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정훈 칼럼] 2024.01.13 ‘이재명 헬기’는 왜 성남의료원으로 가지 않았나 - 12.28 제2, 제3의 한덕수가 계속 나오면
[박정훈 칼럼] 조선일보 논설실장 2024

01.13 ‘이재명 헬기’는 왜 성남의료원으로 가지 않았나
성남 의사회가 물었다
“본인도 안 가면서
누구더러 지방의
공공 병원을
이용하란 거냐”
사태의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다

▲지난 2일 부산대 벙원을 출발해 서울 용산구 노들섬에 도착한 소방헬기에서 이재명 대표가 내려지고 있다. 이 대표는 대기중이던 구급차로 갈아타고 서울대 병원으로 향했다. /뉴시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헬기 이송에 쏟아진 지역 의사회 비판 중에서도 눈길 끈 것이 성남시 의사회의 성명이었다. 성남 의사회는 이 대표에게 “왜 성남시의료원으로 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민주당 설명대로 ‘연고지 이송’이 목적이라면 이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 만든 성남의료원이야말로 가장 연고 깊은 병원이란 뜻이었다.
3900억원을 들여 4년 전 개원한 이 병원은 이 대표가 “나의 정체성이자 기반”이라며 애착을 감추지 않았던 곳이다. 최신 장비와 헬기 계류장까지 갖춘 대학 병원급 시설이지만 이 대표는 그곳으로 가자고 하지 않았다. 성남 의사회는 “본인도 이용하지 않는데 대체 누구더러 이용하라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성남의료원은 ‘성남시장 이재명’의 상징이자 그가 정치에 입문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변호사 시절 의료원 설립 조례가 성남시 의회에서 부결되자 의사당에 난입해 항의했고 이 일로 수배까지 됐다. 경찰을 피해 다니던 중 자신이 시장이 되어 짓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공공 의료원 설립을 ‘1호 공약’으로 내걸고 2010년 성남시장에 선출되자 시 예산을 투입해 공사에 착수했다. 성남의료원은 그가 경기지사에 당선된 지 2년 뒤 완공됐다. 그는 “시민이 만든 시의료원이 공공 의료의 역사를 새로 썼다”며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개원 후 실적은 참혹했다. 509개 병상을 갖춘 대형 병원이었지만 입원실의 73%가 비었고, 수술 건수는 하루 5.7건꼴에 불과했다. 매년 400억~500억원씩 적자를 냈고, 의사들이 수십 명씩 떠났다. 의사를 못 구해 정원의 30%를 못 채울 지경이었다. 지역 주민은 물론 내부 직원조차 병원을 신뢰하지 않았다. 의료원 직원 대상 조사에서 ‘가족·지인에게 치료받도록 적극 권장하겠다’는 응답은 8%뿐이었다.
이 대표 가족도 신뢰하지 않는 듯 보였다. 2021년 말 심야에 낙상 사고를 당한 이 대표 아내 김혜경씨가 간 곳은 분당서울대병원 응급실이었다. 봉합 수술도 성남의료원 아닌 모(某) 성형외과에서 받았다. 이 대표 장남은 분당 자택에서 50여km나 떨어진 고양시 명지병원에 입원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24일간 단식 끝에 이 대표가 입원한 곳도 ‘운동권 병원’으로 불리는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이었다. 창립자조차 기피하는 병원이 성공할 리 없었다. 작년 말 성남시는 의료원 직영을 포기하고 다른 대학 병원에 위탁 관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재명식 공공 의료가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서울대병원 이송에 대한 비판이 일자 이 대표 측은 가족이 간병하기 편한 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신적 지지를 해줄 가족의 간호가 절실했다”고 했다. 이 해명은 설득력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으로선 멀리 떨어진 부산대병원보다 집 근처 가까운 병원을 선호하는 게 당연했다.
현재 이 대표와 가족이 거주하는 곳은 인천시 계양구 아파트다. 성남시 분당에서 살다가 재작년 보궐선거에 출마하며 인천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 대표 자택에서 가까운 인천시 남동구엔 가천대 길병원이 있다. 2014년 국내 처음으로 문을 연 권역 외상 센터 1호 병원이자, 복지부 평가에서 해마다 A 등급을 놓치지 않는 중증 응급 의료의 명가(名家)다. 지난해 평가 때도 대부분 항목에서 최고점을 받으며 전국 응급 의료 기관 40곳 중 1위에 올랐다. 인천엔 인하대병원도 있다. 이곳 응급 센터 역시 2017년, 2020년 전국 1위를 기록하는 등 7년 연속 최상위 A 등급을 받았다.
가까운 곳에 있는 최고 수준 병원들을 놔두고 이 대표는 서울 종로구의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서울대병원은 국가가 지정한 권역 외상 센터가 아니다. 성남의료원·길병원·인하대병원처럼 활용 가능한 헬기 계류장도 없어 이 대표를 실은 헬기는 한강 노들섬에 착륙해야 했다. 이대표는 헬기에서 내려 구급차로 옮겨 타면서까지 서울대병원행(行)을 고집했다. 이 대표 측근인 정청래 의원의 설명이 차라리 솔직했다. 그는 “(수술을) 잘하는 곳에서 해야 할 것”이라 했다. 지방 의사 실력이 서울만 못하다는 뜻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국회에서 민주당은 지역 의사법, 공공 의대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 대선 때 이 대표가 ‘지역 공공 의료’ 강화를 핵심 공약으로 제시한 데 따른 것이다. 이 대표는 정부·지자체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 병원을 전국에 70개 지어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 필요가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의료 서비스의 지역화·공공화를 주장하는 이 대표가 부산의 지역 의료 체계를 거부하고, 성남의 공공 의료 서비스를 기피했다. “본인도 안 가면서 누구더러 이용하라는 거냐”는 성남 의사회의 질문이 이번 사태의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01.27 우리가 알던 ‘그 윤석열’
아무리 불리해도
피하는 일 없이
보편적 가치 편에서
거악에 맞서던
승부사 윤석열은
지금 어디 있나

▲2022년 2월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서울 광진구에서 이준석(왼쪽)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오른쪽)의 손을 잡고 '원팀' 유세를 벌이고 있다./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용장(勇將)형 리더다. 잔 계산이나 좌고우면 하지 않고 정면 승부하는 용맹함이 돋보이는 스타일이다. 그가 일약 국민적 스타가 되고 검찰총장을 거쳐 단숨에 정권까지 거머쥔 데는 그의 승부사 기질 덕이 컸다. 위기가 닥쳐와도 타협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직선으로 돌파해 판세를 뒤집곤 했다.
그는 싸우되 큰 싸움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맞서 싸운 상대는 당대의 대통령, 권력 실세처럼 하나같이 ‘센 놈’들이었다. 그는 박근혜 정권 심기를 거슬러가며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해 3년간 지방 한직을 전전했다. 앞날을 가늠하기 힘든 처지였지만 검찰 고위층이 늘어선 국감장에 나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국민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슬 퍼런 정권 앞에서도 한 치 비겁함이 없었다.
그는 문재인 정권과도 정면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최고 실세였던 조국 법무장관을 수사해 강남 좌파의 위선적 민낯을 세상에 알렸다. 청와대가 총동원된 울산 선거 개입, 대통령의 한마디로 강행된 탈원전 경제성 조작도 눈감지 않았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의 무모한 싸움처럼 보였지만 그는 온갖 탄압을 버텨내며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가 문 정권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은 이기는 길을 갔기 때문이었다. 공정과 상식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무기로 싸웠기 때문에 그에겐 힘이 있었다. 정권 아닌 법치, 진영 아닌 정의의 편에 선 덕분에 국민을 우군으로 삼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정권교체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건곤일척의 대선 무대에 올라갔다. 정치 초보답게 실수도 잦고 작은 전투에선 무수히 졌지만 타고난 승부사 기질은 큰 선거 판에서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그가 이준석을 끌어안고 안철수와 손잡으며 반문(反文) 대연합을 펼친 장면은 지난 대선의 최고 하이라이트였다. 그리고 정권 교체를 이루어 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큰 승부를 주저하지 않았다. 취임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복원했으며, 빗발치는 비판을 뚫고 한일 관계 정상화를 이끌어냈다. 친중·친북 쪽으로 일탈했던 국가 진로를 정상 궤도로 되돌린 거대한 외교 승부수였다. 그 와중에 불거진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는 친일 프레임에 말려들 수 있는 폭탄 같은 이슈였지만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온갖 괴담을 퍼트리던 민주당이 지금은 오염수의 ‘오’자도 꺼내지 않으니 그가 옳았음이 증명된 셈이었다.
그는 역대 정권이 겁내며 피해온 노동 기득권과의 일대 혈전도 벌였다. 대한민국 최강의 투쟁 집단으로 군림하는 민노총의 불법·폭력에 무관용 원칙 대응으로 맞섰고, 귀족 노조가 수십 년간 감춰오던 회계 장부도 공개시켰다. ‘건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건설 범죄꾼 수천 명을 잡아들이면서 돈 뜯고 행패 부리는 공사 현장 관행을 퇴출시켰다. 윤 정권의 공과를 따지긴 아직 이르지만 이런 성과들은 분명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승부의 스케일이 작아졌다. 가치보다 정파적 이익, 대의보다 정치 공학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국민이 이것을 실감한 계기가 지난 3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였을 것이다. 자기 사람을 당 대표에 앉히려 나경원을 끌어내리고 안철수에게 “방해꾼이자 적”이란 이례적 메시지를 날렸다. 대통령이 여당 인사에 관여할 순 있지만 그 방식이 너무도 거칠었다.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았다. 대통령이 내부의 적과 싸우는 모습은 거악(巨惡)에 맞서 큰 싸움을 벌이던 승부사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검사 일색의 편중 인사, 국민과의 소통 부재 등이 쌓여기면서 윤 대통령에겐 기득권의 색채가 더해져 갔다.
김건희 여사 논란에서 그는 더욱 작아 보인다. 그토록 서릿발 같던 윤 대통령이 이 문제 앞에선 원칙을 잃고 표류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김 여사가 함정 공작의 피해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많은 국민이 김 여사의 부적절한 처신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 뇌물에 가까운 고가 명품을 받았는지에 대해 대통령실은 설명하지 못한다. 명품 백을 국고에 귀속시켰고, “돌려주면 오히려 국고 횡령”이라는 해명 같지 않은 해명만 늘어놓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런 요령부득 논리 뒤에 숨어 김 여사 지키기에 몰두하는 듯 보인다.
윤 대통령은 올해 신년 회견도 생략했다. 대신 공영방송 대담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만약 김 여사 관련 질문이 부담스러워 각본 없는 회견장에 서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피하는 법 없던 ‘윤석열다움’과 거리가 멀다. 김 여사 문제 때문에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사퇴시키려 한 것이 사실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과거의 윤석열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상황은 아연하기만 하다. 보편적 가치의 편에 서서 위기를 직진 돌파하던 큰 승부사 윤석열은 어디 갔나. 우리가 알던 ‘그 윤석열’은 어디에 있나.⊙
02.17 임종석은 어떻게 김정은 돈지갑을 지켜주었나
우리 국민 아닌
김정은 편에 서서
국군포로 배상을
훼방 놓은 사람이
총선에 나가
국민의 대표가
되겠다 한다

▲총선 출마를 선언한 임종석 전 실장의 서울 성동구 선거 사무소 건물에 그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뉴스1
2020년 7월 서울중앙지법에서 기념비적 판결이 나왔다. 북한 김씨 정권이 저지른 반인권 만행의 책임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원고는 6·25 때 북에 억류돼 강제 노역에 시달린 2명의 탈북 국군 포로였다. 이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재판부는 “‘피고 김정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공동으로 4200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4200만원은 ‘김일성·김정일의 상속인’인 김정은에 대해 민법상 상속 비율에 따라 산정한 금액이었다. 우리의 사법 체계로 북한과 김씨 일족의 불법 행위를 단죄한 것이었다.
사법사(史)에 남을 획기적 판결이었지만 과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북한과 김정은을 소송 당사자로 우리 법정에 세울 수 있는지부터 논란이었다. 원고 측은 북한이 ‘민법상 비법인 사단’에 해당된다는 법리를 짰고 재판부도 이를 인정했다. 북한에 소송 서류를 어떻게 보낼 것이냐도 문제였다. 재판부는 법원 홈페이지 공지로 송달 효과를 내는 ‘공시 송달’로 처리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피고인 출석 없는 궐석 재판이 진행됐고 4년 만에 결국 원고 승소 판결이 내려질 수 있었다.
남은 문제는 배상금을 어떻게 받아 내냐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이것도 해결해주었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005년 설립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이란 단체가 있다. 경문협은 북한을 대리해 방송국 등에서 저작권료를 징수한 뒤 북에 송금하고 있는데, 대북 제재에 막혀 못 보낸 23억원이 법원 공탁금으로 쌓여 있었다. 재판부는 이 돈을 압류해 배상금으로 주라는 추심 명령을 내렸다. 사법적 효력이 북한에 미치지 못하는 맹점을 깔끔하게 풀어준 것이다.
이 판결은 북에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완벽한 판례를 확립했다. 국군 포로에 이어 6·25 납북자와 연평해전 유족들도 잇따라 소송을 제기해 모두 승소했다. 판결문 구조가 2020년 첫 선고와 똑같았다. 이렇게 법원이 경문협 공탁금으로 지급하라고 선고한 배상액이 지금까지 총 9억여 원이다. 북의 만행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희생자들이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길이 열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닥쳤다. 돈줄을 쥔 경문협이 지급을 거부한 것이다. 경문협은 변호사를 선임해 법정 공방을 벌이며 돈을 내줄 수 없다고 맞섰다. 그 이유가 북한의 선전 논리와 유사했다. 저작권의 소유 주체인 조선중앙방송위가 독립 기구이기 때문에 저작권료도 북한 정부 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치 북한이 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하기라도 하는 양 해괴한 논리를 폈다. 나라 전체가 김씨의 사유물인 북한에서 노동당의 부속품 아닌 기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경문협은 껍데기뿐인 ‘사유제’ 법 조문까지 들고 나왔다. 북 헌법 제24조 등에 ‘개인이 사유 재산을 소유할 수 있다’고 규정된 것을 근거로, 저작권료가 북한 방송국의 프로그램 제작자 개인 소유라고 주장했다. 노동당이 지배하는 국영 방송 선전물이 어떻게 사유 재산이 될 수 있나. 북한이 김정은 1인 지배 국가임을 세상이 다 아는데도 경문협은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를 내세워 법적 다툼을 벌였다. 수십 년 강제 노역 당한 국군 포로의 인권보다 김정은 정권의 재산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궤변의 정점에 있는 것이 임종석 전 실장이었다. 경문협은 노무현 정권 시절 북한에 달러를 보내주려 임종석이 주도해 만든 단체다. 그가 북한 당국에 저작권법 체계를 가르쳐 가며 대리인 계약을 맺은 뒤 설립했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갔던 시기 등을 빼고는 20년 가까이 이사장을 맡아 경문협 활동을 관장해왔다. 경문협이 국군 포로, 납북자, 연평해전 유족에 대한 배상금 지급을 거부한 것도 그가 이사장일 때였다. 임종석이 최종 결정권자란 사실은 누구 눈에도 분명했다.
놀라운 것은 유사한 법리 구조의 강제 징용자 배상에 대해선 그가 정반대 입장을 취한 점이었다. 문재인 청와대의 비서실장 시절, 일본이 한국 법원의 배상 판결에 반발하자 그는 “매우 부적절하다”며 일본에 돈을 내놓으라고 촉구했다.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배상’을 추진하자 “굴욕적” “깊은 모멸감” 운운하며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인권 유린에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해선 김정은 돈을 못 가져가게 끝까지 훼방 놓았다. 엊그제 열린 항소심 선고에서도 경문협의 거부에 막혀 국군 포로 배상이 끝내 좌절됐다. 사실상 임종석이 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북한의 이익을 대변했던 사람이 총선이 다가오자 “정권 심판”을 외치며 선거에 나가겠다 한다. 임종석의 출마를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졌지만 이 문제 하나만으로도 그는 자격이 없다. 그는 국군 포로와 납북 피해자 아닌 김정은 편에 섰던 장본인이다. 우리 국민의 반대편에 서서 김정은 돈지갑을 지켜준 사람이 국민의 대표가 되겠다 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
03.02 패권 원조 친문이 맛본 ‘이재명의 맛’
친문 패권이 저물자
친명 패권이 등장했다…
계파 싸움엔 도가 튼
패권 원조 친문에게도
이재명의 거친 폭주는
한 번도 경험 못 한
독한 맛일 것이다
“차은우보다 이재명”을 외친 민주당 안귀령 부대변인의 이른바 ‘아부 공천’엔 원조가 있다. 문재인 정권 3년 차이던 2019년, 박경미 당시 민주당 의원이 ‘박경미가 문재인 대통령께’란 유튜브 영상을 올렸다. 그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피아노 연주하며 “호수에 비치는 달빛의 은은함” 어쩌고 하더니 “달빛 소나타가 문 대통령의 성정(性情)을 닮았다”고 했다. “문 정부의 피날레는 월광 소나타의 화려한 3악장처럼 뜨거운 감동을 남길 것”이라고도 했다. 보는 사람 손발이 오그라들게 했다.
몇 달 뒤 그는 민주당 공천을 받아 서울 서초을에 출마했다. 선거엔 떨어졌지만 낙선의 아픔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청와대 교육비서관에 발탁됐고, 수석 대변인으로 영전해 정권 임기 말까지 자리를 지켰다. 비슷한 시기 박범계 의원이 대국민 사과를 한 문 대통령을 향해 “아 대통령님!”이라며 안타까워하는 글을 올린 뒤 닷새 만에 법무장관에 임명된 일도 있었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그렇듯, 문 정부 시절에도 낯 뜨거운 충성 맹세가 비일비재했다. ‘문(文)비어천가’란 말이 유행할 지경이었다.
친명(親明)의 비주류 찍어내기가 논란을 부르고 있지만 이것의 원조도 친문이다. 2020년 총선 당시 금태섭 민주당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공수처 설립에 반대하고 ‘조국 사태’를 비판하면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탓이었다. 친문 행동대원 김남국·정봉주가 금태섭을 잡겠다며 달려들고 ‘문빠’ 홍위병들이 집중포화를 퍼부은 끝에 그는 경선에서 졌다. 금태섭은 당 징계까지 얻어맞고 결국 탈당하고 말았다. 지금 벌어지는 비명(非明)의 연쇄 탈당과 스토리 구조가 다르지 않았다.
4년 전 총선 때도 사당화(私黨化) 논란이 있었다. 청와대 참모를 비롯한 친문 인사가 무더기로 공천받아 민주당과 국회를 장악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윤건영, 소통수석 윤영찬, 대변인 고민정 등이 그때 금배지를 단 ‘문재인의 사람’들이다. 염치없게도 울산 선거 개입 사건에 연루된 황운하까지 공천장을 거머쥐었다. 친문들이 대거 단수 공천되거나 좋은 지역구를 차지하는 바람에 ‘친문 양지, 비문 험지’란 말이 나왔다.
당시 친문은 민주당뿐 아니라 국가 권력마저 사유화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국정 운영에서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고 소득 주도 성장, 탈원전 같은 정파적 정책을 힘으로 밀어붙였다.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청와대가 선거에 개입하고, 대통령 심복이란 이유로 내로남불 조국을 법무장관에 기용했다. 친명이 독단적 당 운영으로 민주당을 분열시켰다면, 친문은 편 가르기 진영 정치로 나라를 두 쪽으로 갈라 놓았다. 자기 세력, 자기 진영의 이익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갈등을 조장한 점에서 두 파벌은 오십보백보다.
‘친문의 황태자’ 임종석이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억울함을 호소하며 반발했다. 문 정권 때 그는 권력 사유화를 주도하고 울산 선거 개입의 사령탑으로 지목받은 가해 세력의 핵심이었다. 고민정 의원은 공천 파행에 항의해 최고위원을 사퇴했지만 그 역시 문 정권의 국정 폭주에 앞장서고 박원순 성폭력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우긴 장본인이었다. 공천 탈락 위기에 몰린 윤영찬 의원 또한 비우호적 기사를 올렸다는 이유로 “카카오, 들어오라고 해”라고 호통치며 비판 언론을 억압한 정권의 수비대장이었다.
탈당한 이원욱 의원은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을 “주인 무는 개”에 비유하며 공격했고, 김종민 의원은 조국의 비리를 방어해주는 호위 무사로 활약했다. 컷오프당한 홍영표 의원은 원내대표 시절 공수처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법을 밀어붙였고, 설훈 의원은 김의겸의 재개발 투기와 윤미향의 위안부 할머니 돈 편취를 싸고돈 사람이다.
그렇게 세몰이 하며 5년간 권력을 휘두른 친문이 비주류로 전락해 이재명을 만났다. 계파 싸움엔 도가 튼 친문에게도 이 대표의 거친 폭주는 한 번도 경험 못 한 ‘독한 맛’일 것이다. 이 대표는 가는 곳마다 적을 만드는 난세(亂世)형 정치가다. 그는 친형 가족과 싸워 원수가 됐고 수많은 ‘이재명 저격수’를 출현시켰다.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 유동규, 경기지사 비서실 7급 출신 조명현, 성남시장 수행비서 출신 김진성 등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잇따라 등을 돌려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쏟아내고 있다. 측근 5명이 연달아 숨을 거둔 것도 예사롭지 않다. 계파 패권주의의 원조인 친문이 상상도 못 한 강적을 만나 속수무책 당하고 있다.
지금 벌어지는 친명·친문의 전쟁에서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양쪽 다 파벌 이익에 목숨 건 비정상 집단이니 누굴 동정할 필요도 없다. 친문 패권이 저물자 한층 더 센 친명 패권이 등장했다. 대를 이어 계파 패권주의가 판치는 민주당은 더 이상 고쳐 쓰기 힘든 정당이 됐다.⊙
03.16 아직 ‘조국의 강’, 정의는 언제 실현되나
2심 유죄로
더 도망갈 곳이 없자
“非법률 투쟁”을 외치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조국당’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법 불복이다
21대 국회는 한국 정치에 새로운 표준을 확립시켰다. 아무리 범죄자라도 우기고 버티면 된다는 것이다. 비리가 밝혀져도, 거짓말이 드러나도, 심지어 실형 판결을 받아도 검찰 탓, 정권 탓으로 돌리는 낯 두꺼움의 처세술, ‘후흑(厚黑)’의 정치가 여의도에 자리 잡았다. 파렴치 범죄를 진영 논리로 눙치는 ‘사법의 정치화’가 뉴 노멀이 되어 버렸다.
위안부 할머니 돈을 횡령한 혐의의 윤미향 의원은 18개월 징역형에도 4년 임기를 채워가며 반일·친북 활동을 계속 중이다. 조국 일가 스펙 조작의 공범 최강욱 의원은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이 박탈될 때까지 3년 4개월을 버텼고, 횡령·배임·부정 채용의 비리 백화점 이상직 의원은 감옥 안에서도 2년간 의원 신분을 누렸다. 3년 8개월을 채운 뒤 대법원 선고 직전 사퇴해 비례 후순위에 잔여 임기를 넘긴 정의당 이은주 의원 사례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황운하 의원이다. 4년 전 총선 때 그는 울산 선거 개입 사건의 핵심 피고인으로 재판에 회부됐지만 기소 이틀 뒤 출마를 강행했다. 범죄 혐의를 받는 현직 공직자가 피고인 신분으로 선거에 직행하는 악선례를 만들었다. 3년 10개월 만에 나온 1심 판결에서 황 의원은 3년형을 받았으나 이미 임기를 다 채운 뒤였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조국혁신당으로 옮겨 비례대표 신청을 했다. 당선된다면 대법원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또 2~3년간 의원 특권이 계속된다. 설사 유죄 확정 판결이 나와도 그가 순순히 물러설 것 같진 않다. 아마도 그는 끝까지 검찰 독재를 탓하며 정권 투쟁을 외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기 진영 지지를 얻어 정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황 의원뿐 아니다. 조국혁신당엔 사법 소추에 쫓기는 범죄 혐의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윤석열 찍어내기’로 공수처 수사를 받는 박은정 전 부장검사, ‘김학의 출국 금지’로 재판 중인 차규근 전 법무부 본부장과 이규원 부부장 검사 등이 입당해 비례 의원 자리를 노리고 있다. 범죄에 연루된 공직자가 선거에 나가 사법 제재에 맞서는 ‘황운하 모델’을 답습하려는 것이다. 정당이 제2, 제3의 황운하를 꿈꾸는 피의자들의 집합소가 됐다.
조국혁신당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법 불복과 다름없다. 조국 대표는 지난해 항소심 선고 한 달을 앞두고 돌연 “비(非)법률적 방식의 명예 회복”을 선언했다. 1심에 이어 2심 유죄 선고가 유력해지자 아예 판을 뒤집어 버린 것이었다. 그는 법정 밖으로 나가 “문화적·사회적·정치적 방식으로” 싸우겠다 했고 석 달 만에 당을 만들었다. 창당이 자기 방패막이용임을 자인한 셈이었다.
조 대표는 당 강령에 ‘계층 이동 탄력성’과 ‘입시 기회 균등’을 내걸었다.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가 용이 될 필요는 없다”면서도 자기 자녀는 불법·반칙으로 명문대에 보낸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공약이었다. “공정한 수사”를 내세우며 ‘한동훈 특검법’을 발의하겠다고도 했다. 아무리 복수심에 불타도, 문 정권 시절 친문 인사 감찰을 무마시키고 자신에 대한 수사도 방해했던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다. 온 국민을 아연케 했던 그의 ‘내로남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조국 사태’의 원인을 검찰의 편파·과잉 수사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와 가족이 저지른 온갖 입시 비리 중 검찰이 먼저 캐낸 것은 하나도 없다. 사태를 촉발시킨 ‘부산대 의전원 장학금 비리’는 내부 관계자 제보를 받은 한국일보의 특종 보도로 뇌관이 당겨졌다. 동양대 표창장, 단국대 논문, 공주대·KIST·서울대 인턴 등 ‘7대 스펙’ 위조도 기자들과 의원 보좌관 등이 협업해 파헤친 사실을 검찰이 이어받아 수사한 것이다. 이것을 검찰 독재와 엮는 것은 진실을 위해 용기 낸 수많은 제보자들과 증인, 조각 정보를 퍼즐 꿰듯 맞춰가며 추적한 기자들을 모독하는 일이다.
우리는 준엄한 법원 판결이 나오면 조국이 파놓은 ‘불공정의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혐의를 인정한 적이 없다. 의혹이 제기되면 일단 부인하고, 증거가 나오면 묵비권으로 맞서는 ‘법꾸라지’ 전략으로 일관하더니 2심까지 유죄가 나와 더 도망갈 곳이 없어지자 재판정 밖으로 뛰쳐나가 정치 투쟁에 나섰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던 조국 일가는 법치를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로 살고 있다. 그의 딸은 유튜브 셀렙으로 변신해 유명인 행세를 하고 있고, 그의 아내는 옥중 수기를 펴내 출판 장사에 나섰다. 50억원대 자산가이자 인세 수입으로만 10억원 가까이 번 조 대표는 “수감된 아내의 병원비·변호사비가 걱정”이라며 영치금 수억원을 후원받았다. 반성하며 자숙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국민에게 이것은 조국 사태의 종결법과 거리가 멀다. ‘조국의 강’은 여전히 우리 앞에 있고, 정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03.30 윤 대통령의 선택
선거 패배라는
예상된 위기 앞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정해진 결말을 맞는다면
대통령도 힘들고
피해 입을 국민은
더 불행해질 것

▲총선 주요 격전지인 한강벨트,낙동강벨트의 여야 지지율
4·10 총선 판세는 야당 쪽으로 기우는 흐름이 뚜렷하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가 ‘여당 참패, 야당 압승’을 예고하고 있다. 역대 선거를 보면 투표 열흘 전쯤의 판세가 뒤바뀐 경우는 드물었다. 이변이 없는 한 지금 추세가 선거일까지 갈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민주당은 ‘153석+α’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180석을 얻었던 4년 전 총선 기록을 넘어서고 야권 전체론 ‘200석+α’가 가능하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야당 후보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과 내로남불 재산 증식 논란이 불거지고 있지만 이것이 전체 판세에 얼마나 영향 미칠지는 미지수다. 민주당은 180석을 갖고 21대 국회 내내 입법 폭주를 서슴지 않았다. 그와 유사한, 아니 지난 4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질 여소야대가 현실로 닥쳐왔다는 얘기다.
새 의회 권력의 주인공이 될 사람은 이재명과 조국이다. 두 사람 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찬 강성 좌파다. 이들이 주도할 야당 압승의 국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더 강성화된 거대 야권이 정부 정책을 제동 걸고, 각종 포퓰리즘 법안들을 대거 밀어붙일 것이다. 노동·연금·교육 개혁을 비롯한 윤 정부의 국정 과제는 입법 장벽에 가로막혀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임기가 3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레임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사법 정의가 더 지연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한국적 사법 현실에서 판사들이 정치 지형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이재명 대표의 대장동·백현동·위증 재판이 더 늘어지고, 조국 사건의 대법원 선고가 늦어질지 모른다.
이미 야당은 다음 국회에서 무얼 할 것인지 ‘투쟁 리스트’를 작성해 놓았다. 첫 번째가 김건희 여사 특검이다. 거부권이 행사된 주가조작 사건에다 양평고속도로·디올백 이슈까지 얹어 종합판 특검법을 추진하겠다 한다. 이태원·채상병 쌍특검도 꺼내 들었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야권은 선거 승리의 동력을 몰아 대대적 공세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 ‘촛불 정국’을 조성해 정권의 숨통을 조이려 할 것이다.
조국은 윤 정권을 ‘데드 덕(죽은 오리)’으로 만드는 게 자신의 정치적 목표라 했다. “3년도 길다”며 윤 대통령을 중도 퇴진시키는 게 당을 만든 이유라 했다. 만약 야권이 200석 이상 확보한다면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다. 민주당은 벌써부터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있다. 탄핵 요건에 해당되지 않아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될 게 뻔하다는 지적에 조국은 ‘개헌’까지 들고 나왔다.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하면서 부칙에 현직 대통령 임기 단축 조항을 넣자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어느 한 사람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그러나 그 중심에 윤 대통령 문제가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어떤 여론조사에서도 ‘정권 심판론’이 ‘정권 안정론’을 압도하고 있다. 야당이 공천 갈등과 분당(分黨), 부동산 논란 등을 빚으며 그토록 자살골을 넣어도 판세는 요지부동이다. 한때 정권 심판론이 수그러드나 싶었지만 이종섭·황상무 이슈가 터지며 또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잠시 잊었던 ‘대통령 리스크’를 다시 떠올린 것이다.
부산에 출마한 한 여당 후보는 “시민들이 대통령에게 화가 나있다”고 전했다. 이번 총선을 ‘정권에 회초리 드는’ 선거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윤 대통령의 용장(勇將)형 리더십엔 양면성이 있다. 흔들리던 국가 정체성을 바로잡고 국정 진로를 정상화하는데 성과를 냈지만, 타협 없는 정면 돌파 스타일이 독선·불통으로 비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피의자 신분인 전직 장관을 호주 대사로 임명해 출국시키고, 참모의 ‘회칼’ 망언에 즉각 대응하지 않은 것 등이 중도층의 화를 돋우었다. 윤 대통령으로선 억울한 점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많은 국민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이 예상된 위기 앞에서 윤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선거 참패의 예정된 결과를 맞이하는 것이다. 정치는 시끄럽고 국정은 곳곳에서 차질을 빚을 것이다. 미래를 좌우할 중차대한 국가 과제들은 표류할 것이다. 남은 3년 간 윤 대통령도 힘들겠지만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될 국민이 더 불행하다.
다른 한편으로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선택이 있을 수 있다. 유권자가 회초리 드는 이유인 일방통행식 국정 스타일을 바꾸고 국민 앞에 고개 숙이는 것이다. 늦긴 했지만 이종섭 대사 경질은 대통령의 변화를 알리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의업(醫業) 사태의 불부터 꺼야 한다. ‘2000명 증원’ 숫자를 고집하지 말고 대승적으로 나서 대화의 물꼬를 튼다면 국민에게 던지는 메시지 효과가 클 것이다. 윤 대통령의 진심이 전달된다면 국민의 화도 누그러지고 꺼내 들었던 회초리도 내려놓을 수 있다.⊙
04.06 유동규는 왜 ‘목숨 걸고’ 법정에 선다 했나
평범한 증인들에겐
거대 야당 권력과
맞서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공포다...
선거가 사법마저
좌우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작년 12월 트럭 추돌 사고를 당한 유동규 씨가 병원에 입원했다. 유씨는 이때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나는 자살하지 않는다"고 썼다./유재일TV 갈무리·뉴스1
선거가 다가오며 법원 주변에서 온갖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희한한 것이 이화영 전 경기 부지사 재판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방북 비용을 쌍방울에 대납토록 했다는 혐의를 받는 그는 지난해 6월 검찰 조사에서 이 대표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 “이재명 당시 도지사에게 ‘북한이 방북 의전 비용을 요구하는데 쌍방울 회장이 비즈니스적으로 처리할 거다’라고 보고했고, 이 지사가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 대표의 ‘제3자 뇌물죄’를 입증하는 진술이었다.
그러자 민주당의 전방위 압박이 시작됐다. 법무장관 출신 박범계 의원 등은 “검찰이 이화영을 회유했다”고 주장하며 수원지검을 찾아 연좌 시위를 벌였다. 민주당 의원들은 수감 중인 이화영의 특별 면회를 신청하고 아내·측근과도 접촉했다. 운동권 출신인 아내가 이화영을 접견해 “당에서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 “영웅이 될지 잡범이 될지 판단해라”며 설득한 사실이 드러났다. 재판정에 나온 남편을 향해 아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소리치는 전대미문의 장면까지 펼쳐졌다. 결국 이화영은 “검찰의 압박으로 허위 진술을 했다”며 말을 뒤집었다.
이후 이화영은 재판을 무력화하려는 사법 방해 전략으로 일관했다. 변호인들이 잇따라 사임하거나 법관 기피 신청을 내면서 재판을 몇 달씩 공전시켰다. 총선이 임박할수록 그의 태도는 더욱 당당해졌다. 장난치듯 소리 내 웃는가 하면 뻔한 사실도 막무가내로 부인하며 법정을 희화화했다. 자신이 직접 전결(專決)한 문서도 “모르겠다” 하고, 본인 휴대폰에서 나온 사진도 “저게 왜 내 전화기에 있냐”고 잡아떼는 식이었다. “정신 차리라”고 꾸짖었던 그의 아내가 퇴정하는 남편에게 “멋있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지경이었다.
정치가 사법을 방해하는 일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장동 사건의 핵심 증인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은 이재명 지지자들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법원에 나오면 이른바 ‘개딸(강성 친명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막말을 퍼붓고 시비 거는 일이 예사로 벌어진다. 며칠 전 재판에선 민주당 상징색인 파란색 외투 차림의 방청객이 그를 향해 고함을 치다가 퇴정당하기도 했다. 유동규는 판사에게 “차라리 감옥 가는 게 편할 수 있다”고 토로했다. “이재명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것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란 말까지 했다.
기자가 ‘목숨 걸고’의 의미를 묻자 그는 자신이 이재명 개인이 아닌 거대 야당과 맞서 싸우는 것 같다고 답했다. “언제라도 테러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엄청난 심리적 중압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지난 연말 트럭 추돌 사고를 당한 뒤 입원한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나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고 썼었다. 자기가 죽더라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님을 미리 밝혀 둔다는 뜻이었다. 또 다른 대장동 핵심인 남욱 변호사도 “어디서 칼이 날아올지 모른다”고 했다.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현실로 존재하는 실재(實在)적 공포일 것이다.
이재명 대표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이 법정에 나오면 변호인 대신 마이크를 잡고 직접 신문하는 일이 잦다. 전 성남시 과장, 산하 기관 직원, 국토부 공무원 등을 향해 그들의 증언이 잘못됐음을 추궁하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전직 성남도개공 사장에게 “왜 언론 플레이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따져 묻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의회 권력을 쥔 거대 야당 대표에 맞선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공포다. 이 대표의 위증 혐의를 뒷받침한 전 성남시장 수행 비서는 그와 마주 보는 것이 두렵다며 차단막으로 가린 채 증언하기도 했다. 선거가 끝나고 이 대표가 더 큰 권력을 거머쥔다면 이들이 느낄 압박이 어떨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21대 국회는 법적 정의를 정치로 뭉개는 ‘사법의 정치화’를 뉴 노멀로 만들었다. 범죄를 저질러도, 기소가 돼도, 심지어 유죄판결을 받아도 버티며 의원 임기를 채우는 것이 여의도의 일상이 됐다. 황운하 같은 의원은 3년형을 받고도 또 금배지를 달겠다며 당을 옮겨 당선 안정권에 순번을 올렸다. 수사 받는 박은정, 재판 받는 차규근 같은 친문(親文) 검사 출신도 당선이 확실시된다. 부동산 투기용 불법 대출로 수사 대상이 된 양문석, 천박한 역사관으로 여성을 비하한 김준혁 등 당장 그만둬야 마땅할 후보들도 며칠만 지나면 된다며 버티고 있다. 이들이 국회에 들어가면 또 의원 특권을 방패 삼아 사법 처벌을 피하려 할 것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7개 사건 10개 혐의 재판을 받는 이재명 대표가 차기 대권 후보가 되고, 2심 2년형을 받은 조국 대표가 차차기 대선에 나오는 일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정치가 사법을 오염시키고, 선거가 정의마저 좌우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04.20 지옥 문턱 5번, 이재명 최후의 ‘미션 임파서블’
윤 정권이 헛발질로 민심 이반을 자초하고 몰락에 빠진다면
3개 재판을 받는 피고인 이재명의 마지막 베팅이 성공할 수도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억세게 운이 좋다. 그토록 수많은 스캔들, 온갖 법적·도덕적 논란에 휘말렸어도 매번 궁지를 빠져나와 의회 권력의 정점까지 올랐으니 보통 운은 아니다. 이 대표의 상황 타개 능력은 가히 ‘미션 임파서블’ 급이다. 도저히 빠져나갈 곳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는 놀라운 괴력을 과시하곤 했다.
정치 입문 후 그에겐 대략 5번의 정치적 사망 위기가 찾아왔다. 첫 번째가 ‘형수 욕설’이다. 2014년 공개된 욕설 녹음 파일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남을 폭탄급 악재였으나 그는 “불행한 가족사”로 해명하며 궁지를 넘겼다. 두 번째는 2018년 경기지사 선거 때 ‘허위사실 공표’ 논란이다. TV 토론회에서 “형을 강제 입원 시키려 한 적 없다”는 취지의 거짓 발언을 해 2심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로 뒤집히는 바람에 죽다 살아났다. 당시 대법원 선고엔 대장동 주범 김만배와 연결된 권순일 대법관이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세 번째는 대장동 사건이다. 이 대표가 업자들에게 수천억원 부당이익을 안겨 주었다는 혐의가 2021년 대선 경선 때 제기됐다. ‘단군 이래 최대 비리’라는 의혹은 초대형 쓰나미로 비화됐지만 이 대표는 민주당 경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둬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네 번째는 이 대표 부부가 초밥·한우며 명절 선물, 일제 샴푸까지 경기도 법인카드로 긁은 사실이 비서 제보로 드러난 ‘법카 사건’이다. 대중 분노에 불 지른 민감한 이슈였지만 이 대표는 이번에도 살아남아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민주당 대표로 선출됐다.
작년 9월 당내 반란 표로 체포동의안이 덜컥 가결되면서 다섯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구속 영장이 발부된다면 정치 인생이 끝장 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영장 판사는 “위증 교사 혐의는 입증된 것으로 보인다”고 인정하면서도 영장 기각 결정을 내려 주었다. 이 대표로선 지옥 문턱까지 갔다 온 셈이었는데, 그는 이를 비명(非明) 제거의 기회로 반전시켜 민주당을 완벽한 ‘이재명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권이 잇단 실책과 자살골로 도와주면서 총선 압승의 날개까지 달게 됐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정치 체급을 높여온 이 대표에겐 이제 마지막 목표만 남았다. 대통령이 되는 일이다. 현재 정치 지형에서 차기 대권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이 대표임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는 거대 야당의 지배 주주이자 정치권 최강의 ‘개딸’ 팬덤을 보유했다. 윤석열 정권의 레임덕이 가속화될수록 정국 주도권은 의회 권력을 쥔 이 대표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총선이 여당 참패로 끝난 순간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그런데 그에겐 지금까지 어떤 고비보다 난도 높은 최종 관문이 남아 있다. 사법 리스크다. 현재 이 대표는 ①대장동·백현동 등 병합 사건 ②공직 선거법 위반 ③위증 교사 혐의로 3개 재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피선거권 박탈에 해당되는 유죄 확정 판결을 받는다면 그는 3년 뒤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법률적 관문을 뚫느냐에 이 대표의 대권 도전이 달린 상황이다.
3개 재판 중 ②선거법 위반과 ③위증 교사 사건은 몇 달 내 1심 선고가 나오고 3년 안에 대법원 판결까지 끝날 가능성이 높다. 법리가 간단하고 관련 증거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선거법 사건의 경우 이 대표가 고(故) 김문기 처장을 몰랐다고 말한 것 등이 거짓말이라는 증언들이 있고, 위증 교사도 그가 거짓 증언을 요구했다는 녹음 파일 물증이 확보돼 있다. 이 대표가 빠져나가기 쉽지 않은 구조다.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 대표가 펼칠 대응책은 뻔하다. 선고를 늦추는 지연 전술이다. 175명의 소속 의원들을 방탄 부대로 앞세워 재판부를 압박하면서 대선 전까지 최종 판결이 못 나오게 재판을 질질 끌려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끌어도 3년 내내 대법원 선고를 막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대표는 대선을 앞당기는 방법을 고려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중도 퇴진시켜 자신의 사법 리스크가 확정되기 전에 선거를 치르는 것이다. 야권이 벌써부터 탄핵이니 개헌 얘기를 띄우는 것은 조기 대선을 위한 밑밥 깔기 목적이라 봐야 한다. 이 대표로선 ‘박근혜 모델’, 즉 촛불·탄핵 정국을 일으켜 여론의 힘으로 하야시키는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난도 최상급인 이 전략이 성공하느냐는 결국 윤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윤 정권이 지금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국정 운영을 고수하며 국민 지지를 떨어트리는 것은 이 대표의 대권 플랜을 도와주는 일이다. 계속되는 헛발질로 민심 이반을 자초하고 지지층마저 등 돌리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7개 사건, 10개 혐의로 3개 재판을 받는 이 대표의 마지막 ‘미션 임파서블’이 성공할지도 모른다.⊙
05.04 경제학 새로 쓴다? 이재명 “현금 뿌려 성장”
경제학 이론은
전 국민 현금 지급이
바보 짓이라 가르친다...
이 당연한 원리를
모른다면 無知고
알고도 그런다면
경제 망칠 작정한 것

▲윤석열 대통령이 4월2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회담에서 이재명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이 대표는 이 자리에서도 '전 국민 25만원 지원'을 거듭 요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어려운 분 지원이 바람직하다"며 거절했다 뉴스1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전 국민 25만원’ 주장은 현대 경제학이 생긴 이래 최초의 실험적 제안이라 할 만하다. 부자,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현금을 지급해 내수를 촉진하고 경기를 부양하자는 것인데, 지금까지 이런 정책을 편 나라도 없고 성공한 나라는 더더욱 없다. 코로나 팬데믹 때 각국 정부가 긴급 지원금을 나눠준 적은 있지만 이는 대면 경제가 올 스톱 된 비상 국면에서 이루어진 예외적 응급 조치였다. 위기 아닌 평시 상황에서 모든 국민에게 소비 진작용 현금을 뿌린 나라는 없다.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경제학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일이다.
아예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겪던 시기, 현금 뿌려 장기 불황을 탈출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1999년 일본 정부는 15세 이하 자녀를 둔 3500만 명에게 2만엔권 상품권을 주었고, 2009년엔 전 국민에게 현금 1만2000~2만엔을 지급했다. 개인 손에 일일이 현금을 쥐여주고 ‘이래도 안 쓸래’라며 다그치는 정책이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사람들이 받은 돈을 저축하거나, 어차피 쓰려던 곳에 쓰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기대했던 추가 소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일본 경제는 중증 암 환자와도 같았다. 디플레이션을 동반하는 ‘유동성 함정’에 빠진 나머지 아무리 세금 깎고 공공 지출을 퍼붓고, 심지어 금리를 마이너스로 내려도 경제는 꿈쩍하지 않았다. 어떤 처방도 듣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 암 환자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민간 요법을 쓴 셈인데,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경제는 살리지도 못하고 나랏빚만 잔뜩 늘려놓은 채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 한국 경제가 일본처럼 극약 처방을 내려야 할 중증 위기는 아니다.
이 대표는 일본식 현금 지급을 주장하는 근거로 ‘승수(乘數) 효과’를 내세우고 있다. 정부 지출이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쓴 돈 이상의 부양 효과를 거둔다는 케인스 이론이다. 하지만 이 대표 생각과 달리 현금 지원의 승수 효과가 크지 않다는 사실이 코로나 때 입증됐다. 가구당 40만~100만원씩 지급한 2020년 1차 코로나 지원금의 효과를 KDI가 사후 분석해보니 총 14조원 중 소비로 이어진 것은 약 30%에 불과했다. 100원을 뿌려도 30원밖에 안 쓴 셈이다. 70원은 재정 낭비였다는 얘기다.
경제학 이론은 모든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현금 주는 정책이 바보 짓이라고 가르친다. 일정 소득 이상의 중상류층은 돈 준다고 추가 소비를 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빈곤층은 다르다. 궁핍한 계층은 100원이 생기면 생필품도 사고, 못 하던 외식도 하면서 100원을 다 쓸 것이다. 경제학은 이를 ‘한계 소비 성향’이 높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정부가 현금을 나눠준다면 소비 탄력성이 높은 저소득층에게 주는 게 효과적이다. 전 국민 아닌 취약 계층 위주의 선별 지원이 정답이란 뜻이다.
게다가 한국 같은 성숙 단계 경제에선 정부 지출이 도리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구축(crowding out) 효과’ 이론이다. 현금 뿌리려 나랏빚을 늘리면 금리가 상승하고 이것이 소비·투자를 위축시켜 경기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때 대량 발행한 국채 금리가 급등하는 바람에 고금리 부담이 가계·기업을 억누르는 현상이 빚어졌다. 풀린 돈이 고물가에 기름 끼얹을 위험성은 또 어떡하나. 이 대표의 ‘빚내 현금 뿌리는 성장’ 이론이 이런 역효과까지 극복할 수 있다면 당장 노벨상 후보 감이다.
이 대표는 미국의 뉴딜 정책을 보라고 한다. 1930년대 대공황 때 루스벨트 정부가 재정 주도로 불황을 돌파한 것처럼 정부가 지출을 늘려 성장을 견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뉴딜 정책 어디에도 현금 뿌리기 항목은 나오지 않는다. 후버댐이나 주간(州間) 고속도로 건설 같은 공공 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수요를 창출했지, 전 국민에게 현금 나눠 줘 소비하라는 식의 정책은 쓴 적이 없다.
경제학에서도 수많은 학파가 갈리지만 모든 경제학자가 동의하는 처방이 있다. 현금 살포하는 일회성 지출 대신 인프라 구축하고 일자리 만드는 지속가능한 용도에 돈을 쓰라는 것이다. 1인당 25만원씩 주는 데 드는 13조원은 현대차가 건립 중인 전기차 공장을 7개나 세울 수 있는 돈이다. 최신형 APR 1400 원전도 2기 이상 만들 수 있다. 공장과 산업 인프라를 지으면 일자리가 생기고, 지역 소비가 활성화되며, 연관 산업에 연쇄적 파급 효과를 미친다. 지출 대비 몇 배의 승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굳이 현금을 뿌린다면 고물가와 경기침체로 고전하는 서민·취약층·자영업자 등을 선별해 집중 지원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경제 효과가 크고 분배 정의에도 맞는다. 이 대표가 이 당연한 경제 원리를 모른다면 무지(無知)한 것이고, 알고도 그런다면 경제 망칠 작정을 한 것이다.⊙
05.18 윤 대통령의 ‘정체성’이 의심받는 순간
윤 정권을 탄생시킨 본연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하고
정체성이 흔들린다면 어떤 협치도 소용없을 것…
지지층마저 실망해 등 돌릴지 모른다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회동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대통령실
쏟아지는 용산발(發) 뉴스 중에서도 지난주 ‘비선(秘線) 메신저’ 보도는 충격적이었다. 어떤 공직도 없는 두 정치학자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리인을 맡아 물밑 교섭을 벌였다고 한다. 공식 라인을 제치고 비선이 가동됐다는 뜻인데, 자칭 메신저 두 사람이 인터뷰를 자청해 활약상을 떠벌리는 코미디까지 펼쳐졌다. 한국 정치사에서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모양새도 그랬지만 내용은 더 충격적이었다. 메신저들은 윤 대통령이 “강성 지지층과 참모들이 반대해 그간 이 대표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고 전했다. 피의자와 마주 앉을 수 없다는 윤 대통령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대표에게 불편한 인사는 비서실장 인선에서 빼겠다”는 발언도 있었다고 했다. 이 대표의 대권 행보를 돕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윤 대통령이 “골프 회동, 부부 동반 모임도 하자”고 말했다는 대목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사실이라면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그림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기이한 것은 용산의 반응이었다. 대통령실이 보도를 부인하긴 했지만 강도는 뜨뜻미지근했다. “물밑 라인은 없었다”는 포괄적 부정뿐 문제의 발언들에 대해선 가타부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비선 교섭이 사실이 아니라면 자칭 메신저들은 대통령을 팔아 가짜 뉴스를 퍼트린 악성 범죄자다. 그러나 대통령실은 고발도, 정정 보도 신청도 하지 않았다. 내용이 워낙 구체적인 데다 용산의 대응까지 애매하자 여권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사실 같다”는 반응이 많았다.
메신저들이 전한 물밑 장면은 우리가 알던 그 대통령과 달랐다. 윤 대통령은 무얼 적당히 얼버무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호불호를 표시하는 바람에 대통령이 ‘격노’했다고 보도된 사안도 한두 건이 아니었다. 멀게는 ‘바이든 날리면’ 논란에서 새만금 잼버리 파행,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 경찰 치안감 인사 번복, 가깝게는 채 상병 사건까지 큰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감정을 드러내며 적극적인 의사 표시를 해왔다. 그런데 자칭 비선들이 떠벌린 소리엔 대통령이 침묵하고 있으니 이게 뭔가 싶었다.
대통령의 격노는 종종 같은 편에게도 향했다. 총선 때 윤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통해 한동훈의 비대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적나라하게 불신감을 표출했다. 지난해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는 안철수를 “방해꾼이자 적”이라 직격했고, 나경원에겐 ‘실망감’을 표명하며 출마를 막았다. 이준석을 향해 “내부 총질이나 하던 대표”라고 날 선 반감을 드러낸 문자도 공개됐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원칙을 관철시키려 의사들, 해병대 집단까지 적으로 돌린 사람이다. 그랬던 대통령이 물밑에선 이재명 대표에게 “골프·부부 회동” 운운하며 손을 벌렸다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지난달 윤 대통령이 박영선 전 중소벤처부 장관을 총리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비서실장에 검토 중이란 보도가 나왔다. 대통령실 공식 라인에선 즉각 부인했지만 몇몇 참모들은 “맞는 보도”라고 했다. 전체 맥락으로 볼 때 두 사람이 후보로 검토된 것은 사실인 듯했다. 이들이 누구인가. 박영선은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라며 ‘문비어천가’를 불렀고, 양정철은 문재인의 히말라야 트레킹을 수행한 친문의 핵심 중 핵심이다. 아무리 야당 협조가 간절해도 이런 인물까지 끌어들인다면 보수의 자존심이 뭐가 되느냐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윤 대통령은 살아있는 권력과 맞짱 뜬 법치의 수호자로 인식돼왔다. 며칠 전 검찰 인사는 그 이미지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이었다. 김건희 여사 수사 라인을 모두 교체함으로써 3년 전 문 정권의 수사 방해 인사와 판박이란 지적을 자초했다. 당시 문 정권은 조국 비리, 울산 선거 개입 사건을 방탄하려 수사팀을 해체해 버렸다. 윤 대통령도 명품 백, 주가조작 의혹 등의 수사 지휘부를 교체하고 측근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앉혔다. 문 정권의 방탄용 검찰 사유화와 무엇이 다르냐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윤 대통령은 문 정권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통령이 됐다. 문 정권의 폭주에 기겁한 국민이 ‘문 정권 시즌 2′는 막아야 한다는 염원을 담아 정치 초보인 그를 대통령에 뽑아주었다. 좋든 싫든 반문(反文)의 가치는 윤 대통령을 만든 정치적 출발점이다. 사람과 진영을 적대시하라는 게 아니라 문 정권이 남긴 불공정과 비상식, 내로남불, 법치 유린의 잔재를 해소하고 비정상을 정상화시키라는 것이다. 이것이 국민이 부여한 윤 정권의 정체성이다.
지금 윤 정권이 겪는 곤경이 야당에 고개 숙이지 않았거나 앞 정권 인물을 쓰지 않은 탓은 아닐 것이다. 공정과 상식, 법치와 문 정권 극복이란 본연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하는 한 어떤 협치도 국정 안정을 이루어낼 수 없다. 윤 정권을 탄생시킨 정체성의 기본이 의심받는 순간, 충성 지지층마저 실망해 등을 돌릴지 모른다.⊙
06.15 '헌법의 아버지'들이 상상도 못했을 이재명
오로지 한 사람의
범죄 처벌을 막고
한 사람이 대권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법치를 교란하고
헌정 질서를 흔드는
위헌 폭주를 하는 것

▲이재명 대표가 14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선거법 위반 재판에 출석하면서 취재진 앞에서 입장을 말하고 있다. 이 대표는 주 1~2회 꼴로 재판정에 서고 있다./연합뉴스
논란 중인 ‘헌법 제84조 문제’는 대통령의 불소추(不訴追) 특권에 기존 재판도 포함되느냐의 이슈다. 헌법 84조는 내란·외환죄를 빼고는 재임 중 대통령을 형사 소추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 범죄 혐의가 있어도 기소하지 못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이미 진행 중인 재판도 중단되느냐를 놓고선 해석이 팽팽히 엇갈린다. 가장 명확해야 할 헌법 조문이 불확실성에 휩싸인 것이다.
이 조항이 이제 와서 문제 된 것은 지금까지 없던 전혀 새로운 유형의 정치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7개 사건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을 받고 있거나 받을 예정인 형사 피고인이 거대 야당을 발판 삼아 대권을 두드리는 초유의 상황이 펼쳐졌다. 2017년 대선 때 홍준표 후보 출마 사례가 있으나, 그는 2심 무죄 판결을 받은 상황이었고 당선 가능성도 낮아 별 논란이 되지 않았다. 반면 이재명 대표는 선거법 위반, 위증, 배임, 제3자 뇌물 등의 중범죄 혐의로 기소된 데다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유력 후보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84조 문제’는 나라를 두 쪽 낼 핵폭탄으로 폭발할 수 있다.
대통령 불소추 특권의 역사는 길다. 1948년 제헌 헌법도 제67조에서 토씨 하나 거의 다르지 않게 규정하고 있으니 건국 이래 76년간 대통령을 위한 안전장치로서 기능해온 셈이다. 이 조항을 누가 고안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제헌 헌법의 기초 자료였던 ‘유진오 초안’이 내각제로 돼있던 것을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이 개입해 대통령제로 바꿨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승만의 의지가 반영됐을 것으로 추측만 할 뿐이다. 이승만은 미국식 민주제도의 이상을 헌법에 담으려 했다. 여기에 유진오가 모델로 삼은 바이마르헌법과 옛 관료 그룹이 차용한 메이지헌법 요소, 그리고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한민족이 나아갈 방향이 ‘민주 공화제’임을 간파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이 어우러져 대한민국의 뼈대인 제헌 헌법이 탄생했다.
건국을 설계한 ‘헌법의 아버지’들은 헐벗은 해방 공간에서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을 쥐고 신생 대한민국을 건설해 가길 바랐다. 대통령에게 불소추 특권을 부여한 것도 처벌 걱정 없이 소신껏 국가 운영을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 직무의 안정성을 위한 것이지, 범죄 혐의자에게 사법 리스크의 면죄부를 쥐여 주려는 취지였을 리 없다. 재판받는 형사 피고인이 대통령에 출마하고 그런 사람이 당선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상정(想定) 밖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곤 헌법의 설계자들이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제헌 헌법의 아버지’들이 대한민국을 설계하며 고민했을 상상력의 한계를 이재명 대표는 훌쩍 뛰어넘었다. 명문 조항은 없지만 법적·도덕적 문제 있는 사람은 공직을 맡지 말아야 한다는 게 민주 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 헌법의 취지다. 이 대표는 이런 헌법 정신은 물론, 정글 같은 정치판에서 그나마 통용되던 최소한의 금기마저 모조리 깼다. 대선에서 패배한 사람이 곧장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고 당대표까지 되어 방탄 특권을 몸에 둘렀다. 반대파를 제거해 전통 깊은 야당을 1인 사당(私黨)으로 만들더니 168명 소속 의원들을 방탄 부대로 앞장세웠다. 헌정 질서의 근간인 의회 제도를 개인 범죄 방어에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행정·입법·사법부가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라는 것이 헌법 정신이다. 이 대표와 민주당은 검찰을 겁박하고 법원을 압박함으로써 삼권분립의 기초를 흔들고 있다. 이 대표 사건을 수사하는 검사들 신원을 공개해 공격 좌표를 찍고, 수사팀을 겨냥한 특검법이며 탄핵을 추진하겠다 한다. ‘술판 회유’ 거짓말까지 해가며 재판을 질질 끌던 측근 이화영의 유죄 판결로 법원이 이 대표의 관여 혐의를 인정했는데도 “조작”이니 “창작”이니 하며 사법부 판단마저 불복할 태세다, 심지어 영장 판사를 자기들이 고르고 재판부를 선출로 뽑겠다고까지 한다. 법치의 보루인 사법 시스템을 정치 난장판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지금 이 대표와 민주당이 벌이는 일은 단순한 정치 공세가 아니다. 그것은 헌정 질서를 흔드는 헌법 교란이자 위헌적 폭주에 다름없다. 이 모든 것이 이 대표 한 사람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오로지 한 사람의 범죄 처벌을 막고 그 한 사람이 대권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검찰·법원을 협박하고 “민주적 통제” 운운하면서 사법을 방해하고 있다. 입법 폭주와 특검 남발, 탄핵 협박으로 행정부를 겁박하며 의회 민주주의를 왜곡시키고 있다.
과거 독재 정권은 헌정을 뒤집기 위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헌법 자체를 고쳤다. 이 대표와 민주당은 형식적 합법을 가장했지만 실제론 법치와 사법부 독립, 삼권분립, 의회 제도의 헌정 질서를 흔드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헌법의 아버지’들이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06.29 삼성 저격수, 밖에 나가 눈을 뜨다
싸움닭 박영선도 4류를 탈출했는데
우물안 정치는 아직 4류 감옥에 갇혀있다…
나라 밖 세상에 정답이 널려 있는데 보려 하질 않는 탓이다

▲정치판을 떠난 박영선은 편안해 보였다. 책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집필했다고 했다. “반도체 인재 양성이 급한데 모두 의대로 몰려가 걱정”이라고 했다. 2024.1.12 /이태경 기자
어떤 충격적 경험을 통해 한 사람의 세계관과 인식 체계가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이 있다. 민주당 4선 의원 출신의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지금 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고 있는 듯하다. 서울시장 선거 패배 뒤 미 하버드대 유학을 떠났던 그는 지난봄 귀국해 ‘반도체 전도사’로 활약 중이다. 책을 두 권이나 내고 강연과 인터뷰를 다니면서 반도체·AI에 국가적 사활을 걸자고 호소하고 있다.
이 당연한 주장이 눈길 끄는 것은 그의 과거 이력 때문이다. 그는 ‘재벌 저격수’로 통하던 강성 정치인이었다. 2004년 정계 입문 이후 일관되게 대기업 공격의 선봉에 서며 재벌 개혁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 재벌의 지배구조와 편법 승계, 특혜 시스템이 경제 망치는 주범이라 비판하면서 민주당 재벌개혁특위 위원장을 맡고 각종 규제 법안을 주도했다.
그는 한국 사회를 “재벌의 노예”라고 규정했다. “권력이 재벌로 다 넘어갔다”며 정경 유착을 못 끊으면 “남미형 국가로 추락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공격은 특히 삼성에 집중됐다. ‘삼성 저격수’를 자처하면서 삼성을 핀셋으로 찍은 금산(金産) 분리 강화법, ‘이재용법’으로 불린 불법이익 환수법 등을 추진했다. 삼성이 “재벌 위의 재벌이 됐다”며 ‘삼성 공화국’을 깨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영선은 “재벌 개혁이 경제를 선진화한다”는 논리를 폈다. 순환 출자로 엮인 계열 구조와 오너 1인 체제를 지적하는 그의 비판은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야를 밖으로 돌려 글로벌 관점에서 보면 핀트가 맞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공격한 재벌 시스템이 ‘남미형 추락’은커녕 반도체·휴대폰·배터리 신화와 자동차·조선의 기적을 낳은 사실을 그는 설명하지 못했다. 재벌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백사장에 조선소 짓는 도전도, 일본과 맞짱 뜨는 반도체 투자도 불가능했음을 그는 간과했다. 정치 이력이 쌓여갈수록 박영선의 ‘반재벌’은 기업 전체를 적으로 모는 ‘반기업’으로 흘렀다.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원샷법’을 “금수저 특혜법”이란 황당한 이유로 막아설 지경이었다.
박영선뿐 아니라 민주당 전체가 그랬다. 김대중·노무현 이후 대기업 적대 정당으로 변질된 민주당의 기업관을 상징하는 인물이 박영선이었다. 노무현 정권을 “삼성에 포획됐다”고 비난한 강경파가 정책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민주당은 갈수록 반기업 색채를 더해갔다. 민주당의 정체성은 대기업을 “기득권”으로 규정한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중대재해처벌법, 주 52시간제 등 기업 발목 잡는 겹겹의 규제로 제도화됐다. 기업과 노동을 대립 개념으로 보는 반기업·친노동 기조는 지금의 거대 민주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2017년 대선 때 “재벌 해체”를 언급했었다.
민주당이 반기업을 외치는 동안 대기업들은 세계 시장에 나가 처절한 생존 전쟁을 벌였다. 박영선이 서울 구로을에서 재선에 성공할 무렵, 삼성과 하이닉스는 두 차례의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독일과 일본 업체들을 차례로 궤멸시키며 메모리 패권을 거머쥐었다. 디스플레이는 2004년, 이차전지는 2010년 세계 1위에 올랐고, 현대차는 글로벌 톱5에 진입했다. 과감한 선제 투자와 초고속 의사 결정으로 경쟁자를 압도한 덕이었다. 세계 언론은 “한국형 경영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그 무렵 회자됐던 유행어가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라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말이었다. 무엇이 2류와 4류를 갈랐는지 이유는 자명했다. 기업들은 세계를 무대로 전(全) 지구적 경쟁을 벌이지만, 정치인은 우물 안 개구리로 갇혀 있기 때문이었다. 이념과 정파로 갈려 내부 싸움에 날 새느라 동네 건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2019년 박영선이 문재인 정부의 중소벤처부 장관에 기용되면서 그의 입에선 재벌 개혁이란 말이 잦아들었다. 현장을 보자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초 미국 유학을 떠난 뒤엔 미래 전도사로 180도 ‘전향’했다. 일부에선 윤석열 정부의 총리 자리를 노린 ‘우클릭 코스프레’로 폄하하지만 나는 박영선이 진심일 것이라 믿는다. 격변의 글로벌 세상을 조금이라도 경험했다면 생각이 안 바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박영선의 저격 대상은 재벌에서 정치로 바뀌었다. “미국에서 보니 한국 정치는 진짜 가장 낙후된 분야 같다”거나 “기업 경쟁력 높이기를 고민해야 할 정치권마저 우물 안 싸움만 하고 있다”고 했다. 20년간 자신도 그 일부였던 ‘우물 안 정치’를 나라 망치는 주범으로 지목했다.
“문제는 정치”라는 그의 메시지는 자기 경험에서 우러난 체험적 통찰일 것이다. 천하의 ‘싸움닭’ 박영선도 밖에 나가 4류를 탈출했는데, 한국 정치는 여전히 4류의 감옥에 갇혀있다. 나라 밖에 정답이 널려 있는데 밖을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07.13 김 여사의 그림자
크고 작은 스캔들과
부주의가 잇따르면서
'몰카'에 찍혔던
부적절한 발언들이
진짜 아니었냐고
의심 살 지경이 됐다…
불길하고 또 불길하다

▲대선 국면인 2022년 12월 김건희 여사가 경력 위조 등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회견 후 윤석열 당시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10% 떨어졌다고 김 여사는 한동훈 전 위원장에게 보낸 문자에서 주장했다. /TV조선
‘김건희 여사 문제’는 늘 예기치 않은 곳에서 튀어나와 끊임없이 국민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지난달 국민권익위가 김 여사 명품백 사건을 고발 없이 종결 처리하자 권익위 게시판에 항의 글이 쏟아졌다. “대통령 부인께 300만원 상당 전통 엿을 선물하고 싶은데 괜찮을지 문의드린다”는 식의 비아냥거리는 말이 많았는데, 그 와중에 권익위가 내놓은 법 해석이 기름을 끼얹었다. “청탁금지법은 직무와 관련 없는 경우 공직자 배우자의 금품 등 수수를 제한하지 않는다”며 조롱성 문의에 ‘진지한’ 답변을 단 것이다. 직무 관련성이 없다면 받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권익위 답변은 ‘배우자는 공직자 직무와 관련해 금품을 받아선 안 된다’는 청탁금지법 제8조 4항을 반대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조항은 공직자 배우자도 법 적용 대상임을 명시한 규정이다. ‘받지 말라’는 데 방점이 찍혀있지 직무 관련성이라는 애매한 조건 아래 면죄부를 주려는 취지가 아니다. 권익위는 과거 비슷한 문의에 “배우자는 공직자 직무와 관련해 100만원 이상 금품을 받을 수 없다”고 답변했다. 같은 법 해석이라도 ‘이러면 안 된다’와 ‘저러면 된다’는 천지차이다.
뉘앙스가 달라진 것은 물론 김 여사 사건 때문일 것이다. 권익위로선 명품백 사건 종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려 ‘받아도 되는 경우’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 같다. 그 결과 부패의 회색지대를 막으려 제정된 청탁금지법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말았다. 권익위가 김 여사 사건을 방어하려다 부패의 ‘배우자 루트’를 열어 주었다는 소리가 무성하다. 대통령은 모든 국정의 총괄자인데 대통령 직무와 관련 없는 게 어디 있냐는 비판도 나온다. 김 여사 문제가 반부패 정책의 기조마저 흔든 것이다.
집권당 대표 선거에도 ‘김 여사 문제’가 등장했다. 난데없는 ‘읽씹(읽고 무시함)’ 논란으로 난장판이 벌어졌지만, 배신이냐 아니냐보다 더 충격적으로 느껴진 것이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물밑에서 김 여사의 독자적 소통 채널이 가동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직자가 아닌 대통령 부인의 모든 공적 활동은 대통령실을 통해 대통령 업무의 일환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공적 권한 없는 대통령 부인이 사적 채널을 통해 대국민 사과라는 국정 현안을 여당 대표와 직접 협의하려 했다. 국정 개입 시비를 부를 수 있는 부적절한 행위였다.
김 여사가 문자를 보낸 것은 한동훈 당시 비대위원장 측에서 명품백 문제를 거론한 직후였다. ‘마리 앙투아네트’ 비유가 나오고 한 전 위원장이 “국민이 걱정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고 거드는 과정에서 김 여사가 “사과하고 싶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김 여사가 공개 사과할 의사가 있었다면 대통령실 정무 라인과 상의해야 마땅했다. 대통령실을 통해 사과 방식과 절차를 정해 실행하면 될 문제지, 한 전 위원장 동의를 구할 이유가 없었다. 사적으로 동의를 구해서도 안 됐다.
김 여사는 문자에서 사과의 역효과를 언급했다. “대선 정국에서 사과 회견 했을 때 지지율이 10% 빠졌고” “사과하면 진정성 논란에 책임론까지 불붙듯 이슈가 커질 가능성” 등을 말했다. 사과한다고 선거에 불리해지는지도 의문이지만, 정치와 무관해야 할 대통령 부인이 고도의 정치적 이슈에 대해 스스로 정무적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김 여사는 ‘댓글 팀’ 얘기도 꺼냈다. “제가 댓글 팀을 활용해 위원장님 비방을 시킨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결코 그런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댓글 공작’ 루머에 대통령 부인이 등장한다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문자를 보내고 이틀 뒤 윤석열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통해 한 전 위원장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선거판을 뒤집은 사퇴 파동에 김 여사도 발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여당 대표 선거를 둘러싼 이전투구에 김 여사가 당사자로 참전한 셈이 됐다. 대통령 부인이 정치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논란의 한복판에 선 모양새다.
문자 사태가 더욱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간 불거진 김 여사의 문제 발언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때 김 여사는 좌파 매체 기자와 한 통화에서 “우린 원래 좌파였다” “내가 정권 잡으면 거긴(일부 매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발언이 녹음돼 공개됐다. 친북 목사의 함정에 빠져 “제가 이 자리에 있어 보니” “제가 남북 문제에 나설 생각”이라고 말한 것도 몰카에 찍혔다. 허언 혹은 실언인 줄 알았던 이 말들이 이젠 진짜 아니냐는 의심을 살 지경이 됐다.
시중엔 모 비서관이 김 여사 측근이고, 모 기관장이 김 여사 라인이라는 식의 소문이 파다하다. 용산발(發) 뉴스 중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다 김 여사가 개입했다는 말도 나온다. 근거 없는 낭설이라 믿고 싶지만 김 여사의 부적절한 처신이 의혹을 증폭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크고 작은 스캔들이 잇따르면서 국정 곳곳에 김 여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인상이 굳어졌다. 불길하고 또 불길하다.⊙
07.27 운동권 잔당 정청래는 왜 빌런이 됐나
권력 향배를 읽는 그의 안목은 탁월했다…
임종석·송갑석 등 운동권 본류들이 공천 학살당해도
그가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이재명민주당 대표 후보와 정청래 법사위원장이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뉴시스
개원 즉시 전면전이 벌어진 22대 국회에서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민주당 4선 정청래 의원이다. 이재명 전 대표의 호위 무사를 자처하는 그는 법사위원장에 기용되자마자 법사위를 화약 연기 자욱한 정권 공격의 전투 현장으로 만들었다. 국회 상임위를 탄핵 분위기 띄우고 검찰 겁박하는 무대로 활용하면서 이 전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는 방탄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정 위원장이 논란을 부른 것은 그의 거침없는 폭주 때문이다. 합의의 관행, 품격과 절제 따위는 개나 주라는 식의 일방적 회의 운영으로 법사위를 매번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 증인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고 인격을 후벼 파는가 하면 동료 의원에게까지 독설을 퍼부으며 22대 국회 최고의 뉴스 메이커로 떠올랐다.
법사위원장으로서 그의 행태는 질서 파괴자에 가깝다. 국회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아온 관행의 규범을 무너트리고 내 맘대로 한다는 식의 독주를 거듭하고 있다. 여야 간사 선임조차 건너뛴 채 방송3법을 통과시키고, 위법 논란을 뭉개며 대통령 탄핵용 청문회를 강행했다. 국민 청원을 이유로 청문회를 여는 것부터 의정 사상 처음이다. 대중 압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청원인 요건을 채워도 자제하던 그간의 관행을 하루아침에 뒤집었다.
그의 언동은 저질 시비를 부를 만큼 고압적이고 폭력적이다. 증인을 윽박지르고 호통치고 인격적 모욕을 서슴지 않고 있다. 증인들이 반박하면 “위원장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토 달지 말고”라거나 “어디서 그런 버릇을 배웠냐”는 식의 막말을 퍼부었다. 태도가 불성실하다며 회의실 밖 복도로 ‘10분간 퇴장’ 명령까지 내렸다. 교사가 초등학생 벌주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국회 갑질이 심하다지만 구악도 이런 구악이 없었다.
언어 폭력은 동료 의원에게까지 향했다. 여당 간사가 의사 일정 문제를 제기하자 “성함이 어떻게 되냐”며 시비 걸고, 기가 막혀 쳐다보는 의원에겐 “왜 째려보냐”며 발언권 정지로 협박했다. 여당 의원이 “존경하고픈 정청래 위원장”이라고 부르자 국회법을 들먹이며 “주의·경고나 퇴장도 시킬 수 있다”고 엄포 놓았다. 어쩌다 완장 찬 소아(小兒)가 칼을 휘두르고 싶어 안달 난 모습 같았다. 유치하고 치졸했다.
상식을 넘는 그의 폭주는 운동권 경력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가 몸담았던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은 권위주의적이고 폭압적인 분위기가 지배했다. 상대를 악으로 모는 이분론, 나만 옳다는 정의의 독점, 독단적이고 과격한 폭력성 등으로 특징되는 ‘운동권 DNA’가 정치에 입문한 86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수됐다.
그것은 정청래뿐 아니라 대부분의 운동권 정치인들이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정청래가 독특한 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86 정치인들이 연륜을 더해가며 청년기의 치기(稚氣)를 덜어냈지만 정청래는 4선이 되어서도 80년대식 거친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건국대 84학번 정청래의 ‘훈장’은 1989년 미 대사관저 점거 사건이었다. 다른 대학생 5명과 함께 관저로 진입해 방화를 시도했다가 50분 만에 검거돼 징역 4년형을 받았다. 상급 조직인 서총련 투쟁국 지시에 따라 행동대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는 운동권 주류는 아니었다. 전대협·한총련 간부 출신이 즐비한 정치권에서도 ‘건국대 조국통일위원장’ 명함은 높은 서열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동권 기질은 어느 86 정치인보다 강렬했다.
정청래는 피아를 갈라쳐 때리는 진영 싸움의 선수였다. 좌우, 여야로 맞선 이슈에선 늘 선봉에 서서 화력을 과시했다. 정청래 하면 거친 독설과 막말, 고함과 의사(議事) 방해부터 떠오르는 싸움닭 이미지였다. 그렇다고 신념과 가치를 중시하는 이념가는 아니었다. 자기 지역구에 서민용 공공 임대주택을 지으려는 것을 막아섰다는 일화가 그의 스타일을 상징해주었다. 가치보다 눈앞의 당선이 우선이란 뜻이었다.
권력 향배를 읽어내는 그의 안목은 탁월했다. ‘노사모’에서 출발한 정치 이력은 친(親)문재인을 거쳐 이재명에 줄 서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재명 자서전을 “흐느끼며 읽었다” 하고 이 전 대표를 “손흥민” “민주당의 깃발”에 비유하며 친위대 대열에 끼었다. 이 전 대표가 피습 당하자 “수술은 잘하는 병원에서 해야 될 것”이라며 서울대 이송을 옹호한 것도 그였다. 임종석·송갑석 같은 전대협 출신 주류들이 줄줄이 공천 학살 당하는 와중에서도 ‘운동권 잔당(殘黨)’인 그가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그가 지금 좌충우돌하는 것도 계산된 정치 처세술일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이재명 전 대표의 신임을 얻고 정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폭주에 ‘개딸’들은 환호하지만 많은 국민은 의회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악당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 지금껏 보지 못한 최강의 ‘국회 빌런(영화 등의 악역)’이 등장했다.⊙
08.10 147만명이 청원했던 '문재인 탄핵'
민주당 기준대로면 文 탄핵 사유야말로 차고 넘쳤지만
당시 야당은 엄두조차 못냈다…
탄핵의 피맛을 본 민주당 눈에는 순진해 보였을 것

▲2017년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베이징의 현지 식당에서 노영민 주중 대사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당시 문 대통령은 3박 4일간 10끼 식사 중 8끼를 우리 측과 먹어 '혼밥' 냉대 논란을 빚었다. /연합뉴스
탄핵이란 헌법의 힘으로 공직자를 쫓아내는 서슬 퍼런 제도이나 시대가 혼탁해지자 발에 채일 만큼 흔해빠진 정쟁의 소도구가 되어 버렸다. 22대 국회 개원 후 두 달 새 민주당 등이 발의한 탄핵안이 7건이다. 방통위원장은 임명도 되기 전에 타깃으로 찍히더니 취임 다음 날 탄핵안이 발의됐다. 아무리 사람이 잘못해도 단 하루 만에 탄핵당할 만큼 ‘중대한 헌법·법률 위반’을 저지르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하냐는 항변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재명 전 대표와 민주당 등을 수사한 검사 4명도 탄핵 리스트에 올랐다. 한 검사는 당사자들도 부인하는 피의자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이 탄핵 사유로 적시됐는데 첨부된 증거 자료는 언론 보도 4건이 전부였다. 다른 검사는 음주 추태 의혹 등을 문제 삼았다. 설령 사실이더라도 탄핵 거리가 될 수 없는 사유였다. 이미 무혐의로 결론 난 한명숙 사건 허위 진술 의혹이며 심지어 위장 전입까지 탄핵 사유에 들어갔다. 중대 사안에 쓰여야 할 탄핵의 큰 칼이 허드렛일 용도의 막칼이 되어 버렸다.
민주당과 조국당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작전에도 돌입했다. “3년도 길다”며 탄핵 조사 청문회를 열고 제보센터까지 개설했다. 민주당은 탄핵 청문회의 근거로 국회 청원을 내세운다. 윤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해달라는 청원에 143만여 명이 동의했으니 국회가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4년 전에도 당시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요청하는 국민 청원이 있었다. 여기엔 147만명이 동의해, 민주당이 참여를 독려하며 분위기 띄운 윤 대통령 탄핵 청원보다 4만명 가량 더 많았다. 그러나 4년 전 당시 야당이던 자유한국당은 청원을 이유로 탄핵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노무현 탄핵 역풍’의 트라우마도 있겠지만 엄중해야 할 탄핵을 함부로 내질러도 된다는 발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 임기 중 탄핵 청원은 두 차례 제안됐다. 147만명이 동의한 청원은 코로나 창궐 초기인 2020년 초, 문 정부가 중국인 입국을 안 막아 자국민 보호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발의된 것이었다. 그 전 해인 2019년엔 북한 핵 방치·묵인과 국정원 대공 수사권 박탈을 사유로 든 탄핵 청원에 25만명이 동의했다. 탄핵 요건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떠나 하나같이 국민 분노를 살 만한 사안들이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문 정권이 저지른 울산 선거 개입은 헌법상 탄핵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 중대 범죄였다. 문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청와대 8개 부서가 총동원된 혐의가 드러났다.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이 미는 후보의 공약을 지원해 주고, 경찰은 허위 제보를 근거로 경쟁 후보를 압수 수색했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심각한 헌법 유린이었지만 이걸 보고도 당시 야당은 탄핵 카드를 꺼내들지 못했다.
문 정권은 국가 통계도 조작했다. 아파트 값 지수만 94회 손대고 5년 내내 고용·소득·부동산 통계를 왜곡한 혐의가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통계청장을 내쫓고 그 자리에 자기 편을 갖다 앉히기까지 했다. 이렇게 마사지한 거짓 통계를 근거로 문 대통령은 “(소득 주도 성장의) 긍정 효과가 90%”라거나 “부동산은 자신 있다”는 허언을 늘어놓았다.
지금 민주당과 조국당이 주장하는 기준이 적용된다면 문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차고 넘쳤다. 우리 국민이 죽어가는 걸 방치하고 ‘월북’으로 몰아간 서해 공무원 사건, 에너지 백년대계를 하루아침에 뒤집은 탈원전 폭주, 멀쩡한 원전을 멈춰 세운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온갖 국기 문란 의혹의 정점에 문 대통령이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차라리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사소해 보인다는 말이 나왔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을 탄핵해야 할 이유로 해병대원 사건 수사 개입을 든다. 문 정권은 조국 법무장관을 비호하려 검찰 수사팀을 공중 분해하고 검찰총장 직무까지 정지시켰다. 수사 개입을 넘어 아예 수사를 못하게 막았다. 민주당은 김건희 여사 문제도 탄핵감이라고 한다. 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대통령 전용기로 타지마할에 가고, 현지 대통령도 없는 체코며 이집트 피라미드를 방문해 세금으로 관광 다녔다는 논란을 빚었다.
청와대 특활비로 의심되는 이른바 ‘관봉권(官封券)’으로 옷·장신구를 구입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무엇이 더 중대한가.
민주당 등은 대(對)일본 저자세 외교도 문제 삼고 있다. 이것이 탄핵 사유라면 중국에 ‘사드 3불(不)’을 비밀 약속하고, 김여정의 한마디에 전단 살포를 금지하는 등 대북·대중 굴욕으로 일관했던 문 대통령은 몇 번 탄핵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민주당 기준대로라면 문 정권 5년간 탄핵을 정치 쟁점화할 기회가 수두룩했지만 당시 야당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박근혜 탄핵’의 피 맛을 보았던 민주당 눈에는 참으로 순진하게 보였을 것이다.⊙
08.24 '선고 겁내는 이재명'에게 포획된 민주당
결백 자신한다면서 재판 질질 끄는 건 앞뒤 안 맞는 모순…
이 대표 개인의 사법 리스크가 '민주당 리스크'로 변질돼 버렸다
민주당의 사당화(私黨化)를 완성한 이재명 대표의 아킬레스건은 다 아는 대로 사법 리스크다. 사건 7개, 혐의 11개로 재판 4개를 받는 이 대표로선 대선 때까지 이어질 법정 이슈를 무사히 버텨낼 수 있느냐에 정치생명이 달려있다. 이 대표는 무혐의를 주장하며 문제없다고 한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85% 몰표를 던져주며 다시 대표로 뽑아준 것도 그 말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표는 모든 혐의가 “검찰의 창작”이자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윤석열 정권이 정적을 죽이려 없는 사실을 만들어냈다며 “미친 칼질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입장엔 치명적 모순이 있다. 죄가 없다면서도 정작 법원 판결이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가 결백을 자신한다면 재판 전략은 정해져 있다. 최대한 신속하게 무죄 판결을 받아내 검찰의 기소가 억지였음을 증명하고 사법적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그는 재판에 많은 시간을 빼앗겨 “법정에 갇히게 생겼다”고 하소연한다.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선고를 내려 법정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호소해야 옳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반대다. 재판을 재촉하는 대신 질질 끌며 최대한 늦추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 대표는 토론회 녹화나 국정 감사, 상임위 등을 이유로 수시로 재판을 결석하고 있다. 총선 때는 선대위 출범과 유세 등을 이유로 불출석했고, 단식으로 몇 주간 재판이 순연되기도 했다. 피고가 재판에 빠지면 재판부에 밉보일 수 있다.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재판을 지연시킨다니 보통의 피고인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꼭 필요하지 않은 증인도 신청한다. 증인 신문(訊問) 일정을 늘리려는 의도로 읽힌다. 위증 교사 사건에서 이 대표 측은 KBS 인사 5명을 증인으로 불렀다. 그러나 증언대에 선 KBS 인사들은 정작 이 대표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도 않아 왜 불렀는지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 대표는 수원지법에 기소된 대북 송금 재판의 관할을 서울중앙지법으로 옮겨 달라는 신청도 냈다. 대법원이 관할지 이첩을 검토하는 동안 또 2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검찰의 창작”이라는 이 대표 주장과 달리, 그의 알리바이를 흔드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위증 교사 사건은 전직 성남시장 수행 비서의 증언으로 외통수에 몰렸고, 선거법 사건에선 전직 성남시 과장이 “용도 변경은 국토부 협박 때문”이라는 이 대표 주장을 부인했다. 그러자 이 대표는 이들을 직접 신문하겠다며 마이크를 잡고 추궁했다. 급기야 위증 교사 사건 증인이 두려움을 호소하며 조속히 재판을 끝내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대표 주변에서 잇따르는 비극이 우연만은 아닐지 모른다.
이 대표의 사법 지연·방해 작전엔 공당(公黨)까지 동원됐다. 작년 11월 민주당은 대북 송금, 법인 카드 사건을 수사하는 검사를 탄핵 소추해 관련 수사를 줄줄이 밀리게 했다. 민주당은 “이 대표를 괴롭힌 정치 검사들 죄상을 밝히겠다”며 대장동 사건 등 재판의 유죄 입증을 맡은 수사 검사들 탄핵안도 발의했다. 결백을 자신한다면 이렇게 법정 밖 싸움을 벌일 리 없다.
심지어 재판부 압박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민주당 원내대표는 판사를 비난하며 ‘법관 선출제’를 거론했고, ‘개딸’들은 판사 탄핵 서명운동에 나섰다. 민주당 최고위원은 재판부가 유죄 선고를 내리면 “국민적 저항을 받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었다. 거대 야당의 공격에 판사들은 심리적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선거법 사건 판사는 1년 반이나 재판을 끌다가 돌연 사표를 낸 뒤 “이제 자유를 얻었다”고 했다.
재판을 늦출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멈추게 할 순 없다. 재판 4개 중 선거법 위반과 위증 교사 사건은 지리했던 심리 절차가 드디어 마무리되고 곧 1심 선고가 내려질 예정이다. 피하고 싶던 진실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만약 유죄 판결이 나온다면 이 대표가 입을 타격이 결코 작을 순 없다. 이 대표 지지자들도 현실로 닥친 사법 리스크를 피부로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시작이다. 법원이 정상적이라면 1심에 이어 2심, 3심 선고를 계속 내릴 것이고, 대장동·백현동·성남FC 사건과 대북 송금 재판에서도 객관적 사실과 증언·증거들이 꼬리 물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재명 리스크’가 고조되더라도 민주당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 지도부를 완벽하게 친명 충성파로 채웠고 당헌·당규까지 ‘이재명 맞춤형’으로 고쳐 1인 사당화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피선거권 박탈’ 판결이 나오지 않는 한, 이 대표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도 민주당에 ‘플랜B’는 없다. 다른 대안도 없고 민주당 내 경쟁자도 없다. 이 대표 개인의 사법 리스크가 ‘민주당 리스크’로 변질돼 버렸다. 전통의 명문 정당이 사법 폭탄을 등에 진 이 대표에게 포획당한 것이다.⊙
09.07 文 '진짜 혐의'는 건들지도 못했다
'특혜 채용'은 새 발의 피에 불과…
文의 중대 혐의는 한두 가지가 아니나
尹 정권의 수사 칼날은 文 앞에만 가면 꺾이고 있다

▲울산 선거 개입 사건의 피해자인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월 울산시의회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건의 '몸통'인 문재인 전 대통령 등을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뉴스1
검찰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사위 특혜 채용 의혹의 ‘뇌물 수수 피의자’로 수사 대상에 올리자 민주당과 문 전 대통령 측은 강력 반발했다. “먼지 털기” “정치 보복” “해괴망측한 궤변”이라며 “하늘 무서운 줄 알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문 정권 시절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정반대 의미로 검찰에 불만이다. 문 전 대통령이 연루된 범죄 혐의는 한두 가지가 아닌데 검찰이 여태 무얼하다 이제서야, 그것도 여러 의혹 중 중대한 것은 놔두고 가장 가벼운 사건에만 손을 댔냐는 것이다.
문 전 대통령 사위가 이스타항공의 태국 자회사에 특혜 채용됐다는 의혹이 야당에 의해 제기된 것은 2019년이었다. 이스타항공 창업주인 이상직 전 의원과 문 전 대통령 간 불투명한 관계를 뒷받침하는 언론 보도가 잇따르고 내부자 폭로까지 나왔지만 검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문재인 검찰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정권이 바뀐 뒤 윤석열 검찰까지 팔짱 끼고 있었던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사건은 올해 초 전주 지검이 전 사위와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을 소환 조사하면서 비로소 본격 수사가 시작됐다. 의혹 제기 후 거의 5년이 지난 뒤였다.
게다가 이 사건은 문 전 대통령을 둘러싼 다른 의혹들에 비하면 말 그대로 ‘새 발의 피’다. 예컨대 문 정권 청와대가 저지른 울산 선거 개입 사건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반(反)헌법 중범죄였다.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청와대가 총출동해 맞춤형 공약을 짜주고, 당내 경쟁자를 다른 자리로 회유하며 주저앉혔다. 청와대 하명을 받은 경찰은 허위 첩보로 상대 당 후보를 수사하고 투표일 직전 압수 수색을 벌여 비리 이미지를 덮어씌웠다. 민주주의 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희대의 정치 공작이었다.
선거 개입은 청와대 비서실 8개 부서가 역할을 분담해 군사작전하듯 진행됐다. 정무수석실이 공천을 챙기고, 국정상황실과 민정비서관·반부패비서관실이 하명 수사를 지휘했으며, 사회수석비서관·균형발전비서관실이 공약 수립을 지원했다. 윗선 지시 없이 불가능했음은 누구 눈에도 분명했다. 그러나 당시 윤석열 총장이 지휘하던 검찰은 비서관·행정관급 중심으로 기소하면서 임종석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에겐 면죄부를 주었다. 두 사람까지 기소하면 대통령에게 불똥 튈 것을 우려해 밑 선에서 잘랐다는 분석이 파다했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증언들이 나오자 검찰은 임종석·조국에 대한 무혐의 처분을 번복하고 재수사를 결정했다.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은 여전히 수사 대상에서 빠졌다. 울산 사건의 1심 판결문에 문 전 대통령 이름이 14번이나 나올 만큼 재판부도 관련성을 인정했지만 검찰은 별다른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범죄의 수족들은 줄줄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도 이를 지시한 ‘몸통’은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모양이 되고 말았다.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 사건도 청와대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언제 가동 중단을 결정하냐”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멀쩡한 원전의 셧다운이 결정됐고, 이를 뒷받침하려 수치를 조작하는 전대미문 범죄가 자행됐다. 청와대 비서관·행정관 등이 대놓고 산업부에 조작을 지시했다. 대통령 의중을 확인한 산업부 장관이 말 안 듣는 부하에게 “너 죽을래” 하며 협박하는 사달까지 벌어졌다. 이들이 자기 판단으로 이토록 무리한 일을 저질렀을 턱은 없다.
경제성 조작을 제보했던 한수원 전 노조위원장 등은 문 전 대통령 퇴임 다음 날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이들은 문 전 대통령이 법적 절차 없이 월성 1호기 폐쇄를 지시함으로써 “에너지 안보를 무너트린 이적(利敵) 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단 한 번 조사도 하지 않은 채 고발 후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뭉개고 있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역시 문재인 청와대의 범죄와 관련돼 있다. 문 전 대통령은 공무원 피살 3시간 전 북한 해역 표류 사실을 보고받았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국제 상선 통신망을 통해 북한과 교섭했으면 살릴 수도 있던 사건이었다. 그렇게 우리 국민이 죽도록 방치해놓고는 청와대 안보실장이 주도해 ‘자진 월북’으로 조작했다. 피살 공무원의 형은 2022년 12월 문 전 대통령을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수사하지도, 사건을 종결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상태로 지금껏 붙들고 있다.
법조계에선 윤 정권의 수사 칼날이 문 전 대통령 앞에만 가면 꺾여 버리는 기이한 현상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자신을 키워준 문 전 대통령에게 ‘의리’를 지키고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사적 인연에 얽매어 국가적 중범죄를 덮는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선거 제도를 흔들고, 에너지 대계를 파괴하고, 국민 생명을 희생시킨 혐의가 특혜 채용보다 몇천 배, 몇만 배는 엄중하다.⊙
09.21 윤 대통령은 '보수'인가
이재명 범죄 혐의에 혀를 차다가도
"김 여사는?"이란 반박을 당하면 궁색할 때가 많다…
보수 지지자들로선 속된 말로 'X팔리는' 심정이 된 것이다.

▲김건희 여사가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인 지난 10일 용강지구대 근무자들과 함께 마포대교를 순찰하고 있다. 김 여사는 “미흡한 점이 많다””개선이 필요하다”는 등의 지시조(調) 발언으로 '국정 책임자 같다'는 지적을 받았다. /뉴시스
의료 선진국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아프지 마세요”란 인사가 유행했다는 것은 참담한 얘기다. 추석 연휴 중 구급차에 실려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며, 조심하라는 말로 한가위 덕담을 대신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다행히 대란은 없었지만 결코 호들갑이 아니었다. 탈진한 의사들이 한계에 몰리고 ‘응급실 뺑뺑이’가 잇따르는 현실 앞에서 “아프지 말라”는 것은 그야말로 실존적인 불안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의료 개혁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실행 방식이 너무도 거칠고 과격하고 무모했다. ‘2000명씩 5년간 증원’이란 수치부터 비현실적이었다. 개혁을 한다면서 개혁 대상을 어떻게 설득할지 면밀한 실행 계획도 없이 밀어붙이기만 했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고전하는 것은 문제 해결 능력의 빈곤 탓이다. 이유야 어쨌든 국민으로 하여금 ‘아프면 어떡하나’를 걱정하게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정부가 아니다. 개혁은 꼬일 대로 꼬인 채 의사 집단만 반정부 투사로 내몰고 말았다.
의사뿐 아니다. 대통령의 격노로 시작됐다는 ‘채 상병 사건’으로 해병대 예비역들과 충돌했고, 연구·개발 예산 삭감 소동으로 과학기술인이 등을 돌리게 했다. 윤 정부가 전쟁을 벌인 의사·해병대·과학자들은 어느 직종보다 확고한 국가관과 공적 마인드를 보유한 집단이다. 자유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보수 정권이 보수의 주력 직업군과 잇따라 충돌하며 내전(內戰)을 벌이고 있다. 우군을 적으로 돌린 셈이다.
보수는 현실주의자다. 실천 가능성을 따져가며 점진적·실용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보수의 문제 해결 방식이다. 윤 정부 국정은 보수의 스타일과 거리가 먼 경우가 잦다. 충분한 검토와 준비 없이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로, 혹은 느닷없는 격노로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파열음을 내곤 했다. 의정 갈등은 출구 전략도 못 세운 채 파행을 치닫고, 해병대원 사건은 특검 공세를 자초했으며, 연구·개발 예산 삭감은 1년 만에 백기 투항하는 치욕을 맛봤다. 이것은 유능한 보수가 일하는 방식이 아니다.
윤석열식(式) 정치는 보수의 영토를 잘라내는 ‘뺄셈의 정치’에 가깝다. 청년 정치의 대표성을 지닌 이준석을 여당 대표에서 끌어내리고, 여권내 일정 지분을 갖는 안철수·유승민 등과 절연했다. 대선을 승리로 이끈 ‘보수 빅텐트’를 해체해 버린 것이다. 한동훈 대표와도 끊임없이 갈등 빚으며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다. 정권의 존립 기반인 보수의 외연을 좁히고 스스로를 고립으로 몰았다.
윤 대통령은 보수 주류층까지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김건희 여사 문제 때문이다. 공적 권한 없는 김 여사가 국정과 인사, 심지어 여당 공천과 당무(黨務)까지 관여한다는 의혹이 꼬리 물고 있다. 추석 전 현장 방문에서 김 여사가 제복 공무원들을 세워놓고 “미흡한 점이 많다””개선이 필요하다”며 지시조(調) 발언을 쏟아낸 장면이 상징적이었다.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보수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철학이다. 김 여사의 월권을 수수방관 방치하는 윤 대통령의 태도를 보수층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다.
김 여사 이슈는 보수의 마지막 보루인 법치의 가치마저 흔들고 있다. 왜 대통령 부인은 명품백을 받아도 처벌받지 않는지, 주가조작 의혹으로 고발돼도 4년 넘게 수사가 뭉개지는지, 검찰에 소환돼도 경호처 부속 건물에서 특혜성 조사를 받는지, 설명이 궁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보수층이 이재명의 온갖 범죄 혐의에 혀를 차다가도 “김 여사는?”이란 반박을 받으면 말문 막힐 때가 많다.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지지자들로선 속된 말로 ‘X팔리는’ 심정이 된 것이다.
지지 기반이 무너지는 비상 상황에서도 윤 대통령은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 지난 총선 때, 참패 위기 앞에서도 김 여사를 감싸고 한동훈을 내치면서 선거를 엉망으로 망친 것을 보수층은 기억하고 있다. 하도 기가 막혀 윤 대통령이 보수를 망치려 작정한 ‘X맨’ 아니냐는 한탄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윤 대통령의 곤경은 야당과 협력을 안 한 탓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나 협치(協治)를 논하기 앞서 보수의 기본을 다지는 일부터 윤 대통령은 실패했다. 개혁의 이상만 앞세워 문제 해결을 도외시하고, 사(私)를 앞세워 법적 공정성을 흔들고, 내 편 삼아야 할 우군을 적으로 돌리는 자해 정치로 보수 진영의 마음을 잃었다. 그래 놓고 문재인 정권 인물을 총리로 영입한다, 비서실장에 기용한다 하며 엉뚱한 헛발질을 했다. 문 전 대통령의 핵심 혐의는 수사하지 않고 봐준다는 지적도 받았다. 문제의 본질이 무언지 모르는 듯하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자신이 보수라는 사람 중 윤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53%로, ‘지지한다’ 38%를 압도했다. 보수층조차 윤 정권의 실체에 실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이 보수의 정체성을 의심받을 때 어떤 비극적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10.05 혁신하는 중국엔 '민주당'이 없다
중국 공산당도 '자본의 노동 착취'란 도그마를 버렸는데…
기업을 때려 노동을 보호하겠다는 민주당의 반기업 폭주가
얼마나 심각한 해악인지 중국을 보며 절감한다

▲국회 환노위 소속 민주당 등 야6당 의원들이 지난 8월 '노랑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 즉각 공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산업화가 늦은 중국은 규모의 힘으로 시간적 제약을 돌파한 나라다. 14억명 거대 시장과 가공할 인재풀을 동력 삼아 기술 축적에 필요한 시간 조건을 압축해서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유선 전화를 건너뛰고 무선 통신으로, 신용카드·내연차를 패스하고 곧바로 모바일 결제와 전기차 시대로 넘어간 나라가 중국이다. 지금 중국은 미래 산업과 기술 경쟁력에서 첨단을 달리는 혁신 국가다. 양(量)의 힘으로 질(質)의 도약을 이뤄낸 것이다.
우리는 중국 하면 여전히 싸구려 짝퉁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중국은 인공지능에서 자율주행차, 배터리, 드론, 양자컴퓨팅, 우주항공까지 미래 패권이 걸린 첨단 산업에서 한국을 넘어 미국과 맞짱 뜰 수준이 됐다. 지난주 공개된 무역협회의 중국 보고서는 우리가 인정하기 싫던 사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반도체 빼면 중국이 한국을 다 따라 잡았거나 추월했다”고 했고 “한국이 중국보다 경쟁력 있는 산업은 10%뿐”이라 진단했다. 보고서에 등장한 기업인들은 “두렵다”고 했다. 거대한 데다 혁신적이기까지 한 중국에 통째로 잡아먹힐 수 있다는 공포일 것이다.
중국식 혁신의 핵심은 시간을 압축하는 속도전이다. 인적·물적 자원을 24시간 365일 투입해 혁신 역량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유연한 노동 시스템 때문이다. 스스로 ‘과로(過勞) 문화’라고 자조할 만큼 쉬지 않고 일한다는 일화가 중국 전역에서 쏟아지고 있다. ‘996′(아침 9시~밤 9시, 주 6일)은 흔하고 ‘007′(24시간, 주 7일) 근무까지 등장했다. 배터리 업체 CATL은 세계 1위를 질주하는데도 ‘896′(아침 8시~밤 9시, 주 6일) 계획을 세워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거대 중국이 밤낮 없이 영혼을 털어가며 총력전을 벌이는데 당할 재간이 없다.
중국의 강점은 곧 한국의 약점이다. 한국에선 정반대 일화가 넘쳐난다. 삼성전자의 서울 우면동 R&D캠퍼스나 기흥·화성의 연구개발실은 저녁만 되면 불 꺼지는 곳이 많다. 석·박사급 연구원도 오후 5시 정시 퇴근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일감이 몰려도 하던 일을 멈춰야 하고, 마감이 코앞인데 생산 라인을 세우는 일이 산업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경직적인 주 52시간 근로제 때문이다. 기업인들은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게 발목 잡는 최대의 애로 요인으로 주 52시간 규제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중국에도 법정 근로 시간은 있다. 하지만 근로자가 원하면 얼마든지 노사 합의로 연장하거나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이 “‘996′은 축복”이라 공개 발언하고, ‘중국의 구글’로 불리는 바이두 경영진이 “주말에 쉬길 기대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은 거꾸로다. 연구개발 경쟁에 쫓기고 주문 납기를 못 맞출 지경이 돼도 속수무책이다. 심지어 근로자가 원해도 더 일하면 불법이다. 일이 많을 때 더 일하고, 적을 때 더 쉬는 탄력적 집중 근무가 어렵게 되어 있다.
중국은 노동자가 주인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한국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노동 시스템이 유연한 것은 첫째, 중국에 ‘민노총’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에도 사업장마다 ‘공회(工會)’로 불리는 노조 조직이 있다. 하지만 공장을 점거하고, 물류를 마비시키고, 공사를 멈춰 세우는 조폭 같은 노조는 없다. 현대차가 강성 노조 반대로 28년째 생산 라인을 한 곳도 증설하지 못했듯, 기업 활동을 방해하고 경쟁력을 깎아내리는 민노총 같은 집단은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엔 ‘민주당’도 없다. 전 세계 유례없는 초강력 주 52시간제를 밀어붙인 것이 민주당의 문재인 정권이었다. 부작용이 속출했지만 입법권을 쥔 민주당은 산업계의 보완 호소를 묵살했다. 도리어 산재 사망자가 발생하면 경영자를 감옥 보내는 중대재해처벌법, 노조가 불법을 저질러도 손해 배상을 면제해주는 ‘노란봉투법’ 등을 끊임없이 추진했다. 한국에선 기업 대표이사에 오르는 순간 법규 2200여 개의 적용을 받는 잠재적 형사 처벌 대상자가 돼버린다. 이런 나라에서 혁신이 꽃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혁신의 숨통을 막는 입법 자해(自害)를 주도하는 것이 민주당이다. 문 정권 5년도 모자라 지금도 여전히 ‘반(反)기업이 노동자를 위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공산 중국엔 반기업적 정치 세력이 없다. 중국 공산당이이야말로 노동자의 계급 정당이지만 ‘자본이 노동을 착취한다’는 이념 도그마를 버린 지 오래다. 중국 공산당은 문제가 많지만 적어도 경제를 보는 관점만큼은 한국 민주당보다 스마트하고 선진적이다.
그 차이가 두 나라 간 혁신 스피드의 격차를 더욱 벌려 놓고 있다. 국회를 장악한 거대 민주당의 ‘기업 때려 노동 보호’ 폭주가 얼마나 심각한 국가적 해악을 끼치는지, 중국의 약진을 보면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10.19 '이재명 대통령' 길 깔아주기
이 대표와 민주당은
윤 정권이 쏟아내는
자책골을 먹고 산다…
윤 대통령이 단단했다면
개인 범죄 방탄도
사법 방해 폭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한 김건희 여사 측 해명 중, 복잡한 법리 빼고 가장 설득력 있었던 것이 두 가지다. 첫째, 김 여사처럼 주범에게 계좌를 빌려준 손모씨가 1심 무죄판결을 받았다. 둘째, 문재인 정권 검찰이 그토록 탈탈 털었어도 혐의점을 못 찾아 기소하지 못했다. 이 중 첫째는 전주(錢主) 손씨의 판결이 2심에서 유죄로 뒤집혀 무너졌다. 둘째 역시 정권이 바뀐 뒤에도 검찰이 결론을 못 내리고 계속 끄는 바람에 근거가 약해졌다. 수사팀이 무혐의를 자신하지 못했다는 방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의문점은 계속 커지는 상황이었다. 주가조작범 재판에서 수사 기록이 공개되고, 통화 내용과 편지 등이 유출되면서 김 여사에게 불리한 정황이 잇따랐다. 그런 와중에 검찰총장이 바뀌자 4년 6개월을 끌던 사건이 ‘불기소’로 결론 났다. 검찰은 순수하게 법리만 따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 거면 왜 이제껏 사건을 들고 있었냐는 반론이 나온다. 수사 결과 발표일을 재·보선 다음 날로 잡은 것부터 개운치 않았다.
검찰의 결정에 김 여사와 윤석열 대통령 못지않게 반색했을 사람이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다. 자신의 범죄 혐의를 ‘물타기’할 카드를 또 하나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무혐의 처리가 법리적으로 옳은지 여부를 떠나 무언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부터가 이 대표에겐 호재다. 그는 자신의 모든 혐의가 “정치 검찰의 창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여 오는 사법 공포에 시달리는 이 대표에게 검찰이 핑곗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이 대표가 다음 달 나올 1심 선고에 떨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겉으론 무죄를 자신한다지만 법원의 판결 트렌드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올 들어 나온 1심 선고에서 선거법 위반 사건의 63%가 벌금형 이상, 위증·증거인멸 사건의 56%가 징역형 판결을 받았다. 이 대표는 선거운동 중 허위 사실을 반복 언급했고, 위증 교사는 확실한 증언에다 녹취록까지 있어 더욱 불리하다. 만약 선거법 사건에서 벌금 100만원 이상, 위증 사건에서 징역형이 확정된다면 그는 다음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겁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 대표가 재판 아닌 ‘정치’로 사법 리스크를 돌파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재판으론 불리할 것 같자 재판정 밖에서 싸우겠다며 거대 야당을 개인 범죄 방어에 동원하고, 국회 상임위를 방탄 무대로 만들었다. 이 대표 1인 정당이 된 민주당은 검사들을 무더기 탄핵 소추하는가 하면, 재판부를 향해 “국민적 저항” 운운하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한다”며 사실상 윤 정권 퇴진 운동에도 돌입했다. 온갖 명분으로 포장했지만 결국 사법적 허들을 피하려는 정치적 술수다. 대선까지 2년 반을 기다릴 수 없으니 확정판결이 나오기 전 조기 선거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대표의 전략은 먹혀들고 있다. 민주당을 ‘개인 로펌’으로 전락시켰는데도 당내에선 비판 한마디 나오지 않는다. 의회 시스템을 범죄 방탄의 난장판으로 만들었는데도 여전히 지지율은 높고 선거만 하면 이긴다. 법원마저 정치 압박에 주눅 든 기색이 엿보인다. 이 대표 선거법 사건의 판사는 1년 6개월간 재판을 끌다가 돌연 사표를 냈고, 구속적부심 담당 판사는 “혐의가 소명된다”면서도 ‘정당 대표’라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대장동·백현동·대북송금 사건은 고사하고 선거법·위증교사 사건마저 대선 전에 대법원 판결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사법 방해는 헌정(憲政) 유린의 중범죄다. 정상적 국가라면 사법 시스템을 흔드는 세력은 여론 질타를 받고 당장 퇴출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대표는 대권 레이스 선두를 질주하고, 민주당은 건재하다. 법치를 파괴하려는 사법 방해 세력이 도리어 큰소리치며 정국을 주도하고 있으니 참으로 희한한 한국적 현상이다. 개인 범죄를 야당 탄압으로 둔갑시키는 후흑(厚黑)의 테크닉이 놀라울 뿐이다.
역설적으로 그런 이 대표를 도와주는 것이 윤 정권이다. 주가조작과 명품 백 사건을 무혐의 처리함으로써 공정성 시비를 자초하고 ‘정치 검찰’ 프레임에 명분을 주었다. 국정 개입, 비선 의혹이며, 정치 브로커와 맺은 수상한 관계 등이 끊임없이 불거지는데도 김 여사 문제를 단속하지 않고 방치해 공격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쯤 정치판을 휩쓸었어야 할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 이슈를 정권 심판론이 가려준 모양새다. 윤 대통령이 쏟아내는 자책골을 이 대표와 민주당이 먹고 산다. 윤 정권이 단단했다면 방탄도, 사법 방해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종 대통령 적합도 조사에서 이 대표는 한동훈 대표와 격차를 더블 스코어로 벌렸다. 이대로 선거를 치른다면 뻔한 승부가 될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이 대표를 패배시켰던 윤 대통령이 이젠 ‘이재명 대통령’의 길을 깔아주고 있다. 아이러니다.⊙
11.02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 김정은의 '러시아 용병'
우크라이나 전선이 북한 군인의 집단 탈북 루트가 될지 모른다…
역사 진보의 방향을 거꾸로 짚은 김정은의 도박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북한 군대의 우크라이나 투입을 놓고 ‘파병’이라거나 ‘참전했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자기 군복을 입고 독자적 지휘 명령 체계에 따라 싸우는 것이 파병이다. 북한군은 러시아 군복으로 갈아입고 신분을 위장해 배치되고 있다. 북한 당국이 파병 사실을 인정한 적도 없다. 더러운 전쟁에 끼어들 명분이 없다는 것을 본인들도 알기 때문이다. 결국 돈 받고 싸워주는 용병(傭兵)에 지나지 않는다. 김정은은 군대 아닌 외화 벌이용 ‘전쟁 노동자’를 파견한 것이다.
김정은이 “한국의 베트남 파병을 모방했다”(뉴욕 타임스)는 분석들이 나온다. 1960년대 베트남 참전과 같은 군사·경제 효과를 노린 ‘북한판(版) 베트남 파병’이란 것이다. 턱도 없는 소리다. 베트남에 갔던 한국 군인은 용병이 아니었다. 국회 의결을 거친 공식 참전이었다. 미군과 차별화된 전술로 맹위를 떨친 맹호·백마·청룡부대는 부대 마크도 선명한 우리 군복을 입고 57만여 회 작전을 독자 수행했다.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다는 대의 명분도 있었다. 북한과 러시아가 쉬쉬 하며 숨기기 급급한 우크라이나 용병과 성격 자체가 다르다.
60년 전 베트남 파병은 미군을 한반도에 붙잡아 두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승부수였다. 당시 미국은 주한 미군 2개 사단을 빼내 베트남전에 투입하려 했다. 미군이 일단 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군사·경제력에서 북에 밀리던 한국으로선 심각한 안보 위협이었다. 박정희는 미군 대신 한국군을 보내겠다는 제안으로 미군 차출을 막았다. 국내 여론도 우호적이었다. 6·25 때 우방국 도움을 받은 우리가 이제 남을 돕는다는 명분은 국민 지지를 받았다. 파병안은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다.
첫 파병 2년 뒤인 1966년, 박정희는 장병 격려차 베트남을 찾았다. 공항에서 맹호부대 주둔지까지 헬기로 이동해야 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악천후에 따른 사고 위험에다 적의 대공 사격이 걱정된 월남사령관 채명신이 만류했다. 박정희는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한 치 망설임 없이 헬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최전선에서 적과 대치 중인 장병들을 만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김정은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가서 군인들을 격려하는 일 같은 건 절대 못 한다. 제 목숨 걱정도 되겠지만 총알받이 군인에 대한 애정이라곤 한 푼도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려진 대로, 베트남 전쟁의 본질은 복합적이었다. 하지만 정보가 제약돼있던 당시 한국으로선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안보적 고려에서 출발한 박정희의 파병 결단은 대한민국 발전에 ‘신(神)의 한 수’가 됐다. 한·미 동맹은 함께 피 흘린 혈맹으로 격상됐고, 한국군 전력은 획기적으로 현대화됐다. 구식 M1 소총이 M16으로 교체된 것도 이때부터다. 미국에게서 장비 제조 권한을 받아낸 박정희 정부는 국방과학연구소 등을 설립해 군수 산업 육성에 나섰다. 지금 세계 시장에서 꽃피운 K방산의 출발점이었다.
베트남 파병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압축 성장도 불가능했다. 장병들이 악착같이 모아 송금한 달러 수당, 기업들이 벌어온 공사 대금이 유입되면서 척박한 한국 경제에 부활의 씨앗을 뿌렸다. 이 귀중한 외화가 초기 자본으로 축적돼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종잣돈으로 쓰였다. 5000여 명이 전사하고 전쟁의 상흔도 컸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 덕에 고도 성장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다.
김정은도 이런 효과를 누리고 싶을 것이다. 러시아가 1인당 월 2000달러를 지급할 것이라 하니, 1만명 파견이면 연간 2억달러가 넘는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들어와도 북한은 ‘베트남 특수(特需)’ 같은 경제 효과를 이룰 수 없다. 체제 결함 때문이다. 그동안 북의 해외 노동자들이 그랬듯, 군인들이 목숨 값으로 받은 돈도 대부분 김정은의 금고로 들어가 통치 자금이나 핵·미사일 개발에 쓰일 것이다. 개인을 억압하고 성과를 수탈하는 착취적 제도에선 어떤 기회도 경제 번영으로 연결될 수 없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다론 아제모을루 등이 설파한 대로다.
김정은은 러시아에게 군사 기술을 받아내려 한다. 핵 잠수함, 탄도 미사일을 완성해 체제 유지에 써먹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그러나 도리어 우크라이나에 간 군인들이 체제 모순을 북한 내부에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라 자체가 감옥인 곳에서 갇혀 살다 외부 세계를 목격한 젊은 군인들이 어떤 충격을 받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선이 북한 군인의 집단 탈북 루트가 될지 모른다.
60년 전 한국은 자유 진영의 편에 서서 번영의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김정은은 러시아의 더러운 침략 전쟁에 끼어듦으로써 지는 쪽에 베팅하고 있다. 역사 진보의 방향을 거꾸로 짚은 김정은의 무모한 도박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11.16 평범한 사람들이 무너트린 '이재명 알리바이'
이 대표의 혐의를
뒷받침한 것은
검찰도, 정권도 아니다…
경기도 7급 별정직
성남시 과장·팀장
고인의 유족 등이
정치 권력자에 맞서
유죄 판결을 끌어냈다
▲이재명 대표가 15일 서울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직선거법 위반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아내 김혜경씨가 선거운동 식사비를 불법 결제한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자 일부에선 “고작 10만4000원 갖고...”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부터 펼쳐질 ‘법카 스캔들’의 시작일 뿐이다. 검찰이 선거법 시효에 쫓겨 10만원짜리 사건부터 급하게 기소했을 뿐, 이 대표 부부가 식비·생활비 등에 경기도 법인카드를 썼다는 의혹은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 대표 집 근처 복집에서만 318만원, 단골 과일 가게에선 1000만원 가까이 결제된 정황이 드러났다. 의심받는 유용액을 합치면 수천만원에 달한다. ‘겨우 10만원’이 아니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 법카 의혹을 폭로한 것은 43세 조명현씨였다. 경기지사실 7급 별정직으로 근무한 그는 업무의 90%가 이 지사 부부 수발 드는 일이었다고 했다. 출근하면 샌드위치 세트를 사다 공관 냉장고에 넣어두고, 이 지사가 입을 속옷·셔츠 등을 준비해 옷장을 채우는 일로 일과를 시작했다. 김혜경씨 식사며 생일 케이크까지 챙겼다. 모든 경비는 법카로 결제했다. 이 지사가 즐겨 쓰는 일제 샴푸며 초밥·한우, 제사상 차림, 명절 선물, 심지어 개인 차 수리비까지 법카를 긁었다. 주말엔 일단 개인 카드를 쓴 뒤 평일에 다시 가서 취소하고 법카로 재결제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조씨는 자신이 “공노비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피해자는 자기 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금으로 이 지사 부부 먹고 쓰는 돈 대주고, 개인 수발 드는 공무원 월급까지 주는 국민 모두가 피해자였다. 그는 부조리를 기록해 세상에 알렸다. 평범한 삶을 꿈꾸던 원래 인생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것은 책임감 때문이었다. 조씨는 침묵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 후보가 당선되면 ‘세금 도둑’이 대한민국을 이끌게 될 테니 덮어둘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김혜경씨 재판에도 나가 “김씨가 간장이냐, 초장이냐, 회덮밥 소스까지 일일이 정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결국 1심 유죄 선고를 받아냈다.
그다음 날엔 이재명 대표의 공직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징역 1년형의 유죄 선고가 내려졌다. “백현동 용도 변경이 국토부 협박 때문”이라는 이 대표 발언이 ‘허위 사실 공표’임을 뒷받침한 것 역시 지자체의 전직 공무원들이었다. 성남시 주거환경과장을 지낸 전모씨는 이 대표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압박은 없었다”고 밝혔다. 압박은커녕 국토부가 ‘성남시가 임의로 판단할 사항’이란 공문을 보내왔고 이를 당시 이재명 시장에게 “대면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피고인석에 있던 이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직접 신문에 나섰지만 전씨는 “오로지 시장님 지시 사항만 따랐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전씨뿐 아니었다. 성남시 도시계획과 팀장을 지낸 김모씨, 도시계획과 주무관을 지낸 장모씨도 ‘압박받은 사실이 없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백현동 개발 담당자들이 일관되게 이 대표 발언의 근거를 부정한 것이다. 이들로선 한때 상관이었고,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유력 대권 후보와 맞서는 것에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고(故) 김문기 전 성남도개공 처장을 “몰랐다”고 했던 이 대표 발언에 대해선 고인의 아들이 증언대에 서서 이 대표에게 맞섰다. 이들이 국회 권력 앞에서 회피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는 데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용기가 유죄 판결을 이끌어 냈다.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는 자신의 모든 혐의가 “검찰의 창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 검찰이 정적(政敵)을 죽이려 ‘수사 아닌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표를 궁지로 몬 것은 검찰도, 정권도 아니다. 단군 이래 최대 비리라는 대장동 스캔들은 지방 인터넷 매체 기자의 기사에서 시작됐다. 수원 소재 경기경제신문의 박종명 대표 기자가 ‘화천대유는 누구 것이냐’고 묻는 칼럼을 써 비리 의혹을 처음 고발했다.
위증 교사 사건에선 성남시장 수행비서 출신 김모씨가 이 대표를 외통수로 몰았다. 김씨는 과거 자신이 이 대표에게 유리하게 위증했음을 인정하며 “이 대표가 시키지 않았다면 거짓 증언할 이유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위증을 요구한 적 없다는 이 대표 주장을 정면 부인한 것이다. 이 사건의 1심 판결도 열흘 뒤 나온다.
이 대표는 사법 시스템을 정치로 오염시키려 했다.거대 야당을 앞세워 국회 상임위를 범죄 방탄의 무대로 만들고, 수사 검사들을 탄핵 소추로 보복하는 폭주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표의 혐의를 뒷받침한 것은 경기도 7급 별정직, 성남시 전직 과장·팀장, 극단적 선택을 한 고인의 유족 같은 이들이었다. 권력과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이 이 대표의 ‘알리바이’를 하나둘씩 무너트렸다. 정치로 사법 리스크를 돌파하려는 이 대표의 방탄 전략이 핀트도 맞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11.30 법원이 암시한 李대표 '예비적 유죄' 3건
죄질이 무거운
핵심 혐의 선고가
나오려면 멀었지만
법원은 관련 재판의
조각 정보들을 통해
유무죄를 가늠할
힌트를 주었다
▲이재명 대표가 민주당 지도부와 함께 지난 23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특검 촉구 집회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전기병 기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선거법 재판에서 피선거권 박탈형을 받고도 당당한 데는 나름의 방어 논리가 있다. 큰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허위사실 공표는 공정 선거를 흔드는 반(反)민주적 범죄지만 일반 국민이 보기에 죄질이 약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대표 측은 “말 좀 잘못했다고 야당 대표를 죽이냐”며 ‘탄압’ 프레임을 내세우고 있다. 검찰이 먼지떨이 식으로 사소한 혐의까지 탈탈 털었다고 주장한다.
1승 1패를 기록한 선거법 위반과 위증 교사는 이 대표의 12개 혐의 중 가장 가벼운 것들이다. 죄질이 무거운 핵심 사건은 언제 결론 날지 기약조차 하기 어렵다. 대장동·백현동·위례 비리나 대북 송금 뇌물, 법인카드 횡령 같은 것들이 국민의 ‘분노 게이지’가 높은 진짜 혐의인데, 이 재판들은 아직도 첩첩산중을 헤매고 있다. 자칫 대선 때까지 선고가 내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연 전술을 펼치는 이 대표에게는 다행이겠으나 유권자로서는 불행한 일이다. 이 대표 사법 리스크에 대한 판단 근거를 갖지 못한 채 투표장에 나가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판단 자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법원은 주변 인물에 대한 재판을 통해 몇 가지 힌트를 주었다. 관련 판결문들에 제시된 조각 정보를 조합하면 사법부가 이 대표의 혐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그림을 짜맞출 수 있다.
첫째, 법인카드 유용이다. 이 대표는 경기 지사 시절 법카로 음식을 구입하는 등 경기도 예산 1억원을 개인 용도에 쓴 혐의로 기소됐다. 쟁점은 사적 유용이 있었느냐와 이 대표가 지시·관여했느냐 두 가지다. 이 중 유용 부분은 이 대표 부인 김혜경씨의 수행비서 배모씨가 별도 재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음으로써 사실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배씨가 ‘상하 관계’에 있던 김혜경씨에게 “여러 차례 초밥·과일·식재료 등을 전달한 사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경기도 예산이 이 대표 부부 생활비로 쓰였다는 뜻이다.
김혜경씨의 관여 사실도 인정됐다. 김씨 사건의 1심 재판부는 김씨와 배씨의 공범 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김씨의 묵인·용인” 아래 배씨의 법카 사용이 이뤄졌고, 김씨도 이를 “인식했다”고 보았다. 김씨가 법카 유용의 공범이라면 이 대표 역시 공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경기 지사 신분이던 이 대표야말로 배씨의 상급자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혜경씨 1심 판결이 이 대표에 대한 유죄 선고와 다를 바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둘째, 백현동 비리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 자신의 선대위원장을 지낸 김인섭씨 청탁에 따라 민간 업자에게 사업권을 주고 부지 용도를 4단계 상향하는 등의 특혜를 제공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청탁이 성공했음은 로비스트 김씨가 징역 5년형 확정 판결을 받음으로써 사실로 인정됐다. 김씨의 재판부는 “피고인(김인섭)은 이재명·정진상 등 성남시 공무원의 직무에 속한 인허가 사항을 알선해” 74억원 이상 이익을 얻었다고 판시했다.
이 대표는 용도 변경이 “국토부 압박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책임을 피하려 했다. 자신의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주 전 선거법 사건 공판에서 재판부는 이 대표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이 대표가 스스로 검토해 용도 변경을 했다”고 판단했다. 두 개의 판결을 결합하면 용도 상향 특혜는 이 대표 본인 결정에 따른 것이고, 그 결과 백현동 로비가 성공했다는 구조가 된다. 형법상 배임 요건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셋째, 대북 송금 사건이다. 이 대표는 자신의 방북 비용 등을 쌍방울에 대신 지급하게 했다는 제3자 뇌물 혐의로 기소됐다. 기본적 사실관계는 공범으로 기소된 이화영 전 경기 부지사의 1심 유죄 판결에 의해 확인됐다. 재판부는 이 전 부지사가 쌍방울에 800만달러 대납을 요구했고 실제로 일부가 북한에 전달됐다고 판시했다. 이 전 부지사 요구에 따라 쌍방울이 달러를 보낸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남은 쟁점은 이 대표가 대납에 관여했느냐다. 이 대표 방북 사례 용도의 돈이 송금됐음이 인정된 만큼 이 대표가 몰랐다는 것은 법리적으로 성립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이 전 부지사도 검찰 조사에서 “이재명 지사에게 (대북 송금을) 보고했다”고 진술했다가 민주당 쪽에서 온갖 압박을 가하자 입장을 번복했다. 이 사건은 이 전 부지사가 유죄면 이 대표도 유죄를 피하기 어려운 구조다. 법원이 이 전 부지사에게 1심 유죄 판결을 내린 데는 이 대표도 공범이란 심증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법원은 일련의 관련 판결을 통해 이 대표 핵심 혐의 중 최소 3건을 ‘예비적 유죄’로 판단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런 속에서도 이 대표와 민주당은 자숙할 기미 없이 방탄의 가속 페달을 더 세게 밟고 있다. 위증 교사 1심 무죄가 나오자 기세를 올리며 오만의 폭주를 거듭하는 모습이 기가 막힌 것은 그 때문이다.⊙
12.14 '윤석열의 강' 너머 '이재명의 강'
탄핵으로 가닥 잡힌
'윤석열의 강'을
채 건너기도 전에
국정 혼란을 부추기는
'이재명 리스크'가 등장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지난 4일 새벽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후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리스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윤 대통령이 이룬 업적은 적지 않으나, 한편에선 독단적이고 충동적인 의사 결정으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김건희 여사 감싸기, 한동훈 때리기, 보수 연대 해체, 일방적 의대 증원, 채 상병 사건 격노 등등 국민 눈높이와 동떨어진 비상식적 행보로 총선을 망치고 고립을 자초했다. 이해하기 힘든 자해극이 돌출돼 나올 때마다 그에게 표를 던져준 지지자들은 속된 말로 ‘X팔리는’ 심정이 되어 스트레스 받아야 했다. 결국 시대착오적 계엄 자폭을 감행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보수 진영, 나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윤석열 사태’가 가는 길은 결국 정해져 있다. 고립된 정신세계를 고백한 윤 대통령 담화는 왜 그를 대통령직에서 배제해야 하는지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탄핵 코스는 피할 수 없는 외길 수순이 되었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올 때까지 찬성·반대가 대립할 것이나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격랑의 탄핵 정국에서 윤 대통령은 더 이상 주체적 변수가 아니다. 윤 정권의 짧은 시대가 가장 비극적 방식으로 종착점을 치닫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대통령 윤석열과 결별하고 ‘윤석열의 강’을 건너야 한다.
그런데 탄핵의 강이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를 불안케 하는 또 다른 리스크가 등장했다. ‘이재명 리스크’다. 이 대표는 계엄 후 정국의 최고 주인공이다. 위기 대응에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할 그가 도리어 국정 혼란을 부추기는 무책임함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당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을 국무총리를 탄핵소추하겠다고 한다. 형사 고발까지 언급했다.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을 내란 가담 혐의로 수사하는 특검법도 통과시켰다. 국무위원들을 줄줄이 엮어 무정부 상태로 몰아넣겠다는 의도처럼 보인다.
계엄 실패 이후 이 대표와 민주당의 행세는 ‘점령군’을 방불케 했다. 자기편 아닌 사람에게 ‘부역자’ 딱지를 붙이며 장관들에게 호통치고 군인들을 윽박질렀다. 한 민주당 의원은 국회 본회의장에 나온 국무위원들을 일으켜 세우더니 “90도로 사죄하라”고 몰아붙였다. 인민재판을 보는 듯했다. 4성 장군 출신 의원은 계엄에 동원된 장군들을 개인 유튜브에 불러내 ‘포로 심문’ 하듯 다그쳤다. 그 와중에 이 대표는 해외 언론과 돌아가며 인터뷰하며 대권 행보를 시작했다. 정권 탈환을 위해서라면 국정이 마비돼도, 안보가 흔들려도 상관없다는 태도 같았다.
계엄의 위헌성엔 비교도 안 되지만 이 대표 역시 헌법 침해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2년 새 민주당이 발의한 탄핵안이 28건에 달한다. 하나같이 정략적 목적이거나 보복·협박성이 뚜렷했다. 대장동·백현동 비리, 대북 송금 등 이 대표 관련 사건을 수사한 검사들을 타깃 삼아 무더기 탄핵안을 발의했다. 계엄 이틀 뒤엔 서울중앙지검장 등도 탄핵소추해 직무를 정지시켰다. 이 대표 재판의 공소 유지를 맡은 수사팀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뜻이 엿보였다. 수사를 훼방놓는 사법 방해는 중대한 헌법 위반이다.
민주당은 방통위원장·장관 등에 이어 감사원장 탄핵소추안까지 통과시켜 원장 공석 사태로 만들었다. 탈원전, 서해 공무원 피살 등 문재인 정권 적폐를 감사했다는 이유였다. 감사원의 직무 감찰은 헌법 조항에 명문화돼 있다. 정치 보복을 위해 헌법상 감사 기능을 마비시킨 것이다. 이 대표가 계엄의 위헌성을 따지려면 먼저 자신의 위헌 폭주부터 설명해야 한다.
민주당 장악 과정에서 보여준 이 대표의 정치술은 윤 대통령 못지않게 독선적이고 강압적이었다. 그는 반대 세력을 가차 없이 축출하며 공당을 1인 사당화했다. 거대 야당을 개인 로펌처럼 활용하며 국회를 방탄의 무대로 만들고 온갖 입법 폭주로 정상적 국정 운영을 막아섰다. 입법권 남용은 의회 민주주의를 흔들고 3권 분립을 침해하는 헌법 위반이다.
탄핵 정국에서도 이 대표의 재판 지연은 계속되고 있다. 계엄 사태 후 열린 대장동 재판에서 이 대표는 두 번 연속 불출석했다. 선거법 재판도 질질 끌고 있다. 1심 징역형에 이어 항소심이 접수됐지만 이 대표는 소송 기록 접수 통지를 수령하지 않고 변호인 선임도 미루고 있다. 대선 전 선고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노골적인 사법 방해다.
이 대표는 계엄을 저지한 주역이지만 다음 대통령이 누구냐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이 대표가 혐의 12개를 짊어진 채 형사 피고인 신분으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에 거부감 갖는 국민도 적지 않다. 범죄 혐의의 진실이 가려지기 전에 선거로 면죄부 주는 것이 정의롭냐는 질문은 타당하다. 이 대표가 대답할 때가 됐다.
조기 대선이 가시화될수록 ‘이재명 리스크’에 대한 국민적 의문도 거세질 것이다. 그 의문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나라가 두 쪽 나는 ‘이재명의 강’에 빠져들 수 있다.⊙
12.28 제2, 제3의 한덕수가 계속 나오면
민주당의 점령군 행세는
갈수록 가관이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게 있다
아무리 겁박해도
제2, 제3의 한덕수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우원식 국회의장이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탄핵소추안 의결 정족수가 151명이라고 밝히자 국민의힘 의원들이 의장석으로 몰려가 항의하고 있다. /뉴스1
민주당이 의결 정족수 논란을 무시하며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탄핵소추한 것은 자신들을 무소불위 점령군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만큼 다급하다는 뜻도 된다. 이재명 대표의 대권 플랜에 일분 일초가 아쉬운 민주당으로선 정치색 없는 실무형 총리가 저렇게까지 저항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대행은 민주당 강행 6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데 이어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도 여야가 합의해 오라고 버텼다. 임명을 거부한 게 아니라 정치적 해결을 요청한 것인데 민주당은 즉각 탄핵의 칼을 뽑아들었다. 한 대행으로선 탄핵소추당할 것을 알면서 정면 돌파로 옥쇄(玉碎)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허약해보이던 관료 출신 한덕수가 이렇게 세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한 대행에게 따라붙는 상투어가 ‘무색무취’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이명박 정부를 거쳐 윤석열 정부까지 두루 중용되며 경제수석·부총리에다 총리 2번을 지낸 화려한 이력 덕에 ‘영혼 없는 관료’란 이미지가 굳어졌다. 기능만 탁월한 ‘행정 기술자’라는 것인데, 취재 현장에서 수십 년간 그를 봐온 필자는 이런 상투적 낙인이 얼마나 곡해된 것인지 알고 있다. 그는 정치적으론 무색무취하지만 국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선 분명한 자기 철학을 갖고 일관성 있게 주장해온 사람이다. 적어도 ‘영혼 없는 기술자’는 틀린 표현이다.
그는 철저한 시장주의자이자 경제 영토를 넓혀야 기회가 온다고 믿는 개방 신봉자다. 그의 개방 철학은 정치 환경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았고, 좌파가 집권했다고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도리어 그가 개방의 신념을 밀어붙여 정책으로 현실화한 것은 좌파 정권 때가 더 많았다. 김대중 정권의 통상교섭본부장 시절 한국 영화 스크린 쿼터 폐지를 주장해 영화계를 뒤집어 놓았고, 노무현 정권의 경제 부총리 때 이를 절반으로 축소하는 방안을 관철시켰다. 추곡 수매 제도를 폐지하고 쌀 시장을 개방해 성난 농민들에게 ‘볍씨 세례’를 당하기도 했다.
21세기 한국 외교의 최대 성과인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의 숨은 조정자도 한덕수였다. 노무현 정권 당시, 통상교섭본부장 김현종이 협상 전면에 섰지만 막후에서 큰 전략을 짜고 부처 간 이견을 조정하며 그림을 그린 것이 그였다. 한덕수는 대한민국이 생존하려면 미국과 경제의 피를 섞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협정 체결에 성공했고, 그는 이명박 정부의 주미 대사로 기용돼 미 의회의 FTA 비준안 통과까지 마무리지었다. 한·미가 안보에 이어 경제 혈맹을 맺은 데는 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무색무취가 아니라 신념을 갖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이념을 좌·우로 가르는 시대는 지났다고 본다. 국가를 위로 끌어올리는 ‘업(up)’이냐, 추락시키는 ‘다운(down)’이냐만 있을 뿐이란 소신을 국회 답변에서 밝힌 적도 있다. 좌든 우든, 나라에 도움되고 국익에 기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업’ 세력으로 규정되길 원하는듯 했다. 김대중·노무현의 좌파 정권에서도, 이명박·윤석열의 우파 정권에서도 국익 관점만 보는 ‘업’의 입장에 서왔다는 것이다.
올 4월 총선 후 거대 야당의 폭주가 본격화되자 한 총리의 입도 거칠어졌다. 좀처럼 흥분하는 법이 없던 그가 야당 공격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곤 해 정가의 화제가 됐다. 일각에선 정치적 야심을 의심했지만 그가 정치에 뜻도, 소질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한 총리는 여·야 대치를 치닫는 정치 상황을 답답해했다. 민주당이 과거의 전통을 잃고 이재명 1인을 위한 전투형 사당(私黨)으로 전락해가는 것을 보며 자신이 알던 그 당이 아니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민주당이 탄핵 폭주, 입법 폭주, 방탄 폭주를 거듭할수록 한 총리도 투사로 바뀌어갔다. 침묵해선 안 된다고 작심한 듯했다.
야권에선 과거 자기 편이던 한 총리에게 ‘사람이 달라졌다’고 비난했다. 김대중 청와대 시절 비서실장·경제수석으로 호흡을 맞췄던 박지원 의원은 국회 질의에서 “나쁜 한덕수”로 변했다고 공격했다. 한 총리는 “제가 왜 변하냐”고 반박했는데, 변한 것은 자신이 아닌 야당이란 항변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시절의 합리성을 잃은 민주당이 ‘나쁜 민주당’으로 추락했다고 호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변질된 민주당은 대통령에 이어 권한대행까지 탄핵소추해 국정을 혼란으로 밀어넣었다. 정권 탈환을 위해선 경제가 망가지든, 국정이 마비되든 상관없다는 그 무모함이 소름 끼친다. 말 안 들으면 팬다는 민주당의 점령군 행세는 갈수록 가관이다. 두번째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을 경제 부총리도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또 탄핵으로 협박할 게 뻔하다. 그러나 민주당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폭주를 멈추지 않는 한 아무리 겁박해도 제2, 제3의 한덕수가 또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