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9/ 09-02(월) 트럼프는 좌회전, 해리스는 우회전 - 09-30(월) 청약 당첨 ‘5인 이상 대가족’ 이렇게 많다고?
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9/
09-02(월) 트럼프는 좌회전, 해리스는 우회전

미국 정치에서 “플립-플롭(flip-flop)을 했다”는 평가는 정치적 치명상을 뜻한다. 우리말로 이랬다저랬다 혹은 갈지자 행보에 가까운 표현이다. 2004년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 반대여론이 높은데도 재선에 성공한 것은 상대를 이 프레임에 가두는 데 성공한 영향이 크다. 상대편 후보가 전쟁을 위한 추경예산 110조 원 편성에 찬성표를 던져 놓고도 반전여론이 생겼다고 1년 만에 돌아선 것이 대통령답지 못하다고 외면받았다.
▷이렇게 치명적인 플립-플롭은 일관성을 중시하는 미국 정치의 전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올 11월 대선을 앞두고 노선 변경이 잦아졌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기 위한 플로리다주 주민투표에서 반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6주 만의 판단은 너무 일러 산모의 선택권을 제약한다”는 이유였다. 여성인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의 등장 이후 여성표 쏠림을 막으려는 시도다. 트럼프는 애초에 낙태 반대론자였다. 여성의 낙태권을 허용한 1972년 연방대법원 판결을 50년 만에 뒤엎는 일에 그가 재임 중 임명한 강경보수 연방대법관 3명이 앞장섰다.
▷해리스 후보는 프래킹(fracking)이란 셰일가스 채취 공법에 대한 찬반 견해를 바꿨다. 암석에 고압의 물을 분사해 셰일가스를 채취하는데, 이 방식을 도입한 뒤로는 미국은 중동산 석유 의존증에서 벗어나고 있다. 다만, 수질오염 등이 심각해 민주당에선 반대가 강하다. 해리스 자신도 2020년 경선 때는 반대했다. 그러다가 부통령 후보가 된 후로는 돌아섰다.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 당선에 크게 기여했고, 올해도 핵심 경합주가 된 펜실베이니아주 때문이다. 셰일가스 산업 관련자 30만 명이 그곳 유권자다.
▷이 밖에도 트럼프는 마리화나 합법화에 찬성하기 시작했다. 술 한잔 입에 댄 적 없다는 그는 마약반대론자였다. 요새는 “자기가 피우려고 소량을 지녔다고 일일이 적발한다면 행정력 낭비”라는 논리를 댔다. 젊은층 표를 의식한 결과다. 해리스도 과거엔 불법 이민자 형사 처벌을 두고 “미국답지 못하다”며 반대했지만, 지금은 동의한다. 이처럼 공화당 트럼프의 좌클릭, 민주당 해리스의 우클릭은 뜨거운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이건 어디서건 이랬다저랬다 정치는 힘을 얻기 어렵다. 하지만 시대와 기술이 바뀌고, 안보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오래전 생각을 고집하는 일관성이 좋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왜 갈지자 행보냐”는 비판에는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게 정공법이다. 어쩌면 올 대선은 플립-플롭에 돌아앉던 과거와 달리 유연함에 주목하는 보기 드문 선거가 될 수도 있다. 해리스는 지난주 인터뷰 때 첫 내각에 공화당원을 합류시키겠다고 했다. “다른 경험과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 역시 유연함을 강조한 말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9-03 계엄령

‘계엄령’ 논란이 정치권에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1일 여야 대표 회담 모두발언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최근에 계엄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게 기폭제가 됐다. 대통령실에선 바로 “거짓 정치 공세”라고 반박했고,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도 2일 “사실이 아니라면 국기 문란”이라며 가세했다. 민주당은 “계속 제보를 듣고 있다”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이번 논란은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이 고교 선배인 김용현 대통령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게 발단이 됐다. 방첩사령관도 같은 고교 출신이라는 점이 맞물리면서 “윤 대통령 탄핵 상황이 오면 계엄을 선포할 우려가 있다”, “최근의 흐름은 국지전과 북풍 조성을 염두에 둔 계엄령 준비 작전”이라는 등 민주당 의원들의 의혹 제기가 잇따랐다. 2일 열린 인사청문회에서도 야당 의원들은 “(윤 대통령이) 계엄령 대비를 위한 친정 체제를 구축 중이고 후보자의 용도가 그것”이라고 주장했고, 김 후보자는 “청문회는 거짓 선동하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맞받으며 언쟁이 벌어졌다.
▷계엄은 군이 치안을 강화하는 ‘경비계엄’과 군이 사법과 행정을 포함해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비상계엄’으로 나뉜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군이 체포·구금, 언론·출판·집회·결사 등도 통제할 수 있다. 계엄사령관이 핵심적 역할을 하지만, 계엄사령관을 추천하고 지휘·감독할 권한은 국방부 장관에게 있다.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계엄 선포를 건의할 수도 있다. 이런 자리에 대통령의 최측근을 앉히는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게 야당의 주장이다.
▷정부 수립 이후 비상계엄은 1948년 여순사건을 시작으로 4·19혁명, 5·16군사정변 당시 등 총 9차례 선포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 10월 선포된 비상계엄이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확대돼 1981년 1월까지 지속된 게 마지막 계엄이었다. 제헌 헌법부터 계엄을 명시한 것은 비상사태에 최후의 수단으로 군이 개입해 국가와 국민을 지키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취지와 반대로 과거 군사정권이 유신 선포 등에 반대하는 국민을 탄압하는 데 계엄령을 악용했던 게 사실이다.
▷한동안 사라졌던 계엄 논란이 되살아난 것은 2018년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이후의 혼란에 대비해 기무사가 ‘계엄 문건’을 만든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계엄령 선포 직후 야당 의원들을 체포한다는 등의 내용도 들어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최종 보고서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졌고, 실질적인 실행 계획이었다는 점도 입증되지 않았다. 계엄령하에서 겪었던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사는 이들이 지금도 있다. 누구라도 계엄을 언급할 때는 신중했으면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04 트럼프도 해리스도 “US스틸, 일본에는 못 준다”

미국 노동절인 2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를 유세차 찾은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겸 부통령의 첫마디는 “US 스틸은 미국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기업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였다. 이어 “언제나 철강 노동자들을 지키겠다”고 했다. 1901년 US스틸이 탄생한 곳이 피츠버그이고, 지금도 본사가 자리한다. 피츠버그를 통틀어 가장 높은 건물이 US스틸 타워다. 노동절에 ‘러스트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지대)’ 한복판인 피츠버그에서 노조 표심을 향한 구애를 펼친 것이다.
▷펜실베이니아주는 11월 미국 대선의 핵심 경합지 중 하나다. 2020년 대선에선 조 바이든 대통령이, 4년 전인 2016년 대선에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신승을 거뒀다. 노조원 120만 명인 철강 노조의 지지 없이는 펜실베이니아주서 승기를 잡을 수 없고, 대선 승리도 장담할 수 없다.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끔찍한 일”이라 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도 지난달 펜실베이니아주 요크를 찾아 “일본이 사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제철이 ‘미국 산업화 100년의 역사’ 자체인 US스틸을 149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건 지난해 12월이다. 관세 등 무역장벽이 높고 단단해지자, 미국 시장을 직접 뚫고 세계 3위 철강 기업으로 올라서겠다는 전략이었다. 곧장 전미철강노조가 들고일어났고 의회는 “국가 안보에 핵심적인 사안”이라며 거들었다. 결국 재무부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에 회부됐다. 여기선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의 투자를 제한할 수 있다.
▷그간 US스틸에 대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는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쳐 온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해리스 후보의 노동절 발언은 그 연장선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4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제철의 인수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어진 국빈 만찬에는 전미철강노조 위원장을 초청해 기시다 총리를 대놓고 불편하게 했다.
▷트럼프와 해리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는 무산될 위기다. 국내에선 세계화에서 낙오해 일자리를 잃은 백인 노동자의 좌절이 분출되고, 국외에선 중국이 미국의 리더십에 도전해 오면서 ‘아메리카 퍼스트’가 초당적인 합의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급해진 일본제철은 펜실베이니아주와 인디애나주 2곳의 US스틸 제철소에 13억 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사실상 US스틸의 일자리 보존을 약속한 셈이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 전 장관을 고문으로 영입하며 치열한 로비전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의 거센 흐름을 거스르긴 어려워 보인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9-05 中 전기차의 공습에 獨 공장 문 닫는 폭스바겐

기업 이름 자체가 독일어로 ‘국민 차’인 폴크스바겐(폭스바겐)은 독일 제조업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엄격한 품질 관리와 친환경을 내세운 디젤차 등을 기반으로 오랜 기간 세계 1위 자동차 메이커 자리를 지켰다. 첫 작품인 딱정벌레차 비틀은 세계 곳곳에서 공전의 히트를 거듭했다. 특히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걷어낸 직후인 1980년대 초반부터 중국 시장에 뛰어들어 현지 자동차 판매 1위를 굳혔다. 한때 지구촌에서 팔린 자동차 10대 중 한 대가 폭스바겐그룹 브랜드였다.
▷이랬던 폭스바겐이 1937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본토인 독일 내 공장을 폐쇄한다고 한다. 아울러 대규모 인력 감축 방침도 확정했다. 폭스바겐그룹의 올리버 블루메 최고경영자(CEO)는 2일 “자동차 산업이 몹시 어렵고 심각한 상황”이라며 이 같은 계획을 밝혔다. 폭스바겐은 독일에만 6개 공장과 29만여 명의 직원을 뒀는데, 이 중 완성차 공장과 부품 공장 1곳씩을 닫고 2만 명을 구조조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폭스바겐이 37년 전 미국 공장을 폐쇄한 적은 있지만 자국 공장은 한 번도 닫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유럽 최대이자 세계 2위 자동차 기업인 폭스바겐의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블루메 CEO는 “새로운 경쟁자가 유럽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 내 제조공장을 유지한다는 건 기업 경쟁력을 더욱 뒤처지게 만든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새로운 경쟁자’는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다.
▷내연기관차 시대에는 상대도 안 됐던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전기차로 갈아탄 뒤 그럴듯한 디자인과 1000만 원대부터 시작하는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중국 본토와 유럽 시장을 휩쓸고 있다. 폭스바겐은 전체 판매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서 지난해 토종 전기차 브랜드 비야디(BYD)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유럽에서도 중국 전기차들의 점유율은 이미 20%를 넘어섰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비야디의 해외 판매량은 지난해 1년 치 실적을 웃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거대한 내수에 힘입은 중국 자동차 기업들의 추격에 가속도가 붙었다.
▷내연차 중단을 서둘러 온 유럽연합(EU)의 정책에 맞춰 폭스바겐도 급히 전기차 전환을 선언했지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높은 임금과 과도한 복지의 함정에 빠져 생산성이 떨어지는 독일 공장을 유지할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폭스바겐의 독일 공장 폐쇄로 글로벌 자동차 업계의 판도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자동차 기업들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폭스바겐의 아성을 무너뜨린 중국 전기차 공세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9-06 김태효 “해리스 참모들 많이 가르쳐야”… 이게 뭔 소린지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안보실장 4명이 등장하는 동안 같은 자리를 지킨 참모다. 그래서 김 차장이 대외정책의 진짜 실력자가 아니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매사에 주목받고 있다. 40대 초반에 이명박 청와대에 합류해 대외전략 담당 비서관과 기획관(수석급)으로 4년 반 동안 중책을 맡았다. 김 차장만큼 보수 정부의 대외정책에 깊게 또 오래 관여한 이는 없다. 그런 그가 3일 한 포럼에서 한 실언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김 차장은 11월 미국 대선에서 현직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 후보가 당선될 때 상상할 수 있는 정책 리스크가 무엇인지 질문받았다. 그는 “(대통령이 아닌) 부통령 해리스에게 조언하는 참모진이라 (내년 이후) 백악관에서 얼마나 카리스마를 발휘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밑에서 존재감이 약했던 해리스 부통령의 참모이니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김 차장은 또 “(민주당 참모들의) 이름이 생소하다” “베테랑을 수혈해야 한다” 등의 말도 했다. 그러다 문제가 된 “(내가) 상대하게 되면 해리스 외교안보 참모들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는 앞서 모두 발언에서 해리스 참모진을 설명하며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 필립 고든 부통령 안보보좌관 등의 이름을 열거했던 터라 참석자들은 당연히 이들을 연상했다. 이날 포럼은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은 안보전문가와 중견 언론인이 참석한 자리였다. 이런 자리에서 발언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해석될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가 앞으로 한반도 정책을 주무르게 될 수도 있는 동맹국 최고위 인사를 놓고 ‘가르쳐가며 일해야 할 만큼 경험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묘사한 셈이다.
▷김 차장이 거론한 인물 중의 하나인 고든 보좌관의 이력을 보면 김 차장이 못 만나봤거나 못 들어본 게 경량급의 근거가 될 순 없을 듯하다. 해리스 후보가 당선될 경우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거론되는 그는 이미 15년 전에 국무부 유럽·유라시아 담당 차관보를 지냈고,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외교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쿤스 의원은 14년 상원 생활 중 상당 기간을 외교위에서 활동했다. 미국과 북한을 중심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 정책을 다뤄 온 김 차장으로선 한미동맹만 놓고 본다면 이들보다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에 저자세일 필요는 없지만,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은 오만하다는 말 외에는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김 차장의 발언은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바이든 정부에 보고됐다고 보는 게 상식에 가깝다. 그 외교적 손실과 신뢰 저하를 어떻게 만회하려는 걸까. 김 차장은 한일관계를 놓고도 구설을 일으킨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란 표현을 쓰는 바람에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일방적 일본 거들기로 해석되도록 했다. 그게 1개월도 안 된 일이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9-07(토) 79년 만에 받은 ‘침몰 징용 귀국선’ 조선인 명단

일본 정부가 ‘우키시마(浮島)호 침몰과 함께 사라졌다’던 승선자 명부 일부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방한을 하루 앞둔 5일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1945년 8월 우키시마호가 강제 징용됐다가 귀국하려던 조선인 수천 명을 태운 채 폭침된 지 79년 만이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 해군이 고의로 폭파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랜 세월 피해자와 유족의 한(恨)을 외면해 온 일본이 이제야 달랑 명부를 가져온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 일대를 요새화하면서 방공호와 철도 건설 등에 조선인을 대거 동원했다. 조선인은 기아와 매질, 중노동에 시달렸다. 패전을 맞아 보복이 두려웠던 일본 해군사령부는 조선인 수천 명을 부산으로 돌려보내겠다며 우키시마호에 태웠다. 그러나 8월 22일 오미나토항을 떠난 배는 이틀 뒤 교토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일본 정부는 배가 기뢰를 건드렸다고 발표했지만 믿기 어려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당시 기뢰 폭발에 나타나는 물기둥이 보이지 않았다. 9년 뒤에야 인양한 배는 선체가 안에서 밖을 향해 휘어 있었다. 내폭의 증거다.
▷해군 승조원들이 부산에 가지 않으려고 자침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출항 전 승조원들은 ‘전쟁이 끝났는데 조선에 가면 맞아 죽거나 포로가 될지 모른다’며 항명 사태를 일으켰다. 배엔 돌아올 연료도 없는 상태였다. 폭발 전 일부 해군이 배에서 내려 구명보트를 타는 모습을 본 생존자도 있다. 폭침이 사고를 위장해 징용 조선인을 몰살하려던 해군사령부의 계획이라는 설도 있다. 배는 처음부터 부산이 아닌 마이즈루항으로 향했다. 사령부에서 일했던 아버지로부터 ‘(사령부가) 배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관방장관은 6일 “인도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대응해 왔으며, 이번 명부 제공도 그런 대응의 일환”이라고 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다. 승선자 명부의 존재가 드러난 뒤에도 일본 정부는 이를 부인하거나 답변을 피해 왔다. 유족들이 낸 배상 청구 소송에선 명부를 ‘승선 시 작성해 배에 비치한 것’으로 정의하며 ‘침몰로 상실됐다’고 주장했다. 최근에야 일본 기자의 정보 공개 청구를 계기로 명부 75건을 보관해 온 것을 인정했다.
▷“자기네가 아쉬워서 (사람을) 갖다 썼으면 되돌려 놔야지. 노예같이 부려놓고 사람을 죽이는 게 인도적인 건가?” 우키시마호 생존자의 호소다. 일본 정부가 뒤늦게 명부를 건네려면 사과와 진상 규명 의지를 함께 표하는 것이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일본 정부가 여전히 은폐하고 있는 강제징용 피해자 명부 등 자료가 적지 않다. 총리 방한 등 이벤트에 맞춰 마치 선물 주듯 해서는 일본 정부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릴 것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9-09(월) CEO 체포되자 꼬리 내린 시늉 하는 텔레그램

국내에서 ‘텔레그램 망명’이 벌어진 지 이달로 딱 10년이 된다. 2014년 9월 검찰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 신설과 노동당 부대표 카카오톡 압수수색 논란으로 ‘사이버 검열’ 우려가 불거지면서 소수만 썼던 텔레그램이 순식간에 다운로드 순위 1위로 올라섰다. 요즘 텔레그램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만악(萬惡)의 온상으로 통한다. 범죄 정보와 마약, 딥페이크·성착취물, 리딩방 사기, 테러 모의, 극단주의, 불법 총기 거래…. 세계의 온갖 어둠에 텔레그램이 빠지지 않는다.
▷“사용자가 갑자기 9억5000만 명으로 늘면서 범죄자들이 악용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를 개선하는 것이 목표다. 내부적으로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파벨 두로프 텔레그램 최고경영자(CEO)가 6일(현지 시간) X(옛 트위터)에 올린 성명이다. 두로프가 최근 프랑스에서 조직범죄 공모 등 혐의로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나면서 ‘당국에 꼬리를 내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긴 성급하다. 텔레그램은 근처에 다른 사용자가 있는지 알려주는 ‘People Nearby’ 기능이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삭제하겠다고 했지만 원래도 쓰는 사람이 별로 없는 기능이다. 핵심은 향후 텔레그램이 각국 사법당국의 요청에 응답하느냐이다. 텔레그램은 지금도 홈페이지 ‘자주 묻는 질문(FAQ)’을 통해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현재까지 정부를 포함한 제3자에게 0바이트의 사용자 데이터를 제공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전한 텔레그램 전직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정부 기관 요청 이메일 함은 거의 체크되지 않는다’고 한다.
▷두로프는 성명에서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암호화키를 넘겨달라는 러시아 당국의 요구와 평화 시위대의 채널을 차단해 달라는 이란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정부 기관에도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두로프의 이상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순진한 척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실에선 혁명가를 위한 메신저가 곧 범죄자의 방패가 된다. 이란 등에선 결국 텔레그램 사용이 금지됐으니,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용도로도 빛이 바랜 셈이다. 영웅에서 피의자로 전락한 두로프의 운명은 그의 지향 자체가 가진 모순이 품은 것이다.
▷마치 초법적 존재처럼 운영돼 온 텔레그램이 각국의 법 규제에 승복하기 전까진 딥페이크 등 범죄 피해자의 고통을 끝내기 어렵다. 흔히 텔레그램은 모든 메시지를 서버에 저장하지 않는다고 오해되지만 그건 ‘비밀 대화’를 설정했을 경우이고, 기본 설정인 일반 대화나 그룹 채팅은 내용이 여러 나라에 있는 서버에 분산돼 저장된다. 범죄 메시지는 어떤 플랫폼이라도 사법당국에 정보가 제공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야 범죄자들이 악용할 엄두를 못 낼 것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9-10 ‘성 상납’ 사법 족쇄 벗은 이준석… 분열과 상처만 남은 여권

3년 전만 해도 정치인 이준석은 만 36세 나이에 국민의힘 대표로 선출된 기대주였다. 그러나 1년 4개월 만에 중도 하차했고, 쫓겨나듯 탈당한 뒤 4월 총선 때 개혁신당 후보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가 대표 시절 “윤핵관”으로 이름 붙인 친윤 그룹과 불화한 것이 진짜 이유지만, 그는 이른바 성 상납 사건을 이유로 밀려났다. 이 사건에서 그는 2013년 이후 벤처사업가에게서 성 상납을 받았고, 선물 등을 받고 박근혜 대통령 일정에 관여했고, 이런 주장이 공개되자 회유를 통한 증거인멸을 시도했고, 성 상납 주장을 한 쪽을 무고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4개의 혐의 가운데 무고가 5일 무혐의로 종결됐다. 4번째 혐의 무죄로 이준석을 옥죄던 형사 리스크는 사라졌다. 이에 앞서 성 상납은 공소시효 만료로, 알선수재는 증거 부족으로 정리됐다. 한때 위기도 있었다. 측근인 대표 정무실장이 문제의 술자리 술값을 냈다는 A 씨를 만나 “성 상납은 없었다”는 확인서를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7억 원을 (A 씨 지인인) 피부과에 투자가 성사되도록 하겠다”는 자필 각서를 써 준 것이 빌미가 됐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왜 그런 각서를 써 주겠냐는 의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경찰은 “의혹 제기한 쪽이 증거라고 말한 폐쇄회로(CC)TV 동영상은 원래 없었다”면서 “없는 증거를 인멸할 만한 사정이 없다”고 봤다.
▷그는 현직 대표 시절 당 윤리위에서 당원권 6개월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는데, 자필 각서가 핵심 사유였다. 그런데 그때는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친윤의 힘이 서슬 퍼렇던 국면에서 당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5060세대 친윤이 30대 0선 대표를 몰아붙인다는 인상을 줬다. 권성동 원내대표가 대표를 내부총질자로 묘사한 대통령의 문자를 받았다가 촬영된 게 그즈음이다. 대표직 하차는 친윤의 승리였지만, 대통령의 포용력에 대한 의구심도 생겨났다.
▷지금은 당내 평가가 달라졌지만, 3년 전 국민의힘에선 이준석 체제의 등장을 체질 개선의 신호탄으로 보는 해석도 있었다. 선거 때마다 연전연패하던 국민의힘에 이준석 정치는 ‘2030 남성’이라는 새 지지층을 더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에서 0.73%포인트 차이로 신승하면서 그의 기여도를 놓고 논쟁도 생겼지만 분명한 건 그가 밀려난 때를 기점으로 2030의 당 지지가 급감했다는 점이다.
▷이준석 배제는 뺄셈의 정치였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는 마음에 차지 않던 이 대표와 포옹도 하고, 당선 직후 결별할지언정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했다. “9가지가 달라도 1가지만 같다는 이유로 손잡는 자가 주도한다”는 게 정치다. 하지만 친윤은 정반대였다. 9가지가 같아도 1가지가 다르면, 그걸 이유로 배제했다. 뺄셈의 종착점은 선거 패배였고, 지지층에게 돌아온 상처였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9-11 中 외교부장에서 출판사 직원으로 쫓겨난 친강

친강 중국 전 외교부장(장관)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신임을 얻은 건 그가 외교부 의전국장으로 일할 때 보인 충성심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시 주석의 벨라루스 방문을 앞두고 친 전 부장은 새벽에 상대국 의전 책임자에게 전화해 시 주석이 올라가야 할 계단이 총 몇 개인지 세어서 알려 달라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동선을 짰다고 한다.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오른 관리’라고 불릴 정도로 친 전 부장은 승승장구했다. 2018년 외교부 부부장, 2021년 주미 대사를 거쳐 이듬해 중국 최연소(56세) 외교부장이 됐다. 몇 달 뒤 중국공산당 국무위원(부총리급)으로도 승격됐는데 전임인 왕이 부장이 5년간 외교부장을 하다 그 자리에 오른 것과 비교하면 초고속 승진이었다. 하지만 성공은 거기까지였고 가파른 추락이 찾아왔다. 외교부장 재임 6개월 만인 지난해 6월 그는 돌연 자취를 감췄다.
▷아무리 잘나가는 공직자나 기업인, 연예인도 공산당 눈 밖에 나거나 부패 혐의 등에 연루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게 중국이다. 하지만 시 주석의 복심이자 중국 ‘늑대전사(전랑) 외교’의 상징이던 그의 갑작스러운 퇴장은 온갖 추측을 낳았다. 홍콩의 유명 여성 앵커와 혼외자를 출산했다는 소문부터 권력 암투설, 간첩설, 사망설이 이어졌다. 그러다 올 7월 중국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친 전 부장의 사직 요구를 수용해 면직했다고 밝혔을 뿐 관련 경위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동지’로 지칭해 완전히 숙청된 건 아닐 것이란 여지를 남겼다.
▷1년 넘게 행방이 묘연했던 친 전 부장이 올봄부터 중국 외교부 산하 출판사에 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최근 보도했다. 베이징 도심 골목에 있는 ‘월드 어페어스 프레스’(세계지식출판사)라는 곳에 그의 이름이 낮은 직급으로 올라 있다는 것이다. 그가 실제 근무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직원들은 친 전 부장이 일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부총리급에서 출판사 하위직으로 추락하긴 했지만 처벌을 면한 것만으로도 그에겐 다행이란 시각이 많다. 시 주석은 2012년 집권 이후 ‘호랑이 사냥’이라 불리는 고위층 사정 작업을 지속해 왔는데 그 와중에 옥사하거나 종신형에 처한 권력자들이 적지 않다. 중국 정부는 친 전 부장을 처벌하지 않고도 그의 행방을 철저히 감추고 낙마 경위도 비밀에 부침으로써 ‘어떤 공직자도 당의 손아귀에 있다’는 선전 효과를 이미 거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정부가 고위 각료를 경질할 때 국민에게 사유를 밝히는 게 상식이지만, 친 전 부장은 왜 내쳐졌는지, 또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 길이 없다. 의문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사회주의 중국의 짙은 폐쇄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9-12 불과 수 미터 거리, 악수도 안 나눈 尹-韓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요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 10일 포착됐다. 인천의 한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두 사람은 5∼10m 떨어져 앉았지만,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대통령은 정해진 동선에 따라 입장했다가 축사 후 퇴장했고, 바로 옆 원탁에 30분 전부터 착석해 있던 한 대표는 다가가 인사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냉기류가 흘렀다고 주변 참석자들은 전했다.
▷악수 불발은 당 비대위원장 사퇴 요구, 디올백 사과 문자 등 4월 총선 전부터 쌓인 이른바 윤-한 갈등의 한 단면이다. 여기에 이틀 전인 일요일 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만찬이 가져온 파장도 작용했을 수 있다. ‘번개 만찬’으로 알려진 그 자리에는 인요한 김민전 등 친윤 성향 최고위원, 윤상현 의원 등이 함께했다. 한 대표는 초대받지 못했고, 이튿날 언론 보도까지는 만남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 “당선되면 혼밥하지 않겠다”고 했다. 박근혜 문재인 등 전임자들과 달리 다양하게 만나겠다는 뜻으로 한 얘기지만, 밥과 술을 통한 끈끈한 관계 맺기를 중시하는 대통령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만찬과 악수를 둘러싼 이런저런 뒷얘기들은 양측의 기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실 한 대표는 열세 살 위인 윤 대통령을 사석에선 검찰 직함 대신 형이라고 부르는 걸 봤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로 대통령과 각별했었다. 둘은 2022년 대선을 전후로 정치적 동지로 발전했다. 하지만 현실 정치는 둘을 갈라놓고 있다.
▷윤-한 갈등은 의리와 공적 업무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둘 것이냐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시각도 있다. 한 대표가 대검 반부패·강력부장과 법무부 장관이 될 때 윤 대통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친윤 일각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대표를 정치에 입문시켜 당 비대위원장 자리를 맡긴 것도 윤 대통령이다. 그런 점에서 채 상병 특검법, 김경수 사면, 의대 증원을 놓고 한 대표가 대통령 뜻에 반대하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자 친윤에선 ‘배신’이란 표현까지 쓰고 있다. 한 대표 주변의 설명은 다르다. “대표와 대통령은 사적 의리가 아닌 공적 업무로 관계를 맺어온 사이인 만큼,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대통령 뜻을 따를 수만은 없다”고 한다.
▷한 대표는 7월 전당대회 때 63%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그러나 철저히 현역 의원 중심인 당 구조에서 여전히 소수파다. 국회 또한 여소야대 구도로, 한 대표가 주도할 이슈는 제한적이다. 그 바람에 당 대표가 된 뒤 오히려 지지율은 10%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친한 그룹에선 이를 친윤의 고사 작전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갈등은 여야 간에, 또는 여당 내 힘겨루기 성격이 강하다. 지척에서 악수도 안 나누는 대통령과 여당 대표를 바라보는 민심은 속이 타들어 갈 것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9-13 추석 맞는 기쁨, 아프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평소 건강하던 사람도 추석 연휴엔 응급실 신세 질 일이 생긴다. 차례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성묘 갔다 벌에 쏘이고 진드기에 물려, 산행을 즐기다 발목이 접질려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하루 평균 2만3000명으로 평소의 2배다. 추석 전날보다는 당일과 추석 다음 날 응급실이 더 붐빈다. 가뜩이나 연휴엔 문 닫는 병원이 많은데 올해는 응급실 대란 위기가 고조되고 있어 추석 연휴를 앞둔 기쁨보다는 ‘아프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크다.
▷추석 연휴 응급 환자의 상당수가 집 안에서 발생한다. 많이 먹거나 잘못 먹어 탈이 난 장염 환자와 두드러기 환자들이 평소 2∼3배로 불어나 응급실로 달려온다. 더위가 이어지는 추석엔 음식도 쉽게 상한다. 식중독 환자가 많이 나오는 계절은 여름이 아니라 9월 초가을이다. 전을 부치다 화상을 입은 환자도 평일의 3배로 늘어난다. 어른들이 차례 준비에 분주한 사이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삼키거나, 씹는 기능이 약한 노인들이 송편을 먹다 떡 조각이 목에 걸려 오기도 한다.
▷성묘하러, 친지를 만나러 오가는 길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벌 쏘임 사고의 80%는 벌초객들이 몰리는 7∼9월에 집중돼 있다. 성묘를 가다 미끄러지고 발을 헛디뎌 발목이 접질리고 삐어 구급차 타고 응급실을 찾는 경우가 평일의 2배다.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는 1.5배로 늘어나는데, 들뜬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는 추석 연휴 전날이 가장 위험하다. 음주 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도 연휴 전날과 첫날에 평소보다 23∼25% 많이 일어난다.
▷응급실이 제대로 돌아가던 시절에도 명절 연휴 감기가 심해 응급실에 가면 1시간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올 연휴엔 감기나 복통 정도의 경증이면 본인부담금으로 진료비의 90%를 내야 한다. 지역응급의료센터는 예전보다 4만 원 오른 10만 원, 권역센터는 9만 원 오른 22만 원이다. 의사가 부족하니 가급적 오지 말라는 뜻이다. 큰 병이 아니면 응급의료포털에서 문 여는 곳을 찾아 동네 병원부터 가보고 소화제, 해열제, 두드러기용 항히스타민제, 종합감기약 정도는 상비약으로 챙겨두는 것이 좋다.
▷올 추석 연휴는 19, 20일 휴가를 내면 최장 9일을 쉴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연휴 나들이 계획에 들뜨기보다 “응급실 뺑뺑이를 내가 당하면 어쩌나” 우려하며 ‘추석 연휴 응급실 가지 않는 법’ ‘경증과 중증 판별법’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말 못하는 아이가 경증인지 중증인지 어떻게 알고 오라는 것이냐”며 젊은 부모들 걱정이 크다. 찬 바람 나면 코로나와 독감이 유행하고, 뇌졸중 뇌경색 환자들이 응급실로 몰려들 것이다. 추석 연휴 무탈하게 지나면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14(토) 범정부 TF까지 꾸려진 ‘빈집’ 문제

인구 감소를 먼저 경험한 선진국들 사이에서 빈집은 오랜 골칫거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등은 2000년 전후로 일찌감치 ‘빈집세’(Empty Homes Tax)를 도입했다. 2년 이상 비워 둔 집에 많게는 지방세를 300%까지 중과하는 식인데, 집을 오래 비워 두지 말고 빨리 팔거나 세놓으라는 채찍이다.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선 ‘1유로 프로젝트’가 활발하다. 리모델링을 조건으로 단돈 1유로에 처치 곤란한 빈집을 팔고 싶은 주인과 시골 주택을 싸게 사고 싶은 사람을 맺어주는 식이다.
▷빈집 문제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일본은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빈집(아키야·空き家)이 900만 채에 달한다. 이 중 별장이나 임대·매매용 등을 빼고 사용 목적 없이 방치된 빈집이 385만 채인데 20년 새 갑절 수준으로 불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빈집특별법’을 만들고 지방자치단체마다 입주를 원하면 공짜나 헐값에 살 수 있는 ‘아키야뱅크’(빈집은행)를 운영하고 있지만 급증하는 빈집을 따라잡을 수 없는 처지다.
▷저출산·고령화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도 빈집이 빠르게 늘고 있다. 전국 지자체마다 폐가가 된 시골 빈집 처리로 골머리를 앓은 지 오래다. 재개발·재건축 계획이 틀어져 도심 곳곳에도 흉물로 변해 버린 빈집이 적지 않다. 국내 대도시 가운데 빈집 1위는 “노인과 바다만 남았다”는 말이 나오는 부산이다. 전국 광역시 중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탓에 부산 인구는 서울의 3분의 1인데, 방치된 빈집은 훨씬 많아 5000채가 넘는다고 한다.
▷전국 곳곳의 낡은 빈집에는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진동하고 쥐와 벌레가 들끓는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간 방치된 빈집이 이웃의 안전을 위협하는 건 물론이고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마을에 빈집 하나가 생기면 주변에 빠르게 빈집이 생기는 전염 효과도 강하다. 빈집이 늘면 주변 아파트 값이 3000만 원 가까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빌리자면 버려진 빈집 하나가 동네 전체를 슬럼가로 만드는 현상이 현실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데도 정부의 빈집 실태 파악도, 관리도 둘쑥날쑥이었다. 통계청의 2020년 주택총조사에서 전국 빈집이 151만 채인데 미분양·신축 등이 모두 포함됐다. 1년 이상 아무도 거주하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는 ‘진짜’ 빈집은 13만2000여 채인데 이마저도 도시 지역 빈집은 국토교통부가, 농어촌 빈집은 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가 각각 관리해 왔다. 이들 부처와 행정안전부가 포함된 범정부 태스크포스(TF)가 지난달에야 꾸려져 빈집 철거 등 정비에 나선다고 한다.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는 일부터 서둘러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9-19(목) 헤즈볼라 삐삐 수천 대 동시 폭발… 더 비정해진 전쟁

‘새 무선호출기를 받은 사람은 모두 버릴 것.’ 17일 오후 3시 30분경 레바논의 무선호출기 수천 대에 이런 메시지가 떴다. 짧은 음성으로 온 이 메시지를 듣기 위해 호출기를 만지거나 귓가로 가져간 사람들은 곧 벌어질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호출기를 옷 주머니에 넣고 있어 메시지가 온 지 몰랐던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삐삐’로 불렸던 이 호출기는 몇 초 뒤 레바논 전역에서 일제히 폭발했다. 이 작은 물건은 터지면서 손과 눈, 복부에 치명상을 입혔다.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28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폭발한 호출기 소지자는 상당수가 레바논 무장단체인 헤즈볼라 조직원들이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는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여 왔다. 올 초 이스라엘이 휴대전화 도청과 위치추적을 강화하자 헤즈볼라 지도부는 대원들에게 휴대전화 대신 무선호출기를 쓰도록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레바논으로 갈 호출기가 생산·유통되는 과정에서 누군가 호출기 배터리 옆에 소량의 폭약을 끼워 넣었고, 원격 기폭장치를 통해 폭발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정교한 작전을 수행할 능력과 동기를 가진 쪽은 이스라엘밖에 없지만 이스라엘은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고 있다. 이번 호출기 동시 폭발로 정치·군사적 반사이익을 보는 쪽도 이스라엘이다. 고화력 미사일로 위협하지 않더라도 헤즈볼라 조직원들에게 일상에서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다는 공포심을 심어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헤즈볼라 지도부는 추가 피해를 우려해 조직원들에게 호출기의 주파수를 끄고 배터리도 제거하라는 지침을 내렸는데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헤즈볼라로선 내부 통신이 한동안 마비되는 타격을 입게 됐다.
▷문제는 호출기 폭발의 피해가 헤즈볼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 한복판이나 슈퍼, 카페, 집 등에서 호출기가 폭발해 무고한 민간인들도 다수 희생됐다. 레바논 보건부에 따르면 사망자 중에는 조직원의 8세 딸 등 어린이들도 포함됐다고 한다. 파편에 맞은 노인들이 의식을 잃은 채 이송됐고, 병원에 입원 중이던 조직원의 호출기가 폭발해 의료진이 중상을 입기도 했다. 많은 피해자들이 손가락을 잃었고 열 손가락을 모두 잃은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저강도 공격 수단이 동원된 전쟁도 그 결과는 얼마든지 참혹할 수 있다.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얼굴 없는 전사자들이 많다고 한다. 자폭 드론이 병사들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 머리 위에서 터지기 때문이다. 군번줄도 함께 사라져 버려 기존 방식으론 전사자 신원 확인마저 어려울 지경이다. 컴퓨터 게임을 하듯 프로그램과 조이스틱 조작으로 손쉽게 인명을 해치는 것이다. 냉전 이후 오랜 휴지기 끝에 다시 시작된 전쟁은 예전보다 한층 더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9-20 세계 최고 수준 인정받은 한국 의료, 하지만…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월드 베스트 전문 병원(World’s best specialized hospitals)’ 명단에 한국 병원이 대거 선정됐다. ‘월드 베스트 전문 병원’은 의사, 의과학자 등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 환자 만족도, 치료 성공률 등 의료 성과 지표 등을 종합해 순위가 결정된다. 암, 신경과, 내분비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12개 임상 분야에서 각각 최고 병원의 순위를 매겼다. 한국은 암 치료 상위 300위 안에 16곳이, 내분비과는 150위 안에 21곳이, 소아과는 250위 안에 25곳이 포함됐다. 나머지 임상 분야에서도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암 분야에선 삼성서울병원이 3위, 서울아산병원이 5위, 서울대병원이 8위를 차지했다. 메이오 클리닉, MD앤더슨 암센터 등 세계적인 병원에 뒤지지 않는다. 암 치료를 잘하는 덕분에 우리나라 암 환자 10명 중 7명은 암을 진단받고 5년 이상 생존한다. 사실상 완치라는 판정을 받는단 뜻이다. 우리나라 위암 생존율은 68.9%로 미국의 2배, 영국의 3배 정도다. 대장암 생존율도 71%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 병원의 경쟁력은 공보험 체제 아래서 민간 병원이 경쟁하는 독특한 의료 시스템에서 나온다. 암 환자의 경우 진료비의 5%만 낸다. 나머지는 국민건강보험에서 부담한다. 환자가 쉽게 병원을 찾을 수 있으니 병원에는 그만큼 많은 임상 데이터가 축적된다. 서울 대형 병원들은 한 해 1만∼2만 건씩 암 수술을 한다. 환자 유치를 위한 민간 병원의 치열한 경쟁도 실력이 뛰어난 이유다. 로봇 수술 등 새로운 치료법에 적극적으로 도전한다. 우수한 인재들이 꾸준히 유입된 덕분도 있다.
▷이런 비약적인 발전이 약 70년 동안 이뤄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놀랍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의료의 씨앗이 뿌려진 건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1955년 서울대 의대 소속 의사 12명이 미네소타대 의대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다. 이들이 돌아와 심장병 수술을 했고, 감염병 퇴치에 나섰다. 지금은 해외에서 우리나라에 의술을 배우러 온다. 이번 뉴스위크 순위에서 서울대병원은 상위권에 올랐지만 미네소타대병원은 아예 순위 밖이었다.
▷하지만 의정 갈등의 장기화로 한국 의료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상급종합병원의 암 수술 건수가 급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7월 위암 대장암 간암 등 6대 암 수술 건수는 3만8000여 건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7%가량 줄었다. 전문의는 진료와 수술에 지쳐 연구를 할 수 없는 처지다. 수련받는 전공의가 없으니 대단한 술기가 전수되지 않는다. 힘들게 쌓은 탑이 무너질 판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9-21(토) 통일운동가 임종석의 통일 지우기

30년 넘게 통일운동가를 자처해 온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통일, 하지 말자”고 말해 논란이다. 그는 “통일 강박관념을 내려놓자. … 당위와 관성으로 통일을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다. 그제 광주에서 열린 9·19 남북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다. 문재인 정부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인 그가 민주당이 배출한 대통령 3명이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합의했던 통일의 당위와 필요성을 부인한 것이다. 그 자리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통일은 겨레의 여망”이라고 손잡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도 함께 있었다.
▷1980년대 말 전대협 의장 시절 ‘통일의 꽃’ 임수경을 평양에 보냈던 그는 2000년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남북 간 교류 확대를 주장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했고, 대북송금사건 특검 수사에 반대했다. 대통령비서실장직을 떠날 때 “원래 자리로 돌아가 통일 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통일이 좋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통일, 하지 말자”고 말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임 전 실장은 연설에서 ‘통일 유보’ 주장을 두 가지 이유로 설명했다. 남북 간 화해 협력에 거부감이 생긴다는 것이 하나고, 통일을 유보할 때라야 남북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북한의 불법적 핵무기 개발이 핵심적인 이유라는 사실조차 그는 외면했다.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는 그의 주장은 김정은의 올 초 발언과 흡사하다는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김정은은 올 초 “남북은 더이상 동족관계가 아니며, 두 개의 적대적 국가”라고 선언한 뒤 초강경 대남 압박을 주도해 왔다.
▷뒤이어 연단에 오른 문 전 대통령은 “기존의 평화와 통일 담론을 전면 재검토하자”고 화답하듯 말했다. 이 말은 “북한이 연방제 통일론 등을 폐기한 것으로 해석되는 만큼 비현실적 통일 논의는 접자”는 임 전 실장 생각과 상통한다. 연설 내용이 알려진 뒤 용산 대통령실과 여당이 비판에 나섰는데, 문재인 정부 외교부 차관 출신이 나서 방어막을 쳤다. 이날 연설이 돌출행동이 아니라 사전에 조율된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임 전 실장은 차제에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한 헌법 3조도 없애거나 고치자고 했다. 그러나 북한 땅을 우리 영토로 여길 때 북한 주민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다. 이 조항을 폐기하면 탈북자를 보호할 법적 근거가 없어진다. 임 전 실장은 왜 이 시점을 골라 이런 연설로 논란을 일으켰을까.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라는 북한의 주장에 편승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의 위험성을 부각하는 것이 1차 의도일까. 여전히 남는 의문으로, 앞으로 문재인 정부 사람들이 주장을 추가로 내놓을 때 속뜻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9-23(월) 폐지 줍는 노인 다닐 길이 없다

폐지 줍는 노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추석 연휴 뒤인 20일 새벽에도 경기 고양시의 편도 3차로 도로에서 폐지 수거용 리어카를 끌던 60대 여성이 뒤따르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들이받혀 숨졌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 ‘그러게 왜 인도를 놔두고 차도로 다니냐’며 혀를 차는 이들이 적지 않다. 리어카가 폐지나 고물을 실은 채 차도를 서행하면 ‘교통 흐름을 방해한다’며 경적을 울리거나 욕설을 하는 운전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리어카를 끄는 노인 대부분은 인도로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갈 수가 없어서 차도로 다닌다. 도로교통법상 너비 1m가 넘는 손수레는 차(車)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폐지 수집 노인의 43%가 리어카를 쓰는데, 대개 폭이 1m를 넘는다. 보도(인도)와 차도가 구분된 도로에서 이런 리어카는 차도로 통행해야 한다. 인도로 가면 자동차가 인도를 주행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차도가 따로 있는 도로에서 인도로 가다가 보행자를 치기라도 하면 12대 중과실 사고에 해당돼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폐지 수집 중 교통사고 경험률(6.3%)이 전체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 경험률(0.7%)보다 훨씬 높은 원인 중 하나다.
▷리어카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상상만 해도 아찔한 위험을 감수한다. 리어카는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도로에서 맨 오른쪽 차로로 다니도록 돼 있다. 해당 차로를 불법 주차 차량이 점유한 경우엔 부득이하게 왼쪽 차로를 일부 침범하게 된다. 가로변에 버스전용차로가 있는 도로에선 전용차로 왼쪽이 지정 차로다. 이런 도로에선 왼쪽 차로의 일반 차량과 오른쪽 차로의 버스 사이를 곡예 하듯 다녀야 한다.
▷동네 주택가 이면도로만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소리다. 지난해 말 정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폐지를 주로 집 근처(4km 이내)에서 수거하는 노인은 전체의 43%였고, 나머지는 그보다 훨씬 먼 거리까지 이동하며 폐지를 수집했다. 전체의 47%는 상가·사무실 지역에서 폐지를 주웠고, 주거지역과 상가 등을 가리지 않고 전 지역에서 줍는 이들도 28%였다. 그렇게까지 다니면서 폐지를 주워도 손에 쥐는 돈은 하루 평균 6000원 남짓이었다.
▷일정 크기 이상의 손수레를 차로 분류하는 현행법은 소달구지와 마차가 자동차와 함께 도로를 달리던, 그래서 일반 도로의 통행 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던 과거 시대의 유산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제 도로에서 우마(牛馬)는 사라지고 폐지 줍는 노인만 덩그러니 남아 자동차에 치이는 위험을 감내하고 있다. 당장 노인 빈곤을 해소할 수 없고, 모두에게 폐지 수거보다 나은 다른 일자리를 제공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좀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9-24 200년 만의 폭우 쏟아지더니 하루 만에 가을

으레 긴 옷을 입고 차례를 지냈던 추석인데 이번에는 에어컨조차 끌 수 없었다. 아무리 이른 추석이라지만 연휴 내내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웃도는 이상한 날씨였다. 지독하게 덥고 길었던 여름을 밀어낸 건 여름 장마보다 무섭게 내린 가을 폭우였다. 19∼21일 사흘 동안 남부 해안과 제주 산지에는 최대 500mm 이상, 남부 내륙과 충청에는 200∼300mm 안팎의 비가 쏟아졌다. 경남 창원에는 21일 하루 397.7mm, 시간당 최대 104.9mm의 비가 내렸는데 기상청은 “200년 만에 한 번 내릴 만한 비”라고 했다.
▷비가 그치자 청명한 가을 날씨가 찾아왔다. 전국적으로 낮 최고기온이 25도 안팎이라 아직 여름이 끝났다고 보긴 어렵다. 하루 평균 기온이 20도 밑으로 떨어지고 다시는 올라가지 않아야 비로소 가을이 시작됐다고 본다. 하지만 기온이 갑작스럽게 10도 가까이 뚝 떨어진 탓에 체감상 쌀쌀하게 느껴진다는 사람이 많다. 제주는 폭우가 지나간 21일 밤에야 75일간 이어지던 열대야가 공식적으로 끝났다.
▷일주일 새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나타나는 예측 불가능한 날씨는 과거와 다른 대기의 순환에서 비롯됐다. 여름은 보통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데 고온건조한 티베트 고기압과 중첩돼 ‘이중 열 커튼’이 형성되면 폭염이 찾아온다. 티베트 고기압이 이례적으로 한 달 이상 머물면서 이번 추석까지 폭염이 이어졌다. 올여름 유독 태풍이 힘을 쓰지 못한 이유도 티베트 고기압에 막혀 한반도를 비켜 갔기 때문이다.
▷극한 폭우를 불러온 14호 태풍 ‘풀라산’도 열대 저압부로 세력이 약화해 한반도에 진입했다. 엄청난 양의 뜨거운 수증기는 그대로 머금은 채였다. 그사이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이 남하하고, 더운 북태평양 고기압이 버티면서 정체전선이 형성됐다. 두 기압 사이 갇힌 수증기가 극한 호우를 뿌렸다. 짧은 가을장마의 원인은 여느 해와 다를 바 없지만 수증기량이 늘어 강수의 강도가 세졌다. 지구 온도가 1도 올라갈 때마다 대기 중 수증기량이 7%씩 늘어난다고 한다.
▷이런 기상 이변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온도 상승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일정했던 대기의 순환이 해수면이 뜨거워지면서 엉클어진 것이다. 특히 북반구 중위도에 있는 한반도는 여름에는 위력적인 태풍이, 겨울에는 극단적인 한파가 찾아올 가능성이 커졌다. 해수면 온도가 오르면 태풍은 습해지고 강력해진다. 빙하가 녹아 북극 주변에 찬 공기를 가두고 있던 소용돌이(vortex)가 약해지면 한반도까지 한파가 내려온다. 올해도 가을다운 가을날은 거의 없고 곧바로 한파가 닥칠 것으로 예고됐다. 인간이 만든 재앙인 지구 온난화가 이제는 인간을 덮치고 있다. 지구에서 서로 연결되지 않은 존재는 없다는 사실이 새삼 섬뜩하게 다가온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9-25 퀄컴에 인수설까지… ‘반도체 제국’ 인텔의 굴욕

PC와 노트북마다 붙어 있던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파란색 스티커는 품질 보증서였다. 인텔의 중앙처리장치(CPU)가 들어가 있다는 뜻으로, ‘반도체 제국’ 인텔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지금 제국은 붕괴의 위기에 놓여 있다.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이 인텔에 인수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수합병(M&A)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는 탄식이 나온다. 미국의 한 자산운용사가 인텔에 50억 달러(약 6조7000억 원) 투자를 제안한 것도 ‘제국’으로선 굴욕이다.
▷인텔의 적자 규모는 올해 1분기 3억8100만 달러에서 2분기 16억1000만 달러로 불어났다. 반도체 종목으로 구성된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가 올해 들어 20% 오르는 동안 인텔 주가는 55%나 빠졌다. 급기야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에서도 퇴출될 위기에 몰렸다. 인텔은 전체 직원의 15%인 1만5000명을 해고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를 분사하는 등의 구조조정안을 내놨다.
▷인텔은 반도체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적회로(IC)를 발명한 로버트 노이스, 그리고 IC의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로 향상된다는 ‘무어의 법칙’을 만든 고든 무어가 함께 1968년 창업했다. 사명인 인텔(Intel) 자체가 ‘집적 전자공학(Integrated Electronics)’의 약어다. 1970년 세계 최초로 D램 반도체를, 1971년 최초의 CPU를 선보였다. 이후 PC 대중화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MS)와 ‘윈텔(윈도+인텔) 동맹’을 맺고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다.
▷‘외계인을 납치해 기술을 개발한다’는 소문이 나올 정도로 기술력을 자랑했던 인텔은 이후 PC에서 모바일, 인공지능(AI)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했다. 2006년 애플의 아이폰용 칩 생산 요구를 거절할 정도로 변화에 둔감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연구개발(R&D) 투자를 줄이면서 기술 경쟁력이 뒤처졌고, 조직이 비대화되며 의사결정은 굼떴다. “관료제가 인텔을 멍청한 회사로 만들어 놓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압도적 1등이던 인텔의 몰락은 반도체로 먹고사는 한국으로선 남의 일이 아니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반도체를 비롯한 정보기술산업의 속성이다. 한때 휴대전화 시장을 호령하던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스마트폰 시대로의 이행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처럼, 혁신의 아이콘이 혁신을 게을리하다 도태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인텔의 굴욕’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유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9-26 반가운 아이 울음소리… 코로나 기저효과 넘어설까

한국 저출산 문제의 해결사로 주목받아 온 것이 에코붐 세대다. 2차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로 출생률이 높았던 연령군이다. 올해 28∼33세로 결혼 적령기가 된 이들이 코로나로 미뤄둔 결혼과 출산을 하면 올해 출산율이 바닥을 찍고 반등해 2040년엔 1.19명이 된다는 것이 정부 추계다. 그런데 올 7월 출산과 혼인 건수가 모두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출생아 수는 2만601명으로 1년 전보다 7.9% 증가했다. 17년 만에 최고 증가율이다. 혼인 건수도 33% 늘었다. 코로나 기저효과 덕분일까, 정말 출산율이 반등하는 걸까.
▷출산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많고 그 방향도 일정하지 않다. 다만 산업 국가의 경우 이민자의 유입이 없으면 현재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대체출산율(2.1명) 이하로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후 서구 선진국들의 출산율이 반등하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성평등 수준이 높아진 덕분이라고 해석한다. 여성의 학력과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아지면 출산율은 떨어지지만 부부가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하고 일과 가정 양립이 수월해지면 1.5명 안팎까지 반등한다는 것이다.
▷이는 같은 서유럽 국가들 중에도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은 출산율 반등에 성공한 반면 이탈리아는 저출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프랑스(1.83명)는 ‘셋째 낳기’를 목표로 현금, 서비스, 시간 지원 정책을 펴고 있다. 독일(1.58명)은 ‘남편은 생계, 부인은 양육’이라는 전통적 가족 모델부터 바꿨다. 스웨덴(1.67명)은 부모가 동시에 쓸 수 있는 육아휴직을 30일에서 60일로 늘리는 방안까지 추진 중이다. 유독 이탈리아(1.25명)만이 1.3명 이하의 초저출산 문제로 시름이 깊은데 뿌리 깊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 탓이라는 분석이다.
▷한국도 남성의 가사 분담률이 선진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특히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출산율을 좌우하는 새로운 요인으로 꼽히는 것이 불안감과 좌절감이다. 엄마, 아빠가 되는 나이는 각각 32.5세와 35세인데 평균 퇴직 연령이 49세다. 14∼17년 정도 일할 수 있으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출산을 꺼리게 된다. 소셜미디어로 유통되는 온갖 출산과 육아 정보도 불안감과 박탈감을 부추기고 있다는 진단이다.
▷‘2023년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자녀를 가질 계획이 있는 청년들의 비율이 3년 전보다 늘어났다. 하지만 출산의 희망이 실제 출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희망 자녀 수 차이가 0.2명일 때 출산율 차이는 0.8명이었다. ‘출산 의도 실현의 실패’ 탓이다. 원하는 만큼 낳고 키우도록 불안감과 부담감을 덜어준다면 기적처럼 출산율도 반등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9-27 고향 떠나 상경한 청년들 “돈은 더 벌어도 덜 행복”

한국의 인구 이동, 특히 청년들의 이동은 수도권으로의 일방통행이다. ‘인서울’ 대학 진학을 통해 상경한 청년들은 학업을 마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방에서 대학을 나온 청년들도 일자리를 찾아 다시 수도권으로 몰린다. 매년 10만 명의 청년이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향한다.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들이 비수도권에 남은 청년들보다 돈은 많이 벌지만 행복감은 더 낮고 ‘번아웃’(소진) 경험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
▷통계청이 26일 발간한 ‘통계플러스 가을호’를 보면 19∼34세의 비수도권 출신 청년 가운데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의 연평균 소득은 2022년 기준 2743만 원으로, 비수도권에 남은 청년(2034만 원)보다 709만 원(34.9%) 더 많았다. 청년 인구 대비 취업자 비중도 수도권으로 간 청년(72.5%)이 지역에 남은 청년(66.4%)보다 높았다. 1000대 기업 본사의 73.6%가 밀집해 기회가 더 많은 수도권으로의 이동이 취업과 소득을 위해서는 ‘합리적’ 선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삶의 질을 보면 정반대였다. 수도권으로 떠난 청년이 느끼는 행복감은 10점 만점에 6.76점으로 비수도권에 남은 청년(6.92점)보다 낮았다. ‘최근 1년간 번아웃됐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답한 수도권 이동 청년은 42.0%로, 비수도권 잔류 청년보다 12.3%포인트 높았다. 수도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청년들은 건강이 더 나빴고, 더 좁은 집에 살았다. 더 오래 일했고 통근 시간도 길었다. 높은 주거비 부담 때문에 빚도 더 많았다. 낯선 환경에서 느꼈을 두려움과 외로움은 통계 숫자론 담아낼 수 없다.
▷숨막히는 환경을 벗어나 가족과 친구가 있는 지방으로 돌아가려 해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두렵다. 가장 먼저 발목을 잡는 건 역시 일자리다. 지방에 살아본 청년들은 공무원 말곤 마땅한 사무직군의 정규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일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통, 교육, 주거, 의료, 문화, 쇼핑 등의 인프라도 수도권에 비해 부족하다. 청년들을 지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일자리와 인프라가 한곳에 모인 ‘도시 거점화’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청년들 앞에 놓인 현실은 축구장 반쪽에서 열리는 축구 경기 같다. 한쪽에선 공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몸싸움 속에 부상자가 속출하는데, 이를 지켜보는 반대쪽에선 그저 공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만으로도 부러울 뿐이다. 청년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계속 공부하고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번아웃과 열패감, 수도권 집중과 지역 소멸이 공존하는 마이너스 게임을 이젠 그만할 때가 됐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9-28(토) 50년 시한에 쫓기는 제7광구 한일 공동자원 개발

“해저 자원을 두 나라 이상이 공동 개발한다는 발상은 1969년 (유럽) 북해 대륙붕 분쟁 사건에 대한 국제사업재판소 판결에 의해 제기된 바 있으나, 실제 실천에 옮기게 되는 것은 한일 간 대륙붕 협정이 처음이다.” 1978년 1월 8일자 동아일보는 ‘세계 최초의 석유 공동개발’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그해 6월 한일공동개발구역(JDZ) 협정 발효로 개발이 시작되는 ‘제7광구’의 의미를 이렇게 소개했다.
▷어제 한일 정부가 JDZ 협정에 따른 6차 한일 공동위원회를 도쿄에서 개최했다. 1985년 5차 회의 때 만난 후 39년 만에 마주 앉은 것이다. 협정은 발효로부터 50년이 지난 2028년 6월에 종료된다. 자동 종료 시점으로부터 역산해서 3년 전인, 내년 6월부터는 양국 중 어느 쪽이라도 종료를 선언할 수 있다. 협력을 계속할 생각이 있다면 양국이 더는 협상을 미룰 수 없는 시점이다.
▷제주도 남쪽 200km 바닷속 7광구가 처음 주목받은 건 1969년 유엔 아시아극동경제개발위원회가 관련 보고서를 펴내면서였다. 이 보고서는 “한국 서해와 동중국해 대륙붕에 바다 기준 세계 최대 매장량의 석유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듬해 박정희 정부는 발 빠르게 7광구에 대한 영유권을 선포했다. 수심 200m 이내의 대륙 연장부인 대륙붕이 어느 나라 땅에 연결됐느냐에 따라 개발권을 부여하던 당시 국제법은 한국에 유리했다.
▷1973년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회원국들은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한 서방을 상대로 석유 금수조치를 개시했다. ‘1차 오일쇼크’다. 배럴당 3달러였던 국제유가가 12달러로 뛰었다. 거리만 보면 한국보다 7광구에 가까운 일본은 마음이 급해져 강하게 권리를 주장했다. 자원을 개발할 기술, 재원이 부족한 한국은 1974년 공동 개발을 결정했다.
▷한국석유공사와 일본석유산업단이 1978∼1987년, 2002년 두 차례 7개 시추공을 뚫는 등 공동 탐사를 벌였지만 경제성 있는 유정을 찾지 못했고, 일본은 소극적 태도로 돌아섰다. 탐사·시추를 공동으로 해야 하는 조항 때문에 한국도 발이 묶였다. 1982년 바뀐 국제해양법이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인정하는 등 거리 중심으로 바뀌면서 7광구 상당 부분이 일본에 귀속될 가능성이 커지자 고의로 개발을 미룬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하지만 협정이 종료되더라도 7광구는 한일 대륙붕이 중첩되는 곳이어서 상대국 동의 없는 일방적 개발은 어렵다. 게다가 중국은 한일 협정 초기부터 7광구가 중국에서 뻗은 대륙붕이라는 주장을 펴며 인접 지역에 시추공을 뚫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마음을 열고 7광구를 협력의 장으로 키워 내지 못하면 괜히 주변국 좋은 일만 시킬 수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9-30(월) 청약 당첨 ‘5인 이상 대가족’ 이렇게 많다고?

3대 대가족이 한 울타리에 모여 사는 것은 요즘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든 판타지에 가까운 풍경이다. 1970년대만 해도 다섯 명을 거뜬히 넘겼던 전국 평균 가구원 수가 지난해 2.2명으로 쪼그라들면서 ‘한 지붕 세 식구’도 흔치 않다. 과거 3∼4인 가족에 특화된 전용면적 84㎡(34평형) 아파트가 ‘국민 평형’으로 불렸다면, 최근 소형 가구에 적합한 전용 59㎡(25평형)가 대세로 떠오른 이유다.
▷하지만 아파트 청약 시장만큼은 예외다. 대가족을 부양하는 청약 당첨자들이 쏟아지고 있어서다. 올 들어 서울에서 ‘청약 가점제’로 분양된 아파트를 보면, 당첨자 10명 중 3명꼴로 70점 이상의 가점을 받았다. 이는 5인 이상 대가족이어야 받을 수 있는 점수다. 특히 강남 3구에서는 청약 당첨자의 80% 이상이 5인 이상 대가족이었다. 당첨만 되면 시세차익 20억 원을 번다고 해서 ‘20억 로또’로 불렸던 서초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84점 만점 당첨자도 여럿 나왔다. 자녀 셋을 키우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7인 가족이어야 가능한 점수다.
▷꽤 오랫동안 복권처럼 ‘뽑기 운빨’이 이끌었던 청약 시장은 2007년 청약 가점제가 도입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가점제는 청약저축 가입 기간(17점), 무주택 기간(32점), 부양가족 수(35점)별로 점수를 매겨 합산 점수(총점 84점)가 높은 순으로 당첨자를 정하는 방식이다. 무주택과 청약통장 가입 기간은 각각 15년, 부양가족은 본인을 제외하고 6명 이상이어야 만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15년을 꼬박 다 채운 청약통장 만점자가 330만 명에 육박하면서 부양가족 점수가 청약의 당락을 가르는 결정적 변수가 돼 버렸다. 게다가 몇 년 전만 해도 100% 가점제로 공급되던 서울 중소형 아파트에 추첨제 물량이 대거 풀렸다. 줄어든 가점제 물량을 두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청약 점수, 특히 부양가족 점수 인플레이션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현행 가점제에서 부양가족으로 인정받으려면 직계존속이 청약 신청자와 3년 넘게 같은 주민등록등본에 올라 있으면 된다.
▷하지만 이를 서류로만 입증하면 돼 부모나 성인 자녀 등을 위장 전입시켜 부양가족 점수를 올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최근 3년간 적발된 부정청약의 70%가 위장 전입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부양가족이 많은 무주택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 기회를 주겠다는 제도가 편법과 불법을 부추기는 꼴이다. 부양가족 한 명당 5점씩 가점을 주는 현행 제도에서 1, 2인 가구는 청약 당첨의 꿈조차 꿀 수 없다. 1인 가구 ‘천만 시대’에 발맞춰 청약 제도를 서둘러 손봐야 하는 이유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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