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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2024-02] 07.06 식민지 조선인 입맛 훔친 카레 - 12.28 바이올린은 왜 '허세의 상징'이 됐을까

상림은내고향 2024. 12. 7. 12:19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2024-02]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조선일보  

07.06 식민지 조선인 입맛 훔친 카레

1920년대 카레라이스 조리법 신문 등장, '찬밥치다꺼리에 손쉬운 洋요리 '

▲김남천이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사랑의 수족관' 삽화. 정현웅이 그렸다. 주인공 경희가 조선은행 건너편 고급식당 청목당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식사하는 장면이다. 1930년대 청목당의 카레라이스 가격은 40전 안팎으로 설렁탕, 장국밥보다 2~3배 비쌌다. 조선일보 1939년9월28일자

‘찬밥치다꺼리에 손쉬운 洋요리’.

90년전 신문에 찬밥 처리에 안성맞춤인 서양 요리로 ‘카레’를 꼽은 기사가 실렸다. 카레를 특별 메뉴가 아니라 찬밥 처리용 음식으로 소개했다는 점이 신기하다. 일상에 스며든 가정식으로 대접받았다는 얘기다. 신문에 실린 ‘라이스 카레’(카레 라이스)조리법을 요약하면 이렇다.

3인분 재료로 닭고기 조금, 양파 2개, 밀가루 큰 숟가락 하나, 버터 큰 숟가락 셋,우유 또는 고기 국물, 소금, 후추, 아지노모토와 카레 가루 작은 숟가락 2개 분량을 준비한다. 먼저 닭고기를 잘게 썰어 소금과 후춧가루를 뿌린 다음 밀가루를 묻힌다.

 

양파는 곱게 다진 뒤 후라이팬에 버터 두숫가락을 넣고 불에 놓아 뜨거워진 다음에 다진 양파를 잘 익힌다. 다시 버터 한 숟가락을 넣고 닭고기를 넣은 뒤 2분동안 익힌다. 카레 가루 두 숟가락을 잘 섞은 다음에 우유나 국물을 쳐서 전체를 걸쭉하게 만들고 소금, 후춧가루, 아지노모토를 넣어서 간을 맞춘다. 강한 불로 끓인 뒤 차차 약한 불에서 한 30분 동안 천천히 익힌다. 카레가 준비되면 밥위에 끼얹어 먹는다.(‘찬밥치다꺼리에 손쉬운 洋요리’2,조선일보 1934년3월10일)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2년 서양음식 조리법을 소개한 책 '서양요리통'. 몇달전 출간된 '서양요리지남'과 함께 일본에서 처음으로 카레 요리법을 알린 책이다.

◇카레엔 아지노모토

일본산(産) 조미료인 아지노모토(미원의 원조)를 카레에까지 넣었다는 게 눈길을 끈다. 1909년 일본서 처음 출시된 아지노모토는 조선에는 1915년 매일신보 광고에 처음 등장한다. 아지노모토는 ‘조선박람회’가 열린 1929년부터 판매량이 급증했다. 조선총독부는 1929년 9월12일~10월31일 경복궁에서 식민 통치의 성과를 과시하는 조선박람회를 주최했다.아지노모토 회사는 박람회를 계기로 대대적 선전 활동을 펼쳐 음식점은 물론 가정의 필수품으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아지노모토를 평양 냉면, 장국밥, 떡국, 육개장, 설렁탕 등에 무조건 넣으라는 광고가 먹히면서 모든 국물 음식에 들어가게 됐다.

◇조개 라이스 카레도 등장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카레라이스 만드는 법이 신문에 소개될 만큼 상당히 익숙한 음식이 된 것같다. 동아일보 1925년 4월8일자에 소고기 카레라이스 만드는 법이 나온다. 소고기 반근, 양파 2개, 감자 약간, 단근(당근) 약간, 밀가루, 카레가루가 준비물이다. 카레를 끓일 때 계란부침을 잘게 썰어넣거나 사과 반개를 넣으면 맛이 좋아진다는 팁을 주는 게 독특하다.

 

조개나 굴을 넣은 카레 라이스 조리법도 일찍부터 등장한다. ‘조개나 굴을 넣고 라이스카레를 만들 수있으니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조개로 하든지 굴로 하든지 먼저 소금물에 씻어서 물기를 뺄 것입니다.’ (‘자양많고 맛있는 패류의 요리법’, 조선일보 1928년4월6일) 중외일보(1928년11월8일)도 ‘라이스카레 만드는 법’을 소개했다.

 

 ▲1930년 공평동에 있던 전동식당이 라이스카레를 비빔밥, 설렁탕, 장국밥과 같은 가격인 15전에 판매한다고 실은 조선일보 1930년 11월8일자 광고

◇전동식당의 ‘파천황의 염가 광고

카레 라이스는 원래 식당에서 파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1907년 개업한 서양요리점 청목당은 1914년 조선호텔 양식당이 문을 열기 전까지 최고의 서양음식점이었다. 조선은행,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는 본정(本町) 입구에 자리잡은 이 식당의 1930년대 카레라이스 가격은 40전이었다. 비프스테이크 70전, 정식이 1원50전, 2원, 2원50전이니 서양 음식 중에선 저렴하지만, 설렁탕, 장국밥보다는 두세배 비쌌다.

 

조선음식과 서양음식을 같이 취급한 공평동 전동식당은 1930년 음식값 인하 광고를 신문(조선일보 1930년11월8일)에 게재했다. 라이스카레는 15전으로 비빔밥, 대구탕, 장국밥, 떡국과 같은 가격이었다. 쌀값 폭락에 따른 ‘파천황의 염가’로 제공한다고 선전한 것으로 보아 평소보다 싼 가격이었을 것이다.

 

 ▲1907년 문연 서양요리점 청목당. 조선호텔 이전 개업한 고급 서양식당이었다. 1930년대 카레라이스를 40전에 팔았다. 조선은행쪽에서 촬영했다. /서울역사박물관

◇和洋일체 음식 ‘카레’

카레는 대부분의 서양음식처럼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일본의 카레는 메이지 유신 초기인 1870년대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1872년 출간된 ‘서양요리지남’ ‘서양요리통(通)’같은 책에 카레조리법이 나온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인 다이쇼(大正) 시대와 쇼와(昭和) 시대에 접어들어서야 대중화됐다. 군대와 학교 같은 단체 급식에 잘 맞았다. 고기와 채소가 골고루 들어가 영양소가 균형을 맞췄고,한꺼번에 대량의 음식을 준비하는 데 적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급된 카레는 라멘, 스시와 함께 일본인의 소울 푸드로 꼽힐 만큼 인기있는 음식이 됐다. 조선의 카레 보급은 일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진행됐다.

◇어린이도 카레 선호

1930년대 카레는 어른은 물론 어린이들도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한 학교에서 학생 120명에게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을 조사했더니, ‘라이스 카레’가 ‘누른 밥’(누룽지), 고로케, 치킨 라이스, ‘멘티보르’와 함께 높은 점수를 받았고, 생선 구이, 나물 무침, 간장, 숙주나물, 장찌개, 물고기, 야채샐러드 등이 싫어하는 음식으로 꼽혔다.(’어린이 음식, 어떤 것을 즐기나’,조선일보 1936년 5월15일)

◇라이스카레, 나이수카리?

1930년대 후반이 되면 ‘비프 카레 라이스’ ‘치킨 카레 라이스’ ‘드라이 카레 라이스’처럼 각종 카레 라이스 조리법을 소개하면서 ‘누구나 잘 아는 ‘카레-라이스’란 표현이 등장할 만큼 카레는 익숙한 음식이 됐다. (’라이스 요리 몇가지-손쉽게 되는 가정 요리’, 조선일보 1937년 8월18일)

 

하지만 한용운 장편 소설 ‘박명’(薄命)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같다. 주인공 순영이 친구 정순과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점심을 사먹는 장면이 나온다. 순영은 ‘라이스 카레’를 먹겠다는 친구 얘기에 ‘나이수카리?’라고 동문서답을 한다. ‘이런 멍텅구리, 나이수카리가 머냐, 너 부러 그러는구나 나를 놀리려구.’ 정순은 무안을 주지만 순영은 정말 모르는 눈치다. (‘박명’ 108, 조선일보 1938년9월28일) ‘라이스카레’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도 적지않았음을 보여준다.

 

20세기 후반 들어 카레는 MT나 군대 같은 단체급식에서 빠질 수 없는 메뉴로 자리잡았다. 누구나 좋아하고 대규모 인원에게 손쉽게 식사를 제공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란 카레의 맛은 한국인의 입맛으로 자리잡았다.

◇참고자료

모리에다 다카시 지음, 박성민 옮김, 카레라이스의 모험, 눌와, 2018

박현수, 경성 맛집 산책, 한겨레출판, 2023

박현수, 식민지의 식탁, 이숲, 2022

주영하, 백년식사, 휴머니스트, 2020

 

07.13 오페라 '카르멘''나비부인'…부민관 전성시대

1935년 12월 개관, 3500석 대극장서 오페라,오케스트라 선보여

 ▲1935년12월 개관한 경성 부민관. 9층 높이 시계탑이 우뚝 솟아있다. 부민관은 국내 첫 오페라, 전문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린 공연의 메카였다. 오른쪽 벽돌색 건물은 5개월 앞선 1935년 7월 준공된 조선일보 태평로 사옥. /서울역사박물관

 

‘半島 樂界에 획기적 공전의 장거(壯擧)’. 1940년 10월25일자 매일신보는 후지와라 가극단의 오페라 ‘카르멘’공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10월 오페라 공연이라니! 그것도 경성 시내 한복판인 부민관에서였다. 경성부청(현 서울시청) 바로 건너편이었다.

 

일본 음악계의 스타인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藤原義江·1898~1976)는 1940년 10월25일~27일 자기 이름을 딴 오페라단을 이끌고 내한, ‘카르멘’을 올렸다. 한해전인 1939년3월26일 후지와라 가극단 이름으로 처음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올린 ‘카르멘’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후지와라 가극단은 일본 패전 이후에도 대표적 민간 오페라단으로 활약했다. 재일교포 테너 김영길(일본명 나가타 겐지로)과 훗날 서울대 음대에서 제자를 키워낸 베이스 이인영이 이 가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40년 10월25일~27일 부민관에서 열린 후지와라 가극단 오페라 '카르멘' 광고. 최고가 티켓이 4원50전이었다. 매일신보 1940년 10월25일자에 실렸다.

◇후지와라가 돈 호세 맡아

세르게이 슈와이코브스키가 지휘하는 하얼빈 교향악단이 연주를 맡기로 했으나 공연 직전 시노하라 마사오(篠原 正雄)가 이끄는 도쿄관현악단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처음 오페라 ‘카르멘’을 부른 메조 소프라노 사토 요시코(佐藤 美子)가 카르멘을, 남자 주인공 돈 호세엔 후지와라가 나섰다. 1937년 박태현이 설립한 민간의 경성백조(白鳥)합창단이 합창을 맡았다. 가사도 프랑스어가 아니라 일어로 불렀다. 입장료는 4원50전, 3원50전, 2원30전으로 상당히 비쌌지만 2000석 극장은 가득찼다.

 

이 공연은 기이할 정도로 공연 리뷰나 소개 기사를 찾기 어렵다. 조선, 동아일보가 폐간된 이후였기 때문에 한글 민간지는 그렇다쳐도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나 매일신보도 광고나 짤막한 단신보도 밖에 없어 공연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전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때문인지 음악계에서조차 1940년’카르멘’이 공연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드물다. 일본인이 올린 공연 자체에 무관심한 국내 음악계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카르멘’뿐 아니다. 부민관에서 열린 음악회 목록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다. 부민관 음악회에 대한 심층 분석은 차치하고, 연구 자체가 드물다.

 

 ▲부민관이 1935년 12월10일 개관한다는 소식을 알린 조선일보 1935년 12월8일자 기사. 개관 기념으로 경성부 예산 5000원을 들여 기생공연을 올린다는 소식에 신문들은 비판적이었다.

◇기생 연주로 개관한 부민관

‘50만원의 거액을 던져 태평통(通)에 건축중이던 부민관은 7일로써 준공이 되었다. 부민관의 자랑인 대 ‘홀’은 3000명의 관중을 수용하는 것으로서 무대에만 2만킬로와트의 조명을 설비했고, 그 밖에도 ‘풋라인’ ‘보더 라잇’ ‘써스펜션’ ‘스풋틀라잇’등등 각 조명 장치와 조광기(調光器)도 설치했다고 한다. 개관식은 11일 오전10시반에 성대히 거행하리라고 하며 그날부터 사흘동안 매일 오후6시부터 개관 피로(披露)로 기생과 예기의 무용을 상연시킬터이라는데 입장료는 50전, 35전, 20전을 받으리라 한다. 그리고 11일과 12일 이틀 동안은 오전10시부터 오후3시까지 일반에게 공개해서 내부를 구경시킨다고 한다.’(‘今日 조성된 부민관 10일부터 피로 연주’, 조선일보 1935년12월10일)

 

‘경성의 명물’이라던 부민관 개관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부민관 개관 기념 공연으로 경성부 예산 5000원을 들여 기생 연주회를 연다는 경성부 발표에 비판을 퍼부은 신문들이 시큰둥했기 때문이다.’오천여원 경비들여 하필왈 기생연주’(조선일보 1935년11월20일)를 비롯, ‘대체 ‘부민관 다 됐음네’하고 첫 인사하는 것이 겨우 기생들의 웃음을 사는 것인가?’(휴지통, 동아일보 1935년 12월8일)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1937년 5월 26일과 27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오페라 '나비부인' 전면 광고. 김영길을 '천재적 테ㅡ너'로 소개했다. 매일신보 1937년 5월26일자 전면광고.

◇경성전기 기부금으로 건립

부민관 건립 비용 50만원은 경성전기가 댔다. 경성전기는 비싼 전기요금과 전차, 버스 독점 운영으로 회사를 공영화하라는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공공사업 시설비로 100만원을 경성부에 기탁했다. 이 돈으로 부민 병원을 세우고 남은 50만원으로 부민관을 설립했다. 대지 1486평,연건평 1717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부민관은 냉난방시설까지 갖춘 현대식 초대형 공연장이었다. 고정석 1800석, 보조의자 200석에 입석 1500명까지 더하면 3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1920년 개관한 경성 공회당과 1929년 11월 대강당 확장 공사를 통해 800석으로 늘어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일제 후반 공연의 메카

부민관은 일제 후반 10년 음악, 연극, 무용 등 공연의 메카 역할을 했다. 하얼빈 교향악단(1939년3월)을 비롯, NHK 교향악단 전신이자 당시 일본 최고 수준인 신교향악단(1939년6월10일~11일, 1940년6월15일~16일, ‘악단의 충동 신향 내연’, 조선일보 1939년5월25일)과 만주 신경교향악단(1940년10월7일) 공연이 열렸다. 국내 첫 전막 오페라인 ‘나비부인’(1937년 5월26일~27일)과 후지와라 가극단의 ‘카르멘’이 잇달아 올라간 무대도 부민관이었다. 특히 미우라 다마키가 초초상을 부른 ‘나비부인’엔 조선인 테너 김영길과 조영은이 상대역 핀커튼을 맡아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일본 중앙(中央)교향악단, 미우라 다마키 합창단 등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일본에서 건너왔다. 부민관 개관을 기다린 듯한 초대형 공연들이 이어졌다.

 

 ▲일본 제1의 오케스트라 신향이 1939년 6월10일~11일 경성 부민관에서 공연한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1939년5월25일자 기사

◇개관 5개월만에 출연한 조선인 음악가

 

화제를 낳은 대규모 음악회가 부민관에 몰리면서 조선 양악계가 ‘셋방살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위축되는 경향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이경분 교수 연구에 따르면, 부민관 대강당을 선점한 음악 공연은 일본측 프로그램이었다. 첫 음악 공연은 1935년 12월15일 오후2시 경성제대 악우회 교향관현악단의 제11회 정기연주회였고 같은 날 저녁 8시 일본 성악가 사토 요시코(佐藤 美子)독창회였다. 아마추어 악단인 경성제대 교향악단은 일본인 학생 위주였고, 그날 협연자 역시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음악가가 연주한 첫번째 ‘순수 양악연주회’는 개관 5개월이 지난 1936년 4월24일 열린 ‘계정식 현악4중주단 제1회 발표회’(桂氏 4중주단 제1회 연주회, 조선일보 1936년4월22일)로 보인다. 계정식(제1바이올린) 박태철(제2바이올린) 안성교(비올라) 김인식(첼로)으로 구성된 4중주단은 하이든 현악4중주 D장조 64-5 ‘종달새’로 시작, 모차르트 현악4중주로 마무리했다. 계정식 현악4중주단은 다음달인 5월15일 조선음악가협회 제1회 연주회가 주최한 부민관 공연에도 섰다.

◇양악계의 약진, 1938년

1938년은 조선 양악계가 약진한 해였다. 채선엽(5월5일) 정훈모(5월20일) 독창회를 비롯, 안병소(10월28일·11월15일) 바이올린 독주회, 이관옥(11월4일) 독창회, 경성현악4중주단 음악회(12월7일) 경성음악협회 제1회 연주회(12월5~6일) 등 그해 부민관 음악회 약 50회 중 20회를 넘어선다. 그 해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공연은 우크라이나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도쿄음악학교 교수인 레오 시로타(Leo Sirota)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조선인 음악가들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하지만 1939년 이후 하얼빈 교향악단, 신교향악단, 신경 교향악단과 후지와라 가극단이 화제를 모으면서 조선인 음악가들의 비중이 약해졌다.

 

 ▲부민관 개관 5개월후에야 조선인 음악가 중 처음으로 무대에 선 계정식현악사중주단. 1936년 4월24일 현악사중주단 제1회 연주회를 가졌다. 조선일보 1936년4월22일자

◇안방 내주고 셋방살이(?)하는 조선 음악계

이 때문에 평단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봄 씨-즌이 반을 넘어서도 겨우 최창은 독창회와 신인음악회가 있었을 뿐으로 앞으로도 부민관 ‘홀’은 외래 연주가로 독차지한 감이 있다. 그렇게 한산한 원인을 들자면 하나는 조선의 음악가들은 종래로 모두가 유아독존적 선생님들뿐이어서 어떤 집단적인 활동이란다거나 연구 같은 기특한 발분이 없는 탓이고 또 한 가지는 악단적으로 기력이 없느니만치 안개만치의 분위기나 티끌만치의 자극도 없이 지내는 서재파의 실력으로서는 도저히 청중의 공명을 얻을만한 자신을 잃고 만 점이다.그리고 또 한가지 거기 부언할 것은 리사이틀 형식으로서는 흥행상 큰 결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비극이 덮쳐있기 때문이다.’(耳豪, ‘셋방살이 악단’, 매일신보 1940년 5월21일)

◇행랑 셋방살이, 걷어치고 나가라

평론가 이호의 지적대로, 1940년 3월 부민관 대강당 음악 공연은 경성보육학교 음악회뿐, 전문 음악인들의 공연은 아예 없다.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 경성 YMCA 음악회, 경성사범학교 음악회 등 일본인이 주도한 공연 뿐이다. 경성 YMCA는 당시 일본인이 이끌던 단체로 종로에 있던 조선 중앙 기독교청년회를 흡수, 통합한 단체다. 회관도 일본인 거리인 장곡천정(長谷川町)에 있었다. 경성사범학교 학생, 교사 대다수도 일본인이었다.

 

이호의 분석은 일면 타당하다. 개인 리사이틀로는 2000석 대극장을 채울 만한 청중을 끌어들이기 어려운데다, 대규모 교향악단이나 오페라단을 꾸릴 형편도 아니었다. 부민관 같은 번듯한 공연장이 있는데도’객’(客, 외래연주자)에게 안방을 내줄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었다. 이 글은 음악계에 호소 내지 당부로 끝난다.

 

‘안채를 객(客)에 맡기고 행랑 셋방살이를 감수하는 악단 제군! 날씨도 차차 더워온다. 셋방을 걷어치고 나가지 않으려는가!’

◇참고자료

이경분, 부민관을 통해 본 경성의 조선양악계: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 2022

김은영,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음악공연양상 탐구-매일신보를 중심으로, 이화음악논집 24-1, 이화여대 음악연구소, 2020,3

 

07.20 결혼식 '핫플'로 떠오른 부민관

최승희 무용발표회,'춘향전'등 대형 공연 메카...총력전·내선일체 선전장 전락

 ▲1937년2월20일~21일 부민관에서 열린 최승희 도구고별공연 포스터. 개막 1시간반전에 좌석이 가득차 관객이 더 이상 입장할 수없을 만큼 성황을 이뤘다.

‘입신(入神)의 율동미(律動美)! 만목도취(滿目陶醉)·열광’

1937년 2월20일 경성 도심 한복판 부민관 주변엔 오후 4시부터 군중이 몰렸다. 무용스타 최승희 공연이 열릴 예정이었다. ‘최승희 무용의 첫날 20일의 개막은 밤 7시라는데 4시경부터 몰리는 군중은 5시반경 벌써 부민관이 터질듯이 차고 넘어 만원 패(牌)를 걸고 입장을 거절하지 않을 수없이 되었다. 태평통 넓은 거리 일대에 입장 못한 군중이 수없이 겹겹이 쌓여 경관대까지 출동하여 교통을 정리하는 등 인기는 무서운 것이었다.’(조선일보 1937년2월21일)

◇공연 1시간반 전 만원으로 입장거절

일본에서 활약하던 최승희는 그해 미국·유럽 진출을 앞두고 고별 공연차 경성을 찾았다.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린 ‘최승희 도구(渡欧)고별공연’은 2월20일과 21일 두차례 열렸다. 동경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만든 창작 신작으로 구성했다. 타악기 반주의 ‘위력에의 길’로 시작한 공연은 차이콥스키 작품 ‘안단테 칸타빌레’에서 받은 감상적인 기분을 무용화한 ‘마음의 흐름’, 아리랑을 무용화한 ‘아리랑의 리듬’에 이어 민속음악에 맞춰 제자 김민자와 함께 한 ‘조선의 듀엣’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만도(滿都)를 뒤집는 인기, 광란의 공연전주곡’, 조선일보 1937년2월19일)

 

입장료는 2원, 1원50전, 1원이었다. 관객이 많이 몰려 극장 문짝과 기구가 부서져 ‘55원55전의 수선비’가 들 정도였다. 부민관 개관 14개월 만에 가장 많은 관객이 몰린 공연이었을 것이다.(’대경성의 집회상’, 조선일보 1937년3월12일) 보조석을 합해 2000석 짜리 대극장은 최승희 신드롬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최승희는 한해전인 1936년4월3일~4일에도 부민관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42년2월과 1944년 5월에도 이곳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지면서 비(非)인기장르인 무용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미 군정아래 부민관은 미군전용극장으로 사용됐다. 1949년 미군 철수와 함께 서울시로 넘어왔다./서울역사박물관

◇연극, 무용, 영화 등 다목적 문화공간

1935년12월10일 경성부민의 문화 복지를 내걸고 개관한 부민관은 음악뿐 아니라 연극, 무용, 영화, 가극은 물론 각종 강연회 등 다목적 문화공간이었다. 특히 연극계에선 기껏해야 몇백석짜리 무대에서 2000석짜리 대극장의 등장이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1931년 창단한 대표적 신극단체인 극예술연구회는 제10회 공연부터 부민관에 올랐다.1936년4월11일~12일 이광래 작, 유치진 연출의 ‘촌선생’(3막),이서향의 ‘어머니’(단막)를 올렸다. 극예술연구회(후신 극연좌 포함)는 이후 4년간 이곳을 주무대로 썼다.

 

1936년 9월29일~30일 유치진이 각색, 연출을 맡은 연극 ‘춘향전’은 관객 몰이에도 성공했다.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는 ‘극예술연구회는 부민관 때문으로 해서 전문극단을 지향해 보려는 의지까지 보일 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극예술연구회는 일제 통제로 1938년 3월 극연좌로 이름을 바꿔야했고, 이듬해 5월 강제해산당했다.

 

극예술연구회 이외에도 중앙무대, 인생극장, 낭만좌, 고협, 황금좌 등 상업극단들이 부민관을 주무대로 삼았고, 동양극장 전속극단인 청춘좌와 호화선까지 부민관 무대에 올랐다. 배구자 악극단, 콜럼비아 악극단, 라미라, 신세계, 조선악극단 등 악극단체 10여개와 조선창극단 등 몇몇 단체까지 부민관을 무대로 썼다. 말그대로 복합공연장으로 활용된 것이다.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중인 옛 부민관. 내년이면 건립 90주년이 된다. /김기철기자

◇결혼식 ‘핫플’로 급부상…탁구대회도 열려

부민관은 결혼식 핫플로 인기였던 모양이다. 1937년 1월에만 31쌍이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대경성의 집회상’, 조선일보 1937년3월12일) 부민관 결혼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도 자주 등장한다.

 

스포츠 경기장으로도 쓰였다. 좌석 400석에 입석 1000명까지 들어가는 중강당이 무대였다. 조선체육회는 1936년 10월 개최한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중 탁구 종목을 이곳에서 열었다.(’신량(新凉)의 호절(好節)마저 스포츠 대(大) 페이젠트’, 조선일보 1936년 9월17일) 부민관 중강당에서 탁구 경기가 열렸다는 보도는 종종 나온다.

◇1940년대 친일어용물 양산

부민관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총독부의 전시(戰時) 예술정책의 주무대가 됐다.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로 1942년~1943년 부민관에서 열린 연극경연대회가 대표적이다. ‘국민극 수준을 높이고 각 부분의 연극인들로 하여금 예술가로서의 각자의 역량을 기울여 전시하 반도의 문화전’을 이룬다는 목표를 내건 이 대회는 조선총독부 정보과,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 매일신보가 후원했다. 총력전 체제 아래 불가피한 상황으로 변명할 수있으나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음악계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1940) 조선음악협회(1941) 경성후생실내악단(1942) 등 음악인들이 소속된 단체들은 내선일체와 총력전체제를 선전, 홍보하는 데 동원됐다.’음악보국(報國)주간 대연주회’(1941년6월)’국민음악연주회’(1943년2월) ‘전함헌납음악보국의 실내교향악의 밤’(1943년6월) 같은 전시체제하 관제(官製)공연에 당대의 대표적 음악인들이 출연했다. 부민관은 광복 후 문화예술계를 친일(親日)논란에 빠뜨린 오명(汚名)의 현장이 됐다.

◇전문 공연장 발전 막은 다목적 복합문화공간

유민영 교수는 부민관이 다목적 복합공간의 선례로서 부정적 유산을 현재까지 남겼다고 지적한다. 광복후 세종문화회관을 비롯, 전국 지자체마다 들어선 시민회관, 구민회관이 전부 비슷비슷한 다목적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면서 클래식 전용홀이나 연극 전문극장이 들어서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식민 당국의 후진적 문화정책을 광복 이후 그대로 받아들여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비판은 아프다.

◇광복 20일전의 ‘부민관 폭탄의거’

부민관 건립은 ‘식민지 도시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지배관계 간, 계층간 그리고 동족간 차별과 갈등, 경쟁으로 분산된 식민지 도시민들을 부민으로 통합할 수 있는 적절한 기제로 고안된 프로젝트’(김순주논문 29쪽)였다. ‘경성부는 부민관 건립을 통해 관민간, 민족간 통합을 향한 메시지를 표방’했다. 광복을 채 한달도 남기기 전인 1945년 7월24일 일어난 부민관 폭탄의거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균열을 낸 사건이었다.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한 조문기, 유만수, 우동학 등 스무살 안팎의 열혈청년들은 이날 저녁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 일당이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보도를 듣고 의거를 결행했다. 현재 서울시의회 앞에 부민관 폭탄 의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돼있다.

 

부민관은 광복 직후 미군정하 미 24군단 극장으로 쓰이다 1949년 미군 철수와 함께 서울시로 반환됐다. 이후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시민회관, 세종문화회관 별관 등으로 쓰이다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와 함께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중이다. 90년 가까운 굴곡의 현대사를 수도 한복판에서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다.

◇참고자료

유민영, 예술경영으로 본 극장사론, 태학사, 2017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 1996

이경분, 부민관을 통해 본 경성의 조선양악계: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 2022

김순주, 식민지시대 도시생활의 한 양식으로서의 ‘대극장’-1930년대 경성부민관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2014 가을, 2014, 8

김호연, 1930년대 서울 주민의 문화수용에 관한 연구-부민관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15, 2000,9

송방송, 부민관을 통해 본 일제 말기의 음악상황, 진단학보 80, 1995

 

07.27 '조선에 둘도 없는' 요리책 낸 미식가, 위관 이용기

1924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출간, 기생 요릿집 찾아다니며 가요 1400수 모은 '악부'도 내

 ▲이용기가 1924년 출간한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조선에 둘도 없는' 신식 요리책이란 점을 강조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위관(韋觀)이용기(李用基)는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을 살다 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기생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오입쟁이이면서 조선시대 가요를 1400편이나 수집한 책 ‘악부’(樂府)를 남겼고,계명구락부의 ‘조선어사전’ 편찬자였다.무엇보다 그는 1924년 ‘조선무쌍(無雙)신식요리제법’이란 요리책을 낸 선구자였다.조선에 둘도 없는, 말그대로 유일한 ‘신식요리책’이란 뜻이다.

 

이용기가 1917년 최초의 근대식 요리책으로는 꼽히는 ‘조선요리제법(製法)’ 서문을 썼다는 사실은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스물일곱 정신여학교 출신 교사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은 일제시대 판을 거듭하면서 최고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책이다.좀 배운 여성이라면 집집마다 한권씩 갖출 만큼,가정필독서였다.‘만가필비(萬家必備)’란 수식어를 붙여 책 제목을 달 정도였다.신문관 주인인 최남선과의 인연으로 이용기가 서문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국어학자 권덕규의 증언

1870년 서울서 태어나 1933년쯤 사망한 이 사내의 생애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훗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겪은 국어학자 권덕규가 이용기 사후 매일신보에 쓴 회고는 그 드문 기록 중 하나다.

 

‘위관(韋觀)이라 하면 서울서 모모한 사람은 대개 아는 이이다’로 시작한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그가 생전에 가끔 모모(某某)문사의 틈에 끼어 연석에 참여하게 되기는 무슨 까닭인가.그의 장기(長技)를 취하야 그랬다 하면 그가 음식솜씨가 있고 자차구리한 이야기-곧 잡담이 일수(一手)인 것도 하나이요 또한 문자의 섭렵도 그 방면으로 하야 들을 것이 있으며 더 나아가 말하면 여항의 풍속-더욱 서울 대가(大家)-양반의 집 이야기 또 더 궁중의 이야기도 많이 아는 고로이며 이런 이야기를 그만두고 실상 그의 이야기를 한다하면 한말 망명객들을 좇아 해외에 놀았음으로 그 방면의 이야기를 알아 그들의 내력을 들을 수있으며 해외의 지식을 겸한 고로이다.'질엉이(지렁이)를 보고 위관을 생각하며', 매일신보 1935년 11월21일)

 

 ▲국어학자 권덕규가 1935년 위관 이용기 사후에 쓴 회고담. 음식 솜씨가 있고 재담에 뛰어나 모모한 모임에 종종 초대받았다고 썼다. 매일신보 1935년11월21일자

◇‘유명인사’대접받은 당대 오입쟁이?

서울 대갓집은 물론 궁중 이야기를 꿰뚫어 구수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담이 있었다고 한다.젊을 적 해외에 나가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고,바깥 사정에도 익숙한 인물이었으니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것이다.학식과 몸으로 헤쳐나온 경험이 풍부한데다 무엇보다 요즘 감각으로 주목받는 것은 음식을 즐길 줄 아는 미각까지 갖췄다는 사실이다

 

이용기의 일생을 주로 소개한 이는 노산 이은상(1903~1982)이다.이용기는 1928년-1930년 계명구락부의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때 노산을 만나 자신이 정리한 ‘악부’를 보여주고 지도를 받은 사이였다.노산은 이용기보다 30년 가까이 아래지만, 일본 유학시절 동양문고에서 손진태와 함께 조선 고(古)가요를 정리했기에,노산의 안목을 높이 본 것이다.

◇'깨끗한 선비의 기질을 갖춘 얌전한 인물’

국문학자 신경숙은 노산의 회고를 바탕으로 이용기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용기는 경성 토박이로 말년은 사직동에서 살았다. 젊어서부터 풍류를 좋아하여 오입쟁이로 일생을 살았다.

그러나 주색에 빠지는 방탕이나 활양은 아니고 기녀들을 상대하여 시가를 화답하는 풍류객으로 깨끗한 선비의 기질을 갖춘 얌전한 인물이었다. 실제 그는 최남선, 권상로, 이은상 등과 교유했으며, 수완이나 처세술도 부릴 줄 몰랐고, 가난했지만 친구들을 좋아했다.그는 2권의 저술을 남겼다.그 중 하나 상 하 두권짜리 ‘악부’(樂府)이다. 이 책은 10년 가까이 가요를 수집하고, 수많은 누더기 종이를 덧대어 완성시킨 가요집이다. 다른 하나는 ‘연구집’(聯句集)으로 한시문을 모아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전쟁 통에 소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많은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특히 소설은 약 2000여 권이나 소장하고 있었다.’( ‘위관 이용기의 저술활동과 조선적인 것의 추구’63쪽)

 

노산이 위관을 ‘오입쟁이’라고 부른 게 의아하지만 기생들에게서 옛 노래를 채집하기 위해 접촉했다는 것이니 이해가 간다. 풍류객일 뿐 ‘깨끗한 선비의 기질을 갖춘 얌전한 인물’이란 평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소설만 2000권을 소장했다니 어지간한 애서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위관의 ‘악부’는 연구논문이 여러 편 나올 만큼 국문학자들의 연구소재로 인기가 높다.

◇845가지 한식,양식, 일식, 중식 요리법 망라

K푸드가 세계로 진출하는 요즘,관심사는 그의 요리책이다.1924년 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영창서관)은 845가지의 음식 만드는 법을 실었다.조선음식 뿐 아니라 중국, 일본, 서양음식 만드는 법도 포함됐다.요리사도 아닌 그가 이렇게 많은 음식 만드는 법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알았을까.19세기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중 음식을 다룬 ‘정조지’(鼎俎志)등 옛 문헌을 참조했다는 얘기는 전하지만,주영하 교수는 ‘정조지’를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라고 한다. ‘임원경제지’ 또한 필사본이 몇 점 안될 만큼 희귀서였다.

 

위관의 말년은 가난했다.‘조선에 둘도 없는’책이라고 호언했던 요리책도 ‘조선요리제법’의 인기에 견줄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그는 노산에게 20원을 받고,오랜 세월의 업적인 ‘악부’를 넘겼다. 노산은 이 ‘악부’를 보성전문학교에 기증했고 현재 고려대에서 소장하고 있다. 광복 후 ‘악부’는 국문학자들에 의해 재발견(’국문학 연구에 새 자료 발견’, 조선일보 1963년11월5일)돼 옛 가요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일조했다.

◇참고자료

신경숙, 위관 이용기의 저술활동과 조선적인 것의 추구, 어문논집 62,2010

주영하, 방신영과 이용기, 그리고 20세기 조리서, 근대 한식의 풍경, 한식재단, 2014

 

08.03 '조선의 백종원' 방신영을 아십니까

1917년 '조선요리제법'출간으로 '셀럽' 등극, 광복후까지 34판 발간

▲방신영이 펴낸 '조선요리제법' 1943년판. 한성도서에서 나왔다. 조선요리제법은 1917년 초판이 나온 이래 일제때만 12판까지 발행된 당대 베스트셀러였다. 2만4000부 넘게 팔렸을 것으로 보인다. 국립 한글도서관 소장

 

1933년 유별난 저작권 소송 하나가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당대 베스트셀러를 멋대로 베껴 출간한 출판업자를 상대로 저자가 제기한 재판이었다. 원고는 당시 이화여전 교수인 마흔 셋 방신영. 1917년 최남선이 운영한 신문관에서 ‘조선요리제법’을 펴낸 음식학자, 영양학자였다.

 

‘이화전문학교 교수 방신영씨가 원고가 되어 종로2정목 84번지 책장사 강의영씨를 상대하여 저작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의 소송은 21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350원을 지불하고 이로부터는 원고의 지은 ‘조선요리제법’이란 책을 발매하지 말라’는 판결을 내려서 원고 방신영씨가 승소하였다. 원고가 처음에 손해배상으로 2500원을 청구하였던 것인데 결국 재판소에서는 350원을 지불하라고 판결하였다.’(’요리법작권(作權) 침해, 방신영씨가 승소’, 조선일보 1933년 7월23일)

 

▲방신영은 조선일보 1928년 1월1일자에 '영양문제에 대하여 1천만 자매에게 드림'이란 제목으로 영양의 균형을 갖춘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칼럼을 썼다. 방신영은 당대 가장 영향력있는 음식 칼럼니스트였다.

◇'조선여자 요리계의 첫 손가락’

방신영(1890~1977)은 신문·잡지에 자주 등장한 유명인이었다. 요즘의 백종원처럼, ‘요리’하면 방신영을 떠올릴 정도였다. ‘방신영 여사-기자가 먼저 그를 소개하기 전에 독자 여러분은 반드시 그의 특장인 조선요리 만드는 법을 연상할 것이다. 실상 그렇다. 그는 조선요리로 유명한 유일한 요리사이요, ‘조선요리제법’이라는 책을 저작한 사람이다. 누구든지 그의 요리 만드는 솜씨를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요, 그의 만든 음식을 한번 맛보려고 애쓰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1924년 11월 선구적 여성들을 소개하는 특집 ‘첫 길에 앞장선 이들’(11월23일~12월19일·총26회)을 연재했는데, 방신영은 ‘조선여자요리계에 첫 손가락을 꼽게 된 정신여학교 교사’(조선일보 1924년12월11일)로 등장한다. 정신여학교 바자회 때 그가 만든 음식을 식당에 진열하자 구경꾼들이 몰렸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어려서부터 상당한 가정에서 여러가지 음식을 규모있게 배웠을 뿐 아니라 그것이 자기가 가장 취미있는 생활이라고 생각한 이상 더 연구하고 더 조직적으로 만들어보리라는 결심으로 하나씩 하나씩 일부터 실습을 하여가면서 뺄 것은 빼고, 더 넣을 것은 더 넣어가며 여러 번이나 시험한 후에 그것을 일일이 글로써 책까지 만들었다 한다.’

 

▲방신영이 1926년 도쿄 사이키 영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다는 소식을 알린 조선일보 1926년 3월23일자 보도. '조선요리제법' 저자 방신영은 당대 유명인사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치에서 실뽑듯 솔솔…'

신문은 방신영이 ‘14년 전에 정신 여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에 광주와 군산과 김천-그 세 지방학교로 다니며 열 한해 동안을 여자교육계에 몸을 바쳐 일하였으며 3년전에 자기의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와서 학교 전체의 가사를 맡아서 가르치는 것이다’고 소개했다. 취재기자가 본 방신영의 인상은 이랬다.

 

‘그는 천성이 온순하고 참으로 여자다운 여자이다. 말 한마디를 하려도 앞뒤를 꼭꼭 눌러 생각하여가며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치에서 실뽑듯 솔솔 풀려나오는 것이다. 그의 방도렷한 얼굴, 그의 정다운 눈은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그는 여자로서 더 할 수 없는 여자이요, 사람으로서 가장 얌전한 사람이다.’

◇손맛 뛰어난 어머니 솜씨 물려받아

방신영은 경성 출신으로 아버지 방한권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군산, 김천 등 3곳의 학교에서 가르치다 1921년 모교 교사로 금의환향했다. ‘조선요리제법’의 후광이 컸을 것이다. 1929년 이화여전 가사과 창설교수로 임용됐다.

 

음식 솜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방신영은 1931년 펴낸 ‘조선요리제법’ 5판 서문에 이렇게 밝혔다. ‘때는 연소하였고 경험도 없었으나 자연으로 일어난 붉은 마음 하나로써 어머님 무릎 앞에서 한가지 한가지를 여쭈어보고 조그마한 손으로 적어 만들었던 것입니다.’

◇'규합총서’ ‘부인필지’ 계승한 근대적 요리책

어머니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비법만 담은 것은 아니다. 1908년 명신(1909년 이후 숙명)여학교 교사 이숙은 우문관에서 한글 요리책 ‘부인필지(婦人必知):대한 요리와 재봉의 필요한 법’을 출간했다. 숙명여학교 가사 과목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부인필지’는 실학자 빙허각 이씨가 1809년 펴낸 ‘규합총서’의 음식과 재봉 분야만 간추려 정리한 한글 책이었다.

 

▲1908년 우문관서 펴낸 이숙의 요리책 '부인필지' 광고. 황성신문 1908년 6월16일자에 실렸다. 눈에 잘띄게 하기 위해선지 광고를 거꾸로 실은 게 흥미롭다. '부인필지'는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중 음식과 재봉 부분만 간추려 출간했다.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은 '부인필지'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부인필지’는 약주, 장초, 반죽, 다품, 침채, 어육, 상극류, 채소류, 병과류, 과채수장법, 제과독, 제유수취법 등을 다뤘다. ‘부인필지’는 황성신문에서 1908년 6월9일자를 비롯, 여러 차례 광고를 실었다. 이 신문 광고를 통해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방신영의 1917년 ‘조선요리제법’에서 어육장, 청태장, 팟(팥)고추장, 고초장, 즙장, 청국장, 급히 장만드는 법 등이 나오는데, 팟고추장을 제외하곤 ‘부인필지’의 내용과 똑같다. 19세기초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가 구한말 이숙의 ‘부인필지’를 거쳐 20세기 전반 베스트셀러 음식책 ‘조선요리제법’으로 전승된 것이다.

◇민간 전승 음식조리법 체계적으로 정리

방신영은 일반 가정주부가 가족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상차림에 도움되는 실생활 위주로 조리법을 정리했다. 장, 국, 찌개, 지짐이, 나물, 무침, 포, 전유어, 산적, 찜, 회, 기타 반찬 순으로 소개했고, 다식, 정과, 어채, 화채, 유밀과, 강정 등의 후식, 그리고 밥, 죽, 미음, 암죽, 떡, 김치, 젓 담그는 법, 차 만드는 법을 기술했다. 특이한 사실은 1917년 초판에 벌써 일본요리, 서양요리, 중국 요리 만드는 법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일제 때만 2만 4000부 이상 팔려

‘조선요리제법’은 얼마나 팔렸을까. 방신영은 1931년 5판 서문에서 1917년 초판이 나온 이래 매번 2000부씩 인쇄했고, 4판까지 모두 8000부가 팔렸다고 적었다. 윤정란 교수는 조선요리제법은 1943년까지 총 12판을 찍었으며, 최소 2만4000부 정도 팔렸다고 본다.(’근대 여성지식의 계승, 확산, 그리고 국제교류’, 196쪽) 1930년대 최고 베스트셀러인 박계주의 ‘순애보’가 1945년 이전까지 47쇄, 최소 20만부를 찍었고, 심훈의 ‘상록수’는 총 1945년 이전까지 1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조선요리제법’은 ‘순애보’엔 미치지 못하지만 ‘상록수’보다는 많이 팔렸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사이키 영양학교 유학

방신영은 1925년 도쿄 사이키(佐伯) 영양학교에 1년간 유학했다. 일본 영양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교토제대 출신 사이키 타다스(佐伯 矩)가 1924년 설립한 학교였다. ‘방신영 여사는 작년 봄에 동경으로 건너가 좌백(佐伯) 영양학교에 입학하였던바 지난 15일에 동교에서 남녀 15명의 졸업생을 내게 되었는데, 여사는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업을 마치었다더라.’(‘금년 해외에서 업을 마칠 여성들’8, 조선일보 1926년3월23일)

 

사이키 영양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는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아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영향력 1위 음식 칼럼니스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방신영은 정신여학교에 출강하면서 ‘영양학 전도사’로 나섰다. ‘영양이 불량하거나 부족한 여자는 강건한 아동을 생산할 수가 없습니다. 선량한 자손을 낳고 제2국민을 성육하는 데는 마땅히 선량한 체질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럼으로 먼저 건전한 아동을 성육시켜서 국민의 건강와 사회와 가정의 행복을 증진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많은 연구를 하시기 깊이 바라는 바이올시다.’(‘영양과 가정과의 관계에 대하여’, 조선일보 1926년11월28일)

 

방신영은 1928년 신년특집 ‘영양문제에 대하여 일천만 자매에게 드림’으로 영양이 국민의 건강, 사회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본격적으로 전파했다. ‘영양학은 실로 일 개인의 건강과 안전을 좌우할 뿐 아니라 널리 사회와 인류의 행복을 도모하는 데 중추문제가 되는 것’(조선일보 1928년 1월1일)이라고 못박은 그의 칼럼은 27회나 연재됐다. ‘위생상으로 본 우리의 음식-여러가지 개량할 점’1~3(조선일보 1932년 1월8일, 12~13일), ‘조선 음식의 재음미’1~5(조선일보 1934년3월24일~25일,27일~29일) 등 방신영은 당대 가장 영향력 큰 음식칼럼니스트였다.

◇생활개신운동, 근우회, 조선어표준어사정...

1929년 봄 조선일보가 대대적으로 펼친 ‘생활개신운동’ 위원으로 활약했다. ‘생활부터 달라져야 힘을 기를 수있다’며 조선인의 각성과 변화를 촉구한 운동이었다. 색의단발(色衣短髮,색깔 있는 옷을 입고 머리 짧게 자르기), 건강증진, 상식보급, 소비절약, 허례폐지 등 5대 개선사업을 펼쳤다. 위원장 윤치호를 선두로, 허헌 신흥우 최현배 김병로 한용운 방정환 박길룡 정세권 정인보 백낙준 홍명희 등 당대 각계의 저명인사 100여명이 참여했다. 방신영은 김활란과 함께 위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본사와 협력할 100여名士위원’, 조선일보 1929년5월12일)

 

방신영은 조선 YWCA와 직업여성의 친목도모를 위한 망원구락부, 좌우 여성단체를 아우른 근우회 등 여성운동에도 뛰어들었다. 조선어학회가 1935년 표준어제정을 위해 꾸린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1962년 34판 발간, 판마다 내용 수정

광복 이후에도 ‘조선요리제법’ 개정판을 계속 냈다. 1954년 ‘우리나라 음식 만드는 법’으로 책 제목을 바꿨고, 1962년 34판까지 냈다. 책을 찍을 때마다 내용을 수정했기 때문에 매번 다른 ‘조선요리제법’이 나왔다고 할 수있다. 연구자에 따라 ‘판’과 ‘쇄’를 혼용해서 쓰는 바람에 다소 혼란이 있지만, 반세기에 걸쳐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킨 것만은 분명하다.

 

1967년 재단법인 과학기술후원회(이사장 윤일선)는 첫 사업으로 한국 과학기술진흥에 일생을 바친 과학기술자 9명을 선정, 이들에게 생활비와 연구지원금을 지급했다. 영양학자 방신영은 9명 중 유일한 여성으로 선정됐다.(‘68년유공자 9명’ 과학후원회 선정, 조선일보 1968년8월11일). 위대한 생애였다.(*다음 주 ‘모던 경성’은 휴가로 쉽니다)

◇참고자료

방신영, 만가필비 조선요리제법, 신문관, 1917

방신영, 주부의 동무 조선요리제법, 한성도서, 1931

한식재단, 근대 한식의 풍경, 한림출판사, 2014

김성은, 신여성 방신영의 업적과 사회활동,여성과 역사 제23집, 2015

윤정란, 근대 여성지식의 계승, 확산, 그리고 국제교류-’조선요리제법’과 Korean Recipes를 중심으로, 숭실사학 49, 2022

 

08.17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어떻게 유행어가 됐을까

19세기 英 스마일스 '자조론'대표구절, 日서 유행한 후 조선 전파

▲19세기 스코틀랜드 작가 새뮤얼 스마일스. 개인의 성실과 노력을 강조한 '자조론'은 동아시아로 수입돼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퍼블릭 도메인

 

1923년 경성의 요릿집’국일관’에서 술취해 날뛰던 손님들이 이목을 끌었다. 고보(高普·고등보통학교) 교사들이 동료 생일을 맞아 한 턱 얻어먹는 자리였다. 당시 엘리트 지식인 대우받던 교사들이 좌우에 기생까지 거느리고 요릿집에서 술취한 채 떠들썩하게 모임을 갖던 게 눈총을 샀던 모양이다. 신문 가십성(性) 칼럼은 ‘살을 에는 듯한 밤 바람에 피곤한 몸을 옹숭거리고 ‘현미(玄米) 팡을 외오면서(?) 지나가는 고학생이 있을 것을 생각하였던가’라고 점잖게 나무랐다. 그런 후 ‘사랑가 흥타령에 정신을 잃고도 그 이튿날 아침에 스마일스의 자조론(自助論)이 여전히 나올 터이야!’하고 일갈했다.(‘잔소리’, 조선일보 1923년10월27일)

 

▲최남선은 1908년 신문관을 세워 잡지 '소년'을 발간하면서 스마일스의 '자조론'을 소개하고, 1918년엔 '자조론'을 번역 출간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면서도 '자조론'을 보완하는 원고를 매만지고 있었다고 한다.

◇옥중에서 ’자조론’원고 만진 최남선

 

스마일스의 자조론은 19세기 스코틀랜드 작가 새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1812~1904)의 대표작 ‘자조론’(Self-Help)을 말한다. 초반부에 나오는’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격언으로 유명한 책이다. 신문 칼럼에서 별다른 설명없이 언급할 만큼,스마일스는 당대 조선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다.

 

스마일스 ‘자조론’은 종종 신문에 등장했다. 3.1운동 여파로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육당 최남선의 근황을 소개한 기사에도 등장한다. 육당을 면회한 인사를 취재한 이 기사는 ‘몸은 여전히 건강’하고 ‘얼굴도 별로 틀리지(다르지) 않았다’면서 육당이 ‘지금껏 역술중이던 스마일스 선생의 (자조론)을 그저께 20일까지 탈고를 하였다’고 전했다. 이 기사 제목은 ‘서대문 감옥 철창리에 자조론을 저(著)하는 최남선에 근상(近狀)’(조선일보 1920년6월22일) 이었다.

 

▲위암 장지연이 1906년 6월 창간한 계몽지 '조양호'창간호 첫페이지. 목차에 따르면, 앞부분에 '자조론' 1장을 번역한 글을 실었다. 위암은 '자조론'을 개인적 도덕이 아니라 망국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있는 방법으로 인식했다.

◇17년 노력으로 결실본 안악 고등보통학교

일제 때 중등학교 설립을 향한 지역민들의 염원은 뜨거웠다. 황해도 안악 지방에도 고등보통학교를 세우려는 운동이 1920년대 초반부터 불었다. 마침 경성에선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한창일 때였다. 문제는 50만~60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 마련이었다. 기성회를 만들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지방에서 쉽게 모을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10여년간 사업은 표류하다 1937년 가을 이 지역 김씨문중에서 절반인 30만원을 부담하겠다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기금 모집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나머지 절반도 확보했다. 이 소식을 전한 신문 기사는 ‘’하늘은 자조하는 자를 돕는다’고 한 스마일스의 명담은 그 진리를 잃지 않았던지 그 은인자중의 결과는 마침내 오고 말았다’고 썼다.(’孜孜營營 17년 해서(海西)교육 금자탑’, 조선일보 1938년1월1일)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71년 스마일스의 자조론을 소개한 '서국입지편-원본 자조론'을 출판한 나카무라 마나사오. 이 책은 1921년까지 최소 100만부 이상 팔려 근대 일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책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유학생 출신 나카무라는 이 책으로 '서유'로 불리기까지 했다. /퍼블릭 도메인

◇100만 부 이상 팔린 나카무라 ‘西國立志編’(자조론)

스마일스의 ‘자조론’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1년 영국 유학생 출신인 나카무라 마나사오(中村正直·1832~1891)가 ‘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원본(原本) 자조론’을 내놓으면서 대유행했다. 1921년초까지 해적판까지 합해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부강한 일본을 만든 2권의 책’중 하나로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대표적 저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입신 출세, 산업정신, 윤리 교육을 위한 국민 교육서로 받아들여진 이 책은 ‘서양논어’,나카무라는 ‘서유’(西儒) 로 불리며 구 사무라이층, 관리, 상인, 청소년과 노인 등 전 계층에 영향력을 미쳤다.(우남숙, ‘자조론 한국 근대’96쪽)

 

일본서 유행한’자조론’을 중국, 조선에 재빨리 전파한 이는 청말 개혁사상가 양계초(粱啓超·1873~1929)였다. 그는 1898년 광서제를 옹립한 ‘무술변법’(戊戌變法)개혁이 100일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요코하마에서 ‘청의보’(淸議報) ‘신민총보’(新民叢報)를 잇따라 발간하던 양계초는 ‘자조론’을 비롯한 서양 근대사상을 신문에 소개했다. 구한말 지식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개혁사상가였던 양계초의 논설은 신문, 잡지에 자주 등장했다.

 

▲1920년대 전반 최대의 번역가로 손꼽히는 난파 홍영후. 난파는 1923년 자조론을 번역한 '청년입지편'을 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홍난파까지 '자조론'을 번역할 만큼, 스마일스는 당대 인기있는 사상가였다.

◇위암 장지연의 ‘자조론’ 소개

덕분에’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유명한 격언은 일찍이 소개됐다. 위암 장지연이 1906년 6월 창간한 계몽잡지 ‘조양보’(朝陽報) 첫호는 스마일스(’수마이루수’로 표기)의 ‘자조론’1장 ‘국민과 개인’을 번역 소개했다.’천조자조(天助自助)란 차(此) 한 구절은 만인이 실험한 말이니 정확무의한지라. 자조자신의 정신은 즉 인간 진보의 근저니, 국민이 다수히 차(此) 정신을 체구하면 곧 그 국(國)의 세력이 용연히 발래(發來)하리라.’

 

장지연이 ‘조양보’를 창간하면서 ‘자조론’을 머리글로 내세운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단순히 서구 도덕철학을 흥미삼아 소개한 게 아니라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선의 국력(國力) 배양을 위한 목적이었다.’자조론’은 대한자강회 월보, 서북학회 월보, 공수학회보, 태극학회보 같은 구한말 계몽지에 잇달아 소개됐다.

◇’자조론’번역한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

‘자조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는 육당 최남선이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육당 최남선(1890~1957)은 1908년 출판사 신문관을 세워 본격적 출판계몽운동을 펼쳤는데, 그해 창간한 월간지 ‘소년’을 통해 스마일스의 ‘품성론’ 등을 여러 차례 소개했다. 최남선은 1918년 신문관에서 ‘자조론’을 발간했는데, 앞 기사에서 나온대로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면서도’자조론’을 보완하는 원고를 만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도 1923년 ‘자조론’을 번역한 ‘청년입지편’(박문서관)을 출간했다는 사실이다. 홍난파는 1920년 전후 가장 정력적으로 번역에 뛰어든 작가였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190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시엔키에비치 소설 ‘어디로 가나’,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축약한 ‘애사’, ‘장발장의 설움’, 등 중장편 9편을 번역해 단행본으로 냈고, 단편소설 2편을 번역해 잡지에 실었다.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를 쓴 김병철 교수는 난파를 김억과 더불어 ‘1920년대 최대 번역가’로 꼽을 정도다.

◇새마을운동, 천리마운동에까지 영향미친 ‘자조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론’의 인기는 광복 이후 남북한까지 이어졌다. 최희정의 연구(’한국근대화와 자조정신-남한의 새마을정신과 북한 자력갱생론의 연원’)에 따르면,’자조’를 내건 새마을운동과 ‘자력 갱생’을 내건 천리마운동의 연원은 구한말 이래 대유행한 스마일스의’자조론’까지 거슬러올라간다. 1930년대 피폐한 조선 농촌에 대한 대응책으로 조선총독부가 내건 ‘자력갱생론’이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개인의 나태와 게으름이 빈곤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파탄난 식민 통치의 책임을 회피했다. 한걸음 나아가 관(官)의 지원덕분에 개인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있게 됐다는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흥미로운 주장이다. 구한말 소개된 ‘격언’(格言) 하나가 지금껏 귓가에 맴돌만큼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경이롭다.

◇참고자료

‘자조론’, 조양보 창간호,1906년 6월

최희정, 한국근대화와 자조정신-남한의 새마을정신과 북한 자력갱생론의 연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69집, 2014년 여름

우남숙, 자조론과 한국 근대, 한국정치학회보 49집5호, 2015,12

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을유문화사, 1975

 

08.24 찻집 대신 냉면집 가는 평양 사람들

평안도 출신 작가 김남천의 '냉면예찬', 꿩고기 냉면이 최고

▲평안도 출신 작가 김남천은 '잔칫날 환갑날 생일날 제삿날 장례날 길사 경사 흉사를 물론하고 이 국수를 때로는 냉면으로 때로는 온면으로 먹어왔다'고 썼다. 냉면은 평안도 사람들의 일상 그 자체였다.

 

‘속이 클클한 때라던가 화가 치밀어오를 때 화풀이로 담배를 피운다던가 술을 마신다던가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런 때에 국수를 먹는 사람의 심리는 평안도 태생이 아니고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도박에 져서 실패한 김에 국수 한냥푼을 먹었다는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 이렇게 될때에 이 국수는 확실히 술의 대신이다. 나같이 술잔이나 다소할 줄 아는 사람도 속이 클클한 채 멍하니 방안에 처박혀있다간 불연듯 냉면 생각이 나서 관철동이나 모교(毛橋·모전교)다리 옆을 찾아갈 때가 드물지 않다.그런 때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 ‘다(茶)나 마시러 갈까?’하면 ‘여보, 다(茶)는 무슨 다(茶), 우리 냉면먹으러 갑시다’하고 앞서서 냉면 집을 찾았다.’ (김남천, ‘평양잡기첩’2, 조선일보 1938년5월29일)

 

▲냉면집들은 대개 간판 옆에 종이다발을 길게 늘어뜨린 막대기를 꽂았다. 면발을 표현한 것인데, 갈개발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1936년3월9일자에 실린 아지노모토 광고. 회사측은 아지노모토를 넣어 냉면 육수를 만들면 맛이 좋아지고 경제적이라고 선전했다.

◇엄동의 냉면 맛, 일품

평안남도 성천 출신으로 평양고보를 나온 작가 김남천(1911~1953)이 1938년 5월’평양잡기첩(帖)’을 여섯 차례 신문에 연재했다. 그중 두차례가 냉면 얘기다. 평안도 사람들은 친구를 만나면 찻집 대신 냉면집을 찾는다는 게 이채롭다. 1930년대’냉면’하면 으레 평양을 떠올릴 만큼, 평양냉면은 대중에게 익숙한 음식이 됐다.

 

냉면은 요즘 여름 음식으로 환영받지만 이북 사람들은 겨울에 즐겨 먹었다는 얘기는 꽤 알려져있다. 김남천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냉면은 어느 계절에 먹는 음식일까? 평양이나 평안도 일대에선 점심이나 밤참은 언제나 냉면이니 사절(四節·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이것을 애호하는 셈’이라면서도 제철은 겨울이라고 했다. ‘웬만큼 국수 맛을 아는 사람은 엄동에 오히려 냉면 맛을 향락한다. 혀를 울리는 찌르르한 ‘전동치미’국에 국수를 풀어놓고 도야지 비계 같은 흰잔디쪽위에 다대기를 얹은 것을 훅훅 들이키는 맛이란 아닌게 아니라 다른 계절에선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미각이다.’

 

▲평안도 성천 출신 김남천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어른들의 냉면 그릇에서 여나문 오리를 끊어 이가 서너개 나나 마나한 입으로 모밀로 만든 이 음식물을 받아 삼킨 것이 아마도 내가 냉면을 입에 대어 본 처음일 것'이라고 썼다. 조선일보 1938년 5월29일자

◇꿩고기 냉면, 못 먹어본 이는 냉면 논할 자격 없어

김남천은 ‘국수 꾸미’(국수위에 올리는 고기)로 꿩고기를 제일로 쳤다. 꿩고기 냉면을 먹어보지 않으면 냉면을 거론할 자격조차 없다고도 했다. ‘무엇무엇하여도 냉면에는 꿩(雉)이상 가는 것이 없다.꿩고기를 쳐서 동치미국에 먹어본 적이 없는 이는 냉면에 대하여 용훼(容喙·참견)할 자격이 없다. 꿩은 겨울에 나는 동물이다. 냉면 맛이 겨울에 나는 것은 이 때문도 아닌가 한다. 꿩고기쳐서 냉면을 먹어보지 못한 겨울은 나에게 있어선 지극히 불행한 겨울이다.’(이상 ‘평양잡기첩’3, 조선일보 1938년5월31일)

이쯤하면 냉면 맛 ‘원조 논객’으로 쳐도 될 것같다.

◇보리밥만 먹다 돌아간 선친 떠올라 냉면 못 먹어

평양 냉면은 20세기 초 ‘전국구 음식’으로 널리 퍼진 듯하다. 1917년 9월 최남선이 주재하던 잡지 ‘청춘’에 단편’냉면 한 그릇’이 실렸다. 현상문예 당선작이었다. 상금은 50전. 당시 냉면 두세 그릇 값이다. ‘흐릿한 날이 우중충하게 저물어간다. 서대문안 어느 냉면집 방에는 수삼인의 손(손님)이 냉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앉았다’로 시작한 단편은 시골 출신 김승종이 서울에 일보러 왔다가 냉면 한그릇 먹는 얘기다.

 

김승종은 경성 토지조사국에서 일하며 야학교를 다녔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귀향했다. 모친과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모처럼 서울에 올라온 그가 저녁 겸 냉면을 먹으러 들어왔다가 거친 보리밥만 먹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라 수저를 놓고 나온다는 얘기가 전부다. 필자는 훗날 조선·동아·시대일보 3대 민간지 사회부장을 지낸 유광렬(1899~1981). 필명으로 유종석을 썼다.1910년대에 들어서면 서울에 냉면집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정도였다.

 

▲냉면 먹고 21명이 식중독에 걸렸다는 기사. 여름철이면 종종 볼 수있었다. 조선일보 1933년 7월23일자 기사

◇베스트셀러 ‘조선요리제법’에 등장

방신영이 1917년 출간한 근대식 요리책’조선요리제법’(신문관)에도 냉면 만드는 법이 실려있다. ‘조선요리제법’은 판을 거듭하며 불티나게 팔린 일제시대 최고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다.

 

‘좋은 무김치 말국을 대접에 부어놓고 국수를 더운 물에 잠깐 갔다가 건져 물을 빼서 대접에 담고, 이제 맛있는 무김치와 배와 편육과 제육편육을 채쳐넣고 잠깐 섞은 후에 또 이 위에 여러가지 채친 것을 남겼다가 위에 뿌리고 또 알고명을 채치고 표고버섯 석이를 채쳐 기름에 볶아 뿌리고 실백을 뿌린 후에 설탕을 뿌려서 먹나니라.’

 

알듯 말듯한 옛날 어휘가 곳곳에 등장한다. ‘말국’은 ‘국물’, ‘알고명’은 계란을 풀어서 프라이팬에 얇게 부쳐 가늘게 채를 썰거나 네모나 마름모 모양으로 잘게 썬 고명, 즉 요즘말로 ’지단’이다. 특이한 것은 마지막에 설탕을 뿌려 먹는다는 안내다.요즘은 거의 없어졌지만 냉면에 설탕을 뿌려먹는 관습은 꽤 오래 이어졌다.

 

▲냉장시설이 시원찮던 시절, 냉면은 식중독 온상이었다. 냉면 육수를 검사했더니, 대장균이 득실거린다는 결과를 보도한 조선일보 1935년 8월23일자

◇대장균 꿈틀거리는 냉면

냉면이 각광받는 여름철 신문에 가장 많이 등장한 기사는 식중독이다. 냉장시설이 변변찮던 시절, 고명으로 얹은 고기나 육수가 상해 집단 식중독을 일으키는 경우가 잦았다.

 

‘4일 오후 1시로 3시까지 사이에 부(府)내 장별리 협성면옥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사다먹은 사람 전부가 급격한 구토설사를 일으키어 대소동을 연출중이다. 목하 평양서 위생계에서 냉면재료 전부를 운반하여다가 검사중인바 자세한 원인은 아직 알 수없으나 ‘소-다’의 분량이 많았든지 고기가 변했든지 채소가 불결하였던 관계인 듯하다 한다.’ (냉면중독으로 삼사십명이 중태, 조선일보 1933년7월6일)

 

‘더위를 따라 음식물이 썩기 쉽고, 썩은 것을 먹고는 중독이 빈발하는 이때에 시내 청엽정 3정목 83번지 민윤기(34)가 경영하는 해동루에서도 20일 오후1시경에 냉면을 먹고 중독이 된 사람이 모두 21명이라는 바….’기사에 따르면, 해동루는 2년전에도 윤성관 냉면집이라는 옥호로 영업하다 식중독 환자 20명이 발생하고 그 중 3명이 죽어 해동루로 이름을 바꿔 영업하던 중이었다. 경찰은 상한 돼지고기를 원인으로 지목했다.(냉면먹고 21명 중독, 조선일보 1933년 7월23일)

 

냉면 식중독 원인으로 대장균을 거론하는 기사까지 등장했다. ‘여름의 음식은 무엇이나 위험하나 냉면과 어름과자에 더 위험률이 많다는 결과를 보게 되었다. 평양서에서는 냉면과 어름과자를 평남위생가에 보내어 시험해본 결과 어름과자는 118건 중에서 안전한 것은 겨우 7건, 냉면은 106건 중에서 50건이량 호할 뿐 남은 숫자의 것은 대장균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시험관의 눈을 둥그렇게 만들었는데, 어름과자는 마치 병균배양액과 같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평양서에서는 영업자에게 엄중 경고를 발하는 동시에 유감이 없도록 하리라 한다.’(‘위험한 빙과와 냉면!’, 조선일보 1935년8월23일)

 

식중독 위험이 아무리 높아도 입맛 잃는 더운 여름, 냉면의 인기를 떨어뜨리진 못했다.

◇MZ세대의 ‘냉면논쟁’

백발의 실향민이나 중년 이상의 ‘추억 음식’인 줄 알았는데 MZ세대 젊은이들까지 ‘냉면 논쟁’이 치열하다.’이 희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백석 ‘국수’중)맛이 요즘 취향인 모양이다. 부모님이 평안도 출신이거나 가족력으로 북쪽과 연(緣)이 닿는 사람앞에선 냉면 맛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안전하다. ‘네가 냉면 맛을 알어?’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백석,이효석, 채만식 외, 100년 전 우리가 먹은 음식, 가갸날, 2017

박현수, 경성맛집산책, 한겨레출판, 2022

유종석(유광렬), 냉면 한 그릇, 청춘 제10호,1917년 9월

방신영, 萬家必備 조선요리제법, 신문관, 1917

 

08.31 100년 전 청춘들의 '핫템', 아이스 커피

여름철'혼부라黨'의 선택… 신문마다 '커피 끓이는 법'소개

▲청춘 남녀가 아이스커피 하나를 가운데 놓고 이마를 맞댄 채, 빨대로 마시고 있다. 아이스커피는 '혼부라'당의 여름철 '핫템' 이었다.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조선일보 1930년 7월16일자에 그렸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코오피의 낟을 찧어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이효석(1907~1942)은 서른 한살이던 1938년 발표한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커피 원두를 구입해 갈아서 내려마시는 취미를 공개했다. ‘낙엽 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라던 그가 떠올린 것은 ‘가제(갓) 볶아낸 커피 냄새’였다. 대표적인 커피 마니아였던 셈이다.

 

▲커피 마시는 법'을 설명하는 기사도 신문에 종종 실렸다. 당시엔 커피 가루를 물에 넣고 끓여서 마셨다. 조선일보 1937년 11월30일자

◇잘 끓인 커피 한잔, 도회인만의 여유

이효석 못잖은 ‘커피당(黨)’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박태원(1909~1986)이다.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낸 만문만화가 안석주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다방 취미를 유행시킨 장본인’(조선문단30년측면사,조광 제5권제6호)으로 그를 지목한다. 박태원은 입맛이 까다로웠다. ‘늘 다녀 그 솜씨를 잘 알고 있는 끽다점 외에서 나는 일찍이 가배차를 마신 일이 없소’(기호품 일람표 下, 동아일보 1930년3월25일)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탁류’의 채만식도 추운 겨울날 즐기는 커피를 사랑했다. ‘활짝 단 가스난로 가까이 푸근한 쿠션에 걸터앉아 잘 끓인 커피- 한 잔을 따끈하게 마시면서 아무 것이고 그 때 마침 건 명곡 한 곡조를 듣는 그 안일과 그 맛이란 역시 도회인만이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약(藥)인 것이요, 그것을 모르고 도시에 살다니 그는 분명 촌맹(村氓)이며 가련한 전(前)세기 사람일 것이다.’(茶房讚,조광 제5권제7호)

 

▲1913년9월8일 순종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칙임관 이상 고관을 대상으로 연 오찬 메뉴. 마지막 순서로 커피가 등장한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90년 전 ‘커피는 일상 생활의 필수품’

100년 전 커피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목 마를 때는 냉수나 먹지’ 이것은 벌써 옛말이 되고만 요새올시다. 시체 사람 처놓고 커피니 홍차니 코코아니 하는 차를 안 자시는 분이 별로 없으시겠지요’(몸 피곤할 때는 커피-보다 녹차,조선일보 1936년5월31일)라고 되물을 정도였다. ‘이것은 유행이 아니라 외국의 풍습이 조선에 들어와 일상 생활의 한 필수품으로 뿌리를 박게 되는 경향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라며 커피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일상에 자리잡은 대세라고 했다.

 

1920년대 신문엔 커피 끓이는 법을 소개한 기사가 종종 실렸다. ‘우리 가정에도 차차 차먹는 법이 유행됩니다. 연말연초에 손님접대에는 차 만드는 법도 알아둘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로 시작한 기사는 코코아, 홍차와 함께 커피 끓이는 법을 이렇게 소개한다.

 

‘커피차는 진한 다갈색을 눅눅지 않은 것으로 택하야 주머니에 넣고 차관은 먼저 더웁게 하였다가 사용할 것이올시다. 커피에 넣는 우유는 반드시 더운 것을 쓸 것이요, 크림을 넣으려면 찬 것을 칠 것이올시다. 커피의 분량은 한 사람 앞에 두 숟갈로 한 숟갈(?), 더운 물은 칠팔 작(勺) 가량 넣을 것입니다.’(손님 접대에 알아둘 세가지 차 만드는 방법, 조선일보 1924년 12월31일)

 

당시 커피 원두를 물과 함께 끓인 후 설탕, 우유를 타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커피 끓이는 법’은 1930년대 후반까지 가정면의 단골 목록이었다. ‘커피 마시는 법’해설도 등장한다. ‘커피를 감정할 때는 제1 빛깔, 제2 향기, 제3 맛, 제4 마신 뒤에 받는 상쾌한 감’이라며 ‘윤기가 있고 연한 맛이 있으며 침착한 고동색’을 제일로 쳤다. (陶醉의 仙境에 인도하는 야릇한 향기의 정체, 조선일보 1937년12월1일)

 

▲한국인 최초로 커피 마신 기록을 남긴 문관 민건호의 '해은일록'/부산박물관 소장

◇요즘 핫템’ 아이스커피 유행

안석주는 1930년 여름 풍경을 스케치한 만문만화에서 아이스커피 한잔을 놓고 연인 남녀가 정답게 빨대로 먹는 장면을 그렸다. ‘아이스 커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해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비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빨아먹는다. 사랑의 아이스커피-, 이집에서 아이스커피-, 저집에서 아이스커피-, 그래도 모자라서 혀끝을 빳빳이 펴서 ‘아다시! 아이스 고히가, 다이스키, 다이스키요!’(전 아이스커피가 좋아요, 좋아), 와시모네(나도 그래)”(1930년 여름, 조선일보 1930년7월16일) 요즘 젊은이들의 ‘최애 아이템’인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가 100년 전 경성 거리에서 유행했던 셈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8월20일부터 개최중인 특별전 '요즘 커피' 포스터

◇커피 마신 한국인 최초 기록, ‘해은일록

마침 국립민속박물관에선 특별전 ‘요즘 커피’(2024년 8월20일~12월20일)가 열리고 있다. 개항기부터 현재까지 한국인의 입맛에 파고든 커피의 역사를 훑는다. 이 중 문관 민건호(1843~1920)이 쓴 일기 ‘해은일록’(海隱日錄)이 눈길을 끈다. 커피를 마신 한국인이 남긴 최초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민건호는 1884년 몇 차례 커피를 대접받은 사실을 적었다.

 

‘7월27일 오시 정각에 윤정식의 집을 방문했다. 조금 있다가 당소의(唐紹儀)가 부산 해관에서 왔다. 갑비차(甲斐茶), 일본 우유, 흰 설탕 큰 종지 하나, 궐련 2개를 대접받았다.’

 

당소의는 조선 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초청받은 묄렌도르프 수행원으로 내한, 주 조선총영사를 거쳐 1911년 신해혁명 후 수립된 중화민국 초대 총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민건호는 1883년 부산항 감리서 서기로 출발, 감리서 방판, 다대진 첨사 등을 지내면서 1894년까지 부산서 생활했다.

 

1883년 12월 방한한 퍼시벌 로웰이 이듬해 1월 경기도 관찰사 김홍집 초청으로 별장을 방문해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도 흥미롭다. ‘1884년에 우리는 ‘잠자는 물결’(The House of Sleeping Waves)이라는 집에 다시 올라 조선의 ‘최신 유행품’인 식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로웰은 조미 통상수호조약 체결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 일행 안내를 맡았고, 이후 고종 초대로 방한해 3개월간 머물렀다. 1885년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출간했다.

 

2023년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커피소비량은 405잔. 세계 평균 153잔의 두배가 넘는다. 민속박물관 ‘요즘 커피’ 특별전은 ‘커피 공화국’의 연원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참고자료

국립민속박물관, 요즘 커피, 2024

채만식, 茶房讚, 조광제5권제7호, 1939.7

안석영, 조선문단30년측면사, 조광제5권제6호, 1939.6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조선문학독본, 조선일보사 출판부, 1938.10

 

09.07 우리가 잊었던 '왕십리 미나리'

100년 전 경성 특산품으로 꼽힌 '왕십리 미나리'... 만주, 일본까지 수출

 ▲왕십리는 100년 전 미나리를 비롯한 채소산지로 유명했다. '왕십리 미나리'는 1930년대 만주, 일본까지 수출할 만큼 이름난 경성 특산품이었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미주(美洲) 한인 이주민의 정착 과정을 그린 영화 ‘미나리’는 배우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우연의 일치인지 한국인의 외식메뉴에도 미나리가 돌아왔다. 청도 미나리 간판을 단 고깃집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싶었는데, 마침내 집 근처까지 파고들었다. 매운탕이나 지리같은 생선탕에 곁들임으로 먹던 미나리가 주요리를 제치고 간판으로 등극하다니….

 

미나리 붐의 선두주자는 물 좋고 흙 좋은 자연을 앞세운 경북 청도다. 그런데 한 때 ‘미나리’하면 ‘왕십리’를 떠올리던 시대가 있었던 사실을 아시는지?

 

 ▲왕십리 미나리를 경성 특산물로 소개한 조선일보 1936년1월24일자 기사. 45만인구 경성뿐 아니라 멀리 일본, 만주까지 수출한다고 했다.

◇엄동혹한기 초특산물

한겨울인 1936년 1월 얼음 구덩이에서 미나리를 캐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빙혈(冰穴)에서 미나리 채취광경’이란 설명이 붙었다. 촬영지는 ‘왕십리’. ‘경남(京南)특산품’을 소개하는 기획 첫번째가 ‘왕십리 미나리’였다. 여기서 ‘경남’은 경상남도가 아니라 ‘경성 남쪽’이란 뜻이다. ‘경남(京南)지방에는 허다한 산물중에서도 유독 엄동혹한기에 월등 산출되는 초특산물 몇 개가 있다. 그중 먼저 경남의 미나리(芹)를 말해보자. 미나리는 타지방에서도 산출되지만 경남의 미나리와 같이 사시장절(四時長節) 산출되는 지방은 없을 것이다. 또 풍미와 미각으로도 이런 품질은 없을 것이오. 산액으로 말하더라도 여기처럼 많지는 못할 것이다.’(경남특산1 왕십리의 미나리, 조선일보 1936년1월24일)

◇만주, 일본까지 수출

45만 인구(1935년)의 경성을 배후삼아, 이 도시에 미나리를 공급하는 대규모 생산지가 왕십리에 있었던 것이다. 왕십리는 전국 미나리 공급지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근래에 와서는 장안인들에게 국한되어 소화되던 이 미나리가 차차 지게꾼들의 등짐을 벗어나 기차로 남으로는 멀리 현해탄을 건너가고, 북으로는 만주국에 사절적 식료품으로 수출되어 간다한다.’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등 철도를 타고 현해탄 건너 일본과 만주국까지 수출됐다는 것이다. 1933년 6만2000원,1934년 8만5000원, 1935년 11만2원으로 매년 생산액이 급증했다.

 

 ▲청파동은 왕십리, 미근동과 함께 경성의 대표적 미나리 산지였다. 조선일보 1920년 5월20일자에 실린 청파 미나리밭

◇연한데다 향취도 좋아

천도교 개벽사에서 발간한 대중월간지 ‘별건곤’23호(1929년9월호)에도 ‘왕십리 미나리’가 등장한다. ‘경성의 명물’을 소개하는 코너에서다. ‘안주의 미나리가 백상루와 같이 평남에서 이름이 높고 남원 미나리가 춘향이에 지지 않게 전라도에 소문이 높지만, 서울 왕십리의 미나리처럼 명물은 되지 못할 것이다. 다른 곳의 미나리는 봄철에만 있지만 서울 미나리는 유행동요에 미나리는 사철이란 말과 같이 사철 없는 때가 없다. 길고 연하기도 하려니와 향취 또한 좋다. 특히 동지섣달 얼음이 꽝꽝 언 논속에서도 새파랗게 새싹이 난 미나리를 캐내는 것은 서울이 아니고는 그 생신(生新)한 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왕십리 미나리는 연한데다 향기도 좋지만, 사시사철 특히 한겨울에도 난다는 점에서 다른 지방과는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했다.

◇왕십리처녀는 미나리 장수?

‘왕십리’하면 ‘미나리’를 떠올리다보니, 이런 대화도 신문에 실렸다. “순진이, 봄 미나리를 씻어본 일이 있니?” ‘왜 내가 왕십리 처녀라구?” “왕십리 처녀야 미나리장수로 나가지, 미나리 씻으러 가나?”(봄 거리의 프로므나드, 조선일보 1939년 3월5일)

◇조선시대 왕십리는 채소밭

왕십리는 조선시대부터 채소밭으로 유명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예덕선생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왕십리의 무와 살곶이의 순무, 석교의 가지·오이·수박·호박이며 연희궁의 고추·마늘·부추·파·염교며 청파의 미나리와 이태인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최상급 밭)에 심는데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000전이나 된다네.’ 왕십리는 미나리뿐 아니라 무와 배추로도 유명한 채소산지였다

 

박지원은 미나리 산지로 청파를 거론했는데, 일제시대 청파동은 왕십리와 더불어 미나리 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일보 1920년 5월20일자에는 청파에서 미나리를 키우는 사진이 게재됐다. 경찰청 본청이 있는 서대문구 미근동도 미나리밭으로 유명했다. 이 지역 지명인 근동(芹洞)은 미나리를 많이 재배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왕십리 미나리는 광복 후 한동안 여전히 흥성했다. 조선일보 1958년4월29일자에 소개된 왕십리 미나리.

◇광복 후에도 왕십리 미나리

광복 후에도 왕십리 미나리의 인기는 여전했던 듯하다. 봄 미나리 인기가 높았던지, 봄마다 미나리 캐는 사진과 기사가 함께 실렸다. 조선일보 1955년 4월13일자는 행당동에서 촬영한 미나리 수확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실었다. ‘옛 노래에도 있는 봄미나리는 지금이 한창인 듯. 왕십리밖 미나리에서만도 하루에 만여단씩 뽑아낸다니…시민의 식욕도 과연 적지 않다.’

 

3년 후에도 왕십리에서 찍은 미나리 수확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산뜻한 봄의 미각을 돋구(우)어 주는 미나리가 미끈미끈하게 자라난 논에서 조심스레 미나리를 캐는 손에 대지의 흐뭇한 냄새가 안기는 듯하다. 한묶음 또 한묶음 캐어내는 미나리의 싱싱한 푸른 빛이 혀끝에 닿는 냄새를 풍겨주어 한 입 머금어 보고 싶다. 이제부터는 채소와 과일이 정성들인 결실을 빚어 계절과 함께 차례차례로 우리들에게 생선한 삶을 맛보게 해줄 것이다.’(조선일보 1958년4월29일)

 

아파트 숲으로 바뀐 왕십리에서 미나리밭의 자취를 떠올리긴 쉽지 않다. 그래도 근처를 지날 때 숲 향기 가득한 미나리 내음을 떠올리면 잿빛 도시 풍경이 조금은 색다르게 보일 것같다.

◇참고자료

경성명물집, 별건곤23호,1929년9월

박지원, 예덕선생전, 연암집 제8권 별집, 한국고전번역원

 

09.14 게오르기우 격분케한 앙코르 '별은 빛나건만'

1930년대 조선인 테너의 단골 레퍼토리, 경성방송국 전파 탄 인기곡

 ▲토스카' 공연 도중 상대역 앙코르에 항의해 무대로 뛰어든 안젤라 게오르기우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공연 전 기자간담회장의 게오르기우./연합뉴스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기우(59)의 돌출행동이 빚은 소란이 여전히 시끄럽다. 푸치니 서거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오페라단이 올린 오페라 ‘토스카’주역을 맡은 게오르기우가 지난 8일 테너 김재형이 3막 초반 앙코르에 응하자 무대에 뛰어들어 ‘이건 리사이틀이 아니라 공연이다. 나를 존중해달라’며 소리쳤기 때문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소프라노라 주인공인 자신을 제치고 상대역 테너가 앙코르를 부르며 주목받는 상황을 그냥 넘어갈리 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2016년 빈 국립오페라극장 ‘토스카’에 나선 게오르기우가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관객 요청에 따라 앙코르를 부르자 무대에 나오지 않고 버틴 적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은 그때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단순히 늦게 나타난 게 아니라 무대에 뛰어들어( ‘난입’이라는 단어를 쓴 매체도 있다) 영어로 불만을 쏟아내면서( ‘토스카’는 이탈리아어 공연이다)극의 흐름을 완전히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게오르기우는 지휘자를 향해 ‘익스큐즈 미’를 연달아 세번 외친 후, ‘This is not recital, performance’라고 얘기했는데, 여기서 ‘익스큐즈 미’는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으로 옮기면 안될 것같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날 뭘로 보는거야’(순화한 표현이다)하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커튼 콜 소동은 더 심각하다. 억지로 끌려나오듯 늑장부리며 몇미터쯤 걸어나오다 인사도 하지않고 손을 내저으며 되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게오르기우의 ‘무례’를 보면서 이 소프라노를 격분케 한 ‘별은 빛나건만’은 언제부터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왔을까 하는 의문이 문득 떠올랐다.

 

 ▲이인범은 1936년과 1937년 두 차례 경성방송국에 출연,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을 불렀다. 국립극장이 1958년 주최한 국내 첫 '토스카' 전막 공연에서 주역 카바라도시를 불렀다.

 ‘토스카’, 푸치니 작품 중 방송 1위

결론부터 말하면 ‘별은 빛나건만’은 1930년대 라디오방송에서 조선인 테너가 즐겨 부른 오페라 아리아였다.

‘토스카’의 또다른 대표곡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또한 소프라노가 자주 부른 아리아였다. 푸치니는 1930년대 베르디 다음으로 가장 많이 경성방송국 전파를 탄 오페라 작곡가였다. 그의 주요작품 중 ‘라보엠’ ‘나비부인’(당시 ‘마담 버터풀라이’ 또는 ‘호접부인’으로 불렀다) ‘투란도트’를 누르고 ‘토스카’가 단연 1위였다. 1933년~1939년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간지에 실린 경성방송국 프로그램(조선어채널 제2방송) 7년치를 확인한 결과다.

◇1933년~1939년 ‘토스카’라디오 방송만 18회

1933년 4월 시작한 경성라디오 제2방송은 1939년까지 모두 18번 ‘토스카’아리아를 방송했다. ‘나비부인’은 14번, ‘라보엠’은 11번이었다. 성악가들이 스튜디오에 출연해 라이브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드물게 현장 중계나 음반을 트는 경우도 있었다. ‘토스카’ 아리아는 ‘별은 빛나건만’이 제일 많았고, ‘오묘한 조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가 뒤를 이었다.

 

‘별은 빛나건만’은 ‘별도 빛난다’ ‘별만 반짝이누나’ ‘별은 반짝였다’ 등으로 소개됐다. 최소 9번 이상 연주된 것으로 보인다. 테너 이인범, 안보승, 최창은, 윤두선, 하대응, 전대홍 등이 이 곡을 불렀다. 안보승은 1937년 1월10일과 6월7일 두차례 ‘별은 빛나건만’을 불렀고, 이인범도 1936년 11월19일과 1937년 8월27일 이 곡을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미우라 다마키 상대역으로 ‘나비부인’핀커튼을 부른 테너 김영길도 두 번 출연해 ‘토스카’를 불렀다. 하지만 ‘별은 빛나건만’대신 1막의 ‘오묘한 조화’를 부른 것이 눈길을 끈다.

◇ ‘별은 빛나건만’대표곡으로 부른 이인범

‘별은 빛나건만’을 잘 불렀던 성악가로는 테너 이인범(1914~1973)이 손꼽힌다. 평북 용천 출신인 이인범은 연희전문 문과에 다니던 1935년 9월 조선일보 주최 제1회 전(全)조선음악콩쿨에서 2등을 차지했다.(발군, 영좌를 정복한 찬연, 악단의 삼신성, 조선일보 1935년9월24일) 바이올린(문학준)이 1등을 받았으니 성악 분야 1위인 셈이다. 1936년 제2회 콩쿨에도 참가, 성악부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이인범은 1953년 석유난로 사고로 얼굴과 목에 심한 화상을 입었는데, 3년 후 명동 시(市)공관에서 독창회를 열면서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1958년 국립극장 주최로 시공관에서 열린 국내 첫 ‘토스카’전막(全幕)공연에서 주역 카바라도시를 맡았다. 1962년 출범한 국립오페라단 초대 단장을 맡았고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내다 1973년 타계했다. 타계 5년 후 낸 추모 앨범에 ‘별은 빛나건만’을 수록할 만큼, 이 곡은 테너 이인범의 대명사였다.

◇정훈모, 이관옥 등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

소프라노 정훈모, 이관옥, 오경심도 경성방송국에 출연, ‘토스카’를 불렀다. 도쿄 유학파로 독일 가곡을 원어로 불러 명성이 높았던 정훈모는 1934년9월29일 출연, 슈베르트 가곡 셋을 부른 뒤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신문 프로그램에 소개된 제목은 ‘노래와 사랑으로 살고’. 이관옥은 1938년11월20일 출연, 홍난파의 ‘봉선화’, 브람스 가곡 ‘일요일’와 함께 이 곡을 부른 것으로 보인다.

◇1958년 국립극장 주최,’토스카’첫 전막 공연

‘토스카’ 전막 공연은 앞서 본 것처럼 1958년 10월11일~18일 국립극장이 주최하고, 한국오페라연구회가 주관한 공연이 처음이다. ‘토스카’ 첫 전막 공연에 쏠린 관심덕분인지, 조선일보는 이틀에 걸쳐 공연평을 실었다 계정식 안병소 이흥렬 박태현 김동진 이성삼 등 당대 음악인들이 참여한 집단 비평이었다. 음악평론가 이성삼이 대표집필한 이 리뷰는 먼저 ‘전체적인 면에서 본다면 예(例)에 비해 다소 발전을 보여준 셈이라고 평가’'연 1회 정도의 출연으로서 그만큼 감당해낸다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가수들은 음악적인 재질이 있다고 보아야 타당할 것’(가극 ‘토스카’ 공연회평 上, 10월22일)이라고 썼다.

 

하지만 전반적으론 혹평이었다. ‘연기면에 있어서 가수들의 무능한 탓도 많았겠지만 연출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가극 ‘토스카’ 공연회평 下, 10월24일)며 연기, 연출에 비판을 쏟아냈다. ‘토스카’ 첫 전막 공연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았던 것같다. 게오르기우 소동 덕분에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페라 ‘토스카’의 연원을 더듬어보게 됐다.

 

09.21 전 여름 떠들썩했던 진주 삭전(索戰)의 허무한 결말

城안팎팀으로 나뉘어 14시간 줄다리기, 수만명 몰려 중경상자 20여명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 풍년을 기원하며 열린 전통 민속행사였다. 하지만 승부경쟁이 과열되면서 돌던지기(석전)나 패싸움으로 비화,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경남 진주에서는 거(去) 8일 오후 4시경에 성 내외가 편을 갈라 일신고보 기지(基址)에서 인색전(引索戰)이 개시되었는데 당일 원근에서 회집한 인원수가 수만명에 달하여 초유인 인색전을 성(成)하였더라.’(‘진주에 인색전’, 조선일보 1924년7월12일)

 

100년 전인 1924년 7월 신문에 한줄짜리 기사가 실렸다. 경남 진주에서 대규모 인색전(引索戰)이 열렸다는 것이다. 인색전은 ‘삭전’(索戰)이라고도 했는데 ‘줄다리기’를 가리킨다.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 농경의례의 하나로 대개 정월 대보름에 열렸다. 하지만 진주에선 여름에 ‘삭전’이 열렸다. 이때가 비교적 농한기이자 비가 내리지 않는 시기이고 밤에도 쉽게 잠들수없기 때문에 떠들썩하게 휘저어 놓으면 경기도 생기고 비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진주에는 하기일한(夏期日旱)을 기하여 성외 성내의 인민들이 삭전(索戰)을 하는 습관이 있다. 습관의 유래는 알수없으며 또 그 최초의 원인도 알 수없으나 여하간 이 폐습이 수백년 계속하여 온 것같다. 거금 10여년 전에 이 삭전으로써 기명(幾名)의 사상자를 출(出)한 결과 경찰의 금지가 되어오다가 대정(大正) 10년의 대한재(大旱災) 당시에 다시 이 삭전이 시작되었다.’(‘삭전을 폐지하라’, 조선일보 1924년7월16일)

 

‘삭전’ 시합 도중 패싸움이 벌어져 몇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중단됐다가 1921년 여름 가뭄이 들면서 재개됐다는 설명이다.

 

▲1924년 7월 진주에서 벌어진 줄다리기 시합의 폐해를 지적한 조선일보 1924년7월16일자.

◇경찰서장이 성외팀 승리 선언?

두어해 별탈없이 넘어간 줄다리기 시합에 사달이 났다. 경찰은 야간 경기를 불허하면서 낮 12시~오후5시로 시합 시간을 제한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2시가 될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14시간 넘게 줄에 달라붙어 안간힘을 썼지만 말그대로 지리한 줄다리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은 당초 허가한 오후5시가 넘었을 때부터 해산을 명령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성내(城內), 성외(城外)팀은 자존심을 내건 이 시합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열이 먼저 흐트러진 것은 성내팀이었다. 점원이나 머슴, 근인(勤人·관공서·회사 근로자), 주부 등이 주로 참여했는데, 다음날 생업에 복귀하느라 줄다리기에 매달려 있을 수없었다. 반면 성외팀은 상대적으로 성내팀보다 더 멀리서 왔기 때문에 필승의 각오가 더 강해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없었다. 전세가 기울 무렵, 성외팀에서 누군가 ‘우리가 이겼다’하며 소리를 질렀다. ‘심판자 가타야마 경찰서장이 공평하게 판단해서 성외가 이겼다고 선포했다’ 는 소리도 들렸다.

 

 ▲삭전(줄다리기)는 정초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의례로 남부 지방에서 열렸다. 사지능ㄴ 밀양에서 이뤄진 줄다리기 시합. 조선일보 1934년3월8일자

◇곳곳에서 주민 충돌, ‘살인’얘기까지 돌아

성내 주민 300명은 경찰서장을 찾아가 따졌다.서장은 “나는 그와 같이 말을 한 기억이 전혀없다”며 부인했다. 성내 주민들은 환호하면서 자리를 떴다. 다음날인 8일 시내엔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성내 주민은 성외 주민에게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했고, 성외 주민은 성내 주민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방해했다. 하루종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벌어졌다. ‘칼로 찔렀다’거나 ‘살인했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경찰은 ‘유학생, 노동공제회 간부, 청년회 유력자’ 등을 불러모아 “제군들 같은 선각자가 진주에서의 구식의 소동을 방임하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책임을 다해서 노력해달라”고 설득했다.

◇중경상자 20여명, 농작물 피해

이 사건의 후반은 허무하다. 경찰 설득이 먹힌 건지 싸움의 동력이 소진됐기 때문인지 군중들이 줄다리기 판을 떠나버린 것이다. 남은 것은 대로에 덩그러니 방치된 줄이었다.

 

경찰 종용으로 양 팀 대표자들이 줄을 정리하고 승패를 가리지않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판 전쟁이라도 치를 것처럼 난리치던 군중들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중경상자 20여명’과 ‘피해된 농작물’(‘삭전을 폐지하라’, 조선일보 1924년7월17일)그리고 주민간의 헤아릴 수 없는 적대감을 남긴 채 끝나버렸다.

◇왜 부자들의 유희에 농민, 노동자가 동원되나

조선일보 진주 지국 기자는 이틀에 걸쳐 삭전의 폐해를 상세히 거론했다. ‘첫째 쓸데없는 감정에 흘러서 영원한 적대행동이 되고 만다. 삭전이라 하면 진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남도지방에는 도처에 있는 것같다. 혹 농한(農旱)시를 이용하여 농민의 일(一) 유희적 운동이 되지 아니하는 것도 아니지만 당지의 삭전은 예(例)를 초월한 특별이다. 양편은 수백년을 오면서 이 삭전으로써 전통적 감정이 포장되어 있다. 그리하여 삭전이외까지 이 감정이 파급하여 농업에 상업에 심지어 세탁장에까지 교통을 끊고 야료를 한다. 이와 같이 반목질시로 결국 단도(短刀)로, 투석으로 중경상을 내는데 이른다. 또 삭전이 변하여 격투로 권투로 일종의 백병전이 되는 것이 통례라 한다.’ (‘삭전을 폐지하라’, 조선일보 1924년7월16일)

 

적대감을 대물림하면서 지역민을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또 ‘무산농민의 유린’을 들었다. ‘단결이 노동자의 생명이라고 전 인류가 부르짖는 이 때에 있어 배가 불러서 지질머리가 나는 양반들의 빙수잔이나 먹고 앉아 소일거리가 되는 삭전에 많은 희생을 하고도 오히려 네편 내편하고 영원한 자기계급끼리 우애를 상(傷)하고 또 반목을 하는 노동형제들이여 자람(自覽)하라고 절규하여 마지 아니한다.’

 

왜 양반과 부자들의 한가한 유희에 가난한 농민, 노동자들이 나서야하는가 하는 주장이다.

◇줄다리기하면 비가 온다?

삭전의 폐해로 든 마지막 이유는 ‘미신이 잠재’한다는 것이다. 가뭄에 줄다리기를 하면 비가 온다는 미신은 믿을 수도, 말할 가치도 없다고 잘랐다. 이 기자는 경찰 당국을 향해서도 ‘근래 노동문제이니 사회문제이니 하여 떠드는 이때이니까 삭전같은 것이나 하고 가만 있거라 함이나 아닌가?’라고 따졌다.

 

최근 ‘식민지의 소란, 대중의 반란’ 을 낸 기유정은 삭전을 ‘법질서에 대한 대중의 양가적 욕망을 보여주는 사례’로 본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국가의 법과 권력에의 복종을 선택하지만, 그럼에도 그 복종의 틀에서 벗어나 그로부터 이탈하고 싶은 욕망으로 그들이 언제나 들끓고 있다는 것 말이다.’(193쪽~194쪽) 항일 민족운동 또는 계급운동 시각에서 일면적, 도식적으로만 접근하던 식민지 대중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줄다리기는 조선의 國技?

1920년대~1930년대 신문에는 삭전이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는 기사가 자주 나온다. 줄다리기 끝에 ‘석전’(石戰, 돌던지기)로 격화된 사례도 많았다. 군중들은 언제든지 싸울 각오가 돼있는 ‘전사’(戰士)처럼 보였다. ‘야구는 미국인의 국기(國技)요, 축구는 영국인의 국기요, 각력(角力, 스모)은 일본인의 국기이니 그것이 그 나라 사람들의 심신을 단련하는 이익이 다대함이 있는 것은 일반’이라면서 ‘조선 전반적은 아닐지언정 일부분에 있어써 중요한 운동을 성(成)한 것이 있으니 즉 삭전이 이것이다’라며 ‘삭전’을 조선의 국기 (國技), 즉 나라를 대표하는 스포츠에 비견하는 사설까지 나올 정도였다.( ‘각지 삭전의 보(報)를 듣고’, 조선일보 1926년2월28일)

◇2015년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

삭전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춘 듯하다. 민속학자 송석하는 ‘근년 당국의 불허가 방침과 현실에 얽매인 현대인의 심리로 좀처럼 구경조차 못한다’(동아일보 1939년 1월4일)고 했고, 이듬해에도 ‘구정 놀이로서 줄다리기 등의 자체가 사라진지 오래’(동아일보 1940년2월17일)라는 글이 나온다. 민속 전통에 뿌리를 둔 대중 오락이 전쟁에 밀려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줄다리기는 광복 후 운동회 단골 메뉴로 부활했다. 만국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반(班) 대항 줄다리기 시합을 벌이던 추억을 대부분 갖고 있을 것이다. 1969년부터 여러 지역의 줄다리기가 국가무형문화재와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전승되고 있다. 201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오르기도 했다.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과 함께다. 한 때 미신으로 폄하된 줄다리기는 인류가 함께 보호, 전승해야 할 문화 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참고문헌

기유정, 식민지의 소란, 대중의 반란, 산처럼, 2024

김영미, 식민지기 오락문제와 전통오락 통제에 관한 일고찰-줄다리기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연구 32, 이화여대한국문화연구원, 2017,6

공제욱, 일제의 민속통제와 집단놀이의 쇠퇴: 줄다리기를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95, 한국사회사학회, 2012,9

 

09.28 '독살미인' 김정필은 정말 남편을 죽였을까

1924년 남편 살해 혐의로 사형구형, 절세미인 소문에 방청객 구름떼같이 몰려

▲'독살미인' 김정필 재판은 1924년 하반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이었다. '절세미인'으로 알려진 김정필 재판을 보기 위해 2000명 인파가 몰리고, 신문사와 법원에 김정필 구명을 요청하는 투서가 쏟아졌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스무살에 과부된 것도 원통한데, 나를 사람 죽였다고? 새파란 하늘이 무서워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합니까. 고명한 판관께서 죄없다 말 한마디만 하시면 이자리에서 죽어도 원통치 아니하겠습니다.”(‘법정에서 구타노호’, 조선일보 1924년10월11일)

 

남편 독살범으로 지목된 스무살 김정필이 법정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쳤다. 1924년 10월10일 아침 서소문 경성복심법원 재판이 벌어지던 참이었다. 남편 김호철이 죽기 직전 진찰한 의사 최승하는 재판장이 “김호철이 살아있을 때 독약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던가”라고 묻자 “아내가 주는 약 3개중 2개를 먹고 한 개는 울 뒤에 파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의사 증언이 끝나자마자 김정필이 일어나 항변한 것이다.

◇3.1운동 지도자 공판만큼 인파몰려

‘남편 독살범’ 김정필 재판은 100년 전 경성을 몇 달간 뜨겁게 달군 스캔들이었다. 이날 서소문 재판장 주변에 2000명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방청쇄도 눈코 못뜬 경찰’, 동아일보 1924년10월11일) 3.1운동 지도자 공판때만큼 인파가 모였다고 할 정도였다.(‘법정내외에 인파’, 매일신보 1924년10월11일) 이날은 함경북도 명천군에 사는 김정필의 항소심이 열린 날이었다. 김정필은 결혼 한 달도 안돼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이미 1심이 열린 청진지방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는 경찰 고문으로 허위 자백한 것이라며 이날도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언도받은 스무살 김정필. 훗날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변호사 이인까지 변호에 나섰지만, 유죄판결을 피할 수 없었다. 사진은 조선일보 1924년10월11일자

◇빈발하는 남편 살해 보도

이 재판에 관심이 몰린 이유는 1심 때 독살을 자백한 김정필이 “남편을 결코 죽이지 않았다”고 항소하면서 동시에 그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다. ‘사형미인의 언도는 연기’ ‘법정에 립(立)한 절세미인’ 등 신문마다 호기심 자극하는 제목아래 기사를 쏟아냈다. 1920년대~30년대 신문에는 ‘본부(本夫, 남편)살해’기사가 이례적으로 자주 실렸다. ‘本夫를 참살한 姦夫婦, 사형과 무기징역을 불복하고 공소’(조선일보 1921년3월3일) ‘30년학대로 本夫살해’(동아일보 1922년7월8일) ‘본부살해한 불의남녀 사형’(중앙일보 1932년12월3일)….

 

이 때문에 일본 관료, 학자들이 남편 살해를 ‘조선 특유의 범죄’로 규정하고 연구할 정도였다. 조혼(早婚) 관습, 가부장제 폐해 등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낙후성을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비평’ 최근호에 ‘그녀를 살인범으로 몰았던 것은 가족내의 타자에 대한 증오였고, 성폭행당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혐오’였다면서 ‘김정필은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100년 전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김정필은 남편을 죽인 살인범이었을까, 아니면 무고를 뒤집어쓴 희생양이었을까.

 

김정필은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의 농부 김경렬의 다섯 자녀 중 맏딸이었다. 가난한 농가의 맏딸인 그는 학교 근처도 못가본 채 집안일과 농사에 동원됐을 것이다. 김정필이 당시로선 늦은 스무살에 결혼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먼 친척 오빠 김옥산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같은 군이지만 왕래가 어려운 남쪽끝 하가면 지명동의 열일곱 소년 김호철과 1924년 4월27일 결혼했다. 사돈 집이 재산가였기 때문이다. 김정필은 혼사전에 남편을 본 적도 없기에, 그의 뜻이 반영된 결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남편이 병은 있지만 모양이나 사람은 괜찮소” “내 남편이 살아있으면 나를 발명(發明, 무죄를 밝혀주다)해줄 것이오”(동아일보 1924년9월8일)라고 말한 걸 보면, 부부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호철은 성병(임질로 보인다)을 앓고 있었다.

 

▲남편을 죽인 혐의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김정필이 '남편을 죽인 사실이 없다'고 항소한데 이어 미인으로 소문나면서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매일신보 1924년 10월11일자

◇사건의 재구성

문제는 결혼 직후 남편의 병세가 더 위중해진 것이다. 새 며느리를 대하는 시집 식구들의 태도가 싸늘해졌을 것은 헤아릴 수있다. 김정필은 하필 이 때 시가 친척에게 ‘랏도링’이란 쥐약을 시장에서 사달라고 부탁했다.

 

쥐가 들끓는 친정의 식구들을 위해서였다. 시가 식구들이 보는 가운데 장롱틈에 끼워뒀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5월 23일 남편 김호철이 이 약을 먹었다. 그리고 며칠동안 빈사 상태에 빠지자 시가에서 26일쯤 경찰에 신고해, 김정필이 체포됐다. 그날 주재소 부탁으로 왕진 온 의사 최승하는 환자의 피부가 누렇게 변하고, 입에서 악취가 나면서 토사물과 대변에서 마늘 냄새가 나는 것을 확인했다. 황린 중독이었다. 이튿날인 27일 김호철은 사망했다. 시신을 부검한 최승하는 황린 중독 사망으로 진단했다. 쥐약 ‘랏도링’의 주성분이 황린이었다.

경찰과 검찰은 의사와 시집 식구들의 증언,남은 쥐약과 김정필의 자백을 근거로 그를 남편살해범으로 단정했다.

 

그런데 결혼 한달도 안된 새색시가 독약까지 먹여가며 남편을 죽일 이유가 있을까. 김호철은 쥐약을 두 알 삼켰다고 하는데, 황린 때문에 냄새가 강하게 나는 이 약을 새신부가 권한다고 의심없이 그냥 먹을 수있을까. 이기훈 교수는 김호철이 스스로 약을 먹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비방’(祕方)이라며 독한 약을 먹으면 병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내가 사둔 쥐약을 먹었다는 것이다. 김호철이 경찰에게 끌려가는 아내에겐 “내 살아나기만 하면 임자는 자연 무사할 것이니 놀래지 말고 잠깐 가 있으라”고 얘기하고 의사에겐 “아내가 쥐약을 먹였다”고 얘기한 건, 황린 중독에 따른 환각과 망상 때문이라고 본다. 그럴 듯한 주장이다.

◇김정필의 그후

복심재판관도 김정필에게 사형을 선고하기엔 미심쩍은 대목이 있었던 모양이다. 1924년 10월22일 경성복심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정필은 “상고하겠다”며 통곡하며 끌려나갔다. 하지만 승산이 없다고 봤기 때문인지 상고를 포기했다. 모범수로 착실히 수감생활을 하다 두차례 감형끝에 12년만인 1935년 출옥했다.하지만 남편 살해범으로 복역한 그는 친정으로도 돌아갈 수없었다. 고향 명천의 읍내 일본인여관에서 하녀노릇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후의 삶은 알려진 바 없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김정필의 남편 살해 혐의는 벗겨지지 않았다. 지금의 사법제도 아래서라면 김정필이 이런 부실한 증거와 증언만으로 유죄선고를 받을 것 같지않다. ‘남편살해(미수 포함)’를 양산한 100년 전과 지금은 확실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이기훈, 그녀는 정말 남편을 죽였는가?-한 살부사건의 재구성, 역사비평148호, 2024 가을

이철,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다산초당, 2008

 

10.05 獄苦 치르던 손병희가 영양식으로 먹던 이것?

'문명적 滋養'우유, 1910년대부터 조선인에도 서서히 보급

▲1820년대 신문엔 분유 광고가 자주 실렸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영양분 많은 분유라는 내용이 많았다. 사진은 조선일보 1926년6월21일자에 실린 일본 분유 '라구도겐' 광고

 

1920년 12월 천도교 지도자 의암 손병희의 병세를 소개하는 기사가 났다. 3.1운동 지도자 33인 중 하나로 투옥된 손병희는 건강이 악화돼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주치의는 ‘근일의 용태는 보석되던 당시에 비하여 조금 낫다고 할 수있다’면서 ‘언어도 자유로하여 전일보다는 매우 완전하다’(‘孫의암의 병상’, 조선일보 1920년12월29일)고 전했다. 주치의가 전한 짤막한 소식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식사는 우유와 기타 서양품을 먹는다’는 언급이다. 환자나 노약자가 기력을 되찾기 위해 우유를 자양제삼아 먹었다는 얘기다.

 

조선인은 원래 우유를 마시는 관습이 없었다. 소는 노동력과 고기, 가죽을 활용했을 뿐, 우유를 생산, 판매하는 낙농업 자체가 없었다. 19세기 후반 서양인과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분유나 연유가 수입됐지만 생우유 공급은 인천, 부산 등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시도됐을 뿐이다.

 

경성의 우유 생산 판매를 주도한 것도 일본인이었다. 1900년 12월 미후네 시카타로, 1902년 5월 히라야마 마사키치가 ‘착유업’(搾乳業)을 시작했고, 미 농상공부 기사였던 프랑스인 쇼트도 1902년 프랑스에서 젖소 11마리를 수입, 선교사 등 외국인에게 판매했다.

 

▲아기에게 좋은 영양분을 갖고 있다며 홍보한 수리표 우유 광고. 조선일보 1931년 12월16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生우유판매 광고

‘생(生)에 주의하는 자는 불가불 음용할 것은 세인이 기소공지(其所共知·모두 아는 바)오. 본사 축장을 고조광활한 남대문외 도동(桃洞)에 복지(卜地)하야 우사를 건축하되 그 광활함과 환기며 오물배제 등 설비가 모두 문명적 신식이오.’

 

1907년 9월21일 황성신문에 광고가 났다. 한국축산주식회사 이름으로 낸 우유 판매 광고였다. 경성 남대문 밖 도동(桃洞:지금의 동자동, 후암동 일대)에 목축장을 마련한 이 회사는 ‘세계에 유명한 서양종우중(西洋種牛中)에 건장한 유우(乳牛)를 극택(極澤)하야 20여두를 수입,사육하고 매일 수요대로 착취하야 신선한 우유를 발매’한다고 알렸다. ‘궁궐 어용품’이라는 문구까지 눈에 띄게 달아 선전에 활용했다.

◇궁내부 御用品 선전

‘로열 마케팅’까지 펼친 이 회사는 1906년 7월 일본 효고현의 축산가인 반토 구니하치, 하라 요시오, 고에즈카 쇼타가 경성에 설립, 그해 9월 5일 착유업을 시작했다. 당시 경성엔 일본인이 운영하는 착유소 4곳이 이미 영업중이었다.

 

한국축산주식회사는 ‘증기기계와 여과기를 완비하야 그 우유를 정제하고 각기 전문적 학문과 이력을 가진 기사가 담책시험을 경(經)한 연후에 매일 조석 양차식(兩次式) 응수분전(應需分傳)하오니 그 제품이 신선하고 순전함이 시정에서 파는 양철통연유며 타처에서 착취발매하는 우유라도 그 효험이 크게 다르니 개명신사는 유병무병을 물론하고 이 우유를 애용하심을 복망(伏望)함’이라고 소개했다. 최신 위생 설비와 전문가를 갖추고 우유를 생산, 공급하고 있다는 선전이었다.

 

▲궁내부에 납품하는 우유라고 선전한 조선축산주식회사 광고. 황성신문 1907년11월9일자

◇칼슘 풍부한 우유, 건장한 체격 만들어

1910년대 들어 우유보급은 서서히 진행됐다. ‘조선 사람은 본래 우유를 즐겨하지 아니하야 장위의 자양과 신체의 건강에 대하여 한가지 유감함이 적지 않더니 점점 위생의 필요함을 감각하고 헤아려서 인생의 가장 긴요한 자양품을 먹지 아니하면 불가하다 하고, 작년 동기부터 비상히 우유 먹는 사람이 많아져서 우유발전상 보급에 다대한 이익이 적지 않음으로 일선인(日鮮人) 우유판매업의 좋은 결과를 얻는 중이라더라.’(우유를 많이 먹어, 매일신보 1913년1월21일)

 

우유를 마셔야한다는 계몽적 기사도 종종 실렸다. ‘일상 우유를 마시는 민족은 대개 체격이 장대한 사실은 학리상과 실지상에 증명되는 바이다.’(‘우유와 체격의 관계’, 조선일보 1923년1월11일) 건장한 신체를 가꾸려면 ‘체격의 대소는 즉 골격의 대소니 골격을 형성하는 것은 주로 ‘칼슘’이오, 이 칼슘은 식물(食物) 중 우유에 최다한 소이이다.우유는 타 식물(食物)과 달라 매일 삼합씩 음용하면 오인 신체에 필요한 분량의 칼슘을 공급하는 것이다.’ 뼈대를 형성하는 칼슘이 우유에 풍부하기 때문에 우유 섭취를 장려하는 내용이었다.

◇치열한 분유 마케팅

1920년대 신문에는 분유 선전이 자주 나온다. ‘모리나가’ ‘명치제과’ ‘수리표’ 등 일본, 미국에서 생산된 수입품이 시장을 장악한 가운데 ‘라쿠도겐’이라는 일본 이누이우(乾卯)식료품주식회사 제품이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쳤다. 원래 한방생약을 다루던 이누이우 상점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1921년 식료품부를 독립, ‘라쿠도겐’분유를 개발, 판매했다. ‘허약자에게 우유보다 나은 영양료, 유아를 위하여는 이상적 모유대용품’(라구도겐) ‘모유의 대용, 우유보다 우량’(구라기소)처럼 유아나 노약자를 겨냥했다.

◇1938년 서울우유 전신, 경성우유동업조합 결성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우유에서 결핵균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착유업자들이 공동으로 생산·판매를 맡도록 이끌었다. 1938년7월 경성을 중심으로 고양, 시흥, 양주 등의 착유업자 21명을 중심으로 경성우유동업조합을 결성했다. 앞서 1907년 한국축산주식회사 설립 주역인 고에즈카 쇼타가 조합장을 맡았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따른 전시동원체제 수립과 궤를 함께 한다. 총독부는 우유처리장 건설에 보조금 1만3000엔을 지급하는 등, 우유 생산을 늘려 만주나 중국 관내로 유제품을 공급하는 기지로 활용했다. 광복후인 1945년9월 경성우유동업조합은 서울우유동업조합으로 이름을 바꿨고 1962년 서울우유협동조합으로 모습을 바꿔 현재까지 이어진다.

◇참고자료

임재성 지음, 임경택 옮김, 음식조선, 돌베개, 2024

肥塚正太, ‘조선의 착유사업 및 유제품’, 朝鮮之産牛, 有隣堂書店, 1911

 

10.12 라디오 휩쓴 '꼬마 스타' 진정희

경성방송국 1936년~1940년 14회 출연, '문자보급가' 음반 취입

▲동요가수 진정희는 1930년대 후반 경성방송국을 누빈 스타였다. 5년간 무려 14번이나 출연했다. 진정희가 부른 '문자보급가'는 조선일보가 1930년 말 현상공모한 작품으로 문맹퇴치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1937년 빅터음반사에서 음반으로 출시됐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36년 11월19일 오후 6시 ‘동요가수’ 진정희가 경성방송국 라디오에 출연했다. 함께 출연한 동료 강임진과 번갈아 노래를 불렀다. 진정희는 윤석중 작사 ‘퐁당퐁당’과 김기환(아동문학가 윤복진의 필명) 작사 ‘동리의원’, 홍난파 작사 ‘병정나팔’ 등을 불렀는데, 작곡자는 모두 홍난파였다. 홍난파가 쓴 ‘조선동요100곡집’에 수록된 곡들이다. 당시 라디오 음악방송은 스튜디오에서 라이브로 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36년~1940년 경성라디오 제2방송(조선어방송) 프로그램을 조사했더니 동요 프로그램에 가장 많이 출연한 가수 중 하나가 진정희였다. 진정희는 이 기간 모두 14차례 독창, 중창으로 방송을 탔다. 진정희만큼 인기가 높았던 계혜련과 함께 출연한 게 7차례나 됐다.

 

 ▲조선일보 1930년 12월5일자에 실린 '문자보급가' '한글기념가' 현상공모 사고. 신춘문예 공모 사고 안에 포함됐다.

◇동요 음반 여러장 취입

진정희는 동요 음반을 여러 장 취입했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로 시작하는 ‘맴맴’, ‘책상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로 시작하는 ‘오뚝이’(이상 윤석중 작사, 박태준 작곡), ‘엄마 앞에서 짝짜꿍/아빠앞에서 짝짜꿍’의 ‘도리도리짝짜꿍’(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은 빅터음반사에 출시했다.

‘짝짜꿍’은 계혜련과 함께 불렀다. 이 동요 셋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진정희의 목소리로 들을 수있다. 목소리만 들으면 열살 안팎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같다. 힘있고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가사 전달력이 좋다.

 

 ▲조선일보 1930년 12월7일자 사고. 문자보급가, 한글기념가 현상공모만 따로 소개했다.

◇1937년 ′문자보급가’ 음반 내

진정희는 1937년 빅터 음반사에서 이은희가 노랫말을 쓴 ‘문자보급가’ 음반도 취입했다.(장유정의 음악정류장 50, 한글날에 듣는 문자보급가, 조선일보 2022년 10월13일) ‘문자보급가’는 조선일보가 1929년부터 문맹퇴치를 내걸고 대대적으로 펼친 ‘문자보급운동’에 활용하기 위해 현상공모한 작품이었다. 문자보급가 현상모집 광고(1930년 12월 5일자) 에 따르면, 문자보급반 학생들에게 합창시킬 목적으로 많아야 3절을 넘지 않아야 하고, 반드시 후렴을 쓸 것을 요구했다. 처음엔 신춘문예 모집과 함께 나갔지만 ‘문맹퇴치와 한글운동에 2대 가요 현상모집’(조선일보 1930년 12월7일) 제목 아래 문자보급가와 한글기념가를 공모하는 사고를 따로 냈다. 1등 상금 30원, 2등 상금 20원, 3등 상금 10원을 내걸었다. 당시 신문기자 월급이 50원~60원 정도였으니 상금이 꽤 두둑했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공모 결과 ‘문자보급가’는 2등 2명, 3등 3명이 당선됐다. 이은희의 ‘문자보급가’는 2등이었다. ‘맑은 시냇가에는 고기 잡는 소년들/일할 때 일하고 배울 때 배우세’(1절) ‘푸른 언덕 위에는 나물 캐는 소녀들/일할 때 일하고 배울 때 배우세’(2절), ‘밭가는 아버지도 베짜는 어머니도/일할 때 일하고 배울 때 배우세’(3절). 후렴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로 문자보급운동 구호를 사용했다.(’현상모집 2등 당선’, 조선일보 1931년1월2일)

 

심사를 맡았던 염상섭은 ‘한글만 깨우치면 보고 알고 외우고 불러야 하겠는 고로 가장 통속적이면서도 뜻이 핍진하야 감격을 일으키게 하고 그리고도 운과 향이 아름다운데에 두었다’(‘현상작품 선후감’, 조선일보 1931년1월7일)고 밝혔다. 염상섭은 이은희의 노랫말이 ‘쉽고 부르기 좋다’고 호평했다. ‘문자보급가’ 음반을 들어보면, 진정희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호소력있게 들린다.

◇경성방송국, ‘문자보급가’ 7차례 방송

현상공모 당선 6년이 지난 1937년에 들어서야 음반 취입이 이뤄진 것을 보면 마땅한 작곡자를 찾기 어려웠던 듯하다. 음반엔 작곡자 이름이 없어 누가 이 곡을 썼는지 확인할 수없다. 경성방송국은 진정희를 스튜디오에 출연시켜 ‘문자보급가’를 부르게 하거나 ‘문자보급가’ 음반을 틀어주는 식으로 모두 6차례 방송을 내보냈다.1940년5월4일엔 경성방송동요회가 경성방송관현악단 반주로 ‘문자보급가’를 부르기도 했다. 1937년~1940년 4년간 ‘문자보급가’는 모두 7차례 방송을 탔다.

◇출신, 행적 알 길없는 진정희, 계혜련

1930년대 후반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한 ‘동요가수’ 진정희의 이력을 확인할 수없다는 점은 아쉽다. 나이나 학교는 물론 이후 행적도 알려진 게 없다. 가수나 음악가의 길을 가지 않은 듯하다. 진정희와 동시대에 활동한 계혜련의 행적도 드러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1930년대는 ‘동요의 황금시대’(‘창작동요100년사’ 86쪽) 였다고 한다. 홍난파, 윤극영, 박태준, 김성태, 박태현, 강소천, 윤석중 등 기라성 같은 작곡, 작사가들이 20~30대 젊은 나이에 작품을 쏟아냈다.

 

1933년 4월 조선어방송을 따로 시작한 경성방송국은 매주 1~2회 동요 프로그램을 편성, 동요 보급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모던 경성, ‘윤극영 ‘반달’ 히트 이끈 라디오의 힘’)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 방송에 출연해 노래한 진정희, 계혜련 같은 동요가수의 활약도 역시 아는 게 없다. 한국동요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는데도 그렇다. 이래서야 우리의 근현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든다.

◇참고자료

한국동요문화협회, 창작동요 100년사, 한국음악교육연구회, 2024

 

10.19 김영환은 정말 석조전 어전연주를 했을까

1918년 8월 고종 탄신연 연주說... '찬시실일기', 매일신보 등 기록없어

▲김영환은 동경음악학교를 나온 최초의 피아니스트였다. 1918년 8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고종 탄신을 기념해 열린 연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정말 고종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을까.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18년 1월 일본 유학중이던 영친왕이 잠시 귀국했다. 스물한살 영친왕은 덕수궁 석조전에 묵기로 했던 모양이다. 통치할 나라는 망했지만 왕위계승 1순위였던 그를 맞기 위해 이왕직은 바쁘게 움직였다. 이 와중에 매일신보에 특이한 기사가 났다. 영친왕이 어릴 때 치던 피아노를 함녕전에서 석조전으로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왕세자전하께서는 사진이니 옥돌(당구)이니 승마이니 바둑이니 여러가지 고상하신 취미가 극히 너르신 중에 음악에 당(當)한 취미가 특별히 깊으시와 이번 경성에 건너오신 뒤에도 태왕전하(고종)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왕세자 전하의 어렸을 때에 가지고 노시던 피아노 두 채를 함녕전으로부터 석조전에 옮기게 하시고 그동안 병이난 것을 악기점원이 밤을 새어가면서 급히 고쳐서 전하의 무료하실 때에 위로가 되시도록 하셨다 함은 이미 보(報)한 바어니와...’(매일신보 1918년1월26일)

 

▲안석주가 쓰고 그린 피아니스트 김영환. 머리를 피아노에 바싹 붙이고 두 손을 휘두르는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조선일보 1931년2월18일자.

◇덕수궁 함녕전의 피아노 두 대

영친왕은 근대적 취미에 관심이 많았던 것같다. 당구나 승마는 물론 골프도 좋아했다. 1927년 유럽 여행 때에도 ‘골프의 성지’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라운딩을 할 정도였다. 일본 유학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침실)으로 영친왕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영친왕은 열살이던 1907년12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함녕전에 피아노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명확지 않다. ‘영친왕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피아노’라는 내용으로 보아 1907년 이전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오르간, 피아노를 들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고종이 아끼던 영친왕을 위해 피아노를 들여오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간 뒤 주인 잃은 피아노는 방치됐던 듯하다. 10년 만에 부랴부랴 조율사를 불러 음을 맞추고 수리를 마쳤다는 얘기다.

 

매일신보는 영친왕의 음악 취미를 상세히 소개한다. ‘창덕궁이니 석조전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전하께서는 이왕직 양악대의 주악을 극히 만족하게 들으시며 그 수양의 연숙함을 비상히 칭찬하실 뿐아니라 잔치가 파한 뒤에는 따로 몇곡조씩 희망하시와 친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기색이 화려하심이 거의 매차례라….’(매일신보 1918년1월26일)

 

▲베를린 왕립음악원 출신 일 여성 피아니스트 오구라 스에코의 경성 연주를 소개한 매일신보 1916년12월17일자

◇13년 뒤 나온 김영환 어전연주 회고

고종의 양력생일은 9월8일이다. 하지만 1918년 고종 생일잔치는 8월31일 덕수궁에서 열렸다. 일본에 있던 영친왕이 8월에 다시 들어왔다가 9월초에 돌아가야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일정에 맞춰 생일잔칫날까지 바꿨다.

 

고종 생일연은 대개 아침에 함녕전에서 순종 부부 문안을 받는 것으로 시작됐다. 낮에 석조전에서 왕족, 관료들의 축하인사를 받은 뒤 돈덕전에서 이왕직 아악대의 양악 연주를 들으며 서양식 오찬을 즐겼다. 저녁엔 영화, 공연 등 여흥을 즐겼다.

 

그런데 이날 예전에 없던 피아노 연구가 있었다는 후일담이 나왔다. 월간지 ‘동광’ 1931년6월호에 실린 기사였다. 조선인으로 처음으로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피아니스트 김영환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의 술회담 또 한가지-학교를 나오던 그해의 고종제(帝)생신어연(御宴)이 석조전에서 열리었을 때 그가 어전 연주를 하였다. 이것이 피아노 어전 연주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한다.그리고 하사된 금일봉이 일금 3000원야(也)라.’

 

1918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김영환이 최초로 피아노 어전연주를 하고 거금 3000원을 사례로 받았다는 얘기다. 문제는 김영환의 어전 연주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13년 후 나온 후일담이 유일하다는 사실이다. 고종의 생일축하연은 이왕직(李王職·일본 궁내부 소속으로 李王家 사무를 담당한 부서)공식행사로 매년 신문에 보도됐고 ‘덕수궁 찬시실(贊侍室)일기’나 실록에도 실릴 만큼 중요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물론, 승정원일기 후속으로 매일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찬시실일기’에도 피아노 연주는 나오지 않는다.

 

가장 큰 의문은 김영환이 1974년 신문에 남긴 회고에도 어전연주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독부 고관집을 드나들며 상류층 부인에게 개인 레슨한 얘기까지 털어놓은 그였다. 음악가 경력 초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을 ‘어전 연주’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베를린 왕립음악원 나온 日 피아니스트 오구라 스에코

오구라 스에코(小倉末子1891~1944)는 20세기 전반 일본의 대표적 여성 피아니스트다. 1909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 왕립음악원에 유학한 오구라는 1차대전 발발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 메트로폴리탄 음악학교 교수를 지내다 1916년 귀국했다. 이듬해 동경음악학교 교수로 임용돼 후진을 양성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오구라는 경성까지 연주 여행을 왔다. 1916년 12월일 조선호텔과 YMCA에서 두 차례 리사이틀을 가졌다. 자선 음악회 성격을 띤 19일 첫 공연에는 오구라외에 경성의 외국인들도 출연했다. 총독부 2인자인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정무총감을 비롯, 경성의 유력 인사 300 명이 객석을 채웠다.

 

‘듣는 사람들은 다만 정신없이 실엉키듯 드나드는 파뿌리 같은 열손가락과 그 손가락을 따라서 쏟아져나오는 미묘한 소리에 취할 뿐이더라.’ 오구라 공연을 보도한 기사 제목은 ‘청중을 도취케하는 미묘한 음률’(매일신보 1916년12월21일)이었다.

 

▲오구라 스에코는 1916년 12월22일 오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순종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피아노 연주를 했다. 매일신보 1916년 12월24일자

◇1916년 창덕궁 피아노 어전연주

오구라는 22일 오후2시 창덕궁 인정전에서 순종 부부를 앞에 놓고 ‘어전 연주’를 가졌다. ‘창덕궁에서는 22일 오후2시 이왕(李王)동비(同妃)양전하께서 인정전에 임하옵시고 소창말자 여사를 부르시와 피아노의 탄주를 들으셨더라. 그 채색 유리를 거쳐 들어오는 광채는 정숙히 늘어앉아있는 궁내관의 얼굴들을 비추는데 교묘한 태서명곡은 흘러나오더라. 예정한 세 곡조를 탄 뒤에 여사가 조용히 퇴좌코자 하매 비전하께서 다시 한번 곡조를 더 타랍시는 말씀이 있으셨는 고로 비전하께서 항상 가용하옵시는 악보를 두 곡조를 탄주하였는데 양전하께서는 대단히 만족하게 생각하옵시며 기념으로 순금제보석 든 부인용시계 한 개, 수서품 한 벌, 금100원을 하사하셨다더라.’(창덕궁 어전연주, 매일신보 1916년12월24일)

 

오구라의 어전연주는 총독부 알선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순종비 순정효왕후는 앙코르까지 요청해 두 곡을 더 들었다. 그리고 시계와 하사금을 내릴 만큼 연주에 만족했던 모양이다. 신문 기사로 확인된 최초의 피아노 어전연주였다.

◇문화재청 ‘석조전 음악회’

문화재청은 2015년부터 덕수궁 석조전 음악회를 열고 있다. 100년 넘은 이 대리석 건물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느낌은 각별하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도 연주한 적 있을 만큼 인기 높은 음악회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석조전 음악회’ 근거로 1918년 고종 탄신연 때의 김영환 어전 연주를 들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 연주는 좀 더 확실한 근거가 필요하다. 허술한 고증(考證)에 기댄 역사 복원은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참고자료

이수정, 일제강점기 궁궐 안팎의 음악: 이왕가의 음악을 중심으로,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 2022

김은영, 1910~1920년대 YMCA 음악회에서 상상한 ‘민족’,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2022

이정희, 1910년대 고종 탄신 기념 연회의 공연 양상, 공연문화연구 제35집, 2017.8

홍종인, 반도악단인만평, 동광 제22호, 1931.6

 

10.26 김복진의 누드상(像)은 누가 훼손했을까

1925년 鮮展 입선작, 김관호의 '해질녘', 이제창 '女'는 촬영·게재금지

▲한국의 첫 근대 나체화로 꼽히는 '해질녘'. 1916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김관호의 작품으로 문부성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에 뽑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신문에 게재되지 못했다. 총독부는 여인의 벗은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이 풍속을 해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동경예술대학 소장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입상자 발표는 금 30일 오전10시에 하였는데, 각부 입상자의 씨명은 다음과 같으며 동 11시부터 신문 기자 일동에게 관람을 허락하였는데 정문 입구로부터 동으로 향하여 글씨와 사군자(四君子)를 진열하였고 다시 2층으로 동양화와 조각, 서양화의 순서로 진열하였는데 작품은 그다지 사람을 놀랄 만한 것이 없음이 유감이오. 제2부에 서양화중 4등상에 뽑힌 이제창(李濟昶)씨의 여자라는 나체화는 경찰의 명령으로 사진 박히는 것을 금지한 것이 보는 자의 주목을 이끌게 하였으며….’(’미전입상자발표’, 조선일보 1925년 5월31일)

 

총독부가 1922년 출범시킨 조선미술전람회(鮮展)는 유일한 관립 공모전이자 미술가들이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동양화와 서양화, 글씨와 사군자, 조각 분야로 이뤄진 선전에서 누드는 서양화 분야에서 출품됐는데, 거의 매년 입선작을 배출했다. 총독부는 누드화 전시는 허용했으나 사진 촬영은 제한했다. 신문,잡지에도 입선작 게재를 불허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5월 이제창의 ‘여’(女)도 당선사실은 보도됐으나 사진 촬영이나 신문 게재는 없었다.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4등)을 차지한 이제창의 여. 동경미술학교 재학중에 그린 작품이다. 사진촬영이나 신문 게재는 총독부 검열로 금지됐다.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3년 김관호의 鮮展 입선작은 게재금지

총독부의 누드화 검열은 2년전인 1923년 제2회 선전때도 있었다. 김관호의 당선작 ‘호수’가 신문 게재가 금지된 것이다. ‘김관호씨의 호수(湖水)와 원전운웅(遠田運雄)씨의 나부(裸婦)의 두 점은 나체의 부인을 모델로 하였다 하여 보이기는 하나 신문에 박어내이지는 못하게 하였더라. 이에 대하야 모 화가는 분개하여 말하되 예술의 나라에까지 경무당국자의 이해없는 권력이 미치어서는 참으로 불쾌한 일이라 하더라’(동아일보 1923년 5월11일) 1916년 동경미술학교 수석 졸업과 함께 일본 문부성 미술전람회(文展)에서 ‘해질녘’으로 당당히 입선한 김관호였지만 선전(鮮展) 당선작조차 신문에 실릴 수 없는 처지였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김관호의 '호수'. 역시 사진 촬영이나 신문 게재는 금지당했다.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김관호의 1916년 ‘문전’ 특선 소식은 매일신보(1916년10월20일)가 화가 사진까지 실으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光輝彬彬, 一幅의 그림’이란 제목 아래 ‘조선 화가의 처음 얻는 영예’란 제목아래 ‘금년의 전람회 2부 서양화에는 각 화가로부터 제출한 1546매중에서 겨우 아흔두장의 그림이 입선되고 그외에는 모두 낙선되었는데, 그중에는 다만 한 사람 조선의 청년화가 김관호의 그린 바 ‘석모’라는 서양화 한폭이 입선되었음은 조선의 청년화가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며…’

 

‘전람회에 진열된 김군의 그림은 동경으로부터 사진이 도착하였으나 여인의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사진으로 게재치못함’이란 단서와 함께 ‘김군이 요사이 그린 그림’이라는 풍경화가 게재됐다.

 

▲구로다 세이키(黑田 淸輝)의 1907년 작 백부용(白芙蓉).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일본 문부성이 출품한 '참고품'으로 전시됐다. 조선에 전시된 최초의 근대 나체화로 보인다. 구로다는 일본에서 나체화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역이었다.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도록

◇춘원 ‘조선인의 미술적 天才에 감사’

당시 마침 동경에 체류중이던 춘원 이광수가 전시회를 직접 보고 기사를 써서 보냈다. ' ‘조선인의 그림’이라는 여학생들의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려보니 대동강 석양에 목욕하는 두 여인을 화(畫)한 김관호군의 ‘日暮(해질녘)’라. 아아, 김관호군이여, 감사하노라...나는 군이 조선인을 대표하여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하였음을 다사(多謝)하노라’(‘동경잡신-문부성미술전람회기’ 3, 매일신보 1916년11월2일)

 

누드화 게재 금지가 조선인 작품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 일본은 당시 누드화를 배워야할 서양 근대 문명의 일부로 여겼다. 하지만 누드화 촬영이나 신문, 잡지 게재는 단속했다.

 

▲1925년 5월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김복진의 조각작품 '나체습작'이 전시회 직전 파손된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신문들은 이 사건을 사회면에 비중있게 다뤘다. 조선일보 1925년 5월30일자

◇팔부러지고 배 긁힌 김복진의 ‘나체습작’

한국 최초의 근대 조각가로 꼽히는 김복진(1901~1940)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던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조선인으론 처음 조각 작품을 두 점 출품했다. 그 중 한 점은 여성 전신 누드를 조각한 ‘나체습작’이었다. 문제는 이 작품이 전시 공개 직전 파손된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도 이미 입선자의 발표가 있었고, 30일에는 입상자의 발표와 신문 기자의 관람이 있을 터인데, 이제 전람회로는 물론 조선 미술계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그 중대문제라 함은 이번 출품 중에 조선 사람으로는 처음 출품인 제2부 조각에 배재교보 교원 김복진씨의 조각 2점이 있었는데, 그 출품 중 한 점인 나체습작이란 여자의 나체상이 28일 오전에 이르러 왼편 팔이 상하여 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을 과실로든지 고의로든지 상하게 하였다 함은 실로 조선미술전람회가 있은 후 처음되는 일이오, 이로 인하야 전람회 안에서는 물론 일반 미술계에서는 졸지에 중대한 문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개막전의 美展에 작품破傷사건 돌발’, 조선일보 1925년5월30일)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 실린 김복진의 조각 '나체습작'. 이 작품은 전시회 직전 누군가에 의해 훼손돼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왼쪽 팔이 망가지고, 복부 등에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신문은 사회면(2면) 톱기사로 여러 꼭지를 다룰 만큼,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미술계 안팎에선 혹시 나체작품을 반대한 누군가가 고의로 훼손한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관전(官展)을 주최한 총독부의 관리부실도 문제삼았다.

 

김복진은 이에 대해 ‘일개월 이상 전심전력한 것이 전람회가 열리기도 전에 깨어졌다 함은 참 섭섭합니다. 상처는 왼팔이 떨어지고 배와 국부에 손톱자국이 있음으로 처음에는 ‘누가 고의로 한 일이 아닌가’하는 의심도 있었으나…’라고 인터뷰한 것으로 보아 처음엔 의혹을 가졌던 듯하다. 하지만 ‘내가 예술가라는 처지를 생각하는 동시에 오직 예술가의 양심을 믿는다는 생각으로 어떠한 사람의 고의가 아니라 인부의 잘못으로 생각하려 합니다’(‘예술적 양심을 신임’, 조선일보 1925년5월30일)라고 담담히 정리했다. 김복진의 또 다른 작품 ‘3년 전’은 3등에 입상했다.

 

▲김복진이 1925년 2월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소녀좌상을 만드는 과정을 취재한 조선일보 1925년 2월22일자 기사. 열네살 소녀를 모델삼아 조각을 만들고 있다.

◇붓꺾은 김관호, 6년 수감생활 김복진

김복진은 1925년 2월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소녀 좌상을 제작하는 모습이 신문에 보도됐다.

 

‘작년 가을 동경에서 열린 제국미술품 전람회에서 입선이 된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김복진씨는 요사이 경성에 돌아와 낙산 밑에 있는 서화협회에서 목하 졸업제작에 착수중이다. 조선에서 이 같은 천재 조각가가 처음 나게 된 것은 실로 조선 미술계의 자랑이라 하겠으며 이번에는 조선 소녀의 좌상을 제작중인데, 모델로는 시내 와룡동 88번지에 사는 조봉희(14)라는 귀여운 소녀를 사용중인데 김씨는 손에 흙을 든 채로 기자를 보며 ‘아틀리에도 없이 제작을 한다 하는 것은 참으로 억지의 일이올시다. 그리고 흙도 마땅한 것이 없어서 일본에서 갖다 쓰게 되니 참으로 불편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며 조각 예술은 그림과도 달라서 조선에는 이해자가 너무나 적습니다’하며 적막한 웃음을 보였다.’(‘졸업제작에 열중한 김복진씨’, 조선일보 1925년2월22일)

 

재료나 모델 구하기도 어렵고 조각에 대한 몰이해도 속상했던 모양이다. 그런 김복진이 한달 넘게 애써 만든 조각이 누군가에 의해 훼손됐으니 답답했을 것이다.

 

▲1916년 10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김관호가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당선됐다는 사실을 전한 매일신보 1916년 10월20일자 기사. 당선작이 나체화라서 게재할 수없어 김군의 최근작을 싣는다면서 풍경화를 게재했다.

 

조각, 회화 분야에서 근대 최초의 누드작을 내놓으면서 충격을 안긴 예술가들의 운명은 밝지 않았다. 김관호는 1916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평양에서 풍경화 위주 작품 50점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화가로선 첫 개인전이었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호수’로 입선했으나 얼마후 붓을 꺾었다. 소설가 팔봉 김기진의 형인 김복진은 토월회 창립멤버이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KARF)과 ML당(黨)에 가담했다 1928년 체포당해 1934년까지 6년간 수감됐다. 출감 후 조선미술전람회에 ‘나부’(裸婦) ‘소년’이 특선하는 등 작품활동을 이어갔으나 마흔을 앞둔 1940년 불의의 질병으로 타계했다.

◇참고자료

김소연, 한국 근대기 나체화의 성과와 한계-제작, 전시, 검열의 구조적 고찰, 대동문화연구 제123집, 2023,9

배홍철, 검열이 예술의 제도화에 미치는 영향-한국 1920년대 여성 나체화 수용과정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석사논문, 2013.8

정형민, 1920~1930년대 총독부의 미술검열, 한국문화 제39집,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7.6

김영나, 한국의 미술들:개항에서 해방까지, 워크룸 프레스, 2024

안현정, 근대의 시선, 조선미술전람회, 이학사, 2012

 

11.02 이효석의 애독서 '어머니'는 왜 386 운동권 필독서가 됐을까

1930년대 톨스토이 버금가는 인기누린 고리키…타계 특집 기사 쏟아져

▲소비에트 작가 막심 고리키는 1930년대 젊은 지식인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작 '어머니'는 1980년대 대학가 의식화 교재로 활용됐고, 일반 학생들에게도 널리 읽혔다.

 

조선일보는 1933년 1월 유명 문인, 지식인들의 애독서와 그 이유를 꼽는 기고를 받았다. ‘내 심금의 현(絃)을 울린 작품’이란 제목이었다. 주요섭 김안서 박화성 이헌구 유치진 이하윤 이효석 이태준 양주동 이무영 오천석 박용철 등 13명이 참가했다. 이중 고리키와 투르게네프 작품을 꼽은 이가 각각 2명으로 전체 13명중 4명이다. 1930년대 조선을 휩쓴 러시아 문학의 힘을 엿볼 수있다. 특히 이효석(1907~1942)은 그리스 비극 소포클레스와 함께 고리키 소설 ‘어머니’를 완벽에 가까운 작품으로 꼽았다.

 

어머니가 점심 그릇 속에 삐라를 묻어가지고 공장으로 들어가던 장면, 아들이 가두에서 시위하다 붙들리는 장면 등등 수많은 장면이 언제까지든지 잊히지 않고 신선한 인상을 가지고 눈앞에 살아나오리만큼 감동깊은 작품이었다. 진실로 진보적인 문학, 일원적인 문학, 우리를 울리는 문학 그것을 나는 여기에서 찾아낸 것이다.’(‘소포클레스로부터 고리키까지’, 조선일보 1933년 1월26~27일)

 

▲고리키 '어머니'는 1930년대 신문에 주요 내용이 연재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31년 8월26일~9월1일 여섯차례에 걸쳐 '어머니'를 소개했다.

◇'우리를 울리는 문학’ 고리키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스물여섯살 수재 이효석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혁명적 모성(母性)을 재현한 고리키 ‘어머니’를 ‘진보적 문학’ ‘우리를 울리는 문학’으로 치켜세웠다.

 

이효석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멤버는 아니지만 ‘동반자 작가’였기에 고리키를 높이 평가했다고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독후감을 보자. 진주고보생 김인문이 월간지 ‘동광’에 기고한 ‘고리끼의 作 ‘母’를 읽고’(제31호,1932년3월)는 10대 고교생 눈높이로 읽은 ‘어머니’ 독법이다. ‘자기의 소신을 완전히 자식의 사상변천에 끌리어 자식의 감화의 권내(圈內)에 완전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식의 母가 되었으며 더욱이 용맹한 동지애를 그의 명랑한 필력으로 그려낸 작품이 곧 골키의 ‘모’이다.’ 자식에 이끌려 혁명가로 성장하는 어머니의 변신을 주목했다.

 

1930년대 조선 문단에서 고리키는 톨스토이에 버금갈 만큼 인기를 누리던 러시아 작가였다.(김진영, ‘광장의 문학’ 217쪽) 사회주의에 동조한 청년은 물론 보통의 젊은 지식인들도 고리키를 통해 독립과 해방을 모색했다. 1936년 6월 고리키 타계를 맞아 신문, 잡지에서 쏟아낸 글을 보면 당대 지식인들이 얼마나 고리키에 심취했는지 알 수있다.

 

▲1936년 6월18일 고리키가 타계하자 각 신문은 일제히 특집 기사를 쏟아냈다. 조선일보 1936년 6월21일자에 실린 고리키 특집 '빈곤과 고난의 작가' 첫회. 함대훈이 여섯차례에 걸쳐 썼다.

◇신문마다 한 페이지씩 털어 특집

1936년 6월 18일 고리키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신문마다 고리키 특집이 쏟아졌다. 일본에서 러시아문학을 공부한 함대훈은 조선일보에 ‘빈곤과 곤란의 작가 고리키의 생애와 예술’(6월21~7월1일·총 7회)을 실었다. ‘나는 가난하고 불쌍하고 괴로워하는 계급을 위해 일생을 쓴 그의 작품속에 새겨진 그의 심혼은 다시금 내 문학적 생활에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는 것이다.’(조선일보 1936년 6월21일)

 

조선중앙일보는 한 페이지(6월22일자)를 털어 고리키 특집을 꾸몄다. 카프 작가 김남천 이기영과 이태준 고명자가 필자로 나섰다. ‘고리키를 곡함’을 쓴 김남천은 ‘20세기의 최고의 인간’ ‘억만대중의 최량의 僚友의 지조를 관철한 거대한 인간’으로 추앙했다. 동아일보도 6월20일자 한 페이지를 털어 고리키 기사를 전했다. 카프 출신 문학평론가 한식(韓植)의 ‘문호 막심 골키의 문학사상의 지위’를 비롯, ‘골키의 약력과 저작’이 실렸다. 한식은 6월26일까지 5차례 기고하면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태조이고 그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라고 평가했다. 동아일보는 앞서 고리키 ‘어머니’ 주요 내용을 1931년8월26일부터 9월1일까지 여섯차례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6월22일자에 한면을 털어 고리키 특집을 실었다. 김남천 이태준 이기영이 필자로 나섰다.

◇1980년대 운동권 입문서 ‘어머니’

고리키 ‘어머니’는 1980년대 대학 운동권에서 ‘의식화교재’처럼 읽었던 책이다. 당시 유포된 운동권 세미나 커리큘럼 중 하나인 ‘사회과학학습을 위한 도서목록’(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에 따르면, ‘어머니’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됐는가’와 함께 ‘혁명사’ 학습의 참고도서로 올랐다.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단순한 외부적 논리로 이들 알사(혁명사의 은어, Revolution의 첫 글자 R을 따서 R史라고 했다)를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의 적용가능성을 진지하게 탐색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단서가 붙었다.

 

권위주의 정부와 맞서 싸우면서 일제 때 유행한 고리키를 다시 불러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이런저런 시국사건으로 투옥된 ‘운동권’ 대학생,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어머니’는 이들의 가족이 자식들과 함께 ‘투사’ 대열에 합류하도록 각성시키는 역할을 떠맡았다.

 

‘어머니’는 운동권 교재를 뛰어넘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그 시절의 대학생들에게 ‘어머니’는 최소한 제목은 들어봤을 교양서 반열에까지 올랐다. 노문학자 김진영 연세대교수는 ‘80년대 독자들이 읽은 ‘강철’과 ‘어머니’는 광장의 문학이었다’며 ‘상상이나 낭만 따위와는 거리가 먼 현실 삶의 거울이자 돌파구로서 스스로 의미를 확정지은 문학이었다’고 지적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고리키 ‘어머니’가 2000년대 들어 서서히 잊혀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혁명의 시대’가 저물었기 때문일까.

◇참고자료

김진영, 광장의 문학-격변기 한국이 읽은 러시아, 성균관대출판부, 2024

‘사회과학학습을 위한 도서목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효석 전집 7, 창미사, 2003

김인문, ‘고리끼의 作 ‘母’를 읽고’, 동광 제31호,1932,3

 

11.09 태평양전쟁 직전까지 극장가 휩쓴 할리우드 서부극

게리 쿠퍼, 세실 드밀 인기…경성 약초극장, 명치좌 등 대형극장 성황

▲1937년 경성 약초극장에서 개봉한 '평원아'. 게리 쿠퍼가 주연을 맡았다. 그는 조선에서도 이름 높은 스타였다. 할리우드 서부극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미국 영화 수입이 완전히 중단될 때까지 경성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Public Domain

 

‘전 세계의 작년도에 있어서의 흥행 성적 우수 영화의 주연 배우 조사는 세계 20개국으로부터 통계를 수집한 결과 베스트 텐은 다음과 같이 판명되었다. 1,게리 쿠퍼 2,그레타 가르보 3, 클라크 케이블...’ (‘게리 쿠퍼는 영국에서 인기 제일’, 조선일보 1938년 2월10일)

 

게리 쿠퍼가 1937년 세계 20개국 흥행 영화 주연배우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뉴스다. 출연작 ‘벵갈의 창기병’ ‘평원아’(平原兒) ‘해(海)의 혼’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인기 상한가 게리 쿠퍼

게리 쿠퍼는 1930년대 조선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그는 할리우드 서부극 주인공으로 유명했는데, 1937년 4월28일 경성 약초(若草)극장에서 개봉한 ‘평원아’(The Plainsman)가 대표적이다. ‘파라마운트 창립 25주년 기념작으로 제작된 역작! 링컨의 몰후(沒後)서부 개척에 활약하는 군대와 ‘인데안’과 제휴하는 음모가 사이의 충돌을 취급한 사실에 의한 서부 개척사로 ‘십자군’ 이래 거장 데밀이 오래간만에 메가폰을 들었고, 게리 쿠퍼와 진 아서가 공연하였다.’(매일신보 1937년 4월29일)

 

일본 굴지의 도호(東寶)영화사가 직영한 약초극장은 1935년 지금의 중구 초동에 지하 1층, 지상 2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세워진, 당시까지 조선 최대, 최신식 극장(1200석)이었다. 약초극장은 광복 후에도 스카라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한국 영화계의 주요무대로 활약을 펼치다 2005년 헐린 비운의 극장이다.

 

▲할리우드 서부활극을 본뜬 조선의 선술집 풍경. 카우보이 모자와 스카프, 청바지 차림의 손님이 카운터에 기대고 섰다. 허리춤엔 권총대신 파이프 담뱃대가 끼워져있다. 주모가 막걸리를 잔에 따라주고 있다. 할리우드 서부극 인기가 일상에 파고든 것을 포착한 위트 넘치는 삽화다. 웅초 김규택이 잡지 '제일선' 제3권1호(1933년1월호)에 그렸다.

◇스펙터클한 호쾌함과 대리 만족감

1930년대 후반 경성 극장가에서는 할리우드 서부극이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게리 쿠퍼의 ‘평원아’를 비롯, ‘신천지’(Wells Fargo, 1939년 개봉) ‘대평원’(Union Pacific, 1940년 개봉) 등 파라마운트사(社)가 제작한 서부극이 특히 환영을 받았다. ‘신천지’는 도호의 맞수인 쇼치쿠(松竹)의 개봉관으로 1936년 들어선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됐다. 명치좌는 지하2층, 지상 4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최대 1500명을 수용하는 대극장이었다.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을 전후해 할리우드 서부극이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역사학자 이연식은 ‘ ‘만주 개척’에 이어 이제는 중국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대일본제국의 장엄한 대동아공영권 서사가 미국의 서부 개척 내러티브와 친화성을 띠고 있었고 활극 특유의 스펙터클한 호쾌함과 대리 만족감은 제국과 대중의 욕망을 한데 묶어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경성의 영화배급권은 일본 업체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일본에서의 서부극 열풍은 경성에서 그대로 되풀이됐다.

 

▲프랭크 로이드 감독의 서부극 '신천지'. 원제는 웰스 파고(Wells Fargo) .1939년 2월 당시 경성 최고 극장이던 명치좌에서 개봉했다. 현 명동예술극장의 전신이다./Public Domain

◇스필버그 ‘인생멘토’, 세실 드밀 감독

‘평원아’ ‘대평원’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감을 준 인생 멘토로 꼽은 세실 블라운드 드밀(Cecil B.DeMille·1881~1959) 감독 작품이다. 스필버그는 세실 드밀이 찍은 ‘지상 최대의 쇼’를 어릴 때 처음 본 인생작으로 꼽았다. 세실 드밀은 찰턴 헤스턴, 율 브리너 주연의 ‘십계’(1956), ‘삼손과 데릴라’(1949)로 널리 알려졌으나 1930년대엔 서부극을 많이 찍었다.

◇'국산(일본산) 영화’보라며 서양영화 ‘스크린 쿼터제’도입

충무로 극장가의 할리우드 서부극 인기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서양 영화에 대한 스크린 쿼터제가 실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둔 성과라 이례적이다. 총독부 경무국은 극장에서 상영하는 서양영화의 편수를 1935년 전체의 75%, 1936년 66%, 1937년 50%로 제한했다.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연전에 영화취체규칙을 제정하고 국산영화 장려라는 특수한 입장에서 상영영화의 수량상 통제를 하였다. 즉 소화 10년(1935년)에는 구미의 양화(洋畵)를 4분의3으로 하고 동 11년(1936년)에는 3분의2로 하고 다시 소화12년(1937년)부터는 2분의1로 하기로 결정하야 금년부터는 어떤 영화관에서든지 상연영화에 대하여 서양 영화는 그 절반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한받는 서양영화 금년부터 절반씩’, 조선일보 1937년 1월8일)

 

▲1940년 경성 약초극장에서 개봉한 '대평원'. 원제는 유니온 퍼시픽(Union Pacific), 세실 드밀 감독 작품이다./Public Domain

◇태평양전쟁으로 영미영화 수입 끊겨

서양영화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씨네마 활동 사진이라면 오늘의 도시 생활자들이 눈과 귀를 통하여 얻는 대중적 오락기관으로 내지는 교양의 향상을 위하여 없지 못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그 영화는 종래 대개가 미국과 구라파에서 수입되는 것들이고 일부 일본 내지에서 들어오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구미 각국의 그것에 비하여 여러가지 점으로 빈약한 것이 사실이어서 일반의 취미는 구미의 영화를 더 많이 즐겨왔는데….’(위 기사)

 

대중은 미국,유럽 영화를 즐기는데 총독부는 빈약한 ‘국산(주로 일본산)영화’를 보라고 몰아가는 데 대한 불만이 컸던 모양이다. 국제 정세도 날로 악화됐다. 미국은 1939년 7월 일본에 미일통상항해조약 폐기를 통고하면서 미국 영화 수입도 차질을 빚었다. 여기에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 발발은 찬물을 끼얹었다.

 

‘일반 구라파 영화의 수입은 절망이라고 단연하여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구주대전과 영화계, 양화 수입은 절망’, 조선일보 1939년9월9일)이라는 우려까지 나왔다. 할리우드 서부극 흥행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영국 영화 수입이 완전히 중단되면서 막을 내렸다. 전쟁 선전영화와 국책 영화만 트는 극장가 분위기는 우중충하고 지루했을 것이다.

◇참고자료

이연식, 다시 조선으로, 역사비평, 2024

김려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삼인, 2006

 

11.16 '정조' 유린당한 '苑洞 재킷' 김화동,시대의 罪인가

북촌 원서동 '모던 미녀', 도쿄 유학 꿈꾸다 한량에게 버림받아

▲스무살 김화동이 연애를 뜻하는 자줏빛 재킷과 연록색 치마를 입고 집을 나서면 사랑을 고백하는 청년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북촌의 원동에 산다고 해서 '원동재킷'으로 불렸다. 김화동은 도쿄 유학을 선망하다 부잣집 유학생에게 농락당했다. 그는 '자유연애시대'의 공범이었을까, 피해자였을까.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21년 1월 특이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장안을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 주인공 김화동을 다룬 기사였다. 도쿄 유학을 꿈꾸며 현해탄을 건너갔다가 한량에게 몸만 뺏기고 버림받은 ‘모던 걸’ 스토리를 12회(실제론 11회로 제7회는 중복게재했다)에 걸쳐 연재한 것이다. 원동(苑洞,지금의 원서동)에 살면서 늘 자줏빛 재킷을 걸치고 다녀 ‘원동 재킷’으로 널리 알려진 여성이었다.

 

‘연애를 상징한다는 자줏빛 ‘짜케트’(재킷)와 연녹색 치마에 붉은 해당화 빛이 나는 단을 대어 입고, 좀 갸름하고도 고와보이는 어여쁜 얼굴에 단장 화려히 하고, 옆으로 넘긴 트레머리에 일부러 두세 줄 머리털을 이마 앞으로 넘겨놓고, 굽높은 구두를 발끝만 디디고 가는 허리를 맵시 있게 가누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양은 목석의 심장이 아닌 이상 누구이든지 그 요염한 아리따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없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 1, 조선일보 1921년 1월23일)

 

현진건이 번안한 투르게네프 소설 ‘첫사랑’이 1면에 실리고 고어(古語)투 고담준론과 짤막한 스트레이트 기사가 신문 4쪽을 차지하던 시절, 단박에 눈길이 쏠리는 내용이었다.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 도쿄로

김화동은 열아홉살 나던 1919년 봄 여학교 기예과를 졸업했다. 연녹색 치마에 자줏빛 재킷을 걸치고 대문을 나서면 미모에 반한 청년들이 접근하고 연애편지가 대문앞에 수북이 쌓일 만큼 인기 절정이었다. 하지만 김화동은 당시 유행한 일본 유학에 정신을 빼앗겼다.

 

매일 밤마다 외로운 자리에 눕기만 하면 눈앞에 왕래하는 것이 양복 입은 청년 신사와 손에 손을 잡고 상야(上野, 우에노)공원 달밤을 소요하는 광경이며 여자대학을 영화로이 마치고 모든 사람의 흠양을 받으며….’( ‘원동 재킷’의 애사2, 조선일보 1921년 1월24일)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김화동은 일본 유학의 꿈을 잠시 접고 1920년 봄 ‘삼성무극교’라는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하는 잡지사에 기자로 들어가 일에 재미를 붙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솔깃하게 하는 얘기가 들려왔다.

‘우리 집에 뚜쟁이가 찾아와서 그러는데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고 있는 어떤 청년이 인물 곱고 재주 있는 여학생을 구하는데 마음만 맞으면 일본에 데려가서 같이 공부를 하겠다더라.’ 잡지사 친구는 ‘그 남자 돈은 있어도 품행은 썩 좋지 못하다더라’고 경고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동재킷' 김화동과 도쿄유학생 박석규. 스물여덟살 유부남 박석규는 경성에서 건너온 김화동을 유린하고 버렸다. 어떻게 둘의 사진을 구해 신문에 실었는지 미스터리다. 조선일보 1921년1월27일자

◇싫증난 한량에게 한달만에 버림받아

김화동은 친구에게 주소를 얻어 뚜쟁이를 찾아갔다. 뚜쟁이는 전라도 정읍 출신 부호의 아들 박석규 (朴碩奎)가 참한 신붓감을 찾고 있다며 사진을 건넸다. 여덟살 연상의 남자였다.

 

그해 7월초 김화동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뚜쟁이를 만난지 보름만에 단행한 거사였다. 집에는 ‘여행증명서’까지 구해와 관비유학생으로 유학하게 됐다고 둘러댔다. 박석규는 처음부터 결혼은 물론 유학을 시켜줄 생각도 없었다. 노리개로 생각했을 뿐이다. 한달만에 김화동에 싫증난 박석규는 다른 여성을 찾아 집을 나갔다. 얼마후 박석규의 조카가 찾아왔다. ‘나의 당숙은 본시 한 여자를 데리고 석 달을 못 사는 사람입니다. 고향에는 정식 아내와 아들까지 있으니 그대는 하루빨리 박석규의 무서운 품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원동 재킷의 애사’8, 조선일보 1921년1월31일)

◇ “툭하면 서방 버리고 달아나는 계집이…”

김화동은 어쩔 수없이 혼자 귀국했다. 하지만 한달 후 배가 불러왔다. 김화동의 어머니는 딸을 다시 도쿄로 돌려보냈다.

 

박석규는 냉담했다. ‘그같이 호기있게 가더니 다시 온 것이 의문이오. 바라건대 이 어리석고 못난 박석규보다 더 나은 사람을 구해 재미있게 사시오.’ 김화동은 ‘나에겐 그대의 혈육이 자라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 것이냐’고 따졌다. 박석규는 독기를 품은 웃음을 띠며 이렇게 말했다. ‘툭하면 서방을 내버리고 달아나는 계집이 밴 자식을 세상에 제 자식이라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낙담한 김화동은 두어달 여관을 전전하다 그해 12월 경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임신 7개월의 김화동은 1921년 1월 유산했다. 의사는 약을 먹어 낙태한 것같다고 했지만 김화동은 간질이 있는 친척과 방을 쓰는데 밤에 발작을 일으키면서 자기 배를 때려 유산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 “가엾은 희생자가 또 날까 염려하여”

이 기사의 마지막 회에서 기자(外多生)는 ‘결코 어린 처녀의 가엾은 비운을 구태여 세상에 들춰내 그에게 치욕위에 한 치욕을 더하여 주고자 하는 어리석은 무슨 감정적 행위가 아니었’다고 썼다. 김화동의 설움을 함께 같이 울고자 하는 동정자(同情者)라고도 했다. ‘우리 사회에 그와 같은 가엾은 희생자가 날까 염려하는 한 줄기 열성으로써 이 글을 쓴다’(이상 ‘원동 재킷의 애사’11, 1921년2월3일)는 해명이었다.

◇에필로그: 정읍면장 박석규

박석규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1917년 정읍의 전도유망한 유지로 신문(부산일보)에 소개될 만큼 번듯한 인사였다. 1920년 3월 전주에 설립된 민족계 지방은행인 삼남(三南)은행 대주주이기도 했다. 그도 얼마 후 귀국한 듯하다. 고향 정읍에서 청년회 간부로 일하면서 민립대학 설립준비위에도 참여했다. 1928년~1932년 정읍면장(奏任官 대우)으로 일했다. 정읍경찰서 신축기금으로 1500원을 낸 공로로 총독부 포상을 받기도 했다. 김화동의 불행은 아랑곳없이 무탈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참고자료

전봉관, 럭키경성, 살림, 2007

 

11.23 당대 작가들이 꼽은 해외진출작 1순위, 이광수 이기영 정지용

1936년 '삼천리' 설문조사, 심훈 "내 작품 좀 보내줬으면"

▲춘원 이광수는 당대 작가, 예술가들이 꼽은 '해외로 보내고 싶은 작품'에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1936년초 파인 김동환이 발행, 편집을 맡은 월간지 ‘삼천리’가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유명 작가, 예술가들에게 ‘영어 또는 에쓰어(語,에스페란토)로 번역하여 해외로 보내고 싶은 우리 작품’을 추천받은 결과였다. 근대 문학이 발돋움하던 90년전, 해외 독자까지 시야에 넣고 이런 기획을 했다는 게 신기하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출범한 때가 1996년 이고, 2000년대 들어 한국 문학작품이 번역을 통해 해외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을 떠올리면 얼마나 앞선 기획이었는지 알 수있다.

 

삼천리 조사에 응한 유명 예술가는 23명. 양주동 유진오 채만식 염상섭 심훈 전영택 안석주 김안서 최독견 김태준 노자영 함대훈 장덕조 김광섭 장혁주 이일 홍효민 이무영 정내동 유치진 서항석 임화 민병휘이다.

◇이광수 ‘무정’ ‘흙’ ‘역사물’ 꼽혀

조선의 톨스토이’로 꼽히던 춘원 이광수는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양주동은 ‘춘원의 역사물 2,3종’, 김광섭은 ‘초기 작품’, 김태준은 ‘무정’을 꼽았다. 전영택은 이광수의 ‘흙’을 꼽았고, 유치진은 “정지용씨의 시, 이광수씨의 소설 중 어떤 것을 세계 문단에 보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문학평론가 홍효민은 이기영 장혁주 유진오와 함께 이광수를 꼽았다.

◇이기영의 ‘고향’, 김동인도 인기

1933~1934년 조선일보에 단편 ‘서화(鼠禍)’와 장편 ‘고향’을 잇달아 연재한 카프 작가 이기영도 두루 추천을 받았다. 카프 출신 평론가 임화를 비롯, 장혁주 홍효민 김태준 민병휘가 단수 또는 복수로 ‘고향’을 꼽았다. 특히 임화는 “세계에 자랑할 문학은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라면서 ‘고향’을 단수로 추천했다.

 

김동인은 김안서, 김광섭,전영택의 추천을 받았다. 김안서는 ‘아라사 버들’, ‘광염소나타’ ‘명화 리디아’, 김광섭은 ‘김동인 단편 소설’, 이광수 ‘흙’을 꼽은 전영택은 김동인 ‘감자’도 함께 골랐다.

 

이태준도 다수의 추천을 받았다. 유진오는 이효석과 함께 이태준을 꼽았고, 중문학자 겸 기자 정내동은 이무영과 함께 이태준을 추천했다. 소설가 겸 평론가 장혁주는 이기영 ‘고향’과 함께 이태준의 ‘색시’, 유진오의 ‘T교수와 김강사’를 추천했다. 주요섭 ‘사랑 손님과 어머니’(노자영 추천)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김안서) 박화성 ‘백화’(白花, 장덕조)도 이름을 올렸다.

 

▲정지용은 당대 작가, 예술가들이 뽑은 '해외로 보내고 싶은 작품'중 시인으로선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시인은 정지용이 압도적

시인은 정지용이 압도적이었다. 양주동을 비롯, 유치진, 서항석, 이무영이 정지용을 꼽았다. ‘성북동 비둘기’를 쓴 시인 김광섭은 김동환의 ‘국경의 밤’과 함께 역시 ‘지용시(詩)’를 추천했고, 정내동은 청마 유치환와 함께 정지용시를 꼽았다. 여성 소설가 겸 기자 장덕조는 ‘모윤숙 시집’을 꼽았다. 민병휘 홍효민은 임화를 꼽았다. 김광섭, 정내동이 유치진의 희곡을 꼽은 것도 이채롭다.

◇'추천작 없음’

‘추천작이 없다’고 단칼에 자른 답변도 있었다. 채만식, 염상섭은 “아직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승방비곡’을 쓴 인기작가 최독견은 이렇게 답했다. 만문만화로 이름난 안석주는 “제 개인의 입으로는 말하기 싫습니다”라며 ‘춘향전’같은 고전을 추천했다.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1세대 함대훈 역시 “대단 거북합니다”라고 했다. 안석주처럼 좁은 문단에서 특정 작품을 거론하기 곤란했거나 그럴 만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영화배우, 감독, 신문기자 등 다채로운 경력의 작가 심훈은 호기롭게 답했다. “이 사람이 걸작을 낳거든 귀사(貴社)에서 한번 그렇게 해주십시오.”

 

▲1931년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한 자전적 소설 '초당'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강용흘을 소개하는 기사. 뉴욕대 대학원에 다니던 한보용이 썼다. 조선일보 1931년 4월22일자.

◇번역가부터 길러야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을 위해선 먼저 번역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선견지명을 내비친 응답은 눈길을 끈다. ‘영어, 애세불가독어(愛世不可讀語)로 번역하야 세계에 보내려고 우리 문단에서 작품을 수색하는 것도 좋을 듯하지만 우선 영어와 에세어(愛世語)학자를 양성하고 또 그보다 더 조선의 무엇이 테마가 된 작품을 읽어줄 관대하고 유한한 독서가가 세계 각국에 몇 명이나 있을는지 근년 조선 테마의 작품인 ‘초당’ ‘일본의 조선’을 읽은 외국 사람이 누구누구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이일은 번역가 양성은 물론 세계 출판시장에서 한국 문학을 읽어줄 독자가 누군지부터 파악해야한다는 의견을 냈다. ‘애세불가독어’(語)는 에스페란토를 가리킨다.

 

‘초당’(草堂, The Grass Roof)은 3.1운동 이후 미국에 건너간 강용흘(1898~1972)이 영어로 출간한 소설로 일제 지배와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작품이다. 한국인이 영어로 발표, 미국 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킨 최초의 소설이다. 뉴욕타임스와 뉴욕 헤럴드트리뷴 같은 유수 일간지에서 호평할 만큼 반응도 뜨거웠다.

◇뉴욕 유학하던 한보용, ‘초당’ 반향 현지 보도

당시 뉴욕대 대학원에 유학중이던 한보용은 ‘미국 문단에 조선 사람의 예술적 작품이 출현되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까 한다’(‘강용흘군의 영문소설 뉴욕에서 발행격찬’, 조선일보 1931년4월22일)며 현지 반응을 전했다.

 

한보용은 ‘젊은 조선 망명가 강용흘군의 이 한 권의 예술품은 만약 xxx민족에게 정치적 역사가 없다며 적어도 그들이 예술은 창조할 수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웅변한다’는 뉴욕타임스 북리뷰 기사를 인용했다. ‘조선은 극동의 xx이다. xxxxxxxxxxxxxxxxxxxxx이 같은 정세하의 이 책의 출현은 확실히 금일까지 서구에 나타난 지나(중국) 및 일본 문학에 일대 치욕을 던졌다’고 썼다. 독립이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표현이 많아 검열당국에 삭제당한 듯하다.

 

강용흘의 ‘초당’ 출간 소식은 국내에도 빠르게 전파돼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2년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한보용은 이듬해 조선일보에 입사, 미국 및 세계정세를 분석한 심층 기획을 많이 쓰면서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한국 문학을 해외에 소개할 번역가를 기르고 한국 문학 작품을 읽어줄 해외 독서시장의 실태를 파악해야한다는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2000년대 들어 한국 문학의 세계 진출 또한 비슷한 공식을 따라 이뤄졌기 때문이다. 맨부커상에 이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한국 문학의 성취는 마땅히 축하할 일이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자 영화, 드라마, K팝으로 세계인의 호감을 얻은 대한민국의 성취와 성찰이 없었다면 꿈꾸기 어려웠을 일이다. 한국 문학의 세계 진출을 꿈꾼 몇세대전 선인(先人)들의 글을 읽다가 든 생각이다.

◇참고자료

‘영어 또는 에쓰어(語,에스페란토)로 번역하여 해외로 보내고 싶은 우리 작품’, 삼천리 1936년2월

박숙자, 속물의 교양의 탄생,2012, 푸른 역사

 

11.30 '파우스트'는 왜 국내 두번째 오페라가 됐을까

한불문화협회,1949년 1월 명동 시공관서 공연…1948년 1월 베르디 '춘희'에 이어 두번째

▲1949년1월 '파우스트'가 공연된 명동 시공관. 한동안 국립극장으로 쓰이다 지금은 국립극단 산하 명동예술극장으로 사용된다. 1936년 세워진 극장 '명치좌'가 광복 이후 시공관으로 이름만 바꿔달았다. 1948년 1월 '춘희'. 1949년1월 '파우스트' 1950년 1월 '카르멘' 모두 이곳에서 공연됐다. 한국 오페라의 모태이자 산실이다. /public domain

 

광복 후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첫 전막 오페라는 조선 오페라협회가 이끈 베르디의 ‘춘희’(라 트라비아타)다. 1948년 1월16~20일 명동 시공관(市公館) 에 올랐다. ‘동양의 스키파’로 알려진 테너 이인선이 기획, 제작은 물론 주연(알프레도)을 맡았고, 제자 김자경이 비올레타로 나섰다. 한국 오페라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공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듬해 열린 두번째 공연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1949년 1월13~17일 역시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프랑스 오페라 ‘파우스트’다. 샤를 구노의 대표작이자 인기 레퍼토리이지만 국내에서 자주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다. 이인선이 1950년 1월 ‘춘희’ 후속작으로 올린 비제 ‘카르멘’에 비하면, 초창기 오페라 인력이나 관중 수준을 고려할 때 대중적인 작품은 아니다. ‘파우스트’는 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두번째 전막 오페라가 됐을까.

 

▲한불문화협회는 1949년 1월13~17일 명동 시공관에서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올렸다. 한해전 베르디 '춘희'에 이어 한국인이 만든 두번째 오페라였다. 고려교향악단 이사 채정근이 조선일보 1949년 1월19일자에 쓴 '파우스트' 리뷰.

◇한불문화협회 장길용, 한규동, 이관옥 부부 주도

‘파우스트’를 공연한 단체는 한불문화협회다. 서항석이 연출, 김성태가 지휘를 맡았다. 일본 국립고등음악학원을 나온 한규동이 파우스트, 역시 같은 학교출신인 소프라노 이금봉이 파우스트 애인 마르그리트를 불렀다.

 

베이스 김형노는 메피스토펠레였다.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였던 테너 안기영에게 성악을 배운 한규동(1912~1996)은 서울대 음대 교수를 지낸 소프라노 이관옥의 남편으로 훗날 숙명여대 음대학장을 지냈다. 한불문화협회를 통해 프랑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체적인 제작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불문화협회 이사인 장길용과 한규동, 이관옥 부부가 공연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歌劇 파우스트를 보고’ 上, 조선일보 1949년 1월19일)

◇'오페라 운동사에 길이 남을 주춧돌’

‘파우스트’ 공연은 대체로 우호적인 평가를 받았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자 고려교향악단 이사 채정근은 ‘하면 된다는 말을 우리는 이 ‘파우스트’ 공연에서도 보게 되었다. 1947년 7월 이래 계획 연습하여온 보람이 있어 이제 공연을 갖기에 가장 힘든 가극이 우리 손으로 당당히 막을 올리고 또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라며 ‘갓 시작된 우리 구극(欧劇)운동사에 길이 남을 주춧돌이 놓여졌다 할 것’(‘歌劇 파우스트를 보고’ 上, 조선일보 1949년 1월19일)이라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오케스트라와 불협화음, 연기 엉망

하지만 세부로 들어가면 아쉬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노래와 오케스트라와의 융합은 불행히도 서로의 연합연습이 부족한 탓으로 군데군데 맞지 않고 전체적으로 언제나 감상자에게 즐기기보다도 틀리지나 않았으면 하는 불안을 주며 지휘자의 택트도 지도가 아니라 억지로 타이밍만 하는 감이 있다.’

 

채정근은 주역들의 노래에 대해 아쉬워하면서 무엇보다 ‘출연자들이 연기에 대하여서 일반적으로 무관적(無關的) 태도를 취하는 것은 가극이 종합예술임을 잊은 소이라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歌劇 파우스트를 보고’ 下, 조선일보 1949년 1월20일)

 

‘파우스트’도 ‘춘희’처럼 그해 5월17~21일 시공관에서 앙코르 공연을 가졌다. 연출, 지휘, 출연진은 초연과 동일했던 듯하다.

 

▲조선일보 1932년 3월22일자. 괴테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전면 특집을 실었다.

◇총리까지 축사한 1949년 괴테 탄생 200주년

1949년 왜 ‘파우스트’를 공연했을까 하는 점과 관련, 이 해가 괴테 탄생 200주년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출세(不出世)의 시성(詩聖) 괴테 탄생 2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국립서울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대한학술원 공동주최로 오는 8월28일 오후2시부터 부민관 대강당에서 괴테탄생 200년제를 거행하기로 되었다 하는데…'(‘괴테 탄생 200년제’, 조선일보 1949년 8월22일)

 

독일 문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대와 학술원까지 나서 당대 최고의 극장인 부민관에서 ‘시낭독, 독창, 실내악 연주, 가극 파우스트와 영화 ‘부르그’ 극장 상연’ 등 다양한 행사를 갖기로 했다는 보도다. 국무총리 이하 관계부처장, 서울시장까지 축사를 했다.

 

▲괴테는 20세기 초반 조선에 알려진 가장 유명한 독일 작가였다. 일제시대 그의 대표작 '파우스트'는 부분 또는 발췌역이지만 7종이나 소개됐다. 1949년 1월 명동 시공관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두번째 오페라로 '파우스트'가 공연된 것은 이런 대중적 인기를 반영한다. /public domain

◇뜨거웠던 괴테 서거 100주기의 기억

괴테 탄생 200주년 행사라지만 총리, 서울시장까지 나서서 축사를 할 만큼 호들갑을 떤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괴테는 20세기 들어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독일 문호이기는 했다. 특히 1932년 괴테 서거 100주년을 맞아 각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특집을 마련해 추모한 기억이 남아있을 때였다. 1932년 3월22일 조선, 동아 양대 일간지는 한 페이지를 털어 괴테 특집을 꾸몄다. 시내 인기 카페 명치제과점에서 김진섭 박용철 이하윤 서항석 조희순 등 해외문학파를 중심으로 ‘괴테의 밤’행사도 열었다. 1949년 ‘파우스트’를 연출한 그 서항석이다. 빅터 축음기 회사 후원으로 괴테 작품을 바탕으로 한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 오페라 ‘파우스트’ ‘미뇽’을 감상하기도 했다.

 

괴테 100주기 추모 열풍은 서구 근대를 따라잡기 위한 지식인들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이래 패자로 군림한 서구의 성공비결을 추격하기 위해 근대의 핵심인 서구 문명을 필사적으로 받아들이려했다. 문학, 음악, 미술을 서구 문명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파우스트’ 번역 열풍

괴테는 독일 어느 작가보다 일찍 이 땅에 소개됐고, 대표작 ‘파우스트’도 일제시대 7편이나 번역소개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박희경,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 번역 1-일제 강점기 번역가들과 번역들 79~82쪽). 일부만 번역하거나 자의적으로 발췌한 초역(譯)이었다. ‘파우스트’ 1, 2부 완역은 1961년 김달호 역 정음사 ‘파우스트’에서 시작됐다.

 

문학청년이나 지식층에게 인기가 높았던 일본 신조사(新潮社) 의 베스트셀러 ‘세계문학전집’ 1차분38권(1927~1930년)에 ‘파우스트’도 포함돼 있어 일역본이 널리 읽혔을 것이다. ‘파우스트’을 완독한 사람은 제한적이겠지만, 적어도 괴테나 책 이름 정도는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떠올릴 수있었다. 이런 대중적 인기를 배경으로 1932년의 괴테 서거 100년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20세기 초반의 열띤 괴테 수용사를 이해하지 않으면, 광복 후 두번째 오페라로 ‘파우스트’가 올라가게 된 배경을 알 수없다. 음악은 다소 낯설었지만, 괴테와 ‘파우스트’는 한국인에게 이미 익숙한 대상이었다.

◇참고자료

박희경,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 번역 1-일제 강점기 번역가들과 번역들, 독어교육 제83집 2022, 5

조우호, 근대화 이후 한국의 괴테 수용 연구-20세기 학문적 수용을 중심으로, 코기토 68, 2010,8

김규창, 한국 괴테 수용사 서술의 보고, 독일언어문학 제16집, 2001, 12

 

12.07 '빠파솔라'와 '뻠가라', 조선을 깨우다

자전거 세계일주 도전한 인도 청년, 1926년 2월 부산 경성 평양거쳐 만주로

▲1923년10월부터 자전거 세계일주중인 인도 청년 '빠파솔라'와 '뻠가라'가 1926년 2월 조선에 왔다. 조선을 종단한 이들은 경성, 평양에서 대규모 군중들의 환영을 받고 강연회를 여는 등 일약 스타가 됐다. 조선일보

 

‘파초와 야자수가 우거진 여름의 나라 인도의 청년 두명이 자전거라는 극히 간단한 두 바퀴에 몸을 싣고 세계일주의 길을 떠난 지 3년만에 조선에 왔다.’ (수려한 강산,순후한 인정, 역로도처의 환영을 감패,조선일보 1926년2월18일)

 

1926년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인도 청년은 ‘빠파솔라’와 ‘뻠가라’였을 것이다. 이름만 들으면 허구의 인물같지만 실제 인물이다. 잘 삐 바빠솔라(Jal P.Bapasola)와 루스텀 비 품가라(Rustom B.Bhumgara)라는 20대 청년으로 자전거 세계일주 중이었다.

 

이들은 1923년10월15일 인도 봄베이를 출발,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탈리아 남쪽부터 유럽 대륙과 영국을 훑었다. 이어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횡단한 후 태평양을 지나 1925년 12월부터 일본을 일주했다. 그리고 1926년 2월5일 부산에 상륙했다. 경주, 대구, 상주, 충주, 장호원, 이천, 수원을 거쳐 18일 오후 한강 인도교를 통해 경성 시내에 입성했다. 둘이 익힌 우리말은 딱 하나였다고 한다. “서울은 어디로 갑니까”

 

▲자전거 세계일주중인 인도 청년들은 1926년2월18일 경성에 입성,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조선일보 1926년 2월19일자

◇청중 수천명 몰려든 종로YMCA 강연회

두 청년의 일거수 일투족은 신문에 연일 보도됐다. 식민지 청년의 대담한 도전이란 점에 공감했던 듯하다. 조선일보는 ‘우리 조선과 처지 및 경우가 같은 이 인도의 두 청년을 환영하는 의미로’ 2월19일 저녁7시30분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료 강연회를 개최했다.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와 공동이었다. ‘수천군중으로 대만원된 장내의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출입하는 문을 봉쇄’(감격에 넘치는 어조로 삼만리를 돌파한 實地談, 조선일보 1926년2월20일)할 만큼 청중이 몰려들었다.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 안내로 등단한 두 청년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조선일보와 YMCA는 자전거 세계일주에 도전한 인도 청년들의 경성 방문을 맞아 강연회를 공동주최했다. 조선일보 1926년2월19일자에 강연회 개최를 알리는 사고가 실렸다.

◇'인도의 멍텅구리와 윤바람’

“여기 와서 들으니 조선 멍텅구리와 윤바람은 비행기 하나로 세계일주를 한다 하옵니다만, 우리는 자전거 하나로 세계를 일주하는 인도의 멍텅구리와 윤바람입니다.” ‘빠파솔라’의 우스개 소리에 청중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조선일보에 인기리에 연재중인 네컷만화 ‘멍텅구리 세계일주’를 가리킨 것이었다.

 

‘빠파솔라’는 ‘먹을 것은 없고 사방에 보이는 것은 사막과 해골들뿐’인 페르시아 사막을 지나 바그다드, 시리아, 예루살렘을 통과하면서 ‘심히 험악한 곳과 무서운 짐승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했다. 유럽 대륙과 영국을 거쳐 대서양을 지나 뉴욕, 시카고를 거쳐 록키산맥을 넘어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거쳐 조선에 오기까지 일정이 3만 마일을 돌파했다. 남은 길은 봉천(심양),북경, 상해, 안남을 거쳐 인도로 돌아가기까지 5분의 1이 남았다고 했다. 자전거로 조선을 일주한 외국인(한국인까지 포함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은 이 인도 청년들이 최초였을 것이다.

◇'조선처럼 추운 나라는 없다’

이들은 ‘조선와서 제일 고생하고 통절히 느낀 것은 조선처럼 추운 나라는 없다. 어찌나 추운지 손발이 얼 지경’이라고 했다. 남부와 중부지방을 자전거로 여행했지만 2월 한파가 만만찮았던 모양이다.

 

▲자전거 세계일주중인 인도 청년들은 1926년2월19일 종로 YMCA강당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수천명의 청중들이 참석해 세계를 돌아본 이들의 흥미진진한 여행기를 들었다. 조선일보 1926년2월20일자

◇'인도 3억 민중을 생각하면서’

인도 청년들의 입경(入京)을 맞아 신문 사설까지 나왔다. ‘인도 3억 민중을 생각하면서’(조선일보 1926년2월19일). 사설은 제국주의 영국에 맞서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세계적 경이의 표적이 된 것은 사실’이라면서 식민지 조선의 처지와 넌지시 빗댄다. 조선에 온 인도 청년 둘이 ‘모두 간디씨(氏)의 운동을 지지하는 청년지사인 자라 한다’면서 ‘양씨의 옴은 아무 정치적 사명이나 사교적 의미를 가짐이 아니요, 오직 그 세계를 답파하는 청년의 의기(意氣)를 위함이라. 그러나 어찌 민중적 열정을 모아 이 원래(遠來)한 진객(珍客)을 환대치 아니하랴’고 썼다.

 

▲1923년 10월 인도 봄베이를 출발, 자전거 세계일주에 도전한 아디 비 하킴, 잘 삐 바빠솔라, 루스텀 비 품가라. 1926년2~3월 조선을 일주해 만주로 건너갔다.

◇평양주민 5000명이 대환영

둘은 2월26일 경성을 떠나 개성을 거쳐 3월5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 시민들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악대가 선두에 서서 음악을 연주했고, 그 뒤를 자동차 여러대와 소년군(보이스카웃) 20명이 뒤따랐다. 중간에 인도 청년을 중심으로 자전거 300대가 장사진을 이뤘다. 시내 서기산(瑞氣山)에 모인 환영군중만 5000명이나 됐다. 저녁엔 평양권번 기생 20명까지 출연한 검무, 승무와 국악 공연도 펼쳐졌다.(세계일주 인도 양청년 금수강산 평양에 안착, 조선일보 1926년3월6일) 평양에서도 수천명이 운집한 강연회가 열렸다.

 

▲하킴, 바빠솔라, 품가라가 자전거 세계일주를 마치고 출간한 여행기 'With Cyclist Around World'

◇세계 최초 자전거 세계일주 성공

둘이 만주로 향한 뒤, 또 한명의 인도청년이 3월17일 부산에 내렸다. ‘빠파솔라’, ‘뻠가라’와 함께 인도를 출발, 미국을 횡단한 아디 비 하킴(Adi B.Hakim)이 두 친구의 뒤를 좇아 조선 일주에 나선 것이다. 하킴은 대구, 영천을 거쳐 경성으로 올라왔고 뜨거운 환영을 받으면서 만주로 향했다. 셋 모두 봄베이 역도클럽 회원이었다. 세계 최초로 자전거 세계일주에 성공한 여행가로 꼽힌다. 이들은 ‘With Cyclists Around the World’란 여행기를 출간했다.

◇참고자료

아디 비 하킴, 잘 삐 바빠솔라, 루스텀 비 품가라 지음, 90년 전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찾아온 인도인, SINYUL, 2014

 

12.14 甘酒같은 월급쟁이의 연말 '뽀-너스'

관공서, 은행, 기업의 연말 상여금 축제, '뽀-너스' 맛보는 조선인은 얼마나?

1년에 한번 받는 연말 보너스는 식구들이 목매고 기다리는 날이었다. 저마다 사고 싶은 물건을 요구하는 기세에 가장은 움츠러든다. 석영 안석주가 쓰고 그렸다. 조선일보 1928년 12월19일자

 

♦15일은 조선총독부 경성부청을 위시하야 ♦각 은행, 회사에서 일제히 ‘뽀-너스’를 지급하는 날이다 ♦이날에 크고 적은 월급쟁이들의 어깨는 ♦오래간만에 떠들어오는 지전뭉치에 저절로 으쓱하여졌을 것이나 ♦그 반대로 시내 각 상점은 어떻게 하면 월급쟁이들의 ‘뽀-너스’를 한 푼이라도 더 빼앗을까 하고 가슴을 졸일 것이다. ♦본정통에도 연말대매출! 종로통에도 세말대매출♦과연 어느 동리의 상인이 월급쟁이들의 ‘뽀-너스’를 많이 빼앗을 것이나?’(자명종, 조선일보 1928년 12월17일)

 

연말이면 으레 등장하는 기사가 있었다. 샐러리맨들의 ‘뽀-너스’였다. 20세기 들어 ‘샐러리맨’ 계층이 대거 등장하면서 연말 보너스는 새로운 사회 풍속도로 등장했다. 관청은 물론 은행이나 회사에서 연말 보너스 지급이 상례화됐기 때문이다. 작게는 월급의 10~20%부터 많게는 월급의 서너배까지 보너스는 주머니 빠듯한 월급쟁이들의 최우선 관심사였다.

 

‘대망의 뽀-너스 감로(甘露), 금일로서 패연(沛然)’(조선일보 1937년12월15일) ‘쌜러리맨의 활력소, 관청가에 ‘환소(歡笑)속사포’ (조선일보 1937년12월16일) ‘황금홍수! 금일의 뽀너스 사령’(조선일보 1938년 12월16일). 관공서의 경우, 12월 15일 전후 보너스가 지급됐는데, 부처별로 지급률과 액수를 둘러싼 기사가 쏟아졌다.

 

▲연말 보너스를 반기는 샐러리맨의 처지를 풍자한 만문만화가 안석주의 작품. 두둑해진 지갑덕분에 흥청망청 즐기는 직장인의 세태를 꼬집는다. 조선일보 1934년 12월13일자

◇경성전기의 보너스 대박

1929년 말 샐러리맨들의 부러움을 산 곳은 경성전기였다. 최고 월급 다섯배인 500%를 줬기 때문이다. 그해 9월12일~10월31일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에 100만명 넘는 인파가 몰리면서 전차 수입이 폭증한 덕분이었다.

 

‘조선박람회 때문에 약 40만원의 순이익을 얻어들였다 전하는 경성전기 회사에서는 770여명의 종업원에게 대하여 50일 동안 노력 끝에 준다는 소위 위로금이 겨우 2원씩 밖에 되지 않는다 하여 자본가의 너무도 성의없는 그 태도에 새삼스럽게 세상을 놀래였다 함은 전일 보도한 바 이제 그렇게 인색하던 전기회사에서 내월 즉 12월의 연말 상여에는 동사 중역이나 사원들에게 보통 월급의 3배반 내지 5배(35할 내지 50할)에 해당한 큰 돈을 준다 하는 터인즉 이 한 가지 사실로도 폭리를 많이 내는 독점회사의 면목을 엿볼 수있음은 물론 긴축긴축하여 세상에서는 돈이 귀하다는 이때에 그네들만은 어떻게도 세월이 좋음을 알 수있을 것이다.’(금년의 연말상여는 京電 50할이 최다, 조선일보 1929년11월25일)

 

이밖에 미쓰이 물산 400%, 식산은행 300%, 조선우선회사 100%, 조선철도 150%, 동양척식회사 200%, 상업은행 250% 등 일본 회사나 관변은행의 보너스가 후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한성은행도 250%로 좋았다.

 

▲연말 보너스 지급 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 보너스를 샐러리맨의 감로라고 썼다. 조선일보 1937년 12월15일

◇보너스 경기의 바로미터는 유흥업소

보너스가 나오는 12월 하순이 되면 거리의 공기는 살짝 들떴다. 주머니 두둑한 월급쟁이 손님들로 술집이나 유곽같은 유흥업소가 붐비기도 했다.

 

‘뽀-너스 경기의 바로메-터는 무엇무엇해도 신정(新町) 유곽이다. 15일은 총독부를 비롯하여 시내의 각 관공서와 대회사 은행에서 일제히 뽀-너스 사령과 함께 현금 봉투를 주더니 자정 이후의 거리를 달리는 흥분된 택시는 너도 나도 하고 신정으로만 달렸다. 그리하여 15일 저녁부터 16일 새벽까지 하루밤 동안의 신정 유곽의 전 수입을 조사하였더니, 평시의 평균 2700원 대를 폭죽적으로 깨뜨리고 일약 6000원으로 분등(奔騰)하였다. 뽀-너스의 돌아가는 곳은 이러한 곳이기도 하다.’(유곽수입 3배 분등(奔騰), 조선일보 1934년12월18일)

 

‘보너스화(禍)’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보너스, 연말상여, 월급쟁이에게는 반가운 봉투일런지도 모르나/그 봉투 들은 채로 카페로 몰려가서 술먹고 행패하다가 경찰 신세까지 짐은 뽀너스-화(禍)’(팔면봉, 조선일보 1934년 12월17일)

 

▲연말 보너스는 주머니 얊은 샐러리맨들의 감로였다. 하지만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사람들 등쌀에 가장은 물론 식구들도 골머리를 앓았다. 살림살이 쪼들리는 서민들의 비애는 늘 비슷한 것같다. 안석주가 쓰고 그렸다. 조선일보 1932년12월24일자

◇흥청망청 진고개와 한산한 종로

연말 거리 분위기는 일본인 중심 진고개(본정통)와 조선인 상점이 몰린 종로 네거리가 대조를 이뤘다. ‘길가는 사람들은 월급의 몇갑절씩이나 받은 윤택한 ‘뽀-너스’의 혜택인지 여자나 남자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다 각기 손에 흥정한 종이 보퉁이를 들고 어깨를 서로 마주 겨누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것이 암만 보아도 새로운 정월을 맞이한다는 기쁨은 이곳의 이사람만이 독점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흥청거리는 진고개에 비해 종로는 한산했다. ‘우리의 중심지대인 종로의 네거리를 와 보면 연말대매출의 깃발만은 진고개 못지않게 상점문앞에 즐비하게 서있지만 정말 상점에 들어가 흥정하는 사람은 어찌 그리 적은지 물건팔이 상점원들은 옛날 이야기에 꽃을 피우게 되고 넓으나넓은 종로의 거리에는 다만 쓸쓸한 바람만이 상점의 처마끝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니 이 거리 이 사람들에게는 미구에 올 정월의 기쁨도 맛보지 못하는 듯…’(萬頃 人波의 본정통, 찬바람 부는 종로 일대, 이상 조선일보 1929년 12월31일)

 

이 때문에 ‘뽀-너스’! 뽀-너스는 적어도 월급쟁이들의 목을 축여주는 반가운 ‘오아시스’이다. 그러나 조선 사람으로 뽀-너스의 맛을 보게 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며 또 뽀-너스를 받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혜택을 입게되는 조선 상인은 또 몇사람이나 될 것인가?’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진고개만 殷盛, 종로는 의연한산, 조선일보 1929년12월16일)

 

▲연말 보너스로 흥청망청 쓰는 샐러리맨들의 진짜 속사정을 담았다. 조선일보 1934년12월20일자

◇쇼핑객 따라다니며 구걸하는 어린 거지

두둑한 보너스덕분에 흥청망청하는 계층이 있는가하면 빈곤층도 많았다. ‘세상 사람들은 ‘뽀너스’ 바람에 망년회니 연말간친회니 하여 마음껏 향락하면서 연말기분에 침혹하며 종로 네거리 각 상점에는 ‘세모대매출’ 깃발과 ‘네온싸인’의 장식이 찬란하여 불야성을 이룬 중에서 정월 맞이할 물건을 뭉텅뭉텅 싸가지고 따뜻한 가정을 찾아드는 사람이 연말이 박두한 근일에 더욱 많이 볼 수 있는 반면에 거리마다 걸인군은 뒤를 따라다니면서 겨우 동전 한푼을 구걸하지만 어찌 그들의 실낱 같은 생명을 위하여 동정하는 사람이 있으랴….’

 

‘경성에 걸인이 넘친다’는 지적과 함께 이들의 참상을 생생히 전한다. ‘중학동 천변과 서소문정(町)근처에 진을 치고 ‘모루히네’ 주사에 침혹하고 있는 아편쟁이 거지와 욱정(旭町) 시장 뒤에서 썩은 과실로 굶주린 창자를 채우는 무리들이 있어 거리거리마다 걸인이 없는 곳이 없는 중 북촌에서 제일 번창한 종로 네거리에서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반면에 그들의 뒤를 쫓아다니는 어린 아이 거지들의 궁상은 빈궁의 쓰림을 여실히 나타내는 좋은 ‘콘타라스트’가 되어 있다. ‘(세모풍경 6-도시소음 장단맞춰 걸인軍의 행진, 조선일보 1932년 12월30일)

◇甘酒같은 월급쟁이의 뽀-너스

만문만화가 안석주는 보너스에 울고 웃는 샐러리맨의 애환을 이렇게 썼다. ‘감주(甘酒)와 같은 월급쟁이의 뽀-너스는 세모대매출의 상품에 세모대매출의 인육(人肉)에 햇빛본 곶감시설같이 스러져버리면 새해 신춘의 송구영신도 그것이 이앓는 소리가 된다.그래도 연하장에 댄 붓대는 근하신년이니 공하신희니-세상은 허울좋은 세상이다. 월급쟁이의 저자(도시)는 월급쟁이의 공상을 창조하며 깨뜨리는 곳이다.’(보-너스여 어서 오너라, 보-너스여 어서 가거라, 조선일보 1934년12월13일)

 

안석주는 보너스를 둘러싼 시원 섭섭한 마음을 이렇게 썼다. ‘어서 오너라 미쓰 뽀-너스, 어서 가거라 미쓰 뽀너스’⊙

 

12.21 치솟는 쌀값, 구두값...고물가에 신음하는 샐러리맨

20세기 전반 등장한 샐러리맨 계층, 요즘처럼 연휴 기다리는 맛에 살아

20세기 들어 경성에도 샐러리맨 계층이 대거 등장했다.1930년대 중반 전시 물자통제로 가죽값이 오르자 구두값이 월급 절반인 20원, 30원까지 폭등해 한숨을 쉬게 했다. 박봉의 샐러리맨들은 구두코가 찢어져도 새 구두 한 켤레 살 엄두를 못내고 전전긍긍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1920년대만 해도 조선은 농업국가였다. 하지만 경성같은 대도시엔 샐러리맨 계층이 대거 형성됐다. ‘경성 조선사람 직업중에서 제일 많기는 전기한 바와 같이 상업의 8만4000여명이 제일 많고, 관리, 공리 등 월급생활하는 사람 4만8437명이 다음으로 많다.’(대경성생활기2, 조선일보 1924년11월6일) 1923년말 조사 기준으로, 경성의 조선인 공직(公職·공무원)및 자유업 월급생활자는 4만8437명(남 2만4839명, 여 2만3598명)으로 상업 종사자 8만4454명 다음으로 많았다.

◇월급쟁이의 사치 넥타이

양복 걸친 월급쟁이들이 누릴 수 있는 사치는 많지 않았다. 넥타이는 적은 돈으로 누리던 멋이었다. ‘인텔리, 더구나 월급쟁이에게는 이 넥타이가 그 너절한 월부 양복의 값을 올리는 ‘레텔’이라는 것보담도 그 자신의 품격, 취미의정까지도 말하는 것이다. 50전짜리 넥타이가 잘 팔리는 것은 이들의 각일각으로 변하는 식견때문이라 할까, 갈급한 문화욕때문이라할까, 기름때 묻은 칼라에도 새롭고 깨끗한 넥타이가 달려있음이 우습다.’ (푸른 기폭, 50전짜리 넥타이, 조선일보 1934년5월13일) 만문만화가 안석주는 양복쟁이들의 멋을 쓸쓸하게 표현했다.

 

▲월급쟁이 신사의 유일한 사치품은 넥타이였다. 박봉과 고물가에 시달리는 샐러리맨들의 유일한 낙은 요즘처럼 '이틀 거푸 노는' 연휴였다.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쓰고 그린 작품이다. 조선일보 1934년5월13일자

◇연휴 목매고 기다리는 샐러리맨

연휴 고대하는 샐러리맨들의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듯하다. 당시 신문에도 새해가 오면, 그해 연휴를 헤아리는 기사가 났다. 일요일 휴무조차 생소하던 시절, 연휴는 월급쟁이들만 누리는 사치였다. 1931년은 ‘월급쟁이에겐 축복받은 해’였다. 공휴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날이 하루도 없고, 이틀 연휴가 네번이었다. 하루 건너 휴일도 세번이나 있었다. ‘샐러리맨에게 반가운 이틀 거푸 노는 날’(조선일보 1931년1월4일)이 기사 제목이었다.

◇월급만 안오르고 다 오르는 인플레이션

1930년대 들어 물가가 폭등하자 월급쟁이들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인푸레 경기를 가는 곳마다 말하고 있으나 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노동 임금은 이에 따라 조금도 오르지 않아 지난 1월중의 노동 임금의 지수는 의연히 149.46으로 재작년 12월 이래 물가가 2,3할 심한 것은 5할까지 폭등한 것과는 관계 없이 1년이상이나 조금도 변동이 없으니 결과로 본다면 노동자와 월급생활자에게는 비상한 타격이다. 물가가 오르는 것 만큼 노동 임금과 월급이 오르지 못하게 됨으로 사실상 받는 수입은 실질상으로 적어진 셈이니 일반 서민 근로계급의 생활에는 큰 위협이다.’(인프레 경기도 월급쟁이엔 눈물,조선일보 1934년3월6일)

 

월급은 제자리신세라 푸념만 늘었다. ‘물가는 오른다 오른다 하니 대체 얼마나 오르다마는고. 백가지 물가가 다 오른다는데 오르지 않는 것은 월급쟁이 봉급뿐이라고. 물가가 오르니 오른 만큼 봉급은 깎이운 셈이라 이래서야 되겠는냐고’(딱총, 조선일보 1938년5월4일)

 

▲박봉의 샐러리맨은 연말이면 밀린 빚 독촉하러 오는 사람들로 포위당했다. 연말 보너스는 빚잔치로 끝나기 일쑤였다. 안석주가 월급쟁이들의 비애를 쓰고 그렸다. 조선일보 1928년 12월18일자.

◇쌀값 폭등에 시름

당장 입에 풀칠 할 쌀값부터 폭등했다. 두달만에 세번이나 쌀값이 오른 것이다. ‘지난 달 이래로 두번씩이나 백미(白米)의 판매 가격을 올린 경성 시내 각 공설시장은 8일에 이르러 세번째 다시 올리게 되어 매 킬로그램에 5리씩을 또 올렸다. 그 이유인즉 현미의 시세가 지난 달 이래로 출회의 감소로 등귀하는 일면을 계속하여 왔는데 6월이 되면서 더욱 공급이 달리는 경향을 보여 전번에 21원20전을 보이던 것이 이미 22원50전의 고가를 보여 1원30전의 등귀를 보였는데, 저장조(貯藏租)의 해제가 되기 전에는 오르는 시세가 그대로 지속되겠다 하여 그와 같이 올린 것이라는 바 봉급생활자는 물론 일반 세궁민의 생활상 영향되는 바가 크다고 한다.’ (월급쟁이 죽여내는 천정 모르는 쌀값, 조선일보 1934년6월9일)

 

풍작인데도 쌀 공급을 늘리지 않고 소위 ‘미곡통제’로 가격을 조절하는 총독부 정책을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쌀 한 가마니에 11원80, 90전, 월급쟁이 못살겠다는 소리가 풋득풋득 들린다…풍작에 먹을 쌀이 없어 걱정, 소위 미곡통제의 은택이랄까’.(풍문첩, 조선일보 1934년6월12일) 월급쟁이들도 문제지만, 농민들도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쌀은 이미 팔아치웠고 먹을 쌀을 사먹어야 할 때가 왔는데 총독부의 고미가(高米價)정책 때문에 지출만 늘어나게 된 것이다.

◇치솟는 구두값에 한숨만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전시(戰時)체제가 들어서면서 월급쟁이들의 고통도 심해졌다. 물자통제 탓에 가죽 값이 올라 구두값도 덩달아 폭등한 것이다.

 

‘도야지(돼지) 가죽까지 통제하는 세상이라 소가죽값이 오를 것은 정한 이치이겠만 구두 한 켤레에 20원이니 30원이니 하는 통에 기약한 월급쟁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관만 하고 있다는 것도 그럴 것이,기껏 받아야 40,50원 받는 책상물림 샐러리맨들이 월급의 절반을 털어넣기 쉬운 일인가.’

 

하지만 샐러리맨으로서 초라하게 다닐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고민만 늘었다. ‘갓을 쓰고 옷을 입고 신발을 걸맨다는 데 관심이 없어서는 도시 생활에 군색한 꼬락서니를 면치 못하기 때문에, 금방 발가락이 신 코밑으로 삐죽 나온대도 조바심치면서 선뜻 구두 한켤레 새로 장만 못하는 심정 누가 알아주리오.’(이상 색연필, 조선일보 1938년6월23일)

 

집값, 학원비, 음식값 상승으로 고물가에 시달리는 샐러리맨들의 처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는 듯하다.

 

12.28 바이올린은 왜 '허세의 상징'이 됐을까

모던 보이, 모던 걸의 과시품, 빈 케이스만 들고 다니기도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사랑법. 1920년대엔 바이올린 연주로 프로포즈정도는 할 줄 알아야 모던 보이 대접을 받을 수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바이올린은 연애의 상징이자, 패션 도구역할까지 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바이올린은 1920년대 경성에서 요즘보다 더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것같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보란듯이 거리를 활보하면서 청춘의 아이콘처럼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빈곤층을 다룬 ‘고국’ ‘탈출기’를 쓴 작가 최학송은 이런 모던 보이의 행색이 언짢았던 모양이다. 대중잡지 ‘별건곤’(제10호,1927년12월20일)에 이렇게 썼다. ‘빠이오링, 피아노나 치고 앉아서 연애자유나 부르고 걸핏하면 정사(情死)-그렇지 않으면 실연병에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것은 세기말적의 퇴폐 기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바이올린을 피아노와 함께 연애꾼의 ‘액세서리’처럼 묘사했다.

▲서양식 모자와 나팔바지 차림 모던 보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왼쪽 남자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조선일보 1928년 2월7일자

◇허영의 산물, 바이올린

석영 안석주가 그린 만문만화 ‘모던 보이의 산보’(조선일보 1928년2월7일)에도 구레나룻 수염을 기르고 나팔바지를 입은 ‘모던 보이’가 왼손엔 바이올린 케이스를, 오른손엔 책을 든 채 거리를 활보한다. 바이올린 정도는 켤 줄 알아야 모던 보이 대접을 받을 것만 같다.

 

1921년 당시 ‘원동(苑洞)재킷’으로 이름을 날린 ‘모던 걸’ 김화동의 하루를 소개하는 기사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연애를 상징한다는 자줏빛 ‘짜케트’(재킷)와 연녹색 치마에 붉은 해당화 빛이 나는 단을 대어 입고, 좀 갸름하고도 고와보이는 어여쁜 얼굴에 단장 화려히 하고, 옆으로 넘긴 트레머리에 일부러 두세 줄 머리털을 이마 앞으로 넘겨놓고, 굽높은 구두를 발끝만 디디고 가는 허리를 맵시 있게 가누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양은...’(’원동 재킷’의 애사 1, 조선일보 1921년 1월23일)

 

허영기 많은 김화동에 대한 소개다. 여기에 ‘그의 아리땁다는 소문과 늘 속 빈 빠오링(바이올린)갑을 들고 다닌다는 풍설이 점점 널리 퍼진 결과, 원동 사는 ‘짜케트’입고 다니는 어여쁜 여학생이라면 여간 사람은 거의 다 짐작을 하기에 이른 것’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바이올린 없이 케이스만 들고다니며 폼잡는 경우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바이올린을 든 모던 보이가 쓰러져가는 초가집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하면서 구애하고 있다. 안석주가 조선일보 1928년 4월6일자에 실은 만문만화 '로미오와 줄리엣'

◇안국동 모던 보이의 바이올린

경성제대 예과에 다니던 조용만(1909~1995)의 안국동 스케치에도 바이올린이 등장한다. ‘햇빛에 번쩍이는 복사빛 파라솔과 봄바람에 날리는 노란빛 넥타이 그리고 구두 뒤축에 질겅질겅 씹히는 ‘곤세-루’바지와 정갱이 위에 펄렁거리는 ‘사-지’ 치마, 급한 일이나 있는 것같이 부리나케 달아나는 ‘뽀이’의 손에는 발을 떼어놓을 때마다 바이올린이 앞으로 왔다갔다, 황새 같은 ‘뽀이’를 따라가려고 아기적어리는 ‘껄’의 손에는 오페라 빽스가 대롱대롱….’(동아일보 1928년 4월19일) 바이올린은 당시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선호하던 패션소품이었다.

 

바이올린이 얼마나 유행했으면 중학생들까지 겨드랑이에 바이올린을 끼고 다닐 정도였다. ‘요새는 소위 남녀 중학생아이들까지 겨드랑이에 바이올린을 끼고 다니고 부자 연인(戀人)을 졸라서 제집에다 피아노를 사놓고 무엇이 무엇인지 멋도 모르며 뚱당거리고 앉았는 모양이란….’(현대남녀음악가에게 與하노라, ‘별건곤’ 제2권3호, 1927년3월)

◇바이올린 세레나데로 프로포즈

안석주는 1928년 봄 세태를 풍자한 만문(漫文)만화를 신문에 냈다. 양복 차림 청년이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창문 아래 서서 바이올린을 들고 세레나데를 연주하다 여인의 손등에 입맞추는 그림이었다.

 

‘ ‘룸펜 바이올리니스트’ 한 분이 어느 다ㅡ쓰러져가는 초가집 창밑에서 어제밤 달뜰때부터 오늘 해뜰때까지 바이올린을 긁고 있었으니 그의 서툰 바이올린도 처음부터 끝까지 세레나데를 가늘게 또한 굵게 긁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바야흐로 뭇집의 대문 여는 소리가 요란할 때 홀연히 그 창문이 열리며 노리끼한 손이 나오니 이 사나이는 불시에 눈물을 흘리며 그 손을 고이 고이 잡고서 손등에 키쓰를 하는 것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조선일보 1928년4월6일)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살아도 세레나데 정도는 바쳐야 근사한 프로포즈라고 생각할 만큼, 바이올린의 위력은 대단했다.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잇따라 내한

1923년 경성공회당에서 ‘사랑의 기쁨’ 작곡가 프리츠 크라이슬러와 바이올린의 신(神)이라는 야사 하이페츠가 내한 연주를 갖고, 이듬해 에프렘 짐발리스트까지 찾아오는 등 1920년대 경성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잇달아 선보였다. 바야흐로 바이올린의 시대였다.

◇바이올린의 등장

바이올린은 조선의 음악가들이 즐겨 선택한 악기였다. 일본의 최고 음악교육기관인 동경음악학교 졸업생들의 전공을 살펴보면, 피아노와 바이올린, 성악 3분야로 압축될 만큼, 바이올린 전공자들이 많았다. 1920년대 조선에서 유행한 각종 음악회에 바이올린은 감초처럼 빠지지 않았다. 서양음악하면 바이올린이 떠오를 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홍난파, 문학준, 김생려, 안병소처럼 유명 연주자들의 활약도 바이올린의 인기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특이한 것은 여성 음악가들의 경우, 대부분 성악이나 피아노를 택한 반면, 바이올린 연주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동시대 일본에선 여성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상당수 활동한데 비해서도 특이하다. 음악사 연구자들의 밝혀내야할 과제다. 바이올린은 이렇게 야릇한 스캔들처럼 등장했다.

◇참고자료

최학송, 데카단의 상징, 모-던 껄, 모-던뽀-이 대논평, 별건곤 제10호,1927년12월

박연, 현대남녀음악가에게 與하노라, 별건곤 제5호, 1927년3월

김지선, 근대시기 일본의 음악학교에 유학한 조선인-도쿄음악학교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사학보 41,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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