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전쟁사] 〈301〉 명마의 조건 - 〈320〉 38선, 북한군의 움직임
[임용한의 전쟁사] 역사학자 동아일보 2024
02-06
〈301〉명마의 조건

조선 시대 중요한 전략물자 중 하나가 말이었다. 조선 시대에 장교나 정예병이 되려면 반드시 말이 있어야 했다. 조선은 전국에 국영 목장을 설치해서 좋은 군마를 생산하고 사육했다. 목장의 수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데, 50개 후반에서 많을 때는 120개 정도까지 되었다.
목장은 섬이나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곶에 설치했다. 말이 도망치지 못하게 관리하는 측면도 있었고, 농지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경작이 힘든 지역을 골랐던 이유도 있다. 도둑질이 어렵고, 말이 통하지 않는 맹수의 침입을 막기 쉽다는 점도 섬이 인기인 이유였다. 맹수로 인한 손실이 적지 않았는데, 섬에 목장을 설치하자, 아마 육지에서 가까운 섬이었겠지만, 어이없게도 호랑이와 표범도 따라 들어와서 번식했다고 한다.
목장 사업은 번창해서 성종 대에는 무려 4만 마리를 사육했다.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점점 줄어들더니 고종 때가 되면 5600필 정도로 줄어들었다. 진짜 문제는 군마로 쓸 좋은 말은 지극히 적었다는 것이다. 좋은 말은 비쌌다. 상등마의 가격은 쌀 30석 정도였다.
전투에 투입하는 말은 수송용으로 쓰는 말, 전장에서 타는 말, 장수가 타고 싸우는 최고급 전마로 구분할 수 있다. 전국에 수만 마리 말이 있어도 군마로 쓸 수 있는 말은 적었다. 1492년 성종은 여진 정벌을 하면서 전국 목장에서 좋은 말을 골라 병사들에게 지급했는데, 군마로 뽑은 말이 800필, 전마는 겨우 40필이었다.
좋은 말이 적은 이유로 목장 근무자들이 빼돌린다, 권력가들이 몰래 가져간다는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원래 말 중에서 군마로 쓸 수 있는 말은 적다. 조선의 사육정책도 문제가 있었다. 목장 감독관의 성적은 생산한 말의 수만으로 평가했다. 질은 객관적인 수치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한때 고려와 조선에선 최고급 몽골 말을 생산했었지만, 이런 행정 편의주의적인 관리로 목장은 쇠퇴하고 말의 질은 떨어졌다. 후기가 되면 좋은 군마는 만주에서 들여오는 수입마가 인기를 끌었다. 현대에는 우리나라에 이처럼 많은 말과 기병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졌다.⊙
〈302〉힌덴부르크, 전쟁 영웅의 몰락

1914년 8월 동부 독일의 타넨베르크에서 독일군은 침공해 온 21만의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포로만 9만5000명이었다. 이 포로들의 모습은 러시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나중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 회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였다. 누가 진정한 공로자인가를 두고 8군 참모장 호프만 대령의 공이라는 설도 있고, 힌덴부르크는 별로 한 일이 없고 루덴도르프가 다 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 승리는 팀으로 이룬 승리였다. 최고 사령관으로서 힌덴부르크는 절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루덴도르프의 대담한 기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찾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초급 장교 시절부터 기동과 지휘관의 자율성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공통의 전략적 목표 아래 각 지휘관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프로이센의 전통적 신념과 이를 계승한 그나이제나우, 몰트케에 대한 확실한 신봉자였다. 당시 67세의 노령이었지만, 전략적 사고는 전혀 낡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반동으로 타넨베르크와 힌덴부르크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더욱 높아졌다. 이 인기로 1925년에 힌덴부르크는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힌덴부르크의 극적인 몰락이 시작된다. 대통령으로 그는 영리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았다. 그의 최악의 실수는 히틀러의 후원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히틀러가 쿠데타 실패로 체포되었을 때 관대하게 대했다. 나중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힌덴부르크는 왜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급속히 팽창하는 공산당을 억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설도 있다. 총리 임명 전에 나치는 이미 제2당이 되어 있었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이념도 행동도 초라한 우파 세력이었다. 힌덴부르크는 19세기 독일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지지했고, 물질보다는 고귀한 정신이 강력한 국가를 만든다는 구시대 사상의 소유자였다. 성공한 사람들, 안정된 가정과 재산을 보유한 사람들은 과거의 가치에 안주하고, 현실에 기생하려 한다. 나치의 전체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한탄만 하는 우파, 이런 것들이 겹쳐 힌덴부르크가 나치의 양아버지가 되었던 것이다.⊙
〈303〉대량학살 못 막은 집단지성

2월 21일은 1916년 베르됭 전투가 발생했던 날이다. 뫼즈강의 요새 도시 베르됭을 두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베르됭 전투는 1차대전 사상 최대 희생자를 낸 전투였다. 단일 면적당 희생자가 제일 많았던 전투이기도 하다. 서부 전선에 배치한 사단의 3분의 2가 이 좁은 땅에 투입되었고, 독일과 프랑스군 합쳐서 3500만 발이 넘는 포탄이 발사되었다. 그중에는 포스겐 가스탄도 있었다. 양측 합쳐서 사상자는 60만 명에서 100만 명에 달한다.
1962년에 앨리스터 혼이 쓴 ‘베르됭 전투’는 이 전투에 관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혼은 이 전투를 주도한 지휘관들에 대해서도 상세하고 비판적인 고찰을 남기고 있다. 작가가 이런 분류를 하진 않았지만, 등장인물들은 이런 분류가 가능하다. 전투가 전략적 목표를 잃고 오직 지옥 같은 소모전이 되고 있음에도 잘못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 공격과 승리에 집착하는 장군, 전투가 잘못된 줄 알면서도 우유부단하고 책임만 전가하는 장군, 잘못된 전투임을 알고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창의적인 전술과 방법을 모색하는 장군이다.
기묘한 사실은 베르됭 전투가 처음의 전술적 기교를 잃고, 맹목적인 학살극으로 바뀌어 가자 경악하고 진절머리를 내는 장군들이 많았음에도 전투는 중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처음 공격을 시작한 독일군은 제5군으로 사령관은 국왕 빌헬름 2세의 황태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이었다. 황태자도 처음에는 의기양양했지만, 나중에는 이 전투에 진절머리를 냈고, “공격하자,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군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황태자 자신도 이 전투를 중단시키지 못했다.
대중들은 현명했을까? 전시의 보도 통제나 선전에 휘둘렸던 것일 수도 있지만, 대중들은 승리의 소식을 가져다주는 ‘피의 도살자’형 장군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신중하고 고뇌하는 지휘관들은 비난을 받았다.
인간은 절대 현명하지 않다. 집단지성은 더욱 그렇다. 공포와 욕망에 사로잡힐 때, 이성은 눈을 감는다. 베르됭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그렇다.⊙
〈304〉우크라이나군의 철수

아우디이우카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철수했다. 제2의 바흐무트라고까지 불리던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전과를 올렸다. 이제 우크라이나의 힘이 다하고 러시아가 우세를 잡았다. 더 불리해지기 전에 우크라이나가 휴전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러시아군도 공세를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지원안이 하원을 통과하지 못하면서 우크라이나군이 수세로 돌아선 건 작년 말부터였다. 그러나 러시아군 역시 화력의 우위 속에서도 심지어 아우디이우카를 집중적으로 공격했음에도 우크라이나군이 꽤 오래 버텼다.
러시아군은 작년 2차 징집 이후로 군의 전술적 역량은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도 군수와 무기에는 여유가 많지 않은 듯하고, 군의 전체적인 역량, 조직의 경직성, 정치적 압박 등은 쉽게 개선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 전쟁이 과거 독소전쟁과 유사한 점은 어느 쪽이든 공세로 나갈 때, 희생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러시아가 훨씬 심하다. 이것도 러시아군이 공세를 확장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우크라이나군은 미국의 군수 지원이 끊어지고, 유럽은 아직 군비가 충분치 않다. 병력도 많이 소진되었다. 상황이 좋던 시절에도 극심한 전술적 불균형이 있었다. 제공권, 기갑부대, 기타 여러 부분에서 한계가 너무 많았다. 이런 불균형 속에서 지난 한 해 러시아를 상대로 공세를 유지한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다.
미국이 완전히 지원을 끊진 못할 것이다. 다만 지원의 내용과 질이 좀 더 과감해질지, 이전 형태를 유지할지, 우크라이나가 함락되어서도 안 되지만, 러시아를 지나치게 자극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을 유지할지가 관건이다.
전쟁은 상대를 먼저 파괴하는 전쟁이 될 때도 있고, 누가 더 늦게 파괴되느냐는 싸움이 될 때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 전쟁은 후자에 속한다. 최근 양국에서 동시에 파열음이 들린다. 그것은 한쪽이 결정적으로 불리해지는 신호가 아니라 서로 부서져 가는 싸움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무장 국가로서 유럽의 신속한 변신, 미국의 각성 속도가 관건이다.⊙
〈305〉더 멀리 보는 사람

기원전 341년경, 진나라 군대가 섬서 분지를 나와 위나라를 침공했다. 위나라는 과거 은나라의 수도였던 안읍에 자리한 국가로 진나라 동쪽 국경을 마주한 나라였다. 진나라가 섬서 분지를 벗어나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압해야 하는 나라였다.
이 야심찬 원정을 지휘하는 사람이 상앙이었다. 상앙은 위나라 왕의 후궁의 아들이었다.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위나라 혜왕은 상앙을 등용하지 않았다. 출신이 미천하다는 것과 법가 사상가인 그의 생각이 너무 파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앙은 진나라로 가서 진 효공에게 등용되었다. 진나라는 원래는 중원문화권 밖에 위치한 미개한 지역이었다. 이 진나라를 완전한 강국으로 변화시키고, 천하 패권의 한걸음을 내딛게 한 사람이 상앙이다. 그는 사회 체제와 군대를 개혁하고, 신분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군공을 공정하게 포상하고, 오직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했다. 상앙의 정책으로 진나라 군대는 공포의 군대로 변모했다.
위나라는 공자 앙을 장수로 삼아 상앙을 막게 했다. 공자 앙은 과거에 상앙의 친구였다. 상앙은 공자 앙에게 사자를 보내 차마 ‘그대와 싸우지 못하겠다. 만나서 술을 하고 화친을 하자’고 했다. 공자 앙은 상앙의 제안에 찬성하고 술자리를 가졌다. 상앙은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공자 앙을 습격해 포로로 잡고 지휘관을 잃은 위나라 군대를 섬멸했다. 이 승리로 진나라는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얻었고, 위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야 했다.
상앙이 비열했지만, 진나라의 야망과 변화된 세상을 깨닫지 못하고 과거의 낭만에 사로잡힌 공자 앙의 잘못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상앙은 승승장구했지만, 정치가 너무 가혹했다. 진 효왕이 죽자 상앙은 위나라로 도망쳤다.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공자 앙과 군대에 행한 일을 잊지 않고 상앙을 다시 진나라로 추방했다. 상앙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상앙은 구습을 버리고 혁신을 이루었다. 그러나 잔혹한 정치가 초래하는 미래를 보지 못했다. 과거에 사로잡힌 사람, 당장의 이익과 현실에 매몰된 사람. 패망하는 시기는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306〉 관용으로 평화를 만들 수 있을까

테르모필레 전투를 다룬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정복자이자 침공자인 자신을 “나는 관대하다”라고 표현한다. 역사에 크세르크세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크세르크세스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기는 했다. 그는 멋진 황제가 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신하들을 우대하고, 황제의 품위와 권위를 세우면서도 말투와 행동은 억지스럽지 않았다. 적, 특히 항복하거나 망명해 온 적은 진심으로 관대하게 대했다. 나라 살림과 군대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황제학 교과서가 있다면 훌륭한 황제의 언행은 모두 실천하려고 했다.
황제에게 관대함은 특히 중요한 미덕이었다. 페르시아는 영토 내에 50개가 넘는 종족, 부족이 살았다. 이런 다양함을 통치하려면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다른 문화, 다른 가치관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페르시아도 그렇고 로마도 그렇고, 제국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해와 납득 가능한 법과 제도, 상식만 용납한다면 제국은 피비린내로 가득해질 것이다.
그러나 황제에겐 두 번째 딜레마가 따라온다. 관용으로 통치가 가능할까? 이해 불가능한 격차가 관용의 정치 조건이라는 말 자체가 관용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크세르크세스뿐 아니라 키루스, 다리우스 2세 등 페르시아의 역대 황제들은 관용을 과시하는 전설적인 일화를 보여주었지만, 모두가 정복 군주이고 큰 전쟁을 일으켰다.
제국은 전쟁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전쟁으로 국론을 모으고, 전리품을 나누어 인심을 얻고, 패자와 배신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명성을 얻었다. 제국을 해체하고, 국민국가, 민족국가가 성립하면 전쟁을 멈출 수 있었을까? 제국을 대신해서 유엔을 만들어 보았지만, 유엔은 관용 호소인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는 서로가 관용하고 공존하는 세상을 원한다. 그러나 그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관용을 호소하는 방법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인류의 지성이 도달한 지점은 여기까지다.⊙
〈307〉귀주대첩

1019년 3월 16일(음력 2월 1일)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 앞 들판에서 강감찬의 고려군과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격돌했다. 거란군으로서는 최후의 고비였다. 이 전투에서만 승리하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려군 입장에서는 반드시 섬멸해야 하는 전투였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고려군이 패하거나 거란군이 큰 희생 없이 빠져나간다면 거란군이 또 침공해 올 수도 있었다. 993년에 시작된 고려-거란전쟁은 거의 30년째 지속되고 있었다. 고려, 거란의 병사 중에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참전한 병사들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남편과 자식,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여인들도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귀주대첩은 감격스러운 승리였지만, 이 승리로도 막을 수 없는 비극이 무수히 많았다. 포로가 되어 고려나 거란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천민이었던 양수척이 거란의 후예라는 말도 있지만, 양수척도 그렇고, 거란으로 끌려간 고려인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잊혀졌거나 혹은 고의로 외면한 탓에 전하지 않는다. 고려인이든 거란인이든 포로가 된 후에도 20년, 30년 지속되는 전쟁 중에, 분노한 주민들로부터 이들이 엄청난 핍박과 탄압을 받았으리라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귀주대첩의 소식이 거란에 전해졌을 때, 거란에 있던 고려인들은 어떤 일을 당했을까?
백성들은 적군에 의한 피해만이 아니라 기아, 가난, 범죄로 고통을 받는다. 전후에 자신을 쏜 적의 병사와 만나서 악수하고, 건너편에서 싸웠던 적의 지휘관을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에게 고통의 기억과 분노는 세대를 넘어 100년이 지나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수천 년의 인류 역사 동안 전쟁이 주는 교훈은 한결같다. 우리가 강하거나 받은 타격 이상의 보복을 할 능력이 있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추려면 평화 시에도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희생과 경제적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사고가 난다고 훈련을 축소하고, 시끄럽다고 군대를 쫓아내고, 전쟁을 도발할 우려가 있다고 군비를 줄이고, 기동훈련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전쟁과 100년의 고통을 부른다.⊙
〈308〉의무병

실화를 소재로 한 전쟁 드라마를 보면 지휘관, 베테랑 부사관, 병사들은 실제 인물과 비슷하거나 누가 봐도 강인하고 용감해 보이는 배우를 캐스팅한다. 반면에 심지어 사진이 남아 있어도, 꼭 왜곡되는 인물이 의무병, 군종 신부나 목사이다. 이들의 이미지는 언제나 비슷하다. 공부는 잘할 것 같지만, 겁은 좀 있고, 거친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갸름하고 왜소하고, 얌전해 보이는 인상을 찾는다.
20세기의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그들이 기억하는 의무병은 그렇게 나약한 이미지도 아니고, 편하고 안전한 보직도 아니었다. 일반 의무병은 의사이거나 의대 출신도 아닌 일반 병사들 중에 차출되어 약간의 교육을 받은 병사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힘들고 위험한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포탄이 떨어지고 기관총탄이 퍽퍽 날아와 박히면 병사들은 참호에 머리를 숙이고 엎드려 있지만, 의무병은 부상당한 병사를 구호하기 위해 참호와 참호 사이를 뛰어다니고, 때로는 사방이 노출된 야지에서 몸을 일으켜 부상병을 후송해야 했다.
이라크전쟁 때 어느 이라크 저격병은 시가지에서 상당수의 미군을 사살했는데, 부상당한 병사를 후송하는 병사는 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운은 지극한 예외에 속한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저격병들에게는 1순위 타깃이 의무병이었다. 이런 고의적인 저격이 아니라도 상륙 작전 중에 사방에 쓰러진 부상병을 구하러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다 보면 의무병들이 제일 먼저 소진되는 경우도 있었다. 타라와 전투에서는 상륙을 시도한 지 하루도 지나기 전에 22명의 위생병 중 21명이 전사해 버렸다.
의무병이 없으면 작은 상처로도 죽거나 평생의 장애를 갖게 될 수 있다. 병사들의 사기는 급락하고 움직임은 극도로 소극적이게 된다. 한국전쟁 때 한국군 병사들이 제일 부러워한 것이 미군의 보급보다 의료 체계였다. 즉사만 하지 않으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의사들의 파업이 국가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의사들도 할 말과 고민이 많다. 하지만 의무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처럼 진지한 설득과 감동의 과정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309〉공포로 공포를 이긴다

모스크바 테러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져 갈 것 같다. 러시아는 배후에 우크라이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기회에 연일 최대한 엄포를 놓고 있다. 우리는 분노했고,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선포함으로써 서방세계가 지원을 중단하고 우크라이나에 휴전이나 항복을 설득하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1950∼60년대 냉전의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 흐루쇼프는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서방세계의 약점은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의 이익이 걸리거나 시민들 사이에 불안, 공포, 경제적 손실에 대한 아까움이 번져 간다면 서방 정부는 양보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이 사건들을 기억하는 세대도 적겠지만, 베를린 장벽 설치, 헝가리, 폴란드 민주 시위에 대한 진압,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소련이 서방세계와 충돌했던 사건에서 그들이 배짱 좋게 나갔던 데는 서방세계에 대한 이런 전략적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성공을 거두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이 전략은 꽤 성공을 거두고 있다. 미국은 예상보다 빨리 공황에 빠졌고, 유럽은 예상보다 강경하게 버티고 있다. 몇 개 국가가 전열에서 이탈해서 만장일치제인 나토에 기능 장애를 선물하긴 했지만 말이다. 러시아는 작년 우크라이나의 반격 작전을 좌절시키고, 공세로 돌아섰지만, 기대한 만큼 전진하지도 못하고 있다.
최근에 푸틴은 과격한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공포 작전의 총구를 유럽으로 돌렸다. 하지만 거듭되는 과격 발언은 러시아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데 체력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징후일 수 있다. 이 낌새를 눈치챈 미국의 대선 후보들은 여론의 눈치는 눈치대로 보면서 어떤 형태로 끝나든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자신의 공으로 가져오거나 최소한 타인의 공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죽을 지경으로 만들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비정하고, 정치인들은 더 비정하고, 독재자는 비정의 끝을 알 수 없다.⊙
〈310〉하마스와 IS

과거의 테러리스트들은 어떻게 해서든 방송 카메라에 얼굴을 내밀고, 세계인들에게 자신의 조건이나 목소리를 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 이 점이 은행 강도나 폭력조직의 테러와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들도 이런 태도로 자신들은 범죄자와는 다른 혁명 투사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근래의 충격적인 테러, 9·11사건, 하마스와 이슬람국가(IS)의 모스크바 테러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은밀하게 접근해 신속하고 가혹하게 민간인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살상극을 벌이고 도주한다. 은행 강도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변화의 첫 번째 이유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이다. 굳이 방송국 촬영팀을 부르지 않아도, 지금 이 장면, 이 발언을 찍고 있느냐고 확인하지 않아도 현장에서 촬영되고 신속하게 세계로 송신된다.
두 번째, 팔레스타인 문제, 특정 지역의 종교 탄압, 소수민족 탄압 같은 세계적인 이슈의 원인과 해석, 정답이 이미 잘 포장되어 세상에 퍼져 있다. 굳이 테러리스트가 저격수의 총구를 피해 가며 창문에서 소리 높여 떠들 필요가 없어졌다.
극단적인 문제일수록 정답은 찾기 어렵다. 마치 12가지 합병증 환자처럼 고민하고 타협하고 갈등하며 섬세하게 해결책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테러리즘이 의존하는 이 냉동 포장 상자에는 분노와 감정적 호소와 극단적 대안이 있을 뿐이다. 20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현상이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하나의 사건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졌다. 대다수 사람이 사고를 포기하고 선명하게 포장된 해법에 의존한다. 여기서 진영논리가 발생하고, 벽이 발생했다. 과거에는 테러리즘도 충격과 공포라는 방법을 통해 상대를 설득해 보자는 생각이라도 있었다. 이제는 이들도 설득을 포기한다. 구체적인 요구사항도 없다. 메시지와 답은 이미 던져져 있다는 가정하에서 저승사자처럼 피를 뿌리고 정의의 심판자 행세를 한다. 이는 테러리스트만의 죄가 아니다.⊙
〈311〉중동전쟁 확전될까

이스라엘이 가자를 침공했을 때,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계속 원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많은 분이 헤즈볼라와 이스라엘의 전쟁과 중동 전쟁 확대를 걱정했다. 필자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지상군으로 공격하는 진짜 전쟁은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헤즈볼라가 전력을 많이 강화했고, 레바논의 실세라고 하지만 레바논에는 아직 많은 정파가 있다. 헤즈볼라가 강해졌다고 해도 이스라엘만큼 강하지 않다. 전쟁은 수행하는 쪽의 각오와 목적이 중요하다. 한두 명의 사상자만 나와도 소극적이 될 수 있고, 수백, 수천의 희생도 각오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후자이다. 그러므로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인다면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의 입장이 크게 약화할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 몇 달 동안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초토화하는 동안 헤즈볼라는 드론과 미사일을 계속 발사하기는 했지만, 지상군의 충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의 헤즈볼라 공격 가능성을 세계가 걱정하게 되었다. 이란이 이스라엘 본토를 처음 공격하자 이스라엘군은 공습에 가담한 헤즈볼라 군사시설을 폭격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이 국제 여론도 부담스럽고, 예비군 중심의 군 구조상 두 개의 전쟁은 고사하고 장기전도 힘들 것이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전례 없이 장기전을 수행했다. 게다가 네타냐후 정권은 전쟁을 계속하면서 특별한 성과를 올려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 네타냐후는 처음부터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었다.
이스라엘도 레바논 침공을 감행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다. 군사적 승리가 정치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가자와 하마스 문제도 겉보기와 달리 수렁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스라엘 국민들도 네타냐후의 속셈을 모를 리가 없다. 네타냐후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이스라엘의 공격 가능성은 30%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렵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예측이 정치가의 권력욕이 튀는 방향과 그것이 초래하는 비극이다.⊙
〈312〉호랑이 등에서 내리려면

이란과 이스라엘이 보복과 보복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세계의 공포도 커지고 있다.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은 건너지 않으려 하고는 있지만, 서로 보복을 반복하다 보면 수위는 계속 높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이란에 추가 제재를 하고, 팔레스타인의 유엔 가입에 부담을 무릅쓰고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노력을 보이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만족시키기는 힘든 모양이다. 미사일, 드론, 공중전으로 서로 상대를 괴롭히는 전쟁은 신개념의 전쟁이지만 단점도 분명하다. 상대를 괴롭힌다는 것 외에는 마땅한 전략적 해결 수단이 없다. 서로를 괴롭히고, 재력을 낭비하고 분노만 키워간다. 이 분노는 적에 대한 분노로 시작해서 자국 정권에 대한 분노로 확산된다.
네타냐후 정권도 내심 전쟁을 멈추고 싶을 것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후유증은 처리하기 힘들어지고, 반작용도 커진다. 전쟁을 끝내려면 국민을 만족시킬 가시적 성과가 필요한데 단기간에 성과를 이룰 방법이 없다.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문제는 깊고 깊은 수렁이다. 군사적 승리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다. 그 점은 이스라엘 국민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이란과 서로 보복을 반복하며 장기전으로 가면 모두가 힘들어질 뿐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의외의 타깃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레바논의 헤즈볼라이다. 하마스와 달리 헤즈볼라는 레바논 입장에서는 외래 집단이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않다. 여러 정파 세력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일 뿐이다. 현재 레바논의 경제, 정치 상황은 좋지 않다. 가자 전쟁이 시작됐을 때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을 너무 얕봤고, 이란의 지원을 과도하게 기대했다. 국제사회 압력 등 변수가 많지만, 네타냐후 정권이 헤즈볼라를 타깃으로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5차 중동전쟁은 아니라도 중동의 분쟁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으로 꽤 오래 지속될 듯하다.⊙
〈313〉성 프란체스코의 도시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도시 아시시는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이다. 그의 생가는 현재 성당이 되어 있는데, 아시시의 중심 광장 바로 근처에 있다. 생가의 입지가 보여주듯이 그의 부친은 상당한 부를 쌓은 상인이었다.
소년 시절 부유하고 방탕하게 살던 그는 출세를 동경하며 기사가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포로가 되어 1년간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이 포로 생활이 그에게 인생과 죽음, 삶의 가치에 대해 깨닫게 했던 것 같다.
몇 년 뒤 다시 참전을 위해 길을 나서던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고, 삶의 목표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그가 살았던 13세기의 교회, 특히 교황과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은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이었다. 교황령은 이탈리아에서 제일 큰 국가였고, 전 유럽 귀족들이 교황과 성직을 탐냈다. 이런 시대에 프란체스코는 부와 권력을 멀리하고 오직 수양, 기도, 봉사에 헌신하는 진정한 종교인, 수도사의 자세를 가르쳤다.
그는 정식으로 사제품을 받지도 않았지만, 가톨릭의 성인이 되었으며, 그가 창설한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서 제일 번창하고 존경받는 수도회가 되었다. 심지어 귀족과 부자들도 프란체스코회의 성당에 묻히고 싶어 했다.
아시시에는 교황 명령으로 프란체스코 기념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 아시시는 밝고 따뜻한 도시이다. 이탈리아 소도시 투어를 하는 사람들은 아시시를 최고로 꼽는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이 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도시의 건물 배치 자체가 요새 기능을 겸한다. 요새 기능에 치중할수록 거리는 좁고 어두워진다. 아시시는 건물 간격을 느슨하게 배치한 대신 도시 정상에 로카 마조레라는 다른 도시 성채와 비교해도 특별하고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다. 성과 속, 생활공간과 요새의 절묘한 균형이 밝은 아시시의 비결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도시도 국방에 관해서는 낭만적인 발상을 거부한다.⊙
〈314〉5월에 생각하는 전쟁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버이날의 기원은 어머니날이다. 필자도 아버지지만 참 이게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 생각할수록 어이없다. 전쟁이 끝나면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의 회고록, 수기 등이 간행된다. ‘안네의 일기’처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도 있지만, 가족들의 권고로 혹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남기는 글들도 많다. 오키나와처럼 전쟁의 참화를 겪었던 지역에서 지역사, 집단기억의 일환으로 기록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회고록도 도서관 서고 하나를 채울 만큼 많다고 한다.
참전 군인들의 이야기는 그래도 읽을 만하다. 읽기 힘든 기록이 부녀자와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전쟁은 수많은 비극과 잔혹함을 몰고 오지만, 그 폭풍 앞에 가장 연약한 상태로 노출되는 사람이 아이와 여자, 노약자들이다. 물론 그들이라고 다 약하지 않다. 어떨 때는 아이와 여자들이 더 강하고 끈질기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회고를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스러져간 사람들의 고난은 우리는 채 알지 못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고약한 전쟁을 피할 수는 없을까? 피하기는커녕 전쟁이 인류의 진보와 개혁, 기술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과 자유가 지옥의 겁화 위에 세워졌다는 말이다. 솔직히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정도전의 개혁론과 세종의 많은 업적들은 14세기 고려가 겪었던 엄청난 전란이 없었더라면 결코 시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도 임진왜란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럼 전쟁이 필요악이란 말인가? 아니다. 파멸, 나락, 지옥을 경험하지 않고는 변하고 바꾸지 못하는 우리의 속성이 문제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고난의 기억을 쉽게 잊고, 눈앞의 이익과 편안함에 안주한다. 전쟁을 겪어야만 진보한다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자 영원한 과제이다.⊙
〈315〉신 애치슨 라인

‘애치슨 라인’은 우리에겐 아픈 단어다. 1950년 1월 1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고 선언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원인 중 하나다.
도널드 트럼프의 국가안보보좌관 역으로 지목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부차관보는 최근 애치슨 라인과 비슷한 주장을 했다. 미국은 이제 중국을 견제하기도 힘들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다른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주한 미군이 한반도에서 인질 역할을 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대규모 병력을 증원하는 계획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콜비의 주장은 애치슨 라인과는 결이 다르다. 전쟁에 대처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전략적 주장이다. 중국이 북한을 이용해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켜 미군의 전력을 소모하고, 대만 침공이나 더 적극적인 침략을 감행할 경우, 미국이 술수에 말려들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 주장엔 모순이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중국도 체력을 소모하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의 동북아, 태평양 정책은 한 가지 경우의 수만을 상정해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콜비의 주장은 새가 갑자기 늘었다고 올림픽 스타디움이나 공항을 이전하자는 얘기와 같다.
그러나 ‘대선용 주장’이라고 무시해선 안 된다. 향후 한 세대 정도 미국의 신고립주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미국의 쇠퇴가 아니라 국제 질서, 무력 지도의 재편성이다. 미군이 빠진 자리에 지역별 집단안보 체제가 강화되어야 한다.
유럽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유럽연합(EU)이라는 기본 골격을 갖추고 있다. 반면 동북아엔 확실한 리더십이 없고, 국가 간 반목과 원한이 강하다. 이 시점에서 한국은 특별하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 그러나 반만년 역사 동안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역할이다. 이런 발상의 전환, 결심, 가치관의 이전이 가능할까? 솔직히 말하면 안타까울 뿐이다.⊙
〈316〉선동과 테러

아테네의 민주정은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는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무자비한 폭군이라기보다는 교묘한 독재자였다. 문명을 발전시키는 제1의 동인은 욕구다. 민주주의는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욕구가 공존하면서 터져나오게 하는 데 최대의 장점이자 존재 가치가 있다. 반면에 욕구와 갈등이 조정되지 않고 서로 반목하고 위협하게 되면 강제적인 중재론이 인기를 얻게 된다. 민주주의의 보루였던 아테네도 민주정이 몰락하고 참주정이 대두하는데 그 주역이 페이시스트라토스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자 두 아들이 권력을 계승했다. 형 히피아스는 대중의 욕구를 잘 알았고, 능숙하게 다뤘다. 독재가 탄탄해져 갔다. 여기에 페르시아와의 전쟁의 위협이 커져 가는 것도 참주정의 안정에 한몫했다.
민주정 지지자들이 무력감을 느끼던 기원전 514년, 도시 축제 중에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이란 두 청년이 동생 히파르코스를 암살했다. 암살의 이유는 독재에 대한 응징이란 설도 있고, 개인적인 원한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아테네의 민주정 지지자들은 이 의거를 찬양했고, 두 청년의 동상을 제작해서 광장에 세웠다. 이 동상은 어느 때인가 유실되었다. 현재 로마 시대의 복제품이 나폴리 박물관에 있다.
슬로바키아의 로베르트 피초 총리가 피격을 당했다. 재작년에는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살해되었다. 그뿐인가. 무고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 폭력이 세계에 유행하고 있다. 전쟁, 코로나, 인플레, 포퓰리즘, 과도한 정의감과 과도한 분노가 맹목적인 폭력, 극단적 방법으로 분출되고 있다.
정치인들의 무책임, 선동, 포퓰리즘도 선을 넘고 있다. 온갖 사람이 대립과 분노를 조장하고, 선동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카타르시스인 양 행동하며 부와 명예를 누린다. 테러는 해결책이 아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대중이 깨어나야 나온다.⊙
〈317〉파멸을 향하여

1942년 5월 27일, 항공모함 4척, 경항공모함 2척으로 구성된 일본군 연합함대가 동쪽을 향해 발진했다.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함대였다. 4척의 이 함대에는 세계 최대의 전함인 야마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거함의 임무는 거대한 주포로 미 항공모함을 박살 내는 것이었다. 항모가 전멸하면 미군은 6개월에서 1년은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미국 본토인 하와이가 진주만 습격 같은 공습이 아니라 일본군 육상 병력의 침공 위협을 받게 된다. 미국으로서는 일본과 협상하고, 남태평양에서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장대한 구상과 거대한 함대는 일주일 후 미드웨이에서 침몰할 예정이었다. 나중에 연구자들은 일본군의 계획이 출발 전부터 터무니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략은 급조되었고 준비는 다급했다. 작전계획은 빈 곳이 많았고, 전술과 장비는 균형이 맞지 않았다. 일례로 광활한 태평양에서 해전의 승부는 적을 먼저 탐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항공기의 성능은 전반적으로 일본군이 우세했지만, 장거리 탐지 능력에서는 미군이 훨씬 앞섰다.
디테일하게 파고들어 가 보면 이렇게 엉성한 부분이 꽤 많았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역사상 어떤 전쟁이든 완벽하게 준비되는 경우는 없다. 세부로 들어가 보면 다 훈련은 촉박하고, 장비는 부족하고, 상황은 불투명하다. 성공했다면 이런 준비 부족은 오히려 지휘관의 용기와 결단을 칭송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꽤 맞는 말이다. 전쟁사에서 이런 여백들은 언제나 지휘관의 예지와 신념, 때로는 독단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승자와 패자의 결단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승자의 신념은 객관적이고 정직한 분석기반 위에 서 있다. 반면 일본군 수뇌부는 이 여백을 이 전략의 당위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채웠다. 반대 의견은 증오로 묵살했다. 즉 패자의 신념은 외면의 결과였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패자의 길로 가고 있다.⊙
〈318〉우크라이나 전쟁과 핵위협

우크라이나 전쟁이 극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다. 첫째, 미군의 지원이 늦어지면서 우크라이나군이 전선에서 밀려나고 있다. 러시아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포격과 공습으로 우크라이나군의 병력과 산업, 군수지원시설을 소모시키고, 공세를 진행하고 있다. 둘째, 우크라이나 위기설이 불거지자 서유럽 국가들이 파병과 러시아 영내 타격 허용을 들고나왔다. 미국도 뒤늦게 동조하고 있다. 그러자 러시아는 전술핵 사용론으로 받아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인력, 장비에 손실이 큰 건 사실이다. 이제 우크라이나의 여력이 다했다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 러시아군의 진격도 느리다. 지난 2년의 실수를 교훈 삼아 무리하게 부대를 운용하지 않고, 힘을 모아 짧고 강하게 치고, 휴식하고, 더 집중하고, 더 과감하게 2차 공세를 준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러시아가 공세로 나가면서 푸틴은 바로 중국을 방문했었다. 5월 공세에 상당한 기대와 노력을 투여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중국은 바로 대만해협 봉쇄 훈련이란 지금까지 했던 행동 중에서 가장 강한 행동을 보였다. 북한은 우리를 향해 오물 풍선과 GPS 교란을 시행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행동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이유를 내세우지만, 러시아로서는 득이 된다. 서유럽과 세계에는 핵전쟁과 3차 대전의 공포를 던져주고, 미국엔 과부하의 걱정을 안겨준다. 이 두 가지 걱정이 서방세계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지원을 방어에 국한하고 찔끔찔끔 지원하게 만든 주원인이었다.
다방면에 걸친 푸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방세계는 전에 없이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모든 현상이 러시아군의 전쟁 수행 능력도 심각하게 소진되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6월에 러시아군이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확실한 증거다.⊙
〈319〉정치 과잉의 비극

전쟁사를 보면 나라와 민족, 문화에 따른 특성이 있다. 러시아군은 옛날부터 방어전에 강했다. 공격은 끈질겼지만 소모적이고 세련되지 못했다. 게르만족은 우악스러웠지만 영리했다. 17세기부터 프로이센과 독일군은 우직한 듯하면서 기동과 전술 능력은 선두를 달렸다.
특정 국가에 특별한 특징이 오래 지속되는 건 신기할 뿐이지만 이것이 민족성이라든가, DNA에 내재한 능력은 아니다. 지정학적 구조, 삶의 방식, 문화적 배경과 관습에 의해 지속되는 것뿐이다.
그런 이유로 정반대의 사례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1∼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신화를 써 갔지만 승리를 이끈 정치인들은 의외로 전후에 역풍을 맞았다. 사실 이스라엘 정치는 구조적으로 늘 불안하고 취약했다. 단지 전쟁과 외풍이 후유증을 최소화했던 것뿐이다. 내부에서 극렬하게 대립하던 정파들도 막상 정권을 잡고, 전쟁이나 국익이 걸리면 과거의 모습을 지우고, 어떤 범주 안에서 행동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정형성, 사명감이 사라졌다. 네타냐후 정권은 초강경해 보이지만, 그 정권도 알고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집단들의 연립정권이다. 합리적 설득과 단합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국들은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고 복잡하지만 다들 정치 과잉이고, 이기적인 정치가 되어 있다. 국가적 사명감, 국가적 방향성 자체가 사라져 가고 있다. 최근 유엔에서 144개국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승인했다. 커다란 진전이라고 할 수도 있고 갈 길이 멀다고 할 수도 있다. 팔레스타인의 정치는 이미 2쪽, 3쪽이 나 있고, 영토도 분리돼 있다. 국가적 정체성이 강해지면 2개의 나라로 나뉠 수도 있다.
이게 중동만의 문제일까? 세계가 그렇다. 갈등에 취약한 지역, 지표가 얇은 지역에서 먼저 터져 나오고 있을 뿐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중동전쟁의 진짜 교훈은 이것이다. 정치가 염치와 상도를 넘은 지역의 비극.⊙
2024.06.18
〈320〉38선, 북한군의 움직임

1950년 6월 17일부터 38선의 이북 지역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북한은 38선에 경비대와 보안대 병력만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 주둔하고 있던 8개 사단이 속속 투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8개 사단의 이동 배치는 21일까지 마무리되었다. 작전 명령과 침공 개시 시간은 이미 장교들에게 하달되어 있었다.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비밀은 유지할 수 없었다. 몇 명의 북한군이 부대가 38선에 배치된 틈을 타서 탈영해서 침공 정보를 알려주었다. 24일에 육군 정보부는 북한의 전면 남침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동시에 24일에 내린 비상대기 해지와 전군 외출, 외박령 취소를 건의했다.
채 총장은 이를 거부하고 특수팀을 파견해 적정을 고찰하고 25일 오전 8시까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남침 경고는 이전부터 발령되고 있었다. 3월 위기설, 5월 위기설. 덕분에 전군에 비상대기가 계속 발령되어 병사들이 한계 상황이었다. 채 총장은 이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채 총장의 고민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3월, 5월에 북한군 주력은 38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북한군의 이동 같은 침공 징후를 탐지할 체계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당시에는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당시 한국군은 전면전을 대비한 방어 시스템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미국은 지원을 거부했고, 정부는 돈이 없고, 국회는 정치놀음이 우선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소문만 듣고, 병사들만 괴롭혔다. 외출, 외박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었는데, 병사들만 전시 상태처럼 몰아붙였다.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대응이었다.
정작 육군본부의 인사, 기타 정책은 전쟁 준비와는 반대로 움직였다. 4월에 전군 사단장을 한꺼번에 교체했다. 고민과 행동에 일관성이 없고 항상 정치 논리가 작용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