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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8/ 08-01(목) 尹-韓 90분 만났지만 독대는 없었다는데… - 08-31(토) 무인트랙터, 디지털 허수아비, 운반로봇… 첨단이 바꾼 농업

상림은내고향 2024. 8. 15. 14:08

橫說竪說(동아일보) 2024-08/

08-01(목) 尹-韓 90분 만났지만 독대는 없었다는데…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그제 90분간 만났다.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도 배석했지만, 사실상 독대와 많이 다르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여당의 새 지도부를 불러 대통령실 잔디광장에서 만찬을 한 지 6일 만이다. 지금 여권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는 총선 전부터 불거진 윤-한 갈등을 봉합하는 일에, 두 사람이 의기투합할 수 있느냐다. 한 대표가 제안한 90분 회동은 가능성을 엿볼 기회였다.

▷대통령 가족과 여권을 옥죄는 민감한 이슈를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회동 형식에서 묘한 긴장감이 감지됐다. 대통령-당 대표 회동은 통상 만남 첫 2, 3분을 언론에 공개한다. 대통령 집무실 회동일 때는 거의 예외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언론은 물론 용산 참모 대다수에게도 알리지 않고 만났다. 오전 11시에 만나면서 각각 점심 약속을 취소하지 않았다. 낮 12시 반까지 대화가 이어졌지만 “점심 함께 하면서 더 이야기하자”는 제안은 없었다. “화기애애했다”는 용산 대변인 설명과 실제 상황은 거리가 있었을 거란 짐작이 가능하다.

▷90분 회동치고는 브리핑이 짧았다. 양쪽 설명을 종합하면 윤 대통령의 메시지는 2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당 인사들을 포용하고 경청함으로써 한동훈의 사람을 만들라는 것이 하나고, 당직 개편 등 당무는 한 대표가 책임지고 잘하라는 것이 다른 하나다. 그러나 이걸 두고도 국민의힘 내 친한-친윤 그룹은 제각각으로 해석했다. 친한은 당 대표 주도권을 인정해 줬다고 말했고, 친윤은 친윤 포용과 경청이 대통령의 진짜 생각이라고 풀이했다.

 

▷90분 만남 평가는 정점식 당 정책위의장이 유임하느냐, 교체되느냐에 달렸다는 게 중론이다. 검사 출신으로 친윤 핵심인 정 의장의 1년 임기는 10개월 더 남았지만, 과거 정책위의장은 새 당 대표가 새로 뽑았다. 이 자리가 중요한 이유는 9명으로 구성되는 최고위원회 구성 때문이다. 현재 4 대 4인 친한 대 친윤의 구도가 정 의장 교체 여부에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윤-한은 당직 개편도 논의했다. 한 대표가 교체를 강행한다면 대통령이 한동훈 당 주도를 용인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독대나 다름없던 90분 회동의 특징은 과거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만날 때 있었던 ‘따로 만남’이 없었다는 점이다. 통상 대통령은 여당 지도부와 식사를 한 뒤 20분(문재인-송영길) 정도 1 대 1 진짜 독대를 갖는다. 갈등이 컸던 박근혜-김무성 체제 때도 19분, 때론 단 5분 정도라도 밀담을 나눴다. 하지만 독대인 듯 독대 아닌 90분 회동은 대통령과 한 대표가 아직은 준비가 덜 됐거나, 독대 후 터져 나올 다양한 정치적 해석이 부담스럽다는 뜻일 수도 있다. 윤-한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시각은 여전히 우세하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8-02 법의 빈틈에서 생겨난 ‘검사 겸 당 대변인’

 

이규원 대구지검 부부장 검사 겸 조국혁신당 대변인은 직함부터가 모순적이다.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는 검사가 정당의 대변인을 맡는 건 과거엔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이다. 조국혁신당은 검찰 해체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는 정당이다. 그 당의 대변인이 검찰에서 월급을 받으며 주요 당직자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빚어진 건 국가공무원법과 대법원 판례의 엇박자 때문이다. 이 검사는 총선을 한 달 앞둔 올 3월 법무부에 사표를 내긴 했다. 하지만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이 사표를 내도 중징계 사유가 있고 관련 사건으로 기소된 경우 퇴직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검사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금지 요청서 허위 작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개월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고 항소심 재판 중이어서 이 법에 따라 사표 수리가 되지 않는다. 검사 신분이 유지되는 것이므로 정치 활동도 금지된다.

▷하지만 ‘황운하 판결’이라고 불리는 2021년 대법원 판례가 이 검사에게 정치인의 길을 열어줬다. 민변 회장 출신의 김선수 대법관이 주심이었던 당시 재판부는 공직자가 사표를 내기만 하면 수리 여부에 상관없이 사직으로 간주되고, 선거 출마도 가능하다고 봤다. ‘소속기관장에게 사직원이 접수된 때에 그 직을 그만둔 것으로 본다’는 공직선거법 조항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 덕에 경찰 간부 시절 울산시장 선거 개입 혐의로 재판을 받다가 사표 수리가 안 된 채로 출마해 당선된 황운하 의원이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난 총선은 이 판결이 낳은 뉴 노멀이 현실화된 첫 선거였다. 이 검사와 이성윤 전 서울고검장, 박은정 전 법무부 감찰담당관 등 수사·재판을 받거나 중징계 가능성이 높은 검사들이 줄줄이 사표를 던지고 출마했다. 의원 배지를 단 이 전 고검장과 박 전 담당관은 ‘당선과 동시에 기존 공직자는 사퇴 처리가 된다’는 선관위 규정에 따라 사표 수리가 됐다. 하지만 조국혁신당 비례대표로 나섰다가 낙선한 이 검사는 퇴직 처리도 안 되고, 그렇다고 정치활동을 금지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됐다.

▷대검은 이 검사가 업무복귀 명령에 불복하자 감찰에 착수했지만 그를 복귀시킬 효력은 없는 조치다. 그렇다고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은 이 검사의 사표를 수리할 수도 없어 월급은 검찰에서 받고, 일은 당에서 하는 이중 생활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자칫하면 이 검사가 다음 선거에서 당선될 때까지 검찰이 생활비를 대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황운하 판결이 재판 중인 공직자에게 선거 출마라는 탈출구를 열어줬듯, 지금의 엉성한 법제를 놔두면 이 검사처럼 ‘소속 기관에서 월급 받는 정치인’의 길을 걷는 공직자들이 또 나올 수 있다. 이런 코미디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법의 빈틈을 메워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8-03(토) AI 거품론’이 부른 검은 금요일

 

변덕스럽기가 기후변화 못잖다. 금리 인하 기대감과 인공지능(AI) 열풍으로 ‘서머랠리’(여름 강세장)를 외치던 글로벌 주식시장 분위기가 한여름 때아닌 한파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미국 경기 침체의 공포와 ‘AI 거품론’에 2일 아시아 증시는 ‘검은 금요일’을 연출했다. 코스피는 3.65% 급락하면서 50여 일 만에 2,700 선이 뚫렸다. 일본 닛케이평균주가는 5.81% 폭락해 36년 10개월 만에 가장 큰 하락 폭을 보였다.

▷불안한 투심에 불을 지핀 것은 AI 산업에 대한 회의론이다. 미국 소비와 고용이 침체되면서 AI 투자가 계속될 수 있을지, 실제 수익으로 이어질지 불안감이 커졌다. AI 열풍을 대표하는 엔비디아는 6월 중순 세계 시총 1위에 오르며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전고점이던 지난달 11일 이후 한 달도 안 돼 20% 가까이 주가가 떨어졌다. 시총 4조 달러 선점 경쟁을 벌이던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는 이제 뒤로 달리기 경쟁을 하고 있다.

▷일각에선 AI 시장을 2000년대 초 ‘닷컴 버블’에 빗대고 있다. 엔비디아의 부상과 위기를 보면서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네트워크 장비 시장을 장악하며 단번에 빅테크 반열로 올랐다가 주가가 폭락한 시스코를 떠올린다. 챗GPT의 충격과 찬탄은 잦아들기 시작했고 이제 시장은 AI로 돈을 벌 수 있는지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VC)인 세쿼이아캐피털은 “주요 빅테크의 AI 투자는 연간 6000억 달러(약 822조 원)에 이르지만, 수익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1000억 달러(약 137조 원) 미만”이라고 분석했다.

 

▷AI 진화 속도에 맞춰 인프라가 뒤따를지도 의문이다. 특히 전력이 제대로 공급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전기 먹는 하마’인 AI 데이터센터 등으로 2030년 미국의 AI 전력 수요는 2023년 대비 80배 이상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전력 공급 인프라를 단기간에 구축하기는 쉽지 않다. 모두가 밝은 미래를 의심치 않았던 전기차 시장이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에 빠졌듯이 산업의 성장은 불균형을 피할 수 없다.

▷AI라는 용어는 1955년 컴퓨터 과학자 존 매카시가 발표한 ‘지능이 있는 기계를 만들기 위한 과학과 공학’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 AI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며 1970년대 초반과 1980년대 후반 두 차례의 혹독한 겨울을 겪어야 했다. AI의 미래가 장기적으로 낙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꽃길이 아닌 굽이굽이 비탈길이다. 이번 위기가 ‘세 번째 겨울’의 전조일지, 아니면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일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8-05(월) 연금 수령자 800만 명 시대… 절반이 월 50만 원 미만

 

캐나다와 미국 북부 등 북미 지역에서 미국 플로리다, 하와이, 푸에르토리코 등 이른바 선벨트(Sun belt) 지역으로 이동해 겨울을 나는 은퇴자들을 철새에 빗대 ‘스노버드(Snowbird)’라 부른다. 겨울철, 여름철 주택 2채를 사용하는 것은 ‘스노버딩(Snowbirding)’이다. 캐나다는 공적연금이 탄탄하고, 미국은 퇴직연금 부자가 많다. 덕분에 연금이 두둑한 은퇴자들이 스노버드가 되어 여유로운 노후 생활을 누린다.

▷연금 선진국에는 미치진 못하지만, 우리나라도 연금 후진국에선 차츰 벗어나고 있다. 연금을 받는 노인이 받지 않는 노인을 처음 앞지른 게 지난해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5월 연금을 받는 고령층(55∼79세)이 처음으로 800만 명을 넘어섰다. 고령층 인구 2명 중 1명이 공적연금(국민·기초·공무원 연금 등)과 사적연금(퇴직·개인·주택 연금 등) 중 1개 이상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

▷연금 수령자도 많아졌지만, 연금 수령액도 늘고 있다. 월평균 수령액이 82만 원인데 지난해 대비 10% 가까이 늘었다. 10년 전(42만 원)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통계청은 연금 수령자와 수령액이 동시에 늘어난 이유로 국민연금을 꼽았다. 국민연금이 전국적으로 도입된 1999년 40대였던 ‘베이비붐’ 세대가 연금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초연금 수급자도 올해 7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금 수령자 절반은 한 달 연금액이 50만 원도 되지 않는다.

 

▷공적연금 제도가 성숙하면서 노후 안전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사적연금은 성장 속도가 다소 느리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령이 시작된 개인형 퇴직연금(IRP) 53만 계좌 중에 단 10%만 연금으로 받았다. 나머지는 모두 일시금으로 찾아갔다. 쌓인 연금액이 적은 데다 수익률도 낮은 탓이다. 최근 5년간 퇴직연금 수익률은 2%로 정기적금보다도 못했다. 직장인 ‘백만장자’를 만드는 미국 퇴직연금 ‘401(k)’에 비할 수 없고, 국민연금(7%)과도 차이가 크다. 우리나라 노후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이지만 주택연금 가입자는 12만 명이 조금 넘는다.

▷지난해 기준 적정 노후 생활비는 월 324만 원이다. 현재 월평균 연금 수령액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고령층 10명 중 7명이 “더 일하고 싶다”고 했다. 연금 인프라가 깔렸으니 가입자와 가입 기간이 늘어나면 우리나라도 겨울마다 남쪽 나라로 떠나는 ‘스노버드’가 보편화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연금 제도의 내실을 다져야 한다. 적자가 예고된 국민연금은 개혁으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하고, 퇴직연금은 낮은 수익률과 가입률을 개선해야 한다. 일자리가 불안정해 연금을 꾸준히 적립하기 어려운 사각지대 지원도 중요하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06 “오늘 딴 메달도 이젠 과거, 내일부터는 다시 달려야”

 

승리의 환호와 패배의 탄식이 교차하는 올림픽에서는 오래도록 기억될 명언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2016년 리우 올림픽 때는 펜싱의 박상영(29)이 남긴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가 최고 유행어였다. 에페 결승전에서 4점 차로 뒤져 다들 포기하는 순간 그는 이 말을 되뇌며 역전의 드라마를 썼다. 2021년 도쿄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결승에선 슛오프까지 가는 접전 상황에서 ‘3관왕’ 안산(23)이 했다는 속엣말이 화제였다. “쫄지 말고 대충 쏴!” 파리 올림픽에서도 새로운 어록이 만들어지고 있다.

▷신예들은 패기로 승부한다. 여자 총잡이 금메달리스트 삼인방이 대표적이다. 오예진(19)의 좌우명은 “내 갈 길은 내가 정한다”, 양지인(21)은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다. 반효진(17)은 “나도 부족하지만 남도 별것 아냐”라는 생각으로 쐈다. 남자 펜싱 사브르 3연패에 기여한 도경동(25)은 결승전 후반 1점 차로 쫓기는 상황에서 교체 투입돼 28초 만에 5연속 득점하고 내려와 포효했다. “질 자신이 없었다.”

▷양궁 남자 개인 결승전은 역대급 명승부였다. 마지막 슛오프에서 원샷으로 승부를 결정지은 김우진(32)은 통산 5번째 금메달을 따내며 한국 최다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그는 잠깐 웃더니 “오늘 딴 메달도 이젠 과거다. 오늘까지만 즐기고 내일부터는 새 목표를 향해 달리겠다”고 했다. 후배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메달 땄다고 (그 기분에) 젖어 있지 마라. 해가 뜨면 마른다.” 김우진에게 패한 미국 브래디 엘리슨(36)은 “간발의 차로 졌다고 속상하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챔피언처럼 쐈다. 중요한 건 그거다.”

 

▷한국 패장들의 소회도 인상적이다. 남자 유도 100kg 이상급 결승전에서 한국에 첫 은메달을 안긴 김민종(24)은 금메달을 놓친 후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삐약이’ 탁구 선수 신유빈(20)은 “패배의 경험이 저를 더욱 성장시켜줄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서늘한 총잡이 김예지(32)는 사격 주 종목 예선에서 탈락하고도 쿨했다. “한 발 놓쳤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는다.”

▷이번 올림픽은 테니스 노장들의 고별 무대였다. 노바크 조코비치(37)는 16세 어린 카를로스 알카라스(21)를 꺾고 커리어 골든 그랜드슬램을 완성한 후 “내가 꿈꾸었던 그 모든 것을 넘어섰다”며 오열했다. 8강전에서 탈락한 앤디 머리(37)는 재치 있는 은퇴사를 남겼다. “어차피 테니스 좋아하지도 않았어.” 룩셈부르크 탁구 노장 니샤롄(61)은 ‘언제 은퇴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고 답한다. 신예든 노장이든 승자든 패자든 선수들이 공유하는 명언이 있다.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07 명문대생 연합동아리, 마약 소굴이었다

 

“우린 깐부잖아!” 유명 드라마에 나오는 친근한 대사를 홍보물에 인용하면서 이름도 ‘깐부’(오랜 친구)라고 붙인 이 동아리는 ‘친목 동아리’를 표방하며 회원들을 모집했다. ‘자차 8대 이상 보유’ ‘고급 호텔·리조트 VIP 다수 보유’ 등 광고를 앞세워 고급 사교클럽인 것처럼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KAIST 대학원에 다니다가 제적된 이 동아리 회장 A 씨는 회원을 면접하면서 외모와 집안까지 깐깐하게 따졌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동아리는 마약의 소굴이었다.

▷2021년 말 동아리를 만든 A 씨는 규모를 키우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대학생들이 접하기 어려운 호화로운 술자리를 마련하고 호텔 풀파티에도 초대했다. SNS 등을 통해 소문이 나면서 가입자가 300명으로 늘어나 전국 2위 수준의 대학 연합동아리로 성장했다. 그런데 A 씨가 뿌린 돈의 출처는 마약 판매 자금이었다. 가상화폐로 마약 구매 대금을 딜러에게 보내고 ‘던지기’ 수법으로 받은 뒤 회원들에게 팔았다. 마약상들이 근래 자주 이용하는 방식이다.

▷A 씨는 처음에는 ‘입문 마약’이라고 불리는 대마를 회원들에게 권했다. 이후 엑스터시, LSD, 케타민, 필로폰 등 점차 강력한 마약으로 확대했다. 특히 이들이 애용한 것은 LSD였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LSD를 투약한 뒤 “갑자기 밀밭 전체가 바흐를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을 만큼 환각 효과가 세다. 몇몇 회원은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을 호텔로 불러 함께 투약한 뒤 집단 성관계까지 가졌다고 하니 이런 막장이 없다.

 

▷대학생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혹은 재미 삼아 ‘딱 한 번만’이라는 생각으로 마약에 손을 댔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약의 끝은 감옥이나 병원, 그것도 아니면 무덤”(양성관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이라고 했다. 검찰은 A 씨 등 6명을 기소하고, 단순 투약자 8명은 치료 조건으로 기소유예했다. A 씨를 제외하면 모두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수도권 주요 대학 재학생이었다. 앞날이 창창했던 젊은이들이 마약의 덫에 걸려 미래를 알 수 없게 됐다.

▷지난해 적발된 마약사범은 2만7611명으로 전년 대비 50%, 10년 전에 비해선 3배가량 늘었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마약에 빠진 청년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5년 전만 해도 전체 마약사범 중 20대 이하가 차지하는 비율이 20% 미만이었지만 지난해에는 35%를 넘어섰다. 고교생이 마약 판매에 나서고, 캠퍼스에는 마약 홍보 전단이 뿌려지고 있다. 아직 판단력이 성숙하지 않은 청년들은 마약에 빠져들기 쉽고 그 폐해는 평생을 가는 만큼 교육과 치료를 강화해 단단히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마약의 유혹에 빠진 학생들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현실이 아찔하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8-08 흙수저 美 부통령 후보들의 ‘평범한 미국인’ 전쟁

 

미국의 부통령 후보는 지명 후 첫 연설을 들어보면 발탁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8년 전 트럼프의 마이크 펜스는 기독교 신앙을 지닌 어른스러운 연설로 트럼프의 약점을 보완했다. 4년 전 바이든의 여성 후보 카멀라 해리스는 50대답게 고령의 바이든이 못 갖춘 젊음을 앞세웠다. 보통의 미국인에 가깝다며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팀 월즈(60)는 그제 첫 연설에서 맞상대인 J D 밴스 공화당 부통령 후보(40)의 저격수를 자임했다.

▷월즈는 흙수저 신화의 주인공인 밴스의 대중성을 건드렸다. 월즈는 “그가 보통의(regular) 미국인이라고? 아니다. 그는 (최고 명문) 예일대를 졸업했고, 실리콘밸리에서 억만장자를 상대하며 돈을 벌었다”고 꼬집었다. 밴스가 자기 가족의 밑바닥 삶을 기록한 책(‘힐빌리의 노래’)을 두고는 “고향 마을을 쓰레기로 묘사했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밴스를 비판할지언정, 흙수저 신화만큼은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악역을 시골 고등학교 지리교사 겸 미식축구 코치를 지낸 친근한 이미지의 월즈가 떠안았다.

▷둘 사이엔 공통점이 많다. 우선,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 대신 군에 자원입대해 병사로 복무했다. 밴스 후보는 2003년 해병대에 입대해 4년간 근무했다. 2005년에는 6개월 동안 비전투 공보사병으로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 결석과 지각이 허다했던 학창 시절을 보낸 밴스는 해병대에서 자신을 찾았다고 책에다 썼다. “나는 안 된다”는 좌절이 잘못이란 걸 깨달았고, “인생을 계획한다는 개념을 처음 알았다”는 대목이 있다. 17세에 주 방위군에 들어간 윌즈 후보는 상근 또는 비상근으로 24년간 포병으로 복무했다. 군 생활 중 대학과 대학원을 마친 그 역시 오랜 군 복무를 통해 삶과 일의 방향을 잡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자수성가를 중시하는 미국인 정서에 부합한다. 월즈 후보는 시골 농장에서 자랐고, 이름 없는 대학을 다녔다. 밴스는 마약중독자 어머니 대신 외조부모 손에서 자랐고, 가까운 친척 누구도 대학을 졸업 못 했다. 부시-클린턴-오바마-바이든처럼 하버드나 예일 출신, 30세부터 상원의원을 지낸 미국의 주류가 백악관을 차지해 온 사실에 비춰 볼 때 상대적으로 아웃사이더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이민, 낙태, 동성애 등 사회정책 견해는 하늘과 땅 차이지만.

▷2000년 이후 치러진 6차례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한쪽이 모두 이긴 주는 35곳이다. 11월 5일 대선 때도 비슷할 것이다. 결국 그때그때 지지 정당을 바꾸는 경합주 6∼8곳이 승부를 가를 텐데,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등 이른바 쇠락한 공업도시의 저학력 노동자의 표가 중요해졌다. 왜 중서부를 배경으로 하는 두 후보가 간택됐는지가 명확해졌다. 앞으로 3개월 동안 ‘내가 더 보통 미국인답다’는 부통령 싸움이 더 거세질 것이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8-09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 검찰총장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검찰총장의 임기는 2년이다. 통상 대통령 임기 중 3명의 검찰총장이 나온다. 대통령으로서는 집권 직후의 검찰총장보다는 집권 후반기를 맡는 3년 차 이후의 검찰총장 임명에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 임기 중 발생한 비리가 하나둘 드러나고 집권 초반에 비해 조직 장악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검찰의 권력 수사를 막아내기 어려워지는 시기가 이때부터이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집권 3년 차에 임명된 김기수 총장이 대통령 차남 현철 씨를 구속했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집권 4년 차에 임명된 이명재 총장이 대통령 차남 홍업 씨와 삼남 홍걸 씨를 구속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특이하게도 집권 초반 검찰과의 알력이 심했으나 집권 3년 차 정상명 총장하에서 관계가 안정화됐다. 그러나 수면 밑에서는 박연차 게이트가 끓고 있었고 결국 이명박 대통령 집권 초반 수사 대상이 됐다. 이 대통령 때는 집권 4년 차에 임명된 한상대 총장의 권력 봐주기 수사에 대한 불만이 중앙수사부 폐지 추진을 계기로 터져 나와 검란(檢亂)까지 발생했다.

▷박근혜 대통령 때의 집권 3년 차 총장은 김수남이었다. 박 대통령과 검사 출신 김기춘 비서실장이 믿고 신임한 총장이었으나 총장 스스로도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 최순실 사건에 떠밀려 박 대통령을 구속하는 역할을 맡았다. 문재인 대통령 때의 집권 3년 차 총장은 윤석열이었다. 그는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있을 때는 문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에 앞장섰으나 총장으로 올라가자 문 정부와 격렬한 갈등을 빚고 결국 문 정부에서 쫓겨났다.

 

▷이원석 검찰총장의 임기가 다음 달 만료된다.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가 열려 심우정 법무부 차관, 임관혁 서울고검장, 신자용 대검 차장검사, 이진동 대구고검장 등 4명을 후보로 추천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이르면 윤 대통령 휴가가 끝나는 오늘 4명의 후보 중 1명을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한다는 보도가 나온다. 형식적으로는 장관의 임명 제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통령과 조율을 마친 후보일 것이다.

▷윤 대통령은 최초의 검사 출신 대통령이다. 누구보다 검찰의 생리를 잘 아는 만큼 집권 3년 차 검찰총장의 임명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총장 후보 4명이 모두 윤 대통령과 친분이 깊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믿고 뽑아도 대통령과 알력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검찰총장이다. 윤 대통령 자신도 조국 등 일부 측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고 임명한 문 대통령을 치받고 대통령이 됐다. 윤 대통령은 오늘날의 자신을 만든 이 숙명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11월이면 윤 대통령의 집권이 반환점을 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8-10(토) 日 사도광산 등재 과정 교묘히 왜곡한 외교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사도광산이 지난달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위원국의 만장일치로 등재됐는데, 2주일이 지나도록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가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데 동의한 경위를 놓고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는 탓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앞서 기자들에게 “일본이 전체 역사를 반영하기로 약속했고, 실질적 조치를 이미 취했다”고 등재 동의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막상 등재 뒤 우리 언론이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의 관련 전시물을 확인해 보니 ‘강제동원’ ‘강제노역’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우리 외교부는 동원의 강제성 표현은 이번엔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고 했다. 일본 측이 되풀이하진 않았지만 2015년 하시마 탄광(일명 군함도) 등재 당시 ‘한국인 등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동을 했다’고 밝힌 것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언론이 관련 전시에 ‘강제’ 표현을 안 쓰는 데 한국이 사전 합의했다고 보도하자 외교부는 즉시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부정했다.

▷그러나 사실무근이라는 해명이 사실무근이었다. ‘굴욕 외교’라는 지적에 외교부는 “전시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강제’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본의 과거 사료 및 전시 문안을 요구했으나 최종적으로 일본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뒤늦게 밝혔다. 일본이 강제동원 명시를 거부했는데도 세계유산 등재에 동의해준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외교부는 처음 설명이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할지 모르겠다. ‘강제 표현이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는 건 일본 대표가 세계유산위에서 다시금 강제성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얘기였고, 관련 전시 문안 협상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도 국민도 정부에 강제성 명시 요구 여부를 물었지, 그런 식으로 쪼개서 묻지 않았다. 이렇게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게 바로 거짓말이다. 정부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국민을 우롱해가며 굴욕 외교를 감추려 한 것이다.

▷등재 과정을 왜곡한 정황은 또 있다. 외교부는 세계유산위 개최를 앞두고 배포한 보도자료에선 “모든 노동자”를 위한 전시물을 설치했다는 일본 대표의 발언에서 단어를 “한국인 노동자”로 바꿔 전달했다. 일본이 위원국들 앞에서 모호한 표현을 쓴 걸 우리 정부가 국민들에게 감춘 셈이 됐다.

▷일본이 하시마 탄광 등재 당시의 ‘전체 역사를 소개하겠다’는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 처음부터 등재 동의를 작심하지 않고서야 이 같은 저자세 외교를 할 리가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협상 과정에서 ‘등재를 표결로 가져갈 수도 있다’는 각오는 찾아볼 수 없다.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안보협력 확대를 외교 성과로 꼽고 있는 대통령실의 직간접적 지침이 없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8-12(월) 한달새 6배 급증한 코로나 환자

 

요즘 감기에 걸렸다 싶으면 가능성은 크게 세 가지다. 두통 콧물 재채기로 2∼3일 힘들다 괜찮아질 경우 여름 감기, 감기 증세에 더해 쉽게 피곤해지고 온몸이 아프면 실내외 온도 차로 인한 냉방병이다. 감기인 것 같은데 열 나고 독감처럼 많이 아프면 코로나를 의심해야 한다. 요즘 감기인 줄 알고 병원을 찾는 환자 4명 중 1명은 코로나 환자라고 한다.

▷정부는 코로나 전수조사 대신 전국 220개 병원의 코로나 발생 추이를 표본 조사하고 있는데 이달 첫째 주 코로나 입원 환자 수가 861명으로 집계됐다. 올 2월 초 875명으로 정점을 찍고 줄어들다 6월 말부터 증가 추세로 돌아서더니 한 달 새 환자가 6배로 급증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고온다습한 여름철에는 전파력이 떨어지지만 냉방기 사용과 밀폐된 실내 생활이 전파를 부추기고 있다. 현재 유행하는 바이러스는 오미크론 변이인 KP.3로 전파력과 중증도가 증가했다는 보고는 없다. 코로나 유행은 이달 말∼다음 달 초 정점에 이를 전망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 연기한 끝에 ‘무관중’으로 개최됐던 도쿄 올림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파리 올림픽도 코로나 비상이 걸렸다. 코로나 검사를 하면 5명 중 1명은 확진 판정을 받는다. 남자 100m에서 0.005초 차이로 우승한 미국 육상 선수 노아 라일스(27)는 200m에서 동메달을 결정짓고 쓰러졌는데 이틀 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감염 사실을 알릴 의무는 없다. 라일스는 동메달 시상식 때는 마스크를 쓰고 참석했지만 400m 계주와 1600m 계주는 컨디션 난조로 포기했다.

 

▷현재 코로나 치명률은 독감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아져 확진돼도 격리 의무는 없다. 다만 증상이 사라진 뒤 하루 지나 일상에 복귀하는 것이 좋다. 먹는 치료제는 기저질환자와 60세 이상만 유료로 처방받을 수 있고, 코로나 검사비는 치료제 처방 대상자가 아니면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코로나 확산세로 자가진단키트 가격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정부는 10월 신규 백신 접종을 개시한다. 65세 이상은 무료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드물게는 심각한 병인 경우가 있다. 10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 감기 증세가 심각하고 열이 잘 안 떨어지면 뇌수막염 가능성을 의심해야 한다. 성인이라면 일본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유행하고 있는 ‘연쇄상구균 독성 쇼크 증후군(STSS)’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대개는 가벼운 감기 앓듯 쉽게 회복되는데 고령자, 당뇨 환자, 최근 수술을 받아 상처가 있는 경우 매우 드물지만 폐렴 같은 중증으로 진행될 수 있고, 이 경우 치명률이 30%가 넘는다. 모든 감염병이 그렇듯 손 씻기와 마스크 쓰기만 잘해도 발병률은 크게 낮아진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08-13 어린이집 22% 줄 때 영어유치원 37% 증가

 

보통 5세부터 다니는 영어유치원에 입학하려면 아이가 ‘4세 고시’라 불리는 레벨 테스트를 봐야 한다. 그런데 실력이 있다고 4세 고시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먼저 ‘입금 전쟁’을 치러야 한다. 영어유치원 입학 대기 줄이 길다 보니 원비를 선착순으로 입금받아 레벨 테스트 대상자를 정한다. 3초 안에 입금이 마감된다고 해서 ‘3초 컷’이다. 부모가 선착순 입금에 성공해야지 아이가 4세 고시를 볼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1000명 넘게 레벨 테스트를 치른 한 영어유치원은 응시료 수입만으로 서울 강남 월세를 냈다는 이야기가 돈다.

▷조기 영어 교육 열풍을 타고 전국 영어유치원은 지난해 843곳으로 일반 유치원(8441곳)의 10% 수준까지 불어났다. 2019년(617곳)에 비해 37%가 늘었다. 저출산 여파로 일반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급감한 것과 달리 영어유치원은 ‘저출산 쇼크’에서 비켜나 호황을 누린다. 지난해 어린이집은 2만8954곳으로 4년간 23%나 주는 등 줄폐업이 이어졌다.

▷똑같이 3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고 유치원이라는 이름을 강조하지만, 영어유치원은 사실 영어학원이다. 학원법 적용을 받아 교습비 상한선도 없고, 학원이 정하기 나름이다. 전국 평균 월 교습비는 141만6000원이다. 서울만 보면 200만 원에 가깝다. 요즘 영유아 공교육(유치원)과 공보육(어린이집)은 정부 지원이 늘어 거의 무상이다. 그런데도 비싼 영어유치원이 필수 코스가 되어 버린 건 공교육이 충족시킬 수 없는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는 일찍 배울수록 좋다’는 경험칙을 믿는 부모들은 아이가 어린 나이에 영어에 노출되기를 바란다.

▷‘영유’(영어유치원)냐, ‘일유’(일반 유치원)냐. 아이를 첫 교육기관에 보내는 엄마는 공교육과 사교육을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 선다. 일반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놀이 위주로 학습하고 뛰어노는 시간도 보장이 된다. 그 나이에 꼭 배워야 할 생활 습관이나 사회성도 가르친다. 이와 달리 영어유치원은 교육 과정이 영어 학습에 치우쳐 있어 아이의 균형 있는 발달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많다. 영어유치원 일평균 교습 시간은 4시간 57분으로 중학교 수업 시간과 비슷했다.

▷일단 영어유치원 경로로 들어서면 공교육 이탈이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소수를 대상으로 한 맞춤형 교육을 기대하고 사립초나 국제학교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자녀 수가 줄어들수록 다양한 교육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틀에 갇힌 공교육은 이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이들을 사교육으로 자꾸 밀어낸다. 외동이를 최고로 키우고 싶은 부모의 동기와 공교육의 무기력, 학원의 상술이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영유아 사교육비도 폭증했다. 평등한 출발선이어야 할 영유아 교육도 사교육이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14 “그런 거 안 한다”고 번번이 약속하지만… 또 낙하산 논란

 

역대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약속했다가 어긴 게 있다면 공공기관 낙하산 근절 다짐을 꼽겠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던 2021년 “제가 집권하면… 사장 누구 지명하고 이렇게 안 하고요. 캠프에서 일하던 사람을 시킨다? 저 그런 거 안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정치에 갓 입문해 공정과 상식의 회복을 앞세우던 시점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초에 “낙하산, 보은 인사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낙하산 인사는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란 걸 알았을 걸로 짐작된다.

▷집권 국민의힘에서 4월 총선의 낙천·낙선자가 분명해진 지금, ‘낙하산 부대’는 점프 명령만을 기다리는 듯하다. 5∼8월 57개 공공기관에서 기관장 선임 공고를 냈으니, 수십 개의 낙하산이 펼쳐질 수 있다. 하태경 전 의원은 보험연수원장에 일찌감치 내정됐다. 곳곳에서 하마평이 무성하다.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동서발전 사장에 권명호 전 의원, 남동발전 사장에 강기윤 전 의원이 유력하다는 식이다.

▷용산 대통령실 참모들도 공기업행에 빠지지 않는다. 차순오 전 정무1비서관은 지난달 한국수출입은행 상임감사에 임명됐다. 최근 용산을 떠난 강훈 전 정책홍보비서관은 한국관광공사 사장 공모에 지원한다고 한다. 신문기자 출신인 강 전 비서관은 공식 업무 이외에 김건희 여사 일을 종종 맡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서관 출신으로는 드물게 큰 기관의 사장직에 도전하는 셈이다. 경쟁자가 나오겠지만, 그의 취임을 의심하는 이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낙하산이란 말이 정착된 수십 년 동안 언론은 비판했지만, ‘여권 핵심부와 관계가 좋다’는 것 말고는 어떤 경영 능력이 검증됐는지 알기 힘든 고위직 인사는 반복됐다. 그 이면에는 ‘권력 재생산’을 위한 인력 충원 구조가 도사리고 있다. 정치권 인사의 설명은 이렇다. ‘3년 뒤 대선을 앞두고 잠룡들은 캠프를 차리고 사람을 모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겐 급여가 없다. 내가 미는 후보가 당선된다면 내게 공천 또는 공직을 줄 것이란 믿음 없이 장기간 무급 자원봉사를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실 참모 경험은 기관 경영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해당 공기관의 내부 승진자만이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국전력 자회사 같은 기술기업이나 금융공기업처럼 적잖은 전문성이 필요한 곳에도 비전문가를 내리꽂는 일이 잦다. 그러면 공모 절차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국민들은 ‘내가 안 풀리는 건 힘센 사람에게 부탁할 수 없어서구나’라는 허탈감에 젖게 된다. 공정하게 실력 중심으로 선발한 올림픽 종목의 선수들이 줄줄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을 보며 환호했던 게 불과 1, 2주 전인데….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

 

08.15 北 김정은이 남한식 용어를 쓰는 이유

 

최근 평안북도 의주에 대규모 홍수가 났는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주민 앞에서 위로 연설을 하면서 한국식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고 한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평북도의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이 연설 서두에서 흔히 사용하던 ‘동지’ 혹은 ‘인민’이라는 말 대신 ‘주민’이라고 했고, 노인이나 늙은이를 한국식으로 ‘어르신’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김정은이 쓴 ‘병약자’, ‘험지’, ‘음료수’, ‘폄훼한다’ 등의 표현도 북한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했다. 연설을 들은 주민들이 많이 놀랐다고 한다.

▷지방 출신이 서울서 오래 살아도 여전히 사투리를 쓰는 것처럼 말할 때 즐겨 쓰는 낱말은 잘 바뀌지 않는다. 집무실 TV로 한국 예능과 드라마를 챙겨 보는 것으로 알려진 김정은이다. 얼마나 즐겨 봤으면 용어까지 바뀌었을까 싶다. 한국 드라마를 시청한 10, 20대 청년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북한이지만 탈북민들은 “북한에선 고위층일수록 노골적으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본다”고 말한다.

▷북한은 지난해 초 남한 말투 사용을 금지하는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했는데, 법 조문이라기엔 표현이 저급하다. “괴뢰(남한)말은…조선어의 근본을 완전히 상실한 잡탕말로서 세상에 없는 너절하고 역스러운 쓰레기말”이라고 했다. 금지 항목도 깨알 같은데, “자녀들의 이름을 괴뢰식으로 너절하게” 지어선 안 된다. ‘오빠’라는 호칭은 소년단 시절까지는 쓸 수 있지만 청년동맹원이 된 뒤엔 써선 안 된다. 장마당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문화가 유입되는 걸 김정은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올 6월엔 비슷한 취지로 북한 국가국어사정위원회가 ‘다듬은말참고자료’를 발행하기도 했지만 혼란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평북도의 소식통은 RFA에 “(김정은이) 텔레비죤도 ‘TV’라는 한국식 표현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당국이 ‘다듬은말’로 사용을 권장하는 말이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이라는 명칭에서 보이듯 북한은 원래 ‘텔레비죤’을 많이 썼는데, 요즘엔 공식 매체도 ‘TV’라고 한다. ‘텔레비죤’이 ‘외국말 찌꺼기’라고 판단한 것 같은데, 실은 한국식으로 ‘TV’ 사용이 늘다가 아예 자리를 잡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문화는 물처럼 스며드는 것이어서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평북도의 소식통은 “주민들에게는 평양말을 사용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한국말을 대놓고 쓰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말투까지 주민을 통제하는 김정은이 정작 자기 입은 통제를 못 하는 모양새다. RFA에 따르면 “텔레비죤을 ‘TV’라고 하는 사람은 수상하니 신고하라”는 내용이 과거 북한의 반(反)간첩 포스터에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은을 신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뭔가 수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8-16 환경미화원 死傷 연 6000명

 

2일 새벽 서울 중구 숭례문 지하보도서 작업 중이던 60대 환경미화원이 흉기에 찔려 살해당했다. 그는 밤이면 인적이 드물어 무서운 험지였던 이 구역을 계속 맡아 왔던 ‘반장 언니’였다. 노숙인이 자고 난 자리도 내 집 청소하듯 쓸고 닦던 그의 황망한 죽음에 동료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동료 누군가는 그가 쓰러진 구역을 청소해야 했을 것이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일하는 환경미화원의 작업 환경은 위험천만하다. 숭례문 지하보도 사건이 있은 지 5일 만인 7일에도 충남 천안시 30대 환경미화원이 음주운전 단속을 거부하고 도주하던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지난달에는 경남 양산시 60대 환경미화원이 운행 중인 재활용품 수거 차량 발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어둠 속에서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을 피해 작업 속도를 올리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보도나 시설 등을 물걸레질하는 여성 환경미화원들은 보통 혼자 일한다. 범죄에 노출될 우려가 크다. 으슥한 골목을 청소할 때면 겁이 나기 마련이고, 취객의 욕설이나 시비에 시달리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한다.

▷지난해 환경미화원 사상자는 ‘6439명’이다. 전국 환경미화원은 약 4만 명으로 집계되는데 연간 6명 중 1명이 산재를 당하는 셈이다. 2019년(5078명)에 비해 21%가 늘었다. 다른 직종에 비해 유독 산재 발생 비율이 높다. 사고뿐만 아니라 질병에도 시달린다. 일단 혹독한 바깥 날씨를 견뎌야 하고, 무거운 짐을 옮기느라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산다. 먼지를 많이 마시다 보니 폐질환도 흔하다.

 

▷환경미화원의 일터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것은 결국 비용이다. 환경미화원은 지방자치단체에 직접 고용된 공무직과 용역업체에 고용된 근로자가 있다. 저가로 입찰에 응해야 하는 용역업체일수록 안전 장비 지급이나 안전 수칙 준수에 소홀하다. 정부는 심야나 새벽 근무를 지양하고 ‘2인 1조’ ‘3인 1조’ 근무를 권고하지만, 영세한 용역업체에선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번에 피살된 60대 환경미화원도 용역업체 소속이었다. 고령자처럼 노동시장 약자들이 주로 속해 있다 보니 ‘오전 중에 1km를 청소하라’는 터무니없는 업무량도 묵묵히 견디곤 한다.

▷남들이 잠든 시간에,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일하는 환경미화원의 조용한 노동 덕분에 우리는 아침에 깨끗한 거리를 지나 출근을 한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이들의 귀한 노동을 이토록 함부로 써도 되는 것일까. 이웃인 우리의 반성도 필요하다. 종량제 봉투를 넘치게 채워 무겁게 만들고, 깨진 접시 같은 날카로운 물건을 아무렇게나 봉투에 담는 등 사소한 습관이 환경미화원을 크게 다치게 만든다고 한다. 환경미화원 연간 사상자 ‘6439명’. 이 숫자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짜 안전 성적표란 생각이 든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17(토) 갑자기 확 늙는 나이 44세, 60세

 

사람은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히 늙어가지 않는다. 바다에 파도가 몰아치듯 특정 시기에 확 늙는다. ‘가속 노화’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최근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노화가 갑자기 빨라지는 두 분기점을 특정했다. 44세와 60세. 20∼70대 108명을 7년간 관찰했더니 ‘예전 같지 않은 몸’이 눈에 띄게 현실화되는 나이가 바로 그때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노화가 특히 빠른 건 몸속 단백질 변화 같은 생물학적 원인 못지않게 사회적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40대 중반은 직장에 다니든, 자영업을 하든 가장 몸 바쳐 일하는 시기다. 조직 내 중간관리자로서 제법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도 이때다. 자녀 교육, 노부모 건강 등 신경 쓸 일도 많다. 과도한 스트레스 그 자체도 해롭지만, 쌓인 긴장을 풀기 위해 술 담배에 더 의존하기 쉽다. 40대부터는 알코올과 카페인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대사 능력이 감소하는데 섭취량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늘어나면 사람이 폭삭 늙을 수밖에 없다.

▷요즘은 ‘젊은 노화’를 촉진하는 유혹들도 많다. 노화의 4대 주범이 운동 부족, 기름진 식단, 술, 담배라고 하는데, 일에 지친 40대들에겐 운동보다는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콘텐츠가 더 달콤하다. 균형 잡힌 식단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다 보니 배달 음식이란 손쉬운 대안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30대 중반부터는 당뇨 고혈압을 유발하는 체내 단백질이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거기에 안 좋은 습관까지 겹친 탓인지 요즘 40대 남성의 비만율은 50%가 넘는다.

 

▷60세 가속 노화의 원인은 40대와 정반대인 측면이 있다. 은퇴나 정년퇴직 등으로 몸의 긴장이 갑자기 느슨해지는 게 문제다. 적당한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있을 땐 잠을 잘 자다가 출근을 안 하면서 수면의 질이 떨어졌다는 은퇴자들이 적지 않다. 사람 만날 일이 줄면 거울을 덜 보게 되고 자연히 피부 등 외모 관리에 소홀해진다. ‘퇴직한 지인을 오랜만에 봤는데 1, 2년 새 부쩍 늙은 것 같다’는 반응을 흔히 접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60대부터 심혈관 질환이 급증하는 데에는 일상이 불규칙하고 활력이 떨어지면서 전반적인 신체 저항력이 낮아진 탓도 있다고 한다.

▷100세 시대인 요즘, 60세 생일을 기념하는 환갑은 의미가 많이 퇴색하긴 했지만 이번 연구 결과를 보면 60세는 여전히 삶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기존의 환갑이 지금껏 살아 있는 걸 축하한다는 의미였다면, 지금의 환갑은 ‘유병장수’ 시대에 대비해 천천히 늙어가도록 건강을 바짝 챙기자고 응원하는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 ‘급노화’가 찾아올 수도 있는 환갑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면 아직 건강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몸을 돌보자는 다짐이 필요할 것 같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8-19(월) 인사청문회 무용론’에 앞서 따져봐야 할 것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2년 3개월 동안 국회의 인사청문 대상이 된 공직 후보자는 모두 61명이다. 16일 임명된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현 정부에서 국회의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 없이 자리에 앉은 26번째 공직자가 됐다. 인사청문 대상 10명 중 4명 이상은 거대 야당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임명을 강행했다는 뜻이다. 고위공직자에 대한 국회의 검증 강화라는 인사청문회 도입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2000년 대법원장, 국무총리 등을 대상으로 시작된 인사청문회가 장관급으로 대폭 확대된 것은 2005년이었다. 당시 이기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아들 부정입학 의혹 등으로 전격 사퇴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모든 국무위원 후보자에 대해 청문회를 실시하자’고 공세적인 제안을 했고, 야당도 호응하면서 법제화됐다. 이후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국회의 반대에도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한 사례는 총 30건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이 국회의 의견을 어느 정도 존중한 결과였다.

▷문재인 정부 때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문 전 대통령 임기 중에 청문보고서가 아예 채택되지 않았거나 여당이 단독 채택했는데도 대통령이 임명한 공직자는 34명에 이른다. 야당이 임명에 반대하고 대통령은 무시하는 패턴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문 전 대통령은 “오로지 흠결만 놓고 따지는 무안 주기식 청문회”라고 야당 탓을 했지만, 인사 실패란 지적도 많았다. 정부 스스로 정한 위장전입 음주운전 등 ‘7대 인사검증 기준’조차 지키지 않은 후보가 한둘이 아니었다.

 

▷윤 대통령 역시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첫 조각에서부터 ‘만취 운전’ 전력이 있는 박순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등을 청문보고서 없이 임명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했다. 야당이 발목잡기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이후에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날 골프를 친 합참의장 후보자도 임명했고, 하마평이 나올 때부터 야당에서 강하게 반대한 인물도 지명과 임명을 밀어붙였다. ‘이럴 거면 인사청문회는 왜 하느냐’는 인사청문회 무용론이 커지는 지경이 됐다.

▷인사청문회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공직자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이는 등 순기능이 더 큰 제도다. 청문회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된 일차적 책임은 야당도 수긍할 만한 후보자를 찾아내지 못한 대통령실에 있다. 여야 청문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청문보고서를 채택한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례에서 보듯 적합한 후보자를 내면 야당도 무조건 반대할 수 없다. 이런 후보자들을 계속 발굴하면 청문회가 정쟁의 장으로 변질되는 일도, 인사를 놓고 대통령과 국회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08-20 “배심원 만장일치 판결, 상급심이 함부로 뒤집지 마라

 

배심제를 하는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에는 배심원이 되기 어려운 직업이 있다. 의사나 법률가, 사건 관련 분야의 학자 등 전문직이 배심원에 선정되면 판사는 이런 사람들부터 돌려보낸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근거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게 배심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배심원 중 전문가가 섞여 있어 다른 배심원들에게 영향을 끼치면 공정한 판단이 힘들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12명의 보통 사람들로 이뤄진 미국의 배심원단은 유무죄를 직접 결정한다. 판사는 형량만 정한다.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한 사건은 검사가 상소할 수도 없다. 다만 유죄 평결은 배심원단의 만장일치로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유죄가 강하게 의심되는 피고인들이 무죄로 풀려나는 일도 종종 있지만 수사기관이 배심원 만장일치라는 문턱을 넘기 위해 혐의 입증을 더 철저히 하게 되는 순기능이 크다.

▷우리나라 국민참여재판은 판사가 배심원 평결에 꼭 따라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만장일치로 나온 결론일 땐 얘기가 다르다. 1심 재판부가 배심원들의 일치된 판단을 받아들여 내린 판결은 상급심에서 함부로 뒤집어선 안 된다. 최근 대법원은 30억 원 규모 사기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깨고 돌려보내면서 “배심원 만장일치 의견의 무게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유를 들었다. 1심에서 배심원 전원이 무죄로 판단했다면 유죄로 보기에 합리적 의심이 든다는 게 분명히 확인된 것이므로 그에 명백히 반하는 중대한 사정이 없는 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판례들이 쌓이면서 ‘배심원 만장일치’와 ‘1심 법원의 수용’이란 조건이 충족되면 상급심도 판결을 뒤집는 데 신중해지는 경향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결론도 1심 법원이 그와 반대로 판결하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2008년부터 2021년까지 이뤄진 2800여 건 중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결론과 반대로 난 판결이 109건에 달한다. 배심원들 앞에서 재판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인식 때문인지 국민참여재판 건수는 연간 92건(2022년)에 불과하고 배심원들 출석률도 55% 수준에 그치고 있다.

▷배심원 한 명 한 명은 평범한 시민이지만 다양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이들이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이라면 사법적인 무게가 실려야 한다. 법원이 이를 가볍게 뒤집어 버리면 국민참여재판이란 제도의 실효성이 흔들린다. ‘어차피 결론은 판사의 몫’이란 한계 안에선 배심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평결에 참여할 동기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배심원단에게 유무죄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준 것도 그래야만 배심원들이 고도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재판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판결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8-21 엉터리 수두룩… 전기차 화재 ‘황당 매뉴얼’

 

통상 자동차 화재 진화의 골든타임은 5분이라고 한다. 소방산업기술원이 진행한 실험을 보면 차량 엔진룸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3∼5분 내에 엔진룸 전체로 불길이 번지고, 10분이면 운전석까지 확산된다. 1시간이 지나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차량은 남김없이 다 타버린다. 이 때문에 차량 화재는 초기 대응에 실패할 경우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 쉽다.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 화재도 5t 화물트럭의 엔진에서 발화된 불에서 시작됐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골든타임이 더 짧다. ‘배터리 열폭주 현상’ 때문이다. 전기차에 장착된 리튬이온배터리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온도가 1000도까지 치솟고,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산소와 가연성 가스까지 배출된다. 화염에 휩싸이면 손쓸 틈이 없는 만큼 신속한 초동 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전기차 화재가 발생했을 때 행동 요령을 아는 운전자는 극히 드물다. 심지어 전기차 제조업체들조차 엉터리로 된 화재 대응 매뉴얼을 소개하고 있다.

▷전기차 선두 주자인 미국 테슬라는 긴급 대응 매뉴얼에 ‘고압 배터리에 난 불은 물로 꺼야 한다’, ‘물을 직접 배터리에 뿌리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물의 양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다. 전기차 화재를 진압하는 데 최소 물 1만 L가 필요한데, 일반 소방차 한 대가 싣고 다니는 소화용수가 3000∼5000L 정도다. 미국에서는 테슬라의 고가 세단 ‘모델S’에서 난 화재를 완전히 진화하는 데 물 10만6000L가 쓰였는데, 일반 가정에서 2년 동안 사용하는 양이다.

 

▷기아, KG모빌리티 등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매뉴얼에 ‘반드시 전기 화재 전용 분말 소화기로 진화하라’고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화재를 진압할 전용 소화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도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있지도 않은 소화기를 반드시 쓰라고 소비자들에게 알려준 셈이다. 테슬라는 2016년식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X’의 매뉴얼에서 ‘다 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화재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건 소비자 우롱을 넘어 안전을 위협하는 처사다. 일부 전기차 업체들이 ‘영업 비밀’, ‘본사 방침’을 이유로 배터리 제조사 공개를 거부해 구설에 올랐는데 엉터리 매뉴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세계 각국이 전기차 화재 진압 방법, 열폭주 방지 기술 등을 알아가는 단계라 해도 자동차 제조업체의 무책임한 매뉴얼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전국을 덮친 ‘전기차 포비아’를 진화하려면 올바른 정보를 담아, 제대로 된 화재 대응 매뉴얼부터 만드는 게 첫걸음이 돼야 할 것 같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8-22 연봉 고려 없이 시작했다 후퇴하는 법조 일원화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재임 때 가장 큰 고민으로 우수한 인재를 법관으로 뽑기 어려워졌다는 점을 꼽았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취임 직후 같은 고민을 토로했다. 현재 법원은 경력 5년 이상의 변호사 중에서 법관을 뽑고 있다. 대강 뽑는다면 충원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법원은 예전처럼 우수한 인재를 원한다. 변호사로서 우수한 인재는 대부분 유명 로펌에 가 있는데 법관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받는다. 그들이 연봉을 낮춰 가며 법원으로 오려 하지 않는다.

▷법조 일원화는 2013년부터 시작됐다. 법관도 검사도 변호사를 해본 사람 중에서 충원한다는 것이다. 세상 물정을 알아야 수사와 기소도 재판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취지에서다. 변호사 경력 3년 이상에서 시작해 5년, 7년, 10년 이상으로 차츰 늘려 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검찰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졸업생을 바로 검사로 뽑으면서 처음부터 구멍이 뚫렸다. 반면 법원은 막 법조계에 들어온 우수한 인재를 검찰에 뺏기면서도 변호사 경력자로 법관을 충원하기 시작했다.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내년에는 7년 이상 경력자, 2029년부터는 10년 이상 경력자를 뽑아야 한다. 올해 안에 개정되지 않으면 법원의 우수 인재 영입은 더 어려워진다. 법원은 몇 년 전부터 개정을 국회에 요구했다. 그러나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요지부동이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 반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민주당 의원들이 법관 임용에 필요한 최소 경력을 계속 5년으로 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재명 대표 1심 선고를 앞둔 시점이어서 법원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이 문제의 해결이 시급한 것임은 틀림없다.

 

▷결국은 연봉이다. 변호사 경력자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뽑으려면 유명 로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경력의 법관이 현재 받는 연봉보다는 꽤 많은 연봉을 줄 수 있어야 법조 일원화가 순조로이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어디 공무원 월급 올리는 게 쉬운가. 조 대법원장이 싱가포르는 법관 연봉을 올려서 법조 일원화가 순조롭고 벨기에는 그렇게 못 해 후퇴한 사례를 든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벨기에의 길로 가고 있다.

▷법관의 월급을 올려주지 못하면 일이라도 줄여야 한다. 일을 줄이려면 법관 수를 늘려야 하는데 국회가 늘려주지 않는다. 국민 1인당 소송 건수는 이웃 일본보다 8배가 많다. 소송 건수를 줄일 방법도 뾰족하지 않다. 변호사 경력 10년 이상의 법관으로 법원이 채워져야 제대로 된 법조 일원화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사법개혁이 아니라 근본에서부터의 사법개혁이 없으면 법조 일원화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08-23 마약수사 용산 외압설 부른 낯선 경무관의 전화

 

지난해 가을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마약 수사로 큰 성과를 냈다. 필로폰을 국내로 몰래 들여온 말레이시아 조직원들을 검거해 74kg을 압수했다. 830억 원어치에 달하는, 단일 사건으로는 역대급 규모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밀수범들부터 “세관 직원들 도움으로 마약을 통과시켰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밀수를 단속해야 할 세관이 오히려 공범일 수 있다는 중요한 범죄 단서였다. 사건을 보고받은 경찰청장은 “대내외에 잘 알려야 할 훌륭한 성과”라고 치하했다.

▷그런데 언론 브리핑을 앞두고 수사팀은 난관에 부딪혔다. ‘세관 연루 의혹도 공개하겠다’는 수사팀장(백해룡 경정)과 ‘그건 빼라’는 서장(김찬수 총경)이 갈등을 빚었다. 백 경정은 최근 국회에 나와 당시 상황을 폭로했다. “서장이 ‘용산에서 심각하게 보고 있다’면서 브리핑 연기를 지시했다. 용산에서 괘씸하게 보고 있다는 취지여서 머리가 하얘졌다.” 이에 김 총경은 “직을 걸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해당 대화 녹취가 없어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석연찮은 대목이 적지않다. 김 총경의 지시로 브리핑이 연기된 사이 백 경정은 고위 간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시 서울경찰청 생활안전부장이던 조병노 경무관이었다. 그는 “브리핑에 세관 관련 내용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 경찰이나 관세청 둘 다 정부 일원인데 스스로 침 뱉으면 되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경찰청장이 널리 홍보하라고 칭찬한 사건에 지휘계통에도 없는 간부가 끼어들어 중요 내용을 빼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 경무관은 용산과 가깝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채 상병 사건 핵심 인물인 임성근 전 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의 핵심이자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공범인 이종호 씨가 그를 위해 용산에 승진 로비를 한 정황도 있다. 김건희 여사와의 친분을 과시해온 이 씨는 지인과의 통화에서 조 경무관을 언급하며 “별 2개(치안감) 달아줄 것 같다”고 했다. 조 경무관이 실제 승진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경찰청장이 그의 부당한 수사 개입을 문제 삼아 인사혁신처에 징계를 요청했음에도 ‘불문(책임을 묻지 않음)’ 처리됐다. 청장의 징계 요청이 수용되지 않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세관이 마약 밀수범들과 공모한 단서가 나왔다면 공권력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범죄이므로 적극 수사해 성과를 내려는 게 경찰 조직의 생리다. 그런데도 조 경무관이 일면식도 없는 수사팀장에게 대뜸 전화를 걸어 ‘세관은 빼달라’고 한 것은 경찰청보다 센 곳에서 내려온 요구 때문은 아니었는지 의심을 살 만하다. 게다가 마약 수사로 큰 공을 세운 백 경정은 지구대로 좌천된 반면, ‘용산 발언’ 의혹이 있는 김 총경은 대통령실 행정관으로 영전한 것도 정상적인 인사로 보이지 않는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08-24(토) 첫날부터 삐걱… 日후쿠시마 핵연료 잔해 880t 제거 작업

 

일본 도쿄전력이 22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녹아내린 핵연료 잔해(데브리)를 시험 반출할 계획이었는데, 시작도 못 했다. 준비 작업 중 실수가 발생해 중단했다고 한다. 이날 작업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이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난 지 13년 만에 처음이었다. 시험 추출하려던 양은 3g 미만이었다. 원전 내 격납 용기 안에 방사선을 방출하는 데브리가 880t가량 있는데, 작업 첫날부터 차질을 빚어 2억9000만분의 1도 못 꺼낸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폐로(閉爐)의 최대 난관으로 꼽히는 게 데브리 반출 작업이다. 원전 사고 당시 핵반응이 일어나는 압력 용기 속 노심이 용암처럼 녹아 바닥을 뚫고 격납 용기로 흘러내렸다. 바로 아래에 곱게 쌓여 있으면 그나마 낫겠지만 다시 굳으면서 떡이 진 채 여기저기로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1년부터 반출 계획이 있었지만 3번이나 연기됐다. 이번엔 약 22m 길이의 로봇 팔에 손톱 형태의 장치를 달아 일부를 집어낸 뒤 성분을 분석하고 반출 방법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격납 시설 내 방사능이 워낙 강해 사람은 접근할 수 없다. 2015년 투입한 관측 로봇도 5시간 만에 고장이 났다. 2022년 2월에 이르러서야 1호기에서 처음으로 로봇이 핵연료로 보이는 퇴적물을 발견한 수준이다. 올 1월엔 원자로에 로봇 팔을 넣으려 했지만 배관이 퇴적물로 막혀 있어 실패했다. 격납 용기가 손상된 것도 꺼낼 수단을 제한한다.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로봇을 이용해 수술까지 하는 세상이지만 그건 수술실이라는 완벽히 통제된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데브리를 꺼내지 못하면 오염수가 계속 발생한다. 데브리는 지금도 붕괴열을 내기에 임시방편으로 격납 용기에 냉각수를 주입해 식히고 있다. 지하수도 유입된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오염된 물을 방사성 물질을 걸러내는 설비로 처리한 뒤 1년 전부터 바다에 방류하고 있다. 폐로를 2051년까지 마친다는 게 목표지만 일본 내에서도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1986년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발생한 체르노빌 발전소는 감당을 못해 그냥 콘크리트제 석관(石棺)으로 덮었다. 그 아래 묻힌 핵연료는 250t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엔 시간이 10년 정도 흐르면 어떻게 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지만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못 하고 있다. 그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위험이 줄어들 것을 기대할 뿐이다. 후쿠시마 원전도 차라리 석관으로 덮으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역 복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뿐더러 후쿠시마 원전은 아래에 지하수가 많은 탓에 물이 오염돼 유출되는 걸 막기 어렵다고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08-26(월) 프랑스에서 체포된 ‘어둠의 메신저’ 텔레그램 창업자

 

텔레그램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파벨 두로프(40)의 별명은 ‘러시아의 마크 저커버그’다. 저커버그가 운영하는 세계 최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 이용자가 30억 명인데 텔레그램은 9억5000만 명으로 3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자기 메시지가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텔레그램의 인기는 양지의 모든 SNS를 압도한다.

▷‘어둠의 메신저’ 텔레그램의 지분 100%를 갖고 있는 두로프가 지난 주말 파리 외곽 부르제 공항에 자신의 전용기를 착륙시켰다가 프랑스 사법당국에 체포됐다. 프랑스 당국은 각국 정부의 범죄 수사 협조 요청을 거부해온 두로프가 텔레그램을 통해 이뤄지는 마약 밀매, 아동 착취, 테러 등의 범죄를 방조한 것으로 본다. 수배 중인 줄 알면서 입국한 이유가 불분명하지만 장기 징역형이 불가피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메시지 암호화, 대화방 폭파 기능 등을 갖춘 텔레그램은 보안성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두로프가 사업 초기부터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고, 각국 정부의 범죄자료 제공 요청을 완강히 거부한 덕에 구린 게 많은 글로벌 범죄자들이 안심하고 머무는 놀이터가 됐다. 러시아에서 메신저 회사를 운영하던 두로프가 10년 전 독일로 망명한 것이나 텔레그램 본사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둔 명분도 개인정보 보호다.

▷한국에선 마약 유통·판매의 70% 이상이 텔레그램을 통해 이뤄진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식 사기범들도 텔레그램에 리딩방을 개설해 투자자를 유혹한다. 42년 형을 받은 ‘N번방 사건’ 주범 조주빈의 활동 무대도 텔레그램이었다. 각국 사법당국은 텔레그램의 막대한 운영자금이 어떤 식으로든 범죄 수익과 연관됐을 것으로 의심한다.

▷텔레그램은 정치인들에게도 ‘필수 애플리케이션’이 됐다. 재작년 7월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이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메시지를 받은 앱도 텔레그램이다. 지난달엔 한동훈 대표 후보자의 김건희 여사 텔레그램 메시지 ‘읽씹’ 논란이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뒤흔들었다.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올해 1월 성희롱 논란이 있는 총선 후보의 징계 수위를 테러로 입원 중이던 이재명 대표와 텔레그램으로 상의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텔레그램 측은 이용자 간 대화가 끝난 뒤엔 자사 서버에 메시지가 전혀 남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엄밀하게 검증된 적은 없다. 텔레그램 이용이 많은 만큼 어떤 계기로 메시지의 일부가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2010년 미국의 기밀자료가 대거 폭로된 ‘위키리크스 사건’급 충격이 올 수도 있다. 국내에서도 두로프 체포로 잠 못 이루는 텔레그램 이용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08-27 세계 3대 신용평가사에서 ‘올A’ 받은 현대차·기아

 

현대차·기아가 글로벌 3대 신용평가사로부터 ‘올 A’를 받았다. 최근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현대차·기아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A-로 상향했다. 신용평가사들은 현대차·기아를 묶어서 평가한다. 앞서 2월 미국 무디스와 영국 피치도 두 회사 신용등급을 A등급 단계로 올렸다. 세계 완성차 업체 중 모두 A등급을 받은 회사는 현대차·기아와 독일의 벤츠, 일본의 도요타와 혼다 등 4곳뿐이다. 판매 대수 기준 세계 3위에 오른 데 이어 재무 건전성 등 질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받은 셈이다.

▷올해 들어 현대차·기아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 것은 실적 개선과 유연한 생산 능력, 현금 창출 능력 때문이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부터 분기마다 역대 최대 실적을 다시 쓰고 있다. 올해 상반기 매출액 139조4599억 원, 영업이익 14조9059억 원을 거뒀는데, 영업이익률은 10.7%로 세계 완성차 업체 중 가장 높다. 2분기엔 판매량이 줄었는데도 매출과 이익이 늘었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제네시스 등 고급차 위주로 차량 구성이 재편됐기 때문이다.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차, 전기차 모두를 만들 수 있는 유연한 생산 능력도 현대차·기아의 강점이다. 전기차만 생산하는 테슬라, 하이브리드차에 주력하는 도요타와 달리 시장 상황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다. 우산과 짚신을 모두 팔아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사업구조를 갖춘 셈이다. 현대차가 인도에서 최대 30억 달러(약 4조 원) 규모의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고 있는 것도 유동성 확보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해외의 시선 역시 달라졌다. 올해 2월 미국 경제방송 CNBC는 ‘현대차그룹은 어떻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자동차 기업이 됐을까’라는 제목의 15분 분량의 방송 리포트에서 현대차·기아가 약진한 비결을 집중 분석했다. 로보틱스, 자율주행, 미래항공모빌리티 등 경쟁 업체들이 포기한 영역에도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자동차 분야의 오스카’라고 불리는 월드카 어워즈에서 현대차·기아의 아이오닉, EV9 등은 2022년부터 3년 연속으로 ‘세계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해외 진출 초기 현대차의 홍보 전략은 ‘다른 차 한 대 값으로 우리 차 두 대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반값 떨이 내지 ‘1+1’ 전략이다. 한국 경제에서 이제 자동차는 다른 의미로 ‘1+1’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수출 부진으로 나라 전체가 어려울 때 자동차는 역대 최대 실적을 앞세워 수출을 떠받쳤다. 반도체라는 단발 엔진으로 버티던 한국 경제가 쌍발 엔진을 장착한 것이다. 현대차·기아의 질주가 계속돼야 할 이유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08-28 초중고까지 덮친 딥페이크 성범죄

 

자기 얼굴이 나체에 합성된 ‘딥페이크’ 사진과 함께 공개된 신상 정보를 보고 여성들이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공포는 나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 그 본질이다. 유명 공포 영화 속 샤워실 살인 장면처럼 가장 사적인 공간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친밀한 누군가가 나를 벌거벗겨 능욕할 수 있고, 일상을 공유하는 SNS가 위험천만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국 초중고교에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으로 확인돼 교육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 가해자들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셀카를 인공지능(AI)으로 음란물과 합성해서 유포했다고 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주로 10대다. 현재 피해 상황을 취합 중인데, 피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학교는 450곳에 육박한다. ‘지능방’(지인능욕방) ‘겹지인방’(겹치는 지인방) 등으로 검색한 방의 숫자가 이런 정도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따르면 이 중 40곳에서는 실제 피해가 확인됐다. 피해자 중에는 여교사도 있다고 한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최근 주목을 받게 된 발단은 인하대 사건이다. 텔레그램에 자신의 딥페이크 음란 사진이 유포됐다는 것을 알게 된 인하대 졸업생 유모 씨는 해외에 서버가 있다는 이유로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추적에 나섰다. 딥페이크가 올라온 방을 찾아 들어갔더니 자신의 음란 사진, ‘주인님’이라 하는 음성 파일, 이모티콘까지 공유되고 있었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나도 혹시’ 하며 불안감을 느낀 10, 20대 여성들이 자신도 피해자가 된 것은 아닌지 텔레그램을 뒤지기 시작했다.

 

▷유 씨가 1년 넘도록 끈질기게 증거를 모았지만 처벌을 받은 사람은 그 방 참여자 1200명 중 단 1명에 그쳤다. 붙잡히긴 했지만 “우연히 봤다”고 주장해 풀려난 참여자도 있었다. 성폭력처벌법이 허위 영상물을 제작·유포하는 것은 처벌해도 단순히 시청만 하는 것은 죄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하고 딥페이크를 유포한 1명만 징역형을 받은 것이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이번에 초중고에서 피해 사례가 확인돼도 처벌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번 사건도 유 씨 사례처럼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경우다. 딥페이크 사진이 유포된 방을 찾아 증거를 수집하고 학교 명단을 작성했다. 소셜미디어 계정을 비공개하고 사진도 감췄다. 확인된 피해가 늘어나고 여론이 들끓자 그제야 경찰은 대대적인 단속을 약속했다. 국회에선 처벌을 강화하는 입법이 쏟아진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모욕이 놀이가 되고, 혐오를 과시하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평범한 하루가 언제 공포로 뒤덮일지 모를 일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29 성난 한국인… 국민 절반이 ‘장기적 울분’ 상태

분노가 쌓여 답답한 기운이 누적된 화병(火病)이 한때 한국인에게만 있는 질병이라고 해 미국 정신질환 분류 체계에 ‘Hwa-byung’으로 등재된 적이 있다. 참는 게 미덕인, 가부장적이고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 자주 관찰되는 장애라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특정 문화권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삭제되긴 했지만, 화가 난 한국인이 많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가슴속에 열불’이 나고 ‘단전에서부터 깊은 빡침’을 느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 절반이 장기적 울분 상태에 놓여 있다는 진단 역시 이를 뒷받침해 준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이 최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연구진은 부당하고 모욕적이며 신념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되는 스트레스 경험에 대한 반응을 울분으로 봤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9%가 장기적 울분 상태였고, 이 가운데 9%는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겪고 있었다.

▷특히 30대에서 심각한 울분을 겪는 비율이 14%로 가장 높았다. 30대는 울분이 적은 정상 상태의 비율도 가장 낮았고,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비율도 가장 낮았다. 지금의 30대는 대학 졸업이나 취업, 결혼, 출산 같은 인생의 전환점을 부모 세대보다 수년씩 늦추거나 포기한 ‘지각 세대’, ‘N포 세대’의 대표 격이다. 눈높이를 낮춰도 취업이 힘들고, 내 집 마련은 불가능에 가깝고, 아이를 낳아도 돌봄 불안과 사교육비에 시달리니 분노가 치미는 게 당연한 결과다.

▷이는 한국 사회와 정치 전반에 대한 울분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연구팀이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사회·정치 사안에 얼마나 울분을 느끼는가’ 물었더니 ‘울분 만점’(4점)에 가까운 3.53점으로 나왔다. 빡침의 단골 소재인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 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 외에도 ‘안전관리 부실로 초래된 참사’가 울분 대상 톱 5위에 새로 이름을 올렸다. 159명을 죽음으로 내몬 이태원 참사부터 14명이 숨진 오송 지하차도 참변, 최근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성 배터리공장 화재까지 후진국형 사고가 끊이지 않은 탓이다.

▷앞서 세 차례 실시한 울분 조사와 비교하면 올해 결과가 가장 나쁜 편은 아니다. 하지만 5년 전 독일에서 진행된 비슷한 조사에서 장기적 울분 상태인 사람이 15%에 그친 것과 견주면 한국인은 독일 국민보다 세 배 이상 울분에 찬 상태다. 심각한 울분 상태인 한국인 10명 중 6명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개인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긍정과 배려, 공정의 힘을 길러 울분을 줄이고 예방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08-30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 260개로 남은 아버지

죽더라도 찾고 죽어야지, 그냥 죽을 순 없다”던 아빠였다. 25년간 전국 방방곡곡에 ‘실종된 송혜희를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을 걸었던 송길용 씨(71)가 결국 딸을 찾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숨졌다. 지난달 26일 현수막을 싣고 나갔다가 덤프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송 씨는 25년간 매주 전단 4000장을 뿌렸고, 매달 현수막 300개를 걸었다. 평소와 달리 연락이 뜸한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수막 업체가 실종자 가족 단체에 연락하면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송혜희는 17세가 되던 1999년 2월 학교에 갔다가 귀가하는 길에 행방불명됐다. 경기 평택시 집으로부터 1km가량 떨어진 버스정류장에 내린 후 흔적이 사라졌다. 당시 버스 운전사가 30대 남성이 따라 내렸다고 증언했으나 용의자를 잡지 못했다. 현수막 속의 딸은 여전히 교복을 입은 앳된 모습이다. 배움이 짧은 아버지는 전교 1, 2등을 다투고 서울대를 가고 싶다던 딸 혜희를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딸이 실종되고 처음 3년간은 부부가 함께 전국을 돌며 전단을 뿌렸다. 도대체 맨정신으로는 다닐 수가 없어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전단을 나눠주고, 또 마시고 나눠주곤 했다. 그동안 엄마는 뼈만 앙상히 남은 채로 몸과 마음에 병을 얻었다. 결국 엄마는 딸이 실종되고 7년이 지났을 때 전단이 흩어진 방에서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아내 장례를 치르고 따라가겠다고 결심했던 송 씨의 마음을 돌린 건 남은 자식이었다. 큰딸은 “아빠 죽으면 같이 죽겠다”며 오열했다.

▷‘신장 163cm, 얼굴이 둥글고 검은 피부, 흰 블라우스 빨간색 조끼 파란색 코트.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이 현수막은 늘 새로 단 듯했다. 송 씨는 한 달에 현수막을 300개가량 걸었다. 달이 바뀌면 혹시 찢어졌을까, 떨어졌을까 첫 현수막부터 점검을 하거나 교체했다. 현수막을 걸다 낙상을 당해 허리를 다쳤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최근엔 몸이 온전치 못했다. 주변에선 그만하라고도 했다. 그래도 “자식이라 포기를 못 하겠다”며 다시 집을 나섰다. 지금도 전국에 현수막 260여 개가 걸려있다.

▷2022년 기준 실종 당시 18세 미만이던 1년 이상 장기 실종 아동은 981명이다. 송 씨의 딸 혜희처럼 20년 이상 장기 실종 상태인 아동이 859명을 차지한다. 최근엔 유전자검사, 폐쇄회로(CC)TV 등 기술의 발달로 실종 아동 수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송 씨 가족처럼 실종 아동을 둔 가족의 삶은 아이를 잃어버린 날에 멈춰 버린다. 실종 가족을 찾는 방송에서 송 씨는 딸을 향해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돌아와만 달라”고 했다. 시청자에겐 “연락 주시면 신장이라도 떼어 드릴게요”라고 했다.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지, 그 비통함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08-31(토) 무인트랙터, 디지털 허수아비, 운반로봇… 첨단이 바꾼 농업

 

전남의 한 양돈농장에선 직원 7명이 돼지 7500마리를 거뜬히 키운다. 국내 스타트업이 개발한 인공지능(AI) 카메라 덕분이다. 카메라가 촬영한 영상을 AI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돼지 숫자와 무게를 알아서 측정하고, 활동량을 따져 아픈 돼지를 찾아준다. 일꾼들이 겁에 질린 돼지를 한 마리씩 옮겨 무게를 잰 뒤 출하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진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감귤 수확기에 지능형 운반 로봇을 빌려 쓰는 농장이 늘고 있다. 자율주행 기술과 궤도형 바퀴가 장착돼 노지를 자유롭게 오가는 로봇이 몸값이 뛴 외국인 일꾼을 대신한다.

▷AI, 자율주행, 로봇 등 첨단 기술을 결합한 애그테크(AgTech·첨단 농업)가 노동 집약적인 농업에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부르고 있다. 180여 년 전 쟁기로 출발한 세계 1위 농기계 기업 존디어는 요즘 국내 투자자들에게 ‘농슬라’(농업의 테슬라)로 통하는데, 최신 제품들이 파종부터 제초, 수확까지 모든 걸 알아서 할 정도다. 수천 년의 농업 역사가 AI로 혁명기를 맞은 셈이다.

▷고령화도, 영세화도 심각한 한국 농업은 이런 변화가 더 반갑다. 올 6월에는 국내에 첨단 기술을 망라한 디지털 농업 시범단지가 축구장 76배 크기로 문을 열었다. 논에서는 디지털 허수아비가 음파를 쏴 새들을 쫓고, 밭에서는 운전자 없는 트랙터가 혼자 일을 한다. 논밭 배수로는 관제센터 AI의 통제를 받아 자유자재로 물 공급을 조절한다. 그동안 실내 재배시설에서 주로 이뤄졌던 스마트 농업이 이젠 지붕 없는 노지로 확장된 것이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K푸드는 물론이고 푸드테크(식품+기술)에서는 벤처 정신으로 무장한 청년 창업가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경영학도 출신 임재원 대표(34)가 푸드트럭으로 시작한 피자 브랜드는 8년 새 7개국에 1000호점을 냈다. 20대 때 황학동 주방거리를 발로 뛰며 3분 안에 피자 6개를 구워 낼 수 있는 화덕을 만든 덕분이다. 포스텍(포항공대)에서 인공장기를 연구하던 한원일 대표(36)는 배양육으로 눈을 돌려 마블링이 선명한 덩어리 형태의 배양육을 개발해 냈다. 실험실에서 키운 배양육이 다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해외에서는 빅테크 공룡들까지 농업에 뛰어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AI, 클라우드 기반의 농업 플랫폼을 선보였고 구글은 농업 스타트업에 1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거대 테크기업들이 농업의 미래 성장 가치를 높게 본 것이다. 2030년까지 기술 인프라 혁신을 통해 농업 분야에서 5000억 달러(약 600조 원)의 부가가치가 새로 창출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와 있다. K농업이 AI발 농업 혁명에서 앞서갈 수 있도록 애그테크에 승부를 거는 기업과 청년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야 할 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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