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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物相(조선일보) 2024-06/ 06.01(토) 21년 뒤 화성에 태극기? - 06.29(토) 주 6일 근무 '조르바의 후예'

상림은내고향 2024. 6. 19. 19:16

 

萬物相(조선일보) 2024-06/

06.01(토) 21년 뒤 화성에 태극기?

▲일러스트=박상훈

 

2018년 2월 우주 기업 스페이스X가 팰컨 헤비 로켓으로 테슬라의 스포츠카 ‘로드스터’를 실어 태양 궤도에 띄웠다. 이 희한한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해 스페이스X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화성에 거주할 우리 후손들이 우주를 떠도는 로드스터를 가져다 화성 박물관에서 전시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화성 이주의 꿈을 담은 퍼포먼스인 셈이다. 현재 로드스터는 지구에서 1억㎞, 화성에서 3억㎞ 떨어진 지점에서 태양을 돌고 있다고 한다.

 

▶인류의 첫 화성 탐사선은 1960년 옛 소련의 마스닉 1호였지만 발사 실패로 끝났다. 1965년 미국 매리너 4호가 처음으로 화성에 접근했을 때도 궤도 진입은 못 했다. 1976년 미국 바이킹 1호의 화성 첫 착륙 이후 우주 선진국들이 20여 차례 무인 탐사선을 보냈지만, 임무 성공률은 50%대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강대국들은 ‘인류의 화성 이주’를 목표로 내세우고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거리는 5310만~4억㎞로 달라진다. 태양을 도는 공전 주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지구와 화성이 가장 가까워지는 시점이 지구~화성 간 ‘지름길’이 열리는 때다. 이 시기를 잡아도 8개월이 걸리고, 이때를 놓치면 2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나흘 만에 달에 도착해 인류 첫 발자국을 남긴 아폴로 11호(1969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인(有人) 탐사가 어려운 이유다.

 

▶최단 항로로 가더라도 화성 도착 전에 우주선 안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우주 방사선 노출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선 우주 방사선을 장기간 쬐자 뇌의 신경세포가 심하게 손상돼 이상 행동을 보였다. 방사선을 막아내고 화성 상공에 이르더라도, 번지 점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험이 남아 있다. 화성 대기 밀도가 지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해 궤도 진입 속도가 시속 1만㎞ 이상이다. 그 마찰열을 견뎌내야 한다.

 

▶이렇게 위험한데 인류가 화성 이주의 꿈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뭘까. 생명체가 살았을 가능성이 있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테라포밍(terraforming·지구화)’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 과정까지 가는 도전이 주는 열매일 것이다. 2021년 화성 무인 탐사를 성공시킨 아랍에미리트 책임자는 “아랍 청년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 정신을 가지게 하는 의미가 크다”고 했다. 정부가 2045년 화성에 태극기를 꽂는 ‘스페이스 광개토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허황돼 보이기도 하지만 도전 자체가 줄 열매가 클 것이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06.03(월) 60대 데이트 살인

▲일러스트=이철원

 

최근 자녀에게 ‘안전하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서울 강남역에서 20대 의대생이 연인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그중 하나가 “이별 통보는 비대면으로 해라”다. “씻지 말고 더러운 냄새 풍겨라” “집안이 망했다고 하라” “큰돈을 빌려달라고 하라” 등 나름의 ‘비책’을 알려주는 부모도 있다고 한다. 얼마나 걱정이 컸으면 이럴까 싶다.

 

▶데이트 폭력은 젊은층만의 문제도 아니다. 8년 전 부산에선 60대 남성이 이별을 통보한 연인에게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다 경찰에 붙잡힌 일이 있었다. 그는 넉 달 동안 1600여 건에 달하는 협박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한 해 뒤엔 60대 남자가 헤어진 뒤 만나주지 않는 50대 여성을 골프채로 무차별 폭행하고 염산까지 퍼부은 사건이 벌어졌다. 또 한 해 뒤엔 울릉도에서 일흔네 살 남자가 사귀던 일흔 살 여성에게 이별을 통보받고는 여자 집에 찾아가 욕설을 하고 창문을 부수다 경찰에 붙잡혔다.

 

▶60대의 데이트 폭력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2022년 기준 데이트 폭력 피의자 연령대는 20대가 3631명(36.8%)으로 가장 많았지만 60대도 404명(4.1%)이나 됐다. 급기야 엊그제 서울에선 60대의 데이트 살인 사건까지 발생했다. 60대 남자가 사귀던 60대 여성의 이별 통보에 격분해 이 여성과 그의 딸을 살해한 것이다. 그는 “우발적 범행”이라고 했다.

 

▶공자는 60세를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라는 뜻이다. 서양 철학자 칸트는 “인간이 이성을 완전히 사용하게 되는 시기가 대략 60대”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65세는 한 세대 전 45세의 몸으로 산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몸이 젊어져서일까. 잦아지는 60대 데이트 폭력 사건을 보면 이젠 60대에게 이순이란 말을 붙이긴 어려울 듯하다.

 

▶데이트 폭력은 가해자의 강한 소유욕 때문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고, 반대로 가해자의 자존감이 낮아 사랑을 쉽게 끝내지 못한다는 분석도 있다. ‘젊어진 60대’도 젊은이 못지않은 소유욕과 집착증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데이트 폭력 피의자는 2020년 8951명에서 지난해 1만3939명으로 늘었다. 눈치 빠른 로펌들이 이 시장을 놓칠 리 없다.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를 상대로도 선처받고 감형받는 ‘꿀팁’을 광고하는 로펌도 있다. 노·소(老少) 불문, ‘안전하게 헤어질 자유’가 위협받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최원규 논설위원

 

06.04 영일만

▲일러스트=이철원

 

1975년 말 중앙정보부가 “포항 영일만에서 채굴된 석유”라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들고 왔다. 박 대통령은 석유가 담긴 링거병을 집무실에 두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했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참모의 조언에도 박 대통령은 1976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영일만에서 석유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신문들이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이후 본격 시추에 나섰지만 소득이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황당했다. 시추 과정에서 윤활유로 투입했던 경유(輕油)가 퍼올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1998년 방북해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평양이 기름 위에 떠 있다”고 말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 회장은 “북한 기름을 들여오기 위한 파이프 라인 가설 작업을 곧 시작하겠다”고 했지만, 남북 관계 경색으로 진전이 없었다. 이후 북한에서 유전 탐사 작업을 했던 영국 지질학자가 “북한에 석유 50억 배럴이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영일만 앞바다에 140억배럴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 탐사 결과가 나왔다”고 깜짝 발표를 했다. 석유·가스 수입에만 연 1000억달러 이상을 쓰는 한국으로선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현실화 가능성이다. 정부는 영일만 탐사 성공률이 20%에 달한다고 하지만,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자는 여론도 상당하다.

 

▶대서양 북해 유전의 경우 채굴 성공률이 3%에 불과했다. 미국 석유 기업 엑손이 1966년부터 시추공을 30개 이상 뚫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필립스란 회사가 6개를 뚫고도 찾지 못해 포기하려다 마지막으로 뚫은 시추공에서 노다지가 발견됐다. 이후 북해 해저는 거대한 기름 창고임이 확인됐다. 매장량이 680억배럴에 달해 ‘북해 브렌트유’라는 새 원유 브랜드가 탄생했다.

 

▶네덜란드는 노르웨이보다 10년 앞서 북해에서 초대형 가스전을 발견했지만, 나라에 독(毒)이 됐다. 가스 수출로 재정이 풍족해지자 선심성 복지를 대폭 늘렸다. 임금이 오르고 물가가 급등했다. 결국 주택 버블이 터지면서 경제가 위기를 맞았다. 노르웨이는 네덜란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북해 석유 수출 대금으로 국부펀드를 만들었다. 재정 적자를 메우는 용도로만, 원금은 손 못 대고 수익금만 인출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놨다. 현재 펀드 규모는 1조6000억달러, 국민 1인당 30만달러(약 4억원)꼴이다. 영일만에서 실제 석유가 나와 이런 ‘고민’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김홍수 논설위원

 

06.05 K웹툰 나스닥 상장

▲일러스트=박상훈

 

네이버가 2004년 웹툰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도 인터넷 만화는 있었다. 다만 만화책을 스캔해 인터넷에 띄우는 게 전부였다. 출판 만화가 외면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네이버가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웹툰’을 선보였다. 웹툰은 화면을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리는 스크롤 방식으로 감상한다. 이 단순한 변화가 만화를 떠난 독자를 다시 불러 모았다.

 

▶되살아난 웹툰은 2차 창작의 풍성한 샘이 됐다. ‘미생’ ‘킹덤’ 같은 인기 드라마,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신과 함께’가 모두 웹툰 원작이다. 글로벌 OTT의 등장은 한국 웹툰의 세계 진출을 도왔다. 웹툰 ‘이태원 클라쓰’는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이 일본에 OTT로 소개돼 인기를 끌자 일본판인 ‘롯폰기 클라쓰’로 다시 제작됐다. 지금은 전 세계 150 나라에서 월간 1억7000만명이 즐기는 거대 비즈니스다. 네이버 웹툰의 올해 1분기 세계 매출만 3억2600만달러에 달한다.

 

▶특히 일본에서의 성공이 눈부시다. 단행본 ‘망가(만화)’에 익숙하던 일본 독자에게 일정 간격을 두고 드라마처럼 회차 단위로 쪼개 다음 이야기를 공개하고, 처음에는 유료로 제공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무료로 푸는 마케팅으로 독자를 끌어들였다. 출판사가 한정된 지면을 극소수 작가에게 주는 폐쇄적 방식이 아니라 누구나 아이디어와 스토리만 있으면 무한대인 인터넷을 창작 공간으로 제공해 신인을 발굴했다. 네이버와 카카오 현지 법인은 일본 웹툰 시장 1위와 2위에 올라 있다.

 

▶네이버 웹툰이 지난주 미국 증권위원회에 증권 신고서를 제출하며 나스닥 상장에 나섰다. 한국 웹툰 수출을 넘어 외국 작가와 그들의 새로운 스토리를 찾아내고 이를 웹툰·웹소설·드라마로 제작하는 ‘글로벌 스토리 생태계’를 만든다는 목표다. 기업 가치가 최대 40억달러(약 5조5000억원)에 이를 거란 전망도 나온다. 성공하면 K드라마와 K팝에 이어 또 하나의 글로벌 대중문화 산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러나 만화 산업의 진검 승부처는 애니메이션이다. 시장 규모가 웹툰을 압도한다. 이 부문의 절대 강자는 여전히 일본이다. ‘반딧불이의 묘’ ‘이웃집 토토로’ ‘스즈메의 문단속’ 등 글로벌 히트작 대부분이 일본산이다. 다만 변화 조짐도 있다. 한국 웹툰 ‘나 혼자만 레벨 업’이 전 세계 149억뷰를 올리자 일본 제작사가 협업을 제안해 올 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송됐다. 한국 웹툰을 쳐다보지 않던 일본의 자세 전환이다. K팝이 J팝을 뒤쫓다가 추월했고, 웹툰은 망가를 앞질렀다. 한국 애니메이션에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06.06 마처 세대

▲일러스트=이철원

 

‘마처 세대’로 불리는 1960년대생 10명 중 9명이 노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마처 세대란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를 일컫는 신조어다. 아래위 세대를 다 부양하지만 정작 자식들한테 노후 봉양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3명 중 1명은 고독사 걱정도 했다.

 

▶860만명에 달하는 1960년대생은 전체 인구의 16.4%로, 연령대별 최대 인구다. 710만명의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은퇴에 이어 내년부터는 1960년대생이 차례로 65세 이상이 된다. 이 세대는 거의 절반이 부모에게 상당한 액수의 용돈을 드리고 10명 중 3명은 직접 모시고 산다. 6~7명당 1명은 부모와 자녀를 모두 금전적으로 지원한다. ‘더블 케어’에 이어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트리플 케어’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그러니 ‘60대 취업준비생’도 적지 않다.

 

▶미국에서는 ‘샌드위치 세대’라는 말이 40여 년 전 등장했다. 직장에서 일에 치이고, 가정에서는 부모도, 자녀도 다 돌봐야 하는 30·40대 여성을 ‘샌드위치 세대’라고 했다. 지금은 40~59세 사이의 중년층 71%가 부모와 자녀의 ‘이중 부양’ 부담을 떠안은 샌드위치 세대로 산다. 약 7600만명의 베이비부머(1944∼1963년생)가 80대에 접어들면서 샌드위치 세대의 어깨가 더 무거워지고 있다. 호주에서는 ‘50대가 아니라 60대가 중년’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자녀들 결혼과 독립은 늦어지고 부모는 더 오래 살면서 50~70세에 속한 인구 집단이 장성한 자녀와 병약해진 노부모를 함께 살핀다. ‘에이지퀘이크(age-quake·인구 지진)’로 불리는 고령화의 충격으로 이중 부양 부담을 진 샌드위치 세대의 연령대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낀 세대 신드롬’은 어느 세대나 느끼는 현상이기도 하다. 요즘 회사에서는 40대가 스스로를 ‘마처 세대’로 여긴다. 위로는 목소리 큰 386세대를 상사로 받들어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20~30대 후배들한테 상사 대접도 못 받는 처음 세대라는 푸념이다.

 

▶우리나라는 60세 이상이 가진 순자산이 나라 전체의 40%에 육박한다. 60년대생은 높은 학력에,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안정된 직업을 갖고 상당한 자산을 축적한 세대다. 60년대 후반 출생자까지 60대로 들어가면 세대 간 부의 편중도 더 심해질 것이다. 경제가 성장해 자식 세대가 부유해져야만 ‘마처 세대’의 노후 걱정도 덜어질 것이다.

강경희 기자

 

06.07 봄날에 찾아온 가을하늘

초여름 날씨를 보인 5월 31일 경기도 수원시 광교저수지를 찾은 시민이 활짝 핀 큰금계국을 감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러스트=이철원

 

근래 화창한 날씨에 하늘이 맑아져 북한산에서 멀리 개성 송악산, 인천 앞바다를 보았다는 체험담이 올라오고 있다. 공기가 깨끗해져 가시거리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5월 중순엔 전국에 비가 내리면서 먼지가 씻겨 내려가 서울의 가시거리가 38km로, 평소의 4배 수준을 보인 적도 있었다. 경기도 파주 통일전망대에서 북한 주민들이 농사짓느라 논둑을 걷는 모습은 물론 북한 마을의 창문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는 빛의 산란 때문이다. 빛이 지구로 들어오면서 대기 중 입자를 만나면 산란이 일어나는데, 그중 파장이 짧은 파란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대기 중에 입자가 큰 수증기나 먼지 등이 있으면 하늘이 흰색으로 뿌옇게 보인다. 보통 가을엔 북동풍을 타고 선선하고 건조한 공기가 들어와 대기 중 수증기가 다른 계절보다 적다. 이 때문에 하늘이 높고 푸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하늘이 딱 가을 하늘 같다.

 

▶보통 요즘처럼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땐 중국 쪽에서 서풍이 분다. 이 서풍을 타고 미세 먼지나 황사가 몰려와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다. 그런데 올해는 서풍 대신 북풍이 자주 불었다. 북쪽에서 선선하고 수증기가 적은 건조한 공기가 불어오면서 가을 하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북풍이 좋은 일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북한이 동력 장치가 없는 ‘오물 풍선’을 잇따라 날려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북풍 덕이었다. 바람의 방향은 대남 전단과 대북 전단을 뿌리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 5월 서울의 미세 먼지(PM10) 농도가 1㎥당 33㎍으로 16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5월 중 공기가 가장 맑았다는 것이다. 깨끗한 5월 공기는 비교적 잦은 비와 북풍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지난달 서울의 강수량은 125.1㎜로 평년(103.6㎜)보다 많았다. 주기적으로 비가 내리면서 먼지를 씻어내렸고 마침 건조한 북풍도 불어오면서 국내 오염 물질까지 멀리 날려 보냈다.

 

▶2019년 봄 일평균 초미세 먼지 농도가 150㎍/㎥을 오르내리는 최악의 공기 대란을 겪었다. 말 그대로 숨쉬기가 거북할 정도로 대기 질이 최악인 날이 많았다. 아이들이 하늘을 그릴 때 파란색 대신 회색 크레파스를 칠했다는 기사를 쓴 것도 그때였다. 요즘 가을 하늘 같은 하늘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비와 북풍만 아니라 정부의 미세 먼지 저감 대책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믿는다. 하늘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요즘만 같으면 좋겠다.

김민철 기자

 

06.08(토) '성폭행 피해 여중생'을 위한 복수

▲일러스트=김성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영화 ‘더티 해리’는 사적인 복수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문명국 미국에서 왜 법 테두리 밖 복수가 벌어지고 세상 사람들의 공감도 얻는지를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 이야기 속에 녹였다. 시리즈 5편 중 남자 6명이 집단 성폭행을 저지르고도 법망을 벗어나자 피해 여성이 복수에 나서는 4편은 특히 큰 박수를 받았다.

 

▶우리 드라마나 영화 중에서도 복수 대행업을 하는 ‘택시 드라이버’나, 죽어 마땅한 자만 골라 죽이는 살인자가 영웅으로 나오는 ‘살인자ㅇ난감’ 등이 히트하는 걸 보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인식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을 집까지 찾아가 폭행한 20대 청년이 구속되자 관련 기사에 “의인을 돕고 싶다” “후원 계좌를 알려달라”는 댓글이 쇄도했다. 귀가하던 여성을 뒤따라가 돌려차기로 공격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 범인의 신상을 공개한 유튜버도 비슷한 호응을 얻었다.

 

▶한 유튜버가 20년 전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 신상을 연이어 폭로했다. 2004년 고등학생 44명이 여중생을 1년간 집단 성폭행한 범죄다. 가해자 중 10명만 기소돼 일부만 보호 처분을 받았을 뿐, 아무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피해자는 정신적 충격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지금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 하는데 가해자들은 대학 나오고 취직도 하며 멀쩡히 지낸다는 사실이 공분을 샀다.

 

▶화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사적 제재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사법 체계는 사적 제재를 금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고려 시대에, 사적 복수를 허용했더니 “억울해서 복수했다”며 저마다 정당성을 주장하는 등 폭력 사태가 만연해 개인적 복수를 다시 금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도 이런저런 부작용을 빚는다. 이번 가해자 폭로 건만 해도 사건과 무관한 여성이 가해자의 여자 친구로 지목돼 곤욕을 치렀다. 유튜버가 피해자에게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적도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피해자 구제보다 유튜브 구독자 늘리기에 사회적 공분을 써먹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법으로 유명하지만, 방점은 보복 조장이 아니라 국가가 복수를 대신해 줌으로써 더 큰 혼란을 막는 데 있었다. 수천 년 전에도 알던 이치가 지금도 흔들리는 것은 법이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충분한 단죄나 사법 처리 지연이 사적 제재라는 퇴행을 부른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로 곱씹게 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06.10(월) 휴대용 재떨이

▲일러스트=이철원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흡연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길에 꽁초 버리는 걸 볼 수 없다. 꽁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넣는 장면만 나온다. 온갖 나쁜 짓 다 하던 야쿠자가 꽁초만은 휴대용 재떨이에 담아 가져가는 조폭 영화도 있다. ‘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지 않는다’는 생활 태도가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결과다. 우리는 그 반대다. 한국을 찾은 일본인들은 드라마 흡연 장면조차 모자이크 처리하는 나라가 현실에선 아무 데나 꽁초를 버리는 걸 보고 놀란다고 한다.

 

▶결국 나라 밖에서 망신을 샀다. 일본 쓰시마 섬의 한 신사가 한국 관광객 출입을 금지했다. 일본 신사에서 흡연은 조례로 금지돼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한국에서 하던 대로 담배 피우고 꽁초를 버렸다. 일부는 침까지 뱉었다고 한다. 여러 번 지적해도 고쳐지지 않아 “한국인 출입 금지를 풀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일본 곳곳에서 일부 한국인의 꽁초 투기 행태가 손가락질당한 지 오래다. 오사카의 어느 음식점 사장이 “꽁초를 버리는 한국 손님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한 유튜브 동영상도 있다.

 

▶한국도 꽁초를 무단 투기하다 걸리면 처벌한다. 그러나 벌금 5만원이 고작인 솜방망이 제재고 실제론 못본 척 눈감아 준다. 나라 밖에서 그랬다간 큰 봉변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미국 일부 주와 싱가포르에서 꽁초를 버렸다가 걸리면 우리 돈 약 200만원을 내야 한다. 일본은 처음엔 우리 돈 1만원 정도로 가볍게 제재하지만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최대 1억원 이하 벌금이나 5년 이하 징역으로 엄벌한다.

 

▶2022년 여름 홍수 때 서울 시민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비가 많이 온 탓도 있지만 꽁초가 빗물받이를 막아 피해를 키웠다. 서울에는 약 55만개의 빗물받이가 있는데 담배꽁초가 배수로를 막아 제 구실을 못 한다. 배수로 쓰레기의 70%가 담배꽁초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에 따르면 빗물받이 3분의 2가 막히면 침수 높이가 그렇지 않을 때의 두 배로 올라간다. 이는 반지하 가구에 큰 위협이다. 꽁초 투기를 시민 안전을 위협하는 반사회적 악습으로 다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연간 담배 소비량의 절반인 320억개가 꽁초로 버려진다. 일부 흡연자는 “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지 않도록 쓰레기통을 충분히 설치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담배 쓰레기통은 주변을 흡연장화하고 악취를 뿜는다는 이유로 반발도 크다. 애완견이 늘면서 휴대용 배변봉투가 정착했다. 꽁초도 휴대용 재떨이를 지니고 다니며 각자 처리하는 시민 문화가 뿌리내려야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06.11 북한 군인을 놀라게 하는 것들

▲일러스트=박상훈

 

북·중 국경의 조선족 식당 등에 우리 정부가 한국 TV를 볼 수 있는 장비를 무료로 설치해줬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조선족뿐 아니라 중국 내 북한 주민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북 주민들이 가장 놀라는 프로그램이 ‘6시 내고향’이라고 한다. 북한 농촌에선 매년 아사자가 속출한다. 그런데 한국 농촌에선 먹을거리가 넘치고 일반 농민도 자가용을 모는 장면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는 허구일 수 있지만 농촌의 모습을 매번 가짜로 찍을 수는 없다. 한 탈북민은 “남북 농촌의 차이가 천당과 지옥 같았다”고 했다.

 

▶동물원과 전국노래자랑 방송을 보고도 놀란다. 북 주민 대부분은 평생 바나나를 먹을 일이 없다. 그러나 한국 동물원에선 원숭이와 코끼리가 바나나 등 열대 과일을 푸짐하게 먹기 때문이다.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특권층이 아닌데도 북한 중앙당 간부보다 잘 입고 나와서 무대를 누빈다. 개그 프로에서 한국 대통령이 희화화되는 장면은 기절할 수준이다. 외부와 단절된 감옥에 사는 북 주민들은 한국의 평범한 일상에 더 충격을 받는다.

 

▶휴전선에 배치된 북한군이 50만~60만명이다. 17세에 입대해 10년씩 복무한다. 한창 놀 나이인데 라디오 하나 구경하기 어렵다. 대북 확성기에서 신나는 댄스곡이 나오면 어깨가 저절로 움직인다. 애창곡이 생기고 1년쯤 지나면 방송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김정은의 폭정과 은밀한 가족 관계 등을 방송하면 처음엔 믿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대북 확성기에서 나오는 일기예보가 정확히 맞는 것을 경험하고, 북한 축구팀의 경기 결과 등을 실시간으로 알게 되면 확성기 내용을 신뢰하게 된다. 2011~2016년 철책을 넘은 북한군이 9명인데 그중 4명이 2015년 확성기 재개 이후 나왔다.

 

▶우리 군이 6년 만에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면서 방탄소년단(BTS) 등 노래와 일기예보, 북한 내부에서 거래되는 쌀·옥수수·달러 가격 등을 소개했다. 최전방 북한군들은 6년 전처럼 우리 일기예보를 듣고 빨래를 걷고 한류 스타들의 노래도 흥얼거릴 것이다. 이젠 고향 장마당의 물가까지 확성기에서 확인할 것이다.

 

▶지금 북한군 상당수는 2000년대생이다. 만성적 경제난 속에 노동당이 아닌 장마당이 먹여 살려준다는 걸 깨달은 세대다. 입대 전부터 한류를 즐겼다. 김정은이 ‘한국 드라마 보면 척추를 꺾어 죽인다’고 광기를 부리는 것은 이 신세대의 눈·귀를 가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람의 눈·귀를 어떻게 영원히 가릴 수 있겠나.

안용현 기자

 

06.12 승진 거부권

▲일러스트=이철원

 

HD현대중공업 노조가 올해 임금 및 단체협약에 ‘승진 거부권’을 요구 조건에 넣었다고 한다. ‘승진 거부권’이란 승진해서 노조를 탈퇴해야 하는 직급이 될 때 승진을 거부하고 노조원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선택권을 달라는 것이다. 정년을 보장받는 노조원으로 회사를 오래 다니겠다는 의도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일본 만화영화 ‘짱구는 못 말려’에서 주인공 5세아 짱구의 아빠는 중견 기업의 만년 계장이다. 직장생활 15년 차인데 과장 승진도 못 하고 계장에 머물러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이 만화영화는 일본 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만년 과장’이 늘고, 승진보다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공감을 얻었다. ‘잃어버린 30년’의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일본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좁아진 승진 기회에, ‘만년 과장’으로 사는 아빠들이 대폭 늘었다.

 

▶공기업 한국전력에서는 승진 시험을 치르지 않고 만년 과장으로 퇴직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승진 시험에 합격하면 ‘차장’으로 승진해 대략 2년마다 전국의 지사를 옮겨다니는 순환 근무를 해야 한다. 차장이 된 후 부장으로 승진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바에야 가족과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되는 만년 과장이 낫다는 것이다. 자발적 ‘승진 거부’다.

 

▶100대 기업에서 임원이 될 경쟁률은 120대1에 달한다. 상위 253개 기업의 임원 평균 나이는 53.2세. 서른 즈음에 입사해 100여 명 동기와의 경쟁을 뚫고 성공하면 53세에 임원이 된다는 얘기다. 임원은 ‘샐러리맨의 별’로 불렸는데 요즘은 ‘임시 직원의 줄인 말’이라는 자조가 확산되고 있다. 임원은 정년 보장이 안 되는 계약직이다. 근로기준법상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 대상도 아니다. 법 개정으로 2016년 정년이 55세에서 60세로 높아졌는데 임원의 평균 연령은 10년 새 1.5세만 높아졌다. 임원은 길어야 50대 중반, 빠르면 40대에도 회사를 떠난다. 정년 채우면서 회사에 오래 남아있는 것이 금전적으로 더 이득일 수 있다.

 

▶중장년 세대는 고령화 시대에 ‘가늘고 길게’ 회사를 다니려고 승진보다 ‘60세 정년’을 선호한다. 한 구직사이트 조사에 따르면 20~30대 직원은 절반 넘게(55%) ‘승진 생각 없다’고 했다. 기업이 직원에게 써온 대표적 ‘당근’이 승진인데 요즘 젊은 세대엔 그 효과가 점점 떨어진다. 변화한 세태와 가치관에, 기업들의 인사제도가 근본부터 달라져야 할 것 같다.

강경희 기자

 

06.13 종교 흥행

▲일러스트=이철원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오면 조계사 앞에서 연등회 축제가 열린다. 올해 행사는 예년과 사뭇 달랐다. ‘엄숙한 축하’ 대신 댄스 음악회가 펼쳐졌다. 단상에 오른 개그맨 윤성호씨는 차림부터 남달랐다. 승복 입고 짧게 깎은 머리에 나이트클럽 디제이들처럼 헤드셋을 했다. 이어지는 장면은 힙합 공연을 방불케 했다. 대형 스피커에선 EDM이라는 전자음에 불경을 리믹스한 곡 ‘부처 핸섬’이 흘러나왔다. 연단 아래 모여 있던 청년들이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환호했다.

 

▶이날의 파격은 지난해 윤씨가 연등회 사회를 맡아 선보인 디제이 퍼포먼스가 계기였다. 행사 동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1000만 조회’를 기록하자 조계종이 반색했다. 그에게 영어 ‘뉴’(NEW)와 한자 ‘진’(進)을 합쳐 ‘뉴진’이란 법명을 지어 주었고,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은 “디제이 할 때 쓰라”며 헤드셋을 선물했다. 행사장마다 선보이는 ‘뉴진 스님’의 공연은 인기 K팝 걸그룹 ‘뉴진스’를 연상케 했다.

 

▶파격의 이면엔 지속적인 신도 감소에 따른 종교계의 고심이 담겨 있다. 20년 전 한 해 500명 넘던 남녀 승려 입문자가 지난해 80명대로 줄었다. 해인사는 출가자 모집 광고까지 냈다. 천주교와 개신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올 초 발간된 ‘천주교 통계 2023′에 따르면 지난해 세례를 받은 이는 5만1307명으로 2019년 세례자 수의 63%로 줄었다. 급감하고 있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개신교계도 신학대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7년을 기점으로 국내에서 종교를 갖지 않은 이의 수가 종교인 수를 앞질렀다는 통계도 있다.

 

▶뉴진 스님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디제이’로 나섰다가 현지 불교계의 반발을 샀다고 한다. 중생 구제를 목표로 현실 사회에 적극적으로 간여하는 한국 대승불교와 달리, 동남아에선 개인의 수행과 해탈을 강조하는 소승불교를 믿는다. 그러니 세상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한국 불교 전통에 공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 불교 행사장에서 팔리는 티셔츠엔 ‘중생구제’와 ‘백팔번뇌’ 대신 ‘중생아 사랑해’ ‘번뇌 멈춰’처럼 현대적 어휘가 적힌 것이 인기다. 천주교와 성공회에선 반려동물 축복식이 확산한다. 국민 1500만명이 반려동물을 키우고 개와 고양이를 가족으로 여기는 현실이 사목에도 변화를 불렀다. 유럽에선 성당과 교회가 신도 감소를 못 버티고 나이트클럽과 빵집으로 바뀌고 있다. 세상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종교라고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김태훈 논설위원

 

06.14 해외 한인 마트

▲일러스트=이철원

 

15년 전 파리 특파원 시절 자주 간 한인 마트가 있었다. 구매액의 5%를 적립해 주는 것이 그 가게의 장점이었다. 적립 카드 가득 스탬프가 찍혀 써 먹으러 갔더니 가게가 사라지고 없었다. 파리 교민이래야 6000명 남짓이라 수익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2년 전 파리에 들렀더니 한인 마트가 환골탈태해 있었다. 가게가 훨씬 커지고, 상품 구색도 더할 나위 없이 다양했다. 손님 반 이상이 현지인 청년이어서 더 놀랐다.

 

▶2022년 12월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하던 한국 여행객들이 폭설에 갇혀 차가 꼼짝달싹 못 하게 됐다. 삽이라도 빌리려 인근 주택 문을 두드렸다가 ‘입 호강 행운’을 누리게 됐다. 치과 의사인 집주인이 K푸드 마니아라서 냉장고에 한식 식재료가 가득했던 것. 맛술, 고추장, 참기름, 고춧가루까지 있었다. 솜씨 좋은 여성 여행객이 제육볶음, 닭볶음탕 등 오리지널 한식을 척척 만들어 집주인과 손님 모두 K푸드 파티를 즐겼다.

 

▶미국 소도시 가정집 냉장고에 한국 식재료가 가득했던 건 한인 마트가 대형 유통 체인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미국 최대 한인 마트인 H마트는 1982년 뉴욕 퀸스에서 80평 식료품 가게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미국 전역에 96점포를 거느리고, 연매출 20억달러를 올린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K라면 신드롬’의 산실로 H마트를 지목하며 “H마트 같은 아시아계 식료품점이 문화 현상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보도했다.

 

▶한인 마트의 성장엔 K팝, K드라마 등 한류 문화가 한몫을 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떡볶이, 김밥, 컵라면 등 한국 식료품이 세계인의 눈길을 끌면서 팔도도시락, 신라면, 비비고 만두, 불닭볶음면 등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CJ제일제당은 만두 해외 매출만 1조원이 넘고, 한국 라면은 월 1억달러 이상 불티나게 수출된다. CJ제일제당, 농심, 대상 등 한국 대표 식료품 기업들의 해외 매출 비율이 30~50%에 이른다.

 

▶한인 마트가 자리 잡기 어려운 신흥국에선 편의점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몽골, 베트남, 말레이시아, 카자흐스탄 등에 한국 편의점이 1000곳 이상 진출해 K푸드와 한국 식료품을 판매하고 있다. 외국에서 살아 보면 한인 마트가 한인 사회의 구심점이자 K푸드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유럽 등 다른 지역에서도 미국 H마트처럼 전국적 체인망을 가진 한인 마트가 등장하면 좋겠다. 한식 식재료 조달이 쉬워지면 한식당이 늘고, 한식 수요 기반이 넓어져 한식 세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김홍수 논설위원

 

06.15(토) 기록 말살

▲일러스트=양진경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름이 없어지면 존재도 사라진다고 믿었다. 모세가 유대인을 이끌고 탈출하자 파라오가 그에게 이름을 지우는 벌을 내린 것은 인류 초기의 기록 말살형(刑)이다. 이 형벌은 고대 로마 들어 정교하고 가혹해졌다. 처벌받은 이는 조각상부터 건물 벽면과 바닥에 새긴 초상까지 모두 파괴됐고 업적을 기록한 공문서까지 지워졌다.

 

▶기록 말살을 당한 이 중엔 폭군 네로부터 2차 대전의 두 원흉 히틀러와 무솔리니까지 당해 마땅한 인물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록 말살은 권력자가 세상의 질서를 제멋대로 주무르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스탈린은 1930년대 대숙청 당시 행동 대장으로 부렸던 측근 예조프를 처형했다. 나아가 오늘날 출생지마저 불분명할 정도로 거의 모든 기록을 지웠다. 예조프의 어머니를 매춘부로 조작하며 없는 사실을 만들기도 했다.

 

▶북한은 3족을 멸하는 형벌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기록 말살형에 처한다. 영화배우였던 장성택의 조카사위는 장성택과 함께 처형당했는데 그가 나온 영화는 모두 다시 찍거나 얼굴만 교체하는 딥페이크 기술로 흔적을 지웠다. 정치범 수용소로 가면 그 이름과 사진은 모조리 말살되니 유령이 된다. 김정은이 ‘남북 통일은 없다’라고 선언한 뒤엔 ‘통일’ 단어도 말살 대상이 됐다. 평양 지하철 통일역은 이름 없이 ‘역’으로만 표시된다. ‘조국통일 3대 헌장기념탑’도 파괴됐다. 북한 국가 가사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에서 ‘삼천리’도 없어졌다. 북한은 얼마 전 화보집을 내면서 김정은이 2019년 판문점에서 트럼프와 만날 때 옆에 있던 문재인 대통령 사진을 지웠다.

 

▶그런 김정은이 기록 말살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정은이 2018년 5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주석과 다롄의 해변을 함께 걸었다. 그때 남긴 두 사람 발자국을 중국 당국이 금속으로 본떠 현장에 새겼는데 최근 완전히 지워진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은 중국이 송유관만 잠가도 온 나라가 휘청일 만큼 중국에 의존한다. 그런데도 러시아와 지나치게 밀착하자 시진핑이 매우 불쾌히 여겼다고 한다. 툭 하면 기록 말살 칼을 휘두르던 김정은이 이번에 자신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북한만큼은 아니지만 중국도 기록 말살이 잦은 나라다. 문화혁명 때 덩샤오핑의 사진이 지워졌고 몇 년 전엔 축구 스타 하오하이둥이 공산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득점 기록부터 소셜 미디어 계정까지 모두 사라졌다. 인터넷에 이름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으니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06.17(월) 자식 돌봄 연장전

▲대한의사협회가 14만 회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총파업 투표 마지막 날인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 전공의 학부모가 의협 집행부를 지지한다는 내용이 적힌 화환이 놓여 있다. 2024.06.07. /뉴시스

 

▲일러스트=박상훈

 

얼마 전 지인이 자녀 공군사관학교 입학 시험장에 갔더니 공사 학부모 모임(공학모) 멤버들이 주차·교통정리를 해주고 있었다. 이 모임은 17년 역사에 회원 수도 2000명이 넘는다. 지역별 모임에다 합창단 등 다양한 친목 소모임까지 있다. 찾아 보니 공학모만 아니라 육학모, 해학모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자녀가 성인인데 좀 유난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도 생활을 이해하고 필요할 경우 그림자처럼 조용히 지원하는 ‘스텔스 서포터스’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의 한 외고의 고3 때 엄마들 모임은 20년이 지난 요즘에도 정기적으로 만난다. 대입 정보 교환이 주목적이었지만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진출한 지 오래인 요즘까지 모이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서로의 관심사와 이해관계가 비슷해 멤버들끼리 할 얘기가 많다고 한다. 자녀들이 각계에 진출하면서 이런 모임의 영향력이 웬만한 여고 동창회보다 세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만 극성 학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도 자녀 주위를 헬리콥터처럼 빙빙 돌며 과잉보호하는 ‘헬리콥터맘’이란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차로 자녀를 축구장에 데려다주는 ‘사커맘’ 정도는 애교이고, 자녀 성공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들을 앞서서 다 치워주는 ‘잔디깎이맘’도 있다. 이들의 자녀는 입사 후에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찰러리맨(차일드·child와 샐러리맨의 합성어)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의대생 학부모 모임’이 의대 교수들을 향해 “지금까지 교수님들은 무얼 하셨느냐”고 비판하며 “당장의 환자 불편에도 지금은 행동해야 할 시점”이라는 글을 올렸다. 이 모임은 정부가 의대 증원 규모를 발표한 직후인 지난 2월 인터넷 카페 형식으로 개설됐는데, 현재 회원 수가 2400명이 넘었다. 들어가 보니 18일 의사 총궐기 대회나 의대 증원 관련 기사 등을 공유하며 댓글 등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공학모, 의학모를 보면 부모들이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도 연장전까지 치르는 것 같다. 다만 두 모임엔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공학모의 제1원칙은 ‘학교 행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외부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한다. 신입 회원이 들어오면 이 점부터 주지시킨다는 것이다. 반면 의대생 학부모들이 자녀들 스승인 의대 교수들에게 적극적인 투쟁을 요구하고 나선 점이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이래저래 한국에서 부모 노릇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06.18 생체 연령

▲일러스트=김성규

 

2018년 네덜란드 정치인이자 방송인 에밀 라텔반트가 자기 생년월일을 1949년 3월 11일에서 1969년 3월 11일로 정정해 달라는 소송을 냈다. 또래보다 20세 이상 젊어 보이고 힘도 넘치는데 69세라는 법적 연령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 나이를 낮춰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는 “이름과 성별도 바꿀 수 있는 시대에 나이는 왜 못 바꾸냐”며 따졌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생물학적 나이’라고도 불리는 생체 연령은 2013년 스티브 호바스 UCLA 교수가 세포에서 추출한 DNA로 그 사람의 노화 정도를 정밀 측정할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여러 연령대에서 채취한 표본을 분석한 결과 메틸기라는 원자 집단이 DNA의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데, 이 ‘DNA 메틸화’ 유형이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신체 조직의 노화도를 추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것이 ‘호바스 시계’로 불리는 생체 연령 판별법이다.

 

▶베스트셀러 ‘노화의 종말’로 유명한 데이비드 싱클레어 미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노화는 치료 가능한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노화는 거스를 수 없는 필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첨단 과학의 ‘역노화’ 기술을 활용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의 괴짜 부자 브라이언 존슨은 연간 200만달러를 쓰며 자신의 신체 나이를 되돌리는 실험을 하고 있다. 46세인 그는 의료진의 철저한 관리 아래 매일 111알의 보충제를 먹는 등의 요법으로 18세의 폐활량과 28세의 피부, 37세의 심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화 억제 물질과 요법을 둘러싸고 수많은 이론이 나와있지만 현재까지 의학적으로 가장 검증된 것은 소식(小食)이다. 미 컬럼비아대 연구팀은 열량을 25% 줄인 식사를 2년간 한 사람은 노화 속도가 2~3% 느려졌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시중엔 당뇨병 치료제 메트포르민을 비롯한 각종 노화 억제 약물 리스트도 돌고 있다. 젊은 사람 피를 수혈하면 노화가 늦춰진다는 가설도 있지만 미 FDA는 임상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체내 연령 36세로 측정된 94세 일본인 사토 히데 할머니가 화제가 됐다. 일본 이와테현에 사는 그녀는 60세 어린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로 ‘이웃과 즐겁게 살자’란 인생관을 꼽았다. 노화를 초래하는 다양한 생물학적 원인이 있지만 사회·심리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장수 마을을 연구한 일본 연구자들은 ‘삶은 가치가 있다는 마음가짐’을 장수 요인 중 하나로 꼽고 있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

 

06.19 '남아 선호'가 부른 보복

▲일러스트=이철원

 

자연에서 생식 가능한 개체의 암수 성비(性比)는 장기적으로 1대1로 수렴한다고 한다. 진화생물학에선 이를 ‘피셔(Fisher)의 원리’라고 부른다. 사람의 자연 성비는 여아 100명당 남아 104~107명 범위다. 남아를 만드는 Y염색체 정자가 여아를 만드는 X염색체 정자보다 가볍고 빨라 수정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아 평균 사망률이 여아보다 좀 높아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점차 1대1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그런데 우리나라 신생아 성비가 이런 진화의 규칙에서 30년 가까이 벗어난 적이 있었다. 1970년대부터 2006년까지 자연 성비보다 남아가 훨씬 많이 출생했다. 남아 선호에다 출산 전 성별을 알 수 있는 초음파 검사 탓이다. 1990년 성비가 116.5까지 치솟았다. 특히 셋째 아이 이상 성비는 1994년 206.9를 기록하기도 했다. 기괴한 현상이었다.

 

▶한 자녀 정책을 오래 지속한 중국은 우리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중국의 신생아 성비는 2010년 즈음 120 가까이로 치솟았다. 그 여파로 미혼 또는 애인이 없는 남자가 넘쳐나면서 이들을 가리키는 ‘광군(光棍)’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광(光)’은 없다, ‘군(棍)’은 작대기를 뜻하는데 잎이나 다른 가지 없이 앙상한 가지, 작대기 하나만 있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와 함께 세계 최대 쇼핑행사로 자리 잡은 ‘광군제’에 들어 있다.

 

▶우리 사회에선 남아 선호가 거의 없어졌다. 2007년 이후 자연 성비를 회복했다. 남아 선호가 심해 부모에게 태아 성별을 알리지 못하도록 한 법 규정도 필요 없어졌다. 더 이상 산부인과 의사들이 초음파 검사를 한 다음 “파란 옷 사세요” “아기가 엄마를 닮았네요”라는 식으로 넌지시 태아 성별을 알려주던 모습도 없어졌다.

 

▶그런데 과거 심각했던 출생 성비 불균형이 이제 사회에 ‘보복’을 시작했다. 보건사회연구원은 과거 남아 선호 영향으로 2021년 기준 우리나라 미혼 남성이 미혼 여성보다 무려 20%가량 많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인구 구조상 남성 여섯 명 중 한 명은 결혼을 못한다는 뜻이다. 20~30년 전 잘못된 사회 풍습이 지금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니 새삼 놀랍다. 보고서는 “이 불균형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결혼 실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출생 성비 불균형의 보복은 이제 시작됐는데 지금의 저출생 사태는 앞으로 20~30년 후 어떤 보복을 해올지 걱정이다. 전문가들은 나라와 사회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한다.

김민철 기자

 

06.20 "민주당의 아버지"

▲일러스트=이철원

 

문재인 대통령은 지지자들에게 ‘달님’이라 불렸다. 69번째 생일날 지지자들이 잡지에 낸 광고에는 ‘명월(明月)이 천산만락(千山萬落)에 아니 비친 데가 없다”는 문구가 있었다.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인용했는데 임금의 은혜가 온 세상에 미친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은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던 대통령”이라며 더 나갔다. 교수 출신의 한 정치인은 ‘월광(月光) 소나타’를 피아노로 연주하며 “문 대통령 성정을 닮았다”는 영상 편지를 띄웠고, 얼마 뒤 청와대 대변인 발탁 답장을 받았다.

 

▶김일성의 ‘축지법’ ‘솔방울로 수류탄’ ‘가랑잎 타고 강 건너’는 웃음이 나는 신격화다. 1970년 무렵 북 교과서에도 실렸고, 누가 이를 의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노동신문은 “사실 사람이 땅을 주름 잡아 다닐 수는 없다”며 축지법이 허구임을 고백했다. 김정은이 “세 살 때부터 사격을 했다”고 우상화하던 북한은 2019년에는 “네 살 때부터”라며 한 살을 올려 정정했다. 자기들이 봐도 너무했나보다.

 

▶김종필(JP) 총리는 인문학 소양을 기반으로 아부도 품격 있게 했다. JP는 3김 시대 라이벌이었던 김영삼 대통령 집권 때 YS를 홍곡(鴻鵠·기러기), 자신을 연작(燕雀·참새)에 비유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에는 “밖에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막상 어떤 자리에 오르면 주위를 밝히는 사람이 있다”며 노 대통령을 ‘낮의 촛불’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대통령실 주변에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총선 때 다수가 국민의힘의 참패를 예견하고 있었는데, 용산 주변에선 120석 이상, 또는 잘하면 과반도 가능하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윤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는 아첨이었다. 같은 시기 민주당에선 이재명 대표를 배우 차은우, 축구선수 손흥민, 조선의 정조에 비유하는 경쟁이 벌어졌다.

 

▶이 대표 지명으로 19일 처음 민주당 회의에 참석한 한 최고위원이 이 대표에게 “더불어민주당의 아버지” “집안의 큰 어르신”이라고 말했다. 데뷔 무대에 대한 압박감이 컸던 모양이다. 이 대표 자서전을 읽으며 흐느꼈다던 정청래 의원도 “지금은 이재명의 시대”라며 맞장구를 쳤다. 동교동계 막내였던 설훈은 민주당을 탈당하며 “이 대표는 아부하는 사람만 곁에 두고 있다”고 했다. 아부를 한 정치인은 헤아릴 수도 없지만 ‘아버지’는 처음 듣는 것 같다. 여기가 ‘어버이 수령’이 있는 북한인가. 민주당은 정말 이상해지고 있다.

정우상 논설위원

 

06.21 희한한 북·러 국경 풍경

▲일러스트=이철원

 

두만강 하류인 지린성 훈춘시 팡촨(防川)은 북·중·러 3국 국경이 꼭짓점처럼 만나는 지역이다. ‘용호각’이란 전망대에 올라가면 북·중·러의 국경 초소가 다 보인다. 새벽 닭이 울면 3국 국민이 모두 깬다는 말도 있다. 두만강 520Km 가운데 북·러 국경은 하류 끝의 15km뿐이다. 그런데 이 15km가 동해로 나가야 하는 중국의 출구를 막고 있다. 1886년 중·러 국경 획정 때 중국이 실수했기 때문이다. 용호각 옆에는 중·러 국경을 알리는 ‘토자비(土字牌)’가 있다. 원래는 동해 앞에 세우려 했다. 그런데 두만강 하류는 구불구불하고 강·바다, 동서남북 구분이 어렵다. 중국 관리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간과하고 동해에서 15km 안쪽에 국경비를 세우는 바람에 사달이 났다. 중국은 이 관리를 중형에 처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동해로 빠지는 두만강 하구에 녹둔도가 있다. 세종이 여진족을 밀어내고 4군 6진을 개척할 때 우리 땅이 됐다.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를 공격해온 여진족을 응징하고 적장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운 적도 있다. 이후 녹둔도는 하구 퇴적으로 러시아측 육지와 붙으면서 섬의 모습을 잃었다. 대한제국 때까지 녹둔도에 우리 국민이 거주했지만 지금은 멀리 떨어진 전망대에서 쳐다볼 수만 있다.

 

▶북·러는 1959년 두만강에 철도 교량을 놨다. 양측을 잇는 유일한 육상 통로다. 김씨 일가들이 이 다리를 건너 러시아를 방문한다. 2021년 코로나 창궐 때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 직원과 가족 8명이 두만강 철교에서 ‘레일 바이크’식 수레를 타고 러시아로 탈출해야 했다. 북·러 열차 운행이 끊긴 탓이다. 혹한에 19세기 유물인 철길용 수레를 수동으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북한을 벗어나자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하고 “두만강에 자동차 도로를 건설하는 협정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북·러가 ‘자동 군사 개입’ 협정 등 동맹 관계로 격상했다고 하지만 지금껏 국경에 자동차 연결 도로 하나 없었다. 이런 동맹도 있나 싶다.

 

▶도로가 생기면 북한 노동자의 러시아 유입이 좀 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 접한 러시아 극동은 인구가 적고 낙후한 곳이다. 도로가 생겨도 대부분 비어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북·중 곳곳은 열차·자동차 다리로 연결돼 있다. 지금 북한의 대중 무역 의존도가 역대 최고인 96%를 넘는다. 북 생명줄을 잡고 있는 중국은 북·러 밀착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다. 길게 보면 김정은의 패착일 수도 있다.

안용현 기자

 

06.22(토) 중국 對 필리핀 해상 백병전

▲일러스트=김성규

 

고대와 중세 해전은 상대 배를 들이받는 돌격전이 많았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군은 뱃머리에 돌출한 충각을 앞세워 상대 배를 침몰시켰다. 중무장 해병은 상대 배로 건너가 페르시아 보병을 섬멸했다. 나중에는 함선 간 근거리 포격전을 벌인 뒤 갈고리로 상대 배를 끌어당겨 백병전을 벌였다. 해적도 활용했다. 오스만 제국은 로도스섬 공방전에서 지중해 해적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할 땐 반관반민 해적 출신인 드레이크가 스페인 함선 37척을 불태우며 맹활약했다.

 

▶이런 구식 해전은 근대 이후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남중국해에선 범선 시대의 해상 백병전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필리핀 앞바다나 마찬가지인 세컨드 토머스 암초가 자신들 영해라고 주장한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는 중국의 영유권 공세가 불법이라고 판결했지만 소용이 없다. 중국은 준군사조직인 해상 민병대를 이용하고 있다. 이들은 평소 어업을 하다 정부 지침이 내려오면 해군 대신 분쟁 지역에 출동해 상대 배를 공격한다. 한 번에 100척 이상이 출현한 적도 있다. 제대 군인이 다수인데 정부 지원을 받아 초고속 장비와 무기까지 갖추고 있다. 행태가 해적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우리 서해에도 출몰한다.

 

▶해군이 약한 필리핀은 중국의 공세를 막을 힘이 부족했다. 1997년 세컨드 토머스 암초에 2차 대전 때 쓰던 100m 길이의 폐군함을 고의로 좌초시켰다. 이 배에 해병대를 주둔시켜 섬을 지키고 있다. 그러자 중국이 필리핀 해병대에 식량과 물자를 보급하는 필리핀 보급선을 물대포로 공격하고 있다. 돌을 던지고 도끼와 곡괭이를 휘둘렀다. 칼로 필리핀 고무보트를 찔러 구멍을 내고 보급품을 빼앗았다. 레이저 공격도 한다. 필리핀 선원의 손가락이 잘리는 등 피해가 끊이지 않는다.

 

▶필리핀은 분노하고 있다. 지난달 중국산 선박을 표적으로 바다에 띄워 놓고 한국서 수입한 군함에서 한국산 대함 미사일을 쏴 격침시켰다. 단 한 발에 대형 선박이 침몰하자 필리핀은 환호했다. 중국에 공개 경고를 보내고 국민 울분도 푼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 지대에서도 몽둥이·돌·칼을 동원한 백병전이 수시로 벌어진다. 무력 충돌 확대를 피한다며 두 핵보유국이 육박전을 벌이는 것이다. 중국은 못이 박힌 쇠몽둥이와 과거 관우가 쓰던 언월도까지 들고 나왔다. 인도 군인 수십 명이 죽었다. 해발 4000m 이상 고원 지대 호수엔 최신 순찰정 수십 척을 배치해 대치하고 있다. 21세기 원시적 백병전엔 모두 중국이 끼어 있다. 남의 일 같지 않다.

배성규 기자 

 

06.24(월) "있는 그대로"의 진짜 의미

▲일러스트=이철원

 

김소월 시 ‘진달래꽃’은 말하려는 참뜻과 반대로 말하는 작품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는 실은 곱게 보내드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반어법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딸을 ‘미운 내 새끼’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의 표현과 함의가 상반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화용론(話用論)이 언어철학의 연구 분야인 걸 보면 엉뚱한 말 속에 진짜 속내를 숨기는 게 인간 본성인 듯하다.

 

▶일본에선 남이 한 말의 심중(心中)을 읽는 것을 ‘손타쿠(忖度)’라고 한다.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려 안다’에서 왔다. 영어 ‘read between the lines(행간을 읽다)’와 비슷한 의미일 수도 있는데, 일본에선 권력자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아랫사람이 알아서 일을 처리한다는 뜻으로 변질됐다.

 

▶법정에서도 말의 속뜻이 논란이 될 때가 많다. 대표적인 게 위증 교사다. 위증죄는 기억에 반해 진술하는 행위다. 증인이 사실과 다른 말을 해도 기억에 어긋나지 않으면 위증죄가 안 된다. 위증 교사 혐의로 기소된 이들의 단골 멘트가 “(증인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고 했다”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도 상황에 따라 듣는 사람에겐 ‘기억과 다르게 말하라’는 압박이 될 수 있다. 권력자가 그 말을 했다면 더 그럴 것이다.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고 했다”고 항변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위증 교사’ 사건과 관련해 이 대표 육성이 담긴 녹음 파일이 공개됐다. 이 대표가 2018년 경기지사 선거 때 과거 ‘검사 사칭 사건’에서 “누명을 썼다”고 했다가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된 뒤 증인 김모씨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도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녹음 파일엔 김씨가 “오래돼 기억이 안 난다”고 하자 이 대표가 “내가 변론요지서 하나 보내드릴게요. 기억도 되살려보시고”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된다.

 

▶위증죄나 위증 교사죄는 내심을 확인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위증 교사 사건에선 증언한 사람의 진술이 중요한데 증인 김씨는 이미 위증 혐의를 인정했다. “중압감 때문에 위증했다”고 증언했다. “있는 그대로”라는 이 대표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오래 끌 사건이 아니다. 그런데도 법원은 기소된 지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1심 판결도 내놓지 않고 있다.

최원규 논설위원 

 

06.25 평양의 러시아 정교회

▲일러스트=이철원

 

로마 제국이 동, 서로 나뉘면서 종교도 조금 달라졌다. 동로마 제국이 믿었던 것이 정교회다. 이 정교회가 러시아로 퍼진 것은 키예프 공국 블라디미르 1세 때였다. 동로마 제국 황제가 반란 진압군 파병을 요청하자 블라디미르는 동로마 황족 여성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동로마 황녀 안나가 “정교회를 받아들이면 결혼하겠다”고 하자 통치를 위해 종교적 구심점이 필요했던 블라디미르가 흔쾌히 응했다. 동로마 제국이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러시아가 정교회의 주도권을 쥐었다. 지금도 전 세계 3억명 정교회 신자 중 러시아 정교회 신자가 1억명이다.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오래도록 한 식구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차별이 둘을 갈라서게 했다. 스탈린의 식량 수탈, 러시아의 2014년 크림반도 점령 등으로 사이가 벌어졌다. 2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 결정타였다. 열렬한 푸틴 추종자인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침략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명명하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하는 탱크에 성수(聖水)를 뿌리자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들끓었다. 다른 정교회 국가들도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인정했다.

 

▶러시아인들의 신앙심은 깊다. 종교를 아편이나 마약이라고 치부하는 소련 공산당도 정교회를 없애지 못했다. 여기엔 정치 권력에 굴종해온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도 한몫하고 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18세기 표트르 대제는 세속화된 서방 교회와 달리 정교회가 여전히 백성을 정신적으로 지배하자 총대주교를 없애고 황실에 신성통치종무원을 설치해 교회를 장악했다. 표트르를 롤모델 삼아 종신 집권 길을 연 푸틴도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을 통치에 활용한다. 독실한 신자를 자임하며 종교 행사에도 열심히 참석한다.

 

▶세계에서 종교를 가장 적대하는 나라는 북한일 것이다. 성경을 보기만 해도 살아남기 힘들다. 다른 탈북자는 노동교화형이지만 중국에서 목사를 만난 사실이 드러나면 정치범 수용소나 처형이다. 그런 북한의 평양에 성당·절·교회가 있다. 외국에 보여주기 위한 연극의 무대다.

 

▶지난주 북한을 방문한 푸틴이 과거 김정일이 설립한 평양 정교회 성당을 찾아가 종교 그림을 선물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 수많은 여성, 어린이를 죽인 독재자가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있는 가짜 ‘성당’을 찾았다니 기괴하다. 이번 일로 러시아 정교회가 남북한을 동시에 관장하는 교구장을 5년 전에 임명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그 교구장은 북한 정권에 최소한의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는지 궁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06.26 韓에선 오물, 北에선 보물

▲지난 9일 인천 미추홀구 학익동 한 빌라 옥상에 떨어진 오물풍선을 소방대원이 치우고 있다. /인천소방본부

 

북한이 파지, 꽁초, 분뇨, 건전지, 라이터 등을 담은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자 탈북민들은 “저것은 북한에선 모두 보물”이라고 한다. 그분들에 따르면 북한은 종이가 ‘귀하신 몸’이다. 종이가 없어 교과서도 물려가며 쓴다. 재활용 공책은 온통 누런색이다. 물려받은 교과서가 망가져 재활용 공책에 옮겨 적어 공부하는 학생도 많다. 화장실에선 종이 대신 옥수수 껍질을 쓴다. 휴지는 특권층 전유물이다. 학생들은 파지를 모아 바쳐야 한다. 초등생이 연간 50kg을 내야 한다. 목표량을 채우려 종이는 보이는 대로 줍는다. 중국 상인이 종이 박스를 버리면 서로 차지하려 다툰다. 할당량을 못 채우면 대신 돈을 바쳐야 하니 파지는 ‘보물’이다.

 

▲일러스트=김성규

 

▶담배꽁초도 보기 힘들다. 필터 담배는 부유층이나 필 수 있는데 그 옆에는 항상 그 꽁초를 주우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필터를 모아 빨면 솜이 되고 베개나 이불속으로 쓴다. 건전지는 더 귀하다. 폐건전지는 버리지 않고 재충전해서 쓴다. 라이터와 볼펜 심도 재활용한다. 비료가 없는 북한은 퇴비를 쓴다. 분뇨도 귀하신 몸이 된 것이다. 분뇨 쟁탈전 탓에 분뇨 도둑을 막으려 변소에 자물쇠를 채운다.

 

▶거의 모든 것이 부족한 북한은 ‘버리면 오물, 쓰면 보물’이란 구호를 걸고 폐지나 폐비닐, 폐병, 깨진 유리 등을 모두 다시 쓴다. 폐타이어 안에 짚단을 넣어 쓰고 자투리 천은 장갑이 된다. 아버지 속옷이 아이 운동복이 돼 10년도 간다. 누에고치로 명주실을 생산하는 공장에선 폐수로 단백질 식품과 수액, 비료를 만든다.

 

▶북 당국은 폐기물 수집함과 쓰레기통을 ‘보물함’이라 부르고, 재활용품은 ‘오물로 만든 보물’이라고 한다. 한 번 쓴 자원은 끝까지 재활용해 쓰라는 ‘재자원화법’도 만들었다. ‘70대 노파가 파지와 폐비닐 등을 하루 500kg 이상 모아 왔다’는 뉴스를 내보내고, 오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리는 ‘내가 찾은 보물’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그런 북한이 6·25 하루 전날 오물 풍선을 또다시 남으로 날려 보냈다. 지난달 이후 1600개가 넘는다. 풍선 안엔 파지와 폐비닐, 자투리 천, 담배꽁초, 폐건전지, 퇴비 등이 담겨 있었다. 북한 주민들에겐 ‘보물’ 취급 받는 귀한 것들이다. 북 당국은 급하게 풍선을 날리려고 주민들에게 이 ‘보물’을 바치라고 닦달했을 것이다. 김여정이 오물 풍선을 “진정 어린 성의의 선물”이라고 비아냥거렸는데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그걸 모으느라 고생했을 북 주민들이 안쓰럽다.

배성규 기자

 

06.27 광화문 국기 게양대

▲일러스트=이철원

 

세계에서 가장 큰 국기 게양대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동쪽으로 50㎞ 떨어진 곳에 들어선 신(新)행정수도에 있다. 높이 201.9m 2021년 설치됐다. 세계 곳곳에 이런 대형 국기 게양대가 적지 않다. 150m 이상이 7개, 120m 넘는 것도 22개나 된다.

 

▶나라마다 담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집트 게양대는 아랍 민주화 시위로 쫓겨났다가 재집권한 군부가 자신감을 과시하려는 목적이라고 한다. 7개 토호국 연합체인 아랍에미리트는 몇 해 전 120m 국기 게양대를 토호국마다 하나씩 세웠다. 통합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휴전선에 인접한 북한 기정동 마을엔 160m짜리 북한기 게양대가 있다. 2010년 아제르바이잔에 162m 게양대가 서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우리 대성동 휴전선 마을에 있는 99.8m 태극기 게양대를 압도한다며 세웠다고 한다.

 

▶서울시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광화문 광장에 내후년까지 100m 높이 국기 게양대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실현되면 국내 최고 높이다. 그 앞에는 ‘꺼지지 않는 불’도 설치한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에서 “대형 깃대는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상징이자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대형 게양대를 가진 나라 중에 그런 곳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중인 202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운 게양대가 175m로 세계 2위다. 사우디, 이란, 파키스탄도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도 국기를 적극적으로 게양한다. 미국 위스콘신의 시보이건에 세워진 120m 국기 게양대는 세계 곳곳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퇴역 군인에게 감사하는 취지다. 수도 워싱턴DC의 거대한 워싱턴기념탑은 50개 성조기로 둘러싸여 장관을 연출한다. 2020년 코로나 사태로 20만 명이 사망하자 작은 성조기 20만개를 이 기념탑 주변에 꽂는 추모 행사도 열렸다. 반면, 2차대전 전범국인 일본과 독일에선 지금도 국민들 사이에 국기에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다.

 

▶해방 이듬해 첫 3·1절 때, 남산 정상에 대형 태극기가 걸리자 많은 국민이 감격했다. 6·25 때 1·4 후퇴에서 돌아온 해병대가 광화문 중앙청에 내건 태극기는 피 흘려 지킨 자유를 상징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태극기 부대=낡은 보수’라며 외면하는 이들이 생겼다. 광화문 광장 대형 태극기 게양대가 주변 환경과 어울리겠느냐는 견해도 적지 않은 듯하다. 머릿속 상상과 실제 완성 후 모습은 다를 수 있다. 서울시가 다양한 찬반 견해를 수렴해 합리적 결론을 내리길 바란다.

김태훈 논설위원

 

06.28 친족상도례

▲이종석 헌법재판소장 등 재판관들이 2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헌재는 이날 형법 제328조 제1항 등에 대한 헌법소원 4건을 묶어 선고한다. 친족간 사기죄, 횡령죄 등 재산 관련 범죄의 형벌을 면해주는 '친족상도례' 형법 조항에 대한 위헌 여부가 결정된다. /뉴시스

 

2015년 경찰이 아버지가 숨겨놓은 거액을 훔쳐 달아난 18세 아들을 특수절도 혐의로 붙잡았다. 아버지가 번 돈을 은행에 넣지 않고 창고 라면 박스에 보관하는 것을 알고 1억여원을 훔쳤다. 그 돈을 오토바이, 옷 등을 사고 술을 마시며 탕진했다. 경찰은 아들을 이틀 만에 붙잡았지만 처벌하지 못했다. 친족 간 재산죄는 형을 면제하는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 규정에 따라 공소권 없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러스트=이철원

 

▶우리 형법 328조는 직계혈족이나 배우자, 동거 친족, 동거 가족 등 사이에서 벌어진 절도 사기·횡령 등 재산 범죄를 처벌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른바 ‘법이 가정의 문턱을 넘지 않게’ 한 것이다. 71년 전인 1953년 형법 제정과 함께 도입됐고 지금까지 큰 내용 변화가 없었다. 가족 간 연대가 끈끈한 동아시아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하기 쉽지만 로마법에서 유래한 조항이다. 로마법 체계를 이어받은 프랑스, 독일, 일본도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조항을 갖고 있다.

 

▶그 결과 분명한 범죄여도 친족 사이라면 처벌할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게 생겼다. 아내가 내연남에게 주기 위해 남편 돈을 빼돌려도, 친족이 장애인 친족을 속여 금품을 갈취하거나 수급비를 횡령해도, 아들이 치매 어머니 재산을 관리하다 빼돌려도 처벌할 수 없었다. 범죄 행위자가 별거 중인 배우자나 자녀를 버리고 떠난 부모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피해자가 노인·장애인·미성년자 등 사회적 약자인 경우 문제가 심각하다. 이 조항이 있는 외국의 경우 우리보다 적용 범위가 좁다.

 

▶방송인 박수홍씨 사건 이후 이 조항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졌다. 박씨 부친이 출연료 등을 횡령한 건 친형이 아니라 본인이라고 주장한 이유가 이 조항으로 면책받으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수 있다. 최근 골프 선수 박세리씨가 본인이 아니라 재단 명의로 부친을 고소한 것도 이 조항 적용을 피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많다. 법조인들은 친족 간 재산 사건이 들어오면 이 조항 해당 여부부터 따진다고 한다.

 

▶핵가족을 넘어 1인 가구 시대로 접어들었다. 3촌까지만 친족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을 정도로 친족에 대한 인식도 변했고 친족 간 재산 분쟁이 빈번해졌다. 헌재가 27일 친족상도례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은 이런 시대 변화를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시대에 맞지 않는 법 조항 하나가 사라졌다. 의미가 적지 않지만 시대 변화에 반영하지 못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 법 조항이 이것만 있지 않을 것이다.

김민철 기자

 

06.29(토) 주 6일 근무 '조르바의 후예'

▲일러스트=이철원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인 이미지를 ‘게으르고 무책임한 국민’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주인공 조르바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 채 무일푼 떠돌이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산다. “내가 돈을 댈 테니 크레타섬에 가서 갈탄을 캐자”는 사업 제안을 받고는 “내 마음이 내켜야 간다. 인간은 자유라는 뜻”이라며 배짱을 튕긴다. 조르바는 광산 운영 자금을 술과 매춘으로 탕진하고도 ‘자유’ 운운하며 뻔뻔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10여 년 전 고대 올림픽 발상지, 올림피아를 방문했을 때 ‘조르바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올림피아 유적지의 발견과 발굴 모두 프랑스·독일 고고학팀에 의해 이뤄졌는데, 추가 발굴 작업도 독일팀이 진행하고 있었다. 올림피아 박물관에는 파르테논 신전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제우스 신전 조각 등 뛰어난 유적들이 전시돼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 발굴팀은 왜 없지?’ ‘올림피아 조각을 왜 더 홍보하지 않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2015년 그리스는 국가부도 사태로 구제금융을 받았다. 그런데 국민들이 긴축 요구를 거부했다. ‘조르바의 후예’스러운 모습이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모두 주라”는 포퓰리즘 정치가 40여 년 지속된 탓에 노동 인구 4명 중 1명이 공무원인 나라, 대학 학부는 물론 석·박사 과정까지 공짜인 나라, 퇴직자가 생애 월급의 95%를 죽을 때까지 연금으로 받는 나라가 됐다. 당연히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는데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 사회당 정부의 부총리는 “우리 모두 같이 해먹지 않았냐”면서 조르바식 변명을 했다.

 

▶원래 이런 사람들은 아니었다.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뜻의 영어 관용구 “It’s all Greek to me”는 그리스가 서양 철학 원조국임을 보여준다. 그리스의 해운왕은 이름을 ‘아리스토틀 소크라테스 오나시스’로 지었다. 그리스인들은 “너희 선조들이 거의 원시인일 때 우리 선조들은 철학을 했다”면서 다른 국민들 기를 죽인다. 서양 문명을 만든 사람들인 건 사실이다.

 

▶‘유럽의 병자’ 그리스가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고 있다. 2019년 집권한 중도 우파 정부가 공무원 감축, 세금 인상, 공기업 민영화, 연금 삭감 등 강도 높은 구조 개혁을 진행한 결과, ‘우등 국가’로 변신 중이다. 물가·성장·고용을 종합 평가해 ‘1등 국가’를 선정하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지난해 그리스를 ‘올해의 국가’로 뽑았다. 최근 그리스에선 주 6일 근무를 합법화하는 법까지 통과됐다. ‘조르바식 삶’과의 이별 선언으로 보인다.

김홍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