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271] 공산당의 이권 카르텔 - [300] 강을 건너려는 진흙 보살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종로문화재단대표 조선일보
2023.12.02
[271] 공산당의 이권 카르텔

▲일러스트=이철원
‘천리가 넘는 기나긴 방죽도 개미구멍 하나 때문에 무너진다(千里之堤 潰於蟻穴)’는 내용의 경구가 있다. 아주 미세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 곳, 그래서 방심을 부르는 구석에서 큰 실패가 비롯한다는 뜻이다.
때론 개미구멍이란 뜻의 ‘의혈(蟻穴)’이라는 단어로 이 구절을 압축한다. 의미가 같은 단어는 굴뚝 틈을 가리키는 ‘돌극(突隙)’이다. ‘커다란 집채도 굴뚝 틈에서 샌 불꽃에 타버린다(百尺之室 以突隙之煙焚)’는 글귀에서 나왔다.
개미구멍과 굴뚝 틈에서 번지는 그런 큰 무너짐은 보통 붕궤(崩潰)로 적는다. 그러나 두 글자를 쓰는 중국인의 어감에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앞의 붕(崩)은 대개 산이나 땅이 무너지는 산붕지열(山崩地裂)이다.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니 세상의 종말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에 비해 궤(潰)는 문드러짐이나 갈라짐에서 시작해 방죽처럼 큰 인공의 무엇이 무너지는 경우에 곧잘 사용한다. 궤멸(潰滅), 궤패(潰敗) 같은 단어가 익숙하다.
몇 년 전 나온 저서가 있다. 재미 중국 경제 전문가가 썼다. 제목이 ‘중국: 문드러지고 갈라지나 무너지지 않는다(中國: 潰而不崩)’다. 숱한 문제[潰]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체제가 잘 버티는[不崩] 현상을 분석했다.
책은 불균형 발전이 빈부 격차를 심각하게 불렀으며, 환경 파괴나 도덕 의식 하락 등 엄중한 사회문제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각종 시스템을 장악한 공산당 지도부의 이권 카르텔이 아주 견고해 당분간 체제는 유지하리라고 본다.
책은 그로써 “중국은 강대국으로 일어서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20~30년 안에 무너지지도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중국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책을 한국어로 출판한다면 내용을 알기 쉽게 푼 이런 제목이 어울리겠다. ‘중국: 공산당이 다 독식하는 나라.’⊙
[272] 덩샤오핑과 시진핑

▲일러스트=김성규
배움의 터전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스승에게는 대개 ‘사(師)’라는 한자를 붙여 예우한다. 그러나 이 글자의 초기 꼴과 새김은 지금의 그것과 퍽 다르다. 우선은 전쟁터로 향해 싸움을 벌이는 군대, 병력 등의 의미로 처음 등장한다. 이어 그런 군대의 큰 단위 편제를 가리키다가 무리를 지은 사람들 집단 등의 뜻도 얻는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전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 단위를 사단(師團)이라고 적는 이유다. 나중에는 숱한 관직명으로도 쓰인다.
때로는 행정구역 단위로도 쓰였다. 인구나 면적 등이 제법 많고 큰 구역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로써 나온 단어가 경사(京師)다. 예전에는 흔히 ‘서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 낙양(洛陽) 또한 낙사(洛師)로도 적었다.
그래도 이 글자의 현대 쓰임에서는 ‘스승’의 새김이 들어간 존칭이 훨씬 많다. 남을 가르치는 교사(敎師), 성직자인 목사(牧師), 인술을 베푸는 의사(醫師), 한 분야에서 큰 존경을 받는 종사(宗師), 어떤 영역을 처음 개척한 조사(祖師) 등으로 말이다.
1970년대 말 예전의 폐쇄적 흐름을 일거에 뒤바꾼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따른 호칭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總設計師)’였다. 이념에 파묻힌 계급투쟁의 틀을 벗어 던지고 중국이 새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이끈 데 대한 찬양이 담겨 있는 호칭이다.
통치 11년째로 영구 권력 토대를 만든 현재의 중국 최고 권력자 시진핑(習近平) 공산당 총서기에게도 이런 별칭이 하나 따라붙었다. ‘총가속사(總加速師)’다. 어디론가 향하는 흐름에 큰 힘을 얹어 속도를 더욱 내는 지도자라는 뜻이다.
요즘의 중국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 만한 사람은 죄다 안다. 하강(下降)하고 추락(墜落)하며 퇴행(退行)하는 중이다. 결국에는 중국의 몰락(沒落)을 앞당기는 지도자라는 말일까. 그 별칭이 요즘 들어 퍽 많이 쓰인다.⊙
[273] 대륙의 황혼, 대만의 청천백일

▲일러스트=박상훈
마음이 울적했던 듯하다. 그래서 수레를 타고서 높은 곳에 있는 들판에 오른다. 이어 장엄한 노을이 하늘을 물들인 광경을 지켜보며 시인은 노래한다. “석양은 정말 좋은데, 그저 황혼일 뿐(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시구다. 스산한 심사를 이기지 못해 집 인근의 고지대에 올라 밤을 맞는 시인의 심성이다. 저녁 무렵의 해인 석양(夕陽), 곧 어둠으로 바뀔 노을 비낀 황혼(黃昏)의 하늘이 잘 어울린다.
기세가 등등했으나 어느덧 사위어 드는 그 무언가를 표현할 때 쓰는 명구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도 일컫는다. 뉘엿뉘엿 기우는 해가 서녘 산 위에 접어들 때를 말하는 일박서산(日薄西山)이란 성어도 그렇다.
아침 기운과 저녁의 그것은 퍽 다르다. 중국은 각각 조기(朝氣)와 모기(暮氣)로 적는다. 아침때는 무엇인가 꿈틀거리며 솟는다고 해서 봉발(蓬勃), 저녁은 땅이 꺼지듯 자꾸 내려앉는다고 해서 침침(沈沈)으로 표현한다.
요즘 중국이 저녁의 그 침침함에 접어든 분위기다. 경제는 움츠러들어 각종 경기 지수가 가라앉는다. 수출과 실업률, 부동산 등이 모두 깊은 침체를 예고한다. 크고 왕성하던 기운이 꺾이고 내려앉아 황혼 무렵 너머로 향하는 형국이다. 시장경제의 명맥을 이어가던 남쪽 땅 끝 홍콩도 중국 공산당의 폐쇄적인 조치로 인해 이미 기능을 멈췄다. 팔팔했던 기운은 사라지고 이제는 맥동마저 잘 느껴지지 않는 기진맥진(氣盡脈盡)이 요즘 중국 상태인 듯하다.
그러나 자유와 민주, 법치를 내세우는 대만은 정반대다. 그곳 국기의 큰 콘셉트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이다. 파란 하늘에 이글거리는 태양이란 뜻이다. 그처럼 생기 가득한 곳이 요즘 대만이다. 같은 언어와 문화권임에도 둘의 명암이 크게 갈리는 이유가 뭘까. ‘중국의 문제’를 살필 때 꼭 견줘야 할 곳이 대만이다.⊙
[274] 꼭두각시 연극

▲일러스트=김성규
“한 마당 잘 놀아보세”라고 외치는 옛 재인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봉장작희(逢場作戲)라는 중국 성어 말이다. 흥겨운 자리를 만나[逢場] 제대로 놀아보자[作戲]는 엮음이다. ‘때나 상황에 원활히 맞춰 나가다’라는 속뜻이 있다.
이 ‘장(場)’은 평탄하게 펼쳐진 장소를 우선 가리킨다. 그러나 위의 성어 쓰임에서와 같이 놀이판이 벌어지는 ‘마당’의 뜻도 강하다. 그러니까 일부러 설치한 무대라고도 볼 수 있다. ‘작장(作場)’이라는 단어가 그래서 나왔다. 옛 중국 연희(演戲)의 역사에서 자주 쓰인 말이다. 공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놀이마당[場]을 짓는[作] 일이다. 이 맥락에서 ‘장’이라는 글자는 곧 ‘무대’라는 새김을 굳힌다. 중국에서는 이 새김으로 글자 쓰임이 풍성하다.
무대에 오르는 일이 우선 등장(登場)이다. 중국은 달리 상장(上場)으로도 적는다. 그 반대는 하장(下場)이나 퇴장(退場)이다. 그렇게 무대 등에서 벌어지는 모습이 장면(場面)이자 장경(場景)이다. 연극의 시작과 끝은 개장(開場)과 종장(終場)으로도 적는다.
“인생은 연극 같다(人生如戱)”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는 중국인들이다. 그래서 제 삶을 연극이 펼쳐지는 무대와 배우의 행위에 곧잘 견준다. 원(元)나라 이후 줄곧 발전해 온 민간 희극의 역사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법하다.
요즘 중국이라는 역사 무대에서는 어떤 연극이 펼쳐지나. 강력한 권력자 한 사람이 숱한 당정(黨政) 관료를 이리저리 까부르는 꼭두각시 연극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주 많은 대중은 그에 갈채를 보내는 봉장(捧場) 역할이고 말이다.
중국인들이 펼치는 이 큰 놀이마당의 끝이 궁금해진다. 11년 전 거창하게 건 ‘중국의 꿈(中國夢)’은 이뤄질까. 자칫 잘못하면 덧없는 봄날의 꿈, 일장춘몽(一場春夢) 신세는 아닐지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2023.12.29
[275] 고달픈 시절에 뜨는 태양

▲일러스트=김성규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세상에는 두 임금이란 없다(天無二日, 人無二主)”는 말을 중국인들은 곧잘 쓴다. 하늘의 해에 견줬지만,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사실 뒤에 있다. 세상 가장 높은 권력자 말이다.
그래서 최고의 1인 권력을 자랑했던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따라 붙었던 지칭이 홍태양(紅太陽)이다. 해가 뜰 때 붉게 물드는 동쪽 하늘을 동방홍(東方紅)이라고도 적어 마오쩌둥을 기념한다. 3대 세습의 김일성 왕조도 역시 그와 비슷하다.
해를 가리키는 일(日)은 한자 초기 세계에서도 일찌감치 등장한다. 둥그런 테두리, 또는 그 안의 한 점이나 선으로 표기하는 꼴이었다. 태양을 가리켰던 이 글자는 결국 훤히 밝은 대낮, 지내는 시절, 급기야 제왕의 권력에까지 의미를 넓혀간다. 접미사 격인 자(子)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쓰임은 거의 없고 중국은 자주 쓴다. ‘일자(日子)’라고 적는 방식이다.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우리식으로 풀자면 ‘나날’이다.
이 단어는 때로 삶의 수준에도 이어진다. 좋은 무렵을 말할 때는 호일자(好日子)다. 시간의 흐름에 대충 섞여 나날을 보낸다면 혼일자(混日子)다. 고생이 아주 심한 시간을 보낸다면 고일자(苦日子)다. 그저 세월 보내기면 과일자(過日子)다.
요즘 중국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은 긴일자(緊日子)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고달픈 세월을 지칭한다. 앞으로 닥칠 팍팍한 삶을 예고하는 말이다. 어느 때에 이르러 부진을 전혀 면치 못하는 중국 경제 분위기를 설명한다.
권력의 자장(磁場)과 그 중심을 바라보는 눈이 발달한 중국이다. 좋은 임금 만나면 잘 살고, 그러지 못하면 고생이라는 오랜 교훈 때문이다. 허리띠 바짝 졸라매야 하는 요즘 시절에 중국인들은 제 머리 위에 뜨는 저 붉은 태양을 어떻게 바라볼까.⊙
[276] 독재가 부르는 파탄

▲일러스트=박상훈
바느질은 ‘재봉(裁縫)’과 동의어일까. 흔히는 그렇게 여기지만, 엄격하게 따지자면 차이가 있다. 바늘에 실을 꿰어 옷을 짓는 일이 바느질이라면, 재봉은 옷감을 마르고[裁] 꿰매는[縫] 두 행위를 함께 가리키기 때문이다.
무명이든 비단이든 옷감은 예로부터 귀했다. 상당한 인력을 들여야 만들어지는 의복의 재료였던 까닭이다. 따라서 그 옷감에 칼을 대 이리저리 자르는 마름질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이른바 재단(裁斷)이라는 동작이다. 한 번 자르면 돌이키기 힘든 경우다. 그래서 이 글자는 그런 행위와 관련이 있는 ‘권력’의 의미를 지닌다. 마름질하는 행위를 모두 총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총재(總裁)라고 부르고, 어떤 동작을 가로막는 행위는 제재(制裁)라고 적는다.
직장 상사의 권한은 무언가를 허락하는 동작에서 드러나는데, 우리는 그 일을 결재(決裁)라고 한다. 법이나 규범 등의 기준을 설정해서 최종적인 옳고 그름을 판가름 내는 일은 재판(裁判)이다. 법원을 때론 재판소(裁判所)라고도 했다.
중국에서는 조직으로부터 인력 잘라내는 일을 이 글자로 잘 쓴다. 재인(裁人)이라거나 재원(裁員)으로 표기한다. 대량 감원(減員)이 벌어져 실업률이 급격히 상승하는 중국에서 요즘 들어 이 둘은 가장 불길한 어감을 지닌 단어다.
개혁·개방의 풍조는 모두 사라지고 권력을 쥔 한 사람이 모든 옷감을 마름질하는 독재(獨裁)의 형국이 펼쳐진 지 오래다. 그로 인한 경기의 하강 추세가 수많은 일자리 감축, 고도의 청년 실업을 불렀다. 아예 ‘실업 물결[失業潮]’이라는 표현도 나돈다.
옷감 자르기만 있지, 바느질은 보이지 않는다. 재단만 있고 봉합(縫合)이 뒤를 따라주지 않아서 중국이 걸친 큰 옷 여기저기가 갈리고 뜯긴다. 그로써 속살이 훤히 드러나니, 우리는 이 경우를 파탄(破綻)이라거나 탄로(綻露)라고 적는다.⊙
[277] 체제를 위협하는 유민

▲일러스트=박상훈
아름다운 봄날 밤에 흥취가 오르면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는 말을 절로 내뱉을 법하다. 그래서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은 이렇게 읊었다. “촛불 들고 밤에 노닐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秉燭夜遊, 良有以也)”고 말이다.
유(遊)는 ‘노닐다’라는 뜻이 으뜸이다. 그로부터 놀이, 나다니기 등의 뜻을 더 얻는다. 예전 군사 교육을 받을 때 교관이 유격(遊擊)이라는 과목을 설명하면서 “놀면서 때리다”라는 풀이를 내놨을 때 퍽 당황한 적이 있다.
유희(遊戲)라는 말을 우선 떠올려 그렇게 풀었을 법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떠돌다’라고 해석해야 정답이겠다. 정규군이 아닌 개별적 무장 병력들이 이리저리 빈틈을 파고들어 공격을 가하는 일이 ‘유격’의 원래 뜻이다.
체제의 틀에서 튕겨져 나간 사람들이 무척 많았던 곳이 옛 중국이다. 그들을 대개는 유민(遊民)이라고 적었다. 왕조의 견고한 통치 복판과 그 주변은 보통 조야(朝野)라고 했는데, 그에 몸담지 못해 정처(定處)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다. 뚜렷한 직업 없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강호(江湖) 언저리를 이리저리 오가는 집단이다. 중국인이 만든 무술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길거리의 약사(藥師), 술사(術士), 거지와 연예인, 시정잡배 등이 다 그 범주에 들어간다.
지금 형편으로 보자면 다니던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구걸하는 이들이다. 정도가 더 심해지면 깨지고 몰락한 파락호(破落戶), 제 호적을 상실하고 떠도는 망명(亡命), 어두운 사회에 몸을 담는 무뢰한(無賴漢)과 유맹(流氓)으로 이어진다.
학술적 정의는 아니지만, 위의 ‘유민’이 더 집단화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 유민(流民)이다. 중국의 통일 왕조는 이들의 대거 출현으로 명운을 마감한 사례가 많았다. 요즘 대량 실업으로 길거리를 떠도는 ‘예비 유민’들이 부쩍 늘어난다. 중국 공산당 체제의 불안정 조짐이다.⊙
[278] 대만 선거의 또 다른 의미

▲일러스트=이철원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은 중국에도 있다. 중국은 대륙 남단인 광둥(廣東)을 영남, 동정호(洞庭湖) 남쪽을 호남으로 적는다. 넓은 땅의 크기만큼 중국 각 지역의 차이는 매우 크다. 언어·문화가 다른 나라의 그것처럼 다르다.
광둥의 언어는 수도 베이징(北京)의 말과 아예 다르다. 표준어인 보통화(普通話)를 쓰지 않으면 두 지역 사람들은 소통할 여지가 전혀 없다. 베이징과 쌍벽을 이루는 상하이(上海) 언어도 마찬가지다.
어디 그뿐이랴. 베이징 인근 허베이(河北)는 한국 경기도처럼 수도 외곽이다. 그럼에도 베이징 시내 언어와 허베이 농촌 언어는 퍽 차이가 난다. 장강(長江)을 경계로 이북의 언어 분화는 크지 않지만 원활한 소통은 어렵다.
장강 이남은 더 복잡하다. 저장(浙江)이 아주 심해, 이쪽 산골 주민과 저쪽 산골 사람 말이 상이하다. 동남쪽 연안인 푸젠(福建)의 언어 또한 수도 베이징이나 다른 지역 말과 소통이 불가능하다.
면적 960만㎢의 광대한 중국 언어·인문 지형은 그렇듯 다양하다. 그럼에도 제법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는 강력한 중앙집권 시스템, 그를 떠받치는 표준어와 한자(漢字) 문화의 역할이 크다. 현대 중국 또한 공산당의 강력한 통치 시스템과 보통화가 그를 뒷받침한다.
중앙으로 한데 힘을 모으는 구심(求心)의 그림이다. 그러나 복판에서 이탈하려는 원심(遠心)의 역량도 크다. 특히 ‘통일’을 끌어가는 중앙의 완력이 약해지고 호소력을 잃을 때가 문제다. 이 경우 지방의 분열적 요소가 득세한다.
동남부 푸젠을 등진 이민(移民)의 사회이자, 1949년에는 대륙을 떠난 장제스(蔣介石) 정부까지 합류한 대만에서 최근 ‘탈(脫)중국’의 민진당(民進黨)이 또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 국내 분리·독립 요소가 커질까 봐 중국이 초조하다. 나라 안팎으로 힘을 잃고 있어 더 그렇다.⊙
[279] ‘中國’이라는 자부심이 흔들리나

▲일러스트=박상훈
‘가운데’와 ‘변두리’는 차별적 시선을 담은 언어다. 그래서 나온 나라 이름이 중국(中國)이다. “세계의 중심 나라”라는 자부가 담겼다. 그러나 한때는 지금 인도 지역이 이 ‘중국’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적이 있다. 인도 북부에서 발흥한 불법(佛法)을 따라 배우고자 했던 중국 출신의 승려들에 의해서다. 이들은 석가모니가 탄생한 인도 북부 지역을 ‘중국’, 제가 자라난 지금의 중국을 ‘진토(秦土)’나 ‘한지(漢地)’로 적었다. 진(秦)나라 땅, 또는 한(漢)나라 영토 등의 뜻이다. 부처님 말씀을 좇으려는 구도자(求道者)의 입장에서는 인도 북부가 성스러운 땅이자 세계의 중심으로 비쳤던 셈이다. 종교적 역량의 크고 작음을 인정한 성찰의 결과다.
요즘 중국인들 상당수도 호칭에서는 ‘탈(脫)중국’이다. 당국이 인터넷 검열을 강화하며 방벽을 집요하게 쌓는다고 해서 ‘담의 나라’라는 뜻의 장국(牆國)을 잘 쓴다. 늘 “우리가 대단해(厲害)”라고 자랑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여해국(厲害國)이란다.
웃자란 부추를 뜯어먹듯 국민들을 착취한다는 뜻에서 부추 나라, 구채국(韭菜國)이라는 이름도 나왔다. 통치 행위가 점점 북한 왕조를 닮아가니 아예 서쪽에 있는 북한, 서조선(西朝鮮)이라고 부르자는 주장도 있다.
걸핏하면 국제사회를 향해 으르렁대는 외교관들이 많아 ‘싸움 늑대 나라[戰狼國]’, 공산당 권력 앞에는 누구나 설설 기니 ‘노예 나라[奴隸國]’, 의식수준이 나아지지 않는 국민들이 많다고 해서 ‘몸집 큰 아기들의 나라[巨嬰國]’라고도 부른다.
현실의 문제점 또는 그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다. 구도자의 입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가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다가 나온 호칭들일 수 있다. 국제사회의 신망을 더 잃으면 영문 국명인 차이나(China)의 어원 지나(支那)가 지금 이름 ‘중국’을 대체할 수도 있겠다.⊙
[280] 쓸쓸해지는 중국의 대문

▲일러스트=박상훈
세상에서 가장 외진 곳을 일컫는 한자어는 천애해각(天涯海角)이다. 하늘 가장자리, 바다 끄트머리 정도로 옮겨도 무방하다. 중심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장소다. 중국 하이난(海南)에는 실제 이런 지명도 있다.
벼슬아치로 생활하다 좌천당해 먼 곳을 떠돌았던 옛 관료와 문인들이 시문(詩文) 등에서 자주 쓴 단어다. 이런 변두리를 지칭하는 대표적 한자가 변(邊)이다. 우리도 잘 쓰는 글자이지만, 본래 글자꼴은 평범치가 않다. 뼈만 남은 사람의 몸이 어딘가에 걸려 있는 모습이다. 사람 시신을 걸어 외부 악령(惡靈)의 틈입을 막는 주술적 행위에서 비롯했다는 일본 유명 학자의 풀이가 있다. 그 맥락에서 한 지역의 경계를 표시하는 글자로 발전했다는 설명이다.
변두리의 경계선이 변경(邊境)이다. 나라의 바깥 둘레를 이루는 지역은 변강(邊疆) 또는 변방(邊方)으로 적는다. 경계를 이루는 곳의 땅을 변지(邊地)라거나 변역(邊域), 변토(邊土)라고도 한다. 그곳을 지키는 일이 변수(邊戍)다.
조선시대 비변사(備邊司)의 이름도 그 흐름이다. 적군의 변경 침입을 막기 위한 기관에서 출발했다. 국경 일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비해 만든 군대 주둔지는 변진(邊鎭), 그곳에 있는 군대는 변군(邊軍)이라고 한다.
중국 또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공항, 항구 등에서 출입국 검사를 한다. 요즘은 점차 그곳의 통제를 강화하는 추세라고 한다. 중국식 표현으로는 출입국 지점을 통제한다는 뜻의 변방(邊防)이나 변공(邊控)이다.
‘문제’가 있다고 보는 내외국인의 출입국을 막는 중국 당국 조치가 잇따라 화제다. 게다가 외국인도 대상으로 삼는 반(反)간첩법이 가세한다. 중국을 드나드는 사람들 발길이 더 줄어들 듯하다. 한때 문전성시(門前成市)였던 중국의 각 대문이 이제는 쓸쓸하게 변해가는 분위기다.⊙
02.09
[281] 이지러지는 동그라미

▲일러스트=김성규
둥그런 식탁에 가족 구성원 모두 둥그렇게 모여 앉아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이 설을 맞는 중국인들의 꿈이다. 먼 곳에 나가 고생하던 식구들이 모처럼 고향의 집에 돌아와 한데 모여 앉는 모습을 ‘단원(團圓)’이라고 한다.
두 글자는 모두 동그라미를 일컫는다. 이 동그라미를 향한 중국인의 집착은 유별나다. 제가 세상 중심에 있다고 자부한 옛 황제(皇帝)부터가 그랬다. 제가 있는 곳을 땅의 한가운데로 설정해 그 외곽을 무한히 넓혀가는 동심원(同心圓)의 세계관을 지녔다.
민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의 복판에 앉아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예부터 발달했다. 그런 중국 민간의 처세에 관한 사유는 중용(中庸)이라는 덕목으로 자리를 틀었다. 때로는 원만(圓滿), 원융(圓融)이라고도 쓴다.
그래서 삶의 고달픈 길에서도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상황의 전개를 침착하게 지켜보라는 권유의 새옹지마(塞翁之馬) 식 인생관이 발달했다. 나쁜 일과 좋은 일은 서로 붙어 돌아간다는 화복상의(禍福相依)라는 성어도 그렇다.
기쁨과 슬픔의 희비(喜悲), 불행과 행복의 화복(禍福)이 양단으로 나뉘지 않고 함께 붙어서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동그라미 인생관이다. 달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이지러진 달보다는 둥그런 보름달을 더 높이 치는 이유다.
요즘도 중국인들은 음력설 등 명절이 오면 먼 객지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기꺼이 몸을 들인다. 제아무리 험난한 여정이라도 감수한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먹는 밥[團圓飯], 그렇게 서로 어울리는 정경[團圓夢]이 그리워서다.
올해 폭설과 강추위가 겹친 귀향길도 북적인다. 그러나 예전만 같지 못하다. 경제적 사정이 크게 어려워져 고향 가는 길에 나서길 포기하는 사람이 많단다. 가족과 친지를 만나 오붓한 정을 나누고자 하는 중국인의 소박한 동그라미 꿈도 이렇게 이지러진다.⊙
[282] ‘경기(景氣)’와 ‘여기(戾氣)’

▲일러스트=박상훈
늘 강아지가 문제였을까. 이른바 ‘개’가 출현하는 한자가 많다. 그중에서도 개가 어디로부터 나가려고 하는 동작과 관련이 있는 글자가 우선 돌(突)이다. 구멍[穴]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개[犬]의 모습으로 급한 상황을 그렸다.
다음은 려(戾)라는 글자다. 문[戶] 아래 틈으로 개[犬]가 비집고 나가려는 모습을 그렸다고 푼다. 그로써 이 글자가 얻은 뜻은 ‘비틀어지다’ ‘어긋나다’ ‘뒤집히다’ 등이다. ‘여기(戾氣)’라고 적는 단어가 대표적이다. 이 말은 상황이 비틀어지거나 계속 어긋나다가 폭력적인 행위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한다. 동양 의료계에서도 곧잘 쓰는 말이다. 요즘 자주 사용치는 않으나, 어긋나고 비틀어진 상황을 괴려(乖戾)라고 했다.
폭려(暴戾)라는 말도 그런 기운을 지닌 사람 등이 드러내는 흉포함을 가리킨다. 바르고 좋은 기운인 정기(正氣)와 반대여서 흔히 나쁜 기운, 사기(邪氣)라고도 한다. 이런 기운을 가리키는 말은 귀기(鬼氣), 살기(殺氣) 등도 있다.
삶이 녹록지 않을 때, 형편이 극히 나빠질 때 사회적으로는 이런 ‘여기’가 팽배해지는가 보다. 경제 사정을 일컫는 말이 마침 경기(景氣)다. 따뜻한 기운을 말하는 단어였다가 아예 경제 형편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았다.
요즘 중국에서는 ‘경기’가 곤두박질치면서 ‘여기’가 기승을 부린다는 말이 나온다. 사람들끼리 갈등과 반목이 심해져 걸핏하면 충돌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잦단다. 주머니가 비어가니 사람들이 사나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문틈으로 개가 뛰쳐나가는 ‘려’라는 글자에 ‘삼 수(氵)’를 더하면 공교롭게도 ‘눈물 루(淚)’다. ‘여기’가 기승을 부리면 약자의 설움은 눈물로 번진다는 얘길까. 곤궁한 중국인들의 울음소리가 높아진다. 한국 사회 ‘여기’의 생산 기지, 여의도 국회가 살펴야 할 글자들이다.⊙
[283] 최고 권력자의 구리 솥

▲일러스트=박상훈
황하(黃河) 유역에서 발흥한 옛 중국 문명의 특징 중 하나는 청동기(靑銅器)다. 국가에 준하는 권력이 이미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스케일과 기술력이 자랑이다. 대부분은 왕조 차원의 각종 제례(祭禮)에 동원한 기물들이다.
그중에서 돋보이는 그릇 형태는 세 발 달린 솥, 흔히 정(鼎)이라고 적는 청동기다. 아주 무거운 것은 중량이 50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기원전 사회에서 구리를 캐내 이 정도의 그릇을 주조(鑄造)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큰 세 발 솥을 아홉 개 만들어 국가 최고 권력을 자랑한 때가 있었다. 상(商)과 주(周)에 이어 춘추전국(春秋戰國)을 포함하는 무렵까지다. 중국을 아홉으로 나눠 각 지역의 정보를 담았다는 구정(九鼎)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중국에서는 이 단어를 곧잘 쓴다. 심지어는 ‘구정’이 곧 중국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단어의 핵심적인 의미는 ‘권력’이다. 특히 한군데로 모은 중앙의 권력을 가리킬 때가 많다. 실제 춘추시대 말기 남방에서 일어났던 초(楚)나라가 천자(天子)가 있던 주(周)나라에 “당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세 발 솥 아홉 개의 무게가 얼마냐”고 물었던 ‘문정(問鼎)’의 고사가 아주 유명하다. 이로써 세 발 솥은 곧 최고 권력을 가리켰다.
3연임에 성공해 절대 권력자로 자리를 잡은 시진핑(習近平) 공산당 총서기는 요즘 이 ‘구정’의 중량감에 가장 어울릴 만한 인물이다. 그의 본래 정치적 지향이 모든 힘을 자신에게 모으는 ‘집권(集權)’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 한마디는 세 발 솥 아홉의 무게로 이제 중국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권력자 발언의 중량감이 천근만근으로 불어나면서 밑의 관료들 어느 누구 하나 찍소리 못하는 분위기다. 서슬 퍼런 위엄에 사라지고 만 조화와 균형…. 요즘 중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284] 마라탕과 중국의 우월감

▲일러스트=양진경
전란을 피해 지금 쓰촨(四川)으로 쫓겨 갔던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고생 끝에 초가를 하나 짓는다. 그러나 음력 8월의 가을 태풍에 지붕이 날아가는 설움을 겪으면서 “빗발이 삼 줄처럼 끊기지 않는다(雨脚如麻未斷絶)”고 읊는다.
아주 유명한 시다. 두보가 이 시를 지은 쓰촨은 이제 마라(麻辣) 맛으로 유명하다. 차가운 빗줄기를 아주 질긴 삼[麻] 줄에 비교했지만, 맛으로 따질 때 이 글자는 다른 뜻이다. 산초(山椒)의 일종인 마초(麻椒)의 맛이다.
우리의 매운맛 느낌은 대개 고추[苦椒·苦草]에서 비롯하지만 중국 쓰촨의 매운맛은 고추에 이 마초를 더한 상태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얼얼한 매운맛’인데, 사실은 한자어로 적을 때 ‘마비(麻痹)’에 가깝다. 혀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두텁고 무거운 매운맛이다. 이 쓰촨 지방의 음식 맛은 이제 중국 전역을 넘어 한국 등 이웃 국가들에서도 크게 유행한다. 중국식 샤부샤부[火鍋]를 비롯해 마라탕(燙), 마라향과(香鍋) 등으로 말이다.
이 음식들은 중독성이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감각을 무뎌지게 하는 ‘마라’의 맛에 홀려 여러 지역 사람들이 이 음식에 빠져들고 만다. 정신 등이 흐릿해지는 마취(麻醉), 무뎌지다가 아예 굳어버리는 마목(麻木)이 관련 단어다.
마목불인(麻木不仁)이라는 병증이 있다. 신체 반응이 사라져 바깥의 자극 등에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증상이다. 몸의 이상을 넘어 외부 세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채 안으로만 감겨드는 폐쇄적 행위도 함께 일컫는다.
이런 증상에 가까운 중국인의 자국 중심적 세계관이 늘 화제다. “이제 우리가 세계 최강”이라고 공공연하게 소리친다. 세뇌에 가까운 공산당의 애국 교육 탓이다. 마라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럴까. 덩달아 그 맛 좋아하는 우리도 생각해 볼 글자가 ‘마(麻)’다.⊙
[285] 공산당의 무서운 찻집

▲일러스트=김성규
중국인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하다고 꼽는 일곱 가지의 물건이 있다. 연료[柴], 쌀[米], 기름[油], 소금[鹽], 장류[醬], 식초[醋], 그리고 찻잎[茶]이다. 중국인들은 이를 “삶에서 해결해야 할 일곱 가지 일(開門七件事)”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는 ‘생필품’으로 보기 어려운 물건도 있다. 간장이나 된장을 가리키는 장류, 그리고 식초 등은 생활필수품이라고 하기보다는 조미품(調味品)에 가깝다. 음식의 ‘맛’에 몰두하는 중국인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음료에 해당하는 차는 더 그렇다. 일종의 기호품(嗜好品)이라고 해야 좋을 품목이지만, 중국인들은 삶에 꼭 필요한 물건으로 이름을 올렸다. 찻잎 값이 매우 비쌌던 당(唐)과 북송(北宋)을 지난 뒤에 생긴 현상이랄 수 있다.
중국인 일상에 이 차는 늘 등장한다. 특히 손님을 대접하는 경우의 대객(待客) 예절에서 찻잎의 쓰임새는 매우 많다. 차 마시기를 권한다는 뜻에서 ‘청차(請茶)’라고도 하는 중국 특유의 이 격식과 예절은 제법 은근하다.
손님이 당도하기 전 물을 끓여야 하고, 도착한 손님에게는 찻잎의 종류를 설명하며, 진한 맛을 좋아하는지 여부 등을 먼저 물어야 한다. 이어 손님이 사용할 찻잔을 적당한 온도로 덥히다가 찻잎을 씻은 뒤 우려내기에 들어간다. 나름대로 인정미 넘치는 격식들이다. 그 뜻은 남을 공경하면서 정중하게 대접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요즘 집권 공산당이 “차 한잔 마시자”고 하면 일반 중국인들은 벌벌 떤다. 불러다 조사를 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열 잔의 차(十杯茶)’가 유행이란다. 간첩 행위를 포함해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열 가지 혐의에 걸리면 공산당의 ‘찻집’에 초대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공경과 중후함의 전통 예법은 사라지고 공산당의 살벌한 다례(茶禮)가 기승을 부린다. 더욱 짙어지는 중국의 그늘이다.⊙
[286] 봄꽃과 흥망성쇠

▲일러스트=양진경
남녘의 사람이 북녘의 지인에게 봄소식을 전한다. “강남에는 별것 없으니, 그저 봄 가지 하나를 보낸다(江南無所有, 聊贈一枝春)”고 말이다. 남북조시대 따뜻한 남쪽에 살던 육개(陸凱)가 북쪽에 있던 친구 범엽(范曄)에게 보냈던 시다.
우리에게는 ‘일지춘(一枝春)’이라는 시어로 유명하다. ‘봄을 담은 나뭇가지’의 뜻이지만, 실제로는 남녘에 먼저 핀 매화(梅花)를 보냈던 모양이다. 꽃은 그렇듯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도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우리는 잘 쓰지 않지만 파(葩)라는 글자도 꽃을 가리킨다. 상파(霜葩)라고 적었을 때다. 서리 내리는 시절에 피는 꽃, 즉 국화(菊花)를 가리키는 단어로 자리를 잡았다. 꽃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꽃을 일컫는 말이 기파(奇葩)다. 중국에서는 이 단어를 자주 쓴다. 본래는 훌륭한 결과 등을 지칭했지만, 요즘에는 아주 별난 행동이나 엉뚱한 생각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괴상한 건축물, 심상찮은 음식, 아주 유별난 행동 등이 잇따르며 중국사회의 ‘기파’는 아주 번성한다.
그러나 봄꽃은 죄가 없다. 다 사람이 문제다. “해마다 피는 꽃은 비슷한데, 사람이 달라질 뿐(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이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올해 여의도 국회에는 엉뚱하다 못해 불길한 꽃을 피워내는 이 있을까 걱정이다.⊙
[287] 입 닫고 살아야 편한 사회

▲일러스트=이철원
침묵이 소중하다는 점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 각성을 넘어 ‘말을 함부로 하면 큰일 난다’는 강박감은 중국이 별나다 싶을 정도로 강하다. 우선 입 가벼운 사람에게 쓰는 말이 심상찮다. 요설(饒舌)이 대표적이다. 꺼리지 않고 마구 내뱉는 말이다. 교묘하게 꾸미는 말은 교설(巧舌)이라고 부르며 경계한다. 그런 말을 교언(巧言)이라고 적어 공자(孔子)가 일찌감치 배척했다. 말수가 적어 바람직한 인간상은 침묵과언(沈默寡言)으로 적는다.
한 번 내뱉은 말이 부르는 위기에 중국인들은 퍽 민감하다.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속도로도 입을 빠져나간 말을 쫓아가지 못한다는 뜻의 사불급설(駟不及舌)이 있다. 엎지른 물처럼 돌이키기 어려워 복수난수(覆水難收)라고 하는 경우다.
중국인이 잘 쌓는 담벼락도 경계의 대상이다. 뱉은 말이 샐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이 경우는 “담엔 틈이 있고, 벽엔 귀가 있다(牆有縫, 壁有耳)”고 말한다. 아예 “담 너머에는 귀가 있다(隔牆有耳)”고 줄여서도 적는다.
201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중국 작가의 필명이 마침 “말하지 말자”라는 뜻의 모옌(莫言)이다. 나무와 풀을 상대로 중얼거리며 말을 익히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말을 많이 하자 “말수 줄여야 한다”는 모친의 충고를 듣고 지은 필명이라고 한다.
요즘 이 세계적인 작가가 다시 필화(筆禍)에 시달린다는 소식이다. 공산당의 강요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마오쩌둥(毛澤東)을 찬양하는 발언으로 빈축을 산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열혈 국가주의에 젖은 사람에게 고소를 당했다. “애국선열을 깔봤다”는 이유에서다. 가뜩이나 황제(皇帝) 권력의 살벌한 문자옥(文字獄)으로 매우 오래 주눅이 들었던 중국 지식인들이다. 요즘도 필화와 설화(舌禍)에 시달리니 중국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기는 여전히 힘든 모양이다.⊙
[288] 굴복이냐 극복이냐

▲일러스트=김성규
몸에 걸치는 옷은 사람에게 중요한 부속(附屬)이다. 신체를 가리거나 보호하고, 또는 치장하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다. 그 대표적 한자말은 의복(衣服)이다. 그러나 뒤 글자 ‘복’의 본래 꼴은 평범한 옷과 거리가 멀다. 강제로 사람을 꿇어앉히거나, 적어도 인체에 힘을 가해 제압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먼저 얻는 뜻은 무력을 사용해 상대를 무릎 꿇게 만드는 일이다. 거기서 우선 나온 단어가 복종(服從)이요, 항복(降服)이다.
전쟁이라는 형식을 통해 남을 누르는 행위가 정복(征服)이다. 상대의 위세에 눌려 스스로 무릎 꿇으면 굴복(屈服)이다. “하라면 하지 웬 말이 많아”라고 다그치며 위아래를 내세우면 우리가 흔히 쓰는 성어 상명하복(上命下服)이다.
맡은 임무에 충실히 따르는 일이 복무(服務), 마음으로 상대를 좇으면 심복(心服), 드러난 결과를 받아들이면 승복(承服)이다. 아예 남에게 붙어버린다면 복속(服屬)이다. 그런 경우가 싫어서 이기려고 덤비면 극복(克服)이다.
사람 몸에 따라붙는 ‘옷’의 새김은 나중에 얻었다. 그런 의미 맥락에서 중국은 일찌감치 오복(五服)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자신을 세상 중심에 두고 동심원을 그려 권력의 상하(上下), 거리에 따른 친소(親疏) 관계를 설정했다. 동심원의 가장 안쪽 동그라미에 속해야 최상위에 속한다. 거리가 멀수록 위계(位階) 또한 추락한다. ‘중심과 변두리’라는 중화주의 발상이 영근 사상적 토대다. 그러니 주변에 있는 이에게는 복종과 굴복, 복속을 강요하는 일이 흔했다.
2000년을 넘게 위세를 떨친 중국의 중화주의는 우리에게 큰 문명적 숙제다. 힘이 강해지면 늘 이웃의 여럿에게 서슴없이 강요한 질서다. 이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선거판에서 승리를 노리는 정치인들이 가볍게 여기며 다룰 일이 아니다.⊙
[289] ‘배려’가 없는 중국

▲일러스트=김성규
천 번 생각해도 한 번 실수할 정도인 사람을 중국에서는 지혜로운 이라고 치켜세운다. 천 번 궁리해도 한 번 성공하고 마는 사람은 그 반대의 어리석은 자다. 이를 성어로 표현하면 천려일실(千慮一失), 천려일득(千慮一得)이다.
무엇이 지혜고, 무엇이 어리석음인지를 따지기는 복잡하다. 단지 중국인들이 마음속으로 오래 새겨 온 이 말의 요체는 ‘생각[慮]’과 ‘득실(得失)’을 병렬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수천 년을 자랑하는 중국의 지식 전통이다.
이리저리 헤아려 보는 일의 궁극적인 지향이 얻거나 잃는 득실에 모아져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헤아리는 행위는 곧장 근심과도 이어진다. “멀리 헤아리지 않으면 곧 걱정거리가 생긴다(人無遠慮, 必有近憂)”고 말이다.
공자(孔子)가 논어(論語)에서 한 말이니 제법 오랜 역사를 지녔다. 이리저리 따져서 헤아리며 생각하는 동작이 ‘려(慮)’다. 쓰임이 퍽 많은 글자다. 깊이 따지고 멀리 헤아리는 일을 일컫는 성어 심모원려(深謀遠慮)는 우리에게도 꽤 친숙하다.
관련 단어도 아주 발달했다. 걱정으로 범벅인 생각이면 우려(憂慮)다. 마음과 함께 머리가 복잡해지면 심려(心慮)다. 신경이 타들어갈 듯한 생각이면 초려(焦慮)다. 이런 지식의 맥락이 영글어 만들어진 것이 모려(謀慮), 즉 모략(謀略)의 전통이다.
이 글자가 들어간 어휘에 ‘배려(配慮)’가 있다. 남을 위한 생각이다. 그러나 중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진 단어다. 헤아림의 목적이 이해득실(利害得失)에만 몰려 있는 중국 문화 풍토에서는 나오기 힘든 말이다.
중국이 한반도 자유 평화 통일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굳히는 모양이다. 저울질에만 골몰하는 ‘배려’ 없는 중국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배려’했다. 이해타산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중국을 상대하는 방법을 이젠 다시 생각해야 한다.⊙
[290] 난세(亂世)

▲일러스트=박상훈
“모진 바람 불어야 질긴 풀 알아보고, 난세 겪어봐야 충신을 알 수 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고 말한 이가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다. 부친을 도와 왕조를 세우고 정관(貞觀)의 치세(治世)까지 일군 그의 경험담이다.
그가 난세(亂世)로 정의한 ‘판탕(板蕩)’은 유교의 경전인 ‘시경(詩經)’ 속 두 편명(篇名)이다. 각 편은 폭군으로 이름난 서주(西周) 여왕(厲王) 당시 참혹했던 민생의 아픔을 적은 내용이다. 그로써 ‘판탕’은 아예 난세라는 뜻을 얻었다.
시문에는 매미 소리와 함께 국물 끓는 소음이 난세의 현상으로 등장한다. 원문에 따라 적으면 조당(蜩螗)과 비갱(沸羹)이다. 아주 소란스러운 매미의 울음, 국이 끓을 때의 부글부글 시끄러운 소리 등으로 불안정한 사회를 그렸다.
동의어는 즐비하다. 우선 전쟁 등이 벌어지는 경우인 변란(變亂)이나 동란(動亂)이 대표적이다. 분란(紛亂)이나 분요(紛擾)도 그렇다. “요란을 떤다”고 할 때의 요란(擾亂)도 마찬가지다. 소란(騷亂), 소요(騷擾), 요양(擾攘)도 있다.
많은 것을 앗아가는 물길이 등장할 때도 있다. 동탕(動蕩), 격탕(激蕩)이라고 적으면 걷잡을 수 없는 성난 물이지만, 속뜻은 어지러운 세상이다. 푸른 바닷물이 이리저리 마구 흐르는 경우인 창해횡류(蒼海橫流)도 같은 의미다.
잘 다스려지는 치세와 그 반대인 난세를 늘 고민했던 중국이다. 그래서 시끄러운 매미 울음과 국물 끓는 소리에도 민감하다. 현대 중국의 집권 공산당은 ‘사회 안정 유지[維穩]’를 위해 지금도 국방비 이상의 돈을 쓴다.
그에 따라 웬만한 소란 등은 묻혀버린다. 국가와 사회의 ‘중심’을 잡아가는 집요한 관리 능력 덕분이다. 이번 총선 뒤에도 정치적 불안정성만 높아진 대한민국이다. 이젠 국가의 큰 지향도 묘연해졌다. 난세 걱정 않는 사회에 닥칠 난세는 어떤 모습일까.⊙
[291] 임인유현(任人唯賢), 임인유친(任人唯親)

▲그래픽=박상훈
사람 중에서 가장 잘난 이를 일컫는 글자는 성(聖)이다. 그다음은 보통 현(賢)으로 친다. 둘을 합치면 성현(聖賢)이다. 유가(儒家)는 공자를 지성(至聖), 맹자를 그에 버금가는 성현이라는 아성(亞聖)으로 추켜세웠다.
‘부문별 성인(聖人)’도 많다. 중국 역사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사마천(司馬遷)은 사성(史聖), 서예의 최고봉으로 치는 왕희지(王羲之)는 서성(書聖), 당나라 최고 시인으로 존경을 받는 두보(杜甫)는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그에 미치지 못하지만 영(英), 준(俊), 호(豪), 걸(杰) 등도 재주 등이 남에 비해 탁월한 사람들을 일컫는 글자다. 글자를 서로 조합해서 매우 빼어난 능력자를 영준(英俊), 영호(英豪), 영걸(英杰), 준걸(俊杰), 호준(豪俊) 등으로 적었다.
그러나 세상과 국가를 탁월하게 이끄는 ‘인재(人才)’라는 면에서 고대 중국 사회가 일찌감치 주목한 단어는 현능(賢能)이다. 옛 주요 서적 등에 자주 등장한다. 아울러 이런 인재의 유무(有無)가 흥망과 성쇠를 가른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순서가 있다. ‘현’이 먼저고 ‘능’이 나중이다. 각종 전적의 맥락에 따르면 앞의 ‘현’은 도덕적 역량에 가깝다. 그에 비해 뒤의 ‘능’은 실무적인 능력이다. 우리는 앞 글자를 ‘어질다’ 정도로 풀지만 그보다는 더 복잡하다. 높은 도덕적 역량에 현실적인 면모까지 포함한 이를 일컫는 글자다. 그 맥락에서 나온 성어가 임인유현(任人唯賢)이다. “인재를 뽑을 때는 오로지 덕망과 재능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 반대가 임인유친(任人唯親)이다. 친분만을 좇아 사람 뽑는다는 얘기다.
요즘 중국 공산당은 당성(黨性)과 권력자에 대한 충성 여부로만 고위 관리를 등용하는 듯하다. 어려운 경제에도 뾰족한 대응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렇다. 인사 그르치면 나라조차 크게 기운다.⊙
[292] 봄볕 사라진 중국 경제

▲일러스트=김성규
봄날 따사로운 햇빛을 한자로 이야기할 때는 ‘춘휘(春暉)’가 참 그럴듯하다. 뒤의 글자 ‘휘’는 내리쬐는 햇빛이다. 봄은 곧 석 달이라고 해서 때로는 앞에 삼(三)을 붙여 ‘삼춘휘’라고 적어 역시 봄철의 햇빛을 말한다.
문학적으로 이 단어를 모성(母性)으로 다뤄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 있다.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이다. 아들이 먼 길을 떠난다. 어머니는 손에 바늘과 실을 들고 아들의 옷을 촘촘히 다시 꿰맨다. 일찍 돌아오지 못할까 기울이는 걱정…. 그 말미가 이렇다. “누가 말했나, 한 줄기 풀과 같은 마음으로 봄날 햇볕의 고마움을 갚는다고(誰言寸草心, 報得三春暉).” 어머니의 한량없는 은혜를 가리키는 명구다. 혹은 촌초춘휘(寸草春暉)라고 적어 갚을 길 없는 부모의 은덕을 지칭한다.
이런 봄에 어울리는 성어 표현은 아무래도 모든 꽃이 함께 피어나는 백화제방(百花齊放), 온갖 새가 한데 울음 우는 백조쟁명(百鳥爭鳴) 등이다. 삶의 기운이 쑥처럼 번져가는 생기봉발(生機蓬勃) 등의 성어도 적당하다.
그러나 올해 중국이 맞이하는 봄기운은 예전과 같지 않다. 중국어 권역의 대부분 매체들은 봄날의 경물과는 전혀 맞지 않는 ‘소조(蕭條)’라는 말로 요즘의 중국 경제 사정 전체를 표현한다. 이는 만물의 기운이 꺾여 사라지는 가을의 용어다. 소삽(蕭颯), 소삭(蕭索), 소랭(蕭冷), 소슬(蕭瑟) 등이 관련 단어다. 모두 잎사귀 떨어진 나뭇가지, 그곳에 닥치는 차가운 바람, 그로써 빚어지는 쓸쓸한 분위기를 가리킨다. 생산과 소비 등 산업 전반의 부진을 지적하는 내용들이다.
당나라 시인의 표현처럼 위대한 모성과도 같은 봄볕은 올해 중국의 대지를 외면하는 분위기다. 볕이 드는 정도를 말하는 단어가 마침 경기(景氣)다. 그것 가라앉으니 봄인데도 차갑다. 우리의 봄은 따스한가.⊙
[293] 조심해서 다녀야 할 중국 길

▲일러스트=김성규
가는 길엔 따사로운 햇빛만 내리지 않는다. 비바람이 닥치기 십상이고 온갖 변수가 등장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넓고 편한 길에 오르고자 한다. 작은 길보다는 큰 길, 구불구불한 길보다는 곧은 길이 훨씬 안전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길을 향한 그런 욕망은 한자 세계에서 제법 뚜렷하다. 우선 탄로(坦路)다. 탄탄대로(坦坦大路)의 준말이다. 아울러 평탄(平坦), 순탄(順坦)이라는 말이 나왔다.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는 길 위의 연상은 ‘통달(通達)’이라는 철학적 사유와도 이어진다.
평안한 세월을 가리키는 성어 강구연월(康衢煙月)의 ‘강구’는 크고 넓은 길의 통칭이다. 강장(康莊)도 그렇다. 서쪽 옛 변경의 관문이었던 양관(陽關)으로 향하는 길, 양관대도(陽關大道)는 중국에서 곧고 넓은 길의 대명사다.
그 반대말도 많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중국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다. 전제주의 정권이 통제를 강화하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중국이라는 대륙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중국의 길이다.⊙
[294] 중국 문명의 오랜 답보

▲일러스트=박상훈
말[馬]을 잘 부리는 일은 예부터 중요했다. 먼 거리를 빨리 이동하려는 사람에게는 더 그랬다. 더구나 생사를 가르는 전쟁의 엄혹함 속에서는 무기(武器)라 할 수 있는 말을 제 뜻대로 부려야 적을 꺾고 살아남았을 테다.
이와 관련이 있는 두 글자가 있다. 하나는 어(御), 다른 하나는 어(馭)다. 앞 글자는 말 부리는 일을 훌쩍 넘어 임금이 직접 사용하는 그 무엇이라는 뜻까지 얻는다. 어용(御用), 어도(御道), 어가(御駕) 등이다. 초기 글자꼴을 보면 이는 말을 직접 부리는 행위가 아니라 말 등이 끄는 수레를 모는 동작이다. 글자꼴에는 길, 사람, 고삐로 보이는 끈 등의 요소가 등장한다.
그에 비해 뒤의 글자는 사람이 직접 말을 제어하는 행위에 가깝다. 우리 쓰임은 많지 않은 글자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의 어국(馭國), 수레를 몬다는 의미의 어거(馭車), 임금의 수레를 가리키는 용어(龍馭) 같은 단어가 있다. 직접적으로 말을 다루는 동작이고, 그 본래 새김은 ‘통제(統制)’에 가깝다. 중국의 정치철학사에 이 글자는 ‘어민(馭民)’이라는 단어로 일찌감치 등장한다. 사람을 말처럼 부린다는 뜻이다. 법가(法家)의 한 축인 상앙(商鞅)이 제창했다고 알려졌다. 여러 설이 있지만 ‘어민’ 방법은 대개 이렇다.
첫째 일민(壹民), 생각을 하나로 묶는다. 둘째 약민(弱民), 약하게 만든다. 셋째 피민(疲民), 피곤에 젖어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한다. 넷째 욕민(辱民), 무서움에 눌려 서로를 의심케 한다. 다섯째 빈민(貧民), 가난으로 몰아 뜻을 꺾게 만든다.
2400년 전의 정치적 견해라지만 참 고약하다. 그러나 현대 중국도 강력한 전제주의가 국민을 찍어 누른다. 그래서 현대 중국인 또한 권력자의 ‘어용’과 ‘어민’에 익숙하다. 문명의 ‘답보(踏步)’에 관한 한 중국은 단연 세계 으뜸이다.⊙
[295] 굶주림이 늘 번졌던 땅

▲일러스트=박상훈
중국을 ‘굶주림의 땅’이라고 일컫던 적이 있었다. 전쟁을 포함한 각종의 재난이 빈발했던 까닭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 펼쳐지면서 굶주림, 그로 인한 사망자가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공식적 통계는 아니지만, 1959년부터 3년 동안 이어진 대약진운동으로 직접적인 아사(餓死)나 굶주림으로 인한 비(非)정상적 사망자가 4000만 명에 육박하거나 그를 상회한다는 증언도 있다. 역사 속 기근(饑饉)은 더욱 참담하다.
굶주림이 번질 무렵에는 표현이 가볍다. 흔히 ‘서북풍 마시다(喝西北風)’라고 적는다. 왜 서북풍인가의 유래는 복잡하다. 단지 시리고 추운 시절에 고픈 배를 달래려 바람이나 실컷 마셔 둔다는 정도의 정서로 이해하면 좋다.
기근이 더욱 번지면 사람들은 느릅나무 열매나 껍질을 벗겨 먹는다. 이어 점토질의 흙을 구해 허기를 면한다. 흙으로 만든 양식 대용의 그 물건은 흔히 관음토(觀音土)라 했다. 그러나 많이 먹으면 변비에 걸려 죽는다.
그 마지막이 참담하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인상식(人相食)’의 사례가 이어진다. 이 정도면 차라리 지옥도(地獄圖)라 해도 좋을 풍경이 빚어진다. 그 무렵의 극단적인 단어 하나가 채인(菜人)이다. 사람이 시장에서 식용으로 팔리는 사례다.
1630년에 태어난 청나라 시인 굴대균(屈大均)의 ‘채인애(菜人哀)’란 시가 있다. 그는 서문에 “기황이 심해진 어느 날 아내가 자신의 몸을 시장에 팔아 마련한 돈을 남편에게 건네며 울었다.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아내의 뒤를 밟았으나 이미…”라는 내용을 적고 있다.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빈부격차가 심한 중국의 저소득 계층 사이에서는 ‘서북풍 마시다’라는 말이 또 유행하는 모양이다. ‘헐벗음과 굶주림 문제[溫飽]’를 진작 해결했다고 자부한 공산당이 긴장하겠다. ‘강대국 꿈’에 빠지기 전 먼저 해결할 일이다.⊙
[296] 대도시 유랑객

▲일러스트=박상훈
덧없는 인생을 표현하는 한자어 하나가 부생(浮生)이다. 앞 글자 부(浮)는 물에 있는 아이를 누군가 손으로 잡아주는 모습의 초기 꼴을 지니고 있다. 그로써 ‘헤엄치다’는 뜻과 ‘물에 뜨다’는 새김을 얻은 글자다.
어딘가 한 군데 자리를 잡고 있는 일이 더 그럴 듯해 보인다. 따라서 안정(安定), 정주(定住)란 말이 듬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물에 떠다니는 부평초(浮萍草)는 겉이 멋지게 비칠지 모르지만 사람 삶으로 볼 때는 고달픈 이미지다. 이리저리 떠돌고 헤매니 ‘덧없음’과 동의어인 까닭이다. 그런 경우를 가리키는 단어가 유민(流民)이다. 물 흐름에 실려 떠내려가듯이 정처(定處)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이다. 유랑(流浪), 유리(流離), 유전(流轉) 등이 그런 흐름의 단어들이다.
물에 떠다니는 상황을 일컫는 다른 대표적 글자 하나는 표(漂)다. 떠다니다 가끔 멈추는 일이 표박(漂泊)이다. 그저 흘러 떠돈다면 표류(漂流)다. 뚜렷한 지향 없이 헤매면 표랑(漂浪)이다. 그런 이들을 표객(漂客)이라 적는다.
통일 왕조가 들어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 경우보다 전란과 재난이 발생해 분열의 상황을 맞았던 일이 훨씬 더 흔했던 중국의 역사다. 그로써 거처를 잃고 헤매는 사람인 ‘유민’이 대단한 세력을 형성해 왕조 체제를 위협한 사례가 많았다.
수도 베이징(北京)에 머물면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을 요즘은 북표(北漂)라고 적는다. 상하이(上海)에서 떠도는 이들은 상표(上漂), 또는 그곳의 별칭을 붙여 호표(滬漂)라고 한다. 광저우(廣州)의 그런 사람들은 광표(廣漂)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대도시를 표류하는 일종의 유민 그룹이다. 중국의 경기가 가라앉는 흐름이 구조화하면서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통일 왕조의 견고한 통치 기반도 이 유민들에 의해 무너진 적이 퍽 잦았다. 집권 공산당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질 듯하다.⊙
[297] 총리 같지 않은 총리

▲일러스트=박상훈
레서스원숭이는 인도와 중국 서남부 삼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다. 과거 중국에서는 목후(沐猴)라 했고, 현대 중국에서는 미후(獼猴)라 부른다. 이 원숭이가 모자 쓰고 사람 흉내 내는 모습을 목후이관(沐猴而冠)이라는 성어로 적는다. 원숭이가 사람처럼 꾸미는 일, 겉만 번드르르할 뿐이지 속은 비어있는 뭔가를 일컫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쓴 성어다. 이제는 남의 권력에 편승해 자리만 차지하는 사람들의 사례도 일컫는다.
날짐승과 길짐승을 가리키는 금수(禽獸)라는 단어 또한 그와 유사한 용례가 있다. 의관금수(衣冠禽獸)라는 성어의 예다. 수준에 전혀 못 미치는 사람이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행세하는 일을 가리킨다. ‘목후이관’과 속뜻이 비슷하다.
이념 대립이 엄혹하던 시절 자주 등장했던 단어가 괴뢰(傀儡)다. 본래는 나무 인형 또는 꼭두각시를 일컫는 한자어다. 목우(木偶)라고 적을 때도 있다. 실에 매달려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인형 무대극의 핵심 요소다.
옛 중국 연극의 곽랑(郭郞)이라는 인명도 그렇다. 대머리에 잘 웃기는 캐릭터였는데, ‘어릿광대’ 또는 ‘괴뢰’의 뜻이 있다. 곽랑의 별칭은 ‘대머리 곽씨’라는 뜻의 곽독(郭禿)이다. 꼭두각시의 ‘꼭두’가 이 ‘곽독’에서 나왔다는 풀이도 있다.
중국 행정을 이끄는 총리(總理)라는 자리가 예전과는 아주 다르다. 최고 권력자인 공산당 ‘총서기(總書記)의 비서[助理]’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사람이 정무를 모두 아우르는 권력 집중이 강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1인 독재의 체제는 이렇듯 두렵다. 괜찮은 관료들을 모두 꼭두각시, 괴뢰, 레서스원숭이로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최근 중국 총리가 참석한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그가 한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파트너인지는 이제라도 잘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298] 깨진 거울, 떨어진 꽃

▲일러스트=박상훈
“깨진 거울은 다시 비추지 못하고, 떨어진 꽃은 가지에 올리기 어렵다(破鏡不重照, 落花難上枝)”는 중국의 속언이 있다. 흩어진 남녀의 관계나 끝장난 부부 사이를 가리킬 때 중국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깨진 거울이라는 ‘파경(破鏡)’ 스토리는 조금 복잡하다. 전란을 피해 헤어져야 했던 부부가 서로 쪼개 나눠가진 구리거울로 인해 뒷날 다시 만나 부부관계를 이어갔다는 내용이다. 깨진 거울이 다시 합해졌다는 파경중원(破鏡重圓)이 본말이다.
그에 비해 떨어진 꽃은 이미지가 분명하다. 한 번 가지에서 떨어진 꽃은 끈으로 묶어 가지에 붙여도 곧 시들어 버릴 테니 말이다. 깨진 거울이 다시 합쳐지는 이야기도 이야기일 뿐, 실제 깨진 거울은 제 기능을 다하기 어렵다.
요즘의 중국 거울은 만들어져 처음 쓰이기도 전에 깨지고, 가지 등에 달리는 꽃망울은 제대로 피기도 전에 떨어지는 듯하다. 신혼(新婚)으로 맺어질 부부의 관계가 아예 시작부터 어긋나 깨져서 헤어지는 경우가 빈발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혼인을 맺을 때 신랑 쪽이 내놔야 하는 이른바 ‘결혼 지참금’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채례(彩禮)라고 적고, 옛 중국에서는 빙례(聘禮), 빙재(聘財)라고 지칭했던 의례(儀禮)다. 남성이 상대방 여성을 존중한다는 뜻을 지녔다는 습속이다.
그러나 이제는 결혼을 바로 앞에 두고 여성 쪽이 무리하게 요구하는 ‘채례’로 인해 헤어지는 남녀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도시나 농촌을 가리지 않는 전국적 현상이란다. 한 자녀 정책으로 생겨난 남아선호 때문에 성비 불균형이 발생한 게 원인이라는 분석이 따른다.
그러나 중국의 ‘배금주의(拜金主義)’가 진짜 이유라고 본다. 오로지 돈만 좇는 저질의 취향 말이다. 물욕(物欲)이 인정(人情)을 사정없이 조롱하니, 중국은 문화적 빈국(貧國)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우리에게 늘 무언가를 일깨운다.⊙
[299] '바람 풍'이 두려운 사람들

▲일러스트=박상훈
무협 소설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 강호(江湖)의 풀이는 여럿이다. 본래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그저 권력이 모여든 조정(朝廷)과는 정반대의 민간 영역이라는 해설 등이 따른다.
‘강호’는 글자 그대로 강과 호수의 지칭이다. 물결이 넘실거리거나 도도한 물 흐름이 만들어져 늘 흔들리는 곳이다. 따라서 이를 ‘불안정’에 견줄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제도와 문물이 엄격하게 자리 잡은 조정은 ‘안정’의 대명사다.
강호는 활력이 넘치지만 이런 불안정성 때문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험악한 장소라는 의미도 얻는다. 중국의 언어 습속에는 이런 불안정성을 예감해 보려는 심리가 자주 엿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람 풍(風)’이다.
중국인에게 있어 이 바람은 곧 닥칠 위기(危機)로 비칠 때가 많다. 그런 중국인의 심사를 잘 대변하는 단어가 ‘풍험(風險)’이다. 영어 ‘risk’ ‘hazard’ 등의 역어(譯語)로 중국인에게 매우 친숙하다. 그러나 본뜻은 ‘바람[風]에 실려 오는 위험[險]’이다.
앞서 소개했듯 ‘바람 풍’의 조어 행렬은 대개 불안정성을 암시한다. 풍운(風雲)이 우선 그렇고, 풍우(風雨)·풍파(風波)·풍랑(風浪) 등이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바람’에 관한 한 중국인의 시선은 곧 초조감, 불안, 조바심으로 이어진다.
요즘 중국의 사정이 예전 같지 않다. 국제적인 고립이 깊어지고, 경기는 줄곧 하강한다. 외부 요인도 있지만, 본래 바람과 비를 즐겨 불러댔던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소설 주인공 후예답게 그를 자초(自招)한 부분도 크다.
그러나 바람조차 위기의 전조로 읽는 전통의 저력으로 중국은 더 악화할지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노력이 한창이다. 우리는 어떨까. 강파른 대립과 반목으로 우리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정치권발(發)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인가.⊙
2024.06.21
[300] 강을 건너려는 진흙 보살

▲일러스트=김성규
“진흙 보살이 강을 건넌다면(泥菩薩過江)…”이라는 퀴즈의 물음에는 “(남은커녕) 자신조차 보호하지 못한다(自身難保)”는 정답이 따른다. 진흙은 물에 금세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헐후어(歇後語)라는 문답 형식의 중국 민간 언어다.
답에 등장하는 ‘보신(保身)’의 개념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일이다. 이를 친절하게 일깨우는 성어가 명철보신(明哲保身)이다. ‘명’이나 ‘철’은 다 사람의 지혜를 가리킨다. 슬기롭게 대처함으로써 위험으로부터 저를 지킨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중국은 다난(多難)의 땅이었다. 참혹한 전란(戰亂)이 수도 없이 닥쳤고, 큰 면적에 넓게 번지는 가뭄과 홍수 등 각종 재해도 늘 잇따랐던 곳이다. 그곳에서 생존하려는 노력이 이런 언어 습속으로 이어졌다.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 왕조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이뤘으나 권력을 탐하지 않음으로써 제 명을 지킨 장량(張良), 월(越)나라 구천(勾踐)을 보필해 오(吳)나라를 꺾었으나 역시 선뜻 물러났던 범려(范蠡) 등이 ‘명철보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국의 ‘명철’ 전통은 아주 풍성하다. 다양한 경험적 사례가 모이고 쌓여 명청(明淸) 무렵에 이르러서는 ‘삼십육계(三十六計)’라는 대표적 저작이 등장한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고자 서슴없이 사술(詐術)까지 동원하는 조잡한 내용들이다.
‘명철’이 대표하는 중국의 지혜는 본래 훌륭했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제 이익을 챙기는 ‘보신’으로만 이어진 점이 문제다. 다양성 속 경합이 뿜어냈던 슬기로움의 지적 전통이 줄곧 잔꾀로만 기울어 ‘문명의 퇴행’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현대 중국의 집권 공산당은 그런 퇴행을 거스를 수 있을까. 전망은 썩 밝지 않다. 체제 안정만을 내세우며 국민들을 우민(愚民)으로 만드는 정도가 날로 심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진흙 보살이 강을 건너려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