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物相(조선일보) 2024-11/ 11.01(금) 러시아식 벌금 2간루블 - 11.30(토) 설해목
萬物相(조선일보) 2024-11/
11.01(금) 러시아식 벌금 2간루블

▲일러스트=이철원
러시아가 미국 IT 기업 구글에 부과한 벌금 누적액이 2간(澗)루블, 달러로 환산하면 200구(溝)달러에 달한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1구는 10의 32제곱, 1간은 10의 36제곱이다. 1조(兆)가 10의 12제곱, 1경(京)이 10의 16제곱이니 1구는 1경의 1경배다. 지난해 전 세계 GDP가 105조달러이니 ‘벌금 200구달러’는 세계 GDP의 10의 20제곱 배가 넘는다.
▶구글이 러시아 친정부 매체의 유튜브 채널을 차단하자 러시아 법원은 그 매체의 유튜브 채널을 복원하라고 판결했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매일 10만루블(약 142만원)씩 벌금을 내라고 했다. 벌금을 즉각 안 내면 2배씩 늘어나도록 해 이런 천문학적 벌금이 쌓였다.
▶지난해 현대차는 가동을 멈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1만루블(약 14만원)에 팔고 나왔다. 2년 내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조건이 붙었지만 현재로선 되찾을 기약이 없다. 프랑스 르노는 20달러에, 닛산과 마쓰다는 각각 1달러에 자산을 넘기고 러시아를 떠났다. 이렇게 떠난 기업들은 러시아 기업으로 바뀌었다. 스타벅스가 스타스 커피로 바뀐 식이다.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서방이 경제 제재를 하는데도 러시아 경제는 되레 호황이라고 한다. 실업률은 최저, 실질임금은 두 자릿수 상승이다. 지난해 성장률이 3.6%였고 올해도 3.6% 성장이 예상된다. 그 비결이 ‘전시 경제’다. 러시아는 정부 예산의 30%가량을 국방비로 쏟아붓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 600억달러 정도였던 국방비가 올해 1400억달러에 달한다. 모든 군수 공장이 풀가동된다. 너무 많이 죽은 병사를 채우기 위해 러시아 평균 임금의 3배도 넘는 돈을 초봉으로 제시해 지난해 군인 35만명을 모집했다. 올해는 초봉을 2배로 인상해 병사를 모집한다. 높은 임금 외에도 부상비, 사망 가족 위로금 등 파격 대우를 해준다. 자국민으로 모자라 쿠바, 네팔, 우간다 등 세계 최빈국 청년들을 용병으로 모집하고 있다. 북한 파병도 러시아의 인력난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저소득층이 높은 임금을 받고 전쟁터와 군수 공장에 투입되면서 소비도 호황이다.
▶하지만 정부가 동원 가능한 자금을 모두 끌어 쓰니 국부 펀드의 유동 자산은 44% 줄었다. 정부의 돈 풀기로 인플레이션이 9%대로 치솟았다. 인플레 억제를 위해 지난해 7.5%이던 기준 금리가 올해 21%까지 높아졌다. 엘리트 젊은이들은 러시아를 대거 떠났고 정부가 푸는 돈은 전쟁의 포화로 증발하고 있다. 이 위험한 질주의 끝이 궁금하다.
11.02(토) '바나나 공화국' 정치

▲일러스트=박상훈
‘마지막 잎새’로 잘 알려진 미국 소설가 오 헨리는 1896년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에서 반년 정도 살았다. 온두라스 산업은 바나나 농장이 거의 전부였다. 잘 살려면 공업도 함께 일으켜야 했지만 다국적 농산물 회사와 결탁한 정치인들이 이를 막았다. 정정도 몹시 불안했다. 1838년 독립하고 반세기 뒤 오 헨리가 방문할 때까지 수백 건의 쿠데타와 정권 교체를 겪었다. 미국에 돌아온 오 헨리는 단편집 ‘양배추와 왕들’에 이 이야기를 쓰면서 온두라스를 ‘바나나 공화국’이라 불렀다.
▶그 후 바나나 공화국은 한두 가지 농산물이나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느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정치는 부패한 나라를 멸시하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처음엔 온두라스 등 중남미의 가난한 독재국가들을 지칭했다. 하지만 부패 스캔들이나 정치적 추문이 터진 선진국에서도 자괴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쓰임이 확대되고 있다.
▶미국에선 트럼프가 대선에서 패배한 이듬해인 2021년 미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이 터지자 “여기가 바나나 공화국이냐”는 탄식이 쏟아졌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바나나 공화국에서 선거를 논쟁하는 방식”이라 지적했고 트럼프의 최측근이었던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마저 “바나나 공화국에선 군중의 폭력이 권력 행사를 결정한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권영세 의원이 1일 라디오에 출연해 한국 정치를 바나나 공화국에 빗댔다. 방송 진행자가 “조국혁신당이 탄핵 초안을 쓰고 있다”고 하자 권 의원은 “탄핵이 돼서는 안 될 사안들이 탄핵을 해서 공무원 직무는 정지되지만 실제로는 각하도 되고 기각이 된다”며 “이런 부분들은 우리 정치가 어디 바나나 공화국 정치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툭하면 탄핵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풍조가 의사당 폭동으로 권력을 지키려 했던 트럼프 방식과 닮았다는 비유인 듯하다.
▶국가 이미지는 한 번 굳어지면 개선하기 어렵다. 7세기 당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강한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이후 토번 등과 싸울 때 연전연패하자 ‘당나라 군대’가 오합지졸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했다. 온두라스도 정치가 안정되고 부강해졌다면 바나나 공화국 이미지를 일찌감치 벗어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직전 대통령조차 마약 유통에 간여한 게 들통나 올해 수감됐으니 ‘도로 바나나 공화국’이다. 한국은 사회 각 분야에서 K자를 이마에 붙이고 질주하는 나라가 됐다. 그런데 정치만큼은 후진 기어 넣고 달리며 ‘바나나 공화국’ 멸칭까지 상륙시키는 수준이다.
11.04(월) "남편 몰래 투표하라"

▲일러스트=이철원
작년에 조사했더니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연애·결혼을 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8%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정치 성향이 다르면 친구·지인과 술자리도 못한다’가 33%,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함께 못한다’가 무려 71%였다. 올해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호전되진 않았을 것이다. 사회가 통합도는 하락하고, 갈등은 심화되는 추세인데, 부부도 이 갈등의 골에 휩싸이곤 한다.
▶여성 커뮤니티에는 구구절절 사연이 많다. 남편은 윤 대통령 지지, 아내는 야당 대표 지지, 혹은 반대가 된 사연들이다. ‘정치 얘기는 하지 않는다, 매번 싸움으로 끝난 뒤 터득했다’는 글이 눈에 띈다. ‘한 이불 덮고 살기 힘들다’ ‘사고 회로가 달라 끔찍하다’는 절실한 의견도 있다. 결국 대화는 단절되고, ‘남편은 거실, 아내는 안방에서 따로 유튜브 본다’고 했다. 어떤 회원은 ‘남편하고 싸울 정도로 정치인이 국민 위한다고 생각지 않아요, 좌든 우든’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가 미 대선을 앞두고 “남편 몰래 해리스에게 투표하자”는 광고를 내보냈다. 당장 트럼프 쪽 폭스뉴스 진행자가 “사실상 불륜 아니냐”며 발끈했다. 다소 억지스럽긴 했으나 배우자 몰래 무슨 일을 하면 그게 곧 불륜 아니냐는 소리였다. 백인 밀집 지역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로버츠 광고’는 보수층 남성이 집안 목소리가 크다고 본 것 같았다. ‘남편 모르게 트럼프 찍자’는 광고는 못 들어봤다.
▶지인 집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아파트 거실 앞쪽에 십자가가 걸려 있고, 뒤에는 부처님이 좌정하고 있었다. 상당한 크기였다. 부부가 종교가 달라서 그렇게 합의했다고 한다. 가족이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이 제각각이란 얘기는 약과다. 중계 TV 앞에서 티격태격하다 금세 돌아설 수 있다. 취미가 달라도 교집합을 찾을 여지는 있다. 그런데 부부 사이에 대선 지지 후보가 갈리면 간단치 않다.
▶인공지능에게 물었더니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 하란다. 정치 성향이 다르면 ‘서로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고, 개인도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모범 답안 같기도 하고, 하나 마나 한 소리 같기도 했다. 인터넷에는 ‘남편 몰래 할 수 있는 것’으로 비밀 재산 만들기, 사채 쓰기, 친정에 돈 펑펑 주기, 출장 떠나는 남편 미행하기 같은 게 떠 있다. 책임 못 질 소리들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투표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란 로버츠 목소리는 좀 솔깃하다./
11.05 인텔 쫓아낸 '다우존스 지수'

▲일러스트=이철원
140여 년 전 뉴욕증권거래소를 취재하던 신문기자 찰스 헨리 다우(1851~1902)는 정제된 정보 유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료 기자 에드워드 존스와 함께 ‘주식 정보지’를 만들어 팔았다. 다우가 만든 정보지는 뛰어난 글솜씨와 탁월한 분석 덕에 불티나게 팔렸다. 다우는 몇 년 뒤 경제신문 ‘월스트리트 저널’을 창간, 초대 편집장이 된다.
▶다우는 주식투자 역사에서 ‘기술적 분석’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증시는 상승·하락장을 반복하기 때문에 ‘추세’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고, 추세 파악에 도움이 될 지수를 개발했다. 각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을 추려내 주가를 평균하는 개념이었다. 1896년 제너럴일렉트릭(GE) 등 12개 대표 기업의 일평균 주가로 구성된 다우존스 지수가 첫선을 보였다. 이후 18종목이 추가돼 1928년 이후엔 총 30종목으로 구성됐다.
▶다우존스 구성 종목은 지수산정위원회가 시장 흐름, 기업의 영향력, 성장성 등을 종합 판단해 부정기적으로 교체한다. 다우존스 종목 변화를 보면 미국의 산업 변천사가 보인다. 원년 멤버엔 석유·석탄 등 에너지 기업이 많았다. 1980년대 이후 미국 산업의 중심축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정보통신(IT)으로 옮겨간다. 1990년대 후반 웨스팅하우스를 쫓아내고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새로 편입했다. 2004년엔 코닥, 글로벌 금융 위기 땐 제너럴모터스(GM)가 쫓겨났다. 2015년엔 AT&T가 퇴출되고 애플이 추가됐다. 2018년엔 마지막 원년 멤버 GE마저 쫓겨났다.
▶다우존스 지수는 산업의 변화 흐름을 좇아 편입 기업을 계속 물갈이하기 때문에 대공황, 2차 세계대전, 오일 쇼크, IT 버블 붕괴, 글로벌 금융 위기 등 온갖 풍파 속에서도 120년간 장기 우상향하는 성과를 보여왔다. 40선에서 출발한 지수는 1972년 1000, 1987년 2000, 1995년 5000. 1999년 1만, 2017년 2만, 2020년 3만포인트를 돌파했고, 지난 5월엔 4만포인트를 넘어섰다.
▶8일부터 다우존스 지수에서 인텔이 빠지고 엔비디아가 새로 편입된다고 한다. 세계를 호령했던 반도체 제국, 인텔이 모바일·AI 혁명에서 뒤처져 25년을 넘기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기술 산업 지형의 변화를 뚜렷이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했다. 기업의 살 길은 혁신뿐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다. 다우존스 128년 우상향 그래프를 만들어준 미국 경제의 혁신성과 역동성이 부럽기만 하다.
11.06 게임 같은 드론 전쟁

▲일러스트=박상훈
지난 8월 미국 워싱턴DC의 국립건축박물관에 미국, 영국, 캐나다 국가가 울려 퍼졌다. 세 나라 각 군(軍)의 대표 게이머들이 전쟁 게임 ‘콜오브듀티’ 실력을 겨루는 대회가 열린 것이다. 역대 다섯 번째로 열린 올해 대회에서는 미 육군의 e스포츠팀이 우승을, 영국 공군팀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2020~2021년 이 대회를 연패(連覇)한 미 우주군은 우승을 축하하는 뜻에서 트로피를 우주로 발사했다.
▶2018년 미 육군이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어 신병을 모집하기 위해 게임 전문인 e스포츠팀을 만든 후 해군, 공군, 우주군, 해병대, 해양경비대도 모두 팀을 창설했다. 올 초에는 영국 육군도 전술 슈팅 게임 ‘포트나이트’를 활용한 모병용 영상을 만들었다. 영국 랭커스터대의 마크 레이시 부교수는 이에 대해 “군이 어떤 새 기술을 찾고 있는지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컴퓨터 게임이 이용될 여지가 커졌다는 것이다.
▶군사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기 위한 보드게임은 고대부터 있었다. 로마군은 모래판 위의 미니어처 군대를 움직여 전쟁을 계획했다. 바둑이나 체스도 그 일종이다. 최초의 컴퓨터 전쟁 게임은 미 존스홉킨스대에 설치된 육군작전연구실이 1948년 개발한 ‘방공 시뮬레이션’이었다고 한다. 미군은 풀스펙트럼워리어,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들을 실제 훈련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 육군은 2028년까지 훈련용 게임과 시뮬레이션 개발에 260억달러(약 36조원)를 투입할 예정이란다.
▶우크라이나와 가자 전쟁에 본격적으로 투입된 드론은 전쟁을 더욱 게임처럼 만들고 있다. 드론 조종사는 드론에서 전송된 장면이 보이는 스크린 앞에 앉아 먼 곳의 적을 추적하고 제거한다. 상대의 피를 볼 일이 거의 없다. 인간 조종사가 있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AI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적의 선별, 추적, 타격까지 컴퓨터가 알아서 한다.
▶‘괴짜 게이머’들이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치명적인 드론 조종사가 되고 있다고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드론 조종에는 빠른 판단과 눈과 손의 기민한 협응이 필요한데, 이런 능력은 실제 전투보다 컴퓨터 게임과 더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1년 반 동안 300명 이상의 러시아군을 제거한 29세의 우크라이나군 드론 조종사 올렉산드르 다크노는 어린 시절 너무 열심히 게임을 해서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곤 했다. 게임 강국인 한국에 이런 드론 조종사 유망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을지도 모르겠다.
11.07 상원 의원

▲일러스트=이철원
키 2m가 넘는 거구의 미국 민주당 초선 존 페터먼 상원의원은 지난해 종종 후드티와 반바지를 입고 등원해 ‘눈총’을 받았다. 논란이 계속되자 지난해 9월쯤 다수당이었던 민주당 원내대표가 페터먼 상원의원을 옹호하는 성명을 냈다. 미 상원엔 남성은 정장에 타이, 여성은 어깨를 가리는 원피스나 바지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암묵적 규정이 있었다. 이 암묵적 규정이 ‘폐지’될 상황이었다. 그러자 야당인 공화당은 물론이고 민주당 의원들까지 반발했다. 10여 일 후 “상원 본회의장에서는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다른 곳은 몰라도 미국 상원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영국 등을 본떠 양원제를 채택하면서, 상원의 이름을 고대 로마의 ‘원로원(Senatus)’을 따라 ‘세네트(Senate)’라고 했다. 그 이름과 같은 자부심과 권위를 갖고 있다. 미국 하원의원은 철저히 인구 비례로 선출된다. 현재 전국에서 435명이다. 하지만 상원은 인구가 많은 주(州)와 적은 주의 대표성을 동등하게 보장하기 위해 50개 주에서 2명씩 100명이 선출된다. 하원의원은 지정석이 없지만, 상원의원은 본회의장에 개인 책상이 있다. 1819년부터 내려온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책상이다.
▶미국 상원의원은 스스로 자신을 ‘대통령급’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하원은 주로 세금과 예산 등 ‘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상원은 ‘인사’에 관한 사안을 처리한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하관계는 명백히 존재한다. 1959년부터 2010년 작고할 때까지 51년간 재임한 최장수 상원의원 로버트 버드는 “나는 11명의 미국 대통령과 ‘함께’ 일했다. 그 누구 ‘밑’에서 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상원의원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탄핵소추권은 하원에, 탄핵심판권은 상원에 있다. 상원의원 3분의 2 이상이 ‘유죄’라고 판단하면 대통령은 즉시 퇴출된다. 상원은 미국이 체결하는 모든 조약의 비준권을 갖고 있다. 각료, 대사, 연방판사, 고위 공직자에 대한 인준도 상원의 고유 권한이다. 상원의원들은 정부의 기밀 브리핑도 받는다.
▶미국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러진 연방 상·하원 선거에서 뉴저지주 한국계 앤디 김(42) 연방 하원의원이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한국계가 상원에 입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외의 한국계 정치인이 오른 최고위직일 것이다. 국무부와 백악관에서 일했던 외교·안보 전문가인 그가 한미 동맹에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11.08 또 틀린 美대선 여론조사

▲일러스트=박상훈
2016년 11월 12일 프린스턴대의 여론조사 전문가 샘 왕 교수가 반려동물용 귀뚜라미 통조림을 들고 CNN에 출연했다. “제가 틀렸어요. 많은 사람이 틀렸지만, 남들은 저 같은 약속을 하진 않았죠.” 왕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꿀에 버무린 귀뚜라미를 꿀꺽 삼켰다. 그는 그해 11월 8일 미국 대선을 사흘 앞두고 CNN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승리할 것이라며 “도널드 트럼프가 이긴다면 벌레를 먹겠다”고 약속했다. 결과는 트럼프의 승리였다.
▶한국에서도 작은 지역을 대상으로 작은 표본으로 조사하는 총선 여론조사는 종종 틀리지만 전국 대선 여론조사는 대부분 맞는다. 2016년 미 대선 여론조사가 틀린 것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 특유의 ‘선거인단 제도’를 핑계 삼았다. 당시 힐러리는 전국에서 트럼프보다 약 290만 표를 더 받았다. 미국인 전체의 여론을 본다면 힐러리 승리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트럼프는 소수 경합주에서 0.2~0.7%의 미세한 차이로 승리했는데, 여론조사 오차범위에 속한다.
▶하지만 4년 후인 2020년 대선에서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다. 여론조사대로 민주당의 조 바이든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여론조사보다는 트럼프 표가 더 많이 나왔다. 바이든이 승리한 주(州)에서도 트럼프가 예상보다 평균 2.6%를 더 득표했고, 공화당 텃밭에서는 6.4%를 더 득표했다. 이를 두고 바이든 지지자들이 코로나 때문에 집에 더 머물러서 여론조사 전화를 받을 확률이 더 높다거나, 트럼프 지지자들은 언론과 여론조사를 불신해서 답변을 안 한다는 등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올해도 여론조사는 ‘샤이 트럼프’를 집어내지 못했다. 선거 막판 ‘초박빙’을 예상한 조사가 많았지만, 투표함을 열어보니 트럼프의 압승이었다. 그런데도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선거 당일 아침 해리스 승리 가능성이 56%로 높아졌다고 했다. CNN이 발표한 당일 출구조사에서도 해리스를 선호한다는 답변이 더 많았다. 진보 언론의 ‘희망’이 반영됐다고 할 수도 없다. 여론조사는 조사 회사가 하는 것이지 언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여론조사만 틀린 것이 아니다. 미국 역사학자 앨런 릭트먼은 여론조사 대신 자신만의 지표를 개발해 1984~2020년 10번의 미국 대선 중 9번의 승자를 맞혔다. ‘대선 예측의 구루(권위자)’로 불리는 그도 올해는 해리스의 승리를 예측했다가 틀렸다. 트럼프를 지지하지만 지지한다고 말을 안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11.09(토) 돈은 먼저 알았다

▲일러스트=박상훈
2024 미국 대선에서 미국 주요 여론조사 기관은 예측에 실패했지만 글로벌 베팅 사이트 ‘폴리마켓’은 거의 유일하게 트럼프 승리를 일찌감치 예측했다. 폴리마켓은 지난 10월 중순부터 트럼프 당선 가능성을 66%까지 봤다. 일론 머스크는 “돈이 걸려 있어 여론조사보다 정확하다”고 했다.
▶폴리마켓은 뉴욕 출신 26세 청년 셰인 코플란이 4년 전 창업했다. 코플란은 13세 때 가상 화폐 채굴을 시작했고 2014년 이더리움이 단돈 30센트에 사전 판매할 때 최연소 구매자로 참여했다. 뉴욕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는데 대학을 중퇴하고 독서와 새로운 사업 구상에 빠져 지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 자신의 X(트위터) 계정에 “돈이 바닥나고 있는 1인 창업자, 본사는 집 욕실에 임시로 차린 사무실”이라고 글을 띄웠다. 미국은 선거 도박을 허용하지 않아 미국 사용자들은 차단을 우회해 폴리마켓에 접속한다.
▶영국은 선거 도박이 합법이어서 온라인 베팅 업체가 여럿 있다. 온라인 베팅 업체 ‘베트페어 익스체인지’에서는 2004년 미국 대선 당시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90%를 베팅했다. 2008년과 2012년에는 판돈 90% 이상이 버락 오바마에게 몰렸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국민투표로 결정하고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2016년 이후 선거 도박 시장이 급성장했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높아진 만큼 판돈도 커진 것이다.
▶역대급 선거 도박이 펼쳐진 2024 미국 대선에서 최대 수익자는 테슬라 창업자 머스크다. 1억3200만달러를 캠프에 기부하고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 승리 후 테슬라 주가가 강세를 보여 단 이틀간 시가총액이 1450억달러(약 200조원)나 늘었다. 폴리마켓에 4개의 계정을 가진 ‘프레디 9999′라는 인물은 트럼프 당선 예측으로 총 4800만 달러(약 672억원)를 번 것으로 추산된다. 익명의 프레디 9999는 금융 투자에 경험 많은 프랑스 출신의 통계학자로 알려졌다.
▶돈을 걸고 베팅하는 예측 시장은 새로운 정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참여자 의견이 실시간 반영된다. 정보가 초 단위로 유통돼 주가가 출렁이는 증시와 비슷한 속성이다. 누가복음 12장 34절은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했다. 돈 되는 곳으로 기민하게 움직이는 마음을 실시간 반영하는 기술과 시장이 선거에도 번성하고 있다. 응답자들이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실시간 업데이트도 안 되는 여론조사가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듯하다.
11.11(월) 4B 운동

▲일러스트=김성규
2016년 10월 3일 검은 옷을 입은 여성 수만 명이 폴란드 각지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집권 여당이 낙태를 전면 금지하려고 하자 여성들이 직장, 학교, 집안의 모든 일을 내려놓는 ‘총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새 법이 통과되면 임부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도 의사가 아무 조치를 할 수 없게 될 상황이었다. 여성들이 모든 일을 거부하고 시위에 돌입하자 정부와 의회가 한 발 물러섰다.
▶여성들이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 것은 유래 깊은 일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파네스는 남편들이 전쟁을 멈추게 만들려고 아테네 여성 주인공이 스파르타 여성들과 연합해 ‘섹스 파업’을 하는 내용의 희극을 썼다. 이를 본떠 2006년 콜롬비아에서는 만연한 폭력을 줄이자며 갱단 단원을 남편이나 남자친구로 둔 여성들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필리핀, 벨기에 등에서도 정치적 목적의 성관계 거부 운동이 있었다.
▶여성 운동가가 남성 위주의 사회에 종속되지 않겠다며 결혼과 출산을 꺼린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미국 여성계 대모인 글로리아 스타이넘(90)은 1987년 결혼 제도가 불평등하다며 “결혼을 하면 당신(여성)은 반쪽짜리 하찮은 사람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66세가 되던 2000년, 배우 크리스천 베일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베일과 뒤늦은 결혼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변한 것이 아니라 결혼 제도가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쪽으로) 변했다”고 했다.
▶2017~2018년쯤 한국 여성운동가들 사이에서 ‘4B’ 운동이 시작됐다. 비(非)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을 뜻한다.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상습적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폭로돼 ‘미투’ 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한국에서는 웹하드 업체들이 피해자 고통은 외면한 채 불법 촬영 음란물을 조직적으로 유통시켜 돈을 벌었다는 ‘웹하드 카르텔’ 사건이 터졌다. 남성과의 만남 자체가 불안하다는 여성이 늘면서 ‘비혼’ ‘비출산’에 연애와 섹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추가됐다.
▶트럼프의 대선 승리 후, 미국 진보 여성들 사이에서 한국의 ‘4B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 등이 보도했다. 구글에서 ‘4B 운동’의 검색량이 급증했고 ‘4B’ 해시태그를 단 소셜 미디어 콘텐츠도 인기라고 한다. CNN은 ‘비혼(bihon), ‘비섹스(bisekseu)’처럼 한국어를 그대로 옮겨 4B를 설명했다. 한국 문화가 세계적 주목을 받으며 K페미니즘까지 수출되는 모양이다. 얼마나 호응이 있을지 모르겠다.
11.12 비만 기준 변화

▲비만 관련 이미지. /조선일보 DB
3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소아 자폐 진단율은 1만명 중 1명꼴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50명당 한 명꼴로 자폐 진단을 받고 있다. 자폐 진단률이 30년 전 0.01%에서 2%로 200배 증가한 것이다. 실제 환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일까. 의사들은 그렇지 않고 최근 들어 자폐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그만큼 진단 환자 수가 늘었다고 보는 게 맞는다고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우리나라 갑상선암 발생률은 세계 평균의 10 배, 일본의 15 배에 달한다. 세계 의학계에서도 기이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0년 전 갑상선암 발생률이 과잉 진단 때문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3위까지 내려갔다가 슬금슬금 올라오더니 다시 암 질환 중 3년째 발생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별한 발암물질이나 공해가 늘어난 것이 아니다. 과도한 갑상선 초음파 검진과 무분별한 암 진단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 있다.
▶체질량지수(BMI)는 몸무게(㎏)를 신장의 제곱(㎡)으로 나눈 값으로, 비만 기준으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BMI 25 이상이면 ‘비만’으로 분류하지만 실제로는 BMI 25 부근에서 사망 위험이 가장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를 토대로 비만 기준을 BMI 27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은 30 이상이고, 중국도 이미 BMI 28 이상을 기준으로 쓰고 있다. 현재 한국인 남자 48%가 비만인데, 기준을 27로 올리면 22%로 줄면서 절반 이상이 뚱보 멍에를 벗을 수 있다.
▶우리나라 20세 이상 인구의 30.1%, 약 1300만명이 고혈압 환자다. 당뇨병 환자는 600만명이 넘고 당뇨병 고위험군인 당뇨병 전 단계 인구까지 합치면 2000만명이 넘는다. 그런데 현재 고혈압 기준인 140/90㎜Hg 이상을 130/80㎜Hg 이상으로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 의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그럴 경우 1900만명이 고혈압 환자로 분류될 수 있다. 성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고혈압을 진단받는 것이다.
▶질병 기준이 변하면 멀쩡한 사람도 환자가 될 수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제약 회사 매출과 해당 분야 의사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다. 시대 변화와 연구 성과에 따라 변할 수 있겠지만 질병 기준을 낮춰 환자가 늘어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질병 양산 시대다. 건강 목표가 높아서 나쁠 것은 없지만 이것이 개인 차원이 아닌 의료의 기준이 되면 부작용도 초래할 수 있다. 최선에 집착하다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는 얘기다.
11.13 딸이 된 아들

▲일러스트=박상훈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스스로 ‘비너스’라 칭하고 여신처럼 행동했다. 여자 옷을 입고 화장을 하며 남자들과 연애했다. 의사들에게 성전환까지 의뢰했다고 한다. 남성적 권위와 전통을 숭상한 로마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지지했지만 외조모는 끝까지 반대했다. 결국 외조모와 귀족들의 반발로 재위 4년 만에 암살되고 기록 말살형에 처해졌다.
▶성 정체성 혼란은 주위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다. 부모는 말할 것도 없다. 50대 지인이 딸을 둔 남성과 중매로 결혼했다. 남편 딸을 처음 만났는데 180cm 넘는 거구에 영락없는 남자였다. 놀란 아내에게 남편은 “죽을 각오로 아들을 말렸지만 결국 성전환 수술을 했다”고 고백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는 ‘아들 같은 딸’을 바라보는 두 사람은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원조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부모는 TV에서 “2대 독자인 내 아들을 아직 딸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트랜스젠더 유튜버 풍자는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날 찌르고 가라’며 6시간 동안 칼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고 했다. 이런 갈등은 소설에도 등장한다.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어머니는 게이 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도 “끝까지 보살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김지연의 ‘사랑하는 일’에서 아버지는 동성애 자녀에게 “집 한 채 물려줄 테니 끝까지 소문내지 말고 살라”고 부탁한다.
▶부모는 자식이 정상적 가족·사회 일원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자녀가 혹시나 사회적 시선에 고통 받을까 봐 걱정한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 바뀌어 성 정체성 논란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트랜스젠더 모델 최한빛은 “울며 반대한 아버지가 수술 후 꼭 안아주셨다”고 했다. 풍자도 “10년 만에 아버지가 ‘된장찌개에 밥 했으니 집으로 오라’고 부르셨다”고 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 바뀔 수는 없겠지만 이들 부모의 고통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트럼프 시대의 실세로 등극한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내 아들이 ‘워크(woke·정치적 올바름)’에 의해 살해됐다”고 말해 화제다. 그의 아들은 2020년 성전환 수술을 한 뒤 아버지와 절연하고 이름도 바꿨다. 보통 실리콘 밸리 등 첨단 산업 종사자들은 민주당 지지가 많은 편이다. 머스크도 그랬다고 한다. 그 머스크가 공화당, 그것도 트럼프 적극 지지로 바뀐 것도 아들이 준 충격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 어떤 일이 이보다 큰 충격이 될 수 있을까 싶다.
11.14 "남녀 공학 안 할래요"

▲일러스트=이철원
1950년 단과대학으로 출발한 동덕여대를 종합대학으로 키운 이가 조용각(전 동덕학원 이사장) 박사다. 지금 그의 흉상은 밀가루와 계란, 케첩으로 얼룩져있다. 학교가 남녀공학 전환을 논의한다는 소식에 총학생회 주도로 시위가 벌어졌다. 본관 앞 플래카드에 이렇게 적혀있다.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
▶‘여자대학’은 혁명의 산물이다. 프랑스혁명, 산업혁명, 미국 독립혁명 이후 여성에게 고등교육 기회가 열렸다. 1830년대 미국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 조지아여대 등이 개교했다. 여성은 남성과의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에 따로 학교를 만들어 우대해줘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진일보한 여성 차별’ 의식이다. 미국에는 1960년대까지 280개가 넘는 여대가 있었고, 명문 7개 대학을 따로 ‘세븐 시스터스’라고도 불렀다.
▶전 세계적으로 여대는 퇴조하고 있다.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은 하버드대-래드클리프 여대 커플이었다. 래드클리프 학부는 하버드에 흡수됐고, 이제 대학원 과정만 남았다. 현재 50개 미만인 여대도 몇몇이 통폐합, 공학 전환을 논의 중이다. 일본 부유층이 선호했던 가쿠슈인여대 역시 2026년 가쿠슈인대와 통합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학생들의 남녀공학 선호, 실용 학문 및 대형 학교 지향을 이유로 꼽는다. 남녀공학에 다니는 여학생 취업률이 그렇듯, 여대 졸업생 취업률도 낮은 편이다. 이공계보다 인문계 학과가 많은 탓이다.
▶남녀공학 전환은 대개 성공적이었다. 고려대 의대 전신은 1938년 설립된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였고, 수도여사대와 상명여대는 각각 세종대학교, 상명대학교로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동덕여대 시위 현장에서는 “여성 차별이 존재하는 한” 여대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여대가 여성 차별을 바로잡아온 게 사실이다. 이화여대 출신 여성운동가 고 이효재 교수는 호주제 폐지, 동일노동 동일임금, 여성할당제 도입에 앞장섰다. 군복무가산점제 폐지에도 여대가 나섰다.
▶여대에 페미니즘 바람이 거세지며 여대가 오히려 ‘성적 소수자를 배제’하는 역설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20년 성전환자(트렌스젠더)가 숙명여대 법대에 정시로 합격했지만 학생들 반대로 등록을 포기했다. 레이건 대통령 부인 낸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딸 욜란다가 나온 스미스여대를 비롯, 일본 오차노미즈여대 등은 성소수자를 받아들이고 있다. 여대를 탄생시킨 ‘시대정신’의 근간이 변하면서, 온 나라의 여대들이 ‘성숙통’을 앓고 있다.
11.15 美 장군 숙청

▲일러스트=이철원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 미군은 육군조차 19만여 명에 불과했다. 조지 마셜 장군이 단 5년 만에 이를 800만 육군의 대군으로 탈바꿈시켰다. 그가 구축한 합동참모본부 체계는 지금까지 미군을 움직이고 있다. 마셜은 동맹국 지도자와 협력하고 소통하는 외교 역량도 뛰어났다. 종전 후 국무장관으로 임명돼 서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주도했다.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차 대전을 상징하는 장군은 구데리안, 만슈타인, 되니츠, 로멜 등 천재적 독일군 장군이었다. 그러나 미군에도 뛰어난 장군이 많았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이끈 아이젠하워, 미드웨이 해전에서 최강 일본 해군을 격파한 니미츠, 일본의 항복을 받은 맥아더 등 뛰어난 장군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미군 역사상 별 다섯 개 원수 계급을 받은 장군은 9명인데 모두 2차 대전 영웅이다. 미군 장군들은 지금도 국민의 진심 어린 존경을 받는다.
▶트럼프 1기 첫 국방장관이던 매티스는 해병 여단장 시절 부하들이 지쳐 있자 몸소 보초를 섰다. 휴가를 얻으면 전사한 병사의 집을 찾아 위로했다. 4성 장군이 됐는데도 방에는 작은 침대와 성경만 있었다. 트럼프가 “물고문 부활”을 주장하자 “반대한다”며 정면으로 맞섰다. 트럼프가 미 장군들에게 분노한 순간 중 하나가 2020년 흑인 사망 사건 시위 때라고 한다. 당시 트럼프는 시위 진압을 위해 군 동원 방침을 세웠는데 국방장관과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부터 공개 항명했다. ‘노(No)’를 참지 못하는 트럼프의 충격이 컸다.
▶트럼프가 2기 첫 국방장관으로 소령 출신 방송인 피트 헤그세스를 지명했다. 특이하게도 지금까지 지명한 안보 관련 책임자 중 장군 출신은 한 명도 없다. 국가안보보좌관은 대령 출신, 정보 총책임자는 중령 출신이다. 오히려 퇴역 군인으로 구성한 ‘전사 위원회’를 만들어 현역 3~4성 장군들을 숙청할 예정이라고 한다. 헤그세스는 최근 저서에서 “국방부 지도부를 근본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썼다. 군복을 벗길 대상으로, 시위 진압에 군 동원하기를 반대했거나 군내 성평등을 옹호한 장군들 실명이 이미 거론되고 있다.
▶미군 1년 예산이 9000억달러(약 1200조원)를 넘는다. ‘천조국(千兆國)’이라 부른다. 지구 전역을 넘어 우주까지 관리하는 군대가 미군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한반도 평화에도 미군 역할이 크다. 이 미군을 장군 950여 명이 지휘한다. 이들이 ‘숙청 전야’라니 남의 일로만 보이지 않는다.
11.16(토) 대통령과 골프

▲일러스트=이철원
코로나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 5월의 한 주말,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이 버지니아주(州)의 한 골프장에 나타났다. 대통령의 ‘주말 여가’에 관대한 미국에서도 “미국 내 사망자가 10만명에 가까운데, 대통령은 마스크도 없이 토·일요일 내내 골프를 쳤다”는 보도가 나왔다. 트럼프가 전임자 오바마도 “항상 골프를 쳤다”고 항변하자, CNN은 “오바마는 재임 중 8.77일에 한 번, 트럼프는 4.92일에 한 번 골프를 쳤다”는 통계를 들이댔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의 ‘골프광’은 2차 세계대전 ‘전쟁 영웅’ 출신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다. 그는 취임 이듬해인 1954년 백악관 잔디밭에 퍼팅그린을 설치했고, 재임 8년간 800라운드를 했다. ‘최고사령관’ 대신 ‘최고위 골퍼(Golfer-in-chief)’란 별명도 얻었다. 그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할 때도 골프를 쳤다. 전쟁 중 일시 폐쇄됐던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에 공병 출신 독일군 포로 42명을 보내 재건을 돕기도 했다.
▶1995년 11월 10일 뉴트 깅리치 미 하원의장이 골프채를 들고 기자회견에 나왔다. 예산안이 합의되지 않아 연방정부 운영이 중단될 위기인데 빌 클린턴 대통령이 골프를 치러 갔기 때문이었다. 클린턴은 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벌타 없이 다시 치는 멀리건을 애용해 “멀리건의 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아이젠하워의 진정한 후계자로 꼽힌 것은 오바마였다. 그는 재임 8년 동안 333라운드를 쳤는데, 멀리건 없이 80타 중반~90타 초반을 쳤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때 오바마를 비판하며 “나는 일하느라 골프 칠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첫 임기 4년간 261라운드를 돌았고, 2019년 사비 5만달러를 들여 백악관에 ‘골프 시뮬레이터’를 설치했다. 올 초부터 트럼프 지지율이 꾸준히 높게 나오자, 외교관들은 “만약을 대비해 윤석열 대통령도 골프를 연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바이든 행정부를 의식해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윤 대통령이 여러 차례 토요일에 골프를 쳤다고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민주당이 9월 초부터 “8월에 골프를 치지 않았나”라며 공세 중이었는데, 대통령실이 설명을 않다가 미국 대선 이후 “트럼프와의 외교를 위해 8년 만에 골프 연습을 재개했다”고 해서 긁어 부스럼이 됐다. 대통령의 주말 골프를 문제 삼을 시대도 아닌데 처음부터 솔직히 “골프를 쳤다”고 하지 못해 거짓 해명처럼 돼버렸다.
11.18(월) 머스크식 '주80시간 근무'

▲일러스트=박상훈
테슬라 창업주 일론 머스크는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무섭게 일에 몰두하며 한계를 돌파하곤 했다. 2017년 전기차 모델3 출시를 앞두고 그는 네바다 공장에 진을 친 뒤 네댓 시간만 잠자며 임직원들을 무자비하게 굴렸다. 그가 엔지니어들에게 부여한 목표는 ‘생산 능력을 3배로 끌어올리라’는 가혹한 것이었다. 직원들은 밤 10시까지 일하고, 공장 바닥에서 눈을 붙인 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는 이렇게 무자비한 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머스크 평전엔 그가 기업 현장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2021년 머스크는 우주 탐사기업 스페이스X의 텍사스 발사대를 찾았다. 그런데 일하는 직원이 안 보였다. 금요일 밤늦은 시각이니 사람 없는 게 당연했지만 머스크에겐 용납될 수 없었다. 분노가 폭발한 그는 ‘열흘 내 발사 준비’라는 촉박한 시한을 제시하며 다른 사업장에서 지원 인력을 차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비행기든 자동차든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 즉시 이곳으로 오라”는 이메일을 날렸다. 새벽 1시였다.
▶머스크가 경영하는 기업엔 삶의 질이나 워라밸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직을 비상 상황에 몰아넣고 한계점까지 밀어붙여 성과를 뽑아내는 게 그의 주특기였다. 머스크는 이를 ‘광적인 긴박감’이라 불렀는데, 못 견디고 회사를 떠나는 ‘피난민’들도 속출했다. 그의 비전에 공감해 기꺼이 주말도 반납하는 추종자들이 남아 전기차에서 자율주행차, 저궤도 위성, 인간형 로봇 등에 이르는 혁신을 이루어냈다.
▶머스크는 첨단을 달리는 혁신 기업가지만 경영 수법은 첨단과 거리가 멀었다. 남들은 엄두도 못 내는 분야에 뛰어들어,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고, 터무니없는 목표를 내건 뒤, 독재자처럼 권한을 틀어쥐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비전을 현실화했다. 그의 성공 신화를 보면 “이봐, 해봤어?”라며 조인트 까는 정주영의 1970년대식 리더십이 떠오를 때가 많다.
▶트럼프 2기 ‘정부 효율부’ 수장으로 내정된 머스크가 구인 공고를 내면서 ‘주 80시간 근무’를 조건으로 걸었다. “주당 80시간 이상 기꺼이 일할 수 있는 초고지능의 ‘작은 정부’ 혁명가들이 필요하다”고 썼다. 한국 같았으면 당장 주 52시간제 위반 혐의로 고발되고, 악덕 기업인으로 매장당했을 것이다. 필요한 곳에는 초과 근무를 인정하는 유연한 제도와 문화, 그리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밤낮없이 일할 준비가 된 인재들의 열정이 미국을 혁신 국가로 만들었다.
/박정훈 논설실장
11.19 음모론자도 장관하는 시대

▲일러스트=이철원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은 대표적인 마스크·백신 무용론자였다. 코로나 기간에 재임했던 그는 “백신을 맞으면 악어로 변할 수도 있다”면서 대신 말라리아 예방약을 처방받을 것을 권했다. 모임 등을 제한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반대하면서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재임 기간 브라질에서 코로나로 숨진 사람은 70만명이 넘는다.
▶미국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기간에 자신을 지지한 케네디 주니어를 장관으로 임명할 것이라고 했지만 보건부 장관은 피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케네디는 20년 전부터 백신의 안전성과 효능에 대해 음모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했다. 그런데도 트럼프를 그를 보건부 장관에 지명했다. 미국 보건 전문가들은 그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백신만 아니라 불소, 에이즈, 항우울제, 줄기세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음모론을 신봉해 그의 정책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다.
▶ 세상엔 온갖 음모론이 있고 이를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지 55년이 지났지만 미국에서 “달 착륙은 허구”라고 믿는 사람이 6%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따르면 2019년 미국 인구의 2%가 여전히 지구 평면설을 믿고 있다. 9·11 테러를 미국 정부가 계획했다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음모론 신봉자들은 동서고금 있었지만 그들이 다른 사람의 건강과 안전을 좌우할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오르는 것은 경우가 다르다.
▶미국 트럼프 당선인은 기후 변화는 민주당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거침없이 주장해온 ‘석유 재벌’ 크리스 라이트를 에너지부 장관에 지명했다. 트럼프 자신이 “기후 변화는 거짓”이며 과도한 환경 규제가 경제성장을 가로막는다고 비판해 왔다. 트럼프는 1기 때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스콧 프루잇을 환경보호청(EPA)장에 앉히고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했는데 이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트럼프 인사의 특징은 해당 부처의 핵심 기능을 부정하는 사람을 보낸다는 점이다. 국방 장관, 국가안보 보좌관, 정보 총책임자도 장군 출신은 한 명도 없고 각각 소령, 대령, 중령 출신을 지명했다. 지명하는 인사 중 각종 음모론 신봉자가 적지 않으니 희한하기도 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미국 국내 문제는 모르겠지만 기후 변화, 보건 정책, 국방 문제는 우리나라에도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준비해야 할 것 같다.
11.20 사라지는 제주 야자수

▲일러스트=이철원
가로수는 단순히 거리에 심은 나무가 아니다. 많은 도시가 가로수를 써서 저마다의 이미지를 만든다.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이들은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개선문까지 죽 늘어선 마로니에를 보며 비로소 파리에 왔다고 실감한다. 이탈리아 로마를 대표하는 가로수는 우산소나무다. 나무 꼭대기에서 가지가 우산 모양으로 펼쳐져 자태가 아름답고 지중해 여름 땡볕도 가려줘 관광지 가로수로 제격이다. 남아공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가로수는 자카란다이다. 봄에 보랏빛 꽃을 피우며 계절이 우리와 반대인 남반구 도시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도드라지게 한다.
▶서울에 본격적으로 가로수가 등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다. 나무가 부족한 서울을 빠르게 녹화할 목적으로 잘 자라는 미루나무와 수양버들을 심었다. 해방 후엔 넓은 잎으로 먼지를 흡착해 매연과 분진을 줄여주는 플라타너스가 각광받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도시 미관에 관심이 높아지며 은행나무가 서울의 대표 가로수가 됐다. 서울 가로수 약 30만 그루 중 은행나무가 10만 그루로 가장 많다.
▶가로수로 쓰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나무가 아름다우면서도 사람에게 해롭지 않아야 하고, 매연과 병충해도 잘 견뎌야 한다. 시민의 기호 변화도 반영된다. 냄새에 민감하지 않던 때엔 사랑받던 은행나무가 지난 10년 사이 서울에서만 1만 그루 넘게 사라졌다. 대신 꽃이 예쁘고 악취는 없는 이팝나무가 뜨고 있다. 회화나무도 증가 추세다.
▶제주를 상징하는 야자나무 가로수도 변화를 겪고 있다. 해외 여행이 드물던 시절, 국내에서도 이국적 정취를 느껴보자며 1980년대 워싱턴야자수를 들여와 심은 것이 오늘날 제주를 대표하는 가로수가 됐다. 제주공항 입구의 야자수를 보며 “제주에 왔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은 지 30년이 지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크게 자란 야자수 가지가 태풍 때 부러져 사람과 차량을 덮치고 전깃줄을 끊는 사고가 반복되자 야자수를 다른 가로수로 교체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2021년 교체가 시작돼 지금까지 약 40%를 베어냈다고 한다.
▶야자수가 사라진 자리엔 후박나무, 먼나무, 담팔수 등 상록수가 들어서고 있다. 야자수만큼 색다르지는 않지만 온화한 제주 날씨의 이미지를 살리자는 취지라고 한다. 제주시에 전화해 “야자수를 모두 없애느냐?”고 물었더니 “아쉬워할 방문객을 위해 공항 주변과 용두암 등 주요 관광지의 야자수는 그대로 둔다”고 한다. 제주의 새 가로수도 야자수처럼 방문객의 사랑을 받기 바란다.
11.21 "한국에서 살고 싶다"

▲일러스트=이철원
한 세기 전만 해도 한반도는 희망을 찾기 위해 벗어나야 할 땅이었다. 1900년대 초 이 땅의 청년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났다. 그들이 보내온 사진 한 장으로 맞선을 보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이민선에 오른 여성을 ‘사진 신부’라 했다. 탈(脫)한국은 우리 소설과 영화의 주요 테마이기도 했다.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나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에 나오는 ‘뿌리 뽑힌 한인의 삶’은 불과 반세기 전까지도 우리 모습이었다.
▶지금은 반대다. 지난해 한국행 이민자 증가율이 50.9%로 OECD 기준 세계 2위를 기록했다는 외신 뉴스가 나왔다. 전체 이민자 수는 118만명을 기록한 미국이 압도적 1위지만, 이민자 증가 속도만 보면 52%인 영국과 수위를 다툰다. 외국인 입국자 수가 한국인 출국자 수보다 12만명 많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이 ‘떠나고 싶은 나라’에서 ‘가서 살고 싶은 나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을 보는 시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몇 해 전 동남아에 출장 간 한 회사원은 현지인에게서 “한국인이라니 부럽다”는 말을 들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이는 “한국 사람은 시간은 없지만 돈이 많고, 스페인 사람은 시간은 많지만 돈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많은 외국 젊은이가 K팝 아이돌을 꿈꾸며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소셜미디어에도 한국 상찬이 넘친다. 젊은 여성이 밤늦게 한강변을 거닐며 “여기는 안전한 한국”이란 글을 올리면 엄지 척으로 공감하는 이모티콘이 쏟아진다. 소매치기에 익숙한 유럽인들은 휴대전화를 자리 맡아 두는 용도로 쓰는 한국의 카페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높은 의료 품질과 편리한 대중교통, 깨끗한 화장실도 찬사를 듣는다. 한 외국인은 “한국은 모든 게 선진국”이라고 했다.
▶지난해 국내 외국인 거주 비율이 4.8%에 다다랐다.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개방 국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징표라고 한다.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 금지를 두고 논란을 빚는 프랑스처럼 전에 없던 갈등도 겪게 될 수 있다. 어떤 경우건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흘린 피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온통 장밋빛은 아니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엔 기회의 문이 닫히며 취업과 결혼, 내 집 마련의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호주로 떠난 청년들의 좌절이 그려져 있다. 모두가 희망을 꿈꿀 수 있어야 진짜 살고 싶은 한국일 것이다.
11.22 "공항 영접 그만 나오라"

▲일러스트=이철원
국가원수 공항 영접 행사의 시초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그는 1940년대 카사블랑카·얄타 회담 등을 다녀온 뒤 공항·항구·기차역 등에서 귀국 행사를 열었다. 정부와 군 지휘부가 배웅 나오고 군악대 연주와 퍼레이드가 열렸다. 2차 세계대전 승전을 이끈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소련 흐루쇼프와 정상회담을 마치고 공항에서 환영식을 가졌다. 의회 인사들도 나왔다. 귀국 연설은 TV로 중계됐다.
▶일본은 천황 순방 때 총리와 내각, 정치권이 공항에 환송 나갔다. 총리 순방 땐 야당 대표가 배웅 나오기도 했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내각이 참석한 가운데 공항에서 군악대·의장대 행사를 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공항 영접 행사엔 3부 요인과 당·정·청 수뇌부가 총출동했다. 꽃다발 증정과 기자회견도 열렸다. 러시아와 중국 등 권위주의 국가의 공항 영접 행사는 훨씬 대규모였다. 지도자 개인 찬양 목적이 강했다. 북한 김정은은 2018년 트럼프 전 대통령과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평양 공항에서 환영 행사를 열었다. 많은 군중이 꽃다발을 들고 김정은을 칭송했다.
▶공항 영접은 출세의 기회였다.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닉슨 대통령 순방 때마다 공항에서 외교 성과와 현안에 대한 현장 브리핑을 했다. ‘항상 준비된 충성스러운 참모’로 자리매김했다. 애치슨 전 국무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 선거 패배 후 워싱턴으로 돌아왔을 때 혼자 기차역으로 마중 나갔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4년간 안보 정책을 총지휘했다. 박정희 정부 때 유정회 의원들은 눈도장을 찍기 위해 앞다퉈 공항에 나갔다. 요직에 발탁된 이들도 있었다.
▶권력 갈등도 야기했다. 김영삼 정부 때 민자당 지도부가 대통령 귀국 영접에 나가지 않았다. 공천 갈등으로 비화하며 지도부 교체설까지 나왔다. 박근혜 정부 때도 여당 지도부의 공항 행사 불참이 불화설로 이어졌다. 김무성 전 대표는 단 3초간 대통령과 인사하기 위해 공항에 나갔다. 이명박·노무현 정부 땐 청와대와 갈등을 빚던 여당 지도부가 공항 영접을 계기로 관계 회복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국민의힘 지도부에 “수고스럽게 공항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동안 한동훈 대표가 공항 영접에 나가지 않을 때마다 불화설이 제기됐는데 더이상 소모적 논란을 벌이지 말자는 취지일 것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들에선 공항 영접이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도 그럴 때가 됐다.
11.23(토) 中 '간편 결제'

▲일러스트=양진경
2014년 1월 28일, 중국 최대 명절 춘제(春節·음력 새해)를 사흘 앞두고 IT 기업 텐센트의 모바일 메신저 ‘위챗’에 ‘훙바오(紅包·붉은 봉투)’ 기능이 추가됐다. 보통 붉은 봉투에 넣어주는 세뱃돈을 모바일 결제 ‘위챗페이’와 연동해 휴대폰으로 보낼 수 있게 한 것이다. 게임 사업도 하는 텐센트는 채팅방에 친구 10명을 초청한 뒤 훙바오 5개를 보내 먼저 열어본 5명에게만 돈을 주는 기능, 총금액과 받을 사람 숫자만 설정해 무작위로 훙바오를 주는 기능도 추가했다. 이른바 ‘훙바오 낚아채기(搶紅包)’인데, 돌풍을 일으켰다. 이걸 하려고 위챗페이에 가입한 사람만 800만명이었다.
▶그 후 10년, 중국은 모바일 결제 보급률 86%의 ‘현금 없는 사회’가 됐다. 많은 중국인은 노점상에서도 휴대전화로 QR코드를 읽어 결제하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심지어 거지도 QR코드를 목에 걸고 동냥한다고 한다. 하지만 BC카드 신금융연구소는 올해 8월 중국의 간편 결제 확대 배경을 분석하며 중국 내 ‘위조지폐의 만연’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2015년 중국 공안은 건국 이후 최대의 위폐 조직을 적발했다. 당시 현장에서 압수된 위조지폐만 2억1000만위안, 당시 환율로 380억원이었다. 중국 정부에 모바일 결제는 테크 산업 성장과 위폐 해결을 동시에 하면서 국민의 동향도 감시할 수 있는 ‘일석삼조’였을 것이다.
▶2011년 호주의 한 경영학자는 ‘빚’을 부정적으로 보는 중국 전통도 신용카드 보급을 저해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실제 한국인은 지난해 기준 1인당 평균 4.4장, 중국인은 평균 0.54장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 중국인들에게 나중에 갚을 것을 믿고 거래하는 신용카드는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중국 내에서 신용카드 사기가 많았던 것도 한몫했다.
▶중국에서 모바일 결제와 연동된 ‘은행 카드’는 대개 직불 카드를 뜻한다. 종이 화폐도 신용카드도 못 믿다 보니, 계좌에서 즉각 돈이 움직이는 모바일 결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인의 ‘종이돈’ 불신이 모바일 결제 확산으로 이어진 반면, 종이돈을 믿는 일본인들은 여전히 현금을 선호한다. 한국은 중간쯤 되는 것 같다.
▶8일부터 시행된 중국 ‘무비자’ 관광을 떠난 한국인들이 현금과 신용카드를 쓸 수 없어 곤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중국 정부가 국제 신용카드 사용을 확대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 현장과는 거리가 있어 물 한 병 사기도 힘들다고 한다. 외국관광객들이 처음 맞닥뜨리는 ‘바뀐 중국’인 셈이다.
11.25(월) 데스노믹스

▲그래픽=박상훈
군인 목숨을 금전 가치로 따진 것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법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군인은 대부분 용병이었는데 대가를 지급하지 않으면 고용인을 처벌한다는 조항이 있다. 고대 지중해 섬나라 크레타는 활 잘 쏘는 군인을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보내 돈을 벌었고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왕조는 로마와 전쟁 중인 카르타고에 기병을 팔았다.
▶유럽 선진국 스위스도 근대 이전엔 군인이 주요 수출품이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이 바티칸을 침입했을 때는 교황을 지키다가 전멸에 가까운 인명 피해도 겪었다. 그러다가 고부가가치 산업 위주로 경제가 바뀌고 용병으로 버는 돈보다 우수한 청년 인재를 지키는 것이 나아지면서 170여 년 전 비로소 용병 수출이 법으로 금지됐다.
▶우리도 베트남전 파병 덕에 경제가 일어섰다. 대한항공의 모태가 된 한진상사가 당시 한국군의 보급품 수송을 맡으며 회사를 키워 10대 그룹에 들었다. 현대건설 등 여러 건설 회사도 전 세계 미군 기지 관련 공사를 수주하며 성장했다. 국가 산업의 근간이 섬유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바뀌었다. 대미 수출이 크게 늘었고, 미국에서 배운 군수산업 기술은 오늘날 K방산의 토대가 됐다. 경제는 그 덕에 성장할 수 있었지만 젊은이들 희생이 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군 전사자가 60만명을 넘어섰다. 그런데 전사자가 늘어날수록 러시아 경제가 성장한다는 분석이 나왔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35세 군인을 기준으로, 입대 후 1년 만에 전사하면 유족에게 1450만루블(약 2억900만원)이 지급된다. 이는 35세인 일반 시민이 60세까지 벌 수 있는 기대 소득의 총액보다 많다고 한다. 지금까지 지급된 사망 위로금만 우리 돈 41조원에 이른다. 군수산업 활황으로 실업률이 떨어지며 소비는 증가했다. 돈이 풀리면서 빈곤층 거주 지역 예금이 150%까지 폭증했다. 러시아의 한 경제학자는 이를 죽음이 불러온 활황이란 의미로 데스노믹스(deathonomics·죽음의 경제)라 명명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는 데스노믹스가 러시아 경제에 장기적으로 해롭다고 본다. 풀린 돈이 산업 생산에 재투자되지 않고 물가만 올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의 올해 인플레이션이 10%에 육박할 전망이다. 전쟁에 동의하지 못하는 엘리트 젊은이들이 조국을 등지는 것도 러시아 앞날을 어둡게 한다. 이런 나라에 군인 1만여 명을 파병한 북한도 데스노믹스를 기대한다고 한다. 데스노믹스가 러시아와 북한 젊은이들의 고난에 찬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11.26 웨어러블 로봇

▲일러스트=이철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연구진이 3~96세 연령대를 대상으로 새끼손가락 옆에 여섯째 로봇 손가락을 장착하는 실험을 했다. 만화 ‘형사 가제트’의 주인공이 만능팔을 뽑아 자유자재로 쓰는 것처럼, 인간이 신체 일부를 추가로 장착했을 때 뇌가 여기에 적응해 조작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실험이었다.
▶일각의 예상과 달리 98%의 참가자가 새로운 손가락을 성공적으로 조작한 것으로 조사됐다. 로봇 손가락의 동작 센서는 엄지발가락으로 누르도록 설치됐는데 대다수 참가자들은 금세 사용법을 익혔다. 한 손만으로 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와인잔 2개와 와인병을 동시에 들고 가는 등 다섯 손가락으로는 불가능한 동작을 해내는 영상들이 공개됐다.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증강 인간’의 사례로는 비교적 간단한 기술이지만, 웨어러블 로봇(착용형 로봇)의 수용성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공상과학 작가 로버트 앤슨 하인라인은 1959년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군인들이 신체 능력을 극대화한 장비를 착용하고 싸우는 광경을 묘사했다. 이후 웨어러블 로봇을 실제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본격화했다. 1986년 낙하산 사고로 심하게 다친 미 육군 병사가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거동을 보조하는 초기 형태의 웨어러블 로봇 설계를 시작했다. 이어 제너럴 일렉트릭이 개발에 뛰어들었고, 록히드마틴이 최대 90㎏ 무게를 짊어지고 시속 16㎞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장비를 내놓아 군사용 외골격 로봇 기술이 주목받았다. 공장을 비롯해 산업 현장에서 효율과 안전을 높이는 산업용으로도 시장이 확대됐다.
▶군사용으로 시작돼 생활 전반에 뿌리내린 GPS(위성 위치확인 시스템) 기술처럼 웨어러블 로봇도 우리의 일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보행이 불편한 환자 재활 용도로 개발한 로봇을 노인용으로 최적화해 출시하면서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다. 노년층이 허리와 허벅지에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북한산을 오르는 것이 이젠 드문 풍경이 아닌 시대가 됐다.
▶내년이면 한국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 지금도 인구의 30%에 이르는 1586만명이 교통 약자로 분류되고, 이 가운데 1115만명이 고령자다. 버스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노인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웨어러블 로봇이 초고령 사회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일상 필수품으로 기대를 모으는 까닭이다. 무릎 연골 등을 재생해 노년층 거동을 개선한다는 줄기세포 기술은 이제 웨어러블 로봇을 강력한 경쟁자로 맞닥뜨리게 됐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11.27 고백으로 쓰는 할매들의 시

▲일러스트=박상훈
‘80이 너머도/ 어무이가 조타/ 나이가 드러도 어무이가 보고시따/ 어무이 카고 부르마/ 아이고 오이야 오이야/ 이래 방가따.’ 내년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1937년생 이원순 시인의 ‘어무이’가 실린다. 교과서를 내는 천재출판사가 ‘칠곡 할매’ 4인의 시를 ‘성장’의 의미를 다룬 편에 넣었다.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남에 손 빌려다가/ 내 이름 적는’ 까막눈의 설움을 딛고 시인으로 거듭났다. 이런 ‘성장’이 어디 있을까.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 사는 ‘칠곡 할매’들은 지난 2013년 군이 개설한 ‘성인 문해 교육’ 과정을 통해 한글을 깨쳤고, 시를 썼다. 2015년 89명의 시를 엮은 첫 시집 ‘시가 뭐고’를 낸 후 세 권을 더 냈다. ‘배우께 조은데/ 생가키거를 안는다/ 글이 안 새가킨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다/ 그래도 배아야지’(박후금 할머니 ‘배아야지’) 할머니들은 2000장 넘게 손글씨를 연습해 ‘칠곡할매 서체’도 만들었다. 지난해 대통령실 연하장에 이 글씨가 쓰였다.
▶일본에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있었다. 1911년생으로 불우하게 자란 시바타 할머니는 아들의 권유로 91세에 처음 시를 썼다. 장례 비용으로 모아 둔 100만엔으로 2009년, 98세에 첫 시집을 냈다. 무려 158만부가 팔렸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약해지지 마) 이후 100세 전후를 뜻하는 ‘아라한(Around Hundred) 작가’가 잇달아 나왔다. 2017년 일본 베스트셀러 1위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친 93세 사토 아이코의 ‘90세, 뭐가 경사냐’였다.
▶”호랑이는 가죽을, 칠곡 할매는 시를 남긴다.” 할매들은 못 배워 서러웠던 인생, 시집살이, 남편과의 불화와 추억을 죄다 글로 쓴다. 전국에서 문화 강연을 하는 김별아 강원문화재단이사장은 “박물관 대학, 문학 강좌 같은 지식 강연에는 할아버지 수강생이 많지만, 자백과 고백이 필요한 시 창작에는 압도적으로 할머니가 많다”고 설명한다.
▶고백 문학자, 할머니들도 세월에 꺾인다. 교과서에 수록되는 두 할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심장이 쿵덕기린다/ 도둑질핸는 거보다 더 쿵덕거린다’며 ‘처음 손잡던 날’을 회상한 강금연 할머니, ‘도래꽃 마당에 달이 뜨마/ 영감 생각이 더 마이 난다’던 김두선 할머니, 이제 그리운 분 만나 함께 시를 읊고 계실까.
11.28 붕세권 지도

▲일러스트=이철원
1980년대 서울 쌍문동 서민들의 삶을 그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붕어빵이 자주 등장한다. 동네 친구이자 바둑 천재인 택이의 대국이 다가오자, 주인공 덕선은 종이봉투에 붕어빵을 담아 그의 방문을 두드린다.
“야, 붕어빵. 잘 다녀와.” 덕선이 건넨 붕어빵은 훗날 남편이 되는 택이와 나누는 사랑을 상징한다. 남편을 잃고 두 아이를 키우는 선우 엄마도, 역시 아내와 사별한 고향 선배 택이 아빠가 입원하자 붕어빵을 사 들고 병원을 찾아간다. 이후 택이 아빠가 “날도 추운데 우리 같이 살자”고 청혼해 두 사람은 재혼한다.
▶바삭한 껍질 속에 달콤한 팥소가 들어있는 붕어빵은 이처럼 서민의 겨울을 따뜻하게 지켜온 간식이다. 그 기원은 일본의 ‘다이야키(鯛焼き)’인데, 우리 말로 ‘도미빵’이다. 일본에는 에도 시대부터 둥근 밀가루 반죽 속에 팥을 넣은 ‘이마가와야키’라는 간식이 있었다. 1909년 이것을 팔던 고베 세이지로란 사람이 장사가 잘 안 되자, 물고기 모양 틀을 개발해 다이야키가 등장했다.
▶일본에서 도미는 기쁜 일이 있을 때 먹는 고급 생선이자 행운의 상징이다. 복(福)의 신 ‘에비스’도 옆구리에 도미를 끼고 있다. ‘다이야키’는 서민들은 이런 도미를 좀처럼 먹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해 만든 것인데, 곧바로 대히트했다. 지금도 도쿄 명소 아자부주반에 가면 고베가 만들었던 원조 다이야키를 맛볼 수 있다.
▶다이야키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왔지만, 그 변형인 붕어빵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밀가루를 대량 원조한 1960년대로 추정된다. 동의보감에 “여러 물고기 중 가장 먹을 만하다”고 적혀 있을 만큼 한국인에게 친숙한 물고기여서 ‘붕어빵’이 됐을 것이다. 한때는 겨울이면 어디에나 붕어빵 노점이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밀가루, 팥, 식용유 원가가 상승하면서 가격이 오르자 채산을 못 맞춘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다. 그래도 추운 날 붕어빵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가 보다. ‘역세권(驛勢圈)’을 흉내 낸 ‘붕세권’이란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근처에 붕어빵 맛집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한 중고 거래 앱이 26일 ‘붕어빵 지도’를 공개해 화제다. 주변의 붕어빵 가게와 후기를 찾아볼 수 있다. 2020년부터 호떡, 군고구마 등 ‘겨울 간식 지도’를 제공했는데, 가장 많이 등록·검색되는 메뉴가 붕어빵이었다고 한다. 슈크림, 앙버터 등을 넣은 신종 붕어빵도 등장했다. 붕어빵 정도는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11.29 왕진의 귀환

▲일러스트=이철원
일본 도쿄에서 치과 방문 진료를 따라가 본 적이 있다. 환자는 80대 할머니로 뇌졸중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 집 밖을 나오기 힘들었다. 방문 진료팀은 30대 여성 치과 의사와 치위생사였다. 할머니가 “틀니가 입천장을 찌른다”고 하자, 틀니를 꺼내어 돌출된 부위를 즉석에서 그라인더로 윙~ 갈았다. 다듬어진 틀니로 할머니가 음식을 잘 씹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일본에서 이런 방문 진료를 전체 치과 6만8000여 곳 중 22%가 한다.
▶도쿄 긴자 옆 동네 신바시에 자리 잡은 유쇼카이(悠翔会) 의료법인은 개설 클리닉 없이 방문 진료만 한다. 100여 명의 의사들이 매일 아침 도쿄 시내 곳곳으로 흩어진다. 돌보는 환자 집이 7600여 곳이다. 가 본 환자가 우울증이 심해졌으면, 다음 방문 진료에는 정신과 의사가 간다. 임종이 다가올 환자 집에는 방문 호스피스를 한다. 그런 환자가 집에서 세상을 뜨면, 자연사로 처리된다.
▶신주쿠에 자리 잡은 유미노 심장클리닉은 심부전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환자 집에 산소 포화도, 전자 체중 측정, 심전도 등을 설치하여 환자 상태를 모니터링한다. 병세가 나빠지면, 심장내과 전문의가 모바일 심장 초음파를 들고 가서 진료를 하고 처방전을 낸다. 그러자 심부전 환자 재입원율이 절반으로 줄었다. 집이 마지막 병원인 셈이다. 환자는 집에 있어서 좋고, 병원은 불필요한 입원 환자가 없어서 좋다.
▶도쿄 소방청의 최대 고민거리는 거동 불편 75세 이상 계층이 앰뷸런스를 너무 많이 타서 응급 환자 이송이 지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 해 89만 건의 앰뷸런스 출동 중 25만 건을 75세 이상이 탄다. 그 수도 해마다 늘고 있다. 이들이 응급실에 와서는 간단한 처치나 투약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의사가 환자 집으로 가는 방식이다.
▶의사 선생님이 왕진 가방을 들고 환자 집을 찾아가는 풍광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흔했다. 의료가 고도화되고, 병원 기능이 커지면서 왕진은 자취를 감췄다. 집 나간 왕진이 초고령사회에서 귀환하고 있다. 병원에 못 오는 거동 불편 고령 환자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 해 방문 진료가 1200만 건에 이른다. 우리는 아직 왕진 시범 사업과 뜻있는 의사들의 자원봉사에 머물러 있다. 통상 방문 진료는 인구 고령화 비율이 23~24% 되면서 활성화된다. 지금부터 제도적으로 바짝 준비하면, 조만간 왕진 꽃이 필 것이다.
/김철중 논설위원, 의학전문기자
11.30(토) 설해목
법정 스님은 수필 ‘설해목(雪害木)’에서 폭설이 내릴 때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 올 때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했다. 117년 만의 ‘11월 폭설’로 전국적으로 아파트 주차장 출입구 지붕 등이 무너져 인명 피해까지 속출했지만 나무들도 큰 피해를 당했다. 서울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명물 재동 백송도 길이 3~8m에 이르는 가지 5곳이 찢어지거나 부러졌다. 총리 공관 안에 있는 천연기념물 ‘서울 삼청동 측백나무’도 길이 4∼8m에 달하는 가지 6곳이 부러지거나 꺾였다.

▲일러스트=박상훈
▶이렇게 피해가 큰 것은 이번 눈이 물기를 머금어 무거운 ‘습설(濕雪)’이기 때문이다. 눈이 만들어지는 구름층의 기상에 따라 다양한 눈이 만들어진다. 상공 1.5㎞ 기온이 영하 10~20도로 비교적 높을 경우 함박눈으로 내린다. 이 눈은 습설이라 잘 뭉쳐져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하기에 좋다. 그러나 건조한 눈에 비해 3배나 더 무거워 건물이나 나무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 상공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차가울 때는 싸락눈이, 여기에 바람까지 강할 경우엔 가루눈이 내린다. 북유럽에서 내리는 눈이 이런 가루눈이다. 이 눈은 미세한 눈 조각의 상태로 내려 잘 뭉쳐지지 않는다.
▶스키장에선 인공눈과 자연눈을 함께 쓴다. 인공눈은 물을 압축공기와 함께 뿜어내면서 얼리는 방식으로 만든다. 인공눈은 얼음 알갱이 밀도가 높다. 물 10㎜가 자연눈으로 내리면 10㎝ 쌓이는데 인공눈은 절반인 5㎝에 불과하다. 인공눈은 알갱이 사이의 틈이 적기 때문에 스키가 눈에 빠지지 않고 잘 미끄러진다. 그래서 속도감 있는 스키를 즐기는 데는 자연눈보다 인공눈이 더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 골프장에서 늦가을 소나무 전지 작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웃자란 가지, 늘어진 가지를 솎아내 수형을 다듬는 목적도 있지만 태풍이나 폭설에 가지가 부러지거나 쓰러지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다. 겨울에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인 겐로쿠엔 공원 등에선 ‘유키즈리’라는 독특한 장치를 볼 수 있다. 눈 무게로 고목 가지가 부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뭇가지에 줄을 달아 우산대 모양으로 매어 둔 장치다. 우리나라도 도입해볼 만하다.
▶이번 폭설은 북쪽에서 내려온 찬 바람이 식지 않은 서해에서 수증기를 더 공급받아 만들어졌다. 기상청은 올겨울 조건이 맞으면 이번 같은 폭설이 다시 내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제 겨울이 시작이다. 올겨울엔 눈 예보가 나오면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