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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241]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발돋움하는 그대에게 - [260] 오물 풍선과 자유의 씨앗

상림은내고향 2024. 6. 16. 10:45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소설가 조선일보 2023 - 2024

 

2023.11.22

[241]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발돋움하는 그대에게

 
 

당신을 환영하고 축하한다. 나에게는 당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큰 기쁨이다. 나는 당신이 이곳까지 오기가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당신이 지금 이곳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각자 떠돌아다니던 엄청나게 많은 수의 원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협력적이고 정교한 방법으로 배열되어야만 했다. 너무나도 특별하고 독특해서 과거에 존재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존재하지 않을 유일한 배열이 되어야만 한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중에서

 

수능 시험장에 자녀를 들여보내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쏟아져 한참을 차 안에서 울었다는 학부모 이야기를 들었다. 인생의 첫 관문으로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키우는 동안 마음 졸이고 속상했던 순간들, 기특하고 고마웠던 장면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벌써 품을 벗어나 넓은 세계로 떠나는구나, 서운함과 대견함이 뒤섞여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예비고사와 본고사, 고교 내신, 학력고사, 논술고사, 수학능력시험, 대학 자율 결정.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 제도는 갈팡질팡한다. 교육 현장엔 교권 추락, 학생 간 따돌림, 학부모 불만이 빗발치고, 코로나 방역은 교실에서 배워야 할 많은 경험을 빼앗았다. 학교 밖 세상에서도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며 하루도 전쟁 없는 날이 없다.

 

과학에 대한 거의 모든 기본 지식을 흥미롭게 소개하는 논픽션 작가 빌 브라이슨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 중 상당수는 한때 셰익스피어의 몸속에 있었을 수도 있다. 베토벤은 물론 거의 모든 역사적 인물들로부터 물려받은 것들도 각각 수십억 개는 될 것’이라며 과학을 뿌리 삼아 한 번뿐인 삶의 소중함과 개인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정치 뉴스만 봐도 일류 대학을 나왔다고 똑똑한 건 아니구나, 하버드에 다녔다고 대단한 게 아니구나, 사법고시에 붙었다고 훌륭한 것도 아니구나, 알게 된다. 수능을 봤든 안 봤든, 대학에 가든 안 가든 열아홉 살의 선택이 평생의 행불행을 결정하진 않는다. 오히려 너무 멀어서 상상한 적 없는 우주, 너무 가까워서 있는 줄 몰랐던 내면을 볼 수 있다면, 밤바다에서 등대를 찾은 조각배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복은 천천히 멀리 돌아야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섬의 들꽃 같은 것이기에.⊙

 

[242] 암컷은 설치지 마라?

조지 오웰 ‘동물농장’

 

녀가 스노볼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반란 이후에도 설탕이 있을까요?”였다. 몰리의 질문에 스노볼은 “아뇨”라고 대답했다. “이 농장에선 설탕을 만들 방법이 없소. 게다가 당신한테 꼭 설탕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소?” 몰리가 또 물었다. “그때 가서도 내가 갈기에 리본을 매고 다닐 수 있을까요?” ”동무,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리본이 바로 노예의 표시요. 리본보다 자유가 더 값지다는 걸 모른단 말이오?” 몰리는 그 말에 동의했지만 내심 아주 완전히 납득한 눈치는 아니었다.

-조지 오웰 ‘동물농장’ 중에서

 

특정 여성을 ‘암컷’이라 조롱한 야당 전 의원이 일시 당원 자격 정지라는 가벼운 징계를 받았다. 당대표는 ‘행동과 말을 철저하게 관리’하라고 의원들에게 당부했지만, 수년 전 형수에게 욕했던 그에겐 낯뜨거운 별명이 붙었다. 이 와중에 한 여당 의원의 지역 사무장은 소셜미디어에 쓴 글에서 ‘젖소’라는 표현을 해 소란을 더했다.

 

술집도 아니고 카메라 앞에서 암컷이라 부르며 낄낄거리는 남성들, 그들의 발언을 두둔하는 여성들이 나랏일을 한다며 방송에서 떠들고 국회를 드나든다. 개혁을 외치는 ‘개딸’도, 여성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도 침묵한다. 같은 편을 암컷이라 했다면 분노했겠지만 적진의 여성 인권은 개의치 않는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는 공산당에 충성하는 개들의 어미 제시, 잘못된 걸 알지만 저항하지 못하는 암말 클로버와, 맛있는 것, 멋 내는 것을 좋아하는 몰리, 글자는 읽지만 문해력이 낮은 염소 뮤리엘 등의 암컷이 등장한다. 그중 몰리만 행복을 찾아 농장에서 달아난다. 그런데 왜 공산주의로 참혹해진 “동물농장에서도 암컷들이 설치지 않는다”며 그들은 웃었을까. 소설에서 동물을 착취하는 건 수컷들이다. 수컷이 군림하는 사회에서 암컷은 설치지 말고 복종해야 한다는 뜻일까.

 

한 여성을 암컷이라 비하하면 그녀와 함께 사는 남성은 수컷이 된다. 그래서 더욱 유쾌하기도 했겠지만 너흰 틀렸다, 우리만 옳다고 정쟁하는 그들은 다를까. 치고받고 싸운다는 건 차원과 수준, 체급이 같다는 뜻이다.

 

남을 흉볼 때 손가락 하나는 상대를 가리키지만 나머지는 자신을 향한다. 야당이 공천 심사에 부적절한 언행 경력을 반영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여야 구분 없이 저급한 정치 행태를 벗어나리란 기대는 조금도 생기지 않는다.⊙

 

[243] ‘탄핵의힘’

한스 트랙슬러 ‘황홀한 사기극’

 

마녀로 고발되고 심문을 받는 데는 별다른 요건이 필요치 않았다. 증거 없는 의심은 희생 제물에게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했다. 진짜 마녀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으면 사람들은 죄인을 묶어 물속에 던졌다. 어떻게든 물 위로 올라오면 그것은 그녀가 마녀라는 증거였고, 따라서 화형에 처했다. 마녀가 아니라면 물속에 빠져 익사해야 했다. 한스가 그녀를 고발한 동기는 너무도 뻔했다. 희생자의 소유물에서 자기 몫을 확보하려 했고, 비밀 제조법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한스 트랙슬러 ‘황홀한 사기극’ 중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또다시 탄핵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 표결 전 사의를 표명한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은 무산되었지만 쌍방울 대북 송금 의혹과 관련, 야당 대표를 수사한 검사를 포함한 탄핵 소추안은 야당이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 탄핵의 필요성을 주장한 지도 오래다. 당명을 ‘탄핵의힘’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정부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잼버리 대회 파행 후 정부가 삭감한 내년도 새만금 사업 예산안 1472억원도 야당이 복원했다.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도 수용하지 않는다. 궁지에 몰렸다고 여당이 야당을 탓할 순 없다. 현 야당을 다수당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힘을 보탠 것도 국회, 그들 자신이다.

 

‘황홀한 사기극’은 부모에게 버려졌던 남매가 마녀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이 제빵사 남매의 범죄를 미화한 사기극이라고 주장하는 풍자소설이다. 궁정 제빵사는 카타리나의 과자 비법을 훔치려다 실패하자 마녀로 몰아 고발한다. 혐의를 벗고 석방된 그녀를 여동생 그레텔과 함께 살해, 화덕에 시신을 유기한다. 이 소설로 사건의 양면성에 눈뜬 독자도 적지 않지만, 대중은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는 진실 게임보다 못된 마녀를 물리치는 남매의 모험담을 더 좋아한다.

 

다수당은 법의 장막 안에서 당리당략을 위해 누구라도 탄핵할 수 있다. 대중은 골치 아픈 시시비비는 외면하고 반복해서 크게 외치는 주장에 쉽게 동조한다. “그 사람, 탄핵당했잖아”라는 수군거림과 함께 탄핵은 사실로 남고 내막은 역사에서 잊힌다. 모래가 다 쏟아지고 시계가 뒤집히기 전까지는.⊙

 

[244] 정치인의 한글 오기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래 편지를 쓰자. 그러고 나서 내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지 보기로 하자. 그러자 놀랍게도 그 순간 내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모든 고민이 말끔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기쁘고 마음이 들떠 나는 종이와 연필을 꺼내어 앉아서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왓슨 아줌마에게 아줌마의 도망한 노예 짐은 파이크스빌의 하류 2마일에 와 잇습니다 펠프스씨가 그를 붓잡아놓고 잇습니다 만약 아줌마가 상금을 보내면 풀어줄 거입니다. 헉 핀’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중에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00 접어 나빌레라’ ‘가실 때에는 말없이 00 보내 드리오리다’. 조지훈의 시 ‘승무’,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일부다. 00에 공통으로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고히? 고이? ‘곱게’의 변형이므로 ‘ㅂ불규칙용언’의 어간 뒤에는 ‘이’를 붙인다는 문법 규칙상 ‘고이’가 맞는다.

 

조국 전 서울대 교수이자 전 법무부 장관이 광주 5·18 묘지 방명록에 ‘고히 잠드소서’라고 남긴 글이 화제다. 정치인의 한글 오기가 새삼스럽진 않다. 안철수 의원은 ‘굳건히’라고 써야 할 자리에 ‘굳건이’라고 쓴 적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모든 것을 받치겠읍니다’라고 했는데 ‘바치겠습니다’라고 써야 했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백악관 방명록에 우리나라 이름을 ‘대한미국’이라고 썼다.

 

‘내 나이 팔십 다섰, 조훈 일 하는 개 원이라 마주막으로 불으한 어리니한태 써보고 십슴니다.’ 안동에 사는 80대 어르신이 지난 1년간 빈 병을 주워 판 돈과 용돈을 모아 행정기관에 30만원을 전달했다. 사연을 적은 편지에는 복지관에서 늦게 배운 한글이니 헤아려 잘 읽어 달라는 당부도 적혀 있었다. 평생을 어렵게 살다 생의 마지막,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싶었다는 바람을 담아낸 서툰 맞춤법은 오히려 큰 울림을 남겼다.

 

흑인 노예의 도주를 돕는 것이 당시 사회에선 범죄였던 탓에 허클베리 핀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짐의 주인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짐이 받을 고통을 생각하고는 곧 찢어버린다. 철자법은 잘 몰랐어도 무엇이 더 옳은 일인지 핀은 가려낼 수 있었다.

 

맞춤법, 틀릴 수 있다. 다만 짧은 방명록 글도 미리 확인하지 않는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이 나랏일은 바르게 할까?⊙

 

[245] 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윌리엄 골딩 ‘파리 대왕

 

“누가 내 편이 될래? 나는 너희들에게 고기를 주었고, 나의 사냥 부대는 너희들을 그 짐승으로부터 보호해 줄 거야.” 잭이 말했다. “너희들이 날 선출했으니 내가 대장이야.” 랠프가 말했다. “우리는 불을 계속 피워두려고 했어. 그런데 너희들은 먹을 것만 뒤쫓아 다니기나 하고….” “넌 안 그랬니?” 잭이 소리쳤다. “네 손에 들려 있는 뼈다귀를 봐!” 랠프는 홍당무가 되었다. 잭은 그를 무시했다. “누가 우리랑 재미있게 지낼래? 내 패에 들어올 사람?” “난 들어가겠어.” “나도.” “나도.”

-윌리엄 골딩 ‘파리 대왕’ 중에서

 

야당이 민주 유공자 예우 법안을 정무위원회에서 단독 처리했다.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 국회에서 통과되면 5·18 민주화 유공자처럼,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하던 학생들을 진압하다 경찰 7명이 희생된 동의대 사건, 민족 반동 세력 200만명을 죽여야 사회주의를 완수한다며 폭력적 혁명을 도모했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관련자들을 포함, 운동권 829명이 유공자 반열에 오른다.

 

북한은 한국 노래를 듣거나 드라마, 영화를 본 사람들을 공개 처형한다. 지난 8월엔 소고기를 판매한 혐의로 9명을 공개 총살했다. 2018년, 남북 평화 협력을 기원하는 공연이 평양에서 열렸다. 소고기는 얼마든지 먹었을 것 같은 북한 수뇌부와 평양 시민들은 남한 가수의 노래와 춤을 마음껏 즐겼다.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떨어진 아이들은 랠프를 대장으로 뽑고 저마다 역할을 맡지만, 잭이 멧돼지를 사냥하자 규칙은 무너진다. 봉화를 지키며 구조를 기다릴까, 눈앞의 고기를 먹을까? 아이들은 바비큐 파티를 선택한다. “춤을 춰, 춤을!” 잭이 명령한다.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잭의 고기를 먹은 아이들이 노래하고 춤춘다. 생존의 공포와 포만감이 뒤섞인 축제의 광기는 패거리 밖에 있던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다.

 

야당은 평등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면서도 노동자 단체와 민주화 유공자라는 특권층을 양산한다. 잭의 고기를 먹은 아이들처럼, 평양 거주를 허락받은 북한 상류층처럼 혜택을 받으면 은혜 입은 권력에 충성한다. 6·25 참전 용사는 외면하고 개인의 노력으로 쌓은 부와 성공도 부정하면서, 명단과 공적도 비밀인 민주 유공자와 가족에게 온갖 특혜를 주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출신 성분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와는 정말 다른 것일까?⊙

 

[246] 사형수의 식단과 인권 존중 사회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야채수프는 따뜻하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인데 다 식어버렸으니 오늘은 그나마도 운이 없는 날이다. 생선이라고 해봐야 살점보다 가시가 더 많다. 얼마나 오래 끓여대는지 살점은 모두 떨어져 나가 형체를 분간할 수 없고 머리와 꼬리만 간신히 남아 있기 일쑤다. 죽은 식어버려 한 덩어리로 뭉쳐 있다. 말이 죽이지, 노르스름한 무슨 풀 같은 것을 썰어 넣은 것으로 어쨌든 끓여서 삼백 그램만 되면 그걸로 족했다. 죽이든 죽이 아니든, 죽이라고 하면 그만인 것이다.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중에서

 

“식사하셨어요?”는 우리 사회의 흔한 인사말이다. 품 떠난 자식의 안부가 궁금한 부모는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다. 친구들은 “언제 밥이나 먹자”며 헤어지기도 한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지만 “지금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냐?”며 화를 낼 때도 있다. 배고프던 시절의 잔재인 ‘밥의 정서’는 지금도 작동한다.

 

207명의 목숨을 빼앗은 미집행 사형수 59명과 일반 수감자들이 매일 떡갈비나 돼지불고기 등으로 차린 밥상을 받는다. 교도소에서 먹는 밥이 맛있을까만, 땀 흘려 일하고 김밥,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도 많다 보니 구치소의 영양 식단이 진수성찬처럼 보이기도 한다. 2023년 기준, 재소자 1인당 연간 관리 비용은 3100만원이다.

 

스탈린 시대,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힌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늘 춥고 배고프다. 영하 41도가 되지 않는 한 매일 10시간 고된 노동을 하는 그는 밥 먹는 시간을 고대하지만, 음식은 양도 적고 쓰레기라 불러도 될 만큼 처참하다. 그래도 슈호프는 평소보다 죽 한 그릇을 더 먹은 날, 행복감을 느끼며 잠이 든다.

 

사람은 경험하고 실수하고 배우고 성장한다. 가능성을 열어놓고 기회를 주는 일, 인간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지속돼야 한다. 그러나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권리가 중시되고, 실업급여를 받으려고 취업을 미루고, 군 복무 한 사람보다 병역의무를 거부한 인권 운동가의 말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시대다. 보통 사람들은 남을 존중할 때 자신도 존중받는다는 원칙, 정직하게 산 만큼 보상받고 죄지은 만큼 벌 받는다는 상식이 통용되는 세상을 바란다. 의무와 책임을 다한 사람들, 성실한 사람이 손해 보는 기분이 들지 않는 사회야말로 인권이 살아 있는 사회다.

 

2024.01.03

[247] 공무원의 휴식권과 대민 서비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영웅적인 면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랑이 보건대 서기 비슷한 역할을 맡아보기로 작정했다. 모든 일에는 등록이나 통계 작업이 필요했는데 그랑이 맡아서 했다. 그랑이야말로 보건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조용한 미덕의 실질적 대표자였다. 그는 선의로, 주저함이 없이 자기가 맡겠다고 했던 것이다. 리유가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자 그는 놀라서 말했다. “제일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하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좋으련만!”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에서

 

많은 우체국이 점심시간에 셔터를 내린다. 2016년, 2인 이하 우체국에서 시작된 점심시간 휴식제가 5인 이하로 확대됐다. 주민센터와 구청 등 일부 지자체 관공서도 마찬가지다. 점심시간에 우체국과 관공서를 이용할 수 없는 직장인은 난감하다. 개인 정보 관련 업무는 함부로 부탁할 수 없다. 가족도 직장인인 경우가 허다하고 대리인 입증 절차도 까다롭다.

 

병원도 점심시간엔 진료하지 않는다. 사무실 밀집 지역 식당가엔 오전 일을 마친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으러 일제히 나온다. 공무원이 점심시간을 지키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공무원의 존재 이유는 대민 봉사다. 출생, 취업, 이사, 장례 등 국민 일상과 밀접한 관공서는 세금으로 운영된다. 공무원의 권리와 편의를 위해 국민에게 불편과 손해를 감수하라는 것은 주객전도다.

 

죽음이 만연한 도시, 의사와 여행자, 기자, 종교인 등 자원봉사자들이 전염병에 맞서 싸운다. 시청의 말단 임시 직원 그랑도 하찮아 보이는 일들을 찾아 묵묵히 해낸다. 그 덕에 봉사대가 돌아간다. 소설은 ‘한 사람의 영웅이 있어야 한다면 바로 이 보잘것없고 존재도 없는 영웅,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착한 마음씨에서 나오는 용기를 간직한 그랑’이라고 소개한다.

 

시중 은행이 점심시간 집중 근무제를 시범 운영한다. 정오부터 1시까지 모든 창구를 열고 고객을 맞는다. 오후 4시에 셔터를 내리는 대신 6시까지 영업하는 지점도 있다. 직원의 권리 대신 고객 입장을 배려하자고 사고를 전환한 결과다. 직장인과 겹치지 않게 점심시간을 옮기면 심각한 인권 침해일까. 공무원 100만명 시대다. 새해엔 철밥통, 구태의연, 복지부동이란 꼬리표를 스스로 떼어내고 대민 서비스의 보람을 자부하는 영웅들을 만나고 싶다.⊙

 

[248]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모파상 ‘벨 아미

 

현관으로 나오자 그곳에도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까맣게 밀고 밀리는 소란스러운 군중이었다. 그를 보기 위해서, 조르주 뒤루아를 보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파리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가 눈을 들자 아득히 멀리, 콩코르드 광장 저편에 국회의사당 건물이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마들렌 성당 현관에서 부르봉궁 현관까지 한달음에 뛰어갈 것 같았다. 그는 구경꾼들이 양쪽으로 울타리를 이룬 높은 돌계단을 유유히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보지 않았다.

-모파상 ‘벨 아미’ 중에서

 

야당 대표는 부산대 병원에서 수술에 필요한 검사를 받았지만, 가족과 측근이 ‘잘하는 곳’을 원한다는 이유로 혈세 2000만원이 드는 소방 응급 의료 헬기를 타고 서울로 이송됐다. 부산대 병원은 5년 연속 A등급을 받은 우리나라 최고 권역외상센터이자 최종 의료 기관이다. 2021년에 서울시가 중증 외상 최종 치료 센터로 지정한 서울대 병원보다 한 수 위인 셈이다.

 

두 병원은 환자 정보와 의견을 교환했을 것이다. 마침 헬기장 공사로 노들섬에 착륙, 구급차로 복잡한 도심을 달려 이동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서울대 병원이 전원을 승인했다는 건 당대표의 상태가 응급 상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중증 외상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은 1시간이다. 대표의 수술이 시작된 건 피습 후 5시간 20분이 다 돼서였다.

 

모파상의 소설 ‘벨 아미’는 가난한 청년 뒤루아가 상류사회의 여성을 이용해서 출세의 고삐를 쥐게 되는 천박하고 비열한 성공기다. 기자로 일하면서 상류사회의 화려함과 돈의 위력을 알게 된 그는 정치인이 되면 원하는 걸 모두 소유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정치권과 밀착된 언론사 사장의 딸을 유혹, 권력이란 목표에 한발 더 다가선다.

 

응급실을 찾지 못해 구급차에서 숨지는 환자에 관한 기사가 드물지 않다. 야당 대표가 국가 의전 8번째 서열이라 해도 9밀리미터 봉합이 필요한 환자가 응급 헬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몇 달이나 기다려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밀어내고 즉시 수술받은 것도 일반인은 꿈도 못 꿀 특혜다. 면책 특권에 의료 특권까지 누리는 정치인. 그래서 사람은 출세와 권력을 원하나 보다. 오래전에 그런 노래가 있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249] 정당의 철학

 
 

디키의 옷장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톰은 양복을 꺼냈다. 구두도 신었다. 톰은 갈색 실크 넥타이를 골라 정성껏 맸다. 양복이 몸에 꼭 맞았다. 디키처럼 가르마를 조금 더 옆에서 타서 넘겼다. 톰은 다시 옷장으로 시선을 돌려 맨 위 선반에 있는 모자를 꺼내 비스듬히 썼다. 정수리와 이마를 가리니 디키하고 닮아도 너무 닮아 보여 톰은 흠칫했다. 힘만 제대로 주면 눈썹까지 빼닮았다. “뭐 하는 거야?” 톰이 몸을 홱 돌렸다. 디키가 침실 문 앞에 서 있었다.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재능 있는 리플리’ 중에서

 

지난 6일,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전시관, 박물관, 도서관, 동상을 세우고 공원과 도로에 이름을 붙이고 영화와 도서를 제작, 영웅화 작업이 한창이다. 건국과 발전의 역사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대신 대한민국의 정당성이 그들 진영에 있다는 뿌리 다지기의 일환이다. 문재인 전 정권 수장도 DJ의 포용과 통합을 본받자고 축사했다.

 

선거를 앞두면 이상한 현상이 반복된다. 진보를 표방한 좌파는 기존 주장을 강화하며 지지층을 결집하는데 보수 우파는 존재 이유를 망각한다. 무관심을 깨우고 중도층 표심을 얻어야 한다며 자기 색을 희석한다. 가장 기이한 변화는 2012년 대선을 앞둔 새누리당이 파랑을 버리고 빨간색 당복을 입은 것이었다. 이후 보수 정당을 대표하던 파랑은 민주당의 상징이 되었다.

 

지도를 그릴 때 북한은 붉은색, 남한은 파란색으로 칠한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한반도기는 파랑이다. 여기서도 대중은 혼란스럽다. 자유와 평등은 DJ 덕분이라 하고 5·18 정신을 헌법에 넣겠다고 앞장서느라 의견이 다른 신문을 배포한 자기 당원을 내치는 여당은 어떤 사상과 철학을 기반으로 나라의 미래를 구상하고 있을까.

 

리플리는 거짓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대표한다. 그러나 리플리의 본질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기를 꿈꾸다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다. 통치에서 포용은 중요한 덕목이지만 지지 기반의 집결과 통합이 먼저다. 결집력이 큰 경쟁 상대와 똑같은 주장을 한다면 흡수되어 사라질 뿐이다. 건국 대통령의 기념관 하나 없고 경제 부흥 대통령의 기념식 한번 어깨 펴고 하지 못하는 보수 우파 진영은 야당을 보고 배워야 한다. 그리고 승리를 바란다면 더 늦기 전에 물어야 한다. “지금 뭐 하는 거야?”⊙

 

[250]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번 승강장

▲조앤 롤링 ‘해리포터’

 

해리는 지나가는 역무원을 불러 세웠지만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이란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역무원은 호그와트라는 곳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고, 해리가 그곳이 이 나라 어느 지역에 있는지조차 말하지 못하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해리가 절망감을 느끼며 11시에 출발하는 열차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역무원은 그런 열차는 없다고 말했다. 결국 역무원은 시간을 낭비했다느니 어쩌니 투덜거리며 성큼성큼 가버렸다. 이제 해리는 공황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조앤 롤링 ‘해리포터’ 중에서

 

2021년 8월 15일, 육군은 ‘광복군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포스터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한창 반일 감정을 부추길 때여서 한국은 식민지, 국군의 주적은 일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전 정권은 ‘국방백서’에서 북한이 주적이라는 걸 지우고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 침해하는 세력’이 적이라고 고쳐 썼다. 북한을 주적으로 재명시한 건 2022년, 6년 만이었다.

 

북한은 우리를 ‘불변의 주적’이라 선포하고 전쟁 시 남한을 점령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무력 사용을 기도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한반도 위기라는 목소리가 높지만 위협과 실행은 다르다. 최근 실시한 ‘한·미·일 연합 해상 훈련’처럼 우방과 이룬 동맹은 허술하지 않고 북한의 남침은 현실적이지 않다.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은 해리포터를 꿈과 모험의 세계로 데려가는 통로다. 평화를 남발하던 시절, 종북, 친북, 간첩에게만 열리는 문이 있었다. 북한의 적국 규정은 현 정권을 공격할 구실을 주는 것이지만, 평화 놀이에 동참하지 않고 비밀의 문을 닫겠다는 공식 선언이기도 하다. 이에 야당 대표가 ‘우리 북한, 김정일, 김일성 주석의 노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고 말해 논란이다.

 

김정은 부부가 후계자로 내세운 어린 딸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이 전쟁일까? 경계를 풀어선 안 되지만 군사적 도발이나 러시아 방문, 동족 관계 부정은 대한민국에 흡수되어 사라지느니 독립국으로 인정받아 권력을 세습하려는 북한의 필사적 자구책일지 모른다. 체감하지 못해도 지구가 시속 1670km로 자전하고 초속 30km로 공전하듯, 세상은 매 순간 변한다. 북한조차 예상 밖의 변화를 모색 중이다. 구태의연한 건 종북과 친북에 함몰된 우리나라 정치뿐이다.⊙

 

02.07

[251] 국회에서 열린 종북 세미나

▲아멜리 노통브 ‘오후 네 시’

 

악은 가스와도 같다. 눈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냄새로 식별할 수 있다. 악은 걸핏하면 정체되어 숨 막히는 층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처음에 형태가 없기 때문에 악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러다가 악이 해놓은 일을 발견한다. 악이 차지한 지위와 이룩한 과업을 보고서야 자신이 졌다는 것을 느끼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가스를 몰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사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가스는 팽창, 탄력, 압축, 억압의 특성을 갖고 있다.’ 바로 악의 특성이 아닌가.

-아멜리 노통브 ‘오후 네 시’ 중에서

 

어린 시절 등하굣길에 잡상인이 있었다. 장사엔 관심이 없는 듯 귀에 늘 무언가를 꽂고 골똘히 앉아 있었다. 소형 무선 라디오나 이어폰이 흔치 않을 때였다. 호국 보훈의 달이면 미술 숙제로 반공 포스터를 그렸고 수상한 사람을 보면 113으로 신고하라고 배운 아이 눈엔 그 아저씨가 꼭 간첩 같아서 곁을 지날 때마다 무서웠다.

 

공산당은 뿔 달린 늑대라는 두려움을 심어준 교육은 나쁜 것이었을까? 이젠 ‘광화문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는 것도 표현의 자유’라는 생각이 상식이 됐다. 심지어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남한 영토를 정복하려는 북한의 전쟁관은 정의로우니 그들의 방식을 수용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이에 반성이나 사과도 없고 불이익과 제재도 없다. 윤미향 의원은 “반북, 멸북 정책이 우리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했다. 그녀가 말한 우리는 누구일까? 우연히도 얼마 전 이재명 야당 대표는 ‘우리 북한’이라고 말했다.

 

자칭 사회주의자라던 전 법무부 장관을 사회주의자라고 했더니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는 추종자의 협박성 댓글을 받은 적 있다. 전 정권 수장을 빨갱이, 간첩, 공산주의자, 김일성주의자라 부른 사람들은 강단과 국정감사장에서 쫓겨나고 명예훼손죄, 국회 모독죄로 고발당했다. 특정 사건에 대해서는 비판을 금지하는 법까지 생겼다. ‘나는 정의로운 표현, 너는 성역 모독, 내 자유는 무제한, 네 자유는 없을 무(無)’다.

 

‘사랑채 빌려주면 안방까지 달라 한다’는 말이 있다. 추운 사막의 밤, 코를 허락받은 낙타는 얼굴과 몸통과 네 발을 들이민 뒤 끝내 주인을 내쫓고 텐트를 차지한다. 종북 세력이 내뿜는 가스가 자욱하다. 여긴 우리 대한민국, 우리나라일까, 그들만의 조국 ‘너희 나라’일까?

 

[252] 느리지만 견고하게 세상을 바꾸는 힘

▲레이날도 아레나스 ‘현란한 세상’

 

권력을 가진 자와 죄인은 성서의 언어로 볼 때 동의어다. 권력은 그들을 거만함과 시기로 가득 채우고 형벌을 받지 않는다. 대주교는 과달루페 성모에 대한 설교로 내가 받은 박해에서 자신은 면책받았다. 그는 과달루페 성모의 전통에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의심했다. 그러나 주민들을 속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자신을 정당화하고 주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그는 즉시 나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라고 명했고 죄인이나 도둑처럼 나를 감금하라고 명령했다.

-레이날도 아레나스 ‘현란한 세상’ 중에서

 

쿠바가 우리나라의 수교국이 됐다. 쿠바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카스트로보다 더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 체 게바라, 미 해군기지와 테러범 수용소가 있는 관타나모, 북한과 친밀한 공산주의 국가인데도 재즈와 낭만에 환상을 갖게 한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다. 소설 ‘노인과 바다’의 공간적 배경도 헤밍웨이가 사랑한 쿠바의 바닷가 마을이다.

 

‘현란한 세상’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몇 안 되는 쿠바 작가의 소설이다. 권력자 마음에 들지 않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세르반도 수사는 끔찍한 고초를 겪는다. 책임을 면하려 앞장서서 그를 비난하고 감금한 건 주제까지 정해주며 설교를 간청했던 대주교다. 세상이 바뀌고 수사는 영웅 대접을 받는다. 새로운 권력자가 독재하는 데 수사의 명성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실존한 멕시코인 신부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은, 희망을 품고 쿠바 혁명에 가담했다가 실망하고 고통받았던 작가 입장을 대신한다. 혁명정부는 생명을 위협하며 절필을 강요하다 작가를 추방했고 그는 10년 후 자살했다. 우연한 결말의 일치지만, 카스트로를 지지했으나 20년간 산 집을 몰수당한 헤밍웨이도 쿠바를 떠난 다음 해 자살했다.

 

특정 세력의 무장 폭동이나 급격한 체제 전복은 세상을 개선한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온다. 그러나 사람 마음은 노력한 만큼 더 풍요롭게, 더 자유롭게 지금보다 더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쉼 없이 흘러간다. 정직한 행복을 바라는 소망의 물결이 느리지만 견고하게 세상을 바꾼다. 북한과 돈독했던 쿠바의 수교 결정도 그런 바람에 기인했을 것이다. 더 멀리,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건 북한과 이 땅에 사는 그들의 하수인들뿐이다.

 

[253] 허풍쟁이 팔스타프를 버린 헨리5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 4세’

 

물론 자네인 줄 알았어. 그렇다고 내 손으로 왕의 아들을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왕자한테 칼을 겨누다니 말이 되나? 자네도 내가 헤라클레스만큼 용감하다는 걸 잘 알 거야. 하지만 본능을 생각해 봐. 사자도 왕세자를 건드리지는 않아. 본능이란 위대한 거야. 그때 나는 본능에 따라 비겁했던 거지. 나나 자네나 인생에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네. 나는 용맹한 사자고 자네는 진정한 왕자가 아닌가. 그건 그렇고, 그 돈을 여기 가져왔다니 반갑군.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 4세’ 중에서

 

예전 어른들은 직업인을 넘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뛰어난 실력뿐 아니라 우러르고 존경할 만한 덕목을 갖추어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뜻이었다. 아이들은 위인전에서 본 과학자와 의사, 충신이나 장군, 재능을 발굴하는 교사와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정치가를 꿈꾸며 자랐다. 이제는 행복한 사람이 되라 한다. 애써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고 가르친다.

 

훌륭하다는 말은 정치권에서 가장 먼저 사라졌다. 선거철이 되면 편 가르고 줄 서느라 바쁘다. 색깔을 바꾸고 당을 옮기고 장관들은 직을 버린다. 이념이 다른 정치인들이 모여 국고 보조금 6억6000만원을 챙기고는 흩어졌다.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포함, 국회의원 3분의 1이 전과자인 것도 모자라 야권은 노골적 친북, 반미주의자들을 안전권에 배치한다고 했다.

 

헨리 5세가 왕자 시절에 어울리던 팔스타프는 허풍쟁이 난봉꾼이다. 빌린 돈 갚지 않고, 뇌물 받고 병역 면제해 주고, 전쟁터에서는 죽은 척한다. 적의 시체에 칼을 찔러넣고 포상금도 요구한다. 노상강도 짓을 왕자에게 들킨 팔스타프는 변명을 늘어놓고, 이를 들은 왕자는 유쾌하게 속아준다. 그러나 뛰어난 통치자였던 헨리 5세는 즉위 후 냉정히 그를 버린다.

 

팔스타프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상 인물이다. 2019년에 나온 영화 ‘더 킹: 헨리 5세’에서 외로워진 왕이 그를 중용하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게 하지만 그 또한 허구다. 본성과 사상은 변하지 않고, 정치인의 선택이 자신의 출세와 동료를 얻으려는 수단이 될 때 정치는 타락한다. 지켜야 할 것은 버리고 버려야 할 것은 포용과 화합이란 명분으로 끌어안으면 더 큰 분열과 혼란이 닥친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결단인가, 훌륭한 정치가 아쉽다.

 

[254] 겁 없이 비판할 자유

관리는 토마스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토마스는 거기에 적힌 글을 읽고 너무 놀란 나머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2년 전 외과 과장이 그에게 요구한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 글 속엔 소련 연방에 대한 사랑, 공산당에 대한 충성 서약이 들어 있었다. 토마스는 절대로 무엇을 쓰거나 서명하지 않겠다고 강력히 말하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는 어조를 바꾸었다. “나는 문맹자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쓰지도 않은 글에 서명해야 하나요?”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도태우 변호사의 공천이 취소됐다. 5·18에 대한 과거 언행이 도마에 오르자 후보는 두 번이나 사과했고 국민의힘은 진정성을 인정했으나 이틀 뒤 번복했다. 광주를 찾은 비대위원장은 ‘5·18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 결정이라고 말했다. 인천시의회 의장을 탈당하도록 만든 건 지난 1월, 5·18을 폄훼했다고 자기 사람을 내친 게 최근 들어 두 번째다.

 

당의 상징색인 붉은 바탕 위에 쓴 ‘함께 가면 길이 됩니다’라는 총선용 문구는 문재인 전 정권 수장이 존경한다던 신영복이 수없이 한 말이다. 지난해 평산책방은 ‘같이 가면 길이 된다’는 노동 관련 도서의 북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정당이란 사상과 이념을 같이하는 정치 단체다. 보수를 자처하는 여당이 좌파나 야당, 친북 인사의 언어를 차용하는 게 최선일까?

 

전도유망했던 외과 의사 토마스는 공산당을 비판한 칼럼을 잡지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쓰고 주장을 철회하라는 상부의 권유를 받는다. 자신에게 떳떳해지고 싶었던 그는 자아비판을 거부한다. 그 후 토마스는 지방의 작은 병원으로 좌천되지만 당의 억압이 계속되자 사표를 내고 청소부가 된다.

 

‘김일성 만세, 북한 전쟁관 수용, 박정희·이승만은 독재자’라고 외쳐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5·18은 이상해’라고 말하면 불이익을 받는다. 불온한 사상의 소유자로 몰려 색출되고 매도되고 퇴출된다.

 

많은 이가 5·18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자 성역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그런 것처럼, 멋대로 생각하고 마음껏 떠들고 겁 없이 비판할 자유는 없다. 비대위원장의 약속과 국민의힘 광주시당의 총선 공약대로 ‘오월 정신’이 헌법 전문에 오르면 얼마만큼 자유가 또 사라질까, 두려워진다.

 

[255] 누가 누가 더 ‘비범한 사람’인가?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비범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어떻게 구별됩니까? 제 말은 여기엔 좀 더 외적인 확실성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겁니다. 저 같은 실제적이고 사상이 온건한 인간이 갖게 되는 불안이라고 여기고 용서하십시오. 이를테면 특별한 옷으로 정한다든지, 무슨 표지를, 인장 같은 거라도 지니고 다닌다든지, 뭐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만약 혼란이 생겨서 한쪽 부류의 인간이 자기가 다른 쪽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당신의 아주 적절한 표현대로 ‘모든 장애를 제거하기’ 시작한다면, 그땐 정말….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중에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역구 국회의원 254명과 비례대표 46명 선출을 위한 벽보가 나붙고, 선거 공보물이 배달되고, 사전 투표도 시작된다. 거리마다 후보자와 지지자들의 확성기 광고가 요란하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비범한 사람에겐 법을 넘어설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애물을 제거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람이 영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빠는 악인이라고 판단해 전당포 주인을 죽인 뒤 죄책감이 엄습하자 자신은 평범한 사람일 뿐, 영웅 자질이 없다며 괴로워한다.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을 눈치챈 예심 판사는 그의 논리를 인용하며,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사람인 줄로 자신을 오해하면 어떡하냐고, 비범한 사람에겐 특별한 표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걱정한다. 실제로 너무 많은 평범한 사람이 법 초월자를 자처한다. 별별 죄를 다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 없이 타인을 단죄한다. 자신의 면책특권이 나라와 국민을 위기에서 구한다며 수치심도 없이 사회 정의를 외친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 배지가 ‘비범한 사람’의 표지다. 그 표지를 얻고 싶어서 도전한 후보자가 952명, 아파트 분양권으로 돈을 벌려고 생겨난 떴다방처럼 비례대표를 신청한 정당은 38곳이나 된다. 그중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사람이라 착각하고 나섰을까? 그래도 당선만 되면 180가지가 넘는, 하느님도 부러워할 국회의원 특권을 누린다.

 

평범한 사람들은 좋은 세상을 바라며 투표장으로 간다. 이번 선거만이라도 ‘어떤 불법과 범죄라도 행할 수 있는 특권,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권리’를 원하는 사람을 뽑는 이벤트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256] 늑대와 빨간 모자

 
 

작은 빨간 모자는 괴상하게 모자를 푹 내려쓰고 누워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귀가 왜 이렇게 커요?”

“귀가 커야 네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지.”

“할머니 손이 왜 이렇게 커요?”

“손이 커야 널 더 잘 잡을 수 있지.”

“할머니 입은 왜 이렇게 커요?”

“입이 커야 널 더 잘 잡아먹을 수 있지!”

늑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불쌍한 작은 빨간 모자를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 그림 형제 ‘작은 빨간 모자’ 중에서

 

대통령 부부가 부산과 서울에서 따로따로 사전 투표했다. 정부 수장은 당일에 투표한다는 상식이 깨졌다. 아침 일찍 대통령 부부가 기표한 투표용지를 나란히 투표함에 넣는 사진도 사라졌다. 선거 날은 법정 휴일이다. 굳이 본선거 닷새 전에 사전 투표일을 이틀이나 주는 이유, 집권 여당과 대통령 부부까지 나서서 말 많고 탈 많은 사전 투표를 권장한 까닭은 뭘까?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사전 투표를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은 분이 사전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고 대통령은 강조했다. 사전 투표가 유권자 참여를 높이고 높은 투표율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야당의 승리. 대통령의 희망이 여당의 패배일 리는 없을 터, 전략이 부재했거나 정보전에 무능했다는 뜻이다.

 

작은 빨간 모자라고 하는 어린 소녀는 할머니 댁에 심부름하러 간다. 숲길에 들어서면 한눈팔지 말라는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아이는 꽃밭에서 한참을 논다. 배고픈 늑대는 먼저 가서 할머니를 잡아먹고 아이를 기다린다.

 

빨간 모자는 늑대가 적이라는 걸 몰랐다. 할머니 집 위치를 알려주었고, 늦게 도착해서는 할머니인 척하는 늑대의 큰 귀와 큰 손과 큰 입을 보고도 거짓과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구전을 옮긴 샤를 페로의 원전은 이렇게 살 기회를 몇 번이나 놓친 아이가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림 형제는 사냥꾼을 등장시켜 할머니와 아이를 늑대 배 속에서 꺼내 살리는 이야기를 더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늑대만 나쁘다고 탓할 일도 아니다. 지지자의 조언은 흘려듣고 적이 좋아할 일들만 골라 하다 패배한 집권당에는 해피엔딩을 선물할 사냥꾼, 다음 정권을 창출할 의지와 지혜가 있을까?

 

[257] 누가 병든 의료 체계에 구멍을 내는가?

레마르크 ‘개선문’

 

“천공이 생겼소.” 뒤랑이 말했다. “퀴레트(수술 기구)로 말이죠?” “물론이오.” 뒤랑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그밖에 뭘로 한단 말이오?” 라비크는 검진을 계속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천공을 만들었고, 그걸 몰랐어요. 구멍을 통해 둥글게 휜 장의 일부가 끌려 나왔지요. 당신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던 겁니다. 아마도 태아막 일부가 아닌가, 생각했겠지요. 그걸 긁어낸 겁니다. 그래서 상처가 생겼고요. 맞지요?” 뒤랑의 이마는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레마르크 ‘개선문’ 중에서

 

환자용 영양 음료를 사다 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받고 인근 병원에 갔다. A등급 병원이었는데 평소와 달리 주차장 입구부터 혼잡했다. 대형 병원, 대학 병원으로 가지 못한 환자와 보호자들의 절박한 행렬이었다.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 정책이 의대생 집단 휴학, 전공의 이탈, 의대 교수의 휴진과 사직, 대형 병원들의 경영 위기로 번지고 있다. 일각에선 환자를 버렸다고 의료계를 비난하지만 사전에 충분히 검토, 조율하지 않고 강행하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

 

우리나라 의사는 국비로 키운 인재가 아니다. 공무원도 아니다. 개인이 비싼 학비를 부담하고 스스로 밤새워 공부해서 의대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남성은 군의관 3년 2개월을 포함, 최소 10년에서 15년간 노력한 전문 직업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나만 옳다. 무조건 나를 따르라’며 채찍을 휘두른다.

 

베를린 종합병원의 외과 과장 루드비히는 정치적인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탈출, 프랑스에 왔지만 불법 체류자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라비크라는 가명으로 불법 대리 수술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무능한 의사의 실수를 만회해서 환자 목숨은 구할 수 있었지만,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된 것까지 복구할 수는 없었다. 한번 궤도를 벗어난 그의 삶은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수용소로 끌려간다.

정부는 뛰어난 의료 개혁 전문가인가? 국민 건강을 담보로 의사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고, 전 정권이 병들게 한 의료 체계에 결정적인 천공을 낸 것은 아닐까? 행복하지 않은 의사가 의무적으로 돌보는 환자는 행복할까? 의사가 고래라면 정부는 더 큰 고래다. 그 틈에서 고생하는 건 이권이나 선택권이 없는 국민이다.

 

[258] 가벼운 용서는 더 나쁜 방향으로 등을 떠민다

▲히가시노 게이고 ‘신참자’

 

헬멧을 쓰지 않은 채 오토바이를 타는 소년이 있어 붙잡았더니 아버지가 경시청 수사 1과의 우에스기라고 하더래요. 어쩌면 좋겠느냐고 묻는 상대에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번만은 좀 봐줄 수 없겠느냐고요. 팔팔한 사내 녀석이라면 그런 시기가 있는 법이라고 낙관했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아들이 자랑하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경찰에게 걸려 체포당할 뻔했는데 아버지가 형사라고 했더니 풀어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웬만한 일은 문제없다고요.

-히가시노 게이고 ‘신참자’ 중에서

 

유명 가수가 뺑소니 혐의로 입건됐다. 운전 정황이 드러나고서야 경찰에 출두한 그는 음주 운전은 절대 하지 않았다며 콘서트를 강행했다. 그러나 사고 전 술을 마신 것으로 판단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소변 감정 결과가 발표되고, 전석 매진을 기록한 콘서트가 끝나자 음주 운전을 했다고 시인했다.

 

조국혁신당 대표가 현직 대통령의 임기를 단축하고 4년 중임제로 개헌하자고 주장했다. 청문회 당시 수많은 의혹에 대해 ‘모른다’고 답했던 자칭 사회주의자, 전 법무부 장관은 자녀 입시 비리로 아내가 실형을 받았는데도 ‘법적 공동체’로서 책임도 지지 않고 지지자들의 성원에만 의지해 정의의 사도인 양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고등학생 아들의 교통 법규 위반에 눈감았던 소설 속 형사는 평생 후회하며 산다. 무면허로 헬멧도 쓰지 않고 스피드를 즐기던 아들은 결국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 잘못을 깨달을 기회를 주었더라면 아이는 지금도 살아있지 않을까, 책임과 처벌을 가르치지 못해 자식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전 정권은 거짓 행정의 연속이었다. 탈북 청년 강제 북송, 통계 조작, 탈원전을 위한 한수원 관계자 압박과 증거인멸 등, 부정과 비리 혐의는 셀 수도 없다. 그런데도 집권 3년 차에 접어든 현 정부는 그들의 죄에 눈감는 분위기다. 정치 보복 근절이란 명분으로 조사도 흐지부지, 단죄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발전일까?

관용과 사랑처럼 보이지만 거짓과 불법에 대한 너무 쉬운 용서는 그 사람과 그 사회를 더 나쁜 쪽으로 등 떠미는 셈이 된다.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다’는 말처럼, 거짓도 결국 사람을 집어삼켜 괴물을 낳기 때문이다.

 

[259] 전현직 공직자 배우자 종합 특검법을 발의하라

▲팀 라이스 ‘에비타

 

남들과 다르게 차려입고

여러분 앞에 섰지만

난 평범한 여자일 뿐.

난 지금껏 변해왔죠.

내 삶을 버려둘 수 없어

선택한 자유.

이 모든 행운과 명예 모두

기대하진 않았지만

가질 수 있다면 갖길 원했어요.

그러나 환상일 뿐

내가 찾던 답은 세상이 아닌

여러분 속에 있었죠.

날 사랑해 주는 그대.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팀 라이스 ‘에비타’ 중에서

 

총선 후 민주화 유공자법을 단독 처리하는 등 독주를 이어가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김건희 종합 특별검사법’을 발의했다. ‘타인에게는 엄동설한, 자신과 가족에게는 봄바람’이라며 대통령 부인 의혹에 입 닫은 정부를 비난했다.

 

대통령이든 그 부인이든 자녀든, 권력 측근의 의혹은 밝혀야 한다. 그러나 3억원 이상의 국고 손실이 예상되는 법인 카드 유용 등 배우자의 혐의에는 함구하면서 자신도 면책특권을 톡톡히 누리는 사람이 야당 대표다. 그런데도 ‘특권도 성역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진리를 증명하겠다’고 말할 때 법안 발의자는 양심이 가렵지 않았나 보다.

 

민주당 집권 당시, 김정숙 여사가 3박 4일간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인도를 단독 방문했을 때 든 비용이 약 4억원, 그중 기내식비만 6292만원이다. 전 세계 관광지를 섭렵한 해외 순방 48회의 실체, 대통령 기록물로 봉인된 그녀의 수많은 의상과 고가 액세서리 내역, 이혼 후 청와대에서 거주했던 딸이 태국으로 이주할 때 금전이 오갔다는 의혹도 밝혀져야 한다.

 

세계적인 국가원수 영부인은 많았지만, 사치와 포퓰리즘으로 경제를 파탄 냈다는 원망을 받는 동시에 뮤지컬과 소설, 영화의 주인공 ‘에비타’로 사랑받았던 에바 페론, 구두 3000켤레 소유자로 유명했던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를 빼놓을 수 없다. 권력과 부정부패는 비례하기 쉽고, 대통령의 배우자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자리다. 그렇다 해도 눈감고 귀 막았던 과거와 달리 화살을 쏘는 건 불공평해 보인다. 이참에 통 크게 ‘전현직 대통령 부인과 국회의원 및 고위 공직자 배우자 종합 특별검사법’을 발의, 통과시키면 어떨까.

 

2024.06.19

[260] 오물 풍선과 자유의 씨앗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사람들은 전부 자신이 죽을 때 뭔가를 남긴단다. 아이나 책, 그림, 집, 벽이나 신발 한 켤레, 또는 잘 가꾼 정원 같은 것을 말이야. 네 손으로 네 방식대로 뭔가를 만졌다면, 죽어서 네 영혼은 어디론가 가지만 사람들이 네가 심고 가꾼 나무나 꽃을 볼 때 너는 거기 있는 거란다. 그저 잔디를 깎는 사람과 정원을 가꾸는 사람과의 차이란 바로 매만지는 데 있지. 잔디를 깎는 사람의 마음은 정원에 있지 않지만, 정원을 가꾸는 사람은 언제나 그곳에 있단다.

-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중에서

 

한 탈북 청년이 남한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무심히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 나갔는데 왜 음식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왔냐며 친구들이 웃었다. 양파 껍질과 파뿌리까지 삶아 먹던 북한에서는 ‘음식 쓰레기’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는 창피하기보다는 음식 쓰레기가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나라에서 살게 된 것이 감사하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한국 노래, 드라마는 물론 미국, 홍콩, 대만의 영화까지 즐기며 자랐다. 들켜도 뇌물 몇백 달러만 주면 무사했다. 여가엔 기타를 치며 친구들과 함께 한국 드라마 주제가를 불렀고, 친·인척이 남한에서 보내준 선물을 받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팔아 돈을 벌었다. 이렇게 자란 북한의 20~30대를 ‘MG세대(마켓 제너레이션)’ 즉 ‘장마당 세대’라고 한다.

 

대한민국에 정착한 탈북민은 현재 3만5000여 명, 북한 주민 700명당 1명, 중국과 다른 나라에 체류 중인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70명당 1명이 외부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폐쇄적일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개방을 두려워하는 정치 지도부가 닫혀 있을 뿐, 이미 많은 북한 주민과 청년은 깨어있다. 우민화를 위해 모든 책을 불태우는 미래 사회를 그린 소설 속 주인공처럼, 지식과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억압하면 할수록 더 맹렬히 솟구쳐 오르는 법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화장실 스티커를 본 적 없을 북한 수뇌부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오물 풍선이 표현의 자유라고 큰소리친다. 야당도 대북 전단 살포와 확성기 재개를 반대하고 있지만 남풍이 부는 계절, 자유의 씨앗을 북한에 뿌리기 딱 좋은 때가 왔다.⊙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