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01/ <1회> 경호진도 놀랐다, 클린턴이 DJ 만찬 후 열린음악회 달려간 이유 - <10회>MB, 대통령 때 아웅산테러 현장 29년만에 참배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조선일보 외교담당 에디터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을 역임하며 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그간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주요 사안을 매주 전해드립니다.]
2024.04.17
<1회> 경호진도 놀랐다, 클린턴이 DJ 만찬 후 열린음악회 달려간 이유
경호 장치 전혀 없는 세종문화회관에 자정 가까이 나타나
무대에서 무명 가수 동생과 포옹하고 손 흔들어

▲1998년 11월 21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세종문화회관에서 녹화된 KBS 열린음악회 '한미 우정의 콘서트'에서 가수인 동생 로저 클린턴의 어깨에 오른손을 두르고 기립박수를 보내는 참석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조선일보 DB
<연재를 시작하며>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 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을 역임하며 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그간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주요 사안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매주 일요일 방영되는 인기 프로그램 ‘KBS 열린음악회’에 무명 가수인 자신의 동생을 격려하기 위해 출연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1993년 시작된 KBS 열린음악회는 4월 현재 1472회를 기록 중인데,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아무런 예고 없이 녹화장에 등장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1998년 11월 21일(토) 당시 사회부 기자로 일할 때 데스크에서 지시가 왔습니다. 방한 중인 클린턴 대통령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KBS 열린음악회 녹화 현장에 출연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니 취재하라는 겁니다. KBS는 클린턴 방한에 맞춰 ‘한미 친선을 위한 우정의 콘서트’를 개최하며 그의 동생 로저 클린턴을 초청했습니다. 형보다 앞서 방한한 로저가 자신의 한국 일정을 담당하는 측에 “우리 형이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내 공연을 보러 오기로 했다”고 한 사실이 본지 취재망에 포착된 겁니다.
로저는 사실 미국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무명 가수에 가까운데 한미 관계를 위해 공영방송 KBS가 특별 대우를 했습니다. 클린턴은 자신의 이부(異父) 동생 로저를 끔찍이 아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자서전 ‘My Life’에 클린턴 형제의 돈독한 관계가 묘사돼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현대그룹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된 남북 인적·물적 교류를 시작했는데, 클린턴의 호감을 얻기 위해 로저의 출연이 기획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날 제 임무는 KBS 열린음악회에 클린턴이 출연할 경우, 이를 취재해 시내판 마감 전에 송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진부에서는 채승우 기자를 보내줬습니다. 그런데, 당시 청와대와 외교부에 확인해보니 클린턴 일정 중 세종문화회관 방문은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이날 저녁 늦게까지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및 만찬이 예정돼 있어 취재원들에게서는 “클린턴이 그곳에 갈 시간이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정말 클린턴이 올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 가운데 토요일 저녁에 ‘뻗치기 취재’하는 것을 투덜거리며 공연을 봤습니다. (당시는 일요일 자 신문이 발간될 때입니다.)
저녁 8시쯤 시작된 열린음악회는 주한미군 군악대, 사물놀이패도 나오면서 흥겹게 진행됐습니다. 로저가 등장해 팝송을 여러곡 불렀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가 셰이키 어라운드(Shaky Around)라는 것은 그다음 날 청와대 발표로 알았습니다. 로저는 인순이, 조영남씨와 함께 한국에 ‘물레방아 인생’으로 번안된 ‘Proud Mary’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콘서트가 저녁 10시를 넘겼는데도 끝나지 않아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곧 시내판 기사 마감인데….” 그때 노래를 몇 곡째 잇달아 부르던 로저가 10시 40분쯤 객석을 향해 말했습니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입니다. 나의 형 클린턴 대통령을 소개합니다.”
그러자 수행원과 경호원 약 30여 명에게 둘러싸여 무대 옆에 나타난 클린턴 대통령이 관객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왔습니다. 객석에서는 “와” 하는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지난 1998년 11월 21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만찬을 갖기에 앞서 건배를 하고있다./연합뉴스
클린턴은 무대 중앙에서 동생 로저를 힘껏 껴안았습니다. 관객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무대 뒤편의 관현악단 단원들에게 손을 흔든 클린턴은 무대 옆으로 가더니 10여 분간 더 동생의 노래를 들은 후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상황을 취재해보니 클린턴의 세종문화회관 방문은 사전에 우리와 협의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클린턴은 이날 저녁 10시가 넘어서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만찬이 끝나자 갑자기 “동생이 출연 중인 곳에 가고 싶다”고 했다는 겁니다. 미 대통령이 자신의 동생을 보러 가겠다는데, 이를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정부 관계자들은 클린턴의 ‘돌발 행동’에 몹시도 당황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 미 대통령 방문에 대비한 특수 경호 장치가 없었기에 초비상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만약 클린턴의 방문이 비밀리에라도 예정돼 있었다면 그날 경호가 그렇게 허술했을 리 없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취재가 미 대통령이 나오는 행사 취재입니다. 워싱턴 특파원 때 수차례 경험했지만, 미 대통령 행사에 참석하려면 사전에 신원 확인을 거치게 됩니다. 현장에선 검색대를 몇 차례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이런 까다로운 절차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클린턴이 경호원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왔을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에 한미 관계의 저울추가 미국으로 많이 기울어 있던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P.S.]
#1 이날 무대 뒤편에 앉아 있던 저는 클린턴이 무대 가운데로 나오자 좀 더 가까이서 취재하기 위해 앞쪽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때 클린턴 경호원들이 일제히 저를 쏘아보며 오른손이 양복 안쪽으로 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고 즉각 멈춰 섰습니다. 자칫 암살범으로 몰려 총을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확 들었기 때문입니다.
#2 자정 무렵 마감하는 시내판 조선일보에 클린턴 형제 관련 기사를 넣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속력으로 조선일보 편집국까지 뛰어갔습니다. 약 3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채승우 기자는 클린턴이 로저의 어깨에 오른손을 두르고 왼손을 흔드는 장면을 정확히 포착, 편집부로 넘겼습니다. 이 기사는 다음 날 본지에만 실렸습니다. KBS 열린음악회 특집방송은 본지 보도가 나온 22일 오후 저녁에 방영됐습니다.⊙
<클린턴 방한 에피소드 2편은 다음 주 일요일에...>
<2회> '르윈스키 스캔들'에 시달리다 방한한 클린턴에 DJ가 한 조언
경호팀 만류로 취소되자 자정부터 호텔 20층 방에서 동생과 술 마셔
DJ, “큰일 하는 남자에겐 역경 따른다. 고난 이겨내라”고 조언
클린턴, 1년 뒤 DJ에게 “작년 내게 해준 말 영원히 잊지 않을 것”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1992년 대선 때 TV프로그램 ‘아르지니오 홀 쇼’에 출연,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연주,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엄숙한 이미지와 비교되며 인기가 치솟았다. /조선DB
1998년 방한한 빌 클린턴 미 대통령 에피소드는 KBS 열린음악회 공개 녹화장 불시 방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98년 11월 21일 클린턴이 세종문화회관에 예고 없이 나타난 기사를 급히 송고한 직후인 저녁 11시30분쯤입니다. 클린턴이 자신이 머물던 H호텔의 유명 바(Bar) J에 내려가 색소폰을 불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H 호텔의 J는 투숙 중인 외국인들은 물론 한국의 유명인들도 자주 들르는 곳으로 지금도 유명합니다. 저도 당시 가끔 이곳에서 지인을 만나곤 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능성이 없다던 클린턴의 KBS 열린음악회 공개 녹화장 방문도 현장에서 목격했기에 이곳에도 클린턴이 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즉시 그곳으로 날아가다시피해서 갔습니다.
22일 자정쯤 H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지하의 J에 들어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실제로 그곳에 색소폰이 준비돼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그곳에서 일하던 고참 직원도 클린턴이 내려올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클린턴은 1992년 대선 때 미국의 유명 TV프로그램인 ‘아르지니오 홀 쇼’에 출연, 색소폰을 연주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당시 그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트브레이크 호텔(상심의 호텔)’을 연주했지요. 그가 색소폰을 부는 모습은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의 딱딱한 이미지와 비교되며 인기가 치솟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퇴임 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산레모 가요제 주최 측으로부터 색소폰을 연주해 달라는 초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H 호텔 상황 파악이 끝난 후, 편집국에 “아무런 경호 장치 없는 세종문화회관에 깜짝 출연한 클린턴이라면 색소폰이 불고 싶어서 내려올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클린턴이 등장할 가능성에 대비, 구석에 자리잡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새벽 1시를 넘어 신문 최종판을 마감할 때까지 클린턴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새벽 2시쯤 귀가했습니다.
그 다음 날 H 호텔과 이곳을 담당하는 경찰로부터 뒷얘기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친 클린턴이 바에서 색소폰을 불고 싶다고 했으나 경호팀에서 ‘불가(不可)’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고 합니다. J의 실내가 어둡고 손님들이 많아서 경호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클린턴은 자정 무렵부터 20층 프레지덴셜룸에서 바로 옆 방의 동생 로저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새벽녘까지 이어졌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당시 호텔 측과 경찰로부터 “클린턴 형제가 술을 꽤 마신 것 같다. 빈 술병이 여러 병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클린턴은 이날 왜 J에 가서 색소폰을 불려고 했으며 왜 자정 무렵부터 동생과 술을 마셨던 걸까요? 클린턴은 당시 3박4일 일정으로 방한했습니다.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 등 중요한 일정은 21일 모두 끝나고 22일은 주로 미군 격려 행사여서 다음 일정에 큰 부담이 없었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당시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과의 섹스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1993년 7월10일 방한한 美 클린턴 대통령 내외./연합뉴스
클린턴의 성추문은 당시 절정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는 그가 11개 항(項)의 법률을 위반, 탄핵 사유에 해당한다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1998년 11월 방한 직전에 연방 하원에서 탄핵 절차가 시작됐습니다. 어쩌면 곧 백악관에서 나와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였습니다. 당시 그가 힐러리와 같은 방에서 못 자고, 거실에서 잔다는 얘기기 나오기도 했습니다. 클린턴은 1993년 7월, 1996년 4월 방한 당시에는 부인 힐러리 클린턴(오바마 정부에서 국무장관 역임)과 함께 왔습니다. 하지만 1998년 세 번째 방한에는 힐러리가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그가 동생과 함께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워싱턴 DC로 돌아가면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태였던 것이지요. 실제 클린턴의 탄핵소추안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998년 12월 미국 하원에서 가결됐습니다. 클린턴은 1999년 2월 미 상원이 표결을 통해 탄핵 소추안을 기각 처리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클린턴의 서울 H 호텔 색소폰 소동은 이 같은 탄핵 흐름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97년 미 대통령 집무실에서 백악관 근무 인턴들과 기념 사진을 찍을 당시의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 /백악관
[P.S.]
#1 섹스 스캔들로 어려움에 처한 채 한국에 온 클린턴을 김대중 대통령이 위로해준 것을 1999년 외교부를 출입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DJ는 1998년 11월 21일 저녁 청와대 만찬이 끝난 마친 후, 클린턴이 KBS 열린음악회 녹화장으로 가기 전에 연회장 구석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DJ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습니다. “큰일을 하는 남자에겐 생각하지 못했던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당신이 잘 극복해 나갈 것으로 믿습니다.” DJ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당신은 미국의 재정 적자 모두 없애고, 경제 틀을 튼튼하게 해서 미국의 영웅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역경을 이겨 내시길 바랍니다.”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1999년 9월. DJ와 클린턴이 오클랜드에서 열리는 제7차 APEC 정상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대중-클린턴-오부치 일 총리가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회담장에서 오부치가 먼저 나간 후, 이번엔 클린턴이 DJ 를 불러 세웠습니다. 클린턴이 DJ에게 말했습니다. “I’ll never forget what you said when I went to Seoul(내가 지난해 서울에 갔을 때 김 대통령이 내게 해 준 말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실패로 끝난 DJ의 햇볕정책은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많지만, DJ가 클린턴과의 관계를 위해 들인 정성은 음미해볼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2 지난주 <이하원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첫 회가 나간 후, 클린턴 대통령의 세종문화회관 방문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관계자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한 관계자는 “클린턴 대통령이 녹화장에 올 가능성을 동생 로저로부터 들었는데,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도 함께 오면 좋지 않느냐”는 얘기가 극비리에 거론됐다고 했습니다.
당시 클린턴이 세종문화회관으로 갈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 측은 경호 문제를 고려,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고 합니다. 세종문화회관 외부에서 공연 관련 장비들이 무대 옆까지 곧장 들어갈 때 사용하는 문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서 비밀리에 입장시켰다는 겁니다. 다른 관계자는 “세종문화회관 무대 옆면과 연결되는 통로에 굵은 전선들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 클린턴 대통령이 발을 헛디디지 않을 까 걱정했다”고 했습니다. 미 대통령이 한국 방문에서 전기 배선 등이 깔린 곳을 통해 이동한 것은 전례 없는 일로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빌 클린턴 미대통령이 1998년 11월 22일 오산의 미 공군 기지를 방문하자 장병들이 환호하고 있다. /조선일보DB⊙
<3회>"잘못되면 사표" 전두환의 태평양 정상회의 추진 막은 이 외교관
'강골 외교관' 홍순영 전 외교부 장관
전두환 청와대 비서관 되자마자 ‘추진 불가’ 보고서
YS 정권 실세에게 바른말 하다가 차관서 쫓겨나고
DJ 측근들 인사 청탁 거절하다가 장관서 경질돼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 1999년 12월 28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출석, 일본인의 독도 호적 이전과 관련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조선일보 DB
지난 1월 취임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대한민국의 제 41대 외교부 장관입니다. 1999년 외교부를 처음으로 출입하면서 25년간 제 28대 홍순영 장관부터 총 14명의 장관을 관찰해 왔습니다.
이 중에서 외교관들이 가장 많이 거론하는 소신파 외교관으로는 단연 홍순영 장관이 꼽힙니다. 홍 장관은 김영삼 정권에서 차관으로 기용됐으나 실세에게 바른말 하다가 쫓겨나고, 김대중 정권에서 장관에 임명됐으나 대통령 측근들의 인사 청탁을 거절하다가 장관에서 물러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30일 77세의 나이로 별세, 곧 10주기를 맞는 그는 충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2년 고등고시를 통해 외교관이 됐습니다. 1970~80년대 비동맹 국가를 상대로 한 외교와 ‘북방(北方)외교’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때부터 외교부 안팎에 선이 굵은 외교관으로 알려졌으며 선·후배들로부터는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불렸습니다.
홍 장관의 때로는 정권에도 맞서는 강골 이미지를 만든 1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1983년 외교부 아중동국장에서 청와대 정무 제1비서관으로 발탁됩니다. 당시 전두환 청와대는 12.12 군사 쿠데타 논란을 없애고 정통성 확보를 위해 태평양 정상회의를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 정상들을 서울로 불러서 다자 정상회의를 개최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홍 비서관의 가장 큰 임무가 전 대통령을 국내외에 띄울 수 있는 태평양 정상회의를 성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태평양 정상회의 목적이 순수하지 않고 추진 과정에서 무리한 일이 생길 것을 우려했습니다. 전 대통령의 환심을 얻으려는 좋지 않은 동기에서 이 회의가 제안돼 추진됐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는 비서관이 된 지 한 달 만에 ‘이행 불가’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서슬이 퍼런 군사정권에서 항명으로 비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깜짝 놀라서 이를 반려했습니다. 그러나 홍 비서관은 “잘못되면 사표를 내겠다”며 고집을 부려가며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가 출근해 보니 태평양 정상회의 이행 불가 보고서가 자신의 책상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전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전 대통령이 홍 비서관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보고 계획 추진 중단을 승인한 것이지요.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그는 같은 해 북한의 ‘아웅산 테러’가 벌어지자 이를 조기에 수습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99년 1월 22일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오른쪽)과 오구라 가즈오 주한 일본대사가 한·일어업협정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다
홍 장관을 각인시킨 두 번째 일화는 노신영 안기부장과 관련된 일입니다. 전두환 정권에서 안기부가 ‘외교 기밀 누출 혐의’를 이유로 당시 박건우 미주국장(현 북미국장. 나중에 주미대사로 활동. 작고) 등 고위 간부를 ‘남산(당시 안기부의 별칭)’으로 연행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치욕을 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외교부 장관이 유고에서 열리는 공산권 회의에 참석한다는 기사를 한 신문이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게 문제가 됐습니다. 박 국장이 안기부에 끌려갔었다는 얘기를 듣고 홍 비서관이 청와대에서 외교부로 달려갔습니다. 박 국장의 사무실에 가보니, 넥타이가 풀려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홍 비서관이 육두문자를 써 가면서 화를 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안기부장은 외교부 장관 출신의 노신영 씨로 그의 선배였습니다. 그는 “노신영씨는 외교관 후배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나. 나는 다시는 노신영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의 이같은 언행은 즉각 청와대와 안기부, 외교부 안팎에 퍼졌습니다. 노신영 안기부장이 그에게 연락을 해 다음날 아침에 만났습니다. 노 부장은 “나는 그런 일이 있는 줄 정말 몰랐다”며 “아무리 그래도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그가 김영삼 정권에서 외교부 차관으로 일할 때 일어났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의 실세로 꼽히는 L 수석이 여러 차례 관련 부처의 장, 차관들을 불러서 김영삼 대통령을 국내외에 홍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자 홍 차관이 L 수석에게 항의했습니다. “외교부는 4~5년을 내다보고 정책 만드는 부서가 아닙니다.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하는 겁니다. 임기 5년짜리 정부 홍보하는데 외교부가 동원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나중에 정부가 바뀌면 어떡합니까.” 이 말을 들은 L 수석은 몹시 언짢아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L 수석이 홍 차관에게 “대통령 홍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크게 화를 냈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결국 홍 차관은 1994년 5월 사전 통보도 받지 못한 채 경질됐습니다. 한승주 외교부 장관이 그의 능력을 고려, 주유엔대사로 추천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청와대의 반대로 그는 유엔대표부 대사로 부임하지 못하고, 주독일대사에 내정됐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러시아 대사, 차관을 지낸 후 독일에 부임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다며 아예 외교관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를 아끼는 선후배들의 설득으로 홍 장관은 결국 독일에 부임했습니다.
[P.S.]
#1 홍 장관 퇴임 후, 그의 생전에 어떤 외교관 상가에서 밤 늦게 만났습니다. 당시 현직 외교부 장관이 업무 만찬을 마치고 늦게 문상을 온 후 합석, 세 명이 대화하게 됐습니다. 이 때 홍 전 장관이 일본과의 문제를 포함, 외교부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외교부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너무 청와대에 끌려가는 것 아니냐고 현직 장관에게 크게 화를 내는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 측근들과 맞서다가 차관, 장관 자리에서 잇달아 물러난 그만이 할 수 있는 질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4회>해외 순방 준비하다 개각 22분 전 알았다, 홍순영 외교장관 경질 내막
해외 순방 준비하다가 갑자기 교체돼 ‘쇼크’
‘7인의 탈북자’ 잘못 처리 문책 명목이었으나
DJ 측근들 인사 청탁 거부로 “오만하다” 찍혀

▲지난 1999년 3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홍순영 외교통상부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오른쪽은 김종필 총리./연합뉴스
1999년부터 지난 25년간 교체된 13명의 외교부 장관은 대부분 외교 사안과 관련해서 경질됐습니다. 홍순영 외교부 장관도 물러날 당시의 명목은 탈북자 문제를 잘못 처리했다는 것인데, 사실은 권력 실세들과의 불화로 인해 교체된 특이한 경우였습니다.
홍 장관은 1998년 8월 러시아와 ‘스파이 맞추방 사건’ 여파로 경질된 박정수 장관의 후임으로 임명된 후 강한 리더십으로 빠르게 조직을 장악했습니다.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대북 정책에서 호흡을 맞추고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어 최소한 2000년 4·13 총선이 끝날 때까지는 유임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홍 장관의 낙마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2000년 1월 13일 홍 장관이 전격 경질된 장면은 지금도 명확하게 기억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홍 장관이 유임될 것으로 보고, 취임한 지 2년 가까이 된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현 총리)이 어떤 자리로 옮기느냐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날 오후 5시 무렵 정치부 데스크로부터 긴급 지시를 받았습니다. “홍 장관이 오늘 경질될 테니 후임 장관이 누가 되는 지를 취재하라. 장관실 분위기를 미리 파악해 보고 관련 기사를 준비하라.”
“설마, 그럴 리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즉시 외교부 장관실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이때만 해도 홍 장관은 자신이 경질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홍 장관 경질 및 후임 장관을 취재하자 “이 기자,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것이냐”고 화를 내는 보좌관도 있었습니다.
당시 외교부는 홍 장관이 유임될 것으로 보고 2000년 1월 24일부터 2월3일까지의 홍 장관 외국 방문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러시아, 모로코, 코트디부아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잇달아 방문할 계획이었습니다.

▲지난 1998년 9월 14일 한 · 미 외무장관 회담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른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오른쪽)이 임동원 외교안보수석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문제와 관련, 향후 대책을 협의하고 있다./연합뉴스
제 취재기록에 따르면, 홍 장관은 1월13일 개각 발표를 불과 22분 앞둔 오후 6시 38분에야 자신의 거취를 알 정도로 전격 경질됐습니다. 홍 장관이 이날 오후 6시 정부중앙청사 대강당에서 열린 박태준 신임 총리 취임식에 참석한 후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청와대에서 홍 장관 집무실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청와대 한광옥 비서실장실에서 걸려 온 이 전화는 우선 홍 장관이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이어서 이정빈 당시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의 휴대폰 번호와 자택 전화번호를 물었습니다. 당시 전화를 받은 여비서는 직감적으로 장관이 경질되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홍 장관이 장관 집무실에서 한광옥 실장으로부터 경질을 통보받은 후 굳은 표정으로 간부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홍 장관은 이어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과 통화했습니다. 이정빈 장관에 따르면, 서울법대 동기 사이인 홍 장관은 “당신, 장관이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 축하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홍 장관 경질 직후의 유력했던 분석은 당시 현안이었던 ‘7인의 탈북자’ 문제를 적절히 다루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인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탈북했던 7인의 탈북자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사실이 알려져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탈북자 문제에 대한 부적절한 대처로 인해 총선을 앞두고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니 화근을 제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권 실세들과 불편한 관계가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는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과 함께 김대중 정부의 포용 정책을 추진할 적임자로 평가됐지만, 여권의 핵심 인사들과 마음을 트지 못했습니다.
외교부 주변에서 홍 장관이 권력 실세들과 불화한 계기들이 취재됐습니다. 여권 실세인 A씨가 “외교관 B씨가 현직을 마치고 난 후 다음 보직을 선진국으로 가게 해 달라” 요청했다고 합니다. B씨의 경우, 업무 능력이 괜찮아 A씨가 청탁한 곳의 대사로 나가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홍 장관은 “인사 원칙상 불가하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 후 A씨가 “홍 장관이 너무 오만하다”고 말한 것이 정관계에 퍼졌습니다.
다른 여권 실세 C씨가 홍 장관에게 외교부 고위 간부인 D씨를 승진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D씨는 C씨의 자녀가 외국에 있을 때 현지에 근무하면서 가끔 C씨의 자녀를 돌봐준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홍 장관은 강한 어조로 거절했습니다. 또 다른 여권 실세 E씨도 비슷한 인사 청탁을 하다 거절당했습니다. E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외교관 F 씨에 대해 홍 장관에게 인사 청탁을 했습니다. 소위 핵심부서가 아닌 외곽부서에 있던 F씨를 좀 더 좋은 자리로 옮겨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E씨가 “F 씨가 똑똑하니 좋은 자리로 옮겨달라”고 부탁하자, 홍 장관은 “그렇게 똑똑하면 데려다 쓰시라”며 아예 말을 잘라 버렸습니다.
일련의 사건 후 여권에서는 홍 장관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다고 오만하다는 평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국회나 당정협의회에서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는 증언이 이후에 공개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P.S.
1. 홍 장관은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강한 성격입니다.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구체적인 경질 이유를 취재하기 위해 전화했을 때 그는 딱 부러지는 어투로 말했습니다. “재직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직무와 관련된 일에 대해 일체 이야기하지 않겠다.”
1. 김대중 대통령이 홍 장관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졌던 것은 분명합니다. 홍 장관은 경질된 지 6개월 만인 2000년 7월 주중 대사로 부임합니다. 이어서 2001년 9월에는 통일부 장관에 임명됐습니다. 주중대사, 통일부 장관 재임 기간이 짧았지만, DJ가 홍 장관을 잇달아 요직에 기용한 것은 그의 업무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회>"홍순영, 차관에 DJ 동향 최성홍 대신 고교 후배 반기문 발탁했다가 낙마"
이재춘 전 대사 "정권 실세들이 호남 인물 중
외무차관 발탁 요구했으나 홍순영 장관이 거부해 화근"
외교부 일각 "홍 장관은 무책임한 원칙주의자.
조직 차원에서 권력 실세들을 상대했어야 했다"

▲이재춘 외무부 제1차관보와 윈스턴 로드 美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지난 1995년 2월 23일 오전 외무부 회의실에서 美北 핵합의 이행 문제 등과 관련 한미간 고위실무협의를 갖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회(해외 순방 준비하다 개각 22분 전 알았다, 홍순영 외교장관 경질 내막. 4월28일자)에서 기술한 것처럼 2000년 1월 홍순영 외교부 장관의 갑작스러운 경질 배경은 김대중 정권 권력 실세들의 인사 청탁을 거부, 오만하다고 낙인찍힌 것이었습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고향 출신의 최성홍 주영대사를 차관에 기용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도 있었는데, 실제로 이런 관측을 담은 책이 출간됐습니다.

▲이재춘 대사 회고록 '외교관으로 산다는 것'.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는 2011년 펴낸 회고록 ‘외교관으로 산다는 것’에서 자신이 DJ 정권에 의해 차관 후보에서 배제되며 홍 장관이 경질된 사건에 대해 밝혔습니다. 이 대사는 “(홍순영 장관 경질과 후임에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기용) 내막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호남 인맥의 중용이라는 요인 외에 인사 문제로 홍 장관이 김 대통령의 뜻을 거슬렀다는 청와대 측근들의 항거가 그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 정권 실세들이 집단적으로 호남 인물 중에서 외무차관을 발탁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해왔지만 홍 장관이 끝까지 이를 거부한 것이 화근”이라며 이 때문에 “어부지리를 본 것은 반기문 주오스트리아대사 (이후에 외교부 장관·유엔 사무총장 역임)”라고 했습니다.
이 대사의 분석은 당시 상황을 잘 반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 대사가 ‘호남 인물 중에서 외무 차관 발탁’으로 언급한 외교관은 나중에 DJ 정부 마지막 외교부 장관이 된 최성홍 당시 주영 대사입니다. 최 대사는 DJ와 같은 전남 신안군 출신으로 목포고, 서울법대를 졸업했습니다. DJ 정부에서 차관보로 발탁되면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DJ는 1998년 취임 후 한 회의에서 “젊었을 때 내 고향 바로 옆 섬에서 신동이 났다는 소문을 들었는 데, 그게 바로 최성홍 차관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DJ 정부에서 그가 차관이 될 것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DJ는 홍 장관이 그를 차관으로 지명해 주기를 바랐다는 관측도 있었습니다.

▲지난 2002년 10월 5일 방북을 마치고 방한한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최성홍 외교통상부 장관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조선일보 DB
외교관 최성홍은 DJ와 같은 전남 신안군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역대 정권에서 능력에 비해 불이익을 당했다는 평을 받아왔습니다. 최 대사는 외무고시 3회 수석합격했으며 1987년 ‘키신저의 사상과 표현’ 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지만, 차관보가 되기 전에는 중책을 거의 맡지 못했습니다. 장관이 된 후 저에게 “젊었을 때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 강국 중 어느 한 나라도 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외교부에서 주목받은 것은 1996년 헝가리 대사로 있다가 유엔 차석대사로 발탁된 특이한 경력 때문입니다. 한국은 당시 처음으로 유엔 안보리 이사국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유엔대표부 진용을 대폭 보강합니다. 당시 박수길 주유엔대사가 상당한 수준의 영어실력과 교섭 능력을 갖춘 그를 자신을 보좌하는 ‘넘버2′로 기용해 안보리 이사국으로 활동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했습니다. 박 대사가 당시 유종하 외무장관에게 최성홍 차석대사를 차관보나 외교정책실장에 기용하라고 권하자 유 장관이 “내 힘으로는 어렵다. 쉽지 않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홍 장관은 최 대사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매사 똑 부러지는 스타일의 홍순영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며 조용한 선비를 연상시키는 최성홍은 잘 맞지 않았습니다. 홍 장관은 1998년 8월 장관이 된 후 반년 만에 최성홍을 주영 대사로 내보내고, 이후 여권 실세들의 요구에도 그를 차관에 기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권력 실세들의 거듭된 요구가 자존심이 강한 홍 장관을 반발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9월 12일 오전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 '평화와 통합의 세계 지도자 김대중·브란트·만델라' 국제학술회의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충주고 후배 반기문 대사 차관에 내정해 DJ 재가 요청
어쨌든 홍 장관이 2000년 1월 자신의 충주고 후배인 반기문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차관에 내정한 것은 권력 핵심부와의 관계를 악화시켰습니다. 홍 장관은 사실 처음부터 반 대사를 차관에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초 홍 장관은 차관에 이재춘 당시 주 EU 대사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대사는 외무고시 1회 선두주자라는 상징성이 있으며 제1차관보를 역임,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합니다.
외교관 이재춘은 주일 대사관 1등 서기관, 동북아 1과장, 주미대사관 참사관, 주일대사관 참사관, 아주국장(현 동북아국장), 주일 공사 등 화려한 경력과 출중한 실력을 갖췄습니다. 그러나 여권에서 이재춘 대사 기용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 대사는 1995년 ‘외교문서 변조사건’이 일어났을 때 외무부 제1차관보를 맡아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 측과 강하게 대립, 기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외교문서 변조 사건 관련 비사는 나중에 연재합니다)
결국 홍 장관은 이런 상황에서 ‘반기문 차관’안을 직접 김 대통령에게 들고 가서 재가를 받아버렸습니다. 마침 박주선 법무비서관의 사임으로 민정기능이 마비된 상태여서, 미처 여권에서 이를 막을 틈도 없었을 정도로 전격적이었습니다.
홍 장관은 권력 핵심도 아니면서 권력 실세들의 청탁을 모두 거부할 정도로 단호했습니다. 외교부에서는 그가 당당한 외교관의 모습을 보여줬으며 소신을 지키다가 교체된 장관으로 기억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당시 일부 외교관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몇몇 간부들이 홍 장관에 대해 비판적 해석을 한 것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외교부에서 요직을 역임한 Q씨는 그를 ‘무책임한 원칙주의자’로 평가했습니다. “홍 장관의 지나친 원칙주의는 외교부 조직을 위해서 좋지 않다. 장관 한 번 바뀌면 대외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2년 만에 세 차례 외교부 장관이 임명된 현실을 과연 외국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외국에서 아예 우리를 상대하려 들지 않는다. 홍 장관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권력 실세들을 상대했어야 했다.” 홍 장관이 외교부의 기강을 해치지 않는 최소 범위에서 권력 실세들의 ‘부탁’을 일부 들어주더라도 조직을 온전히 보전하도록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홍 장관 경질을 계기로 청와대는 “외교부가 개혁돼야 한다” 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내놓았는데, 상당수 외교관은 이를 강골(强骨) 외교 수장이 있을 때는 시도하지 못했던 ‘외교부 흔들기’로 인식했습니다. 이정빈 신임 장관도 취임 일성으로 외교부가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교부 장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장관이 권력과 줄타기를 하는데, 유독 이로 인한 마찰음이 컸던 것이 2000년대 초반 외교부 풍경이었습니다.
P.S.
1. 홍순영은 외교부 장관에 이어서 통일부 장관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외교부 장관 때는 권력 실세들과 불화로 경질당했는데, 통일부 장관 때는 북한에 밉보여 교체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주중 대사를 거쳐 2001년 9월 통일부 장관에 임명된 그는 북한의 ‘떼쓰기’ 행태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상호주의에 기반한 협상 원칙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2001년 12월에는 BBC, CNN 방송 인터뷰에서 ‘북한의 호전세력’을 비판했습니다. 북한은 즉각 홍 장관 교체를 요구했고, 김대중 정부는 2002년 1월 임명 4개월 만에 그를 경질했습니다. 북한 정권의 하명(下命)에 우리 장관이 바뀐 첫 케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2. 결과적으로 홍순영 장관은 2000년 반기문 당시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차관으로 발탁, 나중에 우리나라가 유엔 사무총장이 될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이재춘 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반 대사는 자신은 당시 차관이 못 되고, 주러시아 대사로 부임하는 줄 알고 있었답니다. 이 대사가 차관 내정 축하 전화를 하자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반문했다고 했는데, 이 대사는 “반 대사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봤다”고 했습니다. 주러시아대사에는 이재춘씨가 2000년 2월 부임합니다.⊙
<6회>문재인, 첫 방일 때 민단 안 만나고 대사 관저에만 머물렀다
도쿄서 한중일 3국 정상회의 마치고 곧장 주일 대사관 행
기념식수후 대사관저에서 2시간 환담하다가 당일 귀국
민단 청와대 예방도 거부, 민주당은 조총련과 공동 행사 요구

▲한·일·중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도쿄를 방문한 문재인(왼쪽) 대통령이 2018년 5월 9일 도쿄 미나미아자부에 위치한 주일 한국대사관을 방문해 이수훈 주일대사와 기념식수를 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연합뉴스
6년 전인 2018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첫 일본 방문이 한일 양국에서 주목받았습니다. 도쿄에서 열리는 제7차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6년 반만의 일본 방문이었습니다. 그전엔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12월 교토를 방문한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일본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재일교포 사회를 대표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은 문 대통령의 첫 방일을 기대했습니다. 민단 관계자를 비롯, 재일교포들을 만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은 도쿄를 방문하면 민단 관계자들과 재일교포들을 만나 격려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문 대통령과 재일교포들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2018년 6월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 후, 문 대통령이 한·중·일 3국 정상회의 행사 외에 남는 시간이 있었지만, 주일대사관과 맞붙은 관저에만 2시간가량 머물다가 귀국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청와대, 민단 관계자들과의 만남에 부정적
문 대통령의 2018년 5월 9일 방일은 오전 9시 15분 강풍이 불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도쿄 아카사카의 영빈관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에 이어 각각 한일, 한중 정상회담을 진행했습니다.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한 문 대통령이 향한 곳은 도쿄시 미나토구 아자부주반에 위치한 주일 한국 대사관과 맞붙어 있는 대사 관저였습니다. 문 대통령과 이수훈 주일 대사가 수령 20년의 반송을 기념식수할 때 대사관 관계자는 “김대중·오부치 선언 20주년을 맞아서 늘 푸른 소나무 같은 한일관계가 되길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습니다. ‘늘 푸른 한일관계와 양국의 번영을 위하여’라고된 기념석도 제막됐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어서 대사 관저 아래쪽에 있는 대사관을 방문, 직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후, 관저 내부로 이동했습니다.

▲한·일·중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도쿄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5월 9일 오후 도쿄 미나미아자부에 위치한 주일 한국대사관을 방문해 기념식수를 했다. 기념식수 옆 표지석에 '늘푸른 한일 관계와 양국의 번영을 위하여'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연합뉴스
주일 대사 관저는 2층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층은 리셉션 홀이고 2층은 대사 부부가 생활하는 내실(內室)로 돼 있는데, 문 대통령은 주로 2층에서 이수훈 대사 및 자신의 측근들과 약 2시간 가량 보냈다고 합니다. 이후 하네다 공항으로 이동, 저녁 7시쯤 서울 공항에 귀국하기 까지 공식 일정이 없었습니다.
당시 외교부와 주일대사관은 문 대통령의 첫 방일에 주목, 한중일 정상회의를 마치고 나서 오후에는 민단 관계자를 비롯한 재일교포들과의 만남을 계획했지만 청와대는 부정적이었습니다. 당시 86 운동권 출신의 청와대 핵심인사들은 민단의 ‘반공’ 성향을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특히 문 대통령이 김정은과 남북정상회담을 하며 관계 개선에 주력하고 있는데, 민단이 이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주일대사관은 문 대통령과 재일교포들과의 만남 대신 진행할 행사를 기획하다가 대사관저에 ‘기념 식수’ 하는 아이디어를 청와대 승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기념 식수 행사는 불과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 후에도 시간이 많이 남자 공항으로 갈 때까지 대사관저에 머물기로 했던 겁니다.
◇리커창 중국 총리는 3박4일 방일
민단 관계자들은 당시 문 대통령이 자신들을 만나지 않은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6년 반만의 방일이었지만 단 하룻밤도 머물지 않은 것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민단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이 도쿄에 처음 와서 민단 대표를 만나지 않고 귀국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당시 청와대는 그 다음 날이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한일관계와 재일교포를 중시한다면 정상회의 하루 전인 8일 도쿄를 방문, 재일교포는 물론 일본 정·재계, 문화계 인사들을 만나는 것이 바람직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2018년 5월 9일 한·중·일 정상이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7차 한-중-일 3국 정상 회의 후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왼쪽부터, 리커창 중국총리, 아베 신조 일본총리, 문재인 대통령./EPA 연합뉴스
실제로 문 대통령의 행보는 리커창 중국 총리와 극명하게 대비되기도 했습니다. 리 총리는 도쿄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8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당시는 한·일 관계 못지않게 중·일 관계가 긴장된 상태였습니다. 2010년대 초반 일본의 센카쿠 열도 영유화 이후 중일 양국은 교류를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방일한 리 총리는 재일 중국인들은 물론 이듬해 퇴위하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11일엔 아베 총리와 함께 홋카이도의 삿포로에 갔습니다. 하늘색(리커창), 빨간색(아베) 넥타이를 맨 양국 총리가 도요타 공장을 나란히 시찰하는 장면은 일본 TV에서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 민주당 “민단, 조총련과 3.1절 행사 함께 하라”
문재인 정부의 민단 무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단은 새로 정부가 바뀌면 대표단이 방한, 대통령을 만나 대일 정책 건의를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5년간 민단 대표단에게 청와대 방문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민주당과 함께 민단에 주는 연간 보조금 80억원을 대폭 축소하려 했습니다. (민단 대표단은 문재인 정부가 물러난 후 2023년 9월 방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2013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면담한 후, 10년만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9월 1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간담회에 참석해 여건이 민단 중앙본부 단장,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김석기 국민의힘 재외동포위원장, 이기철 재외동포청장 등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민단 대표단이 2013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면담한 후, 10년만이었다. /대통령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민단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화해와 통합을 직·간접적으로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도쿄에 근무할 때 민단의 고위 관계자로부터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도쿄를 방문하는 민주당 중진 의원들이 재일교포를 대표하는 민단에 조총련과 3·1절 100주년 기념식을 함께 하라고 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실제로 도쿄를 방문한 민주당 의원 중에서는 민단과 조총련의 통폐합을 거론하는 의원들도 있었습니다. 민주당의 심재권 의원은 2018년 주일 대사관 국정감사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두 단체가 화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민단에서 반발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민단은 조총련이 1959년부터 약 9만 명의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건너가 자유 없는 생활을 하게 한 ‘북송 사업’에 책임이 있으며, 대북 제재로 인해 일본의 감시 대상이라는 점에서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민단의 한 관계자는 “민단이 매년 정부로부터 80억원의 보조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정부와 여당이 대다수 재일교포의 생각과 동떨어진 요구를 하고 있다”며 “특히 한·일 관계가 악화한 상황에서 조총련과의 공동 행사 개최는 일본 측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재일교포 사회에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자 민단의 전직 간부들은 2019년 문 대통령의 대일 및 대북 정책을 비판하는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민단의 부단장, 지부장 등을 역임한 이들이 주축이 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재일 협의회(한자협)’는 2019년 5월 도쿄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했습니다. 한자협은 취지문에서 “문재인 정권은 정권 유지의 지렛대로 친일 청산을 내세워 국민 간 갈등을 부추기고,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한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북에 대한 제재를 해제해 김정은 정권을 연명시키고 한반도 평화에 필수인 한·미 동맹을 파탄 내려 한다”고도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민단을 무시하고 2018년 10월 대법원이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렸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치하자 위기감을 느낀 겁니다.
한자협 공동대표 중 한 명인 김일웅 전 도치키(栃木) 현 민단 단장은 “우리는 반(反)대한민국 단체가 아니라 반(反)문재인 정권 단체”라며 “문재인 정권의 대일 정책이 계속될 경우, 결국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재일교포”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문재인 정부의 반일정책에 이어 아베 신조 당시 내각의 부당한 경제제재로 한일은 1965년 국교 정상화이후 최악의 관계로 빠져들며 재일교포들은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P.S.
1. 2021년 1월 12일 도쿄 제국호텔에서 민단 신년회가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코로나 긴급 사태 상황이지만 일본 측에서 연립 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 등 여야 중진 의원 19명이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신년회엔 문재인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도 없었고, 문재인 정부의 두번째 주일 대사는 조만간 귀국한다며 불참했습니다. 이날 행사엔 주일 정무 공사가 대신 참석했습니다. 당시 일부 민단 관계자들이 “민단의 중요한 행사에 대통령 메시지도 없고, 대사도 나오지 않아 일본 의원들 보기 민망하다” 고 하소연 한 것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2. 지난주 홍순영 전 외교부 장관 관련 기사에서 “애초 홍 장관은 차관에 이재춘 당시 주 EU 대사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는데, “홍 장관은 처음부터 충주고 후배인 반기문 대사를 차관으로 기용하려 해 문제가 됐다”는 지적이 들어왔습니다. 기사에도 썼지만, 이 대사는 외교문서 변조사건 때 외교부의 대응을 주도하면서 동교동계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염두에 둘 수 없었다는 겁니다. 2000년 상황을 추가 취재,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에게 “고교 후배를 차관으로 기용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것도 확인했습니다. 특정 학교가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인상을 주고, 언론의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홍 장관이 ‘반 차관’ 인사안을 올리는 바람에 김 대통령이 언짢아했는데, ‘7인의 탈북자’ 사건이 일어나자 동교동계에서 홍 장관 경질을 강하게 요구, 교체됐다는 증언입니다. 다음 기회에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7회>"반기문을 차관으로 두고 장관을 하다니...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홍순영 후임 이정빈 외교 장관, 청와대 설득해 반 차관 기용 확정
출근 첫날 자택 방문한 '박동진 사단' 정의용 조정관에 만족감 표현
李 UN과장 시절 潘 능력 인정… 鄭은 '기문이 형'으로 부르며 친밀
2000년 1월 13일 오후 홍순영 외교부 장관이 갑자기 경질되고 후임에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이 임명됐습니다. 당시는 신임 장관 국회 청문회가 없을 때입니다. 이정빈 신임 장관은 임명되자마자 다음날 첫 출근해 업무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1월 14일 아침 일찍 이 장관의 첫 출근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이 장관 자택을 찾아 갔습니다. 오전 7시를 약간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이 장관은 초면이었는데,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그가 대한민국의 제29대 외교부 장관으로 처음 만난 기자에게 강조한 것은 ‘외교부 개혁’이었습니다.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오른쪽)과 크리스토퍼 페튼 EU 집행위 대외관계 집행위원이 20일 오전 세종로청사에서 열린 한·EU 각료회의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00.7.20/연합뉴스
◇호남출신으로 TK 박동진 장관 신임 받은 이정빈
이 장관과 마주 앉아서 인터뷰하고 있을 때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이가 있었습니다. 정의용 당시 외교부 통상교섭조정관이었습니다. (나중에 국가안보실장, 외교부장관 역임) 정 조정관은 여러 번 이 장관 자택에 와본 듯 머뭇거리지 않고 “장관님 축하합니다” 라며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이 장관이 그를 향해 밝게 웃으며 한 첫 마디가 의미심장했습니다. “어이,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반기문을 차관으로 두고 장관을 하다니…. 앞으로 장관은 그냥 하는 거야.”
그 때는 이 발언이 갖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외교부를 출입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던 기자는 차관에 내정된 반기문 주오스트리아 대사가 어떤 외교관인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반기문이 어떤 사람이길래 홍순영 전 장관은 무리해 가면서 자신의 고교 후배를 차관으로 기용하고, 호남 출신의 신임 장관은 반 차관을 데리고 장관 하는 것을 복이 많다고 하는 걸까.” 이정빈·정의용 두 사람의 첫 대화에서 반 차관이 거명된 것도 의아했습니다.
이후 외교부를 비교적 오랫동안 출입하면서 이런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관의 첫 출근길에 정 조정관이 그의 자택을 찾아올 정도로 친밀한 두 사람은 1970년대 후반 외교부 장관을 지낸 박동진 전 국회의원의 측근이었습니다. 외교부에서 YS, DJ처럼 영문 약어로 불리는 외교부 장관은 많지 않습니다. 박 전 장관은 그의 이름을 따서 TJ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컸는데 두 사람 모두 ‘박동진 사단’으로 분류됐습니다. 박동진은 주제네바 대사, 주유엔대사를 거쳐 1975년 12월부터 1980년 9월까지 4년 9개월간 외교부 장관을 지낸 후, 1988년부터는 3년간 주미대사로 활약했습니다. 대구 경북고-일본 주오(中央)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외교부 대구·경북(TK) 인맥의 대부이기도 했습니다.
광주고-서울법대를 졸업한 이 장관은 호남 출신이지만 ‘박동진 사단’에서 ‘허리’역할을 하며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 장관은 1970년대 주유엔대표부 근무 당시 박동진 대사를 모셨습니다. 이 장관은 TJ가 장관으로 있을 때 국제연합과장, 기획관리실 정책조정관, 아중동국장을 역임했습니다. 이 장관의 처가는 대구인데, 그의 장인(이성조 전 경북교육감)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의 장인이 이따금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과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고 이 장관이 밝힌 바 있습니다. 이런 배경도 그가 박동진 사단에 합류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평도 있습니다. 이 장관은 박 장관의 신임을 받으며 호남 출신이면서도 지역 차별을 받지 않고 비교적 승승장구, 1989년부터는 2년 넘게 제1차관보로 재직하면서 한-소 수교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1980년 박동진 외교부 장관 이임 당시 기념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빨간 원안에 있는 인물)가 2000년 장관에 임명되는 이정빈 당시 외교부 중동국장./박동진 장관 회고록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
◇ 12·12 사태 때 일화 남긴 정의용
이 장관의 출근 첫날 아침, 그의 자택에서 만난 정의용 조정관은 박동진 외무부 장관의 비서 출신입니다. 1971년 제5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그는 주캐나다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박 장관의 비서관으로 기용됐습니다. 정의용은 1979년 12·12 사태가 났을 때의 일화가 회자됩니다. 당시 한남동 외무부 장관 관저와 인접한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무장군인들이 오가며 총 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자 정의용은 박동진 장관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겠다고 판단합니다. 박 장관이 관저 뒷산을 넘어 옥수동 방향으로 ‘탈출’ 하는데 기여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박동진 장관은 1992년에 펴낸 회고록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에서 이례적으로 이정빈·정의용 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박 장관은 이 책에서 이 장관에 대해 “내가 1975년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여 한국 문제의 유엔 총회 상정 지양 정책을 추진할 때 실무자로서 나를 잘 보좌한 정우영(전 주벨기에 대사)과 이정빈(주인도 대사)의 조직적인 노력을 나는 지금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박 장관은 12·12 사태와 정의용 비서관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12월 12일) 어둠이 덮이자 단지 외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한남동) 국방장관 관사에서는 전등이 갑자기 꺼지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중략) 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예감이 들어 밤 11시 30분쯤 나는 한남동 관사 단지를 빠져 나왔다. 그날 밤을 신라호텔에서 새우면서 나를 따라온 신두병 총무과장과 정의용 비서관 그리고 직원 한두 명과 함께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남아 있다.”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뉴스1
정의용은 이후 주미 대사관 참사관으로 1988년 주미대사로 부임한 박동진 장관을 다시 모시게 됩니다. 그는 이정빈 장관 시절인 2000년 12월 주제네바 대사로 영전한 후, 노무현 정부에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합니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안보실장, 외교부 장관으로 일하며 남북관계, 북한 비핵화 문제 등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반기문을 발탁한 이는 홍순영이고, 그를 지켜준 이는 이정빈”
이정빈 장관은 청와대로부터 갑작스럽게 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당시 차관에 내정돼 있던 반기문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기용하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이 장관은 1970년대 중반 국제연합(UN)과장으로 활동할 때 인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반기문과 함께 일하면서 그를 신임하고, 업무 능력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홍 장관이 내정한 반 차관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기류가 있었으나, 홍 장관을 경질한 데 이어 반 차관 내정을 취소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습니다. 이 장관은 반 차관을 기용하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밝혀 청와대의 승인을 받아냅니다. 반 차관은 2000년 1월 27일 청와대에서 다른 부서 차관들과 함께 임명장을 받고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반기문을 발탁한 이는 홍순영이고, 그를 지켜준 이는 이정빈 장관”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입니다.
반기문과 정의용은 서울대 외교학과 선후배입니다. 사석에서는 정의용이 반기문을 “기문이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각각 정무·통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서로를 도와주곤 했습니다.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기에 이정빈은 그의 장관 첫 출근 날 정의용이 축하하러 오자 첫 인사로 반기문 차관에 대해서 언급했던 겁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에 이화역사관에서 열린 린다 토마스-그린필드 주유엔(UN) 미국대사와 '파이어사이드 챗'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04.16./뉴시스
이 장관의 첫 출근날 아침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외교부 기자실로 출근하기 위해 내려와 보니 아파트 주차장에 외교부 장관 전용차가 와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낯익은 얼굴의 외교관이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 장관의 첫 출근길을 수행하기 위해 나온 조현동 외교부 인사계장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외교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주윤발’로 불렸던 미남 외교관인데, 평소와 달리 심각한 얼굴이었습니다. 홍 장관이 갑자기 경질되면서 앞으로 외교부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많은 우려를 하는 듯했습니다. 단지 장관 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외교부에 외풍이 불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외교부는 이정빈 장관이 취임한 후, 청와대의 요구로 거센 개혁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다음주 일요일에 계속됩니다>
P. S.
1. 이 장관의 첫 출근길을 수행했던 조현동 인사계장은 이후에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부 ‘동맹파 대 자주파’ 논쟁에 휘말려 고초를 겪으며 ‘외교부의 풍운아’로 불리게 됩니다. 그는 윤석열 정부에서 제1차관으로 발탁된 후, 주미대사로 부임했습니다.
2. 박동진 장관은 회고록 서문에서 자신과 친분이 있던 외교관 후배들의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거명해 놓았습니다. 상당수가 ‘박동진 사단’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동진 외교부장관 회고록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 표지 사진.
박 장관은 “외무부 본부에서 같이 일하고 나를 보좌한 직원들은 현재도 국내외에서 활약 중인 사람이 많고, 또 상당한 직위에까지 승진하였다가 이미 퇴임한 사람도 있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국장급 이상 간부와 비서관들을 거명해 본다” 고 했습니다.
제 17대 박 장관의 후임 장관 중 채용 시험 또는 고시 출신의 외교 장관은 노신영 최광수 최호중 이상옥 공로명 유종하 홍순영 이정빈 최성홍 반기문 송민순 유명환 김성환 윤병세 정의용 박진 조태열 장관인데, 이 중에서 최호중 이정빈, 정의용 장관만 ‘TJ 리스트’에 올라 있습니다. 이정빈, 정의용 두 사람은 ‘박 장관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8회>"해외 공관 비리로 장관이 얼굴 들고 다닐 수 없다"
DJ 청와대 "외교부가 밥 장사를 해왔다"며 강하게 개혁 요구
이정빈 장관, 공관장 회의서 예산 전용·비리 거론하며 질타
외교부 감찰 강화됐으나 카지노 도박, 금품 수수 잇달아 터져

▲1989년 2월 평민당 총재로 스웨덴을 방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의 친필사인이 담긴 사진을 보내주었다./월간조선
2000년 1월 14일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이 신임 외교부 장관으로 첫 출근 하자 청와대에서는 박준영 대변인이 브리핑합니다. “홍순영 외교부장관의 교체 배경에 대해 차관급 인사와 탈북자 처리미숙 등 여러 얘기가 나오고 있으나 홍 장관은 능력 있는 분으로 특별한 흠이 없다. 기본적으로 외교부가 개혁돼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새 시대를 맞아 새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이 교체의 배경이다. 해외공관은 더욱 개혁돼야 한다.” 홍 장관이 능력은 있으나, 김대중 정부 개혁에 다소 소극적이었기에 경질됐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비슷한 시기에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일부 기자들을 만나 직설적으로 “외교부가 밥 장사를 해왔다”며 외교부 개혁 필요성을 거론합니다. “외교부는 앞으로 더 개혁돼야 한다. 외교부는 그동안 밥 장사를 해왔다. 초청 인원을 과다하게 산정해서 돈 빼 먹고, 호화주택에서 생활해왔다. 무슨 고교 인맥, 대학 인맥, 이런 것이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동교동계, ‘외교문서 변조사건’ 때 저항한 외교부 개혁 요구
청와대가 이정빈 장관 체제 출범에 맞춰 ‘외교부 개혁’을 강조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동교동계의 불신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김 대통령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승리했으나, 차기 대선에 다시 이 총재가 다시 나올 것으로 보고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동교동계를 비롯한 새천년민주당 주류는 이회창 총재와 동문인 ‘KS(경기고-서울대)’ 출신들이 외교부를 장악, 자신들에게 비판적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북한과의 화해를 내건 햇볕정책에 소극적이고, 1995년 ‘외교문서 변조사건’이 났을 때 외교부가 강하게 저항한 것도 원인이 됐습니다. 외교부와 일부 외교관들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정권 핵심 세력이 ‘주류 세력 교체’라는 목적하에 혁신을 요구한 겁니다.
이 같은 기류를 잘 아는 이정빈 장관은 취임 후 잇달아 외교부 개혁을 언급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외교부 개혁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며 개혁을 과감하게 하라고 하셨다. 현재 외교부 인력이 1500명 된다. 해외 공관이 125개다. 방대한 조직이다. 1500명의 맨 파워가 작은 것은 아닌데, 현재의 조직으로 과연 효율적으로 외교를 할 수 있겠느냐. 지금은 냉전 체제가 무너지고, 체제 경쟁을 할 때가 아니다. 환경,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국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체제를 가지고는 굉장히 어렵게 돼 있다.”
이 장관은 취임 한 달만인 2월 14일 조선일보 김창기 정치부장(이후에 편집국장, 조선뉴스프레스 대표 역임. 현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 이사장) 과 인터뷰를 갖습니다. 이 장관은 인터뷰에서 “앞으로 외교관들은 10년마다 한 번씩 외교관의 자질을 엄격히 심사,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외교부에서 퇴출 시킬 것” 이라고 했습니다.
-외교부가 개혁돼야 한다는 소리가 여권 핵심부와 행정부 내에서 제기되고 있다. 장관은 어떤 구상을 갖고 있나.
“조직과 인원 운영에 관해 부분적 수정이 아니라 기본적 틀을 바꾸고자 한다. 유능한 외교관들이 인사를 걱정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관심 있는 분야에 서 전문성을 갖게 하겠다. 외교관 각자의 근무내용을 자료로 축적해서 10년마다 심사하고, 자격이 안 되면 퇴출도 시키겠다.”
-외교관의 전문성 확보라는 목표와 오지 순환근무라는 관행은 서로 모순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선진국과 오지 순환근무는 불평 무마 방식이었을 뿐, 전문성 확보와는 무관했다. 앞으로는 지역별 또는 업무분야별 전문성 확보에 중점을 두겠다.”
이 장관은 2000년 3월 외교관들에 대한 인사고과 평점을 상급자뿐만 아니라 동료, 부하직원들까지 매기도록 하는 ‘다면(多面) 평가제’를 도입하겠다고 김 대통령에게 보고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면평가제는 관가에서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인사철마다 뒷말이 나 오고 때로는 권력층도 인사에 개입하는 사례가 있어 다면평가제 아이디어가 나온 겁니다. 대한민국 외교관은 당시 특1급~7급으로 분류했는데, 이를 폐지한다는 조치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외교부의 주류 세력 교체도 시도됐습니다. 당시 한 관리는 “홍순영 장관이 경질된 후, 청와대로부터 모든 인사라인을 바꾸라는 청와대의 지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경기고 출신을 요직에서 배제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정빈 장관은 외교부의 인사를 총괄하는 요직인 기획관리실장, 인사과장을 모두 호남출신으로 바꿉니다. 기획관리실장에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남성고-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박양천 전 루마니아 대사가 기용됐습니다. 박 실장은 외무고시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5년 동안 외교관을 선발하는 고시가 시행되지 않을 당시 대학을 졸업한 후 1967년 7급으로 외교부에 입부했습니다. 입부 10년 만인 1977년에는 인사계장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는 더블 버튼 양복을 즐겨 입으며 상대방을 조용하게 설득하는 스타일로 외교부내에서 평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주홍콩 총영사관에서 부영사, 영사, 총영사로 세 번 근무한 중국 전문가로, 한중 수교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하고 중국에 대한 고급 정보를 입수해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외교부에서 핵심 부서를 거치지는 못했습니다.
◇재외공관 금품 사건, 외교행낭 부정 사용 등 잇따라 적발
외교부에서 2000년은 첫 남북정상회담과 첫 남북외무장관 회담,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서울 개최로 굵직굵직한 외교 사안이 많은 해로 기억됩니다. 그 반면에 내부적으로는 청와대와 동교동계의 개혁 요구가 커지면서 내부적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외교부가 정부부처 중 중점 개혁 대상이 되면서 감찰(監察)이 심해졌습니다. 2000년 초 남미 지역에 파견된 대사가 교민들로부터 금품을 받았다가 파면됐습니다. 5월에는 중동지역 공관장이 현지 카지노에서 거액의 도박을 하다가 적발됐습니다. 그는 카지노를 10여 차례 출입하면서 현지 교민회장, 교포, 사업가들로부터 돈을 빌려 도박을 하는 등 총 6만 3000달러 빚을 진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컸습니다. 6월엔 국제회의에 함께 참석한 여자 교수의 호텔 방에 ‘관련 서류를 전달하겠다’며 밤늦게 찾아갔던 외교관이 직위 해제됐습니다. 12월에 외교부 파우치(외교행낭)를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공관장 4명 등 10여 명의 외교관 적발, 장관 명의 주의처분이 내려졌습니다. 통상적이라면 비공개로 처리됐을 사안인데, 당시 보도 자료는 외교부가 개혁대상이 된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자료입니다.

▲외교부는 2000년 1월 홍순영 장관 경질을 계기로 청와대와 동교동계로부터 '개혁'을 강하게 요구받기 시작했다. 사진은 정부종합청사로부터 독립, 이전한 외교부 청사 전경.
1. 국가기강 확립대책 추진계획상의 특별감찰활동 일환으로 12.23-27간 69개 공관 외교행낭 및 본부 발송 외교행낭에 대한 불시점검 결과, 적발된 사항을 아래와 같이 참고로 알려드리오니 규정에 따른 외교행낭 운영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ㅇ발송료 환수 및 장관명의 주의처분 : 공관장 1명 및 해당직원 1명
ㅇ장관명의 주의처분 : 공관장 2명 및 해당직원 2명
ㅇ감사관명의 주의 통보 : 공관장 2명 및 해당직원 3명
2. 금번 불시점검에서는 규정위반 물품 발송 직원 및 공관장에 대하여만 주의처분하였으나,앞으로는 수령 직원에게도 책임 소재를 추궁, 수령 직원 부탁으로 인한 물품일 경우, 동 수령 직원에게도 주의처분할 예정인 바, 외교통상부 사무관리지침 제22조 규정에 합당한 물품만 외교행낭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DJ, “외교관들이 부동산 많고 못된 짓거리 한 사람 많다”
2001년 1월 재외공관장 회의를 앞두고, 중동 지역 공관장이 비리 혐의로 사표를 낸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감사원 감사에서 대사관저 비용으로 받은 돈 1만2500달러 가운데 8500달러의 사용처를 입증하지 못해 물러난 겁니다.
외교부와 관련한 잡음이 끊이지 않는 상태에서 2001년 1월 29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재외공관장 회의가 열립니다. 외교부는 당시 청와대와 동교동계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 이례적으로 공관장 회의를 서울 시내 고급호텔에서 개최하지 않고, 서울시 서초구 염곡동 한국국제협력단(KOICA) 연수센터에서 열기로 했습니다. 참석하는 97명의 공관장 중 50여명만 독방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2인 1실을 쓰도록 했습니다. 이 회의 첫날 ‘장관과의 대화’에서 이정빈 장관이 비공개로 일부 공관장들의 비리, 근무태만 문제를 강도 높게 거론하며 공관장들을 질타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공관장 회의가 서울시 외곽에서 열린 탓에 현장 취재를 온 취재 기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휴식시간에 친분이 있는 대사들을 만나려고 재외공관장 회의장 밖에 있을 때였습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마이크를 잡은 이 장관의 목소리가 고성으로 회의장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관은 “대부분의 재외공관장이 해외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으나, 국민의 외교관에 대한 실망도 크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난해와 1월 초 발생한 재외공관장 관련 추문을 거론한 뒤 “하도 이런 사건이 많이 생겨서 각 공관에 주의를 환기시켰음에도 금품사건, 근무태만, 해외교민 불화설, 공관운영 문제, 예산 불법사용이 잇달아 발생하고 고쳐지지 않는다”고 질타했습니다.
이 장관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옛날에는 외교관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일하고, 깨끗하고, 훌륭한 줄 알았다. 그런데 (대통령 된 후) 각종 정보를 받아보니, 부동산 많고, 못된 짓거리 한 사람 많다’고 말씀하시더라”며 “도대체 장관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6년 12월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역대 외교부 장관들을 한남동 공관으로 초청, 만찬을 함께 했다. 맨 왼쪽부터 이정빈, 최호중, 최광수, 이원경, 송민순, 박동진, 이상옥, 공로명, 홍순영, 한승수, 윤영관 장관. / 연합뉴스
◇ “공관장이 어떻게 행동하기에 교민들에게 멱살 잡히나”
이 장관은 목소리를 높여가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일일이 언급했습니다. “공관 예산 문제로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 모 공관장의 비리가 확인돼 담당 기관장 양해하에 조용히 처리하려고 해도 이젠 담당기관 직원이 공개해 지켜지지 않는다”. “서울 사는 공관장이 지방에 부인을 위장전입시켜서 부동산을 구입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이런 것이 적발돼 진급이 안 된 사람이 많다.” “도대체 공관장이 어떻게 행동하기에 주재국에서 교민들에게 멱살을 잡히는가”, “다른 곳을 통해 공관장들의 비위사실이 많이 들어온다.” 그는 또, 일부 재외공관장 부인들에 대해서도 개탄했습니다. “왜 공관장 부인들이 공관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월급을 손대서 불필요한 잡음을 내느냐. 공관장이 부임하면 제일 먼저 관저 옮기고, 가구를 사는 이들이 많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이 장관은 “공관장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면서 할 수 없다. 우리가 돈 벌려고 외교관 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참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공관장”이라고도 했습니다. 공관장회의 사상 처음으로 기획된 장관과의 대화는 분위기가 침체된 가운데 대화없이 1시간만에 끝났습니다. 장관의 질책이 끝난 후, 사회를 맡았던 외교부의 한 간부가 아시아 지역의 대사 한 명을 지목해 발언을 유도했으나, “할 말이 없다”며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정빈 장관의 질타는 청와대의 개혁 요구가 거센 상황에서 고육지책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당사자들로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이날 장관과의 대화에 참석했던 한 공관장은 “참석자들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모를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다”고 했습니다. 다른 공관장은 “극소수의 문제를 지나치게 일반화했다. 모욕당한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한 외교관은 “동교동계의 도움으로 장관이 된 사람이 어떻게 외교부 개혁을 말할 수 있느냐”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참석자들의 침울한 표정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습니다.
외교부가 이 장관의 재외공관장 질타 등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2001년 2월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서울 정상회담 때 외교 참사가 발생합니다. 이 공동성명에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의 보존·강화’ 조항이 포함돼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 구축을 위해 ABM협정 파기를 추진하던 부시 미 행정부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이 장관은 경질되는 수순을 밟게 됩니다.
P.S.
1. 청와대 요구로 시작된 외교부 ‘개혁 드라이브’는 후임 장관들을 통해서도 계속됐습니다. 외교부는 2004년 공관장급에 대한 대명퇴직제도를 엄격히 적용, 사실상 정년보장을 폐지하고 공관장 자격심사 2회 탈락자는 공관장의 보임을 허용치 않기로 했습니다. 외교관들은 해외공관에 함께 파견 나온 동료들과 동고동락하고 그 가족들과도 친해지면서 간혹 잘못된 일이 발생하면 눈 감아주는 온정주의 문화가 있었는데, 이런 문화도 차츰 사라지게 됩니다.⊙
<9회>文과 30분 통화한 트럼프, 아베와 75분 전화하며 '北 해법' 물었다
日국빈 방문 트럼프, "보석같은 미일동맹" ...아베와 '브로맨스' 쌓아
文 회고록 "트럼프는 동맹외교 파트너로 아주 잘 맞는 편" 자화자찬
트럼프는 아베에게 "한국이 김정은에게 이용 당했다"며 文 비판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문재인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진열돼 있다./연합뉴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달 펴낸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대변했다”는 지적을 받는 이 회고록은 북한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팩트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이 나옵니다. 남북관계는 물론 한미관계 등에서 사실보다 자신의 감상, 느낌을 우선한 ‘자화자찬’이 많다는 평이 많습니다. “후안무치하다”는 직설적인 비판도 나왔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정부는 균형외교에서 역대 최고의 성과를 냈다. 그렇게 자부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한미동맹이 공고했고, 한일관계가 정치적으로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나 민간 차원의 교류에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잘 돌아갔고, 중국 및 러시아와 좋은 관계, 북한과도 평화를 유지했던, 이런 때가 역대 정부에서 없었다.” (488페이지)
“한미관계를 보자면, 박근혜 정부와 오바마 정부 사이에 호흡이 맞지 않았다.(488페이지)” “그(트럼프) 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내게는 동맹외교의 파트너로 아주 잘 맞는 편이었다”(29페이지).
최종건 전 외교부 1차관도 이런 말을 하며 문 전 대통령의 자화자찬을 도와줍니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가 당선자 신분일 때 사저였던 트럼프 타워까지 가서 도금한 골프채도 선물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케미가 높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30페이지)
문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호흡이 맞지 않았지만, 자신과 트럼프의 관계는 돈독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문 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사실과 동떨어졌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저는 2018년 6월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 일본에서 취재하면서 트럼프-아베의 브로맨스가 역대 최고 수준의 정상관계에 이르렀음을 취재했습니다. 그 반면, 문재인-트럼프의 관계는 문 전 대통령의 생각만큼 돈독하지 못했음을 밖에서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는 2017년 6월 방미,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과 만난 사진들이 실려 있다.
지난달 27일 서울에서 개최된 9차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 앞서 4년 반 전인 2019년 12월 중국 청두에서 8차 한중일 정상회의가 개최됐는데 그 직전에 벌어진 일은 당시의 한미일 3각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아베 통화의 절반이상을 대북 문제에 할애
트럼프와 아베는 2020년 1월까지 정상회담을 14번, 전화 통화를 33번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2019년 12월 21일 두 정상이 75분간 전화 통화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저는 특히 당시 문재인-트럼프 통화는 12월 7일 30분 통화가 마지막이었는데, 트럼프-아베가 1시간 15분간 통화한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한미 정상간 전화통화가 30분이라고 발표되면, 통역을 제외하면 15분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현안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부족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미일 정상간 전화 통화가 1시간 이상 지속됐다면,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통역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40분 가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20년 1월 도쿄의 유력한 외교 소식통으로부터 트럼프와 아베가 그날 1시간 넘게 통화하면서 통화의 절반 이상을 북한 문제에 할애한 사실을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미일 두 정상이 40분동안이나 북한 문제를 놓고 대화했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통화는 트럼프가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며 도발을 시사한 북한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은지 묻고 아베가 답변하는 형태로 진행됐습니다. 당시는 북한이 12월 초 외무성 담화를 통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무엇으로 선정하는가는 전적으로 미국 결심에 달려 있다”고 밝혀 북한의 ‘성탄절 도발’ 가능성이 제기된 시점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트럼프는 아베가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참석차 중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전화를 걸어 대북 전략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고 합니다. 아베가 트럼프의 북한 정책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것이 다시 확인된 겁니다.
아베는 트럼프와의 통화에서 북한의 도발을 사전에 막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북한이 도발할 경우에는 미·일 양국이 강력히 연대해서 대응하는 방안을 제언한 것이지요. 이 같은 논의에 따라 미·일 양국은 12월 24일 한·중·일 3국 정상회의 개최 중 북한이 도발할 경우에 대비한 시나리오도 점검한 것으로 취재됐습니다. 아베는 특히 북한이 미국에 도달하지 않은 중·단거리 미사일이나 핵실험으로 도발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강하게 대응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트럼프와 아베가 1시간 15분간 통화하면서 북한 문제에 대해 40분간 논의한 사실을 단독 보도한 조선일보 2020년 1월 14일자 지면.
당시 백악관은 “특히 북한의 위협적 성명을 고려해 긴밀하게 소통과 조율을 계속하기로 합의했다”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아베 총리도 통화 후 “최근 북한의 정세를 분석하고 앞으로 대응에 관해 면밀하게 조율했다”고 했습니다.
트럼프가 아베에게 대북 전략 조언을 요청한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2019년 문재인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를 계기로 대북 문제에서 한·미 간 중요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이 미·일은 밀착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미·일 밀착과 달리 한·미 관계는 엇박자가 나고 있었습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미국 방문 직후인 2019년 12월 10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 생일 축하 메시지를 문 대통령이 전해주면 좋겠다고 했다”며 중재자를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이 “미국 대통령의 친서로 직접 전달받은 상태”란 담화를 내면서 체면을 구겼습니다. 당시 외교가에서는 “친서 여부도 모를 정도로 한·미 간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니냐”는 말이 나왔습니다. 문 대통령이 2020년 신년사에서 남북 협력 구상울 밝히자 미 국무부는 “모든 유엔 회원국은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를 이행해야 한다”며 사실상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 볼턴 회고록, 트럼프와 가장 친한 인물로 아베를 꼽아
트럼프는 2019년 한중일 정상회의 뿐만 아니라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아베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첫 미북 정상회담을 갖기 하루 전에도 트럼프는 아베와 통화합니다. 아베는 트럼프와 통화한 뒤 총리 관저 1층에서 기자들에게 “트럼프 대통령이 현재까지의 최신 정보에 기반해서 대화하고 싶다고 해 통화했다”고 합니다. 미국과 일본이 자신들이 가진 최신 대북 정보를 공유했음을 시사한 겁니다. 아베는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할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고 했습니다.
트럼프와 아베의 긴밀한 관계는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도 묘사돼 있습니다. 볼턴은 자신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났던 방, 백악관 회고록(The Room Where It Happened: A White House Memoir)’에서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미북 정상회담 직전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믿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밝혔습니다. 볼턴은 이 책에서 트럼프와 가장 친한 외국 정상으로 아베를 꼽았습니다. 이후 영국의 보리스 존슨 종리도 아베 총리만큼 가까운 인물로 등장했다고 했습니다. 아 베는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금장(金裝) 된 골프 드라이버를 선물하며 트럼프와 ‘브로맨스(남자들 간의 특별한 우정)’를 만들었습니다. 2019년 5월 나루히토 일왕 즉위로 후 레이와(令和) 시대가 시작되자 마자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는 온종일 아베와 골프장, 스모 경기장, 일식집을 다니며 “보물 같은 미·일 동맹”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최종건 전 1차관은 문재인 회고록에서 “아베 총리는 도금한 골프채도 선물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케미가 높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는데,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2019년 5월 아베 일본 총리는 트럼프 미 대통령을 레이와 시대의 첫 국빈으로 초청 후 골프회동을 갖고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할 때 트럼프가 문 대통령과 우리 정부를 비판했다는 얘기도 자주 흘러나왔습니다. 트럼프가 2019년 8월 프랑스 비아리츠에 열린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서 한국 정부에 대해 비난했다는 보도도 일본 언론을 통해 나왔습니다. 일본의 우익 매체인 산케이 신문은 익명의 일본 정부 소식통을 인용, 트럼프가 아베를 만났을 때 “한국의 태도는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한국은 현명치 않으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발언도 나왔습니다. 일본에 주재하는 동안 취재원들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아베 2차 집권 8년간 동맹 강화한 미국과 일본
미국과 일본은 2012년부터 2020년까지 8년간의 아베 2차 집권을 계기로 강하게 결속했습니다. 2020년 1월 미·일 신(新)안보조약 체결 60주년을 맞아 아베가 자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를 언급하며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기시는 1960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함께 1951년 맺은 안보조약을 개정한 신안보조약에 서명해 미·일 동맹의 바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아베 총리는 외무성의 이쿠라(飯倉)공관에서 열린 신안보조약 체결 기념식에서 “기시 총리는 당시 ‘지금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100년, 양국은 새로운 신뢰로 협력하라’고 말했다”며 “조부(祖父)와 같은 나이에 이른 나는 같은 맹세를 드리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기시 전 총리가 만든 미·일 신안보조약에 대해선 “아시아와 인도·태평양,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번영을 보증하는 부동(不動)의 기둥”이라며 “앞으로 동맹을 충실히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했다. 아베는 이날 행사에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손녀도 초청했습니다.
트럼프도 미·일 신안보조약 체결 60주년을 축하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지난 60년간 두 위대한 국가 사이의 바위처럼 단단한 동맹은 미국과 일본, 인도·태평양 지역, 전 세계의 평화와 안보, 번영에 필수적이었다”며 “안보 환경이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도전이 생기면서 우리의 동맹이 더 강력해지고 심화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 일본의 모테기 외무상. 고노 방위상 등 4명 명의로 발표된 공동 성명은 “미·일 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강고하고 폭넓으면서도 불가결한 것이 됐다”고 했습니다.
주미 일본대사를 역임한 후지사키 이치로(藤崎一郞) 나카소네 평화연구소 이사장을 2019년 12월 인터뷰했을 때입니다. 그는 일본이 느끼는 문재인 정부의 한·미 동맹에 대한 불안감을 솔직하게 언급했습니다.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굳건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문재인 정부가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등을 다루는 것을 보면 한·미 동맹을 중시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 가끔씩 보입니다. 그래서 중국에 약점을 잡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후지사키 이사장의 이 발언은 문재인 정부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일본 측의 입장을 압축하고 있는데, 중국에 약점을 잡힐 수 있다는 지적은 참고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P.S.
1. 2018년 5월 도쿄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공식행사만 마치고 돌아온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해인 2019년 12월 청두 한중일 정상회의도 끝나자마자 곧장 귀국했습니다. 이 때 리커창 중국 총리는 성탄절인 12월 25일 아베를 세계문화유산인 쓰촨(四川)성의 수리관개시설 두장옌(都江堰)으로 초청, 함께 둘러봤습니다. 리커창-아베 두 총리는 문화 시찰을 전후로 회담, 오찬을 함께하며 4시간가량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두장옌 안내는 나의 오모테나시(진심으로 대접한다는 일본어)”라는 리커창의 말에 아베는 “시찰에 동행하고 점심에도 초대해줘 따뜻함이 느껴진다”고 화답했습니다.
두 총리의 지방 동행은 2019년에 이어 두 번째였습니다. 리커창이 2018년 5월 도쿄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방일했을 때는 아베가 ‘투어 가이드’를 자임, 홋카이도의 도요타 자동차 공장을 함께 둘러보며 관계를 두텁게 했습니다. 당시에도 문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후 도쿄의 주일대사관저에서 2시간 가량 머물다가 방일 10시간 만에 귀국했습니다. <5월 12일자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6회 참고>
2024.06.07
<10회>MB, 대통령 때 아웅산테러 현장 29년만에 참배...표지석 하나 없었다
미얀마에 아웅산 테러 순국사절 추모비 건립, 오늘로 10주년
김태효, MB 방문 한 달전 극비 방문해 특별 경호 조치 협의
"테러 현장에 추모비 세우자" 본사 제안, 2014년 결실 맺어

▲1983년 10월 9일 테러 참사를 몇 초 앞둔 순간 버마(현 미얀마) 랑군(현 양곤) 아웅산 국립묘지에 도열한 수행원들의 모습. 왼쪽부터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대사,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부총리. 이들은 모두 사망했다. 중상을 입은 최금영 연합통신 사진부장이 사진기 테스트를 위해 촬영한 사진으로 폭발사고 당시 촬영자의 피와 화약흔 때문에 사진 일부가 하얗게 바랬다. /
오늘로부터 10년 전인 2014년 6월 6일 현충일, 미얀마 양곤에서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아웅산 테러 유가족 34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아웅산 묘역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 제막식이 개최됐습니다. 1983년 북한에 의해 미얀마에서 테러가 발생한 지 31년만에 현장에 추모비가 건립된 겁니다.

▲2012년 6월 6일 현충일에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열린 아웅산 순국 사절 추모비 제막식에서 유가족 등 참석자들이 헌화·묵념하고 있다. /김상영씨 제공
아웅산 순국사절 추모비 건립 계기는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미얀마 국빈 방문이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미얀마 정부의 초청으로 5월 14일 수도 네피도를 방문, 테인 세인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15일엔 양곤으로 이동, 미얀마 민주화를 상징하는 아웅산 수치 여사를 면담했습니다. 이어서 언론에 알리지 않은 채 29년 전 북한의 테러가 발생한 아웅산 국립묘지를 전격 방문했습니다. 이 대통령의 현장 방문에는 김성환 외교부 장관, 홍석우 지경부 장관, 천영우 외교안보수석, 김태효 대외전략기획관 등 소수의 수행원만 동행했습니다.
아웅산 묘지는 미얀마인들에게는 성소(聖所) 같은 곳입니다. 미얀마의 독립 영웅이자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인 아웅산과 그의 동료를 추모하는 빨간색의 추모탑과 경찰 경호동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얀마는 북한의 폭탄 테러가 발생한 건물을 모두 철거했으며 지금도 개방돼 있지 않습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추모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테러 현장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29년 만에 처음 방문한 이 대통령은 곤혹스러워했습니다. 이곳엔 북한의 테러와 관련된 흔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표지석도 없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결국 아웅산을 추모하는 조형물 앞에 ‘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라고 쓰인 조화 앞에서 묵념해야 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미얀마 새 정부 출범 이후 첫 국빈으로 방문했기에 아웅산 묘지를 찾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북한의 테러에 대해선 “20세기 역사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곳”이라며 “가족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역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이 아웅산 묘지를 방문한 후에야 이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언론에는 네피도에서 양곤으로 이동하는 기내에서 아웅산 묘지 방문을 최종 결심했다고 브리핑했습니다. 청와대가 이렇게 신중하게 나온 배경에는 이 대통령의 아웅산 묘지 방문이 사전에 공개되면 북한의 또 다른 테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정부 고위 관계자는 “아웅산 묘지 방문의 특수성 때문에 비록 그 가능성이 작더라도 북한의 테러 가능성에 대해 대비해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미얀마) 아웅산 테러 직전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도열해 있는 모습. /조선일보 DB
◇북한의 테러에 대비, 자동소총 무장한 암살대응팀(CAT)이 경호
미얀마와 북한은 1983년 아웅산 테러 직후 단교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4월 다시 관계를 정상화, 외교관계를 재개한 상태였습니다. 2007년 김영일 북한 외무성 부상이 이끄는 대표단이 미얀마를 방문, 복교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미얀마도 같은 해 7월 외무 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북한에 보내며 군사 교류를 강화, 우리로서는 북한의 움직임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던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이 물밑에서 움직였습니다. 2012년 4월 주미얀마 한국대사관은 비밀 지시를 받습니다. 김태효 기획관이 다음 달로 예정된 이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서 방문하니, 미얀마 정부 고위 관계자를 만날 수 있도록 접촉하라는 지시였습니다. 김 기획관은 당시 외교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에 알리지 않은 채 혼자 방문했습니다. 그는 이틀간 머물면서 미얀마의 고위 관계자와 만나 이 대통령 국빈 방문 시 경호에 빈틈없이 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특별히 북측의 동향에 신경을 써 달라고 했습니다.
사실상 이 대통령의 특사로 방문한 김 기획관의 요청에 따라 미얀마는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에 돌입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수도인 네피도와 양곤에 머물 때 호텔은 물론 공항, 도로변에 장갑차와 수 천명의 무장 요원들을 배치했습니다. 당시 경호처는 미얀마 측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머무는 호텔 옆 연못을 잠수사를 동원해 수색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방문하는 네피도와 양곤에 대통령 전용 방탄 차량과 경호 차량을 각각 별도로 수송했습니다. 이례적으로 휴대용 권총을 소지한 경호원들뿐만 아니라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암살대응팀(CAT)이 수행하게 했습니다. 또 미국 정부에도 협조를 요청, 미 정보기관으로부터 시시각각 북한 측의 움직임을 모니터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전직 관료는 “이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을 위해 역대 최대 수준의 경호팀과 장비가 동원됐다”고 말했습니다.
김태효 기획관은 이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1983년 아웅산 테러 이후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함에 따라 반드시 현장을 방문, 추모행사를 가져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아웅산 묘지에서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호처는 대통령이 방문할 정도의 경호 준비가 안 돼 있다며 반대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대의(大義)도 좋지만, 대통령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같은 입장이 충돌하는 가운데, 이 대통령이 양곤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웅산 묘지로 가자”고 결정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암살대응팀의 경호 속에 아웅산 테러 폭발 현장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웅산 폭탄 테러 29년만에 현장을 찾아 참배하는 모습이 2012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 1면에 톱 기사로 실렸다.
◇조선일보 편집국 회의 “어떻게 테러 현장에 추모비 하나 없느냐”
이 대통령이 아웅산 묘지를 방문, 추모 행사를 가진 것은 큰 뉴스였습니다. 조선일보는 이 대통령의 현장 방문 기사가 나오자 이를 1면 톱 기사로 다루기로 했습니다. 이날 저녁 7시 조선일보 편집국 회의에서 막 편집된 초판(初版) 신문을 바라보던 당시 양상훈 조선일보 편집국장(현 조선일보 주필)이 혀를 찼습니다. “북한의 아웅산 테러로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데 어떻게 현장에 추모 표지석 하나 없을 수 있느냐.” 양 국장은 당시 정치부 외교안보팀장이던 저에게 “아웅산 묘역 현장에 추모비를 세우는 방안을 강구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후 조선일보는 내부 논의에서 아웅산 테러가 2013년 10월이면 30주년이 되는 것에 착안, 정부에 ‘아웅산 테러 순국사절 추모비’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미얀마에 테인 세인 신(新) 정부가 들어선 것을 계기로 한·미얀마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는 상황도 현지에 추모비를 세울 좋은 기회라고 봤습니다.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서는 늘 불편한 문제로 남아 있던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아웅산 묘지를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도 테러 현장에 아무런 추모비 하나 없는 것을 씁쓸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조선일보의 제안이 의미가 있다고 보고 주미얀마 한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이를 양국 간 주요의제로 논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당시 주미얀마 대사관의 김해용 대사와 윤강현 공사참사관은 미얀마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을 수차례에 걸쳐 만나 “한·미얀마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자”며 추모비 건립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어서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10월 테인 세인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했을 때 김성환 외교부 장관은 운나 마웅 린 외교부 장관에게 아웅산 국립묘지에 ‘희생자 추모비’를 건립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 동의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계획했던 만큼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