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속의 雜事 2024-2/ 04.26 소문난 효자, 페미니스트, 100세 넘겨 고려 최장수… - 06-28 명문가 후손들이 독점한 ‘무관 출세길
韓國史 속의 雜事 2024-2/
04.26 소문난 효자, 페미니스트, 100세 넘겨 고려 최장수…
평범하고도 특별했던 최루백의 삶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옛날 보통 사람의 삶을 복원해보고 싶어 한다. 고려·조선의 보통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조상이고, 현재 우리도 모두 보통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역사학자의 호승지심(好勝之心)을 부추기는 요소가 있다. 남아 있는 사료 거의 다가 소수 지배층의 시각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의 삶은 사료를 거꾸로 읽어야 복원할 수 있다. 어려운 만큼 보람 있는 일이지만, 사료의 한계는 절대로 쉬 넘어설 수가 없다. 특히 고려시대가 그렇다. 고려 앞의 삼국시대는 오히려 『삼국유사』 같은 데 평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설화가 남아 있고, 조선 시대는 유명하지 않은 인물의 일기가 여럿 남아 있지만, 고려는 그런 사료가 없다. 그런 가운데 최루백(崔婁伯)은 참 반가운 사람이다. 여러 사료에 조금씩 나오는데, 그 조각들을 찾아 모으면 고려시대 보통 사람의 삶을 얼마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료 부족 ‘보통의 삶’ 복원 한계
최루백 예외, 그를 통해 추정 가능
“이름 경애…함께 못 죽어 애통”
첫째 아내 죽자 애틋한 묘지명
자녀 유교식 이름, 장례는 절에서
큰딸 남편과 사별 뒤 친정 돌아와
아버지 해친 호랑이 죽여 복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에 있는 최루백 효자비각. 효자 최루백을 기리는 189㎝ 높이의 정려비가 비각 안에 있다.
최루백의 이름은 우선 『고려사』 열전(列傳)에 나온다. 열전이란 개인의 전기를 모아놓은 것으로 고려시대 인물 약 1000명이 올라 있는데, 그 가운데 효자·효녀 17명을 따로 모은 효우편(孝友篇)에 들어있다. 그에 따르면 최루백은 수원의 향리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라고 했다. 이 말은 그의 본관이 수원이며, 조상들은 아직 중앙의 관리가 되지 않은 채 대대로 수원에서 향리 직을 세습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열전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최루백이 열다섯 살 때 최상저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했다. 최루백은 이 호랑이를 잡겠다고 나섰는데, 어머니가 만류하자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라며 도끼를 메고 호랑이를 쫓아갔다. 호랑이가 배가 불러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네가 내 아버지를 잡아먹었으니 나도 너를 잡아먹어야겠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자 도끼로 내리쳐 죽인 다음 그 고기를 담아서 개울가에 묻었다. 또 아버지의 뼈와 살을 골라내서 장사지낸 뒤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다. 상기가 끝나자 묻어두었던 호랑이 고기를 가져다 먹었다.

\▲해주오씨 족도. 집안 계보를 그린 그림으로 최루백의 이름이 나온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익주]
이 일로 최루백은 고려시대의 효자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 뒤 과거에 급제했는데, 향리 집안의 자제가 급제해서 관리가 되는 것은 고려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고려사』 다른 곳에는 1153년(의종 7년) 11월에 기거사인(起居舍人) 최루백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과 1158년 9월 국자사업 최루백이 국자감시의 시험관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거사인과 국자사업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만이 오를 수 있는 관직이고, 외국에 사신 가는 것과 과거의 시험관이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 나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단히 특별한 경력은 아니었고, 최루백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하나의 유물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봉성현군 염씨 묘지명’이라는 유물이 있다. 봉성현군이라는 외명부(外命婦, 관리의 부인에게 주는 관직)를 가지고 있던 염씨(廉氏) 부인의 묘지명이란 뜻이다. 묘지명이란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돌에 새겨 무덤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염씨 부인의 묘지명을 새긴 석판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인데, 이 묘지명을 지은 사람이 바로 염씨의 남편 최루백이었다. 최루백은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을 기리며 이 글을 썼다. 그런데 이 묘지명에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 “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이다”라고 해서 그 이름을 밝혀놓은 것이다.
부인과 딸의 이름을 남기다
고려 500년 역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의 이름은 거의 없다. 여성에게 이름이 있었는지를 의심할 정도다. 하지만 염경애의 존재는 그 의문을 깨끗이 씻어준다. 여성도 이름이 있었지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마침 염경애의 친정어머니 심씨의 묘지명도 남아 있는데, 그에 따르면 심씨의 이름은 지의(志義)이고, 정애(貞愛)라는 둘째 딸이 있었다. 또 염경애의 묘지명에는 귀강(貴姜)·순강(順姜) 두 딸이 있다고 되어 있다. 다른 묘지명들은 모두 딸의 이름을 감추고 첫째 딸, 둘째 딸 하는 식으로 기록한 데 비해서 최루백은 아내뿐 아니라 딸들 이름도 모두 알렸으니, 그 시대의 페미니스트라고나 할까? 심지의·염경애·염정애·최귀강·최순강 다섯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시대 여성 이름 전부라고 하면 좀 놀라운 일일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봉성현군 염씨 묘지명’의 앞면. 고려 사람 최루백의 첫 번째 아내 염씨에 관한 기록인 ‘묘지’와 그를 칭송하는 ‘명’으로 이뤄져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익주]
최루백이 지은 염경애 묘지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황통 6년 병인년(1146년) 정월 28일에 최루백의 처 봉성현군 염씨가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순천원(順天院)에 빈소를 마련했다가 2월 3일에 화장하고 유골을 봉해서 서울 동쪽 청량사(淸凉寺)에 모셨다가 3년이 되는 무진년(1148년) 8월 17일에 인효원(因孝院) 동북쪽에 장사지냈으니 아내의 아버지 묘소 곁이다.” 여기서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불교국가답게 장례의 단계 단계마다 절이 등장한다. 또 빈소를 차렸다가 닷새 되는 날 화장하고 3년 만에 장사지냈는데, 요즘 많이 하는 화장 후 매장 풍습이었다. 장지는 친정아버지 곁으로, 친정어머니 심씨는 남편 곁에 묻혔으니, 부모와 딸이 사후에 한데 모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봉성현군 염씨 묘지명’의 뒷면. 고려 사람 최루백의 첫 번째 아내 염씨에 관한 기록인 ‘묘지’와 그를 칭송하는 ‘명’으로 이뤄져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익주]
묘지명에 의하면, 염경애는 스물다섯에 최루백과 결혼했다. 고려시대 남녀의 결혼 연령을 알 수 없는 우리에게 이 자료는 매우 중요하다. 또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는데, 고려시대의 평균 자녀 수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또한 귀중한 자료이다. 아들들 이름은 위부터 단인(端仁)·단의(端義)·단례(端禮)·단지(端智)라고 지어서 단을 돌림자로 하고 유교의 4덕(四德)인 인·의·예·지를 이름자로 썼다. 그러면서도 4남 단지는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고 했으므로 유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고려사회의 모습이 보인다. 또 큰딸 귀강은 남편이 죽고 집에 돌아와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절대 출가외인(出嫁外人)일 수 없는 고려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최루백의 덤덤한 기록은 고려 사람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준다.
고려시대 여성 재혼도 거리낌 없는 일

▲『오륜행실도』에 실려 있는 고려 사람 최루백에 관한 그림. ‘누백이 호랑이를 잡다(婁伯捕虎)’라는 제목이 오른쪽 위에 보인다. 『오륜행실도』는 세종 때 만든 『삼강행실도』를 기반으로 정조 21년(1797)에 편찬한 책이다. [사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묘지명은 고인에 대한 기록인 ‘묘지’와 고인을 칭송하는 운문인 ‘명(銘)’으로 이루어진다. 최루백은 묘지 뒤에 다음과 같은 명을 붙였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딸이 있어 나르는 기러기 떼와 같으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먼저 떠난 부인을 애틋하게 그리워하며, 함께 죽지 못함을 애석해하는 남편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그런데, 이 남편이 부인이 죽은 뒤 재혼을 했다. 이 사실은 최루백 본인의 묘지명이 남아 있는 바람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묘지명에는 “처음에 ▤▤▤와 결혼해서 4남 2녀를 두었다. 유▤▤와 다시 결혼해서 3남 2녀를 두었다”(▤는 읽을 수 없는 글자)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최루백의 재혼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재혼은,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재혼이 가능하다고 해서 일부다처제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고려는 엄격한 일부일처제 사회였고, 상처 후의 재혼이 오히려 그 근거가 된다.
‘해주오씨 족도’에 최루백이 또 한 번 등장한다. 족도(族圖)란 본격적인 족보가 만들어지기 전에 한 집안의 계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이 족도는 1401년(태종 1)에 만들어졌는데, 조선 전기 가계 기록답게 자기 집안뿐 아니라 처가의 조상까지 기록했고, 그 덕분에 4세 오찰(吳札)의 처증조로 최루백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뜻밖의 곳에서 그 이름을 만나니 반갑기까지 하다. 최루백의 묘지명에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해가 ‘전몽적분약(旃蒙赤奮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갑자(古甲子)로 전몽은 을(乙), 적분약은 축(丑)이니, 을축년 즉 1205년이 되는데, 첫 부인 염경애가 세상을 떠난 지 무려 59년 뒤이다. 염경애의 생년이 1100년이므로, 두 사람이 동갑이면 최루백의 향년이 105세이고 5년 연하라도 100세가 된다. 젊어서 호랑이 고기를 먹어서였을까. 아무튼 고려의 최장수 기록이다. 이렇게 고려 사람 최루백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중앙일보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04-26 1592년 4월 28일 탄금대 패전, 귀 막은 독선의 결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패한 남한강 절벽 탄금대의 ‘열두대’ 바위. 동아일보DB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불과 보름도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경상도를 장악했다.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명성을 날리던 장군 신립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남쪽으로 급파되었다. 신립은 조령이라는 천혜의 관문을 지키지 않고 적들이 소백산맥을 넘어오기를 기다려 탄금대 앞 벌판에 진을 치고 일전을 겨뤘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약 8000명이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조정 차원에서 일본군을 막을 방법이 없었고 닷새 만에 한양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세간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조선이 전쟁에 아예 대비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조는 군사 경험이 있는 장수들을 남방에 배치했는데, 이순신도 이때 선조가 신하들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억지로 전라좌수사에 임명했었다. 이외에도 이때 조정에서 배치한 장수들은 임진왜란 기간 자기 몫을 충분히 해냈다. 그렇다면 이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왜 조선은 초기에 엄청난 패배를 거듭했던가? 그것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대군이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도적 무리가 아니라 정규전을 수없이 치른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하지만 조정은 대군이 넘어와 일시 경상도가 위험에 빠지긴 했어도 북방에서 여러 전투를 치른 용맹한 장수인 신립이 출정하면 해결될 문제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립 역시 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신립은 일본군을 여진족 정도로 생각하는 심각한 오판을 했다. 신립은 일본군이 사용하는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적의 전술 능력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신립의 부하들이 조령에서 방어전을 펼칠 것을 권했지만 신립은 이를 무시했다. 급히 끌어온 병사들이라 산중에서 싸우면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이 신립의 생각이었고, 이 때문에 아예 도망칠 곳이 없도록 강을 뒤에 둔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조선군의 전멸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신립에게는 여러 기회가 있었다. 조령이 어려웠다면 좀 더 물러나 군사를 더 모으고 유리한 지형을 찾아 적의 진입을 막을 수도 있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병력을 더 모으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이런 큰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적이 조령을 넘어왔다는 척후의 보고도 있었는데, 신립은 군심을 어지럽힌다고 척후의 목을 베어버렸다.
신립의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고집불통을 놓고 후대 사람들은 다른 이유를 찾아내려고 했다. 신립에게 버림받아 원한을 품은 여자 귀신이 조령에서 싸우지 말고 탄금대에서 싸우라고 조언을 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전설도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정보를 모으고 주변의 지혜를 빌리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이다. 신립은 그런 일을 게을리 했고 자기 독단에 빠져 부하들과 소통하지 않았다.
바다의 명장 이순신은 신립과 확연히 다른 자세를 가졌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침략을 전해듣고 군사와 병선을 정비했다. 조정의 출정 명령과 원균의 구원 요청이 있었지만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서야 출정했고 그 이후 승승장구했다.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에게 소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소통을 버리면 큰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과거의 승승장구가 미래의 승전을 담보하지 않는다.
동아일보 이문영 역사작가
05.03 퇴계 가족의 애환과 수신제가의 품격
퇴계 이황의 뜻밖의 고백
한국 사람 누구나 퇴계를 알지만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학술의 최고봉을 이룬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 중국과 일본도 인정한 주자(朱子) 이래 최고 학자, 학덕으로 지역의 품격을 높인 스승. 익히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러다 보니 그를 향한 존경이 지나쳐 미화되고 포장되면서 퇴계는 그만 인간의 모습을 탈각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우리가 퇴계를 그리워하는 것은 신이 된 퇴계가 아니라 인간 퇴계의 온기일 것이다. 그가 늘 간직한 ‘고결함을 유지하면서 올바름을 행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것이다.
첫째 부인 요절, 둘째는 정신질환
“부부는 만복 근원 지극히 삼가야”
“세상사 초연했으나 재산은 신경”
1000마지기 농지 결혼 통해 일궈
“여자 성질 나빠도 결별 말아야”
며느리 개가 주선 사실과 달라

▲송재 이우의 초상. 송재는 퇴계의 숙부로 퇴계 형제를 가르쳐 퇴계학의 초석을 마련했다. [사진 이숙인]
퇴계 이황(1501~1570)이 태어난 안동 예안은 그의 조부 이계양이 처가 거주혼으로 정착한 곳이다. 진성이씨 예안파의 입향조가 된 조부는 두 아들 이식과 이우를 두었다. 이식은 전처에서 2남 1녀를, 후처 박씨에게서 4남을 얻었는데, 막내로 태어난 퇴계는 7개월 만에 부친을 잃었다. 퇴계문집에 수록된 ‘상사형(上四兄)’ ‘상오형(上五兄)’이라는 문건은 넷째 형 다섯째 형에게 올린 편지로 동복형 온계(溫溪) 이해와 이징을 가리킨다. 퇴계 성장의 동력이 된 어머니 박씨의 교육열과 가난한 살림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이 형제들을 학자로 길러낸 이는 숙부 송재(松齋) 이우(1469~1517)다.
외할머니 장서가 학문 형성에 큰 역할

▲퇴계 이황의 초상. [사진 이숙인
송재는 형조 참판,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낸 문신으로 퇴계학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서른에 문과 급제한 그가 15여년의 벼슬살이를 스스로 끝내고 낙향한 것은 조카인 온계가 17세, 퇴계가 12세 때다. 퇴계는 “내가 학업에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숙부께서 가르치고 지도해 주신 덕분”이라고 했고, 송재는 퇴계 형제에 대해 “돌아가신 형님에게 이 두 아이가 있으니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이조판서에 추증된 것은 숙부 송재의 현달(顯達, 명성과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로 인한 것이다. 송재와 온계와 퇴계, 진성이씨 예안파 3인방은 급제로 출사하며 재덕겸전(才德兼全)의 정치가로 거듭나 조선의 학술 제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다만 퇴계의 형 온계는 각도의 관찰사와 대사헌을 지냈는데, 권간(權奸)의 모략으로 갑산 유배를 가던 중 사망하였다. 퇴계 50세 때의 일이다. 한편 퇴계의 부친 이식은 첫 부인 김씨의 어머니 의령 남씨로부터 상당한 양의 책을 받는데(『퇴계전서』 46), 이것이 예안파의 학문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퇴계라는 한 거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퇴계는 21세 때 동갑내기 허씨와 혼인을 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부인 허씨는 의령의 부호 허찬(許瓚)의 딸인데, 그녀 쪽의 예천과 의령의 많은 토지가 퇴계로 건너왔다. 그런데 허씨는 27세 때 둘째 아들 이채를 낳고 한 달 만에 숨을 거두는데, 갓난아이는 외가에서 데려가 길렀다. 부인을 잃은 퇴계는 3년 후 권질(權礩)의 딸을 후처로 맞이한다. 권질은 신사무옥(1521)으로 죽임을 당한 권전(權磌)의 형으로 연좌로 예안에 유배 중이었다.
그런데 후처 권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해 가정생활이 어려웠다. 혼인 과정에 여러 설이 있지만 권질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한편 퇴계는 부인 허씨가 죽은 후 안살림을 챙겨 줄 측실을 들이는데, 여기서 서자 이적(李寂)을 얻는다. 훗날 퇴계는 장남 이준에게 서모를 잘 돌보아 줄 것을 당부한다.
며느리 개가 소문 “매우 부끄러운 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퇴계선생 문집. [사진 이숙인]
퇴계가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 이식의 두 아내가 가난한 집의 딸인 데다 일곱 남매가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퇴계는 2명의 아내를 통해 재산이 급격히 늘어나는데, 노비 150명에 농지 1000마지기에 달했다. 전처 허씨로부터 온 토지 외에 후처 권씨로부터 온 풍산의 토지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또 봉화 금씨와 혼인한 아들 이준에 이르러서는 노비 367명에 농지 3000마지기, 집 4채로 불어났다. 이준이 1586년과 1611년에 3남 2녀에게 분급한 내용이다(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2018년). 퇴계는 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들 준에게 피력한 바 있다. “나는 평생 세상사에 초연하게 살아왔지만 나라고 해서 재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학덕의 도야에 집중하되 부차적으로 치산에도 가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태어나 한 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외가 의령에서 성장한 둘째 아들 이채는 혼인 3년 21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48세의 퇴계가 단양군수에 부임한 직후이다. 아들이 떠난 지 6년, 며느리 류씨가 개가(改嫁)를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1554년 2월에 퇴계는 장남 이준에게 편지를 보내 평소답지 않은 매우 격앙된 모습을 보인다. “너는 반드시 사태를 파악하고 속히 저들에게 통보하여 실본(失本)을 하지 말게 하여라.” 실본이란 개가를 가리킨다. 즉 이채의 처가에서 자식 없이 과부로 사는 딸을 개가시키려 하자 퇴계는 이를 막고자 한 것이다. 며느리의 개가는 퇴계에게 “매우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퇴계가 며느리의 개가를 주선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꾸며진 것이다.

▲경남 의령의 덕곡서원.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654년(효종5)에 세웠다. 퇴계의 첫째 부인 허씨가 의령 출신으로 차남 이채가 의령의 외가에서 자랐다. [사진 이숙인]
퇴계의 부부 생활은 어땠을까. 부부 사이를 고민하던 문인 이함형(평숙)에게 퇴계가 보낸 편지가 나왔는데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부부의 인륜은 지극히 소중하기에 정이 흡족하지 못하다고 소박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대의 금실이 좋지 않아 불행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라. 다양한 유형이 있겠지만 대개는 부인의 성질이 나빠 교화가 어렵거나 못생긴 데다 슬기롭지 못한 경우가 있고, 남편이 광포하고 방종한 경우가 있다. 그 가운데 성질이 나빠 교화가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편 쪽에 원인이 있다. 따라서 남편이 반성하여 노력하면 대부분 해결될 일들이다. 또 성질 나쁜 여자라도 큰 죄가 아니라면 잘 선처하여 결별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어서 퇴계는 자신의 경험을 전해준다. “나는 두 번 장가들었지만 줄곧 불행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박하게 하지 않고 노력하여 잘 처신한 것이 수십 년 되었습니다. 몹시 괴롭고 심란하여 번민을 견디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어찌 감정대로 하여 대륜(大倫)을 소홀히 해서 편모에게 근심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퇴계집』 37, ‘여이평숙(與李平叔)’). 예순의 퇴계가 손자 안도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너도 들어서 아는 바이니, 천 번 만 번 경계하거라.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니, 아무리 친하고 가까워도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삼가야 하는 자리이다”(‘여안도손(與安道孫)’). 또 아들 준에게는 “모든 형제자매가 동등하게 대접받아야만 가법이 제대로 선다”고 하는데, 철인(哲人)의 가족 경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는 34세에 출사하여 30년 이상의 세월을 관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그 30년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출처(出處, 나아가고 물러남)를 반복하는데 위기지학(爲己之學, 나를 위한 학문)과 군신지의(君臣之義, 군신의 큰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벼슬살이 중에도 늘 돌아가 이르지 못한 경지를 꿈꾸었다. 1553년 남명 조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43세부터 지금에 이른 10년 동안 세 번 돌아갔다가 세 번 소환되었다고 썼다. 그는 늘 산림으로 돌아가 원 없이 공부하며 일취월장하는 학문과 함께 즐기는 인생을 꿈꾸었다.
삶의 고단함 통해 세계적 지식 유산 남겨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퇴계 묘소의 묘비. [사진 이숙인]
홍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 그 어떤 벼슬을 내려도 제발 자신을 놓아달라며 호소하는 퇴계에게 임금은 제발 돌아와 달라며 애원하는 패턴이 58세에서 67세에 이르기까지 십수 차례 반복되었다. “저로 하여금 길이 물러 나와 허물을 고치고 병을 조리하며 여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퇴계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는데, 또 퇴계를 소환했다. “경연 석상에 두고 그 행동을 보면서 논하는 것을 들으면, 나의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고 나의 마음과 지혜를 키울 수 있으리라.” 68세의 퇴계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임금의 부름에 응해 도성에 들어갔다. 대제학으로 경연에 참여키로 한 것이다. 69세 3월에 왕으로부터 겨우 풀려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 이황, 현인(賢人)의 삶에도 나름의 고단함이 있었다. 만물 존재의 법칙을 밝힌 이기론과 인간 본성을 밝힌 심성론, 실천을 위한 수양론으로 구성된 그의 철학 체계는 인간 퇴계가 고뇌하고 성찰하며 일구어낸 우리의 지적 유산이다.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05-10 왕실 앞 밤새우며 ‘철통 호위’ … 임금의 신뢰·총애 받은 ‘꿈의 직장’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무관 선호도 1위 ‘선전관청’
초기엔 정식기관 지정 안 돼
베일에 싸인 채 왕 신변 보호
수장 정 3품, 부하는 종6·9품
70~80명… 고종 19년에 폐지
선전관청 수장이었던 변경우
“백인걸 후손 쫓아내야” 상언에
정조 ‘임금 업신여긴다’ 판단
되레 변경우 내쳐 서열정리도
# 왕의 목숨을 지키는 사람들
조선 시대 문관들이 가장 선호한 직장이 홍문관이었다면 무관들이 가장 선호한 직장은 선전관청(宣傳官廳)이었다. 관리들의 직장 선호도는 왕과의 거리에 비례했다. 홍문관이 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문관들의 관청이었다면 선전관청은 왕과 가장 가까이하는 무관들의 관청이었던 것이다.
선전관청의 임무는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국왕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었다. 선전관청의 선전관들은 심지어 국왕이 잠든 사이에 침실을 호위하는 역할까지 했다. 국왕은 그들에게 목숨을 맡겨두고 잠드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개국 초에만 하더라도 선전관청을 정식 기관으로 두지 않았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도 단지 8인의 관원 수를 둘 수 있는 곳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그것도 계약직에 해당하는 체아직이었다. 그리고 경국대전 이전에는 아예 선전관에 대한 법적인 규정 자체가 없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자면 조선 초에는 임금의 목숨을 지키고 명령을 전달하는 선전관들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는 뜻이다. 임금이 가장 신임하고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을 관직과 관계없이 임금이 자의적으로 선택해 주변에 배치했던 것이다. 또한 그 자격이나 숫자도 명시적으로 정해놓지 않고 신분에 상관없이 임금이 믿고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지명할 수 있었다. 심지어 환관도 선전관을 지명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선전관은 임금이 가장 총애하고 신뢰하는 무관이었을 수밖에 없었고, 무관이면 누구나 선전관이 되길 원했을 것이다. 이는 곧 선전관이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곧 선전관청이라는 기관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선전관청이 정식 관청이 되면서 선전관은 계약직인 체아직에서 벗어나 정직이 되었다. 선전관청은 ‘속대전’엔 정3품 아문으로 명시되었고, ‘대전통편’엔 선전관청의 임무가 명확하게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대전통편’에는 선전관청의 임무를 형명(形名: 깃발이나 북 등으로 군대의 행동을 호령하는 신호법), 계라(啓螺 : 왕의 거동 때 북이나 나팔을 치거나 불던 일), 시위(侍衛)·전명(傳命, 명령 전달) 및 부신(符信,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신패)의 출납을 장악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선전관은 규정에 따른 이러한 임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임금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고 목숨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한 소임으로 여겼다. 그들은 임금 앞에서 유일하게 칼을 소지하고 근무할 수 있었기에 임금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존재였다.
선전관청의 구성원은 때에 따라 변화가 많았지만, 법상으론 ‘속대전’엔 21인, ‘대전통편’엔 24인, ‘대전회통’엔 25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소수 정예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 정예 무관들은 왕과 나라의 안위를 맡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따라서 무관이라면 누구나 선전관이 되고 싶은 것은 당연했고, 경쟁도 치열했다.
선전관의 숫자는 겸선전관(兼宣傳官)을 합쳐 대략 70인에서 80인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속대전’에 의하면 선전관청의 선전관은 21인이었는데, 수장은 정3품 당상관인 행수 1인, 그 예하에 종6품 참상관 3인, 종9품 참하관 17인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종6품의 문신이 겸하는 선전관 5인과 종6품의 무신이 겸하는 선전관 38인, 종9품의 무신이 겸하는 선전관 12인 등 겸선전관 55인이 별도로 있었다.
선전관청에 관한 세심한 내용들은 선전관청의 일기인 ‘선청일기’에 남아 있는데, 현재까지 존속하는 ‘선청일기’는 정조에서 고종 대에 걸쳐 작성된 106책이 있다. ‘선청일기’가 고종 대까지만 작성된 것은 선전관청이 1882년(고종 19년)에 혁파되었기 때문이다.
# 왕과 힘겨루기도 마다하지 않는 선전관청 행수
정조 8년(1784년) 5월 4일, 병조에서 정조에게 이런 말을 올렸다.
“선전관 백경주는 본청의 가부가 순(順)하지 못하니 예에 의해서 태거하소서.”
태거란 곧 내쫓으란 말이었다. 백경주를 쫓아내는 이유는 선전관에 부합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경주를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는 본청, 즉 선전관청이다. 말하자면 선전관청의 우두머리인 행수가 백경주를 선전관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했고, 이를 병조에서 받아들여 정조에겐 상언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정조는 노기를 드러내며 명했다.
“조금 전 장신(將臣)의 말을 듣건대, 백경주는 바로 백인걸의 9대손이라고 한다. 백인걸이 어떠한 명인인데 8대, 9대는 물론하고, 비록 10대, 20대라 하더라도 그 자손인 자가 어찌 명환(名宦)이 되지 못할 염려가 있겠는가?
문관이면 당년록(當年錄)에 실어야 하고, 무관이면 남항(南行)의 천거에 들어야 한다. 현재 본청의 여러 인원 가운데 현조(顯祖)가 백경주보다 더 훌륭한 자가 있는가? 그 청에서 정축(定軸, 재상을 임명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가부가 어렵다고 하니, 일의 놀라움치고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옛날 선조(先祖) 갑자년에 선전관의 가부가 불순한 일로 인하여 16인이 참여하여 의론하다가 임문(臨門)하여 대처분(大處分)을 한 일까지 있었으니, 어찌 오늘날 우러러 계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선전관의 일이 편당(偏黨)하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처럼 엄격하게 처분함이 계셨는데, 이번에는 본정(本情)이 조금 차이가 있어서 우선은 말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대개 상량(商量, 헤아려 생각하다, 딴생각을 하다)함이 있어서이다. 행수(行首) 변경우를 태거하라.”
정조는 선전관청 행수 변경우가 백경주를 선전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이유를 백경주의 조상 때문인 것으로 파악했다. 백경주의 9대조가 백인걸이라는 인물인데, 백인걸은 중종에서 선조 대에 활동한 뛰어난 문인이었다. 하지만 그 집안이 정조 당대에는 큰 권세를 누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선전관청 행수 변경우는 그의 9대손인 백경주를 남항선전관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에 정조는 무섭게 화를 내며 백경주가 아주 훌륭한 집안의 후손이라며 선전관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되레 백경주를 내치려고 한 선전관청의 정3품 당상관이자 우두머리인 행수 변경우를 내쳐버린 것이다.
정조가 변경우를 내쫓은 것은 변경우가 선전관의 선택은 선전관청의 권한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변경우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면으로 백경주를 선전관으로 임용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백경주를 내쫓으려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백경주가 아닌 변경우를 내치도록 결정한 것이다.
사실, 이 사건엔 왕인 정조와 선전관청 행수 변경우 사이에 보이지 않는 힘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변경우는 비록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선전관을 뽑는 문제는 선전관청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고, 정조는 그런 입장을 가진 변경우를 괘씸하게 여겨 아예 행수 자리에서 내쫓아버린 것이다.
이렇듯 선전관의 자리는 단순히 신하들끼리의 권력 다툼뿐 아니라 왕과 선전관청 사이의 긴장 관계까지 연출할 정도의 민감한 관직이었던 것이다.
■ 용어설명 - 체아직(遞兒職)
정해진 녹봉 없이 계절마다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녹봉을 지급하는 관직. 직전은 지급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거관(去官) 이후 체천(遞遷)될 자리가 없는 경우 체아직에 임명됐음. 조선 시대의 관직에는 실직과 산직이 있었고, 실직에는 녹관과 무록관이 있었는데, 녹관은 정직과 체아직으로 구분됐음.
문화일보박영규 작가
05.11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자결한 충정공… 명함에 유서 남겼어요
민영환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1905년 11월 30일 자결한 민영환. /미국 코넬대
문화재청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유서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할 계획이라고 지난달 11일 밝혔어요. 고종 황제는 민영환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는데요. 오늘날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충정로’(忠正路)는 민영환의 시호를 따서 지은 길 이름입니다. 오늘은 민영환의 삶을 되짚어 보며, 그의 유서가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게요.
민씨 가문에서 태어나 권력의 길을 걷다
민영환은 흥선대원군의 처남 민겸호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외척 민씨 가문이 정국을 주도했고, 민영환은 가문을 배경으로 삼아 출세 가도를 달렸어요.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며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 개혁 정책을 펼쳤는데요. 이때 고종의 최측근이었던 민영환은 여러 요직에 임명돼 경제·기술·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민씨 가문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매우 컸어요. 특히 개항 이후 외세의 경제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농민들의 생활이 나빠졌기 때문이에요. 민중의 분노는 민영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어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전봉준은 민영환과 같은 탐관오리들을 내쫓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거병했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민영환의 출신 배경은 권세를 누리게 해줬지만, 민씨 가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는 상황 속에선 백성에게 원성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민영환은 외교 특사로서 서양 여러 국가를 시찰하고 온 이후부터 다른 세도가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자주 독립을 위한 개혁에 힘쓰다
1894년 일본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민영환을 비롯한 민씨 세력은 중심 권력에서 소외되기 시작했어요. 이때 민영환은 일본의 간섭에 반대하던 정부 내 인사들과 서양 외교관, 선교사 등과 함께 친목 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를 만들어 활동했어요. 민영환은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서양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민영환의 외교 활동에 기초 자산이 되었습니다.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1895) 이후 정동구락부 인사들은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1896)을 주도했어요.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은 무너졌고, 정권을 다시 잡은 고종은 민영환에게 외교관의 역할을 부여했죠.

▲민영환이 자신의 명함 앞면과 뒷면에 빼곡하게 적은, 동포들에게 보내는 유서. 명함은 가로 6cm, 세로 9.2cm 크기입니다. /문화재청
고종은 새로 즉위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축하사절단을 보내달라는 러시아의 요청을 받고, 민영환을 파견했어요. 민영환은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을 거쳐 러시아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대관식에 참석하고, 러시아 근대 시설들을 둘러보고 귀국했죠.
이처럼 민영환은 서양 여러 도시들을 시찰하며 다양한 근대 시설을 견학했고, 이 과정에서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민영환은 고종 황제가 중심이 된 광무개혁에 참여해 군사 개혁과 황제권 강화를 주도했어요. 또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운동을 지지하고, 민중이 함께한 관민공동회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민영환은 황제권의 강화와 함께 민중의 권리 신장을 도모하며, 대한제국을 자주 독립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어요.
“죽어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고, 이에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며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어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요. 하지만 일본 헌병에 체포돼,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석방된 민영환은 기울어진 대한제국의 운명에 크게 한탄했어요.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을 깨우쳐 자유 독립을 회복하는 초석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민영환이 자신의 명함 앞면과 뒷면에 빼곡하게 적은, 동포들에게 보내는 유서. 명함은 가로 6cm, 세로 9.2cm 크기입니다. /문화재청
그렇게 민영환은 1905년 11월 30일 자결했습니다. 그는 2000만 동포와 외국 사절들, 고종 황제에게 보내는 세 통의 유서를 남겼어요. 자신의 명함 앞면과 뒷면에 빼곡하게 남긴, 동포들에게 보내는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음을 기약하는 사람은 삶을 얻는다. 나 민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한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고(死而不死) 저승에서라도 여러분들을 도울 것이니, 동포 형제들이 천만 배 더욱 노력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저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문화재청은 민영환의 유서가 적힌 명함이 그의 정신을 후세에 알릴 수 있는 뛰어난 사료적·문화유산적 가치를 지녔기에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어요.
당시 유서 내용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고 해요. 훗날 국어학자로 활동했던 장지영(1887~1976)은 당시 19세의 나이로 민영환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현장에 모여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통곡을 하는 걸 보며 자신도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고 회고한 바 있어요. 이렇듯 민영환의 자결은 당시 사람들에게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일화는 최초의 민간 검정 교과서로 알려진 ‘유년필독’(1907)에 실려 민족 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하기도 했어요. 이처럼 민영환은 세상을 떠났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유서의 내용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항일 분위기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일보 김성진 서울 고척고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05.16 1392년 5월 4일 정몽주 피살, 선죽교 ‘팩트 왜곡’의 전말

▲정몽주 피살 장소로 알려진 개성의 선죽교. 하지만 실제로는 집 근처에서 살해당했다. 조선 후기 그의 충심을 극적으로 부각하는 분위기 속에서 ‘피로 물든 선죽교’ 이야기가 꾸며졌다. 동아일보DB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 불린다. 공민왕 9년(1360년)에 스물네 살의 나이로 장원급제해 정계에 등장했다. 공민왕 13년에 이성계의 여진족 정벌에 따라갔다. 이후 이성계와 동지가 됐다.
성리학에 해박하여 남들을 압도했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의 해석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뒤에 성리학 책이 중국에서 들어온 뒤 정몽주의 주장이 다 맞는 것을 보고 승복했다.
정몽주는 몸을 사리지 않는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사신으로 명나라로 떠났다가 배가 침몰하는 비운을 맞았다. 정몽주는 바위섬에서 마구를 베어 먹으며 열사흘을 버틴 끝에 구조되었다. 이런 일을 당하면 다시 바다로 나가기가 꺼려질 만도 한데, 그는 일본에 가는 것도 서슴대지 않았다. 정몽주를 핍박하던 권신들이 일부러 그를 사신으로 뽑은 것이다. 당시 왜구가 극성해서 많은 백성이 잡혀간 상태였다. 정몽주는 험난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잡혀갔던 백성 수백 명과 함께 돌아왔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여 실질적으로 고려의 권력을 차지했을 때까지만 해도 정몽주는 이성계 편이었다.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을 바라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왕을 폐위시키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충신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충신이 섬기는 왕을 쫓아내겠는가?
그러나 이성계가 한걸음 더 나아가 왕위를 노리기 시작하자 정몽주는 등을 돌렸다. 이로써 그는 만고의 충신으로 남게 됐다. 새로 왕좌에 앉은 공양왕은 정몽주의 편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오른팔 정도전, 조준 등을 실각시키고 권력의 중심에 섰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태종)이 결국 정몽주를 살해하고 만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살해당했다고 전해온다. 선죽교에는 정몽주가 흘린 피가 돌에 스며들어 있다고도 한다. 돌에 피가 스며들어 수백 년을 내려온다는 게 가능할까? 조선 초의 기록을 살펴보면 선죽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그가 집 근처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성종 때 남효온(1454∼1492)은 개성에 갔을 때 정몽주가 집 근처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됐다는 이야기는 오늘날로 보면 ‘가짜 뉴스’에 속한다. 정몽주라는 충신을 기리기 위해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증거가 필요했고, 그에 적합한 선죽교가 선택됐던 것이다. 대나무가 절개를 상징하기 때문이고, 다리에서 자객이 기다린다는 것은 극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던가. 선죽교 전설이 생겨나서 재밌다고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게 무슨 중요한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다고 해서 엉터리 정보가 사실인 것처럼 돌아다니면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쉽게 음모론에 빠지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 정몽주는 선죽교 이야기를 통해 신격화돼버리고, 이는 정몽주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정몽주는 그저 맹목적인 충신이 아니었다. 정몽주의 복잡한 이면을 선죽교 전설은 묻어버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가짜 뉴스는 언제나 재미 속에 진실을 묻어버린다. 재미있다고 모든 것이 용납될 수는 없다.
동아일보 이문영 역사작가
05.17 결단 미룬 채 변죽만, 효종·송시열의 북벌론 공조
여주에 가면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함께 있어 합쳐 부르면 영녕능인데 대개 영릉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세종의 영릉만 들리고 효종의 영릉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효종은 재임 내내 북벌을 기치로 내세웠기에 세종에는 미치지 못해도 조선의 왕 중에선 존재감이 있는 편이다. 벌(伐)은 천자가 난적을 토벌하는 행위인데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 오랑캐를 치려 했으니 대단한 도전이 아닌가.
이런 대단한 도전인데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당시 조선은 청을 칠만한 국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다. 북벌을 위해 준비한 병력이 고작 1만여 명인데 이 병력으로 청을 치는 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당시 청은 국력이 욱일승천할 때라 북벌이 실제로 이루어졌으면 조선이란 나라를 제대로 보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의 150년 전성기가 효종 10년 때쯤부터 시작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청나라 영토확장의 희생물이 될 수 있어서다.
청 정벌, 달걀로 바위치기인데도
효종 “북벌” 기치, 송시열 불지펴
병자호란 참패 후 민심 무마책
구체적 실행안 없이 독대 논의도
송시열, 효종 정통성 문제삼기도
정조는 송시열 기리는 사당 건립
▲경기도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 전경. 인선왕후의 능을 효종의 능 아래에 조성해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이루고 있다. [사진 김정탁]
그런데도 북벌론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으니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닐까?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한 후 조선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20만~50만명에 달하는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민심을 진정시키고 병자호란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해선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북벌론이라 본다. 그렇다면 북벌론은 이반된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동원된 선전 기제가 아닐까. 정치 세력 산당(山黨)의 영수 송시열도 이런 북벌론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주자 신봉자 송시열, 효종의 대군 시절 스승
▲1785년(정조 9년) 왕명에 의해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여주의 남한강변에 세웠다. 그해에 사액되었는데 이때는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대로사’로 했다가 나중에 ‘강한사(江漢祠)’로 바뀌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시열은 효종의 봉림대군 시절 스승이었다. 당시 봉림대군이 왕이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소현세자가 의문 속에 죽자 졸지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송시열은 신임 왕에게 기축봉사를 올려 “나라를 다스리는데 한 번 정하면 바꾸지 않아야 할 계책이 있는데 정치를 바르게 해 오랑캐를 물리치는 일입니다. 오랑캐 금나라는 우리와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라고 말해 북벌론에 불을 지폈다. 봉사라는 상소 형식도 그렇고,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주장도 주희(朱熹)의 말에서 따왔으니 그는 철저한 주자 신봉자였다.
송시열이 이런 식으로 북벌론에 불을 지폈어도 실제로 청을 정벌하겠다는 건 그의 속내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의 은혜를 잊어선 안 된다는 다분히 명분에 입각한 북벌론이었다. 또 청이 중원을 지배하는 현실을 바꾸진 못해도 중화 문명을 유일하게 계승한 조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에 따른 북벌론이었다. 이런 북벌론만이 광해군의 명·청 등거리외교에 반대해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이데올로그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북벌론을 내세우면서도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유로 송시열은 민생 안정을 들었다. 청과 전쟁을 벌이면 민생이 도탄에 빠지므로 북벌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진정성은 없어 보인다. 당시 대동법은 민생 안정을 위해 시급히 시행돼야 했음에도 산당 대부분이 반대해서다. 산당이 민생 안정을 정말로 바랐다면 대동법 시행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했음에도 이를 반대했으니 민생 안정이란 이유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송시열은 정유봉사를 통해 결국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 정유봉사의 핵심은 북벌보다 양민에 힘쓰고, 사대부를 우대하는 왕도를 기르라는 거다. 또 북벌을 위해 군주로서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수신형가(修身刑家)에 매진하라는 거다. 수신형가 다음에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가 따라 나와 청을 치는 방안이 제시돼야 함에도 이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그러니 북벌은 사실상 그에게서 물 건너갔다. 수신형가 하나만으로 북벌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비난이 그 후 그에게 쏟아진 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효종의 북벌론은 송시열의 북벌론과 과연 달랐을까? 글쎄다. 효종은 정통성 콤플렉스를 지닌 채 왕위에 올랐다. 소현세자가 청과 가깝다고 해 아버지 인조로부터 외면당하자 효종이 소현세자와 그 아들을 제치고 왕이 돼서다. 그러니 왕위 계승 상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려면 효종에게 북벌이 가장 좋은 답이었다. 송시열의 산당도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북벌을 전면에 내세웠다. 본거지 속리산 화양동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새기고, 명나라 제도와 풍습을 따라야 함을 강조한 집단이 산당이 아닌가. 그래서 효종도 북벌론으로 이들을 쉽게 유인할 수 있었다.
효종 후궁 한 명만 두고 북벌 노심초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송시열 초상. 18~19세기 제작된 비단 채색화로 국보로 지정돼 있다. 89.7x67.6㎝.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북벌을 현실에 옮기는 일이 간단치가 않다. 무엇보다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데 당시 군정의 폐단이 커서 군사력 강화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청은 조선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들여다봐 군사력을 무턱대고 늘릴 수 없었다. 효종이 인선왕후 이외에 한 명의 후궁만을 둔 채 북벌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사람들은 제스처라 여겼다. 그렇다면 효종의 북벌론도 명분에 밀려서 꺼낸 정치적 구호가 아니겠는가.
한편 송시열의 산당은 북벌론에선 효종과 호흡이 맞았어도 효종의 왕위 계승 상에 문제가 있음을 내심 지적하고 싶었다. 소현세자가 죽었어도 그의 아들들이 버젓이 살아 있어 봉림대군이 조카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는 건 예법상 있을 수 없어서다. 특히 산당은 주자의 예법을 철저히 따랐기에 국가든 가정이든 장자·장손 세습을 우선으로 한다. 그 후에 벌어진 예송논쟁에서 송시열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효종이 왕이어도 ‘둘째’ 아들로 후사를 계승했음을 굳이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효종은 재위 10년째 되는 해에 송시열과 독대했다. 이때 효종은 “청나라 정세가 심상치 않다. 정예 포병 10만을 길러서 거사하면 청 지배하의 한인(漢人)들이 호응할 것”이라고 전제한 뒤 앞으로 10년 동안의 준비 방안을 물었다. 이에 대해 송시열은 “수신이 요체이니 이를 토대로 국가 기강을 확립하고, 사대부 의지를 결집하면 민생이 안정되고 국부가 달성돼 군대가 양성될 것”이라는 하나마나 한 소리만 늘어났다. 독대는 이런 식으로 서로의 북벌 의지만 확인한 채 끝났는데 독대 후 얼마 되지 않아 효종이 사망하는 바람에 송시열은 북벌의 책임에서 홀가분해졌다.
송시열, 효종 사후 독대 내용 공개
한참 후이지만 독대 내용이 송시열에 의해 공개된 게 미심쩍다. 실속 없는 대책만 늘어놓아 송시열에게 득이 되지 않을 텐데 이를 공개해서다. 혹시 송시열은 북벌을 위해 애쓰는 효종의 모습을 부각해 정말로 북벌을 준비하는 군주로 꾸미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명분상 내건 북벌론을 실제의 북벌론으로 바꾸기 위해 공모한 셈이다. 공자는 『논어』의 ‘자로’ 편에서 “군자는 명분을 바로 잡으면 반드시 말할 수 있고, 말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말에 구차스럽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언행은 구차스럽지 않은가.
효종의 영릉과 가까운 남한강 변에는 송시열을 추모하는 대로사(大老祠)가 있다. 지금은 강한사(江漢祠)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흥선대원군을 대로라 불러서 더 쓸 수 없어서다. 대로사가 여기에 세워진 건 정조가 영릉에 행차했다가 송시열이 여주에 머물 때마다 영릉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후진들에게 북벌의 대의를 설파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사당 건립을 지시해서다. 그런데 영릉을 바라보며 행한 송시열의 충절이 과연 진심이었을까? 진심이었다면 효종을 향해 체이부정을 꺼내 든 건 또 어째서인가?
정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땅의 정치인들도 예나 지금이나 고차원적 술수를 발휘하긴 매한가지다. 그래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겉에 드러난 언행만으로 이들을 평가해 잘 속아 넘어간다. 지탄받아야 할 사람이 괜찮은 인물로, 괜찮은 사람이 지탄받는 사람으로 둔갑하는 것도 이러해서다. 영릉과 강한사 옆을 흐르는 남한강은 이 점을 잘 알 텐데 오늘도 말없이 흐른다.
중앙일보 김정탁 노장사상가
05.25 남북 분단에 '호열자'까지 덮쳤다… 봉쇄된 눈물의 38선
해방 조선을 멈춰세운 1946년 콜레라 팬데믹
▲일러스트=한상엽
미군정이 공포한 ‘군정법령 제1호’(1945.9.24)는 ‘위생국 설치에 관한 건’,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를 폐지하고 ‘위생국’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법령 제2호’인 ‘패전국 정부의 재산권 행사 금지’보다 하루 앞선 조치였다. 이를 통해 미군정은 주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위생과 방역이 군정의 최우선 과제임을 천명했다.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중국 남부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콜레라는 근육 경련이 일어나고 쉴 새 없이 설사를 하는 수인성(水因性) 전염병이다. 일본에서는 ‘고레라(虎列剌·호열랄)’라고 음차해서 표기했는데, 19세기 그 괴질(怪疾)과 함께 병명이 조선으로 전파되면서 조선에서는 잘 쓰지 않는 ‘랄(剌)’자를, 그와 비슷하게 생긴 ‘자(刺)’자로 오독‧오기하면서 “호랑이가 살점을 뜯어 베는 것같이 아픈 병”이라는 뜻의 ‘호열자(虎列刺)’로 부르게 되었다.
남방과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전재민(戰災民), 패잔병 등 대규모 인구 이동이 예정된 가운데, 중국에서 2만여 명, 인도에서 25만여 명이 콜레라로 사망했다. 1945년 11월, 도쿄의 ‘미국 태평양육군 총사령부(GHQ) 군의감실’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예하 부대에 콜레라 확산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이듬해 4월, 주한미군사령부는 예하 각 전술 부대와 군정 부대에 “중국발 입항 선박들에 대한 방역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후 중국발 귀국선을 타고 우여곡절 끝에 조국에 도착한 귀환 동포들은 부산항과 인천항에서 방역을 위해 며칠씩 격리되기 일쑤였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방역망은 경계령이 하달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허망하게 뚫렸다. ‘콜레라 1번 환자’는 상하이발 송환선 ‘윌리엄 왓슨호’를 타고 와 부산항에 내린 황해도 옹진 출신 23세 귀환 동포 김모씨였다. 왓슨호에는 설사 환자가 다수 있었고, 항해 도중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입항 선박에 방역관이 승선해 역학조사를 실시한 후 음성임을 확인하고 승객의 하선을 승인해야 했다. 하지만 부산항 검역관으로 부임한 젊은 미군 중위는 한국인 방역 의사의 반대에도, 간단한 대변 검사조차 실시하지 않고 ‘무증상자’의 하선을 허용했다.
5월 10일 부산항에 도착해서 검역 장교의 ‘실책’으로 15일 보균자 상태로 상륙 허가된 ‘1번 환자’는 경부선 열차를 타고 이튿날 서울역에 도착했다. 역 앞 ‘삼흥여관’에서 1박한 후, 개성과 황해도 연안을 거쳐 18일 아산 백석포에 도착, 1박했다. 19일 백석포에서 100여 명의 승무원과 승객이 탑승한 인천행 정기선 ‘수원환’에 탑승했는데, 선상에서 구토와 설사가 심해 동승자들의 간호를 받았다. 인천 지역 감염병 격리 병원 덕생원에 입원한 ‘1번 환자’는 20일 오후 사망했다(’중외신문’ 1946.5.25). 보균자의 하선을 허용한 것은 경험 없는 미군 검역 장교의 명백한 실책이었다. 하지만 미군정 보건후생국(’위생국’의 후신)은 이후 ‘1번 환자’의 동선을 정확히 파악해 냈다.
5월 15일 ‘콜레라 1번 환자’가 발생한 후, 같은 달에만 부산·목포·서울·대전 등지에서 97명이 발병했고, 그중 38명이 사망했다. 6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수해와 함께,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8선 이북 지역에서도 감염자가 발생했다. 소련군 사령부와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콜레라 비상 방역령’을 발령하고 국경을 봉쇄했다. 겨울이 되면서 위세가 수그러질 때까지, 7개월 동안 남한에서만 1만5644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중 1만181명이 사망했다. 콜레라는 수액만 충분히 공급해 주면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 질병이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구호 물자로 들여오는 수액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사망률이 65%에 달했다.
치료제인 수액의 공급이 부족해 사망률이 급등하자, 미군정 보건후생국은 방역과 예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도 단위로 환자와 사망자 수를 집계해 언론을 통해 공개했고, 전국적으로 무료 콜레라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수액이 부족했던 것과는 달리, 백신 공급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서울에는 해방 전부터 운영되던 백신 생산 시설이 있었다. 한반도에서 유일한 콜레라 백신 생산 시설이었던 삼청동 ‘조선 방역 연구소’ 40여 직원은 하루 10만명분의 백신 제조량을 100만명분으로 늘리기 위해 불면불휴(不眠不休)로 분투했다(‘동아일보’
1946.5.24.). 백신 접종을 독려하기 위해 ‘호열자 예방주사증’ 소지자에 한해 기차와 전차의 탑승과 50인 이상을 수용하는 극장, 유흥업소, 음식점, 공회당 등의 출입을 허용했다.
▲1947년 북한 '강원도 방역위원회'가 제작한 콜레라 예방 포스터 /국사편찬위원회
방역과 위생 선전 활동도 강화되었다. 한건숙 보건위생국장은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호열자는 오염된 물 또는 파리를 매개로 음식을 통해 전염되므로 냉수, 야채, 과일 등 음식에 주의하고, 파리가 끓지 않게 ‘변소’를 청결히 하며, 눈에 띄는 대로 파리를 잡으라”고 호소했다. 그해 여름에는 냉면을 비롯한 ‘날 음식’의 판매와 하천에서의 세탁이 금지되었다.
괴질로 목숨을 잃는 것도 비극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비극은 봉쇄와 이동 제한이 초래했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미소 간에 설정된 38선은 ‘국경선’이 아니었다. 미소 양군은 법령으로 38선 통행을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38선 월경을 막았다. 진주 직후부터 미군정청은 “38선 이북으로의 여행은 자유이지만, 절대 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모순된 입장을 견지했다.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되던 ‘38선 월경’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고, 남북 양측에서 단독 정권 수립 시도가 본격화된 1946년 5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그 명분은 ‘콜레라 방역’이었지만, 찬 바람이 불면서 콜레라의 위세가 한풀 꺾인 이후에도 ‘38선 봉쇄’는 풀리지 않았다.
해방 직후 귀국을 위해 한국인 귀향민 수만명이 모여든 두만강변 투먼(圖們)에도 어김없이 콜레라가 돌았고, 다수의 귀향민이 고향을 코앞에 두고 이역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국경이 봉쇄된 상태로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귀향민들은 인근 한인 촌락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때마침 중국의 토지개혁이 실시되었고, 국경 봉쇄가 풀리기를 기다리던 상당수 귀향민이 토지를 분배받고 중국에 정착했다.
홍수와 식량난에 콜레라까지 창궐하면서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방역을 위해 경찰력을 동원한 강압적 봉쇄와 이동 제한은 미군정에 대한 민심 이반을 초래했다. 좌익 세력들은 그 틈을 교묘히 파고들어 민중을 선동했다. 콜레라의 피해가 유난히 컸던 대구에서는 콜레라 방역이 한창이던 10월 1일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대규모 유혈 충돌이 일어나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좌익의 선동과 성난 민심은 호열자보다 무서웠다.
<참고 문헌>
김춘선, ‘중국 연변지역 전염병 확산과 한인의 미귀환’,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3집, 2007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역사비평사, 2004
임종명, ‘1946년 부산·경남 지역의 콜레라 발병·만연과 아시아’, 역사와 경계 제126집, 2023
정병준, ‘1945~48년 미·소의 38선 정책과 남북갈등의 기원’, 중소연구 제27-4호, 2003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허병식, ‘감염병의 주권과 재영토화: 1946년 콜레라의 발생이 불러온 풍경들’, 한국학연구 제67집, 2022
조선일보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06-05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다

▲임오군란은 부당한 급료 지급과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다. 일본군 교관이 별기군을 훈련시키는 모습. 동아일보DB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이 발발했다. 보통 문제가 아닌 사건이었다. 군인들의 거사였다. 군인들에게 급료가 미지급된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급료가 무려 13개월이나 지급되지 않고 있었다. 멀쩡한 나라라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군란 발생 나흘 전, 한 달 치 급료를 쌀로 지급한다고 하여 군인들이 선혜청에 모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지급된 쌀은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고 양도 적었다. 군인들은 급료 수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선혜청 관리들이 무조건 받아 가라고 윽박지르는 통에 열 받은 군인들이 관리들을 두들겨 팼다. 선혜청의 책임자는 민씨 척족의 우두머리인 민겸호였다. 민겸호는 선혜청에서 일어난 소요를 듣고는 앞장선 군인 네 명을 체포했다. 쌀 지급의 문제를 돌아볼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다. 군인들의 불만은 하늘로 치솟았다.
여기에다 민겸호가 체포된 군인들을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에 놀란 가족들은 통문을 돌려 사람들을 모았고 9일 아침에 종묘 옆에 있는 동별영에 모여 탄원서를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무위대장 이경하나 선혜청 당상 민겸호 모두 이것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말로 할 길이 막히니 이젠 주먹이 나올 차례였다.
“굶어 죽으나 법에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죽일 놈을 죽여서 이 분함을 풀자!”
군인들은 민겸호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민겸호는 재빨리 달아나 찾을 수가 없었지만, 민겸호 집 안을 뒤져 온갖 재화를 털어서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비단, 녹용, 사향 등이 모두 불탔다. 누구도 물건 한 점을 훔치지 않았다.
그동안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도 군인들에게 합류했다. 조직이 갖춰졌다. 제1대는 포도청을 습격해 동료를 구출한 뒤에 민태호 등 민씨 척족의 집을 습격했다. 제2대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공격해 일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를 살해했다. 제3대는 경기감영을 습격해 무장을 강화했다. 제4대는 명성황후가 다니던 절과 무당집 등을 불태웠다.
다음 날이 되자 더욱 커진 무리는 민씨 척족과 가까웠던 흥인군 이최응(흥선대원군의 형)을 살해하고, 대궐로 쳐들어가 숨어 있던 민겸호를 죽였다. 전임 선혜청 당상이었던 탐관오리 김보현도 군인들에게 맞아 죽었다.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계훈의 재치로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다.
군인들에게 급료가 지급되지 않고 있던 것을 고종도 뻔히 알고 있었다. 군인들이 엉터리 쌀을 받고 관료를 구타한 사건 역시 당일 보고되었다. 하지만 9일까지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가 군인들이 폭발한 뒤에야 이경하를 파직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었다. 일찌감치 막을 수도 있었던 것을 외삼촌인 척족 민겸호를 감싸고 있다가 더 큰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작년 여름에 일어난 해병대 제1사단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이 이제 곧 1년이 된다. 부실한 장비를 지급하여 사건이 벌어질 빌미를 제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책임은 누가 지는지조차 아직도 분명해지지 않았다. 이 사건이 1년이나 진실 공방을 해야 하는 그런 일이겠는가? 상관의 명에 의해 목숨을 내놓은 군인의 넋을 기리고 재발을 막기 위해 노력할 때다. 실체적 진실이 빨리 밝혀지길 기대한다.
동아일보 이문영 역사작가
06.07 귀국길 백범이 눈물 흘리며 참배…숨은 독립운동가 백용성 스님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았다. 석 달 뒤인 11월 23일 백범 김구와 김규식 등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 1진이 귀국했다. 12월 1일에는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등 임정 요인 2진이 귀국했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된 조국에서 임정 요인들은 무슨 일을 먼저 했을까.
귀국한 지 열흘쯤 됐을 때였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 요인 30여 명은 12월 12일 서울 종로의 대각사를 찾았다. 해방 조국에서 급히 인사를 해야 할 인물이 있었다. 5년 전에 입적한 백용성(1864~1940) 스님이었다. 김구는 이시영ㆍ조소앙ㆍ이범석ㆍ유림ㆍ황학수ㆍ김창숙 등과 함께 대각사 부처님께 예배한 뒤 용성 스님의 영전에 참배했다.

▲1945년 12월 18일 서울 대각사를 찾은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을 환영하는 저녁 식사 자리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흥교 스님은 “이 광경을 보려고 당시 시민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 건물 한쪽이 무너질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당시 김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용성 큰스님께서는 독립운동 자금을 계속 보내주시어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를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중국 상하이로 보내주시어 만대 위국충절 순국으로 독립운동의 사표가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아울러 용성 스님이 쌀가마에 돈을 넣어 만주로 보내주어 요긴하게 썼다는 일화도 꺼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은 꽤 있다. 그런데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귀국과 함께 서둘러 용성 스님의 영전부터 찾았다. 여기에는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백용성의 생애’가 숨어 있다. 용성 스님의 손상좌인 도문 스님(89, 조계종 원로의원)은 온갖 자료와 함께 스승(동헌 스님)과 집안 어른들에게서 직접 들은 ‘스승의 스승(용성 스님)’이 남긴 독립운동의 족적을 세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백범 김구를 비롯해 조소앙ㆍ이시영ㆍ김규식ㆍ이범석 등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 30여 명이 귀국 후에 서울 대각사를 찾았다. 용성 스님 영전에 독립운동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사진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마침 올해는 백용성 스님의 탄신 160주년이다. 탄생일인 오는 6월 13일(음력 5월 8일)에는 전북 장수의 죽림정사(용성 스님 생가터)에서 용성 스님의 유훈을 따르는 ‘대한민국 800년 대운을 여는 만인대법회’가 열린다.
#수운 최제우와 혜월 스님의 인연
구한말은 격동기였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전북 남원 교룡산성의 불교 암자에 숨어서 동학사상을 정리한 포덕문(布德文)과 논학문(論學文)을 썼다. 암자의 이름은 용천사 덕밀암(德密庵). 당시 덕밀암에는 용천사 조실인 혜월 스님이 있었다. 혜월이 머무는 조실채의 이름은 ‘은적당(隱蹟堂)’. 지금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는 은적당을 최제우 대신사의 피신 성지로 꼽는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백용성 스님이 14세 때 불교에 귀의한 곳이 바로 덕밀암이다. 용성의 스승은 혜월 스님이었다. 훗날 혜월은 수운을 숨겨주고, 함께 개벽의 문호를 열었다는 이유로 승적이 박탈된다. 수운과 혜월의 동지적 인연은 나중에 각자의 손자뻘인 손병희(천도교 3대 교주)와 용성 스님의 항일 연대로 이어진다. 돌아보면 1919년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가진 ‘3ㆍ1 기미 독립선언’의 모태가 된 셈이다.
#독립운동가 이전에 대선사
용성 스님은 출가 후에 27년간 제방 선원을 돌면서 수도에 매진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이전에 대선사였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많은 이들이 용성의 제자였다. 제자들의 깨달음을 체크하며 주고받은 선문답 일화는 지금도 한국 불교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

▲독립운동가 이전에 대선사였던 백용성 스님. 조계종 최고지도자인 역대 종정 중에서 많은 이가 용성 스님의 제자였다. 사진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1910년은 경술국치(한일병합)의 해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겼다. 용성 스님은 곧장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했다. 세상을 향해 뛰어든 셈이다. 이후 6년간 조선 팔도를 돌았다. 정승이나 판서, 도감사와 고을 수령 방백을 지낸 이들을 만나서 독립운동 참여나 독립자금 후원을 독려했다.
용성 스님의 증손상좌인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은 “시대 사조만 탓하는 그들을 보며 용성 스님은 대한제국의 부흥이 아니라 개벽의 꿈인 대한민국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며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왕이 나라의 주인이지만,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다”고 말했다.
#3ㆍ1 독립선언 민족 대표, 왜 33인인가
전국을 돌던 용성 스님은 1918년 서울로 돌아왔다. 천도교의 손병희 교주를 찾아갔다. 독립선언 거사에 대해 제안할 참이었다. 알고 보니 천도교는 이미 준비가 돼 있었다. 천도교의 독자적 차원이었다. 용성 스님은 “강고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사람의 힘만으로 안 된다. 33천(불교적 우주관의 하늘)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대표는 꼭 33인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손병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도교 30인에, 불교 3인으로 하자고 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천도교의 교세가 압도적으로 컸다.
용성 스님은 “천도교 측에서 독립선언을 할 준비가 다 돼 있음은 알겠다. 그런데 교주님이 불교계를 포용하듯이 기독교계 대표도 포용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국 동등하게 천도교 11인, 기독교 11인, 불교 11인으로 결정 났다. 그런데 기독교 장로교와 감리교 측에서 각각 대표 11인씩 요구했다. 도문 스님은 “당시에는 하나의 기독교가 아니었다. 장로교와 감리교를 각각의 종교로 봤다. 33인이면 어떻고, 44인이면 어떠냐는 주장도 나왔다. 결국 불교에서 양보했다. 백용성 스님과 한용운 스님, 두 분만 불교 대표로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결국 천도교 15인, 장로교와 감리교 합해서 16인, 불교 2인이 참여했다.

▲조선총독부 경기도 경찰부 일제감시대상 인물 카드에 올려진 용성 스님. 출가 전 속명이 백상규다. 사진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일회성 행사일 수도 있었다.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종교계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끝날 일이었다. 용성 스님은 그걸 우려했다. 그래서 동헌 스님을 시켜 일본헌병대에 신고하게끔 했다. 도문 스님은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를 부른 뒤 민족대표가 잡혀가야 했다. 고초를 치러야 했다. 그래야만 민(民)이 일어설 거라 봤다”고 말했다.
용성 스님은 미리 태화관 기생들에게 민족대표의 신발과 두루마기를 감추라고 지시까지 해놓았다. 헌병대가 오기도 전에 모임이 파하면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민족대표들이 만세를 부를 때,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모두 잡혀갔다. 이를 계기로 3.1 만세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 사건으로 용성 스님은 형량 1년 6개월을 포함,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2개월 옥고를 치렀다.
#용성 스님, 북간도로 가다
형무소에서 용성 스님은 충격을 받았다. 기독교 신자가 쓰는 한글로 된 성경과 찬송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출옥 후에 용성 스님은 삼장역회를 조직해 숱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일반 신도에게 참선을 지도하는 등 불교의 현대화, 불교의 대중화에도 힘을 쏟았다. 경남 함양에 농장 화과원도 세웠다. 이런 마을이 곳곳에 세워져야 독립을 위한 근거지가 될 거라 생각했다.
일제는 왜색불교를 강요했다. 조선총독부는 주지 임명권을 틀어쥐고 협박했다. 결혼하지 않은 독신 비구에게는 주지를 맡기지 않았다. 용성 스님은 기존의 불교를 버리고 대각교를창교했다. 일제는 사이비 시비를 걸었고, 결국 대각교는 해체됐다.
용성 스님은 1922년 만주 북간도로 갔다. 연길의 명월구에 수백만 평 규모의 농장도 세웠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얻은 승리의 기쁨도 잠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은 거의 궤멸했다. 뿔뿔이 흩어진 독립군을 모을 근거지가 필요했다. 용성 스님의 명월구 농장이 그 중심에 섰다.

▲용성 스님의 손상좌인 도문 스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도문 스님은 용성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의 집안은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독립자금을 후원하는 역할을 했다. 중앙포토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용성 스님의 그 엄청난 독립운동 자금은 대체 어디서 났을까. 전라도 만석꾼 집안(임동수)과 독실한 불교 신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황실 상궁 몇몇이 후원했다. 용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와 만주 일대 독립군을 적극 후원했던 만석꾼 임동수의 증손자가 도문 스님이다.
#윤봉길 의사에게 계를 주다
윤봉길 의사는 어떻게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게 됐을까. 그 배후에 용성 스님이 있다. 1930년 서울 대각사에서 윤봉길은 임철호(도문 스님의 부친)와 함께 삼귀의 오계를 받았다. 신라 원광 법사가 화랑에게 주었던 세속 오계와 비슷했다. 용성 스님은 계를 주면서 윤봉길에게 “상하이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가서 신명을 바쳐 애국충정의 길을 가라”고 했고, 만석꾼 임철호에게는 “아들을 낳아 출가시켜 법을 계승하라”고 했다. 그들이 받은 세간 오계 중 첫째 계명이 ‘나라에 목숨을 바쳐 충성하라’였다.
법륜 스님은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곧장 상하이로 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만주로, 다시 다롄을 거쳐 칭다오로 갔다. 거기서 1년간 세탁소 노동자로 일했다. 그런 뒤에 신중을 기해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 과정을 만석꾼 임동수가 지원했다”고 말했다.

▲법륜 스님은 용성 스님의 증손상좌다. 용성 스님의 숨겨진 독립운동 활약상과 공적을 되짚고 있다. 거기에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백성호 기자
용성 스님은 1만 명의 대한의사군을 양성하고자 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 중 연합군을 창설해 국내로 진격할 계획도 품었다. 그러나 일제가 심어놓은 밀정인 제자의 배신으로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조직은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용성 스님은 1940년 입적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강대국의 종속국이 되지 말고, 주인다운 주인국이 되어라”“사분오열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라.”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메시지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06.11 천문과 시각을 동시에 알린 조선의 첨단 시계들
‘경회루 남쪽에 집 3간을 세워서 누기(漏器)를 놓고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였다. 동쪽 간 사이에 자리를 두 층으로 마련하고 3신이 위에 있어, 시(時)를 맡은 자는 종을 치고, 경(更)을 맡은 자는 북을 치며, 점(點)을 맡은 자는 징을 친다. 12신은 아래에 각각 신패(辰牌)를 잡고, 사람이 하지 아니하여도 때에 따라 시각을 보(報)한다.
천추전 서쪽에 작은 집을 짓고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하고, 종이를 붙여서 산 모양을 만들어 높이는 일곱 자 가량인데, 집 가운데 놓고 안에는 기륜(機輪)을 만들어서 옥루수(玉漏水)를 이용하여 치게 하였다. 오색 구름은 해를 둘러 나들고, 옥녀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며, 사신무사(司辰武士)는 스스로 서로 돌아보고, 4신과 12신은 돌고 향하고 일어나고 엎드린다. 산 사면에는 빈풍(豳風) 사시(四時)의 경(景)을 진열하여 백성의 생활이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였다. 기기(欹器)를 놓고 누수의 남은 물을 받아서 천도의 영허(盈虛)하는 이치를 살피게 하였다.‘ (조선왕조 세종실록 77권, 세종 19년 4월 15일에 적힌 보루각 자격루와 흠경각 옥루에 대한 기록)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된 장영실의 자동 물시계 흠경각 옥루(앞쪽)와 보루각 자격루. 프리랜서 김성태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精髓)가 한자리에 모인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의 한국과학기술사관이 3년간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다음 달 17일 문을 연다. 조선의 주요 과학기술 문물들이 선별됐지만, 전시의 으뜸은 세종 당시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자동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다. 두 물시계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처음이다.
둘 다 조선 최고의 과학기술인 장영실의 작품이지만, 쓰임이 다르다. 자격루는 백성을 위한 국가표준시계다.
경회루 인근 보루각에 설치됐던 자격루가 시간을 알리면, 문루에서 같은 신호를 받아 큰 종과 북으로 서울 시내에 시각을 전파했다. 이전에도 물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록은 자격루 제작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께서는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잘못 알리게 되면 중벌을 면치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장영실에게 명하여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길 시보인형을 나무로 만들었으니, 이에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리므로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 (세종 16년, 1434년 7월 1일)
국립중앙과학관 3년 리모델링
한국과학기술사관 다음달 개관
자격루ㆍ옥루, 처음으로 한 자리에
“15세기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반면 옥루는 임금만을 위한 화려한 천문 물시계다. 왕의 침전 바로 옆 흠경각에 옥루를 두고 언제든 시간을 알 수 있게 했다. 둘 다 원형은 남아있지 않다. 자격루만 일부(물 항아리와 수수호 부분, 국보 229호)가 남아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2007년 남문현 건국대 교수팀이 원형을 복원, 2022년까지 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해왔다. 옥루는 조선 중기에 소실된 이후 문헌상으로만 남아있다가 2019년 9월에서야 국립중앙과학관에서 복원했다.

▲국립중앙과학관 한국과학기술사관 초입에 전시된 소간의와 간의대. 세종의 천문관측 기기 개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4계절 변화 보여주는 산 모양 시계
지난 7일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2층 한국과학기술사관을 찾았다. 개관을 한 달여 앞두고 있었지만, 전시물과 안내판 설치를 마치고 시스템 점검 등 안정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자격루와 옥루는 첫 번째 주제인 ’천문역법 존‘(zone)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2022년 서울 고궁박물관을 떠났던 높이 4m50㎝의 중후한 자줏빛 자격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물항아리 구조물이 오른쪽으로 연결돼 시간을 알리는 장치들을 움직인다. ’탁, 또르르…‘ 구슬이 목판 위에 떨어져 둔탁하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누각 위 인형이 움직이며 징과 북을 울렸다.
자격루 바로 옆엔 화려한 천연색으로 단장한 높이 3.3m의 옥루가 우뚝 서 있다. 산의 사면과 그 아래 들판은 4분의 1씩 구획을 나눠 봄·여름·가을·겨울의 자연을 모두 담고 있었다. 겨울의 산과 들판엔 흰 눈이 쌓였고, 가을은 황금 들판과 붉은 단풍으로 단장했다. 산을 둘러싼 들판엔 12지신상이 누워있다가 때가 되면 일어나고, 동시에 땅속에서 12옥녀가 시패(時牌)를 들고 올라와 시간을 알렸다. 산꼭대기엔 금빛 혼천의가 해와 달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물이 수차를 돌리고, 연결된 기륜이 작동하면서 인형과 혼천의를 움직이는 구조다. 옥루엔 과학기술과 아름다움·철학이 모두 담겨있었다. 봄에 모내기를, 가을에 추수하는 모습을 구현한 옥루를 보면서 백성을 생각한 세종의 마음이 느껴졌다.

▲조선의 최첨단 무기 신기전. 일종의 다연장 로켓포다. 프리랜서 김성태
신기전 등 조선의 첨단 무기들
옥루 복원을 주도한 윤용현 중앙과학관 박사는 ”흠경각 옥루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자동물시계가 어우러진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이자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천문시계“라며 ”세종이 1432년부터 7년에 걸쳐 진행한 대규모 천문의기 제작 사업이 완성된 것을 천명한 기념물인 셈“이라고 말했다. 윤 박사는 ”장영실이 세종으로부터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종 3품 대호군에 오른 뒤 임금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만든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과학기술사관엔 천문역법을 필두로, 인쇄·지리·군사·금속·요업·근현대과학 순으로 전시 주제가 이어졌다. 천문역법 존은 해와 별을 관측하는 소간의(小簡儀)와 간의대, 해 그림자로 절기와 시간을 알 수 있게 한 규표(圭表)로 시작했다. 천문관측 기기의 기본으로, 1432년 세종이 정인지 등에 ”천문의기를 만들라“고 명한 이후 첫 번째 작품이다. 태조 4년 때 한반도의 밤하늘 별자리를 돌에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 복제), 자격루와 옥루, 천체 관측과 시간을 같이 볼 수 있는 송이영의 혼천시계(국보 230호 복원), 홍대용의 혼천시계(복원) 등도 볼 수 있다.
인쇄코너에는 팔만대장경의 인쇄본과 월인천강지곡 조판 금속활자 등 우리 민족의 활자 역사가 전시돼 있다. 지리코너에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다양한 지도와 조선시대 거리 측정 수레였던 기리고차(記里鼓車) 등을, 군사코너에는 로켓형 발사 무기인 신기전, 시한폭탄의 일종인 비격진천뢰 등 조선의 다양한 첨단 무기들을 관람할 수 있다.

▲조선시대 거리 측정 수레였던 기리고차(記里鼓車). 말이 수레를 끌고가면서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프리랜서 김성태
권석민 국립중앙과학관장은 ”자격루와 옥루가 제작된 15세기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며 ”1983년 일본에서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전에 따르면 1400~1450년의 주요 업적으로 한국이 29건, 중국 5건, 일본 0건이며, 동아시아 이외의 전 지역이 28건으로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 조선 과학기술의 자랑이라는 자격루와 옥루는 왜 대전 중앙과학관에만 있을까. 원래 있던 경복궁은 물론, 대통령실·국회·인천공항에도 전시할 만하지 않을까. 세종대왕 동상이 앉아있는 세종대로엔 왜 세종문화회관만 있고, 세종과학관은 없을까. 어젠다는 실천하는 사람의 몫이다.
대전=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06.13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고하 송진우 다시 보기
“송진우는 잃어버린 독립운동가”
⊙ 해방 공간 좌우 세력이 충돌하면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의 암살로 이어지는 비극 낳아
⊙ 《해방 전후사의 인식》 광풍… 송진우·김성수를 토착 세력으로 몰고 여운형의 건준위에 정통성 부여

▲국가보훈부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작년 2월 28일부터 한 달여 동안 광화문 광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광판을 통해 고하 송진우 선생의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고하 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
민족주의 사학의 거인이었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년)가 “정부도 없고 엄혹한 감시와 압박의 일제 시대에 오로지 혼자 《동아일보》를 짊어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한 몸 바친 인물은 고하(古下)밖에 없다”고 칭송했던 위대한 독립운동가 송진우(宋鎭禹·1890~1945년).
그는 왜 현대사의 주역에서 사라졌을까?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뭘까.
고하는 김성수·현상윤과 함께 3·1운동을 처음으로 모의한 중앙학교 3인방이자 《동아일보》 사장으로, 1920~30년대 언론·문화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온몸으로 투쟁한 인물이다.
고하는 해방 직후 좌우 이념의 갈등이 극심하던 시기에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둔 국가 건설에 구심점 역할을 했던 민족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였다.
재단법인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인 김형석 박사는 최근 《고하 송진우와 민족운동》(동문선 펴냄)을 출간, 송진우의 굵고 짧은 일평생을 추적했다. 그리고 한국 좌익 세력의 가치관과 역사관에 큰 영향을 끼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가져온 역사적 왜곡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중앙학교의 송진우 역할론’이 ‘신한청년당의 여운형 역할론’으로

▲김형석 이사장이 쓴 《고하 송진우와 민족운동》(동문선)
김형석 이사장에 따르면 3·1운동의 진원이 중국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이란 연구 성과가 공론화되면서 중앙학교의 송진우 역할론이 신한청년당의 여운형 역할론으로 바뀌어졌다. 아울러 무장투쟁만이 독립운동의 ‘절대선’으로 인정받는 풍조 속에 교육·언론·문화운동은 부르주아 민족운동으로 폄훼되고, 실력양성운동으로 구별되어 독립운동의 영역에서 배제됐다.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3·1운동에는 두 가지 성격이 복합되어 있었다. 하나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종교와 직업을 초월한 민족 대단결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농민·노동자 등의 기층 민중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시위운동을 확산시켰다는 측면이다. 이 때문에 우파에서는 민족 대단결을 중시하면서, 민족 대표 33인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반면에 좌파에서는 3·1운동을 계급투쟁으로 보고 농민·노동자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3·1운동을 실패한 독립운동으로 민족 대표 33인은 투항주의자로 비판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여운형 중심으로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가 9월 6일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주도하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대해 송진우를 비롯한 우파 인사들은 9월 7일 국민대회소집준비회를 개최하고, 3·1운동으로 구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임정봉대론을 주장했다. 이로써 해방 공간에서는 새 국가 수립의 주체가 누가 될 것인지를 두고, 좌우 세력이 충돌하면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의 암살로 이어지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해방 공간에서의 혼란은 1980년대 들어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우리 사회 저변에 광풍을 몰고 오면서 재연되었다. 이들은 해방 직후의 민족 세력에 대해 송진우·김성수의 토착 세력,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 이승만과 안창호 계열의 기독교 세력으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새 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정통성을 부여하였다.
이로 인해 송진우가 여운형보다 앞서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 이양을 제안받고 거절한 사실은 부정되었고, 이후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불참한 이유도 새 정부 수립의 주도권을 빼앗긴 데 대한 열등감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으며, 결국 역사적 대의를 저버린 파렴치범으로 매도되었다. 이와 함께 송진우의 이름 앞에 ‘극우주의자’라는 접두어까지 붙여버렸다.
왜 그랬을까? 1980년대 이후 좌파 세력의 가치관과 역사관에 큰 영향을 끼친 이 책은 해방 전후사를 ‘살아 있는 현재’로 읽어내야 한다는 대명제 아래 우리 역사의 지향점을 ‘분단 극복’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 분단사관에 따라서 미군정과의 협력을 통해 공산주의 세력을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새 국가 건설을 주장한 송진우는 극우주의자로 내몰리게 되었다. 김형석 이사장은 “송진우의 사상과 행적을 살펴보면 ‘극우’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가 쓴 논설 〈자유권과 생존권〉을 보면 정치적 민주주의는 물론 경제적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기간산업의 국유화,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 사형제 폐지 등 당시로는 매우 선진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국민대회준비회도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모든 정파의 인사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김 이사장은 또 “송진우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네 차례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송진우는 일제강점기 동안 네 차례나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세 차례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도합 27개월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다.
또 백범 김구의 노모 곽락원에게 선행을 베풀고, 백야 김좌진의 독립군 부대에 군자금을 지원한 일화도 사실로 검증이 된다. 한마디로 독립을 향한 집념을 불태운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지사다. 문제는 송진우의 행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행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 후학들의 불찰이었다. 이로 인해 송진우는 잃어버린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월간조선 06월 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06.13 서대문독립공원 순국선열추념탑 논란
●순국선열추념탑의 의병들, 사실은 대구에서 처형된 범죄자들?
⊙ “일본, 자신들이 개입한 처형 기록 남겨… 집단 교수형 사진 관련 기록은 없어”(박종인 《조선일보》 기자)
⊙ “사진 속 사형수들은 대구에서 집단 처형된 범죄자들로 추측”(이돈수 한국해연구소 소장)
⊙ 공개 처형과 시신 전시가 만연했던 조선 후기

▲순국선열추념탑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서울 현저동에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에선 순국선열을 기리는 기념식이 열린다. 참석자들은 ‘순국선열추념탑’을 바라보며 애국가를 부른다. 순국선열추념탑(이하 추념탑)은 24대 서울시장 이해원 시장 임기 중인 1992년 3월 착공해, 다음 시장인 이상배 시장 시기인 1992년 11월 제막했다.
이 순국선열추념탑을 두고 《조선일보》 4월 14일 자에 박종인(朴鍾仁) 기자의 기사가 실렸다. 〈순국선열추념탑 ‘의병 처형상’ 속 의병, 진짜 의병인가 떼강도인가?〉라는 제목이다.
순국선열추념탑엔 순국선열들의 활동이 새겨져 있다. ‘항일 의병 무장상’ ‘윤봉길·이봉창 열사 상징상’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 열사 운동상’ ‘3·1 독립 만세상’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 ‘순국선열 의병 체포 처형상’ ‘청산리 전투상’이다. 이 중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이다. 기사의 한 대목이다.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에는 한복을 입고 집단 교수형을 당한 인물 7명이 조각돼 있다. 통나무를 얼키설키 묶은 처형대에 밧줄로 처형당한 의병들이 담담하게 묘사돼 있다. 이 장면 또한 모티브가 된 사진이 존재한다. 식민 시대 일본 기념품점에서 유통시킨 사진들 가운데 하나다.〉
박 기자는 의병 처형상의 모티브가 된 사진을 분석했다. 10명이 넘는 남성들이 교수형을 당한 형태로 나무 장대에 매달려 있는 사진이다. 사진 속 등장인물들의 신원을 유추해보니 일본에 의해 처형된 의병이 아닌, 강도 등의 범죄로 처형당한 범죄자들이 아닐까 하는 추측에 다다랐다. 유튜브 채널 ‘박종인의 땅의 역사’에 해당 내용의 영상을 올렸는데, 내용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댓글이 1000여 개나 달렸다.
이돈수(李燉帥·57) 한국해연구소 소장은 박 기자의 추측에 비슷하지만 좀 다른 생각을 제시한 경우다. 이 소장은 한국 역사와 관련한 기록들을 수집하는 전문 수집가다. 문제의 집단 처형 장면이 담긴 원본 사진과 엽서 역시 여러 장 보유 중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알부민 인화지에 인화된 사진과 엽서들이다. 알부민 인화지는 계란 흰자를 이용해 만든 인화지를 뜻한다.
의병일까, 강도범일까

▲집단 처형 장면을 촬영한 사진. (한국 풍속) 죄인의 교살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5월 8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박종인 기자와 이돈수 소장이 마주했다. 한 장의 사진을 두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흥미로웠다. 박 기자는 《땅의 역사》 시리즈, 《대한민국 징비록》 《매국노 고종》 등 역사서를 여러 권 집필했다. 이 소장은 외부에서 조선(대한제국)을 바라본 자료를 들고 왔고, 박 기자는 조선 내부에서 기록한 자료를 중심으로 서로의 시각을 점검했다.
두 사람은 일단 사진이 촬영된 시기에는 동의했다. 사진 속 군중의 복장 때문이다. 군중은 흰 갓을 쓰고 있다. 국장(國葬)이 벌어지면 1년 동안 백성들은 흰 갓과 흰 옷을 착용해야 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두 차례의 국장이 있었다. 1904년 1월 2일 헌종비 홍씨 명헌태후가 죽었다. 1904년 11월 5일 황태자인 순종의 빈 민씨가 죽었다. 백성들은 1904년 1월부터 1905년 10월 26일까지 흰 갓과 흰 옷을 입고 다녔다. 마치는 날이 1905년 11월 5일이 아닌 10월 26일이었던 이유는 음력으로 계산해서다.
사진을 두고 다섯 가지의 의문이 제기됐다.
첫째, 이들은 일본에 항거한 의병이었을까? 단순한 범죄자들이었을까?

▲1907년 2월에 발행된 영문 잡지에 실린 집단 처형 사진.
이 소장은 1907년 2월에 발행된 영문 잡지(잡지명은 미상)에 실린 기사를 제시했다. 여기에 문제의 집단 처형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 설명은 이렇다.
‘KOREANS HUNG BY JAPANESE MILITARY AUTHO-RITIES FOR PROTESTING AGAINST THE CONFISCATION OF THEIR LAND.’
‘토지 몰수 반대 시위를 해 일본군 당국에 의해 교수형당한 한국인들’이란 뜻이다. 이 설명을 근거로 이돈수 소장은 ‘토지 몰수 반대 시위를 하다 처형된 의병이 아닐까’ 하는 문제 제기를 했다.
과연 맞는 설명일까. 박종인 기자는 1904년, 1905년의 상황을 정확히 봐야 한다고 말했다.
“1904년에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어요.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고 신문에는 반대하는 글들이 실리지요. 그래서 시도도 못 하고 끝나버립니다. 1904년에는 군법을 어긴 범죄를 제외하면, 일본 정부가 토지와 관련해 대한제국의 일반 민간인을 교수형으로 처형할 맥락 자체가 없었던 겁니다.”
공덕리 철도파괴범 총살 사건

▲《역사의 책》 중 앵거스 해밀턴이 기술한 한국 부문에 실린 두 장의 사진.
이 소장은 이 사진이 실린 또 한 권의 책을 제시했다. 《The book of history: a history of all nation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with over 8,000 illustrations(역사의 책: 가장 초기부터 현재까지 모든 나라들에 관한 역사, 8000개 이상의 삽화 수록)》이다. 세계 만국의 역사를 다루는 책으로 총 1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915년에서 1921년 사이에 영어로 출판됐다. 제2권에 조선(대한제국)의 역사가 실려 있다. 해당 부분은 영국인 저널리스트 앵거스 해밀턴(Angus Hamilton·1874~ 1913년)이 집필했다.
조선 부문을 읽다 보면 두 장의 사진을 만날 수 있다. ‘공덕리 철도파괴범 총살’ 사진과 집단 처형 사진이다.
공덕리 철도파괴범 총살은 1904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사진 설명은 다음과 같다.
‘JAPANESE MARTIAL LAW IN KOREA-Three Koreans shot for pulling up rails as a protest against the seizure of land without payment by Japanese, who had obtained the concession from the Emperor.’(한국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군법-세 명의 한국인이 총살을 당했다. 황제로부터 특권을 얻은 일본인들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토지를 압류한 것에 대한 항의로 철도 레일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이 설명이 ‘토지 수탈’을 의미하는 걸까? 박 기자는 사진에 대해 설명했다.
“이 사건은 ‘토지 수탈’이 아닌 ‘군법 위반’에 관한 처벌입니다. 공덕리에 철길을 놓고 있는데 보상을 두고 다툼이 벌어진 겁니다. 이 사람들이 철도 레일에 손을 댄 거예요. 그랬더니 일본 측은 ‘이 철도는 러일 전쟁 때문에 만들고 있는데 철도 레일에 손을 대는 건 군사 시설 침해’라고 하며 군율(軍律)을 적용해 처형을 한 겁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도 보고가 된 사안이에요. 대한제국 대신이 관리들을 힐난합니다. ‘일본군의 군사 시설에 피해를 주면 군율에 의해 처형당한다는 걸 왜 백성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나’ 했다는 보고서가 남아 있어요.”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은 전쟁과 관련해 군법을 어긴다면 대한제국의 민간인에게도 법 집행을 했다는 말이다.
같은 페이지 하단에는 문제의 집단 처형 사진을 실었다.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THE JAPANESE ADMINISTRATION OF KOREA-This photographic reproduction gives a grim picture of the summary methods adopted by the Japanese officials in disposing of the inmates of a Korean gaol.’(일본의 조선 통치-이 사진은 일본 관리들이 한국의 수형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도입한 즉결 처형 방식의 암울한 장면을 보여준다.)
역시 일본에 의한 처형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공개 처형은 조선의 고질병”

▲서울 마포구 양화진 백사장에 능지처참된 채 방치된 김옥균의 사체. 사진=이돈수 한국해연구소 소장
여기에서 두 번째 의문이 든다. 이 사진 설명이 과연 옳은가? 대중에 공개된 장소에서 교수형을 하는 것이 일본이 도입한 방식일까? 박 기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진 설명에 문제가 있습니다. 공개 처형은 조선의 고질병이었습니다. 일본이 도입한 게 아니었고요. 오히려 일본 측에서 왜 잔인하게 공개 처형을 하느냐고 문제 제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조선 후기 공개 처형에 대해 여러 외국인이 기록을 남겼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년)는 조선에 머물며 영문 잡지 《코리아 리뷰》를 발간했다. 《코리아 리뷰》 1903년 12월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1894년 이전에는 서울에 5곳의 사형장이 있었다. 경복궁의 바로 서쪽에 위치한 아주 오래된 다리인 금천교(禁川橋), 종로의 서쪽이자 대로의 첫 번째 다리인 혜정교(惠政橋), 무교(武橋), 서소문 밖, 한강변의 새남터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처형장이 설치된 것이다.
영국의 여행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년)은 《조선과 그 이웃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의 머리는 세 발의 장대에 묶여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장대가 쓰러져 먼지투성이의 길 위에 머리가 버려지자 개가 뜯어먹었고 그 옆에서 어린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놀았다.’ 바로 처형당한 동학군의 머리였다.
스웨덴 여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나, 코리아》(1904)에 ‘관군 20여 명을 살해한 산적의 처형은 굵은 막대기로 안다리뼈, 팔뼈, 갈비뼈를 차례로 부러뜨린 뒤 고통스럽게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썼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金玉均·1851~1894년)은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됐는데, 그의 사체는 서울 마포의 양화진 백사장에서 능지처참된 채 방치됐다.
외부의 물결에 흔들리던 조선 후기, 일본의 강제 병합 전에 이미 한반도에서는 공개 처형과 범죄자 시체 전시가 드문 일이 아니었단 얘기다. 그렇다면 공개 교수형을 일본이 도입했다는 앵거스의 기술은 맞는 설명이라 볼 수 없다.
바이람 사진 설명의 오류

▲프랑스 무관 레오 바이람의 책에 실린 집단 처형 사진.
이쯤에서 특히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 않은 장면에 대한 외국인 저자들의 사진 설명이 과연 정확한지 의문을 품게 된다. 문제의 집단 교수형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이 있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과 만주, 일본을 여행한 프랑스 무관 레오 바이람(Leo Byram)이 1908년에 낸 책 《작은 일본이 크게 되리라(‘Petit Jap deviendra grand’, Berger Levrault)》에 실려 있는 사진이다. 사진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EN 1906: RÉPRESSIONS JAPONAISES — LA PENDAISON
Au premier plan, ombrelles de mousmés et chapeaux japonais. — Dans plusieurs régions, et notamment dans les provinces du sud-ouest, des soulèvements éclatent contre l’autorité japonaise trop sévère et les envahisseurs rapaces et brutaux… mais le châtiment ne tarde guère.’
이런 뜻이다.
‘1906년: 일본의 탄압 - 교수형 전경에는 여성들의 우산과 일본식 모자 - 몇몇 지역, 특히 남서부 지방에서는 지나치게 가혹한 일본 당국과 포악하고 잔혹한 침략자들에 맞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처벌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설명이 맞을까. 일단 연도부터 틀렸다. 1906년이라면 국장 기간이 끝났을 때다. 백성들이 흰 옷과 흰 갓을 착용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1906년에 조선에 발을 디딘 바이람이 직접 사진을 촬영했을 가능성도 없다. 박 기자의 말이다.

▲프랑스 화보 잡지 《일러스트레이션》에 실린 일본군의 의병 처형 사진.
“만약 저널리스트였던 앵거스 해밀턴이나 무관이었던 바이람이 직접 사진 속 현장을 목격했다면, 상황 자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졌을 겁니다. 자신이 목격하지 않은 현장의 사진을 싣다 보니 설명에 오류가 있는 거지요. 프랑스에서 발행된 《L’Illustration(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사진 화보집이 있습니다. 1907년 8월호를 보면 처형 장면이 나옵니다. 죄수 셋이 십자가 모양으로 묶여 있고 일본군이 그 옆에 서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 설명을 보면 ‘전라남도 담양에서 철도를 훼손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장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1907년 당시 전라도에는 철도가 없었거든요.”
박 기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서양 사람들의 당시 기록물들은, 큰 맥락에서는 맞는데 디테일에서 오류가 너무 많습니다. 다른 텍스트와 비교하며 오류를 걸러내야 합니다. 그대로 인용하면 큰일 나는 경우가 많아요.”
이 소장도 동의했다.
“외국인들의 기록에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이들이 작성한 본래 원고를 보면 어떤 부분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는데, 막상 책으로 발간될 때는 내용이 순화돼서 나오기도 하거든요. 그러니 믿을 수 없는 부분도 있고 오류도 많습니다.”
사진 속 처형자들은 12명?
바이람의 사진 설명에서 보듯, 연도나 내용에 오류가 있는 채로 잡지나 책이 한 번 발행되면, 이후 수정 없이 재인용되면서 잘못된 설명이 서구권에 유포됐을 수 있다.
사진을 두고 든 세 번째 의문이다. 혹시 일본인들이 외국에 조선의 미개함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조선의 처형 장면을 유포한 건 아닐까?
이돈수 소장은 해당 사진이 일본인에 의해 촬영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대한제국엔 일본인들이 들어와 사진관을 차려놓고 있었다. 1894년 청일 전쟁 당시 일본신문 종군사진가로 조선에 왔던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의 무라카미사진관이 대표적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조선 황실 사진의 대부분은 무라카미 텐신과 이와타 카나에(岩田鼎)가 촬영했다.
여기엔 박종인 기자도 동의했다.
“‘조선이 얼마나 더럽고 잔인한 곳인가, 우리가 개화시켜주겠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미개함을 강조하기 위해 처형 장면을 보여주기식 이벤트로 이용하고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만 일본이 처형에 개입하고 남긴 기록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1909년에 일본이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이라는 걸 벌입니다. 의병들을 체포해 처형합니다. 어디에서 체포했고 처형했는지 재판 기록을 다 남겨놓습니다. 일본군 입장에선 나쁜 놈들을 처형했으니 떳떳하게 기록을 남긴 거죠. 일본은 자신들이 개입한 처형엔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집단 교수형 사진과 관련해선 일본 측의 기록이 없습니다.”
넷째, 사진 속 처형자들의 숫자는 12명일까? 박 기자는 12명으로 추측했다. 근거는 《사법품보(司法稟報)》의 기록이다. 《사법품보》는 조선 고종 후반, 근대적 사법체계가 개편된 후 작성된 사법 관련 공문서첩이다. 재판소에서 법부(法部)로 보낸 보고서와 질품서(質稟書·상부에 질의하는 문서), 진술서, 판결문 등을 모아놨다.
“사형은 고종의 재가(裁可) 사항이기 때문에 이게 경성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전제하에, 국장 기간의 처형 보고를 뒤져봤습니다. 1904년 3월 15일에 강도범 27명 가운데 한성재판소 관할 죄수 12명을 처형한다는 보고가 있었어요. 인원 규모가 유사하니 이 사건이 아닐까 추정을 한 겁니다.”
이 소장은 12명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사진에 보면 시신들이 겹쳐져 있어서 인원을 제대로 세기 힘듭니다. 나무 장대에 매달린 끈을 기준으로 보면 13명, 혹은 14명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기자가 보기에도 12명이라 하기엔 줄의 숫자가 다소 애매해 보였다.
사진 촬영 장소는 대구?
다섯 번째 의문은, 처형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군중 속에 외국인이 여럿 있다는 점, 배경에 초가지붕이 보인다는 점 외엔 별다른 장소적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한양일까?
박 기자의 말이다.
“12명을 처형했던 날짜의 《승정원일기》를 봤더니 그날 한양이 흐렸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양산을 쓸 정도로 햇빛이 강렬하거든요.”
혹시 대구는 아닐까. 《대구물어(大邱物語)》라는 책이 있다. 1904년 대구에 정착해 대구신문사 사장을 한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쓴 책이다. ‘물어(物語)’는 일본어로 모노가타리, 즉 ‘이야기’를 뜻한다. 대구물어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처음 사형 집행을 목격한 것은 1903년 10월이었다. 서부시장 중앙에 소나무로 된 통나무 형구를 대충 갖추어 놓고 담당 관리와 죄인이 오자 사형 선고문을 공시했다. 곧 교수형에 처할 죄인에게 곤장 20대를 친 후 여자부터 시작해 차례대로 7명을 처형했다. 그다음에 사형 집행을 목격한 것은 1904년 5월인가 6월이었다.
한 번에 15명씩, 3일에 걸쳐 총 45명을 처형했는데 이때는 곤장을 치지 않았다. 15명을 일렬로 교수형에 처하는 광경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안 좋았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안 좋다. 독자 여러분이 만일 당시 광경을 보고 싶다면 대구에 왔을 때 이사카와사진관에 가면 된다.〉
그렇다면 1904년, 1905년 당시 대구에는, 사진에 등장하는 것처럼 양산을 쓴 외국 여성들과 일본식 모자를 쓴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을까. 몇 년 후 프랑스 무관 바이람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건네줄 법한 프랑스인이 대구에 살고 있었을까.
의병 처형은 아니다
대구에는 이미 1882년부터 프랑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882년 천주교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는 경상도 지방 사목 담당으로 임명된다. 1885년 천주교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대구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로베르 신부를 임명한다. 신나무골(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대구본당과 서당이 세워진다.
참고로 고종은 청일 전쟁 이후 조선에서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 왕실을 보호해줄 세력을 찾기 위해 천주교 주교를 가까이하기도 했다. 뮈텔 주교다. 고종 임금의 어머니 부대부인 민씨(1818~1898년)와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는 천주교 영세를 받기도 했다.
일본인은 어떨까. 1905년 대구실업신보사가 《대구안내》라는 일본어 책을 출간했다. 대구를 찾는 일본인을 위한 안내서다. 여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대구는 남한의 대도회지이다. 부산을 일본의 고베항(神戶港)에 비유한다면 대구는 오사카(大阪)나 나고야(名古屋)에 해당한다. 한국 경영에 임하려는 사람이라면 대구를 반드시 시찰해야 한다. 앞서 경부선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면서 대구에 사는 일본인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고, 대구의 급격한 발전은 거주하는 사람들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다. 대구의 일본인은 실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1905년 3월 말 현재 거류민회(居留民會) 조사에 따르면 남자 683명, 여자 417명으로 총 1100명이고 호수는 319호이다. 그러나 조사 이후에도 매일같이 증가해 지금은 약 1500명에 이르렀다.〉
대구에는 일본인들이 차린 사진관도 여러 곳이 들어섰다. 《대구물어》에 등장하는 이시카와사진관을 비롯해, 모리타사진관, 동양헌사진관, 다무라사진관 등이다.
1904년과 1905년 대구에 프랑스인들과 꽤 많은 수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장은 《대구물어》에 기록된 내용과 사진을 둘러싼 수집가들의 증언에 기초해 문제의 ‘집단 처형’ 사진이 대구에서 대한제국 관리에 의해 시행된 처형 사건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결론적으로 이돈수 소장과 박종인 기자 모두, 순국선열추념탑의 ‘의병 처형’ 장면의 모티브인 집단 처형 사진이 의병 처형은 아니라는 점에 동의했다. 배경이 한양이든 대구든 말이다.
지난 세월 동안 ‘토착 왜구’니 ‘친일 청산’을 외쳐온 이들은 대한제국의 집단 교수형 사진을 두고, 일제의 의병 처형 사진이라는 주장을 재생산해왔다. 서울시는 1992년 당시 추념탑 제작에 총 6억원을 썼다. 예산이 얼마가 들었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어쩌면 지난 32년간 우리는 의병이 아닌 범죄자의 처형 장면을 기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침몰 중인 대한제국의 한 장면을, 망국의 한(恨)인 양 떠받들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06.14 고종이 첫 커피 마니아? 그것조차 사실이 아니었다
한국 커피史의 다섯 가지 변곡점

▲조선 26대 국왕이었고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던 고종(1852~1919). /국립중앙박물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줄임말이 있을 만큼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계란 노른자 넣어 주는 다방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죠. 한국인은 언제부터 커피를 즐겨 마신 걸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최근 실증적인 연구가 있었습니다. 정리를 해 보면 한국 커피사(史)는 대체로 5단계의 중요한 역사적 변곡점을 지나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①1861년: 커피가 처음으로 한반도에 들어오다
“내년에 조선으로 들어올 선교사 편에 이 물품들을 보내주십시오. 적포도주나 백포도주 50병들이 2상자, 코냑 4다스, 커피 40리브르, 흑설탕 100리브르.”
이것은 1860년(철종 11년) 3월 6일 조선 천주교회 교구장이던 프랑스인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 주교가 홍콩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조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발굴한 이 편지를 분석한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커피의 첫 한국 전래’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한국 커피의 시조'라 할 베르뇌 주교.
1784년(정조 8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영세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전래된 천주교는 조선에서 불법 종교로 여겨져 탄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846년 조선인 김대건 신부가 처형당한 병오박해 이후 조선의 마지막 천주교 탄압 사건인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20년 동안은 천주교 포교의 상대적 안정기였다고 해요.
19세기 초만 해도 조선에 와 있는 프랑스 신부들은 김치와 밥만으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철종(재위 1849~1863) 때는 조금 여유를 되찾아 서양식 식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들은 “조선으로 커피를 보내달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위 편지에서 ‘리브르(livre)’는 약 0.5㎏에 해당하는 단위입니다. 커피 원두(커피나무 열매의 씨앗을 말려 볶은 것) 20㎏을 요청한 것이죠. 이 편지를 계기로 파리외방전교회가 1861년(철종 12년) 홍콩에서 조선으로 보내준 커피가 지금까지 기록상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커피가 됩니다. 이후 1866년까지 조선으로 온 커피 원두는 프랑스 신부 1인당 약 4㎏이었는데, 혼자 소비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인 신자들과 나눠 마셨던 것이겠죠.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그만한 양을 주문했던 겁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는데 그보다 5년 전인 1861년에는 커피 마실 여유가 있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철종 때 저렇게 상당한 분량의 물건을 선교사가 가지고 국경을 넘는데 해당 지방관이 몰랐다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선교사가 어디에 있고 거기에 천주교인이 얼마나 된다는 것을 나라에서 다 인식하고 있었지만 묵인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병인박해는 그야말로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견제하겠다’며 운현궁을 빈번하게 출입하던 천주교인들이, 나아가 새로 즉위한 임금의 생모이자 운현궁의 안주인인 부대부인 민씨조차 천주교인인 것을 알고 ‘이제 게임 끝났다’고 여겼을 천주교인들이, 하루아침에 전격적으로 추포되는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던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잠깐. 유럽에서도 커피가 평민에게까지 퍼져 누구나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1860년대에 들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1861년 조선의 일반 천주교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상황이 전개됐다면, 세계 커피 문화에서 한국이 그다지 늦은 것은 아닌 셈이 됩니다.
②1884년: ‘식후 커피’, 조선의 최신 유행품 되다
“1884년 1월의 어느 추운 날, 조선 고관의 초청으로 한강변 별장에 유람을 가 꽁꽁 얼어붙은 겨울 한강의 정취를 즐기던 중 누대에 올라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던 ‘저녁 식사 후 커피(after-dinner coffee)’를 마셨다.” 이것은 1883년 조미수호통상사절단의 안내를 맡았던 미국인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저서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남긴 기록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저녁을 먹은 뒤 커피를 마시는 것이 1880년대 조선 양반들 사이에서 ‘최신 유행’이었다는 기록입니다. 당시 커피는 ‘가비(加非)’ 또는 ‘가배(口+加, 口+非)’로 불렸는데, 커피를 음차해 한자로 표기한 이름입니다.
이 ‘조선 고관’이란 ‘경기도 관찰사’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훗날 영의정과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온건 개화파 김홍집(1842~1896)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별장이란 지금의 마포구 마포동 벽산빌라 입구에 있던 담담정(淡淡亭)으로 보입니다.

▲18세기 김석신이 그린 담담정. /간송문화재단
1876년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커피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상류층의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봐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식후 커피 한 잔’이라고요? 원래 한국 사람들이 식후에 마시던 것은 숭늉 아니었던가요? 이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풍습이 한국 내에서 빨리 생겨난 것에 대해선 ‘식후에 차나 숭늉을 마시던 한국인의 음료 문화가 자연스럽게 커피로 대체된 것’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무척 설득력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 의료 선교사이자 훗날 주조선 미국 공사가 되는 호러스 알렌은 “궁중에 드나들 때 홍차와 커피를 대접받았다”고 일기에 썼습니다. 그러니까 궁중과 상류층 사이에선 커피를 마시는 일이 일상화됐다고 할 수 있는데, 1890년대가 되면 커피 없이 못 사는 대표적 ‘커피덕후’가 한 명 출현하게 됩니다. 그는 바로….
조선 임금인 고종이었습니다.
③1896년: 조선 임금이 커피 애호가가 되다
1896년 고종은 일본의 압력을 피해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일시 옮겼던 ‘아관파천’ 때 커피를 본격적으로 즐겼고, 이후 커피 애호가가 됐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최초의 커피 애호가인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기 때문에 한국에 커피가 유행하게 됐다’는 것이 통설이었고, 심지어 배우 박휘순이 엄청나게 멋진 고종으로 등장하는 영화 ‘가비’(2012) 같은 창작물에선 고종이 마시는 커피가 마치 ‘근대화를 향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도 ‘식후마다’ 커피를 즐겨 마신 서울의 양반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고종을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애호가로 볼 수는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커피를 즐겨 마신 것을 계기로 커피를 마시는 인구가 늘었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한국 커피사에서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고종이 커피를 마신 장소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 덕수궁의 서양식 건물 정관헌입니다.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커피가 목에 넘어간단 말인가’라며 분노할 분도 있겠지만, 참 답답하고 한심한 얘기이긴 하지만, 그가 홍차나 숭늉을 마셨더라도 국운이 바뀌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인재 등용의 문제나마 조금 더 생각했더라도 대한제국기의 인사가 그토록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가 커피를 마시다가 변을 당한 일도 있습니다. 1898년 9월 12일, 러시아 통역관 출신의 김홍륙이 유배형을 받은 것에 앙심을 품고 고종을 독살하기 위해 커피에 아편을 탔던 것입니다. 고종은 곧바로 뱉어 무사했지만 같이 마셨던 황태자는 치아가 빠지고 혈변을 쏟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훗날 순종 황제가 되는 황태자가 정신이 온전하지 않게 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삼국지에서 장판파 싸움 중 조운이 어린 아들 유선을 구출해 오자 그를 받은 유비가 집어던진 이후 유선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게 됐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다만 순종의 당구 실력이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고종은 커피를 계속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고종이 미국인 벙커 부부에게 하사한 은제 커피잔을 들고 있는 모습. <왼쪽 그림>/①러시아 공사관에서 일했던 독일인 앙투아네트 손탁이 1902년 서울 정동에서 개업한‘손탁호텔’모습 ②손탁<흰 옷>이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하는 모습 ③1930년 서울 명동의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 카페에서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는 모습 ④1936년 조선호텔 양식당‘팜코트’에서 커피를 마시는 무용가 최승희 /한국콘텐츠진흥원·조선호텔앤리조트·조선일보DB, 그래픽=이철원
④1902년: 서울 첫 커피숍에서 독일식 커피를 팔다
고종에게 커피를 권했던 사람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일했던 독일 여성 앙투아네트 손탁(1854~1922)으로 알려졌는데, 손탁은 대한제국 소유 서울 정동 건물의 위탁 경영을 맡아 서구식 호텔로 꾸며 1902년 ‘손탁호텔’의 문을 열었죠. 이 호텔 1층에 들어선 레스토랑 겸 커피숍이 서울 최초의 커피숍이었다고 합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글로리 호텔’은 손탁호텔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최초’가 아니라 ‘서울 최초의 커피숍’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보다 먼저 인천 대불호텔에 커피숍이 있었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강철군화’를 쓴 미국 작가 잭 런던과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젊은 윈스턴 처칠은 모두 러일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는데, 이들이 이 호텔의 손님이었다고 합니다. ‘독일 여성이 운영하던 커피숍을 계기로 크림과 설탕을 타 마시는 독일식 커피가 한국에서 유행하게 됐을 것’이란 추측도 있습니다.
다만 손탁은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으로 잘 알려진 알사스-로렌 출신인데, 이곳은 원래 프랑스였다가 독일 땅이 된 곳이라 프랑스 출신으로 봐야 할지 독일 출신으로 봐야 할지 좀 헷갈리기도 합니다. 예전 작가 유주현씨는 소설 ‘조선총독부’에서 자못 문학적인 어조로 “알사스-로렌 출신인 손탁이 아시아의 알사스-로렌이라 할 조선으로 온 것은 운명의 장난인가” 운운한 적도 있었습니다.
⑤1920년: 경성에 다방이 유행하다
한국의 커피는 1920~30년대 경성(서울)의 다방 문화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숱한 다방 중 배우 복혜숙이 운영했던 인사동 입구의 ‘비너스’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이 종로1가에 연 ‘제비’ 등이 유명했습니다. ‘제비’에는 화가 구본웅, 소설가 박태원 같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는데, 경성의 다방은 때론 음악회나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최신 서구 예술에 대해 열띤 토론이 펼쳐지는 장소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다방 문화’는 꽤 생명력이 길었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다방이 아주 없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커피를 들고 다니며 마시는 시대가 됐습니다. 다만 지금 유행하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길거리 아무 데나 버리고 가는 일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한국 커피의 역사를 알고 커피를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06-27 645년 6월 20일 당군 막아낸 안시성 전투, 성주는 ‘양만춘’이 아니

▲645년 고구려가 당나라 대군과 벌인 안시성 전투를 그린 그림. 동아일보DB
645년 3월 9일, 당 태종이 고구려에 선전포고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네 번 공격했으나 그 땅을 얻지 못했다. 이제 그 전사자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왕의 치욕을 갚아주고자 한다.”
고구려왕의 치욕이란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정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나라 군대는 4월 1일 요하를 건넜다. 곧이어 현도성, 개모성을 함락시켰다. 당군은 요동성을 공격한 지 보름도 안 돼 함락시켰다. 수나라 백만대군을 막아냈던 요동성이었지만 당 태종의 거센 공격을 이겨낼 수 없었다. 개전 두 달 만인 6월 1일에는 백암성도 성주의 투항으로 당에 넘어갔다.
이제 고구려 서쪽에 강력한 성은 안시성밖에 남지 않았다. 당 태종은 안전을 기해 안시성을 건너뛰고 그 남쪽의 건안성을 공략하여 안시성을 포위하는 방안도 생각했다. 하지만 안시성에서 당군의 보급선을 끊으면 곤란해진다는 건의에 따라 안시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안시성 공격을 망설인 것은 안시성주의 명성 때문이었다. 당 태종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안시성은 험한 데다가 군사도 용맹하고 성주도 재주와 용기가 있다. 연개소문이 군주를 해쳤을 때 안시성주가 복종하지 않았기에 연개소문이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주어버렸다고 한다.”
6월 20일에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당군은 다음 날 뜻밖의 사태를 만났다.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원군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당 태종은 침착하게 고구려군을 유인해 섬멸했다. 안시성의 군민은 한숨 돌리는가 했다가 참담한 심정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도 안시성만큼은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매일 6, 7차례나 공격을 가했지만 소용없었고 포격을 가해 성루를 부숴도 곧 목책으로 보수하는 등 안시성의 저항은 빈틈이 없었다. 당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토산을 쌓았다. 토산을 두 달 동안 피땀 흘려 쌓았는데, 완성이 코앞일 때 고구려군이 뛰쳐나와 토산을 점령해 버렸다. 고구려군이 토산 안에 참호를 만들어 지키니 당군이 사흘간 맹공을 펼쳤지만 결국 이길 수가 없었다.
9월 18일,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자 당 태종은 패배를 인정하고 후퇴했다. 3개월간 펼쳐진 공방전에서 안시성주가 승리한 것이다.
전투 내용은 자세히 전해지지만 이 승리를 이끈 안시성주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안시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이 아니다. 이 이름은 명나라 때 소설가 웅대목이 쓴 ‘당서지전통속연의’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다. 이 소설에는 양만춘 이외에도 고구려 장수 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 이름 중 몇 개를 적어보면 이렇다.
백면낭군, 도로화적, 달로게리, 대대로, 한계루, 김정통, 왕다구, 아력호, 흑수환.
벼슬이나 부족명을 사람 이름인 줄 알고 쓸 정도이다. 조선 시대에 이 소설책을 본 사람은 없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탓에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생겨나고 말았다. 가짜 역사책인 ‘환단고기’에도 양만춘과 추정국(역시 이 소설에 나오는 이름이다)의 이름이 실려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정보를 믿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식민사학자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사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와 같은 반지성적인 행태는 사라질 것이다.
이문영 역사작가
06.28 묘 빼앗긴 부친 숨지자, 두 딸 처절한 복수혈전…왕도 감동했다
아버지 원수 갚은 문랑·효랑 자매
1709년(숙종 35) 성주 사람 박수하의 선산에 청안 현감 박경여가 무단으로 그 조부의 묘를 썼다. 박수하는 남의 묘역에 강제로 매장한 박경여를 성주목(牧)과 경상 감영에 고발하는데, 모두 패소하게 되었다. 5대째 선산을 지켜 온 박수하는 패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선산을 빼앗긴 박수하는 너무 억울한 나머지 서울로 올라가 왕에게 직접 호소해보기로 한다. 이른바 격쟁원정(擊錚原情,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왕·관부에 호소하는 일)이다. 이에 왕은 본도(本道)에 지시하여 재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했다.
소송 열에 아홉은 묘지 소송

▲선산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박수하의 원수를 갚은 박문랑·효랑 자매의 행적을 그린 『박효랑전』.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묘지 소송 즉 산송(山訟)은 노비소송, 전답소송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사소송의 하나다. 타인의 묘역 안에 묘를 쓸 수 없는데, 이것을 침범한 경우에 소송이 붙는 것이다. 산송이라는 법률 용어가 조선에 처음 등장한 것은 현종 때(1664)이다. 이후 18~19세기는 묘지로 인한 소송이 극성을 부린 시대로, 소송의 열에 여덟아홉은 산송이 차지할 정도였다. 다른 소송과 달리 산송은 상중(喪中)에도 허용되었고, 싸우고 때려죽이는 것[鬪毆之殺]의 절반을 차지했다. 노비와 전답 소송이 경제적인 이권 다툼인데 반해 묘지 소송은 이권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집안의 명예라든가 후손된 도리와 같은 가치 문제가 개입되었다. 무엇보다 산송은 부계 친족 마을의 형성과 문중 집단의 등장과 함께 나온 사회 현상이었다.
박수하 선산에 박경여 조부 묘 써
소송 중 발언 문제 역고소로 옥사
큰딸 문랑, 파묘 후 다투다 숨지자
작은딸, 여론전 끝 ‘정려’ 결정 받아
유교 상장례 정착, 묘지 소송 급증
선산 수호 목숨 걸었던 시대 풍경
박수하의 소송 건은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질질 시일만 끌뿐 1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더니 2년이 더 지나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박경여는 박수하의 선산에 입장(入葬)한 조부의 묘소를 꾸미기 시작한다. 주위 송추(松楸, 산소 주변에 심는 나무의 통칭)를 베어내고 묘도를 만든 후 묘비를 세우려는 것이다. 소식을 접한 박수하는 송추를 무단으로 베어낸 박경여의 종을 잡아다 볼기를 쳤다. 이번에는 박경여가 박수하를 고발한다. 박수하가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는데 여기서 던진 말이 문제가 되었다. 경상 감사 이의현(1669~1745)이 박경여의 인척이라 공정하게 처결될지 의문스럽다고 한 것이다. 이에 이의현이 성주로 달려와 박수하를 무고죄로 형문(刑問)하여 하옥시켜 버렸다. 불행히도 박수하는 옥에 갇힌 지 7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미혼의 두 딸 박문랑(朴文娘)과 박효랑(朴孝娘)이 등장하며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회자된 사건이 되었다. 우선 박수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큰딸 문랑이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문랑은 아버지의 옥사가 박경여의 늑장(勒葬, 권세를 빌어 남의 땅에 강제로 장사 지내는 일) 때문이라고 보고 문제가 된 그 집 조부 묘를 파헤치기로 한다. 그녀는 일가친척 및 노복들과 함께 묘산(墓山)으로 올라가 파묘하여 관을 꺼내 시신을 불태워버린다. 사굴(私掘)을 단행한 것이다. 사굴은 범죄인 데다 더구나 시신 훼손은 살인법이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금장(禁葬) 지역에 투장(偸葬, 몰래 매장하는 행위)을 했을지언정 그 묘를 파내는 것은 묘를 쓴 당사자 외에 다른 사람이 할 수 없었다. 사실 이런 법 규정 때문에 도둑 매장을 해 놓고 파묘 명령이 내려져도 팔짱을 끼고 세월아 네월아 하여 산송의 골이 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산송 자료. 묘지 소송인 산송은 단순히 묘지를 둘러싼 이권 다툼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와 위상을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조선시대 소송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문랑이 ‘거사’를 단행한 지 7일이 지나 박경여가 창검으로 무장한 노복들을 데리고 산에 나타났다. 소식을 들은 문랑은 칼을 빼 든 채 말을 달려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박경여 측 사람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문랑은 죽음을 맞이한다. 문랑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박경여 측이 죽였다는 박수하 측의 주장과 사굴과 살인을 저지른 박수하 족친들이 자신들의 죄를 무마시키기 위해 문랑의 자결을 권유했다는 박경여 측의 주장이 그것이다. 어찌 되었건 문랑은 죽었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그녀의 종조(從祖, 할아버지의 남자 형제) 박협은 곧바로 관아로 달려가 박경여 등을 고발한다. 양측이 서로 무장한 채 충돌하여 상호 간에 살상과 고소가 잇따르게 된 이 사태를 국왕 숙종도 주시하고 있다. “근래에 타인의 선산을 빼앗는 폐단으로 시끄럽기 짝이 없는데, 박가처럼 묘지를 파내고 관을 불태우며 사사로이 서로를 살상하는 변란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승정원일기』 숙종 38년 6월 26일)
왜들 이렇게 묘지에 목숨을 걸었던 것일까. 조선의 건국과 함께 유교의 상장례가 국법으로 정해지자 불교식 화장(火葬)을 매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국 100년이 지나도록 완전하지는 못했다. 성종 5년(1474)에는 “존장의 유언을 따라 시체를 화장한 자는 장(杖) 100대에 처한다”는 『대명률』의 조항을 상기시키면서 매장을 고급문화로 여기는 분위기다. 이즈음에 성립된 『경국대전』에는 분묘의 한계를 정하고 경작과 방목을 금지하는 법령이 등재되었다. 분묘가 차지하는 공간은 관료 1품(영의정)이 사면(四面) 각 90보에 한정되고, 2품 이하는 10보씩 감하여 5품이 50보에 한정되었다. 6품 이하 및 생원·진사, 유음자제(有蔭子弟, 음직을 받는 자제)들은 40보를 금장 구역으로 정했다. 100보가 약 70m이므로 40보라면 사면 각 28m가 된다. 국법이 정한 한계 외에 조선후기에는 좌청룡 우백호의 용호수호(龍虎守護)가 인정되면서 불법적인 광점(廣占)이 만연해지며 묘지 분쟁은 더욱 격화되는 형국이었다. 조선후기 사대부가라면 산송에 휘말리지 않은 집안을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야기시켰다.
영남 남인 들고 일어나 억울함 호소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에 있는 박문랑·효랑 자매의 효각. [사진 이숙인]
‘적진’으로 돌진한 박문랑이 죽자 이제 동생 효랑이 아버지와 언니의 원수를 갚고자 일어났다. 효랑은 만류하는 조모와 계모를 설득하여 남장을 하고 상경하는데, 대궐에 몰래 들어가 격쟁원정을 한다. 왕은 이 사건을 본도로 돌려보내며 재조사를 지시한다. 하지만 성주 관아는 차일피일 미루며 해결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박경여 측도 서울로 사람을 보내 자신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효랑은 재차 서울로 올라가 거리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족의 억울함을 알리기 시작한다. 여러 궁궐과 각사(各司)에 청원을 넣을 뿐 아니라 대신이 탄 수레를 붙들고 읍소하며 길 위의 삶을 이어갔다. 효랑의 진정어린 행위에 감동한 장안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노래까지 지어 불렀고, 영조도 세자 시절에 거리에서 효랑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효랑의 요구는 간단했다. 아버지와 언니를 사망케 한 박경여와 경상 감사로 편파적인 판결을 한 이의현을 처벌해 달라는 것이다.

▲효각 안의 비. [사진 이숙인]
아버지와 언니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효랑의 행위에 감동한 경상도 안동 유림 379명은 박문랑의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 표창)를 촉구하는 통문을 성주 유림에게 보낸다. 영남 유림의 발의로 전국의 유림이 들고일어나 문랑과 효랑 자매의 효성을 극구 칭송하는데, 복합상소(伏閤上疏, 대궐 앞에 엎드려 뜻을 전달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그들은 박문랑의 효행 정려를 요구하였고, 박경여의 죄상과 이의현의 불법을 비난했다. 남인 계열의 영남이 궐기한 것은 서인의 핵심 인물 이의현에 대한 감정이 개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자매 행적 그린 전기 『박효랑전』도 나와
영조 2년, 조정 회의에서 박문랑의 정려가 결정된다. 시골 부녀에 불과한 박문랑이 부모에 대한 지극한 애통으로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린 용맹은 장부(丈夫)도 해내지 못할 일이라고 한다. 임금은 “박문랑이 칼을 끼고 말을 달리어 군중 속으로 돌진하는 늠름한 모습이 마치 실상을 보는 듯하다”라고 하였다(영조 2년 12월 20일).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박문랑과 아버지와 언니의 억울함을 여론화하여 명예를 회복시킨 효랑의 행적이 전기로 꾸려졌다. 박수하의 친족이 저술한 『박효랑전』이 그것이다.
묘지 소송으로 시작되어 두 자매의 효행을 기리는 이야기로 마무리된 이 사건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는 유교적 상장례의 확산과 부계 친속 의식의 강화로 조상의 묘를 한 곳에 모시는 종산(宗山)이 형성되면서 산송이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묘지 수호에 목숨을 건 사람들, 조상의 묘에 가문의 위상과 명예를 걸었던 사람들은 저 생이 편해야 이생도 편하다는 사생관과 무덤을 조상의 혼백(魂魄)이 깃든 영원한 안식처로 본 생멸관이 빚어낸 역사의 한 장면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장례 문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06-28 명문가 후손들이 독점한 ‘무관 출세길’… 왕이라도 천거 관여 못해

▲일러스트=김유종 기자
후보군 미리 발탁하는 제도 둬
무예 익힌 양반 한량들이 차지
선전관 선배가 직접 후보 뽑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자리
“사사로이 임용” 문제 불거져
현종때 김좌명 탄핵 위기도
숙종땐 ‘종실 서출’ 제외 소동
천거 막은 박섬 결국 파직돼
# 무관 고위직으로 가는 출세의 지름길
선전관은 고위직 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출세의 요람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선전관은 명문가 출신들만 차지하는 자리로 변질된다. 심지어 선천(宣薦)이라는 제도까지 마련해서 명문가 후손이 선전관을 독점하도록 만들었다.
선천은 일 년에 두 번 실시하는데, 선전관 후보군을 미리 발탁해두는 제도였다. 선천의 대상은 무과의 급제자 혹은 명문가의 한량, 즉 무과 급제자가 아닌데도 무예를 익힌 양반 자제였다. 선전관에 빈자리가 생기면 선천으로 발탁한 자 중 3명을 뽑고, 왕이 그들 중에 한 명을 낙점하면 선전관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선전관은 무과 출신과 음서로 들어오는 한량 출신이 섞여 있었는데, 음서로 들어오는 한량 출신은 숫자가 2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음서로 들어온 선전관을 남항(南行, 음서로 벼슬하는 것을 일컫는데, 한자는 남행이라고 쓰고 남항으로 읽는다) 선전관이라고 하는데, 숫자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한량으로 있다가 남항 선전관이 되기 위해서는 집안의 배경이 매우 든든해야 했다. 말하자면 집안 대대로 권력을 누리고 당대에도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안 자제라야 남항 선전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천의 방식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선전관으로 천거할 땐 반드시 선전관 선배들이 직접 후보를 택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왕이라도 선전관 천거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만큼 선전관의 위세가 대단했다.
선전관의 소임을 마친 무관들은 탄탄대로를 걸으며 고위 무관직으로 향해 가는데, 이 과정에서 선전관 선후배는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상호 보호막을 형성한다. 선전관 출신이 아닌 자들이 고위 무관직으로 올라오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다.
# 선전관 임용 문제로 탄핵당한 김좌명
선전관이 된다는 것은 곧 출세를 보장받는 일이었기 때문에 선전관 자리를 두고 권력 다툼을 벌이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선전관을 사사로이 임용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현종 8년(1667년) 10월에 있었던 지중추부사 김좌명에 대한 대간의 탄핵 사건이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중추부지사 김좌명이 사사로운 관계 때문에 허재라는 인물을 선전관으로 삼았다면서 그를 탄핵했다. 이에 대해 김좌명은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며 현종에게 이런 상소를 올린다.
“대간이 아뢰면서, 낙강한 자를 선전관에 제수한 것을 가지고 신의 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강서(講書)는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여 정해진 규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허재가 사서를 강의하는 시험에서 떨어졌는데도 김좌명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를 선전관에 올렸다며 그를 탄핵했다. 이에 김좌명은 원래 선전관이 되는 자격엔 사서 강의 시험에 대한 요건이 없으므로 비록 이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선전관이 되는 조건과는 관계가 없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빈자리는 항상 부족하고 천거된 자는 항상 많았으므로 모두 다 제수하지 못하였는 바, 제수된 자는 덕 보았다고 여기고 제수되지 못한 자는 곧 나를 제쳐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정을 아는 자가 그런 말을 듣는다면 사세에 있어서 당연한 일로 여길 것이고, 모르는 자가 들으면 의심쩍어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비방하는 의논이 생겨난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말인즉, 원하는 자는 많은데 자리는 부족하여 늘 시기와 질투가 넘쳐나서 비난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김좌명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신은 번거롭게 일일이 지적하면서 아뢰어 시끄럽게 스스로 해명하는 듯이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조정에서는 끝내 어떤 사람에게 사심을 써서 어느 직에 제수하였는지 모를 것이고, 외방에서 듣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논계가 어떻게 해서 발론되었으며 또 어떻게 해서 정지되었는지 모를 것입니다. 이에 부득불 그 대강을 간략히 진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현종은 김좌명의 억울한 심정에 동감을 표하며 말한다. “사실에서 벗어난 일을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이렇듯 김좌명은 가까스로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지만 실록엔 선전관 임용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난 수많은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선전관 자리는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던 것이다.
# 천거 문제로 억울하게 파직당한 박섬
숙종 2년(1676년) 11월 21일, 선전관 박섬이 파직되었는데, 그 사연을 살펴보면 박섬은 다소 억울한 경우였다. 이날 숙종이 경연의 낮 강연인 주강에 나가니, 종친인 완평 부수 이홍이 이런 말을 올렸다.
“종실 자손의 서파(庶派)는 일찍이 사로(仕路)에서 막힘을 당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종실의 아들로서 무과에 오른 자가 서파라고 해서 선전관의 천거에서 삭제를 당하였으므로 감히 계달합니다.”
서파란 곧 서출을 의미하고, 해당 인물은 종실의 서자인 이한주였다. 원래 서출이라고 해도 종실 출신은 벼슬에 제한이 없었는데, 이번에 선전관 선천에서 서출이라고 하여 제외됐다는 말이었다. 숙종은 14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친정을 했는데, 이때 나이 겨우 16세였다. 그런 까닭에 종친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말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숙종은 몹시 진노하여 선전관 19명을 모두 옥에 가두게 하고, 곧 천거받지 못한 3인을 천거 명단에 넣도록 했다.
그러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인의 영수 허적이 아뢰었다. “천거를 막은 자만을 옥사에 가두고, 나머지 사람은 가두는 것이 합당치 못합니다.” 이에 숙종이 허적의 말을 따랐다. 그러자 옥사에 남은 선전관은 박섬 한 명뿐이었다.
박섬을 상대로 이 사건의 내막을 신문하자, 박섬이 자초지종을 이렇게 말했다. “종실의 아들 이한주는 세루(世累, 세상의 속된 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등과(登科, 과거에 합격함)했을 때 국휼(國恤, 국상)을 당했는데도 화동(花童, 어린 소녀)을 끼고 문을 닫고 연락(宴樂, 잔치를 즐김)을 했기 때문에 막은 것이요, 서파(庶派, 서출)이기 때문에 막은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점수가 부족하고 또한 그 문망(聞望, 명예와 인망)이 부족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문지(門地, 가문)가 낮다는 것이 아닙니다.”
박섬의 이 말은 사리에 맞고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린 숙종은 종실의 아들이 서출이라는 이유로 벼슬에서 제거됐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박섬에게 형벌을 가하고 진상을 캐물으라고 닦달했다. 그러자 병조판서 김석주가 숙종을 만류했다. 이에 숙종은 박섬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중지시켰지만, 그를 파직하라고 명령했다. 숙종은 여전히 종친을 홀대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 용어설명 - 주강(晝講)
조선 시대 군왕과 신하가 함께 공부를 하던 하루 3회의 경연(세자의 경우 ‘서연’)이 오후 시간 진행되는 경우 주강이라고 했고, 아침은 조강(朝講), 저녁은 석강(夕講)이라고 불렀다. 주강은 조강에 비해 참석 인원이 적었고 석강과는 대체로 비슷했다고 한다.
문화일보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