餘談/ 2024.04.04 술을 마시지 말고 사람을 마셔라 - 11.29 "아들아 보고싶다" 번호 바꾼 청년에 매일 온 카톡... 그 후 벌어진 감동 사연
餘談/ 2024 -2
04.04 술을 마시지 말고 사람을 마셔라

▲일러스트=이철원
술은 무슨 맛으로 마실까? 아버지가 집에서 홀로 바둑을 두며 소주를 마실 때마다 떠올린 질문이다. 말없이 바둑판을 들여다보다가 말없이 소주를 삼키고는 ‘크으’ 내뱉는 소리. 삼키는 소리인지 내뱉는 소리인지 모를 그 미묘한 소리. 그 소리가 지나가면 고개를 들고 나를 찾았다. 내가 옆에서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고 있으면, 벌게진 얼굴로 씩 웃고는 동전을 한 움큼 내 손에 올려주었다. 동전을 받는 맛으로 거의 매일 밤 아버지 곁에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 술맛이 딱히 달콤하지는 않을 거라고 느낀 적이 있다. 숙제하다 잠들었는데 반복되는 ‘크으’ 소리에 잠을 깼다. 아버지는 불 꺼진 방에서 보이지도 않는 바둑판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데, ‘크으’ 소리가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나에게도 익숙한 소리였다. 내가 무언가 속상해서 울 때 내는 소리였다. 아버지가 우는 걸까. 나는 그날 밤 눈을 뜨지 못했다.
며칠 후 우리 집은 더 작은 곳으로 이사 갔다. 아버지가 친구의 빚 보증을 잘못 섰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어두운 방에서 소주를 마시는 날이 많았다. 어두운 방에서는 숙제를 할 수도 없고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 얼굴을 읽을 수도 없었다. ’크으’ 소리를 계속 들으면, 뭔가 세상의 쓴맛을 너무 일찍 알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 친구 집과 오락실과 도서관을 맴돌았다. 어느새 마시는 모습보다는 마신 후에 이불도 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나는 점점 더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들어왔고, 아버지가 일어나기 전에 학교에 갔다. ‘크으’ 소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아련해졌다.
시간이 흘러 내가 대학 기숙사로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와 소주를 놓고 마주 앉았다. 아버지가 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나도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드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크으’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색해서 대화인지 혼잣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술은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야?” 그 순간,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이 열렸다. 술은 어떻게 마셔야 하고, 어떻게 예의를 지켜야 하고, 술에 취하면 어떻게 해야 하고…. “그러니까, 술이 아니라, 사람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돼.” 아버지는 그 많은 말이 어색했는지 그대로 드러누웠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마음을 먹고 옆에 드러누웠다. 어차피 다음 날이 되면 나는 다른 도시로 떠나고, 한동안 우리가 만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어색한 숨소리만 뱉어냈다. 그러다 불쑥, 아버지도 대화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이제야 같이 마시네. … 이제 됐어.”
그날 새벽 나는 잠시 잠에서 깼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의 그 ‘훌쩍’ 소리를 또 한번 들은 것 같다. 나는 이번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날 아침 나는 집을 떠났고, 그 이후 우리가 술을 마신 날은 열 번도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종종 홀로 소주를 마시는데, 그때마다 익숙한 ‘크으’ 소리에 놀라곤 한다. 아버지의 소리가 내 안에도 있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 ‘크으’ 소리가 왜 삼키는 소리와 내뱉는 소리의 경계에 있었는지. 언젠가 내가 한 연극에서, 술에 관한 긴 독백을 쓴 적이 있다. 그날 밤 아버지가 들려준 술 마시는 법이었다.
“… 받을 때는 신중하게 받고 마실 때는 시원하게 마셔라. 마시고 나서는 주변에 빈 잔들이 없는지 확인해라. 따를 때도 밝게 따르고 받을 때도 밝게 받아라. 술 마시는 동안에는 취하지 말고 다 마시고 헤어질 때부터 취해라. 마시는 동안 취했으면 바깥에 나가 바람을 쐬고 오거나 조용히 집에 와라. 술은 긴장을 풀려고 마시는 것이지만 절대로 긴장을 풀면 안 된다. 긴장이 풀리면 주사를 부린다. 주사는 친구가 떨어져 나가는 지름길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만 지켜도 술자리에서 실수를 안 한다. 이게 내가 너한테 주는 유일한 조언이자 유산이다.”
조선일보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04.09 “잘난 체하는 당신들 한국 사람들 때문이잖아”

▲일러스트=최정진
‘과시하기 경쟁: 한국에선 부유함을 뽐내는 게 왜 미덕일까.’
필리핀 매체 ‘인콰이어러’가 “체면이 전부인 한국에선 부자라고 뻐기거나 부자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게 악덕 이 아니라 미덕인 듯하다”며 보도한 기사 제목이다. “이미 가졌으면 으스대고, 아니면 가질 때까지 가짜로 꾸민다”고 시작한 내용은 대략 이렇다.
“길거리 어디에서나 명품 가방을 볼 수 있다. 명품에 대한 강박 이 워낙 만연해 어린 아이들까지 입고 신고 학교에 간다. 엄마들은 학부모 회의에도 온갖 명품으로 치장하고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가 마치 패션쇼 모델인 양 뽐내며 들어간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한국이 세계에서 1인당 명품 소비가 가장 많은 국가라고 발표한 바 있다. 2022년 한 해 명품 소비는 전년 대비 24% 증가한 21조8000억원에 달했다. 외모와 물질적 지위로 사람을 단정하는 과시 문화의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은 다른 사람 성공은 시샘하며 다른 이로부터 똑같은 반응을 얻어내고 싶어하는 한국인들 속성을 시사한다. 그로 인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고 따라잡으려고, ‘그들 중 한 명’임을 과시하려고 끝없는 경쟁을 벌인다.
게다가 명품 추종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경제적 책임감은 덜하고 자기 표현 욕구는 강한 20~30대가 명품 브랜드들의 새로운 공략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Z세대는 집·자동차를 사기 위한 저축보다는 즉각적인 만족감을 좇아 명품에 돈을 펑펑 쓰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중고생까지 명품을 걸치고 다니는 친구들에게서 또래 집단 압박감을 느낀다. 일종의 ‘밴드왜건 효과’다. 다수의 선택에 휩쓸려 시류에 편승하는 심리적 현상이다. 명품 살 형편이 안 되면 싸구려 모조품을 사서라도 과시 행렬에 끼어든다.
국제결혼을 해 서울에 사는 싱가포르 여성이 명품백을 샀다가 한국인 남편으로부터 핀잔을 듣고는 한마디 쏘아붙였다고 한다. 그러자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머쓱해하더란다. ‘이게 모두 당신들 한국 사람들이 잘난 체하면서 명품백 들고 다니지 않으면 업신여기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조선일보 윤희영 기자
04.09 美 흑인문화 상징 할렘은 무슨 뜻?

▲미국 뉴욕 맨해튼 북부에 위치한 할렘가의 모습./조선DB
아폴로 극장이 있는 미국 뉴욕시 맨해튼 할렘(Harlem)은 미 흑인 문화의 중심지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네덜란드 이주민들의 거점이었다. 1626년 맨해튼섬 남부를 점령한 네덜란드는 이 일대를 새로운 암스테르담(네덜란드 수도)이라는 의미에서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다. 이후 1658년 맨해튼 북부에 네덜란드 이주민 정착지를 세우고 ‘할렘’이라고 했다. 암스테르담 서쪽 소도시 ‘하를럼(Haarlem)’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슬람권의 금남(禁男) 구역을 뜻하는 ‘하렘’과는 무관하다.
뉴암스테르담은 1664년 영국령이 되면서 뉴욕으로 개명했다. 땅 명의자가 왕족 요크 공작(Duke of York)이었기 때문이다. 할렘은 이후 네덜란드 등 유럽 이주민이 주로 살다가 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계기로 흑인 밀집 지역이 됐다. 전쟁으로 유럽발 이민자가 급감, 부족해진 저임금 노동자가 미 남부 흑인들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세계 금융 중심인 맨해튼 남부 월스트리트(Wall Street·월가)는 1653년 네덜란드 이주민들이 원주민 침입을 막으려 성벽(wall)을 쌓은 데서 유래했다. 월가 바닥 곳곳에는 성벽을 구성했던 목재 일부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조선일보 김나영 기자
월간조선 2024.04월 호
●人類 기원설 연구 어디까지 왔나?
‘아프리카 기원설’ 힘 잃고 다지역 진화, 유럽·아시아 기원설까지
⊙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뒤 점차 다른 모든 인종을 대체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說
⊙ ‘다지역 진화설’ 혹은 ‘다지역 연계론’… 호모 에렉투스 시절로 추정하는 약 100만 년 전부터 ‘아웃 오브 아프리카’ 가능성
⊙ 舊인류(네안데르탈인, 베이징 猿人, 자바 猿人)가 독립적인 다양한 거주지에서 半독립적으로 진화
⊙ 직립 보행 대형 유인원이 아프리카보다 앞서 1200만 년 전 유럽에 살았다?
⊙ “진화 역사는 완전 대체나 單線 행진이 아니라, 서로 얽혀가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이어져”

▲서울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을 찾은 초청 관람객들이 인류의 진화를 설명한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인류(人類)의 기원을 두고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이 컸던 설은 ‘아프리카 기원(Out of Africa)’설이었다. 인류의 가장 오랜 직계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이 나온 곳이 아프리카다. 이 화석 인류가 400만~230만 년 전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검은 대륙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30만 년~현재)가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뒤 점차 다른 모든 인종을 대체했다는 것이 고(古)인류학의 탄탄한 정설이다. 호모 사피엔스를 통한 ‘완전 대체설’ 혹은 ‘이주 교체설’의 바탕에 아프리카 기원설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과 가장 닮은 이 호모닌[계통상 침팬지보다 호모 사피엔스에 가까운 모든 영장류를 포함하는 군(群)]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정처 없이 길을 떠나 유럽과 중동을 거쳐 아시아, 그리고 북극을 건너 남아메리카에까지 도달해 정착했다.
진화사로 볼 때 오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 하빌리스→호모 에렉투스→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선(單線) 진화론이 20세기 중반까지 바위처럼 굳게 자리했다. 대개의 40~50대 이상 한국인들은 역사 수업 시간에 이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대표적으로 ‘우리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던 이어령(李御寧· 1933~2022년) 선생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 기원설을 신뢰했다.
이어령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
최초의 인류 조상은 모든 것이 풍족한 아프리카 열대우림에서 오랑우탄이나 고릴라, 침팬지 같은 유인원과 다툴 일 없이 잘 살았다. 풍족한 열매가 열리고 숲이 우거져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었고, 숲속에 숨어버리면 사자나 표범, 하이에나 같은 맹수의 공격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뚝 솟은 산과 해면의 상승으로 우림이었던 공간이 별안간 초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구 맨틀이 좌우로 움직이면서 화산 활동이 활발해져 협곡이나 산맥, 그리고 지금의 아프리카 동부에선 거대한 에티오피아 고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밀림에 그냥 남느냐, 초원으로 떠나느냐. 침팬지 같은 대부분의 영장류는 밀림을 택했다. 초원엔 싱싱한 사철 열매가 없고, 맹수의 공격도 피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인간은 다른 선택을 했다. 미지의 공간으로 삶의 경로를 택해 기꺼이 나그네가 되었다. 사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주자이다. 떠남과 정착, 헤어지고 흩어진 뒤 이어지는 또 다른 만남은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행동의 일부였고 본능이었다.
한용운(韓龍雲·1879~1944년)의 시 ‘님의 침묵’에서 말하는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을 떠올려보라. 만나는 사람은 헤어짐이 정해져 있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
비록 피부색에 따른 인류 기원의 구분이 매우 제한적이지만, 코카소이드(Caucasoid), 몽골로이드(Mongoloid), 니그로이드(Negroid)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인류 대장정의 루트에 근거한다. 백인을 뜻하는 코카소이드는 ‘캅카스 산맥까지 이른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캅카스를 과거엔 코카서스라고 불렀다. 성경 창세기에서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방주가 도달한 곳, 방주 안의 비둘기가 날아가 간난잎(올리브 잎)을 따온 곳이 바로 캅카스(코카서스) 산맥의 아라랏산(5137m)이다. 코카소이드는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유럽의 캅카스 산맥까지 다다른 인류로 지금의 유럽 백인들이다.
동양인을 뜻하는 몽골로이드는 코카소이드보다 더 먼 길의 여정을 택한 인류다. 몽골로이드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7만 년 전부터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현재의 중국을 거쳐 남방 루트를 택해 일본까지 간 몽골로이드를 ‘고(古)몽골로이드(남방계)’라고 부른다.
이들 외에 약 4만 년 전 시베리아 북쪽으로 올라가, 신빙하기에 바이칼호(湖) 근처에 갇힌 채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신(新)몽골로이드(북방계)’다. 그들은 추위를 견디려 코는 더 낮아지고, 눈두덩은 두꺼워지는 진화를 택했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얼굴은 쌍꺼풀이 없는 두툼한 눈, 튀어나온 광대뼈, 납작한 코를 갖게 되었다. 살을 에는 혹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이어령 선생은 “몽골로이드야말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 ‘탈(脫)아프리카’를 택한 인류의 조상 중에서도 가장 긴 여정을 택한 인류”라고 했다.
‘다지역 진화설’ 혹은 ‘다지역 연계론’

▲현생 인류의 두개골(왼쪽)과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오른쪽).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뇌 진화 방식은 유사하다고 한다. 사진=위키미디어커먼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대응해 또 다른 기원설로 ‘다지역 진화설’ 혹은 ‘다지역 연계론’이 제기되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정복’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호모 에렉투스 시절로 추정하는 약 100만 년 전부터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이를 1차 아프리카 탈출이라 부른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탈아프리카 이후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한 당시 전 세계의 모든 ‘호미닌’을 대체한 것을 2차 아프리카 탈출이라 구분해 부른다.
다지역 진화설은 2차 아프리카 탈출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현생 인류는 구(舊)인류(유라시아에서는 네안데르탈인, 중국 베이징과 인도네시아 자바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독립적인 다양한 거주지에서 반(半)독립적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다 인접한 지역의 무리와 이종교배(異種交配)가 이뤄져, 결국 모든 ‘호미닌’을 차례로 받아들여(혹은 멸종시켜) 오랜 세월에 걸쳐 한 종(種)의 현생 인류로 연속적인 유전자 확산을 이뤄냈다는 시각이다.
20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네안데르탈인은 완전히 사라지고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만이 유일하게 생존했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네안데르탈인은 늦어도 50만 년 전에 유라시아에서 살기 시작한 사람 속(屬·호모)이며 4만 년 전에 멸종되었다. 멸종 이유는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에 의해 절멸(絕滅)했다는 게 통설이었다. 두 존재에 대한 유전적 교배 혹은 교류 가능성은 오랫동안 부정되었다.
이 같은 주장의 근거는 ‘제노그래픽 프로젝트(Genographic Project)’를 이끈 스펜서 웰스(Spencer Wells) 박사팀이 지난 1987년 DNA 연구를 통해 뒷받침했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mtDNA)’가 모계(母系)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현 인류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현생 인류의 근원지가 아프리카 대륙이고, ‘미토콘드리아 이브(Eve)’인 한 여성이 인류의 공통 조상이 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연구에서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네안데르탈인(오른쪽)과 호모 사피엔스(왼쪽) 모형. 사진=영국 자연사박물관
이로부터 10년 뒤인 1997년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화석에서 DNA 조각(유전자)을 조사했더니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와의 접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DNA 표본수가 많지 않았다. 이후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계속 출토되었는데 2006년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 개체수 100만 개를 다시 분석했다. 역시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져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을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그러나 연구를 이어가면서 절멸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2010년 5월 《사이언스(Science)》에 실린 연구논문에 현생 인류 DNA의 1~4% 정도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와 비슷하며 우리 현생 인류의 면역체계 감염 반응 등과도 연관성을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과 놀라움을 주었다.
이 연구는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소속 스웨덴 출신의 스반테 페보(Svante Erik Paabo) 박사가 진행했는데 이 공로로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페보 박사는 4만 년 전의 네안데르탈인 유골에서 DNA 미세 조각을 읽고 연결하는 방법을 기적적으로 찾아냈다.
네안데르탈인은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 안에 녹아들었다

▲유전학자 스반테 페보. 2022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사진=연합뉴스
페보 박사는 유라시아에 사는 사람들, 특히 유럽인의 1~4%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갖고 있고, 아프리카 일부 지역만 빼고 현생 인류 대부분 DNA 속에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2% 정도 섞인 것을 알아냈다.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 안에 녹아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둘이 이종교배했다는 사실은, 두 생명체가 생물학적으로 교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까웠을 것이라는 견해에 기반을 둔다.
페보 박사팀은 또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4만 년 전 손가락 골편 채취를 통해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와 교류한, 생물학적으로 표현해 이종교배한 데니소바인(호모 데니소바)의 존재를 처음 발견했다. 네안데르탈인과는 또 다른 사람종(種)이며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데니소바인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페보 박사는 아시아의 남부 및 동부에 사는 사람의 DNA에 데니소바인의 DNA가 6%나 들어 있다는 점도 밝혀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 두개골.
실바나 콩데미와 프랑수아 사바티에가 펴낸 《내 형제 네안데르탈인》(정수민 옮김, 2023)에 따르면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는 서로 유전자를 교배 및 혼합할 수 있었고, 네안데르탈인은 이종교배에 의한 소멸을 겪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은 왜 사라졌는지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 가설은 네안데르탈인이 다수의 사피엔스와 혼합되어 점차 사라졌을 가능성이다. 이때 사피엔스 여성과 네안데르탈인 남성의 결합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사피엔스 남성은 네안데르탈인 여성을 자신의 부족에 통합해 부족을 강화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네안데르탈인 남성의 개체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두 번째 가설은 네안데르탈인의 아주 적은 인구수, 그들의 낮은 인구 통계가 생존과 혁신 능력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빈 공간을 아프리카에서 떠나 유럽에 정착한 호모 사피엔스가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경우 서로 간의 만남에서 일어난 폭력을 배제하거나 또는 입증할 수 없다면 서로에게 유익한 상호작용이 발생했을 개연성이 높다.
네안데르탈인을 둘러싼 두 가설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에서 발견된 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 두개골.
다지역 연계설 이론은 대표적으로 독일의 인류학자 프란치 바이덴라이히(Franz Weidenreich) 등이 주장했다. 194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개체군이, 동일한 형태인 호모 에렉투스(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 거주하던)와 서로 독립적으로 진화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유인원을 압도하는 인종적 위계 질서를 신봉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학자로 미국 미시간대 고인류학자 밀포드 울포프(Milford Wolpoff)가 있다. 그는 200만 년 전 호모닌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의 네안데르탈인, 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자바 원인(猿人)과 베이징 원인], 그리고 틀림없이 인도나 그 밖의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았다. 유전적 흐름으로 연결된 모든 인류가 각자의 지역에서 각각 진화하여 현대 사피엔스까지 흘러갔다는 주장이 많은 고고학자와 인류학자들을 고무시켰다.
이런 유골 화석의 증거들이 스페인의 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 동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테르크폰테인 동굴, 조지아의 드마니시,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섬 등지에서 발견돼 많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지난 2003년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에서 플로(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 남아공에서 호모 날레디가 발견돼 큰 논쟁이 벌어졌다.
플로는 영화 〈반지의 제왕〉(2003)에 나오는 작은 키의 호빗족을 연상시키는 겉모습 탓에 ‘호빗’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플로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작은 머리에 키도 작았다. ‘루시’로 알려진 1974년 에티오피아의 하다르 계곡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 원인의 뇌용량이 420cc, 키가 100cm인 것과 비교해 플로는 뇌용량이 380cc, 키 또한 100cm로 자그마했다. 참고로 성인은 1300~1400cc, 신생아는 350~400cc, 돌 때 800cc 정도다.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된 유골 화석들
350만~3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옴 직한 사람(루시)이 인도네시아에서 5만 년 전에 나왔다는 사실이 고고학계에 큰 놀라움을 주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아프리카에서 1만km나 떨어져 있다.
이후 작은 키와 작은 뇌용량을 둘러싸고 학자들끼리 10여 년간 “예외적이고 병리적인 돌연변이냐, 아니냐”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 2016년 이보다 더 작은 턱뼈 조각이 발견되어 병에 걸린 현생 인류가 아니라 제3의 ‘작은’ 인류로 보는 시각이 많아졌다. 이 플로가 호모 사피엔스와 섞여서(이종교배해) 살아온 유전자가 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과거 통설에서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의 단계 이전에는 아프리카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시각이었지만, 그전부터 이미 아프리카를 벗어나 동남아시아 등의 여러 지역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보다 다양한 지역에서 제기되고 있다. 플로가 이 같은 견해를 강화시켰다.
또 다른 가능성 중의 하나가 1929년 12월 2일 중국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저우커우뎬(周口店) 지역에서 발견된 ‘베이징 원인’(원숭이와 인간의 중간단계)이다. (처음 발견은 1921년 무렵이었다.) 베이징 원인은 그 유골로 볼 때 50만 년 전 직립 원인인 호모 에렉투스로 판명이 났다. 원숭이에 보다 가까웠던 2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 30만 년 전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이의 중간 존재로 당시 베이징 원인을 세계 고고학계가 흥미롭게 바라봤다.
유럽 기원설과 아시아 기원설까지
베이징 원인의 발견보다 앞서 네덜란드 군의관 외젠 뒤부아가 1891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찾은 자바 원인도 존재한다. 자바 원인은 넓적다리뼈, 두개골, 치아 등을 조립한 결과, 직립 보행을 했음이 밝혀졌는데 10만 년 전에 멸종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자바 원인이 호모 에렉투스로 공식 분류된 것은 1980년에 이르러서다.
또한 현생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가 아닌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이 새롭게 제기된 상태다.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지는 않으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독일 튀빙겐대 고생물학자이자 고기후학자인 마들렌 뵈메(Madeleine Böhme)는 2019년 11월 《네이처(Nature)》에 실린 논문(〈A new Miocene ape and locomotion in the ancestor of great apes and human〉)을 통해 인류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직립 보행을 한 대형 유인원이 아프리카보다 500만 년 앞선 무려 1200만 년 전 유럽에서 살았다고 주장했다. 이제까지 가장 오래된 고인류는 중앙아프리카 차드에서 발견된 700만 년 전 사헬란트로푸스였다. 또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호모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류 화석이 약 28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1200만 년설’은 매우 충격적이다.
아시아 기원설은 주로 중국의 고인류학자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중국과학원 광저우 지구화학연구소의 연구자들이 2018년 7월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Hominin occupation of the Chinese Loess Plateau since about 2.1 million years ago〉)을 통해 약 212만 년 전의 석기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은 구인류의 아시아 대륙 진출 시기와 경로에 대한 기존 이론을 재고하게 하는 중요한 담론을 담고 있다.
공동연구자인 로빈 덴넬 영국 엑세터대 고고학과 교수는 “인류가 아프리카를 조기에 벗어난 시점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덴넬 교수는 호모닌 인류가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아시아 기원설’을 주장한다.(《동아사이언스》 2018년 7월 12일 자 기사 〈중국에서 210만 년 전 석기 발견… ‘아시아 최초의 인류’ 정설 바뀌나〉 참조)
최근의 연구 성과는…
다지역 연계론의 입장에서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와 인류 집단 사이에서 보이는 형질적인 연속성은 유전적 교류의 증거다. 둘은 서로 다른 종이 아니었다.
20세기 후반 들어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분석, 기후학과 지질학 등 최신 연구에 힘입어 인류 진화는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진화의 역사는 완전 대체나 단선 행진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서로 얽혀가며 흘러가는 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세계적 석학인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대 인류학과 이상희 교수는 “21세기 고인류학이 지향하는 모델은 브래드 피트가 주연했던 영화 〈흐르는 강물(A River Runs Through It)〉처럼 마치 강이 갈라졌다 합쳐지고 갈라졌다 합쳐지듯 계속 혼종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축적되는 ‘우리 안의’ 네안데르탈인 연구
인류의 기원을 탐색하는 연구는 지금도 중단 없이 진행 중이다.
최근 약 4만여 년 전 유럽의 네안데르탈인들이 황토와 아스팔트 성분인 역청을 섞은 혼합 물질로 석기에 손잡이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 밝혀져 주목을 끌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유럽에 당도하기 전에 네안데르탈인들이 도구를 창조적으로 만들 줄 알 만큼 지능이 뛰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황토 기반 접착 물질은 아프리카에서 초기 호모 사피엔스가 사용한 것은 확인됐으나 유럽 네안데르탈인 유적에서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2월 22일 발간된 과학저널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게재됐는데 독일 튀빙겐 에버하르트 칼스대 패트릭 슈미트 교수가 이끄는 국제팀이 연구를 주도했다.
중기 구석기(약 30만~3만 년 전)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은 역청, 나무 수지, 자작나무 껍질 등으로 접착 물질을 만들었으나 아프리카의 초기 호모 사피엔스는 포도카푸스 나무나 다른 자연적인 끈적이는 물질에 황토, 석영, 뼛조각 등을 섞어 접착 물질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미트 교수는 “이 연구는 아프리카의 초기 호모 사피엔스와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 비슷한 사고 패턴을 가졌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유럽에 도착하기 전, 그러니까 유럽을 지배하던 네안데르탈인이 사자와 같은 맹수를 사냥하고 그 가죽을 벗겨 이용했다는 증거가 발견되기도 했다. 튀빙겐대가 중심이 된 독일과 영국 연구진은 34년 간격을 두고 발견된 동굴사자 2마리의 유골에 나 있는 상처 자국을 분석해 작년 10월 13일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발표했다.
실바나 콩데미, 프랑수와 사바티에가 쓴 《내 형제 네안데르탈인》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식인(食人) 풍습도 소개하고 있다. 약 12만 년 전에 사망한 약 30명의 네안데르탈인의 수백 개의 뼈가 발견된 크로아티아 크라피나 동굴 발굴에서 도살 흔적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후 네안데르탈인 식인 풍습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속속 발견되었는데 골수를 빼내려는 명백한 목적으로 부러진 뼈는 말할 것도 없고 절단, 발라낸 살 등 수많은 흔적이 남아 있는 뼈를 발견했다. 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식인 풍습에 몰두했다고 내다봤다.
과학자들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보다 키가 작고 팔다리가 짧아 땅딸막했기에 맹수를 공격하는 영리한 사냥꾼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대신 죽은 동물의 고기를 처리하는 ‘청소부’였을 것으로 분석했었다.
이후 축적된 연구 결과들은 네안데르탈인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다재다능한 인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을 다룰 줄 알며 자작나무 껍질을 가열해 접착제를 사용한다든가 동굴벽화(6만8000년 전에 그려진), 장신구 등에 비춰볼 때 네안데르탈인 또한 호미닌에 버금가는 존재임이 드러나고 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04.13 너나없이 모르는 짜장면 출생의 비밀
다시 찾아온 블랙데이
짜장면의 오해와 진실
하루에 600만 그릇이 팔린다는 국민 음식. 짜장면은 외래 음식으로는 유일하게 한국의 100대 문화 상징에 포함되며, 정부가 물가를 관리하는 품목이기도 하다. 짜장면의 기원을 두고 여러 설이 있지만 1880년대 개항기 인천 부두에서 일하던 중국 산둥 출신 노동자들이 끼니를 때우던 값싼 국수 요리에서 비롯됐다는 게 대표적이다.
오는 14일은 짜장면 소비가 많은 날 중 하나인 ‘블랙데이’. 짜장면 출생의 통념을 깨는 ‘한국 중화요리의 탄생’(이데아)이 최근 출간됐다. 화교 3세대로 인천화교협회 부회장과 인천화교학교 부이사장인 저자 주희풍씨는 그동안 기억과 추정에 의존해 온 짜장면 기원설을 과거 기록을 토대로 조목조목 반박한다.
주씨가 오류라고 지적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첫째는 짜장면의 탄생 지역이고, 둘째는 탄생 시기, 셋째는 가격이다. 주씨는 “짜장면은 1912년 즈음 중국 베이징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짜장면의 베이징 탄생설은 중국에서는 기정 사실로, 베이징의 다관(茶館)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다관은 차와 함께 요리를 파는 고급 식당이다.
“중국인민대회당 수석 요리사였던 우정거는 ‘짜장면을 먹고자 하거든 자오원(竈溫)으로 가라’고 요리책에 썼어요. 자오원은 1912년 건국한 민국(中華民國) 초에 개업한 식당이고, 손님들에게 자주 짜장면을 내놨다고 합니다. 중국 근현대 문학 거장 루쉰이 쓴 소설 ‘분월(奔月)’과 저명 소설가·극작가 라오서의 연극 ‘다관’에도 짜장면이 등장하죠. 그 밖에도 여러 문학 작품에 짜장면이 나오는데, 배경은 모두 베이징 다관입니다. 짜장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 ‘톈몐장(甛麵醬)’은 베이징 특산물이죠.” 톈몐장은 베이징을 대표하는 요리 카오야(烤鴨·오리구이)를 찍어 먹는 장이기도 하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짜장면은 지금처럼 흔히 먹을 수 있는 저렴한 대중 음식이 아닌 값비싼 고급 국수 요리였다는 주장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잔치 때나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이것을 한국에 진출한 중국인 부두 노동자가 간편하게 먹었다는 건, 지금 잣대로 과거를 재는 거죠.”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발행한 ‘서울연구포커스’(2004년)에 따르면, 1960년대 시내버스 요금이 8원(1965년)일 때 짜장면 한 그릇은 50원(1968년)이었다.
그렇다면 개항기 중국인 노동자들은 뭘로 끼니를 때웠을까. 저자에 따르면 호떡의 일종인 ‘강터우(槓頭)’였다. “강터우는 베어 물기 힘들 정도로 딱딱하게 구운 데다, 소가 들어 있지 않아 맛이 없었어요. 워낙 딱딱해서 돌머리에 빗대기도 했는데, 화교 학교 선생님들이 꿀밤을 날리며 ‘이 강터우 같은 놈아!’ 하기 일쑤였죠(웃음). 짐꾼 우두머리라는 뜻도 있어요. 우두머리가 짐꾼들에게 나눠준다고 해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나만 맞고 남들은 틀렸다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짐꾼 우두머리는 성격이 딱 강터우 같았다는 거예요.”
짜장면이 한국화된 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6·25전쟁으로 양국 외교가 단절되면서부터다. 톈몐장이 중국 본토에서 들어오기 어려워진 데다, 1948년 화교 왕송산씨가 톈몐장에 캐러멜을 첨가해 개발한 춘장이 한국인 입맛에 더 잘 맞아 아예 톈몐장을 대체한 것이다.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이 질문에 사람들은 종종 고뇌한다. 짜장면의 ‘영원한 라이벌’ 짬뽕은 한중일 3국 합작품이다. 주씨는 이것을 “일본 이름을 가진 한국 입맛의 중국 면 요리”로 정의한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중국 화교들이 처음 만든 ‘나가사키 짬뽕’이 기원이다. 나가사키 짬뽕은 돼지고기와 채소가 주재료이고,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아 국물이 맵지 않고 뽀얗다.
한국에 전해진 짬뽕이 빨갛게 바뀐 것은 1960년대 후반. 주씨는 짬뽕이 얼큰해진 배경으로 육개장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과 손님들이 우동과 짜장면 등에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설, 손님들이 고춧가루를 넣어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는 설을 소개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는 떡볶이도 마찬가지로 빨갛게 됐다”며 “고춧가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린다”고 했다. 여기에 홍합·바지락·갑오징어 등 해산물이 다양하게 더해지면서 한국형 짬뽕이 완성됐다. ‘웃기는 짬뽕’이라는 말도 함께.
조선일보 김성윤 기자
04.18 환자는 병원 말고 집으로 가야 했다, 그가 옳았다

▲일러스트=이철원
죽음이 정해진 사내가 왔다. 전신이 퉁퉁 부은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소생실에 누웠다. 그의 외양은 기록과 일치했다. 1년 전 췌장암 3기 진단을 받았으나 치료를 거부하고 귀가했다고만 되어 있었다. 그다음 기록이 지금 응급실 방문이었다. 40대밖에 되지 않았는데 모든 치료를 거부하는 드문 경우였다. 그는 내 말에 간신히 대답할 정도로 쇠약했다.
“다른 병원에도 안 가본 거지요?” “전혀 안 다녔습니다.” “그때부터 치료를 받았으면 이 정도까지는 안 되었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치료받기 무서웠습니다. 이번에도 병원에 안 오고 싶었지만 숨이 가쁘고 움직일 수가 없어서 왔습니다.”
심전도가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파형을 잃고 뒤흔들렸다. 수치는 참혹했다. 병을 일부러 마지막까지 키운 것처럼 보였다. 신장까지 망가져서 칼륨 수치가 지나치게 높았다. 그야말로 즉사 직전 상태였다. 소생실 의료진은 분주했다. 말기 암이었지만 그동안 치료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처치하면 조금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액 줄이 순식간에 그를 뒤덮었다. 그가 심각하게 모니터를 바라보는 나를 붙들었다.
“집에 가고 싶습니다.” “그동안은 어쩔 수 없지만 마지막이니까 병원 말을 들으세요. 이대로면 당장 돌아가실 겁니다. 중환자실에 입원해도 살아나면 다행입니다. 지금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내가 마지막으로 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적당히 조치만 해주시면 집에 가겠습니다.” “안 됩니다.”
심전도 파형이 약간 형태를 갖추자 소생실을 나왔다. 이미 이 상태라면 환자를 나무라는 일은 무의미했다. 그럼에도 환자가 이른 죽음을 선택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고집스러운 환자와 마주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다른 환자를 진료하러 돌아다녔다. 예감했던 연락이 왔다.
“소생실 환자가 자꾸 퇴원하겠다고 합니다. 선생님께 할 얘기가 있다고 면담을 요청하세요.” 나는 굳게 마음먹고 소생실 문을 열었다. “도대체 왜 말을 안 듣습니까. 정말 죽는 게 환자분 뜻입니까?” 그는 그 사이에 약간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았다.
“선생님, 저는 1년 전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어차피 살 방법이 없다고 깨달았습니다. 치료를 받아봤자 연장에 불과하다고요. 그런데 제겐 여섯 살 된 딸이 있습니다. 저는 조만간 세상을 떠나고 딸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을 것입니다. 징그러운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빠로 기억되기 싫었습니다. 좋은 시간을 함께했던 아빠가 되는 게 남은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치료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일을 그만두고 딸아이와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난 1년은 전혀 후회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일단 너무 숨이 차서 왔습니다. 그런데 아직 마지막 인사를 못 했습니다. 당장 딸과 떨어져 있는 게 더 고통스럽습니다. 어차피 조금 더 사는 게 제 인생에 크게 의미 있지도 않습니다. 살아봤자 병원에서 목숨을 건져 온 나약한 아빠로 집에 누워있을 겁니다. 중환자실에서도 사망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죠. 가족 없는 중환자실에서 혼자 죽으면 저는 실패한 겁니다. 마지막 계획이, 그리고 제 인생이, 모두 실패입니다. 마지막까지 가족과 있고 싶습니다. 선생님. 도와주세요. 집에 가겠습니다. 다시는 안 돌아오겠습니다.”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소생실 문을 열고 자리로 돌아왔다.
“소생실 환자 퇴원시키겠습니다.” “칼륨 수치가 그렇게 높은데 퇴원시키는 게 맞나요?” “암 말기 DNR(심폐 소생술 거부) 환자입니다. 괜찮아요. 퇴원시키겠습니다.”
퇴원 기록을 적어야 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책상에 머리를 묻었다. 눈가의 압력이 높아지고 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집으로 가야만 했다. 내가 그르고 그가 옳았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옳았다. 그는 당장 집에 가야 했다.
조선일보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04.20 사과받기 힘든 세상… 신종 변태가 나타났다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미안합니다” 듣고 싶다면
의도적인 상황을 연출하라
주변에서 뭐라든, 그녀와 저는 천생연분입니다. 다만 어디 가서 자랑스레 떠벌릴 수는 없는 내용인지라, 익명의 힘을 빌려 이렇게 고백하고자 합니다.
저는 아주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예를 들면, 일부러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제가 거기 앉아 있으면, 반드시 한 명은 꼭 나타나서 한소리를 합니다. “노약자석에 왜 젊은 사람이 앉아 있어!”
그럼 저는 어정쩡하게 일어나며 무릎 위에 덮어 두었던 겉옷을 들어 올립니다. 깁스한 다리를 보여주면서 발을 절뚝이는 거죠. 그런 제 모습을 본 상대방은 무척 당황스러워합니다. “아휴, 다리가 불편한 줄은 몰랐네…. 미안해요.”
여기서 저는 희열을 느끼는 겁니다. 변태인가 봅니다. 사람들이 맘대로 오해해 화를 냈다가 곧 민망해하며 사과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짜릿합니다. 사과받기 좀처럼 어려운 세상 아닙니까. 제 성향을 처음 알게 된 건 몇 년 전. 자전거를 타고 근처 만둣집에서 만두를 사온 저는 집 엘리베이터에서 별 생각 없이 봉지 속 만두 하나를 집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타고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호통을 치는 겁니다. “이 양반아, 배달 음식을 빼먹으면 안 되지!”
저는 정말 깜짝 놀랐지만, 자전거 모자와 장갑까지 낀 제 복장이 배달원처럼 보일 수 있겠다 싶어 모자를 벗었습니다. “저 여기 304호 주민인데요?” 그 순간 아저씨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군요. “얼마 전에 배달원들이 음식 빼먹는다는 뉴스를 봐서…. 미안하게 됐수다.” 붉어지는 그 아저씨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저는 느낀 겁니다. 쾌감을 말입니다.

▲일러스트=한상엽
며칠 뒤 저는 형 집에서 오토바이 헬멧을 하나 얻어왔고, 배달원이 입을 법한 조끼까지 사 입었습니다. 그러고는 포장해온 음식을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빼먹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 정도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한 사람이 또 그러더군요. “아저씨, 그거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저는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면서 좀 더 격한 분노를 유도했습니다. 상대의 막말이 격해지자, 저는 헬멧을 벗고 이어폰을 뺐습니다. “저 배달 온 게 아니라, 여기 사는 사람인데요?” 또 한번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혹시 몰라 제가 현관문을 여는 것까지 지켜보던 상대의 난감한 표정이란. 어찌나 좋던지요! 그날부터 저는 이 행위에 중독됐습니다. 점점 다양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여자 가방을 하나 샀습니다. 이 가방의 용도는, 카페에서 다른 테이블 빈 의자에 놓아뒀다가 타이밍을 봐서 조용히 들고 나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가끔 누가 쫓아와 저를 도둑으로 몰 때가 있는데, 그때 아니란 걸 증명하면 무척 짜릿합니다. 덕분에 제 삶의 질은 크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국민성이 말입니다, 오해였단 걸 알게 됐을 때 사과하는 대신 오히려 역정을 내는 인간들이 문제란 말입니다.
“다리 깁스했는데 뭐, 어쩌라고!” 심한 경우 설교까지 늘어놓기도 하죠. 제가 카페에서 들고 나온 가방이 제 것이라는 걸 증명했을 때 들었던 말처럼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잖아요? 진짜였어 봐, 오히려 나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인 거지. 그리고 그쪽도 참, 돈이 없는 건지 취향이 이상한 건지 몰라도 그런 가방은 좀 주의하세요. 남자가 왜 여자 가방을 들고 다니고 난리야?”
이날은 저도 욱해서 언성을 높였는데, 그녀는 제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화를 잘 내는 인간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말도 못 하게 우다다다 쏟아내는데, 이길 도리가 없더군요. 질려서 먼저 피해 버렸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며칠 뒤 제 은밀한 취미의 정체를 그녀에게 들켜 버린 겁니다. “그때 그 아저씨네? 이상한 짓거리를 하네? 발도 멀쩡하면서?”
그녀는 제 행위의 본질을 꿰뚫었습니다. 온몸에 식은땀이 났죠. 동네방네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도망쳤지만, 그녀는 쫓아왔고, 저는 저자세로 빌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 강하게 저를 몰아붙였습니다. “당신 같은 작자들 때문에 MZ 세대가 싸잡아 욕 먹는 거라고! 사회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인간 말종 같은 짓이나 하고 말이야!” 잠시 후 저는 더 놀라 버렸습니다. 폭풍처럼 욕을 쏟아내더니만, 곧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 사과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죄송해요…. 아까는 제가 말이 심했죠?”
어쩌다 보니 그녀와 카페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됐고, 그녀도 저와 비슷한 부류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예전에, 극도의 스트레스로 고통받던 어느 시기에, 백화점을 찾아가 일부러 하자 있는 물건을 골라 구매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며칠 뒤 “그 물건을 선물했다가 내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아느냐”며 화를 쏟아냈는데 그게 그렇게 후련하더랍니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에서 크나큰 희열을 느꼈던 겁니다. 저처럼 말이죠.
이것이 저희가 천생연분인 이유입니다. 제 은밀한 작전이 실패했을 때, 그러니까 곤란한 상황에서 사과는커녕 역으로 ‘버럭’ 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 그때가 그녀에게는 완벽한 찬스인 겁니다. 따로 데이트 코스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조선일보 김동식 소설가
05.02 한독목장서 야쿠르트 아줌마로… 꿈의 릴레이는 계속된다
한독목장의 꿈은 야쿠르트로… 다시 ‘야쿠르트 아줌마’로
그렇게 이어져 온 꿈의 릴레이는 ‘나’ 아닌 後代를 정조준했다

▲한국 야쿠르트 매니저가 냉장 카트 ‘코코’를 몰고 서울 봉천동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고 있다./조선일보 DB
박정희 대통령과 독일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광부와 간호사’다. 하지만 우리 산업사에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게 있다. 낙농업. 1인당 국민소득 107달러이던 1964년, 박 대통령은 미래를 열어갈 아이들에게 우유를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꿈을 서독 뤼브케 대통령에게 말했고, 그렇게 독일에서 젖소 200마리를 데려왔다. 낙농이란 말조차 생소해 낙농 기술자까지 함께 들여왔다. 자동차를 수입하며 운전사까지 수입한 격이었다. 한독낙농목장. 이렇게 1969년 경기 안성에 문을 연 이곳은 지금은 농협이 맡아서 안성팜랜드란 테마파크로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야쿠르트의 전설’도 시작된다. 독일 덕분에 우유 생산은 늘었지만 처리 능력이 없으니 버리는 게 너무 많았다. 당시 건국대 축산연구소장이던 윤쾌병씨는 이를 고민했고, 친척이던 윤덕병 한국야쿠르트(현 hy) 창업자가 우유에서 유산균을 활용하는 일본 기술을 사 와서 만든 게 우리 야쿠르트의 효시다. 그 야쿠르트를 팔기 위해 도입한 게 야쿠르트 아줌마로 더 익숙한 ‘야쿠르트 플래시 매니저’. 1971년 8월 서울 종로에서 47명으로 시작해 지금도 전국에 1만1000여 명이 일하고 있다. 평균 연령 50.4세, 최연소 20세, 최연장자 81세. SKY 대학 출신도 있다. 평균 연봉은 약 2650만원. 매출의 25% 안팎이 그들의 몫이다. 플래시 매니저라는 근사한 이름까지 만들어놨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아줌마’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클릭 한번이면 문 앞에 주문 물품이 놓이고, 골목마다 편의점 등이 즐비한 시대에 이들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생활비는 물론 누군가의 학원비나 병원비를 벌겠다는 이들의 소박한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코로나에도 매출을 늘렸고, 함바집도 뚫었고, 전자상거래도 이겨내고 있다. 이들의 땀과 눈물이 자녀들에게 이어져 건강한 사회의 초석이 됐다고 믿는다. 이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도 있다. 회사도 혁신에 매진했다. 최초의 냉장고가 달린 탑승형 전동카트인 ‘코코(coco, cold&cool)’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놀랐다. 한 번 충전에 주행거리 40㎞, 최고 시속 8㎞/h, 한 번에 야쿠르트 2200개가 들어갈 수 있는 창조적인 공간 배치 등이다. 내년이면 코코2가 등장한다. 이런 게 세상을 바꾸는 또 다른 혁신일 것이다. 한국 산업사에는 이런 꿈의 릴레이가 곳곳에 숨어 있다. 관(官)에서 한독낙농목장을 만든 희망의 바이러스가 야쿠르트란 회사와 기업인을 거쳐 소시민들인 ‘야쿠르트 아줌마’들에게 확산됐다. 그 꿈과 희망은 ‘나’가 아닌 ‘다음 세대’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치러진 총선의 ‘포퓰리즘 공약 잔치’나 연금공론화위가 내놓은 ‘미래 세대에게 폭탄을 던지는 개혁안’ 등을 보면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꿈의 릴레이가 이렇게 끊어질 나라는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그게 끊어지면 긴 낭떠리지가 기다릴 것이고, 그 추락은 우리가 아니라 자녀 세대의 몫이 된다. 포퓰리즘을 결코 용인해선 안 되는 이유다.
“한국은 아직 투자하기 매력적이다. 소득 2만달러가 넘는데도 공짜 대신 ‘더 일하고 싶다’는 국민은 정말 드물다”
10여 년 전 만난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 관계자가 해준 말이다.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이 우리 사회가 살 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런 꿈의 릴레이가 곳곳에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일보 이인열 기자
05.22 키오스크 앞에서 늙다
기관지 협착증 진단을 받았다. 가슴에서 쌕쌕 소리가 새 나왔다. 어린 시절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마다 천식 환자가 부러웠다. 주인공 중 꼭 한 명은 천식용 흡입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철이 없었다. 철이 없으니 어린아이다.
문제가 있었다. 다음 날 강연이 잡혀 있었다. 오랜 시간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한지 확인해야 했다. 프리랜서로 혼자 살다 보니 말할 기회가 거의 없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을 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해봐야겠어.” 공통으로 싫어하는 사람 험담을 시작했다. 말이 나왔다. 술술 나왔다. 기관지가 괜찮아서 그랬는지 험담이 즐거워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말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짜장면 시킬 때도 “양파 좀 넉넉히 주시고요”라는 말을 전화로 해야 했다. 배달의민족 시대에는 그럴 이유가 없다. 커피숍 가서는 그나마 말이라는 걸 했다. “우유는 두유로 해주시고 크림 대신 시나몬 한 꼬집 뿌려주세요.” 요즘은 그럴 일도 없다. 커피숍이나 식당 대부분이 키오스크(주문 기계)를 쓰기 시작한 탓이다.
노인들이 키오스크 이용을 어려워한다는 기사는 매달 쏟아진다. 나는 아직 사십 대다. 키오스크 정도야 근심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자부해 왔다. 햄버거 가게에서 나는 무너졌다. 괜히 애플페이로 계산하겠다 만용을 부렸다. 스마트폰을 대라는 문구가 나왔다. 화면에 들이댔다. 계산이 되질 않았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스마트폰을 화면과 충돌시켰다. 뒤에 있던 젊은 커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화면이 아니라 옆에 있는 리더기에 대라는 소리였다.
나는 순식간에 늙었다. 초상화를 칼로 찢은 도리안 그레이처럼 홀연히 늙었다. 나는 반성했다. 키오스크 앞에서 시간 잡아먹는 늙은이들을 마음속으로 괄시한 과거를 참회했다.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은 아니다’던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의 절규를 마침내 몸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05.29 병상의 성철 스님은 왜 "똑같다" 했을까

▲일러스트=이철원
옛 성인들께서는 병을 만났을 때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으로 삼아라” 하십니다. 그런데 막상 병이 왔을 때 우리는 괴롭고 힘들지요.
몸에 병이 났을 때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병은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괴로움 중 하나입니다. 병에 걸리면 의학 전문가를 찾아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병을 대하는 우리 마음입니다. 내가 왜 이 병에 걸렸을까? 왜 내게 이런 병이 생겼지? 과연 나을 수 있을까? 많이 아프면 어쩌지? 등등 온갖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병이 났는데 이런 근심 걱정이 병을 더 키우게 됩니다.
그러니 병에 걸렸을 때,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아픔은 또 지나가리라는 긍정적 마음이 필요합니다. 평상심으로요. 평상심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호흡명상을 권합니다. 근심 걱정이 떠오르면 그 걱정을 알아차리고 호흡에 마음을 집중해 보세요. 병으로 걱정이 떠오르거나 불안을 느낄 때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불안은 지나갈 것입니다. 고통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마음의 불안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철 스님은 팔십이 넘어 병이 났을 때 병실로 문병 온 제자에게 “똑같다. 똑같다”라고 하셨답니다. 평상시나 병중일 때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죠. 이를 ‘병중일여(病中一如)’라 합니다. 여러분도 호흡에 집중하면서 아픔과 불안을 잠재워 보세요. 그렇게 다 지나갈 것입니다.
조선일보 박희승·한국명상지도자협회 사무총장
05.30 군주의 아홉 가지 유형(九主)
은나라를 세운 탕왕이 이윤을 찾아가 함께 재상으로 모시려 하니 이윤은 아홉 가지 유형의 임금 이야기를 한 다음에 탕왕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는 훗날 군주 유형론으로 자리 잡았다.
첫째가 법군(法君)이다. 법을 매우 엄격하게 쓰는 임금을 가리키니 진시황이 여기에 속한다 하겠다. 둘째가 노군(勞君)이니 천하를 위해 부지런히 노고를 다했던 임금이다. 우리 역사 속 세종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등군(等君)이다. 등(等)이란 ‘공평하다[平]’는 뜻이니 등급과 위엄을 정하면서 녹상(祿賞)을 고르게 하는 임금을 가리킨다. 넷째 수군(授君)이란 임금이 스스로 다스릴 능력이 없어 정사를 신하에게 맡긴 경우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단종이 김종서에게 정사를 맡긴 것이 이에 해당한다. 대체로 이런 경우 임금의 말로는 불행하다.
다섯째 전군(專君)이란 자기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해 뛰어난 신하들에게 아무것도 맡기지 않는 임금이다. 예를 들면 한나라 선제(宣帝)가 이에 해당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숙종이 이에 가까운 임금이었다. 여섯째 파군(破君)은 상대를 가벼이 여기다가 외적을 불러들이는 임금으로 나라는 멸망하고 임금은 죽게 되는 유형이다.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킨 오나라 유비(劉濞)와 초나라 유무(劉茂)가 이에 해당하고 우리 역사에서는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인조가 이에 가까웠다 할 것이다.
일곱째 기군(寄君)이란 아래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면서 위로 자기는 교만을 부리는 임금이다. 역사 속 대부분 임금은 이에 해당한다. 여덟째는 국군(國君)이라 하는데 고군(固君)의 잘못으로 본다. 성곽을 완비하고 군대를 튼튼히 했으나 임금다움은 닦지 않는 유형이다. 끝으로 삼세사군(三歲社君)이란 포대기에 싸인 채 사직을 주관하는 것으로 적어도 우리 역사에는 없다.
지극히 현실적인 제왕 유형학이라 하겠다.
조선일보 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
06.01 인생의 효자손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김영재
마음이 힘들어 명상 수업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수업에는 집에 돌아가 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는데 인상적인 건 이 닦기 명상이었다. 이를 15분간 닦으며 이빨에 칫솔이 닿고 거품이 일어나고 세척되는 전 과정과 행위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칫솔질이 뭐 그리 어렵겠냐고 생각했지만 평소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쓰기 위해선 속도를 늦춰야 했다. 결국 나는 평소 내가 분풀이하듯 이를 얼마나 세게, 빠르게 닦았는지 깨달았다. 그제야 치아에 파인 상처가 나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낸 것일 수 있겠다 싶었다.
오십견이 온 친구가 길을 걷다가 가려운 곳을 긁어 달라고 말하며 휴대용 효자손이 있는지 검색해봐야겠다고 말했을 때, 공감의 웃음이 터졌다. 오십에 이르자 갱년기를 겪는 지인들 사이에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고충이 늘어난다. 문득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팔의 가동 범위가 줄고, 눈에 초점이 맞지 않고, 점점 귀가 어두워지는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노안이 오는 이유는 눈앞의 작은 것만 보지 말고 크게 보라는 뜻이며, 귀가 어두워지는 건 사소한 상처의 말은 맘에 담지 말고 흘려듣고, 오십견이 온 이유는 필요할 땐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뜻”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평생을 자기 분야에서 치열하게 산 친구에게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흘려 보고 들으라는 말은 대충 살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날카롭지 않게 둥글게 살라는 뜻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나이가 들수록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이를 본다. 하지만 이런 이들과 대화하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 적절히 힘 빼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흘려보내야 한다. 그래야 행복을 만날 수 있다. 제 아무리 독립적으로 살던 사람이라도 지팡이를 짚듯 타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때가 온다. 남에게 도움을 잘 청하고 받는 것도 일종의 능력인 셈이다. 그렇게 인생을 잘 살아낸 사람들은 말년에 도처에 효자손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06.03 타자의 자기화
21세기 글로벌 사회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점점 단일 민족 국가로서의 사고방식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부 코스엔 동아시아 계열 학생들이 20∼30%, 남아시아와 중동 계열 학생들이 10∼20%를 차지한다. 남미·유럽 등 다른 곳에서 온 외국인 학생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 배경과 민족성을 지닌 학생들을 상대로 고대 그리스·로마 예술에 내재하는 ‘타자(Other)’라는 배타적 철학 개념을 가르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개념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아메리카 편지
고대 그리스인들의 민족적인 자부심과 외국인에 대한 국수적인 태도는 악명 높다. ‘야만적’이라는 뜻을 지난 영어 단어(barbaric)가 ‘외국인’을 지칭하는 그리스어(barbaros)에서 유래했을 정도다. 그런데 BC 4세기 말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후 다양한 문화의 융화가 이루어진 헬레니즘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타자’라는 개념이 이방인이라는 좁은 의미를 떠나 ‘다른 사람’이라는 보편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 예술의 특성도 독특하게 변했다. 젊고 아름다운 남성·여성상 이외에도 쭈글쭈글한 늙은이의 모습을 한 낚시꾼, 탱탱한 아기의 모습을 한 에로스상, 꼬부랑 기생 할머니, 그리고 얻어터져 피범벅이 된 한물간 권투 선수 등 유명하고 독특한 동상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타자’라는 개념이 이방인에게 적용된 사례 중 하나로 아탈로스 1세가 페르가몬에 세운 전승 기념물을 꼽을 수 있다.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의 개념이 여기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들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아름답고 드라마가 넘치게 표현한 이 조각품들은 승자를 일부러 생략함으로써 보는 사람에게 승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그중 아내를 죽이고 자살을 하는 갈리아 전사(사진)는 노예가 되기보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극단적인 용맹함을 표현했다. 다양한 타자개념이 자기화한 것이다.
중앙일보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06.10 우리 몸 안에 있는 신비한 시계
불면증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충을 잘 모를 것이다. 밤늦게 어두운 방에서 조용히 누워서 눈을 감고 있어도 왜 잠이 오지 않을까. 며칠간 그렇게 잠을 설쳐서 피곤하기는 말할 수 없는데도 왜 눈이 떠지는 것일까. 잠 잘 자지 않는 어린아이를 기르는 부모들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던질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불면증이 이상한 게 아니라 밤이 되면 다들 저절로 잠이 온다는 게 더 신기한 것이다. 특별히 고단하지 않아도 전깃불을 환히 켜놓더라도, 잘 시간이 되면 잠이 드는 리듬이 인체에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과 뇌는 잠 잘 시간이라고 저절로 알아차린다. 해외여행으로 시차 적응에 고생해 본 사람은 다 잘 알 것이다. 우리 몸은 출발지의 시간을 따르고 있고, 도착지의 시간이 그와 다르면 거기에 즉시 적응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몸은 어떻게 해서 출발지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을까?
잠 잘 시간 알려주는 생체시계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도 있어
지구 자전 주기에 적응해 진화
작동원리 아직 모르는 것 많아

▲과학하는 마음
인체의 신비로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오묘한 것으로 꼽히는 점은 시간을 알아차리는 생체시계이다. 24시간을 주기로 신체의 여러 가지 기능과 상태가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을 과학자들은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이라 명명하였다. 잠이 들고 깨는 것이 가장 명백한 내용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활동이 그렇게 주기적으로 이루어진다. 체온도 24시간을 주기로 소폭 진동하며, 각종 호르몬의 분배나 신진대사의 속도도 일주기 리듬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한다.
세균도 가지고 있는 생체 주기
더 놀라운 것은, 인간이나 다른 고등동물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이 그런 리듬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각종 꽃송이가 아침에 열리고 저녁에 오므라드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후계자였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식물학자 테오프라스토스가 기원전 4세기에 이미 보고하였다. 그런데 나팔꽃이 아침에 개화하는 것을 보고 해가 떠오르는 데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일주기 리듬은 그렇게 단순히 외부 환경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1729년 프랑스의 과학자 드메랑은 움직이는 식물 미모사의 활동 상황이 24시간을 주기로 변한다는 것을 관찰하였고, 이 리듬이 온종일 깜깜한 곳에 두어도 계속 표출된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주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일주기 리듬이 벌이나 초파리 등 곤충에서도 발견되었다. 그 후로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어, 심지어 세균이나 이스트조차 신진대사의 주기적 리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주기 리듬이란 용어는 1959년에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 생물학자 할버그가 창안해 냈다.
왜 이렇게 각종 생물의 생리가 주기성을 지니게 되었을까? 좀 막연하지만, 지구가 24시간에 한 번씩 자전하면서 해가 뜨고 지는 주기성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에 순조롭게 적응해서 살도록 생물들이 진화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몸에 내재한 생물학적 시계는 자체적으로 작동하지만 지구 위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하면 외부적 신호를 며칠간 받으면서 시각을 다시 맞추는 시차 적응이 된다.
그러나 얘기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가장 신기한 것은, 외부에서 오는 신호를 차단한 상태에서 표출되는 인간의 일주기 리듬의 주기는 24시간이 아니라 25시간 정도라고 한다. 창문 없는 방에 사람을 넣은 후 온종일 모든 환경을 변화 없이 유지해 주었을 때 24시간마다가 아니라 약 25시간마다 잠이 들고, 다른 신체 기능도 더 길어진 그 리듬을 따른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렇게 진화가 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쥐와 같은 야행성 동물의 자체적 리듬은 24시간보다 더 짧다고 한다. 또 우리 몸이 가진 정규적 리듬은 24시간의 일주기성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 1초 정도의 주기로 박동하는 심장부터 음력으로 한 달 주기로 돌아오는 여성들의 월경까지 온갖 작용이 주기적으로 일어난다.
세포 내 생화학적 작용
그러한 리듬들이 어떻게 해서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연구도 많이 진전되었지만, 아직도 확실하지는 않다. 일주기 리듬에 관하여 현재 가장 정설로 간주하는 것은 세포 내에서 이루어지는 생화학적 작용에 관한 이론이다. DNA 내에 그런 주기성을 주관하는 유전자가 있다. 그 유전자가 생산하는 특정 단백질이 있고, 세포 내에 그 단백질의 함량이 높아지면 그것의 생산을 억제하는 장치가 있다. 그런 상호작용의 피드백을 통해 주기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꼭 DNA와 관련된 것만도 아니고, DNA도 없는 적혈구 세포의 기능도 일주기 리듬을 따른다고 한다. 유전자의 발현보다 더 단순한 생화학적 리듬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단세포 차원에서 생물의 리듬이 생긴다는 것을 놀라운 일이고, 화학 반응이 주기적일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신기하다. 그렇다면 생물의 삶이 따지고 보면 결국 화학적이라는 환원론적 함의를 도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분자들도 시간을 잴 수 있는 감성이 있다고 생각해 보면 무리일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각종 시계의 작동원리는 추의 진동 등 물리적인 것이지 생물학적 원리는 아니다. 그런데 시간을 안다는 것은 인간과 같은 지성과 감성을 가진 동물의 근본적 본성이기도 하다. 우주는 그렇게 여러 차원이 미묘하게 엮여있는 것인가. 과학이 밝혀내야 할 과제는 아직도 산적해 있으며, 우리 몸 자체부터 그렇게 신비롭다.
중앙일보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
06.15 '금일'을 '금요일'로 착각한 서울대생
今日이 금요일? 온라인서 시끌
'김을파손' '수박겁탈기' 사연도 넘쳐
AI 시대에 터진 문해력 논쟁
매일 신문만 읽어도 나아질 텐데

▲/일러스트=김성규
지난 며칠 온라인 세상을 흔들었던 두 글자를 혹시 아시는지? 답은 금일(今日). ‘지금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이란 뜻을 품은 이 예쁜 한자어가 최근 엑스(옛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비롯한 각종 소셜미디어를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만든 주범이 됐다.
사연은 이렇다. 서울대의 한 조교가 학생들에게 이런 공지를 남겼다. “금일 자정 이후로 과제물을 제출하면 매일 점수가 20점씩 감점되니 서둘러 제출하기 바랍니다.” 다음 날 한 학생이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물었단다. “과제 제출 금요일 아녜요? 금일 자정까지라고 하셨잖아요.” 조교는 답했다. “금일은 금요일의 줄인 말인 ‘금일’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뜻입니다.” 학생은 반박했다. “평가자라면 오해 소지가 있는 단어를 쓰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
에피소드가 공개되자 온라인 반응도 달아올랐다. 한쪽에선 “아니 ‘금일’ ‘명일’ ‘익일’ 같은 말도 모르는 대학생이 정말 있냐” “중·고등학교에선 뭘 가르치는 거냐” “이게 대체 웬 하향 평준화냐”고 했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조교의 배려가 부족했다.” “AI가 대세이고 법원 판결문도 쉽게 바뀌는 세상에 저런 한자어를 계속 고집하는 것도 문제다.”
돌아보니 이런 사연이 한둘은 아니다. 최근 소셜미디어 스레드에선 ‘내가 겪은 황당한 어휘력 사건’을 게임처럼 주고받는 게 유행이다. ‘심심한 위로’를 ‘지루한 위로’로 이해했다거나, ‘사흘’을 ‘4일’로 알아들었다는 유명한 사례로도 요즘 이 온라인 배틀(battle)을 이기긴 쉽지 않다. ‘김을 파손(기물 파손을 오해함)’ ‘장례 희망(장래희망을 잘못 씀)’ ‘수박겁탈기(’수박 겉핥기’를 잘못 씀)’ ‘눈을 부랄이다(’눈을 부라리다’의 실수)’까지 나오는 판이다.
물론 요즘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서도 ‘어휘력이나 맞춤법을 지적하면 아마도 얼간이일 것(People who point out typos or voca may be jerks)’이란 주제로 글이 올라와 논쟁이 뜨거웠다. 외국 유명 유튜버들의 영상에 붙는 자막 철자가 틀리거나 단어가 잘못돼 댓글 창이 시끄러워지는 경우도 많이 봤다. 조만간 치를 미(美)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도 한때 엑스에 ‘counsel(변호인단)’을 ‘council(위원회)’로 잘못 써서 놀림받지 않았나. 조지 부시의 러닝메이트였던 댄 퀘일 부통령이 열두 살 초등학생이 쓴 ‘potato(감자)’ 철자를 ‘potatoe’로 고쳐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다.
텍스트보다는 영상, 긴 글보다는 쇼츠가 대세인 세상, 어쩌면 이런 해프닝은 전 세계적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AI가 웬만한 철자 오류는 잡아주고 필요한 글도 이젠 대신 써주는 요즘, 문해력(文解力)과 어휘력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럴 땐 챗 GPT와 조금만 대화해 보라고 하고 싶다. 의외로 AI는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AI에 명석한 답을 얻길 원한다면, 그만큼 질문하는 사람 역시 그 사안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로 물어야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AI 시대에도 문해력을 키우고 싶다면 최소 하루 20분 정도는 글을 꾸준히 읽으라고 권한다. 신문을 펼치면 보이는 손바닥만 한 박스 기사 서너 건 정도는 충분히 읽을 시간이다. 디지털 시대에 웬 ‘일해라 절해라(이래라저래라)’ 소리 아니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만 해줘도 ‘금일 논쟁’은 사라지지 않을까.
조선일보 송혜진 기자
06.19 면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면을 좋아한다. 그래서 매일 당뇨약을 삼킨다. 탄수화물을 줄여야 한다. 탄수화물은 3대 영양소 중 가장 중독적이다. 가장 중독적인 것이 가장 위험하다. 쌀은 끊었다. 빨간 김치찌개 국물이 갓 지은 하얀 쌀밥에 배는 아름다움도 잊기로 했다. 두 색이 주는 대비 효과는 극적이다. 한국의 모든 좋은 것은 다소 극적이다.
혈당 검사를 했다. 큰 효과는 없었다. 쌀만 끊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면을 끊지 못했다. 기후변화 탓이다. 올해는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가 될 거라고 한다. 여름이 빨리 왔다. 뜨겁게 왔다. 나는 여름에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다. 차가운 콩국수다.
서울 최고 콩국수는 진주회관이라고 생각한다. 전통 맛집답게 배달을 하지 않는다. 나는 연남동과 이태원을 아우르는 배민 리스트를 갖고 있다. 빠진 것이 콩국수 맛집이었다. 별점 좋은 곳도 묽었다. 콩국수는 목으로 넘길 때 점액질이 느껴지게 진해야 마땅하다. 시행착오를 거쳐 콩국수 맛있는 배달 집을 찾았다. 청년이 한다는 집이다. 요즘은 청년이 뭐든 잘한다.
감탄의 ‘면 치기’를 했다. 콩국이 엉망으로 튀었다. 얼마 전 소셜미디어 대화가 기억났다. 요즘 젊은이들은 면 치기를 하지 않는단다. 후루룩 소리가 불쾌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둘리 친구 마이콜도 “후루룩 짭짭 맛 좋은 라면”이라 노래하던 시절의 산물이다. 면은 입술로 매우 쳐야 맛있다. 배운 세대다.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콩국이 마구 튄 식탁을 보며 깨달았다. 새 공공 예절 앞에서 부아가 치미는 것은 진정한 아재가 됐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곧 면 치기는 거리에서 한쪽 코를 막고 허공에 콧물을 분사하는 궁극의 아재 행위와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나는 콩국수를 카르보나라처럼 오물오물 입에 넣기 시작했다. 면 치기가 사회적 예절이 아닌 미래에 부끄럽지 않은 늙은이가 되는 방법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한 아재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후루룩 도약이 되리라.
조선일보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06.20 여름날, 바람을 전하는 부채

▲전통부채 합죽선./국가유산진흥원 제공
‘여름 생색에는 부채’라는 속담이 있다. 여름을 맞으며 부채를 주고받는 풍습에 따라 생긴 말이다. 부채를 선물하며 마음에 바람을 전하는 데에는, 무더위를 잘 견디고 나쁜 기운도 날려 버리라는 기원도 담겨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귀한 풍습도 변하여, 부채를 부치는 사람보다 손 선풍기를 쥔 사람이 더 흔하게 보인다.
부채는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부채의 한자어 ‘선(扇)’은 새의 깃털인 ‘우(羽)’와 드나드는 문인 ‘호(戶)’가 합하여 새의 날개처럼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을 품고 있다. 부채는 오랜 세월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모양과 재료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특별하게는 부채를 ‘팔덕선(八德扇)’이라 칭했다.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고, 햇빛을 가리고, 비를 막으며, 파리나 모기를 쫓고, 방석으로 쓰며, 밥상으로도 쓰고, 머리에 이고 물건도 나르며, 얼굴을 가리는 쓰임으로 여덟 가지 덕을 지녔다 한 것이다. 손 선풍기로는 대신할 수 없는 부채의 쓰임과 멋은 여전히 전해진다.
마음에 드는 부채를 벗 삼아 바람 한 가닥 마음에 긷고 유유자적하는 서화 속 선비의 모습은 멋스럽다. 선비들은 올곧음의 상징인 대나무와 기품 있는 한지로 조화롭게 만든 합죽선(合竹扇)을 선호했다. 전통 부채를 찾는 이도 만드는 이도 줄었지만, 대나무와 한지가 만나 일으키는 맑은 바람은 지금도 올곧게 국가무형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그 전통 부채를 만드는 기술과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선자장(扇子匠)이라 한다. 대나무 부챗살을 합죽하여 만든 합죽선은, 만드는 사람에 따라 그 태와 바람결의 차이가 크다. 대나무를 쪼개고 깎고 수백 번 다듬는 과정을 반복해야 합죽선 한 자루가 완성된다. 부챗살 깎는 기술이 뛰어난 선자장의 손길을 보면 바람결을 다듬는 것 같다.
더위를 물리치는 선풍기나 에어컨 바람은 한여름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바람을 전해주고 햇빛과 낯빛도 가려주는 부채의 멋과 쓰임에는 비할 수 없다.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은 무더위도 다가올 장마철 눅눅함도 잊게 해줄 듯싶다. 하지를 앞두고 만듦새 좋은 부채를 마련하며, 마음에 청아한 바람을 들인다.
조선일보 윤주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자연유산위원
06.28 젊은 노인(YOLD)
시대는 세대를 만든다
세대는 시대를 만든다
100세 시대에는 현재 나이에 0.7을 곱해야 실질적인 나이가 된다는 평가가 있다. 요즘 실제로 70~80세임에도 노인이라 부르기 미안한 분이 많다.
최근 부쩍 주목받고 있는 ‘욜드(YOLD·Young Old)’는 한마디로 젊은 노인이다. 이들은 돈도 많고 건강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노인층과는 판이하다. 주로 60세 이상이지만 은퇴를 거부하는 불퇴족(不退族)이다. 이들은 꼰대, 나일리지(나이+마일리지) 등 비아냥에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세계적으로는 일하는 80대, ‘옥토제너리언(Octo-genarian)’이 부활하고 있다.
올해 미국 대선 양대 후보의 나이를 보라. 정년과 은퇴에 대한 과감한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조선일보 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07-02 인류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 발견한 플레밍

얼마 전 먹다 놓아둔 식빵에 곰팡이가 핀 걸 발견했습니다. 버리게 된 식빵이 아까워 잠시 장마철 습한 날씨와 제 부주의를 탓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인류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은 이런 곰팡이와 ‘부주의’에서 발견됐습니다.
영국의 미생물학자이자 세균학자인 알렉산더 플레밍(1881∼1955·사진)은 런던대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면역체계를 연구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처참한 전쟁터에서 그는 전투에서보다 패혈증 등 감염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병원으로 복귀한 플레밍은 감염병 치료에 필요한 세균학 및 면역학 연구에 이전보다 더 매달렸습니다.
1928년 여름 플레밍은 세인트메리 병원 예방접종과 세균학 교수로 일하며 포도상구균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실수로 배양 접시 뚜껑을 닫는 걸 깜빡한 채 휴가를 갔습니다. 돌아온 플레밍은 배양 접시에 있던 포도상구균을 푸른곰팡이가 몽땅 먹어 치운 걸 발견합니다. 곰팡이가 세균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플레밍은 그때부터 푸른곰팡이를 연구한 끝에 800배로 희석해도 세균 증식을 억제하는 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물질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페니실린입니다.
이후 플레밍은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1939년 정제된 페니실린으로 시작한 쥐 실험에서 성과를 내면서 1940년 저명한 의학저널에 페니실린이 강력한 감염병 치료제로 효과가 있음을 입증합니다. 플레밍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페니실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상용화돼 수많은 생명을 살렸고, 플레밍은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항생제는 우리 몸의 감염 관련 질병에 대부분 쓰일 정도로 중요한 치료제입니다.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개발되기 전까지 인류는 사소한 감염으로도 많이 죽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항생제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왕조차 종기 때문에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페니실린의 발견은 ‘우연’에서 비롯됐습니다. 하지만 플레밍은 “내가 남보다 단 하나 나았던 건 우연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세균학자로서 대상을 추적한 것”이란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류가 미생물과의 전쟁에서 지금까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동아일보 이의진 도선고 교사 roserain9999@hanmail.net
07.06 반복되는 모든 것
주말에는 남편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며 데이트한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서로 궁금한 게 있냐며 지겹지도 않냐는 말을 하며 다른 친구가 웃었다. 빨래를 개다가, 이를 닦다가, 원고를 쓰다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삶인가 싶어 허무할 때가 있는데 그 기저의 감정은 지겨움이다. 하지만 반대로 반복되는 걸 잘 다루는 것만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반복이 모든 친밀한 관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유독 관계가 좋은 부부나 친구들을 관찰하면 공통점이 있는데, 같은 얘길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잘 듣는다는 것이다.
‘일상다반사’라는 말을 좋아한다. 소박하게 밥 먹고 차 마시는 보통 날의 반복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 생활의 핵심이 반복된 ‘지겨움’일지 모른단 생각을 종종 한다. 사실 매일 보는 사람을 새롭게 느끼는 능력은 결국 서로에 대한 깊은 책임감이다. 영어 단어 Responsibility(책임)는 response(응답)와 ability(능력)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보고 싶지 않아도 보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듣고, 응답하기 싫어도 끝내 응답하는 것이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임감을 사랑이 아니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평범한 남편과 아내가 비범해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사랑받는 순간뿐이다.
반복된 일상에서 시간의 희미한 발자국을 찾는 건 사랑 없이 불가능하다. 매일 보던 남편과 아내의 얼굴에서 흰머리와 주름살을 찾아내며 측은지심을 느끼고, 정신없이 반복되는 출근길에서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꽃과 붉게 물든 단풍잎 하나를 발견하며 계절의 매듭을 느끼는 일. 사랑이 특정한 존재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자 응답인 이유다.
지겨움은 어떻게 친밀함으로 변화하는가. 비밀은 평범한 일상의 반복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때로 ‘발굴’하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다. 우리가 지겹게 하는 매일의 일, 매일 만나는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또한 나를 매 순간 사랑하는 방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07.11 매실이 익을 무렵 콩국수를 먹지
후드득 소리에
귀도 새콤해지네
매실 비
ふるおと みみ なるうめ あめ
降音や耳もすふ成梅の雨
푹푹 찌는가 싶더니 요즘은 날마다 비 소식이다. 장마에 들었다. 장마는 비를 뜻하는 옛 우리말 ‘맣’이 길 장(長)을 만나 생긴 말이다. 과연 비가 길게도 내린다. 습한 공기가 대기에 꽉 차 수영장 물속을 걷듯이 축축하고 묵직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숲길을 걷다 보니 발밑 여기저기 초록색 열매가 떨어져 있다. 매실이다. 그렇구나. 장마철은 매화나무에서 매실이 익어서 떨어지는 계절이구나.
일본에서는 장마를 매실 매(梅)에 비 우(雨)를 붙여 ‘梅雨(쓰유)’라고 한다. 매실이 익어가는 시기에 내리는 비라서다. 오래전 중국에서 건너간 말이다. 이십 대의 바쇼(芭蕉·1644~1694)도 장맛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런 시를 남겼다. 새콤한 매실이 익어 사방에 떨어지니 후드득후드득 빗소리를 듣는 귀가 신맛을 느낄 지경이란다. 입도 아니고 귀가 새콤해서 어쩌나. 당시에는 ‘귀가 시다’가 같은 소리를 여러 번 들어 질린다는 관용어로 쓰였기에 ‘또 비가 내리는구나, 지긋지긋하네’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았다. 옛사람들도 습한 장마가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그런 날이면 입맛도 없다. 그럴 때 일본인들이 찾는 음식이 소금에 절여 햇볕에 말린 매실, 우메보시(梅干し)다. 반찬으로도 먹고 고명으로도 쓰이고 사탕으로도 만드는데,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건 주먹밥 속에 들어간 우메보시다. 붉은 매실 초에 담가 저장하기에 빨갛게 물이 드는데, 하얀 쌀밥 속에 새콤한 우메보시 한 알이 입맛을 돋운다.
내가 처음 우메보시를 경험한 건 일본 편의점 삼각 김밥 속에서다. 난생처음 보는 쪼그라든 빨간 열매를 아무 생각 없이 한 입 꽉 깨물었을 때, 나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셔도 너무 셨다. 세상에 이렇게 신 음식이 있다니!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침이 솟을 정도로 강렬한 신맛이었다. 그렇게 신 우메보시를 즐겨 먹으니 장맛비 소리에 귀가 새콤해질 법도 하다. 우리에게는 전혀 없는 감성이다.
숨이 턱턱 막히게 습한 장맛날, 우리는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이 그리워진다. 일본에는 없는 음식이다. 콩을 진하게 갈아서 만든 걸쭉하고 고소한 콩물이 가슴속으로 한 줄기 폭포수처럼 쏟아지면 더위에 끈적끈적해진 몸이 환희에 잠긴다. 알맞게 반죽해서 탄력이 살아있는 국수에 찬 콩물을 휘휘 저어 한 젓가락 입안에 넣으면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장맛비마저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덥고 답답한 계절이지만 신선한 우메보시 한 알과 구수한 콩국수 한 그릇으로, 그들도 우리도 맛있게 하루하루 버텨보는 수밖에.
조선일보 정수윤 작가·번역가
07.13 편의점서 파는 죽음… '안락사 키트' 사려 그 청년은 나이 속였다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안락사 간편화' 시대 오면
마주할지 모르는 편의점 풍경
2054년의 어느 주택가 편의점, 문이 열렸다. 카운터에서 안경을 닦던 알바생이 이윽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 허리 굽은 백발의 노인이 부들부들 힘겹게 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겨우겨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눈앞의 상품을 식별하기 위해 매대에 얼굴을 거의 붙이다시피 했다. 하나하나 상품을 찬찬히 살피는 그 모습을 알바생이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노인은 아주 느린 속도로 편의점을 돌며 몇 가지 물품을 집어 들었다. 이윽고 노인이 계산대 위에 물건을 내려놓자, 알바생은 말없이 노인을 가만 노려보았고, 노인은 시선을 피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응?” “신분증요.” 노인은 마치 안 들린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알바생은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제야 노인은 알겠다는 듯 반응했다. “아…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예끼!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분증 검사를 해?” “신분증요.”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백 살이 코앞인데 무슨 신분증 검사를 하냐니까.” “하 참. 이거요 이거.”
알바생은 매대 위에 어질러진 물건들 속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거 80세 이상부터 구매 가능하신 거 아시죠? 안락사 키트.” 안락사 키트. 손목에 팔찌처럼 두른 채 버튼 한 번만 누르면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고, 신호를 받은 관계기관에서 뒷정리까지 알아서 해준다는 상품. 노인은 떨리는 눈동자로 그것을 외면하다가, 곧 다시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니까! 이 사람아, 딱 봐도 내 나이가 팔십이 넘는데 무슨 신분증 검사를 하느냐고!” “딱 봐도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안 보이긴!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알바생은 지겹다는 듯 안락사 키트 상자로 카운터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이보세요. 손님처럼 안락사 키트 뚫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세요?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이 속이는 양반들이 온다고요.” “나, 나는 아니라니까? 난 진짜 내일모레 백 살인….” “딱 봐도 칠십 언저리구만. 거 할아버지, 허리 펴봐요. 솔직히 펴지잖아요?”
노인은 뜨끔한 모양새였지만 굽힌 허리를 펴진 않았다. 알바생은 혀를 찼다. “가만 보니 머리카락도 하얗게 탈색한 거네. 염색한 티가 나요 할아버지.” “무, 무슨 소리야? 원래 내 머린데.” 노인은 알바생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쪽 같은 사람들 때문에 편의점이 얼마나 피해가 큰 줄 알아요? 그쪽이야 그냥 한번 거짓말로 뚫는 거지만, 이거 한 번 잘못 판 편의점은 몇 달 영업정지라고요. 막말로 이 나라 법은 참 이상하단 말야. 속인 놈을 벌 줘야지 왜 속은 놈을 벌 줘? 참 나.”
혼자 혀를 찬 알바생은 상황을 정리했다. “신분증 없으시죠? 나머지 물건도 안 사실 거죠? 그럼 얼른 나가세요.” 아무 말 못 하고 우물쭈물하던 노인은 순간, 대놓고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늙으면 죽어야지 아이고! 살아서 이런 수모를 다 겪네! 아이고!” 알바생의 헛웃음을 유발한 노인의 가짜 곡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아이고! 물건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 사고! 아이고! 나이가 백 살이면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알바생은 단호했다. 무덤덤하게 손만 앞으로 내밀었다. “신분증만 가져오세요.”
곡소리를 줄인 노인은 기어이 굽었던 허리를 펴고 섰다. “그래, 나 일흔둘이다! 곧 있으면 여든인데, 그냥 팔아줘!” “안 된다니까요 글쎄.” “왜 안 돼! 내가 죽고 싶다는데 왜 안 되냐고! 편하게 죽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해?” “법적으로 못 합니다. 국가에서 안 된대요.” “이런 망할! 내가 죽고 싶다는데 왜 안 돼! 막말로 편의점에서 이딴 걸 팔 정도면, 국가에서도 늙은이들 죽으라고 등 떠민 거잖아! 안 그래? 근데 왜 안 되냐고!” 노인이 악을 써대자, 알바생도 기어이 폭발했다.
“이 양반아! 당신은 죽기엔 너무 어리다고! 일흔둘이면 한창 일해야 될 나이에 말이야! 나라에 젊은 애들이 없는데! 우리가 적어도 팔십까진 열심히 일해야 할 것 아니야! 일흔다섯인 나도 이렇게 열심히 알바하는데 말이야!” 불같이 화를 내는 알바생의 모습에 노인은 찔끔했다. “아, 79년생이십니까…?” “그래! 82년생이 벌써부터 안락사 키트를 찾고 말이야 어디. 한창 일해야 될 나이에 확.” 노인은 멋쩍게 입술만 핥다가, 조용히 계산대 위의 물건들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냥 둬. 내가 정리할 테니까.” “아 네….”
노인은 꾸벅 인사한 뒤 편의점 밖으로 나섰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빠른 발걸음으로. 노인은 편의점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20대 청년이 빠르게 다가왔다. “성공하셨습니까?” “아니 그게…. 미안하네.” 노인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청년에게 돌려줬다. “못 뚫었어. 돈은 돌려줄게.” 청년은 실망한 얼굴로 심부름 값을 되돌려 받았다. 노인은 떠나기 전 말했다. “그,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긴 한데, 웬만하면 살지 그래. 그렇게 젊은 나이에 왜….” 노인이 골목을 떠나자,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라에 몇 안 되는 청년이라면 누구나 흔히 내뱉는 그것을 말이다.
※픽션입니다.
조선일보 김동식 소설가
07.14 묵묵히 지켜낸 자리 30년, 그의 정년 퇴임식에서 내가 울었다
[최여정의 다정한 안부]
중심에서 밀려나 사라지지만
묵묵히 꽃을 피운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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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영석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흐윽. 죄송합니다.” 퇴임인사를 하던 그가 고개를 깊게 떨구었다. 6월의 마지막 날, 일하고 있는 영화제 사무국 최초로 정년퇴임식이 있었다. 2009년 1회 영화제 개최부터 올해 16회 영화제를 앞둔 지금까지 그는 16년을 오롯이 이곳에서 보냈다. 회사가 먼저 없어지든 아니면 내가 먼저 사표를 내고 나오든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철밥통 공무원’도 저임금과 악성 민원에 시달려 그만둔다는 세상에서 16년 시간의 무게는 묵직하다.
특히나 영화제가 어떤 곳인가. “1년에 일주일 영화제 하고 나면 도대체 뭘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이 돌아오는 이곳은 남들이 보기엔 참으로 이상한 직장이다. 일주일 축제를 위해 작품을 찾고 자막을 입히고 상영 준비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 연속성을 갖는 업무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정규직은 극소수이고 ‘시간제 전문직’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20대들이 대다수인 조직. 고다르와 트뤼포가 쓴 벽돌책을 읽고 아녜스 바르다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밤새워 영화비평문을 쓰는, 멸종 직전의 씨네필인 그들은 5월에는 전주, 7월엔 부천, 10월엔 부산까지 전국 영화제를 돌며 1년 일자리 일정을 꾸린다. 이렇듯 훌훌 짐을 풀고 꾸리기 쉬워 늘 사람들이 들고 나고, 또 작년에 열린 영화제가 올해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지곤 하는 곳에서 16년이라니, 그리고 정년퇴직이라니.
나는 8회 영화제부터 지난 8년간 그와 함께 일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의 정년퇴임식을 준비하고 사회를 맡았다. 영화제 곳곳을 누비던 그의 사진으로 앨범을 만들고 감사패와 꽃다발을 준비하기로 했다. 오래된 기록사진 파일을 뒤져서 찾아낸 16년 전 그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주요 행사장마다 연단 앞에 마이크를 쥐고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항상 그였다. 유명배우들 곁에서 여유 있는 미소로 안내하던 사람도 그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연단 중앙에서 가장자리로, 모임의 가운데에서 맨 끝자리로 작아지더니 점점 더 그가 나온 사진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제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식
지난 8년간 그의 자리는 그렇게 사라져갔다. 오랫동안 맡아온 관리직에서 내려와야 했고 총괄하던 업무들도 하나둘 줄어들었다. 커다란 책상과 책장을 홀로 쓰던 방에서 나와 창가 옆 책상에 가림막을 높이 세우고 점점 더 모습을 감추었다. 그 시절 그는 크게 상심한 때문인지 오랫동안 병가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회사로 돌아왔고 마지막 몇 년은 영화제 게스트를 위한 관광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진행하는 일을 맡아 대학생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현장을 뛰어다니다가 정년퇴임식을 맞았다. ‘나 하나 꽃피어 달라질 것이 없는 세상’이라고 믿지 않았다. 묵묵히 홀로 잎을 밀어 올리며 정년퇴직이라는 작은 꽃을 피워낸 그의 인생이었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울음을 참듯 한마디, 한마디, 조동화 시인의 시를 간신히 읊어나가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오히려 울음이 터진 건 나였다. 그리고 내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30년 넘게 일하신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셨다. 아침이면 회사에 가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그 성실하고 한결같은 매일이 쌓인 시간이었다. 늦은 밤 술에 취해 돌아와, 잠든 어린 딸의 볼에 굵은 수염을 비벼 깨우던 젊은 아버지, 대입시험을 앞둔 딸에게 끝까지 알리지 않고 홀로 위암 수술대에 오른 중년의 아버지, 돌아가신 할머니를 누인 관을 붙들고 꺼이꺼이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던 늙은 아버지. 그의 인생에 슬픈 날도, 기쁜 날도, 괴로운 날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어느새 같은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손 닿을 수 있는 그곳에.
아버지, 승진에서 밀려 후배들과 나눈 술 한잔 뒤에 허물어지고 싶은 발길로 밤거리를 헤매다가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던 그 밤은 언제였나요. 위암 진단을 받고 남겨진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두려워하던 그 밤은 언제였나요. 홀로 5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신 어머니에게 장남으로서 해드린 것 하나 없다며 그리워하던 밤은 언제였나요. 아버지, 당신을 위한 정년퇴임식에서 당신도 눈물을 보이셨나요.
아버지가 한결같이 지켜낸 30년이, 뿌리침을 당하고 밀려나더라도 머리 숙이고 지켜낸 자리라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좀 더 용기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건 돌아보면 눈 닿는 곳에 언제나 당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켜낸 매일이 나를 살게 했습니다. 이제야 당신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들춰봅니다.
나는 눈물을 닦고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에게, 내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긴 시간 당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남겨주신 꽃 한 송이가 제 마음의 꽃밭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보 최여정 작가
07.20 갈팡질팡 내 마음
처음 편의점 배달 서비스 광고를 봤을 때 걸으면 몇 분, 배달하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 서비스가 잘 될까 싶어 의아했다. 하지만 배달 수요가 계속 늘어난다는 뉴스를 보니 인간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게으른 존재란 생각이 든다. 땀 흘리며 운동하는 사진은 매일 인증해도 오피스텔 1층 편의점에 가는 건 또 귀찮다는 것이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한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삼계탕을 먹고, 보일러 온도는 최고로 올려놓고 덥다고 창문을 여는 이 현대적 쾌적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짜장면, 냉면 위에 채 썬 오이는 질색하면서 통 오이는 건강에 좋다며 잘 먹는 나도 이상하다. ‘짬짜면’이 등장했을 때 짜장이냐 짬뽕이냐의 오랜 고민이 드디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저조한 판매를 기록한 이 신박한 메뉴가 중국집에서 하나둘 사라진 지 오래다. 요구르트 한번 원 없이 마시는 게 소원인 어린 시절도 있었는데, 4.5배 더 커진 270ml 요구르트 제품이 나온 지금도 나는 여전히 다섯 개들이 요구르트에 차례로 빨대를 꽂아 마신다. 어쩐지 요구르트는 이렇게 마셔야 맛있을 것 같은 앞뒤 전혀 안 맞는 기분 탓이다.
연애할 때 좋아했던 장점이 결혼 생활에는 단점이 되는 아이러니는 어떤가. 활동적이고 외향적이라 매력적으로 느꼈던 남자 친구의 장점이 남편이 되자 밖으로만 나돌아 오히려 외롭다는 호소로 이어진다. 야근과 구조조정도 함께 견딘 돈독했던 동료 사이가 단돈 10만원 축의금 때문에 멀어지는 게 인간사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게 이것뿐일까. 잘나 보여도 어딘가 고장 나 있는 게 인간이다.
‘버나드 쇼’ 같은 위대한 문학가조차 묘비명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쓰지 않았나.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가끔 길을 잃고 헤맨다. 늘 초행길인 인생에서 우리에게 완벽한 지도는 없다. 오히려 잘못 들어선 길이 좋은 지도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내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다고 자책 말자. 갈팡질팡 사이 적당과 적정도 최선 못지않다.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07.27 안락사냐 영생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10분 내 행복하게 죽는 안락사
육체·정신이 기계와 합쳐져 영생 기대하는 미래도
삶과 죽음, 선택의 영역 되나
감기를 2주간 앓아서 기력이 떨어진 몸에 장염과 위염이 한 번에 덮쳤다. 열이 오르고 복통·두통·근육통이란 삼중고에 잠을 설친 어느 새벽,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24시간 약국을 검색했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약국이 있었다. 차마 70세가 넘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새벽 세 시 약국행을 부탁할 순 없었다. 끙끙거리며 눈을 질끈 감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약국 생각에, 부모님 생각에 어느덧 70대가 됐을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앞으로 신상에 변동이 없다고 가정할 때 혼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 감기나 장염 정도로 고생하지만 그땐 더 큰 병에 걸릴 수도 있다. 호흡이 곤란해지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몸에 차고 있는 스마트 시계·반지와 같은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병원에 연락이 갈 것이다. 그 후에도 의식이 없거나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혼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게 가능할지, 치료를 받은 뒤 아프기 전처럼 생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 큰 문제도 있다. 치매에 걸린 독거 노인의 일상은 도무지 가늠이 가질 않는다. 초기 치매 증상을 자각했을 때 제 발로 요양병원에 들어가야 할까. 그곳에서 먹고 자며 목숨을 이어 간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을 온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화와 함께 맞닥뜨릴 수 있는 온갖 질병과 고통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날 오후에 본 ‘안락사 캡슐’ 기사가 떠올랐다. 지난 18일 AFP통신에 따르면 안락사 단체 ‘더 라스트 리조트’는 곧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을 위해 ‘사르코’가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르코는 캡슐 내부 산소를 질소로 바꿔 저산소증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버튼만 누르면 30초가 채 되지 않아 공기 중 산소량이 21%에서 0.05%로 급격히 떨어지고 그 후 사망 전 약 5분 동안 무의식 상태에 머물게 된다. 심지어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기 전 약간의 행복감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진통제를 들이부어도 이길 수 없는 고통에 육체와 정신이 너덜너덜해질 바엔, 치매 독거 노인이 되어 인간이 아닌 무생물과 같은 존재로 취급받을 바엔, 사르코에 몸을 뉘이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사르코는 석관을 뜻하는 ‘사르코파구스’에서 따왔다.
극심한 고통에 이르는 병이나 치매에 걸릴 경우, 어떻게 사르코가 있는 스위스까지 갈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을 때 최근 테크 전문지 와이어드에 실린 레이 커즈와일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신시사이저 키보드 브랜드로 유명한 커즈와일은 우리 시대의 발명가이자 천재이고 괴짜다. ‘특이점이 온다’(2005)는 베스트셀러로도 잘 알려졌는데, 지난달 ‘특이점이 더 가까이 왔다’라는 신간을 냈다.
커즈와일은 인간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의료 기술을 활용해 더 오래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특이점에 다다르면 기계와 합쳐지고 초지능이 되어 무한히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들이 99세까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막상 99세가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며 120세, 아니 300세까지 사는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AI의 발전에 따라 신약과 치료제 개발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질 것이고 40~50년 후 보편화될 반려 로봇이랑 함께라면 노인 혼자여도 안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르코에 들어가려고 했던 늙고 병든 나의 육신은 어느새 AI와 한 몸이 되어 생의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사르코와 커즈와일 사이를 수없이 오간 밤을 보내자, 동이 트고 열이 식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둘 다 잊어버린 채 앞으로 술을 줄이고 운동도 시작하자는 결심만 떠올랐다. 안락사도 영생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지만,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최선이다
조선일보 변희원 기자
08.28 짱이고 대박이고 따봉이다
짱이다. 아직도 이 말을 쓴다. 좋은 걸 보거나 듣거나 먹으면 저절로 나온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중년이 됐으니 바른 말을 써야 한다. 적절한 대체어가 없다. 나는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도 슬퍼하는 핏줄에게 둘러싸여 “이 정도 인생이면 짱이었…” 하며 눈을 감을 것이다.
우두머리를 뜻하는 장(長)에서 파생한 짱은 싸움 제일 잘하는 친구를 부르는 단어였다. 이젠 어디에나 붙이는 말이 됐다. 몸이 좋으면 몸짱이다. 얼굴이 잘생기면 얼짱이다. 내 소원은 글짱이다. 글짱이라는 말은 없다. 그깟 글 좀 쓴다고 짱이라는 말을 붙여주지는 않는다. 글이라는 거 참 별 볼일 없다.
한번 혀에 붙은 유행어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대박이라는 말이 싫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한 이후 달라졌다. 이젠 모두 대박이라고 외친다. 검색하니 “북한, 러시아산 연료·물자 넘쳐, 우크라전 대박”이라는 ‘조선일보’ 기사도 있다. 전통 일간지가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2008년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단어다. 요즘 국어사전은 일하는 속도가 참 빠르다.
밈(meme)으로 도는 뉴스 장면을 보고 무릎을 쳤다. 요즘 애들은 왜 ‘알잘딱깔센’ 같은 신조어를 쓰냐 꾸짖는 어른에게 애들이 항변하는 장면이다. “어른들도 옛날에는 ‘하이’ 같은 거 초성만 썼잖아요” 할 말 없다. 나는 아직도 ㅎㅇ라고 인사하고 ㅂㄱㅂㄱ라고 반가워한다. PC 통신 하던 애들은 중년이 돼도 애들이다.
유행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이 글을 읽는 부장님들이 MZ세대 사원에게 “이번 보고서는 알잘딱깔센?”이라 지시한 다음 ‘나도 신세대 아재’라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할까 걱정돼서 하는 소리다. 늦게 주워들은 유행어를 신조어처럼 쓰는 것만큼 꼰대 같은 일은 없다.
참, 알잘딱깔센은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라는 뜻이다. 몇 년 전부터 유행이라는데 나도 얼마 전에야 들었다. 이 유행어를 처음으로 알게 된 중노년 독자 여러분이라면 따봉을 부탁드린다. 글짱이 되어 대박을 치려면 더 많은 따봉이 필요하다.
조선일보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09.21 '얼평' 유감
차별 타파하자던 이들까지 서슴없이 '얼평' 해대는 세상
성·빈곤 등 차별의 종합세트… 타인 비난할땐 거울부터 봐라
“두 볼은 한 자가 넘고, 눈은 퉁방울 같고, 코는 질흙으로 만든 병 같고, 입은 메기 같고, 머리털은 돼지털 같고 (중략) 주둥이를 썰어내면 열 사발은 되겠고, 얼굴 얽기는 콩멍석 같으니 그 생김새는 차마 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에서 장화 홍련의 아버지 배좌수의 재혼 상대인 장씨는 지독한 못난이로 묘사된다. 시대에 따라 설정은 조금씩 달라도 외모 비하는 한문본, 한글 필사본, 한글 판각본 등 30여 편의 이본이 대동소이하다. 장씨의 추한 외모는 무고한 장화 홍련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용서할 수 없는 악(惡)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서 외모에 대한 평가와 비교, 차별의 역사는 유구하다. 당나라에서 비롯되어 조선 선비들에게도 강조된 인재상인 신언서판(身言書判)의 첫째도 말글과 판단력까지 앞지른 얼굴과 키였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아름다운 외모가 권력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인권과 개성을 존중하는 풍토에서는 ‘PC(정치적 올바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타인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부적절하며 무례하다는 통념이 자리 잡고 있다. 노골적이고 집요하게 생김새와 차림새를 평가하고 흠뜯는 한국의 ‘얼평’은 옳고 그름을 떠나 보편적이지 않다.
‘얼평’은 남녀노소 불문에 신분과 지위도 아랑곳없다. 연예인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인과 운동선수와 범죄자까지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얼평’은 단지 겉모습의 생김새와 차림새에 대한 취향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한국아동청소년인권실태조사(2020)에 의하면, 성차별이 심한 사람일수록 외모 차별이 심한 경향을 보인다. 외모 차별은 빈곤 차별이기도 하다. 가정 형편은 청소년기에 영양과 청결 등의 형태로 외모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이 ‘명품’의 거대 시장이 된 것도 외모를 통해 빈부 격차를 견주는 풍토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또한 외모는 건강과 직결되며 나이와 강력한 연관성을 가진다. 따라서 ‘얼평’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은 병자와 장애인 등에게 친화적일 가능성이 작고, 에이지즘(Ageism:연령 차별)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크다. 성차별, 빈곤 차별, 연령 차별 등 여러 가지 차별 의식의 종합 선물 세트가 ‘얼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차별이 일상화된 사회는 불행하다. 외모 차별 경험이 많을수록 자존감이 낮고 주관적 건강 상태가 나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데 차별을 타파하자고 외치던 이들조차 서슴없이 ‘얼평’을 해댄다. 반대 진영 인사를 비판하기 위해 ‘망가진 얼굴’, ‘병든 얼굴’을 들먹이며 짧은 글 안에 ‘얼굴’이라는 단어만 여덟 번 등장시킨 어느 지식인의 칼럼을 읽었을 때는 참담한 느낌마저 들었다. 정의로운 원칙은커녕 최소한의 예의조차 내던졌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구도, ‘관상은 과학’이라는 요샛말도 믿기 힘들다. 미용 의학의 발달로 충분한 시간과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나이를 뛰어넘은 외모를 소유할 수 있다. 확증 편향을 제거한다면 신상 공개된 흉악 범죄 피의자조차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얼굴임에 더욱 소스라친다.
못생긴 것만 흉보는 게 ‘얼평’이 아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소개하면서 외모를 지나치게 칭송하는 것도 실력과 성취에 대한 비하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세기의 미남’ 알랭 들롱은, “나는 배우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예쁜 소년이라는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수년간 싸워왔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얼평’의 본능과 끓어오르는 충동을 참지 못하겠다면, 즉시 거울 앞에 서 보기를 권한다. 거울에 비친 경상(鏡像)을 바라보며 조목조목 흠잡아 씹고 뜯고 즐기면 된다. 그것이 바로 ‘자기 객관화’이자 ‘자기 성찰’이다.
조선일보 김별아 소설가
09.28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영화 ‘타이타닉’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주인공들의 사랑이 아니었다. 대탈출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끝까지 배에 남아 연주를 멈추지 않던 연주자들이었다. 실제 이런 일은 1992년 2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분쟁에서도 일어났다.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에 덥수룩한 수염의 한 남자가 가방을 든 채 나타났다. 빵을 사기 위해 모인 사람들 머리 위로 폭격이 가해진 다음 날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그가 가방에서 꺼낸 건 첼로였다.
사라예보 관현악단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그는 전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연미복 차림으로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연주는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22일간 이어졌다. 빵가게 폭격으로 사망한 22명 희생자의 숫자와 동일했다. 놀라운 건 죽은 자를 위한 위로였던 연주가 산 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발포 명령에도 세르비아 점령군 중 누구도 그의 머리에 직접 총을 겨누지 않았다.
긴급한 수술실, 배를 열자 온 장기에 퍼진 암세포를 발견한 외과 의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수술은 크게 의미가 없다. 안타깝지만 수술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가 수술을 시작한다. “밥은 먹게 해드려야지”라는 말이 수술의 이유였다. 하지현 책 ‘꾸준히, 오래, 지치지 않고’에서 이 장면을 읽었을 때 먹먹해졌다. 상황이 얼마나 나쁘든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결 가능한 문제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오랜 임상 경험을 가진 그의 직업 윤리였을 것이란 문장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사라예보 시민으로서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음악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스마일로비치의 말처럼,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할 때 기적은 선물처럼 찾아온다. 그 일이 꼭 대단한 일일 필요는 없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행동만으로 세계는 조금씩 변한다. 기적은 죽은 나무에 핀 꽃이 아니다. 진짜 기적은 절망의 그날에도 당신이 정원에 매일 준 물이다.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09.30 스시바에 가고 싶어

▲소넨 나이프 ‘Sushi Bar Song’(1998)
일본 대표 음식으로 첫손에 꼽히는 스시의 역사는 유구하다. 스시는 우리나라의 가자미식해처럼 곡물 발효를 통한 생선의 저장 보존식 형태로 시작했지만 천 년 전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이르러 발효를 중간에 멈추고 생선과 밥을 같이 먹는 방식으로 분화 발전한다. 이런 발효 초밥의 전통은 붕어를 밥에 절인 방식으로 만드는 후나즈시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즉석에서 손으로 쥐어주는, 긴 발효 과정을 생략하고 대신 식초로 그것을 대체하는 현재의 니기리즈시가 출현한 것은 도쿄 중심의 에도 시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 시대에 이르러 스시는 다양한 재료와 조리법으로 경쟁하는 숙수들의 문화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스시의 핵심은 해산물과 쌀이다. 이 둘은 섬나라 일본이 포기할 수 없는 식재료의 원형이다. 최근 일본 언론에 따르면, 쌀농사 작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일본을 찾는 관광객은 크게 증가해 초유의 쌀 부족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고 한다. 2024년 상반기 일본을 방문한 관광객은 1780만명으로 팬데믹 이전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미식 도시 오사카에서 1981년 결성한 여성 트리오 펑크록밴드 소넨 나이프는 오사카 출신답게 음식을 심심찮게 자신들의 노래에 등장시키는데, 스시에 대한 애정을 담은 이 노래는 거의 스시 가게의 웰컴송으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흥겹고 사랑스러운 록 음악이다.
“스시바에 가고 싶어/ 당신과 함께 갈 거야/ 새끼 방어, 오징어, 새우, 문어, 다랑어, 관자/ 이번 주 금요일 밤 어때?/ 난 기다릴 수 없어/ 붕장어, 성게, 참치 뱃살, 낫토, 장어, 피조개/ 오 얼마나 멋지고 건강에 좋은 것들인지/ 스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음식/ 오, 식재료의 화려한 색채 예술/ 스시는 아름다운 일본의 음식(I wanna go to a sushi bar/ I wanna go with you/ Hamachi, Ika, Ebi, Tako, Maguro, Kaibashira/ How about this Friday night?/ I can’t wait to go/ Anago, Uni, Toro, Natto, Unagi, Akagai/ Ooo, how nice! Healthy menu/ It’s my favorite Japanese meal/ Ooo, colorful art of the food/ It’s a beautiful Japanese meal).”
조선일보 강헌 음악평론가
10.10 청포도가 익어가는 신화적 사건
청포도의 색은 녹색인데 왜 청포도라고 하는 것일까요? ‘푸를 청(靑)’이라는 한자는 원래 푸른색과 녹색을 다 포함했고, ‘푸르다’라는 우리말도 푸른색과 녹색을 다 포함합니다. 그래서 녹색이지만 청포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시인 이육사가 1939년에 발표한 시 ‘청포도’의 처음 두 행에서 “내 고장 七月(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칠월은 음력일 것입니다. 포도는 보통 양력 8월에 익어가고 8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수확을 하니까요. 금년의 그 칠월은 이미 지났고 지금은 수확이 한창일 때이지만, 청포도를 먹다 보니 문득 청포도가 익어가는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을 시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청포도-흰 돛단배-청포 손님
세 사건 어우러져 신화적 의미
‘손님=독립’이라는 해석 많지만
고달픈 시인의 자기연민 느껴져

▲이육사의 시 ‘청포도’는 “손님”이 누구냐를 두고 숱한 해석을 낳았다. 중앙포토
이 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두 번째 연부터 네 번째 연까지는 끊어지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 예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 속에는 세 가지 사건이 들어 있고 그 세 사건은 인과 내지 조건, 혹은 동조의 관계로 연결됩니다. 먼저 청포도가 익어가는 사건. 그 청포도에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힙니다. 그러면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그다음 사건이 일어납니다. 손님이 청포를 입고 찾아옵니다.
처음 두 행에서 청포도가 익는 것은 해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손님이 찾아오는 일이 이루어질 때 청포도의 결실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화적 사건이 됩니다. 이때 청포도가 익는 것과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여는 것과 청포를 입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완벽한 동가(同價)가 됩니다.
이 푸른색의 신화적 사건이 구현되면 시의 화자와 손님은 함께 잔치를 벌여, 청포도를 먹고 두 손을 포도 물에 함뿍 적십니다. 신화의 육화(肉化)입니다. 신화와 동화되는 것입니다. 하얀색은 그 푸른색 신화를 준비합니다. 흰 돛단배에는 청포 입은 손님이 타고 있고, 은쟁반과 하얀 모시 수건은 청포 입은 손님과 푸른 포도를 기다립니다. 시적 진술의 현재에 그 신화적 사건은 아직 구현되지 않았습니다.

▲이육사 시인의 고향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이육사문학관 옆 청포도시비공원. 프리랜서 공정식
손님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손님을 광복된 조국, 혹은 평화로운 미래 세계라고 보는 해석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나 애국지사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작품 바깥에서 시인의 실제 삶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 시 작품 안에 나타나 있는 것들과 연관을 지으면 이런 해석들은 충분히 성립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작품이 언제 쓰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시를 읽은 독자라면 절대로 그런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이때는 내재적 관점에서의 해석만 가능합니다.
내재적으로 꼼꼼히 따져보면 모호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 손님을 화자가 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 없는지, 또 돛단배가 오면 찾아온다고 한 것이 그 손님의 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말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이곳을 ‘내 고장’이라고 칭하는 화자는 이곳이 고향이자 거주지인 사람이라고 여겨지는데, 손님도 이곳이 고향이고 전에 이곳에서 거주했던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저항시인 이육사. 1941년 북경으로 떠나기 전 생일에 서명을 담아 친구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준 사진이다. 이육사문학관
가능한 여러 가지 해석 중 저에게 가장 공감이 가는 것은 손님을 시인 자신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시인이 자신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이 고장에 사는 사람으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이 고장으로 찾아오리라 기대되는 사람으로 만든 뒤, 이 고장에 사는 사람을 화자로 내세웠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이 고장은 칠월이면 청포도가 익어가는 평화로운 곳이고 화자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데 반해 바다 건너에 있는 손님은 몸이 고달픕니다. 손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고장에 와서 휴식과 위안을 얻는 것이고 화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손님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고 싶은 것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시인 자신은 화자보다도 오히려 손님 뒤에 숨어 있고, 그렇게 숨은 채 슬며시 화자를 앞세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다른 시들에 나타나는 강철 같은 의지와는 다른, 깊은 자기 연민이 이 시의 기본 정서로 느껴집니다. 자기 연민과 강철 같은 의지는 상충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것 아닐까요?
포도 수확기인 지금, 청포도를 드시면서 이육사 시인의 시 ‘청포도’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합니다.

중앙일보 성민엽 문학평론가
10.18 '급할수록 돌아가라'의 원래 뜻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한국 전래의 속담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일본에서 전해진 수입 속담이다. 일본어로는 ‘이소가바 마와레(急がば回れ)’라고 한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천천히 가라’도 아니고 왜 하필 ‘돌아가라’고 했는지 어구만으로는 그 의미가 아리송하다. 의문에 대한 답은 본래 일본 속담의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
‘이소가바 마와레’는 15세기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종장(宗長)이라는 시인이 지은 연가(連歌)의 한 구절이다. 노래 배경은 이렇다. 일본의 동서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인 도카이도(東海道)에는 구사쓰(草津)와 오쓰(大津)라는 교통 요지가 있다. 두 곳 사이에는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비와코(琵琶湖)가 있어서 두 곳을 오가려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거나, 조금 떨어진 곳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두 노선의 거리는 호수 횡단 뱃길이 7km, 다리를 이용하는 우회로가 13km로 두 배 가까이 차이가 있다.
당연히 뱃길이 빠른 길이다. 다만 이 길은 인근 히에이(比叡)산에서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돌풍에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 하는 기로에서 먼 거리를 돌더라도 안전하게 다리를 이용하는 편이 결국은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지혜라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였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단순히 서두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시간이나 비용이 더 들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고 검증된 방식을 택하라는 것이 본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신속한 결단과 리스크 테이킹이 생존과 직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큰 성공을 이루는 법보다 실패를 줄이는 법을 먼저 익히는 것이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일 수도 있는 것이 인간사의 이치가 아닐까 한다.
조선일보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10.23 니모를 찾아서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전어를 즐기지 않는다. 이 말을 종종 사람들에게 해왔다. 비난에 시달렸다. 가을 전어가 얼마나 맛있는지에 대한 설교를 몇 번이나 들었다. 시도는 했다. 회도 시도했다. 구이도 시도했다. 자꾸 먹으면 맛있어진다는데 맛있어지질 않는다.
전어가 맛이 형편없는 건 아니다. 맛에 비해 과장된 수사가 붙는 것이 내심 못마땅한 것이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는 맛이라면 이보다는 나아야 마땅하다. 가을 전어는 뼈도 억세다. 씹어 넘기기에 40대 후반 치아는 하찮다. 세꼬시는 건치들이 뻐기려고 먹는 음식이다.
올해는 건치들도 전어 먹기는 힘들게 됐다. 가격이 1년 사이 9배나 올랐다. 수온이 올라서다. 차가운 물에 사는 어류들은 다 납북됐다. 나는 오징어 회를 좋아한다. 초장 찍어 갓 지은 밥에 얹어 먹으면 단맛이 일품이다. 그 맛도 자주 보기 힘들다. 역시 수온이 올라서다. 속초 앞바다 살던 오징어들은 지금쯤 바람 찬 흥남 부두 근처에 있을 것이다.
기후변화 속도는 놀랍다. 1년 사이 전어가 제값 쳐줄 자본주의를 버리고 북으로 향할 정도라면 심상치 않은 신호다. 이미 아열대 생선들이 동해까지 진출하는 중이다. 동남아 여행 가서 본 노랗고 파란 열대 생선들을 먹어야 할 때가 머지않았다.
위 문장을 쓰자마자 가장 먼저 구글에 흰동가리 맛을 검색했다. 식용으로는 쓰이지 않지만 익히면 맛은 나쁘지 않단다. 껍질에 독소가 있어 생으로는 먹지 말라는 주의도 있다.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가. 독이 있는 식물도 동물도 어떻게든 먹을 방법을 찾아내는 민족이다. 흰동가리 회무침 같은 것도 식탁에 올라오는 날이 올 것이다. 부산 별미 멸치 회무침처럼 조리하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맞다. 흰동가리는 ‘니모를 찾아서’의 니모다. 그토록 감동적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어떻게 니모 맛을 궁금해할 수 있냐고? 우리 솔직해지자. 아쿠아리움에 가서도 저놈은 무슨 맛일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면 당신은 한국인이 아니다.
조선일보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10.30 이것은 정치 칼럼이 아니다
원래는 다른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뭔가 다른 걸 쓰려고만 하면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나만 이런 것도 아니다. 지금 전국 수많은 칼럼니스트가 아파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소재가 겹쳐도 이해 부탁드린다.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로제가 미국 가수 브루노 마스와 부른 신곡 ‘APT.’가 지구를 휩쓰는 중이다. 현재 전 세계 최고 히트곡이다. 한번 들으면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 노래는 ‘강남 스타일’을 능가하는 케이팝 대표곡이 될 것이 틀림없다. 다행히도 아파트는 어디에나 있다. 삼성역 근처에 있는 말춤 손 모양 기념상 같은 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안심이다.
아파트라는 노래의 히트가 내심 못마땅한 사람도 있을 법하다. 사실 우리는 아파트를 미워하도록 교육받았다. 아파트는 한국적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키워드였다. 양극화의 상징이었다. 이웃의 정을 차단하는 냉담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세대 이야기다. 나의 살던 고향은 마산 삼익아파트다. 내 세대에게 아파트는 그냥 아파트다. 다만 모든 것을 분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들의 글이 곧 나올 것이다. ‘강남 스타일’이 유행할 때 등장한 사회학적 분석 글들을 찾아보시라. 한국 자본주의의 천박한 욕망을 대변하는 저질 문화 상품이라는 글을 분명히 읽은 것도 같다.
쓸만한 분석은 오히려 소셜미디어에 있다. ‘APT.’의 ‘Hold On’이라는 가사의 의미가 ‘(오르니까 팔지 말고) 버티라’라는 농담이야말로 뼈가 있다. 생각해 보니 뉴진스 노래 ‘Ditto’에 등장하는 ‘Stay In The Middle’이라는 가사가 ‘(선거에서 이기려면) 중도층을 사수하라’는 소리라는 농담도 있었다.
요즘 대통령에 대한 중도층 이탈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여론조사가 계속 나온다. 지지율은 오를 생각이 없다. 이럴 땐 계속 버티기만 하면 좀 곤란할 것이다. 이건 정치 칼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밝힌다.
조선일보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11.08 기독·그리스도·천주

‘기독(基督)’은 그리스어 크리스토스(구원자)의 17세기 중국어 음역 ‘기리사독(基利斯督)’의 줄임말이다. 한자 뜻과 상관 없다. 현대 표준어(만다린)로 ‘지리스두’이지만 구개음화하기 전 옛 발음이 그리스어에 가까운 ‘기리스두’였다.
‘천주’란 가톨릭을 의역한 단어다. 예수회 선교사 리마두(利瑪竇), 즉 이탈리아 출신 마테오 리치가 전체·보편을 뜻하는 어원의 라틴어(catholica)를 하늘 天 으뜸 主로 옮긴 것이다. 그는 20대 후반 고향을 떠나 인도·마카오를 거쳐 1583년부터 중국에서 살다 죽었다. 기독(基督)이 통용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리치는 명나라 중국에서 서방 현사(賢士) 대접을 받으며 유럽의 과학을 전했고 공자 등 유가 사상을 라틴어로 풀어냈다. 특히 유교적 개념·용어를 빌어 한문으로 로마 가톨릭 교리를 설명한 저서 ‘천주실의’는 조선 선비들에게도 공유되었고 이를 통해 조선은 선교사가 오기 전 복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지구상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한자어 基督(敎)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J. 바세 신부 문서에 등장한 게 처음이며 1814년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R. 모리슨의 중국어 성경에 그대로 쓰였다. 한글 성경이 중국어 번역판을 참고해 만들어지면서 ‘기독’은 자연스레 우리말로 자리 잡았다.
한성순보 1884년 7월 중순호에 처음 基督이 등장했으며, 이후 순한글 독립신문에서 ‘긔독(교)’으로 쓰이다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이래 현재의 표기가 됐다. 근년 들어 기독을 그리스도로 고쳐 쓰자는 교계 일각의 목소리가 있다. 한자 음역 기리사독을 기독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를 ‘그도’로 축약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정체성을 상실한 번역어라는 것이다.
일본에선 1549년 스페인 출신의 F. 하비에르 예수회 신부의 도래 이후 ‘기리시탄’(크리스천)들이 생겨 났다. 1613년 쇄국 이후 260년간 박해의 시대에 ‘가쿠레(비밀) 기리시탄’으로 신앙을 지키다가 개항과 메이지유신을 맞았으나 이후 일본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반면 한국 근·현대사는 기독교 없이 논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언어·문화·교육·의료의 발전사에 깃든 기독교의 숨결은 폭넓고 깊다. 1948년 5월31일 대한민국 제헌의회 첫 공식 일정이 ‘기도’로 시작된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당시 임시 국회의장이 국회의원으로 참석 중인 이윤영(목사)에게 즉흥 요청한 결과였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감동 충만한 감사 기도로 출발했다.
스카이데일리 임명신 국제문화부장‧부국장
11.14 다섯 살 소년과 80대 경비원의 '마지막 퇴근'
일부러 암을 키운 것일까, CT 찍어보니 췌장·복강·간·폐…
"진단 받으면 그 녀석을 못 보는데… 그래서 그냥 일했습니다"
매일 출근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 진정 달콤한 삶은 무엇인가

▲일러스트=이철원
마르고 수척한 고령의 남성이 응급실로 왔다. 병원을 오래 다녔던 것 같은 외양이었지만 기록은 전혀 없었다. 딸과 함께 온 그는 숨이 차다고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에게 땀내가 풍겨왔다. 최근에 증상이 시작되었다는 점이 뭔가 이상해서 그에게 물었다.
“정말로 앓던 병이 없습니까?”
“병원에 안 다녔습니다. 다만, 배에서 뭔가 만져진 지는 한참 되었습니다.”
그의 배를 더듬었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종괴가 만져졌다. 숨이 찬 증상과 연결해보면 최악의 진단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재차 물었다.
“살이 빠지지 않았습니까?”
“최근에 살은 좀 많이 빠졌습니다.”
“이게 만져졌을 때 병원에 올 생각을 안 하셨습니까?”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조금 늦었는데, 계속 자랐습니다.”
나는 일단 검사를 해보겠다고 했다. 고집스럽게 병원에 오지 않아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는 종종 있었다. 몸에 자라는 딱딱한 종괴는 대부분 악성 종양이다. 몸 밖에서 만질 수 있는 정도면 이미 안에서 크게 자라고 난 뒤다. 벌써 마음이 불길했다.
잠시 뒤 확인한 그의 시티 영상은 끔찍했다. 마치 일부러 암을 키워온 것 같았다. 시작된 부위는 췌장인 것 같았지만 복강과 간, 폐로 퍼져 있었다. 그가 직접 만질 수 있는 것은 차라리 아주 일부였고, 폐로 번지고서야 호흡곤란이 온 것이다. 이 정도면 치료조차 무용했다. 그러나 설명하기가 괜히 망설여졌다.
“간과 폐에 나빠 보이는 종괴가 있습니다. 입원해서 검사받고 어떻게 치료할지 결정하겠습니다.”
짐작했다는 듯 그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선생님,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기암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요?”
“...솔직히, 다른 진단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주름진 눈가가 구겨졌다. 약간 눈물을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나중에 입원해도, 가능할까요?”
“이 정도면 오히려 치료가 급하지는 않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오늘까지 경비 일을 하다 왔습니다. 오늘도 퇴근하고 온 겁니다. 직장에다가 일을 못하게 되었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숨이 차지 않았습니까? 괜찮으셨습니까?”
“숨은 찼습니다.”
그는 말하는 중에도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일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 단지에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있습니다. 어찌나 총명하고 예의 바른지, 그 아이 보는 재미로 일했습니다. 제가 갑자기 사라지면 아이가 경비 아저씨를 찾을 겁니다. 인사를 하고 와야 합니다.”
“....”
“선생님. 솔직히 배에서 뭔가 만져지는 순간, 저도 암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가 팔십인데, 특별히 이걸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진단을 받는 순간부터, 자식들이 저를 일하게 두지 않을 거고, 직장에서도 쉬라고 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냥 일했습니다.”
옆에서 그의 딸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됐습니다. 지금부터는 쉬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시는 출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워 보였다.
“환자분, 삶이 있다면, 얼마든지 정리하셔도 괜찮습니다.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남은 시간이 있습니다. 다만 도움이 필요하시면 저희는 무엇이든 도와드릴 겁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천천히, 정리하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괜히 그의 암종을 열어 놓고 커서를 느리게 움직였다. 흔히들 일에서 해방된 달콤한 삶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그렇게 순순히 흘러가지 않는다. 적어도 경제적 여유는 행복과 동의어가 아니다. 시간에 맞춰 정든 장소에 출근하고, 아침마다 영특한 아이와 인사하며, 주민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매달 자녀에게 용돈을 건네는, 어떤 책임에서야 인간은 비로소 삶의 의미를 느낀다. 그가 마지막 퇴근이었음을 인지하는 순간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는 나름대로 삶 자체를 완수하고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조선일보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11.29 "아들아 보고싶다" 번호 바꾼 청년에 매일 온 카톡... 그 후 벌어진 감동 사연
▲A씨가 B씨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스레드
전화번호를 바꾼 뒤 매일 낯선 사람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은 한 청년의 사연이 전해졌다. 메시지를 보낸 이는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어머니였다. 청년은 메시지를 받은 것을 계기로 이 가족과 인연이 됐다고 밝혀 온라인상에 감동을 주고 있다.
29일 여러 온라인커뮤니티에는 최근 스레드에 올라온 A씨 사연과 카카오톡 메시지 내용이 공유됐다.
A씨는 “전화번호를 바꾼 이후 매일 오전 9시 전에 카톡이 매번 울렸는데 아무말 하지 않고 기다렸다. 아들을 먼저 보내신 어머님 카톡이었다”며 “계속 지켜만 보기에도 불편한 상황이고 마음 한켠으로 힘드셨을거라 생각해서 조심스레 답변을 드렸다”고 했다.
공개된 카톡을 보면 A씨는 지난 21일 B씨에게 “아들 네가 보고싶은 날이구나”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았다. 이후로도 매일 “다시 네가 내 품으로 돌아왔으면 해” “다시 태어나도 내 아들이 되어주렴” “오늘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된장찌개 먹는다. 부럽지. 매일 꿈에 나와. 오늘도 나와주겠니” 등의 메시지를 받았다.
매일 오는 메시지를 읽어보기만 했던 A씨는 지난 26일 “사랑해 아들, 하늘에서 지켜봐다오”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고 용기를 내 답장을 보냈다.
그는 “네 어머니 잘 지내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살도 찌고 운동도 잘하고 있으니 끼니 거르지말고 마음아파하지 마세요. 최고의 엄마였어요. 저도 사랑해요 엄마”라고 남겼다.
약 40분 뒤 답장이 왔다. B씨는 “너무 놀라서 넋놓고 보고만 있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따뜻하게 말씀해주셔서 고맙다”며 “매번 이렇게 카톡 보내도 될까요? 정말 아들이 그리워서 미안한 부탁이지만 힘이 날 것 같다”고 했다.
A씨는 흔쾌히 응했고, B씨는 “괜찮으면 시간내서 밥이라도 먹으면 좋겠다. 보답이라도 하고 싶다. 덕분에 가족들이 한참을 울다 웃었다”고 제안했다.
▲A씨가 B씨 부부와 함께 찾은 납골당./스레드
인천에 거주중이라는 A씨는 다음날 경기 부천에서 B씨 부부를 만났다며 후기를 남겼다. 수도권에 눈폭탄이 쏟아졌던 27일이었다.
그는 “눈이 많이 와서 약속 시간보다 일찍 만나 뵙고 왔다”며 “어머님이 아버님과 같이 오셔서 만나자마자 안아주셨다”고 운을 뗐다.
이어 “아드님이 생전 사용했던 전화번호가 지금 제가 사용하고 있는 전화번호와 일치해서 매번 저한테 카톡을 보내셨던 것 같다”며 “아드님은 두달 전 사고로 돌아가셨다더라”고 했다.
B씨 부부와 함께 납골당에 다녀온 뒤 함께 식사를 했다는 A씨는 “두분이 아들이랑 체구는 다르지만 웃는 게 비슷하다며 많이 웃고 우시더라”며 “먼길 와줘서 고맙다고, 시간 내줘서 고맙다고 5분간 서로 부둥켜 안고 운 것 같다. 사소한 인연으로 어머님 아버님이 생겼다”고 했다.
이 사연은 수만 네티즌들의 공감을 받으며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퍼졌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좋은 일 하셨다” “감동적이다” “따뜻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등의 반응과 함께 B씨 부부에 대한 위로가 줄이었다.
이후 A씨는 B씨의 후기도 함께 전했다. B씨는 “시간이 지나 어느 덧 겨울이다. 우리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며 “(아들이) 한창 멋을 내고 이제야 세상을 알아갈 단계에서 안타깝게 먼저 천국을 구경하게 돼 엄마의 심정이 많이 힘들고 지친다”고 했다.
이어 “A씨가 많이 격려해주고 도움을 줬다”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를 응원해주고 걱정해주며 따뜻한 말을 해주셔서 놀랐다. 올 겨울이 더 따뜻하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자아 기자
#餘談/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