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物相(조선일보) 2024-07/ 07.01(월) 조(Joe) 아닌 질(Jill)이 결정할 바이든 재출마 - 07.31(수) '선거 도둑질'
萬物相(조선일보) 2024-07/
07.01(월) 조(Joe) 아닌 질(Jill)이 결정할 바이든 재출마

▲일러스트=박상훈
프랑스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당선된 후 한 매체가 부인 브리지트 여사와 전속 사진 에이전트 사이의 통화 녹취를 폭로했다. 브리지트가 전임 대통령 문제를 포함해서 이런저런 일에 끼어든 내용이 공개됐다. 엘리제궁에서는 그저 “보통 대화였을 뿐”이라며 “정치적 과잉 해석”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브리지트가 주간 파리 마치 커버스토리로 6번이나 등장했다는 점까지 거론되며 한동안 시끄러웠다. “마크롱이 동성애자”라는 소문을 잠재우려 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당헌·당규에는 후보 부인의 역할이 없는데도 브리지트는 2017년 대선 과정에 적극 개입했다고 한다. 출마를 망설이는 남편을 채근한 것도 브리지트였다. “이번에 출마하지 않으면 5년 뒤 당신 문제는 내 얼굴이 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브리지트가 나이를 무려 열 살이나 속였다는 위키리크스 폭로도 있었지만, 엘리제궁이 법적 대응을 하지는 않았다. 영부인 관련 예산은 44만 유로인데, 마크롱은 “아내의 역할과 영향력을 인정했다”고 한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 질 여사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지난주 TV 토론에서 바이든이 한참 밀렸다는 얘기가 나오자 “이제 바이든의 사퇴 여부는 질 여사에게 달렸다”는 관측이 줄을 이었다. 질은 남편에게 “기껏 90분 토론으로 당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4년을 정의할 수는 없어요”라고 했다. 또 “남편은 넘어질 때마다 일어선다”고도 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앞으로 무슨 일이든 그녀가 결정할 것” “(그녀가 생각하는 전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장밋빛”이라고 했다.
'천생 학교 선생님’인 질은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2004년 남편이 대선 판에 뛰어드는 것을 반대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가 재선되는 걸 본 질은 훗날 말했다. “난 일주일 동안 검은 옷을 입었어요.” 부시 재선에 절망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이라크전에 반대했다고 한다. 질이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이 이걸 바꿔야 해요.” 2020년 대선 때 질은 남편 선거 캠프에서 핵심 멤버로 변모해 있었다.
▶누구든 큰일 치르고 나면 배우자에게 물을 것이다. “오늘 나 어땠어?” 질은 대답했다. “조, 너무 잘했어요. 당신은 모든 질문에 답했어요.” 미 언론은 “바이든이 포기해야 할 때가 됐는데도 질 여사 때문에 도전하고 있다”고 했다. 참모와 후원자도 질의 눈치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공화당 쪽에서는 “노인 학대를 하고 있다” “누가 군통수권자인가”라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07.02 김정은 배지

▲일러스트=이철원
북한에 처음 등장한 배지는 ‘레닌 배지’였다. 김일성 일극 체제가 완성되기 전인 1950년대 말 북한 간부들은 소련 공산 혁명에 성공한 레닌의 옆 얼굴이 새겨진 배지를 달고 다녔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치자 홍위병을 중심으로 마오쩌둥 배지의 인기가 폭발했다. 한 달 생산량이 5000만개를 넘었다는 기록도 있다. 신(神)과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당 추종자들이 레닌과 마오쩌둥 얼굴이 들어간 배지를 십자가나 염주처럼 모시고 다녔다.
▶김일성은 정적 숙청을 완료한 뒤인 1970년 ‘김일성 배지’를 공개했다. 처음엔 레닌 배지처럼 옆 얼굴이 들어간 도안이었다고 한다. 우상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다양한 얼굴 사진과 형태의 배지가 나왔다. 전 주민이 달도록 했다. 배지를 ‘초상(肖像) 휘장’으로 부르게 했고 집집이 김일성 초상화도 걸게 했다. 배지나 초상화엔 반드시 “모신다”는 표현을 써야 했다. 숭배하라는 것이다. 배지를 안 달아도 되는 사람은 김일성뿐이었다. 자신이 자신을 숭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정일도 1992년 ‘김정일 배지’를 만들었다. 노동당 깃발 안에 얼굴이 새겨진 당원용 배지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김일성·김정일 얼굴이 같이 새겨진 ‘쌍상(雙像) 배지’는 비싸게 거래되기도 했다. 비당원 등이 사서 으스대려고 했다. 외국인이나 한국 사람이 배지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어버이 얼굴을 파는 X도 있냐”며 화를 냈다.
▶북한의 당·정·군 간부들이 전부 ‘김정은 배지’를 단 사진이 지난 30일 처음 공개됐다. 지난 5월엔 각 가정에 김정은 초상화도 배포했다. 김일성에게만 써왔던 ‘태양’과 ‘어버이’ 호칭을 김정은에게 붙이고 있다. 김정은 우상화가 완성 단계라는 뜻이다. 김정은과 부인 리설주는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달지 않고 등장하곤 한다. 김정은 옆에서 의전을 하던 여성도 배지 자리에 은색 브로치를 달았다. 대다수 북 주민이 한국 드라마를 보는 시대다. 김정은 자신부터 배지의 우상화 효과를 믿지 않을 것이다. 이제 김씨 정권에 남은 건 공포 통치와 핵 정도다. 사람을 고사총으로 부수고 소각하는 처형을 목격한 주민들은 트라우마로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고 한다.
▶최악의 경제난이 이어지며 김씨들 배지 가치도 폭락했다고 한다. 북·중 국경 지역에선 김일성 얼굴이 들어간 배지와 화폐가 싸구려 기념품으로 팔린다. 세계 각국 공항에서 남루한 차림에 붉은 배지를 달고 있으면 북한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현지인들에게 멸시당한다. 김씨들 배지가 노예 마크와 다를 게 없다.
07.03 '급발진' 미스터리

▲일러스트=이철원
2009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911센터에 급박한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액셀러레이터가 제멋대로다. 속도가 시속 120마일(193㎞)까지 치솟았다.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는다. 고속도로가 곧 끝나는데, 오 하나님.” 전화 신고 직후 도요타 렉서스 ES350은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일가족 4명이 모두 숨졌다. 운전자는 고속도로 순찰대 소속 베테랑 운전사였다. ‘도요타 페달 게이트’의 시작이었다.
▶미국 ABC방송이 이 911 신고 전화를 공개하자 난리가 났다. “남편이 도요타 차를 사주면 생명보험부터 확인하라”는 블랙 유머까지 등장했다. 도요타는 자체 조사 후 “잘못 설계된 운전석 바닥 매트가 액셀러레이터를 물어서 생긴 사고”라면서 대규모 리콜을 발표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까지 나서 차량 전자 제어 장치(ETCS)의 이상 여부를 조사했지만 별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3년 뒤 다른 급발진 주장 소송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 소프트웨어(SW) 업체가 ETCS 시스템 내 메모리 영역에서 SW 간 간섭 현상이 급발진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를 ‘30초 급가속 재현 실험’으로 밝혔다고 했다. 결국 도요타는 소비자 기만 혐의에 대한 ‘기소 유예’ 처분을 받는 조건으로 미국 법무부에 벌금 12억달러를 냈다. 하지만 이 실험은 도요타 캠리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2009년 렉서스 사고의 증거는 되지 못했다.
▶엊그제 사상자 15명을 낸 시청역 교통사고 운전자는 “100% 급발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동차 제조사가 급발진을 인정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법원 판결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운전자가 차량 결함을 증명해야 하게 돼 있어 원인 규명이 더 어렵다. 전문가 중에는 차량의 전자적 제어, 자동 변속기, 전기차 증가와 함께 급발진 사고가 늘었다는 점을 들어 ‘전자적 문제’가 주원인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급발진 사고 중에는 운전자가 가속기를 밟고도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착각한 경우가 많다. 해법으로 모든 차량에 운전자 발을 찍는 블랙박스를 설치하자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한마디로 아직도 ‘급발진’은 미스터리다.
▶급발진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 내 차에 급발진 징후가 있다면 운전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변속기를 중립(N)으로 바꾼 다음,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고, 가드레일, 가로수 등 멈출 수 있는 물체를 들이받으라고 한다. 다급한 상황에서 실행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07.04 공휴일 요일지정제

▲일러스트=이철원
2020년 6월에 과기정통부가 새해 달력 제작의 기준이 되는 ‘2021년 월력요항’을 발표했다. 그러자 온라인에서 “공휴일 가뭄” “달력 보기가 싫다”며 난리가 났다. 2021년에는 현충일·광복절·개천절이 일요일, 한글날·성탄절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9.1%가 “임시 공휴일 지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정부는 설과 추석 연휴, 어린이날만 적용하던 대체 공휴일 제도를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등으로 확대 적용하는 것으로 여론을 달랬다.
▶1879년에 미국 의회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탄생일인 2월 22일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했다. 생일이 공휴일인데도 1968년 미국 의회가 제정한 ‘월요일 공휴일법’에 따라 2월 셋째주 월요일로 바뀌었다. 당시 미 의회는 근로자들의 휴식도 보장하고 관광·여가 문화도 촉진하려고 월요일을 휴일로 지정하는 법을 만들었다. 1971년부터 발효된 이 법에 따라 워싱턴 탄생일은 2월 셋째주 월요일, 현충일은 5월 마지막 주 월요일, 콜럼버스 데이는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바뀌었다. ‘재향 군인의 날’도 10월 넷째 주 월요일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반발이 있어 1차 대전 종전 기념일인 11월 11일 본래 날짜로 되돌아갔다.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도 날짜 지정 공휴일과 요일제 공휴일이 다 있다. 영국 근로자의 날(5월 1일) 휴무는 5월 첫째주 월요일이다. 날짜 지정 공휴일만 있던 일본도 20여 년 전 미국 법을 참조해서 ‘해피 먼데이’ 제도를 만들었다. 1월 15일이던 성인의 날은 1월 둘째 월요일로, 7월 20일이던 바다의 날은 7월 셋째 월요일로, 9월 15일이던 경로의 날은 9월 셋째 월요일로, 10월 10일이던 스포츠의 날은 10월 둘째 월요일로 바꿔 국민에게 토-일-월 연휴를 보장했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 때 내수 활성화를 위해 일부 법정 공휴일을 요일 지정제로 바꾸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런데 관련 단체의 항의가 컸다. 대신 1959년에 도입했다가 폐지, 재도입을 반복한 대체 공휴일제가 부활됐다. 21대 국회에서는 어린이날을 5월 첫째 월요일로, 현충일을 6월 첫째 월요일로 지정하자는 ‘요일 지정제’ 도입 법안이 발의됐지만 통과되지는 못했다.
▶정부가 경제 활력을 위해 요일제 공휴일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간 공휴일 제도도 들쑥날쑥이었다. 3·1절이나 8·15처럼 날짜 자체가 중요한 기념일이 아니라면 요일 지정제를 도입해서 주중의 업무 단절도 최소화하고 연휴를 보장하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07.05 쓰레기로 버려진 금괴

▲일러스트=이철원
평소 책갈피에 아내 몰래 비자금을 숨겨 온 남자가 돈 쓸 일이 생겨 책장을 뒤졌다. 그런데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200권 넘게 뒤지도록 돈이 안 나왔다. 책 버릴 때 쓸려나갔나 불안해질 때쯤 아내가 방문을 열었다. 남편은 시치미 뗐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책을 본 아내는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뒤 출근한 남편에게 아내가 전화했다. “여보, 돈 찾았어요.” 들통난 비자금은 아내에게 압수당했다. 영문학자 박일충의 수필집 ‘어바웃 계당선생’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책장에만 돈을 숨기는 것은 아니다. 냉장고, 밥솥, 어항, 신발장 등에도 숨긴다. 그렇게 숨긴 돈이 실수로 버려지곤 한다. 한 남성은 낡은 밥솥을 무심코 버렸다가 오래전 그 안에 현금 1000여 만원을 넣어 두었던 것이 기억났다. 열흘 넘게 CCTV를 추적한 끝에 한 고물상에서 돈이 든 밥솥을 찾았다. 과거 검찰이 어느 미술관을 압수 수색하다 거기에 10여 년간 보관돼 있던 다른 사람 현금 60억원을 발견한 일도 있었다. 평생 모은 돈을 세탁기 밑에 보관해온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돈의 존재를 아예 잊었다가 주변 도움으로 되찾거나, 온라인으로 산 중고 냉장고에서 돈다발이 쏟아져 나오는 등 별별 일이 다 있다.
▶인천 서구의 수도권 매립지엔 이처럼 잘못 버려진 돈이나 귀중품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쓰레기통에 돈을 숨겼는데 가족이 내다 버렸다며 오는 이도 있다. 귀금속일 경우 매립지 직원들이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해 함께 찾지만 대부분 허탕이다. 외국에선 거액의 비트코인이 보관된 하드디스크를 버렸다가 쓰레기 매립지를 뒤진 이도 있다.
▶서울 반포의 한 고가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실수로 버려진 금괴 여러 개를 청소원이 발견해 주인에게 돌려줬다. 강남의 일부 고가 아파트는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아 ‘노다지 광산’으로 불린다고 한다. 분리수거장에서 100만원 수표 100장이 든 봉투가 발견된 아파트도 있다. 집안 어딘가 있는데 찾지 못하는 돈이나 귀중품을 찾아주는 업체도 등장했다. 미국 사정도 마찬가지인지 고급 주택가 쓰레기통을 뒤져 귀금속이나 현금을 사냥하는 ‘덤스터 다이버(dumpster diver)’란 직업도 있다. 주당 1000달러 넘게 벌고 가끔 대박도 난다.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금괴가 나오자 인터넷에 ‘최고가 아파트 분리 수거장의 위엄’이란 우스개와 함께 ‘배우자에게 숨긴 비자금’ ‘과거 정권의 비자금’ 같은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우습기도 하지만 왠지 씁쓸하기도 하다.
07.06(토) 영국인의 '셀프 발치'

▲일러스트=박상훈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을 참패로 몰아간 한 주범 중 하나로 국영 의료 서비스의 붕괴가 꼽혔다. 영국이 자랑하던 무상 의료 시스템인 NHS(국립보건서비스)가 사실상 기능 마비에 빠져 진료를 제때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국민 불만이 폭발해 14년간 집권한 보수당에 매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심각한 치과 진료 문제가 총선 내내 주요 쟁점이 됐다. 보수당·노동당이 앞다투어 치과 서비스 개선 공약을 내놨을 정도다.
▶영국의 한 한국인 유학생이 밥 먹다 깨진 치아를 치료하려고 인근 치과 다섯 군데에 전화를 걸었지만 “최소 몇 달 기다려야 한다”며 다 거절당했다. NHS 환자로 등록만 하면 거의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등록 자체가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유학생은 결국 진료비 140파운드(약 25만원)를 내고 간단한 처치를 받아야 했다.
▶NHS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영국 복지의 상징이었다. 누구든 무료로 의료 혜택을 주고 비용은 세금으로 부담하니 가난한 서민들에겐 의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NHS 설립을 주도한 사람이 2차 대전 직후 집권한 노동당 정부의 보건부 장관 어나이린 베번이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때부터 탄광에서 일해 열악한 의료 상황을 뼈저리게 겪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의사들의 거센 반대를 뚫고 NHS를 탄생시켰다.
▶영국의 ‘의료 사회주의’ 시스템은 시간이 지날수록 결함을 드러냈다. 정부가 주는 지원금으로는 비용 충당이 되지 않자 의사들이 NHS 환자를 기피하게 된 것이다. 자기 돈 내고 치료받을 여력이 없는 계층이 치과 진료를 기다리다 못해 집에서 치아를 뽑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50대 남성은 인근 100㎞ 이내의 치과 50곳에 환자 등록을 시도했다가 모두 실패하고 치아 5개를 직접 뽑았다고 한다. 펜치나 초강력 접착제 등으로 치아 치료를 했다는 등의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헝가리나 폴란드 등지로 임플란트 등 치과 진료를 받으러 가는 ‘치과 여행’도 성행 중이다.
▶의료 수요는 급증하지만 재정이 악화되는 바람에 세금으로 감당하는 무상 의료는 갈수록 벅찬 지경에 이르렀다. 올 초 영국에서는 전공의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6일간 파업을 벌였다. 전공의 초임이 시간당 15파운드(약 2만6000원)로 식당 웨이터 시급과 별 차이가 없다. 실질 임금이 15년 전보다 26%나 줄었다고 한다. 무상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는 너무 많아 630만명이, 760만건의 무상 의료 등록 대기 중이다. 경제도, 복지도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07.08(월) '나는 절로'

▲김병권 기자
싱가포르도 우리처럼 저출생 문제로 고민이 많은 나라다. 지난해 합계 출산율이 0.97명에 그쳤다. 그런 싱가포르가 저출생 극복 정책 중 하나로 중점을 두는 것이 미혼 남녀 매칭 사업이다. 일찌감치 1984년에 매칭을 주관하는 정부 기관까지 만들었다. 정부가 직접 사업을 진행하다 요즘엔 민간 업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반응도 좋아 연평균 1700명, 많을 때는 연 4000명의 커플이 이 사업을 통해 결혼에 골인한다.

▲일러스트=백형선
▶우리나라에서도 대구 달서구, 성남시, 김해시 등이 남녀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지자체가 참가자를 간단하게나마 검증해주는 점이 장점이다. 프로그램 이름도 각각 ‘고고(만나go 결혼하go) 미팅’, ‘솔로몬(SOLO MON)의 선택’, ‘나는 김해솔로’ 등으로 재미가 있다. 어떤 지자체는 커플로 매칭만 되면 100만원, 부모 상견례를 하면 200만원을 현금 지원하며 중매에 열을 올린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한 해 몇 쌍씩 결혼에 성공하는 커플도 나오는 모양이다.
▶천주교의 한 신부는 피정(일상생활을 잠시 벗어난 종교적 수련) 형식으로 청년들 만남을 주선하는 ‘혼인 성소(聖召) 찾기’ 행사를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같은 종교를 가진 반려자 찾기인데, ‘돌싱’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신부 강의를 듣고 묵상하며 레크리에이션과 와인 파티 등으로 서로 알아갈 기회를 준다. 천주교 부산교구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조계종이 2030 미혼 남녀의 인연을 맺어주는 ‘나는 절로’ 템플스테이가 호응을 얻자 봉은사는 Z세대 대학생들을 위한 ‘대학생도 절로’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나는 절로’는 미혼 남녀가 짝을 찾는 지상파 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패러디한 이름이다. 코로나로 비대면 수업을 오래해 사람 사귀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학생들에게 자연스러운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금욕의 상징인 사찰이 커플 명당으로 재탄생했다. ‘교회 오빠’에 이어 ‘절 오빠’가 곧 유행할지도 모르겠다.
▶매칭 프로그램이 저출생 대책의 핵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연애에서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선호해 거부감을 갖는 젊은이들도 있다고 한다. 주거·교육·일자리 등에서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선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매칭 프로그램은 투입하는 예산·인력 대비 효과가 좋은 사업이라는 것이 전문가들 얘기다. 특히 비혼 출산이 거의 제로(0)로, 결혼해야 자녀를 낳는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해법일 수 있다.
07.09 연판장

▲일러스트=박상훈
후한 황제 헌제의 신하 동승은 권력자 조조를 제거하기 위해 연판장을 만들었다. 유비와 마등 등 반(反)조조 세력이 대거 서명했다. 하지만 조조 암살 계획이 주변의 밀고로 들통나면서 유비를 제외한 700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최초로 기록된 연판장 파동이다.
▶연판장(連判狀)은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달아 서명하거나 도장을 찍은 문서다. 서양에선 원형으로 서명한 연판장을 ‘라운드 로빈(Round Robin·둥근 리본)’이라고 불렀다. 원형으로 이름을 쓰면 그것만으론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피로 서명한 혈판장도 있다. 약자인 농민이나 비주류, 하위직이 권력자나 주류에 대항해 단합된 의견과 힘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권력자에 대한 뒷담화가 공식적·집단적 의견 표출로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서명자가 집단의 이름 뒤에 숨을 수 있어서 불이익을 덜 받을 것이란 심리가 참여도를 높인다. 하지만 하극상으로 받아들여져 피의 보복이나 사회적 파장을 낳은 경우도 많았다.
▶일본에선 막부 시대 영주들의 무리한 세금 징수와 무자비한 처벌 등에 반발해 농민들이 연판장을 돌렸다. 센다이 영주 다테 쓰나무네는 연판장으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연판장 맨 앞에 서명한 사람은 주모자로 몰려 처형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종이우산에 방사형으로 이름을 적어 주모자를 감췄다. ‘가라카사(傘)’ 연판장이다. 영국에서도 해군 병사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라운드 로빈’ 연판장을 돌렸다. 프랑스에서 귀족들이 왕에게 청원할 때도 같은 방식을 썼다.
▶고부 민란 직전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은 사발통문(沙鉢通文) 연판장을 만들었다. 사발을 엎어 원을 만든 뒤 참가자 이름을 적는 사발통문은 원래 보부상들의 연락 수단이었는데 농민군 지도부를 보호하기 위해 차용했다. 조선 말 유생들은 연판장 성격의 유통(儒通)을 돌렸다. 1960년엔 젊은 장교들이 부정선거와 군 부패를 비판하는 연판장을 추진했고, 1999년엔 정권의 시녀가 돼선 안 된다며 검사들이 연판장을 돌렸다.
▶최근 국민의힘 친윤계 당협위원장들이 윤석열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온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당대표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린다고 한다. 작년엔 이들이 나경원 의원 사퇴를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총선 직전 친이재명계 의원들이 이낙연 전 대표의 신당 창당을 반대하는 연판장을 만들었다. 약자와 비주류가 권력에 맞서는 수단이었던 연판장을 오히려 권력 측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국민이 얼마나 공감할지가 관건일 것이다.
07.10 '개근 거지'

▲일러스트=이철원
학교 다닐 때 개근상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선생님들은 여러 상 중에서 개근상이 가장 값진 상이라고 말하곤 했다. 결석이나 지각·조퇴가 있어서 정근상이라도 받으면 오점이 남는 줄 알았다. 꾀병을 부리면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덕분에 초·중·고교 12년 동안 빠짐없이 개근상을 받았다.
▶요즘 학교에선 가족여행 등 사유를 밝히면 일정 기간은 교외 체험 학습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가 있다. 2007년 도입한 이 제도 덕분에 결석 처리에 대한 염려 없이 자녀와 다양한 목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교외 체험 학습은 해당 학년 수업 일수의 10% 이내에서 사용할 수 있다. 연간으로 따지면 15~19일 정도다. 할아버지 제사, 친척 결혼식 같은 가족 행사에 다녀오는 것도 수업에 참여하는 것만큼 좋은 교육이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시대가 변해 요즘엔 출석 자체에 목을 매지 않는 것이다. 개근상 자체도 사라져 가고 있다. 대신 생활기록부에 ‘개근’이라고 써주는 것이 전부다.
▶미국에선 학생들 결석률이 크게 증가해 고민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공립학교 학생 26%가 전체 등교일의 10% 이상, 즉 18일 넘게 상습적 결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상류층은 가족여행에 데려가느라, 저소득층은 통학 여건이 좋지 않다는 등 사정 때문에 결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아침에 일어나 통학 버스를 타고 수업 시간에 맞춰 등교하는 뿌리 깊은 습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학기 중 체험 학습을 가지 않고 꾸준히 등교하는 학생이 ‘개근 거지’라는 놀림을 받는다는 보도가 나왔다. ‘개근 거지’란 학기 중 외국 여행을 가지 못하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를 뜻한다고 한다. 한동안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어려워지자 뜸해졌다가 근래 해외여행이 늘면서 다시 ‘개근 거지’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최근 한 해외 매체는 친구들에게 이 말을 듣고 우는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달래기 위해 저렴한 해외 항공권을 알아보고 있다는 한국 아버지 사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얘기는 일부 학교, 극히 일부 학생 얘기를 부풀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 가족과 떠나는 해외여행도 교육적이겠지만 학생이 성실하게 등교해 공부하며 친구들과 우정을 쌓는 일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다. ‘개근’은 낡은 구시대의 유물일 수 없다. 개근에 담겨 있는 성실, 책임, 인내, 규칙 준수와 같은 덕목은 시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07.11 쌍꺼풀 수술비와 비슷한 뇌 수술 수가

▲일러스트=이철원
“자연분만은 사람이 32만원대인데 강아지는 20만원이고, 제왕절개는 36만원대로 강아지의 50만원보다 적다.” 5년 전 한 산부인과 관련 의학회 회장이 국회 토론회에 참석해 분만 수가 정상화를 호소하며 든 예다. 10일 이 의사에게 연락해 보니 “워낙 아우성을 치니 분만 수가를 좀 인상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했다. 병원 수가는 정부가 정해 주지만 동물병원 비용은 자체적으로 정하는 구조다.
▶수가(酬價)는 의료 행위 대가로 건보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이다. 이 중 환자가 부담하는 것은 20% 정도다. 필수 의료 의사들은 이 수가가 너무 낮아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2022년 서울아산병원 간호사가 근무 중 뇌출혈로 사망했을 때 뇌동맥류 수술 수가가 도마에 올랐다. 이 수술 수가는 290만원대로 쌍꺼풀 수술 비용과 비슷하다. 일본의 뇌동맥류 수술 수가는 1200만원, 미국은 6000만원 정도다. 한국 맹장 수술 수가도 30만~60만원이다. 어떻게 위험한 수술이 쌍꺼풀 수술의 5분의 1일 수 있느냐고 의사들이 한탄한다.

▲Copilot Image Creator
▶봉합 수술 수가는 청바지 꿰매는 비용과 비교되곤 한다. 의사가 찢어진 피부를 봉합하는 수술 수가는 2만~6만원에 불과하다. 요즘 좋은 청바지를 수선하는 데 몇 만원은 들 것이다. 반려견 때문에 상처가 나서 동물병원에 가면 몇 cm만 꿰매도 몇 십만 원이 나올 수 있다. 심지어 봉합 실 가격도 비싼 것은 몇 만원이라 수술 가치가 실에도 못 미치느냐는 한탄도 한다.
▶조선일보에 대장암 수술 수가가 250만원인데 도수 치료(손으로 하는 치료) 10회 비용과 같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장암 수술은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는 급여 항목이지만 도수 치료는 비급여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아과·산부인과·응급의학과 등 생명과 직결된 필수 의료 수가를 진작 현실화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지난 20여년 동안 근본 개선을 하지 않고 찔끔 처방만 반복해 온 복지부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의료계 책임도 크다. 평가 개선을 하려면 의사들이 각 의료 행위 업무량 등을 알려줘야 하는데 의사 진료 과목별 이해관계 때문에 의사협회가 한 번도 제대로 된 조정안을 내지 않았다. 건보료를 한없이 올릴 수 없는 만큼 의료 행위별 높낮이 조정이 불가피한데 무조건 수가만 올리라고 하면 설득력이 없다. 수가 현실화에 어느 정도 국민적 합의가 있는 지금이 호기일 수 있다. 의대 증원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할 필수 의료 수가 인상과 다른 수가 조정에 의료계가 적극 나서야 한다.
07.12 '짝퉁 왕국'의 진화

▲일러스트=이철원
중국 모조 시계의 역사는 10여 년 전, 수퍼 클론(복제품) 무브먼트(시계 구동 장치)의 탄생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시계 무브먼트의 경쟁력은 부품 수는 최소화하면서 시간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다. 스위스 시계 산업의 세계시장 장악은 초정밀 무브먼트 제조 능력 덕분이다. 그런데 중국 가짜 시계 업체들이 천신만고 노력 끝에 롤렉스의 최첨단 무브먼트(모델 4130)를 완벽하게 복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중국 시계 업체들은 자체 브랜드까지 만들어 스위스 명품 못지않은 고품질 시계를 마음껏 찍어내고 있다.
▶2003년 중국 체리 자동차는 대우 마티즈를 그대로 베낀 ‘QQ’ 자동차를 만들어 100만대 이상 판매했다가 대우차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이런 흑역사를 가진 중국 자동차 제조사들이 요즘 세계 최고 품질의 전기차를 속속 내놓고 있다. 중국 샤오미가 지난 3월 독일 포르셰의 ‘타이칸’을 닮은 전기차 ‘SU7′을 선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충전 속도, 시속 100㎞ 도달 시간(제로백) 등 성능 면에서 포르셰를 오히려 능가한다.
▶중국은 2년 전 중형 여객기 C919를 개발, 미국 보잉, 유럽 에어버스에 이어 세계 3대 민간 여객기 제조국 반열에 올랐다. C919는 승객 168명을 태우고 5555㎞를 논스톱 운항하는데, 가격은 20% 이상 싸다. 개발 당시 유럽 에어버스 320 모델을 베꼈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에어버스 입장에선 중국이 워낙 큰 고객이라 항변도 제대로 못했다.
▶이제 ‘메이드 인 차이나’는 더 이상 싸구려 모조품의 대명사가 아니다. 최고급 소비재 시장도 하나둘 점령해 가고 있다. 국내 고가 로봇 청소기 시장은 중국 업체들이 장악한 지 오래다. 국내 소비자들의 필수품이던 일본 발뮤다의 토스터, 무선 선풍기는 중국 샤오미의 가성비 제품에 밀려나고 있다. 무선 청소기, 날개 없는 선풍기 등 혁신 제품으로 한때 중국 시장을 석권했던 영국 다이슨은 성능이 비슷한데 가격은 10분의 1에 불과한 중국 제품에 밀려 직원 3분의 1을 감원해야 하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중국이 베끼려고 기를 쓰는데도 아직 따라잡지 못하는 분야가 반도체다. 미국이 첨단 반도체 생산 공정에 필요한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중국 수출을 막고 있는 것이 결정적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입자 가속기를 활용해 극미세 회로를 새길 광원(光源)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한국 반도체엔 위기가 될 것이다.
07.13(토) 지각사회

▲일러스트=이철원
고려 후기 문신 우탁의 시조 ‘탄로가(嘆老歌)’는 짧은 인생과 이른 노화를 안타까워하는 작품이다.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라고 했다. 실제로 근대 이전엔 노화가 지름길로 왔다. 한 역사학자가 고려 시대 묘비명 수백개에 적힌 생몰년 등을 근거로 평균수명을 추론해보니 39.7세였다. 죽기 전에 사람 구실 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10대 후반에 결혼해 아빠·엄마 되고 30대에 손주를 봤다.
▶한 단체가 몇 해 전 고조부모와 손자녀가 함께 생존하는 ‘5대 가족 찾기’ 행사를 열었다. 평균수명 80대인 장수 시대이니 사례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국에서 22가족만 나왔다. 만혼과 늦은 출산이 이유였다. 조사 당시 한국의 초혼 연령은 이미 서른을 넘겼다. 지난해 한국 여성의 첫 출산 연령은 33세였다.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를 낳으니 수명은 늘어도 3대 가족으로 사는 현상은 그대로인 것이다.
▶한국은 취직·결혼·출산이 모두 늦은 지각 사회다. 그로 인한 변화를 해부하는 기획 연재가 조선일보에 실리고 있다. 40대에 결혼 청첩장을 돌리고, 입사 초년에 가던 육아휴직을 부장이 되어 떠나는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출산도 늦어져 40대 여성 출산율이 20대 초반 여성의 두 배가 됐다. 환갑이 되어도 고교생 자녀 학자금을 버느라 은퇴를 못 한다. 실제로 2006년부터 60대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20대 초반보다 높아졌다. 지각 사회가 한국인의 인생 시계를 바꾸고 있다.
▶구글은 500세까지 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늙은 몸으로 오래 버티는 게 아니라 노화 세포를 없애 젊은 몸으로 오래 사는 길을 찾는다고 한다. 실현되면 인생 시계가 완전히 달라진다. 쉰 살까지 부모 밑에 있다가 환갑에 결혼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50세가 청년 취급 받고 65세가 노인으로 보이지 않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각 사회가 된 이유로 취업난이 꼽히지만 수명 연장도 큰 이유다. 한국은 내년에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우리보다 먼저 그 길에 들어선 일본은 그로 인해 빚어지는 변화를 ‘저속사회’화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자녀의 취직이나 결혼이 늦어져도 초조해하거나 자녀를 닦달하지 않는다. 대신 부모가 전보다 건강하게 현장에서 뛴다. 복지를 비롯한 사회 시스템과 삶을 대하는 가치관도 그에 맞춰 바뀌고 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07.15(월) 兆 규모 결혼식

▲일러스트=이철원
올 초 중국 푸젠성에서 어느 사업가 아들의 초호화 결혼식이 열렸다. 식장 천장은 황금 용으로 꾸며졌고, 킹크랩·불도장 등 고급 식재료가 총동원됐다. 389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3년 전 중국 후베이성에선 신부가 양쪽 손목과 목에 금팔찌 60개를 차고 나왔다. 금 무게만 6㎏에 달했다. 6년 전 중국 정부가 호화 결혼을 단속하겠다고 했지만 호화 결혼식은 여전하다.
▶2015년 호주의 어느 젊은 정치인은 500명가량의 하객이 몰린 결혼식 피로연을 열어 논란이 됐다. 헬기 4대와 수상 비행기가 등장했고, 수억원대 수퍼카와 고급 오토바이들이 인근 도로를 메우면서 주변 교통이 마비됐다. 이 정치인은 부동산 부자로 알려졌는데, 화가 난 지역 주민들은 해임 서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정도의 호화 결혼식도 인도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
▶2012년 인도 부자 프라모드 미탈은 딸 결혼식에 985억원을 썼다. 스페인에서 3일간 열린 결혼식엔 유명 셰프와 집사 등 200명이 동원됐다. 주문 제작한 6단 웨딩 케이크 무게만 60㎏이 나갔다. 그런데 초호화 결혼식을 한 이유가 어처구니없다. 인도 철강 회사 회장인 자신의 형이 딸 결혼식에 720억원을 쓰자 “형에게 지기 싫다”면서 돈을 더 썼다는 것이다. 프라모드는 8년 뒤 보증을 잘못 섰다가 영국 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세계 9위이자 아시아 최고 부자인 무케시 암바니 인도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 회장 막내아들 결혼식이 최근 시작됐다. 사흘간 열리는 결혼식엔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초청됐다. 암바니 가문은 전세기를 100대 이상 빌리는 등 이번 결혼식에 약 8272억원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6년 전 딸 결혼식에 1128억원을 쓰더니 7배 가까이 규모를 키웠다. 인도 유력 가문들 사이엔 초호화 결혼식 경쟁 심리까지 있다고 한다. 앞으로 조(兆) 규모 결혼식도 나올 듯하다.
▶이 결혼식엔 메타 CEO인 마크 저커버그도 초대됐다. 그런데 정작 그는 2012년 결혼식을 집 뒤뜰에서 열었다. 다이아몬드 대신 자기가 디자인한 소박한 루비 반지를 신부 손가락에 끼워줬다. 초청받은 하객 90여 명은 그의 집 뒤뜰로 안내받고서야 결혼식 하객임을 알았다. 피로연엔 근처 식당 음식이 나왔다. 그 조촐함이 호화 결혼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울림을 줬다. 저커버그의 눈에 인도식 초호화 결혼식이 어떻게 비쳤을지 궁금하다.
07.16 역사를 바꾼 사진

▲일러스트=이철원
2차대전이 끝나고 20년 넘도록 독일을 향한 폴란드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런데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1970년 12월 폴란드 방문을 계기로 용서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브란트가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 꿇은 사진의 위력이 특히 컸다. 신문들은 “무릎 꿇은 이는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라고 했다. 당시 폴란드 총리도 눈물을 흘리며 “용서한다. 잊기는 힘들지만”이란 반응을 내놓았다.
▶1945년 2월 미군 해군·해병대는 태평양 작은 섬 이오지마에서 악전고투 끝에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커다란 국기를 군인 여럿이 힘을 합쳐 일으켜 세우는 사진이 미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신문의 접히는 부분에 사진을 배치했다가 항의 전화가 빗발치자 사진 위치를 바꿔 다음 날 다시 실은 곳도 있다. ‘이오지마 깃발’을 기리는 전쟁 기념비가 전국에 세워졌다.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의 상징도 이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네이팜탄이 떨어진 마을을 알몸으로 울면서 벗어나는 소녀 사진은 네이팜탄의 민간인 거주지 사용 금지 국제협약을 이끌어냈다. 내전이 터진 수단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던 독수리를 찍은 사진을 계기로 수단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여론이 크게 일었다. 우리가 아는 9·28 서울 수복 중앙청 태극기 게양 사진은 ‘이오지마 깃발’처럼 나중에 재현한 것이다. 그럴 정도로 사진이 갖는 효과가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유세장에서 총기 피격을 당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찍은 사진이 전 세계에 타전됐다. 오른손을 치켜들고 “싸우자”고 외치는 모습과 그의 뒤로 푸른 하늘 아래 나부끼는 성조기가 19세기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구도와 놀랍도록 흡사해 이목을 끌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크게 고무됐다.
▶정치인들은 이미지가 지닌 힘을 주목해왔다. 2차대전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오지마 깃발의 영웅들’을 귀국시켜 전쟁 자금 모금 캠페인에 활용하려 했다. 트럼프 진영도 이번 피격 사진을 대선전에 쓸 것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파리 시민들이 입헌군주제 확대를 요구하며 봉기했던 1830년 ‘7월 혁명’에 대한 지지를 담은 작품으로 이후 공화제 전환의 기폭제가 됐다. 트럼프가 이런 ‘자유의 여신’과 어울리는 사람인지, 그 반대인지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것이다. 이 사진이 11월 미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07.17 한우보다 비싸진 흑염소

▲일러스트=박상훈
중국 제나라에선 종(鐘)을 만든 뒤 소의 피를 발라 틈을 메웠다. 왕은 끌려가던 소가 눈물을 흘리자 “차마 볼 수가 없다”며 놔주라고 했다. 백성이 “그럼 피를 바르지 말까요” 묻자 왕은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 양으로 소를 대신한다는 이양역지(以羊易之) 이야기다. 맹자는 왕에게 “눈물 흘리는 소만 봤지 양은 못 보셨군요. 소는 불쌍하고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왕은 제대로 답을 못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불쌍히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측은지심을 못 느끼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국제사회의 압박에도 명맥을 유지했던 개고기가 개 식용 금지법 공포로 2027년부터 사라지게 된 데는 반려견 문화 확산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개고기가 사라진다고 보양식 문화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개고기 식당에선 오래전부터 조리법과 육질이 유사한 흑염소를 ‘대체재’로 준비했다. 메뉴판에 개고기는 ‘영양탕’, 흑염소는 그대로 ‘흑염소탕’이라고 적었다. 들깨, 겨자, 식초가 재료인 소스를 함께 사용하다 보니 두 고기를 구별하기 어렵다. 국내 최대 개 식용 시장이었던 성남 모란시장 입구에는 ‘흑염소 특화 거리’라는 조형물이 들어섰다. ‘복날의 제단’에도 개 대신 흑염소가 오르고 있다.
▶최근 흑염소 낙찰가는 50㎏ 1마리에 100만원으로, 2019년 33만원과 비교해 무려 3배로 올랐다. 가격이 생산비 이하로 떨어져 사육을 포기하던 것이 몇 년 전이었다. 지난달 전남 강진의 염소 경매시장에서 ㎏당 평균 가격은 암염소 1만8776원, 거세 흑염소 1만8150원으로 ㎏당 1만5000원 안팎인 한우를 앞섰다. 국내산 흑염소로는 개고기 빈자리를 감당 못 하자 염소 수입도 2014년 1463t서 2022년 3322t, 작년 5999t로 급증세다. 수입 염소의 99%는 호주산이고 뉴질랜드가 나머지다.
▶국내 흑염소 농가들이 ‘포스트 개고기’에 준비가 덜 된 것과 달리 호주는 치밀했다. 호주축산공사(MLA)는 작년 8월 보고서에서 한국의 개고기 반대 여론을 언급하며 “한국 시장에서는 쇠고기·양고기보다 개에 가까운 풍미와 저지방을 지닌 고기가 개고기를 대신할 것”이라며 ‘염소 특수’를 준비했다. 호주는 국내 흑염소의 절반 가격으로 대대적 공세에 나섰지만, 우리 정부와 국회는 ‘개고기 금지’만 신경 썼지 그 이후는 내다보지 못했다. ‘한우’와 수입산으로 나뉜 소고기에 이어 흑염소도 ‘한염소’와 호주산이 경쟁할 모양이다.
07.18 월급이 0.3 달러

▲일러스트=이철원
요즘 북한에서 월급과 배급이 나오는 유일한 업종이 군수 공장이라고 한다. 지난 5월엔 연말까지 8개월 치 식량을 한꺼번에 배급했다는 얘기도 있다. 러시아 특수로 포탄 수요가 폭발한 덕분이다. 전국 주요 공장이 밤낮없이 가동 중이다. 다른 기업소들이 개점 휴업인 것과 딴판이다. 요즘 김정은이 가장 자주 시찰하는 곳도 군수 공장이다. 작년 10차례, 올해 7차례 찾았다.
▶한때 북에선 개성 주민들이 선망 대상이었다. 개성공단에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0여 한국 기업이 지급하던 월급이 1인당 평균 120달러였다. 북 당국이 달러는 다 빼앗고 월급은 북한 돈 등으로 줬다. 그래도 일반 노동자 월급의 1.5~2배였다고 한다. 그 외에 장마당에서 팔면 북에선 꽤 돈이 되는 초코파이를 4개씩 받았다. 이런 노동자가 5만5000명에 달했다. 개성에선 사지 멀쩡한 성인 전체가 공단에서 일했다.
▶북에서 이런 ‘신(神)의 직장’은 희귀하다. 90% 이상 공장·기업소에서 받는 월급은 1달러가 안 된다. 쌀 1㎏도 살 수 없다. 그나마 대부분 월급을 안 준다. 그러니 너도나도 장사에 뛰어든다. 주로 여자다. 남자가 출근을 안 하면 노동단련대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장사로 남편 월급의 10배, 100배를 벌기도 한다. 요즘은 남자들도 직장에 돈을 바치고 몰래 장사한다. 직장이 월급을 주는 게 아니라 노동자가 돈을 바치는 곳이 북이다. 직장도 은근히 부추긴다.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를 ‘8·3 벌이’라고 하는데 과거 가내수공업을 독려했던 ‘8·3 조치’에서 딴 말이다.
▶북한 공무원들은 이마저 어렵다. 쿠바에서 귀순한 리일규 전 참사는 최근 인터뷰에서 “북 외무성 부국장을 할 때 월급 3000원, 0.3달러를 받았다”며 “넥타이 맨 꽃제비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월급만으론 살 수가 없다는 뜻이다. 해외에 나가면 좀 나아지는데 대사가 600~1000달러를 받는다. 대사관 운영비는 자체 조달한다. 김일성 생일 등엔 충성 자금도 상납해야 잘리지 않는다. 밀수 밀매 등 불법이 일상이다.
▶북 외교관들은 마약, 금괴, 위조지폐를 유통시킨다. 아프리카에선 코끼리 상아를, 쿠바에선 시가를 행랑에 넣어 운반하다 적발되는 일이 다반사다. 외교 행랑이 아니라 밀수 행랑이다. 이렇게라도 달러를 벌 수 있으면 다행이다. 밀수하기 쉬운 후진국이 양지, 그렇지 못한 선진국이 험지다. 모든 것이 부조리하고 황당한 곳이 북한이지만, 그중에서도 ‘월급 0.3달러’는 놀랍기만 하다.
07.19 강대국의 정보 단속

▲일러스트=이철원
미 연방 검찰이 2021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친구인 조셉 버락(77)을 ‘외국 대리인 등록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다. 미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아랍에미리트(UAE)를 위한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버락은 억만장자로 2017년 트럼프 취임위원회 위원장도 지냈다. 돈이나 이념 때문에 외국에 정보를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과 동맹인 UAE는 미 공군 기지까지 두고 있다. 그런데 미 정보 당국은 2016년 버락이 이메일로 사업 파트너였던 UAE 외교관과 접촉한 사실을 확인하자 5년간 그를 추적했다. 버락은 평소처럼 미국과 UAE 친구들을 연결해주고 UAE에 대한 미국의 생각 등을 전해줬다. 간첩과는 거리가 멀었는데도 감옥에 갇혔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2017년 일본인 6명이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온천 개발을 위해 측량을 하다가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그들의 노트북 등에 저장된 사진과 지도가 문제였다. 산둥성에 있는 중국 북해함대 사령부의 일부 모습이 사진에 찍혔는데 간첩 증거라는 것이다. 중국 지방 곳곳에는 군부대가 있고 공식 지도에는 위치가 나오지 않아 외국인은 부대인지 농장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중국 법원은 일본인 2명에게 징역 15년과 징역 5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일본 정부의 항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국의 국공 내전 당시 국민당 정보 총책이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자 승부의 추가 공산당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국민당 정보 통제가 느슨해졌고 국민당군 작전 지도가 마오쩌둥 책상 위에 올려졌다. 중국은 지난해 ‘반(反)간첩법’을 대폭 강화했다. 한국 관광객이 압록강변에서 북한을 향해 사진을 찍어도 잘못 걸리면 ‘제3국(북한) 겨냥 간첩’ 혐의를 쓸 수 있다.
▶미 연방 검찰이 미 중앙정보국 출신의 한국계 대북 전문가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외국 대리인 등록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그가 한국에 넘겼다는 내용엔 비밀 사항이 없다. 그런데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밀을 넘기지 않아도 미 정부에 신고 없이 외국 인사와 밥 먹고 선물 받으면 감옥에 간다는 것이다.
▶미국이 ‘외국 대리인 등록법’을 만든 건 1938년이다. 당시는 나치의 파괴적 선전·선동에 대응하려는 목적이었다.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면서 미국 정부와 의회에 선을 대거나 영향을 미치려는 외국에 경고하는 수단으로 이 법을 이용하고 있다. 독일·프랑스·러시아처럼 과거 제국을 꿈꿨던 국가들도 유사한 법률이 있다. 강대국의 정보 집착을 잘 알아야 한다.
07.20(토) '2인자'

▲일러스트=김성규
소련 유리 가가린이 1961년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하자 미국의 한 의원이 “미국이 2등이 됐다”며 “찰스 린드버그의 이름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대서양을 두 번째로 횡단한 사람 이름을 누가 안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인류 두 번째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비행사는 미국 앨런 셰퍼드다. 그 후 달까지 다녀왔는데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다.
▶누구나 2인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그게 지나쳐 파멸을 부르기도 한다. 1994년 릴리함메르 동계 올림픽 출전권을 두고 낸시 케리건과 경쟁하던 미국 피겨 선수 토냐 하딩은 케리건을 습격해 다치게 만들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서 당시 세계 최고였던 에티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와 맞선 일본 선수는 30㎞까지 아베베보다 앞섰지만 결국 역전당했다. 아베베를 이길 수 없다는 좌절감에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많은 2인자가 1인자의 존재에 괴로워한다. 이를 지칭하는 ‘살리에리 신드롬’이란 용어까지 생겼다. 1980년대 영화 ‘아마데우스’는 작곡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해 독살했다는 시나리오로 그려져 있다. 한국 축구 골키퍼 중엔 좋은 실력을 지니고도 1인자에게 밀려 끝내 월드컵 무대에 서지 못한 이가 있었다. 그의 아내가 TV에 나와 남편의 마음고생을 대신 토로했다. 스포츠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몇 해 전 중국에선 전교 2등이던 중학생이 1등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2000년대 중반, 김연아와 함께 세계 여자 피겨 스케이팅을 지배했던 일본의 피겨 스타 아사다 마오가 최근 인터뷰에서 ‘2인자 시절의 괴로움’을 털어놓았다. 2010년 벤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여자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3회 성공시키고도 김연아에게 금메달을 내준 일을 거론하며 “항상 1위가 되고 싶었다. 나는 즐기지 못했다. 은퇴 후에야 스케이트가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자기가 하던 일을 심한 경쟁 탓에 은퇴 후에야 즐긴다면 불행한 일이다. 1968년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2연패한 아베베는 이듬해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런데 “나에게는 아직 두 팔이 있다”며 털고 일어나 장애인 대회에 나갔다. 주변에서 좌절하지 않고 일어선 비결을 묻자 그는 “나는 남과 경쟁하지 않는다. 오직 나 자신과 싸울 뿐”이라고 했다. 어려운 일이지만 거기에 진실이 담겨있다. 곧 파리 올림픽이다. 성취를 위해 땀 흘려왔고 이 순간을 기다린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07.22(월) '역사 유산' 소록도

구약성서 레위기엔 한센병에 대한 인류의 오랜 공포와 혐오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이 병에 걸리면 의사는 물론이고 환자조차 스스로 ‘부정한 자’라고 선포해야 한다. 세상은 그들을 사회 밖으로 내치며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부당한 혐의까지 덧씌웠다. 시인 서정주는 한센인들이 당한 억울한 차별과 그로 인한 울분을 시 ‘문둥이’에서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고 썼다.
▶우리에겐 그런 아픔의 결정체가 소록도였다. 1916년 일제가 이곳에 자혜의원을 세운 뒤 오래도록 금단의 땅이었다. 육지와의 거리가 1㎞가 채 안 되지만 발길이 끊겼다. 환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가 80여 명이 학살당한 비극의 땅이었다. 부모와 자식은 수직 감염이 안 되는데도 강제 낙태와 출생 후 강제 격리 같은 인권유린도 지속됐다. 1년에 한 번 체육대회라는 명목으로 부모 자녀가 상봉하는 날이면 섬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다.
▶사회에서 외면당한 것과 달리 문학과 영화에선 단골 소재였다. 극한 상황을 딛고 인간애를 표현하는 작품에 주로 쓰였다. 영화 ‘벤허’에선 주인공 벤허가 복수심을 버리자 그의 어머니와 누나가 이 병에서 벗어난다. 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선 사회의 냉대와 편견을 딛고 일어서려는 소록도 한센인들의 분투가 그려졌다. 1940년대 초 ‘완치 가능한 질병’이 되면서 사회적 인식에 변화가 생긴 덕분이었다.
▶소록도는 고귀한 인류애를 간직한 섬이다. 수많은 헌신의 사연이 있다. 그중엔 1960년대 초부터 이 섬에서 한센인을 돌본 오스트리아 출신의 두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 노쇠해져 더는 환자를 돌볼 수 없게 되자 올 때 가져왔던 짐만 챙겨 돌아갔다. 그 사연이 최근 다큐 영화로 제작돼 감동을 선사했다. 세계보건기구는 한국을 한센병 퇴치 국가로 분류한다. 의술 발전뿐 아니라 이런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부가 소록도를 ‘보호 지역’으로 지정해 국립공원 등으로 만드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한다. 일반인 출입이 적었던 덕분에 유지된 자연환경을 지키고, 격리·치료 시설을 역사·문화유산으로 보전하겠다는 것이다. 소록도는 무지와 가난, 그로 인한 시행착오로 얼룩진 반면교사이자 소중히 간직할 인간애의 박물관이기도 하다. 독일은 아우슈비츠 역사를 후손에게 가르칠 때 그곳에서 자행된 악행뿐 아니라 그곳에서 한 명이라도 구출하기 위해 노력한 의인의 삶을 함께 가르친다. 소록도도 그런 공간이 되길 바란다.
07.23 기상망명족
1994년 5월 기상청 직원들이 대규모 체육대회 행사를 하는 날 비가 내렸다. 오후 들어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부랴부랴 행사를 끝내야 했다. 공교롭게도 그 전년 체육대회 날에도 큰비가 내렸다. 기상청은 “총무과에서 예보관실과 상의 없이 날짜를 정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기상청 야유회나 체육대회 날엔 비가 내린다’는 말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7월 들어 기상청 예보가 틀리는 지역이 많아지면서 매년 나오는 불만이 또 나오고 있다. 폭우를 예보했지만 정작 비가 내리지 않거나, 비 예보가 없었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 예보도 수시로 바뀌어 “이 정도면 중계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기상청의 올해 상반기 강수맞힘률(비가 온다는 예보가 맞은 비율)도 평균 69%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포인트 하락했다. 최근 장마전선 폭이 극도로 좁아지면서 같은 지역이라도 강수량 편차가 크다는 것이 기상청 설명이다. 레이더 기상 영상을 보면 강우 지역이 점점이 흩어져 있기도 하다.
▶얼마 전부터 한국 기상청 예보가 아닌 해외 날씨 앱을 본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22일 기준 애플 앱스토어 무료 날씨 앱 부문 1위는 체코에 본사를 둔 ‘윈디닷컴’, 3위는 미국 기업인 ‘아큐웨더’이고 우리 기상청의 ‘날씨 알리미’는 6위로 처져 있다. 노르웨이 기상청이 1시간 단위로 예보하는 앱 YR은 7위에 올랐다. 해외 기상 앱을 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기상 망명족’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기상청이 이들 해외 앱의 한국 기상 예보 적중률을 검증해 본 결과 우리 기상 예측이 훨씬 정확했다고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해외 기상 앱들은 한국 기상청이 제공한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그냥 수치 예보 모델을 돌리는 방식이다. 기상청은 다른 나라에는 제공하지 않는 기상 항공기·기상 관측선 등의 특별 관측망 자료까지 더해 예보 모델을 돌리고, 우리 기상 특성을 잘 아는 베테랑 예보관들의 경험까지 더해 예보하기 때문에 가장 정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만 외국 앱의 그래픽 처리 등은 배울 점이 있다고 인정한다.
▶올해 장마는 ‘도깨비 장마’라고 할 정도로 유별나다. 하지만 날씨가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커지니 기상청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관측망을 더 촘촘히 하고, 예측 모델을 더 정교하게 만들고, 최종 결정하는 예보관 자질을 높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기상을 완벽히 예측할 수는 없다. 어쩌면 기상청의 숙명일 것이다.
07.24 바이든

▲일러스트=박상훈
아일랜드 뇌과학자가 “권력을 쥐면 남녀 구분 없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증가한다”고 했다. 이 호르몬은 뇌에 만족감을 주는 ‘도파민’ 분비를 촉진한다. 마약과 같은 효과를 두뇌에 일으킨다. 권력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해 한번 맛을 보면 스스로 끊기가 매우 어렵다. 권력과 마약은 충동을 조절하는 뇌 전두엽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같다. 권력 중독자에게 ‘당선이 어려우니 출마하지 말라’는 것은 마약 중독자에게 ‘약을 끊으라’고 하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9세 때 상원의원이 됐다. 미국 사상 최연소다. 첫 결혼 직후 입양한 강아지 이름을 ‘상원의원(Senator)’으로 지을 만큼 권력 의지가 있었다. 그런데 당선 한 달 만에 교통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었다. 두 아들은 중상을 입었다. 바이든은 “좋은 상원의원은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지만 좋은 아버지는 찾을 수 없다”며 가족을 돌보기 위해 의원직을 포기하려 했다. 주변 설득으로 마음을 바꿨지만 아이들에게 반드시 돌아온다는 걸 확신시키려고 집에서 워싱턴까지 177km 거리를 매일 4시간씩 기차로 왕복했다.
▶바이든은 내리 7선에 성공하며 오랫동안 상원 외교위를 이끌었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코소보 사태에 미군 개입을 이끌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휴가 중에도 바이든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다. 바이든은 김정은·시진핑·푸틴 등을 공개 석상에서 “Thug(깡패 자식)”라고 부를 만큼 독재자들을 혐오했다. 이라크에서 무슬림 죄수 학대를 조장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을 향해선 “패주고 싶다”고 했다. 미국의 고립주의를 경계했다. 전임인 트럼프가 헝클어 놓은 외교·안보 실타래를 하나씩 풀었다. 작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협력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것도 바이든의 ‘동맹 중시’ 덕분이다.
▶엊그제 바이든이 민주당 대선 후보에서 사퇴했다. 바이든은 상원·부통령 선거에서 진 적이 없다. 경선만 통과하면 모두 이겼다. 이번에도 트럼프와 지지율 격차가 벌어지긴 했지만 선거는 100일 이상 남았다. 때로는 극적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 정치다. 그런데도 “당과 국가를 위해서”라며 선거를 접었다. 트럼프를 막기 위해 자신을 포기한 것이다.
▶'어차피 질 선거 일찍 그만둔 것’이라는 폄훼도 있겠지만 권력 중독자들이 득실대는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모습인 것은 사실이다. 링컨은 “사람 됨됨이를 알려면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고 했다. 한때 ‘노추’로 비판받던 바이든의 뒷모습에서 멋진 일몰 풍경을 본다.
07.25 서울의 세계 유명 화랑들

▲일러스트=이철원
20세기 초 미국은 경제 대국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다만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만은 그대로였다. 세계 예술의 수도는 여전히 프랑스 파리였다. 그런데 소련과 나치 독일이 등장하자 몬드리안·샤갈·뒤샹 등 많은 화가가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욕에 도착한 몬드리안은 대도시 빌딩의 기하학적 아름다움과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돼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를 그렸다. 2차 대전을 분기점으로 뉴욕은 파리를 밀어내고 세계 예술의 수도가 됐다.
▶기업가들이 변화에 앞장섰다. 솔로몬 구겐하임과 그의 조카 페기, 섬유재벌인 콘 가문의 클라리벨·에타 자매가 유명했다. 솔로몬은 뉴욕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었고, 페기는 칸딘스키·달리·자코메티·피카소 작품을 수집하면서 자신이 후원하던 잭슨 폴록과 유럽 대가들의 교류에도 정성을 쏟았다. 콘 자매는 마티스를 후원했다. 마티스는 자매가 작업실을 찾을 때마다 “나의 볼티모어 숙녀들”이라며 반겼다. 두 자매가 타계하며 고향 볼티모어 미술관에 기증한 마티스 작품 500여 점은 미국이 자랑하고 세계인이 사랑하는 컬렉션이다.
▶예술 수도 뉴욕의 위상은 미술품 거래 수치로도 드러난다. 국제 아트페어인 아트 바젤은 지난해 전 세계 미술 거래액 678억달러의 45%인 300억달러가 뉴욕에서 거래됐다고 분석했다. 파리의 비율은 7%로 크게 뒤처졌다.
▶서울은 이 조사에서 1% 점유율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순위에 진입했다. 지난 10년 세계 미술시장은 평균 19% 성장했는데 한국은 220%로 쑥쑥 자란 덕분이었다. ‘미술 도시 서울’에 세계 3대 아트페어인 프리즈가 재작년부터 장터를 열었다. 뉴욕타임스는 ‘서울, 미술 세계의 중심 무대 차지’라는 기사에서 “서울은 좋은 컬렉터와 큐레이터, 자본력을 두루 갖춘 아시아 미술시장의 잠재적 허브”라고 평가했다.
▶독일의 유명 갤러리인 마이어 리거가 오는 9월 서울 강남에 문을 연다는 뉴스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서울 강남에 두어 해 전부터 화이트큐브·페로탕·글래드스톤 등이 줄줄이 문을 열었다. 서울 유명 화랑을 돌아보는 갤러리 투어도 생겨났다. 선진국에서나 하던 미술관 투어를 서울에서 하는 세상이 됐다. 한국 미술 시장이 떠오르는 배경에는 홍콩의 상대적 침체가 있다. 막강한 중국 자본으로 여전히 아시아 미술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지만 홍콩국가보안법 이후 기업과 개인의 자유가 위축된 탓이 크다고 한다. 서울은 정반대다. 자유와 발전을 위해 흘린 땀이 ‘예술도시 서울’이라는 값진 열매를 맺었으면 한다.
07.26 습도 100%

▲일러스트=이철원
미 프로야구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 ‘쿠어스 필드’는 ‘투수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해발고도 약 1600m에 자리 잡아 공기 저항을 덜 받기 때문에 타구가 더 멀리 날아가 홈런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구단 측이 도입한 시설이 ‘야구공 가습 저장고’다. 습기를 머금은 공이 사용되면서 홈런 수가 25%나 줄었다.
▶스위스 물리학자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는 최초의 습도계를 개발한 인물로 꼽힌다. 그가 1783년 내놓은 첫 습도계는 머리카락의 수분 흡수 정도에 연동한 도르래와 눈금의 움직임으로 습도를 계산하는 ‘모발 습도계’였다. 비 오는 날 곱슬머리가 고불고불 더 말리고, 펌(파마)한 머리의 모양새가 죽는 것도 공기 중 물 분자가 모발의 케라틴 단백질에 작용해 머리카락이 변형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흔히 말하는 습도는 공기가 최대 머금을 수 있는 수증기량 대비 현재 수증기량의 비율을 말한다. ‘상대 습도’라고 한다. 최대 수증기량이 100인데 현재 수증기량이 80이면 습도가 80%라는 식이다. 반면 절대 습도는 대기 1㎥에 섞여 있는 수증기의 양(g)을 나타낸다. 상대 습도 100%는 현재 기온에서 공기 중 수증기가 포화에 달했다는 의미다. 이를 넘어서는 수증기는 공기가 더 이상 품지 못해 물로 응결된다. 샤워할 때 욕실 벽면에 송골송골 맺히는 물방울이 그런 예다.
▶여름철 높은 습도는 땀의 증발을 저해하며 체온을 낮추지 못해 열사병을 유발한다. 세균 번식을 확산해 식중독과 같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스트레스 지수를 높여 정신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코로나 팬데믹 때는 높은 습도가 바이러스의 감염력을 더욱 높인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인체 건강에 대한 영향뿐 아니라 반도체, 디스플레이 생산 등 각종 산업 현장에서도 높은 습도는 통제해야 하는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서울의 7월 평균 습도가 80%를 넘어섰고, 일부 지역에선 습도 100%를 기록해 ‘사우나’ 같다는 얘기가 나온다. 욕실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는 등의 고충이 쏟아지고 있다. 보통 적도 인근의 동남아나 페루 리마, 두바이처럼 해양 영향권 도시의 습도가 높지만, 최근에는 고(高)습도 지역의 범위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 여파로 수증기가 산업혁명 시대 대비 5% 이상 증가하면서 지구 대기가 갈수록 습해지기 때문이다. 덕분에 제습기 업계는 호황이다. 습도 100%를 향해 다가가는 기후변화가 제습기를 지구촌의 ‘필수 가전’으로 만들 모양이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07.27(토) 센강

▲일러스트=양진경
파리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는 관광 코스가 ‘바토 무슈’ ‘바토 파리지앵’ 같은 센강 유람선을 타고 파리를 선상 관람하는 것이다. 센은 고대 라틴어로 ‘세쿠아나’라 불렸는데 ‘신성한’을 뜻하는 켈트어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다. 그 센강을 따라 에펠탑, 튈르리 정원,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명소들이 펼쳐진다. ‘파리 압축 관광’에 이만한 게 없다. 27일 새벽에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각국 선수단이 배에 나눠 타고 센강에서 수상 퍼레이드를 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강폭이 1㎞ 안팎에 달하는 넓은 한강을 보다가 강폭이 100~200m밖에 안 되는 센강을 보면 “이게 강이야, 개천이야” 하는 말이 나온다. 그래도 길이는 한강의 1.5배다. 프랑스 중동부 발원지에서 777km를 흘러 북부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프랑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리적 중심지다. 센강 가운데 시테섬은 파리의 발상지다.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로마군이 센강변을 따라 쳐들어와 시테섬을 점령했다. 그로부터 파리의 로마 시대가 열렸다.
▶”글을 한 편 완성했을 때, 혹은 뭔가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고자 할 때 센강변을 거닐곤 했다.… 맑은 날이면 포도주 한 병과 빵 한 조각, 소시지를 사들고 강변으로 나가 햇볕을 쬐면서 얼마 전에 산 책을 읽으며 낚시꾼들을 구경하곤 했다.”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보낸 20대를 회고하며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것”이라는 소회를 남겼다.
▶화가나 작가들에게 센강은 낭만의 공간이지만 프랑스 경제에는 오랫동안 물자 수송로, 교통 중심지였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친환경 물류로 센강이 다시 활용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프랑스 유통업체 프랑프리는 파리 시내 점포에 물건을 공급할 때 화물 트럭 대신 센강의 바지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수질 악화로 오랫동안 센강에서는 수영이 금지됐다. 프랑스 정부는 100년 만에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친환경 올림픽’을 목표로 센강 수질 개선에 2조원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철인 3종 중 수영 경기와 10㎞ 마라톤 수영 경기가 열린다는데 올림픽 개막 직전까지도 수질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센강의 수영 경기를 무사히 치르고 내년부터 파리 시민도 센강에서 수영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게 프랑스 정부 목표다. 오염수 오명을 벗고 청정 센강으로 거듭났으면 한다.
07.29(월) "사지가 타들어 가는" 마지막 스퍼트

▲일러스트=이철원
▶마라톤보다 긴 거리를 4시간 가까이 걷는 육상 경보 50km는 ‘죽음의 레이스’로 불린다. 막판 스퍼트 때는 온 힘을 짜내 100m를 17~18초에 주파하는 스피드를 내기 때문에 체력 부담이 매우 크다. 이 종목 한국기록 보유자인 박칠성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45km 지점에서 2위로 올라선 뒤 경쟁자들 막판 추격을 뿌리쳤다. “마지막 2km를 남겨두곤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파이팅’을 외치는 응원 소리가 욕으로 들리더라.”
▶1992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은 ‘한국 쇼트트랙 왕조’의 서막을 연 대회였다. 당시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마지막 주자로 나선 김기훈은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스케이트 날을 들이밀어 역전 금메달을 따냈다. 사전에 준비한 작전이 아니라, 끝까지 사력을 다하다 보니 본능적으로 나온 동작이었다. 김기훈은 “감독도, 동료도, 나 자신도 놀랐다. 그저 무기력하게 지고 싶지 않아 일단 따라가서 뻗은 발에 희망을 걸었는데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0.01초, 0.001초가 승부를 가르는 스포츠에서 선수들은 조금이라도 먼저 골인하려고 몸부림을 친다. 종목마다 다른 결승선 통과 기준에 따라 마지막 순간 손가락을 쭉 뻗거나 가슴을 한껏 내밀기도 한다. 넘어지면서 보드를 밀어넣기도 한다. 결승선 코앞에서 성급한 세리머니를 하는 사이, 뒤쫓아가던 선수의 막판 뒤집기로 우승자가 바뀌는 일도 벌어진다. 농구도, 축구도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는 팀이 승리한다.
▶28일 파리 올림픽 자유형 400m 동메달을 따낸 김우민은 “마지막 50m가 굉장히 힘들었다. 사지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면서도 “올림픽 메달을 위해서는 감당해야 할 무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눈물과 미소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그의 말대로 끝까지 “잘 참고 이겨내서” 4위 호주 선수를 0.14초 차로 제치고 박태환에 이어 한국 수영 역대 두 번째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박태환 현역 시절 트레이너도 “박태환이 막판 스퍼트 훈련을 할 때 주저앉기 직전까지 힘을 짜내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말한 적 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너무 익숙해서 쉽게 들리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하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굳은 의지, 반복적인 다짐이 필요한 일이다. 포기하지도, 자만하지도 않고, 끝날 때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선수가 더 큰 박수를 받아야 하는 이유다.
/최수현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07.30 활과 한국인

▲일러스트=이철원
활이 등장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은 한국에 있다. 울산시 울주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다. 한민족은 신석기 시대, 늦어도 청동기 시대 초기에 이미 활을 쐈다는 의미다. 세계적으로 활 잘 쏘는 나라의 원조로 꼽히는 나라가 서기 2~3세기 중동의 지배자였던 파르티아다. 말 타고 달리며 후방을 향해 활을 쏘는 게 ‘파르티아 사법’이다. 이런 고난도 궁술은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우리도 이를 썼다는 사실이 5세기 고구려 고분 무용총에 그려진 수렵도로 밝혀졌다.
▶고구려 건국 설화인 동명왕 이야기에 ‘주몽이 7세부터 손수 활을 만들었고 살을 날리면 백발백중이었다’고 돼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신궁(神弓)으로 불렸다. 고려 말 황산대첩에서 왜구 대장의 투구 깃털을 활로 쏘아 맞혔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위화도 회군 당시 군사를 돌리는 명분으로 내세웠던 ‘4불가론’에도 활이 등장한다. ‘지금은 장마철이어서 활을 붙이는 접착제인 아교가 풀릴 수 있다’고 했다. 활은 서양인들도 사랑하는 무기였다. 아폴론, 헤라클레스, 아르테미스 등 고대 신화의 주인공은 명궁이기도 했다.
▶서양은 방아쇠를 당겨 쏘는 기계식 활인 석궁이 대세를 이뤄갔다. 스위스 설화에 등장하는 명궁 빌헬름 텔의 무기도 석궁이었다. 살상력이 커서 12세기 교황 이노센트 2세는 “기독교도 간 전쟁에 석궁을 쓰지 말라”고 했다. 오늘날로 치면 대량 살상 무기 취급한 것이다. 우리의 활은 나무로 만든 목궁이나 나무를 여러 겹 덧댄 뒤 무소 뿔로 연결해 장력을 강화한 각궁(角弓)을 썼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 등장하는 편전은 짧은 특수 화살을 쓴다. 오늘날의 총열에 해당하는 ‘통아’에 넣어 쏘면 살상력이 더 커졌다. 근거리에선 철 갑옷을 뚫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의 신무기였다.
▶대한민국이 내세울 것 없던 시절, 활은 국민적 자긍심이 되어 주었다. 1979년 양궁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소녀 궁사 김진호가 금메달 다섯 개를 목에 걸고 돌아오자 온 나라가 들썩였다. 그것은 단지 시작이었다.
▶한국 여자 양궁이 올림픽 단체전 10연패를 달성했다. 올림픽 한 종목에서 한 나라가 한 스포츠를 40년 지배한다는 것은 ‘위업’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초인적”이라고 했다. 이번에 결승에서 한국 선수들은 최종적으로 단 1점을 앞섰다. 그러나 그 1점에 우리 민족과 활의 수천년 인연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이 아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07.31(수) '선거 도둑질'

▲일러스트=박상훈
우리나라는 한때 부정선거가 횡행하던 국가였다. 1960년 3·15 대통령 선거 당시 여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투표지 40%를 미리 이기붕 표로 채워 놓는 ‘4할 사전 투표’, 3~5인조 공동 투표, 검표 과정에서 야당 표를 떨어뜨린 뒤 줍는 척하며 지장을 잔뜩 찍어 무효표로 만드는 ‘피아노표 만들기’ 등 갖은 수법이 동원됐다. 여당 득표율이 99%까지 치솟자, 득표수를 급히 끌어내리기도 했다.
▶30년 전쯤, 한 러시아 정치인이 모스크바 주재 한국 특파원에게 한국 부정선거에서 힌트를 얻은 선거 필승 전략이라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투표 전날 밤, 유권자를 찾아가 A후보가 주는 거라고 하면서 고급 보드카를 뿌린 다음, 1~2시간 뒤 ‘잘못 전달됐다’면서 도로 가져온다. 상대방 표를 내 표로 돌리는 데 이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한국은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거듭났지만, 러시아에선 여전히 부정선거가 횡행하고 있다. 2011년 러시아 총선에서 푸틴 대통령의 정당이던 통합러시아당을 1당으로 만드는 개표 조작 과정에서 7개 정당 득표율이 유권자 수보다 훨씬 많은 146%를 기록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2년 전 러시아가 침공한 우크라이나 지역 4곳 편입을 위한 주민 투표를 강행할 때는 기표를 마친 투표용지를 선관위 직원에게 펼쳐 보이고, 접지도 않은 채 ‘투명 투표함’에 넣는 투표를 진행해 세계를 경악케 했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선 2004년 친러 정권의 부정선거에 국민이 들고일어나 정권을 바꾸는 ‘오렌지 혁명’이 있었다. 출구 조사 결과 친서방파 유셴코 후보가 11% 앞섰는데, 중앙선관위가 친러파 야누코비치 후보가 3% 더 득표했다고 발표하자, 전국적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대법원의 재선거 결정으로 유셴코가 대통령이 됐다.
▶엊그제 베네수엘라에서 좌파 포퓰리스트 마두로 대통령이 저지른 부정선거는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출구 조사 결과, 야당 대통령 후보가 65% 득표율로 마두로(31%)를 압도했지만, 중앙선관위는 “마두로가 51.2%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 국영TV 개표 방송에서 대통령 후보자 5명의 득표율 합계가 109%로 나왔다. 마두로와 야당 후보를 뺀 나머지 후보들 득표율이 소수점 자리까지 똑같은 상황도 있었다. 국민 저항이 거세지자 마두로는 갱단을 진압에 투입하고 있다. 이런 베네수엘라를 무슨 ‘이상향’이나 되는 듯이 떠받든 한국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