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韓 離脫住民(脫北民) 이야기 2024-2/ 07.01 민간 對北풍선 원조 이민복 - 09.29 태영호 "北엘리트들 두 국가론에 '통일 안 할 거면 왜 세습하나' 의문"
北韓 離脫住民(脫北民) 이야기 2024-2/
07.01 민간 對北풍선 원조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
“對北 풍선은 레이더에 안 잡히고 소리도 없어. 조용히 날리면 아무 문제 없다”
⊙ “대북 풍선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 콘돔보다 얇은 0.03mm 두께 풍선에 전단 13만 장 매달아 5000m 상공서 살포
⊙ 北, 자존심 때문에 값비싼 수소에 오물 담아 보내… 南에 사상적으로 진 것
⊙ 백령도서 풍선 날리면 편서풍 타고 평양 거쳐 나진·선봉까지 날아가
⊙ 이재명의 경기도, 2020년 6월 이씨 거주 시·군 위험 구역 설정 후 차량·풍선 장비 영치
⊙ 임영웅, K-POP보단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더 北에 효과적
⊙ 강원 철원 출장 왔다가 전단 보고 6·25에 대해 의문 갖고는 脫北
⊙ 1996년 결혼했으나 풍선 때문에 이혼, 2013년 재혼했으나 또 이혼 위기
⊙ ‘탈북자’란 용어 만든 1호 유엔 難民… 이중건이라는 가명으로 《월간조선》 1994년 4월호에 등장

북한이 지난 5월 28~29일(약 260개) 수소가스를 채운 고무풍선에 오물과 쓰레기를 매달아 북풍(北風)에 실어 남한으로 날려보냈다. 6월 1~2일(약 720개), 9일(약 330개)에도 오물 풍선이 날아왔다.
지난 5월 29일 경남 거창군 한 논두렁에서는 북한이 날린 것으로 추정되는 오물 풍선이 원형 그대로 발견됐다. 중부 전선에서 거창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80km. 발견된 고무풍선의 지름은 3~4m였는데 풍선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담긴 비닐이 매달려 있었다. 타이머와 함께 비닐을 녹이기 위한 열선(熱線)이 비닐을 감싸고 있었다. 미리 설정된 시각에 맞춰 열선이 작동하면 비닐이 녹아 오물과 쓰레기가 공중에 흩날리도록 만든 것이다.
“오물 풍선, 北이 지고 들어온 것”

북한이 오물 풍선을 날린 의도와 풍선의 수준을 알고자 같은 날 오후 민간인 대북(對北) 풍선 원조 이민복(李民馥·66)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대북풍선단장)에게 연락했다. 이 대표는 2004년부터 민간 차원에서 대북 전단을 담은 풍선(이하 풍선)을 보내는 운동을 처음 시작했다.
이 대표는 “풍선에 담긴 내용물이 공중에서 퍼지지 않고 ‘덩어리’째 추락했다. 이는 실패한 것”이라며 두 가지를 지적했다.
“오물과 쓰레기는 공짜지만 북한에서 수소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값비싼 자원입니다. 일종의 자존심을 앞세워 오물을 보냈지만, 이는 북한이 사상적으로 남한에 완전히 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수소가스가 부산물로 생겨 수소 확보가 비교적 쉽다. 하지만 북한은 관련 기반 산업이 빈약해 물을 전기분해하는 방식으로 수소를 생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큰 비용이 들어 수소를 대량으로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민복 대표는 “풍선은 남에서 보내든 북에서 보내든 원리는 같다”며 “원리를 모르면 실패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에게 ‘풍선을 언제 또 보낼 계획이냐’고 물었다. 그는 “(정해진 건 없다.) 바람만 맞으면 언제든 보낸다”고 했다.
앞서 이 대표는 지난 4월 23일 대북 풍선 활동을 재개해 전단 50만 장을 날렸다. 지난 5월 15일과 30일에는 각각 풍선 16개(약 48만 장), 22개(약 66만 장)를 보냈다.
6년 동안 풍선 보내지 못해
이 대표는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이후 6년 가까이 대북 풍선을 보내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 간 긴장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이 대표의 풍선 운동을 막았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에는 ‘김여정 하명법’이라는 멸칭(蔑稱)이 붙은 ‘대북전단금지법(남북관계발전법 일부 개정 법률[24조 1항 3호])’까지 생겼다. 2023년 9월 26일 헌법재판소는 대북전단금지법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한다”며 위헌(재판관 7:2) 결정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20일 출간한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수준이 저열한 대북 전단은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지난 6월 1~2일에도 오물 풍선을 날렸다. 다음 날(3일) 이 대표에게 연락해 ‘풍선을 언제 날릴 예정이냐’고 또 물었다. 그는 “바람이 맞지 않다. 일단 지켜보자”고 했다. 이틀 뒤에 다시 연락해 ‘내일(6일)은 날릴 것이냐’고 물었지만 “풍속이 약하다”는 답을 들었다.
이 대표에게 ‘전화 인터뷰라도 하자’고 했다. 그는 “그간 인터뷰는 할 만큼 했다. 뻔한 인터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인터뷰를 하고 싶으면 ‘풍선기지’로 와 풍선의 원리를 먼저 이해하고 취재를 해라”고 했다.
이 대표는 대북 풍선을 날리는 일부 단체와 자신을 단순히 비교하는 취재에는 응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20년간 사명감 하나로 묵묵히 조용하게 풍선을 날려왔지만,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갖고 풍선을 날리는 일부 단체 때문에 오히려 풍선 운동의 의미가 퇴색되고 사회적으로 ‘악마화’가 되었다.
이 대표가 말하는 풍선기지는 그의 생활 공간이자 풍선을 날리는 데 필요한 장비·물자를 보관하는 곳이다. 수소가스를 담는 탱크로리와 이를 적재할 트럭, 전단, 타이머 등이 보관돼 있다.
6월 11일 이 대표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으나 풍선기지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했지만, 지도상에는 길이 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포장 길을 따라 무작정 올라가니 CCTV 여러 대가 설치된 허름한 컨테이너 건물이 보였다. 풍선기지일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기지에 도착하니 이 대표의 신변을 보호하는 경찰이 기자를 맞았다.
백령도서 철수한 뒤 경기 북부로

▲이민복 대표는 풍선의 원리를 알기 위해선 우선 바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백령도가 풍선을 날리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했다.
이민복 대표는 기자에게 컨테이너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이 컨테이너는 2010년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26일) 이후 이 대표가 백령도에 풍선기지를 만들었을 때 썼다. 대북 풍선 최고의 적지는 백령도이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 일부 단체가 백령도에서 공개적으로 풍선 날리는 행사를 하는 바람에 현지 주민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연평도 포격 도발(2011년 11월 23일) 이후 반년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주민 반대로 수소가스를 담은 차량이 섬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조용히 풍선을 날렸던’ 이 대표는 평당 만원씩 주고 산 400평 백령도 풍선기지를 포기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이민복 대표는 “대면 인터뷰는 6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인터뷰 중간중간에 여러 언론에서 이 대표에게 연락을 했다. 이들은 ‘풍선을 언제 날릴 것이냐’고 물었고 이 대표는 “바람이 맞아야 날린다”는 말만 반복했다. ‘다른 단체는 풍선을 날린다는데 왜 당신은 날리지 않느냐’는 식의 질문도 있었다. ‘풍선’과 ‘바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이 대표의 대답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을 테다.
— 다른 단체도 북한으로 풍선을 보냅니다. ‘이민복의 방식’과 ‘이민복 이외의 방식’이 다른 겁니까.
“‘이민복 이외의 방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풍선은 과학 원리에 기초해 날아갑니다. 저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과학적으로 풍선을 보낼 방법을 완성했어요. 원리를 알고 나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북 풍선 운동을 하는 단체는 얼마나 될까. 경찰에 따르면 약 50개에 이른다고 한다. 일부는 취미 삼아, 또 일부는 후원금을 목적으로 풍선을 날린다.
이 대표는 “풍선은 금속이 아니기에 레이더에 잡히지 않고, 열을 내뿜지도 않는다. 소리도 없다. 곧장 하늘로 솟구쳐 대낮에도 5분만 지나면 맨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며 “조용히, 정확하게만 날리면 문제 될 게 없다. 자기 활동을 선전할 목적으로, 바람도 무시한 채 떠들썩하게 날리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바람 무시하고 날리면 남한, 일본으로 날아가
그는 “풍선을 언제, 어디서 날렸는지 공개하지 않으면 북한이 풍선을 문제 삼기가 쉽지 않다”며 “공개적인 활동은 북한이 도발할 명분을 준다. 풍선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문제가 생기는 공개적이고 자극적인 풍선을 보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바람을 고려하지 않고 당 창건일이나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 생일에 맞춰 이벤트처럼 풍선을 날리면 자칫 이 풍선은 남한, 심지어 일본으로 날아갑니다. 대북 풍선은 북으로 가야 합니다.”
— 풍선을 북한으로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 가지 조건이 모두 맞아야 합니다. ▲북한으로 향하는 바람(풍향, 풍속) ▲손상되지 않은 풍선 ▲정확한 타이머가 있어야 하죠.”
—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풍선의 동력은 바람입니다. 어디로 날아갈지는 풍향과 풍속이 결정하죠. 북풍이 불면 아무리 풍선을 북으로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어요. 그럼에도 보낸다면 남한 홍천강에서 발견된 풍선들처럼 남쪽에 떨어지겠죠.”
이 대표는 스마트폰을 들고는 항공기상청 홈페이지로 들어가 풍향에 대해 설명했다.
“대북 풍선의 적정 고도는 3000~ 5000m인데 이것은 항공기상청의 슈퍼컴퓨터로 계산된 자료에만 있어요. 이걸 확인하지 않으면 전문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일기예보는 지상 10m 자료만 나오는데 이걸 보고 시도하는 아마추어들은 대부분 실패합니다. 북한이 아니라 남한과 일본에서까지 풍선이 발견되지요.”
— 왜 3000~5000m에서 날아가도록 합니까.
“풍선이 고도 5000m를 넘어가면 강한 제트기류에 휘말려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초속 10m 바람이면 3시간 뒤 평양 도착

▲2009년 1월 이민복 대표의 아들이 강화도에서 풍선 날리는 것을 돕고 있다. 전단 뭉치에는 후원자의 이름과 번호가 적혀 있다. 사진=이민복 대표
— 풍선을 날리는 데 필요한 최소 풍속이 있습니까.
“초속 10m 이상이면 좋습니다. 이 속도면 1시간에 약 36km를 날아갑니다. 중부 전선에서 평양까지 약 120km인데, 3시간가량 비행하면 됩니다. 평양을 목표로 전단을 살포하려면 100km가량 날아간 후 평양을 약 20km 남긴 지점 상공에서 전단 뭉치가 터져야 합니다. 전단이 바람을 타고 대각선으로 흩날리며 평양에 떨어지죠. 풍속이 5m라면 풍향이 좋아도 풍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한반도는 편서풍이 많이 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 대표가 벽에 걸린 한반도 전도(全圖) 앞에 섰다.
“한반도는 서쪽에서 바람(편서풍)이 많이 불어와요. 이 때문에 백령도, 연평도가 풍선을 날리기엔 가장 좋죠. 백령도에서 풍선을 날리면 평양으로 곧장 들어갑니다. 바람만 좋으면 러시아 국경 바로 앞인 나진선봉지구까지 날아갑니다. 한 탈북자는 양강도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복무 시절 전단을 봤다고 했습니다. 백령도에서 철수한 게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 풍선 날리기에 좋지 않은 곳도 있습니까.
“서부 전선 일대, 임진각이 가장 안 좋죠. 이곳은 중부나 동부 전선보다 위도가 낮아 풍선이 남서풍을 타고 동북쪽으로 날아가더라도 휴전선을 넘지 못하고 포천·연천·철원 등지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임진각에서 풍선을 날리는 이유는 기자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고 장소가 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북풍에 풍선을 실어 보내기 위해 중국에도 풍선기지를 만들기 위해 수천만원을 들였으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 바람이 알맞아 풍선을 날리고자 현장에 갔는데 기상이 변하면 허탈하지 않습니까.
“허탈할 게 뭐 있나요. 하늘이 그런 걸 어떡하겠어요.”
수소가스를 절반만 채우는 이유
이민복 대표가 날리는 풍선과 다른 단체가 날리는 것을 비교하면 모양부터 다르다. 다른 풍선단체들은 팽팽하게 가스를 채우고 아래를 묶기도 한다. 하지만 이 대표 풍선은 너비둘레가 4m, 길이는 14m인데 절반쯤만 가스를 채우고 아래를 묶지 않는다.
따라서 아랫단은 홀쭉하다.
— 왜 수소가스를 다 채워 넣지 않습니까. 가득 채워야 부력이 커져 더 많은 전단을 보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풍선이 비행하는 고도(5000m)의 기압이 지상의 절반이기 때문입니다. 기압이 절반이라는 말은 지상에서 수소가스를 절반만 채워도 5000m에 이르면 기압이 낮아져 수소가스의 부피가 두 배로 팽창해 풍선을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사는 지상은 약 1기압(atm)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 밀도가 낮아져 기압이 감소한다. 고도 3000m는 약 0.7기압, 고도 5000m는 약 0.5기압, 고도 1km는 약 0.3기압이다.
— 왜 풍선 아랫단은 밀봉하지 않는 겁니까.
“풍선 아랫부분을 꽉 묶지 않는 이유는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수소가스가 팽창할 때 풍선이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밀봉되지 않았기에 팽창된 수소 중 일부는 자연스럽게 아랫단을 통해 조금씩 대기로 배출됩니다. 수소를 가득 채운 채 아랫단까지 꽉 묶어 날리면 풍선은 목표 고도에 이르지도 못한 채 기압 차로 인해 곧장 부풀어 고도 1000m쯤에서 터져버립니다.”
수소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벼운 원소이다. 폭발 위험이 있지만 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에 사용한다. 헬륨은 수소보다 안전하지만 무거운 기체로서 전단을 그만큼 많이 날릴 수 없고 또 수소보다 10배 이상 비싸다.
“풍선에서 중요한 것은 체공 기술입니다. 이론적으로 5000m에 체공된 풍선이어야 날아가면서 서서히 내려앉습니다. 타이어 바람이 빠지듯 0.03mm 풍선 비닐을 뚫고 가스가 새나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대표는 풍선에 달린 전단뭉치를 단거리용, 중거리용, 장거리용으로 분리하여 풍선이 내려올 만하면 차례로 터뜨려 고도를 유지하며 날아가게 하였다. 이는 나사(NASA)의 다단계 로켓추진체 원리와 비슷하다.
단ㆍ중ㆍ장거리 전단

▲기계식 타이머의 모습. 설정된 시각이 되면 줄이 풀리면서 전단뭉치 아랫 부분이 개방돼 공중에서 전단이 살포된다.
“단, 중, 장거리 전단 방출 기술은 풍선이 고도를 유지하며 골고루, 여러 곳에 전단이 퍼질 수 있도록 합니다.”
이 기술은 정부의 풍선 기술보다도 획기적 발상이라고 한다.
과거 우리 정부는 고농도 알코올을 활용해 풍선의 고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고농도 알코올은 비쌌고 알코올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전단 탑재량에도 제한이 있었다. 이 대표의 방식이 정부가 풍선을 날렸던 방식보다 발전한 셈이다. 값싸면서도 스마트한 이 대표의 풍선은 민간인들도 쉽게 할 수 있게 한 혁명적인 기술이다.
― 타이머는 어떻게 작동합니까.
“타이머는 크게 ▲화학식 ▲기계식 ▲전기식이 있습니다. 화학식은 화학 반응을 유도해 전단이 담긴 비닐을 감싼 머리칼같이 가는 강철선을 녹여 끊어지면서 전단 뭉치가 흩어져 날아게 하는 방식입니다.”
이 대표는 화학식 타이머의 작동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한겨울 산속에 들어가 화학 반응 실험을 하기도 했다. 냉동고도 수천 번 여닫으며 모의실험을 했다.
하지만 치명적 단점이 고공 5000m는 기온이 영하 20도 정도로 화학반응이 느려져 타임시간을 정확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화학식의 단점을 개선하고자 6년 동안 고민한 끝에 발견한 게 기계식”이라고 했다. 기계식이 자동소총 성능이라면 화학식은 화승총이라고 할 수있다.
— 기계식과 전기식은요.
“기계식은 선풍기 타이머를 떠올리면 됩니다. 태엽 방식이죠. 단점은 시간을 3시간 이내에서만 조정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보완한 게 배터리를 활용한 전기식인데 10시간까지 설정할 수 있습니다.”
이 대표는 타이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풍선이 온전한 상태를 유지한 채 북한 상공에 진입해도 타이머가 불량이면 전단을 살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이머가 정상 작동하는지를 반복 시험한 뒤 풍선에 설치한다.
— 풍선은 전단을 몇 장이나 들어 올립니까.
“지름 40cm, 길이 7m인 원기둥꼴 풍선에 수소가스 압력 용기 한 통을 가득 채운 것을 ‘대형 풍선(기본 규격, 길이 7m)’이라고 부릅니다. 대형 풍선 한 개가 최고 3.5kg을 들어 올립니다.”
‘풍선의 길이가 7m는 더 되는 것 같다’고 하자 이 대표는 길이가 늘어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건 초대형 풍선(길이 14m)이에요. 풍선은 수소의 부력만을 이용하니 무게에 민감해요. 대형 풍선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고자 3kg만 실었어요. 풍선 크기를 두 배로 키우면 여유분이 생겨 전단을 500g가량 더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대형 풍선 2개를 각각 보내면 총 6kg을 보내지만 14m짜리 풍선(초대형 풍선)에는 6.5kg을 매달 수 있죠. 나중에는 14m짜리 풍선 두 개를 한데 묶어 ‘초초대형 풍선’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대형 풍선 하나만 날릴 때는 3kg밖에 못 실었는데, 초초대형 풍선에는 13.5kg을 매달 수 있어요. 기본 규격 대비 규모를 4배 키우니 수반되는 작업량은 4분의 1로 줄고 전단은 1.5kg을 더 실을 수 있게 됐죠.”
풍선 두께는 초박형 콘돔 수준인 0.03mm
모텔에서 볼 수 있는 콘돔의 두께가 0.1mm인데 풍선의 두께는 0.03mm이다. 쉽게 흠집이 나기에 풍선을 절대 땅에 두지 않으며 손으로 함부로 만지지도 않는다. 흠집 때문에 구멍이 나면 수소가스가 새어 나와 하늘로 오르다가 곧 추락한다.
이민복 대표가 풍선 날리는 사진과 영상을 보여줬는데, 하나같이 풍선 부위는 만지지 않았다.
— 왜 하필 0.03mm입니까.
“그보다 두꺼우면 풍선 그 자체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그보다 얇으면 더 쉽게 찢어집니다. 여러 번 실험해 얻은 결론이죠.”
— 전단 종류는 어떻게 분류합니까.
“전단은 종이 또는 비닐로 인쇄된 아날로그 전단과 CD, USB 같은 디지털 전단으로 분류합니다. 디지털 전단은 아날로그 전단에 비해서 몇수천만 배의 용량을 가지기에 강력합니다. 하지만 장단점이 있습니다. 아날로그는 기구 없이 즉석에서 볼 수 있기에 그 나름의 장점이 있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냅니다. 민간 풍선은 재력이 약해 디지털 전단을 많이 못 보냅니다. 많이 보냈으면 하는 염원뿐입니다.”
비닐 전단은 혁명

▲2022년 11월 풍선을 날리는 데 활용했던 5t 트럭이 방화로 전소됐다. 범인은 아직 잡지 못 했다. 사진=이민복 대표
— 종이 전단은 없습니까.
“과거에는 종이 전단을 날렸습니다만 2005년부터 보존성이 뛰어난 비닐 전단으로 바꿨습니다. 가격은 종이보다 좀 더 비싸지만 무게는 종이의 10분의 1 수준입니다. 비닐 전단은 혁명입니다.”
— 한 번에 전단을 몇 장까지 보낼 수 있습니까.
“2.5t, 3.5t 트럭을 갖고 있습니다. 2.5t은 수소가스 탱크로리 2개가 장착돼 있어 풍선 40개(길이 7m 기준)를 날릴 수 있습니다. 3.5t은 120개를 만들 수 있고요. 2대를 동시에 끌고 가면 풍선 160개, 전단 약 480만 장(손바닥 크기 기본 규격 기준) 이상 날릴 수 있습니다.”
이 대표는 5t짜리 트럭도 있었지만 2022년 11월 전소됐다. CCTV를 확인해보니 방화로 추정되지만, 아직 범인은 잡지 못했다. 중고로 1000만원을 주고 사와 돈을 아끼고자 500만원 들여 직접 개조한 트럭이었다.
이 대표는 한 시간 가까이 풍선의 원리를 설명하고는 기자를 1층으로 데려갔다. 그러곤 2006년에 시험 삼아 산에 뿌렸던 비닐 전단을 보여줬다. B4용지 크기였는데 약 4분의 1가량은 사라져 있었다. 이 대표는 “2006년 비닐 전단의 보존성을 시험하고자 산에 뿌려놓았다. 일부 훼손은 됐지만 형태가 유지된 부분은 글자가 여전히 선명하다. 북한 주민들이 이걸 돌려가며 읽는다고 생각해봐라. 종이 전단에 비해 수십, 수백배 오래 가는 효과”라고 했다.
— 전단은 어떤 형태이고 그 내용은 무엇인가요.
“전단 내용은 크게 일반용과 선교용이 있습니다. 내용은 저의 탈북스토리, 간증스토리를 적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스토리를 잘 보고 기억한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였습니다. 한편 신뢰를 위해 저의 본명, 고향, 학력, 경력 심지어 남한의 휴대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도 그대로 적어 보냅니다. 일반용과 선교용 전단내용의 주제는 사상적 콘텐츠입니다. 장사꾼들을 통해 한류는 많이 퍼져있습니다. 장사꾼들이 무서워 못 하는 사상적 콘텐츠는 우리가 전단으로 보내야 합니다. 사상적 콘텐츠의 핵심은 백두혈통과 6·25 전쟁의 진실을 담아 보냅니다.”
— USB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습니까.
“6·25 전쟁의 진실이 담긴 다큐멘터리와 태평양 전쟁을 다룬 영상입니다.”
— 후원은 계속해서 들어옵니까.
“2018년 문재인 정권의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강제로 못 날리게 해 중단되었음을 솔직히 말했지요. 못 날린다니 후원은 끊어지지요.
그래도 정직이 최우선이라고 봅니다. 지금은 날리게 되었으니 그 정직함을 보고 후원에 참여하리라 믿습니다. (후원해) 주신 만큼 열심히 날리면 되지 욕심내가며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신용이 곧 생명

▲이민복 대표는 언제, 어디서, 전단 몇 장, 풍선 몇 개를 날렸는지 기록한 수첩을 보여줬다. 이 수첩은 15년 전의 것이다.
10만원(100달러) 정도면 3만 장의 전단을 북한에 뿌릴 수 있다.
바람이 좋을 때 3만 장은 3개 군에 도포된다고 한다. 안전한 남한 땅에서 커피 마시며 라디오나 인터넷조차, 없는 폐쇄 땅에 진리를 보낼 수 있는 셈이다.
타 단체와 달리 이대 표는 풍선을 자기 단체 이름으로 날리지 않는다.
후원자 명의로 후원한 만큼 날리고 영상 찍어 보고한다.
후원자가 왕이라는 것이다. 후원자 자신이 날린 것으로서 긍지를 가지게 해드린다. 자신은 그저 충직한 심부름 꾼이라는 뜻이다.
이 대표는 후원자들의 이름과 풍선을 보낸 장소, 날린 풍선의 개수를 기록한 수첩도 보여줬다. 수첩 겉면에는 2006, 2008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남에게서 1000원 한 장 무상으로 받아도 감사한데 수만, 수십만원어치 풍선 후원금을 받았는데 정말 양심적으로 해야지요.”
그래서인지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가 대표적 대북풍선단체 4곳을 횡령 혐의로 고발하였으나 이 대표만 유일하게 무혐의가 내려졌다. ‘신용이 곧 생명’이란 지조를 행동으로 지킨 것이다.
― 풍선 날릴 때 인원이 얼마나 필요한가요.
“북으로 가는 바람이 언제 불지 몰라요. 새벽에 맞으면 나가야 하는데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남을 부르기 어렵지요. 하여 풍선 작업을 자동화, 단순화하여 가족과 함께 하거나 단독으로 합니다.”
― GPS를 달면 풍선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미국제 상용 등산용 GPS 추적기를 달아 확인한 적이 있어요. 실제로 북한으로 들어간다는 걸 입증했죠. GPS가 너무 비싸 모든 풍선에 달아 보내진 못해요. 가입비가 300달러, 1개 구입비가 200달러입니다.”
― 생수병에 쌀을 담거나 비닐봉지에 약품을 담아 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요즘 알려진 대북 풍선과 물에 띄우는 방법은 최초에 제가 시작한 것들입니다. 선교사로서 찬송가 507장에 저 동토의 땅에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진리를 보내라는 것대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 해안은 철조망으로 봉쇄되고 경비대가 살핍니다. 적지물자가 발견되면 특수 소각조가 현장에서 없애버립니다. 이런 가혹한 폐쇄 조건의 북한 실정을 보아 바람 따라 가는 풍선만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행동원칙인데 이 점을 역이용하여 요란스러운 단체들이 공개적으로 하고 있는 실태입니다.”
그러기에 전 체코무역사장 김태산 탈북인사는 강화도에서 물에 띄워 보내는 것은 유용성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월간조선》은 탈북자들을 살린 언론”
이 대표는 전단과 타이머를 보관한 창고로 기자를 안내했다. 창고는 어지러웠다. 바닥에는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나뒹굴었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선반에 놓인 1990년대 발행된 《월간조선》이었다. 이 대표와 《월간조선》의 인연은 올해로 30년째다.
이 대표는 《월간조선》 1994년 4월호에 러시아에서 유랑하는 탈북(脫北) 벌목공을 주제로 한 기사에서 ‘이중건’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당시 그의 신분은 전 북한과학원 연구원이었지만 탈북 벌목공 문제의 주인공 역할을 했다.
‘벌목공 기사’는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의 지시로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강사로 있던 황성준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이 썼다.
학자들은 이때부터 북한인권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특종 보도 이후 한국 사회에는 북한 인권이 화제가 됐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탈북자를 받지 않는다는 당시 김영삼 정부는 이 기사가 터진 후 전원 수용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 대표는 벌목공 기사에서 ‘탈북자’라는 용어를 처음 조어(造語)한 사람이다.
황성준 기자와의 인터뷰시 이 대표는 자신들을 ‘귀순자’라고 하는데 심한 거부감을 표시하였다. 어감도 귀신같은 이미지가 있어 좋지 않다고 하니 그럼 어떻게 불렀으면 좋을까에 즉석에서 ‘탈북자’라고 답했다고 한다.
“북한을 탈북한 자이니 탈북자라는 말에 거 참 좋겠네요”해서 이때부터 이렇게 불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도 여러 번 “조갑제”라는 이름을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존경심도 묻어나왔다. 그러면서 《월간조선》은 탈북자를 살린 언론”이라고 했다.
“오물 풍선은 주먹구구식”
이 대표는 “북한 오물 풍선은 고무 재질이라 신축성은 좋을지 몰라도 비행 고도 유지는 쉽지 않다”고 했다. 이 때문에 풍선을 어디로 날릴지는 풍선에 매단 오물·쓰레기의 양으로 조절돼 주먹구구라고 했다. 오물 무게가 무거우면 수도권 일대에, 가벼우면 영남까지 날아가는 식이다.
“대북 풍선은 미사일이 아니기에 초 단위까지 정확할 필요는 없어요. 공중에서 산탄총처럼 퍼져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오물 풍선은 전기 배터리를 이용해 오물·쓰레기를 담은 비닐이 녹아내리도록 했더라고요. 배터리 방식은 고도가 높아지면 전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쉽게 방전돼 효과적이지 않죠. 그래서 원형 그대로 추락한 겁니다.”
— 전단을 날리면 이를 보고 연락도 옵니까.
“네! 전단에는 제 전화번호나 이메일이 그대로 적혀있습니다. 이것을 보았는지 북한 대표단으로 외국에 나가 도움을 청하는 전화나 이메일이 옵니다. 그러면 저는 정보기관에 넘기죠.
전단을 보고 배를 타고 백령도에 넘어온 인민군 장교가족도 있습니다. 이들은 전단을 마을 어귀에다 펴놓고 왔다고 해요. 다른 이들도 보라고. 북한민주화위원회 손정훈 전 사무국장이 알려준 정보입니다. 또한 미국교포 한 분이 북한 평성에 갔다가 냇가에서 제 이름이 적힌 전단을 봤다고 국제농업개발연구원 이병화 원장이 직접 전해주었죠.
샘의료재단(박새록 대표)으로 북한에 들어갔던 황해도 책임자는 북한 간부들과 식사자리에서 ‘배시때기 고파도 무섭지 않은데 삐라 때문에 죽을 맛’이라고 한 소리를 들었다고 해요.”
— 일부에선 ‘전단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게 맞느냐’ ‘과연 몇 명이나 전단을 읽어 보겠느냐’며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대북 풍선의 성과는 어떤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북한 주민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때까지 해야만 하는 ‘원초적 인도주의 인권 운동’입니다. 그리고 대북 전단이 효과가 없다면 왜 북한이 풍선에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할까요?”
— 공개든 비공개든 풍선이 북한을 자극하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풍선을 두고 ‘김정은의 골치를 아프게 하니 좋다’는 의견과 ‘북한이 도발할까 봐 불안하다’는 입장이 있어요. 저는 두 입장 모두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입니다. 국민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조용히 날려야죠. ‘성경에도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풍선을 시끄럽게 날리면 날릴수록 표현의 자유를 자기들 스스로 위축시키는 거예요. 민주당이 대북전단금지법을 다시 만들면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 대북전단금지법을 두고 위헌 결정이 나왔습니다. 예상했습니까.
“위헌이라고 믿었지만,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불안불안했죠. 워낙 이상한 판결이 많이 나오니까요.”
‘이재명의 경기도’ 시절에도 고초 겪어

▲이민복 대표가 수소가스 탱크로리 앞에 서 있다.
이민복 대표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기도지사를 지냈을 때도 고초를 겪었다. 2020년에는 이 대표가 사는 지역을 위험 지역으로 설정해 감시하고 통제했다. 이민복 대표의 이야기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이후에는 풍선을 날리지 않고 가만히 있었어요. 그럼에도 2020년 6월 17일 경기도는 이재강 경기도 평화부지사를 앞세워 제 트럭과 수소가스 탱크로리, 각종 장비를 영치해갔죠. 또 대북 풍선 관련 행위 금지 행정명령도 내렸어요.”
이재강 전 평화부지사는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경기 의정부시 을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재강 의원은 지난 6월 13일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대북 전단 살포 시 ‘사전 신고’를 의무화하고, 경찰서장이 ‘살포 금지 통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 영치해간 이유는 뭔가요.
“저보고 ‘가스 안전 자격증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또 수소가스를 적재한 트럭이 국가 인증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어요. 여기에 임시 소화기를 갖추지 않아 위험하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 경기도 측의 주장은 사실인가요.
“모두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2013년에 가스 안전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풍선 날리는 사람 중 아마 저만 이 자격증을 갖고 있을 겁니다. 또 제 트럭은 국가 인증을 받은 트럭입니다. 트럭 뒷면에 ‘위험’ 표시가 없다는 핑계를 댔지만 ‘위험’ 표시가 명확히 돼 있습니다. 물론 소화기도 설치해두었고요. 대북 풍선을 막기 위한 핑계일 뿐이죠. 너무 분해서 경찰에 이재강 평화부지사를 고소했는데 경찰은 무혐의 결정을 하더라고요.”
풍선 장비 영치로만 끝나지 않았다. 경찰은 이민복 대표를 비롯해 풍선 운동 단체를 대상으로 후원금 횡령이 의심된다며 자금도 문제 삼았다. 경찰은 2015년부터 2021년 전반기까지의 후원금 내역을 조사했으나 횡령은 없었다. 이 대표는 대면 조사만 7번을 받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아까 보여드린 풍선 수첩을 갖고 조사받으러 나갔어요. 경찰이 이를 보더니 ‘우리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니 이해해달라. 백신 맞았다고 생각하시라’라고 하더군요.”
— 우리 정부가 지난 6월 9일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다고 했으나 하루 만에 잠정 중단했습니다.
“대북 확성기 방송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거죠. 확성기 방송은 북한이 개방할 때까지 일관되게 해야죠. 북한이 우리 말을 듣지 않을 때 꺼내는 최후의 수단 중 하나로만 대북 확성기 방송을 활용하고 있죠. 저는 이게 불만입니다.”
풍선 바라보는 시선은 左右가 50보 100보
— 정권 성향에 따라 풍선에 대한 태도가 다르지 않습니까.
“풍선을 바라보는 시각, 대하는 태도는 보수나 진보 모두 똑같아요. 제가 2003년부터 풍선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풍선 날리는 걸 막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13년 6월에 남북당국회담을 이유로 박근혜 정부가 풍선 날리는 걸 막더라고요. 차량 길목을 막아 원천 봉쇄했습니다. 그때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플래카드를 차에 달고 여기저기서 시위했습니다.”
— 정부가 확성기 방송을 할 때 주의할 점은 없습니까.
“지나친 서구식 표현은 삼가야 합니다. 북한 주민 사이에서 ‘남조선이 괜히 미 제국의 괴뢰가 아니구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과거 북한에 있을 때 우리 정부가 보낸 전단을 봤는데 영어식 표기를 남발했더라고요. 이는 북한 주민에게 ‘남한이 미제의 식민지’라는 북한의 주장을 믿게 할 뿐입니다.”
이 대표는 “남한에선 ‘헝가리’ ‘폴란드’라고 표기하지만 북한에서는 ‘웽그리아’ ‘뽈스카’라고 한다. 월드컵도 ‘세계축구선수권대회’라고 쓴다”며 북한 주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북한식으로 전단이나 방송의 내용을 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 보따리상을 통해 한국의 발전된 문화가 북한에 흘러들어 가면 북한이 변화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보따리상은 돈을 버는 게 목적입니다. 북한을 변화시키는 건 관심사가 아니죠. 보따리상은 상업적 문화를 다룰 뿐 북한 정권에 치명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이념은 다루지 않습니다. 한계가 있죠.”
— 일부 단체는 풍선에 K-pop이나 임영웅의 노래를 담아 보냅니다.
“북한은 문화 수준이 발전하지 못해 애써 보내더라도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대북 확성기 방송으로 김광석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를 트는 게 효과적일 겁니다.”
— 대북 전단에는 무엇을 담아야 합니까.
“북한의 백두혈통 우상화를 허물 수 있는 내용과 6·25의 진실을 담은 역사입니다. 수령독재체제는 바로 김씨 일가에 대한 우상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북한 주민이 남한과 미국에 적대감을 갖는 이유는 6·25를 일으킨 주범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씨는 2006년에 제작한 ‘기본형 전단’을 꺼내 기자에게 보여줬다. 기자는 14년 전에 이 전단을 본 적이 있다. 북한 주민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역사적인 내용을 짧은 구절(句節)로 정리해 나열했다.
〈이상한 것은 먼저 쳤다는 쪽이 거꾸로 3일 만에 서울 먹힌 것/ 진실을 알기 위해 전쟁 초기 참전자에게 조용히 물어봐/ … 허세 떨던 국군은 전투 경험 풍부한 팔로군 주축의 인민군과 105땅크에 3일 만에 수도 먹힌 전쟁은 6·25밖에 없어/ 〈조국해방전쟁〉 말 자체가 침공했다는 증거/ 하바롭스크에서 김정일 낳아(1941년)/ 그러니 백두산 고향집은 거짓〉
전단 마지막에는 전자우편 주소와 휴대전화 번호도 적어놓았다.
헌 양복, 짝짝이 양말
이 대표는 풍선 때문에 가정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말했다. 지금 현재 ‘이혼 위기’라고 한다.
“1996년 미 대사관에서 일하던 여성과 결혼해 아들 하나를 뒀습니다. 2010년쯤에 북한이 살해 협박을 해왔어요. 아내는 ‘더는 이렇게는 같이 못 산다’며 이혼하자고 했죠. 풍선 날리느라 컨테이너 생활을 해야 했고 주변에선 뱀도 나오니 오죽했겠습니까. 2011년 아내는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2013년에 재혼을 했어요. 딸이 하나 있는데 또 이혼 위기입니다.”
이 대표의 컨테이너 건물에는 아궁이가 있었다. 난방비를 아끼려고 화목(火木)을 하는데, 필요한 나무는 근처 공사장에서 일 도와주고 좀 얻어온다고 했다. 풍선기지에서 기자에게 한참을 설명한 이민복 대표는 경기 성남 분당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지를 떠났다. 차에 올라 양말을 확인해보니 양말이 짝짝이였다. 그는 지금 입고 있는 양복도 누가 입다가 준 것이라며 남한에 있으면 굶어 죽을 일은 없으니 걱정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기자는 분당까지 함께 타며 이 대표의 남한 생활 30년을 압축적으로 들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정리해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며 책을 꼭 쓰고 싶다고 했다.⊙
월간조선 07월 호 글 :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07.02 ‘마르크스주의자’였던 北 인권운동가, 오가와 하루히사 도쿄대 명예교수
●“침묵하는 당신, 공범입니다
⊙ “북한의 ‘자주성’ 강조 사상에 깊은 감명… 김일성 신격화에 돌아서”(오가와 교수)
⊙ “탈북민들의 증언을 다룬 책들은 많습니다. 꼭 공부해주세요”
⊙ “1970년대 ‘北 인권’ 하면 ‘빨갱이’ 소리 들을 만큼 생소했던 개념”(김상헌 ‘북한인권 제3의 길’ 대표)
⊙ “군사 정권 당시 민주화 탄압에 앞장섰던 이들이 북한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北 인권 이용해 걸림돌”(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
⊙ “북송 사업 참가 재일동포들이 김정은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증언’ 덕분”
小川晴久
1941년생.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과 졸업 / 도쿄여자대학 조교수, 연세대 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 도쿄대 명예교수,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대표, No Fence 대표 / 저서 《北朝鮮の人權問題にどう向きあうか(북한 인권 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北朝鮮いまだ存在する強制收容所(북한에 아직도 존재하는 강제 수용소》 등

▲사진=조의환
“당신은 북한의 무서운 인권 유린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던 노인이 불같이 화를 냈다. 허리가 굽어 오래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워 보이던 그의 불호령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84) 도쿄대 명예교수는 북한 강제 수용소를 경험한 이들의 수기(手記), 《대왕의 제전》 《수용소의 노래》 《평양의 어항》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실토하자 통역의 말을 끊은 오가와 교수는 “아이고”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가와 교수는 지난 5월 22일 북한 인권단체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선영)로부터 제3회 물망초인(人) 상을 받았다. 30년째 ‘북한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서다. 3일 뒤인 5월 25일, 오가와 교수가 일본으로 귀국하기 전날 밤 그가 머무는 호텔에서 만남을 가졌다.
‘북송 사업’ 지지했던 過去
1959년 도쿄대학 동양학과 입학 당시만 해도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오가와 교수는 점차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해갔다. 그것도 모자라 ‘자주성’을 강조한 북한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공부도 많이 했다. 지금도 그는 공산당 관련 서적과 논문들의 이름과 내용, 발행 시기까지 정확하게 줄줄 꿰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망한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재일(在日) 한국인 북송(北送) 사업’까지 지지하던 그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일본에선 ‘안보 조약 개정 반대 운동’이 굉장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어요. 일본의 안보 조약은 소련과 중국을 ‘적’으로 전제하고 있는데, 왜 중국이 적대국인지를 알고 싶어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아그네스 스메들리라는 미국인이 쓴 《위대한 길》을 읽으며 중국 근현대사를 처음 공부했고, 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됐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주더(朱德) 장군을 인터뷰하고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죠.”
― 책 한 권으로요?
“안보 조약 반대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동양학과에 많이들 진학했어요. 저는 지방에서 도쿄로 진학한 보통의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도쿄에서 나고 자란 대학 동급생들 중에 한 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다고 해요. 그를 통해 도쿄는 지방보다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곳이라고 느꼈어요.”
― 젊었을 적 목격한 일본의 좌파 운동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제가 직접 좌파 운동에 나섰던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려워요.”
― 그렇다면 북한 체제를 우호적으로 봤던 이유는 뭔가요.
“저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서양 콤플렉스(complex)’가 있었어요. 뭐냐면, 아시아는 유럽보다 과학적·비판적 사고에 아주 약하다는 관념입니다. 그런데 1966년 북한 조선노동당이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이때 소련과 중국은 싸움을 시작했어요. 중소(中蘇) 논쟁이죠.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도움을 받아 존재하죠. 이 상황에서 ‘자주성’을 내세운 북한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었죠. 지금 봐도 굉장히 좋은 내용이에요.”
오가와 교수는 색안경을 끼는 법이 없었다. 좌파든 우파든 그가 생각하기에 논리에 맞는 말을 하는 쪽이라면 사회주의도 좇았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진 시기도 그만큼 앞당겨졌다.
“김일성 신격화에 돌아섰다”

▲2010년 8월 KBS를 통해 보도된 북한의 20대 ‘꽃제비’ 모습. 처참한 몰골의 이 여성은 굶주림에 결국 숨졌다고 한다. 사진=연합뉴스
― 북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계기가 있습니까.
“북한은 1967년 5월 ‘김일성 신격화’를 시작했습니다. 1974년엔 〈당의 유일 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라는 문서를 냈어요. 이걸 보면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김일성 신격화 선언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북한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죠.”
오가와 교수는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를 꺼냈다.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1993년 8월 21일 도쿄에 있는 불고기 집에서 열린 ‘북조선 귀국자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어요. 여기서 식당 여주인이 ‘북송선을 탄 아들 셋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고생하다 한 명은 죽었다는 소식을 한참 뒤에야 들었다’고 말했어요. 또 다른 참석자는 ‘오빠가 정치범으로 체포돼 숨진 사실을 알고 나서 조총련에 2000만 엔을 바치고 올케를 구출했다’고 했어요. 그의 오빠는 북한의 대외(對外) 선전 방송 ‘평양방송’의 일본어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재일동포였어요. 북송 사업을 지지했는데, 현실은 충격적이었어요. ‘지상 천국’이라는 북한으로 떠났던 북송자들의 일본 가족들로부터 들은 얘기도 다 비슷했어요. 그 식당에서 모임을 만든 사람은 박수남(朴壽南)씨입니다. 지금 90세가 넘었지만 살아 계세요.”
이렇게 시작된 오가와 교수의 북한 인권 운동의 목표는 국제사회의 관심을 모으는 것이었다. 북한의 인권 침해 실태를 알리는 계간지 《생명과 인권》을 발행한 게 대표적이다. 오가와 교수는 1996년 가을 이 계간지에 ‘북송 사업 초기 2~3년 동안 건너간 사람들의 태반은 남한이 고향인 사람들’이라며 이런 글을 남겼다.
〈(재일동포들이) 어째서 북한으로 건너갔는가 하면, 일본 생활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 극심한 차별로 인해 일본에서 살아봤자 앞날에 아무런 희망이 없고, 그럴 바에는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하는 게 보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중략) 그러나 막상 북한으로 건너가 보니 또 다른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노동당원이 돼야 사람대접을 받는데, 귀국자가 노동당원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자본주의 사회인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배제당한 것이다. 북한의 성분표에 따르면 귀국자는 51등급 중 32등급에 속한다.〉
북송 사업은 1959년 12월에 시작돼 1984년까지 25년간 진행됐다. 그 수는 9만3000명. 그런데 북송 사업에 참여한 재일동포 대다수는 초반 2년에 몰려 있다. 당시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주장처럼 북한이 지상 낙원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생활조차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이 갖가지 경로를 통해 북한의 검열을 뚫고 일본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25년간 진행된 북송 사업의 절정기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2년에 그쳤다. 이 시기에만 7만여 명의 재일동포가 북송선에 몸을 실었다. 얼마 안 가 귀국열(熱)은 식었다.
생소했던 ‘北 인권’
《생명과 인권》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발행했다. 처음엔 영문판(版)으로 900부를 인쇄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돌렸다. 미국의 북한 인권 운동가 수잰 숄티는 이 계간지를 2000년 10월부터 미국 의회 관계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밖에도 오가와 교수는 1993년 11월 7일 도쿄도 간다구에서 탈북민 증언 집회를 열고 이듬해 2월 20일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모임’을 출범시켰다.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모임’은 1995년 12월 한국·미국·일본·독일 4개국이 서울에서 연 북한 인권 국제회의에 초청받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오가와 교수가 이 단체를 만든 건 1994년 2월 20일이다. 한국 최초의 북한 인권 단체인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설립된 시기는 1996년이다. 한국보다 2년 앞선 것이다. 두 단체는 1996년 5월 11일 도쿄대에서 협력 각서를 체결, 계간 《생명과 인권》을 공동 출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 인권 문제는 생소하기만 했다. 《생명과 인권》의 영어 번역을 맡았던 김상헌(93) ‘북한인권 제3의 길’ 대표가 오가와 교수와 동석했다. 김 대표는 “군사 독재 시절 대한민국은 인권 탄압을 하는 나라로 인식됐다”며 “그땐 북한 인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는 “‘북한 인권’을 얘기하면 ‘빨갱이 아니냐’ ‘잡혀가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고 했다. 김상헌 대표는 “그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며 “사무실로 나올 땐 등골이 서늘했다”고 덧붙였다.
오가와 교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체험자의 증언을 모아 북한 인권 유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며 “그것을 일본에선 일본어로, 그리고 세계를 대상으론 영어로 만들어 널리 알리고자 활동해왔다”고 설명했다. 다만 북한 인권 문제를 공론화하는 방식에 대해선 이들의 의견이 갈렸다.
“국내 여론이 안 따라주니…”

▲왼쪽부터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 오가와 하루히사 도쿄대 명예교수, 김상헌 북한인권 제3의 길 대표가 《생명과 인권》을 들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김영자 이사는 “북한 인권 문제는 국내보단 국제사회에서 공론화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도 외국을 상대로, 유엔을 타깃으로 해서 국제 회의도 연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에서 공론화가 되니 그제야 국내에서도 관련 단체들이 생겨났다. 유엔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이 통과되고 특별보고관도 임명되고 북한인권조사위원회 및 관련 조사 보고서도 나온 데 이어 한국에 유엔 인권사무소가 설립되니 국내 여론도 움직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제사회의 지지를 불씨로 국내 여론이 타오를 수 있다는 게 김 이사의 생각이다.
반면 김상헌 대표는 “내 생각은 다르다”고 했다. 국내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듣고 보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차이지만 결국 국내 여론을 쉽게 바꿀 수 없어서 나라 밖을 대상으로 호소했다는 얘기다. 김 대표는 한국이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때 국제사회의 냉담한 반응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의 얘기다.
“한국에 있는 우리가 국제사회에 아무리 목소리를 내봤자 기대했던 것만큼 반응이 오질 않아요. 관심도 주지 않아요. 해외 기관이나 단체와 접촉해보면 ‘너희 잘 먹고 잘사는 한국에서도 (북한 인권 문제를) 가만히 두는데, 왜 우리가 총대를 메냐’는 정서가 느껴져요.”
오가와 교수도 “그래서 침묵은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라며 “침묵은 공범”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 인권에 대한 기록물은 많으니 한국 사람들이 꼭 공부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국제사회에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이들이 ‘북한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는 시선이었다. 김 이사와 김 대표도 ‘일정 부분은 사실이다’라고 했다.
“민주화 탄압 인사들, 인권을 北 공격 수단으로 이용”

▲김상헌 북한인권 제3의 길 대표는 《타임지》 아시아판이 선정한 ‘2003년 아시아의 영웅’으로 뽑혔다. 당시 한국인으로는 유일했다. 사진=조선DB
김영자 이사는 “반공(反共)주의자들도 북한 인권 운동을 했다”며 “1970년대 군사 정권에 부역하며 민주화 탄압에 앞장섰던 이들이 북한 인권을 운운하니 국제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의 얘기다.
“사실 미국의 인권 운동가 수잰 숄티 여사가 윤현(尹玄·1929~2019년) 전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우리가 《생명과 인권》을 미국 의회에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하니까 수잰 숄티 여사가 윤 전 이사장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 의회에선 당신이 군사 정권 시절에 무엇을 했는지 반응을 보였다’고 전한 거죠. 기분이 나빴죠. 그래서 우리가 해온 활동을 소개했더니 나중에 서울에 방문한 수잰 숄티 여사가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 이런 반응이 나올 만했다고 봅니까.
“국내에서 가장 처음 북한 인권 문제를 꺼냈던 이들 중엔 민주화 인사들을 고문한 사람도 있었어요. 군사 정권 때 잘 살던 사람들이었죠. 북한 체제를 공격하는 데 북한 인권을 도구로 삼았으니 지금까지도 그 부분이 발목을 잡고 있어요. 그런 의심을 받을 때마다 저희와 구성원의 활동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죠.”
김상헌 대표는 “지금까지도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북한 인권 활동이 죽을 쑤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중국을 수십 번 드나들며 탈북자를 구출하는 등 현장에서 뛰기 때문에 후원이 절실했다. 하지만 재정 지원을 받을 때도 이러한 해명을 해야 했다. 이들은 현재까지 1180명의 탈북민을 구출했고, 이 중엔 두 명의 국군 포로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한국의 북한 인권 단체가 갖는 제약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부의 무관심도 한몫했다. 김영자 이사가 2003년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팩스까지 보낸 국군 포로, 관련 부처는 ‘뺑뺑이’
“국군 포로 두 명이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한 적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한국으로 오려고 했죠. 그런데 도움을 받을 곳이 없으니까 이 사람들이 우리(북한인권시민연합) 팩스 번호로 연락을 해온 거예요. 자기의 이력을 상세히 적어서요. 어느 지역 출신이며, 군번이며 어떻게 끌려갔는지까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팩스를 복사해서 공문의 형태로 ‘이 사람을 구해주세요’라고 통일부에 보냈어요. 그랬더니 통일부에선 ‘우리 담당이 아니다’라면서 국방부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국방부로 공문을 보냈지만 소식이 없었어요. 그래서 국방부에 전화했더니 ‘여기엔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부서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그래서 외교부로 갔어요. 그러느라 한 달이 지나갔어요. 이 사람은 중국에서 눈 빠지게 기다리며 얼마나 피 마르는 시간을 보냈겠어요.”
― 어떻게 구출했나요.
“마침 윤현 이사장이 참석한 북한 관련 모임에서 윤영관(尹永寬) 당시 외교부 장관이 강연을 했어요. 강연이 끝나고 가진 좌담회에서 윤현 이사장이 윤영관 장관에게 ‘국군 포로가 이렇게 중국에 있는 상황이다, 이 사람을 도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게 나라냐’라고 토로했어요. 그랬더니 윤영관 장관이 ‘그건 내가 책임지겠소’라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어떤 루트를 통해 우리가 구출할 수 있게 됐어요.”
― 어떤 루트인가요.
“그건 공개할 수 없습니다. 그 국군 포로들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저에게 전화를 해서 ‘저희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국정원에서 조사 끝나면 찾아뵙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렇게 윤 장관에게 얘기한 것을 계기로 2003년부터 국군 포로를 데리고 올 수 있는 통로가 생겼어요.”
“당사국이 관심 안 갖는데, 국제사회가 나서겠나”

▲재일동포를 북한으로 데려갈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新潟) 항구에 정박해 있다. 사진=조선DB
국내 북한 인권 운동 방식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다’는 외부의 지적도 있다. 김영자 이사가 말을 이었다.
“1998년 5월 1일 한국에서 강연을 연 적이 있는데 미국의 언론사인 《저널 오브 데모크라시(Journal of democracy)》의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편집장이 왔어요. 그때 래리 편집장이 저희에게 ‘NGO(비정부 조직)가 이렇게 한가롭게 활동해서야 되겠느냐’고 하더군요. 저희는 이런 활동도 필요하다고 얘기했더니 래리 편집장은 ‘북한의 강제 수용소를 경험한 탈북민들의 증언을 듣고 싶다’고 말했어요. 즉시 래리 편집장이 묵고 있던 조선호텔 로비에서 강철환, 안혁, 이순옥, 이민복, 최동철씨 등 탈북민들을 만나 증언을 모았어요. 그래서 그때 사실상 처음으로 북한의 강제 수용소 문제가 미국에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죠.”
1999년 12월엔 ‘북한 인권 난민 문제 국제회의’가 개최됐다. 이 행사는 서울, 일본 도쿄, 체코 프라하, 폴란드 바르샤바, 노르웨이 베르겐, 영국 채텀하우스, 캐나다 토론토, 호주 멜버른, 스위스 제네바, 독일 베를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등에서도 이어서 열렸다.
이처럼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려면 국내에서 적극적인 노력에 나서야 한다고 북한 인권 운동가들은 입을 모은다. 하지만 한국은 지난 정부에서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에 4년 연속 불참했다. 박근혜 정부 때 설립한 법무부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문재인 정부 때 용인에 있는 법무연수원 분원으로 옮겨져 쪽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당시 북한인권기록보존소장을 지낸 최기식 전 검사는 2024년 《월간조선》 3월호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북한 인권 도외시 경향에 대해 “몸소 느꼈다”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세세히 밝혔다. 나라 안팎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는 이들로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김영자 이사는 이에 대해 “정말 웃기는 일”이라며 허탈해했다. 오가와 교수도 당사국이 관심을 안 갖는 문제를 국제사회에서 신경 쓸 리 없다는 데 공감했다.
오가와 교수는 나아가, 한국과 일본 가릴 것 없이 한일 양국이 ‘납북(拉北)’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60년 전 북송선에 제 발로 오른 재일 한국인도 “납치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증언의 힘’
이와 관련해 지난해 일본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그해 10월 30일 도쿄고등재판소(고등법원)는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갔다가 탈출한 재일동포들이 김정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어려운 소송을 이기게 한 건 재일동포들의 ‘증언’이었다. 앞서 이들은 북한 정부를 상대로 4억 엔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제공하고 주거와 일도 있다’며 북한을 ‘지상 낙원’이라고 속였고 이들이 북한으로 건너온 뒤엔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1심 판결을 내린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는 2022년 3월 북한의 ‘이주 권유’ 행위와 ‘북한 내 유치’ 행위를 별개로 봤다. 따라서 북송 사업을 위해 속인 행위는 일본에 재판 관할권이 있지만 20년의 제척 기간이 지나 소멸했고,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은 재판 관할권이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두 가지를 ‘하나의 행위’로 보고 “이 일체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침해의 관할권은 일본 재판소에 있다”며 다시 심리하도록 도쿄지방재판소에 사건을 돌려보냈다. 북한에서 탈출하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북한에 남아 있으므로 관할권도 인정됐다.
김 이사는 “그만큼 북한 인권 문제는 증언밖에 입증할 수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증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해 들은 증언을 전했다.
“재일동포들 중엔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문서에 서명하고 ‘북한이 지상 낙원이다’라는 조총련의 말만 믿고 속아서 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걸 납치라고 봐요. 그렇게 납치된 사람들이 북한 청진항에 도착했는데, 냄새부터 이상하더래요. 찌든 냄새가 진동하고, 사람들은 못 먹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이상함을 느껴서 북송선에서 내리지 않고 발버둥 치고 버티니까 북한에선 이들을 정신병원이나 정치범 수용소에 가두기도 했어요.”⊙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
07.12 첫 ‘북한이탈주민의 날’이 주는 위로와 자부심
탈북민을 지칭하는 용어는 귀순 용사에서부터 탈북자·북한이탈주민·새터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탈북민의 생활 방식은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두고 온 고향의 일가친척과 친구들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룬다는 사람이 태반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생존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지만 경쟁력은 여전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석사·박사 학위 따고, 성공한 사업가도 나왔다지만 ‘미취업’과 ‘부적응 현황’ 같은 통계에 묻혀 탈북민 사회는 늘 몸살을 앓는다.
혼란스런 삶을 사는 탈북민 많아
상대적 박탈감에 차별한다 느껴
지친 그들 다시 일으켜 세워주길

▲일러스트=김회룡
한국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차별이 없다는 유럽으로 ‘탈남’하는 탈북민이 수천 명이나 된다.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사회관계망과 정부의 각종 지원 프로그램에도 적응하지 못해 아직도 사회적 약자 취급을 받는다. 이렇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탈북민들에게 기댈 곳이 생겼다.
올 초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은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며 통일부에 ‘북한이탈주민의 날’을 제정하라고 지시했다. 지난 5월,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날(1997년 7월 14일)을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지정했고, 오는 14일 첫 기념일을 맞는다. 북한군에서 20년간 복무하다 북한 사회에 환멸을 느껴 1996년 자유를 찾아 압록강을 건넌 탈북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개무량한 순간이다. 그동안 막힌 숨통이 확 트이는 듯하다.
나는 자유를 찾은 이후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란 행복 열차에 무임승차한 듯한 송구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입국한 첫날부터 배우며 일했고 일하며 배웠다. 하지만 북한 공민증을 버리고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막 받아든 사람에게 기계처럼 다가서는 자본주의의 원칙이 야속했던 것도 사실이다. 입국 이후 사회주의의 후유증을 설명할 사이도 없었다. 남북한의 커다란 격차 앞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오랜 세월 몸에 밴 사회주의의 요소를 털어버려야 했다. 그 빈자리에 자본시장의 능동적 원리를 꽉꽉 채워 넣어야 한다고들 조언했다. 그러지 못하면 ‘부적응자’로 낙인 찍어도 할 말이 없던 세월을 대부분의 탈북민은 살아왔다.
그래서 고향이 더 그립고, 상대적 박탈감을 차별이라 느낀다. 사실 탈북민들에게 필요한 건 국민의 관심과 사회적 배려다. 정착 지원을 위한 보조 프로그램, 주거지 지원, 특례 입학 등은 유익한 지원시스템이다. 하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말투가 투박하다고 다니던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건 관심과 배려의 문제다.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석사라도 탈북민의 취업은 더 어렵고, 알려진 소수를 제외한 북한판 MZ 세대도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동원한다. 이 역시 탈북민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한국사회에 편입되지는 않았다는 탈북민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벽돌 한장 쌓은 적 없는 나를 품어주고 안아준 대한민국, 고마운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탈북민들의 마음이 제대로 받아들여진 적 있나 싶다.
대표적 서민 음식의 고급화를 이뤄 낸 평양냉면 식당 사장, 남해 가두리 양식장에서 전복의 세계화를 꿈꾸는 탈북 여성, 국내외에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체를 알리는 청년,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전단을 살포해온 탈북민들이 자기 영달만을 위해 땀 흘려 왔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 ‘철우’와 ‘은영’이가 지쳐있다면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탈북민의 날’이 되길 바란다. 그 ‘철환’이와 ‘상학’이가 상처받았다면 속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탈북민의 날’이 되기를 염원한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탈북민이 성공한 삶을 사는 세월이 성큼 다가왔으면 좋겠다.
북한인권 운동을 해온 나는 2017년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쓰러졌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소생의 날개를 펼치려 한다. 건강을 되찾고 훨훨 날아 사랑하는 고향, 통일된 조국을 품고 싶은 나에게 ‘탈북민의 날’이 날개가 되어 주길 간절히 바란다. 통일의 그 날이여, 어서 오라.

중앙일보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
07-14 尹대통령 “北 동포, 단 한 분도 돌려보내지 않을 것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사

윤석열 대통령이 14일 “대한민국을 찾는 북한 동포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단 한 분도 돌려보내지 않고, 북한을 탈출해 해외에 계신 동포들이 강제로 북송되지 않도록 모든 외교적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윤 대통령은 또 “북한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 대한민국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라 “탈북민을 포용하는 것이 북한 인권을 개선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북한 주민들은 대한민국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고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 책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앞서 윤 대통령은 올해 1월 국무회의에서 탈북민의 날 제정을 지시한 바 있다. 이후 의견 수렴을 통해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1997년 7월 14일을 기념해 7월 14일을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정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 정권은 탈북을 막기 위해 국경 지역에 장벽과 전기 철조망을 치고 지뢰까지 매설하고 있다”며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를 가로막는 반인륜적 행태”라고 비판했다. 이어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폭정과 굶주림의 굴레에 가둬 놓고 있다”며 “아무리 억압해도 자유에 대한 희망, 자유를 향한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고통받는 북한 동포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탈북민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끔 종합적인 보호와 지원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2005년 수준에 머물러 있는 초기 정착지원금을 대폭 개선하고, 미래행복통장을 통해 자산 형성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어 “탈북 여성이 안심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도록 아이돌봄 서비스를 적극 제공하겠다”며 “북한이탈주민을 고용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세액공제와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첫 기념식에는 김영호 통일부 장관과 조태열 외교부 장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 종사자·유관기관 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이탈주민 지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김성민 자유북한방송대표(국민훈장 동백장), 임현수 글로벌연합 선교 훈련원 이사장(국민포장), 마순희 학마을 자조모임 대표(대통령 표창), 남북 주민으로 구성된 ‘위드봉사단’(대통령 표창) 등이 윤 대통령에게 훈·포장 및 표창을 직접 수여받았다.
조혜선 동아닷컴 기자 hs87cho@donga.com
07.15 MZ 탈북민 "한국 드라마 보다 걸리면 뇌물 10년전 30달러… 이젠 엄청 올라"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MZ 탈북민 3인 만나보니

▲윤석열 대통령이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날 기념식'에서 영상을 시청한 후 눈을 만지고 있다. /뉴시스
14일은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이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국내 정착 탈북민은 총 3만4078명. 정부는 이 중 특히 MZ세대 탈북민에게 주목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의 MZ세대는 국가 배급이 아닌 자력으로 살아온 ‘장마당 세대’”라며 “단속을 피해 남한 영상을 보고 말투를 따라 하는 청년 세대가 김정은 체제 균열의 단초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고 했다.

▲그래픽=이진영
본지는 2022년 유럽 지역에서 유학 중 함께 탈북한 평양 출신 20대 여성 3명과 만나 북한 생활과 탈북 이유 등에 대해 들어봤다. 올해 국내 대학에 입학한 정유미씨(24)와 신지은씨(23), 대학 입학을 준비 중인 한지민(24)씨와의 만남은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이뤄졌다. 이들은 평양에 가족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명을 쓰고 얼굴 공개를 원치 않았다.

▲그래픽=이진영
ㅡ평양에 있을 때 한국 드라마가 얼마나 인기였나.
“밖으로 소리가 들리면 안 되니 이불 뒤집어쓰고 이어폰 꽂고 봤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신사의 품격’을 가장 재밌게 봤는데 하지 말라는 걸 몰래 하니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한씨)
“학교 가면 친구들은 전부 남한 영화·드라마 본 얘기만 했다. 걸리느냐 안 걸리느냐의 차이였지 대부분 다 봤다. 김주애(김정은 딸)도 봤을 것이다.” (신씨)
ㅡ한국 드라마는 어떻게 처음 접했나.
“열 살 때 친구네 집 놀러갔을 때 친구 언니가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한국 드라마인 줄 몰랐다. 중국어 자막이 나오고 소리는 아주 작게 틀어놨는데 ‘고마워요(북한에선 ’~해요’ 말투 안 씀)’ ‘괜찮아(북한말은 ‘일없다)’ 이런 말이 들리더라. 분명히 우리말 같은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투여서 깜짝 놀랐다.” (정씨)
“엄마가 고등학생 될 때까지는 한국 말투 따라 할까 봐 소리는 못 듣게 하고 화면만 보게 했다. 고1 때 처음 본 한국 드라마가 ‘드림 하이’인데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 많아서 정말 신나고 재밌었다. 이후 웬만한 한국 드라마는 거의 다 봤다. (한씨)
ㅡ조선중앙TV나 노동신문은 안 봤나.
“재미없어서 안 봤다. 사람들 대부분 안 본다. 거기서 하는 얘기가 죄다 거짓말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다 안다.” (정씨)
ㅡ김정은이 남한 말투 사용을 금지하는 법까지 만들었는데.
“‘안녕’(남한식 인사)도 안 되고 ‘괜찮아’도 안 된다는 거다. 남한 말투를 따라 하지 말라니 우리가 쓸 말이 없더라. 머리 염색도 안 되고 옷차림도 반바지는 안 되고 말투도 이래라저래라. 한국 오니까 그런 제약이 없어 너무 좋다.” (신씨)
“드라마 본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말이 되나. 폭동 일어나면 좋겠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다음 날 사라지니까 사람들이 무서워서 말을 못 하는거지 누군가 총대만 메준다면...” (정씨)
ㅡ북한에 있을 때 단속당한 경험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언니 휴대전화 들고 밖에 나갔다가 보안원한테 걸렸는데 언니가 친구 번호를 별명으로 저장한 게 문제가 됐다. 별명은 사용하지 말라는 거다. 집에 안 보내줘서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한씨)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드라마 보다 걸리면 (뇌물) 30~50달러면 해결됐는데 지금은 엄청 올랐다. 사람들이 반농담으로 ‘한국 드라마 보려면 옆에 만달러는 놓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한씨)
ㅡ학교 수업은 어땠나.
“학교에서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를 가르치는데 정말 쓸데없는 걸 억지로 외우게 했다. 잘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김일성·김정일 시절 옛날 일을 다 외워야 했다.” (한씨)
ㅡ김정은이 김주애를 자주 데리고 나오는데.
“다들 안 좋게 본다. 할아버지뻘 되는 군 간부가 어린애한테 무릎 꿇고 이야기하고 그게 뭔가.” (정씨)
“북한에 김주애처럼 살집 있는 애들 많지 않다. 김정은이 ‘주먹밥’ 먹는다고 해도 북한 사람들 안 믿을 거다.” (신씨)
ㅡ북이 오물풍선 날려보낸 건 어떻게 봤나.
“종이도 부족한 나라에서 먹고사느라 바쁜 사람들 불러모아 안 해도 되는 일 시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 또래도 동원됐을 것 같고.” (정씨)
ㅡ한국 와서 지내보니 어떤가.
“여기 와서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였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어차피 각자 알아서 시장에서 돈 벌고 먹고살아야 했고, 국가에서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탈북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한씨)
▲그래픽=이진영
조선일보 김민서 기자
07.16 [단독] '김정은 표창장' 받은 駐쿠바 北외교관 한국 망명
리일규 참사, 작년 11월 입국해 아내·자녀와 정착
태영호 이후 최고위직… 北외무성 대표적 '쿠바통'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의 리일규(52) 정치 담당 참사(참사관)가 지난해 11월 초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망명해 한국에 정착했다. 리 참사는 북한 외무성의 대표적 ‘쿠바통’으로, 2019년 4월부터 쿠바 주재 정치 담당 참사를 지내며 지난해까지 한국과 쿠바의 수교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2016년 귀순한 태영호 당시 주영국 북한 공사 이후 한국에 온 북한 외교관 중 가장 직급이 높다. 2019년 탈북한 조성길 이탈리아 대사대리, 류현우 쿠웨이트 대사대리의 내부 직급은 1등 서기관과 참사였다.
지난 14일 본지 인터뷰에 응한 리 참사는 “북한 주민이라면 누구든 한번쯤은 한국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북한 체제에 대한 염증, 암담한 미래에 대한 비관, 이런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탈북을 고민하게 된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1999년 외무성에 입부한 리 참사는 2013년 북한 선박 ‘청천강호’가 쿠바에서 지대공 미사일과 전투기 부품을 싣고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려다가 적발됐을 때 쿠바 대사관의 3등 서기관(대외직명은 1등 서기관)으로 파나마 측과 교섭을 벌여 청천강호의 억류를 해제하고 선장과 선원들을 석방시켰다. 이 공로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표창장을 받았다. 이후 2016년부터 약 3년간 평양 외무성 본부서 중남미 담당 부국장으로 근무하며 김정은 정권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2019년 다시 쿠바 참사로 부임했다.
‘김정은 표창장’까지 받았던 엘리트 외교관인 리 참사는 “사실 북한 주민들이 한국 국민들보다 더 통일을 갈망하고 열망한다. 내 자식이 미래가 좀 더 나은 삶을 누리려면 ‘답은 통일밖에 없다’는 생각을 누구나 다 공유하고 있다”며 “오늘날 김정은 체제는 주민들 속에 남아있던 그 한 가닥의 희망마저 무참히 뺏어버렸다”고 했다. 김정은은 지난해 말 남북을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며 “(남북이) 통일될 가능성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07-16 쿠바 北외교관 망명, 김정은 체제 전방위 균열 보여준다
북한의 사회주의 혈맹국이었던 쿠바에 주재하던 북한 엘리트 외교관이 망명, 한국에 정착한 것은 북한 체제의 민낯을 새삼 드러내 준다. 리일규(52)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참사는 지난해 11월 부인 및 자녀와 함께 한국으로 왔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2016년 망명) 이후 가장 직급이 높은 탈북자다. 리 참사는 2013년 무기 선적 북한 선박 청천강호의 파나마 억류사건을 해결해 김정은 표창장을 받고 2018년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의 평양 방문도 총괄한 대표적 쿠바통이다.
리 참사는 16일 보도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며 뭔가 좀 나은 삶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망명 동기를 밝혔다. “북한 주민들은 한국 국민보다 더 통일을 갈망하는데 김정은은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반통일 정책을 쓰고 있다”고도 했다. 북한 권력층의 심각한 부패, 북한 젊은 세대의 한국에 대한 동경 등도 생생하게 증언했다. 근년에 리 참사 외에도 40∼50대 신세대 북한 외교관 등 10여 명이 한국에 온 것으로 알려졌다.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엘리트층의 탈북은 김정은 체제의 전방위 균열이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김정일 시기엔 개성공단 등으로 통일에 대한 꿈이라도 있었는데 김정은은 한국을 적으로 규정하는 바람에 절망감이 커졌다는 것이다.
지난 14일은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 동포는 한 명도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면서 탈북자 지원 확대를 약속했다. 국내 거주 탈북자는 3만 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지원은 당연한 헌법적 의무다. 저출생 등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들의 조기 정착은 더욱 중요하다. 북한에 더 많은 정보를 들여보내야 하고 중국 정부의 강제 북송을 막을 외교 노력도 강화해야 할 때다.
문화일보 사설
07.17 자식 위한 北 주민들 통일 열망, 짓밟아도 못 꺾는다

▲리일규 전 주쿠바 북한 참사가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지호 기자
리일규 전 주쿠바 북한 참사가 본지 인터뷰에서 “북한 주민들은 한국 국민보다 더 통일을 열망한다”고 말했다. 작년 11월 일가족과 함께 한국에 귀순한 리 전 참사는 “북한이 못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북 간부든 일반 주민이든 ‘내 자식은 나보다 나은 삶이 돼야 한다. 답은 통일밖에 없다’는 생각을 누구나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 자신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자녀들까지 북한 체제에서 비참하게 사는 것을 바라는 부모는 없다는 것이다. 리 전 참사뿐이 아니다. 태영호 전 의원을 비롯한 엘리트 탈북자들의 망명 동기가 대부분 자식과 관련돼 있다고 한다.
‘못산다’는 건 경제적 빈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생 계속되는 세뇌 통제와 광범위하고 무자비한 인권 탄압까지를 말한다. 리 전 참사는 공개 처형당한 한성렬 외무성 부상을 예로 들었다. 끔찍한 총살 현장을 강제로 봐야 했던 간부들이 며칠간 밥을 못 먹었다고 한다. 북 주민은 노예와 가축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고, 고위 간부들도 언제 기관총 세례를 받을지 모른다. 이런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싫은 건 인간의 본능이다. 악몽을 끝낼 방법은 탈북 또는 통일뿐이다.
오랜 기간 북 주민들은 북한 밖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북 정권이 극도의 감시·통제·억압으로 귀와 입을 막았다. ‘한국’이란 나라가 ‘남조선’인 것도 몰랐다. 이젠 다르다. 접경지대에서만 은밀히 유통되던 외부 소식이 휴대전화와 장마당을 통해 북 전역에 퍼진다. 한류 콘텐츠가 휩쓸며 주민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동경이 생겨났다. 북한이 한국 문화를 불법화하고 ‘척추를 꺾어 죽인다’며 극단적 처벌법을 연달아 만든 이유다. 하지만 리 전 참사는 “아무리 강한 통제와 처벌에도 한류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김정은이 한류를 막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통일 불가’를 선언한 것이다. 리 전 참사도 “주민들의 통일 갈망을 차단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북은 남북을 잇는 도로·철도를 폐쇄하고 그 자리에 지뢰를 깔고 있다.
휴전선 일대엔 장벽을 만들고 압록강, 두만강엔 전기 철조망을 두른다. 평양 역 이름에서 ‘통일’을 지우고 국가 가사에서 ‘삼천리’를 없앴다. 그러나 견고하던 베를린 장벽도 결국 무너졌다. 김정은의 어떤 탄압도 주민들의 마음속 통일 소망까지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7.23 '북한 인권'에 진심인 유지태… "불의 키우는 건 무관심" 영어 연설
유씨, 지난달 홍보대사 위촉
6분 동안 진심 담아 영어로 연설
北인권에 대한 국내외 관심 환기 기대

▲통일부 북한인권홍보대사인 영화배우 유지태씨가 22일 민주주의진흥재단(NED)가 주최한 '2024 국제대화'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NED
“여러분들에게 촉구합니다. 가장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주세요. 우리의 행동이 그들의 나라(북한)에 의해 무시돼 온 북한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상처를 치유하기를 희망합니다.”
영화배우 유지태(48)씨가 22일 미국 워싱턴DC에서 통일부와 미국민주주의진흥재단(NED)이 공동 주최한 ‘2024 북한인권국제대화’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유씨는 지난달 북한인권홍보대사로 위촉됐고, 김영호 통일부 장관의 이번 미국 방문에 동행했다. 그는 “불의를 키우는 건 불의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이라며 “이 세상에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있다면 눈을 감지 말고 몸을 돌리고 행동하자”고 했다. 유씨는 지난달 홍보대사에 위촉된 자리에서 “한국 사람이라면 북한 인권에 대해 한 번 쯤은 생각해봐야 한다”며 “인권 문제를 적극 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노력할 것”이라 했었다.
이날 행사에는 김 장관, 줄리 터너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데이먼 윌슨 NED 회장 등 한국과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두루 참석했다. 김 장관은 개회사에서 “한국에 정착한 3만4000여 명의 탈북민들은 북한 인권 침해 실태를 생생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며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북한의 군사 도발을 억제하고 북한 인권 문제도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 유씨가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무대 위에 올라 약 6분 동안 영어로 축사를 했다. 왼손에 태블릿PC를 들고 준비한 원고를 또박 또박 읽어나가면서도 배우답게 손짓과 눈 맞춤을 적절히 활용해가며 본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유씨는 탈북 여성이 중국에서 겪는 시련과 강제 북송(北送) 같은 현실을 다룬 웹툰 ‘안까이’를 만화가 제피가루와 연재하며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안까이는 아내를 뜻하는 함경도 방언이다. 유씨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자연스럽게 세계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인 북한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며 “북한에 대한 관심, 유대감은 저를 탈북민들의 삶에 대해 구체적인 고민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했다. 웹툰은 유씨가 탈북자들을 직접 만나 취재했을 정도로 공을 들였고, 초기 콘셉트부터 최종 대본까지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는 지난 2월 본지 인터뷰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사회적 문제에 대한 책임감이 커졌다”며 “우리가 알아야하는 가장 큰 인권 문제가 재중(在中) 탈북자 문제라 생각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어머니와 단칸방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았던 개인사와도 연관이 있다”며 “가난한 환경에 있거나, 마음의 빈곤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를 동요시킨다. 탈북자뿐 아니라 재일 교포, 난민 문제 등에 관심이 있는데 그중 탈북자가 먼저 이야기로 나온 것”이라고도 했다.
유씨는 “심각한 인권침해를 피해 북한을 탈북한 여성들은 탈북 과정에서 더 가혹한 인권 침해를 당하고 오랜 기간 굶주림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며 “남은 평생을 가족들과 헤어지게 된다”고 했다. 이어 “북한 인권 문제는 그것이 북한에 관한 것이란 이유 때문에 특정한 색깔로 칠해지는 경우가 있다”며 “우리가 얘기하려는 것은 북한 내부의 사람들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북한 주민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포착하고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했다.
이는 북한 주민의 보편적 인권 개선을 유도하자는 북한 인권 문제가 보수·진보를 가르는 정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한국은 이 문제의 핵심 당사국이지만 북한인권법이 미국보다 12년, 일본보다 10년 늦은 2016년 국회를 통과했다. 북한 인권 실태를 조사하고 남북 인권대화, 인도적 지원 등 연구·정책을 개발하는 북한인권재단은 여야가 이사 선임을 놓고 대립하면서 8년째 출범하지 못하고 있다.
유씨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자신을 종종 발견한다”며 “불의를 키우는 것은 불의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들의 무관심이다. 이 세상에 부정의가 있다면 그곳으로 몸을 돌려서 행동하고, 여러분들이 어두운 곳으로 손을 뻗기를 촉구한다”고 했다. 6분 남짓한 짧은 연설이었지만 유씨가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큰 박수가 쏟아졌다. 유씨는 23일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주최 행사에도 참석해 북한 인권에 관한 연설을 할 예정이다. 대북 인권 활동가들은 유씨의 존재가 북한 인권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을 환기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란 기대가 큰 상황이다.
조선일보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07.24 "무관심이 불의 키워" 美서 북한 인권 외친 배우

▲통일부 북한인권홍보대사인 배우 유지태 씨가 2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통일부와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NED) 등 공동 주최로 열린 '2024 북한인권국제대화'에서 영어로 연설하고 있다. /미국민주주의진흥재단
영화배우 유지태씨가 22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2024 북한인권 국제대회’에서 영어로 6분간 연설했다. 통일부와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NED)이 공동 주최한 이 행사에 유씨는 정부의 북한 인권 홍보대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불의를 키우는 건 불의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이다. 우리의 행동이 북한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상처를 치유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유씨는 “북한 인권 문제는 북한에 관한 것이란 이유 때문에 특정한 색깔로 칠해지는 경우가 있다”며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북한 내부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전 세계 진보·좌파들의 주요 관심사인 북한 인권 문제가 북한 인권의 당사국인 한국에서만 일부 세력에 의해 공격받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유씨의 북한 인권 운동은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이뤄졌다. 그는 10여 년에 걸쳐 탈북민들을 만나 그들을 주제로 한 웹툰의 시나리오를 직접 집필했다. 그는 몇 년 전에는 국내외 불우 어린이들을 10년 이상 후원한 공을 인정받아 국제구호개발 NGO가 주는 ‘제1회 대한민국 착한 기부자상’을 받기도 했다. 기부 활동이 북한 인권 운동으로 확장된 것이다. 평소 기부 활동을 많이 했던 영화배우 차인표씨도 2012년 탈북자 북송 반대 집회와 콘서트를 개최했고, 많은 동료 예술인의 참여를 이끌었다.
국내에서 북한 인권은 무관심을 넘어 정치적으로 왜곡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국회는 2016년 북한 인권 침해 실태 조사와 북한인권재단 설립 등을 위해 북한인권법을 통과시켰지만, 아직도 재단은 출범하지 못했다. 20대 총선 이래 제1당의 위치를 점유한 민주당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일부 인사들은 탈북민을 “변절자” “쓰레기”로 부르며 매도하기도 한다. 민주당 등은 북한 인권을 말하면 북한 정권을 자극해 북한 주민에게 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북한 주민의 참상은 이미 그런 논리로 눈감을 수준을 넘어섰다. 북한 정권의 인권 유린 목적은 단 하나 김정은 권력 유지다.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김정은과 그의 폭압을 돕는 불의일 뿐이다. 민주당도 이제는 낡은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선일보 사설
07-25 “문재인, 北에 철저히 속았다… 마지막엔 별 수모 다 받아”[영상]

‘귀순’ 리일규 前 北참사 인터뷰
“잇단 쓰레기 풍선 수치심 느껴”
지난해 11월 가족과 함께 귀순한 리일규(52·사진) 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가 문재인 정부 시절 발생한 ‘탈북선원 강제북송 사건’(2019년)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북한에 철저히 속아 별 수모를 다 받았다”고 평가했다. 최근 북한이 10차례 살포한 ‘쓰레기(오물) 풍선’에 대해선 “북한 출신으로서 유일하게 수치심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리 전 참사는 24일 문화일보에서 진행된 단독 인터뷰에서 탈북선원 강제북송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라며 “한국에 온 이상 대한민국 국민인 그들이 안 가겠다고 몸부림치는데 (북으로) 밀어 보내는 장면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는 “북에서 온 사람들은 누구나 아픔 하나쯤은 갖고 있는데 상처에다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보와 보수를 떠나 모든 (남측) 대통령의 업적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그들은 북한에 의해 철저히 속았다. 마지막에 별 수모를 다 받지 않았느냐”고 지적했다. 북측이 문 전 대통령의 2019년 8·15 경축사를 두고 “삶은 소 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비방한 것을 일컫는 것인지 묻자, 그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할 소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리 전 참사는 북한의 오물 풍선 살포에 대해선 “(북한 간부들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신임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선 안 되는 일을 가리지 않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xgVSAWsc4
권승현 기자 ktop@munhwa.com
08-08 [속보]軍 “북한 주민 1명 강화도 앞 교동도로 수영 귀순”…신원식 “관계기관 조사중”
軍 "오늘 아침 귀순…북 주민 수영·도보 귀순"
북한 주민 1명이 8일 아침 한강하구 남북 중립수역을 넘어 남쪽으로 귀순한 것으로 확인됐다.
복수의 군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주민 1명이 이날 남북 중립수역을 헤엄처 넘어와 강화도 앞 교동도에 도착한 뒤 우리 측에 귀순 의사를 밝혔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자리에서 북한 주민 귀순 관련 질문에 "관련기관에서 조사 중"이라고 답변했다.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08-09 北접경지 주민, 강 썰물 때 걸어서 귀순… “북 경비 허술”
태영호 “북한서 사격 한 발 없어
방벽공사 피로 쌓여 경계 느슨”
북한 주민 1명이 8일 새벽 한강 하구 중립수역을 도보로 통과해 귀순하면서 북한의 접경지역 경계가 느슨해진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북한이 지난 4월부터 접경지대에서 진행해온 방벽 건설과 최근 신의주 수해 복구에 군 병력이 대거 투입되면서 경계 태세가 약화한 데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제기된다.
태영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은 9일 SBS 라디오에 출연해 “그 지대(중립수역)는 걸어서 올 수 있어서 남북 간 접경지역에서 제일 귀순하기 쉽다”며 “그만큼 북한에서 경계 인력도 강하고, 지뢰도 촘촘히 매설된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이) 넘어가는 걸 알지도 못했고, 총도 한 방 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시간에 나와 있던 북한군들이 너무 피곤해서 자고 있었다는 것”이라며 “(북한군이) 최근 수해 피해(에 투입되고), 휴전선을 따라 방벽 공사도 하고 하다 보니까 그 지역의 경계가 지금 대단히 허술해졌다는 걸 방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군은 지난 4월쯤부터 군사분계선 부근에 대전차 장애물과 비슷한 방벽을 세우고 있으며, 지난달 말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난 홍수 피해 복구 현장에도 대거 투입되고 있다.
앞서 전날 북한 주민 1명이 북한과 최단거리 기준으로 2.5㎞ 떨어진 인천 강화군 교동도 북측 한강 하구 중립수역을 통해 귀순했다. 중립수역은 별도의 군사분계선이 없으며, 유엔군사령부가 관할하는 완충 구역이다.
권승현 기자 ktop@munhwa.com
08.09 이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 참사의 놀라운 증언
북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 종종 있다. 지난해 11월 탈북한 이일규(사진)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참사의 최근 언론 인터뷰가 그런 사례다. 북한의 어려운 경제 사정은 말할 것도 없고 김정은의 통일 정책 폐기 선언이 얼마나 큰 원망을 일으켰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특히 놀라웠다.
먼저 이 참사는 김정은을 일곱 차례 대면해 그의 건강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김정은은 늘 가쁜 숨소리를 내고 술에 취한 듯 항상 붉은 얼굴이었다고 회상했다. 최근 한국 국가정보원은 김정은의 몸무게가 140㎏으로 초고도 비만이라고 분석했다.더 주목할 점은 이 참사가 밝힌 열 한 살 딸 김주애 관련 내용이다. 전문가들은 계속해서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김주애가 후계자 수업을 받는 것 아닌지 추측해 왔다. 그러나 이 참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저 딸에 푹 빠진 아빠로 김주애를 “공주님”으로 부른다고 한다.
고도비만 김정은, 건강 좋지 않아
경제난에도 딸만 챙긴다는 인식
트럼프와 북핵 협상 내심 기대해

만약 김주애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이 맞는다면 그래도 김정은이 북한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고 ‘김씨 왕조’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단순히 ‘딸 바보’여서 김주애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라면 그의 행동은 사실 정상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는 북한 고위급 간부들이 보기에도 김정은이 북한의 심각한 상황보다 그저 자기 가족만 챙기는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모습이 겹쳐진다. 니콜라이 2세는 연전연패한 러시아 군대 상황은 안중에도 없이 애견을 더 아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참사가 밝힌 북한의 대외 전략도 주목한다. 필자는 이전 칼럼에서 러시아가 북한의 무기 공급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 북·러 관계는 곧 힘을 잃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의 지원도 끊기고 북한은 심각한 경제 상황 극복을 위한 대안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참사의 인터뷰를 보면 김정은도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참사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북한은 중국의 원조 확대를 고려하지 않아 보인다. 그 대신 북한이 원하는 것은 북·미 관계 정상화이고, 이것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7월 북한은 미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상관없다는 입장을 냈다. 그러나 이 참사는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승리를 반길 것으로 봤다. 그 이유는 김정은이 트럼프와의 기존 친분을 기반으로 핵 협상이 가능할 거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정은이 트럼프와의 관계를 이용해 뭔가 협상 타결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또 다른 북·미 정상회담을 꿈꾸고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트럼프 입장에서 3차 북·미 정상회담을 과연 원할 것이냐다. 더는 새로울 것도 없고 트럼프가 원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한 요소가 없다. 설령 정상회담이 열려도 김정은이 원하는 대로 핵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게다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오는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면 북한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해리스가 정상회담을 제안할 까닭도 없겠지만, 제안해도 성차별이 심한 북한 정서상 김정은이 과연 흑인 여성 대통령과 나란히 앉는 정상회담에 나설지 의문이다.
이 참사는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정권과 김정은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은 없다”고 증언했다. 이런 현상은 갑자기 늘어난 탈북자 수와 맞물린다. 지난해 북한 고위 당국자의 탈북 사례가 20여 건이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국정원은 부인하지 않았다.
북한 정권이 대한민국의 문화 확산에 대한 단속과 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심지어 남한 말이나 표현 사용도 금지하고 있지만, 단속이 잘 먹히지 않는다고 이 참사는 말했다.
이제 북한 주민은 두 개의 언어를 쓰게 됐다. 믿을 수 있는 지인이나 가족과는 한국말을, 신고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는 평양말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북한 주민은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즉 두 개의 삶을 갖게 된 셈이다. 한국말 사용을 불법화해서 이제 북한 주민은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때는 한국말 억양과 표현을 쓰게 될 것이다. 한국말이 ‘저항의 언어’가 된 것이다. 이는 과연 북한 정권이 원하는 결과일까.

중앙일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08-23 북한 신세대 향한 ‘문명戰’ 전개할 때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북한의 문은 그렇게 견고하지 않았다. 지난 20일 북한군 하사 1명이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귀순해 왔다. 또, 지난 8일에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한 주민 1명이 자유 대한의 품을 찾아왔다. 북한 군인의 귀순이 공개된 건 2019년 7월 이후 5년 만이다. 이렇듯 북한이탈주민이 상반기에만 100명이 넘는다. 특히, 동해선 지역은 북한이 올 초부터 가로등과 철도 레일을 제거하고 탈북을 막기 위해 지뢰를 집중적으로 매설하는 곳이다. 앞서 방벽 설치와 지뢰 매설에 동원된 수백 명의 북한 군인이 임시 텐트에 기거하면서 교대 인원도 없이 수개월째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북한 측 비무장지대(DMZ) 안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 일명 민사행정경찰로 불리는 민경부대와 특별히 허가받은 공병만이 지뢰 매설을 위해 드나들 수 있다. 그러나 올해 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개 국가론 선언 이후 북측 DMZ 안에서는 무질서한 방벽 공사와 지뢰 매설 등 ‘뉴 국경’을 만드느라 군인들의 등골이 빠진다. 마침 이즈음 한국에서는 북한의 오물풍선에 대응해 대북 확성기 방송의 포문을 열었다.
이번에 넘어온 탈북 하사는 그야말로 장마당세대다. 최소한 20대 중반을 향해 다가가는 북한의 MZ세대일 것이다. 이런 군인들은 군복을 입기 전에는 후방에서 그럭저럭 부모의 장마당 장사로 그렇게 굶주리지 않았을 것이다. 막연하게 군복을 입으면 대우가 좋아질 것이란 기대는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었다. 서부전선 2군단의 북한 군인들은 철도 연결로 어느 정도 보급이 이뤄지지만, 동부전선의 1군단과 중부전선의 5군단은 예외다. 무조건 자력갱생이니 굶기를 밥 먹듯이 한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으로의 탈출은 생사를 건 전쟁이다. 이번에 귀순한 군인은 다른 탈출병을 잡으러 간다고 해서 모두를 속였다고 한다.
그에 앞서 지난 7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진행된 제1회 탈북민의 날 행사에서 “대한민국을 찾는 북한 동포 단 한 분도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새로운 통일 독트린을 발표했다. 6년 만에 재개된 대북 확성기 방송은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군인들에게 ‘희망의 등대’이다. 북한의 신세대들은 한국이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을 다 아는 북한 속의 한국인들이다. 대북 확성기 방송은 그것을 재인식시키는 강력한 매체다. 굶주린 나머지 항상 현실 도피와 탈출을 꿈꾸는 북한 군인들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일규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참사의 탈북 소식 등은 대북 확성기 방송으로 전선의 북한 군인들에게 38도 폭염 속 소낙비처럼 전파됐다. 자유 선진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북한 주민들의 남심(南心)은 이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 됐다. 이제 우리는 심리전이란 표현을 쓸 필요 없이 문명을 전하는 ‘문명전(戰)’이란 문구로 바꿀 때가 됐다. 남쪽의 범람하는 문명을 북한 군인들과 주민들에게 전하는 일은 이 시대의 사명이며, 자유통일의 뉴 독트린이다. 우리는 북한 주민들을 향해 “어서 오시라”고 더욱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그것은 자유·민주·인권 통일의 유일한 지름길이다. 더 많은 북한 동포가 자유를 찾아올 때 자유통일의 아침도 찬란하게 밝아올 것이다.

문화일보
08-25 “한국 와서 낙하산만 200번 넘게 타”…탈북민 최초 특전사된 김대현씨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있는 김대현 씨. 그에게 하늘은 뗄 수 없는 인생이 됐다.
“북한에서 온 탈북민인데요, 군 면제를 해제해 주시면 안 될까요? 군대에 꼭 가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 김대현(가명)은 구글에서 찾아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이같이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건 우리 관할이 아닌데….”
그가 전화를 건 곳은 병무청이었다. 병무청 담당자는 “국방부로 전화하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김 씨는 다시 구글을 통해 찾아낸 전화번호로 국방부를 찾았다.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과정에서, 김 씨는 탈북민도 군에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군에 갈 수만 있다면 이왕이면 멋진 곳에 가보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 구글을 뒤적이던 그의 눈에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가 눈에 띄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씨는 특전사라는 부대가 존재하는 사실조차 몰랐다.
김 씨의 군 입대 결심에는 탈북청소년들이 다니는 한겨레중고등학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가 영향을 미쳤다. 설문 가운데 ‘북한이탈주민도 군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항목이었다.
김 씨는 “무조건 가야 한다”를 찍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질문엔 “대한민국 정부에서 우리를 위한 마음으로 면제를 해주긴 하지만, 군에 가고 싶어도 못 가게 하는 것이야 말로 차별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려면 국민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적었다.
답을 쓰면서 김 씨는 반드시 군대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학교 선생님들도 “너는 군인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응원해주었다.
특전사를 목표로 김 씨는 군 입대 준비를 시작했다. 2015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전문대 군사학과를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솔직히 그때는 특전사는 관련 학과를 졸업해야 가는 줄 알았습니다. 한 학기를 다니고 나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바로 특전사에 진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년 동안 군사 기본지식을 배운 그는 특전사 시험에 응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주변의 탈북민들은 “국방부에서 형식적으로는 된다고 말했겠지만, 실제로는 탈북민이 특수부대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라고 위로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시험을 못 쳐서 그런 겁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특전사 시험은 1년에 다섯 번 치러진다. 나름대로 준비해 두 번째 시험에 도전했지만 또다시 낙방의 쓴 맛을 봤다.
두 번째 떨어졌을 때는 실망스러웠다. “정말 대한민국 사회가 아직도 탈북민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일까”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래도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는 심정으로 세번 째 시험을 치렀다. 이번엔 필기평가를 통과했고, 체력평가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마지막 관문인 면접도 무난하게 치렀다. 결국 그는 최종 합격을 했다.
● 특전사 대원의 삶
“다들 눈 감아”
어두운 밤 김 씨는 입대 동기들과 함께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지옥 훈련을 받던 날이었다. 힘든 훈련을 끝낸 뒤 눈을 감는다는 건 훈련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에게 조용히 나가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부끄러워 나가기를 꺼리는 훈련병을 배려한 조치다.
김 씨가 처음 입대할 때만 해도 동기는 200명이었다. 그런데 일주일간의 첫 지옥훈련을 끝냈을 때엔 이미 70~80명이 줄어들었다. 그중에는 태권도, 유도 등 육체적인 고통에 익숙했을 운동선수 출신이 많았다.
눈 감는 시간이 계속되면서 몸과 마음이 지친 김 씨도 살짝 흔들렸다. 그런데 살포시 뜬 눈에 자기보다 체력적으로 한참 약하다고 생각했던 동기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쟤도 견디는데 내가 왜 못 견뎌.”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우리 아들이 특전사에 갔다”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시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집에 다시 가면 무슨 망신이람. 오늘은 절대 나가지 않을거야.”
김 씨는 그런 식으로 지옥훈련 기간을 버텨냈다.
그리고 2주 훈련 뒤 낙하교육이 진행됐다. 그는 고소공포증을 몰랐는데, 막상 비행기 문이 열린 뒤 뛰어낼 시간이 다가오자 덜컥 겁이 났다.
“뛸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이 말을 되뇌이던 순간 비행기 문밖으로 몸뚱이가 튕겨져나갔다. 등뒤에 있던 동기들에 떠밀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인생 처음으로 하늘을 날았다.
낙하교육 중에도 하차하는 훈련생이 속출했다. 끝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짐을 싸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역시 훈련기간 4번 차례 공수교육에서 낙하훈련을 받았지만, 뛰어내릴 때마다 무서운 감정에 떨어야만 했다.
2017년 10월 입대한 김 씨는 이듬해 4월 정식으로 임관한다. 6개월 동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 환경에서 입학생의 절반이 탈락했지만 김 씨는 끝까지 버텨냈다. 탈북민으로서 직업군인이 된 최초의 사례였다.
그가 처음 받은 보직은 화력주특기. 보안을 중요하게 여기는 군대의 특성상 그의 군 생활을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는 빠르게 적응했다. 벌벌 떨어야했던 낙하훈련도 점차 익숙해졌고, 5㎞ 수영훈련도 무사히 통과했다.
최종 고비는 행군이었다. 다른 보직에 비해 화력주특기가 들고 다녀야할 장비의 무게는 훨씬 무겁다.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걸어댜 하는 천리행군 자체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힘들다. 하지만 군장 40㎏에 각종 무기까지 휴대하고 50㎞ 를 강행군해야 하는 훈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다.
만약 환자라도 발생하면 그의 짐까지 나누어 메고 가야만 한다. 김 씨는 군 복무기간 중 자신의 짐을 전우에게 넘긴 적이 없다. 그렇게 2022년 8월 김 씨는 4년 6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
장기복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군 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걸고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다름 아닌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이다.
맨 처음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만 해도 다리가 떨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특전사 생활을 하면서 거듭 낙하훈련을 받다보니 어느새 하늘을 나는 일이 너무 행복했다.

▲특전사 시절의 김 씨가 해상침투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
● 사라진 엄마와의 만남
“하늘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가 탈북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잔디에서 공을 차고 싶어서였습니다. 북한에서 가질 수 있는 꿈의 최고치였죠. 그런데 한국에 와서 하늘을 날다니, 참 멋있지 않습니까.”
김 씨는 1995년 북한 함경북도의 국경마을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가 사라졌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은 없었다. 어머니가 사라진 뒤 그는 8살까지 고모의 손에서 자랐고, 이후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다시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고생은 모르고 컸다.
계모가 장사 수완이 좋아 돈을 잘 벌어왔고, 김 씨를 친아들처럼 아껴줬다. 용돈도 넉넉히 받아 썼다.걱정 없이 살 줄 알았던 김 씨에게 열다섯되던 해에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다. 학교에서 나오는 그에게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다가온 것이다.“네가 대현이구나. 난 너 외삼촌이야.”친엄마와 외가를 까맣게 잊고 살던 그에게 다소 혼란스러운 조우였다.
외삼촌은 용돈을 두둑이 쥐어준 뒤 “집에 나랑 만났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사라졌다.집에 가서 외삼촌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끝내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그가 어릴 때부터 고모들은 그의 친엄마를 나쁜 사람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다. 누가 와서 같이 가자고 하면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는 말도 수시로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그가 엄마와 연락이 돼 사라지는 일을 경계한 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외삼촌을 만났다고 하면 집안이 난리가 날 것이 뻔해보였다.외삼촌은 이후에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런 만남이 몇 차례 이어졌을 때 삼촌이 그에게 넌즈시 물었다.“엄마 목소리 한 번 들어보고 싶지 않니. 엄마는 너를 너무 보고 싶어 해.”머리를 끄덕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핏줄의 힘이 아니었을까. 기억조차 희미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왜 나를 버리고 갔는지도 알고 싶었다.
“대현이니?”삼촌이 쥐어준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그의 기억에는 없는 것이었다.
“네”그의 대답에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우는 소리를 들으니 그 역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났다.어머니의 아버지는 남쪽이 고향인 의용군 출신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외가는 일찍 연고가 있는 남쪽으로 탈북해 정착했다. 어머니도 어느 날 몰래 가족을 따라 한국으로 떠났다. 남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외독자인 대현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어머니는 이후 남쪽에 정착해 재혼까지 했다. 하지만 북에 두고 온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삼촌을 통해 “우리 대현이가 이젠 내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됐으니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 “잔디밭에서 공을 차고 싶어”
처음이 어려웠지 이후 어머니와의 통화 횟수는 점점 잦아졌다.
운동을 좋아했던 김 씨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거기 가면 잔디에서 공을 찰 수 있어요?”
TV에서 가끔 틀어주는 외국 축구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파란 잔디 위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김 씨는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그가 사는 환경에선 잔디에서 공을 찬다는 것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럼. 여기는 잔디 구장이 너무 많아. 어딜 가든 잔디에서 공을 차지.”
그 말에 어머니가 계신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차마 집을 떠날 생각은 못했다. 아버지와 자신에게 너무 잘해주는 계모를 두고 사라질 순 없었다. 갈등의 시간은 오래 이어졌다.
한국으로 떠날 결심은 다소 충동적으로 정해졌다. 17살 때인 2012년 겨울 그는 운동장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계속 쏟아지는 눈으로, 일주일 내내 계속이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면 파란 잔디 위에서 축구를 하고 있을 것인데, 여기서 욕을 먹어가며 흙바닥 눈이나 치고 있다니.”
순간 짜증이 밀려왔고, 평생 이렇게 살기 싫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그는 눈삽을 팽개치고 외삼촌에게 달려갔다.
“나 엄마한테 갈래.”
그의 결심이 서자 어머니는 부랴부랴 탈북 브로커를 연결해줬다.
탈북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브로커가 있는 곳까진 기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도중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기차에서 휴대전화에 저장된 한국 음악을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열차 안전원이 조용히 다가와 그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서 들은 것이었다. 한국 음악을 확인한 안전원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를 깨워 조사실로 데려갔다.
휴대전화에 꽃은 SD카드 안에는 한국 음악은 물론 한국 영화도 가득했다. 여기서 잡히면 탈북이 물 건너가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이 고비를 넘어야 했다.
“안전원 동지.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손전화는 안전원 동지가 가지십시오.”
무섭게 꾸중하던 안전원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북한에서 휴대전화 가격은 한 가족이 몇 달을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
안전원은 조서를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넣더니 “네가 어리니 한번만 봐 준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봐야 자리도 없으니 조사실에 편히 앉아가라고 자기 자리까지 양보하는 선심을 썼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한 그는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해 브로커를 만났다. 그런데 일주일이 되도록 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브로커는 밤마다 그를 두만강 인근의 외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 메콩강에 뛰어들다
2012년 12월 29일 새벽 3시. 김 씨는 그날도 브로커를 따라 나와 벌벌 떨며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또다시 실패였다.
“추우니 집에 가자”
실망한 브로커는 그렇게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가 중간쯤 갑자기 두만강으로 뛰어 내려갔다.
“중국에 가면 신호가 잡힐거야.”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던 김 씨도 브로커를 따라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중국에 위치한 맞은편 산에 올랐다. 브로커의 예상대로 그곳에선 전화가 연결됐다. 마침내 엄마와 통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벽 3시에 아들이 탈북해 중국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즉시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통화 후 김 씨는 산 속에 들어앉아 그를 데려갈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두 시간 남짓 기다리는 동안 김 씨의 머릿속은 고민으로 가득 찼다. 막상 중국에 오니 집을 몰래 떠나온 일이 후회스럽고, 다시 북으로 건너가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저 안 갈래요. 집에 다시 가야 할 것 같아요”
김 씨가 불쑥 말을 꺼내자 브로커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화를 냈다.
“이젠 되돌릴 수 없어. 너 강을 건너다 경비대에 체포되면 감옥에 가야 해. 엄마랑 전화했다는 것을 알면 가만두겠니.”
맘을 다잡은 김 씨는 결국 차를 타고 연길로 들어온 뒤 브로커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24시간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아, 내가 좋은 곳으로 왔구나.”
시장에 나가 돌아다니는데 한국 영화에서만 보던 억양을 쓰는 부부가 앞을 지나갔다. 그 말을 더 듣고 싶어 한 시간 남짓 이들 부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뒤 연길을 떠났다. 탈북 브로커가 모집한, 중국에서 결혼해 살던 탈북여성들이 일행이었다.
이후 그의 여정한 신기한 경험으로 기억된다. 북한에서 떠날 땐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던 때였지만, 며칠에 한 번씩 계절이 바뀌었다. 마침내 쿤밍에 도착했을 때 계절은 더운 여름이었다. 운동을 즐겼던 그에게 험준한 산을 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라오스 국경에서 메콩강을 건널 때 콩깍지처럼 생긴 배를 타면서 경험한 일은 두고두고 기억날 일이다.
배를 타자마자 브로커가 겁을 주었다.
“생리 중인 사람 손을 드시오. 이 강에 악어들이 득실득실하는데, 예전에 악어들이 피 냄새를 맡고 쫓아와 여자를 물어간 적도 있어요.”
그의 말에 일행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기우뚱거리는 배에 몸을 맡긴 채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런데 내릴 때 사고가 생겼다. 뒤에 앉은 모녀가 급히 내리려다 배가 뒤집힌 것이다.
순간 김 씨는 달려들 악어떼가 떠올랐다.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물속으로 뛰어들어 모녀를 끌어올렸다. 지금 되돌이켜 봐도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이었다.
● 인천공항에서 만난 엄마
북한을 벗어난 지 3주 만에 태국에 도착했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탈북민들이 구류돼 있는 감옥에서 다시 두 달을 더 지냈다. 그리고 2013년 3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 타본 비행기는 너무 신기했다. 인천공항엔 새벽에 내렸다.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출입구로 나오는데 갑자기 앞에 그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보였다.
새벽에 어머니가 마중 나온 것이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대현이니”
어머니는 그를 안고 다시 엉엉 울었다. 인솔자는 그 모습을 보고 차마 재촉할 수 없었던지 5분의 시간을 주었다.
이미 외가 쪽이 다 한국에 와 있어 조사는 많이 받지 않았다. 조사기관과 하나원을 거쳐 한국에 나온 시기는 2013년 8월이었다.
어머니가 살고 있는 청주로 갔다. 청주에 가니 새 아버지와 남동생이 있었다. 저녁에 온 가족이 식당에 모였다. 처음 보는 외할아버지는 물론, 각지에 정착했던 이모들도 다 왔다.
정착 선물이라며 어머니가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처음 봤다. 너무 신기해 식사 내내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새로운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새 아버지도 잘 대해주었다. 인근에 있는 학교에 가니 잔디밭이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그는 축구부에 들어갔다. 잔디에서 원 없이 뛰니 너무 행복했다.
그의 억양에 신기해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북한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나이에 온 그가 학업을 따라가긴 쉽지 않았다.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탈북청소년 교육에 특화된 경기도 안성의 한겨레중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앞날과 만났다. 일반학교를 다녔더라면 “북한이탈주민도 군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는 설문조사를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 인생 목표는 나라를 위한 삶
특전사 복무를 통해 김 씨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주었다. 어디서든 생존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채널A에서 ‘강철부대’가 방영될 때 출연자 중엔 그와 함께 대관령을 행군하던 동기도 있었고, 같은 부대 선후배도 있었다.
“시즌2에서 특전사가 우승했잖아요. 잘 해낼 수 있었다고 믿었어요. 우리가 받은 훈련과 그걸 견디며 키운 정신력이라면 못해낼 일이 없었으니까요.”
요즘 김 씨는 스카이빙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스카이다이빙 교관이 되는 것이다. 이미 200회 넘는 낙하를 했지만, 아직도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 뛰어내리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10대의 김 씨는 파란 잔디에 끌렸고, 20대의 김 씨는 파란 하늘에 빠져들었다.
30대의 그는 어떤 모습일까.
“스카이다이빙도 이것이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된다면 매력적이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저는 나라를 위한, 사명감이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제일 먼저 앞장서 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저의 인생 목표입니다. 그러다보니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지 이 선택이 국가와 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것 같습니다.”
그의 또 다른 취미는 그림이다. 그의 그림 솜씨는 전문가 뺨을 칠 정도로 훌륭하다.
그는 요즘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삶의 무대를 한국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계로 넓혀나가려면 영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해병대나 공군 등에서 군복무를 마친 탈북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군 복무는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탈북민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가장 빠르게 녹아들고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청춘과 땀을 바쳤는데 누가 탈북민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겠습니까. ”
“앞으로도 저와 같은 탈북민 출신 국군 하사관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한국에는 3만4000여명의 탈북민이 왔지만, 아직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 장교와 경찰이 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한 장벽을 넘었듯이, 다음의 장벽도 누군가가 용기 있게 넘어서주길 바랍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09.03 영화 '탈주' 실제 주인공 "나처럼 DMZ 넘는 북한 병사 계속 나온다"
정하늘씨 인터뷰

▲영화 ‘탈주’의 실제 주인공인 정하늘씨가 1일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앞으로도 나처럼 자유를 찾아 DMZ를 넘어오는 북한 병사들은 계속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인원 기자
“비무장지대(DMZ)는 감시 경계가 한 번도 삼엄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앞으로도 나처럼 자유를 찾아 DMZ를 넘어오는 북한 병사들은 계속 있을 겁니다.”
2012년 휴전선 철책을 넘어 탈북한 정하늘(30)씨는 1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사무실에서 가진 본지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죽을 각오를 하기까지가 힘들지 하고 나면 무서울 게 없어진다”고 했다.
정씨는 북한 병사의 탈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탈주’의 실제 주인공이다. 지난 7월 개봉한 ‘탈주’에서 배우 이제훈이 연기한 북한 병사 ‘규남’은 최전방 군부대에서 10년 만기 제대를 앞두고 목숨을 걸고 철책 너머 탈주를 감행한다. 영화와 달리 정씨는 군 복무 1년 5개월쯤 된 2012년 8월 DMZ 철책을 넘었다.
정씨는 1994년 함흥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 이후 군에 입대했다. 그가 18세가 된 2012년은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이 집권한 첫해였다. 정씨는 “조국 통일을 약속했던 김정일은 죽어 버리고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믿을 건 통일밖에 없었는데 실망이 너무 커서 김정일 사망 이후부터 남한에서 날려보낸 대북전 단을 주워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대북 전단은 18세 젊은 병사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전단엔 김정은 체제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담겨있었다. 정씨의 탈북을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인 내용은 전단 마지막 장에 써 있던 “대한민국은 전력이 풍부하고 수림이 무성한 경제 강국”이란 짧은 문구였다. 그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 열심히 평소 관심 없던 감시 근무를 서면서 탈북을 계획했다”고 했다. 밤이면 쌍안경으로 DMZ 너머 남한 마을에서 빛나는 불빛을 쳐다봤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탈북 시뮬레이션’을 했던 정씨는 태풍이 불어닥친 2012년 8월 어느 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DMZ에는 전기 철조망과 가시 철조망 등 3중으로 철책이 설치돼있는데 강력한 태풍으로 이 철책들이 모두 파괴됐다. 정씨는 “때마침 그날 같이 근무를 서던 선임은 낮잠을 잔다며 사라졌다. 하늘이 준 기회였다.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정씨는 수류탄 2발을 양쪽 주머니에 나눠 넣고 AK소총과 탄약 90발을 챙겨 DMZ 철책으로 향했다. 수류탄은 북한군 추적조에 붙잡힐 경우에 대비한 ‘자폭용’이었다.
철책은 무사히 넘었으나 예상치 못한 장애물과 만났다. 정씨는 “북측 경비 구역에서 DMZ 지역을 내려다봤을 때와 달리 실제로 가보니 내 키를 훌쩍 넘는 2m의 갈대밭과 가시덩굴이 있었다”며 “하나하나 헤치고 나오느라 온몸이 가시에 찔려 피가 흘렀고 군복은 다 찢어졌다”고 했다. 약 2km 구간의 DMZ를 넘는 데 걸린 시간은 18시간. 정씨는 “그 18시간 동안의 일은 지금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된다”며 “DMZ 갈대밭에서의 첫날 밤 북한군이 내 이름을 부르고 AK총탄 12발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갈대밭 옆 강물에 총탄이 떨어졌다”고 했다. DMZ를 넘는 동안에만 몸무게 2kg이 빠졌다고 한다. 탈북 직후 43kg였던 그는 현재 67kg이다.
올해로 남한 정착 12년째인 그는 “남한에 온 이후에도 힘든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목숨 걸고 넘어왔던 날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온 뒤 6년 동안 공부해 2018년 대학에 입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2020년 2월부터는 본인과 마찬가지로 2016년 DMZ 철책을 넘어 탈북한 김강유씨와 함께 북한군 실상을 알리는 유튜브 채널 ‘북시탈’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군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알리고자 시작한 일이었다. 정씨의 유튜브 방송을 본 영화 ‘탈주’의 제작사 관계자가 연락해 자문을 구하고 단역 출연을 제의하면서 그는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올해 1월엔 그가 제작·감독을 맡은 단편영화 ‘두 병사’도 개봉했다. 북한군의 인권 실태를 담은 영화다.

▲북한 병사의 탈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탈주’의 한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정씨는 “어느 사회든 차별이 없을 수는 없지만 탈북민을 향한 편견과 차별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북한 주민까지 책임져야 하냐, 통일은 손해 아니냐는 식의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개선됐으면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김민서 기자
09.06 도둑질, 뇌물에 강제노동까지… 북한군 실상 아시나요
2010년 탈북… 北상사 출신 엄영남
북한군 실태 담은 영문 책 출간

▲지난 1일 오후 서울 마포구 FSI 사무실에서 북한 건설 부대 출신 탈북민 엄영남씨가 북한군 사진을 컴퓨터 모니터에 띄우고는 굶주림과 노역에 시달렸던 군 생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북한 건설 부대 출신으로 지난 2010년 탈북한 엄영남(44)씨는 자신이 9년쯤 몸담았던 북한군에 대해 “한마디로 ‘모순 덩어리’”라고 했다. 서울 마포구에서 지난 1일 오후 만난 엄씨는 “내가 상사로 만기 제대할 시점인 2010년만 해도 군인 월급은 일반 담배 10개비 가격 정도인 220원이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군인들에게 도둑질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했다. 임씨는 “북한 정권은 ‘김씨 왕조의 지휘를 받는 북한군이 세계 최강’이라며 군인들을 세뇌하지만, 군인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주민들의 재산이나 군수 물자를 훔쳐 장마당에 내다 파는 게 일상”이라며 “당국은 ‘군민일치(軍民一致)’를 외치지만, 정작 북한 주민들은 ‘군인은 인민의 적’이라고 비판한다”고 했다.
엄씨는 오는 9일 통일부 산하 비영리 단체 ‘프리덤 스피커즈 인터내셔널(Freedom Speakers International·FSI)’과 함께 ‘최강의 북한 군인(Strongest Soldier of North Korea)’을 발간한다. 겉으로는 핵무기를 위시한 강군으로 보이는 북한군이지만, 그 내부는 부조리와 부패가 만연한 상황을 비꼬아서 지은 것이다.
2001년 군 입대를 한 엄씨는 2005년 평안남도 증산에 있는 501 건설여단 부업장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그는 그해 여름 분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분대원들이 모두 영양실조에 걸렸다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엄씨는 “분대장이 제대 후 노동당에 가입하기 위해 하루에 병사 1명에게 배분되는 쌀 600g 중 400g을 매일 빼돌려 상부에 뇌물로 바친 탓”이라며 “분대원 대부분이 한 끼에 쌀 70g쯤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2005년 9월쯤 평양에 있는 부대로 옮겨 수도(首都) 내 인프라 건설을 했다는 엄씨는 김씨 일가의 공사비 절약 명령으로 군인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1989년 평양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 이후 평양 외곽에 있는 순안공항은 사용자가 줄어 애물단지가 됐는데, 공항을 드나드는 길목인 입체교를 2008년쯤 김정일의 명령으로 해체하는 작업을 했다”며 “당시 철거 비용을 줄이기 위해 폭약을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큰 망치로 교량을 부수는 식으로 해체했는데, 해체 도중 건설 자재에 20명이 깔려 3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당시 폭약 비용을 아끼고, 교량에 썼던 철근은 평양에 아파트를 짓는 데 재활용하라고 했다고 한다.
엄씨는 북한군 내부에 각종 부조리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엄씨는 “장교들이 ‘이번엔 명절 선물 없냐?’는 식으로 물으며 뇌물을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엄씨가 복무했던 건설 부대 병사들은 부대 내 시멘트나 철근을 뒤로 빼돌려 생활비를 마련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탈북한 모친과 남동생을 따라 제대 후 3개월 만인 2010년 11월에 탈북한 엄씨가 영어로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다른 탈북자의 연설 덕분이었다. 한 여성 탈북자가 자신의 힘겨웠던 탈북 스토리를 영어로 유튜브에 올렸는데, 전 세계 사람들이 이에 반응하며 댓글을 달았던 것이다. 영어를 유독 싫어했었던 엄씨였지만 이때부터 전 세계에 북한군의 참혹한 실태를 알리려 영어를 익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씨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총 잘 쏘고 격술도 잘하며 인민들을 성의껏 도와주는 군인을 상상하며 입대했는데, 북한군 생활은 굶주림과 노역에 시달리는 교화소(교도소)였다”며 “북한의 ‘선군 정치’는 말뿐이었다”고 북한군을 기억했다.
엄씨의 책은 영어로만 먼저 출간될 예정이다. 엄씨는 “북한군의 실상을 넓은 세계에 알리고 싶어 일부러 영어로 책을 내기로 했다”며 “발간일도 의도적으로 9일로 맞춘 것”이라고 했다. 오는 9일은 북한 정권 수립일이다.
조선일보 김병권 기자
09.07 탈북 청년 엘리트 출신 박충권 의원
“김정은, 북한 내부 통제하기에도 벅찬 상황”
⊙ “김주애의 잦은 등장, 후계 작업이라기보다 김정은의 폭군 이미지 완화 위한 쇼”
⊙ “신형 무기 공개는 북한식 ‘국뽕’ 고취 수단”
⊙ “김정은, 한국을 동족이 아니라 최대 주적으로 만들어서, 북한 주민의 마음속에 한국에 대한 선망 제거하려는 것”
⊙ ICBM 만드는 김정은국방종합대 출신… 외부 세계의 북한 비판 반박하는 김정일 논문 보고 ‘우익 자유주의자’ 돼

▲누군가 말했다. ‘세상을 바꿀 만한 거대한 사건은 1면 톱이 아니라 사회 면 귀퉁이에 처음 실린다’라고. 그래서 만났다. 탈북민 출신 박충권(38) 의원이다.
지난 7월 29일 더불어민주당 최민희 의원의 발언이 큰 파장을 불렀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인 최 의원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인사청문회에서 국민의힘 박충권 의원에게 “전체주의 국가에서 생활하시다 보니 민주주의적 원칙이 안 보이는가”라고 말했다. 박 의원이 MBC를 민주당의 ‘홍위병(紅衛兵)’으로, 민주당 주도 청문회를 ‘인민재판’으로 표현하자 이에 대응한다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한 것이다. 선을 넘은 언사였다.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공격”

▲최민희 국회 과방위원장. 사진=조선DB
―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엔 몰랐어요. 그 발언을 직접 듣지 못했거든요. 제가 지금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방위는 과학 기술과 방송 통신을 다루는데, 방송이라는 이슈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과학 기술, ICT 통신과 관련한 이슈 같은 민생 현안들은 다루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이진숙 방통위원장 후보자의 청문회가 열렸죠. 장관급 후보자 청문회가 3일간 진행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제가 보기엔 편파적이고 공정하지 않은 진행, 후보자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들이 난무했죠. 그래서 회의 진행 방식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논쟁하고 다투는 과정에서 최민희 위원장의 발언이 나온 거예요.”
박충권 의원은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논쟁하느라 발언 당시엔 그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사안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약간 이상한 말을 듣기는 했어요.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하지 않아서 보좌진에게 ‘속기록을 한 번 확인해달라’라고 얘기하고 다시 회의에 참석했죠. 확인해봤더니 그 말이 맞는 겁니다.”
― 화가 나던가요?
“네. 그 순간 분노가 굉장히 많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말은 제 신상에 대한 공격이며 명예훼손이고, 또 저뿐만 아니라 3만4000여 명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니까요. 그 회의가 2시간 넘게 진행이 됐는데 회의 내내 애써 감정을 진정시켜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근데 그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더라고요.”
― 회의 진행 중에 밖에서는 벌써 이 발언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도하 언론이 실시간으로 다 보도했으니까요.
“감정이 제어가 안 된 상태에서 제가 대응하게 되면 국회 상임위 정상 운영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꾹 참았습니다. 사실은 많이 노력하긴 했는데 잘 안 참아졌어요. 그래서 신상 발언을 통해 항의하려고 준비했죠. 페이스북에 글도 올리고요.”
― 그런데 최민희 위원장이 사과했습니다.
“여론이 안 좋아지니까 갑자기 사과하더군요.”
― 어쨌건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최 위원장이 사과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사과를 딱 해버리니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 사과를 받아야 하는가? 제 신상 문제로 상임위가 파행된다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제 개인적으로는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날도 언급한 것처럼, 3만4000여 명의 북한 이탈 주민이 느낄 감정과 그들이 입은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최민희 위원장의 발언은 다른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야당 중진의원이 ‘북한은 전체주의 국가’라고 아주 확실하게 입장 표명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죠. 그 발언 그대로, 최민희 위원장께서 하신 그 워딩 그대로라고 한다면 최 위원장은 북한이라는 체제를 ‘전체주의 국가다’라고 아주 확실하게 인정하신 거죠.”
그렇다면 야당도 북 주민을 해방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류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굶어 죽는 것 봤다”
박충권 의원은 함흥 태생으로, 2009년에 한국에 왔다. 북한에서는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이라는, ICBM을 개발하는 대학을 졸업했고 대한민국에 와서는 서울대에서 석사, 박사, 박사 연구원으로 8년 정도 학업에 올인했다. 졸업 후 현대제철에서 7년 정도 연구원으로 일하다 이번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했다. 북한에서는 영재고등학교인 제1고등학교를 나올 만큼 토대도 좋았다. 북에서는 고위직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무엇이 그를 탈북의 길로 이끌었을까?
“1995년도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죠. 주변에서 학급 동기들 그리고 동네 친구들이 굶어 죽는 걸 봤습니다. 엊그제까지 같이 뛰어놀던 친구가 영양실조에 걸려서 죽어갔어요. 가끔은 밥 굶는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 부모님 몰래 밥을 먹여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누군가가 사라지면 ‘죽었다’라는 소문이 들렸고, 숱한 친구들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도 굶어 죽은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죠.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는 학교 출석률이 30%도 안 됐어요. 들판에 나와서 풀을 뜯어 먹는 어린애들도 꽤 있었습니다. 선생님들도 굶어서 출근을 못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방종합대학
국방종합대학은 규율이 엄했다. 병영의 군인이나 다름없었다. 교내에서 강의실, 컴퓨터실을 갈 때도 개인 개별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밥 먹으러 갈 때도 줄 맞춰서 행진해야 했다. 기합이 심했고, 일주일에 한 번꼴로 거품 물고 쓰러지는 친구들이 꼭 있었다.
“군사 강국으로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 기관 가운데 하나가 국방대학교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학생들은 다들 굉장한 자부심과 충성심을 가지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구나’라고 제 기존의 세계관이 뒤집히는 계기가 있었어요. 충성했던 만큼 어마어마한 증오와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졸업할 때 완전히 깨달았고, 의심은 3학년 때부터 했습니다. 학생 간부를 맡았을 무렵, 북한 체제가 돌아가는 원리, 그 체제가 어떻게 북한 주민들을 통제하고 조직을 관리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 북한은 대학생도 군사 편제처럼 관리하죠?
“네. 제가 관리하던 중대 인원이 80명이었습니다. 그 80명과 24시간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는데, 이 학생들에 대해서 보위부 담당자가 저보다 더 많이 아는 겁니다. 내밀한 사생활까지 모조리요. 저에 대해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잘 아는 거예요. 등골이 오싹했죠. 그래서 그 사람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척지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요.”
― 보위부가 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친해진 다음에 물어봤죠. 그랬더니 끄나풀, 스파이가 있다고 알려주더군요. 그게 누구인지는 말 안 해주고요. 계속 물어보니까 나중에 얘기해주는데 일반 학생 중에 8명 정도가 스파이였습니다.”
순진하고 착해서 전혀 스파이일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친구도 밀고자 중 하나였다. 10명이 넘는 학생 간부는 다 보위부와 협조하고 있었다.
“저보고 누구는 어떠냐고 묻기에 ‘사상도 좋고 조직 생활도 열심히 하는 친구’라고 대답했더니 바로 그러는 겁니다. ‘너 잘못 알고 있다. 이 친구가 어떤 어떤 장소에서 어느 날 이러저러한 얘기한 것을 알고 있는가?’ 소름 돋았죠.”
김정일 논문 읽고 북 체제 모순 직시하게 돼

▲김정일의 논문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그래서 김정일이 썼다는 논문 두 편을 읽었다.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와 〈사회주의에 대한 해방은 허용될 수 없다〉.
“이 논문의 요지가 뭐냐? 외부 세계에서 사회주의 시스템을 분석해 사회주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사회 제도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 점을 하나하나 김정일이 조목조목 반박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머리로는 김정일의 반박이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오히려 외부 세계에서 말하는 것이 맞는 겁니다. 예를 들어 외부 세계에서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다’, 최민희 위원장이 얘기한 것처럼 전체주의라고 비판하고 사회주의는 병영식 주민 통제, 강제력이 큰 행정명령으로 나라를 운영한다고 했는데 제 경험에 비춰보면 다 맞는 얘기였어요.”
의심이 커지니 스스로 사상 통제가 어려웠다. 논문 속의 사회주의 비판자들은 국가를 운영하려면 다당제가 맞고 일당제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니 조선노동당의 무능함이 여실히 보였습니다. 그럼 누가 견제할 거냐? 견제할 다른 정당이 없잖아요. 근데 다당제는 서로 견제하니까 국민 지지를 얻기 위해 더 좋은 정책을 내놓을 거 아닙니까?”
자본주의 경제는 잘못됐다고 배웠지만 청년 박충권이 보기에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가 더 문제였다.
“제가 보기에 시장 경제가 맞더라고요. 국가가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합니까? 제가 내일 아침 뭐 먹고 싶은지 뭘 입고 싶은지 어떻게 알죠? 그걸 어떻게든 알아낸다고 해도, 제때 제시간에 물건을 생산하고 배급하는 일이 가능한가요? 깊게 생각해봐도, 단순 논리로 봐도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에 공부했던 경영학도 이런 확신에 배경지식을 제공했다.
“어떤 제조업 회사를 하나 만든다고 하면, 제가 배운 교과서에는 관리직이 15%를 넘어가면 안 된다고 나옵니다.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이죠. 근데 북한은 거의 80% 이상이 관리직이에요. 그리고 생산직은 다 시장에 나가 있어요. 장마당에 나가서 돈 버느라고요. 그럼 이건 망한 사회죠.”
그때부터 의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의심이 생기면 의문이 풀릴 때까지 파고드는 기질도 사상적 각성에 일조했다.
“대학교 졸업할 때 저는 우익 자유주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그 반대로 가기는 참 어렵잖아요? 내가 속한 체제나 진영에 어떤 잘못이 발생했다고 해서 이걸 버리고 전향(轉向)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래서 세운 논리가 있다. ‘사회가 아무리 썩어도 김씨 일가만은 잘못되지 않을 거다. 김씨 일가를 바로 밑에서 보좌하는 조선노동당 중앙당도 건재할 거다. 부패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나중에 북한 사회는 제일 위에서부터 속속들이 다 부패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북에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대학교 졸업할 때 조선노동당 중앙당에서 저희 학교 졸업생들을 배치하죠. 근데 실력과 성적, 인성이 아니라 뇌물 액수에 따라 직장을 정해주더군요. 평양에 배치해주겠다며 3000달러를 달라더군요. 심지어 그 돈도 간부들하고 연결된 애첩(愛妾)에게 주면 된다는 거예요. 조선노동당 중앙당이 썩었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때 확인한 거죠. 젊은 혈기와 정의감에 불타던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힌 겁니다.”
한국 드라마 통해 외부 세계 발견
탈북민들과 얘기해보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북한 사회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 ‘이 사회에서 벗어나야겠다’라고 결심하기까지는 또 다른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인데 절대선(絶對善)이고 정의라고 믿었던 세상이 악(惡)이라는 걸 확인했잖아요. 그러니까 꿈과 희망이 다 사라진 겁니다. 그 증오와 분노, 배신감 때문에 정말 김씨 일가를 테러하고 싶은 그런 마음까지도 들었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고…”
자존감이 떨어졌다. 스스로가 한 톨 모래알 같은 무기력한 존재라고 느꼈다. 한 달 정도 좌절감에 빠져 살다 논리(論理)를 세워 빠져나왔다.
“젊은 청년에겐 꿈과 희망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북한은 지구상에서 유일한 선과 정의의 국가가 자기들이라고 선전하죠. 그 외에는 다 악이라고 가르쳐요. 근데 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악인 걸 확인했잖아요. 공학도적인 로직(논리)에서 그렇다면 이 바깥에는 정의와 선(善)을 지닌 국가 또한 있지 않을까,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바깥세상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나가야 한다, 나가면 뭔가 알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 드라마도 찾아서 보고, 외부 세계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세상일까 그런 것부터 일단 확인했죠. 닥치는 대로 정보를 수집해 연구하듯 영상물을 봤어요. 제가 딱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한국과 미국, 일본의 드라마였습니다. 북한이 제일 증오하는 국가니까 이건 무조건 봐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북한 정권이 코너에 몰려 있다는 방증”

▲박충권 의원에게 한국 사정을 알게 해준 SBS 시트콤 〈형사〉.
― 기억나는 드라마가 있습니까.
“〈형사〉(2003~2004년)라는 SBS 시트콤을 기억합니다. 시청률이 얼마 안 나온 드라마인데, 그걸 보고 ‘야,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꼈습니까.
“그냥 전부 다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자유롭고, 대화도 전혀 거리낌 없고… 북한 사람들은 무슨 말 한마디 할 때도 조심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는 거예요.”
케이팝 노래도 300곡 정도 찾아서 들었다. 가사에 영어가 섞여 있는 것이 충격이었다. 북한 노래는 하나같이 체제 찬양 일변도인데 남쪽 노래는 엄청나게 세련된 데다 노래 안에 인생이, 삶이 담겨 있었다.
“사소한 것 같지만, 북 주민을 변화시키는 데는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나 케이팝이나 이런 것들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 보위부 아닐까요? 단속하고 통제하는 부서니까 자료가 제일 많겠죠.
“맞습니다. 보위부에서 한류(韓流)를 제일 많이 봅니다.”
7월 10일 TV조선은 정부 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 ‘(대북) 풍선에서 USB를 주워 드라마를 보다 적발된 중학생 30여 명이 지난주 공개 총살된 것으로 파악됐다’라고 보도했다.
“정말 반인륜적인 체제이고, 상식과 통념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걸 증명한 사례입니다. 김씨 일가가 북한 주민들을 얼마나 사람 취급하지 않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줬죠. 그들에게 북한 주민은 노예이자 짐승일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정도로 잔인한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을 만큼 북한 정권이 코너에 몰려 있다는 방증도 됩니다.”
“북한 주민 의식 변화 중심에 K–콘텐츠 있어”
김정은은 작년 12월 말 열린 당 전원회의에서 ‘대남(對南) 노선의 근본적인 전환’을 천명했다. 그는 “남한의 대결 책동으로 북남 관계가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고착됐다”고 했다.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남반부를 평정하려는 군대의 보조 역량으로 대남 사업 부문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대남 무력(武力) 통일 노선을 노골화한 것이다. 이 발언 역시 코너에 몰렸기에 나온 것일까?
“저는 북한 내부 사정이 좋지 않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것이 공격적인 발언이 나온 원인이라 생각하죠. 김정은도 다 알아요. 북한 주민들의 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변했고, 반인륜적인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주민들을 통제하기가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내부 위기의식을 끌어올리느라고 강성 발언을 하는 것이라 봅니다. 한국을 동족이 아니라 최대 주적(主敵)으로 만들어서, 북한 주민의 마음속에서 한국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제거하려는 것이 목적일 겁니다.”
― 엄청난 폭력을 동원해야 북한 주민의 대남 동경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다는 뜻이군요. 북한 주민이 왜 이렇게 바뀐 겁니까.
“이 의식 변화의 중심에 K-콘텐츠가 있습니다.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오빠 금지법’이라고 하죠. 역대 유례가 없는 3대 악법(반동사상문화배격법, 평양문화어보존법, 청년교양보장법)을 만들었잖아요? 이 법들에 따라, 한류를 접하거나 소지하거나 심지어는 남쪽 말을 쓰면 10년 노동교화형부터 총살에 이르기까지 엄벌이 가능합니다. 한류가 얼마나 퍼졌으면 그리고 얼마나 두려우면 이렇게까지 나오겠습니까?”
“적화통일 야망까지 포기한 것 아니다”
― 일각에서는 김정은의 이런 선언을 두고 ‘남조선 해방, 적화통일을 목표로 인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정권 정통성의 근거로 삼아온 스스로의 존립 근거를 무너뜨린 것이다, 북한 정권은 이제 끝장났다’고 주장합니다.
“북한 정권이 위태롭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부분에는 깊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적화통일 야망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죠.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의 공산주의화, 나아가 전 세계의 공산주의화였습니다. 북은 이 목표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다만, 이 과대망상에 불과한 최종 목표를 주장하고 밀고 나가기에는 현재 북한의 상황이 너무 위태롭고 보잘것없습니다. 이미 의식이 크게 변화했고, 특히 한국을 동경하는 북한 주민에게 이러한 목표를 내세우는 것은 역효과를 발생시킬 겁니다. 확실해요.”
박 의원의 말처럼, 필자 역시 김정은의 호전성(好戰性)을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김씨 일가는 남조선 혁명 방식의 적화통일을 포기한 것이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맞습니다. 하지만 북은 적화통일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요. 만약에 북한 체제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그때는 적화통일을 하나의 옵션으로 고려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박충권 의원은 북한 정권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한국의 선진 문화, 앞선 경제, 국제적 위상 등이라고 단언했다. 그 자신이 탈세뇌(脫洗腦)한 경로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탈북을 결심한 뒤 1년 8개월을 준비했고, 두만강을 넘어선 지 사흘 만에 인천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왔다.
“4월 10일이 제가 두만강을 건넌 날이에요. 그리고 4월 13일이 제가 인천항에 들어온 날입니다. 공교롭게도 4월 10일이 이번에 총선일이었죠. 초심을 잃지 않는 데는 이만한 우연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두만강을 건널 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
“새로운 땅으로 간다는 희망도 있었지만 굉장히 허무했고 슬펐습니다. 내가 이뤄놓은 모든 걸 다 버리고,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었으니까요. 심지어는 제 목숨도요.”
이제 태어난 고향은 없구나, 미래도 너무 불투명하고, 과연 살아서 한국에 도착할 수는 있을지… 이런 막막한 심정이었는데 정신적 투지에 불을 댕긴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족 브로커가 저를 굉장히 무시하는 거예요. 서러웠죠. ‘내가 중국의 조선족 브로커마저도 대놓고 무시하는, 이렇게 보잘것없는 나라에서 태어났구나.’ 그런데 그 조선족 브로커가 대한민국은 엄청 칭찬하는 겁니다. ‘너무 살기 좋은 나라’라고, ‘중국 사람들도 가서 일하고 싶어 하는 나라’라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텅 빈 마음이 채워졌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내 조국은 대한민국이다. 내 동족의 나라다. 또 다른 나의 조국이다. 무조건 살아서 내 눈으로 한번 그 땅을 확인해봐야겠다. 죽더라도 한번 가보고 죽자’… 이런 생각으로 넘어왔습니다.”
서울대학교
인천항에서 내려 경찰을 찾아가 북에서 왔다고 했다. 경찰은 아주 친절했다. 국정원에선 아들처럼 챙겨주시는 분을 만났다. 이 밖에도 대한민국의 제도적 혜택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하나원 안에서 대한민국 생활에 대한 설계를 어떻게 했습니까.
“사실 대한민국 생활의 설계는 미리 북한에서 다 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잖아요. 뭘 할 것인지를 구상하면서 옵션 3개를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국정원에서 일하면서 북한 체제를 뒤집는 일을 한다. 두 번째는 대학교를 간다. 새로운 세상에 가서 적응하려면 저에게는 가장 빠른 루트가 공부하는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세 번째가 군(軍)에서 일하면서 조국 통일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무청에선 면제 대상자라고 했고, 국정원에서 일하기엔 경력이 모자랐다. 그래서 《로동신문》에서 본 ‘서울대학교가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기사를 기억하고 목표로 잡았다. 남조선 최고의 대학교라는 서울대학교의 모 교수가 김정일 장군님을 찬양하는 뭔가를 했다는 식의 기사였다.
“《로동신문》에는 항상 대남 섹션이 있어요. 한국을 비방하는 난이죠. 소고기 파동, 이런 걸 비방하는 건데 그 기사를 보면서 든 생각이 있었어요. ‘저거 먹더라도 광우병은 30년 뒤에 걸린다는데, 이걸 가지고 저렇게 시위를 하나?’ 여기 사람들은 아예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북에선 상한 음식이라도 다 먹습니다. 오늘 먹고 내일 죽는다 해도 먹어요. 어차피 굶어 죽으니까. 그래서 그 기사를 읽고 ‘남북 생활 수준의 차이가 너무 크구나’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서울대에선 인턴으로 받아줬다.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고 한 달에 140만원씩 줬다. 나와서 선배들 실험 좀 도와주고 남는 시간에 공부해도 된다고 했다. 너무 좋은 일자리란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장학금 받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7년째 관악에서 머물 무렵 고맙게도 당진 현대제철에서 입사 제의를 해왔다. 알뜰하게 챙겨준 센터장님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정치엔 어떻게 입문하게 된 걸까?
“탈북민이자 MZ 세대”

▲박충권 의원은 총선을 앞둔 지난 1월 8일 국민의힘에 영입되어 국회의원이 됐다. 사진=뉴시스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다만 평소에 정치에 대한 관심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죠. 그래서 통일비전연구회, 블루프린트 코리아, 모자이크 코리아와 같은 여러 모임을 가졌습니다. ‘언젠가 북한 정권을 갈아 엎어버리겠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한국에 왔으니까, 이런 삶의 배경 때문인지 계속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겁니다. 2017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안보가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껴 《조선일보》에 칼럼도 썼어요. 그러다가 한때는 정치 현실에 너무 실망해 아예 정치 뉴스에 귀를 닫아버리고 살기도 했죠. 그러던 와중에 이번 총선에서 당의 인재 영입 제안을 받고 입문했습니다.”
비례대표 제안을 받았을 때는 좀 많이 놀랐다고 한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서다.
― 당선되었을 때 ‘어머니께 이 소식을 알릴 수 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와서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초반에는 제가 정치 신인이라 아무것도 몰라서, 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압박감, 중압감 이런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어떻게 하면 더 잘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세비가 아깝지 않다는 평가를 받을까, 이런 고민을 계속 했습니다.”
― 정치인으로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저는 탈북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 나이 또래 MZ 세대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취업난도 겪어봤고,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고, 집을 하나 장만하는 것도 간단치 않고… 이런 어려움들을 다 겪으면서 살아온 한 사람의 청년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
“고위층 탈북 꾸준히 이어질 것”
― 북한 문제는요?
“저는 북한 체제가 잘못된 걸 깨닫고 이걸 바꿔보려는 꿈을 가지고 탈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기여하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로 가는 고속도로니까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한 사람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 이공계인으로서 대한민국이 과학 기술 강국으로 도약하는 길을 닦고 싶습니다. 과학 기술이 한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결정하는 기술 주권 시대니까요.”
그는 인터뷰 내내 북한 체제의 모순과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최근 북한 엘리트들의 탈북이 이어지는 것도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북한 체제를 지탱해온 가치를 부정하게 된 데서 온 충격이 원인인 것은 혹시 아닐까?
“최근 유학생, 외교관 등, 북한 엘리트층의 탈북이 늘어나는 추세죠. 북한 체제의 핵심 가치가 국내외에서 부정당하는 건, 그리고 그걸 알고 확인한 뒤의 심경 변화의 고뇌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정말 충격이 커요. 그런데다 북한의 미래가 암담하다는 건 더 이상 비밀도 아니죠. 과거 대비 외부 정보 유입이 증가하고, 북한 체제의 본질을 깨닫는 엘리트가 증가하는 만큼 고위층 탈북은 꾸준하게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박 의원에 따르면, 중년 이상의 엘리트들은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탈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필자는 태영호 민주평통 사무처장(전 의원)도 그런 경우라고 본다. 직계가족이 남아 있어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기의 꿈을 얘기하니 북 고위층인 아버지가 ‘탈북해서 홍대에 진학하라’라고 조언했다는 탈북자도 있다.
“김주애, 후계자 단정 일러”

▲김정은의 딸 김주애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김명식 북한 해군사령관. 박충권 의원은 김주애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사진=연합뉴스
― 그럼 북한은 곧 무너지나요? 김주애의 후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붕괴 여부는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다만 김주애 문제는 탈북민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승계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후계자라 단정하기에는 이른 면이 있다고 봅니다. 북은 여전히 문화가 낙후해 있고, 가부장적(家父長的) 분위기가 강해요. 여성 지도자? 인정하기 어려울 겁니다. 또 하나, 북한은 역대로 진짜 후계자를 마지막 순간까지 오픈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김주애의 잦은 등장은 후계 구도 작업이라기보다는 민심 이반을 완화하기 위한 쇼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은의 폭군 이미지를 완화하려는 거죠.”
필자는 민심 이반을 막는 것 이외에, 김정은이 직면한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파악한다. 김일성의 항일(抗日) 투쟁 유산과 그것을 물려받은 김정일로부터 얻은 후광이 사라져 간다는 점이다. 약발이 다된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은이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 하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스스로 김씨 왕조의 새로운 정통성을 세우려는 야욕을 가지지는 않을까?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넘어서, 스스로 김씨 왕조의 중흥조(中興祖)가 되려는 욕심은 혹시 없을까? 핵무력을 증강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는 저의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김일성·김정일의 유산에 의한 약발이 다되었다고 하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주민의 세대교체가 일어났고, 김일성 시대의 향수(鄕愁)를 가진 기성세대가 급감했죠. 아래 세대에선 김정일에 대한 긍정이 약한 것이 현실입니다. 고난의 행군 때 기억이 선명하니까요. 하지만 김정은이 김씨 왕조의 중흥조를 노리기에는 북한 내부를 통제하기에도 벅찬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러는 겁니다. 내부적 혼란과 갈등이 격화할 때는, 위기 조장과 자긍심 고취로 체제를 결속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니까요.”
‘죽기 전 별의 유언’
― 구체적으로는 어떤 겁니까.
“한국과 미국을 외부의 적으로 상정하고, 지속적인 도발로 위기감과 적대감을 고조하는 거죠. 신형 무기 공개는 소위 ‘조선 민족’의 자긍심, 그러니까 북한식 ‘국뽕’을 고취하는 수단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체제 결속 효과가 커요.”
― 독재자들에겐 ‘역사에 남고자 하는 욕망’이 항상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 히틀러도 그랬고, 김정은도 그렇게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인민들에게 다른 성과를 내보일 수 없는 상황에서, 분단 80년 만에 한반도를 다시 통일한 인물로 역사에 남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유혹이 있을까요?
“누구나 꿈은 꿀 수 있죠. 하지만 종말을 걱정해야 할 김정은 입장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남북한은 GDP가 50대 1입니다. 북한은 절대로 남한을 수용할 수 없어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압도당할 테니까요. 그래서 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 겁니다. 우리가 우려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은 김정은 정권 종말의 충격입니다. 제가 이공계 출신으로서 과학적인 비유를 들겠습니다. 수명이 다한 별의 대폭발 장면을 ‘죽기 전 별의 유언’이라고 하잖아요? 별은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지만, 김정은 정권 종말은 비참할 것입니다.”
― 그래도 김정은에겐 핵이 있잖습니까.
“바로 그 점입니다. 핵을 거머쥔 김정은 정권이 종말에 접어들 때 핵 사용을 전제한 전면전 등, 이판사판의 옵션을 선택할 수 없도록 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확실한 핵 억제력만이 비극적 선택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월간조선 09월 호 글 : 장원재 (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09-08 北밀수꾼 → 월1000만 원 버는 사장님…김상진 씨의 ‘우여곡절’ 인생 이야기

▲올해 7월에 진행된 북한이탈주민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김상진 씨.
올해 43세인 김상진 씨의 삶은 ‘산전수전’이나 ‘우여곡절’이란 몇 글자로 다 담기엔 많이 모자란다. 그만큼 굴곡진 삶을 살았다.
소년 밀수꾼으로 시작해 밀수꾼을 잡는 보안원(경찰)이 됐다가 아동유괴범으로 몰려 처형장에 끌려갈 위기까지 경험했다. 이를 모면하고자 목숨을 건 탈북을 선택했고, 현재는 한국에서 월 수입 1000만 원을 올리는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그가 북한에서 소년 밀수꾼이 된 것은 15살로, 밀수꾼에게 고용된 짐꾼이 시작이었다. 2년 뒤 그는 알아주는 밀수꾼으로서 중앙에서 밀수 단속 검열단이 나올 때면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간혹 보안원들에게 잡히면 죽지 않을만큼 매를 맞았다. 크면 꼭 보안원이 되야겠다는 다짐을 그 때마다 했다.
결국 28살이 되던 해 보안서 소위가 돼 밀수꾼 단속을 할 수 있는 지위를 얻었고 33살에 대위로 승진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사촌 누나의 딸을 탈북시키는데 관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하루아침에 ‘아동유괴범’으로 몰렸다.
당시 아동유괴범은 체포 즉시 무조건 총살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 탈북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래서 지금도 무릎 보호대를 차고 꿇어앉아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한 한국 생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정식 출근시간이 오전 8시인데도 2시간 먼저 나갔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사무실 청소를 도맡다시피 했다. 그런 성실함은 통했고, 한국 정착 10년째인 2024년 월수입만 1000만 원이 넘는 사장님으로 변신했다.
북한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고, 탈북한 이후에도 끝모를 고통에 시달리면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는 김 씨. 그의 드라마와 같던 탈북과정과 남한 정착 기를 정리해본

▲울산의 한 공장 구내에서 지계차를 운전하고 있는 김상진 씨
● 15세 소년 밀수꾼
김 씨는 1981년 함경북도 회령의 유선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두만강 바로 옆에 있는 유선은 탈북민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통한다. 한국에서 동창회를 하면 유선중학교 졸업생과 선생의 절반은 볼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 씨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현지 주둔 교도여단 참모(대위)였다. 아버지는 그가 6살 때 제대했고, 가족은 양강도 보천군으로 이주했다. 군관 제대군인이라며 당국은 아버지를 보천군 농촌경영위원회 지도원으로 임명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김 씨의 가족은 평범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1994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이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김 씨와 한 살 많은 형을 먹여 살릴 책임이 심장병을 앓던 어머니 어깨에 지워졌다. 설상가상으로 그때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배급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보안서에서 근무하던 오빠들의 도움으로 도 소재지인 혜산에서 도 보안국 정치학교 이발사로 취직했다. 도 보안국 소속이라 이발사에게도 배급이 나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이 발목을 잡았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에서 6개월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김 씨는 잘 때마다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잤다. 어머니가 그의 손을 꽉 잡을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거의 정신을 잃고 숨을 쉬지 못했다.
체육을 잘하던 형이 도 체육단 축구 양성조에 뽑히면서 하루 800g의 배급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세 식구가 살기 어려웠다. 먹성이 한창이었을 형은 죽만 먹고 축구를 했다.
어린 김 씨는 학교도 가지 않고 산에 올랐다. 나무뿌리를 캐 장마당에 팔았다. 그렇게 해도 세식구가 먹고 살기는 빠듯했다.
이때 등짐에 나무뿌리를 메고 다니던 그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밀수꾼의 짐을 중국에 날라다만 주면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나이 15살 때였다.

▲보안서 소속 경비분대장 시절이던 2003년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은 김상진 씨. 22세때 모습이다.
● “보안원이 되리라”
그는 닥치는 대로 짐을 날랐다. 구리나 니켈 같은 금속부터 약초, 잣 등과 같은 식물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메고, 산을 몇 개씩 넘었다. 등에 멘 무게만큼 보상이 따랐기 때문이다.
밀수꾼은 국경경비대와 짜고 새벽을 이용해 압록강의 특정지역으로 짐을 넘겼다. 구리 1㎏을 넘기면 담배 2보루를 받았다. 수익으로 치면 본전의 두 배 정도였다.
밀수는 단속하는 자와 단속을 피하려는 자 간에 펼쳐지는 치열한 전쟁터다. 보안원들은 밀수꾼이 다닐만한 산길에 잠복하고 있다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빼앗었다. 밀수꾼들은 산을 넘나들 때마다 항상 보안원이 숨어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보안원들이 밀수꾼 잡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에도 돈벌이가 깔려 있다. 그들이 밀수꾼을 잡으면 물건을 반반으로 나누었다. 모두 뺐으면 체포해 조서로 증거를 남겨야 한다. 반면 절반만 빼앗으면 절반은 자기가 갖고, 나머지 절반은 선심 쓰듯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처음부터 물건을 뺏기보다는 겁주기 차원의 처벌을 먼저 했다. 특히 김 씨처럼 어린 학생을 만나면 무자비한 구타로 반쯤 죽여 놓고, 이후 선심을 쓰듯 물건을 챙겼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김 씨는 “크면 꼭 보안원이 돼 이 수모에서 벗어나겠다”고 이를 갈았다.
김 씨는 악착같이 일했다. 먹고 살 길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 간 열심히 밀수꾼을 따라다닌 결과 독립을 할 수 있게 됐다. 경비대 분대장을 포섭하고, 짐꾼들을 고용한 뒤 독자적인 밀수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한창 때에는 하루 밤에 TV 20대를 압록강을 통해 들여왔다. 당시 그는 ‘무사통행증’으로 불렸다. 단속 위험이 있는 곳마다 뇌물을 뿌려 매수한 덕에 체포될 일이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다만 예외도 있었다. 중앙에서 ‘비사회주의 단속 그루빠(중앙검열단)’가 나올 때다. 국경도시 혜산에는 1년에 두 번 정도 그루빠가 나왔다. 한 번 나오면 3개월에서 6개월 동안 현지에 머문다. 인민반을 훑으며 탐문하다 보면 “저 집이 밀수로 돈을 번다”고 고발하는 ‘배가 아팠던’ 사람들이 반드시 나오기 때문이다.
체포되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검열대가 뜰 때마다 김 씨는 멀리 외진 곳으로 도망쳤다. 행정력이 마비된 때라 멀리 숨으면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잡으려 다녀야 하는데, 당시로선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혜산에선 매년 본보기로 공개 총살하는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밀수꾼과 도망자의 삶을 이어가느라 김 씨는 학교 다닐 새가 없었다. 당시 중학교 6학년까지 다녀야만 졸업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의 학력은 중학교 1학년에 머물렀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뇌물을 주면 졸업증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김 씨는 밀수를 좀 더 하기 위해 졸업시기를 늦춰보기로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급을 2년 이상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미성년자일 때와는 달리 성인이 돼 밀수하다 잡히면 처벌 수위는 훨씬 높아진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군에 가야 하는 시기가 닥치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4년 여의 동안 했던 그의 사업으로 집안 형편이 나아진 것이다. 우선 단칸방 짜리 아파트를 구입해 내 집을 마련했다. 어머니 병을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에 갈 때마다 거래 상대방에게 심장병 약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구해온 약을 1년 반쯤 복용한 어머니는 눈에 띄게 병세가 좋아졌고, 졸도하는 일도 없어졌다.
병을 털고 일어난 어머니는 번듯한 일자리도 얻었다. 아들이 마련해준 돈으로 뇌물을 써서 도 보안국 정치학교 식당책임자로 취직한 것이다. 먹을 것을 주무르게 되자 더 이상 밥을 굶을 걱정은 하지 않게 됐다.
● 보안서 대위로 승진하다
북한 군사동원부(병무청)에는 ‘안전부 초모’라는 병과가 있다. 보안서에서 군에 갈 학교 졸업생을 뽑아 일반 병사로 근무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의 의무경찰과 비슷한 제도이다. 다만 북한의 안전부 초모는 권력이나 돈이 있는 집 자식 정도만이 갈 수 있는 자리라는 게 다르다.
김 씨는 안전부 초모가 되고 싶었다. 어렵사리 군사동원부 간부를 만나니 휘발유 200리터를 요구했다. 중국돈으로 600위안, 쌀로 환산하면 300㎏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이런 정도로 많은 뇌물을 준다고 해도 출신성분 심사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안전부 초모에 응모할 수도 없다. 다행히 군관의 아들이었던 김 씨는 북한에서 ‘기본군중’에 속했다.
김 씨는 군복을 입기 닷새 전까지 밀수를 위해 중국 국경을 넘었다. 마지막 밀수로 녹음기 5대와 쌀 50㎏을 마련해 집에 숨겨둔 뒤 함경북도 보안국 정치학교로 갔다. 사실 그는 양강도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밀수를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거주하던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지 못하게 하는 북한군 규정이었다. 하지만 이 마저도 뇌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정치학교에서 3개월 간의 교육을 받는 동안 어머니가 뇌물을 썼고, 그는 혜산에서 승용차로 2시간반 정도 떨어진 양강도 풍서군 보안서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2년 넘게 계호원(수감자 경비원)으로 근무했다. 형기를 받은 사람을 함흥교화소로 이송할 때 김 씨는 구리와 같은 단속 물품을 날라 돈을 벌었다. 범인 호송칸은 검열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호원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그는 군대 내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뇌물로 상납하니 보안서 경비분대장으로 승진했다. 노동당에 입당하기 위해 삼지연건설장 굴 뚫기 돌격대에 자원한 뒤 6개월 정도 지나니 당원증이 나왔다.
이어 입대 6년 만에 양강도 보안서 정치학교에 입학해 집에서 통학도 할 수 있게 됐다. 당시 학교 식당책임자는 그의 어머니였다. 이때 정치학교에선 ‘호남쌀’이라고 부르는 한국 지원 쌀을 먹었다.
2년의 군관 교육 과정을 거친 그는 2008년 졸업하고, 2009년 소위로 양강도 보안서 주민등록부 부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형님도 쌀 200㎏을 뇌물로 쓰고 같은 학교에 입학했고, 먼저 보안원이 됐다.
주민등록과는 뇌물을 받을 일이 없어 보안서 내에서 제일 힘이 없는 사람이 가는 곳으로 통한다. 과장 정도가 되면 주민등록문건을 조작해 중국에 친척이 있다고 만들어주고, 건당 3000위안 정도의 뇌물을 받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일반 부원이라면 문건 수정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이곳에서 김 씨는 대위로 승진한 2014년까지 6년 동안 ‘주민등록대장(주민문건)’을 관리했다.
● 북한 주민등록제도의 비밀
북한의 악명 높은 출신성분 제도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은 자기와 관련된 서류를 볼 수 없다. 이 문건들이 극비 서류로 분류돼 관리되고 있어서다. 이런 이유로 북한주민등록 서류를 관리해온 김 씨의 증언은 여러 모로 귀중한 정보다.
김 씨에 따르면 혜산시 보안서에는 관내 10만 여명의 주민에 대한 문건들이 보관돼 있다. 주민등록문건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5㎝, 25㎝ 크기인 100쪽 분량의 책에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8촌까지 내용이 수기로 족보처럼 기록돼 있다.
예컨대 조부 OOO은 XX에서 태어나 △△에서 살았고 토지를 얼마나 보유했으며 소는 몇 마리를 키웠는지 등에 대한 기록이 정리돼 있다. 심지어 일제 때 순사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등 별치 않은 과거 행적도 담겨 있다.
북한의 일반 가정에서 손자 대로 내려가면 할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왜 자신이 평생 농민이나 탄광 노동자로 살아야 하고, 승진도 할 수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주민등록문건에만 그 이유가 남아 있다.
문건의 첫 페이지엔 사진과 생년월일, 출신성분, 사회성분 등이 기록돼 있다. 출신성분 아래에 다시 종교인, 교화출소자 등과 같은 수십 개 세부 분류가 적혀 있다. 친척 중에 누가 훈장을 받았는지 등의 기록도 자세히 적혀 있다. 각 페이지 맨 아래엔 확인자(특정인의 경력에 대해 진술한 사람) 다섯 명과 검증을 책임진 요해지도원(보안서 주민등록지도원)까지 손도장이 6개가 찍혀 있다.
흥미로운 점은 문건엔 한국 친척의 행적까지 기록됐다는 것이다. 가령 ‘사촌형 아무개는 괴뢰군 연대장을 하다가 몇 년에 전역해 몇 년에 미국 어느 도시에 가족과 함께 이민을 갔다’는 식이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파악하고 있는지 김 씨도 놀랄 정도였다.
다만 한국 가족의 행적은 1990년 이전에만 국한돼 있고 1990년 이후의 기록은 수많은 서류에서도 보지 못했다. 1990년 이전까진 북한이 간첩을 통해 남쪽 주민등록 시스템을 자유롭게 봤지만 그 이후엔 정보망을 잃은 것이라 추정된다.
출신성분 중에 ‘미해명’이란 분류도 있다. “가족 친척 중 누가 6.25전쟁 때 폭격에 죽었다는데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식이다. 미해명은 월남자 가족보다 더 출신성분이 안 좋은 것으로 평가한다. 월남했다면 행적이라도 밝혀졌지만, 미해명은 살아서 뭘 하고 있을지 알지 못해 더 두렵다는 의미다.
6.25전쟁 때 이런 ‘미해명자’가 엄청 많이 생겼는데, 이들은 북한 체제에선 승진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체제를 위해 아무리 목숨 걸고 싸워도 시체는 남겨야 3대가 안전한 것이다.
북한에는 출신성분 외에 또 사회성분이라는 것도 있다. 사회성분은 노동자, 군인, 사무원, 농민의 4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각자 노동당, 직업동맹, 농업근로자동맹 등에 가입할 때의 직업이 사회성분으로 규정된다. 사회성분이 농민이면 평생 농민으로 살아야 한다.
출신성분이 가로의 날실이라면 사회성분은 세로의 씨실에 해당한다. 북한에서 태어나면 가로와 세로로 짜여진 출신 분류의 바둑판 위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태어날 때 바둑판 위에 정해진 자리, 즉 타고난 운명은 바꾸기 거의 불가능하다.
주민등록문건은 매년 12월에 한번씩 업데이트한다. 가령 6촌 OOO이 승진했다거나 8촌 XXX가 훈장을 받았다는 식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변동이 없으면 놔두지만, 만약 신고가 새로 들어오거나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주민등록지도원이 평북 구성으로 출장을 간다.
구성의 비밀갱도엔 주민등록문건의 원본이 보관돼 있다. 이 원본들은 하도 오래 보관돼 누렇게 변색이 돼 있다. 여기에는 토지문서나 과거 이웃들의 진술 따위도 보관돼 있다.
주민등록문건은 보안서에만 보관돼 있다. 물론 보위부에도 요시찰 인물들에 대한 문건을 따로 관리하지만, 전체 주민에 대한 문건은 없다. 보위부에서 열람이 필요할 때는 열람 의뢰서를 받아 보안서에 와서 볼 수 있다.
보위부는 어느 부서나 열람이 가능하지만, 이외 직책은 열람 자격이 제한된다. 도당 간부 인사 관련자, 노동당 5과 지도원, 군사동원부 초모지도원 등만 열람권을 갖는다. 출신성분이 좋아야 김정은 호위병이나 별장 관리사가 될 수 있고, 비행사나 잠수함 승조원도 될 수 있다.
김 씨는 문건을 관리하는 신분이지만, 정작 자기 문건을 볼 수는 없었다. 당사자가 조작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다른데 보관해두고 과장만이 볼 수가 있었다.
김 씨가 탈북할 때까지 주민등록문건은 전국적인 전산화가 되지 않았다. 중앙과 도까지는 전산 확인이 가능하지만, 시군에는 전산 시스템이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을 들고 오면 ‘속견표’라고 불리는 ‘가나다‘ 순으로 이름이 정리된 표를 먼저 보고, 해당 인물의 문건이 어디 있는지 다시 찾아야 했다.
● “누나, 남조선에 도망가요.”
혜산 보안서엔 600~700명의 보안원이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뇌물을 받기 어려운 자리가 주민등록과였다. 북한에서 뇌물을 쓰고 자기 출신성분을 조작하려는 간이 큰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치기도 어렵지만 발각되면 사형에 해당되는 중죄이다.
그래서 김 씨는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정치학교 친구들이 근무하는 단속초소를 많이 활용했다. 밀수통로인 혜산엔 전국에서 많은 밀수품들이 몰려왔다. 김 씨는 차로 물건을 나르는 사람을 소개받아 초소를 통과시키는 대가를 받은 뒤 초소 친구들과 나누었다.
때로는 한국에 간 탈북민 가족을 전화로 연결시켜주고 송금액의 10%를 받기도 했다. 단속해야 할 보안원이 송금브로커 역할도 한 것이다. 보안원 집에는 수색이 들어오지 않아 휴대전화를 보관하기가 용의했다. 다른 보안원들도 먹고 사는 방법은 다들 비슷했다.
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외삼촌이 삼지연에서 인민보안성 답사관리소 부소장으로 있었는데, 외사촌 누나인 그의 딸이 2011년 인신매매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죄명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그닥 큰 일도 아니었다. 국경 인근에서 두부장사 술장사를 하다가 중국으로 넘겨 보내달라고 사정하는 여성 3명을 도강하게 도와주고 돈을 받은 게 적발된 것이다.
북중 국경에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운이 나빠 체포되면 인신매매범이 돼 교화소로 끌려가야 한다. 외사촌 누나도 넘겨 보낸 여성 한 명이 북송된 뒤 압록강을 어떤 식으로 넘었는지 자백하는 과정에서 관여한 사실이 들통나 체포됐다.
보안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던 그는 밤에 천을 찢어 밧줄을 만든 뒤 3층에서 탈출했고, 그 길로 중국으로 도망을 갔다. 북한에서 시집간 여성은 ‘출가외인’으로 간주해 가족들의 출신성분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외사촌의 탈북은 향후 출세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칠 만한 사안이었다.
중국에 건너간 외사촌은 김 씨에게 전화를 해왔다.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치게 돼 영향을 받게 될 가족과 친척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김 씨는 안심하라는 뜻에서 “이왕 그렇게 됐으니 우리 걱정은 말고, 중국에 있다 잡혀 북에 다시 끌려오지 말고 한국에 가서 안전하게 있으라”고 말했다.
외사촌은 그의 말대로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돈도 보냈다. 외사촌의 부탁대로 그는 북에 남은 자식들에게 전달해주었다. 2014년 9월 외사촌 누나는 그에게 다른 부탁을 해왔다. 탈북 비용을 준비했으니, 자식들을 중국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김 씨는 외사촌 누나의 집으로 갔다. 그새 누나의 남편은 재혼을 했고, 아이들은 할머니 품에서 크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이들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있어야 한국에 간 며느리가 보내준 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김 씨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여자 조카를 혜산으로 데려온 뒤 압록강을 넘게 했다. 그런 식으로 16세 된 아들도 보낼 계획이었다.
● 졸지에 아동유괴범이 되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3일쯤 지났을 때 같은 보안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가 아동유괴범으로 찍혔으니 즉시 도망을 가 숨어라. 잡히면 무조건 총살이다.” 조카를 데리고 올 때 타고 다닌 오토바이를 본 누군가가 신고를 한 것이었다.
당시엔 공교롭게도 “어린이를 외국에 유괴하는 자들을 무조건 처형하라”는 김정은이 방침이 하달된 때였다. 2013년 라오스에서 탈북청소년 9명이 북한으로 강제 북송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은이 고아나 꽃제비들을 중국으로 보내지 못하게 엄명을 내린 것이다.
전화를 받은 김 씨는 그 길로 도망가 산에 숨었다. 조카를 압록강으로 넘겨 보낼 때 도와준 사람들에게도 연락해 즉시 숨으라고 했다.
체포조가 샅샅이 훑을 게 뻔해서 갈 곳도 없었다. 생각해낸 것이 산에서 화전을 일구는 집이었다. 그 집 남편은 먼저 한국으로 갔는데, 산에 남은 아내가 6살, 1살 된 두 딸을 키우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김 씨는 예전에 그 남편이 보낸 돈을 아내에게 전달해준 인연이 있었다.
그는 그곳 옥수수밭에 숨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형은 보안서 소좌 계급을 달고 혜산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동상 경비대 부대장을 하고 있었다.
형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형이 가지 말라면 자수하겠다”고 하자, 형은 “자수해도 처형될 것이 뻔하고, 그럼 내가 군복을 벗어야 하는 결말은 똑같다. 살길을 찾아 가라”고 말했다.
김 씨는 한국에 사는 화전민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당신의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면 한국으로 가는 선을 연결해줄 수 있겠냐”고 묻자, 남편은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김 씨는 즉시 계획을 짰다. 강을 넘는 날짜를 추석 연휴 기간인 9월 24일로 정했다. 명절엔 다들 술을 마셔 경계가 소홀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았다. 당일 초저녁 김 씨, 함께 도망친 사람 두 명, 화전민 가족 3명 등 모두 6명이 압록강을 넘었다. 무사히 중국에 도착해 다시 화전민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장백으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말이 수화기를 타고 날아들었다.
이들은 통화 내용대로 도로에 나뭇가지를 깔아둔 채 인근 산으로 숨었다. 마중 나올 차가 멈출 위치 표시였다. 그런데 안내자가 오기 전에 중국 변방경비대 순찰차가 먼저 나타났다. 변방대도 나뭇가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나뭇가지 앞에서 차를 세운 중국 군인들이 전짓불을 켜고 주변 수색을 시작했다. 혼비백산한 일행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김 씨는 한 살짜리 화전민 딸을 안고 냅다 달렸다.
캄캄한 암흑 속을 한동안 달리다 갑자기 몸뚱이가 허공을 나는 기분이 들었다. 높이가 7~8m나 되는 낭떠러지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아이를 감싸며 몸을 비틀었다.
그렇게 땅에 떨어졌을 때 온 몸이 부셔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떨어진 곳은 압록강과 붙은 벼랑이었다. 바닥에는 뾰족한 돌들이 깔려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 무사했다. 등이 뜨끈뜨끈했다. 하지만 아픈 걸 느낄 새 없이 다시 내달렸다.
그렇게 일행은 각자 도망을 쳐 숨었다가 중국군의 전짓불이 사라졌을 때 다시 모였다. 안내자가 온 것은 새벽 4시였다. 안가에 도착하고 나서 긴장이 풀어지니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옷을 벗으니 등에 4~5㎝ 깊이로 돌에 박힌 18곳의 상처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평생 그를 괴롭히는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한국으로 보내줄 선이 연결될 때까지 장백에 숨어있는 동안 상처난 살이 썩기 시작했다. 병원에 갈 수도 없어 항생제는 처방받지 못하고 진통제만 20알씩 먹었다. 주사기로 고름을 뽑을 땐 썩은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다.
그 몸 상태로 다시 태국을 경유해 마침내 10월 30일 한국에 도착했다. 압록강을 넘은지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더 걸렸다. 비행기에 탈 때도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남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한국에 도착해 치료를 받았지만, 적정 치료시기를 놓쳤다는 진단을 받았다. 덕분에 지금도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는 일도 불가능하다.
● 어머니와 형님의 운명
한국에 도착했을 때 어디에서 살지를 정하는 문제는 모든 탈북민의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김 씨는 이를 쉽게 해결했다. 조사관에게 “남자 일자리가 제일 많은 곳이 어딘가”라고 물었던 것. 답은 “울산”이었다.
대답대로 그는 2015년 3월 하나원을 나와 곧바로 울산에 자리를 잡았다. 빨리 돈을 벌어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형님과 어머니를 탈북시키는 일을 목표로 정했다.
울산에 도착한 날 바로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어요. 제가 여기에 온 것을 머잖아 북한도 알 수 있으니 빨리 탈북해 오세요.”
“다행이다. 그런데 네가 한국에 간 줄은 아직 여기서 모르는 것 같아. 내가 군복을 벗으면 네가 탈북한 사실이 알려졌다는 것이니 그때 떠나마.”
보안서 중좌까지 빠르게 승진했던 형은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듯 했다. 외사촌 누나의 아들도 형이 뒤늦게 한국으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뒤 형은 대낮에 불시에 들이닥친 보위부에 체포됐다. 죄명은 ‘괴뢰들과 통신 연락 및 인신매매’였다.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보안서 정복을 입은 두 아들과 함께 거리를 다닐 때는 그렇게 자랑스러웠지만, 불과 1년 사이에 둘째 아들은 아동유괴범이 돼 한국으로 갔고, 첫째 아들은 간첩으로 체포된 것이다.
형이 체포된 다음날 어머니는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고 유언을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나이는 불과 61세였다.
어려서부터 축구선수였던 형님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우 강했다. 하지만 나흘 만에 땅에 묻은 돈의 위치까지 진술했다. 그 정도로 보위부의 고문은 혹독했다. 형님은 ‘보위부 교화형 12년’을 선고받았다.
보위부 교화형은 일반 민간의 노동교화형과는 다른 형벌이다. 노동교화형은 형기를 채우면 석방이 될 수 있다. 반면 보위부 교화형은 형기가 몇 년이든 간에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 형기는 끌고 갈 때 필요한 명분일 뿐 죽을 때까지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시신도 찾을 수가 없다.
죽어도 집에 통지조차 가지 않는다. 보위부 교화형을 받은 사람들이 가는 대표적 수용소가 함북 청진에 있는 수성교화소이다.
형은 신포 어느 섬에 있는 보위부 교화소에 끌려갔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잠수함기지로 추정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이곳엔 약 100여명이 수감돼 있다고 들었다.
김 씨는 형을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써가며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하지만 보위부 교화형을 선고받고 섬에 끌려간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 김 씨는 형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거기 가면 몇 년을 견디지 못합니다. 형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김 씨는 2024년 남북하나재단 주최 정착사례 발표대회에서 조민호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최고상인 대상을 수여받았다.
● 지게차로 이룬 인생 역전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북한 가족을 구출해내기 위해서라도 김 씨는 빨리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다. 처음 취직한 곳은 자동차 콘솔박스를 만드는 곳이었다. 모두가 여성이고 남성은 그가 유일했다.
경상도 여인들의 잔소리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일을 빨리 하지 않는다고, 몸에 담배 냄새가 난다고, 심지어 북한말을 쓴다고 구박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끝내 견디지 못해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이번에 간 곳은 아파트 건설장. 먼저 직장과는 달리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였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소방 설비 배관 조공이었는데, 공구 이름부터 작업장 용어까지 전부 외래어였다. 그래서 공구 이름들을 수첩이나 핸드폰에 메모하고 틈날 때마다 외워야 했다. 일이 서툴러 구박을 받을 때마다 “북한에서 온지 얼마 안돼 그러는데 잘 부탁한다”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
용접사들이 점심식사를 할 때 그는 점심을 거르면서 용접기를 들고 연습을 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눈에 모래가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버텼다. 그렇게 1년을 버티니 조공에서 기공으로 입지가 바뀌었고 월급도 많이 올랐다. 사람들도 성실한 그의 태도에 마음을 열고 친근하게 대해주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평생의 반려도 만나게 된다. 아내도 북에서 온 탈북민이었다. 잠깐의 신혼생활이 지나고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그러다보니 평생 가족을 책임질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이후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 남북하나재단에서 학원비를 지원해준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는 중장비 학원에 등록했다. 북한에서 지게차를 구경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노력해 지게차와 포크레인 기사 자격증을 따냈다.
이후 영업용 지게차 회사에 취직은 했다. 하지만 정착은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자격증은 자격증일 뿐, 초보 실력으로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장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배차를 받아 갔지만,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쫓겨나는 일도 여러 차례였다.
회사에 눈치가 보였다. 잘리지 않기 위해선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남보다 두배 이상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이후 그는 매일 6시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정상 출근시간보다 2시간 먼저 나가 쓰레기통을 비우고 사무실을 청소했다.
노력은 인정받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회사 사장이 “왜 상진이만 매일 청소하냐. 너희들도 좀 따라 배우라”며 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사장은 공사현장에도 “탈북자인데 실수하더라도 예쁘게 봐 달라. 많이 가르쳐주라”는 말을 틈나는대로 전파했다.
이런 시간이 쌓이자 현장 반장들과 사장들도 그를 먼저 알아봐주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온 장비기사 오늘도 왔네”라며 인사도 건넸다. 지게차로 물건을 올리다 실수로 떨어지게 되면 다른 기사들은 지게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지게차에서 내려 물건을 다시 실었다. 그런 모습에 감동한 현장들에서 “내일은 북한에서 온 장비기사를 꼭 보내달라”는 주문이 쏟아졌다.
이후 점점 삶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모은 돈으로 현재 그는 지게차를 두 대나장만해 한 대는 본인이 몰고, 다른 한 대는 직원을 두고 쓴다. 개인사업자 6명과 함께 동업을 해 수입도 늘렸다. 각종 비용을 빼고 한 달 순수입만 1000만 원을 넘기는 때도 있다.
집에 돌아가면 토끼 같은 아들과 딸이 그를 맞아준다. 요즘 부부의 고민은 내년에 아이를 한 명 더 낳을지 여부다.
2024년 남북하나재단이 주최한 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 김 씨는 최고상인 대상을 받았다. 그는 무대에서 “탈북민 대표라고 항상 생각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일했다”며 “이 사회에선 열심히 일한만큼 알아보고 인정해주었다”고 10년을 회고했다.
하루하루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김 씨지만 북한을 떠올리면 늘 가슴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자유의 땅을 밟은 선각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가 먼저 와서 잘 살고 있지만, 북에 남은 사람들도 잘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통일이 되면 엄청난 건설 수요가 생길 것입니다. 내년에 저는 제 이름을 내건 지게차 회사를 만들 생각입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 최대한 사업을 확장해, 정말로 고향에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지게차들을 잔뜩 몰고 북한으로 올라가겠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09.11 "北에서 145년 일해야 받는 돈"...한국서 첫 월급 받고 운 탈북민

▲탈북민 전주영씨(왼쪽)가 한국에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튜브 '유미카'
한국에 와서 첫월급을 받고 꿈같아서 펑펑 울었다는 북한이탈주민(탈북민) 전주영씨의 경험담이 온라인상에서 화제다.
11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탈북민 전씨가 지난 2월 한 유튜브 채널에서 이야기한 내용이 공유되고 있다. 이 영상에서 전씨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월급을 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북한 함경남도의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2005년 7월에 홀로 한국에 왔다.
전씨는 한국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 본 후 안정적인 직장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한국에 들어와 배려받고 살고 있으니 사람 도와주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후 요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사회자가 ‘첫 월급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냐’고 묻자 전씨는 “지금 생각하면 또 운다. (당시) 187만 원을 받았다. 처음에는 손에 (돈이) 안 쥐어져 있으니까 안 믿겼다”고 말했다.
월급이 지급됐다는 이메일을 받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돈이기에 처음에는 의심했다고 전씨는 말했다.
전씨는 “(돈이) 통장에 있다길래 그 길로 바로 통장을 가지고 은행에 확인하러 갔다. 가서 봤는데 187만 원이 들어왔다”며 “‘이게 진짜일까’라는 생각에 돈을 다 뺐다. 그 당시에는 5만 원짜리 지폐도 없어서 만 원짜리를 봉투 서너 개에 담아서 집에 왔다”고 회상했다.
집에 돌아간 그는 받은 월급을 쫙 펴놓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전씨는 “남을 도와주고도 이렇게 돈을 받는구나. 북한에서는 이게 꿈같은 일”이라며 “북한에서는 한 달 월급이 1달러다. (당시 환율 고려했을 때) 계산해 보면 내가 145년을 벌어야 이 187만 원을 벌 수 있는 것이었다. 땅을 딱 쳤다”라고 했다.
이어 “직장에 출근해서 사람들 모였을 때 첫 월급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팀장님이 ‘월급이 적냐’고 물었다. 그래서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팀장님이 ‘열심히 하면 더 나온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직장에서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래도 ‘더 하자’라고 생각했다”며 “직원들에게 ‘여러분들이 버는 최저임금이 북한에서 145년 벌어야 쥘 수 있는 돈’이라고 말하자 웃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정아임 기자
09.11 탈북민의 남한 적응, 왜 어려운가
1990년대 초 영국에서 유학할 때, 입학 동기 중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사람은 필자 외 일본과 중국 학생 한 명씩, 셋뿐이었다. 학기가 끝나면 우리끼리 생존(?) 축하 모임을 열곤 했지만 어쨌든 잘 버텨 모두 원하던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국 대학에서 중도 탈락을 가장 많이 한 학생은 같은 언어권인 미국인이었다. 학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미국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문화 충격’이라고 했다. 그때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영국에서 한참 살다 미국을 처음 방문하고서는 두 나라의 문화 코드가 정말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국에서는 상품을 진열한 가게에 손님이 들어오면 자유롭게 둘러보도록 놔두는데, 미국에서는 직원이 ‘무엇을 도와줄까요’라며 다가왔다. “물건 살 마음이 없으면 빨리 나가세요”라는 압박처럼 느껴졌다.
남북 간 문화 코드의 차이 때문에
탈북민의 남한 적응 매우 어려워
정부의 통일 독트린 살릴 열쇠는
이들의 자립 방정식 찾는 데 있어
사회주의 체제는 문화도 바꾼다. 동유럽을 연구한 학자들(말리소스카이트·클라인, 2018)은 사회주의와 음주 문화의 관련성을 밝혔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산 기간이 길수록 술을 더 자주 마시고 폭음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가치관이 형성되는 18∼25세에 사회주의 국가에 거주했던 남자는 중년과 노년에도 폭음하는 습관이 있다. 음주가 억압적 환경으로부터의 탈출구였고, 이를 대체할 다른 오락 프로그램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뿐 아니다. 사회주의는 인적자본의 축적을 저해한다. 독일 통일 당시 서독과 동독 주민의 지능지수(IQ)를 연구한 논문에 따르면, 서독 출신 징집병의 IQ는 101인데 비해 동독 출신 징집병은 95로 꽤 큰 차이가 났다. 그러나 통일 후 동독 출신 징집병의 IQ는 해마다 0.5씩 증가했다.

▲남북하나재단이 발표한 '2023 북한이탈주민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북민의 실업률은 4.5%로 실태 조사상 일반 국민과 약 1.8%의 차이를 기록했다. 연합뉴스
탈북민의 남한 정착은 어렵다. 남북하나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탈북민의 실업률은 4.5∼9.4%로서 남한의 2.7∼4.0%보다 크게 높았다. 정부나 공공기관의 의무·우대 채용과 고용 보조금 지급 등이 없었다면 실업률은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소득의 차이도 크다. 서울대 경제학부 연구팀의 2016년 조사에 의하면, 월 가구소득이 200만원 이하인 남한 출신 주민은 전체 표본의 5%에 불과했지만, 탈북민은 70%에 달했다. “남한에 얼마나 적응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보통” 혹은 “어느 정도”라고 응답한 비중은 74%였고, “완전히”라고 응답한 경우는 18%에 그쳤다. 그것도 정착 후 10년 이상 지나면 주관적인 적응도는 오히려 하락한다.
왜 이렇게 탈북민의 남한사회 정착이 힘들까. 북한의 사회주의 및 전체주의 제도가 낳은 문화가 주민의 마음에 내재화된 것이 중요한 이유다. 필자를 포함해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심의 연구진은 탈북민의 남한 적응에 있어 문화 혹은 가치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최근 게재했다. 먼저 탈북민의 가치관을 측정하기 위해 암묵적 연상 검사(Implicit Association Test)를 시행했다. 예를 들어, 참여자에게 북한 국기를 보여주고 이를 ‘좋음’이란 단어와 연결할 때의 속도와 ‘나쁨’과 관련시킬 때의 속도를 비교했다. 만약 전자가 후자보다 빠를 경우, 이는 북한에 대한 무의식적 친밀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또 판매자 혹은 구매자의 역할을 임의로 부여한 후 모의 경매를 시행해 거기서 남긴 이윤이나 잉여를 경제성과로 간주했다. 그 결과, 무의식적으로라도 북한에 친밀함을 느끼는 탈북민일수록 경제적 성취도가 낮음을 발견했다. 이는 사회주의 제도가 성취동기를 약화하고 사고와 행동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때문으로 풀이되었다.

▲2023년 12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북한이탈주민 일자리 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채용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분단 후 70여 년이 흐른 지금 남한과 북한 주민의 문화 코드는 크게 달라졌다. 한 탈북민은 하나원 교육을 마친 날 집에 혼자 남게 됐을 때 한없이 막막했다고 한다.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는 정권이 지시하는 대로 했을 뿐,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정착 교육과 관련 정보를 제공하더라도 이를 활용할 엄두가 나지 않고 그 방법을 모르기 일쑤다. 신뢰할 수 있는 지인이 있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겠지만 어려울 때 부탁할 수 있는 남한 출신 주민은 평균 한 명이 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언어가 달라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온 외국인이 일자리를 구하기가 더 쉽다.
탈북민은 머리에 불을 이고 산다. 가슴에 물을 담고 산다. 자유 없이, 어렵게 산 간고(艱苦)의 세월이 억울하고, 두고 온 가족과 산천이 가슴에 사무친다. 억압적인 제도의 피해자인 이들의 남한 정착은 또 하나의 ‘고난의 행군’이다. 탈북민의 신속하고 성공적인 자립이 진정한 통일 준비다. 그래야 북한 주민도 통일을 염원하고 남한도 통일비용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통일 독트린의 얽힌 난제를 풀 열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정부의 정착지원 정책은 엄밀한 증거에 기반을 두지 못했다. 이제라도 탈북민의 자립 방정식을 찾는 데 정부와 학계의 힘을 모아야 한다.
중앙일보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09.24 탈북 청소년 학교가 '환영' 아닌 '기피' 대상이라니

▲지난 12일 서울 강서구의 탈북민 대안학교 여명학교 복도 벽에 "통일이 되면 학교를 세우고 싶다"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 등 학생들이 통일과 관련해 적어놓은 문구들이 보이고 있다. /장련성 기자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서울의 여명학교가 오는 27일로 개교 20주년을 맞는다. 언어·문화 문제로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 청소년들을 위해 교회 23곳이 힘을 모아 서울 봉천동 상가 건물에 처음 문을 열었던 학교다. 그간 이 학교는 우여곡절 끝에 두 번 이사했다. 지금은 작년 8월 강서구에 있는 폐교한 초등학교 자리로 임시 이전한 상태다. 그런데 이 자리에 다른 기관이 들어올 예정이어서 2026년 2월이면 학교를 비워줘야 한다고 한다. 학교 측은 “어디로 옮겨야 할지 막막하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학교가 이전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일부 지역 주민 반대 때문이다. 이 학교는 2019년 운동장이 있는 학교 건물을 지으려 했지만 해당 부지에 혐오 현수막이 걸리고 구청에 ‘이전 반대’ 민원이 빗발쳤다고 한다. 집값에 악영향을 줄까 봐 이런다고 한다. 당시 여명학교 교감이 “무릎 꿇어 줄 어머니마저 없는 탈북 청소년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란 제목의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렸지만 주민 반대 여론을 넘지 못했다. 그러다 지금의 자리로 임시 이전했는데 주민들을 자극할까 봐 이사도 한밤중에 하고 두 달 동안은 학교 간판도 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부지를 서울 밖에서 찾을 수도 없다. 여명학교는 서울교육청이 유일하게 인가한 탈북 청소년을 위한 중·고등학교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고졸 학력을 인정받는다. 그런데 대체 부지를 서울 밖에서 찾으면 서울교육청에서 받은 정규 학력 인정이 취소되기 때문이다. 학교로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간 여명학교는 4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임용고시에 합격한 교사, 간호사도 있다. 지금은 100명이 중·고교 과정을 밟고 있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한쪽만 있는 학생이 적지 않다. 중국 등지에서 오랜 기간 머물다 들어와 한국말이 서툰 학생도 많다. 여명학교는 그런 청소년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교육 시설이다. 학생들에 의한 범죄도 확인된 것이 없다. 이렇게 필요하고 좋은 일을 하는 학교를 기피 시설처럼 여기는 일부 지역 주민들의 인식이 우선 바뀌어야 한다. 서울교육청과 지자체들도 적극 나섰으면 한다.
조선일보 사설
09-27 ‘탈북 외교관’ 리일규·류현우, 민주평통 상임위원 임명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가 지난 25일 리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 등을 제21기 상임위원으로 보궐 위촉했다고 26일 밝혔다. 사진 왼쪽부터 태영호 사무처장, 최윤정 세종연구소 부소장,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관용 수석부의장, 조경복 부산지구이북도민연합회 회장, 동승철 사무차장. 민주평통 제공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는 26일 결원이 발생한 제21기 상임위원 7명 중 4명을 북한 출신 고위 외교관 등 탈북민으로 채웠다고 26일 밝혔다.
상임위원에 위촉된 탈북민은 리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대리,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이현서 세븐 에셋 대표 등 4명이다.
민주평통은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과정에 탈북민의 경험과 지식을 적극 반영하라는 윤석열 대통령 주문에 따라 탈북민 출신 상임위원을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통일·안보, 인권·탈북민 지원, 국제협력 등 9개 분과에서 활동하는 민주평통 상임위원은 총 500명으로, 이번 보궐 위촉으로 탈북민 출신 상임위원은 14명에서 18명으로 늘었다.
김관용 수석부의장은 신임 상임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나서 "앞으로 탈북민들의 자문위원 위촉과 간부위원 임명을 보다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출신인 태영호 사무처장은 상임위원들에게 "어떻게 우리가 북한 정권의 변화를 견인하고 북한 주민의 통일 열망을 고조시킬지에 항상 관심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리일규 전 참사는 "범국민적 통일연대를 굳건히 다지고 북한 안에서 주체적 통일역량을 형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류현우 전 대사대리도 "통일 공감대를 확산하고 북한 인권의 참상을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문화일보 박준우 기자
09.29 태영호 "北엘리트들 두 국가론에 '통일 안 할 거면 왜 세습하나' 의문"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북한은 지난 5월 28일 탈북민 단체 등의 대북전단 살포에 반발해 오물 풍선을 처음 부양했다. 지난 9월 23일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북한이 그동안 22차례에 걸쳐 띄운 오물·쓰레기 풍선은 5500여개에 달한다.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를 제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태영호 신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은 “지난 정권에서처럼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북한에 넘겨주면 안 된다”며 “대북전단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라는 점을 북한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탈북 외교관 출신인 태 사무처장은 “누군가에게 통일은 쪼개진 국토가 연결되고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거창한 일이지만 제게 통일은 고향으로 돌아가 헤어진 일가친척을 다시 만나는 매우 단순한 일”이라며 “사무처장 임기 내에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 안 되더라도 평생 통일을 위해 모든 걸 다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9월 25일 서울 중구 민주평통 사무처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태 사무처장과의 일문일답.
- 최근 임종석 전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장이 통일하지 말자며 '두 국가론'을 주장했다. "남한에서 2개 국가 수용론이 나오는 것이 굉장히 우려스럽다. 임 전 실장이 말하는 통일은 북한이 바라는 통일이 아니었을까. 북한이 통일하자고 할 때는 평생 통일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고 하던 분들이 북한이 통일을 포기하고 두 국가로 가겠다고 하자마자 2개 국가론을 받아들이니 그들이 생각하는 한반도 미래상은 평양 주도의 미래상이 아니었나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 북한은 왜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했나. "먼저 김정은 정권이 자기 체제의 취약성을 느껴 궁여지책으로 내놨다고 본다. 김정은 정권 들어서 한류가 북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개 국가론을 발표하기 전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 평양문화어보호법 등을 만들어 통제를 강화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정은 정권은 통일을 지워버리는 것이 한류를 차단하는 효과적인 방도라고 생각한 것 같다. 두 번째로는 핵을 쓰기 위함이다. 북한은 핵무기에 대한 입장을 자위적 수단에서 선제공격 수단으로 바꿨다. 2022년 9월에 발표한 '핵무력 정책법'에는 비핵국가들이 다른 핵무기 보유국과 야합하여 북한을 침략하거나 공격하면 핵무기를 쓰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런데 북한 헌법에서 남한은 통일의 대상이다. 남한을 향해 핵을 선제적으로 쓸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을 것이다. 헌법과 특별법이 충돌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족·통일 개념을 지우고 2개 국가론으로 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북한 주민들이 2개 국가론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북한의 최고지도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내놓으면 전문가 집단이 사설·논설 등에 풀어서 설명하고 북한 주민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이 다 보는 노동신문에서조차 김정은의 2개 국가론을 해설해 주는 사설이나 논설이 보이지 않았다. 재일 친북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서도 굉장히 큰 혼란에 빠졌다고 한다. 조총련 원로들이 중앙위원회에 '어떻게 이렇게 통일을 내려놓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평양에서 아직 이에 관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2개 국가론과 관련해 체계적인 내용 정립이 안 된 것이다."
- 특히 북한 엘리트 계층이 충격을 먹었다는 얘기도 있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입국한 엘리트 탈북민은 10명으로 2017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북한 외교관들은 '한반도의 분단은 강대국들이 강요한 것이기 때문에 통일을 해야 한다' '통일하려면 미군이 남조선에서 나가야 한다' 등 통일을 외치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통일을 하면 안 된다' '2개 국가로 가야 한다'는 등의 활동을 해야 한다. 업무에 큰 괴리가 올 수밖에 없다. 또한 북한 노동당은 원칙적으로 세습을 반대하는데 세습 체제가 공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던 배경에는 통일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만들면서 '혁명적 수령관'을 넣었는데 쉽게 말해서 지도자가 바뀌면 전 지도자의 정책이 뒤집어지니 통일을 이룰 때까지 세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트 계층에선 '통일을 안 할 건데 왜 세습 통치를 하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제조 시설을 시찰하는 모습이 최근 공개됐다. "김정은이 북한에서 장기 집권을 하기 위해선 무언가 이뤘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이에 '선대들이 못했던 핵 개발을 자신이 완성했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내고 있다. 김정은은 핵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정상회담을 하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같은 대국 지도자가 북한을 찾아온 것이라며 핵이 대단하다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지만 곧 약효가 끝날 것이다. 주민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결국 생계다. 핵이 주민들의 생활고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김정은 정권의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라고 본다. 재원은 한정돼 있는데 핵무기 개발에 쏟아부으면 주민들 생활은 더 힘들어진다."
- 최근 북한의 환율이 급등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사람들은 재산을 북한 화폐로 저축하지 않는다. 만약 오늘 장마당에서 번 북한 돈이 있다면 그날 화폐 가치를 보고 돈주(錢主)에게 달러를 사서 집에 간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장마당에 와서 달러를 내고 북한 돈을 필요한 만큼만 산다. 환율이 굉장히 출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공무원 월급이 몇 달 밀리면 내부적으로 돈을 찍는다. 돈을 계속 찍다가 갑자기 화폐개혁을 하면 이전의 화폐는 휴지조각이 된다. 북한 돈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니 북한 주민들 집에는 김일성이 그려진 지폐 대신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담긴 지폐가 있는 것이다."
- 미국 대선 결과는 북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최근 김정은은 '대화도 대결도 우리의 선택으로 될 수 있지만 우리가 보다 철저히 준비돼 있어야 할 것은 대결'이라고 말했다. 4.5t급 탄두를 장착한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우라늄 제조 시설도 공개했다. (미국 대선에서) 누가 올라서든 북한은 협상을 하려고 하겠지만,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북한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테이블 위에 꺼내놓는 주고받기식 협상 전략을 짜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추후 핵 협상에서 북한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북한 정권은 위기에 빠질 것이다."
- 최근 탈북민의 연령 구성을 보면 20대가 가장 많다. '장마당 세대'로 불리는 2030세대의 탈북이 늘어난 이유는. "기존에는 '톱다운'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보텀업' 방식의 탈북이 이뤄지고 있다. 제가 탈북했던 2016년에는 부모들이 먼저 탈북을 결정하고 자녀들이 부모의 결정을 따랐는데 최근에는 20대 자녀들이 먼저 남한에 가겠다고 하고 부모들이 끌려온다. 그 배경에는 한류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부모 따라서 해외에 간 북한의 젊은 세대들이 전 세계가 한류로 들썩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 온 탈북민 가운데 가장 많은 연령대가 20대였고 그다음으로 10대, 30대 순이었다. 탈북민 중 MZ세대가 이제는 80%를 넘는다고 한다."
- 탈북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차관급 관료직에 임명돼 의미가 남다를 것 같은데. “북한 주민도 우리 헌법에 의해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메시지를 계속 내왔지만 현실적으로 북한 출신도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는 측면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대통령께서 북한 공직자 출신을 차관급으로 임명하면서 북한 주민들도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여줬다. 지금의 북한 체제는 언제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소련이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는 걸 누가 예측했겠나. 외교관 출신으로서 우리의 자유 통일에 대한 국제적 지지와 연대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겠다.”
주간조선 김연진 주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