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機의 韓半島(外交) 2024-09/ 09.02 캠프데이비드 정상회담, 일회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 09-30. 이시바 새 일본 총리가 ‘물컵의 반’ 더 채워 가길 기대한다
危機의 韓半島(外交) 2024-09/
09.02 캠프데이비드 정상회담, 일회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내년도 미래에도 영원히 함께" 1년 전 바이든 호언, 지금까진 허언
美日 리더십, 모두 흔들렸기 때문
원래 세 사람 중 윤 대통령만 남아… 하지만 일회성으로 끝나면 안 돼
새 미국 대통령·일본 총리가 3국 협력 체계 이어가길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8월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인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8.18/대통령실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기자회견에선 국민연금개혁이나 의대 정원만큼이나 중요한 질의응답이 하나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정상교체로 한·미·일 협력 구도, 캠프데이비드 협력체계가 바뀔 가능성을 묻자 윤 대통령은 “지속 가능성 효력이 그대로 인정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윤 대통령은 “캠프데이비드 협력체계라는 것은 인도‧태평양 지역, 글로벌 경제안보에 매우 중요하다”면서 “한·미·일 3국에도 매우 이익이 되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지도자 변경이 있다고 해서 바뀔 것은 아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도 작년 8월 18일 한·미·일 정상회의 직후 “오늘 우리는 첫 3국 단독 회의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연례 정상회담에 합의해서 역사를 만들었다”면서 “우리는 올해만이 아니라 내년만도 아니라 영원히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그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1주년이 된 날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한글본으로는 836자 분량, 3문단짜리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1주년 한·미·일 정상 공동성명’이 올라왔을 뿐이다.
필자는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 직후 이 지면에 “지속가능한 ‘캠프 데이비드’를 위하여”라는 칼럼을 실었다. “내년엔 이 회의가 문제없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듬해인 2025년에도 열릴까? 모를 일이다”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4년 11월 미 대선에서 이기면 캠프데이비드 체계가 무너질 것이고 2027년 한국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도 ‘전방위적 청산 작업’이 진행될 거라 전망했다.
근데 그 전망도 틀렸다. 올해도 못 열렸다. 바이든 대통령이나 기시다 일본 총리가 입장을 바꾼 것도 아니고 세 나라 사이에 균열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미국과 일본의 리더십이 흔들려서다. 바이든은 노쇠한 모습을 연달아 노출해 지지율이 하락하자 결국 지난 7월에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기시다는 비자금 스캔들 등으로 낮은 지지율에 허덕이고 보궐선거에서 연패하자 8월에 자민당 총재 경선 불출마, 즉 총리직 사퇴를 선언했다.
바이든과 기시다 두 사람이 모두 정치적으로 멀쩡했다면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직전에 한·미·일 정상회의가 캠프데이비드나 미국 내 다른 상징적 장소에서 열렸을 거다. 미국에서 한·미·일 협력 강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다. 바이든과 트럼프는 “내가 한국 기업의 투자를 더 많이 유치했다”고 다투는 판이다. 기시다는 자민당 총재 불출마 기자회견에서조차 한·일 관계 개선을 치적으로 내세웠다.
일단 “올해만이 아니라 내년만도 아니라 영원히 하겠다는 것”이라는 1년 전 바이든의 호언은 현재까진 허언이다. “한·미·일 3국에도 매우 이익이 되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지도자 변경이 있다고 해서 바뀔 것은 아니다”는 윤 대통령의 지난주 호언은 어떨까? 모를 일이다. 민주당 해리스 후보가 당선되면 캠프데이비드 협력체계의 틀은 당장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누가 될지 모르지만 자민당 출신 일본 새 총리도 딴소리를 하진 않을거다. 다만 포장지나 형식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공화당 트럼프 후보가 당선된다면? 물론 트럼프 역시 대중 견제를 위해선 인도·태평양 전략, 한·미·일 협력체계를 밀고 갈 것이라는 전망이 많긴 하다. 하지만 트럼프는 바로 엊그제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주 존스타운 유세에서 “김정은의 핵 역량은 매우 실질적이다. 그와 잘 지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현명하고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 직후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국내 방송에 출연해 “트럼프 1기 때도 한·미·일 정상회의를 했고 한·미·일 안보협력을 중시한다는 기조로 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내 회담 개최 가능성을 열어뒀다. 조 장관 말이 맞다. 트럼프가 선거용으로 바이든과 각을 세우고 있을 뿐이지 집권하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한·미·일 협력 강화와 북한에 대한 단호하고 원칙적인 대응은 여러 국정 분야 중에서도 윤 대통령과 이 정부가 뿌듯하게 생각하는 분야다. 다른 영역에 비해선 국민과 전문가의 평가도 낫다. 과거사와 전통적 갈등 사안에 대한 ‘윤석열식 정면돌파’를 통한 한일 관계 개선은 그에 비해 지지가 떨어지고 논란이 적지 않지만 윤 대통령 본인의 의지와 자부심은 상당하다.
이 모두는 대선 승리 이후 윤 대통령이 전 정부의 방향성을 뒤집어서 추진한 것들이다. 그래서 3년 후에는 거꾸로 A.B.Y(Anything But Youn, 윤석열이 한 것과는 다 반대로)라는 말이 유행할 수도 있다. 옳은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옳은 것이다.
조선일보 윤태곤 정치칼럼니스트
09.03 북∙중 삐걱? 소설 쓰지 말라더니…중국 "북한 선수 대북제재"

▲2022년 9월 29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 올림픽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농구 조별리그 C조 경기가에서 북한 박진아가 자국 선수들과 하이파이브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중국 정부가 자국 여자 프로농구 리그에 진출한 북한 선수가 이적 직후 갑작스럽게 귀국했다는 보도에 대해 이례적으로 "대북 제재 이행"을 언급했다. 두 달 전만 해도 북·중 간 이상기류 조짐을 공식 부인했던 것과는 온도 차가 큰 입장이다.
3일 미국의소리(VOA)에 따르면 류펑위(劉鹏宇) 주미 중국대사관 대변인은 전날 북한 여자농구 선수 박진아에 대한 '비자 발급 거부 및 귀국 조치' 보도와 관련한 서면 질의에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한다"면서도 "중국 정부는 원칙적으로 북한에 대한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항상 완전하고 엄격하게 이행해왔다"고 밝혔다.

▲린젠(林劍) 34대 중국 외교부 대변인. 신경진 특파원
중국 정부는 그동안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대북제재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고 강조해왔지만, 최근 북한과의 이상기류를 드러내는 상황과 관련해 이런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오히려 이런 추측에 대해 그간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입장이었다.
지난 7월 초 린젠(林劍)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이 재중 북한 노동자의 비자 연장을 거부했다는 보도에 대해 "최근 한국 일부 매체는 수시로 중조(북·중)관계가 어떻다, 어떻다 하는 소식을 내보내면서 몇몇 실체 없는(捕風捉影·바람과 그림자를 잡으려 함) 억측과 과장된 선전(炒作)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나는 관련 매체가 전문적 수준을 견지한 채 사실에 근거해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뉴스를 소설처럼 쓰지 않기를 바란다"면서다.
앞서 북한 여자농구대표팀 소속으로 센터 포지션을 맡고 있는 박진아 선수는 지난 6월 중국 여자프로농구팀에 '우한셩판(武漢盛帆)'에 입단했다. 그는 소속 팀의 컵 대회 준우승에 일조하는 등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으나, 입단 한 달여 만에 돌연 북한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우리 정보당국은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며 사실상 이를 확인하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해 8월 16일 오전 북한 신의주를 출발한 버스 2대가 압록강 철교(중국 명칭은 중조우의교)를 통해 북중 접경 지역인 중국 랴오닝성 단둥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북·중 양국이 스포츠, 통신(기지국), 문화 콘텐트 등 이른바 '연성 이슈'에서조차 갈등을 빚는 듯한 상황에 주목한다. 비정치적 영역에서의 교류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양국 간 신뢰가 떨어졌다는 뜻일 수 있어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표면적으로 비정치적인 연성 이슈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북한에 더 타격을 줄 가능성이 크다"며 "북·중 관계가 생각보다 심각한 균열을 만들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국가정보원 유관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ㆍ전략연)은 이날 대북제재가 강화된 2017년 이후 북한이 불법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약 63억 달러(약 8조 4325억원)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대북제재 이후 북한 외화수지 추정Ⅱ)'를 내놨다. 고강도 대북제재로 인한 북한의 대외수지 적자가 크지만, 불법 거래로 이를 상당 부분 상쇄하고 있다는 게 보고서의 분석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외화벌이에서 석탄 밀수출이 21억 5000만 달러(약 2조 8818억원)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해외 파견 노동자 임금과 사이버 분야가 각각 17억 5000만 달러(약 2조 3451억원)와 13억 5000만 달러(약 1조 8091억원)로 그 뒤를 이었다. 또 북한이 지난해 러시아에 각종 군수물자를 제공해 올린 수입은 5억 4000만 달러(약 7237억원)로 추산했다.
정영교·이유정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09.06 [단독] 맥매스터 "文, 김정은 말만 믿고 美에 왜곡된 정보 전달"
前 안보보좌관 맥매스터 인터뷰
"6·25 이후 모든 공격은 北 소행
핵은 방어용? 文발언 말 안돼"

▲허버트 R 맥메스터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4일 본지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11월 대선에서) 재선하면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과 다시 만나려 할 것”이라며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주한 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겠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맥메스터는 트럼프 행정부 때인 2017~2018년 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사진은 그가 2018년 3월 미 워싱턴DC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연설하던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김정은이 (공격이 아닌) 방어를 위해 핵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발언은 말이 안 됩니다. 6·25 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공격은 북한에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문 대통령이 김정은의 주장을 믿어주기로 했고, 따라서 왜곡된 정보를 미국에 전달했다고 봅니다.”
허버트 R 맥매스터(62)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4일 본지 화상 인터뷰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이같이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두 번째 안보보좌관을 지낸(2017년 2월~2018년 3월) 3성 장군 출신의 맥매스터가 지난달 27일 출간한 회고록 ‘우리 자신과의 전쟁: 트럼프 백악관에서의 나의 임무 수행’은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책에서 트럼프 집권 5개월 뒤인 2017년 6월 첫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방미한 문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은) 방어를 위해 핵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을 뿐”이라고 해 마이크 펜스 당시 부통령과 언쟁을 벌였다고 폭로했다. 한·미 안보 당국이 북학의 도발 대응 및 비핵화 방향을 두고 지속적으로 이견(異見)을 보였다고도 했다.
맥매스터는 본지에 “문 정부는 북한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북한에 전하고, (동시에) 트럼프와 미 행정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우리에게 전하면서 중매자(matchmaker) 역할을 하려 했다”며 “그러나 결론적으로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그가 전달한 메시지는 지나친 낙관에 기반한 왜곡에 가까웠다”고 했다.
맥매스터는 안보보좌관 시절 북한에 대한 제재 등 압박을 강화해 비핵화 목표를 달성한다는 ‘대북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정책을 입안해 트럼프를 설득시킨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 등 미국의 적성 국가에 대한 대응 문제를 두고 트럼프에게 직언하다가 2018년 3월 경질됐다. 이후 강경파 존 볼턴이 후임에 임명됐다. 맥매스터는 11월 미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재선될 경우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묻자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트럼프가 재선될 경우 김정은과 다시 정상회담을 하려고 할 것이다. 나는 그가 또 한 차례 회담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이길 바란다”고 했다.

▲허버트 R 맥매스터 전 국가안보보좌관이 출간한 회고록 '우리 자신과의 전쟁: 트럼프 백악관에서의 나의 임무 수행'.
육군 중장 출신의 맥매스터는 뛰어난 전쟁 지략가(war thinker)로 평가받는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임기 초기 ‘화염과 분노’ ‘핵 버튼’ 등 설전을 주고받을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내 균형추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본지에 “북한과의 협상을 위한 한미 연합훈련 축소는 트럼프의 크나큰 실수”였다면서도 “트럼프가 항상 무모한 결정을 내렸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의 파괴적인 성격이 (북한이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도록) 대북 압박 전략을 실행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도 됐다”고 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트럼프는 집권 초기 참모들에게 강력한 대북 압박을 주문했지만, 이후 기조를 바꿔 김정은과 대화를 추진했다.
-트럼프 대북 정책의 방향이 전환된 이유는 무엇인가.
“트럼프 스스로가 생각을 바꿨다. 그만큼 트럼프는 기존 정책을 파괴하는 성향(disruptive)이 강한 사람이다. ‘전략적 인내’를 원칙으로 한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북한 핵 억제에) 효과가 없다는 게 분명해졌던 만큼 취임 초기엔 (인내하지 않는 트럼프의 성격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 대북 압박에 도움이 됐다. 문제는 자신의 협상 능력에 대한, 트럼프의 과도한 자신감이었다. 트럼프는 김정은과 (섣부른) 정상회담을 갖고 유화적인 말을 내뱉음으로써 대북 압박이 완화되고 대북 제재 이행이 저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트럼프가 재선하면 김정은과 다시 만나려 할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달성하려고 하는 목표가 CVID이길 바란다. 전 세계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임기 초기 트럼프에게 대북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원칙을 보고했다. 북한과 성급하게 대화 테이블에 앉지 말고, 외교와 군사적 옵션을 별개의 방안으로 분리해서 고려하지 말고, 단순히 대화 테이블에 나왔다는 이유로 성급하게 북한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이를 받아들였고 한동안 지켰다고 생각한다. 이 원칙은 지금도 유효하다. 혹시 ‘2기’가 온다면 그가 이 원칙을 지키길 나는 바란다.”
-김정은도 트럼프의 재집권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나.
“동의한다. 김정은이 그에게 바라는 건 ‘약한 합의(weak agreement)’다. 장거리 미사일 일부는 포기하더라도 기존 핵무기와 (대남용) 단거리 미사일은 계속 보유하려고 버틸 가능성이 크다. 그런 다음 트럼프가 해외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데 대해 회의적이라는 점을 이용해 미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런 모든 김정은의 노력은 결국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김정은에게 (첫 임기 때처럼) 다시 속아 넘어가지는 않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계속해서 이런 목표를 밀고 나갈 것이다. 그가 최근 ‘반(反)통일’ 선언을 하고 미사일 도발 수위를 높이는 이유도 결국은 트럼프와의 ‘회담 무대’를 마련하기 위한 초석일 수 있다.”

▲허버트 R 맥매스터 전 국가안보보좌관.
-회고록엔 문재인 전 대통령이 펜스 부통령에게 ‘김정은은 방어를 위해 핵이 필요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문 전 대통령의 발언은 어떻게 평가하나.
“1950년 6월(6·25 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일어난 무력 도발의 역사를 보라. 전부 북한이 일으켰다. 북한은 (핵뿐만 아니라) 서울을 사정권에 두고 있는 재래식 무기 체계를 보유하고 있다. 북한이 방어만을 목적으로 핵을 갖고 있다는 (문 대통령) 발언은 말이 안 된다. 당시 우리끼리는 문재인 정권에 대해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이 돌아온 것 같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문 전 대통령의 이런 믿음은 미국의 트럼프, 그리고 당시 일본 총리였던 아베 신조와 매우 달랐기 때문에 난감했다. 우리(미국·한국·일본) 사이에 분열이 생기면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것은 북한과 중국뿐이기 때문이다.”
-문 전 대통령은 왜 그렇게 평가했을까.
“문 정부는 미·북 사이에서 중매인 역할을 하고자 했다. 김정은에겐 ‘트럼프가 당신과 정상회담을 하고 싶어 한다’고 했고, 트럼프에겐 ‘김정은이 정말 당신과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고 했을 것이다. 양측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한 셈이다. 중매인을 자처하는 문 대통령의 동기는 좋았다. 일종의 (외교적)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의도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문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김정은 정권으로 하여금 한때 집권했던, 친북·반미 기조의 극좌(far-left) 정부가 다시 들어설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친북·반미 극좌파는 한국의 소수이지만, 김정은은 이들을 보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임기 중 김정은과 세 차례 회담을 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첫 회담이 끝난 후 트럼프는 한미 연합훈련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등 김정은에게 다소 호의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의 불신이 커졌고, 결국 북미 정상회담은 어떤 성과로도 이어지지 못했다.
-한·미 연합훈련 취소는 김정은에게 어떤 신호를 줬을까.
“너무나 큰 실수였다. 내가 만약 그때도 안보보좌관이었다면 트럼프를 뜯어말렸을 것이다. 김정은은 한미 연합훈련이 도발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훈련은 전혀 도발적이지 않다. 배를 침몰시키고, 항공기를 격추하고, 게릴라 기습을 하고, 청와대(대통령실)를 공격한 적국(敵國·북한)을 방어할 준비가 돼 있는지 확인하는 훈련일 뿐이다.”
-트럼프 2기가 오면 당신처럼 트럼프의 충동적 행동을 막으려는 관료를 배제하리라는 전망도 있는데.
“나는 트럼프가 무모한 결정만 내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참모들의 보고에 입각해 결정을 내렸다고 본다. 2기 트럼프 행정부가 온다면 그를 잘 보좌할 인물들이 입각하고 외교 정책에 대해 일부 강력한 목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이 다시 발탁된다면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을 것이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일본 주재 대사를 지냈던 빌 해거티 상원의원은 북한의 위협에 대해 잘 아는 인사다. (입각 가능성이 있는) 톰 코튼, 댄 설리번 상원의원 등도 북한의 위협에 대해 강경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다. 공화당 내에도 트럼프의 신뢰를 받는 동시에 김정은 정권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맥매스터는 책에서 북핵 위협 때문에 “한·일이 미국의 ‘핵우산’에 대해 불신을 갖고 독자 핵무장을 추구할 수 있다”며 우려했었다. 실제로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독자 핵무장’ 여론이 커지고 있는 데 대해 그는 “북핵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핵무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이 핵무장까지 하지 않고도, (미국이) 한국을 안심시킬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자살 행위라는 걸 분명히 북한에 알리고 한·미·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처럼 미국의 핵을 (나토 동맹국들이) 공유하거나, 한반도에 장거리 미사일(핵미사일)을 재배치하는 방법 등도 고려할 수 있다. 우선 해야 할 일은 북한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한국엔 어떤 영향이 있을까.
“트럼프가 중요하게 여기는 두 단어가 있다. ‘호혜성(reciprocity)’과 ‘비용 분담(burden sharing)’이다. 트럼프는 때때로 일관성이 없지만 이 두 가지에 대해선 한결같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한국 기업과 정부가 지금까지 해온 대미 투자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 한미 간 경제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지, 지정학적으로 한미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미 관계가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트럼프가 이를 이미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버트 R 맥매스터
1962년생.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초기인 2017~ 2018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퇴역 미 육군 중장으로 타임지가 “21세기 미 육군의 학구 전사”라고 평가했다.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에서 베트남전 연구 등으로 군사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을 기반으로 쓴 책 ‘직무유기’는 베트남전의 실패 원인을 분석한 역작으로 미군의 필독서로 꼽힌다. 걸프전·이라크전·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했다. 트럼프와 대북, 대러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다가 경질됐다.
조선일보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09.07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이 말하는 북핵 비화와 한반도 지정학
“김대중-클린턴 정부, 북의 제네바 합의 위반 알면서 덮어”
⊙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 직후, 검거된 플루토늄 밀매 조직이 북한 대성은행에서 5000만 달러 빌린 것으로 파악… IAEA이사회에서 문제 제기하려 하자 미국이 극구 만류”
⊙ 1998년 6월 파키스탄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한 北 외교관 아내 김신애, 파키스탄·북한 간 핵무기·미사일 기술 협력 정보를 美 정보기관에 넘겨주던 인물
⊙ 김신애 시신을 북으로 보내는 수송기 편으로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자료·물질 수송
⊙ “북·러 조약은 북한에 대한 ‘도발 면허장’ 발급한 셈”
⊙ “중국, 대만 침공 때 북한이 한반도에서 도발하도록 유도할 가능성 있어”
⊙ “중국이 대만 장악하면 우리나라도 중국 통제권 아래로 떨어지게 돼”
⊙ “비핵노선 유지하면서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우라늄 농축 기술 확보해나가야”
千英宇
1952년생. 부산대 불어과, 미국 컬럼비아대 국제관계학 석사 / 1977년 제11회 외무고시 합격, 주(駐)오스트리아 대사관 국제원자력기구(IAEA) 담당 참사관, 주유엔대표부 참사관, 주(駐)유엔 차석 대사, 외교통상부 국제기구국장, 외교정책 실장,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북핵 6자 회담 한국 측 수석 대표, 주영국 대사, 외교통상부 2차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역임. 現 한반도 미래포럼 이사장 / 저서 《대통령의 외교안보 어젠다》(2022)
金昇泳
1960년생. 서울대 불어과 졸업, 美 컬럼비아대 석사(국제안보정책), 터프스대 플레처 외교-법률대학원 박사(국제관계) / 《조선일보》 외교·통일 담당 기자·뉴욕특파원, 영국 애버딘대학 정치학과 조교수, 셰필드대 동아시아학과 부교수 역임. 現 일본 간사이외국어대학 국제공생학부 교수(국제정치사) / 저서 《American Diplomacy and Strategy toward Korea and Northeast Asia, 1882-1950 and After》

▲천영우. 사진=조선DB
천영우(千英宇·72)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외교·안보 문제와 관련한 국내 보수(保守) 전문가 그룹의 대표적인 논객이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낸 그는 모든 정세 판단의 기준을 국익(國益)에 맞춘다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 직전부터 빈 국제원자력기구(IAEA) 담당 참사관, 유엔 안보리 담당 참사관, 주유엔 차석대사, 6자회담 수석대표 등의 자격으로 거의 모든 북핵 문제 관련 국제 협상에 참여해온 북핵(北核) 협상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2013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한반도미래포럼을 설립해 매월 개최하는 공개토론회와 활발한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외교·안보 현안들에 대한 국내의 담론 형성에 기여해왔다.
지난 5월 중순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아시안 리더십 회의 참석차 귀국했을 때 천영우 이사장을 만났다. 그런데 좀 놀라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와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 직후부터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고 있다는 정보가 지속적으로 파악되는 데도 이를 계속 무시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북한이 파키스탄을 통해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무기 제조 기술을 확보하려 한 상황 등은 그간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 전 《아사히신문》 대기자나 마이크 치노이 전 CNN 동아시아특파원 등이 익명의 소식통의 말들을 인용해 부분적으로 소개한 내용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안을 다뤘던 국내의 핵심 관계자가 자신의 직접 경험을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근무처인 간사이외국어대학에서 방학이 시작되면 다시 귀국해 인터뷰를 갖기로 약속을 잡았다. 이제 1990년대 중반 제네바 합의는 외교사료 공개 시간인 30년이 임박하고 있어 저널리즘뿐 아니라 역사 연구 차원에서도 정리를 시작해야 할 시기가 됐기 때문이었다.
‘한미동맹에 대한 의구심’

▲한미 양국은 작년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핵협의그룹(NCG)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이를 운영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10일 한미핵협의그룹(NCG) 공동 기자회견. 사진=조선DB
7월 18일 오전 종로의 한반도미래포럼 사무실에서 천영우 이사장을 다시 만났다. 먼저 최근 한반도 주변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들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월간조선》은 올해 4월호에서 오동룡 기자가 천 전 수석과 가진 상세한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 이후 북·러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 등 큰 변화들이 이어져왔다.
― 지난 6월 19일 김정은-푸틴 회담에서 포괄적인 전략동반자협정이 체결돼 북한과 러시아가 군사동맹을 복원했습니다. 곧 이어서 워싱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 때 한미 양국의 정상이 만나 ‘한반도 핵억제 핵작전 지침에 관한 공동성명’을 채택했습니다. 이 공동성명의 취지는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미국이 제공하게 될 확장 억제의 가시성(visibility)을 높임으로써 우리 국민들의 의구심을 해소시키려는 게 본질이었다고 봅니다.”
― 북한의 핵 도발에 대응하는 데 한미 양국이 군사적 협력사항과 협의 절차들을 구체화시켜두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미핵협의그룹(NCG)을 만들고 구체화한다고 해서 실제로 기존의 확장 억제가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정부가 NCG를 만들고 해도 늘 우리는 뭔가 더 부족하고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약속을 받으려 하고, 미국이 어떤 대응을 할지 알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한미동맹에 대한 어떤 의구심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따라서 동맹의 건실성이나 품격 차원에서 보면 좋은 신호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美, 북핵 도발에는 핵무기로 대응할 것”
― 북한이 머지않아 대륙 간 탄도탄이나 잠수함 발사 미사일 등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핵능력까지 갖추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될 때 과연 미국이 자국의 도시들을 북핵 공격에 노출시키면서까지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할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한국에 사는 미국인이 거의 20만 명이 넘고 서울에만 15만 명 정도의 미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서울에 북한 핵이 떨어져 미국인의 0.1%만 사망한다 해도 150명 가까이가 희생됩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미국이 과연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까요? 대한민국 정부가 말려도 미국이 사용하려 할 겁니다. 미국은 전 세계 동맹국들과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의 핵 도발에 핵무기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가 구체적인 보장을 자꾸 미국 측에 주문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요.
“일본의 경우 오히려 미국의 전략핵잠수함들의 일본 항구 입항을 거절하면서도 미국의 확장 억제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핵 억제력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은닉성(隱匿性)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만일 한국에 대해 핵공격을 가할 경우 길어도 30분 이내에 태평양 한복판이든 어디서든 발사되는 미국의 핵미사일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또 미사일 방어체계가 발달한 요즘에는 북한이 미국으로 핵미사일을 발사해도 발사나 진입 단계에서 거의 요격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자국(自國) 도시들을 적국의 핵공격에 노출시키면서 우방국을 방어할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60년 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이런 의문을 제기했을 때와는 전략 상황에 큰 변화가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 일본은 이미 핵 재처리 능력과 우라늄 농축 능력 등을 갖추고 있어서 언제든 결정만 하면 신속하게 핵무장을 할 수 있는 잠재적인 핵무장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좀 여유가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도 잠재적 핵무장 능력은 갖춰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까지 가시적 노력이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일본 정도의 잠재적 핵무장을 갖추는 데도 여러 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허세만 부릴 경우 주변 각국이나 해외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美, 北의 제네바 합의 위반 덮어
사실 최근 미국의 확장 억제에 대한 신뢰성에 논란이 일 정도로 사태가 악화돼온 데는 북한의 핵무기 능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돼왔다는 배경이 있다. 이와 관련, 천영우 전 수석은 5월 25일 필자와 만났을 때 1990년대 자신이 외교 현장에서 겪었던 몇 가지 비화를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놨다. 바로 두 주일 전 노무현(盧武鉉) 정부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냈던 이종석(李鍾奭)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과 가진 공개 토론회(통일나눔재단 주최)에서 북핵 문제의 원인을 놓고 벌인 날 선 토론의 여파가 남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천 이사장은 먼저 IAEA(국제원자력기구) 담당 참사관으로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겪었던 미국의 대응을 소개했다.
“미국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가 1994년 북한과 제네바 합의를 한 직후, 유럽에서 플루토늄 밀매 조직이 독일에선가 검거됐는데, 그 밀매 조직이 대성은행인가 하는 북한은행에서 5000만 달러를 빌린 것으로 파악됐습니다(당시는 구소련 붕괴의 여파로 핵물질이 국제 암시장에서 거래되던 상황이었다-필자). 내가 IAEA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려 했더니 당시 미국 에너지부에서 나온 참사관이 ‘제발 제기하지 마라’고 극구 만류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북한의 제네바 합의 위반이 드러났는데도 “미국이 쉬쉬해서 덮은 것”이었다는 얘기였다. 이 문제를 국제기구에서 공개토론하게 되면 바로 “미국이 북한에 사기당했음을 실토하게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천영우 이사장은 말했다. 천 이사장은 또 “나중에 클린턴 행정부 때 백악관에서 비확산특보를 맡았던 게리 세이모어의 얘기를 들었는데, 그는 ‘북한은 제네바 합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과학원 산하에 개발팀을 만들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북한 외교관 아내 피살 사건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 칸 박사. 사진=AFP/연합뉴스
천영우 이사장은 또 “우리 외교부도 1998년부터 군축 비확산 담당 부서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 방식으로 핵무기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파키스탄에 과학자들을 보내 협조 중이었음을 파악했지만, 제네바 합의를 지지하던 김대중 정부 시절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천 이사장은 “따라서 미국의 클린턴 정부도 북한이 파키스탄이 성공한 우라늄 농축 방식을 통한 핵무기용 방사능 물질 확보에 착수했음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과 파키스탄 사이에서 우라늄 기술과 미사일 기술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던 비밀 협력은 충격적인 암살 사건으로 그 전황이 드러났다. 파키스탄에 파견된 북한 경제참사관의 부인 김신애(일명 김사내)가 1998년 6월 7일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천영우 이사장은 “이 암살 사건의 배경과 과정은 파키스탄 당국도 극도로 숨기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윤지준 주파키스탄 대사가 현지에 파견된 미국 및 영국 대사관 측을 탐문해 상세하게 외교부 본부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영미 양국 정보 당국이 파키스탄에서 암살 사건의 배경과 과정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이 사건은 짤막하게나마 파키스탄 신문에도 보도되기도 했다.
천영우 전 수석의 증언 등에 따르면, 암살 당시 파키스탄 핵무기의 대부로 불리던 A.Q. 칸 박사가 운영하던 연구소에는 북한에서 과학자 등 20명의 핵무기 및 미사일 관련 전문가들이 파견돼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무기 제조 기술 등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파키스탄이 최초의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지 열흘 뒤 칸 박사의 저택에서 불과 몇 m 떨어진 거리에 살던 북한 대사관의 경제참사관 역할을 하던 강태윤의 아내 김신애가 의문스러운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이다.
이후 미국의 《LA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마이크 친노이 전 CNN 특파원 등이 탐사보도(《포린폴리시》, 2021년 10월호)를 통해 숨진 김신애가 북한에서 파견된 과학자 및 무기 거래상 그룹의 일원이었다고 보도했다. 김신애는 파키스탄과 북한 사이에 이뤄지고 있던 핵무기 및 미사일 기술 협력 등과 관련한 정보를 미국 정보기관에 넘겨주다가 파키스탄 정보기관에 발각됐다고 한다. 파키스탄 정보기관이 그런 의혹을 북한 대사관 측에 통보했고, 그 직후 김신애가 누군가에 의해 사살됐다는 것이다. 그 배후와 관련, 오히려 인도 정보부의 소행이었다는 등의 외신 보도도 나왔지만, 천영우 이사장은 배후에 북한 과학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직후 김신애의 시신은 파키스탄 공군의 퇴역 장교들이 운영하던 샤힌 에어 인터내셔널사의 전세기에 실려 북한으로 이송됐다. 이 전세기는 미국제 C-130 군용수송기였는데 시신을 담은 관(棺)과 함께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자료와 물질을 같이 수송했다. 세련된 우라늄 원심분리기들과 각종 도면 및 스케치, 원심분리 관련 기술 데이터뿐 아니라 원심분리를 통해 핵폭탄용으로 전환될 수 있는 저농축 우라늄 헥사플로라이드 가스까지 북한으로 운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과 파키스탄 사이의 이 같은 협조는 인도와의 치열한 군사경쟁 때문에 파키스탄 군부가 비밀리에 추진했던 것으로 파악돼왔다. 이미 1993년 베나지르 부토 총리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파키스탄의 우라늄 농축 기술과 북한의 미사일 기술을 상호지원하는 협력체제가 비밀리에 시작돼 가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거의 정부 통제에서 벗어나 핵개발 국가들에 방사능 물질과 핵무기 기술을 전파한 칸 박사의 활동으로 더욱 활발해졌던 것이었다고 밝혀져 왔다.
北, 전방위적으로 우라늄 농축 기기 수입
천영우 이사장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북한이 전방위적으로 우라늄 농축 관련 기기를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었다는 예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했다.
“민주당 정부 시절 북한이 영국 런던의 게트윅공항에서 우라늄 농축용 기기를 환적(換積)하려다 발각된 일이 있었습니다. 또 북한이 독일에서 우라늄 농축 기기를 수입하면서 중국 선양(瀋陽)의 의심스러운 한 회사를 수입선으로 지정해두었는데, 그 수입 상담을 진행한 인물이 바로 빈 주재 북한대표부에 근무하는 과학관으로 독일 옵트로닉스사와 협상해서 수입기로 한 것으로 드러나기까지 했지요. 또 (2003년) 이집트의 한 항구에서 유엔결의안 집행 차원에서 미국의 협조를 받은 이집트 당국이 북한이 수입하려던 우라늄 농축 관련 기기를 끌어내려 압수한 사건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정황들은 2007년 일본 《아사히신문》 대기자였던 후나바시 요이치가 출간한 역작 《한반도문제(The Peninsula Question)》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문제》는 미국 정부 당국자 등의 증언에 기초해 정황을 기술했다.
천영우 이사장은 “한승수 외교부 장관의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2001년, 냉전 시절 한때 우라늄 농축 방식으로 핵개발을 추진하다 포기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관계자들을 초청해 신라호텔에서 비밀 워크숍을 열었다”고 공개했다. 그는 “과연 북한이 어떤 식으로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무기 개발을 하면서 감출 수 있으며 후일 폐기가 가능할지 여부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아보기 위해 열었던 워크숍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워크숍이나 북한의 우라늄 농축과 관련된 정황들은 외교부 안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외교부 출신의 다른 한 관계자는 7월 20일 인터뷰에서 “1990년대 말에는 햇볕정책뿐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일도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 또 당시 외교부에서는 “군축·과학 관련 부서의 현안이나 파키스탄 등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은 주변 4강 등 주요 국가에서 일어난 일들에 비해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의 등장

▲북한은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에도 불구하고 우라늄 농축 등 핵개발을 계속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정보 당국도 실무선에서는 이미 클린턴 정부 시절부터 우라늄 농축을 둘러싼 북한의 의심스러운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권 상층부에서는 제네바 합의 때부터 이어온 북한에 대한 외교적 개입과 관여 정책으로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노선을 끝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등장했을 즈음에는 북한의 제네바 합의 위반과 관련한 정보가 차고 넘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후나바시 《아사히신문》 대기자의 저서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는 2002년 2월부터 본격적인 정보 분석에 착수해 9월쯤에는 마치 로제타스톤을 찾아낸 것처럼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통해 핵무기 개발 중이란 결론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각국에서 모은 정보들을 종합한 결과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확인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The Peninsula Question》, 122~124쪽).
이런 가운데 김대중 정부와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해온 대북관여 정책을 비판적으로 지켜 봐 온 도널드 럼스펠드 등 부시 행정부의 강성 핵심 인사들은 제네바 합의는 이미 북한의 위반으로 완전히 파기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같은 정세 판단에 따라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북한으로 보내 직접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무기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를 확인한다는 대결적 협상 방식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실제로 부시 정부 초기 국무부 군축 담당 부장관이었던 존 볼턴이 출간한 회고록 1권 《항복은 정책옵션이 아니다(Surrender Is Not An Option, 2007)》에도 당시 확인된 북한의 제네바 합의 위반에 대한 분석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국무부에서 대북 교섭을 담당했던 협상파 잭 프리처드 대사의 경우 럼스펠드 국방장관, 볼턴, 딕 체니 부통령 등 강경파 네오콘들이 협상을 통해 북한의 핵개발을 해결하거나 최소한 늦출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았다고 자신의 회고록 《실패한 외교(Failed Diplomacy, 2007)》에 기술했다. 하지만 프리처드 대사도 정보 당국이 규명한 우라늄 농축 관련 정보에 대해서는 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켈리의 방북과 제네바 합의 파기

▲2002년 10월 북한을 방문했던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는 최성홍 외교통상부 장관 등과 만나 방북 결과를 설명했다. 사진=조선DB
북한은 평양을 방문한 켈리 차관보의 통고에 대해 10월 3일 첫날 회담 당시 김계관 외무성 부상(차관)은 “모두 미국이 꾸며낸 얘기”라며 반박만 할 뿐,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켈리를 만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미국이 강압적으로 우리를 목 졸라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며 “미국 때문에 제네바 합의는 완전히 파기됐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당시 50분간 계속된 발언에서 강 비서는 노동당과 정부 전체의 입장이라면서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우리는 그보다 더한 무기도 개발하게 돼 있다”고 맞섰다.(《실패한 외교》, 35~40쪽; 이용준,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 156~157쪽)
북한의 이 같은 시인에 따라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 따른 중유 공급을 중지했고, 북한도 그해 12월 제네바 합의 파기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며 IAEA 사찰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북한은 2003년 1월 NPT 탈퇴를 선언했고 2006년 10월 풍계리에서 1차 핵실험까지 실시했던 것이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 분석과 부시 행정부의 대응 등을 담은 미국 측 인사들의 회고록도 국내의 민주당 인사들이 회고록들을 출간한 전후인 2007년쯤부터 출간됐다. 그러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 민주당 측 인사들과 진보 진영은 거의 모든 책임을 켈리와 네오콘의 고압적인 대북 협상 스타일에 방점을 찍어 북핵 협상이 파탄 난 이유로 지적해왔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2008년 출간한 회고록 《다시, 평화》에서 “북한은 2003년 1월, 지난 8년간 중단했던 핵 활동을 재개하고 본격적인 핵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고까지 주장했다.(408쪽)
외교부, 북한 우라늄 농축 파악
이 같은 주장들에 대해 천영우 이사장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을 비롯한 민주당 정부 측 인사들이 모든 책임을 켈리 차관보나 부시 행정부에 덮어씌우고 있지만 사실 제네바 합의는 이미 김대중 정권기에 북한 측의 위반으로 파탄이 났다”고 말했다. 그러며 “미국 정부 안의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는 분들이 켈리를 악역으로 만들어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천영우 이사장은 켈리 차관보가 2002년 10월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자신이 겪었던 한 가지 관련된 소동을 소개했다. 켈리 차관보 방북 당시 천 이사장은 외교부 본부에서 유엔, IAEA 외교 등을 총괄하는 국제기구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켈리 차관보가 평양에 가기 직전부터 천영우 국장은 IAEA 총회 참석차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출장을 가 있었는데, 켈리가 평양에 갔다 서울을 방문한 직후 이례적인 경험을 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천영우 국장은 IAEA 총회에 참석하는 기회에 올리 하이노넨 IAEA 안전조치국장과 북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검증 방안 등에 대해 협의하고 그 결과를 전문(電文)으로 보고했다. 2001년에 이어 2년째 하이노넨 국장과 가진 협의 결과를 외교부 본부로 보고한 것이었다. 그런데 본부에서 “민감한 문제는 전보로 보고하지 말고 귀국한 후에 구두(口頭)로 보고하라”는 이상한 지시가 내려왔다.
임동원의 추궁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사진=조선DB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청와대에서 임동원 특보가 빈에서 천 국장이 보낸 전문 보고를 읽은 후 외교부 이태식 차관보(주미 대사 역임)에게 “켈리가 (서울에) 와서 얘기한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천 국장이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며 심하게 추궁했다고 한다.
빈 IAEA 출장에서 돌아온 천영우 국장은 2002년 10월 켈리의 방북 결과가 공개되기 이전에 먼저 최성홍 외교장관에게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추진 정황에 대해 소상히 보고했다. 켈리가 평양에 갔다 서울로 돌아온 직후였다. 그랬더니 최 장관이 깜짝 놀라면서 “그러지 않아도 켈리가 평양에 다녀온 결과를 듣고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중”이라면서 “이태식 차관보와 심윤조 북미국장만 알고 있으니 이 두 사람에게만 천 국장이 알고 있는 내용을 알려주라”고 했다. 그래서 이 차관보를 만나 보고를 했는데, 그때 이 차관보로부터 임동원 특보한테서 심한 추궁을 당한 후 “본부에 돌아온 후 구두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다는 것이다.
천영우 이사장은 “어쨌든 최 장관, 이 차관보, 심윤조 북미국장은 켈리가 (서울에 돌아온 후 설명해준) 방북 결과를 듣고서야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국제기구국의 군축과는 1998~99년부터 팔로 업(follow up)하고 있었는데, 국제기구국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을 북미국 라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IAEA의 하이노넨 안전조치국장과 협의한 내용을 전문으로 보고서 (다들) 깜짝 놀랐던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로 대북포용 정책을 주도했던 임동원씨는 2015년 출간한 회고록 《피스메이커》의 개정판에서 당시 천영우 국장의 보고를 통해 우리 정부도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확인했다는 얘기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북한이 “2004년 후반기부터 해마다 2~3개의 우라늄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의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국의 정보 판단은 왜곡·과장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521쪽) 우리 정보기관은 켈리의 방한 직후인 10월 7일 비로소 서울에 온 미국 정보요원 세 명으로부터 브리핑을 들었다고 한다. 임 전 장관은 그 후, 국내 정보기관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이 도입한 알루미늄관 같은 자재는 미사일 등 다른 목적에도 사용 가능한 다목적용으로 용도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며,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계획에 필수적인 장비와 부품들을 확보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고 기록했다.(517~518쪽)
임동원씨의 회고는 후나바시 대기자의 책 등에 나오는 정보들이나 존 볼턴 회고록 1권이 지적한 상황들과는 상당히 다른 평가다. 그리고 본인이 2001년 3월까지 1년 3개월간 국정원장을 지냈으면서도, 그동안 한미 간의 정기적인 정보 교류와 협력 외에 우리 정보기관이 어떤 관련 정보를 수집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6자 회담 수석대표 자격으로 2·13합의

▲6자 회담 대표 시절의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연합뉴스
아무튼 2003년 1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2006년 10월 함경북도 풍계리에서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그러는 사이 주변 정세의 안정을 원하던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가운데 노무현 정부도 협상 국면을 되살리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면서 2003년 8월 말부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이 베이징(北京)에서 시작됐다. 부시 행정부 역시 이라크 전쟁의 장기화로 네오콘들의 영향력이 퇴조하면서 집권 2기가 시작된 2005년부터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6자 회담 등 협상을 통해 북핵 문제에 대응해가려 하는 등 새로운 국면이 전개됐다.
천영우 이사장은 2007년에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자격으로 6자 회담에 수석대표로 참석해서 당시 북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았던 2·13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당시 국내 언론들은 소탈하고 온화한 성품인 천 본부장이 특유의 ‘조용한 카리스마’로 북한의 김계관 대표를 설득해 2·13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6자 회담 시작 전 청와대 안의 보고회 당시 천영우 본부장은 “북한이 알루미늄관을 수입하려다 들통난 사건까지 포함해서 우라늄 농축과 관련된 진상을 이전부터 파악해온 대로 상세하게 보고했다”고 한다. 천 이사장은 “당시 노 대통령께서는 보고 내용을 끝까지 진지하게 들으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후 노 대통령께서 보여주신 저에 대한 대우로 미뤄보면 (그때 보고를) 신뢰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천영우 이사장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지낸 후 주영 대사, 외교부 2차관을 거쳐 2010년 10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발탁돼 2년 반 동안 근무했다.
“푸틴, 미국에 대한 복수심 가득”
무기체계 등 군사 문제에 대해서도 전문적 식견을 갖춘 그는 7월 18일 다시 가진 인터뷰에서 냉철한 시각을 개진했다. 지정학적(地政學的) 경쟁 시대가 다시 한반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어서인지 6자 회담 대표 시절 알려졌던 ‘조용한 카리스마’보다는 매파 현실주의자로서 인상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 지난 6월 19일 푸틴 방북 당시 북한과 러시아 사이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했는데, 군사동맹이 부활했다고 봅니까.
“군사동맹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은 것은 북·러 협약 제4조인데 그 문구만 봐서는 러시아의 자동 개입을 보장한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푸틴이 자기 필요에 따라 하려면 개입하고 않으려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놓은 것이지요. 즉각적인 지원을 제공할지 여부에 대해서도 러시아의 국내법에 따르도록 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약 문안만을 가지고 해석하면 본질을 놓칠 수 있어요. 이 시점에 북·러 간의 조약 체결이 위험한 것은 과거 냉전 당시와 달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면서 무기 지원을 해준 북한에 대해 부채(負債)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푸틴은 또 미국과 서방권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합니다. 미국에 복수할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는 심리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인식들이 결합될 수 있으므로 북·러 조약이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에 큰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어요. 1961년의 북·소 동맹 조약에 비해 내용이 약하더라도 이처럼 상황이 달라진 만큼 북·러 조약이 이행될 경우 우리나라에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북·러 조약의 가장 큰 수혜자는 중국”

▲천영우 전 수석은 북한과 러시아가 지난 6월 19일 체결한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 협정의 최대 수혜자는 중국이 될 것으로 보았다. 사진=로이터/뉴스1
―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시면?
“북·러 조약이 상호 양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에 ‘상호 지원한다’고 하지만, 러시아와 북한은 6·25 발발 때처럼 언제든 공세적인 전쟁을 시작하고도 방어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동맹 조약을 발동시킬 수 있습니다. 또 북한이 우리 측의 대북(對北) 공격을 유도하는 도발을 시작하려 할 경우 안심하고 도발을 결행할 수 있게끔 하는 보험 역할을 이번 북·러 조약이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북한에 대해 러시아가 일종의 ‘도발 면허증’을 발급한 셈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좀 더 넓은 동북아 지역 차원에서 북·러 조약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역 안보 차원에서 제일 큰 전략적 수혜자는 중국이라고 봅니다. 북·러 조약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두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지요. 대만 침공 때 미국이 대만 방어에 집중할 역량을 줄이게 하는 효과를 중국은 기대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공식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진영화(陣營化)를 반대한다며 북·러 조약에 자국이 연계되는 것을 꺼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하지만 내심 중국은 북·러 조약으로 엄청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누리고 있음을 놓칠 리가 없습니다.”
― 대만 유사시 북한의 군사적 대응 시나리오를 좀 구체적으로 예측해주시면?
“중국은 대만 침공 때 북한이 한반도에서 도발을 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만일 북·러 조약이 없다면 북한으로서는 주저하게 될 겁니다. 중국이 군사 지원을 해줄 여유가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북·러 조약이 뒷배 역할을 해줄 수 있게 됐기 때문에 대만해협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북한이 안심하고 대남 도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기대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중국이 북·러 조약 체결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다는 해석은 좀 피상적인 분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러시아 눈치 볼 필요 없다”
― 그러면 우리의 대응 방안은?
“러시아가 국력을 유럽에서 소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최대한 국력을 소비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북한을 러시아가 돕고 싶어도 도울 힘이 모자라도록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방식이라고 봅니다.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평화 파괴 능력을 줄이기 위해 유럽에서 국력을 소진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 우리나라가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제공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더 이상 러시아의 눈치를 보거나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 다시 러시아의 태도를 봐가면서 공격용 무기를 제공할지 여부를 결정하려 한다면 또다시 푸틴의 이중 플레이에 농락당할 여지를 주게 됩니다. 먼저 공격 무기 제공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서, 그 방침을 앞으로 대러 관계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이후 러시아가 대북 관계를 바꾸면 거기에 맞춰서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무기의 종류와 규모를 조정해가야 합니다.”
― 지금 정부의 입장보다 더 강경한 입장인 것 같습니다.
“현 정부가 정말 푸틴의 러시아를 잘 알고 대응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푸틴을 압박할 수 있는 급소를 먼저 눌러놓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야지, 급소는 누르지도 않고 푸틴의 눈치부터 보는 것은 푸틴에게는 통하지 않는 대응 방법입니다.”
― 최근에 ‘인태(印太) 지역 그레이트 게임과 한국의 전략’이란 심포지엄을 한반도미래포럼의 연례행사로 개최하셨는데.
“앞으로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 그리고 우리 운명의 상당 부문이 인태 지역에서 결정된다고 봅니다. 어차피 무역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인태 지역과 얼마나 잘 지내고 사활적(死活的)인 국익을 함께 지켜나갈 체제를 갖춰나가느냐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인태 지역 국가들의 번영과 평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합니다.”
“한일 안보 협력 강화해야”
― 인태 국가들과의 협력이 왜 긴급한 현안이라고 봅니까.
“이 지역에서 패권(覇權)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의 공세적 팽창 정책을 견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중국이 인태 지역에서 패권 확장에 전력하는 상황에서는 우리나라의 사활적인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혼자서 중국의 공세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결국은 우리와 이해가 일치하고 생각이 유사한 나라들과 힘을 합쳐서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 베트남, 필리핀과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협력해 중국에 대한 과도한 경제의존도를 줄여나가고 공급망을 다변화(多邊化)시켜나가는 일이 시급합니다. 중국이 우리나라와 인태 지역 국가들에 대해 경제적으로 강압 정책을 구사할 여지를 줄여가고 대항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 일본의 경우, 정부와 민간이 몇 해 전부터 경제·안보 차원에서 대중 의존도를 줄여가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정부 안에는 대중 경제 의존을 줄여가는 데 필요한 일들이 여러 부처에 분산돼 있습니다. 이들을 제대로 총괄하고 조정해나가면서 경제·안보 대책을 제대로 추진해가야 하고 국민들도 이 문제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높여가야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먹고살아갈 문제와 사활적인 안보 현안들이 누적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권 등에서의 논의들은 마치 세계가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한반도 천동설(天動說)’ 같은 착시감(錯視感) 속에서 진행되는 것 같아 큰 걱정입니다.”
― 일본과의 국방 면에서의 협력은 왜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지금 북한과 중국이 가해오고 있는 위협에 대해 우리나라와 일본만큼 위협 인식에서 공통성이 넓은 나라가 없습니다. 그만큼 안전보장 면에서 협력의 필요성이 높지만, 두 나라 모두 과거사에 대한 인식 때문에 현재와 미래의 협력이 발목 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제 북한의 핵무장 때문에 이전과는 전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국제법을 무시하며 영토 팽창을 추구하는 중국도 군사굴기를 계속하고 있어서 한일 두 나라가 모두 혼자 힘으로는 대응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미국 역시 대선 결과에 따라 고립주의로 돌아가게 되면 한일 두 나라의 안보를 미국이 책임져준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때문에 한일 간의 안보 협력을 강화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일군수지원협정 체결 시급”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지요.
“6·25 때도 그랬지만 일본은 우리나라를 방어하는 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일본 안에 6·25 때 창설된 유엔사령부의 7개 후방기지가 있기는 하지만, 제도적으로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안보 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취약합니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 등을 할 경우 실시간 정보 공유를 하기 위한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하는 것도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군수(軍需)지원협정의 체결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한반도에서 유사시 미군이 사용할 장비나 포탄이 거의 전부 일본에 비축돼 있는데 이 협정이 체결되지 않으면 미군이 필요한 전쟁물자를 우리 군이나 미군이 일본에 가서 운반해 와야 합니다. 또 아프리카 등 먼 나라에 가서 유엔평화유지군(PKO) 활동을 하는 동안 한일 양국 군대가 쌀이나 식료품, 탄약 등을 서로 필요할 때 나눠 쓰면 편리한데 군수협정이 체결돼 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수송기나 헬리콥터, 또는 전투기까지도 경쟁력이 있는 우리 무기를 일본이 구매해주는 방식이나 상호 방산 면에서 가능한 분야에서 기술 협력을 해나가는 것도 상호 신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대만에 미사일 간접 지원 고려할 수 있어”
― 대만의 안보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현재 우리 해상 수송의 90% 가까이가 대만 근해를 통과하고 있어요. 중국이 대만을 지배하게 되면 우리 해양 수송로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게 됩니다.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대만을 장악하는 상황이 되면 우리나라도 중국의 통제권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현재 대만은 중국군의 170km 거리의 대만해협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의 대함 미사일인 하푼미사일을 주문해두고 한참 도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중 관계 때문에 대만에 직접적인 무기 제공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발한 해성미사일 수백 기를 미국에 판매하고 이들을 미국이 다시 대만에 판매하는 방식 등의 간접적인 지원 방식 등으로 대만의 방어를 지원하는 방안 등은 고려할 수 있습니다.”
― 국내의 원자력발전소들이 사용하는 저농축 우라늄 거의 전량을 러시아를 비롯한 해외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잠재적 핵능력 축적과 별개로 경제·안보 차원에서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하는 사업입니다. 현재의 한미원자력협정도 미국산 천연우라늄이나 미국의 기술과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도 우라늄을 농축하는 것을 막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대통령께서 결심을 하시면 과기부를 통해 기계연구소나 한국수력원자력연구원 산하에 회사를 만들어 연구개발을 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실수요자인 한수원 산하에 농축 기술 개발을 담당할 회사를 만드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R&D부터 시작해 기술개발과 이를 검증하기 위한 파일럿 공장 건설, 그 이후 상업용 농축 시설 건설 등의 순서로 단계적 목표를 설정해 추진해나가야 합니다. 일본이 우라늄 농축 기술을 확보하는 데 20년이 걸렸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력과 물적 자원을 투입하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앞으로 10년 정도를 목표로 세워서 추진할 수 있다고 봅니다.”⊙
09.07“中 차관급 인사, 한국 대선 개입 시도했다”
“이 얘기만 해, 대선 자금은 얼마든지 줄 테니 한 번 만나자고”
⊙ 한팡밍 정협 외사위 부주석 겸 차하얼학회장, 朴 탄핵 정국 당시 김상순 박사에게 문재인과 만남 주선 요청
⊙ 문재인, 집권 후 한팡밍에게 수교훈장 수여
⊙ ‘차하얼학회를 숨기고 접근하라’ ‘한국이 여는 정상회의 정보 알려주면 사례금 주겠다’
⊙ ‘공공외교’ 표방하는 中 차하얼학회 설립자 한팡밍, 한국 지도층과 잦은 접촉
⊙ 국내 ‘中 비밀경찰서’ 논란, 동방명주 조성 당시 내부 사진 최초 공개

▲2017년 5월 10일 차하얼학회 홈페이지에 게시된 사진이다. 한팡밍(왼쪽) 차하얼학회 회장과 문재인(오른쪽) 전 대통령이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차하얼학회
중국 차관급 인사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차기 대선 유력 주자로 떠오르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대선 자금 지원’ 의사를 전달하려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후보 경선이 진행되던 2017년 2월, 김상순 베이징대 국제관계학 박사는 한팡밍(韓方明) 당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외교위원회 부주석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정협 외사위 부주석은 우리나라로 치면 차관급에 해당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중국 차하얼학회(察哈爾學會) 회장과 고급연구위원으로, 이들은 지금까지도 현직을 유지하고 있다. 차하얼학회에 대해선 지난달 《월간조선》 8월호에서 소개한 바 있다. 기자는 김상순 박사의 말을 검증하기 위해 그에게 출입국 기록, 연락 내용 캡처 화면 등의 관련 자료들을 요청해 제공받았다. 이에 따르면 중국 차하얼학회는 최근까지도 사람을 시켜 한국의 정치, 외교에 관한 내부 정보를 수집하려고 했으며 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에겐 ‘사례금’ 명목으로 금전 지급도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보 당국이 국내 중국 비밀경찰서로 결론 내린 서울 송파구 소재 ‘동방명주’의 조성 당시 촬영한 내부 깊숙한 공간의 사진도 입수해 처음 공개한다. 지난 7월 25일 만난 김 박사는 “한팡밍 회장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비정상적인 공작 행태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말한다”고 입을 열었다. 먼저 문제의 발언부터 살펴본다.
“얼마든지”

▲2016년 9월 4일 김상순(왼쪽) 박사와 한팡밍(오른쪽) 차하얼학회 회장이 중국 차하얼학회 본부에서 함께 찍은 사진. 사진=김상순 박사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문재인 대통령 후보 쪽에 찾아가서 이 얘기만 해. 대선 자금은 얼마든지 줄 테니 한 번 만나자고.”
김상순 박사는 현재 차하얼학회 고급연구위원이다. 김 박사는 차하얼학회 설립자이자 현직 회장인 한팡밍 당시 중국 정협 외교위 부주석으로부터 이 같은 제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시기는 2017년 2월 20일부터 같은 달 27일 사이, 폭설이 내린 평일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2017년 2월 21일 화요일엔 늦은 밤까지 중국 베이징 전역에 대설(大雪)이 쏟아진 사실이 확인됐다. 대화가 이루어진 장소는 당시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방송사 LeTV 사무실이다. 한팡밍 차하얼학회 회장은 이때 LeTV 부회장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동시에 정협 외사위 부주석이기도 했다. 김상순 박사는 “중국은 차관급 인사가 공산당의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특히 외교에 관해 결정을 내릴 순 없는 구조”라며 “대선 자금을 ‘얼마든지’ 주겠다고 말한 걸 보면 공산당 또는 돈을 댈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고, 개인의 허언(虛言)으로 넘길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김 박사에게 물었다.
― 한팡밍 회장이 정확히 ‘대선 자금’을 대겠다고 한 기억, 확실합니까.
“저한테 ‘분명히 대선 자금을 얼마든지 지원하겠다’고 했어요. 중간에 다리를 놓기 위해 밥을 먹거나 하는 비용을 말하는 건 줄 알았는데 확실하게 대선 자금이라고 했어요. 제가 ‘설마 대선 자금을 말하는 거냐’고 재차 물어봐도 ‘그렇다’고 하는 거예요.”
― 공공외교를 표방하는 차하얼학회의 예산을 쓰겠다는 말일 수도 있지 않나요.
“차하얼학회 예산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국 대선 자금을 댈 정도는 절대 아닙니다. 제가 차하얼학회 고급연구위원으로 있는데 급여가 따로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학술 행사 등에 나갈 때 약간의 강연료나 원고료를 받을 뿐입니다.”
― 한팡밍 회장이 문재인 전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했어요.”
―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가요.
“그건 말하지 않았어요. 할 얘기가 있다고만 했어요. 그러며 차하얼학회 내 저처럼 한팡밍 회장과 오랜 세월 알고 지낸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제안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 그래서 한팡밍 회장의 제안을 수락했습니까.
“안 했죠. 일단 한국의 유력한 대선 주자인데 그런 제안을 수락할 리도 없고, 자칫 외부에 알려지면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극구 만류했어요. 그리고 만나더라도 적어도 민주당 경선이 끝난 다음에 만나자고 제안을 하고, 돈(대선 자금)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당부했죠.”
이처럼 김상순 박사는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당시 후보에게 한팡밍 회장의 자금 조달 의사를 전하지 않았다. 김 박사는 “제가 거절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시켰을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2017년 5월 10일 차하얼학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문재인 대통령과 한팡밍 회장이 만난 모습을 게시했다. 해당 게시물엔 “한팡밍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외교위원회 부주석이자 차하얼학회 회장은 지난 6개월 동안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여야 고위 인사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고 적혀 있다. 또 한팡밍 회장은 같은 해 5월 12일 《아주경제》에 기고한 글에서 “(2017년 5월) 10일 오전 한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문재인 후보가 한국의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며 “필자도 9일 자정이 지나자마자 문 후보에게 축전을 보냈다”고 밝혔다. 이듬해 한팡밍 회장은 문재인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수교훈장 흥인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18일자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인터넷판에 따르면, 당시 노영민 주중 대사가 베이징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대신해 수훈사를 낭독했다. 이에 따르면 한팡밍 회장은 한중 우호 교류 증진을 위해 노력한 점과 양국 교류에 이바지한 점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김상순 박사의 출입국 증명서. 사진=김상순 박사
사례금 제시

▲김상순 박사에 의하면, 한팡밍 회장은 최측근 C씨를 통해 ‘서울에서 열리는 제3회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사람을 보내 내용을 알아오면 1만 위안의 사례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김 박사와 C씨의 해당 대화 내용 캡처. 사진=김상순 박사
차하얼학회는 최근까지도 김상순 박사에게 한국의 내정 관련, 정보 수집을 요구했다. 이에 따른 향응도 약속했다. 이는 김 박사가 한팡밍 회장의 최측근 C씨와 나눈 위챗(중국의 온라인 메신저) 대화 내용을 통해 확인됐다. C씨가 한 회장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은 그의 지위, 직책 등에 의해 확인됐다. 김 박사에 의하면, 한팡밍 회장은 지난 2월 23일 C씨를 통해 김 박사에게 내달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대한 내부 정보를 조사해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김 박사에게 1만 위안, 한화 약 180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김 박사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C씨에게 “1만 위안이 아니라 100만 위안을 준다고 해도 관심없다” “나를 활용하려면 좀 더 공개적이고 의미가 있는 걸로 해달라”라며 선을 그었다. 김 박사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C씨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C씨는 ‘알겠다’고 답했다.
이로부터 이틀 전인 2월 21일에도 김 박사는 C씨와의 메신저(위챗) 통화를 통해 “아는 사람이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참여한다면 더 좋고, 어떤 내용의 이야기들이 오가는지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C씨는 “누군가를 파견해서 알아볼 수는 없느냐, 필요한 비용은 주겠다”며 “김 박사가 (행사에 보낼) 사람을 찾아봐라. 비용은 대겠다”고 했다고 한다.
서울에선 처음 열린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대해 중국이 보인 관심도는 관영 매체를 통해 드러난다. 이 행사를 앞둔 지난 3월 18일, 중국은 영문판 관영지 《글로벌타임스》 사설을 통해 “개최국인 한국은 참여 국가나 지도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고, 다음 정상회담이 열릴지 여부도 의문”이라고 밝혔다. 이 매체는 같은 날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폄하하는 논조의 칼럼만 3건 내보냈으며 그중 소속 기자가 쓴 것엔 “광대 쇼(clown show)”라는 조롱도 있었다.
지난해 미국에서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행사를 앞둔 그해 3월 28일, C씨는 이와 관련한 한국 내부 소식을 김 박사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김 박사에겐 한국과 중국의 정보기관 요원들이 찾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김 박사는 “웨탄(約談·면담) 형식으로 중국 국가안전부 요원들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차하얼학회 얘기는 숨겨라”

▲김상순 박사가 한팡밍 회장의 최측근 C씨로부터 받은 연락. C씨는 김 박사에게 국제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의 연락처를 알려주며 그와 접촉하되, ‘차하얼학회에 관한 이야기는 숨기고 접근하라’고 했다. 사진=김상순 박사
김상순 박사는 2021년 8월 29일 한팡밍 회장의 최측근 C씨로부터 ‘차하얼학회 얘기를 숨기고 한국계 미국인과 접촉해보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C씨가 언급한 한국계 미국인은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HRW)’에서 북한 담당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케이 석(Kay Seok) 씨다. 김 박사의 말에 따르면, C씨는 석씨의 한국 휴대폰 번호와 사무실 전화번호까지 알려주면서 “석씨에 대해 알고 싶고, 차하얼학회에서 협력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하얼학회라는 명칭은 숨기고 접촉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김 박사는 이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C씨에게는 “협력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 이러한 제안들을 거절하고 나서 한팡밍 회장과의 사이가 소원해지진 않았나요.
“그 뒤에도 소통을 했고, (한팡밍 회장이) 다른 정보나 궁금한 게 있으면 저에게 물어보곤 했으니까 어색해진 건 아니지 않을까요?”
― 선을 넘은 감이 있지만, 외국 관련 정보 수집은 학술단체가 할 수 있는 활동 범위 아닌가요.
“아니죠. 학회 이름을 숨기고 사람을 시켜 정보를 빼오라는 게 무슨 학술 활동입니까. 다른 나라가 진행하고 있는 외교 활동 정보를 알아오고, 그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하는 학술단체가 있습니까. 학자들을 스파이로 이용하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 선거를 앞두고 특정 후보에게 돈을, 그것도 얼마든지 대겠다고 하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이 뭘 의미하겠습니까. 대선일 때 이 지경인데, 총선이나 지방선거 때라고 안 그럴 것 같나요. 이건 한팡밍 회장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이미 하고 있는 작업이에요.”
― 한팡밍 회장이 원래 이런 식으로 활동했나요.
“제가 잘못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알고 있던 한팡밍 회장의 모습은 아닙니다. 어쨌든 한팡밍 회장이 공산당의 지시를 받아서 이러한 활동을 했든 본인이 자의적으로 했든, 이건 잘못된 거죠. 한팡밍 회장을 몇 년간 알았지만, 이런 정도의 비정상적인 활동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런 건 아마 본인의 자의보다는 공산당의 지시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민주당과 긴밀
김상순 박사는 한팡밍 회장과 어떤 관계이기에 이처럼 은밀한 제안을 받았을까. 김상순 박사는 2015년 5월 차하얼학회 연구위원으로 선발됐다. 그러고 2018년 1월 고급연구위원으로 승격됐다. 김 박사에 따르면, 차하얼학회는 정치적 의미 또는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고급연구위원 직함을 준다고 한다.
실제로 북중(北中) 수교 70주년을 맞아 양측 간 교류가 활발해지던 2019년, 한팡밍 회장은 북한 김일성대학교 조선어교육연구실의 배광희 교수와 양옥주 교수에게 차하얼학회 고급연구위원 직책을 직접 수여했다. 이때 ‘김일성대학교 내 차하얼연구소()’를 설립할 계획도 논의됐다. 한국에선 더불어민주당 출신 김진표 전 국회의장이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인 2017년 8월 차하얼학회 국제자문위원에 위촉됐다. 김상순 박사도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국제관계 전문위원 등의 직을 지낸 바 있다.
한편 지난해 5월 26일 김진표 당시 국회의장은 관저에 한팡밍 회장을 비롯한 차하얼학회 대표단을 초청, 만찬회를 열고 한중 간 이해와 협력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그다음 달인 6월 8일,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 대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자신의 관저로 초청하고는 “중국 패배에 베팅하는 건 오판이며 반드시 후회한다”며 협박성 발언을 해 양국 관계가 경색됐다. 그러자 며칠 뒤 13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은 베이징 차하얼학회를 방문했다. 차하얼학회에 따르면, 의원대표단 단장으로 나선 김태년 민주당 의원은 이 자리에서 “현재 양국 관계가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가까운 이웃으로서 양국이 ‘헤어질 수 없는 부부’처럼 갈등과 이견이 불가피하다”고 했다고 한다.
“중국, 朴 탄핵을 안줏거리 취급”
김 박사 얘기로 돌아와서,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을 계기로 한팡밍 회장과 가까워졌다고 했다. 김 박사는 “탄핵 정국 당시 중국 관변 기관들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가십(소문)을 주로 다뤘기 때문에 한팡밍 회장 입장에선 본질적인 사정을 알고 싶었던 것 같다”며 “그러한 것들에 대해 ‘설마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 정도였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 한팡밍 회장과 평소에 어떤 이야기를 나누나요.
“한팡밍 회장은 대개 한국에 대해 궁금한 걸 물어봐요.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때는 제가 서울에 다녀올 때마다 만났어요. 사적으로 밥을 먹다가도 탄핵 관련 내용들을 자주 묻곤 했어요. 그때 한팡밍 회장이 먼저 다가와서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된 거죠. 저는 방송에 출연해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하려면 현장에 가봐야 했기 때문에 한국에 자주 갔습니다. 그래서 한 회장에게 서울의 분위기는 요즘 어떤지 등을 알려줄 수 있었고요. 출입국 기록에도 들락날락한 게 나와 있지만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 집회나 태극기 집회에도 여러 번 가봤습니다.”
― 사적으로 가까웠군요.
“제가 한국에 다녀오면 단둘이서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저를 떠보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시진핑 주석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 그래서 당시 한국의 상황을 한 회장에게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화가 났어요. 제가 중국의 방송 토론이나 인터뷰에 나가서 받는 질문을 들어보면, 그들에게 당시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마치 술안주처럼 씹히는 존재였어요. 남자관계가 어떻고, 사이비 종교를 믿고, 이런 얘기들을 갖고 득달같이 달려들었어요. ‘사실 전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소문, 험담 위주로 떠들어댔어요. 중국 안에서도 이러한 보도밖에 없으니 한팡밍 회장은 본질적인 내부 사정이 궁금했던 것이고,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선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죠.”
잘못된 공공외교

▲베이징 차하얼학회 내부엔 한팡밍 회장이 시진핑 국가주석,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자칭린(賈慶林) 전 정협 주석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김상순 박사
정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한국과의 관계 회복을 원하는 중국 측 제안으로 머지않아 양국 간 물밑 접촉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차하얼학회는 비공식 외교 창구를 맡고 있다. 이는 차하얼학회가 발간한 공공외교 총서 《동북아 평화의 길》에서 명시하고 있다. 한팡밍 회장은 이 책 서두에서 “향후 차하얼학회는 ‘전망성, 영향력, 협력’의 이념과 원칙하에 정부, 연구기관, 기업, 사회민중 간에 소통 및 교류 플랫폼을 구축하고 외교 및 국제 관계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실천적 활동을 계속해서 주도해나갈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차하얼학회가 그 역할을 수행하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게 김 박사의 시각이다. 사실 김 박사는 지난 7월 10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다”며 오프더레코드(보도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언질을 준 바 있다. 같은 달 25일, 그는 고민 끝에 관련 자료들을 들고 왔다. 김 박사에게 ‘2017년 일을 왜 이제야 꺼내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어느 나라든, 외교 관계는 물밑에서 접촉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팡밍 회장이 현재 공공외교를 내걸고 하는 활동은 뒤에서 정보를 캐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마다 거부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동안 한강 동방명주(중국 비밀경찰서) 사건과 같은 중국의 공작 활동에 대해 우리 정부가 아무것도 못 하는 걸 보면서 답답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기자님이 이 문제와 관련해 먼저 찾아와서 이젠 말할 시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한팡밍 회장의 제안은 중국공산당의 의중과 같다고 봐도 무방할까요.
“결국 당이 뒤에서 허가를 했기 때문에 (제안을) 하는 거라고 봅니다. 정협 외사위 부주석이 당에 보고하지 않고 한국의 유력 대선 주자를 만나 인맥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중국에선 큰일 날 일이죠. 보고 체계가 있을 테고, 어떻게든 공산당에 보고는 했을 겁니다. 한팡밍 회장은 저한테도 ‘지금 시진핑 주석과 연락이 된다’고 했어요. 제가 드린 차하얼학회 내부 사진을 보시면,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과 한 회장이 악수를 하고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
한편 김상순 박사는 2019년 4월 31일, 지인을 통해 서울 한강에 위치한 동방명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입점을 위한 내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동방명주 내부 회의실?

▲입점 공사가 진행되던 동방명주 내부 1층엔 VIP용 비밀 접견실이 있었다. 사진=김상순 박사
입점 공사가 진행되던 동방명주 내부 1층엔 VIP용 비밀 접견실이 있었다. 그곳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한중 양국의 국기가 꽂힌 책상이 있었고, 시진핑 국가주석의 사진도 놓여 있었다. 사진과 같이, 평범한 중식당으로 보기 어려운 공간이 있었다는 얘기다. 김상순 박사는 이때 왕하이쥔(王海軍) 동방명주 대표를 만났다고 한다. 김 박사는 왕 대표에게 ‘진입하기도 어려운 한강변에 중식당을 만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왕 대표는 ‘나중에 시진핑 주석이 방문하면 이곳에서 만찬을 주최하기 위해 고급스러운 장소를 찾은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 박사가 제공한 동방명주 내부의 사진들을 보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국내 이공계 저명 교수 A씨였다. 김 박사도 이날 그를 처음 만났으며 공사가 진행되던 동방명주에서 그를 만난 점, 그리고 왕 대표가 A씨와 지인 사이라는 점이 의아했다고 한다. 또 A씨가 중국 측 초청을 받아 자주 방문 연구를 진행했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았다고 설명했다.

▲동방명주 내부에 시진핑 국가주석의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김상순 박사
이 밖에도 동방명주 내부에는 화교 관련 몇몇 단체의 현판도 걸려 있었다. 이들은 ▲화조중심(華助中心) ▲중국재한교민협력회총회 ▲중화국제문화교류협회 ▲한화중국화평통일촉진회 등이다. 이후 동방명주를 둘러싼 논란이 터지자 정보기관 요원들이 김상순 박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경복궁 인근의 카페에서 이들을 만난 김 박사는 관련 자료를 넘겨주며 어디를 조사해야 하는지도 조언했다. 그는 이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장기적으로 봐야 해요. 한팡밍 회장과 사진을 찍었거나, 논란이 있는 중국 관련 단체들과 교류한 흔적이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에 검색만 해봐도 다 나오잖아요. 그 사람들을 지켜봐야죠.”
김상순 박사는 한팡밍 회장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차하얼학회는 그동안 해온 공작 행태가 있어서 외국 정치권과의 접촉도 쉽지 않아요. 공공외교를 못 하고 있는 거죠. 한 회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요. 비공식 소통 라인을 만들자는 거잖아요. 그건 좋아요. 다만 지금처럼 음험하게 하지 말자고요.”
“소통창구 바로잡자”
김상순 박사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한중 양국 정부와 정상들에게 세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양국 정부의 비공식 외교 창구 ‘한중 1.5 대화’에 참여한 바 있다. 김 박사는 한국 정부에서 베이징으로 파견을 나온 통일관과 함께 한중 2대 2 비공개 대화를 수차례 진행했다. 중국 측 상대는 주로 중국 국책 연구소 학자들이거나 중국 주요 대학 및 연구소 학자들이었다. 대화 방식은 사전에 방향을 정해서 그들이 공산당에 보고할 수 있도록 했으며 대화 이후 양측 모두 정부 등 관련 기관에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 녹음기 지참도 가능하다고 했다. 대화가 이뤄진 장소는 베이징에 위치한 한식당 밀실이었다고 한다. 이 대화에 대한 보고를 받은 양국 정부의 반응은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김 박사의 세 가지 제안 가운데 첫 번째는 앞서 언급했듯, 한국과 중국이 제대로 된 대화 라인을 구축하는 것이다. 중국이 차하얼학회를 만들었듯, 우리도 중국과의 소통 채널 역할을 하는 종합 연구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김 박사의 견해다.
두 번째는 양국의 소통 방식을 세 단계로 나누어 ▲양국 연구기관의 비공개 대화(한중 2.0 비공개 대화) ▲양국 연구기관과 관련 부처가 참여한 비공개 대화(한중 1.5 비공개 대화) ▲양국 정부 당사자 간 합의(한중 1.0 비공개 대화) 등의 순으로 체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는 김 박사가 차하얼학회에서 일관되게 건의해온 내용이라고 한다.
세 번째로 양국의 소통 방식을 주변국까지 확대해 남북미중(南北美中) 소통 창구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차하얼학회는 이미 평양에 차하얼학회 지부 설립을 추진한 바 있다. 김 박사는 이를 확대하면 주변국들과의 이견 및 불필요한 오해와 충돌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중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양국의 소통 창구는 막혔고, 이는 대화 단절과 불필요한 대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끝으로 김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30년 동안 중화권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측 전문가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한국과의 소통에서 대화 상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5년을 주기로 정부가 바뀌니 그때마다 대화 채널이 바뀐다는 거예요. 장기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을 카운터파트(상대방)가 없으니 고정된 소통 창구를 만들기 어려웠죠. 이런 와중에 민감한 이슈가 터지면 대화는 바로 단절됐습니다. 민간에선 이러한 소통 노력이 있어 왔지만 일회성에 그치는 게 다반사였고, 심층적인 내용보다는 만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았었어요. 그러니 중국 측에서 공공외교를 표방하는 단체가 한국 측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스파이 활동까지 하게 된 측면도 있는 것 아닐까요?”⊙
월간조선 09월 호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09.07 수미 테리 사건으로 보는 워싱턴 로비
자연스럽게 인맥 쌓는 일본, 급할 때 ‘돈으로 구워삶는’ 한국
⊙ “수미 테리 사건은 최초의 한국계 연방 상원의원 후보인 앤디 김에 대한 경고일 수도”
⊙ 정보 수집 위한 소프트·하드 네트워크가 없는 한국, ‘한국계’에 매달리다 상대방 몰락시켜
⊙ 수미 테리에 대한 기소로 그친 것은 한국이 ‘우방국 프리미엄’ 덕 본 것
⊙ 일본 기업, 전직 고관을 ‘고문’ 영입해 고급 정보 획득하고 ‘합법적 보험’ 들어
⊙ 수미 테리 사건, 한미 관계가 아직 특급 비밀 정보를 나눌 사이가 아니라는 것 증명
⊙ 푸틴, 미국 기자 등 16명 내주며 자신의 비밀경호원 출신 암살자 크라시코프 데려가
⊙ 숄츠 독일 총리, 바이든 대통령에게 “당신을 위해, 일을 계속 추진할 것”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미 연방 검찰은 국정원 요원이 구매한 상품이 든 쇼핑백을 들고 수미 테리와 매장을 나서는 모습을 공개했다. 사진=미 연방 검찰
‘1년 52주, 2년 동안 104회 스페셜 시리즈로 만들 만한 흥미진진 스토리!’
8월 초 미국·러시아 24명 스왑(Swap·교환) 뉴스를 본 순간 떠오른 생각이다. 미국이 8명, 러시아가 16명을 풀어준 세기적 ‘딜(Deal)’이 튀르키예 앙카라 공항에서 벌어졌다. 러시아가 넘긴 16명은 기자, 퇴역 군인, 반체제 인사 인권운동가들이다. 전부 스파이 혐의로 수감 중이었다. 미국이 넘긴 수감자도 스파이, 암살 같은 배경을 갖고 있다.
미·러 스왑 뉴스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스파이 스토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려 3년 이상 끈 양국 간 딜과 관련해 양국 대통령이 직접 관여했다는 점, 미국 CIA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같은 정보기관이 주도했다는 부분, 스왑에 직간접 관련된 나라가 무려 10여 개국에 달하는 글로벌 인텔리전스란 점도 ‘아주’ 흥미롭다. 스파이 스왑은 스파이 사건 그 자체보다 몇 배 더 비밀스럽고도 흥미진진하다. 표면적인 뉴스와 실제 내막의 깊이가 전혀 다르다.
명화(名畫) 감상법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그림이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 밖 세계를 얼마나 이해하느냐가 명화 감상의 진수(眞髓)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림 속에서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화가의 생각·꿈·인생, 당시 역사와 공기를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는지가 명화 감상의 기본이다.
24명 스왑 뉴스 중에서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석방이 헤드라인 뉴스다. 조감도(鳥瞰圖), 즉 새의 눈으로 내려다본다면 기자 석방은 눈요깃감 디저트에 불과하다. 1차, 2차 평면 뉴스가 아닌, 3차 입체적 차원에서의 세계를 관찰할 최적의 본보기가 24명 스왑 스토리 속에 녹아 있다.
크라시코프와 나발니
원래 미·러 스왑은 러시아의 철저한 무시로 아예 무산될 뻔했다. 그러나 체첸 지도자를 암살한 러시아인 바딤 크라시코프가 CIA에 포착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크라시코프의 전력(前歷)은 푸틴의 비밀경호원이다. 개인적으로도 푸틴과 가깝다. 크라시코프는 2019년 8월, 독일까지 건너가 체첸 독립운동을 벌이던 인물을 살해한다. 체포 뒤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비밀을 지킨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국가적 영웅인 셈이다. 푸틴은 수차례에 걸쳐 “크라시코프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이며 영웅”이라고 격찬했다.
미국이 크라시코프를 넘길 경우 거기에 따른 반대급부가 반드시 따를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된다. 문제는 크라시코프가 독일 감옥에 수감된, 독일 주권하의 인물이란 점이다. 무려 1년 이상 설득하자 마침내 독일이 크라시코프 석방에 찬성한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었다. 스왑 리스트에 러시아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나발니는 푸틴의 최대 정적(政敵)이다. 독성신경제 노비촉 테러를 당한 뒤 독일에서 치료를 받고 살아난 인물이다. 이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 반푸틴 운동을 전개하던 중 수감된다. 크라시코프를 넘기는 대신 나발니를 돌려받는다는 것이 독일 정부의 조건이자 요구였다.
미국은 자국민과 나발니가 포함된 석방자 명단을 러시아에 넘겼다. 러시아도 크라시코프가 석방된다는 전제하에 일단 응했다. 밀고 밀리던 협상 도중, 올해 2월 예상치 못한 사건 하나가 터진다. 나발니가 수감 중 갑자기 숨진 것이다.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죽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예고된’ 비극. 미국의 묵시적 침묵하에 기획된 미·러 협상의 희생양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푸틴이 크라시코프를 위해 정적 나발니까지 풀어줄 리가 없다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크라시코프 이펙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8월 1일 공항까지 나가서 미국과의 스파이 스왑으로 석방된 바딤 크라시코프를 맞이했다. 사진=AP/뉴시스
결과적으로 나발니 사망은 스왑의 큰 장애물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이든은 올해 6월 초 독일 총리 울라프 숄츠에게 전화를 걸어 크라시코프 석방에 관한 최종 결심을 묻는다. 숄츠는 당시 “당신을 위해, 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For You, I Will Try to Do This)”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이든의 친구로서, 미국의 우방으로서 크라시코프를 풀어주겠다는 의미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24명 스왑이 이뤄진다.
주목할 부분은 스왑 대상자가, 러시아가 내준 사람이 16명으로 미국이 풀어준 8명보다 배나 많다는 부분이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크라시코프를 구하라”는 푸틴의 절대명령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지친 러시아인이 보면 ‘크라시코프 무사 귀환=푸틴의 위업, 러시아의 명예’로 받아들일 것이다.
크라시코프의 석방은 푸틴의 목숨 유지와 직결된 문제라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독재자는 대개 자기 주변 배신자에게 목숨을 잃는다. 비밀경호원 출신 크라시코프의 석방은 푸틴 주변을 120% 충성일꾼으로 채울 수 있는 최적의 약속이자 보상이다. 크라시코프 석방 당일, 푸틴은 직접 공항에 나가 자신의 충복을 기쁘게 맞이했다. ‘크라시코프 이펙트(effect)’라고나 할까? 적어도 당분간은, 내부 총질에 의한 푸틴 실각(失脚)은 없을 듯하다.
24명 스왑 내막을 보면, 미국의 글로벌 전략과 네트워크에 새삼 놀라게 된다. 크게 두 가지다. 우방국과 함께 하나로 뭉쳐 러시아를 상대하는 미국의 협상력과 우방국의 미국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남다르다는 점이 감탄할 내용이다.
첫째, 미국의 협상력을 보자. 미국은 스왑과 관련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러시아인 수감자를 찾아 나섰다. 서로 주고받기 위해서는, 매력적인 메뉴를 러시아에 보여줘야만 한다.
독재국가의 관리는 스스로 나서서 메뉴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다. 실패할 경우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회담장에서 일방적으로 큰소리는 칠 수 있지만, 자국 독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 푸틴, 시진핑, 김정은을 제외한 모두가 파리 목숨이다. 미국이 구체적으로 제안하면 거기에 맞춰 반응하는 것이, 러시아·중국·북한의 공통적인 대응법이다.
미국은 반대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그러하듯, 필요한 경우 밑에서부터 메뉴가 올라온다. 미국은 독일·슬로베니아·폴란드·쿠웨이트·남미에 이르는 수많은 나라와 접촉해, 푸틴의 입맛에 맞을 메뉴 작성에 들어갔다. 이라크 전쟁만이 아니라, 스왑조차 우방국들과 함께하자는 것이 미국의 21세기 협상 전략이다.
미국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미국의 진짜 파워
둘째, 미국에 대한 우방국들의 기대와 신뢰에 대해 알아보자. 간단한 의문이지만, 왜 각 나라가 자국민 석방을 위한 러시아와의 직접 딜에 나서지 않았을까? 푸틴을 상대로 한 협상이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동등한 레벨의 보상이 이뤄질지도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아직’ 러시아는 대국(大國)이다. 대국 눈에는 대국 아니면 전부 소국(小國)이다. 중진국이나 중선진국, 나아가 ‘거의 대국’도 전부 소국이다. 슬로베니아는 러시아 고정간첩 부부 2명을 미국에 넘겼다. 200만 인구의 나라가 러시아 스파이 2명을 돌려보낸다고 해도 푸틴이 응할지, 격에 맞는 보상을 할지 아무도 장담 못 한다. 슬로베니아는커녕, 독일조차도 러시아를 상대로 한 직접 교섭에 나서기 어렵다.
이와 같은 현실을 잘 아는 미국은 우방국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면서 함께 협상에 나섰다. 우방국들은 미국의 생각에 응했다. 21세기 외교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다. 아마 이면에서는 석방에 따른 미국 측의 반대급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미국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없다면 자국 주권하에 있는 러시아 수감자를 풀어줄 리가 없다.
24명 스왑 과정을 보면, 러시아는 철저히 단독으로 움직이고 있다. 반면 미국은 우방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과연 미국이 약해서일까? 눈앞의 힘자랑보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기대와 신뢰가 진짜 파워다.
워싱턴은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
당연하지만, 미·러 스왑의 중심 무대는 워싱턴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를 오가며 벌어진 첩보 드라마지만, 딜에 관련된 소프트·하드 네트워크의 중심은 바로 워싱턴이다.
‘뉴욕=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말이 있다. 워싱턴은 어떨까? 필자에게는 ‘워싱턴=아르고스(Argos)’로 느껴진다.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눈이 100개 달린 괴물이 아르고스다. 아르고스처럼 100개의 눈을 24시간 뜬 채 전 세계를 살핀다. 워싱턴은 뉴욕처럼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평생 눈을 뜬 채 잠잘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다.
신화 속 아르고스가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들면서 파국(破局)을 맞이하듯, 눈 100개를 가진 워싱턴도 시계(視界) 제로에 빠질 때도 있다. 멀리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서, 가까이는 2001년 9·11 동시 테러 사건이 좋은 본보기다.
그러나 전 세계 빅뉴스의 배경을 보면 ‘반드시’ 워싱턴 정치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눈 100개를 굴리면서 지구 핵심 이슈에 적극 개입한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눈 100개에서 벗어난, 워싱턴 글로벌 정치가 작용하지 않는 문제는 이슈 자체가 될 수 없다.
현재 미얀마에서는 민주 세력과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軍部) 세력 간의 내전(內戰)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 또한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워싱턴 100개의 눈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미군을 쫓아낸 아프가니스탄이라지만, 아르고스 눈에서 벗어날 경우 지구 밖에 존재하는 혹성처럼 외면당한다.
미·러 스왑은 바로 ‘워싱턴 아르고스 정치’의 결과물이다. 워싱턴 아르고스의 주식(主食)은 정보다. 워싱턴은 미국만이 아닌, 글로벌 정보의 보고(寶庫)다.
정보는 공개적으로 떠도는 ‘인포메이션(information)’, 비밀로서 소수에게만 허용된 ‘인텔리전스(intelligence)’로 나눠진다. 팩트로서의 1차 정보, 분석으로서의 2차 정보, 평가로서의 3차 정보, 전망으로서의 4차 정보로도 분류할 수 있다.
당연히 정보는 돈이다. 인포메이션보다는 인텔리전스가 고가(高價)로 거래된다. 인포메이션과 인텔리전스를 적당히 활용하면서 1차, 2차, 3차, 4차 정보로 갈수록 가격도 올라간다.
필자는 1999년 이래, 워싱턴에 기반을 두고 에너지 관련 정보 비즈니스에 종사해왔다. 간단히 말해, 국제시장에서의 에너지에 관한 정책 관련 정보 수집·분석·전망이다. 간과하기 쉬운데, 워싱턴은 국제 에너지 가격과 정책을 결정하는, 에너지 관련 글로벌 총본부다. 에너지의 영역은 넓고도 깊다. 워싱턴의 모든 정보가 에너지 문제와 관련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8월 초 글로벌 주식 대폭락의 출발점도 워싱턴이다. 이란 미사일 발사대 배치가 워싱턴 정보망에 걸리면서 전 세계 주식이 급락(急落)한 것이다.
한국계 최초 연방 하원의원의 몰락

▲최초의 한국계 연방 하원의원 김창준. 사진=퍼블릭 도메인
아시아판 스파이 스토리라고 할까? 7월 17일 워싱턴발(發) 한국계 스파이 사건이 터졌다.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대북(對北) 전문가인 수미 테리가 한국 국가정보원의 돈과 브랜드 가방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는 뉴스다. 문재인 정권 당시 저질러진, 아마추어 인텔리전스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남을 외교적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스파이 사건이 발각됐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스파이 사건의 내용이 너무도 미개하고 무식하다. 미·러 스왑 내막을 보면 ‘돈으로 삶는다’는 식의 얘기는 전혀 없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우선이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지만, 무식하면 ‘여기 제일 비싼 와인 주세요’로 간다. 정보 수집을 위한 소프트·하드 네트워크가 없는 상태에서 돈으로 환심을 사려다 걸린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수미 테리의 경력과 한국어 능력이 국정원으로 하여금 작전에 나선 계기가 됐을 듯하다. 편견일지 몰라도, 워싱턴에 있는 한국 정보력을 보면 영어로 상대를 설득할 만한 능력 자체가 없다.
1993년 한국계 최초의 미 연방 하원의원(김창준)이 탄생했다. 그는 3선까지는 성공했지만, 4선에서는 예비 선거에서 좌초했다. FBI가 불법선거자금 수사를 하면서 탈락한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가 있지만, 한국 정부가 기업·대리인을 통해 선거자금을 댄 것이 보도되면서 그의 정치생명도 끝났다. 서로 한국어로 소통하면서 정을 나누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 과정에서 한국식 뇌물이 제공됐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다. 한국계 최초의 하원의원을 추락시킨 장본인은 바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한국 정부인 셈이다.
‘우방국 프리미엄’

▲CSIS 선임연구원 시절의 수미 테리. 사진=조선DB
어느 수준의 정보까지 국정원으로 흘러들어 갔는지 현재 보도된 뉴스만으로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수미 테리가 전직 CIA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직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급 정보를 가까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름 이유와 명분이 있겠지만, 수천 달러짜리 브랜드 가방을 공짜로 받는다는 것은 ‘워싱턴 퇴출(退出)’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워싱턴 싱크탱크 최고 석학(碩學)이라도 영어 3500자 정도 리포트 하나에 250달러 정도를 받는다. 2~3시간 노동의 결과가 250달러란 점을 감안하면, 수천 달러 공짜 가방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워싱턴 룰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사건이 터진 직후, 한국에서는 “왜 우방국 한국을 스파이 범죄 국가처럼 다루느냐”는 불만이 들려온다. 필자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우방국 한국이니까 수미 테리 기소 수준에서 끝났다고 보는 게 합당할 듯하다.
수미 테리는 미국 시민권자다. 한국에서는 부모나 출생지를 근거로 한국과 연계시키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수미 테리는 미국에 세금을 내고 투표권도 갖고 있는 미국인이다. 그나마 ‘우방국 프리미엄’ 덕분에 뇌물을 준 국정원 직원과 상부 책임자에 대한 사법 조치 없이, 전직 CIA 출신 미국 여성만 문제시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만약 비슷한 사건을 중국이나 남미 국가 등이 저질렀다면, 관계자 소환 요구와 국제수배 나아가 미국 출입국 금지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은 이 같은 조치를 국정원과 한국 정부에 취하지 않고 있다.
황당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수미 테리 사건을 보면 왜 아직도 ‘바가지요금’이 한국에 존재하는지 알 듯하다. 일본보다 소득도 높아졌고, ‘K-자화자찬’이 끊이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뉴스가 있는데 외국인 상대 택시요금 부당 청구, 숙박비·식비 바가지다. 필자가 지난 4월 노량진 재래식 가게에서 경험한 일인데, 4800원짜리 물건을 구입한 뒤 1만원을 내자 잔돈을 5000원만 건네줬다. “200원이 모자란다”고 하자, 주인인 60대 남성은 오히려 “푼돈인데 뭘 그렇게 신경을 쓰냐”며 화를 냈다. 그러며 험악한 표정으로 동전을 거의 내던지듯 건네줬다.
‘선물’이라지만…
브랜드 가방과 돈을 둘러싼 한국판 스파이 사건을 보면, 당시 가게 주인의 ‘푼돈 200원 논리’가 겹쳐진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은 가게 주인 생각에 동의하거나, 무심결에 따라가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논리의 연장선에서 보면, 바가지요금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재료도 비싸고 여기저기 다 값을 올리기에 나도 좀 비싸게 받는데, 왜 나만 걸고넘어지냐’는 논리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격으로, 200원에 대한 일을 이렇게 넘기면 나중에 2만원, 20만원, 200만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처음부터 이런 ‘푼돈 200원 논리’에 동의하는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끼리끼리 어울리다 보면 어느 틈엔가 ‘푼돈 200원 논리’에 대충 흡수되고, 이후 2만원, 20만원을 넘어 200만원, 그 이상으로 올라가도 무덤덤해진다. ‘자주 보고, 그러다 보니 식사도 하면서 얘길 나누게 됐고 그 과정에서 정성으로서의 선물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것이 수미 테리 사건에서 나오는 변명 중 하나다.
미국은 1센트, 일본은 1엔 단위로 계산을 한다. 한국으로 치면 10원짜리 정도다. 바가지요금이나 소도둑 근절용 ‘정신무장’으로서의 1센트, 1엔이라 볼 수 있다.
‘일본=돈 로비’라는 착각
수미 테리 사건과 비교되는 모습이지만, 일본만큼 워싱턴 정보에 혈안(血眼)이 되어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필자는 일 때문에 일본인들과 만날 기회가 많다. 현재 워싱턴에 있는 일본 종합상사만 해도 100여 개가 넘는다.
한국에서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일본=돈 로비’라는 등식이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뉴스인, ‘일본 돈 로비로 워싱턴 공격’이란 식의 스토리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워싱턴 로비에 쓰는 돈의 규모는 일본 국력 수준에 준하는 평균 정도에 그친다. 한국이 생각하는 ‘일본=왕창 돈 로비’는 피해의식에 기초한 편견에 불과하다.
사실 ‘일본=돈 로비’는 일본인 스스로가 만든 말이기도 하다. 돈이 아니라, 군대와 무기를 직접 보내라는 보수계의 생각이 ‘일본=돈 로비’란 내부 비난으로 바뀐 것이다.
국정원 직원이 브랜드 가방을 구입해 직접 넘겼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한국=돈 로비’란 생각과 함께, 한국식 ‘푼돈 200원 논리’의 연장선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회사 부장이 신입사원들을 불법 안마시술소에 데려간 뒤, 비용을 회사 카드로 처리했다는 식으로 들렸다. 일본에서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질 수가 없다. 도덕이나 윤리의식 때문이 아니라, 불법 비용을 회삿돈으로 처리할 경우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을 아낀다는 이유로, 불법 지출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평소 고맙기 때문에 수천 달러짜리 가방을 선물한다는 것은 ‘푼돈 200원 논리’에서나 가능하다. 가방을 구입한 국정원 직원도 문제지만, 비용 지출을 허락한 상사가 있다는 점에서 국정원 전체가 ‘푼돈 200원 논리’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미 테리 사건에서 나타난 국정원의 행적은 워싱턴 정보를 대하는 일본의 자세나 방식과 너무도 다르다. 일본은 어떤 식으로 아르고스 100개의 눈에 접근할까?
크게 두 가지다. 모두에게 공개될 투명한 돈과 파티나 만찬을 통한 개인적 교류로 나눠진다. 공익에 주목하는 워싱턴 정책 집단의 재정은 기업이나 개인 기부금에서 시작된다. 워싱턴에 있는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싱크탱크가 대표적인 본보기로, 연방세법 501(C) 조항에 따라 기부도 받고, 세금도 면제된다.
한국 기업도 행하고 있지만, 일본 법인들은 이들 501(C) 대상 조직에 대한 기부를 ‘정례화’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기업 수가 많은 만큼, 기부금 자체도 많다. 따라서 아시아 문제에 주목하는 워싱턴 싱크탱크라면 일본이 행한 기부금이 넘친다. 당연히 기부한 기업은 세금공제 혜택을 받는다.
501(C)에 해당되는 조직의 기본 방침이지만, 외국 정부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 개인이나 기업은 되지만, 외국 정부는 기부 자격에서 제외된다. 국정원은 한국 정부 조직이다. 따라서 싱크탱크에 기부할 수도 없고, 연구원에게 선물을 줘서도 안 된다. 기부와 관련해 싱크탱크는 기부자의 생각에 맞춘 정책을 논의할 필요도 없다. 기부는 받지만, 기부자 생각의 반대로 나아갈 수도 있다.
정보 교류의 장, 홈 파티
두 번째, 파티·만찬을 통한 교류는 어떤 식으로 이뤄질까? 일본 대사관의 경우 온갖 명목으로 파티를 연다. 워싱턴 정책 관계자라면 대사관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다. 일단 음식도 좋고 아시아 관련 정보와 네트워크가 전부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정보와 네트워크의 교류는 집에서 이뤄지는 홈 파티에서 시작된다. 주말이 되면 워싱턴 주재원들 집 여기저기서 파티가 벌어진다. 남자만이 아니라, 부인이나 자식도 전원 참석한다. 아무리 많아도 30여 명 수준으로 곳곳에서 열린다. 가능하면 자기가 알고 지내는 미국인을 데려와 서로 소개하면서 친분을 넓혀간다. 일단 홈 파티에서 얼굴을 익힌 뒤 밖에서 다시 정식으로 만나 친분을 되새긴다.
워싱턴에는 의외로 일본어가 가능한 미국인이 많다. 당연히 홈 파티는 일주일간 수집한 워싱턴 정보의 교환 무대이기도 하다. 어느 레스토랑 메뉴가 좋다는 가십에서부터, 워싱턴 외교가나 정책 기관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얘기들이 교환된다. 물론 미국인에게 일본의 입장과 상황도 알린다. 소위 워싱턴 일본통의 대부분은 이 같은 홈 파티를 통해 자신의 인맥과 정보력을 넓힌다.
한국은 어떨까? 일단 홈 파티에 익숙하지 않다. 취미나 담소에 집중하는 파티 문화 자체가 드물기 때문일 듯하다. 열더라도 남자를 중심으로 한 술판으로 변한다. 한국의 경우 워싱턴을 떠나는 순간, 현지와의 연(緣)도 끊어진다. 후임자에게 자신의 네트워크를 물려주는 경우도 드물다. 일본은 다르다. 중요한 인물은 식사나 홈 파티를 통해 서로 연결시켜준다. 인맥 독점도 드물고, 주재원이 일본으로 돌아가도 현지와의 연이 그대로 유지된다. 물론 이런 상황에 연이 있는 미국인이 도쿄로 부임할 경우 교류는 한층 더 심화될 수 있다.
‘자리’ 주면서 정보 확보
현지 미국인 적극 활용은 일본식 정보 수집 방식 중 하나다. 수미 테리 사건이 터진 4일 뒤인 7월 20일, 흥미로운 워싱턴발 뉴스 하나가 떴다. 일본 최대 철강업체 일본제철이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을 고문으로 영입했다는 속보다. 미국 철강회사 US스틸을 인수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이어졌다.
폼페이오 영입 기사를 보면, 워싱턴 글로벌 정치를 대하는 한일 간 차이점이 선명히 떠오른다. 한국은 직접 ‘돈’을 주면서 정보를 얻으려 하지만, 일본은 ‘자리’를 주면서 정보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비슷한 듯하지만, 불법과 합법으로 나뉠 수 있다.
워싱턴 내 일본 대기업에 들러보면, 현지 채용 미국인 특별고문이 ‘반드시’ 있다. 대부분 유령 고문으로, 회사 출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행사나 파티, 네트워크가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나타난다. 고문 영입 비용은 최하 수십만 달러부터 시작된다. 필자가 보기에 폼페이오 영입에 따른 비용은 1년에 최하 수백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와 특급호텔에 지출될 비용은 따로 계산된다.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대부(Godfather)〉 3부작을 본 사람이라면 ‘돈 콜레오네’ 바로 옆에 누가 앉아 있는지 기억할 것이다. 바로 변호사다. 유럽 선진국이 그러하듯, 일본은 법과 네트워크에 특화(特化)한 고문 하나 영입에 수십만·수백만 달러를 퍼붓는다. 엄청 비싸지만, 고급 정보를 얻고 만약에 대비한 ‘합법적인’ 보험이라 보면 된다.
한국 기업도 고문을 두고 있긴 하다. 그러나 내막을 보면 위인설관(爲人設官)에다 한국계 고문이 대부분이다. 고급 정보나 보험이 아니라, 서울 회장님의 한국계 친구를 위한 자리에 불과하다. 도움은커녕 짐만 될 뿐이다.
최초의 한국계 연방 상원의원 후보

▲한국계 최초로 미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하는 앤디 김. 사진=AP/뉴시스
8월 7일,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팀 월츠 미네소타 주지사가 결정됐다. 바로 다음 날, 일본의 신문·방송에 팀 월츠와 만났던 일본인, 일본 미디어와의 인터뷰 내용이 폭증했다. 공화당 부통령 후보자 J.D 밴스도 마찬가지다. 부통령 후보 선정 즉시, 과거 일본인이 행했던 밴스에 대한 인터뷰가 넘쳐났다.
두 사람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눈 한국인, 한국 미디어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트럼프는커녕, 그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2024년 여름 한국 외교의 현실이다. 필요할 때 왕창 돈으로 구워삶는 것이 아니라, 평소 파티나 식사를 통해 인간관계를 다지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다.
최근 워싱턴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60대 일본인과 통화를 했다. 수미 테리 문제와 관련해 얘기를 나누던 중 한국계 최초의 연방 상원의원 후보자가 된 뉴저지주(州) 출신 연방 하원의원 앤디 김이 화제가 되었다. 그 일본인은 “수미 테리 문제가 앤디 김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미국 연방 상원의원은 미국 대통령에 버금가는 자리다. 연방 상원의원을 통하면 백악관·의회·행정부 그 누구와의 접촉도 가능하다. 한국인이라면 앤디 김이 당선되도록 지원하고 싶을 것이다. 한국 정부도 이 같은 사실을 놓칠 리가 없다. 상원의원 민주당 최종 후보 경선과 관련해, 앤디 김에 대한 한국계의 지원·지지가 엄청나다고 한다. 뉴저지주는 한국인이 몰려 사는 곳이기도 하다.
앤디 김에 대한 이런 지원 열기는 좋지만, 자칫 미국법에 저촉될 수 있다. 한국 정부와 관련된 돈이 들어갈 경우, 고의성 여부와 무관하게 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뉴저지주 전임 상원의원은 이집트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서 실각했다. 2006년부터 뉴저지주를 장악한 민주당의 밥 메넨데즈가 그 주인공이다.
우연이자 필연이지만, 수미 테리 사건이 터진 바로 그날, 메넨데즈는 뇌물 수뢰 관련 16개 사안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국계 최초의 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씨는 한국 정부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실각했다. 노파심이지만 앤디 김의 성공을 원한다면 무관심이 최고의 지지와 지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특급 비밀 정보 나눌 수 있어야 진정한 우방
이스라엘-이란 긴장 고조,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운명, 총리가 도망간 방글라데시 신정부, 대만해협의 안전, 북핵에 맞선 미국의 대응….
전부 워싱턴 아르고스를 통해 다뤄지거나 다뤄질 글로벌 테마이자 숙제다. 재삼 강조하지만, 워싱턴 아르고스를 감동시킬 진짜 무기는 신뢰에서 출발한다. 반미(反美) 신자들이 보면 불편하겠지만, 워싱턴 아르고스 눈의 수와 관찰력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불빛이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황혼(黃昏)의 대국은 아니다.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의 나라’라고 할까? 따뜻하지 않다고 무시하기 십상이지만, 그 빛이 사라지는 순간 방향도 잡기 어려운 암흑세계로 변할 수 있다.
스파이 스왑도 우방·동맹과 함께한 나라가 미국이다. 약해서가 아니라, 서로 믿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있다. ‘스파이’란 말이 들어간다는 것은 특급 비밀 정보가 곳곳에 깔려 있다는 의미다. 진짜 친구이자 우방국은 이 같은 특급 비밀 정보를 나눌 수 있고, 나눠야만 한다.
수미 테리 사건은 한미 관계가 아직 특급 비밀 정보를 나눌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호 신뢰다.
숄츠 총리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바이든에게 말했다.
“당신을 위해, 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과연 한국 지도자가 동맹국 대통령에게 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이 멀다.⊙
월간조선 09월 호
09.07 수미 테리 사건은 왜 일어났나?
‘신의 없는’ 박지원과 수미 테리 사건, 트럼프 노벨상 수상 공작
⊙ FBI가 문제 삼은 것은 문재인-트럼프 정권 시절 수미 테리의 활동과 금품 수수
⊙ 김정은-트럼프 하노이 노딜 후 종전선언 급해진 문재인, 박지원을 국정원장으로 기용
⊙ 수미 테리의 문재인 정권 시절 화상 워크숍 주선 등은 종전선언을 위한 영향력 공작의 일환
⊙ 수미 테리의 박근혜·윤석열 정권 활동은 공공외교
⊙ 트럼프, “아베가 노벨상 추천”… 문재인, “노벨상은 트럼프가 받아야”
⊙ 정의용, ‘북한 체제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전제를 빼고 김정은이 그냥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다고만 발표
⊙ 트럼프의 CIA, 문재인-김정은을 동시에 속일 작전을 만들었을 가능성 높아
李政勳
1962년생. 연세대 학사·석사, 경기대 박사(정치학) / 《월간조선》 기자, 《신동아》 편집위원, 《주간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위원 역임 / 저서 《한국의 핵주권》 《탈핵비판》 《그래도 원자력이다》 외 다수

▲2019년 6월 3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의 판문점 만남.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이 마치 억지로 끼어든 것처럼 보인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때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7월 22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국정원 요원들이 미숙하고 참 바보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더 바보짓을 한 건 (윤석열) 대통령실”이라며 “수미 테리가 활동을 시작했던 박근혜 정부에서 8건, 문재인 정부 5년간 12건, 윤석열 정부 1년간 20건이 넘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주장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하나. 그도 수미 테리를 활용했던 국정원장인데,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수미 테리
이북 출신의 조부모를 두고 CIA에서 분석관으로 근무했으며 윤석열 정부 때인 2023년 미국에서 북한의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 〈유토피아를 넘어〉의 제작과 홍보에 적극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수미 테리는 우파적 인물이다. 이런 그가 ‘친북(親北)’인 문 정부를 위해 12번이나 활동한 것이 오히려 이례적인데 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협력했던 그를 이용하려는 문 정권의 압박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문 정권에서 12번이나 협조했던 그가 윤석열 정부 1년간 20번이나 협력한 것은 그가 우파 정권의 출현을 반겼다는 뜻이 된다. 수미 테리 사건의 ‘속’을 파헤쳐본다.
1990년 무렵 미국의 정보·외교기관에 들어간 한국계 미국인들은 한국의 힘이 G10 수준으로 커지고 북핵 위기가 고조돼 ‘한국 전문가’가 필요해진 2005년 이후 큰 기회를 잡았다. 2018년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직전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수행해 김정은을 만났던 앤드루 김 CIA 코리아 미션센터장과 6자 회담 미국 대표와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내고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위한 미국 실무진을 이끌었던 성 김 미 국무부 차관보 대행 등이 대표적이다. 앤드루 김보다 한발 늦게 CIA에 들어간 수미 테리는 그 ‘뒷물’을 탄 경우였다.
다민족(多民族) 국가인 미국은 정보기관에 진출한 이민족(異民族) 요원이 ‘고국을 위해 활동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어한다. 강릉 잠수함 사건이 일어난 1996년 발생한 로버트 김 사건이 좋은 사례다. 미 해군 정보국(ONI)의 분석관이던 로버트 김은 주미 해군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미 해군의 정보를 건네줬다가 FBI에 검거돼 9년간 옥고를 치렀다.
미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수미 테리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국정원 요원을 만난 것이 문제가 돼 CIA에서 퇴직했다. 그러나 규정을 어긴 것이지 정보를 누설한 것은 아니었기에 사회활동은 할 수 있었다.
한국어가 완벽한 수미 테리는 국제정치학으로 유명한 플레처스쿨의 박사였기에 오바마 정부의 NSC(안보회의)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1년이 지난 2013년(오바마 정부 시절)부터는 싱크탱크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시 국정원 요원을 만났다. 정보는 ‘활물(活物)’이기에 몇 시간만 늦게 알아도 무용지물(無用之物)인 경우가 많다. 국정원은 CIA와 바로 통하는 창구가 있기에, 퇴직 5년이 지난 CIA 요원에게 얻을 정보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그를 만난 것은 미국 여론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꿔보려는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을 위해서였다.
영향력 공작
영향력 공작은 기업이 PR로 불리는 홍보와 ‘대관(對官)’으로 불리는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한 로비를 잘해서 이미지를 개선하고 자사에 유리한 국면을 만드는 경영술과 비슷하다. 수미 테리 박사는 싱크탱크에 몸담았으니 공직자인 앤드루 김이나 성 김과 달리 미국 유력 언론에 한국을 위한 기고를 할 수 있다. 미국은 외국 정보기관이 펼치는 영향력 공작을 막기 위해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미국인은 법무부에 신고하고 그 수입도 밝히라는 ‘외국대리인 등록법(FARA·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을 만들어놓았다. 이 법을 적용할 때 증거로 잡는 것이 대가로 받는 ‘수입’이다.
기소장에 따르면 수미 테리는 10여 년에 걸쳐 40여 번 국정원 요원을 만났는데 이 중 선물(식사 포함)을 받은 것은 세 번이었다. 2019년 11월 13일 메릴랜드주(州)의 한 상점에서 국정원 직원이 신용카드로 2845달러짜리 돌체앤가바나 코트를 사주고 워싱턴DC로 이동해 2950달러짜리 보테가 베네타 가방을 더 사준 것이 첫 번째, 2020년 8월 뉴욕에서 3450달러짜리 루이뷔통 핸드백을 사주고 일식집에서 스시 대접을 한 것이 두 번째, 2021년 4월 워싱턴DC의 루이뷔통 매장에서 3450달러짜리 핸드백을 사준 것이 세 번째다. 이러한 선물 공세는 문재인 정부 때 이뤄졌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5월 국정원은 주미 한국 대사관 명의로 그가 속해 있던 싱크탱크(윌슨센터)로 1만1000달러를 보냈다.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國賓) 방문이 임박한 2023년 4월에는 윌슨센터로 2만5418달러, 수리 테리에겐 2만6035달러를 각각 보냈다. 미 검찰은 수미 테리가 3만7000여 달러 상당의 금품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이는 세 차례에 걸쳐 준 네 가지 선물의 가격인 1만2745달러(2895+2950+3450+3450)에 개인적으로 받은 현금 2만6035달러를 더한(3만8780달러) 것의 개략값으로 보인다.
미국 NSC를 나온 수미 테리는 한미 외교를 잇는 가교(架橋) 역할을 했는데 그때마다 국정원이 움직였다. 기소장에 따르면 2014년 6월 그는 《포린어페어》에 한국 외교부의 입장을 반영한 글을 싣고 국정원 요원으로부터 식사 대접과 고료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다.
FBI, 文–트럼프 시절 관계 주목
외교에서 영향력 공작과 비슷한 분야를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라고 한다. 공공외교는 미국에서 개념이 정립돼 각국으로 확산됐기에, 우리도 ‘공공외교법’을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2014년 11월 FBI는 수미 테리와 국정원의 관계를 조사했으나 공공외교로 본 듯 덮었다(국어사전 등은 공공외교를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이 두루 주체가 되어 국가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하여 외국 국민을 상대로 국가 홍보 활동을 전개하는 외교’로 정의해놓고 있다).
2016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자 국정원은 수미 테리에게 부탁해 트럼프 정부에서 외교·안보를 맡을 이를 만났는데, 이때도 FBI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과 수미 테리 관계는 좌시하지 않았다. 위에서 밝혔듯 기소장에 문재인 정권 시절 국정원이 수미 테리에게 한 금품 공세를 자세히 나열한 것이 그 증거다. 왜 FBI와 미 검찰은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의 선물 공세에 집중했을까. 기소장에 그 실마리가 담겨 있다.
기소장은 2020년 8월 국정원이 두 번째 선물 공세(3450달러짜리 핸드백+스시 대접)를 한 것에 대해 ‘수미 테리가 미 정부 인사들도 참여한 화상(畫像) 워크숍을 주선했기에 이를 받았다’고 밝혀놓았다. 국정원은 왜 수미 테리에게 이 워크숍 주선을 부탁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긴박했던 당시의 한반도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과 5월 26일 이북 통일각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김정은이 문 대통령의 주선으로 그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2019년 2월 27일 하노이에서 2차 미·북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트럼프는 북한이 내놓은 핵 폐기 목록이 엉터리라며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는 노딜을 했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대미(對美) 통로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2019년 6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회담에 참석하게 된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 등을 통해 트럼프와의 면담을 요청해, 6월 30일 판문점에서 3차 미·북 정상회담을 가졌다.
노딜 이후 남북 관계 단절시킨 북한
그때 문재인 대통령은 자기도 이 회담에 참석하겠다며 판문점으로 달려가, 회담장에 들어가려다 미국 경호원들에게 제지를 당했는데, 이 모습이 TV 화면에 그대로 노출됐다. 문 대통령은 두 사람이 회담장을 나온 뒤 접근해 인사를 하며,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한 듯한 연출을 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바람과는 달리 이날부로 미·북 관계는 완전히 찢어졌다. ‘중매를 잘못한 중신아비에게는 뺨이 세 대’라는 말이 있듯이, 다시 노딜을 당한 김정은은 그 책임을 문 대통령에게 돌리며 특등 머저리, 삶은 소대가리라 비난하였다.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러함에도 문 정부가 계속 남북 관계를 이어가려고 하자 북한은 2020년 6월 9일 12시부로 2018년 4월의 판문점 제1차 남북 정상회담 일주일 전에 설치했던, 청와대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를 잇는 핫라인을 비롯한 남북 통신선을 끊어버렸다. 6월 16일엔 개성공단에 있는 ‘우리의 자산’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무단으로 폭파했다.
이때까지 국정원장은 2018년 판문점과 통일각 그리고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을 만들어낸 서훈씨였다. 문 대통령은 서 원장으론 대북 루트를 복원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그를 국가안보실장으로 보내며 새 국정원장을 찾았다.
反文의 기수에서 親文의 첨병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7월 29일 자신과 정치적으로 불편한 사이였던 박지원 전 의원을 국정원장으로 임명했다. 사진=연합뉴스
6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논의하기 위한 오찬을 문정인 연세대 교수, 고유환 통일연구원장, 임동원·박재규·정세현·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그리고 박지원 당시 단국대 석좌교수와 갖고,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직전 대북 밀사로 활동하며 4억 달러가 넘는 김대중 정권의 대북 송금에도 관여해 유죄를 받았던 박지원 교수를 다음 국정원장으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7월 29일 문 대통령은 그를 국정원장에 임명했는데, 상당한 아이러니였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도 깊이 참여했던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 송금 수사를 받고 복역했으니 그와 문 대통령 관계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노 정부는 임기 말 그를 특별 사면하고 복권해주었다. 덕분에 그는 2008년 18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가 통합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으로 복귀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후보로 당선돼 이 당의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2015년 친문(親文) 세력이 더불어민주당을 만들 땐 참여하지 못하고, 국민의당에 입당해 2016년 20대 총선에 출마, 당선됐다. 문재인 세력과 다시 갈라선 것이었다. 그리고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자, 그를 필두로 한 국민의당은 매일 아침 문 대통령을 비난해 ‘문모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20년 4월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실패한 그는 문 정부에 대한 비난의 열도를 높였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반문의 아이콘인 박지원씨를 국정원장으로 삼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위는 2019년 미국에서 대마와 엑스터시를 갖고 들어와 피운 혐의로 기소돼 있었다(2022년 유죄 확정 판결). 가족 중 마약 사범이 있는 이를 정보기관장으로 임명하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그가 북한과 통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고 국정원장으로 삼겠다고 했으니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아닐 수 없었다. 하노이-판문점 노딜 후 문 대통령은 급했던 것이다.
국정원장이 된 그도 표변했다. 하루아침에 친문이 돼, 김정은을 백안시하는 미국 여론을 돌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문재인 정권은 그해 9월 23일로 예정된 문 대통령의 유엔총회 화상 연설에 주목했다. 문 정권은 미·북 대화는 물론이고 남북 대화를 재개하려면 북한에 큰 선물을 줘야 한다고 봤다. 싱가포르와 하노이, 판문점에서 있었던 미·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이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미국이 북한 체제를 인정해주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김정일 이후 일관된 북한의 대미 외교 전략이다.
미국과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계기로 북한과 적국(敵國) 관계에 있다. 북한 체제를 인정하려면 이를 ‘비(非)적국 관계’로 돌려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전쟁 상태를 끝내고 평화 상태로 간다’는 강화조약이나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 국제정치 때문에 이러한 조약을 맺지 않고 평화 관계로 가야 한다면, ‘전쟁 상태를 끝낸다’는 종전(終戰)선언이라도 해야 한다.
미국이 핵을 가진 북한을 상대로 종전선언을 해줄 리 없는데, 우리만 종전선언을 하는 것은 더 우스운 일이 된다. 그래서 문 대통령은 유엔 화상 연설을 통해 ‘미국 조야(朝野)와 북한이 들으라’고 한반도 종전선언을 촉구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한미 관계를 더 삐걱거리게 할 수 있으니, 사전작업을 해야 했다. 외교부는 이러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 이는 국정원 해외 파트가 맡아온 영역이다.
워싱턴 거점장이 직접 수미 테리 만나

▲미국 정보당국이 포착한 국정원 워싱턴 거점장 등과 수미 테리가 만나는 모습. 사진=미국 연방검찰
국정원은 미국 공직자도 참여하는 한반도 문제 워크숍을 미국에서 갖기로 했는데, 수미 테리에게 미국 공직자 섭외 등을 맡겼다. 당시는 코로나19가 창궐했으니 대면회의는 어려웠다. 화상회의는 사무실에서도 참여할 수 있으니 대면회의보다 수월히 참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때문에 미국 공직자들도 이 화상 워크숍에 참여했다.
박지원의 국정원은 문 대통령에게 유엔 화상 연설을 앞두고 친한(親韓)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DC에 대사관,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에 대표부를 두고 있다. 두 곳에는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한 국정원 요원들이 나가 있는 ‘거점’이 있는데, 더 센 곳은 워싱턴 거점이다. 워싱턴 거점엔 공사 타이틀을 가진 미국 거점장이 상주한다.
기소장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때까지 수미 테리를 만난 것은 유엔대표부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남북 접촉에 올인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로는 워싱턴 거점이 그를 만났다. 기소장은 수미 테리에게 스시 대접을 하며 두 번째 선물 공세를 한 2020년 8월 국정원 측에서 미국 거점장 등 두 명이 나와 수미 테리를 대접했다며 거점장을 핸들러-2로 표시한 사진을 공개했다. 거점장이 직접 수미 테리를 만난 것은 박지원의 국정원이 이 워크숍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증거다.
유엔총회 화상 연설 직전에 일어난 해수부 공무원 피살 사건
그런데 ‘하늘이 진노’했는지 화상 연설이 꼬여버렸다. 유엔에서 이 연설을 방영하기 3시간 전쯤인 9월 22일 저녁 서해에서 북한으로 표류한 해수부 공무원이 북한군에 피격돼 소각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정보기관으로부터 어업지도선에 타고 있던 이 공무원이 사라진 것은 물론, 이 공무원이 북한으로 표류했다는 것도 정확히 보고 받았다. 그런데도 종전선언 연설 때문에 전혀 손을 쓰고 있지 않다가 북한이 그를 살해해 태우는 일을 당한 것이다.
이러함에도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해 국제사회가 힘을 모아주실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하며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함께 선언하길 제안합니다”라는 문 대통령 연설을 유엔에서 방영하게 했다. 대한민국 국민이자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무참히 살해됐는데도 이를 무시한 채 황망하고 비상식적인 연설을 막무가내로 진행한 것이다.
문 정권은 이 공무원이 자진 월북(越北)했다는 쪽으로 사건을 몰고 갔다. 모두가 황당해하던 9월 25일 박지원 국정원장이 돌연 북한이 사과하는 통지문을 보내왔다며 이를 청와대로 보내왔다. 그런데 이 통지문에는 평어와 존대어가 섞여 있고 이북 단어와 우리 단어가 혼재돼 있어, 몇 차례 문구가 바뀌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서훈 안보실장이 TV에 나와 이를 그대로 읽겠다며 발표했다. 그런데 서 실장이 그대로 읽겠다고 하며 읽은 통지문과 청와대가 홈페이지에 띄운 통지문, 그리고 서 실장의 발표를 중계한 KTV와 연합뉴스TV가 자막으로 띄운 통지문의 문구에 다른 곳이 있었다.
때문에 ‘북한이 진짜로 사과 통지문을 보낸 것이냐?’ ‘북한이 통신선을 차단했다면서 어떻게 통지문을 보냈느냐’ ‘문서로 보낸 게 아니라 전화로 불러준 것을 우리가 받아썼기에 우리식 단어가 들어간 것 아니냐’는 등의 의문이 제기됐으나, 문 정부는 답하지 않고 지나갔다. 훗날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한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는 문 대통령의 유엔 화상 연설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이 사건을 자진 월북으로 몰고 갔다’고 발표했다.
서훈 국정원의 트럼프 노벨상 수상 공작
수미 테리에 대한 미국 연방검찰의 기소장은 2019년 11월 13일 첫 번째 선물 공세는 그해 1월 미국을 방문했던 서훈 국정원장이 미 국방부와 CIA의 전·현직 고위 관리를 비공개로 만나게 해준 데 대한 답례라고 밝혀놓았다. 서훈 원장이 미국을 방문한 2019년 1월은 트럼프의 하노이 노딜이 있기 직전이었으니 이 공세는 매우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그때 서훈의 국정원은 ‘트럼프 노벨상 수상 공작’을 펼친 바 있기 때문이다. 이 공작은 아는 이가 적기에, 당시 상황을 복기(復棋)하면서 설명하겠다.
문재인 정부는 ‘어느 날 갑자기’ 식으로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연 것이 아니었다. 2017년 북한은 ICBM 개발을 완성하기 위해 숱한 미사일을 쐈기에, 남북 관계는 매우 경색됐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서훈의 국정원은 북한과 대화 채널을 만들기 위해 물밑 작업을 펼쳤다. 북한은 ICBM 개발을 자신한 다음인 2018년 초 김정은 신년사를 통해 대화 의사를 밝혔는데, 국정원이 구축한 비밀라인으로 이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문 정부는 즉각 유화 분위기를 띄웠다.
이런 이유로 김정은은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김여정을 특사로 한 대표단을 보냈고, 문 대통령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등을 북한 특사로 보냈다. 그해 3월 6일 평양에서 돌아온 정의용 특사는 기자단 앞에서 ‘방북 결과 언론 발표’를 발표하며 3항으로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습니다”라는 내용을 밝혔다. 정 특사는 김정은이 북한 체제를 보장해주고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돼야 비핵화를 하겠다고 했다고 밝힌 것이다.
‘잘 되면 노벨상, 안 되면 벼랑 끝’

▲2018년 3월 8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전달했다. 사진=청와대
그리고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를 만난 그는 3월 9일 백악관에서 영어로 발표문을 낭독했는데,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I(=정의용) told President Trump that, in our meeting, 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said he is committed to denuclearization”이다. 청와대 홈페이지는 이를 “저(정의용)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언급했다고 했습니다”라고 번역해놓았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의 언론발표문에서 정 실장은 김정은이 ‘북한 체제를 보장해주고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돼야 비핵화를 하겠다고 했다’고 밝혔는데, 백악관 발표문에서는 ‘북한 체제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전제를 빼고 김정은이 그냥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다고만 발표한 것이다.
그러자 영국의 BBC는 정의용 실장이 미·북 정상회담을 권유했다며 ‘문재인 대통령, 잘 되면 노벨상, 안 되면 벼랑 끝’이라는 보도를 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BBC는 문 대통령도 같은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트럼프가 북핵 문제를 해결하면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판문점 1차 남북 정상회담이 있은 4월 28일(미국 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미시간주 워싱턴 타운십 행사에 참석해 중간선거 유세를 하며 “북한과의 만남이 3~4주 이내에 열릴 것으로 생각한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매우 중요한 회담이 될 것이다”라고 한 후,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언급하며 “문 대통령이 모든 공을 나에게 돌렸다”라고 연설했다. 그러자 갑자기 청중 사이에서 “노벨! 노벨!”이라는 연호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미·북 합의를 하면 트럼프는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마친 문 대통령은 4월 30일 수석·보좌관회의를 가졌는데 이때 이희호 여사가 축전을 보내왔다. 이 여사의 축전엔 “큰일 해내셨다. 노벨 평화상 받으시라”는 덕담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은 “노벨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받으셔야 하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이 발언은 도하 언론을 통해 일제히 보도됐다.
둘로 갈린 미국의 여론
그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북한의 요구대로 북한의 체제를 인정해주면서 북핵 포기를 받을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미국 조야에서는 트럼프를 비난하는 여론이 쏟아졌다. 미국의 여론도 대한민국의 여론처럼 둘로 갈린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장들은 하나같이 트럼프에 대해 우려를 쏟아냈다.
하노이 미·북 2차 정상회담이 결정된 다음인 2019년 1월 29일 댄 코츠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은 WMD(대량살상무기) 개발 역량과 핵무기 및 생산 능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은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고자 부분적 비핵화 조치에 대한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로버트 애슐리 미 국방부 국방정보국(DIA) 국장도 “1년 전에 존재했던 (북핵) 역량과 위협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고 증언했다. 지나 해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비슷한 의견을 밝혔는데, 이는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가 할 수 있는 미·북 합의에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트럼프는 반대로 갔다. 다음 날 트럼프는 이들을 향해 ‘학교로 다시 돌아가 배우고 오라’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이다’라는 트윗을 날렸다. 그러고 ‘(북한) 비핵화를 위한 상당히 괜찮은 기회’라며 ‘북한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시간이 말해줄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미국 정보기관장들을 비판하는 의견이 나왔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정보기관 당국자가 의회 청문회에서 주장하려면 휴민트(인적정보), 통신정보, 첩보위성 등에 근거해 판단해야 한다”며 “미 정보 수장들이 드러낸 대북 불신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아베가 나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5월 1일 페이스북에 ‘평화가 상이다(PEACE IS THE PRIZE)’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이 게시물은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 발언이 알려진 뒤 올라왔다.
이러한 대립이 있던 2월 15일(미국 시각)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하노이 회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희한한 말을 꺼냈다. “아베 총리가 ‘삼가 일본을 대표해 당신에게 노벨 평화상을 줄 것을 (노르웨이 쪽에) 추천했다’고 말했다”고 밝힌 것이다. 도하 언론이 이를 보도하자 일본 언론이 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그러고 2월 17일(일본 시각) 일본 언론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자신을 추천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깜짝 발언은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추가 취재에 들어간 일본 언론은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후인 2018년 가을 미국 측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해줬으면 좋겠다는 의뢰를 해왔다. 추천 마감이 (2019년) 2월이었기에 아베 총리는 추천을 했고, 5장 정도인 추천서 사본을 미·일 정상회담 때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트럼프를 추천한 데는) 교착된 한반도 비핵화와 일본인 피랍자 문제의 타개, 그리고 미·일 통상 교섭에 탄력을 붙이고 싶다는 목적이 있었다’는 보도를 했다.
때문에 트럼프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과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합의를 하고 노벨 평화상을 받으려고 한다는 전망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나왔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국회의원과 차관을 지낸 일부 보수 인사들이 ‘문재인 정권의 국정원이 미·북 합의 유도를 위해 트럼프 노벨 평화상 수상 공작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자비로 미국을 방문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보좌진을 만나 이를 경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언론들이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을 위해 2019년 2월 24일 김정은이 전용열차를 타고 평양역을 떠났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실패한 것으로 판단됐다. 북한은 그들 지도자의 해외 방문을 미리 보도하지 않는다. 귀국할 즈음이나 다음에 ‘이러한 성과가 있었다’며 대대적인 보도를 한다. 그런데 하노이 회담만은 김정은의 평양 출발을 적극적으로 보도한 것이다.
하노이 합의를 확신한 김정은과 문재인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은 2018년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났지만, 회담은 결렬됐다. 사진=AFP/연합뉴스
이는 이 회담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북한은 지난해 9월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 대한 군사 무기 지원 논의를 위한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도 미리 보도한 바 있다). 때문에 하노이 정상회담 첫날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씨는 C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 회담을 “짜고 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과 북한은 이미 합의했고 문 대통령도 이 합의에 이견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이 회담 첫날인 2월 27일(미국 시각) 인터넷 방송인 복스(Vox)는 ‘미·북은 영변 핵 시설 폐쇄와 대북제재 완화에 합의했다. 미·북은 평화협상을 하면서 연락사무소 설치를 논의한다. 미국은 한국이 주도할 남북경협을 위해 대북제재 완화를 추진하고, 북한은 미군 유해를 송환한다’는 하노이 회담 잠정합의문을 입수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미국에도 돈을 주면 원하는 대로 보도해주는 매체가 차고 넘치는데, 한국 언론은 복스가 어느 정도 신뢰성을 가진 매체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이를 인용 보도했다.
그런데 중국 대륙을 관통하며 요란하게 하노이에 온 김정은은 트럼프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노딜을 당했다. 김정은은 물론이고 문재인 대통령도 이를 믿지 못하고 당황해했다는 보도가 쏟아진 것은 물론이다. 그러자 정보 세계에서는 ‘미·북 합의를 위해 한국 국정원이 비밀리에 펼쳤던 트럼프 노벨 평화상 수상 공작은 완전 되치기를 당했다. 트럼프와 아베가 문재인과 김정은을 농락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러함에도 김정은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6월 30일 판문점에서 3차 미·북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또 노딜을 당했다. 그런데 이날 판문점으로 달려가 미·북을 중재하며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만든 것같이 연출한 문재인 대통령은 뜻밖의 성과를 거뒀다.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52.4%로 올라간 것인데, 이는 지난 7개월 사이 최고치였다. 대한민국 국민은 국정원이 미국에서 펼쳤던 트럼프 노벨상 수상 공작이 되치기당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이러한 평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
CIA 코리아 미션센터
문재인 정부와 서훈의 국정원은 트럼프 정부의 CIA가 2017년 앤드루 김이 이끄는 코리아 미션센터를 만들어 운용한 것에 주목했어야 했다. 트럼프의 CIA는 문재인 정부와 김정은을 함께 보면서 대응하고 이들을 동시에 속일 작전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아베 일본 총리에게 협조를 요청했을 수도 있다. CIA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2022년 코리아 미션센터를 폐지하고 중국 미션센터를 만들었다.
판문점 노딜 후 미국은 미·북 교섭은 물론이고 문재인 정권에 대한 관계도 정리해나갔다. 서훈의 국정원이 CIA와의 공작전에서 완패를 당한 것이 확인된 2019년 11월 13일 수미 테리에게 2845달러짜리 코트와 2950달러짜리 가방을 사준 것은 나빠질 대로 나빠진 미국 조야의 여론을 반전시켜보려는 노력일 수 있다.
그러나 서훈 국정원장으로서는 꽉 막힌 북한 채널과 미국 채널을 뚫을 수 없기에 이듬해 문재인 대통령은 그를 배제하고 박지원 의원을 국정원장에 임명해, 미국 조야를 상대로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한 친한화 공작을 한 것이다. 이때 국정원은 수미 테리에게 부탁을 하고 선물 공세를 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국정원은 수미 테리와 더 편하게 접촉했다. 국정원은 수미 테리가 있는 윌슨센터와 수미 테리에게 현금을 보냈는데, 윌슨센터에 보낸 돈도 수미 테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영향력 공작에 치중했던 국정원이 공공외교로 방향을 틀었다는 뜻이다. 트럼프 노벨상 수상 공작을 했다가 CIA 코리아 미션센터+트럼프+아베에게 되치기를 당한 국정원은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국정원이 외교부 명의로 윌슨센터로 1만1000달러를 보낸 한 달 뒤 2022년 6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북한 전문가 5명과 비공개 회의를 가졌는데 수미 테리도 참여했다. 그러고 수미 테리는 이 토론의 내용을 메모해 핸들러-3에게 전달했는데 이를 FBI가 촬영했다.
2023년 4월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 대통령은 북핵을 다루기 위해 한미핵협의그룹(NCG)을 둔다는 등의 워싱턴 선언을 하고 8월에는 기시다 일본 총리와 같이 방문해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한·미·일 공조를 강화한 캠프데이비드 선언을 했다. 문 정권 시절 불편했던 한미 관계가 한순간에 좋아진 것인데, 이 또한 국정원의 물밑 작업이 있었다.
문 정권 때는 영향력 공작, 윤 정부에서는 공공외교
수미 테리로 하여금 NCG를 창설하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2023년 1월 《포린어페어》에 싣게 하고, 3월에는 대일항쟁기에 동원된 정신대에 대해 3자 변제(辨濟)를 하게 하라는 칼럼을 써서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하게 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 직전에는 윌슨센터에서 한미동맹 70주년 행사도 열게 했는데, 국정원이 외교부 이름으로 윌슨센터에 2만5418달러, 수미 테리에게 2만6035달러를 보냈다. 그리고 그해 10월 미국에서는 수미 테리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다큐 영화 〈유토피아를 넘어〉가 개봉됐다.
국정원이 외교부의 이름을 빌려 공공외교를 한 것이다. 그러나 FBI는 2023년 6월 5일 수미 테리를 또 조사했다. 돈이 오간 증거가 완벽했으니 수미 테리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후 국정원은 공공외교를 중단했지만, 13개월이 지난 올해 7월 미국 검찰은 수미 테리를 기소했다.
미국 검찰과 FBI 처지에서는 수미 테리를 한국 정보기관으로부터 돈을 받고 움직인 에이전트로 볼 수 있다. 서훈의 국정원이 미·북 합의를 위해 미국에서 트럼프 노벨상 수상 공작을, 박지원의 국정원이 한반도 종전선언을 촉구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화상 연설을 앞두고 미국 공직자도 참여한 친한화 화상 워크숍을 한 것은 영향력 공작을 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FBI 입장에서는 이때의 수미 테리는 에이전트가 맞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와 윤석열 정부 때 수미 테리가 한국을 위한 기고를 하고 영화 제작에 참여한 것은 미국 국익에 반하는 공작을 한 것이 아니다. 국정원은 외교부의 이름을 빌려 미국 싱크탱크를 지원하며 북한 인권 영화를 만들게 했으니 미국도 인정하는 공공외교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미 테리 재판에서는 그가 한국 국정원이 한 영향력 공작에 참여했느냐 공공외교에 협조했느냐가 논쟁이 될 것이다.
로버트 김 사건과 폴라드 사건

▲석방된 후 2012년 5월 30일 한국을 찾은 로버트 김(오른쪽)은 백동일 전 해군 대령(왼쪽)과 재회했다. 사진=조선DB
1985년 미국과 이스라엘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대계 미국인 조나단 폴라드 사건에는 돈이 개입돼 있다. 미 해군 정보국의 분석관인 폴라드는 1년 동안 미 해군 정보를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제공하고 5만 달러를 받은 것이 확인됐기에 무기(無期)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듭된 요청으로 30년을 살고 이후 5년간 미국을 떠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1996년 미 해군 정보국 분석관인 로버트 김이 한국 해군 무관에 정보를 준 로버트 김 사건에는 전혀 돈이 개입돼 있지 않다. 우리 해군 무관은 무관부 기념품과 대구뽈따구탕을 한 번 대접한 것이 전부였다. 때문에 로버트 김은 9년형을 선고받았다(지금은 석방된 상태).
수미 테리는 CIA와 NSC 출신이지만 그곳을 떠난 후 본격적으로 국정원 요원을 만났다. 그는 현역 정보요원이 아니었으니 그가 국정원에 줄 수 있는 생생한 정보는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미 검찰도 이를 인정했다. 미 검찰은 수미 테리가 미국의 정보를 외국에 전달해서가 아니라 외국 정부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그 사실과 외국 정부로부터 받은 대가를 신고하지 않았다며 FARA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수미 테리 재판에서 미 검찰은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한국 국정원이 미·북 합의를 위해 미국에서 영향력 공작을 했는데 그를 활용했다는 주장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핸들러로 표현한 국정원 요원이 그를 만나 선물을 주는 것을 찍은 사진과 이를 시인한 수미 테리의 증언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수미 테리 측은 영향력 공작이 아니라 공공외교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수미 테리 측 준비에 찬물을 끼얹은 이가 박지원 의원이다. 그는 7월 22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국정원 요원들이 미숙하고 참 바보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더 바보짓을 한 건 (윤석열) 대통령실”이라며 “수미 테리가 활동을 시작했던 박근혜 정부에서 8건, 문재인 정부 5년간 12건, 윤석열 정부 1년간 20건이 넘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라고 반문한 것은 국정원이 미국에서 그를 활용해 영향력 공작을 했다는 인정이기 때문이다.
‘누가 국정원에 협조를 하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화상 연설을 위해 그를 활용했던 박 의원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배신(背信)으로도 보인다. 정치적 입지 때문에 공작이 실패했다고 에이전트를 배신하면 그러한 이들이 있는 정보기관은 제대로 공작하기가 어려워진다. 정보의 세계에서 의리와 신의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노벨상 수상 공작을 했던 서훈씨나 공공외교를 한 윤석열 정부 초대 국정원장 김규현씨가 침묵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적은 북한이다. 이러한 북한에 돈을 보내 유죄를 받고, 사위는 마약 혐의로 유죄를 받은 박지원씨는 절대로 국정원장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와 자기 당을 살리자고 자기가 이끌었던 조직을 위해 일한 사람을 더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월간조선 09월 호
09.09 對北 감시 카메라 꺼진 유엔 안보리

▲지난 5월부로 종료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이후 대체 매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한국, 미국, 일본 등이 협력 중이다. /유엔
지난달 29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비공식 협의를 열고 유엔 대북제재위원회 활동을 보고받았다. 대북제재위는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대응 조치로 만들어졌는데 위원회 의장국은 90일마다 활동 내용을 안보리에 보고해야 한다. 그런데 이날 안보리 회의는 예전과 조금 달랐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북한의 안보리 제재 위반 내용이 어느 정도 공유되는데 이번엔 쏙 빠졌다.
안보리에 정보 공백이 생긴 것은 이 업무를 담당했던 대북제재위 산하 전문가 패널이 올해 5월 활동을 종료했기 때문이다. 전문가 패널은 매년 두 차례 북한의 제재 위반 사례에 대해 보고서를 내왔다. 그 과정에서 대북제재위에 사전 보고를 하며 보고서 내용을 조율했지만 이제는 패널 자체가 없으니 북한이 유엔 제재를 위반해도 이사국들은 공식적 통로로 알 길이 없게 됐다. 피부에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간단한 상황이 아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유엔 제재를 위반하며 핵을 개발하고 불법적 수출입과 금융 거래를 해왔다. 이제는 감시 카메라가 꺼진 상태에서 마음대로 불법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미다.
전문가 패널이 임무를 마치고 자발적으로 해산한 것은 아니다. 이들의 임기는 안보리 표결을 통해 한 해 단위로 연장됐는데 지난 3월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부결됐다. 안보리는 러시아를 비롯한 상임이사국 5국 중 하나라도 반대하면 안건이 통과되지 않는 구조다. 러시아가 반대표를 던진 이유는 북한과의 불법 무기 거래를 숨기기 위한 측면이 크다. 전문가 패널이 활동하면 북한 같은 비정상적인 정권과 거래한다는 점이 확인되는 러시아로서는 불편했을 것이다. 러시아가 던진 돌에 피해는 한국이 보고 있다.
감시망은 허술해지는 반면 북한의 범죄는 지능화되고 있다. 5일 월스트리트저널은 북한 스파이로 인해 떨고 있는 미국 기업들을 조명했다. 현지인인 것처럼 신분을 위장해 원격 근무 직원으로 미국 기업에 입사한 뒤 외화벌이를 해 북한에 돈을 송금하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때 자리 잡은 원격 근무 트렌드를 교묘하게 이용한 방법이다. 미 법무부에 따르면 김정은 정권은 이 수법으로 매년 수억 달러를 벌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쏟아붓고 있다.
한국과 우방국인 미국, 일본은 사라져 버린 전문가 패널의 대체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방법을 찾고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현재 어느 것 하나 새로 만들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북한 정권은 지금도 안보리 제재를 밥 먹듯 어긴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종종 중요한 일을 잊곤 한다. 원래 있었던 것도 마치 없었던 것처럼 된다. 철책을 맞대고 있는 우리마저 이 상황에 익숙해져 무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뉴욕=윤주헌 특파원
09-09 한·일 셔틀외교 더는 흔들려선 안 된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총리 퇴진을 한 달쯤 앞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 주말 전격 방한해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이번 회담은 2023년 3월 첫 만남 이래 12번째다. 기시다 총리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후,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이례적이다. 기시다 총리는 임기 3년 중 한일 관계 개선을 외교 레거시로 간주하는 듯하다. 불출마 기자회견에서 그는 한국과의 외교 관계 개선과 사도(佐渡)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자신의 외교 성과로 언급했다. 후쿠시마 처리수(오염수) 방류도 자신의 공적으로 설명했다.
한일 관계의 대전환은 윤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 의해 가능했다. 윤 대통령은 난제 중 난제였던 징용 문제에 관해 제3자 변제 해법을 선제적으로 제시하며 극적인 대일 관계 개선을 꾀했고, 도쿄로 전격 날아가 정상 간 셔틀 외교 복원의 물꼬를 텄다. 기시다는 이에 수출 규제(화이트리스트 배제) 해제로 화답했고, 안보 대화 끝에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도 정상화했다. 한일 관계는 ‘잃어버린 10년’의 전방위 갈등 시대를 넘어 새로운 협력과 공조로의 대전환을 맞고 있다. 양국 정부와 사회 각계의 대화 채널은 활발히 가동되고 첨단 기술 분야를 비롯한 경제안보, 방위 및 사회문화 분야의 공조 협력 관계는 한층 증진됐다. 양국 간 1년 인적 왕래는 방일 한국인이 1000만 명, 방한 일본인이 250만 명으로 최고 수준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 개선에도 우려의 시각은 여전히 강하다. 한·일 양국 국민 사이엔 불만과 불안의 시선이 있다. 한국 국민은 불만이 크다. 이른바 물컵 반잔론이다. 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일본에 양보하며 관대한 태도로 임했는데도 일본은 여전히 역사 반성에 인색하고 뻣뻣하며 걸맞은 화답이 없다고 불만이다. 반면, 일본 국민은 윤 대통령의 통 큰 결단으로 관계가 개선됐지만, 한국 국내 사정에 따라 후퇴하거나 급변하지 않을지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나름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수교 60주년을 맞아 양국은 경제·안보 분야 등 실질적인 협력을 가속하고 관계 개선의 흐름을 지속하기로 했다. 특히, 기시다 총리는 정권이 교체돼도 한일 협력 기조에는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다. 실제로 자민당 내 총재 선거 구도를 볼 때, 누가 새 총리가 되든 한일 관계를 변화시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기시다는 총리 사임 후에도 당내 유력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한국정책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둘째, 사전 입국절차 제도를 도입해 한·일 국민의 상호 왕래를 실질적으로 간소화하기로 합의했고, 제3국 내 재외국민 보호 협력각서에 서명해 피난민 상호 대피를 돕기로 했다. 실질적인 협력 증진 사업으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셋째, 역사문제와 관련해 일본 측이 우키시마호(浮島丸) 승선 한국인 희생자 명부를 전달했고, 기시다 총리는 역대 내각 담화 계승 의사를 밝혔으며, 강제동원 희생자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고 다시 언급했다. 그렇지만 한국민의 눈높이로 보면 역사문제에 관한 일 정부의 언행과 조치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한일 관계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역사문제에 관한 일본의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문화일보
09.11 [기고] '프라하의 연인'에서 원전까지… 한국과 체코의 우정은 끈끈하다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근처의 펍과 안양의 북극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국과 체코 간 우정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두 나라는 글로벌 안보와 경제 번영을 위한 전략적 동맹을 통해 전통적 파트너십을 뛰어넘으며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이번 방한을 계기로 나는 수십 년 동안 지정학적 지형을 좌우할 양국 관계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가고자 한다.
최근 체코 정부가 한국수력원자력을 신규 원전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획기적인 순간이며, 한국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강조한 결정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체코에서 현대, 두산, 넥센 등 한국 기업들은 고유의 노하우와 역량을 제공하며 두 나라의 상호 이익에 기여했고, 현지 브랜드처럼 친숙하게 여겨진다.
양국 관계는 수많은 개인적 우정과 교육, 문화 및 스포츠 분야 협력을 기반으로 한다. 한국 아이스하키 팬이라면 HL안양에서 ‘북극곰(마스코트)’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한국 아이스하키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파트릭 마르티넥(한국에서는 ‘할아버지’로도 불린다)을 기억할 것이다. 또 2018년 2월 올림픽 사상 최초로 알파인 스키와 스노보드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한 에스테르 레데츠카의 활약 덕분에 개최지 평창과 한국은 항상 체코인의 마음에 남아있다.
2005년 방영된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의 영향으로 여전히 수많은 한국 관광객이 주 4회 직항편으로 체코를 찾는다. 내 집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드라마에 등장했던 펍 ‘우 말레호 글레나(U Malého Glena)’가 있는데, 이곳은 체코어뿐만 아니라 한국어 메뉴가 인쇄되어 있을 정도다! 최근 몇 년간 체코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K팝이 단연 으뜸이다.
체코는 한반도의 평화와 외교에 전념하며 핵무기 없는 한반도와 긴장 완화를 위한 노력을 지지하고 있다. 우리는 국제법 수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역 안보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윤석열 대통령의 기조를 높이 평가한다. 러시아와 북한과의 잘못된 군사 거래는 세계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핵 확산 방지 노력을 약화시키고 유럽과 인도 태평양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지금 체코 안보의 가장 큰 위협은 러시아 제국주의다. 이 시점에서 나는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체코는 우크라이나에 대한민국의 역할과 지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접근 방식은 다른 국가들에도 모범이 되고 있다. 우리는 침략과 공격을 받았던 역사적 경험을 잊지 않고 있다. 또 무력 위협이나 사용을 금지하고 모든 회원국이 다른 국가의 주권, 영토 보전 및 정치적 독립을 존중할 것을 촉구하는 유엔 헌장을 지지한다.
우리는 사이버 방어, 군비 통제 및 비확산, 기술 및 대테러 대응을 포함한 여러 공동의 지역 간 안보 과제에 대해 협력하고 있다. 특히 사이버 보안은 많은 잠재력을 가진 분야이다. 두 나라의 유대는 단순한 외교 관계를 넘어 경험과 문화 교류의 공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양국 하키팀을 응원하거나 ‘우 말레호 글레나’에서 맥주를 즐기면서, 양국은 오래도록 지속되는 견고한 우정을 쌓아 왔다. 우리는 스포츠와 음악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세계 평화와 안보를 위한 헌신으로 하나가 되어 있고, 공동의 위협에 맞서 굳건히 파트너십을 지켜나갈 것이다.
조선일보 얀 리파브스키 체코 외무장관
09-19 北·中 수교 75년과 이상기류
75년 전인 1949년 10월 6일, 북한과 중국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지 불과 닷새 만의 일이다. 이후 북·중 관계에는 수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6·25전쟁을 겪으며 ‘피로 굳어진 관계’는 계속됐다. 올해는 북·중 수교 75주년이자 ‘조·중(북·중) 우호의 해’다. 올해 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신년 축전을 주고받았고, 교류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그때만 해도 북·중 간 상당한 교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그 후 북·중 관계는 다수의 ‘이상 신호’를 내비치고 있다. 지난 9일 시 주석은 북한의 정권수립일(9·9절)을 맞아 김 위원장에게 축전을 보냈는데 이 같은 개인적 교류는 지난 1월 이후 8개월 만이었다. 지난해 수차례의 개인적 교류가 이뤄졌던 것과 비교하면 확연히 줄어든 것이다.
중국 해관총서(관세청)에 따르면 중국은 올해 1∼6월 북한에 쌀 571만3000달러(약 76억 원)어치를 수출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수출액(5339만2000달러)의 10%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밀가루 수출 역시 전년 대비 23%에 그쳤다. 이를 두고 한 북·중 관계 전문가는 “유의미한 움직임이다. 중국이 더 이상 북한 주민들의 생활에 신경을 안 쓰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2018년 다롄(大連) 북·중 정상회담 당시 해변에 새겨놓았던 양 정상의 발자국 동판도 없앴다. 최근 확인한 현장은 발자국 동판을 없애고 콘크리트로 덮은 위를 노란색 주차선으로 도색한 모습이었다.
공식 행사들에서 드러나는 이상 징후도 여럿이다. 9일 9·9절 경축 행사에 중국은 북한 주재 대사가 아닌 대사대리를 보냈다. 지난 7월에는 평양과 베이징(北京)에서 각각 북·중 우호조약 체결 63주년 기념 연회가 열렸으나 이에 대한 보도가 상당히 축소된 데다 참석자급도 낮아졌다.
물론 속단은 금물이다. 75년의 시간 동안 북·중 관계에는 많은 ‘업 앤드 다운’이 있었다. 관계가 악화했다가 어느 순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화해하고 더욱 밀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게 여러 번이다. 최근 북·중 관계의 이상기류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한과 러시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면서 북·러 관계가 강화된 데 따른 것인데, 이러한 상황 역시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다. 9일 시 주석이 9·9절을 맞아 김 위원장에게 보낸 축전에서 시 주석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북·중 관계를 대하겠다고 말했다. 속내는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북한과 결별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 취할 전략이다. 정확하게 현재를 파악하고 그들 간의 관계를 우리 국익에 유리하게 ‘이용’해야 한다. 자오러지(趙樂際)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지난 4월 방북해 ‘조·중 우호의 해’ 개막식 행사에 참석했고, 관례대로라면 다음 달 6일쯤 베이징에서 폐막식 행사가 열릴 전망이다. 하지만 요즘 베이징 외교가에선 폐막식 행사가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북·중 관계가 최악이라는 방증이 될 터다. 다음 달 6일 북한과 중국이 어떠한 행보를 보일지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문화일보
09-20 제25차 한미 통합국방협의체 ( KIDD ) 회의 23일 서울서 개최

▲조창래(왼쪽) 국방정책실장 등 한·미 국방부 수석대표가 지난 4월 11일(현지시각) 제24차 한미통합국방협의체(KIDD) 회의를 워싱턴DC에서 개최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24일까지 국방분야 동맹현안 전반에 대해 논의
한·미 국방부는 오는 23∼24일 이틀간 제25차 한미 통합국방협의체 ( KIDD)를 서울에서 개최한다.
이번 회의는 국방부 조창래 국방정책실장과 미 국방부 앙카 리 동아시아부차관보를 양측 수석대표로, 양국의 국방 및 외교분야 주요 직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번 회의에서 한미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및 핵·미사일 위협억제·대응을 위한 정책 공조, 연합방위태세 강화, 조건에 기초한전작권 전환 추진 등 동맹 안보현안 전반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양측은 올해 후반기에 예정된 제56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의 사전 회의 성격을 갖는 이번 후반기 KIDD 회의를 통해 올해 국방분야 주요 과제 이행상황을 점검하고, 후속조치 방안에 대해서도 협의할 계획이다.
특히, 지난해 제55차 SCM에서 합의한 ‘한미동맹 국방비전’에 따라 대북확장억제 노력 강화, 과학기술동맹으로 진화를 통한 동맹능력 현대화,유사입장국과의 연대 및 지역 안보협력 강화 등에 대해 긴밀히 협의할 예정이다.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09-20 한국·체코, 유럽 원전 시장 공동진출 협력

▲양국 정상 공동 기자회견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체코 프라하성에서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뒤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정상회담서 ‘원전 동맹’ 의지
윤 대통령 “에너지 협력의 이정표로서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의 계기”
야권의 “대규모 손실” 주장에는
대통령실 “가짜 뉴스” 강한 반

윤석열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 수주를 계기로 체코와 ‘원자력 동맹’을 구축, 원전 르네상스를 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특히 체코 측에서 이번 원자력 협력이 체코를 넘어 유럽국가로 확대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한국 원전의 유럽 공략 교두보가 마련될 수 있다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윤 대통령과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열린 정상회담 및 공동 기자회견에서 신규 원전 건설 사업의 한국 컨소시엄 수주 성사에 대해 낙관적 견해를 동시에 밝혔다. 윤 대통령은 “신규 원전이 한·체코 경제의 동반 발전과 에너지 협력의 이정표로서 양국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벨 대통령도 “한국의 사업 최종 수주에 낙관적”이라면서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절차의 공정성, 원전 전 주기에 걸친 전략적 협력 의향 등을 재확인했다.
특히 파벨 대통령은 추가 원전 협력에 대한 의지도 내비쳤다. 파벨 대통령은 이날 두코바니 외 테멜린 신규 원전의 한국 수주 가능성에 대해 “이번 프로젝트가 얼마나 성공하는지에 따라 테멜린 신규 원전 사업이 고려될 것”이라며 “(한국과) 제3국 시장 진출을 같이 도모할 수 있다”고 했다.
파벨 대통령은 이날 공개된 아리랑TV 인터뷰에서도 “원전 협력이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중앙 및 동유럽 국가들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동서 유럽을 연결하는 교통·물류 허브인 체코에 고속철도 수출을 희망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체코 경제지 ‘호스포다즈스케 노비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체코의 고속철도 건설과 운영에 ‘신속과 안전(Fast and Safe)’으로 잘 알려진 한국 고속철도 기업들과의 협력도 기대된다”고 했다.
대통령실은 야당이 제기한 체코 원전 수출에 따른 대규모 손실 주장에 대해서는 ‘엉터리 가짜 뉴스’ ‘궤변’으로 규정하고 이례적으로 강하게 반박했다. 박춘섭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이날 현지 브리핑에서 야당의 주장을 “원전 생태계 재건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을 폄훼하는 궤변”이라고 했다.
한편 윤 대통령 부부는 이날 파벨 대통령 부부와 함께 프라하성 광장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 참석했다. 프라하성은 이달 말까지 열리는 성 바츨라프 왕관 전시로 인해 외빈 접견을 받지 않고 있는데, 윤 대통령 환대를 위해 이날 예외를 둔 것으로 전해졌다.
문화일보 손기은
09.21 안보 책임 최고사령관의 "핵 없이도 북핵 억제" 장담

체코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20일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자체 핵무장 없이도 북핵 위협을 실질적으로 억제·대응할 수 있는 체제가 구축됐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한국은 핵무장을 진지하게 고려하는가’라는 질문에 “북핵 위협에 자체 국방력 강화와 더불어 한미 확장 억제의 실행력 강화를 최선의 방책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미 및 한·미·일 안보 협력을 통해 북핵에 대한 억제 체제가 강화된 것은 사실이다. 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작년 ‘워싱턴 선언’에 이어 지난 7월에는 ‘핵 억제 공동 작전 지침’에 서명했다. 미국의 핵무기 운용에 ‘한반도 임무’를 특별히 배정해 추상적 수준이었던 미국의 핵우산 약속을 문서로 확인한 것이다. 한·미·일 정상은 ‘캠프 데이비드 성명’으로 안보 협력을 제도화했다. 동맹을 중시하는 바이든 정부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한미의 핵우산 강화와 한·미·일 안보 협력은 미국 리더십 교체라는 변수를 맞고 있다. 동맹을 우습게 여기는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바이든 정부의 약속들은 다른 각종 약속처럼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과 미국의 근본 이익이 서로 다르다는 큰 문제가 있다. 한반도 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핵 비확산이다. 반면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다. 미국은 두 문제가 일치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두 문제가 일치될 수 있다면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은 핵무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북한은 핵무기 재료인 고농축 우라늄(HEU) 제조 시설을 처음 공개해 미국 대선 뒤 비핵화 협상이 아닌 핵 보유 국가 간의 군축 협상을 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우리 안보가 훼손될 것이다. 북한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의 군사동맹 관계를 복원하는 조약까지 체결했다.
이렇게 세계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핵 위협과 핵 공갈에 노출된 우리는 주권국가로서 핵무장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국내의 갈등과 국제사회의 현실에서 이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인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국책 연구소에서도 미 전술 핵 재배치와 함께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보 같은 일본식 ‘잠재적 핵 능력’ 보유를 검토하자는 보고서를 낸 것이다.
대통령은 군 최고사령관으로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와 같다. 다른 문제가 아닌 국민 생명과 직결된 북핵 대응에서는 무엇을 장담하기보다는 더욱 신중한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북핵 사태는 그렇게 우리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09.21 한국, 체코와 원전‧배터리 포함 56건 MOU 체결… 유럽 새 교두보 확보

▲윤석열 대통령과 페트로 피알라 체코 총리가 20일(현지시각) 체코 플젠 산업단지 내 발전용 터빈 원천기술 보유 기업 두산스코다파워 공장을 방문했다. 윤 대통령과 피알라 총리는 이날 터빈에 장착되는 블레이드(회전날개)에 공동으로 서명했는데, 대통령실은 “양국이 원전을 함께 짓고, 기업 간 협력을 지원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일(현지 시각) 오전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1시간 떨어진 플젠에 위치한 두산스코다파워. 2009년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이 인수, 한국과 체코 양국 원전 동맹의 상징으로 떠오른 이곳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페트르 피알라 체코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양국의 원전 전(全) 주기 협력 협약식이 열렸다. 가로 7m, 세로 4.7m 크기 양국 국기와 길이 10m, 지름 5m 규모 두코바니 1호기의 대형 스팀 터빈이 설치된 무대에서는 원전 분야에서만 13건의 MOU(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윤석열(맨 왼쪽)대통령과 페트로 피알라 체코 총리(맨 오른쪽)가 20일(현지시간) 체코 플젠 산업단지 내 두산스코다파워 공장에서 박지원(왼쪽 두번째) 두산에너빌리티 회장과 황주호(왼쪽 세번째) 한수원 사장, 요제프 시켈라(왼쪽 네번째) 체코 산업통상장관 간 원전 전주기 협력 협약식에 임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유럽의 숨은 제조업 강국 체코
우리나라가 유럽의 숨은 제조업 강국인 체코와 지난 7월 신규 원전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을 계기로 양국 간 ‘원전 동맹’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협력에 나선다. 원전을 비롯해 배터리·미래차·로봇 등 첨단산업 분야 등에서 이날 맺은 MOU만 모두 56건에 이른다. 제조업 경쟁력이 강한 양국이 손잡고 유럽 시장 공략에 나서는 것이다.
특히 이날 힐튼 프라하 호텔에서 열린 한-체코 비즈니스포럼은 정부 대표단과 양국 기업인 등 약 47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EU(유럽연합) 국가에서 열린 비즈니스 포럼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와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 허세홍 GS칼텍스 대표 등 국내 재계 인사들이 대거 출동했다.
재계 관계자는 “동유럽 제조업의 핵심 기지로 불리는 체코와 우리와의 한단계 높은 관계 설정을 통해 향후 유럽 시장 진출에 있어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체코를 공식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각) 프라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체코 비즈니스포럼에서 박수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요제프 시켈라 체코 산업통상부 장관, 얀 라파이 체코산업연맹 회장,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조태열 외교부 장관, 구광모 LG그룹 회장,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허세홍 GS칼텍스 대표이사. /뉴시스
이날 원전 협력 협약식에서 한국수력원자력과 두산에너빌리티는 체코 신규 원전에 들어갈 터빈을 체코 기업인 두산스코다파워로부터 납품받는 ‘터빈 공급 확정 협약’을 맺었으며, 한수원은 체코 설비·부품 업체인 아마튜리그룹으로부터 신규 원전용 기자재를 공급받는 MOU도 체결했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당초 프랑스와 치열하게 진행했던 수주전에서 우리 측이 내세웠던 ’한국과 체코가 함께 짓는 원전’이라는 슬로건처럼 양국이 성공적인 원전 건설 역사를 함께 만들어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한전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는 체코 브르노공대와 체코 현지에 원자력협력센터를 설립하고, 특별학위과정 개설, 교환학생 확대 등을 통해 원전 전문 인력 양성에 나서기로 했다. 이 밖에 한전기술·한전원자력연료·대우건설 등도 각 분야 체코 현지 기업·기관과 설계, 연료, 건설 등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배터리·미래차·로봇 등 첨단산업도 협력
앞서 양국 기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한-체코 비즈니스포럼에서도 배터리·미래차·로봇 등 3대 핵심 산업의 공동 연구·개발(R&D)을 비롯한 양국 산학연간 협약이 체결됐다.
배터리 업종에선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과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이 체코배터리클러스터 및 브르노 공대와 ‘배터리 협력센터’를 세우고, 삼성SDI와 SK온의 헝가리 공장, LG에너지솔루션 폴란드 공장 등 인근 국가에 있는 생산 기지와 인력 양성 및 기술 교류를 추진한다.
미래차 분야에서는 현지 자동차 공장을 갖고 있는 현대차가 스코다일렉트릭과 수소 모빌리티 및 에너지 분야 개발 MOU를 맺었으며, 이어 국내 관계 기관과 함께 오스트라바 공대와 ‘미래 모빌리티 기술 협업’ MOU를 체결했다. 포스코홀딩스도 철강제조와 이차전지 분야에서 브르노 공대와 협력하기로 했으며, 현대로템은 기관차 제조업체인 스코다트랜스포테이션과 체코 고속철 도입에 협력하기로 했다.
한편, 양국 간 교역 규모가 늘어나는 가운데 이날 양국 정부는 교역 확대를 위한 ‘무역투자촉진 프레임워크(TIPF)’도 체결했다. 한-체코 양국 간 지난해 무역액은 44억700만달러(약 6조원)로 증가했다.
조선일보 조재희 기자 프라하·플젠=양승식 기자
09.21 미 대선 누가 돼도 불편한 중국, 한국은?
엊그제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4년 만에 첫 50bp(빅컷) 금리를 인하하기로 한 결정은 코로나 사태로 촉발된 고금리 체제의 본격적 방향 전환(피벗)을 의미한다.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재정통화 확장, 글로벌 공급망 병목으로 빚어진 초고금리 정책에서 경제 연착륙을 위한 금융완화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피벗으로 환율 불안 등 국제금융시장 변동성은 커질 것으로 점쳐지는 가운데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혁명 가속화, 지정학적 도전 등 글로벌 대변혁 시대의 파장은 올해 미 대선을 기점으로 증폭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TV 토론에서 약진해 유리한 판세를 만들었으나, 트럼프 전 대통령 2차 암살 시도 여파로 40일 앞으로 다가온 대선 판도를 가늠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미·중 무역전쟁은 한국에 직격탄
주식시장 주요국 중 한·중만 추락
한국 ‘정치지배구조’ 개혁 절실
정부, 국정 운영시스템 리셋해야

오는 11월 미 대선은 단순히 미국의 지도자를 결정하는 수준을 넘어 전 세계 경제와 정치 지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역사적인 사건으로, 동북아를 포함한 국제질서는 변곡점에 섰다. 이러한 가운데 초박빙 판세 속 누가 당선되든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대중국 강경노선은 확실해 보인다는 점은 특이할 만하다.
트럼프는 대놓고 관세 폭탄을 경고하고 있고 중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인도계 해리스도 중국 견제 강화를 분명히 했다. 미 국민 70% 이상이 중국에 대해 비우호적인 상황에서 공화·민주 양당은 ‘중국 때리기’에 한목소리를 내는 형국이다. 자칫 관세 폭탄이나 제재 확대가 무역전쟁으로 번지면 미국과 중국이 최대 수출국인 한국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중국이 미국의 관세 인상이나 추가 제재가 더 버거운 이유는 경제체질과 체력이 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는 지금 면역력과 회복력이라는 맷집이 떨어진 상태다.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이 국내외 투자자들의 신뢰와 자신감을 상실한 ‘신뢰의 위기(Crisis of confidence)’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요즘 중국 관련 뉴스는 수출 빼고는 다 나쁘다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다. 중국의 올해 성장 예상치는 인도의 절반 수준인 4%대로 떨어졌고 과거 중국 성장의 드라이버였던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지난 2분기 마이너스 150억 달러에 달해 1990년 이후 첫 FDI 연간 순유출을 기록할 전망이다. 관세 폭탄이 터지면 중국 성장률은 2%대로 반 토막 날 수 있다는 경고등도 켜졌다.
국가 경제의 거울이자 대표적 경기 선행지표는 주식시장 동향이다. 단기적 주가 변동의 과도한 해석은 피할 일이지만, 흔히 주가는 거시경제 현황과 전망을 비춰주고 기업 경기 흐름을 가늠하는 유의미한 선행지표다. 올해 세계 자본시장 성적표 기준으로 최하위권의 나라를 꼽자면 중국, 그리고 한국이다. 지난주 주말 기준, 올해 글로벌 증시 연중 주가 변동을 보면 S&P500 19%, 나스닥 20%, 일본 닛케이 10%, 인도 니프티50 17%, 상하이 종합 -9%, 코스피 -4%, 코스닥 -14% 등이다.
주요국 중 미국·일본·인도 등 증시가 약진하는 동안 왜 중국과 한국 성적은 최하위로 떨어졌을까. 주가 결정 요인은 다양하나 단적으로 다른 주요국 대비 중국과 한국의 유사점, 그중에서도 특히 투자자 관점에 우려되는 공통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한·중 양국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3D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부채(Debt), 부실(Default), 인구(Demography)다. 즉 과도한 부채, 부동산 부실,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악화라는 공통점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일본도 국가부채가 과도하고 고령화가 심각한데 무슨 차이일까. 좋든 싫든 해외 투자자 시각에서 보면 일본은 미국처럼 누가 총리가 되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우방국가이지만, 한국은 종북·친중·반일 성향 의원들이 거대 야당에 자리하고 있는 국가정치 리스크가 큰 나라다.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지배구조(governance) 문제는 흔히 기업지배구조 개선만을 논하지만 사실상 ‘정치지배구조’ 개혁이 먼저다. 중국 주가가 바닥 수준인 진짜 이유도 일인 공산 독재 체제 하에서 기업 역동성과 창의성이 훼손됐고 정치 시스템 개선 조짐이 없기 때문이다.
이달 초 국제포럼 참석차 내한했던 국제 저널리스트 윌리엄 페섹은 미 대선 전망 관련 강연에서 누가 되든 “시간은 한국 편이 아니다”라는 뼈아픈 지적을 했다. 구조적 장기침체를 타개하기 위한 핵심 개혁과제 실천이 지지부진하다는 질타다. 당면한 연금개혁의 본질은 결국 상식과 책임 회복이다. 낸 돈보다 더 받는다는 연금제도는 지속 가능하지 않고 무책임하다. 국민의 노후 자금을 잘 굴려 수익을 크게 높일 혁신 없이 더 주겠다는 얘기는 책임을 미래 세대에 떠넘긴다는 말이다.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한국의 포퓰리즘 정책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과거의 성공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짚었다. 암초에 걸린 대한민국호가 태풍을 막으려면 집권 후반기의 현 정부는 국민적 신뢰 회복과 개혁 추진력 강화를 위해 국정운영 시스템의 과감한 리셋을 해야 한다.

중앙일보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금융위원장
09-24 美日 권력 교체와 北 핵실험 조짐, 더 절실한 외교력 강화
미국 대선을 40여 일 앞두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레바논이 전면전 조짐을 보이는 등 국제 정세가 혼미한 상황에서 북한은 7차 핵실험에 돌입하는 기류다.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은 23일 “미 대선 전후로 북한이 핵실험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김정은은 대러 밀착 자신감을 과시라도 하는 듯 고농축우라늄(HEU) 제조 시설도 대담하게 공개했다. 제이비어 브런슨 한미연합사령관 지명자가 지난 17일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가속화가 최대 도전”이라고 우려한 배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일 외교 장관이 23일 유엔총회가 열린 뉴욕에서 만나 3자 공조 지속을 재확인한 것은 의미가 크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회의 후 “중요한 정치 이벤트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3자 협력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대선을 앞둔 미국처럼 일본도 기시다 후미오 총리 퇴임에 따른 새 총리 선출 및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지만, 3자 협력은 각국 정치 리더십 변화와 무관하게 이어져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확인했다는 뜻이다. 한·미·일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으로서 북·러 밀착에 대한 안보리 차원의 공조도 강화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한미동맹은 워싱턴선언을 통해 핵 동맹으로 진화했고,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 후 한미일 공조도 본궤도에 올랐지만, 미·일은 권력 교체기를 맞고 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당선되면 조 바이든 행정부의 동맹 중시 기조가 계승되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재입성한다면 동맹 외교 틀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국이 중심을 잡고 일본과 미국을 견인해야 한다. 대통령실부터 심모원려의 전략적 외교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통일 포기 개헌 등을 대놓고 주장하는 국내 종북 세력에 과감히 맞서면서, 초당적 협력을 강화해 안보 차원에서라도 남남 갈등을 줄이는 등 내치의 안정화도 중요하다.
문화일보 사설
09-27 ‘北노림수’에 말려든 IAEA 수장… 북핵제재 무력화 우려
■ ‘북핵 인정’ 시사 발언 파장
“北 핵탄두 30~50개로 추정
대화중단에 통제불능 될수도”
北은 핵보유 인정받기 총력
비핵화 정책기조 흔들릴 위기
한반도 안보 대변화 가능성
국제 핵 통제 기구의 수장이 사실상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며 북한의 비핵화를 목표로 해온 국제사회의 대북 정책 기조 자체가 흔들릴 위기에 처했다. 또한 유엔 등 국제사회가 핵 개발을 이유로 수행해 온 북한에 대한 제재도 사실상 무력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린 핵 보유국 인정과 핵 군축을 목표로 한 대화로 전환되는 것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라파엘 그로시(사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26일(현지시간) AP 통신과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와 국제법을 위반한 점에 대해서는 비난받아야 한다면서도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그로시 총장은 2006년 북한이 사실상 핵 보유국이 된 이후 국제사회의 대화 시도가 없었고, 그 뒤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상당히 확대됐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과의 대화 중단이 상황을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악화시키고 있다는 우려도 표시했다.
북핵을 사실상 인정하는 그로시 총장의 발언은 인터뷰 내내 이어졌다. 그는 “북한이 핵탄두를 30개 혹은 50개 보유하고 있다는 관측이 있다”며 “북한은 국제 핵 안전 기준이 지켜지는지 확인할 수 없는 광대한 핵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과 대화를 위해서는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매우 신중하고 외교적인 준비가 필요할 것”이라며 핵 안전 문제가 가능한 대화 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발언은 비핵화가 아닌 군축으로 자연스럽게 북한과의 대화 주제가 변화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로시 총장은 이어 다른 국가들도 핵무기를 늘려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매우 근본적이고 불안한 문제”라고 우려했다. 중국과 미국이 핵에 투자하고 러시아가 핵 사용 원칙을 담은 핵 교리 개정을 공식화하고 나선 상황을 짚은 것이다.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새롭게 만든 정강정책 중 외교안보 정책 관련 조항에서 ‘북한의 비핵화’라는 문구를 삭제한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핵 통제 기구 수장마저 사실상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발언을 한 것은 북한의 핵 위협에 직면한 우리 안보에 현실적인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할 경우 핵 보유국 인정과 핵 군축 흐름이 굳어질 우려가 있다. 엘런 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이날 연구소가 발간한 ‘2024 미국 대선의 글로벌 영향’ 보고서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연애편지’ 교환 등을 통해 북한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대한 영구적인 유예를 얻어내려고 할 것으로 봤다. 또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그런 합의를 바탕으로 북한과 종전을 선언하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로시 총장의 발언으로 실질적으로 유엔 안보리의 각종 제재도 무력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당장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러시아는 서방 국가들의 무분별한 제재에 강력히 반대한다며 IAEA의 북핵 결의안을 거부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북한의 비핵화를 이미 종결된 문제라고 주장했는데, 그로시 총장의 발언은 이 같은 러시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게 됐다.
문화일보 워싱턴=민병기 특파원 mingming@munhwa.com
09.28 북·중·러 모두 핵 폭주, 무력한 국제사회

▲<YONHAP PHOTO-2562> FILE PHOTO: Rafael Grossi, Director General of the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 waits for the start of the Board of Governors meeting in Vienna, Austria, September 9, 2024. REUTERS/Leonhard Foeger/File Photo/2024-09-25 08:37:49/ <저작권자 ⓒ 1980-2024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러시아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26일 북한 비핵화 개념은 “종결된 이슈(closed issue)”라고 했다. 북한과 군사 동맹을 부활시킨 러시아는 북한 핵 보유를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계속 밝히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도 같은 날 언론 인터뷰 도중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채택한 새 정강에선 ‘북한 비핵화’라는 문구가 사라지기도 했다.
북한 핵 보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북이 핵을 가진 상태에서 대북 제재가 해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파키스탄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며 제재에서 벗어났다. 6년 전 트럼프·김정은 회담에서 기존 북한 핵무기와 신형 우라늄 농축 시설은 그대로 놔둔 채 고철 같은 영변 핵시설과 핵심 대북 제재를 맞바꾸는 거래가 성사될 뻔했다. 핵보유국이 돼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것이 김정은의 목표다. 미 대선 상황을 보고 김정은은 다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7차 핵실험도 할 수 있다.
최근 한반도 주변의 핵 위협과 증강이 심상치 않다. 북한은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란 듯 공개했다. 중국은 2030년까지 핵탄두 1000기를 보유할 계획이다. 최근엔 44년 만에 태평양 공해상으로 핵 탑재가 가능한 ICBM을 발사하기도 했다. 러시아 푸틴은 ‘핵 교리’ 개정을 선언했다. 핵 없는 국가라도 핵보유국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공격하면 핵으로 공격하겠다는 취지다. 핵 폭주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북·중·러 모두 독재자 한 명이 군사·안보를 좌지우지하는 전체주의 국가다. 한국은 핵 없이 이들과 맞서 있다.
국제사회 현실과 국내 갈등을 감안할 때 우리의 핵무장은 당장은 어렵다. 일본처럼 ‘잠재적 핵 능력’부터 갖출 필요가 있다. 미국의 핵과 한국의 재래식 전력을 통합해 북핵에 대응하는 작전 지침도 한미 연합 작계(작전 계획) 반영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설마’하고 있기에는 국제 핵 정세가 매우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
09-30. 이시바 새 일본 총리가 ‘물컵의 반’ 더 채워 가길 기대한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집권 자민당 신임 총재(오른쪽)가 지난 27일 전임자인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손을 잡고 있다. 1일 총리가 되면 그는 기시다 정부의 외교안보 노선을 대체로 계승할 전망이다.[AP=연합뉴스]
과거사에 전향적 태도 주목, 한·일 윈윈 기조 잇고
북한 위협에 대응해 한·미·일 안보 협력 더 강화를
일본 집권 자민당의 새 총재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이 지난 27일 선출됐다. 일본은 의원내각제여서 집권당 총재가 총리를 맡기 때문에 이시바 신임 총재는 다음 달 1일 소집되는 임시국회에서 제102대 총리로 선출될 예정이다. 202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지난해부터 무르익은 관계 개선 기조가 이시바 총리 취임을 계기로 좀 더 성숙한 한·일 관계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의 자민당 총재 임기 만료 및 재선 불출마 선언에 따라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는 결선 투표까지 가는 진통 끝에 총재와 총리 자리를 거머쥐었다.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해 온 강경 보수 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경제안보담당상에게 뒤진 채 2위로 결선에 올랐지만, 과반 득표로 역전에 성공했다. 무파벌·비주류 출신으로 ‘4전5기’ 도전 끝에 총리 꿈을 이룬 오뚝이 같은 정치인이다.
부친의 고향인 돗토리(鳥取)현에서 1986년 중의원에 당선한 뒤 12선 관록에 빛나는 그는 정치 경험이 풍부하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그의 총리 취임을 환영하는 것은 그만큼 건설적 역할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한·일 관계를 꼬이게 해 온 과거사 인식에 있어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일본에서 보기 드문 기독교 신자인 그는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거리를 뒀고, 위안부와 징용 등 과거사 이슈에서 온건하고 사려 깊은 목소리를 냈다. 지난해 3월 윤석열 대통령이 징용 해법으로 3자 대위변제 방안을 제시한 이후 일본의 화답이 미흡한 상태에서 이시바 신임 총리가 어떤 성의를 보일지 주목된다.
더욱이 내년은 1965년 한국과 일본이 국교 정상화에 합의한 지 60주년이다. 이시바 신임 총리는 “오부치·김대중 시대 같은 좋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바람대로 윤석열-이시바 체제에서 한·일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할 미래지향적 새 이정표를 어떻게 제시할지 관심이다. 윤석열-기시다 체제에서 반쯤 채워 온 물컵의 나머지를 함께 채워 주길 기대해 본다.
방위상 출신의 안보통인 그는 기시다 정부의 외교·안보 기조를 대체로 계승할 전망이다. 미국의 핵 공유와 ‘아시아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한·미·일 안보 협력을 한층 강화·발전시키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 윤석열 대통령은 11월 페루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시바 신임 총리를 첫 대면할 것으로 보인다. 두 정상이 한·일 양국의 윈윈 협력을 위한 동력을 잘 살려 가길 바란다.
중앙일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