했다. 최석정은 일단 진천에서 소를 올려 면직을 청했다.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듬해 2월 11일 최석정을 다시 영의정에 임명한다. 이때부터 최석정은 영의정 폐출과 임명 사이에서 왔다 갔다하게 된다. 숙종 31년(1705년) 4월 13일 다시 최석정을 영의정으로 삼자 실록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숙종과 최석정이 서로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평이라고 하겠다.
〈이날 임금이 우상(右相) 이유(李濡)에게 영상(領相)을 추천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유가 형세가 편안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재차 불러도 나오지 않으니, 전망(前望·예전에 후보로 추천된 사람) 단자(單子·명단)를 들이라고 명하여 최석정을 정승으로 삼았다.
최석정은 성품이 명민(明敏)하고 유순(柔順)하며 또 은밀한 지원[奧援]이 있어서 임금이 총애하였다. 비록 비위를 거슬려 잠시 폐출(廢黜)되었지만, 연이어 중복(重卜·재차 정승에 임명됨)의 명령이 있음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럼에도 최석정이 소를 올려 대간(臺諫)의 비평이 있으니 나아갈 수 없다고 하자 4월 19일 숙종은 이렇게 답했다.
“영의정[台司]에 재차 임명한 데에서 의지함이 돈독함을 상상할 수 있고, 승지(承旨)의 돈유(敦諭)에서 그리워함이 절실함을 알 수가 있을 터인데, 나의 뜻이 신뢰를 받지 못하여 사직하는 상소가 계속해서 이르니, 몹시 놀랍고 또 부끄러워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기왕의 일에 대하여는 완전히 용서하였으니, 지나친 대간의 상소를 가지고 한결같이 인혐(引嫌)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지금 조정이 거의 비다시피 하였고 국사(國事)는 해이되어 있으니, 경(卿)과 같이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으로써 더욱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부디 자신을 낮추지 말고 즉시 나오도록 하라.”
조부 최명길의 일로 공격받아

▲최석정의 조부 최명길.
숙종은 말년으로 갈수록 소론 중심에서 노론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숙종의 마음이 조금씩 노론 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노론에서는 최석정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예를 들면 그가 영의정으로 있던 숙종 32년(1706년) 3월 3일 사학유생(四學儒生) 송무원(宋婺源) 등이 소를 올려 영의정 최석정을 공격했다.
“영의정 최석정은 (인조 때에) 화친을 주장한 사람인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 수치를 잊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가 있으니 우리 임금을 대신하여 황단(皇壇)의 제사를 행하게 할 수 없습니다.”
황단이란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보단제(大報壇祭)를 말한다. 조부 문제였기에 최석정은 소를 올려 조부 최명길을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이 글은 《숙종실록》에는 실려 있지 않고 《숙종실록보궐정오》(3월 9일)에만 실려 있다. 이 글은 최석정이라는 재상의 식견을 보여줌과 동시에 조부 최명길을 변론하고 나아가 상경(常經)을 넘어 권도(權道)를 발휘해야 하는 재상론이라는 점에서 다소 길지만 채록할 필요가 있다.
〈신의 조부가 또 말하기를, “오랑캐는 우리의 토지(土地)를 탐내서가 아니라 다만 이웃 나라에 위엄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니, 이는 반드시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신의 조부가 성대(聖代)를 만나서 직위(職位)가 숭현(崇顯)함에 이르렀으니, 충의(忠義)를 다한 것은 평소에 축적(蓄積)하였던 바이고 훼예화복(毁譽禍福)은 진실로 이미 끊어버렸던 것이며, 국가의 위급존망(危急存亡)의 날을 당하여 자기 혼자 식견(識見)의 명철함을 가지고 꼭 그렇게 될 계획을 믿어서 다만 성패(成敗)의 운수를 익숙히 강구(講究)했을 뿐만 아니라, 문득 또한 상경(常經·올바른 도리)과 권변(權變·형편에 따른 일처리 수단)의 의리를 살펴 정하였기 때문에 많은 구설에 걸려들어서 여러 번 전패(顚沛·엎어지고 자빠짐)의 지경을 당하였으나, 비방하고 원망하는 것이 들끓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명예에 누(累)를 끼치는 것도 따지지 않으면서 용감하게 곧장 앞으로 나가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으니, 그가 이치를 택하여 의리에 처한 것은 대개 인조(仁祖)에게 올린 봉사(封事)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폄손하여 권도를 행한다”
거기에 이르기를 “《춘추전(春秋傳)》에 권도(權道)를 설행(設行)하는 것은 사망(死亡)이 아니면 설행하는 바가 없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권도를 행하는 것에는 도(道)가 있으니, 자기를 폄손(貶損)하여 권도를 행한다”고 하였으니, 대개 측량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의 변고(變故)이고 한(限)이 없는 것은 의리(義理)입니다. 천하가 무사(無事)할 때에 경상(經常)을 조심해 지키는 것은 뛰어난 이나 뛰어나지 않은 이나 같이 한길로 돌아가겠지만, 역경(逆境)을 만나거나 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면, 능히 이를 변통(變通)시켜서 도리(道理)와 함께 행한 뒤에야 바야흐로 그것을 성인(聖人)의 큰 권도라고 이르겠습니다.
옛날 은(殷)나라 미자(微子) 계(啓)는 면박함벽(面縛啣璧·손을 뒤로 묶고 옥을 입에 물고서 항복하는 것)하면서 탕왕(湯王)의 제사를 보존(保存)하였고, 제(齊)나라 관중(管仲)은 죽지 않고 갇히기를 청하여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아 다스렸으니,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한 몸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하였다면 치욕(恥辱)스러운 사람으로 천한 행동을 한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또한 무엇을 취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그들은 때를 따라 정의(正義)를 마련하고 자신을 굴(屈)하여 권도를 행하였으며, 혹은 조종(祖宗)의 혈식(血食)을 귀중함으로 삼았고, 혹은 이익과 은택(恩澤)이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기 때문에, 공자(孔子)가 모두 인(仁)으로써 그들에게 허여(許與)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전하(殿下)께서는 종사(宗社)를 온전히 하시고 생령(生靈)을 보존하신 공이 옛일에 비하여 빛이 납니다.
만약에 세상에 공자가 있었다면 반드시 두 사람에게 허여한 것을 전하에게 돌렸을 것입니다. 혹은 국군(國君)이 되어서는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말로 오늘의 일을 의논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매우 의혹될 뿐입니다. 무릇 국군이 사직을 위하여 죽는 것은 곧 《예기(禮記)》의 말인데, 해석하는 자가 이르기를 “나라가 망하면 군주도 또한 망한다”라고 한 것이니, 그 나라가 망하지 않았는데 그 임금이 죽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소급해 책망한다는 것은 신이 들은 바가 없습니다.
미자는 은나라의 한 공자(公子)이고 관중은 제나라의 미천(微賤)한 신하로서 모두 종사(宗祀)나 생민(生民)의 책임이 없는데도, 오히려 수금(囚禁)과 치욕(恥辱)의 부끄러움도 사피하지 않고 반드시 조선(祖先)의 계통(系統)을 잇고 천하를 구제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거늘, 하물며 천승(千乘)의 임금으로 종사(宗祀)와 생령(生靈)이 의탁한 바인데, 도리어 스스로 그 몸을 가볍게 여겨서 구독(溝瀆·도랑에 빠져 죽음)의 행동을 달갑게 여기면서 이를 돌아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유리(羑里)의 좁은 곳에서 성철(聖哲)이 구유(拘幽)된 것은 사문(斯文·유학)의 양구(陽九·재앙)라고 이를 만하지만, 문왕(文王)은 능히 준양시회(遵養時晦·도를 따라 반성하고 때가 불리할 때 숨어 지냄)하며 지혜로써 주밀히 방비하여 그 정당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누설(縲絏·감옥에 갇힘)에 걸려들었으나 치욕스럽게 여기지 않고, 도(道)를 굽혀 면함을 구하였으나 아첨(阿諂)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척화와 출성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명이(明夷)는 어려움을 알아 그 정직함을 지키면 이롭다 하고, 안으로 문명(文明)한 덕을 가지고 밖으론 유순(柔順)하여 큰 어려움을 당했으니 문왕(文王)이 이를 실행했다”고 하였으니, 대개 성인(聖人)도 일찍이 곤궁할 때가 없지 않았으나 다만 그 대처하는 데에 방도가 있으니, 오늘은 곧 전하께서 명이를 지킬 때입니다. 전하로 하여금 더욱 어려운 때에 정직한 덕을 행하시면 역시 문왕(文王)이 될 따름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봉장(封章)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경훈(經訓)을 끌어 증거를 대고 의리(義理)를 참고하여 증험한 것은 구차하지 않을 뿐입니다. 비록 그렇지마는 또한 감히 만족한 마음으로 오랑캐를 섬기고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으로써 군상(君上)에게 우러러 인도한 것은 아니니, 대개 말하기를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는 계획과 내정(內政)을 다스려 외적(外敵)을 물리치는 계책을 스스로 다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라” 한 때문에 그 말에 이르기를 “근심이 깊으면 성지(聖智)를 계도(啓導)하고, 어려운 일이 많으면 나라를 일으킨다”고 하였으니, 대개 편안한 데 익숙하여 주색(酒色)에 빠져서 정사에 게으르면 반드시 전복(顚覆)의 화(禍)가 있게 되고, 어려울 때에 처해서도 부지런하고 두려워하면 마침내 난국(難局)을 구제하는 효과를 거두는 것은 이치에 반드시 그렇게 됨이 있어서 결단코 의심할 것이 없으니, 국가(國家)가 상망(喪亡)하는 데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지난해에 화친(和親)을 배척한 일은 진실로 실착(失着)이 되었으나 천조(天朝·명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세웠으니 그 명분이 올발랐고, 올해에 출성(出城·성을 나와 항복함)한 일은 진실로 수치스러웠기는 하나 생민을 위하여 모욕(侮辱)을 참았으니 그 마음이 어진 것입니다. 본조(本朝)에 있어 천의(天意)가 끊어지지 않은 것과 인심(人心)이 성상(聖上)에게서 떠나지 않은 것이 어찌 연유한 바가 없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진실로 능히 성상의 뜻을 분발(奮發)하여 동요되거나 저지되는 바가 없게 하고, 앞일을 징계 삼아 뒷일을 삼가는 계책에 더욱 힘쓰고, 내정(內政)을 다스려 외적을 물리치는 정치를 힘써 다하시며, 진정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한 처지에서 주선(周旋)을 하고 지극한 정성을 펼쳐 밝게 강림(降臨)하는 하늘이 감동한다면, 실패가 성공(成功)이 되고 재앙(災殃)이 바뀌어서 복(福)이 되는 것은 반드시 오늘부터 비롯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夏)나라에서는 일성(一成·사방 10리 땅)을 가지고도 소강(少康)이 흥기(興起)하였고, 월(越)나라에서는 회계(會稽)에 머물면서 구천(句踐)이 패권(覇權)을 잡았었는데, 더구나 지금 국가의 경토(境土)가 결손(缺損)된 바가 없으며, 조종의 덕택(德澤)도 오히려 다 없어지지 않았으니, 변란(變亂)이 비록 비참하나 사방으로 호령(號令)이 막히지 않았고, 재용(財用)이 비록 써서 없어졌지마는 남은 힘이 아직 삼남(三南)에 있으니, 오늘의 일은 오직 전하께서 뜻을 세우시기를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일을 하려고 하시면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노론의 공격으로 결국 사직
이에 숙종은 대신을 흔들고 조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송무원에게 변방 유배를 명했다. 송무원은 송시열의 증손(曾孫)이며 그 아들 송덕상(宋德相)은 홍국영과 정치 노선을 함께하다가 홍국영이 몰락할 때 함께 패망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송무원의 당색을 짐작할 수 있다.
3월 25일 최석정이 올린 사직소를 보면 노론의 공격이 최석정의 목 아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풍문(風聞)에 좌상(左相)이나 우상(右相)이 송무원의 일을 아뢰고 인하여 구해(救解)하는 말이 있다고 하기에, 처음에는 놀라서 의혹한 마음이 없지 않다가, 좌상의 차자(箚子)를 보고 난 후에야 그 본뜻이 그렇지 않음을 비로소 깨우쳤으나, 정세가 위축(危蹙)되는데 어찌 감히 안연(晏然)하게 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좌상은 서종태(徐宗泰), 우상은 김창집(金昌集)이었다. 김창집은 노론이었다.
최석정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같은 해 6월 11일 노론 대신 병조판서 이이명(李頤命·1658~1722년)을 직격했다. 이에 숙종은 곧바로 이이명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 것을 명했다. 아직은 최석정에 대한 숙종의 신임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이명은 이경여(李敬輿)의 손자로 일찍부터 송시열의 지원을 받으며 이선(李選), 이수언(李秀言) 등과 함께 노론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우의정에 오르고 숙종의 총애를 얻어 1708년 좌의정에 올라 숙종 말기 노론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된다.
최석정은 노론 일색으로 바뀌어가는 조정 상황을 보면서 숙종 33년(1707년)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려 마침내 영의정에서 물러난다.
노론 반격의 빌미가 된 《예기유편》
최석정은 숙종 19년(1693년) 《예기유편(禮記類編)》이라는 주석서를 편찬했다. 대체로 조선 초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기본으로 원문의 장구(章句)가 혼동을 주거나 일탈된 것을 정밀하게 바로잡은 책이다.
노론 입장에서 서술된 실록은 숙종 35년(1709년) 1월 18일 자에서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당초에 최석정이 예서(禮書)를 찬집(纂輯)하여 《유편》이라고 이름했는데, 모든 예경(禮經)의 장구(章句)를 거개 분류(分類)하여 모아, 이쪽에서 끊어다가 저쪽에다 보충하고 위에서 잘라다가 아래로 옮기곤 하였는데, 되도록이면 번잡하고 중복된 것들을 없애어 고열(考閱)하기 편리하게 하였다. 또 《중용》과 《대학》을 가져다가 도로 그전의 자리에 편차(編次)하되 편제(篇題)를 첨산(添刪)하기도 하고 장단(章段)을 없애버리기도 하였고, 주자의 설명은 전부 없애고 단지 주설(註說)만 남긴 것도 있고, 정자(程子)의 해설을 끊어내고 자기의 설명으로 대신한 것도 있고, 아랫장(章)을 위에다 넣고서 그 장의 끝에 있는 해석을 삭제해 버린 것도 있고, 딴 주(註)를 새로 붙여 본주(本註)의 뜻을 어지럽힌 것도 있어, 대개 조목(條目)의 배치는 교묘하게 되었지만 큰 본령(本領)은 깎여버리게 되었다.〉
“주자의 설명은 전부 없애고 단지 주설(註說)만 남긴 것도 있고”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발화성(發火性)이 강한 책이었다. 이이명의 동생 이관명(李觀命·1661~1733년)이 깃발을 들었다. 최석정의 책은 “성인을 모함하고 현인을 업신여겼다”는 것이다. 이관명이 댕긴 불은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선비들에게까지 옮아 붙었다. 최석정은 15차례나 사직 의사를 밝혔고 그때마다 숙종은 반려했다. 이에 성균관 유생 이병정 등이 소를 올려 최석정을 공격했다.
〈우리 주부자(朱夫子)가 천 년이나 추락(墜落)했던 통서(統緖)를 이어받고 뭇 성현들의 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사도(斯道)의 오묘(奧妙)한 뜻을 천명(闡明)하되, 집주(集註)와 장구(章句)를 확정하고 저술하여 만세에 교훈을 남겨놓았으니, 이는 바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고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불행히도 지난날에 난적(亂賊) 윤휴(尹鑴)가 선현(先賢)을 가볍게 보고서 《중용(中庸)》의 장구를 멋대로 고쳤었으니, 윤휴가 종말에 창궐(猖獗)하게 된 것이 실지는 이에서 비롯하게 된 것인데,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이 또한 뒤따라 일어나게 되고, 이번에는 최석정이 또한 그가 만든 《예기유편》이란 것으로 신엄(宸嚴)을 간범하고 있습니다.〉
예학(禮學) 혹은 예론(禮論)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정면충돌이었다. 결국 이 일로 최석정은 숙종 35년 6월 29일 40여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다시 영의정을 맡지만 숙종 36년 2월 30일에는 병을 핑계로 영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에 머물렀다. 그러나 판중추에서도 물러나야 했고 마침내 사헌부에서는 최석정을 유배 보낼 것을 청하기도 했다.
판부사(판중추)로 있던 숙종 40년(1714년) 8월 12일 윤증의 상사에 최석정이 제문을 지었는데 그 안에 송시열을 침척(侵斥)하는 말이 있다 하여 유생들이 소를 올렸다. 그러나 숙종은 사사로운 제사에 쓴 글을 갖고서 나라에서 문제 삼을 수 없다는 논리로 유생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품이 경솔하고 천박”(노론)
그러나 이미 노론의 세상이었다. 이듬해인 숙종 41년(1715년) 최석정은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교서를 내려 말했다.
“지극한 슬픔으로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었다.”
그러나 당시에 최석정을 보는 시각은 정확히 둘로 갈렸다. 먼저 노론이 쓴 《숙종실록》 숙종 41년 11월 11일 졸기다.
〈최석정은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공교하며 경솔하고 천박하였으나,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어 여러 서책을 널리 섭렵했는데, 스스로 경술(經術)에 가장 깊다고 하면서 주자(朱子)가 편집한 《경서(經書)》를 취하여 변란(變亂)시켜 삭제하였으니, 이로써 더욱 사론(士論)에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태사(台司·삼정승)에 올랐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으며, 남구만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의 언론(言論)을 조술(祖述)하여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함부로 전도시켰다. 경인년(숙종 36년)에 시약(侍藥)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엄지(嚴旨)를 받았는데, 임금의 권애(眷愛·총애)가 갑자기 쇠미해져서 그 뒤부터는 교외(郊外)에 물러가 살다가 졸하니 나이는 70세이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이번에는 소론이 쓴 《숙종실록보궐정오》 같은 날 졸기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이 졸(卒)했다. 최석정은 자(字)가 여화(汝和)이고, 호(號)가 명곡(明谷)인데, 문충공(文忠公) 최명길의 손자이다. 성품이 청명(淸明)하고 기상(氣像)이 화락(和樂)하고 단아(端雅)했으며,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남구만과 박세채를 따라 배웠는데, 이치를 분별하여 깨달아 12세에 이미 《주역(周易)》에 통달하여 손으로 그려서 도면을 만드니,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구경(九經)과 백가(百家)를 섭렵하여 마치 자기 말을 외듯이 하였는데, 이미 지위가 고귀해지고 늙었으나 오히려 송독(誦讀)을 그치지 않으니, 경술(經術)·문장(文章)·언론(言論)과 풍유(風猷)가 일대 명류(名流)의 종주가 되었다. 산수(算數)와 자학(字學)에 이르러서는 은미(隱微)한 것까지 모두 수고하지 않고 신묘하게 해득(解得)하여 자못 경륜가(經綸家)로서 스스로 기약하였다. 열 번이나 태사(台司)에 올라 당론(黨論)을 타파하여 인재(人才)를 수습하는 데 마음을 두었으며, 《대전(大典)》을 닦고 밝히는 것을 일삼았다. 신사년(숙종 27년 1701년)에 세 번 차자를 올려 미움받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것이었으니, 조태채(趙泰采)가 매복(枚卜)에서 대신(大臣)의 풍도가 있다고 했다.
소관(小官)에 있을 때부터 임금의 권애(眷愛)가 특별하여 만년까지 쇠하지 않자, 당인(黨人)들이 이를 매우 시기하여 처음에는 경서(經書)를 훼파(毁破)하고 성인을 업신여겼다고 무함하다가 마침내 시병(侍病)하는 데 삼가지 않았다고 구죄(構罪)하니, 하루도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편안히 지내면서 끝내 기미(幾微)를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너그러운 도량에 감복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경외(京外)를 왕래하다가 황야(荒野)에서 죽으니, 식자(識者)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문식이 지나치고 또 경솔하여 절실함이 깊지 못하였다.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긴요한 듯하면서 실지로는 범연하여 남구만처럼 독실하고 정확(精確)하지는 못했다. 시호는 문정이며, 태묘(太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수학에 통달했던 르네상스적 인간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쓴 최석정의 《구수략》.
최석정은 1710년 사실상 영의정을 그만둔 뒤부터 전원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졸기에서 말한 대로 산수와 자학 연구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학과 관련한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책을 지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소개다.
〈4권 2책. 목판본. 갑·을·병·정(부록)의 4편으로 엮어졌다. 갑편은 주로 가감승제(加減乘除)의 4칙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 을편은 이들 기본연산(基本演算)을 다룬 응용문제, 병편은 개방(開方)·입방(立方)·방정(方程) 등에 관해서, 그리고 정편은 문산(文算)·주산(籌算) 등의 새로운 산법 및 마방진(魔方陣)의 연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수학의 형이상학적인 역학사상에 의거, 수론을 전개한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수학의 계산을 도외시하면서 삼위일체설에 근거를 둔 수의 분류를 주제로 한 서양의 보에티우스(Boethius) 수학에 견줄 수 있다.
수사(數詞)·단위·산목(算木)·포산(布算·산목의 배열법)·가감승제의 계산 원칙을 비롯하여, 심지어 동양수학의 대표적 고전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의 각 장을 음양사상과 결부시켜 분류하고 있다. (이하 생략)〉
동생 최석항도 좌의정 지내
최석항(崔錫恒· 1654~1724년)도 소론의 거물이며 좌의정에 이르렀다. 경종 4년(1724년) 그의 졸기다.
〈최석항은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의 아우인데, 외모는 왜소하였으나 강한 정신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관찰사로 나갔을 적에는 재국(才局)이 있다 이름을 날렸고, 평생의 처사에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항상 후진(後進)에게 경고하기를 ‘사소한 일을 가지고 남과 서로 따지지 마라. 그러다가는 걸핏하면 실패하고 나랏일을 성취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승으로 들어가 임인년(경종 2년 1722년)·계묘년(경종 3년 1723년)의 큰 옥사를 당하여서는 뜻을 아예 평반(平反·억울한 죄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로 하거나 감형하는 일)에 두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필경 대각(臺閣)의 어긋나고 과격한 논의에 끌려서 모든 일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한지라, 식자는 그의 역량이 적었던 것을 결함으로 여겼다. 부음을 알리자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의 뜻을 전하였고, 세제(世弟·훗날의 영조)도 거애(擧哀)의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예문(禮文)을 따른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