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스카이데일리)/ [31] 최규선의 처절한 몸부림 - [40] 통일 장관 재취임한 임동원 돌변… 北 퍼주기 주저
김대중의 노벨상 프로젝트 스카이데일리 김기삼 변호사 2024
△ 미 프린스턴 대학 졸업
△ 197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시카고 트리뷴지(Chicago Tribune)·프랑스 파리의 IHT(International Herald Tribune)지를 비롯해 50년간 한반도 문제 전문 최고령 현역 기자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2024.11.18
[31] 최규선의 처절한 몸부림… ‘M 프로젝트’ ‘블루 카펫 프로젝트’
직위 이용한 품앗이…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손잡은 DJ
루스벨트 4대 인권상 등 세계적 인권상… 노벨상 징검다리
최규선, 알 만수르 통해 코피 아난 접촉
1998년 4월9일, 최규선은 계약 대행사인 골드윈사를 통해 칼리드 알 만수르와 컨설팅 계약을 맺고 ‘M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알 만수르는 사우디아라비아 알 왈리드 왕자의 수석 변호사로 왈리드 왕자가 추진하고 있는 아프리카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코피 아난 유엔(UN·국제연합) 사무총장과 같은 가나 출신으로 서로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하버드 법대에 추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날 최규선은 박지원 공보수석을 통해 청와대에 제출한 문서에서 김대중(DJ)의 유엔인권상 수상 및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의 면담 계획을 보고했다. 주간 뉴스위크의 기사는 최규선이 알 만수르와 체결한 컨설팅 계약의 진행 과정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M 프로젝트’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알 만수르가 코피 아난 사무총장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점이었다. 최규선은 “알 만수르 박사가 4월15일 뉴욕에서 아난 총장을 만나 김 대통령의 유엔 인권상 수상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면서 면담 결과는 추후에 다시 보고하겠다고 했다.
DJ의 유엔 인권상 수상 모의
1998년 4월15일, 최규선은 코피 아난 총장을 만나 DJ의 유엔 인권상 수상을 논의했다. 아난 총장은 자신의 접촉 창구로 두리 모하메드 에티오피아 유엔 종신대사를 지명했다. 모하메드는 최규선에게 “당신이 준 김 대통령의 프로필은 아난 총장에게 전달했다”면서 “김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하는 날짜에 맞춰 유엔인권위원회가 적절히 일을 진행시키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1998년 6월8일, DJ는 미국을 국빈 방문하는 첫날 뉴욕에 들러 유엔 본부에서 코피 아난 총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인도와 파키스탄 간 핵실험 경쟁이 중단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포괄 핵실험 금지조약’에 가입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DJ는 아난 총장에게 방한 초청을 제의했다.
그날 저녁 DJ는 숙소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국제인권연맹이 수여하는 ‘올해의 인권상’을 수상했다. 수상식에서 DJ는 “인권은 인류 보편의 가치다”고 역설하면서 “한국에 돌아가서도 인권법을 제정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갖추겠다”고 다짐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서울평화상 수상
1998년 10월 24일, 이번에는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서울을 방문해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아난은 청와대를 예방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개편 문제와 한반도 주변 정세 등 상호 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아난은 특히 “김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대북 햇볕정책을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아난 총장은 경희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덤으로 챙겼다. 이렇게 하여 DJ와 코피 아난은 직위를 이용해 서로의 등을 긁어 주고 밀어 주면서 노벨평화상을 위한 ‘품앗이’를 진행시켰다.

▲ 1998년 10월24일 코피 아난(왼쪽) 유엔 사무총장이 서울을 방문해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연합뉴스
최규선의 비무장지대 콘서트 계획
최규선은 1999년 1월 비무장지대(DMZ) 공연안도 마련했다. 그는 행사 계획안에서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등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각계의 저명인사들과 여러 예술 분야의 세계적 스타들을 출연시켜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전 세계에 인식시키고 우호적인 협조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김 대통령의 외교력을 배가시키고 새 정부의 외교 저변 확대를 도모한다”는 거창한 취지를 내세웠다.
“(이 행사는) 전 세계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극복할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한반도에 영원한 종전을 선언하는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며, 수익금은 북한은 물론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는 제3세계 어린이들에게 식량 및 구호물품을 제공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또한 그는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을 행사의 명예 공동의장으로 선임해 북한의 참여를 유도하고 김 대통령에게 남아공 최고의 인권상인 굿 호프(Good Hope)상을 수여하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보다 구체적인 ‘블루 카펫 프로젝트’
한편 ‘M 프로젝트’보다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노벨평화상 수상 추진 계획은 ‘블루 카펫 프로젝트’에 담겨 있다.
이 문서에서 밝힌 추진 목표가 ‘M 프로젝트’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블루 카펫 프로젝트’는 한 단계 진화 발전한 형태의 보고서로 보인다. ‘블루 카펫 프로젝트’는 1999년 초에 본격적으로 발동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는 최규선이 국외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롤백한 시기와 겹친다.
1999년 2월24일, 최규선은 ‘블루 카펫 프로젝트’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보고서의 첫머리에는 “‘블루 카펫’이란 노벨상 시상식 무대에 깔려 있는 푸른 융단을 상징하며 그 명칭에 담긴 이미지 그대로 ‘희망의 길’을 상징한다”는 매혹적이고 그럴듯한 설명이 붙어 있다.
이 문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가는 과정 곳곳에 남북정상회담·이산가족 상봉·북한 어린이 돕기 등 다양한 ‘감동의 장면’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문서에는 2000년 6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기간과 맞물리는 시점에 서울에서 마이클 잭슨의 북한 어린이 돕기 공연을 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앞서 언급한 마이클 잭슨의 공연이 최규선의 작품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블루 카펫’의 다음 목표는 ‘루스벨트 4대 자유상’
‘블루 카펫 프로젝트’에는 “북한과의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만델라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추천인으로 활용한다는 것” 등의 구체적인 추진 전략이 명시돼 있다. 이는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여타의 세계적 인권상을 받으려는 노력이 지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문건에 열거된 다음 목표는 ‘루스벨트 4대 자유상(Four Freedoms Award)’이었다. 주간 뉴스위크의 기사는 이 상을 받기 위해 노력한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서류들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 서류는 윌리엄 휴블 루스벨트 재단 이사장이 1999년 3월25일 DJ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 편지는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차오치 추 이사에 의해 귀하께서 2000년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4대 자유상 수상자 후보로 추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차오치 추는 중국계 미국인 실업가로 루스벨트 재단 이사였다.
“(…) 제가 이 서신을 드리는 것은 개인적으로 귀하의 지명을 지지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저 역시 모든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귀하의 뛰어난 업적을 깊이 존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지원에게 보낸 최규선의 팩스 문서
두 번째 서류는 최규선이 편지 사본과 함께 박지원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 앞으로 보낸 4월2일자 팩스 문서다. 이 문서는 “루스벨트 재단 휴블 이사장이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저에게 보내와 수석님께 전합니다”로 시작된다. 최규선이 보낸 편지 사본엔 휴블 이사장이 DJ를 적극 지지하고 있으나 재단 내에 한국인 이사가 없다는 점도 지적되어 있다. 이 편지를 받은 박지원은 DJ에게 곧바로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최규선은 차오치 추에게 보내는 팩스 문서에서 “박 수석이 편지 원본을 요청했다”면서 최씨 자신의 명의로 원본을 청와대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차오치 추는 그의 부탁대로 원본 서류를 최씨가 미국에서 ‘청와대 박지원 공보수석 앞’으로 보내는 것으로 만들어 4월9일 국제특송우편으로 보냈다. 최규선이 보관하고 있던 문건들 중에는 차오치 추가 보낸 영수증 팩스 사본까지 들어 있었다.
이 모든 자료들은 끈 떨어진 최규선이 DJ의 신임을 되찾기 위해 벌인 처절한 몸부림의 증거 같아 보인다.⊙
[32] DJ,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로 노벨상 수상 확신
‘블루 카펫’ 실패로 김한정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려 버린 최규선
최규선을 사기꾼으로 몰며 ‘블루 카펫’의 실체 부정한 좌파 언론
최규선의 빗나간 예측… 루스벨트 4대 자유상
앞서 말한 ‘블루 카펫 프로젝트’의 진행 사항은 다른 한 통의 편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바로 최규선이 외교통상부 소속 송영오 대사에게 보낸 편지다. 이 편지에서 최규선은 홍순영 장관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 편지는 1999년 6월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올해 초 스칼라피노(Robert Scalapino) 교수님의 제자인 미스터 추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루스벨트 재단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입니다. 그와 함께 2000년 루스벨트 자유상을 저희 대통령이 수상하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저는 당시 박지원 공보수석과 함께 이 일을 추진했으며 당시 박 수석이 대통령님께 보고해 왔습니다.
(…) 금번 루스벨트 재단 이사장과 전화 통화 중 저희가 수상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말을 듣고 박지원 수석이 대통령님께 재차 보고한 결과 홍순영 외통부 장관이 책임지고 추진하라는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홍 장관님을 한번 뵙고 싶으니 비공식적으로 주선을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최규선의 예상과 달리 결과적으로 김대중(DJ)은 루스벨트 4대 자유상을 받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DJ를 향한 최규선의 처절한 구애는 계속됐다. 1999년 6월, 최규선은 조지 스테파노플러스 자서전 ‘너무나 인간적인’을 번역 출간하고 1999년 7월에는 알 왈리드 사우디 왕자를 서울로 초청했다.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은 김한정의 공로
1999년 7월4일, DJ는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한정이 국정원에서 추진한 공작의 성과였다. 거기서 최규선과 김한정의 승부가 갈렸다.
김대중의 노벨상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디딤돌은 역시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이었다. 이 상은 미국 독립운동의 발상지인 필라델피아가 전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에 공헌한 사람·조직에게 해마다 수여하는 상이다. 1988년 제정되어 매년 미국 독립기념일에 시상한다. 1989년 초대 수상자 레흐 바웬사(Lech Walesa·동유럽 민주화를 이끈 공로로 1983년 노벨평화상 수상한 폴란드 대통령)를 시작으로 그때까지 총 13명의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DJ는 자유의 메달을 목에 걸고 나서 노벨상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음을 확신했다. 이 상의 수상자 거의 절반이 동시에 노벨평화상 수상자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넬슨 만델라와 디 클라크·시몬 페레즈는 자유의 메달을 받은 해에 노벨평화상도 거머쥐었다. 1991년도 수상자였던 ‘국경없는 의사회’가 199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DJ는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수상 이듬해인 2000년에, 2000년 수상자 지미 카터는 2년 후인 2002년에 각각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총장을 지낸 마틴 메이어슨(Martin Meyerson) 자유의 메달 수상자 선정위원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김대중은 한국에서 민주적 가치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지도자들로부터도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찬사를 전했다. DJ는 이제 전 세계 민주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위를 공인받은 것이다.

▲ 김대중(왼쪽) 대통령이 2000년 3월10일(한국시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가진 연설에 앞서 페터 게트겐스 자유대학총장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의 메달로 DJ 눈도장 찍은 김한정
자유의 메달은 김한정이 DJ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는 계기가 되었다. DJ는 김한정에게 자유의 메달 상금 10만 달러를 마음대로 쓰라고 허락했다. 이 돈은 1999년 하반기, 김한정이 동티모르 공작을 벌이는 종잣돈이 됐다.
그런데 DJ가 자유의 메달을 받는 데는 필라델피아 출신 이탈리아계 민주당 정치인 톰 포글리에타(Thomas M. Foglietta)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연방하원 12선이라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포클리에타는 1985년 DJ의 귀국길에 이른바 ‘인간 방패’를 자청한 현역 의원이었다. 당시 그는 김포공항에서 “경비원에게 구타당했다”며 뉴스거리를 만들어 냈다. 이후 그는 DJ의 수호천사를 자처했다.
DJ의 수호천사 포글리에타 미 민주당 의원
1999년 11월, 포글리에타는 방한하여 인권문제연구소가 수여하는 인권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됐다. 자유의 메달 수상에 대한 답례였다. 2000년 12월, 그는 DJ의 노벨상 수상식에 참가한 두 명의 외국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2004년 11월, 포글리에타는 자신의 조카에게 상당한 규모의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미국 현지에서는 “1999년 12월 제일은행이 미국의 사모펀드인 뉴브리지 캐피달에 매각될 당시 포클리에타가 거액의 커미션을 챙겼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담이지만, 미국에서는 이탈리아인과 한국인이 테이블 아래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족속으로 통한다.
DJ에게 노벨상을 갖다 바치기 위한 피 튀기는 경쟁
한편, 최규선의 문서 파일은 또 다른 라인에서 노벨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행간을 살펴보면 그들 간에 DJ에게 노벨상의 영광을 먼저 갖다 바치기 위한 피 튀기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건에 의하면 최규선은 1999년 2월 노르웨이를 방문해 게이르 룬데스타드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사무총장을 만났다. 앞서 설명한 김한정이 오슬로를 방문한 직후이다. 최규선은 1999년 2월22일 룬데스타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며칠 내로 김 대통령을 만나 오늘 우리의 만남을 보고하겠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오슬로에서 만난 일을 말씀드리고, 교수님이 83년도에 하버드 대학에서 김 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다는 말씀도 같이 전해 드리겠다. 대통령께서도 기억하실 것이다.”
공작에서 배제당한 최규선
최규선이 룬데스타드와 주고받은 팩스 문서를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1999년 2월에서 그해 9월 이후까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최규선이 룬데스타드에게 1999년 9∼10월께 금강산 관광에 초청하겠다고 하자 룬데스타드는 “일정이 모두 확정되어 있다”면서 거절했다. 아마도 이때쯤이면 룬데스타드도 “최규선과는 더 이상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언질을 어디선가 받았을 것이다.
한편, 뉴스위크 지의 ‘블루 카펫’ 기사는 보도 당일 당장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뉴스위크는 당초 표지에 박지원의 사진과 이름을 넣었다가 인쇄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뒤늦게 이를 삭제하고 표지를 다시 제작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뉴스위크 한국판을 인쇄한 ‘고려 피엔텍’ 측은 주간지 측의 요청으로 9000부를 전량 폐기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이 잡지는 평소보다 하루 늦게 발행되었다.
최규선을 사기꾼으로 몰아간 좌파 언론들
그러면 ‘블루 카펫’ 프로젝트는 과연 어느 정도 실체가 있었던 것일까. 서울의 좌파 언론들은 최규선을 사기꾼으로 몰면서 블루 카펫 기사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2003년 12월23일자 한겨레21의 ‘노벨평화상 DJ 특명은 없었다’, 오마이뉴스의 ‘습작 연애편지가 DJ 특명으로 둔갑’ 같은 기사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기사들은 “최씨가 문건을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하긴 했지만 청와대로부터 거절당했다”고 주장하면서 한결같이 “DJ의 직접 지시는 없었다”는 점을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이 기사들은 사실을 호도하는 3류 찌라시 선전물이다. 최규선의 노벨상 공작은 분명 존재했다. DJ에게 내쳐지기 전까지는 정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고, 버림받은 후에는 DJ의 환심을 회복하기 위해 장외에서 계속 추진했던 것이다.
이처럼 김대중 정권 5년간 노벨상을 둘러싼 보도들은 우리 언론의 수준과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민낯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장까지 다 드러내 보인 셈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것은 한 편의 ‘옐로우 코미디’였다.⊙
[33] 불나방 최규선의 추락과 재등장… ‘최규선 게이트’의 발단
마이클 잭슨 통해 세계 최고위급 인사들과 네트워크 형성
만델라 손목시계 선물로 DJ를 만델라와 동급으로 격상시켜
최규선의 재등장이 일으킨 폭풍
2003년 4월, 김대중(DJ) 정권 마지막 해에 최규선은 최고의 뉴스메이커가 되어 돌아왔다. 그의 등장과 퇴장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는 DJ 정권 출범 직전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유성처럼 사라져 버린 사나이였다. 그런 그가 정권 마지막 해에 다시 등장하자 온 나라는 벌집을 쑤신 것처럼 난리가 났다.
DJ와 최규선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월간중앙 2002년 5월호에 그 대답의 일부가 실려 있다.
“1997년 12월12일 신라호텔 영상 회의실. 화면 저쪽에 국제 금융계의 큰손 조지 소로스가 등장했다. 그 뒤로 마이클 잭슨과 미키 캔터 전 미국 상무장관이 보였다. ‘IMF 재협상’ 발언으로 궁지에 몰렸던 김대중(DJ) 후보는 화상회의에 나와 국제사회의 불신을 씻어 내려는 듯 또박또박한 영어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I will fully support IMF’s program.(나는 IMF의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지지할 것입니다.)’
그런데 화면 저편에 작달막하고 둥근 얼굴에 안경을 쓴 한국인 하나가 보였다. 국민회의 총재 국제담당 특보 최규선이었다. 선거 막판 궁지에 몰린 DJ에게 조지 소로스와의 화상회의를 막후에서 성사시켜 준 인물이 바로 최규선이었다.”
최규선의 DJ 협박용 음성 기록
2003년 4월, 최규선이 뇌물과 사기죄로 구속되기 직전 DJ와 그 아들 김홍걸을 협박하기 위해 남긴 테이프에도 이때의 상황이 음성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저는 이 정권 탄생에 기여를 했습니다. 대통령도 1997년 12월20일 당선 직후에 저를 불러서 ‘창고가 비었네. 자네하고 나하고 나라를 살리세. 자넨 그런 재주가 있고 능력이 있네. 내가 사람 볼 줄 아는데 자넨 정치적으로 대성할 것이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저는 그야말로 만화 주인공인 뽀빠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DJ를 존경을 넘어 신처럼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 ‘이제 자네는 서열이 틀려져 부렀네. 권력 내 위치가 틀려져 부렸단 말일세. 이럴 때일수록 자네는 내 밑에서 커야 하네.’ ‘아이고,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대통령님.’ ‘IMF만 극복하면 역사에 남네. 그리고 남북 관계 풀어 가지고 그렇게 우리 국민이 숙원하는 노벨평화상도 받을 거야. 그때도 자네가 역할을 해 줘.’”

▲ 김대중(오른쪽) 대통령이 2001년 3월12일 청와대를 방문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7년 말, 제15대 대통령 선거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로 국가부도 일보 직전까지 갔다. 최규선의 녹취록은 그가 어떻게 알 왈리드 왕자와 조지 소로스를 방한 초청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들을 설득하여 대우 그룹과 현대 그룹에 긴급 자금을 수혈해 주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1997년 제15대 대선 당시 DJ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수수께끼의 사나이 최규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사기꾼의 기질을 보였다고 알려졌다. 전라남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란 그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의사를 매수했으며, 대학 총장의 직인을 위조해 유학 서류를 꾸몄고, 부잣집 딸을 꼬셔 처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배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 왈리드 왕자에게는 자신의 재력를 과시하기 위해 “덕수궁 앞에서 찍은 사진을 자기 집이라며 속였다”고도 한다.
월간중앙은 또한 최규선과 마이클 잭슨의 10년간의 우정과 결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최규선은 마이클 잭슨에게 접근하기 위해 “잭슨의 가족에게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의 가족에게 선물 공세를 편 끝에 드디어 마이클 잭슨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고, 그 후에는 “잭슨을 통해 전 세계 유력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만델라 손목시계 DJ에게 선물하도록 주선
월간중앙에 의하면, 최규선(미국명 Kenneth Choi)이 DJ 주변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97년 5월 넬슨 만델라의 막내딸 진지가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서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DJ에게 선물하도록 주선한 때부터라고 한다. 그 손목시계 덕분에 DJ는 일약 넬슨 만델라와 동급 반열로 비치게 되었다.
이후 앞서 이야기한 대로 대통령 선거 기간 막바지에 터진 IMF 사태의 국면에서 최규선은 DJ의 국제담당 특보로 임명되어 그야말로 엄청난 활약을 해냈다. 다음은 월간중앙 2002년 5월호에 실린 이어지는 설명이다.
마이클 잭슨이 연결해 준 월드 프리미엄급 인사들
“최규선은 마이클 잭슨 덕분에 조지 소로스‧알 왈리드 왕자‧클린턴 미 대통령의 측근 스테파노플러스, 심지어 남아공의 만델라까지 두루 접촉할 수 있었고, 후보 시절 또는 당선자 시절 DJ가 이들과 인연을 맺도록 주선했다. 그중에서 마이클 잭슨과 스테파노플러스는 후보 시절에, 조지 소로스는 당선자 시절에 각각 DJ를 만나기도 했다.
특히 DJ는 대통령 후보 시절 일산 자택에서 마이클 잭슨을 만나 “당신이 부자라는 것도 알고 있고 한국에 투자 상담을 하기 위해 온 것도 알고 있다”면서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한껏 부각시키기도 했다.
이런 맹활약 덕분에 그해 대선 때 DJ 캠프에서 최씨는 굴러들어온 복덩어리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고 대선 직후 최규선 평민당 총재 국제담당 특보는 일약 이른바 ‘DJ 비서진 5인방’에 포함되었다.“
권력을 향해 날아오르던 불나방의 추락
그런데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날아오르던 최규선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원래 최규선 씨는 청와대 행사기획 비서관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DJ의 5인방으로까지 불렸던 사람이다. 누구도 그의 청와대 진입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씨는 민정팀의 최종 스크린 단계에서 미끄러졌다.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면서 좋지 않은 소문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판문점 공연 건과 관련한 비위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월간중앙 기사 제보자로 추정되는 B씨가 언급한 ‘판문점 공연 건’이 바로 1998년 10월로 예정되었던 마이클 잭슨의 한국 공연이다. 당시 마이클 잭슨과 한국 측 준비팀은 판문점에서 북한 어린이 돕기 자선공연을 한 다음, 그 이튿날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전 세계 뮤지션들과 함께 ‘We Are The World II(위 아 더 월드Ⅱ)’ 공연을 한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물론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최씨가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을 상대로 후원금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거둬 개인적으로 착복했는지는 수사가 중단된 탓에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뒤늦게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김중권 당시 비서실장이 노발대발해 최씨의 청와대 진입을 막았다는 후문이다.”
최규선은 1998년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추진하면서 기업체로부터 20억여 원 후원금을 가로챈 혐의로 경찰청 특수수사과로부터 수사를 받았다. 그해 10월 사기 및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마이클 잭슨으로부터 공연 의향서를 받은 상태라 편취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영장은 기각되었다.
그러자 최씨가 구명을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청와대 J씨의 도움을 받아 풀려났다는 의혹이 뒤따랐다. 어쨌든 그는 1998년 말 해외로 내돌리는 신세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교동 실세 권노갑의 비서가 되어 ‘블루 카펫’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잃은 DJ의 신뢰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DJ는 이미 김한정에게 올인한 상태였다. 청와대로부터 “손 떼라”는 지시를 받고 그는 눈물을 머금고 블루 카펫을 접었다. 마이클 잭슨 공연도 김한정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최규선은 2000년 초부터 김홍걸을 끼고 여러 이권 사업에 뛰어들었다. 2003년 봄을 달군 최규선 게이트는 이때 시작된 것이다.⊙
[34] 민주화 투사라는 갑옷 걸치고 대한민국의 ‘암 덩어리’로 성장한 DJ
학포지란의 땅에 자리 잡은 국정원 본청
서울 강남의 대모산 남쪽 기슭 깊숙한 곳에 커다란 건물 한 채가 들어서 있다. 나지막한 언덕에 가려 있어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높다란 철책 안 널찍한 대지 위에 잘 가꿔진 정원이 펼쳐져 있다. 커다란 정문을 지나 쭉 늘어선 가로수 사잇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다 보면 회색빛의 웅장한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 국가정보원(국정원) 본 청사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명당으로 소문나 왕가의 능(陵)터로 이용되어 왔다.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소위 ‘학포지란(鶴抱之卵)’ 형세의 땅이라고 한다. 조선조 3대 임금 태종의 무덤인 헌릉과 순조의 무덤인 인릉이 바로 옆에 있다. 세종의 무덤도 여주로 이장하기 전에는 이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국가정보원 건물도 학이 날아가는 형상을 본떠 지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길다란 빌딩들이 마치 학이 날갯짓하듯 본채와 연결돼 있어 장관이 연출된다.
자동 제어‧완벽 통제의 인텔리전트 빌딩
1990년대 중반, 국정원 청사는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지어졌다. 온도‧조명‧통풍 등 모든 설비가 자동화되어 있다는 말이다. 건물 안팎의 차폐(遮蔽) 시설도 모두 자동 제어된다.
인원과 물자의 동선이 완벽하게 점검되고 통제된다. 24시간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일반인들의 접근은 엄격히 통제된다. 그래서 이곳은 언제나 차갑고 엄숙하고, 공포와 미스터리가 뒤엉킨 듯한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최근 국정원 주변의 공기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다. 음산한 기운이 마치 새벽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다.
심각한 내상 입고 자멸해 가는 국정원
지난 몇 차례의 좌파 정권을 거치면서 국정원은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노무현 정권이 벌인 과거사 진실위원회 소동으로 이미 한 차례 척수가 뽑히고 뇌수가 털렸다. 박근혜정부에서는 국정원의 등에 칼을 꽂았던 검사가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있다.
문재인정부는 국정원의 국내 정보 부서들을 해체한 데 이어 대공 수사권을 박탈하는 입법 조치를 했고, 2024년 1월1일 부로 그 법이 시행됐다. 덕분에 오늘날 국정원은 예전의 활력을 찾아볼 수 없는 빈껍데기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동안 국정원은 악마화를 통한 좌파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좌파 정부들에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려 무진 애를 썼지만 여론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문재인 정권은 우회로를 선택했다. 국보법을 철폐하지 않고도 같은 효과를 얻을 기회를 노렸다. 그게 바로 국정원 무력화 작업이었다.
그 결과 국정원은 눈과 귀가 막히고 손과 발이 잘려 나갔다. 그 와중에도 직원들끼리 치고받으며 싸우고 있다. 사면초가 상황에서 내분으로 자멸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국정원은 사실상 기능이 마비되어 구더기가 들끓는 산송장이나 다름없게 됐다.
5.16혁명과 함께 태어난 중앙정보부
국정원은 원래 종합정보기관으로 태어났다. 모든 분야의 정보를 전부 다 취급하는 정보기관이라는 의미다. 이런 규모의 정보기관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경우다. 그동안 국정원에선 북한 관련 정보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친 다양한 정보활동이 이루어졌다. 수천 명의 요원들이 달라붙어 매 순간 시시각각 전 세계를 상대로 치열한 정보전쟁을 벌여 온 것이다. 우리가 처한 화급한 안보 현실이 그런 정보기관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 1996년 9월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안기부법 개정 의견수렴을 위한 회의에서 오정소(왼쪽) 안기부 제1차장이 안기부의 대공 수사권 확대 방안과 관련한 소관 업무 보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정원의 역사는 영욕의 역사다. 1961년 6월10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혁명정부는 3주 만에 중앙정보부(중정)를 창설하고 혁명의 수호자 임무를 맡겼다. 중정은 혁명을 지키고 완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후 중정은 조국 근대화에도 견인차 노릇을 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성공 신화 뒤에는 중정 요원들의 보이지 않는 피와 땀이 켜켜이 스며 있다. 중정은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과 유신이라는 정치적 격랑을 돌파하는 데 전위대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중정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만큼 위세를 부렸다.
곪기 시작한 중앙정보부의 절대 권력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했던가. 중정 수장 김형욱과 이후락은 부패했다. 그들은 해임되자마자 해외로 도망갔다. 이후락은 곧 돌아왔지만 김형욱은 해외에 남아 반정부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1979년 10월, 그는 파리의 한 뒷골목에서 자신의 옛 부하들 손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도 최측근이던 중정 부장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대통령을 시해한 중정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간판을 갈았다. 이후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안기부는 옛날 같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기능을 회복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요구가 거세질수록 안기부는 설 자리가 점점 좁아져 갔다. 김영삼(YS)‧김대중(DJ) 정권을 거치면서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또다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리고 이제 옛날의 영화는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YS‧DJ, 국정원에 앙갚음하고 이용하고
YS와 DJ는 집권하자마자 국가정보원이 된 옛 안기부에 앙갚음부터 했다. 이들은 인적 쇄신이란 명분으로 물갈이를 했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는 데 정보기관을 악용했다. 이때부터 정보기관은 일종의 사설 흥신소로 변질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노벨평화상 사업에 정보기관을 동원한 것이었다.
이전에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적어도 정보기관을 사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문민정부의 대통령들은 군인들과는 많이 달랐다.
YS 정권은 군 출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YS의 측근들로 채웠다. 정확히 말하면 ‘소산’이라 불렸던 YS의 아들 김현철의 측근들이었다. 김덕‧권영해‧김기섭‧오정소‧이병기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오정소 차장은 YS 정권의 ‘넘버 쓰리’로 불리며 ‘해결사’ 역할을 했다. 소산 김현철과 이원종 정무수석‧오정소‧이병기 등은 모두 속칭 ‘K2’라 불리던 경복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안기부에 자기 사람을 심은 ‘소산’ 김현철
김현철은 안기부에 자기 사람을 심는 데 그치지 않고 안기부의 힘을 빼는 작업에도 손을 댔다.
1993년 7월, 이충범 청와대 사정비서관이 16개 해외 공관을 대상으로 사정 작업을 벌인 후 ‘해외 공관 운영 실태 점검’을 발표했다. 이충범은 변호사 출신으로 김현철의 최측근이었다. 이후 해외 공관장들은 더 이상 안기부 파견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됐다. 외무부가 안기부로 자동으로 전문을 전송하던 관행도 중지됐다.
국정원을 난도질한 DJ 정권
DJ 정권의 국정원 훼손과 남용은 범죄적인 수준이었다. 그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국정원을 난도질했다. 물갈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피 갈이를 했다. 그들은 추려내야 할 인원을 적은 살생부를 작성했다.
살생부는 엄익준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 10%에 달하는 국정원 요원이 이때 옷을 벗었다. 그중에는 120여 명의 경상도 지역 출신 중견 간부가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는 수준이 떨어지는 요원들로 채워졌다. 사실상 국정원 해체 작업이었다.
이렇게 YS와 DJ가 정보기관을 적대시하면서 파괴한 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야당 시절부터 피해망상을 키우고 있었다. 정보기관은 오랜 세월 민주화 세력을 추적, 감시해 왔다. 그들 가운데 북한과 연계된 세력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야당 지도자였던 YS와 DJ도 당연히 감시 대상이었다. 이처럼 YS‧DJ와 정보기관 간의 악연은 정해진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민주화 투사라는 가면을 쓴 종북 세력 DJ
YS와 DJ는 6‧25전쟁 당시 자신의 또래 젊은이들이 전장에 나가 피 흘리고 죽어 갈 때 이를 회피했던 사람들이다. 국가관이 없거나 희박하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YS는 남파 간첩의 손에 친모가 살해당해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DJ는 달랐다.
DJ는 젊은 시절 좌익 계열의 정당 간부로 활동했고, 정식으로 정계에 들어선 후에는 통일혁명당(통혁당)에 연루되었다. 해외에 나가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민통)을 창설하면서 북한과 밀착했다. 그 후 김대중은 민주화 투사라는 갑옷을 걸치고 대한민국의 ‘암 덩어리’로 성장했다.⊙
[35] 줄 잇는 보안 유출 사고… 노이로제 걸린 DJ
새해 첫날의 비상 소집
1999년 1월1월, 이날 새벽 이종찬 국정원장은 전 직원을 대상으로 비상 소집을 실시했다. 소집 명령을 접한 직원들은 혹시 전쟁이라도 터진 게 아닌지 걱정하면서 하나둘씩 청사로 달려 들어왔다. 새해를 맞아 집에서 차례 지내던 직원도, 동해안으로 해맞이를 떠났던 직원도 모두 허겁지겁 청사로 뛰어왔다.
그런데 소집 이유를 듣고 난 직원들은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 전날 있었던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이름하여 ‘국회 529호실’ 사건이었다.
‘국회 529호실’ 사건
1998년 12월31일,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던 밤에 한 무리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 의원회관 529호실을 습격했다. 국정원이 사용하고 있던 방이었다. 이들은 강제로 문을 따고 들어가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들을 탈취해 갔다. 국정원으로서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한나라당은 “김대중(DJ) 정권에서 국정원이 여전히 국회 내에서 정치사찰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며 핏대를 올렸다. 정국은 꽁꽁 얼어붙었고 한동안 강 대 강 대치 정국이 지속됐다. 국정원은 여야 공‧수가 뒤바뀌긴 했어도 어쨌든 또다시 정쟁의 도구가 됐다.
이날 밤 습격 작전은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의 지휘로 이뤄졌다. 행동책은 이신범 의원이었다. 정형근이 이 사건을 기획하고 실행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예전에 민주당으로부터 똑같은 일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개인적인 보복전이었다.
안기부 차장에서 해임된 정형근의 보복
1995년 2월, 정형근은 안기부 차장에서 해임됐다. 그의 해임은 “안기부가 지방선거 연기를 획책하고 있다”는 야당의 주장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그 전해인 1994년 정형근은 국내 정보 부서장으로 재직하면서 안기부 각 지부에 지방선거 연기에 관한 여론을 수집하도록 지시했었다. 그런데 광주 지부의 한 직원이 이 지시 문건을 민주당 권노갑 측으로 유출했다. 당시에도 특정 지역 직원들의 정치권 줄 대기가 극성을 부렸던 것이다.
문서를 손에 넣은 권노갑은 “안기부가 국내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는 물증”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파장이 커지자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은 안기부장과 차장을 해임하는 선에서 논란을 일단락지었다.
또다시 부딪힌 정형근과 이종찬
국정원에서 새해 첫날의 비상 소집이 있은 그해 가을이었다. 1999년 10월25일, 정형근와 이종찬은 또 한 번 부딪혔다. 이번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였다. 정형근은 A4 용지 7쪽 분량의 문서를 제시하면서 “여당이 언론 장악을 목표로 언론 대책 문건을 작성했다”고 폭로했다.
그 문건은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의 부탁을 받은 문일현 중앙일보 기자가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때마침 중앙일보의 모회사인 보광그룹이 세무사찰을 받고 있던 상황이라 현직 중앙일보 기자가 문건을 작성한 사실이 새삼 이목을 끌었다. 이처럼 DJ 정권에서는 이런저런 보안사고가 자주 터졌다.

▲ 2000년 2월12일 언론대책 문건 사건으로 검찰의 체포시도를 피해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로 피신한 정형근 의원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검지가 하는 일을 약지가 모르게 하라
정보기관은 기본적으로 국내와 국외에서 국가안보에 필요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동시에 안보에 치명적인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곳이다. 정보기관 임무의 본질은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캐내어 오면서, 동시에 적들이 침투시킨 첩자들을 가려내어 우리의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적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적이 알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국정원 요원에게는 보안이 생명과도 같다.
국정원의 신입 요원 교육에서 가장 강조하는 수칙은 “네가 하는 일을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라”이다. 다시 말해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네 왼손이 모르게 하라”이다. 국회 529호실 사건은 국정원에 보안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국정원의 보안 수칙은 “네 검지가 하는 일을 네 약지가 모르게 하라”가 됐다.
DJ 정권 보안 사고의 첫 제물 천용택
조금 우스운 얘기이지만, DJ 정권에서 보안 사고의 첫 번째 제물이 된 사람은 천용택이었다. 그는 이종찬의 뒤를 이어 1999년 5월 말 국정원장에 취임했다.
그해 여름, 옷 로비 사건이 정국을 강타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의 연루 의혹이 언론에 거론되었다. 그러자 천용택은 1999년 12월15일, 법조 출입 기자들을 국정원 청사로 초청했다. 옷 로비보다 훨씬 솔깃한 대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옷 로비 사건을 덮으려 한 것이다.
그는 기자들에게 미림팀 도청 테이프에 들어 있는 ‘핫’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 결과 “지난 대선 당시 DJ가 삼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이 뜻하지 않게 흘러나갔다.
며칠 후 청와대로 불려간 천용택은 DJ로부터 정보누설에 대해 엄중한 질책을 받았다. 그런데 그 직후 더 큰 문제가 불거졌다. 천용택이 기자들 앞에서 정보를 누설하면서 “아주 불경한 언사를 썼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대통령님’이라 하지 않고 ‘김대중이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감히 대통령님의 이름을 존칭 없이 불렀다고라?!!’
남궁진 수석은 급거 기자들의 취재 수첩을 수거해 확인하고는 그 즉시 천용택을 해임해 버렸다. 반년 전 천용택에게 당했던 김한정도 천용택 해임 사건에 가담해 복수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DJ 정권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크고 작은 보안 사고에 시달렸다. 사안의 성격상 노벨 프로젝트팀에게는 보안이 더욱더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보안이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보안이 알파요 오메가였다.
임동원, 남북정상회담 비밀공작 총지휘
1999년 12월23일, 천용택에 이어 임동원이 국정원장에 임명됐다. 임동원은 취임하자마자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남북 간의 모든 비밀 공작 사업을 총지휘했다.
이윽고 2000년 4월 10일,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전격 발표되었다. 제16대 총선을 불과 3일 앞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해 총선에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핵폭탄 같은 발표를 내놓았음에도 DJ의 새천년민주당은 크게 지고 말았다.
임동원의 ‘금년도 정세 전망’
2000년 4월21일, 임동원은 DJ에게 노벨상 공작의 진행 상황을 브리핑했다. ‘금년도 정세 전망’이라는 제목이 붙은 12페이지짜리 장문의 보고서였다. 이 문서는 그때까지의 공작 활동을 총정리하고, 향후 활동 계획을 세세하게 밝힌 것이었다. 이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 ‘보안 대책’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단락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관계자 모두 침묵 속에서 조용히 활동”할 것을 강조하며 “지나친 의욕에 따른 오버액션은 금물”이라고 명시돼 있다.
보고서에서 오버액션의 예로 든 것으로는 △과도한 NB(노벨상) 관계자 접근 및 접촉 △과도한 자료 제공 및 배포 △과도한 홍보 및 미화 △우리 측 입장 위주의 한반도 상황 설명 △우리 측 인사들의 과도한 현지 방문 등이 있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현지에서의 접촉과 홍보 활동은 지나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면서 캠페인 인상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실시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보안을 강조, 또 강조한 임동원의 보고서
“대통령의 한반도 긴장 완화‧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노벨평화상에 대해서는 초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와 여권 관계자들도 대통령의 수상 가능성이 높아질 시점에 이르게 되면 더욱 언급을 자제하고 신중하게 임할 것이 요망된다.
공관장의 노벨 관계자 접촉은 현지 대사로서 외교 활동의 일환이라는 개념하에 시행되어야 하고, 관계자 간에 공명심을 과시하거나 경쟁이나 반목, 시기가 야기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처럼 임동원의 보고서는 보안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36] “남북한 공동 수상 막아라”… 햇볕정책 홍보 총력
임동원 2000년 4월 정세 보고… ‘남북화해 주도’ 부각 전략 제시
노벨위뿐 아니라 노르웨이 의회·여론 주도 기관 등 전방위 로비
임동원, 수상 가능성 언급으로 총선 참패 DJ 위로
2000년 4월21일, 임동원이 보고한 ‘금년도 정세 전망’엔 그때까지의 노벨상 프로젝트 활동 현황과 향후의 행동 계획 등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아마도 임동원은 총선에서 참패한 대통령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 보고서 작성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금년도 정세 전망’은 얼핏 제목만 봐서는 그냥 일반 보고서인 것처럼 보인다. 내용을 읽어 보지 않고는 노벨상 공작 보고서라는 것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무려 12쪽에 달하는 이 장문의 보고서는 ‘최근 정세 평가’라는 소항목으로 시작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년도 총 추천 건수는 150건(개인 114‧단체 36)으로 현재까지 남북정상회담을 제외하고 노벨위원회 측의 관심을 끌 만한 핫이슈(hot issue)는 없는 상황이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우리 측 후보가 금년도 유력 수상 후보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노벨위원회의 기준으로 볼 때 남북정상회담은 수년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빅 이벤트이기 때문에 노벨위원회의 수상자 선정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시킴으로써 우리의 수상 여건이 조성된 상황이다. 하지만 금년 초부터 노르웨이 정부가 막후 중재하고 있는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반군 간의 평화협상이 조기 타결될 경우 우리와 경합을 벌일 가능성이 예상된다.”
남북한 관계 가시적 성과 있어야 한다는 진단
이어서 이 보고서는 노벨상 수상을 위한 몇 가지 착안점을 제시하면서 노벨위원회의 한반도에 대한 시각과 관련한 유의 사항을 지적하고 있다.
“노벨위원회는 한반도가 남북분단에 의해 아직도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한국 인사의 경우 남북한 간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업적을 통해 수상이 가능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우리 측 인사의 수상을 위한 조건으로는 ‘남북한 관계에서의 가시적 성과’ 내지는 ‘남북한 관계의 획기적 돌파구’를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수상 자격을 평가할 것이다.
VIP의 국내 민주화‧인권운동 경력과 아시아 지역 평화 증진 노력도 큰 업적으로 인정하지만 한반도 특성상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시각이다.”
노벨위원회의 수상자 선정 방향
보고서는 또한 노벨위원회의 수상자 선정 활동 방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짚었다.
노벨위원회는 △후보 측의 로비를 철저히 배격하고 △객관적 자료에 의해 공정한 기준으로 후보자를 평가하며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의 외부 영향력을 배제하고 △유력한 후보일수록 접근에 신중을 기하며 △매년 6월 초에 실시하는 3차 심사를 통해 대상자를 10명 내외로 축소한 후 후보자별 정밀 심사자료를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지난해 6월14일 국회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23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북 공동 수상의 가능성 우려
한편 보고서는 남북한 공동 수상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며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노벨위원회가 한반도 문제를 남북한 쌍무적 관계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고 △1994년 이츠하크 라빈(당시 73세) 이스라엘 총리와 시몬 페레스(당시 72세) 이스라엘 외무장관이 야세르 아라파트(당시 64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사례에 비추어 노벨위원회가 유사한 시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와 같은 남북한 공동 수상론의 대두 가능성에 대비해 남북한 평화‧하해 모드 조성이 햇볕정책 등 우리의 일방적인 대북정책에 의한 성과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노벨 공작팀의 활동 보고
이어서 보고서는 그때까지의 노벨상 공작 활동에 관한 깨알 보고를 이어 가고 있다. 구체적인 항목으로는 △현지 공관의 노벨위원회 관계자 접촉 △노벨위원회 관계자에 대한 자료 제공 △주변 인사 접촉 △노벨위원회 관계자 방한 초청 △주변 관계자 방한 초청 △한반도 정세 소개 세미나 현지 개최 △국내 인사의 현지 방문 △노르웨이 비정부기구(NGO)의 한반도 관련 프로젝트 지원 △노르웨이 언론인 방한 초청 △문화행사 등이 언급되었다.
현지 공관의 노벨위원회 관계자 접촉
노르웨이 현지 공관의 노벨위원회 관계자 접촉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관장이 주관하여 월 1회 내외로 시행하고 있으며 △주 접촉 대상은 게이르 룬데스타드 노벨위원회 사무총장과 군나르 스톨셋 노벨위원회 부위원장이고 △간혹 프란시스 세예르스테드 전임 노벨위원장도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지목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자 접촉에 대해서는 △대사관저나 시내의 고급 식당에서 오찬이나 만찬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가끔 국정원 파견관도 동석하는 경우가 있다는 설명을 부연했다.
노벨위원회 관계자에 대한 자료 제공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주요 사안이 발생할 경우 해당 자료를 준비하여 전달하는데 △대부분은 코리아헤럴드 등 언론 자료에서 발췌해 제공하며 △정부 간행물 등 의도적 홍보자료는 캠페인이라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을 고려해 선별적으로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자료를 제공하는 대상과 빈도에 대해서는 △매년 3~9월 기간 중 룬데스타드와 스톨셋에게 분기당 1‧2회를 기준으로 시행하는데 △이들 자료에 대해 룬데스타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스톨셋은 적극 환영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여론 주도 인사‧기관 접촉, 문화행사에도 신경 써
또한 주변 인사 접촉과 관련하여 △노르웨이 의회‧인권단체‧정부기관‧연구소‧ 대학 등 여론 주도 기관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하고 △대부분 공관장이 주관하지만 일부는 국정원 파견관이 주관하며 △오‧만찬을 통해 친분을 심화시키는 한편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고 △통상 월 2‧3회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기타 항목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르웨이 언론인 방한 초청과 관련해서는 “그간 현지 공보관이 주관하여 일부 추진하기는 했으나 노르웨이 언론의 독립성과 배타성으로 인해 홍보 면에서 큰 성과가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 밖에 문화행사로는 “1999년 10월 한국의 사물놀이팀이 현지를 방문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다음으로 보고서는 향후 노벨위원회와 주변 기관 접촉‧접근 및 기본 추진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추진 방향에 대한 설명과 함께 기본적으로 △보안을 유지하여 비노출 활동으로 추진하고 △소수 인원이 단순 지휘체계에서 시행하며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 및 한반도 긴장 완화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현지 공관의 관계자 접촉과 홍보활동을 중심으로 추진하며 △과도한 활동은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신중히 추진할 것을 거듭 주문하고 있다.
간접 홍보활동도 소홀함 없이
향후 추진해야 할 구체적인 활동 방안으로는 △공관장의 노벨위원회 관계자 접촉 활동 △홍보자료 전달 및 배포 △현지 주변 관계자를 통한 간접 홍보활동 △현지 언론 취재팀 방한 초청 및 한반도 특집기사 게재 요청 △노르웨이 NGO의 한반도 프로젝트 지원 △방한 중인 노르웨이 인사 특별관리 등의 계획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이 중에서 노벨위원회 관계자 접촉과 관련해서는 △기존 스톨셋과 룬데스타드 이외에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과 잉게르 이테르호른 신임 위원과의 접촉선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홍보자료의 전달‧배포에 관해서는 △캠페인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중요 자료를 엄선해 신중히 전달하고 △남북정상회담과 정부의 대북정책을 설명하는 자료를 중심으로 제공하며 △주로 스톨셋 부위원장에게 자료를 제공하되 룬데스타드 연구소장에게도 선별 제공할 것 등을 언급했다.
간접 홍보활동의 주요 대상
한편, 현지 주변 관계자를 통한 간접 홍보활동의 대상자로는 △에릭 숄하임 의원 △헤르스빅 월드뷰 사무총장 △람스타드 라프토 인권재단 이사장 등을 꼽고 있다. 또한 현지 언론 대상으로는 “노르웨이의 주요 일간지들이 남북정상회담 취재를 희망하는 만큼 이 기회를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37] 국정원 최종 홍보전략은 ‘NB 맨투맨’접촉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 치밀한 최종 홍보전략 마련
공관장·파견관 등 노벨위 관계자 전담 마크… 지휘·보고 일원화
공작팀의 역할 분담에 대한 깨알 지시
이종찬‧천용택에 이어 DJ정부 국정원장이 된 임동원의 보고서 ‘금년도 정세 전망’은 노벨상 공작 관계자들 간의 임무와 역할 분담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보고서는 △국정원 본부 관계관 △현지 공관장 △현지 파견관(IO‧Information Officer‧정보요원) △청와대 및 공보처 △통일부와 국정원 심리단 등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깨알 같은 지시를 담고 있다.
먼저 국정원 본부 관계관에 대해서는 △한반도 관련 최신 설명자료를 준비하고 △노벨위원회와 주변 관계자들에 제공할 홍보 자료를 개발해 △노르웨이와 스웨덴 현지의 유력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방한 초청과 취재 편의를 제공하며 △현지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여 신속하게 대책을 강구하고 △국제 정세와 언론 동향을 분석한다는 등의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현지 공관장들에게는 △노벨상위원회 관계자와 주변 인사를 접촉, 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좋게 하기 위해 친한화를 적극 유도하고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자연스럽게 한반도와 주변정세의 변화를 상세히 설명해 줌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며 △현지 언론과 유력 인사의 방한을 추진하고 △방한이 성사될 경우 관계기관의 접촉을 주선해 주는 등 편의를 제공한다는 등의 임무가 맡겨져 있다.
국정원 파견관의 특별 임무
현지 파견관들에게는 △현지 정세와 분위기‧언론보도 동향을 본부에 신속 보고하고 △본부에서 하달한 자료를 적시에 관리 및 배포하며 △필요시 공관장과 현지 인사의 접촉을 주선하고 △이들에게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고 친한화를 유도한다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 밖에 국정원 파견관에게는 현지 보안 활동도 중요한 임무로 부여됐는데 △현지에서 불필요한 오해가 야기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고 △공관원‧교민‧현지 방문 인사들 대상으로 노벨상 관련 언급을 사전에 자제하도록 교육하며 △유언비어가 유포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한다는 임무가 추가로 주어져 있었다
청와대‧통일부‧국정원 심리전 팀의 임무
청와대와 공보처는 △정치권 인사들이 노벨평화상과 관련해 거론하는 것을 봉쇄하고 △국내 언론의 노벨상 수상 활동 관련 추적 폭로 기사 게재를 저지하며 △국내 언론 취재팀의 현지 취재를 저지하는 등의 언론 마사지 작업이 임무로 주어져 있었다.
통일부와 국정원의 심리전 팀은 △현지 언론의 방한 취재팀과 방한 인사와의 면담을 주선하고 △이들에게 우리의 대북정책과 남북 경제협력 등 최근 상황을 설명하며 △남북한 관계의 진전 동향 등 최신 홍보자료를 제공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 2001년 9월3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방송의 날 리셉션에 참석한 김대중(왼쪽 세 번째) 대통령이 치사를 통해 ‘햇볕정책’의 견고한 지속을 강조했다. 연합뉴스
초연한 자세와 함구 조치 요구
마지막으로 보고서는 몇 가지 건의 사항을 제시한다. 먼저 “노벨상 공작 활동에 직‧간접으로 관여되었거나 내용을 인지하고 있는 청와대‧행정부‧여권 내 인사들의 초연한 자세와 철저한 함구 조치를 요망”하고 있다.
또한 “1998~99년 여권 내 일부 참여자들이 공명심에서 사적인 활동 내용을 언론에 누설, 추적 기사를 유도한 바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이영작과 최규선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보고서는 나아가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을 노벨평화상과 연계시키려는 분위기를 차단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언하고 있다. 또한 “의도적인 노력으로 비쳐져 DJ의 업적이 퇴색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정부 인사의 노르웨이 방문 및 노르웨이 인사 방한 시 노벨상위원회 관련 사항을 일체 거론하지 않도록 조치할 것”도 주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기간 전후, 노르웨이 언론 취재팀 방한 초청을 적극 검토할 것”을 건의하면서 보고서를 끝맺었다.
마스터플랜… 국정원의 보다 정교한 계획
한편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릴 남북정상회담 준비로 관련 부처가 한참 바쁘게 돌아가던 때 국정원은 한층 정교한 공작계획을 완성했다. 남북정상회담 바로 직전에 작성된 ‘마스터플랜’이라는 국정원 내부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문서는 특히 최종 홍보전략에 관해 상세하고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마스터플랜은 시기별로 정상회담 전과 정상회담 직후, 그리고 정상회담 이후의 세 부분으로 나눠 목표와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마스터플랜의 기본 방향으로는 △우리 상황의 신속 정확한 전달 △관계자 친한화 △주변 분위기 조성 등을 설정했다.
마스터플랜 추진 방안
마스터플랜의 추진 방안으로는 △노벨위원회에 최근 한반도 상황에 대한 정보 제공 지속 △현지 유력 주변 인사들에 대한 정보 제공 지속 △본부의 현지 지원체계 구축 △현지 세미나 및 설명회 개최 △현지 인사 방한 초청 △현지 언론에 한반도 특집 게재 유도 등이 제시되어 있다.
마스터플랜은 2000년 6월부터 9월까지 추진하게 될 △현지 지사 활동 △본부의 효율적 현지 지원 체제 구축 △현지 설명회·세미나 개최 △현지 인사 방한 초청 등에 관한 방안을 기술하고 있다.
현지 지사의 활동으로는 “NB(노벨상) 관계자를 접촉하여 한반도 상황에 대한 정보 제공을 지속”하도록 계획하고 있는데 △이미 접촉 중인 NB 위원 및 N연구소장을 대상으로 △월 2회 내외로 △구두 설명과 자료 제공을 병행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다. 이는 두 달 전의 ‘정세 전망 보고서’보다 더 자주 정보를 제공하기로 방침을 바꿨음을 의미한다. 마스터플랜은 현지 공관을 지사로, 공관장을 지사장으로, 노벨을 NB와 N으로 표기하는 등 보안에 더욱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노벨상 관계자들 맨투맨 식 접촉
특히 마스터플랜은 노벨상 관계자와 주변 관계자들을 ‘맨투맨’ 식으로 접촉할 인사를 지명하고 있다. 현지 공관장이 전담하여 조종해야 할 인사로는 에릭 숄하임 전 사회당 대표‧스브레 롯가아드 노르웨이 국제관계 연구소장‧단 스미스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장‧헬게 히임 오슬로대 교수‧웨거 스톰멘 전 노르웨이 외무차관‧스벤 율링 한 노르웨이 경협위원장 등이 포함됐다.
노르웨이 파견관이 전담 마크해야 하는 대상은 얀 람스타드 라프토 인권재단 이사장‧루네 헤르스빅 월드뷰 인권재단 사무총장‧프랑크 얀센 오메가 TV 방송사 사장 등이었다.
마스터플랜은 본부에서 신속하고 정확한 현지 지원 체계를 구축할 것을 함께 주문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를 위해 “최소한의 인원으로 별도의 효율적인 지휘 및 보고 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최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보안
본부가 실행해야 할 구체적인 임무로는 △현지 활동 방향 제시 △통신 유지 및 현지 출장 △현지 분위기 및 상황 파악 △현지 하달 자료 준비 △현지 인사 방한 초청 계획 수립‧시행 및 편의 제공 △현지 언론 취재팀 방한 초청 계획 수립 및 시행 △국제 평화 운동과 관련한 정세 파악과 판단 등이 열거돼 있다.
마지막으로 마스터플랜은 노벨상 공작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안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는 △인위적인 특별팀 구성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공작 라인의 현지 활동을 팔로우업하는 소수의 ‘섀도우 팀’은 적재적소에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보고서는 △외부 인사와 타 기관은 가급적 배제하되 △필요시에는 꼭 필요한 최소한의 해당 사항만 인지하도록 보안 조치를 시행할 것 △수상 가능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며 △외부에서 노벨상 공작 활동을 인지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원천 차단할 것 등을 요청하고 있다.⊙
[38] 햇볕정책 주도 임동원, DJ 국가 반역죄 공범
이종찬‧라종일 배제 후 對北 유화 앞장… 피스 메이커 자처
6‧25 때 단신 월남‧육사 13기 입학… 北 김정일이 무한 신뢰
DJ의 국가 반역죄 공범 임동원
2003년 2월14일, 필자는 ‘분칠한 가면, 간첩의 초상’이란 글을 통해 임동원의 정체에 대해 양심 증언한 바 있다. 그 후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더해 그의 의심스러운 행적에 대해 다시 한번 밝혀 두고자 한다.
그동안 그의 출신 배경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확인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김대중(DJ) 정권의 실세로 활약하면서 김정일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한마디로 그는 DJ의 국가 반역죄 공범이었다.
1998년 2월, DJ 정권이 출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임동원이 김대중 정권 내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임동원이 언제, 어떻게 김대중과 엮이게 됐는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후 전개된 그의 친북을 넘은 종북 행적이 언제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동원은 DJ 정권에서 안보수석‧통일부 장관‧국정원장, 그리고 다시 통일부 장관을 거쳤다. 5년간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DJ 정권의 외교 안보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햇볕정책 전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
그는 햇볕정책을 기획하는 단계부터 실현시키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햇볕정책의 전도사’였다. 그는 자신을 평화의 사도, 즉 피스 메이커(Peace Maker)라고 자처했다. 그의 자서전 제목도 그렇게 정했다. ‘평화’라는 말을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가장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DJ 정권 초기, 이종찬 국정원장과 라종일 차장은 햇볕정책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 가서 안보 라인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들이 제거된 후 임동원은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고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극단적인 대북 유화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갔다. 그러면서 홍순영 등 장관급 인사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안보 관련 간부를 자기 사람으로 심었다.
북한 측이 신뢰한 DJ 정권의 실세
한편 그는 북한에 대해서는 더없이 살가웠다. 북한 측의 임동원에 대한 선호 또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북한 정권은 임동원에 대해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여기엔 그가 북한 출신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동원이 보인 행적은 단지 그의 고향이 북한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더 있었다. 언젠가 정상회담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던 중 임동원은 무심코 김정일을 극존칭으로 부르는 바람에 직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안개 속의 인물이었다. 북한에 발목 잡힌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는 자기의 감정과 의사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매사에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고 철저했다. 남에게 책잡히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의 기재가 늘 몸에 배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임동원이 품고 있는 미스테리는 그가 언제 어떤 연유로 북한과 그런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무엇이 그를 그처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 김대중(왼쪽) 대통령이 2001년 4월2일 청와대에서 임동원 통일부장관으로부터 주례업무보고를 받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6‧25전쟁 중 단신 월남, 육사 13기로
임동원의 초년에 관한 정보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자서전에서도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1934년 평안북도 위원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1950년, 그는 선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6‧25 전쟁 중에 단신 월남했다. 그리고 1953년 3월,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육군사관학교에 13기로 입학했다.
그는 자신이 왜 남한으로 내려오게 됐는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가 기독교 집안 출신이고, 당시 북한 공산당이 극단적으로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월남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또한 그런 이유로 그가 북쪽에 가족을 남겨 두고 온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한에 그의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향후 그와 북한과의 관계에서 매우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대공 분야 필독서, 임동원의 ‘혁명전쟁과 대공 전략’
그는 오랜 시간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요원으로 근무했다. 군인으로서보다 학자로서 뛰어났다. 육사에서 그는 대북 강경론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가 초급장교 시절에 쓴 논문들엔 그의 투철한 반공정신이 잘 반영돼 있다. 그가 쓴 책들도 마찬가지다.
1967년 10월, 임동원은 ‘혁명전쟁과 대공 전략’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을 상술하면서 우리의 대응 전략을 제시한 책이다. 때마침 이듬해 1월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그해 가을 대규모 무장 공비가 울진‧삼척 지구를 침범했다. 이 일로 일개 육군 대위가 쓴 책이 일약 유명해져 대공 분야 종사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 후 임동원은 우리 군의 무기체계를 현대화하는 사업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과 식견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야전군 지휘관 출신이 아닌 육사 교수요원 출신이 장군으로 진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탁월한 군인이라는 평판과 검증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10.26에서 5‧18 광주사태에 이르는 격동기를 거치면서 그는 소장 계급을 끝으로 군 경력을 마무리했다.
교수요원에서 장군 진급, 청죽회 회원
임동원은 군대 내에서 하나회와 경쟁 관계에 있던 청죽회 회원으로 알려져 있다. 청죽회는 군내 사조직 중의 하나로, 전두환을 비롯한 영남 출신들로 구성된 하나회에 대항하기 위해 이북과 서울 출신들 위주로 조직된 사조직이라 한다. 임동원과 이종찬‧천용택은 모두 청죽회의 회원으로 알려져 있다.
청죽회를 조직한 강재륜은 전두환과 육사 11기 동기생으로, 친형이 일본에서 유학 중 조총련으로 전향한 것이 알려져 강제 예편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임동원은 전두환의 측근 허화평에게 하나회를 탈퇴하고 청죽회로 들어오라고 권유했다가 그런 사실이 전두환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소장으로 강제로 예편을 당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임동원을 나이지리아 대사로 임명하여 사실상 유배를 보냈다.”
나이지리아 대사 발령… 외교관으로서의 새로운 삶
하지만 나이지리아 대사로 발령한 것을 ‘유배 보냈다’고 표현한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전두환의 배려라고 봐야 더 나은 해석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1980년 10월, 임동원은 26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외교관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전역 후 그의 첫 직책은 주(駐)나이지리아 대사였다. 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를 역임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그는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보임됐다. 이 또한 노태우가 그를 챙겨 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인사였을 것이다.
노태우정부 때도 실세…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
노태우 정권은 소위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1970년대 서독이 동독에 추진했던 이른바 ‘동방정책’의 한반도 버전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남북고위급회담을 추진했다. 임동원 외교안보연구원장은 여기에 대변인으로 참여했다. 1991년 12월13일, 몇 차례 밀고 당기는 핑퐁 회담 끝에 남북 간 기본합의서가 체결됐다. 때맞춰 노태우 대통령은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주한 미군은 한반도에 배치했던 모든 전술 핵무기를 철수시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얼마 가지 않아 우리만 바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합의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과 국제원자력기구를 연이어 탈퇴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정일의 뒤통수 한 방에 기본합의서는 일순간에 휴지 조각으로 변했다. 우리만 졸지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지 않아 김정일은 핵무기 개발을 완성했다.⊙
[39] 동생들 몰래 만나고 북측에 무릎 꿇은 임동원
고위급 회담차 평양 갔다 동생들 반강제 상봉… 北공작에 규정 어겨
아태재단 초대 사무총장 조영환… 이유도 모른 채 쫓겨나고 죽음까지
임동원, 동생들과의 반강제적 만남
1991년 12월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됐다. 이에 앞서 제2차 회담은 1990년 10월16~19일 평양에서 열렸다. 임동원이 대표단 대변인으로 방북했을 때, 북한 측에선 그에게 동생들과의 만남을 ‘반강제적으로’ 주선해 줬다.
1990년 10월23일 자 세계일보는 ‘강 총리 방북 때 누이동생 만났다’는 제하의 특종 헤드라인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의하면 “강영훈 총리와 홍성철 통일부 장관, 그리고 임동원 외교안보원장은 회담이 끝난 지난 10월19일 새벽 1시부터 1시간여 동안,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에서 북에 있는 가족들을 만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는 것이다.
애초에 남측 대표들은 북한의 역(逆)선전을 우려해 북한 측의 가족 만남 제의에 대해 “서로 보안을 유지한다는 조건하에 회담이 끝난 후에 면담키로 합의했다.” 그런데 “북측이 이러한 약속을 깨고 가족들의 요청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을 데리고 갑자기 숙소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족 간의 만남이 성사됐다.”
임동원의 가족 상봉 국내 언론에 흘린 북한
이틀이 지난 10월21일, 북측은 남북통일축구대회 취재 차 서울로 내려보낸 기자들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언론에 흘렸다. 북한이 고의로 보안 약속을 깬 것이다.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보면 북한이 작정하고 작업을 벌인 정황이 분명해 보인다.
세계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은 임동원의 술회도 전했다.
“6‧25전쟁 당시 헤어진 후 처음 만나는 두 동생으로부터 부모님이 얼마 전에 작고하셨다는 비보를 들을 수 있었다. 원산에서 트럭 운전을 하고 있는 동진 씨와 가사 일을 돌보고 있는 동연 씨 모두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대뜸 통일 문제를 들고나오는 두 동생을 보니 차라리 안 만난 것만 못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아팠다.”
이와 같은 그의 언급에선 뭔가 숨기고 쉴드 치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임동원은 자신의 자서전 ‘피스 메이커’에도 그날 밤의 감격적인 상봉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그 내용은 세계일보 기사와 비교해 보면 팩트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서전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새벽 1시쯤 되었을 때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북측과 남측 책임 연락원이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임 선생, 동생들을 만나 보시지요. 여동생 임동연과 남동생 임동진을 여기 데리고 왔습니다’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우리 대표들은 사적인 만남은 일절 하지 않기로 되어 있다’고 거절하자 북측 책임 연락원은 ‘강영훈 총리와 홍성철 장관도 만나니 임 선생만 그러지 말고 만나 보세요’라고 하며 복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 마침내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울고 난 후 어머님과 아버님이 모두 전쟁 때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전해 듣게 되자 도무지 눈물의 바다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 감격적이면서 씁쓸한 2시간여의 상봉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만날 때까지 몸 건강히 지내라’며 서로 기약 없는 다짐을 하고 헤어졌다. 이날 밤 나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밤새 울었다.”

▲ 1990년 10월16일 강영훈 총리가 남북 총리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북측으로 가기전 손을들어 환송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갓스 도깨비 데스’… 임동원 남매의 기억
중앙일보 최원기‧정창현 기자가 쓴 ‘남북정상회담 600일’이라는 책에는 당시의 상황이 좀 더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다음은 그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헤어진 지 30년이 지난 오빠와 누이동생은 ‘처음에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릴 적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고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에피소드는 임동원의 어린 여동생이 소학교에 입학하던 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아버지가 어린 누이에게 ‘선생님이 네 생일을 물어보면 주가츠 도오카 데스(10월10일입니다) 라고 대답하라’고 일러 줬는데, 어린 누이동생이 이를 외우느라 연습하면서 ‘주갓스 도깨비 데스’라고 말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는 것이다.”
그 책은 또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강영훈 씨에 따르면 임동원은 ‘누이동생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북한 측 제의에 ‘약속 위반이다’며 완강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 만나고 말았다.”
동생들 만나고 북측에 무릎 꿇은 임동원
이와 같은 강 총리의 회고는 ‘피스 메이커’의 내용과 비슷하지만 뭔가 약간 다른 톤이 느껴진다. 이날 밤 임동원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그와 북한 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한 정보기관 고위 간부가 필자에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 간부는 강영훈 총리가 아직 치매에 걸리기 전에 그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라며 강 총리의 증언을 다음과 같이 귀띔해 줬다.
“나는 당시 전체 대표단 구성원들에 대해 개별 행동을 엄중하게 금지했다. 그런데 임동원이 나의 지시를 어기고 북측과 개별 접촉했다. 10월19일 새벽 동생들과의 반강제적인 만남 이후 임동원은 따로 개인행동을 했다. 나는 그때 임동원이 북측의 협박에 넘어갔을 것으로 확신한다.”
한편, 필자는 워싱턴에서 한반도 정세에 밝은 한 인사로부터도 “임동원은 그때 백화원 초대소 지하에서 북측에 무릎을 꿇었다”는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
아태평화재단과 아태평화위원회
1995년 2월1일, 임동원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의 2대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94년 7월, 북한의 김용순은 마치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든 후에 공개적으로 아태평화재단과의 교류를 제의해 왔다. 북한이 ‘아시아태평양’이라는 용어를 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태평화재단을 겨냥해 작명했다고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태평화재단의 첫 사무총장은 조영환이었다. 그는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 정치학 교수였는데 김대중(DJ)의 요청으로 1994년 1월 아태평화재단에 합류했다. 1994년 여름, 그는 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평양으로 들어가는 길에 베이징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뜻밖에도 북한의 전금철이 그를 찾아왔다. 전금철은 당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전금철은 조영환에게 “역시 조선의 통일을 위해서는 온 민족이 하나가 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네다”고 말했다. 전금철은 조영환에게 “통일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의하면서 “김대중 선생의 아태평화재단과 같은 민간기구를 만들어 함께 통일을 위한 사업을 벌이기 위해 아태평화위원회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조영환의 의문의 죽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영환은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직에서 쫓겨났다. 이때부터 조영환에게는 끔찍한 시련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는 교단으로 돌아가려고 국내 여러 대학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때마다 누군가가 그의 재취업을 방해했다. 그즈음 조영환은 “누군가가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다”며 고통을 호소하곤 했다. 한 대학 총장은 “김대중 이사장의 허락을 받았는가?”고 노골적으로 묻기까지 했다.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서강대 박홍 총장의 도움으로 겨우 교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99년 4월, 조영환은 평소와 같이 지인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조영환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이 끊어진 채 발견되었다. 물이 다 빠진 욕조 안에서 안경을 끼고 누워 있었다. 도대체 그동안 그와 DJ, 그리고 북한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의 죽음은 DJ 주변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문사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었을 뿐,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40] 통일 장관 재취임한 임동원 돌변… 北 퍼주기 주저
DJ가 北 전화 받고 결정한 8·15방북대표단 파견도 반대
노무현에 임동원 안부 물은 김정일, 넌지시 ‘내 사람’ 암시
DJ의 삼고초려로 아태재단 사무총장 된 임동원
1995년 1월 임동원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그가 아태재단 사무총장이 되기 전 김대중(DJ)이 두 차례나 사람을 보내 삼고초려했다는 얘기가 정설로 전해진다. 이에 관해 이종찬은 자신이 임동원을 DJ에게 엮어 줬다고 회고한다.
2012년 7월호 월간조선은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서 DJ와 임동원의 인연에 대한 이종찬의 회고를 전하고 있다. 다음은 그 일부다.
“1994년 여름 무렵이었다. DJ가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임동원 씨를 잘 아느냐’고 물었다. (…) 육사 13기인 임동원 씨는 우리 부부와 가까운 사이였다. ‘잘 안다’고 했더니 DJ가 말했다. ‘아태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는데 정동채 비서가 임 차관을 추천했어요. 정 비서를 보내 사무총장을 맡아 달라고 했는데 거절하더군요. 이 의원이 좀 설득해 주시오.’ 그래서 부부 동반으로 임동원 씨와 식사를 하면서 DJ의 뜻을 전했다.”
이후 사무총장이 된 임동원이 비밀리에 북한 측과 접촉한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임동원과 김용순은 1995년에서 1997년까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임동원과 김용순의 특별한 관계
두 사람은 동갑 나이이지만 스타일은 판이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 그야말로 찰떡궁합이었다. 둘의 관계는 김용순이 2000년 9월 김정일의 방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정점을 찍었다. 김용순은 그 후 2003년 10월 평양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DJ 정권 출범 직전, 대북 첩보 수집부서는 북측의 정보원으로부터 “남북관계가 잘 풀리려면 임동원이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의견이다”는 첩보가 심심찮게 수집됐다. 북측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린 것이다. 물론 역정보일 수도 있었다.
남북대화에서 북한이 “북한에 고향을 둔 남측 대표를 선호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임동원의 결벽증적 보안 의식
DJ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임동원의 행적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는 항상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병적이라고 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썼다. 늘상 뭔가 숨기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의 과잉 보안 의식은 많은 사람의 의구심을 자아냈다. 그는 부하직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보좌관에게조차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종찬 원장 시절, 임동원은 손발을 맞추어야 할 안보 관련 고위 인사들에게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안보 관련 회의에선 서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해야 하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실로 이상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추모의 집에는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국정원 제치고 대북 전략 실제 지
이때부터 김보현 대북전략국장은 직속상관인 라종일과 이종찬을 제치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인 임동원과 직거래하는 일이 잦아졌다. 명령과 복종을 중시하는 국정원의 풍토에선 아주 부자연스럽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천용택 원장 시절,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임동원은 방미 길에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 등 미국 측 인사들을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 그때에도 임동원은 자신의 행적과 협의 내용을 극비에 부치고 국정원 파견관을 의도적으로 따돌렸다.
당시 국정원의 최덕만 샌프란시스코 파견관은 임동원의 방미 활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용택으로부터 “당장 철수하라”는 질책을 받아야 했다. 최덕만은 임동원의 육사 후배였지만 전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최덕만은 대화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통역관을 회유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때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최덕만은 얼마 안 가 병으로 사망했다.
DJ의 방미 실패 후 태도 돌변한 북한
2001년 3월 초, DJ는 미국이 한반도 팀을 꾸리기도 전에 성급하게 준비도 안 된 미국을 방문함으로써 처참한 실패를 안고 돌아왔다. 후에 알려지기로는 DJ는 이때 김정일의 5월 남한 방문과 평화선언 문제 등에 대해 미국의 양해를 구하려고 무리하게 방미를 추진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가 실패한 것을 본 김정일은 즉시 계획되었던 장관급 회담을 무기한 연기시켰다. 그리고 며칠 후인 2001년 3월27일, 임동원이 국정원장에서 해임되자 김정일은 모든 남북관계를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북한은 불과 며칠 전인 3월 중순에 김한길 문화부 장관과 오사카 탁구 단일팀 구성에 합의한 바 있었다. 그런데 임동원이 경질되자마자 모든 남북 접촉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이 시기에 북한에서도 김용순이 체포되는 등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달라진 임동원의 대(對)북한 태도
임동원이 통일부 장관에 재취임한 2001년 4월 이후, 남북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전면 단절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몇 달간 임동원의 북한에 대한 자세가 예전과 같지 않았다. 텔레비전에 출연해 대북 전력 지원이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등 이전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퍼주기’와는 상당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해 8월15일 방북 대표단 파견과 관련해서도 임동원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의외로 그는 대표단 파견에 반대했다. 그 후 알려지기로는 8‧15 방북 대표단 파견은 DJ가 북측의 전화를 받고 직접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8월14일 아침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다가 그날 오전 임동원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온 후에야 부랴부랴 대표단을 꾸렸다고 한다. 하루 만에 급조된 방북 대표단에는 온갖 잡쓰레기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DJ, 북한의 남북관계 중단 이유 분석 지시
2001년 4월, DJ는 신건 국정원장에게 “북한이 남북관계를 전면 중단한 이유를 분석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일이 남북관계를 단절시킨 이유를 김대중이 모를 리 없었다. 아마도 국정원을 떠 보려고 일부러 그런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DJ의 지시가 있자 국정원에선 안태원 종합과장이 중심이 되어 보고서를 작성했다. 안태원은 ‘잘나가는’ 직원이었는데 얼마 후 ‘미 대사관 직원에게 보안 사항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다.
당시 DJ는 ‘김정일이 이미 받을 것 다 받아 챙기고 아쉬울 것 없는 상태’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DJ는 자신이 미국을 방문해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해 김정일이 실망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국정원의 대북 관련 직원들만 감쪽같이 속아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국정원 직원들도 모른 척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무현에게 임동원의 안부 물은 김정일
한참 세월이 지난 2007년 10월3일, 평양의 백화원 영빈관에서는 김정일과 노무현의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진행된 이날 회담은 4시간이나 넘게 걸린 마라톤급 회담이었다. 이 회담에서 노무현과 김정일이 나눈 마지막 대화는 시사하는 점이 있기에 소개해 둔다.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 이제 다음에 합시다. 오늘은 보따리가 넘쳐서 안 돼요. (모두 웃음)
김정일: 오늘 아주 수고 많았습니다. 정열적으로 많이 이야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임동원 선생 건강하지요?
이에 김만복 국정원장이 대신 대답했다. “예, 건강합니다.”
정상회담 말미에 김정일의 입에서 임동원이라는 이름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것은 대화의 맥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질문이었다. 임동원이 서울에서 건강하게 잘 있다는 사실을 김정일이 몰랐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럼 뭐란 말인가. 혹시 김정일은 “임동원은 ‘내 사람’이니 특별히 알아서 잘 챙기라”는 암시를 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