午後餘談(문화일보) 2024-11/ 11-01(금) 미 대선 막판의 反파시즘 연대 - 11-29(금) 中에 지친 ‘신공지능’
午後餘談(문화일보) 2024-11/
11-01(금) 미 대선 막판의 反파시즘 연대

이미숙 논설위원
11·5 대선이 막바지로 접어든 미국에서 때아닌 파시즘 논쟁이 일고 있다. ‘마크 밀리 전 합참의장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뼛속까지 파시스트라고 규정했다’는 내용이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의 최신 저서 ‘전쟁(War)’을 통해 공개된 후 존 켈리 해병대 예비역 대장이 공격의 배턴을 이어받았다. 그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파시즘은 반대자에게 무자비한 극우 독재와 초국가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 군사주의 등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그런 특징은 내가 백악관에서 경험한 트럼프의 행태와 정확히 맞는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때 국토안보부 장관과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켈리는 “트럼프가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트럼프=파시스트’ 주장을 받아 네거티브 선거전에 활용하고 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지난달 23일 CNN 타운홀 행사에서 ‘트럼프가 파시스트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뒤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파시스트 독재자가 되어 여성의 낙태 선택권마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화당 내 반(反)트럼프 인사들의 선두에 선 린 체니 전 하원의원은 트럼프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뒤 해리스를 돕기 위한 선거 캠페인에 적극 나섰다. 체니 전 의원은 지난달 26일 뉴욕에서 열린 주간지 뉴요커 페스티벌에 참석해 ‘트럼프가 파시스트라고 생각하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딕 체니 전 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그렇게 생각하며 해리스 지지 선언을 했다”고 말했다.
공화당 출신 전직 대통령과 부통령, 핵심 관료들이 파시스트 트럼프를 낙선시키기 위해 반(反)파시즘 연대 전선에 뛰어든 것은 이례적이다. 최근 ABC 뉴스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를 파시스트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은 49%였다. 미국 유권자의 절반가량은 트럼프를 파시스트로 생각한다는 얘기다. 트럼프의 전국 지지율이 해리스와 막상막하이고 7개 경합 주에선 미세하게 앞서는 것을 보면 이번 대선은 ‘파시스트 트럼프 지지자’ 대 ‘반파시즘 연대 세력’ 간의 혈투다. 파시스트 진영이 이길지, 반파시스트 전선이 승리할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11-04(월) 시정연설 정치학

오승훈 논설위원
대통령이 국회에서 하는 시정연설은 말 그대로 국정(政)을 어떻게 펼칠지(施) 설명하는 자리다.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으로서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의 심의·처리를 당부하면서, 나라 살림만 아니라 국정 전반의 운영 방향을 밝힌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8년 정부 수립 뒤 9월 30일 ‘시정방침’이란 제목으로 한 것이 헌정사 첫 시정연설이라고 한다.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국회법의 ‘예산안에 대하여는 본회의에서 정부의 시정연설을 듣는다’는 조항에 따른 첫 시정연설은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했다. 하지만 첫해뿐이었고, 이후 국무총리 대독이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때까지 관행처럼 굳어졌다. 국회 본회의장 연단에 다시 선 것은 지난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으나 그 역시 첫해뿐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부터 4년 연속 시정연설을 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5년 동안 본예산은 물론 추경까지 6번을 했다.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담화나 기자회견과 같이 대국민 메시지 발신의 의미도 있지만,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 국정 과제를 법률로 완결하는 입법 리더십의 시험대가 된다. 새로 구성된 국회의 개원식, 연례적인 시정연설이 공식적인 기회인데 현안과 관련해 국회 연단에 선 사례도 많았다. 국회 연설 횟수는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 여야 구도, 정국 상황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승만(12년 집권)은 25회의 국회 연설을 했다. 매년 두 번씩은 국회에 갔다.
박정희(18년) 8회, 전두환(7년) 6회였다. 노태우(이후 5년)·노무현 각 4회, 김영삼 3회, 이명박 3회, 김대중 1회였다. 시정연설은 불리한 정국을 돌파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군사정부 불식이 과제였던 노태우는 ‘민주번영의 통일시대’를 선언했고, 노무현은 측근 비리 곤욕에 재신임 국민투표 실시를 제안했다. 이명박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운동이 확산하자 ‘녹색성장’을 꺼내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내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을 직접 하지 않았다. 야당이 모욕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한다. 제22대 국회 개원식 불참 때도 같은 이유를 댔다. 야당의 태도가 문제이지만, 커져만 가는 대통령의 허물도 여의도로 가는 길을 더 어렵게 하는 듯하다.⊙
11-05 레임 덕, 브로큰 덕, 데드 덕

이현종 논설위원
정치를 오리(duck)에 빗대 표현하는 말이 많다. ‘레임(lame)덕’은 영국 증권시장에서 미수금을 갚지 못하는 투자자를 일컬었으나, 1860년대부터는 정치권에 등장했다. 오리가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을 예를 들어 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을 설명할 때 이 말을 자주 인용한다. 보통 지지율이 30% 이하가 되면 레임덕에 빠졌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여당과 관계가 껄끄럽고 대통령의 권위가 떨어진다. 정부의 공무원들은 야당 눈치를 보면서 말을 잘 듣지 않는 경우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더 나빠지면 브로큰덕(broken duck)이라는 말이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의욕적으로 제기한 ‘대연정’이 여당에서 거부되고 탈당을 요구받은 바 있다. 이때는 레임덕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전인 2009년 1월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7000억 달러의 구제금융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여당인 공화당 하원의원들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 이에 언론에서는 부시의 지도력이 사실상 권력통제 불능 상태가 됐다는 취지에서 브로큰덕으로 표현했다.
브로큰덕을 넘어서면 이젠 데드덕(dead duck)이라는 말이 나온다. ‘죽은 오리에는 밀가루를 낭비하지 말라’는 속담에서 나온 데드덕은 정치 생명이 끝난 사람,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인사, 실패할 것이 분명한 정책 등을 말한다. 레임덕이나 브로큰덕은 그래도 일말의 회복 가능성이 있지만, 데드덕은 회생 불능 상태를 말한다. 보통 지지율이 한 자리로 떨어지면 데드덕이라고 부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직전 지지율이 5%에 달할 때 언론이 데드덕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지난주 한국갤럽 기준으로 19%, 문화일보 기준으로 17%를 기록했다. 여론조사 수치로만 보면 레임덕과 브로큰덕 사이에 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 윤 정부에 남은 화살은 법률안 거부권과 정부 시행령, 예산 증액 동의권 정도이다. 거부권도 벌써 21번이나 사용했다. 정부 시행령을 활용한다고 하지만, 4대 개혁을 하려면 법안 개정이 필요하다. 의석도 8석만 이탈하면 탄핵소추도 막을 수 없고 거부권도 행사할 수 없다. 데드덕으로 가지 않기 위해선 국정 전반에 대한 대수술이 필요하다.⊙
11-06 포르투갈 부활 ‘공짜는 없다’

문희수 논설위원
포르투갈은 저성장에 빠진 유럽에서 단연 돋보인다. 2021년 이후 고(高)성장을 질주하고 있다. 미·중 무역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속에서도 2021년 5.7%, 2022년 6.8%에 이어 2023년에도 2.3% 성장했다. EU가 2022년 3.5%, 2023년 0.4% 성장했던 것과 대조된다. 올 상반기는 EU 주요국의 부진 등으로 성장률이 1.5%로, 지난해 하반기(2.0%)보다는 둔화했지만, 그래도 유로존(0.4%)을 웃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뒤를 이어 2010년 유럽 재정위기를 촉발했던 남유럽 4개국(PIGS)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주요 외신들은 경제 열등국이 경제 우등국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며 호평 일색이다.
포르투갈은 세계적인 관광국이다. 그렇지만, 관광 덕에 부활한 게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강도 높은 재정 긴축과 구조조정의 성과였다. 포퓰리즘에 찌들어 파탄 났던 정부 재정을 과감한 지출 축소로 건전화하고, 탄력적인 고용과 해고가 가능하도록 노동시장을 개혁했다. 이런 고통을 통해 성장률은 높아졌고, 일자리는 확대됐다. 재정위기 직후 18.3%나 됐던 실업률은 올해 6.5% 안팎으로 떨어졌고, 내년에도 이 수준으로 예상된다. 같은 PIGS였던 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보다도 좋다.
그 결과 경제는 선순환한다. 투자하기 좋은 나라가 되면서 외국인 직접투자가 급증세다. 2022∼2023년은 매년 90억 달러(약 12조 원) 이상의 외국인 투자가 이어졌다. 관광산업 이외에 재생에너지·친환경산업·스타트업에 외국인 투자가 이어진다. 싼 물가, 우수한 디지털 기반시설, 높은 교육 수준이 돈과 인재를 끌어모은다. 이에 힘입어 수년째 스타트업 붐이다. 해외로 빠져나갔던 인력도 유턴하고 있다. 2022년 한 해에만 11만7843명이 돌아왔다고 한다.
EU는 저성장이 고착돼 간다. 올해와 내년 성장률은 1%대다. 독일과 프랑스는 아예 0%대다. 지난달 열린 EU 정상회의에서는 유럽이 탄소 감축 등 지나친 환경주의에 갇혀 몰락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던 정도다. 포르투갈의 극적인 부활은 ‘공짜 점심은 없다’는 교훈을 상기시킨다. 아무리 내로라하는 관광대국이라도 가만 앉아 조상 덕에 먹고사는 관광에 의존해서는 미래가 없다.⊙
11-07 ‘트럼프 변동성’ 양지와 음지

이철호 논설고문
역시 돈이 가장 먼저 권력 냄새를 맡는다. 6일 미국 대선 투표함이 열리자마자 비트코인이 1억 원을 뚫었다. 점심 무렵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까지 역전시키자 단숨에 사상 최고치인 1억351만 원을 찍었다. ‘비트코인 대통령’을 자처하며 국가 전략자산으로 삼겠다는 공약 덕분이다. 열광적 지지자이자 돈줄인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 주가도 14.75% 폭등했다.
그림자가 드리운 분야는 전기차와 2차전지. 트럼프의 전기차 보조금 폐지와 내연기관차 중심의 ‘드라이브 아메리칸 법’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 주가는 7% 넘게 떨어지고, 에코프로비엠과 에코프로도 각각 8.63%, 7.61% 급락했다. 엔화 약세 가능성에 반색해 일본 닛케이지수는 2.61%나 올랐다. 중국 상하이 종합지수는 꿋꿋하게 오름세를 유지하다 장 막판에 0.12% 하락으로 마감했다. 트럼프와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브로맨스’에 대한 기대감보다 당장 ‘대중 60% 관세’ 폭탄이 겁나는 것이다.
최악의 유탄은 전문가들이 맞았다. 미국 역사학자들과 정치학회 회원들은 매년 미 역대 대통령 평가를 한다. 부동의 1위는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남북전쟁에서 이기고 노예를 해방했다. 트럼프는 임기 마지막 해에 44명 중 41위를 했다. 도덕성은 바닥이었지만 대중 설득력 점수로 간신히 꼴찌를 면했다. 하지만 지난해 결국 꼴찌로 떨어졌다. 학자들은 “미국을 내전으로 몰아넣거나 탄핵당할 뻔했던 19세기 중반의 대통령들보다 더 나빴다”고 비판했다. 그런 트럼프가 압승을 거두고 부활한 것이다. 하버드대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무너지고 있다”고 절망했다.
이제 트럼프의 귀환은 현실이 됐다. 제2기에 더 노골화될 ‘미국 우선주의’는 경제적으로 높은 관세와 보호무역이 핵심이다. 외교적으로 개입의 축소와 비용 떠넘기기를 의미한다. 더 이상 자유무역주의나 전통적 동맹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 경제는 트럼프노믹스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 수출 위축으로 몸살을 앓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유럽과 더불어 자주 국방을 위해 값비싼 외교·안보 비용도 각오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미국발(發) 초겨울 냉기가 몰아닥치고 있다.⊙
11-08(금) 美 여성대통령 무산의 이면

김세동 논설위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예상보다 큰 차이로 패배했다. 여론조사는 초박빙으로 나와 미국 대선 236년 역사에서 첫 여성 대통령 실현 가능성을 키웠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트럼프는 2016년 힐러리 클린턴에게 승리한 데 이어 여성 대통령 등장을 두 번 막았다. 힐러리가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이었고, 엄청 출세한 백인 엘리트였던 점을 고려하면 ‘흑인+여성’이었던 해리스는 이중의 핸디캡 속에서 뛴 격이다. 고물가 등 경제적 어려움에 조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심판 분위기가 겹쳤는데도 자신만의 장점을 부각하지 못한 탓도 크지만 여성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 유리천장을 깨기 어려웠던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던 2008년에 연수한 학교가 워싱턴DC에 있어 미국 대선을 한가운데서 보는 행운을 얻었다. 유대계 백인인 대학원 수업 조교에게 ‘어떻게 힐러리가 신인 같은 오바마에게 민주당 대선 후보를 뺏길 수가 있나’고 물었더니, 예상 못 한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놀랐는데, “미국에선 여성이 흑인보다 대통령이 되기 더 어렵다”였다. 좀 과장해서 들으면 흑인은 그래도 ‘검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그 무엇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레이디 퍼스트’ 문화 등은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다.
실제 미국에서 흑인 참정권은 1870년 수정헌법 제15조가 만들어지면서 도입됐다. 남북전쟁 직후로, 조선이 반상(班常)을 구별하고 노비를 둔 신분사회이던 때였다. 여성 투표권은 그로부터 50년이나 더 지난 1920년 여성보통선거에 관한 법이 통과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연방 선거에만 허용됐고, 주 선거는 주별로 법이 통과돼야 해 오랜 세월이 걸렸다. 미시시피주에서 1984년에 여성보통선거법을 인정하면서 마무리됐다.
이번 대선 때 민주당 진영에서 ‘남편 모르게 해리스에게 투표하자. 기표소 안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캠페인을 진행한 것도 충격이었다. 백인 여성 표를 노린 선거 운동 전략인데, 달리 생각하면 아내나 딸의 투표에 남편이나 아버지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다. 대통령제 민주주의 종주국이자 선진국으로 알던 미국의 뒷모습이라 씁쓸하다.⊙
11-11(월) 신라에 온 페르시아 왕자

최현미 논설위원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는 해외 한국 관련 기록이 어떻게 ‘문화적 상상력’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역사와 신화가 혼재된 서사시의 배경은 655년에서 680년 사이.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제국에 멸망한 뒤 마지막 왕자가 중국 당나라로 피신했다 신라에 와서 활동한 이야기다. 왕자는 신라 화랑에 신무기 기술 등을 전해주고 신라 공주와 결혼해 경주에서 살다 페르시아로 떠난다. 신라의 기후, 지리, 궁중의례, 음식 등 신라에 대한 내용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란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다 11세기에 기록된 작품은 2000년에야 국내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어 2009년 영국국립도서관에서 필사본이 발견됐고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한국·이란·영국 학자팀이 꾸려져 15년간 해독·번역 및 각주 작업을 벌여 왔다. 그 결과, 드디어 내년 초 주석 달린 완역본이 국내 처음 출간된다. 영문판은 2022년 미국에서 먼저 나왔다. 학자들이 작업을 벌이는 사이 유라시아 실크로드를 관통하는 대서사,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부터 소설, 동화, 만화, 무용, 연극, 애니메니션 등으로 만들어졌다.
최근 국립중앙도서관 주최로 열린 국제세미나 ‘해외 한국 관련 근현대 자료 수집의 현재와 미래’에서 이희수 교수는 쿠쉬나메 작업 진척 상황을 전하며 “한국 역사와 문화가 고대 이래 바깥세상에 완전히 열려 있었고 다른 생각과 가치를 적극 수용하는 전통을 가졌음을 확인해 준다”고 말했다. 쿠쉬나메처럼 기록물들이 다양한 문화 활동과 연계돼 이어지기를 고대한다고도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2004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한국 관련 문서를 수집한 이래 올해 해외 한국 자료 수집 20년을 맞았다. 그동안 러시아, 독립국가연합, 헝가리, 튀르키예 자료를 발굴·수집했고 올해는 체코 자료를 찾는다. 자료는 디지털화돼 누구나 원문을 보고 활용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돼 일반에 공개되면서 소설·드라마가 쏟아졌듯 역사와 문화는 기록과 자료 위에 이뤄진다. 해외 한국 자료는 역사와 문화의 빈틈을 메우고, 다른 시선에서 우리를 보게 한다. 거기에 또 새로운 상상력이 있다.⊙
11-12 反트럼프 망명자들

이미숙 논설위원
워싱턴의 싱크탱크에서 일하는 한 지인은 11·5 미국 대선 전 보내온 이메일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한국이나 유럽으로 망명을 하려는데 받아주겠냐고 얘기하는 미국인 친구가 많다”고 했다. “패망한 남베트남의 보트 피플처럼 미국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민주당 지지자도 꽤 된다고 했다. 트럼프 승리가 굳어진 지난 5일 밤부터 실제 온라인에는 ‘미국 떠나기’ ‘캐나다 이주’ 등에 대한 검색이 폭증했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 확정 후 미국인들의 캐나다 이주 관련 검색량은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정 단어의 인터넷 검색 흐름을 보여주는 ‘구글 트렌드’에서도 캐나다로 이주하는 방법에 대한 검색은 대선 직후 급증했다. 캐나다 이주와 관련된 검색어는 하루 만에 5000%가 늘었다고 한다. 민주당 지지 ‘블루 스테이트’인 버몬트·오리건·워싱턴주에서의 검색량이 높은 것을 보면, 트럼프 당선에 대한 실망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했을 때도 캐나다 이민 웹사이트가 접속 폭주로 일시 마비된 바 있다. 특히, 미국 경제지 포천은 ‘미국을 떠나고 싶으세요’라는 기획에서 미국인이 이주할 만한 나라를 소개했다. 북미에서는 캐나다가 높은 삶의 질과 친이민 정책으로 우선 꼽혔고, 멕시코도 인접성 차원에서 편리하다고 소개됐다. 유럽에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중남미에서는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이 꼽혔다.
‘트럼프 발작증후군(TDS·Trump Derangement Syndrome)’ 환자란 표현이 있다. 트럼프가 2019년 당시 트위터에 새해 메시지를 올리면서 자신을 혐오하는 이들을 조롱하듯 ‘TDS 환자’라고 규정한 뒤 “이 질환이 없는 이들에게 올해는 환상적인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탈미(脫美) 희망자가 폭증하는 것은 다시 4년 전처럼 ‘TDS’를 앓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스마트폰 등으로 워싱턴의 모든 뉴스가 실시간으로 전파되는 상황에서 미국을 떠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지만, 일단 그의 임기 4년만이라도 물리적 거리를 두면 치유될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의 결정이라는 점에서 자발적이고 한시적인 ‘정치 망명’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11-13 한미일 정상 골프와 벙커

오승훈 논설위원
한일 정상 간에 골프 대결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골프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케미(친밀감)를 맞추려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골프 연습이 화제다. 윤 대통령은 최근 8년 만에 골프채를 다시 잡았다고 한다. 이시바 총리도 10여 년 만에 연습장을 찾으라는 압박을 받는다고 한다. 누가 ‘골프 외교’의 물꼬를 틀지가 정가의 관심사가 돼버렸다. 더 야단스러운 쪽은 일본이다. 윤 대통령이 이시바 총리보다 먼저 트럼프 당선인과 전화통화를 했을뿐더러, 윤 대통령(12분)이 이시바 총리(5분)보다 더 길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16년 트럼프 당선 때 가장 먼저 20분간 통화했으니, 이시바 총리 주변에선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골프 경력은 이시바 총리가 조금 나아 보인다. 고교 때 골프부였고, 꽤 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정치 입문 후 거리를 두다 10여 년 전부터는 아예 골프채를 잡지 않았단다. 윤 대통령은 종종 골프를 쳤는데 썩 즐기는 편은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트럼프 당선인의 골프 열정은 거의 광적이다. 집권 1기 때 연평균 80회가량 골프장에 갔다. 전 세계 16곳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고, 78세의 나이에도 핸디캡이 3 안팎(골프다이제스트), 드라이버샷 비거리가 280야드(256m)를 넘나든다고 한다. 한 골프 전문기자가 책에서 ‘누구와 치든 속임수를 쓴다’고 주장했으니, 신뢰도가 높진 않지만 상급인 것은 사실 같다.
트럼프식 골프 외교에서 정점을 찍었던 주역은 아베 전 총리다. 첫 만남 때 7000달러짜리 혼마 금장 골프채를 선물했고, 5차례나 라운드를 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7일 ‘일본의 옛 트럼프-위스퍼러(whisperer)가 전한 세계 지도자들을 위한 교훈’이란 기사에서 “아베의 전략은 트럼프 ‘미국 우선주의’의 공격적인 충동을 막는 지침을 준다”면서 “양국 간 불필요한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아베가 2017년 일본 도쿄 인근에서 트럼프와 라운드 도중 벙커(모래 구덩이)에서 샷을 하고 나오다 그 안으로 넘어진 장면도 상기시켰다. “트럼프는 철강·알루미늄 수입 관세 면제국에서 일본을 제외했고, 김정은과 협상 때도 아베를 배제했다.” 브로맨스의 밀월 관계에도 ‘벙커’가 있는 것이다.⊙
11-14 책사와 브로커

이현종 논설위원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책사(策士)로 장양(張良·장자방)과 제갈량(諸葛亮)을 꼽는다. 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인 장양은 위기의 순간마다 계책을 제시해 유방이 천하를 제패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 전략가인 제갈량은 유비로부터 삼고초려의 예로 초빙돼 ‘천하삼분지계’를 진언하는 등 지금도 뛰어난 전략가를 제갈량과 같다고 할 정도다.
선거 때가 되면 여의도 정치권 주변에서는 장자방, 제갈량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전략 싸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기 때문에 서로 책사를 모시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 1960∼1970년대 선거 책사는 ‘킹메이커’라는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엄창록 씨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자방’으로 알려진 엄 씨는 이북 출신으로 강원도 인제군에서 한약방을 개업해 경영하던 중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인제에서 출마한 DJ와 인연을 맺었다. 연거푸 낙선하던 DJ는 6대 국회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출마했는데 엄 씨의 선거 전략이 돋보였다. 당시 공화당은 노골적인 금품 살포를 했는데 엄 씨는 이를 역이용했다. 푼돈을 넣은 봉투를 여당 이름으로 돌리거나, 여당 후보 이름으로 유권자 수백 명을 음식점에 초청했다가 헛걸음치게 하기, 여당 후보 이름으로 고무신을 돌렸다가 다음 날 회수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역공을 펼쳐 결국 DJ를 당선시켰다.
1987년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에는 민심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는 책략을 내는 책사가 주목을 받았다. 현존하는 가장 노련한 책사로는 여야를 넘나들면서 대선 승리를 이끈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을 꼽는다.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고, 윤석열 대통령 캠프에도 참여해 “연기만 해달라”는 말을 했다가 결국 헤어졌다. 민심의 흐름과 판을 읽는 능력 덕분에 선거 때만 되면 각 진영에서 그를 찾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는 전병민 씨가 유명했다. 여론조사를 처음으로 선거 전략에 이용했던 전 씨는 1992년 대선에서 YS 차남 현철 씨가 이끈 ‘동숭동팀’에서 선거 전략을 주도했다. 윤 대통령 선거 캠프 초기에도 관여한 바 있다.
지난 대선 때 윤 대통령을 도왔던 명태균 씨의 활동이 ‘정치 컨설턴트’였는지 아니면 브로커였는지 주목된다. 종이 한 장 차이 아닐까.⊙
11-15(금) ‘속 빈 강정’ 신도시 재건축

문희수 논설위원
1기 신도시 재건축은 빈 수레처럼 잡음이 그치질 않는다.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등 5개 신도시별로 재건축 선도지구 1∼2곳을 이달 말 발표할 예정이지만, 기대보다는 걱정이 큰 상황이다. 당사자인 주민들은 낮은 용적률, 높은 공공 기여 등에 불만을 드러내며 항의 집회까지 여는 등 반발하는 기류다.
집값 등 재건축 여건이 가장 좋은 분당도 예외가 아니다. 선도지구로 선정되기 위해 가산점 경쟁이 벌어지는 속에서 선정돼도 걱정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선도지구 신청 단지들이 대부분 평가점수 100점 중 배점이 60점으로 가장 높은 주민 동의율 95% 이상을 충족해, 성남시가 가산점을 주는 부지 등의 공공 기여 추가, 이주대책 지원 등을 대거 신청하는 바람에 가구당 분담금이 치솟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상당수 단지는 분담금이 전용 85㎡ 기준으로 최소 1억 원 이상 추가될 것으로 추산하는 실정이다. 공사비도 많이 올라 예정대로 2027년 착공 땐 분담금이 더 늘 것이라며 오히려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집값이 분당에 못 미치는 일산은 사업성 자체가 떨어지는데도 용적률이 낮게 책정돼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현재 일산의 용적률은 169%로 분당(184%)보다 낮다. 그런데도 고양시가 제시한 기준 용적률(아파트 기준)은 300%로, 분당(326%) 평촌·산본(330%) 중동(350%)보다 낮은 최저치다. 고양시는 기반시설 미흡을 이유로 들지만, 각 단지 재건축추진위원회에선 최근 국토교통부와 고양시가 일산 바로 옆인 대곡역 주변에 그린벨트까지 풀어 9400가구를 추가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것과 말이 맞지 않는다며 서명운동에다 합동으로 항의 집회까지 열었다. 그나마 다른 곳은 열기 자체가 시들하다. 집값이 조금 받쳐주는 평촌에서 일부 기대감이 있는 정도다.
신도시 재건축은 말 잔치가 돼 간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기대만 한껏 부풀렸을 뿐, 속 빈 강정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충분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탓에 ‘깜깜이 경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과연 2027년부터 착공, 2030년부터 입주라는 정부 청사진대로 재건축하는 단지가 나올지 의문이다. 정부 무능과 탁상행정의 사례가 또 추가되는 모양새다.⊙
11-18(월) 미국의 동물적 투심

이철호 논설고문
“100년 만에 동물적 투심(투자심리)이 돌아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 금융시장에는 낙관론 일색이다. 주가는 연일 사상 최고를 경신하고, ‘킹 달러’의 무서운 질주에다 비트코인까지 뜀박질하는 ‘에브리싱 랠리’다. 트럼프는 “관세를 올리면 무역적자가 줄고 국내 생산이 촉진될 것”이라며 바람을 잡고 있다. 기준금리가 내려가고 러시아·우크라이나가 휴전하면 시장이 더 끓어오른다는 것이다. ‘포효하는 20년대’의 도래를 점치기도 한다. 미국의 황금시대인 1921∼1929년 사이에 다우존스 지수는 6배나 폭등했다.
주류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비관론이 대세다. 월스트리트저널이 경제학자 6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트럼프노믹스로 인해 ‘인플레가 더 빠르게 상승할 것(응답자 68%)’ ‘고용이 감소할 것(58%)’ ‘재정 적자가 커질 것(65%)’이라고 전망했다. 관세 인상→수입 물가 상승→인플레이션→금리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도 “관세를 올리면 달러 강세와 함께 미 상품 경쟁력을 끌어내려 수출이 감소하고 미 제조업에 타격을 입힐 것”이라 경고했다.
그만큼 트럼프노믹스는 소득주도 성장처럼 ‘듣보잡’ 얼치기 이론이다. 물론 전문가 함정은 경계해야 한다. 뉴턴·아인슈타인 같은 머리 좋은 천재들도 주식 투자로 쫄딱 망했다. 뉴턴은 ‘사우스 시(South Sea)’ 투자로 원금의 90%를 날렸고,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상금 2만8000달러를 몽땅 날렸다. 경제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계량경제학 창시자인 어빙 피셔 예일대 교수는 대공황으로 전 재산을 잃고 대학 기숙사에서 20년 가까이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미국은 100년 만의 황금시대라며 트럼프 랠리에 흥분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엔 악몽이고, 특히 독일이 핏대를 세우고 있다. 킬 연구소는 “독일 경제가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대를 맞을 것”이라 했고, 슈피겔지는 미국의 신고립주의에 절망하며 ‘서구의 종언’이란 사설을 내보냈다. 100년 전처럼 트럼프의 관세 전쟁과 ‘근린궁핍화정책’이 21세기판 대공황을 부를지 모른다는 것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 비중이 42%로 독일(46%)과 엇비슷한 한국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11-19 ‘지연된 정의’ 바로잡기

김세동 논설위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5일 선거법 위반 사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는 데 2년2개월, 799일이나 걸렸다. 선거법 제270조는 1심을 기소 6개월 이내에 ‘반드시 하여야 한다’는 강행규정이지만, 위반이 다반사다. 법원이 법을 무심히 어기는 상황이 더는 방치돼선 안 된다. 2·3심을 각각 3개월 안에 마치라는 규정을 지켜 확정판결은 내년 5월에 끝내 불필요한 사회 정치적 갈등과 혼란을 막아야 한다.
선거법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에서도 과도한 재판 지연이 수두룩하다. 정치인 관련 재판이 유독 심한데, 이미 제21대 국회의원 임기를 5개월도 더 전에 마친 윤미향 전 민주당 의원에게 의원직 상실형인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대법원에서 확정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윤 전 의원은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 횡령 등의 혐의로 2020년 9월 기소됐는데, 지난해 2월에야 벌금 1500만 원이 선고됐다.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 사건인데 1심 마무리에 2년5개월이나 걸렸다.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된 2심은 7개월 만인 그해 9월에 나왔지만, 대법원 확정판결이 1년2개월 더 걸려 지난 14일 내려졌다. 그동안 4년 의원 임기를 다 마쳐 뒷북 판결이나 다름없다. ‘지연된 정의는 부인된 정의’라는 법 격언에 딱 맞는 사례다.
‘부인된 정의’는 또 있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자녀 입시비리 등의 혐의로 2019년 12월 기소된 지 무려 4년여 만인 올해 2월 항소심에서도 징역 2년을 선고받았는데,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다. 문재인 정부 때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으로 기소된 같은 당 황운하 의원은 징역 3년의 1심 선고에만 3년10개월이 걸렸고 아직도 2심 재판 중이라 21대 국회의원을 다 마쳤고 22대 국회의원 임기도 오랫동안 누릴 전망이다. 조국 대표 아들에게 허위 인턴 확인서를 써준 최강욱 전 민주당 의원도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지난해 9월 확정될 때까지 3년8개월이나 걸렸다. 매우 단순한 사건인데도 대법원에서만 1년3개월을 끌어 국회의원 4년 임기를 거의 다 채우게 한 것으로, 사법부의 범죄 행위나 다름없다. 기본적으로 김명수 전 대법원장 때의 죄책이 크지만 현 ‘조희대 법원’의 책임도 작지 않다.⊙
11-20 실패의 가치

최현미 논설위원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가장 큰 실패. 마음껏 실패하라.”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실천은 쉽지 않은 이 메시지를 내건 흥미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21년에 설립된 ‘카이스트 실패연구소’(소장 조성호 전산학과 교수)가 8일부터 20일까지 진행 중인 ‘실패학회’다. ‘실패의 과학:다른 시각으로의 초대’를 주제로 실패 세미나, 학생들의 실패과제자랑대회, 실패담 에세이 공모전 등으로 꾸려졌다. 학생들이 실패담을 공유해 실패를 두려워 않고 도전정신을 키우자는 취지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인데 화제가 되면서 카이스트 캠퍼스 담을 넘어 기업, 재단 등의 관심과 협력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실패’라는 화두가 우리 모두의 절실한 곳을 콕 찌르기 때문일 테다.
“100등에서 10위권으로 가려면 앞선 기술을 카피하고 따라가면 됐다. 한국의 성장 방식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는 매뉴얼도 정답도 없다. 실패를 통해 스스로 정보를 얻어야 한다.” 조성호 소장이 말하는 ‘실패의 쓸모’다. “파산, 불합격 같은 실패도 긴 시간에서 보면 자양분이 된다. 실패를 수동적으로 경험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학’의 대가 에이미 에드먼슨 하버드대 교수도 최근작 ‘옳은 실패’(시공사)에서 “혁신과 발견을 위한 실험에서 성공을 미리 안다면 그건 실험이 아니다”는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 말을 인용하며 혁신과 변화엔 실패가 필수라고 했다. “당신의 목표가 혁신인데 실패하지 않았다면 혁신 시도를 ‘안 했다’는 증거”라고도 했다.
실패는 인류 역사와 함께해 왔지만, 개인에겐 늘 벅찬 상대였다. 특히, 우리는 실패에 박하다. 고도성장과 과도한 경쟁 속에 한 번 추락하면 두 번째 기회를 얻기 어려우니 실패는 두려움을 넘어 공포가 됐다. 실패의 기술이 더더욱 필요한 이유다.
에드먼슨 교수가 전하는 실패의 기술은 이렇다. 상황을 빠르고 공개적으로 알려 작은 실수가 큰 실패로 돌아오지 않게 하라. 잘못을 솔직히 말해 심리적 안정을 만들라. 그래야 새 도전에서 위험을 감내하고 익숙한 영역에서도 실패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심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개인의 각자도생식 기술만으로는 어림없다.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실패 철학과 기술이 절실하다.⊙
11-21 노벨 평화상의 유혹

이미숙 논설위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페루 리마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끝으로 다자외교 무대에서 퇴장한다. 퇴임을 2개월 남겨둔 레임덕 대통령으로서 지난 15일 리마에서 한미일 정상회의도 개최, 북·러 군사 협력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지난해 8월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를 통해 한미일 협력을 제도화한 대통령으로서 이 회의체에 각별한 애착을 보인 것이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회의장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4년 더 재임하면 한미일 협력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미일 관계 원로 전문가인 제럴드 커티스 컬럼비아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방한 간담회 때 “한일관계 정상화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일본 총리의 공이 크다”면서 ‘노벨 평화상감’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이니셔티브로 시작된 한일 협력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윤 대통령의 한일관계 개선 결단에 바이든 대통령이 화답하며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를 성사시킨 만큼 모든 게 잘 풀렸다면 한미일 정상 공동 노벨 평화상도 가능했을 것이다. 재앙적 TV토론 후 바이든 대통령은 재선을 포기해 3국 정상의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 꿈은 물 건너갔다. 더구나 일본의 전향적 과거 청산도 기대하기 어려워 커티스 교수가 생각하듯 한일 정상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어려울 듯하다.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 대선이 끝난 뒤 X(옛 트위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과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을 이끈다면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예정된 전쟁’의 저자인 앨리슨 교수가 미중 정상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이라는 올리브 가지를 내민 것은 서로 상처 입을 것이 뻔한 미중 패권전쟁 대신 우크라이나 종전협상을 주도하라는 제언이다. 트럼프는 1기 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해달라고 각별히 부탁할 만큼 이 상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이다. 재선 성공으로 그 열망은 더 커졌을 게 분명하다. 이제 시 주석만 협상의 무대로 유혹하면 우크라이나 전쟁도 끝이 보일 텐데,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
11-22(금) 부상하는 ‘박정희 핵무장론’

오승훈 논설위원
박정희 시대의 ‘핵무장론’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이 펴낸 월간 보고서(11월) ‘국가 정책 제안-2024 미국 대선과 한반도’는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2기를 앞두고 “박정희의 자주국방 노선이 공론장에 부상 중”이라고 진단했다. 하상응 서강대, 서정건 경희대, 차태서 성균관대, 전재성 서울대 교수의 심포지엄 발표 내용이다.
보고서는 “한미일 삼각협력을 통한 대중국 봉쇄라는 바이든 정부의 의제가 축소로 방향을 틀면서, 신냉전 진영외교 혹은 가치외교의 유효기간이 만료되고 ‘방기(Abandonment)’의 공포가 심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 주한미군의 철수 또는 재조정 등 제2의 닉슨 쇼크 우려가 점증하고 있단다. 이런 때 구 냉전 시대 사례들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며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의 벼랑 끝 전술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고, 박정희가 핵 개발을 추진하며 자주국방의 가능성을 타진했던” 사실을 꼽았다. “이니셔티브를 쥐고 미국을 설득할 수 있느냐가 국익 추구외교에 사활적 화두”라고 했다.
미국은 1969년 7월 ‘아시아 각국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주한미군 7사단 2만 명이 철수했다. 배신감 속에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내걸었다. 1970년 미사일 개발을 지시했고,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시설 도입을 목표로 삼았다. 우라늄광도, 농축기술도 없으니 재처리를 통한 플루토늄 확보가 답이었다. 캐나다에서 중수로 원자로 도입을 추진하면서, 프랑스와 접촉해 매년 핵폭탄 2∼4기를 만들 수 있는 재처리시설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그러나 1974년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이 핵 개발 포기를 종용했다.
박정희는 단념하지 않았지만 1979년 10·26이 터지면서 어둠에 휩싸였다. 미국은 전두환에게 묵시적 지지를 조건으로 압박했다. 1981년 끝내 핵 관련 연구가 금지됐다. 10년 뒤 노태우는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했다. 북한에 대한 핵사찰 압박 전략이었지만, 한국으로선 핵 주권 포기였다. ‘핵 인질’ 신세는 이때 예고됐다. (오인환 저 ‘박정희의 시간들’) 일본은 1967년 핵 제조·보유·반입 금지를 수용한 보상으로 우라늄 농축·재처리시설과 다량의 플루토늄을 확보했다.⊙
11-25(월) 참모와 신하

이현종 논설위원
성공한 리더 옆에는 어김없이 좋은 참모가 있다. 참모 자체가 능력이 출중할 수도 있지만, 리더가 훌륭한 참모를 고르고 그를 늘 곁에 두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능력이 훌륭한 참모라도 리더가 말을 듣지 않거나 부하로 취급한다면 제갈공명이 와도 불가능하다.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비서실장, 국방장관을 두루 지낸 도널드 럼즈펠드는 ‘럼즈펠드 규칙’이라는 백악관 참모론을 주장한 바 있다. 백악관 비서실장의 덕목으로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는다고 생각할 만큼 직언을 할 용기가 없으면 즉각 사임하라’고 했다. 또, 대통령 측근이 되는 대가는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에게 진실을 전달하지 않거나 상황을 왜곡해서 전달할 때 그 피해는 오롯이 대통령과 국민에게 돌아온다. 특히, 그는 “누구든 대통령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말할 기회를 박탈하거나 회의에서 제외하지 말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 쇄신을 위해 대통령실 참모와 내각 개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역대 대통령 중 집권 2년 반을 넘긴 윤 대통령이 참모를 자주 교체하는 축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서실장만 해도 김대기-이관섭에 이어 이번에 정진석 실장이 교체되면 1년에 1명꼴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참모들과 소통이 되지 않아 김기춘 비서실장조차 수시로 보고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 실장은 5선에 국회 부의장까지 지낸 정치인인데도 윤 대통령이 제22대 국회 개원식과 시정연설에 참석하지 말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지지율이 좋지 않고 거야(巨野)가 버티고 있는 국회를 대통령이 찾지 않겠다는 것은 사실상 정치 포기 선언과 다름없다. 직을 걸고라도 대통령의 국회 방문을 관철했어야 하는데 대통령의 심기만 살피니 스스로 참모가 아닌 부하를 자처한 것이다. 홍철호 정무수석은 지난 7일 대통령 기자회견 때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 명확히 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을 “무례하다”고 했다. 참모가 아니라 왕의 신하를 자처한 발언이다. 아마도 비서실 전체의 경직된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귀를 열지 않는다면 누가 다시 임명돼도 소용이 없다. 변화와 쇄신은 윤 대통령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11-26 지드래곤과 카텔란 바나나

최현미 논설위원
올겨울 패션을 좀 아는 남성이라면 실크 스카프 하나쯤은 준비해야 할 듯하다. 23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마마 어워즈 무대로 컴백한 지드래곤의 ‘보자기 패션’ 때문이다. 지디는 이달 초 홍콩 샤넬 쇼 출국길부터 마마 귀국길까지 어김없이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턱 아래에 묶은 독특한 공항 패션을 선보였다. 사진은 순식간에 SNS를 도배했고 일반 남성들이 스카프를 쓰고 출근하긴 어렵지만, 목에 두르거나 가방에 묶는 식의 유행이 예고되고 있다. K-팝 대표주자이자 패션 아이콘인 지디의 힘이지만 아주 흔한 셀러브리티(셀럽)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셀럽의 원래 정의는 ‘타고난 재능을 지닌 위대한 인물’이지만 요즘은 ‘명성과 상업적 성공을 가진 유명인’이다. 일단 유명해지면 대중의 열광과 추종, 돈을 끌어당기며 더 유명해진다. 사회학자 매슈 데프렘은 현대 사회는 “유명인에 대한 동경과 모방, 그 과정의 무한 반복”이라고 했다.
이 같은 셀럽 메커니즘은 미국 호황기인 1980년대 엔터테인먼트에서 폭발해 예술 등 전 영역으로 확대됐다. 모두가 셀럽이 되기를 원하고 기획해 만들기도 한다.
예술계의 대표 셀럽이라면 논쟁의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4)을 꼽을 수 있다. 마침 바나나 1개를 회색 접착테이프로 벽에 붙인 카텔란의 ‘코미디언’이 20일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620만 달러(약 87억 원)에 팔렸다. 낙찰자는 중국계 가상화폐 트론 창업자 저스틴 선. 그는 △바나나와 접착테이프 한 개 △바나나가 썩으면 교체할 방법을 알려주는 안내서 △작가 서명의 진품 인증서를 받았다. 선은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예술, 밈, 가상화폐 세계를 연결하는 문화 현상이다. 미래에 더 많은 생각과 토론을 일으켜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코미디언’은 예술적 전복과 대중의 논쟁 과정 자체를 예술 행위로 만든 의미가 있지만, 620만 달러는 작가 명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낙찰자 저스틴 선 역시 돈으로 명성을 사서 명성을 얻었다.
지디의 아티스트로서의 성취, 카텔란의 예술적 도발을 ‘셀럽’ 현상으로 무화시키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우리의 소중한 일상과 결정이 쏟아지고 밀려오는 셀럽의 블랙홀로 마구 휩쓸려 들어가지 않기를, 잠시 멈춰 생각해 본다.⊙
11-27 북한산의 태극기

이철호 논설고문
북한산에 외국인이 몰린다. 빼어난 경치는 물론 지하철로도 접근 가능하고, 휴대전화까지 빵빵 터지는 게 놀라운 경험이라고 한다. 정상의 백운대 태극기는 국제적 포토존이 됐다. 환경공단은 2015년 국립공원 정상에 어울리지 않는 인공 조형물을 싹 없앴다. 설악산 대청봉을 지켜온 ‘樂山樂水’ 표지석과 태극기도 사라졌다. 유일하게 백운대 태극기만 남았다.
백운대에서 사진사로 일하던 박현우 씨. 그는 1985년 혼자 힘으로 나무 깃대를 세우고 태극기를 달았다. 사진 배경은 근사해졌지만, 비바람이 워낙 드세 깃대는 자주 부러지고 태극기는 쉽게 해졌다. 15년 후 박 씨는 디지털카메라 등장으로 결국 산에서 내려왔다. 2000년부터는 개인택시를 모는 정왕원(74) 씨가 이어받아 관리한다. 정 씨는 24년간 태극기 교체 비용만 430만 원을 쓰며 사흘마다 백운대를 오르내린다고 한다. 공단 측은 팔짱을 끼고 있다. 인공시설을 불허한다는, 스스로 만든 원칙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이웃집 영웅들’이 백운대 태극기를 지켜낸 것이다.
북한산의 불편한 진실은 또 있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북한산’은 가짜뉴스다. 북한산의 백운대·인수봉·만경대는 서울시 땅이 아니다. 서울 강북구가 주인 행세를 하지만, 실제 행정구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아픔과 공무원들의 게으름이 있다. 조선 숙종 시절 북한산성을 다시 쌓으면서 공사 인부들이 모여 산 곳이 북한동이다. 왕이 피신할 행궁을 포함한 산성 내부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 한성부 직할로 편제했다. 하지만 1910년 일제가 500년 수도였던 한성부를 격하하기 위해 경성부로 바꾸고 경기도에 예속시켜 버렸다. 해방 이후에도 이를 바로잡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북한산성 밖은 은평구 진관동부터 강북구 우이동까지 서울시 소속이지만, 백운대를 포함한 산성 내부의 북한동은 경기도 고양시 땅이다. 북한동은, 국립공원 정비 계획에 따라 음식점을 하던 사람들도 다 나가고 사실상 주민 없는 땅이다. 조선 숙종 때도 그랬고 백운대·인수봉·만경대는 200년 넘게 서울 땅이었다. 서울이 1000만 대도시로 확장됐는데도 ‘북한산=경기도’로 둔갑해 있다. 역사적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엉뚱한 행정구역은 상식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11-28 위증·교사 있는데 위증교사 없다?

김세동 논설위원
재판에서 선서한 증인이 허위의 진술을 하면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형법 제152조에 규정돼 있을 정도로 위증은 심각한 사법방해죄다. 그런데 그런 위증을 교사(敎唆)한 자는 위증범보다 더 엄하게 처벌한다. 2022년 이후 위증교사 혐의로 기소돼 1심 판결받은 65건 71명 중 70명(98.6%)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위증범과 교사범이 같이 재판받은 41건 중 37건에서 교사범이 더 높은 형량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 25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위증교사 혐의 1심 판결에서 위증한 전 성남시장 수행비서 김 씨에겐 유죄가 인정돼 벌금 500만 원이 선고됐는데, 정작 증언을 요청한 이 대표에겐 무죄가 내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는 KBS PD와 짠 검사 사칭으로 벌금 150만 원을 확정받은 이 대표가 2018년 경기지사 선거 때 “PD가 사칭하는 데 옆에 있다가 누명 썼다”고 했다가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된 재판에서 김 씨에게 ‘KBS와 성남시장 간에 이 대표를 주범으로 몰자는 협의가 있었다’는 허위 진술 요구 혐의를 무죄라고 했다.
법원의 판결은 김 씨가 왜 처벌받을 것을 각오하고 이 대표가 시키지도 않은 위증을 했다는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재판부는 김 씨가 한 위증을 이 대표가 요청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위증교사 고의성이 없었다’ ‘통화 당시 김 씨가 부탁대로 증언할 것인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고 했는데, 무죄를 전제하고 무리하게 법리를 전개한 ‘기교 사법’이라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위증’도 있고 ‘교사’도 있는데 ‘위증교사’는 없다는 신기한 판결이다. 2020년 이 대표 선거법 위반 상고심에서 권순일 대법관의 “TV 토론회 중의 거짓말은 허위사실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창조적 판결’에 비견된다.
2018년 선거법 위반 재판에서 ‘검사 사칭은 누명’ 부분이 무죄가 돼 ‘친형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키려 한 사실이 없다’는 혐의만 남아 항소심의 벌금 300만 원 당선 무효형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돼 이 대표가 기사회생하는 데 일조했다. 만약 위증교사가 없었다면 상고심에서 2심 유죄 판결을 뒤집기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재판부를 속이고 농락한 가중 처벌 대상인데도 무죄가 된 만큼 항소심에서 제대로 된 판결이 나올 것이란 예상이 많다.⊙
11-29(금) 中에 지친 ‘신공지능’

문희수 논설위원
세계 바둑 최강인 신진서 9단은 올해 예상 밖으로 부진한 모습이다. 연초부터 메이저대회인 LG배를 세 번째 제패하고, 한중일이 격돌한 2월 농심배에서도 기적 같은 6연승으로 한국의 우승을 이끌며 쾌조의 출발을 보여, 올해는 세계 대회 싹쓸이도 가능하다는 전망까지 나왔지만, 이후엔 잇따라 좌절했다. 메이저대회만 3월 춘란배·5월 LG배·7월 응씨배에서 모두 16강에서 탈락해 충격을 줬다.
올 마지막 메이저대회였던 최근의 삼성화재배에서도 중도 탈락했다. 32강전에선 중국의 차세대 에이스로 꼽히는 왕싱하오 9단, 16강전에선 삼성화재배를 두 번 우승했던 커제 9단을 각각 제압했지만, 사실상의 결승전이던 전년 우승자인 딩하오 9단과의 8강전에서 뜻밖의 수읽기 착오로 졌다. 최근 5연승을 기록 중이던 상대에게 충격 패를 당했다.
이번에 우승했다면 올 3개 메이저대회 제패로 세계 최강을 재확인할 수 있었기에 더욱 아쉽다. 지난 8월 메이저대회인 란커배에서 구쯔하오 9단을 다시 만나, 지난해 결승전에서 1승 후 2패로 역전패를 당했던 것을 설욕하며 우승했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또 중국에 막혔다. 컨디션이 떨어져 있음을 방증하는 결과다. 딩하오 9단도 “신진서가 정상 컨디션이었으면 많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을 정도다.
신 9단의 부진은 이례적이다. 승률만 봐도 확연하다. 매년 승승장구하며 신기록 행진을 벌여 왔지만, 올해는 아직 한 달 남긴 했지만 84% 수준에 그쳐, 2021년 (82.47%) 이후 최저치인 상황이다. 슬럼프가 아니냐는 우려를 살 만하다.
인공(人工)지능 뺨치는 ‘신공(申工)지능’ 신진서도 최근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많이 이길수록 대국 수가 많은 법이다. 세계 정상을 지키려면 피할 수 없다. 중국을 넘을 최강 카드는 역시 신 9단뿐이다. 국내 2위 박정환 9단·3위 변상일 9단은 역부족이다. 신 9단은 한창나이(24세)다. 실력은 세계 최강인 만큼, 앞으로 체력·컨디션 관리가 중요하다. 중국은 그를 견제하려고 자국 대회 일정을 빡빡하게 짜는 양상이다. 최근 난양배만 해도 삼성화재배 개막 1주일 전까지 5일간 네 경기(준결승 포함)를 치렀던 강행군이었다. 내년부터는 대회를 선별해 출전할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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