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2024.01.20 연암 박지원부터 김옥균까지 - 06.29 1933년 개업한 ‘제비’ 다방, 그 주인은 시인 이상이었다 (끝)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2024
01.20 연암 박지원부터 김옥균까지…백탑에 서린 개혁의 꿈
‘하얀 돌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서울 종로 탑골공원 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일제 강점기 당시 모습. 인근에 사는 선각자들이 모여 ‘백탑파’를 형성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백탑(白塔)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 한복판에 우뚝 솟아 흰 자태를 뽐냈다. 백탑이 있어 지금의 종로 탑골공원은 그 이름을 얻었다. 1897년 대한제국 최초 근대 공원으로 동양의 불탑이란 의미의 파고다공원으로 명명된다.
파고다는 곧 탑파(塔婆)의 영역인데, 할미 탑이다. 마고할미의 기도가 있는 고려 때는 흥복사가 있었고, 조선에서는 세조가 건립한 원각사가 있던 자리였다. 원각사지 십층 석탑은 하얀 돌탑이다. 하늘에 대한 기도처럼, 탑을 도는 탑돌이는 돌고 도는 회향(回向)이다. 회향은 해현경장(解絃更張)이다. 인생은 늘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매는 그런 해현경장의 새로운 다짐과 같다.
백탑을 돈다. 돌고 도는 회향의 역사. 우리 모두 오랜 세월 백마 타고 온다는 북극성의 나그네를 기다리며, 눈 내리는 백탑을 돈다. 회향을 하면 백탑파들이 돌아온다. 백탑이 꿈꾸는 개화의 꽃을 들고.
박규수가 일곱 살 무렵 외가에 놀러 갔을 때다. 그는 땅바닥에 불탑을 그리며 놀았다. 그런 모습을 본 외종조이자 고명한 성리학자인 류화는 시 한 수를 지어 준다. “네가 석탑을 그릴 때 한 층 한 층 높아지듯 성인군자가 되는 일도 평범한 데서 시작하니 네게 가르치는 독서법은 이것이다”는 내용이다. 박규수가 그린 석탑을 따라 할아버지인 연암 박지원이 돌아온다.
시로써 조선의 개혁 논하던 백탑파
박지원은 탑골에 살았다. 그가 사는 탑골로 사람들이 모였다. 연암은 절세기문(絶世奇文)이었다. 단편소설 『호질(虎叱)』로 통렬하게 양반사회를 풍자한 호방한 천재였다. 그가 살던 원각사지 10층 석탑 인근에 사람들이 모이며 ‘백탑파’가 형성된다. 백탑파는 백탑시사(白塔詩社)를 열며, 조선의 개혁을 위해 『호질』 같은 풍류회를 연다. 시로써 천하를 논하고 통음과 풍류로 천하의 올바른 길을 열고자 했다. 박지원을 비롯해 당대 책벌레 이덕무, 대문호이자 대문장가 박제가, 유득공 그리고 홍대용과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무사이자 협객 백동수가 있었다.
담헌 홍대용과 박지원의 풍류는 지금도 세간에 전한다. 하얀 눈이 내린 밤 홍대용이 박지원을 찾아온다. 박지원은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는 양금(洋琴)을 꺼내 홍대용의 거문고와 어울려 하얀 밤을 지새우며 고아(古雅)한 풍류를 즐겼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한 직후인 1885년 촬영된 사진. [중앙포토]
망원경으로 천체를 본 천재 홍대용이 죽자 연암 박지원은 집에 있는 악기를 모두 치우고 절음(絶音)한다. 지음(知音)을 잃은 통한이다. 홍대용은 음악의 미(美)는 맛(味)과 같다고 『담헌집』에서 말한다. 백탑파는 음악 또한 고리타분한 성리학의 예악론을 벗어나 산조(散調)와 같은 맛과 멋이 있는 개화 음악을 열었다. 그렇듯 백탑파는 당시 관념에만 치우치던 주자 학설을 거부하고 자주적 학문의 자세를 견지하며 사람을 보듬는 이용후생의 학문을 펼쳤다. 그리고 백탑파의 꿈은 후손과 제자를 통해 개화사상을 열었다.
백의(白衣). 백탑을 돌면 ‘백의정승’ 유대치가 온다. 개화의 선각(先覺)으로 박규수와 오경석, 그리고 유대치를 꼽는다. 이들은 추사 김정희와 그의 스승 박지원의 문우 박제가를 관통한다.
개화사상의 싹은 박규수의 북촌 사랑방에서 움텄다. 박규수가 두 번째로 중국에 갈 때 오경석이 역관으로 동행한다. 역관 오경석은 서양의 신식 무기에 맥없이 무너지는 청나라의 모습을 통해 조선의 운명 또한 시간문제라 판단했다. 이에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해국도지(海國圖志)』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다수의 서적을 이웃에 사는 친구 유대치와 나누어 보며 개화의 꿈을 키웠다.
1876년 박규수가 타계하고, 오경석마저 1879년 병사한다. 유대치는 그들과 함께 북촌의 양반 자제들을 개화의 동력으로 키웠다. 유대치는 불교를 깊이 믿어 높고 청백한 품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학문으로는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했고, 변설은 유창했고, 신체는 장대하고, 홍안백발에 항상 생기 있는 인물이었다고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은 말한다.
탑골 위 북촌에는 주로 노론이, 탑골 아래 남촌에는 소론, 남인, 북인 등이 모여 살았다. 그리고 중인이나 양반 자제들도 남촌에 모여 살았다고 매천야록에 써 있다. 백탑을 중심으로 반상의 신분 경계 없이 남촌과 북촌의 인재들이 새로 백탑파의 개화의 꿈으로 모였다. 백탑파는 개화의 선각 유대치와 박규수, 오경석 그리고 북촌 5걸로 다시 핀다.
무역으로 개화 자금 마련한 유대치

▲전남 장성군 북이면 송산리에서 발견된 유대치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명. ‘백의유대치월헌홍규지묘(白衣劉大致月軒洪奎之墓)’라고 적혀 있다. [사진 유영심]
최남선은 『고사통(古事通)』 ‘개화당의 연원’에서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과 귀족이 아닌 이로 백춘배, 정병하 등은 다 대치 문하의 준모(俊髦)다. 일본을 이용해 청을 몰아내고 청년 중심의 신국(新國)을 건설하는 것이 이상(理想)의 윤곽이니 박영효, 김옥균 등이 일본교섭의 선두에 나선 것도 실상 대치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개화당으로 지목하는 이는 대개 대치의 문인들이었다”고 적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 “유대치 거사는 선(禪)을 이야기하기 좋아했다.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그를 따르고 도를 물으니 일시에 선풍이 서울을 휩쓸었다… 동쪽 일본을 시찰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당시의 세계정세를 보게 됐고 그리하여 혁신을 결의하게 됐다. 그런데 그 본말을 따져보면 실로 유거사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고 썼다.
개화 세상을 여는 문은 변법자강의 길이다. 유대치는 불리(佛理)를 세상에 응용하여 개화사상을 꽃피웠다. 백탑의 꿈이었다. 유대치는 개화파 봉원사 승려 이동인을 통해 일본과 직접 무역을 하며 막대한 이윤을 남겨 개화 자금을 마련했다. 개화파에는 중·궁녀·내시·군인·상인들과 나아가 천민들도 적지 않았다. 개화파는 비밀 결사형식의 조직인 〈충의계〉를 조직한다. 고균은 그들 젊은 혁명가들과 갑신년 개화의 봉화를 올린다.
갑신정변이 내건 기치는 ‘반청(反淸) 자주’와 ‘부패 민씨 정권 타도’였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9시 우정국 개국 파티에서 시작된 정변은 6일 오후 7시 30분 북묘 앞에서 끝났다.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으로, 고종 부부를 경우궁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창덕궁으로 들어온 일행은 5일 밤 무기고를 열었다. 소총을 일일이 꺼내 살펴보니 총과 칼이란 죄다 녹슬어서 처음부터 탄환을 장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청나라 병사 1500명이 궁궐로 진입해 사격을 개시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일본군 철수를 선언하고 일본군이 퇴각했다. 부패 정권이 쌓아놓은 부패의 덫, 그만큼 민씨 척족 정권의 부패는 깊고 넓었다. 갑신정변은 실패했다. 김옥균은 결국 1894년 음력 2월 22일(양력 3월 28일) 고종의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하이에서 죽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3월 9일 서울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됐다.
유대치 또한 갑신정변 후 행방을 감춘다. 전남 장성 송산마을에 있는 한 묘 옆에는 ‘백의 유대치 월헌 홍규(白衣 劉大致 月軒 洪奎)’라는 비석이 서 있다. 마을 원로들은 “우리 할아버지 어릴 때도 있었던 ‘삼일천하 할아버지’의 묘”라고 기억했다.
유길준은 개화를 인간사회가 ‘지선극미(至善極美)’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사가 미(未)개화, 반(半)개화, 개화의 단계를 거쳐 변법 진보한다는 문명진보사관을 제시한다. 그 개화의 방법으로 개혁을 주장하였지만 그는 점진적이고 자발적인 변화와 개혁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했다.
1894년 갑오년 봄 동학이 일어선다. 백의(白衣)의 동학군은 일어서면 백산(白山)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었다. 그해 7월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조선은 다시 개화의 줄로 고쳐 맨다. 그러나 갑신년 개화파들이 청나라 군대에 난사 당하고 죽산의 동학은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몰살당한다.
백탑의 꿈은 늘 회향한다. 개화의 꿈은 경장이다. 해현경장하듯 세상을 경장한다.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4·19 혁명으로 백탑에 들불이 인다. 개혁과 혁명의 변법자강을 위한 경장같이, 우리는 매일 구두끈을 고쳐 매는 아침을 맞는다. 파고다 탑골공원에 개화의 봄이 피었는지 두고 볼 일이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김태균 음악평론가
02.03 서울 다녀온 증거였던 우미관, 첫 한국영화 상영한 단성사
K무비의 성지

▲1907년 설립된 단성사.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재개관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국 영화가 탄생하고 발전한 거점은 종로였다. 2019년 (사)한국영화인총연합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영화진흥위원회 등이 후원하는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 기념 ‘제57회 영화의 날’이 성황리에 열렸다. 한국 ‘영화의 날’(10월 27일. 1962년 제정)과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은 1919년 10월 27일 종로 묘동(종로 3가) 단성사에서 상연한 활동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기준으로 한다.
“조선의 활동 연쇄극이 없어서 항상 유감히 여기던 바 신파 활동사진을 경성의 제일 좋은 명승지에서 박아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5000원의 거액을 내어 본 월 상순부터 경성 내 좋은 곳에서 촬영하고 오는 27일부터 본 단성사에서 봉절 개관”(매일신보 1919.10.26.)
당시의 광고문이다.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는 단성사 사주 박승필(1875~1932)이 출자하고 신파극단 신극좌(新劇座)를 이끌던 김도산(1891~1921)이 각본, 연출해 종로 단성사에서 개봉한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연쇄극(連鎖劇)이다. 연쇄극은 키노 드라마(kino drama), 즉 연극과 영화를 함께 보여주는 양식이다. 연극 무대 중에 스크린을 설치해 야외 장면을 필름으로 촬영해 보여주는 것이다. ‘의리적 구토’는 서울의 명승지(청량리·노량진·남대문·장충단·한강)와 기차·전차·자동차·철교 등을 배경으로 한 활극을 촬영한 뒤 연극 도중에 스크린으로 띄워 관객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의리적 구토’ 주인공 송산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핍박을 받으며 자란다. 재산을 탐내는 계모의 계략으로 송산은 집을 나와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계모는 송산을 제거하려고 나서며 둘의 갈등이 깊어지고 마침내 송산은 계모 일당을 물리치고 가문을 지킨다는 줄거리다.
북촌은 조선인, 남촌은 일본인 중심 극장

▲임권택 감독이 2019년 10월 ‘단성사 영화역사관 개관식’에서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1895년 프랑스 파리에서 선보인 활동사진 시네마토그라프가 상품화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896년 중국 상하이에, 1897년 일본 고베에 전해졌다. 조선에도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거류민 극장과 미국인을 통해 들어왔다.
1901년 황성신문에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않는다’는 기사가 나온다. 광고로 직접 확인되는 것은 1903년 6월 23일 황성신문에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밤 8시부터 10시까지 동화 10전을 받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내용이다. 매일 밤 인산인해를 이뤄 수익금이 백여 원에 이르렀다. 상영한 활동사진은 극적인 구성이 없는, 서양의 도시 풍경과 빼어난 경치를 담은 파노라마였다. 그럼에도 이채롭고 모던한 풍경과 신기하게 ‘움직이는 사진(motion
picture)’ 그 자체, ‘볼거리로서의 영화’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인 이주가 많아지며 일본인 상권과 주거지 및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청계천 남쪽인 오늘의 충무로·명동·을지로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1907년에 이미 가부키 공연을 위한 극장, 경성가부키좌(歌舞伎座)가 지금 신세계백화점 근처에 들어섰다.
이어 남촌에 여러 일본인 극장이 생겼다. 남촌의 일본인 극장에서는 일본 전통 예능, 가부키, 신파극 등을 공연하는 한편,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일본인 거리였던 남촌에는 경성고등연예관(1910년), 대정관(1912년), 황금관(1913년), 유락관(1915년), 경룡관(1921년), 중앙관(1922년) 등이 있었다. 유락관(有樂館)은 조선의 제국극장을 표방한 활동사진관으로 1919년 기라쿠칸(喜樂館)으로 이름을 바꾸어 해방 직전까지 대표적인 일본인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일본군 주둔지였던 용산에도 용산좌(龍山座), 사쿠라자(櫻座) 등이 설립 운영되었다.
조선인들의 거리였던 북촌의 경우, 극장은 종로에 밀집했다. 단성사(1907년 설립,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재개관), 우미관(1912년), 조선극장(1922년)이 유명했다. 탑골공원 좌측에는 신파극 공연으로 유명했던 연흥사(1907~1915), 각종 공연과 집회의 장소였던 장안사(1908~1915) 등이 있었다.
을지로 2가 동양척식주식회사 근처에 최초의 활동사진 전용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이 일본인에 의해 1910년에 설립됐다. 언어와 문화, 전통 장르 차이로 조선인 극장과 일본인 극장이 구분되던 당시에 경성고등연예관은 특이하게도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을 동시에 수용하였다. 일본인 변사와 조선인 변사가 번갈아 가며 영화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필름을 영사했다.
‘장화홍련전’ 한국인 첫 극영화 촬영 성공

▲1912년 관철동에 설립된 우미관. 1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영화관이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911년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소요가 일어났는데, 일본인 유도선수와 서양인 권투선수가 시합을 하는 영화를 보며 조선인 관객은 서양인 권투선수를 응원하고, 일본인 관객은 일본인 유도선수를 응원하다가 극장 안에서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이 서로 물건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으며 싸우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같은 언어와 풍속, 역사를 공유하는 종족 정체성을 확인하는 체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극장은 정치·사회·문화·종족적 취향과 의식을 형성하는 공간이기도 했던 셈이다.
1912년 이후 조선인 관객을 위한 활동사진관 우미관이 종로에 들어서고, 일본인 관객을 위한 활동사진관 다이쇼칸(大正館, 1912~1935)과 고가네칸(黃金館, 1913~해방 후 국도극장)이 남촌 을지로 4가에 세워졌다.
우미관(優美舘)은 1912년 종로 관철동에 설립된 영화관으로서 1000명 이상 수용 가능했다. 우미관은 1916년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특약을 맺고 유니버설 영화를 독점 상영해 ‘명금’, ‘카추샤’, ‘몬테크리스토 백작’, ‘파우스트’ 등을 상연했다. “우미관 구경 안 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할 정도로 우미관은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우미관 주변 관철동엔 음식점과 선술집 등이 밀집해 있어서 많은 인파가 붐볐다. 주먹으로 유명한 김두한은 우미관을 중심으로 활동한 바 있다. ‘말하는 활동사진, 관철동 우미관에 처음 상영’(동아일보 1926.2.28.)했다는 건 영화사적으로 주목할 사실이다. 한국에서 무성영화가 아닌 발성영화(토키, talkie)를 처음 상영한 곳이 우미관이었다.
조선극장은 1922년 10월 종로 인사동 입구에 영화상설관으로 개관했다. 1923년 조선극장 주인 일본인 하야가와(早川孤丹)가 ‘춘향전’을 만들면서 조선에서 영화 제작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단성사 사주 박승필은 단성사에 촬영부를 설치하여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한국 극영화 촬영·현상·편집 성공이었다. 조선극장에서는 영화 상영 외에도 신파극, 신극, 가무, 기예가 공연되었다. 특히 연극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를 갖추어서 토월회의 정기공연, 극예술연구회 공연이 조선극장에서 올려졌다. 1937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단성사(團成社)는 한국 영화의 태생지로 불리는 곳이다. 단성사는 서울의 실업가 지명근, 주수영 등이 공동 출자해서 1907년 종로 묘동(종로 3가)에 설립한 극장으로 각종 연희를 공연했다. 단성사의 경영권과 소유권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를 오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단성사는 1913~14년 서양식 외관과 일본극장식 실내구조를 갖춘 1000석 규모로 신축했다. 1918년 광무대(光武臺) 경영자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하여 신축하고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상설 영화관으로 재탄생했다.
박승필은 광무대를 통해 전통 연희를 공연하는 동시에 영화를 상연하는 조선 엔터테인먼트 중심 인물이 되었다. 박승필의 출자로 김도산 등 한국인들에 의해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만들어져서 단성사에서 1919년 10월 27일 개봉됨으로써 훗날 ‘한국영화 제1호’로 정해지고, 10월 27일이 ‘영화의 날’로 제정된 것이다.
정우택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02.17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은 나운규 영화 ‘아리랑’ 주제가
아리랑의 재탄생
한민족이 공통으로 부르는 아리랑은 모던의 중심지, 종로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근대민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여하는 국제행사에서 국가(國歌) 대신 활용하는 아리랑,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응원가로 부르는 아리랑은 원래 본조아리랑(또는 서울아리랑)이라고 한다.
아리랑은 종류가 많다.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경기자진아리랑, 경기긴아리랑, 본조아리랑, 광복군아리랑 등 퍽 많다. 민요학계에서는 민요나 소리를 ‘향토민요’ ‘통속민요’ ‘신민요’ ‘대중가요’로 나눈다.

▲1954년 이강천 감독판으로 평화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아리랑’ 포스터.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향토민요는 특정 지역에서 노동·생활과 함께 지역민들에 의해 불리며 전승되는 전형적인 민요로서 토속민요라고도 한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기 어렵다. 정선·평창·영월·강릉 등지에서 이어온 정선아라리가 바로 향토민요다.
전문소리꾼이 그런 향토민요를 채택해 다듬어 편곡해 레퍼토리로 만든 민요를 통속민요라고 한다. 소리가 유행할 수 있는 환경, 유흥의 장, 놀이판, 시정에서 상품성과 소리꾼 및 소비자 등을 배경으로 생겨났다. 19세기 중후반 잡가의 유행과 함께 생성된 소위 ‘경기 민요’, ‘서도 민요’, ‘남도 민요’의 육자배기, 수심가, 창부타령 등이다. 잡가집의 아리랑이 통속민요인데, 경기긴아리랑과 경기자진아리랑 등이 그것이다.
정선·평창·영월 지역 향토민요 정선아라리가 경복궁 중수 공사(1865~1868) 때 서울로 퍼져 전문 가객들에 의해 편곡되고 레퍼토리로 만들어져 유행한 것이 경기긴/자진아리랑이다. 1395년(태조 4년) 창건된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됐지만 재건하지 못하다가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대원군이 중수 공사에 착수했다. 경복궁 중수 공사에는 조선 8도의 백성들뿐 아니라 강원도 일대의 목재를 한강으로 운반하면서 영동지역의 뗏목꾼들도 동원했다. 경복궁 중수 공사 부역꾼들을 위해 사당패, 농악대, 소리꾼들을 모아 위문잔치를 열었고 노래자랑도 개최했다고 한다. 이때 강원도 부역꾼이 정선아라리를 불렀고 이에 감명 받은 전문 가객이 채택해 통속민요 경기긴/자진아리랑으로 레퍼토리화했다. 이후 서울 경기 인근 소리판, 놀이판에서 경기긴/자진아리랑이 널리 유행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주제가, 본조아리랑
1.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2.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사린 말도 많다
3.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4.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 가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감독·시나리오·주연을 맡았던 나운규.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위 아리랑 노래는 나운규(감독·시나리오·주연)의 영화 ‘아리랑’(1926) 주제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통속민요 경기자진아리랑을 바탕으로 단성사(團成社) 악대가 새롭게 편곡해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본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이다. 나운규는 함경도 회령 사람으로 어린 시절 남쪽에서 온 철도공사판 노동자들이 부르는 아리랑을 듣고 감명 받아 가슴에 간직해 왔는데, 막상 서울에 와서 이 아리랑을 듣고자 했으나 찾을 수 없어서 예전에 들었던 멜로디를 생각해 내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해서 만들었다고 술회했다.(「나운규 대담」, 삼천리, 1937.1)
당시 ‘대학생이 사현금(四絃琴, 바이올린)으로 급우인 광인(狂人)이 부르는 아리랑 노래를 맞추는 것도 좀 서툴렀거니와 (중략) 농촌과 그곳에 들어온 도회 풍조와 조화가 못 된’(매일신보, 1926.10.10.) 것이라며 아리랑이 비판받기도 했다. 양악에 의해 편곡·반주된 본조아리랑이 전통적이고 향토적인 서정을 관철하지 못하고 도회적이고 서양적인 풍조와 어설프게 절충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주제가 본조아리랑이 근대적 악곡에 맞추어 편곡됨으로써 기존의 지역분할적 음악양식인 선법토리(전라도의 육자배기토리, 평안도 수심가토리, 태백산맥 주변의 메나리토리, 서울 경기의 경토리)에 구애받지 않고 계급이나 신분, 성별, 세대의 구별 없이 전면적으로 전국에서 불리게 된 것이다. 본조아리랑은 영화라는 근대적 미디어와 테크놀로지, 근대적 시스템 속에서 산출되고 유통되다 보니 일반 유행가와의 경쟁 속에서 인기를 구가하며 퍼져나갔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확산과 재생산
영화 아리랑의 히로인은 주제가 본조아리랑이었다.
현대 비극 웅대한 규모! 대담한 촬영술!
조선영화사상의 신기록! 당당 봉절!
촬영 3개월간! 제작 비용 일만 오천 원 돌파
눈물의 아리랑, 웃음의 아리랑, 막걸리 아리랑, 북구(北丘)의 아리랑
춤추며 아리랑 보내며 아리랑 떠나며 아리랑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
보라! 이 눈물의 하소연! 일대 농촌 비시(悲詩)!
누구나 보아둘 이 훌륭한 사진! 오너라! 보아라
▲1920년대 ‘아리랑’을 상영한 단성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단성사에서 영화 ‘아리랑’ 광고(조선일보, 1926.10.1.)를 만들어 시내에 배포하다가 선전지를 압수당했다.
작 1일부터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상영한 ‘아리랑’의 활동사진 광고 팸플릿 중에 ‘아리랑 노래’ 중에 공안을 방해할 가사가 있음으로 경찰당국에서는 9월 30일에 선전지 1만 매를 압수하였다더라.(매일신보, 1926.10.3.)
‘아리랑-선전지 압수, 내용이 불온’이라는 위 기사에 의하면, 노래 아리랑 가사가 불온하여 선전지 1만 매를 압수당했다는 것이다. 위 기사가 실린 매일신보 바로 하단에 영화 아리랑 광고가 실렸는데, 거기엔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라는 가사가 삭제돼 있다. 영화와 본조아리랑은 1920년대 당시 삶의 터전을 잃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이산과 유랑, 이주가 대대적으로 발생하는 민중 현실을 ‘아리랑 고개’에 투사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과의 이별 고개, 아리랑 고개는 민족의 가슴 속에 사무친 ‘피눈물의 고개’로 각인됐다. 동시에 아리랑 고개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지금 여기’의 고난을 이겨내는 의지를 충전하며 아리랑을 불렀다. 이러한 민족의 보편적 정서와 주제를 영화 아리랑과 주제가 본조아리랑이 담아냈던 것이다. 아리랑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영화 아리랑의 여주인공이었던 신일선(영희 역)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아리랑이 개봉되자 서울 장안의 화제는 모두 이 영화에 집중했고 관객은 문자 그대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영화관 앞에 기마 순사가 동원되기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관객이 밀린 단성사는 문짝이 부서지기까지 했다. 극장 안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게 초만원이었고 어린애를 데려온 관객은 꼼짝할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오줌을 뉘어야 하는 등 큰 혼잡을 이뤘다. 아리랑은 그 후에도 계속 인기를 끌어 전국 방방곡곡 안 간 곳이 없고 심지어 극장이 없는 시골에서는 가설극장까지 지어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던 것이다.(신일선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 1970.11.24.)
극장에서 아리랑을 보고 부르고 함께 울고 느끼며 서로 동질감(민족정체성)을 확인했다. 아리랑은 바로 이때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단성사는 지방 순업대(巡業隊)를 조직하여 전국 12개 도시에서 순회 상영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나아가 만주·연해주·중국·미주·중앙아시아까지 한민족이 가는 곳엔 아리랑이 함께 하며 정체성을 확인했다. 아리랑은 민요를 넘어 대중가요로, 노래를 넘어 근대적 미디어(음반·영화·연극·무용 등)와 결합하며 재창조됐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표상을 넘어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됐다.
정우택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03.02 '잇뽕' 김두한, 18세에 우미관 무대로 일본인 주먹 평정
장군의 아들 ①

▲1966년 한독당 내란음모 혐의로 수감됐던 김두한 의원이 출감하면서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사람의 역사는 늘 그 궤도를 따라 펼쳐져 왔는지 모른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그 내용 말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그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건 자만이 주인이 된다”고 말한다. 시인 김남주는 한 술 더 뜬다. ‘종과 주인’이란 시에서 그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라며 역시 변증의 논리를 꺼내든다. 인간의 자유를 향한 프랑스대혁명의 서슬 퍼렇던 낫은 끝내 단두대의 피비린내로 얼룩진다. 권력이라는 야만의 총은 명예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인과 노예의 삶을 강제한다. 500년을 이어 온 봉건 조선의 학정은 수많은 질서에 그저 말없이 따르는 순응자들을 만들었다.
우리를 제국의 식민 나락으로 몰아넣은 유교 원리주의 조선왕조의 매국은 급기야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며 떠나는 결과를 빚었다. 동북아는 그로써 세계열강의 다툼 현장으로 변했다. 지금도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의 대립은 여전하다. 당시 조선인들은 동학 노래 ‘새야 새야’에 맞춰 “소련 놈에 속지 말고 미국 놈을 믿지 마라. 일본 놈이 일어서니 조선사람 조심해라”라고 노래했다.
3·6대 국회의원, 국회 오물투척 주역
▲권택 감독, 박상민 주연 〈장군의 아들〉 전단지.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이렇게 친(親)과 반(反), 그리고 사대(事大)와 자주(自主), 애국과 매국의 이분법적 갈등에서 정반합(正反合)의 변법자강(變法自疆)이 송두리째 뽑혔다. 그런 역사의 과정 속에서 좌우익을 빙자한 기회주의가 발호하며 ‘민족’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또 다른 주인과 노예의 역사가 펼쳐진다.
작두날 위에 선 무당의 칼날 같은 살벌한 시절을 산 김두한(金斗漢)이라는 사내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그가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며, 대한청년당의 감찰부장, 제 3대와 6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회 오물투척사건을 일으킨 정치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두한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의송(義松)·가송(嘉松). 별칭은 ‘잇뽕(いっぽん·一本), 즉 ‘한 방’이다. 주먹 한 방으로 세상을 평정한 조선의 사나이라는 의미 맥락에서다. 그의 출생지는 경성(당시 서울 호칭)부 종로 삼청동이다. 북두칠성의 두(斗), 그리고 놈이나 사나이를 지칭하는 한(漢)을 쓰니 그는 곧 ‘북두칠성의 사내’다. 그의 생부인 김좌진 장군이 지어준 이름이다.
김두한을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의 건달, 주먹 황제, 협객, 정치인으로 평한다. 옛 속담에 ‘돈 있으면 한량, 돈 없으면 건달’이라 했지만, 그의 삶은 인생 무대에 온몸으로 서는 광대(廣大)이자 풍류객이랄 수도 있었다. 칼과 낫, 총을 들던 시대 그는 주먹으로 전국을 평정하며 산 사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와, 미(美) 군정 시기에는 군정과 맞섰고, 좌우익 대립 공간에서는 좌우익을 넘는 민족 반공투사로, 그리고 독재에 맞서 민주투사로 살았다. 주인과 종이 폭력적으로 강제되는 역사의 한 복판, 웃통 벗고 대낮에 절대 권력에 맞서 혈기 넘치는 북두칠성의 사내로 거침없는 투쟁의 역사를 살다 갔다. 비록 거대한 군부 권력의 고문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우리는 의협(義俠)이라 불러도 좋을 이 김두한이라는 사내의 역사를 통해 오늘 진정한 보수의 의미를 묻는다.
▲김효천 감독, 이대근 주연 〈협객 김두한〉 포스터.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김두한의 식민지 시대-해방기의 활약을 다룬 전기 영화 〈실록 김두한〉, 〈협객 김두한〉, 〈김두한(속 3부)〉, 〈김두한(속 4부)〉를 분석의 대상으로 영화 속 민족의 협객으로서 김두한이 강조하는 ‘의리’는 식민지 시대 지식인 엘리트의 훼절에 대조되는 ‘조국에 대한 의리’ 즉 항일의 의미를 지녔다. 해방기에 의리는 좌익, 기회주의자, 협잡꾼들의 논리를 이기는 ‘질서, 법’ 나아가 ‘반공’의 가치를 의미했다. 김두한은 의리로 식민지로부터 해방기를 가로지르는 근대사회의 정통성을 구현해 냈다. 영화 김두한 시리즈는 반외세에 대한 정서를 분명히 한 국수주의에 가까운 이념을 선보였다. 논리보다 주먹, 말보다 행동을 앞세운 김두한 시리즈는 피의 수사학, 반 지성주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반 지성주의와 유신의 반 영웅으로 대중들의 보수적 정서를 자극하는 유신시대의 반 신화로서 존재했다. 〈송효정, 우리어문연구 62권〉
김두한은 주인과 종의 권력투쟁이라는 칼날 위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로운 해방의 삶을 산 건달(乾達)이다. 건은 乾(하늘)이요 달은 達(통달)이다. 건달은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니 원래 말 간다르바(Gandharva)가 그렇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적 존재인 간다르바는 음악을 사랑하며 향기를 먹고 사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불법(佛法)의 도를 향해 지나는 길목에 건달이 있다. 사천왕(四天王)을 통해 건달을 본다. 용(龍)과 여의주(如意珠), 비파(琵琶)를 들고 칼을 품은 채 온갖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악을 짓밟고 있으니 악의 무리를 제압하는 건달은 곧 의인이다.
종로는 천하의 중심이요 사천왕들이 모인 현실거리이다. 사통팔달(四通八達)의 한양 거리 곳곳에 조선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대문을 세우고, 그 복판에 보신각(普信閣)을 만들었다. 그 믿음의 신(信)으로 종을 만들어 오행(五行)이 서로 맞물리는 수도 한성을 만들었다. 돌고 도는 세상 속, 복판의 로터리였던 종로는 서울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이고, 사람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조선 궁궐을 관통하는 길을 만들고, 청계천 이남 남촌에 황금정(黃金町·을지로), 본정(本町·충무로), 명치정(明治町·명동)에 5만 명 규모 일본인 거주 신도심을 건설했다.
작(昨 어제) 오후 12시경에 부내 종로서에서는 부내 우미관 앞과 탑골 공원 앞에서 폭력단의 혐의자 이만근 이하 20명을 일제히 검속하였다. 금 31일에도 그들을 엄중히 취조중인데 그들은 우미관과 탑골공원 등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가지의 폭력행위가 있었다는 혐의다(동아일보 1934. 06. 01)
일본 주먹 하야시, 본명은 선우영빈
▲김두한이 활약했던 극장 우미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은 1910년에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1910년 일본인에 의해 ‘고등연예관’으로, 1915년 우미관으로 개칭했다. 대사를 소리로 전할 수 없어 변사(辯士)가 해설을 맡는 무성(無聲)영화 방식이었다. 1928년에 와서야 최초로 유성(有聲)영화를 상영한 후 우미관은 1945년 해방 때까지 단성사, 조선극장과 함께 도심의 주요 개봉 극장이었다. 조선 제일의 주먹이었던 김두한은 이 우미관을 거점으로 종로 지역에서 활약했다.
김두한은 약관 18세에 종로 우미관의 주먹 건달 왕으로 등극한다. 김두한의 싸움 실력은 아주 두드러졌다. 일반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빨랐다. 게다가 빼어나게 정확했다. 특히, 여러 명과 싸울 때 옆 사람의 어깨를 짚고 발차기로 단숨에 상대를 제압하면서 ‘한 방’이라는 ‘잇뽕’으로 이름을 날렸다.
종로의 우미관 극장 주인은 ‘와카사키’란 일본인이었다. 극장의 질서를 잡는 ‘기도’겸 운영의 뒤를 봐주던 복싱 선수 출신 김기환에 이어 일본인 서커스단에서 칼로 묘기를 부리던 미또리오가 온다. 미또리오는 성격이 포악해 여성들에게도 폭력을 휘두르면서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김두한은 이때 결투 신청을 하여 한 주먹에 미또리오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종로를 제패한 구마적과 신마적을 차례로 제압하며 비로소 김두한은 우미관을 중심으로 전국구에 버금가는 조직을 이룬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본정3정목(현 충무로 3가)에는 하야시라는 일본 주먹들의 두목이 있었다. 하야시는 일찍이 창씨개명한 조선인으로 어려서부터 일본에 넘어가 도호야마 미쓰루(頭山 滿)의 수하가 된다. 도호야마는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야쿠자들을 양성하며 대륙침략의 야심을 가졌고, 손문과 김옥균에게 정치자금을 주기도 했다. 하야시는 이런 일본 거물의 힘을 등에 업고 조선의 종로·명동·충무로를 접수했다. 유흥가를 중심으로 돈을 거둬 ‘조직’을 세웠다.
하야시는 선우영빈이 본명이었다. 두 조선인의 만남은 이른바 김두한의 북촌 패와 선우영빈의 남촌 패 사이에서 벌어지는 숙명적 대결이었지만 수표교 싸움 이후 둘은 형님과 아우를 이룬다.〈계속〉
김태균 문화평론가
03.23 김두한 "타락한 정권 응징" 국회서 장관들에 오물 투척
장군의 아들 ②
불쑥 찾아온 해방, 그리고 소련군과 미군의 분단점령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칼바람 부는 세월. 온전한 정신으로 못살 판, 풍류 바람을 타고 한바탕 칼춤이라도 춰야 할 상황이었다. 타락한 시대 타락한 방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소설(小說)이라고 게오르그 루카치는 말한다. 북방에서 밀고 오는 공산주의와 남방에서 밀려 들어오는 자유민주주의의 바람이 협공을 하니 죽을 판이다, 소설가 김동리는 “좌우간의 좌우”를 논하며 다음의 말을 한다.

▲1966년 9월 22일 ‘국회 오물투척 사건’ 현장. 신문지로 포장한 오물을 앞에 두고 김두한 의원이 국무위원들을 향해 호통을 치고 있다. [중앙포토]
“만약 토지개혁과 주요 기업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것이 좌익이라면 조선 사람은 전부 좌익이요, 민족해방과 완전 독립을 갈망하는 것이 우익이라면 조선 사람은 전부 우익일 것이다. 조선의 소련 변방화 거부를 우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우익어어야 할것이고 조선의 미국 식민지 배격을 좌익이라 하면 우리 모두는 좌익이라 할 것이다.”
정확한 실제도 없이 좌우라는 이상을 택해야 하는 타락한 시대에 ‘참’을 추구하는 것. “의인은 그의 믿음과 더불어 산다”는 말밖에 없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광란의 시대가 해방과 분단, 전쟁과 혼란으로 이어진다. 주인과 노예를 거부하는 동학쟁이 수운 최제우의 칼 노래 칼춤, 검결(劍訣)을 한판 부를 판이다.
“때가 왔네 때가 왔네 다시 못 올 때가 왔네. 만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대장부가 다시 못 올 때를 만났으니,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어찌 할 것인가~”
에라 쉬~ 모든 것을 부셔 버리듯 칼춤 추듯 김두한은 타락한 시대에 “똥이나 쳐 먹어라 이 새끼들아” 일갈하고 파란의 생을 접는다. 1966년 9월 16일 삼성은 “한국비료주식회사 비료공장 건설자재를 수입한다”며 사카린 원료 58t을 밀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다. 김두한은 바로 9월 21일 한정식 요정 오진암에서 회식 후 비장의 결투를 준비한다. 바로 22일 정기국회에서 연단에 오른다.
1954년 종로서 민의원 선거 무소속 당선
▲김두한 의원이 오물을 투척하는 순간. [중앙포토]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경제부총리, 민복기 법무장관, 김정렴 상공장관을 앞에 두고 “오늘날 삼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하고 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하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사카린 올시다. 고루 고루 맛보아야 알지”라며 김두한은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가져온 똥을 국무위원들을 향해 퍼부었다.
김두한은 집으로 돌아가며 “이보쇼, 내가 똥물을 던진 것은 말이요, 장관들 개개인한테 던진 것이 아니라 헌정을 무시하면서 밀수사건을 비호하는 제 3공화국 정권에 던진 거란 말이요”라고 당당히 말했다. 헌정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를 국회 똥물 투척 사건은 타락한 시대, 타락한 정권에 대한 정당한 칼 노래 칼춤이다. 북두칠성의 사나이 김두한은 이 사건 후 유신정권의 철퇴를 맞고 죽는다.
『김두한 자서전』을 따라 그의 행장을 본다. 김두한은 어린 시절 지금의 광교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한다. 그때 조선극장에서 싸움 영화를 즐기다 샌드백을 치고 역기를 하며 체력을 키웠다. 파고다 공원 담장을 왼손 하나만 집고 훌쩍 넘을 정도의 체력 소유자였고, 종로를 네 등분했던 신마적·구마적·뭉치·샤스를 차례로 꺾은 뒤 우미관을 차지하며 ‘종로의 주먹’이 됐다.
일본 야쿠자 하야시패와 평화협정을 맺은 뒤 김두한은 인천, 부산, 함흥, 신의주 등 전국을 순회하며 각 지역의 주먹들을 평정한다. 일제 말 김두한은 징용을 피해 ‘경성특별지원 청년단’을 만든다. 서울만 3000여 명, 전국적으로는 2만 명에 이르는 청년 대군 조직이었고, 그는 이를 내세워 반공(反共) 대열에 앞장선다.
해방과 함께 좌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판에서 반만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백의민족이 사는 이 땅을 공산주의 종주인 구(舊)소련의 연방으로 만들 수 없다며 공산주의 타도, ‘타공(打共)’작전을 치열하게 벌인다. 대한민주청년총연맹(민청)을 결성, 백색테러를 감행해 180여 차례 무자비함을 선보인다. 이어 미군정에 잡혀 사형선고를 받은 뒤 형무소 수감 중 1947년 정부수립 후 풀려난다.
한국전쟁 때 김두한은 자신의 조직과 학도병을 이끌고 포항전투에 참여한다. 부산 부두 노동자 파업 때 미군을 상대로 임금 쟁취 투쟁을 한다. 그때 부산 앞바다 20리 전방 수백 쌍의 기동선을 본다. 일본 도피를 꿈꾸는 정부 고위층과 사회 유력인사들로 이루어진 민족 모리배들의 행태에 분노하며, 강제로 기동선 1대를 징발하고 이들의 금품을 털어 조국의 운명을 거는 전투에 사용한다. 그리고 부산 광복동 고급 세단이 주차된 〈늘봄 댄스홀〉에 쌍권총을 차고 들어가 전쟁에 아랑곳없이 쌍쌍이 춤을 추며 육체의 향연에 도취된 판을 엎고 나서 “또 다시 국가와 민족을 망각하고 춤추러 다니는 년 놈은 부산 앞바다에 수장시켜 버린다”고 총 쏘며 외쳤다.
고문 후유증에 석방 뒤 사람 못 알아봐
▲‘김두한의 증언’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피로 물들인 민족사』(박창규 저, 민국출판사).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종전 후 1954년 서른여섯 살 나던 해 김두한은 3대 민의원 선거에 종로을(乙)구에서 무소속 당선된다. 상대 후보들이 “김두한은 소학교 2학년 밖에 못 다닌 무식쟁이에 주먹 대장”이란 공격에 “내가 주먹 대장이지만 약자나 여자를 때리는 것을 본 사람이 있냐”며 “나는 국회의원이 되면 어머니의 사랑같이 나를 희생하겠다”고 외치며 국회에 입성한다. 자유당 정권에서 김두한은 친일파 타도 칼춤을 춘다.
김두한 의원은 1956년 이익흥 내무장관 불신임안을 낸다. “이 장관, 당신은 일제 앞잡이, 왜정 경찰 출신으로 민족 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일제에 아부 근성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마치 제왕으로 알고 맹종하는데, 민주정치에 역행하여 각종 선거에 불법 간섭과 강압을 능사로 대한민국을 일본제국으로 착각하는 당신은 친일파 민족 반역자”라고 일갈하며, 장면 부통령 피습사건의 정치적 책임을 물어 내무장관 불신임안을 내지만 부결된다.
그는 국회 연단에 순국선열 영정을 내걸고 장경근 내무장관을 규탄한다. 1957년 일이다. 국회 속기록의 내용이다.
“장경근은 왜정 때 대표적 친일을 하고 해방 후 국민방위군의 수많은 청소년을 아사, 병사시키고 거창·산청·하동 등에서 죄 없는 양민을 학살했고, 3·15부정선거에 부정 불법 선거를 조장하고 온갖 궤변으로 자유당 정책을 인출하고 이정재, 유지광 깡패를 시켜 장충단 집회를 방해하고 배후 조장하였으니 민주주의 기본 자유의 하나인 집회를 방해하는 민주 반역자로 역사에 고발한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를 친일로 모는 강세향 의원에 맞서 “친일한 것은 당신이요. 일제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일본 놈들에게 아부한 자가 적반하장 아닌가”라며 아예 자유당 총재를 향해 “해방 후 민족운동가나 독립투사는 모조리 제거하고 일본 놈의 경찰 밀정을 해 먹던 놈이나 애국지사를 탄압하던 민족 반역자 친일파만을 두둔, 독재의 아성을 쌓고 간계 잘 부리는 악질 간상 모리배들만 살찌니 친일 민족반역자 두목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이로써 이 대통령 모욕죄로 징계에 회부된다.
온통 사방이 적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의 협잡 판에서 민족 협객의 칼춤은 작두날 위에 선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4·19로 민주주의가 잠시 푸른 하늘을 보이는 듯했으나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김두한은 애국단을 결성한다. 그리고 1965년 서울 용산 보궐 선거에서 한독당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다. 김두한은 국회 첫날 신상 발언을 통해 제3공화국 권력자를 향해 포문을 연다. 그러나 1966년 이른바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을 엮어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음모, 폭발물사용 위반으로 구속된다.
구속 18일 만에 풀려 나왔지만 중정의 혹독한 고문으로 김두한은 넋 나간 표정으로 “자백을 강요당하며 호된 고문을 받았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풀려난 지 8개월. 무도한 정권을 향해 회심의 한 판을 준비한다. 국회 똥물 투척 사건이다. 국회 모독죄,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되고 수감 3개월 만에 병보석(고혈압)으로 풀려난다.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석방 뒤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얼이 빠져 있었고, 이빨도 다 빠졌다 한다. 죽음이 바람처럼 부는 시대 제 정신이면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김두한은 종로에서 태어나 종로를 무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김두한의 칼 노래 칼춤을 그려본다.
김태균 문화평론가
04.13 긴 머리 싹둑 자른 '모단걸' 여성해방 신호탄 쏘아 올리다
1920년대 단발 여성의 출현

▲1924년 개벽사에서 만든 잡지 『신여성』의 창간 1주년 기념호 표지에 실린 단발머리 여성의 모습. [사진 최용신기념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정해진 기간마다 머리를 손질하는 일은 상례에 해당하겠으나, 정도 이상의 머리카락을 갑자기 잘라낸다는 것은 굳은 결심을 드러내거나 어떤 사태에 개입 혹은 단절을 선언하기 위한 방법인 경우가 많다. 목표를 향해 정진한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애달픈 이별을 겪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는 속세를 떠나 세상과 절연하기 위해. 이렇듯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머리카락을 기꺼이 자른다. 물론 이런 행동들은 보통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돼 이뤄지는 일들이다.
염상섭 등 당대 남성 지식인들 혹평
머리를 자르는 행위가 사회적 의미를 크게 지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20년대 여성의 ‘단발(斷髮)’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단발을 한 여성은 강향란으로 알려져 있다. 강향란은 한남권번 기생 출신 여학생으로 1922년 6월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타나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강향란의 단발 사건을 상세히 보도한 신문 기사(단발낭(斷髮娘), 동아일보, 1922년 6월 22일)에 따르면, 강향란의 단발에는 ‘실연의 극복’과 ‘새출발’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남성에게 버림받은 강향란은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실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삶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다지며 단발을 실행한 셈이다. 단발 이후 강향란의 행보는 더욱 파격적이었다. 남성 복식을 차려입고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배화학교에 나가 공부를 하고, 나중에는 상하이와 도쿄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강향란은 단발을 통해 당시 조선에서 가장 대담하고 앞서가는 사회적 인물이 됐다.
▲1936년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발행한 팸플릿(위)과 조선일보에서 만든 잡지 『여성』에 실린 단발머리 여성.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향란 이전에 단발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찍이 구한말 남성 개화주의자들의 단발 시도가 있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 남성들의 머리와 복식은 서양식을 따르는 경우가 제법 흔했지만, 단발한 여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여성의 긴 머리만큼은 절대 불변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남성의 단발은 개화를 향한 의지와 모던한 취향으로 인정받았지만, 여성의 단발은 전통의 파괴, 도덕의 거부, 서구화에 대한 무모한 추종으로 폄하됐다.
강향란을 향해 남성 지식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종로 출신의 작가 염상섭은 강향란의 단발을 두고 “취미성의 열화라든지 사상적 중독이라든지, 일종의 허위적 심리”가 반영된 행위이며 “죽음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무견식하고 그릇된 행동”(여자단발문제와 그에 관련하여, 『신생활』, 1922년 8월)이라고 거칠게 비판하기도 했다. 문단 구습과 사회 패악에 적극 맞섰던 작가 염상섭의 여성 단발에 대한 생각조차 이럴진대, 다른 남성 지식인들의 태도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강향란의 최초 단발은 따가운 시선을 이겨낸 용기의 발현이자 담대한 문화적 실천이었다.
강향란 이후 여성의 단발 소동으로 또 유명했던 사건이 바로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의 ‘공개 단발’이다. 1925년 8월 22일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청계천에 단발을 한 젊은 여성 세 사람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종로의 조선여성동우회관에서 이제 막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내고 나온 주세죽과 허정숙, 고명자였다. 셋은 사람들의 마뜩찮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목을 걷어 올리고 유유자적 탁족을 즐겼다. 여성이 종아리를 드러내놓고 물놀이를 하는 모습도 생소한데, 모두 하나같이 단발을 하고 나타났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들의 공개 단발 소식은 종로를 넘어 경성 전체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우리 3인은 본래 동지로서 친구로서 단발하기로 작정하기는 이미 오랜 일이었습니다. 서로 깎기로 언약하고 곧 머리를 풀고 긴 것만 추려서 집었습니다. 자르고 나니 머리숱이 퍽 많아 보였습니다. 3인 중에서 제일 먼저 자른 사람은 나였습니다. 머리를 잘리우는 그 자신은 쾌활한 용기를 내어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손에 가위를 들고 남의 머리를 자르는 그때는 이제까지 잠재하였던 인습의 편영(片影)이 나타나며 몹시 참담하고 지혹(至酷)한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삽시간에 3인은 결발(結髮)의 신여성으로부터 단발낭자 송락(松絡) 머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다 깎은 뒤에 서로서로 변형된 동무의 얼굴을 쳐다보며 비장하고도 쾌활미가 있는 듯 웃어버렸습니다. 웬일인지 서로 아지 못한 위대한 이상과 욕망이나 이룬 듯이 무조건 기뻤습니다.”(허정숙,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 『신여성』, 1925년 10월호)
1920년대 여성이 단발을 한다는 것은 전례 없는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모던걸(modern girl)’을 단발과 엮어 음차해 ‘모단(毛斷)걸’로 부를 정도로 여성이 자발적으로 머리를 자르는 행위는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를 받아들여 신여성으로 존재의 변화를 감행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표현이었다. 물론 과감하게 단발한 신여성들은 세상으로부터 쉽게 환영받지 못했다. ‘모던걸’이 ‘모단걸’이 되었다가, “못된 걸”에서 “못된 년”으로까지 지칭하는 방식이 격하되는 등 단발 여성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차갑다 못해 가혹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학생과 여성운동가들 사이에 단발은 유행처럼 번졌다. 신여성이라면 혹은 여성해방운동가라면 단발은 응당 필수적인 의례였다. 종로의 거리는 물론 경성 전역에 단발 여성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여성이 단발을 하는 표면적 이유는 “거뜬하고 간편”할 뿐만 아니라 “시원하고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단발은 실용적 목적 외에도 더 많은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가부장제 하의 사회제도, 관습, 도덕 등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 태도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재래의 인습에 대한 저항”이나 “여성해방의 유일한 조건”으로 단발을 꼽은 여성운동가들이 많았다.
여성운동가 최대의 사회적 퍼포먼스
▲1925년 여름 단발을 한 뒤 청계천에서 탁족을 즐기는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 왼쪽부터 허정숙·주세죽·고명자. [사진 위키백과]
하지만 여성의 단발을 그저 흥미로운 볼거리 정도로 격하하거나, 여전히 못마땅해 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여전했다. 견고한 가부장 전통 하에서 억압적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여성들은 단발을 꿈꾸거나 실행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여성 단발이 꾸준하게 확산되거나, 보편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종로 거리와 이화· 숙명·배화 같은 학교에서는 종종 목격됐지만, 경성 전체를 보더라도 단발보다 긴 머리를 유지하는 여성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단발 여성을 더욱 특별하고 앞서가게 보이게 하는 효과로 작용했다. 이렇듯 1920년대 단발은 급진적 여성운동의 상징이었다.
여성 단발은 낙후된 여성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여성이 제 스스로 긴 머리카락을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행위는 전근대적인 면모가 짙게 남아있던 식민지 조선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됐다. 서양의 다양한 근대문화 중에서도 단발을 가장 먼저 수용한 이유는 시각적 파격성 때문이기도 했다. 전통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된 여성의 긴 머리카락이 한 순간에 사라진 모습을 본 당시 남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단발은 세계의 변화에 따른 문화적 전환의 요구를 여성의 몸으로 구현한 최초의 근대적 행위였다. 단발은 오랫동안 억압된 조선 여성들이 근대적 세계와 단숨에 접속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행동이었다. 즉, 1920년대의 단발은 굳건한 조선의 가부장제에 맞서 여성해방을 모색하던 여성운동가들이 수행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회적 퍼포먼스였다.
1920년대 여성 단발은 패션이라기보다 혁명 그 자체였다. 당시 신여성들은 단발 의식을 벌일 때 받은 사회적 주목을 여성해방의 자원으로 삼으려 했다. 당대의 신여성들에게 단발은 사회변혁을 이끌어내겠다는 당당한 외침이었다. 단발 의식을 통해 근대 여성의 사명과 목표는 훨씬 강력하게 동시대의 여성들에게 전파되고 공유됐다. 많은 여성 사회운동가들이 단발 행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냈다. 여성 단발은 전근대적 유교 풍습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 신여성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였다.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 작가
04.27 식민지 아이 이상, 만인 전쟁터 경성을 ‘낯선 말’로 묘사
한국 현대시 문 활짝 연 시인

▲시인 이상이 세 살부터 20여 년간 머물렀던 ‘이상의 집’(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 10번지)을 김민호 작가가 그린 일러스트.
우리 문단에서 ‘현대시’의 문호를 활짝 열어젖혔던 이상의 시는 3음보와 4음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국시의 전통적 호흡 단위를 무시하고 쓰였다. 그의 시는 한국시의 형태를 ‘노래’에서 ‘읽는 시’ ‘보는 시’로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기호나 수식, 그림 등을 이용한 타이포그래피 형태를 취하기도 함으로써, 시의 형식을 노래에서 ‘문자’로, 더 나아가 ‘그림’으로 확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시에서 이러한 정도의 과격한 형태 전환 사례는 드물다. 이 형태적 과격성이 그를 한국시의 전위(avant garde)로 계속 남게 하는 요소다. 이상에 의해 한국시는 시의 언어가 반드시 글월 문자 ‘문(文)’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숫자와 기하학적 이미지에 대한 그의 집착은 그가 현대의 핵심적 언어를 수학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에 앞서 최남선이나 이광수와 같은 신문물의 선전자들이 있었지만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서울공대의 전신)를 졸업한 이상은 그야말로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수학과 과학, 기술시대의 언어로 훈련을 받아 세상에 불려 나온 사람이었다.
그의 시에는 삼각형과 역삼각형, 사각형을 부부나 연인의 모습으로 환치하고(‘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선에 관한 각서7’), ‘1 2 3 4 5 6 7 8 9 0’을 “질환의 구명과 시적인 정서의 기각처”(‘선에 관한 각서 5’)라고 한 표현이 있다. 그는 기호와 숫자가 일반적 문자보다 더 효율적이고 명확하게 삶의 양상과 세계를 형상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수학적 기호는 전통적인 ‘시적인 정서’ 표현의 대체물이었다.
식민지 근대 풍경의 강력한 표상
▲이상이 활동하던 시절 사진. [중앙포토]
문제는 이러한 ‘낯선 말’이 지닌 역사적 함의다. 이상의 문학과 그의 생애 자체가 한 작가적 개인의 문학적 실험을 넘어 한국의 식민지 근대 풍경에 관한 강력한 표상을 이룬다.
이상은 1910년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현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1910년이라면 경술국치가 있었던 해이니, 그의 육체는 식민지의 탄생과 더불어 세상에 나온 셈이다. 현재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운영하는 ‘이상의 집’이 있는 곳,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가 그가 자란 백부의 집이다. 그는 누상동(현 옥인동)의 신명학교와 동광학교를 거쳐 혜화동에 있던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조선의 왕이 살던 경복궁 바로 옆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학교를 다닌 그의 동선은 경희궁·창덕궁·창경궁 등 조선의 주요 궁 주변과 겹친다.
그는 20대에 친구들과 종로 어디쯤에 제비다방이라는 카페를 내기도 했다. 그는 일제의 대륙 침략기지 역할을 했던 식민지 경성, 그 중에서도 조선총독부 주변에서 나고 자랐다. 식민지 경성, 그 중에서도 종로의 아이였던 셈이다. 그의 유명한 소설 ‘날개’에서 잠에 취해 있던 주인공이 탈출을 감행한 곳은 최초의 거대 자동동력기계 기지였던 경성역과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이었다. 서른 살도 살지 못했던 그의 짧은 생애 동선이 ‘전통적 시간과의 과격하며 폭력적인 단절’의 표징이었던 경성 사대문 안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세계사에서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과격하게, ‘도시인’ 체험을 강제당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현대시의 창시자였던, 그래서 세계문화사에서 현대성의 선구자로 불리는 19세기 보들레르가 세계 최초의 계획적 현대도시였던 파리의 아이였던 것과 그의 체험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르다. 19세기 파리는 ‘세계의 수도’였으나, 20세기 초 경성은 ‘제국 수도의 모조품’이었다. 미츠코시 백화점은 동경 미츠코시 백화점의 모조품이었으며 조지야·미나카이·하라다 등의 백화점이 경성의 일본인 거주지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경성역은 도쿄역을 모델로 한 짝퉁이었다. 서구 제국주의를 동경했던 일본 사회에 불어 닥친 세계박람회와 동물원 열풍은 식민지였던 조선으로 옮겨왔고, 그 방식은 식민지 왕의 집이자 정치적 상징터였던 궁을 부수고 해체하여 노예적 굴종을 정치적으로 상징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창경궁이 그렇게 창경원이 되었으며, 경복궁에서 그렇게 조선물산공진회(1915년)와 조선박람회(1929년)가 열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식된 식민지 ‘모던’이 당시 조선인들에게 큰 저항 없이, 오히려 폭발적인 호응 속에 자리 잡아 갔다는 사실이다.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총독부 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식민권력의 선전 행사였다. 이미 많은 부분이 훼손되기 시작했던 경복궁의 근정전 앞 홍화문과 영제교가 이 때문에 헐리는 등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물이 해체되었지만, 공진회는 보란 듯이 엄청난 흥행을 이뤘다. 공진회 관람객은 116만여 명이었고 경성에서만 19만 명 가까이 관람했다. 당시 경성 인구를 감안하면 웬만한 어른은 다 가서 보는 행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모던 경성의 시각문화와 관중』, 한국미술연구소)
1929년 조선박람회는 이보다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창경원의 야행 놀이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구경꾼들로 매년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는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복원되기 전 1980년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여기저기 생긴 경성의 극장들, 조선 자본까지 합세하였던 백화점들 역시 만원이었다.
‘아해’가 진짜 무서워했던 대상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시 ‘오감도’.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상의 ‘낯선 시’로 널리 알려진 ‘오감도-시제일호’는 ‘아해’(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한국 현대시다. 이 시는 도로를 질주하는 아이들의 반복된 ‘공포’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를 하고 있다. 설왕설래가 많은 난해시의 대표작이지만, 이 시가 이상이 태어나고 자랐던 동네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그 새로운 ‘도로’, 도시 풍경 위에서 펼쳐지는 시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용 역시 의외로 명확하다. 아이들은 무섭다(무서워한다)! 무서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뚜렷하지는 않으나, 시인이 보았던 풍경은 그의 동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경성의 도시화, 근대화 과정이었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전통의 시간을 부수고 해체하여 그 위에 ‘질주하는 도시의 속도’를 건설하는 과정 속에 거주했다.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아이들의 두려움이 이 새로운 도시의 속도 풍경에만 있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 아이들에게 느껴지는 가장 내밀한 감각선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 어떤 ‘경악’이다. 나는 아이들의 이 경악을 일제가 지은 근대 풍경의 폭력성을 넘어서, 이 위장된 모던 도시 풍경 속에 도취되고 열광하는 조선인들의 반응을 보며 느끼는 경악으로 읽는다.
이상은 수학과 근대기술로 훈련받은 사람이었고, 시골의 풍경에서 즉시 ‘권태’를 느낄 만큼 예민한 ‘모던 보이’였으나, 식민지 도시가 보여주는 이 망각의 풍경을 체질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한편의 저항시도 쓰지 않았고 많은 시를 일본어로 썼지만, 3·1 독립선언문을 썼던 최남선과 최초의 근대 한글 장편소설을 썼던 이광수조차도 친일을 하던 시대에 단 한 편의 친일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과학과 도시, 성(性)과 병이라는 모티프를 현대시의 주제로 포섭한 한국 최초의 시인이었고, 현대문학이란 이에 관한 도시적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식민지 모던 경성을 긍정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 없었다. 그의 시와 소설에서 경성은 거대한 매춘굴이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만인전쟁터였고, 폐병을 앓는 병든 터전이었다.
전통적 시들이 전통 사회지배 체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 없이 인간의 내면과 사회 및 우주의 질서를 하나의 일관된 음악적 질서로 부드럽게 연결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의 몸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동화될 수 없었기에 그의 언어 역시 각박하고 신경증적일 수밖에 없었다. 두려운 아이의 몸을 체화한 시적 언어, 그것이 음악이 사라진 ‘낯선 말’의 이상이 지은 현대문학이었다.
함돈균 문학평론가·경희사이버대 특임교수
05.04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 선전지 12만 장 뿌린 방정환
102년 전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아-나는 이담에 크게 자라서/이 몸이 무엇을 해야 좋을지/나 홀로 선택할 수 있게 되거든/그-렇다 이 몸은 저 이와 같이/거리에서 거리로 돌아다니며/집집이 장명등에 불을 켜리라.”(‘개벽’, 1920년 8월)
▲1932년 8월 개벽사에서 발행한 잡지 ‘어린이’ 통권 99호 표지. [국립한글박물관]
이 구절은 이 땅에서 ‘어린이’라는 기호가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진 시 ‘어린이의 노래: 불 켜는 이’ 3연의 일부이다. 방정환재단의 염희경 선생에 의하면 이 시는 방정환이 『보물섬』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저자로 유명한 R. L. 스티븐슨의 시 ‘The Lamplighter’의 일역본인 『子供の歌園』(아카호시 센타(赤星仙太)역, 1912년) 중 ‘點火夫’를 중역한 것이다. 방정환은 이 시집의 제목에 있는 ‘자공(子供)’을 ‘아동’이나 ‘아이’가 아니라, 인권을 지닌 근대적 존재로 상상이 가능한 ‘어린이’로 번역하여 시의 제목으로 삼는다.
이 시에서 ‘어린이’는 “아모리 구차한 집도/밝도록 환-하게/불 켜주는” 사람이며, 방정환은 이들로 인하여 “거리가 더 밝아져서/모도가 다-가티 행복되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제국의 문화를 경유하여 그 식민체제에 균열을 낼 새로운 조선적 인간상, ‘어린이’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다.
동화극·사진 소설 등 다양한 실험도
▲소파 방정환 선생. [사진 중앙포토]
1920년 9월부터 1923년 11월까지 일본에 있었던 기간을 빼고 방정환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치열한 아동문화운동의 거점은 종로였다. 방정환은 1899년 서울 야주개(지금의 당주동과 신문로1가에 걸쳐 있던 낮은 고개)에서 장남으로 태어나고 자란 종로 토박이다. 본적은 경성부 견지동 118번지.
조부가 시장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여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던 그는 현 조계사 자리인 수송동 보성소학교를 다닌다. 그러다가 9세 때 부친의 사업 실패로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 못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어, 식구들 모두 도정궁 아래 사직골의 허름한 초가집으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1910년 서대문구 근동으로 이사하여 미동보통학교에 전학하기 전까지는 매동보통학교(현 통의동)에 다녔다. 1918년 천도교단이 인수하여 박동에서 낙원동으로 이전한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계 어린이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진 종로구 경운동은 그의 전 생애를 걸쳐 가장 중요한 시공간이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가난한 청년이 본격적으로 아동문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가 천도교단의 교주인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어 교단의 인적 물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전 작품에 등장하는 학대받는 조선 아동에 대한 절절한 연민과 관심은 방정환이 겨울에 고사리손으로 차가운 물을 지고 날랐던 사직골에서의 어린 시절 경험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혼한 후 그는 재동 처가에 머물며 거기서 가까운 경운동 ‘개벽사’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어린이’와 ‘개벽’ ‘신여성’ 등 매체를 발행하며 각종 문화운동을 수행하는 데 온 힘을 다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중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킬 강연회를 열었고, 어린이를 위한 동화회는 당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늘 만원이었고 앉을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이가 많았다고 전한다.
▲1922년 5월 어린이날에 맞춰 천도교회월보에 실린 어린이 인권 존중 항목. [사진 방정환연구소]
그는 10세 때 선물 받은 환등기를 가지고 변사가 되어 영상회를 열었던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처럼 매우 뛰어난 문화기획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처음에는 잡지 ‘어린이’ 발행에 회의적이었던 천도교단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10판 이상 인쇄하여 2만 부까지 발행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1922년 7월 7일, 개벽사)의 성공 덕분이었다.
방정환이 직접 기획하고 번안한 이 동화집에는 ‘신데렐라’ ‘난파선’ ‘행복한 왕자’ 등 10편의 세계명작동화들이 실려 있다. 평균 판매 부수가 3만 부 정도였고, “3판을 발행한 것이 또 7일 만에 없어”(‘어린이’, 1925년 2월)졌다는 잡지 ‘어린이’의 인기도 문화 운동에서 ‘곱고’ ‘자미잇고’ ‘유익함’을 표방한 그의 다양한 기획 능력 때문이다.
그는 ‘어린이’에서 창작 동화, 위인전(역사동화), 동요(동시) 등 다양한 장르 외에 동화극(‘노래주머니’), 사진 소설 등 새로운 유형의 콘텐트를 시험적으로 선보인다. 이밖에도 상품을 내건 현상문제, 현상문예, 독자 담화실 등을 통해 어린이 독자의 참여를 유도했다.
무엇보다 그는 어린이가 ‘자미잇는’ 문화를 향유하며 행복하길 원했다. 그의 신념이 실천적으로 수행된 수많은 예 중 대표적인 것은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축제처럼 기념행사를 시행한 것이었다.
천도교 소년회 창립 1주년이 되는 1922년 5월 1일, 그의 주도로 전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이 제정돼 행사가 열린다.(5월 5일이 어린이날이 된 것은 해방 이후다) 그날 오후 1시에 탑골공원·전동교동·광화문통 등 종로 일대에 어린이날의 취지를 선전하는 선전지가 뿌려지고, ‘어린이날’ ‘소년보호’ 등의 문구가 새겨진 세 대의 자동차가 종로 큰길을 위시하여 시내 각처를 달리며 선전하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동아일보, 1922년 5월 2일)
집회결사의 자유가 억압당했고 특히 검열 대상 1위였던 전단지의 존재가 이렇게 정치 1번지 종로에 뿌려진 그날의 상황은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당대 식민지 주체 모두에게 어떤 해방감을 주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당시 그가 뿌린 ‘어린이날’이라는 제목의 전단지에는 어린이 인권 존중의 항목인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 하시고 자주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3.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중략) 7. 장가와 시집을 보낼 생각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등 7가지 항목이 인쇄돼 있었다.(동아일보, 1922년 5월 2일)
유토피아적 시공간 꿈꾸다 31세 요절
▲1932년 조선어린이날중앙준비회에서 만든 어린이날 포스터. [사진 문화재청]
이듬해인 1923년에 어린이날 행사는 더욱 확장된 규모로 펼쳐진다. 이 날은 아동문화연구회 ‘색동회’가 발회되고, 천도교청년회를 비롯하여 40여 개의 소년단체가 연합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세워져 어린이날 행사를 주최한다.
이 날 “5월 1일이 왔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드는 날이 돌아왔다”로 시작하는 취지문이 신문에(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 실리고, 12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선전지에 인쇄된다. 그날은 노동절이기도 하여, 옥양목 띠 앞에는 붉은 글씨로, 뒤에는 초록 글씨로 ‘어린이날’이라고 쓴 휘장을 두르고 시가 선전 행진을 하며 선전지를 뿌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조선일보, 1923년 5월 2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3시에 축하식을 갖고 4시경 200명의 소년이 차 4대에 나눠 타고 선전지 12만 장을 시내에 배부하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23년 5월 2일)
이렇게 방정환은 여러 번에 걸쳐 종로 경운동 일대에 많은 사람들을 북적이게 하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고 정작 그는 31세에 짧은 생을 마감한다.
과로로 쓰러지도록 죽도록 일하며 그가 꿈꾸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행사를 기획하면서 그는 10년을 내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린이가 북적대는 종로, 그들이 행복한 장면을 보면서, 그는 이들이 10년 후에 이루어 갈 해방구를 상상했는지 모른다. 물론 방정환이 꿈꾸었던 그 세상은 영원히 유보될 유토피아적 시공간일 수 있다. 그러나 당장 그 시공간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 모두 모여 행복했던 그 순간의 경험은, 삶에서 돌출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넘어 꿈꾸는 자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박지영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
05.18 훈민정음 해례본, 혜원 전신첩, 청자…조선의 혼 지킨 간송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

▲간송 전형필이 지켜낸 국보 문화재들.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단오날 여인네들의 시냇가 풍경이다. [사진 국가유산청]
‘간송미술관’의 간송(澗松)은 전형필(全鎣弼·1906~1962)의 호를 따 지은 이름이다.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유실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샅샅이 수집한 인물이다. 그는 경성 대부호 전명기(全命基)의 아들로 태어나 10만석 자산을 물려받은 상속권자였다. 그의 증조부 전계훈(全啓勳)은 정3품 무관직인 중군(中軍)을 지낸 관료였으나, 한양 배오개(현 종로4가 인의동)에 터를 잡은 뒤 조선 최고의 거리인 운종가, 즉 종로의 상권을 장악해 부를 일궜다. 현재 종로의 광장시장이 바로 전씨 집안이 활약했던 배오개시장의 역사를 이은 곳이다.
개츠비 “전형필 문화재 사랑에 감복”
전형필은 물려받은 전 재산을 일평생 문화재를 사 모으고 보호하는 데 사용했다.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이름난 골동과 질 높은 서화를 수집한 행적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난 뒤에도 그다지 대단한 일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의 문화재 수집과 보존 활동을 대부호의 호사 취미 정도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청자 ‘상감운학문매병’. [사진 국가유산청]
전형필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학업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가문의 재산을 상속했다. 후사가 없던 작은아버지의 호적상 양자로 들어가 있어 작은댁의 재산도 모조리 물려받았고, 본댁에서는 형이 일찍 병사한 까닭에 아버지의 재산도 모두 상속받았다. 그 덕분에, 아버지보다도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전형필이 문화재 보호의 사명에 눈 뜬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당시 일본을 위시해 서양 열강은 조선의 문화재를 경쟁하듯 빼돌렸다.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 보존과 관리 실태에 분개한 전형필은 전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기로 마음먹는다. 일찍부터 골동과 서화에 대한 조선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던 위창 오세창(呉世昌)과 교유하며 문화재 관련 감식안을 키워나갔다. 전형필은 오세창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전형필은 한국의 문화재 보호 역사에 있어 특히 주목을 요하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골동을 수집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것을 보존하고 또 연구하는 일에까지 눈을 돌리고 길을 연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물건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열일을 마다않고 찾아갔다. 상대가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을 제시하고 골동을 사 모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일본으로 넘어간 한국의 서화를 되찾아 오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신윤복의 ‘혜원 전신첩’은 절대로 팔지 않겠다는 것을 끈질기게 설득해 엄청난 가격을 치르고 다시 사왔다. 영국의 유명 콜렉터 존 개츠비(John Gadsby)가 소유하고 있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수십 점을 기와집 수백 채 값을 주고 사온 적도 있다. 개츠비는 “전형필이 주체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진 부호이기만 했다면 그에게 유물을 팔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문화재를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에 감복했다”고 소감을 남겼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사진 국가유산청]
‘훈민정음 해례본’ 보존은 전형필 일생일대의 최고 업적으로 간주된다. 우리 민족의 최고 유산인 한글의 기원과 출발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 해례본 원본은 당시까지 전해지지 않아, 많은 문화재 수장가와 학자들의 애를 태웠다. 훈민정음 본문에 해당하는 세종이 직접 지은 ‘예의(例義)’는 언해본으로나마 전해졌지만, 집현전 학자들이 집필했다는 ‘해례(解例)’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구나 낱장 일부가 아니라 온전한 책의 형태로 고스란히 수습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가치가 더 크다.
1940년 해례본이 경북 안동의 한 고가(古家)에서 출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당장 그 소장자를 찾아 나섰다. 전형필이 해례본을 원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조선 최고의 갑부가 찾는다니 값은 천정부지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전형필의 배포와 품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해례본을 손에 넣을 때, 거간 노릇을 한 사람이 애초에 부른 값 천 원(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은 수고비로 따로 떼어주고, 원주인에게 그의 열 배에 해당하는 일만 원을 값으로 치렀다. 이후 전형필이 소장한 해례본은 ‘간송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고, 훗날 국보 제70호로 등재된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한국 최고의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전형필이 입수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직접 본 직후 “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나타남이여”라고 탄성을 질렀다. 더구나 전형필이 수집한 해례본은 낱장의 뒷면에 한글 창제 당시 학자들의 낙서와 메모가 남아있어 연구사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덕분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질 당시 상황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다. 해례본 본문을 통해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면, 뒷장의 메모들을 통해서는 훈민정음을 접한 지역의 사대부들이 한글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됐다.
‘간송본’ 국보·유네스코 세계유산 돼
▲전형필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 [연합뉴스]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한글 연구는 사법당국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 꽃피운 결실이었다. 한글연구자들을 대거 구속해 처벌한 1942년의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가 저지른 우리 민족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진행된 한글 연구를 통해 말살돼 가던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문화적 긍지는 조금이나마 회복될 수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수집으로 한글 연구의 가장 큰 자산을 마련한 셈이니, 전형필이 당시 한글 연구에 기여한 바는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이 일평생에 걸쳐 아끼는 제일의 보물이 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른 문화재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 해례본만은 끝까지 몸 안에 지닌 채 피난에 나서 잠을 잘 때도 품고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자신이 수집한 백자를 살펴보고 있는 생전의 간송. [중앙포토]
전형필은 어렵게 수집한 단원과 혜원의 서화는 물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그 가치와 의미를 알아보고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내줘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1938년에는 오세창의 자문을 얻어 성북동 북단장 내에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했다. 보화각은 ‘빛나는 보물을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으로 오세창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여기에 수장했던 석탑과 불상, 자기와 서화, 서책 등 상당수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로 등재돼 있다.
보화각 건립이 선구적으로 평가받는 까닭은 그 보존과 전시의 방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보화각은 예전 갑부들이 곳간에 재산을 모으듯 유물을 켜켜이 쌓아만 둔 것이 아니라, 서양의 근대 박물관처럼 체계적인 분류를 시도해 유물을 종류별 시대별로 구분해 열람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또한 전형필에게 보화각은 ‘죽은 유물들의 무덤’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 독립과 해방의 길로 나아갈 ‘조선인의 정신을 보존하고 갱신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역사적 유산을 귀하게 여기는 민족만이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전형필이 문화재 보호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던 일이 근대 교육을 통한 후학 양성이었다. 1940년 동성재단을 만들어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를 겪던 종로구 혜화동에 자리한 보성고보를 인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어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보성중학까지 함께 인수하고 해방 직후에는 직접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고 조선어 교과목이 폐지된 식민지 시기 말, 간송이 운영한 보성중과 보성고는 우리 민족 교육의 마지막 보루였다.
1962년 전형필이 병마와 싸우다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손들과 후학들이 그의 뜻을 이어갔다. 간송이 사망한 뒤 몇 해 지나지 않아 1966년 이들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해 일평생 모았던 간송의 수집품을 정리하고 연구했다. 이때 보화각의 이름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했다. 그의 장남 전성우와 차남 전영우가 주도해 2013년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전형필의 업적과 유지를 기리는 사업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작가
06.01 한국 첫 서양화가 고희동…세 점의 자화상으로 남다
100년 넘은 원서동 화가의 집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고희동미술관 전경 일러스트. 1918년 고희동 화백이 일본 유학 후 돌아와 직접 설계하고 지은 곳으로 41년간 거주했다. [일러스트 김민호]
‘빨래터’라는 이름의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단정한 ‘ㅁ’자형 집이 있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고희동미술관이다. 창덕궁 후원의 서쪽이라 해서 원서동, 조선 궁인과 일반 백성들이 함께 빨래하던 이곳엔 지금도 물이 흐른다. 창덕궁 담장의 북쪽 끄트머리에 춘곡 고희동(1886~1965)이 집을 지은 것은 1918년. 고운 자갈 깔린 담벼락 안의 시간은 근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쿄미술학교의 첫 한국인 입학생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고희동은 보성·중동·중앙·휘문 등지에 도화교사로 나가면서 미술부 제자들을 이 집으로 불러다가 석고 데생을 지도했다. 한국 서양화가 1호가 개설한 최초의 서양화 연구소였던 셈이다. 고희동이 서화 스승 안중식·조석진과 함께 최초의 미술가단체 서화협회를 결성한 것도 집을 지은 바로 그 해다.
고희동은 여기서 41년을 살았다. 집은 세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2002년 헐릴 뻔했지만 시민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나서 등록문화재가 됐다. 이후 종로구에서 사들여 2012년 고희동 가옥으로, 2019년 고희동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한국 서양화가 1호. 조선인 최초로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온 그는 내내 이렇게 불렸다. 1915년 졸업 후 귀국한 게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매일신보는 그를 소개하기 위해 서양화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했다.
최초 서양화 연구소 열어 데생 지도
▲고희동이 남긴 자화상. ‘정자관을 쓴 자화상’(도쿄예술대학 소장). [중앙포토]
“동양의 그림과 경위가 다른 점이 많고 그리는 방법도 같지 아니하며 또한 그림 그리는 바탕과 그 쓰는 채색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그림인데…기름기 있는 되다란 색으로 그린 것이라.”
이렇게 서양화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그는 어떻게 유학 가 서양화를 공부하고 올 생각을 했을까?
조부부터 부친까지 3대가 중인(中人) 역관이었다. 의사·통역관 등 전문 기술을 가진 중인들은 빠르게 시류를 읽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부친 고영철(1853~1911)은 1881년 영선사(領選使)로 중국에 가 영어를 배워왔고, 2년 뒤 첫 미국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도 다녀왔다.(조은정, 『춘곡 고희동』, 컬처북스)
고영철은 셋째 아들 희동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게 했다. 고희동은 13세 되던 1899년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했다. 16~25세가 다닐 수 있는 학교였는데, 나이 제한도 무시하고 조기 입학시킬 수 있었던 수완이 놀랍다. 고희동은 교장 에밀 마르텔에게 프랑스어 통번역을, 수비대 장교인 비르코프에게 체육을, 레미옹에게 미술을 배웠다. 다른 학교에서는 ‘도화’라고 부르던 과목이었다.
레미옹은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프랑스인 미술가다. 세브르 국립도자제작소 출신으로 1900년 공예학교 창설을 위해 궁정에서 초빙했다. 세브르제작소 같은 황실 공예학교를 만들겠다는 고종의 계획은 좌절됐지만 레미옹의 방한이 헛되지만은 않았다. 레미옹이 마르텔의 초상화 그리는 걸 본 고희동이 서양화의 생생한 사실감에 매료됐고, 후에 일본에 유학 가 서양화를 전공하게 됐기 때문이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중앙포토]
1900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한국도 참여하기로 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고희동이 프랑스어를 배운 것은 이 무렵이다. 졸업도 전인 1904년 궁내부 주사가 됐다. 왕실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부서였다. 그러나 자고 나면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어의 인기는 1905년 이후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이 전적으로 일본에 넘어가면서 서울의 외국 공사관이 모두 철수한 까닭이다. 프랑스어 전공자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고희동은 이 무렵부터 조석진·안중식 문하에서 전통 서화(書畵)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1909년 고희동은 “미술 연구를 위하여 일본국 동경에 출장을 명”하는 궁내부의 칙명을 받았다. 도화서 화원들이 소속돼 있던 장례원의 예식관으로 일하던 때였다. 출장이고, 관비 유학이었다. 미술이라는 신지식을 배워와 조선을 계몽하라는 거였다. ‘미술(美術)’은 1873년 일본에서 독일어 단어의 번역어로 탄생했고, 한국에서는 1881년 일본 조사시찰단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 부국강병을 위한 신기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 1911년 출장을 명했던 궁내부가 사라졌다. 관리들도 해산했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고희동은 계속 미술학교 학생으로 지내며 방학이면 귀국해 조석진·안중식에게 서화를 배웠다.
‘최초’는 축복만큼이나 한계도 분명했다. 고희동이 돌아본 유학 시절이다.
“석고상을 놓고 화가(이젤)에 목탄지를 낀 까루동을 버티어 놓고 죽죽 썩썩 그리는데 보기도 처음이요, 말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6년 만에 졸업인지 무어인지 종이 한 장을 들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전 사회가 그림을 모르는 세상인데, 양화를 더군다나 알 까닭도 없고 유채를 보면 닭의 똥이라는 등 냄새가 고약하다는 등 나체화를 보면 창피하다는…” (고희동, ‘양화가 제1호’, 서울신문, 1959)
졸업하려면 자화상을 제출해야 했다. 현재 도쿄예술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돼 있는 고희동의 졸업작품은 ‘정자관을 쓴 자화상’이다. 정자관은 관리가 집안에서 편히 쓰는 모자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화가 고희동이 그린 자신의 모습은 망국의 관리였다. 한국인이 그린 첫 서양화였다. 뒤에서 빛이 들어오는 역광 효과에 피부에도 보라색 기운을 넣었다. 보이는 색이 전부가 아니라고, 빛에서 분해된 색을 조합하는 인상파의 보는 방식을 미약하나마 적용했다.
고희동은 이 그림을 비롯해 자화상을 세 점 남겼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정자관을 쓴 자화상’과 같은 복장으로, 졸업작품을 위한 습작으로 보인다. 등록문화재가 된 ‘부채를 든 자화상’은 흰 모시적삼 풀어헤치고 서재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화원 화가의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한 자세다. 배경에 서양 서적과 풍경화를 공들여 그려 넣어 지식인의 면모를 강조했다.
1933년 화가의 저작권 주장하기도
▲‘부채를 든 자화상’(이상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모두 1914~15년 무렵의 그림이다. [중앙포토]
졸업작품 외 두 점은 1972년 극적으로 발견됐다.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근대미술 60년전’을 열 때였다. 고희동은 1959년 아들의 사업 실패로 원서동 집을 정리하고 제기동으로 이사한다. 이때 챙겨둔 짐꾸러미가 묶인 그대로 골방에 처박혔다. 아들 흥찬(1986년 작고) 씨가 꾸러미를 풀다가 뜻밖에 그림들을 발견해 미술관에 가져왔다. 캔버스 천이 썩어 떨어지고 화면도 더럽혀진 채였다. 한국 근대미술사상 가장 초기 유화의 출현이었다.(이구열,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돌베개)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최초의 서양화가였지만 서양화로 대성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고희동의 서양화는 이 세 점뿐이다. “생활과 동떨어졌기 때문에” 1920년 이후 동양화만 그렸다. 그렇다고 허망한 유학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와 별도로 ‘서화협회’를 조직해 1936년까지 매년 전시회를 운영했다. 관 주도의 조선미술전람회가 조선의 미감을 지배하던 시절, 서화협회전의 존재는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이 공포된 게 1957년. 이보다 훨씬 앞선 1933년 화가의 저작권을 주장한 것도 고희동이었다. ‘화가의 보수금 청구’로 당시 일간지들에 보도됐다. 조선견직회사 사장 민규식에게 비단 보자기 무늬 도안을 그려줬는데 돈을 받지 못해 이 회사를 상대로 그림값 청구 소송을 벌였다는 내용이다. 자화상에 그렸듯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했기에 고희동은 ‘화가’라는 애매한 직업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높이는 데 힘썼다.
근대를 가로지른 많은 화가들이 그를 통해 서양화를 배웠고, 유학을 다녀와 화단을 형성했다. 일제강점기 보성·중동·중앙·휘문 등 사립학교의 미술교사로 출강한 그의 제자 중에는 시인 이상, 1세대 서앙화가 도상봉·이마동·오지호·구본웅, 그리고 간송 전형필도 있었다.
가장 먼저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온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가 집단인 서화협회를 구성했고, 해방 후 최초로 예술원 회장이 됐고, 최초로 국전 심사위원장이 됐다. 1960년 4·19 이후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참의원이 됐으나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돼 ‘최초의 화가 정치인’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술이라는 제도를 정착시키고자 한 근대인, 고희동은 1965년 10월 영면에 들었다. 예총장(葬)이 7일 동안 이어졌다.
권근영 중앙일보 기자·미술경영학 박사
06.15 1920년 취운정에 경성 첫 도서관…유길준 ‘서유견문’ 낳았다
3·1운동 이후 도서관 설립 확산

▲집옥재와 팔우정. 왼쪽에는 서고인 팔우정, 오른쪽에는 이층 복도로 연결된 경복궁 집옥재가 있다. 집옥재는 현재도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도서관으로 운영 중이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지식은 인류의 오랜 삶 속 경륜으로 쌓이고 또 쌓인다. 급기야 인쇄술의 발전을 거쳐 책으로도 긴 축적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 지식은 권력을 쥐거나 그에 가까웠던 계층의 전유물과 다름없었다. 근대는 그런 두텁게 쌓인 인류 지식의 접변(接邊)이 일반인에게 널리 퍼지는 과정과 함께 닥친다. 그 매개는 바로 ‘도서관’이다.
식민지 초기 경성에는 도서관다운 도서관은 없었다. 문맹률이 높아 이용할 사람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3·1운동 이후 학교 진학률이 높아져 문맹이 줄어들고 도서관의 필요성도 높아졌지만, 공공도서관 성격의 대중 도서관은 없었고 소위 ‘종람소(縱覽所)’라고 하여 신문이나 잡지 열람소만 있었다. 아울러 여러 종류의 독서회나 야학이 성행했다. 그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개화파 윤치호가 1904년 8월 남문 밖 약현동에 세운 신문종람소다. 그는 이때 교육사업과 병행해 소규모 도서관 사업을 추진했고, 1906년에는 대한도서관 설립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조선인에 의해, 경성에 세워진 제대로 된 사립도서관이 처음 들어서는 때는 1920년 11월 5일이다. 위치는 종로구 가회동의 조선귀족회 소유 취운정(翠雲亭)이다. 윤익선·윤양구·김장환이 주도했고, 관장은 김윤식이 맡았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1920년 11월 27일 개관식에 내빈 300명과 학생 수천이 참석했다.
고종, 서구 문물 소개책들 집옥재 보관
이 도서관은 민지(民智)의 계발에서 더 나아가 민족운동의 기지로 쓰이기도 했다. 취운정은 박규수를 비롯한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유길준 등 개화파가 탄생한 산실이기도 했다. 또 이 장소는 갑신정변이 구상된 곳이며, 해외에서 귀국한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서관은 1년도 지나지 않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이범승이 종로 탑골공원 서편에 세운 새로운 경성도서관의 분관으로 존속하다 폐관하고 말았다.
▲종로도서관보 창간호.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이범승은 친일파이긴 하나 일제강점기 공공도서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21년 9월 일본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총독부로부터 종로2가 탑골공원 서문 일대 부지 531평과 이왕직 양악대(洋樂隊) 건물을 빌려 새로운 경성도서관을 설립했고, 이후 민영휘의 도움을 받아 130여 평 규모의 석조 2층 양옥 신관을 개관했다. 현재는 인왕산 아래 서울시교육청 종로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고종은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덕수궁 주변 정동에 집착했다. 20세기 후반 외교 공관과 선교사들이 대거 입주하며 일종의 서양인촌을 형성한 이 지역에서 좀 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종은 정동 덕수궁으로 이전하기 전 서구 선진 문물을 소개한 서책들을 왕조 도서관 역할의 규장각으로부터 수집해 집옥재(集玉齋)에 보관했다. 집옥재는 지금도 경복궁 향원정 북쪽에 있다.
이후 고종이 정동 덕수궁에 기거하면서 그 후면에 지은 도서관이 바로 ‘황제의 도서관’으로 불리는 중명전(重明殿)이다. 중명전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으로 1899년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인 다이(J. H. Dye)의 설계로 1층 서양식 건물로 지어졌다.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자 이듬해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고종은 이처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동 주변, 열강의 공사관 한복판에 집무실 겸 ‘황제의 도서관’을 세워 위엄을 높이려고 했지만, 이 도서관은 나중 대한제국의 국권을 넘겨준 을사늑약 체결의 장소로 쓰였다.
▲경성도서관(현 종로도서관)이 종로구 탑골공원 서편에 위치했을 당시 도서관 내부 전경(1967년 7월 21일자 사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편 정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금의 종로 4거리(현 영풍문고 언저리)에 ‘한성감옥서’가 있었고, 여기에는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수감된 구한말 개혁파들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밝혀진 사실은 1902년경 이 한성감옥서에 수감된 개혁파 주도로 옥중도서관이 만들어졌고, 그들이 옥중에서 함께 책을 읽으며 근대적 민주국가 건설을 꿈꿨다는 것이다.
2022년 3월, 월남 이상재 선생 유족들에 의해 당시 이 한성감옥서에서 작성된 143쪽에 달하는 ‘옥중도서대출부’가 공개되어 그 목록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 책들이 결국 그들이 바라본 세상을 설명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한성감옥서 옥중도서관 설립을 주도한 사람이 놀랍게도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우남 이승만이었다. 한성감옥서는 이후에도 경성감옥, 서대문형무소, 안양교도소로 그 역사를 이어갔다. 백범 김구도 서대문형무소 내에서 이승만이 설치했던 서적실 장서를 읽었다는 회고를 남긴 바 있으니, 이 땅의 지도자와 함께 근대사 속에서도 도서관이 살아 숨 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경성에서 도서관 운영이 그나마 활발해진 것은 3·1운동으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며 일제가 그동안의 무단정치에서 벗어나 일종의 사상교화를 위한 국가주의 시스템으로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지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일제는 국가 중앙도서관으로서 모든 도서관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설립한다.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사상 선도를 목적으로 한 조선신교육령(朝鮮新敎育令)을 발령하고 이에 맞춰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중구 소공동 6번지에 세우게 된 것이다. 1923년 12월에 본관을 준공했는데, 전체 대지 면적 1980여 평에 지상 2층, 반 지하 1층 규모였다. 이 본관 건물은 1974년 7월 ㈜롯데 측에 인도될 때까지 조선총독부도서관·국립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의 이름으로 쓰였다. 이 건물은 지금 사라졌지만 소설가 고 박완서의 작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 역사성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박완서는 해방 전인 국민학교 5학년 때 친구 복순이와 같이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찾아간다. 그곳에 대한 첫인상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 해방 후 국립도서관
‘선생님이 가르쳐준 도서관은 지금의 롯데 백화점 자리였다. 그때 그 도서관을 우리는 공립도서관이라고도 했고 총독부 도서관이라고도 했다. 해방되고 나서 국립도서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중략) 안에 충충하게 고여 있는 어둡고도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문 저문 조심스럽게 엿보고 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내 동무는 또박또박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 이용법을 직접 해보려고 왔노라고 말했다.(중략)’
이후 수위의 안내를 받은 박완서와 그의 친구는 어린이열람실이 있는 ‘경성부립도서관’으로 향한다. 당시 경성부립도서관은 조선호텔에서 대로변 하나를 대각선으로 건너면 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이렇듯 1920년대에 동명의 여러 ‘경성도서관’을 비롯하여 조선총독부도서관과 주요 공립도서관이 대부분 세워졌다. 그 중 경성 지역 도서관은 일제강점기 대표적 도서관으로 가회동·종로·소공동·정동·용산에 자리 잡았다. 총독부도서관과 경성의 도서관은 직원이나 장서, 예산이 가장 많아 위상과 역할에서도 한반도 전체 도서관에 영향을 미쳤다.
재미있는 것은 지리·공간적으로 지금의 정동과 서울시청을 중앙에 놓고 가회동이나 종로로 이어지며 주로 조선인이 거주한 북촌, 청계천 건너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소공동과 명동 일대에서 용산으로 확장해 가는 지역에 공공도서관이 세워져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 도서실, 고종의 황실도서관 중명전이 경성 한복판에 자리 잡았음을 보면, 이 지역의 도서관 집중 현상은 당대의 통치 전략과 무관하지 않았다.
결국 일제의 통치에 맞서 구국과 민중 계몽운동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도서관은 그 한계가 분명했지만 그래도 이 땅의 민중이 사회의식을 갖고 ‘비판하는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조금씩이나마 확보해 간 공간이 아니었을까.
송승섭 명지대학교 문헌정보학과 특임교수
06.29 1933년 개업한 ‘제비’ 다방, 그 주인은 시인 이상이었다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끝〉 종로의 다방
▲조선인이 처음 개점한 다방인 카카듀의 모습을 추정해 표현한 작품. [일러스트 김민호]
1936년 1월 『조선중앙일보』에는 이용악의 ‘다방’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당시 다방이 지닌 아우라를 표현한 시였는데,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바다없는 항해에 피곤한
무리들 모여드는
다방은 거리의 항구
인용에서 시인은 다방을 고단한 삶의 여정에 지친 무리들이 모여드는 항구에 비유하고 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주머니를 턴 커피 한 잔에 고달픈 생각을 위로하는 공간이라고도 한다. 시에 나타난 것처럼 당시 다방은 한편으로 암울한 굴레와도 같았던 식민지 현실, 다른 한편으로 부모·가정·사회라는 일상의 속박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공간이었다.
채만식 역시 1939년 7월 잡지 『조광』에 발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활짝 단 가스난로 가까이 푸근한 쿠션에 걸어앉아, 잘 끓은 커피 한 잔을 따끈하게 마시면서 아무것이고 그때 건 명곡 한 곡조를 듣는 그 안일과 그 맛이란 역시 도회인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낙인 것이요.
길을 걷다가 다방에 들르면 커피와 더불어 포근한 자리와 우아한 음악이 반겨준다는 것이다. 앞선 이용악의 시에서 다방을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항구라고 비유한 것과 겹쳐지는 부분이다.
칼피스·소다수·포틀랩 등도 팔아

▲다방 ‘멕시코’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화신백화점 앞 종로네거리. [사진 서울역사박물
식민지 조선에 다방이 들어선 건 다른 근대의 문물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거쳐서였다. 본정(本町)과 명치정(明治町)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다방들은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상권이 발달했던 종로로 진출한다. 조선시대부터 한양의 중심가였다는 종로의 위세는 식민지 시대에도 이어졌지만, 종로라고 다 같지는 않았다. 종로를 대표하는 중심가는 역시 종로 1가와 2가의 경계에 위치한 종로네거리였다. 종로의 다방들이 종로네거리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식민지 시대 종로네거리 주변에는 어떤 다방들이 들어섰을까?
먼저 문을 연 다방이 있었다는 게 밝혀짐에 따라 빛이 바랜 바 있지만, ‘카카듀’는 조선인이 처음 개점한 다방으로 주목 받아 왔다. 그런데 그런 주목도에 비해서 정작 알려진 바는 적고 위치와 시기마저 정확하지 않은 듯하다. 대부분의 학술적 논의에서 다방이 문을 연 시기를 1927년이라고 하지만. 1928년 9월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개업 시기는 1928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듯싶다. 위치는 지금의 관훈동인 관훈정(寬勳町) 초입에 우뚝 서 있던 3층 벽돌집 가운데의 1층 자리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는 최초의 우체국으로 보존되고 있는 우정국의 맞은편 부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카카듀의 주인은 영화 ‘심청전’ ‘춘희’등을 감독하는 등 초기 영화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이경손이었다. 그런데 이경손만큼 주목을 받는 인물은 카카듀의 카운터를 지켰던 현앨리스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하와이로 이주했던 현순 목사의 딸이었는데,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일을 도왔던 아버지를 도우면서 역시 그쪽 일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카듀는 김진섭·이선근·유치진·정인섭 등을 구성원으로 했던 ‘해외문학파’와도 인연이 깊었다. 카카듀라는 이름 역시 김진섭과 이선근이 대화를 나누다가 지었다고 한다. 입구에 간판 대신 붉은 칠을 한 박을 건다든지, 가면(假面)을 이용해 내부 장식을 한 것은 정인섭의 솜씨였다. 그런데 카카듀는 생각만큼 영업이 시원찮았는지 수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멕시코’는 1929년 11월 김인규가 문을 연 다방이었다. 덕흥서림 옆인 옛 낙원회관 맞은편이었는데, 지금으로는 종로타워와 YMCA의 사이 정도 된다. ‘멕시코’는 당시로는 물론 지금으로 봐도 눈에 띄는 외관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는데, ‘멕시코’라는 희고 큰 간판 위에 커다란 물주전자를 매달아 놓은 모습이 그것이었다.
내부를 장식하는 데는 구본웅·도상봉·안석주 등 김인규의 지인들이 도움을 줬다고 한다. 벽은 헌 마대조각으로 장식했고, 커튼은 염색을 한 광목을 사용했다. 벽과 커튼은 빨갛고 검은 원색을 사용해 원초적이고 이국적인 이미지를 살리려 했다고 한다. 거기에 최승희의 무용하는 사진, 영화 ‘모나리자의 실종(Der Raub der Mona Lisa)’, ‘스페인 광상곡(The devil is a woman)’ 등의 포스터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이 다방 ‘멕시코’는 낙원정과 가까웠는데, 그 일대는 요릿집이나 카페가 밀집한 곳이었다. 그래서 요릿집에서 연회를 마친 손님들과 여급, 기생 등이 2차를 가기 위해 은밀히 만나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종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다방 ‘뽄아미’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종로의 다방을 둘러보면서 ‘제비’를 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곳은 ‘날개’ ‘오감도’ 등으로 유명한 시인 이상이 1933년 개업한 다방이었다. 위치는 종로네거리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종로경찰서를 조금 지나서였는데, 지금으로는 종각역에서 피맛골 사이 정도가 된다. 외관은 앞쪽을 전부 유리창으로 장식해 제비를 찾은 손님들이 종로를 오가는 사람들과 전차를 볼 수 있게 했다.
이상과 막역한 사이였던 박태원이 다방 제비에 관해 쓴 글을 보면 이상은 장식도 없는 벽 중간에 그림으로 걸려 있었을 뿐 가게를 자주 비웠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일하는 아이 ‘수영’을 두었는데, 수영은 손님이 오면 아래와 같이 응대한다.
“무얼 드릴깝쇼?”
“저… 나는 포트-랩. 자넨, 칼피스?”
“지금 안 되는뎁쇼. 무어 다른 걸루…”
“안돼?… 그럼 소-다스이.”
“그것도 안 되는뎁쇼.”
“그것두 없다?… 그럼 무어 되니?”
수영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천연스레 대답한다.
“홍차나 고-히나.”
실제 제비는 경영의 어려움 때문에 영업을 한 기간은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뭐가 바빴는지 가게를 자주 비웠던 주인과 커피와 홍차만을 제공했던 종업원을 보면 제비 다방이 서둘러 문을 닫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다방은 커피 마시는 기분을 파는 곳”

▲1937년 종로 2정목(현 종로2가)에 위치한 카바레 낙원회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의도치 않게 박태원의 글은 종로의 다방에서 팔았던 메뉴를 알게 해 준다. 칼피스·소다수·포틀랩 등이 그것이다. 칼피스는 우유에 유산균을 넣어 발효시킨 음료로, 요즘도 일본에 가면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다. 소다수는 탄산음료를 가리키는데, 당시에는 라무네·시트론·사이다 등이 인기가 있었다. 포틀랩은 적포도주에 뜨거운 물을 붓고 설탕을 탄 음료다. 다방에 따라 맥주·아이스크림·코코아 등을 팔기도 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다방을 즐겨 찾았던 사람들이 ‘다방’과 ‘커피 파는 곳’을 구분했다는 것이다. 채만식은 앞의 글에서 미쓰코시백화점 식당, 명치제과는 커피를 파는 가게이지 다방은 아니라고 했다. 현민 역시 ‘현대적 다방’이라는 글에서 다방은 그냥 ‘커피만 파는 가게’가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곳’이라고 했다.
이를 고려하면 손님들은 커피만을 마시기 위해 카카듀·멕시코·제비 등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다방에서 아는 얼굴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또 지인이 없으면 빅터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이나 재즈를 들으며 잠시나마 삶의 고단함이나 강퍅함을 잊곤 했다.
그리고 저마다 별도의 의미로 천진한 꿈을 꾼다. 그리고 물건을 잃고 돌아간다. 그런 점에서 순수하고 좋으며, 그윽한 매력이 되어 언제까지나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다방을 찾는 손님들은 물건을 잃고 돌아가지만 천진한 꿈을 얻어 가는데, 그것이 매력이 되어 언제까지나 남는다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이용악의 시는 다방의 유연한 분위기 속에서 기약 없는 여정을 반추해 보자는 구절로 마무리된다. 이용악이 노래한 다방의 의미 역시 이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박현수 성균관대 학부대학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