午後餘談(문화일보) 2024-07/ 07-01(월) 우상호의 독전(獨戰) - 07-31(수) 블랙 요원
午後餘談(문화일보) 2024-07/
07-01(월) 우상호의 독전(獨戰)

오승훈 논설위원
“나는 계파가 싫다. 계파원이 되는 순간, 민주당은 사라진다.”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얼마 전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가 앉아 있는 행사장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일극, 무소불위’ 친명(친이재명)계가 수두룩한 자리였다. 25년의 민주당사를 정리한 책 ‘민주당 1999-2024’를 펴내면서 마련된 ‘대한민국 정당역사 토크쇼’였다. 우 전 의원은 “계파 투쟁이 심할 때는 누가 당 대표가 되든 내 계파 소속이 아니면 트집을 담아 흔들었다”면서 “계파 투쟁은 정치를 멍들게 하고 국회의원들을 병들게 한다”고 했다. “이 당을 살리는 일을 하려면 나부터 사심을 내려놓고 조정·중재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이 전 대표는 우 전 의원이 “당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해주실 것”이라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뒤 자리를 떴다고 한다.
우 전 의원은 이 전 대표가 차기 당 대표 연임 도전을 공식화하고 물러나자 “대표를 계속하게 되면 진영에 가두어진다. 중도층에서 ‘욕심이 과도한 거 아니냐’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선 출마 시 1년 전 당 대표 사퇴 규정에 예외조항을 둔 것도 “오해 살 일을 왜 하나”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책에서도 “무계파인 나는 문재인 대통령 시절 친문계 열성 당원들에게, 그리고 이재명 대표 시절 친명계 열성 당원들에게 문자 폭탄 세례를 받은 적이 꽤 있다”면서 “하지만 당내에서 내 역할이 갈등과 대립을 완화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정착시키는 일이고, 그게 정치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런 신념을 잘 지켜왔다고 자부하지만, 내 편이 따로 없는 조정자는 인기가 없기 마련이어서 외로울 때도 있었다”고 술회했다.
1999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의 영입 제안에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 86그룹의 맏형. 시인을 꿈꾸던 삶을 포기하고 민주화운동 참여를 결심하며 습작들을 불태웠던 늦은 밤의 자취방과, 1987년 6월 10일 최루탄 연기 속에서 눈물 콧물 닦고 있던 순간에 “하늘에서 두루마리 휴지가 새처럼 떨어져 내려오던” 시민들의 응원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그날의 풍경. ‘이한열 열사의 영정을 들고 있던’ 우상호보다 이때를 더 절절하게 기억한다는 그다. “이재명은 민주당의 아버지”라는 시절, 외롭지 않기를.⊙
07-02 완장 찬 정치인들

이현종 논설위원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삼체’의 첫 장면이 아주 충격적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칭화대 학생들이 이 학교 물리학과 예저타이 교수를 인민 재판하며 집단 구타해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들의 교수를 무참하게 죽이는 광기가 섬뜩하다. 마오쩌둥이 쓴 ‘홍위병’ 글씨의 붉은색 완장을 찬 학생들이 자행한 무소불위의 깡패질은 중국 현대사의 치욕적인 장면이다. 평범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홍위병 완장만 차면 물불 가리지 않는 폭도로 돌변할 만큼 위력이 컸다.
윤흥길 작가의 ‘완장’도 잘못된 권력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 본능을 풍자와 해학으로 잘 그려낸 작품이다. 1989년 MBC에서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최 사장이 저수지 사용권을 따내 양어장을 만들고 무단 어로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동네 건달 임종술에게 저수지 관리를 맡긴다. 관리인이라는 ‘완장’을 찬 임종술이 무소불위의 권력에 취해 자신을 고용한 최 사장의 낚시질까지 막아서는 행패를 부린다는 내용이다.
요즘 거야(巨野)가 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소설 ‘완장’에 등장하는 임종술이 오버랩 된다. 행패를 부리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들에게도 갑질을 하는 형국이다. 방송통신위원을 지냈던 민주당 김현 의원은 지난달 28일 방통위를 항의 방문했다. 그러나 건물 입구에서 진입을 거부당하자 ‘내가 국회의원인데 왜 못 들어가느냐’ ‘방문증을 왜 안 주느냐’며 방문증을 발급하는 직원에게 소리치며 따지기 시작했다. 김 의원은 국회의원 신분증을 내보이며 “이거 어디나 들어갈 수 있다. 이 공무원증이 있으면 안내 안 받고 들어갈 수 있다”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김 의원의 항의를 받던 여직원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앞서 정청래 법사위원장이 청문회에 출석한 전 국방부 장관과 군복을 입은 장성들에게 “어디서 그런 버릇이냐. 토 달지 말고 사과하라. 일어나라”며 10분 퇴장 명령을 남발하는 등 마치 갑질 경쟁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국회의원이나 상임위원장 ‘완장’을 차고도 이런 행패를 부리는데, 만약 이들이 더 큰 권력을 가지면 어떤 모습일까. 문제는 이러고도 부끄러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다. 국민이 일꾼을 뽑았지 완장을 뽑진 않았다.⊙
07-03 소설 ‘싯다르타’와 회복탄력성

최현미 논설위원
헤르만 헤세의 종교적 성장소설 ‘싯다르타’가 요즘 베스트셀러이다. 1922년에 출간돼 한 세기를 넘은 작품이 대형서점 소설 톱10에 오르고 고전 분야 1, 2위를 지키고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0여 권 중 가장 잘나가는 타이틀로 하루 평균 100권 이상 팔리고 있다고 한다. 헤세는 자아 성찰, 문명 비판, 휴머니즘에 밀도 높은 문장으로 늘 사랑받아 왔지만, 한국 독자의 최애 작품은 오랫동안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2016년 방탄소년단의 앨범 ‘WINGS’의 모티브가 되면서 문화적 아우라를 얻기도 했다. 싯다르타의 삶을 다룬 고전이 이 청춘 성장소설의 대명사를 넘어섰으니 이래저래 화제다.
‘데미안’에 방탄소년단이 있다면 ‘싯다르타’엔 뉴진스님이 있다. 개그맨 윤성호가 분한 뉴진스님이 인기를 끌면서 불교는 쿨한 개방적 이미지를 얻었고 2030 세대 사이에서 ‘힙’해졌다. 자연스레 ‘싯다르타’ 읽기로 이어진 이 흥미로운 나비효과는 불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외부의 신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찾으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삶이 녹록찮은 젊은 세대의 마음에 가닿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행복순위가 늘 꼴찌인 곳이다. ‘신경 끄기의 기술’(갤리온)의 작가 마크 맨슨은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국가’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잘하는 일을 더 잘하도록 강요하고 우수한 결과를 내기 위해 사회적 압력과 경쟁을 가하는 건 효과적 공식으로 입증됐지만 심리적 낙진을 초래”했고 “자본주의 최악의 측면인 물질주의와 생활비 문제를 가진 반면, 가장 좋은 부분인 자기실현과 개인주의는 무시했기에 스트레스와 절망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회복탄력성이야말로 한국인의 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 읽기도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삶의 중심을 찾으려는 회복탄력성의 시도라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말이다.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07-04 비극의 평범성

이철호 논설고문
세종대로 18길 역주행 참사는 미스터리투성이다. 50년 베테랑 운전사 차모(68) 씨는 급발진이라 우기고, 경찰은 운전 부주의에 무게를 싣는 모양이다. 일단 부드러운 제동과 정차, 회피 기동 부재 등은 통상적 급발진과 다른 모습이다. 그 비극의 도로는 필자도 30년 넘게 다닌 익숙한 길이다. 정체가 극심한 4차선 일방통행로다. 아무리 밤 9시 26분이라 해도 약 100m 구간을 역주행하면서 단 한 대의 차량과 충돌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BMW·쏘나타와 부딪힌 것은 역주행이 끝난 세종대로다).
세종대로 18길의 역사는 복잡하다. 예전에는 조선호텔이나 프라자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나와 서소문 쪽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당시는 3개 차로가 소공로행, 1개 차로는 시청역(세종대로) 쪽의 양방통행로였다. 이 도로를 타지 않고 을지로나 무교로 쪽으로 우회하면 10분 이상 더 걸렸다. 이 일대 도로 구조는 2004년 서울광장 개장과 함께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세종대로 18길도 2005년 보행로 개선 명목으로 일방통행이 돼 버렸다. 그 후 필자도 이 도로를 역주행할 뻔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옛 관성 때문이다.
차 씨는 버스와 트레일러를 30년 넘게 운전한 베테랑이다. 음주 및 마약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았다. 오히려 그가 1985∼92년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7년간 몰았다는 대목이 마음에 걸린다. 혹시 양방통행의 옛 기억 때문에 역주행이 일어난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른바 전문가의 함정이다. “그동안 길을 잘못 들어 역주행하는 차량을 보는 게 다반사”라거나 “하루에 역주행을 적어도 4∼5회 목격하고, 뒤늦게 역주행을 깨닫고 후진하거나 아예 빨리 지나가려는 차량을 많이 봤다”는 주변 상인들의 목격담도 보도되고 있다. 특히, 조선호텔 쪽이 위험하다. 일방통행 표지를 보지 못하고 직진해 버리면 바로 역주행이 시작된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전국의 일방통행로 점검에 나섰으면 좋겠다. 갑자기 바뀐 길이 많아 필자도 역주행하다 놀랐던 경험 때문이다. 북창동은 강북 샐러리맨들의 고향 같은 곳이다. 너무 익숙한 서울 한복판에서 너무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희생됐다. 비극의 평범성에 소름 끼치는 하루다. 삼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07-05(금) 李 변호사비와 부인 책

김세동 논설위원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부인이 6년 전에 쓴 요리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최근 ‘이재명 대표가 변호사 비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글이 지지자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책 사주기 운동이 벌어지며 발생한 일이다. ‘일주일에 3∼4번 재판에 나가는 이 대표 변호사비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책 구입을 통해서라도 돕자’는 글들이 올라오면서 ‘구매 인증’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전 대표가 성남시장 재직 중이고 경기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2018년 2월 출간한 ‘밥을 지어요’는 김혜경 씨가 음식 사진 등과 함께 66개 집밥 레시피를 올린 요리책으로, 정치·사회적 메시지는 전혀 없다. 6년 만에 ‘역주행’을 할 요인이 별로 없어 개딸 팬덤의 힘 외에는 달리 설명이 안 된다.
논이 99마지기밖에 없는 지주를 불쌍히 여겨 100마지기를 마저 채워주기 위한 소작농들의 모금 운동에나 비유될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신파’스럽다. 우선 이 전 대표는 얼마 전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으로 추가 기소되기 전까지 대장동·백현동·위례신도시·성남FC, 허위사실 공표, 위증교사 등 6개 사건으로 3개 재판을 받고, 2개 사건 수사(대북송금·경기도청 법카 유용)를 받아왔지만, 재산 손실이 난 흔적이 없다. 이 전 대표의 지난해 말 기준 신고 재산은 31억여 원으로 전년도와 별 차이가 없다. 유죄 시 정치생명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야 하고 거액의 벌금·추징금도 물어야 할 뇌물 사건도 있지만, 20여 명으로 알려진 변호사 비용으로 지출된 내역은 없다. 그래서 변호사 비용은 형식적으로 최소한만 지급하고 국회의원 공천으로 ‘퉁쳤다’는 물납(대납) 의혹이 신빙성 있게 제기됐다.
그 때문에 극성스러운 충성파가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김혜경 씨 책 사주기 운동은 이 전 대표에게 외려 누가 되고 있다. 베스트셀러 등극이 알려지자 “밥을 지어요가 아니라 ‘밥을 시켜요’라고 해야죠” “죄를 지어요가 맞다” 등 비판 댓글로 도배되고 있다. 개인 비서처럼 김혜경 씨를 챙긴 별정직 5급 공무원이 도청 업무추진비로 주문해 보내준 초밥 10인분, 샌드위치 30인분, 소고기, 복요리, 과일을 먹었고 심지어 명절 제수품, 친인척 선물까지 충당했던 흑역사를 소환한 것이다.⊙
07-08(월) 장거리 LCC, 기대 반 걱정 반

문희수 논설위원
여름 휴가철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해외여행 붐이 예고돼 있다. 이젠 항공편을 선택할 때 으레 저비용항공사(LCC)를 먼저 찾는다. 일본 왕복 항공료만 해도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등 대형 항공사(FSC)보다 수십만 원이 싸니 당연한 일이다.
LCC의 급성장은 놀랍다. 올 들어 4월까지 국제선 이용객이 1029만 명으로 FSC(950만 명)를 추월했다. 국내 LCC는 제주항공·티웨이항공·진에어 등 9곳이나 돼, 미국과 같고 일본(8곳)·독일(4곳)보다 많다. 그래도 실적은 호조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에 이어 올 1분기 영업이익도 3474억 원으로 11% 늘었다. 대형 항공사 두 곳이 같은 기간 5075억 원에서 4049억 원으로 쪼그라든 것과 대조된다.
LCC는 국내선으로 출발해 2∼5시간 거리인 일본·중국·동남아를 거쳐 미국·유럽·호주 등 장거리 노선까지 영역을 넓히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티웨이의 경우 이달부터 파리·로마 등 유럽 4개 노선을 취항한다. 해외 여객운송은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고 한다. 고물가에도 중거리·장거리 여행 수요도 계속 커지고 있다. LCC 난립 우려에도 성장성이 높다는 평가다.
항공업계는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계기로 지각 변동이 예상된다. 대한항공은 중국·일본 등의 운항 횟수를 늘리며 LCC에 맞서고 있다. 이 회사 계열인 진에어가 아시아나항공 계열 에어부산·에어서울을 인수해 ‘메가 LCC’로 부상하는 시나리오도 예고돼 있다.
LCC는 성공했다. 전망도 밝다. 그렇지만 여객기 교체와 확대, 정비·보수 등 내실 강화가 시급하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기체 결함에 따른 운항 지연·회항이 잇달아 이용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큰 문제다. 특히 유럽연합(EU) 당국은 티웨이의 안전 강화를 위해 정비 등을 중점 조사할 태세다. 사실 LCC는 노후 기체 비중이 높고, 여유분이 많지 않아 기체 보수·정비가 취약하다는 지적을 줄곧 받아 왔다. 항공 여행에서 안전은 당연히 최우선이다. LCC가 아무리 요금이 싸도 기체의 결함·안전 같은 기본이 불신을 받아서야 말이 안 된다. 세계로 나가려면 업그레이드는 필수다. 정부도 대한항공은 물론 LCC에 대한 관리를 강화해 안전 운항에 대한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07-09 美 대선 변수 된 낙태

이미숙 논설위원
주먹을 불끈 쥐고 팔뚝의 힘을 과시하는 여성 근로자 포스터는 미국 여성 파워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우리는 할 수 있다(We can do it)’는 포스터의 글귀에선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남성의 일터였던 폭격기, 수송기 제조 군수 공장이 여성에게 개방되는데 이 시기에 그려진 포스터가 바로 팔뚝의 근육을 과시하는 ‘리벳공 로지’다.
이 포스터는 1960년대를 휩쓴 여권신장 운동의 심벌로 여겨지며 다양하게 재생산됐다.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의원이 여성 최초로 미 하원의장이 됐을 때엔 여성파워를 과시하는 펠로시 이미지로 잡지 표지에 등장했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다시 이 포스터가 영국 이코노미스트 표지를 장식했다. 헤어밴드를 하고 손엔 ‘X’ 표시 투표지를 쥔 작업복 차림의 여성이다. 과거와 다른 것은 팔뚝에 ‘나의 몸 나의 선택(My body My choice)’이란 글귀가 쓰여진 점이다.
낙태가 미 대선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민주당은 여성 선택권을 지지하는 ‘프로 초이스(Pro-choice)’, 공화당은 생명권을 앞세워 반대하는 ‘프로 라이프(Pro-life)’ 입장이다. 그런데 낙태를 여성의 헌법상 권리로 보장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대법원이 2022년 뒤집으면서 낙태 전쟁 무대는 전국 규모에서 각 주로 바뀌었다. 낙태 허용 권한이 주로 넘겨졌기 때문이다. 대선 때 16개 주는 낙태 관련 주민투표를 하는데 여기엔 경합주(swing state)인 네바다, 애리조나, 펜실베이니아, 플로리다가 포함돼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TV토론에서 선전한 데 이어 대법원이 대선 불복 면책특권 일부를 인정하면서 재선에 유리한 상황을 맞게 됐지만, 낙태 문제가 복병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공화당 지지자 중 대졸자들이나 대도시 교외 거주 중산층은 여성의 선택권을 지지해 낙태 문제가 대선 투표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루스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니스트는 얼마 전 ‘낙태는 트럼프의 워털루가 될 수 있다’는 칼럼을 쓴 바 있다. 1815년 워털루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처럼 낙태가 트럼프 당락의 최후 변수라는 지적이다. ‘내 몸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한다’는 여성들이 11월 대선에서 어느 쪽에 표를 던질지 궁금하다.⊙
07-10 정치인의 정년]

오승훈 논설위원
미국에서 정치인의 나이 논란이 뜨겁다. 조 바이든(81)과 도널드 트럼프(77)의 대선 경쟁만이 아니다. 노스다코타주는 지난달 상·하원 의원에 최고령 제한(maximum age limit)을 두는 주 헌법 개정 투표 실시를 승인했다. 임기 종료 1년 전까지 81세 이상이면 출마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인구수가 최하위권(77만 명)이고 위헌소송이 예상되지만, 전국적 관심사가 됐다.
정치인 고령화는 지속적인 논란거리였다. 과거 공산권의 종신집권을 빗대던 노인정치(Gerontocracy)가 다시 회자할 정도다. 미국 의원의 평균연령은 상원 65세, 하원 58세다. 80대 이상 의원은 총 21명으로, 전체의 약 4%라고 한다. 지난해 미치 매코널(82)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TV 카메라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다 갑자기 20초간 정면만 바라보는 일이 있었다. 다이앤 파인스타인(90) 민주당 상원의원은 상임위 투표에서 ‘예’ ‘아니오’ 대신 법안을 읽기도 했다. 얼마 뒤 별세했다. 미 헌법은 상·하원과 대통령 출마에 나이 상한선을 두지 않고 있다. 하한선만 있는데 하원 25세·상원 30세. 대통령은 35세다. 당선되는 한 정년이 없는 현역이다. 대법원은 1995년 각 주가 ‘헌법에 있는 자격 제한 이상의 제한을 추가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우리의 경우 국회의원은 18세 이상(2022년 1월 개정), 대통령은 40세 이상(헌법 명시)이면 출마할 수 있다. 제22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은 56.3세. 최연소 전용기(32)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같은 당 최고령 박지원(81) 의원 간 49세 차이가 난다. 70세 이상은 6명이다. 선출직 공직자는 정년이 없다. 다만 정치적 선택(불출마), 유권자 선택(낙선), 공천 기준 등에 따라 정계 은퇴 여부가 결정되고 있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동일 지역구 연임 제한, 3선 퇴진론 등 세대교체론이 정계에선 사실상 ‘정년 시스템’인 셈이다. 하지만 나이·선수(選數)보다 자질이 문제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고령자의 인지 능력 저하가 논란인데, 20대의 기억력을 가진 ‘슈퍼노인’(super-ager)도 많다. 황우여(77)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630만 명, 12.3%의 노인층 문제를 다른 연령대의 의원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다. 80대, 90대 비례대표도 고려돼야 한다”고 했다.⊙
07-11 사과의 정석

이현종 논설위원
지난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삼성서울병원이 확산의 본거지가 되면서 비난이 고조됐다. 삼성이 하는 병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 보니 국민적 실망도 컸다. 그래서 삼성을 대표해 이재용 회장이 직접 대국민사과에 나섰다. 병원의 책임이었지만, 그룹의 책임자인 이 회장이 직접 나선 것은 이례적이었다. 당시 이 회장의 사과문은 지금도 ‘사과의 정석’으로 회자되고 있다. 사과의 주체, 사과의 이유, 향후 개선 방향과 함께 이 회장은 “저의 아버님께서도 1년 넘게 병원에 누워 계신다”면서 “환자분들과 가족분들께서 겪으신 불안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고 울먹이며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사과를 잘하기로 유명하다. “변명하지 않겠다”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화법으로 늘 야당의 공세보다 먼저 사과를 했다. 야당이 공격할 틈을 주지 않은 것이다. 자동차 공장을 동행 취재한 여기자에게 연인이나 친구에게 쓰는 ‘스위티’라고 불렀다가 성희롱 논란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되자 곧바로 전화해 정중하게 사과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김영삼·김대중 대통령도 아들 구속 문제로 국민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함으로써 위기를 넘긴 바 있다.
사과할 때는 애매하게 하지 말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하면서 행동 계획까지 밝혀야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쿨하게 사과하라’는 책을 쓴 김호·정재승 교수는 “21세기엔 사과가 리더의 언어”라며 “자신의 잘못이나 책임을 축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믿음이 생긴다”고 했다. “제대로 사과를 하지 못하는 리더가 21세기엔 패자가 된다”고 했다.
‘명품백 수수’ 문제로 김건희 여사의 ‘사과’ 문제가 여당 전당대회의 최대 화두가 됐다. 김 여사가 지난 1월 한동훈 당시 비대위원장에게 사과 의사를 밝히는 문자를 5차례 보냈는데 ‘읽씹’했다는 것이다. 원희룡·나경원·윤상현 후보는 한 후보가 답하지 않아 사과 기회를 놓쳐 결국 선거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사과의 주체는 한 후보가 아닌 김 여사 자신이다. “사과하면 지지율이 떨어질 것 같아서 사과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 회장처럼 사과했으면 이 논란은 진작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07-12(금) AI 영화와 감동

최현미 논설위원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인공지능(AI) 영화가 공식 경쟁부문이 되면서 AI 예술이 현실에 바싹 더 다가왔다. 배우와 카메라 없이 이미지 생성 AI로 만든 본선 진출작 15편은 서사·기술·효과 면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아버지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기차의 도착’을 상영한 후 100여 년간 이어져 온 ‘대상을 촬영해 재현하는 종합예술’이라는 영화의 정의가 바뀌고 있다.
작품상을 받은 레오 캐논 감독의 2분짜리 ‘할머니들은 어디로 떠난 걸까(Where Do Grandmas Go When They Get Lost)’는 우리 곁을 떠난 할머니를 상상한 은유적 내용으로 실사와 일러스트를 섞은 듯한 화면이 꽤 고급스럽다. 지난 2월 두바이 AI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고 이번엔 특별 언급상을 수상한 권한슬 감독의 3분짜리 ‘원 모어 펌킨(One More Pumpkin)’도 인상적이다. 노부부의 비밀을 담은 호러물로 역시 배우와 카메라 없이 AI로만 만들었다. 제작 기간 5일, 제작비는 전기요금 정도였다니 놀랍다.
모션캡처, 디 에이징 등 AI 기술은 이미 영화 제작에 널리 쓰이고 있다. 기술 발달 속도가 가파른 만큼 관련 쟁점도 많다. 저작권, 초상권 등에 대한 요구와 함께 AI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예술 논의도 뜨겁다. AI 영화계 대표선수로 이번에 부천영화제를 찾은 데이브 클라크 감독은 “AI 덕분에 누구나 ‘인사이드 아웃’을 만든 픽사가 될 수 있다”며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AI 기술로 영화 제작의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미래를 낙관했다.
반면, AI 담론에 적극적인 과학소설가 테드 창은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좋은 영화란 작가, 감독부터 카메라맨, 의상 디자이너, 편집작가, 음악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모두 숱한 순간순간에 선택한 결과의 총합인데 기존 데이터로 이뤄진 AI는 이에 필적할 감동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AI는 의도도 욕망도 없기에 결코 예술이 될 수 없고, 숱한 범작을 양산해 예술의 하향 평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그렇다면 AI 영화는 예술의 ‘민주화’를 가져올 것인가, 아니면 하향 평준화에 이를 것인가. AI는 그 어떤 욕망도 의도도 없으니, 결국 그 방향은 욕망하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07-15(월) 레위니옹의 폭우

이철호 논설고문
‘호우’는 한 시간에 30㎜ 이상이나 하루 80㎜ 넘게 비가 내릴 때를 말한다. 보통 하루에 연 강수량 10% 이상을 뿌린다. 10일 새벽 전북 군산시 어청도에 시간당 146㎜의 비가 쏟아졌다. 측정 역사상 최고다. 지금까지는 1988년 7월 31일 전남 순천의 시간당 145㎜였다. 2년 전 서울 동작구에도 시간당 141㎜가 쏟아졌다. 극강 호우가 빈발하고 있는 것이다. 일일 최대 기록은 2002년 8월 31일 태풍 루사 때 강원 강릉에 내린 870.5㎜였다.
세계 최대 다우(多雨)지역은 인도 북동부의 아삼 지방이다. 아삼의 메갈라야와 체라푼지는 연평균 강수량이 1만1873㎜다. 인도양과 벵골만에서 불어오는 열대성 저기압이 히말라야 산맥에 가로막혀 엄청난 비를 뿌린다. 연 최고 강수량은 1860년 체라푼지에 내린 2만2987㎜였다. 인도의 일간 최대 폭우는 2005년 7월 26일 뭄바이에 쏟아진 940㎜였다. 과도한 개발로 자연 수로가 사라지고 바닷물까지 역류해 인도 최대 도시가 역대급 참사 현장이 됐다.
최악의 호우 기록은 의외로 프랑스가 갖고 있다. 본토가 아니라 해외 프랑스령이다. 분당 최대 폭우는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과들루프섬에 내렸다.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1970년 11월 26일 서대서양과 카리브해에서 몰려온 허리케인이 분당 38㎜의 비를 퍼부었다. 하루 최대 기록은 동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옆의 프랑스령 레위니옹이 갖고 있다. 제주도의 1.3배 크기인 이 섬은 남인도양 열대성 저기압인 사이클론의 통로에 자리 잡고 있다. 바다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2000∼3000m급 활화산이 즐비한 섬이다. 1966년 1월 7일 사이클론 데니스가 이 산맥에 가로막혀 하루 동안 1825㎜의 비를 뿌렸다.
극강 호우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최근 장마는 예전 장마도 아니다. 과거엔 장마전선이 남쪽에서 순차적으로 올라왔는데, 이제는 언제 어디에서 극강 호우가 쏟아질지 모르는 ‘도깨비 장마’가 됐다. 낮 동안 태양열이 만든 상승기류에 막혔던 제트기류가 밤에 서늘해진 지표로 급강하해 폭우를 쏟아붓는 ‘야행성 장마’도 흔해졌다. 아예 장마 대신 동남아시아처럼 ‘우기’를 정하자는 말까지 나온다. 자연환경이 거칠어졌다. 재해 대비 기준도 바꾸어야 할 때다.⊙
07-16 美대통령 면직 논란

이미숙 논설위원
미국 헌법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를 지닌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조항이 있다. 대통령이 스스로 판단해 결정할 수도 있고, 부통령을 포함한 절반 이상의 각료가 그렇게 판단해 의회에 서신으로 통보하면 대통령직이 정지된다. 대통령이 거부해도 상하원 의원 3분의 2가 찬성하면 하야(下野)가 결정된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벌어진 국가혼란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로 1967년 의회를 통과한 수정헌법 제25조엔 대통령 직무 정지 및 부통령 승계 등이 세세히 규정되어 있다. 이후 25조에 따라 역대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적은 없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W 부시가 수술 등 건강상의 이유로 부통령에게 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한 뒤 회복한 경우가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 워싱턴에서 미 수정헌법 25조 발동론이 나온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은 4년 더 대통령을 하기에 너무 늙은 것뿐만 아니라, 남은 6개월 임기를 버티기도 힘들기 때문에 수정헌법 25조에 따라 대통령직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6월 말 TV토론 후 민주당 진영에서 확산되는 바이든의 대선 후보 사퇴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대통령직을 정지시키자는 극단적 주장이다. 인지 능력이 떨어진 바이든 대통령을 헌법 25조를 원용해 쉬게 해주자는 것인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동의하지 않는 한 현실화 가능성은 없다. 고령 후보를 둘러싼 민주당의 혼란을 부채질하기 위한 공화당 측의 흑색선전일 수도 있다.
정작 수정헌법 25조 발동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여러 차례 거론됐다. 마이클 울프는 저서 ‘화염과 분노:트럼프 백악관의 내부(2018)’에서 참모들이 헌법 25조에 따라 트럼프를 면직시키자는 논의를 한 적이 있다고 폭로해 파장이 일었다. 실제 2021년 1월 의사당 폭력 사태 후 낸시 펠로시 당시 하원의장 등 민주당 지도부는 “반란을 조장하는 대통령을 해임해야 한다”며 헌법 25조 발동 촉구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이크 펜스 당시 부통령이 거부해 불발됐지만, 트럼프에겐 큰 타격이었다. 3년여 전에 이어 또다시 헌법 25조 발동론이 나오는 것은 쇠락 징후가 뚜렷한 미국 민주주의의 종말을 알리는 전주곡인 것 같아 착잡하다.⊙
07-17 방산 베스트셀러 K9 자주포

문희수 논설위원
올해도 K-방산이 잘나간다. 지난해 놓쳤던 수출 200억 달러 달성이 올해는 무난할 전망이다. 수출국도 확대일로다. 한국이 방산 강국으로 자리 잡아 간다.
특히, K9 자주포는 수출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루마니아와 지난해 휴대용 대공 미사일인 ‘신궁’에 이어 지난 9일 K9 자주포 54문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탄약 운반차인 K10 36대를 포함해 총 1조3828억 원 규모다. 2027년부터 순차적으로 납품될 예정이다. 유럽의 K-방산 견제가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독일·튀르키예와의 경쟁을 뚫고 성사한 것이어서 더욱 값진 성과다. 한화는 이미 호주 수출(129대)에 성공한 레드백 장갑차를 앞세워 루마니아의 차기 보병전투장갑차 사업에도 도전할 계획이라고 한다. 루마니아가 폴란드에 이어 K-방산의 유력한 무대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K9 자주포는 이번 계약으로 수출 누계액이 패키지 품목을 포함해 13조 원을 넘어, 최대 효자 품목 위상을 굳혔다. 수출국도 2002년 튀르키예를 시작으로 인도·노르웨이·핀란드·에스토니아·이집트·호주·폴란드·루마니아 등 9곳으로 늘었다. 나토 회원국이 6곳이나 된다. K9의 자주포 시장 점유율은 70%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주포·전차·다연장포 등 K-방산의 진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결정적인 계기다. 뛰어난 가성비, 신속한 제조·납품 능력, 안정적인 후속 군수지원 등이 전력 공백 보강이 시급한 동·북유럽 국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유럽연합(EU)이 2030년까지 유럽 내에서 무기를 조달하는 비중을 50%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독일·영국 등 전통 방산 강국들조차 K-방산을 따라잡지 못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매년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데는 높아진 K-방산의 위상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K-방산의 수주 잔고는 현재 50조 원을 돌파했다. 윤 정부가 목표로 하는 2027년 4대 방산국가를 향해 착실히 전진하고 있다. 최근 북한 무인기를 잡을 ‘한국형 스타워즈’인 레이저 대공무기(블록-1)가 양산 준비에 들어가는 등 무기체계도 선진화돼 간다. 정상들의 비즈니스로 불리는 방산은 원전처럼 민감하고 복잡한 국가 간 초대형 거래다. 정부의 금융·외교 등 전방위적인 뒷받침이 절실하다.⊙
07-18 먹사니즘 막사니즘

김세동 논설위원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 출마선언문 같은 당 대표 출마선언문에서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며 “먹사니즘이 우리의 유일한 이데올로기”라고 했다. 이 전 대표가 ‘먹사니즘’이라는 가벼워 보이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건, 이념에 경도된 좌파 정당에서 중도 실용주의 정당으로 ‘노선 전환’을 쉽게 대중에 어필하려는 때문으로 보인다.
이재명의 등록상표랄 수 있는 ‘기본 시리즈’를 반복하고 인공지능(AI)·로봇 등 새 흐름을 탄 소재를 끌어 왔지만, 해법은 민주당의 구태의연한 레퍼토리의 반복이었다. 그는 “주거, 교육, 금융, 에너지, 의료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성원의 기본적인 삶을 권리로 인정하고 함께 책임지는 ‘기본사회’는 피할 수 없는 미래”라며 기본소득 확장판을 선보였다.
“전국 어디서나, 국민 누구나 햇볕, 바람, 지열, 수력 등 자연력을 이용해 재생에너지를 생산해 팔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데선 기가 막혔다. 문재인 정부 때 대책 없는 탈원전 및 태양광 확대로 인한 전남 지역의 전력 과잉생산 때문에 원전 출력을 강제 감발한 사태를 벌써 잊었나. 전국 어디서나, 국민 누구나 재생에너지를 생산해 팔 수 있게 하려면 송배전망을 얼마나 깔아야 하나. 하더라도 원전 건설 반대, 고준위방폐장법 반대부터 접고 해야 할 말 아닌가.
먹사니즘은 새로운 조어라기보단 2000년에 등장한 ‘먹고사니즘’에서 한 글자를 빼 이재명화(化)한 것이다. 원래 먹고사니즘은 생계유지에 급급해 정치 등에 무관심한 태도를 비판하는 의미로 쓰였다. 이재명이 먹사니즘을 들고나오자 민주당의 과도한 평등주의, 미래 세대에 크게 부담을 지울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지급을 늘리자는 반(反)경제적 관점들을 들어 ‘막사니즘이라고 해야 한다’는 비아냥이 바로 나왔다. 후세대가 죽든 말든 퍼주기 공약을 남발하는 포퓰리즘을 지적하는 동시에 전과 4범에 대장동·백현동·위례신도시·성남FC, 피의사실 공표, 위증교사, 대북송금 등 7개 사건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을 받는 사법 리스크를 비꼰 것이다.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혐의로 재판을 받는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통로로 이용된 ‘먹사연’(평화와 먹고사는 문제연구소)과 본질에서 친연성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07-19(금) 씁쓸한 ‘어대명’ 황금비율

오승훈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의 8·18 전당대회 당 대표 선거전이 18일 방송토론을 필두로 시작됐다. 후보는 이재명·김두관·김지수 3명이지만, ‘어대명’(어차피 대표는 이재명) 주장과 함께 승패보다 득표율에 더 큰 관심이 쏠린 선거다. 일극체제 등의 수식어가 붙은 이 후보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는 까닭이다. 이 후보는 지난 2022년 8월 전당대회에선 77.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번 선거는 ‘비명횡사’ 공천으로 당의 주류가 친명(친이재명)으로 바뀌고, 이 후보 지지세가 강한 권리당원의 투표 반영 비율도 높인 환경에서 치러진다. 득표율이 지난번보다 확연하게 높아야 당내 기반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그게 마냥 바람직한 건 아니다. 2·3위 후보의 득표율이 너무 낮으면 ‘추대 대회’ ‘약속 대련’ 비판과 사당화 논란이 더 거세질 수 있다.
그래서 일각에선 황금비율 주장이 나온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히 흥행이 되고 명분도 갖추는 득표율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정대철 헌정회장, 김상현 전 의원과 경선을 했었는데 그때도 비주류가 30∼40% 있었다”면서 “이번에도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한다”고 했다. 이철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김두관 후보가 (지난 전당대회 당시) 박용진 후보(22.3%)보다는 더 받을 것 같다”고 했다. 대체로 30%대 중반 득표율이 거론된다. 에이스리서치가 뉴시스 의뢰로 지난 14∼15일 실시한 당 대표 적합도 여론조사(자동응답 방식)에선 이재명 45.5%, 김두관 30.8%, 김지수 3.4%였다. 1·2위 간 15%포인트 차였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층(301명)만 놓고 보면 이재명 85.6%, 김두관 8.0%, 김지수 2.8%로 이 후보가 압도적인 우위였다. 다른 조사의 흐름도 유사하다. 당 대표 본선은 대의원 14%·권리당원 56%·일반국민 여론조사 30%씩 반영된다.
김두관 후보는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의 결집을 노리고 있다. 지난 선거 때 이 후보와 경쟁했던 박용진 전 의원 이상의 파괴력을 보여주느냐가 관건이다. 선거 결과는 예단할 수 없다. 전당대회는 언제나 이변과 파란이 소용돌이를 만드는 정치 이벤트다. 승자 독식의 선거에 황금비율이란 없다.⊙
07-22(월) 힐러리 특검 타산지석

이현종 논설위원
김건희 여사는 본받고 싶은 영부인상으로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을 꼽았다는 얘기가 있다. 사업가 출신의 자신과 자의식이 강하고 활동적인 힐러리를 비교하면서, 대선 전부터 윤석열 대통령을 파트너처럼 간주하며 중요한 결정에 관여했다고 한다. ‘명품백’ 최재영 목사와의 대화에서 “내가 5년 내에 통일을 시키겠다”는 발언 등을 보면 정치에 꽤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공통으로 집권 기간에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렸다. 클린턴의 아칸소 주지사 시절 힐러리는 남편과 함께 투자했던 ‘화이트워터 부동산 개발회사’ 대출 특혜에 부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언론의 보도로 쟁점이 된 ‘화이트워터 스캔들’은 당시 현직이었던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큰 정치적 시련이었다. 의혹 제기가 이어지자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1월 법무부 장관에게 특별검사 임명을 요청했다. 중도 성향의 공화당원인 로버트 피스크 특별검사가 임명됐다가 몇 달 후 법이 바뀌면서 연방판사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특별검사를 임명했다. 위원회는 1994년 8월 강경 공화당원인 케네스 스타를 새로운 특별검사로 임명했다. 이후 6년 동안 6차례에 걸쳐 힐러리를 대면조사 했고, 영부인으로서는 최초로 대배심에 출석해 검사의 신문을 받았다. 성 추문까지 겹쳐 클린턴 대통령이 거의 탄핵될 뻔했지만, 결국 스타 검사는 힐러리를 무혐의 처리했다.
김 여사는 지난 20일 현직 대통령 배우자 신분으로서는 처음으로 검찰에 소환돼 12시간 대면조사를 받았다. 청와대 부근 경호처 건물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과 명품백 수수 문제다. 도이치모터스 사건은 전 정권 검찰에서 사실상 무혐의로 결론 내려진 것으로 마무리하지 않다가 이번에야 조사하게 된 것이고, 명품백도 ‘사과’도 없이 뭉개다 결국 조사를 받게 됐다. 야당은 특검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는 퇴임 후 박연차 사건으로 대검 중수부 검사가 부산지검으로 내려가 비공개 조사를 했다.
명품백 문제는 윤 대통령 부부가 잘못된 대응으로 국정 운영의 걸림돌이 되는 대형 사건으로 키워 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김 여사도 당당히 조사를 받은 힐러리를 본받으면 어떨까.⊙
07-23 ‘퍼펙트 데이즈’의 행복

최현미 논설위원
요즘 극장가에서 도쿄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 씨가 인기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이다. 배우 야쿠쇼 고지는 이 역할로 지난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3일 개봉한 영화는 벌써 관객 5만 명을 넘었다.
히라야마는 자기만의 평범한 하루하루를 사랑한다. 그의 하루는 거리를 쓰는 빗자루 소리에 일어나 이부자리 정리로 시작한다. 식물에 물을 주고 좁은 싱크대에서 세수하고 수염을 정리하고 집을 나서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마신 뒤 작은 용달차를 타고 나간다. 그리고 도쿄 공중화장실을 돌며 깨끗하게 청소하고 점심에는 나무 그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다. 출퇴근 길엔 카세트테이프로 올드팝을 듣는다. 퇴근 후엔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 단골 술집과 책방을 차례로 들렀다 책을 읽으며 잠자리에 든다. 그의 가장 큰 기쁨은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보고 그 순간을 사진에 담는 것이다. 그는 이 루틴을 매일 반복한다.
부유한 집안 엘리트 출신인 듯한 그가 왜 화장실 청소부가 됐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남들에겐 별것 아닌 일상이 드라마틱한 고난과 풍파 끝에 도착한 너무나 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반복되는 평범한 것들이 내일이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예민한 시인처럼 순간의 특별함을 알아본다. 그래서 평온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퍼펙트 데이즈, ‘완벽한 날들’이다.
‘완벽한 날들’이라면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의 책이 떠오른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야말로 낙원으로 생각하는 올리버는 히라야마와 닮았다. 산문집 ‘완벽한 날들’에서 올리버는 ‘완벽한 날’이라고 느낀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른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숲에서 벗어나 환하게 쏟아지는 포근한 햇살 속으로 들어서는 아주 평범한 순간, 나는 돌연 발작적으로 행복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행복을 잡으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행복이 주어졌다.’
이들이 말하는 ‘완벽한 날’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평범한 하루하루가 주는 평온함, 그 안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순간들, 그리고 모두의 운명이 그렇듯 내일이면 사라지는 것들로 가득한 지금 이 순간을 아끼는 것이다. 쉬운 듯 어렵고, 어렵지만 또 쉬울 수 있다.⊙
07-24 테크니온 공대

이철호 논설고문
이스라엘에선 고교 졸업 후 인생이 갈린다.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을 군에서 복무한다. 최고의 영재 50명을 입도선매하는 곳이 ‘탈피오트’ 부대다. 이들은 히브리대에서 3년간 자유롭게 연구한 뒤 5년간 의무 복무한다. 이들 손에 의해 탄생한 게 아이언 돔과 자율주행 시스템 등이다. 수학 천재들은 8200부대로 간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 공장을 악성 코드로 망가뜨리고, 세계 최초로 인터넷 방화벽을 개발한 비밀부대다. 자폐증 천재를 뽑는 9900부대도 있다. 항공사진 판독 등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곳에 투입된다.
이스라엘은 갓 제대하면 그동안 모은 돈으로 1년쯤 해외여행을 하는 게 전통이다. 자신이 어떤 분야에 맞는지 깨달은 뒤 대학에 들어가 꼭 필요한 공부를 한다. 가장 강조되는 것은 ‘후츠파’(대담함 또는 뻔뻔함). 뻔뻔할 정도로 질문하고, 자기 소신껏 연구하라는 것이다. 8200부대가 정보기술(IT) 벤처 사관학교 역할을 하고, 9900부대 출신들이 전 세계 자기공명영상(MRI) 판독 시장을 꽉 잡고 있는 비결이다.
단연 최고 명문대는 ‘이스라엘의 MIT’라는 테크니온 공대다. 독일 유대인들이 1924년 “히브리 민족의 운명은 과학기술이 결정할 것”이라며 사막 위에 세운 첫 학교다. 이스라엘이 건국(1948년)하기 한참 전부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이 힘을 합쳤다. 이스라엘 역대 노벨화학상 수상자 4명 가운데 3명이 테크니온 출신. 요즘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는 인공지능(AI)과 의학이다. 이 대학 의대는 의사 배출이 아니라 의사과학자의 산실이다. 전 세계 의료 장비 특허의 40%를 테크니온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
최근엔 엔비디아 직원 3만여 명 중 테크니온 출신이 1120여 명으로 압도적 1위라는 보도가 눈길을 끌었다. 5년 전 이스라엘의 멜라녹스를 인수했기 때문이다. 테크니온 출신들이 모인 이 벤처는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고대역폭메모리(HBM) 간의 데이터 처리를 돕는 데이터처리장치(DPU) 개발에 성공했다. 엔비디아는 9조7000억 원에 멜라녹스를 품은 뒤 ‘데이터 병목 현상’을 해소하며 AI 가속기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세계 AI 업계를 유대계가 휩쓸고 있는 것이다. 딱 100년 전 테크니온에 뿌린 유대인들의 꿈이 열매를 맺고 있다.⊙
07-25 파리올림픽과 박태환 키즈

문희수 논설위원
제33회 파리 하계올림픽이 26일(한국시간 27일 오전 3시) 개막한다. 세계적인 스타들이 8월 11일까지 17일 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겨루는 축제다. 국내 분위기는 예년과 달리 후끈한 열기는커녕 썰렁하기까지 할 정도다. 여자 핸드볼 외엔 인기 종목인 축구·농구·배구 등 남녀 단체 구기 종목이 전멸한 탓이 크다. 선수단 규모가 22개 종목 144명(임원은 117명)으로 48년 만의 최소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큰 관심이 쏠리는 종목과 경기는 수두룩하다. 그중에서도 전통적인 메달 박스인 남녀 양궁과 함께 남자 수영은 단연 압권이다. 세계 톱 수준으로 급부상해 역대 최고 성적이 기대된다. 사흘 뒤인 오는 28일 첫 금메달에 도전하는 것도 김우민이 출전하는 남자 자유형 400m다. 황선우가 나서는 남자 자유형 200m, 남자 계영 800m도 메달 획득이 유망하다. 남자 수영은 박태환이 2008년 베이징대회 자유형 400m 금메달과 자유형 200m 은메달, 2012년 런던대회 자유형 400m와 200m 은메달을 땄던 데 이어 ‘박태환 키즈’가 새 역사를 쓸 참이다.
전통적으로 수영은 육상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취약 종목으로 꼽혀 왔다. 국민의 관심이 덜한 비인기 종목이란 틀에 갇혔던 수영이 묵묵히 실력을 키워 어느새 한국의 유망한 메달 박스로 도약한 것이 실로 경이롭다. 수영은 22개 종목 중 출전 선수가 23명으로 가장 많기도 하다. 온 국민의 박수를 받을 만하다. 한국 MZ세대의 잠재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물론 이외에도 관전 포인트가 숱하다. 여자 양궁 단체전은 사상 초유의 10연속 금메달, 남자 양궁 단체전은 3연속 금메달에 도전한다. 오상욱·구본길 등 ‘뉴 어벤저스’가 3연속 정상에 도전하는 남자 펜싱(사브르), 세계 1위 안세영이 출전하는 여자 단식 배드민턴도 관심이다. ‘스마일 점퍼’ 우상혁의 남자 높이뛰기, 불혹(1984년생)의 비보이 김홍열이 출전하는 브레이킹도 주목된다. 전통 강세 종목인 태권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은 금메달 5개 이상이 목표다. 그렇지만 금·은·동메달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 젊은 선수들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한계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감동이다. 매일매일 멋진 활약을 기대한다. 많은 국민이 힘차게 응원할 준비가 돼 있다.⊙
07-26(금) 두 金여사와 꼬리 자르기

김세동 논설위원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이 김건희 여사를 토요일인 지난 20일 비공개로 대통령 경호처 부속청사에서 조사하면서 ‘검찰청사 소환 조사’ 원칙을 강조해온 이원석 검찰총장에게는 10시간 뒤에 알려줘 ‘총장 패싱’과 ‘특혜 출장 조사’ 시비로 검찰 내부가 시끄럽다. 지난 5월 검찰총장을 패싱해 검사장급 고위 검사 인사를 하면서 김 여사 수사 라인을 대거 물갈이할 때부터 이번 사태가 잉태됐다고 봐야 한다.
검찰 내 항명 논란과 별개로 김 여사가 검찰 조사를 받기 전에 친북 성향 목사에게서 300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받은 사건과 관련한 서면 답변서를 보내고, 김 여사를 보좌하는 대통령실 행정관이 참고인 조사에서 디올백을 받은 “당일(2022년 9월 13일) 김 여사로부터 반환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일이 바빠 깜박하고 돌려주지 못했다”고 진술한 데 눈길이 간다. 김 여사 무혐의를 만들기 위한 뒤늦은 작업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디올백을 사서 최재영 목사에게 건넨 유튜브 방송 ‘서울의소리’가 ‘몰카 공작물’을 방영한 게 지난해 11월인데, 김 여사 사과 문제로 여권이 난리가 나고 총선에서 참패하고도 가만히 있다가 ‘김건희특검법’ 처리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당선을 앞두고서야 그런 얘기를 하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장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는 윤석열 정권은 도마뱀 정권이냐”고 비아냥댔다. ‘꼬리 자르기’는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겨 상급자나 조직 전체를 보위하는 행태를 비판할 때 쓰는 용어인데, 울산시장선거 청와대 개입, 이태원 참사 등의 사건 처리 과정에서도 등장했다.
경기도청 법카 유용 사건으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된 배소현 씨가 지난 5월 22일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의 부인 김혜경 씨 재판에서 “음식을 법카로 주문해 배달하고 나면 김 씨가 음식값을 현금으로 줬다”고 증언해 앞서 검찰 진술을 뒤집었다. 법카로 음식값을 계산하고도 김 씨가 준 돈을 받아 ‘먹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로 보인다. 앞뒤 안 맞는 진술을 뒤늦게 감행한 건 이재명 부부 보위를 위해 ‘꼬리가 꼬리를 잘라낸 것’이거나 위증 청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배 씨의 책임 덮어쓰기에 대해 국민의힘에선 꼬리 자르기 지적이 나오지 않았다.⊙
07-29(월) 탈북자와 선택자

]이미숙 논설위원
구소련 볼쇼이발레단의 간판스타였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76)는 1974년 토론토 공연 후 KGB 요원을 따돌리고 망명했다. 캐나다를 거쳐 뉴욕에 정착한 바리시니코프는 1970∼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노 겸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인기를 누렸다. 그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50년 전 망명과 관련해 “자유를 위해 소련을 떠나겠다는 마음먹고 결행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스스로 자유세계를 택한 만큼 나는 이탈자(defector)가 아닌 선택자(selector)”라면서 “이탈자란 용어는 국가에 해를 끼친 배신자 이미지가 연상돼 싫다”고 했다.
북한에서 탈출해 국내에 정착한 이들을 지칭하는 법률 용어는 북한이탈주민이다. 그런데 이들은 바리시니코프처럼 북한 이탈자라는 표현에 불편해한다. 통일연구원이 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탈북자라는 용어가 바뀌어야 한다”는 응답은 58.9%나 됐다. “용어의 혼란과 부정적 인식 때문”(61%)이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대안 용어가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리가에서 태어난 바리시니코프는 라트비아계 미국인으로 부르면 되지만, 북한 출신자들은 헌법상 우리 국민인 만큼 북한계 한국인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바리시니코프식으로 ‘한국 선택자’라고 해도 타국 귀화자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여론조사에서는 대안 용어로 하나민(27.9%), 통일민(25.9%), 북향민(24.2%) 등이 제시됐지만 모두 어색한 게 사실이다.
북한 김여정은 북한이탈주민을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라고 했다. 이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더불어민주당 소속 일부 운동권 출신 의원과 좌파 인사들은 탈북자를 ‘북한 쓰레기’로 부르기도 한다. 머리가 붉은 쓰레기로 가득 찬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대로 쓰레기 취급하면 그만이지만, 북한이탈주민이란 용어에 대한 본질적 고민이 필요하다. 어떤 근사한 용어를 만들더라도 그에 내재된 주홍글씨 같은 차별은 그대로일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북한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이들의 고향 정도를 구분하는 게 최선 아닐까. 경상도, 전라도 등 고향을 얘기하는 게 차별이 아니듯 북한을 떠난 이들에게도 황해도, 함경도 등 고향은 여전히 소중한 기억일 테니 말이다.⊙
07-30 대통령의 ‘책 소통’

오승훈 논설위원
여름휴가를 앞두면 한번은 찾아보게 되는 ‘○○○ 추천 필독서’, 모두가 기대만큼 도움이 되진 않았던 것 같다. 교보문고가 캠페인을 벌이며 내놓은 ‘스테디셀러 TOP 100’에 눈길이 갔다. 최근 5년 동안 한 달도 빠짐없이 매월 100권 이상 판매되는 100편의 리스트란다. 이 정도면 읽을 효용이 있다는 뜻에서 골라준 목록이다.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 ‘데미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오래전 읽은 듯한(?) 소설을 포함해도 책장을 넘겨 본 건 열 권 정도다. ‘이렇게 대중의 트렌드와 동떨어져 있나?’
캠페인 2탄은 더 심각했다. 35인의 인플루언서가 1년에 딱 한 권만 책을 읽는다면 읽어 볼 만하다고 추천한 책. 물리학자 김상욱, 영화평론가 정성일, 소설가 김기태 등 내로라하는 독서가들이 꼽아준 책들은 대개 들어본 적도, 더구나 읽은 적도 없는 제목이다. 독서도 나이, 직업, 취향, 필요에 따라 선택이 제각각인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대인의 보편적인 생각과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는 직업을 가진 입장에선 당황스러웠다.
책에 관한 인플루언서로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으나, 이 역시 호기심 이상의 느낌을 받진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읽었다는 피터 드러커의 ‘미래의 결단’은 부러 서점에 들러 산 적이 있다.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는 머리말을 읽고 더 나가지 않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추천 도서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선물했다는 ‘넛지’도 끝까지 읽지 못했으나 스테디셀러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을 참모들에게 추천했다는데 읽어보진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추천 도서 목록을 밝힌 적이 없다. ‘보여주기식 독서’를 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지난 2월 KBS 특별대담에서 집무실이 공개될 때 부친이 50년 이상 사용했다는 책장에 꽂힌 책들이 잠시 비친 적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과 책 간의 거리가 국정 능력과 어떤 관계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책 추천을 통해 대통령의 생각과 이미지가 전해지는 과정도 중요한 소통 수단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고, 유튜브에 볼거리가 더 많이 유혹하는 시대. 아날로그적 ‘책 소통’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07-31(수) 블랙 요원

이현종 논설위원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8년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있을 때 그의 건강 상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 중견 언론인들의 만찬 자리에서 뜻밖에 고급 정보가 나왔다. 이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건강 상태가 어떠냐”는 언론인들의 질문에 “양치질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양치질할 정도면 반신불수 등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당시 고위 관계자의 언급은 이튿날 조간신문에 1면 톱기사로 나왔고 파급력이 컸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뒤 정보 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큰일 났다. 우리 정보망이 다 들통났다”며 이를 발설한 청와대 관계자를 성토했다. 김정일이 양치질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극히 일부이고 이런 정보가 남한 측에 흘러갔다는 것을 안 북측이 정보 유출자 색출 작업에 나섰다는 얘기다. 오랫동안 공을 들여 김정일 주변에 심어 놓은 이른바 ‘블랙 요원’의 신분이 탄로 난 것이다.
영화 ‘공작’으로 잘 알려진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특수공작원인 박채서 씨는 ‘흑금성’으로 활동한 블랙 요원이다. 원래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대북 공작관이던 박 씨는 안기부에 스카우트됐고, 1997년 6월엔 김정일 위원장까지 만났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5년에는 남한 톱스타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가 함께 등장한 남북 합작 광고 제작에도 관여했다. 박 씨가 수집한 안기부의 대선 공작 관련 ‘북풍 정보’는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측이 북풍을 막는 데 기여했다.
북한에 직접 침투하거나 국경 주변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목숨을 건 활동은 주로 군 정보사가 맡아서 한다. 대사관에 근무하며 신분이 알려진 ‘화이트 요원’과는 달리 블랙 요원은 은밀하게 활동한다. 그런데 최근 군 정보사령부 군무원의 노트북에서 블랙 요원과 전체 부대원 현황이 담긴 1급 기밀이 북한에 유출됐다고 한다. 정보사 요원 출신인 군무원은 해킹당했다고 하지만 수사 결과 중국 동포에게 건네졌고, 북한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 근무하는 블랙 요원들이 신분 노출을 우려해 귀국하거나 활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블랙 요원 1명 키우는 데 10년 이상 걸리는데 이번 사태로 궤멸 수준을 피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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