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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說竪說(동아일보) 2024-10/ 10-01(화) 1열로 세우면 지구 12바퀴, - 10-31(목) “지지 후보 표명 않겠다”에 독자 20만 떠난 WP

상림은내고향 2024. 10. 27. 13:10

橫說竪說(동아일보) 2024-10/

10-01(화) 1열로 세우면 지구 12바퀴, 현대차 생산 1억 대 돌파

 

 현대자동차가 누적 차량 생산 1억 대를 달성했다. 1968년 미국 포드 차량 조립을 시작으로 자동차 생산에 발을 내디딘 지 56년 만이다. 현대차에 앞서 1억 대를 생산한 업체는 미국의 GM과 포드, 일본의 도요타 닛산 혼다, 독일 폭스바겐 등 6곳뿐이다. 모두 100년 안팎의 역사를 자랑하는 업체들로, ‘1억 대 클럽’에 가입하기까지 60∼70년씩 걸렸는데 현대차가 최단기간 입성에 성공했다.


▷1억 대라고 하면 쉽게 감이 오지 않는다. 현대차에서 가장 많이 생산한 베스트셀링카 아반떼(전장 4710mm) 기준으로 한 줄로 늘어세우면 지구 둘레를 약 11.8바퀴 돌 수 있다. 엄청난 성과지만 출발은 소박했다. 1968년 11월 울산공장에서 1호 차량인 1600cc급 준중형 세단 ‘코티나’를 만들기 시작해 그해 533대를 생산했다. 기술이랄 것도 없었다. 부품 국산화율은 21%에 불과했고, 사실상 볼트와 너트를 끼워 맞추는 수준이었다.

▷현대차는 조립 생산에 만족하지 않고 1975년 첫 독자 모델인 ‘포니’를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포니는 이듬해 한국 승용차 최초로 에콰도르 등 해외에 수출을 시작했다. 1986년엔 ‘포니 엑셀’로 자동차 본고장인 미국 땅을 밟았다. 1991년 국내 첫 독자 엔진인 ‘알파엔진’ 개발에 성공했고, 1994년엔 플랫폼 엔진 변속기까지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한 ‘엑센트’를 선보였다. 1996년 글로벌 1000만 대 생산을 달성했고, 이후 2013년 5000만 대, 2019년 8000만 대, 2022년 9000만 대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현대차는 판매 대수 기준 세계 3위의 빅메이커로 우뚝 섰다. 스승들은 진작에 뛰어넘었다. 현대차에 처음 조립을 맡겼던 포드를 2010년 글로벌 생산량에서 제쳤고, 엔진과 변속기를 얻어 썼던 일본 미쓰비시는 아득히 넘어섰다. 경쟁사들이 주춤할 때 멈추지 않았다. 코로나19 당시 GM과 포드는 공장 가동을 멈췄지만 현대차는 생산을 유지해 점유율을 높였다. 도요타와 폭스바겐이 중국에 대한 높은 의존도로 생산에 발목이 묶여 있을 때 현대차는 미국, 인도 등 신시장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현대차 2억 대 시대로의 출발을 알린 1억1번째 생산 차량은 전기차 ‘아이오닉 5’였다.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미래차 시장에서 승리하려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을 돌파하고 저가 공세를 앞세운 중국의 추격을 뿌리쳐야 한다. 최근 중국은 댓글부대를 동원해 “흉기차(현대차·기아를 비하하는 표현) 누가 타냐”는 식의 악성 인지전까지 펼치고 있다. 승리의 필살기는 여전히 품질과 신뢰다. 56년 전 첫 차를 만들던 마음 그대로 열정과 도전정신도 날카롭게 벼려야 할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0-02 꼬리 내린 텔레그램

 

‘어둠의 메신저’ 텔레그램이 꼬리를 내렸다. 딥페이크 유통, 마약 밀매, 테러 등 범죄에 악용되고 있으니 협조해 달라는 각국 정부의 요구에도 끄떡 안 하던 텔레그램이 응답하기 시작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등 규제 당국이 성착취물 등 불법 게시물을 지워달라고 하면 바로 삭제하고, 수사기관의 범죄자 개인정보 제공 요청에도 응할 방침이라고 한다. 우범자들이 몰려드는 후미진 뒷골목 같은 온라인 공간에 환한 가로등을 세우기로 한 셈이다.

▷텔레그램으로선 등 떠밀린 선택이었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파벨 두로프가 프랑스에서 체포돼 기소된 상황에서 선처를 구하려면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범죄를 방관하는 플랫폼 사업주는 공범으로 간주해 처벌한다는 프랑스 국내법이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두로프 CEO는 이용자 간 대화가 서버에 남지 않고, 암호화된 개인정보를 푸는 것도 쉽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체포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정보 제공이 일부 가능하다고 태도를 바꾼 걸 보면 그동안 정부의 협조 요청을 일부러 외면해 온 것 같다.

▷이번 텔레그램 사례는 유해 콘텐츠를 방치하는 해외 플랫폼에 책임을 묻고 시정하도록 하는 게 공허한 목표가 아니란 걸 보여준다. 외국 기업에 무리하게 국내법을 들이대면 통상 마찰이나 사업 철수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만 설득을 병행하면서 책임을 다하도록 동원 가능한 압박 수단을 마련해놔야 한다.

 

▷호주의 온라인안전국(eSafety Commissioner)이 좋은 사례다. 이 기관은 디지털 범죄를 총괄 대응하는 호주 정부의 컨트롤타워다. 온라인안전국은 구글,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플랫폼 기업에 2년간 시간을 줘 유해 콘텐츠 자정 시스템을 만들도록 한 뒤 충분치 않으면 정부 기준에 따르도록 했다. 아동 성학대나 테러 관련 게시물은 최악의 콘텐츠로 분류해 무조건 삭제하게 했다. 정부의 최고 대응 기구가 어느 정도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제재를 부과하다 보니 기업들의 이행률도 높다.

▷우리는 빅테크 기업들과 상대할 이렇다 할 컨트롤타워가 없다. 여성가족부, 교육부, 보건복지부, 방송통신위원회 등 여러 부처에 걸쳐 있다. 이들 부처에서 불법 콘텐츠를 발견하면 방심위로 넘기는데 방심위는 구속력이 없는 민간 독립기구다. 플랫폼 기업들에 자율 규제를 요청할 수 있을 뿐이어서 삭제 요구 콘텐츠의 30∼40%는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텔레그램을 변화시킨 건 프랑스 사법 당국이고, 호주에서 빅테크들이 눈치 보는 건 온라인안전국이다. 우리도 이런 사례를 참조해 해외 플랫폼 기업들이 불법 유해 콘텐츠 방치를 돈 벌이 수단으로 삼겠다는 발상 자체를 못 하게 해야 한다.

 

10-03 저출산·입시 해법까지 내놓는 한은 총재?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한국은행과 재정·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다. 과거 한은은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의식해 정부와의 교류를 꺼려왔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좀 다르다. 지난달 30일 역대 총재 중 처음으로 기재부를 방문해 ‘정책 공조’를 강조했다. 교육, 복지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엔 대학 입시 문제를 거론해 논쟁의 불을 지폈다. 기재부와의 미팅 직후 “성적순 대학 진학이 공정한 것은 아니다”라며 8월 말 한은이 보고서에서 제안한 ‘상위권 대학 지역 비례 선발제’를 다시 거론했다. 올해 들어 한은은 ‘BOK 이슈노트’라는 형식을 빌려 논쟁적 이슈를 적극 제기하고 있다. 3월엔 돌봄 비용을 낮추기 위해 돌봄 서비스의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고 했고, 6월엔 한국의 의식주 비용이 높다며 농산물 수입 확대를 제안했다.

▷통화정책을 다루는 한은이 입시경쟁 문제에 주목하는 논리는 이렇다.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한 과도한 교육열이 서울 쏠림과 집값 급등, 저출산 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낮춰 금융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은의 관심 영역이 아닌 곳이 없다. “자녀를 낳으면 정년을 연장해 주자”는 내부 기고문도 있었고, 비수도권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균형 발전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등의 수도권 집중 완화 방안도 제시됐다.

 

▷이 총재는 취임 이후 통화정책만으론 장기 저성장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구조개혁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구조개혁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수준을 넘어 한은이 직접 해법을 찾으려는 모양새다. 문제는 금융 분야에 특화된 한은이 내놓는 각종 해법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데 있다. 주요 대학 신입생 선발인원을 지역별 인구비례로 할당하자는 정책을 교육부가 내놨다면 입시 현장을 모르는 획일적인 규제라는 비판이 들끓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의 복잡다단한 문제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내듯 단칼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작 금리와 가계부채에 대한 한은의 해법은 모호하기만 하다. 금리를 올려야 할 때 제대로 올리지 못하더니, 이제 내려야 할 땐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한은으로선 정부 탓을 하고 싶겠지만 한은 총재 역시 ‘거시경제금융현안간담회(F4회의)’의 멤버인 만큼 자유롭다고 할 순 없다. 이 때문에 한은이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두고 ‘구조적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금리정책 실패의 책임에서 회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이 집중해야 할 본연의 역할은 ‘모든 문제 연구’가 아니라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이지 않을까.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0-04 집값 띄우기, 편법 증여… 수상한 거래들

 

서울 서초구 아파트 집주인 100여 명을 모아 단체 채팅방을 만든 뒤 집값 담합을 주도한 ‘방장’이 석 달 전 검찰에 넘겨졌다. 이 방장은 단톡방 멤버들에게 30억 원 안팎에 팔리던 전용면적 84㎡를 34억 원에 내놓으라며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급매를 위해 싸게 내놓은 집주인과 공인중개사를 압박해 매물을 거둬들이도록 했다. 단톡방에선 저가 매물을 올린 공인중개사의 신상과 사진을 공유하는 ‘좌표 찍기’도 버젓이 이뤄졌다. “이런 부동산은 응징해야 한다”, “허위 매물로 신고하겠다” 등의 단톡방 대화들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졌다.

▷서울에서 집값 담합을 주도한 사람이 형사 입건된 건 처음인데, 앞으로 이런 사례가 더 나올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벌인 기획조사에서도 집값 담합을 포함해 위법 의심 거래가 수백 건 적발됐기 때문이다. “우리 아파트는 ○○억 원 이하로 내놓지 마세요.” “○○억 원 이하로 매물 등록한 공인중개사에 단체로 항의합시다.”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주민들이 오픈 채팅방을 만들어 집값을 담합한 정황이 포착됐다.

▷국토부와 관계기관들이 올 상반기 수도권에서 이뤄진 주택 거래 중 수상한 거래를 뽑아내 정밀하게 들여다봤더니, 불법이 의심되는 397건이 추려졌다고 한다. 특히 최근 집값이 많이 뛴 서울 ‘강남 3구’와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의 45개 아파트 단지가 핀포인트 대상이 됐다. 서울 집값의 대장주 역할을 하는 이들 단지에서는 올 들어 신고가 거래가 속출했는데, 가격 담합이나 가격 거짓 신고 같은 불법 거래가 확인된다면 집값 거품을 만든 꼴이다.

 

▷불법 의심 사례 중 가장 많은 건 편법 증여였다. 한 20대 매수인은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서울 용산구 아파트를 21억 원에 사들였다. 어머니에게서 빌린 14억 원, 증여받은 5억5000만 원, 주택담보대출 3억5000만 원으로 매매 비용을 충당한 이른바 ‘엄마 찬스’였다. 올 들어 국회의원 후보들은 물론이고 대법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국가인권위원장 등이 줄줄이 ‘엄빠 찬스’를 동원한 편법 증여 의혹으로 논란이 됐는데 고위공직자들 사이에서 만연한 편법·꼼수 탈세가 일반 국민들로 확산된 셈이다.

▷이와 별개로 정부가 지난해 하반기 신고된 전국 아파트 거래 18만여 건을 분석했더니 미등기 거래가 500건이 넘었다. 집값을 의도적으로 띄우기 위해 높은 가격에 실거래가 신고만 한 뒤 잔금을 치르지 않은 허위 거래일 가능성이 작지 않다. 대출을 조이자 가파르게 치솟던 서울 집값 상승세가 한풀 꺾였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이 틈을 타고 집값 담합이나 편법 증여, 실거래가 띄우기 같은 불법 행위가 집값 상승세를 부추기지 않도록 범정부 차원의 대처가 필요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0-05(토) ‘도로 위 폭탄’ 마약 운전, 음주 운전보다 처벌 수위 낮다니

 

차선을 넘나들며 아찔한 곡예 운전을 하는 차량을 본다면 음주운전 말고 이것도 의심해봐야 한다. 한국이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 아닌 현실에서 운전자가 약물에 취해 있을 수 있다는 건 억측이 아니라 합리적 추측이다. 지난달 28일 새벽 서울 강남구의 유흥가 주변 도로에서 경찰이 국내 최초로 ‘약물 운전 단속’을 시행했다. 검사키트에 침을 뱉으면 마약 및 약물 11종에 대한 양성 여부를 10분 안에 알 수 있다고 한다.

▷약물 운전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 것은 지난해 8월 이른바 ‘롤스로이스남 사건’의 충격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에서 약물에 취한 20대 남성 신모 씨가 롤스로이스 차량을 몰고 인도로 돌진해 20대 여성을 치어 숨지게 했다. 올해 4월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선 필로폰을 투약한 20대 벤츠 운전자가 오토바이를 추돌해 50대 배달노동자가 숨졌다. 마약류 및 약물 운전에 따른 운전면허 취소자는 2019년엔 57명에서 지난해 113명으로 크게 늘었다.

▷약물 운전은 환각, 환청 때문에 대형 사고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지만 음주 운전에 비해 처벌 수위가 훨씬 낮다. 도로교통법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의 운전 금지’ 조항이 별도로 있다. 혈중 알코올 농도에 따라 차등 처벌하는데, 0.2% 이상이면 2년 이상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상습 음주운전자에 대한 가중 처벌도 가능하다. 반면 약물 운전은 ‘과로한 때 등의 운전 금지’ 조항에 포함돼 규정돼 있을 뿐이며, 처벌 수위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그친다.

 

▷경찰의 음주 측정 요구에 불응하면 형사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약물 운전에 대해서는 동공 변화, 흥분, 말더듬 등의 징후가 명확해도 운전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경찰이 검사를 할 수 없다. 7월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에 대해 경찰이 마약 검사를 요구했지만 불응해 그냥 귀가 조치했다. 이 운전자는 2시간 뒤 또 사고를 냈고 이번엔 검사를 해보니 향정신성 약물 성분이 검출됐다. 검사를 강제할 수 있었다면 적어도 두 번째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음주운전에는 혈중 알코올 농도라는 기준이 있지만, 약물이 운전자의 상태에 미친 영향을 측정하는 기준이 없다. 합법적인 의료용 약물이라도 투약 후 얼마 동안 운전하면 안 되는지 가이드라인이 없다. 영국과 독일은 약물 투약 후 24시간 동안 운전하지 못하게 하고, 프랑스는 투약 당일에 운전을 금지한다. 날로 늘어나는 약물 운전이 ‘도로 위 시한폭탄’이 되지 않도록 제대로 된 기준을 세워 엄하게 단속하고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0-07(월) 사망자 4만1870명, 참혹한 ‘가자 전쟁’ 1년

 

1년 전 오늘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세력 하마스가 분계 장벽을 넘어 이스라엘 남부를 기습했다. 민간인 약 1200명이 숨졌고, 약 250명이 인질로 끌려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지상군을 투입해 하마스 소탕에 나섰고, 서울 면적의 60% 정도인 가자지구 대부분을 장악했다. 몇 차례의 이-하마스 휴전협상이 불발되는 동안 국제사회 관심은 헤즈볼라의 배후인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으로 옮겨간 듯하다. 1년 전 받았던 전쟁의 충격이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다 가자지구 사망자가 4만1870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전해졌다. 하마스 보건부와 유엔 기구가 파악한 이 숫자는 민간인과 하마스 대원을 합친 것인데, 사망자의 30% 이상이 어린이로 파악됐다. 정치와 군인이 시작한 전쟁에서 사회적 약자가 제일 먼저 희생된다는 사실이 재확인됐다. 하마스는 빽빽한 흙벽돌 건물 밑으로 지하 터널을 뚫었고, 그곳에서 무기와 인질을 숨겨놓고 저항해 왔다. 하마스가 자국민을 방패 삼은 곳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집중되면서 희생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인구 215만 명인 가자지구에서 주민의 90%가 피란민이 됐다. 식량, 의료품이 절대 부족하고, 병원과 학교는 제 기능을 잃었다. 구호품 실은 트럭을 차단하는 바람에 외국 공군 수송기가 약품과 밀가루를 낙하산에 매달아 투하하던 장면이 기억에 선명하다. 1년 동안 이 좁은 땅에 평균 3시간에 1번씩 폭격이 감행됐다. 외신 사진 가운데 팔다리에 자신과 가족의 이름을 써넣는 모습이 있다. 폭격으로 신체 일부가 훼손되더라도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마스 보건부가 지난달 649쪽 분량의 전쟁 사망자 명단을 공개했다. 그때까지 사망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3만4000여 명을 나이순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그 명부 1∼14쪽을 채운 710명은 0세로, 첫 번째 생일을 맞이하지 못한 채 어른들의 전쟁에 스러져 갔다. 군사작전에 직접 희생됐을 수도 있고, 나빠진 영양과 의료 환경 탓에 숨졌을 수도 있다. 기습공격은 하마스가 감행했지만, 그 피해는 하마스가 지키겠다고 약속한 팔레스타인인에게 집중된 것이 이번 전쟁의 아이러니다.

▷지난 1년간 이스라엘은 군사작전에선 승리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아랍세계에는 분노와 증오가 쌓여 왔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대선 철 미국의 리더십 부재를 틈타 더 공세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가깝게는 하마스와 헤즈볼라, 멀리는 이란과 예멘 반군을 상대로 하니, 네 갈래 전쟁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선 하마스 1인자 제거와 100명 남짓 남은 이스라엘 인질의 석방을 손에 쥐어야 멈출 듯하다. 하마스로선 응할 수 없는 조건이니, 전쟁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 정치와 거리가 먼 이들의 수난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0-08 “의대 5년제로 단축”… 잇단 ‘땜질 처방’ 중에도 가장 황당

 
 
 

의대 공부량은 어마어마하다. 그중에서도 해부학 병리학 등 ‘기초의학’과 내과 외과 등 ‘임상의학’을 동시에 배우는 본과 1, 2학년의 공부량은 압도적이다. 배우는 과목이 많다 보니 하루 8시간씩 꼬박 수업을 듣고 2, 3주에 한 과목씩 시험을 치른다. 과목당 2000∼3000쪽에 달하는 강의 자료를 통째 외워야 할 정도로 암기량이 많다고 한다. 똑똑한 학생들이 모였는데도 의대 유급 비율이 꽤 높은 까닭이다. 이처럼 빡빡한 의대 교육과정을 교육부가 6년제에서 5년제로 단축할 수 있다고 밝혀 논란이다.

▷교육부는 6일 의료인력 수급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의대 교육과정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하겠다며 그 예로 ‘5년제 의대’를 들었다. 이대로 의대생이 복귀하지 않고 의사국가시험을 거부할 경우 내년에 의사 3000명이 사라질 테니 그 뒷감당이 두려웠을 것 같다. 어떡하든 졸업을 시키겠단 얘기니 말이다. 비판 여론이 비등하자 교육부는 “5년 단축이 의무가 아니다. 대학 사정에 따라 학사과정을 조정하도록 길을 터 주려는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다.당장 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선 의대 5년제를 두고 “수의대도 6년인데…” “덤핑 세일이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의료계는 압축 수업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억지로 시행했다간 의대 교육만 부실해질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종태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이사장은 “교육과정을 5년으로 줄이면 방학도 없이 기계처럼 공부해야 한다”, 김성근 전국의대교수협의회 대변인은 “정부가 6년 교육과정도 임상 실습이 부족하다며 개원 면허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으면서 의대 교육과정을 축소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고 했다.

 

▷해외에서도 의대는 기본적으로 6년이다. 미국에선 6년제 통합 의대를 다니거나 아니면 대학 졸업 이후 4년제 메디컬 스쿨에 진학해야 한다. 그다음 의사면허시험(USMLE)에 통과해야 의사가 된다. 일본 독일 등도 6년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국가시험을 치른다. 그래서 의료계에선 의대 5년제가 되면 해외에선 우리나라 의대 졸업자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한다.

▷2월 의대 증원 발표 이후 의대생 1만8000여 명이 학교를 떠났다. 정부는 ‘휴학을 불허한다’며 의대생이 돌아오기를 손 놓고 기다리다가 이제야 졸속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11월까지만 돌아오면 압축 수업을 통해 진급시키겠다고 하고, 5년제 의대도 가능하다고 한다. 기출문제 및 학습지원자료, 이른바 족보를 공개적으로 공유하는 의대교육지원센터도 운영한다고 한다. 교육부는 의대 5년제를 두고 “미국은 파병이 있는 경우 군의관을 조속히 배출하기 위해 압축적으로 커리큘럼을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어쩌다 우리 의료 시스템이 유사 전시 상황에 처한 것인가.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0-09 ‘검사 향응 무죄계산법’ 대법서 뒤집혔다

 

 라임자산운용의 ‘전주(錢主)’인 김봉현 씨가 일으킨 다양한 논란 중에는 룸살롱에서 3명의 검사에게 접대를 했다는 것도 있다. 이후 검사 2명은 불기소됐고 유일하게 법정에 선 나모 검사마저 1·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제 식구 봐주기’라는 비판이 무성했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끝나는 듯했던 이 사건은 대법원이 어제 원심을 파기하면서 상황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

▷2019년 7월 벌어진 술자리에 등장하는 인물은 7명이다. 김 씨와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 현직 검사 3명이 먼저 모였고, 중간에 대통령실 행정관과 이종필 전 라임 부사장이 다녀갔다. 술값과 밴드 비용, 여성 접객원 비용 등을 합친 총비용은 536만 원이었다. 관건은 검사들에게 제공된 향응이 청탁금지법상 처벌 기준인 1인당 100만 원이 넘느냐였다. 통상 전체 비용의 ‘n분의 1’로 계산하는데, 기소와 판결에서 핵심은 모수인 ‘n’을 몇 명으로 볼 것이냐였다.

▷검찰은 기소 단계에서 시간대별로 참석자와 비용을 분류한 뒤 나 검사보다 먼저 자리를 뜬 검사 2명이 받은 접대 금액은 각각 96만여 원으로 산정했다. 두 검사가 귀가한 뒤 발생한 밴드비 등을 제외해 100만 원 아래로 맞춘 ‘기적의 계산법’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나 검사는 114만여 원의 접대를 받은 혐의로 기소는 됐지만, 1·2심은 대통령실 행정관도 일부 향응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나 검사의 향응액은 93만여 원으로 줄었다. 법원이 검찰의 계산법을 인정한 데다 참석자는 더 늘려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술값을 더 세분화하면서 뒤늦게 와 잠시 참석했던 행정관을 빼야 한다고 봤다. 이렇게 되면 나 검사의 몫은 100만 원이 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대법원의 결론이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이 합리적인 논리로 나 검사, 공여자인 김 씨와 전관 변호사를 처벌할 길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검찰이 불과 4만 원 차이로 기소하지 않은 검사 2명도 법원의 판단을 받아봤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애초에 검찰이 청탁금지법을 최소한으로 적용해 면피성으로 일부만 기소한 것부터가 문제라는 얘기다.

▷사법적 판단에 앞서 이 사건의 본질은 검사가 접객원까지 부른 술자리에 머물고 돈은 업자가 냈다는 것이다. 검찰이 법리와 계산법만 따질 게 아니라 반성부터 하는 게 도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검찰은 김 씨가 옥중에서 낸 입장문을 통해 검사들의 향응이 알려진 이후 4년이 지나도록 공식적으로 사과조차 한 적이 없다.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점을 근거로 검사들에 대한 징계도 미뤄지고 있다. 검찰에서 무슨 이유를 대든 국민의 눈에는 힘센 권력기관의 오만과 제 식구 감싸기로 비칠 것 같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0-10 韓 국채 ‘선진클럽’ 편입, ‘공매도 금지’ 주식은 번번이 좌절

 

내년 11월부터 세계국채지수(WGBI)에 한국 국채가 편입된다. 재작년 9월부터 4차례 시도 끝의 성공이다. 영국의 시장지수 산출 기관인 ‘파이낸셜타임스스톡익스체인지(FTSE) 러셀’이 운영하는 WGBI는 블룸버그, JP모건 지수와 함께 세계 3대 채권 지수로 꼽힌다.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 국채가 모두 포함돼 있어 연기금 등 글로벌 ‘큰손’들의 투자 나침반이다. 지수 편입으로 한국 국채에 대한 외국인의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2년 전부터 WGBI 편입을 추진한 한국은 국채 발행 규모, 국가 신용등급을 충족하고도 외국인에 대한 과세 체계, 외환시장 개방성 부문 점수가 낮아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내총생산(GDP) 순위 세계 10대국 중 빠진 건 한국과 인도뿐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외국인의 투자 소득에 세금을 물리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원-달러 거래 시간을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연장하는 등의 보완 조치를 한 끝에 이번엔 편입됐다.

▷WGBI에 투자되는 민간 자금은 약 2조5000억 달러, 한화로 약 3400조 원 규모다. 한국이 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로 560억 달러(약 75조 원) 정도의 외국인 자금이 새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 국채 수요가 늘면 국채 가격은 오르고, 정부는 낮은 이자에 국채를 발행할 수 있게 된다. 올해 말 1200조 원에 육박할 국가채무를 고려할 때 이자 부담 감소는 반가운 일이다. 다만 마냥 축포를 터뜨릴 일만은 아니다. 외국자본 비중이 커지면서 국내 자본 시장이 대외 변수에 더 민감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채권 ‘선진 클럽’ 편입으로 채권 시장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남은 과제는 여전히 극심한 저평가를 받는 주식 시장이다. 한국은 2008년부터 주식 분야의 ‘선진 클럽’인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을 시도해 왔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 신흥국 지수에 머물러 있다. 특히 MSCI는 한국 정부가 작년 11월 시작한 공매도 전면 금지를 문제 삼고 있다. 주식 시장에서 거품을 빼는 기능을 하는 공매도를 금지하는 한 선진국 증시로 보기 어렵다는 거다.

▷채권에 앞서 한국 증시를 선진국 지수에 포함시켜 온 FTSE 러셀도 이번에 “공매도 재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한국 증시 분류에 대해 추가 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일각의 우려처럼 공매도 금지를 이유로 한국을 ‘관찰대상국’으로 강등하진 않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돼선 안 된다는 경고다. 정부가 주식 투자자들 눈치만 보느라 전혀 선진국답지 않은 공매도 금지를 고수하는 동안 대규모 해외 자본이 한국 증시에 들어올 물길을 넓힐 진짜 ‘밸류업’은 위협받고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0-11 “연명치료 안 받겠다” 제도 시행 5년 만에 244만 명 등록

 

사람이 누리는 오복(五福) 중 하나가 고종명(考終命), 제명대로 살다 편히 죽는 것이다. 의술의 발달로 장수하기는 쉬운데 편히 죽는 건 어려워졌다. 대부분 의료장비 주렁주렁 달고 차가운 침상에서 임종을 맞는다. 고통스럽고 무의미하게 사느니 평온한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연명치료 중단 환자가 7만720명으로 관련 법(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첫해인 2018년의 2.2배로 집계됐다. 전체 사망자 5명 중 1명은 연명치료를 중단한 경우다.

▷환자의 권리엔 의사의 치료에 동의할 권리뿐만 아니라 치료를 거부할 권리도 있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치료 거부권을 헌법상 자기 결정권에 근거한 권리로 인정해왔다. 대표적인 판례가 미국의 1976년 ‘퀸란 판결’이다. 식물인간 상태인 아이(캐런 퀸란)의 부모가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했다 거부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은 ‘헌법상 프라이버시권은 치료 거부권을 포함한다’고 판결했다. 세계의사회는 2015년 발표한 ‘의료윤리설명서’에서 치료 거부로 사망에 이르게 될 경우라도 치료 거부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대만은 2000년 말기 환자의 연명치료 거부권을 법제화했다. 법 제정 이전에도 ‘마지막 한 숨은 남겨 집으로 돌아가 죽는 것이 좋다’는 전통에 따라 임종 직전 퇴원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2007년 말기 환자의 연명치료 거부를 허용하기 시작했는데 특이하게도 법이 아니라 후생노동성 가이드라인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법으로 세세하게 규정하면 의사들이 소송 부담에 소극적으로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하게 돼 환자의 치료 거부권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우려에서다.

 

▷한국은 치료 거부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하는 나라다. 의사 2명이 ‘임종 과정’에 들어갔다고 판단하고, 환자의 중단 의사가 확인돼야 한다.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도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인공호흡기 착용 중단 등으로 방법이 제한적이다. 임종 시점을 며칠 앞당기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말기 환자도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2022년 ‘국민신문고’가 6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말기 환자나 그 이전 환자에게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66%였다.

▷연명치료 거부를 비판하는 이들은 삶이란 주어진 대로 끝까지 살아내야 하는 의무라고 한다. 치료 거부권을 요구하는 쪽에선 삶은 권리이며 아프거나 무의식 상태에선 인생을 향유할 수 없으니 존엄한 죽음을 허용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건강할 때 연명치료 중단 의향서를 미리 등록해 둔 사람이 법 시행 5년 만에 244만 명을 넘어섰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것은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뜻일 게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12(토) 50번 중 49번 尹 1위였던 ‘명태균 여론조사

 

김건희 여사 공천개입설로 시작된 명태균 씨 파문이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이뤄진 여론조사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경남 창원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명 씨는 미래한국연구소라는 여론조사업체와 시사경남이라는 인터넷 매체를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여론조사를 직접 하거나 외부에 맡겼다. 그런데 재정 기반이 취약한 명 씨가 대선 1년 전부터 몇몇 언론사와 함께 50차례 여론조사를 한 것으로 드러났고, 57만 명의 국민의힘 당원 명부를 입수해 미공표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한 것이다.

▷50차례의 조사는 모두 PNR(피플네트웍스 리서치)이란 ARS 조사업체가 맡았다. 눈에 띄는 건 50번 중 윤석열 후보가 1위인 것이 49번이었다. 딱 한 차례 2위를 차지했는데, 대선 2개월 전인 2022년 1월 초 조사였다. 김건희 여사의 대국민 사과 10일 뒤였다. 그러나 대선 1년 동안 규모가 큰 다른 업체의 조사에선 윤석열 이재명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했다. ARS보다 응답률이 높은 전화면접을 하는 갤럽 조사가 대표적인데, 25회 조사 가운데 이 후보가 앞선 것이 15회였다.

▷그런데 명 씨와 함께 일했던 강혜경 씨가 유튜브에 출연해 폭로성 발언을 쏟아냈다. 강 씨는 “(대선이 임박했을 때) 3000∼5000개 샘플로 (여론)조사를 했다. 명 씨가 매일매일 윤 후보 쪽에 보고한다면서 빨리빨리 보고서 작성해 올리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그는 여론조사에 들어간 예산이 3억7520만 원이란 서류를 공개하기도 했다. 김영선 전 의원의 창원의창 보궐선거 대가설도 거론했다. 강 씨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강 씨는 이달 21일 국감 출석을 예고한 상태인데, 그의 발언에 따라 정치권이 한바탕 요동을 칠 수도 있다.

 

▷국민의힘 당원 57만 명을 상대로 한 2차례의 여론조사도 논란이다. 이는 여심위 등록의무가 없는 미공표 조사였다. 2021년 10월 국민의힘 경선 후보가 윤석열 홍준표 유승민 원희룡 4인으로 압축된 때였다. 당 선관위가 4인 후보 캠프에 UBS메모리에 담아 준 정보가 명 씨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누가 명 씨에게 전달한 건지, 이 조사 결과를 당시 윤 후보 측이 건네받았는지, 비용 정산은 어떻게 한 것인지 규명돼야 할 사안이 한둘이 아니다.

▷여론조사 학자들은 “여론 자체만큼이나 여론조사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론조사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통상 ARS가 아니라 훈련받은 면접원이 질문할수록, 응답률이 높을수록 품질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조사의뢰자나 조사 수행업체의 기본적 자질도 필수적이다. 명 씨가 실제로 불투명한 여론조사 결과를 앞세워 정치 브로커 역할을 했다면 수사로 가릴 일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여론조사가 아니라 심각한 여론 조작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0-14(월) AI가 대체 못 할 문학 작품 번역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을 영문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는 “번역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고 했다. 작품 배경이 된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을 전달하면서도 영어권 독자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둬야 해 쉽지 않았다는 취지다. 그는 이런 줄타기 과정에서 한강 작가와 계속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소주를 ‘코리안 보드카’라고 하는 식으로 영어권 표현을 차용해 오는 걸 자제하고, 등장인물의 이름 대신 ‘처제의 남편’ ‘지우 어머니’처럼 관계 중심으로 칭한 것도 그런 소통의 결과였다.

▷한국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는 해외에 우리 문학을 전해 온 번역가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 문학의 번역 역사를 돌이켜 보면 초기엔 한국인 번역자들 위주로 진행되다가 외국인-한국인 공동 번역을 거쳐, 현재는 한국어와 외국어에 능통하고 양국 문화에 이해가 깊은 원어민 번역자가 많아지면서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문학 작품 번역은 양쪽 문화권에서 쓰는 관용적 표현이나 단어 너머의 뉘앙스를 섬세하게 포착해야 하고, 원작자가 의도한 은유와 문체, 분위기를 창의적인 언어로 옮겨야 하는 고도의 문학적 작업이다.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달로 번역 업계가 위협받고 있지만 문학 작품 번역만큼은 대체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AI는 일상어의 경우 입력과 동시에 여러 언어로 유창하게 번역하지만 예술적 완성도가 중요한 문학에선 그런 식의 효율과 정확성만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주긴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AI는 자신이 가진 데이터로 해석되지 않는 문장은 아예 건너뛰거나, 비슷한 단어의 조합으로 그럴싸하게 엮어내려 해 예술 작품 번역에 오류가 많다.

▷전문가들이 AI 번역 실험을 한 결과만 봐도 그렇다. 영화 ‘기생충’ 속 대사 ‘김칫국 마시다’를 챗GPT로 번역했더니 ‘We’re drinking kimchi soup(우리는 김치 수프를 마십니다)’로 직역해 섣부른 기대를 한다는 뉘앙스를 살리지 못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구글 번역기를 통해 한국어로 옮겼을 때도 인간 번역과 비교해 정확도가 30∼40%에 그쳤다고 한다.

▷AI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문학 작품 번역은 문화 상품 수출을 위한 주요 공급망이다. 영화, 음악 등 콘텐츠 강국인 한국은 이제 문학에서도 해외 바이어들의 큰 관심을 받게 될 텐데 번역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하면 노벨 문학상 효과는 오래가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 문학 수출을 위한 정부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올해 예산은 전년보다 14% 삭감됐다. 번역 출판 지원사업 예산도 올해 20억 원에 불과하다. 문학 작품 번역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작업이라는 인식 없이는, 한국 문화콘텐츠의 세계화가 언젠가 큰 벽에 부딪힐 수도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0-15 국내 상륙한 위고비, 정말 ‘기적의 비만약’일까

 

몸의 기억은 집요하다. 신체에 일시적 변화가 있더라도 원래대로 돌아오는 성질인 항상성도 몸의 기억이 잡아끄는 힘이다. 항상성은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지만, 반대로 만성 질환에서 벗어나는 걸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현대 의학의 난제 중 하나인 비만이 대표적인 사례다. 건강한 식단과 꾸준한 운동이 해법이란 걸 알면서도 비만을 부르는 몸의 기억에 이끌려 힘들게 뺀 살이 도로 찌는 게 다반사다.

▷15일 국내 출시되는 위고비가 ‘기적의 비만약’으로 불리는 이유는 몸의 기억을 속이는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위고비를 투약하면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신경을 억제해 조금만 먹어도 금방 포만감이 들게 하고 식욕도 떨어뜨린다. 예전 같으면 야밤에 그렇게 당기던 치킨이 덜 생각나고, 막상 시켜 먹어도 몇 조각 못 먹게 되는 식이다. 위고비는 자기 몸에 주사만 한 방 놓으면 이런 효과가 1주일이나 지속되고, 1년 4개월간 꾸준히 맞으면 체중을 평균 15%가량 감량할 수 있다고 한다.

▷위고비는 2021년 미국에서 처음 출시됐을 때부터 뜨거운 인기에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주사기 1대 값이 약 45만 원, 한 달이면 180만 원이 들 정도로 비싸지만 주문이 폭주했다. 특히 일론 머스크, 킴 카다시안 등 유명인들이 위고비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부자들 사이에선 ‘살 빠지는 비타민’이란 별칭으로 불리며 급속히 확산됐다. 이후 전 세계적 물량 부족 사태로 원래 지난해 하반기 예정이던 국내 출시도 1년가량 미뤄졌다.

 

▷하지만 위고비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약을 끊는 순간 ‘요요’가 시작된다. 안경을 쓴다고 눈이 좋아지진 않는 것과 같다. 몸을 잠깐은 속일 수 있지만 끝까지 속이진 못하는 것이다. 투약 기간 동안 건강한 생활 습관을 정립하지 않은 채로 약을 멈추면 그동안 눌러놓은 체중이 용수철 튀어 오르듯 금세 회복된다고 한다. 게다가 빠질 땐 근육과 지방이 같이 빠지지만 다시 찔 땐 지방이 급격히 늘어 전보다 악성 비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거액을 들여 장기간 투약하더라도 살 안 찌는 습관을 몸에 각인시키지 않으면 ‘꿈의 비만약’이라는 위고비도 무용지물이다. 또 비만 환자에게만 효과가 있을 뿐 일반인이 몸매 관리용으로 쓰다간 탈모, 췌장염 같은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다이어트에는 지름길이 없고, 오래 걸리더라도 정도로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비만약 시장은 향후 10년간 연평균 27%씩 급성장할 전망이라고 한다. 위고비를 만든 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의 주가도 급등해 지난해 시가총액이 루이뷔통을 제치고 유럽 1위로 올라섰다. 살 빼는 정답이 뭔지 뻔히 알지만 당장의 쉬운 길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걸 시장은 간파하고 있는 것 같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0-16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 말하는 ‘부자 나라 되는 비결’

 

 남북한은 ‘제도(institution)’의 역할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분단 이전 남북한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다른 제도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 격차가 10배 이상으로 벌어졌습니다.” 대런 애스모글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강연 때마다 남쪽은 온통 불야성이고, 북쪽은 암흑천지인 한반도 야경 위성사진을 소개하며 제도의 중요성을 역설해 왔다.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그는 대중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게 하는 ‘포용적 제도’가 소득·권력의 분배를 개선하고 혁신을 일으켜 부유한 나라를 만든다고 했다. 반면 권력자에게만 부가 돌아가는 ‘착취적 제도’는 기술, 산업의 혁신을 저해해 국가를 가난하게 한다. 특히 세계의 모든 나라가 부국, 빈국으로 나뉜 이유를 설명할 이론적 요소가 한반도의 남북 간 차이에 모두 포함돼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한국이 우쭐할 일만은 아니다. 애스모글루 교수는 올해 5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아직 군사독재 시절의 관치경제, 부정부패의 잔재가 남아 있어 완전한 포용적 경제 제도를 이루기에 갈 길이 멀다”고 꼬집었다. 노벨상 공동 수상자인 같은 대학 사이먼 존슨 교수는 포용적 제도를 구축한 대표적 국가로 한국을 꼽으면서도 “강력한 제도를 구축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금방”이라고 경고했다.

 

▷애스모글루와 존슨 교수, 시카고대 제임스 로빈슨 교수 등 이번에 함께 상을 받은 제도경제학 분야의 석학 3명은 연구, 저술을 통해 공조해 왔다. 스웨덴 노벨위원회는 “이들이 국가의 번영과 제도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혀 냈다”고 평가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1776년 펴낸 ‘국부론’의 원제가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다. ‘어떻게 해야 나라가 부유해질까’라는 경제학의 근원적 질문에 답을 추구해온 이들에게 노벨상이 돌아간 셈이다.

▷저서 ‘좁은 회랑’에서 애스모글루 교수는 독재적 국가권력을 민주적 사회가 견제하는 것을 구약성서에 나오는 괴수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는 일로 표현했다. 성공한 국가를 만드는 과정이 그만큼 어렵고 길도 좁다는 의미다. 수상 인터뷰에서 그는 “북한은 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희망컨대 언젠가 더 민주적인 시스템을 갖춘 한국과 통일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문제는 북한 정권이란 리바이어던은 주민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외부의 도전을 차단하느라 콘크리트 담을 높게 쌓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10.17 뉴진스 하니 출석시켜 ‘코미디 국감’ 벌인 의원들

 

걸그룹 ‘뉴진스’ 멤버 하니가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참석했다. 그 발단은 지난달 11일 뉴진스가 올린 영상이었다. 하니는 이 영상에서 “하이브 사옥 복도에서 마주친 다른 그룹 매니저가 (따라오는 멤버들에게) ‘무시해’라고 했다”고 말했다. 뉴진스 소속사인 어도어의 모회사인 하이브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이후 환노위 소속 의원실에 ‘직장 내 괴롭힘을 조사해 달라’는 팬들의 집단 민원이 쇄도했다고 한다.

▷안호영 환노위원장(더불어민주당)이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질의하겠다”며 하니를 참고인으로, 소속사 어도어 대표인 김주영 하이브 최고인사책임자를 증인으로 각각 불렀다. “나 결정했어! 국회에 나갈 거야! 국정검사(감사를 잘못 표기)! 혼자 나갈 거예요.” 국감도 띄우고, 성난 팬심도 달래보고자 증인도 아니고 참고인으로 슬쩍 불러봤는데 “뉴진스를 지키겠다”며 하니가 출석 선언을 한 것이다. 정말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의원들이 더 놀랐다는 뒷말이 들린다.

▷팬덤의 눈치가 보였던 탓인지 국감이 진행된 1시간가량 의원들의 질의는 공손했다. “참고인 하니 팜 님께 질문하겠습니다” “하니 팜 님,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안 위원장), “뭣 때문에 회사가 싫어한다고 생각하시나요”(국민의힘 우재준 의원), “하니 팜 씨가 직접 ‘무시해’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폭로해서 국민들의 충격이 크다”(민주당 박홍배 의원), “오늘 하니 님이 하신 것이 엔터업계가 ‘우리도 노동자이고 인간’이라는 목소리를 낸 역사적 순간”(진보당 정혜경 의원). 이날 환노위 국감장에 불려 온 기업인들이 면박 섞인 질의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국정감사는 국회가 정부 부처와 기관을 감사해 국정 운영에 문제가 없는지 따지는 자리다. 양측 주장이 엇갈리는 뉴진스 소속사 내부 갈등이 국감 대상인지도 의문이고,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닌 걸그룹 멤버가 ‘직장 내 괴롭힘’의 대상인지도 불확실하다. 안 위원장은 하니 출석과 관련해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다루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날 국감에선 산업재해로 숨진 하청 노동자 문제도 다뤄졌다. 정작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 문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니 출석으로 환노위 국감은 ‘팬 미팅’으로 희화화됐고 같은 시간 진행되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 국감까지 파행을 겪었다. 최민희 과방위원장이 국감 도중 하니와 별도 만남을 가진 사실이 논란이 되어 여야 간 거친 공방이 오가면서다. 무더기 자료 제출과 증인 신청 요청, 막말과 호통만 주고받는 질의로 부족해 이젠 연예인 팬 미팅까지 자청하고 있으니 국감 무용론이 나와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10-18 재산 지키려 사퇴하며 자화자찬, 낯 두꺼운 구로구청장

 

재산이 196억 원인 문헌일 서울 구로구청장은 서울 구청장 중 두 번째 부자다. 구로구에서 중견 정보통신업체를 경영하며 부를 쌓았다. 여기엔 170억 원어치 회사 비상장주식이 포함돼 있다. 문 구청장은 최근 법원이 이 주식을 백지신탁하라고 판결하자 주식을 포기할 순 없다며 구청장직을 내놨다. 백지신탁은 고위 공직자의 이해 상충 문제를 막기 위해 2005년 도입된 제도다. 직무상 알게 된 정보로 주식 거래를 하거나 자기 주식의 가치가 오르도록 정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다. 직무 관련성이 있는 주식은 당선 또는 임명 후 두 달 내에 팔거나 금융기관에 백지신탁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직자는 재산상 손해를 보거나 경영권이 흔들릴 수도 있다. 기업인의 공직 진출을 제약하는 제도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공복이 되기로 결심한 선출직 공직자라면 그 정도 책임을 감수해야 하고, 자신이 없으면 공직에 나서지 말라는 게 대체적인 사회적 합의다. 공직자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사익을 위해 악용하지 않을 것이란 신뢰 없이는 공직의 권위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차례 총선 출마 경험이 있는 문 구청장은 2년 전 구청장 선거에 나서며 주식 백지신탁 가능성을 따져봤을 것이다. 그는 제도의 허점을 노렸던 것 같다. 인사혁신처가 백지신탁 결정을 해도 공직자가 이에 불복해 소송을 내면 몇 년을 끌며 임기를 채울 수도 있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던 고위 공직자들 사례를 보며 그 역시 피해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법하다.

▷문 구청장이 불복 소송을 하며 버티는 동안 그의 주식 가치는 49억 원가량 올랐다. 대신 구민들은 공석이 된 구청장 보궐선거를 치르는 데 드는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에게 구청장직은 어떤 자리였을까. 문 구청장은 출마 당시 “기업을 운영해본 경험이 구정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지지를 호소해 당선됐다. 하지만 그는 이득이 안 되는 공직이라면 미련 없이 내던지는 모습으로 구민들에게 배신감을 안겼다.

▷문 구청장은 16일 퇴임식에서도 그의 그릇된 공직관을 다시 한번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그는 “백지신탁이라는 기업인 출신 구청장에게 가해진 불합리한 제재가 예정돼 직을 수행하기 어렵게 됐다”며 퇴임사를 시작했다. 이어 2년여 재임 기간 동안 받은 각종 표창 등 A4 종이에 써온 구정 성과를 10여 분간 읽으며 자화자찬했다. 그는 스스로를 불운의 공직자로 여기는 듯했다. 보다 못한 한 구민이 소리쳤다. “구로구 주민들에게 안 미안하십니까.” 이날 퇴임식이 끝날 때까지 구민들을 향한 사과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0-19(토) 한국은 머니 머신”… 속수무책인 트럼프의 엉터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는 황당한 주장을 펼 때 뜬금없는 말로 논점을 흐리곤 한다. 며칠 전 미 유력 매체인 블룸버그 편집장과의 1 대 1 대담에서도 그랬다. 트럼프는 “당신의 감세 공약대로라면 국가부채가 10년 동안 최소 7조 달러(약 9000조 원)가 늘어난다는 보고서가 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그렇게 비판했다”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 신문이 뭘 아나. 모든 게 다 틀리는 신문이다. 하긴, 당신도 평생을 틀려 왔으니…”라고 응수했다. “당신이 틀렸다(wrong)”는 말을 5번 반복하는 장면에선 논리적 설명을 할 뜻이 안 보였다.

▷그 자리에서 트럼프 후보는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현금인출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대통령 재임 때 한국 정부에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더 대라. 국회에서 연 20억 달러(약 2조7000억 원)로 동의를 얻어 오라”고 요구했던 일을 공개했다. “그 다음 해엔 50억 달러를 받아낼 생각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의 분담액이 연 1조1000억 원에 못 미치던 때였다. 자신이 이렇게 애썼지만, 후임 바이든 대통령이 합의를 백지화시켰다는 비난을 빼놓지 않았다.

▷트럼프는 마치 우리 정부로부터 큰 걸 얻어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시 한미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 협상은 그가 퇴임할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국방장관과 국무장관 등 참모들은 “한미동맹은 국방비 숫자를 뛰어넘어서는 전략적 가치가 있다”며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압박을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조언에는 별 관심이 없는 트럼프는 블룸버그 대담에서 “내가 지금도 대통령이었다면 한국은 매년 100억 달러를 내고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대선 승리에 한 발 다가섰다는 트럼프의 예측 불가 기질은 중요한 문제다. 불쑥불쑥 이슈를 꺼내들면서 상대국을 압박하지만, 그때뿐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기자인 밥 우드워드의 책 ‘분노(Fear)’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파기와 관련된 일화가 담겨 있다. 하루는 트럼프가 “미국이 손해 보는 FTA를 깨겠다”며 효력정지 문서를 만들도록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파장을 걱정한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장이 백악관 집무실 책상에 놓은 그 문서를 치워 버렸는데, 트럼프는 문서의 존재를 끝내 잊어 버렸다고 한다.

▷트럼프는 이날 특유의 화법으로 대담을 주도했다. 늘 그래 왔듯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어휘를 짧은 단문으로 쏟아냈다. 단순한 메시지를 열 번이고 백번이고 반복하는데, 그의 말을 확신하는 지지층은 여전히 두텁다. 그의 엉터리 언행에도 우리는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미 대선이 다가올수록 선거 결과가 우리 선거 때만큼이나 신경이 쓰인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10-21(월) “수업 중 컴퓨터 쓸 수 있게 하니 수업시간 40% 딴짓”

 

“학생들에게 수업 중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허용했더니 수업 시간의 최대 40%까지 딴짓을 하더라.”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 의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다양한 기관의 통계와 연구 결과를 종합 분석해 내놓은 ‘전국 학교 디지털화 전략 의견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노트북을 켠 학생은 켜지 않은 학생보다 수업 내용 질문에 대한 정답률도 30%가 낮았다. 디지털 도구가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수학과 독해 부문에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성적이 낮은 경향도 발견됐다.

▷의견서의 분석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컴퓨터로 필기하는 학생들은 종이와 펜을 사용하는 학생들보다 성적이 더 나빴다. 또 학생들에게 디지털 기기로 필요한 지식을 검색하도록 하면 깊이 있는 지식을 얻기보다 대강의 얕은 지식만 얻게 될 소지가 크다고 한다. 학생들이 콘텐츠를 종이가 아니라 화면으로 읽으면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현상이 관찰되기도 했다. 흥미 위주로 대강 줄거리만 파악하면 되는 웹 소설과 달리,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한강 작가의 작품이 디지털 기기론 눈에 잘 안 들어오는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한데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인공지능(AI) 디지털 교과서’가 내년 초등학교 3·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의 수학 영어 정보 수업에 전면 도입될 예정이다. 교육부는 이후 단계적으로 이를 다른 학년과 과목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AI 교과서는 콘텐츠가 다양하고 기초, 심화 등 학생별 맞춤형 학습을 지원한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 교육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불안하다. 집에서도 쇼트폼 콘텐츠 등 스마트폰에 빠진 아이가 학교 수업마저 디지털 기기로 받으면 의존이 더 심각해질까 봐서다. 디지털 기기의 역사가 짧아 뇌와 어린이 청소년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세계적으로도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해 쓰는 곳은 독일과 미국의 일부 주(州) 등 소수다. 교실의 디지털 기기 사용을 의무화했던 핀란드는 유턴해 다시 종이책을 사용하고 있다. 문해력 저하 등 부작용이 있다는 평가 때문이다.

▷도입이 불과 4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도 AI 교과서 완성본이 공개되지 않은 점도 걱정을 키운다. 실물이 없으니 어떻게 가르칠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힌다고 말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구독료 등으로 2028년까지 4년 동안 2조∼7조 원의 적지 않은 예산이 들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교육부는 약 3년 동안은 기존의 서책형 교과서와 병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부작용이 어른거리고 준비도 부족해 보이는 정책을 쫓기듯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10-22 남편을 ‘배 나온 오빠’라 했다 뭇매… 여기가 북한도 아니고

 

어르신들은 못마땅해하지만 요즘 아내들이 남편을 부를 때 가장 많이 쓰는 호칭이 ‘오빠’다. 연애 시절부터 쓰던 말이 입에 붙은 것이다. 남편은 대부분 ‘○○야’ 하고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서로를 ‘여보’라고 부르는 부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재혼하는 남성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호칭도 ‘오빠’다. 그런데 국민의힘 김혜란 대변인(48)이 소셜미디어에서 남편을 ‘오빠’라고 했다가 일부 당원들의 문자 폭탄과 대변인직 사퇴 요구를 받고 있다. 대통령 부부를 조롱했다는 주장이다.

▷‘오빠’ 논란의 발단은 지난달 결혼 20주년을 맞은 김 대변인이 최근 페이스북에 결혼식 가족사진과 함께 올린 게시글이다. “오빠, 20주년 선물로 선거운동 죽도록 시키고 실망시켜서 미안해…. (이때 오빠는 우리 집에서 20년째 뒹굴거리는 배 나온 오빠입니다)”. 춘천지법 원주지원 판사 출신인 김 대변인은 지난 4·10총선에서 국민의힘 강원 춘천-철원-화천-양구갑 후보로 나왔다가 떨어졌다.

▷그런데 이 게시물에 ‘그 오빠가 누구냐’고 따지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의 핵심 인물인 명태균 씨가 김 여사에게 받았다고 공개한 카카오톡 문자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를 비꼰 것 아니냐는 의혹 제기였다. 결혼기념일이 한참 지난 시점에 ‘오빠’ 게시글을 올린 것도 의혹을 키웠다. ‘배 나온 오빠’는 대통령 부부에 대한 “명백히 의도적인 조롱” “피아 구분 못 하는 내부 총질”이라는 비난에 “피해망상일 뿐” “배 나온 오빠는 집집마다 있다” “영부인 아니면 오빠란 단어도 못 쓰나”라는 반박 글도 쇄도 중이다.

 

▷오빠 논란은 ‘친윤’과 ‘친한’의 대결로 흐르는 양상이다. 김 대변인은 황우여 비대위원장 시절 임명된 후 유임돼 친한으로 분류된다. 그는 “제 개인정보를 악의적으로 유출하고 집단적인 사이버 테러를 한 정황이 드러났다”며 “문명사회가 묵과할 수 없는 중대 범죄 행위”라고 했다. 그의 대변인직 사퇴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강명구 의원(47)은 대통령실 국정기획비서관, “엄중한 시기에 저런 글을 올리는 ‘국민의힘 대변인’의 부박함”이라 비판한 여명 보좌관(33·강승규 의원실)은 대통령실 정무수석 행정관 출신이다.

▷오빠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oppa’로 올라 있는 단어다. 혈육 관계가 아닌 남자에게 ‘오빠’라 했다간 징역 2년형에 처하는 북한 말고 이 단어에 이토록 과잉 반응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원래 내부 싸움이 더 잔인한 법이라지만 집권당이 어쩌다 ‘오빠’ 소리에 둘로 쪼개져 문자 폭탄으로 치고받는 지경이 된 건가. 문제의 ‘오빠’에 대해 ‘친오빠는 논할 상대가 아니다’ ‘친오빠 맞다’며 온 국민을 농락하는 명 씨에겐 큰소리도 못 치면서 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23 尹-韓 투샷 없는 80분… 차담 직후 원내대표 만찬 호출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회동했을 때 대통령실은 통상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거나 대화하는 모습을 담은 ‘투샷’ 사진을 배포한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 여당 대표와 만날 때도 그랬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그제 오후 차담(茶談)은 과거와 다른 이례적인 장면으로 가득했다. 특히 대통령실이 배포한 사진들은 이번 면담이 얼마나 삭막하고 냉랭했는지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준다.

▷사진 중엔 단 한 장도 윤 대통령과 한 대표 두 사람만 나온 온전한 ‘투샷’ 사진이 없었다. 사진 9장 중 7장은 산책 장면, 2장은 면담 장면이었는데, 그중 두 사람에게 포커스를 둔 ‘투샷’처럼 보이는 사진들도 모두 두 사람 사이 또는 뒤편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들어가 있다. 일부러 ‘둘만 나란히 있는 사진’을 외면한 것일까. 한 대표가 쇄신을 요구한 ‘김건희 라인’으로 알려진 비서관이 두 곳에나 등장한 것도 뒷말을 낳았다.

▷차담 사진도 마찬가지다. 한 대표가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과 나란히 앉아있고, 윤 대통령은 긴 사각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두 팔을 쭉 펴고 있다. 윤 대통령 앞에는 면담 프로토콜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펜과 메모지조차 없다. 당초 한 대표 측은 원형 테이블을 요청했으나 대통령실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자리 배치부터 표정, 몸짓까지 위와 아래를 명확히 구분하는 구도였다. 이러니 “검찰 취조실 같았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 대표를 여당 대표로 인정하지 않고 부하 검사 대하듯 했다는 지적이다.

 

▷사실 이번 면담은 시작부터 끝까지 어색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면담은 20분 정도 늦게 시작했다. 영국 외교장관 접견 때문에 늦었다지만 한 대표는 야외정원에서 선 채로 대기했다고 한다. 오후 4시 55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면담 테이블엔 ‘우리 한 대표가 좋아한다’며 윤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다는 제로 콜라가 놓였다. 면담은 오후 6시 15분에 끝났다. 요청 한 달 만에 성사된 자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윤 대통령의 만찬 일정 때문이었다는데, 윤 대통령은 한 대표를 보낸 뒤 추경호 원내대표를 만찬 자리로 불렀다.

▷사진기자들은 대통령 행사마다 수백 장의 다양한 장면을 찍은 뒤 그날 행사의 의미를 가장 함축적으로 담은 몇 컷을 보도한다. 대통령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진만 골라 배포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과연 누가 골랐고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진다. 대통령실이 선택한 9장의 사진은 ‘용산의 눈’으로 본 이번 면담의 ‘격’과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하대나 박대의 의미를 담고자 했다면 충분히 전달됐다고 본다. 다만 그래서 뭘 얻었는지는 깊이 곱씹어볼 일이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

 

10-24 경보녀, 재창업, 신중년에게 ‘리스타트’ 기회를

 

경단녀’(경력단절여성)라는 단어가 등장한 건 15년 남짓밖에 안 된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를 늘리겠다며 정부가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촉진법’을 제정하면서다. 이때부터 경단녀는 임신, 출산, 육아 때문에 퇴직해 경제 활동을 중단한 여성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20대에는 남성보다 높았던 여성의 고용률이 애 낳고 키우는 30대에 푹 꺼졌다가 40, 50대에 다시 높아지는 ‘M커브’ 역시 경단녀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요즘 민간 기업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들까지 나서서 경단녀를 ‘경보녀’(경력보유여성)로 바꿔 부르고 있다. 경기도를 시작으로 ‘여성 경력단절 예방’ 조례를 ‘여성 경력유지’ 조례로 개정한 지자체가 한둘이 아니다. 여성들을 위축시키는 ‘단절’이라는 부정적 용어 대신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살려 노동시장에 복귀하려는 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자는 취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여성 임금근로자는 올 들어 처음 1000만 명을 넘어섰다. 60년 전과 비교하면 18배 가까이 급증한 숫자다. 여성 자영업자 비중도 30%를 웃돌며 최고치를 찍었다. 눈치 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기업 문화가 확산되면서 여성의 경력단절이 줄어든 데다 창업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이들이 늘어난 영향이다. 특히 이커머스 플랫폼이 발달하면서 사업 아이템만 좋으면 큰돈 들이지 않고 인생 이모작에 도전할 길이 열렸다. 라이브방송의 ‘패션 셀러’ ‘뷰티 셀러’로 성공한 경보녀들이다.

 

▷‘인생 다모작’에 나서는 신중년층도 많다. 교육 수준이 높고 건강한 요즘 5060세대는 은퇴 후에도 계속 일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60대 후반의 경제 활동 참가율이 최근 55%를 웃도는데, 이 연령대에서 일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는 뜻이다. 지게차·굴착기 운전 기능사, 전기 기능사 등 미리 따둔 자격증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거나 그동안 쌓아온 경력으로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에 재취업해 구원투수 역할을 하는 은퇴자가 늘고 있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남성과 여성의 임금 수준과 근로 조건 격차는 여전히 심각하다. 특히 올해 역대 최대 규모로 불어난 비정규직 근로자의 3명 중 2명은 자발적으로 지금의 일자리를 택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은퇴자와 경보녀, 청년 알바족이 몰려 있다. 본인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시간만큼 일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생계를 위해 불안정한 일자리와 타협한 이들이 적잖다. 경직된 노동시장을 개혁해 차별 없는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게 리스타트에 나선 경보녀와 신중년, 청년들을 뒷받침하는 길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0-25 “쪼만한 백” KBS 사장 선임

 

KBS 박장범 앵커(54)는 ‘파우치 앵커’ 혹은 ‘쪼만한 백’으로 불린다. 올 2월 윤석열 대통령과의 단독 대담 방송에서 디올백 사태에 대해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그 뭐 쪼만한 백이죠”라고 말해 사안을 축소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뒤부터다. ‘파우치 앵커’는 23일 KBS 이사회에서 신임 사장 후보로 선임됐는데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면 기자로 입사한 지 30년 만에 12월 임기 3년의 사장 자리에 오른다.

▷처음엔 박민 현 사장이 유임될 것으로 점쳐졌다. 윤 대통령이 임명한 첫 공영방송 수장으로 어렵게 국회 인사청문회까지 거친 박 사장이 전임자의 잔여 임기 1년 1개월만 채우고 그만둘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박 사장이 취임 첫날 발탁한 ‘뉴스9’ 앵커가 박 사장을 제치고 최종 후보가 됐다. 24일 국감에서 야당 의원은 “대통령의 술친구 박민 사장이 김 여사 머슴을 자처한 박장범에게 밀린 것”이라고 했다.

▷KBS 이사회 면접에서도 디올백 질문이 나왔다. 박 후보자는 “사치품을 명품이라 부르는 것은 부적절” “제조사에서 붙인 이름(파우치)을 쓰는 것이 원칙” “파우치는 한국말로 ‘작은 가방’”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대담을 떠올려보면 궁색한 변명 같다. 박 후보자는 ‘명품백 수수 논란’이라 하지 않고 “방문자가 김건희 여사를 만나서 앞에 놓고 가는”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4월 총선 최대 악재인 명품백에 대해 처음 공식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지만 질문이 뭉툭해서인지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다. 18개월간 공식 회견을 거부하던 대통령의 녹화 대담을, 그것도 녹화 3일 후 내보내는 방식을 수용한 것 자체가 공영방송의 흑역사로 남을 일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KBS 이사회가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면서 이른바 ‘민선 사장’ 시대가 열렸다. 한동안 명망가들이 사장에 임명돼 공영방송으로서 제자리를 잡아가나 싶었지만 2000년대 초중반부터 정치색 짙은 인물이 사장이 돼 정권 바뀔 때마다 새 사장이 전임자 시절 ‘용비어천가’를 반성하는 게 관례가 됐다. 박 사장도 첫 공식 행보로 대국민 사과를 했는데 그 후로도 KBS 시청자위원회에서 ‘뉴스9가 땡윤뉴스라는 조롱을 많이 받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장 선임 표결을 거부한 KBS 야권 추천 이사들은 “박 후보자 선출은 원천 무효”라며 소송을 예고했다. 표결에 참여한 여권 추천 이사들이 최근 위법 판결을 받은 방송통신위원회 ‘2인 체제’ 의결로 임명됐으니 이사들 임명부터 무효라는 주장이다. 소송에서 이기고 인사청문회 마치고 사장이 돼도 웬만한 공적을 남기지 않으면 그저 ‘쪼만한 백’ 덕에 큰 감투 쓴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26(금) “트럼프는 인격장애인” 美 정신과 의사들 광고

 

 

고대 로마의 미친 황제로 흔히 거론되는 인물이 네로, 칼리굴라, 콤모두스다. 네로는 불타는 로마를 보면서 수금을 켜는 자기 탐닉적인 모습을 보였다. 칼리굴라는 주변 인물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콤모두스는 자신을 헤라클레스와 동일시하는 과대망상 증상을 보였다. 세 사람 모두 섹스에 집착하고 잔인했다. 물론 현대적인 정신질환의 기준으로 엄밀히 진단한 것은 아니다.

▷미국 정신의학협회(APA)가 정신질환 통계 작성을 위해 사용하는 매뉴얼(DSM)이 있다. 이 매뉴얼의 5번째 개정판으로 2013년에 나와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DSM-5는 정신질환을 22가지로 분류한다. 그중 하나가 반사회적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다. 미국 대통령 재선 도전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반사회적이면서 자기 탐닉적(narcissistic) 요소까지 있는 인격장애인이라는, 정신질환 전문가 225명 명의의 광고가 최근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이 광고는 반(反)트럼프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뉴욕타임스의 연속 기획 중 하나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다. 트럼프 측이 이 광고에 반박할 수 있는 길은 비슷한 수의 정신질환 전문가를 통해 골드워터 규칙(Goldwater rule)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배리 골드워터가 1964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 팩트(Fact)라는 잡지가 정신과 의사들 상대의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그를 ‘사이코’ ‘분열증 환자’라고 불렀다가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당해 패했다. 이후 정신과 의사들이 개인적으로 만나보지 않은 사람에 대해 진단을 내리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는 골드워터 규칙이 1971년 채택됐다.

 

▷DSM에 의한 진단은 ‘관찰 가능한 행위(observable behavior)’라는 기준에만 의존해야 한다. 광고를 낸 측은 “‘관찰 가능한 행위’에 무엇이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해 1971년 이후 많은 발전이 있었다”면서 “우리는 수천 시간 트럼프의 행위를 관찰했으며 트럼프와 직접 교류했던 수십 명과의 인터뷰는 우리의 관찰 결과를 확증했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신체적으로 완벽하기 어렵듯이 정신적으로도 완벽하기 어렵다. 누구나 약간은 편집적이거나 강박적인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성인(聖人)이나 돼야 정신적으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향해 함부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해선 안 된다. 다만 환자로까지 분류하지는 않더라도 정도가 지나친 사람들이 있다. 정도의 지나침이 대통령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궁극적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에 달렸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0-28(월) “난 울 엄니 만나러 가요” 하늘로 떠난 일용 엄니

 

전원일기’는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최장수 드라마다. 요즘도 케이블 채널에선 전원일기를 방영하는데 양촌리 김 회장 댁 최불암(84) 김혜자(83)부터 큰아들 김용건(78) 고두심(73) 내외와 둘째 아들 유인촌(73)까지 톱스타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들 중 ‘일용 엄니’ 김수미가 25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전원일기의 추억이 생생한 이들에겐 ‘일용이 모친상’ 같다.

▷김수미가 일용 엄니를 맡았을 때가 일용이 박은수보다 두 살 어린 31세였다. 요즘 잘나가는 김고은(33) 박은빈(32)보다 어린 나이다. 젊은 배우에게 노역을 맡기는 건 모험이었다. 그런데 방송 첫날부터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인물은 이 하나 빠진 감초역 일용 엄니였다. 일찍 홀몸이 돼 일용이 키우며 김 회장네 덕을 보고 살면서도 때론 용심을 품는 인간적인 조연으로 국민 배우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맞는 일용 엄니 명대사가 있다. “인생사는 계산이 안 맞는겨.”

▷전북 군산에서 김영옥으로 태어나 1970년 MBC 공채 3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동기생 김영애 못지않게 외모에 자신 있었는데 이상한 배역만 들어왔다”고 한다. “연기로 승부 보겠다”고 마음먹었고 드라마 ‘아다다’의 앙칼진 첩실, ‘새아씨’의 몸종 화순이 등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으로 연기상을 휩쓸었다. 머리가 희끗해질 무렵엔 ‘센 캐릭터’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영화 ‘마파도’의 욕쟁이 할매, ‘가문’ 시리즈 홍덕자 여사, 드라마 ‘전설의 마녀’의 일자무식 재소자가 그렇다. 배우로서 독보적 영역을 개척한 그는 “돌멩이도 모양이 다 다른데, 배우들도 다 달라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입담 좋은 예능 스타로 최근까지 웃음을 선사했고, 요리 예능에선 남다른 손맛도 뽐냈다. 드라마 촬영 땐 대형 전기밥솥에 직접 만들고 담근 반찬과 김치를 싸들고 가 스태프 수십 명을 밥해 먹이는 후한 인심으로 유명하다. 고인의 어머니가 없는 살림에도 보따리장수들까지 밥 먹여 보내는 분이어서 “어머니가 지은 복으로 내가 잘산다”고 했다. 친자매 같았던 김혜자에겐 이런 말을 했단다. “혜자 언닌 김치 담글 줄도 모르면서, 내가 밥하고 반찬 해다 주면 먹기만 하면서 왜 국민 엄마야.”

▷“내 얼굴 보면 상욕하고 곗돈 챙길 사람 같지만 사실은 책 좋아하고 꽃만 보면 환장한다.” 에세이집을 포함해 8권의 책을 썼고, 3년 전 써둔 유서시 제목은 어머니가 생전 애지중지 키웠던 ‘나팔꽃’이다. “난 울 엄니 만나러 가요. … 꽃피는 봄도 일흔 번 넘게 봤고 함박눈도 일흔 번이나 봤죠. … 누군가 내 잔디 이불 위에 나팔꽃씨 뿌려주신다면 가을엔 살포시 눈을 떠 보랏빛 나팔꽃을 볼게요. 잘 놀다 가요. 굳바이 굳바이.”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0-29 검사임기제, 공수처 압박에 악용 논란

 
 

“이들이 업무를 계속할 수 있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연임은 조직 운영에 매우 긴요합니다.”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출석한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은 읍소를 거듭했다. ‘이들’은 공수처의 이대환 수사4부장, 차정현 수사기획관, 송영선·최문정 검사를 가리킨다. 윤석열 대통령이 27일까지 연임안을 결재하지 않으면 3년의 임기가 끝나 공수처를 떠나야 할 처지였다. 윤 대통령은 이들의 임기 만료를 불과 53시간여 앞둔 이날 오후 6시 23분경에야 연임을 재가했다.

▷공수처 4부에는 세간의 관심이 큰 사건들이 여럿 몰려 있다.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 의혹, 마약 사건 세관 직원 연루 의혹 사건 수사 등 대통령 부부나 대통령실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들에다 ‘고발 사주’ 손준성 검사장 공소 유지까지 맡고 있다. 그런데 4부에 검사는 이 부장검사와 평검사 1명뿐이어서 차 기획관이 수사를 돕고 있다. 이번에 연임이 무산됐다면 평검사 1명이 대형 사건들을 도맡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공수처 검사의 임기는 기본 3년에 세 차례 연임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 연임을 하려면 공수처 인사위원회가 적격 여부를 심의·의결한 뒤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들은 8월 13일 인사위 심의를 통과했다. 이후 두 달이 넘도록 대통령실에서 연임안을 붙들고 있었다는 얘기다. 재가가 미뤄지는 동안 업무에 집중력이 떨어져 수사에 차질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사실 이번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공수처 내부에서는 검사 임기가 너무 짧아 ‘임시직’이라는 말이 나왔다. ‘임기 3년에 연임 3회 가능’이라는 안은 2017년 10월 법무부가 내놓은 공수처 설치 방안에 등장한 뒤 법률에 반영됐다. 일반 검사는 정년까지 임기에 제한이 없고 7년마다 적격 심사만 받는 것과 대비된다. 당시에는 너무 권한이 큰 공수처가 탄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법무부가 공수처법의 신속한 통과를 위해 이런 안을 제시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수처의 인력 수급을 어렵게 만들고 독립성을 취약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됐다.

▷현재 공수처 검사는 처장, 차장을 포함해 16명이다. 이달 말 1명이 그만둘 예정이어서 실제론 정원 25명 가운데 사실상 10명이 결원 상태다. 그런데 공수처가 지난달 요청한 검사 3명 신규 채용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의 재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공수처가 대통령 부부와 관련된 수사를 여러 건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검사 연임과 충원을 자꾸 미루면 인사권을 무기 삼아 공수처를 압박하려 한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10-30 “말 걸지 마세요” 노키즈 노줌마 이어 노실버존까지

 

노○○존’의 원조는 10년 전쯤 등장한 노키즈존이다. 식당과 카페에서 벌어진 어린이 안전사고를 두고 주인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판결이 이어지고, 똥기저귀를 버젓이 두고 가는 ‘맘충’ 논란이 들끓을 때였다. 해외에도 ‘차일드 프리존(child free zone)’이라며 어린이 출입을 막는 곳이 있지만, 한국처럼 당당히 아이들을 거부하는 나라는 드물다. 프랑스 르몽드는 올 초 “한국이 저출산으로 몸살을 앓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피곤해지기 때문”이라며 500곳이 훌쩍 넘는 우리나라 노키즈존을 조명했다.

▷한국식 노키즈존은 연령과 계층, 성별로 세분화하며 진화하고 있다. 올여름엔 인천의 한 헬스장이 ‘아줌마 출입 금지’ 안내문을 내걸면서 노줌마존 논란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안내문 아래엔 ‘교양 있고 우아한 여성만 출입 가능’하다는 설명과 함께 아줌마를 정의하는 8가지를 제시했다. “나이 떠나 공짜 좋아하면, 대중교통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면, 둘이 커피 한 잔 시키고 컵 달라고 하면, 음식물쓰레기 공중화장실에 몰래 버리면….”

▷노키즈존 못지않게 빠르게 퍼지고 있는 건 노인 출입을 금하는 이른바 노실버존, 노시니어존이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직원에게 반말을 일삼고, 여자 사장을 마담이라 부르며 희롱하고, 때로는 담배를 피워대는 ‘무매너 어르신’들 때문이라고 한다. 충북 제천의 한 수영장에서는 67세 이용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게 발단이 됐다. 안 그래도 일부 노인들이 물속에서 볼일을 보기도 하고 천천히 수영해 방해가 됐는데 이참에 노실버존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쏟아졌다.

 

▷‘젊은 분들에게 인사, 대화, 선물, 부탁, 칭찬 등 하지 마세요’라는 공지문을 써 붙인 헬스장도 있다. 어르신들이 말 걸고 참견해서 불편하다는 젊은 회원들의 민원이 쇄도한 탓이다. 이어폰을 끼지 않은 채 큰 소리로 음악이나 유튜브를 켜놓는 노인들이 방해가 된다는 불평도 적잖다. 운동하다가 쓰러지고 다치는 노인이 늘기도 했지만, 젊은층의 불만이 커지자 안전사고 위험을 구실로 노실버존이 된 스포츠시설이 한둘이 아니다.

▷7년 전 노키즈존을 차별이라고 규정했던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번에도 고령자를 차별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고령이라는 이유로 스포츠시설의 회원 가입을 막는 건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이라는 것이다. 사실 노키즈존에서 문제인 건 아이들이 아니라 자녀를 통제하거나 훈육하지 않는 ‘무개념 부모’이고, 노줌마존과 노시니어존에서 문제인 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일부 ‘진상 고객’이다. 문제의 행동을 제재하는 것과 특정 집단을 싸잡아 배제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늘어만 가는 노○○존은 배려와 존중보다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10-31(목) “지지 후보 표명 않겠다”에 독자 20만 떠난 WP

속임수를 쓰고, 복수심 가득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과 세계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2016년 대선 때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이런 사설을 썼다. 그런 우려가 현실화한 ‘트럼프 4년’을 겪은 뒤 2020년 대선에선 “트럼프는 현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며 더욱 절실한 어조로 조 바이든 후보를 지지했다. 그 후 트럼프의 대선 불복으로 빚어진 1·6 의사당 폭동을 가장 앞장서 비판한 언론 역시 워싱턴포스트다.

▷2013년 이 신문을 인수한 아마존 창업주 제프 베이조스는 트럼프 집권 이듬해인 2017년 신문 1면 맨 위 ‘워싱턴포스트’ 제호 밑에 이런 문구를 새겼다.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어간다(Democracy Dies in Darkness).’ 트럼프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베이조스는 트럼프 비리를 검증하는 기자 20명 규모의 특별취재팀을 출범시키며 “샅샅이 캐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워터게이트 특종의 주역 밥 우드워드 대기자까지 출격해 석연찮은 재산 형성 과정을 파헤쳤다.

▷그랬던 워싱턴포스트가 이번 대선부턴 지지 후보를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트럼프식 권위주의 회귀의 위험성을 지적해온 논설위원들이 최근 퓰리처상을 수상해 이를 자축하던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지지하는 사설 초안까지 작성됐는데 베이조스가 게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오피니언 담당 편집인이 사표를 냈고, 논설위원들은 “비겁하고, 끔찍한 실수”라는 성명을 냈다. “트럼프의 위협에 대해 우리가 보도해온 압도적인 증거들을 무시한 것”(우드워드 대기자)이란 비판도 잇따랐다.

 

▷160년 넘게 지지 후보를 밝혀온 뉴욕타임스에 비해 워싱턴포스트는 지지 후보 공개의 역사가 비교적 짧다. 1976년 대선부터다. 사설에서 언론사의 정치적 지향점을 투명하게 밝히고 기사는 객관성을 지키는 게 미국 언론의 대체적인 전통이지만 그렇지 않은 언론도 있다. 베이조스는 입장문에서 “언론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지지 후보 공개는 우리가 편향됐다는 인식을 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선거가 임박한 가운데 트럼프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수십 년간 이어온 전통을 뒤집은 것을 놓고 트럼프 눈치를 본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파장은 ‘허리케인급’이다. 벌써 20만 명이 디지털 구독을 취소했다고 한다. 종이신문을 포함해 유료 구독자 250만 명 중 8%가 빠져나간 것이다. 이에 따른 최대 수혜자는 트럼프가 될지도 모른다. 대통령 재임 시절 워싱턴포스트를 “가짜 뉴스”라고 비난하며 연방정부에 절독을 지시하는 등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던 그가 이런 결과를 누구보다 바랄 듯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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