午後餘談(문화일보) 2024-10/ 01-02(수) 선거 범죄 공소시효 특혜 - 10-31(목) 끝 보이는 ‘전기차 캐즘’
午後餘談(문화일보) 2024-10/
01-02(수) 선거 범죄 공소시효 특혜

오승훈 논설위원
“10월 10일이 지나면 족쇄가 풀린다.” 국회의원들이 긴장 속에 주시하는 날이다. 지난 4·10 총선 선거사범의 6개월 공소시효가 이날 만료된다. 현역 의원에 대한 무더기 기소가 임박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30일 기준 검찰이 기소한 현역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김문수·양문석·정동영·정준호 의원 등으로 파악된다. 수사를 받는 의원(국민의힘 5명, 민주당 12명, 조국혁신당 1명)이 더 있다. 최종 재판을 받아야 하는 의원은 20명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선거범죄는 대부분 경찰이 수사한다.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수사가 제한됐다. ‘선거사건 협력’ 지침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선거사범 공소시효는 오래된 논란거리다. 선거 결과를 조속히 확정해 권력 개입 등 혼란을 줄여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자는 취지이지만, 단기간 수사로 면죄부를 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1948년 제헌국회 당시 1년이었던 시효는 1950년 3개월로 줄었다가 1991년 총선 규정, 1992년 대통령선거 규정이 개정되면서 6개월로 늘었다. 대검은 지난 2022년 민주당이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박탈) 소동을 벌이던 당시 “선거범죄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선거사범 공소시효가 세계적으로 짧은 편인데, 여기에 검찰의 직접 수사마저 제한된다면 선출직에 대한 ‘이중 특혜’가 된다고 주장했다. ‘국민이 1000원짜리 빵 하나를 훔쳐도 공소시효가 7년인데, 의원들의 선거법 위반 공소시효는 6개월이냐’는 검사의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일반 절도죄의 공소시효는 7년, 특수절도죄는 10년이다. 일본은 선거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40여 년 전에 폐지했다. 미국·독일·캐나다 등은 선거범죄와 일반범죄의 수사 기간에 차이 없이 3∼6년이다.
재판 지연도 문제다. 1심은 공소제기 후 6개월, 2·3심은 전심 선고 후 각 3개월(합계 1년) 이내에 해야 한다는 선거법 조항은 사문화된 게 현실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의 경우 1심 선고가 예정대로 11월 15일에 나오면, 기소 시점으로부터 799일이 된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선거사범에 대한 신속 재판을 주문했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형이 최종 확정되면 의원직을 잃는다.⊙
10-04(금) 녹취록 흑역사

이현종 논설위원
‘김대업 병풍 녹취록’ ‘초원복집 녹취록’ ‘명품백 녹취 영상’ ‘이재명 위증교사 녹취록’ ‘김대남 녹취록’…. 중요한 정치적 사건마다 늘 등장하는 것이 녹취록이다. 말은 당사자들이 부인하면 확인할 길이 없지만, 녹취해 두면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로 녹취 방법이 훨씬 쉬워졌고 일상적이다.
2002년 제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대세론이 초반 분위기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해 7월 검·군 병역비리 합동수사반에 합류한 전 부사관 김대업의 ‘병풍(兵風)’ 폭로가 돌발변수로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김대업은 병역비리 관련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육성 테이프와 녹취록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정치인들은 김대업을 ‘의인’ ‘용감한 시민’으로 치켜세웠다. 병풍 공작으로 여론이 출렁거리면서 결국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 그러나 대선이 끝난 이듬해 녹취가 가짜인 것이 드러나면서 김대업은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1년10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개월을 남기고 노무현 정부에 의해 특별 가석방됐다. 1992년 14대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터진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 진영의 인사들이 부산의 초원복집에 모여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말을 한 것이 녹취돼 선거 판세를 출렁이게 했다.
유튜브 방송 서울의소리 이명수 기자와 최재영 목사가 공작한 명품백 사건은 윤석열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김건희특검법 정국의 핵심 증거다. 반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전 성남시장 비서인 김진성 씨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달라며 전화한 녹취록이 발목을 잡고 있다. 징역 3년이 구형될 정도인데, 만약 유죄가 인정될 경우 이 대표의 대권 꿈은 이 녹취록 하나로 산산이 부서질 위기다.
김대남 전 대통령실 행정관이 서울의소리 이명수와 나눈 ‘한동훈 공격 사주’ 녹취는 윤·한 갈등에 기름을 붓고 있다. 현 정권을 흔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매체의 기자에게 이런 주문을 하다니 어이가 없다. ‘형·동생’하며 11개월여 동안 수시로 전화통화를 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차관급도 가기 힘든 SGI서울보증의 상근감사로 간 것이 한 대표 공격에 대한 보상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10-07(월) 블라인드 테스트

최현미 논설위원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이 화제다.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TV(비영어) 부문 1위에 ‘밈’이 쏟아지고 출연자의 식당엔 긴 줄이 섰다. 미슐랭 스타부터 명장까지 톱 클래스 ‘백요리사’와 덜 알려진 신진 ‘흑요리사’의 대결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더해져 말 그대로 ‘홈런’을 날렸다. 흥행의 트리거는 눈을 가린 ‘블라인드 심사’였다. 까만 안대로 눈을 가리고 음식을 떠먹여 주는 장면은 강렬한 충격을 안기며 프로그램의 핵심 철학을 제공했다. 참가자의 경력과 기존 평가, 인맥에 관계없이 오직 맛으로 ‘공정’하게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보는 순간 편향과 편견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인간 뇌에 검은 천을 두르는 시도다.
블라인드 실험은 과학에서 편견을 배제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이다. 실험실 밖에서도 익숙하다. 1976년 와인 종주국 프랑스와 신흥국 미국 와인이 블라인드 테스트를 벌여 미국이 이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블라인드 채용도 빼놓을 수 없다. 2017년 정부가 블라인드 채용 추진 방안을 발표한 뒤 기업에서도 학력·나이 등을 가린 블라인드 채용·면접이 활발하다.
시음부터 채용까지 블라인드 테스트의 드라마틱한 결과는 ‘언더독의 승리’다. 기득권과 편견을 딛고 진짜 실력자가 등장하는 ‘영웅 서사’다. 하지만 이는 ‘블라인드’가 아니면 실력자는 묻힌다는 불공평한 현실을 전제하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다. ‘흑백요리사’의 미덕은 이 지점이다. 블라인드 심사를 통해 흑·백요리사 모두가 ‘영웅’이 됐기 때문이다. 눈을 가린 두 심사위원은 논쟁을 통해 백요리사의 공력과 경륜을 드러냈고, 흑요리사의 실력을 평가했다. 백요리사도 오랜 노력 끝에 그 자리에 올랐다는 서사를 만들어내면서 패자가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2021년 ‘오징어 게임’의 흥행 이후 드라마와 예능을 가리지 않고 각자도생식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이어져 왔다. 3년 만에 ‘흑백요리사’는 공정을 내세워 이제까지도 공정했고, 앞으로도 공정할 것이라는 서사를 보여줬다. 이 시대 대중의 욕망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만큼 새로운 지점에 당도한 것을 보여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전진하는 이 시대에 낙하산이 난무한 정치는 최악이지만.⊙
10-08(화) 8200부대

이철호 논설고문
하마스·헤즈볼라 수뇌부를 폭사시키고 이란까지 공포에 떨게 만드는 8200부대. 이름마저 무작위 숫자를 조합한 이스라엘 비밀 정보부대다. 총 인원은 5000여 명. 고교 졸업 예정자의 ‘상위 0.1%’를 최우선 선발한다. 컴퓨터·수학·외국어 능력자를 뽑아 3년간 복무시킨다. 전역을 앞둔 고참이 면접에서 직접 후임자를 선발해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게 전통이다. 능력보다 더 눈여겨보는 건 따로 있다. 잠재력이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투자한 이스라엘의 인튜이션 로보틱스. 이 회사 도르 스쿨러 CEO는 고교 시절 형편없는 성적에 문제아였지만, 8200부대는 집중력과 끈기에 주목했다. 스쿨러는 복무 기간 동안 엄청난 빅 데이터 속에서 진짜 정보를 추출하는 천재성을 꽃 피웠다. 이 부대 주특기를 살려 벤처 신화를 일구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글로벌 호스팅 업체인 윅스(wix)의 아브라하미 창업자는 “25년 전 함께 내무반을 쓴 동료 병사 10명 모두 벤처를 세웠다”며 “10개 회사의 시가총액은 모두 50억 달러”라고 자랑했다. 부모에게도 부대명을 알려주지 않는 비밀부대지만, 제대만 하고 나면 몸값이 수직 상승한다.
이 부대의 지시 사항은 간단하다. “이런 문제가 있어. 해결해야 돼.” 부족한 예산과 인력, 빠듯한 시간 안에 불가능한 과제를 주문한다. 10명씩 팀을 이룬 20대 초반의 천재들은 ‘이걸 해내지 못하면 전우(戰友)가 죽는다’며 죽자사자 달려든다. 사이버 해킹이나 무선 감청 등 시긴트(신호정보)뿐 아니라 테킨트(기술정보)도 주특기다. 이번 헤즈볼라 삐삐 사건은 모사드가 주도했지만, 그 뒤에는 8200부대 산하의 극비 조직인 81부대가 숨어 있다. 이 부대는 영화 ‘007’에서 제임스 본드를 위해 각종 희한한 무기와 도구를 개발하는 영국 MI6의 큐(Q) 박사와 같은 역할이다. 이번에도 배터리 속에 미량의 폭약을 심어 특정 메시지를 받으면 과열돼 터지는 삐삐를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정부는 ‘기무사화(士禍)’로 불릴 만큼 기무사령부(현 방첩사령부)를 초토화했다. 정보사령부 군무원은 돈을 받고 해외에 비밀요원 정보를 넘겼고, 국가정보원은 대공수사권을 빼앗겼다. 정보기관과 첩보 부대는 한 나라의 눈과 귀다. 8200부대는 날고 기는데, 우리는 스스로 눈과 귀를 막아버린 셈이다.⊙
10-10(목) 李·曺 빼닮은 영광군수 후보

김세동 논설위원
인천 강화, 부산 금정, 전남 곡성·영광 4곳에서 치러지는 10·16 기초단체장 재보궐선거 중 영광 선거판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인구 5만1000여 명의 작은 지역 군수 선거를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호남 주도권 싸움장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11월 15일과 25일에 선거법 위반, 위증교사 판결을 앞두고 마음이 급한 이재명 대표가 영광에서 군민 1인당 기본소득 100만 원 지급을 약속하자 조국 대표는 120만 원 지급으로 튀겼고 두 당 후보들이 고스란히 공약으로 받아 안았다. 진보당 후보도 100만 원 지급을 내걸었다. 1950년대 고무신·막걸리 선거보다 더 악성인 노골적인 매표 공약으로, 선거법 위반 아닌가 싶다. 전임 강종만 군수가 금품 기부로 벌금 200만 원을 확정받아 치러지는 재선거라 더욱 볼썽사납다.
더 가관은 두 야당이 고른 후보가 그 당 대표들의 흠결을 빼닮았다는 점이다. “민주당 후보는 전과 2범” “조국당 후보 집은 청담동”. 야당 후보들이 서로 삿대질하는 소린데, 처음엔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조국 혁신당 대표 얘긴 줄 알았다. 선관위 홈페이지에 올라온 후보 정보를 보면, 민주당 장세일 후보는 폭력행위처벌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사기·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벌금 900만 원을 선고받은 전과 2범이다. 혁신당 장현 후보는 배우자 명의로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21억 원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영광엔 보유하거나 임차한 주택은 없었다. 두 후보와 박빙 3파전을 벌이는 진보당 이석하 후보는 음주운전 2회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재물손괴 등 전과 7범이다. 난형난제의 싸움판이다.
영광군은 재정자립도가 11.7%로 226개 기초자치단체 중 163위다. 전국 지자체 평균(43.3%)의 4분의 1 수준이다. 지난해 영광의 전체 세입 9609억 원 중 자체 수입은 972억 원에 불과했다. 전체 영광 군민에게 100만 원씩 지급하려면 510억 원이 필요하다. 야당 후보들이 비슷한 돈을 약속한 인구 2만6000여 명의 곡성군 재정자립도는 9.3%(172위)에 불과하다. 이런 공약을 내건 후보들이 군수가 되면 재정의 대부분을 지원하는 중앙정부가 거액을 또 줄 가능성이 없으니 자체 사업을 대부분 포기해야 한다. 이미 진행 중인 지자체의 소멸만 더 앞당기게 된다.⊙
10-11(금) 퇴직연금 수익률 개혁

문희수 논설위원
은퇴 이후 3대 연금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 국민이 가입하는 국민연금, 근로자의 퇴직금인 퇴직연금, 개인이 선택하는 개인연금을 말한다. 개인연금은 보험료를 개인이 100% 부담하지만, 의무 가입인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은 노사가 분담한다.
국민연금 개혁과 함께 2005년 도입된 퇴직연금의 수익률 개선이 현안으로 부상했다. 적립금이 382조 원이나 되지만 2022년 수익률이 고작 0.02%이고, 5년·10년 평균치도 각각 1.51%와 1.93%에 불과하다. 2015∼2022년 수익률이 5% 안팎인 국민연금과 너무 대조된다. 물가 상승률도 못 따라가니 심각하다. 이에 따라 정치권에선 기금화가 거론된다. 근로자가 개별적으로 은행·증권·보험사와 계약해 운용하는 것을 바꿔 국민연금처럼 기금으로 만들어 수익률을 높이자는 것이다. 최근 국민연금연구원도 같은 제안을 했고,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동의한다. 개편 논의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그러나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기금화를 넘어 퇴직연금을 굴릴 기관에 국민연금기금을 참여시키고, 심지어 통째로 국민연금공단에 맡기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위험한 발상이다. 국민연금은 국내에서 경쟁자가 없는 공룡이다. 민간 회사는 경쟁이 안 돼, 고사할 게 뻔하다. 국민연금의 이해 상충 문제도 있다. 고갈이 예고된 국민연금이 퇴직연금을 잠식할 가능성도 배제 못 한다.
특히, 위탁 운용은 민간 자금을 정부에 맡긴다는 발상부터 잘못됐다. 정부가 매년 소비자물가 상승률만큼 국민연금액을 올려 주는 것은 공적연금의 지속성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적연금인 퇴직연금은 안 되는 특혜다. 또, 가뜩이나 압도적인 국민연금의 시장 영향력이 더 커지면 득보다 실이 훨씬 클 수 있다. 연금 사회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물론 퇴직연금의 저조한 수익률은 금융업체의 실력 부족 탓이 크다. 그런 만큼 은행·증권·보험 등 업권별 공통기금을 만들어 경쟁시키는 구도가 바람직하다.
퇴직연금은 노후의 보루다. 물론 수익률이 높으면 좋지만, 원금 손실 위험도 피해야 한다. 근로자가 수익성보다 안정성을 중시한다면 당연히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기금화 등 개혁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아울러 일방통행식의 추진을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다.⊙
10-14(월) 트럼프 여사와 은둔의 내조

이미숙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54)는 역대 미 퍼스트레이디 가운데 의견 표명이 가장 소극적이고 대중 활동도 적은 인물이다. 2017년 1월 트럼프 취임식엔 참석했지만, 초등학생이던 아들 배런의 학교 문제를 이유로 백악관에 들어가지 않아 트럼프의 딸 이방카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6개월간 대행했다. 트럼프 취임 첫해 멜라니아의 공개 연설은 8회에 불과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첫해 때 74회 연설을 한 미셸 오바마나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집권 첫해 때 42회를 한 로라 부시와 비교할 때 턱없이 적다.
멜라니아는 백악관에서도 퍼스트레이디 집무 공간인 이스트 윙보다 관저에 머물렀다. 프라이버시라는 이유로 자신의 일정이나 관심사조차 공개하지 않았고 언론 인터뷰도 피했다. 이 때문에 멜라니아는 ‘대중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퍼스트레이디’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언론에서는 ‘은둔의 영부인’으로 불렸다. 시에나대 조사연구소의 ‘역대 영부인 평가 보고서’(2020)에서 미셸이 애비게일 애덤스, 엘리너 루스벨트에 이어 3위, 로라는 15위에 오른 반면, 멜라니아는 꼴찌를 한 배경이다. 트럼프 퇴임 후엔 플로리다 마러라고로 가면서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멜라니아가 11·5 대선을 앞두고 자서전을 펴내며 대중 앞에 섰다. 책 ‘멜라니아’에는 불법 이주 어린이와 부모를 격리하는 정책을 바꾸기 위해 트럼프를 설득해 격리금지 행정명령에 서명하게 한 일, 부부가 좋아하는 가수 엘턴 존이 코로나 감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트럼프가 병문안을 가도록 한 일, 영국 국왕 찰스 3세와의 편지 왕래 등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 등이 소개됐다. 영부인 시절 어린이를 사이버 괴롭힘 등에서 보호하자는 ‘최선이 되자(Be Best)’ 캠페인을 벌인 데 이어 요즘엔 위탁 아동 장학금 지원을 하고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세상일엔 무심하지만, 어린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인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베일에 싸였던 신비로운 퍼스트레이디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책’이라고 평했다. 김건희 여사의 전방위 국정 관여 의혹으로 정국이 난장판이다. 김 여사가 트럼프 재선 시 만나게 될 멜라니아 정도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꾼다면 과욕일까?⊙
10-15 ‘먹튀’ 재선거

오승훈 논설위원
오는 16일 전남 영광·곡성 군수 재선거 영향이 정치에만 미치는 게 아니다. 영광군 선거관리위원회가 영광군에 통보한 재선거 비용은 14억6688만 원이다. 곡성군 선관위는 10억7800만 원을 요구했다. 선거관리비용은 후보들에게 지급되는 선거운동 보전비용과 투·개표 관리비용 등을 모두 합한 것이다. 공직선거법상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국고 부담, 지자체장·지방의원 등 선거는 해당 지자체 부담이다.
영광군수 재선거는 전임 군수가 지난 2022년 지방선거에서 금품을 건넸다가 당선무효형을 받은 까닭에 치르는 것이다. 곡성군수 선거도 전임자가 선거운동원 등에게 밥을 사줬다가 직위를 상실한 탓이다. 유권자 수는 영광 4만5248명, 곡성 2만4640명. 군수의 위법 행위로 유권자 1인당 영광은 3만2419원, 곡성은 4만3750원씩 돌아갈 군 예비비가 소모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연 100만 원, 조국혁신당이 120만 원을 내걸어 ‘쩐의 전쟁’ 비판을 듣는데, “깨끗한 선거부터 하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배경이다.
물론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가 되면 선거비용 보전금을 토해내야 한다. 하지만 지난 2008년부터 16년간 당선 무효 뒤 반환하지 않은 사람이 77명(190억5200만 원)에 이른다. 서울시교육감 선거 경선에서 떨어진 곽노현 전 교육감의 미납 보전금(약 31억 원)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보전금을 반환하지 않아도 출마 제한 규정은 없다. 5년이 지나면 반환청구권도 소멸된다. 일종의 선거비용 ‘먹튀’가 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월 선거보전금을 반환하는 선거법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중앙선관위는 반환을 강제하기 위한 인적 사항 공개 등 추가 입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지만, 의원들이 소극적이라고 한다. 자신들에게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일 것이다.
재선거와 보궐선거는 엄연히 구분된다. 같은 날 치르는 서울시교육감 선거는 전임 교육감의 대법원 유죄 판결로 인한 피선거권 상실, 부산 금정구청장과 인천 강화군수 선거는 전임자 사망에 따른 보궐선거다. 김영배 민주당 의원이 금정구청장 보궐선거를 두고 “원인 제공, 혈세 낭비한 국민의힘을 또 찍어줄 거냐”고 했다가 유족에게 고소를 당하고, “패륜적 언행”이라는 여론 뭇매도 맞았다.⊙
10-16 한남동 7인 vs 도곡동 7인

이현종 논설위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 경쟁자이던 시기 양측의 계파는 살던 동네 이름을 따서 상도동계·동교동계라고 불렀다. YS는 청와대 시절을 제외하고 상도동에서 평생을 살다가 생을 마쳤고, DJ는 잠시 일산으로 옮겨 대통령이 된 다음 동교동 사저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에는 주로 대통령 성씨를 따서 친노, 친이, 친박, 친문이라고 지칭했다. 지금도 윤석열 대통령의 측근 그룹은 친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친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친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윤 대통령·김건희 여사와 한 대표 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동네 이름을 딴 새로운 계보가 탄생할 조짐이다. 한 대표 측은 김 여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통령실 일부 참모 그룹을 관저가 있는 한남동을 따서 ‘한남동 7인회’로 부르고 있다. 대통령도 아닌 영부인이 계보를 갖고 있다는 것도 처음 보는 현상이다. 윤 대통령이 정치 경험이 전혀 없이 당선되다 보니 주변에 참모 그룹이 형성되지 못했다. 김 여사는 윤 대통령의 검사 시절부터 중요한 거취를 결정할 때 조언해 왔다. 조언이 맞아 들면서 김 여사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결혼 당시 단돈 2000만 원밖에 없었다는 윤 대통령은 집안 경제를 ‘코바나컨텐츠’라는 그림 전시 기획사를 운영한 김 여사에게 의지해 왔다. 김 여사의 관여 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 참모진도 김 여사가 코바나컨텐츠에서 인연을 맺었던 인사들이 들어간 경우가 많다. K 비서관은 코바나컨텐츠에서 특별 도슨트(전시물 설명하는 사람)로 활동한 바 있다. L 비서관도 김 여사 지인이 많이 활동한 예술단체에서 일했는데, 이때 김 여사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7∼8명은 일과 후 서초동 사저·한남동 관저 등에서 따로 모임을 갖고 ‘이너서클’처럼 활동해 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윤 대통령 부부의 의존도가 높으면서 비서실 공조직이 소외되는 일이 벌어졌다.
친윤계의 권성동 의원은 반대로 한 대표의 측근 그룹을 ‘도곡동 7인회’로 명명했다. 한 대표가 사는 도곡동을 빗대 ‘한남동 7인회’에 대응하기 위한 표현이다. 그래도 동교동과 상도동계는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가 있었는데 한남동과 도곡동은 함께할 수 있을까.⊙
10-17 한강과 서점의 ‘오픈런’

최현미 논설위원
소설책 ‘오픈런’은 남의 나라 일인 줄 알았다. 지난해 4월 무라카미 하루키가 6년 만에 장편 ‘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을 출간한 날, 일본 대형 서점 앞엔 개점 한참 전부터 긴 줄이 섰다. 드디어 서점 문이 열렸고 독자들이 하루키 신작을 손에 든 뒤 환호하는 장면은 우리 방송 뉴스로도 전해졌다. 학교를 빠지고 직장에 휴가를 내고 온 이도 있었다. 하루키 오픈런은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2009년 하루키의 장편 ‘1Q84’, 2013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와 2017년 ‘기사단장 죽이기’가 나온 날도 마찬가지였다. 하루키스트들은 서점 앞에서 기다렸고, 발매 첫날 일본 서점 관계자의 말처럼 책은 ‘빛의 속도’로 팔려나갔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한국에서도 오픈런이 벌어졌다. 그의 책은 노벨상 발표 닷새 만에 100만 권 넘게 팔렸다. 하루 평균 20만 부씩 팔려나간 셈이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1분당 136권이 판매됐다는 계산도 나왔다.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1∼10위를 한강 작품이 싹쓸이해 인기 가수들만 한다는 차트 ‘줄 세우기’도 벌어졌다. 작가의 주요작인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흰’뿐 아니라 그의 전 작품이 두루 판매되고 있다. 1993년 시인으로, 1994년 소설가로 등단한 한강은 이제까지 약 20종의 책을 냈다.
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는 노벨상 이전에 100만 부 이상, ‘소년이 온다’ 등도 수십만 부가 팔려 이미 기존 소설 독자들은 대부분 읽었다고 추정한다면, 이번에 새 예비 독자들이 대거 들어왔다. 단기간에 수십만 한국인이 같은 텍스트를 읽고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집단적 문화 체험을 하는 중이다.
한국문학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100만 부짜리 베스트셀러가 늘 존재했다. 김훈 ‘칼의 노래’(2001),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2008), 공지영 ‘도가니’(2009)가 있었고, 좀 더 대중적인 작품들은 400만∼500만 부씩 팔렸다. 이제는 책 인구가 줄어들면서 유명 작가 작품도 10만∼20만 부 판매가 쉽지 않다. 한강 오픈런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는 열풍이 아니라 소설·문학·책 읽기의 전기가 되기를 바라는 이유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 작가들이 신작을 내는 날 서점 앞에 긴 줄이 서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10-18(금) 국토부의 엇박자

이철호 논설고문
미국 경제가 연착륙할 조짐이 뚜렷하다. 안정적 성장을 이어가는 ‘무착륙’ 시나리오까지 나온다. 2%대 물가상승률과 4% 실업률이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것이다. 미 경제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골디락스’ 속에 순항할 것이란 전망이 대세다. 한국은 울퉁불퉁한 길을 가고 있다. 9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6%로 낮아졌고 실업률도 2.1%로 역대 최저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지난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린 이후 연말까지 동결할 움직임이다.
“들썩이는 집값과 가계부채 증가세가 금융 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가 금리 인하에 신중한 이유다. 통계청도 2027년부터 소비자물가에 집값 상승률을 반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그동안 자가주거비를 뺀 채 전·월세 임차료만 포함시켜 체감물가와 큰 괴리를 보였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9년이 대표적이다. 당시 집값 급등에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4%에 머물렀다. 이런 통계 착시로 인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씩 두 차례나 내리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뒤늦게 지난달부터 2단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가 시작됐지만, 가계부채는 잡히지 않고 있다. 서울 집값도 상승률만 둔화했을 뿐 여전히 고공행진이다. 가계대출에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들어 디딤돌(주택구입)·버팀목(전세) 등 국토교통부의 정책대출이 30조 원 폭증해 전체 주택담보대출 증가분(46조5000억 원)의 64%를 차지했다. 문제는 이런 정책 모기지와 전세대출 등이 DSR 적용을 안 받는 사각지대라는 점이다. 특히 9월 가계대출 증가세는 주춤했지만, 정책대출은 오히려 4000억 원 더 늘어났다.
국토부는 이런 구멍을 메우기는커녕 헛발질이 도를 넘고 있다. 박상우 장관은 “집값은 일시적 잔등락”이라 우기다가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린벨트까지 푸는 8·8 공급 대책을 내놓았다. 디딤돌·버팀목·신생아 대출도 “집값 상승의 핵심 원인이 아니며, 줄일 생각도 없다”며 버티는 중이다. 이들 대출에도 DSR 적용을 검토하는 금융 당국과 엇박자를 내고 있다. 오로지 “신혼부부·청년은 좀 쉽게 대출해 줘야 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마패 삼아 독불장군처럼 구는 분위기다.⊙
10-21(월) 수사지휘권 흑역사

김세동 논설위원
명품 가방에 이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서도 검찰이 김건희 여사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더불어민주당은 심우정 검찰총장과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표 11월 1심 선고를 앞두고 여론을 환기하려는 물타기 느낌이 든다. 김 여사에 대한 비판 여론에 기대 형사사법체계를 마비시키려는 노림수라는 의심도 간다.
지난달 16일 취임한 심 총장이 이 사건에 대해 보고받거나 지휘를 하지 않았고, 실제 수사지휘권도 배제돼 있어 탄핵소추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민주당(강유정 원내대변인) 안에서도 제기됐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지도부가 심 총장을 탄핵 대상에 포함해 의심을 더 키운다.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한 검찰총장의 수사지휘권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10월 추미애 장관이 박탈했는데,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복원되지 않았다. 가족이 관련된 사건이라며 윤 총장의 지휘권을 박탈했는데, 김오수·이원석·심우정 등 2대 정부 3명의 후임 검찰총장에 이르도록 복원되지 않았다. 이 총장이 임기 종료를 두 달 앞두고 도이치 사건에 대한 수사지휘권 복원을 요청했을 때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의 지휘권 복원 지휘도 극도로 제한돼야 할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이라며 거부했다. 견강부회 주장이다.
그와 별도로 그간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 행사가 논란을 낳아 폐지 주장도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게 노무현 정부 때 천정배 법무장관이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불구속 수사를 명령한 것. 이에 김종빈 검찰총장이 장관 지시를 강력히 비판하면서도 법은 따라야 한다며 수용하고 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 법이 검찰청법 제8조로, ‘법무부 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고 돼 있다. 취지는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될 수 있으면 개입하지 말라는 것인데, 외려 정권에 부담스러운 사건 수사를 막는 방편으로 써 왔다. 1949년 검찰청법 제정 이후 4번 이뤄진 장관의 지휘권 행사가 모두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다. 일본에서도 집권당 비리 수사를 덮으려 행사됐다가 내각 총사퇴 재앙을 맞았다.⊙
10-22 노벨상 수상자들의 AI 경계론

문희수 논설위원
올해 노벨상에선 단연 인공지능(AI)이 주역이다. AI 전문가로 꼽히는 학자들이 3개 과학상 가운데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위원회가 최소한 과학 분야에서는 AI의 기여를 공인한 셈이다.
이들 노벨상 수상자가 정작 AI의 위험성을 경고해 이채롭다. 물리학상 수상자인 제프리 힌턴(76) 캐나다 토론토대 명예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20년 안에 AI의 추론 능력이 사람을 앞설 확률이 최소 50% 이상”이라며 인류가 AI에 지배당하는 공상과학영화가 현실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류가 향후 몇 년간 AI 통제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힌턴 교수는 글로벌 AI 4대 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AI의 내부고발자’라는 상반된 수식어도 붙는다. AI의 위협을 경고하기 위해 2023년 구글 부사장을 사퇴한 경력도 돋보인다. 오픈AI 공동창업자로서 CEO 축출 사태를 주도했던 일리야 수츠케버를 비롯, 미국 실리콘밸리의 AI 핵심 인력 상당수가 그의 제자다.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인 존 홉필드(91) 미국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역시 “통제할 수 없고 한계를 파악할 수 없는 것에 큰 불안감을 느낀다”며 AI가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을 우려했다. 화학상 공동 수상자인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CEO도 “선한 목적을 위해 쓰일 훌륭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해를 끼치는 일에 사용될 수도 있다”고 동조했다.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MIT 교수는 AI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개발의 과속을 경계했다. 특히, AI의 일자리 파괴는 향후 10년간 전체의 5%에 불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AI가 시대적 과제지만, 빛과 그림자가 있다. 무엇보다 AI가 인류 전체를 파멸할 수 있는 대재앙을 초래할 위험성을 차단해야 마땅하다. 살상용 전투 드론은 이미 하늘을 날고 있고, 킬러 로봇이 등장할 날도 머지않았다. 개별 지도자·빅테크·큰손 투자자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AI 재앙은 일단 벌어지면 끝장이다. 핵무기 위협을 막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생긴 것처럼 인류가 집단지성을 통해 수년 안에 국제적인 통제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통상적인 규제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사전 대비가 시급하다.⊙
10-23 ‘대포밥’ 신세 북한군

이미숙 논설위원
전쟁은 아군과 적군 간의 대량 살육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비인간적이지만, 전쟁터에서 쓰이는 ‘대포밥’이나 ‘총알받이’란 표현은 그중에서도 최악이다. 병사를 탄알과 같은 소모품으로 비하하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북한 공산군은 국군을 향해 ‘미제 놈의 대포밥이 되어 죽을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고, 미군 병사들은 중국군을 대포밥이라고 불렀다. 변변한 복장도 갖추지 않은 의용군이란 이름의 병사들이 인해전술의 도구처럼 쓰인 탓이다.
6·25전쟁 때의 중국군 포로 이야기를 담은 하진의 소설 ‘전쟁 쓰레기(War Trash)’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중국 국경 안으로 불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것이었다. 혹은 우리는 대부분의 전쟁 포로들이 믿는 것처럼 러시아인들을 위해 대포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중국군은 미군이 6·25전쟁을 만주 등지로 확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 왔다고 생각하지만, 포로로 잡힌 후엔 김일성의 6·25 남침을 승인한 소련을 대신해 싸운 것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는 얘기다. 6·25전쟁의 어두운 유산인 대포밥 표현이 재등장했다.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을 하자 미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은 ‘내셔널 인터레스트’ 기고문에서 ‘러시아가 북한 병사들을 대포밥(cannon fodder)으로 여길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도 “북한군은 러시아 부대의 대포밥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면서 “북한군이 무더기로 희생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군사작전’이라고 했고, 국내 여론을 고려해 군 동원령도 내리지 않았다. 부족한 병사는 용병 회사인 바그너그룹을 통해 메꿨다. 이 과정에서 5만여 명의 죄수가 6개월 참전 후 사면 조건으로 투입, 대포밥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바닥이 나자 북한 김정은에게 손을 벌린 것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후 러시아군 사상자는 60만 명으로 추산되고 요즘에도 부상·전사자는 하루 평균 1000명이 넘는다. 70년 전 낯선 땅에서 대포밥이 됐던 중국군처럼 북한군도 생면부지의 땅에서 총알받이가 될 위기다.⊙
10-24 ‘원탁 정치’ 실종 사건

오승훈 논설위원
중세 영국의 영웅담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접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소설, 시는 물론 영화까지 숱한 버전으로 영감을 준 대표적 서사다. 그 원형 탁자는 100명가량이 둥글게 앉는 대형이었다고 한다. 제후와 기사들이 식사 때마다 자리 순서를 놓고 다투자 묘안을 낸 것이 원탁이었단다. 지위에 따라 자리가 구분되던 위계질서를 허물어버렸다. 이후 왕과 귀족들이 전설에 따라 저마다 원탁을 제작했다는 얘기도 있다. 대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발언하는 원탁회의가 여기서 유래했다. 국제기구는 물론 일반 정치 행사에서도 원탁은 회의·회담의 성격과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국내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지난 21일 회동에서 대중의 눈길을 끈 장면 가운데 하나가 ‘원탁 실종’이다. 윤 대통령이 사각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한 대표와 정진석 비서실장을 마주했다. 책상 위에 두 팔을 뻗고 앉은 윤 대통령, 누가 봐도 꼰대 상사가 부하 직원들을 앉혀놓고 훈시하는 듯한 풍경이었다. 계급장 떼고 한판 붙어도 시원찮을 상황인데, 애초 회동 형식부터 허심탄회한 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단 뜻이다. 장소가 원탁이 있는 대통령실 청사 내 집무실이었다가 야외 정원 파인그라스로 바뀌었다는 얘기, 한 대표 측이 사전에 원탁을 요청했지만 대통령실이 사각형 탁자를 배치했다는 얘기 등이 나왔다. 친한계 의원이 “모멸감을 주려는 배치였다”고 하자 대통령실이 “대통령이 주재하는 대화에서 테이블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박했다는 뒷말도 들렸다.
윤 대통령의 원탁 소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때인 지난 2020년 1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당시 윤 검찰총장의 측근을 모조리 내쫓아버린 ‘1·8 대학살’을 했다. 그러자 윤 총장은 “집무실에 있는 원탁을 빼라”고 했다. 커다란 원탁을 계단을 통해 지하 창고로 옮겼다고 한다. 윤 총장과 핵심 참모들이 매일 둘러앉아 현안을 의논했던 원탁이었다. 한 대표도 그 시절에는 원탁 멤버였다. ‘앞으로는 장시간 숙의하기보다, 필요시 짧게 보고만 받겠다’는 취지란 해석이 나왔다. 윤 대통령이 요즘 한 대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사라진 원탁이 보여주는 셈이다.⊙
10-25(금) 기자와 멀어지는 대통령실

이현종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고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긴 가장 큰 이유는 ‘소통’이었다. ‘구중궁궐’이라는 얘기를 들어온 청와대에선 제대로 국민·언론·비서 등과 소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방부 건물로 대통령실을 옮기고 기자실을 대통령이 출근하는 2층에 뒀다. 매일 출근길에 기자들을 직접 만나 질문을 받는 초유의 ‘도어스테핑’을 실시했다. 그러나 2022년 9월 MBC의 ‘바이든 날리면’ 보도와 MBC 기자의 ‘슬리퍼 고함 소동’ 이후 도어스테핑은 61번으로 끝을 맺었다.
이후 명품 가방 사건 등이 터지면서 윤 대통령의 기자 접촉은 극히 줄어들었고, 풀 기자단의 대통령실 행사 취재도 많이 줄었다. 대신 이른바 ‘관선 기자’라고 하는 전속 사진사와 대변인의 서면 브리핑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니 대통령실발 기사의 내용이나 제목이 모두 비슷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윤 대통령과 기자들의 접촉이 원천 차단되면서 한때 기자실을 대통령실 인근 국방회관으로 옮기는 문제가 거론됐다가 기자들의 집단 반발로 취소된 바 있다.
그런데 최근 용산 대통령실에서는 취재·사진·영상 기자들의 할 일이 없어졌다. 특히, 최근 윤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를 비롯한 여당 지도부 만찬(9월 24일), 추경호 원내대표를 비롯한 상임위원장단 만찬(10월 2일), 윤 대통령과 한 대표의 회동(10월 21일) 등이 모두 풀 기자단의 취재 없이 대통령실 직원이 스케치, 사진, 영상을 제공했다. 김건희 여사 관련 행사는 기자의 취재가 봉쇄된 지 오래다. 지난 4월 29일 윤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 때만 해도 취재기자들이 들어갔다.
대변인실은 지난달 24일 윤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 만찬 당시 서면 자료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고 했지만, 뒤늦게 참석자들은 한 대표가 발언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등 매우 냉랭했다고 전했다. 지난 21일 윤 대통령과 한 대표 회동 때는 대통령실이 공개한 7장의 사진 중 윤·한 두 사람만 있는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윤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임을 강조해 왔다. ‘자유’의 필수 요건은 언론의 자유이고 취재의 자유다. 이럴 거면 왜 소통한다고 용산으로 나왔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언론 책임도 크다.⊙
10-28(월) 책의 우주, 동네서점

최현미 논설위원
“서점은 신도들의 공동체다.” 스페인 작가 호르헤 카리온이 전 세계 크고 작은 서점을 직접 찾아 쓴 ‘서점 : 세계를 이해하는 완벽한 장소’에서 내린 정의다. 서점은 책이라는 종교의 성지다. 그래서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단골이었던 105년 전통의 프랑스 독립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같은 곳은 책 신도들의 메카다. 하지만 멀리 파리까지 갈 것도 없다. 요즘 한국의 유명 독립서점·동네서점은 애서가는 물론 여행객의 필수 방문지가 됐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과 함께 동네서점이 화제가 됐다. 한강이 통의동에서 작은 서점 ‘책방 오늘’을 운영한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졌다. 세계적 작가가 작은 서점을 조용히 꾸려 왔다는 사실은 왠지 감동적이다. 작은 서점이 얼마나 큰 세계를 품을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반갑지 않은 뉴스가 따라왔다. 한강의 책이 100만 부 이상 팔려 나갔지만, 동네서점은 책을 공급받지 못해 책을 팔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도매업을 겸하는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들이 도매를 중지하고 소매로 자사에서만 혹은 자사 중심으로 책을 판매했기 때문이다. 또, 출판사들도 동네책방에 직접 공급하는 도매상에 책을 주지 않았다. 노벨상 특수에 상도의가 무너진 것이다.
잇따라 전해진 두 소식은 동네서점의 현실을 보여준다. 특별한 취향과 큐레이션으로 문화적으로 존중받는 동네서점, 하지만 유통 등의 문제로 버티기 어려운 영세한 서점이라는 상황이다. 전국 작은 책방 연합 조직인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는 도서 유통 투명성 확보를 위해 출판서점협의체를 만들고 관련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요청하고 나섰다.
2000년대 말부터 하나둘씩 나오다 201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생긴 동네·독립서점은 ‘책 우주’에서 중요한 자리를 갖고 있다. 1990년대 말 온라인 서점의 등장으로 중·대형 서점이 문을 닫고, 독자가 줄어드는 환경에서도 문화적 취향과 특별한 큐레이션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네 곳곳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 전국에 영업 중인 독립서점은 884곳. 우리도 작가들이 찾고 독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긴 역사가 쌓인 서점을 가져야 한다. 책을 좋아한다는 ‘낭만’만으론 지속 가능성이 없다. 제도와 정책이 필요하다.⊙
10-29 삼성전자의 굴욕

이철호 논설고문
삼성전자가 동네북 신세다. 시스템 반도체는 설계부터 밀리고, 파운드리(위탁생산)에선 TSMC에 게임이 안 된다. 주력인 메모리에서도 첨단 고대역폭메모리(HBM)는 SK하이닉스에 뒤처지고 중저가 D램에선 중국의 추격이 거세다. 주가가 ‘5만 전자’로 가라앉은 것은 이런 총체적 난국의 결과다. 불길은 이재용 회장까지 번졌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빈정거림에다 지난 10년간 자본수익률이 뚝 떨어졌다는 보도까지 나온다.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시달릴 동안 삼성에는 재무 출신이 득세했다. 재무·회계 출신들은 콩을 센다는 ‘빈 카운터스(Bean-Counters)’가 별명이다. 모든 문제에 숫자로 접근하고 단기 수익률만 따진다는 냉소적 표현이다. 삼성도 쉬운 길만 골라 갔다. 예를 들면, 30조 원의 설비투자를 나눌 때 “2차전지에도 3조 원을 달라”는 삼성SDI 의견은 무시됐다. “LCD처럼 언제 중국에 먹힐지 모르는데, 차라리 기대수익률이 높은 D램에 집중하자”는 논리였다. 2019년 김기남 부회장 시절 “돈이 안 된다”며 HBM을 접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자보다 ‘양복쟁이’들이 설치면서 망조가 든 미국 인텔·보잉과 닮은꼴이다. 탁월한 제품보다 비용 절감이 우선됐다.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으로 결정적 선택을 해야 위대한 기업이 탄생한다. 엔비디아는 2019년 3월 이스라엘의 멜라녹스를 69억 달러(약 8조 원)에 인수했다. 그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생태계를 구축해 인공지능(AI)의 제왕에 올랐다. 애플도 삼성전자에 맡기던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독자 개발하기 위해 2009년 짐 켈러의 팰로앨토(PA) 반도체를 2억8000만 달러에 사들였다. 직원 150명의 이 작은 회사가 저전력·고효율의 AP를 개발해 아이폰 신화를 완성했다.
요즘 삼성전자에는 ‘초격차’는 사라지고 사방에서 경쟁력 상실을 걱정하는 소리만 들린다. 위기의식도 예전 같지 않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제동을 걸지 않았으면 생존조차 위험했을지 모른다는 비난까지 쏟아진다. 삼성전자가 30여 년 만에 맞는 대(大)굴욕이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릴 때다. ‘1등도 졸면 죽는다’는 게 이번에는 빈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10-30 위기 몰린 檢 수사심의위

김세동 논설위원
검찰의 기소독점권 오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6년 전 도입된 수사심의위원회가 존폐 위기에 몰렸다.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 사건의 기소 여부를 놓고 검찰총장이 회부한 수심위와 최재영 목사 요구로 열린 수심위가 정반대 결정을 내림으로써 근본적 한계를 노출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이원석 검찰총장이 부의한 수심위는 불기소를 결정했으나, 명품 가방을 전달하고 몰카로 찍어 공개한 최 목사의 요구로 열린 수심위는 기소를 의결했다.
전 판·검사, 법학교수 등 법률전문가들이 모여 한 사건에서 상반된 2개 결정을 함으로써 수심위는 차라리 폐지하는 게 낫지 않으냐는 여론에 불을 댕겼다. 김 여사를 상대로 한 몰카 공작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떠나 공직자 부인은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이 아닌데도 불기소 결정 않고 굳이 수심위로 떠넘겼던 검찰이 정작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은 수심위에 회부하지 않고 불기소 판단함으로써 책임 회피 수단으로 쓴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문무일 검찰총장이 여권의 검경수사권 조정 추진에 맞서 선도적으로 도입했지만, 당시에도 검찰의 자의적 수사 및 기소재량권 남용에 대한 통제수단이 되기엔 역부족이란 지적이 많았다. 수심위 결정은 검찰에 아무런 구속력이 없고 참고만 하는 권고적 효과에 불과하다. 더구나 위원 명단, 심의 내용 등이 공개되지 않아 투명성, 공정성도 논란이다.
법률이 아닌 대검 예규로 규정된 수심위는 검찰총장이 사법제도 등에 학식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 중에서 위촉한 150∼30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현재 250명 정도로 알려졌다. 수심위 결정의 신뢰성과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위원 중에서 무작위로 추첨해 15명을 그때그때 선임한다고 한다. 특정 직역에 편중되지 않도록 변호사, 법학교수, 시민단체·종교계 인사, 언론인과 비법학교수 등 4개 업역으로 구분해 별도로 추첨한다고 하는데, 실제 그런지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이 수심위의 불기소 권고를 따르지 않고 기소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소 결정을 안 따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명품 가방 사건에서 깼다. 주가조작 의혹까지 포함해 김 여사 사건은 무혐의 처분도, 기소도 하지 않고 질질 끌어온 검찰이 키웠다. 그러다 수심위 존폐 논란까지 자초했다.⊙
10-31(목) 끝 보이는 ‘전기차 캐즘’

문희수 논설위원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의 그늘이 짙다. 글로벌 전기차·배터리 업계엔 긴 시련기다. 그래도 많은 업체가 포기하지 않고 실력을 키우고 있다. 이런 때에 마침내 출구가 보인다는 분석이 나와 관심을 끈다. 무엇보다 소비자에게 가장 큰 부담인 높은 가격이 빠르게 낮아져 수요가 살아날 것이란 전망이 고무적이다.
최근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골드만삭스는 오는 2026년엔 전기차 값이 가솔린 등 내연기관차와 비슷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전체 가격의 30∼40%를 차지하는 배터리의 원가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게 근거다.
실제 배터리 평균 가격은 지난해 킬로와트시(㎾h)당 149달러(약 20만4000원)에서 올해 말 111달러, 2026년엔 82달러 수준까지 낮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또, 배터리 양극재 원가의 60% 이상인 리튬 가격은 최근 ㎏당 1만3000원대로 사상 최고치였던 2022년 11월보다 88% 가까이 떨어졌고, 니켈도 최고가 대비 60%가량 하락했다. K-배터리의 주요 소재인 망간·코발트도 크게 내렸다. 이와 함께 배터리 팩에 직접 셀을 조립해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등 신기술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제조업체들의 기술 혁신도 확산하고 있다. 테슬라는 차체와 부품을 한 번에 찍어내는 기가 캐스팅과 배터리 팩을 차량 구조물로 활용하는 신기술(셀 투 섀시)로 차량 경량화와 공간 최적화를 꾀하고 있다. 물론 현대차·기아도 발 빠르다. 고급화·대형화 대신 대중용 저가 소형차 비중이 높아지는 것도 수요 회복 전망을 뒷받침한다. 세계 4위인 스텔란티스 산하 시트로엥은 내년 상반기에 2만 유로(약 3000만 원)짜리 소형차 출시를 예고한 정도다.
마침내 전기차 캐즘의 끝이 보인다. 배터리 업계의 간판인 LG에너지솔루션의 올 3분기 실적 호전도 청신호다. 1년여 뒤엔 말 그대로 대중화 시대가 열릴 참이다. 전기차는 주행거리 등 기본 성능과 기술 측면에선 이미 내연차와 맞먹는 수준이다. 그렇지만 배터리 화재 같은 안전 문제, 충전소 부족 등 정책적·사회적 여건 미비, 핵심 원자재 조달 등은 여전히 과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의 보조금 폐지 같은 리스크도 속출한다. 기업·정부·국회 모두 준비를 잘해야만 기회를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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